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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서해 사건은 우발적 사건, 파국으로 되풀이되지 않길 바란다"

공동조사 요구 묵묵부답, 국제 공론화 움직임에 맹비난

30일 북한은 관영매체 <조선중앙통신>에 '남조선(남한) 보수 패당의 계속되는 대결망동은 더 큰 화를 불러오게 될 것이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동족 대결 의식이 뼛속까지 들어찬 '국민의 힘'을 비롯한 남조선의 보수세력들은 '만행'이니, '인권유린'이니 하고 동족을 마구 헐뜯는데 피눈이 되여 날뛰"고 있다며 "저들의 더러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기회로 만들기 위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분주탕을 피우고 있다"고 비난했다.

 

북한이 이처럼 야당에 대해 날 선 반응을 보이는 배경에는 유엔에서 실제 이 사안이 거론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지난 23일(현지 시각) 토마스 오헤아 킨타나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은 유엔총회 제3위원회 원격회의에 출석해 북한에 대한 인권 현황을 보고하면서 해당 사안을 언급했다.


 

북한은 "그 누구의 '인권문제'까지 걸고들며 유엔을 비롯한 국제무대에도 확산시켜보려고 악청을 돋구어대고 있다"며 "남쪽에서 우리를 비방중상하는 갖은 악담이 도를 넘고 이 사건을 국제적인 반공화국 모략 소동으로 몰아가려는 위험천만한 움직임이 더욱 노골화되고있는 심각한 현실은 우리가 지금껏 견지하여 온 아량과 선의의 한계점을 또다시 흔들어 놓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사건 발생 이후 사과의 뜻을 담은 통지문을 청와대 앞으로 발송하고 시신 수습에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혔음에도, 국제사회에서 이 문제가 공론화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이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셈이다.

 

그러면서 북한은 해당 사안에 대해 남한에 우선적인 책임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북한은 "이미 남측에 통지한 바와 같이 우리는 서해 해상의 우리측 수역에 불법 침입한 남측주민이 단속에 불응하며 도주할 상황이 조성된 것으로 판단한 우리 군인이 부득불 자위적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데 대하여 알고도 남음이 있게 통보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번 서해해상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은 남조선 전역을 휩쓰는 악성비루스(바이러스)로 인해 그 어느때보다 긴장하고 위험천만한 시기에 예민한 열점 수역에서 자기측 주민을 제대로 관리통제하지 못하여 일어난 사건인 것만큼 응당 불행한 사건을 초래한 남측에 우선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이 우리의 변함없는 입장"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북한은 "우리는 서해 해상의 수역에서 사망자의 시신을 찾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주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아직 결실을 보지 못했다"며 "우리는 이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해당 부문에서는 앞으로도 필요한 조치를 지속적으로 취해나가기로 했다"고 밝혀 피살 공무원과 관련한 후속 조치는 이어갈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또 북한은 "우발적 사건이 북남관계를 파국으로 몰아갔던 불쾌한 전례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우리의 입장"이라며 사건이 악화일로로 가는 것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은 사건의 해결을 위한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남한 정부의 공동조사 요청에는 응하지 않고 있어, 이 사안이 향후 남북관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보인다.


 

지난 9월 27일 서주석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장은 "남과 북이 각각 파악한 사건 경위와 사실관계에 차이점이 있으므로 조속한 진상 규명을 위한 공동 조사와 이를 위한 소통과 협의, 정보 교환을 위해 군사통신선의 복구와 재가동을 요청한다"고 밝혔으나 여전히 북한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103009183884121#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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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인력 투입 환영하지만..." 택배 노동자들이 더 바라는 건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0/10/30 10:20
  • 수정일
    2020/10/30 10:2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택배 노동자 인터뷰] '민관공동위원회' 구성해 지속적인 대화로 해결해야

20.10.30 08:31l최종 업데이트 20.10.30 08:31l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 위원회가 19일 오전 서울 중구 한진택배 본사 앞에서 최근 심야택배배송을 마치고 자택에서 사망한 김 아무개씨관련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 위원회가 19일 오전 서울 중구 한진택배 본사 앞에서 최근 심야택배배송을 마치고 자택에서 사망한 김 아무개씨관련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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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CJ대한통운에 이어 26일에는 한진과 롯데글로벌로지스가 택배 노동자 과로사에 대한 사과 및 재발 방지 대책을 발표했다.
  
코로나19 사태로 배송물량이 늘어나면서 올해 상반기에만 8명의 노동자가 과로사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지난 7월 노동조합과 시민단체 등 전국 67개 단체가 참여하는 '택배노동자과로사대책위원회'(아래 대책위)가 꾸려졌다. 대책위는 출발부터 코로나19로 물량이 늘어난 상태에서 택배 주문량이 폭주하는 9~11월 상황을 경고하며 대책 마련을 촉구해왔다. 그러나 이렇다 할 진전 없이 시간이 흘렀고, 기존의 우려는 10월 들어 현실이 되었다. 결국 10월 한 달 동안 4명의 택배기사가 또 유명을 달리했고, 그제야 택배사들의 발표가 나온 것이다.

① 잇단 죽음에 사과한 CJ대한통운 "4천 명 택배분류인력 투입" http://omn.kr/1pwh1
② 택배기사 죽음에 로젠택배 대표 "죄송한 마음 금할 길 없다" http://omn.kr/1pzcm

"10월 들어 계속 추모집회에 참석했는데요. 정말 눈물이 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노조가, 우리 조합원들이 조금 더 애썼으면 그분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 거란 생각도 자꾸 하게 되고요."

CJ대한통운 예산홍성 소속 이광우씨는 이번 택배사 발표에 대한 소감을 묻는 질문에 안타까움을 먼저 전했다.

분류인력 투입은 환영, '단계적'이란 표현은 아쉬움
  

 정태영 CJ대한통운 택배부문장이 22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빌딩에서 택배 노동자 사망 사건과 관련해 노동환경 개선책을 발표 후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부터 박근희 CJ대한통운 대표이사, 정태영 CJ대한통운 택배부문장, 최우석 CJ대한통운 택배본부장, 한광섭 CJ대한통운 커뮤니케이션실장.
▲  박근희 CJ대한통운 대표이사가 22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빌딩에서 택배 노동자 사망 사건과 관련해 노동환경 개선책을 발표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사진 오른쪽부터 박근희 CJ대한통운 대표이사, 정태영 CJ대한통운 택배부문장, 최우석 CJ대한통운 택배본부장, 한광섭 CJ대한통운 커뮤니케이션실장.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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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CJ대한통운이 분류 인력에 4천 명을 투입하겠다고 한 발표는 일단 환영합니다. 하지만 '단계적'이라는 모호한 표현과, 산재보험 가입을 '권고'한다는 것들은 좀 지켜봐야 할 부분이에요. 당장 과로사가 이어지고 있는데, 11월부터 '단계적'으로 투입한다는 건 또 있을지 모르는 사태를 생각하면 아쉬운 얘기고요." 이광우씨는 산재보험 가입은 택배회사에서 대리점에 '권고'할 사항이 아님을 강조했다. 일반회사처럼 사측에서 노동자 전원을 의무적으로 가입시키는 것이 맞는데, '권고'라 해놓고, 보험료를 회사가 50%만 부담하고 나머지를 대리점에 부담시키려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음을 우려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대리점이 다시 택배 기사에게 부담을 떠넘기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CJ대한통운 광주 소속 전주안씨는 현장 동료들과 얘기하다 보면, 최근 과로사 소식에 대해 '다음은 나일 수도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했다. "내일 내가 안 보이면 과로사한 줄 알아"라는 말을 주고받을 정도로 현장의 상황은 열악하다.

"가을이 되면 택배 물품이 무거워져요. 물량도 늘지만, 쌀이나 과일 같은 대형 택배가 늘어나죠. 노동 강도도 세지고, 무거운 만큼 시간도 더 많이 걸리고요. 몸에 무리가 가고 피로가 누적되는 게 느껴집니다. 추석부터 시작해서 구정까지 이런 상태가 지속되죠. 날씨가 추우니까 무릎이나 허리 같은 데 무리도 많이 가고요."
  
전주안씨 역시 분류 인력을 투입하겠다는 회사의 발표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사실상 무임금 노동에 해당하는 분류 작업 인원을 따로 투입해달라는 것은 줄곧 노조와 대책위가 요구해 왔던 거고요. 택배 산업 초기에는 분류 작업은 그다지 많은 시간이 들어가는 일이 아니었는데, 점점 물량이 많아지면서 수수료를 받는 배송 작업보다 오히려 분류작업 시간이 더 늘어나서 하루 5~7시간 정도까지 하게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분류작업을 위한 인력 투입을 하겠다는 발표는 매우 의미가 있죠.

노조에서 정말 많이 노력했기에 이런 발표를 끌어낼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시민사회와 언론도 화답해주었고요. 이전에는 택배 노동자가 과로로 사망해도 알려지지 않고 단순 죽음으로 처리되는 경우도 많았는데, 과로사 대책위가 만들어지면서 제대로 알려지고, 그 심각성도 부각되었어요. 그렇게 국내 가장 큰 택배 회사의 사과와 대책 발표를 끌어냈고, 또 다른 회사들의 발표도 이어졌으니까요. 물론 인원 투입을 '단계적으로 한다'는 모호한 표현이 있기에, 노조에서 계속 주시해야 되겠지만요."


그러면서도 그는 분류작업 인력 비용을 사측이 부담한다는 명확한 표현이 없음을 우려했다. 택배기사는 '개인 사업자' 신분으로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특수고용노동자이기에, 새로 투입되는 분류 작업 인력의 비용을 택배 기사에게 부담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전주안씨는 분류 비용을 회사가 100%를 부담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한진택배가 그나마 좀 나은 편이라는 평가를 덧붙였다.

노동자, 정부, 택배사가 참여하는 '민관공동위원회' 구성 필요
  
 21일 서울 서초구 CJ대한통운 강남2지사 터미널 택배분류 작업장에서 택배기사들이 택배 분류 작업을 하고 있다.
▲  21일 서울 서초구 CJ대한통운 강남2지사 터미널 택배분류 작업장에서 택배기사들이 택배 분류 작업을 하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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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우씨는 이번 CJ대한통운에서 발표한 '택배종사자를 위한 종합대책'에서 '건강한 청년이 하루에 소화할 수 있는 배송의 적정 물량을 산출하고, 이를 초과해서 일하지 않도록 바꿔 가겠다'는 구절에 대해 의문을 표했다.

"'건강한 청년이 하루에 소화할 수 있는 적정 물량'이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통계적으로 측정 가능한지도 의문이지만, 현재 우선 문제가 되는 무임금 노동인 분류작업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배송물량을 조절한다면, 당장 임금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문제가 있어요. 적정 물량을 논하려면, 적정 수수료부터 논해야 한다고 봐요."

그의 말대로 택배 산업이 시작된 이래 택배 기사들에게 돌아가는 건당 배송 수수료는 계속 하락해왔다. 회사는 엄청난 수익을 내는데, 그러한 수익에 가장 크게 공헌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건당 받는 수수료는 갈수록 줄어든 현실도 이제는 돌아봐야 할 것이다.

그는 "과로사 대책위와 전국택배연대 노동조합이 줄곧 요구해온 '민관공동위원회'를 구성해서 택배 노동을 둘러싼 문제를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전주안씨 역시 '민관공동위원회' 구성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택배 노동자들과 정부 관련 기관, 그리고 택배회사가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해서, 대화와 협의를 통해 일회적 발표가 아닌 실효성 있는 대책을 마련하고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이해 당사자들이 모이면 해법이 나올 거라고 생각해요. 또 지금 국회에 계류 중인 생활물류서비스법(일명 택배법)이 통과된다면 조금 더 상황이 나아지겠죠."

이광우씨는 이번 발표와 대책이 대한통운을 비롯한 세 개 회사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회사도 이에 화답해야 함을 강조했다.

"분류작업 인력 투입만으로는 문제가 다 해결되지 않고요. 출발점이라고 봐요. 노조 활동을 하면서 제가 근무하는 CJ대한통운의 지점들뿐 아니라 여러 택배사를 방문했는데, 1970~1980년대도 아니고 정말 어처구니없는 현장이 너무 많아요. 가서 보면 비 다 맞으면서 몇 시간씩 분류작업하고, 자갈바닥에 휴대용 천막을 쳐놓고 물건을 그 안에 쌓아놓고 비를 피하고요.

기본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현장의 복지 환경 변화 역시 시급한 문제거든요. 과로사를 막기 위해 노동시간 단축도 필요하지만, 노동 강도를 줄이기 위해서는 현장 복지도 필요해요. 그런 환경에서 5시간, 7시간씩 분류작업을 하고 나면, 배송할 힘이 남겠어요? 물론 지금 분류 인력을 투입한다고 하지만, 그 환경을 그대로 두면 새로 분류작업에 투입되어 일하는 그분들이 또 그런 환경에서 일하게 되잖아요. 그 또한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저나 우리 조합원들이 노조 활동하는 이유도 그런 거예요. 저뿐만 아니라, 이 땅의 노동자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게 궁극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가야 할 길이니까요. 그 누구도 비인간적인 환경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일해도 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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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한 여성에 손가락질, 종교의 역할 아니다”

[인터뷰] ① ‘성과재생산크리스천포럼’ 김신애 목사와 자캐오 신부 “낙태죄 완전 폐지하라”

강석영 기자 getout@vop.co.kr
발행 2020-10-29 16:19:52
수정 2020-10-29 16: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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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재생산크리스천포럼 회원들이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사랑채 앞에서 '그리스도인X낙태죄 완전폐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0.10.28.
성과재생산크리스천포럼 회원들이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사랑채 앞에서 '그리스도인X낙태죄 완전폐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0.10.28.ⓒ뉴시스  
 
 
 
 
형법상 ‘낙태죄 존치’를 위한 정부의 외로운 싸움에서 종교계는 강력한 지원군이다. “생명은 소중하다. 낙태는 살인이다” 단 두 마디로 임신중지를 결정한 여성들의 존재를 지웠다. 하늘에 계신 신의 뜻이라니, 땅에 발붙인 인간들이 감히 할 말이 있을까. “낙태죄 존치가 과연 하나님의 뜻일까요? ‘남성 대리자’의 뜻은 아닐까요?” 김신애 목사(감리교여성지도력개발원 연구원)와 자캐오 신부(대한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용산나눔의집)가 지난 22일 <민중의소리>와 만나 물었다.

두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낙태죄 전면 폐지’를 주장한다. 이들은 사회적 범죄를 정하는 데 종교적 잣대를 들이밀어선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종교적 관점으로 본다 해도, 임신중지로 고통받는 여성들을 외면한다는 점에서 죄를 지은 건 오히려 교회라고 지적했다. 교회의 역할은 임신중지 여성을 손가락질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삶의 맥락을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① “낙태한 여성에 손가락질, 종교의 역할 아니다”
② “낙태죄 존치, 하나님의 뜻일까? ‘남성 대리자’의 뜻일까?”

‘낙태죄 존치’ 주장을 뒷받침하는 교리는 뭘까? “그런 교리는 없다”라고 자캐오 신부는 일축했다. 고대 사회에서 통용되던 기준으로 성서를 해석해, 임신중지를 법률상 범죄로 취급하려는 입장은 틀렸다는 취지다. 다만 ‘소중한 생명의 동등성’을 강조하는 종교윤리 측면에서 전통적인 교회의 주장을 살펴볼 수 있다고 말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모든 생명은 신이 창조해 선물한 것이라고 가르쳤죠. 고대 사회에서 양적 번성은 중요한 가치이었기에, 교회는 ‘생육하여 번성하라’는 가르침을 강조했어요. 전쟁이나 율법이 정한 기준을 벗어나, 인간이 다른 인간의 생명을 함부로 빼앗지 못하게 했죠. 이런 입장은 고대 사회에 기록되어 편집된 성서의 중요한 기둥이죠. 이를 곧바로 현대 사회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별개로요.”

그러나 이러한 교리는 낙태죄 존치 주장의 “표면상 이유에 불과하다”라고 김신애 목사는 꼬집었다. “교회 안의 남성중심적 여성혐오 문화를 교리로 포장한 거예요. 교리가 만들어졌던 고대에서 임신중지는 고려사항이 아니었으니까요. 임신중지가 공인된 기술 없이 여성들 사이에서 민간요법 형태로 전해지던 시절이었죠. 생명에 대한 결정권은 하느님에게 있다고 하면서, 사실상 남성 대리인이 결정하고 있는 셈입니다”

“낙태죄로 고통받는 이는 누구인가”

자캐오 신부는 ‘낙태죄가 옳은지 그른지’가 아니라 ‘낙태죄로 인해 누가 고통받는지’로 질문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28일 서울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열린 '그리스도인x낙태죄 완전폐지 기자회견'에서 성과재생산크리스천포럼 관계자들이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2020.10.28
28일 서울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열린 '그리스도인x낙태죄 완전폐지 기자회견'에서 성과재생산크리스천포럼 관계자들이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2020.10.28ⓒ뉴스1

그의 어머니는 그를 임신했을 때 임신중지를 시도했다. “크면서 어머니와 갈등하다가 그 사실을 알게 되고 오랫동안 어머니를 미워했어요. 그러다가 어머니의 삶을 입체적으로 보게 됐죠. 어머니는 저를 낳는 순간 원치 않는 불행한 결혼 생활을 유지해야만 했어요. 저를 낳고 이혼을 하면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웠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저를 지킬 거냐 말 거냐로 단순 명료하게 끝나는 일이 아니었어요. 젊은 여성들은 고통과 소외, 불평등한 상황을 홀로 감당해야만 하는 위치에 있어요. 제가 몰랐던 어머니의 삶을 하나씩 이해한 뒤,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사과드리고 화해했죠.”

개개인의 입체적인 삶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것은 교회의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자캐오 신부는 말했다. “그리스도교 이야기 자체가 한 개인에게까지 닿는 서사에요. 성서를 보면 하느님이 개개인의 머리카락까지 모두 세고 있다고 해요. 고대 집단주의 문화에서도 한 사람의 삶을 섬세하게 살핀다는 걸 은유적으로 강조한 건데, 이처럼 그리스도교는 개인의 삶을 단면적으로만 판단하는 종교가 아니에요”

교회의 낙태죄 존치 주장엔 여성을 미성숙한 존재로 여기는 시각이 숨어있다고 김신애 목사는 지적했다. “임신중지는 여성들 삶이 실제로 경험하는 삶의 문제에요. 사람마다 상황이 다를 수밖에 없고, 각자 삶의 맥락이 고려돼야 하는 문제죠. 낙태죄는 여성들을 부당한 상황에 놓이게 하고, 비극을 경험하게 합니다. 낙태죄 폐지의 긴 투쟁을 통해 여성들은 우리의 경험이 법적 언어로 축약되지 않으며, 우리의 삶을 함부로 결정하지 말라고 말했어요. 자기 삶에 대해, 특히 아이의 삶에 대해 가장 고민하고 가장 잘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여성 본인이니까요”

임신중지를 결정한 여성을 손가락질하는 건 종교의 모습이 아니라고 김 목사는 말했다. “인생이 맘대로 안 되잖아요. 그걸 성경에선 모든 일이 하느님 뜻대로 되는 거라고 하는데, 비극이든 희극이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종교인의 자세죠.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기도해주고 보살펴주었던 게 본래 모습이에요. 잘못했으니 벌을 받아도 싸다며 손가락질하는 행위는 교회가 지금까지 쌓은 헌신과 희생의 모든 것을 배반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낙태죄 전면 폐지 촉구하는 천주교 신자 기자회견'이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주최로 10월 14일 오전11시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진행됐다.
'낙태죄 전면 폐지 촉구하는 천주교 신자 기자회견'이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주최로 10월 14일 오전11시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진행됐다.ⓒ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모든 생명의 고통과 공명 위해 인간이 된 예수
“죄를 짓는 건 여성의 실질적 고통 외면한 교회”

두 사람은 함부로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대립 구도로 놓아선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인간의 생명은 수정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교회의 시각은 “논리적 비약”이라고 자캐오 신부는 비판했다. “태아를 인간으로 확정된 존재로 여기는 건 논리적 비약이죠. 태아가 인간인지는 의학적·과학적·철학적 검토가 필요한 문제입니다. 교회는 오랫동안 인간의 원죄가 남성의 정액을 통해 전해진다고 가르쳤어요. 수십 년 전까지 태동을 느끼는 순간부터 태아를 인간으로 볼 수 있다고도 했죠. 이젠 슬그머니 감추는 주장들이에요. 종교라고 모든 걸 다 알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작고 약한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해요. 이때 작고 약한 소리는 상상 속에서 구성한 고통이 아니라 실질적 고통이에요. 눈에 보이지 않는 고통에 대해 기도할 순 있겠지만, 그것을 전제로 현실 세계의 결정을 내리는 건 미신적 행위입니다. 실질적 고통에 놓인 존재들과 동행하는 것이 종교인의 첫 수칙이에요. 그리스도교는 모든 생명의 고통과 공명하며 또 다른 삶으로 안내하려고 무한한 신이 유한한 인간으로 된 존재가 예수라고 가르치거든요”

죄를 짓고 있는 건 교회라고 자캐오 신부는 비판했다. “한국 주류 그리스도교는 임신중지를 살인처럼 생각하도록 ‘여성 vs 태아’라는 대립 프레임을 강조하지만,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가 이 사회에 온전히 이뤄지도록 애쓰지 않았다는 점에서 교회는 죄를 짓고 있어요. 우리 눈앞에 존재하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의 고통에 침묵하고 그 고통이 경감되도록 애쓰지 않은 죄가 더 크죠. 임신중지 결정은 사회적 문제인데, 개인의 문제로 환원해 ‘네가 다 책임져라’는 건 반기독교적이에요”

임신이 시작된 순간부터 태아와 엄마는 하나의 몸이라고 김신애 목사는 강조했다. “태아와 엄마의 운명을 굳이 갈라놓고 대립시키는 건 탁상공론입니다. 엄마가 비극을 겪으면 아이도 비극을 겪고, 아이가 위협적인 삶에 노출되면 엄마도 위기에 처해요. 이때 모든 정보와 가능성을 검토하고 최대한 안전한 미래를 설계하는 건 누구보다 성인인 모체의 책임이 되죠. 아빠는 물론 가족이나 타인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일 수밖에 없어요. 하물며 국가나 교화가 여기에 초월적 권위를 가지고 개입하겠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제도적, 법적 안전장치를 만드는 것도 어디까지나 당사자의 의견을 충분히 경청하고 존중한다는 전제하에 진행해야 한다고 봅니다”

낙태죄 전면 폐지 촉구하는 천주교 신자 기자회견'이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주최로 10월 14일 오전11시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진행됐다.
'낙태죄 전면 폐지 촉구하는 천주교 신자 기자회견'이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주최로 10월 14일 오전11시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진행됐다.ⓒ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두  
 
 
 

강석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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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상호방위조약은 폐기하는 수밖에 없다”

[인터뷰] 제2회 조용수언론상 수상자 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 공동대표

  • 기자명 김치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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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0.29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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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0.10.29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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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가 제2회 조용수언론상 수상자로 선정돼 30일 [통일뉴스] 창간 20주년 기념행사에서 시상식을 가질 예정이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가 제2회 조용수언론상 수상자로 선정돼 30일 [통일뉴스] 창간 20주년 기념행사에서 시상식을 가질 예정이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원래 전혀 상상이나 기대를 안 하고 있었는데 통보를 받고 좀 얼떨떨했다. 조용수 선생은 평화통일과 언론자유를 위해서 큰 이정표를 세우신 분이기 때문에, 그 분을 기리는 상을 받게 된 것을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영광스럽고 기쁘게 생각한다.”

제2회 조용수언론상 수상자로 선정된 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는 26일 오후 서울 당주동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앞으로도 힘이 닿는 한 평화통일운동, 언론의 제역할 찾기를 위해 노력을 하겠다”며 이같이 소감을 밝혔다.

(사)민족일보기념사업회가 주관하고 통일뉴스가 후원하는 조용수언론상은 지난해 제1회 수상자로 김자동 전 민족일보 기자를 시상한데 이어 고승우 공동대표를 제2회 수상자로 선정했다. 수상식은 오는 30일 오후 4시 30분 한국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열리는 통일뉴스 창간 20주년 기념식에서 조용수 동생 조용준 선생 등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될 예정이다.

