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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단체, 징벌적 손배 대안 자율규제 ‘깃발’ 띄웠다

7개 단체 참여, ‘자율규제 열람차단 청구’ 등 심의 방안 발표
언론계 전반 외연 확대 관건... 포털 뉴스제휴평가위 관련 논의 예고

언론 대상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골자로 하는 여당의 언론중재법 개정 추진에 맞서온 언론단체들이 통합 자율규제 기구 설립을 공식화했다. 여러 성격의 언론 사용자 단체와 노동자(현업인) 단체가 자율규제 기구 설립을 위해 이례적으로 한 목소리를 낸 것이다.

7개 단체 참여, 자율규제 ‘열람차단 청구권’ 등 제시

7개 언론단체는 23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자율규제 차원의 ‘열람차단 청구권’ 등을 적용하는 통합형 언론자율규제 기구 실천방안을 발표했다. 

이날 기자회견은 통합형 언론자율규제기구 참여를 선언한 방송기자연합회,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기자협회,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한국신문협회, 한국여기자협회, 한국인터넷신문협회가 공동 주최했다.

[관련 기사 : 불가리스 코로나 억제 보도, 주의 조치 받으면 끝?]

자율규제 심의는 인터넷 기사 팩트체크 등을 통해 심의·평가해 결과를 이용자에게 제시하고 해당 언론에 알리는 방안을 골자로 한다. 자율규제 기구는 허위정보를 담거나 언론윤리를 위반한 인터넷 기사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를 막기 위해 언론에 인터넷 기사 열람 차단을 청구하고, 필요한 경우 실효성 있는 제재를 가하도록 했다.

통합형 자율규제기구는 기사 심의와 별개로 인터넷 기사와 광고로 인한 피해자가 언론중재위원회나 법원에 가지 않더라도 신속한 피해구제가 가능하도록 방안을 마련해 시행하기로 했다. 

▲ 김동훈 한국기자협회장이 23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7개 언론다체 공동 기자회견에서 통합형 언론자율규제 기구 실천방안을 발표했다. 사진=금준경 기자
▲ 김동훈 한국기자협회장이 23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7개 언론단체 공동 기자회견에서 통합형 언론자율규제 기구 실천방안을 발표했다. 사진=금준경 기자

역할과 기능, 자율규제 방식 등에 대한 구체적 방안 마련을 위해 학계, 언론계, 전문가 등으로 연구팀을 조속히 구성해 연구를 수행할 계획이다.

윤창현 언론노조 위원장은 “국민이 언론을 불신하게 만들고 피해 구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데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오늘 기구 설립 발표는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 빠르게 확산되는 이른바 허위조작정보 문제를 해소해 나가고 언론 신뢰를 높여 나가기 위한 첫 발자국”이라고 밝혔다.

성재호 방송기자연합회장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자율규제 시도를 폄하하고, 위헌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며 “우리는 실효성 있는 자율규제 기구를 만들자는 데 합의했다. 잘못된 보도를 스스로 통제하고, 필요하면 과감히 대응 할 수 있는 자율규제기구를 마련해 나가고자 한다”고 밝혔다.

김동훈 한국기자협회장은 “자율규제는 실효성이 없으면 맹탕”이라며 “그간 관련 논의가 있었지만 선언적인 측면에 그쳤다. 이번에는 국민적인 공감대와 설득력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추진했다”고 설명했다.

▲ 사진=Gettyimagebank
▲ 사진=Gettyimagebank

언론사 단체와 노동자 단체 이례적 결합, 이유는?

통합 자율규제 기구 논의는 언론 노동자 및 현업인 단체와 사용자 단체가 함께 구성한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강홍준 한국신문협회 사무총장은 “신문협회가 나선 이유는 기존 자율규제 기구들이 원하는 수준만큼의 실효성 있는 규제를 하지 못했다는 자기 반성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미디어오늘 보도 등에 나온 기존 자율규제에만 맡겨놔서는 제 역할을 못할 수 있다는 지적을 뼈 아프게 받아들였다. 현재 자율규제 기구는 실시간으로 쏟아져 나오는 인터넷 기사에 대한 상시 심의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밝혔다.

성재호 방송기자연합회장은 “그간 현업인 단체가 사용자 단체와 많이 대립했다. 하지만 언론 불신의 위기에 대응하지 않는다면 언론계가 공멸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 전체에 피해가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외연 넓히기 과제, “정부 주도 규제 개선” 목소리도 

이날 기자들의 질문은 참여 단체가 한정적이면 ‘실효성’을 담보하기 힘들 수 있지 않냐는 데 집중됐다. 여러 단체가 참여하긴 했지만 방송사 단체들이 참여하지 않았고, 협회 소속이 아닌 언론사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7개 단체 관계자들은 이날 발표는 ‘기구 설립’ 합의에 의미가 있고, 추후 참여 단체를 늘려갈 계획이라고 답했다.

강홍준 신문협회 사무총장은 “(지상파 방송사를 회원사로 둔) 한국방송협회는 내부 의견 수렴 중”이라며 “포털 뉴스제휴평가위원회에 많은 언론단체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다음주에 제휴평가위 운영위원회 차원에서 관련 논의를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포털 네이버와 다음의 언론사 제휴심사를 담당하는 독립기구인 포털 뉴스제휴평가위원회에는 한국신문협회, 인터넷신문협회 등 언론단체들이 운영 전반을 논의하는 운영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다. 

▲ 한국 언론 자율규제 및 공적 규제 현황. 디자인=안혜나 기자
▲ 한국 언론 자율규제 및 공적 규제 현황. 디자인=안혜나 기자

언론사들의 참여를 위해선 ‘인센티브’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성재호 방송기자연합회장은 “인센티브 측면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좋은 언론 상품이 유통될 수 있게 만드는 게 정부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며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보면 언론중재위에 인력을 추가로 채용하는 내용이 있는데, 중재위에 늘릴 예산이 있다면 언론 스스로 열람차단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면 좋겠다. 바우처 제도 연계도 역할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기구 참여 단체 확대와 더불어 장기적으로 방송통신심의 등 국가 주도 규제를 자율규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이어졌다. 

윤창현 언론노조위원장은 “현재 대한민국에는 양대 국가검열기구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언론중재위원회가 있다”며 “국가가 언론에 개입해서 통제할 수 있는 제도가 대한민국만큼 폭 넓은 민주 국가가 없다. 궁극적으로는 통합자율규제기구가 국가규제 기구를 대체해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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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의 야만을 끝내자’..이석기 의원 석방 2021 추석한마당 열려

김영란 기자 | 기사입력 2021/09/23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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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22일, 감옥에서 9년째 수감 중인 이석기 전 의원의 석방을 촉구하는 <‘감옥에서 9년째, 이석기 의원 석방’ 2021 추석 한마당 - 9년의 야만, 이제는 끝내자>가 대전교도소가 열렸다. [사진제공-한국구명위]     

 

▲ 민중의 노래를 제창하는 참가자들. [사진제공-한국구명위]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22일, 감옥에서 9년째 수감 중인 이석기 전 의원의 석방을 촉구하는 <‘감옥에서 9년째, 이석기 의원 석방’ 2021 추석 한마당 - 9년의 야만, 이제는 끝내자(이하 추석한마당)>가 대전교도소앞에서 열렸다. 

 

추석한마당은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사건 피해자 한국구명위(이하 한국구명위)’ 주최로 열렸으며, 유튜브와 줌(Zoom)으로 생중계되었다. 

 

유튜브로 생중계된 집회에는 서울, 대전, 광주 등 15개 도시 70여 곳 거점에서 3천여 명이 함께했다. 

 

함세웅 한국구명위 고문과 박래군 한국구명위 공동대표가 대회사를 하였다. 

 

함 고문은 “문재인 정부에 대해서 우리가 나름대로 아주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지만 그 실낱같은 희망마저 끊어질 지경에 있어 너무 가슴이 아프다. 이석기 의원이 감옥에서 그러나 더 큰 자유를 가지고 우리에게 자유와 희망 또 민족의 일치와 꿈을 주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박 공동대표는 “벌써 만 9년이 꽉 차고 또 넘쳤다. 이경진 누님이 천 일 동안 청와대 앞에서 농성하고 계시다가 암에 걸리셔서 또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그렇게 이석기 전 의원 석방을 소원했다. 문재인 정권 굉장히 비겁하고 매우 나쁘다. 어떻게 이렇게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이석기 전 의원을 감옥에 가둬두는지에 대해서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라고 토로했다.

 

추석한마당에서 윤택근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수석부위원장)은 규탄 발언을 했다. 

 

윤 직무대행은 “신자유주의 정권은 자신들의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는 언제나 국민의 목소리를 내는 진보정치를 탄압하고 민주노총을 탄압해왔다. 이재용은 석방하고 양경수를 구속하는 나라, 이것이 문재인 정권의 본모습이다. 민주노총은 결심했다. 노동자 민중이 살맛 나는 세상, 비정규직 없는 세상, 노동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결심했다. 10월 20일 총파업은 역사의 분수령이 될 것이다. 양심수 없는 나라, 인권이 존중되는 나라, 노동이 중심이 되는 나라, 민주노총이 만들겠다”라고 연설했다. 

 

이어 김태진 전 부산구명위 회원은 “야만의 시대 끝장내기 위해서 진보집권을 해야 한다. 2022년 지방선거 승리를 위해 부산에서 출마 결심했다. 헌신분투 마음으로 우리의 목표로 함께 전진하자. 부산구명위도 한 걸음씩 나아가겠다”라고 밝혔다.

 

▲ 청년구명위 회원들의 문예공연. [사진제공-한국구명위]  

 

송명숙 청년진보당 대표는 “엊그제 유엔총회장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미중 종전선언을 제안했다. 그런데 9년 전 같은 제안을 했던 이석기 의원은 생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감옥에 있다. 진짜 평화와 자유는 그곳이 아니라 여기 감옥 문을 여는 것부터 시작된다”라며 청년구명위 회원들의 공연을 소개했다. 

 

청년구명위 회원들은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개사한 공연을 선보였다. 

 

이 전 의원이 참가자들에게 보낸 옥중편지가 추석한마당에서 낭독됐다. 

 

이 전 의원은 “아홉 번째 새로운 가을을 맞이하며, 40일 동안 사람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하나의 숨결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동지들이 있기에 내가 있다는 분명한 깨달음이 나를 숨 쉬게 한다”라며 인사를 전했다.

 

계속해 이 전 의원은 “이번 대선은 보수와 진보의 대결도 아니고, 나쁜 것과 덜 나쁜 것의 대결도 아니다. 기득권의 한 귀퉁이씩을 각자 차지하고 상대의 기득권을 조금 더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싸우는 것일 뿐”이라며 “이번 대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이들 기득권 세력의 담합 구도에 파열구를 내는 것이다. 민중 자신이 정치의 한 축으로 일어나지 않는 한 거대 여야의 기득권 체제는 바뀔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추석한마당 참가자들은 ‘민중의 노래’ 제창에 이어 ‘촛불배신 규탄한다, 이석기 의원 석방하라’, ‘감옥에서 9년째다, 이석기 의원 석방하라’ 구호를 외치고 행사를 마쳤다. 

 

아래는 이석기 전 의원 옥중편지 전문이다.

 

-----------아래--------------

 

보고 싶은 벗들, 사랑하는 동지들

 

이제 아홉 번째 가을입니다. 

 

사방을 막은 벽면에서 나오는 숨이 턱턱 막히는 열기는 이제 줄어들어 갑니다만, 코로나로 인한 면회 금지 때문에 한 40여 일 동안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감옥이 있다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지금 나와 벗들을 이어주는 건 편지입니다. 

 

그 편지에는 9년째 갇혀 있는 저의 현실과 가석방으로 감옥을 빠져나간 이재용의 현실과 모두가 잠든 새벽에 강제 연행된 민주노총 위원장의 현실이 담겨 있습니다. 이 정부가 말하는 공평과 정의, 민주주의가 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자각이 들어 있습니다. 

 

종이 위의 검은 글씨는 아무 소리를 내지 않지만, 그것이 깊숙한 데로부터 나오는 분노의 목소리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벗들이 보낸 편지들을 읽다 보면 역설적이지만 나의 영혼은 평안해집니다. 아홉 번째 새로운 가을을 맞이하며, 40일 동안 사람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하나의 숨결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동지들이 있기에 내가 있다는 분명한 깨달음이 나를 숨 쉬게 합니다.

 

5년 전 우리는 가장 먼저 촛불을 들었습니다. 박근혜 정부를 무너뜨림으로써 민주주의와 평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한 발 전진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그저 제자리걸음만 거듭했습니다. 광화문의 촛불이 한목소리로 외쳤던 ‘이재용 구속’은 가석방이라는 희한한 결론으로 끝나버렸습니다.

 

그러니 이번 대선은 보수와 진보의 대결도 아니고, 나쁜 것과 덜 나쁜 것의 대결도 아닙니다. 지금의 거대 여야는 서로 죽일 듯이 싸우지만 막상 우리 사회의 근본적 문제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기득권의 한 귀퉁이씩을 각자 차지하고 상대의 기득권을 조금 더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싸우는 것일 뿐입니다. 이들 중 누가 정권을 차지하느냐는 우리 민중의 삶과는 아무 인연이 없습니다. 거대 양당 체제는 기득권 보호체제라고 나는 규정한 바 있습니다. 

 

이번 대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이들 기득권 세력의 담합구도에 파열구를 내는 것입니다. 누구나 불평등을 말하고, 불공정을 말하지만 실제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평등과 불공정의 피해를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는 민중의 몫입니다. 민중 자신이 정치의 한 축으로 일어나지 않는 한 거대 여야의 기득권 체제는 바뀔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현장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민중과 함께 한 걸음씩 나아감으로써 이를 바꿔내야 합니다. 그것이 지난 5년의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다시 가르쳐 준 교훈입니다. 

 

백무산 시인은 ‘아름드리 나무는 톱 같은 지혜로 베어진다’면서 성경에는 독사 같은 지혜라는 말이 있지만, 우리에겐 톱 같은 지혜가 맞는 말이라고 했지요. 그것이 우리에겐 무기라고도 했습니다. 여기엔 편법도 없고, 요행도 없습니다. 저마다 현장에서 우직하게 만 사람이 한 사람처럼 떨쳐 나선다면 낡은 장벽은 물 먹은 흙담처럼 무너질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운 동지들. 

오늘 쓰는 이 편지가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벗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그립고 고맙고 미안한 마음입니다. 이제는 손을 잡고 가슴을 맞대고 시대의 요구와 민중의 현실에 함께 하고 싶습니다. 비록 우리는 헤어져 있지만 얼마 안 가 우리는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어제에서 오늘로, 오늘에서 내일로 이어집니다. 한 호흡으로 지금처럼, 우리가 꿋꿋하게 싸워나간다면 새로운 미래는 이미 시작입니다.

 

2021년 9월 22일  

대전옥에서 이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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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냉병’일까 ‘보랭병’일까?

[우리말 바루기] ‘보냉병’일까 ‘보랭병’일까?

중앙일보

입력 2021.09.23 00:03

지면보기

기후 변화 등으로 인해 환경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일회용품을 줄이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일회용 플라스틱이나 종이컵을 쓰지 않기 위해 커피 전문점에 보온병을 들고 오는 사람도 많아졌다고 한다. 보온병에는 냉커피를 담기도 하는 등 찬 것을 담아 보관하는 용도로도 사용되기 때문에 ‘보냉병’이라 부르기도 한다.

‘보냉병’ 대신 ‘보랭병’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는데 어느 것이 맞는 말일까? ‘냉’이냐 ‘랭’이냐의 차이인데 여기에서 두음법칙을 떠올렸다면 우리말 바루기의 애독자라 할 만하다.

이와 관련해 한글 맞춤법에는 본음이 ‘라, 래, 로, 뢰, 루, 르’인 한자가 단어 첫머리에 올 적에는 두음법칙에 따라 ‘나, 내, 노, 뇌, 누, 느’로 적는다고 돼 있다. 그러나 단어의 첫머리가 아닌 경우에는 본음을 살려 적어야 한다.

‘保冷’은 ‘보호할 보(保)’ 자와 ‘찰 랭(冷)’ 자로 이뤄진 낱말이다. ‘冷’이 단어 첫머리가 아니라 ‘保’ 다음에 오기 때문에 본음을 살려 ‘랭’으로 읽어야 한다. 따라서 ‘보냉병’이 아닌 ‘보랭병’이 바른 표현이다.

