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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처럼 일하는 삶, 우린 아직도 ‘전태일’이다

등록 :2020-10-28 04:59수정 :2020-10-28 08:15
 
 
[그 후 50년, 여기 다시 전태일들]
1부. 2020년, 무엇이 달라졌나
①여전한 노동, 고단한 삶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몸 불살랐던 전태일의 외침
하루 16시간 일하다 피를 토하던 여공과
하루 16시간 일하다 쓰러지는 택배 노동자들…
2020년, 우린 얼마나 달라졌을까
서울 청계천에 있는 한 봉제공장의 모습. 화섬식품노조 서울봉제인지회 제공
서울 청계천에 있는 한 봉제공장의 모습. 화섬식품노조 서울봉제인지회 제공
1970년 11월13일, 평화시장 봉제공장 재단사로 일하던 22살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2만여명이 넘는 종업원의 90% 이상이 평균 연령 18세의 여성”이었고, “40%를 차지하는 시다공들은 평균 연령 15세의 어린이들”(전태일이 쓴 탄원서)이었다. 이들은 “하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하루 16시간의 작업”을 했다. 전태일은 노동청과 서울시청 근로감독관을 찾아가 이런 부조리를 고발했지만, “한달에 이틀 쉬면서 일주일에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리”는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여공들은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과 폐결핵”에 시달렸다. 전태일 분신 이후 한국 사회는 조금씩 소외된 노동 현장을 살피고 그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50년, 전태일 외에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주변부 노동자들의 삶은 달라졌을까. 얼마나 달라졌을까.
 
2007년 7월, 2년 전 국회를 통과한 비정규직 관련 법이 유예 기간을 거쳐 본격 시행됐다. 기간제 노동자 사용 기간을 2년 이내로 규정한 내용이 핵심이었는데, 비정규직의 존재를 법적으로 인정한 셈이 되어 노동계의 큰 반발을 샀다. 그해 44살이었던 김영순(가명)은 한 고등학교에 비정규직 급식 노동자로 취업했다. 아침 7시30분까지 출근해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학생들의 저녁밥을 배식하고 설거지까지 끝내면 퇴근 시간은 언제나 밤 10시였다. 2300명의 점심과 저녁 두 끼니씩, 매일 4600인분의 음식을 만들었다. 1년쯤 지나 손목 힘줄에 이상이 생겼다. 병원에 갔더니 두 군데나 염증이 생겼다고 했다. 곧 ‘손목 방아쇠 수지 증후군’ 수술을 받았다. 밥솥을 들고 내리다 그런 게 분명한데, 학교는 산업재해가 아니라고 했다. 근무 기간이 짧다는 이유를 댔다. 수술 뒤 재활은 꿈도 꾸지 못한 상태에서 또 새벽에 출근해 밥을 짓고 배식을 하고 설거지를 했다. 학교 쪽은 안 그러면 “해고할 것”이라고 알려왔다. 1년 단위 계약으로 해마다 재계약을 했기에 학교 쪽의 그런 강짜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김영순만 그런 게 아니었다. 모두 불안정한 신분에 과도한 노동을 하다 보니 약간의 충돌에도 예민해졌고, 고참 언니들의 구박과 서로 간의 헐뜯음이 급식실을 오갔다. 월급은 고작 120만원 정도. 그나마 2012년 생긴 학교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꾸준히 싸운 결과, 2017년에 학교 직고용 체제의 무기계약직 신분이 됐다. 불안정한 신분이 조금은 해소됐기 때문일까. 급식실의 구박과 헐뜯음도 현격히 줄었다. 그러니까 그게, 지난 43년 동안 김영순의 신분이 바뀐 유일한 경우다.
1975년 서울 평화시장 봉제공장(왼쪽 사진)과 최근 서울 종로구 창신동 봉제공장(오른쪽 사진)의 모습.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50년이 흘렀지만 풍경은 별반 달라지지 않고 노동자들의 주름살만 더 깊어졌다. 봉제공장 노동자들은 여전히 근로계약서조차 쓰지 못한 채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75년 서울 평화시장 봉제공장(왼쪽 사진)과 최근 서울 종로구 창신동 봉제공장(오른쪽 사진)의 모습.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50년이 흘렀지만 풍경은 별반 달라지지 않고 노동자들의 주름살만 더 깊어졌다. 봉제공장 노동자들은 여전히 근로계약서조차 쓰지 못한 채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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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살 ‘시다’에서 57살 학교 급식 노동자로
1977년, 14살이던 김영순은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터에 나갔다. 밥을 굶을 형편까진 아니었는데 “딱히 학교를 더 다니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어머니 친구의 소개로 서울 동부이촌동에 있는 개인 의상실에 취직했다. 김영순이 처음 얻은 직업은 ‘카렌스 의상샵 시다’였다. 부자 동네의 고급스러운 옷집 일은 어렵지 않았다. “선생님이 피팅할 때 핀 잡아주고 심부름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해 겨울, 첫 월급은 3만8천원이었다.의상실에서 모시던 “선생님이 예쁘게 봐주어” 명동에 있는 노라노 의상샵으로 옮겼다. 당대 최고의 의상실이었다. 1명의 선생님 밑에 6명의 ‘시다’가 일하는 구조였는데, 일이 만만치 않았다. 야근이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평화시장에서 일하면 오후 6시에 딱 끝나고 월급도 1만원 더 준다”는 친구의 말에 혹했다. 의상실에서 봉제공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시다’의 삶이 시작됐다.김영순이 평화시장 2층 다락방 봉제공장에 처음 들어선 시기는 전태일이 분신한 지 7년이 지난 뒤였다. 분신 이후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이 야학을 만들고 공단에 위장 취업해 노동조합을 조직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전태일이 죽음으로 읍소했던 노동 환경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뿌연 먼지로 가득한 공간에 크기를 헤아릴 수 없는 소음이 김영순을 덮쳤다. 다다미 바닥 위 재봉틀은 소란을 멈추지 못했다. ‘이처럼 작은 공간에 이렇게 사람들이 빡빡하게 서서 부딪히지 않고 일할 수도 있구나’라고 떠올렸던 그때 그 생각이 43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고 김영순은 말했다. “상처 하나 없는 깨끗한 마네킹에 화려한 옷을 입히던 소녀”는 그렇게 66㎡(20평) 남짓한 공간에 25명이 부대끼며 일하는 봉제공장의 ‘10대 여공’이 됐다.악 소리도 내지 못할 만큼 바빴다. 교복 자율화 바람이 불었고, 사람들은 점차 소비에 눈뜨고 있었다. “팔다리만 제대로 달려 있으면 옷을 집어가던 시절”이었다. 미싱사 ‘오야’ 언니들이 박카스랑 같이 먹으라며 ‘영양제’를 줬다. 몇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영양제가 ‘타이밍’이라고 불리는 각성제라는 걸 알았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던 시절이었지만 현장은 별나라였어요. 근로기준법에 마약류 투입 금지 같은 조항이 있었겠어요? 그땐 다 그렇게 일했죠.” 김영순은 그렇게 몇년 동안 더 ‘타이밍’을 먹고 잠을 뿌리치며 ‘오야’ 언니들이 집어던진 일감을 수습하고, 옷의 라인을 잡고, 재단된 옷을 넘겼다. “참을 만했던 것인지, 참을 수 있었던 것인지, 겨우 참아냈던 것인지…, 이제 기억나지 않아요.”김영순에게도 빛나던 시절의 기억이 있다. “교회에 공부하러 간다”던 친구를 따라 박형규 목사가 있던 제일교회에서 ‘야학’을 했던 때다. 한문과 세계사, 상식을 그때 처음 접했다. ‘시골에서 올라와 자취하던 언니들이 살던 창신동 보문동 방’을 강의실 삼아 노동법 관련 공부를 하면서 “이슬비에 옷 젖는 것처럼” 조금씩 생각도 바뀌었다. 손학규, 송영길, 김문수 같은 이들을 그때 ‘선생님’으로 처음 봤고, 위장 취업한 두살 위 대학생 오빠와 이른바 ‘노학연대’ 커플이 되어 결혼했다. 변두리 노동자들을 ‘학습’시키겠다며 현장에 ‘침투’했던 그때 그 오빠는 이제 사내 등산반 활동을 열심히 하는 “평범한 생활인”이 되어 위장 취업했던 그 회사에서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다.그러나 김영순의 삶에 큰 영향을 준 일들은 노동법을 공부하던 그 시절이나 전태일 분신 이후 50년 동안 일어난 굵직한 노동 관련 사건들이 아니었다. 청계천을 떠나 경력이 단절됐다가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게 만든 출산이었고, 아이엠에프(IMF) 경제 위기였으며, 43년 사이 폭등한 부동산 가격이었고, 어느덧 훌쩍 자란 아이의 과외비였다. “43년 전에서 지금은 얼마나 멀리 왔을까요? 그때는 공장 위 다락방에서 언니들과 수다를 떠는 게 좋았고, 지금은 그때 어울리던 사람들과 함께 늙어가며 고단함을 견딜 뿐이에요.”
서울 종로구 창신동, 성북구 보문동, 동대문구 신설동 일대에서 일하는 봉제 노동자는 9만여명으로 추정된다. 40~5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시다’로 불리던 이들은 어느덧 ‘사장님’이 됐지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해야 겨우 먹고살 수 있고, 노동법 밖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은 변한 게 없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서울 종로구 창신동, 성북구 보문동, 동대문구 신설동 일대에서 일하는 봉제 노동자는 9만여명으로 추정된다. 40~5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시다’로 불리던 이들은 어느덧 ‘사장님’이 됐지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해야 겨우 먹고살 수 있고, 노동법 밖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은 변한 게 없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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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8시…“아직도 일이 남았다”
61살 이군표(가명)의 삶과 노동도 1970년대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게 없다. 그는 서울 창신동에서 아내와 함께 가내수공업 봉제공장을 운영한다. 지난 13일 만난 이군표는 대뜸 “인터뷰가 오래 걸리느냐”고 물었다.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아직 일이 남았다고 했다. 17살이던 1976년 신설동의 한 의상실에서 ‘시다’로 일하기 시작해 미싱사를 거쳐 가게와 공장을 겸하는 사장님이 되기까지 꼬박 44년이 걸렸다. 하지만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고 했다. “아, 그나마 일하는 곳에 창문이 생긴 게 달라졌네요.”화섬식품노조 서울봉제인지회는 창신동 일대에만 이군표와 같은 이가 9만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울 전역에는 30여만명의 봉제 노동자가 있다. 자영업자인지, 노동자인지 경계도 모호하고 구분도 쉽지 않다. 전태일 분신 50년이 지났지만 이런 봉제 노동자들은 여전히 법 주변부 어딘가로 밀려나 있다. 2019년 대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조사한 봉제 노동자 실태를 보면, 봉제 노동자 가운데 근로계약서를 작성해봤다는 이는 14%에 그쳤다. <한겨레>가 1970년대부터 종로와 동대문 일대 봉제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던 노동자 5명을 만나 물어봤을 때도, 모두 “근로계약서는 단 한번도 작성해보지 못했고 본 적도 없다”고 입을 모았다. 4대 보험이나 근무 시간 준수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다. “봉제 노동자는 어떤 노동 이력도 입증할 수 없는 유령 노동자들이에요. 그렇다 보니 코로나 재난 지원금 같은 것도 전 국민한테 준 거 외엔 아무것도 받지 못했죠. 그나마 국민이라는 데 감사해야겠지요.” 서울봉제인지회 회장 이정기의 말이다.고향인 경기도 이천에서 “밭뙈기 하나 없는 집에서 동생만 셋을 둔 장남”으로 태어난 이군표는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이천 읍내 양복점에서 잡일을 시작했다. 가게에서 먹고 자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옷감을 나르고 또 날랐다. 몇년이 지나 겨우 재단판 앞에 설 수 있었는데, “단춧구멍만큼 작은 눈을 종일 부릅뜨고 옷감과 사투를 벌였다”며 웃었다. 그렇게 받은 월급 3만5천원이 온 가족 생계비였다.이군표의 바지런함과 솜씨를 눈여겨본 고향 선배의 추천으로 서울 신설동의 한 의상실을 소개받은 게 1976년이었다. ‘오야’ 혹은 ‘선생님’이라고 불리던 미싱사 한명 아래 패턴사, 손바느질하는 사람, 패턴 뜨는 사람, 심부름하는 사람까지 다섯명이 한 조가 되어서 일했다. 눈뜨면 일을 시작했고, 일을 마치면 바로 잠들던 시절을 보냈다. 남은 건 관절염과 위장병이었다.
전태일 열사(뒷줄 가운데)가 서울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갓 취직했을 때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 전태일기념재단 제공
전태일 열사(뒷줄 가운데)가 서울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갓 취직했을 때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 전태일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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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한벌 공임, 32년째 내리막길
청계피복노조가 임금 인상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며 싸우던 1980년, 21살 이군표는 처음 ‘오야’가 되어 월급 35만원을 받았다. 열심히 하면 “이름 내건 의상실도 열고, 패션업계 사장님”도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전태일 분신 직후 결성된 청계피복노조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쳐 18년 싸움 끝에 합법성을 쟁취한 1988년, 이군표에게도 전성기가 왔다. 옷 한벌을 만들면 7000~7500원을 받던 시절이라 신나게 일했지만, 모든 것은 1997년 외환위기가 오면서 마른 잎처럼 바스러졌다. 패션 산업은 거대한 구조조정을 거쳤고, 제품을 대량생산하는 공장들은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서둘러 떠났다. 패션산업의 주 무대가 명동에서 이대 앞으로, 홍대 앞에서 강남으로 바뀔 때마다 ‘선생님’으로 불리던 봉제 기술자들의 지위는 더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 ‘전성기’ 이후 꼬박 30여년이 흘렀지만, 요즘도 아내와 함께 옷을 만들면 한벌당 1만7천원을 받는다. 32년 동안 치솟았던 물가와 비교하면, 숙련공 공임의 가치는 끝없는 내리막길을 걸어온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봉제 일을 하고 산 44년 동안 이군표에게 가장 많은 이익을 안겨준 건 밤샘 노동이 아니라 대출을 끼고 샀다가 최근 수억원이 훌쩍 오른 아현동의 낡은 아파트다. “돈을 벌었으니 좋은 것인지, 그동안의 노동이 허무한 건지 헛갈리네요.”
청계노조 산울림회 회원 박원섭, 신항철이 평화시장 내 공장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전태일기념재단 제공
청계노조 산울림회 회원 박원섭, 신항철이 평화시장 내 공장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전태일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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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주가 됐어요. 종업원은 아내…”
18살 때인 1987년 광주에서 상경해 청계천 주변에서 33년째 미싱을 돌리고 있는 51살 윤복기(가명)도 비슷한 처지다. ‘오야’가 25명, ‘시다’도 25명 있는 청계천의 한 봉제공장에서 일했던 1980년대 중반과 아내와 함께 가내수공업처럼 일하는 지금의 노동이 복사한 듯 그대로라고 했다.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분신한 지 17년이 지난 때였지만, 윤복기도 함께 일하던 동료 ‘시다’ 24명도, 심지어 ‘오야’ 25명도 근로기준법을 몰랐다. 지금은 봉제인공제회에도 가입했고 근로기준법도 알지만, 무엇이 달라졌느냐는 질문에 그는 길게 침묵하다 이렇게 말했다. “긴 시간 노동하는 건 하나도 안 바뀌었어요. 청계천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때 일했던 그 사람들이 지금도 똑같이 있어요. 일은 그때보다 더 하는 것 같아요. 바뀐 건, 지하에 있던 공장들이 지상으로 올라가고 좀 밝아지고 환풍기가 생겼지요. 대단한 노동권을 쟁취하기보다 그저 하루 사는 게 고역이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한때 봉제공장 노동자들이 한국 산업 전체를 맨 앞에서 이끌던 때가 있었다. 전태일은 한국 노동운동의 출발점이고, 청계피복노조는 빛나는 투쟁의 현존하는 역사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감당할 수 없었던 거대한 산업구조 변화의 뒤안길은 쓸쓸하기만 했다. 노동운동의 주류가 여공에서 대공장 남성 노동자로 변해가는 동안 봉제공장 노동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퀴퀴한 공장에서 옷을 만들거나 눈길 닿지 않는 현장에서 불안정 노동을 하며 산다. 청계피복노조에서 활동하며 40년 동안 미싱 앞을 지켜온 57살 최석호(가명)는 지난 50년을 돌아보는 질문에 피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노동운동 열심히 했죠. 임금 격차, 시간 격차, 계급 격차 이런 말 많이 하면서 조직화도 해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노동운동이 여기 현실을 잘 몰라요. 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은 절대 뭉칠 수 없어요. 5명도 안 되는 노동자들이 어떻게 투쟁을 해서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 사업주랑 싸울 수 있을까요. 그런데 맨날 투쟁만 하자고 해요. 영세 공장 사업주들도 우리를 등쳐서 더 벌어먹는 게 아니라 생존이 안 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라는 걸 나중에 안 거죠. 그러다 우리도 이젠 다 1~2인 공장 사업주가 됐어요. 종업원이 아내인 공장 말이에요.”
임현재씨, 정인숙씨, 도요한 신부, 이승철씨(왼쪽부터)가 청계피복지부 노조 사무실 현판 옆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전태일기념재단 제공
임현재씨, 정인숙씨, 도요한 신부, 이승철씨(왼쪽부터)가 청계피복지부 노조 사무실 현판 옆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전태일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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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와 권리”라는 말의 설렘은 어디로…
윤복기는 전태일 50주기와 노동권 이야기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20여년 전 육아 이야기를 꺼냈다. 봉제공장 불빛이 꺼질 줄 모르던 그때, 창신동 놀이터(현 다산어린이공원)는 밤늦게까지 일하는 노동자들의 공동 육아장 같았다. “엄마, 아빠가 불 켜진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수십명의 아이들이 창신동 놀이터에서 자기들끼리 어울려 놀았죠. 아직도 놀이터를 지날 때면 그때 생각이 나고, 맘이 흐려집니다. 육아, 이런 개념이 없어 아이들을 그냥 방치했던 거죠. 지금은 그래도 나라에서 (육아를) 책임져주려고 애는 쓰니까 헛산 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김영순은 다른 이유로 1970년대 후반을 아련하게 기억한다. 잠옷 공장의 ‘시다’는 그때쯤 야학에서 “여러분은 존중받아야 하는 사람이고, 무시받으면 안 되는 노동자입니다”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모든 노동자에게는 권리라는 것이 있다. 자기 권리는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말도 마음에 박혔다. 전태일이 몸을 불태우며 부르짖던 그 말들이 시발점이 되어 ‘내가 일하는 기계가 아니라 나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걸 배우던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면 김영순은 아직도 맘이 설렌다고 했다. 하지만 청춘의 설렘은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를 시간 앞에 차츰 흐려졌다. 청계천 ‘시다’로 청계피복노조에 가입해 싸우던 그 미싱사들은 여전히 기계처럼 일한다. 존중받는 주인이 되지 못했다. 그가 몸을 태운 지 반세기가 지났는데도.김완 김민제 기자 funnybone@hani.co.kr
[화보] 그 후 50년 - 여기 다시 전태일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967499.html?_fr=mt1#csidx431ea7e7700370ba9dffd816cace96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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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들 ‘미국은 들어라-아메리카NO 월례 국제평화행동’ 캠페인 시작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20/10/28 09:01
  • 수정일
    2020/10/28 09:01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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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아 통신원 | 기사입력 2020/10/27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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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사드와 세균전 부대를 가지고 이 땅을 떠나라!”

“가짜 ‘유엔사’ 해체하라!”

“한미워킹그룹, 동맹대화 철폐하라!”

“대북 제재 해제하고, 평화협정 체결하라!”

 

▲ 27일 오후 7시부터 청계천 광통교 부근에서 80여 명의 시민이 ‘미국은 들어라-아메리카NO 월례 국제평화행동’을 진행했다.  © 남영아 통신원

 

▲ 집회 참가자들의 큰 호응을 끌어낸 중학생의 상모돌리기 공연  © 남영아 통신원

 

27일 오후 7시부터 청계천 광통교 부근에서 80여 명의 시민이 ‘미국은 들어라-아메리카NO 월례 국제평화행동’을 진행했다.

 

김수형 대진연 미군 장갑차 추돌사망사건 진상규명단 총단장은 “5,000명이 넘는 국민이 국민청원에 동참해 주셨다. 미군강점 75년, 미군장갑차 추돌사망사건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분명히 하고 국민의 목숨을 짓밟는 외세의 그림자를 이제는 걷어내야 할 때”라며 오는 31일 미군장갑차 추돌사망사건 국민대회에 연대와 참가를 호소했다.

 

류경완 2021 미국 전쟁범죄 국제 민간법정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은 “2021년 9월 8일 뉴욕에서 미국의 전 세계 전쟁 반인륜 범죄를 단죄하는 ‘미국 전쟁범죄 국제 민간법정’을 열기로 하였다”라고 밝혔다.

 

이들은 27일 집회를 시작으로 매월 마지막 화요일 저녁 미 대사관 앞에서 미국의 죄행을 규탄하며 미국이 이 땅에서 물러날 것을 촉구하는 평화행동을 개최할 예정이다.

 

이날 집회에서 동학실천시민행동 풍물패의 공연 중 중학생 단원의 상모돌리기는 참가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끌어냈다.

 

▲ 미 대사관 앞에서 열린‘미국은 들어라 아메리카NO 월례 국제평화행동 선포 기자회견’, 앞으로 매월 마지막 주 화요일에 미국이 이 땅에서 물러날 것을 촉구하는 평화행동을 개최한다.   © 남영아 통신원

 

참가자들은 집회를 마친 후 미 대사관 앞으로 이동해 ‘미국은 들어라 아메리카NO 월례 국제평화행동 선포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기자회견문 낭독 후 성조기를 찢는 상징의식을 했다.

 

아래는 기자회견문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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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들어라’아메리카NO 월례 국제평화행동 선포 기자회견문

 

미군이 이 땅에 점령군으로 상륙한 지 75년 되는 올해 9월 8일, 우리는 한반도를 포함한 전 세계에서 미국이 저질러온 전쟁·반인륜범죄를 고발하는 ‘국제고발대회’를 개최한 바 있다. 이를 통해 1866년 제너럴셔먼호 침입 이후 두 세기 넘게 우리 민족을 농락해온 미국을 규탄하고, 구체적으로 한국전쟁 시기를 전후하여 자행된 잔혹한 전쟁범죄와 불평등한 ‘한미동맹’ 하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정 간섭, 사드와 세균전부대, 주한미군 주둔비, 미군범죄와 환경오염, 가짜 ‘유엔사’ 문제 등에 대해 상세히 밝히고 미국의 죄상을 고발하였다.

 

아울러 중동과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에서 미국이 일으킨 온갖 전쟁, 쿠데타, 정치개입 등으로 인한 세계 민중의 피해에 대해서도 폭로·고발하였다. 애초에 원주민 학살과 노예노동 위에 세워진 미국은 150여 차례 이상 침략을 벌여온 전쟁국가이며, 2차대전 이후에만도 37개 국가에서 근 2천만 명을 희생시키며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으로 군림해왔음을 밝혔다.

 

그러나 이제 세계가 변하고 있다. 달러와 무력에 기초한 제국의 세기가 저물고 미국 일극 패권의 쇠퇴와 다극화 질서로의 전환이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다. 세계 반제 진영의 투쟁과 제국 내부 모순이 맞물리면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 심지어 대서양동맹의 중심인 독일에서까지 미국이 후퇴하고 있다. 끝내는 150여 개국에 산재한 900여 미군기지의 감축 및 철군도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 그 길에 강권과 전횡, 침략과 약탈이 아니라, 호혜와 친선에 기반한 새로운 문명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우리는 쇠락해가는 미국의 침략주의를 단죄하고 그 종식을 앞당기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내년 9월 미 제국의 심장 뉴욕에서 ‘미국 전쟁범죄 국제민간법정’을 개최하기로 뜻을 모았다. 또한 그 준비 과정에서 전 세계에 걸쳐 ‘국제고발인단’을 조직하고, ‘아메리카NO 국제평화행동(AmericaNO International Peace Action)’을 진행하면서 지구촌 반제·반전 평화운동의 국제 연대를 강화하기로 결의한 바 있다.

 

이에 오늘, 그간 전개해온 ‘미국은 들어라’ 시민행동과 국제평화행동 1인 시위의 성과 위에 ‘미국은 들어라-아메리카NO 월례 국제평화행동’ 캠페인의 시작을 선포한다. 매월 마지막 화요일 저녁 미 대사관 앞에서 미국의 죄행을 규탄하고 미국이 이 땅에 대한 부당한 영향력을 거두고 물러날 것을 촉구하는 평화행동을 개최할 것이다.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국내외 양심과 시민 여러분들의 관심과 성원을 기대한다. 

 

2020년 10월 27일 

 

‘미국은 들어라-아메리카NO 국제평화행동’ 참가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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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체계’에서는 생소한 일이 벌어진다”

[인터뷰]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 기자명 이계환/이승현 기자 
  •  
  •  입력 2020.10.27 23:32
  •  
  •  수정 2020.10.27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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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헌 명예회장은 '새 용어 제조기'답게 이번 인터뷰에서 '국가보안법 체계'라는 새로운 용어를 소개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권오헌 명예회장은 '새 용어 제조기'답게 이번 인터뷰에서 '국가보안법 체계'라는 새로운 용어를 소개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저는 ‘국가보안법 체계’라는 표현을 쓴다. 국가보안법 체계에 있어서는 생소한 일이 벌어진다.”

‘새 용어 제조기’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은 이같이 ‘국가보안법 체계’라는 새로운 용어를 소개했다. 권 명예회장은 일찍이 운동의 발전에 따라 그에 맞는 새로운 용어와 개념들을 만들어 왔다. ‘비전향장기수’와 ‘2차송환희망자’, ‘송환’ 그리고 ‘양심수’ 등이 그것이다.

이들 개념들은 당시 기독교인권위원회, 불교인권위원회, 천주교인권위원회 등에서 받고, 국제사면위원회에서 따르니까 나중에 유엔인권이사회까지도 인정했다. 정부에서도 일부 인정했다. 특히 양심수 개념이 규정되자 “양심수 석방과 송환까지 큰 힘을 받았다”는 것이다.

권 명예회장은 이번에는 ‘국가보안법 체계’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그 작태들을 열거했다.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대표의 대북전단 살포, 정광훈 목사의 일장기 동원 시위 그리고 이영훈 교수가 쓴 <반일 종족주의> 등. ‘국가보안법 체계’란 한마디로 “반공, 반북만 하면 남쪽사회에서 어떤 일이든 용인된다는 것”이다.

그는 국가보안법 철폐운동만이 아니라 평생을 자주통일, 민주주의, 인권, 양심수 등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해 왔다. 그가 이와 같은 엄청난 일을 하자면 이론과 실천의 겸비는 필수일 터다.

그러나 그는 초등학교 출신자다. 이에 그는 “책도 보고 견문도 넓히려고 했지만 그것이 책에서 얻어지기보다는 어떤 현실조건에 내가 대응하면서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하겠다는 일을 하다보니까 그것이 논리가 생기게 된 것 같다”고는 “그런 논리가 형성되면 그 논리의 힘 때문에 추진하는데 힘이 생기는 것 같다”며 실천을 통해 이론이 형성됐음을 내비쳤다.

이들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아스팔트에서 집회도 하고 단식도 하고 투쟁도 하는 힘든 활동 중에도 기억에 남는 감동적인 장면도 있었다. 다름 아닌 2000년 비전향장기수들의 송환과 그해 북한 노동당 창건 55돌 행사시 방북해 고려호텔에서 만난 비전향장기수들. 권 명예회장은 “이렇게 사람이 살면서 이런 경우도 있고 이런 삶은 후회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감동적이었다”고 표현했다.

거의 모든 사안마다 거침없이 답을 해가던 그도 이재문 선생에 대한 질문에서는 말을 아꼈다. 참고로 권 명예회장은 3년 전인 2017년 6월에 폐암4기 진단을 받았으나, 항암 신약을 복용하자 그게 유전자와 잘 맞는지 다행이라며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몇 번이고 이재문 선생에 대해 묻자 그는 “우리 집에도 몇 달간 있었다”는 정도로 비켜갔다. 남민전 성원으로서 최고지도자에 대한 어떤 ‘배려’(?) 때문일까?

그래서 더욱 필요한 게 자서전이 아닐까 해서 묻자 예전과 달리 이번에는 “소중한 삶이라 자서전 한번 기록하고 싶은 생각은 있다”며 일단의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의 삶은 간단히 일별해 봐도 ‘독학, 농촌 사회운동, 정당운동, 남민전, 인권운동, 통일운동 등등’으로 이어진다. 그의 파란장한 삶의 이야기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언제쯤 주어질까?