고 조용수(1930-1961) 민족일보 사장은 4.19혁명 이후인 1961년 2월 13일 민족일보를 창간, 사장으로 취임했다. 1961년 5.16 쿠데타 직후인 5월 18일 체포되어 12월 21일 사형이 집행됐다. 2008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민족일보는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근로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양단된 조국의 통일을 절규하는 신문’을 4대 사시(社是)로 내걸고 남북협상, 중립화통일, 민족자주통일 등 혁신계의 논지를 펴 선풍적 인기를 끌었지만 5.16 쿠데타세력에 의해 단명하고 말았다. 이후 민족일보 복간운동이 이어지다 2007년 통일뉴스가 민족일보의 뜻을 계승하기로 했다.

75년 합동통신에 입사한 고승우 공동대표는 80년 신군부의 광주만행에 항거에 검열·제작거부에 나서 해고된 뒤 월간 말 편집장을 거쳐 한겨레신문 창간 기자, 미디어오늘 논설실장, 인터넷매체 라이솔 발행인 등 진보언론에 몸담아 왔다.

이 과정에서 80년해직언론인 공동대표와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 이사장, 6.15남측위원회 언론본부 정책위원장 등을 맡아 언론민주화운동과 통일언론운동에 앞장서 왔다. 김대중 정부 시기 국정홍보처에서 일한 것이 유일한 ‘외도’일 따름이다.

고승우 공동대표는 평소 소신 대로 국가보안법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문제점에 대해 집중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폐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가보안법에 대해 “사실 언론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통제하는 악법인데, 언론인들이 기사작성 등에서 보면 항시 자기검열이 일상화 됐는데도 그것이 불편하거나 어색하거나 부당하다는 분위기가 없다. 그래서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대해서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있는 한은 평화통일 노력을 할 수 없다”며 “우리가 평화통일을 이야기하고 판문점 선언, 평양 공동선언을 이야기 하지만, 그것이 실천이 안 되는 이유는 결국 미국이 한반도의 군사권을 장악, 통제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국가보안법이 위헌이라며 개인 자격으로 헌법소원을 제출했는가 하면, 북한 방문시 통일부에 제출하는 확약서의 부당성을 국가인권위에 제기해 확약서 폐지에 일조했고, 국정홍보처 근무시 비정규직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대해 국가인권위에 제기해 바로잡는 등 어느 곳에서나 불의를 보면 바로잡기 위해 행동으로 나섰다. 최근에는 소설가로 등단한 이후 문학계에 남아있는 일제잔재와 국가보안법, 한미동맹의 족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다음은 지난 26일 오후 서울 당주동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진행한 인터뷰 내용이다.

“평화통일운동, 언론의 제역할 찾기 위해 노력하겠다”

고승우 공동대표와의 인터뷰는 26일 오후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고승우 공동대표와의 인터뷰는 26일 오후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통일뉴스 : 제2회 조용수언론상 수상자로 선정된데 대해 축하드린다. 소감을 밝혀 달라.

■ 고승우 공동대표 : 원래 전혀 상상이나 기대를 안 하고 있었는데 통보를 받고 좀 얼떨떨했다. 조용수 선생은 평화통일과 언론자유를 위해서 큰 이정표를 세우신 분이기 때문에, 그 분을 기리는 상을 받게 된 것을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영광스럽고 기쁘게 생각한다. 앞으로도 힘이 닿는 한 평화통일운동, 언론의 제역할 찾기를 위해 노력을 해야겠다. 채찍질로 알겠다.

□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데, 해직언론인, 언론민주화가 먼저 떠오른다. 오랜 언론개혁 활동에 대해 소개해 달라.

■ 광주항쟁은 전두환 일당과 그 지지 세력들이 광주를 지역화하고 왜소화하는 것을 법제화했다. 1980년 5월 광주항쟁 기간 동안 전국의 대부분 언론사에서 신군부의 광주만행에 항거해서 검열·제작 거부를 했었는데 그 부분을 광주항쟁에서 떼어냈다. 광주항쟁을 지역화한 것이다.

40년 동안 노력한 것은 광주의 제모습찾기, 즉 광주역사 바로잡기 차원에서 80년 5월 언론투쟁을 광주항쟁 민주화투쟁의 한 부분으로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광주에서도 적극적으로 동의를 하고 지금 특별법이 올라와 있다. 그래서 전두환과 그 일당이 음모했던 광주의 왜소화, 지역화 책략을 90%까지는 깼다. 광주역사 바로잡기 기본취지가 80년해직언론인투쟁의 큰 목표다.

□ 이후에도 민언련 이사장 등을 맡았는데, 해직기간이 길었나?

■ 75년 연합통신 전신인 합동통신에 입사해 80년도에 해직됐다. 이후 말지 편집장을 하면서 87년 대선을 치렀다. 그때 두 김 씨가 동시 출마해서 굉장히 민주진영을 고통스럽게 하고 혼란스럽게 했는데, 그때 말지를 통해서 ‘타도 노태우’라는 방향으로 편집방향을 정했는데 상당히 성공했던 것 같다.

88년 1월 1일 한겨레 창간에 기자로서 동참했고, 99년에 나왔다. 김대중 정부에서 국정홍보처 분석국장으로 5년 있었다. 그때 공무원 생활을 맛보는 외도를 한 셈이다. 가보니까 그 바닥도 이른바 특채사원, 비정규직이었는데 공무원 별정직이 일반직과 굉장히 차별이 심하더라. 그 부분에 대해서 인권위에 제기해서 정부의 인사정책이 바뀌었다. 별정직도 일반직과 동등한 임용기준을 적용해야 한다고. 공무원 인사정책을 요즘 말로 하면 비정규직을 정상화시킨 것을 보람있게 생각한다.

이후 미디어오늘의 논설실장을 6,7년 하고, 프리랜서로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에 기고하면서 최근에 민언련 이사장을 4년 하고 재작년에 그만뒀다.

여담으로, 기자협회 통일언론상 서류를 제출하면서 보니까 지난해 9월부터 올해 9월까지 1년간 남북문제, 비핵화문제, 성소수자문제로 120건 가까이 썼다. 진보언론은 사회적 약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현 언론이 그렇지 않고, 특히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 그렇다. 지금 세계 24개국이 동성애 결혼을 합법화했는데, 우리는 거리가 멀다.

“우리 언론, 자본에 깊이 예속되고 통제받는 쪽으로 가고 있다”

그는 자본의 언론통제를 언론민주화 환경의 중요한 문제로 짚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그는 자본의 언론통제를 언론민주화 환경의 중요한 문제로 짚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문재인 정부는 촛불 민심에 의해 탄생했다고 볼 수 있는데 현 정부에서의 언론 상황, 현 정부의 언론 정책에 대해 평가한다면?

■ 정부의 언론정책이 범위가 좁을 수밖에 없다. 최근에 상징적으로 드러난 것은 서울신문과 YTN의 주식 매각이다. 서울신문은 정부 주식이 있고, YTN은 공기업 주식이 있는데 그것을 매각을 하겠다고 방침을 세워 지금 진행 중이다. 굉장히 아쉽다. 지금 공영 언론이 굉장히 필요한 시대적 상황인데 공영 언론 역할을 하는 그런 신문 방송을 자본의 손에 넘겨준다는 것은 사실 촛불하고는 거리가 좀 멀다. 너무 철학이 없고 상당히 무책임한 일이다.

박정희 때는 철저하게 신문방송을 통제를 했다. 그런데 광주항쟁 뒤에 87년에 한겨레신문이 최초로 국민주 신문으로 창간됐다. 그러자 당시 노태우 정부가 신문 시장을 거의 공개했다. 종래는 허가제였는데 등록제로 해서 종이신문 시장을 완전히 포화상태로 만들었는데, 결국 종이신문 시장을 자본의 논리로 좌우되게 해서 한겨레신문 같은 민주화운동의 성과물을 희석시키고 무력화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명박 정부는 언론악법에 의해서 방송시장을 자본논리에 휘둘리는 구조로 악화시켰다. 종편채널을 다수를 동시에 허가함으로써 이른바 당시 KBS, MBC 공영언론에 대해서 눈엣가시처럼 대했는데 방송시장을 자본의 논리에 가둬버린 것이다. 오늘날도 보면 KBS, MBC의 공영화, 공영언론으로서의 기능이나 역할이 자꾸 왜소화되고 문제가 심각하지 않나.

인터넷은 포털에 의해서 장악돼 있는데, 박근혜 정부는 인터넷매체 심사규정으로 5인 이상 사원 구성을 요건으로 허가제 비슷하게 가고, 포털이라는 자본에 의해서 인터넷시대 언론을 통제한다.

신문시장은 노태우, 방송시장은 이명박, 인터넷은 박근혜 때 자본에 의해 언론통제를 심화시킨 것이다. 역사적으로 해방이후를 보면, 우리 언론이 자본에 깊이 예속되고 자본의 통제를 받는 쪽으로 가고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 6.15언론본부 정책위원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는데, 그 경험과 내용을 들려 달라.

■ 6.15남측위 언론본부 정책위원장은 언론본부 생길 때부터 쭉 해왔는데,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기 성명서 사업을 많이 했다. 내가 나이가 많은 편인데 성명서를 거의 전담했는데 이것은 젊은 기자들이 써야 된다는 생각이다.

6.15언론본부 정책위원장 하면서 보람있게 생각한 것은 2006년경 우리가 방북할 때 통일부에 가서 확약서를 써야 하는데 그 부분을 내가 인권위원회에 제기를 해서 2010년에 통일부가 폐기했다. 정부 수립이후 60년간 확약서를 강요해 왔었는데, 그 내용에 아주 고약한 면들이 있다. 북쪽의 포섭 내지는 사상에 오염될 수 있다는 식의 국민주권 측면을 정면으로 짓밟는 그러한 처사였는데, 확약서 폐지에 역할을 했다라는 것을 굉장히 의미있게 생각한다.

평양을 몇 번 가봤고, 금강산을 여러 번 가봐서 북한의 언론 담당자들과 대화도 하고 협상도 하면서 느낀 점은 남쪽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언론, 북쪽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언론이 어떤 성격이라든지 지향성이 다르기 때문에 좀 노력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다르다고 해서 안 만난다든지 교류를 못 한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서로 그런 걸 감안해서 소통하고 평화통일로 가야 한다. 오랫동안 언론 교류도 끊겼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해서 같이 노력해야 한다.

“국보법, 하루 빨리 없어져야... 헌법소원 제기했었다”

고승우 615언론본부 정책위원장이 6.15공동선언 16주년을 기념해 6.15언론본부가 개최한 ‘평화 통일을 위한 언론인의 역할’ 주제 토론회에서 사회를 맡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고승우 615언론본부 정책위원장이 6.15공동선언 16주년을 기념해 6.15언론본부가 개최한 ‘평화 통일을 위한 언론인의 역할’ 주제 토론회에서 사회를 맡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해오고 많은 글을 써왔는데, 그렇게 집중한 이유와 폐지되어야 할 논거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 달라.

■ 국보법이 1948년 이승만 정부에서 만들어져서 사실 언론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통제하는 악법인데, 언론인들이 기사작성 등에서 보면 항시 자기검열이 일상화 됐는데도 그것이 불편하거나 어색하거나 부당하다는 분위기가 없다. 그래서 심각하다.

특히 평화통일을 지향하려면 가까운 먼 미래에 대해서 자유롭게 상상하고 여러 가지 추리를 해야 하는데 국보법이 그걸 봉쇄한다. 우리사회가 보면 제대로 된 미래학이 없다. 또 4차 혁명시대는 상상력에 의한 창조의 시대인데, 우리가 국보법에 갇혀있어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고 능동적으로 가는데 굉장히 저해 요소가 된다.

그래서 국보법은 하루빨리 없어져야 된다 싶어서 헌법소원도 제기를 했었고, 물론 그게 각하가 됐지만, 그런 면에서 상당히 아쉽다.

□ 언론인이 개인 자격으로 국보법 헌법 소원을 낸 것은 처음인가?

■ 공개적으로 이야기 안 하기 때문에 내가 알 수는 없다. 아마 처음일 거다. 내가 거의 들어본 바 없으니까. 내가 1975년에 입사해서 언론생활 45년이 됐지만 45년간 들어본 바 없다.

□ 국보법 못지않게 소파(SOFA, 주둔군지위협정)와 주한미군 문제를 제기해왔다. 소파와 주한미군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와 논거를 간략하게 설명해 달라.

■ 사실 소파는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의 부속협정에 불과하다. 우리 사회가 한미관계, 한미동맹을 이야기할 때 소파를 주로 이야기한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이야기를 거의 안 하더라.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가 ‘미국이 한국에 군사력을 배치하는 권리(right)를 한국은 허용(grant)하고 미국은 수용(accept)한다’고 하는데, 이게 grant와 accept라는 것이 외교적으로 대가 없이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파(주둔군지위협정)와 주한미군방위비특별협정(SMA) 이런 것이 전부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에서 나왔다.

소파에는 주한미군의 부지와 시설을 한국이 제공하는데 5조에 주한미군 주둔비는 미국이 부담하게 명시돼 있다. 그런데 이 소파 5조에서 빼서 주한미군방위비특별협정(SMA)를 만들었다. 이번에 트럼프 대통령이 방위비 분담금을 5배로 인상을 요구하는 것이 국제법적으로 합당한 것인가, 아니면 정말 미국이 노상강도인가 이런 의문이 자연히 들 텐데도 우리 언론이나 정치권, 학계에서 문제제기를 안 하는 거다.

소파 규정은 미국의 권리(right)에서 파생됐기 때문에 주한미군의 기지사용으로 인한 환경오염 같은데 대해서 그 부담을 미국이 전혀 안 지는 거다. 우리 정부가 전부 다 부담을 한다.

그리고 세균전 독극물, 탄저균도 마음대로 들여오는 것도 역시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 권리에 의해서 행사되고, 미 첨단 정찰기들이 수시로 몇 대씩 떼지어서 한반도 상공을 날아 북한을 정찰한 것도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 권리에 의해서다.

또 미국의 대북선제공격 전략도 역시 4조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하다. 미국의 대북선제공격 전략을 보면 3개월 동안의 준비기간을 거쳐서 60만 육상전력, 1천여대의 항공기 2,3백척의 전함을 깔아놓고 일단 선제타격을 한 다음에 지상군이 북진하는 것인데, 이런 부분은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4조가 없으면 우리 정부가 사전에 동의를 해줘야 되는데,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미국은 입만 뻥끗하면 대북선제타격을 이야기한다.

이번에 밥 우드워드 책 『분노』를 가지고 해프닝이 벌어졌었는데, 우리 언론에서 논란이 된 것은 80발의 핵탄두 공격을 미국이 하느냐, 북한이 하느냐 번역 문제였다. 책을 보면, 위아래에 여러 부분에서 미국의 대북 선제공격 부분이 나온다. 오바마 정부 때도 집중 검토를 했고, 트럼프 대통령이 그걸 자랑하면서 80발로 북한을 완전히 초토화시키겠다라는 것이다.

우리 국내 언론은 영문법 따지다 그냥 지나가 버렸다. 이번에 트럼프의 발언이 굉장히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데, 미국이 최근에 폭발력이 약하고 방사능 낙진이 적은 저강도 핵무기를 개발했다. 그것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의 3분의1 위력이라고 한다. 그 핵무기를 미국이 선제공격으로 80발을 북한에 떨어뜨릴 경우에는 북이 이른바 유사시에 대비해서 만들어 놓은 방사정포라든지 그런 부분은 완전히 무력화된다

그래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있는 한은 평화통일 노력을 할 수 없다. 이번에 문재인 대통령이 종전선언을 이야기했을 때 미국의 정계나 현 미국의 핵심지휘부의 의견을 나타내는 미국의소리(VOA) 방송 등에서 보면 다 반대를 한다. 그러면서 드디어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정식 기자회견을 통해서 ‘종전선언은 비핵화의 한 과정으로 추진될 것’이라고 해서 완전히 대한민국 대통령을 망가뜨린 거다.

우리가 평화통일을 이야기하고 판문점 선언, 평양 공동선언을 이야기 하지만, 그것이 실천이 안 되는 이유는 결국 미국이 한반도의 군사권을 장악, 통제하기 때문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제6조에 의해서 폐기하는 수밖에 없다. 상호 협의해서 개정하거나 그런 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결단을 내려서 폐기하고 새로 만들든지 아니면 안 만들든지 결단이 나와야 된다고 생각한다. 정말 언론이나 학계, 정계에서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 이번에 조용수언론상을 받게 되면서 그런 부분이 활성화 됐으면 좋겠다.

“한미상호방위조약, 폐기하는 수밖에 없다”

2008년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언론인대표자회의 기념사진. 남측 6.15언론본부와 북측 6.15언론분과위는 한때 활발한 교류를 가졌지만 남북관계의 경색으로 중단됐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2008년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언론인대표자회의 기념사진. 남측 6.15언론본부와 북측 6.15언론분과위는 한때 활발한 교류를 가졌지만 남북관계의 경색으로 중단됐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주한미군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보면 한반도와 주변에 배치하게 돼 있다. 미군의 순환배치도 사실 무섭다. 전 세계 미군을 돌리는 식으로 하는데, 중동에 파견됐던 미군이 한국으로 다시 들어오고, 그러기 때문에 어쩌면 미국의 세계군사전략의 한 부분으로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각종 무기가 들락날락하고.

그래서 이 부분이 존속하는 한은 평화통일 노력은 불가능하다. 판문점 선언, 평양 공동선언이 지금 올 스톱돼 있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개별관광 운운하는데 이렇게 하면 안 된다. 국방부 장관이나 대통령이 한미상호방위조약, 한미군사동맹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도 엊그제도 물자 반입으로 주민들과 충돌이 있었지 않나.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사드 백지화 이야기 했는데, 왜 박근혜 정부 때보다 더 강력하게 추진되는 것인가. 설명을 해야 되는데 침묵하는 것이 나는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서 어쩔 수 없다. 미국이 통보하면 우리는 그것을 집행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국민 여러분 양해해 주시오” 이렇게 이야기해야 되고, 학계나 정치권에서도 이야기해야 된다.

그런데 통일부 장관조차도 금강산, 개성 이런 부분이 해결이 안 되니까 개별관광을 들고 나오는데 상당히 궁색하다. 주권국가의 고위공직자답지 않은 발언이다.

□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도 심각하다는 지적도 있는 것으로 안다.

■ 필리핀이 미국과 맺은 군사협정에 보면 미군은 필리핀에 진주할 경우에 반드시 필리핀 군기지 내에서만 주둔할 수 있고 영구기지는 불가하고, 핵무기 반입도 되지 않고. 필리핀에 주둔하는 미군은 필리핀 국내법에 적용을 받고, 환경오염에도 책임져야 한다. 두 나라의 군사협정도 10년이 시한이다. 10년 이후에는 폐기 되거나 다시 맺거나 해야 된다. 그 전에도 계속적으로 그 협정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협의를 하게 돼 있다.

또 하나는 만약 군사충돌이 벌어졌을 경우에 유엔에 즉시 보고하게 돼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한반도에 군사충돌이 벌어졌을 때 유엔에 보고할 의무가 없다. 주한미군 사령관이 모자가 3개 아니냐. 유엔사령관이 유엔에 귀속돼 있다면 한반도에 군사충돌시 유엔에 즉시 보고해서 사후조치에 대한 유엔의 결정을 따라야 하는데 아무런 규정이 없는 거다. 미군의 의사대로만 할 수 있기 때문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확실히 폐기돼야 된다. 정상화는 폐기 밖에 없다.

그런데 한미상호방위조약 ‘폐기’를 이야기 하면 사람들이 하도 경기를 일으키기 때문에 ‘정상화’라는 좀 애매한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언론이 제4부로 복귀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고승우 공동대표는 국가보안법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폐기하고 언론이 제4부로 복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최근 한국기자협회가 시상하는 제26회 통일언론상도 수상하는 겹경사가 있었다. 개인적인 소회가 있다면?

■ 국가보안법이 우리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데, 특히 언론에서 역할을 제대로 해야 되는데 그걸 안 하고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도 언론이 성역화해서 아주 그 부분은 전혀 생각조차도 안하고 그러다 보면 국민의 알권리가 제대로 충족이 안 된다고 본다.

이번에 참 생각지도 않게 두 큰 상을 받게 된 것은 언론이 제4부로 복귀하는 그런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제가 통일언론상 수상식 때 그렇게 이야기했다. “국보법과 한미동맹에 후배기자들이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우리 언론이 두 가지 만큼은 빨리 해결을 해야 4부로서의 언론 위상도 회복하고 역사에 죄를 안 짓는 길을 것이다.

요즘 미중관계가 굉장히 긴박해지지 않나. 중국은 아는 바와 같이 타이완에 대해서 군사공격을 하겠다고 노골적으로 협박한다. 최근에 나오는 얘기를 보면, 극초음속 미사일 둥펑(東風) 17호는 음속의 10배다. 이것을 대만을 향해서 배치했다. 그런데 그게 우리 성주 사드기지를 겨냥하고 있다. 그러니까 만약에 미중 간에 군사적인 충돌이 벌어지면 위기상황으로 가는데도 언론이 그것에 대해서 무신경한 것 같아서 시정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 앞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싶거나 개인적으로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 몇 년 전에 월간문학에 소설로 등단했다. 남북문제나 통일문제를 소설로 쓰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쪽에 들어가서 보니 심각한 것이 일제잔재와 국보법에 완전히 장악돼 있다는 걸 느꼈다. 엄청 갑갑한 상황이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좀 주관적인 것을 많이 쏟아낼 수 있기 때문에 칼럼이라든지 사회과학과는 다른 측면이 있는데, 소설 분야도 완전히 국보법하고 한미동맹, 일제잔재가 그대로 온존돼 있어서 우리 국민들이 문학에 대해서 감사하고 느낄 수 있는 권리가 굉장히 박탈돼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힘닿는 한은 문학 쪽에서도 친일청산, 국보법, 그 다음에 냉전논리나 한미동맹 이런 부분에 대해서 쇠막대를 좀 뽑아내야겠다 생각하고 있다.

□ 독립 인터넷 언론 ‘라이솔’을 운영한 경험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창간 20주년을 맞은 통일뉴스에 대해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 언론 자유를 이야기했을 때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언론자유 그런 부분을 절감한다. 한겨레 창간이라든지, 미디어오늘, 통일뉴스, 제 개인적인 1인 매체...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언론운동 결국 그것은 경제적인 기반의 문제다. 통일뉴스도 그런 면에서 경제적인 자립을 온라인 등을 통해서 달성해서 평화통일의 견인차가 됐으면 좋겠다. 지금도 하고 있는데 더 광범위하게 해야 한다.

□ 자본주의 체제에서 언론운동, 특히 온라인 언론은 굉장히 열악하다. 극소수 매체 외에는 정론을 펴는 곳들은 물적 기반이 거의 없다고 보는데, 어떤 돌파구가 있을 수 있다고 보나?

■ 한국에 적용될지 모르겠는데 외국 언론의 몇 가지를 보면, 영국의 가디언이라든지 미국의 뉴욕타임스 등은 온라인을 통한 기고, 기부를 요청해서 성공한 케이스다. 가디언은 완전히 기사를 무료로 다 볼 수 있게 한다. 전 세계 독자들에게 호소한다. 뉴욕타임스는 기부를 받으면서도 기사는 유료로 한다. 개인 독자는 한 달에 20건만 무료로 볼 수 있게 한다.

