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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동박새 아시나요

옆구리 ‘김칫국물 자국’, 한국동박새 아시나요

윤순영 2019. 05. 28
조회수 237 추천수 0
 

예민하고 보기 힘든 나그네새

 

크기변환_YSY_5611.jpg» 한국동박새 부부가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고 있다. 동박새와는 옆구리의 붉은 밤색 무늬와 연주황 부리로 구별한다.

 

동박새란 이름만 들어도 친근감이 느껴지는 귀여운 새다. 동박새는 동백나무가 많은 남해안과 서해안 도서지방, 해안지대에서 흔히 번식하는 텃새여서 그럴 것이다. 

 

다른 새들처럼 사람을 피하거나 놀라지 않고 가까이 다가와 지내는 온순한 새다. 먹이는 식물성으로 주로 꿀과 열매 그리고 작은 애벌레를 잡아먹기도 한다.

 

동박새는 혀끝에 붓 모양의 돌기가 있어서 꿀을 빨 때 편리하다. 특히 동백꽃의 꿀을 좋아하는데, 벌과 나비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전인 이름 봄 동백나무에서 무리 지어 꿀을 빨아 먹으며 꽃가루받이를 돕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런 동박새와 다른 한국동박새도 있다.

 

크기변환_YSY_4038.jpg» 한국동박새. 옆구리에 난 붉은 밤색 무늬가 특징이다.

 

크기변환_YSY_1600.jpg» 동박새. 옆구리의 검붉은 무늬가 없고 아래 부리도 회색이다.

 

크기변환_YSY_4547.jpg» 한국동박새는 동박새와 다른 색다른 매력이 있는 새다.

 

지난 5월 12일 우리 곁에 흔치 않은 한국동박새를 만났다. 일반적으로 동박새는 알아도 한국동박새란 새가 있는지는 모르는 이들이 많다. 

 

3일 동안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이 찾아왔다. 나그네새이기 때문에 잠시 머물다 가면 볼 수 없고, 다음에 또 볼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요즘은 오전 6시면 날이 밝는다. 새들이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인다. 한국동박새도 예외는 아니다. 

 

봄철 이동 시기에 한국동박새는 10~20마리 정도의 작은 무리를 이루는데 30마리가 넘기도 한다. 무리 지어 나뭇가지와 나뭇잎에 몸을 숨기며 오가면서 먹이를 먹는다. 무리를 이루는 것은 안전을 위해 중요한 전략이다.

 

크기변환_YSY_4257.jpg» 한국동박새는 옆구리의 붉은 밤색 깃털 무늬와 함께 멱의 노란색이 가슴과 이루는 경계가 깔끔하고 명확한 특징이 있다.

 

크기변환_YSY_4911.jpg» 텃새인 동박새는 옆구리에 전체적으로 옅은 밤색이 감돌고, 멱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노란 깃털의 경계가 흐릿하다.

 

한국동박새는 오전에 활발하게 활동하고 오후에는 거의 움직임을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하다. 아주 짧은 거리도 무리를 지어 이동하며, 절대로 혼자 무리를 이탈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위협 요인이 되는 소리가 들리거나 위협을 가할 새가 나타나면 재빨리 나뭇잎 사이로 몸을 숨기거나 피한다. 아예 움직임을 멈추고 주변이 안전한 것이 확인되면 다시 무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치밀함도 보인다.

 

좀처럼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이 한국동박새다. 관찰하는 동안에도 민첩하고 은밀하게 움직여 좀처럼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시야에서 바로바로 사라지기 일쑤다. 

 

일상처럼 이런 행동이 반복된다. 한국동박새가 현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따라가다 보면 정신이 없다. 이런 행동은 천적을 교란하는 데 효과적일 것이다.

 

크기변환_YSY_5507.jpg» 은밀하게 상록활엽수의 나뭇잎과 가지 사이를 옮겨 다니는 한국동박새.

 

크기변환_YSY_4189.jpg» 맘에 드는 새순을 고르는 한국동박새.

 

크기변환_YSY_3585.jpg» 잎이 크고 무성한 상록활엽수는 한국동박새가 몸을 숨기기에 제격이다.

 

한국동박새를 자세히 관찰하거나 촬영하는 데 애를 먹었다. 일반적인 새들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예민했다. 그러나 조심성은 한국동박새가 살아가는 유일한 방편이다. 

 

텃새인 동박새의 친숙함과 여유 그리고 호기심 많은 행동을 찾아볼 수 없었다. 동박새들은 좀처럼 땅으로 내려오지 않는 새다. 한국동박새도 동박새와 비슷하게 상록수림을 선호하지만, 한국동박새와 동박새는 생활습성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한국동박새는 울음소리가 동박새와 다르고 매우 예민하여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고 조심성 있게 은밀하게 무리가 움직이는 것이 동박새와 크게 다르다. 한국동박새나 동박새의 애정표현은 유난히 귀엽다. 서로 곁에 앉아 몸을 치장하고 부부의 애정을 확인하면서 사랑을 나누는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도록 깜찍하다.

 

크기변환_YSY_4534.jpg» 나무 수액을 핥아 먹는 한국동박새.

 

크기변환_YSY_4438.jpg» 정면에서 바라본 한국동박새. 멱의 노란색과 가슴이 아주 명확하게 구분돼 있다.

 

크기변환_YSY_4474.jpg» 분주하게 먹이를 찾아 움직이는 한국동박새들.

 

한국동박새는 남한을 지나가는 나그네새다. 봄에는 5월 초순과 중순 사이, 가을에는 9월 중순과 10월 중순 사이에 관찰된다. 북한, 우수리, 러시아 동아시아, 중국 북동부에서 번식하고, 중국 서남부와 인도지나 반도의 미얀마, 타이,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북서부에서 월동한다. 

 

한국동박새의 몸길이는 11㎝인 동박새보다 다소 작은 10.5㎝다. 옆구리엔 뚜렷한 붉은 밤색 무늬가 아주 선명하다. 잘 익은 김칫국물로 찍어놓은 얼룩 같다. 일부 흐린 개체도 있다.

 

크기변환_YSY_5613.jpg» 한국동박새 부부의 다정한 모습.

 

크기변환_YSY_5597.jpg» 정성껏 깃털을 다듬는 한국동박새 부부.

 

크기변환_YSY_5657.jpg» 상대의 깃털을 다듬어 주는 몸짓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한국동박새.

 

한국동박새는 노란색 멱과 흰색 가슴의 경계가 명확하다. 가슴 옆은 회색이 감돌고 가슴은 회색이 도는 흰색, 부리 기부와 아래 부리는 연한 분홍빛이다. 

 

아래 꼬리덮깃은 노란색이다. 이마에서 등 위 꼬리덮깃까지 윗면은 흐릿한 녹색과 노란색을 혼합한 듯한 색이다. 눈 둘레에는 흰색 고리 모양이 뚜렷하다.

 

흰 고리 선이 끝나 연결되지 않은 눈 앞쪽은 검은색이다. 턱밑과 멱은 노란색, 배는 흰색, 가슴은 회색이 도는 흰색, 가슴 옆은 회색이다. 배는 흰색, 암컷은 온몸의 빛깔이 희미한 편이다.

 

크기변환_YSY_5608.jpg» 깃털을 털고 있는 한국동박새.

 

크기변환_YSY_5633_01.jpg» 분주하게 이리저리 다니던 한국동박새 부부가 나뭇가지에서 한가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한국동박새의 생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먹이로는 주로 거미류, 애벌레, 진드기류, 딱정벌레, 나비, 매미, 메뚜기, 잠자리 등을 잡아먹으며 작은 꽃과 꽃가루, 꽃꿀 등을 먹는다. 5~6월에 한배에 4~5개의 알을 낳아 11~12일 동안 품는다. 새끼의 성장 기간은 11~13일이다. 다양한 환경의 산림에 서식한다.

 

5월 14일 갑자기 한국동박새 무리가 나뭇잎 사이에서 쏜살같이 뛰쳐나와 멀리 사라진다. 머물고 있던 곳에서 미련 없이 떠나는 느낌을 받았다. 

 

나그네새가 중간 기착지에서 머무는 기간은 종마다 다르다. 길게는 15일, 짧게는 3~4일이다. 지금쯤 한국동박새는 이미 만주의 번식지에 도착해 신혼살림을 꾸렸을 것이다.

 

글·사진 윤순영/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 한겨레 환경생태 웹진 ‘물바람숲’ 필자. 촬영 디렉터 이경희, 김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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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동박새 아시나요

옆구리 ‘김칫국물 자국’, 한국동박새 아시나요

윤순영 2019. 05. 28
조회수 237 추천수 0
 

예민하고 보기 힘든 나그네새

 

크기변환_YSY_5611.jpg» 한국동박새 부부가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고 있다. 동박새와는 옆구리의 붉은 밤색 무늬와 연주황 부리로 구별한다.

 

동박새란 이름만 들어도 친근감이 느껴지는 귀여운 새다. 동박새는 동백나무가 많은 남해안과 서해안 도서지방, 해안지대에서 흔히 번식하는 텃새여서 그럴 것이다. 

 

다른 새들처럼 사람을 피하거나 놀라지 않고 가까이 다가와 지내는 온순한 새다. 먹이는 식물성으로 주로 꿀과 열매 그리고 작은 애벌레를 잡아먹기도 한다.

 

동박새는 혀끝에 붓 모양의 돌기가 있어서 꿀을 빨 때 편리하다. 특히 동백꽃의 꿀을 좋아하는데, 벌과 나비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전인 이름 봄 동백나무에서 무리 지어 꿀을 빨아 먹으며 꽃가루받이를 돕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런 동박새와 다른 한국동박새도 있다.

 

크기변환_YSY_4038.jpg» 한국동박새. 옆구리에 난 붉은 밤색 무늬가 특징이다.

 

크기변환_YSY_1600.jpg» 동박새. 옆구리의 검붉은 무늬가 없고 아래 부리도 회색이다.

 

크기변환_YSY_4547.jpg» 한국동박새는 동박새와 다른 색다른 매력이 있는 새다.

 

지난 5월 12일 우리 곁에 흔치 않은 한국동박새를 만났다. 일반적으로 동박새는 알아도 한국동박새란 새가 있는지는 모르는 이들이 많다. 

 

3일 동안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이 찾아왔다. 나그네새이기 때문에 잠시 머물다 가면 볼 수 없고, 다음에 또 볼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요즘은 오전 6시면 날이 밝는다. 새들이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인다. 한국동박새도 예외는 아니다. 

 

봄철 이동 시기에 한국동박새는 10~20마리 정도의 작은 무리를 이루는데 30마리가 넘기도 한다. 무리 지어 나뭇가지와 나뭇잎에 몸을 숨기며 오가면서 먹이를 먹는다. 무리를 이루는 것은 안전을 위해 중요한 전략이다.

 

크기변환_YSY_4257.jpg» 한국동박새는 옆구리의 붉은 밤색 깃털 무늬와 함께 멱의 노란색이 가슴과 이루는 경계가 깔끔하고 명확한 특징이 있다.

 

크기변환_YSY_4911.jpg» 텃새인 동박새는 옆구리에 전체적으로 옅은 밤색이 감돌고, 멱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노란 깃털의 경계가 흐릿하다.

 

한국동박새는 오전에 활발하게 활동하고 오후에는 거의 움직임을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하다. 아주 짧은 거리도 무리를 지어 이동하며, 절대로 혼자 무리를 이탈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위협 요인이 되는 소리가 들리거나 위협을 가할 새가 나타나면 재빨리 나뭇잎 사이로 몸을 숨기거나 피한다. 아예 움직임을 멈추고 주변이 안전한 것이 확인되면 다시 무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치밀함도 보인다.

 

좀처럼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이 한국동박새다. 관찰하는 동안에도 민첩하고 은밀하게 움직여 좀처럼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시야에서 바로바로 사라지기 일쑤다. 

 

일상처럼 이런 행동이 반복된다. 한국동박새가 현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따라가다 보면 정신이 없다. 이런 행동은 천적을 교란하는 데 효과적일 것이다.

 

크기변환_YSY_5507.jpg» 은밀하게 상록활엽수의 나뭇잎과 가지 사이를 옮겨 다니는 한국동박새.

 

크기변환_YSY_4189.jpg» 맘에 드는 새순을 고르는 한국동박새.

 

크기변환_YSY_3585.jpg» 잎이 크고 무성한 상록활엽수는 한국동박새가 몸을 숨기기에 제격이다.

 

한국동박새를 자세히 관찰하거나 촬영하는 데 애를 먹었다. 일반적인 새들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예민했다. 그러나 조심성은 한국동박새가 살아가는 유일한 방편이다. 

 

텃새인 동박새의 친숙함과 여유 그리고 호기심 많은 행동을 찾아볼 수 없었다. 동박새들은 좀처럼 땅으로 내려오지 않는 새다. 한국동박새도 동박새와 비슷하게 상록수림을 선호하지만, 한국동박새와 동박새는 생활습성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한국동박새는 울음소리가 동박새와 다르고 매우 예민하여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고 조심성 있게 은밀하게 무리가 움직이는 것이 동박새와 크게 다르다. 한국동박새나 동박새의 애정표현은 유난히 귀엽다. 서로 곁에 앉아 몸을 치장하고 부부의 애정을 확인하면서 사랑을 나누는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도록 깜찍하다.

 

크기변환_YSY_4534.jpg» 나무 수액을 핥아 먹는 한국동박새.

 

크기변환_YSY_4438.jpg» 정면에서 바라본 한국동박새. 멱의 노란색과 가슴이 아주 명확하게 구분돼 있다.

 

크기변환_YSY_4474.jpg» 분주하게 먹이를 찾아 움직이는 한국동박새들.

 

한국동박새는 남한을 지나가는 나그네새다. 봄에는 5월 초순과 중순 사이, 가을에는 9월 중순과 10월 중순 사이에 관찰된다. 북한, 우수리, 러시아 동아시아, 중국 북동부에서 번식하고, 중국 서남부와 인도지나 반도의 미얀마, 타이,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북서부에서 월동한다. 

 

한국동박새의 몸길이는 11㎝인 동박새보다 다소 작은 10.5㎝다. 옆구리엔 뚜렷한 붉은 밤색 무늬가 아주 선명하다. 잘 익은 김칫국물로 찍어놓은 얼룩 같다. 일부 흐린 개체도 있다.

 

크기변환_YSY_5613.jpg» 한국동박새 부부의 다정한 모습.

 

크기변환_YSY_5597.jpg» 정성껏 깃털을 다듬는 한국동박새 부부.

 

크기변환_YSY_5657.jpg» 상대의 깃털을 다듬어 주는 몸짓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한국동박새.

 

한국동박새는 노란색 멱과 흰색 가슴의 경계가 명확하다. 가슴 옆은 회색이 감돌고 가슴은 회색이 도는 흰색, 부리 기부와 아래 부리는 연한 분홍빛이다. 

 

아래 꼬리덮깃은 노란색이다. 이마에서 등 위 꼬리덮깃까지 윗면은 흐릿한 녹색과 노란색을 혼합한 듯한 색이다. 눈 둘레에는 흰색 고리 모양이 뚜렷하다.

 

흰 고리 선이 끝나 연결되지 않은 눈 앞쪽은 검은색이다. 턱밑과 멱은 노란색, 배는 흰색, 가슴은 회색이 도는 흰색, 가슴 옆은 회색이다. 배는 흰색, 암컷은 온몸의 빛깔이 희미한 편이다.

 

크기변환_YSY_5608.jpg» 깃털을 털고 있는 한국동박새.

 

크기변환_YSY_5633_01.jpg» 분주하게 이리저리 다니던 한국동박새 부부가 나뭇가지에서 한가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한국동박새의 생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먹이로는 주로 거미류, 애벌레, 진드기류, 딱정벌레, 나비, 매미, 메뚜기, 잠자리 등을 잡아먹으며 작은 꽃과 꽃가루, 꽃꿀 등을 먹는다. 5~6월에 한배에 4~5개의 알을 낳아 11~12일 동안 품는다. 새끼의 성장 기간은 11~13일이다. 다양한 환경의 산림에 서식한다.

 

5월 14일 갑자기 한국동박새 무리가 나뭇잎 사이에서 쏜살같이 뛰쳐나와 멀리 사라진다. 머물고 있던 곳에서 미련 없이 떠나는 느낌을 받았다. 

 

나그네새가 중간 기착지에서 머무는 기간은 종마다 다르다. 길게는 15일, 짧게는 3~4일이다. 지금쯤 한국동박새는 이미 만주의 번식지에 도착해 신혼살림을 꾸렸을 것이다.

 

글·사진 윤순영/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 한겨레 환경생태 웹진 ‘물바람숲’ 필자. 촬영 디렉터 이경희, 김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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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한·미 정상 통화 유출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한국당, 기본과 상식을 지켜달라”

정제혁 기자 jhjung@kyunghyang.com

입력 : 2019.05.29 11:21 수정 : 2019.05.29 11:28

 

 

문재인 대통령이 29일 청와대 여민관 영상회의실에서 열린 을지태극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29일 청와대 여민관 영상회의실에서 열린 을지태극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은 29일 주미대사관 참사관 ㄱ씨의 한·미 정상 통화 유출 건과 관련, “정부로서는 공직자의 기밀 유출에 대해 국민들께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 모두발언을 통해 “국가의 외교상 기밀이 유출되고, 이를 정치권에서 정쟁의 소재로 이용하는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다”며 이같이 말했다. “변명의 여지없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고도 했다. 문 대통령이 현 정부에서 일어난 일로 인해 직접 사과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례적이다. 

문 대통령은 “이번 사건을 공직기강을 바로 세우는 계기로 삼고, 철저한 점검과 보안 관리에 더욱 노력하겠다”면서 “각 부처와 공직자들도 복무 자세를 새롭게 일신하는 계기로 삼아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문 대통령은 특히 ㄱ씨로부터 3급 국가기밀에 해당하는 한·미 정상 간 통화 내용을 입수해 공개한 강효상 의원을 ‘공익제보’ ‘국민의 알 권리’ 등 명분을 내세워 두둔하고 있는 자유한국당 지도부를 ‘기본과 상식을 지켜달라’며 강도높게 비판했다. 