이번 인터뷰는 ‘통일뉴스 창간 20주년, 비전향장기수 송환 20주년’을 맞아 이뤄졌다. 권 명예회장과의 인터뷰는 10월 20일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이계환 기자와 이승현 기자가 함께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권 명예회장은 2시간 30분에 걸쳐 모든 사안에 대해 쉼 없이 그리고 거침없이 답하는 노익장을 발휘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권 명예회장과의 인터뷰는 10월 20일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2시간 30분에 걸쳐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권 명예회장과의 인터뷰는 10월 20일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2시간 30분에 걸쳐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항암 신약이 잘 맞아 다행이다”

□ 먼저, 독자들이 선생님 건강에 대해 궁금하실 것 같다. 2017년 폐암4기 진단을 받으셨죠. 지금 건강이 어떠신가요?

■ 감히 저에 대한 염려를 해주신데 대해서 너무 감사하고 사실 그런 염려들 때문에 생각했던 것 보다는 현재 상태는 잘 버티고 있다고 말씀드리겠다. 정확히 2017년 6월에 판정을 받고 7월경부터 이레사라는 항암 신약을 복용했는데, 그게 제 유전자 검사하고 그 약이 잘 맞았다. 그 약을 투약한 사람 중 저처럼 오래 견딘 사람도 흔치 않았다. 2019년 9월까지 정확하게 2년 3개월을 견뎠다.

그리고 내성이 생겨서 작년 9월경에 그 약을 끊었다. 전적으로 처음부터 저를 담당했던 서울대 김동완 교수가 항암주사를 놓았다. 처음에는 먼저 먹는 약도 그렇지만 주사제도 전신에 피부발진이라든가 위 장애, 식용부진, 변비 등 부작용이 있었는데 그것도 얼마 지나니까 적응이 됐다. 어제(10월 19일)가 주사 맞은 지 1년 되는 날이었다.

어제 병원에 가서 담당의사에게 물어보니까 지금 상태로는 괜찮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나아지는 건지, 괜찮다는 건지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런 걸 물어보기도 어렵고... 나쁜 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으니까.

어제 처음으로 '암세포가 줄어드는 것이냐'고 물어봤더니 '이 약을 쓰고 나서 (암세포가) 줄어들고 정지상태가 유지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병원에서도 제가 실험대상이라면 성공한 것이라는 거다. 언제 또 내성이 생겨서 다시 또 잘못될지도 모르지만.

그전에도 1년쯤 지나서 척주로 옮겨진 적이 있다. 폐암이 무서운 게 척추로 전이되는 것 하고 뇌로 가는 것인데, 척추로 간 것은 방사선 치료 한 번에 괜찮아진 것이다. 그러니까 거기서 한 것이 나한테는 잘 맞은 것이다. 지금 현재로는 다행히 잘 견디고 있다.

□ 그전에 잘 안 오시다가 엊그제 6.15산악회에도 오셨는데, 그렇게 산에 오시는 것 보니까 건강이 호전되는 것 같다.

■ 다른 것보다는 처음으로 느낀 것이, 올해 1월에 북한산을 올랐는데, 나는 무릎 아픈 것만 걱정했는데 오르다보니까 숨이 차더라. 숨이 차서 도저히 못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릎이 아프다고 하고는 뒷풀이에 갔었다. 그 다음에 병원에 가서 알아보니까 항암주사 때문에 빈혈증이 생겼는데 적혈구 치수가 보통 성인남자가 13~14라면 저는 8이 나왔다. 이거는 수혈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낮은 수치하고 하는데, 제가 그냥 견뎌보겠다고 했다.

단백질 섭취라던가 이런 걸 신경 쓰고 있는데, 지금은 9까지 올라왔다가 어제는 8.5까지 떨어졌더라. 이거는 항암치료 하는 동안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 병원에서도 조심하고 될 수 있으면 단백질 섭취를 많이 하라고 한다.

지금은 그 일 때문에 산에 못가는 것이고 어제는 제가 제안해서 둘레길을 가겠다고 한 것인데 다 같이 가게 된 것이다.

“난 초등학교 출신자. 현실조건 극복 위해 고민하니 논리가 형성돼”

□ 선생님께서는 오랜 기간 활동해 오셨기 때문에 선생님에 대해 '양심수의 대부', '한국의 호치민', '평생청년', '이론과 실천의 양수겸장' 등 별칭이 많다. 이에 대한 소감은 어떠신가요?

2019년 11월 제25회 불교인권상을 수상한 권오헌 명예회장이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
2019년 11월 제25회 불교인권상을 수상한 권오헌 명예회장이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

■ 사실 너무 지나치고 분수에 넘치는 호의라고 생각된다. 사실은 뭐 그런 부분에 대해서 일은 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지닌 감성이랄까, 이런 것과 사회적 여건과의 조건반사적인 만남의 결과라고 보인다. 열심히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성과는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저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해야겠다는 생각은 늘 갖고 있다. 그런 생활을 해 왔을 뿐인데 저한테는 분수에 넘치는 호의라고 생각한다.

□ 외부 사람들이 보기에는 늘 청년처럼 움직이고 외모도 호치민과 같이 안온한 모습이 있으며, 양심수를 위해서 평생 일해 오셨고, 말 그대로 이론과 실천을 두루 아우르는 활동을 해 오신데 대해 좋은 의미에서 이런 종합적인 말씀을 하시는 것 같다.

■ 이론과 실천 이야기가 나왔는데, 제가 초등학교 출신 아닌가. 알면 얼마나 알겠어요. 물론 노력은 많이 했다. 지금은 민간인이 갖고 있는 책도 거의 없을 것으로 알고 있는데, 1946년에 나온 자본론 3권을 제가 갖고 있다.

6학년 담임이었던 정인묵 선생이 '이건 자네가 봐야 할 책이네'라며 건네 주셨다. 그건 보물이었다. 지금도 진품명풍에 나갈 수 있는 책이라고 알고 있다. 당시 노트하면서 봤던 것이 지금도 남아있다. 잉여가치라든가 용어 하나 하나를 외우다시피 했다. 내용을 알기 위해서 노력했다.

알다시피 그걸 다 읽은 사람이 많지 않다. 역사, 경제, 문화 등이 다 있다. 그걸 보면 완벽한 인격도야에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런 것을 비롯해서 책도 보고 견문도 넓히려고 했지만 그것이 책에서 얻어지기보다는 어떤 현실조건에 내가 대응하면서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하겠다는 일을 하다보니까 그것이 논리가 생기게 된 것 같다.

그런 논리가 형성되면 그 논리의 힘 때문에 추진하는데 힘이 생기는 것 같다. 가령 양심수나 비전향장기수 규정이라든가 하는 새로운 개념은 그분들 석방하고 송환하는데 아주 결정적인 큰 도움이 됐다. 그전에는 한국의 양심수에 대해서도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양심수로 인정하지 않았다. 엠네스티에서 만델라도 양심수가 아니라고 했다.

제가 이 논리를 세우고 난 후 처음에는 기독교인권위원회, 불교인권위원회,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이걸 다 따랐다. 그리고 국제사면위원회에서 이런 논리를 따르니까 나중에 유엔인권이사회까지도 그렇게 하여서 이 분들을 양심수로 규정하고 석방과 송환까지 큰 힘을 받았다.

그래서 정확한 논리라는 것이 굉장한 힘이 된다. 맹목적으로 사업을 하면 힘이 없다. 반드시 논리가 있어야 한다. 양심수 석방의 당위성, 국가보안법 폐지의 논리라든가. 뭐 다 마찬가지이다. 저는 활동하면서 그냥 목소리 높이는 것보다는 논리성을 찾고 그에 따라서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까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 같다.

□ 실천으로 옮길 경우 그에 합당한 이론이나 논리가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식에 맞춰 하는 경우가 많다. 선생님은 그걸 스스로 깨우치면서 이론이 올라가고 실천이 쌓여져 가니까 그런 점에서 많은 분들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 그동안 제가 써놓았던 원고를 두 번에 걸쳐서 책을 냈지 않았나. 거기에도 이런 이론화 과정이 나온다. 그냥 덮어놓고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전문 학자들의 논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일반 시민사회의 성명서 같은 것과는 다르다.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논리가 형성되어서 글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 선생님께서 6.15산악회에서 산상강연을 하시는데 10~20분 즉흥적으로 하시면서도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는 것을 보면서 평소에 늘 자신에게 질문을 하고 답을 하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을 했다.

방북한 권 명예회장이 리인모 묘소를 참관했다. [사진제공-권오헌]
방북한 권 명예회장이 리인모 묘소를 참관했다. [사진제공-권오헌]

■ 그것이 생활화되고 하다보니까 그냥 어디 가서 함부로 이야기하긴 어렵다. 그냥 이야기하면 권력자나 시민사회 상대에게 힘을 못 받는다.

비전향장기수 송환하는 과정에서 제가 글을 많이 썼다. 정확하게는 1993년 리인모 선생 송환 때부터 시작해 1995년 함세환, 김인서, 김영태 등 세분 송환 활동(고향이 이북이고 한국전쟁 기간에 체포된 비전향 장기수는 제네바협약에 따른 전쟁포로로 취급하여 송환해야 한다)을 거쳐 1999년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됐다.

당시 송환운동에 많은 단체들이 같이 했지만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제 논리에 따라 활동했다. 잘 모르면 논리도 세우기가 어렵다. 논리가 별건 아니다. 이런 현상들이 있었는데 이걸 어떻게 해결하고 극복할 것인지 방법을 추구하다보면 논리가 정립되는 것이다. 그게 시대상황마다 다르게 나온다. 통일부가 입장을 밝히는데 따라 반박논리도 나오는 거다. 이렇게 해서 송환운동 과정에서 상호주의론, 자격문제도 나온 것이다.

“비전향장기수 송환, 방북해 다시 만난 비전향장기수들.. 감동적이었다”

□ 선생님께서는 평생을 우리 민족의 자주통일, 나라의 민주주의, 인권, 양심수 등 여러 가지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해 오셨다. 특별히 애착이 있는 분야가 있는가?

■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저는 주어진 조건에서 처음엔 감성으로 대하다가 이성적 판단으로 상승하게 되었다. 그렇게 이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일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60~70년대만 하더라도 처음엔 노동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통일사회당에 들어가서 김철 씨 구속되고 옥중 관련된 일을 하게 되다보니까 그쪽으로 쏠리게 되고 양심수후원회 만들어져서 통일운동과 연계되어서 그쪽으로 더 저의 활동영역이 달라지게 됐다. 그렇게 하다보니까 자주통일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권, 국가보안법, 양심수로 다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이라고 하면 노동문제도 다 포함되지 않나. 결사의 자유라던가 노동3권 등, 또 생존권이라고 하면 노동자·농민·빈민이 다 해당되지 않나. 제 글속에는 그런 것이 다 있게 된 거다. 그래서 어느 부분에 더 관심이나 집착이 있다기보다는 가장 보람 있고 긍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을 꼽는다면 이런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동안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1988년 12월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을 비롯해서 시국사범이 전원 석방됐다. 물론 저 사람들이 말하는 공안 쪽은 나오지 못했지만. 남민전이 나왔으니까 제헌의회(CA)라든가, 반제청년동맹 등 반국가단체 관련자들까지 전원 다 나온 것이다. 남민전이 다 끌고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비전향장기수'들도 상당히 많이 나왔다. 전향서를 썼던 분들은 거의 다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김영식, 양원진, 박희성 선생 등 지금 낙성대에 계신 분들이 그때 나온 분들이었다. 그때 저는 남민전 석방운동에 온 정력을 투여했기 때문에 보람을 느꼈다. '아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이 있었다. 야당이었지만 당시 민주당 인권위원장이 저하고 석방 규모와 내용 등을 상의하고 그랬으니까.

(통혁당 재건위와 남민전 준비위 사건으로 쌍무기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임동규 선생(2020년 9월 21일 별세)의 석방을 위해 광주를 찾아가 봐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그 사람을 나오는 방향에서 '그걸' 해달라는 요청이었는데, '우리 동지한테 뭘 써달라'고는 말 못하지 않나. 박현채와 함께 가기로 했다가 나 혼자 가서는 '당신이 지금까지 해온 대로 하는 것이 원칙이다. 당신 마음대로 하라'고 했는데 결국은 다 나왔다. 그때 감동을 잊을 수 없다.

그 다음으로는 1999년 2월 25일 우용각 선생을 비롯한 17명이 석방되었다. 1999년 손성모, 신광수 등 두 분이 나왔다. 이 분들은 7.4성명 이후 이쪽 공안에 의해서 유인되었다는 혐의가 역력하다. 일본에서 들어왔다가 김포공항에서 다 잡힌 사람들이다. 신광수는 일본인 납치와 연관되었다고 해서 낙성대에 와서 시위가 있었다. 그때 내가 그것도 다 막아냈다. 일본 NHK방송에 다 나가고 했다. 그렇게 해서 비전향장기수가 다 나왔는데 그때 그 감동과 보람은 말도 못했다.

2000년 10월 북한 노동당 창건 55주년 행사 때 방북한 권 명예회장은 고려호텔에서 그해 9월 송환된 비전향장기수 대부분을 만났다. [사진제공-권오헌]
2000년 10월 북한 노동당 창건 55주년 행사 때 방북한 권 명예회장은 고려호텔에서 그해 9월 송환된 비전향장기수 대부분을 만났다. [사진제공-권오헌]

2000년 63명 송환됐을 때의 감동, 그해 조선노동당 창건 55돌 경축 행사에 남측에서 42명이 참관을 하게 됐다. 제가 서둘러서 전국연합에서 참관 결정을 했고 홍근수 목사, 백기완 선생 등이 개별적으로 가기도 했다. 그때는 열병식이나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백전백승 조선노동당'이 문제가 아니라 비전향장기수들을 고려호텔에서 다 만났다는 것. 이게 저한테는 정말 감동적이었다. 이렇게 사람이 살면서 이런 경우도 있고 이런 삶은 후회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 활동하시면서 아스팔트에서 힘들게 집회도 하고 단식도 하고 투쟁도 하면서 너무 힘든 삶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크게 보면 기억에 남는 감동적인 장면도 있었다.

■ 따지자면 여러 가지 있겠지만 이건 정말 내 일생에 대표적인 감동적인 장면들이었다.

□ 얼마 전 비전향장기수 1차 송환 20주년을 맞았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9월 2일 63명의 비전향장기수가 북으로 송환됐다. 20년이 지난 소회가 어떠신지요.

■ 20년이 지났지만 어제 일처럼 그때 장면이 떠오른다. 몇 가지로 나눈다면, 첫째 당사자들이 끈질긴 노력이다. 조국통일을 위해 수십 년 감옥을 살면서도 정치적 신념과 양심을 지켜왔다는 것. 이것이 아니었다면 갈 수 없었던 것이다. 비전향장기수들의 불굴의 투지와 신념의 강자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분들이 '인간승리'로 갔다는 생각이다.

비록 외세에 의해서 분단이 되었지만 남북이 합의해서 이런 인도주의 문제를 해결하고 이걸 시초로 해서 당시 6.15공동선언이 말했던 자주원칙, 통일방식, 다방면적인 교류협력 등을 차근차근 엮어져서 이어졌던 것. 비전향장기수 송환은 남북관계를 발전시키고 이어지게 한 계기이면서 우리민족이 세계에 대해서 자주민족으로서의 긍지를 가질 만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 6.15선언 이후 많은 분들이 북측에 갔는데, 선생님은 몇 번이나 가셨나?

■ 평양은 제가 7번인가 8번 갔었다. 공동행사도 있고 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에서 하던 콩우유돕기운동 차원으로 평양에 가서 좋은 이야기들 많이 나누었다.

□ 평양에서 비전향장기수 선생들을 만난 이야기를 해 달라.

■ 평양에 갈 때마다 안 만난 일은 거의 없다. 당창건 55돌에는 병원에 계신 네 분인가 빼고 고려호텔에 다 나오셔서 사진도 같이 찍고 그랬다. 2001년 8.15민족통일대회 때였는데, 아주 뙤약볕이었다. 남측에서 간 분들이 고려호텔에서 아웅다웅 늑장부리는 바람에 비전향장기수들이 3대헌장기념탑 앞에 얼굴이 새까맣게 탈정도로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들도 휠체어 타고 기다렸다. 찍히기도 했지만 우린 모두 거기로 가서 선생님들 다 뵀다. 그리고는 선생님들이 제가 묵었던 고려호텔 '초호화실'(침실이 있고 응접실이 따로 있고 화장실이 2개 있고, 회의실도 굉장히 컸는데 혼자 쓰도록 했다)에 찾아 오셨다.

방북해 김선명 선생 등 비전향장기수들을 만났다. [사진제공-권오헌]
방북해 김선명 선생 등 비전향장기수들을 만났다. [사진제공-권오헌]

선생님들이 찾아오셨다고 해서 빨리 내려가서 맞이하려고 했더니 북측 담당자들이 그냥 계시라고 하더라. 그런 의전을 철저히 하더라. 홍경선·황용각 선생이 대표로 오셔서 공식적으로 인사를 하고 같이 내려가서 아홉 분을 만나 다른 회의실로 옮겼다.

그렇게 여러분을 만난 일은 그 뒤로는 없었다. 고려호텔이나 양각도호텔에서 신청을 하면 비공식으로 만나서 선물도 전해드리고 애기한 적은 있다. 사진으로 공개된 것도 몇 번 있다. 2001년까지는 많이 만났고 그 이후에는 그렇게는 못 만났다. 그 뒤로는 적게는 세 분에서 많게는 일곱 분의 대표성 있는 분들을 만났다.

□ 연로하신 선생들이 별세할 때마다 북측 매체에서는 부고를 알렸는데, 2010년 이후부터는 소식이 나오지 않는 것 같다. 지금 몇 분이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돌아가신 것 같다.

■ 2012~2013년쯤에 재미언론 <민족통신>에서 정리한 적이 있다. 노트에 다 정리를 해두었는데 지금 노트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때 25명 정도 남아 계셨다. 그리고 2017년 제 출판기념회 때 22명으로 확인했다. 그때 아홉 분이 영상으로 축사를 보내주면서 22명이 남았다고 알려오신 거다. 그 뒤 3년이 지났는데 15명이 남아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정확치 않고 그 후 더 돌아가셨을 것 같다.

이 자리를 빌어서 공식적으로 인사드리고 싶다. 그때 출판기념회 때 영상메시지를 손수 보내주셨는데 너무 감사드리고 그 뒤 오랜 시간이 걸리는 동안 많은 선생님들이 별세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돌아가신 분들에 대해 명복을 빌고 살아계신 선생님들은 항상 건강하시면서 평생 염원이셨던 자주통일 세상을 이루면서 그 영광과 축복을 누리셨으면 좋겠다. 공식적으로 전해드리고 싶다.

'비전향장기수'와 '2차송환희망자', ‘송환’ 그리고 ‘양심수’의 개념

□ 지난 10월 10일 기독교회관에서 '비전향장기수 송환 20주년 기념 및 2차 송환 촉구대회'를 하셨다. 이때 ‘비전향장기수’와 ‘송환’의 개념을 말해주셨는데, 다시 한 번 정리해 달라.

■ '비전향장기수'와 '2차송환희망자'는 다르다. 비전향장기수는 "국방경비법, 국가보안법, 반공법 등 반민주악법으로 구속기소 되어 수십 년을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온갖 고문 등 핍박을 이겨내고 조국통일에 대한 정치적 신념과 양심을 지켜낸 불굴의 투사, 신념의 강자들"을 말한다.

1975년 사회안전법이 생겨서 감호처분을 받았던 분들 중 1989년에 사회안전법 폐기로 인해 그해 후반부터 1990년에 전향을 하지 않고 나온 분들이 이에 해당된다. 또 1990년부터 대전 등 전국 교도소에 있던 비전향장기수 중에 노약자·병약자를 비전향으로 내보냈는데, 김석행·이종환·권양섭 선생 등 15명 정도가 비전향장기수에 포함한다.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들'은 명칭 자체가 개인이 아니라 복수이다. 역사적 개념에 속하는 고유명사가 된 것이다.

사회안전법이 폐지(1989년)된 이후 사상전향제도가 폐지(1998년)되고 준법서약제도가 폐기(2003년)된다. 본인 의사에 반해서 강제로 사상을 전향시키는 것은 제도 폐지와 함께 당연히 원인 무효가 된 것이다.

비전향장기수 송환자 중에도 사실 쓰고 간 분이 있다. 청주감호소에서 나오기 전에 썼던 분들이 북으로 간 분들이 있다. 그렇지만 사회안전법이 폐지됐기 때문에 원인무효라고 본 거다. 정부에서 이런 역사인식이 있다면 강제 전향자들에 대해서 원인무효임을 확인하고 보내드려야 한다는 거다.

이런 분들은 개별적으로 '비전향장기수'는 아니지만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는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2002년과 2004년에 걸쳐서 강제전향을 위한 공작의 일환으로 강제급식 과정에서 돌아가신 5명에 대해 사상전향제도의 위헌성, 강제전향공작의 위법성을 지적하고 이분들을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사람으로 규정했다. 이렇게 강제전향은 사실상 전향이 아니라고 사실상 인정했다.

이때까지 양심수후원회에서도 송환 대상자와 관련해 '장기구금양심수',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 등을 혼용했는데 2004년 통일부에서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들'로 규정한 뒤로 2006년부터는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들'로 용어를 단일하게 했다.

이 분들을 엄격한 의미에서 '비전향장기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실상 강제전향을 원인무효로 해석하는 상황인 만큼 복합적인 명칭에서 '비전향장기수'라는 표현을 이렇게 정리해도 된다. 그리고 인권개념이 그때와 지금은 많이 달라져 있다. 이 분들은 어디까지나 조국통일에 대한 정치적 신념과 양심을 지금까지 지키고 현장에서 뛰는 사람들이다.

2020년 7월 통일부 앞에서 열린 ‘비전향장기수 2차 송환’ 기자회견에 참가한 권 명예회장. [통일뉴스 자료사진]
2020년 7월 통일부 앞에서 열린 ‘비전향장기수 2차 송환’ 기자회견에 참가한 권 명예회장. [통일뉴스 자료사진]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들은 처음에 33명이었다가 13명이 추가되어 총 46명이었으며, 이중 33명이 돌아가시고 현재 13명이 남아 있다. 이 분들이 전부 그런 분들이다. 13명 중 박종린 선생이 병원에 계신데 오래 견디지 못하실 것 같다.

'송환'이라는 개념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쓴 것이 정전협정문에서였다. 그 이전에 전쟁포로에 대한 제네바협정에서 전쟁이 끝나면 일정기간을 두었다가 송환해야 한다는 뜻으로 사용됐다. 송환을 뜻하는 리페이트리에이션(repatriation)은 전쟁포로가 본국으로 돌아간다는 뜻이고 '반드시 보내야 한다'는 당위성을 포함하고 있다.

리인모 선생과 2000년 9월 2일 63명 송환 때에는 '북한 방문'을 목적으로 했으나 2005년 정순택 선생의 유해가 육로로 보내질 때에는 '유해송환'이라는 표현을 남북이 합의해서 정확히 썼다. 미묘하지만 용어의 변화가 있다. 남과 북 어느 쪽도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송환에 대한 '자격문제'도 짚고 넘어가자. 얼마 전 통일부에서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들의 송환을 촉구하는 서한에 대해 과정 전결로 '가야할 분들은 다 보냈다'고 답을 보내온 것은 아주 인권개념이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남북합의 정신에 대한 역사인식이 없는 것이다. 민족과 국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무엇이고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이다. 너무 무식한 것이다. 송환은 반드시 보내야 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정부에서 이미 인정한 만큼 나머지 분들은 모두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 한 가지 더 여쭤보겠다. ‘양심수’ 용어도 처음 쓴 것으로 알려졌는데...

■ 양심수라는 개념은 한마디로 '국가권력과 사회정의실천 사이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사회정의를 위한, 개인이나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 공동선을 위해서 양심에 따라 행동하다 구속된 사람"이라고 제가 처음 표현했다. 조국통일, 노동3권, 생존권보장, 양심적 병역거부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확신을 가지고 활동을 했기 때문에 '확신수'라고도 했고 예전에는 ‘정치범’이라고도 했다. 전에는 정치적 사건과 관련해서 구속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공안당국에서도 일반 형사피의자와는 다르게 취급했다. 그런 것을 인권감수성이라고 볼 수 있는데, 문재인 정부에서는 양심수에 대한 인권 감수성이 없는 것 같다.

인권변호사라고, 촛불정부라고 자임하면서도 양심수, 국가보안법 철폐문제에 대해 취임 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숫자는 줄어들었지만 양심수는 숫자가 많고 적은 문제가 아니라 단 한사람이 갇혀 있더라도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 대표적인 양심수는 누가 있나.

■ 현재 12명이 갇혀있다. 양심수가 제일 많았던 1989년에는 1,700여명이 갇혀 있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천지차이이지만 양심수와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발전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양심수가 갇혀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또 그 내용이 감옥에 갈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갇혀있다는 것도 문제이다.

민가협 목요집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권 명예회장.  [통일뉴스 자료사진]
민가협 목요집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권 명예회장.  [통일뉴스 자료사진]

세 가지로 분류하는데 먼저 국가보안법 위반 관련이다.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국회의원과 인터넷 논객인 김경용 씨, 조종원 평화협정운동본부 국보법폐지 특별위원장 등 3명이 있다.

이밖에 금속노조 소속 유성기업 노조원 4명과 제주해군기지내 기습항의시위로 구속된 송강호 박사, 마크 리퍼트 전 주한미대사 피습 사건으로 구속된 김기종 우리마당 대표, 오세훈 낙선운동에 나섰다 구속된 유선민 서울대학생진보연합 운영위원장, 양심에 따른 병역법 위반으로 구속 중인 송상윤 씨 등 12명이다. 예전에 비하면 참 숫자는 작지만, 양심수이기 때문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문재인 정부의 인권 감수성에 대해 지적하셨는데...

■ 적폐세력들과 대항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노력을 한다. 또 경제, 코로나19 등 질병관계에 대해서 고민하고 남북문제, 한미관계에 대해서도 고심하는데 민주주의와 정권의 건전성,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하다. 이게 도덕적으로 정당성을 갖기 때문에 중요한데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한상균 전 민주노총도 사면 성격으로 한 게 아니지 않나.

사회정의와 기회균등, 공정성 등에 대해서도 말은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부당한 전교조 법외노조는 부처 행정명령으로 한 것이어서 노동부의 철회만 있으면 되는데 그걸 하지 않고 있다. 그런 면에서 무척 아쉽다.

“‘국가보안법 체계’에서는 생소한 일이 벌어진다”,, 박상학, 전광훈, <반일 종족주의> 등

□ 양심수 문제는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와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국가보안법은 민주화시대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다. 2004년 12월 동토에 삭발도 하고 정치적 이슈도 되어 국회에도 갔지만 결국 국회 상정은 되지 않은 아쉬움이 있었다. 전 국민적인 투쟁으로 흔치 않은 기회였지만 굉장히 중요한 투쟁이었다. 16년이 지난 지금 다시 평가한다면?

■ 참 아쉽다. 그때 그 절호의 찬스를 놓쳤다.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이 대중적으로 가장 규모 있게 벌어졌던 때였다. 그전에는 1989년 명동성당에서 국가보안법 폐지운동과 개정운동이 진행되다가 통합하여 1990년 500여 단체가 망라된 국보법폐지 국민행동이 발족하게 됐다.

당시 국보법 폐지가 안 된 것은 한마디로 노무현 정부의 의지 부족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의지가 있었다면 국회의장의 합법적 권한인 경호권을 발동했으면 된다. 그때 폐지했으면 국가 기강, 체면, 국격 모든 면에서 우리나라의 형편이 아주 달라졌을 것이다. 대규모적으로 처절한 투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은 천추의 한이다. 앞으로 그런 기회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해 겨울은 몹시 추웠다.’ 2004년 12월 1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회 앞에서 열린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촛불집회에서 권오헌 명예회장이 농성에 들어갔다. 이후 농성자들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집단 삭발과 함께 1천명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그해 겨울은 몹시 추웠다.’ 2004년 12월 1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회 앞에서 열린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촛불집회에서 권오헌 명예회장이 농성에 들어갔다. 이후 농성자들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집단 삭발과 함께 1천명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 국보법이 왜 폐지되어야 하는지, 왜 폐지가 어려운지에 대해 말해 달라.

■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동족인 북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또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상 양심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 학문 예술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려면 목적이 정당하고 수단이 적합하며 제한의 최소성, 법익의 균형성이 갖추어져야 한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 방역을 위해 기본권을 제한하고 있는 것은 그만한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헌법 37조 2항은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의 안전보장, 질서유지, 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는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여기에 해당한다.

