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우 /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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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6월 30일 비무장지대 올렛초소를 방문했다. 당시 올렛초소에는 유엔기를 비롯한 세 걔의 깃발이 게양되어 있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5. 유엔깃발 논쟁의 전망
1) 의제설정 무대
의제를 다룰 무대가 어디일 것인가가 우선 중요하다. 미국이 유엔사유신전략을 수립하기 시작할 무렵인 2013년 1월 14일 북은 다음과 같이 성명을 발표했다.
‘판문점에 아직도 유엔기발이 버젓이 걸려있는 것은 시대착오의 산물로서 유엔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유엔의 권위와 공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유엔군사령부》는 지체없이 해체되어야 한다... 룩셈부르그와 에티오피아는 《유엔군사령부》에 상징적으로 남겨두었던 자기기발까지 철수해갔으며 아직 기발을 철수하지 않은 나라들 가운데도 《유엔군사령부》에 자국의 참모성원을 한명이라도 상주시키거나 그 활동에 직접 간참하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주44)
‘판문점에 걸린 유엔기’는 1993년 부트로스 갈리의 유엔기사용취소논쟁의 기억을 다시 소환하기 위한 소재로 보인다. 이어 룩셈부르크와 에티오피아가 자국깃발을 유엔사에서 철수시킨 사실을 언급하며 깃발논쟁을 점화시켰다. 또한 유엔사해체를 ‘한국문제’로서가 아니라 ‘유엔문제’로 확장시킨 점이 주목된다.(주45)
유엔을 권력체가 아닌 권위체로 본다면 ‘유엔의 권위’란 유엔의 본질인 셈이다. 유엔사해체가 유엔문제로 정립되려면 유엔의 본질에 대한 대립·모순관계가 정립되어야 한다. 이에 ‘유엔의 권위 : 미국의 권력’이라는 대립구도를 명확히 했다. 이는 북이 유엔사해체문제를 오직 ‘한국문제’에서 ‘한국문제’ 와 ‘유엔문제’ 두 가지 경로로 추진할 수 있는 유연성을 확보했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는 달리 말하면 유엔사해체를 추동할 주체가 오직 북한만은 아니라는 의미도 된다. 유엔의 권위를 훼손한 미국패권에 문제를 제기하는 모든 나라·단체·개인으로 주체가 넓어진다. 유엔외교에서 북한이 유일하게 능동적·공세적으로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던 주제가 유엔사문제였다. 북핵이 유엔무대에서 최고의 제재와 공격을 받는 수동적·방어적의제인 점과 대비된다. 그러나 북핵은 평화협정체결과 주한미군철수를 위한 북·미 직접외교 틀에서는 능동적·공세적 의제이다.
이처럼 의제를 상정할 무대를 어디로 선택하는가에 따라 의제의 전개가 달라진다. 물론 유엔사가 미국사령부이므로 유엔사해체, 평화협정, 주한미군철수가 북·미 직접외교에서 일괄타결될 가능성도 있고 북은 물론 미국으로서도 외교비용의 절감이란 면에서 가장 이상적인 해결일 것이다. 75년 당시 북은 유엔무대에서 이러한 일괄타결을 시도했던 셈이다.
그러나 일괄타결은 의제자체를 분리되지 않게 집중상태를 유지하는데 만 많은 부담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즉 실패가능성도 높아진다. 의제의 전제조건 즉 의제의 기원과 구조에 따라 현실적 해결가능성이 높은 무대를 선택하는 것은 성공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한편 미국은 75년 이래 이 문제를 총회에서 안보리로 이관하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하며 지연시키려는 의도이다. 그러나 안보리에서 유엔사해체문제가 다시 지연되면 2차 책임이 있는 총회로 넘어올 것이 명확하다. 만약 미국의 안보리이관의 목표가 지연이 아닌 조기해결에 있다면 안보리로 이관할 것이 아니라 미국이 해체를 결정하고 안보리든 총회든 보고만 하면 된다.
따라서 안보리 이관전략은 지연전략 임이 뻔하다. 따라서 유엔총회결의인 유엔사해체결의는 유엔총회에서 실행촉구결의를 추진하는 것이 이 문제의 전제에 가장 충실한 선택이 될 것이다.
2) 전제
하나의 의제가 정립되었다는 것은 반드시 전제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유엔기사용취소와 유엔사해체로 정립된 의제에는 전제가 있다.
우선 유엔기사용은 유엔깃발법을 법적 전제로, 유엔안보리의 유엔기사용승인을 정치적 전제로 하고 있다. 전자가 법이라면 후자는 권력으로, 법과 권력의 불일치로부터 대립이 발생했다. 따라서 유엔기사용승인 취소는 깃발법과 안보리결의의 대립관계가 전제로 작용한다. 유엔법에 의해 설립된 권력이 그 법을 위반한 셈이다.
안보리권력은 헌장에 의존해 있으면서도 헌장을 배제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대립관계에 놓인다. 유엔안보리가 1차 책임을 지지 않았으므로 총회가 2차 권한을 행사하여 그 위반을 바로잡았다. 이처럼 법위반에 대한 처벌이란 점에서 이 사건은 복잡할 게 없는 사건이었다. 즉 법에 의해 권력이 완벽히 통제되거나, 권력에 의해 법이 완벽히 통제된다면 대립될 이유가 없다.
유엔기사용금지는 유엔깃발법을 전제로 법적 권한을 가진 유엔사무총장이 결정하여 통보하면 된다. 즉 유엔에서 가장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여야 한다. 그러나 법대로 해결되지 않기에 문제이다.
유엔명칭사용 역시 유엔기만큼이나 유엔의 권위를 상징화·대상화한다. 유엔기에 대해서는 깃발법이 있지만 유엔명칭사용에 대해서는 명칭법이 따로 없다. 따라서 미국통합사령부의 유엔명칭도용에 대해서는 법이 없으므로 위반도 없다. 미국은 법의 틈새를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다. 법의 틈을 보완하기보다 법의 틀 밖에서 법을 이용했다는 점에서는 이 역시 법-권력의 대립관계 위에 놓여있다.
미국통합사령부창설결의 과정에서 ‘유엔’명칭사용을 반대한 것은 다름 아닌 미국이었으며 미국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미국사령부로 결정된 점에 주목하면 안보리결의에서 미국사령부와 유엔사령부를 혼동할 어떤 이유도 없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유엔명칭사용이 문제가 되는 것은 미국이 유엔의 권위를 도용했다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안보리결의가 미국의 조치가 아니라 유엔의 조치인 것처럼 보이게 했고 지금까지 참전국들은 유엔의 조치로서 자신들이 참전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미국통합사령부가 유엔의 정식군대이든 보조기관이든 유엔조직임을 입증해야 한다. 미국은 수없이 이 입증을 시도했다. 그러나 유엔의 공식기관인 유엔사무총장 명의로 수차례 유엔사란 이름을 쓰는 이 조직이 유엔조직이 아님이 확인되었고 미국은 이에 대한 반증에 실패했다.
유엔사가 유엔조직이 아니라는 사실은 유엔공식기관에 의해 법적근거를 갖지만 미국의 주장은 주장일 뿐이다. 미국이 유엔사문제에 들어오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따라서 유엔명칭도용을 중지시키는 유엔의 법적조치가 시도되어야 한다.(주46)
다음으로 1950년 10월 7일 총회결의가 만든 전제에 대해 살펴보자.
이 결의의 가장 중요한 대목은 38선 이북지역을 한국의 영토가 아니라고 확인한 대목이다.(주47) 그리고 이 결의에 의해 소집된 10월 12일 한국관계소위원회 회의에서는 다음 사항이 권고된다.
‘...유엔군에 의하여 점령되어 있는 한국지역의 민간행정에 대한 모든 책임을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이 이 지역에 행정을 고려하게 될 때까지는 통합군사령부가 임시로 담당할 것을 권고하고, 통합군사령부가 본 결의에 의거하여 민간행정을 위하여 설치된 모든 기관과 주한통합군사령부 휘하의 수개 유엔회원국 군대로부터의 장교와 협력하기 위한 조속한 조치를 취하도록 건의하고...’(주47)
북한지역에서 언커크(UNCURK)에 의한 민정이 실시되기 이전까지 유엔사령관에게 점령통치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유엔사령관이 이 결의에 의해 북한점령통치권을 수여받았다는 주장은 북한점령을 전제한 작전계획들의 법적근거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1954년 11월 17일 38선이북-군사분계선이남에 대해 주권이 아닌 행정권만을 한국에 이양하는 법적근거로 이용되었다.(주48)
이는 유엔사가 한국헌법과 정면충돌하는 묵과할 수 없는 반국가단체임을 드러낸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점령통치문제는 유엔문제와 주권문제의 직접대립을 정립했다. 유엔자체내의 법과 권력의 대립관계에서 권력이란 미국의 권력 즉 패권이다. 미국 말고 유엔헌장의 밖에 있을 수 있는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 유엔문제와 주권문제는 약소국인 남한과 북한의 주권을 의미한다. 즉 유엔헌장의 적용범위를 넘어서는 국내문제, 국내권력에 대해 유엔이 개입하여 침해했음을 의미한다. 유엔은 국제기구로서 국가 간의 문제만을 다룰 뿐 국내문제는 유엔의 범위 밖에 있다. 유엔이 국내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헌장2조 7항에 명시된 유엔안보리의 헌장7장에 의한 군사적강제조치가 결정된 경우뿐이다.(주49)
그러나 미국은 안보리도 아닌 총회를 통해 국내문제에 개입한 것이다. 이는 북한주권만이 아니라 한국주권에 대한 침해이다. 결국 이 문제도 유엔내의 법-권력 대립관계로 귀착된다. 따라서 유엔총회에서 언커크가 해체된 것은 법-권력의 대립에서 권력측의 근거를 해소하고 유엔법의 권위를 정립한 결정이었다.
문제는 언커크의 북한점령통치권을 위임받은 유엔사는 해체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미국패권의 입장에서 보면 유엔을 통해 남북한 주권에 바로 개입할 수 있는 통행증을 얻은 셈이다. 즉 유엔의 외부문제를 유엔의 내부로 끌어들여 유엔내 법-권력대립관계를 더 복잡하고 예리하게 대립시킨 것이다. 따라서 유엔기-유엔명칭-유엔사점령권-유엔사해체의 전제가 더욱 종합적이고 본질적인 수준으로 심화발전된 것이다.
3) 전가
전제는 주체의 실천에 의해 새롭게 규정되고 규정은 차이와 대립과 모순을 낳는다. 미국은 전제를 부정하거나 전제를 변경함으로써 문제를 회피하거나 다른 문제에 전가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불일치가 발생하고 갈등이 발생한다. 불일치가 해소되지 않고 전가되면 이는 대립과 모순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 모순은 양극 중 한극이 소멸되어야 비로소 해결되는 관계이다.
미국이 유엔기를 내리고 유엔명칭사용을 포기하고 미국통합사령부란 이름만을 사용하겠다고 하며 문제의 본질을 다른 문제로 전가시킬 수 있다. 즉 통합사라고 해서 유엔안보리 결의에 의한 권한위임이 부정되진 않는다는 논리를 내세울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미국이 취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전술이다. 미국이 그렇게 프레임을 변경하여 하나의 문제를 다른 문제로 전가하면, 문제는 해결되는 게 아니라 더 본질적인 대립으로 심화된다.
즉 이번엔 미국통합사령부의 조치가 유엔의 조치인가가 문제시된다. 일련의 안보리결의에 따른 미국과 참전국의 조치는 각국의 조치일 뿐 유엔의 조치가 아니다.(주50) 유엔헌장 39조의 ‘권고’는 평화적 해결에 대해서만 적용된다. 그것은 군사조치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즉 ‘군사조치를 권고’한다는 말은 유엔헌장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켈젠과 함께 스톤 역시 헌장 39조 규정에 “국제평화 및 안전의 유지 또는 회복을 위하여 권고한다”는 것은 평화적 수단을 권고하는 것을 의미하며 강제조치에 대한 권고는 포함하지 않으므로, 6월 27일의 결의에서 안보리가 가맹국에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 등을 권고한 것은 헌장에 입각한 결의가 아니라는 것이다.(주51)
이 역시 유엔헌장과 안보리결의, 법과 권력사이에서 불일치가 발생한다. 이러한 불일치를 시정하려는 노력의 결과가 75년 유엔총회에서의 유엔사해체결의이다. 그러나 75년 이래 미국이 회원국으로서의 실행의무를 다하지 않고 왜곡·기만했다는 점과 유엔총회가 미국의 약속실행을 강제할 조치와 수단을 동원하지 못했다는 점이 이 사건의 새로운 전제를 구성한다. 문제의 전가는 해결이 아니라 모순의 심화를 가져올 뿐이다.(주52)
여기서는 미국의 기만이 초래한 결과만을 살펴보자. 75년 미국이 유엔사해체를 위해 내건 전제조건은 정전협정의 유지였다. 즉 평화협정체결 반대가 아니라 평화협정체결시까지의 정전협정유지였다고 봄이 타당하다.
75년 당시 미국이 제출한 결의안의 숨은 의도는 북의 평화협정주장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드러낼 수도 없었고 드러내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정전협정유지라는 고착적 주장만 했지 정전협정유지가 어떻게 평화협정반대가 되는지 그 맥락을 설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전협정의 목적인 평화와 안정의 유지는 평화협정의 정립을 통해 더 잘 충족되므로 이내 자기논리의 함정에 빠지고 만다.
정전협정 유지는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현재의 상태이므로 새로운 전제를 제시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전쟁이 나거나 평화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는 언제 어느 시점에서나 정전협정은 유지되고 있을 것이므로 바로 그 상태가 유엔사해체의 최적상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북의 다음과 같은 입장에 대해 미국은 속수무책이 되고 마는 것이다.
‘조·미쌍방이 수십년간 정전상태를 효과적으로 관리해오고 있는 현실은 《유엔군사령부》를 해체하지 못할 리유가 더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주53)
미국이 내세운 전제조건은 사실은 아무런 전제도 아닌 셈이다. 따라서 미국의 의도야 어떻든 75년 이후 45년 동안 유엔사해체 약속을 지연시키고만 있는 것이다. 미국의 이러한 지연전략 이 가능한 것은 법의 원리가 아니라 힘의 원리를 적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의 대상화· 상징화로서의 법은 이제 권력의 현실을 반영할 수 있는 매개로서의 지위를 잃고 단순한 형식으로 전락해 간다. 미국패권의 매개수단이었던 법이란 형식이 벗겨지며 날것으로의 권력만 남게 된 것이다. ‘법 : 권력’의 대립관계가 ‘권력 : 권력’의 대립관계로 심화된 것이다.
4) 순서
전제하기와 정립하기의 시간적 전개가 순서이다. 정립된 순서는 고착되거나 고정불변의 순서가 아니다. 결국 규정된 순서일 뿐이다. 순서를 규정해야 그로부터 다양한 측면의 부정과 반발을 고려할 수 있고 본질로 나아갈 수 있다.(주54)
순서가 규정되어 있지 않으면 현상의 대응에 매몰되어 길을 잃을 수 있다. 유엔사해체의 전제에서 유엔문제가 아닌 해당국의 주권문제는 외적요인으로 유엔사와 주권의 불일치·갈등을 노정하기에 주권국민들에게 1차적 자극을 제공한다. 그리고 운동의 측면에서 그것은 적극 활용할 요소이기도 하다. 즉 1차적 순서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외적요인으로 내적요인을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따른다. 이들 외적요인은 계기이지 본질은 아니다.
그러나 유엔기사용승인취소나 유엔명칭도용금지는 직관적이고 감성적이며 1차적 순서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유엔문제의 내적요인과 본질의 한 측면을 구성한다. 즉 낮은 수위라도 유엔법과 권력의 대립관계를 내포하고 있는 깃발문제나 명칭문제는 본질적 계기를 구성한다. 당연히 이러한 계기가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유엔이란 무대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부득이 주권적 계기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주권적 계기는 살라미전술에 의해 본질로 발전되는 길이 차단·왜곡될 가능성이 더 많다.
유엔무대에서 다룰 때도 깃발과 명칭은 계기적 의미만 있다. 지난 경험에서 보듯이 미국은 깃발문제와 유엔사 해체문제를 분리시켜 역공을 취했다. 외적인 요인들도 유엔법과 권력의 대립관계내로 끌어들여 통합시킬 수 있다면 본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어쨌든 유엔사해체를 집중된 의제로 설정하고, 유지하고, 강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의제의 집중을 방해하고 분산시키려는 시도에 대해 때론 단호하고 때론 유연하게 차단·저지하는 것이 순서를 주도하는 길일 것이다. 순서가 있어서 그 길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그 길을 감으로써 순서가 생기는 것이다.
평화협정과 주한미군철수는 유엔사해체와는 다른 전제를 갖는다. 평화협정과 주한미군철수는 북·미간 적대관계를, 유엔사해체는 유엔법·권력간 불일치를 전제로 하고 있다. 평화협정과 주한미군철수문제를 유엔에서 다루는 것은 별효과가 없음이 확인되었다.
논리적으로는 평화협정체결과 북미수교가 된다면, 그리하여 적대관계가 정치적으로 해소된다면 북은 핵을 가지고 있어도 되고 미국은 주한미군을 철수시키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간의 북·미가 이룩한 관계의 질로 볼 때 그것은 이론적 가능성일 뿐이다.
북·미간 핵·평화협상에서는 주권문제가 본질을 이루며 유엔문제는 오히려 외적요인이 된다. 북의 입장에서 추론해 보면 유엔사해체를 통해 주한미군철수나 평화협정으로 나아가는 순서는 잘못된 순서이다. 유엔도 결국은 주권에 기반함으로 현재 국제체계에서 가장 본질적인 관계는 주권체계이다. 미국의 주권이 패권이 될 수 있는 것은 세력균형체계와 유엔체계를 융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아닌 나라가 주권-동맹-유엔을 융합시키는데서 미국을 압도하진 못한다.
따라서 대미관계는 ‘주권 : 패권’이 본질이며, 미국의 패권을 구성하는 동맹과 유엔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도록 대못을 박아놓고 미국과 ‘주권 : 주권’으로 상대하는 구도를 만들 때 북으로서는 승산이 있을 것이다.
75년 당시 미국의 입장이었던 정전협정 유지하에서의 유엔사해체가 재확인된다면 유엔사해체가 우선순위가 될 것이나 평화협정을 지연시키기 위한 전술로 이를 활용한다면 북은 굳이 유엔사해체를 앞 순위에 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북은 평화협정체결과 주한미군철수에 집중할 것이므로 유엔사해체는 유엔사참전국과 관련국의 국가·단체·개인이 주체로 나설 공간이 존재한다. 이처럼 의제설정의 무대가 다르고 분리된 채 병렬적으로 추진되는 순서는 순서간의 배합과 배치가 문제된다.
5) 배치
두세 개의 순서가 동시 진행되거나, 순서가 병립할 때는 배합과 배치가 문제된다. 순서가 시간적 조합이라면 배치는 공간적 조합이다. 주한미군철수와 평화협정체결은 북한자신을 대체할 다른 대안이 없고 의제의 집중화란 차원에서 주한미군철수든 평화협정체결이든 하나의 의제만 관리해나가기도 만만치 않은 상황일 것이다.
그러나 유엔사해체는 북한만이 아니라 유엔문제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세력들이 존재한다. 이들 세력이 북한만큼 절실하게 이 문제를 다룰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대미관계에서 의제의 집중화를 유지하기 위해 유엔문제를 분담할 세력이 있다는 점이 북에게도 불리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유엔깃발승인취소, 유엔명칭사용금지, 유엔사해체등을 유엔문제로, 주한미군철수와 평화협정체결을 북한의 주권문제로 분리할 수도 있고, 병행추진할 수도 있다. 즉 두 개의 경로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세의 발전에 따른 의제의 배치와 배합의 문제가 중요해진다.
물론 이러한 분리병행전략은 북한이 싸워왔던 의제가 세계적 호응을 받는다는 점에서는 북을 이롭게 하는 것이지만 배가 산으로 가는 상황이 발생해 북의 통제를 벗어난다면 북에게 매우 불리할 수도 있다. 북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만 유엔문제가 다루어지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비이락은 우연적 관계이지 필연적 관계가 아니다. 당연히 각국이 처한 이해관계로부터 출발하기에 주권문제와 유엔문제의 배합이 필요하다. 의제의 순서정하기와 의제 간 배치에는 우선 해당의제의 한계가 정확히 계산되어야 한다.
우선 유엔문제의 한계를 살펴보자.
