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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소 수개표]는 백성과 민족의 생존전략

[투표소 수개표]는 백성과 민족의 생존전략
(서프라이즈 / 명태 / 2013-03-19)


어제 페이스북에서 어떤 분이 18대 대선에서 수개표만 정확하게 했더라면, 정권을 도둑맞지 않고, “국립대학통합”, “대학입시지옥철폐”가 이뤄졌으리라고 말했다.

나라가 바로 서려면 교육과 언론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그런데 수개표를 하지 않아 정권을 도둑맞음으로 인해서 온 국민의 그 비원은 물거품이 되고 있다.

어디 교육과 언론뿐이랴. 비정규직문제와 정리해고문제도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경제민주화와 보편복지도 물 건너가고 있다. 특히 남북관계가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져 있다. 한반도가 전쟁의 참화를 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

목숨을 걸고 단식 투쟁을 하고 있는 춘몽님도 바로 백성과 민족의 사활과 운명을 걱정하고 계신다. 그러기에 먼저, 18대 대선에서 수개표를 하지 않고 콤퓨터로 개표결과를 제멋대로 조작한 불법부정선거를 바로잡자고, 그와 동시에, “투표소 수개표”로 선거법을 개정 입법하자고 목숨 걸고 투쟁하고 계신다.

문재인+안철수+야당 국회의원들+명망가들+기자들+지식인들+일반 국민들은 수개표 하지 않은 불법부정선거를 바로 잡으려 할 경우 나라가 혼란스러워질까 우려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바로 수개표를 하지 않은 불법부정선거를 바로 잡고 투표소 수개표로 개정 입법하는 길만이 백성과 민족의 살길, 생존전략임을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야당들과 야권 국민들은 앞으로도 모든 선거에서 지는 것은 물론 차기 대선에서도 정권교체를 이룰 수 없을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야당국민들이 무슨 신명이 나서 문재인+안철수+박원순+야당국회의원들을 믿고 다시 표를 줄 수 있겠는가? 그들이, 춘몽님처럼은 못할망정, 수개표를 하지 않은 문제를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고, 투표소 수개표로 개정 입법하는 모습을 보일 때, 야당국민들께서 또다시 힘을 내서 그들을 지지해주시지 않겠는가?

 

명태

 

 

‘제주 해군기지 반대’ 양윤모 49일째 옥중단식
(민중의소리 / 정혜규 기자 / 2013-03-18)

 


▲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운동을 벌이다 1년 6개월 실형을 받고 수감된 영화평론가 양윤모(57)씨가 19일로 단식 49일째에 접어들었다 사진은 양씨가 첫번째 단식을 이어가던 2011년 모습.ⓒ제주의소리 제공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운동을 벌이다 1년 6개월 실형을 받고 수감된 영화평론가 양윤모(57)씨가 19일로 단식 49일째에 접어들었다. 문정현 신부 등이 양씨를 면회한 자리에서 단식 중단을 호소하고 세계적 석학 노엄 촘스키 교수가 양씨의 석방을 촉구하는 등 그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3년간 160일 넘도록 단식

양씨는 지난 2월 1일 업무방해 혐의 등으로 구속 수감된 이후 이튿날부터 단식에 돌입했다. 양씨가 해군기지 반대 운동을 벌이다 단식에 들어간 것은 2011년 74일간 단식을 한 이후 세번째로 그가 지금까지 해군기지 사안으로 단식을 벌인 날을 모두 합치면 160일이 넘는다.

양씨가 세 번째 단식에 들어가자 동료 활동가와 강정마을 주민들은 모두 만류했다고 한다. 양씨가 장기간 단식으로 이미 몸이 악화된 데다 몸을 회복하지 못한채 해군기지 반대 운동을 계속해왔기 때문이다. 이미 2년 동안 단식을 해온 상황에서 또다시 단식에 들어갈 경우 몸에 무리가 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양씨는 주위에서 만류를 할 때마다 “잘못된 해군기지 건설에 대해 당당하게 항의해왔는데 국가가 법을 통해 형을 살게 하는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양씨는 강정마을에 거주하는 활동가들 속에서도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로 꼽힌다. 그는 강정마을에 내려오기 전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강우석필름아카데미 초대교장을 역임하는 등 30여년간 충무로에서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해왔다.

그러다 고향인 제주도에서 요양을 하던 중, 정부가 강정마을 주민들의 반대속에도 해군기지 건설을 강행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저지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이후 강정마을 구럼비 바위에 중덕사라는 비닐하우스를 짓고 거주하면서 반대운동에 앞장서왔는데,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거나 크레인 밑으로 들어가 공사를 막는 것은 늘 그의 몫이었다고 한다. 양씨는 이 싸움을 하다 2010년 이후 업무방해 혐의 등으로 모두 4번 수감되기도 했는데 주민, 평화활동가 등 해군기지 반대 운동을 벌인 사람들 중 가장 많은 수치이기도 하다. 그가 구속이 되거나 단식을 벌일 때마다 사그라들었던 강정마을 이슈는 다시 전국적인 사안으로 떠올랐다.

문정현 신부 등 단식 중단 목소리 높아져

양씨의 단식이 또다시 길어지면서 단식 중단과 석방을 요청하는 국내외 목소리도 이어지고 있다. 노엄 촘스키 매사추세츠공과대학 명예교수는 18일 연대 메시지를 통해 “제주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다 구속돼 단식을 투쟁을 벌이고 있는 양씨를 즉각 석방하고, ‘평화의 섬’으로 지정된 제주도에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정의롭고 용기있는 저항을 자유롭게 지속할 수 있게 되기를 호소한다”고 밝혔다.

제주해군기지건설 저지를 위한 전국대책회의도 지난 12일 긴급 대책회의를 열고 양씨에게 단식을 중단할 것을 호소했다. 15일에는 민주통합당 장하나 의원, 문 신부, 문규현 신부, 강동균 강정마을회장 등이 양씨를 면회한 자리에서 단식을 철회할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하기도 했다.

대책회의 관계자는 “우리는 70일 검증기간 평가와 향후 활동계획을 확정하면서 양씨에게 단식을 중단할 것을 요청했다”며 “지난 2011년부터 이어진 양씨의 단식은 해군기지 강행의 문제점을 전국적인 사안으로 확장하는데 큰 영향을 줬다. 이제는 그가 단식을 중단할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주길 부탁한다”고 말했다.

http://www.vop.co.kr/A00000611150.html

 

 


<한미FTA 효과, 통계로도 보이지 않는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30318101411&section=02


<[뉴스타파 호외 영상] '국정원장 정치개입 지시' 의혹 문건 공개>

http://cafe468.daum.net/_c21_/bbs_read?grpid=1RcF1&fldid=Il2P&contentval=00065zzzzzzzzzzzzzzzzzzzzzzzzz&datanum=377&regdt=20130318230532


<긴급)민주노총법률원이 부정선거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http://cafe468.daum.net/_c21_/bbs_read?grpid=1RcF1&fldid=Il2P&contentval=00061zzzzzzzzzzzzzzzzzzzzzzzzz&datanum=373&regdt=20130318200954


<한반도 긴장고조와 평화의 길>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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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중생 '룸살롱'취업 후 접대 못한다고 '보도방' 넘겨

 


제주 경찰은 보도방을 운영한 업주와 조직 폭력배를 검거했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보도방 업주 24명은 2009년 9월부터 제주시 신제주지역을 중심으로 보도방을 차려 유흥업소에 소개하고 약 13억의 부당이익을 챙겼다고 합니다.

보도방 업주 김모씨 등 업주와 조직폭력배 27명은 유흥업소에서 여성 접대부를 원하면 이들을 보도방 전용 승합차에 태워 유흥업소에 투입한 후 시간당 2만5천원 또는 매월 40만원씩을 받아온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특히 보도방 업주 김모씨는 중학생 A양 등 10대 청소년을 고용해 유흥업소에 100차례 이상 소개하고 소개비 명목으로 1일 2만5천원씩 165만원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제주의 소리' 에 따르면 여중생 등 10대 청소년 2명은 처음에는 룰살롱에 취업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더하고 있습니다. 이들 여중생 등 10대 청소년 2명은 겨울방학이던 지난해 12월 룸살롱에 취업해 손님과 함께 술을 마시며 접대를 했다가 어린 나이에 룸살롱 접대를 잘하지 못하자, 해당 업소 사장은 "손님 접대를 잘 못하니 보도방에 가서 일 좀 배우라고" 말하며 보도방으로 넘겼다고 합니다.

경찰은 보도방 업주를 상대로 조사를 벌이다 지난해 2월13일 제주시 연동소재 모 노래텔에 이들은 내려준 김씨를 현장에서 검거했고, 10대 청소년 2명은 가족에게 인계했습니다.

' 보도방 연합회에 변호사 선임 비용 지원까지, 조직화된 범죄집단'

이번에 검거된 보도방 업주들은 2009년부터 '제주지역 보도방 연합회'를 구성해 18개 업체 회원사가 매월 5만원씩 받으며 회칙까지 구성해 조직적으로 보도방을 운영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 제주경찰이 보도방과 유흥업소에서 압수한 통장과 차량,현금, 성인용품. 출처:제주의 소리

 


보도방 업주 김모씨를 중심으로 조직된 '제주지역 보도방 연합회' 회칙에 따르면 이들은 신규 보도방 업주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을 막기도 했고, 회원 보도방 업주가 경찰에 구속될 경우 변호사 비용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들은 무전기를 통해 실시간으로 여종업원 공급 현황을 수시로 공유하는 것을 회칙에 명시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보도방 업주는 물론이고,'키스방'.'풀살롱' 등 여성 접대부를 공급하는 범죄 집단이 벌이는 행태는 교묘하면서 법망을 이리저리 피하기도 합니다.

 

 

▲ 업주와 종업원이 구속됐지만 여전히 영업중인 풀살롱. 출처:SBS뉴스

 


룸살롱에서 술을 마시고 모텔과 연계해 성매매까지 제공하는 이른바 '풀살롱'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강남주변에 많이 있는데, 선릉역 주변 한 풀살롱 업소를 지난 2월 14일 경찰이 기습 단속해 업주와 종업원 등 12명을 입건했습니다. 그러나 3주 뒤에 그곳을 찾았지만, 여전히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업소는 두 차례나 단속됐지만, 영업을 계속했는데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간판과 사장의 명의를 바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실소유주를 파악해 구청에 통보해 영업정지를 내리려면 경찰 단속 후 보통 한 달 이상이 걸리는 점을 업주들이 악용해 버젓이 영업하는 것입니다.

' 범죄와의 전쟁, 그 실효성은?'

신연희 강남구청장은 지난해 7월2일 '성매매특별단속 TF팀'을 구에 조직해 호텔과 룸살롱 등 유흥업소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단속을 벌여왔다고 합니다. 강남구는 강남경찰서,수서경찰서,민간 단속반까지 편성해 성매매 유인 홍보물 배포와 성매매 현장 오피스텔 등에 대해 집중적인 점검에 들어갔습니다.

강남구가 성매매특별단소 TF팀을 구성해 단속에 들어가 R호텔과 다른 L,S 호텔 등에 영업정지 1~2개월에 과징금을 부과하는 시도를 했지만, 강남구에 있는 '키스방','풀살롱','안마'등의 불법 영업은 여전히 근절되지 않고 있습니다.

 

 

▲ 강남구 일대에 뿌려지는 성매매 업소 관련 전단지.

 


성매매에 대한 처벌을 강화한 성매매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대한 법률 (성매매방지특별법)이 시행되면서 '창녀촌','윤락가','사창가' 등에 대한 집창촌은 붕괴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교묘하게 이루어진 '휴게텔', '풀살롱', '침대방', '안마시술소', '키스방', '인형방', '페티쉬 클럽', 'XX방' 등의 변태적인 성매매 업소는 늘어만 갔습니다.

강남구청장이 아무리 특별단속반을 만들었어도 강남은 신종 성매매 1번지로 계속 자리 잡고 있으며, 특급호텔 객실 수십 개를 장기 입차해 성매매를 알선하는 등의 조직적이고 대규모 불법 행위는 근절되지 않고 있습니다.

'경찰 단속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법의 엄중한 집행'

우리 사회는 오랜 세월 동안 성폭력,성매매 등의 성범죄를 예방하고 단속하기 위해 수십 차례 범죄와의 전쟁을 벌여왔습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늘 단속을 강화했고,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성폭력 등을 근절하겠다고 나섰습니다.
 

 

▲ 경찰대 졸업식에서 성폭력 범죄 근절 등 4대 사회악을 근절하겠다고 밝힌 박근혜 대통령. 출처:청와대

 


지난 3월 14일 박근혜 대통령은 경찰대 졸업 임용식에서 4대 사회악인 '성폭력','학교폭력','가정폭력','불량식품'을 반드시 뿌리 뽑겠다고 강조하면서 '4대 사회악 근절 추진본부'와 '성폭력 특별수사대'등을 발족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따라 일선 경찰서는 앞다퉈 성폭력 등에 관한 TF팀을 너도나도 조직하고 나섰습니다.
 

 

▲ 박근혜 대통령 4대악 근절과 연관된 캠페인과 TF팀을 조직한 경찰

 


경찰청은 성폭력 사범 검거 100일 작전을 펼치고, 지역 경찰서와 무슨 본부와 같은 조직에서는 '4대악 근절 캠페인'을 벌이고, 일선 경찰서는 형사들을 중심으로 TF팀을 다시 구성한다고 하지만 사실 이런 일들은 모두 일시적입니다.

경찰이 성범죄, 성폭력 단속 어쩌고 하면 나오는 것이 과거 성범죄자들을 방문해서 확인하는 일인데, 이런 일을 견디다 못해 성범죄자들은 오히려 주소 이전을 하지 않고 다른 곳에 몰래 거주하는 등 그 실효성에는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성범죄와 성매매와 같은 범죄를 근절시키는 방법은 이처럼 캠페인을 벌이고, TF팀을 조직하는 일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사례1)
대전고법은 청소년 3명을 고용해 성관계까지 강요했던 A씨에게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

사례2)
부산지법은 미성년자 등 여종업원을 고용해 속칭 '키스방'을 운영한 혐의로 B씨에게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사례3)
청주지법은 성매매 알선 업소를 운영해 수억원 상당의 부당이득을 챙긴 형의로 기소된 C씨에게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3억여원을 선고.


사례에서 보듯이 대한민국에서 미성년자를 고용해 성매매 알선을 했다고 무거운 형량을 받지는 않습니다. 아동,청소년 성매매를 알선한 업자에게 7년 이상의 징역형을 처벌하는 현행법이 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2년 이내에서 형량이 구형되고 있습니다.

만약 미국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면 그들은 어떤 형량을 받을까요?
 

 

▲ 미국 조지아주 연방법원에서 판결을 기다리는 스티브 레머리.


미국 조지아주 연방법원은 미성년자 약취와 성매매 알선혐의로 기소된 스티븐 레머리에게 징역 80년을 선고했습니다. 여기에 90세 이후에나 가석방을 신청할 수 있도록 가석방 불허기간을 50년으로 정했습니다. 결국, 스티븐 래머리는 90세가 넘어서야 겨우 사회에 나올 수 있으며, 그와 함께 청소년 성매매 알선에 가담했던 친구도 30년형을 받았습니다.

만약 대한민국에서 성폭력,성매매,아동 청소년 성매매 등에 관한 형량이 50년 이상이 된다면 아마 지금보다 성범죄가 줄어들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 번이라도 범죄를 저지르면 사회와 영원히 격리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조직적인 성매매 업자들이 위축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단속을 아무리 하고, 검거해도 성범죄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범죄에 대한 근절 효과는 그리 높지 않음을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인권 침해 소지도 일부 있을 수 있는 조항도 있겠지만, 미성년자를 고용해 보도방을 운영하며 청소년들이 일을 그만두려고 하면 '얼굴에 염산을 뿌리겠다'며 폭행과 협박을 강요했던 악질 성매매 업자와 같은 자들에게는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도록 무거운 처벌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10대 아이들은 그들의 삶에 대한 명확한 가치관과 판단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한순간의 실수로 성매매에 뛰어든 아이나, 그곳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아이들은 보호해야 합니다. 또한, 인륜을 저버린 성범죄 청소년을 단순히 미성년자라고 그저 용서하는 일도 잘못됐습니다.

단순하게 일회성 대국민 범죄와의 전쟁은 이제 지긋지긋하고 효과도 없습니다. 딸을 키우는 부모들에게 대한민국은 결코 안전한 사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더욱 불안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4대악 근절 운운하는 소리가 별로 믿음직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지키는 힘은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아니라, 범죄를 응징하고 재범을 막을 수 있는 체계적인 법률과 지속적이면서 효과적인 경찰의 단속 시스템입니다. 이제 대한민국에도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성매매,성범죄를 저지르면 90세 이전에는 절대 사회에 돌아갈 수 없는 강력한 잣대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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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가 걸어온 길 6. 민주화의 사제 함세웅

 

명사가 걸어온 길 6. 민주화의 사제 함세웅
등록일: 2013.03.18 [18:07] | 조회: 80 스크랩 0회
 

 

맑은 얼굴 맑은 눈/ 비 온 뒤라면 무지개 걸려/ 그러나 독재나 어떤 잔재 따위에는/ 진흙탕 싸움을 사양할 수 없다/ 그 아들은 한국 천주교회의 앞에서/ 지(知)와 신앙으로 집을 지었다/ 그는 도시의 신부다(고은 시인의 ‘만인보’ 중 ‘함세웅’ 편의 일부) ‘민주화의 사제’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1970~1980년대 불끈 쥔 주먹으로 독재에 맞서면서도 늘 기품을 잃지 않았던 그를 고은은 ‘도시의 신부’라고 불렀다. 서슬 퍼런 박정희 유신 정국 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1974년)을 만들어 박종철군 고문 사망(1987년), 삼성 비자금 조성(2007년) 등 묻혀 있던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며 질곡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딪친 그였지만 이름 앞에 ‘명사’(名士)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 영 어색하다고 했다. 겸허함을 지켜야 할 사제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거북하다고도 했다. 나이 일흔이 넘도록 흔한 회고록 한 권 내지 않은 이유다. 함 신부는 지난해 8월 사제 생활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인권의학연구소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그는 매주 월요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시국미사에 참석하는 등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영원한 현역을 꿈꾸는 함 신부를 지난 8일 서울 마포구 도화동 인권의학연구소에서 만났다.

▲ 함세웅(왼쪽) 신부가 지난달 25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생명평화미사에서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다. 함 신부는 매주 월요일 시국미사에 참석하는 등 소외된 이들의 편에 서서 계속 활동하고 있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함 신부는 광복을 3년 앞둔 1942년 6월 서울의 용산구 원효로에서 태어났다. 유교적 가풍 때문에 가족 중에 가톨릭 신자는 없었지만 집 근처에 천주학당(현 성심여고)이 있어 가톨릭과 서양 문화를 자연스레 접했다.

여덟 살 되던 1950년 6·25가 터졌다. 소년 함세웅은 전쟁의 참상을 바라보며 어렴풋하게나마 신앙에 눈을 떴다.


“어느날 집 앞에서 놀고 있는데 쾅 하는 굉음이 나는 거예요. 한낮인데 하늘이 시커매. 나중에 들었는데 B29 폭격기들이 한강 임시다리를 폭파하는 소리였대요. 너무 놀라 친구들과 어디로 우르르 몰려갔는데 거기가 성모병원이었어요.”

병원은 아비규환이었다. 피 칠갑을 한 환자들이 신음하고 있었고 수녀들이 그들을 간호하고 있었다. 인간의 탐욕이 빚은 전쟁, 그 속에서 생사의 경계에 섰던 사람들을 지켜본 경험은 그의 첫 종교적 체험이었다. 그때부터 가톨릭 신자가 됐다.

“평범한 신자였던 제가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성당에서 복사(천주교 미사 때 신부를 돕는 신자)로 활동했는데 그해 11월 2일 위령의 날 신부님과 함께 서울 잠원동, 논현동 일대의 공동묘지를 찾게 됐지요. 너른 터에 빼곡히 들어선 묘지는 정말 충격이었어요. ‘아, 누구나 다 이렇게 묘소에서 끝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6·25와 공동묘지의 체험이 겹쳐 결국 사제가 돼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셈이지요.”

‘천국에 온 것 같았다’는 회고처럼 신학교 생활은 그에게 더없이 잘 맞았다. 4·19 혁명이 전국을 휩쓴 1960년 가톨릭대에 입학한 그는 2학년을 마치고 육군 일반병으로 입대했다.


“훈련소에서 헌병으로 차출됐어요. 이야, 이제부터 폼나게 군대생활 좀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지요. 하지만 제가 배치된 곳이 부산과 광주(경기)의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였어요. 그곳에서 군생활을 꼬박 2년간 했지요. 군대는 대한민국 남성으로서 체험한 첫번째 모순의 사회였어요. 불합리한 일상을 겪으면서도 낙오하지 않으려면 숨죽인 채 순종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박정희 독재를 겪으며 ‘대한민국 모든 남성이 군에서 모순의 사회를 배우고 길들여졌구나’하는 생각에 마음 아팠지요.”

▲ 1979년 구속 100일만에 풀려나 기뻐하는 모습.



신학 교수의 꿈을 품은 함 신부는 1965년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길에 오른다. 당시는 4년 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취임해 독재와 탄압을 본격화하던 때였다. 햇수로 9년을 로마에 머무는 동안 그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나라 밖에 있다 보니 3선 개헌, 유신체제 선포, 학생과 민주인사들에 대한 투옥과 고문 등 뉴스를 외려 국내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빨리 접할 수 있었어요. 마음 아프고 부끄러웠어요.”

1973년 귀국해 마주친 조국의 첫인상은 낯설었다. 마포대교 등에는 헌병이 총을 들고 서 있었고 서울역에서는 중·고등학생을 동원한 반공 궐기대회가 수시로 열렸다. 그야말로 병영사회였다.

서울 연희동 성당에서 보좌사제로 있던 그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결정적 사건이 1973년과 1974년 잇달아 터졌다. 김대중(1924~2009) 납치사건과 지학순(1921~1993) 주교의 구속이었다. 특히 1974년 7월 지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과 ‘유신헌법 무효’ 양심선언으로 15년형을 받자 성난 사제들이 성당 밖으로 뛰쳐나왔다. 함 신부는 이 과정에서 젊은 신부들을 중심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했다. 당시 사제단에 참여했던 문정현(73) 신부는 함 신부에 대해 “타고난 조율가이자 소통가”라고 평가했다. 문 신부는 “대표가 없는데도 사제단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박학하고 판단이 빠른 함 신부 덕이었다”고 말했다. 함 신부는 지 주교의 구속에 대해 “돌이켜보니 은총의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이 일을 계기로 사제들이 사회 참여를 시작하면서 유신체제의 모순에 대해 눈 떴다는 얘기다.

▲ 1987년 6월 항쟁 당시 명동성당에서.