국보법은 법을 집행하는 사법기관이나 공안당국이 자의적 해석에 따라서 유무죄를 결정하는 애매모호성 때문에 법으로서의 균형을 잃고 있다. 사회가 변하면 법률과 제도도 바뀌어야 하는데, 오늘날 남북관계는 이 법이 있어서는 안 되지 않나.

최근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도 있지만 특히, 10.4선언에서는 남북관계 발전에 저해되는 법, 제도 폐지를 명시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현재 국보법 적용을 받고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데 특성이 있다. 지금 8년째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이석기 의원의 경우 대법원에서 내란음모, 지하혁명조직 등이 모두 ‘혐의없음’으로 판결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내란 선동으로 급조, 뒤집어 씌워서 국보법 제7조 찬양 고무죄를 엄격하게 적용했다.

보수정부에서도 찬양 고무, 이적표현물 소지 등 국보법 7조 적용해서 구속시킨 사례는 거의 없는데, 무려 8년 징역을 살리고 있다.

또 일심회 사건으로 7년 옥고를 치른 장민호 씨의 경우 간첩죄, 이적단체 구성 등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이적표현물 소지 등 하찮은 죄목을 적용해 만기를 꽉 채우게 하고는 만기출소하는 날 80살 노모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하게 하고 미국으로 강제출국시켰다. 그것도 모자라 미국에서 5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하게 하다가 노모가 위급한 병환에 이르자 여러 가지 조건을 붙여 입국제한조치 일부 해제를 하는 엄격한 국보법 적용을 하고 있다.

최근 범민련에 대한 가혹한 탄압의 경우까지 보면 미국을 반대하고 민족자주에 투철한 경우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가혹하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정부만의 뜻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압력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는 '국가보안법 체계'라는 표현을 쓴다. 국가보안법 체계에 있어서는 생소한 일이 벌어진다. 박상학을 비롯한 대북전단 살포 주도자들은 정부와 시민사회에서 막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외국의 반북단체까지 끌고 들어와서 터무니없는 대북모략 내용의 전단 살포를 보장받고 있다. 반공, 반북만 하면 남쪽사회에서 어떤 일이든 용인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 북에서 잔인한 범죄행위를 저지른 것이 세계 언론에 공개된 자가 남쪽에 와서 국회의원이 되는 이런 사회는 국보법 체계 속에서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정광훈 목사가 대통령 하야를 주장하면서 온갖 얘기를 다하고 태극기부대가 성조기와 이스라엘기, 최근에는 일장기까지 동원하고 있는 이런 현상은 오로지 반공, 반북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 나아가 이영훈 교수가 쓴 <반일 종족주의>까지 국보법체계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남북대화 복원하려면 정상 간 합의문 이행해야”

□ 선생님께서는 정세에도 관심이 많다. 지난 10일 조선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과 김정은 위원장 연설이 있었다. 광경이 파격적이었고 화제가 많이 됐다. 소감이나 평가를 해주신다면.

■ 이런 표현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민주사회인데. 우리 사회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국가보안법 체계가 있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평자들이 말하는데 공감하는 바 있다. 열병식에서 한 김정은 위원장의 연설을 주의 깊게 들었다.

권 명예회장이 인터뷰 도중 발언의 정확성을 위해 가끔 돋보기로 자료를 살피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권 명예회장이 인터뷰 도중 발언의 정확성을 위해 가끔 돋보기로 자료를 살피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크게 두 가지 아닌가. 이른바 인민을 위한 ‘인민대중제일주의’라는 것이 하나 있고, 허리띠를 졸라매서라도 부당한 외침으로부터 자위적 억제력을 갖추고 만약 침략하면 강력하게 물리치겠다는 것 두 가지이다. 이번 연설에서는 인민대중제일주의와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인 것 같다.

"하늘같고 바다같은 우리 인민의 너무도 크나큰 믿음을 받아 안기만 하면서 언제나 제대로 한번 보답이 따르지 못해 정말 면목이 없다. 나는 우리 인민의 하늘같은 믿음을 지키는 길에 설사 온몸이 찢기고 부서진다 해도 그 믿음만은 목숨까지 바쳐서라도 무조건 지킬 것이고 그 믿음에 끝까지 충실할 것을 다시 한 번 이 자리에서 엄숙히 확언한다"고 말했다. 이런 말을 국가지도자가 공개적으로 한다는 것은 어느 자유주의 국가에서도 찾아보기 어렵고, 연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열병식에서 연설을 통해 '핵억제력'이 아니라 '전쟁억제력'이라고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새로운 전략무기체계와 개인장비를 선보임으로써 인민들에게는 자주권과 생존권을 위한 군사력 보유 의지를 과시하고 외세에는 경고한 것으로 본다.

□ 여전히 미국과의 관계에서는 장기전으로 보고 정면돌파전으로 가는 흐름이 있을 것 같고, 남측에 대해서는 보건문제 풀리면 손을 잡자는 언급도 있어서 남북관계 복원을 점칠 수 있지 않나 하는 평가들도 있다.

■ 현재까지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이렇다 할 내용을 제시하지 않았다. 하노이 결렬 연장선에서 새로운 셈법을 가져오라는 것 외에는 없다. 기본적인 것은 싱가포르 정상회담은 인정하는 것인데, 거기에서 한반도 비핵화는 북쪽만의 비핵화는 아니지 않나. 일본이나 남쪽의 핵우산까지 포함되는 거다. 더 확대하면 오키나와, 괌까지 포함된다. 이렇게 찬찬히 들여다보면 미국이 함부로 대들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남북사이의 적대 관계 해소는 원칙적으로 7.4남북공동성명에서부터 시작됐다. 7.4성명과 6.15남북공동선언, 10.4평화번영선언을 비롯해서 문재인 정부가 직접 만나서 합의했던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을 이행하면 되는 것이다.

민족자주와 민족자결의 원칙, 이걸 가지고 남북 사이에 더 이상 전쟁이 없다는 것을 합의하고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기국면을 조성하지 않기 위해서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하지 않고 첨단무기 도입을 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남북 간 대화가 복원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남민전 이재문 선생. 우리 집에도 몇 달간 있었다”

□ 사적인 질문을 좀 드리겠다. 활동하면서 많은 조직사건과 연루되었고 또 많은 운동가들과도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남민전 사건으로 옥고도 치렀는데, 40년이 지난 남민전을 한국 운동사에서 평가한다면?

■ 지금까지 웬만한 공안사건은 다 평가되고 대부분 부당한 권력에 의해서 탄압받은 것으로 규정되어서 복권되거나 보상까지 받았다. 지금까지 안 된 사건이 남민전 하고 통혁당 사건이다. 통혁당 사건은 일부가 한국영토 바깥에서도 활동하는 것으로 공식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남쪽에서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역시 남쪽에서 활동한 내용이 자주통일과 민주주의 발전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기 금기시될 만한 일도 아니다.

남민전은 전혀 외부와 연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국회를 해산하고 스스로 국회의원을 임명하는 유신체제의 그 포악성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고, 거기에 더해 2차 인혁당 사건에서 사법살인이 자행된 상황에서 비공개조직으로 활동한 것이 남민전 사건이다.

그때 농촌은 말할 수 없이 피폐했고 저농산물 정책을 토대로 임금을 낮추는 노동착취를 통해 수출지향 정책을 펼쳤다. 거기에 공안탄압, 폭정까지 있었다. 남민전은 대외적으로 민족자주를 주장하고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남북 연방연합정부를 수립한다는 강령이 있었는데, 지금 정당이나 사회단체가 하는 것보다 심하지도 않다. 한 사람은 사형집행 당하고 한 사람은 강제로 죽임을 당했다.

2019년 10월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내 이재문 선생 묘역에서 열린 남민전 열사 첫 합동추모제인 ‘고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박석률 남민전 민족민주통일열사 합동추모제’에서 추도사를 하고 있는 권오헌 명예회장. [통일뉴스 자료사진]
2019년 10월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내 이재문 선생 묘역에서 열린 남민전 열사 첫 합동추모제인 ‘고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박석률 남민전 민족민주통일열사 합동추모제’에서 추도사를 하고 있는 권오헌 명예회장. [통일뉴스 자료사진]

남민전 사건은 유신폭정에 항거해서 일어났던 반파쇼 민주화운동이었고, 반외세 민족자주운동이었다. 실제 활동한 내용은 반파쇼 민주화운동이었고 그 일환으로 최원석 가에 대한 응징투쟁도 있었다. 남민전은 반드시 재평가되어야 한다. 자주통일운동과도 관계가 있지만 특히 유신철폐 투쟁에 가장 헌신적이고 희생적으로 참여한 단체였다. 어떤 단체도 3년간 성명 하나 내지 못했던 시기에 빈틈없이 투쟁했다. 현재 일부 회원들이 재심 청구해서 재판하고 있다.

□ 만나본 분들 중에서 특별히 영향을 받은 운동가는?

■ 이재문 선생이다. 우리 집에도 몇 달간 있었다. 저는 학교도 안다녔고 학연이 없으니까... 농촌에서 농촌청소년 운동을 하다 군대 갔다 와서 다시 농촌사회 운동하고 그 다음에 64년 한일협정 반대투쟁이 심할 때 처음으로 사회에 나갔다. 현장에 있다가 몰래 서울로 올라왔다. 장준하 선생 사무실이 교보문고 부근에 있었다. 데모대에 섞여서 그곳에서 국회의사당(현재 서울시의회)에 같이 들어갔다가 잡혀서 종로경찰서에 들어가기도 했는데, 여러 사람이 끌려들어갔기 때문에 몰래 빠져나오기도 했다. 그해 시골에서 여름을 지내고 9월에 서울로 왔다. 그때 굉장히 혼란을 겪었다. 농촌에서는 혼신을 다해서 농촌사회운동을 했는데, 서울에서는 다 자기를 위해서 일하고 노동자를 위한 조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상계의 오랜 독자로서 종각 옆 한청빌딩에서 장준하 선생, 함석헌 선생을 만났다. 최초로 사회적으로 이름 있는 분들을 만나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그때는 현장에서 하루 40페이지 글을 읽고 40페이지 글을 쓴다는 생각으로 지냈다. 장준하 선생이 농촌소설을 쓰면서 당시 경복궁에 근무하던 박경수 선생을 소개해주었는데, 그 분이 내 글을 읽고 '위험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웃음) 그 글들은 지금도 내가 갖고 있다.

67년께 서울에서 공사장 장비 관리 일을 하다가 충북 제천의 충북시멘트 공장으로 옮겨 근무하던 중 지금은 돌아가신 박금수를 만났다. 박금수는 당시 성신여사대 교수를 지내다가 5.16후 해직되어 인텔리 노동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나를 미스터 권이라고 부르던 박금수 씨는 '미스터 권은 정치 한번 해보지'라고 권하면서 통일사회당 김철 씨를 소개했다. 정식으로 일을 한 것은 1968년이었고 김일성대 교수를 지낸 이동하 교수와 이몽 등과 함께 통일사회당에 들어간 것이 1970년이었던 것 같다.

그때 만난 사람이 김철, 안필수, 양호민 등이고 단둘이 자주 만나 술도 많이 마셨던 천관우(동아일보 주필) 와는 절친하게 지냈다. 더 지나서는 참여문학 동인지인 상황파에서 비문인으로서 구중서, 임헌영, 신상웅 등과 동인 활동을 했으며, 농촌운동을 하던 이우재도 발탁해 글을 쓰게 했다. 두세 살 위인 박현채, 두 살 아래인 임헌영과는 특히 가까웠다. 학연은 없었지만 여러 토론회에 빠짐없이 참여해서 다 기록하고 영어, 일어 공부도 열심히 했다.

□ 아무래도 이재문 선생에 대해서 한 말씀 해 주신다면.

■ 임헌영 추천으로 안재구 선생 주재로 남민전에 가입했다. 이재문 선생은 그 다음에 우리 집에 오게 됐다. 우선 믿을 만하고 지휘부를 보호해야 할 때여서 우리 집에 왔지만, 그때 나는 현장도 다녀야 하고 통일사회당도 끝낸 것이 아니었다. 상황파 등과의 교우관계도 있지 않나. 여러 가지 맺는 관계가 있어서 사실 참 어려웠다. 이재문 선생은 참 좋은 분이었다. 집에 있던 자본론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지금도 내가 그건 가지고 있다. 그때 몇 가지를 신상웅한테 주어서 치워두었었다, 신향식 선생도 돌아가셨지만 참 좋았다. 남민전과 관련해서는 임헌영도 그렇고 다 인간관계로 맺은 분들이다.

독학, 농촌 사회운동, 정당운동, 남민전, 인권운동, 통일운동...
“소중한 삶이라 자서전 한번 기록하고 싶은 생각은 있다”

□ 지금 말씀하신 내용만 해도 상당한 양이 될 텐데... 자서전 권유를 받지 않으시지 않나. 선생님에 대해 ‘한국현대사의 보고’라는 평도 있는데, 자서전을 검토해 보시면 좋겠다.

■ 아까도 말했지만 제가 화려한 자서전이 나오지 못하죠. 학교도 안다녔고 그렇다고 큰 단체를 이끌면서 연대체의 중심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양심수후원회라는 사회단체 중의 일부를 애써 꾸린 것이어서 대단한 자서전이 나올 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온 속속들은 참 소중하다고 본다.

2019년 11월 6.15산악회 산행에서 도봉산에 오른 권오헌 명예회장.. 그는 6.15산악회 회장도 맡고 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2019년 11월 6.15산악회 산행에서 도봉산에 오른 권오헌 명예회장.. 그는 6.15산악회 회장도 맡고 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고 일제가 패망한 다음 날 하루아침에 달라진 세상을 겪으면서 느낀 혼란. 학교에 갔더니 신사가 불태워지고 유리창이 깨지고 교장이 발가벗겨서 쫓겨나는 큰 변화. 전쟁이 나자 우리 마을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 혼자 공부도 하고 농촌 사회운동도 하고 사회에 나와서 정당운동에 남민전, 인권운동, 통일운동까지 이어지는 역사. 이것도 참 소중한 삶이구나 하는 생각이다. 한번 기록하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있어 이 일을 단절하기도 어렵고 그렇다.

또 하나는 나의 건강상태가 2년만 더 살 수만 있다면 달려들고 싶은 생각이 있다. 그런데 장담하지는 않는다. 저만큼 기록을 가진 사람도 없을 것이다. 군대생활 당시 일기도 아직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 눈이 나빠서 볼 수도 없다. 아주 유치한 일도 있지만, 4.19당시 기록만 봐도, 그 때 상황을 볼 수 있고 '70년대의 인식'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낼 생각이 있다.

그때 통일사회당 문화국장이었는데 감히 '문학예술인들에게 보내는 글'이란 걸 쓴 적이 있다. 이렇게 보면 지금 봐도 유치하지 않다. 당시 국내외 정세에 대해서도 통일사회당에서 보고를 한 것을 보면 그때 30대 초반이었을 때이니까 비례대표로 국회에 나와도 되지 않았을까?(웃음)

60년대까지는 기록이 상당히 많은데, 73년 이후에는 일체 기록을 하지 않았다. 남민전 들어갔다 나오고 할 때에도 상당 부분 기록이 없다. 엄혹한 시기에는 기록을 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일체 기록이 없다. 상상이고 다른 연관된 기록이 있다.

□ 창간 20주년을 맞는 통일뉴스와 통일뉴스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 통일뉴스 하면 2001년 금강산에서 남북해외 대토론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김치관 기자와 송정미 기자가 그때 그렇게 열심히 뛰던 모습이 떠오른다. 통일뉴스가 창간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 기자가 와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을 보고서는 ‘야 이렇게 헌신적으로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민족정론지로서 장구한 발전을 해 주었고 변함없이 일관성 있는 큰 역할을 해 주셨다. 정말 축하드리고 여기에는 통일뉴스를 이끄는 대표님을 비롯한 성원들의 헌신이 있었지만 또 많은 독자들과 여러분이 함께 노력한 것이 포함된 것이라고 본다. 이계환 대표께서 지금까지 통일뉴스가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면 앞으로 통일을 이룩해내는 시기로 빨리 전환되기를 바란다고 하셨는데 그 시기가 빨리 앞당겨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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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정치를 하다](13)‘성실’로 경제 살렸지만, 독선의 파국도 따라왔다

장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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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대처 

11년간이나 총리직을 지킨 마거릿 대처의 성실함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위험한 독선이 영국 사회의 분열로 이어진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1년간이나 총리직을 지킨 마거릿 대처의 성실함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위험한 독선이 영국 사회의 분열로 이어진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시 암송 경연대회에서 입상
교장은 “너는 참 운이 좋구나”
발끈한 아홉살의 마거릿은
“저는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상 받을 만한 자격을 갖췄기에
수상자가 됐습니다”라고 대답
 

“내가 처음으로 가진 직업은 플라스틱을 만드는 공장의 개발과에서 일한 것이다. 소규모 실험 단계를 거쳐 새로운 플라스틱을 만들어낸 다음 어떤 용도로 사용하고 어디에 팔 것인지 생각하는 일이었다. 가끔 노동당 일원인 친구들에게 ‘난 너희보다 공장에서 일한 경험이 더 많아’라고 말하며 장난을 치고는 했다.”

마거릿 대처는 아버지를 존경했다. 구두 제조공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13세에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악물고 일했다. 잡화상 점원으로 앞만 보며 생활한 소년은 이내 식료품점의 주인이 되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었다. 근면한 삶에 보상이 따른다는 종교적 신념도 깊었다. 감리교 교회의 평신도 설교자로 명성이 높았다. 지역에서 자수성가의 대명사로 통했던 앨프레드 로버츠는 중산층에 진입하자, 정치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랜섬 시의회 의원을 거쳐 1945년에 시장이 된 앨프레드 로버츠의 둘째 딸은 아버지의 연설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 같았다.

1925년 영국 중부의 링컨셔 그랜섬에서 태어난 마거릿 대처는 어린 시절부터 승부욕이 강했다. 또래 집단들과 어울려 노는 대신 책을 읽거나 부모님이 운영하는 식료품점에서 일을 했다. 아홉 살 때 시 암송 경연대회에서 입상한 마거릿 대처에게 교장 선생님이 아무렇지도 않게 “너는 참 운이 좋구나”라고 하자, 마거릿 대처는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저는 그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수상자가 되었습니다”라고 맞받아쳤다.

마거릿 대처는 어린 시절부터 승부욕이 강했다. 또래 집단들과 어울려 노는 대신 책을 읽거나 일했다. 10대 시절의 마거릿 대처

마거릿 대처는 어린 시절부터 승부욕이 강했다. 또래 집단들과 어울려 노는 대신 책을 읽거나 일했다. 10대 시절의 마거릿 대처

그녀는 옥스퍼드대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다. 사립 기숙학교에 갈 형편이 아니었지만, 상황을 탓하는 대신 수업료가 낮으면서도 우수한 학생이 많았던 공립학교 케스티븐 앤 그랜섬 여학교를 선택했다. 옥스퍼드는 입학 자체도 어려웠지만, 등록금도 무척 높았다. 마거릿 대처는 부모님이 옥스퍼드 학비를 지원할 만큼의 경제적 여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장학생 선발 시험에 응시했다. 1943년 10월 마거릿 대처는 옥스퍼드대학교 솜머빌 칼리지에 입학한다.

대학 생활은 쉽지 않았다. 우선, 전공 공부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화학보다는 정치학과 경제학에 관심이 갔다. 게다가 옥스퍼드의 친구들은 대부분 사립 기숙학교 출신이었고, 그들끼리는 대대손손 혈연과 지연으로 서로 얽혀 있는 경우가 많았다. 소외감을 느꼈다. 마거릿은 혼자 산책을 하거나, 교회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1946년 10월 마거릿은 옥스퍼드대학교 보수협회에 가입했다. 유서 깊은 정치토론 클럽인 옥스퍼드 유니언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당시에는 여성 회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옥스퍼드대학교 보수협회에서 마거릿의 활약은 눈부셨다. 가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협회장이 된 마거릿은 보수당의 외연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회원을 확보해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로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옥스퍼드에서 만난 대부분의 친구들은 보수와 진보의 정치 성향을 떠나 마거릿의 뜻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때부터 마거릿은 주류 사회 안에서 평온한 삶을 살며 세련된 교양과 호사 취미를 은근히 자랑하는 친구들과 자신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인식하게 된다. “마거릿 대처에게는 언제나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들이 연 파티에 참석한 불청객 같은 분위기가 흘렀다.” 그녀는 자신을 하찮은 집안의 출신으로만 보는 동문들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열등감에 사로잡히면서도, 세상 물정을 모르는 도련님 같은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며 우월감에 도취되기도 했다.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해야 했다. 1947년 옥스퍼드를 졸업한 마거릿은 안경테와 필름 등을 생산하는 플라스틱 제조 회사에 취직해 1년 반 동안 근무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정치인이 되겠다는 포부를 숨기지 않았다.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1950년 런던 남동부에 위치한 닷퍼드의 보수당 지역구위원장 자리에 옥스퍼드 시절 지인이 마거릿을 추천했다. 그녀는 1950년 총선에 출마한다. 24세의 마거릿은 표를 얻기 위해서라면 어디든 직접 찾아갔다. 우선 유권자들을 만나야 했다. 남성들만 출입 가능한 클럽이 즐비했던 시절, 여성은 종업원 이외에 입장이 되지 않자, 마거릿은 클럽에서 맥주 따르는 일을 하면서 남성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할 정도로 선거에 최선을 다했다. 결과는 석패였다. 1951년 총선에도 도전했지만, 다시 낙선했다.

두 번의 실패를 겪은 마거릿은 선거운동 기간 중에 만난 데니스 대처와 1951년 12월에 결혼했다. 그는 아내의 능력과 야망을 높이 평가했다. 1953년 8월 쌍둥이를 출산한 마거릿은 선거를 치르면서 계획했던 일을 실천에 옮긴다. 정치인에게 법률 지식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던 마거릿은 세금관계법으로 변호사 시험을 준비해 합격했다.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그녀는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과정이 곧 정치와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하루빨리 직업 정치인이 되고 싶었다.

[여성, 정치를 하다](13)‘성실’로 경제 살렸지만, 독선의 파국도 따라왔다
보수당 대표 시절인 1975년 미국 백악관에서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과 회담하는 모습, 1982년 북아일랜드를 방문한 마거릿 대처 부부 .

보수당 대표 시절인 1975년 미국 백악관에서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과 회담하는 모습, 1982년 북아일랜드를 방문한 마거릿 대처 부부 .

세번째 도전 끝에 의원 당선
엘리트 남성의 전유물로 인식
여성 의원 휴게실도 없던 의회
살아남는 방법은 오직 실력뿐
간명하면서 공격적 언어 구사
첫 여성 총리가 된 ‘철의 여인’
 

1959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마거릿 대처는 의회에서 법안을 발의할 때마다 주목받았다. 의회에 여성 의원을 위한 휴게실조차 하나 없던 시절이었다. 엘리트 남성들의 전유물로 인식되었던 의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실력뿐이었다. 그녀는 특히 연설에 공을 들였다. 간명하면서도 공격적인 정치 언어를 구사했다. 한편 지역구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년 후인 1961년 10월, 마거릿 대처는 연금국민보험부의 정무차관으로 임명된다. 36세의 최연소 차관 마거릿 대처는 보고만 받지 않았다. 복지 제도의 실효성을 다각도로 검토하며 현안을 직접 챙겼다. 대처는 1970년 교육부 장관에 취임하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마거릿 대처는 우리 모두의 머리를 합친 것보다 더 좋은 머리를 가졌어.”

하지만 보수당 에드워드 히스 총리의 경제 정책이 영국 국민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자 1972년 노동당으로 정권이 교체된다. 마거릿 대처는 나라 살림이 국정 운영의 최우선 과제라는 교훈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1974년 보수당의 정책연구센터 부소장으로 취임한 마거릿 대처는 경제 이론들을 다각도로 분석하며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근간을 점검한다. 보수당이 영국 사회를 다시 이끌어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지만, 뜻밖의 사건이 벌어진다. 1974년 10월 보수당의 차기 대표 후보였던 키스 조지프가 “양육에 문제가 많은 하층 노동계급 미혼모의 출산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현실을 우려한다”고 발언한 것이다. 키스 조지프는 사태를 수습하지 못한 채, 기자들을 피해 다니기에 바빴다. 그가 후보직에서 사퇴하겠다고 밝혔지만, 누구도 쑥대밭이 된 보수당을 책임지려고 하지 않았다. 마거릿 대처는 “내가 출마하겠습니다”라고 나섰다.

1969년 한 기자로부터 총리직을 꿈꾸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총리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제 모든 것을 헌신해야 하니까요”라고 답했지만, 마거릿 대처는 의회에 입성하면서부터 더 정확하게는 옥스퍼드 시절부터 영국의 지도자가 되고 싶었다. 그녀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욕망을 감추지 않기로 한다. 겁쟁이처럼 도망치는 남성 정치인들을 보면서 마거릿 대처는 “모든 것을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지인들은 그녀에게 도박에 손을 대지 말라고 충고했다. 보수당 중진 의원들과 언론 매체들은 “모든 여성 정치인은 이류에 불과하다” “마거릿 대처는 여성일 뿐만 아니라 경력도 일천하다”며 그녀를 깔보았다. 재무부, 내무부, 외무부에서 일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당 대표도 총리도 될 수 없다는 논리로 마거릿 대처를 압박하기도 했다. 그녀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마거릿 대처는 아직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겁먹지 않았다.” 1975년 2월4일과 2월11일,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보수당 대표 투표의 승자는 마거릿 대처였다.

보수당 대표에 취임하자마자, 마거릿 대처는 조직 쇄신에 착수한다. 집권 정당이 되는 길은 오직 하나, 정책 개발에 있다고 판단했다. 경제 회생을 위한 감세 정책에 주력했다. 1979년 5월, 보수당은 압승했다. “총리직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발언했던 마거릿 대처는 10년 동안 절차탁마의 시간을 보내고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에 취임한다. 역대 최장 기간인 11년 동안 영국 총리로 재임하며, 마거릿 대처는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신봉했다. 어떤 타협도 후퇴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녀의 정책이 성공을 거둘수록 그녀는 대학 시절 가졌던 우월감에 다시 빠져들었다. 보수당 의원과 내각을 수반하는 장관들이 부유한 집안에서 “물러 터지게” 살아와 아무것도 모른다며 그들을 자주 야단쳤다. 본인은 피나는 노력으로 총리가 되었지만, 보수당 의원들과 각료들은 너무 쉽게 권력과 부와 명예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노동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노동자 출신인 자신이 노동당의 귀족들보다 노동을 훨씬 잘 안다고 확신했다.

마거릿 대처와 남성 엘리트 정치인들은 혐오와 차별적 언어를 주고받았다. 총리가 물가를 언급하면 실물경제에 정통하다고 평가하는 대신 ‘야채 가게’ 출신은 어쩔 수 없다고 비아냥거렸다. 마거릿 대처의 독선도 나날이 거칠어졌다. 총리가 아니라 여왕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정치적 여정을 함께해온 최측근들에게조차 모멸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1990년 11월, 부총리 제프리 하우는 “더 이상 국민의 이익과 총리에 대한 의리 사이에서 갈등할 수 없다”는 말로 대처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결국 제프리 하우의 공개 비판은 3주 후 대처 정부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1990년 11월20일 실시된 투표에서 대처는 뒤늦게나마 세론(世論)을 알게 되었다.

이틀 후인 1990년 11월22일 오전, 마거릿 대처는 사임을 발표하며 보수당의 승리를 기원했다. 자진 사퇴 결정이야말로 마거릿 대처의 정치생명을 연장시켰다. 1997년에는 후배들의 간청으로 보수당 총선을 지원했고,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마거릿 대처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정계에 입문한 이후로 하루에 잠을 4시간 이내로만 자면서 정치 현안과 행정 업무를 완벽하게 파악하고자 했던 마거릿 대처의 성실함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위험한 독선이 영국 사회의 분열로 이어진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 마거릿 대처는 자력갱생의 미덕과 독선의 파국을 함께 선사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를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장영은
 
[여성, 정치를 하다](13)‘성실’로 경제 살렸지만, 독선의 파국도 따라왔다

성균관대학교에서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비교문화연계전공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를 함께 썼고,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썼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해온 여성들의 생애를 복원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차근차근 모아 널리 전하고자 한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10270600025&code=910100#csidx01c94c3e85fbb458b3d12f585d691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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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으면' 석탄발전에서 탈출하라

[함께 사는 길] "'탈석탄법'을 제정하라"

 

"9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추세였던 우리나라의 온실가스 배출량이 2018년을 정점으로 2019년부터 감소추세로 돌아섰습니다. 초미세먼지도 줄어서 연평균 농도가 개선되고,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이 늘어났습니다."