강대국간 세력균형체의 성격을 갖는 유엔안보리는 거의 약소국을 대상으로 하기에 결의의 실행을 강제할 수단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집단안보체의 성격을 갖는 총회는 ‘권고’만 할 수 있기에 물리적으로 강제할 수단이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물리적 제재대신 법적정당성과 세계적 여론을 궐기시키는 경우에는 강대국이라도 압박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같은 여론은 해당국가의 권위와 위신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특히 강대국일수록 권력 못지않게 권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엔 특히 유엔총회는 권력체이기보다 권위체로서의 성격을 갖기에 권위와 위신의 상실에 목표를 맞춘다면 강대국의 유엔결의위반이나 불이행에 대해 일정한 외교적 압박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권위와 위신의 유지를 포기한 국가들에 대해서는 압력이 될 수 없다.
다음으로는 유엔문제의 외적요인으로서 주권에 의한 강제력행사의 한계를 살펴보자.
유엔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국가권력이 물리적 조치를 취하는 방법이 있다. 최근 대북제재의 경우 미국이 캐나다를 움직여 해양에서의 불법선적을 감시하도록 예산을 지출하도록 한 바 있다. 캐나다의 이러한 조치는 캐나다의 조치일 뿐 유엔의 조치가 아니다. 그러나 유엔의 밖에서 유엔결의의 집행을 보조한다.
북의 경우 정전협정 무효화, 군사정전위 해체 후 판문점대표부 설치 등 주권을 이용한 조치를 취하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유엔사에 압박을 가하는 조치이다.
그러나 유엔사관련국 특히 한국과 일본에게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주체가 바뀌면 관계가 바뀌고 관계가 바뀌면 지위와 역할이 바뀐다. 유엔사문제는 북이 처리하기엔 복잡하고 영향력도 미미하지만 한국이나 일본이 결단할 땐 직접적이고 치명적이다.
주권차원에서 보면 본질적으로는 북한문제가 아닌 한국문제인 것이다. 유엔사/연합사 동시해체를 통해 전작권을 환수 받으면 유엔사는 해체에 가까울 정도로 위축된다. 몇 가지 법적 문서만 정비하면 된다. 1954년 유엔사령관에게 한국군의 작통권을 이양한 한미합의의사록 2항을 폐기하여 법적문서로 남기고, 연합사해체를 통한 전작권 환수와 함께 유엔사의 전작권도 완전히 소멸된다는 것을 확인하는 문서 한 장만 있으면 된다.
그럼 국방부가 밝혔듯이 한국은 유엔사회원국이 아니다. 그리고 유엔사회원국이 아니기에 유엔사에 참여할 필요가 없고 유엔사가 만들려는 다국적군들과 행정협정(SOFA)이나 방문국지위협정(VFA)를 체결하지 않아도 되고, SOFA나 VFA가 없으면 다국적군의 방문과 주둔은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한국정부가 밝힌 입장대로 법적 조치만 취하면 유엔사 강화를 물리적으로 봉쇄할 수 있다.
유엔군사령부에 작통권이 없다는 것은 군조직이 아니란 의미이기도 하다. 정전관리업무는 경찰도 할 수 있는 행정업무이고, 유엔사회원국들과의 연락유지업무는 외교업무이다. 9.19 남북군사보장합의서를 통해 남측은 정전업무를 실질적으로 이양받은 셈이다. 이를 유엔사와 법적으로 정리하면 유엔사에겐 자기역할 축소라는 압박이 될 수 있다.
또 1954년 11월 17일 38선 이북-군사분계선이남지역의 행정권만을 이양한 유엔사 한국정부간 합의서를 폐기하고 완전한 주권의 이양을 법적으로 완결짓는 것도 유엔사에 가하는 주권의 압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이 가할 수 있는 최대의 타격은 유엔사로부터 전작권을 법적으로 완전히 환수하는 것이다. 유엔문제가 아닌 한국문제로 작동하는 영역은 바로 이 지점이다.
또한 일본의 ‘요시다-애치슨 교환공문’과 그에 기반한 ‘유엔사-일본정부간 행정협정(SOFA)’의 폐기가 추진된다면 이 역시 유엔문제의 밖에서 주권이 가하는 외적압박요인이 될 것이다. 또 16개 참전국과 5개 의료지원국이 유엔의 조치가 아닌 각국의 조치로 유엔사에 참여할 경우 북한과 개별적인 교전국이 된다. 이들 국가와 국민들이 북한과 교전국이 되는 것을 거부하며 유엔사참여와 자국의 작전통제권을 유엔사에 이양하지 않는다는 운동이 조직될 수 있다.
이들 주권차원의 조치는 유엔문제의 관점에서는 외적요인이 되겠으나 외적요인의 양적 축적이 내적요인, 즉 질의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한국과 일본의 주권적 권력이 유엔법을 압도하는 상황이 되면 유엔문제가 외적요인이 되는 전도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엔문제에서 주권문제는 외적요인이다.
유엔차원과 주권차원의 한계가 계산되었으면 이를 어떻게 배합배치 할 것인가하는 마지막 문제가 남는다. 이는 유엔깃발논쟁의 주체들이 배합과 배치의 황금비율을 찾는 문제가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숙제는 주체들의 몫으로 남긴다.
6. 결론
유엔깃발논쟁이 재점화된다는 것은 유엔차원과 국가차원의 의제설정, 의제순서정하기, 의제배치하기의 과학을 통해, 의제집중화와 의제현상화, 그리고 마침내 현상변경에 이르는 일련의 정치일정이 시작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북·미는 핵·평화협상에 집중하는 모양이다. 여기서 유엔은 외부요인이다. 그러나 유엔사해체는 유엔문제가 본질이다. 의제를 다룰 틀이 다르기 때문에 의제의 발전과 전개과정도 다르다. 유엔사해체 문제는 결과적으로 북에 이익이 되겠으나 이 문제의 본질적 전제는 유엔의 법-권력간 대립관계에 있고 이를 해소하는 것이 목표이다. 이는 유엔헌장에 의해 미국패권의 남용을 단죄함으로써 유엔의 권위를 다시 세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유엔사참전국들이 유엔의 조치가 아닌 미국의 조치에 기만되어 북과 개별적으로 교전국가가 되는 것을 막는 것도 국제평화의 유지와 평화의 파괴를 예방하는 데에 중요하므로 이 역시 유엔내부의 본질적 문제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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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44) <노동신문> 2013. 1. 14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132
45) 북은 유엔가입 직후 유엔외교를 다시 강화했다. 1993년 10월 5일 송원호 북한 외교부부부장은 제48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유엔은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평화보장체계를 수립하는 문제에서 자기의 응당한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1994년 6월 김영남 외교부장이 갈리 사무총장에게 보낸 편지 등을 통해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 및 유엔군사령부 해체 등을 위해 유엔이 주도적으로 나설 것을 요구하였다. (서보혁, 「북한의 평화제안 추이와 그 특징」,『북한연구학회보』13권1호, (북한연구학회, 2009), pp.68-69) 그러나 위 성명은 유엔이 다루어야 할 한국문제가 아니라 바로 유엔문제라는 인식을 보여줌으로써 유엔의제화 시켰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46) 북은 1996년 4월 11일 유엔사무총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유엔은...최소한 미국에 의해 도용되고 있는 이름과 깃발이라도 구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A/51/98. S/1996/270. 11 April 1996, p.6
47) A/Res/376(V) 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 7 October 1950
48) The Administration of the Territories Occupied by the United Nations Forces (October 12, 1950. Y.H.Chung, ed. The United Nations and the Korean Question (Seoul: The U.N. Association of Korea, 1961), pp. 186-189; 박명림,『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Ⅰ(서울: 나남, 1997, 2쇄), pp.569-570
49) 이시우, 「유엔사 군사관할권의 실상」, (민중당전문가토론회자료집, 2018,5,14국회의원회관 제3간담회실); http://www.leesiwoo.net/?p=7764 (2019.7.28.검색)
50) 유엔헌장 2조7항: 이 헌장의 어떠한 규정도 본질상 어떤 국가의 국내 관할권 안에 있는 사항에 간섭할 권한을 유엔에 부여하지 아니하며, 또는 그러한 사항을 이 헌장에 의한 해결에 맡기도록 회원국에 요구하지 아니한다. 다만, 이 원칙은 제7장에 의한 강제조치의 적용을 해하지 아니한다.
51) 이시우,『유엔군사령부』, (파주: 들녘, 2013), pp.496-498
52) Julius Stone, Legal Controls of International Conflict (New York: Rinehart & Company Inc., 1954), pp.234-235
53) 김종기, 「마르크스의 변증법에서 모순의 객관성」,『시대와 철학』6권2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1995), p.237 참조
54) <노동신문>, 2013.1.14. ;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132
55) 하나의 규정은 오직 피정립성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이중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되는바, 즉 여기서 그 하나의 규정은 현존재와 본질이라는 두 측면에 다같이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앞의 경우를 따른다면 현존재는 피정립적 존재로서보다는 좀 더 고차적인 것으로 간주될뿐더러 또한 이 피정립적 존재는 외적반성에 해당하는 주관적인 것에 속한다고 하겠다...그런데 피정립성이란 것은 아직도 반성규정에 다다르지 않는 한낱 부정성 일반으로서의 규정성에 지나지 않는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제 정립하는 것은 외적인 반성과 통일을 이루고 있는가 하면 바로 이러한 통일 속에서 외적반성은 절대적 전제를 마련한 셈이 된다. (헤겔, 임석진 역,『대논리학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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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일 얻어맞아도 “괜찮다”..궁색한 미국의 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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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구 주권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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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8/18 [12:04] 최종편집: ⓒ 자주시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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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한미합동군사훈련을 강행하는 와중에 북한이 7월, 8월 여러 차례 미사일을 발사하고 있다. 미국은 북한의 위력시위에 연일 저자세를 보이고 있다.
추가 대북 제재는 ‘찔끔’, 안보리 회의는 ‘도망’
미 재무부는 7월 29일 베트남에 있는 북한 사람 1명을 특별지정 제재 대상에 추가했다. 이 사람이 경제, 무역, 광업 등 활동을 함으로써 북한이 외화를 벌어들였다는 것이다. 특별지정 대상에 오른 결과 이 사람은 미국 내 자산 등이 동결되게 되었다.
이런 미국의 제재는 과거 대북 제재에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미국은 2017년 8월 핵과 미사일 개발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6곳과 기관 10곳, 같은 해 9월에는 개인 26명과 북한 은행 8곳을 추가 제재 대상에 올린 바 있다. 2017년 12월에는 조선노동당 군수공업부 부부장을 제재 대상으로 지정했다.
이와 비교하면 미국이 이번엔 추가로 대북제재를 했다는 대상은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이다. 심지어 미국이 추가 대북제재를 했다는 사실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다. 추가 대북제재를 했다는 모양새만 갖추고, 북한의 반발을 최소화하려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유엔도 예전같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북한이 7월 연달아 미사일 위력시위를 하자 유엔 안보리에서는 8월 1일 비공개 회의를 열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문제라는 것이다.
유엔 안보리는 통상 북한 미사일 발사와 관련해 회의를 열면 의장성명이나 언론보도문을 채택해왔지만, 이날에는 안보리 차원의 어떤 활동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영국과 독일, 프랑스 3국이 회의 후 별도로 기자회견을 했을 뿐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통상 유엔 안보리 회의는 미국이 소집했지만 이번에는 영국과 프랑스, 독일이 요청해 소집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이 회의에 아예 참석하지 않았다. 미국이 유엔 안보리에서 아예 빠져버렸다.
미국은 유엔 안보리에서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도록 힘을 쓰는 게 아니라, ‘우리는 미사일 발사를 문제 삼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북한에 전달하는 게 가장 중요했던 것이다. 미국의 세계 패권이 땅에 떨어졌다는 걸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기자회견에서 한 동문서답
미국이 북한에 쩔쩔매고 있다는 것은 미국 정부의 태도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5월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했을 때는 ‘탄도’미사일임을 극구 거부했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지 1개월가량 지난 시점인 6월 3일에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아마도’ 유엔 결의 위반”이라고 어물쩍 인정했다.
미국이 ‘탄도미사일’임을 인정하지 않은 이유는 유엔 안보리 결의 1874호에서 탄도 미사일 관련 모든 활동을 중단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북한이 유엔 결의를 위반했다고 인정하면 그에 대한 대응조치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조치를 극구 피한 것이다.
이런 촌극은 애초에 미국의 부당한 제재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북한의 모든 탄도미사일 활동을 금지해버리니 어느 나라나 가지고 있을 단거리 미사일이라도 북한이 발사하면 불법이 되는 것이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8월 3일 보도된 담화에서 “그 어떤 발사체든 지구중력에 의하여 직선이 아니라 탄도(포물선)곡선을 그리는 것은 지극히 자명한 이치”라며 탄도 미사일을 탄도 미사일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미국의 태도를 조롱했다.
미국은 5월에 이어 7월과 8월에도 ‘탄도미사일’임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대신 새로운 논리를 개발했다.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이긴 하지만 ‘북미 합의 위반’은 아니라는 것이다. 강경 매파인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북한은 ICBM을 발사하지 않기로 합의”했다며 트럼프 대통령에 맞장구를 쳤다.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은 미국에 경고한 것이 아니다. 다만, 남과 북은 분쟁을 벌여오고 있다. 아주 오래된 분쟁”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발사한 미사일은 단거리기 때문에 미국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며 이 국면에서 빠지려고 하는 것이다.
미국은 세계경찰을 자처하며 전 세계에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일어난 안보 분쟁에 뒷짐을 지고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면, 한국이 미군을 한반도에 주둔하게끔 허용할 이유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미국의 태도에 친미 정당인 자유한국당이 불안을 느꼈는지 8월 12일 당내 의원모임인 ‘핵포럼’이 정책토론회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NPT를 탈퇴하고 핵무기를 개발하자는 주장이 나왔다고 한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도 “유비무환”이라며 핵무장에 동의했다.
이렇듯, 자유한국당마저 불안감을 느끼고 핵무장을 주장한다는 것은 친미파가 보기에도 미국이 북한에 저자세를 보이며 꼼짝 못 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7월 30일 기자가 ‘(북한의 비핵화가 아닌) 현상 유지가 목표이냐?’라고 묻자 “나는 김정은 위원장과 관계가 매우 좋다”고 동문서답했다. 그러면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자”라고만 답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북한의 비핵화? 아니면 미국의 패배?
얼마 남지 않은 시간표
어쩔 줄 모르고 진땀을 빼는 미국을 향해 북한의 압박이 점차 거세지고 있다. 8월 9일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를 받기도 했다.
친서를 받은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은 한미연합훈련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우리가 하는 건 소규모 훈련이지만 김정은 위원장은 좋아하지 않았고, 그 내용을 편지에 썼다”고 밝혔다. 이어 “나도 한미연합훈련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라고도 덧붙였다.
미국은 북한에 압박에 일체의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은 미국에 ‘올해 말까지 새로운 계산법을 들고 오라’고 최후통첩을 보낸 상태다. 미국은 8월 한미합동군사훈련을 하지 않는 선택지가 있었지만 걷어차 버렸다. 그래놓고 정작 북한이 반발하니 어쩔 줄 몰라 전전긍긍하는 꼴이 세계초강대국 체면을 다 구겨버리고 있다.
애초에 북한은 미국에 ‘굴복’을 요구하지 않았다. 북한과 미국은 2018년 발표한 싱가포르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 평화와 공존을 합의하지 않았던가.
미국은 북한과의 대결을 고집한 끝내 파국을 맞을 것이 아니라 북한과 공존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이제는 인정해야 늦지 않을 것이다.
한편, 추락하는 미국의 현실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일본의 경제 공격에 대한 대책으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폐기’와 ‘남북 평화경제협력’을 빼 들었다.
그러나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이 8월 9일 방한해 “지소미아 유지가 한·미·일 안보협력에 중요하다”며 지소미아 폐기를 가로막았다. 또, 남북경제협력은 미국이 한미워킹그룹으로 철저히 틀어막고 있다. 미국은 우리나라의 앞길에 사사건건 몽니를 부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에서 방위비 분담금을 받아내는 것이 아파트 월세를 받기보다 쉬웠다”며 주한미군 방위비 지원금을 6조 원으로 인상하라고 날강도 같은 요구를 하고 있다.
미국은 북한에 쩔쩔매면서 우리나라에 온갖 못된 짓만 골라 하고 있다. 이런 미국에 의존하다가는 일본의 경제 공격에 어려움만 생기고, 미국에 줄 것은 다 내줘야 하는 비참한 꼴을 면하기 힘들다.
우리의 미래를 제 한 몸 가누기 힘겨워하는 미국에 걸지, 아니면 판문점에서 남북이 합의한 한반도 평화·통일·번영에 걸지, 우리도 이제는 선택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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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창영위원 2019 조국통일촉진대회 참가기 -
프레스아리랑 | 기사입력 2019/08/18 [11:00]
▲ 조국통일촉진대회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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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규재 범민련남측본부 의장이 대회사를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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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민주당 한명희 대표가 축사를 낭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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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5남측위원회 이창복 상임대표의장은 연대사를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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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대회에는 다양한 영상물 상영과 문화공연이 곁들여져 2시간 넘게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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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통련 8.15 대표단’에게 꽃다발을 선사했다. 박남인 부의장이 우리말로 연대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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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통일의 의지를 드높인 축제와 결의의 한마당
- 2019 조국통일촉진대회 참가기 -
외세를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겠다는 신념을 안고 ‘2019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을 위한 조국통일촉진대회’에 참가했다.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을 주축으로 한 조국통일촉진대회준비위원회가 지난 해에 이어 개최한 행사다. 8.15 전야제를 겸하여 14일 오후 8시부터 광화문 북측 광장에서 열린 본대회는 시작 전부터 설레는 마음이 사뭇 컸다.
지난 해 동국대학교 만해광장에서 열렸던 대회의 열기가 새삼 떠오르기도 했거니와 올해에는 더욱 활짝 열린 광장에서 대회를 치른다는 점에서 자주통일이 그만큼 가까이 왔음을 실감하게 했기 때문이다.
대형 화면을 중심으로 무대 왼쪽에는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통일 앞당기자’ 오른쪽에는 ‘남북은 공동선언 이행, 미군은 아메리카로’라는 구호를 새긴 벽이 각각 세워져 있어 대회의 핵심 주장을 웅변하고 있었다.
사전 마당으로 민중가수 박준의 노래와 연주에 맞춰 1500여 명의 청중은 <남누리 북누리> 등을 함께 불렀다. 통일노래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가 울리는 가운데 번쩍이는 조명 속에서 어린이 율동패 ‘엇박자’의 경쾌한 춤동작이 펼쳐지자 광장에서는 박수와 함께 웃음과 환호가 터져 나왔다.
대북공연 순서에는 통일을 향한 민족의 고동 소리를 대변하듯 세 개의 대북이 리듬에 맞추어 웅장한 소리를 내면서 참가자들의 심장을 울렸다.
범민련 남측본부 원진욱 사무처장의 개회선언으로 본대회를 시작하면서 <공동선언찬가>를 함께 불렀다. ‘7천만 겨레여 공동선언에 발맞춰 나가자. 자주의 새 날이 열린 우리 앞길에 외세의 간섭일랑 필요치 않다. 민족의 공조로만 뭉쳐서 가자. 6.15 공동선언 승리의 길로.’ 노래말이 그대로 우리민족의 주장이고 호소였다.
무대에서는 합창단이 힘차게 노래를 부르고, 단 아래에서는 양 손에 한반도기를 든 율동패가 하나된 몸짓으로 힘을 북돋고, 광장에서는 참가자들이 손뼉으로 박자를 맞추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통일애국의례로서 묵상을 마치고 일제히 움켜진 주먹을 뻗으며 함께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투쟁의 결의와 각오를 새롭게 다지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무대 화면에서는 독립운동 시기부터 민주화 투쟁 그리고 통일운동에 이르기까지 몸을 바쳐 싸워 온 선열들과 투사들의 모습이 차례로 비춰졌다. 조국통일의 결정적 시기를 목전에 둔 오늘날, 지난한 투쟁의 역사가 더욱 소중하게 생각됐다.
“평화협정 체결하라!” “주한미군 물러가라!” “한미동맹 해체하라!” “민족자주 실현하자!” 광장에서 한목소리로 외친 구호는 인근의 미국대사관에도 분명하게 전달됐을 것이다.
조국통일촉진대회 준비위원장인 범민련 남측본부 이규재 의장은 대회사에서 “마침내 조미 대결은 비대칭에 종지부를 찍고 핵보유국 간의 대결로 변화되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우리민족은 미국과의 최종 대결의 국면에 서게 되었”다고 현정세를 정리했다. 또한 “민족의 자주통일과 평화번영의 미래를 우리 스스로 열어나가기 위해 미국패권 반대, 미군 철수, 한미동맹 해체 투쟁을 상시화하자”고 호소했다.
6.15남측위원회 이창복 상임대표의장은 연대사에서 “미국 중심의 패권질서는 무너져 가고 있으며 우리민족은 평화와 번영을 위한 큰 걸음을 이미 시작했”으나 “판문점선언의 정신과 9월 평양공동선언에 담긴 약속은 멈춰 있”으며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도 여전”하다고 지적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바라는 각계 시민들과 더불어 손잡고 더 크게, 더 힘차게 나아가자”고 호소했다.