유신독재 타파를 외치며 정권에 맞서던 그는 1976년 3·1 구국선언에 참여했다가 구속됐다. 첫 투옥은 시련이자 기회였다. 서대문 구치소 등에서 1년여 옥고를 치른 그는 “제2의 신학교 생활 같았다”고 했다. 차디찬 감옥에서 자신의 인간 본성을 엿본 웃지 못할 촌극도 있었다.

“중앙정보부에 체포돼 밤늦게 구치소에 갔는데 교도관이 제 방이라며 안내했어요. 근데 완전히 쓰레기통이야. 그래도 내가 살 방이니 의지를 갖고 아침에 청소를 깨끗이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어요. 근데 다 치워놓으니까 교도관이 ‘방 배치를 다시 해야 하니 나오라’는 거예요. 좀 억울하잖아요. 그래서 ‘싫다. 살 준비 다했으니 내 방이다’라고 하니까 교도관이 ‘교도소에 내방 네 방이 어디 있느냐’고 해요. 근데 옮겨 보니 새 방이 너무 깨끗한 거예요. 청소 좀 했다고 교도소 방 옮기기 싫어한 제 모습이 참…. 덧없는 소유욕이 드는구나 하는 생각에 혼자 웃었어요.”

▲ 1974년 사상가이자 민권운동가였던 고함석헌(오른쪽)선생과 함께.



함 신부는 교도소에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등과 함께 꼬박 1년간 재판을 받으며 기도와 독서로 마음을 달랬다.

함 신부가 그 지긋지긋하고 끔찍했던 유신독재의 종말을 목격한 곳도 교도소였다. 1979년 미사를 집전하면서 농민 오원춘이 정보기관에 납치·감금당한 일에 대해 강론하다가 경찰에 연행돼 영등포 교도소로 끌려갔다. 두번째 옥살이가 시작됐다. 그리고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암살됐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박정희 피살 소식을 접하며 성경에 나오는 이집트 노예 해방의 기적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함 신부는 김재규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유신독재의 핵심을 제거한 일은 높이 평가해야 해요. 그는 1979년 부마항쟁을 현장에서 지켜본 뒤 박 대통령에게 민심을 수습할 정책을 써야 한다고 건의했어요. 그러나 박 대통령은 경호실장 차지철과 나눈 대화에서 ‘그까짓것 100만~200만명쯤 죽여도 문제 없어. 3·15 부정선거 때 경무대 경호책임자인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내린 죄로 처형당했는데 내가 발포 명령을 한다면 나를 어떻게 할 거야’라고 했다지요. 김재규는 이 말을 듣고 10·26 의거를 결행했다고 재판에서 진술했죠.”

그는 1970~1980년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기적과도 같은 민초들의 힘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제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 받을 때 피로를 못이겨 눈 감고 있었더니 혼자서 저를 감시하고 있던 중정 요원이 ‘신부님, 정신 차리세요. 소신껏 답변하셔야 해요’라며 응원하더군요. 힘이 불끈 솟았지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질 때 옥중에 있던 이부영 전 의원의 쪽지를 전달한 사람도 이름 없는 양심적인 교도관이었어요. 사도행전을 보면 감옥에서 천사들이 감옥 문을 열어 사도들을 내보내 줬다는 구절이 있잖아요. 그런 기적을 현실에서 체험한 거죠.”

▲ 1965년 우르바노대 신학원 유학시절.



1970년대 함 신부와 함께 군부독재 권력과 싸웠던 이들 중 지금은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다. 이를테면 김지하 시인이나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 같은 사람들이다.

“한 사람을 평가할 때는 시기별로 구별해서 봐야 해요. 인간은 원래 쉽게 변할 수 있는 존재니까요. 예컨대 김지하 시인도 1970년대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던 청년 김지하와 1990년대 이후 현실과 야합한 장년 김지하로 나눠 볼 수 있겠죠. 윤리신학적으로 봐도 사실 선과 악, 천사성과 악마성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거든요. 어느 쪽이 마음속 주도권을 잡느냐의 문제죠. 일제시대 때 최남선, 이광수 같은 분도 일면으로는 얼마나 훌륭했나요. 변절한 것은 시대적 한계를 넘지 못한 그들의 한계죠.”

함 신부는 잘못된 사회·정치 제도를 바로잡는 데 교회(종교)가 앞장서야 한다고 줄곧 강조해 왔다. 왜 하필 교회일까. 그는 “불의 없는 사회를 만들어 사람들이 양심껏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종교적 인간 구원의 핵심이기 때문에 종교가 사회 정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꽤 오래 전의 일화 하나를 끄집어냈다.

“1970년대 어느 부활절 때였어요. 자정 가까운 시간인데 국영기업에 다닌다는 한 40대 신도가 성당에 왔어요. 술에 취했는데 고해성사를 보겠대요. 그러면서 ‘신부님, 어차피 오늘 반성해도 내일 저는 똑같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요. 그냥 저와 술 한잔 하시고 용서해주세요’하는 거예요. 또 ‘신부님은 세상을 모릅니다. 부정과 타협 안 하면 살 수가 없어요. 집에 노모까지 5명이 사는데 회사 월급만으로는 버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뇌물받아 아래, 위와 나눠 가져야 해요’라고 하더군요. 양심적으로 살려면 회사를 그만둬야 하고 그러면 당장 식구들이 굶어 죽는데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고 묻더군요.”

함 신부는 당시 30대의 젊은 사제였다. 그 신자에게 ‘그래도 천주교 신자로서 양심껏 사세요’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메시지도 그 사람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신자들이 양심껏 살도록 도우려면 결국 옳지 못한 사회 구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교(政敎) 분리는 사실 폭압자들의 논리예요. 종교의 이름으로 불의에 항거하면 ‘예배당, 불당에 가서 기도나 하세요’하는 식이죠. 성경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했잖아요. 그러려면 세상 한복판에서 세상을 껴안아야 해요.”

▲ 함세웅 신부는 지난해 사제직에서 공식 은퇴했지만 우리 사회를 위해 자신이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향후 활동 계획에 대해 말할 때에는 들뜬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이호정 기자 hojeong@seoul.co.kr

 

우리 나이로 일흔둘. 오랜 삶의 길을 걸어온 함세웅 신부지만 지난 일보다 지금의 일에 대해 더 들려주고 싶어 했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들이 많다.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숨 고를 틈조차 없이 활동하는 이유다. 함 신부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핍박받는 이들이 널려 있다는 증거다. 그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박종철군 고문 사망 사건(1987년)의 진실을 세상에 알려 정치 민주화를 이끈 지 올해로 26년이 됐지만, 경제민주화, 남북 화해·통일, 역사 바로 세우기 등 그가 나서야 할 일들은 수북이 쌓여 있다. 이 때문에 노(老) 신부의 마음은 바빠 보였다. 지난 15일 서울 마포구 도화동 인권의학연구소에서 함 신부를 다시 만나 민주화 이후의 삶에 대해 인터뷰를 이어 갔다.

민주화 이후 함 신부와 사제단에 전국민적 시선이 다시 쏠린 건 2007년 10월 김용철(55)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폭로 사건 때였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정치 민주화의 물꼬가 터진 지 꼬박 20년째 되던 해다. 삼성그룹 구조본부 법무팀장 출신인 김 변호사가 “내 이름의 계좌에 삼성 비자금 50억원이 관리되고 있다”고 말문을 열며 시작된 사건은 17대 대선을 한 달여 앞둔 한국 사회에 큰 소용돌이를 몰고 온다. 10월 29일 서울 제기동성당에서 열린 기자회견 때 사제단은 “김 변호사의 양심선언을 계기로 경제정의민주화 운동을 해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사제단의 고문인 함 신부도 회견 자리를 지켰다. 그는 김 변호사를 처음 만난 그해 10월 18일 당시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김 변호사가 가까운 친구 등과 저를 찾아왔어요. 그는 자신이 삼성 탓에 당했던 고통을 쏟아냈어요. 예컨대 삼성에서 나온 뒤 검사 출신 선배와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했는데 삼성이 압력을 가한 까닭에 사건을 못 맡고 있다는 등의 얘기였습니다. 그러면서 비자금 조성 등 삼성의 불법적 행위에 대해 털어놨어요. 얘기를 다 듣고는 저와 동료 사제들이 김 변호사를 나무랐어요. ‘삼성에서 간부를 지낸 당신도 결국 공범자인데 이런 문제를 가지고 왜 왔느냐’고 했죠. 그랬더니 ‘저도 반성하고 있습니다’라고 해요. 삼성을 위해 일하면서 잘못한 일은 인정하지만 삼성이라는 기업과 그 책임자가 저지른 범죄가 워낙 크니까 자기고백을 통해 삼성의 범죄도 고발하고 싶다는 거예요. 우리 사회가 이러한 문제를 모두 알아채고 정화시켰으면 좋겠다는 취지였어요. 김 변호사는 당시 삼성이 자신을 해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제가 물었죠. ‘김 변호사, 당신 감옥 갈 각오 돼 있소?’라고요. 그랬더니 ‘돼 있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럼 같이 하자’고 했죠.”

 

▲ 함세웅(왼쪽 세 번째) 신부가 지난해 8월 26일 서울 중구 신당6동 청구성당에서 사제 은퇴를 앞둔 마지막 미사를 집전한 뒤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 함세웅 신부가 지난해 10월 22일 서울광장에서 ‘유신 40주년에 대한민국을 다시 생각한다’를 주제로 열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전국시국기도회에서 강론을 하고 있다.

 



▲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인 함세웅(왼쪽 두 번째) 신부가 북한 조선종교인연합회 장재언(가운데) 위원장 등 남북 대표단 일행과 2010년 3월 중국 다롄 뤼순 옛 일본군 감옥 ‘안중근 의사 추모실’에서 묵념을 하고 있다.



이후 사제단은 김 변호사를 보호하며 삼성의 비자금 조성과 사회 전방위로 진행된 불법 로비의 수법, 검찰·언론계·관계와의 유착 의혹 등 파괴력 있는 폭로를 이어 갔다. 함 신부와 사제단은 이 사건이 단순히 거대 재벌의 비리를 폭로하는 차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경제민주화의 신호탄으로 삼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그러나 우군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검찰과 언론은 물론 믿었던 노무현 정부까지도 사건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삼성 돈의 힘이 컸어요. 부끄럽게도 노무현 정부는 삼성에 이미 예속돼 있었어요. 노 대통령은 물론 그 아래 참모진도 몇 명 빼고는 모두 삼성 편에 서 있었습니다. 어렵게 특검까지 끌고 갔지만 특별검사가 삼성에 종속된 사람이었어요. 특검은 의혹 대부분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내렸고 일부 조세포탈 및 배임 등의 혐의에 대해서만 기소했어요. 결국 우리가 폭로한 삼성의 불법 행위는 대부분 무죄 판결이 나고 삼성 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 헐값 발행에 대해서 이건희 회장의 배임 혐의를 인정해 유죄판결을 내리는 등 법의 심판이 일부 있었지만 이마저도 넉달 만에 대통령이 특별사면을 해 줬습니다. 삼성이 우리 사회 전반을 다 돈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체감했어요. 그때가 기업민주화와 경제민주화를 할 절호의 시기였는데…. 몇몇 기자들이 비아냥대며 ‘신부님이 이건희 회장 비자금을 오히려 찾아준 셈이에요. 이건희씨에게 감사받아야 해요’라고도 했어요. 마음이 아팠습니다.”

정계나 법조계, 언론계와 달리 자본권력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천주교단은 사제단에 큰 힘이 돼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함 신부의 설명은 달랐다.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자 가운데 삼성에 다니는 간부들이 많고 대기업으로부터 사회복지 후원금을 많이 받으니까 기업의 불법성을 고발하지 못해요. 어찌 보면 교회는 기업이 흘리는 떡 부스러기를 집어먹고 사는 거죠. 정진석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이었을 당시 김 변호사를 도왔던 전종훈(57) 신부에게 안식년을 명분으로 3년이나 성당을 맡기지 않았어요. 권한을 남용한 것이고 부끄러운 일이죠. 신부들이 삼성비리 폭로에 앞장서니까 거북해하는 사람들이 많았죠”

함 신부와 사제단은 정계 등의 인사들로부터 ‘왜 삼성 같은 기업을 몰아세우느냐’는 원성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함 신부는 “우리도 국제적 기업인 삼성이 잘되길 바랐다. 다만 건강한 기업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희망한 것이다. 불의한 오너 일가가 적은 자본으로 기업을 사유화하면 안 된다는 확신이 있었다”고 말했다.

결국 김 변호사의 양심선언 결과는 사제단의 애초 계획과는 엇나갔다. 하지만 김 변호사는 자신의 회고록에 “열병같은 진실을 끌어안고 괴로워하는 이들을 만나면 나는 말한다. ‘사제단이 있다’고…”라고 적을 만큼 함 신부와 동료 사제들에 게 깊은 경의와 신뢰를 표했다.

함 신부가 지난해 8월 사제 생활에서 공식 은퇴한 뒤 가장 공을 들이는 프로젝트 중 하나는 ‘김근태 기념 치유 센터’ 건립이다.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인권의학연구소가 지난해부터 추진 중인 사업인데 고문 등 잘못된 공권력 탓에 정신적 상흔을 껴안고 사는 이들을 위한 치유 시설을 만들려는 계획이다. 함 신부와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장의 노력 속에 건립 계획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고문 피해자이자 ‘민주화의 대부’인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의 이름을 내걸었다. 함 신부가 고문 피해자 문제에 다시 관심을 가진 것도 김 전 의원 때문이다. “1970~1980년대에는 정부기관으로부터 고문당한 분들 이야기를 듣고 마음 아파 밤잠을 설친 적이 많았어요. 그런데 수십년을 들으니까 저도 고문 피해의 무서움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거예요. 김 전 의원한테도 마찬가지였어요. 김 전 의원과는 1980년대 만나 30년을 가깝게 지냈거든요. 우리들은 그에게 ‘민주화 선봉가로 앞장서라, 더 뛰어라’, ‘왜 그렇게 행동에 신중하냐’라고 채근하고 등을 떠밀었어요. 그런데 2011년 12월 30일 김 전 의원이 돌아가신 뒤 그가 서울 남영동의 경찰 대공분실에서 전기 고문 등을 받아 평생 후유증을 앓은 사실이 재조명됐잖아요. 그제서야 ‘아, 우리가 김 전 의원이 고문당한 사실을 잊고 지냈구나. 사선을 넘나든 분께 위로와 치유를 주기보다는 너무 가혹하고 모진 주문만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문을 견뎌 냈던 김 전 의원같은 분들 덕에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의 열매를 맛보고 있잖아요. 동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이 김 전 의원 같은 분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공권력 피해자와 그 자녀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센터 건립을 위해 힘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는 또 지난 1월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으로 취임하는 등 역사 바로세우기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함 신부는 진보정치 진영의 원로다. 지난해 18대 대선 때도 재야원로회의에 참석해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후보 측에 여러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대선 결과는 그가 바랐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대통합을 강조하는 박근혜 정부에 대한 평가를 부탁했다.

“대(大)자가 들어가면 항상 거짓이 있어요. 통합은 진실과 정의를 바탕으로 이뤄져야 해요. 신학적으로 예수님의 구원론을 통합원리와 해체원리로 설명하거든요. 통합원리는 사랑, 용서, 자비, 은혜, 상생 같은 것이고 해체원리는 회개, 갈등, 뉘우침, 고발 같은 것이에요. 둘 다 예수님의 가르침이지요. 큰 집을 지으려면 잘못 지어진 집을 허물고 땅을 파야 해요. 이것이 해체 기능이에요. 그런데 아무런 기초작업 없이 큰 집만 짓겠다는 것은 거짓이죠. 다시 말해 우선 박근혜 대통령이 잘못된 과거를 뉘우치고 청산해야 화합과 통합을 이룰 수 있는 거예요. 구호는 구호일 뿐 정치가 될 수는 없어요.”

함 신부는 야권에도 애정 어린, 그러나 따끔한 질책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저에게 이런 얘기를 했어요. ‘열린우리당 의원의 절반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의원과 똑갚습니다’라고요. 성향과 관계없이 정치꾼인 거예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야권 내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정신 못 차리는 것이 가슴 아프죠. 정치인 본연의 소명대로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야당 정치인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정권교체는 저절로 이뤄지겠죠. 한 시민으로서 저도 야당 의원들을 달래고 채찍질하며 끌어가야겠죠.”

함 신부에게 “세간의 평가처럼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진보, 보수로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진짜 보수주의자는 진보주의자일 수밖에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모순된 답변인 듯 들려 재차 물었다. “보수와 진보를 지금처럼 나누는 언론의 인식이 잘못됐어요. 원래 보수라는 단어는 뜻이 좋아요. 한자로 ‘보전하고 지킨다’는 것이니까요. 즉 그리스도인으로서는 하느님의 진리를 지키고 보전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느님 가치를 지키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돼 있어요. 결국 참된 진리를 지키고 보전하면 진보주의자가 되는 거죠. 언론이 말하는 보수는 수구라고 생각해요. 역사를 왜곡하고 친일·반민족 행위를 칭송하는 사람이 어떻게 보수겠어요.”

사회 약자의 편에 서서 한평생을 산 함 신부에게 “희망을 잃고 좌절하는 젊은이들이 많은데 행복해질 수 있는 비책이 없느냐”고 물었다.

“우선 ‘어려움아, 놀자’라고 생각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해요. 요즘 신학에서는 하느님을 근엄하고 초월적인 존재로만 인식하지 않고 인간과 함께 뛰어 노시는 하느님,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 신으로 인식하거든요. 두 번째로는 우리보다 어렵고 억울한 사람을 생각해 보는 거예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면 ‘벌거벗겨진 채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가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우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분이 사회에 주신 메시지는 아마 ‘그래, 나 억울한 사형수다. 네가 힘들고 억울해도 나보다 억울하냐. 난 죽었잖아. 넌 그래도 살아 있잖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청년들 가운데 피자를 10분 빨리 배달하려다 사고로 숨진 이도 있고 제철소에서 일하다가 용광로에 빠져 세상을 떠난 이도 있잖아요. 나보다 어려운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 있도록 찾아나서야 할 것 같아요”

인터뷰를 마친 뒤 젊은 기자는 “종교·사회의 원로에게 살아가면서 힘이 될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곧바로 함 신부의 답이 돌아왔다. “원로? 나 원로 아녜요. 아직 청춘이지(웃음).”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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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이 눈감은 그림자 엄마와 추억 지우는 남자

[황유미, 그리고 6년 ⑤] 한혜경 씨 모녀와 정희수 씨의 하루

최형락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3-19 오전 7:51:18

 

'삼성 백혈병'으로 상징되는 산업 재해 피해자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끝내 산재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등진 희생자의 유가족은 또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이들의 일상을 따라가기로 한 것은 이 문제가
지금 어떻게 지속되고 있는지를 기록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들이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이 매듭을 풀지 않으면 언젠가는 우리가, 우리의 아이들이 다르지 않은 고통과 맞닥뜨릴 수 있다는 경고음을 공유하기 위한 것이다.

8년째 투병 중인 한혜경 씨와 그의 어머니 김시녀 씨, 작년 5월 세상을 떠난 이윤정 씨의 남편 정희수 씨를 만났다. 이들의 평범한 하루를 기록했다. <편집자>

혜경 씨와 그림자 엄마

엄마는 그림자 같았다. 하루 종일 혜경 씨 옆을 떠나지 않았다. 보행기를 잡고 걷는 딸의 뒤를 엄마는 왼발 오른발 맞춰가며 따라 걸었다. 밥 먹을 때도, 화장실 갈 때도 함께였다. 그렇게 8년. 엄마는 딸의 삶을 따라 살고 있었다.

 

 

▲ 강원도 춘천시 강원대학교 병원에서 만난 한혜경 씨와 어머니 김시녀 씨 ⓒ프레시안(최형락)


혜경 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는 1995년 10월 삼성전자 LCD 기흥공장에 입사했다. 수백 개의 칩이 꽂힌 회로기판솔더크림을 바르고 챔버(가열기)에 넣었다 뺀 뒤 까맣게 타버린 불량을 체크하는 일을 했다. 솔더크림의 주성분은 납. 안전에 관한 어떤 설명도 듣지 못한 채 2001년까지 6년을 일했다.

2005년 소뇌에서 종양이 발견됐다. 크기로 봐서 7~8년은 된 종양이었다. 머리를 열고 종양을 제거했다. 예전 같으면 수술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지만 수술은 감행됐다. 종양은 다 제거되지 않았다. 목숨은 살릴 수 있었지만 후유증은 컸다. 지체장애, 시력장애, 언어장애 1급. 제대로 걷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산재를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업무 연관성이 없는 개인 질병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재심까지 불승인되자 2011년 4월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불승인 처분 취소 소송을 걸었다. 2년이 다 돼가지만 아직 1심 판결도 나오지 않았다. 오는 4월 12일 예정된 것까지 공판만 여덟번 째다.

지금은 어떤 상태일까? 사물이 여러 개로 보이는 복시 때문에 안경알 한쪽을 뿌옇게 만들어 놓았다. 왼 눈은 쓰지 않는다. 두 다리는 중심 잡기와 힘 조절이 되지 않는다. 1년 전부터는 보행기를 잡고 걷게 됐지만 아직 혼자 걸을 수는 없다. 듣고 생각하는 데는 무리가 없지만 말은 느리고 어눌하다. 한 자 한 자 힘주어 내는 음절을 조합해야 겨우 알아들을 수 있다.

 

밤에는 두세 차례 꿈을 꾼다. '학교 가야지'라고 잠꼬대를 하면서 신발을 신으려고 내려오다 넘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서울대 분당병원에 입원했을 때 기절이 잦아 먹기 시작한 약 때문에 생긴 증상이다. 아침에 9알, 낮에 2알, 저녁에 9알의 약을 먹고도 자기 전에 꿈 안 꾸게 하는 약 4알을 먹어야 한다.
 

 

▲ 강원도 춘천의 강원대 병원에 입원한 혜경 씨. 이 병동에는 뇌질환 환자가 많다. ⓒ프레시안(최형락)

 


어머니 김시녀 씨는 딸 간병 생활이 8년째다. 이젠 병원 생활에 이골이 나서 집에는 1~2주에 한 번밖에 들르지 않는다. 병원이 더 편하다고 말한다. 힘든 때는 아플 때다. 딸을 돌봐야 하니 아파도 가지 않던 병원에 조금만 몸이 이상해도 달려가곤 한다. 딸 때문에 아플 수도 없다. 때론 아프지도 못하는 게 서럽기도 하다.

엄마의 하루는 혜경 씨와 정확히 일치한다. 오전 6시 30분에 일어나 혜경 씨를 목욕시키고 7시 반이면 아침을 먹는다. 9시 반에 재활 치료, 11시 반에 작업 치료를 다녀온다. 점심을 먹고 걷는 연습을 하고 3시 15분에는 자전거 운동 기구를 태운다. 30분이던 것이 이용자가 많아 그마저 25분으로 줄었다. 저녁을 먹고 TV를 보다 간이 침대에서 잠이 든다.