 

제1회 '푸른 하늘을 위한 국제 맑은 공기의 날'이었던 9월 7일, 문재인 대통령은 기념사를 통해 정부의 기후변화와 미세먼지 대응 노력을 강조했다. '푸른 하늘을 위한 국제 맑은 공기의 날'은 '대기 환경과 기후 변화에 대한 국민의 이해와 관심을 높이고 대기오염 저감 활동에 대한 범국가적 참여를 유도'한다는 취지로 지정한 날로 지난해 9월 열린 '기후행동 정상 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제안에 따라 유엔이 이를 공식 채택한 뒤 올해 첫 기념일을 맞았다.

 

올해 코로나 감염병 확산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뿌연 공기가 가시고 푸른 하늘이 열렸다. 하지만 기후위기로 인한 '빨간 지구'는 더욱 심각해졌다. 코로나 감염병이 장기화되는 상황에서도 대기 이산화탄소 농도는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올해 8월 기준, 지구 평균 이산화탄소 농도는 414ppm(100만분의 1)을 기록했다. 산업화 이전인 1850년에 비해 47% 증가한 수치다. 

석탄발전 퇴출한다면서 수명 30년은 보장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세계 감염병 대유행부터 최장기간 이어진 장마와 태풍까지, 기후위기는 당장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비상사태로 치닫고 있다. 한국의 온난화 속도는 세계 평균보다 2배 이상 빨라 폭염 사망을 비롯한 기후 재난 위험이 급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푸른 하늘의 날' 기념일에 초강력 태풍 '하이선'이 덮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단기적 대기오염 대책에 안주하며 기후위기에 정부가 무대응한다면, 시민 생명과 안전은 더욱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1.5℃ 지구 온난화 방지를 위한 탈탄소 전환에 대한 정부의 정책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한국의 현행 2030년 온실가스 감축 목표는 1.5℃는커녕 3℃ 이상 온난화로 이어지는 '매우 불충분'한 목표라는 국제사회의 혹평을 받는 처지다.


 

가장 큰 역설은 '푸른 하늘의 날'을 제안한 한국이 대기오염과 기후변화 주범인 석탄발전에 중독된 대표적 국가라는 사실이다. 한국은 현재 석탄발전소 60기가 가동되고 있고 현재 7기가 추가 건설 중이다. 석탄발전은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30%를 배출하는 최대의 배출원이며, 연구에 따르면 석탄발전에서 배출되는 미세먼지로 해마다 1천 명이 조기 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도 석탄발전의 문제점에 대해 모르지 않는다. 더구나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로의 전환을 가속화하겠다"라고도 말한다. 동일한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정부는 신규 석탄발전소 허가를 전면 금지하였으며, 이미 폐쇄한 노후 석탄발전소 4기를 포함하여 임기 내 10기를 폐쇄하고, 장기적으로 2034년까지 20기를 추가로 폐쇄하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태양광과 풍력 설비는 2025년까지 지난해 대비 세 배 이상으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럼, 한국은 석탄발전으로부터 제대로 '탈출'하고 있는 것일까.


 

대통령의 연설을 보면, 한국이 석탄발전을 과감히 줄이는 정책을 펴는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그건 착시다. 대통령은 석탄발전소를 2034년까지 20기를 추가 폐쇄하겠다고 했지만 석탄발전소의 가동 수명을 30년으로 정하고, 수명이 만료되는 발전기를 순차적으로 폐지하겠다는 방침에 근거한 말이다. 석탄발전소의 폐쇄에 대한 공식적 규칙이 없었던 과거보다는 나은 것일까. 아마 10년 전이었으면, 그렇게 평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기후위기로 온실가스 배출을 극도로 억제하고 줄여나가야 할 시점인 현재로선 전혀 그렇지 않다.


 

1.5°C 지구 온난화 방지 목표를 달성하려면, 전 세계적으로 204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은 늦어도 2030년까지 석탄발전을 완전히 퇴출해야 한다는 게 과학적 명제다. 정부 계획대로 수명을 30년으로 설정해 석탄발전소를 가동하게 한다면, 온실가스 배출량은 1.5°C 목표 대비 3배를 초과할 전망이다. 특히 향후 온실가스 급증의 원인이 될 7기의 건설 중 석탄발전소에 대해서 정부는 수수방관할 뿐이다. 실제 정부 예측을 보더라도, 석탄발전은 15년 이후에도 최대의 발전량 비중을 유지할 전망이다. 기후위기 비상사태를 목도하는 현재, 석탄발전의 '수명 30년 보장'이 아닌 조기 퇴출을 촉진해야 하는 이유다.


 

▲ 환경운동연합은 지난 9월 9일 국회 앞에서 '석탄발전 퇴출법'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했다. ⓒ서울환경운동연합

석탄발전 퇴출 위한 탈석탄법 제정해야


 

환경운동연합은 8월 26일 '탈석탄법 제정 캠페인'을 선포하며 "국회는 신규 석탄발전소 건설 금지와 '2030 석탄발전 퇴출 로드맵' 수립을 포괄한 탈석탄법을 제정하라"고 촉구했다. 이날 회원 1233명이 선언자로 참여한 '석탄발전 퇴출을 촉구하는 환경운동연합 1천인 선언'을 발표해 △2030 석탄발전 퇴출 로드맵 수립 △환경 과세 강화 및 환경급전 제도화 △석탄발전 사업에 대한 공적금융 지원의 중단 △건설 중 석탄발전의 중단 및 지원 근거 마련을 요구했다. '탈석탄법'이 담아야 할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첫째, 석탄발전 퇴출 로드맵을 마련해야 한다. 올해 말까지 1.5℃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장기 저탄소 발전전략'을 유엔에 제출해야 하는 가운데 전국 모든 광역기초지자체가 기후 비상 선언을 선포했다. 아울러 2050년 온실가스 순배출 제로 목표와 2030년 목표를 강화하자는 국회 '기후위기 비상선언' 결의안이 상임위를 통과하면서 진전된 온실가스 감축 목표 설정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높아졌다. 석탄발전을 운영 중인 유럽 15개국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석탄발전의 단계적 폐지 방안을 공식화했고 대부분 2030년 이전까지 석탄발전의 퇴출을 완료할 계획이다.

 

한국도 2030년까지 석탄발전을 퇴출하기 위한 로드맵이 마련돼야 한다. 폐쇄되는 석탄발전소의 자리만큼 에너지 효율 개선과 풍력, 태양광 등의 재생에너지 확대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한다. 석탄발전은 조속히 퇴출하되, 지역 사회와 노동자의 일자리는 보호하고 안정화해야 한다. 석탄발전에 의존하던 지역이 에너지 전환에 기반을 둔 일자리와 경제로 회복될 수 있도록 정부의 지원 대책이 선행돼야 한다.


 

석탄발전의 퇴출을 제도적으로 정한 해외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네덜란드 의회는 2019년 12월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 달성의 일환으로 석탄발전 금지법(Law on the prohibition of coal in electricity production)을 제정해 2025년부터 석탄을 이용한 발전시설을 전면 금지하는 것을 입법화했다. 핀란드는 2029년 5월 1일 이후로 석탄을 연료로 한 전기 및 열 생산을 전면 금지하는 법을 2019년부터 발효했다. 정책적 의지만 있다면 방안은 만들면 된다.

 

둘째, 석탄발전의 비용에 환경오염을 제대로 부과해야 한다. 이는 온실가스 배출량이 많은 석탄발전이 과도하게 가동되는 '시장 왜곡'을 바로잡고 효과적 감축을 유도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현행 전력시장은 발전원에 대해 아무런 기후변화 비용이 반영되지 않는 구조다. 그나마 배출권 거래제가 시행 중이지만, 배출권 가격도 급전 순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태다. 오로지 연료비만 따지는 '경제급전'만 작동 중이다. 온실가스 배출 비용을 전력시장 급전 순위 결정에 반영하는 '환경급전'을 조속히 시행할 필요가 있다. 배출권 유상할당 비율과 화력발전의 배출원단위 기준도 대폭 강화해야 한다. 아울러 석탄발전이 미세먼지의 다배출 오염원인 만큼, 대기오염 세제도 높여야 한다. 발전용 유연탄에 대한 개별소비세 세율을 대기오염 환경비용에 충분히 반영하도록 2배 수준으로 인상하는 개별소비세법 개정이 요구된다.


 

셋째, 석탄 사업에 대한 공적금융 지원을 중단하고 금지해야 한다. 2015년 노르웨이 연기금은 기후변화 대응 및 윤리적 투자를 위해 석탄 관련 기업에 대한 투자 중단과 철회를 선언했다. 전 세계적인 파슬 프리 캠페인(Fossil Free Campaign)에 1000개 이상의 투자기관이 동참했다. 반면, 한국산업은행 등 공적 금융기관은 최근 10년간 국내외 석탄발전 사업에 총 23조 원 규모의 금융을 제공하며 석탄 사업에 대한 주요한 자금 제공처 역할을 담당했으며, 석탄발전에 대한 금융 지원의 축소와 중단을 선언한 바 없다.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무역보험공사, 국민연금 등 공적금융 기관의 사업 업무에 사회, 환경, 지배구조 등 사회책임을 고려하고 석탄발전 투자를 금지하는 기준을 포함시켜야 한다. 아울러 기후변화 영향이 큰 프로젝트에 대한 금융 지원을 결정하는 경우, 기후변화 비용을 포함한 경제성 평가를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건설 중인 석탄발전 사업을 중단하고 전환을 지원해야 한다. 현재 강원도 삼척과 강릉, 경남 고성, 그리고 충남 서천 등 지역에 건설 중인 7기의 대규모 석탄발전 사업이 중단 없이 그대로 추진돼 향후 30년 동안 가동된다면 연간 5160만 톤의 온실가스를 배출할 것으로 예측된다. 석탄발전소 건설과 장거리 송전선 입지로 인한 생태계 파괴와 주민 갈등도 더욱 심화되는 상황이다.


 

이대로 추가 석탄발전소를 건설하기보다는 매몰비용에 대한 보전을 통해서라도 중단시키는 방안이 공익적으로 편익이 높다. 방법이 없지 않다. 현행 전기사업법과 전력산업기반기금을 통해 석탄발전소를 포기하는 경우 보상책을 제공할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 현재 건설이 진행 중인 석탄발전소를 멈춰 세우기 위해서는 강력한 의지를 모아야 한다. 국회는 건설 중 석탄발전 사업의 중단 및 전환을 위한 국회 결의안을 채택하고 지원 대책을 마련하는 데 머리를 맞대야 한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102612122427271#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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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섯, 그는 자신에게 칼을 들이댄 동생의 '책임자'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0/10/27 10:47
  • 수정일
    2020/10/27 10:47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조기현의 영 케어러 ③] 알코올 의존증 동생을 돌보는 청년형수씨의 이야기

20.10.27 07:07l최종 업데이트 20.10.27 07:07l
'가족 돌봄'을 말할 때 떠오르는 얼굴들은 '중장년'입니다. 하지만, 분명 한국 사회에도 아픈 부모나 가족을 돌보며 살아가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영국과 일본 등에서는 이들을 지칭하는 '영 케어러'(Young Carer)라는 개념이 있을 정도지만, 한국에서는 그저 '효녀', '효자'로 불릴 뿐 사회적 주체로 가시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난 10여 년간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직접 돌본 조기현 <아빠의 아빠가 됐다> 작가가 자신과 같은 한국의 영 케어러들을 찾아나섭니다. 돌봄이 형벌이 되지 않는 사회를 위해, 더 많은 청년들의 경험담을 기다립니다. 
(제보 - youngcarer90@gmail.com, jeor23@ohmynews.com)[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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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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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이 얼굴에 주먹이 날아들어 정신이 아득했다. 김형수(가명)씨가 다시 술을 먹겠다고 방을 나서려는 동생을 몸으로 막아선 직후였다. 방 안에 갇힌 동생은 주먹을 들어 올리며 "친다, 친다" 소리치며 형수씨를 겁줬다. 형수씨의 등 뒤에 서있던 외할머니는 "너한테 술 판 곳 찾아서 경찰에 신고할 거야!"라며 소리쳤다. 그 말이 기폭제가 된 것처럼 주먹이 뻗어 나왔다.

주먹을 날린 후에도 동생은 더 날뛰었다. 형수씨는 아득한 정신을 서둘러 부여잡았다. 그는 항상 정신이 아득해지는 일 앞에서도 제일 먼저 정신을 차려야 하는 '책임자'였다. 동생을 눕혀 온 몸으로 짓눌렀다. 평소에는 자신보다 더 힘이 셌지만, 지금은 만취 상태였다. 그렇게 잠잠해지는 것 같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동생이 벌떡 일어났다. 비틀거리면서 부엌으로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형수씨가 돌아봤을 때 동생의 손에는 끝이 번뜩이는 부엌칼이 쥐어져 있었다. 눈앞에 거슬리는 무엇이든 찌르려는 듯 형수씨를 노려봤다.  

한두 번 겪는 일은 아니었다. 동생은 이미 여러 번 칼을 빼들었다. 하지만 형수씨를 목표물로 여겼던 적은 처음이었다. 동생 19살, 그가 21살이 된 때였다. 그날 동생은 부엌칼로 형제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그때 마음이 아예 떠났어요. 얘랑은 아무 형제 관계도 아니고, 남남이구나 싶었죠."

알코올 의존자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

언젠가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해 가족 돌봄의 어려움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나는 프로그램의 진행자에게 아버지를 돌보면서 힘들었던 순간들을 말했다. 가족 돌봄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 않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에는 벅차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대부분 방송에서는 힘든 순간을 하나의 질병으로 환원하기를 원한다. 바로 '치매'다. 국가적 관심사이면서, 실제로 모두가 두려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아버지를 돌본 10년이란 기간의 전반부는 치매가 아니라 알코올 의존으로 고생했다. 알코올 의존으로 인한 아버지의 당뇨, 환각, 신부전 등이 나를 힘들게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코올 의존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순전히 개인의 '의지' 문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알코올 의존은 마음만 굳건하게 먹으면 해결될 일처럼 느껴진다. 만약 그런 마음조차 없다면 알코올로 인해 몸 안에서 벌어지는 재난은 스스로 감당할 몫이라고 여기게 된다. 

실제로는 스스로 감당하지 않는다. 많은 가족들이 가족 구성원의 알코올 의존 때문에 고생한다. 내가 만나본 아픈 가족을 돌보는 청년들도 대부분 알코올 의존으로 돌봄의 전조를 감지했다. 질병은 이미 예약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족들은 알코올 의존을 겪는 부모나 형제가 술을 마시지 못하도록 집에 있는 술을 버리거나 외출을 제한하기도 하고, 술을 끊을 수 있는 동기를 만들기 위해 마음의 정성도 쏟아본다. 그럼에도 당사자를 제어하지 못하고, 그가 술을 꾸준히 마시면서 시간이 흐른다. 그러다가 질병이 터져 나오면,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돌봄을 하게 된다.

지난 10월 15일, 인천 한 카페에서 95년생 김형수씨를 만났다. 형수씨는 알코올 의존이 한 가족에게 어떤 경험을 전해주는지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한 청소년 기관을 통해 그를 소개받았다. 그는 주변에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숨기지 않았다.

이전에도 그는 한동안 동생의 알코올 의존을 해결하기 위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는지 도움을 요청했다. 다만 세상에는 알코올 의존을 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창구가 많지 않았다. 알코올 의존은 세상의 관심 밖이었다. 다행히 그의 이야기를 기억하던 사회복지사가 그와 나를 연결해줬다.

동생의 첫 번째 책임자

때때로 새벽이면 동생이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았다.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어서 무시하고 잠들고 싶었지만, 그런 전화를 한 번 받으면 긴 한숨이 나오는 동시에, 졸음이 달아난다. 그럴 때면 형수씨는 풀어진 정신을 주섬주섬 챙기며 경찰이 알려준 위치로 향했다.

어느 날은 집 앞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빨간 소주 4병을 쌓아두고 쓰러져 있는가 하면, 또 어느 날은 대중교통으로 1시간이나 되는 다른 동네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동생은 늘 혼자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하면 순순히 형의 말을 듣지 않았다. 부축하려는 형수씨의 손은 뿌리치기 일쑤였다.

"그럼 보호자 분 왔으니까 저희는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동생과 실랑이를 벌이면 옆에서 지켜보던 경찰이 늘 하는 말이다. 형수씨도 경찰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동생 곁에 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었다. 새벽녘에 해가 뜰 때면 동생에 대한 형수씨의 기대는 저물었고, 좌절감이 밀려왔다. 

그는 언제부터 동생의 삶에 금이 가기 시작했는지, 왜 그에게 의지가 사라졌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어린 시절에 동생은 똑똑했고 체격도 좋았다. 어른들은 형수씨보다 동생을 더 예뻐했다. 그는 내성적이었고 늘 방어적이어서 친구를 사귀기보다 혼자 그림을 그리거나 게임을 했다. 반면 동생은 늘 사교적이어서 친구들이 넘쳐났다. 

그런 동생이 17살쯤부터 술을 먹기 시작했다. 소위 '비행 청소년' 집단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술과 담배는 늘 지니고 다니는 명찰 같은 것이었다. 후배들 돈을 갈취하거나 패싸움을 하는 건 일상이었다. 모두 집 밖에서 벌이는 일들이었다. 경찰서나 학교에서 연락이 오는 날이 아니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조차 몰랐다. 
 
 그는 언제부터 동생의 삶에 금이 가기 시작했는지, 왜 그에게 의지가 사라졌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다만, 동생은 17살쯤부터 술을 먹기 시작했다.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그는 언제부터 동생의 삶에 금이 가기 시작했는지, 왜 그에게 의지가 사라졌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다만, 동생은 17살쯤부터 술을 먹기 시작했다.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영화 파수꾼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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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형제는 초등학교 때부터 쭉 외갓집에 살았다. 부모님은 이혼했고, 아버지는 중학교 때 한 번 보고 만난 적이 없다. 결혼 생활의 생활비로 썼던 비용이 고스란히 어머니에게 빚으로 남았다. 이혼하고 지금까지, 어머니는 경기도 등지에 있는 공장을 다니며 기숙사 생활을 한다. 형수씨가 같은 집에 살고 밥을 먹고 생활한 사람은 할머니, 외삼촌 둘, 그리고 동생이었다.

할머니는 동생에게 늘 마음을 썼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폭력적인 동생을 할머니가 제어할 수는 없었고, 만취해서 여기저기 드러누워 있는 걸 쫓아다닐 수도 없었다. 큰 외삼촌과 막내 외삼촌 모두 40대 중반을 넘겼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 큰 외삼촌도 알코올 의존이 심해서 스스로를 챙길 수도 없는 상태였고, 막내 외삼촌이 투잡을 뛰며 집안의 모든 생계와 부양을 담당했다. 외삼촌들은 매번 사고만 치고 다니는 동생을 곱게 보지 않았다. 

형수씨가 동생이 벌인 일들에 첫 번째 책임자가 되는 건 자연스러웠다. 선택하고 자시고 할 게 아니었다. 19살 때부터 밑 빠진 독에 물을 붓 듯이 동생이 벌이는 사고를 수습하러 다녔다. 그러다 그가 혼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사고가 커지면 가족들에게 그 사항을 보고했다. 그럴 때면 무슨 명절처럼 어머니, 할머니, 외삼촌들, 자신이 한 자리에 모였다.

"안 마셔볼게" 단 한 번의 다짐 

20살이 된 형수씨는 대학에 들어가 학생회 활동에 열중했다. 사회복지 관련 학과였다. 어떤 결과물을 내기 위해서 협업하는 과정이 좋았다. 하지만 저녁 6시가 넘으면 여지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형수야, 미안한데 집에 일찍 들어가서 동생 좀 봐줘."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동생을 돌보지 못하니, 형수씨라도 잘 돌봐주기를 바랐다. 반면 형수씨는 동생을 책임지고 싶지 않았다. 학생회 활동에 더 집중하려고 노력하던 때였다.

저녁이 돼서 친구들끼리 술을 마시거나 맛있는 걸 먹으러 갈 때, 그는 어머니 전화를 받고 몸을 일으켜야 했다. 전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졌고, 자신도 동생의 부모였다면 그랬을 것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가 저녁마다 자리를 뜰 때면 아쉬워하던 친구들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를 으레 '집에 가는 애'라고 여겼다. 그렇게 이 집에 가면 동생이 술 먹으러 나가지 못하게 지키는 게 전부였다. 동생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뭐가 그렇게 힘드니? 왜 계속 술을 마시니?"

그런 질문에 동생은 곧바로 입을 닫았다. 너무 많은 게 힘들어서 말을 않는 것인지,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려는 질문이라고 느낀 것인지는 모르겠다. 결국 형수씨는 동생의 마음의 문에 노크하듯이 '술 먹지 말고 좀 더 잘 살아보자'는 잔소리밖에 할 수가 없었다. 삶을 포기한 동생과 동생의 삶을 놓지 못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형수씨는 혼자 조난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안 마셔볼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동생이 그의 잔소리에 응답했다. 시커멓게 빛 하나 없는 망망대해를 떠돌다가 어디 등대라도 발견한 것 같았다. 동생의 의지를 함께 메워줄 사람들을 찾았다. 서둘러 알고 지내던 청소년 기관에 도움을 요청했고, 집 근처에 있는 사회복지관의 청소년 상담사를 소개받았다. 

하지만 동생의 말 한마디에 너무 큰 기대를 걸었던 걸까. 동생은 상담사의 전화에 잠수를 탔고, 다시 만취해서 집에 돌아오길 반복했다. 집에서 만취해 있던 큰 외삼촌과 밖에서 만취해 들어온 동생은 마주치면 크게 싸웠다. 외삼촌은 욕을 하면서 동생을 때렸고, 동생은 부엌에서 칼을 뽑아들며 외삼촌에게 욕을 퍼부었다. 기력도 없는 할머니와 형수씨가 외삼촌과 동생을 뜯어 말렸다. 알코올 의존이라는 구멍이 점점 커져서 집안 전체가 꺼질 판이었다.

기대를 거는 순간 상처를 입는다
 
  동생은 17살쯤부터 술을 먹기 시작했다.
▲  동생에게 기대를 거는 만큼, 더 감당하기 힘든 파국이 뒤따랐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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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잘 살 수 있을 거란 기대를 아예 접을 수는 없었다. 그건 애틋한 마음으로 거는 기대가 아니다. 모든 사태가 동생이 의지만 있으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 인식에 가까웠다. 기대는 일종의 투자와 비슷하다. 내가 이만큼 기대를 걸면 얼마만큼 보상이 따를 것이라는 마음의 공식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노력하고 계기를 만들어주면 알코올 의존을 겪는 사람이 도의적으로라도 성의를 보일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형수씨의 기대는 번번히 상처로 끝났다. 그는 19살 때부터 8년간 동생의 알코올 의존을 돌보며 온몸으로 이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날 동생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을 때, 차라리 일이라도 하면 정신을 차리겠거니 했다. 하지만 편의점 카운터에 앉아서도 만취해서 정신을 잃었다. 동생이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친구들은 동생이 잠든 사이 물건들을 싹 다 훔쳐갔다.

분노한 점주는 동생과 친구들을 한데 묶어 특수절도죄로 고소했다. 형수씨는 동생이 감옥에 들어가서 정신 차릴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호소했지만, 어머니는 기어코 동생의 합의금을 마련해줬다. 1000만 원에 가까운 돈이었다.

큰 외삼촌과 갈등이 극에 달하자 동생은 집에 쉽게 들어오지 못했다. 그때 형수씨는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어디 고시원 방이라도 얻어 혼자 살아보면서 정신을 차릴 기회였다. 어머니에게 얘기해서 간신히 동생이 살 고시원을 구했다.

거기서 동생이 어떻게 지냈는지는 모른다. 병원 응급실에서 동생이 급성 췌장염으로 입원했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술만 먹었겠구나 싶었다. 한동안 술을 마시지 않으면 계속 장기가 아프다고 했던 동생의 말도 떠올랐다.  

"의사가 막 다그쳤어요. 췌장염은 가족들이 잘 안 돌봐주면 죽는 거라고. 가족들은 이미 알코올 의존으로 다 지쳐 있는데."

동생에게 기대를 거는 만큼, 동생이 정신 차릴 계기를 마련한 만큼, 더 감당하기 힘든 파국이 뒤따랐다.

술 뒤에 삶과 가족

"좌절감도 있지만, 동생에 대한 분노도 너무 커요. 얘도 못 바꾸고 내 마음도 어떻게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인데, 과연 내가 사회복지 분야의 일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들이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요. 내가 일하다가 동생이랑 비슷한 비행 청소년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는 지금 대학교 4학년이다. 원래는 사회복지 전공과 청소년 기관 활동 경험을 살려서 청소년 사회복지 쪽으로 걸어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대학을 다니는 내내 동생을 돌보면서 겪은 경험들이 그의 발목을 낚아챈다.

여전히 동생이란 사람을 감당할 수 없고, 마주하는 것도 힘이 부친다. 또다시 전화벨이 울리며 경찰서나 병원에 가는 악몽이 시작될 것만 같다. 어쩌면 첫 번째 책임자의 임기는 동생이 죽을 때까지일지도 모른다.

동생은 급성 췌장염을 겪은 이후에도 계속 술을 몸속에 들이부었다. 몸은 만성 췌장염과 당뇨로 악화됐고, 지금은 병원에 입원했다. 몸이 악화되는 걸 계기삼아 그동안 미뤄두었던 정신병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의사는 이미 동생의 뇌가 "술에 절여졌다"고 말했다. 통제력을 아예 잃은 상태라는 것이다. 동생은 올해 초 퇴원을 하려고 했지만, 코로나19가 터져서 아직 퇴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퇴원하는 날이 다가오는 것 같아서 형수씨는 초초하다.

10대가 알코올 의존을 겪는다는 사실은 많이 이들에게 낯설 수 있다. 실제로 10대의 알코올 의존 비율은 다른 연령층에 비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2019년 건강보험 심사평가원 '알코올중독 현황' 자료에 따르면, 10대 알코올 의존증 환자는 2014년 1588명에서 2018년 2106명으로 약 33%나 늘었다.
 
 10대 알코올 중독 현황.
▲  10대 알코올 중독 현황.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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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알코올 의존증 환자 증가의 원인으로는 청소년이 겪는 과도한 스트레스, 술에 관대한 음주문화, 술을 산 청소년은 처벌 받지 않고 사업주만 처벌받는 구조 등이 언급된다. 술에 대한 교육, 예방, 처벌 등을 강화돼야 청소년 알코올 의존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조금은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 술은 여러 가지 표현 중에 하나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알코올 의존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술을 둘러싼 문화를 점검하는 것과 더불어 술 뒤에 감춰진 삶을 들여다봐야한다. 모든 중독과 의존에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삶의 맥락에서 따라가 보지 않으면 중독과 의존은 술이 아니라 또 다른 것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술뿐만 아니라 다양한 중독과 의존이 벌이는 사고들을 수습하는 가족이 있다. 형수씨는 말했다.

"병원에 가두는 것 말고 알코올 중독자를 케어할 수 있게 돕는 제도가 구체적으로 없어요."

형수씨와 나는 긴 침묵을 나눴다. '알코올 의존'이라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술 뒤에 감춘 삶을 되짚어줄 사회가 우리에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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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은 ‘대표이사 회장’이 될 수 있을까?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부담으로 이사직 내려놔…‘사법 리스크’ 여전

조한무 기자 chm@vop.co.kr
발행 2020-10-26 18:59:48
수정 2020-10-27 08:4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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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5월 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불거진 위법 행위에 대한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2020.05.06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5월 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불거진 위법 행위에 대한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2020.05.06ⓒ민중의소리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25일 별세했다. 본격적인 ‘이재용 체제’를 위한 작업이 추진될 전망이다. 그러나 이 부회장이 등기임원 선임에는 나서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의 불법 행위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이고 비판 여론도 높은 상황이다.

26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담당업무로 부회장직을 맡고 있지만, 이사회에는 참여하지 않는 미등기임원이다.

(부)회장·(부)사장 등으로 표기되는 담당업무는 법적으로 규정된 직함은 아니다. 담당업무로서의 직함은 이사회 의결을 통해 부여된다.

대표이사를 비롯한 등기임원 선임은 다르다. 주주총회를 열어 일정 비율 이상의 주주 찬성표를 받아야 한다. 즉, 이 부회장이 ‘회장’이 되는 건 큰 무리가 없겠지만, ‘대표이사 회장’이 되는 건 쉽지 않다는 얘기다.

이 부회장은 2016년 책임경영을 내세워 사내이사를 맡았으나, 지난해 10월, 3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이사직을 내려놨다. 2019년 10월 이 부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 등에 뇌물을 준 혐의로 기소된 ‘국정농단’ 사건의 파기환송심이 시작됐다. 위법 행위에 대한 비판과 사법 리스크에 대한 우려, 국민연금과 해외 연기금 등 주주의 반대 가능성 등으로 연임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분석이 당시 지배적이었다.