저위도에 위치하며 표고가 600m 이상으로 높고 차가운 곳을 의미하는 ‘高冷地’를 읽어 보자. 이 역시 단어 첫머리가 아닌 중간에 ‘冷’이 오므로 ‘고냉지’가 아니라 ‘고랭지’라 표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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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광고에서 '무한상사' 냄새가 난다

 
우후죽순처럼 쏟아지는 OTT 서비스, 유튜브 등으로 이제 우리는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보고싶은 방송을 볼 수 있게 됐다. '본방 사수'를 위해 TV 앞에 앉는 일은 먼 추억이 됐다. '정주행'이라는 말도 더이상 낯설지 않다. 그래서 준비했다. 연휴기간 몰아보면 좋을 유튜브 몇 개를 소개한다.[편집자말]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무려 5일에 달하는 기나긴 연휴 기간이지만 지난해에 이어 올해 역시 코로나19의 위협 속에 집콕 생활을 택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유야 어찌되건 바쁘게 움직이던 일상 생활에서 잠시 벗어나 마음의 여유, 그동안 하지 못했던 여가선용의 기회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추석 연휴다.  

오랫동안 이 시기의 좋은 벗이 되어준 존재는 TV였지만 그 역할을 점차 유튜브로 대표되는 인터넷, 모바일 신흥 매체가 대신하고 있다. 장소·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데이터를 사용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언제든지 다채로운 즐길거리를 만날 수 있는 유튜브 속에서 이른바 '웹예능'은 좋은 벗이 되어 준다.  

10여분 남짓한 짧은 분량으로 부담없이 스트레스를 해소해줄 수 있는 이들 프로그램이야 말로 휴일, 그리고 휴식을 위한 가장 적합한 수단으로 손꼽인다. 이 시기를 그동안 감상하지 못했거나 이미 봤지만 다시 즐겨도 괜찮을 만한 유튜브 예능들을 소개해본다.

춤·노래·이젠 유튜브까지 접수? 다재다능 아이돌
 
 '런웨이' 시즌2, '쩡이집비니?'의 한 장면

▲ '런웨이' 시즌2, '쩡이집비니?'의 한 장면 ⓒ 1theK, 덤덤스튜디오

 
유튜브 속 웹예능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존재는 바로 아이돌이다. 당당한 주인공으로 프로그램을 이끌어 나가는가 하면, 살짝 예능감이 부족하거나 낯가림이 있더라도 부담 없이 숨겨진 끼와 재능을 뽐낼 수 있는 도구로서도 유튜브 예능은 최적의 역할을 담당해준다. 팬들과의 대면 접촉이 거의 사라진 요즘 같은 시기엔 좋은 말벗이 되어주는가 하면, 이곳에서의 활약에 힘입어 기존 TV 인기 예능으로 진출하는 기회도 만들어낸다. 

​최근 유튜브에서 맹활약하는 인물 중 이미주(러블리즈)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7월부터 인기리에 공개중인 1theK 채널의 <런웨이> 시즌2에서 이미주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산하면서 포복절도 웃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매력의 소유자 답게 웹툰, 드론, 댄스 스포츠, 치어리딩 등 다양한 분야와의 만남에서 그녀는 활기넘치는 행동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예능돌'로 손꼽히는 활약을 펼치는 오마이걸도 빼놓을 수 없다. 리더 효정과 비니가 이끌고 있는 덤덤스튜디오 채널의 <쩡이집니비?>는 마마무 문별, 프로미스나인, <펜트하우스>에 출연한 배우 윤종훈 등이 출연해 눈길을 끌었다. 토크쇼와 각종 게임쇼를 결합시킨 형태로 프로 MC 들과는 대비되는 조금은 서툰 진행이 쏠쏠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예나의 동물탐정', '전설의 연습생'의 한 장면

▲ '예나의 동물탐정', '전설의 연습생'의 한 장면 ⓒ 스튜디오와플, All The K-Pop

 
​지난 8월부터 공개중인 스튜디오 와플의 <예나의 동물탐정>, All The K-Pop 채널의 <전설의 연습생>은 신구세대 아이돌의 재능 발산으로 볼거리를 제공해 눈길을 모은다. 아이즈원 출신의 최예나를 전면에 내세운 <동물탐정>은 강아지, 호랑이 등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을 비롯해서 수달, 알파카 등 조금은 생소한 생명체들을 만나서 독특한 생활 습관을 영상에 담아낸다.  

<전설의 연습생>은 관록의 아이돌 소녀시대 써니가 14년째 연습생을 하고 있다는 가상 설정을 해두고 인기 그룹 멤버들을 만나 나누는 토크 버라이어티 예능이다. 현실과는 정반대로 후배 아이돌들을 선배로 삼아 온갖 상황극을 펼치면서 때론 '현타'를 맞기도 하는 써니의 모습이 큰 웃음을 선사하는데, 이게 프로그램의 매력 포인트다. 

TV 속 예능 고수... 이제는 유튜브 달인
 
 '대부님', '그늘집'의 한 장면.

▲ '대부님', '그늘집'의 한 장면. ⓒ 엠드로메다, 달라스튜디오

 
기존 TV 예능의 주인공 역할을 담당했던 중견 예능인, 개그맨들에게 유튜브는 또 다른 활동 영역을 마련해주고 있다. 

​한동안의 공백기를 맞았던 탁재훈 또한 유튜브와 TV 출연을 병행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동료 연예인들과의 티키타카식 토크로 재미를 구가하며 30만 구독자들의 환호를 이끌어낸 <탁재훈의 탁사장>을 중심으로 최근에는 엠드로메다 채널의 <대부님>에서 신인 음악인을 위한 무대를 마련 중이다.

지난 2018년 좌충우돌 토론 배틀 <뇌피셜>로 100만 구독자들의 배꼽을 쏙 빼놓았던 김종민은 이번엔 달라스튜디오의 <그늘집>을 통해 토크 MC로 변신을 꾀했다.  건물 옥상에 마련된 간이 골프장에서 초대손님과 대결을 펼치면서 티격태격 대화로 웃음을 선사하고 있다.   
 
 '할명수', '미선 임파서블'의 한 장면

▲ '할명수', '미선 임파서블'의 한 장면 ⓒ JTBC, DIA TV

 
​이미 2년째 방영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은 JTBC <할명수>, DIA TV <미선 임파서블>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필청' 유튜브 프로그램으로 언급할 만하다. 박명수의 원맨쇼 예능 <할명수>는 등장 초기엔 TV 방영을 병행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유튜브 공개에만 전념하면서 요즘 젊은 구독자들의 기호에 맞는 독특한 구성, 편집, 자막으로 폭넒은 사랑을 받고 있다. 

개그우먼 박미선이 젊은이들의 문화를 체험해 본다는 취지로 출발한 <미선 임파서블>은 올해 들어 쿡방·먹방 등 소재에 변화를 주면서 더 큰 인기몰이에 나섰다. 히밥, 웅이, 승우아빠 등 인기 유튜버들을 초대해 쉴 틈 없이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는 등 변화를 꾀하며 재미를 모색하고 있다.
 

무려 50인분 요리 장만에 나선 히밥 출연분은 880만 조회수를 기록했고 역시 라면 60그릇을 끓였던 웅이 편은 570만회 이상을 기록하는 등 기대 이상의 인기를 얻었다. 

신제품 홍보도 이젠 유튜브 예능으로?
 
 '프로덕션 Z', '못배운 놈들'의 한 장면

▲ '프로덕션 Z', '못배운 놈들'의 한 장면 ⓒ 삼성전자, GS25

 
​각종 제품 CF 영상 위주로 채워지던 기업체의 유튜브 채널도 최근 자체 제작 웹예능을 통해 소비자들과의 친밀도를 키우고 있다. 예능이라는 소재를 통해 광고라는 틀에 대한 거부감을 희석시킴과 동시에 웃음과 재미를 선사하면서 기업 이미지 재고 및 제품 홍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있는 것. 

삼성전자의 < 프로덕션 Z >는 지난 8월 갤럭시 Z폴드3 및 Z플립3 홍보를 위해 제작된 6부작 유튜브 전용 예능이다. '무한상사' 캐릭터에 착안해 유재석과 이미주, 승희(오마이걸), 김희철(슈퍼주니어), 정세운을 가상의 마케팅 팀으로 조합해 오피스 상황극을 펼치면서 신제품 알리기에 나섰다. 광고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상물이지만 일반 TV 프로그램 못잖은 완성도를 보여줬는데, 일부 팬들은 이 멤버 그대로 신규 예능 만들어달라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GS25의 이리오너라 채널이 방영중인 <못배운 놈들>은 서울 지역 시내버스 이용자들에게 친숙한 존재다. 차량 속 TV 영상물로 자주 소개되면서 이에 호기심을 느낀 승객들이 유튜브로 유입되는 다소 특이한 현상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어느덧 시즌3까지 제작될 만큼 성공적인 기업체 유튜브 예능으로 각광 받고 있다.

tvN D의 <휠링캠프>는 현대자동차와 협업한 야외 캠핑 예능으로 지난해에 이어 올해 시즌2 방영에 돌입할 만큼 괜찮은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탁월한 진행력과 더불어 각종 차량에 대한 지식이 많은 래퍼 데프콘과 딘딘을 메인 MC로 삼고 아이돌, 배우 등 다양한 연예인 초대손님을 모셔 신차 시승기를 한다는 콘셉트다. 
덧붙이는 글필자의 블로그 https://blog.naver.com/jazzkid 에도 수록되는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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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배의 복수?…‘테러와의 전쟁’ 20년, 끔찍한 대차대조표

등록 :2021-09-21 20:48수정 :2021-09-21 21:17

 
[테러와의 전쟁 20년 결산]
탈레반 축출로 시작해 탈레반 복귀로 마무리
이라크전쟁까지 번지며 희생자 규모 눈덩이
전체 90만명 사망, 미국은 8조달러나 지출
세계는 안전해졌나, ‘필요한 희생’이었나
전쟁 의미와 효과 놓고 미국 안팎 갑론을박
 
탈레반 병사가 9·11 테러 20돌인 지난 11일 아프가니스탄 카불공항을 순찰하고 있다. 카불/AFP 연합뉴스
탈레반 병사가 9·11 테러 20돌인 지난 11일 아프가니스탄 카불공항을 순찰하고 있다. 카불/AFP 연합뉴스
 

20년 전 9·11 테러 뒤 쫓겨난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이 윤회라도 한듯 돌아온 것으로 ‘테러와의 전쟁’은 사실상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미국인들은 탈레반 정권 축출로 시작한 전쟁이 탈레반 정권 복귀로 끝났다는 사실과 철군 과정의 혼란상에 어리둥절해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테러와의 전쟁’은 성공인가 실패인가? 성공이라면 무엇이 그렇고 실패라면 왜 그런가? 지금 미국 안팎에서 던지는 질문이다. 한마디로 답하기는 쉽지 않다. 입장에 따라,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거기에 ‘테러와의 전쟁이 없었다면’, ‘전쟁이 그런 양상이 아니었다면’이라는 가정까지 섞는다면 질문의 난도는 더 올라간다. 하지만 막대한 인명과 비용이 희생되고 수십 개 나라가 휘말린 이 국제전에 대한 평가는 피할 수 없는 주제다. 미국 안팎에서 벌어지는 ‘테러와의 전쟁’ 대차대조표 논쟁의 핵심 포인트들을 짚어본다.

 

“미국은 안전해져” vs “세계는 더 불안해져”
 

전쟁이 쓸모가 있었다는 긍정론의 강력한 논거는 ‘미국이 더 안전해졌다’는 것이다. 9·11 테러의 공식 사망자 수는 약 3천명(2977명)이다. 이 테러는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들에 의한 세계 전체 사망자 수 그래프를 확 끌어올렸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미국 내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에 희생당한 미국인은 107명에 ‘불과’하다. 그러니 언뜻 비교해봐도 미국이 안전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입장에 선 이들은 그냥 안전해진 게 아니고 미군이 알카에다 등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알카에다 수장 오사마 빈라덴이 도주 중에도 미국에 대한 또다른 대형 테러를 계획했다는 정보도 있었다. 빈라덴은 2011년에야 사살됐지만, 그 전에도 알카에다는 미군의 공격 때문에 세를 불리거나 대규모 테러를 기획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대니얼 바이먼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는 인터넷 매체 <복스> 인터뷰에서 “과거 알카에다는 아프간에서 수천명을 모집해 훈련시킬 수 있었다”며, 미군의 아프간 침공이 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미국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의 마이클 오핸런 국장도 언론 기고에서 “큰 틀에서 우리는 방어에 성공했으며, 아프간에서 목숨을 버린 이들을 포함해 안보에 기여한 모든 이들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했다. 알카에다가 대량살상무기를 손에 넣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추정까지 고려하면 아프간전을 비롯한 ‘테러와의 전쟁’은 더욱 정당성이 인정된다는 시각도 있다.

 

2001년 9·11 테러 직후의 뉴욕 세계무역센터 잔해. AFP 연합뉴스
2001년 9·11 테러 직후의 뉴욕 세계무역센터 잔해. AFP 연합뉴스
 

반면, 미국 영토 안에서의 테러 위협 감소만 따질 게 아니라는 반론도 나온다. 미국이 중동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통해 자국과 자국 시설에 대한 위협을 상당한 정도로 잠재웠을지는 몰라도 중동이나 유럽에서 테러 위협은 오히려 강화됐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이 탈레반 정권을 제압한 데 이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는 지적이 많다. 알카에다 이라크지부나 이슬람국가(IS)는 미국의 공격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나 수많은 인명으로 살상으로 이어졌다. 이라크는 내전의 수렁에 빠졌고, 2015년 전후로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이슬람국가가 발호하면서 중동과 유럽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이번에 미군 철수 과정에서 카불 공항 자살폭탄 테러로 17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슬람국가 호라산’은 이슬람국가의 아프간지부 격인 조직이다.

 

이런 평가는 미국보다는 동맹인 유럽 쪽에서 많은 편이다. 메리 칼더 영국 런던정경대 교수는 <가디언> 기고에서 ‘테러와의 전쟁’ 여파로 극단주의가 중동과 아프리카에 만연해졌다며 “아프간 침공 20년 후, 극단적 이슬람주의자들이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고 했다. 프랑스 통신사 <아에프페>(AFP)도 ‘테러와의 전쟁’ 20년 총평 기사에서 마찬가지 이유로 “완전한 실패”라고 규정했다. 아프간과 이라크 주재 영국대사를 역임한 윌리엄 패티는 “극단적 이슬람주의의 위협은 어느 때보다 심각하며, 그것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시엔비시>(CNBC)에 말했다.

미국이 ‘제2의 9·11’을 겪지 않은 게 전쟁 덕분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접근이라는 시각도 있다. 미국은 대형 테러를 겪은 뒤 테러분자 감시와 정보 수집 등 전쟁 이외의 대테러 활동을 크게 강화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9·11 직전 테러 가능성을 탐지하고도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데는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FBI) 사이의 장벽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공인된 사실이다.

 

긍정적 또는 부정적 평가와 관련해 계량적 측면도 따져봐야 한다. 전쟁 목적 달성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인명과 비용이 소모됐는지도 판단 요소나 배경으로 삼을 수 있어서다. 이와 관련해 미국 브라운대의 ‘전쟁 비용 프로젝트’ 통계가 광범위한 데이터를 제공한다.

이 프로젝트가 이달 1일 발표한 것을 보면, 20년간 ‘테러와의 전쟁’ 무대에서 죽어간 사람은 89만7천~92만9천명으로 추산된다. 지역별 사망자는 △이라크 27만5천~30만6천 △시리아/이슬람국가 26만6천 △아프간 17만6천 △예멘 11만2천 △파키스탄 6만7천 △기타 1천명이다. 신분별로는 △미군 7천 △미군 계약 업체 8천 △현지 군경 20만 △민간인 36만4천~38만7천 △미군의 적대 병력 등 29만7천~30만2천 △언론인과 구호기관 등 1500명이다.

 

사망자들이 전부 미군이나 그 동맹군과의 직접 충돌 과정에서 숨진 것은 아니다. 해당 국가의 정파적 대립이나 테러에 희생된 이들도 많다. 하지만 어쨌든 이런 죽음들은 ‘테러와의 전쟁’과 직간접적으로 얽혀 있다. 또 무력 사용에 의한 것으로 확인된 인원만을 집계한 것이어서, ‘테러와의 전쟁’과 결부된 죽음들 중 누락된 인원이 있다.

 

이런 숫자의 의미는 몇 가지 점에서 분석해볼 수 있다. 우선 ‘전쟁’이라고 하기에는 민간인 희생자 비율이 높다. 전후방이 따로 없는 교전 양상 속에 게릴라전, 무차별 보복, 테러가 난무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적대 세력 사망자 비중은 약 3분의 1이고, 미군의 동맹인 현지 군경이나 민간인 사망자가 3분의 2에 육박한다는 점도 눈에 띈다.

