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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나노기술 이용 무공해 과일농장?

 

북, 나노기술 이용 무공해 과일농장?
 
평양천연향료 연구소 과학자들 성과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3/01/17 [08:11] 최종편집: ⓒ 자주민보
 
 

북이 무공해 천연 식물성 농약을 개발 발전시키고 있는 가운데 천연향과 나노 기술을 이용해 살충 효과를 높이는 연구에서 성과를 거 둔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로동당기관지인 로동신문은 17일 문화면에서 “평양천연향료연구소 과학자들이 식물성농약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해 살충제를 적개 쓰면서도 구제 효과를 높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로동신문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과일생산을 늘이는 비결의 하나는 병해충 구제사업을 잘하는데 있습니다.”라고 밝혀 김위원장이 병해충 구제사업에 각별한 관심을 두고 있었음을 전했다.

이 신문은 “평양천연향료연구소의 과학자들이 우리나라에 흔한 천연향을 원료로 하여 천연향살충제를 연구완성하기 위한 사업을 꾸준히 내밀고 있다.”며 “이곳 일꾼들인 최등광, 김 병철동무들은 신제희동무를 비롯한 연구소의 과학자들이 대동강과수종합농장의 과학자, 종업원들과 힘을 합쳐 우리의 기술과 원료에 의한 살충제를 완성하는데 큰 힘을 넣도록 조직 정치사업을 짜고 들고 있다.”고 전했다.

▲ 대동강 과수농원은 둘레가 100km에 이르는 대규모 과일생산 기지로 과일 가공 공장도 가동되고 있다. ©이정섭 기자
신문은 “나노기술에 의거하여 살충성분의 함량을 훨씬 높이기 위한 사업, 우리나라에 흔한 물질로 살충성분의 특성을 개선하기 위한 사업, 대동강과수종합농장에서 이미 이용하던 살충제를 대폭 절약하면서도 살충효과를 기상조건에 구애됨이 없이 최대한 높이기 위한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과학자들은 자기들이 연구한 천연향살충제와 새로운 방법으로 제조한 혼합 살충제가 각이한 기상조건에서 얼마만 한 효과를 나타내는가를 이미 여러가지 방법으로 시험해보았다.”고 전해 현장에서 연구 사업이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이어 “이른 봄철부터 늦은 가을철까지 그것도 넓은 면적에 뿌리내린 한그루, 한그루의 사과나무들의 잎과 가지, 열매들을 빠짐없이 관찰하면서 계절별로 발생하는 각종 해로운 곤충들에 대한 살충효과를 정확히 검증하는 일은 사실상 품이 대단히 많이 든다.”고 연구 과정의 어려움을 알렸다.

로동신문은 “이곳 과학자들은 우리 식의 식물성농약연구에서 귀중한 자료로 되는 야외 시험준비를 지금부터 착실히 하고 있다.”며 “지난해에 수차례에 걸쳐 1,000여정보의 과일나무 밭에 우리의 기술과 원료로 만든 식물성농약을 뿌린 결과는 대단히 좋았다.”며 연구사업의 정황을 설명했다.

신문은 무공해과일생산기지를 건설하는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이라며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신년사에서 밝히신대로 인민들에게 생활상혜택이 더 많이 차례지게 하자면 우리가 대동강과수종합농장의 무공해과일생산에 필요한 식물성농약연구에만 관심을 돌려서는 안된다. 전국각지에 우리 식의 식물성농약이 모두 도입해 무공해과일생산에서 더 큰 은(성과)을 내게 하자.”고 호소했다.

특히 “이렇게 대동강과수종합농장만이 아니라 전국의 과수농장들에도 연구성과를 확대도입할 통이 큰 목표를 내걸고 평양천연향료연구소의 과학자들은 지금도 탐구의 길을 변함없이 달리고 있다.”고 천명했다.

한편 조선의 과학자 기술자, 농민들은 집단적 방법에 의거하여 보다 비용이 적게들면서 효능이 높은 무공해 농약 개발에 힘을 쏟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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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편에 뒤통수 맞은 MB... 나도 놀랐다

4대강 사업 입장 바꾼 <조선>·감사원, 청문회에서 만나자

13.01.16 19:03l최종 업데이트 13.01.16 19:35l

 

 

낙동강 '녹조라떼'입니다. 감사원과 <조선일보>가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녹색성장의 위력을 뒤늦게 깨달았나 봅니다. 드디어 4대강 사업의 진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 이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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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한 달여 남은 이명박 대통령의 '끈'이 다 떨어진 모양입니다. 지난 9일 <조선일보>는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4대강 공사 구간의 수질은 정부가 애초 목표한 수질보다 상당히 떨어지는 공업용수 수준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감사원도 비판했습니다. <조선일보> 기사의 한 대목을 직접 보겠습니다.

감사원의 태도 변화 왜 이럴까요

"이번 감사는 4대강 사업에 대한 감사원의 두 번째 감사다. 2010~2011년에 걸쳐 진행된 1차 감사에서는 '공사비 5119억원 정도가 낭비될 우려가 있다'는 결론만 냈다. 사업 타당성이나 환경·문화재 파괴 우려 등에 대해서는 '별문제가 없다'는 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그러나 1년여 만에 실시한 이번 2차 감사에서는 수질, 홍수·가뭄 관리에서 복합적 문제가 확인됐고, 보(洑) 본체의 균열과 보 하단의 세굴(洗掘) 현상도 16개 보 대부분에서 확인된 것으로 알려졌다. 감사원은 현재 감사 결과를 확정하기 위한 마지막 검토 작업을 진행 중인 가운데 정부 관계자들은 "많은 문제가 확인됐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일보>가 4대강 사업의 진실을 이야기하다니, 뒤늦게 정신을 차린 걸까요? 아니면 권력 갈아타기를 하는 걸가요? 참 요지경입니다. 감사원은 이 대통령에게 4대강 감사 결과를 보고하지 않았다고 <조선일보> 기사를 반박했지만, 4대강 사업의 문제점은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 조선일보.20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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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원은 "한 입으로 두 말 한다"는 <조선일보>의 지적을 들을 자격이 충분합니다. 22조 원이 투입된 4대강 사업은 대한민국 역사 이래 최대 국책사업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현 정부는 이명박 대통령 임기 안에 4대강 사업을 완공하려 여러 불법과 편법을 일삼았습니다.

일단, 환경영향평가를 단 넉 달 만에 졸속으로 해치운 환경영향평가법 위반, 국회 예산 심의 없이 사업을 조기 착공한 헌법54조 위반, 500억 원 이상 대규모 사업에 반드시 해야 할 예비타당성 조사를 하지 않은 국가재정법 제38조 위반, 하천법 상위 계획에 위배된 하천법 위반 등 4대강 사업은 불법과 편법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감사원은 지난 2010년 6월, 4대강 사업 감사를 다 끝내고도 '검토중'이라며 발표를 미적거리다 2011년 1월 27일에야 감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감사 결과 22조 원의 사업비 중 겨우 "5119억 원 정도 낭비 우려가 있다"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잘못도 밝혀내지 않았습니다. 결국 감사원이 4대강 사업에 면죄부를 준 것입니다.
 

감사원이 곧 4대강 사업 감사 결과를 발표한다고 합니다. 1차 감사결과에서 별문제 없다던 감사원이 이명박 정부가 다 끝나가니 4대강 사업에 문제가 많다고 한다네요. 참 웃기는 감사원입니다. 책임을 다하지 못한 감사원 역시 4대강 죽이기 공범 중 하나일 뿐입니다.
ⓒ 미디어다음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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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사업 담합으로 '삽질 재벌'들의 주머니로 들어간 혈세가 1조 원이 넘습니다. 최근엔 4대강 사업의 하나인 영주댐 공사에서도 담합으로 혈세가 낭비되는 불법 사례가 밝혀졌습니다. 4대강 사업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불법 천지였습니다.

그러나 감사원은 4대강 사업이 완공되고, 이명박 정부가 다 끝나가는 지금에 와서야 4대강 사업에 문제가 많다는 '뒷북 감사' 결과를 내놓고 있습니다. <조선일보>는 "2010년 감사 때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어서 수질과 보 등을 세밀하게 보기 어려웠다"는 감사원 관계자의 '변명'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4대강 사업으로 인한 국토 파괴와 국고 탕진의 책임에서 감사원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삽질 재벌 뒷주머니 채워준 4대강 사업은 온갖 불법과 비리 투성이 사업이었습니다. 그러나 감사원은 불법천지 4대강 사업이 아무 문제없다며 면죄부를 주었습니다. 정권이 바뀌니 이제와서 문제가 많다고 지적하는 감사원은 문제가 많습니다.
ⓒ kbs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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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감사원의 비난할 자격이 있나

<조선일보>는 9일에 이어 14일에도 4대강 사업을 비판하는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이 신문은 환경부의 인수위원회 보고 자료를 인용한 '수질개선비 4조 쓴 4대강, 다른 하천보다 개선 안 돼'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4대강 사업으로 물이 썩는 4대강의 위기를 보도했습니다.
 

<조선일보>가 지난 1월 9일 4대강 사업의 잘못을 지적하는 보도했습니다. 4대강 사업 초기에 이렇게 열심히 보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강이 흐르지 않으면 썩는다는 기초적인 사실을 <조선일보>는 몰랐을까요?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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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조선일보>는 '단독'이라며 연일 4대강 사업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감사원의 한 입으로 두 말 하기를 비난한 <조선일보>, 과연 4대강 사업의 재앙을 보도할 자격이 있을까요?

<조선일보>는 다른 보수 언론들처럼 일방적으로 4대강 사업을 두둔하기 보다는, 찬반 양쪽의 견해를 10회에 걸쳐 특집으로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이 신문은 당시 박재완 청와대 수석과(현 기획재정부 장관)과 목사인 필자와의 4대강 '맞장 토론'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4대강 사업 찬성의 허물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지난 2011년 9월 15일 '4대강 난리 난다던 사람들의 침묵'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비난했습니다.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싸잡아 비난한 <조선일보> 사회부장 출신인 박정훈 기사기획에디터의 칼럼입니다. 이러고도 <조선일보>가 4대강 사업의 잘못을 지적할 자격이 있을까요?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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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사업 반대 진영이 돌연 조용해졌다. 시위와 점거농성, 삭발에 단식까지 하며 '단군 이래 최대 재앙'을 외치던 사람들이었다.(중략) 그들은 제대로 된 팩트를 제시하지 않은 채 침묵 모드로 전환했다.(중략) 일부 반대론자들은 4대강 투쟁에서 철수해 한진중공업과 제주 강정마을로 화력(火力)을 옮겨갔다. 그래서 '좌파의 치고 빠지기'란 소리가 나온다. 국가 백년대계를 좌우할 4대강 논쟁도 결국 이념 싸움으로 흐르고 마는지, 안타깝다."

<조선일보>는 4대강 사업의 잘못을 보도하기 전에, 자신들의 잘못부터 사죄하는 게 마땅합니다. 국토 파괴라는 대 재앙 앞에서 언론의 사명을 다하지 못했다고 참회해야 합니다. 4대강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을 싸잡아 비난했으니, 이에 사과하는 게 언론의 도리입니다.
 

<조선일보>뿐만 아니라 <TV조선>이 14일 4대강국민검증위원회가 발표한 낙동강 합천보의 물이 보 아래로 새는 파이핑 현상에 대해 상세히 보도하였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보 아래로 물이 새서 위로 솟구치는 장면입니다. 보 안전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TV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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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4대강 난리 난다던 사람들의 침묵'을 통해 4대강 사업을 반대하던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오류를 시인하라"고 했는데, 이는 <조선일보>부터 실천해야 할 말입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과학은 없다

<조선일보>는 "감사원 감사 결과, 수질을 비롯하여 홍수·가뭄 관리에서 복합적 문제가 확인됐고, 보 본체의 균열과 보 하단의 세굴 현상으로 보 안전에도 많은 문제가 확인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사원 감사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 합니다. 그러나 저는 전혀 기대하지 않습니다. <조선일보> 보도를 비롯해 감사원 감사 결과 내용이 전혀 놀라운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미 지난 3년여 동안 <오마이뉴스>를 통해 4대강 사업으로 인해 발생할 문제를 수없이 지적했습니다. 또 <강은 살아있다>와 <대한민국이 무너지고 있다>라는 두 권의 책을 통해 MB표 4대강에서 벌어질 재앙을 낱낱이 밝혔습니다.

낙동강 칠곡왜관철교 붕괴, 수질 악화 등 4대강에서 벌어진 여러 재앙들은 모두 제가 기사와 책으로 지적한 것들입니다. 제 능력이 출중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4대강 사업은 과학이 아니라 상식 이하의 광란의 삽질이어서 제가 지적한 겁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11월 27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국내 건설사의 기술을 거론하며 4대강 사업으로 인한 수질 악화 우려를 일축했습니다. 그러나 4대강 사업 결과 4대강의 물은 '녹조라떼'로 변하여 공업용수로도 쓰기 곤란한 물로 전락하였습니다.

<조선일보>는 14일자 신문에서 "한강·낙동강·금강·영산강 등 '4대강(江) 살리기 사업'을 실시한 하천의 수질이, 4대강 사업을 하지 않은 하천보다 4대강 사업 이전에 비해 수질이 더 나빠진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습니다. 이어 신문은 "16개 보를 통해 총 7억t 이상의 강물이 더 확보됐지만, 수량이 많아지면서 생기는 수질 개선 효과보다 강물이 정체되면서 발생하는 수질 악화 효과가 더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지적했습니다.

과연 이게 22조 원의 엄청난 혈세를 탕진한 후에 전혀 몰랐던 의외의 결과인양 쓸 수 있는 기사일까요? 수질을 정화시키는 여울, 습지, 모래가 사라지고, 16개 대형 댐 규모의 보를 건설하여 물이 흐르지 않으면 당연히 물은 썩을 수밖에 없습니다. 습지와 모래가 사라진 흐르지 않는 강이 썩는다는 건, 초등학생도 다 알 수 있는 상식입니다.
 

4대강 수질의 진실을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지난 9월 태풍이 지나 간 후 10월 초의 낙동강 강정고령보입니다. 4대강 문화관인 디아크(동그라미)가 있지만, 4대강 사업 이전엔 탁하던 금호강(우측)이 태풍 홍수 후에도 녹조가 번성하고 있는 낙동강보다 더 맑아보입니다. 얼음이 녹기 시작하는 올봄에 어떤 녹조대란이 벌어질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 낙동강지키기부산시민운동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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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4대강 파괴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만약 언론들이 상식 이하의 불법천지 4대강 사업에 대해 처음부터 제대로 보도했다면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사업은 이룰 수 없는 허망한 꿈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4대강 사업 보도를 철저히 통제한 방송국들과 4대강 사업을 찬양한 언론에 힘입어 4대강 사업은 완공되었습니다. 4대강 죽이기에 대한 책임은 국토파괴 주범인 이명박 대통령만이 아닌, 비판과 감시라는 언론의 사명을 망각한 대한민국의 언론에게도 있습니다.
 

낙동강 제1비경 경천대가 4대강 사업으로 파괴되었습니다. 국토파괴 범죄에 불과한 4대강 사업에 대해 언론들이 제대로 보도했다면, 4대강 사업은 제대로 진행될 수 없었을 겁니다.
ⓒ 최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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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는 정부 관계자가 "4대강 사업에 문제가 많다"고 밝혔다고 보도했습니다. 정부 관계자의 말은 정확한 표현입니다.

필자는 <오마이뉴스>를 통해 4대강 사업의 잘못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지난 3년간 전국의 대학과 시민단체와 교회, 사찰, 성당 등에서 총 300회가 넘는 강연을 했습니다. 강연이 끝나면 4대강 사업의 좋은 점은 없는지 묻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저는 "4대강 사업의 좋은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4대강 사업은 대국민 사기극에 불과했습니다"라고 확실하게 대답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4대강 사업으로 수질을 개선하고 홍수와 가뭄을 대비한다며 4대강 사업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많다"는 4대강 사업의 첫 번째 문제는 바로 국토파괴입니다. 이 대통령은 하늘이 수만 년 동안 빚어 선물로 준 아름다운 강을 단 2년 만에 처참하게 파괴했습니다. 이는 후손들에게 물려줄 소중한 국토를 파괴한 범죄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지난해 6월 가뭄에서 보듯, 4대강 사업은 가뭄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4대강에 가득 채운 물을 정작 가뭄으로 물이 필요한 지역에 공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2조원 들여 4대강에 모아 둔 물은 아무 쓸모없이 썩은 '녹조라떼'로 변했습니다.

세 번째 문제는 4대강 사업은 홍수 예방이 아니라 언젠가 터질 거대한 물폭탄이라는 겁니다. 모래 위에 성을 쌓는 자는 어리석은 바보라던 예수님 말씀처럼, 4대강 사업은 준공 일 년도 되지 않아 붕괴 논란을 겪고 있습니다. 4대강 16개 보는 언젠가 터질 대형 물폭탄에 불과합니다.
 

준공한 지 일년도 되지 않아 4대강 보의 물받이공과 바닥보호공에서 심각한 균열이 발생했습니다. 4대강에 세워진 16개 괴물 댐(보)은 언제 터질 지 모르는 거대한 물폭탄에 불과합니다. 제2의 연천댐 붕괴의 재앙이 낙동강에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 시민환경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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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사업 문제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4대강 준설로 인한 역행침식으로 지천의 붕괴가 심각하게 진행중입니다. 역행침식 탓에 지천의 크고 작은 다리들이 무너지기도 했습니다. 4대강 준설로 낙동강 칠곡왜관철교가 붕괴된 것처럼, 4대강 사업은 지천뿐아니라 4대강을 지나는 교량들에도 위험 요소입니다.

4대강 사업으로 철새들의 낙원을 만든다던 4대강은 더는 철새들이 살 수 없는 철새들의 사형장이 되었습니다. 또 물고기가 떼죽음 당하는 물고기들의 처참한 사형장으로 전락했습니다. 4대강 사업의 문제를 하나 하나 열거한다면 끝이 없습니다. 4대강 사업을 한마디로 줄인다면 'MB표 대국민 사기극'입니다.
 

다리는 무너지고, 물은 썩고, 물고기들은 떼죽음 당하고.... 4대강 사업은 재앙의 연속입니다. 이게 바로 MB표 4대강 사업의 진실입니다. <조선일보>의 기사와 감사원 감사 결과가 놀랍지 않은 이유입니다.
ⓒ 정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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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사업에 대한 청문회를 열어야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지난해 12월 16일 대선 후보 3차 TV 토론에서 "4대강 사업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제기를 알고 있지만, 홍수기를 더 지나보고 결과에 따라 위원회 등을 구성해 잘못된 점을 보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4대강 재앙은 삽질 재벌들의 뒷주머니 채워주려는 이명박 대통령의 눈물겨운 배려와 침묵으로 이에 동조한 박근혜 당선인, 새누리당의 합작품입니다. 박 당선인도 신음하는 4대강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올 봄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4대강엔 심각한 녹조 대란이 다시 벌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난해 9월 큰 태풍으로 큰 홍수가 지나갔음에도, 10월 초 낙동강에서는 물이 썩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홍수가 지난 지 겨우 며칠 만에 곳곳에 녹조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4대강을 살리는 길은 딱 한 가지입니다. 4대강 보 수문을 열어 녹조대란을 막아야 합니다. 그리고 국토를 파괴하고 국고를 탕진한 이명박 대통령과 관련 공무원, 자칭 전문가라던 지식 장사꾼들에 대한 청문회를 실시해 두 번 다시 이런 어리석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4대강 준설로 인한 역행 침식으로 지천에 하상유지공까지 설치했지만 무너져 사라지고(가운데 위의 화살표), 모래는 다시 퇴적됐습니다. 강물은 태풍 홍수가 지나갔음에도 녹조가 피기 시작했습니다(동그라미 속 강물). 올봄에 녹조대란이 일기 전에 수문을 열어야 합니다. 박근혜 당선인의 올바른 판단을 촉구합니다.
ⓒ 낙동강지키기 시민운동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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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감사원과 <조선일보>가 뒤늦게 4대강 재앙에 호들갑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4대강 재앙을 <대한민국이 무너지고 있다>(오월의 봄 출판사)에 이미 상세하게 밝힌 바 있습니다. 박근혜 당선인과 인수위원들에게 감사원 감사 보고보다 <대한민국이 무너지고 있다>를 강력히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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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김현희’ 논란의 주범은 김현희 본인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3/01/17 08:47
  • 수정일
    2013/01/17 08:47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가짜 김현희’ 논란의 주범은 김현희 본인
 
[특별기고] ‘북한인 입증’ 객관적 증거 제시해야... 말바꾸기도 문제
 
신성국 | 2013-01-16 18:39:0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MBC가 15일 밤 11시 15분부터 70분 동안 기존의 ‘100분 토론’ 대신 <특별대담-마유미의 삶, 김현희의 고백>을 전격 방송했다. 이에 대해 이용마 MBC노조 홍보국장은 “이 대담이 방송 7시간 전에야 녹화를 하고 부랴부랴 내보내야 할 속보성 사안인지 의문이다. 이런 식의 편성은 전례가 없다”며 방송 배경에 의혹을 제기했다.

공중파에 다시 등장한 김현희를 지켜보면서 두 사람이 떠올랐다. 한 명은 전두환이고 다른 한 명은 박근혜였다. KAL858기 사건의 핵심 인물은 전두환이다. 12.12사태를 일으켜 대한민국 헌법을 유린하고, 광주 학살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KAL기 사건의 덕분으로 자신이 지목한 후계자 노태우에게 정권 이양을 성공리 마칠 수 있었다.
 