공연 순서로 무대에 오른 ‘민주노총 톨게이트 수납노동자 직접고용 쟁취를 위한 농성단’은 <우리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간주 시간에 “직접고용 쟁취하자! 조국통일 이룩하자!”라는 구호를 삽입하여 노동현장의 주장과 통일의 열망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표현했다. 농성단은 “비정규직 없는 평화와 번영의 통일조국을 위해 힘차게 투쟁”하자고 호소하고 나서 <가자 통일로>라는 노래로 공연을 이어 갔다.
투쟁사 순서에 연단에 오른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윤택근 부위원장은 “분단으로 인해 노동의 가치는 훼손되었”다며 “노동의 가치가 존중되는 통일조국 건설에 민주노총이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박행덕 의장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군이 척양척왜 보국안민을 외치며 외세를 몰아내는 일을 시작한 지 125년이 됐다”며 “우리민족의 자주를 회복하고 자주통일을 이루는 데 전농이 함께하겠”다고 선언했다.
빈민해방실천연대 최영찬 공동대표는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이 통일 투쟁에 행동으로 나서야 한다”며 “민중생존권과 통일을 위하여 늘 앞장서서 투쟁하겠”다고 밝혔다.
민중당 이상규 상임대표는 “남과 북 해외의 민족자주 역량이 하나로 뭉치면 우리는 민족자주의 힘으로 반드시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이루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면서 “반미 반일 민족자주의 힘으로 역사의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자”고 호소했다.
민중민주당 한명희 대표는 “반미자주 없이 민중민주도 조국통일도 없고, 미군 철거 없이 보안법 철폐도 민중의 참된 복지도 조국의 평화적 통일도 불가능하다”며 “전쟁의 화근이고 만악의 근원인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전쟁도 분단도 없었을 것”임을 강조했다. 또한 “우리민족 우리 민중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미군 철거”라면서 “미군은 스스로 물러가는 법이 없을 것”이므로 “오로지 우리민족의 단결과 투쟁으로만 미군철거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여 큰 호응을 받았다.
두 번째 공연 순서로 등장한 범민련 공연단이 <연길폭탄> <통일무지개> 등으로 무대를 후끈 달군 후 <우리는 하나>라는 노래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 대표단 22명이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등장했다.
한통련 박남인 부의장은 연대사에서 “한국에 대해 경제보복 조치를 단행한 아베 정권에 대해 우리 한통련은 8월 8일 일본의 벗들과 함께 일본의 심장부인 아베 수상 관저 앞에서 역사왜곡 경제침략 평화위협을 도모하는 아베 정권을 규탄하는 항의 행동을 강력히 전개했음을 먼저 보고드”린다고 말문을 열고 “한반도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시기를 맞아 온겨레가 단결된 힘으로 주한미군 철수와 평화협정 체결의 그날을 맞이”하자고 호소했다.
범민련 해외본부는 한통련 오사카 본부 김융사 대표가 대신 읽은 연대사를 통하여 “범민련 해외본부와 해외동포들은 민족자주와 대단결의 기치 아래 남북 해외의 굳건한 연대 연합으로 시대와 정세의 요구에 부응하여 진정한 민족의 주체적 역량을 강화하는 거족적 투쟁에 항상 함께 할 것”임을 밝혔다. 범민련 북측본부는 남측본부 김재명 부의장이 대독한 연대사에서 “우리는 민족자주의 기치를 조국통일운동의 생명선으로 변함없이 높이 들고나가야” 한다며 “온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막아서는 온갖 도전을 과감히 밀어내고 평화와 번영, 통일의 활로를 힘차게 열어” 나가자고 호소했다.
이어진 주제공연에서는 <조선의 별>이 노래극으로 펼쳐졌다. ‘조선아 자유의 노래 부르자. 이천만 우리 동포 새 별을 보네.’ 식민지 치하에서 해방을 그리는 우리민족의 염원이 캄캄한 밤 하늘에 빛나는 별로 묘사되어 남다른 감동을 자아냈다.
이어지는 노래 공연은 <백두산의 눈보라>로서 고난을 뚫고 투쟁하는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었다.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라>에 이어 <조국은 하나다>라는 노래로 마무리되는 노래극은 그대로 우리민족의 역사였고 투쟁에 대한 부름이었다.
대회 말미에 낭독한 결의문에서는 네 가지 핵심 내용이 정리되어 있었다.
1. 민족자주의 기치를 더욱 높이 들고 외세의 횡포와 간섭을 끝장내자!
2.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전쟁위험을 제거하고, 평화를 수호하자!
3. 일본의 경제침략을 막아내는 거족적 투쟁에 적극 나서자!
4. 거족적 반미운동을 벌여내기 위해 반미운동을 전선화하고, 상설화하기 위한 노력을 적극 벌여내자!
어느덧 마지막 순서로 대합창 이어지는 가운데 대회의 핵심 주장을 담은 공연이 펼쳐졌다.
일장기와 성조기가 합성된 대형 깃발이 무대 앞의 바닥을 뒤덮었다. <아침은 빛나라> <범민련 찬가>가 힘차게 울리면서 한반도기가 등장하여 일장기와 성조기를 찢으며 깃발춤을 추었다.
참가자들은 한목소리로 외쳤다.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통일 이룩하자!’
‘미국놈들 몰아내고 조국통일 앞당기자!’
지창영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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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코리아국제평화포럼 국제토론회 개최
- 조혜정 기자
- 승인 2019.08.17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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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14일 국회 의원회관 제2세미나실에서 (사)코리아국제평화포럼(KIPF, 이사장 최병모)이 주관하는 “미국전쟁범죄 국제토론회”가 열렸다. |
지난 8월 14일 국회 의원회관 제2세미나실에서 (사)코리아국제평화포럼(KIPF, 이사장 최병모)이 주관하는 “미국전쟁범죄 국제토론회”가 열렸다.
<미 제국, 전쟁의 세계화-인류에 맞선 긴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이날 토론회에는 한일민중연대, 한일평화연대, 미국 재향군인회, 한통련 등 해외인사 20여 명이 함께한 가운데 약 100명이 참석하여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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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사말을 하고 있는 한충목 (사)코리아국제평화포럼(KIPF) 이사 |
(사)코리아국제평화포럼 한충목 이사는 토론회 인사말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 세계 대부분의 침략전쟁을 수행했던 나라는 미국”이라면서, “미국에 의해서 전쟁은 군인들의 싸움이 아니라 민간인들의 학살과 범죄로 얼룩졌다”고 지적하곤, “해방 이후 70여년 만에 미국이라는 나라를 함께 파헤쳐보기 위해 토론회를 마련하게 됐다”고 토론회 취지를 설명했다.
민중당 김종훈 국회의원은 서면 인사말에서 “아베 정권이 평화헌법 개정과 핵을 보유한 ‘보통국가’를 지향”하는 이 때에 “미국은 또다시 한반도에 갈등과 위기를 몰고 다니는 전쟁상인의 얼굴을 들이밀고”, “중단을 약속한 한미합동군사훈련을 버젓이 벌여놓고 ‘중거리 미사일배치’와 ‘호르무즈 파병압력’, ‘방위비 인상’까지”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판문점선언을 확고히 이행해 나겠다는 의지와 실천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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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전쟁범죄 국제토론회” 토론자들 |
“미 제국, 인류에 맞선 긴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황성환 <아메리카 제국의 몰락> 저자가 기조발제를 하였다.
황성환 저자는 “간사한 계략과 잔혹한 폭력을 빼놓고는 미합중국의 태생과 성장과정을 설명할 수 없다”면서, 건국 “250년이 다 돼가는 현재까지 단 한 순간도 간계와 폭력을 멈춘 적이 없는” 것이 “미 제국의 역사”라고 못 박았다.
황성환 저자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독립”이라는 미국의 건국이념은 “원주민을 무참히 죽이고 그들의 터전을 빼앗으며 아프리카 흑인들을 납치해다 노예로 부렸던 백인 무법자들”의 이념이라고 지적하고, 원주민 도살만행에 대해 세세히 열거하며 미 제국의 성장사를 비판했다.
또한 남북전쟁 이후 곧바로 영토확장전쟁에 나선 이래 멕시코, 하와이군도, 쿠바 침공, 제1차세계대전과 제2차세계대전 개입, 코리아,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침공과 리비아 압살 등의 침략전쟁의 역사에 대해서 일일이 폭로규탄했다.
나아가 쿠데타 지원, 반군 육성과 민간인 학살의 역사로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정부 전복과 민간인 학살, 이란의 모사데크 정부 전복, 콩고의 루뭄바 정부 전복과 아프리카 전쟁 조장에 대해 설명하고, 아메리카 대륙의 비극적 사태에 미국이 책임이 있다며, 칠레에서의 아옌데 대통령 살해와 민간인 학살, 아르헨티나에서의 페론 정부 전복과 민간인 학살, 니카라과 반군의 만행과 미 제국의 역할, 과테말라에서의 정부 전복과 인디오의 비극, 아메리카 대륙전반에서의 ‘더러운 전쟁’에 대해 단죄했다.
황성환 저자는 미국은 지금 “달러패권과 군사패권의 종언으로 몰락”하고 있다면서, “패도의 시대를 마감하고 지구촌 모든 나라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며 사회정의와 인류보편의 도덕이 바탕이 되는 덕치의 시대를 준비할 때”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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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제국, 전쟁의 세계화-인류에 맞선 긴 전쟁> 토론회 |
기조발제에 이어 사례발제가 이어졌다.
“세계 제1의 불량국가”라는 제목으로 발제에 나선 죤 김 John Kim((미국 평화재향군인회 Veterans for Peace) 변호사는 “불량국가”(rogue state)라는 용어의 기원, 이 용어가 미국의 국가 안보정책에 사용된 역사, 불량국가의 정의, 그리고 미국이 왜 세계 제1의 불량국가 미국인가“에 대해서 조목조목 논증했다. 죤 김 변호사는 “불량국가”란 용어에 대해 언어학 전문가인 노엄 촘스키 교수의 말을 빌어 “미국이 통제할 수 없는 누구든지”를 일컫는다고 지적하고, “그 나라를 악마 취급하고 국제 사회로 부터 고립시키기 위해 대중선전용으로 이 용어를 사용한다”고 꼬집었다.
또한 죤 김 변호사는 미국이 저지른 1871년 조선침략, 4.3제주학살을 비롯해 세계적 범위에서 자행된 “침략범죄, 전쟁범죄, 반인도적인 범죄”를 열거하며, “정권교체, 경제전쟁, 심리전, 그리고 테러, 마약 밀매, 납치, 전 세계 통신 감청, 사이버 범죄 등을 포함해서 국가 간의 관계에 적용되는 국제법의 수많은 원칙을 위반”한 것으로 해서 “미 제국이 오늘날 세계에서 제1의 불량국가”로 불릴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설명했다.
신기철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은 “한국전쟁의 전쟁범죄와 민간인 학살”이라는 제목으로 발제하였다. 신 소장은 “국민보도연맹 사건처럼 자기 영토에서 물러나면서 민간인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행위는 전 세계 어느 전쟁에서도 찾을 수 없다. 점령지로부터 후퇴하면서 또는 점령지를 수복하면서 적을 도울 것이라든가 또는 적을 도왔다든가 하는 이유로 민간인을 학살하는 행위는 전쟁범죄”라고 규정하고, “전투인지 학살인지 구별할 수 없는 사건”들이 많다면서 몇 가지 사례를 소개했다.
그 중에는 한국전쟁사에 있어 최초의 승전이라고 보고된 ‘1950년 6월 25일 내전의 시작과 대한해협 전투’를 포함하여, ‘1950년 7월 26일 영동 노근리 학살’, ‘1950년 8월 18일 덕적도에서 벌어진 인천상륙작전 학살’ 등에 대해서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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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전쟁범죄 국제토론회” 토론회 발표장면 |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사건의 미국 책임 고찰”이라는 제목으로 발제에 나선 임재근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교육연구팀장은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20여 일간 법적 절차 없이 충남지구CIC,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에 의해 보도연맹원들과 대전형무소 재소자들 등 최소 1,800명 이상, 최대 7천 명가량이 집단 학살” 당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간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과 관련하여 한국군과 경찰의 책임을 묻는 연구는 있었으나, 직접적으로 미군의 책임을 묻는 연구는 없었다며, 1) 미군의 한국군에 대한 태생적 구조적 영향력, 2) 학살 현장 보고서를 작성, 3) 대전전투에 앞선 미 제24사단 및 미군 지휘부의 역할, 4) 학살 시기에 진행된 작전지휘권 이양, 5) 9.28수복 이후 미군의 지휘 아래 부역혐의자 학살 등의 근거를 제시하며, “민간인 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물었다.
마지막 발제자로 나선 손정목 4.27시대연구원 국제분과장은 “미국의 정권 전복 프로그램 –색깔혁명”이라는 제목에서 “색깔혁명은 미국 패권의 실현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손정목 국제분과장은 미국의 패권전략을 유형별로 ▲ 경제제재를 통한 내정 불안, 봉기유도(북, 베네수엘라, 이란 등), ▲ 반정부 극단주의 세력에 대한 지원을 통한 봉기 또는 쿠데타 시도 (색깔혁명) ▲ 직접적 혹은 대리세력을 앞세운 전쟁 수행(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리비아, 시리아) 등으로 나눌 수 있다고 발표했다. 이중 색깔혁명은 “미국이 친미정권 수립을 목표로 해당 국가의 반정부 극단주의 세력을 지원해 일으킨 정권 전복 시도”로서, 2003년 조지아(그루지야) 장미혁명,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혁명, 2005년 키르기스스탄 튤립혁명, 2006년 벨라루스 수레국화(청바지)혁명, 2009년 이란 녹색혁명, 2014년 우크라이나 유로마이단혁명, 2014년 홍콩 우산시위 등을 들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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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전쟁범죄 국제토론회” 기념사진 |
토론이 종료되고, 민중당 자주평화통일위원회 권오혁 국장이 ‘유엔사 해체 국제운동’에 대해서, 와타나베 켄쥬 일한민중연대 공동대표가 ‘일본 평화운동 현상과 과제’에 대해 보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미군범죄 국제토론회> 자료집
https://drive.google.com/file/d/18ERPOaq-IATiwc45LDvw4fKWv1ivuNqh/view?usp=sharing
조혜정 기자 jhllk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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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노회찬 OOO를 만나다] '미완의 기록'으로 본 노회찬과 김대중
노회찬은 항상 '영감'을 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등졌지만, 세상은 그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은 노회찬재단과 함께 노회찬이 만난 사람, 노회찬의 생각, 노회찬의 꿈에 대해 되짚어보는 '노회찬 OOO를 만나다' 연재를 진행합니다. 편집자.
2009년 8월 18일 오후 방송과 언론에 속보, 뉴스특보가 뜬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 43분 서거했다. 향년 85세.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오후 1시 35분께 심박동이 정지했다가 40분께 다시 돌아왔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서거했다."
서거 소식을 알리는 기사의 제목을 보면, '한국 민주화의 상징'(오마이뉴스), '시대의 거목'(뷰스앤뉴스), '민주와 평화의 상징'(이뉴스투데이), '위대한 지도자'(뉴스한국), '햇볕정책·평화 전도사'(이데일리), '한국 정치계 큰 별'(노컷뉴스), '암살 ·사형선고 이겨낸 진정한 지도자'(아주경제)이라는 표현과 함께, '인동초'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끝내 쓰러진 인동초'(디지털데일리), '이 땅에 민주화 꽃피운 인동초'(헤럴드POP), '민주주의와 인권에 앞장선 인동초'(베타뉴스), '忍冬草 85년'(한국경제) 등.
8월 18일 당일 노회찬(진보신당 당대표)은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고 김 전 대통령의 업적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는 추모사를 발표한다. 그리고 김대중의 서거 소식에 지레 겁을 먹은 이명박 정부가 경찰을 동원해 서울 시청광장과 청계광장을 봉쇄하고 나서자,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린다. "김대중 대통령 서거소식에 경찰이 12개 중대 800여 명의 병력을 풀어 서울시청광장과 청계광장을 봉쇄했군요. 참으로 한심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민심이 두려우면 차라리 이 나라를 떠나십시오."
이틀 뒤인 8월 20일 노회찬을 비롯한 진보신당 대표단은 국회광장에 마련된 공식 빈소를 찾아 영정 앞에 분향 및 헌화를 한다.
▲ 오른쪽 사진: 왼쪽부터 진보신당 이성화(사무총장) 이덕우(전 공동대표) 이용길(부대표) 조승수(원내대표) 노회찬(당대표)
숫자와 기록으로 본 '인동초' 김대중(DJ)의 정치역정
1987년 9월. 12월의 1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광주 망월동 묘역을 찾은 김대중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혹독했던 정치의 겨울 동안 겨울을 이겨내는 강인한 덩굴풀 인동초를 잊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바쳐 한 포기 인동초가 될 것을 약속합니다.…동트는 민주와 민중의 새벽을 앞장서 열어 갈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김대중에게는 '인동초'(忍冬草)라는 별명이 뒤따라 다닌다.
"인동초." 김대중의 생애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한 말은 없을 것이다. 엷은 잎 몇 개로 모진 겨울을 견뎌내고 새 봄에 꽃을 피운다는 인동초. 별명대로 그의 일생은 도전과 응전의 역사였다. 숱한 시련에 부닥치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인간승리의 신화를 일궜다(「가택연금 55회…투옥 6년…망명…사형선고」, 중앙일보, 2009년 8월 19일).
역대 독재정권 아래 가택연금을 당한 것이 6년 반, 여기에 감옥에서 보낸 세월이 5년 반, 국외로 쫓겨난 것도 3차례에 모두 3년이었다. 최소 15년 동안 신체적 자유를 박탈당했던 것이며, 심지어는 내란음모죄를 뒤집어쓰고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김대중 사이버기념관). 잇따른 낙선, 납치, 투옥, 그리고 죽음의 위협 등을 이겨내고 인고의 꽃을 피운 김대중의 삶을,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결국은 꽃을 피우는 인동초에 비유하게 된 것이다.
평생 열네 번의 선거에 출마해 일곱 번 당선 : 국회의원 선거는 10번 나와 6번 당선
1924년 1월 6일(호적상으로는 1926년 1월 6일) 김대중은 목포에서 뱃길로 34㎞ 떨어진 작은 섬인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호인 후광(後廣)은 고향 마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한국전쟁이 한창이었던 1951년 김대중은 부산 영도에 '흥국해운'이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이후 3년 간 운영한다. 이때 김대중이라는 이름이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 첫 등장한다. '흥국해운주식회사 사장 김대중씨가 부산 부평동시장에서 수표책을 분실한 것을 차재상이라는 사람이 습득, 시계, 양복, 금반지 및 백미 7가마 등 당시 시가 약 7백만원어치를 매입 착복'했다는 기사가 동아일보(1953.4.24.)에 실린 것이다.
사업 성공 등 승승장구하던 김대중에게 1954년 발생한 '부산정치파동'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사건이다. 이를 계기로 정치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기 때문이다. 이후 10번 나와 6번 당선한 국회의원 선거 결과를 정리하면 이렇다. ('전남 2'와 '전남 3'은 현재의 전남 목포시 일대를, '강원 15'는 현재의 강원 인제군 일대를 말한다.)
1954년 3대 총선에서 목포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한 김대중은 5위로 낙선한다. 1958년 4대 총선의 경우 민주당 후보로 강원도 인제에 출마하려 했으나 자유당 후보가 중복추천을 통해 등록무효를 시켜 출마조차 하지 못한다. 1959년 재보선에 다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자유당 후보가 제기한 색깔론에 의해 낙선한다. 당시 이른바 「아이롱.투표용지」가 출현해 말썽을 빚기도 한다. 즉 투표소에서 발부된 투표용지에 민주당 입후보자 김대중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투표용지가 배부되어 일부 투표소에서 말썽이 일어난 것이다(동아일보 1959년 6월 5일).
세 차례 실패 끝에 김대중은 1961년 5월 13일 실시된 5개 구의 민의원 보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강원도 인제에서 당선된다. 하지만 사흘 만에 5·16 쿠데타가 벌어지는 바람에 의사당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의원직을 박탈당한다. 당선통보 후 실제임기는 약 12시간에 불과했다.
1967년 7대 총선에 당선한 재선 국회의원 김대중은 5월 15일 국회 연설집 <분노의 메아리>(숭문각)를 출간한다. 동아일보는 "보라! 이것이 6대 국회 최대웅변가요, 이론가요, 투사로서 내일이 촉망되는 김대중 의원의 문제발언들이다!"라고 광고한다.
