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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법 제정 탄력받나…‘원청 처벌’ 집중 제기된 국회 공청회

민주당 의원들, 중대재해법 필요성 ‘공감’…국민의힘은 보이콧

남소연 기자 nsy@vop.co.kr
발행 2020-12-02 19:19:42
수정 2020-12-02 19:3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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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 ‘중대재해법 제정에 대한 공청회’가 국민의 힘 법사위원 전원이 불참한 가운데 열리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2일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 ‘중대재해법 제정에 대한 공청회’가 국민의 힘 법사위원 전원이 불참한 가운데 열리고 있다. (공동취재사진)ⓒ정의철 기자/공동취재사진  
 
매해 2400여명, 하루 7명의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숨지는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논의 중인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하 중대재해법)에 대한 국회 공청회가 2일 열렸다.

중대재해법은 원청을 비롯한 기업이 안전·보건 조치 의무를 위반해 인명사고가 발생할 경우 기업과 사업주, 경영책임자 등에 대해 형사책임을 지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두고 재계에서는 '과잉 처벌'이라며 거세게 저항하고 있지만, 공청회에 참석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죽음의 행렬을 막기 위해선 원청의 책임도 물을 수 있는 중대재해법이 필요하다는 데 대체로 공감을 표했다.

이날 공청회 진술인으로는 김재윤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최정학 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 교수,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 임우택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안전보건본부장 등이 나섰다. 각 진술인들은 노동계, 재계 등 이해 관계자들로부터 추천받은 인사들로 구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김 교수와 최 교수는 중대재해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쳤고, 정 교수는 원청의 사업주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는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의 한계를 해결한 뒤 중대재해법을 보충적으로 제정해야 한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혔다.

반면, 경영계 대표로 참석한 임 본부장은 ▲원청에 책임을 묻는 건 지나치다는 점 ▲모든 사고의 원인을 기업 경영진에게 돌리는 건 과도하다는 점 ▲경영 책임자 등에 부여된 안전 의무가 모호하다는 점 등을 들어 중대재해법을 전면 반대했다.

 

'노동자 안전' 외면했던 재계 향한 쓴소리도
"기업 책임 상향시키는 법안 통과해도
우회하는 방향만 연구해"

2일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 ‘중대재해법 제정에 대한 공청회’에 참석한 진술인들이 의견을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재윤(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정진우(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최정학(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 교수),임우택(한국경영자총협회 안전보건본부장).(공동취재사진)
2일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 ‘중대재해법 제정에 대한 공청회’에 참석한 진술인들이 의견을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재윤(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정진우(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최정학(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 교수),임우택(한국경영자총협회 안전보건본부장).(공동취재사진)ⓒ정의철 기자/공동취재사진

진술인들의 발표 후 민주당 의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우선 민주당 김남국 의원은 "대형재해를 노동자 개인의 위법 행위로 평가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그동안 산안법에 따라 일부 (중간) 관리자, 심지어 노동자의 단순 과실로 평가해버리는 부분이 너무나 많았다"며 "산업안전 재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기업 경영에 영향을 미치는 경영자들의 책임을 제대로 물을 때 산업안전을 제대로 담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김남국 의원은 "중대재해법이 이번에 처리됐는데 산업 현장에서 변화하는 게 없다면 또 한 번 많은 국민의 생명이 훼손될 수 있다"며 현재 나온 중대재해법으로 충분한지, 더 필요한 내용은 없는지에 대해 질문했다.

답변에 나선 김 교수는 "법 조문의 개별적인 내용을 보면 부족한 부분이 분명히 있지만 문제는 이런 법조차 없는 나라라는 것"이라며 "2013년부터 (법안이 발의되는 등) 수없이 노력했지만 번번이 재계 쪽에서 반대해 무산됐다. 그 사이 시민들의 생명은 매일매일 사라져가고 있다는 점을 참고해달라"고 말했다. 다소 아쉬운 내용이 있을지라도 하루라도 빨리 중대재해법을 처리하는 게 필요하다는 얘기다.

각종 재해가 반복되는 상황에서 안전 조치를 외면해 왔던 재계를 향한 질타도 이어졌다.

송기헌 의원은 중대재해법을 반대한 임 본부장을 향해 "실제로 기업들 행태를 보면 선제적으로, 전체적으로, 포괄적으로 산업안전을 예방하는 조치로 나아가지 않았다"며 "(기존 법안을 강화해 기업의) 책임을 상향해 놓으면, 그 방향을 우회하는 방향만 연구해 온 게 현실이기 때문에 중대재해법 논의가 진행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송 의원은 "중대재해법을 통해 아무리 벌금이 많이 부과하더라도 국민 뜻에는 호응하지 못할 것 같다. 경영자에게 아무리 많은 벌금을 부과하더라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징역형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하청에서 중대재해 발생하면 무조건 원청 책임일까
전문가 "기업에서 선제적으로 안전조치를 취하면 돼"

2일 국회 본청 법사위 회의실입구 에서 정의당 의원들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제정을 촉구하며 피켓시위를 하고 있다.왼쪽부터 이은주,강은미,배진교의원. (공동취재사진
2일 국회 본청 법사위 회의실입구 에서 정의당 의원들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제정을 촉구하며 피켓시위를 하고 있다.왼쪽부터 이은주,강은미,배진교의원. (공동취재사진ⓒ정의철 기자/공동취재사진

최기상 의원은 산재 사망사고의 원인이 떨어짐과 끼임, 부딪힘과 같은 단순 사고가 절반이 넘는다는 점을 지적한 뒤 "(이러한 사고들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는 평가가 있는데, (사고 발생을) 예상하면서도 조치를 하지 않은 부분은 미필적 고의로 볼 수 있지 않느냐"는 취지의 질문을 던졌다.

이에 최 교수는 "기업이 위험한 일들도 하게 된다. 위험한 물질도 다루게 된다. 그러면서 인명피해가 발생하게 되는데 지금까지는 사고로 보고,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기업을 하다 보면 그럴 수 있는 거 아니냐는 시각이 너무나 강했다"며 "이제는 우리가 인식을 바꿔야 한다. 당연히 지켜야 하는 의무조차 이행하지 않는 데 대해 과실 정도가 아니라 고의에 의한 범죄라고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용민 의원은 법안의 핵심인 원청에 안전 의무를 부여한 내용에 대해 집중 질의했다. 하청에서 중대재해가 발생할 시 무조건 원청도 처벌 대상이 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부각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법안을 살펴보면 원청 등 기업이 안전 의무 조치를 다한 경우에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별도로 명시돼 있다.

김 의원은 "도급을 하는 대기업도 처벌될 수 있는가"라고 물었고, 김 교수는 "기업에서 선제적으로 안전 조치를 하면 법인이나 경영 책임자들은 이 조항을 통해 면책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 의원은 "(원청인) 대기업도 (의무를 다하지 않을 시) 책임져야 하는 상황인데, 그렇지 않기 위해 (하청인) 중소기업이 안전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대기업이 충분한 조치를 취하도록 지원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주장했다. 김 교수도 "그렇다. 그걸 요구하는 게 가장 핵심적인 의미"라고 호응했다.

마지막 질의에 나선 신동근 의원은 "법이 과도한 과잉처벌, 명확성의 원칙에 어긋나고 모호하다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한다. (하지만) 그런 부분은 법률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보완하고 명확하게 하더라도 중대재해법을 만들어서 노동자들에 대한 안전장치가 만들어져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중대재해법 제정 필요성에 힘을 보탰다.

공청회 마무리 후 상임위 논의 본격 시작
중대재해법 제정연대 "신속히 논의해 정기국회 내 처리해야"

지난달 24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더불어민주당사 앞에서 열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한 집중 집회에서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이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이날 집회는 사회적거리 2단계에 맞혀 10인 미만으로 진행됐다.   2020.11.24
지난달 24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더불어민주당사 앞에서 열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한 집중 집회에서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이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이날 집회는 사회적거리 2단계에 맞혀 10인 미만으로 진행됐다. 2020.11.24ⓒ김철수 기자

이번 공청회를 시작으로 중대재해법 논의가 본격화될 전망이다. 소관 상임위인 법사위는 이날 공청회 논의를 바탕으로 법안 심사에 나서게 된다.

법안 처리의 '키'를 쥐고 있는 민주당의 공식 입장은 정기국회 내 처리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어렵지만, 연내 처리를 위해 박차를 가하겠다는 것이다. 중대재해법은 이낙연 대표가 처리하겠다고 공언한 '미래입법 과제' 명단에도 포함된 핵심 입법 과제다.

현재 국회에는 정의당 강은미 의원이 발의한 법안과 민주당 박주민, 이탄희 의원이 발의한 법안, 고 김용균 씨의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이 올린 입법 청원 등이 계류 중이다. 국민의힘 임이자 의원도 뒤늦게 중대재해법을 내놨지만, 전날 오후 늦게 발의되면서 공청회 안건으로는 포함되지 않았다.

민주당 소속 윤호중 법사위원장의 발언을 문제 삼으며 법사위를 보이콧 중인 국민의힘 의원들은 이날 공청회 역시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해당 법안을 발의한 정의당 강은미 의원이 방청했다. 강 의원을 비롯해 배진교, 이은주 의원 등 정의당 의원들은 공청회 시작 전 회의실 앞에서 중대재해법 제정을 촉구하는 피켓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그동안 중대재해법 제정을 강하게 요구해 온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본부는 국회를 향해 조속히 법안 처리에 나서야 한다고 거듭 촉구했다.

이들은 전날 공청회 관련 입장문을 내고 "공청회가 마무리 되면 21대 국회는 신속한 법안심의로 정기국회 내에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통과시켜야 한다"며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일하는 국회이며, 개혁입법이자 민생입법이다. 국회는 노동자, 시민의 반복되는 죽음의 행진을 멈추라는 국민의 엄중한 명령을 즉각 이행하라"고 요구했다.

 

남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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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살104] 남북미 코로나 대응 비교 1

문경환 | 기사입력 2020/12/02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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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17일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처음 발생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2020년 1월부터 세계 곳곳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1월 31일 비상사태를 선언하였고 3월 11일에는 팬데믹(범유행전염병)을 선언하였다. 코로나19는 2009년 팬데믹이 선언된 A형독감(신종플루)보다 널리 전염되고 치사율도 높으며 제2의 흑사병이라 부를 정도로 인류 사회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예측과 대응이 어려운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세계 각국은 다양한 위기관리 양태를 보였다. 이 속에서 각국의 제도와 가치관이 어떻게 다른지, 숨겨진 사회 모순이 무엇이었는지 속속 드러나고 있다. 특히 남, 북, 미 세 나라의 코로나19 대응과 결과는 매우 큰 차이를 보이고 있어 이를 비교하는 것은 인류가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는데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 양상

 

(1) 한국

 

2020년 1월 20일 국내 첫 감염자가 발생하였다. 그는 우한시에 거주하는 중국인으로 19일 인천공항으로 입국하면서 고열 증상이 있어 격리되었다가 확진판정을 받고 인천의료원으로 이송, 격리되었다. 이에 질병관리본부는 감염병 위기 경보를 ‘관심’에서 ‘주의’ 단계로 격상하고 중앙방역대책본부, 지자체 대책반을 가동했다. 이틀 후 문재인 대통령은 설 연휴 특별대책을 지시하면서 공항, 항만 검역은 물론 지역사회 대응체계도 주문했다. 23일 외교부는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에 여행경보 2단계 ‘여행자제’, 우한시를 제외한 후베이성 전역에 1단계 ‘여행유의’를 발령했다. 같은 날 질병관리본부는 교민 보호와 현황 파악을 위해 중국 현지 공관에 역학조사관을 파견하기로 하였으며 행정안전부는 전 국민에 코로나19 예방 안내문자를 발송했다. 대한항공은 우한시 취항 노선을 취소한다고 밝혔다. 

 

초기 노력에도 불구하고 1월 24일 국내 두 번째 감염자가 발생했다. 질병관리본부는 즉각 역학조사에 나서 69명의 접촉자가 있었으며 이들을 관할 보건소에서 능동감시(대상자를 격리하지 않는 대신 14일간 하루 2번 연락해 증상 여부를 확인하는 방식)한다고 밝혔다. 다음날 외교부는 후베이성 전역을 여행경보 3단계 ‘철수권고’로 격상하였으며 질병관리본부는 공항 검역 감시 대상 오염지역을 우한시에서 중국 전역으로 확대하였다. 

 

26일, 세 번째 감염자가 발생했다. 그는 우한시에서 거주하다 20일 입국한 한국인으로 입국 당시 무증상이어서 능동감시 대상자가 아니었다. 이에 질병관리본부는 능동감시 범위와 방역기준을 강화하였다. 같은 날 문재인 대통령은 대국민 메시지로 “정부를 믿고 과도한 불안을 가지지 말 것”을 당부했다. 국방부는 전국 공항, 항만 등의 검역소에 군의관과 간호장교를 파견하기로 하였다. 

 

27일, 네 번째 감염자가 발생하자 보건복지부는 위기 경보 단계를 ‘주의’에서 ‘경계’로 격상했다. 또한 보건복지부 산하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중앙사고수습본부’를 설치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책회의를 열고 중국 우한에서 입국한 사람 전원을 조사하며 필요시 군시설도 활용하라고 지시했다. 다음날 질병관리본부는 중국 전역을 검역대상 오염지역으로 지정하였다. 한편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28일 긴급 경제장관회의를 열어 코로나19 확산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점검하고 208억 원의 관련 예산을 신속히 집행하기로 하였다. 다음날 정부는 코로나19 환자 검사, 격리, 치료 비용 일체를 국가가 지원한다고 밝혔다. 

 

한편 중국 우한시에 있던 교민 중 약 720명이 귀국을 희망하는 상황에서 중앙사고수습본부는 ‘해외에서 위급한 상황에 처한 국민을 국가가 보호한다’는 정신 아래 전세기를 동원해 데려왔다. 이들은 일정 기간 충청남도 아산시 경찰인재개발원과 충청북도 진천군 국가공무원 인재개발원에서 격리 수용된 후 귀가했다. 2월 18일에는 일본 요코하마항에 정박 중인 프린세스 다이아몬드호에 있는 우리 국민을 이송하기 위해 대통령 전용기(정부 수송기)를 투입했다. 이후에도 이탈리아, 이란, 페루, 에티오피아 등 세계 곳곳의 교민을 데려오기 위해 전세기와 대통령 전용기를 날려 국민에 감동을 주었다. 

 

정부는 국민 불안을 부추기는 가짜뉴스, 부도덕한 마스크 매점매석 행위에 대해 특별 단속에 나서는 한편 실내 모임 자제를 요청했다. 정부도 각종 행사를 취소하였다. 이런 정부의 적극적인 대처로 2월 중순까지 감염자는 크게 늘지 않았다. 2월 17일까지 누적 확진자는 31명이었다. 

 

정부가 이처럼 신속하고 효과적인 대응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충분한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질병관리본부는 2017년부터 메르스 같은 신종 전염병이 발생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가지고 여러 가지 가상 시나리오와 대응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또 2019년 12월에는 실제 만들어둔 대응책을 가지고 중국에서 사스, 메르스와 유사한 코로나바이러스의 변종이 넘어올 경우를 상정하고 이를 진단하는 모의훈련을 시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2월 19일부터 대구경북 지역에 신천지를 중심으로 확진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정부는 범정부 특별대책지원단을 현지에 파견했다. 2월 20일 신천지 대구교회에서 38명의 대규모 감염자가 나오면서 코로나19 사태는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갔다. 21일 소방청은 소방동원령 1호를 발령, 각지의 구급차, 구급대원을 동원하였다. 23일 확진자가 602명으로 급증, 유치원과 초중고 개학을 미루고 정부는 위기단계를 ‘경계’에서 최고단계인 ‘심각’으로 격상했다. 또한 전국의 모든 신천지 시설을 폐쇄하였다. 그러나 신천지의 방해와 대구 지자체의 무능이 겹치면서 26일에는 누적 확진자가 1,261명, 28일에는 2,337명, 29일에는 3,150명으로 폭발하였다. 

 

이제 한국 사회는 대구 신천지 발 코로나19 폭증을 막기 위한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전국의 의료진이 대구로 달려갔다. 광주는 대구에 마스크를 제공하고 병상도 지원하였다. 정부는 마스크 대란을 해결하기 위해 2월 26일부터 마스크 공적판매를 개시했다. 이런 노력의 성과로 3월 중순부터 코로나19 상황이 호전되기 시작했다. 

 

5월 초 이태원 클럽에서 코로나19 집단감염이 발생하면서 2차 사태가 발생했다. 관련 확진자는 102명이었으며 주한미군 원인설까지 나왔다. 이 사태로 그동안 논란은 있었지만 경제논리로 인해 손대지 못하던 유흥시설에 대해 정부가 집합금지 명령을 내렸다. 

 

8월 15일 광복절에 진행된 태극기집회를 계기로 코로나19 3차 사태가 발생했다. 집단감염이 발생한 전광훈 사랑제일교회를 중심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국에 퍼져 지역사회 감염이 급속도로 확산됐고 이로 인해 정부는 수도권에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를 발령했다. 이에 따라 식당, 카페 영업시간에 제한이 걸리고 포장주문만 허용하는 등 자영업자들이 직격타를 맞았고 국민도 큰 불편을 겪게 되었다. 

 

가을 들어 잠잠해지나 했던 코로나19는 겨울이 다가오면서 다시 확산되기 시작했다. 11월 22일, 정부는 코로나19 대유행을 공식 인정하며 수도권 사회적 거리두기를 다시 2단계로 격상했다. 호남 지역도 1.5단계로 격상했다. 

 

정부는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할 때마다 국민에게 동선을 공개하며 전염 가능성이 있는 이들을 조사하고 자가격리하도록 하였으며 해당 장소를 폐쇄하고 지역을 봉쇄하는 등 철저한 방역 조치를 취했다. 또한 질병관리본부를 질병관리청으로 승격하고 법을 개정해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하는 등 법, 제도도 손질했다. 그러면서도 자가격리자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각종 생필품과 식량을 제공하는 등 국민 생활을 꼼꼼히 챙기는 모습도 보였다. 

 

정부의 노력과 더불어 국민의 성숙한 시민의식도 빛을 발했다.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모두가 자발적으로 마스크를 쓰고, 마스크가 부족하자 직접 만들어 쓰는 정성을 보였다. 중국에서 교민을 데려와 수용한 지역의 주민들은 초기 반발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자기 가족처럼 여기고 환영해주어 찬사를 받았다. 1년 가까이 마스크를 쓰고 여행도 함부로 못 가고, 모임도 제대로 못 하는 등 답답한 생활을 이어갔지만 이로 인한 폭동이 일어나거나 소요 사태가 발생하지도 않았다. 어려운 조건에서도 서로 격려하며 힘을 내었고 불편함을 감수하였다. 

 

이런 노력을 통해 한국은 초기 코로나19 창궐 국가라는 오명을 딛고 11월 30일 기준 누적 확진자 34,201명, 사망자 526명, 완치자 27,653명으로 방역 모범국가로 찬사를 받고 있다. 확진자 수 기준으로 보면 90위권 수준이며 인구비례 확진자 수를 기준으로 보면 130위권, 치명률(확진자 중 사망자 수) 110위권으로 세계적으로 볼 때 상당히 대응을 잘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코로나19로 걸려 사망하거나 건강을 잃은 국민도 있고 경제적 피해도 컸지만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면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2) 북한

 

북한 역시 1월부터 국가 차원에서 코로나19 대응에 나섰다. 북한은 1월 22일 즈음 북중 국경을 폐쇄하고 외국인 관광객의 입국을 금지했다. 1월 28일자 노동신문 기사에 따르면 ▲보건성 직원들을 방역 지역에 파견하고 ▲치료 예방 기관들에 위생 관련 강연자료를 내려 보냈으며 ▲국경, 항만, 공항에서 병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대책을 강도높이 세우고 ▲각 지역 담당 의사들이 주민을 진찰하며 의심자 발생 시 방역기관과 연계 아래 철저한 격리를 선행하며 ▲제약사업소들이 항바이러스 약을 생산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고 하였다. 주로 대중 교양과 예방 위주의 조치로 보인다. 