▲ 87년 대선 하루 전날 김현희(마유미)가 서울로 압송됐다. 투표 당일 김현희 압송 기사를 실은 <조선일보> 1987년 12월 16일자 1면.

전두환은 국민을 상대로 '평화의 댐 사기사건', '수지김 조작사건' 등 집권기간 동안 북한과 관련된 공안조작사건들이 유독 많았다. 훗날 전두환 정권 시기에 발생한 공안사건들은 모두 조작으로 드러났지만, 'KAL858기폭파사건'은 숱한 의혹만 남긴 채 아직도 진상규명이 진행형이다.

전두환은 이 사건이 발생한 지 이틀 만에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북한에 의한 폭파 테러’로 규정했고, 국내 언론들은 모두 안기부의 나팔수 노릇을 했다. 그리고 13 대선 전날 김현희가 혜성처럼 나타나면서 노태우는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 사건의 조사와 수사는 일사천리로 마무리되었다. MBC는 전두환 정권 하에서의 KAL858기 사건 수사발표와 '정체불명'의 김현희를 믿으라고 강요해서는 안된다.

 

어제 MBC에 출연한 김현희는 18대 대통령 당선자인 박근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기를 필자는 기대했다. “박근혜 당선자는 2002년 5월 11일부터 14일까지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과 회담을 가졌는데, 왜 KAL858기 사건에 대한 시인과 사과를 받아냈지 못했습니까?” 그러나 김현희는 박근혜에 대해 철저히 침묵했다.

안기부는 KAL858기 사건 수사 발표문에서 이 사건은 김정일의 친필 지령에 의해 저질러진 테러로서 천인공로한 범죄라고 했다. 박근혜는 KAL858기 사건의 지시를 내린 '주범' 김정일을 만나고도 왜 이를 한 마디 언급하지 못하고, 또 사죄도 받아내지 못했는가? 반공사상과 투철한 안보관을 자부하는 그가 우리 역사상 가장 큰 항공기 테러폭파 사건을 자행한 김정일을 만나 사과 한 마디도 받아내지 못했다니 말이 되는가?
 

방북 이틀째인 2002년 5월 12일 김정일 위원장과 단독회담 중인 박근혜 대표

박근혜가 11년 전 김정일과의 회담에서 이 사건을 깨끗이 마무리짓고 올바로 해결하고 왔다면 피해자 가족들도 의혹을 접고 진상규명 활동도 종결했을 것이다. 나아가 이 사건으로 인한 국론 분열도 종식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김현희는 그런 역할을 못한 박근혜를 질타하고 책임을 물어야함에도 애꿎은 국민들 탓만 하고 있으니 둘 다 정상은 아니다. 결국 '가짜 김현희' 논란에서 박근혜도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일이다.

결국 '가짜 김현희' 논란의 원인 제공자는 다름아닌 바로 김현희 본인이다. 김현희를 의심하는 사람들의 주된 이유 중 하나는 김현희가 '북한인'임을 입증하는 물증을 왜 제시하지 못하는가 점이다. 북한인 17세 이상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공민증 번호’조차도 모르는 김현희이다.

국정원이 탈북자들의 신원을 조사하면서 '북한인'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바로 '공민증 번호'라고 한다. 그런데 그동안 나온 모든 KAL기사건 수사기록 및 재판기록 그 어디에도 김현희의 공민증 번호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노동당 당원으로 활동했다는 김현희가 노동당증 번호도 모르고 있다고 한다. 그런 김현희를 북한사람(북한공작원)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비전향 장기수 가운데 노동당 당원 출신들은 50~60년이 지난 지금도 당증번호를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김현희는 본인이 북한 출신인임을 증명할 수 있는 공민증 번호와 노동당증 번호만 정확하게 밝히면 손쉽게 해결될 수 있는 일을 끝내 밝히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가짜 김현희' 논란의 주범은 바로 김현희 본인임을 깨달아야 한다. 김현희는 자신이 자신이 가짜가 아니라고 공중파 방송에 출연해여 전파를 낭비할 필요가 없다. 객관적 물증을 내놓으면 된다.

“한국으로서는 마유미(김현희)의 자백과 상황증거만으로도 공판은 유지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렇게 큰 사건에서 물적 증거가 제로라는 것은 민주주의 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다. 일본만 해도 그 정도의 물증으로는 도저히 공판 유지가 될 수 없다.” (이타쿠라 히로이, 일본 형법학자, 1988. 1. 20)

국민들이 김현희를 불신하는 이유는 그가 거짓말을 밥먹듯 하고 또 자주 말을 바꾸기 때문이다. 작년 종편 <TV조선>과 어제 MBC에서도 뻔한 거짓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 가령 김현희는 자기 자녀들의 나이도 모르거나 거짓말로 속이고 있다.

2003년도 MBC PD기자들이 자신의 집을 취재하러 왔을 때, 세 살짜리 아들과 한 살짜리 젖먹이를 둘러엎고 서둘러 도망갔다고 언급했다. 김현희는 아이들 나이을 속였다. 2003년도 김현희의 큰 아이는 다섯 살이고 작은 아이는 세 살이었다. 이 사실은 <조갑제 닷컴>에 실린 김현희 가족 사진에서 증명되었다. 아래 사진은 2008년도에 찍은 것이다.

 

 


김현희는 1997년 안기부 직원과 결혼하였다. 위 사진을 보면 둘다 초등학생임을 알 수 있다. 2008년 11월 김현희가 이동복 상임대표에게 편지와 사진을 보냈다. <조갑제 닷컴>은 이 사진을 설명과 함께 올려놓으면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 사진 설명에 아들은 10살, 딸은 8살이라고 기록되었더군요. 2008년도에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더군요”

당시 김현희의 나이도 46세로 나왔음을 밝혔다. 2008년도에 아들이 10살이면 5년 전 2003년도에는 5살이고, 딸은 세 살이 맞다. 그런데 김현희는 공영방송에 나와서 2003년도에 아들이 세 살이고, 딸이 한 살이라고 버젓이 거짓말을 하고 있으니 엄마로서 자식들 나이도 속였다. 김현희의 영원한 멘토 조갑제는 김현희의 주장을 뒤엎고는 김현희가 주장한 것보다 2살 많다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다. 2009년 6월 21일 <여성조선>도 김현희의 거짓을 증명하고 있다.

“김현희는 어느새 초등학교 3학년이 된 아들과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을 둔 두 아이의 학부형이 되었다” (<여성조선> 백은영 기자의 김현희 취재)

2003년 KBS, SBS, MBC 방송 3사가 KAL858기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당연히 김현희 인터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방송사의 보도에 문제가 있었다면 김현희는 언론중재위에 제소하고 방송사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노력과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1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MBC에 출연하여 억울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또 작년 9월 새누리당이 총대를 메고 <김현희 가짜 만들기 진상규명대책위>까지 구성하여 김현희 지원에 나섰다. 새누리당은 김현희를 10월 9일 국감 증인으로 채택하여 참여정부가 김현희에게 저지른 탄압의 진상을 밝히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국감판을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김현희는 국감에 출석하지 않았다. (그는 어제 MBC와의 대담에서 “국회에서 연락이 오지않아 출석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박근혜 대통령 시대를 맞아 기다렸다는 듯이 공중파 MBC에 출연하여 국민들 앞에 나타난 김현희는 대체 누구인가? 왜 김현희의 뒤에는 전두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일까? 왜 새누리당은 김현희를 여신처럼 받들며 다시 유신독재로 회귀하고 싶어하는가?

KAL858기 사건으로 희생된 115명의 피해자 가족들의 피눈물은 도대체 누가 닦아 주어야 하는가? 김현희가 TV와 언론에 나올 때마다 피해자 가족들의 숨죽이며 울고 있는 고달픈 심정은 언제나 멈춰지려나? 그러나 진실을 위한 국민들의 행보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가 목숨처럼 아끼는 것은 바로 진실이야!”라고 일갈하신 리영희 선생의 말씀이 귓전을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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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유가족들, 참사 4주기 앞두고 개발지 돌며 '동병상련'

"사람도 안 사는 저 아파트 때문에…사람이 죽었나"

[현장] 용산참사 유가족들, 참사 4주기 앞두고 개발지 돌며 '동병상련'

최하얀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1-16 오후 5:30:25

 

2009년 용산참사로 남편을 잃은 유영숙(53) 씨. 참사 4주기가 가까워진 요즘, 그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낮에는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을 외치며 바쁘게 움직이지만, 밤이 되면 어두운 방에 홀로 남아 답답한 가슴을 친다. 그는 "아직도 남편이 많이 보고 싶다"고 했다.

지난 15일 아침, 유 씨는 무거운 마음을 이끌고 집을 나섰다. 이날은 용산참사 4주기 추모위원회가 준비한 '강제 퇴거 현장 순회'의 날. 남편을 떠나보낸 용산 4구역 남일당 현장처럼, 재개발 광풍에 휩싸여 폐허가 된 지역들을 방문한다. 오전 10시 자욱한 아침 안갯속에서 유 씨는 중구 대한문 앞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의 손을 부여잡았다.

이날 유 씨를 비롯한 현장 순회단 70여 명은 중구 순화동 재개발 지역, 경기도 일산 덕이 재개발 지역, 경기도 김포 신곡 재개발 지역을 순서대로 방문했다. 모두 한때 재개발 광풍이 불어 소지주와 세입자들이 터전을 잃은 곳이다. 또 지금은 각각의 이유로 재개발이 중단된 곳이기도 하다. 유 씨와 함께 순회단에 참가한 전재숙(69) 유가족 대표는 "이렇게 다 중단될 것을, 왜 그리 사람을 죽기 살기로 내쫓았나"라며 내내 가슴을 쳤다.

[중구 순화동] "남편과 오손도손 꾸려가던 식당 자리엔 무성한 잡초만…"
 

▲ 중구 순화동 재개발 지역. ⓒ프레시안(최하얀)


중구 순화동 재개발 지역은 유영숙 씨가 남편 고(故) 윤용헌 씨와 함께 식당을 했던 곳이다. 경찰본청 바로 맞은편 이곳에서 부부는 10여 년 전 한정식 가게 '미락정'을 열었다. 주변에 있던 40여 개 상가 주민과 함께 유 씨 부부는 매일 바쁘게 보냈다. 점심시간이면 인근의 공무원과 경찰들이 식당 앞에 긴 줄을 만들었다. 유 씨는 "열심히 살았고, 잘살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청천벽력 같은 재개발 통보는 모든 것을 바꿔 놨다. 2005년 5월, 세입자들과 소지주들은 일방적인 재개발 통보를 받았다. 재개발 조합 측이 내놓은 보상은 약 1000만 원 수준의 영업보상금이 전부였다. 좋은 상권으로 들어오기 위해 대출까지 받아 만든 권리금은 되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며 원주민들은 힘의 논리에 밀려갔다. 유 씨는 "조합의 회유·압박으로 소지주들은 땅을 헐값에 매매하고 하나씩 떠났다"라며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리고 곧이어 2006년 명도집행이 들어왔다. 유 씨는 "100명은 훌쩍 넘어 보이는 새까만 철거 용역들이 집을 부수고, 주민들을 길바닥에 내동댕이쳤다"고 말했다.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상스러운 욕에 기겁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처럼 개발 사업이 이루어지는 곳에는 어김없이 철거 용역이 등장한다. 덩치가 크고 몸 이곳저곳에 문신을 새겨 넣은 이들은 폭행, 협박, 성희롱 등을 거침없이 하며 거주민을 위협한다.

유 씨는 "그래도 남편은 싸워보려는 의지가 있었다"고 말했다. 유 씨는 "처음에는 온 가족이 나서 남편의 투쟁 의지를 꺾어보려고 했지만, 남편은 굳건했다"며 "용산에 간 것도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을 지나칠 수 없어서"라고 말했다.

윤용헌 씨는 2009년 참사 당시 망루에서 목숨을 잃었다. 유 씨는 "남편이 용산으로 떠나기 직전, 나를 데리고 이곳(순화동)을 한 바퀴 둘러보며 천막 치기 좋은 장소를 알려줬다"며 "'내가 없을 때 순화동을 잘 지켜라'라고 당부했다"고 말했다.

유 씨는 지금도 한 달에 한 번꼴로 순화동을 방문한다. 2011년 이후 중단된 공사가 혹시라도 재개될까 걱정돼서다. 순화동 재개발 사업은 조합 비리가 터지고, 급기야 조합과 재개발 대책위원회 간의 소송에서 조합이 패소하며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다.

공사가 중단됐다고 해서 유 씨가 과거의 삶을 돌려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부부의 삶이 뿌리내렸던 '미락정' 자리는 이미 무성한 잡초가 차지했다. 이제는 모두 떠나고 다섯 가구만이 남은 이곳. 스산한 공터에 폐허처럼 서 있는 건물에서 나풀거리는 빨래 옷가지들이 "여기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일산 서구 덕이동] "사람도 살지 않는 저 아파트가 '집'이긴 한가"
 

▲ 일산 덕이동에 있는 김명자 씨의 천막. 순회단원들이 천막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다. ⓒ프레시안(최하얀)


유영숙 씨는 순화동을 떠나 일산 덕이동으로 향했다. 전국에서 유명한 대규모 가구 상가 단지였던 이곳에선 2006년 5월, '주거지 인가'가 떨어지며 재개발이 시작됐다.

당시 세입자들은 재개발이 논의 중임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 개발 사업은 보통 막바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대부분 거주민 모르게 구메구메 진행된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처음 개발 사업 구역을 지정할 때, 이를 아는 거주민은 전체의 10%(보통 개발 찬성 주민)도 채 되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다 어느 날 "경축, 정비사업구역으로 지정"이란 현수막이 동네 어귀에 내걸려야 비로소 세입자들은 "쫓겨날 처지"임을 깨닫게 된다.

덕이동에서 200평 규모의 가구점운영하던 김명자(52) 씨도 그랬다. 2001년 가구점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동네에서 잘나가던 여성 최고경영자(CEO)로 불렸"던 김 씨. 그러다 2008년 4월, 건물 주인이 재개발 업체에 땅을 팔면서 그는 한순간에 '철거민'이 됐다.

김 씨는 세 딸과 함께 천막을 치고 '이주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김 씨는 "물도 전기도 없는 천막에서 우리 네 모녀만 1960년대에 살고 있다"며 "툭하면 철거 용역이나 술 취한 행인이 한밤중에 천막에 들어와서 행패를 부린다"고 말했다. "이런 일이 하도 많아, 욕만 늘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김 씨는 재개발 반대 투쟁을 하며 남편과 이혼했다. 하지만 세 딸은 김 씨를 떠나지 않았다. 천막을 처음 치던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막내딸은 올해 대학에 갔다. 원래 수의사가 꿈이었는데, 얼마 전에는 건축공학을 공부하겠단 포부를 밝혔다고 했다. "엄마한테 예쁜 집을 지어주고 싶어서라고 하더라"라며 김 씨는 정겹게 웃었다.

현재 김 씨의 가구점을 밀어낸 자리에는 고층 아파트들이 유령처럼 서 있다. 재작년에 분양이 시작됐지만, 이제 겨우 입주가 30%가량 진행됐다고 김 씨는 전했다. 그러면서 "사람도 살지 않는 저게 집이야? 내 천막이 집이지"라고 김 씨는 말했다.

김 씨의 설명을 듣고 있던 유영숙 씨는 결국 북받쳐 울음을 터뜨렸다. "어떡해. 정말 어떡해"라는 말이 입에서 연달아 터져 나왔다. 멀찌감치 떨어져 순회단을 지켜보고 있던 전재숙 씨도 가슴을 쳤다. 전 씨는 "엄마(김 씨)를 지켜주는 (김 씨의) 딸들이 정말 기특하다"면서도 "이런 일을 후세대에게 물려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김 씨는 자신을 살린 건 2009년 용산에서 목숨을 잃은 다섯 철거민(이상림, 양회성, 한대성, 윤용헌, 이성수)이라고 말한다. 그는 "죽으려고 몇 번 했는데, 돌아가신 분들 보니 안 되겠더라고"라며 "억울해도 죽으면 말 못해. 살아야 해. 저 사람들 몫까지 내가 살아야 해"라고 말했다.

[스산한 유령도시 김포 신곡] "여기 사람이 있다"
 

▲ 김포 신곡동 재개발 지역에 마지막 하나 남은 주거 건물.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이 "여기 사람이 있다"고 알린다. ⓒ프레시안(최하얀)


순회단을 실은 버스는 이번엔 김포 톨게이트 바로 옆에 있는 신곡동에 멈췄다. 참가자들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충격'이란 표정을 지으며, 허공에 탄성을 쐈다.

115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넓디넓은 땅은 흡사 '전쟁터'와도 같았다. 쓱 보기만 해도, 반파된 공장 건물과 주택이 10여 개는 족히 돼 보였다. 길가에 자란 앙상한 나무들은 사람이 심은 것이 아니라 씨앗이 날아와 자란 것이라고 했다. 이곳 주민들은 "사람들이 목매러(자살하러) 여기에 오고 쓰레기를 무단 투척하러 온다"며 "밤이 되면 온 동네가 캄캄해 무섭다"고 말했다.

신곡동에선 2006년 재개발이 시작됐다. 그러다 자금난에 시달리던 시행사부도를 냈고, 재개발 조합도 해체됐다. 이미 철거 용역들이 거주민을 내쫓고, 여러 공장에 불을 지른 후였다.

이처럼 개발 사업으로 퇴거와 철거가 이루어지는 동네에 가보면, 한쪽 벽면이 무너져 있는 사이로 위협적인 낙서가 있거나 쓰레기가 잔뜩 쌓여 있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는 건물을 철거하기 전 철거 용역들이 거주 환경을 '일부러' 훼손한 것으로, '철거 예비 행위'라고 부른다.

이렇게 철거 예비 행위를 하면, 남아 있는 주민은 계속 거주하기 어렵다. 한밤중에 철거 용역들이 옆 건물에 불을 지르는데, 이를 버텨낼 수 있는 주민은 많지 않은 게 당연하다.
 

▲ 김포 신곡동 재개발 지역. ⓒ프레시안(최하얀)


신곡동 주민 조규승(58) 씨는 자신의 공장으로 순회단을 이끌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유영숙 씨는 조 씨의 공장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밖을 서성였다. 유 씨는 "여기 있기 싫어"라고 말했다.

유 씨 부부는 2009년 이전에도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신곡동 주민들의 재개발 저지 싸움에 힘을 보태러 왔었던 게다. 신곡동을 방문했던 그날, 부부는 조 씨 공장에서 음식해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고 전했다. 유 씨는 "이 공장에 오니 남편이 사무치게 그립다"며 "가슴이 무너진다"고 말했다.

유가족 전재숙 씨는 "2009년 참사 전에는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다"며 "내가 이렇게 재개발 지역들을 알게 돼서 악에 받치게 된 건 나 때문이 아니라 저들 때문"이라고 말했다. 재개발로 이득을 취하는 건설사들과 투기 자본, 그리고 이를 위해 국민의 주거권은 아랑곳하지 않는 정부 때문이란 얘기다.

전 씨는 "철거민이 되기 전에는 개발이 되면 좋은 건 줄 알았고, 세금 내고 열심히 살면 잘살게 되는 건 줄 알았다"며 "이 넓은 땅을 허허벌판으로 만들어놓을 것을, 대체 왜 내쫓은 건지 모르겠다"고 읊조렸다.
 

▲ 재개발 지역을 순회한 소감을 적는 용산참사 유가족 유영숙 씨. 오른쪽이 유가족 대표 전재숙 씨다. ⓒ프레시안(최하얀)


순회단의 모든 일정이 끝나고 참가자들은 각자 작은 종이에 자신의 소감을 남겼다. 작은 흰색 종이에 유영숙 씨는 이렇게 썼다.

"오늘 하루가 너무 힘든 날인 것 같네요. 순회 지역을 가보니깐 남편이 어디선가 날 부르면서 올 것 같았는데. 덕이, 신곡에 와보니 더욱더 남편의 발자취가 생각나네요. '현구 엄마' 하면서 불러줄 것만 같은 마음에 심정이 답답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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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봉산 겨울능선을 닮은 DMZ 짝귀 산양과의 만남

윤순영 2013. 01. 15
조회수 4125추천수 1
 

200만년 전 태고 모습 고스란히 간직한 세계적 희귀동물, DMZ 등서 500여 마리 생존

경계심 많지만 놀라지 않는 의연한 모습…체계적 보전대책 시급

 

크기변환_SY3_8369.jpg » 느긋하게 마른풀을 씹고 있는 멸종위기야생동식물 1급 산양의 의연한 모습.

 

지난 1월8일 설레는 마음으로 산양을 보기 위해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으로 향했다. 고성은 금강산을 품은 땅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을의 하나로 손꼽혀 왔다. 김포에서 3시간이 넘게 걸리는 여정이었다.


군부대에서 운영하는 율곡회관에 여장을 풀고 내일 건봉산 산양을 만날 기대감 속에 밤을 보냈다. 날이 밝았다. 춥기는 하지만 아주 쾌청한 날씨다.

 

크기변환_SY1_8363.jpg »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에서 바라본 건봉산과 주변 산줄기.

오전 9시 건봉산 들머리 주차장에서 안내를 맡은 정훈장교를 기다렸다. 30분 정도 늦는다더니 아예 10시쯤 도착한단다. 기다리는 시간을 이용해 옷깃을 여미고 건봉사에 들렀다. 푸르른 소나무가 방문객을 맞는다.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건봉사가 불타고 500년 된 팽나무와 불이문만 남았다고 한다. 지금도 새롭게 건축을 하고 있는 중이다. 옛 흔적이 사라졌지만 설악산의 신흥사, 낙산사, 화암사, 백담사와 갈은 절들이 모두 건봉사의 말사였다니 절에 규모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크기변환_SY1_8319.jpg » 건봉사 들머리의 늘름한 소나무 숲.