문 대통령은 “외교적으로 극히 민감할 수 있는 정상 간의 통화 내용까지 유출하면서 정쟁의 소재로 삼고, 이를 국민의 알권리라거나 공익제보라는 식으로 두둔하고 비호하는 정당의 행태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했다. 

이어 “국정을 담당해봤고, 앞으로도 국민의 지지를 얻어 국정을 담당하고자 하는 정당이라면 적어도 국가 운영의 근본에 관한 문제만큼은 기본과 상식을 지켜 줄 것을 요청한다”며 “당리당략을 국익과 국가 안보에 앞세우는 정치가 아니라 상식에 기초하는 정치라야 국민과 함께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5291121001&code=910203#csidx05812ec190f5f47a2d05f5bbda189d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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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눈감은 인도네시아 대학살의 역사는 진행형

[아시아생각] 군부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미완의 과제
2019.05.29 08:15:57
 

 

 

 

2019년 5월 18일, 39주년을 맞는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리고 있는 망월동 국립묘지 추모식에 비슷한 아픔을 가진 인도네시아의 인권활동가가 서있었다. 그의 이름은 베드조 운퉁(Bedjo Untung).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인도네시아 1965~66 대학살의 진상규명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현재 베드조 운퉁씨가 대표로 있는 YPKP65(Yayasan Penelitian Korban Pembunhan 1965-66의 약자로 '1965-66년 인도네시아 대학살 희생자 조사를 위한 재단’이라는 뜻)는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1965~66 대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자 배·보상 및 국가폭력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며 활동하고 있다. 

 

▲ 1965년 10월 인도네시아 보안군이 공산당원 혐의로 한 남성을 체포하고 있다. ⓒ미국 국가안보기록원


1965 대학살은 무엇인가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는 국부로 불리던 수카르노가 실각하고, 수하르토 대통령의 32년간의 장기집권이 시작될 시점에 전국적으로 소위 '빨갱이 사냥'이 진행되었다. 학살의 각본은 군부에 의해 사전에 준비되었다. 자바와 아체, 그리고 인도네시아 공산당 본부가 있던 발리에서의 대대적인 학살로 50만 명에서 300만 명에 이르는 무고한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고, 여성들은 성폭행을 당했다. 당시 열일곱 살이었던 베드조 운퉁씨는 학교에 다니다가 자카르타에 있는 군 정보부에 잡혀가 재판 없이 9년을 강제노동을 하며 감금생활을 하고서야 풀려나게 되었다.  

1965년 10월 1일, 정보사령부의 한 대령은 "자바에서의 학살은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저지른 짓이며 그들은 창고를 약탈하여 모든 무기를 준비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반란이다"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정작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이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는 전적으로 군부의 계획이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은 군부가 주도면밀하게 계획한 것으로 각 도시의 특공대에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죽이라는 무선 전보가 내려졌다. 1965년 10월 첫째 주부터 인도네시아 공산당원에 대한 체포가 전국적 규모로 대대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군사작전은 반공단체 및 군대 산하조직을 통해서도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공산당을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동원되었다. 여기에서 제주의 4·3사건과 서북청년단이 연상되는 것은 필자만이 아니리라.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소비에트연방의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의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당원은 300만 명이었으며 지지자는 거의 2600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학살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봉기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1945년 헌법에 기반하여 사회적인 공동체를 이루고 그것을 발전시키는 데에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은 거대한 국가 인도네시아 건국을 이루며 수많은 집단의 통합을 강조하고 이를 '판차실라(Pancasila)'라는 인도네시아의 건국 5원칙에 담았다. 산스크리트어 단어인 판차실라는 '판차' (Panca, 다섯이라는 뜻)와 '실라' (Sila, 원칙 이라는 뜻)의 합성어로 ①다양한 신앙에 대한 존중, ②정의와 문화적인 인본주의, ③인도네시아의 단결, ④ 합의제와 대의제를 통한 민주주의의 지혜로운 길잡이, ⑤사회정의 구현을 이른다. 

 

1945년 6월 1일에 열린 독립준비위원회에서 수카르노는 "판차실라의 탄생"이라는 주제의 연설로 인도네시아 건국 정신인 이 원칙들을 무슬림과 민족주의자 그리고 기독교 신자들과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밝혔다. 헌법에도 담겼던 인도네시아 통일과 단결원칙은 20년이 지난 후 수하르토와 군부에 의해 찢겨져 나간 것이었다.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민주주의와 평화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자신들이 무고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지역 당국에 협조했다. 그러나 그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구금되고 고문을 받았고, 납치되기도 했다. 군부의 묵인과 방조 아래 감옥에 갇혔던 사람들은 사법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죽임을 당했다. 이러한 일은 1965년부터 1968년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되었으니 전쟁도 아닌데 이 군사작전으로 최소 50만 명에서 300만 명의 무고한 사람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수많은 수용소에서 강제노동과 납치, 고문이 이루어졌고 많은 여성들이 성폭행을 당했다.  

또 다른 광주 


세월이 흘러 1965년의 비극에 대한 미국의 외교문서가 2017년 10월 공개되었다. 공개된 3만여 쪽에 달하는 19개 문서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1965년 공산당원에 대한 학살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카르타에 위치한 미국 대사관은 살해당한 인도네시아 공산당 대표의 신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의 정부 관료들이 적극적으로 인도네시아 군부가 인도네시아 내 진보적인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것을 지원했음이 보고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문서에는 반공산주의적 성향을 가진 이슬람 종교단체가 이 학살에 협력했음이 적시되어 있었다. 군부는 인도네시아 공산당과 그 산하조직을 박멸하는 작전을 수행했고 그 결과 50만 명의 공산당 지지자가 죽었으며 1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공개된 CIA의 문서를 참조할 때 미국의 개입은 분명한 사실이며, 영국과 호주 역시 무기와 자금을 제공하여 수카르노의 제거를 지원했다는 것도 드러났다. 미국은 이렇게 1965년 인도네시아 대학살의 배후에 있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와 국제시민법정 


사건 이후 오랫동안 금기시되던 1965 대학살은 2012년에 이르러서야 밝은 햇볕 아래 실체를 드러낼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국가인권위원회는 진상규명팀을 설치하여 1965년부터 1966년 사이에 벌어진 국가폭력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위원회는 2012년 7월 23일, 1965년의 비극이 인도주의에 반하는 범죄이며 살인과 구금, 고문, 약탈, 성폭행, 강제노동, 차별과 추방이 있었다고 확인·발표했다. 또 위원회는 법무부 장관에게 인권법정을 설치하여 인권법에 따라 이러한 범죄를 처리할 것을 권고하였고, 학살을 자행한 군부 내 명령체계를 공개했다. 

그 결과 인권침해를 심판하기 위한 국제시민법정(민간법정)이 2015년 11월 10일부터 13일까지 헤이그에서 열렸다. 여기서는 1965대학살에 대한 인도네시아 국가인권위원회의 보고가 단순히 '인도주의에 반하는 범죄'일뿐 아니라 '학살'범죄라고 확인되었다. 1965년의 비극이 특정 집단의 사람들에 대한 박멸을 시도하고 있으며 이는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박해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상규명의 그날까지 


베드조 운퉁씨와 그가 대표로 있는 YPKP65는 현재 암매장된 유해의 발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당시 살해된 사람들이 집단으로 매장된 무덤을 찾아 발굴하고 당국에 신고하는 활동을 벌인 결과 현재 319개의 학살 공간을 찾았다고 했다. 본격적으로 발리를 조사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군부는 여전히 학살을 부인하고 있고, 군부에 대한 불처벌은 아직도 인도네시아에서 현재진행형이다. 정치적 해결의지가 없는 한 인도네시아 정부의 해결은 요원한 것이다. 80세가 넘은 노인임에도 그는 여전히 해결의 의지를 불태우며 포럼에서 만나는 참가자들에게 연대를 호소하며 당시 후방에서 지원했던 서방국가들의 사죄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는 같은 자리에서 독일의 나치범죄 중앙사무국장이 "세계 2차대전 패전 후 74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가 나치 범죄자들을 추적하는 것은 그런 범죄는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사실을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잘못된 과거사를 바로잡자는 목적도 있지만, 미래에 대대적인 국가폭력이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라고 발언한 것과 좋은 대조가 되고 있다. 독일에서 나치 범죄의 공소시효는 1969년 의회 결의로 폐지됐다. 이로 인해서 1944년 17세의 나이에 폴란드 슈투트호프 수용소에서 감시원으로 일했던 함부르크 시민(92세)은 지난 4월 살인 방조 혐의로 기소될 수 있었다. 

광주의 5‧18기념재단은 삼처럼 엉키어버린 5‧18왜곡과 폄훼에 맞서 국제사회에 과거청산의 정당성을 호소하고자 지난 5월 18일~19일 국제회의를 개최했다. 미완의 과거청산이라는 주제로 열린 아시아포럼에서는 국제적으로 이행기 정의를 비교적 잘 실천한다고 인정받고 있는 과거청산의 경험을 가진 독일과 아르헨티나의 사례와 다른 한편으로는 미완의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경험을 보여주었다. 과거청산이라는 표현은 마치 과거사를 지우개로 지우듯 불을 질러 그 흔적을 없애버린다는 의미로 우리나라에서 주로 쓰이지만, 국제적으로는 이행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 혹은 잘못된 과거 바로잡기(Dealing with the Past Injustice)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역사가 E.H. 카의 유명한 명제처럼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과거는 청산되어 사라지지 않고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 잘못된 과거문제를 올바르게 정리하거나 해결하지 않고서는 현재나 미래의 민주주의는 담보되지 않는다. (이글에 나오는 1965대학살 내용은 베드조 운퉁씨의 광주아시아포럼 발표문과 YPKP65사이트(www.ypkp1965.org), 미국 국가안보기록원 사이트(https://nsarchive.gwu.edu/)를 참고했다. 필자) 

 

한국은 아시아에 속합니다. 따라서 한국의 이슈는 곧 아시아의 이슈이고 아시아의 이슈는 곧 한국의 이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에게 아시아는 아직도 멀게 느껴집니다. 매년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아시아를 여행하지만 아시아의 정치·경제·문화적 상황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낯설기만 합니다. 

 

 

아시아를 적극적으로 알고 재인식하는 과정은 우리들의 사고방식의 전환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또한 아시아를 넘어서 국제 사회에서 아시아에 속한 한 국가로서 한국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나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기반을 두고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2007년부터 <프레시안>과 함께 '아시아 생각'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필자들이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 문화, 경제, 사회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인권, 민주주의, 개발과 관련된 대안적 시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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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국군대, 모두 몰아내야 한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9/05/29 11:01
  • 수정일
    2019/05/29 11:0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미군 기지로 피해 보는 국가들 연대 필요해
 
 
 
용산 통신원 
기사입력: 2019/05/29 [00:55]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지난 25일, 국제민주법률가협회 및 아시아태평양법률가연맹 대표단이 용산 미군기지 답사 및 주민들과 간담회를 진행했다.     © 용산통신원

 

▲ 지난 25일, 국제민주법률가협회 및 아시아태평양법률가연맹 대표단이 용산 미군기지 답사 및 주민들과 간담회를 진행했다.     © 용산통신원

 

지난 25국제민주법률가협회 및 아시아태평양법률가연맹 대표단(이하 대표단)이 용산 미군기지 답사 및 주민들과 간담회를 진행했다.

 

용산 미군기지 답사는 김은희 용산미군기지온전히되찾기주민모임(이하 주민모임대표가 안내하고국제민주법률협회 준 사사모토 일본변호사미콜 사이어 이탈리아 변호사장경욱 변호사와 주민모임의 오숙정 회원이 통역했다.

 

용산 미군기지 답사는 이태원부군당역사공원이태원광장구 유엔사부지 등을 둘러보았고 용산 미군기지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이태원부군당역사공원은 용산 미군기지 메인포스트가 잘 보이는 곳으로한창 논란이 되는 한미연합사 건물도 보이는 곳이다.

 

이어 용산 미군기지에서 흘러나오는 지하수 오염즉 부유 기름을 모으는 집수정이 있는 이태원 광장으로 대표단은 이동했다.

 

이곳에서 녹사평역 기름유출사고와 용산 기지 내부오염 조사 결과 공개를 위한 소송에 대해서 그리고 FOIA(미국정보자유법)에 의해 밝혀진 그동안 숨기고 있었던 최악의 기름유출 사고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답사단은 오염을 시킨 자가 오염정화의 책임을 지지 않는 이상한 나라오염정보를 받아 볼 수 없는 이상한 관계의 동맹을 확인하며 모두 분노했다.

 

마지막으로 대표단은 공사가 진행 중인 유엔사 부지가 보이는 육교로 이동했다.

유엔사부지는 2006년에 반환되어 2011년에 환경오염 정화사업이 끝난 곳이다그런데 이곳에서 공사 중에 다시 오염원이 발견되었고 정화 명령이 떨어져 있는 상황이다.

 

▲ 지난 25일, 국제민주법률가협회 및 아시아태평양법률가연맹 대표단이 용산 미군기지 답사 및 주민들과 간담회를 진행했다.     ©용산통신원

 

▲ 지난 25일, 국제민주법률가협회 및 아시아태평양법률가연맹 대표단이 용산 미군기지 답사 및 주민들과 간담회를 진행했다.     © 용산통신원

 

▲ 지난 25일, 국제민주법률가협회 및 아시아태평양법률가연맹 대표단이 용산 미군기지 답사 및 주민들과 간담회를 진행했다.     © 용산통신원

 

답사를 마치고 대표단은 주민모임 회원들과 간담회를 진행했다.

 

최명희 주민모임 회원은 미군기지 오염 문제에 대한 우려를 드러내고 문제가 발생해도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등 때문에 미국에 제대로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준 사사모토 변호사는 일본 오키나와에도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군 기지를 만들었는데이후 비행기 추락 사고도 잦아 현지 사람들이 미군을 상대로 소송을 많이 걸었다며 미군 부대에서 생화학무기를 발견했는데 관련 사실을 증명할 방법이 없는 등 한국과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미콜 사비어 변호사는 전 세계 70개국에 800개 이상 미군기지가 있고 그중 한국일본독일이탈리아에 집중돼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사비어 변호사는 “(미군 기지를 둘러싼 문제가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다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주민들께 박수를 보낸다고 강조했다.

 

간담회에서는 세계 800여개의 미군기지가 있는데 한국에서 일어나는 문제처럼 불평등한 SOFA 협정으로 인해 범죄가 발생하거나 오염 문제가 발생해도 미군이 처벌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피해를 보는 국가 간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데 대해 함께 공감했다.

 

한편국제민주법률가협회는 전 세계 법률가들의 교류를 촉진하고 인류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1946년 프랑스 파리에서 창립한 단체다.

 

아시아태평양법률가연맹은 인도와 일본네팔파키스탄 등의 인권 변호사·검사 등이 모여 2016년 네팔 카트만두에서 설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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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을 잊지 말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굴복하지 않는 고려인의 용기를 기억합니다] 마지막회
2019.05.28 09:13:27
 

 

 

 

러시아로 여행을 떠난 지인의 사진을 보게 됐다. 사진에는 우스리스크 수이푼강의 풍경이 담겨 있었다. 수이푼 강은 헤이그 특사인 이상설의 유해가 뿌려진 곳이다. 지인은 사진과 함께 그의 유언을 언급했다. 

"나는 광복을 못 보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남김없이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마라."

이상설은 연해주에서 권업회를 조직하는 등 활동을 하다 1917년 사망한다. 수이푼강 인근에 이상설 유허비가 세워진 것은 2001년 일이다. 유허비란 기록은 있으나 유물과 문화재가 없는 유허지 땅에 세운 비석을 가리킨다.  

유허비에 새겨진 몇 줄 문장이 혼마저 타국에 두겠다고 한 그의 심정을 더듬게 한다. 광활한 땅에 홀로 세워진 유허비를 떠올리자니, 서툰 말로 내게 선조들의 역사를 들려준 고려인들이 떠오른다. 이상설 특사가 타국에서 눈감은 지 100년. 그의 혼이 남아있을 땅에서 온 이들을 만났다. 유허비와 그들은 닮았다. 

조선에서 연해주로 연해주에서 다시 중앙아시아로. 거듭해 터전을 옮겨야 했던 러시아 한인들은 뿌리를 증명할 많은 것들을 잃었다. 러시아 신분을 얻는 과정에서 성씨는 변형됐다. 김씨는 김가이가 되고, 이씨는 니가이가 됐다. 강제이주 과정에서 족보는 사라졌다. 족보만 잃었나. 가족도 잃었다.  

그렇게 살아온 흔적들을 잃고, 남은 것은 친척들이 들려준 이야기 몇 구절이다. 기억만 남았다. 기억을 간직한 이들을 만났다. 
 

▲ 고려인독립운동 기념비건립 국민추진위원회 출범식에서. ⓒ김신/ 고려인독립운동기념비건립추진위


유허지에 서 역사를 듣다 

"우리 고조할아버지 의병 지휘관이었어요. 고조할아버지가 사람들에게 앞서 싸우자 했어요. 다들 죽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나갔어요. 잡혀서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 당했어요."

서툰 한국말이 의병, 지휘관, 형무소라는 단어 앞에서 멈춘다. 러시아어가 섞인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기가이 소피아는 허위 의병장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를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라 불렀다.  

허위 의병장이 소속된 13도 창의군은 국내 최대 의병저항운동 세력이었다. 그는 의병을 모아 한양으로 진격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가 체포되어 사형당한 후 자녀들은 조선에 머물 수 없었다. 만주와 연해주로 도피한다. 기가이 소피아가 우즈베키스탄에서 나고 자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소피아가 해줄 수 있는 허위 의병장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어릴 적 할머니를 통해 들은 것이 전부라 했다. 기억을 더듬는다.  

러시아에서 온 고려인 3-4세는 자신의 기억을 서툴고 짧은 문장으로 전했다. ‘일본군과 맞서 싸워 죽임을 당했다’ ‘체포하려 하자 도망쳐 러시아로 왔다’ 그 짧은 말들을 이어 붙이다보면 황량한 유허지에 서 있는 기분이 된다.  

그럼에도 이들이 전해준 이야기는 많은 역사를 품고 있다. 

앞서 언급한 이상설과 허위. 그리고 경제적으로 성공한 러시아 한인으로 항일운동조직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한 최재형, 봉오동・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홍범도, 러시아 적백내전 시기 일본군이 소속된 백군에 맞서 싸운 대한의용군 소대장 마춘걸.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세워진 한국 최초 사회주의 정당 ‘한인사회당’ 탄생의 주역인 이동휘, 김알렉산드라. 

