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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에게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물려주자!”

학교비정규직 노동자 100인 청와대 앞에서 삭발
 
백남주 객원기자 
기사입력: 2019/06/18 [07:52]  최종편집: ⓒ 자주시보
 
 

▲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 100인이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집단 삭발식을 진행했다. (사진 : 학비노조)     © 편집국

 

학교비정규직노동자들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학교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100인 집단 삭발식을 가졌다.

 

전국학교비정규직노조(이하 학비노조)는 17일 오전 11시 청와대 사랑채 옆 도로에서 집단삭발식 및 대통령 공약이행 촉구 기자회견을 공정임금제’ 시행과 교육공무직 법제화’ 등을 요구했다.

 

▲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는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진 : 학비노조)     © 편집국

 

학비노조는 오늘 학교비정규직 여성노동자 100인의 청와대 집단 삭발은 3년차 문재인정부 노동정책을 평가하는 상징적인 자리가 될 것이라며 왜 보수야당과 재벌들적폐세력의 공격에 초심을 잃고 운전대를 돌리는가?”라고 현 정부를 비판했다.

 

학비노조는 공무원 최하위 직급의 60~70% 수준인 학교비정규직의 임금을 80%수준으로 올려 달라고 요구하며 정규직-비정규직의 임금격차 80%의 공정임금제는 2017년 더불어 민주당 대선공약집 87페이지에 있는 내용이라고 지적했다.

 

학비노조는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50%가까이를 차지하는 학교비정규직은 작년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에 따른 가장 큰 규모의 피해 직군이라며 단체교섭으로 어렵게 만든 복리후생비가 산입범위에 포함되면서 일부 직원은 작년보다 임금이 줄어들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 집단 삭발식을 진행하고 있는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진 : 학비노조)     © 편집국

 

또한 학비노조는 전체 교직원의 41%를 차지하는 학교비정규직을 당당한 교육의 주체로 인정해 달라며 교육공무직에 대한 법제화를 요구했다학비노조는 교육공무직법은 2016년 현 유은혜 교육부 장관이 야당국회의원으로 대표발의하고 100명 가까운 국회의원이 동참했던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나아가 학비노조는 전국 교육청이 두 달 넘게 집단 교섭을 파행시켰다며최근 시작된 본 교섭에도 불성실하게 임한다면 7월 초 총파업에 나서겠다고 예고했다학교비정규직연대회의는 교육부 17개 시도교육청과 집단교섭을 진행하고 있으나, 2달째 교섭절차조차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학비노조는 18일 오전 11시 파업찬반투표 결과발표 및 총파업 선포 전국 동시다발 기자회견을 열고, 7월 2일 최종 총파업 돌입 기자회견을 개최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 삭발로 7월 총파업 결의를 다지는 학교비정규직 노동자. (사진 : 학비노조)     © 편집국

 

기자회견을 마친 뒤 삭발식이 이어졌다. 100명의 노동자들이 삭발을 거행하자 곳곳에서 울음들이 터져 나왔다.

 

학비노조의 기자회견 후 서비스연맹 차원으로 ‘7월 총파업 승리결의대회를 개최하고 광화문 정부종합청사까지 행진을 벌였다. 

 

▲ 청와대 측에 항의서한을 전달하려는 참가자들. (사진 : 학비노조)     ©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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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인 집단삭발식에 임하는 학교비정규직노동자

학교비정규직 정규직화 대통령 약속 이행 촉구” 기자회견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100인의 삭발은 유래가 없는 투쟁이다.

 

오늘 학교비정규직 여성노동자 100인의 청와대 집단 삭발은 3년차 문재인정부 노동정책을 평가하는 상징적인 자리가 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를 향한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바램은 한결같다.

더도말고 덜도말고 대통령의 약속을 지켜주라는 것이다.

 

소득주도성장으로 양극화를 해소하려면 확실히 해달라는 것이다왜 보수야당과 재벌들적폐세력의 공격에 초심을 잃고 운전대를 돌리는가촛불로 이번 정부를 탄생시킨 노동자들은 이렇게 삭발과 눈물로 여전히 호소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학교비정규직노동자들은 올해 2019년이 대통령의 학교비정규직 정규직화’ 약속 이행을 받아낼 마지막 해라고 생각한다마지막이기에 더 절절한 마음으로 투쟁한다.

 

먼저공무원 최하위 직급의 60~70% 수준인 학교비정규직의 임금을 80%수준으로 올려 달라정규직-비정규직의 임금격차 80%의 공정임금제는 2017년 더불어 민주당 대선공약집 87페이지에 있는 내용이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50%가까이를 차지하는 학교비정규직은 작년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에 따른 가장 큰 규모의 피해 직군이다단체교섭으로 어렵게 만든 복리후생비가 산입범위에 포함되면서 일부 직원은 작년보다 임금이 줄어들게 되었다.

 

2019년 집단교섭의 사용자 측 당사자인 교육부와 학교비정규직의 실질 사용자인 정부가 책임있는 입장을 보여 달라!

 

둘째국가적 차원에서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는 학교비정규직 즉, ‘교육공무직에 대한 법제화를 요구한다.

 

전국적으로 통일된 정원 배치기준과 인건비 예산 기준이 마련하고전체 교직원의 41%를 차지하는 학교비정규직을 당당한 교육의 주체로 인정해 달라교육공무직법은 2016년 현 유은혜 교육부 장관이 야당국회의원으로 대표발의하고 100명 가까운 국회의원이 동참했던 사안이다.

 

현재 학교비정규직의 법적 사용자인 시·도 교육감들에게 강력히 경고한다. 2달째 계속된 집단교섭 파행의 책임은 권한없는 교섭위원을 내세우고 뒤에 않은 시·도 교육감들이다.

 

1년 전 선거 시기 진보교육감임을 내세워 맺은 학교비정규직 차별해소에 대한 정책 협약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중앙노동위원회 조정을 통해 어렵게 시작한 본교섭조차 파행이라면 우리는 7월 무기한 총파업으로 사용자의 책임을 물을 것이다.

 

이번 삭발에는 정년퇴직을 앞둔 조합원이 다수 동참한다취업준비생인 딸이 직접 엄마의 머리를 깍아준다특성화고 졸업생과 취업을 앞둔 대학생이 머리를 깍아준다.

 

오늘 머리에 흰서리 내린 노동자들이 삭발까지 하는 것은 단순하다.

 

본인은 평생을 비정규직으로 살아왔지만 아이들에게만은 비정규직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결심 때문이다.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격차정규직/비정규직이 사회적 신분이 되어버린 이 더러운 세상을 내버려 둘 수 없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정책의 완전한 이행을 요구하는 민주노총의 7월 총파업에 5만 5천 조합원의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은 가장 많은 파업 대오로 앞장설 것이다.

 

학교비정규직의 눈물어린 집단삭발에 대통령이 약속 이행으로 화답해주길 촉구한다.

 

■ 7월 강력한 총파업으로 집단교섭 승리하자!

■ 2019대통령은 학교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약속을 이행하라

■ 우리 아이들에게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물려주자!

 

2019년 6월 17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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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층 옥상에 섰다, 행렬의 바닥도 끝도 안 보였다

[홍콩 현지취재] 이희훈 기자, 200만 운집한 홍콩 '검은행진' 24시간 추적기

19.06.17 23:07l최종 업데이트 19.06.18 07:23l

 

 범죄인 인도법 폐지를 촉구하는 반중국 집회 ‘검은 행진’이 16일 오후 홍콩 각지에서 출발해 중앙정부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범죄인 인도법 폐지를 촉구하는 반중국 집회 ‘검은 행진’이 16일 오후 홍콩 각지에서 출발해 중앙정부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하며 애드미럴티역 인근을 지나고 있다. 이날 주최측 추한 참가자는 200만명이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하며 애드미럴티역 인근을 지나고 있다. 이날 주최측 추산 참가자수는 200만명이다.ⓒ 이희훈
   
홍콩의 중심이 검은 물결로 출렁였다. 검정색 티셔츠를 입고 흰색 리본을 단 홍콩 시민들이 길거리로 몰려나와 대규모 행렬을 이뤘다. 

홍콩정부가 추진했던 범죄인 인도법, 속칭 송환법이 추진되자 시민들과 야당은 거센 항의의 행동을 시작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리로 나와 저항하기 시작했고 정부는 무력진압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굴하지 않고 더 큰 집회와 파업을 예고했다.  

그 과정에서 고공시위를 하던 30대 남성이 추락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고 '검은 행진'의 규모를 키우는 도화선이 되었다. 

격화되는 사회분위기에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은 집회가 열리기 전날인 15일 송환법 추진을 잠정 연기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16일 주최 측 추산 200만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현지에 파견된 <오마이뉴스> 이희훈 기자가 홍콩 시민들이 벌였던 저항의 24시간을 시간대별로 기록했다.


[16일, 11:00] 노란 우비 청년의 죽음, 애도의 물결
  
 범죄인 인도법 폐지를 촉구하는 반중국 집회 ‘검은 행진’이 열릴 예정인 16일 오전 홍콩 애드미럴티역 인근 공사현장에서 고공시위를 벌이다 추락사한 량씨를 추모하는 한 시민이 흰색 리본을 달고 있다.
16일 오전 홍콩 애드미럴티역 인근 공사현장에서 고공시위를 벌이다 추락사한 량씨를 추모하는 한 시민이 흰색 리본을 달고 있다. ⓒ 이희훈
 범죄인 인도법 폐지를 촉구하는 반중국 집회 ‘검은 행진’이 열릴 예정인 16일 오전 홍콩 애드미럴티역 인근 공사현장에서 고공시위를 벌이다 추락사한 량씨를 추모하던 시민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16일 오전 홍콩 애드미럴티역 인근 공사현장에서 고공시위를 벌이다 추락사한 량씨를 추모하던 시민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이희훈
 
지난 밤, 송환법을 반대했던 30대 남성 량아무개씨가 홍콩정부청사와 가까운 애드미럴티역 부근 대형 쇼핑몰 외벽공사현장에서 추락했다. 소방당국과 경찰이 출동해 에어매트가 깔렸지만 사고를 막지 못했고 이번 시위의 첫 번째 사망자가 되었다. 청년의 죽음에 홍콩시민들은 흰 꽃과, 종이백합, 종이학 등으로 추모를 했고 그 규모는 점점 늘었다.

[16일, 13:00] 전장에 들어설 준비

홍콩 시내의 중심 코즈웨이 베이 골목 구석구석, 상점 곳곳마다 검정 옷을 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몰려다녔다. '검은 행진'에 참가하기 위한 홍콩시민들이 빅토리아 파크에 도착하기에 앞서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했고 주변에는 마이크와 확성기를 들고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의 사퇴를 외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또한 두꺼운 피켓 뭉치를 든 사람들은 행진 참가자들에게 재빠른 손놀림으로 메시지가 담긴 피켓을 나눠줬다. 

[16일, 14:30] 검은행진의 시작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결집 장소인 빅토리아 파크로 사람들이 구름 같이 몰려들었다. 공원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히 운집한 군중은 홍콩 정부가 추진했던 '범죄인 인도법'을 향한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무대에 설치된 스피커로 사회자가 목소리를 높였고 군중들의 함성이 모이자 진동이 느껴지는 듯했다. 

빈틈이 보이지 않는 행렬은 움직이는 듯 움직이지 않는 듯 서서히 앞을 향해 전진 했다. 

[16일, 17:00] 다시 찾아간 코즈웨이베이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 참가자들이 홍콩 중앙정부청사를 향해 행진하는 모습을 목씨가 아파트 옥상에서 구경하고 있다.
16일 오후 ‘검은 행진’ 참가자들이 홍콩 중앙정부청사를 향해 행진하는 모습을 한 주민이 아파트 옥상에서 구경하고 있다.ⓒ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오후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선두를 따라잡기 위해 나아가려 했지만 모든 골목은 검정 옷을 입은 사람으로 가득 차 쉽지않았다. 멀리 15층 높이의 아파트가 보였다. 걸어서 10분이 걸리지 않을 거리를 '익스큐즈미' 수 천번을 외치며 겨우 도달했고 마침내 옥상에 올랐다.

옥상 난간에 서니  두 가지가 보이지 않았다. 바닥이 보이지 않았고 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 틈을 뚫고 나온 게 믿어지지 않았다. 홍콩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한 눈에 들어왔다. 순간 몇 년전 광화문의 함성이 떠올랐다.

[16일, 18:00] 온종일 걷고 또 걷고

더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뛰고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했다. 발이 너무나 아프고 지쳤다.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들른 월드트레이드센터에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잠시의 휴식을 접고 조금이라도 빨리 이동하기 위해 지하철로 향했다. 하지만 지하철에도 사람들이 계속 유입되는게 보였다. 

[16일, 20:00] 행렬 속 혼자 멈춘 노란 우비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오후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검은행진의 사람들은 조금씩 조금씩 중앙정부청사로 움직이고 있었다. 해가 지고 하늘은 검푸른 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추락사한 량씨의 추모 장소에 추모객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수 많은 인파 때문에 길을 건널 수 없어 맞은편에서 지켜보는 순간 한자로 '반송중(反送中.중국송환반대)'이라고 적힌 노란 우비가 보였다. 노란 우비는 량씨가 숨질 때 입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이 사진을 찍고 고개를 숙이고 손을 모았다. 목적지를 눈 앞에 두고 행렬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16일 22:00] 우산혁명의 성지, 다시 모인 평화 행진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17일 오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이 중앙정부청사 앞에서 검은 복장을 하고 피켓을 들고 서 있다.
17일 오전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이 중앙정부청사 앞에서 검은 복장을 하고 피켓을 들고 서 있다.ⓒ 이희훈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범죄인 인도법 폐지를 촉구하는 반중국 집회 ‘검은 행진’이 16일 오후 홍콩 각지에서 출발해 중앙정부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검은 행진’이 16일 오후 홍콩 각지에서 출발해 중앙정부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 이희훈
 
5년전 홍콩 우산혁명이 일어난 중앙정부청사에 첫 시위가 열린 지난 12일 경찰의 고무탄, 최루탄 등으로 폭력진압이 일어났다. 이날 행진에는 경찰의 저지나 무력진압이 없었지만 사람들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코스의 마지막인 중앙정부청사의 고가 도로 위에 사람들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지막 행렬을 기다리며 잠을 청하기도 했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16일 21: 30] 환호성 속 울리는 하나의 외침
  
 범죄인 인도법 폐지를 촉구하는 반중국 집회 ‘검은 행진’이 끝난 16일 오후 민주당 소속 로이 궝천유 의워이 중앙정부로 모인 시위 참가자들을 향해 발언을 하고 있다. 로이 의원은 폭력 진압에 대한 경찰의 진정성 있는 사과, 캐리 람 행정장관의 사퇴 등을 촉구했다.
‘검은 행진’이 끝난 16일 오후 민주당 소속 로이 궝천유 의원이 중앙정부에 모인 시위 참가자들을 향해 발언을 하고 있다. 로이 의원은 폭력 진압에 대한 경찰의 진정성 있는 사과, 캐리 람 행정장관의 사퇴 등을 촉구했다.ⓒ 이희훈
 범죄인 인도법 폐지를 촉구하는 반중국 집회 ‘검은 행진’이 끝난 16일 오후 민주당 소속 로이 궝천유 의워이 중앙정부로 모인 시위 참가자들을 향해 발언을 하고 있다. 로이 의원은 폭력 진압에 대한 경찰의 진정성 있는 사과, 캐리 람 행정장관의 사퇴 등을 촉구했다.
‘검은 행진’이 끝난 16일 오후 민주당 소속 로이 궝천유 의원이 중앙정부에 모인 시위 참가자들을 향해 발언을 하고 있다. 로이 의원은 폭력 진압에 대한 경찰의 진정성 있는 사과, 캐리 람 행정장관의 사퇴 등을 촉구했다.ⓒ 이희훈
 
'로이, 로이, 로이, 로이" 군중들이 반복해서 외쳤다. 이내 확성기를 통해 목소리가 퍼져 나왔고 사람들은 환호성과 박수를 보냈다. 홍콩 민주당 소속의 로이 궝천유 의원이었다. 군중 사이를 뛰어다니며 집회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송환법 반대와  캐리 람 행정장관의 사퇴, 경찰의 폭력진압의 진정성 있는 사과 등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 그의 검은 물결 속 외침은 지지자들을 결속시키는 힘이 있었다.

