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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 계속 방사포를 쏘는 이유

북이 쏜 발사체, 방사포일까 미사일일까

한미합동군사훈련은 끝났으나 북한(조선)의 방사포 발사는 멈추지 않는다. 그 까닭을 알아보기에 앞서 북이 쏜 발사체가 미사일인지 방사포인지를 둘러싼 논란부터 해명해 본다.

방사포를 미사일로 오해한 이유는 북이 유도제어가 가능한 발사체를 쏘았기 때문이다.

발사체의 사거리가 400Km에 달하고 탄두 지름이 400mm가 넘는 것 때문에 미사일이 아니냐 하는 주장도 제기되지만, 이는 방사포(MRLS)와 미사일의 차이를 너무 모르고 하는 소리다.

방사포와 미사일을 구분하는 기준은 런칭(발사)장비와 유도제어다.

미사일의 런칭장비는 직선형 레일로 발사대라고 부르고, 방사포의 런칭장비는 나선 모양의 레일로 포신이라고 부른다.

직선 레일을 통과한 미사일은 자체 회전하지 않지만 나선 레일을 통과한 방사포는 회전하며 날아간다.

최근 북이 쏜 발사체에서 자체 회전이 확인됨에 따라 방사포로 분류되었지만, 유도 기능이 있다는 북한(조선)의 발표로 인해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일반적으로 방사포탄은 미사일과 달리 유도제어가 불가능하다.

나선형 홈이 있는 포신을 통과한 방사포탄은 회전 비행하므로 자이로스코프(축 회전)의 균형이 외부제어에 의해 변경되지 않아 유도가 불가능하다.

만약 방사포탄이 유도 제어가 되면 고도의 명중률을 가질 수 있으며, 비행고도가 낮은 데다 여러 발이 동시에 날아오기 때문에 요격이 불가능해진다.

“세상에 없는 또 하나의 주체 무기”라고 자랑하는 북한(조선)의 방사포에 과연 유도 기능이 탑재되었을까.

발사체의 유도제어는 추진엔진이 동작하는 능동구간에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방사포탄의 경우 능동구간에 외부제어가 불가능하므로 피동 구간(관성과 중력에 의해 탄도를 따라 비행하는 구간)인 종말 단계에 보조 엔진이 작동해서 궤적을 변경해야 한다.

무기 선진국의 경우 포탄 비행시간이 2분 이상인 대구경 장거리포의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 보조 엔진을 장착, 비행 과정에 공기저항으로 회전량과 속도가 감소하는 종말 단계에 엔진과 날개를 활용해 탄도를 수정하는 유도기능을 도입한다.

북한(조선)이 주장하는 “국방력 강화에서 전례 없는 기적 창조”란 이처럼 유도기능을 갖춘 방사포 개발을 두고 한 표현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북한(조선)은 유도 기능까지 갖춘 최신형 방사포를 왜 자꾸 쏘는 걸까?

그 이유는 지난 4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시정연설을 통해 이미 밝힌 바 있다.

시정연설에서 문재인 정부에 자주정신을 흐리게 하는 사대적 근성과 민족공동의 이익을 침해하는 외세의존 정책에 종지부를 찍고 모든 것을 남북관계 개선에 복종시킬 것을 요구했다.

특히 북미 관계 중재에 쓸데없는 힘을 쓸 대신 남북관계 개선에 미국 눈치 보지 말고 당사자로 나설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9월평양공동선언’에서 채택한 ‘군사분야 이행합의서’를 한미 합동군사훈련 실시로 파탄 내고, 한미 워킹그룹의 압력에 밀려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마저 재개하지 못함으로써 ‘평화 번영’의 길에 난관을 조성했다.

남북관계를 개선해 ‘통일 전성기’를 열겠다는 결심을 한 북한(조선)으로선 남측 당국에 경종을 울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조선)이 방사포를 쏜 또 다른 이유는 미국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각인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실제로 한반도 비핵화에 관하여 북한(조선)은 지난 2016년 발표된 ‘공화국정부성명’에서 미국이 한반도 주변에 전개한 핵 타격 수단의 제거와 한국에서 핵 사용권을 쥐고 있는 미군 철수를 요구했다.

그 때문에 이번에 쏜 방사포는 한미 합동군사연습 재개에 대한 대응이면서도 미국이 적대시 정책에 계속 고집한다면 자립적 국방산업의 기술 향상 계획이 계속 추진된다는 것을 암시했다.

특히 지금은 주한미군 기지를 사거리로 한 유도제어 방사포를 발사했지만, 연말까지 미국이 새로운 계산법을 들고나오지 않으면, 미국 본토에 도달하는 고성능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다시 개발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했다.

미국이 북한(조선)의 방사포에 담긴 정치적 메시지를 이해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방사포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데 주저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강호석 기자  sonkang114@gmail.com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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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자택 앞 “이재용 구속하라”

29일 대법원 판결앞두고 민주노총·민중공동행동 ‘기자회견’

프레스아리랑 | 기사입력 2019/08/28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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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과 민중공동행동이 27일 오전 이재용 자택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 노동과세계 정종배


민주노총·민중공동행동은 27일 오전 10시 이태원에 있는 이재용 자택 앞에서 ‘이재용 재구속 촉구’ 기자회견을 갖고 “국정농단 범죄자 이재용이 가야할 곳은 이 집이 아니라 감옥”이라면서 이재용 재구속을 촉구했다.

윤택근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삼성장학생 재판부가 2심에서 이재용을 국민의 뜻을 거스르고 집행유예로 풀어줬는데 박근혜, 최순실과 함께 29일 대법판결이 열린다니 다행이지만 더 늦기 전에 범죄자 이재용은 감옥에 가야 한다”면서 “제일모직 합병에 국민연금 6천억 손실,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몸통, 6천여 건의 노조파괴 문건 발견 등 범죄자 이재용의 구속은 국민의 명령이기 때문에 반드시 경영권 박탈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정진두 공무원노조 법원본부 사무처장은 “이재용 재판이 29일 대법 전원합의체로 선고가 예정돼 있는데 국민들이 바라는 결과가 나와야 한다”면서 “국민들의 염원을 담아서 이재용, 박근혜, 최순실에 대한 판결이 나올 때까지 농성장에 결합하고 실천해 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재용 자택은 사람들의 왕래가 끊긴지 오래된 집처럼 철문으로 굳게 잠겨 있었다. 이 부회장이 소유한 자택은 2006년 기준 42억 9천만 원으로 평가돼 당시 국내에서 가장 비싼 단독주택(연면적 578.42㎥·대지 면적 988.1㎡)으로 알려졌다.

참가자들은 이재용 자택 철문에 ‘경영세습 위한 뇌물’, ‘노조파괴 뇌물증여 분식회계’, 말 세 마리가 뇌물이 아니면 뭔가?‘ 등의 내용이 적힌 피켓을 철문에 붙이면서 “이재용을 구속하라”라고 외쳤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말 모양의 분장을 한 퍼포먼스 참가자들이 나와 눈길을 끌었다. 이재용이 박근혜를 통해 정유라에게 준 ‘말 세 마리’가 뇌물이냐 아니냐에 대한 여부가 이번 대법 판결에 쟁점으로 떠오른 탓이다.

세 마리 중 1번 말 분장을 한 참가자는 “2심에서 말의 주인이 아니라고 말해 이재용이 집행유예로 풀려났는데, 자그마치 38억이나 되는 말의 주인이 누구인지 상고심에서 명확히 가려지길 바라면서 서울을 돌아다니겠다”고 말했다.

2번 말 분장을 한 참가자는 “정유라에게 가서 잘 보여 주인 기 좀 살려주려고 열심히 고생해서 갔는데 뇌물이 아니라고 해서 속상하고 억울해서 나왔다”라고 빗대 말했다.

참가자들은 12시 광화문 세월호 광장, 14시 이재용이 박근혜, 최순실과 만난 곳 청와대 앞. 16시 이재용 집무실이 있는 삼성본관에서 기자회견, 선전전 등을 통해 ‘이재용 구속’을 알려나간다. 말 세 마리 분장 퍼포먼스도 함께 대동한다.

민주노총과 민중공동행동이 27일 오전 이재용 자택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 노동과세계 정종배

 

민주노총과 민중공동행동이 27일 오전 기자회견 후 삼성 리움갤러리 앞으로 이동하여 발언과 선전전을 이어가고 있다. ⓒ 노동과세계 정종배

 

민주노총과 민중공동행동이 27일 오전 이재용 자택 앞에서 주최하는 기자회견에서 참여자들이 상징의식으로 피켓을 붙이고 있다. ⓒ 노동과세계 정종배

 

민주노총과 민중공동행동이 27일 오전 이재용 자택 앞에서 주최하는 기자회견에서 윤택근 민주노총 부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 노동과세계 정종배

 

민주노총과 민중공동행동이 27일 오전 이재용 자택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 노동과세계 정종배

 

민주노총과 민중공동행동이 27일 오전 이재용 자택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 노동과세계 정종배

 

민주노총과 민중공동행동이 27일 오전 삼성 리움갤러리 앞에서 말인형을 입고 정유라와 최순실 가면을 쓴 참여자들이 갤러리 입간판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노동과세계 정종배

 

민주노총과 민중공동행동이 27일 오전 삼성 리움갤러리 앞에서 발언과 선전전을 이어가는 말머리 탈을 쓴 참여자들이 리움갤러리 입간판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노동과세계 정종배

<출처: 노동과세계 강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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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대전' 한가운데로... 검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분석] '조국 죽이기'와 '조국 구하기' 사이에서

19.08.28 07:07l최종 업데이트 19.08.28 11:08l

 

 

  27일 오후 경남 양산시 부산대병원 의학전문대학원 간호대학에서 압수수색을 마친 검찰이 상자를 옮기고 있다. 2019.8.27
▲   27일 오후 경남 양산시 부산대병원 의학전문대학원 간호대학에서 압수수색을 마친 검찰이 상자를 옮기고 있다. 2019.8.27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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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대전'의 한가운데로, 검찰이 성큼 뛰어들었다.

27일 오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특수2부(부장검사 고형곤)는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및 가족 의혹과 관련해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장소만 따져봐도 부산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사모펀드 운용사 코링크PE, 학교법인 웅동학원 등 전방위다. 수사대상은 딸의 장학금과 입시 특혜 의혹, 조 후보자 가족 소유 사학 문제, 사모펀드 논란 등 광범위하다. 검찰은 수사 주체도 형사1부에서 하루 만에 특수2부로 바꿔 화력을 집중했다.

조 후보자 쪽은 친인척 관계자로부터 압수수색 소식을 전달받았다고 한다. 갑작스런 강제수사 상황에 법무부 인사청문회 준비단도 적잖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오전 9시 15분경 한 관계자는 기자들에게 "오늘 후보자는 출근하지 않는다"고 말한 뒤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어 오전 9시 30분쯤 사무실 앞에 도착한 또 다른 관계자는 "이제 막 출근해서 정확한 상황은 파악해봐야 한다"며 말을 아꼈다.

상황이 달라지다
 

 법무부 장관 후보자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이 마련된 사무실 로비에서 입장을 발표를 마치고 승강기를 탑승하고 있다.
▲  법무부 장관 후보자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이 마련된 사무실 로비에서 입장을 발표를 마치고 승강기를 탑승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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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후 늦은 출근길에 나선 조 후보자는 "검찰의 판단에 대해선 제가 왈가왈부할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다만 "검찰 수사를 통해서 모든 의혹이 밝혀지길 희망한다"고 했다.

 

그는 또 '법무부 장관이 되면 검찰을 지휘하는데, 수사가 공정하겠냐'는 질문에 "법무부 장관은 검찰 수사에 대해 구체적 지휘를 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즉 '나도 몰랐다'이고, 앞으로도 '모르겠다'는 선언이다. 그는 민정수석으로 임명될 때부터 "(검찰이) 수사를 알아서 하되, 잘못됐다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수사 불간섭 원칙'을 밝혀왔다.

이 모든 상황의 긴장감은 조 후보자가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이라는 점과 대표적인 검찰개혁론자라는 점에서 나온다. 그는 법대 교수 시절부터 줄곧 정치검찰의 청산을 말해왔고, 문재인 정부 민정수석으로서 중점을 둔 정책 역시 검찰의 권한을 분산하는 수사권 조정과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였다. 때문에 검찰의 움직임에 의도가 있다는 해석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무엇보다 시점이 미묘하다. 하루 전 조 후보자가 검찰개혁안을 발표했고, 여야가 9월 2~3일 청문회 개최에 합의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검찰의 숨은 의도를 경계하는 관점은 전혀 다른 두 시각이 공존한다. '조국 죽이기'와 '조국 구하기'. "이번 압수수색이 검찰개혁을 방해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아니길 바란다"(홍익표 민주당 수석대변인)는 발언이 전자를 대변하고, "검찰이 수사하는 시늉만 보일 수도 있고, 진정한 수사 의지가 있을 수 없다고도 본다"(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발언이 후자를 대표한다.

검찰 "신속한 증거보전 차원... 다른 사정 고려 없다"

하지만 이런 해석에 검찰은 억울해한다. 압수수색 시점에 대해서도 청문회 직후나 임명 직전, 또는 임명 이후 언제 하든 말이 나올테니, 원칙적으로 신속히 진행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이다. 한마디로 정치적 고려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국민적 관심이 큰 공적 사안이고, 여러 건의 고발이 제기돼 객관적 자료를 토대로 한 사실관계 규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며 "신속한 증거보전 차원의 압수수색이 필요했고, 다른 사정은 고려한 바 없다"고 했다. 또한 "검찰개혁 이슈와 전혀 상관 없다"며 "(윤석열) 검찰총장은 이미 검찰개혁 관련 국회 결정을 존중하겠다고 했다"고 덧붙였다.

검찰의 강력한 명분은 '살아있는 권력 수사'다. 역대 총장과 마찬가지로 윤석열 총장도 국회 인사청문회 등에서 어떻게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나갈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또 문재인 대통령은 윤 총장에게 임명장을 주며 "그동안 보여왔던 정치검찰의 행태를 청산하라"고 당부했다.

27일 검찰의 조 후보자 관련 움직임은 이러한 흐름에서 볼 수 있다. 조 후보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이다. 그런 그를 검찰이 정조준했다는 것은 '우리는 더는 정치검찰이 아니다'라는 선언으로 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이번 수사를 두고 '검찰이 제 역할을 한다'는 평가도 있다.

꽃놀이패

반격이든 방어든 검찰이 유리한 상황이다. 끝까지 판다는 특수부, 그것도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검사들이 맡았으니 어떤 결론이든 한쪽은 승복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조 후보자 관련 의혹이 '혐의 없음'으로 나온다면 후보자는 후보자대로 결백을, 검찰은 검찰대로 정치적 중립성을 얻는다.

검찰의 전리품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자신과 가족의 신상, 재산내역 등이 탈탈 털린 법무부 장관이다. 수사는 몰라도 검찰개혁을 지휘해야 하는 인물이 본인의 모든 것을 쥐고 있는 검찰에게 얼마나 수술용 메스를 들 수 있을까. 한 법조계 인사는 이번 수사를 "조 후보자에게 '검찰을 안고 가야 한다'고 각인시키는 것 아니겠냐"고 해석했다.

수사 결과가 반대라면 조 후보자는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고 물러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검찰은? '살아 있는 권력을 제대로 수사했다'는 성취가 남는다. 개혁의 대상으로 몰린 검찰에게는 진정한 반격의 기회가 찾아오는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국민은 검찰개혁을 원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검찰개혁을 부르짖고 추진하던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검찰이 수사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누가 웃을까.
 
  윤석열 검찰총장이 27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검청사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집무실로 돌아가고 있다. 2019.8.27
▲   윤석열 검찰총장이 27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검청사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집무실로 돌아가고 있다. 2019.8.27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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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조국#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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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제국주의의 모습

[지구화시대 자본주의 - ‘후기 국가독점자본주의론’] 제4장 현대제국주의 ①
  • 김정호 북경대 박사
  • 승인 2019.08.27 20:31
  • 댓글 0

한국 변혁진영 내 이론 논의의 활성화를 위해, 저자 김정호씨의 양해 아래 그 동안 레디앙에 연재해 오던 [지구화시대 자본주의―‘후기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앞으로 민플러스에서도 공동 연재하기로 하였다. 저자는 이 연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우리는 198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당시의 자본주의에 대해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개념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이 같은 용어를 잘 사용하지 않게 되었으며, 우리는 그간 이 문제를 별반 고려하지 않은 채 행동해 왔다. 하지만 변혁운동의 전진을 위해서는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자본주의가 어떤 단계인지를 분명히 해야 하리라고 본다. 본 글의 연구주제는 간단하다. 즉, 지구화시대인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도대체 어떤 자본주의인가, 여전히 국가독점자본주의인가, 아니면 새로운 국제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진입하였는가? 이 궁금증을 밝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설정된 본 글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제1장 신자유주의의 본질 ; 제2장 국제독점자본의 형성과 발전 ; 제3장 지구화시대 금융업자본 ; 제4장 현대제국주의 ; 제5장 다극화와 신국제질서.

현재 제3장까지 (총 7회) 연재가 끝난 상태이며, 민플러스는 앞으로 연재되는 ‘제4장 현대제국주의’부터 게재할 예정이다. 그전 내용이 궁금한 독자께서는 기존 레디앙에 연재된 저자의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아래 링크 참조) 
현대제국주의에 대한 저자의 입장이 전후 미국중심 현대제국주의체제를 어느 정도로 볼 것인가 등에서 독자들과 견해가 다를 수 있다. 그럼에도 현대제국주의에 대한 논의자체를 한국사회를 이해하는데 폭넓은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또한 독자들의 공론화의 장으로서 역할을 자임하며, 현대제국주의와 한국사회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기대한다. [편집자]

[새 장을 시작하며] ‘제국주의’란 말이 요즘 들어 다소 낯설게 들린다. 지구화시대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개념은 유효할까? 그런데 한편에선 세계 모든 일에 간섭하려고 하는 미국이란 존재는 우리를 난감하게 만든다. 단순히 ‘패권주의’라는 규정만으로 그 복잡한 동기와 행동논리를 다 파악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렇다면 ‘패권주의’란 무엇인가? 지구화시대에 있어 더욱 많은 문제들이 국제정세와 연계되며, 과거보다도 훨씬 대외적 요소의 내적 규정성은 강해졌다. 이 같은 외부적 힘을 올바르게 이론화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이 때문에 ‘제국주의’ 개념은 오늘날 더욱 우리에게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된다.

제4장 현대제국주의

현대제국주의는 과거 식민지지배로 상징되었던 구제국주의와 구분되는 의미에서의 제국주의이며, 제2차 세계대전 종식이후 냉전체제하에서 성립된 이래 오늘날 지구화시대에 이르기까지 존재하고 있는 제국주의를 일컫는다. 우리는 앞서의 논의를 통해 지구화시대인 오늘날 현대제국주의의 성립과 관련된 객관적 조건에 대한 인식에 접근할 수 있는 일정한 기초를 확보하였다고 판단된다. 즉 '생산의 국제성'과 '자본의 일국적성(민족성)' 간의 모순으로 집약되는 국제적 차원에서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현실에서 국제 분업의 더 한 층의 발전에 대한 객관적 요구와, 이를 가로막는 '지역경제 집단화'라는 국제독점 동맹 간의 모순 등으로 구체화되어 표현된다.1)

그러나 이 같은 모순이 존재한다고 하여 정치적 상부구조로서의 제국주의2)가 곧 바로 성립하거나 현실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독점자본이 지배하는 국가가 모두 제국주의로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듯이, 제국주의 문제에 있어서도 반드시 그 객관적 필연성과 주관적 능력간의 관계가 고려되어야만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오늘날에 있어 더욱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국부적이고 지역적인 영향력만 가지고서도 출현할 수 있었던 구제국주의와는 달리, 지구화시대의 현대제국주의는 반드시 전 지구적 범위에서의 '슈퍼 제국주의'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제국주의는 아무 국가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듯 전 지구적인 거대한 슈퍼 제국주의가 애초에 어떻게 생겨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현대제국주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우선 부딪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현대제국주의의 기원과 관련한 문제이다.

독점자본의 상부구조로서의 제국주의는 한편에선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경제관계의 궁극적인 규정을 받으면서도, 다른 한편 그 자신 상대적 독자성을 갖고 나름의 역사적 진화를 겪는다. 때문에 얼마간 역사적 시기가 근접한 제국주의 간에는 그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일정한 연계와 계승성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여기서 지구화시대의 현대제국주의는 냉전체제하에서 성립된 현대제국주의를 직접적인 발판으로 삼고 있으며 그 계승자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현대제국주의의 출발점은 2차 대전의 종식이며 이를 전후로 하여 구제국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큰 획을 긋지만, 그러나 종전 이후 출현한 현대제국주의에 있어서도 다시 그것의 내부적 발전에 따라 서로 다른 두 형태의 제국주의를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점은 지구화시대의 현대제국주의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관건적이다. 비록 과거에나 지금이나 현대제국주의에 있어 미국의 패권적 지위는 변화가 없지만, 그러나 이 같은 '미국'이라는 동일성 때문에(즉 그것의 현대제국주의 내의 연속적인 지배적 지위 때문에) 그가 대표하는 현대제국주의가 중간에 질적 변화가 발생한 점을 놓치는 것은 이론연구에 있어 실패를 자초하기 쉽기 때문에 주의를 요한다. 종전 후 냉전체제 하에 존속했던 제국주의는 냉전종식 후의 제국주의와는 상당한 차이점을 보이는데, 사실상 현대제국주의의 이 같은 내부변화는 일찍이 1970년대 초반부터 진행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제국주의는 그 성격 변화에 따라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질 수 있다. 전기는 대체로 ‘냉전체제’에 상응하는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 종식부터 시작해서 1990년대 초반까지의 시기에 해당되며, 후기는 냉전체제가 해체된 1990년대 초중반 이후 지금까지에 이르는 시기의 그것을 말한다. 이 같은 현대제국주의의 시기구분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크게 보면 대체로 그 경제적 하부토대인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내부적 성격변화에 또한 조응된다고 할 수 있다. 서구의 국독자 역시도 1980년대를 전후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구분되는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현대제국주의 내에 있어 후기 형식은 당연히 전기의 현대제국주의를 모태로 한다. 때문에 그 전기 형식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 지구화시대의 제국주의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담고 있다. 필자는 전기의 그것을 '동맹적 제국주의'로 그리고 후기의 그것을 '단일패권적 제국주의'로 부르고자 한다.

1. 냉전체제하의 '동맹적 제국주의'

1) 구제국주의와 현대제국주의

현대제국주의의 초기 형태가 그 성격에 있어 '동맹적'3)이었으며 또 그것이 왜 그 같은 형태로 밖에 출범할 수 없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구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 성격상의 차이, 그리고 그에 따라 제국주의가 갖추어야 할 주체조건 상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의 직접적인 점령여부는 구제국주의와 현대제국주의를 구분하는 가장 기본적인 표식이 된다. 구제국주의는 식민지에 대한 강점을 전제로 하는 동시에, 정복과 군사력 그리고 행정적 통치에 의존해서 그것을 유지하였다. 이에 비해 현대제국주의가 의지하는 것은 주요하게는 국경과 지역을 초월하는 일종의 '규범' 혹은 '규칙'이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 광범한 식민지 민중들의 자각과 전쟁 당사국인 구식민제국들의 쇠락 그리고 세계사회주의체제의 존재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직접적 점령과 같은 강압적인 식민통치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리하여 새롭게 나타난 것이 '규범'과 '규칙'에 의한 통치방식인데, 이는 현대제국주의에 강압적인 인상 대신 일정 합법적 외투를 걸칠 수 있게 해주었다.

현대제국주의는 이렇듯 일종의 특정한 규범적 국제 질서이자 기제라고 할 수 있으며, 또 이 때문에 그것은 처음부터 세계적 규모로 출범할 수밖에 없었다. 이 양자는 상호 의존적이다. 세계적 범위에서 통용되지 않으면 감히 국제 질서라 부를 수 없으며, 또 범세계적 차원에서 관철되기 위해서는 형식상으로나마 보편적 규범에 입각한 국제 질서이어야만 한다. 이에 비하면 전통적 제국주의는 일종의 국부적이며 지역적인 존재에 불과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과거 대영제국이 강점한 식민지가 비록 아시아‧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 세 개 대륙에 걸쳐 있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 불렸지만, 그러나 그러한 영국도 모든 식민지들을 점령하지는 못했으며 더더구나 지구적 통치를 구축하는 차원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따라서 구제국주의국가와 현대 제국주의국가가 갖추어야 할 조건은 확연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구제국주의국가의 경우 침략당하는 국가에 비해 경제와 기술 그리고 군사 방면의 실력이 일정한 우위를 갖추기만 하여도 식민주의자가 될 수 있었다. 심지어 포르투칼이나 스페인과 같은 오래된 식민주의국가들은 당시 대면했던 상대가 대부분 아직 노예제나 씨족사회의 단계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단지 신식 항해기술을 장악하고 조총이나 대포로 무장한 얼마 되지 않는 모험가들 대오만을 거느리고서도 자신들보다 인구나 면적 면에서 수배 내지 수십 배에 달하는 식민지를 점령통치하는 일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런 일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불가능하다. 현대제국주의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이미 독립을 획득하여 주권을 지닌 국가들이며, 또한 일부 지역의 소수 몇 개 국가가 아니라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다. 때문에 현대제국주의가 하나의 세계질서와 세계패권을 건립하고 유지하려면 강력한 군사‧경제‧과학기술 방면의 하드파워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또한 상당한 정치‧문화‧사상‧이데올로기 방면의 소프트파워 또한 필요하다. 이 같은 실력과 영향력을 갖출 때만이 각종 국제법과 국제규칙을 제정하고 또 그것을 해석하고 집행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질 수 있다. 형상적 비유를 빌자면 현대 제국주의자는 '지구 사령관임'에 비해, 전통적 제국주의자는 '지방 성주'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4)

그런데 2차 대전이 막 종식 되었을 무렵만 하더라도 기존의 오래된 제국주의국가들을 포함해서 이 같은 현대의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국가의 자격을 갖춘 나라는 당시 지구상에 존재하지 아니하였다.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미국조차도 당시에는 이러한 기준에 비추어 볼 때 훨씬 미달하였다. 종전 직후의 미국은 비록 경제와 군사 면에서 다른 나라들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였지만, 그러나 미국의 영향력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지구적'인 것이기 보다는 '국부적'인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미국은 독립 후 줄곧 국내 문제에 치우쳐 왔으며 해외 식민지 개발에 있어서는 다른 서구 열강에 비해 크게 뒤처져 있었는데, 그 같은 상황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비록 2차 대전 기간 중 연합국진영에 참여하여 그 지도적 국가로서의 위신을 크게 넓혔다고는 하나, 객관적으로 볼 때 종전 직후 미국의 경제‧정치‧군사 면에서의 영향력은 자신이 대전기간 중 직접 군대를 주둔시키거나 점령한 서유럽과 아시아태평양 일부 국가와 지역의 범위를 크게 상회한 것은 아니었다.5) 이 같은 조건을 감안 할 경우 종전 직 후 전 세계적 범위에서의 규칙 제정권을 요하는 현대제국주의의의 성립을 위해서는 반드시 몇 개 유력한 국가들의 협력이 요구되었으며, 이에 따라 현대제국주의의 초기형태는 '동맹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서 당시 신흥 강대국인 미국은 오직 서유럽의 전통적인 구제국주의국가들 (그중 특히 영국)과의 동맹을 통해서만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종전 후 미국과 몇몇 서유럽국가들이 결합한 '동맹적 제국주의'는 우선 국제연합(UN)의 설립과 'IMF-GATT 체제'의 구축을 통해 현실화되었다. 이들 기구 출범이 갖는 의의는 초기 참여국의 규모가 가졌던 의미를 훨씬 넘어선다. 이들에 의해 제정된 규칙들은 종전 후 정치와 경제면에서 국제질서를 규정하였으며, 이후 회원국들도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이들 기구는 명실상부한 전 지구적인 질서와 규범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국제 정치조직으로서의 국제연합은 연합국진영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천명한 '반파시스트 투쟁정신'의 계승을 자신의 표면상의 설립취지로 삼았다. 이 때문에 국제연합의 이념에는 전 세계의 항구적 평화에 대한 옹호, 회원국 간의 상호평등과 존중 및 공존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이에 비해 국제 경제조직인 IMF와 GATT가 설립목표로 삼았던 것은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세계무역질서의 수립이다. 비록 위의 국제조직들은 정치면에서 거부권을 갖는 안보리 5개국 상임이사국의 존재를 인정하고, 또 경제면에서 일국화폐인 미국달러를 세계기축통화로 삼는 등의 일정한 형식상의 불평등을 포함하였지만, 그러나 우리가 너무 이상에만 치우쳐서 보지 않는다면 이러한 내용만 가지고서 '패권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당시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세계 각국이 수용하고 공감할 수 있는 정도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논란이 많은 'IMF 통화체제'라 할지라도, 당시 달러 자신은 국제협약에 의하여 '1온스=35달러'의 가치로 황금과 연계되어 있었으며, 또 이를 지키기 위한 미국 국내법의 구속을 받는 제도적 장치도 마련되어 있었다. 예컨대 미국의 국내 화폐(즉 유통 중인 미연방준비이사회의 지폐) 가치의 25%는 법률 상 황금에 의해 지지되게끔 되어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 같은 국제통화제도는 '준 금본위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규정이 끝까지 제대로 지켜진다면, 이 제도의 형식상의 '공정성'은 어느 정도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형식상으로나마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 규범이 마련되었는데, 이는 현대제국주의가 출현할 수 있는 조건의 일부가 갖추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필요조건일 뿐 결코 충분조건은 아니다. 이것만 가지고서는 사실상 형식상의 '공정경쟁'을 위한 규칙을 제공한 것일 뿐 아직 '제국주의체제'라고 부를 수는 없다. 이 같은 규범과 규칙이 실제 어떻게 제국주의적인 것으로 기능하게 되었는지, 또 국제적으로 이러한 질서구축을 위해 일부 서유럽 유력 국가들과 '동맹' 관계를 맺은 미국이 어떻게 그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지속적으로 강화시킴으로써 최종적으로는 '패권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는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여기서 일국 내 법률관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국가 간의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규칙'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고 집행할 수 있는 능력이 더 관건적일 때가 많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은 결국 경제력과 군사력에 의존한다는 점도 함께 기억하여야 한다. 그중 경제력은 궁극적으로는 한 국가의 패권실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지만, 단기적으로만 보자면 보다 직접적으로는 정치군사적 요인이 결정적인 경우가 많다. 미국은 당시 경제력과 군사력 이 두 가지 측면의 우세를 모두 갖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이 같은 우세는 모두 전쟁 종식 직후의 특수한 상황에 기인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시적이며 결코 항구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후 전후 복구과정을 통해 서유럽의 동맹국들이 경제부흥에 성공하게 된다면, 그들은 경제방면에 있어 얼마든지 다시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또 만약 미국의 경제적 우위가 지속될 수 없게 된다면, 그 군사적 우위 또한 오래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은 종전 후 국제질서를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이해에 맞게끔 방향 지워야 할 동기를 강하게 가질 수밖에 없었다. 마침 서유럽 국가들이 소련을 비롯한 새롭게 출현한 사회주의권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상황은 이를 위한 좋은 계기를 제공하였다. 미국이 이를 위해 채택한 전략이 동서 간 '냉전체제'의 의도적인 구축이었는데, 이 같은 냉전체제를 빌려 미국은 종전 후 경제와 군사방면에 있어 자신의 일시적 우위를 보다 항구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었다.6) 그리고 이 과정은 종전 후 자본주의 국제질서가 초기 다소 모호하고 때론 '이상주의적'이기까지 했던 색채를 벗어 던지고 점차 제국주의적인 것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수반하였다.7) 여기서 현대 제국주의의 출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냉전체제의 성격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하에서 그것의 의의·성격·형성과정 등에 대해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2) 냉전체제와 '동맹적 제국주의'의 수립

미국에 있어 냉전체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이 의도하는 국제질서 구축에 있어 필수적인 '전 지구적 배치를 갖는 군사력'을 어떻게 창출할 수 있는지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종전 직후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은 아직 서유럽과 아시아태평양 일부 지역에만 머물러 있었는데, '전 지구적 배치를 갖는 군사력' 창출이라는 이 문제가 해결될 때라야만 현대제국주의는 비로소 성립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회주의권이 배제된 자본주의진영만의 단독적 시장을 성립시키는데 있어서도 그러하며, 또 나중에 명백해지듯 미국의 달러패권의 유지의 측면에서도 또한 그러하다. 후자의 경우 이는 순수한 경제력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며 정치·군사력의 지지가 필수적이다. 또 이 같은 달러패권의 유지는 미국이 경제패권을 지속할 수 있는 관건적 요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냉전체제는 어떻게 미국의 이 같은 군사력 창출이 가능토록 도왔을까?