이 외에도 이동녕, 이위종, 이범윤, 신채호, 장도빈… 무수하다. 그리고 역사에 이름을 새겨 넣지 않아도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낯선 땅에서 땅을 일구고 삶을 개척한 사람들이 있다. 

저마다의 이유로 연해주로 이주했고 각자의 가치를 붙잡고 옳다고 믿는 일을 행했다. 살아남는 것이 목표인 이도, 죽음을 불사하는 이도 있었다. 머나먼 땅에서 살아갔다. 그리고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수십 년, 아니 백년이 지나고서야 ‘고려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그 후손들이 한국 땅을 밟았다.  

가깝고도 먼 사람들이 오다 

"우리 고려시대 때 온 것 아니고 조선에서 왔다면서 왜 고려인이라 불리나요?"

어릴 적 한국에 온 고려인 3,4세들이 부모를 붙잡고 한 번은 물어보게 되는 질문이다. 구소련 영토에서 '까레이츠'라 불리던 시절에는 하지 않았을 질문이다. 그때는 '까레이츠'가 한국인이라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 알게 된다. '한국인'과 '고려인'은 다른 단어임을. 

한국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에게 한국은 가깝고도 먼 나라다. 나에게도 이들은 멀고도 가까운 사람들이다. 생김새는 몹시 닮았는데 말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수십 년을 교류 없이 각자 다른 문화권에 살았다. 이들은 '닮음'을 보이겠다며 환갑잔치 사진 같은 것을 내밀었다. 차려입은 한복이 고왔다. 사진 속 낯설고도 익숙한 풍경에 오래 눈이 갔다. 

기가이 소피아는 한국에 와서야 할아버지의 역사와 조우했다. 독립유공자 후손임을 인정받았다. 이곳에서 자녀를 키우며 살아갈 것이라 한다. 한국 땅에서 살기로 마음먹었으니 그녀와 나의 ‘닮음’은 많아질 것이다. '차이'를 확인하는 일도 잦아질 것이다. 그런데 우선은 알아가야겠다.  

<독립운동기념비 건립을 위한 추진위> 결성을 알리는 자리에서 공동대표로 선 소피아가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게 고려인을 잊지 말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잊지 않기 위해 세우다 

잊지 않으려면 기억해야 할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고려인에 대해 기억할만한 것이 없다. 이들의 삶과 역사를 모른다. 한국사회에는 유허비를 세울 공간조차 없었다. 

조선에서 연해주,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 다시 러시아로. 또는 한국으로. 이들을 떠돌게 한 시작은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에서 비롯한다. 그 역사를 지나 지금 ‘우리’의 삶이 만들어졌다. 오랜 세월 떨어져 있었으나 ‘고려인’과 ‘한국인’은 역사의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 

서로의 역사를 공유한다는 것은 옛날이야기를 회상한다는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 앞에 놓인 역사적 과제와 책임을 함께 나눈다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소피아 공동대표가 말한 '잊지 않는 일'이 시작된다.  

8만여 명의 고려인이 한국을 찾는 지금, 잊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다. 존재를 인정하고 정착을 지원하고 교류하는 일. 멀고도 가까운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기억하려 한다. 기억하기 위해 비(碑)를 세운다.  

 

 

'고려인 독립운동 기념비' 건립 비용 모금을 위한 기획연재는 펀딩사이트 <같이가치>에 공동 게재되고 있습니다. 고려인 독립운동 기념비는 연해주 등지에서 이뤄진 고려인의 항일항쟁 역사를 대한민국 땅에 적어내리는 기록입니다. 낯선 땅에서 굴하지 않고 삶을 지켜낸 이들, 더 나아가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웠던 그러나 이름 없이 잊힐 수밖에 없던 수많은 이들을 기억하는 작업에 함께해주시길 바랍니다. 고려인 독립운동 기념비 건립 5만 명의 건립자가 되어주세요. - 고려인독립운동 국민추진위원회

 

후원 참여: 신용협동조합 131-017-209819 안산희망재단

기념비 건립 모금을 위한 스토리 펀딩 사이트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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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큰교회, 가톨릭 안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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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이 만난 사람들을 함께 만나보세요. 또 '인간은 변하는가, 변하지 않는가'란 인류정신사의 가장 큰 주제를 오해 테마로 한 인터뷰와 이에 대한 목사와 신부, 스님, 주역의 대가와 심리학자 등 10명이 모여 토론한 대담을 선보입니다.

작지만 큰교회, 가톨릭 안동교구

조현 2019. 05. 27
조회수 137 추천수 0
 

 

두봉권-.JPG» 가톨릭 안동교구 현 교구장인 권혁주(왼쪽) 주교와 초대 교구장인 두봉 주교

 

작은 것이 아름답다. 가톨릭 안동교구엔 주교 2명, 신부 90명 등 92명의 성직자가 있다. 서울대교구가 주교 6명, 신부 912명인것과 비교해보면 안동교구가 얼마나 작은 교구인지 알 수 있다. 국내 16개 교구 가운데 가장 작다. 규모가 작다고 아름다운것은 아니다. 작음에도 사랑이 무한정 샘솟는 신비가 비로소 아름다움을 준다.


 현대 50년간 급격한 이농으로 교구민이 138만명에서 71만명으로 오히려 절반 가량이 줄어든 안동교구가 50돌을 맞았다. 교구 성직자와 신자들은 지난 26일 오후 2시 안동실내체육관에서 7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감사미사를 봉헌했다. 세례를 수많은 이들에게 주었지만 그들 대부분이 도시로 떠나버렸으니 감사함보다는 쓸쓸함이 맴돌법할듯한 교구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초대교구장 두봉 주교와 현 교구장 권혁주 주교를 24일 안동 안기산 숲으로 둘러싸인 안동교구청에서 만나자마자 숫자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프랑스인 두봉 주교는 작은 키와 90세라는 노구를 무색케할만큼 천의무봉의 꾸밈없는 발랄함으로 사랑의 아우라를 방사했다.  청년시절부터 자신을 멘토로 삼아 어엿하게 성장한 권혁주(64) 주교를 바라보는 눈에도 사랑과 신뢰가 가득했다.

 

두봉-.JPG» 안동교구 사목 표어대로 `기쁘고 떳떳하게 살자'면 손을 드는 두봉 주교 

 두봉 주교가 이른바 ‘잘 나가는’ 큰 교구가 아닌 안동교구에 자리잡은 것은 운명같은 것이다. 그는 잔다르크의 땅으로 유명한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소도시의 변두리에서 농사를 지어 채소를 팔아 생계를 꾸렸고, 형제 자매 5형제뿐 아니라 자기 부모가 맡아 돌본 사촌형제들까지 7형제가 복닦대며 함께 살았다. 그는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로 한국에 파견됐다. 파견 전 프랑스에서 군복무 때 가장 친하게 지내던 고아였던 전우가 한국에 파병돼 전사했다고 한다. 그는 한국 파견을 명 받았을 때 친구가 목숨을 바친 땅이자 너무도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어서 기뻤다고 한다. 

 그러나 대전에서 15년을 지낸 뒤 1969년 안동교구가 설립되면서 첫교구장으로 부임받을 때는 오고싶지않았다고 한다. 교황청 주도로 연 제2바티칸공의회에 따라 기존의 닫힌 교회에서 벗어나 이웃과 세상에 활짝 열린 교회를 할 꿈에 부풀었는데, 유교의 고장 안동은 옛날방식만을 고집해 좀체 열린 교회를 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이곳에 온 그는 유림들과 첫상봉에서부터 ‘공자님 말씀’을 외워가 언급하며, 자기부터 열린 모습을 보여주며 지역민들의 마음을 열었다.

 안동교구가 1973년 건립한 안동문화회관이야말로 열린 교회의 마중물이었다.  재정이 자립이 안돼 겨우 외국의 원조에 의해 살아가고 안동 내에 성당이 하나뿐인 허약한 교구 여건에 이제 그럴듯한 성당 하나 가져보자는 성직자와 신자들의 오랜 바람을 제치고, 두봉주교는 ‘가톨릭’이란 이름도 들어가지않은 문화회관을 건립했다. 당시로서는 안동에서 가장 높은 6층에, 최초로 엘리베이터까지 있는 이 건물은 예식장과 음악다방까지 갖춘 안동시민의 안식처가 되었다.

 

권혁주-.JPG» 현 안동교구장 권혁주 주교 

 무엇보다 두봉주교는 농촌사목의 대부였다. 1978년 안동가톨릭농민회가 창립됐고, 다음해엔 ‘오원춘 사건’으로 알려진 ‘씨감자 피해보상 농민운동’에서 고문 당한 농민편을 들었다가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추방명령을 받기도 했다. 한국 교구의 교구장은 한국인 주교가 맡아야 한다며 교구장 교체를 4번이나 교황청에 요구했던 그였지만, ‘괜한 말썽을 일으킨다’는 교황청의 사임 요구에 ‘그런 이유로 사임할 수 없다’고 버틴 강단을 내보이기도 했다.

 1990년 퇴임 뒤 후임자에게 부담을 주지않기 위해 경기도 고양 행주산성 부근 조립식가건물 공소에서 지내다가 2004년 권 주교의 간청으로 의성의 작은 공소에 머물며 70여평의 텃밭을 직접 가꾸고, 지금도 전국 곳곳에 피정 강연을 다니고 있다. 2012년 만해실천대상을 수상해 받은 상금 3천만원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까지 모두 안동교구에 기증할 정도로 두봉주교의 교구 사랑은 지극하다.

 권 주교는 “취임 후 사목표어로 정하고, 50돌을 맞아 다시 다짐하는 표어 ‘기쁘고 떳떳하게’는 늘 입에 달고 사는 두봉 주교님의 말씀에서 따온 것”이라고 했다. 권 주교는 “안동교구에서 가난하고 작았기에 가족처럼 서로 알고 함께 할 수 있었다”며 “부족한 가운데도 나누면 기쁘고 떳떳하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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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이란을 침공하지 못한다


손정목의 이슈분석

1. 미국, 이란과의 전쟁위기를 높이다

미국이 이란핵합의(포괄적 공동행동계획. JCPOA)를 일방적으로 탈퇴한지 1년여만에 이란을 겨냥한 제재와 군사조치를 강화하면서 전쟁위기가 급속히 고조되고 있다. 미국은 지난 4월 이란의 혁명수비대를 외국테러조직으로 지정하더니, 지난 6개월간 원유가격의 급격한 인상을 막기 위해 8개국에 허용했던 이란원유수입 예외조치도 완전 중단하였다. 이란의 원유수출을 완전히 봉쇄하겠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철강, 광물수출 마저 막겠다고 나섰다. 아예 이란을 고사시키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무력으로 담보하기 위해 미국은 USS 에이브러햄 링컨 항모전단과 B-52 폭격기 등을 걸프지역에 급파하여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다. 나아가 이라크 주재 필수 인원을 제외한 철수명령을 내리고, 1,500여명의 미군을 추가 파병하는 등 전쟁 위기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미국의 일방적 군사조치에 세계적 비난이 일자 미국은 오히려 이란이 자국의 군대와 군사외교시설 및 동맹을 공격할 것이라는 ‘구체적이고 신뢰할 만한 정보’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고, 이러한 조치가 이란의 공격위험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변하였다. 나아가 존 볼튼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이란에 대해 "미국과 동맹국의 이익을 공격하면 가차 없는 물리력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또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도 "제3의 군대, 민병대, 헤즈볼라가 공격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란 지도부에 그 책임을 직접 물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것은 확실히 침공 명분을 최대로 확장한 것이다. 이란 자체의 핵보유 시도만이 아니라 이란이 미군만이 아니라 동맹국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면 공격하겠다는 것이다. 또 이란과 우호적인 레바논의 헤즈블라나 시리아 정부군이 미국과 그 동맹을 공격하는 것도 이란에 대한 공격명분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전후 미국의 패권체제하에서 미국을 상대로 선제공격을 한 나라는 없다. 비록 지금 그 지위가 많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패권적 지위에 있는 미국을 상대로 선제공격을 할 나라는 지구상에 극히 드물다. 미국 역시 이를 알기에 동맹인 이스라엘이나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이란과 그 우호세력에 의한 공격까지도 침공의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쟁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이란, 헤즈블라, 시리아 정부는 과거 이스라엘이나 사우디아라비아의 음모와 공격행위에 대한 반격을 수시로 공언해 왔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미 하원의원이 "다른 사람이 먼저 주먹질하기를 바라면서 얼굴을 들이밀고 반격할 준비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판한 것은 타당하다.

실제로 지난 5일 볼튼 보좌관이 미군의 항모를 비롯한 대규모 무력 증강 조치 발표 이후 그 명분인 미국 동맹에 대한 공격 위험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였다. 지난 12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유조선 2척을 비롯 상선 4척이 피습당하여 파손되었고, 14일에는 사우디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의 석유 펌프장 두 곳이 미확인 드론의 공격을 받았다. 급기야 19일 이라크 미 대사관이 있는 그린존 지역에 로켓포탄마저 날아들자, 트럼프대통령 까지 나서 "이란이 싸우길 원한다면, 그것은 이란의 공식적 종말이 될 것"이라며 "다시는 미국을 협박하지 말라"고 최고 수위의 경고를 하였다. 이후에도 사우디 중부 탄도미사일 요격(20일), 사우디 남부 나즈란 공항 드론 공격(21일) 등의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였고, 이란군이 아랍권의 전통 범선인 다우선 2척에 미사일을 옮겨 싣는 위성사진이 공개되기도 하였다. 이 직후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직접 나서 최근 걸프 해역에서 일어난 일련의 공격의 배후가 모두 이란일 가능성이 있다고 공식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고,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 정권이 전쟁을 일으키고, 파괴와 혼돈을 퍼뜨리지 못하도록“하기 위해 30일 걸프협력회의(GCC)와 아랍연맹 긴급 정상회의 개최를 제안했다. 5월 들어 유례없이 연속적인 사건이 이어지자 마치 잘 짜 맞춘 것 같은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2. 미국-이스라엘의 공모와 B팀

뉴욕타임즈(NYT)는 지난 16일 이스라엘 정보국(모사드, Mossad)이 ‘이란과 그 대리세력이 이라크의 미국인을 타격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미국에 제공했다고 보도했다, 뉴스위크(Newsweek)도 이란이 범선(다우선)에 미사일을 옮겨 싣는 위성이미지는 미국이 자체로 확보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제공한 것이라고 폭로하였다.

캐나다의 진보적 온라인 매체 글로벌리서치(globalresearch)가 게재한 지난 22일 “이란의 위협신호는 조직적인 미-이스라엘의 속임수인가?”(Do Iranian ‘Threats’ Signal Organized U.S.-Israel Subterfuge?)라는 칼럼의 폭로는 더 구체적이다. 칼럼은 4월15일 워싱턴에서 존 볼튼 미 국가안보보좌관과 벤 샤벳(Ben Shabbat) 이스라엘 국가안보보좌관이 만났고, 이 자리에서 ‘걸프지역에서의 미국과 그 동맹에 대항하는 이란의 음모에 관한 시나리오’가 토의되고 통과되었다고 폭로하였다.(볼튼은 이 회담을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시인) 그리고 이 회담은 지난 2017년 12월12일 미-이스라엘이 맺은 ‘이란에 대항한 공동계획에 관한 비밀조약’(secret U.S.-Israeli agreement on a joint plan of action against Iran)에 의거한 것으로, 이 조약에 따라 양국은 4개의 공동워킹그룹을 설치하여 이란을 중심으로 시리아, 헤즈블라, 하마스 등에 대한 긴장고조 시나리오를 준비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칼럼은 모사드가 미국의 항모파견 등 무력증강을 포함한 시나리오의 중심적 아이디어를 제공하였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확실한 근거에 의해 시나리오를 작성한 것은 아니었다고 이스라엘 정보관리의 말을 인용 폭로하였다. 이것은 지금의 중동에서의 긴장고조가 미-이스라엘간 사전에 합의한 시나리오에 따른 것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과거에도 미-이스라엘은 이란에서의 색깔혁명을 지속적으로 추구하였다.(이란 색깔혁명 관련 사안은 필자의 “이란 ‘색깔혁명’ 시도, 더 높아진 중동의 긴장”<⌜민플러스⌟. 2018.1.10.>참조)

이와 관련 이란의 모하메드 자바드 자리프 외무장관은 이러한 상황 전개의 배후로 B팀을 지목했다. B팀이란 존 볼튼 미 국가안보보좌관과 벤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세자 모하메드 빈 살만, 아랍에미레이트 왕세자 자예드 알 나옌으로 구성된 반 이란 연합조직으로 그 목적은 이란의 정권교체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자리프 장관은 이를 위해 이 B팀이 이란에 경제적 테러를 가하고, 심지어 전쟁까지도 불사하려 한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과 전쟁을 원하지는 않지만 B팀에 의한 미끼에 걸려 전쟁에 휘말릴 수 있다고 우려하였다.