[17일 24:00] 중앙정부청사 한켠에 밝혀진 촛불
 
 17일 오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행진을 마치고 중앙정부청사 주변에 촛불을 밝히고 있다.
17일 오전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행진을 마치고 중앙정부청사 주변에 촛불을 밝히고 있다. ⓒ 이희훈
 17일 오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행진을 마치고 중앙정부청사 주변에 촛불을 밝히고 있다.
17일 오전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행진을 마치고 중앙정부청사 주변에 촛불을 밝히고 있다.ⓒ 이희훈
 
 행진에 참여했던 일부 시민들은 대중교통이 끊기기 전 자리를 떠났지만 수많은 시민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정부종합청사 한켠에 촛불을 든 사람들이 보여 불빛을 쫓아가봤다. 고공농성 중 사망한 량씨의 임시분향소가 만들어져 있었고 촛불을 세워 추모했다. 추모의 메시지가 적힌 메모장도 벽면을 채웠다.

[17일 03:00] 끊이지 않는 평화를 향한 찬송
  
 17일 오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청사 내 광장에서 밤샘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17일 오전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청사 내 광장에서 밤샘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이희훈
 17일 오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청사 내 광장에서 밤샘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17일 오전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청사 내 광장에서 밤샘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이희훈
 17일 오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청사 내 광장에서 평화노래 밤샘 농성을 이어가던 시위 참가들이 바닥에 누워 쪽잠을 자고 있다.
17일 오전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청사 내 광장에서 평화노래 밤샘 농성을 이어가던 시위 참가들이 바닥에 누워 쪽잠을 자고 있다. ⓒ 이희훈
 
중앙정부청사 광장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성가대에서 부를 법한 거룩한 분위기의 찬송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확성기를 중심으로 눕거나 앉아 한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대부분 차가운 바닥에 누웠지만 순서를 바꿔가며 노래를 이어갔다. 

"싱 할렐루야, 싱 할렐루야, 싱 할렐루야 투 더 로드"

네 소절의 노래와 함께 동이 터 올랐고 도로를 점거하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몇백명을 남기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17일 09:00] 충돌 없이 끝난 경찰과의 대치
  
 17일 오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에게 경찰들이 도로점거 철수를 요구하며 다가오자 한 시민이 손 피켓을 들고 마주하고 있다.
17일 오전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에게 경찰들이 해산을 요구하며 다가오자 한 시민이 손 피켓을 들고 마주하고 있다.ⓒ 이희훈
'폭력진압' 대신 투입된 협상 경찰 17일 오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에게 경찰들이 도로점거 철수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 12일 '폭력진압'으로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되어 경찰은 강경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
▲ '폭력진압' 대신 투입된 협상 경찰 17일 오전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에게 경찰들이 해산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12일 폭력진압으로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되어 경찰은 강경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 이희훈
 범죄인 인도법 폐지를 촉구하는 반중국 집회 ‘검은 행진’이 16일 오후 홍콩 각지에서 출발해 중앙정부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검은 행진’이 16일 오후 홍콩 각지에서 출발해 중앙정부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 이희훈
 17일 오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에게 경찰들이 도로점거 철수를 요구하며 대치하고 있다.
17일 오전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에게 경찰들이 해산을 요구하며 대치하고 있다.ⓒ 이희훈
 17일 오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에게 도로점거 철수를 요구하던 경찰들이 자리를 떠나고 있다.
17일 오전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에게 도로점거 철회를 요구하던 경찰들이 자리를 떠나고 있다.ⓒ 이희훈
 
날이 밝자 거리에 긴장감이 돌았다. 밤을 새운 일부 시위참가자들이 헬멧을 쓰고 양팔에 비닐 랩을 싸기 시작했다. 취재하던 기자들도 행진 때는 쓰지 않던 헬멧을 착용하고 방독면도 준비했다. 

마침내 경찰들이 시선에 들어왔다. 하지만 무장을 하지 않은 협상 전담 경찰관들이 선두에 있었고 시민들과 경찰은 대치했다. 일부 점거물을 철거하는 시도가 있었지만 시민들과 마이크로 대화하던 경찰은 이내 모두 철수하며 아무런 충돌 없이 상황이 끝났다.

[17일 11:00] 평화롭게 마무리 된 검은행진
 
 16일 오후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폐지를 촉구하는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16일 ‘검은 행진’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중앙정부 청사를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도로를 점거했던 시위대는 자리를 떠났고 거리는 평화를 되찾았다. '홍콩의 자유'를 외치며 행진한 200여만 시민의 행진은 폭력없이 끝났고 시민들은 자신들이 지키고자 한 홍콩을 지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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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점점 싫어지는 이유


[기획연재] 6.15와 판문점선언 (2) 6.15와 반미자주

6.15공동선언 발표 19돐을 맞아 6.15시절 ‘우리민족끼리’가 사회 전반에 어떻게 구현됐는지를 통해 4.27시대 ‘평화와 번영’의 길로 가기위한 과제를 조망해 본다.

[기획연재] 6.15와 판문점선언
(1) 6.15와 민족화해
(2) 6.15와 반미자주
(3) 6.15와 경제협력
(4) 6.15와 수구보수

2000년 6.15공동선언 이후 한국의 가장 큰 의식변화는 ‘반북’정서가 줄고, ‘반미’감정이 높아진 것이다.

1993년 여론조사를 보면 한국에 가장 위협적인 국가로 [북한 44% Vs 미국 1%]로 응답한 반면 2005년에는 [북한 14% Vs 미국 55%]로 조사됐다.

특히 대미 의존형 한미관계를 탈피해야 한다는 여론도 2002년 28%에서 2005년 72%로 급성장했다.

자료참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료참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반북의식이 사라진 이유는 이해가 간다. 6.15이후 평양 방문자 4만여명, 금강산 관광객 200만 시대였으니, 북한(조선)을 직접보고 느끼면 반감이 없어지는 것이야 당연한 이치다.

그렇다면 반미의식은 왜 이렇게 폭발하게 됐을까?

해방이후 미군정 기간 재등용된 토착왜구와 그 후손들의 숭미주의를 제외한 대부분 우리 사회 친미의식은 크게 두 가지 우려 때문에 생겨났다. 하나는 주한미군이 없으면 북한(조선)이 남침할 수 있다는 걱정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은 강대국이며 동맹국이기 때문에 미국에 의존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들이 2000년 6.15 공동선언 발표 이후 급격히 쇠퇴했다.

6.15 이전까지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박힌 반북 정서는 모든 것을 합리화하는 주된 명분이 되었다. 예속적인 한미관계도, 독재정권의 폭압도, 과도한 군사비 지출도 모두 북한의 ‘적화통일’이니 ‘남침 위협’ 따위의 반북 선전을 통해 유지될 수 있었다. 주한미군 주둔으로 인한 주권 침해도, 주둔비 부담도, 끊임없는 범죄와 환경오염도 모두 북한(조선)에게서 한국을 보호해준다는 명분 때문에 우리 국민이 참아야 했다.

그러나 6.15공동선언에서 ‘우리민족끼리’가 강조되면서 남침으로 인한 전쟁위협은 사라지고,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남과 북이 잘살아보자는 기운이 넘쳐나면서 미국의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2002년 ‘효순이•미선이 사건’이 터지면서 반미의식으로 폭발했다. 오죽했으면 박빙의 승부가 펼쳐지던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미국에 NO할 수 있는 대통령이 되겠다, 미국에 사진이나 찍으러 가진 않겠다”고 했을까. 이런 발언은 반미가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고, 득표에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에 가능했다.

이 같은 국민적 의식변화에 힘입어 2000년대 반미투쟁은 활화산처럼 번져갔다. 부산 하야리야 미군부대 투쟁, 용산 군산 미군기지 폐쇄투쟁, 매향리 미군폭격장 폐쇄투쟁, 평택 미군기지 폐쇄투쟁, 경산 함안 대전 등 전국으로 번진 미국의 양민학살 진상규명 등 반미자주화 투쟁에 봇물이 터졌다.

▲ 미대사관 앞에서 한미합동군사훈련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 : 뉴시스]

6.15공동선언 발표 19년, 판문점선언과 ‘9월평양공동선언’이 있은지도 1년이 지났다. 그러나 우리의 자주권은 오히려 후퇴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미국의 승인 없이 한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는 모욕적인 말을 대놓고 내뱉었다.

판문점선언에서 약속한 남북 철도•도로 연결, 개성 공동연락사무소, 적대행위 중지, 종전선언 등이 미국의 노골적인 방해와 거부로 중단돼 있다.

‘9월평양공동선언’에서 합의한 남북군사공동위원회 설치, 개성공단 금강산관광 재개, 동서해 관광특구, 이산가족 상설면회소 설치 등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길이 미 국무부 일개 관리에 의해 차단됐다.

스티븐 비건을 미국측 단장으로 하는 한미 워킹그룹은 마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행세를 하며 남북관계 발전에 사사건건 개입하고 방해한다.

비건의 워킹그룹은 이산가족 상봉 문제까지 미국의 승인을 받으라며 통제하고 있으니 아연실색할 일이다.

6.15시절 ‘우리민족끼리’ 정신으로 효순이•미선이 추모촛불을 들었던 것처럼 판문점선언과 ‘9월평양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반미자주의 촛불이 거대한 횃불로 번질 때가 된 것은 아닐까.

강호석 기자  sonkang1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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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탈북민에게 천만 원으로 광수인정 요구했다 거절 당해”

“지만원, 탈북민에게 천만 원으로 광수인정 요구했다 거절 당해”
 
 
 
임두만 | 2019-06-17 09:32:0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5.18 북한군 특수부대원 600명 침투’라는 ‘북한군개입설’을 주장하고 있는 시스템클럽 지만원 대표가 탈북민에게 현금 1천만 원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자신이 주장하는 ‘광수(지 씨의 광주침투 북한군 지칭용어)’가 되어 달라고 요구했다 거절당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지난 2월 8일 국회 지만원 공청회를 계기로 지만원 구속, 5.18 망언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등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국회제명을 요구하며 2월 11일부터 123일째 국회 앞에서 농성 중인 ‘5·18농성단(대표 김종배 전 의원)’이 지만원 씨를 찾아가 기자회견을 열고 전한 공개질의서를 통해서다.

▲지만원 씨의 사무실 앞에서 5.18왜곡 중단을 요구하는 농성단 © 임두만

앞서 5·18역사왜곡처벌농성단 (약칭 5·18농성단)은 지만원 망언 공청회 이후 4월 4일 학살주범 으로 꼽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연희동 집 앞에서 제1차 행동의 날을 선포하고 전 씨에게 진상을 자백하라고 요구한 뒤 현재까지 10차에 걸쳐 행동의날 행사를 개최했다.

이후 2차로 지난 4월 11일 영등포경찰서에서 지만원 수사촉구 집회를 열고, 4월 18일에는 정호용 전 특전사령관의 과천 집 앞에서 3차 집회, 4월 25일 장세동 전 안기부장의 집 앞에서 4차, 5월 2일 허삼수 전 보안사 인사처장 집 앞에서 5차의 집회를 열면서 이들에게 진상의 자백을 촉구했다.

또 5월 9일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지만원 수사촉구 집회를 연 것으로 6차, 5월 16일 허화평 전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집 앞에서 7차, 5월 21일 전남도청 앞 집단사살 39주기에 다시 전두환 집에서 8차, 5월 30일 최세창 전 3공수 여단장 집 앞에서 9차 집회를 열어 5.18 책임과 관련있는 이들을 추궁했다.

이어서 농성단 중간점검 전진대회로 10차 ‘5·18행동의 날’ 행사를 통해 역사왜곡 처벌을 촉구하고, 집단학살의 진범을 추적했으며, 농성 123일째인 6월 13일 오후 11차 집회로 지만원 씨의 ‘500만 야전군사령부’ 사무실 앞에서 공개질의 형식의 기자회견을 갖고 질의서를 전달했다.

이날 오후 2시 지하철 7호선 내방역에 집결한 농성단은 2시 20분 경 지만원 사무실 앞까지 행진한 뒤 농성단 김병운 회원의 사회로 행사를 시작했다. 이 집회에서 농성단 임태경 대변인은 “5.18민중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 역사 왜곡하는 지만원은 즉각 사과하라”는 모두발언으로 지만원 씨를 비판했다.

이어 전태일 열사의 동생인 전태삼 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가 공개질의서를 낭독했으며, 이 질의서를 5.18 사형수였던 5.18농성단 대표 김종배 전 의원과 장성배 5.18 기획위원이 지만원 씨 사무실 관계자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이 질의서에 지 씨가 탈북민을 돈으로 매수하려 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날 농성단이 지 씨에게 전한 공개질의서에서 농성단은 지만원 씨의 광수 얼굴 분석 기법이 허구라고 주장하고, 광수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로 계엄군의 사체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즉 지금까지 행불자 시신을 찾지 못하는 것은 계엄군이 시체를 유기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어 농성단은 지 씨가 북한의 대남공작용 자료를 불법유출해 왜곡선전에 이용했다면서 기밀유출 행각을 지적하고, 마지막으로 지 씨가 탈북민을 돈으로 회유해 광수로 만든 조작을 추궁했다.

한편 이날 5.18 농성단의 ‘지만원 사무실 방문’행사는 태극기부대 80여 명의 시민들이 나와  맞불을 놓기도 했으나 이들의 충돌은 없었다. 아래는 이날 농성단이 공개한 공개질의서 전문이다.

공 개 질 의 서

― 5·18진실왜곡원흉 지만원은 국민과 역사앞에 석고대죄하라 -

5·18역사왜곡처벌농성단의 국회앞 농성이 123일을 맞이한 오늘, 집단학살의 진실은 39주년째 묻혀있다. 이미 5·18민중항쟁은 대법원 확정판결, 국가기념일 제정·국립묘지 승격은 물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로 국내외의 평가가 완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등 광주학살 책임자들은 왜곡주범 지만원이 북한의 대남공작용 자료를 악용해 주장해온 북한 특수군 개입 폭동설에 동조해왔다.

이로 인하여 국론은 분열되고 5․18의 역사적 가치는 훼손되었다. 우리 5·18농성단은 5·18의 진실에 대해 역사와 국민의 이름으로 묻는다.

첫째, 지만원은 5.18당시 투입되었다는 북한군 특수부대 629명의 광수놀이가 허무맹랑한 대국민 사기극임을 자백하라

5.18에 참여한 광주시민들을 황장엽 오극렬 최룡해 이을설등 북한인사로 둔갑시킨 영상분석기법이 황당무계한 엉터리임이 재판을 통해 밝혀져 당신은 1억 원이 넘는 벌금을 납부했다. 시스템공학박사임을 내세워 지만원 당신은 ‘노숙자담요’라는 가공인물이 건넨 자료를 최신 특수영상처리기법으로 분석 처리했다는 사기극을 당장 중단하고 국민 앞에 사죄하라.

둘째, 지만원 당신은 5.18국립묘지 내 무명열사 5기의 묘지를 북한군 특수부대원이라 날조하여 5.18의 명예와 자긍심을 노골적으로 훼손했다. 당장 묘역 현장에 내려와 유가족과 광주시민에게 백배 사죄하라.

당초 3묘역에 안장된 11기의 무명열사 중 6기는 현 국립묘지로 이장하면서 유전자감식을 통해 가족을 찾았고 나머지 5기 중에는 4~5세 가량의 어린이와 70세가 넘는 희생자가 포함되어 있어 북한군이라는 당신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특히 당신의 주장대로 북으로 귀환한 특수부대원이 사망하여 묻힌 청진시 영웅묘역은 6.25당시 참전한 청진시민과 월남전에 참가한 북한공군사망자가 안장된 묘역임이 최근 국내 언론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분단 상황에서 직접적인 사실 확인이 불가능함을 악용하는 간교한 책동을 즉각 중단하라.

셋째, 당신의 북한특수군 침투주장대로라면 당신이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는 전두환 등 신군부 책임자들과 북한군이 합동작전으로 광주시민을 살상케 했으므로 지금 당장이라도 즉결처분이 가능한 중대범죄이며 대한민국의 국군과 국방력을 능욕한 행위임을 자백하라.

지만원 당신의 주장에 따르면 북한특수부대는 해안선과 휴전선, 험준한 백두대간을 넘나들었다. 그러나 해당 구간을 돌파당한 군부대는 한 곳도 없다. 당시 미군 정찰위성들이 휴전선과 광주상공을 집중 감시했으나 북한의 특이동향은 전혀 없었다고 한미 양국 군당국이 밝혔다. 북한의 대남공작 및 남남갈등 조장용 거짓선전을 대변하는 당신의 행위가 대한민국의 국방력과 국군의 명예를 훼손한 중대범죄임을 사죄하라!

넷째, 당신의 5·18왜곡의 원천 자료가 대부분 북한의 대남공작용 방송자료의 불법유출임을 자백하라.