▲ <분노의 메아리> 책 표지 및 동아일보 1967년 5월 16일자 광고
1971년(4선)의 경우는 1972년 10월유신으로 국회가 해산당함으로써 자격이 박탈된다. 1992년(6선)의 경우 1992년 12월 19일 대선 패배로 정계은퇴를 선언, 국회의원을 사퇴한다. 1996년 15대 총선 새정치국민회의 전국구의 경우 13번까지 당선, 전국구 14번인 김대중은 국회의원이 되지 못한다. 전국구 9번인 권노갑의 경우 1997년 12월 26일 뇌물수수로 의원직을 상실하는데, 의원직 승계 전 김대중이 15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권노갑 의원직은 전국구 15번인 송현섭이 승계하게 된다.
대통령 선거, 4번 출마 끝에 당선
10번 나와 6번 당선된 국회의원 선거를 포함해 김대중은 평생 열네 번의 선거에 출마해 일곱 번 당선한다. 순탄치 않은 역정이었다. 다섯 차례의 대선에 출마해 모두 당선한 박정희나, 열두 차례의 선거에 출마해 열 번 당선한 김영삼 전 대통령과는 대조적이다(중앙일보, 2009년 8월 19일).
▲ 김대중 대통령선거 포스터 (왼쪽부터1987년 대선, 1992년 대선, 1997년 대선)
김대중의 대선 출마 결과를 정리하면 이렇다.
1970년 9월 29일 서울시민회관. 7대 대선 후보를 뽑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은 막판 대역전 드라마를 연출한다. 총재 유진산의 실질적인 지명을 받아 낙승을 자신하던 김영삼(YS)을 제치고 대의원들에 의해 후보로 선출된 것이다. 이후 평생의 라이벌인 김영삼과 정치 인생 내내 숙명의 대결을 벌이게 된다.
▲ 1971년 4월 18일 장충단공원 대선 유세 (“여러분! 이번에 정권 교체를 하지 못하면 이 나라는 박정희 씨의 영구집권의 총통시대가 오는 것입니다.…550만 서울 시민 여러분! 7월 1일에 청와대에서 만납시다.”)
다섯 차례의 죽을 고비: '불사조' 김대중
94만 표 차로 분패한 1971년 7대 대선 결과는 박정희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것은 김대중에겐 혹독한 시련의 전주곡이었다. 1972년 유신체제 등장 전후부터 19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뤄지기 전까지의 기간은 김대중의 정치인생 중 최대의 암흑기이자 형극의 세월이었다. 이 시기 김대중은 모두 다섯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6년간 투옥됐으며 10년간 55차례, 183일의 가택연금을 당했다. 상당 기간 망명길에 오르기도 했다.
이 시기 DJ와 함께 등장하곤 하는 명칭이 '남산'과 '동교동'이었다. <남산의 부장들 1, 2> 저자인 김충식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정치사에는 남산 혹은 정보부, 안기부로 불리던 정치공작처가 있었다. 분단 내전 냉전 독재 학생혁명 군사쿠데타라는 특이한 역사가 배태한 제3의 막강 정치집단, 그것은 한국정치에만 존재하는 괴물이자 어두운 유산이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의 권력보위 기능을 맡았던 이 무소불위의 남산조직, 거기에 맞섰던 가장 두드러진 대항 세력은 누가 뭐라 해도 단연 동교동이었다."(김충식, 「끝내 제 몸마저 불태운 '主君정치'의 한계-'동교동' 영욕의 30년」, <신동아>, 2003년 1월호, 520호)
▲ (왼쪽) 1971년 5월 24일자 동아일보 기사 ▲ (오른쪽) 1971년 8대 총선 지원유세 중 무안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 후 깁스를 한 채 상경하여 유세를 하는 김대중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김대중은 때때로 "나는 다섯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말을 하곤 했다.
첫 번째 죽을 고비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체포돼 목포형무소에 갇혔는데, 총살직전에 기적적으로 탈출해 목숨을 건진다.
두 번째는 1971년 4월 대통령선거에 이어 5월에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 선거 때. 비례대표 2번으로 등록하고 전국 지원유세에 나선 김대중은 월11일부터 선거 전날인 5월 24일까지 무려 5300여㎞를 달리며 100곳이 넘는 지역을 찾아가 신민당 후보지원 연설을 한다. 5월 24일 후보지원 유세를 위해 서울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달린 광주-목포간 도로 무안지점에서 느닷없이 돌진한 14t짜리 대형트럭에 받혀 교통사고를 당한다.
당시 사고 처리 과정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사고 지점에서 10분 거리에 무안경찰서가 있는데도 경찰은 두 시간이 지나서야 나타났다. 대통령 후보까지 지낸 유력 정치인이 하마터면 죽을 뻔한 대형 사고를 당했는데도 언론 보도는 <경향신문> 1단 기사가 전부였다. 중앙정보부가 보도를 틀어막은 것이었다. 검사가 문제의 운전사를 살인혐의로 조사하자 즉시 다른 검사로 교체됐다. 교체된 검사는 사건을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하고 끝냈다. 세 사람이나 죽었는데 운전사는 구속조차 되지 않았다.
세 번째와 네 번째는 1973년 8월 8일 중앙정보부에 의한 일본 동경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과 관련돼 있다. 일본 NHK가 구성한 김대중 자서전에 따르면 일본의 그랜드팔레스호텔 복도에서 김 전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의 요원들에게 납치돼 처음에는 호텔방 욕실에서 토막살인될 뻔했다. 그들은 여의치 않자 김 전 대통령을 배로 옮겨 손발을 묶고 현해탄 한가운데에서 수장하려 했지만 미국의 개입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명섭, 「쇳덩이 매단 바다 위의 김대중 "이렇게 죽는구나" 떨고 있는데…」, 한겨레, 2015년 9월 14일). 구사일생으로 김대중이 동교동으로 귀가한 것은 8월 13일 밤 10시가 조금 넘었을 때로 실종된 지 5일 9시간 만이었다.
▲ (왼쪽) 1973년 8월8일 도쿄에서 납치된 김대중은 오사카항에서 중앙정보부의 공작선 용금호에 실려 이틀간 바다에 떠 있는 동안 ‘수장’될 뻔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 (오른쪽) 김대중의 구사일생 생환기는 동교동으로 몰려든 국내외 기자들에 의해 박정희 독재정권의 실상을 전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김대중이 손목 발목 등 온몸의 생생한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다섯 번째 고비는 1980년 7월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신군부에 의한 사형선고이다.
5.18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던 하루 전날인 5월 17일 김대중은 정권전복을 꾀한 주목자로 지명돼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간다. 이어 군법회의와 대법원에서 내란음모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등 7가지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하던 중 국내외의 구명운동과 미국의 개입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19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 미국 망명길에 오른다.
▲ 1980년 11월 3일 고등군법회의 항소심에서 사형 확정
이처럼 다섯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김대중은 '불사조'라는 별명을 얻는다.
미국으로 건너간 김대중은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강연과 대 의회활동 등 열정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1983년에는 국내에 있던 김영삼의 단식투쟁을 계기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구성하고 양 김씨가 공동의장를 맡는다. 마침내 1985년 2월 8일 '신변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전두환 정권의 으름장에도 불구하고 2년여만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고국으로 돌아온다. (※ 1995년 광주민주화운동특별법이 제정돼 관련자들의 재심 청구와 명예 회복이 이어졌고, 김대중은 대통령 임기를 마친 2003년 이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해 2004년 무죄를 선고받는다.)
1964년 5시간 19분 동안의 필리버스터
명연설가로서 김대중은 잘 알려지지 않은 기록의 보유자이기도 하다. 김대중은 1963년 6대 총선에서 목포에서 당선, 재선 국회의원이 된다. 1964년 4월 6대 국회에서 김대중은 '김준연 의원 구속동의안' 처리를 막기 위해 본회의장에서 5시간 19분 동안 쉬지 않고 발언하는, 합법적인 의사진행 방해인 필리버스터(법적 표현은 무제한 토론)로 전국적 지명도를 얻는다. 이때 기록한 5시간 19분은 당시까지 최장시간 국회 연설 기록으로 기네스북에도 오른다. 공화당은 170석 중 110석의 의석을 가지고 있었다. 표결로는 동의안 처리를 막을 방법이 없었던 상황에서 결국 국회의 구속동의안은 부결된다. 당시 '동아방송'은 국회 단상 밑에 신문지로 감싸 숨겨둔 마이크를 통해 김 전 대통령의 발언 육성을 세상에 전달(김유리, 「김대중 5시간19분 필리버스터는 어떻게 끝났을까-의장이 일방적으로 본회의 불법 폐회… 최장 기록은 박한상 '박정희 3선 개헌 반대' 10시간」, <미디어오늘>, 2016년 2월 23일), 김대중은 단연 화제의 인물로 부상한다.
국회 연설 세계최장기록은 1957년 미국의 스트롬 서몬드 공화당 상원의원이 민권법 통과를 막으려고 시도한 24시간 18분 동안의 연설이다. 한국에서는 1969년 3선개헌을 저지하기 위해 법사위에서 10시간 15분 동안 연설한 신민당 박한상 의원이 의정사상 최장기록 보유자로 되어 있다가,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로 더불어민주당의 은수미 의원(2월 24일)이 10시간 18분을, 이종걸 의원(3월 2일)이 12시간 31분의 최장 발언시간을 기록한다. 필리버스터 9일째까지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소속 37명의 의원과 무소속 의원 1명 등 총 38명이 연단에 섰고, 누적 발언시간은 총 192시간 27분(8일 0시간 27분)으로 세계 최장기록이다.
1945년 해방 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 한국인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2박 3일 동안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이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진행한다.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었고 회담 결과로 마지막날 6·15 남북 공동선언이 발표된다. 미국의 AP통신은 2000년 12월 25일 '2000년 세계 10대 뉴스'를 발표하였는데 이 남북정상회담은 5위를 차지한다.
▲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6.15남북공동선언문에 합의한 후 기념촬영 (사진: 김대중 평화센터)
2000년 10월 13일 오전 11시 노르웨이 노벨 평화상위원회는 올해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이라고 발표한다. 군나르 베르게 위원장은 "金대통령이 한국과 동아시아에서의 민주주의와 인권, 특히 북한과의 평화.화해를 위해 노력한 점이 인정된다"고 선정 이유를 밝힌다. 그는 또 "金대통령이 '햇볕정책'을 통해 전쟁과 적대로 50년간 이어졌던 남북 관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했고 이제 한국에서도 냉전이 종식될 것이라는 희망이 싹텄다"고 평가한다.
이날 청와대에서 수상 소식을 들은 김대중은 "오늘의 영광은 지난 40년 동안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남북간의 평화와 화해.협력을 일관되게 지지해 준 국민의 성원 덕분이다. 이 영광을 우리 국민 모두에게 돌리고자 한다. 우리 국민과 더불어 이러한 노력을 성원해 준 세계의 민주화와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시민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한다.
1987년부터 14번 연속 후보에 오른 김대중은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을 받게 된 것이다. 아시아에선 일곱 번째 평화상 수상이며, 1996년 동티모르의 카를로스 벨로 주교와 독립운동가 호세 라모스 오르타가 공동 수상해 수상자로선 여덟 번째다.
김대중과 노회찬, 월간 <다리>를 통한 두 사람의 만남
노회찬과 김대중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정확히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기록을 살펴봐도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유추해보건대 고등학교 시절에는 김대중이 어떤 인물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1972년 10월유신 이후 노회찬은 "정부 발표에 대해서는 일체 신뢰하지 않게 된 대신 <월간 다리>를 구독하고, 강제 폐간된 <사상계>를 청계천 헌책방에 가서 권당 30원씩 한 보따리씩 사다가 읽었다. 논문도 있고 논조도 어려워 이해할 수 있는 글이 별로 없었지만 열심히 읽었다."(안재성, 「약전: 멈추지 않을 진보정치의 꿈, 노회찬」, 노회찬, <우리가 꿈꾸는 나라>, 창비, 2018, 150-151쪽)는 기록이 이다.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고등학생 시절 노회찬은 백기완 선생의 흥사단 강연을 듣고, 판매금지 당한 <씨ᄋᆞᆯ의 소리> 함석헌 선생을 댁으로 찾아뵙고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창간 이후 폐간, 복간, 휴간하다 끝내 없어진 월간잡지 <다리>를 통해 '김지하'를 알게 되었고, '서울대 내란음모사건' 그리고 '박현채'와 같은 진보학자들의 논문도 읽어 볼 수 있었다. 당시 신문에 나오지 않는 내용은 <다리>라는 잡지에 다 있었다. 김대중 관련 글과 기사도 물론 있었다. 노회찬이 소장하고 있던, (가칭)'노회찬의 서재'에 있는 월간 <다리> 가운데 김대중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몇 개 고르면 이렇다.
- 강인섭의 「7대 국회의원들의 저서 붐」에서 김대중의 <내가 걷는 70년대> 책 소개 (1971년 1월호)
- 김대중의 <내가 걷는 70년대>(범우사) 책 광고(1971년 3월호, 4월호; 1972년 4월호)
- 김대중, 「정보정치는 항쟁을 낳는다」 (1971년 12월호)
- 「통제받지 않는 권력은 악이다: 김대중 의원과 김동길 교수 대담」) (1972년 9월호)
당시 월간 <다리>는 <사상계>가 폐간된 직후인 1970년 9월 창간되었으며 월 2만 부가 나갈 정도로 인기있는 잡지였다. <다리>의 실질적 사주는 김상현으로 김대중 후보의 핵심 참모였다. 편집인 겸 주간인 윤형두는 김대중 후보의 선거용 간행물을 제작하고 있던 범우사 사장이었으며, 발행인 윤재식은 김대중 후보의 공보비서였다.
김상현과의 첫 만남에 대한 노회찬의 기억은 이러했다. "궁금한 점이 많아서 책을 훑어보니 '김상현'이라는 이름이 있어 전화했더니 오라고 했다. 광화문 당주동 월간 <다리> 사무실을 찾아갔는데 김상현 씨가 나를 보고 고등학생이 대단하다고 했다. 그리고 일단은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을 가고, 그다음에 찾아오라고 했다. 크게 실망했다. 이후 김상현 씨가 국회의원이 되었는데 내가 나중에 국회의원이 되어서 이 이야기를 했는데 기억을 못하더라" (「<'自由人' 인터뷰> 노회찬 진보신당 상임고문」, 2011년 8월 18일)
청주교도소 수감 생활, 독서와 화단의 꽃 가꾸기
▲ 1981년 청주교도소 겨울, 수인번호 9번
1981년 1월 31일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된 김대중은 군교도소를 떠나 청주교도소로 이감된다. 기결수로 머리를 짧게 깎고 수인번호 9번으로 새로운 이름을 얻은 김대중은 0.96평 규모의 독방에서 생활한다. 면회는 월 1회, 운동은 1일 30분 허용된 가운데 김대중은 하루 10시간 이상 독서를 하며 짬짬이 운동시간에 화단의 꽃을 가꾸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자서전에서 김대중은 "때로 나는 화단의 꽃들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훗날 역시 독서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식물에게도 말을 걸고 다정하게 대해주면 더 오래 시들지 않고 자태 또한 예뻐진다고 한다. 실제로 내가 가꾼 꽃들이 그랬다. 늦가을이 돼서도 다른 화단의 꽃보다 적어도 한 달 이상은 더 오래 피어 있곤 했었다"며 청주교도소 생활의 일부를 소개하기도 했다. 1982년 12월 23일 미국 망명길에 오르기까지 김대중은 23개월 동안 청주교도소에 머문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김대중 사형선고'의 배경이 된 5.18광주민중항쟁은 노회찬에게 큰 충격을 던진다. "광주시민들의 외침이 무참하게 짓밟히는 것을 보고, 올바르고 참된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노회찬은 "노동자들의 조직화, 세력화되어 앞장 설 때만이 세상을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깨달음 속에서 노동운동 현장으로의 존재 이전을 준비하게 된다.
한편 7년 동안의 수배 생활 끝에 1989년 12월 24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된 노회찬은 치안본부 홍제동 대공분실을 거쳐 서울구치소(수인번호: 272번) 이감된다. 그 뒤 안양교도소(수인번호: 5009번)에서 여름과 가을을 보낸 뒤 1990년 늦가을부터 1992년 4월 1일 청주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한다. 청주교도소 수인번호는 336번이다.
당시 노회찬에 대해 사회학자 이진경(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이렇게 회고한다(노회찬재단 모아냄, <그리운사람 노회찬>, 2019).
"노회찬 의원과는 개인적인 연이 있습니다. 구치소에서도 같이 있었고 징역 생활도 청주에서 같이 했지요. <삶을 위한 철학 수업> 강연할 때 항상 드는 예인데 아주 보기 드문 사람이었습니다.
감옥이란 자유를 제한하는 구속의 공간이죠. 그래서 누구나 닫힌 방의 숨막히는 공간에서 나오려 애쓰는데 그래도 그 당시 구치소는 정치범이 너무 많아(300명 이상) 징역 생활이 좀 '트여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노회찬 씨는 인사라도 하려 찾아가보면 문을 잠가놓고 있는 겁니다. 하여 문을 따달라고 할까요 물어보면 그러지 말라고, 자기가 일부러 부탁해서 잠근 거라는 겁니다. 이유를 물으니 구속되기 전엔 보고 싶은 책이 많아도 시간이 없어 못 보았길래 구속되면서는, 이젠 책 좀 실컷 봐야지 했답니다. 그러나 징역이 트여있는 덕에 찾아오는 이들이 너무 많아 책을 제대로 볼 수가 없더랍니다. 그래서 일부러 잠가 놓고, 닫힌 문 앞에서 얼른 돌아가게 하려는 것이라는 겁니다.
흔히 자유와 구속을 대립시키지만 이를 보고선, 아, 자유란 때로 더 강한 구속을 자처하면서도 가능한 것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책을 보는 자유를 위해 방문을 잠그는 구속을 자처한 것이니까요. 마치 자유인이 되기 위해 문을 잠그는 무문관 수행자들처럼. 자유란 그런 점에서 능력이라고, 능력만큼 자유로운 것이라고 하는 얘기를 무엇보다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김대중이 화단의 꽃을 가꾼 것처럼, 노회찬은 청주교도소에서 해바라기를 심는다. 그리고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노회찬, 「해바라기처럼」, <신동아> 1994년 10월호 칼럼).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자그마한 화단에 해바라기 씨앗을 심은 것은 1991년 어느 봄날 청주에서였다. 지난 수개월 동안 벼르던 일을 해내서인지 꽃씨를 심은 그날은 물을 뿌린 흔적 밖에 없는 화단을 내다보기 위해 몇 번이나 철창가로 다가갔는지 모른다. … 하루하루 자라는 어린 싹을 보며 깊은 숲 속에서 심호흡을 하는 여유를 맛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곳은 어린 해바라기가 자신을 유지하고 성장시키기엔 너무나 험난한 환경이었다. 비록 화단의 모양새는 갖추었지만 높은 사람들이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 후미진 곳인지라 변변한 나무나 화초가 심어져 있지도 않았다.
… 이듬해(1992년) 봄이 오자 보통 해바라기의 절반도 안되는 크기의 씨앗을 화단에 다시 심었다. 그해 4월 청주에서 만기 출소한 나는 화단에 심은 해바라기의 뒷 소식을 듣지 못했다. 대신 몇 개의 씨앗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 친지와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시골집 앞마당에도 심었다. … 해바라기를 키우며 알게 된 것 중의 하나는 해바라기 꽃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태양의 위치를 따라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환한 대낮의 해바라기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두워진 후에 해바라기 얼굴은 빛이 마지막으로 사라지던 곳,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다음날 오전이면 해는 이미 중천을 향하고 있어도 해바라기의 얼굴은 그날 새벽 어둠을 뚫고 밝은 빛이 처음 새어 나오던 곳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해바라기가 보여준 것은 권세를 쫓는 기회주의가 아니라 광명천지를 향한 희구였던 것이다. … 진보정당운동은 권세를 쫓아 어둠과 타협하는 것을 거부하고 광명천지를 향해 나아가는 운동이다. 어둠을 몰아내는 해바라기 정치를 추구하는 운동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진보정당운동의 오늘은 청주교도소 화단의 해바라기처럼 불우한 조건에 놓여 있다. … 그러나 해바라기를 길러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해바라기는 어떤 땅에서도 다 잘 자란다. 그 자태는 숱한 잡종교배 끝에 만들어낸 화려한 꽃에 비할 수 없지만 그 열매는 어떤 화초보다도 크고 풍성하다. 무엇보다도 일관되게 광명천지를 향하는 해바라기의 자세는 많은 이들의 희망이 되고 있다."
대통령 선거, '비판적 지지'라는 진보정치의 족쇄
김대중과 진보정치는 한국 현대정치사 속에서 애증의 관계를 이어왔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김대중은 진보정치가 실체조차 없던 시절부터 일정하게 진보정치의 영역을 대변해 온 유일한 정치인이었고, 서슬 시퍼런 군사독재 시절에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함께 했던 '동지'였다. 다른 한편으로 김대중은 1987년 대선 이후 진보정치의 발목을 잡아온 '비판적 지지'의 대상이기도 했다.