3. 미국은 이란을 침공하지 못한다

트럼프대통령은 지난 20일 폭스(fox)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이란과 전쟁이 아닌 경제적 ‘침공’을 추구한다고 밝혔다. 그는 “전쟁은 경제를 죽이고 가장 중요하게는 인민을 죽이기 때문에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 압박을 통한 이란과의 관계 재정립이지 직접적인 군사대결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지난 15일에도 패트릭 섀너핸 국방장관 대행에게 이란과 전쟁하길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실 미국은 이란을 침공하지 못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이란의 군사력이 시리아보다 월등히 강하고 사거리 2,000km에 달하는 중거리탄도미사일 ‘코람샤흐르’를 비롯 다종의 미사일을 보유하여 미 항모전단을 직접 타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리아전쟁에서 IS를 몰아낸 전투경험을 가진 강력한 지상전투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혁명수비대의 아미랄리 하지자데 공군 사령관은 지난 12일 "미 항공모함이 과거에는 우리에게 심각한 위협이었으나 지금은 하나의 타격목표"라고 말했다. 이미 이란은 지난 2016년 1월 미 항모 해리 트르먼함 머리위로 스텔스 드론을 보내 그 영상을 방송하여 미군을 경악하게 하였다. 이는 이란의 군사력이 미 해군 항모타격단의 방공감시망을 뚫고 들어갈 수 있음을 입증한 것일 뿐 아니라 드론이 보내주는 정확한 위치정보에 따라 이란의 미사일이 미 항모를 정확히 타격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과거 이라크, 리비아와 마찬가지로 이란에 대해서도 오랜 기간 제재를 가해 사실상 무장해제 상태를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란은 제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지대공 미사일 S-300을 비롯 북(조선), 중국으로부터 다량의 무기를 구입해 실전배치하는 등 전쟁대비를 확고히 하여 미국은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아프카니스탄, 이라크 등 무장력이 약한 나라를 상대로 확실히 승리가 담보된 전쟁을 하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장기전의 수렁에 빠져 아프카니스탄의 경우는 제2의 베트남전쟁이라는 치욕을 당하고 있는 처지다. 그 이후 미국은 직접적인 대규모 참전을 꺼리게 되었고 리비아나 시리아전쟁에서 보듯이 공군력이나 IS 등을 앞세워 뒤에서 지원하는 형태의 전쟁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 리비아에는 친미정권을 세우지 못했고, 시리아전쟁은 패배하여 미군철수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중동패권은 시리아전쟁 패배로 결정적으로 추락했다. 그런 미국이 전쟁준비가 잘 되어있는 이란을 직접 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이유로 이란의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는 미국과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미국과의 대결은 ‘군사적 충돌보다는 의지의 시험’이라고 밝혔다.

미국의 공세에 대한 이란의 대응은 중동 어느 나라보다 강경하다. 이란은 트럼프대통령이 수차례 대화할 것을 요구하고 전화번호까지 알려준다 했지만 미국의 태도 변화 없이 대화는 없다고 못 박고 있다. 이란은 미국의 이란 혁명수비대의 테러조직 지정에 맞대응해 미군 중부사령부를 테러조직으로 지정하고, 수출을 막으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겠다고 강력히 경고하였다. 호르무즈 해협은 이란 뿐 아니라 친미적인 걸프협력회의(GCC)국가들도 이용하는 석유 수출 길로 세계 석유 운송의 30%를 차지하는 전략적 지역이다. 여기를 이란이 봉쇄한다면 가히 세계경제에는 재앙이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미국이 가뜩이나 위기인 세계경제를 파국으로 몰고 가려 하지 않는 한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4. 이란, 북중러와 협력하여 자주적 발전 도모한다

지난 8일 이란은 미국의 군사조치에 대응해 이란핵합의의 일부 이행 중단을 선언하고, 핵합의 준수를 다짐하면서도 이행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유럽참가국(영국, 독일, 프랑스)들에게 핵합의 사항인 금융과 원유 수출을 60일내 정상화하지 않으면 “우라늄을 더 높은 농도로 농축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것은 60일내 핵합의 이행이 이뤄지지 않으면 이란도 핵합의를 파기할 것이라는 사실상의 최후통첩이다.

이로써 이란 전쟁위기는 향후 2달이 중요고비가 될 것으로 보인다. EU는 지난 1월말 이란핵합의를 유지한다는 방침에 따라 미국의 이란제재를 우회하여 이란과 거래하는 인스텍스(INSTEX·무역거래 지원 수단)라는 특수목적법인을 발족했지만 현재까지도 유럽기업들의 눈치 보기와 유럽 각 국의 이해차이로 이렇다 할 가동을 못하고 있다. 인스텍스는 유럽이 중심이 된 최초의 달러배제 무역결제시스템으로 제대로 가동된다면 세계 경제에 커다란 파급효과를 낼 것이다. 이란 역시 이에 대응하는 자국 특수 목적법인인 STFI(Special Trade and Finance Institute)를 발족하였다. 지난 10일 이란핵합의 유럽서명국인 영국, 독일, 프랑스는 갈수록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조건에서 이 시스템의 조속한 가동을 약속했다. 만약 이 시스템이 2달 내 정상가동하여 이란-유럽과의 교역이 정상화된다면 미국제재는 사실상 무용지물이 되고 미국의 전쟁위기 고조는 결정적으로 약화될 것이다.

북(조선)을 비롯 중국과 러시아의 이란과의 협력강화는 더 강력하다. 북-이란과의 관계는 이미 지난해 8월 “동맹관계를 더욱 확대할 것을 합의”했고, 지난 4월 자리프 외교장관이 이란의 NPT(핵확산금지조약)탈퇴를 거론하면서 조만간 북(조선)을 방문할 것이라고 밝혔듯이 오랜 기간 공고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과의 무역 전쟁이 더 격화되면서 미국에 의존하지 않는 자주적 발전을 보다 강력히 모색하게 되었다. 중국은 이란의 최대 원유 수입국으로서 미국의 중단요구에도 아랑곳 않고 원유수입을 계속하고, 일대일로 사업의 일환으로 이란-이라크-시리아를 잇는 철도와 도로건설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의 요구에 반하여 더욱 이란과 밀착해 나간다.

러시아 푸틴대통령도 독일, 프랑스 정상과 3자 대화를 통해 이란핵합의 유지를 합의하여 이란을 지원하고 있다. 시리아전쟁의 승리로 중동의 중심은 러시아와 이란 그리고 터키다.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위기감 속에 한편으론 전통적인 미국에 매달리고 다른 한편으론 러시아와도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러시아는 사방이 적인 이스라엘을 다독이고, 사우디아라비아와 협력을 강화하여 이들이 무모하게 이란과의 전쟁으로 나아가는 것을 저지하고 있다.

결국 미국의 이란을 상대로 한 전쟁위기 조성과 제재강화는 전쟁을 막고 새로운 세계질서를 내오려고 하는 북‧중‧러와의 협력과 유럽의 참여로 실패할 것이다. 그 기간 트럼프정부는 이란에 대한 제재, 압박을 계속할 것이다. 적어도 트럼프대통령이 내년 재선을 위해서는 유대계의 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갈수록 미국의 이란 적대시는 말로 끝나고 북중러를 비롯 인도, 터키, 유럽과의 협력으로 문제가 해결돼 나갈 것이다. 이란은 지리적으로 유라시아 중심으로서 새로운 평화, 협력의 다극화된 세계 질서 건설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손정목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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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국가의 강대성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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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9/05/28 08:29
  • 수정일
    2019/05/28 08:29
  •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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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국가의 강대성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박한균 기자 
기사입력: 2019/05/27 [16:53]  최종편집: ⓒ 자주시보
 
 

 

 

 

 

 

 

 

 

북 노동신문은 “국가의 강대함은 매 공민들의 심혼이 깃든 사업성과에 달려있다”고 강조했다.

 

북 노동신문은 27일 “오늘 우리 앞에는 융성 번영하는 천하제일강국, 인민의 낙원을 일떠세워야 할 중대한 과업이 나서고 있다”면서 이같이 보도했다.

 

신문은 “국가의 강대함은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나타난다”며 “사회의 단결과 국방력수준, 경제기술발전지표를 놓고도 말할 수 있으며 문화 도덕적 측면을 가지고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신문은 “국가의 강대성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며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도, 발전된 문화도 국가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공민들의 피타는 사색과 탐구, 헌신적인 노력을 바탕으로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자기의 운명과 행복을 국가와 뗄 수 없이 하나로 잇고 애국의 땀과 열정을 아낌없이 바쳐 고귀한 창조물을 마련해가는 참된 공민들이 있는 국가만이 강대한 나라로 위용떨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북은 2019년 1월 1일 새해 첫날 <우리의 국기> 노래를 북 주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양시키고 나라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해 널리 보급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람홍색 기발 창공높이 날릴 제 바라보면 높뛰는 심장 애국의 피로 끓어라. 거세찬 펄럭임에 조국의 숨결 어리고 목숨처럼 소중한 기폭에 인민의 운명 실었네. (후렴) 사랑하리라 빛나는 우리의 국기를 나붓겨다오 이 세상 다할 때까지.” <우리의 국기> 1절 가사. 

 

“노래가 대단히 좋다. 전체 인민의 감정이 담긴 훌륭한 노래 창작한 데 대하여 높이 평가하며 만족하게 생각한다. 널리 보급할 것. 2019.1.1.김정은”

  

 

또한 김정은 위원장은 “조선노동당의 영도를 충직하게 받들어나가는 것은 우리 국가제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근본담보입니다”라고 강조했다.

 

북은 언론매체를 통해 “오늘 우리 인민 앞에는 애국열, 투쟁열을 총폭발시켜 조국의 위대한 역사를 써나가야 할 성스러운 과업이 나서고 있다”며 “이 투쟁과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해나가자면 모든 당원들과 근로자들이 우리 국가가 제일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지니고 당의 영도를 충직하게 받들어나가야 한다”고 밝혔다.(노동신문 2019.1.29.)

 

이어 “국력이 강하고 끝없이 융성번영하며 인민들이 세상에 부럼 없는 행복한 생활을 마음껏 누리는 사회주의강국건설위업은 당의 영도에 의해서만 승리적으로 개척되고 전진하며 완성될 수 있다”며 “우리 공화국은 세기적인 낙후와 빈궁, 빈터와 재더미우에서 자주, 자립, 자위의 사회주의국가로 솟구쳐 오른 기적의 나라이다”고 강조했다. 

 

북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주민 전체가 일심단결해 나라의 발전을 꾀하고 있다.

 

특히 북은 주민들의 정신력, ‘애국심을 높여어려운 문제도 자력갱생의 힘으로 이겨내면서 사회주의강국건설에 모두 떨쳐나서고 있다.

 

박영자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평양을 방문한 인사들이 전하는 북한의 경제성장, 평양에 새로 건설된 고층아파트들, 400만대가 훌쩍 넘어선 무선통신 이용자수, 각종 위락시설의 발전, 그리고 평양 등 대도시의 백화점이나 대형 유통망에서 거래되는 북한산 제품 등을 통하여 북의 경제사회가 고도로 성장했다는 일부의 평가를 전했다.(주간한국 2019.3.25)

 

북에 대한 편견과 오해로 점철된 우리의 사고를 조금씩 깨부수는 시도가 필요하다. 

 

지금은 자유롭게 북을 오갈 수 없지만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일상적인 평화로운 시대가 다가오면 북의 사회를 더 깊이 알아갈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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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백화점 현지취재', 이걸 남한서 볼 순 없을까

[인터뷰] '통일TV' 개국 준비하는 진천규 대표

19.05.27 21:52l최종 업데이트 19.05.27 21:52l

 

 재미언론인 진천규 기자
▲  재미언론인 진천규 기자.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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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과 베트남 그리고 한국이 분단됐다고 한다. 이중 독일과 베트남은 이미 통일이 됐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분단 70년이 넘었는데도 38선이 한 차례 지독한 동족상잔의 비극 이후 '군사분계선'으로 바뀌었을 뿐, 여태 철조망은 걷히지 않고 있다.

나는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가장 큰 배경엔 동·서독 방송의 역할이 가장 컸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동·서독 국민들은 상호 방송을 통해 나라의 장래를 위해 분단 극복 의지를 키웠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평화통일과 겨레의 앞날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온 시민들의 분단극복 의지가 꼭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북녘 조국을 제대로 봐야 하고, 있는 그대로 그들의 실상을 봐야 하며, 남과 북이 손을 잡고 평화의 눈으로 상대를 바라봐야 평화통일의 그날을 앞당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도 민의를 대변한다는 정치권에서는 색깔론을 정쟁의 도구로 삼고 있다. 그뿐인가. 분단극복을 방해하는 세력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휘날리며 설치고 있다. 지난날 일부 정치인들은 분단 극복은커녕 이를 교묘히 그들의 정권 연장에 이용하기도 했다. 그들은 지금도 강대국에게 빌붙어 분단의 위기감을 조성시켜 정권을 탈취하려는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요즘 텔레비전을 켜면 별별 채널이 다 있다. 그런데 평화·통일을 위한 전문 채널이 하나 없다는 것은 분단국가로서 뭔가 한참 잘못된 것이 아닐까?

이런 가운데 남과 북의 간극을 좁히고 평화통일의 주춧돌을 놓고자 하는 진천규 통일TV 대표(전 <한겨레> 기자)를 지난 25일 광화문 인근에서 만났다. 

왜, 지금 '통일TV'인가
 
 평양시민들이 대성백화점 ‘즉석료리’ 코너에서 맥주잔을 들고 건배하고 있다(2019. 5. 5.).
▲  평양시민들이 대성백화점 ‘즉석료리’ 코너에서 맥주잔을 들고 건배하고 있다(2019. 5. 5.).
ⓒ 진천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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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규 대표. 그는 요새 무척 바쁘다. 최근에도 북녘을 자주 오가는 데다가 전국순회강연으로 남녘 곳곳을 다니고 있다. 그의 발걸음은 남과 북을 관통한다. 

진 대표와 나는 개인적인 인연이 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1972년 3월 1일 서울 오산중학교 입학식 날. 나는 그의 담임교사였다. 그때만 해도 그는 젖내가 나는 소년이었는데, 그새 초로의 신사가 됐다. 진 대표와의 인터뷰는 사제간의 대화 형식을 취했음을 미리 밝힌다. 

- 자네, 그동안 북녘을 몇 차례 다녀왔으며, 가장 최근 방북일정은 어떻게 되는가. 
"지난 5월 1일부터 15일까지 제13차 방북해 주로 북녘의 교육기관을 둘러봤습니다. 평양을 떠나 개성, 판문점 등지도 둘러 봤고요."

아마도 '통일TV'를 개국하게 되면 남녘의 시청자들에게 보여줄 화면을 찍어온 모양이었다. 

- 이 시점에 왜 '통일TV' 개국이 필요한가?
"지난해 1월 1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 신년사 이후, 70여 년의 분단 역사에 큰 변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때 평창 동계올림픽은 전 세계의 이목을 끌어모으며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세계인에게 알리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뒤 4.27 판문점 정상회담, 5월 북미정상회담, 9.19 평양정상회담으로 흐름이 이어지면서 남북간에 곧 장벽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더욱이 6.12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면서 그 큰 흐름은 급물살을 타는 듯 했지만, 2월 하노이 회담이 이른바 '노딜(No Deal)'로 끝나면서 오늘까지 소강상태로, 다소 지루한 공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도 북에 대한 실상은 지속적으로 왜곡되고 부정적인 틀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입니다. 북에 대한 무조건적인 왜곡의 틀을 깨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저는 언론인으로서 있는 그대로의 북녘 모습, 기자정신에 충실한, 객관적인 북녘의 모습을 보여주는 TV 채널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케이블 채널이 300개에 이르고 있습니다. 영화·드라마·다큐멘터리·스포츠·역사 등 다양한 장르의 채널은 물론이고, 미국·중국·일본 등 외국 드라마 등의 전문채널도 몇 개씩 있습니다. 음식·요리·바둑·낚시·장기 등 갖가지 취미 생활 채널, 심지어 강아지 전문채널도 두세 개 있습니다.

이러한 채널 중에, 지난 70여 년 분단국가로서, 그 분단의 반쪽인 북녘을 제대로 방송하는 채널이 단 한 개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라도 앞장서서 북쪽 전문 채널을 만들어야겠다는 심정으로 '통일TV' 개국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 언제부터 '통일TV' 개국 준비를 하셨는가?
"기본적인 생각은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었습니다. 2017년 10월, 재외동포 신분으로 2010년 5.24 조치 이후 대한민국 국적 언론인으로는 처음으로 방북 취재를 시작하면서, 북측 영상물 저작권 확보를 위한 준비를 했습니다.

이는 마치 선생님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한국전쟁 사진을 보고 전 한국인에게 알려야겠다는 그 정신과 같습니다. 선생님을 통해서 배운 겁니다. 그리하여 북측의 '저작권사무국'과 여러 차례 회의를 해 그들을 설득했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2018년 11월 남측 '통일TV'에 북측 영상저작물을 제공한다는 '합의계약서'를 체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통일TV 진천규 대표(오른쪽)가 북측 저작권사무국(왼쪽, 부국장 장철순)과 평양호텔 3층 면담장에서 '합의계약서'를 서로 교환하고 있다(2018. 11. 15.).
▲  통일TV 진천규 대표(오른쪽)가 북측 저작권사무국(왼쪽, 부국장 장철순)과 평양호텔 3층 면담장에서 "합의계약서"를 서로 교환하고 있다(2018. 11. 15.).
ⓒ 진천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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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TV' 개국 준비 진행과정과 앞으로 일정은? 
"그 '합의계약서'를 시작으로 본격 '통일TV' 개국을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희 '통일TV'에서는 각 전문 분야 직원 9명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세밀하게, 오는 8월 15일 광복절에 개국을 목표로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님, 이종찬 전 국정원장님, 권영길 전 의원님을 상임고문으로 모시고, 여러 전문 분야에서 고문·자문위원 그리고 해외자문위원 등 200여 분을 모셔서 꼼꼼하게 차질 없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달 말까지 '증자 운동'도 벌이고 있습니다. 이는 자금 확보 측면도 있지만, 더 많은 일반 국민들이 저희 '통일TV'에 참여해 외연을 넓히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 '통일TV' 증자 자본금은 얼마며, 최소 및 최대 청약금액은 얼마인가? 
"20억 원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최소 청약은 100주 20만 원으로, 한 분이 최대 1억 원을 넘지 않도록 결정했습니다. 어느 특정한 세력이나 특정한 분에게 쏠리는 현상을 막기 위함입니다."

- '통일TV' 주주에 대한 배려와 배당금 예상 지급시기는?
"'통일TV 주주님들에게는 북녘에 대한 여러 가지 일들을 가능한 최우선으로 알려드릴 계획입니다. 세부적인 방안은 세워놨지만, 지금 단계로서는 밝힐 수가 없다는 점을 양해바랍니다.

그리고 저희 '통일TV'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 점을 명심하고 있습니다. 대표를 맡고 있는 저로서는 상당히 신중할 수밖에 없는 예상이지만 최소한 1년 뒤부터는 이익을 발생시켜서 주주들에게 적절한 배당을 해드릴 계획입니다. 미리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릴 수는 없지만 안정적으로 '통일TV'를 유지할 수 있는 방안도 있습니다."