 

이 부회장에 대한 비판 여론은 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이 부회장은 ‘국정농단’과 ‘경영권 불법 승계’ 두 건의 재판을 받고 있다. 지난 22일에는 경영권 불법 승계 사건 관련 첫 재판이 열렸다. ‘이재용 체제’는 주식시장과 재계가 걱정하는 ‘사법 리스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국정농단 사건은 파기환송심 재판은 지난 1월 중단됐다가 이날 다시 공판 준비기일이 열렸다.

두 재판 모두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의 이 부회장 불법 행위가 핵심 쟁점이다. 현재 삼성 지배구조는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통해 구축됐다. 삼성전자 지분이 적은 이 부회장은 삼성물산이 가진 삼성전자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 합병을 추진했다. 합병과 관련해 이 부회장을 비롯한 경영진의 뇌물·횡령·배임 등 불법 의혹이 불거졌다. 검찰은 이 부회장이 최대주주로 있던 제일모직 가치를 높이고 삼성물산 가치를 낮추는 과정에서 불법이 행해졌다고 보고 있다.

이건희 지분 가치 18조원, 상속세 10조원 규모 추산
삼성생명법 통과 시 지배구조 개편 불가피

이 부회장은 재판 진행과는 별개로 지배력 강화 작업을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일단 이 회장 지분을 상속받기 위한 세금을 마련해야 한다.

이 회장이 보유한 주식 평가액은 사망 직전 영업일인 23일 종가 기준으로 총 18조2천억원 수준이다.

이 회장은 삼성 지배구조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삼성물산·삼성생명 3곳과 삼성SDS 지분을 보유했다.

지분 가치가 가장 큰 건 삼성전자다. 지난 6월 기준 이 회장은 삼성전자 보통주 2억4,927만주(지분율 4.18%)와 우선주 61만9,900주(0.08%)를 보유했다. 지분 가치는 이 회장 사망 직전 영업일인 23일 종가 기준 보통주 15조61억원, 우선주 330억원 수준이다.

삼성생명 지분 가치도 조 단위다. 이 회장이 보유한 삼성생명 주식 4,151만9,180주(20.76%)의 가치는 2조6,199억원 규모다.

삼성물산 지분은 542만5,733주(2.88%)로 가치는 5,643억원으로 추산된다. 삼성SDS 9,701주(0.01%)의 가치는 17억원 정도다.

이 회장 지분 상속에 따른 총 세액은 10조원 규모로 추산된다.

30억원 이상 상속 재산에 대한 세율은 50%다. 회장은 4곳 계열사에서 최대주주 또는 최대주주의 특수관계인으로, 상속세법상 최대주주 할증 대상이다. 과세 대상 지분에 할증률 20%를 적용한다. 여기에 상속인이 세금을 자진 신고하면 세액에서 3%를 공제한다.

다만, 주식 평가액은 사망 전·후 2개월씩 넉 달간의 종가 평균을 기준으로 산출해, 최종 세액은 향후 주가 변동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연부연납제도를 활용하면, 상속세를 신고할 때 6분의 1을 낸 뒤 나머지를 5년간 분할 납부할 수 있다.

삼성 소유지분도
삼성 소유지분도ⓒ공정거래위원회

이 회장 지분에 대한 상속이 삼성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도 관건이다.

삼성 지배구조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의 출자구조를 주축으로 한다. 이 부회장은 지주사 격인 삼성물산 지분 17.33%를 가진 최대주주다. 삼성물산은 삼성생명과 삼성전자 지분을 각각 19.3%, 4.4% 보유하고,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 8.5%를 가지고 있다. 이 부회장의 삼성전자 지분은 0.7%에 불과하나, 삼성물산을 고리로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다.

삼성생명은 출자구조를 이루는 주요 계열사이나, 향후 관련법 개정에 따라 지배력 측면에서의 중요도가 축소될 수 있다. 현재 국회에는 일명 ‘삼성생명법’으로 불리는 보험업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해당 법이 통과하면, 삼성생명은 총자산 3%를 초과하는 삼성전자 지분을 처분해야 한다. ‘금산분리’ 원칙을 바로잡자는 취지다. 이 경우 이 부회장이 삼성생명 지분을 보유하더라도 삼성전자 지배력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된다. 때문에 이 회장의 삼성생명 지분은 상속 과정에서 일부 매각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삼성생명이 핵심 출자 구조에서 빠지게 되면 삼성물산이 삼성전자에 대한 직접 지분을 확보해야 한다. 이상헌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날 ‘향후 삼성그룹 지배구조 변화 불가피할 듯’ 보고서에서 “삼성물산이 보유한 삼성바이오로직스 지분을 삼성전자에 매각하고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을 매입할 수도 있다”며 “삼성물산이 삼성전자 지분을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지배구조 변화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조한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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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통일뉴스 창간 20주년, 해외에서 본 통일뉴스②] 강민화 재일 대동연구소 소장

  • 기자명 도쿄=강민화 
  •  
  •  입력 2020.10.27 00:42
  •  
  •  수정 2020.10.27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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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20년

6.15공동선언이 발표되고 온 겨레가 통일열기로 들끓었던 시기에 세상에 태어난 [통일뉴스]가 창간 20주년을 맞은데 대해서 진심으로 축하한다. 뜻깊은 이날에 즈음해서 글을 쓸만한 남, 북, 해외 인사들도 많겠는데 나에게 ‘해외에서 본 통일뉴스’라는 주제로 글을 써달라니 참으로 영광이다.

그런데 이날을 기념해서 내가 글를 쓴다면 ‘통일뉴스와 더불어 20년’이라는 제목으로 쓰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이 느껴진다. 그만큼 나 자신과 통일뉴스와의 관계가 깊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일본 도쿄 주오(中央)대학에서 열린 ‘10.4선언 발표 1주년 기념토론회’를 진행하고 있는 강민화 당시 평통협 홍보국장.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일본 도쿄 주오(中央)대학에서 열린 ‘10.4선언 발표 1주년 기념토론회’를 진행하고 있는 강민화 당시 평통협 홍보국장. [자료사진 - 통일뉴스]

그 계기는 2003년 7월에 진행된 당시 통일뉴스 상임고문 김남식 선생(고인)의 일본에서의 강연 출연이었다. 강연은 가는 곳마다 호평이었다. 선생은 6.15공동선언의 당위성을 비롯해서 조선(한)반도의 평화와 통일문제에 대해서 소박하고 알기쉽게 말씀하시다가 도중에 개성관광이 화제에 올랐을 때 “나는 황진이를 사모합니다”라고 청중들을 웃기기도 하셨다.

그런데 참으로 아쉽게도 이때 기자가 동행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툴게나마 내가 기사를 쓰고 그것이 통일뉴스에 실리게 되었다. 아마도 재일동포가 남녘의 언론과 이렇게 공동작업을 한 것은 당시로서는 참으로 드문 일이 아니었을까.

이 공동작업을 계기로 훗날에 통일뉴스 기자들과의 만남이 실현되었으며, 그것이 일본 각지에서의 동포들과의 만남과 조선학교에 대한 방문취재, 그리고 내가 속한 조국평화통일협회(평통협=재일조선인평화통일협회라고도 한다)가 주최한 토론회를 비롯한 여러 행사들에 대한 취재 등으로 이어졌다.

물론 그전부터 통일뉴스는 재일동포들 속에서 널리 알려지고 애독되고 있었다. 그러나 동포사회에 대한 취재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재일동포 문제를 다루는 기사의 내용도 깊어져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통일뉴스 기자들이 일본에 올 때마다 그들을 안내하고 나름대로 편의를 제공한다고 했지만 마음뿐이지 그들이 불편한 점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통일뉴스가 재일동포 사회에 접근하는데 내가 다소나마 기여할 수 있었다면 참으로 다행스럽다.

키워드는 ‘민족’

이렇게 깊어간 나와 통일뉴스의 관계인데 그 키워드는 바로 ‘민족’이었다.

고 김남식 통일뉴스 상임고문이 6.15 3주년을 맞아 일본 도쿄에서 통일강연회를 가졌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고 김남식 통일뉴스 상임고문이 6.15 3주년을 맞아 일본 도쿄에서 통일강연회를 가졌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2006년 일본 도쿄에서 고 김남식 선생의 유지에 따라 『21세기 우리민족 이야기』의 일본어판이 출간돼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2006년 일본 도쿄에서 고 김남식 선생의 유지에 따라 『21세기 우리민족 이야기』의 일본어판이 출간돼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한 번은 김 선생으로부터 <통일뉴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남녘에서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보급되자 인터넷언론을 해보고 싶다고 찾아온 젊은이들에게 선생은 어용언론이 되지 않게 “당당하게 고생하자, 그러되 옳은 일을 하자”고 해서 통일뉴스가 출발을 하게 되었다, 활동방향은 특정한 단체나 이념에 기울어지지 않게 나가자고 했는데 그러자면 민족·민족자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선생이 남녘에는 “민족이 밥 먹여 주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에게 통일은 결국 민족문제가 아닌가, 통일을 지향하는 데서 단체나 계급의 이익에 집착하는 것은 소탐대실이라고 해왔다고 말씀하신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데 나와 통일뉴스 기자들과의 관계 역시 사상과 이념, 거주지역의 차이를 초월해서 조국통일이라는 지향을 공유하면서 동포애적으로 깊어갔었다.

그러한 민족적 연계의 결과물의 하나가 바로 일본에서 출판된 김 선생의 저서 『21세기 우리민족 이야기』의 일본어판이었다. 이 책은 원래 통일뉴스에서 먼저 출판되었다. 그후 선생은 자기 저서를 일본에서 번역출판하기를 희망하셨다. 그런데 그가 2005년 1월에 일본에서 천만뜻밖에 세상을 떠나고 이 말은 결국 유언이 되고 말았다.

책의 일문판은 이 유언에 따리 재일동포 유지들과 남녘의 여러 인사들을 편찬위원으로 해서 저자의 1주기에 출판되었다. 때문에 이 책은 말 그대로 ‘민족적 집체작’인 셈이다.

아낌없이 내놓은 ‘보물’

나와 통일뉴스의 연계를 실물로 보여주는 것은 그것 뿐 만이 아니다.

『인간 문익환』 집필로 인연을 맺은 고 박용길 여사와 2002년 10월 서울에서 만난 필자.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인간 문익환』 집필로 인연을 맺은 고 박용길 여사와 2002년 10월 서울에서 만난 필자. [자료사진 - 통일뉴스]

나에게는 통일운동을 하는 과정에 마련된 귀중한 ‘보물’이 있다. 그것은 일본에서 출판된 나의 첫 저서 『인간 문익환』(일본어)의 인연으로 서로 알게 된 늦봄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여사(장로)와 내가 주고받은 편지, 그리고 여사가 나에게 보내준 문 목사의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의 한 구절을 자필로 옮겨 쓴 액자이다.

나는 이 ‘보물’을 세상에 공개하지도 않고 여러 해 동안 소중히 보관해왔는데 2019년에 그것을 통일뉴스에 아낌없이 제공했다.

나는 저서 『인간 문익환』도 그렇고 자신의 ‘보물’을 세상에 공개할 바에야 문 목사와 박 여사에 대한 인물소개로 그칠 것이 아니라,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만남을 비롯해서 두 분이 단행했던 방북에 관한 이야기, 또한 거기에 반영된 북녘동포들의 통일의지, 민족대단결 사상에 대해서 남녘동포들은 물론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알리고 싶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의 ‘보물’을 통일뉴스에서 널리 소개해준데 대해서 참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와 통일뉴스의 인연에는 또 하나의 추억이 있다.

고 김남식 선생과의 인연은 통일뉴스 임원들과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2009년 4월 통일뉴스 이계환 대표(오른쪽)와 ‘북한의 민족 문제 및 민족주의 문제’를 주제로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자료사진 - 통일뉴스]
고 김남식 선생과의 인연은 통일뉴스 임원들과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2009년 4월 통일뉴스 이계환 대표(오른쪽)와 ‘북한의 민족 문제 및 민족주의 문제’를 주제로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자료사진 - 통일뉴스]

내가 김남식 선생에게 앞으로도 더 많은 동포들을 만나보시고 좋은 강연도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을 때였다. 선생은 “아니 나 같은 늙은이가 언제까지나 쥐고 앉아있어서는 안 된다, 창발성이 없어진다”고 굳이 사양하시는 것이었다. 그러시고는 내가 상임고문으로 있는 통일뉴스의 임원들이 대학을 나와서 노동운동을 하기도 했던 젊은이들인데 오히려 그들과 많이 만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해서 서로 알게 된 우리이지만 어느새 20년 세월이 흐르고 나 자신도 이제 칠순을 넘게 되었다. 그리고 나와 공동작업을 하고 취재현장에 함께 가기도 했던 통일뉴스의 기자들도 ‘젊은이’라고 불리울 시기가 지나고 어떤 사람은 환갑을 넘었다. 그런데 민족의 간절한 염원이자 지상의 과제인 조국통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어렸을 때 부모님으로부터 너희들이 어른이 될 때면 조국통일이 다 이루어져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던 내가 그때 부모님보다 더 나이를 먹게 되고 때로는 ‘내가 통일을 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러나 비록 개개인의 육체에는 한계가 있지만 민족은 결코 사리지지 않는다.

창간 20년을 맞으면서 통일뉴스가 들었던 ‘민족과 함께 한 20년, 통일로 함께 갈 20년’의 슬로건이 그래서 몹시 인상에 남았다.

일본 도쿄에서 재일동포들이 대지진의 아픔을 딛고 “현 시점에서 다시 생각하는 ‘우리 민족끼리’”라는 주제로 2011년 5월 16일 6.15공동선언 발표 11주년을 기념하는 통일토론회를 개최했다. 맨 오른쪽이 필자.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일본 도쿄에서 재일동포들이 대지진의 아픔을 딛고 “현 시점에서 다시 생각하는 ‘우리 민족끼리’”라는 주제로 2011년 5월 16일 6.15공동선언 발표 11주년을 기념하는 통일토론회를 개최했다. 맨 오른쪽이 필자. [자료사진 - 통일뉴스]

지난 20년 동안에 반통일세력에 의해서 한때 6.15시대의 흐름이 막혀버렸지만 그 기본정신인 ‘우리 민족끼리’가 4.27판문점선언을 통해서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주의 원칙으로 계승되어 나왔다. 그러나 통일의 노정은 여전히 간고하고 복잡하다.

민족의 최대 염원이 이루어질 그날까지 통일뉴스가 반드시 창간 시의 초심을 관철할 것과 그 과정에 자기 활동에서 보다 큰 전진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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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시대 본격 개막…지배구조 개편·사법문제 해소 시험대

등록 :2020-10-26 04:59수정 :2020-10-26 07:44

맞물린 상속·지배구조 문제 풀어야
심화된 경제 불확실성 ‘넘어야 할 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가운데)과 아들 이지호씨(오른쪽), 딸 이원주양이 2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빈소로 이동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가운데)과 아들 이지호씨(오른쪽), 딸 이원주양이 2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빈소로 이동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별세로 관심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앞으로 삼성을 어떻게 이끌어갈지에 쏠린다. 이 부회장은 2014년 이 회장이 쓰러진 뒤부터 이미 총수 역할을 맡아온 터라, 급작스러운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상속’과 지배구조 개편 한데 맞물려이 부회장 앞에 놓인 가장 큰 위험 요인은 승계 문제와 관련한 ‘사법 리스크’이다. 현재 이 부회장은 국정농단 뇌물 사건 파기환송심과 삼성물산-제일모직 불법합병·회계부정 사건 등 두개의 재판을 받고 있다. 26일엔 서울고법 형사1부(재판장 정준영)의 국정농단 뇌물사건 파기환송심 재판이 예정돼 있다. 이건희 회장이 보유한 재산의 상속 과정도 변수다. 증권가에서는 이 회장이 가지고 있던 삼성전자 지분 4.18%를 비롯해 삼성생명(20.76%), 삼성물산(2.88%) 등의 상속재산가액이 약 18조원, 이에 해당하는 상속세만 약 10조~11조원에 이를 것으로 본다. 정대로 미래에셋대우 애널리스트는 지난해 11월 낸 보고서에서 “이 회장 보유 상장사 지분에 대한 상속세는 약 11조원 규모”라고 예상하며 “상속 과정에서 삼성전자 보유 지분에 대한 매각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이 부회장과 특수관계인이 갖고 있는 지분 변동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 부회장은 6월 말 현재 그룹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 지분은 0.7%만 들고 있다. 그의 그룹 지배력은 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로 이어지는 출자 구조에 기대고 있다. 이 부회장은 삼성물산의 최대주주(17.33%)다. 현재 이건희 회장 등 삼성전자의 대주주 및 특수관계인(계열사 포함)이 가진 지분은 모두 21.36%(우선주 0.25% 포함)이나, 주요 안건에 대한 의결권은 15%까지만 행사할 수 있다. ‘독점 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공정거래법)은 대기업집단 소속 금융·보험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국내 계열사 주식의 의결권 행사에 대해 경영권과 관련된 주요 안건을 결의할 때 대주주 및 특수관계인이 가진 주식의 15%까지만 의결권을 적용한다고 돼 있다. 의결권을 온전히 쓸 수 없는 이 회장 보유 삼성전자 지분 일부를 이 부회장이 넘겨받은 뒤 매각해 상속세 비용을 치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상속 과정에서 지주회사 체제로의 변환 등 현재 삼성에 요구되는 ‘정상적인 지배구조 개편’을 처리할 가능성도 남아 있다.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의 주식(8.8%)도 삼성이 풀어야 할 숙제다.
■ ‘반도체 비전 2030’ 등 경영능력 시험대 올라코로나19와 미-중 무역갈등, 반도체 산업 지형 변화 등 경제 불확실성도 이 부회장으로선 넘어야 할 또 다른 과제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도 삼성전자의 올해 1~3분기 실적은 굳건했다. 그러나 최근 미국 정부는 화웨이에 이어 중국 반도체 기업 중신궈지(SMIC)에도 수출 규제를 내리면서 불확실성은 더욱 짙어진 상황이다. 최근에는 에스케이(SK)하이닉스가 10조원을 투자해 인텔의 낸드플래시 사업을 인수했고, 지난 9월에는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가 일본 소프트뱅크그룹 자회사인 영국 반도체 개발 기업 에이아르엠(ARM·암홀딩스)을 총 400억달러(약 47조원)에 인수하는 등 세계 반도체 산업의 지각 변동도 진행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부회장은 지난해 4월,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파운드리 및 칩설계) 글로벌 1위를 달성하겠다며 내놓은 ‘반도체 비전 2030’을 차질 없이 진행해야 하는 처지다.“저는 제 아이들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을 생각입니다. … 제 자신이 제대로 된 평가도 받기 전에 제 이후의 제 승계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5월6일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의 권고로 이뤄진 이 부회장의 사과에서 언론의 주목을 가장 많이 받은 대목이다. 당시 대부분의 언론은 ‘4세 경영권 미승계’에 방점을 뒀지만,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별세 이후 더욱 주목되는 부분은 바로 “제 자신이 제대로 된 평가도 받기 전”이라는 대목이다. 이 부회장은 당시 대국민 사과를 통해 아버지만큼의 경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한 뒤 ‘앞으로의 자신의 역할’을 강조하며 본격적인 경영 행보에 나설 것을 예고했다.이후 이 부회장은 중국 시안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찾은 것을 시작으로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의 두차례 회동,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회사 에이에스엠엘(ASML) 방문, 베트남 아르앤디(R&D)센터 공사 현장 방문 등 광폭 행보를 이어오고 있다. 이 회장의 별세로 이 부회장은 이제 본격적인 경영 능력 평가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economy/marketing/967189.html?_fr=mt1#csidx85031e88e3977b4a1d38d6fb238eb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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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운동의 긴 여정에서 오아시스 역할

[통일뉴스 창간 20주년, 해외에서 본 통일뉴스①] 재미동포 김동균

  • 기자명 뉴욕=김동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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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0.26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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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통일뉴스] 그 기사 보셨습니까?”
“어 무슨 기사요? 지금 열어보겠습니다”

종종 조금 이른 어느 아침, 조국 한(조선)반도에 민족과 통일 관련한 어떤 큰 뉴스가 나오면 평소 조국에 대한 염려가 많은 가까운 동포들끼리 놀란, 혹은 기쁜 마음에 서로 전화로 주고받는 대화이다.

6.15남측위원회가 주축이 된 ‘2019 유엔 시민평화대표단’의 뉴욕 현지 활동에 6.15미국위원회 회원들이 함께 했다. 2019년 10월 26일 ‘코리아 평화를 위한 국제회의’ 모습. [자료사진 - 통일뉴스]
6.15남측위원회가 주축이 된 ‘2019 유엔 시민평화대표단’의 뉴욕 현지 활동에 6.15미국위원회 회원들이 함께 했다. 2019년 10월 26일 ‘코리아 평화를 위한 국제회의’ 모습. [자료사진 - 통일뉴스]

다소 진보적 성향의 해외동포들에게 [통일뉴스]는 조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통일 관련 사건과 현안들을 현장성 있게 정확하고 포괄적으로 보도해 주는 매체로 인식되어 있어 동포들이 아침저녁으로 한 두 번은 들어가 보는 인터넷 매체이다.

조국통일에 관심 많은 우리 해외동포들에게 남북 관련 보도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 남녘의 매체는 극소수의 인터넷 매체뿐이며 [통일뉴스]가 그 대표적 매체라 할 수 있다.

[통일뉴스]는 6.15가 낳은 통일전령으로서 남, 북, 해외의 통일관련 소식을 상세히 전해주는 전령의 역할과 함께 남북해외 동포들이 활동 소식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소통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오고 있다.

[통일뉴스]의 이러한 역할은 깊은 인내가 요구되는 통일운동의 긴 여정에서 그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얻게 하는 오아시스와 같은 역할을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2013년 7월 24일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6.15미국위원회를 비롯한 관련 단체들이 ‘정전60주년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촉구’ 시위를 벌였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2013년 7월 24일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6.15미국위원회를 비롯한 관련 단체들이 ‘정전60주년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촉구’ 시위를 벌였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더욱이, 해외동포들이 깊은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남녘의 지역들과 부문들의 통일운동 현장의 소식들이 취재 혹은 통신원 보도형식을 통해 상세히 소개 되고 있어 해외에 있으면서도 마치 국내의 현장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비록 서로들 만난 적은 없지만 곳곳에서 같은 뜻으로 행동하는 사람들과 단체들이 있음을 알게 되어 보이지 않게 서로를 고무하고 연대감을 갖게 해주는 등 연대의 장으로서의 [통일뉴스] 역할에 고마움이 작지 않다.

이번 <통일뉴스> 창간 20주년 슬로건이 “민족과 함께한 20년, 통일로 함께 갈 20년”이다. 해외동포로서 이 슬로건의 의미를 ‘민족화해’에 방점을 둔 민족통일언론의 지난 20년을 계승함과 동시에 ‘자주통일’에 강조점을 둔 민족통일언론의 새로운 20년으로 전화, 발전하겠다는 의지로 해석하고 싶다.

[통일뉴스]가 해외동포들에게 우리 조국이 우리 스스로의 의지와 힘에 의한 자주적 연방통일과 항구적 평화, 남북 공동번영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민족통일언론사가 되길 희망하기 때문이다.

남북관계가 경색된 상황에서도 ‘10.4선언 발표 9주년 기념 남북해외 공동토론회’가 2016년 10월 6일 중국 선양(심양)시 칠보산호텔에서 에 남․북․해외 대표단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남북관계가 경색된 상황에서도 ‘10.4선언 발표 9주년 기념 남북해외 공동토론회’가 2016년 10월 6일 중국 선양(심양)시 칠보산호텔에서 에 남북해외 대표단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통일뉴스]의 새로운 20년, 남북해외 모두로부터 받는 신뢰를 기초 삼아 ‘판문점선언시대’, ‘자주통일시대’를 앞장서 열어가는 민족통일언론사로서 남북해외 가운데 우뚝 서길 성원하고 기대한다.

끝으로, 통일뉴스를 창간한 이계환 대표와 김치관 편집국장 및 기자 분들께 그간의 노고에 해외동포로서 감사를 드리고 그간 얻었을 보람에 응원의 박수를 보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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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만 보인다 - 조선의 놀라운 군사력

[개벽예감 416] 아는 만큼만 보인다 - 조선의 놀라운 군사력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 기사입력 2020/10/26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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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세계에서 가장 빠른 저격땅크가 나타났다

2. 경사각 포탑에 장착된 125mm 무강선포

3. 장갑자행포와 조종방사포의 엄청난 위력

4. 해수면을 스치며 날아가는 금성-4 

5. 1년 만에 만들어낸 최강의 전략무기

 

1. 세계에서 가장 빠른 저격땅크가 나타났다

 

중국 마카오(澳門)의 온라인매체 <마카오 비즈니스(Macau Business)>가 2019년 9월 4일 매우 흥미로운 기사를 실었다. 중국 광둥성 주하이(珠海)에 나가있는 조선수출입회사인 조광무역이 각종 중무기를 국제무기시장에 출시했다는 보도기사였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국제무기시장은 미국, 로씨야, 중국 같은 선진무기수출국들이 치렬한 경쟁을 벌이는 곳이어서 경쟁력이 있는 무기가 아니면 감히 내놓지도 못한다. 그런데 2019년 8월 조선은 각축전이 벌어지는 국제무기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제국주의진영으로부터 혹심한 경제제재를 받는 조선은 다른 나라에 무기를 수출하지 못하는데도 각종 중무기를 국제무기시장에 출시했으니,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든 당시 조광무역 웹싸이트에 실린 무기목록에는 조선이 출시한 각종 중무기가 열거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천마호 땅크와 폭풍호 땅크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조선에서는 전차를 땅크라고 부른다. 천마호 땅크는 대당 270만 달러에 출시되었고, 폭풍호 땅크는 대당 420만 달러에 출시되었다. 

 

2013년 6월 5일 나는 평양에 있는 조선인민군 무장장비관 중무장전시실을 참관하면서 조선이 1967년부터 자체로 생산하기 시작한 땅크 10종이 전시된 것을 살펴보았는데, 폭풍호라고 부르는 땅크는 없었다. 아마도 미국과 한국의 군사전문가들이 천마-216 땅크를 폭풍호라는 자의적인 별칭으로 부르고 있으므로, 조광무역도 해외에 널리 알려진 그 별칭을 그대로 쓴 것으로 보인다. 

 

2004년에 생산된 천마-216 땅크과 2009년에 생산된 선군-915 땅크는 모두 3세대 주력땅크들이다. 천마-216 땅크는 500대가 실전배치되었고, 선군-915 땅크는 900대가 실전배치되었다. 그런데 조선이 3세대 주력땅크인 천마-216을 2019년 8월 국제무기시장에 출시했으니,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의문은 2020년 10월 10일 조선로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에서 풀렸다. 완전히 새로운 개념으로 설계된 4세대 땅크가 열병식에 등장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 조선은 천마-216 땅크와 선군-915 땅크를 능가하는 4세대 땅크를 2019년 이전에 이미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마-216 땅크를 국제무기시장에 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야간열병식을 보여주는 텔레비전화면에 신형 땅크가 나타났을 때, 그 새로운 모습을 보고 나는 놀랐다. 야간열병식을 해설하던 조선중앙텔레비죤 방송원은 그 신형 땅크를 저격땅크라고 불렀다. 땅크제작기술에서 가장 앞섰다는 몇몇 선진국들이 만든 첨단땅크들의 작전성능을 분석한 기술자료를 가지고 텔레비전영상화면에 나타난 조선의 저격땅크를 분석적으로 고찰하면서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저격땅크는 조선이 1967년에 처음 땅크를 만들어낸 때로부터 자력갱생투쟁 50년 동안 축적한 고도의 땅크제작기술로 쌓아올린 금자탑이며, 세계 최고 수준의 땅크제작기술이 응축된 결정체이다. 조선의 저격땅크를 그처럼 높이 평가하는 것이 과장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독자들을 위해 저격땅크의 뛰어난 작전성능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겠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저격땅크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직접적인 지도에 의해 개발된 것이다. 2010년 1월 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근위서울류경수제105땅크사단 구분대를 시찰하였을 때, 동행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몸소 땅크에 올라 조종간을 잡고 땅크를 몰면서 훈련표적들을 향해 땅크포를 사격했고, 2012년 1월 1일에는 그 땅크사단을 다시 방문하여 첫 현지지도를 시작했다. 이런 사정만 봐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땅크무력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알 수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조선국방과학원에 신형 땅크 설계과업을 준 시점은 아무리 빨라도 2013년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로부터 불과 5년 남짓한 기간에 세계 최고 수준의 첨단땅크를 자체 기술로 만들어냈으니 세상을 경탄케 하는 일이다.  