노회찬은 이렇게 말한다.
"김 전 대통령이 앞장선 민주화가 6월 항쟁으로 꽃이 폈고, 이와 함께 진보정치도 합법적 공간에서 활동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김 전 대통령이 진보정당이 서는 밑거름을 마련하는데 일조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레디앙>, 2009년 8월 20일)
"동전의 양면이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그 자신이 진보정치인은 아니었다.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의 기초를 위해 싸워왔다면 이제 남은 것은 우리 몫이다. 한 시대가 마감된 만큼, 이제 제대로 된 진보정치를 실현해야 할 것"(<레디앙>, 2009년 8월 20일)이라고 말한다.
비판적 지지론은 한편으론 '최악을 막기 위한 연대'이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자기 정치 정체성을 배반하는 이율배반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비판적 지지가 공개적으로 몸을 드러낸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노회찬과 인민노련은 진보진영의 독자후보를 통해 합법적 진보정당 건설이라는 꿈을 꾼다.
"인민노련은 공개적인 민중 정당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1987년 백기완 선생을 대선 후보로 내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합법적 진보 정당을 만드는 노선을 채택했던 것이지죠." (정운영, <정운영이 만난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랜덤하우스중앙, 2004, 81쪽)
1987년 13대 대선 당시 진보진영의 후보전술은 세 가지로 제시된다. 비판적 지지론, 후보단일화론, 독자후보론이 그것이다. 그 차이가 표면화된 것은 10월 13일 재야의 대표격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범국민적 후보로 김대중 고문을 추천한다」는 성명서를 발표, 그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면서부터다. 민통련의 결정에 대해 많은 비판이 제기되고 결정 철회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민통련의 발표로 인해, 후보 단일화 문제를 둘러싼 공방의 내용은 한층 축소되어 '두 김 씨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누가 좀 더 대통령에 적합한 사람인가', '누구를 대통령 후보로 밀 것인가' 하는 문제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10월 18일 노회찬과 인민노련은 「10월 13일자 민통련의 김대중 지지선언은 명백한 정치적 과오이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그 주요 내용은 "민통련이 군사파쇼세력의 재집권음모를 저지시키기 위해 부르조아 야당과 단결하고 민주진영의 대통령 후보를 단일화시켜야 한다는 데에만 몰두하여 민족민주운동과 대중의 자발적 진출을 결합시켜야 할 보다 주요한 임무를 잊거나 방기하고 있다"는 것, "김대중과 김영삼의 차이는 실로 사소하지만 김영삼, 김대중 등 자유주의 부르조아당과 민족민주운동과의 차이는 근본적"이라는 것, "김대중의 상대적 진보성이라는 것은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며 설사 그가 진보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우리의 독자성, 그 독자성을 기초로 한 역량의 강화를 유보해 가면서까지 그를 지지해야 하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것 등이었다.
11월에 들어서 인민노련은 「백기완 선생 대통령후보 청년 추대운동의 진로에 대한 인노련의 제안」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 당시 인민노련은 약칭으로 '인노련'으로 불렸는데, 양승조 등이 이끌던 과거의 '인노련'과 혼동을 주는 바람에 점차 '인민노련'으로 불리게 된다.)
결국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는 비판이 없는 무조건적 지지로, '후보 단일화'는 김영삼에 대한 지지로 나타났으며, '독자적인 민중 후보 추대론' 역시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 등의 자유주의 정파들을 반군부독재 투쟁으로 견인하는 데는 무력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 결과는 민정당 노태우 후보의 당선과 6공화국의 출범이었다.
1987년 대선 이후 진보진영 내의 합법정당 건설에 관한 논의는 주요 쟁점을 둘러싸고 상호 치열한 논쟁과 갈등과 대립을 반복하게 된다. 비판적 지지는 1997년 15대 대선에서 재등장한다. 핵심은 "우리 시대의 진보는 DJ와 DJP를 지지하여 지역문제를 해결하고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어내는 데 역량을 총집중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 논리에 따르면 독자후보전술에 바탕한 정치세력화의 실천은 '이적 행위'에 다름 아니게 된다. 이것은 다음 인용문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김대중 씨에겐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한 가지 큰 장점이 있다. 그건 여당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의 망국적이라는 그 지역문제는 더욱 악화될 것이나,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되면 대통령이 된 그 자체만으로 지역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수도권에 사는 호남 출신 사람들이 '나 전라도 출신이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끔 숨통을 열어주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는 엄청난 진보가 가능하다는 것을 직시하자―행여 진보진영도 독자후보를 내겠다고 발버둥치지 마라. 97년 대선은 진정한 그리고 건설적인 3김 청산의 절호의 기회이다. 왜 그렇게 성급한가? 왜 이 몇 달을 못 참는가? 진보진영은 공정선거를 이루는 데 모든 노력을 경주하라." (강준만, 「'김대중 당선 불가론'의 허와 실」, <인물과 사상 2>, 1997, 244-245쪽).
손호철의 지적처럼, '진보정당'과 '비판적 지지'를 둘러싼 갈등의 정도는 생각 이상으로 심각한 후유증을 낳았다(「누구를 위한 비판적 지지인가?」, <이론과 실천>, 2002년 8월호, 195쪽).
"그렇다. '진보정당'과 '비판적 지지'라는 두 단어는 87년 민주화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현실을 고민해 온 모든 사람들의 피를 끓게 하고, 열띤 논쟁에 혈압을 올리게 하는가 하면, 피를 나눈 한 때의 동지들이 서로를 증오하게 하고 '원수'가 되게 한 시대의 표상어들이다. 그래,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가면서 이 문제를 될 수 있으면 피해가려고 노력해 왔다."
비판적 지지론이 '민주대연합론', '진보정당 사표론' 등으로 바뀌면서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한 이유에 대해 노회찬은 이렇게 설명한다?(노회찬,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2014, 비아북, 114-116쪽).
"몇 가지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한 가지는 분단이라는 특수성을 가진 한국사회가 독자적인 길을 주저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작용한 것이다. … 그리고 한국의 경우 애초에 진보정당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운동권 내부에도 적었다. 외부의 여러 부정적인 공세도 있었지만 진보정당운동 내부의 패착도 크다.
노동운동이 스스로 정치세력화를 결단을 하지 못했던 것이 진보정당의 성장을 지체시켰다. 스스로 독자세력화해 정치력을 행사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했다. 노동운동세력이 관념적, 이상적으로 오랫동안 낡은 노선에 매몰되어 있었다. 지금 상황도 마찬가지다. 노동운동이 사민주의를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민주의는 개량이고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활동가와 간부가 꽤 있다. 그럼 노동자들의 인식을 사회주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나? 전혀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그대로 둔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사민주의의 복지나 연대를 굉장히 등한시하고, 오히려 '우리 노조', '우리 회사'를 중시한다. 탈계급, 보수화를 용인하고 방치하는 과정이 되어가고 있다. 오히려 사민주의 국가들의 노동운동보다 더 보수화되고 있다. 이것이 대중성을 잃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노동세력이 정당운동 자체에 굉장히 냉소적이다. 정당운동은 국회의원이 되려는 사람들의 출세를 위한 운동이라고 본다. 그래서 선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고, 조합원들이 새누리당이나 새정치민주연합을 찍는 상황을 방치해버린다.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결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인 정치문제를 위해서는 단결을 하지 않는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으로 분리된 토양 위에 이런 문제까지 겹치면서 완전 무장해제되어 있다."
노회찬, 제도적 대안으로서 '대통령 결선투표제'와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제안
"결선투표제 도입을 통해 국민 과반 지지 대통령을 만들자"
노회찬은 특히 대선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등장해온 비판적 지지론의 정치적 파장과 후유증을 해소하고 민주정치의 정상화와 활성화를 위한 제도적 대안으로서 '대통령 결선투표제' 도입을 제안한다. 노회찬은 대통령 결선투표제가 ①민주화 이후 치러진 역대 대통령선거의 후보단일화 협상과정에서 드러났던 문제들을 상당 부분 해결해줄 수 있을 것이며, ②한국의 선거 및 정치과정의 정상화·활성화와 민주주의의 진전에 기여할 수 있는 핵심적인 제도적 장치라고 판단한 것이다.
노회찬은 민주화 이후 역대 대선에 결선투표제 도입을 단순 가정한 결과를 <표>로 요약해 제시하면서 2012년 7월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한다.
▲ 출처: 노회찬의 「결선투표제 도입을 위한 정치권의 과제와 공직선거법 개정안」(노회찬·한국정치연구회.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제 도입을 위한 입법공청회 자료집>, 2012.7.9, 24쪽)을 기초로 해서 재구성.
2016년 7월 4일 국회 비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통해 노회찬(정의당 원내대표)은 "결선투표제 도입을 통해 국민 과반 지지 대통령을 만들자", "국민의 지지가 국회의석수에 일치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자"고 제안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지금 우리 사회에 놓인 많은 과제가 있지만, 또 다시 개헌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권력구조를 변화시키자는 개헌 주장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국민의 의지가 정치권력에 정확히 반영되는 제도, 즉 선거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권력구조가 지붕이라면, 선거제도는 기둥입니다. 그런데, 기둥을 그대로 둔 채 지붕만 바꾸는 것을 진정한 개헌이라고 우리는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대통령제를 유지한다면 결선투표제를 통해 국민 과반의 지지를 받는 대통령이 나와야 합니다. 또 어떤 권력구조이든 국민의 지지가 국회의석수에 일치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돼야 합니다. 승자독식과 지역패권정치를 연명시켜온 현행 소선거구 다수대표제를 그대로 둔 채 권력구조 변경을 추진하는 것은 기둥을 그대로 둔 채 초가지붕을 기와지붕이나 콘크리트 슬라브 지붕을 바꾸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2016년 12월 29일 대통령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는 내용의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재차 대표 발의한다. 현행법의 대통령당선인의 결정방식인 상대다수투표제는 다수의 후보자 가운데 최고득표자를 뽑는 방식으로 지지하는 사람보다 반대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경우라도 당선될 수 있어 민주적 정당성의 결여와 이에 따른 정치적 안정성의 부재 등 많은 부작용을 발생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통령 선거 개표결과 유효투표 과반을 넘긴 후보자가 없을 때 1위와 2위 득표자가 결선투표를 해 다수 득표자를 대통령 당선인으로 결정하자는 것이며, 그것은 헌법 개정 사항이 아니라 공직선거법 개정 사항임을 강조한다.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더 나은 세상을 이루기 위한 제도적 발판
1999년 8·15광복절 기념사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정치가 나라의 발전을 선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지역당 구도를 벗어나 전국정당화를 위한 선거제도가 필요합니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민주당을 창당하는 과정에서 정치개혁을 위해서는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발언을 한 바도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자 집권당 총재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실무를 담당하는 국회의원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다르게 추진한다. 관련 보도를 살펴보면, '독일식'에서 '일본식', '일본식'에서 '유럽식'으로 춤을 추다가 결국은 자민련의 당리당략에 따라 '일본식'에 가까운 안이 최종안으로 결정된다(참여연대, <월간 참여사회>, 2001년 9월호).
2001년 7월 19일 헌법재판소는 정치권에 큰 지각변동을 불러올 판결을 내린다.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이하 선거법)'에 따라 1인1표 투표에 의해 구성되던 비례대표 의석배분 조항이 위헌이라는 것이다.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서 투표한 한 표로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배분한 것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직접선거의 원칙'을 위반한 것이며, 지역구 선거에서 여러 정당과 무소속이 경쟁하고 있는 실정에서 정당에만 한정해 배분한 것은 '평등선거의 원칙'에도 위배된다는 것이다. 헌재는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뽑을 경우 정당명부에 투표하는 1인 2표제를 도입하거나 비례대표제도를 없애야 한다는 한정위헌 결정을 내린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한정위헌 결정이 나오기까지 노회찬과 민주노동당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국회를 통과한 제도는 원했던 '독일식'이 아니라 '일본식'에 가까운 것으로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선거제도 개혁의 원천기술 보유자'로서 노회찬은 1인2표제, 결선투표제, 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연령 낮추기 등을 관철시키기 위해 온 힘을 쏟는다. '탄환 대신 투표로(Not Bullet, But Ballot)'로 상징되는 민주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선거가 제 기능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선거제도야말로 진보정당이 제 역할을 하고 민주주의를 꽃피우면서 더 나은 세상을 이루기 위한 제도적 발판(조현연, 「행복해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의 꿈」, 노회찬, <노회찬, 함께 꾸는 꿈>, 후마니타스, 2019, 007)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둔 2월 8일 노회찬은 '선대본일기'(난중일기)에 이렇게 쓴다. 선거제도를 포함해 정치관계법 개정안을 다루는 국회 정개특위 활동시한을 하루 남기고 개혁의 실종을 질타한 것이다.
국회 정개특위에서 '개혁'이 실종된 지는 오래되었다. 정치관계법 개정전망도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이제 정치제도 개혁은 민주노동당만의 외로운 외침이 되고 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개혁은 '영국식 돈 안 드는 선거제도' 도입이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개혁은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로부터 출발했다. 두 사람은 모두 실패했다. 개혁대상을 개혁주체로 삼았고 개혁주체들은 개혁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2003년부터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개혁은 '총선승리'이다. 자신과 자신의 당이 승리하는 것이 바로 '정치개혁'이다. … 지금 그들에게 '개혁'은 한나라당이 한 석이라도 덜 얻는 것이다. 골치 아픈 민주노동당이 한 석이라도 덜 얻는 것도 '개혁'이다. 시민단체들의 정치개혁 역시 시민운동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이다. 총선과정에서 시민운동의 정치적 영향력을 극대화해야 시민운동의 발언권도 강화된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정치제도개혁안이 휴지조각이 되는 동안 물갈이로 낙천운동으로 달려가고 있다. 남은 것은 민주노동당과 노동운동뿐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미약하고 노동운동은 바쁘다. … 자신의 성장이 곧 정치개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세력은 민주노동당밖에 없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의 정치개혁에는 저항이 따를 수밖에 없다. 힘과 힘이 부딪힐 수밖에 없다. 외롭더라도 민주노동당이 앞장서서 싸워야 한다. 내일로 국회 정개특위 활동시한이 마감된다.
2016년 20대 국회에 들어와서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한 노회찬의 노력은 계속된다.
어떤 권력구조이든 국민의 지지가 국회 의석수에 일치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되어야 합니다. 승자독식과 지역 패권 정치를 연명시켜온 현행 소선거구 다수대표제를 그대로 둔 채 권력구조 변경을 추진하는 것은 기둥을 그대로 둔 채 초가지붕을 기와지붕이나 콘크리트 슬래브 지붕으로 바꾸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2016년 7월 4일 국회 본회의 비교섭단체 대표 연설)
"지지율 10%의 정당은 결정권 10%를, 51%의 정당은 51% 결정권을 가져야 대의기구인 의회가 국민의 의견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입니다." "국민의 지지가 국회 의석에 정확히 반영되는 선거제도, 즉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이야말로 공정한 정치를 만드는 시작입니다." (「협치와 선거제도 개혁」, <시사인> 인터뷰, 2017년 7월 11일)
연동형 비례대표제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는 국민의 사표를 방지함으로써 정치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다양한 국민의 요구와 지향이 정치에도 정확히 반영되는 가장 선진적인 정치제도입니다. (2017년 2월 9일 국회 본회의 비교섭단체 대표 연설)
김대중 '국민의 정부'와 노회찬
1997년 김대중은 DJP연합과 내각제 개헌 합의를 통해 97년 대선을 승리로 이끈다. 단일화 합의문의 핵심내용은 이러했다. ①대통령 후보는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로 하고 집권 후 공동정부의 국무총리는 자민련 김종필 총재로 한다. ②차기정부의 관료구성 등은 동등하게 균분하고 양당 동수로 공동정부 협의기구를 구성한다. ③공동정부 출범과 함께 개헌추진위를 발족하고 대통령이 주도적으로 개헌안을 발의, 99년 말까지 개헌을 완료한다. ④대통령을 간선으로 선출하고 수상이 국정 전반을 책임지는 순수내각제로 한다. 독일식 불신임제를 채택한다. ⑤내각제 개헌 후 초대 대통령과 수상의 선택은 자민련이 우선권을 갖는다.
▲ (왼쪽) 1997년 11월 3일 DJP연합의 탄생 순간-후보단일화 합의문에 서명. 왼쪽부터 김용환, 김대중, 김종필, 한광옥 ▲ (중간) 15대 대선에서 DJP(또는 DJT)연합을 한 김종필, 김대중, 박태준(왼쪽부터). ▲ (오른쪽) 1998년 2월 25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열린 15대 대통령 취임식 (출처: 김대중도서관)
김대중 정부 출범 직전인 1998년 2월 7일 서강대 다산관. 노회찬은 학술단체협의회가 <김대중 정권의 과제와 전망>을 주제로 개최한 토론회에 종합토론자로 참석한다. 토론회장은 '이상 열기'로 가득 찼다. 주최 쪽이 준비한 자료집은 토론회 시작 전에 모두 동났고, 5시간 가까운 토론 내내 자리를 뜨는 참석자도 드물었다. 전에 없던 풍경이다. 논쟁도 격렬했다. 노회찬(국민승리21 기획위원장)은 "새 정권과 구제금융 시대, 나아가 21세기를 맞는 운동단체들의 방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위기를 평했다. 그의 말대로, 진보진영은 어둡고 깊은 고민의 터널 한 가운데 서 있다. 우리 사회 전체에 휘몰아치는 거센 변화의 소용돌이 탓이다(한겨레, 1998년 2월 25일).
2001년 민주노동당은 5월부터 권영길 대표 등 지도부가 전국을 돌며 '민생살리기 대장정'에 나선다. 9월 22일부터 서울 명동 시국연설회에서 노회찬(서울시지부장)은 이렇게 대회사를 한다(<진보정치> 60호, 2001.9.28.~10.4).
국민의 정부 3년 6개월 동안 우리는 국민을 죽이는 정부라는 걸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김대중정부는 이미 실패한 정부이며 김대중정부의 실패는 이승만정권 때부터 대물림된 50년간의 보수정치의 실패입니다. 따라서 민주당, 한나라당, 자민련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식으로는 절대 안 바뀝니다. 이제 노동자 농민 빈민들이 정치에 나서야 합니다.
이어 연단에 오른 이재용 민주노총 서울본부장은 "김대중 선장이 이끄는 배가 빵구가 나서 침몰 직전인데 구명보트를 달라는 노동자들에게 스티로폴만 던져줬습니다. 이제 물갈이가 아니라 보수정치판의 판갈이가 필요합니다.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과 함께 희망의 정치를 만들어가겠습니다."고 발언한다.
2002년 2월 6일 청와대 앞. 민주노동당은 각종 게이트에 청와대가 연루되어 있는 것에 항의하는 집회를 개최한다. 정현준-이용호-진승현-최규선-윤태식으로 이어지는 권력층의 '게이트'의 양산은 대통령의 아들들의 비리, 이른바 '3홍 게이트'로 김대중 정부 시절 일어난 각종 게이트의 대미를 장식한다.
▲ ‘서민들의 분노’로 박을 타 진짜 몸통 ‘청와대’를 꺼내는 퍼포먼스를 하는 노회찬, 박순보 민주노동당 부대표 (<진보정치> 75호. 2002.2.8.~2.14.)
2003년 7월 3일 민주노동당은 여의도 국회 앞 한양빌딩 4층으로 당사를 이전한다(2006년 12월 17일 문래동 종도빌딩으로 당사 다시 이전). 열린우리당이 영등포시장 공판장으로 옮겨가고 한나라당이 박근혜 대표체제 출범과 함께 천막당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당사만 놓고 보면 민주노동당이 제일 버젓했던 상황에서, 노회찬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당사 쇼'를 한다"고 평가절하한다. 한양빌딩과 10년을 함께 한 한 시민은 "김대중 대통령도 이 건물에서 탄생했고, 민주노동당도 여기 와서 성공하지 않았냐"며 민주노동당이 명당자리에 둥지를 틀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당의 미래를 낙관(<진보정치> 197호, 2004.10.25.~10.31)하기도 한다.