- '통일TV'에서도 상업광고를 할 예정인가?
"물론입니다. '통일TV'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사회에서 운영됩니다. 앞으로 북쪽 관련된 사업이나, 제품 등이 제재가 풀리고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때가 오면 그 수요는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가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때 '통일TV'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척 많고 크리라 봅니다."
  
"대한민국 현행법 준수하는 '통일TV'가 될 것" 
 
 만경대소년궁전 학생들이 공연을 마치고 객석을 향해 인사하고있다. 오케스트라 연주자도, 지휘자도 학생이었다(2019. 5. 9.).
▲  만경대소년궁전 학생들이 공연을 마치고 객석을 향해 인사하고있다. 오케스트라 연주자도, 지휘자도 학생이었다(2019. 5. 9.).
ⓒ 진천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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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TV'에서 주로 다룰 프로그램은?
"저희들이 북녘에서 직접 취재한 교양·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비롯해 남녀노소가 모두 재미있고 즐길 수 있는 예능성 정보, 평화통일 관련 전문가 강좌 및 대담 그리고 북녘 제작 영화·드라마와 기타 문화 영상물, 남북 스포츠 교류 관련 영상물 등 양쪽 국민들이 원하고, 서로 알고 싶어 하는 분야의 콘텐츠를 선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지금 '국가보안법'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점을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국가보안법 아래서 '통일TV'가 가능할까? 이런 질문도 합니다. '통일TV'라고 국가보안법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더욱 철저하게 현행법을 준수할 것입니다. 저희 '통일TV'를 지켜보는 눈이 얼마나 많겠습니다. 다양한 정치적 생각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기서 가장 확실한 것은 법을 준수하는 일입니다. 법 이상의 정치적 해석을 저희 '통일TV'는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예민한 국가보안법을 지키는 '통일TV'가 될 것입니다. 또한 그런 프로그램을 방영할 것입니다. 절대로 다른 쪽의 우려를 하지 않아도 될 방송을 할 계획입니다. 애정을 가지고 저희를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 앞으로 '통일TV' 평양사무소도 설치할 예정인가? 
"저희가 하고 싶다고 모두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물론 '통일TV' 평양사무소를 설치하는 것은 저희들의 바람입니다. 이 점은 좀 더 시간을 갖고 우리 정부와 북쪽 당국과 충분히 협의를 해서 진행하게 될 겁니다."
 
 평양 대성백화점  ‘즉석료리’ 코너에서 여성조리사가 휴일을 맞아 찾은 시민들에게 봉사하고 있다(2019. 5. 5.).
▲  평양 대성백화점 ‘즉석료리’ 코너에서 여성조리사가 휴일을 맞아 찾은 시민들에게 봉사하고 있다(2019. 5. 5.).
ⓒ 진천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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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호텔’ 2층 연회장에서 일본 오사카 지역 30여 명 ‘재일동포조국방문단’ 일행이 3박4일 동안 북녘 가족친지들과 상봉한 뒤 마지막 날 여흥을 즐기고 있다(2019. 5. 2.).
▲  ‘평양호텔’ 2층 연회장에서 일본 오사카 지역 30여 명 ‘재일동포조국방문단’ 일행이 3박4일 동안 북녘 가족친지들과 상봉한 뒤 마지막 날 여흥을 즐기고 있다(2019. 5. 2.).
ⓒ 진천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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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녘에서도 남의 '통일TV'와 같은 방송국이 개설되리라 보는가?
"그것은 북쪽 당국에서 알아서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단지 우리나라에서 '통일TV'를 세워서 방송하는 것이 평화 통일을 앞당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통일TV' 개국 준비의 애로사항 및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여러 가지 정치적인 상황이 잘 풀리지 않는 듯이 보여서 그런지 현재 저희 '통일TV' 증자 운동이 탄력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단지 약간의 소강상태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답답한 상황일 때 더 필요한 것이 '통일TV'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앞에도 말씀드렸지만, 정치적 판단의 우려를 저희 '통일TV'는 더욱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통일TV'가 될 것입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지지와 성원을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나는 대담 그 자리에서 '통일TV' 신주청약서에 서명했다. 그가 시작한 '통일TV'가 통일로 가는 험난한 여정의 지름길이 되길 기원하면서 가뿐한 걸음으로 원주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통일TV 청약 안내문
▲  통일TV 청약 안내문
ⓒ 통일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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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통일TV’ 청약관련 문의 전화 및 홈페이지 : 02-337-3991 / www. tongil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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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농단의 검은손’ 김앤장

["존경하는 재판장님" 사법농단, 법정의 기록 ⑤]‘사법농단의 검은손’ 김앤장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입력 : 2019.05.27 06:00 수정 : 2019.05.27 09:04

 

김앤장 법률사무소의 사법농단
윤병세 등 로펌 출신 인맥들 활용

일본 기업 승소 위해 ‘전방위 로비’

서울 종로구의 김앤장 법률사무소 로비. 김앤장은 ‘양승태 대법원’과 ‘박근혜 청와대’의 ‘재판 거래’에 관여한 의혹으로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기도 했다. 윤병세씨는 박근혜 정부의 초대 외교부 장관이 되기 전 김앤장 고문으로 4년간 재직했다.    연합뉴스

서울 종로구의 김앤장 법률사무소 로비. 김앤장은 ‘양승태 대법원’과 ‘박근혜 청와대’의 ‘재판 거래’에 관여한 의혹으로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기도 했다. 윤병세씨는 박근혜 정부의 초대 외교부 장관이 되기 전 김앤장 고문으로 4년간 재직했다. 연합뉴스

 

“이 사건에는 외교관계 측면에서 민감한 여러 가지 기밀사항이 포함돼 있습니다. 노출될 경우 국익에 미칠 영향에 대해 우려스럽습니다. 과거 (박근혜) 정부뿐만 아니라 현 (문재인) 정부도 앞으로 이웃 나라(일본)와 굉장히 민감한 협의를 해야 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는데 저희가 여기서 논의하는 내용이 연계될 수도 있습니다.” 

지난 14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66)이 재판을 비공개로 진행해달라고 요구했다. 윤 전 장관은 박근혜 정부 초대 외교부 장관으로 4년 넘게 재임한 ‘장수 장관’이었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둘러싸고 대법원과 청와대가 부적절한 거래를 했다는 시기도 이때였다. 재판은 ‘사법농단’이라는 위법행위,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인권침해를 다룬다. 하지만 윤 전 장관은 ‘외교관계’ ‘국익’을 그에 앞세웠다. 재판부는 재판을 공개로 진행했다. 그러나 윤 전 장관은 검사가 외교부 문건을 제시할 때마다 ‘비밀 자료’라며 공개해선 안된다고 막는가 하면, 답변도 어물쩍 넘어갔다. 검사가 질문할 때마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하곤 했다. 윤종섭 재판장이 “증인이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검사가 묻는 사항에 대해 사실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임을 명심하라”고 지적했다.

이날 윤 전 장관의 증언에서는 국내 1위 로펌인 김앤장 법률사무소의 로비가 드러났다. 김앤장은 법정 안에서만 활약하지 않았다. 김앤장은 전직 고위 관료들을 ‘고문’으로 영입하고, 그 고문들은 현직 고위 관료들과의 연줄을 이용해 내밀한 정보를 주고받았다. 일본 기업에 한국 정부 입장을 속속 전해주고, 일본 기업의 승소를 위해 대법원 판결에 영향을 미칠 계획도 세웠다. 김앤장은 사법농단 속 또 하나의 사법농단이었다. 

■ ‘징용 소송’에 외교·법조 전관 총동원…박근혜 외교부와 ‘상부상조’

외교부 관료 출신인 윤 전 장관 역시 장관이 되기 전인 2009년부터 4년간 김앤장 고문으로 일했다. 2012년 5월24일 대법원이 피해자들 손을 들어주는 내용으로 일제 강제징용 사건을 파기환송했을 때도 김앤장 소속이었다. 파기환송 직후 김앤장에서는 대책회의가 열렸다. 김영무 대표를 포함해 김용갑·조귀장 변호사 등이 모였다. 윤 전 장관도 참석했다. 윤 전 장관은 특별한 회의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미 그 시점에 1965년 이후 한국 정부의 입장과 입법부·법원의 조치 등 사실관계가 다 나와 있었기 때문에 제가 아마 설명을 뭔가 했다면 팩추얼한(사실에 기반을 둔) 설명을 했을 수 있습니다. 일본의 우려가 언론에서 많이 나왔기 때문에 그런 내용을 공유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윤 전 장관은 2013년 1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통일안보분과 위원으로 참여하면서 김앤장 고문직을 그만뒀다. 그해 2월에는 박근혜 정부의 첫 외교부 장관으로 지명됐다.

김앤장은 김앤장 출신 장관을 활용할 계획을 세운다. 검찰에 따르면 2013년 1월10일 김앤장 조귀장 변호사가 내부 변호사들에게 전송한 e메일에는 미쓰비시중공업 고문이 된 무토 마사토시 전 주한 일본대사가 방한 일정을 조율하면서 윤 전 장관과 현홍주 전 주미대사,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과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는 내용이 기재돼 있다. e메일에는 ‘일제 강제징용 사건은 일개 기업이 아니라 양국 정부가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는 문구도 있다. 그 직후인 1월18일 김앤장의 한 변호사가 한상호 변호사에게 보낸 e메일을 보면 “미쓰비시중공업 측에서 ‘윤(외교통상부 차기 장관)’에게 직접 연락을 드린 모양”이라며 김앤장이 윤 전 장관과 무토 마사토시 전 대사의 오찬 일정을 맞춘 내용도 나온다. 

윤 전 장관은 장관 취임 후인 2013년 3월 김앤장 변호사들을 외교부에 초대했다. 김영무 대표와 현홍주 전 대사, 한상호 변호사 등이다. 현 전 대사는 윤 전 장관의 경기고, 서울대 법대 선배이고 외교부에서 함께 근무했다. 윤 전 장관을 김앤장에 스카우트한 사람이 현 전 대사이고 김앤장에서도 한팀으로 일했다. 한상호 변호사도 윤 전 장관의 경기고 선배다. 외교부 관료로 있을 때 윤 전 장관과 근무 인연이 있는 유명환 전 장관은 김앤장 고문으로 옮긴 뒤 현 전 대사와 함께 윤 전 장관을 수차례 만난다. 윤 전 장관은 이 같은 만남들이 모두 인사치레거나 친목도모 목적이었고 강제징용 사건과는 무관하다고 했다. 그러나 외교와 정치와 재판에 얽힌 학교, 직장 선후배가 ‘친목’을 도모하는 순간, ‘공정함’의 외관은 무너진다. 

김앤장 고문 출신 윤 전 장관 
취임 후 김앤장 변호사들 초청
그해 11월 외교부 사무관 일지엔 
“판결 나오면 끝이다, 작살난다
청와대·관계부처 끌어내야”
 

그해 11월 외교부 정모 사무관 업무일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판결 나오면 끝이다, 외교부는 작살난다, 판결 나오고 방안 찾을 것이냐, 청와대·관계부처 끌어내야, 범정부적 입장 마련.” 정 사무관은 윤 전 장관이 격하게 말한 내용을 받아 적었다고 했다. 윤 전 장관은 “대법원 판결의 번복을 의도한 게 아니라 어떠한 판결이 나와도 좋은데 다만 그 판결에 국내적인 측면만 있는 게 아니라 한·일관계 등 국제법적 측면이 있기 때문에 (대법원이) 충분히 고려해서 판결해주면 외교부가 대응하는 데 도움이 되고 우리 국익에도 유리하다는 입장이었다”고 설명했다.

■ “외교부 장관이 패소 전폭 협조” 

김앤장 분위기는 어땠을까. 한상호 변호사가 2015년 1월 신일철주금 관계자를 만나기 위해 작성했다는 문건은 상징적이다. 한국 정부에 대한 로비 현황을 김앤장이 일본 기업 측에 성과로 보고하는 내용이다. 

2년 뒤 김앤장 변호사 문건에선 
“외교부 최고책임자 접촉, 공감
특명 내려 패소에 전폭 협조 지시”
 

“문건을 보면 외교부 최고책임자인 증인(윤 전 장관)을 김앤장이 여러 차례 접촉해서 이야기했고, 증인이 공감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또 이런 문장도 있습니다. 외교부의 최고책임자는 담당 국장에게 ‘특명’을 내려서 패소에 전폭적으로 협조하도록 지시하였음.”(검사)

“저는 국익을 다루는 외교부가 이런 문제에 대해 (외부와) 정보를 공유하는 것에 대해 (자제해야 한다는) 분명한 철학을 항상 갖고 있었습니다. 문건들은 과장돼 있는 것이고, 유명환 전 장관이 사건 이야기를 하길래 담당 국장을 만나보라고 넘겼을 뿐입니다.”(윤 전 장관)

김앤장 최건호 변호사가 작성한 문건에는 ‘외교부 동향, 2012년 대법원 판결 잘못됐다는 공감대 있음, 참고인 의견서 제도 알고 있음, 대법원 요청 있어야 한다는 입장, 참고인 의견서 제출 이후 신속히 판결 나왔으면 좋겠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유 전 장관은 “윤 전 장관에게 들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윤 전 장관은 “제가 알려준 내용이라기보다는 외교부의 여러 인사들을 통해서 파악한 것 같다”며 “유 전 장관과 현 전 대사가 상세한 내용을 갖고 물어오면 선문답하듯이 말한 적은 있다”고 부인했다. 윤 전 장관이 흘려 이야기한 것이 김앤장에는 중요 정보가 됐고, 이 정보는 일본 기업으로까지 흘러갔다. 

2015년 12월15일 윤 전 장관이 현 전 대사·유 전 장관과 식사를 하며 나눈 대화 내용도 문건에 남았다. 윤 전 장관은 ‘그동안 진전 있었다, 대법과 협의, 청와대 VIP 보고사항, 한·일 정상회담 후 일정 바빠, 조만간 타이밍 검토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나온다. 김앤장 측 답변으로는 ‘위안부 문제 연결 적절치 않다, 일 아베 총리 생각 바뀌지 않아 실기할 수 있다, 한·일관계 중대 영향 미치는 사항,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돼 있다. 대법원에 외교부의 의견서 제출과 관련해 논의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윤 전 장관은 이 자리 발언도 의례적이었다고 했다. 외교부와 김앤장 사이에 정보는 수시로 오갔고, 결과적으로 외교부는 김앤장이 원한 대로 강제징용 사건 관련 의견서를 대법원에 제출했다. 2012년 대법원 판결에 문제가 있다는 데는 청와대와 법원행정처도 모두 입장이 같았다.

윤 전 장관도 위안부 합의 발표 전 
언론 기고 청탁 등 김앤장 활용

윤 전 장관 역시 필요할 땐 김앤장을 활용했다. 검찰에 따르면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 발표 전날인 2015년 12월27일 윤 전 장관은 유 전 장관과 또 만났다. 윤 전 장관은 검찰에서 “다음날 한·일 위안부 합의 발표를 앞두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여론 부담이 만만치 않다고 생각해서 유 전 장관에게 (위안부 합의에 대한 이해를 돕는) 언론 기고를 부탁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진술했다. 그렇게 외교부와 김앤장은 상부상조했다. 

■ “기억 안 난다”는 윤병세 

2013년 10~11월 주철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윤 전 장관에게 ‘친전’을 보냈다. “10.29. 대법원 임종헌 기획조정실장이 내방하여 주유엔대표부에 판사를 파견하기를 희망한다며 협조를 요청해왔습니다. 대법원 측에서 작성한 관련 자료를 첨부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문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 계기에 일본관계 현안도 협의 및 참고자료를 전한 바 있습니다. 외교안보수석 주철기.”

일본 기업 대변한 변호사들 
대부분 판사 출신, 김앤장 경력
최근까지도 판사들 김앤장으로
 

일제 강제징용 사건에 외교부 입장을 반영해주는 대신 법관 해외파견에 협조를 받으려고 한 것 아니냐는 검사 질문에 윤 전 장관은 친전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청와대에서 장관에게 친전으로 내려보내서 무게 있게 다가왔다”는 김규현 전 외교부 1차관이나, 윤 전 장관이 강제징용 사건에 관심이 많아 회의에도 직접 참석했다는 외교부 직원들 증언과 상반된다.

윤 전 장관은 8시간의 증언을 마치고 난 뒤에 또 한·일관계를 걱정했다.

“현재 한·일 간에 외교적으로 전례 없이 심각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고, 국제사회가 특히 일본 정부가 (사법농단 사건을) 면밀히 모니터링하기 때문에 국익과 관련해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법정에서의 성실한 증언에 추가해서 역사 앞에 증언한다는 심정으로 이렇게 섰습니다.” 윤 전 장관에겐 청와대·외교부·김앤장·대법원 선후배들의 ‘로비’도 ‘역사’가 될까.

강제징용 소송에서 일본 기업 측 일을 도맡은 김앤장 변호사들 대부분은 판사 출신이다. 최근까지도 법원행정처에서 일했던 판사 상당수가 김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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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5270600025&code=940301#csidxd70e81277f250d587b04d2ed563c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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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민의 청년전태일들] 구의역 3주기, 김군이 남기고 간 과제

김종민 전 청년전태일 대표
발행 2019-05-27 09:58:51
수정 2019-05-27 09:58:51
이 기사는 번 공유됐습니다
 

구의역 3주기 추모문화제가 5월25일 2시에 구의역 앞에서 열렸다. 400명의 시민들이 모인 자리에 산재로 사망한 청년노동자의 가족들이 함께했다. 특성화고 졸업생이자 CJ에서 일하다가 죽은 故김동준의 어머니, 故이한빛 PD의 아버지, 제주현장실습생 故이민호의 아버지와 어머니,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가 산재를 당한 한혜경님과 어머니, 그리고 청년 건설노동자 김태규의 누나가 함께했다. 필자는 추모제 사회를 보며 가족들을 한 분한 분 소개해 드렸다. 가족들이 일어나서 추모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할 때마다 참가자들이 눈물을 흘렸다.

많은 사람들이 청년노동자 산재사망이 일어날 때마다 죽음에 슬퍼하고 추모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반복되는 청년노동자들의 사망 소식을 보면서 2016년 5월28일 이후 3년이 지난 지금 과연 무엇이 바뀌었을까 의문이 든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참사가 일어난 지 3년이 지난 지금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지 짚어보고자 한다.