물론 한국적 현실과 다른데, 결국에는 인터넷 시대, 온라인 시대가 됐기 때문에 소비시장을 그쪽에서 구할 수밖에 없다. 온라인의 소비자들을 감동시켜서 지갑을 열도록 만들 수밖에 없다. 결국 기사 서비스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굉장히 열심히 한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방법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물론 일부에서 뉴욕타임스 하나가 성공하기 위해 많은 군소 인터넷 매체들이 사라져갔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또 하나는 뉴욕타임스나 미국에 있는 주요언론들이 요즘에 보면 팩트 체크를 최우선시 한다. 이번에 바이든과 트럼프 후보 공개토론회도 팩트 체크가 인터넷 화면 맨 위쪽에 나온다. 우리는 아직 갈 길이 멀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우리 언론 쪽이 정파성과 진영논리에 너무 함몰돼서, 휘둘려서 제4부의 역할을 완전히 스스로 내팽개친 측면이 있다. 그래서 이 부분은 하루빨리 정상화 돼야 되겠다. 이런 부분을 누가 담당해야할 것인가. 통일뉴스가 담당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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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시가 현실화가 ‘조세 형평’인데…또 ‘세금폭탄 딴지’

등록 :2020-10-29 04:59수정 :2020-10-29 10:05  
뉴스분석
실효세율 떨어지는 부작용 외면
집값 올라도 세금은 덜 내겠단 말
세금은 국회가 세율 조정해 풀 문제
공시가 현실화를 위해 공시가격 상향조정. 그래픽 김승미
공시가 현실화를 위해 공시가격 상향조정. 그래픽 김승미
 

정부가 2030년까지 공시가격의 시세 반영률을 90%까지 올리는 방안을 제시한 가운데, 야당을 중심으로 ‘공시가격 현실화는 사실상 증세다’, ‘세금폭탄이다’ 등의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 공시가격이 시장가격보다 크게 낮은 탓에 보유세 실효세율이 떨어지고 조세 형평성이 저해되는 등 부작용이 컸던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냐는 비판이 나온다. 공시가격을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동반되는 세부담 증가 문제는 필요하다면 국회가 세법 개정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 국민의힘 “공시가격 인상폭 제한할 것”

국민의힘은 28일 전날 공개된 국토교통부의 ‘부동산 공시가격 현실화 계획 시안’에 대한 논평을 내어 “공시가격을 올려 실질적 증세 효과를 거두겠다는 심산”이라며 비판하고 나섰다. 공시지가 인상폭을 통제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할 방침도 세웠다. 송석준 국민의힘 부동산시장정상화특위 위원장은 “공시지가가 급격히 상승해서 실제 세율 상승보다 더 많은 국민 부담으로 지워지는 것은 조세법률주의 위반으로 보고 있다”며 “공시지가 인상폭에 상한을 두는 내용이 담긴 부동산공시법 등을 포함한 관련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유경준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6월 공시가격 인상폭을 5%로 제한하는 내용의 ‘부동산 가격공시에 관한 법률’(부동산공시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시세가 10% 뛰어도 공시가격 인상폭을 5%로 조정해 보유세 부담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시세보다 하향 조정된 공시가격이 보유세 실효세율을 낮추고, 조세 형평성을 저해한다는 비판은 오랫동안 제기돼왔다. 2019년 기준 3억원 미만 주택의 현실화율이 68.6%인 데 반해 9억~15억원대 주택 현실화율은 66%대로 오히려 저가 주택의 현실화율이 더 높은 ‘역전현상’도 벌어진 바 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데 여야가 합의해 지난 4월 ‘부동산공시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부동산의 적정한 가격형성과 각종 조세·부담금 등의 형평성을 도모’라는 제정 목적을 1조에 담은 법은 공시가격을 “통상적인 시장에서 정상적인 거래가 이루어지는 경우 성립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인정되는 가격”으로 규정하는데, 사실상 ‘시장가격’이다.미국 국제과세평가사협회(IAAO)는 공시가격이 실거래가의 90~110%에 있을 때 시장가격을 적절히 반영한 과세가 이루어진다고 본다(‘부동산 보유세 개편과 과세표준 현실화 정책’, 박상수 한국지방세연구원 연구위원). 국토연구원에 따르면, 미국 덴버는 현실화율이 101.3%, 캐나다 온타리오주는 100%, 오스트레일리아(호주)는 90~100% 수준이다.반면 2020년 기준 우리나라의 공시가격 현실화율(실거래가 대비 공시가격)은 토지 65.5%, 단독주택은 53.6%, 공동주택은 69.0%에 그친다. 한국 보유세 실효세율은 0.167%(2017년 기준)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0.396%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데, 시장가격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허수아비’ 공시가격이 원인으로 꼽힌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소장은 “실거래가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공시가격이 있어야 국회가 정한 세율에 따라 세부담이 정확하게 나오는 조세법률주의가 실현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부동산 가격과 세부담 연동해 인식해야”

이 때문에 공시가격과 시장가격의 괴리를 최소화하는 ‘공시가격 현실화’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바 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4년 5월 국토교통부는 ‘2016년부터 부동산 실거래가를 기반으로 한 부동산가격 공시제도를 도입한다’는 내용의 공시가격 개선 방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증세’라는 프레임 앞에서 번번이 좌절됐고, 2019년에야 공시가격 산정에 실거래가가 반영되기 시작했다.박용대 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 소장(변호사)은 “근로소득은 오르면 오른 만큼 세부담이 느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반면, 부동산에 대해서는 그런 인식이 없다”며 “공시가격이 시장가격을 제대로 반영해서 부동산 가격과 세부담을 연동해서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세금 부담이 과도하다는 데 대해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다면 행정 가격인 공시가격을 인위적으로 조정할 게 아니라 국회가 정치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005년부터 공시가격 현실화율 90%를 목표로 잡고 2017년에 90.7%를 달성한 대만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번 ‘부동산 공시가격 현실화 계획 시안’ 연구용역을 맡았던 이형찬 국토연구원 연구위원은 “대만은 공시가격 현실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세율 조정 과정이 있었다”며 “공시가격은 시장가격을 반영하고, 세금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 해결해야 시스템이 생긴다”고 말했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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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은 공시가격으로 9억원 이상 주택 혜택

‘증세’, ‘세금폭탄론’ 등이 거론되지만, 공시가격 현실화로 당장 세부담이 크게 늘어나는 주택은 고가 주택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국토부가 산출한 예상 세액을 보면, 시세 2억원 주택의 보유세는 올해 대비 2023년 3만원(19만원→22만원), 8억원은 54만원(132만원→186만원), 21억원은 603만원(737만원→1340만원) 늘어난다.특히 그동안 시장가격보다 하향 조정된 공시가격으로 세부담 완화의 혜택을 누렸을 것으로 보이는 시세 9억원 이상 주택이 35만호 정도로 추산된다. 지난 4월 국토부가 발표한 전국 공동주택 가격 자료를 보면, 시세 기준 9억원 이상 주택은 전국 66만3383호로 전체 주택(1382만9981호)의 4.8%였으나 공시가격 기준으로는 30만9642호로 2.3%에 그쳤다.주택 가격이 급등할수록 시세와 공시가격 격차가 커지는 것도 문제다. 실제 주택공시가격 제도가 도입된 2006년 이후 최근까지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의 실거래가와 공시가격을 비교해 보면, 은마아파트가 10억원을 돌파(2015년 12월)한 뒤 책정된 2016년 공시가격은 6억7900만원이었는데, 20억원을 돌파(2019년 12월)한 뒤 매겨진 2020년 공시가격은 13억9200만원이었다. 시세 10억원일 때 3억원 수준이었는데, 올해 이 차이가 6억원으로 2배가 된 것이다. 현실화율은 67.9%에서 67.6%로 제자리걸음이다.박준 서울시립대 교수(국제도시과학대학원)는 “공시가격 현실화는 세금 차원에서 보면 그동안 덜 내왔던 부분을 제대로 부담하게 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며 “또 공시가격은 세금 말고도 60여가지 행정적 목적으로 쓰이기 때문에 세부담과 관련 없이 시세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게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진명선 김미나 기자 torani@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economy/property/967672.html?_fr=mt1#csidxcea883c84ca2803a412e6913e6e50f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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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과 병장 월급 차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을 거다

[김형남의 갑을,병정] 포퓰리즘 딱지 떼고 제도화 할 때 20.10.29 08:04l최종 업데이트 20.10.29 08:04l김형남(khn8911)

장병 휴가 통제 끝... 76일 만에 정상 시행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통제됐던 장병 휴가가 정상 시행된 8일 오전 강원 춘천시 육군 2군단 사령부 위병소에서 병사들이 휴가를 떠나고 있다. 2020.5.8
▲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통제됐던 장병 휴가가 정상 시행된 8일 오전 강원 춘천시 육군 2군단 사령부 위병소에서 병사들이 휴가를 떠나고 있다. 2020.5.8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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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부터 병사에 대한 징계 벌목 중 영창 제도가 폐지되면서 새로 도입된 벌목 중에 '감봉'이 있다. 고작 60만 원 주면서 그것마저 빼앗아 가려고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다가도, 건국으로부터 70년이 지난 이제서야 월급 삭감이 벌칙으로 작용할 수준이 되었다는 사실에 씁쓸함을 느낀다. 그만큼 병사들에게선 빼앗을 게 없었다. 행정상 불이익에 불과한 징계를 받으면서 범죄자처럼 쇠창살에 갇혀 몸으로 때워야 했던 병사들이 자기 월급으로 잘못된 행동에 책임을 지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대단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화폐개혁으로 돈의 단위가 '환'에서 '원'으로 바뀐 1962년, 병장의 월급은 2000원이었다. 그로부터 64년이 지난 2020년 기준 병장의 월급은 54만 900원이다. 단순하게 비교하면 270배가 오른 셈이다. 물론 월급 액수를 단순하게 비교한 수치로는 병사의 월급 수준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다. 그래서 간부의 최고계급인 4성 장군 대장과 병사의 최고계급인 병장의 월급을 비교해보았다. 군에서 병사의 군 복무에 매기는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해보기 위해서다.

대장과 병장의 월급 차이

 

이승만 대통령이 '병 진급령'을 개정해 병장 계급이 생긴 것은 1957년, 이때 병장의 월급은 60환이었고 대장의 월급은 900환이었다. 대장이 병장에 비해 15배 많은 월급을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4.19 혁명 이후 장면 정부가 집권했던 시기까지 똑같이 이어진다.

그러다 5.16 쿠데타가 발발하고 1963년 박정희 정권이 집권하게 된다. 아무래도 군사 정권이 들어섰으니 군인의 처우가 좋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추론도 가능하겠으나 현실은 달랐다. 이때 병장의 월급은 2000원, 대장의 월급은 9만 6200원이었다. 차이가 48배로 현격히 벌어진 것이다. 유신이 시작된 1972년에는 격차가 한층 더 크게 벌어진다. 10년 사이 대장의 월급은 15만 2000원으로 오른 반면, 병장의 월급은 1030원으로 오히려 삭감되었다. 이때의 차이는 무려 148배에 달한다. 박정희 정권 마지막 해인 1979년까지 격차는 167배로 늘어난다.

이후로도 김대중 정권이 끝날 때까지 대장과 병장 간 월급 격차는 100배가 넘었다. 전두환 정권 마지막 해인 1988년 기준 대장 월급은 93만 원, 병장 월급은 7500원으로 124배 차이를 보였고, 노태우 정권 마지막 해인 1993년에는 124배, 김영삼 정권 마지막 해인 1998년에는 169배, 김대중 정권 마지막 해인 2003년에는 171배의 차이를 보였다. 이 당시 대장의 월급은 395만 원, 병장의 월급은 2만 3100원이었다.
 
 역대 대장과 병장 월급 차이는 얼마나 될까?
ⓒ 고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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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차는 참여정부가 출범한 뒤로 확연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참여정부 마지막 해인 2008년 기준 대장의 월급은 594만 6800원, 병장의 월급은 9만 7500원으로 61배의 차이를 보인다. 참여정부 집권 5년간 병사의 월급 인상률은 300%가 넘었다. 그래도 10만 원이 채 되질 못했다.

병사의 월급이 처음으로 10만 원을 넘은 것은 2011년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출범 이후 2010년까지 병사의 월급을 동결했다가 2011년에서야 인상했다. 이후로 병사 월급은 매년 인상을 거듭해 박근혜 정부 마지막 해에는 21만 6천 원에 이르렀는데 이때 대장과 병사의 월급 격차는 36배까지 줄어들었다.

2017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는 병사의 월급을 2017년 최저임금의 50%를 목표로 인상하겠다고 공약했다. 문 대통령 취임 이후 이러한 약속은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국방부가 발표한 '2021~2025 국방중기계획' 상 2022년 기준 병장 월급은 67만 6000원으로 딱 2017년 최저임금 월 135만 2230원의 절반이다.

2020년 현재 병장과 대장 간 월급 차이는 16배다. 1970년대에는 160배 정도였음을 고려할 때, 두 계급 간 월급 차이로 병사의 군 복무에 군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매겨왔는지 가늠한다면 그 가치는 10배가 오른 셈이다. 월급의 많고 적음이 하는 일의 가치를 오롯이 담아내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돈을 주는 이가 받는 이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주는 지표는 될 수 있다. 대한민국이 국방의 의무에 매겨온 가치는 불과 10년 전만 해도 10만 원이 채 되질 않았다. 병사들은 소모품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군 복무의 가치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도 국방의 의무에 매길 가치의 적정선을 찾지 못하고 있다. 병사 월급은 늘 논란의 대상이다. 인상 때마다 '포퓰리즘'으로 국방비에 과도한 부담을 지운다는 비판이 대두된다. 반면 병사 월급이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다는 주장도 많다. 정치권의 주장도 각양각색이다. 점진적으로 인상하자는 주장, 100만 원을 기준점으로 삼자는 주장, 최저임금에 맞추자는 주장, 최저임금의 50%를 목표로 하자는 주장, 하사 임금을 기준으로 그보다 낮게 책정하자는 주장 등 말하는 사람마다 기준이 다 다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병사 월급 인상률은 정권의 의지에 따라 널뛰기를 뛴다. 대통령 임기 중 인상률이 문민정부 17.7%, 국민의정부 73.7%, 참여정부 322.1%, 이명박 정부 32.9%, 박근혜 정부 66.7%, 문재인 정부 150.4%로 천차만별이다. 원래 급여액이 턱없이 적은 탓에 차이의 폭도 컸을 수 있겠으나, 기본적으로 기준선이란 것이 없다. 공무원 봉급 인상률이 정권과 관계없이 일정한 등폭을 유지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이는 이상한 일이다.

공무원의 보수는 '공무원보수규정'에 따라 인사혁신처장이 실시하는 보수자료 조사에 근거하여 책정된다. 인사혁신처장은 보수자료 조사 시 민간의 임금 수준, 표준 생계비 및 물가의 변동 등을 근거로 공무원의 보수를 책정한다. 군인 간부의 월급 역시 '군인보수법'에 따라 공무원보수규정에 위임하여 책정된다. 병사의 월급은 '공무원보수규정' 상 '군인의 봉급표' 말미에 쓰여있다.

그렇기에 병사의 월급 역시 공무원의 보수를 책정하듯 관련한 기준을 법령에 마련하고 인상률 역시 해마다 이에 근거하여 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에 앞서 정부와 정치권이 사회적 토론을 통해 병사 급여의 적정한 기준점을 정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병사 월급 인상에는 늘 포퓰리즘 딱지가 붙을 수밖에 없다. 병사의 월급은 우리 사회가 국방의 의무에 매기는 가치의 단면이다. 계속 주먹구구식으로 정부 정책에 따라 널뛰기를 하게 둘 수는 없다.

2020년 병사 월급은 2019년에 비해 33.3%가 인상되었다. 병사 월급에 소요되는 예산은 2조 964억으로 2019년 대비 4946억이 늘었다. 간부의 월급에 소요되는 예산은 10조가량으로 2019년 대비 1457억이 늘었다. 2020년 국방비는 2019년 46조 7000원에서 3조 5000억 원(7.4%)이 늘어난 50조 2천억이었다.

지금껏 대한민국이 해마다 증가하는 국방비 중 의무복무 중인 병사 40만 명의 월급 인상을 위해 5000억 원의 예산을 추가로 편성할 여력이 없는 나라는 아니었을 것이다. 곳간이 풍족해져서 월급이 오른 것이 아니고, 우리 사회가 국방의 의무를 대하는 눈높이만큼 월급도 따라 올랐을 뿐이다.

공교롭게도 월급이 많이 오른 10년간 군인의 인권 수준도 눈에 띄게 높아졌다. 이제 병사 월급 인상에서 포퓰리즘 딱지를 떼줄 때가 되었다. 언제까지 국방비를 정할 때 병사들 월급 올리는 일과 무기 구매가 하나의 저울에 달려 비교되어야 하는가. 월급 책정과 인상의 제도화를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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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서 탄소중립 선언한 文대통령...그린피스 "적극 환영한다"

 

선언은 '환영', 구체적 내용은?...그린피스 "탈석탄 2030년 전 마무리 필요"

하지만 구체적 목표치 설정이 부족해 정부 의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날 문 대통령은 국회에서 "국제 사회와 함께 기후변화에 적극 대응해 2050년 탄소중립을 목표로 나가겠다"고 말했다. 탄소중립이란 배출하는 온실가스량과 제거하는 온실가스량을 동일하게 맞춰 순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러 사회단체에서는 이를 '넷제로'로 부르기도 한다.

 

문 대통령은 보다 구체적으로 노후 건축물과 공공임대주택의 친환경 시설 교체, 전기차와 수소차 보급 및 기반 인프라 투자 확대, 지역 재생에너지 사업 지원 확대 등의 방안을 제시했다. 도시 공간·생활 기반시설의 녹색전환에 2조4000억 원, 전기·수소차 보급과 충전 인프라에 4조3000억 원을 투자한다는 게 골자다.


 

이에 따라 한국은 올해 말로 예정된 2030년 국가감축기여(NDC)와 2050년 저탄소발전전략(LEDS)의 유엔(UN) 제출에 탄소중립 목표안을 반영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지난 7월 그린뉴딜 정책을 발표했으나, 탄소중립 선언은 당시 담기지 않았다. 녹색에너지로 전환한다는 구호와 달리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핵심인 석탄 발전 구조조정안이 담기지 않아 '무늬만 녹색'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과 다를 바 없는 구호'라는 비판이 크게 일어난 배경이다.


 

한국에 앞서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세계 70여개국이 탄소중립 목표를 선언한 바 있다. 독일을 포함한 유럽 여러나라 등은 탄소중립 목표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감축 계획서까지 유엔에 제출한 상태다. 이를 고려하면 한국의 탄소중립 선언 시기는 매우 늦은 편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 정부의 의지 부족을 우려한 듯, 환경단체뿐만 아니라 그간 국내외에서도 한국 정부의 탄소중립 선언이 시급하다는 요구가 이어진 배경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 27일 국회 기후위기그린뉴딜연구회와 더불어민주당 미래전환K뉴딜위원회 그린뉴딜분과는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에 탄소중립 선언을 촉구한 바 있다. 앞서 국회는 지난 달 기후위기 비상대응 촉구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들은 "국제에너지기구 분석에 따르면 현재 가장 많이 투자되는 에너지는 전체 에너지 투자의 66%인 재생에너지인 반면, (한국 정부가 여전히 크게 의존하는) 석탄 화력은 12%, 원자력은 8%에 불과하다"며 "녹색산업 경쟁력이 곧 국가경쟁력이 되는 시대"라고 전환 의지를 촉구했다.


 

이어 "일본 정부가 어제(26일) 2050 탄소배출 제로를 선언했고 지난 9월에는 온실가스 배출 세계 1위인 중국도 2060 탄소 중립을 선언했다"며 "한국 정부도 화답할 차례"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이번 문 대통령의 국회 연설은 이 같은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해석 가능하다.


 

환경단체들은 문 대통령의 탄소중립 선언 후 일제히 논평을 냈다. 일단 환영의 뜻을 보였으나 더 구체적인 의지를 정부가 정책으로 보여야 한다고 환경단체들은 촉구했다.


 

그린피스는 "문 대통령의 선언을 적극 환영한다"면서도 탄소중립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발표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린피스는 성명문에서 "현재 정부 계획에 따르면 (2050 탄소중립 선언과 반대로) 석탄발전이 2050년 이후까지 지속되고, 내연기관차 퇴출 시점 논의 역시 부족하다"며 "빠른 시일 내에 2050 탄소중립을 위해 발전부문을 중심으로 한 에너지 전환과 수송, 건물 등 다양한 분야의 로드맵이 설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2030년 이전에는 탈석탄과 탈내연기관을 완료할 계획이 제시돼야 2050년 탄소중립 달성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2050년에 한국이 온실가스 넷제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빠른 속도로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여야 하는데,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시간 계획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기후솔루션도 이날 문 대통령의 발표를 일견 환영하면서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했다고 강조했다.

 

김주진 기후솔루션 대표는 이번 문 대통령의 선언을 두고 "(이미) 파리협정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달성해야만 하는 목표"였으며 "그간 과학자들과 시민사회가 줄기차게 요구한 것"에 대한 응답으로 해석했다.

 

김 대표는 구체적으로 "현재 매우 느슨하게 설정된 2030년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대폭 강화하는 게 필수"라며 "신규 석탄발전소 건설을 즉시 중단하고, 기존 석탄발전소도 급속히 줄여나가며, 국내외 석탄사업 금융지원도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한국 정부가 밝힌 2030년 온실가스 배출량 목표는 5억3600만 톤이다. 기후 분석 전문기관인 클라이밋 애널리틱스(Climate Analytics)는 한국의 목표가 '매우 불충분'한 수준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지난 4일 양이원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정부의 이 같은 감축 목표안을 두고 "그린뉴딜 정책의 진정성이 의심받을 것"이라며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만들어 감축 의지를 국제사회에 약속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2050 탄소중립 목표를 선언했다. ⓒ연합뉴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102811535505750#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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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총수일가 상속세 마련 위한 ‘배당 잔치’ 벌어질까?

배당 산정에 총수일가 사적 이해관계 개입 시 부작용 우려…산정 근거 투명성 제고 주문도

조한무 기자 chm@vop.co.kr
발행 2020-10-28 18:54:41
수정 2020-10-28 18:5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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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1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호암상 축하 만찬에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과 이서현 제일모직 사장과 ,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재용(왼쪽부터) 삼성전자 부회장이 참석하고 있다.
2015년 6월 1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호암상 축하 만찬에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과 이서현 제일모직 사장과 ,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재용(왼쪽부터) 삼성전자 부회장이 참석하고 있다.ⓒ뉴시스  
 
삼성 총수일가 상속세 마련 방안으로 주요 계열사 배당 확대가 대두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이 지분을 보유한 계열사 배당을 늘려 상속세에 보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경영 차원에서 결정해야 할 배당 산정에 총수일가 개인의 이해관계가 개입하면, 합리적인 판단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28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등에 따르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보유한 주식 평가액은 총 18조2천억원 수준이며 상속세 규모는 10조원 정도로 추산된다. 연부연납제도를 활용하면, 상속세를 신고할 때 6분의 1을 내고 나머지는 5년간 분할 납부할 수 있다. 연간 납부액은 약 1조 8천억원이다.

증권가에서는 총수일가가 지분을 보유한 계열사 배당을 더 늘려 상속세를 충당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향후 배당 확대가 집중될 것으로 전망되는 계열사는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이다. 이 부회장은 삼성물산 지분 17.3%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삼성전자 지분은 0.7%에 불과하지만, 삼성전자 배당이 늘면 이 부회장도 간접적으로 이득을 보게 된다. 삼성물산과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지분을 추가 매입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로 이어지는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다.

유종우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이 부회장 등 총수일가가) 상속세를 마련할 방법은 보유 지분의 배당금과 개인 파이낸싱일 가능성이 있다”며 “향후 계열사 주주환원 정책 확대로 배당 소득이 더 늘어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김동양 NH투자증권 연구원도 “지배주주 일가가 상속세 납부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삼성전자 배당 정책을 강화하고 삼성물산과 삼성전자에 지분을 집중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배당은 경영 일환…총수일가 사적 이해관계 개입 말아야

총수일가 상속세 마련 방안으로 배당 확대를 활용하는 데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총수일가의 사적 이해관계가 개입하면, 합리적으로 결정돼야 할 배당 산정이 왜곡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배당은 기업 순이익 가운데 처분되지 않은 부분, 즉 미처분이익잉여금으로 지급한다. 미처분이익잉여금은 투자 재원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배당이 확대되면 상대적으로 재투자 여력이 줄어든다.

배당과 재투자는 기업과 모든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주식회사의 목적에 걸맞은 방향으로 결정돼야 한다. 재벌 기업은 배당을 확대하면서 ‘주주친화정책’이라는 명목을 내세우지만, 배당 만이 능사는 아니다. 주주의 이익 증대는 ‘배당을 통한 이윤 분배’와 ‘사업 성과를 통한 주가 상승’ 두 축으로 이뤄진다.