 

‘테러와의 전쟁’을 개시한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11일, 20년 전 탑승객들이 납치범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추락한 유나이티드항공 93편 사고 현장인 펜실베이니아주 섕스빌 추모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섕스빌/EPA 연합뉴스
‘테러와의 전쟁’을 개시한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11일, 20년 전 탑승객들이 납치범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추락한 유나이티드항공 93편 사고 현장인 펜실베이니아주 섕스빌 추모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섕스빌/EPA 연합뉴스
 

여기서 ‘테러와의 전쟁’이 왜 시작됐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본토에서 상상할 수도 없었던 끔찍한 테러로 약 3천명이 희생당하자 미국 지도자들은 “어디까지든 쫓아가 징벌하겠다”고 다짐했다. 그 전쟁이 20년을 끄는 동안 그보다 더 많은 미국인들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고, 전쟁과 관련된 전체 사망자는 9·11 테러의 300배에 이른다. 미국 입장에서는 테러분자들이나 테러 위협을 발본색원하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비례의 원칙’이 심하게 무너진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미국에서는 이렇게 희생 규모가 커졌지만 아프간이나 이라크 등 어느 쪽도 제대로 ‘안정화’하지 못한 데는 이라크 침공이 결정적이었다는 지적이 많다. 조지 부시 당시 대통령은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거짓 정보를 앞세운 네오콘의 선동에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겠다며 이라크를 치기로 결정했다. 그 효과로 아프간의 탈레반이 생존 공간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또 이라크에서는 수니-시아파 내전이 촉발됐고, 권력을 잃은 수니파 세력이 알카에다로 갔다가 다시 이슬람국가를 만들었다. 미국이 이라크전을 시작할 때, 중동에서 시아-수니파의 투쟁이 본격화하면 신-구교 충돌로 수백만명이 희생된 17세기 유럽의 30년전쟁의 재판이 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온 바 있다. 9·11 직후 테러 관련자 조사를 이끈 당시 연방수사국 요원 알리 수판은 <슈피겔> 기고에서 “알카에다와 탈레반이 아프간에서 재조직되던 시기에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전 준비를 위해 중요 자원들을 빼돌리면서 이미 2002년 가을에 우리는 아프간에서 패배했다”고 말했다

.

브라운대 조사팀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 비용은 총 8조달러(약 9392조원)로 추산했다. 현지 작전 비용이 2조1천억달러, 이자 1조800억달러, 국내 테러 예방 및 대응에 1조1200억달러, 전쟁에 따른 해외 기지 추가 비용 8800억달러, 2050년까지 참전 군인을 위한 지출 2조2천억달러 등이다.

 

‘테러와의 전쟁’ 규모와 방식에 찬성한다면 ‘필요한 지출’이었다고 볼 것이다. 하지만 동의하지 않는 쪽은 ‘그 돈을 다른 데 썼다면…’이라며 날려버린 기회비용을 생각할 것이다. 알카에다 제거에만 집중하거나, 아프간 너머로 전쟁을 확대하지 않고 보다 건설적이고 평화적인 프로젝트에 돈을 썼다면 나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명백한 승자는 따로 있다?
 

막대한 돈이 중동의 사막 한가운데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돈은 수많은 명목으로 지출됐고, 누군가의 주머니를 불렸다.

무기 등 군수물자를 대는 방위산업체들이 전쟁 확대와 장기화로 재미를 본 것은 당연하다. 또 전쟁 실패와 관련해 자주 지목되는 게 현지인들의 부패다. 미국은 1980년대부터 소련군과 싸우는 아프간 군벌들에게 거액의 ‘연봉’을 줬다. 그 뒤로도 군사적 목적이나 재건을 위해 돈을 주면 그대로 착복하거나, 원가를 부풀려 차익을 챙기는 행태는 반복됐다. 아프간 정부와 정부군의 부패를 제대로 감시하지 못한 게 탈레반 정권의 복귀로 이어졌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워싱턴 포스트>는 1060억달러어치 미국 국방부 계약을 검토한 회계 감사관이 그 돈의 약 40%가 현지 관리나 군벌, 범죄적 조직의 배를 불린 것으로 결론내렸다고 전했다. 미군이 탈레반을 축출한 직후인 2001년 말부터 2014년까지 아프간 대통령을 역임한 하미드 카르자이도 부패의 한 축으로 지목됐다. 하지만 오히려 그는 2019년 <에이피>(AP) 통신 인터뷰에서 미국의 현금이 아프간 관리들을 부패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나머지 돈은 어디로 갔을까?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아프간이나 이라크 재건에 큰 돈을 썼다지만 결국 큰 몫은 건설업체 등 서구 기업들에게 돌아갔다. 부시 행정부 때는 그와 친분이 있는 기업들이 계약을 따냈다. 2002~2021년 미국이 제공한 재건 비용의 12%만이 아프간 정부에 할당됐다. 이라크 정부에 자문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계약한 업체의 직원이 단 1명뿐이었고, 그는 다름 아닌 미국 국방부 부차관보의 남편인 경우도 있었다. 최근 <뉴욕 타임스>의 한 칼럼은 “누가 테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나”라고 물은 뒤 “미국의 국방 관련 계약자들”이라고 자답했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1012300.html?_fr=mt1#csidxea1f8a8b94d10d1b86223904c088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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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어떻게 '2조 5천억' 부동산 부자가 되었나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1/09/22 07:41
  • 수정일
    2021/09/22 07:4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조선'은 어떻게 '2조 5천억' 부동산 부자가 되었나

[김종성의 히,스토리] 조선일보의 성장 비결

▲ 열린민주당 김의겸 의원이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에서 교육·사회·문화 분야 대정부질문에 나서 조선일보사와 사주 일가의 부동산 현황을 공개하고 있다. 김 의원은 "<조선일보>와 그 사주 일가가 보유한 부동산은 총 40만여 평으로 시가 2조5000억 원 규모"라며 언론사·사주의 재산을 공개하는 법안을 발의하겠다고 밝혔다. ⓒ 남소연

 
열린민주당 김의겸 의원이 <조선일보> 사주 일가의 부동산 규모를 16일 공개했다. 서울 여의도 면적 45%에 해당하는 40만여 평으로, 공시지가로는 4800억 정도, 시가로는 2조 5천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속초·양양·의정부·인천·서울·화성·대전·부산 등에 부동산이 산재해 있다는 것이 김 의원의 설명이다. 앞으로 언론사 및 사주의 재산을 공개하는 법안을 발의하겠다고 그는 예고했다.

<조선일보>는 초창기에도 재산 문제로 주목을 받았다. 방상훈 현 대표이사의 증조부인 방응모가 1933년 인수한 뒤에 이 신문사는 금(金) 문제로 주목을 받았다. 방응모가 평안북도 삭주군에서 금광 사업으로 큰돈을 번 뒤였을 뿐 아니라 그의 경영 방식이 언론기관보다는 일반 기업에 훨씬 가까웠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경영방식

김옥균의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에 평안북도 서부인 정주군에서 태어나 10대 중반까지 한학을 공부한 방응모는 국권 침탈(경술국치) 1년 뒤인 1911년(만 27세)에 잠시 교편을 잡았다가 변호사 사무소에서 대서업을 경영했다. 3년 뒤 그만둔 그는 31세 때인 1915년부터는 자택을 이용해 여관사업을 경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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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신문 사업에 손댄 것은 38세 때인 1922년이다. 이때는 <조선일보>가 아니라 <동아일보>였다.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했던 것이다. 뒤이어 정주지국장이 됐고, 1924년부터는 삭주군의 교동광업소를 겸영하면서 굴지의 광산업자로 떠올랐다.


그는 식민지배에 참여할 의향도 있었다. 1927년 정주지국장에서 정주지국 고문으로 물러난 그는 46세 때인 1930년에 광역의원 선거인 도평의회(도회) 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조선일보>와의 인연은 그로부터 얼마 뒤 맺어졌다. 48세 때인 1932년에 <조선일보> 영업국장이 됐다가 1933년에 아예 인수했다.

1932년에 135만원이라는 거액을 받고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교동광산을 넘긴 뒤였으므로 <조선일보> 인수 당시의 방응모는 자금 사정이 넉넉했다. 이런 상황은 그가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에 기관총 구입비를 헌납하는 데 기여했다. 그 돈은 항공기 저격에 쓰이는 고사기관총 구입에 사용됐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제2권은 '방응모 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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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했다. 같은 달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에 고사기관총 구입비로 1600원을 헌납했다. 같은 해 7월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해 1940년 8월 폐간 때까지 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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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33년 10월에는 조선신궁 설립 10주년 기념사업을 담당하는 조선신궁봉찬회의 발기인 겸 고문이 되고, 1934년 3월에는 총독부와 군부의 지원 하에 일본 사상 전파를 담당하는 조선대아세아협회의 상담역이 됐다.

1937년 5월에는 총독부가 설립에 관여한 조선문예회의 문학위원이 되고 두 달 뒤에는 '경성 군사후원연맹' 위원이 됐다. 1938년 2월에는 총독부의 언론 통제를 돕는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가 됨과 함께 '조선 지원병제도 제정축하회' 발기인이 됐다. 이듬해 7월에는 영국 타도 운동을 벌이는 배영동지회 상담역이 되고, 1940년 10월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가 되고, 1941년 8월에는 임전대책협의회의 설립에 간여했다.
 

▲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그가 상당한 열의를 갖고 이런 활동들을 벌였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그는 1937년 2월 원산에서 시국 강연을 하던 도중에 '비국민적 행위를 배격하자'는 발언을 했다가 청중들에게 봉변을 당했다. 자신과 청중들을 일본국민으로 전제해놓고 연설을 했던 것이다.

그해 7월에는 <조선일보> 편집국장과 영업국장의 반대를 물리치고 '일본군을 아군으로 표기하는 방안'을 관철시켰다. "이후 <조선일보>의 지면은 '국민적 입장'으로 변했다는 조선총독부의 평가를 받았"다고 <친일인명사전>은 말한다. '그의 나라'가 어디인지 쉽게 느끼도록 만드는 대목들이다.

하지만 그가 일본을 위해서만 열심히 일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자신과 가족의 치부를 위해서도 열심히 뛰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가히 혁신적이었다. 신문 구독자 숫자를 늘리기 위해 경품 제공 방식을 도입하는 것은 물론이고 헬리콥터까지 띄워 대중의 주목을 끌었다.

2015년에 <지역사회연구> 제23권 제1호에 실린 강영걸 대구대 교수의 논문 '식민지 시기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의 경영전략에 관한 연구'는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혁신호를 발행한 것은 1933년 4월 26일"이라며 그의 경영 방식을 이렇게 소개한다.
 

"방응모는 전 12면으로 구성된 혁신 기념호를 식민지 신문 발행 사상 최고 부수인 백만 부를 발행, 전국에 무료 배포한다. 연이어 어린이날을 기념하여 본사 헬리콥터를 띄워 에어쇼를 하는가 하면, 태평로에 당시로서는 최고층의 신사옥을 짓는 등 일반 대중에게 위용을 공격적으로 과시해나간다."

 
노골적 친일로 성장

이 외에, 비행기를 이용해 취재한다든가 스타기자를 영입한다든가 하는 등의 아이디어도 그는 선보였다. 그 같은 공격 경영에 힘입어 인수 3년 뒤인 1936년부터 <조선일보>는 <동아일보>를 추월하게 된다. 인수 당시 <동아일보> 부수의 절반밖에 발행하지 못했던 <조선일보>가 역전을 이뤄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비정한 면모도 연출했다. 일장기 말소 사건 때 특히 그랬다.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의 운동복에 새겨진 일장기를 삭제한 채 손기정 사진을 내보낸 일로 인해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제재를 받자, 그는 이를 <조선일보> 도약의 계기로 자축하는 행사를 열기까지 했다.

<친일인명사전>은 "1936년 8월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가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정간과 강제휴간을 당하자, 경쟁관계에 있던 <조선일보>는 전국적으로 발전 자축회를 개최하는 등 이를 사세 확장의 기회로 이용했다"고 설명한다.
 

▲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을 맞아 5일 오전 서울 광화문네거리 조선일보사 부근 원표공원에서 '조선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청산 시민행동'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자회견과 함께 오종선 작가의 '조선일보 백년전'이 열렸다. 오종선 작가는 일제강점기 때 1월 1일이 되면 1면에 일왕 부처의 사진을 싣고, 제호위에 일장기를 올려 놓은 조선일보를 '두루마리 휴지'로 만들어 전시했다. 2020.3.5 ⓒ 권우성

 
공격적인 경영과 과감한 친일을 통해 방응모가 이룩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방응모 왕국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조선일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잡지 출판에도 손을 댄다. 성인용 종합 대중지인 <조광>과 더불어 <소년>과 <여성>도 창간하게 된다. <조선일보> 창간 3년 뒤인 1936년에 그는 언론재벌이라 할 수 있는 이 같은 상태를 이루게 된다. 강영걸 논문은 이렇게 평가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산의 절반 정도를 투자하여 <조선일보>를 인수한 이후 방응모는 <조광>, <여성>, <소년> 등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일련의 잡지를 발간하면서 남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언론 왕국을 꿈꾸었다."  


방응모의 사업적 성과는 노골적 친일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혁신 경영은 빛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공격적이고 참신한 경영 기법에 토대를 뒀다 해도, 일본과의 노골적인 제휴 속에서 이뤄진 수익 창출이 정당성을 갖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반민족성과 반역사성을 태생적 운명처럼 타고난 <조선일보>는 오늘날에도 반시대적이고 부조리한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런 토대 위에서 <조선일보> 사주 일가는 여의도 면적의 45% 정도 되는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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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진하는 한국 기후정치의 풍경

[함께 사는 길] "한국의 탄소감축정책은 역진하고 있다"

해를 이어 산림 화재를 경험하고 있는 시베리아, 기록적인 50℃ 기온을 경험한 남·북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대륙과 폭염과 더불어 대홍수 피해를 본 유럽과 아시아 등 전 세계적으로 이상기후가 휘몰아쳤다. 결국 올해 7월은 지표면 온도 관측이 시작된 1880년 이래 가장 뜨거운 16.73℃를 기록(20세기 평균 15.8℃보다 0.93℃ 높은 온도)했다는 보고가 미국 해양대기청(NOAA)에서 나왔다. 그리고, '이젠 탄소 감축의 문제에서 생존의 문제가 됐네….' 기후변화가 정치 의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라고 느꼈던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의 보고서가 나왔다. 지난 8월 9일 IPCC가 '6차 (기후변화)평가보고서 제1실무그룹 보고서'를 승인한 것이다. 보고서의 요지는 '지구가 생태적 파국 없이 감당할 수 있는 기온상승한계 1.5℃ 돌파 시한이 지난 2018년 나온 '1.5℃ 특별보고서'의 예측보다 10년 이상 빨라졌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오는 11월 영국에서 개회될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의 논의기반이 될 것이다.


 

1.5℃ 이내의 기후변화 억제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남은 탄소예산은 300Gt뿐이다. 이조차도 100% 확실한 게 아니고 약 83%의 확률로 억제할 수 있는 배출량일 뿐이다. 게다가 전 세계가 극적으로 탄소 배출을 줄여서 2050년 탄소중립을 이루더라도 1.5℃ 기후변화는 불가피하다. 2040년 무렵 지구평균기온은 산업화 이전보다 1.5℃ 상승할 게 확실하고 이 기온변화를 다시 정상으로 돌리는 데만 최소 30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1.5℃ 기온상승은 지구의 생태적 파국을 피하고 인간과 자연이 적응할 수 있는 최소 기온변화일 뿐 피해가 없는 기후변화인 건 아니다. 그것이 산업혁명 이래 오늘날까지(1850~2019) 이미 인류가 배출한 탄소 2390Gt이 불러온 결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0년 세계 총탄소배출량은 34Gt(단위 CO₂eq, 이산화탄소환산톤)에 달한다. 이런 규모의 탄소배출은 1.5℃ 기후변화 통제목표를 아득히 초과하는 것으로 탄소예산 완전 소비까지 10년이 채 걸리지 않는 규모와 속도다.


 

말 그대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지구촌 기후정치의 근간은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가 합의한 신기후체제이다. 각국의 탄소감축계획(NDC)을 점진적으로 확대하는 얼개로 짜였다. 문제는 각국 NDC의 총합 또한 이미 1.5℃ 목표를 아득히 추월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 강화된 감축계획이 필요한 마당이다. 이러한 인식 아래 유럽을 선두로 산업에 더 직접적인 탄소감축을 요구하는 제도 도입이 이어지고 있다. 유럽연합은 지난 6월 28일 기존 목표보다 15% 상향된 탄소감축목표(1990년 대비 55%)를 설정하고 2050년 탄소중립을 명문화한 '기후기본법'을 제정한 데 이어, 7월 14일에는 이 법의 하위 실행법에 해당하는 발전, 제조, 이동과 수송 부문의 12개 법안(Fit for 55)의 시행을 밝혔다. Fit for 55는 이미 탄소감축 이행수단으로 널리 쓰이는 '배출권거래제(ETS; 기업 간 탄소배출권 매매제도)'의 강화(무료 할당량 단계적 축소)와 '탄소국경세(CBAM; 유럽연합의 탄소배출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한 국가의 수출제품에 유럽연합 역내 생산제품과의 탄소비용 차액을 관세로 부과)'의 신설(2026 시행 예정) 등 시장기제와 행정기제를 망라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유럽에 수출하는 국가들의 기업들은 정부로부터 무료 할당받은 탄소배출권에 대해서 추가 관세를 물어야 하고 생산에 재생에너지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 부분도 추가 관세를 물게 된다. 자신들의 탄소감축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국가의 수출품에 관세를 매겨 유럽연합 내부 생산제품의 가격경쟁력을 확보하고 교역 관계가 있는 유럽 이외 지역의 탄소감축도 강제하는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적어도 일방적인 '사다리 걷어차기(선발 국가의 후발 국가 성장을 막는 제도적 장벽의 도입)'로만 볼 수 없는 명분이 있는 것이다.