냉전체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대 진영 간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에 있다. 그런데 당시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국제문제의 가장 주요한 이슈로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종전 후 전쟁으로 파괴된 기존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서유럽 각국 내의 계급투쟁이 격화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본래 일국적 상황으로 전개되는 계급투쟁이 국제적 차원에서 다시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한 양대 진영 간의 대립으로 확대 발전하는 데에는 많은 복잡한 요인들이 작용하였다. 예컨대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각국 국가독점자본주의 간 국제적 대단결의 성공, 당시 서유럽의 가장 강력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 공산당의 전후 국제정세에 대한 전략적 판단 오류와 타협주의노선, 소련의 경직된 '양대 진영' 이론과 패권적 야심 등등이 그것이다. 어떻든 이 같은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동서 양대 진영의 분화와 대립은, 서유럽 각국의 노동계급이 전쟁이 가져온 폐허와 생활고 속에서 기존체제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계급투쟁의 수위가 임계점에 접근함에 따라, 그리고 미국과 같은 패권적 야심을 가진 국가의 전략적 의도가 첨가됨에 따라, 어렵지 않게 한 단계 수위를 높인 전면적인 군사 대결적 성격으로 발전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미국과 서유럽 각국의 통치계급은 국내의 불만을 국제적인 긴장조성을 통해 상대적으로 완화시키고 대중의 관심을 외부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처음 양대 진영이 성립하는데 있어 원인을 제공하였던 이데올로기적 차이와 대립은, 점차 본격적으로 군사집단화한 양대 진영에 대해 다시 그 존재에 대한 나름의 명분과 합법성을 부여하게 된다. 이리하여 냉전체제는 먼저 각국의 일국 내 계급투쟁을 국제적인 이데올로기적 대립으로 수렴시킨 후, 다시 이를 군사집단화한 양대 진영 간의 대립으로 탈바꿈시키는 과정을 통해 성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같은 냉전체제의 형성은 당시 미국이 주도하는 '동맹적 제국주의'가 성립할 수 있었던 '시대적 상황'으로 작용하게 되었으며, 또한 그 동맹이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이면서 군사적 성격을 띠도록 만들었다.

냉전체제의 구축을 통해 미국은 현대제국주의의 성립에 필수적인 지구적 범위에서의 군사력 배치를 완성할 수 있었으며, 이로부터 국제관계의 규칙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고 '집행'할 수 있는 실질적 능력을 확보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세계적 범위로 냉전체제가 확산되어가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냉전은 처음 1945~49년 기간에 유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미·소가 유럽대륙에서 각자 비교적 안정적인 전략적 구조를 건립한 후인 1950~60년대에 점차 아시아와 중동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및 세계 각지로 확대되었다.8)이러한 냉전체제의 세계적 확장에 수반하여 미국은 유럽과 지중해 그리고 아시아와 근동지역에서 필요한 군사기지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또 자신이 주도하는 각종 지역안보동맹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냉전체제 구축과정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미국과 영국 간의 동맹관계이다. 미국은 당시 정치상으로 영국의 지지가 대단히 중요하였다. 영국의 지지가 있어야만 유럽에서의 군사적 주둔을 계속할 수 있고, 또 반드시 유럽을 '발판'으로 하여야만 자신의 경제적·군사적 영향력이 전 세계로 확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9) 이 때문에 종전 직후 미국이 현대 제국주의국가로 성장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중요한 절차는, 그 당시만 하더라도 여전히 세계 각지에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으면서 국제정치 무대에 있어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영국과 상호이익의 기초위에서 세계분할에 대한 암묵적 합의를 이루는 일이었다. 이 점에 있어 영국은 당시 국민당 장개석 정권의 통치하에 있던 중국과 일본에 대한 미국의 권리를 인정해 주었으며, 그 대가로 미국은 영국의 인도와 인도네시아에 있어서의 정책과 행동을 지지하는 식의 타협이 이루어졌다.10)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지중해의 세력범위를 분할하는데 있어서는 큰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지중해는 전통적으로 영국을 포함한 서유럽 열강의 세력범위에 속하였는데, 미국의 독점자본은 근동지역(터키를 중심으로 한 중동지역 일대)에 진입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이 경우 특히 영국자본은 가장 크고 완강한 경쟁 상대가 되었으며, 만약 미국 해군이 지중해에서 활동하게 된다면 대영제국의 이익과 장차 크게 충돌하게 될 것이 우려되었다. 우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배경과 관련하여 당시 독일 자본의 근동지역 진출을 둘러싸고 이 지역에 기득권을 갖고 있던 영국 자본과 대립이 발생했었던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때마침 이러한 곤란한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졌는데, 이하에서 소개하는 1947년2월에 발생한 그리스사태가 바로 그것이다.11)

그리스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앞서 일찍이 1944년10월 해방을 맞이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나치 점령 치하에서 무장투쟁을 이끌었던 공산당이 거의 전역을 석권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어서 옛 종주국인 영국의 군대가 진주하면서 자신의 대리정권을 내세웠으며, 이에 따라 내부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이 격화하면서 마침내 1946년 전면적인 민중봉기가 발생하였다. 이듬해 봄 영국은 4만 명의 군대를 파견하고 또 전쟁 피해로 여의치 않은 자국 경제사정에도 불구하고 당시로선 거액인 4.6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였지만 여전히 사태의 발전을 통제하지는 못하였다. 영국정부는 이로써 국내적으로 커다란 재정과 정치 양면의 압력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자신의 힘만으로는 사태를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할 수 없이 미국에 원조를 요청하게 되었다. 1947년2월21일 영국정부는 마침내 정식으로 미국정부에 각서를 보내 경제적 곤란으로 인해 3월31일 이후 그리스에 경제와 군사원조를 제공할 수 없기 때문에 미국이 이 중임을 맡아줄 것을 희망한다는 공식 의사를 표명하였다. 당연히 미국이 이 같은 요청을 거부할 리가 없다. 미국정부는 이것은 영국이 '세계의 영도력'을 자신에게 건네준 것과 마찬가지라고 간주하였으며, 기꺼이 이 역사적 임무를 감수하겠다고 선뜻 회답하였다.12) 미국정부는 장차 이 사태에 대한 개입으로 부터 얻게 될 다음 세 가지 전략적 이익에 주목하였다. 첫째, 대영제국의 기반을 접수하여 자신의 세력범위를 확대하고 그 세력을 중동과 지중해까지 넓힐 수 있다. 이는 미국이 꿈에도 그리워하던 숙원이었다. 둘째, 자신의 세력을 소련의 변경지대까지 밀어붙임으로써, 유럽의 허약한 복부(腹部)인 중근동지역에 있어 소련에 대한 '억제정책'을 펼 수 있는 전초기지를 세울 수 있다. 셋째, 원조의 제공자요 자유의 수호자로서 그리고 공산주의 확장에 대항하는 중임을 떠맡을 수 있는 자유세계 지도자로서의 형상을 수립할 수 있다.

1947년은 잘 알려지다시피 '마셜플랜'이 발표되는 등 유럽에서 냉전체제가 본격적으로 구축되기 시작한 중요한 한 해이다. 우리는 이 같은 해의 년 초에 발생한 그리스사태의 새로운 진전과 그 이후 동서 간 냉전적 대립을 촉진시키는 일련의 사태발전이 긴밀한 인과 관계에 있음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이후 한국전쟁을 계기로 유럽에서 시작된 냉전을 동아시아에까지 확대하는데 성공하였다. 미국의 군사력이 비교적 일찍 유럽과 아시아·태평양지역에 진출하였던데 반해 중동지역에의 진출은 약간 늦어졌다. 이 역시도 주요하게는 영국이 여전히 2차 대전 이후에도 자신의 식민지였던 중동 각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실력의 지속적인 상승에 따라 영국은 점차 중동지역에서도 철수하게 되는데, 1956년 수에즈운하 위기 이후 영국은 완전히 이 지역을 포기하고 대신 미국은 영국군이 사용하던 일련의 군사시설을 포함하여 영국의 중동지역에서의 영향력을 고스란히 접수하게 된다.13) 1968년이 되면 미국은 월남전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 대한 간섭이 그 정점에 이르게 된다. 이 시기 월남전에 참여한 54만 명의 미군을 포함하여 100여만 명의 미군이 유럽과 아시아 대륙 및 인근 도서에 주둔하였으며, 30만 명의 미군은 본국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군함에서 생활하였다. 미국은 이 무렵 전 세계에 2000여 개의 군사기지를 설치하였으며, 40여개 국가와 지역에 대한 정식 보호 의무를 떠맡았다.14)

이상의 종전 후 미국이 주도하는 현대제국주의가 건설되는 과정을 정리하면 이러하다. 전후에 미국의 경제와 군사력은 서유럽제국과 소련 등 다른 경쟁국들에 대해 상당한 우세를 점했지만, 그러나 여전히 현대제국주의가 필요로 하는 전 지구적 범위에서의 패권구축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할 때 서유럽이 지니고 있던 경제‧정치‧정신상의 영향력과 군사상의 잠재력 그리고 지정학적 위치는 미국의 지구적 전략을 실현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였다. 미국의 독점자본과 지배집단은 종전 후 서유럽경제의 침체와 사회동란 그리고 서유럽국가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이용하여 냉전 구도를 설계하고 추진하였으며 최종적으로 그것을 완성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 서유럽제국과의 정치와 경제 및 군사방면을 포괄하는 동맹관계를 결성하고 이에 기초한 새로운 제국주의 세계질서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냉전체제를 배경으로 성립되고 존속한 현대제국주의는 기본적으로 '동맹적 제국주의'의 성격을 갖는다. '동맹적 제국주의'는 이후 미국이 지역차원의 강대국에서 진정한 세계적 패권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덧붙이자면, 이렇게 성립된 '동맹적 제국주의'는 내부관계에 있어서의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보면 냉전시기 내내 그 구성주체 간의 관계에 있어 '동맹'적 성격의 틀을 끝까지 유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동맹' 성격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비록 이들 간의 관계에 있어 미국의 리더십이 인정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종적인 복종관계 보다는 횡적인 평등관계에 가깝다는 점을 의미한다. 즉 형식에 있어 기본적으로 동등한 '파트너 관계'임이 공식적으로 천명되었으며,15) 내용적으로도 비록 미국이 간혹 패권적 행동을 보일지라도 종국에 가서는 원래의 파트너 관계로 복귀함으로써 그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종전 직후의 제국주의가 그 내부관계에 있어 기본적으로 '동맹'적 성격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냉전체제 자체의 성격과 구속력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보여 진다. 미국은 종전 후 자신이 패권국가로 성장하기 위한 전략으로 '냉전체제'의 구축을 구상하고 적극 실천하였는데, 이러한 냉전적 국제질서는 이후 반대로 미국과 다른 서구 국가들이 상호 장기간 '동맹'적 성격을 유지하도록 강제하였다.

첫째, 냉전체제는 동서진영 간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념대립'을 기본으로 삼는다. 이 경우 유럽은 근대문명의 출발지로서, 인류문명에 대한 기여도나 역사의 유구함 그리고 학문적 전통과 이론적 깊이에 있어 미국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다른 한편, 2차 대전이 끝난 직후 강고한 독일파시즘을 패망시키는데 있어 결정적 기여를 한 소련과 그 제도인 사회주의가 세계 인민으로부터 높은 위신과 기대를 모으고 있었던 사정도 고려하여야만 하였다. 때문에 미국은 냉전체제 하에서 계속해서 이념적 우세를 점하기 위해선 반드시 서유럽의 정신적·도덕적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둘째, 냉전체제가 요구하는 직접적인 군사적 대결의 측면에서 볼 때도 그러하였다. 종전 후 미국이 아무리 초군사강국이고 막강한 공업과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을 갖고 있었다 할지라도, 당시 세계 최강의 육군병력을 보유한 소련과 그 사회주의 동맹국들을 혼자서 상대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미국의 핵 독점은 1949년 소련이 원자탄실험에 성공함으로써 일찍이 무너졌으며, 1960년대 중 후반에 이르러선 미소양국의 핵전력은 비슷한 수준으로 전반적인 균형에 이르게 되었다. 또 1957년과 1959년에 소련이 미국보다 한발 앞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과 유인 우주선을 각각 지구궤도에 쏘아 올린 데서 볼 수 있듯이, 과학기술면에 있어서도 소련은 첨단 강국에 속했으며, 그 경제력 역시도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위 자리를 오랫동안 지켰던 데서 볼 수 있듯이 만만치 않았다. 냉전 후기인 1980년대 초에는 소련 경제는 한때 미국 GDP의 2/3에 이를 정도로까지 발전하였다. 이렇듯 소련 하나만 가지고서도 미국은 상대하기가 벅찼으며, 여기에 사회주의권 전체를 적으로 삼아야 하는 냉전적 대결구도를 전 지구적 범위에서 형성하기 위해서는 미국은 반드시 서유럽과 일본의 힘을 빌려야만 하였다. 아래 표4-1은 미국이 1970년대 중반 들어 군사비지출 면에서 소련에 오히려 뒤처진 상황을 보여주며, 표4-2는 나토의 집단적 힘을 빌려 비로소 소련과 그 동맹국에 대항할 수 있었던 상황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에 자신과 동등한 동맹국 지위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의 요인 때문에 냉전기간 현대제국주의의 내부관계는 기본적으로 '동맹'적 성격이 유지되었다. 물론 이러한 동맹적 관계가 순탄하게 저절로 실현된 것은 아니다. 사적영역의 독점형태인 카르텔과 마찬가지로, 현대제국주의 내부 주체 간의 동맹 역시도 상호 역관계의 변화, 미소관계, 제3세계권과의 관계 등 주변 조건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는 동요와 갈등이 나타났다. 그 때문에 현대제국주의 내부에서 '동맹관계'라는 기본적 성격의 규정은, 상호간의 갈등과 투쟁을 통해 도달한 일종의 종합적 '균형'의 결과이자 표현이라 할 수 있다.18) 이리하여 이상 열거한 요인 중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츰 자연적으로 소실되거나 인위적으로 해결 짓게 된 것들이 생겨나게 됨에 따라, 현대제국주의의 성격에 있어서도 새로운 변화가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된다. (다음 호에 계속)

<본문주석>

1) 만약 어떤 역사적 시기에 있어 제국주의가 등장하는 것이 나름의 현실적 의의를 갖는다면, 오늘날의 그것은 분명 생산의 국제화와 관련된 지구화의 추진과 일정한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국제적 차원에서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예컨대 오늘날 '지구적 공급사슬'과 같은 국제 분업의 발전추세와 이를 가로막는 '지역경제 집단화'와 같은 국제독점 동맹 간의 모순은 결코 경제적 범주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게 된다. 결국 '현대 제국주의'라는 현실 정치역량이 객관적 요구로 떠오르게 되는 필연성이 여기서 제기된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 기본모순(즉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자본주의적 사적점유 간의 모순)은 지구화시대인 오늘날에 있어선 주요하게는 '생산의 국제성'과 '자본의 민족성' 간의 모순형태로 집약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상부구조로서의 현대제국주의와 관련한 문제는 이 같은 자본의 '국적성' 내지 '민족성'과 관련된 모순이 가장 고도하고 집약적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본 글에서 제국주의 개념은 이처럼 주요하게는 정치적 상부구조 측면에서 파악된다. 이 같은 규정은 엄밀한 것은 아니며 편의상의 고려에서이다. 그것은 레닌이 말한 “금융자본의 기초위에서 성장한 비(非)경제적 상부구조, 즉 금융자본의 정책과 이데올로기"라는 규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레닌전집>(제27권),1990년,인민출판사, p397. 레닌은 원래 '제국주의'를 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있는 자본주의의 경제와 정치 모두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이 점은 레닌의 제국주의에 관한 '5가지 지표'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즉 ➀독점 형성➁금융자본의 형성➂자본수출➃경제적 세계분할➄영토분할이 그것이다. 그중 앞의 네 가지는 경제와 관련되며, 마지막 다섯 번째는 정치와 관련된다.

3) 여기서 '동맹적'이라는 개념은 현대제국주의를 형성하는 주체(서구 선진 자본주의국가들) 내부에 있어서의 상호관계를 주로 지칭하며, 그것의 외부적 표현으로서의 객관적 국제질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4) 이상 현대 제국주의에 대한 성격규정 및 관련 내용은 [中]王金存,2008년,《帝国主义历史的终结―当代帝国主义的形成和发展趋势》,pp.101-104참조.

5) <강대국의 흥망성쇠>의 저자 폴 카네기는 2차 대전 종전 무렵의 미국 군사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그러나 나중의 분석이 지적하는 것과 같이, 미국의 군사역량은 실질적으로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강대하지는 않았으며 (미국은 단지 몇 개의 원자탄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또한 원자탄 사용이 일으킬 커다란 정치적 결과를 고려하여야만 했다), 미국은 또한 그 군사력을 이용해서 소련과 같은 멀리 떨어져 있고 의심으로 가득 차있는 수수께끼 같은 나라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가 어려웠다." [英]保罗·肯尼迪,《大国的兴衰》(下卷),p92. 1945년에 미국은 유럽에 69개 사단과 아시아 태평양지역에 26개 사단을 주둔하고 있었으며, 미국 본토에는 한개 사단도 없었다. 위의 책,p93.

6) 카터 정부 하에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역임한 브레진스키는 그의 대표적 저서인 <거대한 체스판(The Grand Chessboard)>에서, 오늘날 국제질서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인 소위 '미국체계'에 대해 이 같은 "미국체계의 대다수 내용은 냉전 기간에 출현"하였다고 서술하였다. [美]兹比格纽·布热津斯基,《大棋局―美国的首要地位及其地缘战略》,pp24-25.

7) 미국 권력층 내에서도 종전 후 수립될 국제질서와 관련하여 상당한 노선대립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전쟁 중 수립한 소련과의 우호적인 관계에 기초한 국제질서를 구축해야 한다는 일명 '비둘기파'가 존재하였으며, 소련을 배제하고 서유럽만으로 소위 자유진영을 구축하고 소련에 대해선 더 이상 공산주의가 확장되지 못하도록 봉쇄전략을 펼쳐야 한다는 '매파' 진영이 존재하였다. 비둘기파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제3기 집권 시 부통령을 역임한 당시 상무부장관이었던 헨리 월라스를 대표적 인물로 하였는데 대체로 민주당내 좌파세력이 집결하였다. 매파는 당시 부통령으로서 루스벨트의 후임이 된 트루만과 국무부장관인 벨라스를 대표적 인물로 하였으며, 민주당내 우파와 공화당 연합세력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두 노선의 대립은 1946년에 들어서면서 대충 우세가 판가름 났다. 결국 후자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1947년부터 이후 '트루만 독트린'과 '마샬 플랜' 등으로 이어지는 대 소련 봉쇄와 대결정책이 본격화 되었다. [中]刘金质,2003년, 《冷战史》(上卷),pp98-99 참조

8) 냉전은 다른 사물과 마찬가지로 발생과 확대 그리고 종식의 역사 과정을 밟았다. 필자가 참고한 [中]刘金质,2003년,《冷战史》(上·中·下卷) ,世界知识出版社는 46년에 이르는 냉전사를 이하 5 단계로 나누었는데 참고할 만하다. 즉 냉전의 개시(1945-1949), 냉전의 확대(1950-1962), 냉전의 완화(1963-1979), 냉전의 재현(1980-1984), 냉전의 종식(1985-1991)이 그것이다.

9) 미국의 전략가 브레진스키는 유럽이 미국 패권전략에 있어 갖는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만약 미국의 서부 파트너 (서유럽을 지칭함-주)가 미국을 그 주변지역의 근거지로부터 쫓아낸다면, 미국은 자연스럽게 유라시아 대륙의 체스 판에서의 경쟁을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된다.", "유럽은 무엇보다도 미국의 유라시아 대륙의 지역정치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교두보이다. ……미일 관계와는 다르게, 대서양 동맹은 유라시아 대륙에 있어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과 군사력을 직접적으로 확립시켰다. ……유럽의 어떠한 확대도 모두 자연스럽게 미국의 직접적인 영향력 범위의 확대로 된다. 반대로, 만약 범 대서양 간의 긴밀한 관계가 없으면, 미국의 유라시아 대륙의 주도적 지위는 곧 존재하지 않게 된다." 《大棋局―美国的首要地位及其地缘战略》,p30; pp47-49.

10) 미영 양국 간의 타협 내용은 위 《冷战史》上卷, pp98-99의 내용 참조.

11) 이하 그리스사태와 관련한 내용은 위의 책, pp107-110 참조.

12) 《冷战史》上卷, pp109-110. 그 당시 트루먼정부의 고위관리였던 에치슨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역사의 전환점이 이미 이르렀으며, 미국은 필히 용감히 나서서 몰락 중인 영국을 대신해서 자유세계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세계창조의 현장기―나의 국무부에서의 세월>,뉴욕1969년,p220. 위의 책,p110.

13) 그러나 미국이 진정으로 중동에 군사기지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영향력 확장에 나서게 되는 것은 소련이 1979년 아프가니스탄에 침입한 후의 일이다. 브레진스키는 <거대한 체스 판>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냉전의 최후 단계에 세 번째 방위 '전선' 즉 남부전선이 유라시아 대륙의 지도상에 출현했다. 소련의 아프간 침공은 미국의 두 측면에서의 반응을 일으켰다. 첫째는 미국이 직접 아프간 민족항쟁을 원조해서 소련을 곤궁에 빠지게 하였다. 둘째는, 페르시아 만에 대규모 군사기지를 건설해서 위협역량으로 삼은 것이다." 《大棋局―美国的首要地位及其地缘战略》,p6. 미국과 중동 각국의 군사관계 및 군사기지는 이후 냉전이 종식된 직후 비교적 큰 변화를 겪었다. 이때부터 미국 군사시설과 군대가 더 많은 중동국가에 진입하였으며, 이후의 10년간 미국은 중동의 군사기지를 통해 이라크에 대한 '비행금지구역'을 유지하였다. 이 밖에 1990년대 중반부터 미국은 나토의 '동쪽 확대'를 추진하였는데, 지금까지 이미 동유럽 몇 개 국가에 군사기지의 효능을 갖춘 시설들을 계속해서 설립하였다. '9.11'테러습격 이후 미국은 반테러전쟁을 전개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에 진출하여 반테러전쟁의 필요라는 명의를 빌려 군사기지를 설립하였다. [中]樊吉社 张帆 共著,《美国军事―冷战后的战略调整》,p70.

14) [中]刘绪贻 杨生茂 总主编,2008년, 《美国通史》(第6卷),p388.

15) 케네디 대통령은 1962년7월4일 필라델피아에서 소위 '웅대한 계획'이라 이름붙인 유럽정책에 관한 중요한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그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유럽을 동반자(파트너)로 간주하며, 그들과 완전히 평등한 기초위에서 함께 자유국가 공동체를 건설하고 수호하는 모든 중대하고 지난한 임무에 종사할 수 있다. " 《美国通史》(第6卷), p274.

16) 《世界经济统计简编1982》,p70에서 재인용.

17) 《世界经济统计简编1982》,p71에서 재인용.

18) 이 같은 상호간의 갈등과 투쟁은, 미국과 서유럽과의 관계를 실례로 들 경우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종전 직후에서 1940년대 말까지는 서유럽이 미국에 대해 경제와 군사상에 있어 일방적으로 의지하는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1949년4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정식 출범하였는데, 미국은 그 지휘권의 장악을 통해 서유럽을 정치와 군사상으로 확실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초 서유럽 국가들의 전쟁피해 복구가 어느 정도 일단락되고 경제부흥이 시작되면서 양자 관계는 조정을 받는다. 그 첫 번째 상징적 사건이 1953년2월 서유럽 6개국의 '유럽석탄강철공동체'의 설립이었다. 이는 프랑스와 서독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국가들이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초기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노력은 이후 1958년1월 6개국 유럽경제공동체와 유럽원자력공동체 건설에 대한 조약 (로마조약)이 성사됨으로써 더욱 진전되게 된다. 이 같은 단합을 바탕으로1950년대 중반부터 서유럽은 미국에 대해 자신들의 실력 향상에 걸 맞는 정치·경제·군사상의 합당한 지위를 요구하게 되었다. 1960년대 들면서 이 같은 양자관계의 조정은 더욱 적극적으로 진행되는데, 그 힘의 균형은 후반으로 갈수록 미국에게 불리하게 되었다. 한편에서, 미국은 그간 계속된 군비지출 특히 월남전의 확전으로 막대한 국지수지 적자가 발생함으로써 날로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아졌다. 다른 한편, 강력한 민족주의자인 프랑스의 드골이 1958년 정권을 잡은 이후 그 독자노선을 노골적으로 천명하면서, 미국의 주도권에 정면 도전하였다. 그는 핵무기를 보유하는 문제를 포함하여 모든 문제에 있어 미국과 나란히 동등한 지위를 갖기를 요구하였으며, 미국대통령 아이젠하워와 영국수상에게 비망록을 보내 미·영·불 3국으로 구성되는 '안전조직'을 결성하여 지구적인 정치와 전략문제를 해결할 것을 제안하였다. 드골은 심지어는 미국을 현대문명의 어머니인 유럽의 '자식'이라고까지 불렀으며, 유럽이 마땅히 인류 진보에 있어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또 유럽이 미국의 국제수지 균형을 유지토록 도와주는 것에 대해서도 단호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드골의 이러한 독립적인 자주정책의 영향 하에서, 그간 미국 혼자서 조종해오던 나토조직은 크게 쇠약해졌다. 미국의 이러한 곤궁은 1970년대 초 닉슨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야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미국은 우선 서유럽과 일본을 압박하여 달러의 금 불태환과 변동환율제로의 이행을 관철시켰는데, 이러한 국제통화체제의 변화는 날로 누적되던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이 과정에서 서유럽 동맹국들과의 관계가 한 때 상당히 악화되기도 하였지만, 이것도 1973년 중동전쟁 이후 OPEC의 석유가격 인상을 계기로 화해의 실마리가 찾아졌다. 즉 제3세계권의 새로운 도전에 맞선 공동대처의 필요성에 공감하였던 것이다. 이후 카터 대통령시기 미국과 서유럽 동맹국 간의 일정한 관계개선이 이루어 졌으며, 레이건 정부가 들어선 1980년대에 양자관계에 있어 더욱 적극적인 진전이 나타났다. 미국은 이 시기 소련과의 신 냉전을 획책하였는데, 이 과정을 통해 서유럽동맹국들과의 공동전선을 재정비하면서 이전의 약화된 주도권을 상당부분 만회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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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시작하며 ① '신자유주의 본질' http://www.redian.org/archive/133369
신자유주의의 본질, 이론·역사와 그 현대적 기원 http://www.redian.org/archive/133718
신자유주의와 후기 국독자 http://www.redian.org/archive/133878
국제독점자본과 국제분업, 지구적 경제일체화의 기초 http://www.redian.org/archive/13423
1990년 이후의 국제독점자본 http://www.redian.org/archive/134498
금융업자본의 인수합병 http://www.redian.org/archive/135010
국제 외환·채권·주식시장의 형성 배경 http://www.redian.org/archive/135325

링크모음 : 후기국독자론1-3장 https://drive.google.com/file/d/1NfXFHO2n1e-gzUy_AUTZgdrGFOQXMnXa/view?usp=sharing

 

김정호 북경대 박사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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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의 지소미아' 종료, 위기 아닌 기회다

[좌담회] 지소미아 종료 평가와 이후 한반도 정세 전망
2019.08.28 08:37:39

 

 
지난 22일 정부는 일본의 수출 통제 및 한국에 대한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 배제에 대한 대응조치로 한일 군사 정보 보호 협정(지소미아, GSOMIA) 종료 카드를 꺼내들었다. 정부의 지소미아 종료 결정에 대해 일본은 물론이고 미국까지 나서서 당혹감과 불쾌감을 표하고 있다. 

여기에 북한은 지난 7월 25일 이후 연일 미사일 시험을 발사하며 한국을 압박하고 나섰다. 북미 대화 재개의 모멘텀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동력도 차츰 약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이에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함께 지소미아 종료의 의미와 이후 한반도 정세를 전망해보는 좌담회를 마련했다. 

김동엽 교수는 지소미아 종료에 대해 "지소미아의 본질은 한일 간 정보 문제가 아니라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시작된 측면이 있다"면서 "이번 지소미아 종결이 지소미아가 가지고 있는 '한미일 3각' 틀에 얽매이는 고리를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고도 본다"고 평가했다.  

정욱식 대표는 "지소미아 종료의 타이밍은 적절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해 종료했어야 했던 것 아닌가? 지난해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고 북한은 핵과 미사일 시험을 중단했다. 이는 지소미아가 체결됐던 사유가 개선된 상황으로, 지소미아를 종료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던 상황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향후 지소미아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구축 과정에서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김 교수는 협정이 기본적으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관련돼있었기 때문에 한반도 문제에 있어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이 사안을 최대한 한일 문제로 좁혀야 한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김 교수는 지소미아 종료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북미 대화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향후 남한이 북미 간 대화에 중재자나 촉진자로 참여하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전망했다. 