25일 오후 서울 구의역 앞에서 '구의역 참사 3주기 추모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25일 오후 서울 구의역 앞에서 '구의역 참사 3주기 추모문화제'가 열리고 있다.ⓒ뉴시스

김군 동료들은 정규직이 됐지만
여전히 또 다른 외주화에 시달리고 있는 공공부문 노동자들

필자는 구의역 김군이 한국사회에 남기고 간 과제를 3가지로 정리한다. 첫 번째는 청년비정규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직고용) 문제이다. 두 번째는 특성화고 졸업생 노동자들의 현장실습 및 노동환경에 대한 문제이다. 세 번째는 위험의 외주화와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이다.

구의역 김군은 서울시의 대표 공공기관인 서울메트로의 하청업체 은성PSD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구의역 김군이 사망한 뒤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는 김군의 동료들을 무기계약직인 안전업무직을 거쳐 정규직으로 직고용 했다. 여전히 비정규직 출신들의 경력을 인정해주지 않는 차별은 존재하지만, 더 이상 하청 비정규직 신분은 아니다. 지하철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화는 서울 지하철뿐만 아니라 전국의 지하철에서 공통적으로 변한 부분이다.

하청비정규직 노동자가 본사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은 고용의 안정성과 노동자의 안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외주화는 하나의 현장에서 노동자가 하나의 운영시스템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외주화된 회사 숫자만큼 여러 개의 운영시스템으로 움직이게 된다. 하청업체 직원들은 정보에서 소외되는 것이다. 직고용을 해서 하나의 시스템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해야 안전을 지킬 수 있다. 더불어 직고용을 해야 노동자들 간의 동료의식이 생길 수 있다. 구의역 김군 사고 이후 장례식장에서 같은 하청업체 직원을 제외하고, 지하철 정규직 노동자들의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이는 하나의 현장이지만 회사가 달랐기 때문에 동료의식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은 당선이 된 직후 인천공사를 찾아갔다. 거기에서 문 대통령은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이야기했다. 문 대통령의 발언 이후 공공기관과 민간에서 모두 경쟁을 하듯이 정규직화를 선언했다. 대통령의 발언은 IMF이후 20년간 지속된 ‘민영화와 외주화는 끝났다’는 상징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2년이 지난 지금 공공부문에서 정부가 말한 정규직은 대부분 또 하나의 외주, 자회사로 되고 있다. 자회사는 노동자들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움직이게 하지 못한다는 지점에서 안전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방식이다.

전국특성화고등학교졸업생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특성화고 졸업생 노동조합 결성선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조합원들이 '구의역·제주·이마트 억울한 죽음 끝내자'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전국특성화고등학교졸업생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특성화고 졸업생 노동조합 결성선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조합원들이 '구의역·제주·이마트 억울한 죽음 끝내자'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김슬찬 인턴기자

차별 없고 안전한 사회 만들려는 특성화고 졸업생들

구의역 김군은 특성화고 졸업생 출신 노동자였다. 은성PSD가 저임금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2014년 하반기 특성화고 학생들을 대거 고용할 때, 친구들과 함께 현장실습생으로 스크린도어 수리 업무를 시작했다.

‘구의역 김군’의 후배들은 김군 사망 직후 구의역스크린도어 9-4승강장 앞 포스트잇에 “선배의 죽음의 남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그 김군이 후배들이 2017년 7월 구의역에 모여 특성화고등학생권리연합회를 창립하면서 ‘제2의 김군’이 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다음 해인 2018년 5월에는 특성화고졸업생노동조합이 설립되면서 한국사회에서 한 번도 주목받지 못했던 집단인 특성화고 출신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017년 11월 현장실습생 故이민호의 죽음 진실을 밝히는 과정에서 특성화고 현장실습 문제가 한국사회에 많이 알려졌다. 제주라바를 만드는 생수업체 제이크레이션은 값싼 노동력을 얻고자 2017년 8월 물이 많이 팔리는 여름 성수기에 현장실습생을 대거 고용했다. 하루빨리 돈을 벌고 싶었던 현장실습생 故이민호는 안전설비는 뒤로한 채 값싼 노동력을 얻고자 했던 사장의 욕심에 삶을 마감했다. 이 사건이 사회에 알려지자 정부는 현장실습 폐지를 들고 나오면서, 특성화고 졸업생들의 노동안전 문제에 대해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당사자들이 변화의 주체로 나서면서 한국사회에서 특성화고 졸업생들의 노동안전 문제, 현장에서 고졸출신 노동자들의 차별을 당연한 것이 아니라 바꿔야 할 과제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많은 회사에서 고졸 출신들의 승진차별을 당연하다고 여긴다. 이를 명문화한 공공기관도 있다. 그러나 특성화고 졸업생들은 학력이 아닌 실력으로 평가받고 싶다고 창립선언문에 이야기했다. 2019년 4월 건설현장에서 사망한 故김태규와 같은 20대의 특성화고 출신 노동자들의 노동안전 문제, 학력으로 인한 차별을 그만 받고 싶다는 특성화고 출신 노동자의 외침에 대해 이제는 한국사회가 무엇이든 화답을 해야 할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청년 비정규직 故 김용균 시민대책위원회’와 유족은 서울 광화문 분향소에서 '국회 산안법 개정에 대한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원회 입장'을 발표했다.
‘청년 비정규직 故 김용균 시민대책위원회’와 유족은 서울 광화문 분향소에서 '국회 산안법 개정에 대한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원회 입장'을 발표했다.ⓒ시민대책위 제공

줄어들지 않는 산재 사망사고

외주화가 노동자를 죽이는 근본적 원인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인식한 사건이 ‘구의역 김군’ 사고였다. 기업이 노동안전 비용과 산업재해 이후의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서 안전업무를 외주화 시킨 결과가 김군의 죽음이었다. 산재사망 90%가 외주화된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이다. 노동자들이 ‘구의역 김군’ 이후 지속적으로 안전업무 위험의 외주화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산재사망사고가 줄어들지 않았다.

2018년 11월 서부발전 하청업체 한국발전기술 노동자인 ‘김용균’이 사망했다. 김용균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과 노동자들의 싸움, 시민사회의 연대로 28년 만에 산업안전보건법, 이른바 ‘김용균법’이 통과됐다. ‘김용균법’은 산업안전에 있어서 원청의 책임을 강화하고, 그동안 법으로 보호받지 못한 특수고용노동자, 라이더 노동자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시행령에 있어서 정부가 후퇴한 안을 들고 나와서 논란이 있지만 한국사회의 노동안전에서 진일보한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

문재인 정부가 2017년 집권 이후 2020년까지 산재사망자를 절반으로 줄인다는 목표아래 여러 가지를 추진했지만, 고용노동부는 2018년 2142명이 산업재해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2017년보다 산재사망으로 줄어든 인원이 없었다. 김용균법 통과와 더불어, 정부가 김용균 사망사고 이후 내린 공공기관에서 2인1조 지침 등이 산재사망사고에 영향을 미치길 바란다. 정부는 우선 입법취지보다 후퇴한 산안법 시행령 개정부터 해야 할 것이다.

구의역 김군이 이후 한국사회는 많은 것이 변했고, 또 여러 과제들이 남아있다. 김군의 죽음을 잊지 않고, 슬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져야 한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3주기인 지금이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한국사회에서 아침에 인사하고 저녁에 집에서 가족을 보지 못하는 일이 더 이상 없길 바래본다.

김종민 전 청년전태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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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행진에 극우 지지자 난입 ‘아찔했던 순간’

언제까지 극우 지지자의 폭력을 묵과할 것인가?
 
임병도 | 2019-05-27 09:10:0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취재를 위해 찾은 5월 25일 토요일 광화문광장은 찢어질 듯한 스피커 소리에 귀가 아팠고, 옆 사람과의 대화조차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이날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는 자유한국당의 장외집회가 열리고, 광화문 중앙광장(세종대왕상)에서는 4월 16일 약속국민연대, 4.16가족협의회 공동주최로 ‘세월호 참사 진실은폐, 민주주의 훼손, 자유한국당 적폐세력 심판’을 촉구하는 대규모 범국민촛불문화제가 개최됐습니다.

자유한국당은 촛불문화제를 의식한 듯 빠른 템포의 가요 등을 연신 틀어댔고, 크레인에 매달린 대형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굉음 때문에 객석 뒤편에서는 촛불문화제 무대에서 발언하는 목소리나 4.16합창단의 공연을 거의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공간에 두 개 집회가 열리는 모습을 보면서, 충돌(?) 보다는 극우 지자자들의 폭언과 폭력이 걱정됐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촛불문화제 도중 극우 지지자들의 시비는 계속됐고, 폭력 사태도 벌어졌습니다.

세월호 유가족의 애절한 마음을 조롱하는 피켓

촛불문화제 무대에서는 세월호 진상규명에 관한 영상과 세월호 유가족들의 애절한 마음이 담긴 발언이 이어졌습니다. 그러자 객석 뒤편을 맴돌던 극우 지지자는 급조한 ‘세월호 시체팔이’라고 적은 피켓을 들고 조롱하듯 걸어 다녔습니다.

세월호 유가족과 촛불문화제 참가자가 통로를 지나가자 극우 지지자 여성 한 명은 그들을 향해 폭언을 했고, 황급히 피하는 그들을 쫓아가며 주먹을 휘두르기도 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을 향한 폭언과 폭력은 이날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광화문광장에서는 너무나 흔히 볼 수 있었던 모습입니다.

제발 부탁드린다.
우리 유가족 엄마들과 서명지기 그리고 피켓팅 하는 분들을 괴롭히지 말아 달라.
365일 세월호 진상규명에 매달리는 유가족과 416연대 활동가들 그리고 우리 유가족 옆에서 봉사활동 하시는 분들은 괴롭히지 말아달라.

당신들이 괴롭힐 만큼 그분들이 잘못한 것 없다.
그분들 모두 내 가족이며 내 형제이다.

당신들이 두른 태극기의 숨은 뜻은 알고 있는가?
당신들이 내 뱉는 독설 속의 시체팔이가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말인가?
당신들이 우상시하는 박근혜가 우리 국민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는가?

경찰은 불법적인 폭력을 단 한건도 용납하지 마라. 단 한번이라도 우리 유가족 엄마들이나 활동가들이 불법적인 폭력에 당한다면 경찰들이 전부 책임져야 할것이다. 
나 같이 못난 위원장 믿고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 아이들 억울함을 알리려고 나오신 분들이다. 
제발 우리를 보호하라. 
저들을 보호하지 말고. (장훈 4.16연대 공동대표/준형이 아빠)

장훈 4.16연대 공동대표는 전날 페이스북에 ‘유가족과 활동가들, 봉사자들을 괴롭히지 말아 달라’며 경찰에게 ‘우리를 보호해달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태극기와 극우라는 완장이 있다고 해도 인간을 조롱하고 멸시하며 폭력을 휘두르는 행위는 법적으로 처벌받아야 마땅한 증오 범죄입니다. 이날 현장에서 목격한 모습 만으로도 경찰의 수사와 보호가 시급해 보였습니다.

촛불행진에 극우 지지자 난입 ‘아찔한 순간’

촛불문화제가 끝난 뒤 유가족과 참가자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를 행진했습니다. 행진이 시작되고 불과 몇 분 뒤 다급한 목소리로 ‘경찰’을 애타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극우 지지자 남성 한 명이 촛불행진을 향해 난입했고, 다행히 참가자들과 경찰의 제지로 안쪽까지는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이날 촛불행진에는 주말을 맞아 부모의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유모차를 타고 온 아기들도 있었습니다. 만약 촛불행진 안쪽까지 들어왔다면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촛불행진 바깥쪽 차선은 교통이 통제되지 않았기에 극우 지지자로 아수라장이 됐다면 더 큰 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언제까지 극우 지지자의 폭력을 묵과할 것인가?

집회 현장에 나가면 극우 지지자들의 폭언과 폭력을 매번 목격합니다. 이들은 과격한 행동과 충돌을 연출하기 위해 주변을 맴돌며 고의적으로 시비를 겁니다. 특히 생방송을 하는 극우 유튜버들이 많아지면서 클릭이나 후원을 위해 자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극우 지지자들은 세월호 유가족이나 진보 집회 참가자들과 싸우는 것을 자신의 애국을 증명하는 길이자 훈장처럼 여깁니다. 마치 서북청년단의 ‘빨갱이 처단’과도 같은 모습으로 광기마저 느낍니다.

문제는 경찰이 집회 도중 벌어지는 극우 지지자의 폭력과 폭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이날 집회 도중 폭언과 폭력을 휘둘렀던 극우 남성은 경찰에게 체포되지도 않은 탓에 또다시 촛불행진에 뛰어들 수 있었습니다. 이 남성이 큰 사고를 유발할 수도 있었음에도 경찰은 강력하게 제지하지 않았고, 촛불행진을 향한 조롱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날 촬영한 영상을 보면 극우 지지자 남성이 자유한국당 해체 손피켓을 든 여성의 눈을 찌르려고 했고, 여성의 얼굴에는 위협을 느낀 표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단호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기에 집회 현장에서 극우 지지자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고 폭언과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극우 지지자들의 만행을 계속 봐야 할까요?

유튜브에서 바로보기: 촛불행진에 극우 지지자 난입 ‘아찔했던 순간’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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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연 판도라, 인류의 희망? 종(種)의 재앙?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유전자 변형 인간의 탄생
 
2018년 11월 홍콩에서 열린 제2회 국제인류유전자편집학술회의에서 허젠쿠이(贺建奎) 중국 남방과학기술대학 교수는 "유전자를 편집한 쌍둥이가 태어났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불임치료를 받고 있는 7쌍의 부부로부터 배아를 채취, 유전자가위(CRISPR)를 사용하여 유전자 교정을 했다. 그리고 한 쌍의 부부로부터 에이즈 바이러스(HIV)에 면역력을 가진 룰루(Lulu)와 나나(Nana)란 이름의 쌍둥이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그동안 유전자 변형 아기의 탄생은 시간이 문제였지 이미 예견된 사건이었다. 과학자들이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실험'을 허젠쿠이(贺建奎)가 실행에 옮겼을 뿐이다. 중국은 이미 2015년 유전자 가위를 활용한 인간 배아 실험을 가장 먼저 허용하였다. 허젠쿠이가 무모한 '일탈'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중국 당국의 태도와 관련이 깊다.

중국은 2003년 12월 24일 과기부(科技部)와 위생부(卫生部)가 공동 발표한 <인간배아줄기세포 연구윤리 지도원칙(人胚胎干细胞研究论理指导原则)>을 통하여 유전자 편집기술을 통제하여 오고 있었다. 그러나 허젠쿠이는 엄격히 금지된 출산 목적의 인간 유전자 편집을 과감히 시도했다.  

크리스퍼(CRISPR), 판도라 상자를 여는 열쇠가 되다. 

오늘날 크리스퍼(CRISPR) 유전자 가위는 생명 현상의 신비를 밝히는 아주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유전자 가위는 '판도라 상자(Pandora Box)'를 여는 열쇠가 됐다. 금단의 상자를 열어 인류에게 죽음과 질병을 안겨준 판도라, 그러나 그리스 신화의 원전을 찾아가면 그녀 자신도 원래 인류에 대한 재앙으로 만들어진 인조인간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미 보편화된 'GMO 곡물'의 경우처럼 그 위험성에 대한 아무런 검증도 없이 유전자 가위의 사용이 보편화된다면 인류가 창조한 '신인류'의 탄생으로 '현생인류'는 지구 역사 속으로 사라질 지도 모른다. 찰스 다윈이 '진화론(evolutinary theory)'에서 예언한 돌연변이와 적자(適者)생존을 통한 종의 교체가 이루어지는 것을 뛰어넘어, 인류 스스로 새로운 종을 창조하고 멸망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자연임신이 아닌 인공수정 만으로만 아이를 출산하도록 통제하는 인류의 미래를 다룬 영화 '가타카(Gattaca)'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알파고(AlpaGo)가 인공지능에 대한 우려를 가져왔듯이, 유전자 조작기술 역시 유전자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사회에 대한 우려가 현실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호기심과 편리를 위하여 만들어진 기술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대한 인간의 새로운 윤리관이 중요해졌다. 노화를 되돌리고, 신체를 자유롭게 교체하고, 태어날 아기를 마음대로 선별하거나 DNA를 조작, 편집하는 것이 인류를 더욱 행복하게 할까? 아니면 인간의 신체적 능력이나 조건조차도 경제력의 차이가 결정하는 세상이 될 것인가?

나아가 가까운 장래에는 유전자 분석과 줄기세포 치료 등에 부의 양극화가 심각해질 가능성이 있다. 부유한 계층은 유전자 편집과 줄기세포 치료가 일반화되고 빈곤층은 아예 혜택을 못 누리거나 불법의 시술에 의존하게 되어 인류의 극심한 계층 분화가 일어날 수도 있다.

미래의 생명공학은 인류에게 질병 치료, 수명연장, 식량, 에너지, 환경 등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장밋빛 전망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같이 드리우고 있다. 새로운 윤리관에 바탕을 둔 정비된 법률과 제도 없이는 '판도라 상자(Pandora Box)'안에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까지도 아무 쓸모없게 된다.  

인간 유전자 편집 기술의 경우, 현재의 과학기술의 수준에서는 그 이득보다는 위험성이 훨씬 더 크다. 현재 하나의 유전자를 조작했을 때 또 다른 어떠한 문제가 발생할 지에 대한 충분한 지식마저도 없다. 특히 인간 배아의 유전자 조작은 후손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재차의 검증을 통한 접근이 필요하다. 

소 잃은 뒤에라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 

유전자편집은 지금까지 공상과학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환상적인 이야기였다. 그러나 지금 영화 속의 현실이 실제로 우리 눈앞에 실현되고 있다. 인류 전체가 짊어져야 할 위기감과 윤리적 과제를 놓고 전 지구적인 합의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는 시점이다.

허젠쿠이(贺建奎) 사건 이후에 세계 과학계는 물론 중국 정부도 유전자 과학기술의 인간 적용에 대하여 그 위험성과 사회적 합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2019년 2월 26일 중국 국가위생건강위원회(国家卫生健康委员会)가 발표한 <생물의학신기술임상응용관리조례(生物医学新技术临床应用管理条例, 의견청구안)>는 이러한 우려에서 등장한 국무원 법령으로 앞으로 중국에서 유전자 가위를 통한 연구에 학술심사와 윤리심사를 대폭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본 조례의 <의견청구안>에서는 고위험생물의학기술에 DNA편집기술, 생물복제기술, 보조생식기술 등을 포함시키고 있다. 그리고 고위험생물의학기술의 임상실험 시에 각 단계마다 엄격한 심사를 거친 후 등록을 하도록 강제하는 규정이 포함되어 있다.