행복한 가정 이루는 꿈, 그러나…

엄마는 혼자 식당을 해서 남매를 키웠다. 고생하는 엄마를 본 딸은 착하고 속 깊게 컸다. 하루 500원을 주면 아끼고 모아 한 달에 2000원을 쓰고 1만3000원을 돌려주는 딸이었다. 삼성에 들어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삼성은 일의 강도가 셌지만 성과급이 많아 일을 많이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다. 그만두고 싶었지만 6년을 다녔다. 김시녀 씨는 삼성에는 똘똘하지만 가난한 아이들이 많이 다녔다고 기억한다.


혜경 씨의 꿈은 현모양처였다. 좋은 남편을 만나 아이들과 행복가정을 꾸리는 것. 그녀는 평범하게 살았고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물론, 이 소박한 꿈을 꾸게 된 데는 불우했던 유년의 기억도 한몫했다. 혜경 씨는 홀로 남매를 키운 엄마에 대한 애착만큼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도 강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혜경 씨의 꿈은 병이 생기면서 산산조각 났다. 고생하며 마련하고 지킨 아파트병원비로 고스란히 날아갔다. 모아 놓은 돈도 거의 다 써버렸고 지금은 월세집을 얻어 산다.

"뭐 생각해?"

"또 늦어진 거."

"몇 년을 기다렸는데 또 못 기다리겠냐."

"엄마 미안해."

"뭐가?"

"엄마 인생이 없어졌으니까."

"넌 엄마가 이러면 버릴 거니?"

"아니 그건 아니고…."

"혜경이 네가 나야."

혜경 씨는 밤마다 간이 침대에 누우며 편하다고 하는 엄마에게 미안하다. 병실의 밤은 편할 수 없다. 심전도혈압 체크, 채혈 등으로 늘 어수선한 병실에서 8년째 잠드는 엄마를 보는 것은 그래서 미안하고 불편하다.

"엄마한테 잘해야 해요. 엄마 없으면 아무것도 못해요. 엄마는 내가 엄마라는데 저한테는 엄마가 저예요. 정말 미안해요. 그런데 언제까지 미안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착한 딸이 아니에요. 속만 썩이는…."


 
ⓒ프레시안(최형락)
 
 
 

 

"삼성, 주먹으로 때려주고 싶다"
 
 

 

혜경 씨가 그림자 엄마를 멀리하는 순간이 있다. 삼성 얘기를 할 때다. 엄마가 속상해 하는 것이 싫어 다른 데 가 있으라고 한다. 엄마가 가지 않으면 입을 잘 열지 않는다. 그녀가 서투른 말투로 말을 시작한다. 느리지만 얼굴과 목소리에는 독기가 서렸다.

"내 삶이 엉망이 됐어요. 이건 너무하지 않아요? 이게 다 삼성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열받아요. 마음앓이 많이 했어요. 주먹으로 때려주고 싶어요. 돌릴 수만 있으면 돌리고 싶어요. 하! 내 인생 돌려내."

삼성은 3년 전 합의를 종용했다. 엄마는 너무 힘이 들어 합의에 응할까 생각도 했다. 그러나 딸이 반대했다. 딸만큼이나 제정신일 수 없었던 엄마는 딸의 뺨을 네 대나 때렸다. 엄마가 이렇게 힘든데 언제까지 승산 없는 싸움을 하자는 것이냐고 엄마는 울분을 토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삼성의 합의 제안은 산재 신청 기한을 넘기게 하려는 꼼수였다. 제대로 보상할 계획도 없었다. 그걸 알고 항의하자 그쪽에서도 시인한 일이다.
 
 

 

엄마와 딸, 꿈이 남아 있을까?
 
 

 

8년간의 투병은 모녀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았다. 아직도 투병은 끝나지 않았고 더디게 진행 중인 소송에서 무엇을 더 빼앗길지 알 수 없다. 어떤 희망도 꿈도 갖기 어려운 것이 현실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모녀는 삶의 계획을 세우고 작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엄마의 바람은 분명했다. 어떻게든 작은 집이라도 마련해 딸이 혼자서 생활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보행기를 잡고 혼자 걷고 밥을 떠먹을 수 있으면 더는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엄마는 2년쯤 뒤엔 그렇게 되리라고 믿고 있다.

의외였지만 혜경 씨도 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엄마 발을 주무르고 있으면 엄마가 시원하대요. 안마사 하고 싶어요. 아픈 사람 시원하게 해 주고 싶어요. 풍 걸린 사람도 고쳐주고…. 그런데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혜경 씨도 스스로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하면 되지. 왜 못해"라는 말로 딸의 희망을 홀로 긍정했다.


모녀의 하루가 저물었다. 춘천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밤 기차 안에서 창 밖은 암흑뿐이었다. 하지만 창밖에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기차는 새벽이 오고 해가 떠오르면 서서히 밝아지는 아침을 달릴 것이었다.

 
▲ 엄마가 혜경 씨의 손을 잡고 있다. 혜경 씨는 수술 이후 시력이 악화되고 몸의 균형을 제대로 못 잡아 넘어지고 부딪혀 상처가 많다. ⓒ프레시안(최형락)

 
▲ 엄마는 마치 그림자 같았다. ⓒ프레시안(최형락)

 
▲ 작업 치료. 핑크색을 좋아하는 혜경 씨가 오늘은 파스텔톤 파란색을 마음에 들어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작업 치료 중 색칠하기를 하고 있는 혜경 씨. 힘 조절이 안 돼 큰 필기구를 두 손으로 잡아야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재활 치료 중 혜경 씨가 선생님들과 같이 만들었다는 모형물을 들고 어머니가 자랑을 한다. 재활에 열심인 혜경 씨는 더디지만 조금씩 호전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딸과 엄마는 8년 동안 병원 생활을 함께했다. 둘 다 상대방이 자기라고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산재 불승인 이후 2011년 행정소송을 걸었지만 2년이 되도록 아직 1심 판결도 나오지 않고 있다. 오는 4월 12일 8차 공판이 열린다. ⓒ프레시안(최형락)

 
▲ 오후 3시가 넘으면 자전거를 탄다. 혜경 씨는 다리에 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힘 조절이 잘 안된다. ⓒ프레시안(최형락)

 
▲ 혼자 움직이는 딸을 엄마가 급히 뒤쫓는다. 혜경 씨는 1년 전부터 보행기를 잡고 걷기 시작했다. ⓒ프레시안(최형락)
 

경기도 부천시 송내동의 한 정육점. 정희수 씨가 손님이 없는 틈을 타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를 보고 있다. 큼지막한 화면에 가족 사진을 띄웠는데 넘겨도 넘겨도 사진이 끊이질 않는다. 그러나 눈앞의 가족은 너무 멀리 있었다. 아내는 지난해 세상을 떠났고, 아이들은 부산에 내려보냈다. 혼자 사는 가장에게 사진은 큰 재산이었다. 사진을 넘기며 그가 살아온 얘기를 풀어 놓기 시작했다.

아내와 첫 만남, 그리고 이별

희수 씨가 아내를 만난 것은 2002년 크리스마스였다. 부산에서 막 서울에 올라온 그는 차를 몰고 천안까지 내려가 윤정 씨를 만났다. 충남 서천이 고향인 윤정 씨는 4촌 누나의 회사 동료였다. 셋째 딸이라서 그런지 착해 보였다. 1년 반의 연애 끝에 2004년 5월 대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변변한 신혼집을 구하지 못해 상가 2층에 작은 방을 마련해 살았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조금씩 집을 늘려가면서 행복도 커졌다. 아들딸 하나씩을 뒀다. 여행도 많이 다니고 남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일상을 보냈다.

그러다 2010년 5월 5일 아내가 갑자기 쓰러졌다. 급히 응급실로 옮겼다. 머리 사진을 찍자마자 중환자실로 옮겨야 했다. 교모세포종, 뇌암이었다. 병원은 시한부 삶을 선고했다.

병세가 깊어졌다. 말수가 적어지고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했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했다. 간병을 하면서 가게에는 신경 쓸 수 없었다. 처남이 도와줬지만 고기 장사는 단골 장사라서 주인이 자리 비우면 매출은 줄게 마련이었다. 병원비가 만만치 않았다. 보험금이 실비보다 적게 나왔다. 결국 벌어 놓은 돈을 까먹기 시작했다.

희수 씨는 좋다는 것은 모두 해 먹였다. 주위에서 가망이 없다며 말렸지만 그는 최선을 다했다.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병을 알고부터 2012년 5월 7일 세상을 떠나기까지 아내는 딱 2년을 살았다.
 
▲ 정희수 씨와 이윤정 씨. 부부는 많은 곳을 놀러 다녔다. 즐거운 한때는 사진으로만 남았다. ⓒ프레시안(최형락)

삼성과 맺은 악연

아내가 세상을 떠난 것은 공장에서 일하면서 쓰던 유독물질 때문이었다. 이윤정 씨는 1997년 삼성전자 반도체 온양공장에 입사해 6년을 일했다. 반도체 칩이 꽂힌 기판을 챔버에 넣고 빼며 불량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상상이나 했을까. 2003년 퇴사하고 7년이나 지났는데 뇌암이 발병했다. 2010년 7월 산재를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2011년 4월 행정소송을 걸었다. 재판은 지지부진했다. 올해 2월 22일 7차 공판이 열렸지만 공판만 거듭될 뿐 아직 1심 판결도 나지 않은 상태다. 그러나 그 사이 윤정 씨는 세상을 등졌다. 벌써 1년이 다 돼 간다.

아내를 잃은 남자의 삶은 온전할 수 없었다. 아이들을 부산 큰누님 집으로 보냈다. 가게에 나가서 늦게 들어오는데 아이들을 돌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카들이 커서 그나마 가능했다. 그는 혼자가 됐다. 억울한 마음서초동 삼성전자 본사 앞 시위에 100번도 넘게 갔다. 갈 때마다 경호원들이 막았다. 울분이 치밀어 싸웠다. 그는 투쟁이니 민주화니 노동운동이니 그런 건 모르고 살던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파탄 난 가정의 가장'이어서 그곳에 갔다고 했다.

황유미 씨가 죽은 지 6년 되던 날 희수 씨는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공장에 갔다. 공장을 나오는 꽃다운 얼굴들이 보였다. 나오는 얼굴마다 밝지 않았다. 불쌍하고 마음이 안 좋았다. 살아서 윤정 씨의 표정이 그랬으리라.

ⓒ프레시안(최형락)

혼자 남겨진 남자

희수 씨는 부천에서 10년을 살았다. 서울에 올라온 뒤 방학동에 잠깐 살다 이곳에 이사와 정착했다. 장사를 시작한 것도, 결혼해 아내와 집을 늘려가며 자리를 잡은 것도 이곳이었다. 아이들도 여기서 키웠다. 그런데 여기에 덩그러니 혼자 남았다. 고향에 내려갈까 생각도 많이 했지만 떠나기는 또 쉽지 않았다.

오늘은 옆집 과일가게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마음 넓은 주인 아주머니가 불고기와 미역국을 끓였다. 혼자 지내다보면 끼니를 잘 챙겨먹지 않는다. 아침은 거를 때가 많고 점심은 사먹거나 가게에서 라면으로 대충 때운다. 그래서 이웃이 신경 써줄 때가 더없이 고맙다.

과일 가게에 들어섰다. 강아지 사랑이가 뜨끈한 앉을 자리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그 옆에 앉아 희수 씨는 전화를 건다. 부산에 있는 아이들이다. 뭘 잘못했는지 일곱 살 딸이 고모한테 혼나고 울고 있다.

"아빠~~~."

"고모한테 혼났어? 괜찮아."

"아빠 보고 싶어."

"아빠도 보고 싶어."

"아빠 언제 와?"

"4월에 갈게."

"4월 언제? 6일?"

"글쎄 15일쯤? 그때 상황 봐서 갈게. 비행기 타고 숑 갈게 기다려."

"아빠 빨리 와~~~. 보고 싶어~~~."

아이가 서럽게 운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고개 숙인 희수 씨의 눈시울도 붉어진다.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는데......(한숨) 아이들 울고, 아빠 보고 싶다 하는데 그런 마음 누가 알겠어요. 애들은 무슨 죄라고…."
희수 씨는 사별 후 상당한 우울감을 겪었다. 애써 괜찮은 척하지만 지금도 혼자 있으면 외로움을 느낀다. 부산에는 두 달에 한 번 갈까 말까다. 그의 휴대전화에는 가족 사진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왜 이러고 사나 싶죠. 누구나 행복한 가정을 꿈꾸지 않나요?"
 
▲ 화상통화. 아이들은 부산에 내려보냈다. 가게 때문에 돌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프레시안(최형락)

귀가.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엔 휑한 집에 잘 들어가지 못했다. 집에 들어섰다. 아이들 사진은 있는데 윤정 씨의 사진이 없다.

"처음엔 그냥 뒀는데 보면 자꾸 마음이 아파서…. 그래서 지금은 뗐어요"

그는 혼자 있을 때 아내 사진을 보기가 어려웠다고 말한다. 추억을 조금씩 지워가는 중이라고 말하는 희수 씨는 이 집에 살기 어려워 4월에 이사를 가기로 결정했다.

희수 씨가 방 안에 들어가 아내의 유품 상자를 꺼낸다. 상자 안에 공부했던 노트가 몇 권 보였다.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 대신 공장으로 가서 언니 뒷바라지를 해야 했던 착한 아내는 늘 언젠가는 대학에 가겠다고 말하곤 했다. 아내의 유언도 자식들 공부시켜서 대학에 꼭 보내라는 것이었다. 공부 못해 대학 안 가고 공장 가면 싫다고. 윤정 씨는 결국 대학 가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떠났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는 그저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을 뿐이다. 아픔을 지우기 위해 추억을 지워간다던 남자. 그는 그것을 지울 수 있을까? 돌리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홀로 남겨진 남자는 천천히 유품 상자를 덮었다.
 
 
▲ 부천시 송내동에 위치한 정희수 씨의 정육점. ⓒ프레시안(최형락)

 
▲ 고기는 단골 장사라서 주인이 꼭 자리를 지켜야 한다. 친절하게 손님을 맞는 희수 씨. ⓒ프레시안(최형락)

 
▲ 희수 씨는 틈틈이 휴대전화에 저장된 사진을 본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 정육점 지하 창고에서 앨범을 들춰보는 희수 씨. ⓒ프레시안(최형락)
 
 
▲ 과일가게. 혼자인 희수 씨에게 신경 써 주는 이웃이다. 가끔 밥을 얻어 먹기도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퇴근 후 옆집에 들렀다. 강아지 사랑이(11)가 주인 아줌마의 품에 안긴다. ⓒ프레시안(최형락)
 
 
▲ 그나마 화상통화 덕에 아이들 얼굴을 자주 볼 수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귀가 ⓒ프레시안(최형락)

 
▲ 아무도 없는 휑한 집에 혼자 들어서는 희수 씨. 사별 후 처음엔 집에 잘 안 들어오려고 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윤정 씨의 유품을 열어본다. 대학에 가고 싶어 하던 아내의 노트. 주고받은 편지, 선물, 사진들이 담겨 있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 가족으로 북적이던 아파트에 혼자 사는 희수 씨는 4월 작은 곳으로 이사를 계획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그는 그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을 뿐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프레시안(최형락)
 
 
 
 

 

/최형락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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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훈 국정원장 정치개입 지시 내부자료 드러났다

[단독] 원세훈 국정원장 ‘정치개입 지시’ 내부자료 드러났다
(한겨레 / 정환봉 기자 / 2013-03-18)

 

▲ 원세훈 국가정보원장(맨 앞)이 지난달 12일 북한 핵실험 관련 긴급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실에 들어서고 있다. 뉴스1

진선미의원 확보…선거때 인터넷 여론관련 활동 주문
“젊은층 우군화 심리전 강화”…‘댓글’ 사건과 일맥상통

원세훈(62) 국가정보원장이 직원들에게 직접 국내정치 개입을 지시했다는 내용이 담긴 국정원 내부 자료가 공개됐다. 자료에 나오는 지시 내용은 지난 대선 때 인터넷 여론조작을 한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는 국정원 직원 김아무개(29)씨가 작성한 글과 매우 비슷해, 김씨의 활동이 원 원장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의혹이 일고 있다. 국정원법은 국정원이 국내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 만큼, 원 원장과 국정원 전반으로 수사를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겨레>가 17일 진선미 민주통합당 의원을 통해 입수한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이라는 제목의 자료를 보면, △선거에서 인터넷 여론에 개입 △국정원 직원 김씨가 소속된 심리전단의 젊은층 우군화 심리전 강화 △종교단체의 정부 비판 활동 견제 △4대강 사업 등 국책사업에 대한 대국민 여론전 등을 지시·주문한 내용이 다수 발견된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민주노총 등을 탄압하기 위해 일선 직원뿐 아니라 간부들까지 나서 정부 기관에 압력을 넣도록 한 정황도 들어 있다.

<한겨레> 취재에 응한 복수의 전·현직 국정원 직원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은 국정원 본부 국장과 지역 지부장 등 주요 부서장이 참석한 가운데 한달에 한번꼴로 열리는 확대 부서장회의에서 원세훈 원장이 발언한 내용을 정리해 국정원 내부망(인트라넷)에 올린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입수된 자료에는 원 원장 취임 직후인 2009년 5월부터 2012년 11월까지의 지시사항이 담겨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당선된 2011년 10·26 보궐선거 직후 나온 지시사항에는 “악의적 허위사실은 선거에 미치는 영향 막대. 선거가 끝나면 결과 뒤바꿀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원이 역할을 제대로 해줘야 함. 특히 종북세력들이 선거정국을 틈타 트위터 등을 통한 허위사실 유포로 국론분열 조장하므로 선제적 대처 해야 함”(2011년 11월18일)이라고 적혀 있다. 선거 정국에서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형성되는 여론에 인위적으로 개입할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다.

2010년 7월19일 지시사항에는 “심리전단이 보고한 젊은층 우군화 심리전 강화방안은 내용 자체가 바로 우리 원(국정원)이 해야 할 일이라는 점을 명심”하라는 내용이 나온다. 국정원 직원 김씨가 젊은층이 자주 찾는 인터넷 커뮤니티 ‘오늘의 유머’, ‘보배드림’, ‘뽐뿌’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인 것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또 2011년 2월18일 지시사항을 보면 “종북세력 척결과 관련, 북한과 싸우는 것보다 민노총(민주노총), 전교조 등 국내 내부의 적과 싸우는 것이 더욱 어려우므로 확실한 징계를 위해 직원에게 맡기기보다 지부장들이 유관기관장에게 직접 업무협조를 하기 바”란다고 돼 있다. 2010년 3월19일에는 “일부 종교단체가 종교 본연의 모습을 벗어나 정치활동에 치중하는 것에 대해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필요함”이라고 주문했다.

진선미 의원은 “믿을 만한 제보를 통해 이런 내용들을 입수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국정원이 부당한 정치개입을 통해 국기를 문란하게 한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반드시 엄단해야 할 사항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국정원 대변인은 “내부망에 게시된 내용은 확인해줄 수 없다. 관련 내용이 있는지도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78458.html

 


 

[단독] ‘국정원장 정치개입’ 내부자료 입수
(한겨레 / 정환봉 최유빈 엄지원 기자 / 2013-03-18)


 

▲ 원세훈 국가정보원장(맨 앞)이 지난달 12일 북한 핵실험 관련 긴급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실에 들어서고 있다. 뉴스1

2011년 2월18일 “민노총·전교조 등 징계, 유관기관장 협조 얻어라”

국정원 ‘원장님 지시·말씀’ 내용

원세훈 국가정보원장의 지시사항을 담았다는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에는 정치·사회·문화 등 광범위한 분야에 국정원이 개입하도록 지시·주문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모두 국정원 본연의 구실인 ‘국가 안전보장을 위해 필요한 정보활동’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독재정권 시절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 등이 야당 정치인과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한 사찰과 고문을 일삼고 간첩사건을 조작했던 과거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국정원의 국내정치 개입은 법으로 엄격히 금지돼 있다.

2010년 1월22일/ 세종시 논란 간여
“우리 원이 앞장서서 대통령님의 진의를 적극 홍보하고 뒷받침해야”

2010년 3월19일/ 4대강 사업 관련
“일부 종교단체 정치 활동에 치중 바로잡으려는 노력 필요”

2011년 11월18일/ 서울시장 선거 후
“선거기간 트위터·인터넷 등 확실하게 대응 안 하니… 우리 원이 역할 제대로 해줘야”

2012년 4월20일/ 총선 직후
“선거 결과 다수의 종북 인물 국회 진출함으로써 원에 대한 공세 예상되니 대처”

■ 선거 등 정치 개입 의도 드러나 2011년 11월18일 지시사항에는 “선거기간 동안 트위터, 인터넷 등에서 허위사실 유포. 확실하게 대응 안 하니 국민들이 그대로 믿는 현상 발생. (중략) 선거가 끝나면 결과 뒤바꿀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원(국정원)이 역할을 제대로 해줘야 함”이라고 적혀 있다. 같은 날 지시사항에는 “특히 종북세력들이 선거정국을 틈타 트위터 등을 통한 허위사실 유포로 국론분열 조장하므로 선제적 대처”를 하라는 내용도 들어 있다. 이는 2011년 10·26 재보궐선거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이 당선된 직후 나온 것으로, 당시 선거에서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형성된 여론이 여당에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판단이 반영된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야당 국회의원을 종북으로 낙인찍기도 했다. 2012년 4·11 총선 직후인 4월20일 지시사항에는 “이번 선거 결과 다수의 종북 인물들이 국회(에) 진출함으로써 국가 정체성 흔들기, 원(국정원)에 대한 공세 예상되니 대처”하라고 적혀 있다. 이는 4·11 총선에서 당선된 13명의 통합진보당 의원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2011년 5월20일 지시에서는 “지난 재보선에서 천안함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고 주장하던 인물이 강원지사에 당선”됐다고 언급했다. 최문순 지사를 겨눈 말이다.

또 “4월 국회에서는 주요 개혁 입법들이 모두 처리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2010년 3월19일) 등 국회 고유 권한인 입법활동에까지 개입할 것을 지시한 내용도 나온다. 당시 4월 국회에서는 ‘세종시 수정안’, 4대강 주변 개발사업을 위한 ‘친수구역 활용에 관한 특별법안’ 등 정부·여당이 주도하는 법안이 논의될 계획이었다.

■ 종교단체까지 ‘종북좌파’ 낙인 이명박 정부의 국정 운영을 비판하는 세력은 모두 ‘종북’으로 규정됐다. 종교계도 예외가 아니다. 2010년 3월19일 지시사항에는 “일부 종교단체가 종교 본연의 모습을 벗어나 정치활동에 치중하는 것에 대해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적시돼 있다.

그 나흘 전인 3월15일, 불교·천주교·개신교·원불교 등 4대 종단은 낙동강 상주보 건설 현장에서 ‘생명의 강을 위한 4대 종단 공동기도회’를 열고 4대강 사업 중단을 호소한 바 있다. 서울 봉은사의 조계종 직영사찰화 논란도 한창이었다. 2010년 3월11일 조계종 중앙종회는 특별분담금 사찰인 봉은사를 직영사찰로 전환하는 안건을 찬성 49명, 반대 21명으로 가결했다. 봉은사 주지로서 이명박 정부의 각종 정책에 반대 의견을 활발하게 표명해온 명진 스님은 직영사찰화를 반대하다 그해 11월 주지직에서 물러났다. 명진 스님은 이듬해 3월6일 마지막 법회에서 “원세훈 국정원장이 지난달 봉은사를 방문해 리영희 교수 49재에서 내가 한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말에 대해 항의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해 국정원이 자신의 퇴출에 개입했음을 시사한 바 있다.