 

한국국방과학연구소도 첨단전차를 만들기 위해 힘써왔다. 그들은 1995년부터 K-2 흑표 전차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전차제작에 필요한 핵심기술을 자체로 개발하지 못하고, 도이췰란드와 미국에서 도입했다. 한국방위사업청은 2005년부터 근 15년 동안 K-2 흑표 전차의 핵심부품인 1,500마력 디젤엔진, 변속장치, 조향장치, 제동장치, 제어장치, 냉각장치를 자력으로 개발하려고 애썼으나, 결국 독자개발에 실패했다. 그래서 핵심부품들을 도이췰란드에서 수입해서 조립했다. <조선일보> 2020년 10월 20일 보도에 따르면, 도이췰란드에서 수입한 핵심부품들을 조립해서 K-2 흑표 전차를 만들었기 때문에 도이췰란드의 허락을 받아야 다른 나라에 수출할 수 있다고 한다.   

 

이번 야간열병식에 등장한 저격땅크의 구조적 특징 가운데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지탱바퀴다. 일반적으로, 땅크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무한궤도차량은 맨앞쪽에 향도바퀴가 1개 달렸고, 맨뒷쪽에 추동바퀴가 1개 달렸으며, 그 사이에 지탱바퀴들이 여러 개 달렸다. 조선이 1976년부터 만들어낸 천마 계렬의 각종 땅크는 모두 지탱바퀴가 5개인데, 2003년에 만든 천마-215 땅크, 2004년에 만든 천마-216 땅크, 그리고 2009년에 만든 선군-915 땅크는 지탱바퀴 6개가 달렸다. 로씨야가 만든 3세대 주력땅크 T-90이나 중국이 만든 3세대 주력땅크 99식 전차도 지탱바퀴 6개가 달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번 야간열병식에 등장한 저격땅크에는 지탱바퀴가 7개 달렸다. 세계 각국이 보유한 수많은 종류의 전차들 가운데서 지탱바퀴가 7개 달린 전차는 미국의 M1 에이브럼스(Abrams) 전차, 도이췰란드의 레오파르트(Leopard)-2 전차, 로씨야의 T-14 아르마타(Armata)밖에 없는데, 조선이 지탱바퀴가 7개 달린 신형 땅크를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만들어냈으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탱바퀴가 6개에서 1개 더 늘어난 것이 뭐 그리 대단한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최첨단기술이 없으면 지탱바퀴가 7개 달린 땅크를 만들지 못한다. 땅크에 지탱바퀴가 7개 달린 것은 땅크가 커졌고, 무거워졌음을 의미한다. 땅크가 커졌다는 말은 내부공간이 넓어졌다는 뜻이며, 넓어진 내부공간에 최첨단장비들이 들어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조선의 저격땅크에 지탱바퀴 7개가 달린 것은 기존 땅크보다 더 넓어진 내부공간에 최첨단장비들이 들어갔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땅크가 커졌다는 말은 포탄적재량이 늘어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저격땅크는 포탄 40~50발을 적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땅크가 무거워졌다는 말은 엔진출력이 기존 땅크보다 더 강한 새로운 동력장치(엔진과 변속기)를 달았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지탱바퀴 6개가 달린 선군-915 땅크에는 1,200마력 엔진이 들어갔는데, 지탱바퀴 7개가 달린 저격땅크에는 1,500마력 엔진이 들어갔다. 지탱바퀴 7개를 달고 있는 미국의 에이브럼스 전차, 도이췰란드의 레오파르트 전차, 로씨야의 아르마타 전차에도 각각 1,500마력 엔진이 들어갔다. 화성-13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싣고 달리는 거대한 8축16륜 발사대차의 엔진출력이 700마력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저격땅크의 1,500마력 엔진이 얼마나 고급한 기술로 만들어낸 것인지 직감할 수 있다. 세계 정상급 첨단기술이 있어야 1,500마력 엔진을 만들 수 있다. 

 

한국방위사업청은 K-2 흑표 전차에 들어가는 1,500마력 엔진을 개발하려고 15년 동안 애썼으나 결국 실패했다. <조선비즈> 2020년 10월 12일 보도에 따르면, K-2 흑표 전차를 더 이상 생산할 수 없게 되자, 그 전차에 들어가는 각종 부품을 생산하는 1,100여 개에 이르는 중소기업체들이 파산위기에 몰렸다고 한다. 그와 대조적으로, 조선국방과학원은 불과 5년 남짓한 기간에 1,500마력 엔진을 개발했으니, 군수공업부문에서 남과 북의 격차는 너무 크게 벌어졌다. 

 

미국의 에이브럼스 땅크는 중량이 60~70t으로 무겁고, 도이췰란드의 레오파르트 땅크는 중량이 63t으로 중간급이고, 로씨야의 아르마타 땅크는 중량이 55t으로 가볍다. 그런데 조선의 저격땅크는 가볍고 날렵해 보인다. 저격땅크의 중량은 50t 정도로 추정된다. 천마-216 땅크의 중량은 39t이고, 선군-915 땅크의 중량은 44t이다. 저격땅크의 중량이 50t 정도라고 추정하는 까닭은, 조선은 60t 미만의 가벼운 땅크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삼천리강산에는 크고 작은 하천들에 다리가 많은데, 하천교량의 안전하중은 대체로 60t이다. 그래서 조선은 중량이 60t 이상인 무거운 땅크는 만들지 않는다.   

 

1,500마력 엔진이 달린 땅크를 경량화하면 당연히 땅크의 주행속도가 빨라지고, 기동이 날렵해지고, 주행거리도 늘어나게 된다. 지난 50년 동안 조선은 신형 땅크를 개발할 때마다, 중량을 되도록 가볍게 줄임으로써 주행속도가 빠르고, 날렵하게 기동하고, 주행거리를 더 늘이는 개발원칙을 지켜왔다. 고속돌격전의 주역인 땅크는 주행속도가 빨라야 하고, 날렵하게 기동해야 한다. 주행속도와 기동이 느린 땅크는 교전상대의 공격에 맥을 추지 못한다.  

 

미국의 에이브럼스 땅크는 최고주행속도가 시속 72km이고, 도이췰란드의 레오파르트 땅크는 최고주행속도가 시속 68km이고, 로씨야의 아르마타 땅크는 최고주행속도가 시속 90km로 전 세계 전차들 가운데서 가장 빠르다. 그런데 아르마타 땅크가 시속 80km 이상으로 계속 달리면, 엔진에 무리가 가서 엔진수명이 짧아지기 때문에 그런 속도로 계속 달리지 못한다. 아르마타 땅크는 2015년에 시제품이 나왔는데,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다량계렬생산에 들어가지 못하는 까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땅크에 걸맞는 고출력 엔진을 달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량이 55t나 되는 무거운 아르마타 땅크가 시속 80km 이상으로 계속 달리려면 2,000마력 엔진을 달아야 하는데 1,500마력 엔진을 달았으니, 그 땅크는 최고주행속도를 내지 못하고 시속 80km 이하로 달리는 수밖에 없다.    

 

그와 대조적으로, 중량이 50t 정도로 가벼운 조선의 저격땅크는 1,500마력 엔진을 달고 시속 80km로 계속 달릴 수 있다. 급박한 상황에서는 더 빠른 속도를 낼 수도 있다. 저격땅크는 그렇게 빠른 속도로 계속 달려도 엔진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조선의 저격땅크야말로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땅크라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군사분계선에서 부산까지 거리는 약 400km이므로, 전시에 고속돌격전에 나선 저격땅크가 멈추지 않고 달리면 5시간 만에 부산에 도착할 수 있다. 

 

 

2. 경사각 포탑에 장착된 125mm 무강선포

 

땅크에게서 빠른 주행속도 다음으로 중요한 작전성능은 강한 화력이다. 강한 화력으로 교전상대를 순식간에 타격, 제압하는 강철의 무쇠주먹이 바로 땅크다. 땅크의 화력은 주포에서 나온다. 저격땅크의 주포는 선군-915 땅크의 주포와 마찬가지로 125mm 무강선포다. 무강선포를 활강포라고도 부른다. 일반 화포는 포강 안쪽에 강선(腔線)이 파였지만, 무강선포에는 강선이 없다. 교전상대의 장갑을 관통하는 강력한 철갑탄을 쏘려면 무강선포를 사용해야 하므로, 현대화된 땅크에는 무강선포가 탑재되는 법이다. 

 

이번 야간열병식에 등장한 저격땅크의 주포는 포신길이가 길어 보인다. 포신이 길면, 포탄을 더 빠른 속도로, 더 강한 에너지로 발사할 수 있다. 포탄을 더 빠른 속도로 발사하면, 그만큼 사거리가 길어지게 된다. 또한 포탄을 더 강한 에너지로 발사하면, 장갑관통력이 더 커지게 된다. 그러므로 땅크포는 포신길이가 길수록 더 강한 화력을 가진다. 저격땅크의 포신길이가 선군-915의 포신길이보다 좀 더 길어진 것은 더 강한 화력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도이췰란드에서 개발된 120mm 무강선포를 각각 탑재한 미국의 에이브럼스 땅크와 도이췰란드의 레오파르트 땅크는 사거리가 4km다. 120mm 무강선포를 탑재한 한국의 K-2 흑표 전차는 사거리가 3km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125mm 무강선포를 탑재한 로씨야의 아르마타 땅크는 사거리가 11.4km다. 이런 사실을 비교하면, 로씨야의 아르마타 땅크가 매우 우월한 작전성능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아르마타 땅크처럼 125mm 무강선포를 탑재한 조선의 저격땅크는 사거리가 10km 정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엄청난 사거리다. 

 

다른 나라의 땅크들과 다르게, 조선의 저격땅크는 차체 왼쪽 측면에 레이저유도식 반땅크미사일 발사관 2문을 장착했다. 이 반땅크미사일의 이름은 불새-4다. 불새-4 이전에 개발된 반땅크미사일인 불새-3은 2016년 2월 26일에 시험발사되었는데, 불새-3의 사거리는 5.5km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이번 야간열병식에 등장한 불새-4 레이저유도식 반땅크미사일의 사거리는 7km 정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엄청난 사거리다. 

 

또한 저격땅크 포탑 위에는 30mm 자동유탄발사기 1문과 30mm 유탄 100발이 들어가는 탄통이 탑재되었다. 이 자동유탄발사기의 사거리는 2km 정도다. 강력한 화력이다. 

 

위에 열거한 몇 가지 사실을 종합하면, 조선의 저격땅크는 전 세계 땅크들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로 고속돌격전을 전개하면서, 사거리가 10km 정도인 125mm 주포, 사거리가 7km 정도인 레이저유도식 반땅크미사일, 사거리가 2km 정도인 30mm 자동유탄발사기로 교전상대를 타격, 제압하는 천하무적의 땅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저격땅크에는 땅크를 지휘하는 전차장(commander) 1명, 땅크를 운전하는 조종수(driver) 1명, 땅크포를 쏘는 포수(gunner) 1명을 포함하여 모두 3명이 탑승했다. 그와 다르게, 천마-216 땅크에는 포탄을 장전하는 장전수(loader) 1명을 더하여 모두 4명이 탑승했다. 저격땅크에 장전수가 탑승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동화된 사격통제장치가 설치되었음을 의미한다. 자동화된 사격통제장치가 설치된 저격땅크는 빠른 속도로 달리면서 사격할 수 있다. 

 

저격땅크에서 돋보이는 또 다른 구조적 특징은 포탑의 장갑이다. 조선이 이전에 만든 각종 땅크의 포탑은 주조(鑄造)기법으로 만든 반구형 포탑이었다. 그런데 저격땅크의 포탑은 용접기법으로 만든 경사각 포탑이다. 이전에 반구형 포탑에는 덧장갑이 씌워졌는데, 저격땅크의 경사각 포탑은 덧장갑이 없어서 표면이 매끈하다. 이것은 저격땅크의 장갑방호력이 더욱 강화되었음을 말해주는 변화다. 

 

저격땅크의 좌우측면에 있는 지탱바퀴들 위에는 두꺼운 집초방어판(side skirt)이 덮여있다. 집초방어판은 로켓발사기(RPG)공격으로부터 바퀴들과 궤도를 방어해준다. 

 

또한 저격땅크 뒤쪽에는 철장장갑(slat armor)을 부착했다. 전투 중에 저격수들은 장갑이 가장 약한 부분인 땅크의 뒤쪽을 로켓포발사기로 공격하는데, 저격땅크의 뒤쪽에 부착된 철장장갑은 그런 로켓발사기공격을 막아준다. 저격땅크의 외부에 드러나 보이는 각종 장치는 다음과 같다. <사진 1> 

 

 

 

▲ 신형 저격땅크


전차장 조준경

조종수 관측기

포수 조준경

포수 열상관측기 

레이저거리측정기

레이저유도장치

레이저경보기

전자광학교란기

풍향감지기

125mm 무강선포

불새-4 반땅크미사일

연막탄발사기

30mm 유탄발사기

집초방어판

철장장갑 

 

 

3. 장갑자행포와 조종방사포의 엄청난 위력

 

1) 이번 야간열병식에서 저격땅크의 뒤를 이어 등장한 무장장비는 신형 자행포다. 지탱바퀴 6개가 달린 무한궤도장갑차 위에 152mm 자행포가 탑재되었다. 조선인민군 포병부대들이 운용해온 기존 자행포는 170mm 자행포와 152mm 자행포인데, 지탱바퀴 5개가 달린 무한궤도차량 위에 탑재되었다. 

 

지탱바퀴 5개가 달린 가벼운 무한궤도차량에서 자행포를 쏘면, 사격하는 순간, 강한 반동에너지가 발생하여 차체가 흔들린다. 차체가 크게 흔들리면, 정밀조준사격을 하기 힘들다. 그런데 이번 야간열병식에 등장한 신형 자행포는 지탱바퀴 6개가 달린 무거운 무한궤도차량에서 쏘기 때문에 차체의 진동이 억제되고, 따라서 정밀조준사격을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 

 

또한 조선의 기존 자행포들은 장갑이 없는 차량에 탑재되어 방호력을 갖지 못했는데, 신형 152mm 자행포는 무한궤도식 장갑차에 탑재되었다. 장갑자행포로 변신한 것이다. 신형 장갑자행포는 방호력을 갖추었고 차체중량도 더 무거워졌다. 차체중량이 무거워진 것은, 엔진출력이 큰 신형 엔진을 달았다는 뜻이고, 차체 내부에 자동사격통제장치와 자동장전장치가 설치되었다는 뜻이며, 더 많은 포탄을 적재한다는 뜻이다. 그로써 신형 152mm 장갑자행포가 포를 조준하고 포탄을 장전하는 방렬시간이 단축되었다. 

 

한국군이 운용하는 k-9 155mm 자주포는 도이췰란드가 만든 1,000마력 엔진과 미국이 만든 변속기를 달았지만, 조선의 신형 152mm 장갑자행포는 국산엔진과 국산변속기를 달았다. 한국의 방위산업체들은 외국산 핵심부품을 가지고 만든 첨단무기를 판매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리면 그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조선군수공업의 강한 자존심은 자기들이 만드는 각종 첨단무기에 외국산 핵심부품을 달아놓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혹독한 제재와 봉쇄를 뚫고 조선을 자력갱생강국으로 일으켜 세운 힘의 원천이다. 

 

신형 152mm 장갑자행포의 포신길이는 종전의 152mm 자행포 포신길이보다 좀 더 길어졌는데, 이것은 사거리가 더 길어졌음을 말해준다. 신형 152mm 장갑자행포의 사거리는 50km 정도로 추정된다. 또한 신형 152mm 장갑자행포에는 30mm 유탄발사기 1정이 포탑 오른쪽 위에 장착되었다. 포수열상조준경 1개가 정면에 장착되었고, 전자광학교란기가 좌우에 1개씩 장착되었으며, 연막탄발사기가 좌우에 4개씩 장착되었다. 포탑 뒤쪽에는 풍향감지기 1개가 장착되었다. 

 

조선이 독자적인 제작기술로 자행포를 처음 만들어낸 때는 1972년이다. 조선은 그때부터 오늘까지 48년 동안 103mm 자행포, 122mm 자행포, 130mm 자행포, 152mm 자행포, 170mm 자행포, 370mm 자행비반충포를 만들어냈다. 이번 야간열병식에 등장한 신형 152mm 장갑자행포는 지난 48년 동안 축적해온 자행포제작기술의 최고결정체이다. 신형 152mm 장갑자행포는 교전상대에게 발사징후를 노출하지 않고 무징후불시타격과 고속기동타격을 할 수 있는 무기다. <사진 2>

 

▲ 신형 152mm 장갑자행포  

 

2) 신형 152mm 장갑자행포의 뒤를 이어 등장한 것은 신형 방사포 5종이다. 240mm 22관 방사포, 300mm 12관 방사포, 600mm 4관 조종방사포, 500mm 6관 조종방사포, 610mm 5관 방사포가 위용을 과시하며 행진했다. 

기존 240mm 22관 방사포는 3축6륜 포차에 탑재되었는데, 이번 야간열병식에 등장한 신형 240mm 22관 방사포는 4축8륜 포차에 탑재되었다. 이것은 신형 방사포가 더 무거워졌음을 의미하는데, 사거리가 더 늘어나고, 화력이 더 강해진 것이다. 이 신형 방사포의 사거리는 50km로 추정된다. 2020년 7월 24일 미국 육군성이 펴낸 ‘북조선의 전술(North Korean Tactics)’이라는 제목의 자료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육군 연대의 횡간공격범위는 3~6km이고, 종심공격범위는 40~50km라고 한다. 전시에 그들은 40~50km에 이르는 작전종심에 240mm 22관 방사포를 집중발사한 뒤에 총진격할 것으로 예견된다. 

 

3) 기존 300mm 8관 방사포는 3축6륜 포차에 탑재되었는데, 이번 야간열병식에 등장한 신형 300mm 12관 조종방사포는 4축8륜 포차에 탑재되었다. 화력이 더 강해졌음을 의미한다. 이 신형 조종방사포의 사거리는 250km로 추정된다. 

주목되는 것은, 신형 300mm 12관 조종방사포의 포탄 앞쪽에 부착된 조종날개(canard)다. 조종날개는 방사포탄이 날아가면서 비행방향을 바꿀 때 사용하는 것이다. 이 신형 조종방사포에 조종날개와 위성항법유도장치가 장착되었으므로, 정밀타격능력이 고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동아> 2020년 1월호에 실린, 한국군이 2014년에 작성해 청와대에 보고한 대외비문서에 따르면, 조선은 2012년에 오차범위가 50m인 300mm 방사포를 개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벌써 8년 전의 일이다. 지난 8년 동안 조선은 조종방사포에 첨단유도장치를 장착해 오차범위를 크게 줄였다. 그래서 이번 야간열병식에 등장한 모든 조종방사포들의 오차범위는 6~7m로 크게 좁아졌다. 조종방사포의 타격정밀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아져, 마치 눈이 달린 포탄처럼 타격대상을 끝까지 추적하여 외과수술식으로 제거할 수 있다. 군사분계선 인근에서 충청남도 계룡대에 있는 한국군 육해공군본부를 향해 신형 조종방사포를 쏘면, 주차장에 있는 버스에 명중하고, 경기도 평택에 있는 주한미국군기지를 향해 쏘면, 그 기지 안에 있는 군인가족아파트들과 대폭발위험이 있는 열화우라늄탄무기고를 피해 군사시설과 무장장비만 족집게식으로 골라서 파괴할 수 있다.  

 

4) 이번 야간열병식에 등장한 600mm 4관 조종방사포는 4축8륜 포차에 탑재되었다. 원통형 발사관에 포탄이 들어있다. 이 방사포의 포탄에도 조종날개가 달렸다. 방사포탄 첨두를 흰색으로 칠했다. 2019년 월에 시험발사한 신형 조종방사포다. 600mm 조종방사포는 견고한 타격대상을 날려버릴 때 쓰는 강력한 무기다. 600mm 조종방사포에 콘크리트관통탄을 장착하여 쏘면, 400km 밖에 있는 강화콘크리트로 견고하게 축조한 반항공레이더시설이나 전투기격납고를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다. 전술탄도미사일도 그 정도의 화력을 가지고 있지만, 조종방사포는 단거리탄도미사일보다 낮은 고도로 비행하기 때문에 교전상대의 반항공요격망을 뚫고 들어갈 수 있다. 

 

5) 이번 야간열병식에 등장한 500mm 6관 조종방사포는 지탱바퀴가 10개 달린 무한궤도포차에 탑재되었다. 원통형 발사관에 들어있는 방사포탄 첨두에 흰색을 칠했고, 조종날개가 달렸다. 이 방사포는 2019년 월에 시험발사한 신형 조종방사포다. 이 신형 조종방사포의 사거리는 350km로 추정된다. 조선인민군 방사포부대는 고폭발탄, 열압력탄, 산포탄, 집초탄, 철갑탄, 지뢰살포탄 등 전술목적에 적합한 각종 포탄을 불우박처럼 쏘는 화력타격전을 전개하게 된다. 

 

6) 610mm 5관 조종방사포는 이번 야간열병식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4축8륜 포차에 탑재된 세계 최강의 방사포다. 원통형 발사관에 들어있는 방사포탄 첨두에 노란색을 칠했고, 조종날개가 달렸다. 노란색은 방사능을 표시하는 색이므로, 노란색을 칠한 첨두에는 전술핵탄두가 들어간다. 탄두지름이 600mm 이상으로 커지면, 전술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번 야간열병식에 처음 등장한 610mm 5관 조종방사포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강한 핵방사포다. 이 핵방사포의 사거리는 420km로 추정된다. <사진 3>

 

▲ 신형 610mm 5관 조종방사포  

 

그런데 핵방사포는 어디에 쓰는 무기인가? 동족에게는 절대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조선이 스스로 정한 철칙이다. 조선의 핵무기는 우리 민족 8천만의 생명과 안전을 해치려고 덤벼드는 침략군을 징벌하는 응징의 무기이지, 동족을 살상하는 무기가 아니다. 전시에 상황을 오판한 미국이 조선을 공격하기 위해 항모전투단을 앞세운 미일연합함대를 동해작전구역에 출동시키는 경우, 조선인민군은 610mm 핵방사포를 발사하여 미일연합함대 상공에서 거대한 핵폭발을 일으킬 것이고, 그런 기상천외한 전자기파공격은 미일연합함대를 완전히 마비상태에 빠뜨릴 것이다. 항모전투단과 미일연합함대가 마비되어 동해 해상에서 정처 없이 표류하는 대참패를 당하면, 백악관은 전쟁을 중지하고 구조함을 현장에 급파해야 한다. 

 

조종날개가 달린 조종방사포에서 포탄이 발사되면, 위성항법유도장치의 유도비행에 따라 교전상대의 반항공레이더를 피해 낮은 고도로 날아가다가 갑자기 높은 고도로 상승비행을 하였다가 타격대상을 향해 내리꽂히는 변칙비행을 하기 때문에 교전상대의 반항공요격망은 그냥 무용지물로 된다. 

 

위에 열거한 신형 조종방사포들은 무징후불시타격, 초정밀타격, 반항공요격망돌파에 최적화된 무기체계다. 각종 신형 조종방사포를 실전배치함으로써 지금 조선의 화력타격력은 100배 증강되었다. 

 

<중앙일보> 2017년 6월 21일 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7년 3월 1일 군수공업부문 간부들과 진행한 회의에서 방사포탄에 영상추적장치를 달아 남조선 전역의 10,000개 타격대상들을 조종방사포만으로 타격할 수 있는 준비가 완료된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평가하면서 “조국통일은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오늘 조선인민군은 통합화력타격과 정밀타격에 적합한 장갑자행포, 조종방사포를 전방지대에 전진배치했다. 한국군사과학기술학회지 2013년 4월호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포병무력의 74%가 군사분계선에서 10km 안에 전진배치되었다고 한다. 이런 사정은 조선인민군 포병부대들이 무징후불시타격과 고속기동타격을 위한 작전준비를 완전히 갖추었음을 말해준다.  

 

 

4. 해수면을 스치며 날아가는 금성-4 

 

세계에서 가장 강한 방사포의 뒤를 이어 야간열병식에 등장한 것은 신형 반함선미사일이다. 지탱바퀴 6개가 달린 무한궤도발사대차에 원통형 발사관 8문이 탑재되었다. 

 

조선이 만들어낸 반함선미사일들에는 금성이라는 별이름이 붙어있다. 조선은 1993년 2월 처음으로 금성-1 반함선미사일을 시험발사한 이후 27년 동안 반함선무력을 꾸준히 강화발전시켰고, 오늘에는 세계 정상급 반함선미사일을 만들어냈다. 이번 야간열병식에 등장한 금성-4 반함선순항미사일이 바로 그런 세계 정상급 미사일이다.

 

2020년 7월 4일 조선인민군은 강원도 문천 인근에서 동해 북동쪽 해상에 설치한 가상적함을 향해 반함선순항미사일을 여러 발 발사하는 것과 동시에 수호이-25 공격기에서도 반함선순항미사일을 여러 발 발사했다. 그날 지상과 공중에서 동시에 발사한 반함선순항미사일의 비행고도는 2km 안팎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순항미사일들이 비행 중에 공중에서 선회비행을 두 차례 하더니 급하강하여 3m 고도에서 해수면을 살짝 스치듯 날아가는 초저공비행으로 가상적함을 향해 돌진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런 놀라운 비행특성은 섬 뒤에 숨어있는 적함을 끝까지 찾아가 타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성-4 반함선순항미사일의 순항비행고도가 2km 정도이고, 선회비행을 하며, 돌진비행고도가 3m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적함의 반항공무기체계를 완전히 무용지물로 만든다는 뜻이다. 금성-4 반함선순항미사일은 시험발사 중에 200km를 날아갔는데, 도중에 선회비행을 두 차례 하였으므로, 사거리는 300km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처럼 놀라운 작전성능을 가진 금성-4 반함선순항미사일은 어디에 쓰는 무기인가? 전시에 상황을 오판한 미국이 해병대 병력 2,900명을 가득 실은 45,000t급 강습상륙함 아메리카함(USS America) 같은 거함을 동해에 출동시켰을 때, 조선인민군이 지상과 공중에서 금성-4를 동시다발로 쏘면 그런 거함들은 동해안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300km 밖에서 격침, 수장될 것으로 예견된다. 금성-4 반함선순항미사일을 실전배치한 것은 조선인민군의 반상륙작전능력이 대폭 증강되었음을 말해준다. <사진 4>

 

▲ 신형 금성-4 반함선순항미사일  

 

 

5. 1년 만에 만들어낸 최강의 전략무기

 

금성-4 반함선순항미사일 뒤를 이어 야간열병식에 등장한 것은 신형 수중전략탄도미사일이다. 조선중앙텔레비전방송 방송원은 방송해설 중에 신형 수중전략탄도미사일을 가리켜 “세계 최강의 병기 수중전략탄도탄”이라고 불렀다. 탄체를 검은색으로 칠한 신형 수중전략탄도미사일은 차체길이가 긴 6축12륜 수송차량에 실려 자기의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탄체에는 북극성-4ㅅ이라는 선명한 글자가 새겨졌다. 자음 시옷은 수중전략탄도탄의 ㅅ을 뜻한다. 

 

조선국방과학원이 신형 수중전략탄도미사일 북극성-3형을 시험발사했던 때는 2019년 10월 2일인데, 그들은 불과 1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북극성-4ㅅ을 만들어 이번 야간열병식에 등장시켰다. 어떻게 그처럼 초고속으로 최첨단전략무기를 만들어내는지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2019년 10월 25일 미국 해군 참모차장 로벗 버크(Robert P. Burke)는 국방기자협회 간담회에서 당시 조선이 시험발사한 북극성-3형을 “판세전환자(game changer)”라고 하면서, 조선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1년 만에 북극성-4ㅅ이 등장하여 세상을 또 다시 놀라게 했으니, 미국 군부는 조선의 군사력이 상상을 초월한 속도로 강화발전되는 것을 보고 공포를 느낄 만하다. 

 

세계 각국이 보유한 각종 잠수함들을 분석하는 미국의 온라인전문매체 <은밀한 바닷가(Covert Shores)>는 2020년 10월 15일에 실은 분석자료에서 북극성-4형ㅅ의 탄체길이는 9.8m이고 탄체지름은 1.8m라고 밝혔다. 이런 분석에 따르면, 북극성-4형ㅅ은 탄체지름이 북극성-3형과 같지만, 탄체길이가 북극성-3형보다 0.8m 짧아졌음을 알 수 있다. 