 

크기변환_SY1_8316.jpg » 건봉사 전경. 설악산 신흥사, 낙산사 등을 말사로 거느린 큰 절이었다.

안내를 맡은 정훈장교가 도착했다. 검문소에서 간단한 출입신고를 마치고 정훈장교의 안내를 받아 건봉산으로 향했다. 해발 910m가 조금 넘는 건봉산은 민간인통제구역이 곳곳에 있었다.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최전방 능선을 따라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는 철책이 이어져 있다.

크기변환_SY1_8378.jpg

 

크기변환_SY1_8431.jpg » 철책선에 가로막혀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건봉산.

 

급한 경사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구불구불 좁은 길은 차가 교차하면 한쪽에서 서야 한다. 지프로 이런 길을 운전하는 경험도 처음이다.

 

아득히 내려다 보이는 낭떠러지는 아슬아슬한 느낌을 주었다. 산 전체가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천연림으로 덮혀 있는데 그 위에 하얗게 눈이 쌓여 산 전체가 온통 은빛이다. 발아래 보이는 능선이 청량제처럼 시원스럽게 다가온다.

 

크기변환_SY1_8441.jpg » 건봉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고성의 모습.

 

크기변환_SY1_8369.jpg » 백두대간 중 금강산의 정맥을 잇고 있는 건봉산 연봉.

 

차량이 힘겹게 30분 정도 움직여 건봉산 꼭대기에 이르자 바다와 맞닿은 고성 땅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이제부터 산양을 보려면 타래난초 꽃처럼 타래를 튼 고진동 계곡의 물굽이로 난 작전도로를 따라 30분 더 가 건봉산 북쪽 끝자락에 가야 한다.


고진동 계곡은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신비로운 하얀 눈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태고의 화석동물 산양을 품고 있어 그런가.

 

크기변환_SY1_8371.jpg » 잎 떨군 활엽수들이 실핏줄처럼 이어져 있는 건봉산 능선.

 

크기변환_SY1_8383.jpg » 고진동 계곡. 추위와 눈으로 하얗게 얼어붙었다.

 

북쪽으로 흐르던 고진동계곡의 물줄기는 동장군의 기세로 지금은 멈추었다. 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다시 비무장지대의 계곡을 거치면서 금강산 남쪽 자락을 휘감아 돌면서 남강과 만나 동해로 빠진다.

 

산양이 자주 목격되는 계곡에 도착했다. 현재 이곳에 서식하는 산양의 수는 알 수가 없다. 사전 지식이 없어 경계근무를 마치고 나오는 초병에게 물어봤다. 봄, 여름, 가을엔 자주 목격되지만 겨울엔 가끔씩 나타난다는 답이 돌아온다. 이제부터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크기변환_SY1_8381.jpg » 동물에게 피난처와 서식지를 제공하는 가파른 고갯마루.

 

크기변환_SY1_8390.jpg » 산양이 자주 목격되는 철책선.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났다. 계곡물이 얼어 너무 조용해 적막감마저 드는 계곡에서의 춥고 지루한 기다림. 철책선 안과 비무장지대의 계곡을 좌우로 바둑판처럼 나누어 쌍안경으로 샅샅이 훑어 나갔다. 나뭇잎이 떨어진 회색빛 가지는 산양 색과 비슷해 산양이 나타나도 잘 보이지 않는다. 나중엔 검은 물체가 산양으로 착각될 정도로 어른거린다.

 

해가 기울고 산 그림자가 계곡에서부터 정상을 향해 올라가며 그늘을 드리운다. 결국 기다리던 산양은 관찰할 수 없었다.

 

7시간의 기다림과 허탈한 마음, 그래서인지 추위가 더 엄습해 온다. 2박 3일의 기회, 내일 이곳을 다시 찾아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산양을 만날 수 있는 간절한 마음을 고진동 계곡에 남겨 두고 철수했다.

 

크기변환_SY2_8335.jpg » 건봉산에서 바라본 동해.

 

크기변환_SY1_8425.jpg

 

1월9일, 어제보다 기온이 내려갔지만 날씨는 더 좋다. 오전 9시 검문소 주차장에서 정훈장교와 다시 만나 고진동 계곡을 향해 출발했다. 산양과 만날 수 있다는 간절한 희망을 마음속에 되새겼다. 건봉산 능선과 발 아래 펼쳐진 동해 아침 햇살을 받아 유리알처럼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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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변환_눈SY2_8355.jpg » 사람을 보고 경계하는 산양.

 

오소동 계곡을 지날 때쯤 검은 물체가 움직인다. 처음엔 멧돼지인줄 알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마른풀을 뜯고 있는 산양이었다. 절벽과 나무가 없는 볕이 잘 드는 개방된 장소다. 생전 처음 보는 산양이다. 숨을 죽이고 차에서 내려 카메라를 조심스럽게 꺼내들고 셔터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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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변환_눈SY3_8348.jpg » 얼어붙은 땅을 헤짚어 먹이를 찾는 산양.

 

바람에 꼬리의 흰 털이 휘날리고 비단 같은 질감의 몸털이 잔잔하게 물결을 이룬다. 소처럼 큰 눈과 얼굴, 귀는 당나귀와 비슷하고 짧은 듯 간결하게 살짝 활처럼 휜 뿔은 나이테 무늬 가 있고 끝부분으로 올라 갈수록 검은색이다. 완벽한 방어 무기로 손색이 없다.

 

크기변환_눈SY3_8412.jpg » 강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산양의 위엄.

 

크기변환_sns.jpg » 예상치 못한 불청객의 출현에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산양.

 

다리는 말과 같이 튼튼하고 등과 엉덩이로 이어지는 곡선은 군더더기가 없이 매끈하다. 소와 말 그리고 여러 동물의 형상을 조합해 놓은 듯 보인다.

머리 뒤쪽으로부터 등을 따라 꼬리까지 검은색 줄이 나 있으며 뿔에서 코 로 이어지는 이마는 검은색 털로 덮여있다.

 

몸통의 바탕 털은 전체적으로 솜 느낌의 두텁고 노란색이 감도는 회색 그 위에 검은 털이 거칠게 솟아올라 조금 길게 분포 돼 있다. 목에는 큰 흰무늬 반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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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변환_SY3_8369.jpg » 어렵게 구한 먹이를 먹으면서도 불청객의 동태에 눈길을 멈추지 못하는 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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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 일인지 오른쪽 귀 상단부가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산양 귀에 상처가 난 것이 종종 발견되기도 한다.

 

큰 귀를 지닌 산양이 어릴 때 험준한 기암절벽과 무성한 나무 숲 사이를 오가며 부상을 입었을 수 있고, 비무장지대에 산재해 있는 철조망이나 영역다툼, 발정기 때 싸움으로 인한 상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뿔에 새겨진 나이테나 윤기가 있는 진한 회갈색 털, 균형 잡힌 체격, 단독 생활을 하는 것으로 봐 8~10년 생 수컷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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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변환_눈SY3_8461.jpg » 배를 채우기엔 부족한 먹이활동 후 서서히 이동하고 있는 산양.

 

암컷은 수컷보다 색이 흐리고 콧등에 회색이 돈다. 아주 잘 생긴 산양이다. 오소동 계곡의 왕자답다.

 

비무장지대에서 살아서인지 경계심은 강해도 화들짝 놀라는 기색 없이 의연하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여유롭다.

 

30분이 지났을까? 여러 행동을 보이지 않고 마른풀을 뜯던 산양이 즐기던 식사를 멈추고 능선을 따라 서서히 시야에서 사라진다. 산양은 200m 밖 낙엽 밟는 소리를 듣고 도망갈 정도로 청력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실제 관찰하기가 무척 어렵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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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변환_SY3_8473.jpg » 먹이 활동 후 나무를 위장막 삼아 능선을 따라 안식처로 향한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강원도 양구, 고성, 화천과 삼척, 충북 제천, 경북 울진 봉화 등지에서 산양을 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1967년 설악산의 자연생태를 조사한 학술 보고서에는 산양이 해마다 수백 마리씩 잡힌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무분별한 사냥과 폭설 피해 등으로 인해 현재 설악산에는 100여 마리의 산양이 남아 있을 뿐이다.

 

크기변환_1SY3_8473.jpg » 나무색과 흡사해 식별이 어려운 산양.

 

야생 동물이 자연 상태에서 번식을 이어나가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개체수가 통상 100여 마리이기 때문에 설악산 지역의 산양은 생존의 마지막 기로에서 있다.

 

산양은 200만 년 전 태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 불린다. 일반인들에게 산양은 그림책이나 만화 속에 등장하는 낯선 동물로 여겨지지만 2013년 현재 한반도에도 산양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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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산양과 같은 종인 아무르산양은 러시아 하바로프스키 내륙 오지와 연해주의 바위가 많은 지역에 폭넓게 분포 하였지만 이제는 개발에 밀려 숫자가 크게 줄었다. 이제 러시아 전 지역에 산양은 시호테알린과 라조브스키 두 개 연해주 자연 보호구에 집중 분포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 생존해 있는 산양은 약 600여 마리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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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양의 형태와 생태

 

산양은 몸의 길이가 115~130㎝, 몸무게 22~42㎏, 귀는 12~13㎝, 겉면은 엷은 쥐색이며, 밑 부분은 어두운 초록색을 띤 갈색이고, 안쪽은 흰색이다. 긴 털이 난 꼬리 길이는 11~15㎝이고, 꼬리의 윗면은 갈색이고 아랫면은 백색이다. 어깨높이는 65~75㎝ 정도이다.

 

산양은 암수 모두 뿔이 있다. 뿔 길이는 나이에 따라 다르나 어른이 되면 12∼17㎝ 정도로 자란다. 뿔은 가지를 치지 않고 일생 동안 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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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변환_SY2_8415.jpg » 얼어붙은 산 속에도 청초록의 자태를 뽐내는 소나무.

 

겨울에 몸 전체의 바탕은 회색을 띤 노란색이고 솜과 같은 털 위에 검은색의 거친 털이 몸 전체에 솟아 있다. 등 면의 정중선은 검은 색이며, 주둥이에서 머리 뒤에 이르는 부분은 검은색을 띠고, 머리 옆과 입술은 회색을 띤 갈색에 검은색이 섞여 있다. 입술의 다른 부분은 희고, 뺨은 검은색이며, 목에는 흰색의 큰 반점이 있다. 몸 뒤에는 짧은 갈기가 있으며 흑색을 띤다.

 

크기변환_SY2_8327.jpg » 산양이 다니는 길목에는 어김없이 거친 바위와 나무가 어우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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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변환_SY3_8531.jpg » 어미 멧돼지 뒤로는 얼굴을 빼꼼히 내민 아기 돼지의 모습도 보인다.

 

크기변환_SY3_8497.jpg » 산양의 모습을 담던 중 슬며시 나타난 멧돼지 가족.

 

절벽과 바위 위를 잘 걸어 다니기 위하여 다리가 굵고 발통은 둥글며 발끝이 뾰쪽하다. 발굽의 가장자리는 날카롭고 밑바닥에서는 끈적끈적한 물질이 나오기 때문에 산양은 벼랑에서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 어깨로부터 무릎에 이르는 곳에 검은색의 띠가 이어져 있다. 아래 배의 양측과 허벅 다리 사이는 흰색이다. 가슴과 윗배는 검은색이다.

 

크기변환_SY3_8464.jpg » 정수리 뒤로 이어진 산양의 갈기가 건봉산의 능선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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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종이 다른 산양과는 얼굴에 분비선이 없다는 특징이 있다. 발굽 사이의 분비샘에서 냄새 나는 분비액이 나오며 산양은 뿔을 나뭇가지에 문질러 분비액으로 자기 영역을 표시하며 영역을 침범하는 산양이 있으면 짧고 날카로운 뿔로 싸워서 쫓아낸다.

 

높이 600m 이상 되는 높은 절벽으로 둘러싸인 산림지대의 꼭대기에서 활동하고 다른 동물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험준한 바위와 바위 사이 또는 동굴에 2∼5마리가 모여 군집생활을 하는데, 겨울에는 폭설을 피해 다소 낮은 산림지대로 내려오기도 하지만 활동지역에서 멀리 떠나지 않는다.

 

크기변환_SY3_8331.jpg » 바람에 나부끼는 산양의 흰털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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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선택한 지역에서 영구히 살며 이동하는 성질이 없다. 이른 아침과 저녁에 가까운 숲속으로 이동해 초본류 식물을 먹기도 하지만 주로 연한 신갈나무, 피나무 등을 주식으로 하며 계절에 따라 열매와 도토리 바위이끼, 진달래와 철쭉의 잎도 잘 먹는다.

 

넓은잎외쑥, 산새풀 등을 간식으로 먹는다. 한낮에는 보통 햇볕이 잘 드는 남향을 택한다. 안전한 바위 벼랑에서 쉬면서 되새김질을 한다. 거의 같은 곳을 쉼터로 쓰고 똥도 같은 곳에 싸는 버릇이 있다. 밤에는 안전한 보금자리로 돌아가 잠을 잔다.

 

보통 10~12월에 짝짓기를 하며 임신 기간은 180~240일로 이듬해 5~6월에 1~2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산양의 목소리는 염소와 비슷하며 다쳤을 때에는 까치의 울음과 같이 찢어지는 듯 애처로운 소리로 강하게 운다.


크기변환_SY3_8341.jpg » 자세히 보니 녀석의 귀가 찢어져 있다. 다음에 만나면 다른 산양과 구별이 가능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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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1월 20일 천연기념물 제217호로 지정되었고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1급이다. 국제자연보호연맹(IUCN)의 보호대상 목록인 적색보호목록에 올라 있다. 전 세계적으로도 단 5종만이 분포하고 있어 국제적인 보호를 받고 있는 희귀 동물이다.

 

아직도 밀렵과 올무에 의해 산양이 죽는 사례가 많이 있고 폭설 때 굶주림에 주검으로 발견된다고 한국산양보호협회 관계자는 말한다. 비무장지대인 만큼 정부와 시·군에서 군부대와 협조하여 체계적으로 겨울철 먹이 터를 마련해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을 강구했으면 한다.

 

복원보다 관리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산양 연구도 전무하다시피 하고 겨울 동안 비무장지대 안 산양 먹이 주기는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체계적인 보전 대책이 서둘러 나와야 할 것으로 보인다.

 

글·사진 윤순영/ 한겨레 물바람숲 필진,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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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순영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 김포의 재두루미 지킴이. 한강 하구 일대의 자연보전을 위해 발로 뛰는 현장 활동가이자 뛰어난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이메일 : crane517@hanmail.net
블로그 : http://plug.hani.co.kr/cr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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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개표 청원’, 마침내 국회에 제출됐다

 

‘수개표 청원’, 마침내 국회에 제출됐다
 
‘아고라’ 서명 23만명 명의... 선관위, 17일 국회서 ‘개표 공개시연회’
 
정운현 기자 | 등록:2013-01-15 18:03:36 | 최종:2013-01-15 19:38:4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18대 대선 이후 개표부정 등을 주장하며 재검표를 요구해온 시민들의 ‘청원서’가 15일 국회에 제출됐다. 이로써 어떤 형태로든 국회가 ‘재검표’와 관련해 입장을 밝혀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됐다. 이에 즈음하여 선관위는 17일 국회에서 6천매 개표 공개시연회를 갖기로 해 부정선거 의혹을 잠재울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일반시민 유권자들로 구성된 ‘18대 대선 부정선거 진상규명 시민모임’ 소속 회원 9명은 이날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의 ‘수개표 청원’에 참여한 23만여명의 서명을 받아 국회에 18대 대선 수개표를 청원한다”고 밝혔다.
 

지난 12일 서울 대한문 앞에 모인 시민들 재검표 요구 손팻말을 들고 집회를 열고 있다

 

이들은 이어 “대선 이후 SNS와 인터넷 게시판은 부정선거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여러 정황들을 들이대며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게시물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고 지적하고는 “그러나 정치권도 언론도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고 부정선거 의혹을 철저하게 파헤치고 진실을 규명해야 할 선관위는 변명하기에 급급하다”고 정치권과 기성언론을 두루 비판했다.

또 이들은 “해킹과 조작이 가능하다는 전자개표기를 사용하고, 수개표 과정이 충실하게 지켜지지 않았다고 보여지는 18대 대선은 철저한 수개표를 통해 부정선거 의혹을 규명해야 한다”며 “이는 선관위가 다시 국민의 신뢰를 받는 지름길이며 새정부가 부정선거로 탄생했다는 오명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했다.

수개표를 주장하는 배경을 두고 이들은 “우리는 당선자를 바꾸기 위해 수개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정의, 개표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밝히고는 “여야를 막론하고, 수십만 국민의 이름으로 요구하는 수개표 청원을 민주주의의 퇴보와 역행을 막겠다는 엄중한 책임감으로 국회가 받아들이기를 바란다”고 거듭 강조했다.

한편, 문재인 전 대선후보의 서울시민캠프 공동대표들도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대선 수개표와 당선무효소송 제기를 민주당에 요구했다. 이들은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는 소송 제기로 인한 역풍만 염려하지 말고, 제기된 의혹을 규명하지 않고 소극적인 민주당을 버리는 역풍을 더 염려하라”며 “문 후보가 박근혜 후보에게 당선축하 인사를 건넨 것은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른 축하인사이지 부정한 개표에 의한 선거 승복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수개표 문제와 관련해 민주당 의원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관심을 보여온 정청래 민주당 의원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저는 이분들의 주장에 찬반을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 23만여명이 이렇게 절규하고 있다”며 “이런 목소리를 국회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국회로서, 국회의원으로서 일을 다했다 말할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민주당 지도부는 수개표 문제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역풍을 우려한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문희상 비대위원장은 이날 광주 금남로 YMCA회관에서 열린 ‘회초리 민심간담회’에서 수개표 청원과 관련해 “현재 20만이 가담한 소위 투개표 논란에 관한 부정선거 시비 개표에 관한 말씀도 잘 수렴해서 잘 듣고 있다”고만 밝혔을 뿐이다.
 

재검표를 요구하는 시민들이 서울 영등포 민주당사 앞에서 민주당의 재검표 요구 동참을 주장하며 집회를 갖고 있다

한편, 중앙선관위는 오는 17일 국회에서 대선 개표의 전 과정을 재연하는 공개시연회를 갖기로 했다. 대선 후 개표 의혹이 줄기차게 제기되자 지난 1일 선관위는 해명자료를 내 부정선거의혹을 일축한 바 있다. 그러나 이같은 해명에도 의혹 제기가 수그러들지 않자 마침내 공개시연회 자리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진선미 민주당 의원은 15일 원내대책회의에서 “선거관리위원회가 오는 목요일 17일 오후 2시에 국회본청 지하에서 18대 대선 개표의 전 과정을 재연하고 설명하는 공개시연회를 갖는다”고 밝혔다. 이번 시연회에는 3개 투표구 기준으로 약 6천매를 개표 시연할 예정인데, 그중 2천표는 현장에 참여하는 분들이 직접 기표한 표로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공개시연회는 여야 의원들은 물론 언론사 기자들과 일반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인터넷으로 생중계될 예정이다. 진 의원은 “보다 적극적으로 의혹들을 제기했던 시민들과 관련 전문가들을 모시고 직접 여러 가지 의문점들을 해소할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며 의혹 제기자들의 적극 참여를 호소했다.

한편, 시민단체와 네티즌들은 지난 4일 대법원에 선거무효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대법원에서 심리를 통해 진위를 가려질 전망인데 그 결과에 따라서는 재검표가 실시될 수도 있다. 이 사건은 1·2심 없이 대법원에서 단심으로 진행된다. 재미동포 등 ‘재외 유권자 모임’은 15일 3차 성명 발표를 통해 재검표를 거듭 촉구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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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아빠가 보육원 아이의 1,500원 식사를 짓밟는 나라


 

 

 


1월 15일 천안시 홈페이지에 한 장의 사진이 올라왔습니다. 저소득층 초,중,고교생이 방학에는 학교 급식을 먹지 못해 도시락이 배달되는데, 그 아이들이 먹는 도시락 사진이었습니다. 도시락을 보면 이것을 과연 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감자튀김 몇 개, 단무지 3조각, 김치 몇 조각, 썩은 부위를 도려낸 듯한 귤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추운 겨울 아이들이 이런 부실한 도시락을 먹고 하루를 버틸 수 있는지 한숨이 나옵니다.

이런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한 부실도시락 문제는 한두 번이 아닙니다. 지난번에도 '건빵도시락'이라 불리는 허술한 도시락이 아이들에게 배달된 적도 있습니다.

 

 

▲2005년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배달됐던 군산 건빵도시락과 서귀포 부실 도시락, 출처:연합뉴스,미디어제주.

 


2005년에 서귀포 저소득층 아이에게 배달됐던 도시락이 메추리알과 단무지, 빵 등으로 부실하게 구성돼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군산에서도 결식아동에게 지급되는 도시락에 건빵이 들어가 있어 많은 시민의 분노를 자아낸 적도 있습니다.

당시 군산시 송웅재 시장 권한대행은 건빵도시락이 문제없다는 발언을 해 항의를 받기도 했는데, 송 부시장은 "제도적인 문제(현재의 가격 2,500원)가 있기는 하지만 운영비 500원을 제외하고 2,000원으로 만든 도시락이 이 정도면 양호한 것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했습니다.

