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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北 숨겨둔 핵시설 5곳’…? 불쑥 꺼낸 트럼프의 속내는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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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9/05/22 08:24
  • 수정일
    2019/05/22 08:2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김원식 | 2019-05-21 14:01:4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분석] ‘北 숨겨둔 핵시설 5곳’…? 불쑥 꺼낸 트럼프의 속내는
앞뒤 안 맞는 주장만 반복하는 트럼프… 강경파 측근 내치지 않고는 재선도 쉽지 않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9일(현지 시간)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에서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북한 내 핵시설 5곳 중 1∼2곳만 폐기 의사를 밝혀 결렬됐다고 밝혔다.ⓒ폭스뉴스 방송화면 캡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9일(현지 시간)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의 결렬 이유가 당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북한 내 핵시설 5곳 중 1∼2곳만 폐기 의사를 밝혀 결렬됐다고 말해 그 의도에 관심이 쏠린다.

북한이 보유한 핵시설 숫자를 처음으로 5개라고 꼭 찍으면서 자신은 전부 폐기를 요구했으나. 김정은 위원장은 이를 숨긴 채 그중 단지 1∼2곳만 폐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북미정상회담이 최종 결렬됐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 같은 주장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 직후 그는 기자회견에서 스스로 “영변 핵시설보다 플러스알파를 원했던 것 아니냐”로 반문한 뒤 “나오지 않은 것 중에 우리가 발견한 게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추가로 발견한 시설이 우라늄 농축과 같은 것이냐’는 질문에도 “그렇다”면서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해 북한이 놀랐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북한이 그동안 꼭꼭 숨겨왔던 핵시설을 미국에 들켰다는 의미다.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에 기자회견에 동석했던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영변 핵시설 외에도 규모가 굉장히 큰 핵시설이 있다”고 말해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에도 미국 측은 북한이 숨겨놨다는 핵시설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핵시설 숫자가 5개라고 꼭 찍어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5곳에 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란과의 긴장 관계를 설명하면서 불쑥 10초정도 스쳐가듯 언급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미국 측의 이러한 주장은 하노이 회담 당시에도 별로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상회담 실무진들도 합의문 초안까지 다 준비했는데 오찬 회담 직전에 갑자기 결렬됐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물론 미국 측 실무 관계자들도 당시 결렬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미국 측의 설명이 맞는다고 해도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다. 아무리 ‘톱다운’ 방식의 회담이었지만, 정상회담 전에 수차례 고위급 회담과 실무회담을 개최했다. 이 과정에서는 북핵 시설 숫자를 말하지 않다가 갑자기 정상회담에서 이를 꺼냈다는 것은 오히려 회담 결렬을 사전에 작심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정상회담 합의문 서명 당일에 이러한 주장이 담긴 정보 문서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고해 판을 바꿨고 이에 설득당한 그가 막판에 회담장을 나가버렸다는 분석도 나오는 이유이다. 당시에도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이 유력한 인물로 거론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난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개최된 북미 확대정상회담에서 노란 봉투를 앞에 놓고 등장한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 모습ⓒ뉴시스/AP

그렇다면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북미협상이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가운데도 트럼프 대통령이 구체적인 숫자까지 거론하며 이 같은 주장을 다시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북미협상 결렬과 교착의 책임을 자신이 아닌 북한에 떠넘기겠다는 속내이다.

이는 북미협상에 관해 트럼프 대통령이 일관되게 자신의 업적만 자랑하는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이날 인터뷰에서도 여지없이 자신의 업적만 내세웠다. 이날도 자신이 북한 문제에 관여하고 나서는 “실험이 없었다(no test)”고 수차례 강조한 이유이다.

또 최근 북한이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북미관계가 얼어붙고 있지만, 그는 이날 이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는 추후 북미협상을 염두에 둔 발언일 수도 있지만, 자신이 그동안 내세웠던 ‘미사일 발사도 없었다(no missile)’는 자랑에 금이 가지 않게 하려는 의도이다.

‘도돌이표’ 과거 추구하는 측근들… 트럼프, 美유권자가 뽑아준 이유 되새겨야

한 발 더 들어간다면, 북한은 연말을 시한으로 미국이 근본적인 생각을 바꿔 다시 회담장에 나오라고 압박하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모른 척 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내년 재선 운동 돌입을 앞두고 북미협상이 최종 결렬돼도 북한에 책임을 떠넘기고 자신은 빠져나가겠다는 심보이다.

하지만 북미관계의 역사를 새로 썼다고 자랑하는 그도 과거 미국의 협상 결렬 방식을 그대로 닮은 ‘도돌이표’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미국은 북한과 최종 합의를 하고 나서도 또 다른 문제를 꺼내 이를 파기한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오히려 이번에는 최종 합의 전에 이를 파기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오히려 잘됐다는 씁쓸한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합의해 놓고 또 파기하는 속내를 다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미리 결렬시켰으니 그나마 낫다는 일침이다.

이 모든 과정을 잘 복기해 본다면, 어느 정도 답은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가 재임에 성공하더라도 8년밖에 권좌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가 단지 순간을 모면하고 자신의 업적만 내세우다가 이 모두가 또 파기되면, 그 역시 북미관계 새로운 역사에 단 한 줄도 장식하지 못하는 인물이 될 것이다.

북한에 발가벗기를 요구하기 전에 미국도 사고방식을 바꿔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역사에 한 줄이라도 자신의 업적을 새기려면 우선 북한 문제 해결뿐만 아니라, 이란 등 중동 문제도 다시 도돌이표로 돌아가려는 측근들은 과감하게 내쳐야 한다.

그것이 오히려 미국의 장기적인 이익을 위하는 길이다. 역설적으로 오바마 대통령의 집권 8년도 또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도 모두 중동전쟁에 지친 미국 유권자들의 손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왜 우리가 쓸데없이 세계경찰 노릇을 하느냐”는 그의 평소 말은 다시 꺼낼 필요도 없다.

왜 미국의 유력 주류 매체는 물론 전문가들도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을 빨리 잘라야 한다고 말하는지는 거론하지 않겠다. 또 외교라는 커튼 뒤에 숨어서 자신의 강경정책을 암암리에 수행하고 있는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즉각 경질도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정말 미국 국민들도 바라는 현실을 계속 무시하고 자신의 자랑만 다람쥐 쳇바퀴처럼 반복하다가는 북한 이전에 미국 유권자들이 식상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같은 말도 한두 번은 통할지 모르나 계속 반복한다면, 미 유권자들은 당신에게 ‘재선’이라는 선물을 주지 않을 것이다.

*‘민중의소리’에 게재된 필자의 기사입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1&table=newyork&uid=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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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무기구매, 이대로 괜찮은가?

제목 한국의 무기구매, 이대로 괜찮은가?
등록일 2019-05-21
저자 김종대(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발행처 동아시아재단
파일 동아시아재단 정책논쟁_제118호.pdf 동아시아재단 정책논쟁_제118호.pdf
요약

한국의 국방비는 문 대통령의 집권 첫해인 2017년 7.6%, 2018년에 8.2%가 증액되어 OECD국가 중 가장 높은 증가율을 기록하였다. 이 추세대로라면 3년 후인 2022년에 우리나라 국방비는 일본을 추월하여 세계 5~6위권의 국방비를 자랑한다. 지난 이명박·박근혜 대통령 집권 9년 동안 한반도는 항상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위험지역이었다. 이에 따라 두 전직 대통령은 ‘3축 체계’로 불리는 군사작전 개념을 수립하였고, 이것이 문재인 정부에 그대로 계승되어 대규모 국방예산 증액으로 이어지고 있다. 많은 군사전문가들이 3축 개념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지만 한반도 안보상황의 엄중함, 군사적 대비의 필요성이 절실함에 따라 대규모 국방예산 투입이 지속되고 있다. ‘3축 체계’는 필연적으로 한국의 대규모 첨단 무기 해외구매로 이어져 국내에 방위산업과 첨단기술 육성 효과는 미미한 대신 미국 방위산업체에게는 막대한 이익을 안겨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단순히 국부의 대량 유출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기술종속이 초래하는 지정학적 영향 또한 매우 심각하다. 무기도입이 안보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안보를 약화시키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행 한국군의 군사작전 개념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는 ‘플랜 B’가 필요하다.

 

일본 추월한 국방비, 이제는 60조원 국방시대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선거 당시에 현재 GDP의 2.6%인 국방비를 2.9%까지 올리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우리 국방비는 문 대통령의 집권 첫해인 2017년 7.6%, 2018년에 8.2%가 증액되어 OECD국가 중 가장 높은 증가율을 기록하였다. 이 추세대로라면 3년 후인 2022년에 우리나라 국방비는 일본을 추월하여 세계 5~6위권의 국방비를 자랑한다. 매년 7.6%대의 국방비 증액을 표방한 국방부의 「2019~2023 국방중기계획」은 2022년 한국 국방예산은 57조원으로 전망한다. 반면 2% 이내로 증액을 억제하는 일본의 방위비는 2022년에 56조원(5.5조엔)으로 한국에 추월당한다. 2012년 우리 국방예산이 일본의 50% 불과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10년 만의 역전이다. 2023년에 국방예산 60조를 돌파하게 되는 한국군은 육·해·공·해병대의 50만 병력과 약 770여개의 무기체계, 약 70만 종의 군수품으로 구성된 대형 국방 시스템으로 유지된다. 국방비 증액의 견인차는 단연 첨단 군사장비 도입이다. 2019년 국방비 46조7000억원 중에서 군사 장비를 개발하고 획득하는 방위력개선비는 15조 3,733억원으로 작년에 비해 13.7% 늘어났다. 첨단 장비 도입은 필연적으로 장비의 운용과 유지·정비에 필요한 예산 증가로 이어지는데, 작년보다 7.3% 늘어난 군수지원 및 협력 예산 5조2,937억원이 이에 해당된다. 이 둘을 더한 20조6,670억원이 한국의 군수시장이다. 향후 3~4년 후면 이 시장은 매년 30조원에 육박할 것이다.

한국의 군수시장은 왜 이렇게 폭발적인 성장을 하는 것일까? 지난 이명박·박근혜 대통령 집권 9년 동안 한반도는 항상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위험지역이었다. 2011년에 집권한 북한의 권력자인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비약적인 군사과학기술의 발전을 성취했다. 북한은 2017년에 신형 백두산 엔진이 장착된 화성-14호 장거리 로켓(ICBM)을 성공적으로 발사하였고, 그 직전에 고체연료 미사일로 잠수함발사 미사일(SLBM)도 개발했음을 입증했다. 2017년 9월에 북한의 6번째 핵실험은 이제껏 북한의 핵실험 중 가장 폭발력이 강했으며, 증폭핵분열탄으로 알려진 폭발 효율이 뛰어난 소형 핵탄두까지 북한이 실험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 핵탄두는 장차 북한이 수소폭탄까지 개발할 수 있는 기술적 잠재력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거에 서방의 군사전문가들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무시했던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다. 북한은 단·중·장거리 미사일을 모두 보유함에 따라 한국은 물론 미국과 일본이 타격 범위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반도에 대량 핵전쟁의 시나리오가 구체화되자 한국의 두 전직 대통령은 미국의 핵우산을 통해 한반도에 전쟁 억지력을 구축하고, 한국군 단독으로도 북한의 핵과 미사일에 대응할 수 있는 군사작전 개념을 수립한다. 이를 한국 국방부는‘3축 체계’라고 불렀는데, 이 개념이 명칭만 바뀐 채 문재인 정부에 그대로 계승되어 대규모 국방예산 증액으로 이어지게 된다.