※ 한나라당의 '천막당사 쇼'는 2004년 6월 16일 서울 강서구 염창동의 새 당사와 함께 문을 연 '초심의 공간'이란 이름의, 한나라당 '천막기념관'으로 이어진다. 천막기념관 앞에는 "한나라당은 84일의 고통과 반성의 시간을 잊지 않고… 이곳은 기념관이나 전시관이라는 거창한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과거를 철저히 반성하고 국민들을 한 번 더 생각하는 공간으로…"라는 자세한 설명이 적혀있다. (…)
'기념사진을 찍으세요.' 이 말은 곳곳에 걸린 '고통과 눈물'과 '참회의 천막생활'을 기억하고 기념해야할 사람들을 한나라당이 아닌 일반인들로 만들고 싶다는 의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기념할 것'을 권하며 과거를 반성해야 할 의무와 자신들을 용서할 수 있는 권리를 일반인들에게 안겨놓고,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한다. (이선민 기자, 「천막기념관서 사진 찍으라고?!-[기자수첩] 한나라당이 천막 당사에서 얻은 교훈은?」, <미디어오늘>, 2004년 6월 23일)
"대한민국은 법치국가?" : '검찰개혁'과 김대중과 노회찬
김대중, "이 나라의 최대 암적 존재는 검찰"
검사는 검찰권을 행사하는 국가기관이며, 검찰은 검사들로 이루어진 국가조직이다. 법률은 사법정의의 실현을 위해 검사에게 범죄 수사와 기소, 재판과 형의 집행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있다. 아울러 '공익의 대표자'로서 피고인의 정당한 이익을 보호하고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권한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검찰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공익의 대표자이자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라고 할 수 있을까? 2005년 12월 총 750명의 네티즌이 참가한 <오마이뉴스>의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삼성 장학생'이라는 답변이 332건(35%)으로 1위를 차지했다. 또 '인권침해'라는 답변은 203건(22%), '상명하복(검사동일체)'은 151건(16%), '폭탄주'는 123건(13%)으로 나타났다. 검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대체로 높은 응답률을 보인 반면, '비리정치인'(85건, 9%)·'정의'(29건, 3%)·'강철중'(15건, 2%) 등 긍정적 이미지는 낮은 응답률을 보여 검찰에 대한 네티즌들의 불신을 실감케 했다. 네티즌들이 '검찰'하면 떠오르는 것으로 '삼성 장학생'을 가장 많이 꼽은 것은 조사 당시 검찰이 '삼성X파일'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한 영향 때문이었다.
2011년 9월 27일 한나라당 이정현 의원은 <검찰의 신뢰저하 분석 보고서>를 공개한다. 검찰 신뢰도에 대한 용역보고서가 공개된 것은 처음 있는 일로, 일반인(1000명)과 검찰 공무원(부장검사, 평검사, 일반직 1403명), 전문가 집단(20명)을 조사한 이 보고서는 법무부가 여론조사기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2010년 3월 완성한 것이다. 보고서의 핵심은 "검찰이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등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하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경향신문, 2011년 9월 29일).
김대중 정부에 이어 노무현 정부까지 이른바 '민주정부 10년' 동안 정부는 처음으로 검찰개혁을 구상하고 실행에 옮기기 위한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 최고 사정기관은 중앙정보부였고, 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는 보안사였다. 김영삼 문민정부 이후 이들이 밀려난 뒤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검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고 있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법절차를 통한 사정이 보편화됐고, 사법처리 대상을 선별할 수 있는 기소권을 법률로 보장받고 있는 검찰이 권력의 핵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김대중은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며 자서전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이 나라의 최대 암적 존재는 검찰이었다. 너무도 보복적이고 정치적이며, 지역 중심으로 뭉쳐 있었다. 개탄스러웠다. 권력에 굴종하다가 약해지면 물어뜯었다. 나라가 검찰공화국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 같아 우려스러웠다." (김대중, <김대중 자서전 2>, 삼인출판사, 2010)
※ 대통령 퇴임 후 노무현도 비슷한 말을 남긴다.
"결국 검․경 수사권 조정도 공수처(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설치도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검찰 개혁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한 가운데, 검찰은 임기 내내 청와대 참모들과 대통령의 친인척들을, 후원자와 측근들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검찰의 정치적 독립을 추진한 대가로 생각하고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정치적 독립과 정치적 중립은 다른 문제였다. 검찰 자체가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있으면 정치적 독립을 보장해주어도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 정권이 바뀌자 검찰은 정치적 중립은 물론이요 정치적 독립마저 스스로 팽겨쳐버렸다. 검․경 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설치를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스러웠다. 이러한 제도 개혁을 하지 않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려 한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퇴임한 후 나와 동지들이 검찰에 당한 모욕과 박해는 그런 미련한 짓을 한 대가라고 생각한다." (노무현재단 엮음, 유시민 정리, <운명이다>, 돌베개, 2010)
▲<김대중 자서전>과 노무현 전 대통령 평전인 <운명이다>
노회찬, 삼성X파일사건과 20대 국회 최초로 공수처 설치법 발의
2005년 8월 18일 국회 법사위 회의장. 노회찬은 검찰수사를 촉구하고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하기 위해 삼성X파일 '떡값검사' 명단을 공개한다. 당시 법무부장관이 '건국 이래 최대의 정, 경, 검, 언 유착사건'이라 말했음에도, 뇌물을 준 사람, 뇌물을 받은 사람 그 누구도 기소되거나 처벌받지 않은 대신, 이를 보도한 기자 두 사람(이상호 <문화방송> 기자와 김연광 <월간조선> 편집장)과 노회찬이 황교안(중앙지검 2차장)이 진두지휘한 X파일 사건 수사팀에 의해 기소된다. 이로 인해 노회찬은 결국 2013년 2월 14일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한다.
검찰개혁과 관련, 노회찬은 강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2012년 1월 노회찬은 이렇게 말한다(박창규, 「노회찬의 정치의제와 법안, 무엇을 남겼나?」, 노회찬재단, <제2회 노회찬포럼>, 2019년 6월 11일).
역사에는 시효가 없다. 100년 전의 과거사도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조사하고 판정을 하는 게 세상살이의 도리다. 이른바 삼성X파일이라고 불리는 280여개의 테이프는 서울중앙지검에 임시 보관 중이다. 17대 국회가 법안만 제시하고 말았지만, 이 테이프를 공개하고 조사를 할지 말지는 아직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에 속한다. … 20년이 넘는 민주화의 역사를 지나왔지만 거대권력이 저지르는 부정과 비리는 한국 사회의 여전한 고질병이라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동시에 고위 공직자들이 저지른 범죄는 정치검찰에 맡길 수 없으며, 이런 범죄를 수사할 검찰 밖의 독립적인 기구를 반드시 설치해야 한다는 사실도 재확인 되고 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2016년 7월 21일 노회찬은 "지금이 검찰개혁 적기"라고 하면서, 20대 국회 최초로 공수처(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설치법안(수사권, 기소권, 공소유지권을 갖는 공수처 설치)을 발의한다. 이어 8월 24일에는 검찰의 독립성·공정성 확보 및 '제2의 우병우' 탄생 방지 차원에서 검-청-검 회전문 인사 금지하는 검찰청법 개정안을 발의한다. 노회찬은 검찰개혁 정책보고서 용역을 의뢰하는 등 다양한 검찰개혁 방안을 모색한다. 핵심과제는 '정치검찰에 의한 수사권, 기소권 오·남용의 근절', '검찰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에 맞춰져 있었다.
노회찬은 공수처법을 발의하며 "우리 사회의 부정부패를 뿌리 뽑는 일을 해야 할 검찰이 그 내부에서 '부정부패 범죄자'들을 배출하고 있는 광경을 국민들은 참담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삼성X파일 떡값검사 명단을 공개하였다는 이유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한 저 역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담한 심정이다. 현재 실시되고 있는 '특검법'및 '특별감찰관법'은 사상초유의 검찰비리 앞에서 무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지난 10여 년간 무성한 논의만 한 채 결론내리지 못했던 공수처법 제정안을 20대 국회가 여야 합의로 통과시키자"고 강조한다. 하지만 2018년 말 법제사법위원회의 공수처 설치법 논의과정에서 자유한국당의 강한 반발과 이후 국회 파행으로 좌절되고 만다. 공수처 등 검찰 개혁 법안들은 여전히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2007년 17대 대선, '제7공화국 건설운동'과 노회찬
2007년 1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노회찬은 민주노동당의 대선후보 출마를 결심, '제7공화국 건설'을 기치로 내걸고 당내 경선 레이스에 참가한다. 이에 대해 심상정 후보는 '서민의 요구를 헌법개정 틀로 형식화할 우려가 크다', '왜 한국 진보정당의 비전이 다음 8공화국에 의해 대체되어야 할 7공화국이어야 하는가', '당 강령을 재구성한 수준이다' 등의 비판을 제기한다.
노회찬은 당시 핵심 화두였던 신자유주의를 기준으로 6공화국과 7공화국을 구분한다. 즉 "7공화국 건설운동은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신자유주의 6공화국 정권을 끝장내고, 그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반신자유주의 7공화국을 건설하는 운동"임을 전제로, 비판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노회찬은 이렇게 말한다(노회찬 대선예비후보, 「권영길, 심상정 후보의 '제7공화국' 비판에 대한 반론 - 진보적 상상으로 가득한 제7공화국 11테제」, <진보정치> 336호, 2007.8.20.~8.26).
7공화국이란 용어를 쓴 이유는 '단절의 정치언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노선을 추종하는 과거 정권과 근본적으로 다른 정권을 표현하는 단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신자유주의 노선에 근거한 6공화국, 신자유주의 체제를 폐지하고 민주적 사회경제체제의 초석을 다지는 7공화국, '단절의 정치언어'로서 상당히 매력적인 슬로건이다.
'7공화국 11테제'에는 노회찬이 만들어갈 새세상에 대한 비전과 공약이 가득하며, 당강령에 기초해 2007년도에 걸맞는 진보적 상상을 담아내는 것, 바로 이것이 11테제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다.
9월 9일 민주노동당 1차 경선 결과, 권영길 후보 49.37%, 심상정 후보 26.08%, 노회찬 후보 24.53% 득표로 노회찬은 결선투표에 오르지 못하고 낙선하고 만다. 경선 패배로 노회찬의 '7공화국 건설운동'은 빛을 보지 못한 채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평등과 통일을 양대 가치로 하고 있는 '7공화국 11테제'는 반신자유주의 테제와 교육·의료·주택· 일자리 국가완전 보장 테제 외에, △통일테제 △탈동맹 평화테제 △차별철폐테제 △기간산업 사회화테제 △동일노동동일임금테제 △식량주권테제 △성평등테제 △녹색국가테제 △국민주권테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석준(정의당 부설 정의정책연구소 부소장)이 강렬한 장면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노회찬의 7공화국 비전 속에는 인상적인 대목이 꽤 많다. 국가가 반드시 책임져야 할 4대 기본권으로 교육, 의료, 주거, 일자리를 꼽은 점(교육공개념, 의료공개념, 주택공개념, 일자리공개념)이 특히 그렇다(「[장석준, 그래도 진보정치] 노회찬이 남긴 꿈, 제7공화국」, 한겨레, 2019년 7월 19일).
▲ 7월 17일 ‘제7공화국 건설운동’을 선포하고 있는 노회찬 민주노동당 대선 예비후보와 ‘노회찬’을 연호하는 많은 지지자들
DJ 서거, 그 이후
"무엇보다도 제가 DJ를 높이 평가하는 건 '공부하는 대통령'이라는 것입니다."
서거 다음날인 2009년 8월 19일 트위터 네티즌과 가진 오프라인 번개모임에서 노회찬(진보신당 당대표)이 한 말이다. 양광모(휴먼네트워크연구소 소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트위터 번개는 참석자들이 노회찬에게 궁금한 점들을 자유롭게 질문하고, 노회찬이 답변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김영국, 「노회찬 "DJ는 '공부하는 대통령', 해방 후 가장 앞선 정치인"」, <오마이뉴스>, 2009년 8월 20일).
이 자리에서 노회찬은 "선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한 번도 표를 던진 적이 없고, 김대중 정부의 경제정책과 노동자 정책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반대도 많이 했었다."며 진보 정치인으로 정치노선이 달라서 불편했던 과거를 회고한다. 그러면서도 "DJ는 해방 이후 한국의 정치인들을 놓고 보자면 가장 앞선 반열에 충분히 설 만큼의 큰 정치인이었고, 수십년에 한 번씩 나타날까 말까 한 정치인이다."고 평가한다. 특히 DJ에 대한 세간의 평가 중에서 '스스로 공부하는 열정'과 '탁월한 언어구사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대개 보면 평소에도 공부를 안 하지만, 높이 올라갈수록 더욱더 안 한다. 그래서 마음을 안 비우고 머리를 비운다거나, 어떤 분들은 공부한 사람들을 데려다 쓰면 되지 하는 일이 많다."고 기존 정치인의 세태를 꼬집기도 한다. 노회찬은 'DJ가 말을 잘한다'는 의미에 대해 "휘황찬란하게 얘기한다기보다는 필요한 얘기를 필요한 장소에서 정확하게 전달하게끔 한다는 점에서 정치인으로서는 가장 완벽에 가까운 언어구사 능력을 지녔다. 남이 써준 내용을 뜻도 모르고 읽는다든지 그런 게 없다."고 설명한다.
노회찬은 "진정한 정권 교체는 사실상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비롯되었고, 또 87년 이후에 민주주의가 진전이 되었다고는 하나 사실상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때 급속한 민주주의 진전이 있었다."고 김대중 정부를 평가하면서, 특히 "남북관계를 개선시킨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아마도 다른 사람 어떤 누가 대통령이 되었더라도 못했을 일을 해낸 것이다. DJ의 오랜 경륜이 잘 반영된 곳이 바로 남북관계였다."고 말해 이 분야에서 DJ의 독보적 업적을 인정한다.
한편 노회찬은 "해방 이후에 들어선 정부 중에서 가장 나은 정부가 김대중-노무현 두 정부였는데, 그 가장 나았던 정부 아래에서도 사회 양극화는 막지 못했고 더 심화되어 왔던 한계도 있었다."며 진한 아쉬움을 토로하면서, "더 나은 정부가 들어섰어야 되는데, 이상하게 훨씬 십수년 전으로 후퇴하는 정부가 들어서서 우리가 이 고생이다."며 이명박 정부를 겨냥하기도 한다.
노회찬은 "이전 정부보다 조금 더 나은 정부가 들어서서 민주주의의 완성도를 높여 나가고, 남북관계도 6.15 정신을 계승해 더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그리고 가장 나았던 정부 하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서민의 민생문제까지도 일정한 진전을 이루는 정부를 우리는 반드시 세워야 된다."고 호소하면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이룬 업적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역설한다.
1년 뒤인 2010년 8월 17일 노회찬은 트위터에 이렇게 쓴다.
김대중 대통령 서거 1주기 추모식이 국립현충원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영정만 모셔졌을 뿐 꽃 한송이 향 한자루 없는 단촐한 식장이 추모의 격을 높이고 있습니다.
2013년 8월 18일 노회찬은 페이스북을 통해 "오늘은 김대중 전대통령 서거 4주기 되는 날입니다. 남과 북의 대립과 갈등, 미국 등 열강의 견제 속에서 6.15 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 낸 큰 정치인이 더욱 생각나는 나날입니다."라고 말한다.
2014년 7월 8일 7.30 재보궐 선거 동작을 출마 기자회견을 한 노회찬은 이틀 뒤인 7월 10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을 방문해 故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한다.
2015년 8월 17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서 김대중 대통령 서거 6주기를 맞아 '평화와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다'를 주제로 추모 토크쇼가 열린다. 토크쇼 참석자들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와 '통일 대박론'을 천명했던 박근혜 대통령 정부 아래서 남북관계는 오히려 대결국면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다.
노회찬은 남북관계 악화의 근본 원인으로 새누리당이 늘 남북관계에 앞서 국내정치에서의 이해타산을 따지기 때문이라고 꼬집는다. 이어 "과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의) 남북관계 개선노력에 대해 '퍼주기 했다'고 폄하하면서 정치적 이익을 도모했던 것처럼, 지금도 '어떻게 하면 남북관계를 개선하는데 도움이 되느냐'의 판단기준보다는 '어떻게 하면 국내 정치에서 지지를 얻는데 도움이 될 것인가'하는 판단의 결과로 늘 강경대응이 채택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 왼쪽부터 황방열(사회, <오마이뉴스> 기자), 박지원(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 노회찬(전 정의당 국회의원), 문정인(연세대 정외과 교수)
민주주의 위기를 주제로 진행된 토크쇼 2부에서 특히 참석자들은 한국사회가 겪는 민주주의의 후퇴상황 속에서도 무력한 모습만 보여주는 야권의 현실에 대해 자성의 목소리를 쏟아낸다. 노회찬은 "'정권교체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늘 40%가 넘는 유권자들이 '그렇다'고 답변하지만, 정권교체가 필요하다고 답변한 사람들에게 '야당을 지지하느냐'고 물으면 일부만 '그렇다'고 답변한다. 이는 정권교체는 필요하지만 지금의 야당으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선거에서의 야권연대에 대해서는 "한국과 일본이 사이가 좋지 않을 때도 있지만 외계인이 쳐들어오면 힘을 합쳐 싸워야 하는 것 아니냐. 차이가 있을 때는 이합집산을 되풀이 하는 것보다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도 큰일에서는 힘을 합하는 '협력적 경쟁관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어 "새누리당의 의석을 단 한 석이라도 줄이기 위해 내년 총선에서 반드시 승리해 기어서라도 국회에 들어가겠다"고 밝히기도 한다.
▲ 왼쪽부터 문정인(사회, 김대중도서관 관장), 홍익표(더불어민주당 의원), 정동영(국민의당 의원), 노회찬(정의당 의원)
2016년 6월 9일 오후 6시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16주년 기념식이 여의도 63빌딩 컨벤션센터에서 개최된다. 이 행사는 김대중평화센터,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한반도평화포럼, 김대중기념사업회,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이 공동주관하고 서울시가 후원한다. 기념식에 앞서 오전 10시부터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서 '평화체제 구축과 한반도 비핵화의 진전'을 주제로 학술회의가 열린다. 총 4세션으로 진행되는 학술회의 2세션인 '20대 국회, 남북관계 어떻게 풀 것인가'에 노회찬은 토론자로 참석, 현안 돌파를 2가지로 압축해 '개성공단, 북핵문제'에 대한 색채를 명확히 한다. 8월 18일에는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7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뒤 참배한다.
2017년 10월 9일 정의당 20차 상무위 모두발언을 통해 노회찬은 MB국정원 김대중 노벨평화상 수상 취소 추진 관련해, "이명박(MB) 정부의 국가정보원이 일부 보수단체를 앞세워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 취소'를 구체적으로 추진한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과 보수단체 간부가 주고받은 이메일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수상한 노벨평화상을 취소하는 방안이 논의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MB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보수단체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과 민주당을 비하하는 논평을 내도록 사주한 정황도 알려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국정원'이 아니라 국가에 엄청난 걱정을 안겨주는 '걱정원'이었다는 세간의 평가가 사실임을 확인해주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두 달 뒤인 12월 7일 서울 여의도 63컨벤션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17주년 기념식'에 참석한다.
마무리: '(평양)냉면', '음식'과 '어머니'
2019년 1월 23일 서울시가 현재 진행중인 세운새정비촉진지구 정비 사업을 재검토하고 2019년 말까지 관련 종합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힌다. 이 과정에서 을지로 일대의 역사를 담고 있는 오래된 가게(노포, 老鋪)인 을지면옥, 양미옥 등을 생활유산(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오랜 시설, 업소, 기술, 이야기 등 유무형 자산)으로 보존하기로 한다. 살아계셨다면 김대중과 노회찬 두 분 모두 꽤나 반가워했으리라 본다. '양미옥'은 김대중이 들렀던 식당으로 알려져 있으며, '을지면옥'은 노회찬이 '을밀대', '부원면옥' 등과 함께 자주 찾았던 평양냉면 집이다.
참고로 한겨레 이인우 기자의 <서울 백년 가게-골목 구석구석에 숨은 장안 최고의 가게 이야기>(꼼지락, 2019)는 서울에 존재하는 역사가 오래된 가게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성공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서울에서 백년을 한결같이 사랑받은 가게 24곳을 소개하고 있는데, 을밀대도 '하루 천 그릇이 팔리는 냉면집'으로 책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김대중과 노회찬, 둘 다 '먹성'이 좋기로 소문난 분들이다.
대식가이면서, 동시에 미식가 성향도 가지고 있던 김대중은 김치찌개를 즐겨 '김치대장'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밤에는 야식으로 라면을 즐겼는데, 주치의 의견에 따라 라면을 자제하고 견과류 등으로 바꿨다고 한다. 청와대 주방장 출신의 조리명장 문문술은 냉면과 관련한 에피소드 하나를 이렇게 기억한다.
"대통령께서 워낙 한식을 좋아하셔서 해외순방 때 함께 동행할 때가 있었어요. 어느날 비행기 안에서 갑자기 냉면을 찾으시는 겁니다. 냉면 육수라는 것이 뚝딱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참으로 난감했죠. 어떻게든 만들어 드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일단 기내에 있던 스테이크를 삶았어요. 스테이크 삶은 물에 동치미 국물을 섞어 육수를 만들었더니 기대보다는 괜찮은 육수가 완성되더군요. 기대하지도 않았던 냉면 상을 받은 대통령께서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아요."(<한국경제매거진> 60호, 2010년 5월 1일).