경영 환경에 따라 사업 확대와 기술 고도화 등에 대한 투자를 통해 경쟁력 강화에 집중해야 할 상황도 있을 수 있다. ‘투자 확대-경쟁력 강화-매출 증대-재투자’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에서 주가가 상승해 주주 이익이 늘어난다. 배당은 상대적으로 단기적인 이익 실현 수단일 뿐, 주주친화 측면에서 항상 투자를 앞선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는 얘기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주주 입장에서는 배당과 주가 상향에 따른 이익의 합이 최대가 되는 방향으로 경영 정책이 집행돼야 한다”며 “배당과 투자에 대한 합리적인 판단이 이뤄져야 기업과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배당 수준은 경영 차원에서 결정해야 한다”며 “상속세 마련이라는 총수일가 개인의 필요에 따라 배당을 산정하면 기업 경영에 왜곡을 초래할 수 있어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창민 경제개혁연대 부소장(한양대 교수)은 “배당도 주가 부양 목적을 갖고, 투자를 통한 실적도 배당 확대 여력으로 작용해 배당과 투자는 상호 연결성을 갖는다”며 “배당은 절대다수 주주의 이익에 맞게 결정해야지 총수일가 사익 추구 수단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유족들이  28일 오전 서울. 삼성서울병원 암병원 강당에서 열리는 영결식을 마친뒤 나서고 있다.  2020.10.28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유족들이 28일 오전 서울. 삼성서울병원 암병원 강당에서 열리는 영결식을 마친뒤 나서고 있다. 2020.10.28ⓒ김철수 기자

삼성 총수일가 연간 배당 이득 7천억원 규모…배당 산정 근거 투명하게 공개해야

삼성 총수일가는 이미 매년 수천억원의 배당을 챙겨왔다. 이 회장, 홍라희 여사, 이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이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삼성 내 상장 계열사로부터 받은 배당금은 총 3조원 수준에 달했다. 지난해 배당 소득만 7천억원대에 이르는데, 2014년 2천억원 수준에서 3배 이상 증가했다.

배당 확대는 주로 이 씨 부자 지분이 높은 핵심 계열사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이 회장의 삼성전자 지분은 4.18%, 이 부회장의 삼성물산 지분은 17.3%다. 삼성전자의 2014년 중간배당과 결산배당은 1주당 각각 500원, 1만9,500원이었는데, 2017년에는 각각 2만1천원으로 크게 뛰었다. 삼성물산 경우 2015년 500원이던 배당금이 2017년 발표한 배당 정책에 따라 3년간 2천원으로 지급됐다.

배당 분석 지표로는 배당성향이 있는데, 순이익에서 배당으로 사용된 총금액의 비율을 이른다. 배당성향이 높으면 벌어들인 순이익 대비 배당 규모가 크다는 의미다. 삼성전자는 2015년 순이익 18조7천억원을 거둬 이 중 배당으로 3조원을 써 배당성향이 16.4%였다. 2019년 배당성향은 44.7%로 급등했다. 순이익은 21조5천억으로 3조원 정도 늘었는데, 배당총액은 9조6천억원으로 6조원 이상 불면서 배당성향이 치솟았다. 같은 기간 삼성물산 배당성향은 3.1%에서 31.4%로 올랐다.

삼성전자의 최근 5년간 배당 규모
삼성전자의 최근 5년간 배당 규모ⓒ삼성전자

삼성전자와 삼성물산 배당성향은 한국 주식 시장에서 높은 편이다.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2008~2018년 한국 상장사 배당성향은 평균 24.8%다. 삼성전자 배당성향은 국내 평균치의 2배에 육박한다. 삼성물산도 평균치를 크게 웃돈다.

그러나 삼성전자와 삼성물산 배당성향을 마냥 높다고 평가하기는 무리가 있다. LG전자의 지난해 배당성향은 434.4%였다. KT는 62.5%를 기록했다. 주요 7개국(G7) 기업 배당성향 평균은 41.9%로 삼성전자와 비슷한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적정 배당 수준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고 설명한다. 가령 애플 배당성향은 20%대인데, 단순히 삼성전자보다 낮다는 이유로 배당 정책이 주주친화적이지 않다고 평가할 수 없다는 얘기다. 반대로 삼성전자가 애플보다 주주친화적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사업 기회와 투자 수요 등을 고려하면 평가가 분분할 수 있다.

배당은 기업의 이윤을 주주에게 분배하는 수단이며, 주주의 정당한 권리이기도 하다. 주주가 기업 순이익이 증가에 따른 배당 확대를 요구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문제는 배당이 합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산정됐는지 여부다. 주주가 배당 정책을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기업이 중장기적인 배당 계획과 근거를 주주에게 제시해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배당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문이 나온다. 배당은 이사회가 산정해 주주총회 안건으로 올리면 주주 의결을 거쳐 확정하는데, 대부분의 기업은 이사회가 어떤 근거로 배당을 산정하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있다.

이상훈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실행위원(변호사)은 “그간 대기업 배당이 총수일가 개인의 이해관계로 움직이는 사례가 더러 있었다”며 “기업이 사업 전망과 연계한 중장기적인 배당 계획을 세우고 주주에게 설명하면 배당 산정 타당성과 투명성을 제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지난 2019년 3월 20일 서울 서초 사옥에서 정기 주총을 열고 ▲재무제표 승인 ▲이사선임 ▲이사 보수한도 승인 등 안건을 처리했다.
삼성전자는 지난 2019년 3월 20일 서울 서초 사옥에서 정기 주총을 열고 ▲재무제표 승인 ▲이사선임 ▲이사 보수한도 승인 등 안건을 처리했다.ⓒ삼성전자  

조한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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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창간 20주년 좌담회] 스무 살 통일뉴스가 20대에 묻다

  • 기자명 이광길 기자 
  •  
  •  입력 2020.10.29 07:53
  •  
  •  수정 2020.10.29 08: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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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오후 '스무 살 통일뉴스가 20대에 묻다' 좌담회가 열렸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27일 오후 '스무 살 통일뉴스가 20대에 묻다' 좌담회가 열렸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2000년 6월 평양에서 만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역사적인 ‘6.15공동선언’을 채택했다. 남북관계 해빙 기류를 타고 그해 10월 31일 인터넷신문 [통일뉴스]가 첫발을 떼었다. 민족화해의 소식을 전한지 20년, 스무 살이 된 [통일뉴스]가 20대 청년 4명과 좌담회를 열었다.

화두는 ‘6.15공동선언’에서 가져왔다. 이 선언 1항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밝혔다. 핵심어인 ‘북한’, ‘통일’, ‘민족’에 대한 20대의 생각을 들어봤다. 

이정도(고려대 대학원 한국사학과 1995년생), 김송현(중앙대 공공인재학부 1999년생), 이진희(서울지역 대학생 겨레하나 1997년생), 구현우(서울지역 대학생 겨레하나 1999년생) 씨가 참석했다.

좌담회는 27일 오후 3시 10분부터 70분간 서울 마포구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회의실에서 열렸다. 

 

□ 북한 얘기부터 하자. 9월 서해상에서 ‘어업지도원 피살사건’, 10월 ‘노동당 창건 75돌 열병식’도 있었는데 북한 뉴스 접하면 어떤 느낌이 드나? 

1995년생 이정도 씨. [사진-이승현 기자]
1995년생 이정도 씨. [사진-이승현 기자]

이정도 : 저는 남북 분단은 냉전과 관련이 깊다고 생각한다. 소련의 붕괴로 세계는 냉전에서 벗어났지만 한반도에서는 냉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북한이 존속되면서 탈냉전 시기에 이르러서도 한반도, 동아시아,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냉전은 끝났지만 남한과 북한 내부에서 냉전 때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경제적으로 북한에서는 남한이, 남한에서는 북한이 분단체제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목소리에 힘을 불어넣는 행태가 유지되고 있다. 북한이라는 존재가 당장 다가갈 수 없고, 남한 내부에서 전문가들이 말하는 것도 각자 다르고 그들이 말하는 논거나 이유도 부정확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북한이라는 존재에 대한 진실은 잘 알 수 없다. 어업지도원 피살사건이나 열병식도 남한 내에서 각각의 주체들이 그것을 어떻게 이용할지에 따라서 다르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저는 남한이 이렇다 북한이 이렇다 북한의 의도가 이렇다고 하기보단 남북 간 상호작용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북한 관련 좋은 뉴스도 있고 나쁜 뉴스도 있는데, 특히 젊은 층에서 ‘같은 민족’이라는 개념이 옅어지고 있는 건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젊은 세대들이 전쟁도 냉전도 경험하지 못했고 이산가족 등과 같은 민족의 한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같은 민족이라는 공감이 더 발휘된다면 조금 다르지 않을까. 북한의 도발을 부각시키는 기사가 아무리 많고 아무리 세대가 지나더라도.  


김송현 : 북한하면 양면적 측면이 떠오른다. 부정적 측면이라면, 많은 사람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없게 이동의 자유를 침해한다던가, 10년 넘게 걸리는 군대 생활을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던가. 사람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권리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측면은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반면, 북한의 문화나 생활모습에는 긍정적 측면도 많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탈북민 친구들 많이 만나면서부터다. 제가 겪은 문화들이 진짜 북한의 문화인지 알 수 없지만 간접적으로 탈북민들 통해서 경험한 북한의 문화는 되게 소박하고 친환경적이고 우리가 도시화·자본주의화 되면서 옅어지고 있는 공동체 의식이나 순우리말을 많이 사용한다든가 우리 민족의 고유성을 많이 보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으로 봐야 할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이진희 : 북한 하면 옛날에는 대학 들어오기 전에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국가’, (말보다) 무력 행동으로 나와서 폭력적이라는 생각이 컸다. 그런데 대학 들어와 대학생겨레하나 동아리 활동하면서 북에 대해 알게 되고, 2018년 판문점선언 때 김정은 국무위원장 발언 보고 북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었다. 정말 대화 안하려고 한 것은 우리였구나, 북은 오히려 대화를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었구나 생각 들었고. 기존 북의 이미지는 딱딱하고 어렵고 그랬는데 화면에서 봤던 김정은 위원장 이미지는 유머 있고 재밌고 내가 생각했던 그런 이미지가 아니었구나 하고 깬 게 판문점선언이었다.  

2018년 (판문점선언)전까지는 북 문제는 통일 동아리 하는 우리한테나 관심 가는 문제였다고 생각했다. 저희 동아리 회원도 7~8명, 별로 없었다. 판문점선언 직후 제가 ‘대학생 남북교류 준비단’ 일을 했다. 1주일도 안됐는데 대학생 300명이 모였다. 평소에는 그렇게 안모였는데. 대학생들이 아직도 남북 교류, 평화통일에 관심이 많구나 실감했다. 정세가 그래서 별로 표현하지 않았구나 싶었다.   


구현우 : 대학 들어올 때부터 통일문제에 관심 갖고 있어서 작년부터 겨레하나에서 활동하고 있다. 북한은 평화를 위해서는 같이 품어나가야 할 존재이지만, 개인적으로 사회적 이슈 보고 있을 때는 북한은 또한 경계해야 할 대상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업지도원 피살사건, 열병식도. 북한의 행위들이 한반도 평화에 방해되는 측면이 있다.


□ 여러분들은 민화협이나 겨레하나 활동을 하니 북한에 관심이 많은 편이지만, 주변 또래의 북한 인식은 어떠한가?


구현우 : 제 주변 친구들한테는 안 좋은 인식이 많은 것 같다. 북한 뉴스 접하면, 나오는 반응이 ‘돈도 없으면서 미사일만 쏜다’는 식이다.  

이진희 : 요즘 이런 얘기 꺼내면 논쟁거리가 된다. (의견이) 갈리는 얘기는 잘 안 하는데 하게 되면 안 좋은 얘기 나오더라. 부정적인 생각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북을 너무 모르기도 하고 뉴스나 매체도 너무 자극적으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고. 

1999년생 김송현 씨. [사진-이승현 기자]
1999년생 김송현 씨. [사진-이승현 기자]

김송현 : 제가 통일에 관심 있는 대학생이라고 말하고 다님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게다가 기자들이 쓴 북 관련 기사에 대한 신뢰도도 부족하다.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부정적이다 긍정적이다를 떠나서 우린 아예 북에 대해서 잘 모르고 무관심하다는 표현이 가장 적합한 것 같다.  


이정도 : 제 주변에서 북한에 긍정적인 친구들은 북한에 대해서라기보다는 통일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더 많다. 북한(자체)보다는 통일에 관심의 초점이 더  맞춰져 있는 것 같다. 북한에 대한 관심, 통일에 대한 관심은 결이 조금 다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친구들이 대체적으로 많다. 그 이유는 아까 나왔듯이 북한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남북관계가 일관적이지 못하다는 점, 남한의 정권이 바뀜에 따라 북한에 대한 정책이 수정되고. 어떤 때는 정부에서 북한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나오지만 다른 때는 반대적인 평가가 나오고.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 북한에 대한 평가는 국민들이나 특히 북한을 많이 경험하지 못한 젊은 청년들이 북한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요소다.  


□ 언론에서 나오는 북한 뉴스가 팩트라고 믿어지나?


이정도 : 아니다. 사회문화분야 말고 북한 정치.군사 기사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북한이 존재하는 이상 남한에서는, 남한이 존재하는 이상 북한에서는 충분히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권의 입장에 따라서 특히 언론인의 성향에 따라 기사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요즘은 북한 기사를 보면 기사를 보기 전에 누가 작성했는지 신문사나 기자를 먼저 찾아보고 읽는 편이다. 국민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방법이 언론 쪽에서도 쉽지 않은 것 같다. 북한에 직접 가서 취재할 수도 없고 북한에서 나오는 보도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도 없고. (그렇지만) 언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정보 전달이다. 북한의 정치.군사 분야 기사를 작성할 때는 사실에 초점을 맞춰서 전달해야 하지 않을까. 판단은 국민에게 돌리고. 북한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국민에게 가감 없이 전달하되 언론인이 판단은 유보하고 국민들에게 맡기는 편이 좋지 않을까. 정치.군사 분야 이외에는 민족적 감정이나 공감 능력이 조금 더 발휘될 수 있는 기사 있으면 좋을 것 같다.   


김송현 : 제가 처음에는 이분 정도면 북한 관련해 많은 경력 쌓았으니 믿을 수 있겠다 생각해서 그분 기사에 대해서는 비판 없이 사실로 받아들였는데 그분도 사실과 다른 기사 내는 것 보고 나서는 다른 기사들 통해서 팩트인지 아닌지 찾아보는 습관 생겼다. 다른 경로가 많이 없기 때문에 오보가 날 가능성이 있지만 나중에라도 알았을 때 정정해주면 독자들에게 더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정부쪽에 부탁하고 싶은 것인데, 실제 북한에서 나오는 뉴스에 대해서 언론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국민들도 (북한 뉴스를 직접) 볼 수 있는 경로가 열렸으면 좋겠다. [주-남측 정부는 조선중앙통신과 노동신문을 비롯한 북한 사이트들을 ‘유해 사이트’로 분류해 차단하고 있다.]

1997년생 이진희 씨. [사진-이승현 기자]
1997년생 이진희 씨. [사진-이승현 기자]

이진희 : 근거 없는 보도 좀 안했으면 좋겠다. 누가 죽었네 누가 총살당했네 (했는데) 다음 공식석상에 나오고. 그렇게 보도하고 나서 기자들이 책임 안지고 그냥 내버려두더라. 그런 근거없는 이야기들, 도움 안 되는 기사 안 썼으면 좋겠다. 북의 소식을 차라리 국민들이 곧바로 접할 수 있는 경로가 확대되면 좋겠다. 

구현우 : 예를 들어 열병식 같은 하나의 사안에 대해 엄청 많은 의견들이 나오더라. 볼 때마다 사실도 너무 다르고 기자들의 주관적 의견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다. 북한 관련 기사를 쓸 때 기자들의 주관이 너무 많이 들어가지 않았으면 하고, 최대한 팩트만 전달했으면 좋겠다. 앞에서 얘기했듯 민간에서도 북한 뉴스나 방송들 바로 볼 수 있게 풀어줬으면 좋겠다. 북한 뉴스도 (팩트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걸 판단할 능력을 국민들이 갖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북한 뉴스나 방송을 (국민들이) 직접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통일은 필요한가? 필요하다면 그 이유는?


이정도 : 아예 무관심한 편을 제외하면, 통일은 해야 한다고 보는 친구들이 제 주변에는 많다. 통일을 해야 하는 당위성, 이유는 생각들이 나뉜다. 민화협 들어올 때 첫줄에 ‘저는 민족주의자입니다’라고 썼다. 지금은 그 단어가 엄청나게 무서운 것임을 알고 그런 말 함부로 안하지만, 그만큼 민족주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지금도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통일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는데, 제 친구들은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통일해야 한다’는 프레임을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된다. 다른 나라들을 보더라도 같은 민족인데도 나라가 다른 경우도 존재하고 굳이 합치지 않아도 평화적으로 잘 살고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민족이라는 프레임보다는 경제적 편익, 이익, 교류를 통해서 육로가 뚫리면 얻게 되는 경제적 이익 등으로 통일의 당위성 설명하는 친구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김송현 : 저도 그렇지만, ‘통일보다는 평화’가 청년세대의 중점적인 키워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북 주민들이 피해를 보거나 지금보다 삶이 더 나아지지 않는 방식의 통일이라면 저는 반대한다. 평화가 오지 않는 상태에서의 통일에는 저는 반대한다. 통일과 평화가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나고 과정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는 주변 친구들도 다양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통일해야 된다 안해야 된다고 결론을 지어서 의견을 표현하는 친구들은 별로 없다. (어떤 통일인지, 과정까지 포함해서) 다 고민하는 친구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이진희 : 우리가 분단된 것은 우리가 원해서 된 것은 아니다. 외세에 의해서 강제로 분단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통일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힘으로 자주적으로 통일하는 게 중요하고 우리 민족의 자주성 회복을 위해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999년생 구현우 씨. [사진-이승현 기자]
1999년생 구현우 씨. [사진-이승현 기자]

구현우 : 우리 때문에 분단된 것은 아니니까 같은 민족으로서 통일하는 것은 맞다고 생각한다.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통일을 추진하는 것은 맞지만 서로 원하지 않는 방식을 통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예멘이라든가 다른 나라들 사례 보면 통일했지만 내전이 난 경우도 많더라. 통일을 했지만 불완전한 통일은 원치 않는다. 앞에서 얘기했듯 남북 간에 평화가 먼저 자리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화가 먼저 자리 잡아야 서로 오갈 수 있고 서로 신뢰를 쌓을 수 있지 않나. 그런 과정 속에서 통일도 같이 이뤄질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한다.

□ 통일과 민족, 민족주의는 직결된 문제로 여겨져 왔는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


구현우 : 민족주의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제 생각에는 위험한 것 같다.  

이진희 : 위험한가요?

김송현 : 모든 게 그렇지만 과한 것은 나쁘지만 어느 정도의 민족주의는 우리 고유의 문화나 가치를 보존할 수 있는 좋은 이념이라고 생각한다. 과도한 것은 나쁘지만 적정한 수준의 민족주의는 우리가 추구하는 통일을 실현하는 좋은 매개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정도 : 민족주의는 견지는 해야 하지만 조심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과도한 민족주의는 우리뿐 아니라 주변국가에게도 폐해가 있다. 근본적으로 평화를 해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대신, 민족주의 + 평화주의나 공동체주의라든가 결합하면 좋지 않을까. 우리의 생존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공동체의 생존을 같이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 20대에게 정말로 통일은 절박한가?


구현우 : 통일은 필요하다고 생각은 한다. 넓게 봐서는 통일로 이어지는 과정이 결국 동북아시아와 전세계 평화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미국과 중국 보면 신냉전 조짐이 있는데. 또한 분단으로 인해서 저희 삶에 많은 제약이 있는데 통일이 된다면 그런 것들을 벗어나서 러시아 등 대륙으로 진출하고 우리 삶이 많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이진희 : 분단으로 인해서 받고 있는 제약을 생각하면 꼭 통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재일동포들 만난 적 있다. 저희 동아리에서 시모노세키에 있는 강제동원역사관에 갔는데 그분들은 자기의 뿌리에 대해서 엄청 생각하시더라. 처음 만났는데 ‘조국통일 만세!’ 외치며 오시더라. 엄청 신선한 충격 받았다. 그분들 얘기 들어보니 자기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일본 땅에서 그걸 지키기 위해서 엄청 고민하고 있더라. 그런 분들을 보면서 진짜 평화통일에 대해서 절박하게 생각하고 있더라. (그분들에게는) 삶의 문제이구나. (서울에서는 덜 절박한데) 왜 그럴까요?


구현우 : 솔직히 분단체제에서도 먹고 살아가는 데 큰 문제 없으니까. 현실에 안주하면서 살아가는 편안함에 젖어있을 때가 많다는 생각이 스스로도 든다. 청년들도 그런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경제가 어렵기도 하고. 통일보다는 요즘 청년들은 경제 문제에 관심 많은 것 같다. 


김송현 : 저도 통일이 왜 필요한가 많이 생각해봤다. 분단체제에서도 잘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는 왜 통일을 해야 하나 의문점을 많이 해결한 게 북에서 오신 분들 만나면서다. 북한이탈주민들을 제2의 이산가족이라고 생각한다. 1세대 이산가족들과 마찬가지로 북한이탈주민들이 보고 싶을 때 가족들을 못 보는 것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많이 공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은 한 국가로 만들어나가는 것인데 왜 필요한가라고 생각했을 때 영국 브렉시트(Brexit) 많이 떠올랐다. 유럽연합(EU) 형성해서 잘 살았지만 다른 국가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이 체제에서 떠나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자유로운 왕래나 한 국가 안에서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제약이 늘어나게 된다. 한 국가 테두리 안에서 있을 때와 많이 차이가 난다. 그런 점을 재외동포나 탈북민들 이야기 통해서 한 국가의 테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공감했다. 그래서 지금은 통일에 대해서 찬성하고 있다.
 

이정도 : 통일 얘기 할 수 있는 분들 많이 만나 얘기하는 편인데 요즘은 통일이 필요할까 하는 의문이 커지고 있다. 이산가족이나 탈북민 보면 통일의 필요성 있어 보이지만, 그러면 통일의 대상이 문제가 된다. 통일을 원하는 세력도 있으나 반대하는 세력도 있다. 남한에서의 통일의 주체는 누구이고 북한에서 통일의 주체는 누구일까. 저는 통일은 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는데, 사회 분위기 보면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통일해야 할까’ 하는 질문에 대해서 바로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는 없는 것 같다.   


□ 통일 과정에서 해보고 싶은 일이 있는가?    


이정도 : 저는 진정한 남북 간의 교류협력 시대가 왔을 때 통일시대에 걸맞는 역사학을 하고 싶다. 현재 남북이 가르치는 역사와는 조금 다른 역사가 필요할텐데 나는 어떻게 준비할까 이런 고민하면서 공부하고 있다. 
 

김송현 : 실제 북한 사람 만나는 남북교류가 활성화됐으면 좋겠다. 그 중심에 청년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앞으로 통일 미래를 살아갈 주역은 청년들인데 그 세대들이 계속 무관심하게 통일문제를 대하는 것에 대해서 저는 아쉽게 생각한다. 무관심을 넘어서 긍정이든 부정이든 심도 있게 고민하는 과정이 청년세대에 필요하고 그러려면 실제 북에 대해 아는 게 필요하고 그래서 더 많은 북과의 교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진희 : 저는 미대생이라 미술교류전 하고 싶다. 그리고 제가 통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현실적인 실천들이라고 생각한다. 통일을 가로막는 미국, 분단에 기생하는 사람들에 맞서 목소리를 내고 싸우는 게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에도 통일운동하는) 대학생들이 있고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구현우 : 저도 민간교류 통해서 북한 사람들 직접 만나고 싶다. 특히 청년들과 만나고 싶다. 이곳에서 활동하고는 있으나 실제로 만나지 못하니 아는 게 별로 없다. 하고 싶은 것은 북한에 대한 오해라든가 객관적인 사실을 정립하고 싶다. 학교에서도 북한, 통일에 대해 배운다. 그런데 학교에서 배우는 북한 얘기와 겨레하나 동아리에서 듣는 얘기랑 너무 다르다. 언론에서도 북한에 대해 너무 안 좋게 얘기하고 오보 내보내는 경우도 엄청 많고.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서는 북한에 대한 오해와 불신들이 너무 많아서 북한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런 것들이 체계적으로 정립되어야만 우리 사회에서 통일과 북한에 대해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자리가 많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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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세균실험실 폐쇄하라” 온라인 남구주민대회 성황리 열려

  • 기자명 홍기호 현장기자
  •  
  •  승인 2020.10.27 21:20
  •  
  •  댓글 0
 
 

300여명의 남구 주민들 화상으로 만나 주민투표 성사 결심

지난 24일, 부산항 미군 세균실험실 추방을 위한 ‘온라인 남구주민대회’가 8부두 미군세균실험실 앞을 비롯한 50여개의 거점에서 남구주민 3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됐다.