3축 체계는 전임 박근혜 정부가 북핵 미사일 위기가 가장 극심한 시기에 수립한 것으로 총 47개 무기체계를 57조 4,795억원의 예산을 투입하는 계획이다. 2017년까지 17조원이 지출됐고, 문재인 정부 임기 내 매년 5조원 이상이 투입된다. 제1축 Kill-Chain(킬체인)은 북한 핵미사일 발사 징후를 발사 이전에 탐지해 제거하고 그 결과까지 확인하는 선제공격 계획이다. 탐지에서 식별과 타격 및 결과 확인까지 25분 안에 완료해야 한다. 이를 위해 총 30 종류의 무기체계를 도입하게 되는데, 정찰위성, 무인정찰기(HUAV, MUAV), 다출처영상융합체계, 고성능 센서(MS-EO/IR)를 통해 북한을 감시하고 표적을 획득한다. 표적을 타격하는 데는 타우러스(TAURUS) 공대지 미사일, 중거리 공대지 유도폭탄, 레이저 유도폭탄을 도입한다. 이 외에도 전술함대지 유도탄, 복합유도폭탄(SDB-Ⅱ), 중거리 GPS 유도폭탄, 전술지대지 유도무기를 구입한다. 이런 타격전력은 새로 도입하는 F-35A 전투기와 기존에 운용 중인 F-15K 전투기, 육군의 대형공격헬기 아파치에서 운용하게 되며, 해군의 구축함도 이에 가세한다. 육군은 기존에 확보한 사정거리 800km의 탄도미사일과 1000km의 순항미사일을 대량으로 확보할 예정이다.

무기 위에 무기가 겹겹이 쌓여버린 무기 공화국

이와 같은 선제공격이 북한 핵미사일을 제압하는 데 실패했을 경우 공중에서 한국군의 요격미사일로 북한 미사일을 방어하는 제2축 KAMD(한국형미사일방어체계)이 준비된다. 여기에 10종의 무기체계가 투입되는데 먼저 미사일 경보에 정찰기, 탄도탄 조기경보레이더, 탄도탄작전통제소가 운용되고 실제 요격에는 미국으로부터 도입한 패트리어트 요격미사일과 한국군이 자체개발하는 저고도 요격무기(M-SAM)와 중고도 요격미사일(L-SAM)이 투입된다. 최근 한국 해군은 자체 보유하게 될 3척의 이지스함에 미국의 스탠다드 요격미사일(SM-3)을 구축하겠다는 입장이다. 제2축에 의한 방어에도 실패할 경우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될 한국은 북한의 정권을 확실히 궤멸시키는 대량응징보복(KMPR) 전력을 제3축으로 준비한다. 여기에는 제1축의 킬체인 전력을 사용하되 7종의 무기체계가 추가된다. 특수전 병력을 수송하기 위해 수송헬기(CH/HH-47D), 특수작전용 유탄발사기, 구축함의 특수작전지원능력, 특수작전 모의훈련체계와 특수임무부대 전력 보강이 이에 해당된다.

이러한 3축 개념은 아직까지 그 효용성이나 적절성이 입증된 바 없다. 예컨대 항공대학 교수인 장영근은 2017년에 우리 정찰위성 5대로는 북한이 1개 이동식 발사대(TEL)로 핵미사일을 발사하더라도 사전에 식별하고 제거하는 임무수행 성공률이 0.12~2.64% 수준에 불과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한국형미사일방어(KAMD)의 경우 요격무기 레이더는 탐지거리가 제한될 뿐 아니라 북한 미사일이 35km 이상 상승해야 탐지가 가능하다. 그러면 KAMD는 발사준비시간, 발사 후 비행시간 등 총대응시간이 부족하고 요격자산 통합시험 및 검증시험도 누락되어 있어 실효성이 크게 의심된다. 공군 예비역 장성인 윤우는 2017년에 제3축인 KMPR은 북한 지휘부가 도발을 한 이후 북한 지휘부 은거지역을 정확히 공격해야 효과가 있는데, 은거지역을 정확히 식별할 수 있는지 신뢰성이 매우 낮다고 지적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1,700㎢에 달하는 평양시 전체를 고루 폭격해야 하는데 이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200조원을 들여 6만개 미사일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미사일을 투입해도 북한 지휘부는 모처의 벙커에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육군 지대지 미사일에 대해 회의론도 만만치 않다. 해군이 도입하려는 요격미사일 SM-3에 대해 미 의회조사국(CRS)도 2013년 6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요격고도가 500km로 지나치게 높아서 “(한국에서) 이점이 크지 않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처럼 수많은 무기체계가 거론되었는데, 3축 체계를 위해 신규도입/추가도입이 예상되는 무기체계 목록을 종합하면, 전략정찰기 E-8 조인트스타스, 해상초계기 P-8A 포세이돈, 해상작전헬기 MH-60, 무인공격기 MQ-1C 그레이이글/MQ-9 리퍼, 무인정찰기 RQ-170 센티넬/RQ-7 섀도/RQ-4 글로벌호크, 전투기 F-35A, 요격미사일 SM-3/SM-6/PAC-3 MSE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많은 군사전문가들이 3축 개념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지만 한반도 안보상황이 매우 엄중하고, 군사적 대비의 필요성이 절실함에 따라 한국의 역대 정부는 대규모 국방예산의 투입을 지속시키고 있다. 국방부 내에서조차 무기도입 사업이 너무 많아서 종국에 각 군의 합동작전이 저해될 우려까지 표출되고 있다. 육군이 미사일 쏘면 공군은 전투기를 띄울 수 없는데, 이럴 경우 북한의 주요 표적을 타격하는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느냐로 다툼이 벌어진다. 여기에다 전문가들은 3축 개념은 필연적으로 한국의 대규모 첨단 무기 해외구매로 이어져 국내에 방위산업과 첨단기술 육성 효과는 미미한 대신 미국 방위산업체에게는 막대한 이익을 안겨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예컨대 미국의 보잉사는 한국에 이미 F-15K 전투기 60대와 아파치 공격헬기 36대를 판매한 데 이어 조기경보기와 공중급유기까지 추가로 판매하려고 하고 있다. 록히드마틴은 F-16 전투에 이어 F-35A 전투기 40대를 판매하였고 같은 기종을 20대 더 판매하기를 희망하고 있으며 이지스함의 전투체계도 공급하였다. 이 두 개 회사는 3축 체계를 명분으로 한국으로부터 20조원 이상의 추가 수입을 올리게 된다. 노스롭그루먼은 글로벌호크 무인정찰기, 레이시온은 패트리어트 요격미사일을 한국에 공급한다. 이들 군수기업들이 한국에서 거두는 수익은 단순히 무기 판매로 인해 발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첨단 무기일수록 무기를 도입하는 비용보다 도입하고 난 이후에 운용과 정비로 인한 예산이 훨씬 더 많이 투입된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국부가 해외로 유출되고 정치적·기술적으로 미국에 종속되는 과정이 이어져 더욱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배꼽이 더 커지게 되는 국방예산, 정비비가 4조 7백억

예컨대 최근 공군이 도입하는 F-35A는 40대 도입에 약 7조7천억원(1대당 약 1,900억원)이 투입되었는데 앞으로 20년 간 운용 및 정비에는 약 10조원이 투입된다. 국방부는 소극적으로 소모품 위주로 운영유지비를 추산해 20년간 운영유지비 890억원 정도 소요된다고 보지만, 합동참모본부 측의 자료를 보면 20년간 1기 운영유지비에 2,500억원이 소요된다. 1시간 당 비행비용이 1만6천불에 달하는 이 전투기는 총 수명주기 기간에 미국에 의해 전면적으로 기술이 통제된다. 상시 정비를 요구하는 이 전투기를 한국군은 무단으로 뜯어볼 수 없고, 정비를 하려면 대륙별 F-35 정비창(MRO&U)이 있는 일본이나 호주에 반드시 입고시켜야 한다. 이 전투기의 모든 운항 기록과 정비 판단은 미국의 통합정보센터(ALIS)에서 실시간 데이터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이로 인해 한국군은 한국 전투기에 대해서도 무단 접근이 차단된다. 첨단 전투기를 정비할 능력이 없는 한국군은 대부분의 정비를 해외에 의존하게 된다. 그 결과 외주 정비의 해외의존율은 F-16은 76%, F-15K는 94%에 달하고 E-737은 100% 해외 의존이다. F-35의 경우도 스텔스 도료를 다시 칠하는 것까지 해외에 의존하게 되는 데, 그 비용은 추산조차 되지 않는다. 첨단 장비의 기체와 엔진의 정비, 구성품과 수리 부속의 해외 의존은 기하급수적으로 정비비 증가를 유발한다. 2019년 현재 군 장비 정비비는 3조1천억원이지만 매년 약 14% 정도 증가하여 2023년경에는 매년 4조7백억원을 투입해야 하는 것으로 국방부의 「국방중기계획’19~’23」은 전망하고 있다. 2023년에 이르면 4조7백억원 중 26%가 판매국으로 유출될 예정이다. 항공장비 정비비 해외 유출은 특히 심각한데, 2023년에는 항공장비 정비비 1조6천억원 중 절반 이상인 약 9,000억원이 해외로 유출된다. 정비하는 과정에서 성능개량이 추진될 경우 외국유출은 더욱 심각해서 정비하는 과정에서 성능개량이 추진될 경우 별도 비용이 추가된다. 한 번 첨단무기를 판매하면 구매국은 정비와 성능개량을 위해 지속적으로 종속의 길을 걷는다. 이런 상황이 되면 갑과 을의 위치가 전환되어 돈 주고 사정하는 촌극이 벌어지게 된다. 결국 한국군은 2020년대가 되면 해외 무기 도입에 매년 4~5조원을 투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비슷한 규모의 정비비 유출을 감당해야 하는 이중 부담에 짓눌리게 된다.

2019년에 국내 80여개 방위산업체는 매출과 영업이익, 수출, 고용효과가 모두 감소했다. 국방비는 세계 6위권이지만 한국의 항공·방위산업은 15위권에도 미치지 못한다. 우리보다 국방비가 절반에 불과한 이스라엘이 우리보다 8배나 많은 무기를 수출하고 있으며, 우리의 6분의 1에 불과한 스웨덴은 우리보다 6배나 많은 무기를 더 수출하고 있다. 우리는 항공기 구매는 월등히 많은데도 불구하고 항공 산업 능력은 이탈리아, 인도네시아, 남아공, 스페인에도 밀리고 있다. 스웨덴 스톡홀름 평화연구소가 2016년에 밝힌 바에 의하면 국방비 1원을 투입했을 때 부가가치 창출이 스웨덴은 2.3, 미국은 1.8인데 반해 한국은 0.7이다. 즉 국방비 투입으로 돈을 벌고 일자리를 만드는 외국과 달리 해외무기를 대규모로 도입하는 우리의 경우 국방비를 쓰면 쓸수록 손해라는 이야기다.