민주노동당에 가입하거나 후원금을 낸 전교조 교사와 공무원에 대한 중징계의 배후에 국정원이 있었다는 정황도 드러난다. 2011년 2월18일 지시사항에 “종북세력 척결과 관련, 북한과 싸우는 것보다 민노총(민주노총), 전교조 등 국내 내부의 적과 싸우는 것이 더욱 어려우므로 확실한 징계를 위해 직원들에게 맡기기보다 지부장들이 유관기관장에게 직접 업무를 협조”하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 직전인 2011년 1월26일 서울중앙지법은 “민주노동당에 가입해 당비나 후원금을 낸 혐의로 기소된 전교조 및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소속 교사와 공무원 260명에게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벌금 30만~50만원을 선고했다. 가벼운 벌금형에도 불구하고 이후 교육과학기술부는 일선 교육청에 이들을 파면·해임 등 중징계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 4대강 보위에 앞장선 국정원 ‘지시·강조 말씀’ 중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4대강’이다. 2011년 1월21일 지시 내용을 보면 “4대강 사업 등 국책사업이 원활히 추진되기 위해 책잡히는 일이 없어야 하므로 지역민들에게 최대한 성의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주문이 담겼다. 당시 경남 의령군 낙동강 19공구 인근 주민들은 “4대강 공사로 농지 침수 현상이 나타난다”며 정부에 대책 마련을 촉구한 바 있다. 이 지역 성산마을 주민 40여가구는 2011년 1월5일 경남도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책사업 때문에 주민들의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는데도 주민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정부에 배신감을 느낀다”고 비판했다.

이밖에 “4대강 사업이 장마철 이전 마무리되도록 지부장들은 지원에 만전을 기하고 공사현장의 안전문제 점검”(2011년 2월18일), “낙동강·한강변 등에 집을 지으면 4대강 사업의 완성된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줄 수 있을 것”(2011년 6월17일), “4대강 그랜드오픈이 한달여 정도 남았는데 지역단체 언론 등을 통해 행사가 잘 마무리될 수 있도록 사전 면밀점검”(2011년 9월16일) 등 ‘4대강 사업 챙기기’ 지시사항이 다수 발견된다.

실제로 4대강 사업 반대운동을 해온 한 환경단체 간부는 “2009년부터 지인을 통해 국정원이 나를 사찰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2년쯤 뒤에는 해당 국정원 직원이 내게 직접 전화해 몇 번 만난 적도 있다. 국정원 직원은 나를 만난 자리에서 ‘대통령 편하게 해주는 것, 대통령이 가장 자신있게 내민 4대강 사업을 이루도록 돕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세종시 논란과 관련해선 2010년 1월22일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좌파단체들이 많은데 (중략) 우리 원이 앞장서서 대통령님과 정부정책의 진의를 적극 홍보하고 뒷받침해야 할 것”이라는 지시사항이 나온다. 2010년 1월11일 정부가 ‘세종시 수정안’을 발표한 직후다. 세종시 수정안은 당시 야당은 물론 박근혜 대통령도 “국민과의 약속을 어기는 일로 신뢰만 잃게 됐다”며 반대해온 법안이었다.


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78459.html

 


 

[단독] 국정원 김씨 인터넷 글, ‘지시 말씀’ 의도 충실히 따른듯
(한겨레 / 정환봉 기자 / 2013-03-18)


 

원장이 ‘해군기지 반대’ 우려하자
한달여 뒤부터 6차례 댓글 올려
 
대통령 외교성과 지속 강조에
“순방 역대 최고” 잇달아 칭송
 
여론 대처 구체적 방안까지
김씨 작성 어투에 영향 준듯

지시 내용-댓글 비교해 보니

원세훈 국가정보원장의 지시를 담았다는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 내용은 대선 여론조작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는 국정원 직원 김아무개(29)씨가 ‘오늘의 유머’(오유) 게시판 등에 올린 글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인다. 지시 내용 중 방점이 찍힌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 주민 비판 △이명박 전 대통령 해외순방 칭송 △야당 정치인 종북 낙인 등은 김씨가 작성한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유사성은 김씨의 인터넷 활동이 국정원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을 뒷받침한다.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 자료를 보면, 지난해 9월21일 지시 내용 중 “제주에서 개최된 세계자연보전총회 시 종북좌파들이 행사장 앞에서 방해활동”을 하고 있다며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강정마을 주민들을 비판하는 내용이 나온다. 한달여 뒤부터 김씨는 ‘오유’ 게시판에 모두 6차례에 걸쳐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강정마을 주민과 시민단체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진짜 무슨 생각으로 해군기지 반대하는 건지?”(2012년 11월2일), “해군기지사업 이제 와서 중단하라니”(2012년 11월12·13일), “팽 당한 구럼비바위”(2012년 11월20일), “해군기지 뭐 어쩌자는 거지?”(2012년 11월30일), “하루라도 빨리 완공하라고 쪼는 게 정상 아님?”(2012년 12월10일) 등이다.

 

▲ 불법 대선 여론조작 혐의를 받고 있는 국정원 직원 김아무개(29)씨(오른쪽 둘째)가 지난 1월4일 오후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수서경찰서에 들어서고 있다. 경찰은 김씨에 대한 수사를 3개월 넘게 벌여왔지만 아직까지도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김봉규 기자

이명박 전 대통령의 해외순방 칭송도 마찬가지다. 이 전 대통령이 2010년 6~7월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제4차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와 캐나다·파나마·멕시코 등 북중미 3개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 “대통령님의 외교가 국내 정세와 연계될 수 있도록 원이 더욱 역할을 다해야 함”(2010년 7월19일)이라는 지시 사항이 나온다. 이 전 대통령의 외교 성과를 강조하라는 홍보 방침은 2년여 뒤까지 계속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김씨는 지난해 ‘오유’ 게시판에 “이명박 대통령이 내일부터 5일간 인도네시아와 태국을 순방한다고 한다. 이번이 자그마치 48번째 해외순방이라는데 압도적인 역대 최고”(11월6일), “평창올림픽, GCF(녹색기후기금) 유치 등등 MB(엠비) 외교력이야 워낙 정평이 나있지 않나. 이번에도 UAE(아랍에미리트)의 원전 3~4호기를 우리 기업이 추가 수주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할 것이라고 한다”(11월19일), “이명박 대통령이 재임기간 중 무려 49회의 해외순방을 했다고 한다. (중략) 외교가 바로 경제이고 경제가 외교인 시대에 사는 지금 우리 대통령이 외교에 강점이 있다는 사실이 참 다행스럽다”(11월27일) 등 4차례에 걸쳐 이 전 대통령의 외교력을 칭송하는 글을 썼다.

김씨가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선 후보를 비판하는 글을 3차례(2012년 12월5·6·7일) 쓴 것 역시 “이번 선거 결과 다수의 종북인물들이 국회 진출함으로써 국가 정체성 흔들기, 원(국정원)에 대한 공세 예상되니 대처할 것”(2012년 4월20일)이라는 지시 사항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국정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에는 여론 개입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지시한 대목도 있다. “원(국정원)도 훈수두기식 활동을 탈피, 국정성과 홍보 확산 실행 주력할 것”(2012년 1월27일), “홍보내용도 많은 것을 하려 하지 말고 핵심적이고 중요한 것을 선별하여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홍보방법에서도 우리 시각이 아닌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구체적이면서도 인과관계를 명확히 설명할 것”(2012년 9월21일) 등이다. 실제로 국정원 직원 김씨가 욕설이나 과격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이 전 대통령의 핵심 정책을 여러번 반복적으로 옹호한 것은 이 지시 사항에 부합한다.

지시 사항 대부분이 김씨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작성한 글에 반영됐다는 점에서 국정원이 지난 대선 때 정부·여당에 유리한 활동을 조직적으로 벌였다는 의혹이 더욱 커지고 있다. 국정원은 지난 1월 김씨가 ‘오유’ 등에 정치적으로 편향된 글을 쓴 사실이 <한겨레> 보도(1월31일치 1면)로 드러나자 곧바로 “정상적인 대북심리전 활동”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국정원은 이후 “(게시글 작성은) 김씨가 개인적으로 한 일”이라고 말을 바꿨다.


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7846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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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민이 추앙하던 박정희, 제주를 '미군기지'로

 


박근혜 정부의 초대 국정원장으로 내정된 남재준 국정원장 내정자가 제주 4.3에 대해 '무장폭동 내지 반란'이라고 강연을 하고 다닌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민주통합당 김현 의원은 남재준 후보자가 2008년부터 작년까지 '북한의 대남전복전략 실체와 우리의 자세'란 제목의 강연에서 "북한은 자신들의 전력증강과 전쟁준비를 차질 없이 진행시키는 한편 우리 국군의 전투력 증강을 방해하고, 힘을 소진시키기 위해 가용한 모든 요소를 총동원해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48년도 남한 단독총선을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일으켰던 제주 4.3사건" 이라는 발언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남재준 후보자의 강연에 대해 민주당 김현 의원은 "제주 4.3사건을 무장폭도 및 반란으로 규정한 것이 맞냐?"고 질의했고, 이에 대해 남 후보는 "우리 군인들이 알기는..사법부는 달리 판단했다. 내가 말한 건 전체가 아니라 김달삼 등에 한정돼서 말한 것"이라고 해명했습니다.

이날 국정원장에 대한 제주4.3 질의가 이어지자 갑자기 새누리당 서상기 위원장은 "(질의가)개인 신상에 관한 것이다. 마이크 끄세요"라고 외쳤고, 인사청문회가 소란스럽자 서 위원장은 정회를 선포했습니다.

박근혜 정부 초대 국정원장 내정자가 지닌 제주4.3에 대한 개념과 가치관을 제주에 사는 '아이엠피터'는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로 들었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제주에는 제주4.3에 대한 아픔과 상처가 치유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 박정희를 추앙하는 제주도민, 그의 딸 박근혜를 지지하다'

제주에서 박정희라는 이름은 제주를 풍족하게 해준 인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감귤 산업을 발전시킨 장본인이고, 5.16도로와 같은 제주의 도로를 건설해준 '은인'처럼 생각하는 도민이 많기 때문입니다.

 

 

▲중문 관광단지 개발 현장과 감귤 농장을 시찰하는 박정희. 출처:1978년 경향신문

 


박정희는 제주를 자주 찾은 대통령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휴가도 제주로 자주 왔고, 제주의 귤밭 사업과 축산, 그리고 관광 사업 개발과 도로 확충 등에 많은 지시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덕분인지 제주 유지들은 박정희가 제주에만 오면 ' 각하께서 (제주)를 방문하시면 아버지가 외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것처럼 기뻐들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박정희가 제주에서 밀감 사업을 장려하고 도로를 확충했다는 이유로 지난 대선 때 제주에서 노령층은 대부분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기도 했습니다.

 

 

▲ 제주도 유세 중에 밀감을 선물받은 박근혜 후보. 출처:서울신문

 


제주도민 중 노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 대한 신뢰도가 높았고, 이는 그대로 18대 대선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결국, 도내 전체 33만967표 중 박근혜 후보가 16만6184표를 얻어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야당이 강세였던 제주였지만, 지난 대선에서는 박근혜 후보가 승리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박정희의 '경제성장'과 '감귤' 사업으로 제주가 부자가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 국토건설단이 만든 5.16도로에 파묻힌 인권'

제주에서는 5.16도로라고 불리는 도로가 있습니다. 이 도로는 제주시와 서귀포를 잇는 도로입니다. 원래 5.16도로는 일본이 만든 임도를 확장 포장하여 만든 도로인데, 원래는 5.16도로가 아니라 '한라산 횡단도로'였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5.16 군사쿠데타를 기념하기 위해 5.16도로를 주장했고, 이는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한라산 횡단도로 개통식 장면, 출처:오마이뉴스 ⓒ 김동식

 


한라산 횡단도로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국토건설단'이라는 조직이 있습니다. 이 국토건설단은 박정희가 5.16쿠데타로 집권한 뒤에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만들어진 조직인데, 원래는 장면 정부에서 '대학생 취업'을 돕기 위해 구상된 취업 확대 시스템이었습니다.

박정희는 대학생 취업이라는 본래 취지를 없애버리고, 병역미필자를 구제한다는 이유로 전국의 불량배,부랑자,병역기피자에 대한 검거를 실시해 이들을 '국토건설단'에 강제로 넣었습니다. 예비역 군인들을 감독관으로 폭력과 인간 이하의 대접으로 마치 죄수처럼 노역에 시달렸던 '국토건설단'은 결국 국민 여론의 반발로 해체됐습니다.

 

 

▲MBC드라마 '빛과 그림자'의 한 장면. 출처:MBC

 


'국토건설단'에 의해 만들어진 5.16도로는 제주도민에게는 혜택이겠지만 단지 병역을 기피했거나 부랑자, 또는 시국에 대한 불순한 언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잡혀가 죽도록 고생하고, 다치고 죽었던 사람들에게는 '고통과 억압'의 상징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전두환이 만든 삼청교육대가 박정희의 '국토건설단'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사실만 봐도, '국토건설단'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군사정권의 노동력 동원과 통제방식으로 결과 이전에 과정 자체가 불법과 인권유린의 현장이었음을 제주도민은 깨달아야 합니다.

'제주도를 미군기지로 제공하려던 박정희'

박정희를 제주의 은인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박정희가 제주도를 미군기지로 제공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제주도를 미군기지로 제공하겠다고 선언한 박정희. 출처:경향신문

 


1969년 박정희는 미국이 오키나와 기지를 일본에 반환하게 되는 경우나 아니면 새로운 미군기지 등 어떠한 형태라도 제주도를 미군기지로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박정희의 이러한 제주도 미군기지 제공 선언은 단순히 군사력 증강이라는 차원을 넘어, 대한민국 국토를 외국 군대에 아예 넘기겠다는 위험한 발상 중의 하나였습니다. 특히 제주도민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력을 동원한 군대 출신 대통령답게 자신의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독재자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박정희의 제주 미군기지 제공에 대해 미국의 반응이 쌀쌀했다. 출처:경향신문

 


제주도민의 생각은 아랑곳없이 자기 생각대로 제주도를 미군기지로 제공하겠다는 박정희의 생각은 오히려 미국의 냉담한 반응에 부딪혔습니다. 미국은 제주가 항만시설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수도와 전력시설도 없으며, 바람이 세서 미군기지에 적합하지 않다고 봤습니다.

어떤 이들은 제주도에 해군기지가 완성되고 하와이처럼 미군이 들어서면 좋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진짜 하와이 주민들은 오히려 미군기지 때문에 겪는 피해로 지금도 고통받고 있습니다.

하와이에 관광 오는 사람들은 좋을 수 있겠지만, 사실 하와이에 사는 주민들은 물 부족과 주택난,예산 부족에 허덕이며 높은 생활비에 환경문제까지 하와이를 죽음의 땅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제주에 방문해 제주해군기지 설명을 듣는 박근혜 후보. 출처:한겨레

 


박근혜 후보는 지난 대선 때 제주를 방문해 마치 해군기지가 민군 복합형 관광미항으로 만들어지면 제주가 하와이처럼 발전할 것이라 주장했지만, 진실은 전혀 다릅니다.

[시사] - 제주도민이 박근혜의 말에 경악했던 사연

'아이엠피터'는 제주해군기지를 무조건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해군기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정부의 행동과 모습, 그리고 그것이 마치 지상낙원과 같은 유토피아는 결코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고 고민하고 접근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박근혜는 제주4.3을 완벽히 해결할 수 있을까?'

제주에 살면서 제주4.3을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직도 제주4.3에 대한 악몽과 연좌제에 걸려 있던 고통을 기억하는 제주도민이 워낙 많기 때문입니다.
 

 

▲ 제주4.3사선을 다룬 영화 '지슬'의 한 장면

 


제주가 제주4.3희생자 유족에 대한 추가 신고를 받은 결과 총 2만7792명의 제주도민이 제주4.3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이는 당시 제주도 인구가 30만 명을 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10명 중 한 명은 제주4.3사건으로 죽거나 행방불명 됐거나 그 희생자의 가족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제주에서 제주4.3은 제주도민이 대다수 연루됐지만, '무장폭동과 반란'이라는 이유로 그동안 숨겨졌다가 1960년 4.19혁명을 계기로 진상조사가 시작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로 다시 '무장폭동과 반란'으로 규정돼 수십 년간 말도 꺼내지 못해 살다 겨우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에 이르러 억울함이 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 7대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와 제주에서 발견된 무더기 부정표. 출처:동아일보

 


제주 사람 일부는 제주 경제발전을 가져다준 사람이 박정희라고 주장하지만, 그가 남발했던 국토개발로 제주는 지금도 땅 투기꾼들과 재벌들이 소유한 수십만 평이 그대로 남아 있고, 인권을 무시한 5.16도로는 그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자신에게 경제적 혜택을 준다고 부정을 눈감아주고, 인권을 무시하고, 불법과 무분별한 환경 파괴까지 자행하며, 억울한 제주4.3을 말하지 못하게 했다는 사실로 '아이엠피터'는 박정희가 제주의 '은인'이 아니라 제주의 '파괴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8대 대선때 제주에 걸렸던 새누리당 현수막.출처:트위터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제주4.3추모 국가기념일 제정' 공약을 내걸었고, 새누리당은 곳곳에 '4.3 완전한 해결 새누리당이 해내겠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걸었습니다.

제주4.3을 아직도 '무장폭동과 반란'이라고 강연에서 떠들고 다니는 사람을 국정원장에 내정한 박근혜 대통령이 과연 제주4.3을 완전하게 해결할지는 의문입니다.

누군가 빵을 준다면 그 영혼까지 팔겠다고 하겠지만, '아이엠피터'는 아무리 누가 나에게 빵을 준다고 해도 내 영혼을 팔아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 박정희가 제주에 남긴 빛만 보는 것이 아니라 아픔까지도 생각하며 대선 때 약속한 제주4.3 관련 공약을 반드시 지킬지 두고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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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핵선제 타격 날 다가오고 있다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3/03/19 09:52
  • 수정일
    2013/03/19 09:52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북, 핵선제 타격 날 다가오고 있다
 
“도발과 침략의 아성을 모조리 불바다”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3/03/19 [08:36] 최종편집: ⓒ 자주민보
 
 

▲ 미국은 대북적대정책으로 한반도 전쟁 위기를 고조 시키고도 모자라 연일 조선의 지도자와 체제를 모독하는 발언으로 일관해 정세는 더욱 엄중해 지고 있다. 북의 김정은 원수를 비롯한 지도부와 군민들은 하나가 되어 대미 항전에 나서고 잇다. ©

조선이 연일 한미합똥군사훈련을 북침전쟁연습으로 규정하고 강력한 행동을 취하고 있는 가운데 핵선제타격의 날은 다가오고 있다는 입장을 발표해 주목된다.

로동신문은 18일 ‘도발과 침략의 아성을 모조리 불바다로’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 같이 밝혔다.

조선로동당 기관지인 로동신문은 “남조선전역에서 우리 공화국을 침략하기 위한 북침합동군사연습이 본격적으로 감행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괴뢰군부깡패들은 저저마다 나서서 극단적인 전쟁폭언들을 마구 늘어놓고 있다.”고 한국군의 발언을 문제 삼았다.

로동신문은 조선을 향해 지난6일 합동참모본부 작전부장의 경고성명과 국방부 대변인 성명, 국방부장관 내정자 등의 발언을 싣고 “말 한마디에 전쟁이 터지는 법이다. 괴뢰들은 우리에게 참을 수 없는 도발을 걸어옴으로써 이 땅에서 한사코 북침전쟁의 불을 지르려고 발광하고 있다.”고 발언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이 신문은 한미양국이 합동으로 실시하고 있는 키리졸브/독수리 훈련의 성격과 규모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현실은 조선반도에서 도발의 불집을 연이어 터뜨리며 사태를 걷잡을 수 없는 파국상태에로 몰아가는 장본인, 주범이 다름 아닌 남조선 괴뢰들이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고 비난했다.

신문은 “우리는 핵전쟁으로 민족의 운명을 위협하는 호전광들, 더욱이 우리의 신성한 체제와 최고 존엄을 조금이라도 건드리는 천하의 역적무리들을 추호도 용서치 않으며 무자비하게 죽탕쳐버릴 것”이라며 “괴뢰들이 미국과 야합하여 우리에게 선전포고와 다름없는 극단적인 전쟁폭언들을 줴치고 있는 이상 우리의 결심은 더욱 확고부동해지고 있다.”고 단호함을 보였다.

또한 “두 차례의 혁명전쟁에서 제국주의강적들을 타승하고 만난을 무릅쓰며 언제나 승리의 한길을 걸어온 우리에게 괴뢰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전략로케트 및 정밀핵무기들은 결코 진열품이 아니다.”면서 “누르면 발사하게 되어있고 퍼부으면 불바다로 타번지게 되어있다. 우리의 단호한 군사행동이 시작되는 그 순간 청와대는 산산이 박산 나고 서울은 물론 남조선전역이 재가루속에 잠기게 될 것”이라고 불바다 론 언급했다.

이어 “연평도의 불바다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 전쟁이 터지면 남조선은 그 어디를 막론하고 완전 초토화 되고 영구불모지로 화하게 될 것이다. 남조선괴뢰들이 그토록 구세주처럼 믿는 미국상전의 ‘확장억제력’도 주구들을 비참한 종말의 운명에서 구원해 줄 수 없다.”고 역설했다.

아울러 “우리는 이미 조선정전협정이 완전히 백지화되는 3월 11일부터 북남사이의 불가침에 관한 합의들도 전면무효화 될 것이라는 것을 공식선언하였다. 동족대결에 환장이 되여 북침전쟁책동에 광분하는 괴뢰패당과는 더 이상 할 말이 없기에 우리는 북남직통전화도 단절해버렸다.”며 “이것은 조국통일을 위한 성스러운 혁명전쟁의 개시에 장애가 되는 온갖 허접스러운 것들을 모조리 제거하기 위한 정의로운 조치”라며 정전협정 백지화를 비롯한 조치들의 정당성을 피력했다.

특히 “침략자들의 본거지, 도발의 아성들에 대한 우리의 핵선제 타격권리 행사의 날은 다가 오고 있다.”며 미국과 한반도의 전쟁 위기가 다가 오고있음을 시사했다.