부산8부두 미군세균전부대 추방 남구대책위(이하 대책위)의 주최로 열린 이번 행사는 코로나 상황을 감안하여 8부두에 중계석을 운영하고 5~6명의 주민들이 각자의 생활거점에서 화상회의 방식으로 참여했다.

여성, 노동자, 자영업자, 종교인 등 남구에 거주하는 각계각층의 분들이 참여했으며 연령 또한 10대 청소년부터 80대 어르신까지 다양했다.

8부두 온라인 중계석을 통해 개회사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주민 참가자 인터뷰, 주민투표 성사를 위한 주민회의, 남구 주민 주권 선언 발표가 순서대로 진행됐다.

동네슈퍼, 중국집, 미용실, 계란가게, 카페, 식당, 도서관, 마을 평상, 공동체센터, 반찬가게 등 마을 공간에서 화상으로 참가한 주민들의 적극적 의견들이 온라인을 통해 모아졌다.

주민투표 성사를 위해 “한사람이 열 명의 주민들의 요구서명을 받자.”, “시장에 오는 단골 손님에게 서명을 받겠다.”, “아파트 현관 입구에 주민투표 홍보물을 붙이겠다.”, “차량에 홍보 스티커를 붙이겠다.”, “세균 실험실 주변 거주자들의 건강 상태 역학 조사를 통해 피해 등을 확인하자”라는 의견 등 꼭 주민투표를 성사시키겠다는 주민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참가자들은 남구주민 미군 세균무기실험실 폐쇄 남구주민 주권선언을 통해 “부산시 주민투표를 우리가 성사시키자”, “생활과 생업 속에서 주민투표 자원봉사 실천을 이어가자.”, “실험실을 패쇄하고 아이들에게 평화로운 이 땅을 물려주자.”라고 선언했다.

참가자들은 온라인 대회 직후부터 미군 세균실험실 폐쇄 주민투표 요구서명 수임인이 되어 마을 곳곳에서 서명운동을 펼칠 예정이다.

부산항 미군세균실험실 패쇄찬반 주민투표 추진위 관계자는 “남구 대책위 온라인 주민대회를 시작으로 구별 추진위 결성 및 결심 행사가 연이어 이어질 예정이다.”라며 “부산시민의 생명과 안전이 걸린 사안인 만큼 부산시민이면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서명운동이 펼쳐질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 향후 시민사회 및 구별 추진위 결성 및 수임인대회 일정 ]

■10월 27일(화) 부산항 미군 세균실험실 폐쇄 찬반 주민투표 부산진구 추진위원회 결성식(오후 6시, 부산진장애인자립생활센터 교육관

■11월 12일(목) 부산항 8부두 미군 세균실험실 폐쇄 여성 온라인 집회(오후7시 30분, 온라인 대회)

■11월 15일(일) 부산항 미군 세균실험실 폐쇄 대학생 청년 청소년 원탁회의(오후3시, 온라인대회)

■12월 5일(토) 연제구 추진위원회 수임인 대회 (일시장소 미정)
*업데이트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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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에도 쓰레기가 줄었다? 대구 달서구의 '황당한' 기적

[백경록의 지방의회는 지금] 박종길 구의원은 재활용폐기물 수거량·잔재물량을 어떻게 감축했나

20.10.28 08:00l최종 업데이트 20.10.28 08:00l
1991년 지방의회가 부활한 지 곧 30년이 됩니다. 각 시·도·군·구의 주민들을 대표해 지방자치를 실현해가야 할 주체로서 과연 제 역할을 잘하고 있을까요? 백경록 대구의정참여센터 운영위원장과 함께 지방의회의 현재,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어봅니다.[편집자말]
우리가 배출한 플라스틱 24일 부산 강서구 부산시자원재활용센터에 각 가정에서 배출된 플라스틱 등 재활용 폐기물 분류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부산에서 배출되는 재활용 폐기물이 모이는 이곳은 코로나19로 배달 음식과 택배가 늘어나면서 지난해보다 20% 이상 처리량이 늘었다.
▲ 우리가 배출한 플라스틱 지난 9월 24일한 자원재활용센터에 각 가정에서 배출된 플라스틱 등 재활용 폐기물 분류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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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여파로 재활용쓰레기가 가파르게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환경부에 따르면 올 1~8월 재활용폐기물 발생량은 전년 동기 대비 11.4% 늘었다. 전국 민간 소각시설은 9월 현재 가동률 106%로 허가용량을 초과 운영 중이다.  

비대면 소비 확대로 택배 상자 같은 쓰레기가 늘면서 폐기물 또한 빠르게 증가했다. 이는 통계청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8월 온라인 쇼핑 거래액은 14조 3833억 원으로 전년 대비 3조 1047억 원(27.5%) 증가했다.

그런데, 이 시국에 재활용폐기물 수거량의 수치가 줄어든 지방자치단체가 있다. 바로 대구광역시 달서구다. 인구 57만3천여 명으로, 대구시 안에서 가장 큰 기초지방자치단체이자 평균연령이 가장 젊은 지역중 하나다. 

달서구 월배권의 재활용폐기물 수거량은 1~5월 기준 2019년 6023톤에서 2020년 4839톤으로 1184톤 감소했다. 매달 평균 약 237톤이 줄어든 셈이다. 처리 과정에서 재활용하지 못하고 남은 잔재물도 5개월간 2019년 2949톤에서 1442톤으로 총 1507톤, 매달 평균 약 301톤을 감축한 것으로 확인됐다. 대체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대구의정참여센터와 <오마이뉴스>가 공동주최한 2020년 7월 '우리삶을 변화시키는 지방의원과 정책'에서 대상을 받은 박종길 달서구의원(더불어민주당)의 사례를 보면 우리가 놓치는 것들이 보인다.

젊은이 많아서 쓰레기도 많다? 달서구 논리의 허점

지난해 10월 달서구청 용역으로 계명대학교 산학연구소에서 생활폐기물 수집·운반·처리비 원가계산 최종보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박 의원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2020년도 재활용폐기물 수집·운반·처리 대행수수료 예산이 2019년도 대비 72% 증액된 것이다. 금액으로 보면 2015년 18억 원이었던 대행수수료 관련 예산이 2020년에는 약 62억 원으로 늘었다. 2015년 대비 무려 250% 수준이다.

자료를 받아봤더니, 원가 산정의 기준이 되는 수거량, 재활용폐기물 선별과정에서 나오는 잔재물량이 지나치게 많이 잡히고 있었다. 특히 잔재물은 소각이나 매립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악취나 각종 오염물질이 발생되기 때문에 철저히 선별해 재활용률을 높여야 하지만 그런 노력이 보이지 않았다. 

2019년 말, 박 의원은 달서구청을 상대로 문제제기에 나섰다. 대구시의 다른 구·군은 재활용폐기물이 1인당 30~32kg인데 왜 달서구는 약 44kg냐고 물었다. 달서구 측은 "성서산단과 4개 대학이 있어 젊은 층이 많이 거주한다"며 "타 구보다 유동인구가 많아 인구 1인당 재활용폐기물이 많이 발생해 수거량 또한 많다"고 답했다.

달서구는 재활용폐기물을 성서권역과 월배권역으로 나눠 서로 다른 업체가 처리한다. 계명대학교 등 대학이 밀집한 곳은 성서권이다. 젊은층이 밀집한 지역이 포함돼 있어 구 전체적으로 쓰레기 수거량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과연 사실일까? '젊은 사람이 많을수록 쓰레기도 많이 나온다'라는 달서구의 논리라면, 성서산단과 4개 대학이 들어선 성서권의 발생량이 그렇지 않은 월배권보다 많아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다.

이 내용을 근거로 다시 물었지만, 2020년 2월 12일 이태훈 달서구청장은 "의원님이 자기 선입견으로 자꾸 강요"한다며 박 의원이 잘못 판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구 달서구 권역별 재활용가능폐기물 수거량 비교표. 월배권역이 문제가 된 지역이다.
▲  대구 달서구 권역별 재활용가능폐기물 수거량 비교표. 월배권역이 문제가 된 지역이다.
ⓒ 백경록  
 
같은 지역인데 수거량이 왜 이렇게 다를까? 박 의원은 두 권역의 차이를 파고들었다. 알고 보니 성서권은 수거 차량마다 지정된 카드로 자동 계량하고 있는 반면, 월배권은 카드를 이용한 자동계량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월배권의 업체가 수거량을 부풀리고 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드는 지점이었다. 

월배권 수거는 17년 동안이나 동일한 업체가 맡아왔는데, 달서구청은 이 업체의 정확한 수거량을 파악하기 위한 어떠한 행정조치도 하지 않고 있었다. 수거량의 정확성을 담보할 시스템 구축도 부실했고, 심지어 월말에 기초자료가 되는 계근전표마저도 받지 않았다. 업체가 속일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줬다는 게 박 의원의 판단이었다.

이후 박 의원의 문제제기가 나오자 월배권 대행업체는 자동계량화 시스템을 도입하고 계근전표를 제출하기로 했다. 더 이상 예전처럼 숫자를 속일 수 있는 여지가 사라지게 됐다. 그러자 실제 재활용폐기물 발생량은 줄어든 것이 아닌데, 월배권의 수거량과 잔재물량의 수치가 획기적으로 줄어드는 기적과 같은 상황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배출량이 극적으로 줄어드는 기적은 없었지만

박 의원은 문제 해결을 위해 다른 업체 관리자와 인터뷰하던 중 핵심을 찌르는 말을 들었다. "재활용폐기물 잔재물을 줄이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업자의 의지다." 재활용폐기물의 재활용률을 높이고 잔재물량을 감축하려면 업체의 노력 또한 관건이라는 뜻이다. 이 부분은 환경부도 경청해야 될 대목으로 보인다.

박 의원은 달서구의 재활용폐기물 처리 예산을 점검하면서 계약방식에 대한 문제도 제기했다. 현재 달서구는 협상에 의한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데, 적격심사를 통한 완전 공개입찰을 도입하면 업체선정 과정의 투명성도 높이고 예산도 절약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동일한 회사와 계약을 반복한 달서구는 낙찰률이 99.9%였고, 적격심사를 통한 완전 공개입찰방식을 선택한 달성군 다사지역은 낙찰률이 87.33%였다. 낙찰률이 낮을수록 비용을 절감한다. 만약 계약방식을 일찍이 바꿨다면 약 7억 원을 아낄 수 있었다고 박 의원은 주장한다.

이밖에도 이태훈 구청장은 2020년 재활용폐기물 수집·운반·처리 대행수수료 예산을 2019년 대비 72% 증액한 또 다른 이유로 인력 증원을 꼽은 바 있다. 수집·운반원이 3.56명, 선별인원이 9.14명 증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 의원이 임금대장을 분석해보니 거의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예산 증액의 허점을 또 한 번 짚어내자, 그제야 구청장은 "세부사항은 제가 아직 미처 파악을 못한 상태"라며 한계를 인정했다. 

안타깝게도 쓰레기 배출량이 극적으로 줄어드는 기적은 없었다. 다만 자동계량화 시스템, 계근전표 제출, 계약방식의 변경 등 기초지자체가 관리·감독만 제대로 한다면, 수거량은 물론 전국에서 한해 폐기물을 처리하는 데 드는 비용 연간 15조 원 중에서 절약해볼 수 있는 요소들이 분명히 생긴다는 점이다.

달서구의회는 문제의 반복을 막기 위해 2020년 8월 대구광역시달서구 폐기물 관리에 관한 조례를 개정하면서 제12조(생활폐기물 수집·운반·처리의 대행 등)에 아래와 같이 2가지 항목을 추가했다.

▲ 임금지급내역, 수거량 집계표 및 계량증명서(계근전표) 등을 포함한 대행업무와 관련된 자료제출 요구에 관한 사항
▲ 대행업체 현장점검에 관한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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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처럼 일하는 삶, 우린 아직도 ‘전태일’이다

등록 :2020-10-28 04:59수정 :2020-10-28 08:15
 
 
[그 후 50년, 여기 다시 전태일들]
1부. 2020년, 무엇이 달라졌나
①여전한 노동, 고단한 삶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몸 불살랐던 전태일의 외침
하루 16시간 일하다 피를 토하던 여공과
하루 16시간 일하다 쓰러지는 택배 노동자들…
2020년, 우린 얼마나 달라졌을까
서울 청계천에 있는 한 봉제공장의 모습. 화섬식품노조 서울봉제인지회 제공
서울 청계천에 있는 한 봉제공장의 모습. 화섬식품노조 서울봉제인지회 제공
1970년 11월13일, 평화시장 봉제공장 재단사로 일하던 22살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2만여명이 넘는 종업원의 90% 이상이 평균 연령 18세의 여성”이었고, “40%를 차지하는 시다공들은 평균 연령 15세의 어린이들”(전태일이 쓴 탄원서)이었다. 이들은 “하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하루 16시간의 작업”을 했다. 전태일은 노동청과 서울시청 근로감독관을 찾아가 이런 부조리를 고발했지만, “한달에 이틀 쉬면서 일주일에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리”는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여공들은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과 폐결핵”에 시달렸다. 전태일 분신 이후 한국 사회는 조금씩 소외된 노동 현장을 살피고 그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50년, 전태일 외에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주변부 노동자들의 삶은 달라졌을까. 얼마나 달라졌을까.
 
2007년 7월, 2년 전 국회를 통과한 비정규직 관련 법이 유예 기간을 거쳐 본격 시행됐다. 기간제 노동자 사용 기간을 2년 이내로 규정한 내용이 핵심이었는데, 비정규직의 존재를 법적으로 인정한 셈이 되어 노동계의 큰 반발을 샀다. 그해 44살이었던 김영순(가명)은 한 고등학교에 비정규직 급식 노동자로 취업했다. 아침 7시30분까지 출근해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학생들의 저녁밥을 배식하고 설거지까지 끝내면 퇴근 시간은 언제나 밤 10시였다. 2300명의 점심과 저녁 두 끼니씩, 매일 4600인분의 음식을 만들었다. 1년쯤 지나 손목 힘줄에 이상이 생겼다. 병원에 갔더니 두 군데나 염증이 생겼다고 했다. 곧 ‘손목 방아쇠 수지 증후군’ 수술을 받았다. 밥솥을 들고 내리다 그런 게 분명한데, 학교는 산업재해가 아니라고 했다. 근무 기간이 짧다는 이유를 댔다. 수술 뒤 재활은 꿈도 꾸지 못한 상태에서 또 새벽에 출근해 밥을 짓고 배식을 하고 설거지를 했다. 학교 쪽은 안 그러면 “해고할 것”이라고 알려왔다. 1년 단위 계약으로 해마다 재계약을 했기에 학교 쪽의 그런 강짜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김영순만 그런 게 아니었다. 모두 불안정한 신분에 과도한 노동을 하다 보니 약간의 충돌에도 예민해졌고, 고참 언니들의 구박과 서로 간의 헐뜯음이 급식실을 오갔다. 월급은 고작 120만원 정도. 그나마 2012년 생긴 학교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꾸준히 싸운 결과, 2017년에 학교 직고용 체제의 무기계약직 신분이 됐다. 불안정한 신분이 조금은 해소됐기 때문일까. 급식실의 구박과 헐뜯음도 현격히 줄었다. 그러니까 그게, 지난 43년 동안 김영순의 신분이 바뀐 유일한 경우다.
1975년 서울 평화시장 봉제공장(왼쪽 사진)과 최근 서울 종로구 창신동 봉제공장(오른쪽 사진)의 모습.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50년이 흘렀지만 풍경은 별반 달라지지 않고 노동자들의 주름살만 더 깊어졌다. 봉제공장 노동자들은 여전히 근로계약서조차 쓰지 못한 채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lt;한겨레&gt; 자료사진
1975년 서울 평화시장 봉제공장(왼쪽 사진)과 최근 서울 종로구 창신동 봉제공장(오른쪽 사진)의 모습.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50년이 흘렀지만 풍경은 별반 달라지지 않고 노동자들의 주름살만 더 깊어졌다. 봉제공장 노동자들은 여전히 근로계약서조차 쓰지 못한 채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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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살 ‘시다’에서 57살 학교 급식 노동자로
1977년, 14살이던 김영순은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터에 나갔다. 밥을 굶을 형편까진 아니었는데 “딱히 학교를 더 다니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어머니 친구의 소개로 서울 동부이촌동에 있는 개인 의상실에 취직했다. 김영순이 처음 얻은 직업은 ‘카렌스 의상샵 시다’였다. 부자 동네의 고급스러운 옷집 일은 어렵지 않았다. “선생님이 피팅할 때 핀 잡아주고 심부름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해 겨울, 첫 월급은 3만8천원이었다.의상실에서 모시던 “선생님이 예쁘게 봐주어” 명동에 있는 노라노 의상샵으로 옮겼다. 당대 최고의 의상실이었다. 1명의 선생님 밑에 6명의 ‘시다’가 일하는 구조였는데, 일이 만만치 않았다. 야근이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평화시장에서 일하면 오후 6시에 딱 끝나고 월급도 1만원 더 준다”는 친구의 말에 혹했다. 의상실에서 봉제공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시다’의 삶이 시작됐다.김영순이 평화시장 2층 다락방 봉제공장에 처음 들어선 시기는 전태일이 분신한 지 7년이 지난 뒤였다. 분신 이후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이 야학을 만들고 공단에 위장 취업해 노동조합을 조직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전태일이 죽음으로 읍소했던 노동 환경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뿌연 먼지로 가득한 공간에 크기를 헤아릴 수 없는 소음이 김영순을 덮쳤다. 다다미 바닥 위 재봉틀은 소란을 멈추지 못했다. ‘이처럼 작은 공간에 이렇게 사람들이 빡빡하게 서서 부딪히지 않고 일할 수도 있구나’라고 떠올렸던 그때 그 생각이 43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고 김영순은 말했다. “상처 하나 없는 깨끗한 마네킹에 화려한 옷을 입히던 소녀”는 그렇게 66㎡(20평) 남짓한 공간에 25명이 부대끼며 일하는 봉제공장의 ‘10대 여공’이 됐다.악 소리도 내지 못할 만큼 바빴다. 교복 자율화 바람이 불었고, 사람들은 점차 소비에 눈뜨고 있었다. “팔다리만 제대로 달려 있으면 옷을 집어가던 시절”이었다. 미싱사 ‘오야’ 언니들이 박카스랑 같이 먹으라며 ‘영양제’를 줬다. 몇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영양제가 ‘타이밍’이라고 불리는 각성제라는 걸 알았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던 시절이었지만 현장은 별나라였어요. 근로기준법에 마약류 투입 금지 같은 조항이 있었겠어요? 그땐 다 그렇게 일했죠.” 김영순은 그렇게 몇년 동안 더 ‘타이밍’을 먹고 잠을 뿌리치며 ‘오야’ 언니들이 집어던진 일감을 수습하고, 옷의 라인을 잡고, 재단된 옷을 넘겼다. “참을 만했던 것인지, 참을 수 있었던 것인지, 겨우 참아냈던 것인지…, 이제 기억나지 않아요.”김영순에게도 빛나던 시절의 기억이 있다. “교회에 공부하러 간다”던 친구를 따라 박형규 목사가 있던 제일교회에서 ‘야학’을 했던 때다. 한문과 세계사, 상식을 그때 처음 접했다. ‘시골에서 올라와 자취하던 언니들이 살던 창신동 보문동 방’을 강의실 삼아 노동법 관련 공부를 하면서 “이슬비에 옷 젖는 것처럼” 조금씩 생각도 바뀌었다. 손학규, 송영길, 김문수 같은 이들을 그때 ‘선생님’으로 처음 봤고, 위장 취업한 두살 위 대학생 오빠와 이른바 ‘노학연대’ 커플이 되어 결혼했다. 변두리 노동자들을 ‘학습’시키겠다며 현장에 ‘침투’했던 그때 그 오빠는 이제 사내 등산반 활동을 열심히 하는 “평범한 생활인”이 되어 위장 취업했던 그 회사에서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다.그러나 김영순의 삶에 큰 영향을 준 일들은 노동법을 공부하던 그 시절이나 전태일 분신 이후 50년 동안 일어난 굵직한 노동 관련 사건들이 아니었다. 청계천을 떠나 경력이 단절됐다가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게 만든 출산이었고, 아이엠에프(IMF) 경제 위기였으며, 43년 사이 폭등한 부동산 가격이었고, 어느덧 훌쩍 자란 아이의 과외비였다. “43년 전에서 지금은 얼마나 멀리 왔을까요? 그때는 공장 위 다락방에서 언니들과 수다를 떠는 게 좋았고, 지금은 그때 어울리던 사람들과 함께 늙어가며 고단함을 견딜 뿐이에요.”
서울 종로구 창신동, 성북구 보문동, 동대문구 신설동 일대에서 일하는 봉제 노동자는 9만여명으로 추정된다. 40~5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시다’로 불리던 이들은 어느덧 ‘사장님’이 됐지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해야 겨우 먹고살 수 있고, 노동법 밖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은 변한 게 없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서울 종로구 창신동, 성북구 보문동, 동대문구 신설동 일대에서 일하는 봉제 노동자는 9만여명으로 추정된다. 40~5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시다’로 불리던 이들은 어느덧 ‘사장님’이 됐지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해야 겨우 먹고살 수 있고, 노동법 밖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은 변한 게 없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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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8시…“아직도 일이 남았다”
61살 이군표(가명)의 삶과 노동도 1970년대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게 없다. 그는 서울 창신동에서 아내와 함께 가내수공업 봉제공장을 운영한다. 지난 13일 만난 이군표는 대뜸 “인터뷰가 오래 걸리느냐”고 물었다.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아직 일이 남았다고 했다. 17살이던 1976년 신설동의 한 의상실에서 ‘시다’로 일하기 시작해 미싱사를 거쳐 가게와 공장을 겸하는 사장님이 되기까지 꼬박 44년이 걸렸다. 하지만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고 했다. “아, 그나마 일하는 곳에 창문이 생긴 게 달라졌네요.”화섬식품노조 서울봉제인지회는 창신동 일대에만 이군표와 같은 이가 9만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울 전역에는 30여만명의 봉제 노동자가 있다. 자영업자인지, 노동자인지 경계도 모호하고 구분도 쉽지 않다. 전태일 분신 50년이 지났지만 이런 봉제 노동자들은 여전히 법 주변부 어딘가로 밀려나 있다. 2019년 대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조사한 봉제 노동자 실태를 보면, 봉제 노동자 가운데 근로계약서를 작성해봤다는 이는 14%에 그쳤다. <한겨레>가 1970년대부터 종로와 동대문 일대 봉제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던 노동자 5명을 만나 물어봤을 때도, 모두 “근로계약서는 단 한번도 작성해보지 못했고 본 적도 없다”고 입을 모았다. 4대 보험이나 근무 시간 준수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다. “봉제 노동자는 어떤 노동 이력도 입증할 수 없는 유령 노동자들이에요. 그렇다 보니 코로나 재난 지원금 같은 것도 전 국민한테 준 거 외엔 아무것도 받지 못했죠. 그나마 국민이라는 데 감사해야겠지요.” 서울봉제인지회 회장 이정기의 말이다.고향인 경기도 이천에서 “밭뙈기 하나 없는 집에서 동생만 셋을 둔 장남”으로 태어난 이군표는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이천 읍내 양복점에서 잡일을 시작했다. 가게에서 먹고 자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옷감을 나르고 또 날랐다. 몇년이 지나 겨우 재단판 앞에 설 수 있었는데, “단춧구멍만큼 작은 눈을 종일 부릅뜨고 옷감과 사투를 벌였다”며 웃었다. 그렇게 받은 월급 3만5천원이 온 가족 생계비였다.이군표의 바지런함과 솜씨를 눈여겨본 고향 선배의 추천으로 서울 신설동의 한 의상실을 소개받은 게 1976년이었다. ‘오야’ 혹은 ‘선생님’이라고 불리던 미싱사 한명 아래 패턴사, 손바느질하는 사람, 패턴 뜨는 사람, 심부름하는 사람까지 다섯명이 한 조가 되어서 일했다. 눈뜨면 일을 시작했고, 일을 마치면 바로 잠들던 시절을 보냈다. 남은 건 관절염과 위장병이었다.
전태일 열사(뒷줄 가운데)가 서울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갓 취직했을 때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 전태일기념재단 제공
전태일 열사(뒷줄 가운데)가 서울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갓 취직했을 때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 전태일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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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한벌 공임, 32년째 내리막길
청계피복노조가 임금 인상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며 싸우던 1980년, 21살 이군표는 처음 ‘오야’가 되어 월급 35만원을 받았다. 열심히 하면 “이름 내건 의상실도 열고, 패션업계 사장님”도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전태일 분신 직후 결성된 청계피복노조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쳐 18년 싸움 끝에 합법성을 쟁취한 1988년, 이군표에게도 전성기가 왔다. 옷 한벌을 만들면 7000~7500원을 받던 시절이라 신나게 일했지만, 모든 것은 1997년 외환위기가 오면서 마른 잎처럼 바스러졌다. 패션 산업은 거대한 구조조정을 거쳤고, 제품을 대량생산하는 공장들은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서둘러 떠났다. 패션산업의 주 무대가 명동에서 이대 앞으로, 홍대 앞에서 강남으로 바뀔 때마다 ‘선생님’으로 불리던 봉제 기술자들의 지위는 더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 ‘전성기’ 이후 꼬박 30여년이 흘렀지만, 요즘도 아내와 함께 옷을 만들면 한벌당 1만7천원을 받는다. 32년 동안 치솟았던 물가와 비교하면, 숙련공 공임의 가치는 끝없는 내리막길을 걸어온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봉제 일을 하고 산 44년 동안 이군표에게 가장 많은 이익을 안겨준 건 밤샘 노동이 아니라 대출을 끼고 샀다가 최근 수억원이 훌쩍 오른 아현동의 낡은 아파트다. “돈을 벌었으니 좋은 것인지, 그동안의 노동이 허무한 건지 헛갈리네요.”
청계노조 산울림회 회원 박원섭, 신항철이 평화시장 내 공장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전태일기념재단 제공
청계노조 산울림회 회원 박원섭, 신항철이 평화시장 내 공장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전태일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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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주가 됐어요. 종업원은 아내…”
18살 때인 1987년 광주에서 상경해 청계천 주변에서 33년째 미싱을 돌리고 있는 51살 윤복기(가명)도 비슷한 처지다. ‘오야’가 25명, ‘시다’도 25명 있는 청계천의 한 봉제공장에서 일했던 1980년대 중반과 아내와 함께 가내수공업처럼 일하는 지금의 노동이 복사한 듯 그대로라고 했다.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분신한 지 17년이 지난 때였지만, 윤복기도 함께 일하던 동료 ‘시다’ 24명도, 심지어 ‘오야’ 25명도 근로기준법을 몰랐다. 지금은 봉제인공제회에도 가입했고 근로기준법도 알지만, 무엇이 달라졌느냐는 질문에 그는 길게 침묵하다 이렇게 말했다. “긴 시간 노동하는 건 하나도 안 바뀌었어요. 청계천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때 일했던 그 사람들이 지금도 똑같이 있어요. 일은 그때보다 더 하는 것 같아요. 바뀐 건, 지하에 있던 공장들이 지상으로 올라가고 좀 밝아지고 환풍기가 생겼지요. 대단한 노동권을 쟁취하기보다 그저 하루 사는 게 고역이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한때 봉제공장 노동자들이 한국 산업 전체를 맨 앞에서 이끌던 때가 있었다. 전태일은 한국 노동운동의 출발점이고, 청계피복노조는 빛나는 투쟁의 현존하는 역사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감당할 수 없었던 거대한 산업구조 변화의 뒤안길은 쓸쓸하기만 했다. 노동운동의 주류가 여공에서 대공장 남성 노동자로 변해가는 동안 봉제공장 노동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퀴퀴한 공장에서 옷을 만들거나 눈길 닿지 않는 현장에서 불안정 노동을 하며 산다. 청계피복노조에서 활동하며 40년 동안 미싱 앞을 지켜온 57살 최석호(가명)는 지난 50년을 돌아보는 질문에 피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노동운동 열심히 했죠. 임금 격차, 시간 격차, 계급 격차 이런 말 많이 하면서 조직화도 해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노동운동이 여기 현실을 잘 몰라요. 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은 절대 뭉칠 수 없어요. 5명도 안 되는 노동자들이 어떻게 투쟁을 해서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 사업주랑 싸울 수 있을까요. 그런데 맨날 투쟁만 하자고 해요. 영세 공장 사업주들도 우리를 등쳐서 더 벌어먹는 게 아니라 생존이 안 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라는 걸 나중에 안 거죠. 그러다 우리도 이젠 다 1~2인 공장 사업주가 됐어요. 종업원이 아내인 공장 말이에요.”
임현재씨, 정인숙씨, 도요한 신부, 이승철씨(왼쪽부터)가 청계피복지부 노조 사무실 현판 옆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전태일기념재단 제공
임현재씨, 정인숙씨, 도요한 신부, 이승철씨(왼쪽부터)가 청계피복지부 노조 사무실 현판 옆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전태일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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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와 권리”라는 말의 설렘은 어디로…
윤복기는 전태일 50주기와 노동권 이야기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20여년 전 육아 이야기를 꺼냈다. 봉제공장 불빛이 꺼질 줄 모르던 그때, 창신동 놀이터(현 다산어린이공원)는 밤늦게까지 일하는 노동자들의 공동 육아장 같았다. “엄마, 아빠가 불 켜진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수십명의 아이들이 창신동 놀이터에서 자기들끼리 어울려 놀았죠. 아직도 놀이터를 지날 때면 그때 생각이 나고, 맘이 흐려집니다. 육아, 이런 개념이 없어 아이들을 그냥 방치했던 거죠. 지금은 그래도 나라에서 (육아를) 책임져주려고 애는 쓰니까 헛산 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김영순은 다른 이유로 1970년대 후반을 아련하게 기억한다. 잠옷 공장의 ‘시다’는 그때쯤 야학에서 “여러분은 존중받아야 하는 사람이고, 무시받으면 안 되는 노동자입니다”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모든 노동자에게는 권리라는 것이 있다. 자기 권리는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말도 마음에 박혔다. 전태일이 몸을 불태우며 부르짖던 그 말들이 시발점이 되어 ‘내가 일하는 기계가 아니라 나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걸 배우던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면 김영순은 아직도 맘이 설렌다고 했다. 하지만 청춘의 설렘은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를 시간 앞에 차츰 흐려졌다. 청계천 ‘시다’로 청계피복노조에 가입해 싸우던 그 미싱사들은 여전히 기계처럼 일한다. 존중받는 주인이 되지 못했다. 그가 몸을 태운 지 반세기가 지났는데도.김완 김민제 기자 funnybone@hani.co.kr
[화보] 그 후 50년 - 여기 다시 전태일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967499.html?_fr=mt1#csidx431ea7e7700370ba9dffd816cace96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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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들 ‘미국은 들어라-아메리카NO 월례 국제평화행동’ 캠페인 시작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20/10/28 09:01
  • 수정일
    2020/10/28 09:0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남영아 통신원 | 기사입력 2020/10/27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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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사드와 세균전 부대를 가지고 이 땅을 떠나라!”