 

▲ 지난해 3월 포스코센터 앞에서 주주총회에 참석하는 주주들에게 포스코의 신규 석탄발전소 중단을 촉구하는 '기후위기비상행동'에 환경운동연합 회원들이 참여하여 퍼포먼스를 펼쳤다. ⓒ환경운동연합

#2. 역진하는 한국 기후정치의 풍경


 

유럽연합의 전향적인 정책과 비교할 때 우리나라 탄소감축정책은 역진하는 중이다. 지난 8월 6일 민관 공동으로 설립된 '2050 탄소중립위원회'가 3개 탄소중립 시나리오 초안을 공개했다. 2개의 시나리오는 아예 2050 목표연도까지 탄소중립을 이루지 못하는 안이고 1개 시나리오만 탄소중립이 가능했다. 탄소중립 목표연도인 2050년 이후까지 석탄화력 7기와 LNG화력발전을 유지(1안)하거나, 석탄화력은 퇴출하되 LNG화력발전은 유지(2안)하는 시나리오가 어떻게 탄소중립 시나리오가 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위원회로서는 각 행정부처가 산업계 등 주요 탄소 배출처에서 제출된 자료를 받아 국가계획에 대비해 판단 후 정리해 제출한 전달한 자료를 종합정리한 것이니 사실상 탄소중립 달성 불가 2개 시나리오가 한국 산업계와 행정부의 '진심'에 가까운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탄소중립을 달성하는 1개 시나리오에도 문제는 있다. 석탄화력발전과 내연기관 자동차의 퇴출 등 탄소중립을 위한 핵심과제의 완료 시점이 명기되지 않은 그저 선언에 가까운 시나리오이기 때문이다.


 

한편, 지난 8월 18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여당(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야당 의원들이 반발해 퇴장한 야간에 '2050 탄소중립'과 '2018년 배출량 7억2760만t 대비 35% 감축목표(구체적 목표 수치는 대통령령에 위임, 2030 NDC 목표로 삼게 된다)'를 담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 녹색성장법'을 단독 처리했다. 이 법에 담긴 감축목표는 IPCC가 제시한 각국 NDC 기준목표인 '2010년 대비 45% 감축'에 턱없이 미달한다. 그저 기존 '녹색성장법'에 2050 탄소중립 목표만 집어넣어 개명한 대체입법인 것이다.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와 2030 탄소감축목표가 명시된 탄소중립 녹색성장법 결의 과정에서 정부여당이 보여준 탈석탄, 내연기관 퇴출에 관한 정책 의지 박약과 더불어 더욱 문제적인 것은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이 보여주는 이중성이다. 국내 신규 핵발전소 건설은 불허해도 수출은 장려한다(5.21. 문재인 대통령 방미 한미정상 공동성명)거나 소형모듈원자로(SMR) 개발사업 연구비를 지원하는 일(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2021년 대통령 업무보고)들은 기후위기 대응에 핵의 역할을 대대적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보수야당과 핵산업계의 주장에 동조하는 결과를 불러올 뿐이다. 수출해도 되는 핵발전소를 내수시장에서도 확대하지 않을 논리적인 이유가 없고 발전과정만 보면 저탄소인 핵발전으로 석탄화력과 가스화력발전을 대체하지 않을 논리적인 이유 또한 없기 때문이다. 이 논리를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예를 들어 거부하면 안전하지 않은 핵발전소 수출을 지원하는 정부라는 프레임에 걸린다. 그러니 원자로 규모만 줄인 SMR을 핵의 위험성도 줄인 신기술인양 포장하는 꼼수를 쓸 수밖에 없다.


 

기후파국을 피할 시간이 10년밖에 남지 않은 현재, 유럽연합을 위시해 한국의 NDC 수준을 훨씬 넘는 전향적 탄소감축목표를 세우고 실행에 나선 소위 '선진국'들의 탄소감축 규모와 속도는 이미 개도국을 벗어나 '선진국이 된 우리나라(유엔무역개발회의는 지난 7월 5일 68차 이사회에서 한국의 지위를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공식 변경했다)'에겐 반드시 좇아가야 할 과제가 됐다. 국력에 훨씬 못 미치는 NDC의 수준은 전 세계 기후정치권과 시민사회로부터 '기후악당국가'라고 불리는 직접적 원인이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공식 국가감축목표는 '2030년에 2017년 배출량 대비 24.4% 감축'이다. 하지만 오는 11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는 이전보다 상향된 국가감축목표를 제출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여당이 내놓은 안은 녹색성장법 대체입법에 담긴 '2030년에 2018년 배출량 대비 35% 감축'에 불과하다. 위기의 심각성에 비해 심각하게 안이하고 그만큼 국내 산업계의 형편을 봐준 이기적인 감축목표다. 

 

#3. 기후위기의 현실을 살아가기 위하여


 

후기산업주의의 질서와 변화를 연구해 탁월한 성과를 남긴 역사가이자 사회발전론 연구자인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는 1930~1970년대에 이르는 일련의 연구를 통해 '신·구 에너지체제는 경쟁을 통해 전환한다'고 갈파했다. 오늘날 한국의 기후변화 대응 감축정책을 보면 구 화석연료체제가 신 재생에너지체제의 성장을 정치와 제도의 관성으로 억누르는 상황이다. 총론에서 전환의 당위성과 방향에는 동의하지만, 각론에서 구 에너지체제를 옹호하는 정책 현실은 2030년 이후 닥칠 피할 수 없는 기후변화의 증강된 후폭풍을 재촉할 뿐이다. 그리고 그 피해는 국가가 대변하고자 애쓰는 산업계는 물론 개별 국민, 특별히 사회적 약자들에게 집중될 것이다.
 

 

21세기 중반까지 향후 100년간의 지구 미래를 예측한 저서, <성장의 한계>(1972) 공동 저자인 미래학자 요르겐 렌더스는 지나온 40년을 돌아보고 다시 40년 뒤(2052년)의 미래를 다룬 저서 <더 나은 미래는 쉽게 오지 않는다>(2012)를 통해 지구의 생태총량을 초과한 경제활동과 기후변화의 영향 아래 국가와 정책의 실패로 더 살기 어려워진 미래를 예측하고 그 미래를 살아갈 개인들에게 기후위기 시대의 20가지 적응 방법을 제안했다. 그 제안의 핵심은 기후위기와 중첩된 사회경제적 성장의 한계를 인정하고 이기적이지만 영리하게 국적, 거주지, 직업, 자녀교육, 투자를 '성장의 한계가 뚜렷한 곳에서 덜 뚜렷한 곳으로 바꾸라'는 것이었다. 임박한 재난과 함께 살 생각을 하라는 권유다. 기후위기는 이제 회피하기 어려운 현실이자 미래다.


 

국가, 공권력의 무능과 산업계를 중심으로 한 자본의 이기주의는 21세기 중반에도 여전히 살아남아 생활해야 할 개별 시민들과 자연생태계의 생명들에게 치명적이다. 아직 우리에겐 시간이 있다고 말하기엔 너무나 촉박한 일정이다. 인류는 10년 이내에 지금보다 최소한 9분의 1 수준으로 탄소를 감축하고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이루는 대대적인 전환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올해 생태발자국 초과일은 지난 4월 5일이었다. 12월 31일까지 써야 할 생태예산을 8개월 앞당겨 탕진한 셈이다. 이러한 '초과'가 계속되면 결국 인출할 잔고가 마르고 그 순간 지구의 생태적 파산이 찾아온다. 기후위기는 생태발자국 초과의 결과이자 가속기제다.
 

 

이기적 개인으로 기후위기시대에 생활과 생존을 시험받을 것인지 지금 당장 국가와 산업의 에너지 체제 전환을 재촉하는 적극적 기후행동가가 될 것인지 2021년 가을, 우리는 절박한 질문 앞에 서 있다. 이기적 생활자로 살아남고자 한다면 한순간이라도 빨리 요르겐 랜더스의 조언을 실천해야 한다. 지구와의 공존을 선택한 기후행동가로 나서고자 한다면 당장 비영리 기후행동단체(시민사회단체) 회원이 되어 정치와 자본의 전환을 요구하는 시민참여행동을 시작해야 한다. 다행히 개별적 생활자와 기후행동가의 삶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당장 오늘부터 미래를 연습해야 한다. 기후위기를 완화하면서 동시에 그 위기에 적응하는 삶을 앞당겨야 하는 것이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91313413014655#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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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춥겠다" 추석에 또 이 말 들을까봐 두렵다

[코로나 베이비 시대 양육 고군분투기] '라테파파'가 "라떼는 말이야" 어른들께

21.09.20 19:59l최종 업데이트 21.09.20 19:59l
'코로나 시대의 육아를 누군가는 기록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으로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시간은 흐르고 언젠가 막이 내릴 시대이지만 안 그래도 힘든 육아에 이 시국이 무언가로 고통을 주는지 알리고 공유하며 함께 고민해 보고 싶었습니다. 항상 말미에 적는 글이지만 아기를 양육하고 계시는 이 시대의 모든 부모님들께 위로와 응원 너머의 존경을 보내는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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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아빠로서 아이를 키우다 보면 "나 때는 말이야" 하며 조언을 건네는 일명 "라떼족" 어른들을 자주 만난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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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테파파'는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유모차를 미는, 아기 양육에 적극적인 아빠들을 말한다.

요즘 아빠로서 아이를 키우다 보면 "나 때는 말이야" 하며 조언을 건네는 일명 '라떼족' 어른들을 자주 만난다. 곧 다가올 명절 연휴 역시 친지들의 육아 충고를 피할 수 없는 때다.

그 중 감사한 충고들은 가슴에 새겼지만, 일부 들으면서 의아했던 적도 있다. 지금도 잘 이해되지 않는 말들을 기록으로 남겨보려 한다.

"아기에게 무겁다고 말하는 거 아니다" 이제 11개월에 접어든 아기는 가수 진성의 '보릿고개'라는 노래를 참 좋아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울다가도 이 노래를 불러 주면 그친다. 약 두 달 전, 아기와 함께 한 방송에 이 사연으로 출연하게 되면서, 친척과 지인들의 전화·메시지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육아 경험담을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기 시작한 것도 주위 분들의 관심을 받게 된 데 한몫했다. 이런 이유로 연락을 해오는 지인들로부터 만나자는 요청을 많이 받았다.

일전에 필자가 가르쳤던 자영업자 분들과도 그렇게 해서 최근 모임을 하게 됐다. 50대 이상 분들이라 항상 만날 때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대화의 주제는 당연히 연재하고 있는 글과 텔레비전에 나온 아기 얘기가 먼저였다. 아기가 귀엽다는 칭찬을 필두로 시작된 말씀들은 아기를 기르고 있는 나를 향한 조언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 대화 내용 중에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대목도 많았다. 당시에는 대답을 바로 해 드리지 못했다. 사람마다 육아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섣불리 뭐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그저 '정말 예전에는 육아 방식이 많이 달랐구나'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자주 들었던 조언들 중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던 얘기들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먼저 미신에 관한 내용이다. 두어 번 이상 들어서 '아, 이게 한 사람의 생각만은 아니구나'라고 느낀 것들만 적어 본다.

'아기에게 무겁다고 하지 마라. 키가 크지 않고, 잘 자라지 못하며, 아프게 된다.'

아기가 생후 11개월에 들어서며 몸무게가 10킬로가 넘었다고 하자 돌아온 말이다. 아기에게 '절.대. 무겁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근거는 없다. 그저 조심하라는 뜻에서 어른들이 건네는 충고다. 

'아기가 엄지를 빨면 둘째가 아들이고, 둘째 손가락을 빨면 딸이다.'
'아기 이가 하나씩 나면 딸이고 두 개가 한꺼번에 나면 둘째가 아들이다.'


아기의 동생을 바라는 지인들께 들은 말이다. 미스터리다. 우리 아기의 이는 두 개가 한꺼번에 났고 둘째 손가락을 빠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성별은 관계없다. 둘째가 생기면 그저 대환영이다.

"아기를 자주 안아주면 안 된다"
     
써큘레이터 앞에서 시위하는 아기 뭐든 잡고 서서 부려 뜨려 바닥에 눕혀 놓은 서큘레이터 앞에 가서 쉬고 있는 아기. 덥다고 바지도 거부하는데 어떻게 싸매라는 건지...
▲ 써큘레이터 앞에서 시위하는 아기 뭐든 잡고 서서 부려 뜨려 바닥에 눕혀 놓은 서큘레이터 앞에 가서 쉬고 있는 아기. 덥다고 바지도 거부하는데 어떻게 싸매라는 건지...
ⓒ 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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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충고는 육아에 관한 조언이다. '우리 때는 안 그랬어, 그렇게 안 키웠어'라고 하시던 말씀들이 귓가에 아직도 생생히 들리는 듯하다. 그렇게 시작하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다. 

'아기는 여름이든 겨울이든 꽁꽁 싸매서 길러야 한다.'

산책 때마다 제일 많이 들은 말이다. 올 여름에도 길에서 만난 어르신들은 하나같이 "아기에게 왜 반팔을 입혔냐, 아기가 너무 추워할 거다"라고 하셨다. 해가 쨍쨍한 한여름에 말이다. 그러나 우리 집 아기는 너무 열이 많아서 시원하게 기르고 있다. 꽁꽁 싸맸다간 땀띠와 습진으로 고생할 것이다.

'아기를 자주 안아주면 안 된다. 버릇된다.'

참 어려운 조언이다. 기저귀를 갈아주고 배를 채워줘도 울면 안아서 달래는 방법밖에 없는데... 초보 아빠는 그저 이런 말을 들으면 당황스러울 뿐이다. 

'밥상 예절은 호되게 가르쳐야 한다.'

자기주도 이유식을 하는 것과 아기가 과일을 스스로 먹는 모습을 보고 친지들께서 많이 하셨던 말이다. 손이 서툰 아기는 주변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자유롭게 놀듯이 식사를 즐기는데, 어른들 눈엔 그게 걱정스러우셨나 보다.

그러나 전문가들에 따르면, 밥상머리교육뿐만 아니라 24개월 이전의 아기는 훈육의 개념이 없어서 가르치는 효과가 없다고 한다.

'울면 밥 줘야 한다.'

이 말씀, 정말 많이 들었다. 그러나 우는 게 무조건 배고프다는 신호는 아니라고 한다. 요즘엔 수유 간격을 체크해 적정량을 먹이려는 양육자들이 많다.

'코를 자주 잡아 당겨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코가 낮아진다.'

아직 뼈가 여물지 않은 아기의 코를 굳이 잡아당겨야 할까. 그러기엔 마음이 아프다. 생김새는 그저 유전자의 결과일 테다. 부모 코가 높은 아이들은 안 잡아당겨도 훗날 다 높아지는 것 같더라.

'아기는 엎어 재워야 한다.'

엎드려 재워야 놀라지 않고 잘 자며, 뒤통수도 예뻐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 말에 따르면 아기는 아직 폐가 완성형이 아니어서 엎드려 재우는 게 위험할 수 있다고 한다.

이밖에도 '아기에게 장난감을 너무 많이 사준 거 아니냐', '과일 지금 먹이면 안 되는 거 아니냐' 등 엄청나게 많은 조언을 들었지만 지면상 생략한다.

초보 양육자들에게 정말 필요한 말은 따로 있다
 
 라테파파 등 초보 양육자에게 필요한 건 시원한 라테 한 잔과 같은 위로와 격려다.
▲  라테파파 등 초보 양육자에게 필요한 건 시원한 라테 한 잔과 같은 위로와 격려다.
ⓒ 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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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른들이 보기엔 요즘 부모들의 육아가 못미더울 수도 있을 것 같다. 당신들의 시대와 육아하는 방식이 다르니까.

그렇지만 이것만은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아기를 누구보다 사랑하며 조심스레 키우고자 하는 건 그 아기의 양육자다. 밤낮으로 잠을 참아가며 맘카페에도 물어보고 책도 뒤져가면서 열심히 공부한다.

최근엔 전문가들이 의학적 정보를 담아 집필한 육아서적들이 시중에 많이 나왔다. 헷갈리면 소아과 의사에게 찾아가 물어보기도 한다. 오히려 정보가 너무 많아서 헷갈릴 때도 있다. 그럴 땐 아이에 맞게 취사선택하며 육아한다.