한편 미국 워싱턴 백악관 제이 카니 대변인은 “오바마 대통이 북한 관련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며 “미국을 표적으로 하는 핵 미사일 개발을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고 말해 조미대결전은 피 할수 없는 상태로 빠져 즐고 있어 관련 당사국들의 평화적 노력을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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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비밀접촉' 관여한 유완영 회장

 

“남북관계, 제일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의지”
'싱가포르 비밀접촉' 관여한 유완영 회장 (수정)
 
 
2013년 03월 18일 (월) 15:38:02 김치관 기자 ckkim@tongilnews.com
 
“통전부장 직접 협상은 분단 역사상 처음”

   
▲ 유완영 유니코텍코리아 회장이 13일 여의도 사무실에서 <통일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2009년 10월 '싱가포르 비밀접촉'에 대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사진 - 통일뉴스 백운종 객원기자]
“이명박 정부의 대북 협의 중에 임태희 당시 노동부 장관과 김양건 통전부장이 협상했다는 것은 상당히 큰 의미다. 통전부장이 직접 협상을 했다는 것은 분단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지난 2009년 10월 임태희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김양건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간의 이른바 ‘싱가포르 비밀접촉’에 간접적으로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유완영 유니코텍코리아 회장은 지난 13일 오후 2시 여의도 사무실에서 <통일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북측이 통전부장을 내세웠을 때는 그만큼 중요한 관계개선을 생각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처음으로 ‘싱가포르 비밀접촉’ 관련 인터뷰에 응했다는 유완영 회장은 “그때까지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통전부장과 협상해본 적이 없지 않느냐”며 “중간을 거치지 않고 바로 대면할 수 있는 위치의 고위급 협상을 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했다.

임태희 전 실장은 지난해 6월 20일 대선후보 경선에 뛰어들면서 기자회견을 통해 “당시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과 비밀접촉한건 사실”이라고 공식 확인하고 “북측이 국군포로와 납북자에 대한 ‘인도적 조치’를 하면, 우린 그에 상응하는 ‘인도적 지원’을 할 수 있다는 기본원칙을 갖고 북측을 설득했다”면서 “말하자면 한국판 ‘프라이카우프’였던 셈”이라고 밝힌 바 있다.

‘프라이카우프’(Freikauf)는 서독이 동독에게 경제적 대가를 치르고 정치범을 데려오던 방식으로 ‘자유를 산다’는 뜻이며, 이명박 정부는 비밀접촉에서 국군포로와 납북자를 데려오는 조건으로 식량지원을 하는 방안을 제시해 북측에서도 사실상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임태희 전 실장이 남북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추진한 2009년 10월 싱가포르 비밀협상은 11월 통일부와 통전부 간의 이른바 ‘통-통 라인’의 협상으로 이어졌지만 합의에 실패했다.

유완영 회장은 “언론에 나온 내용에 따르면, 국군로포.납북자 문제를 명문화 했다는 것은 분단사상 처음으로 금기시되는 대목까지 서로가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이라며 “많은 사람을 데려오느냐 적게 데려오느냐 차이 가지고 논란은 있었지만, 그 행위를 처음 명문화 했었더라면 역사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은 남북관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길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오랜 남북경협 경험을 토대로 ‘싱가포르 비밀접촉’에 간접 관여했던 유 회장은 임태희 전 실장이 비밀접촉에 나서게 된 계기를 “언론에도 보도됐듯이 김대중 전 대통령 특사조문단이 왔을 때 임태희 전 실장이 역할을 했던 것은 사실”이라며 “임태희 전 실장은 남북문제에 관심이 많았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간 협의가 통일부로 넘겨져 남측 통일부와 북측 통전부의 이른바 ‘통-통 라인’으로 전환된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 대통령 입장은 남북관계는 통일부가 해야 된다는 인식이 상당히 있었던 것 같다”며 “정치인 임태희였다면 아마 달랐을 수도 있지만 노동부 장관인데 주무 부서가 있지 않느냐”고 설명했다.

특히 ‘통-통 라인’ 접촉에서 합의가 파탄난데 대해 “김태효 비서관도 예전에 계속 이야기했지만, ‘한 1년만 끌면 북이 무너진다’는 인식이 강했다”며 “지금 본다면 대통령이 잘못된 보고를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하고 “결국 통치하는 사람의 철학이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유 회장은 “나는 (협상이) 깨진 것이 아니라 미완성이라고 본다”며 “이명박 정부의 북측과의 접촉에서 있었던 많은 얘기들이 북측으로부터 공개됐지만 결국 임 전 실장과 협의했던 내용에 대해서는 북측이 아직까지 어떤 말도 없었다는 것은 그쪽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주목된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당시 협상 내용에 근거해 다시 추진해 볼 여지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의지”

   
▲ 유완영 회장은 남북관계는 대통령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진 - 통일뉴스 백운종 객원기자]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제일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의지다.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서 남북관계는 상당히 변화할 수도 있고 후퇴할 수도 있다”고 전제하고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 대해서 우리가 특사를 보내서 설명한 적도 없고 그 얘기를 해준 적도 없다”며 “그러니까 북측 입장에서는 ‘비핵.개방.3000’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유 회장은 “박근혜 정부는 ‘이러이러하게 남북관계를 가겠다. 너희도 여기에 우리랑 맞춰라. 그러면 뭔가 다른 면이 있을 것이다’ 이런 진지한 내용을 전달해야 한다”며 “남녀가 연애할 때처럼 서로의 공통분모를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한 “박 대통령이 이야기하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신뢰를 기반으로 해서 간다면 성공확률이 높다고 본다”면서 “매번 협상을 하거나 할 때마다 변하는 것이 아니고 전략적으로 정해지면 끝까지 가야한다. 설령 진행하다가 조금 실수가 있더라도 원칙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유 회장은 “지금 핵문제로 인해 시끄럽기 때문에 그 잠복기 기간이 길어질 수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라며 “미국은 핵확산 억지력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우리는 핵 자체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므로 이 차이를 한미 간에 어떻게 풀어 가느냐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지금 3차 핵실험 이후 유엔 제재가 나왔는데 바로 북한은 또 핵실험을 한다든지 인공위성을 쏘아올릴 것”이라며 “북미 간에 극단상황까지 가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본다. 그런 시점을 본다면 10월까지는 이런 상황이 가지 않겠나”라고 진단하고 “그 기간 동안 우리 안보라인이 흔들리지 않는 정책을 가지고 북쪽을 설득하고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때 가서 이렇게 하고 저때 가서 저렇게 바뀌는 것은 지난 5년을 풀어 가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됐다”는 것이며, “오늘은 제재하고 내일은 대화하고, 이건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 길정우 새누리당 의원의 대북접촉 시도와 최대석 대통령직 인수위원 낙마와 관련해서는 “대통령의 의중을 받지 않고 움직였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과 “통일부장관과 국정원장도 임명되지 않아 대북정책 방향이 나오지 않았는데 움직였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남북관계 개선돼도 레버리지 상당히 떨어져”

   
▲ 유완영 회장은 이후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북한 물류사업 분야에 진출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 - 통일뉴스 백운종 객원기자]
실제로 평양에 모니터 조립공장 등을 운영했던 유 회장은 “지난 정부에서는 개성공단과 금강산이 중요하다 보니까 내륙에 들어가서 고생한 기업들에 대한 문제점이나 이런 생각은 전혀 못했다”며 “왕래가 없다 보니까 관리를 할 수 없는 입장이 돼 버렸고, 관리를 못하니까 투자해놓고 거의 벌거벗고 나와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러나 “리스크가 컸지만 또 돌아올 수 있는 게 컸다라고 생각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갔던 것”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통일부 가면 맨날 돈이나 달라 하는데, 나는 한 번도 요구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우리 정부는 어떨지 몰라도 북측의 변화는 경협인들이 손실을 본 것에 대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도와줘야 된다는 사고를 갖고 있는 것은 최근에 달라진 부분 중에 하나”라며 “공식석상에서 그런 이야기들을 (북측) 관계자들이 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고 밝혔다.

유 회장은 “지난 5년을 거쳐 북측도 남북관계가 풀려야지 먹고 산다는 개념은 많이 떠났다”며 “북측도 일단 자본주의 경제에 대해 상당히 많은 학습효과를 가졌고, 남북 거래했던 부분들이 전부 중국과 직접 거래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한 “중국이라는 새로운 카드가 있기 때문에 남북관계가 개선된다고 해도 레버리지(지렛대)가 상당히 떨어졌다고 봐야 한다”며 “경제논리로 지금 거래하고 있는데 남측이 온다고 해서 더 비싸게 사주지 않는 한 우리한테 뭘 주겠냐”고 반문했다. “일반 기업하는 입장에서 거래처 하나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냐”는 것이다.

유 회장은 “5.24조치가 풀어지지 않는 한 남북 민간교류는 갈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며 경협업자들의 방북을 허가해야 한다고 제언하면서도 “지금은 핵문제에 또 걸려 있다 보니까 그 자체도 풀 수 있는 해법이 상당히 적어지는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유 회장은 앞으로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물류분야에 진출해보고 싶다며 “철도.도로 연결이라든지, 라진선봉 화물운송 부분에 관심이 있다”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수정,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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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 설립 바람, 운영할 수 있는 의식과...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3/03/18 10:17
  • 수정일
    2013/03/18 10:17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협동조합 설립 바람, 운영할 수 있는 의식과 문화 만드는 일에 먼저 힘써야

 
이남곡 2013. 03. 17
조회수 256추천수 0
 

 
이남곡1.jpg
 
H형께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아 보았습니다.
 
이제 이 곳 산골도 봄이 완연합니다. 장독대에 반짝이는 봄햇살하며, 졸졸 흐르는 시냇물소리, 곧 터질 것 같은 새잎들, 농사 준비하는 농부들의 바빠진 움직임들이 봄의 생명력을 느끼게 합니다.
 
평생을 농촌과 협동을 위해 살아오신 H형께서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요즘처럼 협동조합 바람(?)이 분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감회가 남다르면서도 감탄만 할 수 없는 형의 심경에 저도 동감합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듯이,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려는 내부역량과 때맞추어 어미닭의 쪼아줌이라는 외부조건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데, 확실히 지금은 줄(啐)보다는 탁(啄)이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협동조합운동을 해오신 분들은 이것을 많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내부역량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부는 바람이 혹시 일시적인 거품으로 끝나, 오히려 진정한 협동조합의 발전에 장애요소로 작용하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지요. 자활이나 사회적 기업과 같이 관이 지원하는 이상한 형태로 되어버리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생각들은 충분히 근거가 있다고 봅니다. 줄(啐)과 탁(啄)의 갭이 너무 크기 때문이지요.
 
협동조합박원순.jpg
 
지금 협동조합을 하려는 사람들, 단체들, 정부관료, 지방자치단체들이 많이 견학을 하러가는 유럽 등 협동조합의 선진국들은 150여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발전된 시스템과 함께 그것을 가능케하는 문화가 축적되어 있습니다.
외형적인 시스템이나 규약, 원칙 등은 쉽게 볼 수 있지만, 그것을 가능케하는 의식, 문화, 생활 등은 겉으로만 봐서는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설사 머리로 이해한다하더라도 그것을 체득하는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눈에 안 보이는 부분이 눈에 보이는 부분을 있게 하는 것 아닌가요?
 
우리역사에는 협동조합이라는 말이 들어오기 훨씬 전에 상당히 우수하고 정교한 시스템인 두레나 계(契)와 같은 민중에 의한 자발적인 전통이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원래 협동을 잘하지 못하는 국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이지요.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전통을 발전시키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결국 나라를 군국주의 일본에 식민지로 강점당했던 역사와 해방이 분단으로 이어지는 극심한 좌우대립이 지배하면서 이런 전통들이 발전할 수 없는 환경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단절의 역사가 너무 오래 되었습니다. 거의 한 세기 가까우니까요. 그것을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DNA 속에서 꺼내 현재에 살린다는 것이 결코 녹녹한 작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는 원래 개별주체성이 강해서 협동에는 안 맞아’ 하는 부정적이고 비관적 관념이 근거없는 것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요즘 국내외 정세, 특히 남북관계를 보면서 그 질기게 변치 않는 대립적 사고의 완고함에 많이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실 요즘의 협동조합 바람이 북 쪽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남쪽에서만이라도 그 완고한 사고방식들이 근저(根底)에서 변화하는 신호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잘 아시다싶이 그간의 완고하고 교조적인 이념대립은 모든 창조성들이 싹을 트지 못하게 한 주된 원인의 하나였지요.
 
협동조합을 보더라도, 이익 즉 탐욕에 눈먼 사람들이나 문화 속에서는 협동조합은 돈벌이 수단으로 왜곡되어버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을 최고의 가치로 인식하는 사람들에게는 협동조합은 개량주의 즉 근본적인 변혁을 방해하는 요소로 취급되었던 것이지요.
자본주의의 위기가 여기저기서 노정되는 지금, 양극화, 저성장, 고용없는 성장 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양심적인 우파에게도 협동조합이 다시 보이기 시작하고, 사회주의의 실패가 여실히 보여주듯 제도를 변혁하더라도 그것을 운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준비되지 못한다면 반대만 하지 결국은 낡은 체제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는 합리적인 좌파들에게도 협동조합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대단한 정치적 잇슈는 아니지만, 저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조용히 우리의 경직된 과거의 사고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향한 진정한 좌우 소통과 창조의 계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의 편지에서 얼핏 스치듯 말씀하신 가운데, 협동조합운동을 둘러싸고 좌우 대립의 기미가 보인다는 말씀을 듣고 약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서로 관점이 다른 면은 있겠지요. 또 하루 아침에 생각의 틀이 바뀔 수 있는 것도 아니겠지요. 또 지금의 협동조합 바람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밝은 것만도 아니구요.
또 협동조합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되는 것도 아닌 것이구요.
 
다만 우파에게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격을 높이는데, 상당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좌파에게는 새로운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양성되고 여러 가지 현실적 시스템들을 실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데서 저는 대립보다는 협력할 수 있는 분야가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좌우가 협력할 수 있다면, 비록 전체적으로는 미미하게 보일지 몰라도 대단히 뜻 깊은 창조의 장을 시작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일단 벌어져 있는 갭을 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좋아진 외부여건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내부 역량을 키우는 일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빨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체 빠른 국민이니까요.ㅎㅎ
 
러나 눈에 안 보이는 것, 즉 협동조합의 원칙과 시스템을 운영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의식과 문화를 만드는 일은 그렇게 빨리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실패하거나 왜곡되는 모습들도 많이 나타나겠지요. 그 과정에서 좋은 모델들이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섯 개가 실패하더라도 제대로 된 하나의 모델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넓어져 가는 것이지요.
저도 제 건강이 허락하는 한 다소라도 도움이 될 일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특히 눈에 안 보이는 영역, 그 의식과 문화를 형성하는 일에 미력이라도 힘을 보탤까 합니다. 협동운동과 인문운동의 접합점을 어떻게 실천할지 고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준비하고 있는 것은 ‘협동조합을 위한 맞춤형 인문(연찬)프로그램’입니다.
 
서울대생협.jpg
*한겨레 자료사진
 
잘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분들과 함께 다듬어가면서 협동조합 안에 내장(內藏)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형이나 저나 이제 나이가 만만치 않지만, 특히 저보다 연상이신 형께서 아직도 정열이 젊은이 못지 않은 것을 뵈면서 저도 힘을 얻습니다.
노욕(老慾)으로 되지 않도록 마음을 쓰고는 있습니다.
세상에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은 없다(毋必)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 볼 생각입니다.
꿈결 같이 지나는 인생이라지만, 이 기적 같이 만나는 순간들 속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늘 건강하소서!
 
2013. 3. 12
南谷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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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곡
서울대 법대 재학 때부터 민주화에 투신 4년간 징역을 살고 나온 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과 겸손으로 진리를 향한 실험을 멈추지 않고 있다. 정토회 불교사회연구소장을 거쳐 경기도 화성 야마기기마을공동체에 살았으며, 2004년부터 전북 장수의 산골로 이주해 농사를 짓고 된장·고추장 등을 담그며 산다. 서울에서 매주 ‘논어 읽기’ 모임을 이끈다.
이메일 : namgok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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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가하는 미군 범죄, 그들은 단지 '야수'일 뿐인가?

[인권오름] 미군 도심 난동 사건이 던지는 숙제

박정경수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사무국장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3-17 오후 1:22:15

 

"최근 미군 범죄가 증가하고 있는데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평소 울리지도 않던 전화기가 바빠질 때가 있습니다. 서울 어디에선가 미군 병사가 말썽을 부린 게 분명합니다. 경험적으로 서울이 아닌 곳에서 일어난 일에는 그렇게 많은 관심이 집중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사회면에 실리는 기사는 대개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일에 관심을 갖게 되는 모양입니다.

최근에 일어난 미군의 도심 난동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미군이 총기를 사용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는 했겠지만,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서 범죄가 발생했다는 사실 역시 중요한 이유였을 겁니다. 그럴 때 전화기 너머로 기자들이 물어오는 질문은 대개 비슷합니다. 기사 한 귀퉁이에 한 줄짜리 인터뷰를 싣기 위해 미군 범죄의 이유를 묻거나, 그도 아니면 처음부터 통계 자료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아마 제목은 '갈수록 증가하는 미군 범죄'이거나 '날로 흉폭해지는 미군 범죄'일지 모릅니다. 저도 그런 비슷한 자료를 보도자료로 쓰기는 합니다만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대개 이때 저의 고민은 시작됩니다. 이 문제를 어느 미군 병사 개인의 무분별한 행동으로 몰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군 범죄에 대응하는 단체에서 상근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범죄를 저지른 미군 병사를 괴물로 만들어버리는 일 말입니다. 결국 그런 결론에 다다르게 되면 그 나쁜 미군을 강력하게 처벌하라는 말밖에 생각나지 않을 게 분명하니까요. 하지만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될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편으로 유혹이기도 합니다. 제게 주어진 몇 마디의 인터뷰 안에서 미군 범죄 문제를 진지하게 설득할 자신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그 한 줄조차 제가 선택할 기회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이 짧은 글에서 그 한 줄을 넘어서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미군 범죄가 계속 증가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없는 걸까?

사람들에게 미군 범죄 문제를 설득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아마 그동안 일어난 끔찍한 범죄를 나열하거나, 그동안 미군 범죄가 얼마나 늘어났는지 근사한 그래프로 설명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이런 일들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뒤돌아서면 무언가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런 질문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미군 범죄가 계속 증가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없는 것일까?'

미군 범죄, 혹은 미군 기지 문제로 제법 시끌벅적했던 한 해를 보내고 나면 다음 해에는 여지없이 통계치가 감소합니다. 의미 있는 변화는 아니더라도, 오르기만 하던 미군 범죄의 화살표가 방향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당연히 여론을 의식한 미군 당국도 병사들의 외출과 행동을 통제할 테고, 합동 순찰도 강화하다보면 범죄도 조금은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미군 범죄의 해결책을 찾은 것도 아닐 테고 몇 해가 지나면 다시 범죄는 증가할 텐데, 반대로 미군 범죄가 증가하길 바라며 제사라도 지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통계는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가리키는 지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 그러니까 "미군 범죄가 증가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그냥 이렇게 대답하곤 합니다. "미군 범죄는 예전에도 많았고, 지금도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라고요. 그런데 실제로 그렇습니다. 범죄가 증가할 때도 마찬가지지만 50건, 100건쯤 줄어든다고 문제가 달라진 것은 아닐 테니까요. 사실 단지 몇 건의 범죄가 발생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저는 군대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 특별한 신분인 군인들의 범죄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미군 기지가 있는 곳에서 범죄가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꺼내볼까 합니다. 어디 환경 잡지를 읽어보니 환경 문제를 다루는 사람들 사이에는 '환경 정의'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이 환경 정의는 환경 오염이 생물학적 약자, 혹은 사회적 약자에 집중되는 사회적 현상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 환경을 오염시키는 사람들과 그 오염된 환경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분리 혹은 역전되는 문제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공해나 홍수, 토양 오염 같은 다양한 환경 문제를 통해 오염 책임자들에 비해 그 책임이 많지 않은 사회적 약자들이 고스란히 그 피해를 떠안게 되는 경우를 목격하곤 합니다.

사회적 약자에게 집중된 미군 기지의 범죄

반대로 저는 평화 문제, 소위 안보 문제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군사 기지, 특히 미군 기지가 그렇습니다. 굳이 안보 세력이라고 부르지 않더라도, 안보 문제를 통해 기득권을 유지하고 권력을 나누는 사람들을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그도 아니라면 적어도 지금의 불안정한 정전체제를 지지하거나 유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있겠지요.

그런데 이런 갈등에는 무기 구매나 군대 유지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적 비용도 발생합니다.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들이 없다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반대편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알게 된다면요. 징병제를 유지하는 거대한 병영국가의 국민들을 떠올려보거나 군 의문사 같은 다른 문제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저는 군사 기지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중 특히 미군 기지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소위 기지촌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기지촌은 미군 기지 주변에 형성된 마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특히 기지촌은 미군을 상대로 술을 팔거나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집중되어 있는 곳인데, 이는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한국에 오는 미군들이 가족을 데리고 올 수 없고 1년밖에 머물지 않는다는 특징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 미군들을 대상으로 한 술집들, 소위 클럽들이 자연스레 모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박정희 정권 때에는 기지촌을 관리하거나 유지·강화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미군 범죄는 특별히 이 기지촌에서도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미군들을 가장 많이 만나고 그들을 상대해야 하는 여성들이 범죄의 피해자가 된 것이지요.

제가 활동하는 단체 역시 지난 1992년 동두천에서 있었던 윤금이라는 클럽 여성의 끔찍한 죽음을 계기로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결성되었습니다. 과거에 비슷한 사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사건의 끔찍함과 함께 1987년 민주화를 거치면서 합법적인 운동 공간이 생기면서 비로소 미군 범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기게 된 것이지요. 소위 미군과 군대에 대해 비판을 하더라도 빨갱이 소리를 덜 들을 수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대개 미군 범죄라고 부를 때는 좁은 의미로 이런 여성들에 대한 범죄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군 범죄 반대 운동이라는 것은 미군 기지를 중심으로 한 지역적인 운동 과제인 동시에 이런 여성과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를 다루는 소위 '정의'의 문제도 포함합니다.