 

1월 30일 노동신문은 북한 비상설 중앙인민보건지도위원회가 위생방역체계를 국가비상방역체계로 전환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따라 중앙과 도, 시, 군에 비상방역지휘부를 꾸리며 외국 출장자와 주민에 대한 검진 등을 강화했다. 이날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도 잠정 중단하였다. 또 다음날 영국, 인도 외교부는 북한이 중국을 오가는 모든 항공기와 열차 운행을 중단한다는 발표를 했다고 공개했다. 

 

2월 들어 북한은 의심 환자를 격리 치료하고 있다고 밝히고 마스크 추가 생산을 본격화하였다. 또한 국토 전역에 대한 소독도 진행하였다. 또한 2월 8일 건군절 기념 열병식, 4월 평양국제마라톤 대회 등 주요 행사도 취소하였다. 2월 12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외국 방문 경력자와 접촉자의 격리 기간을 15일에서 30일로 연장했다. 

 

2월 29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코로나19 방역이 주요 안건에 올랐다. 이 자리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증의 전파 속도가 매우 빠르고 잠복기도 불확정적이며 정확한 전파경로에 대한 과학적 해명이 부족한 조건에서 우리 당과 정부가 초기부터 강력히 시행한 조치들은 가장 확고하고 믿음성이 높은 선제적이며 결정적인 방어 대책들이었다”라면서 “국가적인 비상 방역에 관한 법을 수정·보완하고 국가위기 관리규정들을 정연하게 재정비”할 것을 강조했다. 또한 비상 방역사업과 관련한 중앙지휘부의 지휘와 통제에 모든 부문, 단위들이 무조건 절대복종하고 철저히 집행하는 엄격한 규율을 확립하며 이에 대해 감시를 강화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안일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3월 21일 노동신문은 강원도 천내군 인민위원장이 “초특급 방역조치들에 불응하여 많은 사람을 모아놓고 음주불량행위를 조장”했다고 비판하며 당 중앙위 검열위원회 결정에 따라 출당 처벌이 내려졌음을 보도했다. 출당은 노동당 규약 상 가장 높은 수위의 처벌이다. 

 

4월 11일 김정은 위원장의 주재로 열린 노동당 중앙위 정치국회의는 당 중앙위, 국무위원회, 내각의 공동결정서 ‘세계적인 대유행 전염병에 대처하여 우리 인민의 생명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국가적 대책을 더욱 철저히 세울 데 대하여’를 채택했다. 북한은 공동결정서에서 코로나19 방역에 모든 힘을 집중하기 위해 일부 정책적 과업을 조정, 변경하였다. 경제 목표를 낮추더라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것이었다. 북한은 공동결정서 관철을 ‘인민사수전’이라고 표현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7월 2일 당 중앙위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다시 한 번 방역을 강조했다. 

 

이처럼 코로나19 방역에 국가 차원에서 큰 힘을 기울이는 와중에 7월 19일 탈북자 김 모씨가 개성시로 들어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북한은 24일에 이 사실을 확인하였고 김정은 위원장은 다음날 곧바로 당 중앙위 정치국 비상확대회의를 소집했다. 북한은 개성을 완전 봉쇄하고 구역별, 지역별로 격폐시키는 조치를 취했으며 국가비상방역체계를 최대비상체제로 전환하였다. 

 

또한 경계에 실패해 김 모씨가 들어간 지 5일이 지나서야 파악한 개성 지역 전방부대의 근무실태를 문제 삼아 당중앙군사위원회가 집중조사를 진행한 후 엄중한 처벌을 내렸다. 최룡해 국무위원회 제1위원장이 직접 개성시를 찾아가기도 했다. 에드윈 살바도르 세계보건기구(WHO) 평양사무소 소장은 김씨를 검사한 결과 음성이 나왔으며 1차 접촉자 64명, 2차 접촉자 3,571명을 40일 간 정부 시설에 격리했다고 밝혔다. 

 

김정은 위원장은 8월 5일 당 중앙위원회 정무국회의를 열어 완전 봉쇄한 개성시에 식량과 생활보장금을 특별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7일 오후 개성에 특별지원물품이 전달됐다. 

 

이후에도 김정은 위원장은 8월 13일 당 중앙위 정치국회의, 8월 25일 당 중앙위 정치국 확대회의와 정무국회의, 9월 29일 당 중앙위 정치국회의 등 코로나19 방역을 핵심 의제로 한 주요 회의를 여러 차례 직접 주재하였다. 

 

10월 10일 북한은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행사를 수십만 명의 국민이 모인 가운데 성대하게 진행하였다. 김정은 위원장은 열병식 연설에서 “한명의 악성바이러스 피해자도 없이 모두가 건강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하였다. 북한이 이날 수많은 국민이 밀집하는 행사를 진행하고 특히 열병식 때는 마스크도 쓰게 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코로나19 방역에 자신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러 언론은 북한에 코로나19 환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면서 의혹을 제기한다. 수차례 북한에 코로나19 환자가 발생했다는 추측성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의심환자를 격리수용한 것을 두고 확진자가 발생했다는 엉터리 주장도 한다. 일부 통계자료도 북한을 미발병국으로 표기하지 않고 발병의심국으로 표기한다. 다른 그 어떤 나라에도 적용하지 않는 특이한 표기인데 다른 나라 통계는 그 나라 정부의 발표와 세계보건기구의 보고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북한만 특별 취급하는 것이다. 

 

물론 확진자 0명이라는 수치는 매우 특이하여 믿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초기부터 국경을 완전히 폐쇄하는 등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수준의 방역조치를 취했으며, 세계보건기구도 인정한 만큼 북한에 코로나19 환자가 있다고 의심할 근거는 없다. 지난 11월 9일 에드윈 살바도르 세계보건기구 평양사무소장은 북한 보건성이 10월 29일까지 누적 12,072명을 검사했지만 확진자가 없다고 밝혔다. 여러 코로나19 관련 통계자료를 보아도 북한은 확진자 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코로나19 미발병국은 오세아니아의 7개 섬나라 키리바시, 미크로네시아, 나우루, 팔라우, 사모아, 통가, 투발루를 제외하면 북한이 유일하다. 북한의 경우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매우 독특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3) 미국

 

미국은 코로나19 피해자가 가장 많은 나라다. 10월 말부터 하루 신규 확진자가 10만 명을 넘어서고 현재는 20만 명을 넘는 날도 있는 등 확진자 수에서 다른 나라를 압도하고 있다. 또한 사망자도 27만 명을 넘겨 태평양전쟁 전사자 수인 16만 명에 1차 세계대전 전사자 11만 명을 더한 수준이다. 전 세계 확진자, 사망자의 4분의 1 정도를 미국이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이 처음부터 코로나19로 초토화된 것은 아니다. 1월 20일 첫 확진자가 발생한 이후 3월 중순까지는 나름 방역에 성과를 내는 듯했다. 1월 30일 트럼프 행정부는 보건복지부장관이 이끄는 대통령 직속 범정부 태스크포스를 설치했다. 다음날 국무부는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중국 전역에 여행경보 4단계 ‘여행금지’를 선포했다. 동시에 최근 2주 이내 중국 방문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했다. 이때만 해도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를 두고 중국인만 막으면 되는 지역 유행 독감 정도로 치부했다. 

 

3월 들어 감염자가 점점 늘어나자 5일 워싱턴주와 플로리다주, 캘리포니아주가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8일에는 뉴욕주 등 6개 주가 추가로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각 주는 확진자가 늘어나는 지역을 중심으로 봉쇄지역을 설정하고 주 방위군을 투입해 소독작업과 구호품 전달을 하는 등 엄격한 방역 관리에 들어갔다. 

 

3월 13일, 결국 트럼프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18일에는 캘리포니아주가 주민들에게 외출금지령을 내렸다. 3월 19일 미국 내 확진자 1만 명을 넘어서면서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더니 3월 26일에는 세계 1위로 올라섰다. 그제야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코로나19 사태를 총괄 통제하는 수장이 되었다. 이때까지 미국에는 코로나19에 대응할 ‘컨트롤타워’가 없었다. 펜스 부통령은 모든 학교의 휴교, 영화관 폐쇄 등 고강도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코로나19 확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4월 6일, 미국의 코로나19 사망자가 1만 명을 돌파했으며 5월 26일에는 10만 명을 돌파 했다. 

 

이후 미국의 코로나19 대응 양상은 무정부상태를 방불케 했다. 

 

가장 심각한 건 대통령이었다. 밥 우드워드가 트럼프 대통령과 인터뷰를 하면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트럼프는 코로나19의 위험성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면서 사회 혼란을 피하기 위해 축소, 은폐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재선을 앞둔 권력욕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트럼프는 처음부터 코로나19가 단순한 독감 수준이라거나, 잘 통제하고 있다거나, 금방 사라질 것이라는 식의 무책임한 발언을 쏟아냈다. 그리고 코로나19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의사나 민주당을 향해서는 자신의 재선을 막으려는 가짜뉴스라고 반박했다. 

 

또 마스크를 쓸 필요가 없다, 살균제를 주사해보자, 경제활동을 재개하지 않으면 예산삭감을 하겠다는 식으로 방역조치를 무력화하고 국민을 혼란에 빠뜨리는 주장을 계속했다. 또한 코로나19 검사를 중단하면 확진자도 없을 것이라는 황당한 주장, 매일 천 명이 죽는다는 비판에 ‘별 수 없다’는 망언 등 대통령의 발언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말들을 이어갔다. 이 때문에 언론들은 코로나19 관련 트럼프의 브리핑을 아예 보도하지 않거나, 보도하면서 동시에 사실확인(팩트체크)을 하거나, 그도 아니면 전문가를 내세워 정정보도를 해야 했다. 정부 관료나 과학자들이 일일이 트럼프 발언을 반박하는 경우도 잦았다. 

 

트럼프뿐 아니라 정부 인사들도 비슷했다. 마크 매도우즈 백악관 비서실장은 팬데믹을 통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언해 논란을 일으켰으며, 백악관 과학기술처는 트럼프 최고 업적으로 팬데믹 종식을 꼽았다. 9월 14일에는 트럼프가 임명한 연방판사가 펜실베이니아주의 셧다운 조치를 위헌 판결하였다. 사법부가 코로나19 방역을 가로막은 꼴이다. 윌리엄 바 법무부장관은 “시민들에게 집에 있으라고 하는 국가적 봉쇄조치는 미국 역사상 노예제 다음가는 자유의 침해”라고도 하였다.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제롬 애덤스 공중보건서비스단장은 마스크가 효과가 없다며 사지 말라는 말까지 했다. 

 

결국 10월 1일에는 트럼프 대통령마저 확진 판정을 받았다. 

 

11월 30일 기준 누적 확진자는 약 1,338만 명으로 미국 인구의 4%를 차지하며, 전 세계 확진자의 약 21.9%를 차지한다. 사망자는 26만6천 명으로 확진자 100명 중 2명 꼴로 사망했으며 전 세계 사망자의 약 18.6%를 차지한다. 확진자 수, 사망자 수 기준으로 모두 압도적인 세계 1위며 인구비례 확진자 수를 기준으로 보면 바레인, 벨기에, 체코, 카타르, 아르메니아 다음인 6위다. 한 마디로 코로나19 최악 대응국이라 할 만하다. 

 

매일 ‘사상 최다’를 기록하는 신규 확진자 속에서 미국 의료체계는 붕괴하고 있다. 의사, 간호사 부족에 의료장비도 부족하고 심지어 의사용 마스크마저 부족할 지경이다. 중환자 진료는 사실상 포기하고, 코로나19에 걸린 의료진이 진료에 투입되는 실정이다. 의료진 사이에선 중환자실을 ‘시신 구덩이’라 부를 정도다. 넘쳐나는 시신을 처리 못해 주 방위군은 물론 교도소 수감자들까지 시신관리 작업에 투입되고 있으며 시체안치소가 부족해 냉동 트레일러를 동원하고 있다. 또 무연고 시신을 안치하던 뉴욕시 하트섬에 코로나19 사망자를 집단 매장하며 ‘무덤의 섬’을 만들었다. 한 마디로 생지옥, 아포칼립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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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전단 살포에서 금지법 통과까지

  • 기자명 한경준 현장기자
  •  
  •  승인 2020.12.02 18:14
  •  
  •  댓글 0
 
 

대북 전단 살포 금지법이 2일 마침내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를 통과했다.

이날 송영길 외통위원장이 대표발의 한 이 개정안에는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전단 살포 행위 등 남북합의서 위반행위를 하는 경우 최대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 벌금으로 처벌’하는 내용이 담겼다.

비록 5개월 만에 겨우 외통위를 통과했지만, 법사위를 거쳐 연내 국회 본회의까지 통과할 가능성은 매우 높아졌다.

지난 5월 말 탈북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로 인해 남북관계는 위기에 직면했다.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폭파되고 ‘4.27판문점선언’과 ‘9월평양공동선언’이 수포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에 접경지역 주민들과 시민사회가 팔을 걷어붙였다.

파주시 주민들은 대북전단 살포 반대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민통선에 거주하는 접경 주민들은 대북전단 살포 즉각 중단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밖에도 6개 접경지역 주민들의 호소문을 국회의원들에게 전달했다.

지난 6월 12일 경기도는 관내 연천군, 포천시, 파주시, 김포시, 고양시를 대북전단 살포와 관련한 위험구역으로 설정했다. 이 지역 안으로 대북 전단 살포 관계자의 출입을 통제하고, 관련 물품의 운반·살포 등을 금지했다. 이를 위반할 시에는 현행범으로 체포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접경지역인 강원도와 경기도, 인천광역시의 10개 지역(인천시 강화‧옹진, 경기도 파주·김포·연천, 강원도 철원·화천·양구·인제·고성) 시장과 군수들로 구성된 접경지역 시장‧군수협의회는 대북 전단 살포로 인해 “접경지역 주민의 생활권, 재산권, 발전권, 행복권 박탈과 인권 침해 등의 피해”가 심각하며, “대북전단 관련 단체의 이 같은 행위는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이 정한 제한 사유에 해당한다”고 지적하면서 유엔 퀸타나 북한인권보고관에게 대북전단살포 중단 협조까지 요청했다.

이 밖에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를 비롯한 시민사회 곳곳에서 성명을 발표했고, 위기에 빠진 남북관계를 극복하기 위해 7월 1일부터 사상 최대 4,996개 단체가 참여한 ‘비상시국선언’이 진행되었다.

이런 적극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지난 8월, 대북전단 금지법이 야당의 몽니로 안건조정위원회에 넘겨져 3개월이나 계류되는 참담한 상황을 맞았다.

하지만 법안 통과를 위한 이들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겨레하나’는 안건조정이 끝나는 10월 13일부터 11월 말까지 매일 국회 앞 1인 시위를 진행, 42차에 이르렀다.

또한 전국에서 외교통일위원회 국회의원들에게 대북전단 금지법 개정을 요구하는 팩스와 문자 보내기가 진행되었다. 외통위에서 여당 소속 의원에 따르면 야당 특히 무소속 의원들이 팩스에 시달리다 법안 통과 쪽으로 마음이 움직였다고 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11월 17일 접경지역(경기, 강원, 인천)의 지자체와 주민들, 시민사회가 함께하는 연석회의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날 경기도 이재강 평화부지사, 강원도 김성호 행정부지사, 인천광역시 박인서 균형발전정부부시장이 참여하고 접경지역 주민들과 시민사회가 참여해 대북전단 살포 금지법을 제정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연석회의에 참석한 외통위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아직도 법을 통과시키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다. 다른 의원들을 설득해 대북전단 금지법이 입법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대북전단 살포 금지법이 외통위를 통과했다.

“너무나 당연한 입법을 위해 이렇게 큰 노력이 들 줄 미처 몰랐다”라는 한 관계자의 말은 긴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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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내 자리는 없지 않을까”… ‘그 생각’이 너무 가깝다