김 교수는 "지금 나타나고 있는 북한과 미국의 반응을 보면 한국의 역할에 대해 북한은 남쪽을 미국의 대변자로, 미국은 반대로 남한이 자신에게 이야기도 안하고 북한과 손발을 맞춰서 자신을 코너로 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이런 상황에서 지소미아가 종료되면서 미국 입장에서는 우리가 북미 간 협상에 개입하는 것 자체가 불편할 수 있다. 지소미아 종료가 자국의 안보 영역에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는 미국 입장에서 안보 사안인 북미 간 대화에 우리를 다시 불러들일 가능성이 낮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런 상황이라면 정부가 북미 사이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려고 애쓰기 보다는 다른 방식을 모색하는게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 스스로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등의 다른 길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라고 주문했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역시 지소미아 종료가 북미 회담과는 크게 관련이 없을 것이라면서도 "지금 우리가 북미 양측을 중재하기 위한 조건과 환경이 상당히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일단 남북 간 대화는 단절돼있기 때문에 한미 공조를 통해 미국에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북미 간 협상에서 핵심은 결국 '빅 딜'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이냐에 달려있다. 양측이 대타협의 안을 만들어서 밀어붙여야 한다"며 "연내 합의가 가능하다면 북한도 5개년 경제발전 계획인 내년에 맞출 수 있고 미국도 재선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맞춰서 준비해야 한다. 그러니까 일단 연내 빅 딜을 타결하고 내년에 이를 본격 이행하는 국면으로 전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좌담회는 박인규 <프레시안> 이사장의 사회로 26일 진행됐다. 다음은 주요 내용이다. 
 

▲ 김유근 국가안보실 1차장이 22일 오후 춘추관 대브리핑룸에서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지난 2월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평화적 분위기가 깨지기 시작하면서 현재는 미중 무역전쟁에 한일 무역갈등뿐만 아니라 지소미아 종료 문제까지 불거졌다.  

지소미아 종료가 향후 한반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 다양한 관측이 나오고 있는데, 우선 이번 조치에 대해 평가해본다면?  

김동엽 : 개인적으로는 지소미아가 처음에 맺어졌던 2016년부터 반대했기 때문에 언젠가는 종료돼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시점이 지금이냐는 부분에 대해서는 좀 신중했어야 하지 않나 싶다. 이 시점에 어떤 파장이 있을지 고려해야 할 요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부가 지소미아 종료에 대비해 여러 시나리오들이 점검됐다면, 그리고 그에 맞춰 나름의 복안이 있었다면 괜찮았다고 본다.  

그런데 지소미아의 본질은 한일 간 정보 문제가 아니라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시작된 측면이 있다. 따라서 그 시작점이 그랬듯 한일 양측의 갈등보다는 미국과 관련해 문제가 더 커질 수 있는데, 오히려 이번 지소미아 종결이 지소미아가 가지고 있는 '한미일 3각' 틀에 얽매이는 고리를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고도 본다. 그런 측면에서 왜 종료했냐도 중요하지만 향후 어떤 복안을 가지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욱식 : 지소미아 종료의 타이밍은 적절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해 종료했어야 했던 것 아닌가? 지난해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고 북한은 핵과 미사일 시험을 중단했다. 이는 지소미아가 체결됐던 사유가 개선된 상황으로 종료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던 상황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동시에 현 상황에서 정부가 복안을 가지고 있어야 할 부분은 일본과 계속 이런 형태로 갈등을 지속할 것이냐, 아니면 일본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동참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 것이냐의 문제인데 지금까지 분위기로 봐서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겠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했는데 정부는 북일 간 관계 정상화를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한편으로 정부는 미국 반응을 잘 살피고 대응해야 한다. 미국 주류가 지소미아 종료에 대해 격렬하게 반발하고 있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일단 지켜보자는 반응을 내놨다. 그렇다면 한미 간 갈등은 정상 간 전화통화를 하든 메시지를 보내든 해서 톱 다운 방식으로 가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지소미아는 오바마 대통령 집권 당시에 했던 일이라는 점을 잘 주입시켜서 갈등 국면을 최소화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김동엽 : 그런데 미국 행정부가 트럼프 정부로 바뀌었다고 해서 미국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전략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오바마 정부 때 이야기했던 '재균형', '아시아로의 회귀' 등과 트럼프 정부의 '인도-태평양전략'은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트럼프의 전략은 오바마 때보다 확정되고 있기도 하다. 오바마의 '아시아로의 회귀'의 핵심은 태평양 축이었다. 즉 태평양으로 확장하는 중국에 맞서 일본을 중심으로 한반도, 대만, 필리핀이 중요했는데 지금은 이를 확대해서 인도, 호주까지 연결한 것이다.  

물론 미국이 이러한 전략을 세운 것은 중국이 '일대일로'를 통해 태평양이 아닌 서쪽으로 진출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자국의 에너지원 물동량의 70%가 인도양을 통해 들어오고 있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또 중국의 일대일로는 중국 내부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름'을 빼는 파이프관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 내부에 축적되고 있는 과잉 건설, 자본, 인력 등을 밖으로 빼는 과정을 통해 예전 일본이 겪었던 '버블 경제'를 겪지 않겠다는 의도다.  

문제는 이걸 미국이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즉 미국을 중국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묶어버리면 안에서 이 고름이 터질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래서 중국을 봉쇄하기 위해 일본과 한국 등도 활용하는 것이고.  

앞서 말했지만 이번 지소미아 종료를 통해 우리가 그러한 틀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후 정부의 움직임이 미국의 중국 봉쇄 하위 구조에서 이탈하겠다는 식으로 이어지면 위험해질 수 있다. 따라서 일단 현 상황에서는 지소미아 문제를 한일 간의 문제로 완전히 좁혀서 처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정욱식 : 물론 오바마 정부의 아시아로의 회귀 전략이 트럼프 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이름이 바뀐 것 이상의 큰 의미는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바마 정부 때 미국의 기본적 전략은 동맹과 우방국들의 군사 능력을 높이고 군사 네트워크를 강화하면서 미국의 패권 전략을 강화하겠다는 생각이었는데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과 관련해 이러한 전략보다는 '금전'을 중시한다.  

또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자체적인 힘으로 중국을 상대할 수 있다면서 굳이 동맹에 미국의 돈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즉 미국이 가지고 있는 군사 기술과 경제력, 여러 전략 무기의 우수성 등을 감안할 때 미국이 독자적으로 하면 되지 굳이 과거처럼 동맹국을 결집시켜서 뭔가를 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이렇다보니 미국 주류의 연속성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대통령이 바뀌는 과정에서 미국 내부의 응집력은 줄어들고 있다. 만약 오바마 정부 때 지소미아 종료가 일어났다면 우리한테 전략적 부담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지금은 다르다. 오히려 우리가 복안을 가지고 현 상황을 잘 풀게 되면 전화위복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은 지소미아 종료와 관련해 동맹의 업그레이드 언급했는데, 무엇을 염두에 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편으로는 동맹이 강화하는 일변도로 빠지면 안되는 부분이 있다. 그러니까 군사적 부분은 유연화 시키면서 평화 구축을 도모할 수 있는 동맹 관계로 끌어가는 것을 구상해서 하나 둘씩 조치를 취해야 한다. 

현 상황은 한미일 군사동맹으로 향해 가던 분위기에 브레이크가 걸린 건 맞다. 이후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이냐가 중요한데, 지소미아 종료와 맞물리면서 9월 북미 회담의 성사 여부와 그 결과가 미칠 여파가 커질 것 같다.  
 

▲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프레시안(이재호)


프레시안 : 지소미아 종료 이후 미국 정부가 강력한 불쾌감을 표시하면서, 이번 사건이 한미 동맹을 약화시켰고 우리가 북한에 대해 더 취약해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김동엽 : 미국이 강하게 불쾌감을 표시한 것은 우리에 대한 불만도 있겠지만, 그만큼 미국이 모양 빠지게 된 상황이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시아로의 회귀든, 인도-태평양 전략이든 미국은 이를 미중 대결 구도 속에서 구상하고 있다. 그런 미국에게 이번 사건은 타격이 될 수 있다. 러시아가 최근에 독도 영공을 침공했을 때 여기에 같이 대응해줘야 할 한국과 일본은 독도 문제를 가지고 대립했다. 이를 보고 중국과 러시아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미국 너희 뜻대로 될 것 같아? 밑에서 저렇게 싸우는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중국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을 볼 때 미국 입장에서 가장 견고하게 중국을 막을 수 있는 지역이 그나마 동쪽, 즉 한반도와 일본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오랜 기간 동안 미국-일본-한국의 구도를 가져왔는데 최근 이것마저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니까 미국은 모양 빠지는 것이다. 그런데 지소미아 종료까지 나오니 미국은 기분이 많이 나빴을 것이다. 

프레시안 : 한편으로 한국군이 이번에 독도 방위 훈련을 실시했는데 상대적으로 예전보다 규모가 커졌다. 이 훈련을 두고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의도가 있던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김동엽 : 대내, 대외적인 목적이 다 있다고 본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 안 할 수는 없다. 현재 한일 양국 정부는 상대방과 관계에서는 잘못되고 있는 측면이 있지만 자신들의 정권을 수호한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양국 간 접점이 생기려면 상대에게 압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과 일본 국민이 자기들 정부를 상대 쪽으로 틀게 해야 하는데 양측 정부 모두 여기서 굽히고 들어가면 대외, 대내적으로 헤어나기가 힘드니까 이렇게 방향을 틀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독도 방어 훈련의 명칭을 '동해 영토 수호 훈련'이라고 바꿨던데 이건 좋은 선택이었다고 본다. 훈련의 규모는 두 배나 커졌지만 동해라는 용어를 쓰면서 어떤 특정국가가 아니라 불특정 국가와 세력에 대비해 우리의 이익을 수호하는 차원의 훈련이 됐기 때문이다. 

실제 훈련도 독도에 일본의 극우단체가 상륙하는 상황과 함께 불특정 국가의 침범 상황, 주변 국가 함정의 영해 침범 상황 등을 가정해서 진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 즉 이번 훈련이 단순한 독도 방위의 훈련이 아니라 포괄적인 여러 상황을 감안해 진행했고, 이를 통해 일본과 적대적인 문제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욱식 : 문재인 정권과 아베 정권이 국내 정치적으로 '적대적 의존관계'에 들어간 상황이 가장 우려된다. 실제 양측의 갈등이 국내에서 각자 정부의 지지율을 받쳐주는 효과가 드러나고 있기도 하지 않나? 그런 상황이라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이 갈등 국면을 타개하려는 동기가 위축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국가 간 관계가 나빠지면 결국 국가 구성원에게 피해가 돌아간다. 우리야 일본이 숙이고 들어오기를 바라고 있겠지만 현재 그런 징후는 없고 앞으로도 별로 그럴거 같지 않다. 이런 상황이 장기화되면 경제적 악재가 될 가능성이 높은데 이를 감당할 수 있겠냐는 부분에 대해 냉정하게 짚어봐야 한다.  

미국, 한일 갈등 중재할 이유 없다 

프레시안 : 미국이 보기에 한국과 일본의 대립이 자신들의 동아시아 전략에 있어 문제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중재를 할법도 한데, 왜 미국은 가만히 있었을까? 

정욱식 : 7월 초 일본이 수출규제 조치를 취하고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시키는 경제 보복 조치가 가시화될 때 국내에서는 '미국이 개입할거다. 타이밍의 문제다'라는 전망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미국은 팔짱 끼고 있었다.  

군사 및 안보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한일 간 관계 악화가 미국에 부담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경제 전쟁에 준하는 상황의 발생은 미국, 특히 트럼프 행정부 입장에서는 마다할 이유가 별로 없다. 

트럼프 정부는 자유무역보다는 보호무역을 선호하고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는 향후 RECP(역내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 한중일 FTA 등 자유무역과 관련한 조치가 가시화되고 있었다. 그러다 이번에 한일 갈등으로 이같은 조치가 다 물 건너가게 생겼다. 즉 동아시아의 자유무역질서를 억누르겠다는 미국의 전략이 일본의 수출규제와 이해관계가 잘 맞아 떨어진 셈이다. 이 때문에 애초부터 트럼프 정부가 개입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또 이번 조치에서 일본이 가지고 있는 장기적 목표는 남북경협의 본격화를 예방한다는 측면도 있다. 전략물자 통제를 엄격히 하면서 북한에 이러한 물자가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다. 이 부분에 대해 미국과 일본이 이미 이야기가 됐을 것이라고 본다. 일본의 이 조치는 미국의 '최대 압박' 전략과도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 25일(현지 시각) G7 정상회의를 계기로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정상회담을 가졌다. ⓒAFP=연합뉴스


한편으로는 전면적인 개입주의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트럼프가 한일 간 개입을 꺼리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 미국의 국가안보전략보고서나 주요 국가 문서에 과거 같았으면 한국, 일본, 호주 등과 관계를 강화시키는 것이 중요하게 언급됐을텐데 지금 트럼프는 이보다는 '공정함'을 중요시하고 있다. 또 지난해 북한과 정상회담을 가지면서 북한 위협론의 필요성도 굉장히 떨어졌고, 중국과는 경제전쟁을 하다 보니 여기서 한일 문제에 개입해봐야 득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일 간 갈등에서 미국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한일 간 경쟁이 붙을 수 있는데, 그럴 경우 트럼프는 꽃놀이패를 쥐게 되는 것이다. 방위비 분담금이나 무기 판매에 있어 경쟁이 붙은 양쪽에 청구서를 들이 밀면 그 효과는 더욱 커질 것이다. 이 부분이 우려되는 지점이다.  

김동엽 : 미국 개입이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한미일 구도를 옭아매고자 미국이 노력했던 것이 한일 양국의 역사적 갈등 해결이었다. 위안부 합의도 이러한 측면에서 이뤄진 셈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한일 간 문제를 적극적으로 중재하면 미국이 중국을 포위하는 군사적 차원에서 동북아 문제들을 바라보고, 처리하고 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즉 한일 간 다양한 역사적 문제에 개입하는 순간 대중국 전략의 의도가 겉으로 드러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차원에서 미국이 쉽게 개입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또 미일 간 이 문제와 관련해 일정한 공감대가 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여기에 괜히 개입하기보다는 암묵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것이 자신들이 중요시하고 있는 미일 동맹 자체를 더 제대로 관리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이 문제를 접근했을 수 있다. 

지소미아 종료와 북미 대화  

프레시안 :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이나 불확실성은 결국 북핵 위협이 없어지고 남북관계가 풀리면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을 텐데, 그런 측면에서 지소미아 종료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어떤 연관관계가 있을 거라고 전망하나?  

김동엽 : 지소미아 시작점 자체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관련돼있다. 따라서 미국이 생각하는 구도 등을 생각했을 때 분명히 지소미아 종료가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래서 이 사안을 한일 문제로 좁혀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이다. 

북핵 문제 해결의 관건인 북미 대화가 지소미아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한반도의 전체 안보 환경이나 동아시아 차원에서 보자면 지소미아가 큰 변수이긴 한데, 북미 관계라는 양자적 차원에서만 보면 지소미아의 유무는 크게 상관이 없어 보인다. 다만 우리가 북미 간 대화에 개입하려고 했을 때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남한은 지난 1년 동안 북미 사이에서 나름대로 역할을 잘 해왔다. 평창 올림픽부터 시작해서 9월 평양 정상회담까지의 과정은 좋았고, 올해 2월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4월에는 워싱턴에 가서 한미 정상회담을 하면서 중재자든, 촉진자든 나름의 역할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가 6월 30일 판문점에서의 남북미 정상 회동으로 이어졌다고 평가할 부분도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 나타나는 북한과 미국의 반응을 보면 한국의 역할에 대해 북한은 남쪽을 미국의 대변자로, 미국은 반대로 남한이 자신에게 이야기도 안하고 북한과 손발을 맞춰서 자신을 코너로 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즉 양측 모두 우리를 균형된 중재자가 아니라 일방적 메신저 또는 중재자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지소미아가 종료된 현 시점에 미국 입장에서는 우리가 북미 간 협상에 개입하는 것 자체가 불편할 수 있다. 즉 미국이 우리에게 북미 간 비핵화 협상 과정에 동참할 기회를 줄 것이냐의 문제가 있다.  

미국은 지소미아 종료가 자국의 안보 영역에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북미 간 테이블에 우리를 다시 불러 들일 가능성이 낮다. 이런 상황이라면 정부가 북미 사이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려고 애쓰기 보다는 다른 방식을 모색하는게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 스스로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등의 다른 길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김동엽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프레시안(이재호)


정욱식 : 지소미아 종료는 북미 회담과 별로 관계가 없을 거라고 본다. 한미 관계는 좀 불편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의 반응을 종합해보면 우려했던 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지소미아 연장을 선택했다면 남북관계에 악재가 됐을 수 있다. 그래서 추가적인 악재를 차단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 부분도 있다고 본다. 

또 북한이 최근에 정부에 막말을 하고 한국만을 사정거리에 두고 있는 미사일 시험을 하고 있는데 미국에서 별다른 반응이 없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려를 표명한다든지, 경고를 한다든지 등등 발언이 나와야 하는데 지금 일체 그런 것이 없다. 오히려 북한에서 오케이하면 실무회담을 하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역시 분명 과거와 달라진 미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난해 북미 양측이 처음 만났을 때는 남한 정부가 중재 또는 촉진의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그게 필요 없어졌다. 여기에 북한은 한국의 중재 역할이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미국은 북한과 바로 소통이 가능한데 남한이 끼어들 필요가 있냐고 보는 것 같다. 이는 지소미아 종료 이전부터 있었던 생각으로 보인다.  

물론 지소미아 종료에 따른 한미 간에 일시적인 불편함이 생기긴 했으나, 오히려 이제는 한미 동맹 문제에 관해 우리가 어젠다를 가지고 치고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미국 대통령이 한미 연합 군사 훈련이 싫다고 하고 북한도 이걸 가지고 물고 늘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한미 정상 간 합의를 통해 적어도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한미 훈련은 중단하겠다는 정도의 조치를 이끌어내는 등의 움직임이 필요하다.  

지소미아, 위안부에 이어 사드 배치까지?  

프레시안 : 지소미아 종료를 2015년 일본군 '위안부' 합의, 2017년 사드 배치 등 미국의 관여로 만들어진 사안들이라고 한다면, 위안부 합의와 지소미아는 정리됐고 이제 남은 것은 사드 배치 문제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부분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이라 예상하나? 

정욱식 : 현재 사드 배치는 일반 환경영향평가에 들어갔고 내년 초에 끝난다. 약식평가에서는 상관 없는데 일반 평가에서는 주민 공청회를 해야 한다. 이게 변수인데, 정부에서는 최대한 공청회를 미뤄서 주민들의 반발을 근거로 정식 배치를 늦추려고 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지소미아 종료 이후 사드 철수 문제도 한미 간에 논의를 해야 할 사안이다. 당연히 미국 주류는 반발하겠지만 트럼프는 한국에 사드 갖다놓은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고, 또 한미 간 합의로 사드를 한반도에서 철수하면 자신의 성과로 포장할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미국이 정식 배치를 의제화할 경우 우리는 철수를 의제화하는 맞대응이 필요하다. 양국 정상이 합의를 통해 철수를 위한 출구전략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프레시안 : 이미 사드 포대를 비롯해 시설은 다 들어온 것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철수할 수 있을까?  

정욱식 : 현 상태로 유지한다고 하면 우리 정부가 2017년에 공언했던 이른바 '3불'을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정식 배치가 공론화되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은 발전기를 가져다 놓고 레이더를 돌리고 있지만 정식 배치되면 송전선을 깔아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미국이 레이더를 업그레이드하면 2017년의 3불 정책이 뿌리째 흔들리게 된다. 그 상황이 가기 전에 우리 측에서 먼저 철수를 의제화하면서 의제 선점 효과를 노리는 것도 생각해봐야 한다.  

김동엽 : 시설적 측면만 놓고 본다면 다를 수도 있지만 임시배치에서 실제배치로 넘어간다고 해서 이것이 '3불'을 완벽하게 벗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3불은 추가적인 포대가 늘어나느냐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드가 정식 배치 단계로 접어들면 어떤 경우든 중국의 반발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공론화시킬 필요가 있다. 즉 사드를 가지고 들어온 가장 큰 명분 상 이유인 북한의 위협을 가지고 우리가 이야기해야 한다. 이와 연결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드 임시배치를 정식배치로 넘겨야 할 정도로 안보적 상황이 급변되거나 악화된 건 아니지 않나? 지금 안보 상황이 사드를 배치했던 2017년보다 좋아지면 좋아졌지 나빠지진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 사드를 배치했던 때와 비교했을 때 임시배치를 정식배치로 빠르게 전환할 만한 명분이 부족하다면, 이를 이용해 우리가 시간적인 여유를 갖는게 중요하다.

정욱식 : 사드 문제 관련해서 하나 더 짚고 싶은 부분은, 만약 정식배치에 돌입하면 한국에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하려는 미국의 필요성이 더 커질 것이다. 중국이 군사적 대응을 공론화할 것이고 북한도 가만히 있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면 중국과 북한의 군사적 대응을 동시에 불러낼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이에 대비하기 위해 중거리 미사일 배치 명분을 쌓을 수 있다.  

따라서 북미 회담이 이러한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이른바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을지가 중요하다. 사드 정식배치가 현실화되면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 배치도 현실화될 수 있고 그러면 동북아 내 군사적 긴장이 높아질 수 있다.  
 

▲ 지난 2017년 4월 26일 새벽 사드 장비를 실은 트레일러가 성주골프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김동엽 :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 배치는 사드와 다르다. 사드는 나름 배치 명분이 있었지만 중거리 미사일은 한국에 배치되는 순간 신냉전의 시작이다. 

중거리 미사일은 사거리 500km 이상의 미사일을 의미한다. 이건 북한이 아니라 중국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다. 사드는 고각이든 뭐든 구실을 만들어내서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한 대응이라고 말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중거리 미사일은 그런 명분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따라서 상황이 뒤바뀌지 않는 이상, 즉 북중러의 '북방 3각'이라는 개념을 통해 중국이 주한미국을 위협할 수 있다는 차원의 이야기가 나오면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은 이상 중거리 미사일 배치 문제는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또 사드 정식배치 문제가 중국이나 북한의 반발을 불러올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고 해도 이걸 명분으로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할 수는 없다. 또 실제 미국의 반발과 실제 물리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긴장 상황의 고조와는 다른 측면이 있다.  

중국이 말로는 긴장 고조를 할 수도 있지만 지금 지리적으로 봤을 때 중국은 추가적으로 어떤 움직임을 보이지 않더라도 괜찮은 상황이다. 오히려 사드 정식배치 됐다고 해서 단순한 말을 넘어선 추가적인 행동을 하면 그걸로 인해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 배치의 빌미를 줄 수 있다. 중국이 현명한 전략가라면 이러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중거리 미사일을 한국에 가지고 올 정도의 실질적인 긴장 고조까지 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북한의 '막말'은 간절함의 표시?  

프레시안 : 최근 북한의 동향도 좀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 북한이 저렇게 막말을 하고 연이어 미사일을 시험 발사하는 상황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북한의 본심은 대체 무엇인가?  

정욱식 : 우선 대내적인 측면에서 이같은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이달 29일 최고인민회의를 앞두고 있고 아마 그 이후에 북한은 나름의 '빅 딜'안을 준비해서 북미회담에 임하려고 할텐데, 북미회담이 잘된다는 건 곧 북한의 핵 포기를 의미한다. 즉 회담이 잘된다는 것은 전략적으로 결단을 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구도인만큼, 북한은 자신들이 핵을 포기하더라도 '초대형 방사포'로 자위력 지킬 수 있는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군사 분야에서 계속 현지지도를 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남한에 보내는 메시지도 있다. 북한은 한미 연합 군사 훈련 문제뿐만 아니라 남한이 전면적 군비 증강으로 나가고 있는 부분과 관련해 이를 중지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기도 하다. 

또 미국에 보내는 메시지도 있다. 미국이 지금 하는 단거리 미사일 시험 정도는 넘어가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자신들의 자위권 문제이며, 막말로 미국까지 날아가는 것도 아니지 않냐면서. 어쨌든 미국은 눈감아주고 있는 분위기로 가고 있는 것 같다. 

한편으로 북한이 이렇게 연이어 미사일 시험을 감행하는 것은 역으로 비핵화 담판을 준비하려는 신호일 수 있다. 그래서 9월부터 상황변화가 있을 수 있고, 이런 부분들을 우리 국방 예산에도 적절히 반영해야 한다.  
 

▲ 25일 북한 매체들은 지난 24일 북한이 '새로 연구 개발한 초대형 방사포'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지도 하에 성공적으로 시험발사했다고 보도했다. 조선중앙TV가 25일 오후 공개한 사진에서 김 위원장이 방사포를 뒤로 하고 활짝 웃고 있다. ⓒ조선중앙TV=연합뉴스


사실 남북, 북미 관계에 있어 중요한 변곡점 중에 하나가 남한이 내년 국방예산을 어느 정도 규모로 책정할 것이냐는 문제다. 북한이 과거에 이야기했던 병진노선과 지난해 채택한 새로운 전략노선은 상당한 모순관계에 있다. 북한 입장에서는 지난해 새로운 노선을 이야기하며 군비 조절을 통해 경제발전에 필요한 내적자원을 동원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남한이 군비 경쟁 드라이브를 걸어 버리니까 골치아픈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물론 한반도 문제가 북미 간 적대관계와 이를 해소하기 위한 북미 회담을 중심으로 진행된 것은 맞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지금 남북관계가 상당히 악화됐다는 점을 살펴보고, 여기에는 북한의 언행이 유감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우리가 원인을 제공한 측면은 없는지 따져보기도 해야 한다.  

김동엽 : 2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북한의 발언들, 특히 지난 4월 12일 김 위원장의 시정연설을 포함해 지금까지 보도를 통해 나온 북한의 언사를 오독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북한의 발언은 대내적 메시지로 귀결된다.  

북한은 지난 7월 25일 이후 지금까지 미사일 발사 시험을 7번 했는데 처음에는 F-35 전투기와 한미 연합 군사 훈련을 언급했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이러한 부분은 발표 내용에서 사라진다. 이를 통해 북한이 남한의 군사적 행위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는 있지만 이것이 최근 메시지의 본질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북한은 지난해 미사일을 시험 발사하거나 동‧하계 군사 훈련 등을 김정은의 현지지도라며 공개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이는 어떻게 보면 김정은이 지난해 정상적인 통치 활동을 제대로 못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김정은이 이렇게 했던 이유는 남한, 미국과 관계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대의 중심에 문재인 대통령이 있었다. 

김정은은 지난해 중국에 비행기를 빌리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싱가포르로 갔고 60시간이 넘게 기차를 타면서 베트남으로 향했다. 미국과 협의를 통해 인민들에게 선물을 안겨주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물을 없었고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물론 그동안 훈련다운 훈련도 제대로 못했고. 이런 과정에서 북한 내부에서는 우리 안보는 어떻게 하냐는 의구심도 나왔을 것이다.  

하노이 결렬의 충격을 받은 김정은은 이로 인해 두 달 동안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4월 12일 시정연설을 하면서 입장을 밝혀고 이후 처음으로 했던 공개활동이 군 부대 방문이었다. 이는 김정은이 지난해처럼 하지는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협상을 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고, 훈련이든 군비 확충이든 할 건 다하면서 연말까지 미국에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즉 대화의 문은 열어 두되 내가 할 것은 다하겠다는 뜻이다. 

북한은 결국 미국에 양보하는게 아니라 '니가 만들어 놓은 틀 속에 들어가지는 않겠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라고 본다. 또 트럼프가 트위터로 6월 30일 판문점 만남을 구상했지만 이걸 기회로 잡아 1시간 대화로 만든 것은 김정은이다. 이후 김정은은 7~8월 내부 통치를 정상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거라고 봐야 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미국의 말도 오독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트럼프가 한미 연합 훈련은 필요 없다, 북한 미사일 발사 별거 아니다 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를 두고 '미국 너희들은 미사일 안맞으니까 그렇게 말하는거 아니냐, 우리만 맞아 죽으라는 거냐'라고 해석하는데 사실 트럼프 발언 역시 대내 정치적인 메시지로 봐야 한다. 1년 뒤 대선을 앞두고 있는 대통령선거 후보 입장에서 발언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남한을 신경쓰기보다는 대선에 임하는 자신의 업적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이 북한과 협상을 해서 북한이 미사일을 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켜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2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에도, 지난 6월 30일 판문점 회동 이후에도 북한이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만 반복해서 하고 있다. 

미국이 북한의 미사일을 이해한다고 넘기면서 한미 연합 군사 훈련은 쓸데없고 돈 낭비라고 일갈하는 이유도 북한과 협상에서 자신의 역할을 부각하면서 실무진에서는 어떻게 하든간에 지도자 간에는, 즉 김정은과 자신의 관계는 그대로 유지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혹시나 있을 수 있는 회담에서의 북한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한 발언이었다고 해석된다. 

한국, '중재자' 또는 '촉진자'만이 능사 아냐 

프레시안 : 최근 북한이 WFP(세계식량계획)를 통해 전달하려던 우리 쌀은 받지 않고 중국이 지원하는 쌀은 받으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북중 간 경협이 다시 본격화되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나오는데, 반면 남북관계는 상당 부분 막혀있다. 남북관계 복원, 그리고 나아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 정부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정욱식 : 북한에게는 미국과 담판을 짓겠다는 것이 번지점프를 하는 것과 같다. 살아서 돌아오려면 뒤에 묶인 줄이 튼튼해야 한다. 북한 인민들의 지지는 물론이고 중국 혹은 러시아와 전통적인 우방관계를 공고히하는 것이 필요하다. 얼마 전에 북한 인민군 총정치국장이 중국가서 중국 수뇌부 만나서 군사협력 강화하겠다는 것도 미국과 본격 담판에 돌입하기 전에 안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으로 읽힌다. 중국과 러시아가 단단히 잡아주겠다는 메시지가 있어야 북한도 나름대로의 빅딜을 시도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김정은이 지난 4월 시정연설을 통해 북미 간 협상 시한을 올해 말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이는 내부적으로도 그렇게 시한을 잡아놓은 것이었다고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북한은 미국에게 '너희들이 양보해라'라는 메시지만 보낼 수는 없다. 그래서 북한은 2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서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협상안을 준비하자는 일관된 메시지를 밝히고 있다. 

물론 미국이 이걸 받아들일 것이냐는 별개의 문제다. 만약 미국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의 결렬을 초래했던 입장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면 협상판은 100% 깨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북한은 내년부터 '새로운 길'을 보여줄 가능성이 높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전개된다면 트럼프도 더 이상 지금과 같이 나올 수는 없다.  

그래서 북미 회담이 중요한데, 우리가 여기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가 문제다. 지금 우리가 양측을 중재하기 위한 조건과 환경이 상당히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일단 남북 간 대화는 단절돼있기 때문에 한미 공조를 통해 미국에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영변 핵 실험장 폐기 카드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간 것이 확인됐기 때문에 이 방안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우리 나름의 안을 준비해서 미국에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북미 간 협상에서 핵심은 결국 '빅 딜'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이냐에 달려있다. 양측이 대타협의 안을 만들어서 밀어붙여야 한다. 연내 합의가 가능하다면 북한도 5개년 경제발전 계획인 내년에 맞출 수 있고 미국도 재선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맞춰서 준비해야 한다. 그러니까 일단 연내 빅 딜을 타결하고 내년에 이를 본격 이행하는 국면으로 전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지난 6월 30일 판문점에서 만난 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AFP=연합뉴스

 
김동엽 : 남한에 대한 북한의 수위 높은 이야기를 보면 절절함이랄까, 간절함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막말 자체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이 다른 길을 가지 않게 붙잡아 달라는 신호로 보인다. 또 여기에는 남한에 대한 실망감과 섭섭함, 아쉬움 등도 묻어나는 것 같다.  