지만원 당신이 증거라고 내세운 자료들은 국정원, 국방부, 통일부 등이 보유한 국가보안상 기밀정보로서 비밀취급 인가자만이 열람할 수 있다. 그 중 상당수는 북한이 대남방송용으로 허위사실을 선동하는 내용의 공작용이었다. 기밀취급 인가자가 아닌 당신이 내민 기밀자료의 출처와 유출자는 누구인지, 이들과의 불법적인 검은 거래가 있었는지 자백하라!

다섯째, 탈북민에게 금전을 제공하며 광수가 되어달라고 회유한 사실을 자백하라.

지금까지 탈북동포 중 5‧18 당시 북한 특수군으로 남파되었다고 진술하고 국정원으로부터 입국허가를 받은 자가 단 한 명도 없다. 자신이 80년 광주에 침투한 북한특수군이라 책을 쓰고 강연을 하러 다녔던 탈북민 임천용은 지만원 당신에게 수시로 돈을 받은 것도 모자라 계속 돈을 요구하여 당신도 시달렸다.

탈북민 김유성에게 일금 일천만원을 주고 광수가 되어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제보가 농성단에 들어와 있다. 국내 입국 후 어려운 탈북민에게 금전으로 회유해 광수로 조작하려고 했던 행각을 낱낱이 자백하라!

우리 5·18농성단은 5·18의 진실이 밝혀지고 전두환 등 학살주범과 지만원 등 왜곡주범들에게 합당한 수사와 처벌이 이뤄질 때까지 계속 투쟁해나갈 것을 천명한다.

2019. 06. 13.
5.18역사왜곡처벌농성단 일동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8&table=c_flower911&uid=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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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차기 검찰총장에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내정

청와대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 척결, 검찰 개혁과 조직 쇄신 기대”

 

최지현 기자 cjh@vop.co.kr
발행 2019-06-17 11:01:15
수정 2019-06-17 11:21:28
이 기사는 번 공유됐습니다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자료사진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자료사진ⓒ민중의소리
 

문재인 대통령은 17일 차기 검찰총장으로 윤석열(59·23기) 서울중앙지검장을 내정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박상기 법무부 장관의 제청을 받고 윤 지검장을 검찰총장 후보자로 지명했다고 고민정 대변인이 브리핑을 통해 전했다.

앞서 검찰총장 후보추천위원회(위원장 정상명 전 검찰총장)는 13일 정부 과천청사에서 회의를 열어 검증 작업을 벌인 끝에 차기 검찰총장 후보로 윤 후보자 등 4명을 박 장관에게 추천했다.

차기 검찰총장은 추천위가 선정한 후보자 4명 중 박 장관이 1명을 문 대통령에게 임명 제청하고, 문 대통령이 제청자를 지명해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임명된다. 오는 18일 국무총리 주재로 열리는 국무회의에서 정부인사 발령안이 심의·의결되면 국회로 인사청문 요청서가 보내진다.

윤 후보자는 대전고검 검사로 지내다가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임명됐다. 이는 문재인 정부의 '검찰 개혁 신호탄'으로 불릴 만큼 파격적인 인사로 평가됐다.

검찰 조직에서 정치적으로 독립된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던 윤 후보자는 박근혜 정부 당시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수사팀장을 맡아 수사를 지휘했고,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국정원 특수활동비, 이명박 전 대통령, 사법농단 수사 등을 지휘했다.

그런 그가 검찰의 수장까지 오른다면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수사'와 '검찰 개혁'에도 탄력이 붙을지 주목된다. 윤 후보자가 문무일(58·18기) 현 검찰총장보다 5기수 아래인 점에서도 파격 인사라는 평가가 나온다.

고 대변인은 윤 후보자에 대해 "검사 재직 시절 부정부패를 척결해왔고 권력의 외압에 흔들리지 않는 강직함을 보였다"라며 "서울중앙지검장으로서 탁월한 지도력과 개혁 의지로 국정농단과 적폐 청산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검찰 내부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았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고 대변인은 "윤 후보자가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를 뿌리 뽑음과 동시에 시대적 사명인 검찰 개혁과 조직 쇄신 과제도 훌륭하게 완성할 것이라고 기대한다"라고 밝혔다.

한편 문 대통령의 대표적인 검찰 개혁 공약인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를 두고 마찰음을 내던 문 검찰총장은 내달 24일 임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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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의 면상을 후려 갈겨라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9/06/17 11:10
  • 수정일
    2019/06/17 11:1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특별기고> 박학봉 시인 격시

프레스아리랑 | 기사입력 2019/06/17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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檄詩(격시)

미제의 면상을 후려 갈겨라

 

박학봉 

                                     

 

행주치마에 돌을 날라 침략자 일본놈들에게

참패를 안긴 것으로 조선 여인의 비장함을 추켜세우지 말라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여인으로 부각하지 말라

진정

조선의 여인은 돌멩이가 아니라 산도 능히 움직이며

고결한 애국적 순결과

자신의 심장을 녹이는 절개는 목숨보다 더 중하게 여기느니

무참히 짓밟힌 조국은 피로 싸우고

침탈당한 행복한 보금자리 삶의 터전은 죽어

넋이 되더라도 끝까지 지키리라

 

약탈자의 증오와 적대감이

<이 악귀 같은 놈아원한에 사무친 조선 여인의 마음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똑똑히 알아두어라외치며

왜장의 목을 두 팔로 꽉 조여 쥐고

남강 푸른 물에 몸을 던진 여인 논개

연광정에 꽃잎처럼 떨어진 의기 계월향은

<나으리는 살아 남으셔서 저 왜놈들을 하나라도 더 죽이고 저를 따라 오시오.

나으리가 저를 베지 않으면 내 스스로 목을 찔러 죽는 수밖에 없으니

부디 저를 베어주세요높이 외치며

가루개 언덕에서 자결하지 않았는가

 

누구를 위해 피를 흘렸으며 목숨을 던졌는가

살아서 지키지 못한 조국이여

죽어서 이 손으로 행복의 조국 지키리라

또 죽어서 이 몸 산산조각이 되더라도

행복한 가정 다시 찾으리

조국은 지아비로

백성은 하늘로 섬기고

지아비없이 어디 하늘아래 떳떳할 수 있는가

 

조선 여인의 용감성에

왜장 잃은 군졸은 오합지졸이라

자기 한 몸 희생에

침략자 왜군은 공포 속에 떨고 있어라

죽어서 넋으로라도

끝까지 지켜야 할 내 자식 내 가정

내 조국의 사랑은

뜨거운 단비가 되어 이 땅을 촉촉이 적시는데

역사의 여인들이여

조선의 꽃으로 다시 태어나리

 

침략자의 더러운 발길이 닿는 곳마다

짓밟힌 치욕의 핏자국

북녘의 신천 땅에서 남녘의 끝 제주까지

피로 물든 민족의 산하여

너의 불행과 고통과 아픔에

비수를 가슴에 품고

원한의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꿋꿋하게 살아온

이 땅의 여인

절규의 외침소리

일제의 총칼에 빼앗긴 40

무자비한 굴욕의 나날

미제의 군화발로 짓밟힌 70

치욕의 역사를

이제 통일의 아낙으로 미제 침략에 맞서

싸우는 방패가 되리

다시는 사랑하는 가정을 빼앗기지 않으리

따듯한 조국의 품에서 나를 스스로 태우는 촛불이 되어

통일투쟁에 빛을 뿌리리라.

 

청춘의 무지개를 타고

활짝 피지도 못한 꽃송이 윤금이여

너의 육체는 산산이 부셔져 미제 원수에게

총알이 되어라

점령군 미친개 장갑차에 짓밟힌 효순 미선아!

채 피지도 못하고 쓰러진 애 어린 꽃망울

내 너희에게 뜨거운 심장을 주니 살아서 오라

웃는 얼굴로 사랑하는 우리 민족 앞에 와서는

너희의 식을 줄 모르는 원한과 분노를 풀어보렴

여럿이 모이고 또 힘을 모아

수백 수천의 미제 침략자 대갈통을 날리자

꼬꾸라지는 놈

기어가는 놈

뒤로 자빠지는 놈

모두 다시 일으켜 뒤통수를 후려 갈기고

냅다 태평양 건너 식민의 땅으로 던지자

 

미제는 우리 가슴에 박힌 쇠말뚝이다

70년이 지나 녹쓸대로 녹쓸어버린

쇠말뚝 뽑아 버려야 한다

 

치 떨리다

해방 이듬해 10월 1일 대구에서

미군정 반대하며 앞가슴을 헤치고 <쏠테면 쏴라외친

여성 노동자를 무참하게 사살하지 않았는가

한국전쟁 중에 미제침략군은

노근리에서 비행기 폭격과

기관총으로 노인과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이 처참하게 죽였고

마산재실거창에서 박격포탄과 기총사격으로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하고

골짜기까지 끌고가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죽은 시체에 마구 총을 쏘아댔다

젖먹이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다 멎은 후에 총을 멈추고

시체에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 죽이지 않았는가

무자비하고 능숙한 살인자가 되기 위한 미침략군은

탱크로 짚차로 깔아 뭉게 죽이고

총으로 조준 사격하여 즉사시키고

군화로 짓밟고 각목으로 때려 실신시켜 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고

불태워 죽이고

M-1소총 개머리판으로 때려서 죽이고

달리는 열차에서 던지고 다리에서 떨어뜨려 죽이고

쇠밧줄로 목 졸라 죽이고

미제가 저지른 치 떨리는 악행과

불장난 같은 전쟁연습에

우리 민족의 피가 흐르지 않을 날이 없었다.

무참하게 희생된 값진 죽음 앞에 너희 멸망을 선언 하노라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기는 듯 아프고

입술을 피나게 깨물며 울음도 씹어 삼키며

원수와 다시 피의 결전을 준비하자

몸이 다 타고 찢어져 죽더라도

침략군의 화살도 총탄도

죽음 앞에서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어머니의 참 모습

복수하리라

주먹을 움켜줘라

무쇠보다 강한 주먹으로

미제의 면상을 후려 갈기자

오직 한 마음으로

한 길만 걸었다

행복의 보금자리 무참히 짓밟고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잔인하게 빼앗아 갔으니

기어이 너희 죄를 묻고 복수하리라 맹세한다

 

 

 

 

▲     ©프레스아리랑

 

 

 

▲     ©프레스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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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 지났어도 이루지 못한 민주주의

[개벽예감 352] 32년 지났어도 이루지 못한 민주주의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9/06/17 [07:31]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독재정권의 세대교체로 귀결된 민주항쟁

2. 불평등과 불공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3. 고강도 계급독재와 저강도 계급독재

4. 1987년 6월 민주로조가 없었다

5. 진보정당 없이 일어난 민주항쟁

6. 모습을 드러낸 씨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리브시  

 

 

1. 독재정권의 세대교체로 귀결된 민주항쟁

 

항쟁의 열기로 들끓었던 1987년 6월, 그로부터 어언 32년 세월이 지난 2019년 6월 10일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 홍익표는 논평에서 “더불어민주당도 6.10민주항쟁정신을 받들어 민주주의 완성과 한반도 평화의 길을 국민과 함께 열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6월항쟁의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강령에서 천명한 정당이 집권당으로 되었고, 32년 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으로 6월민주항쟁을 이끌었던 인권변호사 문재인이 대통령으로 되었다. 이런 사정을 보면, 지난 32년 동안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생각되지만, 눈에 보이는 겉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속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진실이 드러난다.   

 

돌이켜보면, 6월민주항쟁기간에 500만 명에 이르는 시위군중이 총궐기하여 광장과 거리에서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치며 싸웠건만, 그들이 타도하려고 하였던 전두환 독재정권은 1987년 12월 16일 대통령 선거를 통해 노태우 독재정권으로 간판만 바꿔 달았다. 독재정권의 세대교체가 실현된 것이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야합한 보수대연합에 의해 이른바 ‘문민’이라는 명목으로 변형된 독재정권이 또 다시 출현하였다.  

 

32년 전, 500만 명에 이르는 시위군중이 항쟁의 광장과 거리에 쏟아져 나와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치며 싸웠건만, 그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민주주의는 실현되지 않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서 가장 초보적인 과업들 가운데 하나인 선거제도개혁(직선제 개헌)만 실현되었을 뿐이다. 6월민주항쟁의 집단적 체험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까지 얼마나 멀고 험한 투쟁의 길을 헤쳐가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한국의 민중만이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민중들 모두가 그런 이치를 깨달았다. <사진 1> 

 

▲ <사진 1> 1987년 6월 18일 부산에서 민주항쟁에 참가하여 투쟁하던 청년 한 사람이 전투경찰이 난사한 직격최루탄을 맞고 다리에서 떨어져 숨졌다. 민주주의를 위해 스물여덟의 짧은 생애를 바친 대학생 출신 노동자 이태춘 열사였다. 위의 흑백사진은 1987년 6월 27일 부산에서 거행된 이태춘 열사 장례행진의 한 장면이다. 이 흑백사진 속에는 장래에 대통령이 될 인권변호사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얼굴에 마스크를 쓴 채 열사의 영정을 두 손으로 정중히 받쳐든 노무현 인권변호사와 그의 곁에 있는 문재인 인권변호사다. 지금으로부터 32년 전, 노무현 인권변호사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으로 민주항쟁의 앞장에 섰고, 문재인 인권변호사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으로 민주항쟁의 앞장에 섰다.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치며 시위군중과 함께 싸웠던 인권변호사 두 사람이 각각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들이 외친 민주주의는 32년이 지나도록 실현되지 않았다.     

 

이를테면,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20년 동안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민주주의를 짓밟고 부정부패와 폭압만행을 저지른 독재정권들 가운데서 특별히 악독했던 3대 독재정권이 있었다. 1961년부터 1997년까지 간판만 바꾸면서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으로 4대에 걸쳐 지속된 한국의 독재정권들, 그리고 1965년부터 1986년까지 존재하였던 필리핀의 마르코스 독재정권, 그리고 1974년부터 1990년까지 존재하였던 칠레의 피노체트 독재정권이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으로 4대에 걸쳐 지속된 독재정권기에 1979년 10월 부산마산민주항쟁,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 1987년 6월 6월민주항쟁이 일어나 수많은 시위군중이 피를 흘리며 싸웠건만, 독재정권은 그때마다 간판만 바꿔달면서, 무려 36년 동안 독재정권의 세대교체가 계속되었다. 

 

1998년 2월 25일 김대중이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가 집권하여 4대에 걸친 독재정권의 세대교체는 종식되었지만, 김대중 정권의 출현은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못한 보수적 정권교체에 지나지 않았다. 이명박 독재정권과 박근혜 독재정권의 연속적인 출현에서 보듯이 보수적 정권교체는 매우 불안정하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한국에서 진행된 보수적 정권교체가 필리핀과 칠레에서도 똑같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1965년부터 1986년까지 21년 동안 존속하였던 마르코스 독재정권은 1986년 2월 22일부터 25일까지 전개된 2월민주항쟁으로 막을 내리고, 1986년 코라존 아퀴노가 이끄는 민주당계 정당연합체인 통합국가민주기구가 집권하여 보수적 정권교체를 실현하였다. 다른 한편, 칠레에서 1974년부터 1990년까지 16년 동안 존속하였던 피노체트 독재정권은 1990년 빠뜨리씨오 아일윈이 이끄는 기독교민주당의 집권으로 막을 내리고 보수적 정권교체가 실현되었다. 

 

한국, 필리핀, 칠레에서 일어난 보수적 정권교체는 극우정당의 집권이 우익정당의 집권으로 교체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세계 각국에 존재하는 민주당 계렬의 우익정당들은 당명에 민주라는 두 글자를 얹혀놓고, 민주주의라는 말만 요란하게 늘어놓을 뿐이다. 민주당 계렬의 우익정당들에게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의지도 없고, 민주주의를 실현할 능력도 없다. 그러므로 극우정당의 집권이 우익정당의 집권으로 교체되는 보수적 정권교체로는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없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민주당 계렬의 우익정당들이 집권한 이후에 펼쳐놓은 현실이 이를 충분히 입증한다.  