등록 :2020-12-02 10:17수정 :2020-12-02 10:5
 
[조용한 학살을 멈추자]
20대 여성 7명의 이야기
“지지 않고 잘 살고 싶어요”
한국 20대는 남녀 모두 힘들다. 취업 첫발이 쉽지 않다. 수년간 이어진 고용시장 침체에 올해는 코로나19라는 재난이 겹쳤다. 이런 상황은 20대 여성에게 더 가혹한 결과로 이어졌다. 통계청 월별 고용동향을 보면, 코로나 1차 확산 여파가 컸던 올해 3~4월 20대 여성 취업자는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24만1천명 줄었다. 20대 남성 취업자 감소폭(9만3천명)의 2.6배에 달했다.20대 여성 자살률은 급증하고 있다. 10만명당 20대 남성 자살률(통계청)은 21명(2017년)→21.5명(2018년)→21.6명(2019년)으로 큰 변화가 없지만, 20대 여성 자살률은 11.5명→13.2명→16.6명으로 44% 가파르게 증가했다. 2020년 상반기 20대 여성 자살사망자(보건복지부)는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43% 늘었다. 추세가 꺾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특정 연령대에서만 극단적 선택 비율이 급증하는 것은 위기경보이자 구조신호다. 숫자들은 위기에 내몰리는 20대 여성을 가리켰지만 사회는 주목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20대 여성들은 사회에서 설 자리를 조용히 잃어갔다.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20대 여성의 위기를 임윤옥 한국여성노동자회 자문위원은 ‘조용한 학살’이라고 했다.지난 달 <한겨레> 젠더 미디어 <슬랩>이 ‘조용한 학살이 다시 시작됐다’고 알리자 20대 여성 수천명이 좌절과 분노, 희망과 위안의 댓글로 공감했다. 그제서야 정부는 20대 여성의 극단적 선택을 예방하기 위한 대책 마련에 나섰다.<한겨레>는 20대 여성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전하려 한다. 그 목소리에 답이 있기 때문이다. 조용한 학살은 이제 멈춰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한겨레>는 11월 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20대 여성을 찾았다. 비정규직으로 일하거나 취업을 준비 중인 여성 7명이 나서주었다. 5명은 서면으로, 1명은 전화로, 1명은 대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들에게 현재 마음 상태, 경제적 여건, 사회적 지지망은 어떤지를 물었다. 5명은 우울함이나 불안, 강박, 무기력 증세로 정신건강의학과 도움을 받고 있거나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2명은 진지하게 병원 방문을 고려하고 있었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태어난 연도만 공개한다.(91년생 ㅇ씨, 95년생 ㅎ씨, 95년생 ㄱ씨, 95년생 ㅈ씨, 96년생 ㄱ씨, 97년생 서씨, 97년생 송씨)
“작년까지만 해도 하루에 한 번씩 생각했다.”(95년생 ㅎ씨)“우연한 계기로 고통 없이 갈 수 있다면 당장 선택할 거다.”(95년생 ㄱ씨)
① “살고 싶어서 병원에 갔거든요” 95년생 ㅈ씨
(1년 계약직, 1인 가구, 월 소득 110만원, 소속감 집단: 딱히 없음)취업을 준비 중인 95년생 ㅈ씨는 몇 달 전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우울, 불안, 강박, 무기력 모두 높은 수치란 진단을 받았다. 매일 밤 처방받은 약을 먹고 잠자리에 든다. 2주에 한 번씩 병원에 가고 있다.“병원에서 제 불안 점수가 거의 만점이라고 해요. 약을 먹어도 불안해서 약이 도움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지난 20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만난 ㅈ씨는 미래에 대한 막연함, 불안함이 학교에 소속돼 있을 때보다 취업준비생으로 사는 지금 더 심하다고 했다.“원래 회사에서 여성을 뽑는 비율이 적다고 들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채용시장이 얼어붙어서 전체 채용 인원 자체가 줄면 거기서 여성의 파이는 얼마일까요. 이젠 내 자리가 없을 것 같아요.”지난해 취업 공고를 훑어볼 때 비하면, 올해는 코로나 때문인지 공고 자체가 확 줄었다고 했다. “여자들이 힘들다고 해요.” ㅈ씨는 주변 친구들도 많이 우울해하는 상황이라고 했다.“서류에서 계속 떨어지고,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 땐 친구들한테 말하기도 조심스러워요. 친구들 다 취업 준비하는 20대 여성인데, 이 애들도 이미 자기 몫으로 충분히 우울한 사람들이거든요.”현재 ㅈ씨는 서울에 혼자 살며 월 110만원 안팎의 사무 보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5평 원룸에 사는데 매달 생활비로 70~80만원 정도가 든다. 늘 절약하고 돈을 모아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다.“(경제 문제에서) 난 그냥 이미 글렀다는 생각이 들어요.”ㅈ씨는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고, 취업 준비도 열심히 하지만 요즘은 ‘별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특별한 계기 없이도 무기력한 느낌이다. 부동산 뉴스를 볼 때, 채용 비리 뉴스들을 볼 때 특히 더 그렇다.
“취업하려고 하는 쪽은 코로나 시국과 관계없이 그냥 사람을 적게 뽑아요. 얼마 전 공고 보니 딱 1년 계약직이더라고요. 들어가는 게 나은 것인지 아닌지 진짜 모르겠어요. 한번은 제가 원하는 직무에 6개월 인턴 자리가 뜨길래 되게 고민하다 결국 원서를 넣긴 넣었어요. 하다 보면 6개월 뒤에 다른 뭐가 있을까…, 되게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오는 거 있죠.”
ㅈ씨는 우울에 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간 것도 잘 이겨내고 싶어서다.“이 세상이 환멸 나고 지긋지긋하더라도, 저는 성공해서 잘 살고 싶은 그런 욕망도 비등비등해요. 현실은 시궁창이지만 되게 잘 살고 싶거든요. 잘 살 방법을 찾으려고 병원에 간 거예요. 그래도 나 열심히 살고 싶은데.…”
② 단기 알바와 생활비의 굴레, 91년생 ㅇ씨
(단기 아르바이트, 1인 가구, 월 소득 불규칙, 소속감 집단: 친구)“올해까지만 살아있자.” 91년생 ㅇ씨는 1년 뒤, 3년 뒤 생각은 하지 않는다. 자꾸 틀어지는 계획을 세우는 게 의미가 없어서다. 자신한테 실망하는 이유만 될 뿐이다.“그냥 이번 달까지만 살아있자, 올해까지만 살아있자, 그런 식으로 생각해요.”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ㅇ씨는 ‘앞으로 뭘 하고 싶다’, ‘1~3년 사이에 이런 걸 해야겠다’ 같은 것을 만들지 않는다고 했다.ㅇ씨는 3년 전 세상을 등지려 했다. 계획을 행동에 옮기려 했다. 다행히 친구의 신고로 구출되면서 ㅇ씨의 계획은 중단될 수 있었다. 이후 ㅇ씨는 한동안 덤덤하게 지냈다. 하지만 요즘 다시금 크게 힘들 때, 또 그 생각이 찾아온다.그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20대 초반 집을 나왔다. 부모님이 자신의 명의로 빚을 지는 바람에 늘 ㅇ씨를 따라다니는 부채를 갚느라 20대 내내 고생을 했다. 지난해 겨우 빚을 청산했지만 늘 생활비에 쫓긴다. 단기 알바를 구할 뿐 꾸준한 소득을 예상할 수 없는 처지다.“한 1년이라도 안정적인 생활비가 있으면 취업 공부를 할 수 있을 텐데….”최근 꽤 괜찮은 두 달짜리 알바를 구했다. 소득이 200만원 생기는 기회라 놓칠 수 없었다. 하지만 더 나은 일자리를 찾으려면 꼭 해야 하는 공부를 미뤄야 한다.
“이게 엄청 큰 딜레마에요. 생활비를 벌어야 해서 (더 나은 일자리를 위한) 공부를 미루게 되고, 일을 하다보면 공부를 놓게 되고, 그럼 안정적 일자리를 위한 공부는 못하게 되고…, 그럼 또 아무 일이나 하게 되고, 그럼 몸이 상하고, 그럼 병원에 가고, 병원에 가려면 일을 해서 생활비(병원비)를 벌어야 하고…, 이런 식으로 계속 반복이 되고 있어요. 일상에서 힘든 건 거의 항상 돈 때문이죠. 돈만 있었으면…, 이런 생각 하죠.”
지금 ㅇ씨가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사회안전망은 없다.“긴급생계비 지원 같은 조건에 저는 해당 사항이 없어요. 차상위층이나 가정폭력 피해자는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다던데 저는 그게 아니라서요. 불규칙적이나마 소득도 있어서요.”그는 세상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해’라고 말하면 반항심이 든다. ㅇ씨에겐 늘 자신을 괴롭히는 지병이 있다. 항상 몸에 통증을 달고 사는 병이다.“제가 몸이 아프잖아요. 정신과 병원에서도 그렇고, 주변 친구들도 그렇고 ‘운동하면 다 나아’, ‘노력하면 다 낫는다’, ‘나가서 걸어라’ 이러면 엄청 짜증 나는 거예요. 통증이 발바닥에도 있어서 걸으면 무조건 아프거든요. 걸으면 아픈데 ‘나가서 걸어라’ 그러면 더 할 말이 없죠….”
③ “매일 합니다. 그 생각” 95년생 ㄱ씨
(프리랜서, 월 소득 200만원, 소속감 집단: 가족)95년생 ㄱ씨는 답변지에 “맨날 합니다”라고 적었다. 그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서 병원에 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ㄱ씨는 ‘그냥 죽어야겠다’가 말버릇이라고 했다. 당장 극단적 선택을 할 계획을 세운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는 “그냥 우연히 죽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한번은 병원의 도움을 받기로 마음먹고 정신건강의학과에 방문한 적이 있다. 약을 처방받았는데 잘 안 맞는 것 같아서 복용을 그만뒀다. ㄱ씨는 요즘 다른 병원에라도 다시 한 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무엇이 그리도 ㄱ씨를 힘들게 하는 것일까. 내년 2월 대학 졸업을 앞둔 ㄱ씨는 현재 방송업계에서 프리랜서로 일한다. 한 달 200만원을 손에 쥐지만 일주일에 몇 시간 일하는지조차 가늠되지 않는다.“그냥 눈 뜨고 있을 때는 거의 일합니다. 퇴근 후에도 언제든 연락 오면 최대한 빨리 일을 해야 합니다.”일자리가 있고 소득이 있다고 해서 또래보다 형편이 나은 것은 아니다. ㄱ씨는 일자리에 대한 만족도가 무척 낮다고 했다.
“현재 하는 일에 대한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1점입니다. 업계가 열정페이가 심해요. 기본급이 좀 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일한 것에 비해 보상이 적고 페이는 너무 짠 편이에요. 딱히 삶이 희망적이지 않아요. (미래가) 잘 안 그려져서 그냥 좀 일찍 삶을 마치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해요.”
ㄱ씨는 자신을 원래 ‘욕심과 의욕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어떤 계기로 한번 번아웃(소진)이 찾아온 뒤 요즘은 ‘별 희망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예전에 고시원에 살았을 때 혼잣말하는 버릇이 생겨서 지금까지 계속됩니다. 창문 없는 곳에서 온종일 말 한마디도 안 할 때가 있다보니 정말 정신질환에 걸리겠더라고요.”지금은 부모님이 주신 전세금으로 얻은 집에서 언니와 살며 그나마 생활 환경이 나아졌지만 앞으로 삶의 경로는 잘 그려지지 않는다.④ 3년 뒤 내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다코로나19가 덮친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사람 3명 중 1명은 20대 여성이다. 올해 상반기 20대 여성 자살자 수는 전년도 같은 기간에 견줘 43% 늘었다. 이런 통계들에 대해 당사자인 20대 여성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데엔 경제적 이유가 가장 크다고 생각해요. 같은 20대 여성 중에서도 경제적으로 어려울수록 극단적 선택을 생각하거나 시도할 확률이 높은 것 같아요. 이런 뉴스를 볼 때 괜찮은 일자리, 그러니까 경제적 기회를 이들에게 줬으면 달랐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해요. 지금은 몇 안 되는 불안정한 일자리를 놓고 같은 20대 여성들끼리 경쟁하고 있거든요.”(97년생 송)
코로나19로 고용 충격이 심했던 3~4월, 20대 여성 고용률은 모든 연령·계층 가운데 가장 큰 폭으로 감소했다. 인터뷰에 응한 7명은 주로 취업을 준비하면서 생계형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부모님께 생활비를 지원받고 있었다. 일하는 경우 소득은 적었고, 일자리는 불안정했다. 그들은 일상에서 식비나 문화생활을 최대한 줄이려 노력하지만, 이미 최소한의 생활비로 사는 그들에게 절약마저 쉽지 않다. 주거 환경이 열악한 점을 호소하는 경우도 많았다. 1평 방의 셰어하우스, 5평 원룸, 고시원, 볕이 들지 않는 하숙방 등은 이들을 정신건강 위기로 몰아넣은 조건 가운데 하나였다.91년생 ㅇ씨에게 ‘이것만 개선되면 좀 낫겠다’ 싶은 딱 한 가지를 꼽아달라고 했다. 그는 “안정된 주거”라고 답했다. 현재 그는 보증금이 없는 월세 20만원의 셰어하우스에 살고 있다. 거실에 책상과 식탁이 있지만 개인 방은 1.2평이다.“너무 오랫동안 고시원이나(열악한 곳에 살았어요). 이사도 너무 자주 다니고. 그런 식으로 힘들게 살아서, 그런 것(이사)들만 없어도 제가 조금 편안하게 어느 한 곳에서 일할 수도 있고 이사 다니면서 쓰는 힘을 덜 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요.”인터뷰에 참가한 이들은 공통으로 당장 코앞의 미래조차 그릴 수가 없다고 했다. 95년생 ㅈ씨는 요새 계획 세우는 걸 포기했다.“3년 후 내가 어디에 입사해서 어떤 프로젝트를 하고 5년 후에는 대리가 되어서…. 그런 구체적인 설정을 못 하겠어요.”그는 그럴듯한 계획을 세우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무기력에서 빠져나온 것 같다고 했다.“오늘 할 것 미루지 말고, 이번 일주일 행복한 생각 하면서 잘 보내고, 또 이번 한 달 잘 보내자,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까 무기력증이 조금 괜찮아졌어요. 3년, 5년 뒤? 그냥 오늘 쓸 자소서 잘 궁리하고 자자, 이렇게 생각해요.”이들은 특히 젊은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경험들이 일상을 옥죈다고 털어놓았다. 혼자 사는 집의 문을 누군가 갑자기 두드리는 일은 수시로 있다.“한국에서 여자로 태어났으면 밤늦게 누가 문 두드리고, 이런 게 너무 디폴트(초기값) 경험이잖아요”(95년생 ㅈ씨)아르바이트 면접에서 ‘얼평’(얼굴 평가)을 당한 경험이 숱하게 공유되고, 일상에서 외모 비교를 당할 때도 많다.“(외모를) 가꾸는 사람들이 많은 직업군에 있다 보니 외모를 가꿔야 한다는 강박이 조금 병적으로 생겼습니다. 한때 밤에 거울을 봤는데 얼굴이 비정상적으로 왜곡돼 보이고, 그래서 생각도 안 했던 부위의 성형외과 상담을 받으러 돌아다닌 적이 있어요. 아무래도 한국은 외모지상주의 사회니까요.”(95년생 ㄱ씨)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 자살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 전화하면 24시간 전문가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women/972429.html?_fr=mt1#csidxb33db4a76dd94dc9677a463173a6a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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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100억 배당하고도…“코로나로 2억 적자” 구조조정한 회사

오경민 기자 5k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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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100억 배당하고도…“코로나로 2억 적자” 구조조정한 회사
 

인천 소재 기업 심팩주물
3월 배당 이후 5개월 만에
노동자들에 희망퇴직 권고
현장 인력 30% 넘게 떠나
“해고 회피 노력 없어” 논란
 

지난 8월 코로나19 때문에 경영상황이 어렵다며 노동자를 구조조정한 기업이 코로나19가 이미 확산된 시점인 3월 말 주주들에게 100억원가량을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로 인한 경영난을 노동자에게만 전가하는 게 아니냐고 지적했다.

심팩주물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지난 8월18일 경영난을 이유로 희망퇴직을 요구받았다. 경영진은 노동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올해 누적 적자가 2억원이라 공장 인원 3분의 1을 감축해야 한다”며 인원 감축을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심팩주물의 인천 남동공장과 가좌공장 두 곳에서 현장 인력 3분의 1가량이 희망퇴직과 권고사직으로 회사를 떠났다.

노동자들은 형식은 희망퇴직이지만 사실상 정리해고라고 주장했다. 희망퇴직을 권고받은 노동자 A씨는 “지난 8월25일 오후부터 (노동자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면담을 하더니 그 자리에서 권고사직서를 쓰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경영진 중 한 명이 희망퇴직을 하지 않으면 기본급 2개월치에 해당하는 위로금을 받지 못한다며 노동자들이 희망퇴직서를 쓰게끔 종용했다고 말했다.

심팩주물 관계자는 기자와 통화하면서 “코로나19 때문에 이탈리아와 미국 등으로 수출이 어려워져 생산량이 절반 가까이 줄고 경영이 많이 어려워졌다”며 “노동조합과 협의해 부득이 희망퇴직을 받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심팩주물 노동자들을 대리하는 박선희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노무사는 “코로나19로 인해 구조조정이 필요할 정도로 경영난이 초래된 것인지, 장기적 관점에서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는지 등도 명확지 않은 상황”이라며 “노동자들은 (회사 경영 사정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회사의 일방적 통보로 생계 터전을 잃게 됐다”고 주장했다.

실제 이 회사의 주주들은 코로나19 유행이 시작돼 국내 누적 확진자 수가 1만명에 육박했던 지난 3월 이미 회사의 이익을 나눠가졌다. 심팩주물 감사보고서를 보면 지난 3월25일 이익잉여금 중 100억원을 주주에게 현금 배당했다. 회사는 임시주주총회를 통해 자본준비금 120억원가량을 이익잉여금으로 전입시킨 뒤 보통주당 8만3333원을 주주들에게 배당해 100억원을 처분했다. 노동자들의 정리해고 5개월 전이었다.

권두섭 민주노총 법률원 변호사는 “이미 한참 전부터 코로나19 유행이 있었는데 (구조조정) 몇달 전에 엄청난 액수를 배당하고 적자가 일부 났다고 인원을 감축하는 것은 회사가 해고 회피 노력을 다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박 노무사는 “정작 이익에 기여한 노동자들은 어떠한 권한도 행사하지 못하고 쫓겨나는 와중에 주주와 경영진은 이익을 챙겼다”고 비판했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영난이 노동자 실직으로 이어지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직장갑질119가 지난 9월 발표한 ‘코로나19와 직장생활 변화 설문조사’를 보면 응답자 1000명 중 15.1%가 코로나19로 인한 실직을 경험했다고 밝혔다. 실직 사유로는 권고사직이 21.2%로 가장 많았다. 해고는 근로기준법에 따라야 하고, 경영상 필요를 증명하는 등 갖춰야 할 요건이 많아 기업들은 희망퇴직이나 권고사직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권 변호사는 “회사들이 법적인 해고 처분인 정리해고보다는 권고사직이나 희망퇴직을 통해 사실상 정리해고 효과를 보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노동자 인원 감축은 최후 수단이 되어야 한다. 윤지영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정리해고를 위해서는 해고 회피 노력, 대상자 선정의 합리성과 공정성,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어야 한다”며 “올해 경영이 힘들었다고 하더라도 내년에 회복될 가능성이 있다면 경영상 필요에 의한 해고라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12020600005&code=940702#csidxcda099176fe07a596453a09b99c2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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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없는 유엔사가 막고 있다... 이인영 장관 와달라"

[인터뷰] 개성공단 재개 선언 촉구 '통일대교 1인 시위' 23일째 이재강 경기도 평화부지사

20.12.02 07:10l최종 업데이트 20.12.02 07:10l
 개성공단 재개 촉구를 위한 도라전망대 집무실 설치가 유엔사의 반대로 가로막힌 가운데, 경기도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에서 천막으로 임시집무실을 설치한 이재강 경기도 평화부지사.
▲  개성공단 재개 촉구를 위한 도라전망대 집무실 설치가 유엔사의 반대로 가로막힌 가운데, 경기도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에서 천막으로 임시집무실을 설치한 이재강 경기도 평화부지사.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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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기온이 영하 6도를 오르내린 11월 30일, 이재강 경기도 평화부지사는 오전 11시가 되자 어김없이 경기 파주시 통일대교 남단 철제 바리케이드 앞에 섰다. 그의 목에는 자신의 키만큼이나 큰 대형 피켓이 걸려 있다. 피켓에는 '한반도 평화번영의 첫걸음, 평화의 새로운 길 개성공단 정상화'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1998년 개통된 통일대교는 지난 20년간 남북 간 평화를 연결하는 다리였다. 고 정주영 회장이 소 떼를 몰고 방북할 때 처음 통일대교를 건넜고,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통일대교를 지나 평양으로 가서 남북정상회담을 했다. 개성공단이 폐쇄된 2016년 2월까지 입주기업들은 매일 통일대교를 통해 인력과 물자를 실어 날랐다. 2018년 4월 청와대를 출발한 문재인 대통령은 통일대교를 거쳐 남북정상회담 장소인 판문점으로 향했다. 

이재강 부지사도 사무실 집기를 싸들고 이 다리를 건너 비무장지대(DMZ) 내에 있는 도라전망대로 집무실을 옮기려고 했다. 개성공단 재개 선언을 촉구하기 위해서다. '평화부지사'는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취임하면서 경기도의 남북 교류 및 평화 정책 등을 전담할 수 있도록 신설한 자리다. 하지만 유엔사령부(United Nations Command. 아래 유엔사)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통일대교를 건너지 못한 이 부지사는 결국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바람의 언덕' 위에 임시 집무실을 꾸렸다. 그는 2일 현재 기준 23일째 통일대교 앞에서 유엔사 규탄과 개성공단 재개 선언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이재강 부지사는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정전협정에 의하면 유엔사의 승인권은 군사적인 성질의 것에 대해서만 한정하고 있는데 평화부지사의 집무실 설치까지 막은 것은 정전협정 위반이자 월권"이라며 유엔사를 비판했다. 그는 또 "개성공단 재개를 선언하면 (대북) 제재를 넘어서 국제적인 협력을 끌어내 남북이 함께 화해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면서 이인영 통일부장관의 동참을 호소했다.

다음은 이재강 부지사와의 인터뷰 일문일답 요지이다.

"비군사적인 사무실 집기 옮기는 것도 안된다니... 참담하다"
 
 개성공단 재개 촉구를 위한 도라전망대 집무실 설치가 유엔사의 반대로 가로막힌 가운데, 경기도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에서 천막으로 임시집무실을 설치한 이재강 경기도 평화부지사.
▲  이재강 경기도 평화부지사.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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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바람의 언덕'에 평화부지사 임시 집무실을 만든 이유가 무엇인가.