2005년 2,500원짜리 도시락이 저 정도였는데, 2013년 한 끼 1,500원짜리 식사는 과연 어떨까요?

' 김밥 한 줄도 1,500원인데, 한 끼 식대가 1,500원이라니'

최근 확정된 정부 예산안에 따르면 보육원 아동 1만 6천명에게 한 달간 지원되는 금액이 15만 9천 원입니다. 그런데 그 중 의복비 등으로 2만 원을 제외하면 한 끼 밥값은 1,500원 정도가 됩니다.

 

 

▲부실한 식사와 김밥천국 1,500원짜리 김밥,출처:인터넷커뮤니티

 


요새 김밥천국의 저렴한 김밥도 1,500원은 하는데, 1,500원으로 한 끼 먹을 음식을 만든다면 완전 맨밥만 먹으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한국아동복지협회'에 따르면 피복비에는 신발,양말,가방까지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식대로 도저히 더 많은 돈을 쓸 수가 없다고 합니다. 철마다 크는 아이들에게 작은 신발이나 구멍 난 양말을 계속 신길 수가 없으니 피복비는 그대로 써야 하고, 시설비도 난방비가 있으니 손을 못 대고, 결국 무조건 1,500원 한도 내에서 식사를 제공해야 하니 어려움과 고충이 이만저만 아니라고 합니다.

시설이 크거나 후원이 많이 들어오는 보육원, 자원봉사자가 활발한 보육원은 그나마 낫지만, 소규모에 지방이나 시골에 있는 보육원은 원장들이나 시설 종사자들이 텃밭을 직접 가꾸며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실정입니다.

' 제주 국제학교 4,500원 한 끼 식대와 비교하니'

한국아동복지협회는 지난해에 복지부에 보낸 공문에서 "보육원 아동에 대한 급식 단가를 최소 지역아동센터와 동일하게 3,000원으로 지급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보육원 아이들의 한 끼 1,500원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지만, 복지부는 기초생활수급자와 같은 금액이 지원된다는 이유로 이것을 거절했습니다.

 

 

 


보육원 1,540원의 한 끼 급식비는 지역아동센터 3,500원보다 적습니다. 여기에 제주 국제학교의 한 끼 급식비 4,500원과 비교하면 과연 2013년 보육원이 1960년대 고아원과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고 반문할 정도로 국가의 지원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지원입니다.

기획재정부는 복지부가 제시했던 2013년 보육원 아동 한 끼 급식비 200원 인상안을 거절하고 100원 인상으로 확정지었는데, 이유는 재정이 문제였습니다. 보육원 아동에게 3,000원짜리 한 끼 식대를 맞추기 위해서는 295억 원이 소요되는 데 이 예산이 없어서 복지예산에 포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돈이 없어서일까요?

' 제주 국제학교 1인당 지원금 1억 9천만 원'

2011년 개교한 제주 국제학교는 건립부터 국가의 세금이 투입된 교육시설입니다. 그런데 국가의 세금이 투입된 공공 교육시설이 일부 부유층 자녀들의 귀족학교로 전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눈여겨봐야 할 것입니다.

 

 

 


제주 영어교육도시에 개교한 NLCS(노스 런던 컬리지잇 스쿨)의 입학인원 436명 중 절반에 가까운 48.6%인 212명은 서울출신이며 그 중 76%인 161명이 강남3구 출신인 것으로 나타나 ‘강남부자들을 위한 학교’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합니다.

말이 국제학교이지 외국인 학생은 겨우 4.4% 19명에 불과한 국제학교를 세우기 위해 공공투자와 국비 지원은 총 4,824억 원이 소요됐는데, 계산하면 1인당 건립비용으로 5,630만 원이 지원된 것입니다.

국제학교지만 교육부 특별교부금 등의 지원을 받는데 이 지원금액만 무려 1억 9천만 원에 달합니다.(건립비 5.360만원+특별교부금 1억3,600만 원)

문제는 앞으로 일부 국제학교에서는 본교에 로얄티를 지급하는데 그 금액이 612억 원에 달하고 그 금액을 국가에서 보전해줘야 한다는 점입니다. 현재 NLCS는 2016년까지 179억 원의 누적 적자가 예상되는데, 학교 측은 2025년에서야 흑자로 전환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동안의 적자는 국민의 세금으로 메꾸어줘야 하고 그 금액이 한 해 전체 보육원 아동 한 끼 식대를 올려줄 수 있는 295억 원이 넘습니다.


 

 

▲2011년 9월 개교한 제주 국제학교 식사 배식 장면, 출처:연합뉴스

 


부자들이 자신들의 돈으로 '귀족학교'를 세우고 보내는 일에 대해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세금으로 왜 부자들만의 자녀를 위한 학교를 세워주고, 지원까지 해줘야 하나요? 그것도 말이 교육이지, 외국에 로얄티를 지급하면서까지...

지금 우리는 보육원 아이들의 한 끼 1,400원 식사를 200원조차 올려주지 않고 100원만 인상해준 정부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정부가 부자 부모를 둔 아이에게는 연간 1억 9천만 원을 지원해준 사실을 보면서 무엇을 고민하고 생각해야 할까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제주 국제학교 아이들은 밥이 부실해도 빵을 사 먹을 수 있지만, 보육원 아이들은 한 끼 밥을 먹지 못하면 그대로 굶는 것입니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 제대로 자랄 수 있도록 대한민국이 도와주는 것, 그것이 국가가 해야 할 의무입니다. 그 의무를 저버리지 않도록 여러분이 감시하고 비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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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15 21:08l최종 업데이트 13.01.15 21:08l

 

 

18대 인수위가 확정한 정부 17부3처17청
ⓒ 고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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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인수위'의 정부조직개편안은 '개편 최소화'를 내세웠지만, 결국 MB정부의 흔적이 거의 남지 않게 됐다. "칸막이를 없앤다",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며 MB정부에서 없애거나 합쳤던 경제부총리와 부처들이 되살아났다.

5년 전 '이명박 인수위'는 정부 규모의 비대화와 비효율성을 비판하면서 부처 통·폐합안을 내놨다. 당초 인수위안은 노무현 정부의 '18부 4처'를 '13부 2처'로 대폭 축소·통합한다는 것이었지만, 여론과 정치권의 반발로 결국 '15부 2처'로 확정됐다.

'이명박 인수위'는 대부처주의가 선진시스템이라고 주장하면서 "칸막이 없이 유연하며 창의적으로 일하는 실용적인 정부"를 주장했다. 그러나 같은 새누리당이 배출한 박근혜 당선인이 제시한 정부조직도는 이와 사뭇 다르다.

부처 간 시너지 효과를 목적으로 통합했던 국토해양부는 해양수산부와 국토교통부로 다시 나뉘었다. 수산분야가 다시 해양수산부로 돌아가게 된 농림수산식품부는 농림축산부가 됐다. 사라졌던 정보통신부와 교육부로 통합됐던 과학기술부는 미래창조과학부로 부활하게 됐다.

정통부 + 과기부 + 알파 = 미래창조과학부

이번 개편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설되는 미래창조과학부다. 교육과학기술부의 과학기술 기능과 지식경제부의 산업인력 양성기능, 연구개발(R&D) 예산의 배분과 조정권까지 한 부서로 모아놨다. 여기에 정보통신기술(ICT) 기술을 총괄하는 전임 차관제도 도입된다.

각 부처에 분산되어 있는 과학기술 관련 부서를 한데 모아서 융·복합 효과를 내겠다는 인수위의 복안으로 만들어진 '거대 부처'다. 현재 방송통신위원회에서 담당하고 있는 방송통신 진흥 부분도 ICT 차관이 가져갈 예정이다.

거대부처가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MB정부의 '칸막이 없애기'와 비슷한 면도 있지만, 내용상으론 지식경제부와 방송통신위원회로 쪼개졌던 옛 정보통신부가 사실상 이전보다 강력해진 모습으로 부활하는 셈이다. 정통부의 폐지는 MB정부가 가장 잘못한 과학기술 정책으로 꼽힌다.

이번 정부 개편안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유민봉 인수위 기획조정분과 간사는 "미래창조과학부는 앞으로 한국의 성장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역할을 주도적으로 수행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미래를 창조하는 과학의 가장 큰 특징은 융·복합"이라고 덧붙였다.

"'경제 콘트롤 타워' 필요"...경제부총리제 부활

'박근혜 인수위'는 MB 정부가 '작은 정부'를 표방하면서 2008년 폐지했던 경제부총리제도 되살리겠다는 계획이다. 기획재정부 장관을 부총리급으로 격상시켜 경제 전반에서 정부의 역할을 제고하겠다는 것이다.

MB 정부에서도 '실세'로 구분되던 기획재정부 장관이 부총리급으로 격상됨에 따라 박근혜 정부의 기획재정부 부총리는 보다 강력한 경제 수장의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

경제부총리제의 부활 배경에는 글로벌 경제위기와 내수시장 침체 등 어려워진 국내외 경제 사정이 큰 이유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유 간사는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 전반을 총괄할 '콘트롤 타워'가 필요하다는 것이 박근혜 당선인의 생각"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날 인수위는 경제부총리의 구체적인 업무관할 범위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유 간사는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 간에 실·국, 산하기관의 업무기능 배분에 변동이 있기 때문에 (지금 설명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특임장관제 폐지... 해양수산부는 살려

MB정부에서 소통 강화 등을 위해 설치했던 특임장관실도 폐지됐다. 직능이 분명치 않은 특임장관실은 청와대 정무수석실과 하는 일이 적지 않게 겹쳐 효율성 논란을 빚어왔다.

유민봉 간사는 "현재 특임장관의 정무 기능은 대통령실과 국무총리실에 분산돼 있다"며 "앞으로는 이런 기능이 각 부처의 장관이 정무 기능에 적극 참여하고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정리됐다"고 폐지 배경을 설명했다.

MB정부 탄생과 함께 해양 수산 분야를 흡수하면서 거대해졌던 국토해양부와 농수산식품부도 다시 '홀쭉'해졌다. 이 두 부서는 해양수산부 부활과 함께 업무를 이관하고 국토교통부와 농림축산부로 명칭이 변경된다.

그러나 '부활 해수부'가 5년 전 수준으로 단순 복원될지 박 당선인이 유세기간 중 지속적으로 강조해 온 '강한 해수부'로 부활할지는 미지수다. 인수위는 이날 "급변하는 해양질서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이전 해양수산부의 기능을 복원하겠다"고 밝혔지만, "부처에 추가되는 기능에 대해서는 추후 발표할 예정"이라면서 즉답을 피했다.

사라진 정부부처들을 되살리고 경제부총리를 부활시킨 '박근혜 인수위'의 정부조직개편안에는 앞으로는 정부가 현재보다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기조가 엿보인다. '이명박 인수위'가 '정부의 효율성을 높이고 민간이 더 잘하는 일은 민간에 맡긴다'는 기조를 세운 것과는 반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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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 민주당 - 안에서는 진선미 쑈, 밖에서는 문희상 쑈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3/01/16 07:19
  • 수정일
    2013/01/16 07:19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시연은 시연일 뿐, 선관위와 민주당은 쑈하지 마라!
(서프라이즈 / 트위터 / 2013-01-16)

 

한영수(전 중앙선관위노조위원장) ‏@hys23h36

시연은 시연일뿐, 실제상황이 아니다. 개표장에서 왜 혼표가 발생했는지에 대해 시연을 해야한다. 전산전문가를 초청, 전자개표기 소스프로그램을 공개하여 이번 대선에서 어떻게 혼표가 발생했는지 밝혀야 진정한 시연이다. 선관위와 민주당은 쑈하지 마라!

https://twitter.com/hys23h36/status/291046144816066561

이석현 ‏@lsh4u

국회 행안위에서 선관위가 '시연'을 한다는데 오작동없는기계갖다 시연하면뭐하나! 오히려 시민측 전문가가 개표기의 프로그램조작으로 혼표발생 가능함을 시연케 해야죠

https://twitter.com/lsh4u/status/291099119068520448

트위터

 


 

 

아수라 민주당 - 안에서는 '진선미 쑈', 밖에서는 '문희상 쑈'
(서프라이즈 / 눈팅 / 2013-01-16)

민주당이 아수라장이다. 안에서는 진선미가 중앙선관위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생쑈를 기획하고 있고, 밖으로는 문희상이 '밑도 끝도 없는 사과질'하러 다니느라 생쑈를 벌이고 있다.

 

 

 

 

 

 

이 당에 미래가 있을까?

눈팅

 


 

 

민주 '회초리 투어'에, 안팎에서 '회초리'


(아시아경제 / 김승미 기자 / 2013-01-16)


 

[아시아경제 김승미 기자]민주통합당 비상대책위원회는 15일 ‘회초리 민생투어’를 시작했다. 광주·전남을 출발점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대선 패배에 대한 반성의 뜻을 전하고 현장의 쓴 목소리를 듣기 위한 취지에서다. 그러나 이같은 지도부의 민생 행보에 대해 당 내에서조차 곱지않은 시선이 쏟아지고 있다. 국민에 대한 진정성 있는 반성이라기보다 보여주기식의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다.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을 비롯한 당 지도부는 이날 오전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를 참배했다. 문 비대위원장과 현역의원, 당직자 100여명이 ‘민주영령’ 앞에 ‘사죄의 삼배’를 올렸다. 당 관계자는 “대선 패배 후 즉각적인 당 혁신을 뒤로하고 계파 갈등에만 매몰돼 국민들 앞에 자중지란의 모습만 보인 것에 대한 참회의 의미”라고 말했다.
 
문 비대위원장은 이날 참배에 앞서 “가장 어려웠던 국난의 위기에서 고비마다 광주가 나라를 일으켜 민주당을 만들었다”며 첫 방문지를 광주로 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광주가 민주당의 표밭인 호남의 중심이자 야권의 ‘심장’이기도 해 광주에 대한 민주당의 사죄는 어느 지역보다 의미가 더 크다는 해석이다. 이어 문 비대위원장은 “그럼에도 질래야 질 수 없는 선거, 져서는 안 되는 선거를 지고 말았다”며 고개를 떨궜다. 그러면서 “민주당은 뼈와 가루가 되는 한이 있어도 다시 태어나겠다”면서 “여러분이 만들어 준 민주당을 다시 한번 살려달라”며 광주 시민에게 호소했다.
 
이어 당 지도부는 광주 양동시장, 전남 함평 상공리 해보수산 노인정에 들러 민심을 청취했다. 16일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이 있는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과 부산 민주공원 등을 찾을 예정이다.
 
그러나 여론은 싸늘했다. 이날 민주당 게시판과 트위터에 당 지도부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국민의 마음이 떠난 정당이 별소리 별짓 다 해봤자다”, “회초리 가지고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특권과 기득권 내려 놓지 않으며 무슨 민생투어?”, “지긋지긋한 쇼에 국민은 지쳤다”는 등의 냉소적인 글이 잇따랐다.
 
당내에서도 탐탁지 않다는 목소리가 들끓었다. “보여주기식 ‘회초리 투어’ 보다는 대선 평가 토론회가 급선무”라는 등의 지적이 봇물터지듯 제기됐다.

박지원 전 원내대표는 이날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 “전국을 다니면서 무릎을 꿇고 ‘잘못했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지금은 혁신의 길을 제시해야 하고, 전당대회를 준비하면서 지난 패배한 선거에 대한 백서부터 써야 한다”고 촉구했다. 비주류 김영환 의원도 “참 안쓰럽다”며 “무엇을 반성하는지, 무엇을 사과하는지 누가 어떤 책임이 있는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퍼포먼스에 불과하다”고 힐난했다.

김승미 기자 askme@

 




※ 본 글에는 함께 생각해보고싶은 내용을 참고삼아 인용한 부분이 있습니다. ('언론, 학문' 활동의 자유는 헌법 21조와 22조로 보장되고 있으며, '언론, 학문, 토론' 등 공익적 목적에 적합한 공연과 자료활용은 저작권법상으로도 보장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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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김현희 대담 긴급 편성…뉴라이트 압박 때문?

 

<100분 토론> 취소하고 15일 오후 긴급 녹화…25년 전 일을 왜?

이대희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1-15 오후 12:34:08

 

MBC가 15일 밤 예정된 정규 프로그램 <100분 토론>을 갑작스레 취소하고, 대신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 사건 범인인 김현희 씨 대담을 방송하기로 했다. 편성표에도 없는, 이해하기 힘든 긴급 결정이다.

이번 방송은 김 씨가 신동호 아나운서와 대담하는 인터뷰 형식으로 이뤄지며, <100분 토론> 제작진이 방송 제작을 맡는다. 갑작스레 일정이 추진된 탓에 방송 하루 전인 전날 오후에야 편성실무진에 통보됐다. 녹화 역시 이날 오후 3시 리허설이 이뤄지고, 4시에 시작된다. 대담 주제는 알려진 바 없다.

25년 전에 일어난 일을 두고 이처럼 화급하게 방송하는 건 극히 예외적이다.

이와 관련해 MBC 측은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본부장 정영하)에 이번 방송 결정이 "방송문화진흥회 결의에 따른 후속 조치"라고 밝혔다. 즉, 방문진이 관련 방송을 내보낼 것을 주문했고, 그에 따라 갑자기 방송 제작이 결정됐다는 얘기다. 이 주장이 사실일 경우, 대주주가 MBC 편성권을 침해한 꼴이 돼 심각한 제작 자율성 침해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KAL 858기 폭파범 김현희. ⓒ연합뉴스

이번 방송 제작이 결정된 원인은 좀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찾을 수 있다. 지난 2003년 KAL 사건 유족과 천주교 사제단을 중심으로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고, 이에 따라 MBC는 같은 해 11월 18일 <PD수첩>의 '16년간의 의혹, KAL 폭파범 김현희의 진실' 편에서 관련 사건을 다뤘다.

그런데 최근 들어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을 중심으로 당시 방송이 조작이었다는 논란이 일어났고, 급기야 <TV조선>은 작년 6월 김현희 씨와 인터뷰한 내용을 내보내 이 논란을 키웠다. 해당 방송에서 김 씨는 노무현 정부가 자신을 가짜로 몰아갔고, 방송 3사가 집중적으로 자신을 습격해 이 논란을 키웠다고 주장했다.

이후 작년 9월부터 방문진 이사진 중 여권 추천 이사들의 주도로 방문진은 MBC에 해당 방송이 나간 지 10년여가 지나 진상조사를 요구하게 됐다.

MBC "방문진 결의에 따른 조치"…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이 주도한 듯

이와 관련, 방문진 이사들의 말을 종합하면 현 방문진 이사 중 여권 추천 이사와 고영주 감사는 지난해 8월 취임동시에 이 문제를 가장 먼저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야권에서 추천한 최강욱 이사는 "새 방문진 이사진의 임기가 시작한 작년 8월말부터 일부 이사들이 MBC의 KAL 의혹 제기와 송두율 교수 보도에 대해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며 "한동안 김재철 사장 문제로 이 논의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일부 이사들은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공론화하려 했다"고 말했다.

결국 방문진 이사회는 백종문 편성제작본부장을 이사회로 불러 과거 <PD수첩>의 KAL 보도에 대한 사과방송을 두 차례에 걸쳐 요구했다. 가장 최근에 이뤄진 소환은 대선 직후인 작년 12월 20일의 소환이다.

이사들에 따르면 이날 방문진은 백 본부장을 호출해 사과방송을 다시금 강하게 요구했고, 백 본부장은 "<PD수첩> 방송에서 팩트는 틀린 게 없지만 한쪽 주장을 일방적으로 내보냈으니, 대담 프로그램을 편성해 김현희 측의 주장을 내보내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이 타협안이 결국 받아들여진 셈이다.

이 문제를 주도적으로 제기한 인물은 고영주 감사와 김광동·차기환 이사 등 여권 추천 인물로 알려졌다. 고 감사는 대검 감찰부장을 지냈으며, '일전불사 종북박살' 기치를 내걸고 지난 2011년 출범한 국민행동본부와도 강한 연대를 맺고 있는 인물이다.

김광동 이사는 나라정책연구원 원장을 지냈으며 교과서포럼 운영위원을 맡았다. 차기환 이사는 수원지법 판사 출신이며 자유주의연대 출신이다. 교과서포럼과 자유주의연대 모두 뉴라이트 계열이다.

결국, 방문진이 과거 프로그램에 대한 진상조사를 갑작스레 요구하고, 그에 따라 이번 방송 제작이 갑자기 결정된 것으로 풀이된다.

이와 관련해 김광동 이사는 "김현희 문제와 관련해 과거 <PD수첩>이 지나치게 편향됐다는 취지의 의견을 방문진에서 제기한 건 맞다"면서도 "방문진이 MBC에 프로그램 편성을 요구하진 않았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MBC 노조는 이날 성명을 내 "방송 7시간 전에야 녹화를 하고, 부랴부랴 편집해서 방송을 내보내겠다는 것"이라며 "모든 것이 통상적인 절차를 벗어난다"고 비판했다.