 

나는 2019년 10월 7일 <자주시보>에 실린, ‘놀라움 안겨주는 북극성-3형의 진실’(http://www.jajusibo.com/47420) 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북극성-3형의 사거리를 7,000km라고 추정한 바 있다. 그런데 북극성-4ㅅ의 탄체길이가 그보다 0.8m 짧아졌으니, 사거리는 6,500km 정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이 북극성-4ㅅ을 북극성-3형보다 약간 짧게 만든 까닭이 있다. 북극성-3형은 기존 전략잠수함 함교 내부에 설치된, 길이가 약간 긴 수직발사관 안에 들어가고, 북극성-4ㅅ은 신형 전략잠수함 본체 내부에 설치된, 길이가 약간 짧은 수직발사관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기존 전략잠수함 함교 내부에는 수직발사관을 3~4문밖에 설치할 수 없는데 비해, 신형 전략잠수함 본체 내부에는 수직발사관을 더 많이 설치할 수 있다. 

 

이번 야간열병식에 북극성-4ㅅ이 등장한 것을 보면, 그 미사일을 탑재할 신형 전략잠수함이 건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형 수중전략탄도미사일을 탑재할 신형 전략잠수함이 없는데도, 신형 수중전략탄도미사일을 만드는 어리석은 나라는 없다.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조선이 최근 신형 전략잠수함을 건조하였다는 사실이다. 2020년 10월 7일 국방부에서 진행된 국회 국정감사에서 서욱 국방장관은 조선이 4,000~5,000t급 신형 잠수함을 건조하는 중이라고 답변했다. 조선의 잠수함에 관한 정보가 부족한 그는 그처럼 헷갈리는 답변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조선은 수중배수량이 5,000t 이상인 핵추진잠수함을 이미 건조한 것이 분명하다. 다만 사안의 민감성을 고려해서 신형 핵추진잠수함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지만, 이번 야간열병식에서 신형 핵추진잠수함에 탑재될 북극성-4ㅅ을 공개함으로써 신형 핵추진잠수함을 건조했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밝혔다. 

 

북극성-4ㅅ을 탑재한 신형 핵추진잠수함은 얼마나 큰 잠수함일까? 실물이 공개되지 않았으므로, 다른 잠수함들과 비교하여 추정하는 수밖에 없다. 한국 해군이 2022년 1월에 실전배치하려는 3,700t급 도산안창호함은 함체지름이 7.7m인데, 이번 야간열병식에 등장한 북극성-4형ㅅ의 탄체길이는 9.8m나 된다. 다시 말해서, 탄체길이가 9.8m인 북극성-4형ㅅ이 들어가는 신형 핵추진잠수함의 함체지름은 최소한 10.5m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함체지름이 10.5m인 대형 잠수함은 핵추진잠수함이다. 잠수함의 함체지름이 그렇게 크면, 반드시 핵추진잠수함으로 만들어야 한다. 함체지름이 10.5m 안팎인 핵추진잠수함은 전 세계에 세 종류가 존재한다. 함체지름이 10m인 미국의 로스앤젤레스급 핵추진잠수함은 수중배수량이 7,000t이고, 함체지름이 그와 똑같은 로씨야의 빅터급 핵추진잠수함은 수중배수량이 7,250t이다. 함체지름이 11.3m인 영국의 어스튯급 핵추진잠수함은 수중배수량이 7,400t이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조선이 최근 건조한 신형 핵추진잠수함은 수중배수량이 7,000t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인민군 해군은 한국 해군의 최신형 디젤-전동식 잠수함보다 2배나 더 큰 최신형 핵추진잠수함을 보유했으니, 남과 북의 잠수함전력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격차가 벌어졌다.  

 

조선이 건조한 7,000t급 핵추진잠수함에는 수직발사관이 한 줄에 5문씩 두 줄로 나란히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신형 핵추진잠수함에 북극성-4ㅅ 10발이 탑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5>

 

▲ 신형 북극성-4ᄉ 수중전략탄도미사일  

 

북극성-4ㅅ에는 각개발사식 핵탄두가 5개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탄체지름이 2.11m인 미국의 트라이던트 수중전략탄도미사일에 각개발사식 핵탄두가 8개 들어갔으므로, 탄체지름이 그보다 0.31m 짧은 북극성-4ㅅ에 각개발사식 핵탄두가 5개 들어간다고 보는 추론은 합리적이다.   

 

미국 해군은 수중전략탄도미사일 24발을 탑재한 18,000t급 핵추진잠수함을 보유했고, 조선인민군 해군은 수중전략탄도미사일 10발을 탑재한 7,000t급 핵추진잠수함으로 그에 맞선다. 미국의 핵추진잠수함은 조선의 핵추진잠수함보다 크기가 2.5배 더 크고, 수중전략탄도미사일을 14발 더 탑재했지만, 조선이 각개발사식 핵탄두를 장착한 수중전략탄도미사일을 만들고, 그것을 탑재한 핵추진잠수함을 보유한 것은 제국주의핵무력을 억제하는 능력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나는 이번 야간열병식의 맨마지막에 등장한 초대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의 위력보다 북극성-4ㅅ을 탑재한 핵추진잠수함의 위력이 훨씬 더 크다고 생각한다. 각개발사식 핵탄두를 5개씩 장착한 수중전략탄도미사일 10발을 싣고 바다속 깊은 곳에서 은밀히 움직이는 핵추진잠수함이야말로 미국의 핵전쟁도발을 50개의 핵탄두로 억제하는 가장 강력한 전략무기체계가 아닌가!  

 

(조선의 신형 무기체계를 분석한 두 번째 글은 여기서 끝맺고, 세 번째 글은 다음 월요일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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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훈의 글로벌 리포트] 코로나19 2차 대유행, 다시 한국 방역에 주목하는 나라들

  20.10.26 07:38최종 업데이트 20.10.26 07:38
 

▲ 23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주 나폴리에서 상인들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야간통행 금지령에 항의하며 촛불 시위를 벌이고 있다. 캄파니아주는 이날부터 코로나19 재확산 차단을 위한 야간통금에 들어간다. 시간대는 밤 11시부터 다음날 오전 5시까지다. ⓒ 연합뉴스

 
전 세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누적 확진자가 4천 3백만 명을 넘어섰다. 특히 유럽에서는 2차 유행이 현실화되면서 피해규모도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그에 따라 해당 지역 방역당국들의 고심도 깊어지고 있다. 상황이 악화되면서 유럽 언론들이 한국을 비롯한 모범적 방역 국가들의 코로나19 대응에 다시 주목하기 시작했다. 지난 봄 1차 유행 당시와는 다른 이유 때문이다.

2차 대유행

지난 3~4월 1차 유행 당시 유럽은 효과적인 방역 모델을 갖추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각국 정부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장세는 방역당국의 통제 규모를 훌쩍 넘어서 버렸다.

무엇보다 정책적 판단 착오가 아쉬웠다. 마스크 논쟁이 대표적이다. 대부분 정부는 자국이 마스크 수급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실을 국민들에게 숨겼다. '의무진을 제외하고 마스크를 착용할 필요가 없다'는 부적절한 지침도 내려졌다. 심지어 마스크 판매금지령까지 나왔다. 유럽 국가들이 얼마나 팬데믹 상황을 안일하게 생각했는지 여실히 보여준 사례들이다.

시민들도 세기적 전염병의 심각성을 초기에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동아시아의 마스크 착용 습관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색적인 문화 정도로 치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100년 전 스페인 독감 창궐 당시 유럽인들에게도 마스크 착용이 일반화됐었다. 과거의 경험이 매뉴얼로 이어지지 못한 사례다.

그러다 한국의 코로나19 대응 모델이 혁신적이고, 무엇보다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서 유럽이 주시하기 시작했다. 영국과 스웨덴처럼 방임 수동적이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중국처럼 강압적이고 권위적이지도 않은 새로운 방역모델에 관심이 모아졌다. 이 모델이 서구사회에 적용 가능한지 논쟁도 이어졌다.

▲방역당국의 공격적인 검사와 추적 ▲이를 위한 대대적 진단키트 생산 ▲첨단 정보기술(IT)의 활용 ▲정부의 투명한 프로세스 공유 ▲시민들의 능동적 참여. 이 요소들이 어우러진 것이 한국식 방역 모델이다. 이를 위해서는 선진적 의료체계와 첨단산업,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정부와 주권의식을 발현하는 시민의식이 필수적이다.

한국형 모델에 눈 뜬 여러 나라에서 이를 벤치마킹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도 1차 유행 당시 초반에 충분히 확보되지 못했던 진단키트와 마스크가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수급되기 시작했다. 방역당국은 좀 더 적극적 검사에 돌입했고 시민들의 마스크 착용도 점차 일반화를 거쳐 의무화 단계까지 이르렀다.

국가 차원의 집단봉쇄까지 경험한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등 서유럽 국가들은 신규 확진자 증가세가 둔화되자 점차 봉쇄를 해제했다. 특히 여름철 바캉스 시즌에 맞춰 대부분의 엄격한 조치들이 완화됐고, 시민들은 모처럼 코로나19의 피로감에서 벗어나는 듯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2차 유행에 대한 경고는 늘 제기돼 왔고, 9월을 지나면서 그 경고는 현실화됐다. 가을철이 되면서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신규 확진자가 급증가하기 시작한 것. 정부, 방역당국, 전문가 그룹은 역학분석과 대책마련에 나서지만 둘 중 어느 것도 쉬워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계절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같은 북반구에서 한국과 같은 나라는 오히려 8~9월보다 10월 들어 신규 확진자가 줄었다.
 

▲ 유럽대륙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2차 유행이 가속하는 가운데 10월 5일(현지시간) 스페인 마드리드의 한 병원에서 간호사가 마스크를 착용한 채 임금인상과 노동여건 개선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연합뉴스

 
물론 한국의 코로나19 역학관계를 유럽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우선 규모가 다르다. 그리고 8~9월 신규 확진자 급증 이유에는 정부 지침에 반하는 종교행사, 대규모 집회의 상관 가능성이 열려 있다. 어떻든 가을 들어 확진자가 급증하고 있는 유럽과 달리 한국에서의 계절 영향은 현재까지는 크지 않다.

일본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일본에서는 여전히 하루 신규 확진자가 4백~6백 명 발생하는 등 한국보다 피해규모가 크다. 한국에 비해 누적 확진자는 네 배 가까이, 사망자는 세 배 이상 많다. 하지만 일본 역시 7~8월에 피해가 더 컸고 가을 들어 오히려 신규 확진자는 줄어드는 추세다. 결국 유럽의 확진자 급증 요인을 계절에서만 찾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왜 한국처럼 안 되지?

그렇다면 유럽발 2차 유행의 원인은 무엇일까? 물론 코로나19에 대해 발생경로를 포함해 관련 정보가 현저하게 부족한 현 상황에서 병리학적 원인규명은 불가능하다. 현재로서는 방역당국의 정책적 판단과 시민의 생활방역으로 수렴되는 결과만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특히 한국을 벤치마킹한 나라들의 경우 한 동안 선방하는 듯 보이다 왜 다시 악화되는지 이유를 파악하는 게 해당국에게도 또 한국에게도 중요하다. 어쨌든 우리는 생활방역으로 2차 유행을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서구 언론들이 한국에 다시 관심을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같은 모델을 사용한다 해도 결과에 차이가 난다면 그 원인을 알아야 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지난 13일 영국의 <가디언>은 영국이 코로나19 관련 검사와 추적을 했음에도 미미한 효과밖에 얻지 못한 이유를 분석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영국은 코로나19와 관련해 진단검사와 추적 프로그램을 가동하는데 120억 파운드(약 17조 7천억 원)가 소요됐다고 한다. 그럼에도 왜 미미한 효과밖에 얻지 못했을까?
 
한국과 달리 영국에서는 사생활 침해에 대한 불신이 끝내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라는 동력을 이끌어내지 못했다고 이 신문은 지적한다. 세계적 대유행 확산 초기에 앱이나 하드웨어를 통한 모니터링을 포함해 진단과 추적이 큰 화두로 떠올랐지만 영국에서는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두려움이 효과적 방역을 막았다는 것.

게다가 앱 다운로드와 사용에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았다는 점도 이 신문은 지적하고 있다. 격리 수칙 준수 문제 역시 영국의 효과적 방역을 방해하는 문제로 제기됐다고 이 신문은 밝히고 있다.

정부 역량에서도 문제가 지적됐다. 이 신문은 영국의 검사 인력이 부족해 진단검사를 하고 결과를 받기까지 오래 기다려야 하는 까닭에 검사·추적 시스템의 유용성이 떨어졌다고 지적한다.
 

▲ 지난 13일 영국의 <가디언>은 영국이 코로나19 관련 검사와 추적을 했음에도 미미한 효과밖에 얻지 못한 이유를 분석했다. ⓒ 가디언 기사 캡처

 
외신들의 지적

<가디언>은 영국이 검사와 추적에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이유와 관련해 이 모델로 성공한 가장 대표적인 나라로 한국을 꼽고 있다. 왜 같은 모델이 한국과 달리 영국에서는 실패했을까? <가디언>의 지적과 앞서 언급한 한국형 방역모델의 다섯 가지 요소를 비교하면 몇 가지 문제점이 노출된다.

우선 영국에서는 충분한 검사를 위한 인력이 부족했다. 정부의 책임에 귀속되는 문제다. 그리고 역학조사에 필수적인 추적을 실패했다. 첨단 정보기술이 충분히 사용되지 못했기 때문인데, 이 문제는 사생활 침해 우려 문제와 관련된다.

이와 관련해서 <가디언>은 한국의 경우 사생활 침해 우려 문제는 재난상황을 규정한 해당 법률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위기에 대응하는 정치권의 순발력이 요구되는 문제인데 이 역시 정부와 정치권의 책임에 해당한다.

정부와 시민 사이에 수준 높은 주권민주주의 프로세스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해야 한다. 사생활 침해 우려 문제도 관련이 되지만 정부는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공개해야 하고 시민은 이에 대해 감시를 전제로 하는 신뢰를 보여줘야 한다. <가디언>은 란셋 보고서를 인용해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높고 정부가 내놓는 공중보건 지침이 명확한 나라들이 검사와 추적을 잘 활용한 나라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한 나라는 독일, 뉴질랜드, 노르웨이, 스코틀랜드, 한국이었다고 밝혔다.

그 밖에 마스크 착용 여부가 방역 성공 여부의 차이였다고 지적하는 언론도 있다. 미국의 월간 <애틀랜틱>(The Atlantic)은 10월호 기사 'The COVID-19 Fall Surge Is Here. We Can Stop It.'에서 '한국은 광범위한 봉쇄를 실시하지 않고도 코로나19 대응에 매우 성공적'이었다면서 대신 보편적인 마스크 착용과 감염 의심자 식별을 위한 추적, 핀셋 격리 등의 조합을 활용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역시 미국의 <시엔엔>(CNN)은 13일 '코로나19에 대한 서구의 많은 국가, 특히 미국의 실패가 아시아인들의 관점에서 놀라운 것처럼 보이지만 마스크 착용만큼 코로나19 대응 방식의 차이를 부각시키는 것은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 밖의 많은 서구 언론들도 유사한 지적을 하고 있다. 결국 문제는 '어떤' 모델을 적용하느냐 못지않게 '얼마나 철저하게' 적용하느냐 역시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원론적 이야기임에도 세계적 대유행과 같은 엄중한 상황에서마저 지켜지기 쉽지 않은 명제다. 하지만 백신과 치료제가 원활하게 공급되기 전까지 이번 겨울을 생활방역으로 이겨내야 하는 이상, 지속적으로 반복할 수밖에 없는 명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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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악했고, 정부는 약했다”

[인터뷰] 이보라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동대표

김백겸 기자 kbg@vop.co.kr
발행 2020-10-25 16:35:35
수정 2020-10-25 17: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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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공원 인근에서 열린 '의료4대악 정책추진 반대 전국의사 총파업 궐기대회'에 참가한 대한전공의협의회 소속 전공의들이 의대 정원 확충, 원격의료, 공공의대 설립 등의 반대를 촉구하고 있다. 2020.08.07
7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공원 인근에서 열린 '의료4대악 정책추진 반대 전국의사 총파업 궐기대회'에 참가한 대한전공의협의회 소속 전공의들이 의대 정원 확충, 원격의료, 공공의대 설립 등의 반대를 촉구하고 있다. 2020.08.07ⓒ김철수 기자  
 
"의사들의 속마음이 다 들켜버린 거죠. 그동안 도도하게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체면도 집어던지고 싸우다 보니 천박하고 속물적인 속성이 드러난 거죠"

이보라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공동대표는 지난 8월 중순부터 보름간 진행된 '의사 파업'에 대해 "의사들의 속마음이 드러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의사정원 확대' 등 정부의 의료정책을 반대하며 시작된 의사들의 집단행동은 '의사파업'을 주도한 대한의사협회(의협)와 정부, 여당의 합의로 일단락됐다.

의사파업 이후 의사들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분노와 불신으로 바뀌었다. 이는 의사 파업에 동조했던 의대학생들의 의사면허 국가고시 재시를 반대하는 여론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아직 의협과 정부가 합의한 '의정협의체'에서 진행될 '의사정원 확대' 등 의료정책에 대한 논의도 과제로 남아있다.

 
이보라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공동대표가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보라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공동대표가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김철수

"의사 집단은 기득권을 위해 저항했고, 정부는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공동대표는 '민중의소리'와의 인터뷰에서 의사파업에 대해 "문재인 정부의 미흡한 의료 개혁 마저도 무산시킨,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 의사들의 집단 행동이었다"고 평가했다.

앞서 인의협은 의협이 주도한 의사 파업에 대해 "명분 없는 이익집단행동"이라며 반대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내놓은 '의사정원 확대안'에 대해서도 '의사 증원'이라는 방향은 합의하나 공공의료 강화가 빠진 미흡한 정책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 공동대표는 "문재인 정부의 공공의대 신설안이나 의대정원 확대안이 엄청나게 진보적인 정책도 아니지만, 이런 미흡한 정책도 기존 의사 집단이 받아 내지 못했다는 것"이라며 "의사 집단이 결국 사회 기득권층이란 것을 드러내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뺏기지 않으려고 저항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의사파업에 대형병원 응급실마저 정지된 상황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정부를 향해서도 "정부가 꼼짝 못 하고 타협할 수밖에 없는 허약한 모습을 보였다"고 꼬집었다.

전문가 집단의 집단행동으로 국가 주요 시스템인 의료 체계 전체가 흔들린 현상은 의료 인력의 양성 및 운영을 시장에 맡긴 비정상적인 의료체계의 약점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 공동대표는 "의료 시스템을 정부가 주도할 수 있을 만큼 공공병원 등 공공의료 인력들이 많았다면 좀 더 정부가 밀고 나갈 수 있을 텐데 민간집단의 파업 하나로 의료 시스템이 스톱된 상황이었다"며 공공의료 강화를 강조했다.

무엇보다 의사들의 자본가적인 인식이 드러난 사건이라고 봤다. 그는 "의사들 자체가 공공의료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면서 "국립대병원, 공공의료원 등 공공병원에서 일하는 의사 중에서도 일부가 파업에 참가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전국의사 2차 총파업( 집단휴진)에 돌입한 26일 오전 서울 26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앞에서 한 전임의가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정부는 이날 수도권 소재 수련병원에 근무하는 전공의·전임의에 대한 업무개시명령을 내렸다.  2020.08.26
전국의사 2차 총파업( 집단휴진)에 돌입한 26일 오전 서울 26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앞에서 한 전임의가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정부는 이날 수도권 소재 수련병원에 근무하는 전공의·전임의에 대한 업무개시명령을 내렸다. 2020.08.26ⓒ김철수 기자

특히 이번 의사파업에서는 파업에 참가한 의사들을 향한 국민들의 분노가 적극적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과거 의약분업을 반대한 의사파업 등 과거 의사들의 집단행동에서 특별한 국민 여론이 나타나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특이한 일이다.

이 공동대표는 엘리트주의를 가진 의사들이 국민들은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을 한 것을 원인으로 봤다.

실제로 그동안 의료계의 고질적인 문제인 가혹한 노동 환경에 시달려 온 전공의들이 오히려 의사파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의사정원 확대를 반대했다.

다른 한쪽에서는 문류분류 인원을 늘려 주지 않아 택배 노동자들이 연이어 과로사하는 일이 일어난 것을 생각해보면, 일반적인 임금 노동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이 공동대표는 "필수진료 영역에서도 진료거부한 전공의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알린다면서 전교 1등의 잘난 체 같은 것들만 있고 설득력은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왜 투쟁하는지 설명한다면서 '우리가 똑똑하고 우리가 이만큼 노력했으니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데 못하게 됐다'는 걸 납득시키려 하니 이상한 비유를 들고 그러다 보니 반응이 싸늘해 진거 같다"고 분석했다.

자극적인 표현과 가짜 뉴스를 이용해 자신들의 입장을 주장한 것도 국민들에게 반감을 샀다.

이 공동대표는 "공공의대를 만들어서 시민단체 자제를 입학시키려 한다든지, 의사들을 북한으로 보내려고 한다든지 설득력 없는 주장을 하면서도 '왜 국민들은 이해하지 못하냐'고 오히려 분노하는 모습들이 의식있는 시민들에게는 이해가 안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의사파업이 주장한 의사정원 확대 반대, 공공의대 반대 등 논점에 보수 세력을 끌어들여 정치 논쟁화 한 것도 문제였다. 실제로 공공의대와 관련한 대부분의 가짜뉴스들이 진보세력와 문재인 정부를 겨냥한 것들이었다.

국민 여론이 국시 재시를 거부하고 있는 것도 의대생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 공동대표는 "의협과 정부, 여당이 합의를 하면서 상황이 끝났고 한차례 국시가 연장되기도 했는데 계속 거부하는 명분이 뭔지 알 수 없는 모습을 보였다"면서 "안 그래도 채용 같은 공정성에 민감한 국민 여론이 의사파업으로 의사를 실체를 알게 되면서 반응이 싸늘해 진 것"이라고 봤다.

이보라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공동대표가 진료를 보고 있다.
이보라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공동대표가 진료를 보고 있다.ⓒ김철수

"결국 공공의료 강화...의사들이 공적인 시스템에서 일하게 해야"

의사파업으로 드러난 의사들의 인식은 오랫동안 공공의료를 무시해 온 비정상적인 의료 구조에 기인한다. 공공의료를 책임질 공공병원이 부족하니 민간병원 위주로 의료체계가 운영되고, 의사들은 자본을 쫓아 민간병원과 개원가로 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공동대표는 비정상적인 의료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결국 공공의료가 강화되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공공병원이 늘어나서 의사들이 영리적인 목적이 아닌 의사 본연의 의무를 다하면서도 보람을 느낄 수 있는 병원이 많아져야 한다"면서 "지금은 의사들이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해야 되는 구조인데 공공에서 일하는 의사들이 존경받을 수 있는 구조가 돼야 (의료 구조가) 바뀔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 한국에서는 코로나19 상황에 의사가 늘어나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에도 의사들이 반대하는데, 독일에서는 의사들이 나서서 의사 증원을 환영하기도 한다"면서 "공적인 시스템에서 의사들이 일하면 상식적인 게 통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공동대표는 의협과 정부만으로 구성되는 '의정협의체'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냈다. 국민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의료정책을 이익을 앞세운 전문가집단과의 논의로만 결정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그는 "의정협의체에서 국민 건강을 좌지우지할 의료정책을 결정해선 안 된다"면서 "이익집단과 정부와의 거래가 의료체계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더구나 의사정원 확대를 반대한 의협과 미흡한 의사정원 확대안을 냈던 정부가 논의할 경우, 의사정원 확대 정책이 정부안보다 더 후퇴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를 막기 위해 의료서비스의 또다른 주체인 국민이 논의에 참여해야 한다고 이 공동대표는 주장했다. 그는 "보건 의료, 국민 건강의 문제는 의사와 국민이 주체"라며 "정부가 국민을 완전히 대변한다고는 할 수 없으니 정부와 의사에게만 맡겨선 안 되고 시민사회 분야에서 견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시민사회단체가 포함된 협의체를 구성해서 충분한 공론화 과정을 거친 뒤 합의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주요 대학병원장들이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를 찾아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예방하고 있다. 사진은 사진은 왼쪽부터 김영훈 고려대의료원장, 윤동섭 연세대의료원장, 김연수 서울대병원장, 김영모 인하대의료원장. 2020.10.13
주요 대학병원장들이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를 찾아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예방하고 있다. 사진은 사진은 왼쪽부터 김영훈 고려대의료원장, 윤동섭 연세대의료원장, 김연수 서울대병원장, 김영모 인하대의료원장. 2020.10.13ⓒ정의철 기자/공동취재사진

이 공동대표는 반대 여론이 높은 국시 재시와 관련해서는 "원칙"을 강조하면서도 재시가 진행되지 않을 경우 의료체계에 가해지는 충격을 우려했다.

그는 "내년 의대 졸업생 중에 일정 정도는 군의관, 공중보건의로 충원돼야 하는데 한 해에 수가 부족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면서 "또 다음 해에는 병원에 들어오는 인턴 규모가 2배가 되니까 인턴과 레지던트에 의존하는 수많은 병원은 힘들어진다"고 우려했다.

이어 "의대생들이 현재 의료체계에서 전문성을 가진 강자라는 걸 알고 이 같은 집단행동을 벌인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국시는 실기기험으로 응시 대상자 중 14%만이 응시했다. 내년 1월에 치러지는 필기 시험에는 응시 대상자 대부분이 응시한 상태다. 이에 올해가 아닌 내년 상반기에 실기 시험을 한번 더 진행해 인턴 부족·몰림 현상을 완화할 방안도 거론된다.

이 공동대표는 이번 국시에 응시한 의대생들의 차별을 받을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의대생 사이에서 국시 거부에 반대 입장을 보이기가 쉽지 않은 분위기라는 말들이 들려온 만큼 국시에 정상적으로 응시해 먼저 병원에 가게 될 인턴들이 의사 사회에서 차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우려다.

그는 "올해 시험을 보고 정상적으로 올해 의사면허증을 받은 학생은 3월에 인턴으로 출근하게 될 텐데 현재로서는 극소수가 될 것 같다"면서 "이 인턴들은 병원에서 보기에 '파업에 열심히 참여 안 했겠지'라는 시선으로 보여서 차별을 받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백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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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경영자 이건희, 글로벌 삼성을 키워낸 힘

등록 :2020-10-25 10:37수정 :2020-10-25 10:40

 

이건희 회장 별세
2003년 10월10일 이건희 회장이 경기도 화성 삼성전자 메모리 연구동 전시관에서 황창규 사장으로부터 차세대 메모리에 관해 설명을 듣고 있다. 이 회장은 25일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8세. 2014년 5월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진 뒤 6년 만이다.
2003년 10월10일 이건희 회장이 경기도 화성 삼성전자 메모리 연구동 전시관에서 황창규 사장으로부터 차세대 메모리에 관해 설명을 듣고 있다. 이 회장은 25일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8세. 2014년 5월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진 뒤 6년 만이다.
한국 사회에서 삼성은 기업 이상의 특별한 존재였다. 그 특별함은 상당 부분 이건희 회장에 기인한다. 긍정적으로, 그리고 부정적으로.2019년 삼성전자 매출액 230조원이 그해 정부예산 469조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현실은 한국 경제에서 삼성전자의 위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삼성전자의 국외 매출액 규모는 우리나라 수출총액의 20% 안팎이다. 삼성전자는 메모리반도체, 스마트폰, 티브이(TV), 디스플레이, 가전 등의 분야에서 세계 1위 제품을 만드는 한국의 대표기업이다.

■ 45살 때 총수 취임…“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

 

 소니, 파나소닉, 도시바, 제너럴일렉트릭(GE), 필립스, 모토롤라, 노키아,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 엘피다, 인피니온, 후지쓰, 히다치....후발주자 삼성전자는 숱한 선도 기업들을 따라잡거나 제물로 삼으며 정상으로 질주했다. 인터브랜드의 2019년 조사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브랜드 가치는 611억달러(약 71조원)로 애플,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코카콜라에 이은 세계 6위다. 종합전자기업으로는 세계 최고이자, 미국 이외 기업으로는 맨 앞자리에 있다. 직·간접적으로 삼성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고 전세계인은 삼성을 알고 있다.

