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300/471/imgdb/original/2021/0404/20210404502325.jpg)
![최씨와 이에스아이엔디가 사들인 농지와 임야는 아파트 건설이 확정된 2014년 공시지가가 매입 당시보다 2배 이상 올랐다. 왼쪽은 해당 토지 인근의 2008년 모습이고, 오른쪽은 최근의 모습이다. 카카오맵 갈무리](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800/238/imgdb/original/2021/0404/20210404502328.jpg)
문재인 대통령이 4·7 재보궐선거 이후 단행할 것으로 보이는 개각 폭과 대상에 대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
5일 정치권에 따르면 4·7 재보궐 선거 이후 상당 폭의 개각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선거 결과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일정 부분 국정 쇄신이 필요한 시기라는 점과 정세균 국무총리가 대권 도전을 위해 사임할 것이 유력시 되기 때문이다.
결국 재보궐 선거 결과와 정 총리의 거취가 개각의 시발점이 되는 셈이다.
정 총리는 4·7 재보선 후 이란을 방문해 지난해 1월 오만 인근 해역에서 나포된 ‘한국케미호’ 선장 석방 문제를 해결할 계획이다. 정 총리는 이 문제를 마무리한 뒤 총리직에서 내려올 가능성이 높다.
차기 총리 지명과 국회 인사청문회 일정 등을 감안하면 실제 물러나는 시기는 이달 말이나 다음달 초로 관측된다.
또 김상조 전 대통령정책실장이 전격 경질되면서 문재인 정부 2기 경제팀 수장인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교체를 통해 새로운 경제팀을 개편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홍남기 부총리는 지난 1일자로 재임 845일을 맞아 최장수 기재부 장관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지만 재난지원금 지급 방식 등을 두고 여당과 파열음을 빚으며 이미 두 차례 사의를 밝혔고 피로감도 높은 상태다.
다만 총리 교체 시 직무대행을 부총리가 맡게 될 수도 있어 바로 교체하기보다는 시차를 두고 바뀔 가능성도 있다.
여기에 시한부 유임된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을 비롯해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 등 재직 2년이 넘은 장수 장관들도 교체 대상으로 거론된다. 재직한 지 2년이 가까워진 문성혁 해양수산부 장관, 김현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등이 교체될 경우 개각 폭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정가에선 후임 총리로는 김진표 의원, 김부겸 전 민주당 국회의원, 박지원 국정원장,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 박광온 의원 등이 거론되고 있으며, 차기 경제부총리 후보군으로는 은성수 금융위원장, 방문규 수출입은행장, 구윤철 국무조정실장, 고형권 주OECD 대사 등이 꼽힌다.
이미 사의 표명을 수용한 변창흠 국토부장관 후임에는 조정식 민주당 의원이, 농림부장관에는 김종회 전 의원과 김병원 전 농협중앙회장, 산업부 장관에 정태호 의원과 김관영 전 의원이, 해수부 장관 후보에는 전재수 의원 등이 거론된다.
정치권 관계자는 “4.7 재보궐선거에서 서울·부산 모두 지면, 전면적인 개각 카드가 나올 것”이라며 “차기 총리가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경제부총리나 경제장관들 인사도 결정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 경기신문 = 정영선 기자 ]
등록 :2021-04-05 04:59수정 :2021-04-05 07:10
전문가들은 최씨가 회사 설립 다음날부터 한달 동안 임야 수천평과 농지를 잇따라 사들인 것을 두고 전형적 투기 수법이라 지적한다. 농지법상 농지는 자경 목적이 아니면 소유할 수 없다. 한 농지법 전문 변호사는 “애초 농사가 아닌 부동산 개발 목적으로 농지를 산 것으로 보인다. 농지법 위반 소지가 크다”고 지적했다. 최씨는 1993년에도 농지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받은 바 있다.
최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사업 취소 직후인 2011년 8월 양평군에 위 토지들을 도시개발구역으로 지정해달라고 요청했고, 양평군은 이듬해인 2012년 11월 도시개발구역 지정을 승인했다. 문제는 양평군의 승인 전에 최씨가 인근 농지 46㎡를 더 샀고, 이에스아이엔디 역시 회사 명의로 임야 2585㎡를 추가 매입했다는 점이다. 사업 승인을 확신하지 않으면 쉽지 않은 일이다.
4·7 재·보궐 선거가 이틀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오세훈 국민의힘 서울시장 후보가 2005년 6월 처가가 소유한 서울 내곡동 땅 측량에 참석했는지가 논란이 됐다. 당시 한 생태탕 식당 주인이 오 후보가 가게에 들렀다고 밝히면서 의혹을 뒷받침할 ‘근거’가 제시됐다. 그러나 생태탕 식당 주인이 증언에 앞서 진행했던 일요시사와 인터뷰가 뒤늦게 공개됐는데, 당시에는 오세훈 시장 방문 여부에 대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김어준 방송에선 ‘오 기억난다’ 하더니 생태탕집 주인, 그 나흘전엔 ‘기억 없다’” 기사를 내고 “식당 주인 황모씨가 나흘 만에 진술을 바꿔 논란이 일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조선일보는 “야당은 ‘제2의 김대업 만들기냐’ ‘생떼탕 끓이느냐’고 반발했다”고 전했다. 김대업씨는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 장남이 돈을 주고 병역을 면제받았다며 허위 의혹을 제기했던 인물이다.
반면 한겨레는 “내곡동 생태탕집 아들 ‘오세훈 분명히 온 거 맞다” 기사를 냈다. 한겨레는 “식당 주인 아들 ㄱ씨가 4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오 후보가 분명히 우리 가게에 왔다’고 거듭 밝혔다”며 “그는 5일 기자회견을 열고 당시의 정황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고 했다. 생태탕집 사장 아들은 한겨레와 통화에서 “내가 어머니를 설득해 오 후보가 생태탕을 먹으러 왔다는 사실을 언론에 밝혔는데 있는 사실을 말해도 마치 거짓말쟁이가 된 것 같은 지금 상황에 화가 난다”고 했다.
지난 3일 일요시사가 공개한 어머니 인터뷰 내용이 번복된 이유에 대해 생태탕 식당 사장 아들은 “어머니가 외부에서 전화를 받고 머리 아픈 일 신경 쓰면 피곤하니까 ‘그때는 오래전 일이라 모른다’ 답했다”며 “제가 오히려 어머니를 설득해 방송 인터뷰까지 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뉴스공장’도 방송 인터뷰 나가기 전에 예전에 전화 통화했을 때는 ‘나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답했었다”고 했다.
생태탕집 사장 아들은 5일 ‘김어준의 뉴스공장’과 인터뷰에서 “어머니께서는 내곡동에서 35년 정도 가게를 하셨기 때문에 외부에서 ‘하지 말라, 그냥 모른다고 해라’ 이렇게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며 이후 자신이 설득해 증언을 하게 된 것이라고 거듭 밝혔다. 김어준씨는 “저희도 어머님께 처음 연락드렸을 때 어머님이 인터뷰를 거절하셨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라고 했다.
서울 높은 사전 투표율, 샤이진보 결집? 정권심판?
4·7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사전 투표율이 21.95%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자치구별 투표율은 종로구가 24.44%로 가장 높았고 이어 동작구(23.62%), 송파구(23.37%) 순으로 나타났다.
여야는 높은 사전투표율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했다. 민주당은 “여권 지지층이 뭉친 것”이라고 했고 국민의힘은 “정권 심판론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중앙일보는 “더불어민주당이 높은 사전투표율에 기대를 거는 건 사전투표율이 20%를 넘긴 최근 세 번의 전국 단위 선거에서 모두 이겼던 경험 때문”이라며 “반면에 국민의힘은 ‘사전투표율 상승=민주당의 유리’란 공식이 깨졌다고 본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동아일보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동아일보는 “눈에 띄는 점은 서울시장 선거의 유권자 수가 가장 많은 송파구가 투표율에서도 상위를 기록했다는 점”이라며 송파구가 부동산 문제에 민감한 곳이지만 강남3구 중 유일하게 민주당 의원을 21대 총선에서 배출한 곳이라 유불리를 점치기는 쉽지 않다는 여권 관계자의 발언을 전했다.
경향신문은 “코로나19 때문에 선거 당일을 피해 투표한 노년층도 적지 않았다”며 “선거의 높은 관심도와 사전투표제 안착이라는 의미 이상은 과잉 해석”이라고 밝히면서 “(야권 우세인) 현재 추세가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으로 연결된다”고 했다. 경향신문은 그 근거로 “금천구 등 민주당 강세 지역의 투표율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점”을 전했다.
부산도 높은 사전투표율
부산지역 역시 사전투표율이 역대 재보선 최고치를 기록했다. 부산시장 보궐선거 사전투표율은 18.65%를 기록했다.
부산일보는 ‘우열을 판단하기 힘들다’고 봤고, 국제신문은 신중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야권 강세 경향이 있다고 판단했다.
부산일보는 “이번 보선에선 부산 중서구와 중동부 권역의 사전투표율이 20.1%, 19.57%로 부산 전체 투표율보다 높았다”며 “(여론조사에 따르면) 중서부는 민주당 김영춘, 중동부는 국민의힘 박형준 후보가 각각 우세를 보인 곳이라 권역별 사전투표율 수치로도 어느 한쪽에 치우쳤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국제신문은 “부산의 지역별 투표율을 보면 일단 보수 지지세가 강한 원도심과 중앙대로 벨트, 동부산에서 비교적 높은 투표율을 보였다”며 “반면 북구, 강서구, 사하구, 사상구 등 상대적으로 민주당 강세지역인 서부산은 낮은 투표율을 기록했다”고 전했다. 이어 국제신문은 “여야의 유불리를 따지기 어렵다는 관측도 나온다”고 덧붙였다.