특히 노조는 해당 방송 제작 결정에 MBC 경영에 대한 감독권밖에 없는 방문진이 개입한 사태를 심각한 제작 자율성 침해로 보고, 이와 같은 요구를 받아들인 MBC 경영진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대희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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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는 과연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그루터기추억

이 나라는 과연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독재인가 혁명인가?
(다음아고라 / 그루터기추억 / 2013-01-15)


이곳 아고라에, 이번 대선의 부정개표 의혹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혁명’에 대한 발언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잠시 이런 발언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대한민국에, 과연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가? 우리는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가장 먼저, 무엇을 보고 혁명이라고 부르는지, 혁명의 개념부터 정확하게 알아야만 된다. 왜냐하면, 혁명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파악하고, 혁명의 정의를 분명하게 인식함으로써, 현재 전개되고 있는 부정개표 논란으로 인한, 마치 폭풍전야와도 같은 정국이, 장차 시민혁명으로까지 연결될 수 있을 것인지 아닌지를, 좀 더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과거 박정희가 일으켰던 5.16이 군사쿠데타인지 아니면 혁명인지도, 보다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5.16의 명칭에 대한 여러 가지 논란들을 정리하는데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양심과 학문에 대하여, 정직하고 그 의식이 깨어있는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나 정치학자들은, 박정희가 일으킨 5.16이 군사쿠데타가 분명하다고 얘기한다. 반면에 그의 딸 박근혜는, 자기 아버지가 일으켰던 5.16에 대하여, 쿠데타라는 말을 거의 하지 않고, 이 사건을 혁명이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

그녀는 양심적인 학자들이 5.16을 군사쿠데타로 부르는 것에 대해 반발한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자기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대통령이 되려고 한다는 말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안병욱(65) 가톨릭대 교수는 ‘프레시안’의 최형락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박근혜 정부가 이명박 정부보다 과거사와 관련해 더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며 “역사 전쟁이 전개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녀가 과거사 문제를 ‘박정희 명예 회복’이라는 기준에서 다룰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박정희의 5.16이 군사쿠데타가 아닌 혁명이었다는 박근혜의 주장을, 그녀 자신이 대통령이 됨으로써, 반드시 관철시키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그녀의 생각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잘못된 생각의 연장선상에 놓여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박정희의 5.16을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근거 중의 하나가, 5.16이 ‘성공한 쿠데타’라는 것이다. 그리고 5.16 군사쿠데타가 성공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근거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그 '기간'이 매우 길었다는 점이다. 마치 고려왕조에 반란을 일으켜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의 ‘역성(易姓)혁명’처럼,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를 동일한 혁명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둘 다 성공의 기간이 매우 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어이없는 생각은, 박정희를 이성계처럼 왕으로 간주할 때만 타당할 뿐이다.

누구든지 어떤 방법으로든, 일단 왕이 되고 나면, 왕은 권좌에 앉아서 나라를 다스리면서, 자신에게 반역하는 모든 자들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가차 없이 처단해 버린다. 왕은 역도들을 토벌하기 위해, 나라의 군대를 동원한다. 그렇다면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대한민국 공화국’이 아니라 ‘박씨 왕조’를 창건한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역성혁명을 통해 ‘이씨 왕조’를 창건한 이성계처럼, 박정희가 일으킨 5.16도 혁명이 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만약 사람들이 박정희 시대의 대한민국을 '박씨 왕조'라고 기꺼이 부를 수만 있다면, 조선왕조를 창건한 이성계의 역성혁명처럼,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를 혁명이라 불러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단지 대한민국의 국명을 ‘박씨 왕조’로 바꾸지만 않았을 뿐이지, 마치 한 나라의 왕이 반역자들을 토벌하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했던 것처럼, 쿠데타를 일으킨 자신의 군대를 지속적으로 동원해, 대한민국을 강압적으로 통치했다. 박정희는 쿠데타로 세운 자신의 군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여러 차례 군대를 동원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계엄령과 위수령 및 긴급조치 등을 선포하면서 언론을 통제하고, 모든 반대파 정치세력들을 탄압했다. 박정희는 자신의 독재통치에 반발하는 대학교에는 휴교령까지 내렸다. 마치 왕이 자기 나라를 자기 마음대로 다스리듯이, 독재자 박정희는 스스로를 ‘박씨 왕조’의 왕인 것처럼 여기고, 대한민국을 강압적으로 통치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단지 독재자였을 뿐이지, 결코 왕이 아니었다.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독재자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현재 부정개표 논란이 일고 있는 선거쿠데타와 같은 방법으로, 그 부친의 대를 이어서 또 다시 정권을 잡은 것처럼 보인다. 왕조가 대를 이어 자기 자식들에게 왕좌를 물려주듯이, 그 딸이 대를 이어 대통령 당선자로 발표되었으니까, 드디어 박정희가 창건한 ‘박씨 왕조’가 완성되었다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가 보다.

앞서 언급한 ‘프레시안’과 인터뷰했던 안병욱 교수는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의 90% 이상은 박정희의 딸이라는 점 때문 아닌가. 한국 정치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의 지형에서 약간의 변화만 있을 뿐, 50년 넘게 그 틀이 바뀌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치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고 있으니까, ‘이씨 왕조’를 창건한 이성계의 역성혁명처럼, 박정희가 일으킨 5.16 군사쿠데타도, 이제는 5.16 혁명으로 바뀌어야만 한다는 논리인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고 치졸한 발상이다.

쿠데타(coup d'Etat)라는 단어를 직역하면, '국가에 대한 일격' 이라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 뜻 그대로, 쿠데타는 무력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정권을 빼앗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쿠데타는, 특정 분야의 지배 세력이 자신의 권력을 더 강화하고 더 확대시키기 위해서 일으키는 국가적인 변란이다. 즉, 쿠데타는, 이미 권력을 가지고 있는 지배계층에 속한 자들이 일으키는, 정권찬탈 행위인 것이다.

쿠데타 주동세력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기존 권력의 강화나 확대 및 또 다른 권력의 전복을 도모한다. 이를 위해, 이들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권력을 강제로 빼앗는 일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쿠데타 주동세력은, 기존의 법과 질서를 따르지 않은 채, 합법적인 지휘계통 상에 있는 권력을 무시하거나 파괴하는 불법을 저지르게 된다.

이런 쿠데타는, 쿠데타를 일으킨 주체와 쿠데타를 시행한 방법에 따라서, 군사쿠데타, 정치쿠데타, 선거쿠데타 등으로 나눠진다. 군인들이 군사력을 동원해서 일으킨 것이 군사쿠데타이고, 정치인이나 통치자가 정치력을 이용해서 일으킨 것이 정치쿠데타다. 그리고 부정개표 논란이 야기되고 있는 이번 선거처럼, 불법과 거짓 및 조작선거 등의 방법으로, 기존권력을 계속해서 유지하려 하거나, 보다 더 강화하고 확대시키려는 것이 바로 선거쿠데타다. 그러므로 쿠데타에 의한 권력이동은,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사이에서 벌어지는 권력투쟁이 아니라, 기존의 지배계층 내부에서 전개되는 권력투쟁이다. 이런 쿠데타는 단지 권력의 수평이동만을 가져올 뿐이다.

이처럼 지배계층 내부의 수평적인 권력이동에 불과한 쿠데타와는 달리, 혁명은, 억압받고 있던 피지배계층 사람들이 자신을 억압하고 착취하던 지배계층에 대하여 반란이나 폭동을 일으켜서, 이를 성공시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런 혁명이 발생할 경우에는,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위치가 수직적으로 급반전하게 된다. 즉, 지배계층은 몰락하여 피지배계층이 되고, 피지배계층은 혁명을 통해 권력을 쟁취함으로써,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등장하게 된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어부지리를 얻어서, 혁명을 일으킨 계층과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계층이 불일치하게 되는 그런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프랑스혁명 때는 지배계층이 단두대로 보내져, 그곳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었다. 이제 ‘쿠데타’라는 말이 유래된 프랑스 정치와, 반복적인 혁명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정립시켰던 프랑스 정치사를 이 자리에서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1789년에 발발한 프랑스혁명이 성공하자, 혁명을 주도한 ‘공화파’들은 왕정을 폐지하고, 당시 왕이었던 루이 16세를 처형시켜 버린다. 권력을 잡은 공화파는 ‘국민공회’를 설립한 후, ‘프랑스 제1공화국’을 출범시킨다. 하지만 이들 공화파는 나중에, 의회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우익 지롱드파’와 사회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좌익 자코뱅파’로 나뉘어서, 서로 갈등과 대립을 계속하게 된다. 이러한 상호 대립의 결과, 마침내 좌익인 자코뱅 당이 승리하면서, 우익인 지롱드파를 대규모로 숙청하게 된다. 정적들을 모두 숙청하고 권력을 움켜쥐게 된, 자코뱅 당의 총수 “로베스피에르”는, 이후 무소불위의 독재적인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프랑스의 이런 정치적 상황아래서, 그 유명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등장한다. 당시 군인이었던 나폴레옹은 로베스피에르의 독재통치 아래서, 출세의 과정을 한 단계씩 밟아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과정 중에서, 독재자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고 그의 공포정치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때 독재자 로베스피에르 일당으로 간주되었던 나폴레옹은, 매우 힘든 고난의 시간들을 보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공화정에 대한 ‘역 반란’이 일어나, 프랑스혁명을 주도했던 ‘국민공회’가 매우 큰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을 무력화시키려는, 극우 보수 및 왕당파 폭도들을 모두 진압하고, 극적으로 기사회생하게 된다.

이처럼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한 나폴레옹은, 주변국들과의 전쟁에서도 계속 승리를 쟁취하면서, 프랑스의 국가영토를 지속적으로 확장해 나갔다. 그러자 국민들은 이런 나폴레옹을 폭발적으로 지지하게 된다. 하지만 프랑스 공화정부는, 나폴레옹의 이런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몹시 경계하기 시작했다. 결국 프랑스정부는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나폴레옹을 프랑스에서 멀리 떨어진, 지중해 건너편에 있는 이집트 지역으로, 원정 보내 버린다. 그런데 이런 원정 명령을 받은 나폴레옹은, 고려왕조의 장군으로 왕의 명령에 의해 멀리 중국 땅으로 나아가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갑자기 회군하여 조선왕조를 세운 것처럼, 이집트로 원정을 가는 도중에 프랑스로 되돌아와서,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해 버린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쿠데타(coup d'Etat)’라는 말은 바로 이 때 생겨난 것이다.

아무튼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3년 뒤인, 1792년에 군사쿠데타를 일으켜서, 당시 의회역할을 하던 500인회를 해산시키고, 제1통령이 된다. 그리고 나중에는 법을 고쳐서 종신통령이 된다. 이런 나폴레옹의 모습은,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후, 유신헌법을 만들어서 끝까지 권좌에 남아 있으려 했던, 독재자 박정희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종신통령이 된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일으킨 지 12년째 되던 해인, 1804년에 마침내 프랑스의 황제로 즉위해 버린다. 프랑스 민중들이 프랑스혁명을 통해서,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왕정을 폐지했지만, 왕정을 대신했던 공화정 출신의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면서, 왕정을 폐지시킨 지 15년 만에, 다시 왕정을 부활시킨 것이다. 당시 프랑스혁명 이후에 전개되던, 매우 혼란스러운 정국에 불안을 느끼던 민중들은, 단지 정치적으로 안정을 얻기만을 간절히 바라면서, 자기들의 손으로 폐지해 버린 왕정과 왕좌를, 나폴레옹이 다시 차지하도록 그냥 내버려 둔 것이다.

이처럼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하여 다시 왕정으로 되돌아갔지만, 역사적으로 그 유명한 ‘워털루’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영국 연합군에 패배함으로써, 황제의 자리에서 폐위되게 된다. 나폴레옹이 폐위된 이후에는, 프랑스혁명 때 처형됐던 “루이 16세”의 동생들이 다시 프랑스 왕궁으로 돌아와서, “루이 18세”와 “샤를 10세”라는 이름을 가지고 차례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들은 비록, 프랑스혁명으로 인해 처형된 루이 16세처럼,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귀족과 부유층과 같은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한 정책들을 펼치면서, 프랑스혁명을 일으켰던 일반 민중들을, 또 다시 왕과 귀족의 노예와도 같은 피지배계층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하지만 한번 혁명을 일으킨 경험을 지니고 있는 프랑스 민중들은, 1830년에 또 다시 들고 일어나서 “7월 혁명”을 일으켰다. 이 혁명으로 “샤를 10세”는 폐위되고, 그의 친척인 “루이 필립”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프랑스 민중의 혁명에 의해서 왕으로 옹립된 루이 필립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평민들의 왕”이며 “민중의 친구”라고 불렀다. 루이 필립이, 피지배계층으로 전락해 있다가 혁명을 일으킨 프랑스 민중의 눈치를 살핀 것이다. 그러나 이런 루이 필립도 나중에는, 역시 지배계층의 본색을 드러냈다.

루이 필립은 당시 지배계층이었던 보수파들에게 자신이 가진 권력의 일부를 나누어 주었다. 동시에 루이 필립은 또 다시, 가진 자들만을 위한 ‘기득권 옹호정책’을 시행했다. 루이 필립 왕에 의해서 지명된 보수파의 수상은, “부자가 되라. 부유해지면, 투표권을 얻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서슴없이 하고 다닐 정도로 ‘기득권 옹호정책’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의 유권자는, 단지 성인남자의 3%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들로 인해서, 돈이 없이 가난했던 민중과 농민과 노동자들은, 기득권 옹호정책을 펼치는 루이 필립과 보수파 세력들에게 거세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그동안 ‘사회적인 평등’과 ‘차별 없는 투표권’을 주장하면서, 이를 적극적으로 요구하던 ‘공화파’와 ‘사회주의자’들에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들 공화파와 사회주의자들 및 민중의 주도로, 1832년에 재차 “6월 항쟁”이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이 항쟁은, 루이 필립 왕을 지지하던 왕당파의 진압으로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굴복하지 않은 프랑스 민중들은, 그 이후 16년의 세월이 지난 뒤인 1848년에, 공화파의 주도로 또 다시 “2월 혁명”을 일으킨다. 이 2월 혁명이 성공하면서, 루이 필립 왕은 결국 폐위되고 만다. 또 다시 왕정이 막을 내리고, 공화정이 세워진 것이다. 이른 바 ‘프랑스 제2공화국’이다.

그런데 매우 아이러니컬한 것은, 새로 탄생한 제2공화정이, 2월 혁명 당시에 공화파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던 ‘파리의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이들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해 버린 것이었다. 정말로 아이러니컬하게도, 2월 혁명에 주도적으로 동참했었던 노동자와 민중들이, 혁명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피지배계층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왕정일 때는 왕족과 귀족들이 그들의 지배계층이었다. 그리고 혁명을 통해서 공화정이 들어서게 되자, 돈 많은 자산가 계층인 이른 바, “브르조아” 계층이 지배계층으로 새롭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결국 가난한 노동자들인 이들 “프로레타리아” 계층은, 또 다시 피지배계층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폐위 된 나폴레옹 황제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이, 망명 중에 있다가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는 제2공화정의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루이 나폴레옹은 나중에 자신의 삼촌이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후광을 등에 업고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된다. 마치 독재자 박정희의 후광으로, 박근혜가 대통령 당선자로 발표된, 작금의 상황과 아주 유사하다.

당시 피지배계층이었던 농민들과 노동자들에게는, 자코뱅파와 같은 ‘좌익’도 공포의 대상이었고, 왕당파와 같은 ‘우익’도 역시 공포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이런 무시무시한 좌익과 우익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 주고 자신들을 보호해 줄 통치자로, 루이 나폴레옹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민중들의 지지로 대통령이 된 루이 나폴레옹은, 이런 민중들의 희망과는 달리, 자신의 숙부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바라보면서, 자기도 자신의 숙부처럼, 절대 권력을 지닌 황제가 되려는 욕심을, 이미 그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다.

결국 대통령 루이 나폴레옹은 자신의 손아귀에 프랑스 군대를 완전히 장악하고서, 자신이 꿈꾸고 있던 왕정에 반대하면서, 공화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탄압하고 박해하기 시작했다. 이런 모습은 선거에 의해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국민들의 희망과는 전혀 다르게, 자신의 욕심만을 추구하면서 독재통치를 일삼고 있는, 문민독재자 이명박의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아무튼 루이 나폴레옹은 공화정치를 가능하게 해주던 보통선거를 모두 중지시켜 버렸다. 그리고 선거집회 역시 그 자신이 철저히 통제했다. 또한 루이 나폴레옹은 자신이 계속해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헌법상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는, 대통령에 대한 ‘재선금지조항’의 개정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루이 나폴레옹은 1851년에 프랑스 제2공화정 의회를 해산하고, 이른바 “친위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어리석은 프랑스 민중들이, 과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당시처럼, 이번에도 역시 “나폴레옹 만세”를 외치면서, 이런 루이 나폴레옹을 또 다시 “나폴레옹 3세”라는 이름의 황제로 등극시킨 것이다. 이런 모습은 독재자의 딸 박근혜를 계속해서 지지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어리석은 민중들의 모습과 완전히 오버랩 된다.

숙부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서, ‘쿠데타’라는 용어가 만들어 졌다면, 그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에 의해서 ‘친위 쿠데타’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보고, ‘자본론’이라는 책을 써서 공산주의 이론의 토대를 놓은 칼 마르크스가, “역사는 반복 된다”고 그렇게 말했다. 마르크스는 역사의 반복을 이야기 하면서,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역사가 반복 된다"고 했다. 그가 ‘또 한 번’의 역사를 희극이라고 말했던 것은, ‘비극을 한 번 체험하고서도, 나중에 동일한 비극을 또 다시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결코 웃을 수만은 없는, 가장 비참한 희극과도 같은 아이러니컬한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자국의 역사를 바라보던, 프랑스의 한 정치학자는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들은, 자신의 수준에 꼭 맞는 그런 정부를 갖는다”고 지적했다. 결코 가볍게 흘려들어서는 안 되는 그런 말이다. 우리 대한민국도 역시, 그 국민들의 수준에 꼭 맞는 그런 정부를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땅 대한민국에서 독재자 박정희의 딸이, 자기 아버지가 일으킨 5.16 군사쿠데타를 혁명이라고 하면서, 독재적인 사고방식과 천박한 역사의식을 드러냈는데도, 이런 여성을 국민들의 거의 절반이나 되는 사람들이 지지하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영국 수상이었던 처칠의 발언이 생각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처칠은 한국을 향하여 거의 조롱조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 속에서 장미가 피길 바라는 것과 같다”라고. 이런 말들을 생각해 보면, 칼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독재의 망령이 떠돌고 있는 이 땅 대한민국에서, 또 다시 독재통치의 비참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비극으로 점철된 가슴 아픈 역사를 겪고서도, 이런 역사로부터 아무런 깨달음도 얻지 못한 채, 똑 같은 비극을 또 다시 되풀이 하는 것만큼 비참한 희극”이, 과연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쿠데타와 혁명에 대한 이러한 개념을 가지고서, 박정희가 일으켰던 5.16을 살펴보면, 이미 군대 안에서 장성으로서 군사 권력을 지니고 있었던 박정희 소장이 일으킨 5.16은, 두 명의 나폴레옹이 일으켰던 그 일들처럼, 혁명이 아니라 분명한 군사쿠데타인 것이다. 또한 이번 선거에서 독재자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51.6%의 득표율로 당선된 것이, 득표율 추정 프로그램에 의해서 사전 조작된 것이 확실한 것으로 밝혀진다면,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자 발표는, 이미 모든 권력을 손 안에 틀어쥔 여당에 의해서 저질러진, 분명한 선거쿠데타로 명확하게 ‘판명’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군사쿠데타는 군대에 의해, 그 계획이 매우 은밀하게 계획되고 추진되다가, 불시에 기습적인 방법으로 전격 감행되어 정권을 탈취하게 된다. 그리고 쿠데타가 성공한 이후에는, 자신의 군사력을 가지고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언론을 통제하며, 국회의 활동을 정지시키거나, 기존의 헌법을 개정 또는 폐지시켜 버린다. 이런 조치들을 통해서 쿠데타 세력은, 자신의 반대파 세력들의 활동을 일단 억압한 후, 나중에 이들을 전부 숙청시켜 버리는 것이다.

박정희는, 당시 제 6군단에 속한 포병대, 해병대, 제1공수 특전단 등을 동원하여,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5월16일 오전 9시에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전국에 즉각적인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는 그 즉시 모든 언론들을 통제했으며, 헌법을 정지시키고, 반대파를 숙청하는 등의 작업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박정희는 원래 1960년 5월 8일을 쿠데타 거사일로 정했었지만, 그해 발생한 4.19 혁명으로 인해서 이 계획이 좌절되자, 한 해 뒤인 1961년 5월16일에, 다시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처럼 박정희의 ’권력에 대한 야심‘은 아주 집요했었다.

당시에 박정희가 일으킨 5.16은 너무나도 명백한 '군사쿠데타'였다. 따라서 당시 모든 신문들은 헤드라인에 '쿠데타 발생‘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물론 당시 신문에서도 '혁명군'이라는 말을 기사에 사용하기도 했었는데, 이는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군대가, 자신들을 가리켜서 자칭 '혁명군'이라는 말을 구호로 내걸었기 때문에, 그렇게 기사에 사용되어진 것뿐이다. 그런데 이런 과거의 기사를 보고서, 5.16을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들이, 자신을 스스로 혁명군이라고 주장했던 사실을 보도한 그런 기사를 보고서, 아주 분명한 군사쿠데타를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은 일이다.