그래서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 이후 2차 북미 정상회담까지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어떤 역할을 했었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비핵화 문제에서, 또 북미 간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는 문제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려고 했었는지에 대한 부분을 역지사지의 자세에서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반성을 시작점으로해서 우리가 향후에 어떻게 현 상황을 풀어갈지 고민해야 한다.  

그렇다고 그동안 남한이 했던 중재자 또는 촉진자로서의 역할을 다 버리라는 건 아니다. 언젠가는 다시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역할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부분을 인정하고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게 중요하다. 이를 위해 현재 중요한 것은 남북관계다. 

이번 정부는 처음에 출범했을 때는 남북관계를 통해 뭔가를 극복해 보겠다는 담대함과 용기가 있었다. 남북관계를 통해 생길 수 있는 한미관계에서의 약간의 소원함 등을 감수하겠다는 나름대로의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정말 하고 싶었던 것과 하려는 것의 차이가 커졌고 여기에 용기도 없어졌다. 이런 상황에서는 우리가 어떠한 역할을 하려고 해도 실제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지금은 오히려 남북관계에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고 치고 나가야 한다. 

북한이 통미봉남을 이야기하는 듯 하지만 사실 남북관계는 통미봉남으로 갈 수 없다. 이건 구시대적인 발상이고 북한도 이렇게 할 수는 없다는 점을 알고 있을 것이다. 선후관계는 있을 수 있으나 누구하고는 이야기하고 누구하고는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식의 방법으로는 문제를 풀 수 없다.  

물론 북한이 플랜 A와 B를 모두 생각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플랜 A는 당연히 미국과 담판을 짓는 것이다. 그게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올해 11월부터 내년 미국 대선 결과가 나오고 새 정부가 짜여질 시기까지, 즉 앞으로 1년 6개월 정도는 북미 간 새로운 합의를 만들어 낼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러면 그 1년 6개월을 버틸 수 있도록 북한이 핵과 미사일 시험을 하지 않는 것 외에 또 다른 합의 사항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트럼프 입장에서도 자신의 대선 선거 유세 기간 동안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시험하게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지금부터 올해 11월 전까지 되돌릴 수 없는 북미관계를 일정 부분 만들어놓아야 한다. 그런데 이걸 북미 관계로만은 할 수 없다. 남북관계도 함께 가야 한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세 번의 남북 정상회담을 가진 만큼, 이를 동력으로 삼아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서로 상호 보완적으로 되돌릴 수 없는 수준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를 통해 한반도 비핵화의 모멘텀을 구축해야 한다.  

북한이 만약 플랜 B로 간다면 미국을 젖히고 중국과 러시아를 통해 국제사회로 나가겠다는 건데, 이게 가능하려면 북한은 핵과 미사일 시험을 유예하고 있어야 한다. 또 그 상황에서 남북 간 평화가 계속 유지돼야 한다.  

결국 북한 입장에서 플랜 A를 택하든, 플랜 B를 택하든 간에 남북관계가 일정 부분 되돌릴 수 없는 수준에 있어야 한다는 점은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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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연방연합제 1단계에 우리는 이미 들어와 있다”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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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9/08/28 11:52
  • 수정일
    2019/08/28 11:52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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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뉴스 기획강좌②>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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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8.27  14:5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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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남북 연방연합제 통일방안’, 2007년께 개념화 2014년 공식화

   
▲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은 지난 8일 오후 광화문 조영래홀에서 열린 '2019 통일뉴스 기획강좌'에서 '공존단계를 거친 통일 -북측 연방연합제를 중심으로'를 제목으로 강연했다. [사진 - 조천현]

“북한의 남북연방연합제 개념은 2000년도부터 북측 내부에서 논의되기 시작해서 2007년도에 개념화가 됐다. 그리고 20014년 7월에 공화국 성명으로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연방연합제라고 하는 단어가 나온다.”

‘2019 통일뉴스 기획강좌’ 제2강을 맡은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은 ‘공존단계를 거친 통일 -북측의 연방연합제 통일방안’을 주제로 한 강연에서, 북측의 공식 통일방안인 남북연방연합제가 2007년께 개념화 돼 2014년 발표됐다고 밝혔다. 나아가 판문점선언으로 남북은 사실상 연합제 1단계에 진입했다고 평가해 주목된다.

정창현 소장은 21세기민족주의포럼과 통일뉴스가 지난 8일 오후 7시 서울 광화문 변호사회관 조영래홀에서 개최한 ‘통일방안을 논하다’ 기획강좌에서 북한의 통일방안 변천사와 연방연합제로의 정립, 연방연합제의 단계와 내용 등에 대해 분석했다.

먼저, 잘 알려진 대로 북측의 연방연합제는 직접적으로는 2000년 6.15공동선언 2항에서부터 출발했다고 짚었다.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고 합의한 대목이다.

정창현 소장은 "북측은 6.15공동선언 2항이 나오고 나서, 외무성, 대남사업부문, 선전선동부문, 이 부분들이 다 모여서 TF팀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며 ”여기서 남측의 연합제와 연방제의 공통점이 도대체 뭐냐? 그제서야 굉장히 깊이 있는 연구를 시작했다고 본다“고 관측했다.

이어 “그 결과 2007년 10.4선언이 나올 때는 북에서는 내부적으로 연방연합제라는 말을 벌써 쓰기 시작했다”며 “2007년부터 2014년까지 7년 동안 그것을 수면으로 내세우기 위해서 내부적으로 굉장히 많은 토론을 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2014년 7월 7일자 공화국 정부 성명은 6.15공동선언 2항을 언급한 뒤 “북과 남은 련방련합제방식의 통일방안을 구체화하고 실현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공존, 공영, 공리를 적극 도모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북 연방연합제 방식 통일방안’을 공식 천명한 셈이다.

당시 박근혜 정부에 대해서도 “우리는 북남관계문제, 나라의 통일문제를 민족의 지향과 념원에 맞게 풀어나가려는 립장에 선다면 남조선당국을 포함한 그 누구와도 손잡고 나갈 것이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2016년에 36년만에 열린 제7차 당대회에서는 통일방안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고 김정은 위원장이 “북과 남은 상대방에 존재하는 서로의 사상과 제도를 인정하고 용납하는 기초우에서 온 민족의 지향과 요구에 맞게 련방국가를 창립하는 길”을 언급했을 뿐이다.

정 소장은 “연방연합제라는 말을 쓰지 않고 1단계는 통일의 동반자로서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는 단계, 이게 우리가 이야기하는 남북화해협력 단계”이며 “서로의 사상과 제도를 인정하고 용납하는 단계, 이게 연방으로 넘어가는 두 번째 단계. 그리고 그 단계에서 전 민족적인 높은 단계의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 식의 연방제 방식으로 통일하자는 게 2016년도 7차 당대회 북측 기본입장”이라고 해설했다.

북의 완성된 통일방안, [사진 - 조천현]

   
▲ 정창현 소장은 북측은 2014년 남북연방연합제 통일방안을 천명했지만 1980년 발표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을 지금까지도 기조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 [사진 - 조천현]

이같은 연방연합제 통일방안은 어느날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적 맥락에서 배태되었다는 것이 정 소장의 고찰이다.

그는 “남북이 분단된 이후에 상당히 오랜 기간 남과 북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통일방안도 기본적으로는 흡수통일 방안이었다”며 “과도적인 대책으로 잠시 남북간의 연방제를 실시할 수도 있다는, 과도적 형태의 연방제를 1960년 8월 14일, 광복절 하루전날 기념대회에서 김일성 수상이 당시 제기했다”고 되짚었다.

남쪽에서 예기치 못한 4.19혁명이 발발했고, 북측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북측이 ‘자신감’ 속에서 당장 남북총선거가 어렵다면 과도기적 대책으로 연방제를 제안했다는 평가다. 당시 북측은 연방제 영문표기를 ‘confederation(연합)’으로 했고, 그는 당시 동독의 ‘국가연합제’안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70년대 초반 미-중 간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1972년 7.4남북공성명이 채택됐고,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고 하는 북측이 생각하는 통일의 3대 원칙을 남측과 같이 합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게 됐다”고 평가했다.

7.4공동성명이 무산된 이후 북측은 1973년 고려연방제를 제안했고, “고려연방제의 가장 큰 특징은 남쪽 정부를 배제하고 남북의 정당사회단체 각계각층의 인민들로 구성되는 대민족회의를 소집해서 그것에 기초해서 고려연방제를 건설하자고 하는 안으로 제안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병행해 북측은 1974년 유엔에서 남쪽을 배제하고 북측과 미국 양자 간에 평화협정을 맺자는 수정제안을 내놓았다. 평화협정의 당사자가 남북에서 북미로 바뀐 것이다.

   
▲ 북한이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채택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을 도표화 했다. [자료제공 - 정창현]

이 같은 과정을 거쳐 마침내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이 채택됐다. 그는 “39년이 지났지만 북한의 공식 통일방안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이라며 “지금도 북쪽 사람들을 만나면 기본 골격은 이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남북이 동수로 참여하는 대표에 해외대표단이 들어와서 최고민족연방회의를 구성하고 일상적으로 그 회의를 대체할 수 있는 연방상설위원회를 만들고 그 밑에 남측 정부와 북측 정부가 지역자치정부로서 기능을 하고 그리고 주요한 정치‧경제‧국방‧외교 문제는 최고민족연방회의, 최고연방상설위원회에서 논의한다. 그리고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이라는 단일 국호로 유엔에 다시 가입하자고 하는 안이 기본적으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구성안이다”라고 설명했다.

북측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의 4대 선결조건으로 △반공법·국가보안법 폐지, △모든 정당, 단체 합법화, △군사파쇼정권의 교체 등 군사파쇼정치 청산과 사회민주화 실현,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군 철수 등을 내세웠다.

그는 “1983년 이후 전두환 정권과 정상회담 논의를 진행함으로써 스스로 선결조건을 무력화시켰다”며 “4대 선결조건은 당시로서는 남측 정부가 수용하기 어려운 조건들이었지만 39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보면 어쨌든 80년대 선결조건을 우리가 상당히 많이 충족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북측 내부에 두 가지 기류가 있었던 것 같다”며 하나는, 과도적 연방제, 고려연방제안,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으로 이어지는 기본 흐름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아니, 어떻게 전두환 정권하고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을 만들 수 있느냐.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흐름이 있어 결국 4대 선결조건이 따라 붙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또한 4대 선결조건 다음에 10대 시정방침을 발표했지만 이 역시 1993년 ‘민족대단결 10대 강령’으로 교체됐고, “민족대단결 10대강령이 훨씬 온건하고 훨씬 계급포용적”이라고 평가했다.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1993년 4월 6일)
 

근 반세기에 걸치는 분단과 대결의 력사를 끝장내고 조국을 통일하는 것은 온 민족의 한결같은 요구이며 의지이다.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서는 전민족이 대단결하여야 한다. 민족의 운명을 우려는 사람이라면 북에 있건 남에 있건 해외에 있건, 공산주의자이건 민족주의자이건, 무산자이건 유산자이건, 무신론자이건 유신론자이건 모든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 단결하여야 하며 조국통일의 길을 함께 열어나가야 한다.

힘있는 사람은 힘을 내고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을 내고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내여 모두다 나라의 통일과 통일 된 조국의 륭성 번영을 위하여 특색 있는 기여를 함으로써 민족 분렬을 끝장내고 통일된 7천만 겨레의 존엄과 영예를 세계에 떨쳐야 한다.

1. 전민족의 대단결로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국가를 창립하여야 한다.

북과 남은 현존하는 두 제도, 두 정부를 그대로 두고 각 당, 각파, 각계각층의 모든 민족성원들을 대표할 수 있는 범민족통일국가를 창립하여야 한다. 범민족통일국가는 북과 남의 두 지역정부가 동등하게 참가하는 련방국가로 되여야 하며 어느 대국에도 기울지 않는 자주적이고 평화적이며 쁠릭불가담적인 중립국가로 되어야 한다.

2. 민족애와 민족자주정신에 기초하여 단결하여야 한다.

전민족은 각자의 운명을 민족의 운명과 하나로 련결시켜 민족을 열렬히 사랑하고 민족의 자주성을 생명으로 지키려는 하나의 뜻으로 단결하여야 한다. 우리 민족의 존엄과 긍지를 가지고 민족의 주체의식을 좀먹는 사대주의와 민족허무주의를 배격하여야 한다.

3. 공존, 공영, 공리를 도모하고 조국통일위업에 모든 것을 복종시키는 원칙에서 단결하여야 한다.

북과 남은 서로 다른 사상과 리념, 제도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서로 침해하지 말고 함께 진보와 번영을 누려가야 한다. 지역적, 계급적 리익에 앞서 전민족 리익을 도모하여야 하며 모든 노력을 조국통일위업을 이룩하는데 기울여야 한다.

4. 동족사이에 분렬과 대결을 조장시키는 일체정쟁을 중지하고 단결하여야 한다.

남과 남은 대결을 추구하거나 조장하지 말아야 하며 모든 형태의 정쟁을 중지하고 비방중상을 그만두어야 한다. 동족끼리 적대시하지 말고 민족의 힘을 합쳐 외세의 침략과 간섭에 공동으로 대처하여야 한다.

5. 북침과 남침, 승공과 적화의 위구를 다같이 가시고 서로 신뢰하고 단합하여야 한다.

북과 남은 서로 상대방을 위협하지 말아야 하며 침략하지 말아야 한다. 서로 상대방에 자기의 제도를 강요하지 말아야 하며 상대방을 흡수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6. 민주주의를 귀중히 여기며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하여 배척하지 말고 조국통일의 길에서 함께 손잡고 나가야 한다.

통일 론의와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여야 하며 정치적 반대파라고 하여 탄압, 보복, 박해, 처벌하지 말아야 한다. 친북, 친남을 시비하지 말아야 하며 모든 정치범을 석방, 복권시켜 조국통일위업에 함께 이바지하게 하여야 한다.

7. 개인과 단체가 소유한 물질적, 정신적 재부를 보호하여야 하며 그것을 민족대단결을 도모하는데 리롭게 리용하는 것을 장려하여야 한다.

통일되기 전에는 물론 통일된 후에도 국가적 소유, 협동적 소유, 사적 소유를 인정하고 개인 또는 단체의 자본과 재산, 외국자본과의 공동리권을 보호하여야 한다. 과학, 교육, 문학, 예술, 언론, 출판, 보건, 체육을 비롯한 모든 부문에서 각자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명예와 자격을 인정하며 공로자가 받고 있는 혜택을 계속 보장하여야 한다.

8. 접촉, 래왕, 대화를 통하여 전민족이 서로 리해하고 신뢰하며 단합하여야 한다.

접촉과 래왕을 가로막는 온갖 장애물을 제거하고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래왕의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 각당, 각파, 각계각층에게 동등한 대화의 기회를 주어야 하며 쌍무적, 다무적 대화를 발전시켜야한다.

9.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서 북과 납, 해외의 전민족이 서로 련대성을 강화하여야 한다.

북과 남, 해외에서 조국통일에 유익한 것은 편견 없이 지지성원하고 해로운 것은 함께 배격하여야 하며 각자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서로 보조를 같이하고 협조하여야 한다. 조국통일을 위한 애국사업에서 북과 남, 해외의 모든 정당, 단체와 각계각층의 동포들이 조직적으로 련합하여야 한다.

10. 민족대단결과 조국통일위업에 공헌한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여야 한다.

민족대단결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공을 세운 사람들, 애국 렬사들과 그 후대들에게 특혜를 베풀어야 한다. 지난날 민족을 배반하였던 사람들도 과거를 뉘우치고 애국의 길에 나서면 관용으로 대하며 조국통일에 이바지 한 공로에 따라 공정하게 평가하여야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5차 회의에 제출한 김일성 주석의 로작)

문익환‧임동원, ‘낮은 단계 연방제’로의 진화에 기여

   
▲ 정창현 소장의 강연 후 참석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사진 - 조천현]

실제로 그 사이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됐고, 무엇보다도 그는 “객관적으로 보면 90년을 전후해서 남북간의 힘의 역관계가 변화된 측면이 강하다고 본다”고 진단했다.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고, 남북 간에 경제적인 추세에서 남쪽이 상당히 변화되고. 특히 전두환시절 1983년도부터 3저호황에 기초해서 굉장히 한국 경제가 양적 성장을 하지 않았느냐”는 것.

그 과정에서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가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만나 허담 비서와 ‘4.2공동성명’을 채택함으로써 “쌍방은 누가 누구를 먹거나 누가 누구에게 먹히지 않고 일방이 타방을 압도하거나 타방에게 압도당하지 않는 공존의 원칙에서 연방제방식으로 통일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 선택해야 할 필연적이고 합리적인 통일방도가 되며 그 구체적인 실현방도로서는 단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는 점에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는 합의가 나왔다.

그는 “연방제 통일을 하는데 실현 경로에 대해서 사실은 89년도에 문익환 목사와 김일성 주석의 대화가 굉장히 중요한 결정이 된다”며 “거기에 기초해서 1991년 1월 신년사에 김일성 주석이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을 공식적으로 제안하게 되는 거다”라고 말했다.

   
▲ 북측의 통일방안 변화 과정을 도표화 했다. [자료제공 - 정창현]

김주석은 91년 신년사에서 “고려민주련방공화국 창립 방안에 대한 민족적 합의를 보다 쉽게 이루기 위하여 잠정적으로는 련방공화국의 지역자치정부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며 장차로는 중앙정부의 기능을 더욱 더 높여 나가는 방향에서 련방제통일을 점차적으로 완성하여야 한다”라며 ‘느슨한’ 형태의 연방제를 제시했다.

이에 근거해 1991년 남북 총리회담에 기초한 남북기본합의서가 만들어졌고, 기본합의서 협상 당시 남북의 두 주역 임동원-림동욱 라인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다시 만나 6.15공동선언 2항에 합의하게 됐다는 것.

그는 “북쪽에서는 남북기본합의서를 기본적으로 북측이 생각하는 조국통일 3대헌장에 넣지 않고 있다”며 “남북기본합의서를 북측에서는 연방제 문서가 아니라고 보는 것 같다. 연합제 문서지 연방제 문서가 아니라는 거다”라고 짚었다. 조국통일 3대헌장은 △조국통일 3대원칙,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 이다.

아울러 “남북회담에 나가는 대표단에게 김일성 주석이 어떻게든지 합의를 타결하고 오라는 훈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훈령을 우리가 알았다”며 “그래서 우리가 굉장히 세게 밀어붙였던 거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연합제 방식에서 봤을 때 굉장히 잘 만들어진 남북기본합의서가 만들어졌다”고 뒷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4단계 연방연합제와 DMZ 평화지대화‧철도도로 연결

   
▲ 북측의 연방연합제 통일방안을 연합제와 연방제를 각각 두 단계로 나누어 모형화 했다. [자료제공 - 정창현]

결국 2000년 6.15공동선언 2항을 거쳐 2007년 10.4선언과 지난해 4.27판문점선언, 9.19공동선언 및 군사분야합의서 등 남북 정상간 합의들이 이어졌고, 북측은 연방연합제 통일방안을 공식 입장으로 굳히게 됐다.

먼저, 그는 연방제와 연합제의 공통점에 대해 △통일의 형태가 아니라 통일의 준비과정을 규정하고 있고, △평화공존하는 과도적 단계와 느슨한 결합을 상정하고 있고, △남북 정부 간에 상설 협의체를 상정하고 있는 점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그는 “공통점이 사실 평화공존 단계를 거친다는 것 외에 없다”며 “차이점은 굉장히 크다”고 평가했다. 특히 △연방기구의 유무 △연방기구의 권한(외교권, 군사권), △상설합의체의 권한 유무를 중요한 기준으로 제시했다.

그는 남북 연합단계와 연방단계를 각각 2단계로 나누어 ① 남북연합 1단계 ② 남북연합 2단계 ③ 낮은 단계 연방제 ④ 높은 단계 연방제로 4단계에 걸친 남북연방연합제 모형을 제시했다.

남북연합 1단계는 ‘남북연합기구 추진’ 단계로 △남북정상회담 정례화 △분야별 장관급회담 △남북 의회 교류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설치를 꼽았다. 남북연합 2단계는 △남북정상회의 △남북각료회의(실행위원회) △남북평의회 △서울,평양 공동연락사무소 설치를 들었다.

이 같은 맥락에서 그는 판문점선언에 대해 “단어상으로 보면, ‘평화’라고 하는 개념을 북쪽에서 다 수용을 해서 판문점선언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 안에 조항들을 보면 사실은 남북연합제에 해당되는 통일로 가는, 북측이 생각하는 연방연합제의 1단계에 해당되는 제도적인 장치들이 대부분 들어가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평화와 번영이라는 형태로 강조가 돼 있지만 곳곳에 통일이라고 하는 아이콘이 숨어있는 게 판문점선언”이며 “판문점선언을 통해서 남북관계는 이제 남북연합단계에 진입을 했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기적인 정상회담, 직통전화 연결, △고위급회담, 국방장관회담 등 개최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설치 등이 남측 표현으로 ‘남북관계의 제도화’에 해당되지만 사실상 남북연합 1단계의 제도적 장치들에 해당된다는 해석이다.

그는 “우리는 연합제 1단계에 이미 들어와 있다”며 “안 된 게 남북 의회교류”라고 짚었다. 아울러 서울‧평양 연락사무소 대신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설치를 현실적 대안으로 평가했다.

그는 “연합기구 구성은 생각보다는 빨리 된다고 생각한다”면서도 “남북연합 단계가 시기적으로 굉장히 길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연합에서 연방으로 넘어가려면 우리가 이제 연방제로 넘어갈 때가 됐다는 것을 국민들한테 보여줘야 한다”며 “나는 연합단계의 가장 상징적인 사업이 DMZ 평화지대화 하는 문제와 철도‧도로 연결이라고 생각한다”고 제시했다.

이어 “지금 공동경비구역에 실질적인 비무장화는 진행됐고, 남북 간을 연결하는 통로가 개성 가는 길과 금강산 가는 길 두 개에서 철원 쪽에 하나 더 열렸다”며 “거기에다 철도‧도로를 연결해서 사람이 오고가고 물자가 오고가는 이게 사실은 제도적인 형태들 보다는 가장 핵심적인,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업”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우리는 연합제 1단계에 이미 들어와 있다”

   
▲ 정창현 소장은 북한의 연방연합제 통일방안 역시 가변적일 수 있다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진 - 조천현]

나아가 “연합제 2단계로 넘어가는 징표를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으로 본다”는 점과 “연합에서 연방제로 넘어갈 때는 평화협정과 비핵화가 전체 단계에서 가장 핵심적인 공정이 마무리되는 단계까지 진전이 될 때”라고 점쳤다.

그는 “노래에도 나오는 ‘사회주의 조선’과 ‘자본주의 한국’이 그냥 평화공존하면서 그럭저럭 잘 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간격을 좁히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었다”면서 평화공존이 ‘과정’이 아닌 ‘목표’로 될 수 있는 현실을 지적하고 임동원 전 통일부장관의 ‘통일지향적 평화공존’ 의미를 되새겼다.

그러면서 “우리세대는 힘들겠지만 IT와 스마트폰으로 또는 4차혁명과 인공지능 이런 세대에 적응이 된 남과 북의 젊은 세대들, 20대 30대들이 남과 북의 주역이 됐을 때는 사회문화적인 게 아니라 그야말로 IT나 정보기술로 자연스럽게 통합이 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도 내놓았다.

그는 “우리가 그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현실이 더 드라마틱하게 돌아가고 있다”며 “지금 북이 이야기하는 연방연합제라고 하는 것도 과정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크게 변화는 안 되겠지만 언제든지 가변적이라고 하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남북연합의 2단계의 기간을 얼마큼 볼 것이냐가 사실 쟁점이 될 것 같다. 나는 굉장이 오래될 것이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그는 참석자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과거‧현재‧미래 핵은 통일과 병존하지 않을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며 “과거‧현재‧미래의 핵도 다 협상 대상, ‘완전한 비핵화’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 배경으로 “북의 미래 청사진을 각 분야에서 만들고 있는 사람은 대부분 40대인 것 같다”며 “지금 현재 북을 움직이고 있는 신‧구세대가 있다면, 신세대들은 완전한 비핵화 부분에서 과거‧현재‧미래 핵에 대해서 미국과 협상할 용의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게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폐기) 중에 'I', 불가역적이라는 부분은 북에서 받지 않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이종적 전 통일부 장관의 ‘과정으로서의 통일 -남측 통일방안을 중심으로’ 강연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이날 강좌에서 정해랑 21세기민족주의포럼 대표가 여는 말을 했으며, 세 번째 강좌는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이 ‘한반도 평화체제 로드맵과 통일방안’을 주제로 9월 5일 오후 7시 서울 광화문 변호사회관 조영래홀에서 강연할 예정이다.

‘2019 통일방안 기획강좌’는 평화3000과 6.15남측위원회가 후원하고 있으며, 무료 공개강좌로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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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혁명의 전적지를 가다

빨치산 혁명의 전적지를 가다

 

김영승 기자 | 기사입력 2019/08/27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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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산의 역사성과 그 의미를 되 새겨본다

 

1. 서언

 

역사기행은 현장 답사를 통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학습장이 돼야 한다.

 

동시에 왜곡 되고 잊혀진 현대사를 바로잡고 정상적으로 발전시키는데 기여해야 한다.

 

현장답사에서 단순히 어떤 사건들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아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

그 시절 그때로 돌아가 당시 펼쳐진 사건들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가?

 

그 원인을 똑바로 규명하고 그 속에서 체득해야 할 역사적 경험과 교훈이 무엇인가의 핵심을 찾아내야 한다.

 

역사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성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현장답사의 물줄기를 과거로부터 현재현재에서 미래에로 지향해 가는 목적의식적인 현대 정치사로 연결시켜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주체적 역사관을 옳게 확립하는데도 기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기행문도 전개되는 사건들의 가감 없는 진실을 밝히고 오늘의 조국의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에 접목시켜 저마다 주어진 여건에서 당면한 과업 완수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기본 관점에서 기술하고자 하나 미흡한 점 많으리라 생각한다.

 

2. 피로 물든 섬진강을 가다

 

우리 일행에는 유복남박유배동지(백운산 빨찌산 출신들과 필자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노투사 (이성근안학섭양희철안희숙김영승나승하정관호전덕례정귀남윤혜자신평식손영심)들 그리고 몇몇 젊은 일꾼(박지수김해령노진민 등)들이 함께 했다.

 

남원에서 구례를 통과하는 길에 밤재가 있다.

 

지금은 밤재에 산 터널을 뚫어서 가파른 고개를 넘지 않아도 직선으로 통할 수 있다.

그동안 많이 변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 밤재에 얽힌 사연은 이렇다.

 

1951년 가을 이현상 부대가 백아산까지 와서 인원을 보충하고 지리산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당시 곡성과 구례 해방작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구례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이 밤재 능선을 장악해야만 했다.

 

 

밤재 능선이 남원에서 구례로 넘어오는 적의 통로를 차단하는 유일한 작전지대였기 때문이다.

구례작전은 밤재와 곡성에서 구래로 들어오는 통로하동에서 구례로 들어오는 통로를

완전히 차단해야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 빨치산 무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전투였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끝까지 사수하지 못하고

 

피아간의 수많은 사상자를 냈던 피어린 밤재 능선을 잊을 수 없다.

 

 

일행이 구례 산동면을 지날 때는 산동면 해방작전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면은 지리산 자락에 골짜기 하나가 한 마을을 이루고 있기에 상동하동중동이라 불렀다.

이 세 골짝 마을의 끝에 산동면 지서가 위치해 있다.

 

산동면을 해방시키는데 마지막 지서 함락 작전이 전개됐다.

이 작전에서 지서안의 적들은 실탄이 다 떨어져서 손을 들고 나오려고 했었는데 아군부대는 이 정보를 모르고 날이 새 불리하다고 생각한 결과 후퇴했었다.

 

이 함락 작전에서 총사 연대 중 7연대 연대장 등 지휘 간부들과 대원 동지들의 희생이 있었다.

 

참으로 잊을 수 없는 한편의 역사 현장이었음을 되새겨 보면서 섬진강에 이르렀다.

 

구례 토지면에서 섬진강변을 따라 하동읍을 향해 달려가다 보면

 

▲     © 자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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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 우측은 우리의 기행 목적지인 백운산이그리고 좌측은 지리산이 자리 잡고 있다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지리산과 백운산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토지면에서 강건 너 백운산 쪽 간전면과 하동군 학예면을 가기 전

한순애 골을 좌측으로 바라보면서 달리게 된다.

 

한순애 골 가기 바로 전에는 강변 모래사장이 있다이곳도 잊을 수 없다.

백운산 따리봉에서 섬진강변까지 뻗어 내린 능선을 중바위 등 능선이라 부른다.

 

1953년 9월 15일 김선우 도당위원장을 보위한 우리 일행은 5명이었다.

 

권영용(체포후 총살 집행중대장과 연락지도원 윤석두(체포후 총살 집행동지가 후방을 감시하고

 

필자와 이선근 연락지도원이 적구 정찰 책임을 맡고 위원장과 조 보위병은 중간에 두고 섬진강을 건너는 과정이었다.

 

우리 적구 정찰조가 강을 무사히 건너 모래사장을 지나 도로 언덕에 다달았을 때였다.

시계는 바로 해가 서산에 지고 어둠이 캄캄하게 깔린 상태였다.

그런데 일몰 전 건너편 중바위능선 중턱을 돌아내려 지리산 자락 도로변을 정찰하는데

섬진강 건너편에서 우리 일행을 발견한 적의 잠복부대가 막 도착해서 자리를 잡는 순간에

일행 중 강을 먼저 건 낸 우리 정찰조와 마주치게 된 것이다.

 

뒤의 일행은 별 일 없으리라 생각하고 강을 한참 건너오고 있는 순간이었다.

 

캄캄해서 실체는 보이지 않지만 적의 말소리가 들렸다바로 앞에서 "이곳에서 잠복하면 된다"는 말소리가 들렸다.

 

일단 적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나면 대응하기 어렵겠다고 판단했다.

뒤쪽으로는 물살을 가르며 건너오는 소리가 크게 들리고 있었다위기의 순간이었다.

 

바로 그 순간우리 정찰조가 M1 8발을 쏘며 돌격 소리로 전진했다.

적은 당황한 나머지 한발도 쏘지 못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우리 일행은 왕실봉 중터리를 단숨에 오르며 무사히 노고단을 넘을 수 있었다.

그런 사연이 얽힌 강변 모래사장을 회상하면서 한순애골 강변을 달리게 됐다.

 

이 한순애골은 백운산에서 지리산지리산에서 백운산으로 오는 연락통로 중의 하나였다.

그 당시 섬진강을 건너다 얼마나 많은 동지들이 희생되었던가.

 

물살에 떠내려가 죽은 동지들강을 건너다 건너편 매복에 걸려 강물에서 싸우다 희생된 동지들특히 엄동설한에 물살이 가슴까지 차오르는 속에 강을 건너야만 했고

건너다 싸움이 벌어지면 물살에 전사하고 빗발치는 적의 총탄을 맞으며 넓은 모래사장을 지나 적의 매복지를 뚫고 지리산으로 이동하며 투쟁했던 섬진강은 잊을 수 없는 역사의 피어린 현장이기도 했다.