‘내로남불 금지’에 보수정당·언론 반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4·7 재·보궐선거 투표를 독려하는 현수막에 ‘내로남불’이라는 표현을 쓰지 못하게 하자 반발이 이어지고 있다. 국민의힘에 따르면 선관위는 “특정 정당을 쉽게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 조선일보는 “하지만 선관위는 작년 총선에서 ‘100년 친일청산 투표로 심판하자’ 문구를 허용했다가 본투표 이틀 전에애 다시 불허했었다”며 “반대로 당시 야당 측이 쓰려던 민생파탄, 투표로 막아주세요라는 문구는 현 정권을 연상하게 한다면서 하용하지 않았다”고 했다. 동아일보는 사설을 내고 “선관위가 편향성 시비에 휩싸인 것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달 한 시민단체가 ‘보궐선거 왜 하죠?’ 캠페인을 하려 하자 선관위는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로 제지했다”고 지적했다.
[손호철의 발자국] 13. 경남 통영 : 동백림 사건으로 '상처받은 용', 윤이상 이곳에 잠들다
하지만 아름다운 다도해와 세월을 비껴간 것 같은 아담한 도심, 그리고 한국 최대의 굴 생산지답게 싱싱한 굴 요리로부터 충무김밥, 중앙시장의 시락국 등 풍부한 먹거리와 좋은 지인(고 노회찬 의원의 고등학교 동기이며 이곳에서 '건강한 굴양식'을 하는 시인 장석 씨) 때문에 자주 찾는다.
이 같은 매력과는 별개로, 통영에 들어서면 나도 모르게 한국인으로서 '자부심'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특히 2018년부터 찾게 된 미륵도 관광특구의 언덕에 서면 그러하다. 이 언덕에 서있는 멋진 현대식 건물 뒤쪽으로 가면 커다란 천연석으로 만든 묘비석이 통영의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처염상정(處染常淨)'. 돌에 새겨진 '더러운 곳에 있어도 항상 맑다'는 뜻의 글 밑에는 '윤이상 1917~1995'라고 쓰여 있다.
그렇다. 통영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이지만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해외간첩단사건'인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의 희생자였던 윤이상의 고향이다. 따라서 이곳에 서면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에 대한 자부심과 동백림 사건이 웅변적으로 보여준 분단의 슬픔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다행스러운 것은 2000년대 들어 그가 우리 사회에서 '복권'이 되어 그를 기리는 통영국제음악제가 열리고 통영국제음악당을 지은 것이다. 특히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2018년에는 독일에 있던 그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했다.
충남 예산에는 비구니들의 절인 수덕사가 있다. 그 앞에는 초가지붕을 한, 풍치 있는 수덕여관이 자리 잡고 있다. 수덕여관 앞에는 땅에 누운 커다란 바위에 글자를 닮은 특이한 암각들이 눈에 띈다. 윤이상과 함께 동백림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파리에서 활동하던 화가 이응로 화백(1904~1989)의 흔적들이다. 일본에서 생활했던 그는 해방 후 귀국해 수덕여관을 인수해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했으며, 바위에 새겨놓은 그림들도 그의 작품이다. 유럽에서 활동하던 두 명의 세계적인 예술가가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간첩의 누명'을 쓰고만 것이다.
"나는 공산당이 아니다." "아이들아 아버지는 간첩이 아니다." 1967년 6월 말. 윤이상을 심문하던 조사관이 조사실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가 이상한 소리에 잠을 깨서 보니, 벽에는 피로 이 같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윤이상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조사관이 잠든 사이 윤이상은 책상에 있던 사각형 재떨이로 머리를 쳐 자해를 하고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자신의 피를 손가락에 묻혀 쓴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7월 3일부터 17일까지 무려 7차례에 걸쳐 유럽 거주 지식인들과 유럽에 유학한 바 있는 국내 교수들, 이들 교수들과 연결된 학생운동 지도자 등 203명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간첩 활동을 벌이고 대한민국 정부의 전복을 꾀했다는 동백림 사건('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대남적화공작단사건')을 발표했다. 203명에는 윤이상, 이응로, 윤이상 씨 부인 이수자 등 해외 거주 교민 30명과 황성모 서울대 교수, 김중태, 현승일 등 서울대 학생운동 지도자들 이외에 시인 천상병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독일에서 공부한 서울대 문리대 교수이자 한일회담 반대투쟁 등 당시 학생운동의 중심이었던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의 지도교수였던 황성모 교수를 통해 북한이 학생운동을 조종하고 있는 것으로 몰아갔다. 대한민국은 충격에 빠졌고 총선 부정선거 규탄투쟁을 벌이던 학생운동은 풍비박산 났다. 중앙정보부가 공작원들을 파견해 독일과 프랑스에 윤이상, 이응로 등을 사실상 불법적으로 납치한 것이 알려지면서 국제 여론도 들끓었다.
윤이상과 이응로는 공통점이 많다. 서양 예술에 각각 동양적 음악과 동양화 기법을 도입해 주목을 받은 것이 그러하고, 둘 다 1950년대 후반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윤이상이 통영의 죽마고우로 월북한 음악가 친구의 소식을, 이응로는 한국전쟁 때 헤어진 아들 소식을 물어보려 동백림(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을 방문한 것도 비슷하다.
서베를린에 살고 있던 윤이상은 이후 북한대사관을 10여 차례 방문했고 여비 등의 명목으로 금품도 받았다. 자신의 작품 테마로 구상하고 있던 고구려 강서고분도 보고 북한의 실상을 보고 싶어 1963년 북한을 방문했다.
하지만 윤이상은 재판과정에서 "북한의 노동당 가입 권유는 일언지하에 거부했으며 북한과 접촉한 것은 결코 사상적으로 동조해서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부인 이수자는 윤이상이 돈을 받은 의리 때문에 북한대사관에서 전화가 오면 몸서리를 치면서도 찾아갔고, 다녀와서는 "내가 백림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괴로워했다고 진술했다.
이처럼 윤이상 등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이 북한대사관을 방문해 대접을 받고 금품도 받았으며 일부는 북한은 방문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의 지시를 받아 간첩 행위를 했다는 정부의 발표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박정희 체제하임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간첩죄에 대해서 전원 무죄 판결을 내렸고, 다만 '적국'인 북한 방문 등에 관해서만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이에 화가 난 박정희는 유신 후 판사 재임명제를 도입해 사법부를 정권의 하수인으로 변질시켰다).
윤이상, 이응로는 국제예술가들의 서명운동과 독일, 프랑스 등의 압력으로 석방되어 독일과 프랑스로 돌아갔다. 황성모 교수와 김중태 등 학생운동 지도자들 같은 민비연 관련자들도 가벼운 형을 받는데 그쳤다.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시 이들 유럽의 지식인들은 국내와 달리 국가보안법 등을 잘 몰랐고 북한에 대해 강한 적대감도 갖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이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앞서 있었고, 외화송금 제한 등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던 유학생 등은 북한의 호의에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많은 유학생 등이 북한에 대해 알고 싶거나 한식이 먹고 싶다는 이유로도 동백림 북한대사관을 방문했다.
문제는 독일 유학 시절 북한대사관을 방문한 적이 있는 임석진 교수가 자신의 대북접촉 전력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정보기관에 자수를 하면서 불거졌다. 이를 보고받은 박정희는 임 교수를 직접 청와대로 불러 설명을 듣고 공작팀을 만들어 유럽 등에서 관련자들을 잡아오도록 지시한 것이다.
당시 반공에 목을 매고 있던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이들을 좌시할 수 없는 심각한 안보 위협이라고 판단해 반드시 응징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국제법을 무시하고 이들을 독일, 프랑스 등에서 잡아 온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남편과 함께 옥고를 치른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는 "국내법을 모르는 상태에서 동서독 간 교류를 보고 동백림을 왕래해서 그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사전에 한국대사관이 경고라고 했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이들에게 무리하게 간첩죄를 씌워 상처를 주었지만 대법원이 간첩죄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윤이상을 간첩으로 발표해버림으로써, 그가 간첩이란 오명을 쓰고 평생 쓰고 살도록 했다. 그 결과 윤이상, 이응로와 같은 세계적인 예술가들을 소위 '반한친북인사'로 만들고 말았다.
주목할 것은 동백림 사건의 해외 불법납치공작의 경험이 1970년대의 비극적 사건들을 잉태했다는 점이다. 1973년에 있었던 김대중 납치사건과 1970년대 말에 있었던 '김형욱 살해사건'이 그것들이다, 유신 선포 당시 외국에 있었던 김대중은 일본을 중심으로 반정부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중앙정보부가 그를 납치해서 서울로 끌고 왔다. 김형욱 사건은 더욱 극적이다. 중앙정보부장으로 동백림 사건을 터트린 김형욱은 권력에서 밀려나자 해외로 도주, 미국에서 반(反)박정희 운동에 앞장서고 있었는데 중앙정보부가 그를 프랑스로 유인해 비밀리에 살해한 것이다. 이처럼 동백림 사건은 이후 이어진 박정희 정권의 불법해외공작의 효시이다.
윤이상은 1969년 독일로 돌아간 뒤 독일로 귀화했고 1972년 오페라 '심청'으로 뮌헨올림픽의 서막을 여는 등 세계적인 작곡가로 주가를 날렸다. 동백림 사건을 겪으며 정치적으로 성숙해진 그는 1980년 광주학살을 보고 '광주여 영원하라'를 작곡했다. 1988년에는 자신이 직접 옥고를 치르며 체험한 분단을 넘어서기 위해 남북한 정부에 민족합동음악축전을 제안해 1990년 분단 45년 만에 남북 간의 음악 교류를 성사시켰다.
윤이상은 통영을 무척이나 사랑해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 했다. 1994년 서울 등 국내 주요 도시에서 윤이상음악축제가 열리면서 귀국을 준비했으나, 한국 정부가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옹졸하게 요구하자 귀국을 거부했다. 윤이상은 독일 예술에 기여한 공으로 독일 대공로훈장과 괴테상 등을 받았다.
결국 귀국하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목숨을 거둔 그는 이제 윤이상 생가터에 세워진 윤이상공원의 동상으로 우리를 맞는다. 공원에 세워진 윤이상기념관에 가면 그의 천재성과 분단과 동백림 사건으로 '상처받은 용'의 아픔 등 그의 체취를 잘 느낄 수 있다. 특히 잘 알려지지 않은 윤이상의 음악관을 배울 수 있다.