당시에 모든 외신들 역시, 극동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고 보도했었다. 이처럼 박정희가 일으킨 5.16은, 당시 지배계층에 의해서 억압과 착취를 당하고 있던 피지배계층에 속한 어떤 민중이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혁명이 결코 아닌 것이다. 앞서 살펴 본 프랑스 정치사에 비추어보거나, 쿠데타라는 단어를 정의해 놓은 ‘백과사전적인 개념’에 비추어 볼 때도, 5.16은 아주 명백한 ‘군사쿠데타’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포털 등에서 5.16을 검색해 보면, ‘쿠데타’와 ‘혁명’이라는 말이 모두 다 5.16 뒤에 붙어서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독재자 박정희가 일으킨 5.16 군사쿠데타에 대한 분명한 개념정리가, 아직까지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던 그 독재자의 딸이 당선자로 발표되었으니, 역사적 개념의 혼동은 더욱 더 가속화되어질 것 같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 박정희가 일으킨 것과 같은 군사쿠데타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또는 경제적으로 전국적인 대규모의 위기상황이 초래되거나, 야당이나 여당을 포함한 기존 정치권의 무능으로 인해서, 의회의 정상적인 기능이 중지되거나 마비되는 일들이 나타나게 될 때, 보다 쉽게 발생한다. 동시에, 이런 정치경제 및 사회적인 상황들과 맞물려서, 군대 내부에 ‘권력에 대한 야심’을 가지고 있는 군부 지배세력이 존재할 때, 군사쿠데타는 매우 쉽게 일어난다. 독재자 전두환도 역시, 권력에 대한 이런 엄청난 야심을 가지고서, 또 다른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전형적인 인물인 것이다.

앞서 쿠데타는, 쿠데타를 일으킨 주체와 쿠데타를 시행한 방법에 따라서, 군사쿠데타, 정치쿠데타, 선거쿠데타 등으로 나눠진다고 했었다. 군사쿠데타는 군인들이 군사력을 동원해서 일으킨 것이고, 정치쿠데타는 정치인이나 통치자가 정치력을 이용해서 일으킨 것이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이 일으킨 것이 군사쿠데타라면, 그 조카 루이 나폴레옹 대통령이 일으킨 친위쿠데타가 바로 정치쿠데타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이승만 자유당 정권시절에 발생했던 3.15 부정선거가 바로, 실패한 선거쿠데타인 것이다. 이번 대선의 개표부정에 대한 것도 역시, 독재자 이명박에 의해서 자행된 선거쿠데타로 현재 규정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만약 그 전모가 드러나게 되면 실패한 선거쿠데타가 될 것이지만, 이대로 덮여서 모두 그냥 넘어가버리고 말면, 성공한 선거쿠데타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3·15 부정선거는,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의 1인 장기집권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려고, 당시 여당이었던 자유당이 자체 조직과 경찰 및 관료조직, 그리고 ‘반공단체’ 등을 모두 동원해서 저지른, 엄청난 부정선거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자유당의 부통령 후보자였던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서 그의 측근들이, 내무부 관료들 및 자유당소속의 정치폭력배 등을 동원하여, 부정 선거와 개표 조작을 감행한 선거쿠데타 사건이었다.

이런 3.15 부정선거는 결국 전국적으로 범국민적인 저항을 불러일으켜서, 마침내 이승만을 하야시킨 4·19 혁명을 촉발하게 되었다. 부정 선거가 폭로되자, 전국 각지에서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거센 항의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도중 마산 앞바다에서 실종되었던 김주열 학생이, 1960년 4월에 그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 사건이 결국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마침내 국회에서는 모든 선거를 무효로 처리해 버렸다.

그 후, 이승만 대통령이 재선거를 약속했지만, 자유당 독재를 펼쳐오던 대한민국 제1공화국은, 4월 27일 결국 붕괴되고 말았다. 이때 당시에는 부정선거가 모두 폭로되고, 이로 인해 독재자 이승만을 하야시킨 4.19 혁명이 발생했었는데, 왜 지금은 모두들 이렇게 조용한 것인가? 그것은 언론이 독재자 이명박의 손아귀에 모두 장악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미 대한민국의 언론은 모두 죽어있다고 보아도 된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시점에서, 과거 4.19혁명과는 또 다른 그런 혁명을 생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아무튼 4.19 혁명은, 당시 권력의 지배계층에서 소외되어 있던 피지배계층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통치자인 이승만 대통령을 그 권좌에서 쫓아내고, 지배계층인 자유당을 붕괴시킨 ‘전형적인 혁명구도’로 진행된 사건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학생들에 의해서 촉발된 이 4.19 혁명은, 나중에 박정희가 일으킨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서 무참하게 짓밟혀 버렸다. 나중에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던 독재자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의해서 제거되었고, 박정희가 만든 유신체제는 모두 붕괴되었다.

그 이후에, 또 다시 민주화를 향한 ‘서울의 봄’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하지만 이 역시, 독재자 전두환이 일으킨 군사쿠데타에 의해서 철저하게 유린되고 말았다. 학생들과 국민들이 흘린 뜨거운 피로써 일어난 민주주의가, 군인들의 군홧발에 의해서 참혹하게 짓밟히고 유린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슬픈 대한민국의 역사는, 비록 지난 선거에 의해서 대통령으로 선출되긴 했지만, 문민독재 통치를 펼친 독재자 이명박에 의해서, 그 가슴 아픈 역사를 계속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런 끈질긴 독재의 역사가, 이제 독재자의 딸에게까지 이어질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깊이 우려하고 있다.

이명박 독재정권은, 독재에 맞선 시민들의 민주화 투쟁인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사실과 실체를 모두 외면한 채, ‘5.18 광주항쟁’을, 단지 왜곡된 정보를 받아들인 소수의 ‘폭동’으로 몰고 가려는, 아주 몰상식하고 몰염치한 시도를 지속적으로 추진해 왔다. 이것은 역사의 진실을 뒤집어엎으려는, 가증스런 범죄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박정희가 일으킨 5.16을 군사쿠데타가 아닌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역시, 역사의 진실을 뒤집어엎으려는 더러운 작태를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5.16을 군사쿠데타가 아닌 혁명이라고 억지주장을 하는 반면에, 5.16 군사쿠데타 세력이 군홧발을 동원해서 짓밟아버린 4.19 혁명은, 그 혁명성이 너무나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좀처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완전한 자가당착이요 적반하장의 논리인 것이다.

이처럼, 독재자의 세뇌를 통해서 끊임없이 독재의 향수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4.19 혁명의 그 선명한 혁명성마저 모두 부정한 채, 적반하장으로 명백한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를 5.16 혁명이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이라는 아주 선명한 키워드를 사용해서, ‘국가기록원’ 이라는 국가기록포털( http://contents.archives.go.kr )을 통해, 3.15와 4.19에 관한 기록들을 모두 공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독재자의 딸 박근혜를 포함해서, 5.16을 군사쿠데타가 아닌 혁명으로 부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부족한 역사의식과 역사에 관한 일천한 지식들을, 다시 한 번 더 깊이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를 5.16 혁명으로 바꾸어 부르면서, ‘박씨 왕조’를 재건하려는 독재자의 딸 박근혜에 의해서, 지난 세월들 동안 가슴 저미도록 고통스럽게 전개되어 온 대한민국의 역사는 ... 이제 과연, 어디를 향해서 흘러갈 것인가? 독재자 이승만의 3.15 부정선거가 4.19 혁명을 불러왔듯이, 현 부정개표 시국이 또 다른 혁명을 부르는 그 길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4.19 혁명의 꽃을 꺾어 버린 박정희와,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처참하게 짓밟아 버린 전두환 같은 독재자들이 득세하는, 또 다른 독재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앞에서도 계속해서 말씀드린 것처럼, 쿠데타란 지배계층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인 반면에, 혁명이란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지난 19세기에 지배계층 사람들은 피지배계층에 대한 억압과 수탈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다윈의 진화론과 관련된 ‘약육강식’, ‘적자생존’, ‘우생학’ 등의 개념을 사용해서 사람들 상호간의 치열한 ‘경쟁체제’를 끊임없이 조성해 왔다.

지배계층에 의해서 널리 이용된 이 같은 ‘사회적 다윈주의’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까지 동서양의 온 세계를 넘나들면서, 지배계층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 그 결과 마침내, 이들 지배계층을 위한 정치경제적 이데올로기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살인적인 ‘경쟁’을 가장 효율적인 도구라고 주장하는 ‘사회적 다윈주의’나 ‘경제적 신자유주의’는,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을 강조하는 진화론의 체계에 그 사상적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들 이데올로기는, 모든 인간을 도덕적인 ‘선’이나 ‘덕’과는 전혀 상관없는, 마치 짐승과도 같은 천박한 존재로 전락시켜 버렸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라는 짐승세계의 원리에 의해서, 내가 살아남고 또 내가 더 즐기기 위해서, 남들에게 온갖 못된 짓과 패악을 자행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지배계층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자유주의라는 정치철학적 이론을 가지고서, 피지배계층을 지속적으로 억압하고 착취할 수 있는 온갖 방법과 계략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는 중이다. 그 결과 신자유주의는 경제적으로도 ‘양극화’를 가속화시키는 부작용을 끊임없이 야기 시키고 있다.

오직 ‘경쟁’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은, ‘노동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면서, 자신들의 지배를 받는 피지배계층의 사람들을, 마치 자신의 노예와 같은 존재로 만들어 버리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한다. 하지만 짐승이 아닌 인간은, 비록 노동할 수 없는 경우에 처하더라도, 최소한 인간답고 사람답게 살 권리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 생존에 필요한 기본 식량과 의료혜택을 반드시 공급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자들은 사회적 약자와 힘없는 노동자들, 신체적 장애자들에 대한 배려를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산성과 경쟁의 측면에서 전혀 효율적이지 않은, 매우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이들을 간주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지난 5년 동안, 이명박 독재정권이 수많은 서민과 장애자 극빈자들의 복지혜택을 과감하게 축소시켜버린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김영삼 정부 때인, 1997년의 금융위기 이래로 한국에 등장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의 정치철학적 개념은( 여기서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것은 깊이 논의하지 않기로 한다 ), 현재 우리나라에서 소수 지배계층의 통치 이데올로기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음과 동시에, 대다수 피지배계층인 국민들에 대한 지속적인 억압과 착취를 가능하게 만드는 거대한 사상적 매트릭스를 형성하고 있다.

이번 대선도 지배계층의 이런 견고한 매트릭스 체계 안에서 치러진 것이다. 따라서 비록 지배계층의 기득권 수호를 위한 다양한 선거조작이 있었다 하더라도, 지배계층이 만들어 놓은 온갖 매트릭스에 갇혀서 지내는 피지배계층의 대부분은, 이런 부정과 거짓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또 운 좋게 이를 파악했다 하더라도, 이들은 지배계층이 만들어 놓은 이런 억압과 착취의 매트릭스를 무너뜨릴 만한, 적절한 수단과 방법을 쉽게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무기력하고 절망적인 상황들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가속화되면, 마침내 자포자기 해 버린 일단의 군중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동시에 이들에게 힘을 싫어주고, 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동기를 부여하고, 이들로 하여금 일어나서 행동하게 만드는 깨어있는 지식인들도 역시 반드시 나타나게 된다. 인류 역사가 지금까지 그렇게 전개되어 왔다.

절망한 군중과 지식인들은 힘을 합쳐서, 자신들의 삶에서 희망을 빼앗아간 지배계층의 각종 매트릭스를 파괴하기 위해서, 그야말로 사력(死力)을 다하게 된다. 삶에 대한 전혀 새로운 동기부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 힘이 ‘혁명’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이다.

때문에 세간에서는, 피지배계층을 ‘철저하게 절망하도록 만드는 일’을 일컬어,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을 ‘날이 시퍼렇게 서도록 더욱 더 모질게 탄압하는 일’이라고 그렇게 부른다. 현재 이 땅, 대한민국의 서민들은, 신자유주의적인 사회정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지배세력의 기득권에 의해서, 끊임없는 억압과 착취의 매트릭스 속에 갇혀서 살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야말로 날이 시퍼렇게 서도록 모질게 탄압받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미국산 수입쇠고기 개방이나 한미 FTA, 4대강 사업, 온갖 레버리지를 동원한 부동산거품들, 각종 민영화 정책 등도 모두 다, 소수의 지배계층이 만들어 놓은 억압과 착취의 매트릭스 안에서 발생하는, 지극히 당연한 일에 불과할 뿐이다. 지배계층은 피지배계층의 온갖 반발과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계획한 이런 여러 가지 일들을, 계획한대로 하나씩 하나씩 고집스럽게 추진해 나가면서, 이를 자신들의 승리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현재 섣부른 자축의 샴페인 뚜껑을 열심히 터트리고 있는 중이다.

지금 이곳 아고라에서 거세게 일고 있는 부정개표와 선거조작에 관한 온갖 항의에 대해서도, 모든 언론들을 통제한 지배계층이 이를 철저히 억압하고 무시함으로써 무력화시키려는 것도 역시, 동일한 억압과 착취의 매트릭스 체제하에서 발생하는 일련의 통과의례에 불과할 뿐이다.

이들은 국민들이 ‘수개표’와 선거과정에 대한 총체적인 점검을 요구하는 모든 항의를,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견고한 매트릭스 시스템 안에서, 모두 묵살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리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승리의 나팔을 불어댈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 이들 지배계층이 이런 행동들을 취함으로써, 더욱 더 절망의 끝으로 내몰리는 국민들과 깨어있는 지식인들이, 마침내는 행동을 개시하게 될 것임을, 이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거대한 ‘혁명’의 도화선에 불이 붙기 시작하면, 그리고 그 혁명의 폭탄이 터져버리면, 지배계층이 만들어 놓은 온갖 억압과 착취의 매트릭스는 모두 다 파괴되어 버릴 것이다. 그리고 지배계층의 운명은 일순간에 급 전락 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이런 혁명의 도화선에 불이 붙기 전까지는, 그 어느 누구도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불은, 수많은 억압과 착취를 지속적으로 당해온 피지배계층이, 마침내 자포자기(自暴自棄) 하여 사즉생(死卽生)의 상태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타오르기 때문이다.

쿠데타와 혁명에 대한 개념을 혼동하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쿠데타를 통해서 만들진 독재와 이에 저항하는 혁명도 역시, 그 상호연관성이 매우 높다. 독재의 지난(至難)한 끝에는 반드시 혁명의 그림자가 너울대는 것이다. 이제 이명박 문민독재에 이어서, 군사독재와 유신독재를 시행했던 독재자의 딸이, 자기 아버지가 일으킨 군사쿠데타를, 감히 혁명으로 미화하려는 역사의식을 가지고서 또 다른 문민독재를 꿈꾸고 있다.

군사쿠데타를 혁명이라고 생각하는 그러한 잘못된 역사인식과 의식구조 아래서는, 반드시 독재적인 사고방식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사고방식을 지닌 지배자는 이에 반발하는 피지배계층과 제대로 소통할 수 없게 된다. 이로 인해, 독재자 자신의 일방적인 사고방식을 따라서 행해지는 독재 통치는, 필연적인 수순이며 당연한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독재 통치는, 좀처럼 중간에서 끝이 나는 법이 없다. 자기 부하의 총에 의해서 비명에 간 그녀의 아버지처럼, 반드시 극단의 끝으로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 극단의 끝에서, ‘혁명’의 거대한 폭탄에 연결되어 있는 도화선에 불이 붙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혁명의 폭탄은 터지게 된다. ‘이명박근혜’와 ‘새누리당’은, 앞서 언급했던 ‘프랑스혁명’ 때, 지배계층이 단두대로 보내져, 그곳에서 그들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던 그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기회가 주어져 있을 때, 이를 붙들지 못하면, 기회는 비극을 이끌어 오게 된다. >

긴 글,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루터기추억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2261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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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천 알고보니 병도 고치더라

내성천 알고보니 병도 고치더라

 

김성만(채색) 2013. 01. 14
조회수 7369추천수 0
 

지율스님과 함께 한 낙동강 답사기 ①

대형댐 들어설 내성천 약수로, 썰매로 느끼기 "신나지만 슬퍼요"

경작 중지된 논에는 생명체 풍성…몇 년 뒤엔 수장되겠지만

 

눈이 많이 내렸다. 기온도 ‘영’ 아래로 쑥 내려갔다. 1월 3일. 이틀 뒤가 소한인 그야말로 엄동설한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방 안에서 움츠리고 있을 때, 영주역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였다. 지율스님을 필두로 한 강 답사단이다. 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온 아이들과 어른들, 봉화에서 온 나와 유하, 사과농사를 짓는 농부 문종호님 등이다. 모두 모이고 나니 스무명 가량 된다.

지율스님은 수 년 전부터 강에 깃들어 살고 있다. 강의 신음소리를 가까이에서 듣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하는데 힘을 모으고 있다. 재작년부터는 내성천 강가에 임시 거처를 마련해 두고서 강을 바라보며 살고 있고, 강이 처한 현실을 알리기 위해 부단히 알리고 있다. 조계사 앞에서 1년이 넘도록 내성천의 현실을 알리는 전시공간 ‘스페이스 모래’를 운영했고, 현장에서는 ‘물빛 풀빛 별빛 내성천 텐트학교’나 다양한 답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번 답사도 내성천을 지키기 위한 활동으로, 좀 다른 것은 내성천의 상류(즉, 낙동강의 상류)에서 낙동강의 하구까지 둘러본다는 것이다. 1월 3일부터 1월 9일까지 정확히 일주일간의 일정이다.

내가 가져간 해리포터(유하와 나의 차, 기종은 포터II)에 사람들의 등짐을 모두 실었다. 사람들이 모두 타기 위한 조처다. 신기하게도 내 차엔 짐을 싣기 위한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짐에 녹물이 배지 않게 깔 수 있는 방수천이 있었고, 짐을 묶기 위한 고무밴드도 있었다. 나 답지 않게 미리미리 준비한 것처럼. 답사도 이처럼 술술 풀리면 좋겠건만! 예감이 좋다.

_MG_2624.jpg » 물야저수지와 백두대간 줄기. 내성천은 이 일대에서 발원한다.


영주역에서 출발한 차는 소백산 자락을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내성천의 발원지로 향하는 길이다. 불과 이틀 전에 내린 눈으로 산야는 온통 흰 색이었다. 심지어 도로도 흰 색. 평소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달렸다. 도로 위로 듬뿍 뿌려진 모래 덕에 크게 무리는 없다. 뒷 좌석의 사람들은 김서린 창을 문질러 밖을 확인한다. ‘아름답다’는 표현들이 들린다. 느린 속도 덕분에 아름다운 경치를 얻은 셈이다.

부석사 입구를 지나치고 드디어 봉화의 물야면에 닿았다. 왼쪽 차창 밖으로 보이던 백두대간을 이제 정면으로 두고 달렸다. 차 안에서 그나마 그 지역을 아는 내가 설명을 했다. “정면으로 보이는 저 능선이 ‘백두대간’이에요. 저기 골짜기 곳곳에서 물이 흘러와 내성천이 되는 거에요.”

 

곧 오전약수라는 곳에 도착할 거라고 덧붙였다. 강은 어느 한 곳에서 발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산야 전체에서 발원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었으나 차는 금세 오전약수에 도착했다.

지율스님은 앞장서 걸어가 약수 앞에서 참가자들에게 설명했다. “30년 전에도 이곳에 왔었어요. 그 땐 정말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 중에는 환자들이 많았는데, 정말로 병을 고쳐나간 사람들이 있었어요.” 조선시대 약수대회에서 1등을 했었다는 설명도 잊지 않았다. 그야말로 ‘사람도 고치는 강’인 셈이다.

_MG_2595.jpg » 물야저수지. 30년 전만 하더라도 이 일대엔 병을 치료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실제 그들은 이곳에서 물을 꾸준히 마시고 요양한 뒤 병을 치료했다고 한다.


_MG_0534.jpg » 거북이 조형물에서 '병도 고치는' 약숫물이 끊임없이 나온다.


_MG_2588.jpg » 물 맛을 보는 참가자들. 처음 맛보는 물에 대해 표정이 제각각.

_MG_2591.jpg » '철봉 맛'을 본 참가자 재희. 표정에서 물 맛이 느껴진다.

_MG_2594.jpg » 어느 강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그토록 큰 낙동강도 처음에는 작은 개울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에게 물은 없어서는 안될 필수요소다. 인체를 구성하는 요소 중 물은 70%내외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지 않던가. 생명의 생성과 유지에 중요한 구실을 하는 물이 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자연은 우리를 만들어 주고 또 치료도 해 주는 그야말로 ‘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셈.

그런 막강한 능력을 가진 약수가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거북이 입에서 많지 않지만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곳 물맛이라면 내가 판단하기로 ‘철봉 맛’이다. 병을 고치는 이유가 아니라면 보통의 맹물처럼 벌컥벌컥 들이킬 ‘맛’이 나지 않는다. 다행히 스님의 설명 덕인지 아이들도 한 바가지씩 들이킨다. 처음 맛보고 잘못된 건 아닌지 의심했던 나의 반응과는 전혀 달랐다.

사람도 고치는 내성천 발원지를 조금 떠나 하류 쪽으로 조금 내려오니 넓디 넓은 호수가 나왔다. 다름아닌 물야저수지다. 얼음이 얼고 그 위로 눈이 쌓였다. 꼭 드넓은 설원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인공적인 호수가 아름다워 보이는 것에 괜히 심술이 났다. 참가자들도 ‘멋지다’, ‘아름답다’ 같은 말들을 뱉어냈다. 그들에게 ‘4대강 사업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乃城川 三百里(내성천 삼백리) 이곳에서 시작되다’하고 새겨진 발원지 비석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참가자들의 표정은 밝다. 이른 아침 따뜻한 이불 속에서 지었던 ‘귀찮은 표정’은 어디에도 없다. 이제부터 진짜 답사의 시작이다.

_MG_2621.jpg » 내성천 발원 기념비 앞에서 단체사진. '소한'의 혹한에도 참가자들의 표정이 밝다.