 

 

2. 불평등과 불공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2019년 6월 10일 문재인 대통령은 서울 용산구 남영동 옛 치안본부 대공분실 앞에서 진행된 6월민주항쟁 32주년 기념식에서 행정안전부장관이 대독한 기념사를 통해 “민주주의를 제도로만 생각하면 이미 민주주의가 이뤄진 것처럼 생각할지 모른다. 민주주의는 제도이기 이전에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더 자주 실천하고, 더 많이 민주주의자가 되어가는 것이 민주주의다. 민주주의가 더 커지기 위해서는 불평등을 해소해야 하며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경제에서도 우리는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인용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민주주의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생각은 더불어민주당이 집권하여 민주주의가 부분적으로 실현되었지만, 불평등과 불공정은 아직 청산되지 못하였으므로, 한국 사회를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로 전변시켜 민주주의를 완성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민주주의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부분적으로 실현되고, 아직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불평등과 불공정도 아직 청산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민주주의가 완성되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부분적으로도 실현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늘 한국 사회에 불평등과 불공정이 만연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불평등은 극단적으로 벌어진 빈부격차로 표출되었고, 불공정은 극도로 악화된 대량실업과 부정부패로 표출되었다.  

 

▲ <사진 2> 위의 사진은 양극화된 한국 사회의 빈부격차를 보여준다. 사진에 보이는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초호화 고층아파트는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있는 타워 팰리스이고, 사진에 보이는 허물어져 가는 판자집들은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의 극빈층 거주공간이다. 세계경제연단(WEF)이 2015년 9월 7일에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112개국의 사회경제상황을 분석하였더니 한국이 불평등을 해소하는 정책에서도 최악이고 구조적 부패도 최악이라고 한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오늘 문재인 정부 시기에 불평등과 구조적 부패는 더욱 악화되었다. 32년 전, 500만 명에 이르는 시위군중이 항쟁의 광장과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피흘려 싸웠지만, 오늘 한국에서는 그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불평등과 불공정, 빈부격차와 구조적 부패가 더욱 만연되고 있다. 이것이 보수적 정권교체가 가져온 오늘의 참담한 현실이다.     

 

명백하게도, 불평등과 불공정이 만연된 사회는 민주주의가 전혀 실현되지 못한 비민주적인 사회다. 독재정권은 사라졌으나, 온갖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이 만연된 사회를 민주주의가 부분적으로 실현된 사회라고 말할 수 없다. 온갖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이 청산될 때, 민주주의가 부분적으로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고, 사회역사적 발전이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아져 대립적 사회계급관계가 폐절될 때, 민주주의가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오늘 한국 사회에 만연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은 민주주의가 부분적으로 실현된 사회에서 생겨나는 현상이 아니라,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class-dictatorship)의 직접적 산물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계급독재는 권력과 재부를 과점한 극소수 사회계급이 절대다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구조적으로 지배, 억압하고 착취, 수탈하는 독재라는 뜻이다.

 

모든 형태의 독재는 권력과 재부를 독점한 극소수 사회계급에 의해 자행되는 계급독재이므로, ‘개인독재’라는 개념은 성립될 수 없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같은 독재자들은 계급독재의 집행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개별적 독재자들이 퇴출되었다고 해서, 계급독재가 폐절된 것은 결코 아니다. 

 

 

3. 고강도 계급독재와 저강도 계급독재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는 다음과 같이 두 종류로 구분된다. 

 

첫째, 극우정당이 집권하면, 군대와 경찰, 정보기관과 사법기관을 동원하여 진보정당을 해산하고,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농민과 중산층을 억압하는 가장 폭력적이고 극악한 고강도 계급독재를 자행하게 되는데, 이런 고강도 계급독재를 패씨즘(fascism, 파시즘)이라고 부른다.  

 

둘째, 극우정당이 퇴진하고 민주당 계렬의 우익정당이 집권할 때, 고강도 계급독재는 저강도 계급독재로 이행된다. 민주당 계렬의 우익정당이 집권하더라도 대립적 사회계급관계는 폐절되지 않기 때문에 온갖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은 여전히 만연되어 있는데, 그런 사회정치체제를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라고 부른다. 박근혜 독재정권이 퇴진하고, 문재인 우익정권이 등장한 이후에도 온갖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이 여전히 만연되어 있고, 더욱이 지난 시기 역대 독재정권들이 탄압의 도구로 사용하던 악법(국가보안법)도 철폐는커녕 개정도 되지 않았다. 이런 고착현상은 오늘 한국 사회가 패씨즘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저강도 계급독재 아래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진 3> 

 

▲ <사진 3> 위의 사진은 2018년 8월 9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가 진행한 제1183차 정기목요집회의 장면이다. 민가협은 1993년부터 서울 종로2가에 있는 탑골공원 앞에서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촉구하는 집회를 매우 목요일마다 진행해왔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민가협은 박근혜 독재정권이 퇴진하고 문재인 우익정권이 들어서자 문재인 대통령이 양심수를 사면석방할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그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박근혜 독재정권이 퇴진하고 문재인 우익정권이 등장한 이후에도 온갖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은 여전히 만연되어 있고, 더욱이 지난 시기 역대 독재정권들이 탄압의 도구로 사용하던 국가보안법도 철폐는커녕 개정도 되지 않았다. 이런 고착현상은 오늘 한국 사회가 패씨즘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저강도 계급독재 아래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익정치인들은 저강도 계급독재를 자유민주주의라는 그럴듯한 말로 미화, 분식하지만, 저강도 계급독재 아래서는 계급적 지배의 강도와 계급적 착취의 강도가 이전보다 조금 약해졌을 뿐,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이 여전히 만연되어 있다. 전후맥락을 면밀히 따져보면, 대립적 사회계급관계가 계급적 지배와 계급적 착취를 산생시키고, 계급적 지배와 계급적 착취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을 산생시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2019년 현재 한국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계급적 지배와 계급적 착취가 자행되는 저강도 계급독재 아래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고강도 계급독재 아래서는 권력과 재부를 과점한 극소수 사회계급을 제외한 절대다수의 사회구성원이 혹독한 불행과 고통을 겪는데 비해, 저강도 계급독재 아래서는 억압강도와 착취강도가 약간 낮아지기 때문에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계급적 지배와 계급적 착취를 여전히 당하면서도 계급독재에 저항하지 않고 때로 순응하게 된다. 자유민주주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저강도 계급독재에 저항하지 않고 불평등과 불공정을 참고 견디게 만든다.  

 

고강도 계급독재와 저강도 계급독재를 구분할 때, 6월민주항쟁의 한계가 뚜렷이 드러난다. 그 항쟁으로 전두환 독재정권이 물러가고, 노태우 독재정권이 등장하였다. 다시 말해서, 6월민주항쟁 이후 고강도 계급독재가 저강도 계급독재로 이행된 것이 아니라, 고강도 계급독재가 여전히 지속되었던 것이다. 왜 이런 최악의 씨나리오가 펼쳐졌던 것일까? 

 

 

4. 1987년 6월 민주로조가 없었다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 아래서 계급적 지배와 계급적 착취를 가장 가혹하게 당하는 사회계급은 노동계급(working class)이다. 계급독재 아래서 농민도 억압과 수탈을 당하지만, 농민은 독자적인 사회계급이 아니다. 자기의 생산수단을 전혀 갖지 못한 노동자는 자본가가 소유한 생산수단을 사용하여 사회적으로 생산활동을 벌이지만, 농민은 토지와 농기계, 농기구 같은 자기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개별적으로 생산활동을 벌인다. 자기의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개별적으로 생산활동을 벌이기 때문에 농민은 독자적인 사회계급으로 되지 못한다. 자본주의사회에 존재하는 사회계급은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사회계급, 곧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이고, 나머지 근로대중은 사회계층(social stratum)으로 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계급은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를 폐절시키는 데서 누구보다 가장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진다. 그런 노동계급이 민주로조를 조직하고, 농민과 도시중산층 등 다른 사회계층들과 전략적으로 연대하여 민주항쟁을 주도할 때, 계급독재를 폐절시키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위대한 변혁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민주로조를 건설한 노동계급의 조직력량은 민주항쟁을 이끄는 주도력량으로 된다. 

 

그러나 6월민주항쟁이 일어났던 1987년에 한국에는 민주로조가 없었고, 독재정권에 순응하는 어용로조만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민주로조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대중투쟁에 앞장선 노동계급의 자주적 조직이다. 오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바로 그런 조직이다.

 

한국의 노동계급은 6월민주항쟁 직후인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일어난 노동자대투쟁을 계기로 하여 지역별, 업종별로 민주로조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456개 단위로조가 참가하고, 16만 명 조합원이 망라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결성된 때는 1990년 1월 22일이었고, 전노협이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결성된 때는 1995년 11월 11일이었다. 

 

다른 한편, 한국의 농민들은 6월민주항쟁 직전인 1987년 2월 26일 전국농민협회를 결성하였고, 1989년 3월 1일 전국농민운동연합을 결성했다. 그리고 6월민주항쟁에서 선봉투쟁에 앞장선 대학생들은 6월민주항쟁 직후인 1987년 8월 19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결성했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1986년을 기준으로 한국의 노동계급은 1,400만 명을 넘어섰지만, 그들 대부분은 조직화, 의식화되지 못하였다. 1987년 6월에 존재하였던 단위로조 2,742개는 모두 어용로조들이었다. <사진 4>

 

▲ <사진 4> 위의 사진은 1987년 8월 4일 기독교백주년기념관 강당에서 진행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제1차 전국회의 현장을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속에 서 있는 세 사람은 6월민주항쟁의 지도부를 구성하였던 문익환, 김대중, 김영삼이다. 2,196명이 참가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야당정치인, 종교인, 사회단체대표가 주도하였고, 전체구성비율에서 노동자는 1.78%, 농민은 7.8%밖에 되지 않았다.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를 폐절시키는 데서 가장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진 노동계급이 민주로조를 아직 조직하지 못한 상황에서 6월민주항쟁이 일어났으므로, 항쟁지도부는 계급독재를 폐절시키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전략목표를 제시할 수 없었다. 항쟁지도부에서 발언권이 강한 우익정당(통일민주당)이 자기의 구상대로 항쟁을 이끌어갔다. 민주항쟁의 투쟁력량이 민주변혁의 추진동력으로 전화, 발전되지 못하고 유실된 까닭이 거기에 있다.     

 

마땅히 민주항쟁의 주도자로 나서야 할 민주로조가 세상에 아직 출현하지 않은 시기에 민주항쟁이 일어나면, 노동계급이 아닌 다른 사회계층들이 연대련합하여 항쟁을 주도하게 된다. 6월민주항쟁은 바로 그렇게 전개되었다. 1987년 5월 27일에 결성되어 6월민주항쟁을 주도하였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계급계층적 구성에서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다. 2,196명이 참가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종교인 683명, 교육자 413명, 사회단체대표 343명, 야당정치인 213명, 농민 171명, 여성 161명, 문화예술인 100명, 언론출판인 43명, 노동자 39명, 빈민 18명, 청년 12명으로 구성되었다. 노동자는 1.78%, 농민은 7.8%밖에 되지 않았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주도한 것은 1987년 4월 21일 김대중과 김영삼을 중추로 하여 창당된 통일민주당과 1985년 3월 29일 민주주의정치활동가들이 결성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었다. 민통련 의장은 문익환, 부의장은 계훈제, 김승훈, 사무총장은 이창복이었다.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를 폐절시키는 데서 가장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진 노동계급이 민주로조를 아직 조직하지 못한 상황에서 6월민주항쟁이 일어났으므로, 항쟁지도부는 계급독재를 폐절시키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전략목표를 제시할 수 없었다. 항쟁지도부에서 발언권이 강한 우익정당(통일민주당)이 자기의 구상대로 항쟁을 이끌어갔다. 당시 우익정당이 6월민주항쟁에서 추구한 전략목표는 직선제 개헌이었다. 각계각층 군중 500만 명이 총궐기하였으나, 민주항쟁의 투쟁력량이 민주변혁의 추진동력으로 전화, 발전되지 못하고 유실된 까닭이 거기에 있다. 

 

 

5. 진보정당 없이 일어난 민주항쟁

 

민주로조로 조직화된 노동계급의 투쟁력량은 민주항쟁을 이끌어가지만, 민주로조가 새로운 민주정권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 정권을 수립하는 과업은 언제나 정당에 의해 수행된다. 민주로조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투쟁을 이끄는 영도조직이라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힘으로 건설된 진보정당은 정권수립의 직접적 담당자다.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를 폐절시키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역사적 과업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업, 곧 독재정권을 퇴출시키고 민주정권을 수립하는 진보적 정권교체의 과업은 민주로조가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로조가 주도적으로 참가한 진보정당이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보정당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민주항쟁이 일어나면, 독재정권은 퇴출되고 민주정권이 수립되는 진보적 정권교체는 실현될 수 없고, 극우정당과 대립하는 우익정당이 민주항쟁을 주도하고 우익정권을 수립하는 보수적 정권교체가 실현된다. 

 

그런데 32년 전 6월민주항쟁은 극우정당의 집권이 우익정당의 집권으로 교체되는 보수적 정권교체마저 실현하지 못했고, 전두환 독재정권이 노태우 독재정권으로 간판만 바꾸는 독재정권의 세대교체가 진행되었다.   

 

진보적 정권교체의 직접적 담당자로 되어야 할 진보정당은 6월민주항쟁이 끝난 뒤 3년이 지난 1990년 11월 10일에 민중당이라는 이름으로 창당되었는데, 1990년 1월 22일에 결성된 전국노동조합협의회는 같은 해 11월 10일에 창당된 민중당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처럼 민주로조와 진보정당이 서로 분리된 비정상적인 정치현실이 펼쳐진 가운데, 1992년 3월 24일에 시행된 제14대 총선에서 민중당은 한 석도 얻지 못해 해산되었다. 민주로조가 참가하지 않은 진보정당은 대중적 지지기반을 든든히 구축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래 가지 못한다.      

 

민주로조와 자주적 농민조직의 힘으로 건설된 진보정당은 온갖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을 청산하는 민주주의강령,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의 부분적 실현을 위한 민주변혁강령을 전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제시하는 한편, 조직화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강력한 힘에 의거하여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하게 된다. <사진 5> 

 

▲ <사진 5> 위의 사진은 2017년 10월 15일 오후 서울시청 광장에서 당원 1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민중당 출범식 장면이다. 민주로조와 자주적 농민조직의 힘으로 결성된 진보정당은 온갖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을 청산하는 민주주의강령을 전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제시하는 한편, 조직화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강력한 힘에 의거하여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하게 된다. 낡고 썩은 사회를 뒤집어엎고, 새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민주변혁은 민주주의강령을 가진 진보정당을 건설하는 당건설사업에서 시작된다. 대중적 지지기반을 강화한 진보정당은 진보적 정권교체의 길을 열어놓을 것이며, 바로 그 길에서 전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새로운 민주사회를 건설하는 민주변혁을 추진하고, 민주사회의 주인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진보정당의 민주주의강령,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를 부분적으로 실현하는 민주변혁강령이다. 진보정당의 민주주의강령은 그 정당의 전략목표이며 존재근거다. 낡고 썩은 사회를 뒤집어엎고, 새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민주변혁은 민주주의강령을 가진 진보정당을 건설하는 당건설사업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진보정당을 건설하지 않고, 새로운 민주사회를 건설하겠다는 말은 공리공담에 지나지 않는다. 민주로조와 자주적 농민조직의 힘으로 건설된 진보정당은 진보적 정권교체의 길을 열어놓을 것이며, 바로 그 길에서 전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새로운 민주사회를 건설하는 민주변혁을 추진하고, 민주사회의 주인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민주사회의 주인으로 등장하는 사회역사발전경로는 민주로조 건설과 자주적 대중조직 건설 → 진보정당 건설 → 진보적 정권교체 → 민주변혁 → 새로운 민주사회 건설로 이어지는 것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힘이 진보정당으로 결집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독재정권이다. 그래서 독재정권은 민주로조와 자주적 대중조직들을 악랄하게 탄압하고, 진보정당을 강제로 해산시킨다. 이를테면, 박근혜 독재정권은 2011년 12월 6일에 창당된 통합진보당에게 말도 되지 않는 내란음모죄를 뒤집어 씌웠고, 우익언론매체들은 통합진보당을 ‘종북정당’이라고 집중공격하였고, 그런 광란적 분위기 속에서 헌법재판소는 2014년 12월 19일 통합진보당을 해산하는 판결을 내렸다. 박근혜 독재정권의 폭거로 104,692명의 당원과 5명의 국회의원을 가진 통합진보당은 창당 3년 만에 강제해산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진보정당을 건설하려는 줄기찬 노력은 강제해산으로 막을 수 없었다. 통합진보당의 뒤를 이은 또 다른 진보정당이 2017년 10월 15일에 창당되었으니, 그 정당이 바로 민중당이다.  