오해는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아기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다 사랑과 관심으로 건네시는 조언인 거 알고 있다.

다만 그저, 가끔은 따뜻한 미소로 초보 양육자의 성장을 가만히 지켜봐주며 응원해줄 때도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수면부족과 생애 첫 육아로 하루하루 긴장하며 사는 양육자들에게 필요한 건, 지식보다도 위로와 격려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아기를 사랑과 정성으로 돌보며 육아에 매진하고 있을 모든 양육자들께 라테 한 잔을 닮은 위로와 격려, 그리고 응원의 마음을 보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브런치와 블로그에 실립니다.

태그:#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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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코로나] 코로나19 창궐 이후 두 번째 추석…올해 풍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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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창궐 이후 맞는 두 번째 추석. 올해 모습은 어떨까.

 

크게 세 양상으로 나뉘는 모양새다. 바로 정부의 ‘위드 코로나’ 선언 예고에 따라 마지막 희생을 결심한 ‘집콕족’과 가족이라도 봐야겠다는 ‘모임족’, 답답함에 집 밖으로 뛰쳐나온 ‘여행족’이다.

 

꽉 막힌 고속도로. (사진=연합뉴스)
▲ 꽉 막힌 고속도로. (사진=연합뉴스)

 

◇ 올 추석, 전년보다 이동량 많을 듯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는 지난 14일 정례 브리핑에서 “한국교통연구원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번 추석기간 동안 일평균 이동량이 작년 추석 대비 3.5% 정도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며 “특히 감염 우려 등으로 자가용 이용(93.6%)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이날 한국공항공사 발표를 보면 추석연휴(17~22일) 인천국제공항을 제외한 국내 14개 공항 여객 수는 111만2046명으로, 지난해 추석 기간보다 18%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인천공항공사도 올 추석연휴 승객이 5만8792명으로, 전년대비 66.7%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백신 접종률이 1차 접종 기준 전 국민의 70%까지 상승하면서 이번 추석연휴에는 가족·친지모임이나 여행 등을 계획한 사람들이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김포공항 국내선이 여행을 떠나는 이들로 북적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김포공항 국내선이 여행을 떠나는 이들로 북적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언제 나아질 줄 알고요. 일단 집은 나서렵니다”

 

실제로 코로나19로 인해 숨 막혔던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고향을 방문하거나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다수 있는 것으로 본보 취재 결과 확인됐다.

 

수원에 거주하는 박모(50대·남)씨는 15일 경기신문과 인터뷰에서 “작년에는 집에만 있었는데, 올 추석에는 여행을 떠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이유에 대해 박 씨는 “솔직히 그동안 정부의 방침대로 잘 따랐다고 생각한다”며 “그런데 협조하면 할수록 답답하다는 느낌이 계속 들었다”고 설명했다.

 

이는 정부가 내놓은 사회적 거리두기 개편안에 명시된 방역지침이 터무니없이 애매하고 모호했을 뿐더러 그 이후 확진자 수가 감소하기는커녕 증가세를 나타내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박 씨는 “정부 방침의 타당성, 효율성 등을 언급하는 것은 섣부른 행동일 수 있지만, 국민이 느끼는 감정이 이렇다”며 “‘이번만 참으면 된다’는 말만 믿다가 1년하고 반년이 훌쩍 지났다. 속 터져서 더는 못참는다”라고 일갈했다.

 

용인에서 자영업을 하고 있는 석모(20대·여)씨도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가족의 품속에서 추석연휴를 보낼 예정이다.

 

석 씨는 “사실 자영업을 시작한지 불과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코로나19로 인해 영업시간이 제한된 이후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며 “작년과 올해 초까지는 희망을 갖고 가족도 보지 않고 명절 연휴에도 열심히 일했는데, 지금도 여전히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그래서 이번 추석 연휴에는 가게 문을 닫고 가족을 만나러 갈 생각”이라며 “매출이 반토막 이상 난 상태에서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지만 이번에도 안 보면 제가 너무 힘들 것 같다”고 덧붙였다.

 

놀이 중인 가족. (사진=연합뉴스 제공)
▲ 놀이 중인 가족. (사진=연합뉴스 제공)

 

◇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요…이번만 참으면 나아지겠죠?”

 

반면 정부의 ‘위드 코로나’ 선언 예고에 따라 올해도 어김없이 희생을 자처하는 이들도 존재했다.

 

수원시민 김모(60대·남)씨는 경기신문과 전화통화에서 “작년에 이어 올해 추석도 가족들과 모이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김 씨는 “벌써 세 번째나 가족과 명절을 못 보내는 것”이라며 “너무 속상하긴 하지만 희망을 갖고 정부 방침에 협조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김 씨의 이 같은 결정은 최근 정부가 ‘위드 코로나’를 선언하겠다고 예고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실제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지난 7일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코로나19 유행을 통제하고 방역지침을 완화하는 이른바 '위드 코로나' 전환 시점을 10월 말로 예측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김 씨는 “당장 귀성은 아니더라도 가까운 곳으로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은 심정이지만 개인이 사소한 욕심을 채우려다가 방역에 차질이 생기면 곧 국민이 피해를 입는 것”이라며 “가끔 제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자부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어쩌면 명절 연휴에는 푹 쉬고 싶은 가장의 욕심을 미화시키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문득 든다”며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중대본 브리핑 하는 박향 방역총괄반장. (사진=연합뉴스 제공)
▲ 중대본 브리핑 하는 박향 방역총괄반장. (사진=연합뉴스 제공)

 

◇ 수도권 중심 코로나19 확산세 ‘비상’…정부 “추석, 소규모로 모여 달라”

 

한편, 정부는 최근 수도권을 중심으로 4차 유행세가 ‘정체’에서 ‘확산’으로 돌아서면서 추석 연휴 ‘소규모 만남’을 강조하고 나섰다.

 

박향 중앙사고수습본부(중수본) 방역총괄반장은 지난 14일 브리핑에서 “지난 1주간(5~11일)의 하루 평균 국내 환자 수는 1725명으로 직전 한 주간의 1672명보다 3.2명 증가했다”며 “유행 중심지역인 수도권은 직전 주 대비 6.7% 증가해 8월 둘째 주 이후 매주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날 0시부터 오후 9시까지 서울에서만 확진자 790명이 새로 쏟아져 나왔다. 이미 서울의 하루 신규 확진자 기존 최다 기록(8월24일 677명)을 깼다. 자정까지 집계를 더해 15일 0시 기준으로는 800명을 넘길 것으로 보인다.

 

지난주(6~12일) 전국 이동량은 직전 주보다 1.9% 증가해 3주 연속 증가세를 보였고, 지난주 감염재생산지수도 ‘1’을 넘어 1.01로 ‘유행 확산’을 나타냈다.

 

박 반장은 “(추석 연휴에) 가족들이 모일 때 함께 자리하는 전체 숫자가 최소화할 수 있도록 ‘형제가 시차를 두고 고향에 방문하는 등’의 방안을 강구해달라”고 했다.

 

이어 “최근 고령층 돌파 감염 사례가 늘고 있는 만큼, 백신 접종을 하지 않은 분들의 귀성을 자제해 달라. 접종 완료자라도 최소 인원이 모일 수 있게 일정도 조정해야 한다”고 했다.

 

[ 경기신문 = 김기현 기자 ]



[출처] 경기신문 (https://www.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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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세금을 내기 싫었던 거였다 _ 미국의 독립

[연재] 추석 연휴에 만나는 재미있는 경제역사 ③

이완배 기자 
발행2021-09-20 14:46:36 수정2021-09-20 14:46:36
 

*편집자 주 - 지난 설에 이어 추석 명절을 맞아 경제역사에서 벌어졌던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사건들을 소개하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연휴 기간 동안 모두 다섯 건의 경제역사가 소개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 바랍니다.

① 수에즈 운하의 패권을 다투다 _ 수에즈 전쟁
② 구아노가 남미를 초토화하다 _ 새똥 쟁탈전
③ 사실은 세금을 내기 싫었던 거였다 _ 미국의 독립
④ 노예 해방은 전쟁의 원인이 아니었다 _ 미국 남북전쟁
⑤ 주식회사의 출발로 촉발된 바다의 패권 다툼 _ 영란 전쟁

많은 사람들이 “왜 유럽에서는 기독교가 번성한 반면, 아프리카와 서아시아에서는 이슬람교가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했을까?”라는 궁금증을 갖는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과 아프리카, 서아시아는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웠던 데다가, 중세 이후 유럽의 기독교는 유럽을 휩쓸 정도로 위세가 등등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프리카와 서아시아에서는 기독교가 별로 힘을 쓰지 못했다. 이슬람교에 철저히 눌렸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기독교도들은 “이슬람교도들이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종교를 퍼뜨렸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해왔다.

이슬람교도들이 땅을 점령한 뒤 그곳 주민들에게 “믿을래? 죽을래?”라고 협박했고, 원주민들은 그 힘에 굴복해 이슬람교를 믿게 됐다는 것이다. 이슬람교의 폭력성이 종교의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는 이야기다.

 

이런 논지를 펼치는 이들 중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를 그 증거로 대기도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Muhammad)가 태어난 성지 메카(Mecca)가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 위에는 ‘알라 외에는 신(神)이 없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고, 그 아래에는 칼이 한 자루 그려져 있다. 이것이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을 상징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들은 대부분 억지다. 일단 역사적으로 이슬람교가 기독교보다 더 폭력적이었다는 주장부터 너무 주관적이다. 이슬람교가 일으킨 전쟁이 적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가 일으킨 전쟁의 양도 결코 그에 뒤지지 않는다.

사실은 세금이 문제였다

이런 해석에 사우디아라비아 국기를 끌어들인 것은 견강부회의 극치다. 사우디아라비아 국기에 그려진 칼은 폭력이 아니라 ‘정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또 그 국기는 지금으로부터 고작 50년 전인 1973년에 만들어졌다. 1973년 이후 이슬람교를 믿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일으킨 전쟁이 몇이나 되나? 이 시기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랍 국가들 중 가장 온건한 성향의 나라였다. 그래서 실제 이슬람교도들은 “이슬람교가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을 들고 폭력으로 종교를 퍼뜨렸다.”는 말을 들으면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한 가지 더 살펴보자. 이슬람교도들은 오른손과 왼손을 매우 정확히 구분한다. 깨끗한 것을 만질 때에는 오른손을, 용변을 본 뒤 물로 씻을 때에는 왼손을 쓴다. 만약 이들이 한 손에 『코란』, 한 손에 칼을 들었다면 오른손으로는 당연히 가장 중요한 『코란』을 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칼을 왼손으로 쥘 수밖에 없다. 왼손에 칼을 쥐고 그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는 이야기인데 그게 말이 되나? 통계적으로 사람은 오른손잡이가 왼손잡이보다 훨씬 많다. 이슬람 전사들이 모조리 왼손잡이가 아닌 한 왼손에 칼을 쥐고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슬람교가 아프리카와 서아시아에서 득세한 이유를 좀 더 객관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헌금이다. 종교가 국교로 숭배되던 시절, 헌금은 내도 그만 안 내도 그만인 돈이 아니라 반드시 내야 하는 세금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기독교의 헌금이 십일조(소득의 10분의 1을 헌금으로 내는 제도)였던 반면, 이슬람교의 헌금은 소득의 2.5%에 불과했다. 이슬람교를 믿는 것이 기독교를 믿는 것에 비해 돈이 4분의 1밖에 들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가난한 민중들에게 이 차이는 매우 컸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경합했던 시기, 아프리카와 서아시아 원주민들이 이슬람교를 선택했던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7년 전쟁의 불똥이 북아메리카로 튀다

역사적으로 벌어진 수많은 전쟁 중에는 이와 유사한 것들이 널려 있다. 뭔가 숭고한 가치를 위해 전쟁을 벌이고 사람을 살상한 것처럼 포장하지만, 그 내면에는 돈의 문제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특히 세금은 전쟁의 매우 중요한 원인이었다. 중세 아프리카와 서아시아에서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벌인 영토 확장 분쟁의 핵심 요인 중 하나가 헌금(사실상 세금)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근대 이후 세금이 촉발한 최대 규모의 전쟁을 꼽으라면 그것은 단연 미국의 독립전쟁(1775~1783)이 될 것이다. 독립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였다. 그런데 당시 영국과 미국의 관계는 일본과 조선의 관계 같은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의 주류는 영국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북미 대륙의 주도권이 원주민(유럽인들이 ‘인디언’이라고 불렀던)들에게 있었다면 당연히 그 관계는 매우 험악했을 것이다. 하지만 북미 대륙의 주도권은 영국에서 건너온 신교도들에게 있었고, 그들은 영국에 별 악감정을 갖지 않았다.

비교적 무난한 관계가 지속되던 두 나라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이 유발된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최초의 세계대전’이라고도 불리는 7년 전쟁(1756~1763)이 그것이다. 이 전쟁의 출발은 오스트리아에서 벌어진 단순한(!) 왕위 계승 전쟁이었다. 그런데 이 전쟁에 프로이센이 개입하더니, 이후 영국, 프랑스, 러시아, 스페인, 스웨덴, 포르투갈 등 유럽 열강들이 각자의 이유로 이 전쟁에 참여해 전쟁의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영원한 앙숙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 대륙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이 불똥이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번졌다. 북아메리카에서 각각 식민지를 갖고 있던 프랑스(캐나다)와 영국(미국)이 이곳에서도 전쟁을 벌인 것이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은 당연히 영국 편에서 프랑스와 싸웠다. 그리고 미국은 이 싸움에서 꽤 진심으로 영국을 도왔다. 당시만 해도 원주민이 아닌, 즉 영국에서 건너와 정착한 이주민들은 자기들이 식민지 피지배인이라기 보다 영국 사람에 가깝다고 믿고 있었다.

이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돌아갔다. 문제는 전쟁에서 너무 많은 돈을 쓰는 바람에 영국 정부가 막대한 빚을 졌다는 점이었다. 영국 정부는 이 빚을 메우기 위해 엉뚱하게도 식민지에서 더 많은 세금을 걷기로 했다. 종전 이듬해인 1764년 영국이 만든 설탕법(Sugar Act)이 이를 위한 정책이었다.

이번에는 인지세가 문제였다

설탕법이 실시된 배경과 역사는 생각보다 조금 더 복잡한데, 최대한 간략히 요약하면 이렇다. 17세기 영국은 크롬웰이 만든 항해법(Navigation Acts)을 통해 영국 식민지에서 재배된 설탕과 담배 등을 무조건 일단 영국에 팔도록 정해놓았다. 영국은 그렇게 모은 설탕과 담배를 다시 그것을 필요로 하는 다른 식민지에 내다 팔았다. 중개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긴 것이다.

그런데 7년 전쟁 이전까지 미국은 이 법을 거의 지키지 않아도 별 탈이 없었다. 담배야 원래 아메리카 대륙에서 났던 것이니 외국에서 수입할 필요가 없었고, 문제는 설탕이었는데, 미국 주민들은 이 설탕을 대부분 밀수로 구입했다. 미국과 우호적 관계였던 영국도 미국의 이런 설탕 밀수에 별 시비를 걸지 않았다.

하지만 7년 전쟁 이후 제정된 설탕법은 국면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설탕법의 요지는 한 마디로 “미국 이주민 너희들도 앞으로 설탕을 밀수하지 말고, 우리 영국에서 수출되는 정상적인 설탕만 수입해라. 그리고 우리는 그 설탕에 세금을 왕창 매길 테니 그 세금을 온전히 내라!”는 것이었다.

이 법이 통과되면서 미국에 거주하던 이주민들이 갖고 있던 영국에 대한 우호적 감정은 완전히 박살이 났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 이주민들은 자기와 별 상관도 없는 7년 전쟁에서 진심으로 영국을 도왔는데, 영국은 세금폭탄을 매겨 은혜를 원수로 갚았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반(反)영 감정의 불씨가 서서히 타오를 무렵, 영국은 이 불씨 위에 기름을 들이붓는 일을 자행했다. 여전히 부족했던 재정을 메우기 위해 1765년 인지세법(Stamp Act)이라는 것을 미국에 도입한 것이다.

인지세법이란 미국에서 발행되는 신문이나 팸플릿, 서적이나 증명서 등 종이로 만든 모든 출판물에 우표와 비슷한 모양이 인지를 사서 붙이는 것을 의무화한 법이다. 즉 미국 식민지 개척민들은 종이 문서를 만들 때마다 건건이 세금을 내고 인지를 사야 했던 것이다.

이 법에 대한 미국 이주민들의 반발은 상상을 초월했다. 설탕법이 반영 감정의 불씨 역할을 했다면, 인지세법은 반영 감정을 산불처럼 확산시켰다. 이때 미국 이주민 대표들은 “우리가 뽑은 우리의 대표가 없는 상태에서, 영국 의회가 독단적으로 내린 인지세법 결정에 동의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펼쳤다. 그 유명한 “대표 없이 과세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는 말이 널리 알려진 계기였다.