단순히 국부의 대량 유출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기술종속이 초래하는 지정학적 영향은 매우 심각하다. 일본이 우리에게 국방비를 추월당한다고 하지만 “모든 무기를 국내에서 생산한다”는 원칙에 따라 정비능력과 기술을 축적함으로써 한국을 종속시키게 된다. 현재 미쓰비시 중공업이 일본 나고야에 구축한 대규모 정비라인은 미국이 북태평양 지역의 F-35를 정비하게 될 지역정비창으로 지정되어 있다. 미국은 한국에 F-35를 판매하면서 한국 국내가 아닌 지역정비창에서 한국 전투기를 정비하도록 계약조건에 명기했다. 앞으로 우리가 군사적으로 위급한 순간에 일본에 군사정비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이럴 경우 동북아시아에서 지정학적 변화가 예상된다. 군사강국인 일본이 지도적 위치라는, 싫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한국의 비루한 처지가 현실화된다. 이에 대해 지금 군 당국은 별다른 대책이 없다. 육·해·공 각 군이 서로 더 많은 무기를 도입하기 위한 내부 경쟁에 몰입하여, 군사적 실효성이나 국가 이익보다는 자군의 몸집을 부풀리는 데 더 관심을 집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군사적 관료체제는 한국 안보의 합리성을 크게 저하시키고 있다.

국가차원의 군비통제센터로 무모한 질주를 막아야

2017년 9월 백악관은 '한국이 무기 수입을 하기로 했다'는 내용의 두 정상 전화통화 내용을 공개했다. 그해 11월 방한 때 트럼프 대통령은 직접 "한국이 무기 구매를 크게 확대해 (미국의) 무역 적자가 감소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인 2019년 4월 11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이 군사장비를 대량구매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거기에는 제트 전투기라든지 미사일 그 외에 여러 가지 장비가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앞으로 한국이 트럼프 행정부 임기 내에 10조원 이상의 무기를 더 구매할 가능성이 클 것으로 전망된다. 그런 가운데 북한은 한국군의 대규모 무기도입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며 “남북 군사합의 위반”이라는 비난을 퍼붓고 있다.

무기도입이 안보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안보를 약화시키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행 한국군의 군사작전 개념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는 ‘플랜 B’가 필요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3월, 국방부 업무보고에서 남북 관계 발전에 따라 대규모 군사력 증강을 억제하고 남북한 군비통제를 도모하는 새로운 계획을 만들라고 지시한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은 탐욕스러운 국방 관료에게 통하지 않는다. 아마도 대통령 직속으로 ‘한국군 3축 체계 평가위원회’를 구성하고, 국가 차원의 ‘군비통제 센터’를 만들어 한국군 무기 도입의 효율성을 검토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이 기고문의 견해는 필자의 개인 의견이지 동아시아 재단의 공식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필자소개

김종대(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김종대는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이다 (정의당 비례대표, 국회국방위 소속). 월간 <디펜스21+>의 전 발행인 겸 편집인이기도 한 김 의원은, 대한민국 14대, 15대, 16대 국회 국방위 보좌관을 역임하였으며 16대 대통령직인수위 국방전문위원, 대통령비서실 국방보좌관실 행정관, 국무총리비상기획위 혁신기획관, 국방부장관 정책보좌관 등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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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검찰 ‘부실수사’로 ‘조선일보 방사장’ 밝힐 길 없어졌다

강석영 기자 getout@vop.co.kr
발행 2019-05-20 20:24:39
수정 2019-05-20 20:2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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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검찰의 ‘부실 수사’로 고 장자연 씨 사건의 진상을 밝힐 수 있는 길이 가로막힌 현실이 확인됐다.

장 씨 사건에 대한 과거 검찰의 은폐 의혹 등을 조사한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심의한 대검찰청 진상조사단 보고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 시절 검찰은 장 씨의 문건 속 ‘조선일보 방 사장’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부실수사로 인해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다.

법무부 검찰 과거사위원회 문준영 위원이 20일 오후 경기도 과천 법무부에서 ‘고 장자연 씨 사건’ 최종심의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2019.05.20
법무부 검찰 과거사위원회 문준영 위원이 20일 오후 경기도 과천 법무부에서 ‘고 장자연 씨 사건’ 최종심의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2019.05.20ⓒ김철수 기자

법무부 검찰 과거사위원회(이하 위원회)는 20일 정부과천청사에서 ‘장자연 리스트 사건’ 조사 및 심의 결과를 최종 발표했다.

위원회의 재조사 권고를 받은 대검찰청 진상조사단은 ▲장자연 문건 속 ‘조선일보 방사장’에 대한 성 접대 의혹 및 ‘조선일보 사장 아들’에 대한 술 접대 강요 의혹 ▲조선일보 관계자들의 수사 외압 여부 ▲수사기관의 부실 수사 의혹 ▲‘장자연 리스트’의 존재 여부 ▲장 씨의 성폭행 피해 등 의혹 등을 조사했다.

이 밖에도 ▲기획사 대표 김종승에 의한 술 접대, 성 접대 강요 의혹 ▲김종승의 장자연에 대한 강제추행 및 추가 협박행위에 대한 수사미진 의혹 ▲김종승이 이 사건 관련 명예훼손 사건에서 위증했다는 의혹 등을 조사했다.

“부실 수사로 ‘방 사장’ 특정 어려워”

조사단은 끝내 ‘조선일보 방사장’을 특정하지 못했다. 과거 검찰이 부실 수사로 ‘방사장’을 특정할 기회를 놓친 이유가 결정적이었다. 위원회는 “당시 부실한 수사 등으로 장 씨가 ‘조선일보 방사장’에게 술 접대를 하고 잠자리를 강요받은 사실이 있는지 확인할 수 없다”라고 밝혔다.

또한 애초 강제 수사권이 없었던 진상조사단 활동은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과거사위원회 문준영 주심위원은 “장자연의 행적 및 이 사건 주요 의혹 관계자들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을 확인할 수 없었고, 주요 의혹 관련자들이 면담을 거부해 조사에 한계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다만 위원회는 ▲2007년 10월경 방용훈 코리아나호텔 사장과 장 씨가 만난 사실이 확인되는 점 ▲당시 방 사장이 술자리 등에서 ‘조선일보 방사장’으로 불리기도 한 점 등을 종합하면, “장 씨가 방용훈을 ‘조선일보 방사장’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은 있다”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당시 경찰은 ‘2007년 10월경 방 사장이 장 씨와 식사를 했다’라는 김 전 대표의 진술을 확보하고도 방 사장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아울러 검찰은 ‘조선일보 방사장’ 접대에 관한 사실관계 자체보다 이 사건이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과 무관하다고 판단하는 데 치중한 채 수사를 종결한 것으로 드러났다.

방용훈 코리아나 호텔 사장과 방정오 TV조선 전 대표이사
방용훈 코리아나 호텔 사장과 방정오 TV조선 전 대표이사

위원회는 “수사 검사는 방상훈 사장이 ‘조선일보 방사장’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하더라도 ‘조선일보 방사장’이 누구인지, 장 씨가 피해를 호소한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으나, 수사 당시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혐의를 두는 것이 합리적이었다고 판단되는 방용훈 사장을 상대로 전혀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다”라고 지적했다. 검찰의 부실수사로 ‘조선일보 방사장’의 실체를 규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방사장의 아들’에 대해 위원회는 과거 수사 미진으로 방정오 전 TV조선 대표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현재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장 씨에 대한 방 전 대표의 술 접대 강요 등 범죄 사실이 있었다고 판단할 만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방 전 대표가 2008년 10월경 한 유흥주점에서 김 전 대표에게 술 접대를 받으며 장 씨와 동석한 사실이 인정되지만, 검찰은 방 전 대표의 모임 당일과 다음 날 이틀간 통화 내용만 좁게 확인하는 데 그쳤다.

조선일보 수사 외압 확인돼
“우린 정권도 창출할 수 있다”

방 씨 일가에 대한 수사에서 조선일보가 사건 무마를 위해 외압을 행사한 사실도 드러났다. 위원회는 “조선일보 관계자의 진술에 의하면 2009년 당시 조선일보사가 대책반을 만들어 장 씨 사건에 대처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장 이모 씨가 조현오 경기청장에게 “조선일보는 정권을 창출할 수도 있고 퇴출시킬 수도 있다. 이명박 정부가 우리 조선일보하고 한 번 붙자는 겁니까?”라며 방상훈 사장을 조사하지 말라고 협박한 사실도 인정됐다.

다만 ‘조선일보가 수사기록을 제공받고 통화 내용 삭제를 시도했다’라는 의혹에 대해 위원회는 관련자의 진술을 확보했으나 이를 뒷받침할 추가 진술이나 구체적인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법무부 검찰 과거사위원회 문준영 위원이 20일 오후 경기도 과천 법무부에서 ‘고 장자연 씨 사건’ 최종심의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2019.05.20
법무부 검찰 과거사위원회 문준영 위원이 20일 오후 경기도 과천 법무부에서 ‘고 장자연 씨 사건’ 최종심의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2019.05.20ⓒ김철수 기자

위원회는 장 씨 사건에 대한 과거 수사가 부실했음을 분명히 했다. 위원회는 ▲장 씨 등 주요 인물에 대한 통화 내용을 보존하지 않은 점 ▲경찰이 장 씨의 주거지 등 압수수색에서 주요 증거가 될 수 있는 ‘조선일보 방사장’ 등이 적힌 다이어리 등을 압수하지 않은 점 ▲디지털 압수물 자료 편철이 빠진 점 등을 지적했다.

수사 부실로 증거인멸에 공소시효 만료까지
재수사 불가능하게 만들어놓은 MB 검찰

‘조선일보 방 사장’ 외에도 성 접대 요구자의 명단이 적혀있다는 ‘장자연 리스트’의 존재 여부와 관련해, 위원회는 진상조사단이 관련자들의 엇갈린 진술로 인해 확정할 수 없었지만 ‘리스트’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고 밝혔다.

‘장 씨가 술 접대 자리에서 약을 탄 술을 마시고 성폭행당했다’라는 의혹에 대해, 위원회는 동료 배우인 윤지오 씨 외에도 관련자들의 진술이 나왔으나 “이들의 진술만으로는 구체적인 가해자 등을 알 수 없으므로 수사를 개시할 수 있는 객관적 혐의가 확인됐다고 보기에는 부족하다”라고 봤다.

이외에도 위원회는 기획사 대표 김종승 씨에 대해 “장 씨에게 술 접대를 강요한 사실은 인정된다”라면서도 “성 접대 강요나 성매매알선이 있었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또 김 씨가 장 씨를 강제 추행했을 가능성이 크고 협박한 사실이 분명함에도 이에 대한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 사건과 관련한 재판에서 김 씨가 거짓 증언한 정황도 확인했다.

위원회는 여러 의혹을 확인했으나, 과거 검찰의 부실 수사로 주요 증거가 사라지거나 공소시효가 만료돼 기획사 대표 김 씨의 위증 혐의에 대한 수사 권고만 내렸다. 아울러 위원회는 ▲성폭행 피해 증거의 사후적 발견에 대비한 기록 보존 ▲디지털 증거의 원본성 확보를 위한 제도 마련 ▲압수수색 등 증거확보 및 보존 과정에서 공정성 확보 방안 마련 등을 권고했다.

정한중 과거사위원장은 “한 젊은 여성의 꿈을 짓밟은 고위 공직자들과 언론 및 연예계의 힘 있는 자들을 처벌할 수 없어도 양심에 의한 심판은 피할 수 없다”라며 “우리 사회 권력자들에게 성찰의 계기가 된다면 과거 사건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사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강석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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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재인 대통령에게 '감옥 갈 일' 하라는 건가?