 

민중당은 자기의 기본정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건설”하고, “민중 자신의 힘으로 노동존중, 인간존중의 새로운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진보집권”을 전략목표로 제기하였고, “민족의 자주권을 확립”하고, “민중이 경제의 주인이 되는 평등사회를 실현”하고, “평화지향의 중립적 통일국가를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민중당의 강령(기본정책)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명명백백한 민주주의강령이다. 그것은 낡고 썩은 사회를 뒤집어엎고, 새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민주변혁강령이며, 사회과학용어로 표현하면,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를 폐절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민주변혁강령이다. 32년 전 6월민주항쟁이 일어났을 때, 그런 민주주의강령을 가진 진보정당이 있었더라면 민주항쟁은 민주변혁으로 전화, 발전되었을 것이다.  

 

 

6. 모습을 드러낸 씨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리브시

 

1987년 6월 전두환 독재정권의 고문살해만행과 장기집권음모에 분노한 각계각층 군중이 서울과 부산을 비롯한 대도시들에서 광장과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위군중은 화염병을 던져 각지의 파출소들과 경찰차량들을 불태웠다. 항쟁의 폭발력은 무서운 속도로 증폭되었고, 최루탄을 난사하는 전투경찰의 진압으로는 막을 수 없게 되었다. 날로 불어나는 시위군중이 총공세를 벌여 경찰저지선을 돌파하는 날, 전두환이 있는 청와대까지 들이닥칠 판이었다. 상황이 자기에게 불리해지는 것을 직감한 전두환은 최후의 대책을 꺼내들었다. 1987년 6월 19일 오전 10시 전두환은 국방장관, 고위급 군지휘관들, 안기부장을 청와대로 불러 비상회의를 진행하면서, 최후의 대책을 논의했다. 그들이 논의한 최후의 대책은 군대를 출동시켜 6월민주항쟁을 짓밟으려는 유혈진압대책이었다. 1980년 5월 군대를 출동시켜 광주민주항쟁을 짓밟고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한 살인악당이 6월민주항쟁을 총칼로 짓밟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위급한 정황이 조성되었다. 

 

<뉴욕타임스> 1987년 7월 6일 보도에 따르면, 한국 경찰이 시위군중을 진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1987년 6월 19일 밤, 전두환은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대를 출동시켜 서울과 다른 대도시들의 외곽을 포위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한국군 부대들이 출동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전두환은 갑자기 출동명령을 취소하였다고 한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워싱턴포스트> 1987년 7월 5일 보도기사에 당시 긴박했던 상황이 담겨있다. 보도에 따르면, 1987년 6월 20일 아침 오스트레일리아를 향해 태평양 상공을 날아가던 전용기 회의실에서 미국 국무장관 조지 슐츠와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 개스턴 씨거가 당시 한국에서 벌어진 급박한 상황을 놓고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고 한다. 씨거는 몇 시간 전에 주한미국대사관이 보내온 상황보고를 받고 밤잠을 설친 채, 아침 일찍 슐츠 국무장관과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는데, 그 두 사람을 긴장시킨 것은 전두환이 6월민주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한국군 출동을 검토하고 있다는 긴급보고였다.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전두환에게 자제하라는 친서를 이미 보냈지만, 상황이 더욱 악화되면 전두환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는 아무도 몰랐다. 씨거는 슐츠에게 자기가 오스트레일리아 방문을 수행하지 않고 서울로 날아가 전두환에게 미국의 의사를 직접 전달하는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내놓았고, 슐츠도 그 의견에 찬성하였다.       

 

국무장관 슐츠의 지시에 따라 미국 국무부는 1987년 6월 22일에 발표한 공식논평을 통해 한국 군부가 6월민주항쟁에 개입하지 말라고 직접적으로 경고했고, 슐츠와 헤어진 씨거는 6월 23일 허둥지둥 서울에 나타났다. 씨거는 6월 24일 오후 청와대에서 전두환을 만나 90분 동안 회담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시 전두환과 미국 사이에서 벌어진 긴박한 움직임을 시간별로 파악하는 것이다. 전두환이 청와대에서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한 때는 6월 19일 오전 10시였고, 그가 위수령을 발동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한국군에게 시위진압출동명령을 내린 때는 6월 19일 밤이었고, 씨거가 청와대에서 전두환을 만난 때는 6월 24일 오후였다. 그런데 6월 20일 새벽 전두환은 자기가 몇 시간 전에 내렸던 위수령발동지시와 시위진압출동명령을 갑자기 취소하였다. 전두환의 갑작스러운 취소와 씨거의 청와대 방문 사이에는 무려 4일이라는 시차가 있다. 이런 정황은 전두환이 씨거를 통해 미국의 강한 압박을 받고 취소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어떤 다른 일이 벌어지는 바람에 취소결정을 내렸음을 말해준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워싱턴포스트> 1987년 7월 5일 보도에 따르면, 씨거가 서울에 도착한 6월 22일 이전에 “워싱턴은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이 개입을 거부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미국 국무부는 그런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에게 개입하지 말라고 직접 요구하는 이례적인 성명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이 보도기사는 전두환으로부터 시위진압출동명령을 받은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항명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자발적인 항명이 아니었다. 전두환이 6월 19일 오전 10시에 청와대에서 소집한 비상대책회의에서 위수령 발동과 한국군의 시위집압출동을 전두환과 함께 논의한 한국군 고위지휘관이 불과 몇 시간 뒤에 마음이 바뀌어 전두환의 명령을 자발적으로 거부하고 항명하였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다. 항명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외압에 의한 것이었다.  

 

6월민주항쟁에 관한 역사기록에서 오랜 기간 은폐되었던 항명사태의 진상은 1987년부터 3년 동안 주미한국대사관에서 정무참사관으로 근무한 정태익이 <조선일보> 2013년 12월 9일부에 실은 기사에서 드러났다. 정태익의 서술에 따르면, 전두환이 안보위기를 빌미로 장기집권을 하기 위해 친위군사정변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가 미국으로 전해졌을 때, 미국은 “주한미군에 배치된 각급 장교들을 통하여 한국에서 군사쿠데타는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된다는 메시지를 신속히 한국군의 각급 장교들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이것은 주한미국군사령관이 한국군 지휘체계를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런 내막을 살펴보면, 1987년 6월 20일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이 전두환의 시위진압출동명령을 거부한 항명사태는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이었던 윌리엄 리브시의 긴급명령에 따른 행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리브시는 전두환의 시위진압출동을 차단한 날로부터 닷새가 지난 1987년 6월 25일 전역하여 미국으로 돌아갔다. <사진 6>   

 

▲ <사진 6> 이 사진은 1987년 6월 24일 오후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 개스턴 씨거가 청와대에서 전두환을 만나 악수하는 장면이다. 전두환-씨거 회담은 90분 동안 진행되었다. 회담에는 당시 외무차관이었던 최광수와 당시 주한미국대사이었던 제임스 릴리가 배석하였다. 전두환-씨거 회담이 있었던 때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6월 24일 자정, 전두환은 야당지도자 김대중의 가택연금을 해제하면서, 그에 대한 사면복권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유혈진압을 감행하려고 광분하던 전두환이 갑자기 유화적인 태도로 돌변한 것은 미국이 씨거를 청와대에 보내 전두환을 강하게 압박하여 장기집권음모를 포기시켰음을 말해준다. 그보다 앞서 6월 19일 오전 10시 전두환은 청와대에서 진행된 비상대책회의에서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대를 출동시켜 6월민주항쟁을 진압하는 문제를 논의했고, 그날 밤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대를 출동시켜 6월민주항쟁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은 전두환의 시위진압출동명령을 거부하는 항명사태를 일으켰고, 전두환은 하는 수 없이 시위진압출동명령을 취소하였다. 이런 돌발적인 항명사태는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이었던 윌리엄 리브시의 긴급명령에 따른 행동이었다.     

 

그렇다면 6월 24일 오후 청와대에서 진행된 전두환-씨거 회담에서는 무슨 대화가 오갔을까? 전두환-씨거 회담이 있었던 때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6월 24일 자정, 전두환은 김대중의 가택연금을 해제하면서, 그에 대한 사면복권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유혈진압을 감행하려고 광분하던 전두환이 갑자기 유화적인 태도로 돌변한 것이다. 이런 태도돌변은 미국이 씨거를 청와대에 보내 전두환을 강하게 압박하여 장기집권음모를 포기시켰음을 말해준다. 1987년 6월 29일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였던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을 통해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하고, 김대중의 사면복권 및 시국관련 구속자들의 석방을 공약한 특별선언을 발표한 것은 6월민주항쟁에 총궐기한 각계각층 군중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대민타협이 아니라 미국의 강한 압박에 무릎을 꿇은 대미굴종이었다. 

 

미국이 전두환의 장기집권음모를 포기시키고 김대중을 사면복권하도록 비상조치를 발동하여 전두환의 유혈진압기도를 극적으로 차단한 까닭은 항쟁에 나선 시위군중의 안전을 지켜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6월민주항쟁이 위수령과 군대출동으로 진압되기는커녕 더욱 강하게 폭발하면서 한국 군부가 친전두환파와 반전두환파로 분렬되어 내전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내전위험을 직감한 미국은 전두환의 장기집권음모를 포기시키고 김대중을 사면복권하도록 강하게 압박하는 비상조치를 발동하여 6월민주항쟁의 불꽃을 꺼버렸던 것이다. 각계각층 군중 500만 명이 총궐기하였으나, 민주항쟁의 투쟁력량이 민주변혁의 추진동력으로 전화, 발전되지 못하고 유실된 근본원인은 미국이 한국의 정치와 군사를 틀어쥐고 강력한 지배권을 행사하는 대미예속체제에 있었다. 

 

1986년 2월 22일 필리핀에서 민주항쟁이 일어났을 때, 독재자 마르코스가 필리핀군을 출동시켜 유혈진압을 감행하려고 하자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은 필립 하빕을 자신의 특사로 마닐라에 급파하여 마르코스에게 당장 하야하고 미국으로 망명하라고 압박했고, 마르코스는 그 압박에 굴종하였다. 미국의 막후공작으로 필리핀 2월민주항쟁의 불꽃은 사흘 만에 꺼지고 말았다. 

 

영원히 잊지 못할 민주항쟁은 미국의 장기지배에서 벗어나 자주권을 갖지 못하면 민주주의도 실현할 수 없고, 통일국가도 건설할 수 없다는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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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환성·김광일 PD 1주기 이후 관심 끊겨"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9/06/16 12:56
  • 수정일
    2019/06/16 12:56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7월 13일 2주기 추모행사 "우리라도 되살려야 한다"…재능기부 제작된 단편영화 상영

[미디어스=윤수현 기자] #5. 환성 사무실 입구

박환성 “우리가 여기에 모인 이유. 우리 모두가 지금 겪고 있는 방송 불공정 문제, 저작권 문제, 방송사 갑질, 폭행 사건 등 너무 많은 일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하려고 불렀어. 우리가 남아공에서 돌아오면 그때부터 시작이야. 내가 방송 일을 그만두는 한이 있어도… 다 바로 잡을 거야”

김광일 “저도 남아공 다녀와서 참여할게요. 지금 참여하지 않으면 변화하기도 어려울 것 같으니까요”

7월 13일 고 박환성·김광일 PD의 2주기 추모 행사 ‘멈춘 시간’이 열린다. 추모 행사에서는 고 박환성·김광일 PD가 아프리카로 출국하기 2일 전 있었던 일을 다룬 단편영화가 상영된다. 단편영화에는 독립 PD의 열악한 환경, EBS의 제작지원비 상납 요구 상황이 상세히 담겨있다. 김광일 PD의 부인인 오영미 작가는 “이제 고 박환성·김광일 PD에 관한 관심이 줄어들고 있지만, 우리라도 이분들을 되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추모 행사는 7월 13일 오후 6시 부평 문화사랑방에서 개최된다. 행사 1부에서는 추도식 및 단편영화 상영 및 간담회가, 2부에서는 부활 8대 보컬이었던 가수 정단·하림·비쥬·성용 등의 공연이 열린다. 가수들은 고 박환성·김광일 PD가 즐겨 부르던 노래로 공연을 할 계획이다.

▲단편영화 '멈춘 시간' 촬영 현장 (사진=오영미 작가)

추모 행사와 단편영화는 고 박환성·김광일 PD의 죽음을 기리는 이들의 재능 기부로 이뤄진다. 추모 행사의 기획자인 가수 성용은 “현재 행사나 영화 촬영은 별다른 후원 없이 유족의 사비로 진행된다”면서 “가수, 제작진, 배우 등 많은 분이 재능 기부를 했다. 영화 촬영 및 행사에 참여하는 분 중 돈을 받고 온 사람들은 없다. 이번 행사의 취지를 이해해 도와주고 싶다는 분들만 모셨다”고 밝혔다.

성우 겸 배우 이규화 씨는 단편영화 '멈춘 시간'에서 박환성 PD 역할을 연기한다. 이규화 씨는 KBS 외화드라마 X파일의 멀더 역을 맡은 바 있다. 김광일 PD역은 tvN 푸른거탑에 출연한 배우 주효준 씨다. 

고 박환성 PD는 지난해 다큐멘터리 ‘야수와 방주’를 찍기 위해 EBS에 제작비 2억 1000만 원을 신청했다. EBS는 1억 4000만 원만 지원했다. 제작비가 부족한 상황이었지만 ‘야수와 방주’는 RAPA의 ‘2017년 차세대 방송용 콘텐츠(UHD) 제작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1억 2000만 원을 추가 지원받게 되었다. 이후 EBS는 박환성 PD에게 “RAPA와의 계약서에 지적 재산권을 방송사업자에 양도할 수 있다는 문구를 넣어라”고 요구했다. 자신들이 다큐멘터리 저작권을 소유하겠다는 것이었다.

EBS는 박환성 PD에게 제작지원금의 40%를 간접비로 납부할 것을 요구했다. 박환성 PD가 응하지 않자 EBS는 지원금을 주지 않는 것이 계약 해지 사유에 들어간다는 식으로 말했다. 또 EBS는 제작비 정산 내역, 촬영 원본을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박환성 PD는 제작지원금 납부 요구에 응하고 공정거래위원회에 민원을 넣었다. 그 후 촬영을 위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떠났고 사고를 당했다. 사고 당시 박환성·김광일 PD는 운전기사를 고용하지 않고 직접 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박환성 PD 유족은 EBS 임직원 2명에 대해 업무 방해와 명예훼손을 적용해 형사 고소장을 제출했다. 하지만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리됐다. 박환성 PD가 남아공으로 떠나기 전 제출한 공정거래위원회 민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5월 열린 <고 박환성 PD가 제기한 EBS의 불공정행위 진상규명을 촉구한다> 기자회견 (사진=미디어스)

두 독립 PD의 죽음에 책임을 지는 사람은 없었다. 박환성·김광일 PD에게 제작비 상납을 요구한 PD는 유족에게 별다른 사과를 하지 않았다. 우종범 전 EBS 사장은 박환성 PD의 유족·언론개혁시민연대와 함께 ‘EBS 협의체’를 만들어 이 사건의 대책을 강구했다. 하지만 장해랑 사장이 취임한 후 협의체는 멈췄다. 

독립PD협회가 장해랑 사장에게 사과를 요구했지만, 장 사장은 “시스템에 의한 문제이지 두 임직원이 사과할 일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장해랑 사장은 고 박환성·김광일 PD 1주기 때 초청장을 받았지만 참석하지 않았으며, 화환도 보내지 않았다. 반면 이효성 방송통신위원장, 류지열 한국PD연합회장, 양승동 KBS 사장, 최승호 MBC 사장, 박정훈 SBS 사장은 화환을 보냈다. 장해랑 사장 이후 임명된 김명중 사장 역시 유가족에게 사과하지 않고 있다.

오영미 작가는 EBS가 고 박환성·김광일 PD의 죽음을 외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오영미 작가는 13일 독립영화 ‘멈춘 시간’ 촬영장에서 미디어스와 만나 “EBS에서 우리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한 적이 없다”면서 “두 PD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 EBS의 사과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했다.

오영미 작가는 대중의 관심이 사그라지고 있다고 밝혔다. 오영미 작가는 “사고가 났을 때는 사람들의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1주기가 지나고 나선 아무도 이번 사건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서 “1주기 당시 찾아온 정치인, 언론들은 이후 연락이 없었다. 너무 힘들었던 시간이었다”고 밝혔다. 

오영미 작가는 “두 PD의 죽음은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오랫동안 회자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서 “사고가 발생했을 당시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관심을 가져줄 거냐’고 발언한 적 있다. 실제로 그 이후 조용해졌고, 다들 그냥 넘어간 것 같다”고 말했다.