"11월 9일은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날이다. 그래서 그날 남북의 장벽을 무너뜨리자는 생각에 평화부지사 집무실을 (DMZ 안에 위치한) 도라전망대로 옮기려고 했다. 그런데 유엔사가 못 들어가게 해서 다음날 여기에 (임시로 집무실을) 만든 것이다. (지금 우리가 들어와 있는) 이 몽골텐트도 도라전망대에 들고 가려고 했다. (도청에 있는 평화부지사) 집무실과 똑같은 시스템을 도라전망대에 만들려고 했는데, 그럴 수 없어서 여기에 임시로 해 놓았다. 매일 오전 10시에 회의하고, 부서별 보고도 받고, 결제 시스템도 다 되어 있다. 실제 평화부지사 업무를 여기서 다 하고 있다. 원래 도라전망대에서도 그렇게 하려고 했다."

- 유엔사가 도라전망대에 평화부지사 집무실 설치를 막은 이유는 무엇인가?

"실제 (도라전망대를 담당하고 있는 육군) 1사단과는 협력이 잘 되어서 (집무실) 설치에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유엔사의 승인이 없어서 설치가 안 되겠다고 (1사단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유엔사에서 직접 연락 온 것은 없다. 유엔사에서 '불승인'이라고 한 것은 아니고 '검토 중'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못 듣고 있다. '검토 중'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불승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정전협정에 대한 유엔사의 유권해석이나 관행에 의해서 못 들어가게 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유엔사는 (한국 전쟁이 끝난) 1953년 이후로 계속 그렇게 해왔다."

- 1인 시위가 20일을 훌쩍 넘었다.

"도라전망대에서 매일 개성공단을 눈으로 보면서 출퇴근하고 싶었다. 그렇게 개성공단 재개를 남북 정부에서 선언만 해달라고 촉구하려고 했는데... (1인 시위를 하는) 통일대교가 철문으로 막혀 있는 모습이 참담하더라. 우리 땅인데 막아놓았다. 그 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걸어가신 길이다. 차만 세우면 방송으로 나가라고 하고, 사진도 못 찍게 한다. 통일대교로 들어갈 때 (통일대교를 지키고 있는) 1사단에서 유엔사에 전화하더라. 거기서 승인이 떨어져야 들어갈 수 있다. 유엔사가 다 장악하고 있다. 개성공단 문제도 심각하지만, 이런 상황이 너무 참담했다. 빨리 공론화해서 국민의 합의를 모아내는 게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 '유엔사의 승인권 문제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했는데, 어떤 문제가 있나.

"전해철 의원(더불어민주당)이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유엔사의 승인에 관한 질문을 했을 때 국방부에서는 '정전협정에 의하면 군사적인 성질의 것에 대해서만 한정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도라전망대에 평화부지사 집무실 설치를 막은 것은 정전협정 위반이다. 총칼을 들고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비군사적인 사무실 집기 등을 옮기는 것이 안된다는 것은 국방부에서 밝힌 것과 상반되는 이야기다. 군사적인 부분에 한정된 유엔사 권한을 존중한다지만 비군사적인 부분에까지 굳이 유엔사가 개입해서 승인해야 하는가. 그런 부분을 바로 잡아야겠다는 것이다.

정전협정의 기본 정신은 한반도 평화 증진인데 그에 부합해서 유엔사에서 승인하거나 제재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지난 2018년 남북이 합의해서 철로를 조사하기 위해 방북하는 것도 유엔사에서 승인하지 않았다. 이것은 정말 (유엔사의) 월권이고 오버다. 도라전망대에 화‧수‧목‧금요일에만 들어가게 하고, 오전 9시에서 오후 5시 사이 하루에 200명으로 인원도 제한했다. 판문점에서도 미군 장교의 설명을 한국 사람이 통역해준다. 우리 땅인데 왜 (유엔사가) 그렇게 제한을 하는지, 이제는 다시 생각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 <가짜 '유엔사' 해체를 위한 국제캠페인>이라는 단체가 지난 24일 임진각에서 '가짜 유엔사의 주권침해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유엔사가 유엔의 하부기구도 아니고 유엔과 아무 관계가 없는 기구임에도 불구하고 유엔의 이름으로 한반도의 평화프로세스를 가로막고 대한민국의 주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동의하는가?

"그 단체가 참고하라고 준 자료를 보니까, 1975년에 유엔총회에서 유엔사를 해체하라고 결의를 했더라. 맞는 얘기다. 미군이 만든 유엔사는 족보가 없다. 유엔에는 유엔사에 대한 어떤 규정도 없다. 유엔의 산하 기구도 아니고 명령을 받은 것도 아니고 경제적 지원을 받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누차에 걸쳐서 유엔에서 한국에 있는 유엔사는 유엔의 것이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 단체에서는 유엔사에 유엔 깃발을 떼라고 계속 요구한다고 한다. 그분들 주장이 좀 과격하지만, 맞는 말이다."
 
 개성공단 재개 촉구를 위한 도라전망대 집무실 설치가 유엔사의 반대로 가로막힌 가운데, 경기도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에서 천막으로 임시집무실을 설치한 이재강 경기도 평화부지사.
▲  개성공단 재개 촉구를 위한 도라전망대 집무실 설치가 유엔사의 반대로 가로막힌 가운데, 경기도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에서 천막으로 임시집무실을 설치한 이재강 경기도 평화부지사.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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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시민단체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됐던 유엔사의 승인권 문제를 이재강 부지사가 공론화시켰다는 평가도 있다.

"유엔사의 승인권은 모순적이다. 대대적인 토론을 통해서 국민적인 동의를 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여러 시민단체에서 저를 위해 지지방문을 왔는데, 그런 사실을 몰랐다고 하더라. 유엔사 승인권 문제를 우리가 함께 해결하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처음에 1인 시위를 할 때는 유엔사에 관한 내용을 피켓에 담았는데, 개성공단 재개 선언을 촉구하러 왔다가 유엔사 얘기만 하는 게 좀 이상해서 다시 만든 피켓에서는 유엔사 얘기를 뺐다. 개성공단 문제에 집중하자는 의미였는데, 유엔사가 계속 승인을 안 해주고 있어서 다시 유엔사 문제를 피켓에 담아야 할 것 같다. (웃음)"

- 우리 정부와 통일부의 입장은 뭔가?

"정전협정에 따라서 유엔사가 승인해야 한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입장이 없다. 정전협정의 내용이나 유엔사 권한에 대해서 상반된 견해가 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공론화를 했으면 좋겠다. 정부도 참여하고 시민단체도 참여해서 국민적 공감대를 얻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 남북이 개성공단 재개 선언에 적극적으로 나서 줄 것을 요청하는 차원에서 도라전망대에 집무실 설치를 추진한다고 했다. 그러나 여러 국제 정세 속에서 개성공단 재개는 쉬운 문제가 아닌데, 선언만 하면 되는 것일까?

"미국의 승인이나 (유엔의) 대북 제재라는 틀 속에 갇혀서는 개성공단 재개가 불가능하다. 개성공단 재개를 선언하면 (대북) 제재를 넘어서 국제적인 협력을 끌어내 남북이 함께 화해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 특히 이인영 통일부장관이 '남북의 시간이 왔다'고 했는데, 그래놓고 정부나 통일부의 입장은 비핵화를 얘기한다. 비핵화를 얘기하는 순간 남북 화해는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작심해서 김정일 전 위원장과 함께 개성공단을 만들었다. 그때 미국의 승인은 없었다. 2016년 2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미국 동의도 안 받고 개성공단을 없앴는데, 지금은 개성공단 재개하려면 미국 승인을 받으라고 한다. 말도 안 된다. 우리 것인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작심해서 시작한 공단,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작심해서 문 닫은 공단을 왜 남북이 만나서 못 여는 것인가. 왜 미국 승인을 받아야 하나."

"쇼라고? 가만히 있는 게 직무유기... 3보 1배로 도라전망대 간다"

- 개성공단 조업 재개가 가지는 정치적, 경제적 의미는?

"(개성공단이 처음 가동된) 2004년부터 (문을 닫은) 2016년까지 누적 생산량이 3조 8000억 원이다. 남한의 약 900명의 노동자, 북한의 5만 5000명의 노동자, 그렇게 5만 5900명의 노동자가 매일 만나서 매일 통일이 이뤄지는 현장이었다. 그런데 누적 생산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갈 즈음에 폐쇄되었다. 남한의 자본과 기술, 북한의 노동력과 토지가 결합한 남북 경제 공동체가 실험되는 장이었는데, 공단이 폐쇄되면서 평화도 폐쇄가 되는 일이 벌어졌다.

161개의 개성공단 입주 기업이 있었는데, 개성공단 폐쇄로 너무 힘들어하고 있다. (개성공단 내) 공장에 기계를 두고 와서 엄청난 손해를 보고 있다. 그들 중에서도 경기도에 41개 기업이 있다. 그들의 경제적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서도 공단 재개를 해야 한다. 경기도는 유일하게 그 기업들에 1년에 3억 원 정도씩 지원금을 주고 있다. 그 기업들이 여기에 매일 온다. 꼭 (개성공단을) 열어달라고, 더는 먹고 살기 어려워서 죽겠다고 한다.

개성공단을 폐쇄했다고 하는데, 최근 한 재미교포가 개성공단에 갔더니 매일 꽃을 갈고 청소를 하더라고 한다. 그들은 (남한의 기업들이) 들어오길 희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도 조건 없이 들어오라고 선언했다. 4.27 판문점 선언과 9.19 평양 공동선언의 첫 번째 합의가 개성공단 재개였다. 그것만 국회에서 비준해도 개성공단에 지금 당장 들어갈 수 있다."
 
 이재강 경기도 평화부지사가 11월 24일 경기 파주시 통일대교 남단에서 개성공단 재개 선언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이재강 경기도 평화부지사가 11월 24일 경기 파주시 통일대교 남단에서 개성공단 재개 선언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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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성공단 재개에 대한 의지는 알겠지만, 굳이 도라전망대에 집무실까지 설치해야 하는가? 일각에서는 '비무장지대에 무슨 집무실이냐', '쇼 하지 마라' 등의 비아냥도 들린다.

"개성공단이 문 닫은 지 4년 10개월이 됐다. 저는 입주기업들이 매일 찾아와서 고통을 호소하는 민원을 외면할 수 없었다. 개성공단 중단으로 가장 피해를 당한 곳이 경기도다. '보여주기식 쇼'라는 얘기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평화정책을 담당하는 부지사가 그런 말이 두려워서 가만히 있는 것이 오히려 도민에 대한 직무유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비난을 듣더라고 경기도 기업들의 활로를 찾기 위해서 길을 모색하는 것이 경기도 평화부지사의 역할 아니겠나."

- 한편으로는 지방정부 부지사도 저러는데, 끊어진 남북 대화 채널 복원 등을 위해 나서야 할 통일부 등 현 정부가 너무 소극적인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많은 분이 저에 대한 지지 방문을 오시는데, 정부나 국회에서, 특히 (이인영) 통일부장관이 한번 오시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같이 얘기도 하고, 공동으로 남북 관계의 발전을 모색하는 실마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제가 집무실을 (도라전망대로) 옮기려는 것은 이 정부에 촉구하는 의미도 있다. 항의하고 반발하는 것이 아니라 남북 관계가 잘 될 수 있도록 제가 촉매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단식하거나 농성을 하게 되면 현 정부에 대한 반기를 드는 모습이 되기 때문에 상당히 조심해서 하고 있다. 단식 농성 같은 것은 안 한다. 여기에 집무실을 계속 유지하면서 평화부지사로서의 역할을 잘할 것이다."

- 1인 시위 외에 다른 활동도 계획하고 있나?

"2004년 12월 15일 개성공단에서 만든 통일 냄비가 처음 들어왔는데, 서울에서 하루 만에 완판됐다. 그래서 개성공단 첫 출품을 기념해서 (12월 15일에) 개성공단 재개 선언을 촉구하기 위한 3보 1배를 하려고 한다. 개성공단 입주기업과 많은 단체에서 함께 한다. 여기서 도라전망대까지 3보 1배로 가면 약 6시간 정도 걸린다. 힘들겠지만 그 정도 각오는 하고 있다. 그 정도 해서 국민적 의지를 모으고 국민적 합의를 만든다면 저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 앞으로 남북 평화교류 사업과 관련 경기도의 계획은?

"비핵화 프레임을 앞서는 것이 평화 프레임이다. 평화 프레임을 먼저 장착하면 비핵화는 저절로 해결된다. 그래서 평화프레임을 가져오는 첫걸음이 저는 개성공단 재개라고 본다. 그런 일을 계속 추진할 것이다. 또한 이런 경색된 국면에서도 경기도는 유일하게 남북 간 인도주의적 보건의료 교류를 계속 해왔다. 실제 성과도 있었다. 인도주의적인 협력, 보건의료 협력은 계속 추진하고 예산도 만들고 있다. 경기도가 한반도 평화의 오솔길을 내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일을 위해서 평화부지사로서 최선을 다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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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흥화력발전소 화물노동자가 추락한 뒤 한동안 방치된 이유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20/12/02 10:27
  • 수정일
    2020/12/02 10:27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화물노동자 고 심장선 씨 아들 “왜 아버지를 방치했나”

이승훈 기자 lsh@vop.co.kr
발행 2020-12-01 22:30:35
수정 2020-12-02 08:52:38
이 기사는 번 공유됐습니다
화물노동자 심장선 씨 응급구조 시간대별 정리
화물노동자 심장선 씨 응급구조 시간대별 정리ⓒ공공운수노조 제공  
 
지난달 28일 영흥화력발전소에서 석탄재를 화물차에 싣다가 추락해 숨진 화물노동자 심장선(52) 씨가 추락한 이후 한동안 방치돼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미끄러워 추락할 위험이 있는 차량 위 구조물에서 혼자서 일을 하다가 사고를 당한 뒤 방치된 것이다. 현장에는 함께 일하는 동료도 없었고, 안전관리자도 없었다.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와 유족은 사고 현장 CCTV를 통해 확인한 응급구조 상황을 시간대별로 정리해 1일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했다.

화물연대본부와 유족에 따르면, 사고 발생 당일 화물노동자 심장선(52) 씨가 작업 중 추락한 뒤 발견되기까지 약 5분의 시간이 걸렸다. 신고가 접수되고 발전소 내 구급대원이 현장에 도착하기까지는 약 10여분이 더 소요됐다. 심폐소생술과 출혈부위 지혈 등의 응급처치도 그만큼 늦어졌다.

심장선 씨의 아들은 “사고가 일어난 뒤 골든타임에 관리감독관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관내 119에서는 현장 출동까지 15분이 걸렸다”라며, 왜 아버지를 이렇게 방치했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1일 오후 서울 중구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열린 한국남동발전 영흥화력본부 화물노동자 고 심장선씨 사망사고 유가족 기자회견에서 고인의 아들이 발언을 하고 있다. 심씨는 지난 28일 3.5m 높이의 트럭 상부에서 석탄회를 싣는 작업을 한 뒤 내려오다 떨어져 숨졌다. 2020.12.01
1일 오후 서울 중구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열린 한국남동발전 영흥화력본부 화물노동자 고 심장선씨 사망사고 유가족 기자회견에서 고인의 아들이 발언을 하고 있다. 심씨는 지난 28일 3.5m 높이의 트럭 상부에서 석탄회를 싣는 작업을 한 뒤 내려오다 떨어져 숨졌다. 2020.12.01ⓒ김철수 기자
석탄재가 나오는 모습
석탄재가 나오는 모습ⓒ공공운수노조 제공

심 씨가 사고를 당한 곳은 언제든 추락사고가 발생할 위험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30일 고용노동부 관계자, 유족 등과 함께 현장을 둘러본 노조 관계자는 석탄재가 나오는 관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사진을 보여주며 “이렇게 연기처럼 뿜어져 나오는 미세한 먼지 때문에 차량 위 구조물은 굉장히 미끄럽다. 노동자가 중심을 잃게 되면 낙상사고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구조였다”라고 설명했다.

현장에는 “(석잔재) 출하 버튼을 누른 후 35t에 상부에 올라가 넘치는지 지켜봐 달라”는 공지가 적혀 있었다. 트럭 탱크에 석탄재가 약 35t가량 채워지면, 석탄재가 넘치기 전에 올라가서 상차를 정지시키라는 안내다.

공지문에 2인 1조 등의 규정은 적혀 있지 않았다. ‘안전벨트(안전고리)’ 등 안전장구를 착용하라는 안내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구조물 위에서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작업을 하다 보면 오히려 ‘안전벨트와 구조물을 연결하는 줄’에 걸려서 넘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전해졌다.

2인 1조 등의 규정 없이, 안전장구 착용만 안내하며 위험 작업을 지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흥화력발전소를 운영하는 한국남동발전은 “추후 같은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대책 마련에 최선을 다하겠다”면서도 “연료환경설비 적정운영인력 산정 용역(2019.11. KMAC) 결과, 2인 1조 구성이 필요한 작업은 컨베이어벨트 운전원과 밀폐공간(옥내저탄장)으로 한정됐다. (심 씨가 일하던) 현장은 작업 여건 등을 감안했을 때 2인 1조 작업장이 아니었다”라고 주장했다. 용역연구에서 2인 1조 작업장이라고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2인 1조로 운영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해당 작업장은 2인 1조로 일할 필요가 없는 곳이라는 한국남동발전 측 주장에, 화물연대는 기자회견에서 “그렇다면 홀로 일하다 방치되어도 된다는 말인가”라고 반박했다.

이어, 화물연대는 올해 9월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스크루 상차 작업을 수행하던 화물노동자의 사망사고 등을 언급하며 “(용역 연구는) 태안화력 故 김용균 노동자 사망사고 이후 연료환경설비운전의 상주 하청업체에 대한 인력충원 문제만 다루었고, 석탄재 반출 및 중량물 운반 등 화물노동자의 안전 문제는 전혀 다루지 않았다”라고 지적했다.

1일 오후 서울 중구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열린 한국남동발전 영흥화력본부 화물노동자 고 심장선씨 사망사고 유가족 기자회견에서 고인의 아들이 발언을 하고 있다. 심씨는 지난 28일 3.5m 높이의 트럭 상부에서 석탄회를 싣는 작업을 한 뒤 내려오다 떨어져 숨졌다. 2020.12.01
1일 오후 서울 중구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열린 한국남동발전 영흥화력본부 화물노동자 고 심장선씨 사망사고 유가족 기자회견에서 고인의 아들이 발언을 하고 있다. 심씨는 지난 28일 3.5m 높이의 트럭 상부에서 석탄회를 싣는 작업을 한 뒤 내려오다 떨어져 숨졌다. 2020.12.01ⓒ김철수 기자

또 화물연대는 석탄재 상차를 위한 작업이 심 씨의 계약상 본래 업무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전에는 발전소에 상하차 작업을 담당하던 노동자가 있었는데, 발전소에서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해당 작업을 화물노동자에게 전가하다 보니, 계약상 업무도 아닌 상하차 작업을 화물노동자들이 떠맡게 됐다는 것이다.

화물연대는 이 같은 주장의 근거로 지난해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지침에 따라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해 승인받은 건을 예로 들었다.

화물노동자는 사실상 회사와 종속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사업자로 분류돼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해 온 대표적인 특수고용직이다. 이런 이유로 화물노동자는 계약 내용과 다른 업무까지 떠맡아 일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떠맡은 일을 하다가 사고를 당하면 산업재해 보상조차 받지 못했다. 고용노동부는 이런 일을 방지하고자 지난해 6월 28일 ‘계약 내용과 다른 업무수행 중 발생한 화물자동차 운전자 사고 처리 요령’을 발표했다. 화물노동자가 계약과 다른 업무를 수행하다가 산재를 겪더라도 재해 발생 사업장에 고용된 노동자로 간주해 산재보상을 진행한다는 내용이다.

화물연대는 이 지침을 근거로 올해 5월 27일 근로복지공단에 화물노동자들의 산재사고 사례를 집단 신청했고, 일부 사건에 대해 승인을 받았다. 그중 하나가 2019년 7월 석회석 가루 적재 작업을 하던 화물노동자가 탱크 폭발로 한쪽 눈을 잃은 사고였다.