 

지금도 강물은 말없이 흐르고 있다한순애골에도 빼놓을 수 없는 일화가 있다.

하나만 소개한다면 1953년 85지구당 조직위 결정으로 지구당을 해체하게 됐다.

그때 5지구당 결정서 문건을 지참하고 한순애골을 내려오던 도중 박영발 위원장 주치의였던 이행년 동지가 매복에 걸려 부상 생포 당함으로써 문건을 빼앗겼던 아픔이 있는 곳이다.

 

부상당한 이 동지는 응급조치를 제대로 하지 못해 결국 파상풍에 걸려 죽고 말았다.

지금 그의 유골은 영광군 군서면 이 동지 선산에 묻혀 있다.

 

▲     © 자주일보

 

 

피아골 입구를 지나면서는 피아골 입구 전투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피아골 입구는 1950년 9·28 후퇴 후 소위 유엔군 부대와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전적지였다.

 

구례에서 하동읍으로 이동하던 적들에 매복전으로 결정적 타격을 주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화계장터를 지나면서 화계골의 빗점골에서 이현상 동지가 매복에 걸려 희생됐던 1953년 9월 18일을 되새기면서 악양면을 바라보며 하동읍을 달리게 됐다.

 

악양면은 지리산 세석평지로 이어지는 한 골짜기가 한 개 면인데 1951년 동기 공세 전 이현상 부대가 일시적으로 해방시켰던 곳이다.

 

여기에서 보급한 식량을 동기 공세로 인하여 다 소모하지도 못하고 적들에게 빼앗겼던 기억도 새롭게 되살아났다.

 

 

하동읍을 통과할 때 지나는 강변 낭떠러지 입구는 1953년 7월 하동읍 파출소를

전남부대 소조가 습격해 괴멸시킨 곳이었다그러나 그때의 파출소 흔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일행은 어둠이 깔린 속에 하동읍에서 광양군 진월면으로 통하는 섬진강 다리(새로 건설됨)를 건너

진월면 옥곡면을 거쳐 옥룡면 옥룡골 백운식당에 이르렀다.

 

이곳 민박에서 일박하면서 하루의 피로를 풀고 각자 소개와 하고 싶은 말 한 마디씩을 남기고 1박했다.

 

 

3. 한재를 오르다

 

한재는 해발 868고지이다.

 

한재 너머 구례군 간전면(지리산 문수골로 통함좌측을 오르면 따리봉,

 

우측으로 오르면 상봉을 향하는 원능선이다옥룡골은 도로와 민박들이 들어서서 옛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아침 7시에 출발한 일행은 연병장을 통과하게 됐다.

이곳은 9·28 후퇴 후 해방구를 갖고 있을 때 빨치산 부대들이 훈련 등 각종 행사를 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개발되어 도로가 나고 새로 심은 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옛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연병장은 도당 지도부가 있던 88골짜기에서 연병장을 통해

도슬봉으로 가는 통로이기도 했다.

그래서 1951년 동기 공세 때부터 이곳을 지나다 적의 매복에 수많은 동지들이 희생되고 생포되기도 했던 곳이다.

 

이곳 근처에서 생포됐던 한 여성 동지는 지금 살아 생존하고 있다.

지금은 할머니가 되었지만이런 저런 일들을 생각하며 한재를 향해 올랐다.

원래 88능선에서 추모행사를 진행하려 했으나 사정상 변경하여 한재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러나 일행 중 노 투사들의 건강이 허락지 않아 일부만 한재까지 오르고 나머지는 중도에 처지는 상태였다그래서 한재골의 소골짜기인 용지선 골과 한재로 가는 갈림길 골짝 물가에서

상봉을 바라보며 동지들을 추모하는 자리를 가졌다.

 

준비해 간 과일과 술을 따르고 조국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먼저 산화하여 간 동지들을 기리면서

 

엄숙한 마음으로 묵념을 했다일행은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먼저 간 동지들의 희생정신을 본받아 6·15 공동선언 고수이행으로 남은 생을 다 바쳐나갈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서로 손과 손을 맞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함께 불렀다.

한재는 동기 공세 전 백운산 부대가 거점으로 쓰던 곳으로 여기에서 각종 문화행사도 했다.

동기 공세 때는 적아 간의 전투장이 되어 많은 희생자를 냈던 한재 전적지이기도 하다.

 

▲     © 자주일보

 

특기할 만한 것은 이 한재는 잣나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당시 속된 말로 한재 잣이 이승만의 진상에 오르기도 했다는 일화도 있었다.

그만큼 한재 잣이 유명했다는 것이다.

 

참고****지금 한재에는 우리 선생들 3분의 유분이 뿌려져 있다

 

4. 용지선골 확독터를 가다

 

백운산은 큰 산이라 눈도 제법 많이 와서 눈을 밟으며 확독터를 찾아 오른다.

옛날에 밟았던 길이고 고리수를 받기 위해 비닐 파이프를 설치하느라 민간인들이 다녔던 길이기는 하나 눈에 덮여 제 길을 찾아가기 쉽지 않아 숲과 너덜강 바위를 넘나들며 한참 헤맨 끝에 드디어 확독터를 찾아냈다용지선골에는 도당 연락부가 터를 쓰고 있었다.

 

이 확독은 넓은 바위 한복판에 징으로 쪼아 만든 것이다이 작업은 당시 연락부원 형(이름 미상)이 목수였기에 며칠간의 작업 끝에 파서 디딜방아를 만들어 양쪽에서 발로 디디며 한 사람은 확독에 넣은 곡식을 밀어 넣고 찧었던 곳으로 1951년에 만들었던 곳이다.

 

지금 살아 있는 생존자로서 당시 방아를 찧었던 정관우 선생과 정덕례 여성 동지가 살아 있다현장을 답사한 감회와 추억이 새롭게 되살아나기도 했다.

 

이 확독에서 벼나 겉보리 등을 찧었는데 이 확독을 거쳐 간 동지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나 유일하게 이 두 동지만 남아 있는 상태다.

 

토벌대는 방앗고는 없앴어도 확독만은 파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말없는 역사의 증인으로 남아 그때의 생생한 모습을 전해주고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며 새로운 다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백운산에서 유일한 전적지의 생생한 역사 현장이기도 하다.

일행은 여기에서 간단한 추모의 뜻을 표하고 사진촬영도 했다.

 

여기에서 원능선에 오를 선생들만 남고 나머지 일행은 옆 능선 너머 도당 지도부가 있던 88터를 답사하고 하산하여 집결지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기로 했다.

 

우리 일행은 가파른 경사우거진 숲과 바위를 넘나들며 나무와 풀잎을 잡고 미끄러지고 또 오르면서 드디어 원능선에 도달했다.

 

오르는 과정에 지난 폭우 때 산사태가 나서 자연환경이 많이 훼손되었으나 이를 치유할 손길은 미처 뻗치지 못하고 있음도 실감했다일행 중에 젊은 한 친구 때문에 오르는 속도가 느리기도 했다.

"노장 선생들은 잘 오르는데 왜 젊은 친구가 그렇게 더디냐"고 가벼운 재촉도 했다.

 

그런데 뒤늦게 몸이 아픈 상태에서 역사기행을 취재하겠다는 일념으로 아픔을 참고 함께 올랐던 것임을 알고서

젊은 친구의 불편함을 사전에 감지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기도 했다.

 

다시금 지면을 통해 죄송함과 이해를 구한다추운 눈얼음 속에서도 진땀을 흘리며 원능선을 올랐을 때 그동안 막혔던 숨통이 확 트인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반세기 전 빨치산 동지들이 생사를 걸고 단숨에 오르고 내리던 길을 단시간이나마 체험해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값있는 경험이 됐으리라 생각한다.

 

 

드디어 고 김선우 위원장 유골이 묻혔던 능선고지에 다다랐다.

 

이 가묘에서 상봉을 향해 간단히 추모의 뜻을 표하고 백운산을 한눈으로 내려다보며 동서남북 방면 지형지세를 관찰했다.

 

선우 동지가 이곳에 묻히게 된 동기는 이러하다.

 

선우 동지는 전남 보성 출신으로 고매한 성품을 가진 지도자로서 매사에 다정다감하고 하부 일꾼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절대로 반말이나 '해라'를 하지 않았던 지도자였다.

 

그래서 하부 일꾼들이 항상 그를 우러러 받들었다.

 

선우 동지의 최후

 

진월면 폐장 금굴에 잠복해 있다가 적들에게 발각돼 함께 있던 유상기 책임지도원 동지와 보위병 동지는 위원장 동지 구출 작전에서 희생되고 선우 동지만 다리 허벅지 관통상을 입고 단신으로 백운산에 들어왔다가 적들의 포위망에 걸려 최후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적들은 선우 동지의 인품과 인격그리고 지도자상을 받들어 시신을 이곳 능선에 묻게 했던 것이다.

 

그 후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늦게나마 살아있는 노장들이 기억을 더듬어

 

유골이라도 찾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몇 차례의 지형 답사 탐사 작업을 통해

지형지세 탐색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류락진 선생(암으로 작고했다과 이복순동지가 유골지를 발견 했다.(복순 여사는 당시 선우위원장 기요원인 동시에 비서로 사업했다.)

 

골격과 옷그리고 묻힌 지점을 종합해서 선우 동지임을 여러 노장들과 함께 확인하고

선산인 보성군 웅치면에 안치했다그후 매년 참배를 하고 있다.

 

5. 한눈으로 바라보는 백운산의 지형지세와 역사적 의미

 

백운산은 역사적으로 임진 조국전쟁갑오농민전쟁일제 강점 하 의병투쟁항일투쟁해방공간시의 유격투쟁조국전쟁 시기의 치열한 전투장이었다이 모두가 이 땅에서 외세를 몰아내기 위한

민족자주와 조국해방투쟁의 산 전적지 중의 하나임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백운산은 1227고지로 상봉따리봉도슬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3대 봉우리로 둘러싸인 안쪽을 내각이라 하고 그 반대 바깥쪽을 외각이라 불렀다.

내각은 제일 큰 옥룡골이라 부르고 상봉 너머는 진상골다합골서골독새바위골이라 부르고

따리봉에서 섬진강변까지 뻗어내린 능선은 중바위등 능선이라 부른다.

도슬봉에서 옥룡골 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은 봉강능선이라 부르고 그 골짝을 봉강골이라 한다.

 

그리고 도슬봉에서 순천 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에 용개산이 있고 용기동골이 있다.

 

섬진강 쪽으로는 문척골과 간전골이 있다상봉에서 하봉-삼각고지-기관포고지-800고지-박우리봉으로 이어지고 한 갈래는 옥룡면과 옥곡면 경계를 이루는 큰 능선이 길게 늘어져 있다.

그 외에 이름 모를 능선들과 골짜기들이 수없이 펼쳐진다.

 

6. 백운산 봉우리와 골짜기들의 새로운 명칭 부여 했다재산시 잘 싸우다 희생된 간부들이나

 

전투원들의 이름을 따서 백운산 봉우리와 골짜기들을 새로 명명했었다.

지금 기억에 남아 있는 것만 열거한다면백운산은 전남 도인민위원장 김백동 동지 이름을 따서 백동산상봉은 도당위원장 김선우 동지 이름을 따서 선우봉따리봉은 도당부위원장 인철 동지 이름을 따서 인철봉도슬봉은 백운산지구 사령관 유몽룡 동지 이름을 따서 몽룡봉옥룡골은 당시 도당 부위원장 염형기 동지 이름을 따서 염기동골상봉 너머 진상골은 당시 도당 책임지도원이었던 유상기 동지 이름을 따서 유상기골박우리 봉은 광양 군당위원장 박정기 동지 이름을 따서 박정기봉진상골 잣나무터는 부대장인 이봉상 동지 이름을 따서 이봉상터라 불렀으며 다합골은 당시 전남 부대 연대장이었던 이정태 동지 이름을 따서 이정태골간전골은 당시 도당 부위원장 정귀석 동지 이름을 따서 정귀석골용개산은 당시 정공대장 조동만 동지 이름을 따서 동만산이라 불렀다.

용기동골은 당시 백운산지구 사령관인 남태준 동지 이름을 따서 남태준골옥룡골 쪽 88터 능선 너머 백암골은 동기 공세 때 지구사령부 참모장이었던 조갑수 동지 이름을 따서 조갑수골이라 불렀다.

 

안타깝게도 그 외에는 생각나지 않는다참으로 다 기억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7. 옥룡골에서 잊을 수 없는 몇가지 역사적 사건들

 

옥룡골은 우선 필자가 1954년 초봄에 총 세발을 맞고 체포된 곳이며 전남 부대가 최후를 마쳤던 곳이다.

 

옥룡골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오면 똥섬이 있다이 똥섬은 1953년 8월 14일 저녁 기습작전에 들어가다가 지뢰를 밟아 50여 군데 파편을 맞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던 곳이며 특히 소년전사 구춘길 동지가 장렬하게 죽어간 곳이다.

 

따리봉 밑에서는 토벌대들의 포위공격에 인철 부위원장 동지가 희생됐다.

토벌대가 그의 목을 잘라 배낭에 넣어 한재에서 상봉으로 가는 첫 봉우리인 민세등에 놓아둔 것을

유봉남 동지가 발견해서 정귀석 부위원장과 전영선 여성동지가 머리를 시신 몸통에 붙여 매장했다.

 

하지만 지금도 매장지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1954년 봄 염형기 부위원장 동지가 비트에 있다가 수색에 발견돼 전사했다토벌대는 그의 목을 잘라 담요로 싸서 광양읍까지 가져왔다.

 

염형기 동지는 당시 순천군당위원장이었던 남상훈을 소환하여 오는 과정에서

 

도슬봉 밑에서 잠시 쉬는 중이었는데 칼빈으로 저격하여 염동지와 보위병을 쏘아죽이고 자수하는 웃지 못할 비극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88능선 너머 백암골에는 민청학원이 있었고 이 골짝에 도당 정공대 3대대 부부대장 심 동지(여수 출신으로 기관총을 소총 다루듯 한 우람한 체격을 가지고 있던)가 단신으로 토벌대 12명을 사살하고 마지막에 희생된 곳이다.

 

시신은 공세가 끝나고 묻었으나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8. 두 소년 전사

한 소년 전사(이름 미상)는 1951년 동기 공세 때 백운산 지구 사령부 부정치원 연락병이고

또 한 소년 전사 구춘길은 전남 부대원이었다이 소년 전사는 부정치원과 함께 한재 골에서 기술 잠복하고 있었다.

 

토벌대는 수색작전을 펴며 능선에서 골짜기로 내려오고 있었다그런데 당시 토벌대 중대장이 부정치원 대학동창이었다.

부정치원은 이를 알고 위기의 순간 손을 들고 투항하면 살 수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자기 연락병에게 함께 투항하자고 했다.

 

그러나 소년병은 완강히 거부했다아무리 설득해도 듣지 않아 자기만 투항했다.

그래서 그는 살았다그러나 소년 전사는 발각돼 생포됐다그 순간 소년 전사는 끝까지 저항했다.

"나는 너희들에게 투항할 수 없다미제의 앞잡이들아쏠 테면 쏴라하면서 완강히 저항하자

결국 토벌대는 할 수 없다고 체념하고 참으로 악질이라면서 저항하는 소년 전사에 8발의 총탄을 퍼부어댔다그리하여 장렬하게 전사했다.

 

구춘길 소년 전사는 우리 전남부대 전투원으로서 1954년 초 토벌대와 치열한 전투 끝에 다리 부상으로 걸을 수 없게 됐다.

 

동무들은 할 수 없이 그를 바위 밑에 은신시켜 두고 전투가 끝나면 데리러 오려고 했다.

 

그러나 적과 전진 후퇴를 거듭하는 투쟁 속에 구춘길 동무는 발각됐다적은 그를 생포해서 데리고 가려 했다그러나 구춘길 동무는 완강히 거부했다.

"미제의 앞잡이개새끼들아쏠테면 쏴라죽어도 너희들에게 투항하지 않겠다"고 성토했다.

적들은 수차례에 걸쳐 위협도 하고 달래도 보았지만 도저히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빨갱이 악질이라며 3명이 집중사격을 가함으로써 소년 전사는 몸이 벌집이 돼 붉은 피를 쏟으며 최후의 장렬한 죽음을 맞게 됐다.

 

이 소식을 듣고 포로된 동무들은 할 말을 잃고 있었다.

구춘길 동지는 구례 간전면 출신으로 노래도 잘 부르고 활달한 성격에 한마디를 하더라도 야무지게 하며 돌격전에도 항상 선두에 서서 진격하며 생활에서 적극성과 자발성을 갖고 다른 전사들의 모범이 돼 사랑을 독차지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때의 그 모습이 선하게 남아있다이제는 한줌의 흙이 되었지만

항상 머리 위에서 지금 동무들은 어떻게 살며 무얼 하고 있는가 말하는 것 같다.

백운산을 그리며 동지를 되새겨보게 된다.

 

 

9. 진상골에 얽힌 몇 가지 역사적 사실들

 

진상골 발치에서 상봉까지 폭 50m로 웅장하게 심어진 나무를 벌목해서 상봉에서 골짝을 내려다보면 개미 기어가는 것도 다 보일 정도로 민둥하게 만들었었는데 전쟁 기간 내내 그 형태 그 모습이 남아 있었고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은 1948년 10월 19일 여순 애국병사 봉기 후 백운산 빨치산의 거점과 부대 이동을 한눈으로 감시하기 위해서 벌목했던 해방공간시의 역사현장이기도 했다.

 

잣나무터(전남부대 터)는 1953년 8·15 경축행사를 하던 중 그날 밤 적들이 들어와 포위하고 날 새기를 바라고 있었으나 우리의 새벽정찰이 적들을 발견해 부대가 무사히 포위망을 탈출했던 일이 있었던 곳으로 당시 적들과 대치하며 아군의 사상자까지 내면서 싸웠던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소능선을 넘으면 소령터가 있다. 1951년 적의 군용차를 습격하여 소령을 생포했다가

다시 내려 보냈던 곳을 소령터라 명칭을 부여했던 것이다.

 

또한 전남 연대장이었던 이정태 동지가 적의 매복에 희생돼 박영발 동지의 애정어린 동기애의 눈물을 자아냈던 아픈 사연도 있다.

 

그 외에 많은 역사적 사연들이 있으나 한정된 지면에 다 열거할 수 없어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리고 하봉에서 800고지로 가는 삼각고지는 1952년 1월 중순 도당 정공부대가 토벌작전에 동원된

 

육군 수도사단이 막 삼각고지에 짐을 푸는 순간 대낮 기습전을 감행해 많은 무기와 탄약 보급품을 노획했던 고지이다.

 

이때 노획한 M1 탄 1만여 발을 한재골 바위 밑에 비장했으나 비장한 동지가 모두 희생돼 지금껏 찾을 길 없다.

 

아마도 무언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겠지만 영원히 빛을 발하지 못하는 흙진주가 될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다.

 

 

서골에는 환자터가 있었다.

 

이곳 환자터는 공세 때 부실하기 짝이 없는 흙땅굴 비트에 들어가 있었다. 1953년 늦가을적들의 대대적 수색작전에 모조리 발견돼 끝까지 저항하는 환자 동지들은 사살하고 나머지는 생포해 갔던 피의 투쟁이 서린 골짜기이다.

 

이때 모자가 입산해 어머니는 저항하다 사살되고 아들은 생포되는 비극도 있었다.

 

아들은 지금도 살아 있을 텐데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그리고 800고지는 1953년 초가을 미 전투기 5대가 한 편대를 지어 타원을 그리며 맹폭격과 기관총을 난사하고 소이탄을 터뜨려 불바다가 된 상황에서 고지에서 살아나온 기억도 생생하게 남아 있어 평생 잊을 수 없다.

 

10. 용기동골에 얽힌 역사적 사실들

 

1951년 야산지대에서 활동하던 동지들 백여명이 용개산에 들어갔을 때는 적들의 일차 공세 중이었다.

그래서 백운산 내각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일차 공세가 끝나면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고

 

독자적으로 연락원 2명의 인솔 하에 공세를 막고 있었다보급로가 차단돼 몇칠을 굶으면서 비무장 동지들은 매일 계속되는 포위 공격 수색작전에 걸려 일부는 체포되고 일부는 죽어 갔다이 와중에 공세 전 방앗간 터에 쌓인 멧재를 눈과 얼음을 깨고 손으로 한줌씩 불어서 싸래기 한 주먹을 알루미늄 솥에 넣어 물을 붓고 끓여서 한 모금씩 나누어 먹으면서 공세를 극복해야 하는 처절한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투쟁의식이 약화돼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것이니 날이 새도 산상 잠복 나가지 않고 그대로 터에 남아 있다가

 

토벌대들의 총탄에 맞아 소각당해 검게 타버린 앙상한 시신을 수없이 보게 되었다.

 

그 역경 속에서도 투쟁의 의지를 불살랐던 동지들은 살아남았고 완전히 자포자기한 동지들은 수없이 죽어갔던 피어린 역사의 현장용기동골을 잊을 수 없다.

 

필자 역시 살아남은 유일한 몇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 그때의 현실을 회상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마음 속 깊이 되새기면서 하산길에 들어섰다.

 

11. 88능선과 88터 답사

 

일행은 내려올 때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88 보초선 능선에 도달했다.

 

이 능선을 타고 내려가면 빠꾸바위가 있다빠꾸 바위라는 이름은 동기 공세 때 도당 지도부 산하 각 기관 단체성원 약 백여명이 88터에서 중허리를 돌아 큰 바위 밑에 왔으나 토벌대의 공격으로 다시 오던 길로 되돌아 후퇴하게 된 데서 붙여진 것이다.

 

부대 이동 때 이 빠꾸바위 밑은 이따금 하루쯤 묵다가 이동하는 이른바 정거장거점으로도 이용됐다. 88 능선에 도달한 일행은 새삼 88 보초선 위치가 그 얼마나 전략적인 위치인가를 실감하게 됐다여기서는 백운산 내각 원능선을 한눈으로 살펴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있다.

적들의 진격에 따라 사면팔방으로 후퇴할 수 있는 요충 지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사실 위령비를 세우려고 다 준비했다가 비문의 사전 발각으로 일단 계획 실천을 접게 된 일도 있다.

 

가파른 경사를 따라 내려오던 일행은 중간쯤에서 도당위원장 바위밑 터와 구들장도 발견하게 됐다.

그때 바위 밑에서 불을 지폈던 검은 그을음이 반세기가 지났어도 아직 남아 있었다.

 

88이란 도당 암호이다.

 

이 골짝에는 위원장 터를 비롯해서 도당 각 부서와 인민위원회 터들이 있었다동기 공세 전에 구들장을 만들고 잣나무로 귀틀집을 사각형직사각형으로 짜서 틈새를 진흙으로 발라 바깥 공기를 차단시키고 지붕은 서까래를 얹어 흙을 바르고 쐐를 둘렀다.

 

공세 때 토벌대가 수차에 걸쳐 불을 질렀으나 지붕은 타고 통나무는 타지 않고 그을린 채로

1954년 봄까지 그 형태가 남아 있었다그러나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는 귀틀집은 흔적조차 없고 나무와 숲만 우거져 있었다.

 

 

88터에도 잊지 못할 사연이 하나 있다.

 

1952년 1월 27일 정공대장이 88 보초능선에서 전투하다 다리 관통상을 입었다그래서 도당 위원장 비서 정태 동지주치의 행년 동지그리고 필자와 같이 조동만 대장을 보위하고

 

임시 땅 밑 환자터에 들어가다가 발각돼 적들을 물리치고 3명은 살아났으나 동만 대장은 희생되고 마는 아픔을 겪은 곳이다.

 

시신은 살얼음판 속에 낙엽으로 묻어주고 공세 끝나고 해동되면 다시 매장하려 했으나

 

이후 그곳을 가지 못했다.

 

그 후 반세기 후 찾았으나 흔적조차 없었다(지금도 위치는 알고 있지만).

당시 정공부대는 8명으로 출발해서 공세 때 잘 싸워 100여 명의 무장대오로 발전했다.

이 정공대는 도당 산하 기관 동지들을 보위하고 보급을 해결하는 강력한 무장부대였다(부대원은 모두 도당 학생들군관학생민청학원생들이었다).

 

이렇게 무적을 자랑하던 부대였으나 대장이 부상으로 비트에 들어감에 따라 부부대장에게 지휘권을 위임했다하지만 계속되는 전투에 피로에 지친 나머지 적의 집중 공세를 예견하고 밤에 외곽으로 이동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음에도 이를 어기고 날이 새자 88 능선 너머 백암골에 분산 잠복시킴으로써 1월 27일 하루 사이에 종막을 고하는 아픔도 겪었던 곳이다.

 

지도자나 지휘관의 역할이 그 얼마나 중요한가를 뼈저리게 느꼈으며 원칙을 저버리면 어떤 결과가 오는가를 실감하게 되었다.

 

그 역사적 경험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이와 같은 생각을 되새겨 보면서 집결지에 시간 맞춰 도착해서 먼저 하산한 동지들과 합류했다.

우리 일행은 양지 바른 잔디에 앉아 마무리 인사를 마치고 기념 촬영한 후 상경 길에 오르게 됐다.

 

우리 몇 사람은 따로 남아 다른 곳 기행답사도 진행했다.

 

12. 결어

 

이번 백운산 역사기행은 원래 9·28 후퇴 후 도당부와 빨치산 총 사령부 산하 부대들이 활동하며 싸웠던 백아산을 돌아가기로 했었지만

 

시간 관계상 부득이 취소하고 섬진강변을 돌아가게 되었다또한 상경길에 노장들이라 피로했겠지만 역사기행의 소감들을 각자 한마디씩 남기는 시간을 갖지 못한 아쉬움도 남았다그러나 오랜만에 찾는 기행에서 노장들임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사고나 낙오자도 없이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도 잊을 수 없다.

 

또한 기행을 통해 과거 빨치산들의 어려운 역경을 짧은 시간이나마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역사현장 답사를 통해 자신들의 정신적 육체적 단련을 했음은 물론 일사불란하게 정해진 시간표대로 모든 일정을 마침으로써 단결되고 단합된 강철의 대오를 실천으로써 증명했다.

 

우리는 이번 기행이 이 땅에서 외세를 몰아내고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조국을 자주적으로 통일할 문을 활짝 열어 준 6·15 공동선언 고수이행 관철에 우리의 운명을 걸고 남은 생을 값있게 바쳐야 한다는 다짐을 굳게 맹세하는 계기가 됐을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항상 오늘의 현실을 단순히 조국분단에서 오는 비극으로만 돌릴 것이 아니라

분단의 원인제공자가 누구이며 왜 확고한 주체성을 확립하지 못했는가 하는 냉철한 반성과 함께

누가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도 많은 피를 흘리고 죽이고 죽임을 당해야 했던 그 처절한 역사의 경험과 교훈을 되살려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이땅에서 외세를 몰아내고 간섭을 배제하지 않는 한 비극의 역사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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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대격변이 다가오고 있다①

[아침햇살41]세계의 대격변이 다가오고 있다①
 
1. 대격변의 주요 현상
 
자주시보 
기사입력: 2019/08/27 [11:40]  최종편집: ⓒ 자주시보
 
 

2010년대도 벌써 저물어가고 있지만 세계에는 크고 작은 대립과 충돌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최근 지구 곳곳에서 나타나는 대립 양상은 과거와는 다른 어떤 경향과 특징을 보여준다. 이들은 모두 세계에 대격변이 다가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들이다. 이에 세계의 대격변을 주제로 네 번에 걸쳐 자세히 분석해보고자 한다. 

 

1. 대격변의 주요 현상

2. 여러 현상들의 특징

3. 대격변의 배경-반미자주국가를 중심으로

4. 대격변의 배경-미국을 중심으로

 


 

1. 대격변의 주요 현상

 

2차 세계대전 후 지금까지 세계는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 특히 소련 해체와 냉전 종식 후 미국은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초강대국을 자처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나라가 미국에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미국의 지배에 순응하지 않고 침략과 약탈에 저항하는 반미국가들은 있었다. 그리고 최근 들어 세계 곳곳에 있는 반미국가들의 미국과의 대립이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주요 반미국가인 북한, 중국, 러시아, 이란, 베네수엘라의 사례를 하나씩 살펴보자. 

 

(1) 북한

 

현존하는 나라 중 미국과 가장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나라는 북한이다. 

 

트럼프 정부는 집권하면서부터 북한을 대외정책에서 최우선 순위로 지목했다. 트럼프 정부가 이전 민주당 정부인 오바마 정부와 달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데니스 맥도너 백악관 비서실장은 2017년 1월 9일 “트럼프 당선인에게 처음부터 북핵이 최우선순위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스는 2017년 3월 4일 「트럼프가 물려받은 유산」이란 기사를 통해 “미국은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만한 능력을 아직 갖추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이런 위협은 많은 전문가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끈질긴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트럼프 정부는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막기 위해 강경책을 사용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전 세계가 보지 못한 화염과 분노에 (북한이) 직면하게 될 것”(8월 8일), “북한을 완전히 파괴시킬 것”(9월 19일)이라고 경고했고 실제로 항공모함을 투입하고 전략핵폭격기를 동원하는 등 북한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북한은 괌 포위사격, 태평양 상 역대급 핵실험 등을 언급하며 미국을 위협했고 마침내 2017년 11월 29일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면서 북미 대결을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렸다. 

 

2017년 12월 28일 뉴욕타임스에 실린 트럼프 대통령 인터뷰 내용은 미국이 북한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보고 있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은 무역 분야에서 우리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고 있지만 나는 중국에 대해 관대했다. 내게 무역보다 더 중요한 유일한 것은 전쟁이기 때문”이라며 중국과의 무역전쟁보다 북한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확인했다. 또한 “중국이 북한 문제에서 나를 돕는다면 무역 문제를 약간 다르게 봐줄 수 있다”고 하여 중국과의 무역전쟁이 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함을 공개했다. 

 

아무튼 미국 본토에 북한의 핵미사일이 날아올 위기가 닥치자 트럼프 대통령은 즉각 북한과 대화를 시작했다. 그리하여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 1차 북미정상회담, 2019년 2월 27~28일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 6월 30일 판문점 3차 북미정상회담이 연달아 열렸다. 계속된 정상회담은 미국이 핵을 가진 북한의 존재를 인정하는 성격을 갖는다. 즉, 미국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한 셈이다. 

 

▲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  ©자주시보

 

하지만 정상회담을 했어도 북미 사이에 대립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미국은 여전히 한미연합훈련을 통해 북한을 군사적으로 압박하고 있으며, 북핵폐기를 요구하며 협상에도 성실히 임하지 않고 있다. 이에 북한은 미국이 연말까지 ‘새로운 계산법’을 들고 오지 않으면 ‘새로운 길’로 나아갈 것이라고 경고하고 대미 압박 수위를 거듭 높이고 있다. 반면 미국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 등 군사적 압박을 두고 군사적 대응을 자제하면서 ‘약속 위반은 아니다’, ‘대화를 원한다’며 저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대결은 지속되지만 미국이 수세에 몰려 후퇴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2) 중국

 

트럼프 정부 들어 미국과 중국의 대립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시기부터 중국을 미국 경제의 걸림돌로 규정하고 무역 보복을 하겠다고 공언해왔다. 그러나 북한 문제에 우선순위를 두면서 중국과의 문제는 뒤로 밀리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러나 북미정상회담과 동시에 북중정상회담이 열리면서 중국이 북한편이라는 게 확인되자 미국은 곧바로 무역전쟁에 돌입했다. 