그런데 과거에는 이런 기지촌과 미군 기지가 있는 마을을 낙인찍으며 차별했던 역사가 있었습니다. 소위 안보 정의의 비용을 특정 지역에 부담시키면서 차별을 통해 그들을 효과적으로 분리해냈던 것이지요. 특히 기지촌의 여성들에 대해서는 사회적 차별이 훨씬 심했는데, 그래서 1990년대까지도 이런 여성들에 대한 범죄는 '미제 사건'이라는 특징을 보입니다. 가족도 형제도 찾지 않는 여성들, 소위 버림받은 여성들의 범죄에 대해 사회도 무관심했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달라진 환경과 바뀌지 않은 것들

그런데 최근에 우리가 언론을 통해 보게 되는 미군 범죄에서는 이런 모습들을 쉽게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 기지촌의 여성들이 대부분 외국인 여성들로 교체되면서 한국 사회와 접점을 많이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같은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닌데 과거보다 이런 사정을 알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다른 측면은 미군 병사들이 도심에서 한국인들을 만나는 빈도가 상대적으로 많이 증가했다는 사실입니다. 인터넷이 확산되고 한국계 미군들이 증가하면서 이제는 기지촌뿐만 아니라 홍대나 압구정동, 강남 등에서 미군들을 만나게 되는 일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당연히 지방이었다면 관심을 끌지 않았을 사건들이 더 자주 관심을 받게 되었겠지요. 하지만 무엇보다 최근 미군 범죄가 많이 보도되고 있는 것은 한국에 너무나 많은 CCTV가 생기면서 이들의 범죄가 영상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파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최근 언론에 보도된 범죄들은 대개 CCTV나 블랙박스 영상으로 드러나다보니 미군들의 폭력성이 부각된 것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바뀌지 않은 것들이 많습니다. 여전히 범죄를 포함한 기지의 사회적 문제는 기지촌을 중심으로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폭행과 같은 남성들에 대한 범죄보다 여성들, 아동들에 대한 성범죄가 해결하기 훨씬 어렵습니다. 지역적인 분리와 역전 현상은 더욱 넓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인 10년 전쟁으로 병사들의 전쟁 스트레스가 동맹국에서 범죄로 나타날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안보 세력뿐만 아니라 미국의 안보 세력이 만들어낸 전쟁이 한국 시민들의 안전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입니다. 실제 미군 병사들의 재판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직접 호소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미군 부대 내에서 무분별한 행동의 증가와 성범죄의 증가가 최근 미군 범죄의 증가를 설명하는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환경 정의의 문제에서는 환경경제학을 바탕으로 오염은 외부 비용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고, 인위적으로 이런 외부경제에 비용을 매기는 방식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오염 책임자에게 비용을 물어 환경 정화에 사용하는 것들이 대표적입니다. 기지로 인한 피해들 중에서 특히 소음과 관련한 부분이 이런 방식을 택합니다. 소위 군사 기지 주변의 주민들이 받은 소음 피해를 금전으로 해결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보다 그 피해 범위가 다른 군 기지 피해에 비해 훨씬 광범위하게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기지촌으로 분류되지 않는 사람들의 피해가 증가하면서 사회적인 공감대를 더 쉽게 획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른 군 기지로 인한 피해에서는 아직 이런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여전히 이런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들이 감수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해결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범죄 해결을 위해 미군과 협상하거나 피해자들의 원상회복을 위한 보상과 같은 노력보다는 이들을 은폐하고 분리해내는 방식이 아직은 더 익숙합니다. 그나마 언론을 통해 관심을 모은 사건에 한해서만 문제 해결에 사회적인 자원을 투여할 뿐입니다.
 

▲ 지난 2일 밤 서울 도심에서 난동을 부리고 차로 도주한 혐의를 받는 주한미군 중 한 명인 C 하사가 11일 오후 서울 용산경찰서에 재출석하는 모습. ⓒ연합뉴스


삭제된 기지촌의 사회적 맥락

그런데 "미군 범죄가 증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은 이런 기지촌의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탈락시킵니다. 그곳에 미군 기지가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미군 범죄 대응은 이런 왜곡된 안보 정의의 문제와 함께 피해자들의 인권을 회복해 문제가 반복되지 않도록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미군 개인의 폭력성과 특수성을 강조해서 다른 외국인 범죄에서처럼 '미녀와 야수'라는 자극적인 프레임에 넣어버리게 되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탈락시킨 미군 범죄는 오로지 병사 개인의 폭력성으로만 설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원인이 그들이 야수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버리면 아무런 해결책도 찾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피해자의 인권도 이런 폭력성을 설명하는 도구가 되기 쉽습니다. 이런 경우 결국 해결책이라고는 그들에게 더 강한 처벌을 요구하는 것밖에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실제로 사회가 원하는 대답은 경찰의 행정권 강화와 가해자 처벌 강화 같은 손쉬운 방식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제게 요청하는 한 줄짜리 인터뷰 역시 그런 면을 강조하고 싶을 때 사용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군 기지에서 사는 사람들의 평화권

저는 미군 범죄가 미군 기지 주둔의 사회적 비용 문제와 함께 군사 기지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평화권 문제를 고민할 수 있는 주제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미군 범죄뿐만 아니라 기지로 인한 환경 오염과 주민 건강 문제, 그리고 훈련 피해 등도 그렇게 다루어지길 바랍니다. 미군 범죄를 이야기할 때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로 인한 피해자들의 지친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강정마을과 대추리 투쟁에서 주민들의 생존권만이 아니라 군사 기지 확장과 새로운 군사 기지 건설 문제를 보면서 여전히 전쟁을 준비하고 연습하는 우리 사회의 평화 안보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몇 년이 지나면 미군 범죄를 뉴스에서 잘 보지 못하게 될지 모릅니다. 지금 서울에 있는 미군 기지는 대부분 경기도 남쪽의 평택으로 이전할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기지와 뉴스를 장식하는 폭행 사고가 우리 눈앞에서 사라졌을 때, 미군의 도시는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육지 위의 섬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가 접하는 불편한 미군 범죄 앞에서 함께 고민해야 할 숙제일지 모릅니다.

(*이 글은 "미군 범죄를 보는 다른 시선"이라는 제목으로 주간인권신문 <인권오름>에도 실렸습니다. <인권오름> 기사들은 정보공유라이선스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정보공유라이선스에 대해 알려면, http://www.freeuse.or.kr을 찾아가면 됩니다.)

 
 
 

 

/박정경수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사무국장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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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대 대선 부정선거 진상 규명 서울시민 공청회

제18대 대선 부정선거 서울 시민공청회
(서프라이즈 / huknow / 2013-03-16)

 

단식 13일째, 춘몽의 절절한 외침으로 초대의 글을 대신합니다.

“엄천난 부정선거가 저질러져도 그냥 침묵하고 나 하나 잘먹고 잘사면 된다 생각하는 사람들 모두 공범입니다. 공범!”

“여러분! 저만큼은 아니더라도 분노하셔야 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이 대한민국입니다. 이대로 가면 힘 있고 돈 있는 자들만 살아가고 힘없고 돈 없는 60% 70% 80%되는 사람들은 모두 노예로 살아가야 되는 겁니다.

노예도 한우리에 갇혀서 던져주는 먹이나 먹어가면서 히히낙낙하고 테레비 보면서 스포츠 스타, 연예인들 보면서 킥킥 거리면서 살아가야 하는, 사육되는 동물이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 ... 일어나야 됩니다. 일어나서 정의를 세우고, 개표정의를 바로 세워야지 이 나라가 문명국가고 이나라가 선진국가고 이번에 수개표를 반드시 관철시켜야지만이 이 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써나가게 됩니다.

만약에 이번에 수개표를 관철시키기만 하면 이 대한민국은 세계 선도국가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나라는 이대로 박근혜의 5년이 지나가면 5년 뒤에 이 사람들이 부정선거 또 안 저지르겠습니까?

지금까지는 내내 지들 멋대로 맘대로 했는데 선거 때만은 정직해진답니까? 이명박 5년 내내 지맘대로 했는데 선거 때만은 공명정대하게 치러졌습니까? 그렇게 생각되십니까?
‘상식’을 회복하십시오!


패널: 이경목 교수(세명대, 전자상거래학)
신상철 대표(진실의길)
한영수 대표(선거무효소송인단)

일시: 2013년 3월 21일(목) 저녁 7시

장소: 영등포산업선교회 ( 02- 2633-7972 )

문의: 011 457 0211, 018 644 6814

주최: 18대 대선부정선거규명목회자 모임

 

huk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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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도 몰라, 5.18도 몰라”… 근현대사 수능에서 제외

 

현대사가 철저히 외면 받기 때문
 
耽讀 | 등록:2013-03-17 13:50:34 | 최종:2013-03-17 14:08:3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인쇄하기메일보내기
 
 


 

 

“안중근 의사가 누군지 아세요?”(선생님)

“안과 의사 선생님.”(학생1)
“아냐 소아과 선생님이야.”(학생2)
“아냐 치과 선생님.”(학생3)

몇 년 전 삼일절을 맞아 안중근 의사가 누구인지 학생들에게 묻자 나왔다는 학생들 답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사실 역사가 고등학교 선택과목이 되었다가 거센 비판을 받아 필수과목이 되고, 수능시험에 역사가 선택과목이 되면서 이미 예견된 일입니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만 아니라 이제는 4.19혁명과 5.18광주민중항쟁 그리고 6.10항쟁도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현대사가 철저히 외면 받기 때문입니다. 특히 올해 수능에는 근현대사 과목도 사라집니다. 교육과학기술부에 따르면 지난 2009년 교육과정 개정이 이뤄지면서 2011년 당시 고등학생 1학년생부터 국사와 한국근현대사, 세계사 과목이 한국사, 동아시아사, 세계사로 조정·통폐합됐다고 <미디어오늘>은 전했습니다.

한국사로 근현대사 내용이 편입되긴 했지만, 독립 과목이 폐지되고 수능에서 별도의 시험을 치루지 않으면서 근현대사 역사 인식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난 2009년 당시 학계에서는 전근대와 근현대사로 하나로 묶어 통사로 배워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근현대사 과목을 폐지하기로 했습니다.

문제는 통폐합하면 아이들이 공부를 더 하는 것이 아니라 외면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학생들은 사회탐구영역 10개 과목 중 2개 과목을 선택합니다. 외울 것이 많은 국사는 어렵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많기 때문에 그 동안 수능에서 철저히 외면 받았습니다. 지난해 수능에서 사회탐구영역 11개 과목 중 국사를 선택한 비율은 7번째였습니다.

특히 한국사는 필수이지만, 수능 과목이 아니기 때문에 집중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미디어오늘>에 따르면, 기존 근현대사 과목은 사회탐구영역 과목 11개 중 시험 선택 비율이 3번째였습니다. 국사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그런데 올해부터 근현대사가 통폐합되면서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외면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국사를 선택하지 않은 아이들이 한국사를 선택할 가능성이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평화적 데모를 하는 경북고교생을 개끌듯 끌어가는 경찰. 앞으로 우리 아이들은 이승만 독재 진실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한 누리꾼도 “지금까지의 수능에서 근현대사는 선택비중이 높았던 과목"이었다면서 "그런데 통합해서 한국사로 만들어버리고 사회탐구 시험 과목을 2개로 줄어버린 상황에서 누가 미쳤다고 한국사를 공부하겠냐”고 비판했다. 다른 누리꾼도 “안 그래도 양이 많아서 국사를 안 했는데 근현대사까지 포함되면 누가 한국사를 선택하겠느냐”라고 반문했다.-<미디어오늘> 수능에서 사라진 근현대사… “5. 18이 뭐에요?”

이미 근현대사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외면받았습니다. 심지어 ‘좌파역사교과서’를 고쳐야 한다며 개정에 나섰습니다. 지난 2008년 뉴라이트 계열의 교과서포럼이 만든 <대안교과서>가 ▲ 식민지 근대화론을 인정하고 ▲ 제주 4·3 사건을 좌파 세력의 반란으로 규정하며 ▲ 이승만·박정희 반공 독재체제를 긍정한 내용이 나왔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12월 한 출판사가 집필진 동의 없는 수정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자 이명박 “그 출판사는 정부가 두렵지 않느냐”는 무시무시한 발언을 했었습니다.

국산편찬위원회도 지난 해 6월 ㄱ출판사의 역사교과서에 나온 ‘한·일 을사늑약’ ‘을사조약’으로 수정할 것을 권고했고, ㄴ교과서는 일본 역사를 설명하면서 ‘국왕 중심의 새로운 정부’라는 대목을 ‘천황 중심의 새로운 정부’로 수정하라는 권고를 했었습니다. 결국 두 출판사는 국사편찬위 권고를 받아 수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ㄹ교과서에서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들 사진’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김구 선생을 가리키며 설명하는 것을 삭제하고, 이승만·이동휘·안창호 선생만을 임시정부 요인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고쳤습니다.

무엇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재임 첫해만 5.18민중항쟁기념식이 참석하고, 이후는 빠졌습니다. 하기사 5.18국립묘지 ‘유영봉안소’에 파안대소한 것을 안다면 그의 역사인식은 '빵점'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인 지난 2004년 5.18국립묘지를 찾아 영령들의 영정을 모셔놓은 ‘유영봉안소’에서 파안대소를 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은 2008년 10월 ‘건국 60년’을 맞아 80여개 영상물이 담긴 <기적의 역사>라는 영상물과 책자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적의 역사>는 독재정권의 통치와 이에 항거한 민주화 과정의 현대사는 빠져 있고 경제 발전과 옛 정권의 치적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기적의 역사>에는 노골적인 박정희 전 대통령 영웅만들기를 중심으로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의 업적 찬양 일색으로 영상 40개로 이루어진 1960~70년대 부분의 경우 박정희 전 대통령 관련 영상이 절반이 넘는 22개이며 영상마다 박정희 대통령을 산업화의 지도자로 극찬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례식 장면은 “태산이 무너지듯,강물이 갈라진듯 이충격 이비통 어디다 비길까”라는 심금을 쥐어짜는 내레이션 대사를 넣어 그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극대화시켰습니다. 4·19 혁명을 짓밟은 자에게 찬사를 보낸 정권이 이명박 정권입니다.그리고 4·19 혁명을 ‘4·19 데모’라고 비하했습니다.

▲ 2008년 10월 교과부가 펴낸 소책자 ‘기적의 역사’ 6쪽 내용. ‘4.19데모’라고 써 있다. ⓒ<오마이뉴스>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 역시 현대사 인식에 굉장히 문제가 많습니다. 5.16군사반란을 구국의 혁명이라고 했고, 그가 내정한 각료들은 하나같이 교과서가 기술한 ‘5.16군사정변’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습니다. 특히 지난 2008년 뉴라이트가 만든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출판 기념회 축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말했습니다.

“청소년들이 왜곡된 역사 평가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뜻있는 이들이 현행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청소년들이 잘못된 역사관을 키우는 것을 크게 걱정했는데 이제 걱정을 덜게 됐다…필자 여러분이야말로 후손들을 위해 큰 일을 하셨고, 덕분에 걱정을 덜게 됐다…나라는 인간에게 몸과 같고 역사는 혼과 같다. 건국 60주년을 맞아 성장한 몸에 걸맞게 혼을 바로 세워야 한다. 우리 대한민국은 피와 땀과 눈물로 역사상 유례 없는 성취를 이루었다. 근현대사에 대해 국민이 정확히 알아 자긍심을 갖고 이를 토대로 국민통합과 결집을 이루어 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꿈꾸는 선진국으로 갈 수 있다.” - 2008.05.26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출판 기념회 축사

박근혜 대통령 현대사 인식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박근혜 정부 각료들이 끝까지 5.16을 군사반란으로 부르지 않는 것은 민주공화국 장관 자격이 없습니다. ‘쿠데타’는 “국가에 대한 일격”이라는 뜻을 지닌 프랑스어 ‘coup d’État’로 “국민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무력 등의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정권(政權)을 빼앗으려고 일으키는 정변”을 뜻합니다.

쿠데타는 군대, 경찰, 그밖의 무장집단 등에 의해 은밀하게 계획되고 기습적으로 감행되며 정권탈취 후에는 군사력을 배경으로 계엄령 선포, 언론 통제, 반대파 숙청, 의회의 정지, 헌법 개폐(改廢) 등의 조치를 취한다. 일반적으로 쿠데타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는 것을 국가적인 규모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위기, 기성 정치권의 무능, 의회의 정상적인 기능 마비 등이며, 또 이에 대해 국내에 유일한 무력조직으로서의 군대나 경찰 및 이를 지휘하는 야심적인 정치가나 장군 등의 존재이다.-<다음백과사전> ‘쿠데타’

쿠데타는 군과 경찰 등이 은밀하게 계획된 것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규정합니다. 시민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5.16은 당연히 군사반란, 군사정변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5.16이 군사반란이라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

그리고 5.18광주민중항쟁 역시 근현대사가 빠지면 “5.18이 뭐냐”는 질문에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5.18은 전두환 독재정권이 시민을 무참히 살해한 사건입니다.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는 이 같은 비극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수능에 목매는 나라에서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면 외면은 당연합니다. 어쩌면 이 땅의 수구기득권세력은 자신의 더러운 역사를 아이들에게 가르칠 마음이 없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일본 극우가 종군위안부와 징용 그리고 일본제국주의 어두운 역사를 가르치지 않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안 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4.19혁명과 5.16군사반란, 5.18민중항쟁을 가르쳐야 합니다. “4.19도 몰라요, 5.18도 모르”는 비극이 일어나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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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문명은 인종주의 지배체제

 

 

 

서구문명은 인종주의 지배체제
 
[제3세계 눈으로본 서구열강](24) 반인륜적 망령의 인종주의 해악
 
유태영 박사
기사입력: 2013/03/17 [23:45] 최종편집: ⓒ 자주민보
 
 

인종주의라고 하면 떠오르는 생각이 1930년대에 있었던 독일의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한 사건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독일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이전에는 인종주의가 없었는가? 아니다. 나치의 반유대주의적 사건 이전에도 역시 뿌리 깊은 인종주의가 서구문명의 역사에 존속되고 있었다.

<인종주의>의 고대적인 역사의 기원을 히브리인의 신화에서는 노아 할아버지의 세 아들 <야벳의 자손>, <셈의 자손> 그리고 <함의 자손>들이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번창하여 서로 상이한 인종의 기원이 되었다고 말해 주고 있다.(BC 3,800, 구약성경 창세기 10장) 하지만 히브리인의 신화적인 고대의 설화만을 가지고는 진정한 의미로 오늘의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인종주의 역사와 문제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에 있어서 사람들은 자신의 종족이 다른 종족보다 우월하다고 보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고대인들은 주로 피부, 머리카락, 눈동자의 색깔, 얼굴의 모양 그리고 종교적 우월성을 가지고 인종주의에 있어서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특히 기독교시대에 들어와서 다른 종교와 문화에 대하여 인종적 적대감을 고취한 역사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1800년대에 “반유대연맹”이라는 단체가 등장하여 독일을 비롯하여 서유럽에서 인종주의를 선동한 역사가 있다. 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많은 분쟁과 전쟁의 역사는 <인종주의>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단 반인륜적인 망령의 <인종주의>에 대한 올바른 관찰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지난 500년 동안 유럽의 국가들이 인종주의를 전 세계로 확대시켜 다른 지역 사람들을 살육하고 착취하면서 노예화 했다. 인종주의적 망령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뿐만 아니라 냉전이라고 하는 비도덕적인 이데올로기로 되살아나 인종간의 갈등과 증오를 고취하고 있었다. 오늘 미국에서는 정치적으로 이른바 “신보수주의”와 함께 망령의 인종주의 현상이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인종주의를 생물학적인 면에서 신체의 특징에 따라 구분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오늘의 인종주의는 사회과학 분야와 함께 정치적 분야에서 계급과 자본, 지배와 피지배 그리고 이득쟁취의 직능적 과제 등이 가장 중요시 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인종주의는 경제와 정치적인 관점에서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인종주의가 사회적 집단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개인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수단으로 열등한 문명과 인종들을 예속시키고 때로는 멸절시키기도 한다.

1. 중세 서유럽의 인종주의

AD 7세기 이후에 있어서 중세 유럽의 정치적 세계를 지배한 제국은 <로마제국>, <비잔틴제국>, <이슬람제국>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로마제국과 비잔틴제국은 AD 476년에 동서로 분열되어 두 개의 제국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개의 제국은 로마 카톨릭 교황청의 통치하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1054년까지 578년 동안 명목상으로 로마 카톨릭 교황청의 통치 하에서 하나의 교회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중세 유럽에서 오직 <이슬람제국>만이 비기독교제국으로서 단독으로 정치와 사회 그리고 종교적인 면에서 두 개의 기독교제국과 대립하여 막강한 이슬람제국의 두각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슬람제국을 일명 <사라센제국>이라고 부른다. 이슬람제국은 고대로부터 사라센족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사라센족의 기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적인 설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BC 2000년 경의 신화적 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가 후손을 출산하지 못함으로 아브라함이 이집트 출신의 하녀 하갈이라는 여인에게서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브라함이 100세에 본부인 사라가 임신하여 아들을 하나 낳았다. 그러므로 이집트 출신 하녀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은 사막으로 추방을 당해 쫓겨났으며 거기서 방랑자의 조상이 됐다고 한다. 사막의 방랑자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사라센 민족을 형성하였다고 한다.(구약 창세기 16장 참조)

이와 같은 좋지 못한 전설적 구전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이슬람제국은 한때 세력이 팽창하여 유럽에서 대제국의 영향력을 과시하면서 세속적 성취는 물론이고 문화적으로 서유럽의 기독교국가들 보다 더 앞서 있었다. 이슬람제국은 그리스 철학과 자연과학을 받아들임으로써 국력을 확대시켜 로마제국을 제치고 고대문명의 계승자로 자처하고 있었다.

특히 1187년에 이슬람제국이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통치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하여 이슬람제국의 세력이 서유럽과 비잔틴제국을 제치고 상당 기간 동안 문화와 군사적으로 우세한 통치세력으로 등장하여 서유럽의 기독교제국을 곤경에 빠뜨리고 있었다. <서로마제국>, <비잔틴제국>은 살 길을 찾아야만 했다.

다급해진 서유럽의 <로마제국>과 <비잔틴제국>은 막강한 이슬람세력을 물리치기 위한 명분으로 그동안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서로 연합하고 단합하여 1095년에 십자군을 창설하였다. 십자군을 창설한 목적은 이슬람의 통치하에 있는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함이었다. 1096년에 제1차 십자군전쟁을 시작하여 1279년까지 제9차 십자군전쟁을 시도하여 183년 동안 계속하여 싸웠다.

183년 동안이나 계속하여 싸운 십자군전쟁은 결국 예루살렘 탈환을 성취하지 못하고 실패한 전쟁으로 끝나고 말았다. 중세기의 십자군전쟁은 서구의 기독교제국이 예루살렘을 탈환한다고 하는 허황된 주장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으며 사실은 이방종교의 나라에 대항하여 싸운 <인종주의>적 전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중세기의 십자군전쟁은 상이한 인종 사이에서 우열을 판단하기 위하여 우등하다고 스스로 판단한 인종이 열등하다고 판단한 인종을 지배하려는 전쟁이었다. 동시에 유럽의 기독교제국은 이러한 전쟁을 신의 섭리에 따른 성전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스마엘- 사라센- 이슬람- 마호메트로 연결되는 이슬람에 대하여 기독교인들은 부정적인 인종주의적 편견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슬람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부각시키면서 십자군전쟁을 183년 동안이나 계속했다. 하지만 서구의 기독교제국은 정반대로 주장하기를 우리는 신의 뜻에 충성하고 종교적 봉헌심을 통하여 악마와 싸우는 고상한 정신적 인종주의자라고 자신의 우월감을 묘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12세기 중반 이후에 들어서서 십자군 전쟁이 점점 난관에 빠지게 됐으며 1187년에는 예루살렘을 또 다시 사라센- 이슬람에게 빼앗김으로써 서유럽의 인종주의적 우월감과 낙관론은 완전한 실패로 사라지게 되었다.