[기고] 대법원 '강제동원' 판결 국면을 점검한다 ②

 

 

 

한일관계가 최악이라고들 한다. 지난해 11월 21일에 여성가족부가 '화해‧치유 재단' 해산 방침을 발표한 것이나, 뒤이은 일본 초계기 논란도 원인으로 지목되지만, 가장 큰 원인은 지난해 10월 30일 대법원이 신일철주금(현재의 일본제철)을 상대로 한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선고한 것이 꼽힌다.

판결이 선고되자 '국가의 자격이 없다'라는 등 험한 말을 쏟아내던 일본은 이후 '한국 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라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30일과 11월 29일에 발표된 외무대신 담화에 압축되어 있는 일본 정부의 주장은 '1. 대법원 판결은 '청구권협정' 위반이다, 2. 한국 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3. 그러지 않으면 일본 정부가 대응 조치를 강구하겠다'라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한국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한국 정부와 기업이 나서서 일본 정부와 기업도 참여하는 기금을 만들어 해결하라거나(2+2), 일본 정부는 빼고 3자가 참여하는 기금을 만들어 해결하라는(2+1) 주장들이 그것이다. 심지어 '종족적 민족주의'라는 낙인으로 한국 정부를 비난하는 칼럼까지 나왔다.  

모두 다 표적을 벗어난 것이다. 반년 이상 이어지고 있는 이 갈등은 대법원 판결의 의미를 정확하게 포착함으로써만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  
 

▲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춘식 씨가 지난해 10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승소 판결을 받고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 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 

대법원 판결은 국제법상의 조약 해석 원칙에 따라 '강제동원 문제는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되지 않았다'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 판단이 자신의 해석과 다르다고 해서 '조약 위반'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 일본 정부가 할 수 있는 주장은 최대한으로 잡아도 '해석이 다르다'라는 데 그쳐야 한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청구권협정' 제3조에 따라 '해석상의 분쟁'에 관한 협의를 요청해왔다. 2011년에 한국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 같은 근거로 협의를 요청한 것과 마찬가지 방식이다. 당시에는 일본 정부가 요청을 거부했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요청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과연 '해석상의 분쟁'은 존재하는가? '해석상의 분쟁'이 존재하려면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 문제는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되었다'라고 주장해야 한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그런 주장을 하지 않는다. 단지 '징용공 문제 혹은 한반도 출신 노동자 문제가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되었다'라고 할 뿐이다.  

대법원 판결은 강제동원과 징용은 다르다고 한다. 전자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것인 데 대해 후자는 그 합법성을 전제로 한 것이라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대법원 판결의 전제인 '식민지배의 불법성' 자체를 부정한다. 따라서 '강제동원' 자체를 부정한다. 그러므로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도 '강제동원' 문제는 '청구권협정'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애당초 '해석상의 분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나서라는 건 무슨 의미인가?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대해 조치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야기하지 않은 채 마냥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라고만 하고 있다. 결국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하라는 이야기인데, 과연 그게 뭘까? 한국 정부가 나서서 대법원 판결을 뒤집으라는 것인가? 한국 정부가 압력을 가해 대법원으로 하여금 판결을 뒤집게 하라는 것인가? 한국 정부가 대법원 판결에 따른 강제집행을 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인가? 

대한민국은 삼권분립에 입각한 민주주의국가이다. 당연히 행정부가 사법작용에 관여할 수 없다. 판결도 강제집행도 모두 사법작용이다. '재판거래'를 시도해 삼권분립을 유린했다는 혐의로 전직 대법원장이 구속기소되어 있고, 그 '거래'의 상대인 전직 대통령은 감옥에 있다. 그런데 정부가 나서서 삼권분립을 허물라니, 대통령에게 감옥갈 일을 하라니, 이것이 과연 이웃나라에 대해 할 수 있는 요구인가? 

무엇보다 일본 정부 자신이 강제동원 문제에 대해 기업보다 더 큰 책임이 있다. 강제동원을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강행한 주체는 다른 아닌 '대일본제국 정부'이다. 그래서 피해자들이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할 때는 일본 기업은 물론이고 일본 정부도 피고로 했다. 2000년에 한국에서 소송을 제기할 때 일본 기업만을 피고로 한 것은 '다른 주권국가를 법정에 세울 수 없다'는 국제법상의 '주권면제 법리'를 고려한 때문이다.  

게다가 2000년대에 들어 국제인권법의 발전에 따라 '주권면제 법리'를 제약하려는 흐름도 형성되고 있다. 2004년에 이탈리아 대법원은 나치 독일에 의해 강제동원됐던 이탈리아인이 독일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에서 인권 등 국제법상의 보편적인 가치가 우선한다는 이유로 '주권면제 법리'를 배제하는 판결을 선고했다. 2012년에 국제사법재판소가 그 판결을 뒤집었고, 이탈리아 국회가 그 취지를 반영한 법률을 제정했으나, 2014년에 이르러 이번에는 이탈리아 헌법재판소가 그 법률이 위헌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사실상 '주권면제 법리'를 배제했다.  

한국에서도 2016년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서 현재 진행 중이고, 강제동원, 징용, 징병, 사할린 억류 한인, BC급 전범 피해자 등도 한국 법원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소송에서 '주권면제 법리'가 다투어지게 될 것이다. 

요컨대 강제동원 문제에 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은 지금까지는 소송 절차상의 장애 때문에 제기되지 않은 것일 뿐이며, 앞으로 법정에서 다루어지도록 예정되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책임의 당사자로 지목되는 일본 정부가 마치 한국 정부에게 모든 책임이 있는 양 채근하는 것은 사태의 본질에서 한참 벗어난 적반하장이다.  

'우리가 나서야 한다'? 

2+2는 대법원 판결과 충돌한다. 대법원 판결의 결론은 강제동원 문제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곧 강제동원 문제는 해결된 적이 없고, 일본 정부와 기업에게 법적 책임이 남아 있으며, '청구권협정'의 결과 한국 정부가 수령한 무상 3억 달러의 가치를 가지는 일본국의 생산물 및 일본인의 용역은 강제동원 문제와 관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한국 정부와 기업은 강제동원 문제에 대해서는 적어도 '법적 책임'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법적 책임이 없는 한국 정부가 나서서 마찬가지로 법적 책임이 없는 한국 기업에게까지 기금을 내게 하여 해결하라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이다. 가해자인 일본 정부와 기업은 오히려 책임이 없다며 발뺌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구나 그렇다. 심지어 일본 정부는 빼주자는 2+1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전례로 드는 독일의 '기억, 책임, 미래 재단'은 가해자인 독일 정부와 기업이 만든 재단이라는 사실을 되새겨야 할 터이다.

한국 정부의 '감성적 종족적 민족주의'를 탓하는 비난 역시 뒤집힌 논리이다. 대법원 판결은 국제법상의 조약 해석 원칙에 근거하여 내려진 판단이다. 극단적인 '종족적 민족주의'인 '대일본제국'의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 눈 감고서, 그 잘못을 조악한 법논리로 회피하려는 일본국의 '종족적 민족주의'에 대해 눈 감고서, 그에 대한 법적 책임 추궁에 오히려 '종족적 민족주의'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그 전도된 의식의 뿌리가 사뭇 궁금하다. 

위와 같은 근거가 박약한 주장이나 비난들과는 결을 달리하는 제안도 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성공을 위해 "먼저 식민지 시대에 대해서는 일본이 책임을 보다 명확하게 인정"하고, "대신 배상 문제에 대해서는 그동안 일본 정부가 해온 여러 경제적 조처를 사실상의 배상으로 우리가 인정"하는 역사선언을 하자는 것이 그것이다. (☞ 관련 기사 : '레이와' 시대, 오해와 진실 

이 제안은 대법원 판결 이전이었으면 매력적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선 지금의 일본이 그런 방향으로 움직일 현실적인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따져볼 일이다. 나아가 무엇보다 대법원 판결이 일본 정부의 여러 경제적 조처는 배상이 아니라고 하는데 한국 정부가 그것을 배상으로 인정하게 되면 배상 책임을 대신 떠안아야 한다는 문제도 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일본의 협력을 도출해야 한다는 당위론은 한국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모든 주장의 근거로 등장한다. 그 당위론 자체는 틀린 것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일본 정부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이다. '종족적 민족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움직인다면 그것이 과연 한반도 평화에 도움이 될 것인가? 보다 현실적으로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을 것인가? 냉철하게 따져보고 대응해야 할 일이다.

한국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문재인 정부가 취하고 있는 원칙은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라는 것이다. 2+2 이야기가 불거졌을 때 '비상식적'이라고 잘라버린 것은 그 연장선상에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 조치 자체는 적절했다.  

한편 한일관계의 현실에 대해서는 "대법원 판결과 사법 절차를 존중한다는 기본 입장 하에 피해자들의 정신적 고통과 상처를 실질적으로 치유해야 한다는 점과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하여 대응방안을 마련해 나가고자 한다"라는 것이 외교부의 입장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월 10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강제동원 문제는 "한국 정부가 만들어낸 문제"가 아니라 "과거 불행했던 역사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며,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정부가 사법부 판결에 관여할 수 없"고 "사법부 판결을 존중해야" 하므로, 일본도 "한국 법원의 판결에 불만이 있더라도 기본적으로 그 부분은 어쩔 수 없다는 인식을 가져야" 하며, "문제를 정치 쟁점화해서 논란거리로 만들고 확산시키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니"라고 짚은 것도 같은 취지인 것으로 보인다.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월 10일 청와대에서 가진 신년 기자회견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청와대


기본적으로 타당한 방향이다. 하지만 왠지 수세적이다. 일본 정부는 '국제법 위반이다'라며 연일 떠들고 있는데, 한국 정부의 '대응방안'은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가해자가 큰 소리를 치고 피해자는 움츠러들어 있는 듯한 어색한 풍경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법원 판결은 강제동원 문제가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곧 피해자들의 청구권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도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정부는 승소한 피해자들은 물론이고 소송을 제기하지 못한 수많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도 배상하라고 일본 정부와 기업에 대해 요구하여 마땅하다.

그 요구의 시기와 강도는 현실 외교의 상황을 고려하여 결정한다고 하더라도,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라는 입장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히는 것은 지금 당장 필요하다. '사법부의 판단'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관한 문제는 해결된 적이 없고, 일본 정부와 기업에게 그에 대한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라는 것이다. 그것을 한국 정부의 입장으로 명확하게 선언함으로써 이 어색한 풍경을 바로 잡아야 한다. 

문제는 문자 그대로 '역사'에 관한 것이다. 1965년에 해결하지 못하고 묻어두었던 본질적인 문제가 반세기가 지나 다시 분출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보다 꽉 짜인 '사실과 법논리의 대결'이라는 모습으로 불거졌다. 적어도 1990년대 초 이래 3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축적된 사료와 논리의 결과물이다.  

문제가 본질적인 것인 만큼 단기간에 해결되기 어렵다. 긴 호흡으로 충실한 자료와 정치한 논리를 쌓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때마침 일본 정부가 역사 갈등 상황에 대한 대응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전문가를 육성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컨트롤 타워 부재'를 지속적으로 지적받고 있는 한국 정부의 입장에서 크게 주목해야 할 일이다. 