이주민들의 반발로 인지세법은 유야무야됐지만 감정은 이미 곪을 대로 곪은 상태였다. 인지세법이 폐지되며 체면을 구긴 영국 의회는 타운센드 법 등 다양한 법을 새로 만들어 미국 이주민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물리려 했다. 이런 세금 횡포에 더 이상 영국 식민지인으로 살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이주민들은 마침내 독립을 꿈꾸기 시작했다.

1773년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을 계기로 두 나라의 감정의 골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 결국 두 나라는 1775년 미국 독립을 두고 일전을 시작했다.

전쟁 초기 전황은 압도적으로 영국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당시 세계를 주름잡던 영국과, 전쟁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던 미국은 전력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게다가 지금 우리가 이 전쟁을 ‘영국 대 미국의 전쟁’으로 불러서 그렇지, 당시 미국은 ‘하나의 나라’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13개로 나뉜 영국의 식민지 연합이었다. 이런 연합체가 일치단결된 힘으로 세계 최강이었던 영국을 꺾기란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다.

미국 독립전쟁 때의 전투 모습ⓒ기타

하지만 13개 식민지 연합군은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이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앞세워 조금씩 전황을 만회해 나갔다. 그리고 식민지 연합군은 유렵 열강에도 도움을 청했다. 7년 전쟁 이후 영국이 지나치게 강성해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유럽 열강들이 하나 둘씩 참전해 미국 편을 들기 시작했다.

참고로 당시 영국과 앙숙이었던 프랑스를 외교의 힘으로 식민지 연합군 편으로 끌어들인 인물이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이다. 이 사람의 이름을 한 번도 못 들어본 사람은 있어도, 이 사람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프랭클린이 바로 100달러 지폐에 그려진 초상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점차 전황을 회복해나가던 식민지 연합군은 끊임없이 영국군을 괴롭히는 소모전을 펼쳤다. 영국군은 단기 전투에서 종종 승리했지만 그 드넓은 대륙에서 벌어진 장기 소모전을 감당하지 못했다.

1781년 10월 요크타운 전투에서 식민지 연합군을 이끌던 워싱턴이 마침내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전쟁이 사실상 끝났다. 2년 뒤인 1783년 영국이 미국의 독립을 인정함으로써 미국은 공식적인 독립국가가 됐다. 인지세가 유발한 미국의 독립전쟁은 19세기 주인공 영국의 퇴장과, 20세기 주인공 미국의 등장으로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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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집에 간다는 생각도 흐릿..'인도주의' 진정성 보여야

[인터뷰] 2차송환 희망 비전향장기수 3인, 박희성·김영식·양희철 선생

  • 기자명 이승현 기자 
  •  
  •  입력 2021.09.21 04:39
  •  
  •  수정 2021.09.21 0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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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성 선생을 비롯한  2차 송환 희망 비전향장기수 선생들은 80 중·후반을 넘는 고령으로 인해 갈수록 송환에 대한 기대와 자신감을 잃고 있어 조속한 송환 대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사진-통일뉴스 김래곤 통신원]
박희성 선생을 비롯한  2차 송환 희망 비전향장기수 선생들은 80 중·후반을 넘는 고령으로 인해 갈수록 송환에 대한 기대와 자신감을 잃고 있어 조속한 송환 대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사진-통일뉴스 김래곤 통신원]

조마 조마한 심정이었는데, 기어이 추석 명절이 시작된 연휴에 또 한번의 비보가 날아들었다.

추석 명절을 맞아 안부를 확인하고 인사를 전하는 과정에서 2차 송환을 기다려 온 빨치산 출신 비전향장기수 김교영 선생이 지난 8월 2일 노환으로 별세하셨다는 소식이 뒤늦게 확인된 것이다.

올해 초 34년간 옥살이를 한 박종린 선생이 88세의 연세로 별세하면서 11명 남은 2차송환 희망 비전향장기수에 대한 관심이 잠깐 일었으나 금세 또 잊혀졌다. 

또 한분이 유명을 달리하고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실 날을 기다리는 분은 10명만 남았다.

같은 처지의 박희성 선생은 "코로나때문에 조용히 넘어갔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우리도 돌아가신 줄 모르고 있었거든요. 전화해도 전화도 안받으신다고..우린 그냥 그렇게만 생각했어요"라고 소식을 전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집에 가는 게 언제냐는 것이 아니라 저 세상으로 가는 다음 차례가 내 차례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빠져드는 처지에 놓여있어요"라고 한다.

한분 한분 돌아가실 때마다 그 허울뿐인 '인도주의'를 보도하는 잔인한 위선의 세상, 잔혹한 인심이 새삼 쓸쓸하다.

집 나선 가족들이 부모형제와 만나기 위해 천리 먼길 마다하지 않고 부모님께 달려가는 명절이면, 갈 수 없는 고향을 둔 이들에겐 어쩔 수 없는 고독과 공허함이 밀려든다.

그래도 이곳 낙성대 만남의 집엔 아무 연고도 없는 땅이지만 때마다 잊지 않고 찾아주는 반가운 손님들도 있다. 

2차 송환 희망 비전향장기수들인 양원진(93세, 29년 6개월 수감), 김영식(89세, 27년 수감), 양희철(88세, 37년 수감), 박희성(87세, 27년 수감) 선생이 일상을 꾸려가는 낙성대 만남의집을 지난 18일 찾았다.

최고령인 양원진 선생은 담석 제거를 위해 1차 복강경 시술을 했다가 수술로 전환하여 전신마취에 개복 수술까지 한 뒤 지금 병원에 입원중이다. 의사들이 놀랄 정도로 빨리 회복되고 있어 추석을 지내고 돌아올 예정이다.

추석 명절을 맞아 18일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양희철, 김영식, 박희성 선생 등 2차 송환을 희망하는 비전향장기수 선생을 찾았다. 왼쪽부터 양희철, 김영식, 박희성 선생.  [사진-통일뉴스 김래곤 통신원]
추석 명절을 맞아 18일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양희철, 김영식, 박희성 선생 등 2차 송환을 희망하는 비전향장기수 선생을 찾았다. 왼쪽부터 양희철, 김영식, 박희성 선생.  [사진-통일뉴스 김래곤 통신원]

각자 개성도 분명하지만 서로 배려하고 단합하는 조직력이 최고인 삼총사처럼 낙성대 만남의 집을 든든히 버티고 있는 김영식, 양희철, 박희성 선생은 이날도 6.15합창단원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자연스럽게 역할을 나눈듯 조화를 보여주었다.

작년 말 이후 빠짐없이 하던 등반을 중지한 박희성 선생은 귀가 어두어져서 정상적인 소통에 다소 어려움을 겪었지만, '나는 늘 엑스트라야'라며 배려하는 양희철 선생의 도움으로 큰 불편없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양 선생은 가족이야기를 좀처럼 하지 않는 김영식 선생이 격정을 토로할 때는 부연설명을 곁들이거나 슬쩍 대화의 방향을 바꾸고, 재밌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바꿔나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 문제에 대해 이미 2000년 9월 2일 63명의 비전향장기수를 송환한 것으로 모든 문제가 마무리된 것으로 인식한다며 진정성없는 태도를 보이는데 대해서는 강한 유감을 표시했다.

'인도주의 협력'을 남북관계의 만병통치약처럼 입에 올리는 문재인 정부가 정작 핵심적인 '인도주의' 사안에 대해 보이는 '비인도주의적 태도'에 실망한 탓이다. 

양 선생은 "지금까지 사실상 우리는 여기 현실법에 저촉돼서 징역(27~37년)을 살았다고 치더라도,  감옥에서 나오게 되면 자기 원적지로 보내줘야 하는 게 원칙 아니에요"라고 말했다.

주무부처인 통일부장관에게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당면한 2차송환 희망자들의 절박한 사정을 이해한다면 설령 직접 오지 못하더라도 자기들 사정이 이렇다는 설명이라도 하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아쉬움을 표시했다.

27년의 수형생활과 20년의 막노동 생활을 거친 끝에 2007년 만남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박 선생은 "혼자 사는 사람들이 그런 것 같애요. 너무나도 보고 싶고 하게 되면 사람이 머리가 돌라 그래요. 돌라그런다구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명절에 고향에 가지 못하고 혼자 남은 사람으로서 겪은 오랜 아픔에 대해 이야기했다.

면회 올 연고자가 없어 교도소 면회실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고, 여관에서 지내던 20년동안 "명절 전날이면 명절음식을 조금 사다 놓고서는 밖에 나가질 않았다"는 아픈 기억도 털어놓았다. 

"남들이 그렇게 행복하게시리 명절지내는 것을 시기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걸 보게 되면 더 가슴이 아프고 집생각이 나기 때문에 아예 딱 방에서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그냥 나가질 않고 지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이라도 고향에 가면 그곳을 떠날 때 손 흔드는 모습만 기억나는 아들 동철과 동철엄마의 손을 잡고 이야기 나누고 싶다는 소망을 말했다. 또 지금까지 사회생활이라곤 영화기사로 1년 반 해본 게 전부인데 "어떻게 하든 들어가서 다만 하루라도 사회생활을 해 보고 죽었으면 하는 그 생각"이라고 했다.

이야기는 이렇다. 

11살에 해방을 맞은 한 소년이 16살에 군대에 들어갔다. 18살되던 1952년에 전쟁터에서 화선입당하고 7년만에 제대한 뒤 대남사업에 복무하던 중 1962년 경기도 화성 앞바다에서 총격을 입고 체포되었다. 그렇게 28살의 청년으로 살아남았다. 그 뒤 27년은 감옥에서, 또 20년은 낯선 땅 막노동 판에서, 그리고 겹치는 21년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싸우다 어느새 귀도 멀어버린 87살 노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분단이 관통하는 우리 민족의 이야기이고 그의 소망이 나의 일상인 우리의 이야기이다. 혼자서만 떠안기에는 너무 가혹한 역사의 짐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 사람을 생각해야만 하는 '인도주의'에 관한 이야기이다.  

박 선생의 이야기를 따라 크게 다르지 않은 김영식 선생의 이야기를 싣는다. 양 선생은 죄송한데 이번에도 엑스트라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

 

나이들어가니 자꾸 자신도 없어지고...

박희성 선생.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통일뉴스 : 오늘은 선생님들 깊은 말씀을 듣고 싶다. 특히 김영식 선생님은 가족 이야기를 잘 하려고 하지 않으신다. 젊을 때도 약주를 전혀 하지 않으셨나.

■ 박희성 : 젊어서 대남사업할 때도 술이 나오곤 하면 안먹고 다 옆 사람들 주고 그랬어요. 술 안먹고 담배 안 피고 그러니까 그래도 지금 건강할꺼요.

■ 양희철 : 담배는 영향이 있지만 술은 영향이 없어.

6.15합창단원이 "그래요 저 술마시고 담배 안 피워서 건강해요"라고 우스개소리를 하자
■ 박 : 그걸 내가 알지. 산행가게 되면 지나가는 걸 옆에서 다 아니까. 처음보다는 지금 많이 나아졌어.(웃음) 계속 와야지. 그때 불암산 갔을 때 딸 데리고 왔는데, 딸이 엄마보다 산행을 더 잘했어.(웃음)

 

□ 산에 오랫동안 못가셨다고 했는데, 지금은 다니시나.

■ 박 : (말을 잘 못알아듣고) 빨리 해야 되겠어요. 지금 전화기같은 건 잘 들리는데 여럿이서 이야기하게 되면 잘 분간이 안돼요. 지금 3번가서 검사했는데 11월이나 되어야 (보청기가) 된다네요. 옛날에는 3개월 걸렸대요. 근데 요즘에는 3개월도 부정이 많다고 해서 6개월로 연장이 된 거에요.

■ 양 : 앞으로도 3번 더 가야돼요. 먼저는 뇌파검사도 했어요. 

 

□ 어떤 시술이길래 뇌파검사까지 하나.

■ 양 : 장애인 등급을 받아야 국가에서 무료료 보청기를 해줄 수 있기 때문에 검사를 받는 거에요. 제일 아래 등급인 장애인 5급만 받게 되면 보청기는 무료로 나오고 한달에 5만원씩 보조비가 나온데요.

■ 박 : 처음 만난 곳에서 전화가 왔어요. 3번 검사를 다 받았다고 했더니, 이제 끝나게 되면 요즘 제일 비싼 보청기가 200만원짜리라고 하는데, 그걸 무료로 준다고 하더라구요.

 

□ 지금 산에는 가시나.

■ 박 : (또 못알아 듣고) 원래는 6.25때 폭탄이 옆에서 터졌기 때문에 약간 지장이 있었어요. 왼쪽은 괜찮았는데. 그래서 전화를 받아도 왼쪽으로 받지 오른쪽으로 받으면 못알아들어요.

 

□ 빨리 보청기를 하셔야겠다. 어른들이 귀가 안좋으면 생활이 몹시 불편하고 사람들과 소통이 잘 안되니까 힘들어 하시더라.

■ 양 : 지금도 잘 안들리니까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 산에 가시냐니까 귀 안들리는 이야기를 하시잖아.(속상한 표정)

동석한 6.15합창단은 "산행은 작년 11월에 은퇴하고 올해는 도봉산 둘레길 같은 곳은 한두번 참가했다"며 앞으로 산행은 둘레길로만 하자고 입을 모았다.

 

□ 추석에 선생님들 찾아오는 손님들 맞이하시는 것 말고 특별한 일정이 있나.

■ 박 : 내가 2007년에 여기 왔거든요. 계속 강북에 있었으면 저 세상 사람된지 오래됐을 거에요. 여관에 있고 그럴 때는 명절 전날 명절음식을 조금 사다 놓고서는 밖에 나가질 않았어요. 왜그러냐하면 남들이 그렇게 행복하게시리 명절지내는 것을 시기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걸 보게 되면 더 가슴이 아프고 집생각이 나기 때문에 아예 딱 방에서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그냥 나가질 않고 지냈거든요. 

그랬는데 내가 2007년도에 여기 와서는 명절다운 명절을 지내잖아요. 혼자 사는 사람들이 그런 것 같에요. 너무나도 보고싶고 하게 되면 사람이 머리가 돌라 그래요. 돌라 그런다구요. 여기와서는 명절되기 전에 이렇게 와서 같이 지내기도 하고 전화도 오고 하니까 그렇지, 그러지 않았으면 저 세상 사람된 지 오랬을 거에요.

지금 권오헌 선생님도 꼭 추석하고 구정때는 고향에 갔다가 여기에 3시께 되면 도착하곤 하잖아요. 저나 김영식 선생은 마찬가지로 여기 연고자가 전혀 없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교도소 생활하면서 면회라는 건 일체 없었어요. 

교도소에 접견장소가 어디에 있는지 그것도 전혀 몰랐는데, 여기 나와서 이제 국가보안법 위반자들 면회다니고 했으니까 지금은 나만큼 전국의 교도소 면회장소가 어디인지 아는 사람도 쉽지 않을꺼요. 다 돌아다녀봤으니까.

 

□ 교도소에서 나온 이후에는 선생님이 오히려 면회를 다니신건가.

■ 박 : 그래서 지금은 내가 면회를 가잖아요. 그러면 내가 그분들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이 나를 찾아오는 것으로 생각하는 거요. 그전에 못했던 것을, 나를 위로해 준다고 생각하거든요. 영치금을 넣어 올리면서도 그걸 내가 하는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에게 넣어준다고 생각하고서 생활하기 때문에 그렇게 편안하고 좋을 수가 없어요. 그런 생활 안한 사람은 전혀 몰라요.

그래놔서 나는 이제 오늘에야 또 알았구만. 김교영 선생님이 8월 2일에 돌아가셨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2차 송환 희망 비전향장기수)가 11명이 아니라 이제 10명이 남았다구요. 코로나때문에 조용히 넘어갔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돌아가신 줄도 모르고 있었거든요. 전화해도 전화도 안받으신다고..우린 그냥 그렇게만 생각했어요.

또 더군다나 가슴아픈 것이 그렇게 간다고해도 보내지도 않고 자꾸 이렇게 한분씩 한분씩 19명 남은 중에서 지금 11명인줄 알았는데, 10명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제는 집에 가는 것이 언제냐는 것이 아니라 저 세상으로 가는 다음 차례가 내 차례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빠져드는 처지에 놓여 있어요.

나는 내년 6월이면 여기(북에서 남으로)로 나온지 꼭 60년이에요. 조금 좋아지려는 것 같아서 금년 추석은 평양에 가서 지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더랬는데, 그것이 안되니까 집에 간다는 생각이 자꾸 흐릿해지고 그런 거에요.

나이 자꾸 들어가니까. 뭐야. 자신이 없어지고.