화물연대는 이 같은 사례를 소개하며 “결과적으로 산재는 승인됐고, 이는 화물을 적재하는 작업이 화물노동자의 업무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화물의 상하차 업무를 위해 수반되는 작업은 화물노동자가 수행해야 할 업무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한편, 화물연대와 유족은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남동발전 측에 ▲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원청의 사과, 유가족 보상 ▲ 화물노동자 상하차 작업 전가 금지 ▲ 상하차 작업 설비 개선 등을 촉구했다. 또 정부와 국회에 ▲ 안전운임제 전면 확대적용 ▲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요구했다.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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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하고 딱 폐지시키면 그냥 끝이다”

[추가] 각계단체, 국보법 72주년 맞아 폐지 촉구 기자회견 (전문)

  • 기자명 김치관 기자 
  •  
  •  입력 2020.12.01 12:29
  •  
  •  수정 2020.12.01 14:44
  •  
  •  댓글 1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한국진보연대 등 각계단체는 국가보안법 제정 72주년을 맞은 1일 민주인권기념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 상호 합의에 기초한 통일을 추진하기로 한 6.15공동선언이 발표된 지도 20년이 지났지만 국가보안법이라는 모순된 법이 아직 남아 민주주의 실현과 남북화해협력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치안유지법을 모태로 1948년 12월 1일 탄생한 국가보안법 72주년을 맞은 1일, 137개 단체와 161명의 인사는 “국가보안법, 이제는 폐지해야 한다”면서 이같은 주장을 담은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한국진보연대 등은 1일 오전 10시 서울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최근 국회에 국가보안법 개정안이 상정되었다”며 “지난 총선에서 국민들은 적폐세력을 다시 한번 심판하였고, 180석에 육박하는 의석이 집권 여당에 주어졌다”고 상기시키고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를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국가 보안법이 이미 사문화된 것이 아니냐고 말하지만, 오늘날까지도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분단 적폐, 국가보안법의 폐지 없이는 민주주의도, 이 땅의 평화통일도 이뤄낼 수 없다”고 분명히 했다.

이들은 “국가보안법 폐지 논의에 적극 나서, 적폐청산과 평화통일을 향한 중요한 디딤돌을 만들어야 한다”며 “각계 시민사회 또한 범국민 기구 구성 및 적극적인 공동행동 등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해 최대한 힘을 모아 실천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 의장이 여는 말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 이창복 의장, 김경민 한국YMCA 사무총장.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은 여는말을 통해 “72년이 되도록 아직까지 국가보안법이 살아있다는 것이 참 창피한 일”이라며 “특히 국가보안법 제7조는 결정적으로 헌법에 의한 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될 수 있는 조항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국가보안법 제7조 ‘찬양.고무’는 이른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국가보안법 피해자를 양산해온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 꼽히고 있다.

이창복 의장은 “개정 운동은 일부 몇 사람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뜻이 있는 사람이 중심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면서 힘을 모아낼 때 정치권에서 움직일 거라 생각한다”며 “이번 기회에 개정이 될 수 있도록, 나아가서는 폐지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다 힘을 모아 보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김경민 한국YMCA 사무총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민주주의가 완성됐다”는 발언에 이의를 제기하며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의 완성은 국가보안법 폐지 없이 불가능하다”면서 “더 이상 한국사회에서 국가보안법으로 인해서 탄압받고 시달렸던 사람들의 한숨이 가득 찬 사회가 되지 않도록, 그리고 남과 북이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열어갈 수 있도록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다”고 밝혔다.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는 “국가보안법은 폭력을 동원한 날치기 통과로 만들어진 법이다. 귀태법률이라고 할 수 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법”이라고 규정하고 “마침 21대 국회, 이른바 민주개혁세력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심하고 딱 폐지시키면 그냥 끝이다. 이제 딱 폐지하기를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피해 당사자인 진보당의 김재연 대표(앞줄 맨 오른쪽)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피해 당사자인 진보당의 김재연 대표(앞줄 맨 오른쪽)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날 기자회견에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의 피해사례 등이 거론됐고, 블랙리스트와 검열로 얼룩진 예술계와 이석기 전 의원이 아직도 감옥에 갇혀있는 진보당 등 피해 당사자들의 대표들도 참석해 폐지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헌법재판소 앞에서 매주 월요일 1인시위를 진행하고 있는 ‘국가보안법 7조부터 폐지운동 시민연대’와 국회앞 1인 시위 등을 진행해 온 ‘국가보안법 폐지 대학생 실천단’의 국민청원 활동도 소개됐다.

박정은 참여연대 사무처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기자회견에서 김재연 진보당 상임대표, 김도형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회장, 조헌정 예수살기 대표, 한미경 전국여성연대 상임대표, 박미자 ‘국가보안법 7조부터 폐지운동 시민연대’ 운영위원장, 강부희 ‘한국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 국가보안법 폐지 대학생 실천단’ 단장 등이 발언에 나섰고,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이규재 범민련남측본부 의장 등이 배석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기자회견문(전문)] 국가보안법 제정 72년에 즈음한 각계 공동선언

“국가보안법, 이제는 폐지해야 합니다!”

국가보안법 제정 72년입니다.

국가보안법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일제가 만들었던 ‘치안유지법’을 바탕으로 탄생하였다는 점에서, 태생부터 정권이 반대자를 억압하고 처벌하기 위한 법률이었습니다. 또한 상대방을 적대하고 배제하려는 ‘냉전 대결’의 산물이기도 하였습니다.

지난 72년간 국가보안법은 끊임없는 검열과 통제를 통해 사상과 양심, 표현의 자유 등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해 왔고, 화해와 협력의 당사자인 북을 적으로 강요하는 분단체제의 수호자로서 군림해 왔습니다.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 상호 합의에 기초한 통일을 추진하기로 한 6.15공동선언이 발표된 지도 20년이 지났지만, 국가보안법이라는 모순된 법이 아직 남아 민주주의 실현과 남북화해협력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국가보안법이 이미 사문화된 것이 아니냐고 말하지만, 오늘날까지도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온라인으로 전세계가 연결된 지금, 누구라도 북한의 인터넷 사이트를 접속하여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오직 우리 국민만이 가로막혀 있습니다. ‘북한의 주장과 유사하다’는 낙인만으로 끝없는 검열과 정치적 통제가 가능한 상황입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분단 적폐, 국가보안법의 폐지 없이는 민주주의도, 이 땅의 평화통일도 이뤄낼 수 없습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세 번의 남북정상회담이 열려 4.27판문점선언, 9월 평양공동선언 등 남북화해협력의 구체적인 사항들에 합의하였습니다. 평화와 통일의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만큼, 분단대결 체제를 유지,강화하는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를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지난 총선에서 국민들은 적폐세력을 다시 한번 심판하였고, 180석에 육박하는 의석이 집권 여당에 주어졌습니다. 이는 민주주의와 평화, 통일을 향한 촛불 민의의 발현이며, 정부 여당이 보다 철저히 적폐청산과 사회대개혁에 매진하라는 준엄한 명령이었습니다.

국가보안법, 이제는 폐지해야 합니다.

악법을 그대로 둔다고 결코 저절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언제라도 되살아나 다시 민주주의 발전과 평화통일의 발목을 잡게 마련입니다.

최근 국회에 국가보안법 개정안이 상정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국가보안법 폐지 논의에 적극 나서, 적폐청산과 평화통일을 향한 중요한 디딤돌을 만들어야 합니다.

각계 시민사회 또한 범국민 기구 구성 및 적극적인 공동행동 등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해 최대한 힘을 모아 실천해 나갈 것입니다.

2020년 12월 1일

(사)겨레하나, (사)정의·평화·인권을위한양심수후원회, (사)통일의길, 4.27시대 연구원, 6.15경기본부, 6.15제주본부, 6.15청학본부, 6.15충북본부, 615 시민합창단, 가톨릭농민회, 경기정의평화기독교행동, 경기진보연대, 경남진보연합, 고난받는 이들과함께하는모임, 공공연대노동조합, 광주진보연대, 구속노동자후원회, 국가보안법7조부터폐지운동시민연대, 국가보안법철폐 긴급행동, 국민주권연대, 권리찾기유니온, 기독교사회선교연대회의, 기본소득당, 노동당(인천시당), 노동 사회과학연구소, 노동자연대, 노동전선, 녹색당, 다른백년, 다른세상을향한연대, 다산인권센터, 대구경북진보연대, 대한민국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동학천도교 보국안민실천연대, 민들레,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단체연대회의,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민족통일애국청년회, 민주노동자 전국회의, 민주노점상 전국연합, 민주노총 경기도본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언론 시민연합, 민주평등사회를위한전국교수연구자협의회, 민주화실천가족운동 협의회, 민중공동행동, 반올림, 법과인권연구소, 보건의료단체연합, 부산민중연대, 빈곤사회연대, 빈민해방실천연대, 빈민해방철거민연합, 사월혁명회, 사회변혁 노동자당, 사회진보연대, 서울진보연대, 수원지역목회자연대,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안산새사회연대일:다, 알바노조/알바연대, 예수살기, 울산 진보연대, 이석기의원내란음모사건피해자한국구명위원회, 인권교육센터 들,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인권운동사랑방, 인천자주평화연대추진위원회, 자주 평화통일실천연대, 재일한국민주여성회,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도쿄본부), 전국 노점상총연합,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북도연맹 정읍시농민회소성면지회), 전국 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 빈민연합,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전국여성연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전국 철거민연합, 전국청소년행동연대 날다, 전국학생행진, 전남시민단체연대회의, 전남 진보연대, 전두환심판국민행동, 전태일노동대학, 전태일재단, 정의당, 제주 통일청년회, 제주평화인권센터, 조국통일범민족연합남측본부, 주권자전국회의, 진보네트워크센터, 진보당, 진보대학생넷, 참여연대, 천주교 인권위원회, 촛불문화연대, 코리아국제평화포럼(KIPF), 통일광장, 평등교육실현을위한 전국학부모회,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평화통일시민행동, 한국YMCA전국연맹,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센터, 한국대학생진보연합, 한국민족예술단체 총연합회 (서울민예총, 부산민예총, 인천민예총, 대구민예총, 대전민예총, 광주민예총, 울산민예총, 경기민예총, 강원민예총, 충북민예총, 충남민예총, 경남민예총, 전북민예총, 전남민예총, 제주민예총, 세종민예총), 한국비정규노동센터,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 한국진보연대, 한국청년연대,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형명재단, 화성노동인권센터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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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10명 중 1명은 치매... '초고령화' 옥천의 현실

홀몸노인 등 지역사회 대책 시급, 옥천 치매안심센터 중심으로 사례 관리

20.12.01 07:30l최종 업데이트 20.12.01 10:18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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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5년 사이 옥천군 65세 이상 인구 중 치매 환자 수 및 그 비율
▲  최근 5년 사이 옥천군 65세 이상 인구 중 치매 환자 수 및 그 비율
ⓒ 월간 옥이네  
 
# 충북 옥천군 옥천읍 외곽에 사는 80대 A씨는 매일이 불안하다. 혼자 지내는 집에 자꾸 도둑이 들기 때문. 건넛방에 누군가 오가는 것 같기도 하고, 마당에 찍힌 낯선 발자국을 발견하기도 한다. "도둑이 들었다"고 경찰에 신고하기를 여러 번. 하지만 도둑을 잡을 순 없었다. 처음부터 도둑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 치매를 앓는 A씨가 도둑이 든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의 이상행동을 감지한 이웃들과 보건소 측의 협조로 A씨는 치매 검사와 진단을 받을 수 있었다.

# 면에 사는 80대 B씨는 온 집안과 마당 가득 물건을 쌓아둔다. 가만히 살펴보면 '도대체 저걸 어디에 쓸 수 있을지 모를' 잡동사니가 가득하다. 치매와 함께 저장강박증세를 보이는 B씨의 사연을 듣고, 지역 봉사단체가 나서 한바탕 대청소를 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B씨의 마당은 마을 구석구석에서 주워온 고물로 다시 메워졌다.

농촌 지역 고령화가 심해지면서 치매 환자 수도 증가하고 있다. 국내 치매환자가 75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초고령화 사회로 돌입한 충북 옥천 역시 매년 치매 환자가 늘고 있다. 옥천의 65세 이상 노인 인구 중 치매 환자는 2015년 11.03%에서 2019년 12.06%까지 1%가량 더 늘었다(중앙치매센터, 전국 및 시도별 치매유병현황).
     

치매 진단을 받은 주민 중 중등도‧중증 환자 비중도 그만큼 높아지고 있다. 2015년 기준 최경도 환자 243명, 경도 577명, 중등도 358명, 중증 216명이던 것에서 2019년에는 최경도 299명, 경도 711명, 중등도 441명, 중증 266명으로 상승세에 있다. 고령화가 심해지다 보니 치매 환자 수가 높아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 하지만 그만큼 지역사회 안의 대책을 마련하는 데도 고민이 깊어진다. 

지난해 옥천읍 가화리에 문을 연 옥천군치매안심센터는 ▲ 치매 조기검진 ▲ 상담 ▲ 사례 관리 ▲ 예방 교육 및 홍보 ▲ 치매 가족지원 등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치매 검진의 경우 60세 이상 주민을 대상으로 보통 2년 주기로 실시하지만 옥천은 1년 단위로 검진을 시행한다. 지역 고령화가 심한 만큼 치매 환자의 조기 발견을 위한 것. 현재 센터가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사례 관리 역시 빠질 수 없다. 사례 관리는 보호자나 가족이 없어 돌봄을 받기 어려운 치매 환자를 대상으로 대상자별로 필요한 지원서비스, 지역사회 의료 및 복지제도를 연계해 주는 역할을 한다. 앞의 두 치매 환자 역시 이런 사례 관리를 통해 발굴된 것.

옥천군보건소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옥천군 내 홀몸노인은 4193명으로 이 중 친인척이 거의 없어 외부의 돌봄을 기대하기 어려운 경우가 2839명에 달한다. 홀몸노인의 비중이 높은 만큼, 치매 환자 사례 관리 역시 지역에서는 더욱 중요한 서비스일 수밖에 없다. 현재 옥천치매안심센터에 등록된 사례 관리 대상자는 약 290명. 이 가운데 절반이 홀몸노인에 해당한다.

'기억지키미' '실버건강지도사' 양성해 인력난 해소
       
 치매안심센터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상담 중인 모습
▲  치매안심센터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상담 중인 모습
ⓒ 월간 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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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옥천군 치매안심센터
▲  충북 옥천군 치매안심센터
ⓒ 월간 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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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들을 관리하는 인력은 4명에 불과하다. 담당자 1명이 70명 이상의 대상자를 관리해야 하는 셈. 대상자의 집을 찾아 환경과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위험한 상황은 아닌지, 별도의 지원 서비스가 필요하지 않은지 등을 확인한다. 치매 정도에 따라 방문 횟수는 달라지지만 양호한 경우 두 달에 한 번 꼴로 방문하는 일정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코로나19로 현장 방문이 어려워졌다. 현재는 전화나 마을 이장, 부녀회장 등을 통한 확인으로 대체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례 관리 업무를 담당하는 옥천군보건소 건강관리과 치매관리팀 노승원 주무관은 "치매환자가 증가하면서 사례 관리 대상자가 많아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과이지만, 그만큼 담당자 1명이 맡아야 하는 대상자 수가 늘어나는 부담이 있다"며 "치매 특성상 담당자가 오랫동안 속속들이 잘 알아야 효과적인 관리나 지원이 가능한데 인력 부분에 있어 어려움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치매관리팀 강은주 팀장 역시 "담당자 4명이 관리하기엔 역부족인 게 사실"이라며 "특히 면 지역에 대상자가 많아 거리상으로도 어려움이 있다. 그나마 지역사회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이 있어 어려움을 덜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사례 관리라는 게 단순히 잘 계시는지 확인하는 수준이 아닌, 직접 냉장고도 열어보고 집안이나 주변 환경은 어떤지, 약을 제대로 챙겨먹고 있는지, 식생활의 질 등 현장에서 꼼꼼히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데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치매안심센터는 이 같은 인력의 어려움을 지역 주민 연계 활동을 통해 풀고 있다. 기존 지역봉사단체 외에 '기억지키미'나 '실버건강지도사' 등을 양성해 치매 환자에 대한 인식이 높은 봉사자를 키워내고 있는 것.

기억지키미는 관련 교육을 이수 받은 봉사자가 주 1회 대상자를 만나 인지변화 관찰, 치매예방체조, 간단한 학습지 풀이 등을 진행하는 활동이다. 실버건강지도사의 경우 지난해 기본교육과정과 올해 심화교육과정을 이수한 주민이 대상자와 함께 교구 수업, 인지능력 확인 및 인지 강화 수업을 진행한다는 게 기본 계획.

강은주 팀장은 "혼자 사시거나 부부 모두 치매인 경우, 부부 중 한 명이 치매인 노인 부부 세대 등에 대한 실제적인 보호와 돌봄 지원을 위해 지난해와 올해 준비 중인 게 실버건강지도사"라며 "11월에 2기 기본과정과 함께 심화 과정을 추가로 실시하고 우선적으로 돌봄이 필요한 가구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외에 치매 조기 검진을 비롯해 경도인지장애를 겪고 있는 주민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구상 중"이라며 "이 시기에 확실한 예방과 관리가 중요한 만큼 센터 차원에서도 관련 활동을 강화할 수 있도록 하겠다. 치매에 대해 아직 사회적 인식이 높지 않지만, 주민들께서도 센터를 부담 없이 찾아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주 1회 어르신들 만나며 돌봄 문제 돌아보게 됐어요" http://omn.kr/1qrlw

월간 옥이네 2020년 11월호(통권 41호)
글·사진 박누리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옥이네> 11월호에도 실립니다.

 
태그:#옥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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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한국문화재 털어간 '큰 창고(오쿠라) 작은창고(오구라)'

(小倉)입니다.” 2015년 2월 웃지 못할 기사가 하나 떴다. 한 시민단체 소속 학생들이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공개질의서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당시 문화부 장관이 2014년 11월 열린 한·중·일 문화장관 회의에서 일본 문무과학생 대신에게 “오쿠라 컬렉션 등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가져간 한국문화재를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는 것이다.

얼핏보면 전혀 문제될 게 없는 발언 같다. 하지만 시민단체 소속 학생들은 “아마도 문화부 장관이 오구라를 오쿠라로 잘못 언급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당시 문화부는 “장관 발언을 보도자료로 옮길 때 잘못 표기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장관이 잘못 발언했든 아니든 헷갈리기 십상이다.

오쿠라와 오구라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자성으로 오쿠라는 ‘대창(大倉)’이고, 오구라는 ‘소창(小倉)’이다. 예전엔 큰 대(大)자를 ‘오오’라고 해서 ‘대창(大倉)’을 ‘오오쿠라’로 읽었지만 지금은 표기법이 바뀌어 그냥 ‘오쿠라’라 한다. 그래서 원래 ‘오구라’로 읽는 ‘소창(小倉)’과 헷갈리게 됐다.

오구라 유물 중 또하나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전 공주출토 금동반가사유상’.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오구라 유물 중 또하나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전 공주출토 금동반가사유상’.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큰 창고’와 ‘작은 창고’

그러나 솔직히 말해 ‘대창’이든 ‘소창’이든, ‘오쿠라’든 ‘오구라’든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오십보백보이다. 둘 다 일제강점기에 귀중한 한국문화재를 가져간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1837~1928)와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1870∼1964)이다.

그러고보면 오쿠라의 ‘대창(大倉)’은 큰 창고, 오구라의 ‘소창(小倉)’은 작은 창고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큰 창고’인 오쿠라가 가져간 문화재의 규모가 컸다는 이야기인가. 딴은 그렇다.