“가짜 ‘유엔사’ 해체하라!”

“한미워킹그룹, 동맹대화 철폐하라!”

“대북 제재 해제하고, 평화협정 체결하라!”

 

▲ 27일 오후 7시부터 청계천 광통교 부근에서 80여 명의 시민이 ‘미국은 들어라-아메리카NO 월례 국제평화행동’을 진행했다.  © 남영아 통신원

 

▲ 집회 참가자들의 큰 호응을 끌어낸 중학생의 상모돌리기 공연  © 남영아 통신원

 

27일 오후 7시부터 청계천 광통교 부근에서 80여 명의 시민이 ‘미국은 들어라-아메리카NO 월례 국제평화행동’을 진행했다.

 

김수형 대진연 미군 장갑차 추돌사망사건 진상규명단 총단장은 “5,000명이 넘는 국민이 국민청원에 동참해 주셨다. 미군강점 75년, 미군장갑차 추돌사망사건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분명히 하고 국민의 목숨을 짓밟는 외세의 그림자를 이제는 걷어내야 할 때”라며 오는 31일 미군장갑차 추돌사망사건 국민대회에 연대와 참가를 호소했다.

 

류경완 2021 미국 전쟁범죄 국제 민간법정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은 “2021년 9월 8일 뉴욕에서 미국의 전 세계 전쟁 반인륜 범죄를 단죄하는 ‘미국 전쟁범죄 국제 민간법정’을 열기로 하였다”라고 밝혔다.

 

이들은 27일 집회를 시작으로 매월 마지막 화요일 저녁 미 대사관 앞에서 미국의 죄행을 규탄하며 미국이 이 땅에서 물러날 것을 촉구하는 평화행동을 개최할 예정이다.

 

이날 집회에서 동학실천시민행동 풍물패의 공연 중 중학생 단원의 상모돌리기는 참가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끌어냈다.

 

▲ 미 대사관 앞에서 열린‘미국은 들어라 아메리카NO 월례 국제평화행동 선포 기자회견’, 앞으로 매월 마지막 주 화요일에 미국이 이 땅에서 물러날 것을 촉구하는 평화행동을 개최한다.   © 남영아 통신원

 

참가자들은 집회를 마친 후 미 대사관 앞으로 이동해 ‘미국은 들어라 아메리카NO 월례 국제평화행동 선포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기자회견문 낭독 후 성조기를 찢는 상징의식을 했다.

 

아래는 기자회견문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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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들어라’아메리카NO 월례 국제평화행동 선포 기자회견문

 

미군이 이 땅에 점령군으로 상륙한 지 75년 되는 올해 9월 8일, 우리는 한반도를 포함한 전 세계에서 미국이 저질러온 전쟁·반인륜범죄를 고발하는 ‘국제고발대회’를 개최한 바 있다. 이를 통해 1866년 제너럴셔먼호 침입 이후 두 세기 넘게 우리 민족을 농락해온 미국을 규탄하고, 구체적으로 한국전쟁 시기를 전후하여 자행된 잔혹한 전쟁범죄와 불평등한 ‘한미동맹’ 하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정 간섭, 사드와 세균전부대, 주한미군 주둔비, 미군범죄와 환경오염, 가짜 ‘유엔사’ 문제 등에 대해 상세히 밝히고 미국의 죄상을 고발하였다.

 

아울러 중동과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에서 미국이 일으킨 온갖 전쟁, 쿠데타, 정치개입 등으로 인한 세계 민중의 피해에 대해서도 폭로·고발하였다. 애초에 원주민 학살과 노예노동 위에 세워진 미국은 150여 차례 이상 침략을 벌여온 전쟁국가이며, 2차대전 이후에만도 37개 국가에서 근 2천만 명을 희생시키며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으로 군림해왔음을 밝혔다.

 

그러나 이제 세계가 변하고 있다. 달러와 무력에 기초한 제국의 세기가 저물고 미국 일극 패권의 쇠퇴와 다극화 질서로의 전환이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다. 세계 반제 진영의 투쟁과 제국 내부 모순이 맞물리면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 심지어 대서양동맹의 중심인 독일에서까지 미국이 후퇴하고 있다. 끝내는 150여 개국에 산재한 900여 미군기지의 감축 및 철군도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 그 길에 강권과 전횡, 침략과 약탈이 아니라, 호혜와 친선에 기반한 새로운 문명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우리는 쇠락해가는 미국의 침략주의를 단죄하고 그 종식을 앞당기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내년 9월 미 제국의 심장 뉴욕에서 ‘미국 전쟁범죄 국제민간법정’을 개최하기로 뜻을 모았다. 또한 그 준비 과정에서 전 세계에 걸쳐 ‘국제고발인단’을 조직하고, ‘아메리카NO 국제평화행동(AmericaNO International Peace Action)’을 진행하면서 지구촌 반제·반전 평화운동의 국제 연대를 강화하기로 결의한 바 있다.

 

이에 오늘, 그간 전개해온 ‘미국은 들어라’ 시민행동과 국제평화행동 1인 시위의 성과 위에 ‘미국은 들어라-아메리카NO 월례 국제평화행동’ 캠페인의 시작을 선포한다. 매월 마지막 화요일 저녁 미 대사관 앞에서 미국의 죄행을 규탄하고 미국이 이 땅에 대한 부당한 영향력을 거두고 물러날 것을 촉구하는 평화행동을 개최할 것이다.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국내외 양심과 시민 여러분들의 관심과 성원을 기대한다. 

 

2020년 10월 27일 

 

‘미국은 들어라-아메리카NO 국제평화행동’ 참가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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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체계’에서는 생소한 일이 벌어진다”

[인터뷰]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 기자명 이계환/이승현 기자 
  •  
  •  입력 2020.10.27 23:32
  •  
  •  수정 2020.10.27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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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헌 명예회장은 '새 용어 제조기'답게 이번 인터뷰에서 '국가보안법 체계'라는 새로운 용어를 소개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권오헌 명예회장은 '새 용어 제조기'답게 이번 인터뷰에서 '국가보안법 체계'라는 새로운 용어를 소개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저는 ‘국가보안법 체계’라는 표현을 쓴다. 국가보안법 체계에 있어서는 생소한 일이 벌어진다.”

‘새 용어 제조기’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은 이같이 ‘국가보안법 체계’라는 새로운 용어를 소개했다. 권 명예회장은 일찍이 운동의 발전에 따라 그에 맞는 새로운 용어와 개념들을 만들어 왔다. ‘비전향장기수’와 ‘2차송환희망자’, ‘송환’ 그리고 ‘양심수’ 등이 그것이다.

이들 개념들은 당시 기독교인권위원회, 불교인권위원회, 천주교인권위원회 등에서 받고, 국제사면위원회에서 따르니까 나중에 유엔인권이사회까지도 인정했다. 정부에서도 일부 인정했다. 특히 양심수 개념이 규정되자 “양심수 석방과 송환까지 큰 힘을 받았다”는 것이다.

권 명예회장은 이번에는 ‘국가보안법 체계’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그 작태들을 열거했다.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대표의 대북전단 살포, 정광훈 목사의 일장기 동원 시위 그리고 이영훈 교수가 쓴 <반일 종족주의> 등. ‘국가보안법 체계’란 한마디로 “반공, 반북만 하면 남쪽사회에서 어떤 일이든 용인된다는 것”이다.

그는 국가보안법 철폐운동만이 아니라 평생을 자주통일, 민주주의, 인권, 양심수 등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해 왔다. 그가 이와 같은 엄청난 일을 하자면 이론과 실천의 겸비는 필수일 터다.

그러나 그는 초등학교 출신자다. 이에 그는 “책도 보고 견문도 넓히려고 했지만 그것이 책에서 얻어지기보다는 어떤 현실조건에 내가 대응하면서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하겠다는 일을 하다보니까 그것이 논리가 생기게 된 것 같다”고는 “그런 논리가 형성되면 그 논리의 힘 때문에 추진하는데 힘이 생기는 것 같다”며 실천을 통해 이론이 형성됐음을 내비쳤다.

이들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아스팔트에서 집회도 하고 단식도 하고 투쟁도 하는 힘든 활동 중에도 기억에 남는 감동적인 장면도 있었다. 다름 아닌 2000년 비전향장기수들의 송환과 그해 북한 노동당 창건 55돌 행사시 방북해 고려호텔에서 만난 비전향장기수들. 권 명예회장은 “이렇게 사람이 살면서 이런 경우도 있고 이런 삶은 후회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감동적이었다”고 표현했다.

거의 모든 사안마다 거침없이 답을 해가던 그도 이재문 선생에 대한 질문에서는 말을 아꼈다. 참고로 권 명예회장은 3년 전인 2017년 6월에 폐암4기 진단을 받았으나, 항암 신약을 복용하자 그게 유전자와 잘 맞는지 다행이라며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몇 번이고 이재문 선생에 대해 묻자 그는 “우리 집에도 몇 달간 있었다”는 정도로 비켜갔다. 남민전 성원으로서 최고지도자에 대한 어떤 ‘배려’(?) 때문일까?

그래서 더욱 필요한 게 자서전이 아닐까 해서 묻자 예전과 달리 이번에는 “소중한 삶이라 자서전 한번 기록하고 싶은 생각은 있다”며 일단의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의 삶은 간단히 일별해 봐도 ‘독학, 농촌 사회운동, 정당운동, 남민전, 인권운동, 통일운동 등등’으로 이어진다. 그의 파란장한 삶의 이야기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언제쯤 주어질까?

이번 인터뷰는 ‘통일뉴스 창간 20주년, 비전향장기수 송환 20주년’을 맞아 이뤄졌다. 권 명예회장과의 인터뷰는 10월 20일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이계환 기자와 이승현 기자가 함께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권 명예회장은 2시간 30분에 걸쳐 모든 사안에 대해 쉼 없이 그리고 거침없이 답하는 노익장을 발휘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권 명예회장과의 인터뷰는 10월 20일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2시간 30분에 걸쳐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권 명예회장과의 인터뷰는 10월 20일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2시간 30분에 걸쳐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항암 신약이 잘 맞아 다행이다”

□ 먼저, 독자들이 선생님 건강에 대해 궁금하실 것 같다. 2017년 폐암4기 진단을 받으셨죠. 지금 건강이 어떠신가요?

■ 감히 저에 대한 염려를 해주신데 대해서 너무 감사하고 사실 그런 염려들 때문에 생각했던 것 보다는 현재 상태는 잘 버티고 있다고 말씀드리겠다. 정확히 2017년 6월에 판정을 받고 7월경부터 이레사라는 항암 신약을 복용했는데, 그게 제 유전자 검사하고 그 약이 잘 맞았다. 그 약을 투약한 사람 중 저처럼 오래 견딘 사람도 흔치 않았다. 2019년 9월까지 정확하게 2년 3개월을 견뎠다.

그리고 내성이 생겨서 작년 9월경에 그 약을 끊었다. 전적으로 처음부터 저를 담당했던 서울대 김동완 교수가 항암주사를 놓았다. 처음에는 먼저 먹는 약도 그렇지만 주사제도 전신에 피부발진이라든가 위 장애, 식용부진, 변비 등 부작용이 있었는데 그것도 얼마 지나니까 적응이 됐다. 어제(10월 19일)가 주사 맞은 지 1년 되는 날이었다.

어제 병원에 가서 담당의사에게 물어보니까 지금 상태로는 괜찮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나아지는 건지, 괜찮다는 건지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런 걸 물어보기도 어렵고... 나쁜 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으니까.

어제 처음으로 '암세포가 줄어드는 것이냐'고 물어봤더니 '이 약을 쓰고 나서 (암세포가) 줄어들고 정지상태가 유지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병원에서도 제가 실험대상이라면 성공한 것이라는 거다. 언제 또 내성이 생겨서 다시 또 잘못될지도 모르지만.

그전에도 1년쯤 지나서 척주로 옮겨진 적이 있다. 폐암이 무서운 게 척추로 전이되는 것 하고 뇌로 가는 것인데, 척추로 간 것은 방사선 치료 한 번에 괜찮아진 것이다. 그러니까 거기서 한 것이 나한테는 잘 맞은 것이다. 지금 현재로는 다행히 잘 견디고 있다.

□ 그전에 잘 안 오시다가 엊그제 6.15산악회에도 오셨는데, 그렇게 산에 오시는 것 보니까 건강이 호전되는 것 같다.

■ 다른 것보다는 처음으로 느낀 것이, 올해 1월에 북한산을 올랐는데, 나는 무릎 아픈 것만 걱정했는데 오르다보니까 숨이 차더라. 숨이 차서 도저히 못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릎이 아프다고 하고는 뒷풀이에 갔었다. 그 다음에 병원에 가서 알아보니까 항암주사 때문에 빈혈증이 생겼는데 적혈구 치수가 보통 성인남자가 13~14라면 저는 8이 나왔다. 이거는 수혈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낮은 수치하고 하는데, 제가 그냥 견뎌보겠다고 했다.

단백질 섭취라던가 이런 걸 신경 쓰고 있는데, 지금은 9까지 올라왔다가 어제는 8.5까지 떨어졌더라. 이거는 항암치료 하는 동안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 병원에서도 조심하고 될 수 있으면 단백질 섭취를 많이 하라고 한다.

지금은 그 일 때문에 산에 못가는 것이고 어제는 제가 제안해서 둘레길을 가겠다고 한 것인데 다 같이 가게 된 것이다.

“난 초등학교 출신자. 현실조건 극복 위해 고민하니 논리가 형성돼”

□ 선생님께서는 오랜 기간 활동해 오셨기 때문에 선생님에 대해 '양심수의 대부', '한국의 호치민', '평생청년', '이론과 실천의 양수겸장' 등 별칭이 많다. 이에 대한 소감은 어떠신가요?

2019년 11월 제25회 불교인권상을 수상한 권오헌 명예회장이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
2019년 11월 제25회 불교인권상을 수상한 권오헌 명예회장이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

■ 사실 너무 지나치고 분수에 넘치는 호의라고 생각된다. 사실은 뭐 그런 부분에 대해서 일은 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지닌 감성이랄까, 이런 것과 사회적 여건과의 조건반사적인 만남의 결과라고 보인다. 열심히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성과는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저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해야겠다는 생각은 늘 갖고 있다. 그런 생활을 해 왔을 뿐인데 저한테는 분수에 넘치는 호의라고 생각한다.

□ 외부 사람들이 보기에는 늘 청년처럼 움직이고 외모도 호치민과 같이 안온한 모습이 있으며, 양심수를 위해서 평생 일해 오셨고, 말 그대로 이론과 실천을 두루 아우르는 활동을 해 오신데 대해 좋은 의미에서 이런 종합적인 말씀을 하시는 것 같다.

■ 이론과 실천 이야기가 나왔는데, 제가 초등학교 출신 아닌가. 알면 얼마나 알겠어요. 물론 노력은 많이 했다. 지금은 민간인이 갖고 있는 책도 거의 없을 것으로 알고 있는데, 1946년에 나온 자본론 3권을 제가 갖고 있다.

6학년 담임이었던 정인묵 선생이 '이건 자네가 봐야 할 책이네'라며 건네 주셨다. 그건 보물이었다. 지금도 진품명풍에 나갈 수 있는 책이라고 알고 있다. 당시 노트하면서 봤던 것이 지금도 남아있다. 잉여가치라든가 용어 하나 하나를 외우다시피 했다. 내용을 알기 위해서 노력했다.

알다시피 그걸 다 읽은 사람이 많지 않다. 역사, 경제, 문화 등이 다 있다. 그걸 보면 완벽한 인격도야에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런 것을 비롯해서 책도 보고 견문도 넓히려고 했지만 그것이 책에서 얻어지기보다는 어떤 현실조건에 내가 대응하면서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하겠다는 일을 하다보니까 그것이 논리가 생기게 된 것 같다.

그런 논리가 형성되면 그 논리의 힘 때문에 추진하는데 힘이 생기는 것 같다. 가령 양심수나 비전향장기수 규정이라든가 하는 새로운 개념은 그분들 석방하고 송환하는데 아주 결정적인 큰 도움이 됐다. 그전에는 한국의 양심수에 대해서도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양심수로 인정하지 않았다. 엠네스티에서 만델라도 양심수가 아니라고 했다.

제가 이 논리를 세우고 난 후 처음에는 기독교인권위원회, 불교인권위원회,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이걸 다 따랐다. 그리고 국제사면위원회에서 이런 논리를 따르니까 나중에 유엔인권이사회까지도 그렇게 하여서 이 분들을 양심수로 규정하고 석방과 송환까지 큰 힘을 받았다.

그래서 정확한 논리라는 것이 굉장한 힘이 된다. 맹목적으로 사업을 하면 힘이 없다. 반드시 논리가 있어야 한다. 양심수 석방의 당위성, 국가보안법 폐지의 논리라든가. 뭐 다 마찬가지이다. 저는 활동하면서 그냥 목소리 높이는 것보다는 논리성을 찾고 그에 따라서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까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 같다.

□ 실천으로 옮길 경우 그에 합당한 이론이나 논리가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식에 맞춰 하는 경우가 많다. 선생님은 그걸 스스로 깨우치면서 이론이 올라가고 실천이 쌓여져 가니까 그런 점에서 많은 분들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 그동안 제가 써놓았던 원고를 두 번에 걸쳐서 책을 냈지 않았나. 거기에도 이런 이론화 과정이 나온다. 그냥 덮어놓고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전문 학자들의 논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일반 시민사회의 성명서 같은 것과는 다르다.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논리가 형성되어서 글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 선생님께서 6.15산악회에서 산상강연을 하시는데 10~20분 즉흥적으로 하시면서도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는 것을 보면서 평소에 늘 자신에게 질문을 하고 답을 하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을 했다.