 

미국이 중국산 수입품에 관세를 대폭 추가하면서 시작된 무역전쟁은 몇 차례 미중정상회담과 각종 회담을 통해 타협과 휴전을 반복했으나 여전히 출구를 찾지 못하고 대결 수위가 높아가고 있다. 지난 8월 23일 트럼프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을 ‘적’이라고 표현하며 ‘우리는 중국이 필요 없다’고 극단적 발언까지 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승리를 낙관하는 이는 드물다. 오히려 미중 무역전쟁으로 미국 기업이 피해를 입는다는 불만이 미국 내에서 터져 나오는 형편이다. 뉴욕타임스는 8월 6일 보도 「트럼프 대통령의 성과없는 무역 전쟁」에서 지난 2년 동안 트럼프 행정부는 명확한 전략이나 뚜렷한 목표가 없고, 끝도 보이지 않는 무역전쟁을 해왔다며 비판했다. 마이런 브릴리언트 미국상공회의소 수석부회장도 8월 23일 성명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 때문에 좌절했을 수는 있지만 미국 기업이 14억 소비자 시장을 무시하는 건 답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중국의 대응도 과거와 다르다. 과거 중국은 ‘도광양회(韬光养晦)’, 즉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는 방침에 따라 미국의 공격에 소극적으로 방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2013년 시진핑 체제가 들어서면서 ‘주동작위(主動作爲)’, 즉 스스로 주인이 되어 움직여 일을 도모한다는 방침을 내걸었다. 세계에 자기 몫을 주장하겠다는 것이다. 

 

이코노믹리뷰는 8월 26일자 보도 「미중 무역전쟁 격화…애플 ‘새 국면’」에서 “현재 미중 무역전쟁은 난타전이다. 미국이 공격하면 중국이 즉각 대응하는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며 중국이 미국에 결코 수세적으로 대응하고 있지 않다고 전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도 8월 24일 논평에서 “국가의 핵심 이익과 인민의 근본 이익을 지킨다는 중국의 의지는 꺾을 수 없다”면서 “미국이 기어이 제로섬 게임을 택하면 중국은 끝까지 싸울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같은 날 중국 관영 환구시보도 사설에서 마오쩌둥의 시 구절을 따와 “중국이 이처럼 반격할 것이라고 미국은 생각하지 못했을 것”, “미국이 전력을 다해 압박을 가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상상 못 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무역전쟁뿐 아니라 군사적 대결도 치열하다. 미국과 중국이 장기간 대치중인 남중국해 분쟁은 미중 양국은 물론 동남아 국가들과 대만까지 합세해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미중 양국은 남중국해를 둘러싸고 최근까지도 군대를 동원해 무력시위를 하고 있다. 그런데 트럼프 정부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탈퇴하면서 대결 양상에 변화가 생겼다. 애초에 TPP는 오바마 정부가 아시아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추진한 아시아 중시정책의 대표적 사업이었다. 미국이 TPP에서 빠지면서 동남아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이 줄어들었고 반대급부로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대학 미국학연구센터(USSC)는 지난 8월 19일 발간한 보고서를 통해 미군이 “위축되어가는 세력”이며 “전략 측면에서 파산”한 상태라고 지적했다. 반면 중국은 “첨단 군사체계에 대규모 투자를 한 덕분에 지역의 질서에 힘으로 도전할 수 있는 능력을 점점 더 많이 갖춰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보고서는 미국이 태평양에서 더는 중국에 대해 군사적 우위를 누리고 있지 못하며, 중국으로부터 동맹을 보호하기도 어려울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처럼 미국과 중국 사이에 대결이 격화되고 있지만 대세는 미국의 패배 가능성이 점점 커지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3) 러시아

 

미국 대선 과정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러시아 게이트가 터지자 트럼프 행정부와 러시아는 각별한 관계, 아니면 적어도 우호적 관계 아니냐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미국과 러시아의 대립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격화되고 있다. 

 

먼저 군사적 대립을 보자. 미국과 러시아는 현재 시리아에서 간접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미국은 시리아 반군을, 러시아는 시리아 정부군을 지원하고 있다. 양국은 시리아 문제를 두고 첨예한 대립을 이어갔다. 

 

2018년 4월 화학무기 논란으로 두 나라가 충돌했다. 시리아 내전 와중에 화학무기가 사용되었는데 미국은 시리아 정부군이 화학무기를 사용했다고 주장했고 러시아는 증거가 없다고 반발한 것이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4월 11일 “시리아에 미사일이 날아갈 것이다. 러시아는 준비하라”고 위협했다. 실제로 미국은 14일 새벽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등에 105발의 미사일을 발사했고 시리아는 러시아제 요격미사일로 미군 미사일의 70% 이상을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양측 주장이 엇갈리는 가운데 결과적으로 미군의 공습이 전황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실제로 이후 시리아 내전은 정부군의 승리로 마무리 되는 분위기이며 트럼프 정부는 시리아 철군을 논의하고 있다. 

 

2018년 10월 20일,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와 중국이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지키지 않는다면서 조약 탈퇴를 시사해 새로운 군사 대결을 시작했다. 올해 2월 2일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끝내 INF 이행 중단을 선언, 이에 맞서 같은날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이행 중단을 선언해 6개월 후인 8월 2일을 기해 INF는 공식 소멸했다. 

 

INF는 1970년대 유럽에서 미국(나토)과 소련 사이에 불붙은 핵미사일 경쟁의 결과 탄생한 조약이다. 1987년 체결된 이 조약은 사거리 500~5500km 지상발사형 미사일을 폐기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조약의 기한은 1991년 6월 1일까지였지만 이후에도 양국은 여전히 조약을 준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공식 폐기가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은 아시아 지역에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하겠다고 말했다. 현재 미국이 핵미사일을 배치할 수 있는 아시아 나라는 미군이 주둔 중인 한국과 일본뿐이다. 미국은 INF 폐기를 통해 동북아시아에서 러시아, 중국과 군비 경쟁을 하려는 것이다. 전 세계는 미·중·러 세 나라의 무한 군비 경쟁을 우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의 군비 경쟁은 일단 러시아에게 유리해 보인다. 미국은 2008년 금융공황 여파로 장기간 신무기 개발에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2018년 2월 매티스 미 국방장관은 “미국이 지난 8년 동안 F-35 전투기 단 한 종류를 개발하는 동안 러시아, 중국, 북한 등 경쟁국 및 적국은 34종의 새로운 핵 운반 시스템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반면 러시아는 차세대 슈퍼무기를 연거푸 선보이고 있다. 특히 2018년 3월 1일 푸틴 대통령은 연례 국정연설에서 핵추진 순항미사일, 신형 미사일 아방가르드, 극초음속 중거리미사일 킨잘, 차세대 ICBM 사르맛, 핵추진 대륙간 수중드론 카년, 레이저포 등을 공개했는데 이 중 일부는 이미 실전배치를 하였다고 한다. 

 

▲아방가르드 미사일 개념도

 

군사적 대결과 더불어 경제 갈등도 심해지고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대러시아 제재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2013년 4월 시작되었다. 그러다 2017년 1월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제재를 완화 혹은 폐기하리라는 예상을 뒤엎고 그해 8월 ‘통합제재법(CAATSA)’을 제정해 제재를 강화했다. 그리고 최근까지도 제재를 추가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대러시아 제재가 효과를 내는지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의문을 품고 있다. 일단 러시아 경제는 국제유가에 가장 큰 영향을 받기에 제재 효과를 입증하기는 쉽지 않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제재를 역이용해 자국 산업 발전 기회로 삼으면서 중국 등 비서방 국가와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실제로 러시아는 제재 속에서도 마이너스 성장을 플러스 성장으로 되돌려놓았다. 

 

또한 유럽연합측이 미국의 대러시아 제재에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제재에 맞서 러시아도 유럽에 대해 경제제재를 하고 있어 유럽의 피해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유럽연합 내에서는 대러시아 제재를 6개월마다 연장하고 있지만 매번 실효성 논란이 일고 있다. 실제로 2014년 제재 이후 줄어들었던 러시아와 유럽연합 사이의 무역 규모가 2017년부터 다시 증가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과 러시아는 대결을 이어가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4) 이란

 

중동의 전통적 반미국가인 이란과 미국은 오랜 기간 대립해왔으며 특히 트럼프 정부 들어 미국이 이란 핵협정을 탈퇴하면서 극단적 대결로 치닫고 있다. 

 

이란 핵문제도 북한 핵문제만큼이나 오랜 기간 복잡한 경로를 거쳐왔다. 그러다가 2015년 미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영국, 독일, 유럽연합과 이란이 포괄적공동행동계획(JCPOA: 이하 ‘핵협정’)을 합의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이 합의는 이란이 핵프로그램을 동결, 감축하는 대신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를 푸는 내용이다. 

 

그런데 2018년 5월 8일 트럼프 정부가 이란 핵협정 탈퇴를 선언했다. 이란이 협정을 위반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과 유럽연합은 근거가 없다며 미국을 비난했다. 미국은 이에 아랑곳 않고 곧바로 대이란 제재를 강화하였다. 특히 11월 5일 2차 이란 제재를 단행하면서 이란 기업과 거래하는 다른 나라도 제재하는 이른바 세컨더리 보이콧을 선언했고 이에 유럽연합이 반발하는 등 논란이 확산됐다. 2019년 들어서는 정규군대인 이란 혁명수비대를 테러단체로 지정해 갈등을 키웠다. 

 

이란은 미국의 공격에 맞서 핵협정 일부를 단계적으로 중단했고 미국은 이란 공습 준비에 들어갔다. 5월 19일 트럼프 대통령은 트윗을 통해 “이란이 싸우길 바란다면, 그것은 이란의 공식적 종말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24일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미국의 폭격을 당하더라도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6월 들어서는 이란 근해에서 유조선이 공격당하는 의문의 사건이 발생하고 이란이 미국 무인정찰기를 격추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미국은 보복공격을 하려고 하였으나 전면전을 우려해 포기하였고 대신 하메네이 라흐바르(이란의 최고 지도자)를 제재하였다. 7월 18일에는 미국이 이란 무인정찰기를 격추했고 전쟁 위기는 갈수록 고조되고 있다. 

 

▲이란 최고 종교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미국은 항공모함과 F-22 랩터 스텔스 전투기, B-52 폭격기 편대 등을 투입해 이란을 위협하는 한편 경제제재를 통해 이란을 굴복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란은 전쟁 불사를 선언하며 미국의 위협에 맞서고 있다. 나아가 핵개발을 할 수도 있다며 미국을 압박하고 있다. 이란에서는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를 상황이 이어지고 있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미국이 이란을 쉽사리 공격할 수 없을 것으로 본다. 이란은 이라크나 시리아보다 훨씬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으며 러시아와 관계도 긴밀하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은 이란을 상대로 한 군사동맹체인 ‘호르무즈 호위 연합’을 만들고 있다. 혼자서는 상대하기 어려우니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만 참여한 상태로 미국의 핵심 동맹국인 일본, 독일 등은 참가를 거절하였다. 결국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7월 29일 미국의 한 강연에서 “(호르무즈 호위 연합 구성이) 기대했던 것보다 시간이 걸리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이처럼 미국과 이란은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를 맞고 있지만 미국이 쉽사리 공격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5)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는 남미의 강력한 반미국가로 최근까지 미국과 전쟁 직전까지 가는 치열한 대결을 했다. 

 

베네수엘라는 막대한 석유부국이지만 미국식 신자유주의로 인해 빈부격차가 극에 달했던 나라였다. 그러다 1999년 집권한 차베스 대통령이 미국 자본의 약탈 배격, 석유 국유화, 사회주의와 빈곤퇴치 정책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베네수엘라에서 쫓겨난 미국 석유자본은 베네수엘라산 석유 수입을 줄이고, 베네수엘라 내 친미세력을 지원해 쿠데타와 폭동을 사주했다. 그러나 차베스 대통령에 대한 베네수엘라 국민의 압도적 지지로 미국의 의도는 쉽사리 먹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2013년 차베스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니콜라스 마두로 부통령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설상가상으로 유가가 폭락하면서 석유수출로 유지되던 베네수엘라 경제는 심각한 위기를 맞는다. 미국은 베네수엘라를 공략할 절호의 기회로 보고 경제압박을 시작한다. 특히 2017년 9월 마두로 대통령이 석유 가격을 달러 대신 위안화로 표시하자 미국은 달러를 지키기 위해 초강력 경제제재를 시행한다. 

 

베네수엘라는 경제 위기 속에서 2018년 5월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마두로 대통령은 2013년 대선 때 얻은 득표율 50.6%보다 17.2% 포인트나 오른 67.8%를 득표해 재선에 성공하지만 야당들은 선거 무효를 주장하며 정권 퇴진 운동에 돌입했다. 여기에 2019년 1월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이 대통령 권한을 인수한다고 선언하면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과이도는 2002년 차베스 정권을 전복하려는 쿠데타가 일어났을 당시 시위를 주도한 인물로 이후 미국에 건너가 교육을 받았다. 그는 2007년에도 베네수엘라에서 폭력 시위를 주도해 미국의 내정간섭을 유도했다. 

 

과이도가 누군지 아는 베네수엘라 국민이 20%도 되지 않을 정도였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즉각 과이도를 대통령으로 인정한다고 밝혔다. 2천만 달러 이상을 지원하겠다고도 하였다. 볼턴 백악관 NSC 보좌관은 ‘5000명 병력 콜롬비아 파병’이라 적힌 노트를 일부러 사진에 찍혀 언론에 유포했다. 베네수엘라에 군대를 투입할 수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다른 친미국가들도 과이도 정부를 인정했다. 마두로 정부는 사태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규정하고 미국과 단교를 선언, 전면 대결에 나섰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2019년 1월 28일 '5,000병력 콜롬비아로'라고 쓴 자필글씨를 노출시켰다.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4월 30일 과이도 의장은 수십 명의 군인을 앞세워 군사봉기를 시도했다. 이에 호응해 미국도 군사적 개입을 할 수 있다며 마두로 정부를 위협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 군부는 마두로 정부를 확고히 지지하였다. 마두로 대통령은 4,500명의 병력을 사열하며 군부 장악력을 과시했다. 과이도 의장은 제헌의회로부터 면책특권을 박탈당했고 함께 했던 수십 명의 군인들은 브라질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사태가 장기화되자 트럼프 정부는 과이도 의장에게 실망하기 시작했다. 워싱턴포스트는 6월 19일 “수개월째 지지부진한 상황에 트럼프가 인내도 흥미도 잃었다”며 베네수엘라에서 손을 뗄 분위기를 전했다. 물론 최근까지도 미국은 베네수엘라에 대한 제재를 추가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조치는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미국은 베네수엘라와 전쟁 직전까지 가면서 쿠데타를 사주하는 등 심각한 대치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 주요 반미국가와 미국의 대립 양상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이들 사례에는 공통점이 있으며 현재 국제 질서를 보여주는 특징이 담겨 있다. 이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글은 자주시보와 주권연구소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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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의 '가짜뉴스', 금강에서 증명하다

[삽질 10년, 산 강과 죽은 강 4] '자전거 탄 금강' 답사 마지막 날

등록 2019.08.27 07:50 수정 2019.08.27 07:50
 
조만간 출범할 국가 물관리위원회는 오는 9월~10월경 '금강-영산강 보 처리 방안'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릴까? <오마이뉴스>는 8월 21일부터 31일까지 금강과 낙동강 현장을 환경단체들과 동행취재하면서 4대강 보의 문제점 등을 탐사보도한다. '삽질 10년, 산 강과 죽은 강' 특별기획 보도는 9월 말까지 이어진다. 10월에는 '4대강 부역자와 저항자들'(오마이북 출간)을 원작으로 오마이뉴스가 제작한 4대강 다큐멘터리 영화 '삽질'(영화투자배급사 <엣나인필름>)을 영화관에 개봉한다.[편집자말]

▲ 금강 유역 환경사회단체들로 구성된 '자전거 탄 금강' 답사단이 23일 오후 충남 공주시 공주보 상류 고마나루(곰나루) 모래톱에서 고운 모래를 들어 손가락 사이로 흘려내리고 있다. ⓒ 권우성

 
맨발로 걸었다. 발바닥 감촉이 부드러웠다. 두 손에 가득 모래를 담아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냈더니 바닥에 닿기 전에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이틀 동안 금강 하굿둑에서부터 페달을 밟은 '자전거 탄 금강' 답사단은 모래톱 위에 해바라기 모양으로 누웠다. 얼굴은 따가웠지만, 등짝으로 전해지는 뜨끈한 온기로 5분만 누워 있어도 스르륵 잠이 들 것 같았다.

10년 전만 해도 4대강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강수욕 풍경이었다. 어른과 아이들은 물장구를 치며 놀다가 지치면 물이 찰랑거리는 곳에 모래를 파서 띄워 놓은 시원한 수박과 오이, 참외를 쪼개먹었다. 아이들은 모래성을 만들고, 어른들은 모래 속에서 얼굴만 바깥으로 내민 채 모래찜질을 하면서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잠시 내려놓았다.

하지만 4대강사업 후 10년 동안 금강 답사팀이 누운 곳은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모래를 죄다 파내고, 보를 세워 강물 속으로 수장시켰다. 매년 여름에는 녹조가 창궐했다. 강바닥을 한 삽 푸면 최악 수질을 상징하는 실지렁이와 깔따구들이 들끓었다. 하지만 공주보 수문이 열린 지 1년도 지나지 않아서 10년 전 강수욕을 했던 풍경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금강은 물속에 잠겨 있던 모래톱을 드러내면서 강의 귀환을 알렸다.   

[곰나루] "옛날 새하얀 모래는 아니네"

답사단은 금강 탐사 마지막 날인 23일 국가명승지인 공주 곰나루 모래밭을 걸었다. 금강하굿둑에서부터 1박2일동안 자전거를 탔던 일부 시민들은 다른 일정으로 빠져나갔다. 이날 정민걸 공주대 환경교육과 교수와 이상돈 의원실의 박용훈 작가, 황치환 세종환경운동연합 상임대표와 박창재 사무처장, 최병조 세종시 지속가능발전협의회 사무국장 등이 합류했다. 

열린 강과 닫힌 강의 차이는 확연했다. 여전히 금강 하굿둑으로 막혀 있는 구간은 강의 흐름이 멈춰 있었다. 수심이 깊기에 강변에 접근하기도 어려웠다. 녹색 페인트 물감을 풀어놓은 듯이 녹조가 창궐했다. 하지만 상류의 세종보와 하류의 공주보, 백제보가 열린 뒤 곰나루에는 강물이 흐르면서 펄이 씻겨 내려가고 모래가 쌓이기 시작했다.

"옛날 모래가 아니네."

답사단과 함께 곰나루를 걷던 정민걸 공주대 교수가 한 마디 던졌다. 공주보 개방으로 모래톱이 쌓인 이곳을 처음으로 왔다는 정 교수는 과거 모래톱과 색깔부터 다르다고 했다. 지금의 모래 속에는 4대강사업으로 쌓였던 검은 펄이 조금 섞여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강물과 모래톱이 만나는 지점에는 모래 반 펄 반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 금강 유역 환경사회단체들로 구성된 '자전거 탄 금강' 답사단이 23일 오후 충남 공주시 공주보 상류 고마나루(곰나루) 모래톱에 둥그렇게 누웠다. ⓒ 권우성

 
모래톱의 '복병'과 '제초 원정대'

올해 3~4월만 해도 이곳은, 예전처럼은 아니었지만, 시원한 모래톱이 형성된 과거로 되돌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그 뒤부터 풀이 자라기 시작했다. 채 씻겨내려가지 못한 펄속에 뿌리를 박은 단풍잎돼지풀과 가시박, 환삼덩굴과 칡들이 얼기설기 자랐다. 일부 식물을 제외하고는 환경부가 지정한 생태계 교란종 외래식물들이었다. 

사람 키만큼 자란 풀들은 모래톱으로 사람을 불러들이는 데 '복병'이었다. 내가 지난 7월부터 혼자 이곳의 풀을 뽑기 시작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삽과 낫을 들고 풀뽑기 작업을 도운 공주시민들이 있었다. 대전에서도 일명 '제초 원정대'를 자임하면서 찾아왔다. 이날 답사단이 밟은 모래톱은 이런 숨은 노력 덕분으로 탄생한 곳이었다.

이날 답사단이 모래톱에 누워 오마이뉴스 권우성 사진부장이 띄운 드론을 향해 양손을 흔들면서 모래톱의 귀환을 기뻐하는 분위기를 반감시킨 이는 정민걸 교수였다. 

"아쉬운 것은 고정보와 수문 하단 고정구조물 때문에 되살아나는 모래톱에 여전히 펄 성분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겁니다. 이건 예전의 하얀 백사장은 아니죠. 수문을 열었지만 공주보의 고정구조물이 곰나루 위까지 물의 흐름을 저해하기 때문에 어린 아이와 함께 백사장을 걷기도 하고, 물가에서 물에 발을 담그며 걷는 추억을 만들어 주었던 곰나루의 드넓은 모래톱이 아직 되살아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수문이 개방된 뒤 물이 흐르면서 전반적으로 수질이 개선되고 강 생태계가 되살아나고 있지만, 공주보의 고정보와 문지방에 해당하는 수문 하단 고정구조물 때문에 부분적으로 물이 정체되고 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일부 정체구간을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녹조가 사라졌고, 특히 수온 저하와 물의 흐름으로 남조류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 것은 4대강사업의 대형보가 강 생태계를 저수지 늪으로 바꾸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면서 "수문 개방으로 물이 흐르면서 물을 정화하는 모래톱이 많이 되살아난 것도 강 수질과 생태계가 예전의 비단처럼 맑은 금강으로 되살아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4대강사업이 저지른 만행의 결과인 대형보들이 철거되어 강이 진정으로 되살아나고 수서생물이 건강하게 살며, 사람이 자연의 강과 공존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4대강 대형보로 인해 물의 수위가 올라가고 지하수위가 올라가 주변 아파트와 주택은 과거보다 더 습해지고 곰팡이나 세균이 잘 번성해 사람의 건강에도 해가 됩니다. 결국 대형보를 철거하는 것이 주거 환경을 위생적으로 개선하고 건강증진에도 기여하는 겁니다."

[공주보] 답사단, 공주보에 최초로 보철거 대형 현수막 내걸다
 

▲ 금강 유역 환경사회단체들로 구성된 '자전거 탄 금강' 답사단이 23일 오후 충남 공주시 공주보에 '4대강 보, 완전 해체하라! 금강 흐르게'가 적힌 대형현수막을 내걸었다. ⓒ 권우성

 
이날 답사단이 곰나루의 모래톱을 밟기 전에 찾아간 곳은 공주보였다. 4대강사업 준공 이후 녹조가 발생하고 물고기 집단 폐사가 발생한 곳이다. 강바닥에 펄층이 쌓이고 실지렁이와 붉은깔따구가 발견되면서 시궁창이라는 오명을 받기도 했다. 또 썩은 강물에서 풍기는 잦은 악취 탓에 민원에 시달리기도 했다.

지난해 3월 수문을 전면 개방하면서 이곳의 강물은 막힘없이 흘렀다. 흐르는 강물은 강바닥의 펄을 하류로 흘려보냈다. 햇빛에 반짝이는 낮은 여울이 생겼다. 윗물과 아랫물이 뒤섞이면서 물속에 산소를 공급하는 곳이다. 또 이곳에 서식하면서 알을 낳는 다양한 물고기들이 돌아왔고, 모래톱에는 삵과 고라니 등 야생동물도 돌아오고 있다.

이날도 공주보는 수문을 활짝 연 상태로 답사단을 맞았다. 강물은 빠른 속도로 콘크리트 물받이공을 타고 흘러내려갔다. 보 상·하류의 크고 작은 모래톱에는 이곳을 다시 찾은 하얀 쇠백로와 빛바랜 색깔의 왜가리들이 한가롭게 날았다.
 

▲ 금강 유역 환경사회단체들로 구성된 '자전거 탄 금강' 답사단이 23일 오후 충남 공주시 공주보에 '4대강 보, 완전 해체하라! 금강 흐르게'가 적힌 대형현수막을 내걸었다. ⓒ 권우성

 
이곳은 지난 2월 4대강조사평가기획위원회가 '금강-영산강 보 처리방안'을 발표했을 때 자유한국당과 관변단체 등이 내건 '공주보 철거반대' 현수막으로 도배됐던 곳이다. 4대강조사평가기획위원회가 공주보의 공도교 기능을 살린 채 부분 철거하는 방안을 제시하자, 자유한국당과 일부 단체들은 "공도교도 다 철거할 예정"이라는 가짜뉴스까지 퍼트리기도 했다.
   
이날 답사단의 유진수 단장(금강환경회의 사무처장)과 이경호 대전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 이철재 에코큐레이터, 최병조 세종시 지속가능발전협의회 사무국장 등은 가짜뉴스 현수막이 나붙었던 공주보 공도교 중간 지점에서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힌 대형 현수막을 내렸다.

"4대강 보, 완전 해체하라! 금강 흐르게"

4대강조사평가기획위원회의 발표 이후 거짓 현수막으로 도배됐던 공주보에 잠시나마 보 철거 현수막이 내걸린 건 이날이 최초였다. 

[세종보] 수문개방의 상징인 곳에서 '흰수마자'를 풀다
 

▲ 금강 유역 환경사회단체들로 구성된 '자전거 탄 금강' 답사단이 23일 오후 충남 세종시 세종보 하류쪽에서 멸종위기종 1급인 흰수마자 모형을 강에 풀어주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권우성

 
'자전거 탄 금강' 답사단의 마지막 행선지는 20km 정도 상류에 있는 세종보 아래의 하중도였다. 세종보는 4대강사업 16개 보 중 제일 먼저 공사를 시작했다. 준공도 가장 빨랐다. 또 문재인 정권 들어서 제일 먼저 상시 전면 개방했다. 이 보는 수문을 여닫는 방식도 다른 15개 보와는 달랐다. 수문을 수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수문을 눕히고 세우는 방식의 전도식 가동보이다. '최첨단 가동보'라고 적극 홍보하던 곳이다.

최첨단 가동보라고 적극 홍보했던 이곳은 준공 이후부터는 '고철덩어리 보'로 전락했다. 가동보 구간 223m, 고정보 구간 125m로 총 연장 348m인 세종보의 수문을 여닫는 실린더에 토사가 끼면서 수문이 작동하지 않고 잦은 오작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또 세종보는 4대강사업 때 금강에 지은 보의 최상류에 있기에 토사량이 가장 많았다. 퇴적토가 많다는 것은 오염원 또한 첫 번째로 모이는 장소라는 의미이다. 그런 이유로 강바닥에 쌓인 펄에는 환경부가 지정한 수생태 최악의 오염지표종인 실지렁이, 붉은 깔따구가 득시글했다. 

하지만 지난해 1월부터 1년 넘게 수문이 활짝 열려서 펄층도 거의 없어졌고, 최근에는 흰수마자 등 멸종위기종 1급인 물고기도 대거 발견돼 생태계 회복의 상징적인 장소로 회자되고 있다. 

답사단은 세종보 바로 아래에 있는 학나래교로 이동했다. 수문 개방 후 넓은 모래톱이 생겨난 곳이다. 이곳도 곰나루 지역처럼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최근 내린 비 때문인지 물살이 빨랐다. 이곳에서 답사단은 세종보에서 발견된 흰수마자가 돌아오는 퍼포먼스를 했다. 
    

▲ 세종보 아래 강 중앙에 만들어진 모래톱에서 흰수마자를 들고 ‘4대강 보 해체’ 퍼포먼스를 했다. ⓒ 김종술

▲ 세종보 아래 강 중앙에 만들어진 모래 여울에서 재첩을 잡다가 물속에 누워 휴식도 취했다. ⓒ 박용훈

  

▲ 세종보 아래 강 중앙에 만들어진 모래톱에서 흰수마자를 들고 ‘4대강 보 해체’ 퍼포먼스를 했다. ⓒ 박용훈

또 바로 앞에 생겨난 모래섬으로 이동했다. 1년 전과는 달리 이곳에도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강변의 모래를 손으로 파보니 맑은 물에서 사는 생명체인 재첩을 발견했다. 세종보가 보이는 이곳에서 답사단은 마지막 퍼포먼스를 벌였다. 열린 강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곳의 물속에서 8개의 글자를 적은 피켓을 들었다.
 
"4대강 보 해체하라!"

[조촐한 해단식] 산 강과 죽은 강 확인하면서 달린 100km

23일 오후, 2박3일을 함께한 '자전거 탄 금강' 답사단과 마지막 날 합류한 인사들은 세종보 옆에 있는 약수터에서 조촐한 해단식을 했다.

황치환 세종환경운동연합 상임대표는 "서천 하굿둑부터 여기까지 먼 거리 오느라 고생했다"면서 "4대강이 끝까지 흐를 수 있도록, 흰수마자가 금강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자"고 말했다.

유진수 답사단장은 "2013년에 자전거를 타고 금강을 답사하면서 2012년 4대강사업이 마무리된 이후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확인했고, 이번에는 금강 3개보 개방 이후 금강의 자연성 회복을 살펴보았다"면서 답사 과정에서 조사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녹조 발생 상황이나 모래톱과 수질생태계를 보면 먼저 활짝 연 곳이 자연성 회복이 잘 되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서해와 만나는 지점의 경우 하굿둑의 영향으로 상류보다 녹조가 많았다. 첫날 하굿둑에서 본 녹조의 경우도 지난해와 지지난해보다 훨씬 줄었다는 것을 목격했다. 결국 강이 흐르기 시작하자 금강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금강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도록 2020년에도 '자전거 탄 금강' 행사를 계속할 예정이다. 힘을 모으자."

행사를 마친 뒤에 3일 동안 일반 시민 참가자로 탐사를 함께했던 손장희씨는 기자와 헤어지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첫날 서천 하굿둑에서 본 맑고 아름다운 바다의 모습에 감탄했는데, 불과 10분 거리에서 믿을 수 없이 처참한 녹조의 강을 보았다. 강을 가득 채운 거대한 녹색은 영화CG와 같은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이를 전하려고 자전거를 타면서도 투명카약을 띄워 유튜브 중계를 하고 드론을 띄워 죽어가는 강과 살아나는 강을 비교해 국민들에게 전하는 답사단과 취재팀의 활동에 고마움을 전한다."
 

▲ 21일 오후 충남 서천군 화양면 망월리 금강에서 김종술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녹조를 뿌리며 얼마나 심각한지 확인해보고 있다. ⓒ 권우성


열린 강은 살았고 닫힌 강은 죽었다. 자유한국당은 최근에도 금강 지역과 낙동강 지역을 돌면서 이명박 정권의 4대강사업의 치적을 홍보하고 있지만, 누가 봐도 강을 죽인 사업이었다. '고인 물은 썩는다'는 명제는 4대강사업을 완공한 뒤 지난 10년간 녹조가 창궐한 강이 스스로 증명했고, 답사단은 이번에 하굿둑에서 확인했다.

자유한국당은 수문을 열거나 해체하면 농업용수가 없어진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2박 3일간 답사단이 자전거로 달린 100km 구간의 금강을 직접 와서 보면 확인할 수 있다. 금강의 3개 보 수문이 활짝 열렸는데도 농경지에 물이 넘쳐 흘렀다.  