오쿠라 기하치로는 청·일 전쟁 때 무기와 군수물자를 팔아 거부가 된 인물이다. 구한말 부산에 진출, 고리대금업과 무역업을 겸한 오쿠라는 엄청난 양의 한국문화재를 일본으로 빼돌렸다.

‘대창(大倉)’ 오쿠라 기하치로(왼쪽 사진)이 가져간 이천 석탑(가운데)와 평남 대동군 율리사지 팔각탑(오른쪽).

‘대창(大倉)’ 오쿠라 기하치로(왼쪽 사진)이 가져간 이천 석탑(가운데)와 평남 대동군 율리사지 팔각탑(오른쪽).

특히 일제가 1915년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연답시고 철거한 경복궁 자선당(세자의 침전) 건물을 통째로 뜯어갔다. 또한 조선물산공진회 때 경기 이천 향교에서 경복궁으로 옮겨온 오층석탑과 평양 율리사지 팔각석탑도 가져갔다. 오쿠라는 그렇게 반출한 자선당 건물과 석탑, 유물 등으로 일본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오쿠라슈코칸’(大倉集古館·1917년 개관)을 꾸몄다. 오쿠라슈코칸의 조선실에 진열된 미술품이 3692점이나 됐고 서적도 1만5600여권에 이르렀다.

하지만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으로 자선당을 비롯한 슈코칸의 진열관이 모두 소실되었다. 오쿠라가 모았던 고려자기 등이 모두 불에 탔고, 석조물(이천 오층석탑과 평양 율리사지 팔각석탑)만이 남았다. 1996년 겨우 살아남은 자선당의 유구만이 반환되었을 뿐이다. 이 대목에서 쓸어간 남의 나라 문화재를 화재로 잃어버린 오쿠라의 죄상을 필설로 다할 수 없다. 찾아오고 싶어도 찾아올 수 없게 만들어버린 죄를 어지 용서할 수 있겠는가.

오쿠라슈코칸에 옮겨진 경복궁 자선당 건물(위 사진). 1923년 간토대지진으로 불에 타서 유구만 남아있다가(아래 사진) 김정동 목원대교수가 찾아냈으며,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1996년 반환됐다.

오쿠라슈코칸에 옮겨진 경복궁 자선당 건물(위 사진). 1923년 간토대지진으로 불에 타서 유구만 남아있다가(아래 사진) 김정동 목원대교수가 찾아냈으며,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1996년 반환됐다.

■‘작은 창고’의 묻지마 싹쓸이 수집

그렇다면 ‘작은 창고’(小倉)인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어떤가. 그 역시도 어마어마한 수의 한국문화재를 쓸어간, 악명이 높은 자이다. 오구라는 일본에서 아버지의 뇌물수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생활을 한 뒤 ‘한국행’을 택했다. 당시 ‘한국행’을 택한 일본인들은 대부분 불량도항자들이었다. 일본에서 발붙일 곳이 없던 자들이 한국행 배를 탄 것이다.

오구라는 부동산투기와 전기사업으로 떼돈을 벌어 유명인사로 행세했다. 수재의연금을 내고 영남지역의 명망가로 평가됐다. 이토 히로부미의 유묵을 5만엔이라는 거금을 들여 구입했고, 닥치는대로 수집한 한국문화재를 특별전에 출품하기도 했다.

오구라는 부동산투기와 전기사업으로 떼돈을 벌어 유명인사로 행세했다. 수재의연금을 내고 영남지역의 명망가로 평가됐다. 이토 히로부미의 유묵을 5만엔이라는 거금을 들여 구입했고, 닥치는대로 수집한 한국문화재를 특별전에 출품하기도 했다.

한국으로 건너온 오구라는 막 개발붐이 일어난 대구에서 ‘부동산 투기’로 큰 돈을 번 뒤 전기사업에 뛰어든다. 사업수완을 발휘한 오구라는 곧 전국의 전기사업을 통합 경영하면서 재력가로 급부상했다. 그렇게 떼돈을 모은 오구라가 눈길을 돌린 분야는 바로 문화재 수집이었다.

오구라는 “일본 고대사 중에 조선의 발굴 및 고미술품에 의해 비로소 분명하게 밝혀지는 부분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면서 문화재 수집 동기를 밝혔다.

‘전 울산’ 금동관(왼쪽 사진)과 ‘전 경주’ 금동관.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전 울산’ 금동관(왼쪽 사진)과 ‘전 경주’ 금동관.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실제로 오구라가 한국문화재 수집을 위해 2000만엔을 썼다고 한다. 이것은 당대의 수장가인 간송 전형필(1906~1962)이 투자한 돈의 10배에 해당되는 거액이다. 그렇다면 의문점이 있다.

아무리 일본인이지만 꼬박꼬박 제 돈 주고 문화재를 수집한 것이 그렇게 큰 죄가 되는가. 그것을 팔아넘긴 한국인들의 잘못이 더 큰 게 아닐까. 그러나 오구라의 행적을 추적하면 절대 그런 말이 나올 수 없다.

오구라 유물 가운데 ‘전 경주 금관총 출토 금제수식’이 눈에 띈다. 금관총 발굴 당시 도굴품을 오구라가 구입한 것이다.|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오구라 유물 가운데 ‘전 경주 금관총 출토 금제수식’이 눈에 띈다. 금관총 발굴 당시 도굴품을 오구라가 구입한 것이다.|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우선 오구라는 특정분야 문화재를 집중 구입한 수집가들과 달랐다. 장르불문, 출처불문으로 닥치는대로 긁어모은 ‘묻지마 싹쓸이’ 수집이었다. 불교문화재와 도자기, 목칠공예품, 회화, 전적, 서예, 복식까지….

그렇게 모은 유물 중 금동관모와 새날개모양관식, 금동신발 등 8건은 일본 중요문화재로, 견갑형 동기와 고운무늬거울(정문경) 등 31건은 일본 중요미술품으로 각각 지정됐다. 국립도쿄(東京)박물관은 오구라가 기증한 한국문화재 1030점 등이 이른바 ‘오구라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소장하고 있다.

전 창녕 출토 금동제품들. 1920~30년대 창녕 고분에서 무자비한 도굴이 자행되었고, 그중 상당수가 오구라 등에게 흘러들어갔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전 창녕 출토 금동제품들. 1920~30년대 창녕 고분에서 무자비한 도굴이 자행되었고, 그중 상당수가 오구라 등에게 흘러들어갔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거액으로 도굴품 마구 사들인 죄

물론 오구라가 도굴을 주도했거나 사주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오구라는 도굴범들의 장물을 너무도 후한 값을 치르고 긁어 모은 것으로 유명하다.

일례로 오구라는 경산의 한 농부가 들고온 ‘청자 죽작문주전자’(대나무와 참새 그린 주전자)를 5000원을 주고 구입했다. 당시 20칸짜리 기와집 가격이 4000원 정도였다니 농부가 받은 돈은 지금으로 치면 수십억원은 족히 되었던 것이다. 갑자기 돈벼락을 맞은 농부가 고향에 가서 떠벌리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경찰에 체포됐다가 오구라와의 대질 끝에 풀려났다는 일화가 회자됐다.

오구라 유물 중에는 고종과,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가 쓰고 입었던 익선관(위 사진)과 당의(아래 사진)가 보인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오구라 유물 중에는 고종과,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가 쓰고 입었던 익선관(위 사진)과 당의(아래 사진)가 보인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이런 소문이 퍼지니 모든 골동품상과 도굴꾼들이 오구라 집에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고령의 가야 고분 300여 기를 파헤친 악명높은 도굴꾼은 장물 전부를 오구라에게 건넸다고 한다. 이때 개당 2원씩 샀다는 ‘굽은옥’(곡옥)의 양은 두 되가 넘었다. ‘후하게 쳐줘서 고맙다’는 인사치레에 오구라는 “물건만 많이 가져오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개성경찰서장을 지낸 나가타(永田) 경시(총경급)는 개성 근무 당시 장물로 압수한 고려청자 5점을 자기 개인 소유로 둔갑시킨 뒤 이를 오구라에게 팔았다. 니가타는 10만원을 부른 평양 골동품상의 제의를 거절하고 ‘부르는 대로 다 준’ 오구라에게 넘겼다고 한다.

경주 계림보통학고 교장인 지바 젠노스케(千葉善之助)라는 자의 일화도 기막히다. 지바는 일요일마다 건장한 학생 몇몇을 불러 모은 뒤 미리 보아둔 신라 고분을 대놓고 도굴했다. 지바는 이 도굴품을 교장 관사에 옮겨두고 경주경찰서장과 오구라에게 연락하여 “유물 좀 보러 오라”고 했다. 그러면 오구라는 한밤중에 술을 사들고 찾아왔고, 마음대로 값을 계산한 뒤 경찰서장과 지바 교장에게 얼마씩 나눠주고는 유물을 가져갔다는 것이다. 교장이라는 작자가 학생들을 도굴에 동원했으니 참으로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것이다.

오구라 같은 자가 이렇듯 광적으로 한국 문화재를 싹쓸이했으니 엄청난 수의 유적이 파괴되고 유물이 도굴되는 악순환이 초래됐던 것이다.

1929년 10월29일 동아일보. 왕실유물이 유실되고 있다는 기사이다. 고종이 썼던 익선관 등이 언제 어떻게 사라져 오구라의 수중에 들어갔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29년 10월29일 동아일보. 왕실유물이 유실되고 있다는 기사이다. 고종이 썼던 익선관 등이 언제 어떻게 사라져 오구라의 수중에 들어갔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라진 금관총 유물 어디갔나 했더니

그런 탓에 절대 다수의 ‘오구라 유물’ 명칭에는 ‘전(傳)’자가 붙어있다. 출토지가 어디인줄 모르는, 혹은 밝힐 수 없는 유물이라는 뜻이다. ‘어디 어디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傳)하는 유물’이라는 소리다.

이렇게 ‘전(傳)’자가 붙는 유물의 결정적인 흠은 ‘출처, 즉 근본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유물의 출토지와 출토상황 등을 모르는 유물로는 역사를 복원할 수 없다. 그러니 ‘근본을 모르는 유물’은 문화유산로서의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예가 오구라 유물 중 ‘전(傳) 금관총 유물 일괄’이다.

금관총은 1921년 9월 주막집 확장공사 도중에 우연히 발견된 고분이다. 여기서 사상처음으로 신라금관을 비롯, 팔찌와 관모, 귀고리, 허리띠와 허리띠 장식 등 온갖 황금제품들이 출토됐다. 그러나 유적조사 전문가들이 신고한지 3일이 지나도록 도착하지 않아 현장은 혼란에 빠졌다. 결국 경험이 없는 경주 지역 조사원들이 불과 4일 만에 발굴을 해치우고 말았다. 이 혼란의 와중에 상당수 유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구라 유물’ 중에 있는 ‘전 금관총 출토유물’은 ‘금제수식’과 ‘금제흉식금구’, ‘금제도장구’, ‘곡옥’(굽은옥), ‘청령옥’(유리구슬옥) 등이다. ‘금제수식’은 금관테의 둘레나 귀고리에 붙인 중간장식이다. ‘금제흉식금구’는 장식에서 몇가닥으로 늘어진 구슬을 고정하려고 일정간격으로 끼운 부속구이다. ‘금제도장구’는 칼의 손잡이나 몸통에 돌려감은 얇은 금판이다. 모두 완성품의 부품들인데, 금관총 발굴 때 누군가 슬쩍 훔쳤다가 오구라에게 팔아넘긴 장물이었을 것이다.

‘전 동래 연산동’ 유물. 투구(왼쪽)와 갑옷(왼쪽 밑), 원두대도(오른쪽 사진)가 눈에 띈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전 동래 연산동’ 유물. 투구(왼쪽)와 갑옷(왼쪽 밑), 원두대도(오른쪽 사진)가 눈에 띈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왜 유물 앞에 ‘전(傳)’자가 붙었나 했더니

오구라 유물의 백미라 할 수 있는 금관(전 경남)과 금동관 2점(전 경주 및 전 울산), 금동관모(전 창령) 등도 모조리 ‘전’자가 들어가 있다. 도굴품이라는 얘기다.

이중 금관은 전형적인 신라 양식인 ‘출(出)자형’이 아니라 가야 양식인 ‘초화형(草花形)’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고령 출토품으로 전해지는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금관(국보 제138호)과 비슷하다”면서 “국내에 온다면 국보의 대접을 받기에 충분한 유물”이라고 평가했다.

통일신라시대 피리. 오구라 유물의특징은 장르불문, 출처불문인 것이다.|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

통일신라시대 피리. 오구라 유물의특징은 장르불문, 출처불문인 것이다.|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

또한 ‘전 창녕 금동관모’라는 명칭이 암시하듯 경남 창녕 또한 오구라의 집중 표적이 된 듯하다. 일본 학자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는 “다수의 창령고분군이 도굴로 거의 내용물을 잃었는데 그 부장품들은 대구 오구라와 이치다 지로(市田次郞) 등의 소장품이 됐다”(우메하라의 <조선고대묘제>, 1972년)고 밝혔다.

‘창녕’이라면 최근 도굴분 밑에 가려있다가 온전한 모습으로 확인된 무덤(63호분)에서 금동관 등 금제유물이 쏟아진 교동·송현동 고분군을 가리킨다. 오구라 유물 중 ‘전 창녕’ 출토품은 ‘금동관모’ 외에도 ‘금동제조익형관식’(새날개모양관장식) 등이 있다. 둘 다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

지금도 창녕 교동·송현동 고분에는 무자비한 도굴의 흔적이 역력하다. 도굴을 조장한 오구라 등이 고분군에서 불법으로 유출된 장물들을 수중에 넣었다는 얘기다. ‘전 동래 연산리 출토 유물’과 ‘경주 입실리 출토품’도 1920~30년대 마구잡이 도굴로 흩어진 뒤 오구라의 품으로 흘러들어갔다. 이밖에 ‘전 경주 출토품’으로 표기된 ‘견갑형 동기’는 현재까지 오구라 유물에만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어깨를 보호하는 갑옷의 한 부분처럼 생겼다고 해서 ‘견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청동기에는 두마리 사슴이 그려져 있는데, 그중 한마리는 등에 화살이 꽂혀있다.

7세기 백제시대 작품으로 여겨지는 금동일광삼존불상. 본존은 좌상으로 8엽의 연화문이 장식된 원형광배를 갖추었다.|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7세기 백제시대 작품으로 여겨지는 금동일광삼존불상. 본존은 좌상으로 8엽의 연화문이 장식된 원형광배를 갖추었다.|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고종이 썼던 익선관은 왜?

오구라의 유물 가운데는 좀체 이해할 수 없는 몇 점이 보인다. 익선관과 당의, 치마 등 조선왕실 최고위층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들이다. 실제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작성된 오구라 유물 목록에는 ‘익선관(임금의 곤룡포에 쓰는 관모)=이태왕소용품’이고, ‘당의, 치마, 속곳 등=이왕비 소용품’이라는 기록이 나란히 발견됐다. ‘이태왕’은 고종(재위 1863~1907)을, ‘이왕비’는 순종(재위 1907~1910)의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런 왕실유물들이 대체 언제 오구라의 수중에 넘어갔을까. 동아일보 1924년 10월19일 기사에서 실마리가 잡힌다.

“덕수궁에 보존된 왕실유물이 땅으로 새었는지, 하늘로 올라갔는지 사라져서 재작년에 남은 물건을 창덕궁으로 옮기고 재고품 목록을 만들었지만 이 역시 점차 없어졌다.”

나라 잃은 지도자의 유품마저 유물 사냥꾼의 손아귀 안에 잡히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이밖에 오구라 유물 중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전 공주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비롯, 금동일광삼존불상과 금동약사여래입상 등 93건의 불교문화재가 있다.

또 각종 고려자기와 분청사기, 조선백자 등은 물론이고 소반과 주칠장까지 다방면의 문화유물을 긁어 모았다. 회화에도 손을 뻗쳐 겸재 정선과 심사정, 최북, 김득신, 강세황, 이인문, 김홍도, 변상벽, 장승업 등의 작품으로 알려진 유물들도 소장했다. ‘괴물 불가사리’가 따로 없을 정도다.
 

수레모양 토기와 네 발 달린 항아리.|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수레모양 토기와 네 발 달린 항아리.|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해방되자 자기 집 마루밑에 숨기고간 유물

오구라는 해방 되기 10여 년 전부터 한반도에서 긁어모은 유물을 야금야금 일본으로 옮긴다.

그중 고운무늬청동거울(정문경)과 고려청자 등이 일찌감치 일본의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됐다. 아마도 도굴품 거래의 증거가 되는 유물을 일본으로 옮겨 혐의를 피하려 했을 것이다. 기막힌 일이 또 있었다.

8·15 해방 직후 오구라는 트럭 한 대를 국립부여박물관까지 몰고와서 “소장 문화재를 나에게 팔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단다. 그러자 박물관의 일본인 관리가 하도 어이가 없어 “아니 부여박물관 물건은 나라의 재산인데 어찌 당신한테 팔라고 하느냐”고 반문했단다. 그러자 오구라가 했다는 말이 기막히다.

“지금 나라가 어디 있느냐.”

오구라는 마지막까지 한국문화재를 쓸어모으려고 발악했던 것이다.

해방이 되자 오구라의 유물들은 ‘적산문화재’으로 한국측에 귀속될 처지였다. 오구라는 눈물을 머금고 700~800점을 대구부(시)에 기증했다. 그러나 오구라는 다 주지 않았다. 트럭 7대분의 문화재를 일본으로 실어날랐다. 그러고도 상당수 문화재를 700평에 달하는 대구의 저택 마루 밑과 천장에 숨겨두었다.

200여점의 유물은 과수원을 갖고 있던 심복(최창섭)에게 맡겨놓았다. 오구라는 최창섭에게 “10년 후에 다시 올테니 잘 보관하라”고 당부했단다. 당시 쫓겨가던 일본인들 중 상당수가 ‘곧 돌아올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자기 재산을 땅 밑에 묻어두었다고 한다. 이 또한 기막힌 일이다.

1964년 5월27일 옛 오구라 저택의 밑바닥에 숨겨놓았던 유물 142점이 전기공사 도중 발각됐다. 이 유물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인계됐다. 그런데 오구라는 “142점이 아니라 500여점을 마루 밑에 묻어놨다”느니, “소장품 중 8할을 대구에 두고왔으니 행방이라도 알고 싶다”느니 하면서 못내 아쉬워했다.

오구라 유물 중 가장 독특한 유물로 평가되는 견갑형 동기.  어깨를 보호하는 갑옷의 한 부분처럼 생겼다고 해서 ‘견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오구라 유물 중 가장 독특한 유물로 평가되는 견갑형 동기. 어깨를 보호하는 갑옷의 한 부분처럼 생겼다고 해서 ‘견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결국 돌아오지 못한 오구라 유물

그렇다면 일본으로 가져간 유물은 어찌 됐을까. 오구라가 일본으로 돌아올 때의 나이는 76살이었다.

모든 생활의 기반이 한국에 있었던데다 뭔가를 새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늙었다. 생활고에 시달린 오구라는 결국 수집한 문화재를 야금야금 팔아 생활비를 충당했다. 오구라는 1964년 당시로서는 천수를 다한 9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오구라 유물 중 남은 1030건의 한국문화재가 1981년 국립도교박물관에 기증된다.오구라 유물은 1965년 한일회담 당시 한국측이 반드시 가져와야 할 ‘반환목록’에 올랐다. 1958년 4차회담에서 한국측은 “오구라 컬렉션이 개인소장품이라지만 대부분이 도굴품이고 일본의 국보나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된 것이 많다”면서 “가치나 중요도로 비춰볼 때 당연히 반환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국정부는 1960년 제5차 한일회담에서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오구라 소장품을 보물로 지정하거나 유출 금지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총독부가 오구라의 유물 반출을 방관 혹은 허락한 뒤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한 게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측은 “오구라 컬렉션은 어디까지나 개인소장품(사유재산)”이라면서 미온적인 반응으로 일관했다. 끝내 1965년 한·일 양국이 합의한 반환문화재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다.