예루살렘이 또 다시 완전히 이슬람의 손으로 넘어간 후 1254년에 이르러 유럽의 인종주의적 낙관론자들은 무력으로는 이슬람인들을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결국 기독교와 이슬람교, 유럽인과 아랍인 등 서로 다양한 형태의 인종들이 상대방을 자기 나름대로 이해하고 접촉하는 길 밖에 별 도리가 없음을 중세기 십자군의 치열한 전쟁을 통하여 결과적으로 터득한 셈이다.

중세기 서유럽 기독교제국이 이슬람제국과 당면했던 역사적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오늘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12-13세기에 있어서 평화적인 공존을 위하여 기독교국가와 이슬람국가 사이에 서로 관용적인 화해의 관계를 모색하여 평화를 유지한 역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두 개의 종교가 상호 존중의 정신으로 <예수>와 <마호메트>의 이름을 빼버린다면 <하느님>은 모든 인종들에게 평등한 하느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오늘의 세계가 원하는 평화로운 공존이 아니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상호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삶의 지혜는 인종주의를 극복하는 길에 있을 뿐이다.

2. 식민지 자본주의와 인종주의

서구유럽의 역사에서 중세기는 종교와 관련된 인종주의로 인하여 많은 문제들을 일으켰다. 그런데 15세기에 이르러서 유럽인들의 선박들이 서아프리카 해안을 넘어 아시아와 아메리카로 진출하면서 유럽인들의 인종주의는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났다. 유럽인들이 이번에는 종교와 관련된 인종주의가 아니라 정복자로서 점령과 착취를 정당화하는 새로운 인종주의자로 변장된 모습으로 등장했다.

유럽인의 식민지 자본주의는 점령과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새로운 인종주의가 필요하고 중요했다. 유럽인들은 점령지의 원주민을 “저열한 야만인”으로 규정하고 유색인들의 생명, 토지, 문화, 사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 “신의 뜻”을 수행한다고 정당화하고 있었다.

영국인 법률학자 브레캔리지(H. Brackenridge)는 주장하기를 “인디언들이 토지를 경작하지 않고 유목생활을 하고 있음으로 인디언들은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라고 법률적 괴변을 주장했다. 유럽의 식민지 인종주의자들은 인디언들이 19세기 말에는 거의 멸절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사실에 있어서 인디언들이 아메리카대륙에서 거의 절멸되고 말았다.

15세기 말에 아메리카를 점령한 유럽인들은 처음에는 원주민 인디언들을 노예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인디언들을 노예로 삼으려면 싸워야 했으며 싸우다 서로 죽는 위험이 많았다. 인디언들은 노예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안으로 나온 것이 아프리카 흑인 노예노동력을 확보하는 노예제도였다. 흑인 노예제도는 1700년대 초까지 북미 식민지 사회구조 안에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흑인 노예제도를 확립시키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은 ‘인종주의”를 부추기는 방법이었다. 흑인은 생리학이나 심리적인 면에서 인종적으로 열등한 인종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인종주의적 노예제도가 만들어 지는 것을 확고히 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유럽인들은 인간을 “유럽인”, “아메리카인”, “아프리카인”, “아시아인”으로 나누어 태생적으로 우열을 논하는 인종주의적 도식을 주장했다.

미국은 독립선언서에서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미국의 헌법을 기초한 제퍼슨은 노예제도의 폐지에 대하여 관심이 전혀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제퍼슨은 오히려 흑인의 내적이며 자연적인 열등성을 지적하면서 흑인들은 더위에 강하기 때문에 육체노동에 생물학적으로 적합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이중적인 모순은 하느님이 인간의 조상 아담과 이브를 창조했다고 하는 성경을 믿는 미국인들에게 자기모순적인 과오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인종을 다른 인종과 구분하는 것은 과학적 근거는 없다. 하지만 과학적인 생물학으로 인종주의를 부인하더라도 인간의 사회적 현실에 있어서는 인종차별이라고 하는 “인종주의”가 그대로 역사 속에 존재하고 있다.

오늘 서구문명의 자본주의적 발전은 <인종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인종주의는 유럽의 식민지 자본주의를 확립시키는데 있어서 잔인한 정복전쟁과 인종학살을 정당화시켰으며 또한 산업에 필요한 자본축적을 위하여 비인간적인 노동의 착취를 합리화시키고 있었다.

미국을 위주로 하는 유럽의 자본주의 지배세력은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주축으로 삼는다.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야만적 억압과 탄압으로 미국의 유색인들의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탄압하며 비백인들을 이방인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미국의 백인 인종주의는 제3세계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고 민중의 자의식을 퇴보시키는데 필요한 모든 수단방법을 다하고 있다.

인종주의가 비인간적이라는 비판의 소리가 커짐에 따라서 제국주의 식민주의자들은 이에 대한 방어책을 찾아내야 했다. 19세기가 되면서 식민 자본주의자들은 인종주의를 다윈의 진화론의 언어를 빌어 <자연법칙에 의한 선택>이라고 변명했다. 한편 기독교인들은 인종주의적 인간의 억압에 대하여 변명하여 유색인들에게 성경을 인용하여 <정복자들과 억압자들에게 다른 뺨도 내주어라>라고 요청했다.

식민 자본주의 인종주의자들은 소수가 미개한 대중을 지배하는 개척자적인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한 예를 들어 말하면 1890년에 3억이나 되는 인도인들을, 영국의 겨우 7만명의 군인과 6천명의 영국인 정치인들이 통치했다. 19세기 미국의 최고 동물학자인 아가시즈 박사는 미국의 흑인들에 대하여 인종주의적인 멸시의 말을 했는데 <흑인들의 뇌는 백인이 어머니 자궁에서 7개월 된 태아의 불완전한 뇌와 같다>라고 악담을 했다.

식민 자본주의와 백인의 인종주의적 우월성은 유색인을 열등인종으로 규정해 놓고 멸종, 괴멸, 노예와 흡수 등을 수세기 동안 계속해 왔다. 식민 자본주의는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로 제3세계를 억압하고 착취하면서 그 원인과 결과를 오히려 뒤집어 거꾸로 주장을 하면서 모든 책임을 피압박자들에게 전가시키고 있는 것이다.

식민 자본주의가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경제적 착취를 강요하는 핵심적인 수단과 방법이 바로 인종주의이다. 식민 자본주의 피라미드의 최고 정점위에 올라 앉아 있는 백인 자본가들은 아래를 굽어보면서 인종주의적 우월성을 과시하고 있다.

인종주의와 백인 우월주의 사이에는 언제나 밀접한 관계가 존재한다. 인종주의가 끈질기게 살아남는 그 주요한 이유는 바로 자본주의 질서가 인종주의를 보존해 주면서 합리화시킴으로써 상호 결탁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인종주의는 미국의 식민 자본주의 착취체제도와 연결된 유기체이다. 따라서 미국의 인종주의와 싸우는 제3세계의 투쟁은 자본주의 뿌리를 뽑아내는 혁명적인 투쟁이 되어야 한다. 이 길만이 인류의 고질적인 인종주의 질병을 고칠 수 있다.

3. 프랑스의 인종주의

프랑스의 인종주의 문제는 프랑스의 문화와 종교가 완전히 다른 아프리카에 대한 프랑스의 침략으로 인하여 발생했다. 프랑스와 인접해 있는 유럽의 외국인들 중에 예술가, 기술자, 상인과 노동자들이 수없이 많이 프랑스에 살고 있었으나 프랑스인들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은 프랑스인과 같은 종교와 같은 문화권의 배경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 이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에 프랑스에는 아프리카에서 이른바 제3세계의 이민의 물결이 파도처럼 프랑스에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문화와 종교가 다를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빈민에 속하고 교육수준이 낮은 아프리카인들이 프랑스의 오랜 식민통치의 부산물로써 난민들이 되어 프랑스에 체류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찌하여 아프리카의 난민들에게 프랑스의 인종주의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일까? 왜 아프리카인이 문제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프랑스가 북아프리카에서 식민통치를 수 세기 동안 어떻게 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편의상 ㄱ, ㄴ, ㄷ순으로 살펴본다.

ㄱ. 프랑스는 1830년에 북아프리카 알제리에서 오스만 세력을 밀어 내고 식민통치를 시작했다. 1830년 이전 시기에 영국과 스페인, 프랑스는 식민지 쟁탈전을 북아프리카 에서 오랫동안 계속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는 알제리를 독점하였으며 알제리의 청년 17만 3,000명을 징집하여 전쟁터로 내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알제리 청년 15만명을 프랑스군으로 둔갑시켜 전쟁터에 내보냈다. 알제리는 청년들의 인명피해 뿐만 아니라 재산과 경제적 착취를 백년동안 계속하여 당했다. 프랑스로 인한 알제리의 비극의 역사는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다.

알제리 민중들의 독립투쟁운동은 계속됐는데 약 100만명이 죽임을 당했고 70만명이 투옥됐다. 프랑스 식민통치의 잔악성에서 프랑스의 고급문명인의 모습과 기독교 전통의 성스러운 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1962년 7월 5일에 수십년 동안의 치열한 투쟁 끝에 알제리는 드디어 독립을 쟁취했다. 다른 북아프리카 나라들에게 독립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알제리가 독립은 쟁취하기는 했지만 알제리의 고질적인 문제는 20만 명의 친프랑스인들, 즉 <하르키>의 문제였다. <하르키>란 무었인가? <하르키>는 알제리 민중을 반역한 악질적인 <친프랑스 매국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국의 친일파와 같은 족속들을 알제리에서는 <하르키>라 부른다.

<하르키>들은 혈통으로는 알제리인이 분명하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완전히 프랑스인처럼 행세한 민족반역자이며 매국노들이다. <하르키>들은 알제리가 독립을 쟁취한 후 알제리에서 발붙일 자리가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하르키> 20만명이 살길을 찾아 무작정 상경식으로 프랑스로 밀려갔다. 프랑스는 20만명의 알제리인 <하르키>들은 냉정하게 불청객으로 취급을 했으며 그들은 골칫덩어리 난민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르키>들은 버림받은 채 프랑스 도시의 어두운 빈민굴에서 비참하게 일생을 살아가고 있다.

ㄴ. 튀니지는 1,300년의 찬란한 문화재를 자랑하는 이슬람 나라였다. 하지만 1881-1956년 까지 75년 동안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1945년의 기록에 의하면 프랑스인 144,000명이 튀니지에 상주하면서 식민통치를 집행하고 있었다. 동시에 수많은 튀니지인들이 프랑스에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하여 붙잡혀 왔으며 훗날에 프랑스에서 제3세계 난민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1956년에 튀니지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 하지만 튀니지 정권은 여전히 프랑스의 정치적 영향 하에 놓여져 있었다. 튀니지의 대통령 벤 알리는 프랑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친프랑스 경향의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벤 알리 대통령은 36년 동안 친프랑스 독재정권으로 통치를 하다가 튀니지 민중들의 저 유명한 <제스민 혁명>에 의하여 권좌에서 축출되고 35년의 징역형 선고를 받았다.

프랑스는 친프랑스 독재정권을 이용하면서 튀니지 착취를 정당화했다. 내 것은 내 것이요, 네 것도 내 것이다라고 하는 착취 방법을 계속했다. 튀니지 노동자들이 프랑스에 많이 끌려와 상주하면서 노동의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ㄷ. 코트디부아르는 1904년에 서아프리카 프랑스령에 편입되어 있다가 1958년에는 프랑스 공동체 안에서 한 개의 자치주가 됐다. 1960년에 독립투쟁의 결과로 독립국이 되기는 했으나 프랑스 공동체 안에서라는 말은 여전히 붙어 있었다. 역대 대통령들은 프랑스를 배경으로 삼고 집권을 할 수밖에 없었다.

브와니 대통령은 33년 동안 친프랑스 독재로 집권하면서 프랑스의 기업체들이 건설, 물, 통신, 교통 등 모든 산업체들을 독점하도록 허용하는 통치를 했다. 그리하여 프랑스와 코트디부아르는 두 나라가 아니라 한 개의 나라인 모양으로 항상 잡음이 계속되고 있었다. 2002년에 북쪽의 반군세력이 수도인 아비쟝과 전국을 장악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프랑스의 개입으로 인하여 2003년에 코트디부아르는 독립이 아니라 북과 남으로 분열됐다. 북과 남 사이에 유혈전이 벌어지자 유엔군 8.000명과 프랑스군 8,000명이 코트디부아르에 주둔했으며 무기는 약 300만정이 코트디부아르에 유입됐다. 그바그보 대통령은 임기와는 관계없이 계속하여 집권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바그보 대통령은 2010년에 프랑스에 배신을 당하여 드디어 권좌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프랑스와 코트디부아르의 종속관계가 100여년 동안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코트디부아르의 다수의 난민들이 프랑스에 흘러 들어가게 된 것은 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문제는 오늘의 프랑스가 코트디부아르의 난민들에 대하여 어떻게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인종주의 문제를 처리하는가를 국제사회는 주목하고 있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최고의 문명국이며 신사숙녀의 나라로서 카톨릭 전통을 과시하는 나라이다. 그런데 북아프리카의 이주민들로 인하여 프랑스 사회에서 인종주의가 표출되고 있는 것은 세계의 주목을 일으키는 매우 경악스러운 사실이다.

프랑스에서 이와 같은 인종주의 문제에 대하여 정책적인 면에서 대표적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민족전선, Le Front National>이라고 하는 정당이다. 민족전선은 1972년에 창당하여 1990년 이후부터 프랑스에서 제3당의 위치로 격상하여 정치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면 <민족전선>은 프랑스의 뿌리 깊은 인종주의와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가? 알제리의 <하르키>를 비롯하여 프랑스의 도시마다 가득차 있는 북아프리카 피식민지인들을 취급하는데 있어서 <민족전선>은 인종차별적인 인종주의에 대하여 어떠한 정책을 가지고 있는가?

흑인에 대한 백인의 지배를 당연시하고 있는 프랑스의 주류사회가 북아프리카의 피식민지 흑인노동력이 프랑스로 유입됨으로 인하여 한때 프랑스의 경제가 발전되는 것을 보고 프랑스인들이 흑인들을 반가운 손님으로 환영하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1962년에 알제리가 독립을 쟁취하고 또 다른 북아프리카 식민지 나라들이 줄을 이여 독립을 쟁취함으로써 프랑스와 종주국의 관계는 끊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1970년대에 있어서 프랑스의 경제는 내리막길로 떨어졌으며 실업자의 수가 증가함으로 인하여 북아프리카 나라들과의 관계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로 인하여 프랑스의 기존의 정치세력인 극우파 보수주의가 정치력을 확대하는 좋은 기회로 삼고 인종주의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프랑스의 정치적 변동기에 있어서 제3의 대안으로 등장한 정당이 있었다. 이 정당이 바로 <민족전선, Le Front National>>이었다.

그런데 <민족전선> 뿐만 아니라 보수주의적 인종주의를 주장하는데 대안으로써 <신인종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또 제3의 방법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프랑스의 <인종주의>를 논의하면서 동상이몽으로 흑인문제의 해결책을 주장하고 있었다. 1993년 현재에 프랑스에는 약 440만 명의 북아프리카 출신 흑인들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 129만 명이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민족전선>과 <공화국 민족운동> 그리고 <제3의 방법>을 주장하여 프랑스의 인종주의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이들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ㄱ. <민족전선>의 창시자 르 갈루 (Le Gallou)는 아프리카 흑인들이 프랑스에 정착하는 이민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민족전선>은 인종주의 보다는 오직 <문화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프랑스 문화는 절대로 아프리카 문화를 흡수할 수 없으며 또 흡수되어도 안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민족전선>은 아프리카 문화가 프랑스의 문화와 전통을 보전하는데 있어서 치명적 위협이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모순된 면도 노출하고 있다.

어쨌든 <민족전선>은 프랑스 문화의 우월성만을 고집스럽게 주장하지 않으며 단지 프랑스 문화의 정체성은 다른 문화와 다르며 동시에 각 국가는 다른 문화의 권리를 갖고 있음으로 그것은 보호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민족전선>은 프랑스 민족의 정체성을 역설하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이면서 또 다른 문화도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함으로 이중성의 비판을 받고 있다.

ㄴ. <민족전선>에 반대하여 극우파인 <공화국 민족운동>이라는 단체가 등장했다. 이 단체는 매그레(B. Magret)가 주동이 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유럽인은 종교, 역사, 관습 및 도덕을 공유하고 있으며 동시에 프랑스인의 민족정체성은 형이상학적인 가치로부터 유래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러므로 <공화국 민족운동>은 보편주의적인 <민족전선>의 주장을 강하게 반대하면서 프랑스가 이슬람과 아프리카인을 통합시키기 위하여 수정주의 또는 어떠한 재구성을 시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발상이며 절대로 반대한다고 외치면서 우파적인 보수주의를 주장한다.

ㄷ. 프랑스 인종주의 문제에 있어서 제3의 방법을 주장한 사람은 르펜(Le Pen)이다. 르펜은 극단적인 우파 보수주의자로서 다른 단체들의 주장을 근본적으로 배격한다. 르펜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프랑스는 우리 조상의 땀과 피로 형성된 나라임으로 프랑스의 자부심과 우월성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외국의 이주자들은 자신들의 피를 흘리는 희생적인 행위를 통해서만 그들의 육체와 영혼이 프랑스 영토에 섞여 먼지가 되어 프랑스에 통합될 때, 그때에 비로소 그들이 자신의 조국을 이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르펜은 프랑스의 혈통적 우월성을 강하게 주장한다. 그러므로 신앙, 문화, 사회적 전통에 조금이라도 배치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두려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결론으로 르펜은 프랑스의 고귀한 역사와 다른 길을 걸어온 아프리카 출신인 난민들은 프랑스 사회로부터 추방되는 길밖에 다른 길은 없다고 주장했다.

오늘 프랑스에서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을 인종주의자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들의 이민문제가 심각하다고 시인하는 사람과 특히 북아프리카인들이 프랑스에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수의 비율이 상당이 높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프랑스 경제의 어려움에 따른 실업문제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더 큰 근원적인 문제는 문화차이에서 오는 인종주의적 갈등에 기인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프랑스에서 문화적 갈등을 해소시키는 최선의 길은 두 개의 문화가 융합하여 둘 사이를 구분하는 특성을 사라지게 하는 길이 있을 뿐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을 가리켜 <신인종주의>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신인종주의>의 길도 만일 오늘의 프랑스인들이 과거 프랑스가 수백년간 북아프리카에서 저지른 극악무도한 반종교적이며 반문화적인 식민지 침략통치에 대하여 참된 회개와 반성이 없다면 그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4. 한국 사회의 인종주의

인종주의는 서구 문명국에만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오늘 한국은 미국의 강력한 세계화 침략의 영향권 하에 있으며 미국의 인종주의 질서에 편입된 조건 하에서 인종주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인종주의 <가해자>가 되고 있다.

한국은 중소기업의 무리한 요구에 따라 값싼 노동력을 동남아의 빈곤한 나라에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한국 정부는 이주노동자 관리정책을 올바로 실시하지 못하여 많은 불법체류자를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당황한 정부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제도와 이데올로기로 부당하게 처벌을 가하면서 오히려 당연시 하고 있다.

정부와 마찬가지로 기업체들은 이주노동자를 채용하면서 서구식으로 노동자들의 주권을 거부하고 있다. 한국 기업주들은 이주노동자들이 불쌍하기 때문에 도와주어야 한다는 구제의 대상으로만 보려고 하면서 응당 지불해야할 법적인 임금은 지불하지 않는 오만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이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지 않음으로써 동남아 이주노동자들은 인종주의적 착취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세계화 노동착취가 백인에게만 있는 이야기가 이제는 아니다. 한국의 방직회사가 과테말라에 투자하여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착취에 성공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 기업체는 과테말라 현지 노동자들에게 인종주의적 부당한 노동을 강요하여 국제노동법을 어기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언론의 기사를 읽어 보았다.

<수백명의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 공장의 뜨거운 공기 속에서 일하면서 옆에 있는 동료에게 말 걸기조차 무섭다. 잡담하다 걸리면 한국인 관리가 와서 폭언을 하거나 머리를 마구 때린다. 체벌을 당하면 악취가 나는 화장실로 도망가듯이 가서 실컷 울기라도 하고 싶으나 그것도 쉽지 않다. 화장실을 자주 간다고 한국인 관리자가 면박을 주거나 또 때릴 수 있다. 한국인 관리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늘 고함을 지른다. 그러나 “빨리 빨리-개새끼”라는 일부 단어들의 뜻을 과테말라 여성노동자들은 알고 있다.>

위에 글들이 과테말라 한국 기업의 방직회사의 일상을 소개한 솔직한 일면이다. 과테말라에서 한국 기업들의 불법행위가 그 얼마나 심했기에 미국의 국무부가 현지에 와서 직접 조사를 했을까?

최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동남아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몰상식하고 추악한 인종주의적 사건들은 한탄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한국인들이 외국 노동자들에게 미국식 <인종주의>를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종주의는 서구 자본주의로 인하여 발생했는데 인종주의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자본주의에 오염된 정부가 아니라 민간운동단체들이 국제적으로 연대하여 투쟁의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길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한국을 찾은 파키스탄의 여성으로서 <인종주의 연구자>인 아흐메드 여사가 외친 주장이다.

한국에서 인종주의가 문제시 되는 이유와 원인이 무엇일까? 그것은 약육강식의 서구식 자본주의를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적해야할 요점은 한국인들은 역사적으로 <피지배자>의 심성을 가지고 있음으로 심리적인 반응을 일으켜서 <백인문화에 대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인들의 동남아 이주노동자들을 향한 시선은 <더럽고 추하다, 가난하다, 위험하다, 불쌍하다, 돈만 주면 뭐든지 다 하는 사람들>이다. 이와 같이 한국 사회는 어느 새 미국과 일본의 인종주의를 그대로 닮아가고 있다. <농촌총각 장가보내기>라는 사회적 기현상이 이주노동자의 수를 증가시키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2011년 현재 한국에는 55만여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있다. 그런데 이들 중 상당수가 동남아 이주노동자들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자본주 기업가들은 한국인 노동자의 고용을 기피하고 값싼 외국인 노동자를 선호하고 있기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 수는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일본과 미국의 <인종주의>로 인하여 한 세기를 <피해자>로 살았다. 그러한 비극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에 오늘은 동남아 이주노동자들이 급속히 증가함에 따라 한국은 그들에게 인종주의적 <가해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말을 다시 바꿔 뜻으로 언급을 한다면 한국은 <가해자>라기 보다는 오늘의 역사 속에서 미국과 일본의 제국주의적 강력한 세계적인 영향권 하에서 한국은 동남아시아에 대한 집단적인 <인종주의>질서 안에 편입되어 피동적으로 행동을 하고 있는 것 뿐이다. 한국은 원숭이처럼 미국을 본받아 동남아 이주노동자들에 대하여 인종주의 <가해자>가 되고 있다.

어쨌든 한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인종주의>에 대하여 한국인들이 주동하는 사건이라고 설명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독단적으로 이주노동자들에게 <인종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이 미국 백인을 동경하고 미국이 주장하는 <인종주의> 정책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한국이 이주노동자들에게 <인종주의>를 미국식으로 강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큰 죄악에 빠지도록 유혹을 받는다. 미국 문화에 완전히 빠져 있고 미국의 막강한 힘에 완전히 사로 잡혀 있는 한국 사회는 미국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자유를 주장하지만 역설적으로 미국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미국을 부러워하고 동경하고 있는 것이다.