내성천은 봉화를 가로지르는 백두대간 일대에서 발원해 물야면과 봉화읍내를 관통한다. 영주의 이산면과 평은면 사이사이의 크고 작은 논 밭 사이를 흘러흘러 예천군의 산야도 비껴 흘러간다. 이제는 유명해진 회룡포에서 360도 방향을 튼다. 이렇게 300리, 즉, 120㎞ 정도를 흐른 뒤 경북 예천의 삼강마을 앞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공식적(?)으로 낙동강은 태백시의 황지에서 발원한다고 하지만 강으로 흘러오는 산골짜기 곳곳이 어찌 ‘발원지’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내성천은 발원하자마자 물야저수지에 갇혀 강 다운 모습을 잃어버리고, 도중에 크고 작은 수많은 농업용 보들로 멈칫거린다. 봉화 읍내를 지나 이산면에 이르면 내성천은 자연적인 모습으로 회복한다. 좌우로 굽이치며 한 쪽은 가파름을 한 쪽은 완만함을 남겨둔다. 완만한 쪽엔 깨끗한 모래가 수면 위로 드러나고 다양한 생물들의 쉼터가 된다. 사람들이 느끼는 이곳의 아름다움은 크나큰 덤이다.

특히나 내성천은 우리나라에서 또 세계적으로도 드문 모래강이다. 강 표면에 드러난 곳은 물론이고 영주댐을 건설하며 드러났 듯 강 속 20m 내외까지 모래가 가득 차 있다. 모래와 모래 사이는 물은 충분히 흘러가고 유기물은 걸러낼 만큼의 공간이 있다. 걸러진 유기물은 모래 알갱이에 붙어사는 다양한 미생물의 먹이가 된다.

 

그 덕에 모래강은 ‘정수기’ 노릇을 톡톡히 하며 맑은 물을 유지시켜주는 특별한 강인 셈이다. 더군다나 낙동강에도 엄청난 모래를 공급하여 ‘정수기’ 구실을 전해주기도 한다. 안동댐 상류의 낙동강 모습과 내성천이 합류한 다음의 낙동강 모습이 확연히 다른 것도 그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내성천에 거대한 댐이 건설되고 있다. 영주시 평은면에 공공기관(국토해양부와 수자원공사)과 여러 민간건설사(삼성물산과 동부건설 등)이 힘을 모아 강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갇혀버리면, 댐 상류는 거대한 호수가 되어 버리고, 하류는 모래가 끊겨 자갈만 드러나게 된다. 모래강의 특징을 점차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1990년대 중후반에 세워졌던 댐 계획은 1999년에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된 적이 있고, 10여년간 아무런 문제없이 지내왔던 걸 생각하면, 댐 건설 목적에 쉽게 동의할 수 없다. 영주댐 홍보물에는 댐 건설의 첫번째 목적으로 ‘중하류지역의 수질개선을 위한 하천유지용수’라고 밝히고 있다.

모래강의 신비나 영주댐으로 인한 파괴에 관한 이야기도 좋지만 피부로 직접 느끼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다. 지율스님은 누구보다도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랬기에 첫 날의 메인 프로그램을 ‘내성천 얼음썰매 타기’로 넣었을 것이다.

_MG_2709.jpg » 어른이 아이의 썰매를 끌어주기도 하고,


_MG_2674.jpg » 어른이 어른의 썰매의 끌어주기도 했다. 썰매에 타면 일단 아이로 변신!


_MG_2679.jpg » 강은 어른에게나 아이에게나 함박 웃음을 주었다.


_MG_2681.jpg » 이렇게!


_MG_2711.jpg » 썰매타기의 마무리는 뜨끈뜨끈한 군고구마로.


봉화읍내에는 내성천 위에 모래를 조금 걷어낸 뒤 물을 가두어 만든 얼음썰매장이 있다. 게다가 썰매는 무료로 빌려주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은 신나서 썰매를 들고 얼음판으로 달려갔다. 며칠 전만 해도 얼지 않아 운영을 못 했다. 강추위가 고맙기도 하다.

썰매 위에 앉거나 무릎을 꿇었다. 못이 박힌 작대기를 얼음판 위에 꽂고 뒤로 밀었다. 쌓인 눈 때문에 ‘신나게’ 가지는 못했지만 아이들 웃음소리만큼은 얼음판 여기저기로 미끌어져 갔다. 서로서로 밀어주고 끌어주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얼음판을 즐겼다.

이 썰매장 홍보물에는 ‘추억의 썰매장’으로 설명하고 있다. 오래전에는 강 가장자리가 얼면 나무 판자에 길고 날카로운 쇳조각을 대고 썰매를 만들어 탔다. 논에 물을 대고 얼려 아이들을 위한 썰매장을 만들기도. 어른들의 ‘추억’을 지금의 아이들에게 주는 셈이다. 이젠 이 아이들의 머리와 가슴 속에도 이날의 썰매타기는 오래동안 기억될 것이다. 다만, 아이들이 다 컸을 때, 그들의 아이들도 이와 같이 탈 수 있다면 좋겠다. 다 사라지고 지금은 이렇게 진짜 강 위에서 썰매를 탈 수 있는 곳은 몇 안되니 말이다.

썰매장의 흥분 때문이었을까 괴헌고택으로 이동한 뒤에도 아이들은 신나게 뛰어놀았다. 강은 포클레인으로 파헤쳐져 있었고, 논은 경작금지 팻말을 앞세우고는 여러가지 들풀들이 자라나 있었다.

강 일대 새들의 생태를 설명할 요량으로 참가한 박중록 선생님(습지와 새들의 친구 운영위원)은 우리들이 도착하자 날아오르는 작은 새들이 ‘쑥새’라고 설명했다. 그는 “쑥새들이 이렇게 많이 몰려있는 건 처음 봅니다.”라며 이곳 일대의 변화가 ‘심상치’ 않음을 알렸다.

지율스님은 “댐이 건설되면서 이곳에 농사를 못 짓게 했어요. 1년 정도만 묵혔을 뿐인데 여러가지 생명들이 돌아왔어요.” 두더지나 곤충들, 그리고 새들도 기존의 논에 비해서 훨씬 많아졌다는 설명이다. 이 논들은 사실, 제방이 생기기 전까지는 상습적으로 침수되는 강 습지 였다.

_MG_2762.jpg » 이산면 일대의 논은 지난해 농사를 짓지 않았다. 불과 1년 정도만 지났을 뿐인데 많은 생명들이 돌아왔다.


_MG_2783.jpg » 말똥가리는 하늘에서 답사단을 반겨주었다.


_MG_2755.jpg » 수몰지구 내에 있는 괴헌고택.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다른 곳으로 이전한다 하더라도 그 '문화'까지 옮길 수 있을까?


_MG_2724.jpg » 괴헌 고택 안을 살펴보는 지율스님.


_MG_2728.jpg » 괴헌 고택 이곳 저곳을 살펴보는 아이들.

곧이서 큰 새가 날아올라 우리 위를 빙~빙~ 돌았다. 말똥가리였다. 이들도 곤충이나 작은 새들, 두더지들과 함께 불어났다. “와~ 크고 멋진 새가 우리를 반기네요!” 아이같은 순수가 섞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지율스님이었다. 마치 이곳의 자연이 다소나마 살아난 것이 자신이 살아났다는 듯한 인상이다. 얼마나 기쁜 목소리인지!

아쉽게도 파헤쳐진 강은 이곳의 미래를 암시하고 있었다. 즐겁게 놀던 아이 준일이도 ‘멋진 새’를 올려다보다 휘청하며 강 쪽으로 떨어질 뻔 했다. 그가 서 있던 곳이 포클레인으로 모래를 가파르게 쌓아놓은 작은 언덕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로 영주댐이 완공되고 담수를 하게 되면 몇 년동안은 이곳 논은 그대로 자연으로 돌아가겠지만 결국엔 수장되고 말 것이다. 그 자리에서 그런 일은 절대 없도록 빌었다.

숙소 봉화전원생활센터엔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동국대학교에서 생태학을 가르치는 오충현 교수님이다. 그는 답사단에게 복잡하지 않은 ‘생물다양성’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리산에 방사한 몇 마리의 곰들이 번식을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던진 뒤 생명들이 대를 잇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충분한 개체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했다. 호랑이의 경우에는 암수 각각 300마리 이상이 있어야 ‘유전자의 다양성’이 유지되어 그들이 멸종하지 않는다고 한다. 근친으로 태어난 자식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정상’ 범위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_MG_2820.jpg » 동국대학교 오충현 교수. 그는 참가자들에게 '생물다양성'의 개념을 알기 쉽게 설명했다.

 

또 다른 질문으로 “‘종’보전을 위해 동물원만 있으면 될까요?”하고 던진 뒤, 그들이 살 수 있는 서식지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야생’의 서식지가 없으면 보전이 안 된다는 말이다. 그 범위는 어떤 동물은 좁고, 어떤 동물은 넓다. 서식범위가 넓은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 만큼의 충분한 서식지가 보전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이론을 강에 접목시켜 설명했다. 강이 댐이나 보들로 가로막혔을 때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기존의 환경에 적응해오던 동물들이 호수가 된 강에서 살 수 없다고 강조했다. 물은 수위에 따라서 온도 차이가 많이 날 뿐 아니라 흐름도 각기 다르다. 갑자기 그런 곳이 깊은 호수로 변했을 때 어떻게 될까? 강 속의 생태가 바뀌면 그 강에 적응해 있던 강 밖의 생태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내성천은 더군다나 모래강으로 모래에 적응해 살고 있던 생물들이 많다고 한다. 이곳에 사는 생물이 이곳에서 멸종되면 전세계에서 멸종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1급으로 멸종위기에 처해있는 ‘흰수마자’가 그런 꼴일 것이다.

낮의 쾌활했던 분위기는 잠시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슬퍼할 수만은 없는 노릇아닌가. 우리가 내성천의, 낙동강의 슬픈 현실을 알았다면 행동하면 될 일. 희망을 갖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니라 기쁜 일이다.

_MG_2793.jpg » 가장 활기차게 뛰어놀던 아이, 준일. 갑자기 눈 밭에 드러누워 팔과 다리를 휘저었다.

_MG_2796.jpg » 조심스레 일어나 머리위에 선을 하나 그었다. '천사'라는 설명이다. 그는 강변에 천사를 남겨두고 왔다.

 

글·사진 김성만(필명 채색)/ 한겨레 물바람숲 필진, 생태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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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만(채색) 생태활동가
녹색연합 자연생태국, 4대강 현장팀에서 활동했었다. 파괴를 막는 방법은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라 믿고 2012년 3월부터 '생태적인 삶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여행을 떠난다. 중국 상하이에서 포르투갈의 리스본까지 자전거로 여행하고 <달려라 자전거>를 냈고, 녹색연합에서 진행한 <서울성곽 걷기여행>의 저자이기도 하다.
이메일 : sungxxx@hanmail.net
블로그 : http://plug.hani.co.kr/likeb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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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탕평' 원한다면 특권층 1%와 싸워야

박근혜, 사도세자를 두 번 죽이지 말기를...

[게릴라칼럼] 진정한 '탕평' 원한다면 특권층 1%와 싸워야

13.01.14 19:53l최종 업데이트 13.01.14 21:37l

 

 

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12월 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에서 열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 참석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교부받은 당선증을 들어보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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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당선인은 취임 직후부터 '대탕평 인사'를 국정 키워드로 표방하고 있다. 이를 통해 국민 모두가 행복한 '100% 대한민국'을 실현시키겠다는 것이 그의 약속이다.

탕평은 고대 중국 역사서인 <서경>의 '홍범' 편에 나오는 정치이념이다. 여기에는 군주가 지켜야 할 9가지 정치원칙인 홍범구주가 나온다. 이 중에서 제5원칙이 탕평과 관련된 내용이다.

제5원칙의 핵심 내용은 군주가 국가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5원칙을 다룬 부분은 "황극(皇極)은 임금이 표준을 세우는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군주가 표준을 세우는 상태' 즉 '군주가 중심이 되는 상태'가 황극이며, 이 황극에 관한 내용을 다룬 것이 제5원칙이다. 황극의 실현 방법과 관련하여 다음 두 문장이 특히 관심을 끈다.

"일반 백성들이 은밀히 뭉치지 않고 높은 사람들이 뭉치지 않는 것은 임금이 표준이 되기 때문이다."-제1문장.
"치우침이 없고 당을 만들지 않으면 왕도가 탕탕(蕩蕩)하고, 당을 만들지 않고 치우침이 없으면 왕도가 평평(平平)하다."-제2문장.

제2문장의 '탕탕'과 '평평'을 압축한 게 탕평이란 두 글자다. 탕평의 의미는 제1문장에 나온다. 백성들이 파벌을 만들어 끼리끼리 뭉치는 상태를 배격하는 것이 바로 탕평이다. 바꿔 말하면, 여러 집단과 계층이 골고루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탕평이다. 이 같은 탕평을 통해 '임금이 중심이 되는 상태'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탕평의 본질, 국가가 특정 파벌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 것
 

영조의 어명으로 세워진 탕평비가 보관돼 있는 탕평비각. 서울시 종로구 성균관대학교 정문에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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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가 국가의 중심이 되는 것이 탕평이라면, 이것은 군주 독재를 위한 논리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탕평의 본질은 국가가 특정 파벌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백성들이 끼리끼리 뭉치지 않도록 군주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특정 당파가 아닌 백성 전체의 이익을 위해 국가 조직이 움직이도록 군주가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일반 백성들보다는 '높은 사람들' 즉 특권층이 당파를 만들 위험성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제5원칙의 궁극적 목표는 특권층 내의 파벌이 국가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이 사람 저 사람 끌어모으는 것은 탕평이 아니다. 국가가 백성 전체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탕평이다. 이것은 인사조치에만 국한하지 않고 국가의 법률제도까지 과감히 뜯어 고칠 때만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1% 귀족의 나라'가 아닌 '100% 만백성의 나라'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왕권도 자연스레 강해질 것이라는 게 옛날 왕들의 계산이었다.

그런데 왕권이 비교적 강했던 중국과 달리, 귀족이 더 강했던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탕평의 원리가 제대로 실현될 수 없었다. 1%를 규제하고 100%를 위하는 군주는 1%의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임금은 폭군이란 소리를 들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1%가 99%보다 훨씬 더 강했기에, 옛날 우리나라의 왕들은 탕평을 감히 추진하기 힘들었다.

탕평이 공식적으로 추진된 것은 조선 후기인 18세기 초반부터였다. 숙종 임금(재위 1674~1720년) 때에 당파 투쟁이 최고로 격렬해지고 이 틈을 타서 숙종이 당파들을 교묘히 대립시키고 지치게 만들면서, 당파 정치는 이전과 달리 크게 약해졌다. 물론 그 후에도 보수파인 노론당 계열이 여전히 제1당이었지만, 숙종시대 후반부터는 노론당을 포함한 당파들의 힘이 예전 같지 않았다.

이렇게 당파 정치가 약화된 틈을 타서, 숙종의 아들인 영조가 선언한 것이 바로 탕평정치였다. 그는 '1% 양반 귀족의 나라'가 되어 버린 조선을 '100% 만백성의 나라'로 바꾸려면 특정 당파의 독점을 깨고 당파 간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통해 왕권이 자연스레 강해질 것이라는 게 그의 계산이었다.

이런 시도의 결과로 영조가 즉위한 1724년부터 정조가 사망한 1800년까지는 '1% 조선' 이 아닌 '100% 조선'을 위한 탕평정치가 추진되었다. 물론 그것이 완벽하게 구현된 것도 아니고 또 노론당이 힘을 잃은 것도 아니지만, 이전 시기와 비교하면 이 시대의 정치는 분명히 진일보한 것이었다.
 

사도세자의 사당이 있었던 경모궁 터. 서울대병원 뒤편에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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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사망한 장소인 창경궁 문정전 앞뜰.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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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시대에 영조나 정조보다 훨씬 더 교과서적으로 탕평을 추진한 인물이 있었다.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그 주인공이다.

사실, 영·정조는 약간 타협적으로 탕평을 추진했다. 탕평을 표방하면서도 실상은 특정 당파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다. 특히 영조는 정권 유지를 위해 외척세력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이처럼 완벽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이 훌륭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이전의 왕들이 감히 시도하지 못한 것을 그들이 용감하게 시도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가 특권층과 죽기 살기로 싸운 이유

다소 타협적인 영·정조에 비해 사도세자는 매우 원칙적으로 탕평의 이념을 고수했다. 그는 1749~1762년의 13년 동안 영조를 대신해서 대리청정(권한대행)을 수행했다. 따라서 탕평정치가 시행된 76년 중에서 13년 동안은 실질적으로 사도세자의 시대였다. 그러므로 탕평정치의 계보는 영조-정조가 아니라 영조-사도세자-정조였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사도세자는 '100% 조선'을 이루려면 특권층인 노론당과 외척세력을 눌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노론당을 얼마나 경계했는지는 나이 열 살 때부터 노론당을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노론당을 비호한 영조의 태도까지 비판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처가인 홍씨 가문이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앞장선 사실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그는 외척세력이 국정에 개입하는 것을 견제했다. 노론당과 외척으로 이루어진 '1%'를 견제했던 셈이다. 한마디로, 그는 '100% 조선'에 목숨을 건 용감한 사나이였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 13년 만에 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뒤주에 갇혀 목숨을 잃은 것은, 그가 교과서적인 탕평을 추구했고 그것이 특권층에게 공포심을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화병을 앓았고 그로 인해 어느 정도 문제가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뒤주에 갇힌 본질적 요인은 '1%'와의 갈등이었다.
 

사도세자가 갇혀 죽은 뒤주의 복원품.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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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1%로부터 얼마나 미움을 받았는지는, 그가 죽은 뒤에도 오래도록 죄인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들인 정조가 왕의 자리에 있을 때도 왕으로 추존되지 못한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왕의 아들이 아닌 사람이 왕이 되면 자기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정조는 끝내 이 일을 하지 못했다. 사도세자에 대한 특권층의 거부감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사도세자가 왕으로 추존된 것은 구한말 때인 1899년이었다. 100%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1% 때문에 얼마나 곤욕을 치를 수 있는지를 사도세자는 온몸으로 보여줬다.

사도세자는 251년 전에 죽은 사람이지만, 그는 아직도 우리 주변에 남아 탕평을 외치고 있다. 서울 시민은 물론이고 지방 사람들도 많이 찾는 대학로 서울대병원의 바로 뒤편에는 그의 위패를 모셨던 사당인 경모궁의 터가 남아 있다. 또 경모궁 터에서 왼쪽으로 직경 500미터 거리에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사망한 곳인 창경궁 문정전 앞뜰이 있다.

박근혜 당선인이 말로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탕평을 원한다면, '1% 대한민국'이 아닌 '100% 대한민국'을 정말로 원한다면, 경모궁 터와 문정전 앞뜰에서 울려퍼지는 사도세자의 절규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한국의 정치환경에서는 사도세자처럼 특권층과의 대결을 불사하지 않고서는 탕평을 추진할 수 없다. 한여름 날씨에 8일간 뒤주에 갇혀 세상과 작별할 각오를 하지 않고는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탕평이다.

박 당선인이 '100% 대한민국'을 위한 대탕평을 하고자 한다면, '죽기 살기로' 1%와 싸울 각오부터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진정성 있는 탕평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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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론가능한 부정 기획개표 매카니즘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3/01/15 09:49
  • 수정일
    2013/01/15 09:49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추론가능한 부정 기획개표 매카니즘
부정을 저지를 수 있는 시스템과 실행의지만 있으면 언제나 가능


 

(서프라이즈 / 독고탁 / 2013-01-14)


 

"해킹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중앙선관위는 자신있게 말합니다. 방송사와의 인터뷰에 나서서 전국민을 상대로 외칩니다. 선관위 전산시스템은 어떤 해커들의 공격으로부터도 안전을 보장받은 듯 주장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따져보면 굳이 거창하게 '해킹'할 필요조차 없어 보입니다. 단순히 기계의 특성만 이용해도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니까요.


 

OMR 카드리더기

* OMR(Optical Mark Reader, 컴퓨터 입력 장치의 하나로, 빛을 이용해 마크 시트 따위의 용지에 연필이나 펜 등으로 표시한 부분에 빛을 비추어 판독하고 전기 신호로 바꾸어 주는 역할을 한다. 자료의 내용이 비교적 단순하고 양이 많은 업무를 고속으로 처리하는 데 널리 이용되고 있다. 주로 시험의 해답을 체크하는 데 이용된다. - 네이버백과)

대학수능시험에서 사용하는 OMR 답안지에 학생들은 수성사인펜으로 마킹을 합니다. 한 과목에 수십개의 문항이 들어 있습니다. 과목에 대여섯개 되니 대략 300여개의 문항에 마킹을 하는 셈입니다.

 

 

학생들이 작성한 OMR 답안지가 모이면 OMR 카드리더기로 판독을 합니다. OMR이 처음 개발되어 상용화된 것이 1950년대 부터이니 상당한 역사가 흐른만큼 기술도 측적되었을 것입니다.

 

 

위의 기종은 비교적 낮은 사양에 속하는 OMR카드리더기로 가격도 저렴한 편입니다. 그럼에도 무려 분당 300매를 처리할 수 있다고 하는군요. 그보다 사양이 높은 것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 리더기는 분당 처리속도가 500매입니다. 즉, 1초당 8장의 OMR 카드를 처리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럼에도 1장을 리딩할 때마다 200회 이상 데이터비교 검색이 가능하다고 하니, 처리 속도가 빨라서 오류가 날 수도 있다는 주장은 설 자리가 없어 보이는군요.