또 강물을 열면 농업용수가 부족하다는 것도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는 게 지난 10여 년간의 환경부와 충남연구원의 금강 모니터링 과정에서 확인됐다. 설령 농업용수가 부족하다고 해서 농사를 짓기 위해 녹조물, 소위 죽은 물을 사용하겠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녹조의 독성 물질이 농작물에 농축된다는 연구결과도 있기 때문이다.

강을 위해서도, 인간을 위해서도 4대강은 끊임없이 흘러야 한다.

['자전거 탄 금강' 행사]
공동 주최 : 금강유역 환경회의, 대전환경운동연합, 대전충남녹색연합, 세종환경운동연합, 서천생태문화학교, 이상돈 국회의원실
기술 후원 : 충남연구원

동행 취재 : 김종술 이철재 김병기 권우성 기자

덧붙이는 글 <오마이뉴스> 탐사취재팀은 오는 28일부터 31일까지 낙동강을 취재합니다. 이 기사에 보내주시는 ‘좋은 기사 원고료’는 김종술 기자의 취재비 등으로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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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조국 의혹’ 부산대 의전원·서울대 등 전격 압수수색

[속보] 검찰, ‘조국 의혹’ 부산대 의전원·서울대 등 전격 압수수색

등록 :2019-08-27 09:58수정 :2019-08-27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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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조국 관련 의혹 형사1부에서 특수2부로 재배당
조국 쪽 “검찰 수사 통해 사실관계가 해명되길”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26일 오전 인사청문회 준비단이 사무실이 마련된 서울 종로구 적선현대빌딩으로 들어서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26일 오전 인사청문회 준비단이 사무실이 마련된 서울 종로구 적선현대빌딩으로 들어서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검찰이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관련 각종 의혹들을 조사하기 위해 부산의료원과 서울대 등에 대한 전방위적인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부장 고형곤)는 “오늘 입시, 사모펀드, 부동산, 학원재단 등 관련 사건 수사를 위해 관련 의전원, 대학교, 사모펀드, 학원재단 등을 압수수색했다”고 27일 밝혔다. 압수수색 장소에는 부산대 의료원, 서울대 환경대학원, 단국대, 사학재단 웅동학원, 사모펀드 코링크프라이빗에쿼티 등의 사무실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번 압수수색에 대해 “이 사건은 국민적 관심이 큰 공적 사안으로서, 객관적 자료를 통해 사실관계를 규명할 필요가 크고, 만약 자료 확보가 늦어질 경우 객관적 사실관계를 확인하기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조처”라고 밝혔다.

 

조 후보자는 평소와 달리 인사청문회 준비단 사무실이 마련된 서울 종로구 적선현대빌딩에 출근하지 않고 자택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사청문회 준비단 관계자는 “(조 후보자가) 심신의 피로로 자택에 머물고 있는 상황”이라며 “조 후보자는 ‘검찰 수사를 통해 사실관계가 해명되길 바란다’는 입장”이라고 전했다.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07258.html?_fr=mt1#csidxa025f06d756a3ed828c90958045df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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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 농단' 이재용 대법 선고일이 다가오고 있다

시민단체, 이재용 국정농단 대법원 선고 앞두고 천막농성 돌입
2019.08.26 17:14:26
 
 

 

 

 

시민단체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재구속을 촉구했다. 민주노총과 민중공동행동은 26일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같이 밝혔다. 이 부회장은 29일 국정농단 재판의 대법원 상고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이 부회장 상고심 재판의 쟁점은 이 부회장이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에게 제공한 말 3마리 구입비 34억여 원을 뇌물로 볼 것인지 여부다. 박 전 대통령과 최 씨의 2심 재판부는 말 구입비를 포함해 87억여 원을 뇌물로 인정한 반면 이 부회장 2심 재판부는 말 소유권이 최 씨에게 넘어가지 않았다며 이를 제외한 36억여 원만 뇌물로 인정했다. '뇌물을 준 액수와 받은 액수가 달라져버린' 상황이다.
 
시민단체는 이 부회장 2심 재판부가 이 부회장을 집행유예로 석방하기 위해 뇌물액수를 50억 원 이하로 맞추려 부당하게 판결했다고 주장한다.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의 횡령죄는 횡령액이 50억 원 미만일 때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 '3년'은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있는 유기징역의 마지노선이다.
 

▲민주노총과 민중공동행동이 26일 대법원 앞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구속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프레시안(조성은)

시민단체는 기자회견을 통해 "이재용의 뇌물 공여에 대한 2심은 △국정농단의 핵심 증거인 '안종범 수첩'의 증거 능력을 부인했고 △'이재용의 승계 작업이 목적이라는 의식이 없었다'고 판단했으며 △고가로 제공된 경주마 문제를 '소유권이 이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재용의 뇌물공여 액수를 89억 원에서 36억 원으로 낮춰 집행유예로 석방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재판부가 '안종범 수첩'의 증거 능력을 부인한 판결을 두고도 "이재용 재판을 제외한 모든 재판에서 '안종범 수첩'은 증거능력을 인정받았다"면서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는 '이재용 봐주기'를 위해 자행된 2심 판결을 바로잡는 판결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은 이재용 부회장을 두고 "정권과의 유착, 부패 그리고 온갖 탈법을 동원해 꼼수로 세법을 피해가고 법망을 피해가면서 결국은 국정농단까지 벌였다"면서 "또한,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다시 한 번 사법농단을 일삼고 뇌물액수를 줄여가며 감옥 문을 나왔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29일 대법원 판결은 한국 사회에 정의가 살아있음을 확인해주는 날이 돼야 한다"며 "(이 부회장을 재구속해) 재벌개혁을 위한 역사적인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태연 변혁당 대표도 "지난 20년 간 삼성의 3대 세습 과정에서 일어난 범죄에 대법원은 면죄부를 줬다"며 "2016년 국정농단 사태는 그 과정에서 자행된 것"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얼마 전에도 1만 명의 시민들이 대법원에 이재용을 반드시 재구속해야한다는 탄원서를 제출한 바 있다"며 "대법원이 또 다시 삼성에 굴복하고 면죄부를 줄 것인지 대한민국 국민과 전세계가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기자회견이 끝낸 뒤, 대법원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에 돌입했다. 이들은 이 부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있는 29일까지 농성을 이어갈 계획이다. 
 

▲시민단체가 26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재구속을 촉구하며 대법원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에 돌입했다. ⓒ프레시안(조성은)

 

▲시민단체가 26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재구속을 촉구하며 대법원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에 돌입했다. ⓒ프레시안(조성은)

 
조성은 기자 pi@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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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향한 ‘광란의 시대’의 언론

조 후보자 관련 보도 중에서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기사들 정리
 
임병도 | 2019-08-26 08:58:1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연일 뉴스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언론사들은 수십에서 수백 건의 기사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일부 언론사는 공직자 후보를 검증하는 기사를 통해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켜주는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의 언론은 기사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수준의 보도를 내놓고 있습니다.

조 후보자 관련 보도 중에서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기사들을 일부 정리해봤습니다.

악의적인 기사 제목들

8월 24일 중앙일보는 <“아픈 아기 피 뽑아 만든 논문, 조국 딸이 휴지조각 만들었다”>는 제목으로 조 후보자 딸의 논문 논란을 보도했습니다. 기사 제목을 보면 ‘아픈 아기’, ‘피 뽑아’ 등으로 마치 하드코어 영화 제목을 보는 듯합니다. 꼭 이런 제목을 사용해야 했을까라는 의문이 듭니다.

2002~2004년 샘플을 모았고, 2007년 실험을 진행했다. 논문은 2009년 발표했다. 2005년 황우석 사태 이후 법률·윤리규정이 강화됐고, 그 전에는 매우 허술한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고교생 1저자 논문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 [출처: 중앙일보] “아픈 아기 피 뽑아 만든 논문, 조국 딸이 휴지조각 만들었다”

기사를 보면 실험은 2007년이고, 논문은 2009년입니다. 샘플을 모은 시기를 보면 조 후보자 딸의 고등학교 재학 시절과 무관해 보입니다. 그런데도 기자는 2005년부터 윤리규정이 강화돼 조 후보자의 딸이 2004년에 허술한 규정을 이용한 것처럼 기사를 썼습니다. 시기적으로 맞지가 않음에도 조 후보자의 딸을 악의적으로 묘사했습니다.

매일경제는 8월 21일 오후 4시 44분에 <조국 딸 오피스텔… 거주자 주차장엔 차 10대 중 2대가 포르쉐>라는 제목의 기사를 올렸다가 자정쯤에 삭제했습니다. 매일경제는 ‘기사 제목에 오해의 소지가 있어 삭제했다’고 밝혔지만, 제목을 수정하는 경우는 있어도 기사를 아예 삭제하는 것은 드뭅니다.

매일경제의 기사는 주차장에 있는 포르쉐의 차주가 누구인지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그저 카더라 통신을 무조건 보도하고 보자는 식의 대단히 무책임한 보도였습니다.

8월 25알 중앙일보는 <일가족 모두 고발 당한 조국···검찰 조사받는 법무장관 되나>는 기사에서 조 후보자가 법무장관이 되더라도 검찰 조사를 받을 것이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가족이 고발당했더라도 직접적인 개입 혐의가 없다면 조사를 받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자유한국당은 조 후보자가 투자에 개입했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건 하느님만 아는 일이죠.’라고 답하기도 했습니다.

확실치도 않은 ‘검찰조사’를 제목에 넣음으로 조 후보자가 법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악의적인 왜곡 보도입니다.

재산이 많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채무가 더 많다니…

8월 20일 <조국 가족 운영 창원 웅동학원 법인재산만 130억 원대>라고 보도한 SBS는 23일 <조국이 내려놓겠다는 웅동학원, 자산보다 ‘빚’ 더 많아>라며 불과 사흘 전과 다른 보도를 했습니다.

SBS의 보도가 다른 결정적 계기는 조 후보자의 가족이 웅동학원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발표한 이후입니다. 이전에는 마치 백억이 넘는 재산을 보유했다는 식으로 공격하더니, 이제는 빚만 남은 재단을 넘겼다며 비난하고 있습니다.

같은 언론사인데, 전혀 다른 기사를 보면 왜 이렇게 보도했지라는 의문이 듭니다. 빚이 많은 재단이었다면 이미 130억이라는 보도가 나올 때 채무 또한 정확하게 보도했어야 합니다. 그때는 채무를 보도하지 않았다가, 사회에 기부하겠다는 발표가 나오자 기사에 포함시킨 행태는 올바른 저널리즘의 보도 행태로 보기 어렵습니다.

조국은 MB -박근혜 정권의 실세였나?

8월 25일 국민일보는 <논문·장학금·인턴십까지…조국 딸만 관련되면 바뀌는 제도들>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마치 조 후보자가 딸의 학교 생활을 위해 제도를 바꾸도록 압력을 가한 사람처럼 묘사했습니다.

국민일보는 ‘조 후보자의 딸이 2008년 참가했던 단국대 의대의 이른바 ‘학부형 인턴십 프로그램’도 그해 이후 11년간 한 차례도 운영되지 않았다’고 보도했습니다. 2008년은 MB정권 시절입니다. 당시 조국 후보자는 자기 딸을 위해 ‘학부형 인턴십 프로그램’을 만들 정도로 유명하거나 영향력 있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기자는 조 후보자의 딸만 혜택을 받고, 일부러 제도를 만들었다는 식으로 보도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내놓지 못했습니다. 특히 기사를 보면 누가 페이스북에 어떤 글을 올렸다는 것만 있지, 기자가 직접 취재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공직후보자에 대한 언론의 검증 기사는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정확한 취재가 뒷받침 되지 않으면서 ‘아니면 말고식의 보도’, ‘악의적인 제목’,’미리부터 범죄자 낙인 찍기’ 등의 수준 낮은 기사는 오히려 국민에게 혼란만 줄 수 있습니다.

강기석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광란의 시대’의 언론’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습니다. 강 이사장은 중앙일보 기사를 인용하면서 “중앙일보 후배들아! 10년 뒤 후회하고 반성하지 말고 지금 당장 문제 제기를 하고, 거부하고, 저항하라.”고 주장했습니다.

강 이사장은 ““위에서 시킨 건데”, “먹고살기 위해서인데”, “조직이 보호해 줄 건데”,집단심리에 휘둘려 넋 놓고 손에 피를 묻히고 있다가는 후회하고 반성하고 속죄할 기회조차 없을지 모른다.”라며 말미에 판사가 전직 중앙일보 기자에게 했던 말을 인용했습니다.

“앞장서 칼을 휘두르다 화살받이가 되지 마세요. 로얄들(족벌신문사 사주)은 손에 피 안 묻혀요. 어쩌려고 그래요?”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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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미사일’ 놓고 트럼프 “약속위반 아냐”, 아베 “유엔결의 위반” 공개 대립

공개 석상에서 북한 문제 놓고 또 의견 충돌... 트럼프, “축소된 한미훈련도 돈 낭비” 폭탄성 발언도

김원식 전문기자
발행 2019-08-26 09:52:41
수정 2019-08-26 09:52:41
이 기사는 번 공유됐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5일(현지 시간) 프랑스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에 참석 중에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시험 등 북한 문제를 놓고 입장이 완전히 대립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5일(현지 시간) 프랑스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에 참석 중에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시험 등 북한 문제를 놓고 입장이 완전히 대립하는 장면을 연출했다.ⓒ뉴시스/AP
 

이어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게 “이게 맞는다고 말해주겠냐? 내가 엄청나게...”라고 동조를 구했고 볼턴 보좌관은 “그렇다. 아주 많이 수정됐다”고 호응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수정된 방식. 그러나 솔직히 나는 그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재차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어 ‘북한과 만남에 대한 추가할 내용이 있느냐’는 질문에 “아마 (만남을) 할 것이다. 그래, 아마”라며 “그러나 나는 단거리(미사일)를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면 단거리는 신조의 것, 알다시피 그것(단거리)은 정말로 그의 영토이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나는 신조에게 묻고 싶다. 북한의 단거리미사일 시험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느냐?”면서도 “그가 (공포로) 오싹해 하지 않는다”고 아베 총리의 동의를 구했다.

하지만 공을 넘겨받은 아베 총리는 “우리의 입장은 분명하다. 북한의 단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는 분명히 유엔 안보리 결의안 위반”이라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최근 북한의 또 다른 단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를 경험하는 것은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일본 총리가 어떻게 느낄지 이해할 수 있다”면서 “내 말은 내가 이해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다르다. 그러나 난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다소 진화에 나서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어 한 기자가 아베 총리에게 ‘트럼프 대통령이 더욱 당신의 입장에 다가오길 희망하느냐’고 묻자 그도 “나는 우리가 전에 했던 것처럼 나 자신과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에 관한 한 항상 합심(same page)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미국과 북한의 프로세스(process)를 100%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며 더 이상 논란의 확산은 피하려는 답변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5일(현지 시간) 프랑스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에 참석해 악수를 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5일(현지 시간) 프랑스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에 참석해 악수를 하고 있다.ⓒ뉴시스

북한 미사일 발사 두고 김정은 위원장 두둔한 트럼프
아베는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반발

또 다른 기자가 ‘사안을 그렇게 서로 다르게 보고 있는데 합심하고 있느냐’고 묻자 트럼프 대통령도 “그(아베)가 총리이고 내가 대통령인 한 우리는 항상 합심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는 같은 입장에 있다”고 이견 불식에 나섰다.

그러나 한 기자는 ‘미안하지만 트럼프 대통령, 당신은 단거리미사일 발사가 유엔 결의안 위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아니냐’며 아베 총리와의 입장 차이를 재차 꺼내 들면서 공격적인 질문을 이어갔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결코 김 위원장과 개인적으로 그것(단거리미사일)에 대해 논의한 적이 없다”며 “장거리미사일을 논의했고, 그는 그것을 하지 않았다. 핵실험도 하지 않았다. 단거리, 일반적인 미사일을 시험했다”며 시종일관 김 위원장을 두둔했다.

또 “당신이 좋아하든 안 하든 그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단거리미사일을 시험하고 있다”면서 “나는 내가 잘 알고 있는 김정은이 궁극적으로 옳은 일을 할 것이라는 신뢰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가 옳은 일을 할 것이라고 느낀다. 북한은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 북한처럼 그런 잠재력이 있는 국가도 없다”면서 “그는 누구보다도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가 옳은 일을 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어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아마 그렇지 않을 수도. 그러나 그럴 수도. 하지만 나는 그가 옳은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겠다”고 덧붙였다.

미일 두 정상은 지난 5월 트럼프 대통령의 방일 때 개최한 공동 기자회견에서도 북한의 단거리미사일 발사 문제에 관해 비슷한 엇박자를 연출한 바 있다.

이날도 두 정상은 모두발언때 까지는 덕담을 나누며 대북 공조 체제를 유지하는 모양새를 연출했다. 하지만 기자들의 질문이 나오고 구체적인 북한 관련 질문이 나오자, 상황이 돌변해 다시 두 정상의 입장 차이를 그대로 드러낸 기자회견이 되고 말았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최근 북한의 잇따른 단거리미사일 발사 시험을 놓고 정면으로 대립하는 엇박자를 다시 한번 드러냈다.

프랑스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에 참석 중인 두 정상은 25일(현지 시간) 양자 정상회담 직전 기자들과의 문답에서 기자들이 구체적으로 북한의 최근 단거리미사일 발사 시험 등에 관해 질의하자 완전히 충돌하는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먼저 트럼프 대통령은 한 기자가 ‘북한이 더 많은 시험(test)을 하는 데 대해 우려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기쁘지는 않지만, 합의를 위반한 것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김정은 위원장으로부터 “지난주 훌륭한 친서를 받았다. 그가 한국이 전쟁 게임(war game)을 하는 데 화가 나 있었다”면서 “진실을 말하자면, 나 또한 그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한미훈련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지만, 나는 반대를 추천하고 싶다. 당신들이 한다면, 개입하고 싶지는 않다”면서도 “나는 완전한 돈 낭비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그것(훈련)을 축소했다”고 폭탄성 발언도 내놨다.

김원식 전문기자

국제전문 기자입니다. 외교, 안보, 통일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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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 조롱하는 트럼프, 미일동맹 중시하는 트럼프

[개벽예감 362] 한미동맹 조롱하는 트럼프, 미일동맹 중시하는 트럼프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9/08/26 [08:57]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궤변을 진실로 믿어버린 친미주의자

2. 친미맹방을 발밑에 두고 멸시하는 미국

3. 주둔비 전액부담 못하면 철군하는 수밖에

4. 미국의 새로운 지배전략수행에서 배제되는 한국

5. 아베의 군국주의무력증강 지원해주는 트럼프

 

 

1. 궤변을 진실로 믿어버린 친미주의자 

 

2018년 9월 26일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 텔레비전방송 <팍스 뉴스>와 대담하였다. 대담 중에 철군문제에 관한 질의응답이 오갔다. 

 

질문자 - “미국은 60년 넘게 한국에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는데, 당신은 주한미군이 철수되기를 바라는가?”

 

문재인 - “바라지 않는다. 종전선언과 관련해서, 종전선언이 발표되면 유엔사령부의 지위가 흔들리거나 또는 주한미군이 철수되어야 하는 어떤 압박을 받게 되는 게 아니냐 하는 의심이 있다. 그러나 종전선언은 한국이 65년 전에 정전협정을 체결한 이후 평화협정을 체결하지 못한 채 정전상태로 지나왔기 때문에 이제라도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고 전쟁을 끝내는 정치선언을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종전선언은 평화협상이라는 과정을 거쳐 평화협정으로 되는 것이다.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정전체제는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전선언은 유엔사령부의 지위나 주한미군의 지위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평화협정이 체결되더라도 주한미군의 지위는 전적으로 한미동맹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고, 평화협정과는 무관하다. 지금 주한미군은 남북관계에서 평화를 조성하는 대북억지력으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동북아시아에 평화와 안정을 조성하는 균형자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안보를 도와주는 것은 물론이고, 동시에 미국의 세계전략과 잇닿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평화협정이 체결된 뒤에도, 심지어 남북이 통일된 뒤에도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주한미군이 계속 주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위와 같은 대담을 하기에 앞서 2018년 9월 20일 문재인 대통령은 북측 방문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진행한 남북정상회담 대국민보고회에서 위의 대담내용과 거의 똑같은 발언을 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서, 문재인 대통령의 위와 같은 대담발언은 열렬한 친미주의자에게서 들을 수 있는 전형적인 친미발언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친미발언을 무심히 스쳐갈 수 없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2018년 9월 26일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 텔레비전방송 <팍스 뉴스>와 대담하는 장면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담에서 종전선언이 발표되더라도 유엔사령부의 지위가 흔들리거나 주한미국군이 철수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주한미국군이 대북억지력으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동북아시아에 평화와 안정을 조성하는 균형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평화협정이 체결된 뒤에도, 그리고 남북이 통일된 뒤에도 주한미군이 계속 주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친미주의자에게서 들을 수 있는 전형적인 친미발언이다. 그런 친미발언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대결과 전쟁을 불러오는 주한미국군 영구주둔론과 대북흡수통합론을 주장했다. 그가 평양공동선언에 서명하고 1주일 뒤에, 트럼프 대통령이 선호하는 보수언론매체에 대담자로 출연하여 친미발언을 늘어놓은 것은, 평양을 방문하여 남북정상회담에 참석한 그가 북의 대남전략에 끌려가 한미동맹을 약화시키는 게 아니냐고 의심의 눈초리를 번득이는 미국을 안심시키고 환심을 사려는 계산된 행동이었다.     

 

(1) 한미동맹은 철두철미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장치의 일부인데,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친미주의자들은 한미동맹이 한국을 지켜준다는 착각의 수렁 속에 깊이 빠졌다. 친미주의자들이 모르는 것은, 미국이 자기의 태평양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에 전략거점을 꾸려놓고, 미일동맹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는 것, 그리고 한국을 미일동맹에 부속된 하위체제로 끌어들여 한미동맹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자국의 안보를 위해 이용한다는 것이다. 친미주의자들의 정치적 무지몽매는 한미동맹이 반미조선의 안보위협으로부터 친미한국의 안전을 지켜준다는 궤변을 진실로 믿게 만든다. 

 

(2) 더 심각한 문제는, 문재인 대통령이 통일된 한반도에 주한미국군이 계속 주둔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주한미국군이 철수되어야 평화통일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은 70년을 헤아리는 분단역사가 입증한 진리인데, 문재인 대통령은 철군과 통일의 불가분리성에 관한 진리를 부정하였을 뿐 아니라, 주한미국군이 통일 이후에도 계속 주둔해야 한다는 궤변을 꺼내놓았다. 주한미국군이 통일 이후에도 계속 주둔해야 한다는 말은 영구주둔론을 정당화하려는 궤변일 뿐 아니라, 흡수통합론을 정당화하는 궤변이기도 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주장한 대로, 만일 미국군이 주둔하는 가운데 한반도가 통일된다면, 그것은 자주통일도 아니고 평화통일도 아니며, 남측이 북측을 먹어버리는 흡수통합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문재인 대통령은 자유한국당과 똑같이 영구주둔론과 흡수통합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주한미국군을 영구히 주둔시키려는 시도나 남측이 북측을 흡수통합하려는 시도는 대결과 전쟁을 불러올 것이므로, 영구주둔론과 흡수통합론은 변형된 대결옹호론이며 변형된 영구분단론이다. 그러므로 문재인 대통령이 영구주둔론과 흡수통합론을 주장할수록 자유한국당과 똑같이 대결과 전쟁을 부추기게 되는 것이다.      

 

(3)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 언론매체와 대담하면서 위와 같은 친미발언을 늘어놓은 시점은 그가 평양공동선언에 서명한 날로부터 불과 1주일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공동선언에 서명하고 1주일 뒤에, 트럼프 대통령이 선호하는 보수언론매체에 대담자로 출연하여 친미발언을 늘어놓은 것은, 평양을 방문하여 남북정상회담에 참석한 그가 북의 대남전략에 끌려가 한미동맹을 약화시키는 게 아니냐고 의심의 눈초리를 번득이는 미국을 안심시키고 환심을 사려는 계산된 행동이었다. 

 

(4) 하지만 그런 행동은 부정적 결과만 가져왔다. 평양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회담하고, 평양공동선언에 서명한 문재인 대통령이 1주일 뒤에 그 선언과 정면 배치되는 친미발언을 늘어놓으며 미국의 환심을 사려고 하였으니, 그에 대한 북의 기대가 무너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 북을 자극하는 친미발언을 늘어놓는 바람에 그에 대한 북의 신뢰는 고작 1주일밖에 유지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던 때로부터 근 한 해가 지난 요즈음 북이 문재인 대통령을 비난, 질책하는 것은, 평양공동선언 이후 그 선언에 배치되는 친미적 언행을 계속해왔을 뿐 아니라, 남북 사이에서 우발적 무력충돌이 일어나면 평양에 침투하여 북의 수뇌부를 제거한다는 이른바 참수작전연습(위기관리참모훈련)까지 승인한 그에게 그 동안 참고 참았던 북의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현상인 것이다. 

 

 

2. 친미맹방을 발밑에 두고 멸시하는 미국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친미주의자들은 미국이 친미맹방에게 호의를 베풀어줄 것으로 기대하지만, 미국은 친미맹방에게 호의를 베풀기는커녕 자기 발밑에 두고 멸시한다. 미국이 한국을 얼마나 멸시하는지 알려면, 미국 해군정보국에서 정보분석관으로 근무하던 중 대북군사정보를 주미한국대사관에 전달하다가 미국 사법당국에 체포되어 1997년부터 2004년까지 수감되었던 재미동포 김채곤 씨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2016년 9월 19일 <조선일보>에 실린 대담기사에서 그는 미국이 영국이나 캐나다에게는 대북군사상황에 관한 고급정보를 넘겨주면서도 정작 한국에게는 넘겨주지 않는다고 지적하면서, “한국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과대평가합니다. 미국 정부에서 일해 보면, 우리가 ‘맹방’, ‘우방’이니 하는 건 한국 혼자의 생각이고 미국의 국익에 따라 결정할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 같은 친미주의자들은 미국이 한국을 맹방이라고 부르면서 친근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발밑에 두고 멸시한다는 것을 모른 채, 미국을 칭송하고 추종하는 자기 최면에 걸려있는 것이다.  

 

한미관계가 그처럼 근본적으로 뒤틀려있는데도,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11월 5일 주한미국군사령관과 그 휘하의 고위군사지휘관들, 주한미국대사를 청와대에 모두 초청하여 오찬을 대접하면서 그들에게 “한미동맹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 피로 맺어졌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반도의 평화를 만들어내는 동맹, 그리고 한국과 미국의 안보와 번영을 끌어내는 동맹, 나아가 동북아 전체의 평화와 안전을 이끄는 위대한 동맹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역설하면서, “한미동맹이 영원할 수 있도록 끝까지 같이 갑시다”라고 호소했다. 입으로는 맹방이니 뭐니 떠들지만, 실제로는 한국을 발밑에 두고 멸시하는 미국 앞에서 “혈맹만세”를 외치는 것이야말로 한미관계의 참담한 현실을 모르는 청맹과니의 헛소리이고, 민족적 자존심을 내버린 굴종행위가 아닐 수 없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2018년 11월 5일 문재인 대통령이 주한미국군사령관과 그 휘하 고위군사지휘관들, 주한미국대사를 청와대에 초청하여 오찬을 대접하면서 담화하는 장면이다. 담화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피로 맺어진 한미동맹이 영원할 수 있도록 끝까지 같이 갑시다"라고 말했다. 입으로는 맹방이니 뭐니 하지만, 실제로는 한국을 발밑에 두고 깔보고 멸시하는 미국 앞에서 "혈맹만세!"를 외치는 것이야말로 한미관계의 참담한 현실을 모르는 청맹과니의 헛소리이고, 민족적 자존심을 내버린 굴종행위가 아닐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처럼 한미동맹에 대한 환상에 젖어 자주의식이 몽롱해졌을 때, 트럼프 대통령은 친미주의자의 충성심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고 한미동맹을 조롱하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처럼 한미동맹에 대한 환상에 젖어 자주의식이 몽롱해졌을 때, 트럼프 대통령은 친미주의자의 충성심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고 한미동맹을 조롱하였다. 한미동맹을 조롱하면서 한국에게서 분담금 명목으로 돈이나 뜯어내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적나라한 모습이 <뉴욕포스트> 2019년 8월 9일 보도에서 드러났다. 보도에 따르면, 그날 뉴욕시 근교의 대저택에서 열린 대선자금모금행사에 참석한 트럼프 대통령은 청중을 웃기는 만담 같은 즉흥연설을 펼쳐놓던 중에 “한국은 텔레비전도 잘 만들고, 경제도 잘 돌아가는데, 왜 우리가 그들을 지켜주기 위해 돈을 내는가? 그들이 돈을 내야지”라고 하면서 목청을 돋우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그가(문재인 대통령을 지칭-옮긴이) 협상(주한미국군 주둔비 분담금 책정협상을 지칭-옮긴이)에 어떻게 끌려 들어왔는지를 묘사하는 대목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고 한다. 이것은 한국을 발밑에 두고 멸시하며 모욕하는 짓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만 멸시하는 게 아니라 다른 맹방들도 멸시하는데, 그런 거친 언행은 그가 백악관에 들어가기 훨씬 전부터 계속되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는 1990년 3월 1일에 발간된 미국의 도색잡지 <플레이보이>에 실린 대담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일본, 서부 도이칠란드, 싸우디 아라비아, 한국 같은 이른바 맹방들이 우리나라에서 돈을 뜯어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좀 더 이기적으로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나라들은 우리 등에 업혀서, 이제껏 만들어진 것 가운데 가장 큰 돈기계를 가동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우리나라를 이용해먹는다. 그 나라들은 (자국 기업들에게) 많은 보조금을 주면서 좋은 상품을 생산한다. 만약 우리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약 15분 만에 지구 위에서 사라질 나라들, 그런 부유한 나라들에게서 우리는 보상도 받지 못하고 해마다 1,500억 달러씩 잃어버리며 그 나라들을 지켜주면서도 전 세계에서 웃음거리로 되고 있다. 우리 맹방들은 우리에게서 수 십 억 달러를 뜯어가고 있다.”

 

위의 인용문이 말해주는 것처럼,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30여 년 전부터 친미맹방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극도로 불신하고 있었다. 그의 판별기준에 따르면, 친미맹방들 가운데 미국에게 이용가치가 거의 없는 맹방은 한국이다. 조선의 핵무력완성과 중국의 국력증강과 로씨야의 대미갈등으로 국제정세가 급변된 오늘, 미일동맹을 강화하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눈에 한미동맹은 이용가치가 거의 없고, 막대한 유지비를 소모하여 미국에게 재정손실만을 안겨주는 골치거리로 보인다. 그러니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을 멸시하는 게 당연하다. 

 

 

3. 주둔비 전액부담 못하면 철군하는 수밖에  

 

2019년 2월 25일 미국의 전략국제문제연구소(ISIS)가 펴낸 ‘1990년 이후 주한미국군에 대한 도널드 트럼프의 회의적인 태도’라는 제목의 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열거되었다.