이어 2019년 3월 14일 7개국의 과학자와 윤리학자 18명은 국제 공동의 규범이 정립되고 안전성이 입중되기 전까지는 최소 5년간 유전자 편집 인간 배아의 착상을 전면 중단하는 한편 인간 유전자 편집을 관리 감독할 국제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공동성명을 과학저널 <네이처>( Nature)'에 발표하였다.  

생명과학을 통제 규율하는 법제도는 연구기술 본연의 도전성, 연구윤리, 사회질서를 모두 고려하는 균형 감각을 이루는 것이 필요하고 이는 인류의 영원한 숙제로 논의의 핵심이다. 허젠쿠이(贺建奎)의 무모한 실험이 있기 전에 각국이 실질적인 법제도를 만들어 규제하였더라면 하는 후회는 있지만 지금이라도 무너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

우리나라는 2005년 '황우석 사태'를 계기로 생명윤리에 대한 규제가 강화된 후 생명과학기술에 대한 체계적 발전의 대안을 아직까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순수 연구 목적의 인간배아 유전자 편집마저도 금지하고 있다. 유전자 편집에 대한 실질적인 법제도 확립과 함께 생명공학의 발전을 위하여 금지한다고 규정하지 않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 허용하는 네거티브(negative) 방식의 규제 개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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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의 실패원인, 역사는 알고 있다

[개벽예감 349] 백악관의 실패원인, 역사는 알고 있다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9/05/27 [08:25]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백악관이 미사일협상에 매달린 이유

2. 즉석에서 제시된 파격적인 미사일해법

3. 조선의 우라늄농축문제 물고 늘어진 미국

4. 핵무기를 더 많이 만드는 조선

5. 완전히 파탄된 미국의 공중정찰작전

 

 

1. 백악관이 미사일협상에 매달린 이유

 

가을정취가 짙어가던 2000년 10월 24일 평양고려호텔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가운데, 미국 국무장관으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조선을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진행한 기자회견이었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하였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클린턴 대통령의 친서를 전하고 3시간 동안 회담하였으며, 조명록 차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백남순 외무상과 각각 회담하였다. 그처럼 중요한 방문일정을 마치고 워싱턴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기자회견장에 나왔으므로, 내외신 취재진은 그가 과연 무슨 이야기를 꺼내놓을지 무척 궁금했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기자회견 중에서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킨 발언은 다음과 같다.

 

“김정일 위원장과 나는 조선의 고유한 미사일 프로그램과 미사일 수출 등 미사일에 관한 상호관심사를 폭넓게 논의하였다.”

 

“나는 다음 주에 두 나라 미사일전문가들이 회담을 재개할 것이라는 사실을 발표하게 되어 기쁘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위와 같은 발언을 들어보면, 2000년 당시 조미협상의제는 핵문제가 아니라 미사일문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93년부터 2001년까지 클린턴 행정부 시기의 백악관은 조선의 핵무기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이 없었고, 조선의 미사일에 대해서만 관심을 두었다. 그런 사실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조선을 방문하기 14일 전인 2000년 10월 9일 조명록 차수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로 워싱턴을 방문하여 백악관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회담한 직후, 10월 12일 평양과 워싱턴에서 동시에 발표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 사이의 공동코뮈니케’에서 뚜렷이 드러났다. 조미공동코뮈니케에는 다음과 같은 합의사항이 들어있다.  

 

“쌍방은 미사일문제의 해결이 조미관계의 근본적인 개선과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의 평화와 안전에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라는데 대하여 견해를 같이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은 새로운 관계구축을 위한 또 하나의 노력으로 미사일문제와 관련한 회담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모든 장거리미사일을 발사하지 않을 것이라는데 대하여 미국측에 통보하였다.”

 

지금으로부터 19년 전, 백악관이 그처럼 핵문제를 외면하고 미사일문제에만 매달린 까닭은 다음과 같은 사연에서 밝혀진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2000년 10월 2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조선을 방문한 매들리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을 환영하기 위해 평양에 있는 백화원 영빈관에서 마련한 만찬 중에 축배를 드는 장면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에게 파격적인 미사일해법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2000년 12월 안에 평양에서 조미정상회담을 개최하여 미사일해법을 최종적으로 타결하자는 놀라운 제안을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을 통해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냈다. 만약 클린턴 대통령과 참모들이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미사일해법을 받아들였다면, 오늘 우리 겨레는 자주적 평화통일이 실현된 나라에서 살고 있을지 모른다.     

 

(1) 클린턴 대통령과 참모들은 조선이 핵보유국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조선이 핵무기 개발을 막 시작한 초보적 수준에 있는 것으로 오판하였다. 미국의 탐사보도기자 쎄이무어 허쉬가 잡지 <뉴욕커> 2003년 1월 27일부에 발표한 장문의 기사에 따르면, 2002년 6월 미국 중앙정보국은 부쉬 대통령과 참모들에게 조선의 핵무기개발현황을 분석한 ‘국가정보평가서’를 제출하였는데, 거기에는 “1997년 이후 정밀기술, 핵탄두설계정보, 핵무기시험자료 등을 파키스탄으로부터 넘겨받은” 조선이 우라늄을 농축하여 핵폭탄을 만들고 있다는 정보판단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1999년 조선이 파키스탄에게 정밀한 핵탄두설계도를 넘겨주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미국 중앙정보국은 거꾸로 파키스탄이 핵탄두설계정보 등 핵무기기술자료를 조선에게 넘겨준 것으로 오판하였고, 조선이 파키스탄에서 핵무기기술을 이전받아 핵폭탄을 개발하는 중이라고 오판하였다. 오판이 더 큰 오판을 낳은 것이다.

 

2019년 5월 20일 <자주시보>에 실린, ‘파키스탄과 리비아를 거쳐 미국에 간 조선의 핵탄두설계도’라는 제목의 글에서 내가 상세히 논한 것처럼, 6.25전쟁이 끝난 뒤 1950년대 말, 소련으로부터 핵폭탄설계도와 무기급 플루토늄 200kg을 입수하고 핵무기제조기술을 전수받았던 조선은 1960년대 중반에 핵폭탄을 10발 정도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1998년 5월 30일 파키스탄 발로치스탄주 차가이사막에 건설된 임시핵시험장에서 비공식 핵시험을 진행하였으며, 1999년에 평양을 방문한 파키스탄 핵무기개발 총책임자 압둘 카디르 칸에게 소형화, 경량화, 정밀화된 핵탄두 3발을 보여주고 핵탄두설계도 사본을 넘겨주었다. 그런데 미국 중앙정보국은 그런 중요한 정보를 파악하지 못하고, ‘국가정보평가서’에 뚱딴지같은 소리를 늘어놓았던 것이다. 

 

뚱딴지같은 소리가 담긴 ‘국가정보평가서’를 읽은 클린턴 대통령과 참모들이 조선의 핵문제에 대해 오판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전략적 오판에 빠진 클린턴 대통령과 참모들은 조선이 1999년에 파키스탄으로부터 기술자료를 넘겨받아 핵개발을 시작했으니, 2005년쯤 되면 일류쉰-76 전략수송기에 실을 크고 무거운 ‘원시적인 핵폭탄’이나 한 두 발쯤 만들지 않을까 예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핵협상을 외면하고, 미사일협상에 매달렸다.  

 

(2) 1991년에 파키스탄은 중국에서 탄도미사일을 수입하였다. 미사일을 해외에 수출하는 경우 사거리를 300km로 제한하고, 탄두중량을 500kg으로 제한한다는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의 규정을 준수하는 중국은 사거리가 290km밖에 되지 않는 전술미사일을 파키스탄에 수출하였다. 파키스탄은 중국산 전술미사일을 역설계한 복제품을 만들어 1997년 7월 4일에 시험발사를 진행하였는데, 당시 파키스탄이 절실히 요구한 것은 전략미사일이었다. 핵탄두를 장착할 중거리탄도미사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파키스탄에게 전략미사일 개발기술을 지원해줄 나라는 조선밖에 없었다. 중국은 미사일기술통제체제의 수출규정을 위반하지 않으려고 조심했고, 로씨야는 중거리탄도미사일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파키스탄은 그 두 나라에게 전략미사일수출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압둘 카디르 칸은 당시 파키스탄 총리 베나지르 부토에게 조선의 전략미사일 개발기술을 전수받는 의견을 내놓았다. 칸의 의견을 받아들인 부토 총리는 측근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조선을 방문하였다. 그날은 1993년도 다 저물어가던 12월 29일이었다. 영국 출신 언론인들이며 국제정치저술가들인 에이드리언 레비와 캐더린 스캇-클락이 공동집필하여 2007년 10월에 펴낸 ‘속임수: 파키스탄, 미국, 국제핵거래음모’라는 제목의 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에 도착한 부토 총리는 김일성 주석에게 파키스탄의 숙적인 인디아로부터 핵공격위협을 받고 있는 심각한 상황에 관해 하소연하였고, 인디아 내륙 깊숙이 날아갈 중거리탄도미사일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미사일설계도를 요청하였다. 부토 총리의 하소연을 들으며 미국으로부터 핵공격위협을 받고 있는 조선의 상황을 생각한 김일성 주석은 파키스탄을 도와주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김일성 주석은 부토 총리가 평양을 떠나기 전날 밤, 화성-7 설계도가 저장된 컴퓨터 디스크 보따리를 그에게 주었다. 

 

조선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화성-7은 사거리가 1,500km이고, 5축10륜 발사대차량에 싣는 중거리탄도미사일이다. 화성-7 탄체에는 우리글 자음 ㅈ과 9개 자리 숫자가 일련번호로 새겨져 있는데, ㅈ은 전략미사일이라는 뜻이다. 당시 파키스탄의 숙적인 인디아는 중거리탄도미사일을 아직 갖지 못했다.    

 

파키스탄은 화성-7 설계도를 받았으나, 그들의 기술로는 전략미사일을 만드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요구되었다. 신속한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다급한 심정을 안고 1994년에 조선을 찾아온 칸과 파키스탄 군사지휘관들에게 조선은 화성-7 완제품 10발을 넘겨주었고, 조선의 미사일기술자 10명을 파키스탄에 파견하여 전략미사일개발을 직접 지도해주었다. 그렇게 되어 파키스탄은 1998년 4월 6일 화성-7을 복제한 중거리탄도미사일 가우리를 시험발사할 수 있었다. 

 

인디아의 핵공격위협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파키스탄에게 보내는 조선의 지원과 방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파키스탄은 조선의 전폭적인 기술지원을 받아 가우리 전략미사일을 만들었으나, 핵탄두를 가우리에 장착할 만큼 핵무기를 소형화, 경량화하는 기술이 없었다. 그래서 칸과 파키스탄 군사지휘관들은 1999년에 조선을 또 다시 찾아갔다. 조선은 그들에게 소형화, 경량화된 핵탄두 실물 3발을 보여주면서 핵탄두설계도가 저장된 방대한 분량의 컴퓨터 파일 복사본을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탄도미사일 200발도 수출하였다. 조선이 탄도미사일을 한번에 200발씩 대량수출한 것은 엄청난 미사일생산능력을 가졌음을 말해준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조선이 핵탄두설계도를 파키스탄에게 넘겨주었다는 극비정보는 알지 못했고, 조선이 파키스탄에게 화성-7 제조기술을 이전하고, 탄도미사일을 대량으로 수출하였다는 정보만 파악하였다. 중앙정보국의 정보보고를 통해 그런 사실을 알게 된 백악관은 조선의 미사일기술이전을 차단하고, 미사일생산능력을 억제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하였다. 바로 이것이 클린턴 대통령과 참모들이 조선과의 미사일협상에 매달리게 된 사연이다.    

 

 

2. 즉석에서 제시된 파격적인 미사일해법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은 자주적 평화통일의 앞길을 밝혀주는 6.15공동선언을 채택, 발표하였다. 민족의 가슴마다 통일열기가 끓어올랐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조선은 미국을 상대로 미사일협상을 진행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략은 미사일협상을 넘어 원대한 목표를 지향하였다. 미사일협상이라는 강력한 지렛대로 백악관을 움직여 주한미국군을 완전히 철거하는 자주와 평화의 대격변을 일으키고, 6.15공동선언에 명시된 연방제통일을 실현하는 결정적인 국면을 열어놓으려는 것, 바로 이것이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자주통일전략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자주통일전략은 미사일해법으로 펼쳐졌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제시한 미사일해법은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는데, 2001년 3월 22일 미국 외교문제협의회(CFR) ‘한반도변화관리특별전문의원회’가 부쉬 대통령에게 보낸 공개서한을 통해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다. 서한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제시한 미사일해법은 조선이 미사일수출을 중단하는 것에 상응하여 미국은 매년 10억 달러를 현금 또는 현물로 보상한다는 것, 그리고 미국이 조선의 인공위성발사를 지원해주는 것에 상응하여 조선은 장거리미사일시험발사 및 생산을 중단하고 미사일기술통제체제에 가입한다는 것이었다. 파격적인 미사일해법이었다. 

 

또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12월 안으로 클린턴 대통령이 조선을 방문하면 미사일해법을 최종적으로 합의할 수 있다고 하면서, 합의방법과 합의시한까지 제시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파격적인 미사일해법을 받은 클린턴 대통령은 이것이 자기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호기임을 직감하였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 임기의 마지막 시기인 2000년 12월 중에 조선을 방문하여 미사일협상을 최종적으로 타결하려고 서둘렀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커다란 걸림돌이 평양으로 향하려던 클린턴 대통령의 발걸음을 가로막았다. 그 내막은 다음과 같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2000년 10월 10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로 미국을 방문한 조명록 차수와 일행이 백악관에서 클린턴 대통령을 접견한 뒤에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다. 조명록 차수는 먼저 국무부를 방문하였는데, 거기서 백악관으로 출발하기 직전 양복을 군복으로 갈아입고 백악관에 들어섰다. 위의 사진을 보면, 클린턴 대통령 옆에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과 리용호 부상의 모습이 보이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웬디 셔먼 국무부 특별보좌관의 모습이 보인다.     

 

클린턴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제시한 미사일해법을 받아가지고 워싱턴으로 돌아온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으로부터 방문보고를 받은 직후 백악관에서 대책회의를 소집하였다. 2001년 5월 1일 서울에서 발간된 <민족 21>은 그 대책회의에 관해 다음과 같은 사연을 전해주었다. 

 

대책회의에는 주한미국대사 출신들인 제임스 릴리, 제임스 레이니, 도널드 그렉, 그리고 사회과학연구협의회 동북아시아협력안보프로그램 책임자 레온 씨걸 등이 참석하였다. 참석자들의 의견은 세 갈래로 갈라졌다. 레온 씨걸은 클린턴 대통령의 조선방문을 지지하는 긍정적인 의견을 내놓았고, 제임스 릴리와 제임스 레이니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제시한 미사일해법을 검증하기 전에는 클린턴 대통령이 조선을 방문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고, 도널드 그렉은 조선과 미사일협상을 개최하여 미사일해법을 실현하려는 의지를 확인한 뒤에 클린턴 대통령이 조선을 방문하면 좋겠다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클린턴 대통령은 절충안에 귀가 솔깃해졌다. 그렇게 되어 2000년 11월 1일 말레이시아 수도 콸라룸푸르에서 조미미사일협상이 진행되었다. 

 

미사일협상에서 조선은 미국에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미사일해법을 실행하려는 의지를 재확인하면서, 클린턴 대통령이 2000년 12월에 조선을 방문하면 미사일해법이 최종적으로 타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워싱턴에 감돌던 지배적인 의견은 신중론이었다. 신중론은 합리적인 판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미사일해법에 대한 무지와 불신, 편견과 오해가 뒤엉킨 오판이었다. 워싱턴의 신중론자들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조선방문을 마치고 평양을 떠나기 직전 기자회견에서 이야기했던 다음과 같은 극적인 장면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바로 어제(2000년 10월 23일) 우리는 대집단공연(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뜻함-옮긴이)을 함께 관람하던 중에 조선의 대포동미사일(인공위성 광명성-1호를 지구궤도에 올려놓은 백두산위성운반로켓을 뜻함-옮긴이)의 영상이 (공연장 배경대) 화면에 나타났다. 바로 그때 김정일 위원장이 나에게 이것은 첫 번째 위성발사이며 동시에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처럼 극적인 분위기 속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에게 진정성 있는 미사일해법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조선에 대한 무지와 불신, 편견과 오해에 사로잡힌 워싱턴의 신중론자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진심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신중론자들이 평양으로 향하려던 자신의 발걸음을 붙잡아버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좌고우면하며 어물어물하던 클린턴 대통령은 2000년 12월 21일 아침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대중 대통령 밑에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지낸 김하중은 2015년 1월에 출판된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정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화를 건 클린턴 대통령은 자신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기 전에 조선의 미사일문제를 해결하고 싶은데 자신의 조선방문은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2001년 1월 중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워싱턴에 초청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튿날 클린턴 대통령은 유엔주재조선대표부를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워싱턴 방문을 희망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전하였다.  

 

그러나 그런 희망은 허망한 것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대통령 권한을 당선인 부쉬에게 넘겨주고 사실상 자연인으로 돌아간 클린턴과는 정상회담을 할 수 없었다. 더욱이 2000년 11월 7일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복잡한 선거개표문제 때문에 12월 13일에 가서야 당선이 확정된 부쉬는 클린턴의 조선방문을 반대하였으므로, 정상회담은 고사하고 미사일협상마저 중단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클린턴 대통령이 조선을 방문하여 미사일해법을 타결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야 보나마나, 조선은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고, 거기에 장착되는 메가톤급 열핵탄두도 만들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미국은 국가안보파탄위험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 대한 무지와 불신, 편견과 오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백악관은 절호의 기회를 놓쳤고, 그로써 국가안보파탄위험이라는 불행 속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3. 조선의 우라늄농축문제 물고 늘어진 미국

 

1998년 4월 6일 파키스탄은 가우리 전략미사일을 시험발사하였다. 발사대차량에서 하늘로 솟구쳐 오른 그 미사일은 9분 58초 동안 비행하면서 정점고도 350km에 도달하였고, 1,100km를 날아가 발로치스탄 사막에 설치된 타격목표에 명중하였다. 파키스탄에 파견되어 미사일개발기술을 전수해온 조선의 미사일기술자 10명은 그것으로 자기 임무를 완수하였다. 