 

꿈속에서도 아들은 이모 등에 업혀 손흔들던 애기

□ 아들, 동철이. 예전 1인시위할때 가족들은 다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믿고 지내는게 내맘도 편하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 박 : 나올때 1년 4개월된 걸 보고 나왔으니까 금년에 60살 아니에요. 지금도 그래요. 가족에 대해서 지금 궁금하지 않느냐고 하는 분들이 많은데 물어봐야 그건 돌아가신 분들이 많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나는 62년도 여기 나올때 살아계시던 분들은 지금도 다 살아계실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도 걱정안한다, 당에서 보호해주고 하기 때문에 다 잘살고 있다, 나만 건강하면 된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거지요. 그러지 않으면...

  

□ 명절이 되면 굉장히 보고 싶으실 것 아닌가.

■ 박 : 글쎄 명절때 집 생각하고 이렇게 되면...오늘 저녁때는 내가 잠을 못자요. 이렇게 가족하고 만났드랬으면 마주 앉아서 그랬겠는데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제 수원에서 하는 개성공단사진 전시회에 갔다 왔거든요. 그거 보고 와서도 잠 못잤어요. 이것이 빨리 잘 됐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왔다갔다하고 그러겠는데. 너무나도 잘 알죠. 송악산을 북에서는 어머니산이라고 그런다는데, 박연폭포도 나오고...너무 안타까워요. 꼭 한번 들어가 봐야되는데.

 

□ 사모님을 꼭 애기엄마라고 하시던데.

■ 박 : 동철이 생각하면 나올 때 그때 생각이 자꾸 나요. 왜냐면 그날이 연평 앞바다에서 조기가 제일 전성기일 때에요. 조기가 흑산도에서 연평으로 왔다가 평안북도 철산으로 간 후 대만쪽으로 옮기는 거거든요. 연평치가 산란할 때까 되어서 제일 알이 커요. 

애기하고 셋이서 있는데, 이 조기가 엄청나게 나왔어요. 우리 애기를 부방향장(세포위원장) 부인이 안고는 그걸 염장을 하느라고 다들 경황없는 중에 나를 보지도 못하고 그랬어요. 지금도 애기가 나한테 손흔들던 모습. 꿈에 나타나도 그것 밖에 안나타나요. 왜 그러냐면 그 이상은 본 것이 없으니까. 나한테 손흔들던거. 그 애가 육십이 됐으니 지금 뭐 이게 너무 가슴아파요.

나는 교도소있으면서도 면회한번 오지 않고 그랬지만 나만 건강하면 된다, 집에 있는 가족들은 당에서 보호해주기 때문에 내가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지 않아요, 그런데 여기 계시는 분들은 가족들이 면회오고 걱정하는 뭐 그런 것이 있잖아요. 난 그런 것을 전혀 보지 않기 때문에 마음은 엄청나게 가벼웠더랬어요.

 

양희철 선생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양희철 선생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사모님은 조금 섭섭하실 것 같다. 오실 때도 살뜰하게 한 말씀 안하셨을 것 같은데.

■ 박 : 나는 성질이 그래서 그런지, 대남사업하면서 3년 동안 결혼생활을 했어요. 그런데 생활하는 동안에 말다툼 한번 해본적도 없고 그러면서도 지금 제일 생각나는 것이 왜 그때 더 잘해주지 못했나 하는 거에요. 지금 누우면 그게 생각나요. 특히 왜그러냐 하면 가족은 언제 내가 나갔다가 이렇게 사고날 지 계속 걱정하고 있을 거 아니에요. 그걸 위로해주지 못한 것 그게 상당히 미안해요. 

그래서 다른 분들한테는 결혼생활하면서 앞으로 후회할만한 행동을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한번도 말다툼하지 않았지만 더 잘해주지 못한 것으로 후회하는 생각이 드는데, 싸우고 그랬다면 지난 후에 생각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 양 : 그러니까 봐봐. 평소에 비록 속으로는 정말 사랑한다고 하지만 표현으로 못했으니까 당신 내가 사랑해라고 해 보시라니까.
 
■ 박 : 나는 그렇게, 그런 것 까지는 없었어요. 동철이 엄마는 다섯살 차이니까 지금 82살이구만요. 하여튼 동철이 엄마도 편안한 생활은 못했으니까. 언제 나갔다 언제 잘못될지...62년도 되면서 사고가 엄청 많았거든요. 나갔다가 들어오지 못하고 희생돼서 들어오는 분들로 계속...그런 것만 보기 때문에. 그러고 어떤 분들은 그런 걸 못하겠다고 가는 사람도 있고. 내가 있는 동안에도 두 사람이 가버렸어요. 

애기 한번만 딱 봤으면 좋겠는데, 이것이 제대로 되겠는지..

 

송환, 진심이 있다면 이래서는 안된다

□ 통일부나 정부 당국자들이 선생님들을 찾아와서 송환을 위한 의논을 한 적이 있나.

■ 양 : 이인영 장관이 여길 한번 온다고 했어요. 간접적이더라도 자기들 상황이 이렇다는 설명이라도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일체 없습니다. 지금까지. 사실상 우리는 여기 현실법에 저촉돼서 징역을 살았다고 치더라도, 27년 살았죠. 난 37년을 살았어요. 그렇다면 나오게 되면 자기 원적지로 보내줘야 하는 게 원칙 아니에요. 그리고 현재 민주주의사회를 표방하면서 왜 거주 이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습니까.

당면한 우리들의 심정을 이해한다고 하면 자기가 직접 오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서면상으로라도 할 수 있었을 거에요. 이것이 하나의 국가를 움직이는 정체냐 하는 걸 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난 처음엔 문재인 이분에게 기대가 있었는데, 완전히 없어져 버렸어요.

민주당과 청와대에서 2차 송환 희망자 명단을 보내달라고 해서 한번씩 보낸 적은 있는데, 통일부는 우리가 직접 접촉을 하기도 했는데 그런 일이 없습니다. 진심이 있다면 여기 와서, 개인적으로라도 그래서는 안되죠.

그저께 목요일에 우리 김영식 선생님이 통일대교에 가셨습니다. 피켓 앞쪽에는 '아저씨, 아주머니가 계시고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 고향으로 돌려보내달라'고 쓰고 또 다른 면에는 '6.15공동선언 합의사항을 이행하라'고 썼습니다. 파주경찰서 보안과장이 나와 있었어요. 김 선생님은 고향으로 돌려보내주지 않으면 나 여기서 죽는다고 넘어지고 했는데, 곁에 있던, 한때 진보적이었던 인사가 '왜 이런 시기에 그런 주장을 하느냐'면서 '정세가 좋을 때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해요. 남북이 포를 서로 쏘는 격화된 시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이야기같애요.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당사자 입장에서 역지사지해보라. 얼마나 고향에 가고 싶었으면 이러시겠느냐'고 했어요.

■ 박 : 내가 하루라도 가서 살고 싶은 것은, 인민학교 3학년때 해방이 되어서 공화국에서 살게 되었는데 2년 더해서 5학년 졸업했어요. 다른 해에는 다 6년이었는데, 우리 졸업할 때는 5년이었어요. 그리고는 중학교 3학년때가 16살이었는데, 전쟁이 일어난거에요. 50년에 군대 나가서 꼭 7년 있었어요. 군관학교에 들어갔다가 고혈압때문에 제대되었어요. 지금도 후회되는 것이 노농적위대에 들어가보지도 못한 거에요. 

병으로 제대된 사람은 노농적위대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군사동원부에 가서 그냥 제대되어 왔다는 것만 확인하지 등록이 안된단 말이에요. 그래가지고서 내가 전쟁 3년 다 겪고나서 군관학교 제대되고 사회 나와서 꼭 1년반 사회 생활을 했어요. 영화관에서 영화기사를 한거에요. 소련영화, 동독영화 상영해주고 하다가 당에서 소환해가지고 1년 반만에 대남사업에 동원된거에요.

그러니까 사회생활이란 건 1년반 해본 것이 그게 다에요.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들어가서 다만 하루라도 사회생활을 해보고 죽었으면 하는 그 생각이에요.

 

□ 영화기사일은 재미있으셨나.

■ 박 : 학교에 가기로 되어 있었어요. 연극영화대학에 재직반이죠. 어린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니는 과정이에요. 거기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당에서 딱 소환해서 오니까. 그것도 안됐죠.

 

□ 아쉬우셨나보네.

■ 박 : 아 그렇지 않고 내가 영화기사가 되었더라면 어떤 영화가 나왔을지 알아요.(웃음) 그래서 내가 자꾸만 가서 다만 몇일이라도 사회생활을 했다면 1년반에서 더 추가되지 않겠느냐고 하는 거에요.

■ 양 : 그것은 2차적인 거고, 1차적인 것은 동철이 손잡고 동철이 엄마하고 만나야 하는 거지.

■ 박 : 한번 노력해서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해 주세요. 우리만 한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니까.

 

□ 이렇게 매번 명절마다 자식같은 후배들이 찾아와서 인사드리고 하니까 좋으신가.

■ 박 : 아이구 그걸 말해서 뭐해요.

 

누군가 힘들어 다른 결심했더라도 그 책임은 내게 있다.

김영식 선생 [사진-통일뉴스 김래곤 통신원]
김영식 선생 [사진-통일뉴스 김래곤 통신원]

■ 양 : 김 선생님은 속이 아주 깊으세요. 왠만하면 가족이야길 안합니다. 박 선생님과 달리 김 선생님은 속에 꾹 담고서 참다가 때로 폭발할 때는 고함을 내지르고 그래요. 그때 조금씩 이야기합니다. 강원도가 고향이신데, 그렇게 다정다감할 수가 없어요. 속에는 포근함이 항시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런 이야기하자고 하면 귀찮다고 말도 안하려고 하십니다. 돌아가신줄도 모르고 그런다고..

 

□ 지난번 1인시위하실 때 따님 이야기를 하면서 카메라를 보내셨다고 했는데, 그 따님이 카메라를 좋아하셨나.

■ 김 : 김련희씨 딸 연금씨 이야기에요. 나는 집안이 있어도 소식을 모르는데, 김련희씨는 자기 남편한테 시계를 사준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나는 연금이에게 카메라를 보내면서 대중사업에 잘 쓰길 바란다고 했죠. 내가 62년도에 딸 김경자를 놔두고 나왔는데 소식을 모르니 연금이가 찾아서 같이 한 가족처럼 살았으면 좋겠다는 편지를 했어요. 그래서 카메라를 보낸 거에요.

■ 양 : 유감스럽지만 김 선생은 가족은 다 죽었을 것이다, 마누라는 다른 데 개가하지 않았겠느냐고 생각하면서 당신 딸한테 편지도 썼어요. 불쌍한 너희 어머니에게 잘해드리라고.

 

□ 박 선생님이 생각하는 신념과는 또 다르네요.

■ 양 : 그것과는 또 달라요. 분화가 많이 되어서 그런지. 젊은 청춘이 그냥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죠.

 

□ 카메라를 보낸 특별한 이유가 있나.

■ 김 : 그거 뭐 여기 나와서 교도소에서 체육운동할 때 보면 교무과장 같은 이들이 막 사진찍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연금이도 자기가 뭐 남기고픈게 있으면 사진도 찍고 뭐 그렇게 재밌게 살라고 보낸거요. 

■ 양 : 김경자 언니 만나서 사진찍어 보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지요. 그렇게 한 가족처럼 살아라는 편지를 했으니까.

 

□ 첫 따님인가.

■ 김 : 경자는 첫딸인데 1960년 8월 15일에 낳았어. 그전에 현일이라고 큰 아들은 59년에 봤고. 세번째 자식은 태중에 있었고.

 

□ 연세로 볼때 지금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많은데. 사모님도 그렇고.

■ 김 : 그런데 난 이거 뭐. 박 선생은 다 살아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는데, 나는 그런 자신감이 없어.(쓴웃음)

 

□ 한집에 살면서 박 선생님하고 의논도 좀 하지 않나.

■ 양 : 아주 회의적이에요.

 

□ 회의적인 이유가 있나.

■ 김 : 이유는 없는데. 아들놈은 내가 나올때 몸이 건강하질 못했어.

■ 양 : 부인은 젊은데, 그렇게 오래 혼자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거죠. 딸한테도 그렇게 편지를 했다니까. 니 엄마가 그렇게 했더라도 엄마한테 잘해라고. 그런데 김 선생, 살아계시면 그냥 김선생 오시기를 기다리면서 그냥 계신다고. 리인모 선생님도 그러셨잖아요.

 

□ 두 분 생각이 다르지만 다 이해가 된다. 사모님이 계속 살아계시다고 생각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텐데.

■ 김 : 나는 북에 있을 때 아내를 두고 군대나갔다 들어왔어요. 들어와서 아내가 딴데로 갔다나 어떻다나 하는 소리도 듣고 그랬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젊은 처가 사는게 어려워서 딴데 시집갔다 그래도 나는 박수치고 칭찬을 해요. 그 책임은 나에게 있거든. 내가 돌봐주지 못했으니까. 젊은 여자가 어려워서 딴데로 갔는데 그걸 가지고 탓할게 없어요.

■ 양 : 김 선생님은 국가일에 동원되지 않았어요. 그 가족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당에서 보호해준다는 걸 믿으셔야죠.

■ 김 : 그렇죠. 그것도 믿죠.(웃음) 나는 당원이었고, 아내는 당원은 아니었지. 조선노동당원이 되기는 참으로 힘이 들어요. 정말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열성적으로 실천하는 그런 사람이 되는데, 열심히 해야 되요.

 

□ 연세도 여든을 훌쩍 넘겼는데, 가족들을 보고 싶다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 않나. 왜 내가 보고 싶은 가족을 보지 못하고 이렇게 있는지, 참 답답하실 것 같다.

■ 김 : 그걸 어떻게 말할까. 난 누굴 탓하는게 아니야. 가족을 못 보게 되었다고 그런 것도 아니고 역사를 탓 하는 거죠. 만나고 싶지만 역사가 그렇게 흘러가는데 안되는 걸 어떻게 하겠냐는 거죠. 

그래서 나는 다른 이야기는 다 걷어치우고 내 조국 내 민족을 스스로 잘 다스려야지 외국놈들에게 이렇게 비참하게 당하면서 살면 안된다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어. 또 생산수단을 개인소유로 해서는 안되고 우리민족끼리 화목하게 살자는 것도 잊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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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세 철학자의 끝 모를 흑백논리

[손석춘 칼럼] 김형석, 문재인정부가 사회주의 경제관 절대시? 유럽은 극좌인가?
박정희 전두환 시절 흑백논리 땐 침묵하고 지금 흑백논리로 소리쳐
  • 손석춘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media@mediatoday.co.kr 
  • 승인 2021.09.20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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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무지 지나침을 모른다. 101세 철학자는 한가위 연휴인 일요일에도 MBN과의 인터뷰에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편 가르기 없애기”라며 영어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 흑백논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언론과 기회 닿을 때마다 흑백논리를 비판하는 김형석 전 철학교수다.

하지만 이상하다. 흑백논리를 비판하는 철학자 자신이 흑백논리에 흠뻑 사로잡혀 있다. 더구나 다가오는 대통령선거에 편향적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기실 바로 그래서 조중동 신방복합체가 부쩍 그를 부각하고 있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 MBN 시사스페셜-김형석 명예교수 직격 인터뷰 “제일먼저 해야 할 일은 편 가르기 없애기” 유튜브 갈무리
▲ MBN 시사스페셜-김형석 명예교수 직격 인터뷰 “제일먼저 해야 할 일은 편 가르기 없애기” 유튜브 갈무리

조선일보가 101세 철학자를 우려먹는 풍경은 안쓰럽기조차 하다. 조선닷컴은 그가 문재인 정부 들어 “나라가 무너지고 있다”고 개탄했다는 발언을 대대적으로 부각했다. 그 인터뷰를 대서특필한 날, 조선일보는 “늑대가 자기들은 안 잡아먹을 줄 아나” 제목으로 류근일 전 주필의 칼럼을 실었다. 83세의 그는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최후의 결전이 벌어지고 있다며 “자유주의 진영과 좌파 파시즘 세력의 싸움이 그것”이란다. 더 나아가 “대한민국이냐 반(反)대한민국이냐의 사생결단”이란다.

참으로 궁금하다. 대체 그는 누구를 염두에 둔 걸까. 그가 말하는 “온건 진보를 수정주의로 매도하는” 이들은, 한국에 있다는 “좌파 탈레반”은, “좌파 파시즘”은 누구를 지칭하는 걸까.

우리 시대의 철학자라라면, 더구나 ‘원로’라면 바로 조선일보가 노상 펴나가는 흑백논리를 바로 잡아주어야 옳다. 논리학의 상식에 ‘허수아비 때리기 오류’가 있다. ‘상대의 주장을 반박하기 쉽도록 왜곡한 후 그것을 반박하는 오류’를 83세 언론인과 101세 철학자가 난형난제로 펴간다. 대한민국 언론의 수치요, 철학의 희화화다.