덧붙임 : 다수의 언론이 계속해서 '강제징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적절하지 않다. 대법원 판결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강제동원'이다. 강제연행과 강제노동을 합친 개념이다. 무엇보다 대법원 판결은 강제동원과 징용이 엄격하게 구별된다고 하고 있다. 따라서 '강제징용'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혼란을 초래할 위험이 큰 용어이다. '강제징용' 대신 '강제동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간곡하게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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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붙는 ‘전교조 법외노조 취소’ 촉구 목소리

불붙는 ‘전교조 법외노조 취소’ 촉구 목소리
 
 
 
백남주 객원기자 
기사입력: 2019/05/21 [07:0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재야원로’ 326명과 1,610개의 전국시민사회단체들이 전교조 법외노조 취소를 촉구하는 서한을 발송했다. (사진 : 민중의소리)     © 편집국

 

오는 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창립 30주년을 앞두고각계각층에서 전교조 법외노조 취소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학술계교육계문화예술계종교계언론계 등의 재야원로’ 326명과 1,610개의 전국시민사회단체들은 20일 오전 11청와대 분수대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청와대에 전교조 법외노조 철회를 촉구하는 서한문을 보냈다.

 

재야원로들은 전교조 창립 30주년이 되는 지금까지 박근혜가 저지른 민주노조와 참교육 죽이기란 폭거만행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으니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라며 해직된 교사 9명을 조합원으로 품었다는 이유로 6만 명이나 되는 전교조의 법적 지위를 통째로 박탈하는 행정명령을 내린 것은 교통신호를 위반한 적도 없는 노동자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재야원로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구시대의 잘못된 관행과 과감히 결별하겠습니다약속을 지키는 솔직한 대통령이 되겠습니다라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며, “자기 말을 스스로 거역하는 건 촛불 대통령이 아니요그것은 바로 박근혜 독재의 연장이라고 주장했다.

 

재야원로들은 적폐 청산의 첫걸음은 바로 전교조 법외노조 만행 취소라며 또다시 기다려라시간을 달라고 한다면 이제 우리의 싸움은 문재인 정부와 전면전을 시작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경고했다.

 

시민사회단체들도 서한문을 통해 박근혜 정부에서 전교조가 법외노조였던 총 기간은 754이었다며 오는 6월 4일부터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전교조 법외노조 기간은 박근혜 정부 때보다 길다고 지적했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촛불의 힘으로 탄생한 정부가 출범 3년 차인 지금까지 과거 정부의 가장 큰 적폐 행위였던 전교조 법외노조 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무능을 넘은 반민주 행위이며 촛불 항쟁에 대한 모독이고 촛불 민심에 대한 반란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교조 측에 따르면 이번 전교조 법외노조 취소 촉구 서한에 참여한 단체수는 1,610개로 지난 촛불집회를 주도했던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에 참여한 1,533개 단체보다 많다.

 

▲ 전교조 법외노조 철회 촉구 서한을 청와대 측에 전달하고 있는 참가자들. (사진 : 민중의소리)     © 편집국

 

기자회견 이후 대표단은 전교조 법외노조 즉각 취소 촉구 서한을 청와대 측에 전달했다.

 

전교조는 이날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전국교사대회가 열리는 25일 전까지 학부모단체와 시도교육감협의회 등에서 릴레이로 기자회견을 이어갈 예정이다.

 

한편 전교조는 20일 오후 1시 30분부터 서울 정부종합청사 옆 세종로 소공원에서 전교조 법외노조 취소 촉구’ 농성 선포식을 갖고 천막농성에 돌입했다전교조는 25일까지 법외노조가 취소되지 않을 시 29일 11시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29일부터 청와대 앞에서 농성투쟁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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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5.18광주에 개입한 까닭


[기획연재] 5.18과 미국 (3)

5.18광주항쟁 39주기를 맞아 미국에 학살 책임을 묻는 2단계 진상규명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이에 기획연재 ‘5.18과 미국’을 통해 ‘광주의 진실’에 한발 다가서고자 한다. [편집자]

[기획연재] 5.18과 미국
(1) 전두환 하나회의 배후는 누가인가
http://www.minplus.or.kr/news/articleView.html?idxno=7289
(2) 5.18 발포명령, 누가 내렸는지 모른단 말인가
http://www.minplus.or.kr/news/articleView.html?idxno=7299
(3) 미국이 5.18광주에 개입한 까닭

자유한국당은 5.18 북한개입설을 프레임으로 수구세력 결집을 위해 애를 썼지만, 39주기를 맞은 5.18광주는 미국개입설이 더 화제다.

12.12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신군부와 미국과의 관계로 보나, 한미연합사 소속 20사단이 민간인에 총질한 것으로 보나 군사작전통제권을 쥔 주한미군과 미국의 5.18 개입 사실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신군부를 도와 5.18광주학살에 개입했을까?

미국의 5.18 개입은 미국 금융자본과 군수자본의 요구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중반 자본주의를 이끌었던 케인즈주의는 70년대 두 번의 오일쇼크를 거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80년대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가 등장,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지배하게 된다.

신자유주의라는 미국식 자본주의로 일색화하는 데서 한국을 첨병역할로 구상하고 있던 미국으로선 박정희 군부독재 이후 한국에 민주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도저히 허용할 수 없었다.

미국경제를 이끄는 쌍두마차인 군수자본의 입장에서도 한국에 평화통일을 바라는 민주정부가 수립돼서는 절대로 안 될 일이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80년 5.18관련 내란음모 등 혐의로 계엄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진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80년 ‘서울의 봄’로 불리던 민주화의 열기는 당시 가택연금에서 해제(1979.12.08.)된 김대중 씨를 가장 유력한 대통령감으로 꼽고 있었다.

만약 5.18 내란음모죄로 사형이 선고되지 않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80년에 대통령이 됐더라면, 2000년 615공동선언이 20년 당겨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 군수자본은 무기를 소비해야만 돈을 벌 수 있다. 무기 소비는 오로지 전쟁과 전쟁연습으로 가능하다. 그 때문에 미국은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고 분쟁지역을 만들어 미군을 파견, 전쟁을 대비한 군사훈련을 지속한다.

한반도의 평화는 곧 미국 국익의 심각한 손실을 의미한다.

지난 1월 발표한 ‘세계 방산시장 연감’은 이런 사정을 잘 설명하고 있다. 한국의 보수정권 시절인 지난 2008~2017년 미국의 무기수출 현황을 보면 한국이 7조원을 넘겨 세계 3위를 기록했다.

해방후 미군정 하에서 김구 선생을 암살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세운 것처럼, 4.19혁명이 일어나자 박정희를 앞세워 5.16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것처럼, 미국은 이번에도 김대중을 5.18내란음모죄로 몰아 제거하고 체육관선거를 통해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만든다.

이후 존 위컴 5.18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은 “한국민은 ‘들쥐’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어도 따를 것”이라고 자신의 심정을 제법 솔직하게 밝혔다.

지난해 9월 트럼프 미 대통령이 “그들(한국)은 우리(미국)의 승인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모욕적인 말이 어떻게 나올 수 있었는지 이제는 알 것도 같다.

강호석 기자  sonkang1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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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통일교육, 보편적 가치 중요시하는 분위기"

제7회 통일교육주간 개막, '평화·통일교육 컨퍼런스' 열려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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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5.20  17:4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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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준기 통일교육원 원장이 20일 열린 제7회 통일교육주간 평화·통일교육 컨퍼런스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통일부와 교육부가 공동 주최하는 제7회 통일교육주간이 20일 오전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개막됐다.

지난해 '평화·통일교육'이라는 개념으로 통일교육의 기본방향을 정리한 후 첫 번째 열리는 제 7회 통일교육주간에서는 이날 개막식에 이어 △한반도의 지속가능한 평화와 교육 △평화·통일교육의 방향과 쟁점 △학교/사회/해외의 평화·통일교육 등을 주제로 한 평화·통일교육 컨퍼런스로 첫 행사가 열렸다.

김연철 통일부장관은 모시는 글에서 "평화·통일교육은 자라나는 어린이에게 어울려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이 많은 젊은 세대에게 통일이 어떤 희망을 줄 수 있는지, 국민들에게 우리 민족의 미래는 어떤 모습인지, 이야기하고 함께 고민하는 일일 것"이라고 말했다.

백준기 통일교육원 원장은 환영사를 통해 "기존 통일교육의 방향과 하향식 통일교육에 대한 우려, 그리고 평화·통일교육의 합목적적 체계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이 있었다"고 하면서 "오늘 이 자리가 이러한 우려와 질문들에 대해서, 평화와 통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자유롭게 토론을 펼치는 공론의 장이 되기를 희망한다. 정부는 다양한 논의가 논의로서 그치지 않고 사회적 합의로 발전할 수 있도록 정책에 반영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재정 경기도교육청 교육감은 기조연설에서 지난해부터 본격화된 한반도 평화기류를 설명하고는 "흔히 건전한 안보관을 목적으로 하는 통일교육이 아니라 보다 더 적극적으로 평화시대를 만들어 가기 위한 통일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 시민이 깨어나 분단 대결구도를 벗어나 평화를 만들고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진정한 화해와 통일의 길을 열어갈 수 있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2017년 경기도교육청이 수도권 교육청과 함께 출간해 사용하고 있는 '통일시민교과서'를 사례로 제시하면서 "우리 학생들은 통일문제를 자기 삶의 미래로 생각하고 스스로 해법을 찾아가고 있다. 현재까지 진행된 남북간의 대화는 물론 국제사회와 북한간의 갈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를 학생들의 눈높이에서 이해하고 해법을 제기할 수 있도록 교육해 나가고 있다"고 소개했다.

올해에는 학생들이 통일과 평화를 위한 자신만의 동기를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현장체험학습을 새로 시작했으며, 앞으로 이 프로그램을 '자유학년제'에 적용하여 모든 학생들이 평화·통일 교육에 참여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편성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 이재정 경기도교육청 교육감은 기조연설에서 교육이 시대를 앞서 나가야 한다며, 교육이 평화·통일의 길이라고 강조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 교육감은 "교육이 시대를 앞서 나가야 한다. 교육은 이제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고 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탐구하여 여러가지 가능한 답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하면서 "교육이 평화·통일의 길"이라고 역설했다.

이어진 평화·통일교육 컨퍼런스 1세션에서 정현백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발제를 통해 한반도 통일교육 패러다임의 전환은 이미 진행되고 있다고 하면서 "'평화·통일교육, 방향과 관점'이 통일은 과정이라는 인식, 통일교육과 평화교육을 결합하려는 노력, 북한과의 동질성 강조 등 여러 진전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통일부는 학교와 지역사회에서 통일교육을 실시할 때 활용할 수 있도록 배포하는 '통일교육지침서'를 2018년 '평화·통일교육, 방향과 관점'으로 바꾸어 발간하고 다양한 의견수렴과정과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평화·통일교육의 중점방향' 15개항을 도출했다.

'평화·통일교육, 방향과 관점'에 정리된 ' '평화·통일교육의 중점방향' 15개항

1.통일은 우리 민족이 지향해야 할 미래이다.  
2.한반도 통일은 민족문제이자 국제문제이다.  
3.통일을 위해서는 남북한의 주도적 노력과 함께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이 필요하다.  
4.평화는 한반도 통일에 있어 우선되어야 할 가치이다.  
5.통일은 튼튼한 안보에 기초하여 평화와 번영을 구현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6.북한은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는 경계의 대상이면서 함께 평화통일을 만들어 나가야 할 협력의 상대이다. 
7.북한에 대한 이해는 객관적 사실과 인류 보편적 가치 규범에 기초해야 한다. 
8.북한은 우리의 공통의 역사·전통과 문화·언어를 공유하고 있다. 
9.남북관계는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이다. 
10.남북관계는 기존의 남북합의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11.남북관계 발전을 이해 화해협력과 평화공존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12.통일을 통해 구성원 모두의 자유·인권·복지 등 자유민주적 가치가 보창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 
13.통일은 한반도 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 및 세계의 평화와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어야 한다. 
14.통일은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15.통일은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추진해야 한다.