OMR카드리더기의 기능이 오작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을까요? 만약 대입 수능시험에서 OMR 카드리더기의 문제로 인해 학생들의 성적이 뒤죽박죽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2번>에 색칠을 했는데 <1번>에 색칠한 것으로 채점이 된다면 학생들 성적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학부형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OMR 카드리더기가 실수한 것 본 적 없다 - 30년 교사의 증언

OMR 카드리더기도 기계인데 오작동이 없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30년 경력의 현직 고등학교 교사에게 물어봤습니다. 돌아온 답변은 이랬습니다.

"OMR카드리더기가 고장이 나서 아예 작동을 하지 않으면 모를까, OMR카드리더기를 통해 나온 결과가 틀리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문제가 있는 답안지는 바로 튀어나온다. 채점 후 OMR카드를 학생들에게 돌려주는데 문제가 있다고 들고 찾아오는 경우가 간혹 있다. 그 경우라도 색상이 희미하거나, 두 개를 선택했거나 모두 학생들의 실수나 잘못으로 판명이 나지 기계가 잘못읽어 오류가 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OMR카드리더기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다."

이 증언은 OMR 카드리더기가 그만큼 정확도가 높다는 것을 설명하기에 충분합니다. 우리 주변에 고등학교 교사들 만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으니 이 글을 보시는 분들도 주변의 교사분들께 한번 물어보셔서 확인하시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카드리더기>의 성능이 어떤지 여부를 확인하는데 그만큼 확실한 방법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학부모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꼽으라면 자녀의 대학입학 문제일 것입니다. 만약 교과부에서 사용하는 OMR카드리더기의 기능에 대해 신뢰할 수 없다면 학부모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단 한 장의 잘못 읽혀진 카드가 발견된다고 해도 교과부로 달려가서 쑥대밭을 만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나라의 미래를 결정하는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는 대선>에서 카드리더기가 엉망진창으로 읽고 분류를 했는데도 왜 아무도 그것을 문제삼지 않는 걸까요?


전자개표기에는 '인공지능' 기능이 달여있지 않다

우리가 기계를 사용하는 이유는 <주어진 조건에 따라 단순 반복되는 일을 쉽고, 빠르고, 정확하게 하기 위하여> 입니다. 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거나 위배하면 기계를 사용할 이유 자체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소위 '기술'을 조금이라도 안다는 사람 백이면 백 길을 막고 한 번 물어보십시오.

국가에서 하는 업무를 위해 납품받는 기계가 센서를 이용하여 결과물을 분류했는데, 저토록 선명하고 분명하게 두 번째 칸에 마킹이 된 것을 첫 번째 칸에 마킹한 것으로 오인하여 분류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냐고. 한 번 물어나 보십시오. 과연 저것이 가능한 일이냐고 한 번 물어 보십시오. 미치고 환장할 일이지요.

 

 


(박근혜 묶음표에서 발견된 문재인표)

 

정상적으로 제작이 되었고, 검사를 거쳐 제대로 납품된 기계가 저런 결과를 보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저 제품을 납품한 회사는 망했어야 합니다. 회사 사장은 처벌받고 손해배상은 물론 패가망신했어야 하는 거지요. 제조회사가 저토록 부실한 제품을 국가에 납품하고도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것이 이해할 수 있는 일인가요?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기계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아닐까요? 저러한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애지중지 사용되고 있다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저 회사 사장을 집어 넣어야 옳은 것 아닌가요?


 

기계의 특성을 이용한 부정 기획개표 매카니즘

지금부터 드리는 얘기는 이번 대선에서 부정이 저질러진 방식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추론입니다. 그리고 전제가 있습니다. 이번 대선에서 사용한 자동개표기가 적어도 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OMR카드리더기 만큼의 정확도와 신뢰성을 갖고 있다고 전제합니다. '기계가 잘못되어서 그렇다'라는 주장은 개무시한다는 뜻입니다.

기계가 잘못되어서 그런지 여부는 <기계의 정확도를 검증하는 기회>에 하면 될 일입니다. 국정조사를 하든, 제조업체에 대한 조사를 하든, 샘플링을 하든, 관련 세미나를 하든 그것을 검증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은 얼마든지 열려 있습니다. 기계가 별 것 있나요. 기계는 기계일 뿐, 그것의 신뢰도를 검증하는 것은 일도 아닌 일입니다.

 

 

개표소에서 테이블 위헤 무작위도 쏟아진 표를 사람들이 대충 모아서 자동개표기에 넣습니다. 그런데 자동개표기를 거쳐서 나온 결과물 100장 속에 무려 10장 씽이나 잘못된 결과물이 포함되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상황에서 저질러진 부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손을 탈 겨를도 없이 기계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니까요. 그런데 <전자개표기가 적어도 OMR카드리더기 수준의 정확도와 신뢰도가 있다>고 전제한다면 이것은 기획(프로그램)된 결과물로 볼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기획(프로그램)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는 것이 지금부터의 추론입니다. 전자개표기는 컴퓨터의 제어를 받습니다. 선관위에서는 <단순 분류기>라고 거짓말을 해댔지만 <컴퓨터의 제어를 받는 전자개표기>라는 사실은 수많은 네티즌들의 검증과 사진증거를 통해 밝혀진 바 있습니다.

첫째, 유치하고 뻔한 방법입니다만, 프로그램 제어 방식으로 일정 분량의 상대표가 포함되어 들어가도록 제어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멀쩡한 표가 엉뚱한 곳으로 달려가는 원리를 설명하기 어여룬 것이지요. 결국은 사람의 일입니다. 그렇게 부정을 저지를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 결정하고 실행하는 사람에 딸린 문제입니다. 기계는 그런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실행가능한 환경을 제공할 뿐이지요.

둘째, 일정 시간 센싱기능의 정지입니다. 눈으로 보면 멀쩡하게 돌아가지만 내부에서 분류할 때 예를 들어 분당 300장을 리딩하는 기계라면 초당 5장을 처리하게 되는데, 1분 가운데 단 1초 동안이라도 센싱(Sensing)기능이 동작하지 않도록 셋팅한다면 5장이 랜덤(Random)으로 섞여 들어갈 수 있습니다. 확률적으로는 반반 섞여 들어가는 거지요. 그것을 제대로 걸러내는지 여부는 뒤에 앉는 사람들이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린 문제입니다.

기계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자동개표기가 적어도 국내 수많은 고등학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OMR카드리더기 만큼의 성능을 갖고 있다고 전제한다면 이번에 나타난 현상은 위의 두가지 조작 방식외에는 추론할 방법이 없습니다.

독고탁


덧글 : 선관위는 전자개표기가 아닌 전자분류기라고 주장하지만 아래의 사진을 보면 선관위의 주장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센싱하면서 부지런히 집계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찍여 있으니까요. (사진출처 : 아고라 - 안양 만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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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 목에 '돈의 칼'을 들이대다

대한민국, 국민 목에 '돈의 칼'을 들이대다

[강자의 무기, 손배·가압류 ②] 이명박 정권, 노동자 대상 손배 본격화

김윤나영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1-15 오전 8:09:10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 대한민국 헌법 제33조 제1항이다. 여기서 말하는 단체행동에는 잔업 거부, 태업, 부분 파업, 전면 파업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 다르다. 막상 노동자들이 단체행동을 하면, 헌법이 보장한 노동3권은 손쉽게 제한된다.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악랄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평가받는 게 손해배상청구소송(손배)과 가압류다.

지난해 12월 21일 최강서 한진중공업 노조 조직차장을 자살이라는 벼랑 끝으로 몰았던 것도 이 손배·가압류였다. 최 조직차장은 유명을 달리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노동 현장이 수십 억, 수백 억대의 손배·가압류에 시달리고 있다. 이를 짚어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편집자>

 

 

<강자의 무기, 손배·가압류>
① 내 가족 죽게 만든 '연쇄 살인범', 알고 보니…

 


"노동자들의 죽음을 현 정권과 연결시키려는 주장은 잘못됐다."

이채필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 2일 정부 과천청사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한 말이다. 이 장관은 "손배나 가압류 문제는 한진중공업 조합원 유서에 언급됐으나, 노동조합에 대한 것이고 개인에 대한 사항은 없다"면서 이와 같이 발언했다.

이 장관은 "손배는 노무현 정부 때가 건수는 훨씬 많고 금액은 이명박 정부 때가 커졌다"고 덧붙였다. 노무현 정부 때 손배와 가압류 건수는 각각 62건, 60건이었으나 이명박 정부 들어 33건, 26건으로 줄었다는 것이다.

이 장관이 지적한 대로 손배·가압류 문제가 이명박 정권 들어 처음 나타난 건 아니다. 그 이전에도 손배·가압류는 존재했고, 노동자의 죽음에 영향을 끼쳤다. 2003년 1월 두산중공업의 배달호 씨가 분신 자살했고, 같은 해 10월 김주익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장이 '손배·가압류 철회'를 요구하며 스스로 목을 매 숨졌다.

노동자들이 잇따라 목숨을 끊었던 2003년 당시 언론은 손배·가압류를 '신종 노조 탄압 수단'으로 지목하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지만 손배로 노동자가 죽는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자였던 최강서 씨는 지난해 12월 21일 '158억 손배 철회, 민주노조 사수'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프레시안(김윤나영)


손배는 어떻게 '신종 노동 탄압' 수단이 됐나?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손배는 사회 문제로 대두되지 않았다. 1990년대에 경영계는 주요 파업 대처 방식으로 민사소송보다는 형사소송을 통한 파업 주동자 구속·수감을 택했다. 노조 간부 구속 및 수억 원대 손배 청구동시에 이뤄졌지만, 파업이 끝난 후 노사가 서로 민형사상 소송을 취하하는 것이 관례였다.

2000년대 초반 들어 상황은 달라졌다. 경영계에서 손배 청구는 노조에 대처하기 위한 효율적인 '경제적 압박 카드'로 부상했다. 실제로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부설 연구원이 2004년 내놓은 '불법 쟁의 행위와 손해배상·가압류에 관한 연구'를 보면, 경영계는 "불법 파업에 대한 손배·가압류는 최소한의 자구 조치"라고 주장했다.

손배의 양태도 달라졌다. 경영계는 '노조 조직'에만 부과하던 손배를 2000년대 이후 노조 간부뿐만 아니라 파업에 참가한 평조합원, 가족, 신원보증인에게도 부과했다. 가압류 대상도 노조 조합비에서 노조원 개인의 임금 및 퇴직금, 노조원의 아버지나 형제의 선산까지로 확대됐다. 친척에게까지 '연좌제' 성격차압이 들어오니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가족 관계가 파탄 나는 것은 당연했다.

배달호·김주익 씨가 숨진 2003년 전후 손배는 '노조에 대처하는 협상 카드'에서 '노조 탈퇴 압박 수단'으로 차츰 진화했다. 사측은 전방위적으로 손배·가압류를 걸어 노동자를 압박한 뒤, 노조를 탈퇴하고 회사에 순응하는 사람들에게 선별적으로 가압류를 취하했다. 박성호 한진중공업 지회 부지회장은 "손배를 갚을 수 있는 길은 노조를 탈퇴하고 회사한테 잘못했다고 비는 것"이라며 "그렇게 노조 간부들이 회사와 손잡고 해고 명단이나 손배 대상에서 빠지면, 노조는 완전히 깨진다"고 말했다.

배달호 씨의 죽음은 '손배 탄압'의 상징이었다. 두산중공업 노조 교섭위원이던 배 씨는 2002년 단체협상이 어그러지고 파업에 돌입하면서 임금과 퇴직금, 부동산이 압류됐다. 배 씨는 구속된 이후 현장에 복귀했지만, 가압류로 6개월 이상 사실상 임금도 받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는 초반에 배달호 씨의 죽음을 외면했다.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지금과 같이 민주화된 시대에 노동자들의 분신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후 김주익 지회장마저 '손배' 문제로 스스로 목숨을 끊자 노 전 대통령은 노동자 투쟁에 대한 강경한 태도에서 한 발 물러났다. 2003년 11월 정부는 노사정위원회를 열고 급여에 대한 가압류 범위를 최저임금이 보장되도록 제한하는 방안을 도입키로 결정했다. 경영계도 신원보증인과 평조합원에 대한 손배 청구는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문제는 가압류 대상이 되는 노동자들이 주로 '징계 해고자'라는 점이다. 이미 해고돼 최저임금만큼 남겨둘 '급여'조차 없는 노조 간부들과 그 가족들의 부동산은 제도가 도입된 이후에도 여전히 차압됐다. 해고 시 가압류로 퇴직금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현실은 이명박 정부 때에도 이어졌다.

"민주노총 사업장에 청구된 손배 총액, 575억→1582억"

이명박 정부 들어 변한 것도 있었다. 우선 이채필 장관 스스로 밝혔듯 손배 액수가 절대적으로 늘었다. 민주노총이 2011년에 낸 정책 보고서를 보면, 민주노총 소속 사업장에 청구된 손배 총액은 2003년 10월 575억 원에서 2011년 5월 1582억7000만 원으로 3배에 가까운 금액이 됐다.

손배 액수를 보수적으로 책정하는 고용노동부 자료를 따르더라도, 손배 총액은 2010년 121억4200만 원에서 2011년 7월 700억1000만 원으로 6배에 가까운 금액이 됐다. 가압류 신청 금액도 2010년 13억3000만 원에서 지난해 160억4900만 원으로 12배가 됐다.

손배 액수가 커진 이유에 대해 권두섭 공공운수노조 법률원장은 "2003년 직전까지만 해도 돈 있는 사측이 경제적 약자인 노동자에게 손배를 청구하는 것을 도덕적으로 꺼리는 분위기가 있었다"며 "지금은 손배에 대한 사회적 문제 제기나, 국회나 정부 차원에서 제한하려는 노력이 없다 보니 마구잡이로 금액을 청구한다"고 분석했다.

이명박 정부, 노조에 대한 손배 청구 본격화

이전까지 손배 청구 주체가 주로 사측이었다면, 이명박 정권 들어 정부가 노조와 파업 참여 노동자들에게 본격적으로 손배를 청구하기 시작했다는 점도 중요한 변화다. 2009년 쌍용자동차 파업에 대한 손배 청구가 대표적이다.

2009년 당시 1년치 최루액 사용량의 90%를 사용해 파업을 진압했던 정부는 쌍용차 해고자들을 상대로 경찰 치료비와 경찰 개인 위자료 및 장비 손상비를 청구하는 소송을 벌이고 있다. 이 소송의 원고 '대한민국 및 경찰'이 피고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와 노동자 103명에게 세 차례에 걸쳐 청구한 손배 금액만 22억 원이다. 65명을 대상으로 청구한 가압류 금액도 20억 원에 달한다.

2011년 사측이 공격적으로 직장 폐쇄를 한 유성기업에서도 정부가 유성기업 노동자 30여 명에게 '경찰 피해 및 장비 손상비' 1억1000여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에 더해 정부는 2800만 원의 가압류를 신청했고, 해고자인 홍종인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장의 퇴직금을 압류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한정애 민주통합당 의원이 지난해 법무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2008년부터 2011년 8월까지 국가가 노조와 노조원을 상대로 승소한 손배 소송 수는 8건, 압류를 마친 손배 액수는 1억6000만 원이다. 이는 정부가 '노조'로 인정하지 않는 화물연대(특수고용직) 파업에 대한 손배 소송, 그리고 패소한 소송과 진행 중인 소송은 제외한 수치다.

양형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조직실장은 "이전에는 회사만 손배를 때렸지만, 국가까지 나서서 노동권이 있는 노동자에게 손배를 청구하는 것은 납득이 안 간다"며 "다친 사람은 우리가 더 많은데 경찰 개인 위자료 2억 원까지 청구하는 건 너무하다"고 호소했다.

공공 부문에서 정부가 '손배로 적극 대응' 독려하기도

노동계에서는 정부의 노동정책이 '파업 유도→고소·형사처분→파업 불법화→징계해고·손배 소송→노조 파괴'를 묵인하거나 조장한다고 분석한다. (☞ 관련 기사 : "노동부, 타임오프 감독하며 금속노조 찍어 관리", "용역한테 쇳덩이 맞고 살려달라고 해도 경찰은…", "폭력을 상품화한 그들, 몸통은 현대차")

정부와 경찰의 묵인 하에 손배는 '노조 압박' 수단으로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한명숙 민주통합의원이 아산경찰서에서 입수한 문건을 보면, 경찰은 "유성기업 파업은 적법"하다고 자체 판단했지만 "(파업) 상황이 악화하고 여론 지지를 확보한 뒤 경찰력 투입, 노조 지도부 체포영장 조속 발부를 통한 (노조) 지속 압박, 사측에 손해배상 청구 유도를 통한 지속적 노조 압박" 등의 대응책을 내부 문건으로 공유했다. (☞ 관련 기사 : 구사대 동원 트라우마, 유성기업 노동자 자살)

공공 부문에서는 정부가 더 노골적으로 '노동 탄압'을 주문하기도 했다. 2009년에는 청와대와 국무총리실이 한국전력 자회사인 발전회사들의 노조 탄압을 지시한 정황이 포착됐다. 주목할 만한 점은 정부가 직접 주관한 회의에서 공기업의 "(민형사상) 고소, 고발에 대한 적극적 대처"를 독려했다는 점이다.

2009년 9월 17일 박영준 당시 국무총리실 국무차장 주재로 '노사관계 회의'가 열렸다. 노동부, 행안부, 지경부, 교과부, 방통위 등 정부 부처 국장이 참석한 자리였다. 발전노조가 공개한 당시 회의록에 따르면, 이영호 당시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은 "철도공사에(서)는 적극적으로 노조 대응을 하고 있으나, 가스와 발전은 계획만 있지 실천은 없다"고 지적했다. 박영준 차장은 "해당 기업이 고소, 고발하면 경찰에서는 적극적으로 대처 당부"라며 손배를 포함한 각종 민형사상 소송을 독려했다.

이영호 비서관은 "인사권, 경영권에서 양보하지 말고 원칙적으로 대처"하되 "이면계약 등 노사 간의 이면 합의는 절대 용납 불가"하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정부가 이미 일어난 노사 분규에 공권력을 투입해 진압하는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정부가 직접 '노사 문제에 개입'해 노사 분규를 유도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영호 비서관이 '노조 대응을 잘하고 있다'고 칭찬한 철도공사의 상황을 보자. 철도공사는 2006년 3월 철도노조가 '철도 민영화 철회, 인력 충원,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걸고 불과 나흘간 돌입한 파업을 빌미로 2009년 100억 원대의 손배 소송과 가압류를 단행했다. 2009년 파업 때도 노조 간부들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와 압수수색이 이어졌다. 200여 명이 해고됐고 1만3000여 명이 징계됐으며, 100억 원이 넘는 손해배상청구소송이 뒤따랐다.

결과는 참혹했다. 철도노조 파업에 참여한 이후 해고자가 된 허모 씨(39)는 2011년 11월 21일 화장실에서 연탄불을 피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실제로 청와대와 정부가 '발전노조 대응 회의'를 한 지 두 달 뒤인 2009년 11월에는 동서발전이 발전노조와 맺은 단체협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해 파업을 유도했다. 한전은 발전회사 노조들의 '민주노총 탈퇴' 실적과 '노조 사무실 회수' 노력을 경영 평가에 반영했다. 같은 해 발전노조 영흥화력 남성화 지부장은 '근무 태만'을 이유로 해고됐다. 발전회사가 노조에 걸었던 손배 소송은 결국 법원에서 기각됐다.
 

▲ 전국철도노동조합은 철도 민영화 등에 반대해 4일간 파업을 벌였다가 철도공사로부터 100억 원대 손배 소송에 휘말렸다. 사진은 철도노조가 지난해 2울 서울역 광장에서 KTX 민영화 반대 결의대회를 여는 모습. ⓒ연합뉴스


수십억 원대 손배액은 합당한가?

손배 가압류가 노동자들의 죽음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쳤음에도 경영계는 손배·가압류가 '불법 파업을 막는 효율적인 수단'이라고 강조한다. 문제는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합법 파업'을 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헌법은 파업권을 보장하고 있지만, 정부와 법원은 파업권과 경영권이 충돌하면 경영권이 우선이라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 철도노조가 KTX 민영화에 반대하거나, 한진중공업 지회가 정리해고에 반대하거나, 언론노조가 편집권 독립을 요구하거나, 두산중공업 노조가 회사 매각에 반대해 파업하면 '불법'이다. 파견 노동자들이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원청 사업장에서 파업하는 것도 원천적으로 불법이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사측이 청구하는 수억, 수십억 원대의 손배액이 합당한지 여부는 별개의 문제다. 일례로 경주 발레오만도가 파업 참가자 32명에게 청구한 손배액 26억4800만 원에는 영업 손실액, 용역 투입비와 더불어 파업에 따른 '사장의 명예훼손 및 정신적 피해 위자료'가 포함됐다.

권두섭 공공운수노조 법률원장은 "파업으로 손해가 안 생겼을지라도 사측은 노조 압박 수단으로 손배 대상이 안 되는 천문학적 액수를 일단 청구하고 본다"며 "설사 법원에서 몇 년 뒤에 기각 판결이 나더라도 당장 파업을 진행하는 노조를 무력화해야 하고, 가압류도 (되면 좋고) 법원에서 안 받아주면 그만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사측이 신청한 '가압류'가 일단 받아들여지면, 재판이 진행 중이더라도 신속하게 재산을 차압해 광범위한 노동자들을 압박할 수 있다는 얘기다.

법원이 일반적으로 사측의 자료를 넓게 인정해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낸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권 법률원장은 "노조로서는 영업 손실액이 적절한지 확인할 정보가 없고, 법원은 사측이 면밀한 손실액을 입증하지 않아도 사측 자료를 편의적으로 인정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김윤나영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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