"우주에는 항상 흘러 다니는 음(音)이 존재한다." "음악은 작곡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음을) 낳는 것이다." 음이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서양음악과 달리 그는 도교적 관점에서 이처럼 주장했다. 그는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했다. "나의 음악언어는 차라리 정의를 향한 절규에 더 가깝습니다. 나의 음악은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단결을 호소합니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적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천의무봉한 시인 천상병 하면 우리는 하늘나라로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로 끝나는 아름다운 시 '귀천'을 생각한다. 그가 독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한 친구에게 막걸리를 얻어먹은 죄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성기에 전기고문까지 받고 나와 쓴 '소풍'이란 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통영을 떠나려는데 '소풍'의 슬픈 구절이 생각났다. 박정희 정권은 동백림 사건을 통해 이 땅에서 가장 맑은 영혼을 가진 '귀천'의 시인까지도 이처럼 절규하게 만들고 만 것이다.
아름다운 저 세상 소풍 끝나는 날 /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 천상병의 삶이 소풍이었다고? / 그 소풍이 아름다웠다고? /
(중략)
오늘 / 반쪽의 일터에서는 굴뚝 위에서 농성을 하고 / 바람이 바뀌었다고 / 다른 쪽의 사람들은 감옥으로 내 몰리는데 / 이 길이 소풍길이라고? /
(중략)
홀로 밤길을 걷고 / 길을 비추는 달빛조차 몸을 사리는데 / 이곳이 아름답다고?
입력 : 2021.04.04 11:00 수정 : 2021.04.04 11:11
서울 노원구 아파트에서 세 모녀를 살인한 혐의를 받는 피의자가 2일 오후 서울 노원경찰서에서 조사를 마친 뒤 도봉경찰서 유치장으로 이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노원구 한 아파트에서 세 모녀를 살해한 남성 김모씨(25)가 ‘퀵서비스’를 가장해 집에 침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4일 경찰 등에 따르면 김씨는 지난 23일 오후 5시30분쯤 큰 딸인 A씨의 여동생이 혼자 있을 때, 퀵서비스라며 초인종을 눌러 A씨가 사는 아파트에 들어갔다. 김씨는 집에 침입해 A씨의 여동생을 살해한 뒤, 밤에 A씨의 어머니(60)가 귀가하자 살해하고 이후 집에 돌아온 A씨까지 살해했다. 앞서 서울 노원경찰서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구두로 전한 피해자들 사인이 모두 ‘목 부위 자상’이었다고 밝혔다.
김씨는 지난달 25일 범행 직후 세 모녀의 집 거실에서 흉기로 자해를 시도해 인근 병원으로 이송됐다. 경찰은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에서 회복 중이던 김씨를 지난 2일 오전 체포해 범행 동기 등에 대해 조사를 벌였다.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자신의 혐의를 인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A씨 주변인 등의 증언과 김씨 휴대전화 디지털포렌식 결과 등을 종합해 김씨가 범행 수개월 전부터 A씨를 스토킹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시의 범죄 전력이나 병력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인터뷰] 유튜브 '까날쿠바' 운영하는 정호현 감독 "한-쿠바 역사 100년을 기록하기 위해"
"100años de coreanos en CUBA(쿠바 한인 100년) 축하공연"이라는 제목의 유튜브 영상을 클릭했다.
'까날쿠바'(CanalCuba, 채널 쿠바)라는 이름의 이 유튜브 채널에선 쿠바의 10대, 20대들이 나와 익숙한 K-POP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훤칠한 아이들이 BTS, ITZY, SuperM, BlackPink, 4MINUTE 등등 익숙한 그룹들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면서도 한국어 가사에 반응하며 마치 한국인처럼 입모양을 들썩인다.
우리에게 멀고 생소한 나라지만, 쿠바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정도로 지구상에서도 '별난 나라'. 그 곳의 아이들에게도 K-POP열풍은 여지없이 불어왔다. 과거에는 한국 드라마나 대중가요가 '매니악'한 취미로 여겨졌었다. 하지만 지금 쿠바의 10대, 20대들은 다르다. 쿠바는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국가고, 미국의 제재로 인해 어쩔수 없이 전 세계와 단절된 나라이지만, 그들은 다른 세계의 아이들과 똑같이 호기심 많고 열정적이다. 젊은 쿠바 친구들에게도 K-POP은 선풍적 인기다. 리듬과 춤이 일상인 나라, 살사와 룸바의 나라 쿠바에서도 세련된 이미지의 K-POP은 매력적인가 보다.
올해는 쿠바 한인 이주 100년이다. 100년이라는 특별한 숫자가 아득해 보이지만, 100년 전 일제강점기의 엄혹한 시대에 상륙했던 한인들은, 100년 후 한국 문화의 쿠바 상륙을 맞이할 줄 알았을까.
쿠바의 열악한 인터넷 환경, 열악한 자본 환경에서 이 영상을 제작한 이는 쿠바에 거주하는 정호현(훌리아) 감독이다. 다큐 영화 <쿠바의 연인>을 연출했던 그답게 영상 촬영과 편집에서 베테랑의 기운이 느껴진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만 이렇게 아마추어로 활동하는 K-POP 팀만 100팀은 족히 넘을 것이라고 한다. 아바나뿐 아니라 쿠바 전역에서 K-POP을 즐기고 K-POP 경연대회가 열린다. 이들은 '축제'처럼 K-POP과 함께 모여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교양 유튜브 채널'에 가까워보이는 까날쿠바 채널인데, 정 감독은 처음에 쿠바 친구들의 K-POP 커버 영상을 채널의 한 코너로 생각했다고 했다. 그래서 춤추는 친구들에게 '잘 찍고 잘 편집한 영상'을 선물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추천을 받아 처음에 3팀의 친구들과 영상을 찍었다. 쿠바의 명소 탁 트인 말레콘에서 춤을 추니 느낌이 좋아 보였다.
그렇게 말레콘에서 3팀과 함께 촬영을 했다. 그런데 곧바로 코로나19 확산세가 커지면서 쿠바에 방역3단계가 적용돼 아바나가 봉쇄됐다. 그러나 K-POP에 열정적인 젊은 친구들의 요청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실내 촬영 장소를 섭외하러 다녔다. 마침 좋은 스튜디오가 나왔다.
까날쿠바에 업로드되는 영상 자체가 십시일반으로 선물 받은 것들이었다.
제대로 된 한국 음식은 사실 쿠바에서 먹기가 어렵다. 물자가 부족한 것은 둘째 치고, 한국식으로 다듬은 식재료 자체가 없다. 이를테면 돈까스를 튀기려면 직접 빵을 부숴 빵가루를 만들어야 한다. 코로나로 더 열악해진 환경에서 한국 음식까지 만들어 스테프들에게 대접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지만, 까날쿠바'와 K-POP 팬들의 '호의'에 비하면 대수가 아니었다.
문제는 있었다. 특히 영상 업로드가 문제였다. 쿠바에서도 비대면 교육 때문에 아이들 수업이 인터넷으로 진행되긴 하지만, 인터넷 환경은 매우 좋지 않다. 3분짜리 영상 하나 올리는데 약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일상생활에서 수시로 유튜브를 보기도 쉽지 않다. 쿠바 사람들도 공원 등지에서 공공 와이파이를 통해 영상을 보는데, 공기처럼 인터넷이 깔린 한국과 비교하면 바깥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그들의 열정은 우리 보통 사람의 몇 배나 된다고 볼 수 있겠다.
영상에 등장해 춤을 추는 쿠바의 K-POP 팬들은, 왜 K-POP이 좋은 걸까. 궁금했다. 무엇이 그들을 K-POP에 빠지게 할까.
쿠바 한인 이주 100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를 영상으로 남기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지금, 지구의 국경선 쿠바도 예외는 아니다. 월드오미터에 따르면 쿠바의 현재 코로나 확진자 수는(2일 기준) 7만6276명이고, 사망자 수는 425명이다. 사망률은 0.6%로 코로나 방역 모범국인 한국(1.7%)보다 낮다. 남북미를 통틀어 가장 가난한 나라로 인식되지만, 남북미를 통틀어 사망자 수가 가장 적은 나라들(도시국가 수준의 인구 소국 제외) 중 하나다.
미국의 경제 제재로 인한 고립은, 코로나라는 외생변수로 더 심각해졌다. 1년에 1만 명에 달하던 한국인 관광객도 코로나 여파로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그래도 그곳에서는 삶이 이어진다. 당연하게도.
올해는 쿠바 한인 이주 100년 되는 해다. 코로나 사태가 없었다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취임(트럼프는 오바마 전임 대통령의 대쿠바 정책을 거의 폐기하다시피 했다.) 분위기와 함께 한-쿠바 관계 100년을 기리는 행사들이 소박하게나마 활기를 찾았을 터다.
1905년 5월 14일. 인천을 떠난 1033명의 한인이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도착했다. 주로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던 그들 중 300여 명의 한인은 1921년 3월 멕시코를 떠나 쿠바로 이주했다. "쿠바가 매우 잘 살아서 사탕수수를 자르는 노동자들도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일한다고 했고, 물을 마시지 않고 대신 우유와 맥주를 마신다고도 했다"는 말에 혹해서 떠났으나, 그것은 환상이었다. 한인들은 쿠바 아바나에서 2시간가량 거리인 마탄사스 등에 정착해 한인촌을 이루고 대한국인국민회를 만들었다. 그들은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고 한글 학교를 세웠다. 도서관을 만들고 한인 사회 소식을 공유하기 위한 간행물을 출판했다. 대한인국민회 한인들은 강령을 만들었다.
그들은 에네켄 농장과 사탕수수 농장에서 힘들게 일해 번 돈을 아껴 아바나의 중국 은행을 통해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 자금을 보낸다.
그렇게 지구 반대편 생소한 섬에서 조국의 독립을 바라며 살아가기 시작한 지 100년. 정호현 감독은 까날쿠바로 한국인들, 그리고 쿠바인들과 함께 소통하고 싶다고 했다.