박환성 PD의 동생 박경준 씨는 “대중의 관심사가 바뀌자 정치권에서 사건 해결에 대한 특별한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박경준 씨는 “이번 추모 행사는 두 PD가 잊히지 않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추모제 내용 또한 이들을 기억하고자 하는 내용이 주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송규학 전 한국독립PD협회 협회장은 “장해랑 사장은 KBS PD때 후배들이 존경하는 선배였다. 많은 독립 PD들은 장해랑 사장이 EBS 사장으로 오면 뭔가 풀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면서 “그런데 막상 취임하고 나니까 입장이 달라졌다. 유가족이 사과와 재발 방지를 요구하자 장해랑 사장은 ‘사내 직원들이 원하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했다.

단편영화 ‘멈춘 시간’은 다음과 같은 대사로 마무리된다.

#14. 환성 사무실 옥상

광일 “선배님, 우리도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는 날이 언젠가 오겠죠?”

환성 “광일아… 지금은 좀 힘들겠지. 그래도, 곧 바뀔 거야. 안 되면 뭐 까짓거 우리가 한번 바꿔보자!”

광일 “그럴 수 있겠죠?”

환성 “당연하지. 자, 마시자!”

윤수현 기자  melancholy@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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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배워가는 '사는 집'의 계급

어릴 때부터 배워가는 '사는 집'의 계급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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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와 단독·다세대 주택이 섞여 있는 서울 시내의 모습. / 우철훈 선임기자

아파트와 단독·다세대 주택이 섞여 있는 서울 시내의 모습. / 우철훈 선임기자

 

서울 서대문구에 사는 직장인 윤일환씨(39)는 올봄 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했다. 준공된 지 오래됐지만 넓이에 비해 가격이 싸다는 장점을 보고 첫 내 집 장만의 꿈을 이뤘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아내와 초등학생 아이의 불만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입주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바로 옆 대규모 아파트단지와 비교가 된다는 얘기였다. 학생 대부분이 대형 아파트단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아파트에 살지 않는 소수 학생은 무리에 끼기조차 힘들었다.

그나마 윤씨의 딸은 집에 별다른 경제적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대놓고 따돌림당하는 처지는 아니었다. 윤씨 아파트 주변에 있는 다세대주택에서 사는 학생들은 보다 노골적인 따돌림을 당한다는 얘기를 듣고 윤씨는 헛웃음이 나왔다. 윤씨는 “우리 애가 ‘걔는 며칠이 지나도 옷을 안 갈아입어’라고 말하길래 야단치다가 얘기를 들어보니 참 가관이었다”며 “심지어는 그 대형 아파트단지에 사는 애들 중에서도 집 평수에 따라 끼리끼리 갈라진다는 얘길 듣고 도대체 어디로 이사를 가야 하나 싶었다”고 말했다. 

주거빈곤에 따른 심리적 위축 
살고 있는 집이 거주자의 사회·경제적 위치를 말해준다는 얘기는 이미 광고에도 공공연히 등장했을 정도여서 차별적인 언어로 보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이런 차별이 적어도 체면을 차리느라 대놓고 말하길 꺼리는 어른에 비해 어린이와 청소년들 사이에서 더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것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주거의 양극화가 더욱 심각해지면서 어린 시절부터 계급의 격차를 느끼는 경우는 더욱 복잡하고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특히 주거빈곤을 겪는 어린이들은 최소한의 적정조건만 갖춰진 곳에서 생활했을 경우 차별에 따른 심리적 위축을 훨씬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서울 강북구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박모씨(42)는 같은 아파트단지 안에서도 건물의 ‘높이’ 하나로 아이들이 격차를 바로 느낀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다. 박씨가 자주 방문하는 임대아파트는 분양된 아파트와 같은 단지로 분류되지만 다른 동보다 층수가 낮다. 임대아파트 입주민 중에서도 박씨가 들러야 하는 가구는 한부모가정이나 조손가정일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박씨는 단어 하나하나를 주의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정작 아이들은 차별적인 표현에 익숙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게임마다 ‘부모 없는’이란 욕이 기본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만난 그 아이는 한부모가정 애인데 자기도 그런 욕은 거리낌없이 쓸 정도로 신경쓰지 않으면서 ‘너는 집 없잖아’라는 욕이 더 기분 나빴대요.” 박씨가 전해 들은 차별의 언어는 ‘크고 높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작고 낮은 임대’와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우월을 주장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과거 담당하던 지역 역시 영세한 가정이 적지 않았으나 동네 전체의 경제적 수준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편이었다. 극심하게 대비되는 주거환경이 뒤섞인 동네일수록 차이가 차별로 직결되는 경험을 많이 봐왔다는 게 박씨의 얘기다. 

이런 현상이 아동 주거빈곤 문제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모습은 지하·반지하 주택이 서울에 주로 모여 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집의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 중 지표면보다 낮은 부분이 50% 이상을 차지하면 지하, 50%에 미달하면 반지하로 분류된다. 2017년 국토교통부의 주택실태조사를 보면 반지하 가구로 분류되는 집은 전체 주택의 2% 남짓이다. 그러나 지역별 분포를 보면 수도권, 특히 서울에 크게 집중되어 있다. 전체 반지하 주택의 60%가 서울에 있고, 95%는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에 있다. 전국에서 0.2% 수준인 지하 주택도 서울과 경기에 각각 절반씩 몰려 있다.

“친구 초대해본 적 없다” 66.9% 
아동 가구로만 초점을 맞춰도 결과는 비슷하다. 아동이 있는 전체 가구 중 지하·반지하를 비롯한 주거빈곤가구의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도 서울(14%)이다. 광역시 중에서는 인천(9.6%)만 아동 주거빈곤가구 비율의 전국 평균인 9.4%보다 높았고, 다른 광역시들은 모두 평균보다 낮았다. 이외에 전국 평균보다 아동 주거빈곤가구의 비율이 높았던 지역은 제주(12.3%)·강원(10.6%)·전남(10.2%) 세 곳뿐이어서 도시와 농촌 안에서도 양극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보였다. 조사를 진행한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관계자는 “도시 중에서는 일찍부터 극심한 과밀화를 겪은 서울과 인천 등 수도권 대도시에서 아동 주거빈곤 비율이 높았고, 농촌지역에서는 상·하수도 같은 도시기반시설이 부족해 주민 전체가 주거상황이 열악한 곳에서 이 비율이 높았다”고 설명했다.

현실적으로 농촌지역에서는 주거빈곤이 나타나더라도 주변 이웃과의 격차는 크지 않은 반면,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밀집한 주거지역 안에도 여러 층위로 나누어지기 때문에 실제 어린이들이 체감하는 격차는 더 커질 수 있다. 특히 빈곤이 단순히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수준에만 그치지 않고 또래집단 안에서의 인간관계 형성에까지 영향을 미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경기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진행한 아동 주거빈곤 조사에서도 주거빈곤가구 아동은 ‘친구를 집에 초대해본 적이 없다’고 응답한 비율이 66.9%였다. 일반가구 아동의 36.2%와 큰 차이가 난다. ‘생일잔치 등의 이벤트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비율도 주거빈곤가구 51.7%, 일반가구 27.6%로 차이를 보였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어도 열악한 주거환경 때문에 이뤄질 수 없는 희망사항으로 남는 현실이다.

당사자인 아동의 입장에서 부동산 가격 격차를 비롯한 빈부격차 문제의 근원까지 따질 수는 없어도 피부로 와닿는 이 문제가 자라면서 점차 쌓여가는 절망감과 우울감의 한 원인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서울 은평구의 주거빈곤가구에 살고 있는 초등학생 정희수군(11·가명)의 걱정은 자신의 앞날까지 향해 있다. “부모님은 ‘너만 열심히 하면 좋은 데서 살 수 있어’라고 말씀하시거든요. 기죽지 말고 힘내라는 의미라는 건 아는데, 제가 보기에도 우리 부모님 열심히 사세요. 그런데도 이사를 자주 해봤자 비슷비슷한 집이었어요. 제가 과연 벗어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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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6151035011&code=940100#csidx2cf6876e0d83ae2baf3455b4097e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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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동맹도 민족을 앞설 수 없다...금강산관광, 개성공단 재개”

615공동선언 19주년 기념 ‘민족자주대회’, 미대사관 에워싸는 평화의 손잡기 행사 열려

김동현 기자 abc@vop.co.kr
발행 2019-06-15 19:59:38
수정 2019-06-15 20: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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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남측위원회가 6.15공동선언발표 19주년을 기념해 15일 오후 5시 광화문 북측광장에서 ‘민족자주대회’를 하고 있다.2019.06.15
6.15남측위원회가 6.15공동선언발표 19주년을 기념해 15일 오후 5시 광화문 북측광장에서 ‘민족자주대회’를 하고 있다.2019.06.15ⓒ김철수 기자

‘미국의 승인은 필요없다. 한반도 평화와 번영, 통일을 우리 민족의 힘으로! 시민의 힘으로 열어내자!’

무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나서 했던 발언들을 하나씩 읽어내려갔다. 사회각계 단체 대표들이 벽돌을 하나씩 쌓았다. 바닥부터 차근차근 올라간 벽돌은 이내 문구를 드러냈다.

배경화면에는 2017년부터 지금까지 남과 북이 만나는 장면을 담은 영상과 사진이 지났고 무대에선 ‘단일기’가 휘날렸다. 이내 앞으로 큰 현수막이 내려왔다. 광화문광장에 앉은 시민들이 외쳤다.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

6.15남측위원회가 6.15공동선언발표 19주년을 기념해 15일 오후 5시 광화문 북측광장에서 ‘민족자주대회’를 개최했다.

6.15남측위원회가 6.15공동선언발표 19주년을 기념해 15일 오후 5시 광화문 북측광장에서 ‘민족자주대회’를 마친 뒤 미 대사관 평화손잡기를 하고 있다.2019.06.15
6.15남측위원회가 6.15공동선언발표 19주년을 기념해 15일 오후 5시 광화문 북측광장에서 ‘민족자주대회’를 마친 뒤 미 대사관 평화손잡기를 하고 있다.2019.06.15ⓒ김철수 기자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은 대회사를 통해 “분단역사상 첫 정상회담의 결실로 탄생한 6.15공동선언은 통일의 주인은 우리 민족이라고 밝힌 선언”이라며 “이후 10.4선언에 이어 심각한 전쟁위기를 넘고 평화통일의 전기가 될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북미정상회담까지 열렸다”고 밝혔다.

이 상임대표는 “미국은 싱가폴 북미정상선언을 이행하지 않고 있으며, 남북간 합의 이행을 사사건건 가로막고 있다”면서 “미국의 간섭과 개입을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어떤 동맹도 민족을 앞설 수 없다”며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자”고 호소했다.

그는 남북 당국에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해달라고 호소하면서 이산가족 상봉, 평화군축, 금강산관광 재개, 개성공단 재가동 등 남북간 합의 조항을 모두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15남측위원회가 6.15공동선언발표 19주년을 기념해 15일 오후 5시 광화문 북측광장에서 ‘민족자주대회’를 하고 있다.2019.06.15
6.15남측위원회가 6.15공동선언발표 19주년을 기념해 15일 오후 5시 광화문 북측광장에서 ‘민족자주대회’를 하고 있다.2019.06.15ⓒ김철수 기자

이종덕 개성공단기업협회 부회장은 “비핵화의 첫 단추가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재개”라면서 “공단재가동 사전 점검을 위해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이 방북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그는 남북 당국에 조속히 방북을 승인해 달라고 요구했다.

6.15공동선언실천민족공동위원회 남측위원회, 북측위원회, 해외측위원회는 이날 공동호소문을 채택, 발표했다. 애초 남측위원회가 남북해외공동행사를 제안했으나 북측위원회에서 한반도 정세와 남북관계를 고려, 공동행사가 어렵다는 입장을 전해오면서 공동호소문을 발표하기로 한 것.

참가자들은 집회를 마치고 미대사관을 한바퀴 둘러싸는 ‘미대사관 평화의 손잡기’ 행사를 진행했다. 광화문 북측광장을 출발한 참가자들은 단일기와 피켓, 현수막, 각종 선전물을 들고 행진하며 대열의 머리와 꼬리를 이어 건물이 있는 블록은 완전히 에워쌌다.

참가자들은 “미국은 간섭 말라”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 “개성공단 금강산관광 재개하라” 등의 구호와 함성을 외치며 행사를 마감했다.

6.15남측위원회가 6.15공동선언발표 19주년을 기념해 15일 오후 5시 광화문 북측광장에서 ‘민족자주대회’를 하고 있다.2019.06.15
6.15남측위원회가 6.15공동선언발표 19주년을 기념해 15일 오후 5시 광화문 북측광장에서 ‘민족자주대회’를 하고 있다.2019.06.15ⓒ김철수 기자
6.15남측위원회가 6.15공동선언발표 19주년을 기념해 15일 오후 5시 광화문 북측광장에서 ‘민족자주대회’를 마친 뒤 미 대사관 평화손잡기를 하고 있다.2019.06.15
6.15남측위원회가 6.15공동선언발표 19주년을 기념해 15일 오후 5시 광화문 북측광장에서 ‘민족자주대회’를 마친 뒤 미 대사관 평화손잡기를 하고 있다.2019.06.15ⓒ김철수 기자

한편 이날 6.15남측위원회는 ‘민족자주대회’에 앞서 광화문광장에서 통일박람회를 개최했다. ‘615어린이 통일놀이터’ ‘백두산 통일기행단 페이스페인팅’ ‘가자! 금강산 희망엽서쓰기’ 등의 부스가 마련됐다.

진보대학생넷, 청년민중당, 한국청년연대는 이날 용산 전쟁기념관 앞에서부터 미대사관까지 6.15선언발표 19주년 자주평화 한반도 만들기 청년학생 행진을 벌였다.

6.15남측위원회가 6.15공동선언발표 19주년을 기념해 15일 오후 5시 광화문 북측광장에서 ‘민족자주대회’를 마친 뒤 미 대사관 평화손잡기를 하고 있다.2019.06.15
6.15남측위원회가 6.15공동선언발표 19주년을 기념해 15일 오후 5시 광화문 북측광장에서 ‘민족자주대회’를 마친 뒤 미 대사관 평화손잡기를 하고 있다.2019.06.15ⓒ김철수 기자
진보대학생넷, 청년민중당, 한국청년연대가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미 대사관 앞에서 6.15선언발표 19주년 자주평화 한반도 만들기 청년학생 행진 미국이 문제다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들은 용산 국방부에서 행진을 시작했다.
진보대학생넷, 청년민중당, 한국청년연대가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미 대사관 앞에서 6.15선언발표 19주년 자주평화 한반도 만들기 청년학생 행진 미국이 문제다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들은 용산 국방부에서 행진을 시작했다.ⓒ김철수 기자

6.15공동선언 발표 19주년 6.15공동선언실천 민족공동위원회 공동결의문

우리는 역사적인 남북선언들의 기치를 높이 들고 평화번영의 시대로 나아가려는 겨레의 지향과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시기에 6.15공동선언발표 19돌을 맞이한다.
민족사의 새 시대를 연 2000년 6월 평양상봉과 공동의 통일원칙과 목표, 실천방도들을 제시한 6.15공동선언의 발표는 불신과 대결로 얼룩진 남북관계를 화해와 단합의 관계로 전환하고 우리 민족의 통일실현을 획기적으로 전진시킨 일대 사변이었다.
6.15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거세찬 흐름속에서 땅길, 하늘길, 바다길이 이어지고, 삼천리 강토에는 화해와 단합의 기운이 굽이치게 되었으며, 우리 겨레의 조국통일 운동은 해내외의 각계층이 폭넓게 참가하는 전 민족적 운동으로 확대강화되었다.
지난해 6.15공동선언의 기본정신을 계승한 역사적인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이 채택되어 남북관계에서 극적인 전환이 실현된 것은 전쟁위기로 치닫던 한반도에서 조국통일을 위한 새로운 출발을 선언한 뜻깊은 결실이다.
남북공동선언 이행의 앞길에는 여전히 시련과 난관이 있지만, 오늘의 난국을 과감히 타개하고 이 땅의 공고한 평화를 실현하며 자주통일의 새 역사를 써 나가려는 겨레의 의지는 더욱 굳건하다. 
6.15공동선언실천 민족공동위원회는 역사적인 남북선언들의 기치 밑에 굳게 단결하여 오늘의 시련과 난관을 뚫고 평화와 번영, 통일의 새시대를 앞당기자는 의지를 안고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우리는 민족의 총의가 집약된 역사적인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을 고수하고 이행하기 위한 전 민족적 행동을 더욱 힘차게 벌여 나갈 것이다.