"동네 뒷골목에 숨은 맛집을 찾아다니는 방랑식객이었고, 음식만들기도 잘한 용문객잔의 주방장"인 노회찬은 여러 음식 중에서도 특히 평양냉면을 좋아했다. 평양 옥류관에서 냉면 한그릇에 사리를 다섯 번이나 추가하는 바람에 지배인이 특별방문록을 들고올 정도였다. 을밀대는 그런 그가 서울에서 가장 사랑한 냉면집. 거리 집회로, 정당 살림살이로 목이 쉬고 땀에 절은 몸으로 노회찬을 따라나섰다가 이 을밀대에서 솔솔 풍기는 육수맛과 쫄깃한 냉면발에 휘감겨 잠시 시름을 덜은 이가 얼마나 많았을까. 겨자맛처럼 코끝이 찡해져 온다(이인우, 「음식天國 노회찬-<1>평양냉면집 을밀대에서」, 노회찬재단 <소식지 '민들레'> 창간호).
고교 동창으로 오랜 절친인 장석은 이렇게 말한다. "회찬이는 젊은 시절부터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생활에 누구보다 익숙했지만, 음식이야말로 한 나라, 한 민족의 정체성의 핵심이란 걸 잘 알았죠. 음악에서 음식까지, 노동현장에서 의회까지 그의 세계가 넓을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닐까요?" 이인우는 "노회찬이라는 사람의 인간미人間味 속에 음식의 세계가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나, 주변의 지인들에게나 다같이 축복이었다."는 말을 덧붙인다(이인우, 「음식天國 노회찬-<1>평양냉면집 을밀대에서」, 노회찬재단 <소식지 '민들레'> 창간호).
"음식은 정이고 맥이라고 생각해요. 맥은 통할 수 있는 길이에요."
'한국 음식'이라는 방대한 소재를 27권의 책과 7년에 걸친 연재를 통해 풀어낸 <식객>의 허영만 화백이 한 말이다. <식객>은 일반적인 요리 만화라기보다는 우리 밥상의 맛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는 한국 음식 문화 인문학에 더욱 가깝다. 단순한 정보 전달에 그치지 않고 마음으로 느끼는 음식,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음식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진한 감동을 주는 이야기들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허영만은 '선생님은 생애 마지막 식사로 무엇을 드시고 싶으세요?' 라는 질문에, "나는 원래 함흥냉면만 먹고 평양냉면을 싫어했었어. 그런데 내가 요새 평양냉면에 빠졌어요.…마지막 식사로 뭘 먹겠냐고 물으면 평양냉면이야. 이렇게 입맛이 변해요." (「'식객' 허영만 화백: "내 생애 마지막 식사는 평양냉면"」, <미쉐린 가이드>, 2017년 5월 11일)
한편 어머니에 대해 허영만은 <식객 1>에서 '생명의 근원이고 영원한 그리움'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음식을 최초의 맛으로 기억한다.…남루하고 고단한 삶이어도 어머니의 사랑이 있기에 함부로 좌절할 수 없듯 그 시절의 행복한 기억은 살아가는 힘이 되어 주는 것이다. 맛은 추억이다. 맛을 느끼는 것은 혀끝이 아니라 가슴이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훌륭한 맛이란 없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숫자와 동일하다. 쌀과 어머니는 닮아 있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고 영원한 그리움이다. 적어도 한국인에게는 그렇다."고 말한다. (허영만, <식객 1>, 감영사, 2003, 77쪽)
2009년 7월 병원에 입원하기 직전까지 김대중은 정리된 자서전 원고를 읽으며 직접 고치고 부족한 부분은 추가로 구술해 반영하도록 한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출생에서 정치 입문까지'를 엮은 <김대중 자서전 1권>(삼인, 2010)에서 김대중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오랫동안 정치를 하면서 내 출생과 어머니에 관해서 일체 말하지 않았다. 많은 공격과 시달림을 받았지만 '침묵'했다. 평생 작은댁으로 사신 어머니의 명예를 지켜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을 감춘다 해서 어머니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셨고, 나 또한 누구보다 어머니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는 당신이 이 세상에서 맺었던 모든 인연과 화해하셨을 것이다." (한겨레 2010년 7월 30일)
'본인에게 어머니란 어떤 의미입니까?'는 물음에 노회찬은 이렇게 답한다(경향신문, 2011년 1월 17일).
모든 사람들에게 어머니는 존경의 대상이죠. 다만 제가 걷는 길은 밖에서 보기에 손해를 보는 길, 위험해 보이는 길이었기 때문에 어머니도 처음에는 걱정하시며 만류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제 결심이 굳다는 걸 아시고는 격려해주셨죠. 정치적, 이념적 격려라기보다 '힘들더라도 옳다고 하면 그 길을 가라. 막지는 않겠다.'라고 하셨는데 정말 큰 힘이 됐습니다.
2011년 한진중공업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30일 단식농성(7.13.~8.11.)을 마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8월 18일 노회찬(진보신당 상임고문)은 한 인터뷰에서 '노회찬에게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한다(「<自由人' 인터뷰 8> 노회찬 진보신당 상임고문」, 2011년 8월 30일)
'나에게 자유란 어머니가 주신 첫 선물이다.' 나에게 자유라는 것이 생명과 같은 것이다. 생명이 없으면 자유가 무의미하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유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 이러한 자유는 생명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나에게 주신 선물은 나에게 생명을 주신 것이고 또 그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유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만큼 자유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자유는 어머니가 주신 첫 선물이라 생각한다.
2018년 7월 27일 오전 국회 본청 앞. 국회장으로 엄수된 고(故)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영결식 제단에는 그가 보물처럼 아꼈던 어머니의 손편지와 그에 대한 기사를 모은 스크랩북이 영정과 함께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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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팟인터뷰] 직설적 광복절 기념사로 화제 된 김원웅 광복회장
19.08.17 19:46l최종 업데이트 19.08.17 19:46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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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오전 천안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에서 열린 제74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참석자들과 함께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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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이게도 친일반민족 세력들이 커밍아웃을 하고 있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일본의 경제보복에 우리 국민들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느냐"라는 질문에 위와 같이 답하며 말을 이었다. 그는 "위기상황임은 분명하지만 그간 잘 노출되지 않았던 친일반민족 세력의 본질이 드러나는 계기가 됐다"면서 "결국 선거라는 기회가 왔을 때 국민들이 친일세력을 정리하는 선택을 하지 않겠느냐"라고 강조했다.
앞서 김 회장은 15일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제74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일본이 경제 보복을 일으킨 건 한국 경제를 흔들고 민심을 이반시켜 그들이 다루기 쉬운 친일 정권을 다시 세우려는 의도"라면서 "향후 6자 회담 등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테이블에서 일본을 배제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김 회장의 발언 이후 바른미래당은 공식 논평을 통해 "도가 지나친 발언들은 그가 과연 광복회를 대표할 만한 인물일지 의심케 한다"면서 "김원웅 광복회장의 '자중지란(自中之亂)' 지나치다"라고 평가했다. 이날 김원웅 회장의 이름은 포털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며 회자됐다.
<오마이뉴스>는 16일 김원웅 광복회장과 전화로 '파격적인 연설문'이 나오게 된 계기를 직접 확인했다. 다음은 그와 나눈 대화를 정리한 내용이다.
"연설문, 5일 이상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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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불매운동은 제2의 항일운동" 1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광복회관앞에서 "일본 경제보복에 대한 전략과 대책 긴급토론회"에 참석한 광복회와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평화나비대전행동, 경기도농민단체협의회, 한국중소상인자영업자총연합회, 한국대학생진보연합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일제 불매운동은 제2의 항일투쟁, 경제보복 당장 철회하라" 현수막을 들고 공동결의문을 채택했다. 사진 가운데 김원웅 광복회장. |
ⓒ 권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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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일 광복절 기념사가 화제였다. 어떻게 준비했나?
"우리 정부가 광복절에 어떤 입장을 표명할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관심이 큰 상황이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한계가 있다. 속 시원하게 말하고 싶어도 자칫 부담으로 작용해 말할 수 없다. 그 부분을 고려해 만든 연설문이다. 길지 않은 연설문이지만 5일 이상 준비했다."
- 연설문 내용을 사전에 청와대와 교감했다는 뜻인가?
"아니다. 사전에 논의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처한 위기에 대해,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한 공통된 인식이 이미 존재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공통으로 고민하는 지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 부분을 강조해 언급한 것이다."
- "일본의 경제보복은 친일정권을 다시 세우려는 의도"라고 규정했다. 상당히 직설적이다.
"사실 일본이 제기하는 문제는 두 가지다. 첫째는 1965년에 맺은 한일회담으로 강제징용 문제가 해결됐는데 왜 약속을 깨냐는 것, 두 번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관련해 2017년 박근혜 정권이 아베 정권과 12.28 합의 했는데 왜 무너뜨리느냐는 것이다. 따져보면 모두 불평등 조약이다.
강제징용(강제동원) 문제는 일본의 잘못에 대해 마땅히 사과 받고 배상받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일본에 매우 굴욕적으로 굴복하고 야합했다. 2017년 12월에 맺은 한일위안부합의도 마찬가지다. 피해자들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맺어버린 탓에 상황이 어렵게 됐다.
아버지 박정희와 딸 박근혜가 똑같이 했다. 문재인 정권이 이를 바로 잡고 있는 거다. 당연히 일본 입장에서는 자신들에게 계속 유리한 결과를 내는 친일 반민족 세력이 필요하다. 경제보복도 친일정권을 다시 세우려는 일본 극우정권의 의도로 진행됐다."
"자중지란? 민족단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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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원웅 신임 광복회장이 강동구 사무실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하며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 회장은 인터뷰에서 "친일찬양 금지법" 제정을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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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사 후 보수야당을 중심으로 '자중지란'라는 지적이 나왔다.
"자중지란이란 무엇인가? 국민들을 분열시킨다는 뜻 아닌가? 소위 보수주의자들이 나에게 '자중지란'이라고 말하는데, 누가 진짜 보수냐. 나 같이 국익을 우선하는 사람이 진짜 보수인 거다. 자꾸 보수와 진보의 싸움으로 말하는데, 이 문제는 민족과 반민족의 싸움이다. 어떻게 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보수냐. 가짜 보수다."
- 15일 연설문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격려 박수를 보내자고 말했다. 이 때문에 '문비어천가'라는 지적도 나왔다.
"지금은 국민들이 단합하고 통합할 때다. 누가 봐도, 지금 문재인 정권이 대일본 대응을 잘하고 있다. 지금은 더 힘을 모아줘야 한다. 더 힘을 내라고 강조한 것인데, 이를 반대한다? 저는 상당수가 친일반민족에 뿌리를 둔 세력이라고 본다. 나는 연설문에서 민족시인 신동엽의 시를 인용해 '껍데기는 가라, 모든 쇠붙이는 가라'라고 말했다. 껍데기는 친일반민족 세력을 뜻한다. 쇠붙이는 우리의 평화를 방해하는 세력을 말한다. 지금은 힘을 모아야 할 시기다."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친일파 커밍아웃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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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오전 천안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에서 열린 제74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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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북아 6자 회담에서 일본을 배제하자고 한 이유는?
"일본은 처음부터 자격이 없었다. 회담에 참여시키면 안 됐다. 노무현 정권 당시 6자 회담에 일본이 포함된 건 미국의 영향 때문이다. 예상대로 일본은 회담장에서 엉뚱한 소리만 했다. 회담에 나온 북한을 악마화하기도 했다. 화해와 협력 분위기를 만드는데 전혀 도움 되지 않았다. 한반도 문제 해결에 있어서 일본은 백해무익하다. 이를 고려해 향후 회담에서 일본을 배제해야 한다고 말한 거다."
-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비롯해 국민들의 '친일청산'의 요구가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이다.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우리 경제가 위기상황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역설적이게도 그간 잘 노출되지 않았던 친일반민족 세력의 본질을 드러나게 했다. 커밍아웃을 하게 된 것인데, 이는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이 선거라는 기회가 왔을 때 친일세력을 청산하는 선택을 하게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사회의 정치사회적 지형이 긍정적으로 변화할 것이라고 믿는다."
- 광복회장으로서 우리 국민들에게 당부하고자 하는 바는?
"나는 광복절 기념사에서 '자각의 시대'를 강조했다. 하지만 친일청산 없이는 분단 극복과 한반도 평화 정착이라는 우리의 미래를 만들 수 없다. 민족의 명운을 개척해야할 이 시기, 내부적으로는 촛불혁명으로 자각의 성숙도가 올라갔다. 외부적으로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국제 정치 지형이 재편성되고 있다. 친일청산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장애물을 청산하는 것이다."
한편 독립기념관에서 광복절 경축식이 열린 건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이후 15년 만이다. 그동안은 세종문화회관과 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행사가 진행됐다. 정부는 이날 행사장 입구에 '우리가 되찾은 빛, 함께 밝혀갈 길'이라는 글씨를 임시정부의 마지막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의 필체로 만들어 걸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번 광복절 경축사를 약 6주 정도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는 경축사를 영어와 일본어로 번역해 배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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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나라가 자신을 보호하고 대우하기는커녕 차별과 멸시를 가했다면 어떨까. 상민과 노비 같은 피압박민들은 “나라와 왕과 지배권력이 내게 해준 게 뭐가 있는데?”라며 차라리 나라가 망해 자신들이 천형 같은 하층계급에서 탈출할 길이 열리기를 원하지는 않을까.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게 우리 민족의 아이러니다.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놓였을 때는 조선이 불교를 내쳐 천시했는데도 승병들은 물론 노비들까지 낫과 도끼를 들고 싸웠고, 일제강점기 때는 가장 멸시받은 백정이나 기생들까지 나서 독립운동을 했다. 거대 제국 중국의 변방에서 거란족 선비족 여진족 말갈족 등 대부분이 정체성을 상실하고 소멸한 데 반해 유구한 역사 동안 끈질기게 생명력을 유지해온 비밀이 거기에 있다. 우리에게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은 신앙 이상의 공동체성으로 내면화해 있다.
» 백정과 범인의 줄임말인 백범을 호로 사용한, 상민 출신 임시정부 주석 김구
» 상민출신으로 대부호가 된뒤 민족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오산학교를 세우고, 개신교의 3.1운동을 참여케한 남강 이승훈이 3.1운동으로 일제에 의해 수감된 모습
» 남강 이승훈과 오산학교생들. 사진 <EBS>지식채널 갈무리
» 노비와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의 대부가 된 최재형
#하층민인데도 계급투쟁을 제쳐놓고 독립에 앞장선 이들이 있다. 상민 출신으로 ‘백정과 범인’의 약자인 ‘백범’으로 호를 지었던 김구, 상민 출신 부호로 오산학교를 세워 민족지도자들을 양성하고, 기독교를 3·1운동에 참여시킨 남강 이승훈이 대표적이다. 특히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가 된 최재형(1860~1920)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함북 경원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극심한 기근과 가난을 탈출하려던 할아버지, 아버지를 따라 9살에 러시아 연해주 지신허로 이주했다. 11살 때 굶주림을 이기기 위해 가출한 그는 실신 상태로 러시아 선장에게 발견돼 6년간 선원으로 세계를 다니며 글로벌 청년으로 성장했다. 18살에 연해주로 돌아온 그는 러시아의 동방정책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상주한 수만명의 러시아 군인을 상대로 한 군납으로 대부호가 되었고, 지역 군수가 되어 한인마을마다 32곳의 소학교와 교회들을 세우고 독립운동에 앞장서다가 1919년 3·1운동 직후 설립된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됐으나 이듬해 일본군에게 검거돼 총살을 당했다. 그 뒤 유가족은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됐고, 그의 유해도 묘지도 찾지 못하고 있다.
» 12일 러시아 우수리스크 최재형의 고택에 마련된 최재형기념관에서 열린 최재형기념비 제막식
» 최재형기념비 제막식에 참여한 최재형의 손자 최발렌틴을 비롯한 고려인들
» 구한말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
» 구한말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
» 일본군에 의해 학살된 한인들
» 최재형이 지도자였던 연해주 대한독립운동 지도부 동의회의 조직도. 안중근은 동의회의 의병부대장으로, 최재형의 명과 지원에 의해 국내진공작전으로 승리를 거두기도했다.
» 최재형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이토오 히로부미를 척살한 안중근의 거사도
#그 최재형이 살던 러시아 우수리스크의 고택을 단장해 문을 연 최재형기념관에서 12일 고인의 흉상인 ‘최재형 기념비’가 12일 우수리스크 죄재형의 고택에 제막됐다. 최재형은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안중근 의거의 지원자였다. 안중근이 동지 11명과 손가락을 끊어 동맹한 것도 최재형의 집이었고, 안중근에게 ‘기자증’을 만들어준 것도 대동공보사 사장인 최재형이었다. 거사 뒤 러시아인과 영국인 변호사를 뤼순에 보내고, 안중근의 순국 뒤 유족을 보살핀 것도 최재형이었다. 최재형은 노비 출신이라는 개인적 한계를 벗고 독립을 위해 몸을 던졌지만 일본의 감시 말고도 동포의 천대라는 또 다른 시련에 맞서야 했다. 고종에 의해 간도관리사로 파견된 이범윤의 견제를 받고, 1909년엔 이범윤 부하의 저격을 받아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조선 양녕대군 16대손임을 내세우며 왕족 코스프레를 했던 이승만 같은 양반 출신보다 상민이나 노비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헌신이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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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기] 서울시 수질검사원의 하루
19.08.16 08:28l최종 업데이트 19.08.16 08:28l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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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질 검사가 끝나고 주방에 붙이는 스티커 |
ⓒ 문세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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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동으로 갑니다. 각 조에 배치된 가구 수는 ○○가구이고 검사할 목표량은 ○○개입니다. 오늘도 수고하세요."
나는 지난 3월 5일부터 서울시상수도사업본부 관할 기관인 중부수도사업소 소속 수질검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서울시의 6개 수도사업소에서 시행하는 이 사업의 명칭은 '아리수품질확인제'다. 일자리 창출과 서울의 수돗물인 '아리수' 홍보를 목적으로 한다. 벌써 10년째 진행하고 있다. 사업에 참여하는 분은 모두 여성이며 8개월의 기간제 근로자로 일한다.
일을 시작한 지 벌써 5개월이 넘었다. 2인 1조로 짜인 8개 조가 있다. 7개 조는 매일 아침 각 가정이나 학교, 관공서에 수질 검사하러 나간다. 나머지 1개조는 사무실에 남아 수질검사 결과지를 입력한다. 오전 9시에 출근해 간단히 조회를 하고 배정된 지역으로 '출장'을 간다. 이동할 때는 사무실에서 준비한 승용차(경차)를 이용한다.
어느덧 중년이라는 나이대에 들어서니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다. 지난 1월 우연히 서울시 공공일자리를 검색하다가 이 일자리를 발견했다. 자격조건 중에 눈에 띈 것은 '여성만 지원 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성차별적 구인 조건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오로지 내 관심은 '합격'에 있었다.
서류와 면접 전형을 거쳐 기대하던 합격 통보를 받았다. 3월 5일, 드디어 첫 출근을 했다. 역시 인생은 예측 불가다. 내가 수질검사원으로 일하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달콤한 늦잠도 이제는 안녕이다. 오전 9시 출근이니 조금만 늑장 부리면 지각이다.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에 몸을 구겨 넣는다. 서두르지 않으면 좋아하는 핸드드립 커피를 내릴 시간도 없다. 지하철에서 내려 10분이 채 안 되는 거리의 사무실까지 무조건 뛴다. 어느덧 5개월이 지났다. 이제는 아침 6시 반이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
배정된 지역에 도착하면 오늘 정해진 할당량을 채워야 한다는 일념밖에 없다. 한 집 한 집 초인종을 누르며 외친다. "수질검사 나왔습니다!" 처음 한 달 동안은 이 소리를 내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추억의 "찹쌀떡 사~려~" 도 아니고, 수질검사 나왔다고 소리를 지르려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평범한 직장인은 평일 하루 8시간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아침부터 수질검사원이 벨을 누른다고 "어서 오세요" 하면서 문을 열어주는 시민은 대부분 더 이상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거나, 이제는 팔아야 할 노동력이 바닥이 나서 집을 지키는 일이라도 해야 하는 어르신이거나, 가족의 돌봄 노동을 담당하는 주부다.
친절하게 문을 열어주는 시민을 만나면 기분이 좋다. 오늘의 할당량이 하나씩 채워질 때의 기분, 그것은 마치 보험설계사가 계약에 성공해 수당을 받는 것처럼 짜릿하다.
"더운데 고생이 많으십니다, 우리 집 수돗물은 괜찮은가요?"라는 질문과 함께 냉장고에서 시원한 음료수를 꺼내주는 어르신, 한평생 가족밖에 모르고 산 주부님을 만나면 별것도 아닌 이 일에 자부심이 생긴다.