원래는 K-POP은 물론이고 쿠바에서 사는 이야기, 훌리아가 만난 사람, 쿠바 한인 이주의 역사 등을 다루고 싶었다. 까날쿠바 채널에는 정 감독이 직접 만든 쿠바 한인 이주 100년 역사 관련 영상도 있다. 정 감독은 "지금은 100년 한인들이 삶을 유튜브 영상 등을 통해 좀 더 조명해 보고 싶다. 이번이 아니면 다시 하기 힘드니까. 그리고 지금 80대이신 어르신 분들 다들 돌아가시면 못하니까, 거기에 관심이 많다"라고 말했다.
정 감독은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쿠바 여성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쿠바의 성소수자 문제, 쿠바의 영화 문제다. '까날쿠바에 들어가면 쿠바의 이런저런 소식이 있더라. 내용이 들쑥날쑥해도 재미는 있네. 볼 만 하더라.' 그런 이야기를 듣는 채널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40218185087976#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현장] 노무현도 찾아갔던 학교, 효암학원 명예이사장... 추모 분향소에서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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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 개운중학교에 마련된 고 채현국 효암학원 명예이사장의 분향소. | |
ⓒ 윤성효 |
"학교는 좋은 학생만 길러내는 곳이 아니라 좋은 교사도 길러낼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삶이란 끊임없이 묻고 배우고 깨우치는 과정이다. 확실하게 아는 것도 고정관념이다. 세상에 정답이란 건 없다. 한 가지 문제에는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공부를 하지 않으면 내가 썩는다. 공부를 하면 썩어도 덜 썩는다. 상 받는 아이들은 상 받지 못하는 아이들 덕분에 상을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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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이 19일 오후 서울 성북구 성북예술터에서 열린 "쓴맛이 사는 맛" 초청 강연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2015.3.19 | |
ⓒ 이희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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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노무현 대통령은 후보 때인 2002년 12월 6일 양산 효암고등학교에서 수업했고, 이 학교는 교실 앞에 "노무현 대통령이 수업한 교실"이라는 팻말을 걸어 놓았다. | |
ⓒ 윤성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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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타파 <목격자들 4회 "건달 할배, 채현국"> 중에서5 | |
ⓒ 뉴스타파 |
등록 :2021-04-02 23:48수정 :2021-04-03 07:38
▶ “두번의 실패는 없다”는 없다고 했지만 패색이 짙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 얘기다. 집값은 올랐고 서민들은 주거 불안에 떠는데 공공택지·주택을 공급하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 임직원은 땅투기에 나섰다가 꼬리가 잡혔다. ‘윗물은 맑다’더니 청와대 정책실장과 여당 국회의원들은 주택임대차보호법 발효 전 임대료를 ‘남들이 하던 대로’ 올렸다. 언행일치는 물론 역지사지도 없었다. ‘지공주의의 태두’ 김윤상 경북대 명예교수가 보는 문제의 핵심은 ‘토지 불로소득’이다. 토지를 ‘깔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 어마어마한 이득이 생기면 투기가 발생할 수밖에 없으니,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자고 했다. 오늘도 “부동산 투기는 전 국민이 언제라도 감염될 수 있는 팬데믹”이라며 이를 종식하기 위한 ‘토지 불로소득 환수’를 백신으로 제시하지만 기득권의 반발은 언제나 그랬듯 강고할 것이다. 지난달 22일 대구 경북대에서 만난 김 교수가 자신의 생애와 지공주의 이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하늘이 내려준 땅에서 나오는 불로소득을 모든 사람이 공유하자는 이상은 이 땅에서 실현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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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2일 찾아간 대구 경북대학교. 들머리에 ‘진리·긍지·봉사’라는 글씨가 돋을새김된 상징탑이 청명한 하늘과 잘 정돈된 캠퍼스 잔디밭을 잇고 있었다. 고개 들어 향유할 수 있는 하늘과 발 딛고 살아가야 하는 땅. 사람이 곧 하늘이요,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라고 하지만, 땅 위의 사람은 전혀 평등하지 않다. 집값이 치솟아 주거불안에 떠는 서민들의 반대편엔 갖가지 방법으로 땅부자·집부자가 된 ‘성투(성공투자)’ 사례가 부동산 카페에 넘쳐난다. 투기와 투자의 경계는 사라진 지 오래다. 급기야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투기 사례까지 터져나왔다. 땅에 돈 놓고 돈 먹으며 영혼과 윤리마저 저당잡힌 현실. 무엇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 답을 찾기 위해 토지 불로소득 환수를 줄기차게 주장해온 ‘한국의 헨리 조지’ 김윤상 경북대 명예교수(행정학)를 만났다. 추가 인터뷰는 전화로 진행했다.
사회정의·토지정책을 연구한 노교수의 학부 때 전공은 법학이다.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돌이 지나기 전 6·25가 터졌으며 부모 품에 안긴 채 피난을 내려왔다. 아버지 직장인 미군부대의 주둔지를 따라 경남 거제를 거쳐 대구에서 자라게 된다. 경북고 시절 그는 양주동 박사의 고려가요 해설서인 <여요전주>를 읽으며 국문학도를 꿈꿨다. 그러나 어려운 집안 형편에 “국문과 가면 밥 못 벌어먹는다”는 소리를 들었고, 친구들이 다 법대를 간다고 하니 “거름 지고 장에 가는” 식으로 서울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검사 출신이었던 강재섭 전 한나라당 대표와 송광수 전 검찰총장이 법대 동기다.
―법학 공부 해보니 어떻던가요?
“막연히 생각하기에는 법 공부를 하면 사회정의라든지 큰 철학적 원리를 공부하는 줄 알았는데, 아이고… 법학이라는 게 실정법 해석이에요. 돈 빌린 사람이 어떻게 갚도록 해야 한다든지. 너무 재미가 없었죠.”
그가 대학에 입학한 1967년 6월 총선이 치러졌다.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이 175석 중 129석을 싹쓸이했다. 부정선거 논란이 가열되면서 전국 대학에는 휴교령이 떨어졌다. 이 시기 청년 김윤상은 서울대 학보인 <대학신문> 기자 활동을 하게 된다. “조금 더 세상물정을 알고 인간적으로 성숙하려면 고등학교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서 경험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결국 고시 공부를 안 하셨습니다.
“67년도에 부정선거도 있고 졸업 무렵에 유신도 있었으니까 학교 다니기가 참 어려웠어요. ‘이런 시국에 공무원 되면 뭐 하냐’는 마음이 컸죠. 피난 내려와서 어렵게 타지에서 사는데 친척 중에 출세한 사람이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으니 판검사가 좋은지도 몰랐죠.”
그래서 그는 “자유로운 교양인”이 되기로 마음먹고 정치학·경제학 등 ‘인접 학문’에 눈을 돌렸다. 그러던 중 행정학·도시계획학을 전공한 노융희 교수의 권유로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입학한다. “컴퓨터, 통계학, 사회과학 전반을 공부하면 사회를 보는 눈이 커질 거 같았다”는 게 전공을 바꾼 이유였다.
도시계획학을 공부하며 그는 토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 1960~70년대는 대규모 토목공사와 개발로 전국의 땅값이 들썩이던 시기였다. 서울 강남 개발이 시작되고 1966년 제3한강교(한남대교)가 착공되면서 3.3㎡(1평)당 300원 하던 강남 신사동 일대의 땅값은 1년 새 10배가 뛰었다. ‘복부인’이라는 말도 이때 등장했다. 투기장으로 변한 서울에서 그는 석사를 마치고 1976년 경북대 교수로 채용됐다. 박사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이어 하버드-옌칭 연구소 장학생으로 선발돼 1978년 미국으로 떠났다.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박사 학위 전공도 도시계획학이었다. 그는 유학 시절 “사회정의와 같은 가치 있는 주제를 택해서 학위논문을 쓰고 싶었지만 영어가 짧아서 못했”다고 훗날 회고했다. 아쉬움은 1982년에 귀국한 뒤에도 계속됐다. 1986년 펴낸 첫 저서 <도시모형론> 서문에서 “이제는 도시모형 연구에서 멀어지고 싶다. 우리 사회에 보다 절실한 본질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얄팍한 숫자놀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되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한국적 현실에서 사회에 기여할 바가 있을지”를 고민했고 부동산 투기 광풍에 따른 빈곤의 심화를 목격하면서 연구 주제를 토지정책으로 바꿨다. ‘토지는 인간의 생산물이 아니므로 토지를 소유하는 것만으로 돈을 버는 건 불로소득이며, 이런 이득을 제거하면 투기도 사라진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관련 연구를 진행하면서 강원 태백시 성공회 수도원의 대천덕(아처 토리 Archer Torrey, 1918~2002) 신부가 쓴 <토지와 경제정의>라는 책을 읽고 헨리 조지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100여년 전 토지 불로소득 환수를 주장한 헨리 조지와 자신의 생각이 일치했다. 김 교수는 1989년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을 처음으로 번역했다.
―<진보와 빈곤>을 처음엔 완역이 아닌 축약본으로 번역하셨습니다.
“빨리 전파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88올림픽을 계기로 또 부동산값이 오르고 전셋값이 없어서 일가족이 자살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시시한 번역자의 책이지만 예상 밖으로 보급이 됐습니다.”
미국의 언론인·사상가였던 헨리 조지는 토지를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여기서 발생하는 지대(토지 사용료와 매매차익)가 빈부격차를 심화시킨다고 진단했다. 서부개척과 산업혁명으로 철도가 놓이고 도시가 개발되며 땅값이 폭등하던 시기였다. 헨리 조지는 하늘에서 주어진 땅을 우연한 기회에 소유하게 됐다는 이유로 이득을 보는 건 정의가 아니라고 봤다. “자연이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이 베풀어준 기회를 개인이 독점할 수 있게 함으로써 근본적인 정의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토지 사용자가 땅주인에게 토지 이용료를 내는 건 “사용자가 정당하게 벌어들인 사유재산을 땅주인에게 빼앗기는 결과가 되며 이는 강도행위나 다름없다”고도 했다. 근로소득보다 불로소득에 세금을 우선 매겨야 한다는 주장도 여기서 출발한다.