방북한 권 명예회장이 리인모 묘소를 참관했다. [사진제공-권오헌]
방북한 권 명예회장이 리인모 묘소를 참관했다. [사진제공-권오헌]

■ 그것이 생활화되고 하다보니까 그냥 어디 가서 함부로 이야기하긴 어렵다. 그냥 이야기하면 권력자나 시민사회 상대에게 힘을 못 받는다.

비전향장기수 송환하는 과정에서 제가 글을 많이 썼다. 정확하게는 1993년 리인모 선생 송환 때부터 시작해 1995년 함세환, 김인서, 김영태 등 세분 송환 활동(고향이 이북이고 한국전쟁 기간에 체포된 비전향 장기수는 제네바협약에 따른 전쟁포로로 취급하여 송환해야 한다)을 거쳐 1999년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됐다.

당시 송환운동에 많은 단체들이 같이 했지만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제 논리에 따라 활동했다. 잘 모르면 논리도 세우기가 어렵다. 논리가 별건 아니다. 이런 현상들이 있었는데 이걸 어떻게 해결하고 극복할 것인지 방법을 추구하다보면 논리가 정립되는 것이다. 그게 시대상황마다 다르게 나온다. 통일부가 입장을 밝히는데 따라 반박논리도 나오는 거다. 이렇게 해서 송환운동 과정에서 상호주의론, 자격문제도 나온 것이다.

“비전향장기수 송환, 방북해 다시 만난 비전향장기수들.. 감동적이었다”

□ 선생님께서는 평생을 우리 민족의 자주통일, 나라의 민주주의, 인권, 양심수 등 여러 가지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해 오셨다. 특별히 애착이 있는 분야가 있는가?

■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저는 주어진 조건에서 처음엔 감성으로 대하다가 이성적 판단으로 상승하게 되었다. 그렇게 이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일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60~70년대만 하더라도 처음엔 노동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통일사회당에 들어가서 김철 씨 구속되고 옥중 관련된 일을 하게 되다보니까 그쪽으로 쏠리게 되고 양심수후원회 만들어져서 통일운동과 연계되어서 그쪽으로 더 저의 활동영역이 달라지게 됐다. 그렇게 하다보니까 자주통일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권, 국가보안법, 양심수로 다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이라고 하면 노동문제도 다 포함되지 않나. 결사의 자유라던가 노동3권 등, 또 생존권이라고 하면 노동자·농민·빈민이 다 해당되지 않나. 제 글속에는 그런 것이 다 있게 된 거다. 그래서 어느 부분에 더 관심이나 집착이 있다기보다는 가장 보람 있고 긍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을 꼽는다면 이런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동안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1988년 12월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을 비롯해서 시국사범이 전원 석방됐다. 물론 저 사람들이 말하는 공안 쪽은 나오지 못했지만. 남민전이 나왔으니까 제헌의회(CA)라든가, 반제청년동맹 등 반국가단체 관련자들까지 전원 다 나온 것이다. 남민전이 다 끌고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비전향장기수'들도 상당히 많이 나왔다. 전향서를 썼던 분들은 거의 다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김영식, 양원진, 박희성 선생 등 지금 낙성대에 계신 분들이 그때 나온 분들이었다. 그때 저는 남민전 석방운동에 온 정력을 투여했기 때문에 보람을 느꼈다. '아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이 있었다. 야당이었지만 당시 민주당 인권위원장이 저하고 석방 규모와 내용 등을 상의하고 그랬으니까.

(통혁당 재건위와 남민전 준비위 사건으로 쌍무기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임동규 선생(2020년 9월 21일 별세)의 석방을 위해 광주를 찾아가 봐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그 사람을 나오는 방향에서 '그걸' 해달라는 요청이었는데, '우리 동지한테 뭘 써달라'고는 말 못하지 않나. 박현채와 함께 가기로 했다가 나 혼자 가서는 '당신이 지금까지 해온 대로 하는 것이 원칙이다. 당신 마음대로 하라'고 했는데 결국은 다 나왔다. 그때 감동을 잊을 수 없다.

그 다음으로는 1999년 2월 25일 우용각 선생을 비롯한 17명이 석방되었다. 1999년 손성모, 신광수 등 두 분이 나왔다. 이 분들은 7.4성명 이후 이쪽 공안에 의해서 유인되었다는 혐의가 역력하다. 일본에서 들어왔다가 김포공항에서 다 잡힌 사람들이다. 신광수는 일본인 납치와 연관되었다고 해서 낙성대에 와서 시위가 있었다. 그때 내가 그것도 다 막아냈다. 일본 NHK방송에 다 나가고 했다. 그렇게 해서 비전향장기수가 다 나왔는데 그때 그 감동과 보람은 말도 못했다.

2000년 10월 북한 노동당 창건 55주년 행사 때 방북한 권 명예회장은 고려호텔에서 그해 9월 송환된 비전향장기수 대부분을 만났다. [사진제공-권오헌]
2000년 10월 북한 노동당 창건 55주년 행사 때 방북한 권 명예회장은 고려호텔에서 그해 9월 송환된 비전향장기수 대부분을 만났다. [사진제공-권오헌]

2000년 63명 송환됐을 때의 감동, 그해 조선노동당 창건 55돌 경축 행사에 남측에서 42명이 참관을 하게 됐다. 제가 서둘러서 전국연합에서 참관 결정을 했고 홍근수 목사, 백기완 선생 등이 개별적으로 가기도 했다. 그때는 열병식이나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백전백승 조선노동당'이 문제가 아니라 비전향장기수들을 고려호텔에서 다 만났다는 것. 이게 저한테는 정말 감동적이었다. 이렇게 사람이 살면서 이런 경우도 있고 이런 삶은 후회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 활동하시면서 아스팔트에서 힘들게 집회도 하고 단식도 하고 투쟁도 하면서 너무 힘든 삶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크게 보면 기억에 남는 감동적인 장면도 있었다.

■ 따지자면 여러 가지 있겠지만 이건 정말 내 일생에 대표적인 감동적인 장면들이었다.

□ 얼마 전 비전향장기수 1차 송환 20주년을 맞았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9월 2일 63명의 비전향장기수가 북으로 송환됐다. 20년이 지난 소회가 어떠신지요.

■ 20년이 지났지만 어제 일처럼 그때 장면이 떠오른다. 몇 가지로 나눈다면, 첫째 당사자들이 끈질긴 노력이다. 조국통일을 위해 수십 년 감옥을 살면서도 정치적 신념과 양심을 지켜왔다는 것. 이것이 아니었다면 갈 수 없었던 것이다. 비전향장기수들의 불굴의 투지와 신념의 강자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분들이 '인간승리'로 갔다는 생각이다.

비록 외세에 의해서 분단이 되었지만 남북이 합의해서 이런 인도주의 문제를 해결하고 이걸 시초로 해서 당시 6.15공동선언이 말했던 자주원칙, 통일방식, 다방면적인 교류협력 등을 차근차근 엮어져서 이어졌던 것. 비전향장기수 송환은 남북관계를 발전시키고 이어지게 한 계기이면서 우리민족이 세계에 대해서 자주민족으로서의 긍지를 가질 만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 6.15선언 이후 많은 분들이 북측에 갔는데, 선생님은 몇 번이나 가셨나?

■ 평양은 제가 7번인가 8번 갔었다. 공동행사도 있고 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에서 하던 콩우유돕기운동 차원으로 평양에 가서 좋은 이야기들 많이 나누었다.

□ 평양에서 비전향장기수 선생들을 만난 이야기를 해 달라.

■ 평양에 갈 때마다 안 만난 일은 거의 없다. 당창건 55돌에는 병원에 계신 네 분인가 빼고 고려호텔에 다 나오셔서 사진도 같이 찍고 그랬다. 2001년 8.15민족통일대회 때였는데, 아주 뙤약볕이었다. 남측에서 간 분들이 고려호텔에서 아웅다웅 늑장부리는 바람에 비전향장기수들이 3대헌장기념탑 앞에 얼굴이 새까맣게 탈정도로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들도 휠체어 타고 기다렸다. 찍히기도 했지만 우린 모두 거기로 가서 선생님들 다 뵀다. 그리고는 선생님들이 제가 묵었던 고려호텔 '초호화실'(침실이 있고 응접실이 따로 있고 화장실이 2개 있고, 회의실도 굉장히 컸는데 혼자 쓰도록 했다)에 찾아 오셨다.

방북해 김선명 선생 등 비전향장기수들을 만났다. [사진제공-권오헌]
방북해 김선명 선생 등 비전향장기수들을 만났다. [사진제공-권오헌]

선생님들이 찾아오셨다고 해서 빨리 내려가서 맞이하려고 했더니 북측 담당자들이 그냥 계시라고 하더라. 그런 의전을 철저히 하더라. 홍경선·황용각 선생이 대표로 오셔서 공식적으로 인사를 하고 같이 내려가서 아홉 분을 만나 다른 회의실로 옮겼다.

그렇게 여러분을 만난 일은 그 뒤로는 없었다. 고려호텔이나 양각도호텔에서 신청을 하면 비공식으로 만나서 선물도 전해드리고 애기한 적은 있다. 사진으로 공개된 것도 몇 번 있다. 2001년까지는 많이 만났고 그 이후에는 그렇게는 못 만났다. 그 뒤로는 적게는 세 분에서 많게는 일곱 분의 대표성 있는 분들을 만났다.

□ 연로하신 선생들이 별세할 때마다 북측 매체에서는 부고를 알렸는데, 2010년 이후부터는 소식이 나오지 않는 것 같다. 지금 몇 분이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돌아가신 것 같다.

■ 2012~2013년쯤에 재미언론 <민족통신>에서 정리한 적이 있다. 노트에 다 정리를 해두었는데 지금 노트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때 25명 정도 남아 계셨다. 그리고 2017년 제 출판기념회 때 22명으로 확인했다. 그때 아홉 분이 영상으로 축사를 보내주면서 22명이 남았다고 알려오신 거다. 그 뒤 3년이 지났는데 15명이 남아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정확치 않고 그 후 더 돌아가셨을 것 같다.

이 자리를 빌어서 공식적으로 인사드리고 싶다. 그때 출판기념회 때 영상메시지를 손수 보내주셨는데 너무 감사드리고 그 뒤 오랜 시간이 걸리는 동안 많은 선생님들이 별세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돌아가신 분들에 대해 명복을 빌고 살아계신 선생님들은 항상 건강하시면서 평생 염원이셨던 자주통일 세상을 이루면서 그 영광과 축복을 누리셨으면 좋겠다. 공식적으로 전해드리고 싶다.

'비전향장기수'와 '2차송환희망자', ‘송환’ 그리고 ‘양심수’의 개념

□ 지난 10월 10일 기독교회관에서 '비전향장기수 송환 20주년 기념 및 2차 송환 촉구대회'를 하셨다. 이때 ‘비전향장기수’와 ‘송환’의 개념을 말해주셨는데, 다시 한 번 정리해 달라.

■ '비전향장기수'와 '2차송환희망자'는 다르다. 비전향장기수는 "국방경비법, 국가보안법, 반공법 등 반민주악법으로 구속기소 되어 수십 년을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온갖 고문 등 핍박을 이겨내고 조국통일에 대한 정치적 신념과 양심을 지켜낸 불굴의 투사, 신념의 강자들"을 말한다.

1975년 사회안전법이 생겨서 감호처분을 받았던 분들 중 1989년에 사회안전법 폐기로 인해 그해 후반부터 1990년에 전향을 하지 않고 나온 분들이 이에 해당된다. 또 1990년부터 대전 등 전국 교도소에 있던 비전향장기수 중에 노약자·병약자를 비전향으로 내보냈는데, 김석행·이종환·권양섭 선생 등 15명 정도가 비전향장기수에 포함한다.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들'은 명칭 자체가 개인이 아니라 복수이다. 역사적 개념에 속하는 고유명사가 된 것이다.

사회안전법이 폐지(1989년)된 이후 사상전향제도가 폐지(1998년)되고 준법서약제도가 폐기(2003년)된다. 본인 의사에 반해서 강제로 사상을 전향시키는 것은 제도 폐지와 함께 당연히 원인 무효가 된 것이다.

비전향장기수 송환자 중에도 사실 쓰고 간 분이 있다. 청주감호소에서 나오기 전에 썼던 분들이 북으로 간 분들이 있다. 그렇지만 사회안전법이 폐지됐기 때문에 원인무효라고 본 거다. 정부에서 이런 역사인식이 있다면 강제 전향자들에 대해서 원인무효임을 확인하고 보내드려야 한다는 거다.

이런 분들은 개별적으로 '비전향장기수'는 아니지만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는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2002년과 2004년에 걸쳐서 강제전향을 위한 공작의 일환으로 강제급식 과정에서 돌아가신 5명에 대해 사상전향제도의 위헌성, 강제전향공작의 위법성을 지적하고 이분들을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사람으로 규정했다. 이렇게 강제전향은 사실상 전향이 아니라고 사실상 인정했다.

이때까지 양심수후원회에서도 송환 대상자와 관련해 '장기구금양심수',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 등을 혼용했는데 2004년 통일부에서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들'로 규정한 뒤로 2006년부터는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들'로 용어를 단일하게 했다.

이 분들을 엄격한 의미에서 '비전향장기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실상 강제전향을 원인무효로 해석하는 상황인 만큼 복합적인 명칭에서 '비전향장기수'라는 표현을 이렇게 정리해도 된다. 그리고 인권개념이 그때와 지금은 많이 달라져 있다. 이 분들은 어디까지나 조국통일에 대한 정치적 신념과 양심을 지금까지 지키고 현장에서 뛰는 사람들이다.

2020년 7월 통일부 앞에서 열린 ‘비전향장기수 2차 송환’ 기자회견에 참가한 권 명예회장. [통일뉴스 자료사진]
2020년 7월 통일부 앞에서 열린 ‘비전향장기수 2차 송환’ 기자회견에 참가한 권 명예회장. [통일뉴스 자료사진]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들은 처음에 33명이었다가 13명이 추가되어 총 46명이었으며, 이중 33명이 돌아가시고 현재 13명이 남아 있다. 이 분들이 전부 그런 분들이다. 13명 중 박종린 선생이 병원에 계신데 오래 견디지 못하실 것 같다.

'송환'이라는 개념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쓴 것이 정전협정문에서였다. 그 이전에 전쟁포로에 대한 제네바협정에서 전쟁이 끝나면 일정기간을 두었다가 송환해야 한다는 뜻으로 사용됐다. 송환을 뜻하는 리페이트리에이션(repatriation)은 전쟁포로가 본국으로 돌아간다는 뜻이고 '반드시 보내야 한다'는 당위성을 포함하고 있다.

리인모 선생과 2000년 9월 2일 63명 송환 때에는 '북한 방문'을 목적으로 했으나 2005년 정순택 선생의 유해가 육로로 보내질 때에는 '유해송환'이라는 표현을 남북이 합의해서 정확히 썼다. 미묘하지만 용어의 변화가 있다. 남과 북 어느 쪽도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송환에 대한 '자격문제'도 짚고 넘어가자. 얼마 전 통일부에서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들의 송환을 촉구하는 서한에 대해 과정 전결로 '가야할 분들은 다 보냈다'고 답을 보내온 것은 아주 인권개념이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남북합의 정신에 대한 역사인식이 없는 것이다. 민족과 국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무엇이고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이다. 너무 무식한 것이다. 송환은 반드시 보내야 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정부에서 이미 인정한 만큼 나머지 분들은 모두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 한 가지 더 여쭤보겠다. ‘양심수’ 용어도 처음 쓴 것으로 알려졌는데...

■ 양심수라는 개념은 한마디로 '국가권력과 사회정의실천 사이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사회정의를 위한, 개인이나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 공동선을 위해서 양심에 따라 행동하다 구속된 사람"이라고 제가 처음 표현했다. 조국통일, 노동3권, 생존권보장, 양심적 병역거부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확신을 가지고 활동을 했기 때문에 '확신수'라고도 했고 예전에는 ‘정치범’이라고도 했다. 전에는 정치적 사건과 관련해서 구속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공안당국에서도 일반 형사피의자와는 다르게 취급했다. 그런 것을 인권감수성이라고 볼 수 있는데, 문재인 정부에서는 양심수에 대한 인권 감수성이 없는 것 같다.

인권변호사라고, 촛불정부라고 자임하면서도 양심수, 국가보안법 철폐문제에 대해 취임 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숫자는 줄어들었지만 양심수는 숫자가 많고 적은 문제가 아니라 단 한사람이 갇혀 있더라도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 대표적인 양심수는 누가 있나.

■ 현재 12명이 갇혀있다. 양심수가 제일 많았던 1989년에는 1,700여명이 갇혀 있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천지차이이지만 양심수와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발전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양심수가 갇혀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또 그 내용이 감옥에 갈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갇혀있다는 것도 문제이다.

민가협 목요집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권 명예회장.  [통일뉴스 자료사진]
민가협 목요집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권 명예회장.  [통일뉴스 자료사진]

세 가지로 분류하는데 먼저 국가보안법 위반 관련이다.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국회의원과 인터넷 논객인 김경용 씨, 조종원 평화협정운동본부 국보법폐지 특별위원장 등 3명이 있다.

이밖에 금속노조 소속 유성기업 노조원 4명과 제주해군기지내 기습항의시위로 구속된 송강호 박사, 마크 리퍼트 전 주한미대사 피습 사건으로 구속된 김기종 우리마당 대표, 오세훈 낙선운동에 나섰다 구속된 유선민 서울대학생진보연합 운영위원장, 양심에 따른 병역법 위반으로 구속 중인 송상윤 씨 등 12명이다. 예전에 비하면 참 숫자는 작지만, 양심수이기 때문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문재인 정부의 인권 감수성에 대해 지적하셨는데...

■ 적폐세력들과 대항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노력을 한다. 또 경제, 코로나19 등 질병관계에 대해서 고민하고 남북문제, 한미관계에 대해서도 고심하는데 민주주의와 정권의 건전성,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하다. 이게 도덕적으로 정당성을 갖기 때문에 중요한데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한상균 전 민주노총도 사면 성격으로 한 게 아니지 않나.

사회정의와 기회균등, 공정성 등에 대해서도 말은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부당한 전교조 법외노조는 부처 행정명령으로 한 것이어서 노동부의 철회만 있으면 되는데 그걸 하지 않고 있다. 그런 면에서 무척 아쉽다.

“‘국가보안법 체계’에서는 생소한 일이 벌어진다”,, 박상학, 전광훈, <반일 종족주의> 등

□ 양심수 문제는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와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국가보안법은 민주화시대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다. 2004년 12월 동토에 삭발도 하고 정치적 이슈도 되어 국회에도 갔지만 결국 국회 상정은 되지 않은 아쉬움이 있었다. 전 국민적인 투쟁으로 흔치 않은 기회였지만 굉장히 중요한 투쟁이었다. 16년이 지난 지금 다시 평가한다면?

■ 참 아쉽다. 그때 그 절호의 찬스를 놓쳤다.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이 대중적으로 가장 규모 있게 벌어졌던 때였다. 그전에는 1989년 명동성당에서 국가보안법 폐지운동과 개정운동이 진행되다가 통합하여 1990년 500여 단체가 망라된 국보법폐지 국민행동이 발족하게 됐다.

당시 국보법 폐지가 안 된 것은 한마디로 노무현 정부의 의지 부족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의지가 있었다면 국회의장의 합법적 권한인 경호권을 발동했으면 된다. 그때 폐지했으면 국가 기강, 체면, 국격 모든 면에서 우리나라의 형편이 아주 달라졌을 것이다. 대규모적으로 처절한 투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은 천추의 한이다. 앞으로 그런 기회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해 겨울은 몹시 추웠다.’ 2004년 12월 1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회 앞에서 열린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촛불집회에서 권오헌 명예회장이 농성에 들어갔다. 이후 농성자들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집단 삭발과 함께 1천명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그해 겨울은 몹시 추웠다.’ 2004년 12월 1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회 앞에서 열린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촛불집회에서 권오헌 명예회장이 농성에 들어갔다. 이후 농성자들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집단 삭발과 함께 1천명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 국보법이 왜 폐지되어야 하는지, 왜 폐지가 어려운지에 대해 말해 달라.

■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동족인 북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또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상 양심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 학문 예술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려면 목적이 정당하고 수단이 적합하며 제한의 최소성, 법익의 균형성이 갖추어져야 한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 방역을 위해 기본권을 제한하고 있는 것은 그만한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헌법 37조 2항은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의 안전보장, 질서유지, 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는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여기에 해당한다.

국보법은 법을 집행하는 사법기관이나 공안당국이 자의적 해석에 따라서 유무죄를 결정하는 애매모호성 때문에 법으로서의 균형을 잃고 있다. 사회가 변하면 법률과 제도도 바뀌어야 하는데, 오늘날 남북관계는 이 법이 있어서는 안 되지 않나.

최근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도 있지만 특히, 10.4선언에서는 남북관계 발전에 저해되는 법, 제도 폐지를 명시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현재 국보법 적용을 받고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데 특성이 있다. 지금 8년째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이석기 의원의 경우 대법원에서 내란음모, 지하혁명조직 등이 모두 ‘혐의없음’으로 판결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내란 선동으로 급조, 뒤집어 씌워서 국보법 제7조 찬양 고무죄를 엄격하게 적용했다.

보수정부에서도 찬양 고무, 이적표현물 소지 등 국보법 7조 적용해서 구속시킨 사례는 거의 없는데, 무려 8년 징역을 살리고 있다.

또 일심회 사건으로 7년 옥고를 치른 장민호 씨의 경우 간첩죄, 이적단체 구성 등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이적표현물 소지 등 하찮은 죄목을 적용해 만기를 꽉 채우게 하고는 만기출소하는 날 80살 노모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하게 하고 미국으로 강제출국시켰다. 그것도 모자라 미국에서 5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하게 하다가 노모가 위급한 병환에 이르자 여러 가지 조건을 붙여 입국제한조치 일부 해제를 하는 엄격한 국보법 적용을 하고 있다.

최근 범민련에 대한 가혹한 탄압의 경우까지 보면 미국을 반대하고 민족자주에 투철한 경우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가혹하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정부만의 뜻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압력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는 '국가보안법 체계'라는 표현을 쓴다. 국가보안법 체계에 있어서는 생소한 일이 벌어진다. 박상학을 비롯한 대북전단 살포 주도자들은 정부와 시민사회에서 막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외국의 반북단체까지 끌고 들어와서 터무니없는 대북모략 내용의 전단 살포를 보장받고 있다. 반공, 반북만 하면 남쪽사회에서 어떤 일이든 용인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 북에서 잔인한 범죄행위를 저지른 것이 세계 언론에 공개된 자가 남쪽에 와서 국회의원이 되는 이런 사회는 국보법 체계 속에서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정광훈 목사가 대통령 하야를 주장하면서 온갖 얘기를 다하고 태극기부대가 성조기와 이스라엘기, 최근에는 일장기까지 동원하고 있는 이런 현상은 오로지 반공, 반북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 나아가 이영훈 교수가 쓴 <반일 종족주의>까지 국보법체계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남북대화 복원하려면 정상 간 합의문 이행해야”

□ 선생님께서는 정세에도 관심이 많다. 지난 10일 조선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과 김정은 위원장 연설이 있었다. 광경이 파격적이었고 화제가 많이 됐다. 소감이나 평가를 해주신다면.

■ 이런 표현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민주사회인데. 우리 사회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국가보안법 체계가 있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평자들이 말하는데 공감하는 바 있다. 열병식에서 한 김정은 위원장의 연설을 주의 깊게 들었다.

권 명예회장이 인터뷰 도중 발언의 정확성을 위해 가끔 돋보기로 자료를 살피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권 명예회장이 인터뷰 도중 발언의 정확성을 위해 가끔 돋보기로 자료를 살피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크게 두 가지 아닌가. 이른바 인민을 위한 ‘인민대중제일주의’라는 것이 하나 있고, 허리띠를 졸라매서라도 부당한 외침으로부터 자위적 억제력을 갖추고 만약 침략하면 강력하게 물리치겠다는 것 두 가지이다. 이번 연설에서는 인민대중제일주의와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인 것 같다.