101세 철학자는 숱한 인터뷰나 기고문에서 조중동의 오래된 흑백논리를 전혀 비판하지 않는다. 아니, 문제의식조차 없어 보인다. 인터뷰를 보자. 조선일보 기자가 “흑백논리와 편 가르기가 고질적인 문제”라고 묻는다. 김 교수가 답한다. “영국이나 미국 사람을 만나보면 흑백논리가 없다. 우리는 조선왕조부터 원수 갚느라 다 죽이고 은혜 갚느라 끼리끼리 뭉쳤다… 세계는 다원사회로 가고 있다. 진보냐 보수냐, 좌냐 우냐는 낡은 생각이다.”

▲ 조선일보 “北서 살 때 경험해보니 언론통제는 자유통제 신호… 文 대통령은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 기사 갈무리. 사진=조선일보 홈페이지
▲ 조선일보 “北서 살 때 경험해보니 언론통제는 자유통제 신호… 文 대통령은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 기사 갈무리. 사진=조선일보 홈페이지

질문한 기자와 답한 철학자 공히 허수아비 때리기, 유체이탈의 오류에 갇혀있다심지어 식민사관 인식마저 묻어난다.

김 교수는 문재인 정부를 “사회주의적 경제관을 절대시하는 과오”를 범한다거나 “150년 전 계급투쟁의 폐습을 계승”한다는 주장을 펴왔다. 조선일보의 내로라하는 전‧현직 주필들이 문재인을 좌파정권으로 몰아치는 수법과 똑같다.

하지만 냉철히 짚어보자. 바로 그것이 흑백논리의 전형 아닌가. 한국의 부익부빈익빈 경제 질서에 대해 조금이라도 개혁 정책을 펼라치면 ‘좌파’로 훌닦고 있지 않은가. 대체 문재인 정부의 어떤 정책에서 ‘사회주의적 경제관의 절대화’를 읽을 수 있단 말인가.

사대주의 사고가 또렷한 그의 발언도 짚어보자. 유럽 정치가 그의 말처럼 대화로 문제를 풀어가는 이유는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이 정권을 주고받는 틀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사회주의 경제관을 절대시하는 정권이라는 김 교수의 잣대로 본다면, 그가 칭송하는 영국‧프랑스‧독일에서 사회민주당 계열의 정부가 집권해 복지정책을 편 사실은 뭐라 할 것인가. 그들은 극좌란 말인가. 우리는 진보정당이 국회에서 원내교섭단체를 가진 ‘경험’도 없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절 흑백논리가 대한민국을 지배했다. 철학자 김형석은 그 시대의 흑백논리에 침묵했다. 그리고 지금 나라가 무너진다며 흑백논리로 소리친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젊은 세대를 오도할까 우려스럽다. 나라가 무너지는 상황 아니니 편안히 노후를 보내시길 충정으로 권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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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장동 논란 정면돌파 “부당 이익 취했으면 후보·공직 다 사퇴”

추미애 “대장동 사건 이재명 비리로 끌고 가려는 야당·언론·이낙연 한심”...이낙연 “그럼 덕담하나”

19일 오후 광주 MBC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선거 더불어민주당 경선 후보 토론회 리허설에서 이재명 후보가 발언하고 있다. 2021.09.19.ⓒ뉴시스

 더불어민주당 대선 주자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19일 2010년 성남시장 취임 뒤 추진한 대장동 공영 개발사업을 둘러싼 논란과 관련해 “제가 부정을 하거나 정말 단 1원이라도 부당한 이익을 취했으면 후보 사퇴하고 공직 다 사퇴하고 그만두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 지사는 이날 오후 광주 MBC에서 열린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자 광주·전남·전북 지역 TV 토론회에서 “그 당시 정책 진행 책임자였던 성남시장으로서 국민에게 사과할 의향이 없냐”는 박용진 의원의 물음에 이같이 답했다.

이 지사는 대장동 개발 사업의 특성에 대해 “토건 세력과 결합한 당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게이트가 숨어 있다가 제게 태클을 당했고, 결국은 기도했던 이익의 극히 일부밖에 취득하지 못해 제가 공공 환수로 5천 503억 원 이상을 성남시로 환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대장동 관련 사건은 토건 비리 세력과 국민의힘이 추진한 불로소득 추진 사업이 저 때문에 반쯤 실패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과거 토건 세력들은 이명박 대통령 시절 이 땅을 이미 다 샀고,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공공 개발을 하고 있는데 신영수 전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의원을 통해 로비해 (LH가) 공공 개발을 포기하도록 하고, 민영 개발을 하도록 확정됐다”며 “제가 (성남시장에) 당선된 후, 민간 개발을 통해 너무 많은 이익이 민간에 구속되기 때문에 공공 개발을 하기로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는 대장동 사업에 얽힌 부정한 유착을 “몰랐냐”며 이 지사에게 여러 차례 책임을 추궁했다. 이 전 대표는 대장동 개발사업 민간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특혜를 받았단 의혹이 제기된 자산관리 회사 ‘화천대유’를 거론, “소수의 민간업자가 1천 1백 배의 이익을 얻은 건 (사업) 설계가 잘못된 건가, 아니면 원래 설계에 포함된 건가”라며 “역대급 일확천금 사건”이라고 쏘아붙였다.

 

이 전 대표는 “(대장동 논란과 관련해) 수사가 빨리 이뤄지길 바라면 이재명 후보와 가까운 분들이 국회 국정조사에 증인 출석, 자료 제출을 원활하게 하길 바라나”고 물었고, 이 지사는 “당연하다”고 답했다.

이 지사는 “시장이 가진 조그마한 권한으로 그걸(불로소득) 막으려고 정말 총력을 다해 노력했고 성과를 냈는데 ‘왜 더 빼앗지 못했냐’, ‘왜 더 환수하지 못했냐’는 건 방화범들이 소방관들 불 끄러 가서 열심히 불 껐는데 ‘왜 3초 일찍 도착하지 못해서 더 피해를 키웠냐’고 하는 거랑 똑같다”며 “이낙연 후보, 불 끄려고 노력은 해봤는지 묻고 싶다”고 날을 세웠다.

19일 오후 광주 MBC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선거 더불어민주당 경선 후보 토론회 리허설에서 추미애 후보가 발언하고 있다. 2021.09.19.ⓒ사진 = 뉴시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대장동 논란으로 이 지사를 몰아세우는 이 전 대표에게 “야당, 언론 심지어 이낙연 후보는 대장동 사건을 이재명 후보의 개인 비리 문제로 자꾸 끌고 가려 하고 의혹을 부풀리고 있다. 참 한심하다”고 말했다.

추 전 장관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국기 문란 사건을 덮으려는 야당의 꼼수에 넘어가는 거 아닌가 걱정이다. 이슈를 이슈로 덮겠단 야당의 선거 전략이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는 대장동 사업에 대해서도 “민간 개발로 개발 이익이 전부 몽땅 민간에 넘어갈 뻔한 사업을 (이 지사가) 개발 방식을 바꿔 그나마 민간과 공공이 반반씩 개발 이익을 나눈 게 사실 아닌가”라며 “2010년 당시엔 여러 여건 상 공공 개발이 상당히 어려울 때였다. 그래서 지혜로운 개발 방법이라고 평가하고 싶다”고 언급했다.

이에 이 전 대표는 “절대 다수 언론과 절대 다수 국민이 걱정하고 있다. 그에 대해서 민주당이 그 짐을 덜어야 할 거 아니냐”며 “이재명 후보가 본인은 관계없고 오히려 잘한 일이라고 하니 기회를 드리는 것”이라고 추 전 장관의 말을 맞받았다.

또 “설명을 요구하고, 매우 절제된 방법으로 연구하고 있는데 그것마저 하지 말고 덕담할까. 그건 옳지 않다”며 “지금 추미애 후보만큼 제가 네거티브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9일 오후 광주 MBC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선거 더불어민주당 경선 후보 토론회 리허설에서 이낙연 후보가 발언하고 있다. 2021.09.19.ⓒ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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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美 핵잠수함 이전에 촉각..'상응조치 취해질 것'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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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21/09/20 09:57
  • 수정일
    2021/09/20 09:57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 기자명 이승현 기자 
  •  
  •  입력 2021.09.20 08:37
  •  
  •  댓글 0
 

북한은 최근 미국이 오스트레일리아에 핵추진 잠수함 건조기술을 이전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상응 조치가 취해질 수 있음을 경고했다.

북한 외무성 보도국 대외보도실장은 20일 [조선중앙통신] 기자와 문답에서 "최근 미국이 영국, 오스트랄리아와 3자 안보협력체를 수립하고 오스트랄리아에 핵추진잠수함 건조기술을 이전하기로 한 것은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전략적 균형을 파괴하고 련쇄적인 핵군비경쟁을 유발시키는 매우 재미없고 위험천만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또 "우리는 미국이 이러한 결정을 내린 배경과 전망에 대하여 엄밀히 분석하고 있으며 우리 국가의 안전에 조금이라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경우 반드시 상응한 대응을 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조성된 정세는 변천하는 국제안보환경에 대처하자면 장기적인 안목에서 국가방위력을 강화하는 사업을 잠시도 늦추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다시금 확증해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대외보도실장은 '인도 태평양지역 안전을 위한 것'이라고 한 백악관 대변인의 발언을 거론하면서 "그 어떤 나라든 자국의 이해관계에만 부합된다면 핵기술을 전파해도 무방하다는 주장으로서 국제적인 핵전파방지제도를 무너뜨리는 장본인이 다름아닌 미국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이어 "새 행정부의 집권 후 더욱 농후하게 나타나고 있는 미국의 이중기준행위는 보편적인 국제규범과 질서를 파괴하고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엄중히 위협하고 있다"고 거듭 비판했다.

한편, 미국과 영국, 오스트레일리아는 지난 15일(현지시각) 3국 안보협력체인 '오커스'(AUKUS)를 창설을 발표하면서 구 소련에 대응하려는 목적으로 미·영간에만 공유해 오던 핵추진 잠수함 보유를 예외적으로 오스트레일리아에도 허용하기로 해 주목을 끌고 있다. 

중국 견제용이라는 분석이 나오면서 류펑위 미국 주재 중국대사관 대변인이 즉시 "국가 간 협력이 특정국가를 표적으로 한 배타적 체제를 구축하거나, 제3국의 이해를 해치는 쪽으로 이뤄져선 안된다"고 반박했다.

최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에 성공한 한국의 핵잠수함 개발구상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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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에 가족들과 싸우지 않는 비결, 엄청 간단합니다

'우리는 더 사랑하기 위해 모였다' 이 한 가지만 기억하세

 

21.09.19 19:46l최종 업데이트 21.09.19 20:16l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예로부터 추석이 되면 아무리 가난하고 어려워도 다 같이 모여 추수한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즐겁게 보냈다.
▲  예로부터 추석이 되면 아무리 가난하고 어려워도 다 같이 모여 추수한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즐겁게 보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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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있으면 민족 대명절인 '한가위'가 다가온다. 한가위는 추석을 뜻하는 순우리말로, 매년 음력 8월 15일이다.

한가위에 대해서는 여러 유래가 있지만, 우선 의미적으로는 크다는 뜻의 '한'과 가운데란 뜻의 '가위'가 합쳐져 일 년 중 가장 크고 중요한 날이라고 해석한다.

예로부터 추석이 되면 아무리 가난하고 어려워도 다 같이 모여 추수한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즐겁게 보냈다. 이러한 연유로 "1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인심과 정을 나누는 추석을 앞두고, 몇 해가 지났지만 그날의 추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잔소리 폭격을 맞던 그날, 조카의 한마디 

"어휴~! 쟤랑 어디 한 번 나가려면 속 터져. 쟤 놔두고 우리끼리 나가자!"
"11시까지 준비하면 된다면서, 아직 11시가 안 됐는데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아니나 다를까 그날도 성격 급한 아버지는 화장대 앞에서 느긋하게 준비하는 나를 향해 볼멘소리를 쏟아냈다. 과거에는 가족과 한 번 어디를 가려면 루틴처럼 이렇게 꼭 한 번씩 입씨름했던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 가족은 다 같이 여행을 자주 다녔는데, 그때마다 서로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 잘 알 수 있었다. 예컨대, 아버지는 출국 4시간 전부터 공항에 도착해서 밥을 먹어야 안심하는 부류였고, 나머지 가족은 그런 아버지를 따라나서기만 하면 되기에 몇 시 비행인지 공항에 도착해서 확인하는 그런 부류였다.


가족 여행을 떠나는 과정에서 적잖이 받는 스트레스를 외부인은 알 리 없다. 수십 년의 세월을 같이 산 지금이야 내공이 쌓여서 괜찮지만, 서로가 마음의 평온을 찾는 과정은 제법 힘들었다.

오죽하면 기타노 다케시 작가는 "가족이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고까지 표현했을까. 화목한 가정이라는 보기 좋은 타이틀은 담 넘어 이웃집 타인이 부여하는 훈장이라는 것쯤은 굳이 시시콜콜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날도 가족과 외출 전 기분이 조금 상한 상태에서 마지막까지 혼자 방에 남아 단장을 하고 있었다. 다들 현관문을 열고 나갈 때, 누군가가 내 방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온다.

"고모 정도라면 기다려줄 수 있는데..."

내 허리보다도 키가 작은, 친오빠 아들인 조카 진욱이었다. 작고 조그만 아이는 혼잣말인 듯 툭 던지고는, 내 옆을 스쳐지나 그대로 침대 위에 올라가 누웠다. 순간 내 두 귀를 의심하며, 거울 보는 일을 멈추고 아이에게 다가가 되물었다.

"진욱아~ 고모 정도라면 기다려줄 수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이야?"

크고 동그란 두 눈동자를 빛내며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음~ 그건 말이죠. 고모를 아주 많이 좋아한다는 뜻이에요!"

생각지도 못한 아이의 말 한마디에 불쾌했던 감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진욱이는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의식하지 않은 채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 위에 누워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더욱더 사랑스러워 아이를 꼭 끌어안자 옥시토신이 분비되며 감동의 눈물이 글썽거렸다.

'화목한 가족'으로 사는 법
 
 가족과 있으면 마냥 행복하기 때문에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사랑하기 위해 우린 함께 하는 것이다.
▲  가족과 있으면 마냥 행복하기 때문에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사랑하기 위해 우린 함께 하는 것이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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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등학교 3학년이 된 진욱이는 그때보다 더욱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멘트를 날리며 가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사실 우리 아버지는 자상한 성격으로 다정다감한 행동만큼은 로맨티시스트다. 단지, 안타깝게도 말로 천 냥 빚을 지는 그런 스타일이다. (웃음)

이렇듯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주고받는 상처와 아픔, 화해와 위로의 순간들이 씨실과 날실처럼 얽히고설켜 있다. 살아온 세월의 크기만큼 커지는 공동 작품을 우리는 '화목'이라고 부르며, 가족이 함께 따뜻하게 지어 입고 있는 것은 아닐까.

멋 부리지 않고 쉽게 말하자면, '화목한 가정'이란 징그럽게도 지지고 볶으면서도 끝끝내 서로의 손을 놓지 않은 결과 그뿐인 것 같다.

추석 명절, 좋은 가족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비밀을 순수한 아이들은 동화 곰돌이 푸우의 이야기를 통해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해서 함께한 게 아니야.
더 사랑하려고 함께 하는 거야.

-곰돌이 푸우

가족과 있으면 마냥 행복하기 때문에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사랑하기 위해 우린 함께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면 좋은 순간만을 기대하는 어리석음은 버려야 한다.

지지고 볶고 싸우고 화가 나는 순간에도 부지런히 서로 사랑하면서 이해하는 가운데 행복이 무엇인지 배우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가까운 가족을 통해 인간관계를 깨달으면서, 올바로 화해하는 방법까지 자연스럽게 터득해 나가게 된다.

이실직고하자면, 그날이 추석인지 평일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대가족(사촌 식구 오 남매가 어릴 때부터 한동네에 살고 있다)은 수시로 만나 놀러 다니기 때문이다.

그날도 가족끼리 모여서 느꼈던 분위기의 스토리만 추억 속에 남아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날, 어디에 가서, 무엇을 먹었는가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내 삶에 있어서는 그런 건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그저 더 사랑하기 위해 다 같이 모여 충만했다는 느낌이 든다면, 나에겐 그날이 일 년 중에 가장 크고 중요한 한가위다.

이번 추석에는 아버지 칠순을 맞아 오빠네 가족이 온다고 연락 왔다(원래 추석에는 오지 않고 새언니 친정이나 여행을 간다). 다행히 가정 내 8인까지는 모임이 가능하다고 하니, 아무래도 집에서 파티를 해야 할 것 같다.

이번에 부회장 선거에서 당선됐다는 동욱이와, 자신은 부회장 선거에서 떨어져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진욱이 모두의 삶을 축하하며 가족과 함께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야겠다.

덧붙이는 글 | 이은영 기자 브런치에도 동시 게재됩니다. https://brunch.co.kr/@yoconiso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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