헨리 조지는 이렇게 발생하는 불로소득을 국가가 가져가면 사실상의 ‘토지 공유’를 달성할 수 있다고 봤다. 토지에서 생기는 불로소득이 “사회의 성장에 따라 증가하는 사회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자연법이 마련해주는 기금”이라는 것이다. 헨리 조지는 이를 모두 환수(지대조세)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김 교수는 토지 가격만큼에 대한 은행 이자는 인정하고 나머지를 세금으로 걷는 ‘지대이자차액세’를 제안한다.
“우리나라는 토지사유제가 정착된 지 한참 됐고 현재 땅을 갖고 있는 사람 상당수가 자기 돈 내서 샀습니다. 어제 1억원 내고 땅을 샀는데 오늘 지대조세제 실시하면 땅 매매가격이 0원이 됩니다. 매매가격은 미래 지대의 합인데 미래 지대를 다 거두면 현재 매매가격은 0이 되는 거죠. 그러면 사유재산 침해의 문제가 생기고 땅 가진 사람으로서는 억울합니다. 또 땅값이 0원이 되면 땅을 담보로 잡고 빌려줬던 은행 대출은 어떻게 됩니까. 은행 다 망할 거 아니에요. 가격을 떨어뜨려선 안 되고, 가격만 안 떨어지면 토지공개념을 정착시키고 투기도 막을 수 있으니 이자는 빼고 세금으로 걷자는 겁니다.”
―여기서 이자란 토지 매입 자금을 은행에 맡겼을 때를 상정한 이자를 말하는 건가요?
“정기예금 이자로 볼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부동산 대출 이자와 은행 정기예금 이자 중간으로 볼 수 있고. 실무의 문제니까 그 사이 어딘가에서 결정이 되겠죠.”
―내 돈 내고 산 게 아니라 상속받은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상속받을 당시의 시세가 있으니까 그것에 대한 이자가 되겠죠. 그러면 ‘부동산 소유 안 할래’ 하는 사람이 나올 겁니다. 실수요가 아닌 부동산을 갖고 있어 봐야 부담만 되지, 이익 될 게 없으니까.”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토지 국유화로 가는 거 아닙니까?
“빌려서 쓸 거냐, 소유해서 쓸 거냐 선택해야 할 때 소유해서 쓰는 게 나을 수 있어요. 빌려서 써도 임대료를 내야 하고 소유를 해도 그만큼을 국가에 세금으로 내야 하기 때문에 드는 돈은 똑같아요. 그런데 소유를 하면 누가 나가라고 안 하니까, 안전하니까, 부담이 똑같다면 사람들이 소유하는 걸 택하겠죠. 물론 취득세·양도소득세는 모두 없어집니다.”
―실수요자만 남게 되면 토지는 공공이 소유하고 건물만 거래하게 하는 토지임대부 주택이 바람직하겠습니다.
“좋죠. 싱가포르가 그래서 부동산 정책에 성공한 것 아닙니까. 토지임대료가 부담되는 계층한테는 환매조건 붙여서 깎아주면 되고.”
지대이자차액세의 과표는 건물을 제외한 토지다. 김 교수는 2004년 8월 청와대 국민경제자문회의에 참여해 거래세가 아닌 보유세를 강화해야 한다며 “건물이 아닌 토지에 과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파트를 사서 월세를 놓았을 때 임대료는 토지와 건물 사용료를 합친 것이 됩니다. 과세 대상은 토지 사용료가 될 것인데 토지 사용료와 건물 사용료를 어떻게 가를 수 있습니까?
“똑같은 품질의 아파트를 서울 강남과 대구 경북대 앞에 지었을 때 가격 차이가 납니다. 땅값 때문이죠. 가격 평가는 전체 단지의 아파트 가격을 전부 평가한 다음에 대지 지분으로 나누면 됩니다. 신축할 경우에 든 비용을 계산해서 만약 10년이 지났으면 그동안 감가상각이 된 금액이 건물 가격이죠. 전체 가격에서 감가상각된 건물 가격을 빼면 나머지는 다 토지 가격이 됩니다. 그 토지 가격을 건물 평수로 나누면 되죠.”
―재개발·재건축 과정에서 교통시설이 확충되고 그게 또 집값에 반영됩니다. 이런 기반시설도 토지 가치에 반영된다고 봐야 할까요?
“그렇죠. 토지 불로소득을 완전 환수하게 되면 개발이익 얻으려고 사람들이 들입다 싸우고 그런 일은 없어져요. 붕괴 위험 있을 때 공공이 나서서 보조금 줘가면서 하는, 정말로 필요한 재건축만 하게 되죠. 지금 쓸데없는 재건축 해서 멸실되는 아파트가 얼마나 많습니까.”
―지대이자차액세가 시행되면 당장 내가 가진 집을 팔아서 얻을 수 있는 큰 차익을 잃게 되는데, 이에 대한 불만이 크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불로소득을 기대하면서 집을 소유한 경우라면 물론 실망이 크죠. 그러나 ‘도둑질하려고 했는데 도둑질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라며 저항하는 것과 똑같죠. 설득을 해야 하고 토론을 하면 설득이 될 걸로 봅니다. 결국엔 나한테 그게 이익이구나 알게 된다는 거죠.”
―헨리 조지는 지대만 세금으로 걷는 지대조세 단일세를 주장했습니다. 지대이자차액세만으로 세수 충당이 가능한가요?
“안 되죠. 극단적으로 지대가 떨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당연히 국가가 돈을 내줘야 해요. (지대보다 이자비용이 커서) 마이너스가 되면 (국가가 그 차액을 개인에게) 내줘야죠. 그렇게 되면 정부가 또 다른 대책을 세워야겠죠. 전반적으로 경기가 후퇴하고 인구도 줄고 지대도 줄고 그러면 정부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이냐, 그건 정말 고민이죠.”
―지대보다 이자가 더 많이 나가면 정부가 내줘야 한다고요?
“가령 동네에 혐오시설, 공공에 필요한 쓰레기매립장이 들어오면 그 주변 토지의 지대가 떨어질 거 아닙니까. 지대로 이자를 충당하지 못할 정도라면 그 차액만큼 돈을 내줘야죠. 땅이 우리 모두의 것이고 토지 가치가 우리 모두의 것이라면, 손해 보는 것도 우리 모두가 손해를 봐야 하니까요.”
―이런 말씀은 처음 듣습니다.
“땅값이 계속 오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거기까지는 말을 안 하죠. 그러나 원론대로 하면 내줘야죠. 그렇게 되면 님비 현상도 많이 줄어요. 예를 들어 주변에 이슬람 사원을 짓는다고 주민들이 난리를 칩니다. 말로는 치안이 문제라고 하면서도 사실은 땅값 떨어질까봐. 그러면 안 되는데 요즘 공공임대주택 짓는다고 하면 막 반대하잖아요. 그런 게 훨씬 줄어들게 됩니다. 경제적으로는 세금을 덜 내게 되니까.”
김 교수는 헨리 조지의 사상을 ‘지공주의’(地公主義)라고 명명했다. “지대 환수가 단순 세제가 아니고 ‘제3의 이념’으로 대접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붙인 이름이다.
“토지와 자본을 모두 사유화하는 게 전통적 자본주의이고 이를 모두 국공유화하는 게 사회주의입니다. 토지는 원칙적으로 공유하고, 자본은 사유로 하는 그런 사상을 대변하는 말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공유를 한다는 건 토지 몰수를 한다는 게 아니고 철학적으로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토지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 또 토지공개념의 두 글자가 겹치니까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다고 생각해서 지공주의라는 용어를 만들었죠.”
이런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토지공개념에 보수세력은 종종 ‘좌파 사회주의’라는 꼬리표를 달아 비판하지만 김 교수는 이를 “마음에 안 드는 대상에는 일단 좌파라는 딱지를 붙이고 보는 우리나라 기득권층의 나쁜 버릇”이라고 반박한다. 지공주의는 자유와 시장을 기반으로 하는 우파적 방법으로 좌파의 가치인 분배정의와 사회보장을 지향한다. 김 교수가 말하는 ‘좌도우기(左道右器)론’이다.
―“과거 우리나라에 등장했던 토지공개념 정책 중 시장기능과 어긋나는 내용도 있었기 때문에 시장주의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을 말씀하신 건지요?
“순수한 시장경제는 가격·소유·거래 규제를 하면 안 돼요. 그런데 토지거래허가제는 거래 규제, 분양가상한제는 가격 규제, 택지소유상한제(1998년 폐지)는 소유 규제입니다. 이런 건 순수한 시장경제에 어긋난다는 거예요. 불로소득을 제대로 환수 안 하기 때문에 그런 무리한 방법이 나오거든요. 시장에 불로소득이 생기지 않고 모든 소유자가 실수요자가 되면 그런 가외의, 시장원리에 어긋나는 규제가 뭐 필요하냐는 거예요.”
―토지 불로소득 환수로 확보되는 세수만큼 부가가치세나 소득세를 깎아줘야 한다는 주장도 하셨습니다.
“세금 중 제일 나쁜 게 부가가치세예요. 부가가치는 전부 사람이 생산한 생산의 결과잖아요. 거기에 세금을 매기는 건 자본주의, 시장원리에 어긋난다고 보는 거고. 그다음 순위는 소득세. 소득은 좀 섞여 있어요. 땀 흘려서 번 노력소득이 있는가 하면, 운에 의한 소득도 있고, 시장의 권력관계에 의한 소득도 있고.”