글을 맺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핵보유가 미국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으며 미국은 세계적으로 소동을 일으키고 있다. 왜 그런가? 미국이 주도하는 <인종주의> 구조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덩달아 소동이다.

미국이 조선의 비핵화를 주장하고 있는데 가능한 주장인가? 미국은 조선이 핵무기를 포기하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이것은 논리적으로 모순된 요구이다. 미국이 먼저 반인륜적이며, 비종교적이며, 반평화적인 <인종주의>를 앞세운 침략정책을 완전히 포기하고 세계적으로 평화에 공헌하는 것이 확인되면 그 때에 네 편 내 편 할 것 없이 동등한 위치와 공통된 목적을 위하여 비핵화를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미국의 특징은 <인종주의>이며 미국의 패권은 <인종주의>에 의존하고 있다. 사실에 있어서 서구 문명의 본질적인 요소가 바로 <인종주의>이다. 오늘 지구상의 문제는 서구 문명의 본질인 인종주의로 인하여 <배부른 세계>와 <굶주리는 세계>로 양분되어 있는 문제이다. 빈부의 격차로 양분된 세계를 고치는 방법은 만민평등의 이념으로 투쟁하는 길밖에 없다.(2013년 3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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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없는 박근혜 인사... 李낙하산 솎아낸 자리에 또 朴낙하산

 

원칙없는 박근혜 인사... 李낙하산 솎아낸 자리에 또 朴낙하산
 
청와대 비서관도 '그 밥에 그 나물'
 
서울의소리 기사입력 2013/03/17 [03:33]
 
 
 

조만간 관가에 대규모 인사태풍이 몰아닥칠 전망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공공기관과 금융기관의 대대적인 물갈이를 예고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지난 11일 취임 후 처음으로 가진 국무회의에서 박 대통령이 공공기관과 공기업의 인사 문제를 직접 거론하며 대폭 ‘물갈이’ 인사를 예고했다. 정부 조직 개편이 지연되면서 이완된 행태를 보인 일부 공기업 기관장에 대해 ‘전문성을 갖고 확실한 책임하에 조직과 업무를 장악하라’는 새 정부의 메시지가 과거 정부에서 임명한 기관장의 '자리 보장'으로 오인되자 대통령이 직접 나서 ‘옥석을 확실하게 가리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서 당면한 국정 과제를 언급한 뒤 “이런 막중한 과제들을 잘해내려면 인사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각 부처 산하기관과 공공기관에 대해 앞으로 인사가 많을 텐데 새 정부의 국정 철학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임명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고 말했다. “인사가 많을 텐데”라는 말로 대폭적인 인사를 예고했고 ‘새 정부 국정 철학 공유’라는 인사 원칙을 제시했다. 박 대통령이 대규모 물갈이를 예고함에 따라 5년 전 점령군처럼 들어왔던 MB맨들이 이번에는 본인들이 쫓겨낼 판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낙하산을 솎아낸 자리에 또 다른 낙하산이 올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공공기관장 인선 과정에서 논공행상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 대통령이 ‘국정철학 공유’를 꺼내든 것은 이명박 정부에서 해당 분야의 전문성 없이 임명된 이들을 걸러내는 명분이면서, 한편으론 박 대통령 대선 승리 기여자, 측근 인사 등 코드가 맞는 인물들이 공공기관장에 입성할 길을 열어두는 것이란 말이 나온다.
<리차드 윤 취재부 기자>

이 날 국무회의에서 박 대통령의 공공기관 인사 원칙은 한층 구체화됐다. 당선인 시절에 제시한 원칙은 ‘전문성’ 하나였으나 이날 ‘국정 철학 공유’라는 한 가지 원칙이 더 보태졌다. 박 대통령은 당선인 신분이던 지난해 12월 25일 “공기업, 공공기관 이런 데에 전문성 없는 인사들을 낙하산으로 선임을 해서 보낸다.

이런 얘기가 많이 들리고 있는데 국민께도 큰 부담이 되는 것이고 다음 정부에도 부담이 되는 일이고 잘못된 일”이라고 말했다. 이런 언급을 감안하면 지난 정권에서 전문성 없이 ‘낙하산’으로 이뤄졌거나 누가 보더라도 ‘MB 사람’이라고 인식돼 새 정부와 국정 철학을 공유한다고 보기 어려운 사람들은 물갈이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이 인사권을 행사하는 자리는 7000여개에 달한다. 이 중 헌법기관 고위직과 고위 공무원, 검찰·경찰 등 특정직 공무원을 제외하고 인사권을 행사하는 공공기관의 자리는 590개에 육박한다. 한국전력공사·한국철도공사 등 공기업 30개, 국민연금관리공단·한국토지주택공사(LH) 등 준정부 기관 87개, 산업은행·수출입은행 기타 공공기관 178개가 대상이며, 이곳의 기관장과 감사가 모두 대통령의 실질적인 인사권 아래 있다.

이 가운데 연내 임기가 끝나는 공공기관장, 감사 등이 100명 가까이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광우 국민연금관리공단 이사장과 이채욱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은 임기를 남겨둔 상태에서 사퇴해 현재 공석으로 있다.

MB맨들 100명이 1차 타깃


이 중 청와대가 공공기관장 재편 과정에서 전문성 없이 낙하산으로 내려온 이명박 정부 인사는 물러나게 하고, 전문성을 갖춘 관료 출신 인사는 공공기관 및 기관장 평가 결과 등을 감안해 진퇴 여부를 결정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온다.

일차적으로 이명박 정부 때 정권과의 친분 관계로 임명됐다는 지적을 받아온 정치인이나 대선캠프 관련 인사들을 중심으로 100명 정도의 기관장들이 교체대상으로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기획재정부 공공기관 경영평가단이 수행하고 있는 인사 평가 결과가 교체 결정의 주요 근거가 될 것으로 알려졌다.


 

▲ 강만수 산업은행 지주회사 회장. ▲ KT 이석채 회장.

무엇보다 금융권의 인사태풍이 거셀 전망이다. 이미 알려진 대로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 이팔성 우리금융지주 회장,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은 대표적인 MB맨으로 꼽힌다. 이들은 이명박 정부에서 김승유 전 하나금융지주 회장과 함께 금융권 실세라는 뜻으로 ‘4대 천왕’으로 불렸다.


특히 강만수 회장의 거취가 관심사다. 2008년 4월 15일 당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취임 후 가진 첫 기자간담회에서 청와대의 공공기관장 일괄사표 방침과 관련한 질문을 받았다. 강 장관은 공공기관장들의 반발 기류와 관련해 “정무직은 정권의 철학과 운명을 같이하는 자리다. 지난 정부에 임명된 수장들은 현 정부의 철학과 정책을 따르기 힘들다고 본다. 대통령과 함께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리를 지키는 것은 국민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의민주주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쐐기를 박았다.

 

 

▲ 이번 인사 태풍에 대표적인 물갈이가 예고되고 있는 포스코 정준양 회장.








 

5년 전 ‘강만수 장관’이 했던 발언은 정권이 바뀌면서 부메랑이 돼 강만수 산은금융그룹 회장에게 되돌아왔다. 대표적인 ‘MB(이명박)맨’인 강 회장의 거취는 금융공기업을 포함한 공공기관장들 사이에서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강 회장이 물러난다면 공공기관에 일대 ‘인사 태풍’이 휘몰아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공교롭게도 5년 전 MB 정부가 공공기관 수장들에 대한 물갈이를 할 당시에도 김창록 당시 산업은행 총재의 사퇴가 대규모 ‘사퇴 도미노’의 신호탄이었다. 금융계에선 오는 7월 임기가 만료되는 어윤대 회장의 연임 여부가 금융권 물갈이의 출발점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코드 맞추기도 한창


포스코와 KT의 CEO 자리도 관심이다. 두 회사는 공기업에서 민영화된 지 오래됐고, 정부 지분도 전혀 없지만 정권 교체 때마다 수장이 바뀌었다. 박 대통령이 제시한 공공기관 인사 원칙을 두 기업에도 적용하면 포스코의 정준양 회장과 KT 이석채 회장은 전문성에선 큰 흠결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정 회장은 처음부터 포스코에서 성장한 인물이고, 이 회장은 과거 통신산업을 관장했던 정보통신부 장관 출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정 철학 공유’의 원칙에선 이론(異論)이 있을 수 있다. 정 회장은 회장으로 선임될 당시 MB 정권 실세의 외압이 작용했다는 논란이 있었고, 이 회장도 MB 정권이 임기가 남은 남중수 전 KT 사장을 물러나게 하고 앉힌 사람이다. 두 사람의 임기는 모두 2015년 봄 주총 때까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어떻게 해서든 대통령의 눈에 들어 임기를 끝까지 가져가겠다는 기관장들의 움직임도 있다. 감사원이 대표적이다. 현재 2년 임기가 남은 감사원장은 <선데이저널>이 보도했던 대로 최근 4대강 및 한식세계화 감사에 나서며 박 대통령과 눈높이를 맞추고 있다. 이는 5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 때 임명됐던 검찰총장과 국세청장이 이명박에게 충성을 하며 연임을 할 수 있었던 것과 비슷한 경우다.



하지만 “국정철학을 함께할 사람을 쓰겠다”는 박 대통령의 방침은 산하기관, 공기업 인사까지 직접 챙기겠다는 의중을 드러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면에서 ‘박근혜식’ 코드 인사, 낙하산 인사로 비쳐질 수 있어 우려와 비판을 낳고 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인사 기준으로 ‘국정철학 공유’ 정도만 언급했을 뿐, 전문성이나 청렴도 등 여타 기준은 제시하지 않았다. “정부 출범 과정에서 소외된 대선 공로자를 배려하기 위한 포석 아니냐”는 의구심이 정치권에서 나오는 배경이다.


실제로 친박계는 박 대통령이 “각 부처 산하기관과 공공 기관에 앞으로 새 정부의 국정 철학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임명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고 말한 데 대해 안도하는 분위기다. 대선 후 의도적으로 배제되는 상황이었는데, 더 이상 '역차별'을 당하진 않을 것 같다는 것이다.

물갈이에 대한 비판적 기류를 감안한 듯 청와대 김행 대변인은 “현 공공기관장에 대해서는 해당 부처 장관과 청와대 인사위원회에서 전문성과 내부 신망을 점검해 결정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청와대 비서관도‘그 밥에 그 나물’



박근혜 대통령이 12일, 청와대 비서관 인선을 마무리했다. 비서관 인사를 둘러싼 온갖 잡음으로 취임 3주 만에 지각 인선이 이뤄진 것이다. 청와대는 이날 공석 중이던 민정수석실 법무비서관에 이혜진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와 홍보수석실 홍보기획비서관에 최형두 총리실 공보실장을 임명하는 등 40명의 비서관 인선 결과를 확정해 발표했다. 신설되는 국가안보실 소속 비서관 3명은 정부조직법 개편안이 통과되지 못해 이날 발표에서 빠졌다.

취임 3주가 돼서야 비서관 인선을 마무리 한 것은 비서관 인사를 둘러싼 잡음이 결정적이었다. 당초 홍보기획비서관에는 이종원 전 <조선일보> 부국장이 내정됐다가 취소됐고 법무비서관으로 내정됐던 변환철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로스쿨 교수 재직 중 변호사 활동을 한 것에 대해 편법 논란이 불거지자 사의를 표명했다. 이 때문에 막바지에 이르렀던 인선 작업은 또 다른 후보군 검증에 들어가면서 차질이 생겼다.

또 민정비서관의 경우도 내정과 취소를 오가다 결국 이중희 비서관이 다시 임명됐고 사회안전비서관과 보건복지비서관의 경우도 다른 인사가 내정됐다가 최종 교체됐다. 이 과정에 ‘친박’ 실세들 간 권력암투가 영향을 미쳤다는 설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이번 청와대 비서관 인선의 특징을 살펴보면 비서실장 직속, 정무, 민정, 홍보 라인에 박 대통령의 측근과 대선 승리 공신들이 대거 합류한 게 눈에 띈다. 또 인수위 및 당선인 비서실 출신이 절반을 넘는 22명에 달해 ‘쓴 사람을 또 쓴다’는 박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이 그대로 드러났다.

비서실장 직속 비서관에는 박 대통령의 여의도 입성 후 십수년 째 보좌해온 최측근 보좌관들이 대거 포진했다. 총무비서관에 이재만 전 보좌관, 제1부속비서관에 정호성 전 비서관, 제2부속비서관에 안봉근 전 비서관이 각각 내정됐다. 박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해온 이들은 새누리당 시절 ‘문고리 권력’ 3인방으로 불렸다.

김선동 정무비서관, 2007년 대선 경선 때부터 박 대통령을 도왔던 조인근 연설기록비서관, 백기승 국정홍보비서관, 최상화 춘추관장 등도 박 대통령의 오랜 측근으로 분류된다.

 


선데이 저널 USA 리차드윤 기자 http://www.sundayjournalus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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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춘몽을 살려냅시다.

 

어제(3월 16일)저녁 춘몽은?
 
[현장보도]무조건 춘몽을 살려냅시다.
 
꺾은붓 | 2013-03-17 08:51:5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인쇄하기메일보내기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춘몽님의 상황을 생생하게 알려드려야 하나 대한민국에서는 이를 보도하는 언론이 없어 제가 어제저녁 가 보았던 당시의 상황만을 쓸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토요일이었고 17:00부터 대한문 앞에서는 주말행사와도 같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민집회가 열렸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참여는 하지 않았지만 50여명의 뜻있는 시민들이 모여 선거과정에 관이 개입한 명백한 부정선거이고, 개표과정에는 수많은 증거자료가 있는 빼도 박도 못할 부정개표임에도 박근혜는 자신이 정당한 절차를 거쳐 합법적으로 당선된 것인 양 취임을 강행하여 가소롭고 역겹게도 청와대 주인행세를 하고 있고, 당선을 도둑맞은 야당후보와 야당은 제1야당으로 안주하는 것으로 자족하고 부정선거와 개표에 대하여는 입도 뻥끗 못 하고, 공직집단의 모든 공권력은 박근혜의 눈치나 슬금슬금 살피며 스스로 알아서 기며 국가와 민족이 아닌 박근혜에게 충성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런 내우(內憂)에 북에서는 국민들의 머리 위에 언제 포탄을 쏟아 부을지 모르는 외환(外患)까지 겹쳤으니 국민들의 심정은 천 길 낭떠러지 절벽위로 내 몰린 상황같이 화급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와중에 박근혜는 국방장관 후보자로 협잡배나 다름없는 후보자를 청문회에 들이밀고 걸레쪽이나 다름없음이 밝혀져 청문보고서조차 채택을 거부당했는데도, 자격 있는 새 후보자를 물색할 생각은 안 하고 돌아가는 여론이나 살피며 어떻게든 협잡배걸레를 국방장관에 들여앉힐 궁리만 하며 북에 대하여 종이호랑이의 포효 같은 으름장만 날리고 있습니다.

꼭 6.25직전과 같은 상황입니다.

당시 북은 소련으로부터 무기를 지원받아 착착 남침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남쪽의 국방장관 신성모라는 자는 이승만 앞에만 가면 눈물을 질질 짜며 역겨운 충성심을 내 보이며 “각하!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그러면 화살 같이 밀고 올라가서 대동강 물로 쌀을 씻어 각하의 점심수랏상을 차려드리고 압록강 물로 쌀을 씻어 각하의 저녁수랏상을 차려드리겠습니다.”하고 얼빠진 소리를 해 대니 보다 못한 염라대왕이 6.25발발 반년 전에 지옥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 전쟁의 결과는 어땠습니까?

한강물로 쌀을 씻어 김일성의 점심밥을 지었고 낙동강 물로 쌀을 씻어 김일성의 저녁밥을 지었고, 삼천리강산은 시산혈해 쑥대밭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와 지금이 다를 게 별로 없습니다.

군에서도 다 알고 있는 그런 협잡배를 국방부장관에 앉히면 군의 사기는 땅속으로 파묻혀 군령계통이 서지를 않고, 지금과 같이 박근혜가 저울질이나 하면서 국방장관의자를 빈 회전의자로 놔둔 상태에서 북이 밀고 내려온다면 빈 회전의자가 박근혜로부터 명령을 받아 군령권을 행사할 것이니 빙글빙글 돌다 제물에 쓰러져 버릴 것입니다.

얘기가 잠깐 다른 데로 흘렀습니다.

그러니 어찌 맑은 영혼의 젊은이 춘몽이 보다 못해 나서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어제가 모든 곡기(穀氣)와 물을 목구멍으로 넘기지 않은지 13일째입니다. 보통사람 같았으면 벌써 죽었을 것입니다.

춘몽님은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서 젊은 날 한때는 머리를 깎고 승려생활을 하며 심신을 수련한 적도 있었다 하며 굶기를 밥 먹듯 단련한 초인적인 정신력의 소유자라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의사들이 밝힌 한계가 5일 정도였고, 길어야 일주일이었습니다. 춘몽님은 의학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현대판 기적을 지금 현실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어제는 대한문 앞 집회를 마친 시민들 20여명이 필자도 섞여 함께 여의도 춘몽을 찾았습니다. 춘몽의 친형과 뜻있는 시민 몇 분이 그 옆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춘몽의 요구에 의해 오래간만에 젊은 아주머니들이 달려들어 전기온수기로 물을 끓여 수건에 적셔 누워있는 춘몽님의 긴 머리를 물수건으로나마 감아드렸고, 두세 시간 동안 수건을 뜨거운 물에 적셔 춘몽님의 얼굴에 찜질을 해 드렸습니다.

그 일을 찬 밤바람을 맞아가며 몇 시간씩 끈질기게 하는 여성들의 눈동자는 샛별과 같이 맑았고 얼굴로 풍기는 인상은 천사와 같았습니다.

젖은 이불을 벗겨 내고 새 침낭에 춘몽님을 들어 집어넣는 장면을 보니 춘몽님의 몸은 미라나 다름없었습니다.

그 장면을 떨면서 바라보는 내 눈이 시큰거렸고 “칼부림”으로 알려진 여성분은 필자의 귀에다 대고 “부모라도 저렇게 못 할 텐데 여기 오면 누구라도 저렇게 안 할 수가 없다,”고 속삭였습니다.

그 말보다 더 진실 된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가 오래서 온 것도 아니고 다 스스로 거기로 오지 않으면 안 되어서 자신의 양심의 명령에 따라온 사람들입니다.

많은 시민들이 왔으므로 춘몽님의 친형을 중심으로 구수회의가 열렸습니다. 춘몽님 형의 제안으로 강제로라도 병원으로 후송을 강행하려고 춘몽님께 넌지시 의사를 타진해 보았더니 춘몽님의 의사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강제로 후송을 당하느니 이 자리에서 그 순간 바로 목숨을 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이 지긋한 경찰인 그 자리를 수시로 살피고 있는 영등포경찰서 사복형사가 밤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또 춘몽님의 상태를 살피려고 와서 춘몽님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 경찰 분 계급이 어찌 되는지는 몰라도 연령으로 보아 하급경찰은 아닐 것 같고 풍기는 인상이 사려 깊어 보였습니다.

춘몽님 관찰이 끝난 그 경찰의 등을 찔러 춘몽님이 듣지 못할 저만치 데리고 가서 필자가 제의를 했습니다.

이제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경찰로서도 저대로 두고 볼 수는 없을 것이고, 조금 전에 친형과 시민들이 강제후송을 하려다 그만둔 내용을 말하고 필자의 의견을 제시해 보았습니다.

춘몽님의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강제후송을 하려다가는 무슨 불상사가 날지 모르니 그런 방법은 단념하고, 의사를 불러 건강 상태를 체크를 하는 것으로 하고(춘몽님도 그것은 마다 안함) 호흡을 통하여 코로 들이마시는 마취제를 투여하든지 혈액을 채취한다고 속이고 마취를 하여 의식을 잃게 한 상태로 후송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했습니다.

물론 저는 법이나 의학지식은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그 말을 들은 여러 사람의 의견이 그런 방법은 법적인 문제가 있을 수가 있고, 저렇게 건강이 악화된 사람을 마취했다가는 깨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영원한 마취상태가 될 위험이 있어 의사도 마취를 거부할 것이라는 의견 등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또 제가 제시한 방법을 그 경찰이라고 해서 독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제 의견은 의견으로 끝났습니다.

춘몽님은 이번 월요일이면 민변이나 문재인씨 또는 민주당에서 춘몽님의 요구에 어떤 긍정적인 응답과 행동이 있을 것으로 알고 그 때까지는 절대로 단식농성을 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모인 시민들의 의견은 일단 월요일까지는 이 상태를 유지하자는 데로 모였습니다.

이제 길을 두 개로 좁혀졌습니다.

첫째로 춘몽님의 남은 체력과 정신력이 월요일 오후까지 버텨 주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둘째는 민주당, 문재인, 민변이 월요일까지 춘몽님의 요구조건을 수용하여 춘몽님이 받아들일 문서를 만들고 구체적인 행동을 개시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행동”을 거론한 것은 춘몽님이 단식을 풀고 나서 민주당, 문재인, 민변이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고 춘몽님의 단식을 풀게 할 목적으로 서류상으로만 춘몽님을 속였다고 판단할 때에는 춘몽님은 단호한 결단을 할 그런 분이기 때문에 “행동”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이 글을 올리는 목적도 바로 그것입니다.

춘몽님이 월요일까지 버텨주시느냐 하는 것은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도리가 없고 단, 살아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신 독자 분들은 자신뿐 아니라 주변 분들을 설득하여 민주당, 문재인, 민변에 춘몽님의 요구조건을 수용할 것을 강력하게 압박을 해야 합니다.

이제 길어야 시간은 30시간 남짓입니다.

저는 SNS인지 뭔지를 못해 문재인씨나 민주당과 민변을 압박하는 그런 것은 할 줄을 모릅니다.

그저 몸으로 가서 춘몽님의 근황을 살피고 이렇게 글을 써서 여러분의 집단지성에 호소하는 것만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여러분의 양심과 의협심에 호소합니다.

실오라기만 한 인연이라도 다 동원해서 저들을 설득하고 압박을 가하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춘몽님을 살리는 것은 단 한 생명을 살리는 것을 넘어 우주보다도 더 귀한 인간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고, 우리 시대의 죽어 있는 양심을 되살리는 일입니다.

만약에 춘몽님이 불행한 일을 당하신다면 우리는 집단 살인공범이고, 머리를 똑바로 들고 하늘을 바라볼 수 없는 양심의 죄인들입니다.

국민여러분!

여(輿)도, 야(野)도, 한 형제인 북한마저도 우리 모두를 버리려 하고 있고 양심의 집결체라는 민변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춘몽이고, 춘몽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다만, 그 무거운 짐을 춘몽 혼자 지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들의 동참을 호소합니다.
개개인과 집단의 지성에 호소합니다.
무조건 춘몽을 살려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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