1964년 6월17일자 조선일보. 오구라가 살던 대구의 저택 마루 밑바닥에서 유물 142점이 발견됐다는 기사다. 오구라는 조만간 다시 돌아온다는 일념아래 40여 년 간 긁어모은 문화재들을 여기저기에 숨기고 귀국했다.

1964년 6월17일자 조선일보. 오구라가 살던 대구의 저택 마루 밑바닥에서 유물 142점이 발견됐다는 기사다. 오구라는 조만간 다시 돌아온다는 일념아래 40여 년 간 긁어모은 문화재들을 여기저기에 숨기고 귀국했다.

지금 국립도쿄박물관이 갖고있는 오구라 유물은 1030점에 이른다. 이중 일본의 국보·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것만 무려 39건이다. 그중 절대 다수가 출처, 근본을 잃어버린채 남의 나라 박물관 진열장이나 수장고에 놓여있는 처량한 신세이다.

끈질기게 문제를 제기하고 반환을 요구해야 할 ‘한국 문화재’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고보니 한국내에서 ‘오구라컬렉션’이라는 표현을 쓰는게 어떤지 모르겠다. 한반도를 도굴천지로 전락시키면서까지 한국문화재를 닥치는대로 쓸어간 자의 유물을 ‘오구라 컬렉션’으로 세탁해주는 셈이 아닐까. ‘오구라 도굴품’ 혹은 ‘오구라 도굴조장품’ 쯤으로 일컬어야 하지 않을까. 또하나 일본정부는 ‘개인소장품’이어서 반환이 난색을 표했단다. 그렇다면 1981년 이후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되었다면 이제는 ‘개인소장품’이 아니다. 정부차원이라면 얼마든 반환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셈이 아닌가.

<참고자료>

김동현·김삼대자·남은실·오다연·오영찬·이순자·이원복·이한상·정다움·최연식, <오구라컬렉션,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 국외소재문화재재단, 2014

정규홍, <유랑의 문화재>, 학연문화사, 2009

국립문화재연구소,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오구라 컬렉션 한국문화재>(해외소재문화재조사서 12책), 2005

황수영 편, <일제기 문화재 피해자료>, 국외소재문화재재단, 2014

이순우,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에 관한 조사보고서 1-2>, 하늘재 2002~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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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코로나 전쟁' 발발 1주기...종군기자가 돌아본 '인간과 인간의 전쟁'

[코로나 1년 성찰과 희망 찾기] ①

우리는 지난 1년간 코로나19에 얼마나 잘 대처해왔는지를 살펴보고 코로나가 일상이 된 현실을 어떻게 현명하게 타개해나갈지를 성찰해야 한다. 정치가 과학을 무시하거나 과학 위에 군림할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코로나19에 잘 대처한 국가와 그렇지 못한 나라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코로나 시대에 나타난 인간의 군상들은 어떠했는지 톺아보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코로나 불안에 빠진 사람들을 겨냥해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제품과 상품을 파는 장사꾼들과 이들의 홍보꾼으로 전락한 언론의 부끄러운 모습도 다시금 되짚어야 한다. 방역 우선이란 무기를 앞세워 인권을 짓밟고 민주주의를 훼손한 일은 없었는지 살피는 것은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만드는데 필수적인 성찰이다.

 

코로나가 바꾼 세상과 앞으로 바꿀 세상의 모습은 어떠할 지에 대한 통찰과 분석은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백신과 치료제 개발, 그리고 각자도생과 각국도생이 아니라 국제협력을 바탕으로 코로나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없는 한 코로나가 지구를 떠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하나씩 냉철하고 과학적으로 톺아보고 이를 토대로 코로나 일상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를 개인과 국가, 세계가 터득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코로나 전쟁에서 최후의 승리의 깃발을 꽂을 수 있는 지름길이다.


 

1. 코로나 전쟁 1년, 종군기자의 주마간산기(走馬看山記)


 

1년 만에 6천2백만 명 확진, 145만 명 사망


 

2019년 12월 1일 인간은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로운 바이러스와 맞닥뜨렸다. 전문가들은 최초의 코로나19 환자, 즉 제로 환자(Patient Zero)가 2019년 12월 1일에 나왔다고 보고 있다. (Huang, Chaolin; Wang, Yeming; Li, Xingwang; Ren, Lili; Zhao, Jianping; Hu, Yi; Zhang, Li; Fan, Guohui; Xu, Jiuyang; Gu, Xiaoying; Cheng, Zhenshun; Yu, Ting; Xia, Jiaan; Wei, Yuan; Wu, Wenjuan; Xie, Xuelei; Yin, Wen; Li, Hui; Liu, Min; Xiao, Yan; Gao, Hong; Guo, Li; Xie, Jungang; Wang, Guangfa; Jiang, Rongmeng; Gao, Zhancheng; Jin, Qi; Wang, Jianwei; Cao, Bin (February 2020). "Clinical features of patients infected with 2019 novel coronavirus in Wuhan, China". The Lancet. 395) 

나중에 이 새로운 바이러스에 사스코로나바이러스2(SARS-CoV-2)란 이름을 붙였다. 이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중국에서 그 모습을 처음 드러냈다.


 

중국은 2002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이란 신종 감염병이 등장했을 때처럼 자신들이 미지의 병원체한테서 공격 받은 사실을 숨겼다. 병원체의 은밀한 침입을 눈치 채지 못한 인간은 이들의 치명적 공격에 쓰러지는 사람이 잇달아 나오고 나서야 새로운 감염병이 유행하고 있음을 알렸다. 이것이 인류에게 얼마나 치명타를 가할지에 대해 당시 중국은 예상하지 못했다.


 

1년 만에 6200만 명이 넘는 인류가 코로나19에 걸렸다. 사망자는 145만 명이 넘는다. 한두 명의 감염자가 이처럼 짧은 기간에 아무 장애물 없이 마구 밑으로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이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끝은 창대할 것이 분명하다. 그 끝이 언제가 될지 아는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 명도 없다. 바이러스가 생겨나고 인간의 몸에서 개체수를 불리는 것은 신의 손이 저지른 일이 아니기에 신도 모르는 일이다. 인간이 코로나 발발 1주기를 맞아 여전히 불안해하는 까닭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불확실성에 있다.


 

중국 최초 보고, WHO 팬데믹 선언 모두 늦어 위기 자초


 

세계보건기구(WHO)는 3월 11일 코로나19를 세계적 대유행병, 즉 팬데믹으로 선언했다. 하지만 중국이 자신의 국가에서 치명적인 신종 감염병이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국가들에 드러내는 공표가 늦었던 것처럼 팬데믹 선언 또한 상당히 늦었다.


 

감염병 퇴치는 전쟁과 같은 것이다. 아니 전쟁이다. 초전에 상대방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면 공격자들은 파죽지세로 몰아붙인다. 특히 상대방이 결정적이고 강력한 무기를 지니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코로나19는 실은 자신이 침입한 인간이란 숙주 몸 안에서 본격적인 증상을 나타나게 만들기 전에 이미 다른 숙주를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바이러스의 놀라운 특성을 감염병이나 바이러스 전문가조차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증상 감염자를 인간 집단에서 구별해 이들이 타인에게 전파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은 쉽지 않다.

 

코로나, 비장의 무기인 무증상 전파에 초토화


 

이런 능력을 지닌 바이러스와의 전투에서 인간이 승리하기는 정말 어렵다. 코로나19는 이미 오래 전에 일일생활권이 된 지구촌에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중국을 벗어나 인근 아시아 국가는 물론이고 미국, 유럽 등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유럽에서는 3월부터 코로나 유행이 본격화했다. 유럽은 6백여 년 전 중앙아시아에서 시작한 선페스트, 즉 흑사병이 이탈리아에 상륙해 불과 4~5년 사이(1347~1351년)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 가량의 목숨을 앗아간 아픈 역사를 지녔다. (<전염병과 역사> 셀던 와츠 지음, 태경섭,한창호 공역, 모티브 북, 2009.) 코로나19는 그 전파 속도가 흑사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삽시간에 유럽 전역을 휩쓸었다. 각 나라는 공포와 불안의 나날을 보냈고 지금도 2차 대유행을 겪고 있다.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 등 북미와 브라질 등 중·남미, 인도 등 세계 곳곳은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코로나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다. 경제가 마비되고 의료체계가 붕괴됐다. 병원 문턱을 넘어보지도 못하고 숨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제대로 된 장례도 치르지 못한 수많은 주검들이 집단 매장됐다. 병원이나 장례식장에 안치할 수 없는 주검들을 냉동 트럭에 보관하거나 길거리에 방치하는 나라들도 속출했다.


 

기저질환자와 노인에 치명적, 사망자 급증


 

코로나는 특히 기저질환이 있거나 면역력이 약한 노인 등에게서 치명적 형태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의료 선진국이자 복지 선진국이었던 유럽의 많은 나라는 이미 고령사회여서 특히 많은 사망자가 나왔다. 브라질, 인도 등 개발도상국 또한 치명적 감염병에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 미비와 열악한 의료 자원과 체계로 많은 사망자를 내고 있다.

 

중국에서는 유행 초기 우한에서 걷잡을 수 없이 코로나가 확산하자 1천만 명이 넘는 도시 전체를 봉쇄했다. 인류 역사에서 그동안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세계 곳곳에서, 선진국에서도 도시 전체를 봉쇄하거나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검역차단(콰란틴)이 이루어졌다.


 

세계 각 나라는 자국에서 코로나가 유행하는 것을 막거나 줄이기 위해 아예 국경을 폐쇄하거나 사실상 문을 걸어 잠그는 강력한 대응을 하고 있다. 이는 인류 역사상 보기 어려웠던 모습이다. 사실상 세계 관광이 중단됐다. 국가 간 인적 교류도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문화, 스포츠 교류 등은 사실상 멈췄다. 사람이 아닌 물건과 상품의 교역만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다.


 

올림픽 연기, 외국 관광 사라지고 마스크 사회 도래


 

감염병 때문에 올림픽 대회가 연기됐다. 내년에 열릴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세계 각 나라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 새로운 문화가 되었다. 잠자거나 집에서 혼자 있을 때만 제외하고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고 지내는 일상이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외출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서 공공장소를 드나들거

나 대중교통을 타면 범죄자 취급을 받는다. 
 

 

중국이나 한국 등에서는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려면 QR코드를 찍거나 출입명부를 작성해야만 한다. 건물을 출입하려면 먼저 열화상카메라 앞에 서야 하고 여기서 체온이 37.5도 이하가 되어야 한다. 수업도 유행 정도에 따라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병행하고 있다.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경기가 침체되고 실업자가 폭증하고 있다. 특히 음식점과 관광산업 등은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다. 배달 문화 등 비대면 사회가 새로운 표준이 되었다. 이런 변화 때문에 인공지능과 정보통신, 로봇 등 새로운 산업기술이 각광을 받고 있다. 각 나라들은 이런 기술 개발과 발전에 집중 투자를 하고 있다.


 

코로나 전쟁에서 심각한 타격을 받지 않은 나라들은 대체적으로 과학적인 방역 전략을 제때 세우고 이를 국민들이 잘 실천해왔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감염병 유행에 대비하는 시스템을 잘 갖춘 국가 또는 신속하게 준비한 국가는 상대적으로 혼란을 적게 겪고 있다. 베트남, 뉴질랜드, 대만, 한국, 일본 등이 그런 나라에 속한다.

 

코로나, 개인 자유 구속과 국가주의 강화란 과제 던져


 

코로나 1년이 인류 사회에 드리운 그림자는 여전히 짙다. 또 코로나가 우리에게 던진 여러 숙제를 아직 풀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는 사회경제적 약자와 안전 약자에게 더 가혹하게 다가오고 있다. 이들은 감염과 사망 위험뿐만 아니라 실직과 소득 감소의 위험이 높은 영순위 집단들이다.


 

이들의 보호와 방역뿐만 아니라 경제 침체를 막기 위한 국가의 역할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이는 역으로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고 전체주의, 국가주의의 강화를 부채질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코로나 일상 시대에서 어떤 것이 바람직한 표준인지 논란이 될 수 있는 지점이다.


 

코로나 대유행 시대는 혼돈의 시대다. 무엇이 우리가 좆아야 할 표준인지 성급하게 제시하는 것은 위험하다. 한 국가에서 표준으로 정하고 있는 것을 다른 나라가 그대로 본떠 시행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중국과 한국, 미국, 유럽 국가들이 지닌 국가 정체성과 인권 존중, 민주주의 수준, 문화와 역사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한 국가에서 잘 작동된다고 해서 다른 나라에서 잘 작동할 것이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 전쟁, 지난 1년은 인간과의 싸움


 

지금까지의 코로나 전쟁, 즉 1년간 치른 전쟁은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었다. (<코로나 전쟁, 인간과 인간의 싸움> 안종주, 동아앰엔비, 2020.) 그동안 코로나 확산 방지는 바이러스와 직접 싸우는 것이 아니라 코로나에 걸린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지 않도록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쓰기 등을 얼마나 잘 실천하느냐, 즉 인간의 행태에 달려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코로나 백신과 치료제가 본격 나오기 시작할 것으로 예상하는 2년차부터는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싸움과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 병행하는 과도기를 거쳐 백신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시기가 되면 그때는 코로나 전쟁이 바이러스와의 정면 승부가 된다. 이 단계에서 인간이 승리하면 인간과의 싸움 때 나타났던 비대면 등 많은 문화와 행태가 바뀔 것임이 분명하다. 서서히 코로나 이전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때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 희망이다. 그 희망은 인간에게 달려 있다.


 

필자 안종주는 최근 코로나 사태를 분석한 책으로 <코로나 전쟁, 인간과 인간의 싸움>, <코로나19와 감염병 보도 비평>을 낸 저자입니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113015033004176#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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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하고 상호 수용 가능한 합의 조속 도출’ 합의

한미, 미국 대선 후 첫 방위비분담협정 화상협의 개최

  • 기자명 김치관 기자 
  •  
  •  입력 2020.12.01 02:17
  •  
  •  수정 2020.12.01 02:22
  •  
  •  댓글 0
 
정은보 한·미 방위비분담협상대사가 미국 대선 이후 처음으로 30일 밤 도나 웰튼(Donna Welton) 미 국무부 방위비분담협상대표와 제11차 한·미 방위비분담특별협정 화상협의를 가졌다. [사진제공 - 외교부]
정은보 한·미 방위비분담협상대사가 미국 대선 이후 처음으로 30일 밤 도나 웰튼(Donna Welton) 미 국무부 방위비분담협상대표와 제11차 한·미 방위비분담특별협정 화상협의를 가졌다. [사진제공 - 외교부]

제11차 한·미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 협의가 30일 화상회의 형식으로 진행돼 협상 현황을 점검했다. 여전히 트럼프 행정부의 임기가 남아있지만 미국 대선 결과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외교부는 30일 밤 “정은보 한·미 방위비분담협상대사와 도나 웰튼(Donna Welton) 미 국무부 방위비분담협상대표(정치군사국 선임보좌관)는 공평하고 상호 수용 가능한 합의를 조속히 도출하기 위하여 긴밀히 협력해나가기로 합의하였다”고 밝혔다.

지난해 9월 시작된 제11차 협정 협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과도한 인상요구로 지난 3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7차 회의 이후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한미 양측은 지난해 분담금(1조389억원)에서 13%가량 인상안에 잠정 합의하기도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거부로 타결짓지 못한 채 시간을 끌어왔다. 이에따라 주한미군 한국인 근로자 4,000여 명이 처음으로 강제 무급휴직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우리 정부가 올 연말까지 급여를 지원키로 해 시행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화상협의는 내년 1월 들어설 조 바이든 행정부와의 본격 협상을 앞둔 상황 점검에 해당될 것으로 보인다.

외교부는 이번 화상협의에 한미 양측은 협상대표 이외에 한측에서 외교부·국방부 및 미측에서 국무부·국방부 관계자들이 협의에 참여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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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할 11가지 이유

  • 기자명 조혜정 기자
  •  
  •  승인 2020.11.30 23:34
  •  
  •  댓글 0
 
 

국가보안법 7조부터 폐지운동 시민연대 기자회견

▲ '국가보안법 7조부터 폐지운동 시민연대'가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있다.[사진 : 시민연대 제공]
▲ '국가보안법 7조부터 폐지운동 시민연대'가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있다.[사진 : 시민연대 제공]

국가보안법 제정 72년째를 맞이하여 <국가보안법 7조부터 폐지운동 시민연대>가 오늘 오전 11시 헌법재판소 앞에서 <국가보안법 7조폐지 법안의결 및 위헌심판 촉구>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현 21대 국회에서는 지난 10월 22일 이규민의원의 대표발의로 15명의 국회의원이 함께 국가보안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발의한 상태이다(의안번호 4605). 헌법재판소에서는 국가보안법 7조 위헌심판청구사안이 현재 심의중에 있다.

▲ 국가보안법 폐지 기자회견에 참가한 지보당 김재연 상임대표와 대학생들[사진 : 시민연대 제공]
▲ 국가보안법 폐지 기자회견에 참가한 지보당 김재연 상임대표와 대학생들[사진 : 시민연대 제공]

이날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국회에서는조속히 국가보안법 7조부터 폐지 법안을 의결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헌법재판소를 향해 심의중인 국가보안법 7조 위헌심판청구사안을 속히 위헌 판결하여 헌법정신을 수호해야 할 것을 촉구했다. 

▲ 국가보안법 폐지 1인 시위중인 진보당 김재연 상임대표 [사진 : 시민연대 제공]
▲ 국가보안법 폐지 1인 시위중인 진보당 김재연 상임대표 [사진 : 시민연대 제공]

기자회견 후 김재연 전의원이며 현 진보당상임대표가 1인시위를 진행했다. 대학생들 역시 1인 시위에 동참했다.

아래는 <국가보안법 7조부터 폐지운동 시민연대>가 발표한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할 11가지 이유이다.

▲ 국가보안법 폐지 기자회견에 참가한 대학생들[사진 : 시민연대 제공]
▲ 국가보안법 폐지 기자회견에 참가한 대학생들[사진 : 시민연대 제공]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할 11가지 이유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치안유지법(1941년 시행)은 “국체를 변혁할 목적”을 처벌하며, 국가보안법(1948년 12월 1일)은“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할 목적”을 처벌한다. 치안유지법은 독립운동을 하는 목적을 처벌했고, 국가보안법은 통일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의 목적을 처벌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행위가 아니라 생각을 처벌하는 법은 없다. 그동안  유엔인권위원회와 유엔 시민적 정치적 권리규약위원회, 국제 엠네스티 등 국제사회에서는 반인권적인 국가보안법에 대한 폐지를 권고했다. 우리나라의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권고한 바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 특히, 국가보안법 7조(찬양·고무)부터 즉각 폐지해야 한다.

1.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억울한 피해자를 양산한다. 
현대사회는 SNS상에서 세계적인 정보가 공유되고 북에 대한 정보도 실시간으로 넘치기 때문에 수많은 개인적인 관심과 호기심등 다양한 목적으로 습득한 정보들에 대하여 검사나 판사가 목적을 판단하여 처벌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2. 북맹을 조장하여 평화통일을 가로막는다.
통일을 지향하며, 평화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것은 헌법에서 명시하고 있는 국가사업이다(제4조).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북을 알고 교류해야 한다. 7조는 북에 대한 정보를 알고 탐구하는 것을 단죄하기 때문에 통일교육이 위축되고, 통일관련 토론은 불가능하다.