역사적인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은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의 계승이며 우리 겨레가 조국통일의 그날까지 변함없이 지켜 나가야 할 민족공동의 통일대강이다.
지나온 남북관계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민족의 자주통일대강인 남북선언들을 철저히 이행해 나가면 조국통일의 큰 전진을 가져올 수 있지만 반통일의 역풍에 주저앉으면 불신과 대결의 악순환이 되풀이 된다.
우리는 남북선언들을 철저히 이행하는 길에 자주통일과 평화번영의 밝은 미래가 있다는 신념으로 우리 겨레가 살고 있는 모든 곳에서 선언 이행의 목소리를 높여 나갈 것이다.
우리는 선언 이행이 빈말이 아니라 과감한 실천으로 이어지도록 적극 추동해 나갈 것이며, 6.15시대에 이룩된 모든 성과물들을 공고히 하고 평화번영의 시대에 맞게 그것을 더욱 확대 발전시켜 온 겨레가 남북선언들의 성과를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다.

2. 우리는 민족자주의 기치를 높이 들고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며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번영의 시대를 개척하는데 앞장설 것이다.

우리는 역사적인 남북선언들의 철리인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가 결정한다’는 민족자주의 원칙을 깊이 새기고 확고히 지켜 나갈 것이다.
우리는 민족내부 문제, 남북관계 문제에 대한 외세의 간섭과 전횡, 민족자주정신에 위배되는 온갖 사대적, 외세의존적 정책을 반대하고 관계개선의 좋은 분위기가 평화와 통일의 결실로 이어지도록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나갈 것이다.
남북선언의 이정표를 따라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길을 다시 열고, 남북사이의 철도와 도로를 하나로 연결시켜 자주통일과 공동번영의 대 통로를 넓혀나가는 그 날을 앞당기기 위하여 적극 노력할 것이다.

3. 우리는 온 겨레의 단합된 힘으로 동족대결과 군사적 긴장을 고조하는 행위들에 반대해 싸워 나갈 것이다.

민족의 화해와 단합, 평화와 통일을 달가워하지 않는 반통일, 반평화세력들은 남북관계를 판문점선언 이전 시기로 되돌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우리는 겨레의 통일지향과 역사적인 남북선언들의 정신에 배치되는 온갖 군사적 적대행위와 동족 사이의 불신과 반목, 대결을 부추기는 행위를 저지하기 위한 운동을 강력히 전개해 나갈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수십년간 이 땅에 뿌리내린 분열과 대결, 전쟁의 적폐들을 말끔히 청산할 것이다.

4. 우리는 남과 북, 해외의 각계각층 단체들과 연대연합을 실현하고 전 민족적인 통일운동을 더욱 강화해 나갈 것이다.

남과 북, 해외의 각계각층 단체들과 인사들의 연대연합을 실현하는 것은 전 민족적인 통일 분위기를 고조하고 민족의 단합과 통일운동을 강화하는 필수적인 과제이다. 우리는 남과 북, 해외의 각 계층별, 부문별, 지역별 단체들 사이의 다양한 연대활동을 통하여 남북선언 이행 열기가 온 삼천리 강토와 우리 겨레가 살고 있는 지구상의 모든 곳에서 뜨겁게 맥박 치도록 할 것이다.
우리는 남북선언들을 지지하는 해내외의 각계층과 굳게 손잡고 민족의 화해와 단합을 도모하고 선언 이행을 위한 전 민족적 운동을 힘차게 전개해 나갈 것이다.

8천만 겨레여!
민족의 휘황한 앞길을 환히 밝히는 민족공동의 통일대강이 있고 그 어떤 시련과 난관도 이기고 이를 실천해 나갈 우리 겨레의 뜨거운 마음이 있어 평화롭고 번영할 통일조국의 아침은 반드시 밝아 오고야 말 것이다.
우리 모두 남북공동선언의 기치를 높이 들고 평화와 번영, 통일의 전성기를 힘차게 열어 나가자!


2019년 6월 15일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6.15공동선언실천 북측위원회
6.15공동선언실천 해외측위원회

김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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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생명체 나타났던 내 고향, 지금은 천국 같아요

[삽질의 종말 26] 창벽 앞 모래톱에 둥지 튼 새의 이야기

19.06.15 17:25l최종 업데이트 19.06.15 17:25l

 

4대강사업 조사·평가 기획위원회가 '금강과 영산강 보 처리 방안'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긴급 기획 '삽질의 종말'을 진행합니다. <오마이뉴스>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삽질>은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습니다.[편집자말]
우선 아래 사진을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금강에서 발견한 꼬마물떼새 새끼.
▲  금강에서 발견한 꼬마물떼새 새끼.
ⓒ 김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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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모습이 아닙니다. 며칠 전에 오마이뉴스 김종술 시민기자가 금강에서 찍은 내 친구의 아이들 모습입니다. 녀석들은 엄마한테 잘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사람들의 눈에 띄자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죽은 체를 했다고 하더군요.

나를 보고 감탄사를 날린 이상한 손님들

바로 아래 사진은 며칠 뒤에 이렇게 세상에 나올 내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금강 창벽의 모래톱에서 발견한 꼬마물떼새알.
▲  금강 창벽의 모래톱에서 발견한 꼬마물떼새알.
ⓒ 김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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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너무 예쁘다!" 

지난 4일 금강에 소풍을 온 사람들이 내 아이들을 품고 있는 나를 보며 한 말입니다. 나를 몰래 찍은 화면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탄성 소리는 멀리서 알을 품고 있는 나에게도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우리에게는 경계의 대상이었던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이런 감탄사는 나에게는 아주 생소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본 사람들은 특별했습니다. 이전에 모래톱을 찾아온 대부분 사람들은 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 먹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걷다가 우리 둥지를 위협하거나 훼손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조심했습니다. 아주 천천히 모래밭을 걸으면서 우리를 찾아다녔고 내 둥지 옆에 나뭇가지로 표시까지 해뒀습니다. 혹시 밟을 것을 우려한 것이겠지요. 

사람들은 나를 '꼬마물떼새'라고 부릅니다. 나는 최근 금강의 창벽 앞에 둥지를 틀고 3개의 알을 낳았습니다. 둥지도 정성스럽게 꾸몄습니다. 좁쌀만 한 모래알 수백 개를 입에 물고 와서 모래톱 위에 정성스레 지은 집입니다. 특히 많은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 모래이기에 번식하기에 딱 좋은 곳이기도 합니다. 10년 전 내가 태어난 곳입니다.

악몽 같았던 지난 10년

2008년에 태어난 나는 이곳에서 엄마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습니다. 수달과 쇠제비갈매기, 깝짝도요 친구들과 모래톱에서 함께했던 추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하지만 2010년 모래톱에서 동생을 키우던 부모님은 포클레인에 맞서 동생을 지키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뒤에 매년 금강을 찾았지만 고향은 고사하고 강줄기 어디에도 내가 안착할 모래톱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녹색으로 물든 강물에서 물고기가 죽어갔습니다. '큰빗이끼벌레'라는 이상한 생명체도 나타났습니다.

이 때문에 나는 지난 10년간 공사장과 주차장 등을 전전하며 새끼를 키웠습니다. 그곳은 불편했고 불안한 공간이었습니다. 번식에 실패한 해도 있었습니다. 번식에 대한 부담감을 안고 매년 여름을 보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10년 전에 금강에 무슨 일을 벌였는지는 잘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걸어다니며 먹이를 찾을 곳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새끼를 키울 고운 모래톱도 사라졌습니다. 얕은 물을 걸어다니며 먹이를 구해야 하는데 끼니를 채우는 게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80cm였던 수심이 4.5m로 변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창벽 앞 고향을 찾아온 까닭
 
 금강 창벽 아래 모래톱에서 꼬마물떼새가 알을 품고 있는 모습.
▲  금강 창벽 아래 모래톱에서 꼬마물떼새가 알을 품고 있는 모습.
ⓒ 김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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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난해 동남아시아에서 월동하고 돌아와 보니 금강의 곳곳에 넓은 모래톱이 생겼습니다. 나는 주저 없이 나의 고향 창벽을 찾았습니다. 이곳은 그야말로 나에겐 천국과 같습니다. 지난해 무사히 번식을 마치고 다시 이곳 모래톱을 찾아왔는데, 지난해보다 더 커져 있었습니다. 

4월 찾아온 뒤 1차 번식을 통해 3마리의 새끼를 길렀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번식지의 상황에 따라 매년 2~3차례 새끼를 낳아 키웁니다. 4월 이후 또 다른 두 가족이 창벽 앞의 모래톱을 찾아왔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는 또 다른 반가운 친구를 만났습니다. 10년 전 창벽에서 함께 지냈던 쇠제비갈매기입니다. 세종보 수문을 완전하게 열어둔 뒤에 새로 생긴 모래톱인데, 창벽 바로 위에 있습니다. 쇠제비갈매기는 이곳에서 번식을 준비하고 있는데, 지난해 월동지인 동남아에서 금강에 대한 소문을 듣고 다시 찾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각자 번식을 마치고 다시 남쪽으로 이동할 때 함께 가기로 약속했습니다. 월동지에서 깝짝도요 등 금강의 친구들도 찾아볼 계획을 세웠습니다. (관련 기사 : 10년만에 금강으로 돌아온 쇠제비갈매기 http://omn.kr/1ji94)
 
 비행중인 쇠제비갈매기
▲  비행중인 쇠제비갈매기
ⓒ 이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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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갑자기 강이 변한 것을 생각하면 오늘 같은 평화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다시 수심이 깊어지면 주차장과 공사장을 찾아다녀야 하겠지요. 이 때문에 창벽 앞의 평화가 지켜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랫동네 사람들은 다시 세종보에 물을 가두어 달라고 현수막까지 붙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우리들은 그들에게 생명 취급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 아주 이상한 손님들이 내 둥지를 찾은 것입니다. 경계를 철저히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을 만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알을 품듯이 희망을 품어 봅니다

하룻밤을 보내려는지 텐트를 치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우리와 공존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경험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니 과거 금모래가 흐르는 금강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무척 반가운 손님들입니다.

다시 모래톱에 번식을 하고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나 경계하는 일은 어쩌면 우리에게는 숙명 같은 일입니다. 모래톱과 맑은 물이 흐를 수 있다면 이런 숙명쯤은 충분히 견뎌낼 수 있습니다.
 
 금강 창벽 앞에서 1박 2일 소풍을 마치고 모래톱에 누워 기념 사진을 찍는 사람들.
▲  금강 창벽 앞에서 1박 2일 소풍을 마치고 모래톱에 누워 기념 사진을 찍는 사람들.
ⓒ 김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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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톱이 늘어나면서 나의 친구인 수면성 오리도 늘었습니다. 2016년 690개체였는데 2017년 1266개체에서 2018년에는 1453개체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10년 전 500마리 월동하던 황오리도 저와 함께 금강을 떠났었습니다. 그런데 2017년 7마리가 찾아왔고, 2018년에는 61마리로 늘었습니다. 모래섬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황오리에게도 희망이 생긴 것이지요.

이곳에 소풍 온 사람들에게 우리들의 서식처인 강변 모래톱을 지켜달라고 부탁하면 들어 줄 수 있을까요? 강변을 찾을 때는 우리가 새끼를 키울 수 있으니 조심해 달라고 하면 어떨까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10년 전에 일어난 강의 변화로 겪은 고통은 또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을 보면서 다시는 우리의 둥지가 썩은 물에 잠기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어봅니다. 내가 지금 품고 있는 세 아이의 희망을 품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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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힘으로 미국에 맞서자” 미국규탄대회 열려

“우리 민족의 힘으로 미국에 맞서자” 미국규탄대회 열려
 
 
 
박한균 기자 
기사입력: 2019/06/15 [20:0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6.15공동선언 발표 19주년 15일, 오후 2시 미대사관 앞에서 ‘평화협정 체결! 미군철수! 민족자주 실현! 미국규탄대회’가 열렸다.     © 자주시보, 박한균 기자

 

▲ 6.15공동선언 발표 19주년 15일, 오후 2시 미대사관 앞에서 ‘평화협정 체결! 미군철수! 민족자주 실현! 미국규탄대회’가 열렸다.     © 자주시보, 박한균 기자

 

▲ 6.15공동선언 발표 19주년 15일, 오후 2시 미대사관 앞에서 ‘평화협정 체결! 미군철수! 민족자주 실현! 미국규탄대회’가 열렸다.     © 자주시보, 박한균 기자

 

▲ 지창영 평화협정운동본부 집행위원장, 오승철 민중민주당 학생위원회 위원장.     © 자주시보, 박한균 기자

 

“미국이 아닌 역사를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 민족의 힘을 믿고 미국과 당당히 맞서자”

 

6.15공동선언 발표 19주년 15오후 2시 미대사관 앞에서 평화협정 체결미군철수민족자주 실현미국규탄대회가 열렸다.

 

대회는 민중민주당 학생위원회 학생들의 ‘우리 하나 되어’ 율동 공연으로 시작되었다.

 

첫 발언자로 나선 지창영 평화협정운동본부 집행위원장은 “자이툰 부대를 전격 방문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눈물을 훔쳤던 노무현 대통령을 생각했다. 정의롭지 못한 전쟁인 줄 알면서도 미국의 요구 때문에 파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 나라의 운명이었다. 국가 운영을 책임진 대통령이었기에 하기 싫은 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회상했다.

 

이어 지 위원장은 “지금 청와대와 문재인 대통령의 심정도 이와 같을 것”이라면서 “돌이켜보면 문재인 대통령은 갖은 노력을 해왔다. 북미관계가 전쟁 전야로 치닫던 2017년 7월 1일 워싱턴에서 열린 동포간담회에서는 ‘남북관계에서 우리가 운전석에 앉아 이끌어 나가겠다’고 했고 베를린 연설에서는 ‘평화협정을 추진하겠다’라고도 했으며 2018년에는 평양 시민들에게 감동적 연설까지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북에는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협상장에 이끌어 낸 우리 민족이 있고 남에는 적폐 정권을 끌어내린 촛불 민중이 있다. 미국을 두려워하지 말고 역사를 두려워해야 한다. 당당히 미국과 맞서 달라”고 호소했다.

 

두 번째 발언에 나선 오승철 민중민주당 학생위원회 위원장은 “미국은 일장기를 내리고 제국주의의 성조기를 띄우며 외세에 빌붙어 먹던 이들을 그대로 등용했다”면서 “말로는 평화를 이야기하며 ‘리비아식’이나 ‘불량국가’니 하며 우리 민족에 대한 적대 정책을 이어오고 있는 것 또한 미국이다. 이 나라를 바로 세울 주체는 우리 민중이다. 우리가 미군 철거와 수구 청산의 들불을 일으켜 조국통일로 나아가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참가자들은 노래극단 ‘희망새’의 노래 공연이 끝난 후 한미당국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전달하기 위해 청와대로 행진했다.

 

박교일 자주평화통일실천연대 대표는 참가자들을 대표해 “6.12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직후 미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중단한 한미합동군사연습은 아직도 이름만 바꿔 진행되고 있다. 미국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모든 대북적대 행위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 우리는 민족자주 정신에 위배되고 남북선언 이행을 방해하는 모든 세력에 맞서 투쟁할 것”이라는 내용의 ‘6.15공동선언 19주년, 한미당국에 보내는 공개서한’을 낭독했다. 

 

▲ 민중민주당 학생위원회 학생 율동 공연과 노래극단 희망새 노래공연.     © 자주시보, 박한균 기자

 

▲ 6.15공동선언 19주년, 한미당국에게 공개서한을 전달하러 청와대로 행진하고 있다.     © 자주시보, 박한균 기자

 

▲ 6.15공동선언 19주년, 한미당국에게 공개서한을 전달하러 청와대로 행진하고 있다.     © 자주시보, 박한균 기자

 

▲ 6.15공동선언 19주년, 한미당국에게 공개서한을 전달하러 청와대로 행진하고 있다.     ©자주시보, 박한균 기자

 

▲ 6.15공동선언 19주년, 한미당국에게 공개서한을 전달하러 청와대로 행진하고 있다.     © 자주시보, 박한균 기자

 

▲ 6.15공동선언 19주년, 한미당국에게 공개서한을 전달하러 청와대로 행진하고 있다.     © 자주시보, 박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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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정신 못 차린 한미당국: 정상회담은 조문·친서에서 오지 않는다

  • 김광수 정치학 박사(북한정치 전공)
  • 승인 2019.06.14 13:22
  • 댓글 1

문재인 정부는 부쩍, 그것도 아주 자주 6월 말로 예정되어 있는 한미정상회담 이전 원 포인트 남북정상회담 분위기 고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그것도 해외순방 중에서도 ‘물리적으로 6월이 불가능하지 않다’며 희망적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고, 이에 주무부처인 통일부는 성사를 위해 안간힘을 쓰는 듯하다. 더불어 정치인들과 정부에 우호적인 대북전문가들도 호응하고, 일부 언론들은 그 방향에서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더해서 김여정 부부장을 통한 판문점까지의 조문사절단을 두고는 ‘절묘한’ 조문예의라며 이는 곧 남북관계 회복의 신호탄으로까지 희망해낸다.