 

1998년 5월 어느 날, 귀국을 앞둔 조선의 미사일기술자들에게 칸은 우라늄농축장비인 P-1(1세대 원심분리기) 20기를 감사표시로 조선에 보내겠다고 하였다. 조선의 미사일기술자들은 이왕이면 P-2(2세대 원심분리기)를 달라고 했다. 칸은 상부와 협의하고 나서 그들이 요구한 P-2 원심분리기 4기를 감사표시로 조선에 보냈다.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감시하던 미국 중앙정보국은 파키스탄의 원심분리기가 조선에 넘어간 것을 알았다. 중앙정보국은 조선이 그 원심분리기를 역설계하여 독자적으로 원심분리기를 개발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중앙정보국은 감시의 눈초리를 조선의 우라늄농축에로 돌렸다.   

 

조선의 미사일기술자들이 P-2 원심분리기 4기를 가지고 귀국한 때로부터 4년이 지난 2002년 10월 3일 아침, 미국 공군 수송기 한 대가 평양국제공항에 착륙하였다. 미국인 8명이 내렸다. 그들은 미국 대표단 성원들이었다. 대표단은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 제임스 켈리를 단장으로 하고, 대조선교섭담당 대사 잭 프릿처드, 코리아과장 데이빗 스트로브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이 평양에 도착하였던 2002년은 조미관계가 악화된 때였다. 2002년 1월 29일 부쉬 대통령은 연두교서를 발표하면서 조선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모독하는 폭언을 내뱉었고, 2002년 5월 국무차관 존 볼턴은 부쉬보다 한 술 더 떠서 조선, 이라크, 이란, 리비아, 수리아, 꾸바를 모조리 싸잡아 ‘악의 축’이라고 모독하는 2차 폭언을 토해냈다. 폭언과 모독의 광란은 협상을 중단하고, 대결을 재개하려는 흉심의 표출 이외에 다른 게 아니었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2002년 1월 29일 조지 부쉬 대통령이 연방상하원 앞에서 연두교서를 발표하는 장면이다. 그의 뒤에서 딕 체니 부통령과 데니스 해스터트 하원의장이 손뼉을 치고 있다. 부쉬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조선, 이란, 이라크를 이른바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폭언을 내뱉었다. 그가 그런 폭언을 내뱉은 것은 이전 클린턴 행정부가 진행해오던 조선과의 미사일협상을 완전히 중단하고, 조선에 대한 핵대결도발책동을 시작하려는 흉심의 표출이었다. 부쉬 행정부는 2002년 10월 조선의 우라늄농축문제를 물고 늘어지면서 제네바 기본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하였고, 2003년에는 조선에 대한 핵대결을 도발하여 정세를 극도로 악화시켰다. 8천만 민족의 안전과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직접적으로 위협한 제2차 조미핵위기는 그렇게 조성되었다.     

 

조선과 미국이 그처럼 험악한 분위기 속에 있었던 때에 미국 대표단이 평양에 나타난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해하기 힘든 사연은 2009년 11월 18일 데이빗 스트로브가 서울을 방문하였을 때 <연합뉴스> 취재기자에서 털어놓은 회고담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2002년 10월 국무부 코리아과장으로 미국 대표단에 망라되어 조선을 방문하였던 스트로브는 당시 상황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2002년 10월 3일 미국 대표단이 평양에 도착한 첫날 오후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켈리 국무부 차관보를 각각 양측 수석대표로 하는 협상이 진행되었다. 켈리 차관보는 “우리는 조선이 고농축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하면서 추궁발언을 꺼내놓았다.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김계관 부상은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고 하면서 “이것은 조미관계의 진전을 바라지 않는 자들의 책동”이라고 맞받아쳤다. 첫째날 협상은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둘째날 오전에 협상이 재개되었는데, 켈리 차관보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조선이 우라늄농축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을 자기들이 알고 있다느니 뭐니 하면서 추궁발언을 또 다시 꺼내들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이루어질 리 만무했다.  

 

셋째날 오후 5시에 마지막 협상이 진행되었다. 이번에는 김계관 부상보다 직급이 높은 강석주 제1부상이 나왔다. 그는 “어제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고위책임자들이 회의를 진행하여 논의한 내용을 설명하겠다”고 하면서 30분 동안 발언하였다. 

 

스트로브는 2009년 11월 서울에서 만난 취재기자에게 자신의 회고담을 들려줄 때, 강석주 제1부상의 발언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켈리 차관보의 발언내용만 주로 언급하였다. 자기들에게 불리한 정황은 덮어두고, 자기들에게 유리한 정황만 드러내는 화술이다. 

 

켈리 차관보가 조선의 우라늄농축에 관한 의혹을 물고 늘어지자, 강석주 제1부상은 “그런 것은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그것보다 더 강한 것도 있다”고 맞받아치면서, “미국이 우려하는 문제를 담판으로 해결할 수 있다. 최고령도자급 회담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석주 제1부상의 위와 같은 발언은 조선의 우라늄농축을 자인한 것이 아니라, 2000년 12월에 성사될 뻔하다가 부쉬의 반대로 무산된 조미정상회담을 개최하여 핵문제를 해결하자는데 강조점을 찍은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핵문제를 해결하는 방도는 조미정상회담밖에 없으므로, 당시 부쉬 대통령이 조선을 ‘악의 축’으로 모독하면서 조미관계를 악화시켰지만, 그런 그에게도 과거를 묻지 말고 조미정상회담을 다시 준비하자고 제안한 것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아량 있는 협상의지였다.

 

 

4. 핵무기를 더 많이 만드는 조선  

 

그러나 부쉬 대통령과 참모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아량 있는 협상의지를 외면하였을 뿐 아니라, 강석주 제1부상이 켈리 차관보와 회담하는 중에 조선의 우라늄농축을 사실상 인정하였다느니, 또는 조선이 원심분리기 제조에 사용할 고강도 알루미늄관을 수입했다느니 뭐니 하면서 마구 떠들어댔다. 

 

부쉬 대통령과 참모들이 2002년 10월부터 조선의 우라늄농축문제를 물고 늘어진 까닭은 제네바 기본합의를 파기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1994년 10월 21일 조선과 미국이 채택, 발표한 제네바 기본합의에서 미국은 조선에게 경수로 2기를 2003년까지 지어주기로 하였고, 클린턴 대통령은 자신의 명의로 작성한 공약이행담보서한까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보냈으면서도 착공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1997년 10월에 착공식을 진행하였다. 그런데 공약이행시한으로 정해진 2003년이 눈앞에 다가온 2002년 말이 되자, 부쉬 행정부는 미국이 공약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덮어버리기 위해 제네바 기본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다.  

 

미국의 일방적인 합의파기는 핵대결도발음모로 이어졌다. 정세는 극도로 긴장되고 있었다. 8천만 민족의 안전과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미국의 핵대결도발과 그에 맞서싸우는 조선의 대응행동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함경남도 신포의 금호지구에 있는 경수로 공사현장을 촬영한 것이다. 미국은 1994년 10월 21일 조선과 채택한 제네바 기본합의에서 조선이 플루토늄핵시설을 폐쇄하는 것에 상응하여 신포에 100만킬로와트급 경수로 2기를 2003년까지 건설해주겠다고 공약하였다. 클린턴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제네바 기본합의를 성실히 이행하겠다는 담보서한까지 보냈다. 신포 경수로 건설비는 46억 달러인데, 미국은 건설비의 70%인 32억2천만 달러를 김영상 정부에게 떠넘겼다. 클린턴 행정부가 경수로 건설비를 한국, 일본, 유럽연합에게 떠넘기기 위한 경비분담협상을 벌여놓은 바람에 경수로 건설공사 착공은 1997년 8월 19일로 늦춰졌다. 그런데 2002년 10월 부쉬 행정부는 조선의 우라늄농축문제를 물고 늘어지면서 이전 클린턴 행정부가 조선과 채택한 제네바 기본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다. 경수로 건설도 중단되고 말았다. 미국의 합의파기농간 때문에 한국이 경수로 건설비로 지출한 11억3,700만 달러, 일본이 지출한 4억700만달러, 유럽연합이 지출한 1,800만달러가 하루아침에 허공에 날아갔다.     

 

2002년 1월 부쉬 행정부는 ‘핵태세검토보고서(NPR)’를 연방의회에 비공개로 제출하였다. 그 문서에서 부쉬 행정부는 조선, 이란, 이라크, 리비아, 수리아가 “즉시적이고, 잠재적이고, 예상할 수 없는 도발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비해 핵공격계획을 수립할 필요가 있는 나라들”이라고 지목하면서, 미국 국방부에게 핵전쟁계획을 작성할 것을 요구한다고 서술하였다. 그들이 말한 핵전쟁계획은 선제핵타격계획을 뜻하는 것이었고, 선제핵타격계획에 선정된 1차 대상은 미국의 전쟁광신자들이 가장 적대시하는 조선이었다. 

 

미국이 제네바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인데, 전쟁광신자들이 노골적인 핵전쟁도발책동까지 벌여놓았으니, 조선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조선은 2003년 2월 10일 외무성이 발표한 성명에서 분노를 표출하였다. 

 

“미국이 핵몽둥이를 휘두르면서 우리 제도를 기어이 없애버리겠다는 기도를 명백히 드러낸 이상 우리 인민이 선택한 사상과 제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핵무기고를 늘이기 위한 대책을 취할 것이다. (중략) 우리는 이미 부쉬 행정부의 증대되는 대조선고립압살정책에 맞서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서 단호히 탈퇴하였고 자위를 위해 핵무기를 만들었다. 우리의 핵무기는 어디까지나 자위적 핵억제력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위에 명시된 것처럼, 조선은 미국의 핵공격위협에 대응하여 자위적 핵억제력으로 핵무기를 보유하였을 뿐 아니라, 앞으로 핵무기를 더 많이 만들겠다고 성명하였다. 조선이 그처럼 명백한 어법으로 성명했는데도, 무지와 불신, 편견과 오해에 사로잡힌 부쉬 대통령과 참모들은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다. 조선이 파키스탄으로부터 핵무기개발기술을 이전받은 것으로 오판한 그들은 조선이 실전에서 사용하지 못할 만큼 크고 무거운 핵폭탄 3~4발을 만들어놓고 허세를 부리는 줄로 착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조선이 그런 원시적인 핵폭탄을 몇 발 더 만든다고 해도 미국의 국가안보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할 것으로 오판하였다. 부쉬 대통령과 참모들이 그런 착각과 오판에 빠졌으므로, 그들은 2002년 10월 5일 평양에서 진행된 셋째날 협상에서 강석주 제1부상이 켈리 차관보에게 전한 조미정상회담 제의를 무시해버렸다.  

 

그러나 만일 부쉬 대통령이 상황을 오판하지 않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조미정상회담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조선은 핵보유-핵증산 성명을 발표하지 않았을 것이고, 조미핵대결은 중지되었을 것이며, 조미핵협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5. 완전히 파탄된 미국의 공중정찰작전

 

전략적 오판에 사로잡힌 부쉬 대통령과 참모들은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길을 선택하였다. 핵협상을 중단하고 핵대결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결코 이기지 못하고 종당에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핵대결이었다. 

 

미국이 도발한 핵대결은 조선을 핵무기증산과 핵무력완성의 길로 이끌어갔다. 당시 부쉬 대통령과 참모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핵대결을 선택한 때로부터 15년이 지난 2017년에 조선은 마침내 메가톤급 수소탄두 기폭시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였고,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화성-15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조미핵대결 25년 역사를 돌이켜보면, 백악관의 전략적 오판은 미국의 국가안보를 파탄위험에 빠뜨리는 근본원인으로 되었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조선은 부쉬 행정부의 핵대결도발에 단호한 대응조치로 맞섰다. 조선이 2003년 2월 10일 핵보유-핵증산 성명을 발표한 것은 부쉬 행정부의 핵대결도발을 강하게 내리친 대응조치였다. 

 

조선의 핵보유-핵증산 성명으로 심하게 얻어맞은 미국의 전쟁광신자들을 이성을 잃고 광분하였다. 그들은 조선에 대한 선제공격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뉴욕타임스> 2003년 2월 28일 보도에 따르면, 당시 미국 국방부는 조선에 대한 “외과수술식 미사일공격, 집중폭격, 전술핵무기를 사용하는 선제공격”을 검토하고 있었다고 한다.  

 

전쟁광신자들은 선제핵타격을 감행하기에 앞서 공중정찰활동부터 서둘렀다. 2003년 3월 2일 뜻밖의 사건이 터졌다. 그날 오전 탄도미사일발사준비에 관련된 신호정보를 수집하는 미국 공군의 RC-135S 정찰기 한 대와 통신신호정보를 수집하는 일본해상자위대 EP-3E 정찰기 한 대가 겁도 없이 조선을 정찰하려고 동해 상공에 나타났다. RC-135S 정찰기가 앞섰고, EP-3E 정찰기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의 정찰비행을 감시하던 조선인민군 항공군은 그 두 정찰기를 공중에서 나포해 강제착륙시키기 위해 미그-29 전투기 2대와 미그-23 전투기 2대를 긴급히 출동시켰다. 뜻밖의 위험에 빠진 정찰기들은 정신없이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사진 5> 

 

▲ <사진 5> 2012년 1월 30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선인민군 공군 제1017군부대를 시찰하고 전투비행사들의 비행훈련를 지도하였다. 평안북도 선천군에 있는 그 부대는 오중흡7련대 칭호를 받은 정예부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군부대 시찰과 전투비행훈련지도를 마치고 부대장의 집을 방문하였다. 위의 사진은 부대장의 집을 찾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허룡 부대장과 그의 아내 김성실의 손을 다정히 잡고 걸어나오는 장면이다. 허룡 부대장은 2003년 3월 2일 조선 동해안에서 241km 떨어진 공역에서 정찰활동을 벌이던 미국 공군 RC-135S 정찰기와 일본해상자위대 EP-3E 정찰기를 공중에서 나포하여 강제착륙시키는 항공작전에 출전하였던 4명의 전투비행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들은 정찰기들이 자기들의 접근비행을 포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전투기에서 발신되는 모든 전파장치를 끄고 오로지 전투비행사의 육안식별과 비행감각에만 의존하여 해수면을 스치는 듯한 무전파초저공비행으로 240km를 날아가, 15m까지 바짝 접근하였고, 20분 동안 그 정찰기들의 주위를 포위비행하면서 나포위협과 격추위협으로 그들의 정신을 쑥 빼놓았다. 혼비백산한 정찰기들은 전속력으로 도망쳐 나포위험에서 가까스로 벗어났다. 허룡 부대장은 이 항공작전에서 세운 공로로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미국과 일본이 정찰기 두 대를 동해에 출동시킨 것은 조선에 대한 선제핵타격을 준비하기 위해 감행한 공중정찰작전이었는데, 조선의 전투비행사들은 용맹한 무전파초저공비행으로 미일합동공중정찰작전을 완전히 파탄시켰다.     

 

조선인민군 전투기들은 정찰기 전방에 바짝 붙어 비행하다가 추력엔진을 분사하여 비행을 방해하는가 하면, 어느 새 정찰기 후방에 따라붙어 비행하다가 공대공미사일을 발사하는 사격통제레이더를 켜면서 격추위협을 가했다. 조선인민군 전투비행사가 엄지손가락 하나만 살짝 누르면 공대공미사일이 불을 뿜으며 날아가 그 두 정찰기를 바다에 쳐박을 판이었다. 20분 동안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그 두 정찰기는 전속력으로 도망쳐 나포위험에서 가까스로 벗어났다. 전쟁광신자들이 선제핵타격을 준비하기 위해 감행한 공중정찰작전은 완전히 파탄되었다.  

 

이 경악할 사태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발칵 뒤집어졌다. 전쟁광신자들은 새로운 핵전쟁계획을 작성하려고 서둘렀다.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제임스 엘리스 전략사령관에게 새로운 핵전쟁계획을 작성하라고 지시하였다. 그 지시에 따라 미국 전략사령부가 새로운 핵전쟁계획을 작성하였는데, 그것이 2003년 3월 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제출된 ‘전략핵전쟁계획서’라는 제목의 극비문서다. 

 

미국이 핵전쟁을 도발하려면 계획서는 물론 작전계획도 필요하다. 그래서 미국 전략사령부는 조선의 군사전략거점들을 선제핵타격으로 파괴하기 위한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작성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2003년 11월에 완성된 ‘개념계획(CONPLAN) 8022’다. 2004년 6월 럼스펠드 국방장관과 리처드 마이어스 합참의장은 ‘개념계획 8022’를 발효시키는 ‘임시적인 전지구적 타격 경계명령(Interim Global Strike Alert Order)’을 전략사령부에 하달하였다. 이 명령은 조선에서 공격징후가 나타나는 즉시, 미국이 지상군을 파견하기 전에 장거리스텔스전략폭격기 B-2 편대와 장거리전략폭격기 B-52H 편대를 재빨리 출동시켜 조선의 군사전략거점들을 선제핵타격으로 파괴하는 실전준비를 명령한 것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핵안보연구가 핸스 크리스텐슨이 2008년 7월 25일 미국과학자동맹(FAS) 웹싸이트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2004년 가을 제임스 카트롸잇 전략사령관은 ‘개념계획 8022’를 슬그머니 철회하였다고 한다. 전쟁광신자들이 광분했던 핵전쟁도발책동은 물거품처럼 꺼졌다. 

 

그로부터 어언 1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트럼프 대통령과 참모들은 백악관이 2000년부터 2004년까지 기간에 겪었던 실패경험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망각의 늪에 빠져있다. 조선에게 리비아식 비핵화를 적용하려는 망상이 망각의 늪에서 독초처럼 자랐다. 트럼프 대통령과 참모들은 망각과 망상의 이중주에 맞춰 어지럽게 오판의 춤을 추며 돌아가고 있다. 망각과 망상은 2019년 12월이 가기 전에 그들에게 전략적 실패를 안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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