(출처-통일부, 2019통일백서, 270쪽)

그러나 아직 안보의식과 평화의식,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등 충돌할 수 밖에 없는 내부 요소의 정리가 난해한 문제로 남아 있다고 하면서 효과적인 실행방안에 대한 논의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평화교육은 인간의 생각과 행동, 태도는 교육과 학습을 통해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라고 하면서 "평화·통일교육의 효과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인권교육, 양성평등교육, 폭력예방교육, 다문화 이해교육, 평화교육, 통일교육, 민주시민교육 등 각각 산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교육들을 통합적으로 운영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사진 왼쪽부터 양문수 북한연구학회장, 정현백 성균관대 명예교수, 여현철 국민대 교수, 심근석 경북 경산중 교사, 윤신원 서울 성남고 교사, 정지윤 부산교대 학생.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토론자로 나선 여현철 국민대 교수는 통일교육에도 흐름, 유행이 있는 것 같다고 하면서 "과거에는 민족의 동질성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통일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를 많이 언급했었는데, 분단 상황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젊은 대학생들에게 통일편익(통일대박)을 강조하는 흐름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평화, 민주, 세계시민' 등 보편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라고 언급했다.

이러한 변화는 정부의 성격이나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지만 일관되고 지속적인 통일교육, 그리고 목표지향적인 통일교육과 함께 과정으로서의 평화교육도 중요하다는 등의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공감을 표시했다.

이날 컨퍼런스는 한만길 흥사단 교육운동본부 상임대표의 사회, 조정아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원과 김지수 교육개발원 통일교육실장이 발제, 안승대 대구미래대 교수와 정영철 서강대 교수가 토론자로 나선 2세션 '평화·통일교육의 방향과 쟁점', 그리고 박성춘 서울대 교수, 최혜경 어린이어깨동무 사무총장, 정주진 성공회대 교수 등이 발제를 하고 관련 전문가들이 토론자로 나선 3세션 '학교/사회의 평화·통일교육과 해외 평화교육 사례'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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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기념식, 조선 “화합 사라져” 한국당 “분열 조장”

[아침신문솎아보기] 중앙·동아 황교안 ‘험난한 광주 방문’ 부각
경향 “한국당, 신군부 민주정의당의 후신… 반성없는 가해자”

장슬기 기자 wit@mediatoday.co.kr  2019년 05월 20일 월요일

지난 18일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을 두고 조선일보와 자유한국당은 ‘분열을 조장하는 반쪽 행사’였다며 문재인 정부를 비판했다. 중앙·동아일보 등에선 황교안 한국당 대표가 기념식에 참여했다가 광주시민들에게 거센 항의를 받아 고전하는 모습을 자세히 전했다.

반면 서울신문은 극우성향의 보수단체가 집회를 열었지만 광주시민들이 성숙하게 대응해 별다른 충돌 없이 기념식을 끝냈다고 평가했다. 경향신문은 황 대표가 5·18 망언을 한 이종명 의원 제명,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특별법에 따른 진상조사규명위 설치 등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며 관심을 모았고, 한겨레는 특별법을 통과해 역사왜곡과 폄훼를 단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20일자 경향신문 만평
▲ 20일자 경향신문 만평
 
다음은 20일자 아침종합신문 1면 머리기사 제목이다.
경향신문 “황교안 ‘진정한 검증대’ 다시 서다” 
국민일보 “20대 국회는 팽개치고 총선에 정신팔린 여야” 
동아일보 “한국에 속성 박사유학 ‘중국의 학위공장 될판’” 
서울신문 “도장 하나에 운명 달린 ‘위기의 아동’” 
세계일보 “단기 성과만 내려다…효과 못 내는 국정과제” 
조선일보 “美전투기 위해 섬까지 사주는 일본” 
중앙일보 “굳어지는 ‘확장재정’ 내년 예산 500조 돌파” 
한겨레 “‘바보 노무현’의 도전, 지역주의 허문 씨앗 되다” 
한국일보 “전쟁 임박한 듯 민간인 철수…美-이란 ‘초긴장’”
 

 

조선일보는 정치면에서 여당이 한국당에 “총공세”를 펼쳤고, 시민사회단체 시위에도 가야할 곳을 다녀왔다는 황 대표의 말을 전했다. 문 대통령이 “독재자의 후예가 아니라면 5·18을 다르게 볼 수 없다”고 말한 것을 전하며 조선일보는 “여권은 이에 발맞춰 한국당의 역사관을 규탄하는 등 대야 총공세를 펼쳤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교수들의 발언을 인용하며 이런 모습을 불필요한 정쟁으로 규정했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는 조선일보에 “정치권이 역사적 상처인 5·18을 정쟁의 장으로 활용해 서로 지지층 결집만을 꾀한다면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고, 홍득표 인하대 명예교수는 이 신문에 “내년 40주기 기념식은 광주 영령의 넋을 진심으로 기리는 사회 통합의 장이 돼야 한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황교안 ‘환영받으러 오지 않았다, 꼭 와야할 곳이기에 왔다’”는 기사에서 민주노총·민중당 등 일부시위대가 황 대표에게 의자와 물병을 던졌다며 황 대표 앞에 의자가 날아든 사진을 실었다. 민경욱 한국당 대변인은 페이스북에 “김정숙 영부인은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악수하고, 악수를 청하지 않은 채 황 대표 얼굴을 뻔히 쳐다본 뒤 좌측으로 넘어가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와 악수했다”며 비판했다. 청와대 쪽은 “고의가 아니라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라고 해명했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문 대통령이 사실상 우리 당을 겨냥하는 발언을 했다”며 “반쪽짜리 기념식을 본 듯해 씁쓸하다”고 했다. 이에 조선일보는 ‘만물상’이란 칼럼에서 “5·18 단체 회원들의 육탄항의와 ‘물러가라’는 구호”, “김정숙 여사가 황 대표와 고의로 악수를 하지 않았다” 등을 언급하며 “과거 기념식도 시끄럽긴 했지만 이 정도로 살풍경은 아니었다”며 “화합이란 말이 사라진 채 반쪽이나 다름없는 행사가 됐다”며 나 원내대표의 발언에 힘을 보탰다. 

▲ 20일자 조선일보 정치면 기사
▲ 20일자 조선일보 정치면 기사
 
▲ 20일자 중앙일보 1면 사진기사
▲ 20일자 중앙일보 1면 사진기사
 
▲ 20일자 동아일보 정치면 사진기사
▲ 20일자 동아일보 정치면 사진기사
 

 

동아일보도 정치면에서 “황교안에 의자-물병 날아들어…격렬 항의 속 비상문으로 퇴장”이란 기사에서 황 대표가 항의 받는 모습을 자세히 전했다. 이 신문은 황 대표가 “호남시민들, 광주시민에게 한국당이 사랑과 신뢰를 회복할 길을 찾아보겠다”고 한 말을 전했다. 또한 같은 면에 황 대표가 넥타이를 붙잡히는 장면을 담은 사진기사를 실었다.

중앙일보 역시 1면에 “의자 날아든 황교안 5·18기념식 가는 길”이란 사진기사를 실었고, 8면에선 “황교안 200m 행사장 가는데 15분, 나올 땐 정문 아닌 옆길로”란 기사에서 황 대표가 항의받는 모습을 부각했다.  

반면 서울신문은 이번 기념식에서 큰 충돌이 일어나지 않은 점에 주목했다. 사회면 “극우의 욕설·폄훼에 무대응으로 맞서…5월의 광주는 성숙했다”는 기사에서 “기념식을 하루 앞둔 지난 17일부터 자유연대·턴라이트 등 보수단체가 전남대 정문에서 ‘5·18 유공자 명단 공개’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으나 시민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서울신문은 “이런 단체가 터무니없는 주장을 할 수 있는 것도 오월열사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며 “이들이 더 이상 5·18에 대한 왜곡과 폄훼를 할 수 없도록 진상규명조사위원회를 조속히 꾸리고, 왜곡처벌법이 제정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는 시민들의 주장도 전했다.  

이어 “(보수단체 집회에서) 발언자로 나선 일부 인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욕설을 일삼았다”며 “하지만 지나가는 시민들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맞대응을 자제했다”고 전했다.  

서울신문은 5·18을 폄훼하는 모습에 단호하게 나서지 않는 황 대표를 비판했다. 이 신문은 “‘임을 위한 행진곡’ 부른 황교안, 입으로만 외친 화합”이란 기사에서 “(황 대표가) ‘광주 민심 달래기’에 나섰지만 진정성 있는 조치로서는 아직 미흡하다”며 “야권 대권주자로서 입지를 굳히고 영남·보수 지지층 결집을 위해 광주에 ‘맞으러 간다’는 말까지 나오는 등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됐다”고 분석했다. 

▲ 20일자 경향신문 1면 사진기사
▲ 20일자 경향신문 1면 사진기사
 

 

경향신문도 이번 황 대표의 행보가 진정성이 있는지 지켜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신문은 “‘5·18=폭동’이라고 망언한 이종명 의원에 대한 제명, 5·18민주화운동 진상조사규명위원회 설치 등 관련 현안이 있어 황 대표의 5·18 진정성이 시험대에 올랐다”며 “하지만 황 대표가 머뭇거리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고 했다.  

한국당의 반응도 비판했다. 경향신문은 사설 “‘반쪽 5·18기념식’이라는 한국당, 누가 그렇게 만들었나”에서 “한국당은 전두환 신군부가 쿠데타로 만든 민주정의당의 후신”이라며 “반성없는 가해자의 모습은 피해자들에게 또 다른 고통을 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당시 광주시민은 대한민국 국군이 아닌 ‘괴물’과 맞닥뜨렸다”며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 심정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회가 5·18 특별법 개정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한겨레는 사설에서 “과거 보수 정권조차 부정하지 못한 5·18의 가치를 시대착오적 망언과 왜곡·거짓 선동으로 색칠하는 걸 막기 위해 이젠 정치권이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야 할 때”라며 “여야 모두 ‘5·18 역사왜곡 처벌 특별법’ 처리에 힘을 모으길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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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과 리비아를 거쳐 미국에 간 조선의 핵탄두 설계도

[개벽예감 348] 파키스탄과 리비아를 거쳐 미국에 간 조선의 핵탄두 설계도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9/05/20 [07:44]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압둘 카디르 칸의 국제핵거래망과 CIA의 고용간첩들

2. 압수한 기밀자료 놓고 신경전 벌인 미국과 스위스

3. 설계도에 나오는 소형화, 경량화, 정밀화된 핵탄두

4. 왜 우라늄핵탄 만들지 않고, 플루토늄핵탄 만들었을까? 