문재인 정부가 선포한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은 지공주의의 지향과 같다. 그러나 문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에도 집값 상승을 막지 못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3월15일인가 청와대에서 회의할 때 문 대통령이 ‘드러나는 현상에 대응해왔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현상유지에 중점을 뒀어요. 투기 국면에 현상유지가 됩니까. 그런 정책의 실세는 (전 청와대 정책실장인) 김수현씨와 장하성씨라고 생각해요. 장하성씨가 낸 <왜 분노해야 하는가>라는 책을 보면 ‘우리나라는 임금 불평등이 크지, 자산 불평등은 크지 않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려 놨어요. 그게 말이 되는 소리예요? 상식을 가진 사람입니까? 임금주도성장을 해본들 부동산 가격이 이렇게 오르는데 무슨 효과가 있어요.”
―헨리 조지의 영향을 받은 김수현 전 실장이 집값 잡기에 실패했으니 결국 ‘지공주의의 실패다’, 이런 지적들도 나옵니다.
“김수현 교수는 참여정부 때는 이정우 교수(당시 청와대 정책실장)와 한 팀이 돼서 헨리 조지 사상을 긍정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 그 양반이 책 쓴 거 보면 보유세 인상에 겁을 먹고 있어요. ‘보유세 인상을 하면 정치적으로 부담이 커진다, 온통 수구언론이 세금폭탄이라고 해서 정권을 잃어버린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한 거 같아요. 이번 정부에 들어가서도 참여정부 자기네 팀이 만들어놨던 보유세 강화 같은 거 안 했잖아요. 그거만 회복시켰으면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이고 이렇게까지 폭등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는데….
물론 원인은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만들었죠. 노무현 정부가 만든 걸 형해화시키고 박근혜 정부 들어와서 ‘빚내서 집 사라’ 정책을 펴서 휘발유 좍 깔린 상태였는데, 그것도 모르고 장하성 같은 사람이 근본대책 안 세우고, 자산 불평등 얼마 안 된다고 했으니. 자기 강남 집값이 굉장히 오르고 있는데도 그런 소리를 했잖아요. 이 정부가 진단과 대비를 잘못한 거지.”
2018년 7월3일, 대통령 자문기구인 재정개혁특위는 이명박 정부가 감면한 종합부동산세율을 찔끔 인상하는 권고안을 발표했다. 3주택 이상 보유세 중과는 결론도 내지 못했다. 3일 뒤 기획재정부는 2020년까지 공정시장가액비율(과표를 정할 때 적용하는 공시가격 비율) 목표치를 재정개혁특위 권고(100%)보다 더 낮은 90%로 잡았다. 문재인 정부도 보유세 강화에 미온적이라는 강력한 시그널이 시장에 전파됐다. 부동산 대책이 거듭 발표돼도 집값은 잠깐 꺾였다 급등하는 패턴이 반복됐다. 그러고 공공택지·주택을 공급하는 엘에이치 임직원들이 투기에 가담한 사건까지 터져나왔다.
―엘에이치 직원들의 땅 투기 의혹을 접하고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요?
“처음 전개된 과정을 보면 목표와 분노의 대상을 잘못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내부정보 이용해서 다른 사람보다 쉽게 돈을 번 건 나쁜 일이에요. 그걸 비난하는 데 이의가 없지만 내부정보를 취득해서 돈을 벌었다는 것에 타깃을 맞추면 근본대책이 어그러져요. 그러면 내부정보 이용 안 했으면 괜찮으냐, 다른 공직자가 하면 괜찮으냐, 공직자 말고 일반국민이 하면 괜찮으냐, 이런 질문을 계속하면서 그러면 근본대책을 세우자, 누구도 부동산 불로소득을 얻지 못하게 하자, 이런 식으로 가야 하는데, 너무 적발·처벌 쪽으로 치우쳤다고 생각합니다.”
김 교수는 분노의 성격을 ‘공분’과 ‘사분’으로 구분하며 말을 이어갔다.
“‘나보다 더 유리하게 돈을 벌었어, 이건 참을 수 없다’는 건 사분입니다. 처음에는 사분이 많이 작용해서 정부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고 생각해요. 이제 정부가 할 일은 끓어오르는 사분을 공분으로 바꾸는 작업이죠. 이참에 이 분노를 기회 삼아서 토지 불로소득을 완전히 없애는 지대이자차액세 같은 근본대책으로 나아가야죠.”
문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 시행 직전 전셋값을 14% 올린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을 경질하고 “부동산 부패의 근본적인 청산”을 지시했다. 뒤이어 나온 대책이 ‘1년 미만 보유 토지’의 양도소득세 강화와 토지 담보 대출 규제다. ‘부동산 부패 청산을 위한 반부패정책협의회’에서는 경제부총리, 국토교통부 장관, 검찰총장 권한대행, 경찰청장 모두 기획부동산 근절에 뜻을 모았다고 한다. 김 교수는 “부동산 투기는 전 국민이 언제라도 감염될 수 있는 팬데믹”이라며 부동산 불로소득에 대한 강도 높은 환수 정책이 없는 한 “근본적 대책이 아닌 땜질”이라고 평가했다. “꿀에 개미가 꼬이면 꿀을 치워야 하는데 꿀은 놔두고 개미들에게 이름표만 붙이는 식”이라는 것이다.
헨리 조지는 1879년에 <진보와 빈곤>을 출간했지만 142년 전 경고에도 부동산 투기와 자산 불평등은 여전하다. 복지 강화 등 자본주의를 수정하려는 노력이 꾸준히 있었지만 토지 불로소득 문제는 왜 교정되지 못했을까?
“크게 두 가지입니다. 마르크스 경제학,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경제학, 이런 식으로 딱 양분이 되니까 그 중간이라고 할 수 있는 헨리 조지 사상이 발붙일 수가 없었죠. 또 시장경제라는 건 사유재산제가 전제되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대가를 주는 게 사유재산제입니다. 시장경제라면 지공주의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람이 만들지 않은 자연물은 모든 사람의 것이고, 인공물은 인공을 가한, 생산한 사람의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돼야 진짜 시장경제가 된다고 지공주의는 생각하는데, 우파 경제학에서는 왜 그걸 못했느냐? 한마디로 싫으니까요. 가진 사람이 (그런 식으로 부를 빼앗기는 게) 싫으니까요. 땅으로 부동산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계층에서 양보를 안 하는 거죠.”
―우리나라 부동산 문제는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라고 보십니까?
“농민들이 종래의 형편없는 소작제도 속에서 고생하다가 농지개혁으로 해방이 됐죠. 그러나 1960년대 후반 도시화 과정에서 경자유전의 원칙을 도시 토지에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주택의 경우에는 사는 사람이 집을 소유해야 한다, 즉 ‘주자유택’ 원칙을 적용했어야 합니다. 다른 토지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박정희 정권 도시화 과정에서 그런 문제가 간과됐군요.
“경자유전 원리를 도시 토지, 산업화 과정에서 응용해야 했는데 그걸 못했죠. 투기 생기면 투기 대책 내놓고, 경기 시원찮으면 투기 진작시키고.”
―투기에 가담해서 정치자금도 만들고요.
“경부고속도로 처음 생길 때 강남 개발하면서 공화당에서 정치자금 마련하고 그랬잖아요. 고위공직자 특혜 분양하고 정경유착하고. 자기한테 이익이 돌아오는데 개혁하려고 하겠어요?”
김 교수는 1994년 대구에서 이정우(경북대)·전강수(대구가톨릭대) 교수와 함께 헨리조지연구회라는 모임을 결성했다. 여기에 기본소득 연구자인 강남훈 교수(한신대)와 시민사회 영역의 ‘토지+자유연구소’ 남기업 소장 등이 합류해 2018년엔 헨리조지포럼으로 확대됐다. 이들을 포함해 이원영(수원대)·정세은(충남대) 교수 등이 함께하는 토지정책학회가 이달 말 발족된다. 지공주의 학파의 외연이 더욱 넓어지는 것이다. 전 교수와 강 교수는 2017년 대선 때 이재명 예비후보 캠프에서 ‘기본소득형 국토보유세’ 공약을 입안했고, 강 교수는 지금도 경기도 기본소득위원장을 맡고 있다. 토지 불로소득을 환수해 이를 기본소득 재원으로 쓰자는 ‘기본소득형 국토보유세’는 조세저항을 우회할 수 있는 전략적 방식이라고 이들은 설명한다. 90%가 넘는 국민이 결국은 수혜자가 되기 때문이다.
―지공주의 학자들이 이재명 경기지사를 도왔고 현재도 돕고 있습니다.
“이 지사가 이야기하는 공직자 백지신탁제도 제가 주장했던 겁니다. 정책결정자들이 부동산 이해관계가 있으니까 자꾸 안 하려고 하잖아요. 제가 살고 있는 수성구는 주호영 의원의 전 지역구입니다. 서울에 아파트 가지고 있고 단기간에 시세차익이 십수억원이라고 하는데 ‘시세차익 한 푼도 없어도 좋으니 이런 개혁 하자’고 하는 게 되겠어요? 자기 불로소득 얻은 건 너무나 당연한 거고, 의도치 않게 생긴 운이고, 세금 올리는 건 부담되니까 싫다, 내가 잘못하는 거 있느냐, 이렇게 자꾸 합리화하게 되잖아요. 그런 걸 없애려면 고위공직자 백지신탁부터 해야 한다고 했어요. 백지신탁제부터 해야 불로소득을 환수하고 토지보유세 올리자는 게 먹혀들어가죠.
그런데 그 안을 제가 처음 낸 게 아닙니다. 예전(2004년) 박근혜 천막당사 시절에 워낙 다급했는지 자산백지신탁제를 제안했어요. 자산 안에는 당연히 부동산이 들어가죠. 그런데 그중에서 관련성 있는 공직자의 주식백지신탁제만 제도화됐어요. 부동산 백지신탁은 고위공직자가 실수요 아닌 부동산 가졌을 때 전부 백지신탁하자는 건데 그걸 하면 상당히 좋아질 것으로 봅니다. 그리되면 이해충돌방지법도 쉽게 채택되지 않을까요. 완전한 토지 불로소득 환수제도가 들어오기 이전에 공직자 대상으로 해야 할 건 부동산 백지신탁제와 이해충돌방지법 두 가지입니다. 개혁이 제대로 되려면 이론·운동·정치 3박자가 맞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땅은 여전히 가장 강력한 자산이자 욕망의 대상이다. 기득권의 구심력도 강고하다. 지공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물었다.