 

(1) 트럼프는 대통령에 취임하기 훨씬 이전인 1990년부터 맹방들을 위한 미국군의 노력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이것은 지난 30여 년 동안 트럼프의 공식발언 114건에 대한 분석에서 나타나는 일관된 내용이다.  

 

(2) 트럼프 대통령은 친미맹방들이 자국 안보를 위해 무임승차를 하고 있다고 믿는다. 

 

(3) 한국, 북대서양조약기구, 일본에 보내는 트럼프 대통령의 일관된 메시지는 친미맹방들이 미국군 주둔비를 더 많이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4) 친미맹방들이 미국이 제공하는 안보리익을 챙기면서도 미국에게 커다란 무역적자를 안겨주며 미국을 이용해 먹는다는 것이 트럼프 대통령의 판단이다.

 

(5)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이 공동의 가치, 공동의 국제관심사, 공동의 도전 및 기회라는 관점에서 미국에게 이익을 주고 있는 증거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주목되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해외주둔 미국군 주둔비 분담금을 친미맹방들에게 전액 부담시키고, 만일 어떤 맹방이 전액부담을 거부하는 경우 그 나라에 주둔하는 미국군을 철수하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분담금문제를 중심에 놓고 동맹문제와 철군문제를 생각한다. 2016년 3월 26일 <뉴욕타임스> 기자 두 사람이 당시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트럼프와 전화통화로 대담한 내용을 간추려 보도하였는데, 트럼프와 취재기자는 분담금문제와 철군문제의 상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취재기자 - “만일 한국과 일본이 미국군 주둔비 분담금을 인상하지 않을 경우, 당신은 그 나라에 주둔하는 미국군을 철수하겠는가?”

 

트럼프 - “그렇다. 철수하겠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렇게 하지는 않겠지만,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수 십 억 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금액을 잃어버릴 수 없다. 나는 그 나라들이 분담금을 매우 많이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 나라들이 분담금을 많이 내지 않으면, 나는 미국군을 철수하겠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금으로부터 3년 전에 꺼내놓았던 위와 같은 강경발언은 결코 지나가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2019년 5월 8일 미국 플로리다주 패너마씨티비치에서 연설하면서 자기가 주한미국군 주둔비 분담금을 어떻게 인상했는지를 밝히는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2019년 5월 8일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플로리다주 패너마씨티비치에 모인 지지자들에게 연설하는 장면이다. 그는 연설 중에 자기가 주한미국군 주둔비 분담금을 어떻게 인상했는지를 밝혔다. 그는 "돈이 아주 많고, 우리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 한국을 지켜주기 위해 미국이 주한미국군 주둔비로 해마다 50억 달러씩 소모하는 것은 믿기 힘든 일이라고 지적하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보다 앞서 2019년 2월 12일 백악관 각료회의에서 자기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주한미국군 주둔비 분담금 5억 달러를 더 받아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면서 앞으로 분담금을 더 인상하겠다고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2019년 7월 24일 트럼프 대통령은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서울에 파견하여 주한미국군 연간주둔비 48억 달러 전액을 한국이 부담해야 한다고 통보했다.     

 

“나는 미국군 지휘관에게 우리가 이 부유한 나라(한국을 지칭-옮긴이)를 지켜주는 데 얼마나 드느냐고 물었더니, 50억 달러가 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렇다면 그들은 얼마를 내느냐고 물었더니, 5억 달러를 낸다고 했다. 돈이 아주 많고, 우리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 그 나라를 지켜주기 위해 우리가 45억 달러를 잃어버리고 있다니, 이게 믿어지느냐? 그래서 나는 그 나라 지도자(문재인 대통령을 지칭-옮긴이)에게 전화를 걸어, 불공평하므로 당신들이 돈을 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가 국회에서 (국방예산이) 통과되었다면서, 5억 달러 이상은 못 내겠다고 했다. 나는 7억5천만 달러를 내라고 했는데, 5억 달러 수준에서 합의를 보았다. 나는 그들(문재인 정부를 지칭-옮긴이)에게 나머지 금액을 요구하는 전화를 걸라고 우리 사람들에게 지시했다.”

 

그보다 앞서 2019년 2월 12일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각료회의에서 자기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화 한 통을 걸어 주한미국군 주둔비 분담금 5억 달러를 받아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면서, “앞으로 몇 해 동안 분담금은 더 오르게 될 것이다. 한국은 지금까지 잘했고, 앞으로도 아주 잘 할 것”이라고 떠들어댔다. 그의 곁에 앉은 각료들도 전적으로 공감하였다. 누구나 직감하는 것처럼, 이 발언은 미국이 한국에게서 앞으로 더 많은 분담금을 뜯어내겠다는 갈취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2019년 7월 24일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서울에 나타난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정경두 국방장관을 각각 따로 만나, 주한미국군 운용비 항목을 열거한 지출명세서를 건네주면서 주한미국군 주둔비 48억 달러 전액을 한국이 부담해야 한다고 통보했다. 

 

그런데 미중경제전쟁, 한일관계파탄, 세계시장경제의 전반적 침체가 공포의 삼각파도처럼 국제무역구도에 몰아치는 가운데 한국의 수출의존경제가 급속히 위축되어 경제적 시련을 겪는 한국은 미국에게 48억 달러를 상납할 수 없는 곤궁한 처지에 놓였다. 2018년에 진행된 분담금책정협상 중에 트럼프 대통령이 연간 12억 달러를 내라고 요구했을 때도 그렇게 많은 돈은 내지 못하겠다고 펄쩍 뛴 문재인 정부에게 이제는 연간 48억 달러를 내라고 하니, 문재인 대통령은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문재인 정부가 48억 달러를 상납하지 못하겠다고 버티면서 좀 깎아달라고 간청하더라도 트럼프 대통령은 한 푼도 깎아줄 수 없다고 잡아떼면서, 만일 48억 달러를 내놓지 않으면 주한미국군을 철수하는 수밖에 없다고 협박할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철군협박을 들이대도, 문재인 정부가 미국에게 해마다 48억 달러씩 상납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문재인 정부가 전액부담요구를 거부하는 것이 트럼프 대통령의 철군결심을 뒷받침해주는 명분으로 된다는 점이다. 아마도 트럼프 대통령은 철군명분을 얻기 위해 한국에게 감당할 수 없는 전액부담을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4. 미국의 새로운 지배전략수행에서 배제되는 한국

 

2018년 4월 24일 중국 베이징에서 주목할 만한 일이 있었다. 그날 베이징에서 회의를 진행한 상하이협력기구(Shanghai Cooperation Organization)가  미국의 패권주의를 비판하고, 미국에게 유엔헌장과 국제법을 준수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미국의 패권주의를 비판하고 미국에게 국제법을 준수하라고 촉구한 국제기구는 없었는데, 상하이협력기구가 사상 처음 그런 성명을 발표하여 미국의 패권주의를 흔들어놓았다.    

 

상하이협력기구는 중국의 주도로 설립된 국제안보협력체다. 중국, 로씨야, 인디아, 파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타지키스탄 등 8개국이 그 기구에 가입하였고, 이란, 몽골, 벨라루시, 아프가니스탄 등 4개국이 그 기구에 참관국으로 이름을 올렸으며, 뛰르끼에, 깜보쟈, 쓰리랑카,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네팔 등 6개국이 그 기구에 대화상대국으로 이름을 올렸다. 포괄인구와 경제규모를 보면, 상하이협력기구는 유엔을 제외하고 전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국제기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상하이협력기구가 미국의 패권주의를 정면에서 비판한 것은 미국의 패권이 결정적으로 약화되었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아시아가 미국의 패권에 순응하던 시대가 저물고, 미국의 패권이 약화된 새로운 국제안보환경이 조성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런 정세변화의 추이는 2019년 8월 19일 오스트레일리아 씨드니대학교 부설 미국학연구쎈터가 펴낸 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지난 수 십 년 동안 지속된 중동지역전쟁에 국력을 소모했고, 분렬적 당파정치와 전략시설들에 대한 저투자로 파산상태에 빠졌으며,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는 위험에 노출되었고, 미국군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은 자꾸 위축되어 이제는 위험수준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뉴욕타임스>는 2019년 8월 13일 기사에서 트럼프의 불개입정책이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를 약화시켰다고 분석했지만, 그것은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 것이다. 트럼프의 불개입정책을 원인으로 하여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가 약화된 것이 아니라, 미국의 국력이 아시아태평양지역을 이전처럼 전반적으로 장악, 지배하지 못할 만큼 약화되었기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불개입정책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국은 자기에게 불리해진 상황에서 벗어나 앞으로도 세계패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새로운 지배전략을 서둘러 추진해야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트럼프 행정부가 들고 나온 인도-태평양전략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인도-태평양전략은 미국 국방부가 2019년 6월 1일에 발표한 국가안보전략문서인 ‘인도-태평양전략 보고서’에 들어있다.  

 

한국에서는 인도-퍼씨픽 스트래티지(Indo-Pacific Strategy)라는 영어명칭을 우리말로 인도-태평양전략이라고 번역하는데, ‘인도(Indo)’는 인도(印度)라는 발음과 똑같아서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인도(Indo)’는 인디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태평양과 연결되어 있는 인디아양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인디아양-태평양전략이라는 번역어를 써야 마땅하지만, 한국에서 인도-태평양전략이라는 번역어가 널리 쓰이고 있으므로 이 글에서도 편의상 그 번역어를 쓴다.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하는 인도-태평양전략에는 다음과 같은 전략적 의미가 들어있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2019년 6월 1일 미국 국방부가 발표한 안보전략문서인 '인도-태평양전략 보고서'의 겉표지다. "준비태세, 동반자관계, 그리고 상호연계된 지역의 진전"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하는 인도-태평양전략은 미국의 지배체제를 태평양에서 인디아양으로 확장시키고, 중국, 로씨야, 조선과 대립하며, 전략수행에서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를 중시하는 반면, 한국은 배제하는 전략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국가안보문제에 직결된 조미핵협상을 진전시킬수록 한미동맹의 이용가치는 휘발되기 때문에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수행에서 한국은 배제될 수밖에 없다. 위의 보고서에는 한국이 배제된다고 기록되지 않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외부에 공개한 문서에서 한국을 배제한다고 밝히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그런 중대하고, 민감한 안보전략문제는 비밀문서에 기록하는 법이다.     

 

(1) 인도-태평양전략이 포괄하는 지배범위는 미국 서부 해안에서 인디아 서부 해안에 이르는 광대한 해역이다. 인도-태평양전략은 미국의 지배체제를 태평양에서 인디아양으로 확장시킨다.  

 

(2) 미국이 인도-태평양전략으로 상대하는 적대국은 중국, 로씨야, 조선이다. 인도-태평양전략으로 상대하는 적대국에 조선이 포함된 것은, 그 전략수행이 한반도 정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말해준다. 중국, 로씨야, 조선은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에 맞서기 위해 전략적 협동을 강화하기 시작하였고, 그에 맞서는 미국, 일본, 오스트레일리아는 인도-태평양전략의 중심축으로 결합되기 시작하였다.   

(3) 미국이 인도-태평양전략을 수행하기 위해 지배거점을 구축한 친미맹방은 일본,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태국이다. 미국은 이 다섯 나라에 군사기지를 두고 있지만, 동맹관계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미국이 인도-태평양전략을 수행하는 데서 중시하는 양대 친미맹방은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다. 

 

(4) 한미동맹을 조롱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언행은 인도-태평양전략을 수행하는 데서 한국의 이용가치가 휘발되었음을 말해준다. 인도-태평양전략을 수행하는 데서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중시하는 것은 미일동맹이다. 그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미일동맹에 부속된 한미동맹은 연간 50억 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유지비만 소모할 뿐 미국에게 주는 이용가치는 거의 없다. 

 

만일 문재인 정부가 연간 50억 달러에 이르는 주한미국군 주둔비 전액을 부담하면, 트럼프 대통령은 주한미국군을 철수하지 않겠지만, 문재인 정부에게는 그 많은 돈을 내놓을 능력도 의사도 없다. 이런 사정을 간파한 트럼프 대통령은 적절한 시기에, 적당한 명분을 내걸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하고 한미동맹을 포기하는 대신, 미일동맹을 비상히 강화하고, 조선과 핵협상을 벌여 조미관계를 개선함으로써 미국 본토에 대한 조선의 핵위협을 감소시키는 전략목표를 설정하였다. 한미동맹을 조롱하고, 미일동맹을 중시하며, 조선과의 핵협상에 매달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일관된 언행은 바로 그런 전략목표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 인용된 <뉴욕포스트> 2019년 8월 9일 보도기사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자기에게 대선자금을 희사한 억만장자 지지자들 앞에서 한미동맹을 조롱하는 발언을 늘어놓고 나서, 자신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분관계에 대해 언급한 내용도 들어있다.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이번 주에 그(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지칭-옮긴이)로부터 멋진 친서를 받았다. 우리는 친구다. 사람들은 그가 나를 만날 때 미소를 짓는다고 말한다. 만일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북조선과 피터지는 큰 전쟁을 벌였을 것이다.”

 

그날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동맹을 조롱하면서 자신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분관계를 강조하였다. 남과 북을 대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태도는 너무 대조적이다. 이런 대조적인 현상이 말해주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국가안보문제에 직결된 조미핵협상을 진전시킬수록, 그의 표현을 빌리면, 자신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분관계가 지속되는 한, 한미동맹의 이용가치는 휘발되기 때문에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수행에서 한국이 배제된다는 사실이다. 

 

미국 국방부는 위에서 인용된 안보전략문서 ‘인도-태평양전략 보고서’에서 미국이 자기의 안보전략을 수행하는 데서 이용하게 될 친미맹방들을 일본,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태국 순으로 열거하였다. 이것만 보면, 미국이 인도-태평양전략수행에서 한국을 두 번째로 중시하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외부에 공개한 문서에 한국을 배제한다고 밝히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그런 중대하고, 민감한 안보전략문제는 비밀문서에 수록되는 법이다. 미국이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국가안보전략문제는 정세흐름을 분석하면서 추리해야 한다.  

 

 

5. 아베의 군국주의무력증강 지원해주는 트럼프

 

그날 정치만담 같은 즉흥연설 중에 트럼프 대통령은 자기가 중시하는 미일동맹에 대한 언급도 빼놓지 않았다. <뉴욕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자기가 아베 신조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흥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베 신조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아베 신조의 아버지 아베 신따로(1924~1991)가 67세를 일기로 사망했을 때, <뉴욕타임스> 1991년 5월 16일부에는 그의 사망을 알리는 부고기사가 실렸다. 기사내용에 따르면, 아베 신따로는 1944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제국 해군항공대에 입대했고, 1945년 봄에 가마가제특공대에 들어갔는데, 그가 특수훈련을 받던 중에 일제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났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특수훈련은 착륙장치가 없고 이륙장치만 있는 자폭항공기들이 폭탄을 싣고 날아가 공격대상 40km 앞에서 분산비행을 하다가 사방에서 수직으로 돌진하여 미국 해군 군함에 충돌하는 자폭공격훈련을 뜻한다. 1944년 10월에 조직된 가미가제특공대는 태평양전쟁 말기 10개월 동안 자폭공격을 약 5,000번 감행했지만, 자폭공격으로 격침시킨 미국 군함은 47척밖에 되지 않았다. 일제가 최후발악으로 감행한 가미가제 자폭공격은 실패였다. 

 

트럼프는 아베의 아버지가 태평양전쟁시기에 가마가제특공대원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흥미가 동했다. 그래서 트럼프는 가미가제특공대원들이 술에 취하거나 마약을 투입하고 자폭공격을 감행한 게 아니냐고 아베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아베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자기 나라를 사랑하였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아베의 답변은 사실왜곡이다. 미국 학사원 정회원이었던 문화인류학자 오오누끼 에미꼬가 쓴 ‘죽으라면 죽으리라’는 제목의 책에 따르면, 가미가제특공대원들은 일본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자폭용사들이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 몇몇 전쟁광신자들은 가미가제특공대에 자원입대했지만, 자원입대자가 얼마 되지 않자, 일제는 항공대원들과 항공학교 졸업생들을 강제로 입대시켰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2019년 6월 28일 일본 오사까에서 열린 주요20개국 정상회의 중에 트럼프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촬영한 기념사진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아베 총리의 어깨 위에 손을 얹어놓은 모습이 눈길을 끈다. 이 다정한 모습은 우연히 연출된 장면이 아니라, 그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친숙한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트럼프와 아베 사이에 형성된 친숙한 관계는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수행에서 일본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트럼프 대통령이 아베 정부의 군국주의무력증강을 용인하는 수준을 넘어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해주면서, 다른 한편으로 한미동맹을 조롱하는 것을 보면, 인도-태평양전략이 어느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가미가제특공대가 ‘미영귀축’을 부르짖으며 미국을 공격하였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아베의 왜곡답변에 귀가 솔깃해졌던 트럼프 대통령은 지지자들 앞에서 “애국심을 가진 가미가제 조종사들이 비행기에 연료를 절반밖에 넣지 않고 군함을 향해 날아가는 장면을 상상해보라!”고 마구 떠들어댔다.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만담에서 주목되는 것은, 아베가 자기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트럼프에게 들려줄 정도로 두 사람이 친숙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다. 트럼프와 아베 사이에 형성된 친숙한 관계는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수행에서 일본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트럼프 대통령이 아베 정부의 군국주의무력증강을 용인하는 수준을 넘어 그것을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해주면서, 다른 한편에서 한미동맹을 조롱하는 것을 보면, 인도-태평양전략이 어느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사정을 눈치 채지 못한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6월 30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판문점에서 만나기 위해 서울에 도착한 트럼프 대통령을 청와대로 맞아들여 회담하면서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에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인도-태평양전략이 추진될수록 한미동맹의 이용가치가 휘발되는 줄을 전혀 알지 못하는 문재인 대통령은 그 동맹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자신의 염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인도-태평양전략수행에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인도-태평양전략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전략수행에 협조하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어리숙한 약속을 듣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서 그는 한국의 재정지출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연간 48억 달러짜리 전액부담청구서를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냈다. 이것은 인도-태평양전략을 수행하는 데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데, 정세변화에 둔감한 문재인 대통령을 압박하여 왕창 뜯어내겠다는 속셈이다. 

 

만일 문재인 대통령이 48억 달러를 내지 못하겠다고 버티면, 트럼프 대통령은 그에게 전화를 걸어 주한미국군을 철수하겠다고 몇 차례 협박하다가, 적절한 시기에, 적당한 명분을 내걸고 철군결정을 내릴 것이다. 한미동맹을 믿는 최면에 걸린 친미주의자들에게 각성의 찬물을 끼얹고, 한반도 정세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미증유의 대격변은 어느 날 갑자기 닥쳐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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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무릎 꿇고 '사죄'하던 이영훈 교수를 기억한다

[반일 종족주의 ①] '우리 안의 위안부'론의 허점

19.08.26 07:23l최종 업데이트 19.08.26 07:23l

 

<반일 종족주의>가 논란입니다. 몇 회에 걸쳐 이 책의 문제점을 짚어봅니다. [편집자말]

뉴라이트 학자인 이영훈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장은 15년 전 이맘때도 한국 사회를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다. 2004년 9월 2일 MBC <100분 토론> '과거사 진상규명 논란' 편에 출연한 그는 위안부 피해자와 성매매 여성을 동일 선상에 놓는 발언을 해서 국민적 공분을 자초했다.

여론이 악화되자 그는 9월 5일 해명서를 발표해, 진의가 잘못 전달됐다며 진화에 나섰다. 해명서에서 그는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하여 여성을 강제 동원하고 감금하여 병사들에게 성적 위안을 강제한 행위는 국제사회가 협약으로 금하고 있는 성노예 범죄"라며 자신도 위안부 피해자들과 같은 편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다음날인 6일 오전, 그는 경기도 광주시에 소재한 나눔의집을 방문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직접 사죄했다. '사과'가 아니라 '사죄'라고 해야 할 수준이었다. 할머니들에게 큰절을 올리고 50분가량 두 손을 모은 자세로 있었기 때문이다.  
 

 'MBC 100분 토론(지난 2일 방송)'에서 일제시대 정신대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이영훈 교수가 6일 오전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이 생활하는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을 사죄방문했다.
▲  "MBC 100분 토론"에서 일제시대 위안부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이영훈 교수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생활하는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을 사죄 방문했다 2004.9.6.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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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100분 토론(지난 2일 방송)'에서 일제시대 정신대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이영훈 교수가 6일 오전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이 생활하는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을 사죄방문했다.
▲  "MBC 100분 토론"에서 일제시대 위안부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이영훈 교수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생활하는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을 사죄 방문했다 200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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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100분 토론(지난 2일 방송)'에서 일제시대 정신대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이영훈 교수가 6일 오전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이 생활하는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을 사죄방문했다. 이영훈 교수가 '할머니들에게 예를 갖춰야 한다'며 큰절을 하고 있다.
▲  "MBC 100분 토론"에서 일제시대 정신대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이영훈 교수가 6일 오전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이 생활하는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을 사죄방문했다. 이영훈 교수가 "할머니들에게 예를 갖춰야 한다"며 큰절을 하고 있다. 2004.9.6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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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할머니들은 사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군자 할머니(2017년 별세)는 "뚫린 입이라고 막말을 하느냐?"고 소리쳤고, 이옥선 할머니는 "일본인 아니냐?"며 "당장 호적등본 떼와라!"라고 호통쳤다.

그런 중에도 이영훈 이사장은 '위안부 강제동원은 범죄'라며 "할머니들이 일제강점기 성노예자라는 역사인식에 동의하며, 철저한 역사청산이 이뤄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로 거듭거듭 용서를 구했다. 이렇게 일종의 '이영훈 담화'를 발표하면서 사태 진화를 시도했다.

15년 전에는 "성노예 범죄"라며 사과, 지금은 다시 "성매매 여성"

하지만 그의 인식이나 주장은 달라지지 않았다. 세월이 15년이나 흐른 금년 7월 다섯 명의 뉴라이트 학자들과 함께 펴낸 <반일 종족주의>를 읽어보면, <100분 토론>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 없음을 알 수 있다.

<반일 종족주의> 제3부 '종족주의의 아성, 위안부' 편의 첫 번째 글은 '우리 안의 위안부'다. 글의 요지는 '일본군 위안부는 해방 후의 한국군 위안부, 미군 위안부와 같을 뿐 아니라 그 전부터 존재했던 일반 성매매 여성과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와 똑같은 제도가 '우리 안'에도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일본군 위안부보다 우리 안의 위안부를 먼저 돌아보자는 게 그가 던지는 메시지다.

그는 한국군 위안부와 관련해 "'우리 안의 위안부' 가운데 일본군 위안부를 그대로 복제해놓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라면서 "6·25 전쟁기의 한국군 위안부가 바로 그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런 뒤 이렇게 말한다.
 

"1951년의 어느 시기로 추측됩니다. 국군은 장병에게 성적 위안을 제공하는 특수위안대를 설립하였습니다. 1956년 육군본부가 편찬한 <6·25사변 후방 전사(戰史)>에 의하면, 특수위안대는 장병들의 사기를 앙양하고 성적 욕구를 장기간 해소하지 못함에 따른 부작용을 예방할 목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그는 특수위안대에 속한 위안부 여성을 700명 정도로 추산했다. 이들이 하루 평균 6.3명을 상대하는 "성교 노동"을 강요당했다고 한 뒤 "그것은 하나의 전쟁 문화였습니다"라고 주장한다. 한국전쟁 때도 '전쟁 문화' 차원에서 위안부가 있었으니 '일본군 위안부도 그런 차원에서 바라보자'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던 모양이다.

한국군 위안부와 더불어 그가 비중 있게 다루는 것은 일반 성매매 여성이다. 그는 이들을 '민간 위안부'라 부른다. 이들을 일본군 위안부와 분리해 생각하는 한국인들의 태도에 그는 의문을 제기한다. "역사를 세밀히 살피면 군 위안부는 이전부터 죽 있어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15세기 이래 조선시대부터 있어온 것입니다. 또 1945년 일제가 패망한 뒤에도 위안부는 우리 사회에 죽 있어 왔습니다."

 
그는 성매매 여성이 한때 위안부로 불린 사실을 부각한다. 이들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다를 바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말한다.
 

"한국 정부가 <보건사회통계연보>에서 성매매를 전업으로 하는 여인을 위안부로 규정하는 것은 1966년까지입니다. 다시 말해 1945년 일본의 패망과 더불어 사라진 것이 아니라 1960년대까지 존속했으며 오히려 번성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는 일반 성매매 여성들을 놓고 "그들은 분명히 일본군 위안부의 계보를 잇는 존재였습니다"라고 규정한다. 불특정 다수의 남성을 상대한다는 점과 더불어 '위안부'라는 똑같은 명칭을 사용한 적이 있음을 근거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성매매 여성을 동일시한 것이다. 어떤 조건이 충족돼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볼 수 있는지를 따지지 않고, 위안부라는 호칭의 동일성만을 근거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강제로 동원된 참혹한 성노예란 점 부정 
 

 지난 16일, 유튜브 채널 이승만TV에 출연한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  지난 16일, 유튜브 채널 이승만TV에 출연한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 이승만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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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조건이 충족돼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볼 수 있는지는, 이 문제에 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인 고노 담화(1993.8.4)에서 드러난다. 고노 담화에서는 "위안소는 당시의 군 당국의 요청에 따라 마련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옛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했다"고 말했다. 여기서 나타나듯이 한·일 간에 거론되는 위안부는 '일본 국가권력에 의해' 동원된 피해자들을 지칭한다.

또 고노 담화에서는 "위안부의 모집에 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맡았으나, 그런 경우에도 감언·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모집된 사례가 많았"다고 했다. 이 말에서 나타나듯이 한·일 간에 거론되는 위안부 피해자는 '강제동원'된 여성들을 지칭한다.

고노 담화는 또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황 하의 참혹한 것이었다"고 인정한다. 위안부는 참혹한 성노예였다는 것이다.

 

종합하면, 한·일 간에 거론되는 위안부는 '일본 공권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동원돼 참혹한 성노예 생활을 한 여성'들을 지칭한다. 설령 위안부로 불린다 해도, 이 요건에 부합하지 않으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민간 성매매 여성들도 자발적으로 그 일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들 대부분이 그 일을 할 수밖에 없는 데는 사회적 영향도 매우 크다. 취약 계층을 그쪽으로 내모는 시스템이 우리 사회 내에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들과 관련된 우리 사회의 부조리도 당연히 규명되고 청산되어야 한다.

하지만 민간 성매매 여성의 문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본질이 다르다. 본질이 다르므로 해결 방법도 달라야 한다. 단순히 명칭이 같았다는 이유만으로 양자를 동일시하게 되면 똑같은 해결 방법을 쓰게 되고, 그렇게 되면 두 문제의 해결에 실패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민간 성매매 여성 문제를 올바로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이 문제를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떼어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영훈 이사장은 명칭이 같다는 이유로 두 문제를 똑같이 놓고 바라본다. 그러고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응을 비판한다. 민간 성매매 여성도 많은데 일본군 위안부 문제만 따지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는 미군 위안부 문제도 언급한다. "해방 후 '우리 안의 위안부'를 가장 길게 대표하는 것이 있는데, 다름 아니라 미국군 위안부입니다"라면서 "민간에서 통용된 호칭은 양색시·양공주·양갈보 등입니다만, 공식적 호칭은 미군 위안부였습니다"라고 말한다.

위의 두 문장은 '미국군 위안부'라는 소제목 하에 처음 나온다. 첫 문장에서 호칭 문제를 비중 있게 다룬 것은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가 똑같이 불렸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호칭 문제에 집착하는 그의 내면을 드러내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부터 민간 위안부가 있었고 1900년대에는 일본군 위안부뿐 아니라 한국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도 있었거늘, 일본군 위안부 문제만 꼭 집어내 문제 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이영훈 이사장의 주장이다.

그가 이렇게 자신 있게 결론을 내리는 최대 근거는 민간 위안부, 일본군 위안부, 한국군 위안부, 미군 위안부가 한때 똑같은 호칭으로 불렸다는 사실이다. 각각의 특성이 어떤가는 비교하지 않고, 단순히 호칭만 놓고 그런 결론을 성급하게 내린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미군 위안부에만 유독 '선처 호소'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면 안 된다. 각각의 위안부 문제가 다 똑같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는 특정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특별 대우'를 호소한다. 비판하려면 다 똑같이 비판해야 한다고 해놓고, 특정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선처'를 호소하는 것이다.

그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비판을 외면한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한국인들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위안부 강제동원을 자행한 일본에 대해서는 비판을 삼간다. 이를 두고 '그는 왜 유독 일본에 대해서만 침묵할까?'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그가 일본에만 그런 '선처'를 베푸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그런 태도는 미군 기지촌 문제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그는 이 문제를 명분으로 박정희·전두환 정권을 비판하거나 한미동맹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 경계심을 표시한다.
 
"사회운동가들은 미군 위안부 문제가 국가의 폭력이었다고 비판합니다. 그들은 미군 위안부 문제가 박정희와 전두환 정부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며 국가배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지적하고 싶습니다. 동시대 전국 도처에서 발달한 사창가의 여인들은 훨씬 더 비참했다고 말입니다."

미군 위안부보다 열악하게 생활한 성매매 여성들이 있는데 미군 위안부 문제를 거론할 필요가 있느냐는 게 그의 말이다. 그는 미군 기지촌 문제를 비판하는 한국인들을 겨냥해 "나아가 그들은 위안부 문제의 근원에 한미동맹이 있다고 주장합니다"라고 한 뒤 "그러한 주장에 저는 동조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 사회가 성매매를 금지하면서도 미군 위안부를 용인하는 것이 위선적인 태도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그렇지만 저는 그 수준에 관한 한, 우리의 인생살이 자체가 위선적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 한미동맹에서 파생되는 미군 기지촌 문제를 비판해야 할 대목에 가서 '우리 인생 자체가 다 위선'이라는 엉뚱한 말로 얼버무린 것이다.

<반일 종족주의>는 정치적 사고의 산물 
 
 이영훈 전 교수 등이 펴낸 <반일 종족주의> 325페이지. 이 전 교수는 "위안부 생활은 '위안부 생활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선택과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  이영훈 전 교수 등이 펴낸 <반일 종족주의> 325페이지. 이 전 교수는 "위안부 생활은 "위안부 생활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선택과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 이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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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드러나는 것은, 그가 일본군 위안부뿐 아니라 미군 위안부 문제 역시 불거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그의 인식이 한미일 삼각동맹과 무관치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미일 삼각동맹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그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과 미국을 변호하고 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는 이영훈 이사장이 학술적 관점이 아니라 정치적 관점으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고 있음을 뜻한다. <반일 종족주의>에 나열된 그의 주장들이 치열한 학문적 탐구의 결과라기 보다는, 한미일 삼각동맹에 대한 정치적 사고의 산물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15년 전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호된 꾸지람을 받을 당시 그는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하여 여성을 강제 동원하고 감금하여 병사들에게 성적 위안을 강제한 행위는 국제사회가 협약으로 금하고 있는 성노예 범죄"라고 인정하는 '이영훈 담화'를 발표했다. 그래놓고도 그는 그날의 사죄에 아랑곳하지 않고, 위안부에 관한 망언들을 <반일 종족주의> 내에 가득 담았다. 나눔의 집에서 큰절을 올리고 50분간 두 손 모은 채 할머니들의 말씀을 경청했을 때, 그는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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