5. 우라늄핵탄, 플루토늄핵탄, 수소탄 만드는 동방의 핵강국 

 

 

1. 압둘 카디르 칸의 국제핵거래망과 CIA의 고용간첩들

 

2003년 6월 21일 목가적인 풍경이 흐르는 스위스 동부지역의 조용한 산간마을 제니스에 외지인 두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은 빅 블랙 리버 테크놀로지라는 유령회사의 최고경영인으로 위장하고, 제임스 킨스먼과 션 매허피라는 가명을 쓰는 미국 중앙정보국 소속 공작원들이었다. 공작원 두 사람은 제니스에서 고용간첩을 만나 비밀계약을 체결하였다. 비밀계약의 내용은 진공밸브(vacuum valve)의 지적 소유권 및 판매권을 고용간첩들이 소유한다는 것, 그리고 중앙정보국이 고용간첩에게 지급하는 공작금 100만 달러를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의 로드 타운에 설립된 위장회사인 트라코 그룹 인터내셔널의 은행계좌에 입금한다는 것이었다. (뉴욕타임스 2008년 8월 25일) 

 

진공밸브는 우라늄을 농축하는 원심분리기의 핵심부품이다. 원심분리기(centrifuge)는 원자력발전소의 핵연료 또는 핵무기의 핵물질을 만드는 우라늄농축장비다.  

 

제니스에서 비밀계약이 체결된 때로부터 4개월이 지난 2003년 10월, 리비아로 가던 도이췰란드 선적 화물선 BBC 차이나가 이딸리아 남부 타란또항에서 전격 나포되었다. 나포사건의 배후에 미국이 있었다. 나포된 화물선을 수색하자, P-1 원심분리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리비아의 가다피 정권이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주문한 장비들이다. 

 

원심분리기를 압수한 미국은 가다피 정권의 비밀핵개발계획이 드러났다고 떠들어대면서 리비아에게 핵포기를 강요하였다. 미국의 드센 압박으로 궁지에 몰린 가다피 정권은 핵개발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찰단을 리비아에 급파하여 P-1 원심분리기, 우라늄농축공장 설계도, 핵탄두 설계도를 모조리 압수하였다. 그 핵탄두 설계도는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 있는 어느 세탁소에서 사용하는 세탁물보관자루에 쌓여있었다. 이런 정황은 가다피 정권이 가지고 있던 P-1 원심분리기, 우라늄농축공장 설계도, 핵탄두 설계도가 파키스탄에서 만들어졌음을 말해준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에 나타난 것은 미국이 리비아의 가다피 정권에게서 압수하여 2004년에 미국 본토 테네시주 오크리지로 반출해온 원심분리기들이다. 테네시주 오크리지에는 핵무기연구소인 오크리지국립실험소가 있다. 위의 사진에 나타난 원심분리기들은 나무상자에 2기씩 들어있다. 이 원심분리기들은 파키스탄이 개발한 P-1(1세대 원심분리기)이다. 가다피 정권은 파키스탄의 핵무기개발 총책임자 압둘 카디르 칸이 운영하는 국제핵거래망을 통해 이 원심분리기를 수입하여 핵무기를 개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칸의 국제핵거래망에는 미국 중앙정보국의 고용간첩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중앙정보국은 고용간첩들이 보내주는 첩보를 분석하면서 국제핵거래망을 감시, 추적해왔다. 리비아와 이란은 칸의 국제핵거래망을 통해 핵무기개발장비와 핵탄두 설계도 등을 입수하려고 하다가 미국 중앙정보국의 차단공작에 걸렸다.     

 

가다피 정권은 파키스탄이 제작한 P-1 원심분리기를 10,000개나 수입하여 우라늄농축공장을 건설하려던 판이었는데, 만일 그 공장이 미국의 방해를 받지 않고 계획대로 건설되었다면, 해마다 핵탄두 10발씩 만들 수 있는 고농축우라늄을 생산할 수 있었다. (뉴욕타임스 2004년 2월 12일)

 

미국 중앙정보국과 영국 정보기관 M16은 리비아에서 압수한 원심분리기, 우라늄농축공장 설계도, 핵탄두 설계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모든 압수물품들이 국제핵거래망을 통해 리비아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가디언 2008년 6월 15일) 여기서 말하는 국제핵거래망은 당시 파키스탄의 핵무기개발 총책임자였던 압둘 카디르 칸이 운영해온 국제핵거래망이다. 미국은 칸의 국제핵거래를 불법으로 낙인찍었지만, 실제로 국제핵거래를 가장 많이 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이다. 자기가 핵거래를 하면 합법이고, 남이 핵거래를 하면 불법이라는 미국의 이중적 법리판단이야말로 궤변 중의 궤변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미국 중앙정보국에 고용된 스위스 국적 간첩 3명이 칸의 국제핵거래망에서 핵심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이다. 중앙정보국의 고용간첩들은 프리드리히 티너, 우르스 티너, 마르코 티너다. 프리드리히는 우르스와 마르코의 친아버지이고, 우르스는 마르코의 친형이다. 

 

프리드리히 티너는 진공밸브를 발명하여 국제특허까지 받은 스위스의 저명한 기계공학자다. 그가 개발한 진공공학기술은 기계공업부문과 우라늄농축부문에서 사용되는 이중용도의 첨단기술이다. 원심분리기에 핵심부품으로 들어가는 진공밸브를 개발한 것을 인연으로 하여, 프리드리히 티너는 1970년대 중반 이후 근 30년 동안 압둘 카디르 칸과 함께 일해왔다. 

 

칸과 손잡고 원심분리기를 개발해온 프리드리히 티너는 칸이 운영하는 국제핵거래망에 자연스럽게 관여하게 되었는데, 가다피 정권이 칸의 국제핵거래망을 통해 원심분리기를 수입하기 시작한 1990년대 말부터 칸과 티너 3인의 관계는 더욱 밀착되었다. (뉴욕타임스 2008년 8월 25일) 

 

그러나 칸은 티너 3인이 미국 중앙정보국의 고용간첩들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중앙정보국은 티너 3인의 간첩활동을 통해 칸의 국제핵거래망을 손금 보듯 들여다보며 감시했다. 클린턴 행정부와 부쉬 행정부에서 중앙정보국장을 지낸 조지 테닛은 국장직에서 퇴임한 후 2007년 미국에서 출판된 자신의 회고록에서 중앙정보국은 10년 이상 칸의 국제핵거래망을 집중적으로 추적해왔다고 밝힌 바 있다. 

 

칸의 국제핵거래망을 호시탐탐 노린 중앙정보국의 감시와 추적에 걸려든 나라가 리비아와 이란이다. 티너 3인이 중앙정보국의 고용간첩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드러난 때로부터 5년이 지난 뒤, 부쉬 행정부 관리들은 취재기자에게 다음과 같은 비밀을 털어놓았다. “중앙정보국 요원들은 4년이 넘는 기간 동안 티너에게 1,000만 달러를 지급하였는데, 때로는 여행가방에 현금을 가득 채워 주기도 했다. 그 대가로 티너는 리비아의 (핵)폭탄프로그램을 종식시키는데 도움이 된 비밀정보와 이란의 핵개발사업을 말해주는 비밀정보, 그리고 칸의 핵거래암시장을 무력화하는 비밀정보 등을 (중앙정보국에) 제공하였다.” (타임 2008년 8월 28일) 

 

중앙정보국은 칸의 국제핵거래망을 감시만한 게 아니라, 리비아와 이란의 핵무기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교란공작도 감행했다. 티너 3인은 리비아와 이란에 핵개발장비들이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중앙정보국의 비밀공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한다. (뉴욕타임스 2008년 8월 25일) 

 

 

2. 압수한 기밀자료 놓고 신경전 벌인 미국과 스위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다. 리비아와 이란의 핵무기개발을 저지하려는 중앙정보국의 방해공작과 교란공작에 고용간첩으로 깊숙이 개입한 티너 3인은 결국 스위스 사법당국에 체포되었다. 스위스 사법당국은 그들의 집과 사무실에서 컴퓨터 파일과 기밀문서를 압수하였다. 압수된 기밀자료는 수백만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었다. 

 

압수한 기밀자료를 조사하던 스위스 사법당국은 아연실색하였다. 왜냐하면 파키스탄, 리비아, 이란이 연계된 국제핵거래망에 관한 비밀정보들, 그리고 티너 3인이 국제핵거래망에서 미국 중앙정보국의 고용간첩으로 활동해온 내막에 관한 비밀정보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부쉬 행정부 관리들의 말을 인용한 <타임> 2008년 8월 28일 보도에 따르면, 스위스 사법당국이 압수한 기밀자료에는 핵폭탄 설계도와 원심분리기 설계도만이 아니라 티너와 중앙정보국의 연계에 관한 기록물들을 비롯하여 티너의 활동에 관한 10여 년 간의 기록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뉴욕타임스> 2008년 8월 25일 보도에 따르면, 스위스 사법당국이 압수한 기밀자료에는 핵무기개발에 관한 기술자료들, 원심분리기에 관한 기술자료들, 미사일유도체계에 관한 기술자료들, 그리고 “매우 정밀한 핵폭탄 설계도”가 들어있었다고 한다. 

 

스위스 사법당국은 신병과 물증을 확보하였으나, 이 엄청난 사건을 처리할 방도를 찾지 못해 고심했다. 왜냐하면, 미국 중앙정보국이 그 사건에 깊숙이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스위스 사법당국은 티너 3인을 법적으로 처벌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넘겨달라고 미국에게 거듭 요청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스위스 사법당국의 거듭되는 요청을 번번이 무시하면서 응답하지 않았다.  

 

스위스 사법당국의 요청에 한동안 응하지 않던 미국은 갑자기 해괴한 요구를 꺼내들었다. <뉴욕타임스> 2010년 12월 23일 보도에 따르면, 부쉬 행정부의 국무장관 칸돌리자 라이스는 스위스 외교부 고위관리들에게 티너 3인에 대한 수사를 중지하라고 요구하였다고 한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칸의 국제핵거래망에서 미국 중앙정보국의 고용간첩으로 활동하였던 스위스 국적자 우르스 티너의 신상기록자료를 촬영한 것이다. 스위스 사법당국은 미국 중앙정보국의 고용간첩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프리드리히 티너, 우르스 티너, 마르코 티너를 체포하였고, 그들의 집과 사무실에서 수백만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기밀자료를 압수하였다. 압수된 기밀자료에는 파키스탄, 리비아, 이란이 연계된 국제핵거래망에 관한 비밀정보들, 티너 3인이 국제핵거래망에서 미국 중앙정보국의 고용간첩으로 활동해온 내막에 관한 비밀정보들, 핵무기개발에 관한 기술자료들, 원심분리기에 관한 기술자료들, 미사일유도체계에 관한 기술자료들, 매우 정밀한 핵탄두 설계도 등이 들어있었다. 티너 3인을 고용하여 국제핵거래망에서 벌여온 중앙정보국의 비밀공작내막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까 우려한 미국은 스위스 사법당국에게 압수한 기밀자료를 모두 파기하고, 체포한 혐의자 3인을 석방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스위스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였다.     