결론부터 말하면 번지수를 잘 못 짚어도 한 참 잘못 짚었다. 정상회담이 그냥 그렇게 만들어지는 정치적 이벤트가 아니라면, 정상회담은 정상회담이 성립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져야만 가능한 것이다.

▲ 사진 : 뉴시스

그런데도-이 이치나 원리를 모르지 않을 많은 사람들이-왜 갑자기 6월이 가기 전에 남북정상회담이 열려야 한다고 군불을 지피고 있는 것일까? 추측은 뭔가 그래야만 하는 절박한 이유가 있다는 말인데, 그것은 아마도 한미정상회담 전에 남북정상회담이 열려야 된다고 하는 정치적 판단때문일 게다. 남북→한미→북미회담으로 이어지는 시퀀스로 똑똑히 재미를 봤기 때문이다. 연동하면 6월 중순 남북→6월 말 한미→가을 북미정상회담의 경로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말 그런 그림들을 관료들이 그리고 있었다면 ‘열릴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이런 것들을 연구 분석하고 이를 대통령께 잘 보고 드리고 조언해야 한다. 그냥 타이밍적으로나 정치적 의미로 볼 때 지금 해야되니 그냥 군불 때는 식의 ‘정치화’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스럽다는 말이다.

이른바 위와 같이 노력은 전혀 없이(식량지원 등과 같은 노력이 노력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그런 노력과 정상회담 성사의 필요충분조건은 다르다는 것을 강조) 트럼프도 김정은 위원장으로부터 축전을 받았고, 트럼프도 이를 ‘아주 멋진 소식’으로 치켜세우니까 북미관계도 뭔가 새로운 흐름이 만들어질 수 있는 느낌을 받고, 이를 소망적 사고로 확대해 남북관계도 뭔가 이뤄질 것만 같은 그런 정세인식을 했다면 이는 정말 한심하고 한탄스럽다. 왜냐하면 언론들과 대북전문가들은 자신들의 존재감과 주가를 올리기 위해서라도 ‘많이’ 있는 것처럼 뻥튀기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손 치더라도 정부 관료마저 그러면 안 되지 않는가.

북이 ‘오지랖’ 발언 이후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렸다면, 그 속뜻을 파악하고 남북정상회담 약속이행을 위한 많은 노력을 했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어떤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 식량지원 문제와 800만불 지원이 있었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통일부 관료들은 다 사표를 내야 한다. 식량지원과 800만 불이 어찌 남북정상회담 약속 사항이던가?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정말 꼬여있는, 혹은 교착국면에 있는 남북관계의 경색을 풀고 싶다면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가 왜 꼬여졌는지, 무엇이 정상회담을 가로막고 있는지 그 원인부터 먼저 파악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게 파악된 원인이 있다면 그 걸림돌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다음 정상회담을 성사시켜 나갈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순서적으로 맞다.

그래놓고 봤을 때 남북, 북미정상회담의 필요충분조건은 다른 데 있지 않다.

다름 아닌, 남측은 어설픈 중재자로서의 ‘오지랖’에서 벗어나 민족공조의 관점에서 기간 남북정상회담의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확실한 담보 메시지를 북측에 전달해야 한다.

그리고 미국은 연말 이전까지 리비아식 빅딜안을 폐기하고, 단계적이고 동시·병행적인 비핵화에 합의될 수 있는 ‘새로운 계산법’을 내놓아야 한다. 그리고 대북제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과 메시지 전달 없이 그냥 필요에 의한 희망만으로는 절대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는다. 반드시 이 조건을 해결해야만 정상회담은 열려지는 것이다. 이른바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풀려지는 것이다.

반대로, 그런 노력 없이 그 어떤 움직임이 있더라도 정상회담은 요원하다. 이른바 ‘좋은’ 말잔치들, 뉴욕 채널, 인도적 지원, 조문, 축전, 돼지 콜레라 예방 등과 같은 수많은 유의미한 행위가 이뤄지더라도(이것이 의미가 없다가 아니라) 이것이 정상회담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 등가가 아니라는 말이다.

필자 김광수 약력

저서로는 『수령국가』(2015)외에도 『사상강국: 북한의 선군사상』(2012), 『세습은 없다: 주체의 후계자론과의 대화』(2008)가 있다.

강의경력으로는 인제대 통일학부 겸임교수와 부산가톨릭대 교양학부 외래교수를 역임했다. 그리고 현재는 부경대 기초교양교육원 외래교수로 출강한다.

주요활동으로는 전 한총련(2기) 정책위원장/전 부산연합 정책국장/전 부산시민연대 운영위원장/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사무처장·상임이사/전 민주공원 관장/전 하얄리아부대 되찾기 범시민운동본부 공동운영위원장/전 해외동포 민족문화·교육네트워크 운영위원/전 부산겨레하나 운영위원/전 6.15부산본부 정책위원장·공동집행위원장·공동대표/전 국가인권위원회 ‘북한인권포럼’위원/현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부산지역본부 운영위원(재가)/현 사)청춘멘토 자문위원/6.15부산본부 자문위원/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외 다수가 있다.

김광수 정치학 박사(북한정치 전공)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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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샌더스 "억만장자들의 정치와 싸워야 할 때"

"이 나라엔 '부자 사회주의'만 있다"…'민주적 사회주의' 전면화
2019.06.14 18:46:39
 

 

 

 

2020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조 바이든 전 부통령,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 등과 함께 야권 후보군 선두 그룹에 포함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민주적 사회주의'를 전면화시키며 대선 경쟁을 본격화했다.

지난 수십 년간, 그리고 2016년 미 대선에서도 샌더스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강조했다. 그 덕에 최근 미국 언론과 유권자들도 그의 주장에 과거와는 다른 수준의 관심을 보이고 있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 유력 매체를 비롯해 많은 현지 언론이 샌더스의 지난 12일 조지워싱턴대학교 연설을 비중 있게 다뤘다. 샌더스의 연설은 자신이 주장하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정의(定義)하는 내용이었다.

세계 자본주의의 본산인 미국에서 시민들이 '민주적 사회주의'에 보이는 관심은 의미가 각별하다. 지난달 20일 발표된 미국 여론조사기관 '갤럽'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 유권자의 43%는 '사회주의는 미국에 좋은 것'이라고 답변했다. 물론 '사회주의는 미국에 나쁜 것'이라는 응답이 51%로 과반이었으나, 43%라는 숫자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체제 경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 초반에 비해서도 18%포인트나 높은 수치였다. 

사회주의권과의 냉전 대결을 승리로 끝낸 '자유 세계의 리더' 미국의 유권자들이 왜 2019년에는 샌더스의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주장에 귀를 귀울이게 된 걸까. 샌더스의 연설 내용에 일정한 답이 있다.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그리고 이를 부추기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에 대한 반발이 그 요체다.  

워싱턴D.C.에 위치한 조지워싱턴대 연설에서, 샌더스는 "21세기에, 세계 역사상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인권은 곧 경제적 권리라는 것(economic rights are human rights)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며 "그리고 그것이 나의 '민주적 사회주의'의 의미"라고 말했다. 

그는 "생활 가능한 임금을 지급하는 괜찮은 일자리(decent job)를 가질 권리, 양질의 건강보험을 누릴 권리, 교육을 마칠 권리, 적절한 수준의 주택(affordable housing)을 가질 권리, 깨끗한 환경을 누릴 권리와 은퇴를 보장받을 권리"를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민주적 사회주의'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뉴딜 정책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2010년대의 오늘, 우리는 미완의 뉴딜을 계승해 완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보장연금, 실업급여, 노조 결성권, 최저임금제, 농민 보호, 월스트리트 규제, 대량의 인프라 개선 같은 '뉴딜 의제'들은 오늘날 미국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이라며 "그러나 루스벨트를 매도하던 당시의 과두제주의자들은 이런 대중적 (뉴딜) 프로그램을 '사회주의'라고 비난했다"고 그는 언급했다. 연설 후반부에서 그는 이렇게 역설했다. 

"내가 믿는 것은 미국인들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자유는 자주 사용되는 말이지만, 지금은 이 말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엄밀히 살펴볼 때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자유롭다는 것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신이 아플 때 의사에게 갈 수 없다면, 당신은 진정 자유로운가? 당신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약을 살 돈이 없다면, 당신은 진정 자유로운가? 70세가 넘었는데도 연금이나 은퇴하기에 충분한 돈이 없어 노동을 강요받는다면, 당신은 진정 자유로운가? 당신 가족이 돈이 없어서 대학이나 직업학교에 가지 못한다면, 당신은 진정 자유로운가? 적정임금을 받지 못해 주당 60~80시간을 일해야 한다면, 당신은 진정 자유로운가? 당신의 아이가 태어났는데 육아휴직을 쓸 수 없어 출산 직후 일터로 복귀해야 한다면, 당신은 진정 자유로운가?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노(no)라면, 당신은 자유롭지 않다.

권리장전은 전제정부의 압제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지만, 지배층의 다수는 미국인들을 과두정, (즉) 다국적 기업, 월스트리트의 은행과 억만장자들의 전제정치에 복종시키고 싶어한다. 미국인들은 일어나 자유, 인간의 존엄성, 안전을 위한 권리를 얻기 위해 싸워야 할 때이고, 사실 그 때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났다." 

그는 자신이 비판하는 "과두정", 즉 '소수의 지배'란 "바로 지금, 미국에서는 세 가문(家門)의 부(富)가 하위 50%인 1억6000만 미국인 보다 많"은 등 "상위 1%가 하위 92%보다 많은 부를 소유"한 결과, "미국이 1920년대 이후 최악의 경제적 불평등"을 겪고 있는 현실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가 연설에서 뉴딜정책 등을 언급한 대목은, 그의 '사회적 민주주의'가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와 무엇이 다르냐는 의문을 낳고 있기도 하다고 <NYT>는 지적했다. 신문은 '민주적 사회주의'의 개념을 다룬 별도 해설 기사에서 "민주적 사회주의자들 사람 수만큼 '민주적 사회주의'의 개념이 있다"고 모호성을 꼬집기도 했다. 

샌더스는 이날 연설에서 사회주의라는 말이 금기어가 아님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과두제적 동료들은 우리가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한다고 우리를 공격하지만, 그들도 모든 형태의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그들은 근로대중(working people)에게 이익을 주는 민주적 사회주의는 증오하겠지만, 트럼프 자신과 다른 억만장자들을 더 부자로 만들어 주는 '기업-사회주의(corporate socialism)'는 절대적으로 사랑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트럼프는 부자와 권력자를 위한 '기업-사회주의'를 믿는다. 나는 이 나라의 근로대중 가족을 위한 민주적 사회주의를 믿는다. 이것이 트럼프와 나의 차이"라고도 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월스트리트의 자본가들이 수 조에서 수십 조 원의 구제금융을 받아간 일을 거론하며 "월스트리트가 하룻밤에 '큰 정부 사회주의자'들이 됐었다"고 그는 비꼬았다. 

그는 그러면서 미국의 민권운동 대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을 인용했다. "이 나라에는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가 있지만,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는 단호한 개인주의만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는 "트럼프가 사회주의를 공격할 때, 나는 이 말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그는 연설에서 이처럼 트럼프 대통령을 실명으로 8회나 거론하며 맹비판했다. <NYT>는 그가 자신과 트럼프를 선명하게 대조시키면서 스스로를 트럼프의 맞수로 끌어올리는 전략을 썼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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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하나, “6150명이 금강산으로 가겠습니다”

겨레하나, “6150명이 금강산으로 가겠습니다”
 
 
 
백남주 객원기자 
기사입력: 2019/06/15 [08:33]  최종편집: ⓒ 자주시보
 
 

 

▲ ‘겨레하나’가 6150명의 ‘금강산 방문신청서’를 통일부에 접수했다. (사진 : 겨레하나)     © 편집국

 

국민들의 금강산 관광 재개의지가 크다는 것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6.15공동선언 발표 19주년을 맞아 겨레하나는 14일 오전 11시 통일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6150명의 금강산 방문신청서를 접수했다.

 

겨레하나는 4월 27일부터 6월 14일까지 전국에서 7512명의 금강산 방문신청서를 받았다이 중 1차로 6150명이 직접 작성한 방문신청서를 통일부에 제출한 것이다.

 

겨레하나 이연희 사무총장은 이렇게 많은 국민들이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발전을 희망하고 있다며 정부는 국민들의 지지와 응원을 믿고눈치보지 말고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과감한 결단을 내려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 6150명의 긍강산 방문 신청서. (사진 : 겨레하나)     © 편집국

 

겨레하나는 지금 금강산으로 가겠다는 국민들의 마음은 단지 아름다운 산을 구경하거나 관광하고 싶다는 것이 아니다며 금강산 관광 재개를 시작으로 한반도 평화의 길을 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겨레하나는 남북의 약속을 지키고 이행하는 것이 우리의 책무이고당면해서 금강산 관광 재개는 남북공동선언을 이행하는 첫 걸음이라며 정부가 국민들의 힘을 믿고 금강산 관광 재개를 결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겨레하나는 사사건건 색깔론 시비를 붙이며 금강산과 개성공단마저 퍼주기라고 비난하는 아직도 평화를 방해하고 남북관계를 파탄내려는 사람들이 있다며 이들을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고 평화로 전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겨레하나는 미국은 더 이상 금강산을 비롯한 남북문제에 간섭하고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며 남북공동선언의 이행은 미국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며허락하거나 승인할 문제도 아니다고 지적했다.

 

▲ 기자회견에서는 국민들의 금강산 방문 신청 사연이 소개되기도 했다. (사진 : 겨레하나)     © 편집국

 

기자회견에서는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던데... 왜 그런것인지 직접 가서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황해도 할머니인데 언제면 금강산에 갈 수 있을까?”, “평화는 노력이 필요하다하루빨리 평화가 이루어져서 금강산 구경하고 싶다” 등 국민들의 금강산 방문 신청 사연이 소개되기도 했다.

 

기자회견 후 겨레하나 조성우 이사장 등 참가자들은 통일부에 6150장의 신청서를 전달했다.

 

▲ 통일부에 금강산 방문 신청서를 접수하러 가는 참가자들. (사진 : 겨레하나)     ©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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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문>

 

금강산으로 가겠다는 국민들 6150명의 마음이 모였다지금 금강산으로 가겠다는 국민들의 마음은 단지 아름다운 산을 구경하거나 관광하고 싶다는 것이 아니다금강산 관광 재개를 시작으로 한반도 평화의 길을 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2000년 6.15 공동선언이 내일이면 19주년을 맞는다. 6.15에 이어 10.4, 4.27, 9월평양공동선언까지남북공동선언이 우리에게 준 원칙과 방향은 분명하다남북이 손잡고 남북공동선언들을 이행한다면 평화와 번영이 찾아올 것이며그렇지 않으면 분단의 장벽을 끝내 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남북의 약속을 지키고 이행하는 것이 우리의 책무이고당면해서 금강산 관광 재개는 남북공동선언을 이행하는 첫 걸음이다.

 

금강산 관광 재개국민들의 힘을 믿고 결단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발전을 이대로 멈출 수 없다아직도 평화를 방해하고 남북관계를 파탄내려는 사람들이 있다이들은 사사건건 색깔론 시비를 붙이며 금강산과 개성공단마저 퍼주기라고 비난한다분단시대와 전쟁시대로의 회귀를 꿈꾸는 낡은 세력이다우리는 이들을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고 평화로 전진해야 한다.

 

미국은 더 이상 금강산을 비롯한 남북문제에 간섭하고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남북공동선언의 이행은 미국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며허락하거나 승인할 문제도 아니다미국이 진정으로 강대국다운 지위를 지키고 동맹국가로서의 역할을 하고 싶다면 적대와 대결의 산물인 대북제재부터 해제해야 할 것이다.

 

지금 국민들의 뜻과 의지가 길을 열고 있다.

국민들이 가고자 하는 길은 막을 수 없다.

금강산 관광 재개를 시작으로 한반도 평화와 남북교류의 길을 다시 열자.

대북제재의 벽도미국의 간섭도 국민들의 힘으로 넘자.

 

가자국민들의 힘으로!

가자금강산으로!

가자평화와 번영통일로!

 

2019년 6월 14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한 6150명의 방문신청자를 대표하여 기자회견 참가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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