"선생님 댁의 수돗물 수질은 아주 좋습니다. 탁도도 좋고, 잔류염소 수치와 pH(산성화농도)는 물론 철, 구리 모두 서울시에서 정한 먹는 수돗물 기준보다 좋게 나왔어요. 안심하고 드셔도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시면 30초 정도 고인 물을 빼고 사용하세요. 서울의 수돗물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할 만큼 좋은 물이에요. 끓이지 않고 그냥 드셔도 됩니다. 괜히 돈 들여 정수기 사지 마시고요."
검사 결과에 덧붙여서 설명을 해줘도 못 믿겠다는 표정을 보면 문 열어줘서 좋았던 기분은 온데간데없다.
"수돗물에서 염소 냄새가 나서 그냥은 못 먹겠더라구요. 가끔 이물질도 나오는 것 같고... 마시는 물은 정수기를 쓰거나 생수를 사다 마셔요. 밥할 때와 요리할 때는 수돗물을 사용해요."
갑자기 수돗물 전도사가 된 기분
다섯 달 동안 수질검사를 하면서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99%의 가구가 정수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도사업소가 생긴 지 30년, '아리수 품질확인제 사업'을 한 지 10년이 되었는데 수돗물에 대한 신뢰가 왜 이렇게 낮을까. 의문이 생겼다. 십 년 동안 수질검사를 해주고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수질을 높였는데 시민들은 믿지 않고 있다.
서울 수돗물의 원수는 팔당댐부터 한강 잠실 수중보까지 약 25Km 구간에 위치한 팔당, 강북, 암사, 구의, 풍납(영등포), 자양(뚝도), 취수장에서 끌어온다. 원수의 수질 보호를 위해 팔당 상수원 보호 구역을 관리하고 하수처리장 등 환경 기초 시설을 운영하며 상수원 보호 감시활동을 펼친다. 이 과정에서 24시간 수질을 감시한다. 거기다 법정 항목 60개 이외에 감시항목 111개를 추가하여 총 171개 항목의 수질 검사를 하는 등, 고도의 정수처리를 하고 있다. 20년 이상 된 낡은 수도관도 교체해 주며 모든 시민이 안심하고 수돗물을 먹을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 출처 : 서울시상수도사업본부 홈페이지
이렇게 긴 설명을 해 준다고 믿을까? 설명해 줄 시간도 없지만 이렇게 깐깐하게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면 다음 문제를 들고나온다.
"우리 집 수도관은 어떤가요?"
"20년 이상 된 노후 수도관은 사업소와 상담 후 교체해 줍니다."
수돗물 관리를 믿지 못하고 오래된 수도관 때문에 불안하니까 각 가정의 개수대 옆에는 정수기를 둘 수밖에 없다.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다. 나는 마지막 카드를 꺼낸다.
"수돗물에는 정수기에 없는 미네랄이 살아있어요. 정수기는 몸에 좋은 성분을 모두 거르기 때문에 맛이 없어요. 실제로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봤는데 수돗물을 선택하는 사람이 가장 많았어요. 안대를 벗으며 깜짝 놀라죠. 정수기 물 아니면 생수인 줄 알았대요. 저도 그냥 수돗물 마셔요."
실제로 우리 집에는 정수기가 없다. 수돗물을 믿었다기보다는 '수돗물 먹어도 안 죽는다'는 남편의 말을 믿고 안 샀지만. 이 일을 하면서 수돗물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수돗물을 먹지 않는 사람들에게 수돗물을 먹게 하기 위한 더 설득력 있는 아이템은 무엇일까? 공신력 있는 매스컴을 통해 대대적인 홍보를 하는 것은 어떨까? 갑자기 수돗물 전도사가 된 기분이다.
일에 대한 욕심이 생긴 건지 집착이 생긴 건지 집집마다 놓인 정수기를 보면 없애고 싶다는 충동이 생길 때도 있다. 수돗물 관리에 들인 돈이 줄줄 새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일에 대한 자부심도 떨어졌다. 더운데 고생한다면서 검사원을 반기는 시민들을 만나도 즐겁지 않다. 가장 기분이 좋을 때와 반가울 때는 '정수기가 없는 집'을 만날 때다.
일하는 재미가 점점 줄고 있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사건이 터졌다. 지난 5월 30일 인천에서 붉은 수돗물이 나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수질검사원으로 경험한 붉은 수돗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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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도를 재는 기계로 수치를 측정하고 있다. |
ⓒ 문세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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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약 한 달 뒤, 서울 문래동에서도 갑자기 붉은 수돗물이 나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번엔 인천 사태 때보다 더 관심이 갔다. 하필 내가 수질검사원으로 일하고 있는 때 사건이 터지다니.
상부에서도 '아리수품질확인제' 사업을 시작한 이래 한 번도 없던 일이라고 했다. 사업소는 비상체제로 들어갔다. 기간제 노동자인 16명의 수질검사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평일뿐만 아니라 주말에도 관할 사업소인 남부수도사업소로 지원을 나갔다. 문래동 인근의 학교와 안전이 시급한 산후조리원을 우선적으로 검사했다.
사고 지역의 가정집으로 수질검사를 하러 가면 어떻게든 주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정중하게 설명했다. 수질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홈그라운드를 벗어나 일하고 온 검사원들 역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서로를 격려했다. 사태의 원인을 하루빨리 찾고 대책이 나오길 바랐다.
6월 21일 문래동 붉은 수돗물 사건이 터지고 20여 일이 지난 7월 12일, 본부에서는 더 이상 지원 근무를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한시름 놓았다. 나는 지원 근무를 두 번밖에 안 나갔지만 관계자들은 정말 고생이 많았다.
나를 포함해서 15명의 검사원들에게 이 일자리는 매우 소중하다. 육아와 경력단절 등으로 오랫동안 경제활동을 못하다가 재취업했기 때문에 더 열심히 일하고 있다. 가족을 위한 재생산 노동만 하다가 경제활동을 하니 삶의 활력을 찾았다는 분도 있다.
나 역시 전공을 살려서 다시 일해보고 싶었으나 오라는 곳은 없고 절차는 까다로워 재취업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더 감사한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 가끔씩 튀어나오는 안 좋은 성질머리가 훼방을 놓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었고 경험도 많으니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조직은 냉철했다. 개성이 강했고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니 차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함께 풀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5개월 동안 매일 얼굴 보며 일하다 보니 어느새 정이 들었다. 계약이 종료되는 10월이 되면 많이 아쉬울 것 같다. 철없는 내 행동을 조금씩 귀엽게 봐주기 시작했는데.
입추가 지났지만 아직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모자 쓰고 선크림 잔뜩 바르고 양팔에 토시도 끼고 완전 무장 후 '출장'을 나가 외친다.
"수도사업소에서 수질검사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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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호소문] 민족의 자주와 존엄을 수호하고 평화와 통일의 새 시대를 열어나가자!(전문)
- 강호석 기자
- 승인 2019.08.15 19: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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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주와 평화를 위한 8.15민족통일대회·평화손잡기가 15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사진 : 뉴시스] |
“분단된 동포 간의 하나 됨을 위한 노력은 이 시대의 새로운 독립운동입니다.”
-백범 김구, 1948년
“역사 정의와 주권의 회복, 평화와 통일의 실현. 겨레는 수십년간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습니다.”
-이창복 8.15민족통일대회 추진위 상임대표 대회사
“남과 북, 해외의 온 민족이 민족자주의 정신 아래 평화와 통일을 실현하는 데 힘과 지혜를 합쳐 나간다면, 극복하지 못할 난관이 없고, 넘지 못할 장애란 없다.”
-광복 74주년, 자주와 평화를 위한 8.15 민족통일대회 남북해외 공동호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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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경제전쟁 도발로 반일 감정이 최고조로 치달은 8.15광복절. 해방과 동시에 맞이한 분단과 미군정은 친일파의 집권을 허용했고, 광복 74년인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은 ‘친일 분단’ 세력과 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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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뉴시스] |
“광복 74주년, 8.15민족자주독립의 날, 자주와 평화의 손을 잡자”는 구호를 내건 2019년 8.15대회는 707개 시민사회단체가 결성한 8.15민족통일대회·평화손잡기 추진위원회 주최로 15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이날 대회 참가자들은 “우리 민족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결정하고 개척해 나가자”면서, 오늘날 독립운동은 한반도 평화 번영 그리고 통일시대를 열어내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창복 추진위 상임대표는 대회사에서 “평화를 말하면서 선제공격용 신형무기를 도입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라면서, 최근 한국정부가 미국으로부터 ‘F-35A’ 10여 대, ‘글로벌 호크’, 해상고고도요격미사일 ‘SM-3’ 등의 무기 도입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또한 “상대방에게만 약속을 지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면서, 이름만 바꿔 진행하는 한미합동 군사훈련을 이제라도 그만두라고 촉구했다.
이어 아베 정부의 경제전쟁 도발에 대해 식민범죄에 대한 사죄 배상이 먼저라면서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허원배 목사는 “한일 분쟁이 강제징용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의 경제보복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동북아패권을 두고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까지 거미줄처럼 얽힌 패권경쟁에서 비롯됐다”면서, “우리민족의 미래는 우리가 결정하고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하는 길임을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온 세상에 선언하자”고 호소했다.
허 목사는 이어 “촛불정신으로 탄생한 현 정부는 위대한 국민의 힘을 믿고 흔들리지 않는 남북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촉구하면서, 갈등과 폭력을 조장하는 토착왜구 친일 보수세력을 반대했다.
이날 대회에서 “민족의 자주와 존엄을 수호하고 평화와 통일의 새 시대를 열어나가자”는 남북해외 공동호소문이 발표됐다.
대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일본대사관까지 행진하면서 ‘한일군사정보협정’ 폐기와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 음모를 폭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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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뉴시스] |
[광복 74돌 남북해외 공동호소문]
민족의 자주와 존엄을 수호하고 평화와 통일의 새 시대를 열어나가자!
8.15광복절을 맞이하는 지금, 우리 겨레는 피어린 항일운동의 나날들과 조국통일을 위한 70여년간의 투쟁행로를 돌이켜보며 자주와 평화, 통일에 대한 의지와 각오를 굳게 하고 있다.
해방의 환희와 기쁨보다 분단과 전쟁으로 인하여 겪는 불행과 고통이 크기에, 우리는 한여름 쏟아지는 폭우와 뜨거운 태양빛속에서도 자주와 평화, 통일을 위한 실천과 투쟁으로 역사의 이 날을 맞이해 왔다.
분단의 8.15를 진정한 해방과 통일의 8.15로 만들기 위해 우리 겨레가 흘린 피와 땀은 얼마였는가.
지난해 4.27선언의 채택으로 평화와 번영, 통일의 밝은 미래가 활짝 열릴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판문점에서 시작된 평화의 흐름은 전진을 멈추었으며 힘겹게 첫발을 뗀 남북관계는 교착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일본당국은 패전 74년이 되는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과거 범죄와 침략역사를 은폐, 왜곡하려 하고 있으며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정당한 사죄배상 요구에 맞서 파렴치하게도 경제보복과 재무장의 칼을 빼 들고 있다.
우리는 광복 74돌을 맞으며, 역사적인 남북선언들을 이행하여 평화와 통일번영의 새 시대를 앞장서 열어나갈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1. 민족자주, 민족자결의 기치를 굳게 들고 나아가자!
우리 민족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결정하고 개척해 나가겠다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는 바로 여기에 평화를 실현하고 남북관계를 전진시켜 나가기 위한 출로가 있다.
겨레의 운명에 대해 구태여 남의 눈치를 보고 승인을 받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남북 사이의 모든 문제를 우리 민족의 지향과 요구에 맞게 민족 자체의 힘으로 풀어가자!
민족 내부 문제에 대한 부당한 간섭과 전횡을 배격하고 우리 민족의 이익을 당당히 지키자!
역사적인 남북선언들은 겨레의 지향과 염원이 집약된 공동의 통일이정표이다. 이것은 조건이 성숙되고 환경이 마련되는 그 때에 가서 이행하기로 한 약속이 결코 아니며, 우리 겨레와 전 세계 앞에 그 실천을 확약한 평화선언, 자주통일선언이다.
온 겨레가 역사적인 판문점선언과 9월평양공동선언을 고수하고 이행하기 위한 통일운동에 함께 나서자!
2. 한반도에서 전쟁위험을 제거하고 나라의 평화를 튼튼히 지키자!
남북선언들을 통하여 남과 북은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렸음을 내외에 엄숙히 천명하였다.
그러나 중단하기로 한 합동군사연습과 군비증강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이것은 남북선언의 합의 정신에 위배 될 뿐 아니라 한반도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향한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온 민족의 힘을 합쳐 이 땅을 전쟁의 불안이 영원히 없어진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자!
남과 북 해외 온겨레가 굳게 손을 잡고 나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운동에 함께 나서자!
3. 일본의 역사왜곡과 경제침략에 반대하는 거족적 행동을 적극 펼치자!
우리 민족에 대한 일본의 야만적인 식민지배와 국가범죄는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어도 지울 수 없는 한으로 겨레의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대해 철저히 사죄하고 배상하기는 커녕, 역사왜곡과 독도영유권 주장, 군국주의 재무장 등 도발적인 정책들을 이어왔으며, 최근에는 심지어 식민범죄 배상요구에 대해 경제보복으로 도전하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주권침해’, ‘경제침략’ 행위이자 우리 겨레에 대한 모독이며, 과거 일제가 저지른 식민범죄의 완전한 청산과 동아시아의 평화협력을 염원하는 아시아 민중들의 기대에도 역행하는 처사이다.
우리 겨레가 사는 모든 곳에서 일본의 경제보복에 반대하는 행동을 적극 펼치자!
일본의 경제침략에 동조하는 친일매국 집단들의 행위에 단호히 반대하자!
일제가 우리나라를 불법적으로 강점하고 식민통치를 실시하며 감행한 범죄들을 반드시 결산하고, 오늘날 더욱 노골화되고 있는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과 군국주의 부활, 재일동포들에 대한 정치적 박해와 탄압을 저지하기 위한 전민족적 투쟁을 더욱 힘차게 벌이자!
남과 북, 해외의 온 민족이 민족자주의 정신 아래 평화와 통일을 실현하는 데 힘과 지혜를 합쳐 나간다면, 극복하지 못할 난관이 없고, 넘지 못할 장애란 없다.
우리 모두 남북선언들의 기치 아래 굳게 단결하여 평화롭고 공동번영하는 밝은 미래를 힘차게 열어내자!
2019년 8월 15일
자주와 평화를 위한 8.15민족통일대회-평화손잡기추진위원회
6.15공동선언실천 북측위원회
6.15공동선언실천 해외측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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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석 기자 sonkang1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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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평통 대변인, 문 대통령 경축사 비난 "다시 마주앉을 생각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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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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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8/16 [08:39] 최종편집: ⓒ 자주시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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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는 문재인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 대해 "광복절과는 인연이 없는 망발을 늘어놓은 것"이라고 비난하며 “두고 보면 알겠지만 우리는 남조선 당국자들과 더 이상 할 말도 없으며 다시 마주앉을 생각도 없다”고 밝혔다.
조선중앙통신은 16일 조평통 대변인이 담화를 통해 “남조선당국이 이번 합동군사연습이 끝난 다음 아무런 계산도 없이 계절이 바뀌듯 저절로 대화국면이 찾아오리라고 망상하면서 앞으로의 조미대화에서 어부지리를 얻어 보려고 목을 빼들고 기웃거리고 있지만 그런 부실한 미련은 미리 접는 것이 좋을 것”이라면서 이같이 전했다고 보도했다.
대변인은 “태산명동에 서일필이라는 말이 있다”며 “바로 남조선당국자의 ‘광복절경축사’라는 것을 두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한마디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남조선당국자가 최근 북조선의 몇 차례 ‘우려스러운 행동’에도 불구하고 대화분위기가 흔들리지 않았다느니, 북조선의 ‘도발’ 한 번에 조선반도가 요동치던 이전의 상황과 달라졌다느니 뭐니 하면서 <광복절>과는 인연이 없는 망발을 늘어놓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남조선당국자의 말대로라면 저들이 대화분위기를 유지하고 북남협력을 통한 평화경제를 건설하며 조선반도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소리인데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이라고 비난했다.
또 대변인은 “지금 이 시각에도 남조선에서 우리를 반대하는 합동군사연습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때에 대화분위기니, 평화경제니, 평화체제니 하는 말을 과연 무슨 체면에 내뱉는가 하는 것이다”며 “역사적인 판문점선언 이행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북남대화의 동력이 상실된 것은 전적으로 남조선당국자의 자행의 산물이며 자업자득일 뿐”이라고 밝혔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광복절 74주년 경축식에 참석해 “최근 북한의 몇 차례 우려스러운 행동에도 대화 분위기가 흔들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정부가 추진해온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큰 성과”라며 “북한의 도발 한 번에 한반도가 요동치던 그 이전의 상황과 분명히 달라졌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 고비를 넘어서면 한반도 비핵화가 성큼 다가올 것이며 남북관계도 큰 진전을 이룰 것”이라며 “경제협력이 속도를 내고 평화경제가 시작되면 언젠가 자연스럽게 통일이 우리 앞의 현실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담화 전문이다.
태산명동에 서일필이라는 말이 있다.
바로 남조선당국자의 《광복절경축사》라는것을 두고 그렇게 말할수 있다.
섬나라족속들에게 당하는 수모를 씻기 위한 똑똑한 대책이나 타들어가는 경제상황을 타개할 뾰족한 방안도 없이 말재간만 부리였으니 《허무한 경축사》,《정신구호의 라렬》이라는 평가를 받을만도 하다.
한마디 짚고 넘어가지 않을수 없는것은 남조선당국자가 최근 북조선의 몇차례 《우려스러운 행동》에도 불구하고 대화분위기가 흔들리지 않았다느니,북조선의 《도발》 한번에 조선반도가 요동치던 이전의 상황과 달라졌다느니 뭐니 하면서 《광복절》과는 인연이 없는 망발을 늘어놓은것이다.
남조선당국자의 말대로라면 저들이 대화분위기를 유지하고 북남협력을 통한 평화경제를 건설하며 조선반도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있다는 소리인데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노릇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남조선에서 우리를 반대하는 합동군사연습이 한창 진행되고있는 때에 대화분위기니,평화경제니,평화체제니 하는 말을 과연 무슨 체면에 내뱉는가 하는것이다.
더우기 우리 군대의 주력을 90일내에 《괴멸》시키고 대량살륙무기제거와 《주민생활안정》 등을 골자로 하는 전쟁씨나리오를 실전에 옮기기 위한 합동군사연습이 맹렬하게 진행되고있고 그 무슨 반격훈련이라는것까지 시작되고있는 시점에 뻐젓이 북남사이의 《대화》를 운운하는 사람의 사고가 과연 건전한가 하는것이 의문스러울뿐이다.
정말 보기드물게 뻔뻔스러운 사람이다.
말끝마다 평화를 부르짖는데 미국으로부터 사들이는 무인기와 전투기들은 농약이나 뿌리고 교예비행이나 하는데 쓰자고 사들였다고 변명할 셈인가?
공화국북반부 전 지역을 타격하기 위한 정밀유도탄,전자기임풀스탄,다목적대형수송함 등의 개발 및 능력확보를 목표로 한 《국방중기계획》은 또 무엇이라고 설명하겠는가.
명백한것은 이 모든것이 우리를 괴멸시키자는데 목적이 있다는것이다.
남조선국민을 향하여 구겨진 체면을 세워보려고 엮어댄 말일지라도 바로 곁에서 우리가 듣고있는데 어떻게 책임지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뇌까리는가 하는것이다.
아래사람들이 써준것을 그대로 졸졸 내리읽는 남조선당국자가 웃겨도 세게 웃기는 사람인것만은 분명하다.
북쪽에서 사냥총소리만 나도 똥줄을 갈기는 주제에 애써 의연함을 연출하며 북조선이 핵이 아닌 경제와 번영을 선택할수 있도록 하겠다고 력설하는 모습을 보면 겁에 잔뜩 질린것이 력력하다.
력사적인 판문점선언리행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북남대화의 동력이 상실된것은 전적으로 남조선당국자의 자행의 산물이며 자업자득일뿐이다.
남조선당국이 이번 합동군사연습이 끝난 다음 아무런 계산도 없이 계절이 바뀌듯 저절로 대화국면이 찾아오리라고 망상하면서 앞으로의 조미대화에서 어부지리를 얻어보려고 목을 빼들고 기웃거리고있지만 그런 부실한 미련은 미리 접는것이 좋을것이다.
두고보면 알겠지만 우리는 남조선 당국자들과 더이상 할말도 없으며 다시 마주앉을 생각도 없다.
주체108(2019)년 8월 16일
평 양(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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