"하늘같고 바다같은 우리 인민의 너무도 크나큰 믿음을 받아 안기만 하면서 언제나 제대로 한번 보답이 따르지 못해 정말 면목이 없다. 나는 우리 인민의 하늘같은 믿음을 지키는 길에 설사 온몸이 찢기고 부서진다 해도 그 믿음만은 목숨까지 바쳐서라도 무조건 지킬 것이고 그 믿음에 끝까지 충실할 것을 다시 한 번 이 자리에서 엄숙히 확언한다"고 말했다. 이런 말을 국가지도자가 공개적으로 한다는 것은 어느 자유주의 국가에서도 찾아보기 어렵고, 연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열병식에서 연설을 통해 '핵억제력'이 아니라 '전쟁억제력'이라고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새로운 전략무기체계와 개인장비를 선보임으로써 인민들에게는 자주권과 생존권을 위한 군사력 보유 의지를 과시하고 외세에는 경고한 것으로 본다.

□ 여전히 미국과의 관계에서는 장기전으로 보고 정면돌파전으로 가는 흐름이 있을 것 같고, 남측에 대해서는 보건문제 풀리면 손을 잡자는 언급도 있어서 남북관계 복원을 점칠 수 있지 않나 하는 평가들도 있다.

■ 현재까지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이렇다 할 내용을 제시하지 않았다. 하노이 결렬 연장선에서 새로운 셈법을 가져오라는 것 외에는 없다. 기본적인 것은 싱가포르 정상회담은 인정하는 것인데, 거기에서 한반도 비핵화는 북쪽만의 비핵화는 아니지 않나. 일본이나 남쪽의 핵우산까지 포함되는 거다. 더 확대하면 오키나와, 괌까지 포함된다. 이렇게 찬찬히 들여다보면 미국이 함부로 대들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남북사이의 적대 관계 해소는 원칙적으로 7.4남북공동성명에서부터 시작됐다. 7.4성명과 6.15남북공동선언, 10.4평화번영선언을 비롯해서 문재인 정부가 직접 만나서 합의했던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을 이행하면 되는 것이다.

민족자주와 민족자결의 원칙, 이걸 가지고 남북 사이에 더 이상 전쟁이 없다는 것을 합의하고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기국면을 조성하지 않기 위해서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하지 않고 첨단무기 도입을 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남북 간 대화가 복원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남민전 이재문 선생. 우리 집에도 몇 달간 있었다”

□ 사적인 질문을 좀 드리겠다. 활동하면서 많은 조직사건과 연루되었고 또 많은 운동가들과도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남민전 사건으로 옥고도 치렀는데, 40년이 지난 남민전을 한국 운동사에서 평가한다면?

■ 지금까지 웬만한 공안사건은 다 평가되고 대부분 부당한 권력에 의해서 탄압받은 것으로 규정되어서 복권되거나 보상까지 받았다. 지금까지 안 된 사건이 남민전 하고 통혁당 사건이다. 통혁당 사건은 일부가 한국영토 바깥에서도 활동하는 것으로 공식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남쪽에서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역시 남쪽에서 활동한 내용이 자주통일과 민주주의 발전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기 금기시될 만한 일도 아니다.

남민전은 전혀 외부와 연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국회를 해산하고 스스로 국회의원을 임명하는 유신체제의 그 포악성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고, 거기에 더해 2차 인혁당 사건에서 사법살인이 자행된 상황에서 비공개조직으로 활동한 것이 남민전 사건이다.

그때 농촌은 말할 수 없이 피폐했고 저농산물 정책을 토대로 임금을 낮추는 노동착취를 통해 수출지향 정책을 펼쳤다. 거기에 공안탄압, 폭정까지 있었다. 남민전은 대외적으로 민족자주를 주장하고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남북 연방연합정부를 수립한다는 강령이 있었는데, 지금 정당이나 사회단체가 하는 것보다 심하지도 않다. 한 사람은 사형집행 당하고 한 사람은 강제로 죽임을 당했다.

2019년 10월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내 이재문 선생 묘역에서 열린 남민전 열사 첫 합동추모제인 ‘고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박석률 남민전 민족민주통일열사 합동추모제’에서 추도사를 하고 있는 권오헌 명예회장. [통일뉴스 자료사진]
2019년 10월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내 이재문 선생 묘역에서 열린 남민전 열사 첫 합동추모제인 ‘고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박석률 남민전 민족민주통일열사 합동추모제’에서 추도사를 하고 있는 권오헌 명예회장. [통일뉴스 자료사진]

남민전 사건은 유신폭정에 항거해서 일어났던 반파쇼 민주화운동이었고, 반외세 민족자주운동이었다. 실제 활동한 내용은 반파쇼 민주화운동이었고 그 일환으로 최원석 가에 대한 응징투쟁도 있었다. 남민전은 반드시 재평가되어야 한다. 자주통일운동과도 관계가 있지만 특히 유신철폐 투쟁에 가장 헌신적이고 희생적으로 참여한 단체였다. 어떤 단체도 3년간 성명 하나 내지 못했던 시기에 빈틈없이 투쟁했다. 현재 일부 회원들이 재심 청구해서 재판하고 있다.

□ 만나본 분들 중에서 특별히 영향을 받은 운동가는?

■ 이재문 선생이다. 우리 집에도 몇 달간 있었다. 저는 학교도 안다녔고 학연이 없으니까... 농촌에서 농촌청소년 운동을 하다 군대 갔다 와서 다시 농촌사회 운동하고 그 다음에 64년 한일협정 반대투쟁이 심할 때 처음으로 사회에 나갔다. 현장에 있다가 몰래 서울로 올라왔다. 장준하 선생 사무실이 교보문고 부근에 있었다. 데모대에 섞여서 그곳에서 국회의사당(현재 서울시의회)에 같이 들어갔다가 잡혀서 종로경찰서에 들어가기도 했는데, 여러 사람이 끌려들어갔기 때문에 몰래 빠져나오기도 했다. 그해 시골에서 여름을 지내고 9월에 서울로 왔다. 그때 굉장히 혼란을 겪었다. 농촌에서는 혼신을 다해서 농촌사회운동을 했는데, 서울에서는 다 자기를 위해서 일하고 노동자를 위한 조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상계의 오랜 독자로서 종각 옆 한청빌딩에서 장준하 선생, 함석헌 선생을 만났다. 최초로 사회적으로 이름 있는 분들을 만나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그때는 현장에서 하루 40페이지 글을 읽고 40페이지 글을 쓴다는 생각으로 지냈다. 장준하 선생이 농촌소설을 쓰면서 당시 경복궁에 근무하던 박경수 선생을 소개해주었는데, 그 분이 내 글을 읽고 '위험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웃음) 그 글들은 지금도 내가 갖고 있다.

67년께 서울에서 공사장 장비 관리 일을 하다가 충북 제천의 충북시멘트 공장으로 옮겨 근무하던 중 지금은 돌아가신 박금수를 만났다. 박금수는 당시 성신여사대 교수를 지내다가 5.16후 해직되어 인텔리 노동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나를 미스터 권이라고 부르던 박금수 씨는 '미스터 권은 정치 한번 해보지'라고 권하면서 통일사회당 김철 씨를 소개했다. 정식으로 일을 한 것은 1968년이었고 김일성대 교수를 지낸 이동하 교수와 이몽 등과 함께 통일사회당에 들어간 것이 1970년이었던 것 같다.

그때 만난 사람이 김철, 안필수, 양호민 등이고 단둘이 자주 만나 술도 많이 마셨던 천관우(동아일보 주필) 와는 절친하게 지냈다. 더 지나서는 참여문학 동인지인 상황파에서 비문인으로서 구중서, 임헌영, 신상웅 등과 동인 활동을 했으며, 농촌운동을 하던 이우재도 발탁해 글을 쓰게 했다. 두세 살 위인 박현채, 두 살 아래인 임헌영과는 특히 가까웠다. 학연은 없었지만 여러 토론회에 빠짐없이 참여해서 다 기록하고 영어, 일어 공부도 열심히 했다.

□ 아무래도 이재문 선생에 대해서 한 말씀 해 주신다면.

■ 임헌영 추천으로 안재구 선생 주재로 남민전에 가입했다. 이재문 선생은 그 다음에 우리 집에 오게 됐다. 우선 믿을 만하고 지휘부를 보호해야 할 때여서 우리 집에 왔지만, 그때 나는 현장도 다녀야 하고 통일사회당도 끝낸 것이 아니었다. 상황파 등과의 교우관계도 있지 않나. 여러 가지 맺는 관계가 있어서 사실 참 어려웠다. 이재문 선생은 참 좋은 분이었다. 집에 있던 자본론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지금도 내가 그건 가지고 있다. 그때 몇 가지를 신상웅한테 주어서 치워두었었다, 신향식 선생도 돌아가셨지만 참 좋았다. 남민전과 관련해서는 임헌영도 그렇고 다 인간관계로 맺은 분들이다.

독학, 농촌 사회운동, 정당운동, 남민전, 인권운동, 통일운동...
“소중한 삶이라 자서전 한번 기록하고 싶은 생각은 있다”

□ 지금 말씀하신 내용만 해도 상당한 양이 될 텐데... 자서전 권유를 받지 않으시지 않나. 선생님에 대해 ‘한국현대사의 보고’라는 평도 있는데, 자서전을 검토해 보시면 좋겠다.

■ 아까도 말했지만 제가 화려한 자서전이 나오지 못하죠. 학교도 안다녔고 그렇다고 큰 단체를 이끌면서 연대체의 중심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양심수후원회라는 사회단체 중의 일부를 애써 꾸린 것이어서 대단한 자서전이 나올 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온 속속들은 참 소중하다고 본다.

2019년 11월 6.15산악회 산행에서 도봉산에 오른 권오헌 명예회장.. 그는 6.15산악회 회장도 맡고 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2019년 11월 6.15산악회 산행에서 도봉산에 오른 권오헌 명예회장.. 그는 6.15산악회 회장도 맡고 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고 일제가 패망한 다음 날 하루아침에 달라진 세상을 겪으면서 느낀 혼란. 학교에 갔더니 신사가 불태워지고 유리창이 깨지고 교장이 발가벗겨서 쫓겨나는 큰 변화. 전쟁이 나자 우리 마을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 혼자 공부도 하고 농촌 사회운동도 하고 사회에 나와서 정당운동에 남민전, 인권운동, 통일운동까지 이어지는 역사. 이것도 참 소중한 삶이구나 하는 생각이다. 한번 기록하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있어 이 일을 단절하기도 어렵고 그렇다.

또 하나는 나의 건강상태가 2년만 더 살 수만 있다면 달려들고 싶은 생각이 있다. 그런데 장담하지는 않는다. 저만큼 기록을 가진 사람도 없을 것이다. 군대생활 당시 일기도 아직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 눈이 나빠서 볼 수도 없다. 아주 유치한 일도 있지만, 4.19당시 기록만 봐도, 그 때 상황을 볼 수 있고 '70년대의 인식'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낼 생각이 있다.

그때 통일사회당 문화국장이었는데 감히 '문학예술인들에게 보내는 글'이란 걸 쓴 적이 있다. 이렇게 보면 지금 봐도 유치하지 않다. 당시 국내외 정세에 대해서도 통일사회당에서 보고를 한 것을 보면 그때 30대 초반이었을 때이니까 비례대표로 국회에 나와도 되지 않았을까?(웃음)

60년대까지는 기록이 상당히 많은데, 73년 이후에는 일체 기록을 하지 않았다. 남민전 들어갔다 나오고 할 때에도 상당 부분 기록이 없다. 엄혹한 시기에는 기록을 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일체 기록이 없다. 상상이고 다른 연관된 기록이 있다.

□ 창간 20주년을 맞는 통일뉴스와 통일뉴스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 통일뉴스 하면 2001년 금강산에서 남북해외 대토론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김치관 기자와 송정미 기자가 그때 그렇게 열심히 뛰던 모습이 떠오른다. 통일뉴스가 창간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 기자가 와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을 보고서는 ‘야 이렇게 헌신적으로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민족정론지로서 장구한 발전을 해 주었고 변함없이 일관성 있는 큰 역할을 해 주셨다. 정말 축하드리고 여기에는 통일뉴스를 이끄는 대표님을 비롯한 성원들의 헌신이 있었지만 또 많은 독자들과 여러분이 함께 노력한 것이 포함된 것이라고 본다. 이계환 대표께서 지금까지 통일뉴스가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면 앞으로 통일을 이룩해내는 시기로 빨리 전환되기를 바란다고 하셨는데 그 시기가 빨리 앞당겨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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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정치를 하다](13)‘성실’로 경제 살렸지만, 독선의 파국도 따라왔다

장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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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대처 

11년간이나 총리직을 지킨 마거릿 대처의 성실함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위험한 독선이 영국 사회의 분열로 이어진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1년간이나 총리직을 지킨 마거릿 대처의 성실함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위험한 독선이 영국 사회의 분열로 이어진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시 암송 경연대회에서 입상
교장은 “너는 참 운이 좋구나”
발끈한 아홉살의 마거릿은
“저는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상 받을 만한 자격을 갖췄기에
수상자가 됐습니다”라고 대답
 

“내가 처음으로 가진 직업은 플라스틱을 만드는 공장의 개발과에서 일한 것이다. 소규모 실험 단계를 거쳐 새로운 플라스틱을 만들어낸 다음 어떤 용도로 사용하고 어디에 팔 것인지 생각하는 일이었다. 가끔 노동당 일원인 친구들에게 ‘난 너희보다 공장에서 일한 경험이 더 많아’라고 말하며 장난을 치고는 했다.”

마거릿 대처는 아버지를 존경했다. 구두 제조공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13세에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악물고 일했다. 잡화상 점원으로 앞만 보며 생활한 소년은 이내 식료품점의 주인이 되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었다. 근면한 삶에 보상이 따른다는 종교적 신념도 깊었다. 감리교 교회의 평신도 설교자로 명성이 높았다. 지역에서 자수성가의 대명사로 통했던 앨프레드 로버츠는 중산층에 진입하자, 정치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랜섬 시의회 의원을 거쳐 1945년에 시장이 된 앨프레드 로버츠의 둘째 딸은 아버지의 연설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 같았다.

1925년 영국 중부의 링컨셔 그랜섬에서 태어난 마거릿 대처는 어린 시절부터 승부욕이 강했다. 또래 집단들과 어울려 노는 대신 책을 읽거나 부모님이 운영하는 식료품점에서 일을 했다. 아홉 살 때 시 암송 경연대회에서 입상한 마거릿 대처에게 교장 선생님이 아무렇지도 않게 “너는 참 운이 좋구나”라고 하자, 마거릿 대처는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저는 그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수상자가 되었습니다”라고 맞받아쳤다.

마거릿 대처는 어린 시절부터 승부욕이 강했다. 또래 집단들과 어울려 노는 대신 책을 읽거나 일했다. 10대 시절의 마거릿 대처

마거릿 대처는 어린 시절부터 승부욕이 강했다. 또래 집단들과 어울려 노는 대신 책을 읽거나 일했다. 10대 시절의 마거릿 대처

그녀는 옥스퍼드대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다. 사립 기숙학교에 갈 형편이 아니었지만, 상황을 탓하는 대신 수업료가 낮으면서도 우수한 학생이 많았던 공립학교 케스티븐 앤 그랜섬 여학교를 선택했다. 옥스퍼드는 입학 자체도 어려웠지만, 등록금도 무척 높았다. 마거릿 대처는 부모님이 옥스퍼드 학비를 지원할 만큼의 경제적 여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장학생 선발 시험에 응시했다. 1943년 10월 마거릿 대처는 옥스퍼드대학교 솜머빌 칼리지에 입학한다.

대학 생활은 쉽지 않았다. 우선, 전공 공부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화학보다는 정치학과 경제학에 관심이 갔다. 게다가 옥스퍼드의 친구들은 대부분 사립 기숙학교 출신이었고, 그들끼리는 대대손손 혈연과 지연으로 서로 얽혀 있는 경우가 많았다. 소외감을 느꼈다. 마거릿은 혼자 산책을 하거나, 교회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1946년 10월 마거릿은 옥스퍼드대학교 보수협회에 가입했다. 유서 깊은 정치토론 클럽인 옥스퍼드 유니언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당시에는 여성 회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옥스퍼드대학교 보수협회에서 마거릿의 활약은 눈부셨다. 가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협회장이 된 마거릿은 보수당의 외연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회원을 확보해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로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옥스퍼드에서 만난 대부분의 친구들은 보수와 진보의 정치 성향을 떠나 마거릿의 뜻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때부터 마거릿은 주류 사회 안에서 평온한 삶을 살며 세련된 교양과 호사 취미를 은근히 자랑하는 친구들과 자신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인식하게 된다. “마거릿 대처에게는 언제나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들이 연 파티에 참석한 불청객 같은 분위기가 흘렀다.” 그녀는 자신을 하찮은 집안의 출신으로만 보는 동문들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열등감에 사로잡히면서도, 세상 물정을 모르는 도련님 같은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며 우월감에 도취되기도 했다.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해야 했다. 1947년 옥스퍼드를 졸업한 마거릿은 안경테와 필름 등을 생산하는 플라스틱 제조 회사에 취직해 1년 반 동안 근무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정치인이 되겠다는 포부를 숨기지 않았다.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1950년 런던 남동부에 위치한 닷퍼드의 보수당 지역구위원장 자리에 옥스퍼드 시절 지인이 마거릿을 추천했다. 그녀는 1950년 총선에 출마한다. 24세의 마거릿은 표를 얻기 위해서라면 어디든 직접 찾아갔다. 우선 유권자들을 만나야 했다. 남성들만 출입 가능한 클럽이 즐비했던 시절, 여성은 종업원 이외에 입장이 되지 않자, 마거릿은 클럽에서 맥주 따르는 일을 하면서 남성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할 정도로 선거에 최선을 다했다. 결과는 석패였다. 1951년 총선에도 도전했지만, 다시 낙선했다.

두 번의 실패를 겪은 마거릿은 선거운동 기간 중에 만난 데니스 대처와 1951년 12월에 결혼했다. 그는 아내의 능력과 야망을 높이 평가했다. 1953년 8월 쌍둥이를 출산한 마거릿은 선거를 치르면서 계획했던 일을 실천에 옮긴다. 정치인에게 법률 지식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던 마거릿은 세금관계법으로 변호사 시험을 준비해 합격했다.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그녀는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과정이 곧 정치와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하루빨리 직업 정치인이 되고 싶었다.

[여성, 정치를 하다](13)‘성실’로 경제 살렸지만, 독선의 파국도 따라왔다
보수당 대표 시절인 1975년 미국 백악관에서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과 회담하는 모습, 1982년 북아일랜드를 방문한 마거릿 대처 부부 .

보수당 대표 시절인 1975년 미국 백악관에서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과 회담하는 모습, 1982년 북아일랜드를 방문한 마거릿 대처 부부 .

세번째 도전 끝에 의원 당선
엘리트 남성의 전유물로 인식
여성 의원 휴게실도 없던 의회
살아남는 방법은 오직 실력뿐
간명하면서 공격적 언어 구사
첫 여성 총리가 된 ‘철의 여인’
 

1959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마거릿 대처는 의회에서 법안을 발의할 때마다 주목받았다. 의회에 여성 의원을 위한 휴게실조차 하나 없던 시절이었다. 엘리트 남성들의 전유물로 인식되었던 의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실력뿐이었다. 그녀는 특히 연설에 공을 들였다. 간명하면서도 공격적인 정치 언어를 구사했다. 한편 지역구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년 후인 1961년 10월, 마거릿 대처는 연금국민보험부의 정무차관으로 임명된다. 36세의 최연소 차관 마거릿 대처는 보고만 받지 않았다. 복지 제도의 실효성을 다각도로 검토하며 현안을 직접 챙겼다. 대처는 1970년 교육부 장관에 취임하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마거릿 대처는 우리 모두의 머리를 합친 것보다 더 좋은 머리를 가졌어.”

하지만 보수당 에드워드 히스 총리의 경제 정책이 영국 국민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자 1972년 노동당으로 정권이 교체된다. 마거릿 대처는 나라 살림이 국정 운영의 최우선 과제라는 교훈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1974년 보수당의 정책연구센터 부소장으로 취임한 마거릿 대처는 경제 이론들을 다각도로 분석하며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근간을 점검한다. 보수당이 영국 사회를 다시 이끌어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지만, 뜻밖의 사건이 벌어진다. 1974년 10월 보수당의 차기 대표 후보였던 키스 조지프가 “양육에 문제가 많은 하층 노동계급 미혼모의 출산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현실을 우려한다”고 발언한 것이다. 키스 조지프는 사태를 수습하지 못한 채, 기자들을 피해 다니기에 바빴다. 그가 후보직에서 사퇴하겠다고 밝혔지만, 누구도 쑥대밭이 된 보수당을 책임지려고 하지 않았다. 마거릿 대처는 “내가 출마하겠습니다”라고 나섰다.

1969년 한 기자로부터 총리직을 꿈꾸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총리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제 모든 것을 헌신해야 하니까요”라고 답했지만, 마거릿 대처는 의회에 입성하면서부터 더 정확하게는 옥스퍼드 시절부터 영국의 지도자가 되고 싶었다. 그녀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욕망을 감추지 않기로 한다. 겁쟁이처럼 도망치는 남성 정치인들을 보면서 마거릿 대처는 “모든 것을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지인들은 그녀에게 도박에 손을 대지 말라고 충고했다. 보수당 중진 의원들과 언론 매체들은 “모든 여성 정치인은 이류에 불과하다” “마거릿 대처는 여성일 뿐만 아니라 경력도 일천하다”며 그녀를 깔보았다. 재무부, 내무부, 외무부에서 일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당 대표도 총리도 될 수 없다는 논리로 마거릿 대처를 압박하기도 했다. 그녀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마거릿 대처는 아직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겁먹지 않았다.” 1975년 2월4일과 2월11일,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보수당 대표 투표의 승자는 마거릿 대처였다.

보수당 대표에 취임하자마자, 마거릿 대처는 조직 쇄신에 착수한다. 집권 정당이 되는 길은 오직 하나, 정책 개발에 있다고 판단했다. 경제 회생을 위한 감세 정책에 주력했다. 1979년 5월, 보수당은 압승했다. “총리직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발언했던 마거릿 대처는 10년 동안 절차탁마의 시간을 보내고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에 취임한다. 역대 최장 기간인 11년 동안 영국 총리로 재임하며, 마거릿 대처는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신봉했다. 어떤 타협도 후퇴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녀의 정책이 성공을 거둘수록 그녀는 대학 시절 가졌던 우월감에 다시 빠져들었다. 보수당 의원과 내각을 수반하는 장관들이 부유한 집안에서 “물러 터지게” 살아와 아무것도 모른다며 그들을 자주 야단쳤다. 본인은 피나는 노력으로 총리가 되었지만, 보수당 의원들과 각료들은 너무 쉽게 권력과 부와 명예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노동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노동자 출신인 자신이 노동당의 귀족들보다 노동을 훨씬 잘 안다고 확신했다.

마거릿 대처와 남성 엘리트 정치인들은 혐오와 차별적 언어를 주고받았다. 총리가 물가를 언급하면 실물경제에 정통하다고 평가하는 대신 ‘야채 가게’ 출신은 어쩔 수 없다고 비아냥거렸다. 마거릿 대처의 독선도 나날이 거칠어졌다. 총리가 아니라 여왕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정치적 여정을 함께해온 최측근들에게조차 모멸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1990년 11월, 부총리 제프리 하우는 “더 이상 국민의 이익과 총리에 대한 의리 사이에서 갈등할 수 없다”는 말로 대처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결국 제프리 하우의 공개 비판은 3주 후 대처 정부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1990년 11월20일 실시된 투표에서 대처는 뒤늦게나마 세론(世論)을 알게 되었다.

이틀 후인 1990년 11월22일 오전, 마거릿 대처는 사임을 발표하며 보수당의 승리를 기원했다. 자진 사퇴 결정이야말로 마거릿 대처의 정치생명을 연장시켰다. 1997년에는 후배들의 간청으로 보수당 총선을 지원했고,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마거릿 대처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정계에 입문한 이후로 하루에 잠을 4시간 이내로만 자면서 정치 현안과 행정 업무를 완벽하게 파악하고자 했던 마거릿 대처의 성실함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위험한 독선이 영국 사회의 분열로 이어진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 마거릿 대처는 자력갱생의 미덕과 독선의 파국을 함께 선사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를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장영은
 
[여성, 정치를 하다](13)‘성실’로 경제 살렸지만, 독선의 파국도 따라왔다

성균관대학교에서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비교문화연계전공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를 함께 썼고,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썼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해온 여성들의 생애를 복원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차근차근 모아 널리 전하고자 한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10270600025&code=910100#csidx01c94c3e85fbb458b3d12f585d691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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