3. 민주화운동의 경력을 가진 사람들을 선택적으로 처벌하는데 악용한다.  
국제교류와 여행이 자유로운 시대이다. 국제여행이나 국제학술대회나 국제협력사업의 과정에서 북쪽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남북한 동시수교국이 158국 정도). 만약 북쪽 사람들과 사업을 하거나 만날 경우, 학생운동이나 민주화운동경력을 가진 사람을 색안경을 쓰고 선택적으로 조사·처벌하는 것으로 악용할 수 있다(사업가 김호의 사례)   

4. 언제나 모든 국민이 고소·고발에 시달릴 수 있으며 현재도 진행중이다.
문재인대통령은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확고하다.’는 발언으로 국가보안법 7조 위반으로 고발당함(2020년). 유시민노무현재단이사장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에 대한 ‘계몽군주’발언도 국가보안법 7조위반으로 고발당함(2020년). 인디밴드의 프로듀서 박정근씨는 우리민족끼리트위터계정을 비판하며 리트윗하여 국가보안법 7조위반으로 구속되어 재판받았다(2012). 

5.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인 비판적 사고와 다양한 의견표명을 불가능하게 한다.
자유로운 생각이나 비판적인 발언에 대해서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말을 들으면 입을 다물게 되어, 전체주의적 사고를 조장한다. 무상급식이나 무상의료, 부의 불평등 문제, 보편적 복지제도 등에 대한 정책이나 사학비리에 대한 문제제기 등에 대해서도 빨갱이로 매도한다.

6. 정부의 성향에 따라 다르고, 사법처벌이 달라질 수 있다.  
정부의 성격과 평화통일정책 추진의지에 따라 사법부의 처벌을 받는 피해자가 나올 수 있다. 남북교류협력사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정권이 바뀌면서 탄압받고 사법처리될 수 있다. 정권의 성격에 따라 민주화 운동의 경력도 빨갱이 경력으로 조롱당하고 가중 처벌을 받음. 

7. 예술가들의 표현이 고소·고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제작진들은 국가보안법 고발과 수사를 각오함. 영화 ‘강철비2’에서 북한 위원장 역할로 꽃미남 배우를 기용했다는 것 등을 7조 위반으로 감독과 제작자가 고발당함.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TV드라마 ‘사랑의 불시착’도 국가보안법 7조 위반으로 고발당함. 

8. 우리의 현대사를 제대로 교육하기 어렵다. 
4·3제주항쟁, 부마항쟁, 5·18민주화 운동 등 우리 현대사의 시대적인 사건을 다룰 때, 당시 정부에 대한 비판과 미군정에 대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내용을 가르칠 때, 당시 정부와 미군에 대한 비판을 해야 하는데, 심리적인 불안감으로 제대로 교육하기 어렵다. 당시 유행했던 민중가요를 부르는 것도 7조 위반으로 처벌될 수 있다.

9. 내부검열( 처벌이전에 생각의 검열체제로 작동) 교육권과 학습권을 침해한다.
심리적으로 38선을 갖고 살고 있다. 해야 될 생각과 하지 말아야할 생각을 구분하는 자기검열, 내부검열이 일상화되어 있다. 어린학생들의 사고력을 제한하고 상상력을 제한시킨다. 창의력은 갇힌 사고에서는 나오지 않고 열린 사고와 도전의식에서 나온다. 
 
10. 증오와 혐오문화를 유포시키는 반교육적이고 비인간적인 법이다. 
민주시민교육의 기본인 ‘다름’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위배하고 혐오와 배제의 논리를 유포한다. 북에 대해서 긍정적 정보나 사실 확인의 과정도 유죄가 될 수 있으며(고무찬양혐의), 북을 바로 알기 위해 자료를 탐색하고 연구하는 과정을 범죄행위(이적표현물 소지 혐의)로 규정하고 있다. 반면에 북에 대한 막연한 비난과 욕설은 무한대로 용인한다.

11. 국가보안법 7조는 정치공작의 최후 안전장치, ‘보험용’ 기소의 수단이다. 
수사기관은 사찰 및 내사를 거쳐서 간첩죄, 내란죄, 이적단체 구성 가입 등의 사건을 만드는데, 주거와 직장 등을 무차별적으로 압수수색하고 서적과 문서, 컴퓨터와 USB에 저장된 파일들을 수거한다. 이 자료들은 다른 혐의가 무죄가 될 경우에 대비하는 ‘보험용’으로 국가보안법 7조 1항과 5항을 끼워 넣어서 기소했다. 노래 한 곡을 부르거나 책 한 권을 서재에 가지고 있었던 피해와 낙인은 너무나 혹독했다. 민중가요‘혁명동지가’를 제창했던 안소희파주시의원은 의원직을 박탈당했고, 서재에 <민족의 세시풍속 이야기>를 두었던 박미자교사는 30년 일한 교단에서 파면되었고 연금도 박탈당했다. 

* 특히 국가보안법 7조는 그동안 독재정권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였다. 민주화운동이나 평화통일운동을 지향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가혹하게 탄압하고 억울한 피해자를 양산했다. 결국 민주주의 사회로 가는 길을 막고 있다. 폐지해야 맞다. 
* 북도 보안법이 존재하는데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있다. 그런데, 남북교류와 협력에 걸림돌이 되는 법이 있다면, 우리가 먼저 개정하고 선제적으로 북에 대해서도 민주적 요구를 할 수 있다. 우리가 먼저 7조부터 폐지해야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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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1981년 2월, 광주는 ‘전두환의 미소’를 봤다

입력 : 2020.11.30 06:00 수정 : 2020.11.30 06:00 

전두환씨 대통령 시절 광주 방문 사진 69점 입수 

[단독]1981년 2월, 광주는 ‘전두환의 미소’를 봤다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가 5·18민주화운동 9개월 뒤인 1981년 2월18일 광주 동구 금남로를 지나며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고 있다(위 사진). 하지만 제12대 대통령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광주를 방문한 대통령 행렬을 바라보고 있는 시민들은 전씨를 향해 손을 흔들지 않고 있다. 금남로는 5·18 당시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숨진 곳이다. 이 사진들은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에 정보공개를 청구해 받았다.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가 5·18민주화운동 9개월 뒤인 1981년 2월18일 광주 동구 금남로를 지나며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고 있다(위 사진). 하지만 제12대 대통령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광주를 방문한 대통령 행렬을 바라보고 있는 시민들은 전씨를 향해 손을 흔들지 않고 있다. 금남로는 5·18 당시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숨진 곳이다. 이 사진들은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에 정보공개를 청구해 받았다.

5·18 유혈진압 9개월 뒤 ‘개선장군’처럼 금남로서 손 흔들어
시민들 ‘싸늘’…30일 광주지법 사자명예훼손 혐의 선고공판
 

번호판 대신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 표장’을 단 검정 차량 행렬이 도로를 지나고 있다. 승용차 뒷좌석에 탄 남성은 차창 유리를 내리고 환한 표정으로 손을 흔든다. 행렬이 지나고 있는 곳은 광주 동구 금남로.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수많은 시민이 숨졌던 곳이다.

‘개선장군’처럼 광주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남성은 5·18학살의 책임자로 꼽히는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89)다. 금남로를 위풍당당하게 ‘행차’하고 있는 전씨의 모습은 5·18 유혈진압 9개월 뒤인 1981년 2월18일 찍혔다.

경향신문은 29일 정보공개를 청구해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에서 전씨가 재임 당시 광주를 방문한 사진 69점을 받았다. 전씨의 사진들은 당시 공보처 홍보국 사진담당관이 촬영한 것이다.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사진을 보면 전씨는 1980년 9월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부터 매년 수차례 광주를 찾았다. 부인 이순자씨(81)와 동행한 행사도 여럿이었다. 눈에 띄는 것은 5·18 당시 광주시민들이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사망한 금남로를 전씨 일행이 지나는 모습이다.

이 사진들은 ‘대통령선거인’에 의한 간접선거로 치러진 1981년 2월25일 ‘제12대 대통령선거’를 1주일 앞두고 있던 시점에 촬영됐다. 사진 속 ‘400만의 화합 약진 새 전남, 새 희망 큰 광주’라고 쓰인 아치형 홍보물이 설치된 곳은 당시 금남로에 있던 광주은행과 광주가톨릭센터 앞이다. 광주가톨릭센터에는 현재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들어서 있다. 사진 제목은 ‘광주시민 가두 환영인파’이지만 금남로에 선 시민들은 전씨를 향해 손을 흔들지 않는다.

전씨는 1981년 2월18일 포항제철 제4기 확장공사 준공식에 참석한 뒤 광주를 찾아 민주정의당 전남도지부 관계자들을 만났다. 경향신문은 이튿날 보도에서 전씨가 이 자리에서 “지난해의 광주사건과 관련된 구속자는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나는 대로 최대한의 관용조치를 베풀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5·18 당시 보안사령관과 합동수사본부장·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하며 사실상 권력을 장악해 5·18 유혈진압의 최고 책임자로 꼽히는 전씨가 사과는커녕, 오히려 ‘관용’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 같은 전씨의 태도는 5·18 이후 40년간 이어지고 있다.

1997년 대법원에서 군사반란과 내란목적 살인 등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그해 12월 특별사면된 전씨는 5·18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있다. 2017년 출간한 회고록에서는 5·18을 부정하고, 5·18유공자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1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전씨는 회고록에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해 “신부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해 2018년 5월 기소됐다. 지난 4월 광주 법정에 출석한 전씨는 “내가 알기로는 헬기에서 사격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검찰은 지난달 결심공판에서 전씨에게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전씨에 대한 1심 선고공판은 30일 오후 2시 광주지법에서 열린다. 전씨도 법정에 출석해야 한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11300600005&code=940100#csidx0ac76796ef6d83499fb4846c7e63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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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전화 "내가 점심 사면 안 되겠심니꺼?"

마산 민간인학살 유족 노상도 노현섭 형제의 고난기20.11.30 08:40l최종 업데이트 20.11.30 08:40l박만순(us2248)

 5.16 군사정변.
▲  5.16 쿠데타 당시 박정희.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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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릉'

"예, 마산유족회입니더." "지는 부산기지사령관 박정희라 캅니더." "그런데예?" "내도 유족인데, 점심 사면 안 되겠심니꺼?"

'동래유족회'가 결성되던 1960년 8월 25일 오전 마산유족회 사무실로 걸려 온 전화였다. 당시 마산유족회는 마산 중앙동 부두노조 사무실에 공간을 마련해 사용하고 있었다. 마산유족회의 노현섭은 자유노련 소속 부두노조 위원장이었다.

 

유족회로서는 군인이, 더군다나 고위 장성이 관심을 갖고 식사를 하자고 하니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무슨 의도가 있는가 하는 의심에 실제로 식사에는 응하지 않았다.

노현섭은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6월 12일 마산유족회를 결성했다. 그는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의 전화를 받고 한껏 고무됐다. 박정희는 대구 10월 항쟁 사건으로 희생된 박상희의 친동생이었다.

박상희의 아내 조귀분은 선산유족회 부녀부장으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조귀분은 경북 지역 유족회 활동에 적극 발품을 팔았다. "내 시동생이 부산기지사령관이라예. 울산에서 유해 발굴할 때 트럭도 내줬다 아입니꺼." 조귀분은 동네방네 다니며 자신의 시동생 박정희를 칭찬했다.

야누스의 얼굴을 한 박정희

노현섭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족회 임원들은 박정희를 같은 유족이자 한 식구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너무나 순진한 생각임이 밝혀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지 이틀 후인 1961년 5월 18일 전국유족회장 노현섭(1921년생)은 영장도 없이 202방첩대에 다짜고짜 연행됐다. 그는 마산교도소와 육군교도소를 거쳐 1961년 8월 23일 서울 서대문교도소로 이감됐다. 이후 그는 '혁명재판부'로부터 징역 15년을 선고받았고 1972년 4월 11일 가석방될 때까지 11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박정희의 놀라운 변신이었다. 박정희는 4.19 혁명 이후에는 민주화세력이 대세라고 판단하고 '피학살자유족회'에 손길을 내밀었다. 하지만 5.16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후에는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의심하는 미국을 안심시키기 위해 제1의 국시로 '반공(反共)'을 내걸었다. 그런 연유로 피학살자유족회 임원들을 반국가행위로 전부 구속해 사형부터 7년까지 골고루 선고했다.

동생은 트럭에서 뛰어내리고, 형은 괭이바다서 수장
 
 일본 유학시절의 노상도 형제.  오른쪽 앉은 이가 노현섭, 그 뒤가 노상도.
▲  일본 유학시절의 노상도 형제. 오른쪽 앉은 이가 노현섭, 그 뒤가 노상도.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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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사무소로 부역하러 나오시오"라는 전갈을 받은 노상도는 삽과 소쿠리를 들고 면사무소로 갔다. 하지만 면사무소에는 구산지서 경찰들이 대기시켜 놓은 트럭만 있었다.

경남 창원군 구산면 일대의 보도연맹원들이 전부 소집되자 구산지서 지서장은 '출발' 신호를 내렸다. 보도연맹원들을 태운 GMC 트럭이 움직이자 노현섭의 마음도 출렁거렸다.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는 것일까?'라는 의구심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트럭이 길모퉁이를 돌 때였다. "저 놈 잡아라!" "탕탕탕" 트럭에서 뛰어내린 노현섭은 죽기 살기로 뛰었다. 경찰들은 그를 쫓지 않았다. 나머지 보도연맹원들을 데려가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당시 트럭에 같이 탔던 노상도는 동생의 탈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집안에 한 명은 살아남아야 했다. 트럭은 마산시내 강남극장 앞에서 멈췄다. 이들은 다시 마산형무소로 이송되었다. 6.25가 발발한 지 20일 만인 1950년 7월 15일의 일이었다.

마산형무소는 나무로 된 단층 건물로 기결수를 수용하는 1사와 결핵환자를 수용하는 병사인 2사 등을 모두 합쳐 수용 인원이 300명밖에 되지 않았다. 보도연맹원들이 몰려들어 형무소에는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대다수 보도연맹원들은 형무소 마당에 가마니를 깔고 노숙을 했다. 이날부터 특무대(CLC) 대원들의 심사가 진행되었다. '골'로 갈 사람과 '석방' 될 사람의 분류작업이었다.(김기진, 『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

1~2주일간 형무소에서 진행된 분류작업 이후 전차상륙함(LST)에 실려 괭이바다에서 수장된 마산시 보도연맹원들과 형무소재소자들은 모두 1681명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기겁할 일이 발생했다.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 중에는 여성이 50명이었다. 이들을 심사하던 CLC 대원 4~5명이 이들을 강간했다. 성폭행을 당한 여성 47명은 석방됐지만 완강히 거부한 3명은 형무소 인근에서 사살되었다. 이는 1960년 4.19 혁명 후 제4대 국회 '양민학살특위 경남반'이 경남도청에서 진행한 증언 청취에서 증인 김용국이 진술한 내용이다. 

노현섭의 형 노상도는 1950년 8월 18일 마산지구계엄사령부고등군법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후 괭이바다에서 수장되었다. 동생은 트럭에서 뛰어내려 살아남았지만, 형은 괭이바다에서 학살된 것이다.

일본 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을 한 형제

"이놈아, 머리가 이기 뭐꼬!" 노상도는 길게 머리를 땋고 "하늘 천 땅 지"를 외는 동생 노현섭에게 꿀밤을 먹였다. 동생보다 열 살이 많은 노상도(1911년생)는 구산국민학교와 부산 동래중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일본 풍전중학교를 다니던 그가 방학 때 고향에 왔는데, 동생 현섭은 시대에 뒤떨어지게 천자문을 외우고 있었다.

상도는 일찌감치 동생을 일본에 데리고 갔다. 형은 와세다대를, 동생은 주오대학에 다녔다. 일제강점기에 형제가 모두 일본 명문대에 다닐 수 있었던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상도·현섭의 아버지 노용환은 구산면에서 대구어장을 해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노용환의 재산 정도로 자식 둘을 일본 유학 보내기에는 버거웠다. 하지만 '교육만이 민족과 집안이 살 길'이라는 생각으로 노용환은 자식들을 가르쳤다.

형 노상도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노현섭은 귀국 후 마산부청(馬山府廳)에 근무하면서 아나키스트 운동에 몸 담았다.(홍중조·이상용, 『불세출의 노동운동가 소담 노현섭』)

해방 후 형 노상도는 마산고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구산면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후에 노상도는 단독정부 수립 반대투쟁을 했다는 이유로 1948년 4월에 포고령 2호 위반으로 구속됐다. 그는 징역 1년 5개월을 선고받아 만기출소했다. 이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됐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경찰에 예비검속되었다.

동생 노현섭은 마산공립상업중학교(현 용마고)에서 교직활동을 시작했다. 해방 직후에는 형 노상도와 함께 구산면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형의 명예 회복을 위해 발 벗고 나선 노현섭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정부는 6.25 당시의 보련(保聯) 관계자의 행방을 알려라!! 만일 죽였다면 그 진상을 공개하라!!"는 플랜카드를 들고 김용국군과 단 둘이서 침묵의 시위를 온 시내로 하였다. 1,600여 명의 행방불명자의 영혼이 내 가슴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노현섭 육필일기』)
 
1960년 5월 24일 노현섭과 김용국이 현수막을 들고 한 이날의 시위는 경남 마산 괭이바다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최초의 진실규명 외침이었다.

그는 그해 5월 25일부터 마산시 중앙동 마산자유노조 사무실을 연락사무소로 운영하고 <마산일보>에 광고도 했다. "6.25 사변 당시에 보도연맹 관계자로서 행방불명된 자의 행방과 그의 진상을 알고 관계 당국에 진정하고자 하오니 유가족께옵서는 좌기(左記)에 의하여 연락하여 주시옵기 자이 경망하나이다"라는 내용이었다. 민간인학살 피해 유족들은 노현섭을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노현섭은 진정서를 국회에 제출했다.(이창현, 『1960년대 초 피학살자유족회 연구』)

1960년 6월 12일 마산상공회의소에서 열린 '마산유족회 결성식'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노현섭은 유족들이 단결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1960년 8월 28일 부산상공회의소에서 '경상남도피학살자유족회연합회(경남유족회)'를 결성했다. 이후 1960년 10월 20일 서울 종로구 견지동 전 자유당 중앙당부 회의실에서 경남·북 유족 대표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유족회 결성대회'가 열렸다. 회장은 노현섭이 맡았다. 

아버지는 전쟁 때 수장... 아들도 간첩 누명
 
 위령제에서 인사말 하는 노치수 회장
▲  위령제에서 인사말 하는 노치수 회장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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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끽" 지프차에서 헌병들이 후다닥 내렸다. 헌병들은 노치영(1936년생)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와 이러십니꺼?" "너를 간첩죄로 체포한다." 노치영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헌병대에 끌려간 노치영은 구타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군 제대 후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그가 간첩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하소연해도 고문관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노치영 스스로도 답답했다. "내가 뭔 죄를 졌는지, 갈차 주이소." 차라리 자신의 간첩죄를 얘기해주면 승복하겠다는 말이었다.

수사관들은 노치영의 먼 친척뻘 아줌마의 남편이 월북해서 교육 후 간첩으로 남파되었는데 그가 "노치영에게 돈을 줬다"고 증언했다고 말했다. 순식간에 간첩 혐의자가 된 노치영은 오랜 고문과 수사, 재판 끝에 1962년 무죄석방되었다.

사실 노치영은 6.25 때 괭이바다에서 수장된 노상도의 아들이다. 그러다 보니 노치영은 마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했지만 신원조회에 걸려 불합격 처리되었다. 그가 간첩으로 내몰린 것은 아버지 노상도 사건과 무관할 수 없었다. 아버지를 잃은 설움과 국가로부터의 끊임없는 감시는 그를 평생 옥죄었다.(노치수 증언. 74세.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

아들의 무죄에 이어 아버지 노상도 역시 무죄를 선고받았다. 6.25 때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 무죄라는 것이다. 2020년 2월 14일 창원지법 마산지원의 재심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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