 
국외매출 비중이 86%에 이르는 삼성전자의 2018년 영업이익 58조원은 그해 국내 무역흑자액 705억달러(약 85조원)의 68%에 해당하는 규모다. 무역수지, 산업경쟁력, 고용, 투자, 국가이미지 등 한국 경제의 상당 부분을 삼성전자가 담당하고 있다. 2019년 62개 삼성 계열사들의 전체 자산에서 삼성전자의 비중이 절반 이하인 것을 감안하면, 국가 경제에서 삼성의 비중은 막대하다.이병철 선대회장이 1938년 삼성물산(삼성상회)을 창업하고, 이후 삼성전자를 설립해한 뒤 1983년 선도적인 반도체 투자로 터전을 닦았지만, 한국의 선두 기업에 불과하던 삼성을 전자·디지털 분야 최고의 글로벌 브랜드로 키워낸 경영자는 이건희 회장이다. 3남으로 태어난 그는 24살인 1966년부터 동양방송·삼성물산 등에서 10여년간 후계자 수업을 받다가 부친 이병철 회장 사망 12일 만인 1987년 12월1일 삼성그룹 회장에 올라 그룹을 물려받았다. 45살의 그룹 총수는 취임사에서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고 약속했다.■ 1993년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이 회장은 공개적 자리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고 말을 아껴 ‘은둔의 경영자’로 불렸다. 그의 역할과 말이 널리 알려진 순간은 1993년 6월 독일에서의 선언이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한 호텔로 그룹 핵심 경영진 200여명을 불러모았다. 이 자리에서 ‘신경영 선언’을 하고 그룹 간부들과 함께 68일간 유럽과 일본의 산업현장을 돌아보며 자신의 경영철학을 설파하는 ‘벤치마킹 그랜드투어’를 했다. 그는 “(회사 미래를 생각하면) 밤에도 잠이 오지 않아 1년 전부터 하루 3~5시간 밖에 못잤고 깨어나면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고 위기론을 설파했다. 당시 삼성전자는 앞선 기업들의 제품을 빠르게 모방해 저렴한 가격과 무난한 기능을 경쟁력으로 삼는 게 기본전략인 기업이었다. 그는 수원사업장 세탁기 조립라인에서 작업자들이 금형 사출 불량으로 닫히지 않는 세탁기 뚜껑을 손으로 일일이 깎아서 조립하는 모습을 고발하는 사내방송 영상을 보여준 뒤 “마누라와 자식빼고 다 바꾸자”고 주창했다. “국제화시대엔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가 될 것이다. 지금처럼 잘 해봐야 1.5류다”라고 말하고, 양적 경쟁 위주에서 질 위주로 변할 것을 주문했다.이때부터 이 회장은 불량품이 나오면 해당 생산라인 가동을 전면 중단하는 ‘라인스톱제’를 도입하는 등 품질 제고에 온힘을 쏟았다. 1995년 3월 구미공장 ‘무선전화기 화형식’은 상징적이다. 당시 무선전화기 불량률이 11.8%까지 치솟자, 이 회장은 질책하며 불량제품 15만대(150여억원어치)를 수거해 공개 화형식을 가졌다. 품질 경영을 향한 비장한 각오였다. 1995년엔 닐 암스트롱, 찰스 린드버그 등 역사적 인물들을 내세워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는 시리즈 광고를 진행하며 ‘세계 일류’만이 생존의 길이라고 강조했다. ‘신경영 선언’이 내건 대로, 삼성은 품질 우선으로 혁신했고 많은 제품이 ‘세계 1위’에 올랐다.
20일 서울 한남동 소재 승지원에서 이건희 삼성회장(사진 오른쪽)이 한국을 방문한 주바치 일본 소니 차기 사장(사진 왼쪽)을 맞아 반갑게 악수하고 있다. 삼성그룹제공
20일 서울 한남동 소재 승지원에서 이건희 삼성회장(사진 오른쪽)이 한국을 방문한 주바치 일본 소니 차기 사장(사진 왼쪽)을 맞아 반갑게 악수하고 있다. 삼성그룹제공
■ 영화·자동차에 마니아적 취향삼성이 후발주자로 뛰어들었지만 최고의 자리에 오른 메모리반도체와 스마트폰, 디스플레이의 성공에는 이 회장의 통찰력있는 리더십과 과감한 결정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첨단기술과 제품 전환주기가 빨라 신속한 기술개발과 대규모 투자가 필수적인 이 분야에서 ‘이건희 경영’이 주효했다. 서울대 송재용·이경묵 교수는 <삼성웨이-이건희 경영학>에서 대규모 조직이면서도 빠른 의사결정 구조를 갖춘 ‘패러독스 경영’이 이건희식 경영의 특징이라고 봤다. 주력제품인 디(D)램 반도체의 경우 개발과 양산·출시가 경쟁사보다 배 이상 빨라 경쟁자가 모방하기 힘든 방식으로 경쟁력을 만들어냈다고 평가했다. 삼성전자는 1992년 세계 최초로 64MB D램을 개발하면서 1위로 올라선 뒤 이후 D램 세계시장에서 40% 넘는 점유율로, 28년째 부동의 1위를 유지하는 절대강자다.이 회장은 영화, 전자제품, 자동차 등에 마니아적 취향을 갖고 젊을 때부터 직접 분해조립해 보며 기술적 지식과 통찰력을 키웠다. 2002년 이 회장이 디자인에 깊이 관여해 ‘이건희폰’으로 불리는 조약돌 모양의 휴대전화(모델명 ‘SCH-X430’)은 단일 모델로 1000만대 넘게 팔리는 기록을 낳기도 했다.이 회장은 인재 육성을 강조하고 “21세기는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10만~20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천재경영론’을 펼쳤다. 삼성은 학벌, 지연 아닌 철저한 실적 위주 인사가 자리잡은 기업으로 통한다. 그는 1990년부터 1년 이상 국외에서 현지 문화와 언어를 익히는 지역전문가 제도를 도입해 글로벌 전문인력을 체계적으로 육성하며 국제화시대를 대비했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2011년 “지역전문가 제도는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빠르게 성공한 핵심 비결”이라고 평가했다. 이 회장은 한국의 삼성을 세계 속의 삼성으로 키워냈고, 한국사회가 단기간에 글로벌화에 적응하고 수혜를 누리게 만드는 데도 기여했다.■ 안기부X 파일 등 정경유착의 상징하지만 이건희 회장 자신과 삼성의 일부 모습은 ‘글로벌 표준’의 예외일 뿐더러 국내 법과 시민의 상식을 무시한 일탈과 퇴행의 연속이었다. 삼성은 세금없는 승계를 노린 탈법·편법 경영, 노조 설립을 방해·탄압해온 무노조 경영, 뇌물과 정치자금으로 권력을 관리하고 대가를 누려온 정경유착 재벌의 상징이었다.이건희 회장은 전두환·노태우 특검 재판에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100억원 뇌물 제공이 밝혀져 1996년 징역 2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2007년엔 삼성그룹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으로 삼성의 광범하고 조직적인 불법 비자금과 로비, 차명재산 의혹이 드러났다. 이듬해 ‘삼성비자금 특검’을 거치면서 이 회장은 대국민 사과를 하고 삼성 경영에서 물러났다.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을 선고받았지만 1년 뒤 유례없는 대통령 단독사면을 받았다. 2005년 언론 보도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이학수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간 대화를 도청한 ‘엑스파일’이 알려졌다. 삼성이 ‘떡값’과 ‘정치자금’으로 정·관계 주요 인사들을 ‘삼성장학생’으로 포섭하고 관리해온 사실이 드러났다. 삼성쪽의 뇌물 공여자는 무사했지만 ‘삼성 떡값 검사’를 공개한 노회찬 의원은 통신비밀 위반으로 의원직을 잃었다. 삼성의 무소불위 권력을 실감한 순간이다.■ 편법·탈법 승계…후계자의 발목 잡는 짐삼성의 탈법·초법적 행위는 기본적으로 세금없는 상속·승계와 총수 일가의 변칙적인 계열사 지배력 유지 욕구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 자신도 공익법인을 통한 변칙 증여를 받았다.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삼성그룹의 경영권(11조5000억원)을 넘겨받을 때 낸 증여·상속세는 181억원이다. 이 회장은 아들 이재용 부회장 등 세 자녀에게도 ‘세금 없는 대물림’을 이어갔다. 이재용 부회장이 글로벌 기업 삼성의 경영권을 승계하는 데 든 돈은 60억원이다. 이 회장은 아들에게 1995년 60억8000만원을 증여했고 이재용 부회장은 이에 대한 증여세 16억원을 냈을 따름이다. 44억원을 종잣돈으로 삼성에버랜드의 전환사채(CB) 헐값 발행, 삼성에스디에스(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저가 배정 등의 편법·탈법을 통해 회사와 주주의 몫을 자식들에게 빼돌린 것이다. 경영권 승계를 위한 일감 몰아주기와 부당 내부거래는 삼성의 일상이었다.이건희 회장은 삼성을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기업으로 키워내며 막대한 경제적 기여를 한 탁월한 경영자다. 거인이었지만 사회적 책임에는 소홀했다. 이 회장은 2008년 비자금 특검으로 퇴진하면서 순환출자 해소와 지주회사 전환을 약속했다. 숨겨왔던 차명 재산도 실명전환 뒤 벌금과 세금을 내고 남은 조 단위의 돈을 사회환원하겠다고 말했다. 그가 숨지면서 풀지 못한 채 남긴 과제가 됐다. 편법과 탈법을 통해 최소한의 돈으로 경영권 승계를 이뤄내려던 비책도 결국엔 후계자의 발목을 잡는 짐이 됐다.
 
구본권 선임기자 starry9@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967091.html?_fr=mt1#csidxe44e2b1ab282822a106f5974de2fa6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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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의 대전환, 기후위기를 말하다

[인터뷰] 정성헌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

환경단체나 국제기구가 아니다. 새마을운동중앙회가 지난 6월 선포한 '생명살림국민운동' 선언문 중 일부다.

 

알다시피 새마을운동은 군부독재시절 관변 운동단체다. 특히 5공 시절에는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회장을 맡으면서 온갖 비리의 온상이었다. 이후 5공 청산의 일환으로 전경환이 처벌되고 새마을운동은 지역봉사단체로 거듭났지만 여전히 민주화운동과는 대척점에 있는 곳이었다.

 

그런 새마을운동은 지난 2018년 정성헌 회장이 취임하면서 큰 변화를 맞이한다. 정성헌 회장은 1970년대 가톨릭농민회부터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이후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인제 평화생명살리기 운동본부 등 재야에서 활동해 온 민주화운동의 원로다.


 

정성헌 회장은 지난 6월 '생명살림국민운동'을 선포하며 새마을운동을 기후위기 극복 운동단체로 탈바꿈한다. 정성헌 회장은 선포대회에서 "운동은 그 시대의 가장 근본적이고 절실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70년대의 시대적 과제가 절대가난 극복이었다면 지금은 기후위기 극복"이라며 "새마을운동은 절대가난을 극복한 역사적 경험과 성취를 바탕으로 우리 시대의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새로운 문명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했다.

 

새마을운동의 생명살림국민운동이 특별한 이유는 구호에만 그치지 않고 기후위기 극복을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바로보기 : 생명살림국민운동 다큐멘터리)


 

<프레시안>이 지난 16일 정성헌 회장을 만나 새마을운동이 대전환을 맞이하게 된 배경과 이유, 그리고 '생명살림국민운동'이 목표로 하는 '1건(建)·2식(植)·3감(減) 운동'에 대해 이야기했다. 인터뷰는 박인규 프레시안 이사장이 진행했다.

 

▲정성헌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 새마을운동은 올해 코로나19 사태에 100만 개 이상의 마스크를 제작해 배포했다. ⓒ프레시안(최형락)

새마을운동, 농촌부흥운동에서 생명살림운동까지


 

프레시안 : 2020년 올해는 새마을운동 50주년이다. 새마을운동은 정부 주도의 농촌부흥운동이었으나 위상과 역할이 크게 달라졌다.


 

정성헌 : 새마을운동은 처음부터 정부가 주도한 운동이 아니었다. 새마을운동이란 말을 처음 도정 목표로 쓴 곳은 1963년 경상남도였다. 자생적인 농촌운동으로 시작했다. 이미 경북 청도, 전남 영광, 경북 포항에서는 대표적인 자생 새마을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지역사회에서 퍼지던 새마을운동을 1970년 박정희 정부가 포착해서 전국적인 '농촌 잘살기 운동'으로 발전시켰다. 그래서 1970년 새마을운동을 창립했다고 안 하고 '제창했다'고 표현한다.

 

민주화이후 새마을운동은 국민봉사운동체로 바뀌었다.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집중해왔다. 의성 새마을은 플라스틱 농약병을 수거해 1억에 달하는 수익을 얻었다. 이 수익금을 다시 지역의 소외된 노인들을 위해 썼다. 성남 새마을은 가로수나 전봇대 옆에 깃발 꽂는 일을 한다. 사소해 보이지만 품이 많이 들고 귀찮은 일인데 꾸준히 그런 봉사를 해오고 있다.

 

세월호 침몰 당시에 팽목항에서 유가족 곁을 지키며 처음부터 끝까지 봉사활동을 해온 건 진도 새마을부녀회였다. 올해는 코로나19가 퍼지면서 2월부터 추석 전까지 45만 명의 회원들이 13만 회 이상의 방역활동, 마스크 100만 개 이상을 제작·배포 했다.


 

프레시안 : 올해는 생명살림국민운동으로 전환을 선언했다. 생명살림국민운동은 무엇인가

 

정성헌 : 생명살림국민운동은 기후위기와 생명의 위기를 극복하자는 국민참여운동이다. 기후위기에 대한 심각성을 깨닫고 이에 대응하는 실천운동이다.


 

기후위기가 이대로 이어진다면 2040년대 중반에 한반도는 기후이탈이 되어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된다. 기후위기는 전 지구적인 위기다. 지구의 온도가 1℃만 올라도 가뭄이 계속되고 육상 생물은 10% 이상 멸종한다.

 

이에 따라 2015년 채택한 파리 기후협약에서는 지구의 온도 상승을 산업화 이전에 비해 2℃보다 훨씬 아래를 유지하고, 더 나아가 1.5℃까지 제한하도록 노력하기로 했다. 우리나라도 이에 따라 2030년까지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배출전망치 대비 37% 감축하기로 했는데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없다. 이건 정부만 주도해서도 안 되고 국민 참여가 절실한 운동이다.


 

프레시안 : 생명살림운동은 환경단체가 해야 할 것 같다. 새마을운동이 이를 핵심 목표로 삼게 된 이유가 있나.

 

정성헌 : 운동은 그 시대에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해결하는 방법은 자기가 처한 조건과 가진 힘에 맞는 방식으로 찾아야 한다. 새마을운동은 18개 시·도, 288개 시·군·구 조직, 3200개 읍·면·동 조직을 가진 200만 명 규모의 큰 대중운동 단체다. 행동으로 실천해왔다는 것이 새마을 운동의 가장 큰 특징이나 장점이다.

 

70년대는 가난하니까 그걸 해결하고자 했고 지금은 환경과 생태계를 살리는 생명살림운동이 필요한 때다. 지금 기후위기에 대처하지 않으면 절멸할 것이다. 이 명제에는 대부분 동의한다. 미세먼지 문제만 하더라도 도시나 농촌 할 것 없이 밖에 빨래를 널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다. 2018년에 최대 폭염과 열대야가 왔다. 그러다 올해 코로나19까지 왔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가 됐다.


 

새마을운동의 생명살림운동은 지역사회 곳곳이 뿌리내린 새마을운동 조직을 바탕으로 국민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환경을 넘어 생명으로, 평등을 넘어 평화, 인권을 넘어 공경' 새마을운동이 새로 목표로 하는 '생명·평화·공경'이다.


 

프레시안 : '생명·평화·공경'은 새마을운동의 표어였던 '근면·자주·협동'과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환경운동과 생명살림운동은 어떻게 다른가.


 

정성헌 : 그 두 질문이 가장 많이 나온다. 우선 근면·자주·협동은 운동에 임하는 자세다. 이 자세를 가지고 생명·평화·공경의 가치를 실현하자는 거다.


 

생명·평화·공경은 '환경을 넘어 생명으로, 평등을 넘어 평화, 인권을 넘어 공경으로'라고 설명한다. 보다 높은 차원을 이야기 하자는 거다. 어떤 문제는 좀 더 높은 차원의 가치를 지향할 때 해결된다. 인권만 외치면 고소·고발로 끝나고 평등만 외치면 자본과 노동자간 싸움에서 그치는 것처럼. 환경도 마찬가지다. 환경만 외치면 지금의 기후위기나 전체 생명질서의 붕괴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생명살림운동은 환경운동보다 더 큰 개념이다. 지금은 전 지구적인 기후위기로 생명질서가 붕괴의 위험에 처해 있다. 환경운동이 인간의 관점에서 생태계를 바라본다면 생명살림운동은 생태계를 전일적으로, 유기체적 관점으로 바라본다.

 

농민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원로 정성헌에게 생명운동이란


 

프레시안 : 농민운동(가톨릭농민회), 민주화운동(6월민주항쟁 전국상임집행위원장) 거쳐 현재는 생명운동에 몸담고 있다.


 

정성헌 : 70년대 중반에 농민회에 참여하면서 농민운동을 시작했다. 그때 농약으로 인한 피해를 알리며 '농약공해'라고 했다. 그 대안농법으로 효소농법을 배우고 실천했다.


 

80년대 신군부 쿠데타 이후 변화기를 겪으며 민주화운동을 병행하게 됐다. 현대 과학기술 자본주의 거대문명 자체가 폭력의 뿌리라는 문제의식에서였다. 이걸 극복하려면 농민운동만으로도, 민주화운동만으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생명공동체'라는 말을 80년대 중반부터 쓰기 시작했다. 생명운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건 6월민주항쟁 후다. 유기농, 도·농 공동체 운동을 하면서 대중운동은 90년대 우리밀 살리기 운동으로 발전했다.


 

프레시안 : 2018년 봄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 맡게 됐다. 진보 운동권 원로가 어쩌다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을 맡게 됐나.


 

정성헌 : 2017년 문재인정부 출범 후에 당시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으로부터 제안이 왔다. 새마을운동이 농촌에서 시작된 대중운동이니 정치적인 사람이 아니라 대중운동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 맡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네 달을 거절하다가 결국 해보겠다고 하고 회장 선거에 후보 등록 했다.


 

중앙회 내부에서는 진보운동권 원로가 출마한다고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 그래서 소통을 많이 하려고 했다. 그때 회장에 출마하려던 분이 또 계셨다. 새마을운동중앙회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부녀회장도 하셨던 분이었다.

 

그분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분이 나에게 "내가 출마하려고 했던 건 중앙회가 잘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당신이 훨씬 잘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본인이 생각하는 중앙회의 잘못된 점과 고쳐야 할 방향 20가지 정도를 적어서 줬다. 나도 대부분 공감하는 내용이었다.


 

결과적으로 찬성 79%로 내가 당선됐다. 회장 취임 후 110일, 네 달 정도를 많은 모임과 토론을 거쳐 이런 생명살림국민운동으로의 대전환에 합의했다. 내가 추천한 이사들 뿐 아니라 기존의 이사들도 지지해줬다. 시작이 좋았다.

 

"하나를 세우고 두 개를 심고 세 가지를 줄이자"


 

프레시안 : 목표인 1건(建)·2식(植)·3감(減)에 대해 설명해 달라.


 

정성헌 : 1건(建)은 생활현장에 유기농 태양광발전소를 짓는 것이다. 2식(植)은 나무와 케나프(양삼)를 심는 운동이다. 케나프는 기후위기 극복에 큰 도움이 되는 식물이다. 나무는 자라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반면 케나프는 1년생이라 금방 자라고 광합성도 활발해 온실가스를 줄이는데 효과적이다.


 

3감(減)은 화석 에너지, 비닐과 플라스틱, 수입 육고기를 30% 줄이는 운동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인간이 멈추니까 지구가 살아났다'는 걸 알게 됐다. 온실가스를 발생시키는 화석 에너지, 비닐과 플라스틱, 수입 육고기를 당장 멈출 수는 없지만 줄여나가자는 거다.


 

1·2·3 운동이라고 했지만 실천은 3·2·1로 하자고 한다. 무슨 뜻이냐면 3가지를 줄이는 것, 2가지를 심는 것은 개인이 할 수 있다. 유기농 태양광 발전소 하나를 세우는 건 개인이 혼자 하기 어렵다.


 

프레시안 : '유기농 태양광발전'은 뭔가.


 

정성헌 : 유기농업과 태양광 발전을 함께 하는 거다. 태양광 발전은 온실가스와 미세먼지 배출이 없는 신재생 에너지다. 그런데 지금 농지에서 태양광발전소를 설치하는 게 법으로 금지돼 있다. 농지 잠식을 이유로. 환경에 이로운 유기농법을 하는 농민들에게 태양광발전을 제한적으로 허가해주는 정책을 제안하고 싶다.


 

프레시안 : 기후위기 극복과 유기농이 무슨 상관인가.


 

정성헌 : 현재의 관행농은 화학비료를 사용하고 유기합성농약을 사용한다. 비닐 같은 농자재도 석유로부터 만들어진다. 화석연료를 엄청나게 쓴다는 말이다. 유기농으로 전환을 유도해야 화석연료 사용을 죽이고 기후위기 극복에 도움이 된다.


 

2017년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가 배출한 온실가스 총량이 7억 900만 톤이다. 그중 농업에서 나오는 게 2000만 톤이다. 7억 톤 중에 2000만 톤이면 별거 아니다 싶은데 2000만 톤 중에 58% 정도가 메탄가스다. 화학비료를 쓰기 때문이다. 석유화학 농업이기 때문이다.


 

메탄은 이산화탄소의 21배의 온실효과를 발생시킨다. 1000톤의 메탄은 실제로 2억1000만 톤의 역할을 하는 거다. 물론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에 100년 있다면 메탄은 몇 년 만에 없어지긴 한다. 근데 문제는 지금 몇 년이 시급하다는 거다. 획기적인 농업 대전환이 필요하다.


 

프레시안 : 태양광 발전과 유기농법을 동시에 하려면 별도의 태양광 패널이 필요하다고 본 것 같다.

 

정성헌 : 독일에서 많이 하는 방식으로 직립형이 있고 일본에서 많이 하는 공중형이 있다. 쉽게 할 수 있는 건 공중형이다. 태양광 패널을 높이 설치해서 햇살 투과도 되고 그 아래에서 농기계도 움직일 수 있다.

 

문제는 태양광 발전이 중요하다고 말로만 했지 우수한 국내 태양광 패널 기업들을 육성하지 않았다는 거다. 농지 잠식을 이유로 태양광 발전 건설 허가를 안 하니까 수요가 적어지고, 그러니 우수한 태양광 패널 업체가 자꾸 문을 닫는다. 법을 개정해 태양광 발전을 육성하고 수요를 늘려야 한다.


 

프레시안 : 1건, 유기농 태양광 발전 다음으로 중요한 건 무엇인가.


 

정성헌 : 케나프 심기를 강조한다. 2년 정도 직접 심어봤다. 케나프는 1년생이라 나무에 비해 금방 자란다. 지금 키우는 것 중 제일 크게 자란 게 5미터가 넘었다. 올해 있었던 폭우나 강풍도 다 견뎌냈다.


 

기후위기 극복에 케나프가 좋은 점은 빨리 큰다는 것도 있지만 광합성을 많이 한다는 점이다. 그만큼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 흡수량이 많다. 통계로 봤을 때 상수리나무의 10배, 소나무의 9배, 나무 평균으로 4배가 조금 넘는다.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케나프를 심는 건 국제적인 움직임이기도 하다. 후진타오 전 중국 주석은 2008년에 80만 헥타르에 케나프를 심자고 했다. 우리나라 논 전체 면적 정도이다. 미국도 마리화나를 이유로 케나프를 불법화했다가 재작년에 법을 바꿔서 대대적으로 장려하고 있다.


 

케나프는 쓰임새도 많다. 목포 새마을회는 케나프를 이용해 화장품을 만들었다. 부산 새마을회는 지팡이를 만들어서 노인회에 기증도 하고 케나프를 이용한 요리경연대회도 했다.


 

케나프는 또 좋은 종이의 원료다. 지폐를 만들 때도 사용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전량을 수입하고 있다. 소의 사료로도 쓸 수 있고 퇴비로도 이용할 수 있고. 일본에서는 천연 플라스틱을 만들어 자동차 내장재 소재로도 쓴다. 중앙회차원에서 시도해볼 생각이다.


 

▲정성헌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 ⓒ프레시안(최형락)

"3년간 500만 명의 생명살림운동 참여자를 육성하겠다"


 

프레시안 : 생명살림운동 지도자 1만 명, 활동가 10만 명, 참여자 500만 명 확보. 각자의 역할은. 어느 정도 진척됐는지

 

정성헌 : 지금 새마을운동중앙회 지도자가 17만 명이 있다. 주로 봉사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대중운동의 경험은 적다. 우선 이 17만의 지도자를 상대로 대중운동이 뭐고 생명살림운동은 무엇인지 집중적으로 교육할 생각이다. 그중 1만 명을 선발해 생명살림운동 지도자로 육성할 계획이다.
 

 

한 명의 지도자가 10명의 활동가를 만들고, 한 명의 활동가가 50명의 시민을 만나 참여를 독려한다면, 3년이면 가능할 거라 본다. 

 

프레시안 : 3년간 500억 기금 모금을 목표로 했다. 정부 지원은 없나. 어디에 쓸 계획인가.

 

정성헌 : 새마을운동중앙회는 사단법인이지만 특별법 단체다. 행안부 소관이다. 다만 1999년부터 정부에서 운영비 보조를 전혀 받고 있지 않다. 회원들에게 회비를 걷고 교육수입이나 시설 임대수입 등으로 충당하고 있다.

 

작년 11월에 당시 이낙연 총리를 만났을 때 생명살림국민운동을 설명하니까 좋은 생각이라고 하면서 지원을 해야겠다고 했다. 나는 자원은 안 받는다고 했다. 처음부터 지원을 받으면 운동의 자발성이 떨어진다.

 

기금을 만든다는 건 참여하는 시민이 운동과 구체적으로 결합하는 것이다. 기금을 모금하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하지 못하는 시급한 생명살림운동부터 추진할 수 있게 된다.


 

우리밀 살리기 운동을 했을 때를 비춰보면, 100명의 사람을 만나면 25명이 후원을 한다. 4분의 1이다.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점점 느끼고 있기 때문에 참여하는 시민 참여가 활발할 거라 생각한다. 생명살림국민운동 모금을 시작한 지 20일 정도 됐는데 생각보다 모금이 많이 됐다. 대략 40% 정도가 기금을 내더라. 우선은 케나프를 활용한 천연 플라스틱 공장을 만들 생각이다.


 

그린뉴딜, '생명'이 있어야 한다.


 

프레시안 : 생명살림운동에서 '농업'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 아직 석유농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유기농으로의 대대적 전환 가능할까


 

정성헌 : 정부의 역할이 필요한 부분이다. 유럽이나 쿠바도 사실상 정부가 끌고 갔다. 최근에 농민수당이나 농민 기본소득 이야기가 나왔는데 적게는 친환경 농업, 크게는 유기농업 하는 사람들에게 지원하면서 전환을 유도해야 한다.

 

내가 계산해 봤을 때 그렇게 1년에 7조 원을 투자하면 7년 반 정도 됐을 때 우리나라 농림축산업의 80%가 지속가능한 산업으로 바뀐다. 정부가 그린뉴딜을 사면서 5년 간 73조 원을 투입한다고 한다. 자동차를 전기차로 바꾸고 풍력발전소를 세운다고 한다. 이건 효과가 바로 나온다. 정부와 기업이 하는 거지 국민의 자발적 참여는 없다.

 

기업과 정부의 그린뉴딜에서 끝나지 않고 국민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는 '생명사회로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국민 참여는 효과를 보는 데 시간이 걸린다. 경험상 농업에서 비료농약을 쓰지 않으면 3년 뒤에 반딧불이가, 7년이면 구렁이가 돌아온다. 10년이면 내가 있던 강원도에서는 산양이 새끼를 낳아서 돌아왔다. 생태계가 복원되는 것이다.

 

프레시안 : '생명의 열쇠로 평화의 문을 열고 평화의 들판에 통일의 집을 짓는다'고도 했다. 생명살림운동과 남북통일과도 연관이 있나.


 

정성헌 : 생명운동은 남북문제에도 연결된다. 'DMZ평화생명살리기'도 생명운동을 바탕으로 한다. 기후위기로 모든 생명체가 절멸의 위기에 있는데 그때가 되면 북한의 핵이 무슨 소용인가.


 

진짜 평화를 위해 북한과 함께 환경과 생태를 살리는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유엔이 제재한다면 국제사회를 설득해 제재를 뚫고서라도 해야 한다.


 

남북문제는 시간이 걸려도 한반도 생명공동체, 생태공동체를 만드는 걸 기본으로 해야 한다. 지하자원을 쓰고 철도 연결하고 하는 건 근사한 얘기인데 그보다는 22만 평방 킬로미터의 땅과 233만 평방 킬로미터의 바다를 어떻게, 어떤 생명체가 살 수 있도록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정부의 그린뉴딜은 생명운동에서 시작해야 한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102117014511036#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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