―교수님 말씀은 맞지만 너무 이상적이다, 과연 가능할까, 이런 회의적인 시각도 많을 것 같습니다.
“노예제 폐지는 200년 전까지 감히 꿈도 못 꿨습니다. 100년 전에야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졌고 이제 남녀평등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가 됐습니다. ‘그게 되겠나’라며 회의적으로 생각하면 노력도 안 하게 돼요. 결국 토지 불로소득 환수가 이상적이라는 얘기는 ‘그거 하지 말자’는 겁니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헨리 조지도 <진보와 빈곤>에 이렇게 썼다. “다른 사람도 같은 별을 본다는 사실을 알 때 더 확신을 가지고 별을 보게 된다.”
대구/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89473.html?_fr=mt1#csidx59caffaf1d306c9a3d58df72362b08b
1947년 3.1절 기념식이 끝난 후 제주 관덕정에서 가두시위를 구경하던 어린이가 기마경찰이 탄 말에 치이는 사고가 발생했다. 기마경찰이 아랑곳하지 않고 현장을 그대로 빠져나가려 하자 군중들이 항의했고 경찰이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면서 6명이 숨졌다.
“해방된 우리 땅에서 경찰 총에 맞아 죽다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데, 얼마나 많은 죽을 고비를 넘고 또 넘었는데”라는 절규가 쏟아졌다.
3.1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지만 일제 경찰 출신이 82%인 당시 제주도 경찰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에 3월 10일 유례없는 총파업이 벌어졌다. 3월 13일까지 나흘간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인 160여개 기관과 단체가 파업에 돌입했다. 이를 핑계로 미군정은 제주도를 레드 아일랜드(빨갱이 섬)라 칭하고 군병력을 동원, 파업주모자라는 이유로 2500여명을 구금했다. 제주4.3항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오늘을 사는 노동자라면 한번쯤 생각하게 된다. 3.1사건 발생 열흘 만에 노동자 95%가 참여하는 총파업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광복 2년이 지났는데 3.1절을 기념한 이유
총파업 성사 요인을 찾기에 앞서 우선 광복된 지 2년이나 지났는데 3.1절 기념행사에 제주도민 절반에 해당하는 6만 명이나 모이게 된 이유부터 알아야한다.
해방이 되자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던 제주도민들이 돌아왔다. 그 수는 12만 제주도민의 절반에 해당하는 6만 명에 이르렀다.
사선을 넘어 해방된 고향 땅에 돌아온 이들은 9월 15일 제주읍 인민위원회를 시발로 노동조합, 부녀동맹, 교육자동맹 등 각종 대중단체를 잇따라 조직해 과거 일본인의 재산(적산)을 관리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등 새조국 건설에 떨쳐나섰다.
그러나 9월 28일 제주도에 진주한 미군은 적산을 송두리째 강탈하고, 일제의 밀정 출신들로 경찰을 구성해 치안을 담당케 했다. 당시 제주도(지)사 스타우트 소령 휘하의 경찰 총수 1,157명 중에 일제 경찰이 949명으로 82%를 차지했다.
미군정은 인민위원회와 노동조합 등 민주단체 인사들을 불순분자로 몰아 구속하는 등 파괴공작을 감행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미군정의 비호아래 자행된 ‘한라단’ 사건(친일파들의 테러조직 한라단이 인민위원회를 습격한 사건)이다.
이렇게 되자, 일제 대신 제주를 점령한 미군에 대한 분노는 하늘을 찔렀고, 인민위원회는 ‘3·1투쟁기념행사제주도위원회’(이후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이양)를 결성해 1947년 3월 1일 대규모 반미 시위를 계획했다.
3.1절 당일 “미군은 물러가라”는 시위군중의 현수막과 기념식 개회사는 당시 제주도민의 정서를 그대로 반영했다. “우리 제주도민은 모두 3.1혁명의 정신을 계승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의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자.”(남로당 제주도당 책임자 안세훈의 개회사 중)
95% 노동자가 총파업에 돌입한 이유
3.1사건 직후에 바로 총파업이 가능했던 이유는 미 점령군의 실체가 만천하에 폭로됐기 때문이다.
처음 미군정이 시작될 때만해도 그들의 말대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파견된 해방군인 줄 알았다. 그러나 독립만세를 외치는 조선인에 총을 겨누는 미군은 결코 해방군일 수 없다.
조선총독부가 미군정청으로, 일본군이 미군으로, 친일 경찰이 친미 경찰로 바뀌었을 뿐 해방은 아직 멀리 있음이 3.1사건으로 드러났다. 이에 제주 노동자들은 미군정에 맞서 총파업을 결행했다.
총파업이 성사된 또 다른 요인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이라는 강력한 노동자 조직이 제주 인민위원회와 제주 민전의 기둥으로 망라되었기 때문이다.
일체의 노동운동이 금지됐던 일제치하를 벗어나자마자 조선광산노조를 시작으로 금속, 철도, 출판, 섬유, 토건, 화학, 전기, 조선 등 각 분야에 노조가 결성되었다. 1945년 11월 5일 전평 결성대회에는 1,194개의 노조, 50만명의 노동자를 대표한 505명의 대의원이 참석했다.
전평은 자신들의 과제를 경제투쟁을 넘어서서 정치투쟁을 통한 일제잔재 청산과 반제‧반봉건 민중혁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전평이 주도한 주요 투쟁은 1946년 ‘9월 총파업’과 1947년 ‘3월 총파업’을 꼽을 수 있다.
철도노조에서 시작한 9월 총파업은 110만 명의 노동자가 참여해 전국의 주요도시와 지방 60여개 군으로 확산되었다. 미군정은 전평의 요구사항을 묵살하고 강경대응 방침을 세웠다. 9월 30일 미군정은 탱크를 앞세우고 군경 3천여 명과 우익단체 청년 2천여 명을 동원해 용산 철도파업 현장을 습격했다.
2차 총파업으로 불리는 3월 총파업은 일제 부역 경찰간부 처벌과 경찰 민주화, 구속된 노조간부 석방을 요구하는 정치파업이었다. 제주 3.10파업이 바로 전평의 지휘아래 제주에서 벌어진 총파업인 것이다.
2차 총파업 역시 미군정의 강경진압에 의해 2천여 명이 구속되며 끝이 났지만 전평은 1948년 다시 3차 총파업을 감행한다. 이 역시 남한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정치파업이었다. 3차 총파업은 제주4.3으로 이어졌고, 3만 명에 달하는 제주도민이 미군정의 초토화 작전에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전평은 3차례의 총파업으로 인해 수많은 간부들이 검거되거나 살해 당해 조직과 세력이 극도로 약화되었다. 그러나 1948년 5월 10일 남한의 단독정부 선거일에 맞춰 다시 총파업을 조직했고 전국 규모로 확산시키는 데까지는 성공하였으나 역시 잔혹하게 진압 당했다. 하지만 제주도에서는 4.3항쟁을 이어 5.10단선을 무산시키는 데 성공한다.
제주4.3은 반제자주, 조국통일을 향한 전민항쟁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어둠을 가르는 한발의 총성은 순식간에 제주도를 흔들어 전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한라산의 봉우리마다 붉은 봉화가 올라가고 미군정의 탄압에 맞선 항쟁의 불길이 타올랐다.
‘탕’하는 총성은 5.10 분단선거를 무력으로 저지하라는 공격개시의 신호임과 동시에 제주도민 전체의 궐기를 촉구하는 호소였다.
3천여 명의 무장대원들은 각지의 산봉우리에 일제히 올려진 봉화와 총성에 동서남북으로 호응하여 봉기의 포문을 열었다. 그리고 제주도민에게 전하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경애하는 부모 형제 여러분!
4월3일 금일, 여러분의 아들 딸과 형제들은 무기를 손에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적 단독선거에 반대하여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독립을 찾기 위해.
여러분에게 고난과 불행을 강요한 압제자와 그 하수인의 압제의 사슬을 풀기 위해.
여러분의 골수에 사무치는 원한을 풀기 위해.
저희들은 오늘 분연히 떨쳐 일어섰습니다.
여러분들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몸을 던져 싸우는 저희들에게 협조하시고 저희들과 함께 조국과 민중이 인도하는 길로 결연코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친애하는 경찰관 여러분!
탄압하면 항쟁할 뿐이다. 제주도 빨치산은 민중을 수호하고 민중과 함께 한다.
항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민중의 편에 서라.
양심적인 공무원 여러분!
하루라도 빨리 선(조직선)을 찾아가서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고, 직장을 수호하며, 악질 동료와 최후까지 용감하게 투쟁하라.
양심적인 경찰, 장병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를 위하여 피를 흘리고 있는가?
한국 민중이라면 조국과 민중을 유린하는 외적을 내쫓는 투쟁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조국과 민족을 팔아먹고 애국자를 학살하는 반역자를 타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총구는 놈들에게 향하라. 결단코 여러분의 부모 형제에게 향해서는 안 된다.
제주4.3의 전평이 오늘 민주노총에 묻는다
3만여 제주도민의 생명을 앗아간 주한미군이 76년 째 주둔하고 있다. 제주도민을 학살하라 명령한 주한미군은 여전히 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다. 자신의 부모 형제를 쏴 죽인 주한미군에게 제주도민의 세금이 방위비분담금으로 지급된다.
11월 총파업을 선언한 민주노총은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혁신교육감④] 서울시장 후보들에게 '11대 교육의제' 제안한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혁신교육 10년 무엇을 남겼나? 이를 알아보기 위해 혁신교육감 인터뷰를 이어갑니다. [편집자말] |
<동아일보>에 게재한 무상급식 관련 광고.큰사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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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가 2010년 12월 21일자 <동아일보>에 게재한 무상급식 관련 광고. | |
ⓒ 동아일보 |
'전면 무상급식 때문에...'란 제목의 광고를 기억하시는가? 벌거벗은 초등학생 아이가 식판으로 주요 부위를 가린 그 광고.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재직하던 2010년 12월, 서울시가 몇몇 신문에 낸 유료광고다.
내용은 '무상급식 때문에 저소득층 급식비 지원 등 선별복지정책이 사라지게 됐다'는 것이었다. 이 광고가 나온 뒤 8개월여 만에 치른 '초등학교 전면 무상급식 반대를 위한 주민투표'가 무산되자 오세훈 당시 시장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어린 아이 벌거벗긴 그 광고 그렇게 초등학교 전면 무상급식이 시작됐고, 10년이 흘렀다. 그동안 초중고 친환경 전면 무상급식 실시에 이어 이제 유치원 전면 무상급식까지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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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연 서울교육감. | |
ⓒ 권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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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연 서울교육감실 한켠에 세워진 자전거. | |
ⓒ 권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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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연 서울교육감. | |
ⓒ 권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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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연 서울교육감. | |
ⓒ 권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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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연 서울교육감. | |
ⓒ 권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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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탈자 신고“2000년 6.15선언에 그 내용이 그대로 옮겨앉은 89년 4.2공동성명이 발표된지 벌써 32년, 그 선언들을 아직도 우리는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천은커녕 그 선언을 만들어내신 정경모 선생님을 생전에 고국에 모시지도 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51년 만에 유해로 돌아온 ‘분단시대의 망명객’ 정경모 선생의 추도식이 1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분단시대의 망명객 故 정경모 선생님 유해봉환위원회’ 주최로 열렸다.
이날 추도식은 [통일의집] 유튜브 채널과 <통일뉴스>를 통해 생중계됐다.
1989년 고인과 더불어 방북길에 올랐던 문익환 목사의 3남 배우 문성근 씨는 추도사에서 “정경모 선생님과 문익환 목사는 영혼의 동지셨다”며 이부영 선생이 “이제라도 정경모 선생을 문익환 목사가 누워계신 모란공원에 유원호 선생과 함께 나란히 모시자”고 제안해 “아~ 정말 좋다. 김구 여운형 장준하 선생이 어울리고 계신 ‘찢겨진 산하’에 이제 정경모 선생님도 문익환 목사 손을 잡고 들어가시겠구나”라며 반겼던 심경을 전했다.
『찢겨진 산하』는 고인이 일본에서 발간한 잡지 <씨알의 힘> 제6호(1983년 6월)에 여운형, 김구, 장준하의 구름 위 정담(三先覺雲上經綸問答) 제목으로 발표했고, 1984년 이를 단행본으로 엮은 책으로 국내에도 번역돼 널리 읽혔다. 죽임을 당한 세 분의 선각자 여운형, 김구, 장준하가 사후세계에서 만나 가상의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다.
1924년 서울에서 출생한 고인은 1970년 일본으로 건너간 뒤 고국의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을 지원하며 한 평생을 바쳤고, 끝내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지난 2월 16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영면에 들어 2월 19일 유해로 돌아왔다.
하루 전인 지난달 31일과 1일 서울 중구 충무로역 인근 ‘공간 채비’에서 일반인 조문을 받았고, 2일 오전 19시 ‘채비’에서 발인해 오전 11시 고 문익환·박용길 부부의 자택이었던 서울 수유리 ‘통일의 집’에서 노제를 지낸 뒤 오후 2시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이승환 통일맞이 이사장은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인 1989년 선생님과 문익환 목사님께서 한반도 탈냉전과 화해의 일념으로 방북하셨고, 그때 만들어진 4.2공동성명을 우리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며 “4.2공동성명은 민(民)의 투쟁과 성찰의 성과 속에 만들어진 기념비적 남북합의이며, 이 민의 성과를 이어받아 6.15공동선언이 탄생할 수 있었다. 또 6.15를 계승한 숱한 남북선언들의 초석이 되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나아가 “우리는 4.2공동성명을 6.15선언의 마중물로만 해석하는 일반의 오해를 넘어 민이 만들어낸 평화와 통일의 장정으로 이해하고 이를 계승해 나가야 할 것”이라며 “4.2공동성명의 정신은 바로 오늘의 위기 앞에 남북이 사상과 제도, 신념과 가치를 뛰어넘어 민족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힘을 합치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문익환 목사와 정경모 선생은 김일성 주석과 면담하고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장과 4.2공동성명을 발표한 뒤 문익환 목사는 감옥에 갇혔고 정경모 선생은 일본 망명객 신세를 면치 못했다.
“쌍방은 누가 누구를 먹거나 누가 누구에게 먹히지 않고 일방이 타방을 압도하거나 타방에게 압도당하지 않는 공존의 원칙에서 연방제방식으로 통일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 선택해야 할 필연적이고 합리적인 통일방도가 되며 그 구체적인 실현방도로서는 단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는 점에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는 4.2공동선언 4항은 이후 6.15공동선언 2항의 통일방안 합의의 토대가 됐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은 “4.2 남북공동성명은 바로 2000년 6.15 남북정상선언의 기초가 되었고 그 이후 여러 차례 이어진 남북정상선언의 길을 열어놓았다”며 “문익환 목사님과 정경모 선생님이 내놓으신 길을 갈아엎으려는 그 어떤 만행도 용납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은 “선생의 생애 대부분을 망명객으로 살게 한 국가보안법의 낡은 틀은 여전하다”며 “둘로 찢긴 산하는 아직 평화롭지 않고 하나되지도 못했다. 소중한 겨레의 약속들이 결실도 맺지 못한 채 사라져가고 있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하고 “이제 남은 몫은 우리들에게 남겨 놓고 부디 영면하소서”라고 추도했다.
유가족을 대표해 고인의 장남 정강헌 씨는 조카 정진영 씨가 대독한 ‘감사의 말씀’을 통해 “아버지께서는 작년 가을부터 오연성폐렴으로 입퇴원을 반복하다 11월에 퇴원하시고 퇴원한 지 3개월 만인 2월 16일 목숨을 다했다”며 “기소정지 상태인 아버지는 ‘정보 당국과 화해하려고 했었는데도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사라진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대한민국 역사에 남길 것도 의의가 있다’고 귀국에 대해서는 그리 고집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정강헌 씨는 “민주화니 통일이니 분주했기에 문자 그대로 무일푼, 식구들은 경제적으로 고초를 겪어온 것도 사실”이라면서도 “저희 아버지가 마석 모란공원에 문익환 목사님, 유원호 선생님과 함께 안장되게 된 것에 대해 유가족으로 정말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사의를 표했다.
김재규 전 통일맞이 사무처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추도식에는 함세웅 신부, 이낙연 전 총리, 이종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대표상임의장 등이 추도사를 했고, 이소선합창단과 평화의나무합창단이 추도곡을 공연했다.
추도식은 영정을 앞세우고 만장을 휘날리며 모심굿으로 시작했고, [통일의집] 유튜브 채널로 생중계됐으며, <통일뉴스>를 통해서도 중계됐다.
추도식에는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박중기 추모연대 명예의장,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 이규재 범민련남측본부 의장, 임재경 <한겨레> 초대 부사장, 이해학 겨레살림공동체 이사장, 조성우 겨레하나 이사장, 문영금 통일의집 관장, 서승 우석대 석좌교수 등이 참석했다.
1924년 7월11일 - 서울 영등포 출생
1942년 - 경기중학교 38회 졸업
1943년 - 일본 게이오대학 의학부 입학, 45년 3월 본과 입학
1945년 - 6월 도쿄 공습 피해 귀국
1945년 - 9월 서울대 의대 입학
1947년 - 이승만 장학생으로 미국 유학, 에모리대학 화학전공
1950~53년 - 도쿄 맥아더사령부 통역관 차출, 한국전쟁 정전회담 통역 배석, 주일 미군 한국어 교사
1951년 7월 - 요코하마 하숙집 딸 일본인 나카무라 지요코와 문익환 목사 주례로 결혼
1956년 - 귀국, 서울 원남동 거주
1962~67년 - 상공부 기술고문으로 울산공업센터(석유화학단지) 건설 참여, 기공 기념 박정히 축사 작성
1970년 9월 - 박정희 군사독재 반대 일본으로 망명. 반체제 인사로 입국 불허.
1973년 - 일본 잡지 <세카이>(世界) 기고 계기로 한국문제 시사평론가, 문필가 활동 시작
1973~78년 - 재일 한민통 기관지 <민족시보> 주필, 김대중 납치 구명운동 등 민주화운동
1981년 - 한국문제 전문지 <씨알의 힘> 발행, ‘씨알 어학숙’ 설립 운영
1985년 - 몽향 여운형 선생의 39주기 첫 번째 도쿄 추도강연회 주최
1988년 12월 - 몽양 둘째딸 여연구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초청으로 첫 번째 북한 방문
1989년 - 늦봄 문익환 목사·유원호 씨와 두 번째 방북, 김일성 주석 면담, ‘4.2공동선언’ 초안 작성
1991년 - 일본의 평화와 조선의 통일을 생각하는 ‘씨알의 힘’ 모임 발족
1994년 - 문익환 목사 별세 충격으로 뇌경색 와병
1995년 7월 - 김일성 주석 1주기 추모식 초청으로 박용길 장로와 함께 세 번째 방북. 김정일 국방위원장 접견.
1999년 -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와 통일맞이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귀국 추진, 준법서약서 요구로 무산
2001년 - 제6회 늦봄통일상 선정(동생 정성모 대리 수상)
2003년 - 노무현 참여정부에 귀국 의사 표시, 자수서 요구 거절. 송두율 교수 구속 사태로 무산
2009년 5월~11월 - <한겨레> ‘길을 찾아서’ 회고록 ‘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연재
2010년 - 연재 회고록 <시대의 불침번>(한겨레출판) 출간
2011년 - 회고록 일어판 <역사의 불침번>(후지와라서점) 출간, 도쿄에서 출판기념회
2019~20년 - 문재인 정부와 귀국 협의, 자수서 요구로 또 다시 무산
2021년 2월16일 - 요코하마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 향년 97. 망명 51년째.
[자료제공 - 유해봉안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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