 

티너 3인에 대한 스위스 사법당국의 사법처리가 미국의 비협조와 방해로 난항을 겪으면서 어느덧 4년이 흐른 2007년 7월 말, 스위스 법무장관 크리스토프 블로허는 미국 법무장관 앨버토 곤잘레스와 미국 연방수사국(FBI) 국장 로벗 뮬러를 만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스위스 법무장관은 티너 3인에 대한 사법처리문제를 논의하려고 워싱턴에 갔으나, 미국은 사법처리에는 관심이 없었고, 스위스 사법당국이 티너 3인을 체포하면서 압수한 기밀자료를 넘겨달라는 생뚱맞은 요구를 꺼내놓았다. (뉴욕타임스 2008년 8월 25일)

 

스위스 법무장관은 기밀자료를 넘겨달라는 요구만 듣고 빈손으로 돌아갔다. 그랬더니 미국은 스위스 사법당국이 압수한 기밀자료를 파기하라는 또 다른 요구를 꺼내놓았다. (타임 2008년 8월 28일) 미국이 스위스 사법당국에게 기밀자료를 파기하라고 요구한 까닭은, 티너 3인을 고용하여 국제핵거래망에서 벌여온 중앙정보국의 비밀공작내막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당시 부쉬 행정부 관리들이 전한 말에 따르면, “중앙정보국은 (티너의) 재판과정에서 티너와 미국의 관계가 세상에 드러나 핵밀거래자들을 대하는 미국의 태도에 대한 (국제사회의) 의혹이 불거지지나 않을까 우려했을 뿐 아니라, 이란의 핵개발사업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던 시기에 (중앙정보국의 대이란첩보사업을 위한) 신입간첩모집사업이 위험에 빠지지 않을까 우려했다”고 한다. (타임 2008년 8월 28일) 

 

미국의 압력을 받은 스위스 정부는 저항을 포기하고 굴복을 택했다. 2007년 8월 말, 스위스 대통령 파스칼 코체핀은 티너 3인에 대한 형사처벌을 취소할 수 있다고 하였고, 같은 해 11월 14일에는 스위스 사법당국이 압수한 기밀자료를 전부 파기하기로 결정하였다고 말했다. 2008년 5월 23일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스위스 대통령 코체핀은 스위스 사법당국이 압수한 기밀자료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감독 하에 전부 파기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스위스 사법당국이 기밀자료들을 파기했다는 소식을 들은 미국 중앙정보국 고위간부는 “우리는 그 문서들이 파기되어 매우 기쁘다”고 반색하였다. (타임 2008년 8월 28일) 

 

그러나 그들이 기뻐한 이유는 기밀자료가 파기된 것에만 있었던 게 아니다. 스위스 국제방송 2009년 4월 2일 보도에 따르면, 스위스 사법당국이 전부 파기하였다는 기밀자료의 사본이 스위스 검찰청에 보관되었다고 한다. 그 사본들은 미국에 넘어갔다. 스위스 사법당국은 2006년에 프리드리히를 석방했고, 우르스와 마르코를 2008년 12월과 2009년 1월에 각각 석방했다. 핵확산을 저지한다는 미명 아래 자행된 중앙정보국의 국제간첩활동은 참으로 어수선하게 막을 내렸다. 

 

 

3. 설계도에 나오는 소형화, 경량화, 정밀화된 핵탄두

 

스위스 사법당국이 압수한 1,000기가바이트 분량의 30,000개 파일들 가운데서 눈길을 끈 것은 매우 정밀하게 작성된 핵탄두 설계도다. 그 설계도에 나오는 핵탄두는 어떻게 생겼을까? 

 

(1) 설계도에 나오는 핵탄두는 중거리탄도미사일에 장착되는 핵탄두다. 영국 언론매체 <가디언> 2008년 6월 15일 보도에 따르면, 설계도에 나오는 핵탄두는 조선의 중거리탄도미사일 ‘노동’(공식명칭은 화성-7)과 이란의 중거리탄도미사일 샤합-3에 각각 장착될 수 있는 핵탄두라는 것이다. 하지만 <가디언>은 설계도에 나오는 핵탄두가 화성-7이나 샤합-3에 장착되는 것만이 아니라, 파키스탄의 중거리탄도미사일 가우리에도 장착된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좀 더 심층적인 정보를 살펴보면, 파키스탄과 이란은 조선에서 화성-7의 설계기술과 완제품을 직수입하여 가우리와 샤합-3을 각각 만들었다. 그러므로 가우리와 샤합-3은 화성-7의 복제품들이다. 이런 정황은 그 3종의 중거리탄도미사일들에 장착되는 핵탄두가 조선의 핵탄두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2) 설계도에 나오는 핵탄두는 외형과 성능이 파키스탄 핵탄두와 매우 비슷하다. 스위스 사법당국이 압수한 기밀자료를 조사한 국제원자력기구 사찰관들의 말에 따르면, 컴퓨터 파일에 들어있는 핵탄두 설계는 파키스탄의 핵탄두 설계와 매우 비슷하다고 한다. (워싱턴포스트 2008년 6월 15일) 그들은 매우 비슷하다는 표현을 썼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스위스 사법당국이 압수한 핵탄두 설계도는 파키스탄 핵탄두 설계도의 디지털 사본이다. 우르스 티너는 파키스탄 핵탄두 설계도의 디지털 사본을 자기 컴퓨터 파일에 저장해놓고, 핵탄두 설계도를 고액으로 사려는 구매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파키스탄 핵탄두 설계도의 디지털 사본은 스위스 사법당국이 압수한 우르스 티너의 컴퓨터 파일에만 들어있었던 게 아니다. 리비아의 가다피 정권도 칸의 국제핵거래망을 통해 파키스탄 핵탄두 설계도의 디지털 사본을 입수하였다. 이 핵탄두 설계도 사본은 2006년 미국이 리비아에 파견한 사찰관에게 압수되어 미국으로 반출되었다. 미국이 리비아에서 압수, 반출한 파키스탄 핵탄두 설계도의 디지털 사본이 지금 미국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2006년 당시 미국 언론매체들은 미국이 리비아에서 3종의 핵탄두 설계도를 압수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사진 3>

 

 

▲ <사진 3> 맨위쪽 사진은 중국이 1964년 10월 16일 자국의 첫 핵시험에서 기폭시킨 핵폭탄 모형이다. 이 핵폭탄은 지름이 1.6m 정도로 크고 무거워서 중거리탄도미사일에 장착할 수 없었고, 수송기에 싣고 적진 상공에서 공중투하해야 하였다. 그래서 이 핵폭탄의 뒷부분에는 공중투하용 방향날개가 달렸다. 미국이 리비아의 가다피 정권에게서 압수한 3종의 핵무기 설계도 디지털 사본들 가운데 첫번째 설계도가 바로 이 구식 핵폭탄 설계도였다. 가운데 사진은 2017년 12월 12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에서 제8차 군수공업대회가 진행되었을 때, 행사장으로 사용된 4.25문화회관의 복도에 게시된 사진문헌들 가운데 하나다. 촬영시점과 촬영장소를 알 수 없는 이 사진문헌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핵탄두를 살펴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핵탄두 표면에 마치 꼭지처럼 생긴 작은 물체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듬성듬성 튀어나온 것이 보인다. 사진문헌에 나타난 핵탄두는 1999년에 조선을 방문하였던 파키스탄의 핵무기개발 총책임자 압둘 카디르 칸에게 조선이 보여주었던 바로 그 핵탄두다. 당시 조선은 그에게 핵탄두 3발을 보여주면서 '관찰학습'을 하도록 배려하였는데, 그 핵탄두의 직경은 약 60cm이고, 뇌관 64개가 장착되었다고 한다. 맨아래쪽 사진은 2016년 3월 8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핵무기연구부문의 과학자, 기술자들을 만나 핵무기병기화사업을 지도하는 모습을 촬영한 조선의 언론보도사진에서 핵탄두만 추출, 확대한 사진이다. 표면이 매끄럽게 생긴 구면체 핵탄두다. 이 핵탄두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인 화성-13 전투부에 장착된다. 핵탄두가 소형화, 경량화, 정밀화되었으므로,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화성 계렬의 대륙간탄도미사일들만이 아니라 주일미국군기지들과 괌을 타격할 수 있는 화성 계렬의 중거리탄도미사일들에도 충분히 장착될 수 있다.     

 

첫 번째 설계도에 나오는 핵무기는 크기가 너무 커서 탄도미사일에 장착하지 못하는 구식 핵무기였다. (워싱턴포스트 2008년 6월 15일) 이 구식 핵무기는 1960년대 중반 중국이 만든 1세대 핵무기다. (뉴욕타임스 2008년 6월 16일) 압둘 카디르 칸은 2003년 10월 12일 자기 아내에게 쓴 편지에서 1982년에 중국이 핵무기 설계도를 파키스탄에게 넘겨주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중국의 첫 핵시험은 1964년 10월 16일에 진행되었는데, 첫 핵시험에서 기폭된 핵폭탄은 지름이 1.6m 정도나 되는 크고 무거운 핵폭탄이었으므로 탄도미사일에 장착할 수 없었다. 중거리탄도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하려면, 탄두지름을 90cm 이하로 줄여 소형화, 경량화하여야 한다. 

 

<뉴욕타임스> 2010년 12월 23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이 리비아에서 압수한 3종의 핵무기 설계도 가운데서 중국의 구식 핵폭탄 설계도 이외의 다른 2종의 설계도는 고도의 핵기술로 정밀하게 작성한 핵탄두 설계도라고 한다. 고도의 핵기술로 작성한 핵탄두라는 말은 중거리탄도미사일에 장착할 수 있도록 소형화, 경량화된 핵탄두라는 뜻이다. 

 

그 정밀한 핵탄두 설계도는 스위스 사법당국이 압수한 우르스 티너의 컴퓨터 파일에 저장되었던 바로 그 핵탄두 설계도였다. 리비아 가다피 정권은 칸의 국제핵거래망에서 핵심역할을 하는 미국 중앙정보국 고용간첩 우르스 티너에게서 그 핵탄두 설계도를 입수한 것이다. 

 

 

4. 왜 우라늄핵탄 만들지 않고, 플루토늄핵탄 만들었을까? 

 

조선 영토의 80%가 ‘보물고’다. 그 ‘보물고’에는 석유, 철광석, 석탄, 석회석, 마그네싸이트, 금, 은, 구리, 아연, 흑연, 희토류, 망간, 니켈, 크롬, 티탄, 우라늄, 지르코늄 등 값비싸고 희귀한 지하자원들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그처럼 거의 모든 종류의 지하자원을 골고루, 풍부히 가진 나라는 전 세계에서 조선밖에 없다. 조선의 애국가 1절에 나오는 “은금에 자원도 가득한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이라는 구절은 시가적 표현만이 아니라 현실인식의 반영인 것이다. 

 

조선에 매장된 각종 지하자원들 가운데서 천연우라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에는 얼마나 많은 천연우라늄이 매장되어 있을까? <뉴욕타임스> 2014년 8월 28일 보도에 따르면, 고품질 천연우라늄 400만톤이 조선에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전 세계 천연우라늄 매장량은 473만톤으로 추산되는데, 조선에 고품질 천연우라늄이 400만톤이나 매장되어 있다니 깜짝 놀랄 일이다. 조선은 세계 최고 천연우라늄 부국이다.     

그런데 좀 이해하기 힘든 문제가 있다. 세계 최고 천연우라늄 부국에서 개발된 핵무기가 우라늄핵탄이 아니라 플루토늄핵탄이라는 사실이다. 천연우라늄 부국이 왜 우라늄핵탄을 만들지 않고, 플루토늄핵탄을 만들었을까?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에 나타난 노란색 물질은 흔히 노란 케익(yellowcake)이라고 불리는 천연우라늄을 정련한 가루다. 우라늄광산에서 캐낸 천연우라늄광석을 곱게 분쇄, 정련하여 이런 가루를 만드는데, 이것을 농축하면 핵물질인 우라늄 235을 얻어낼 수 있다. 저농축하면 원자력발전소에서 사용되는 연료로 되고, 고농축하면 우라늄핵탄에 들아가는 핵물질로 된다. 조선은 세계 최고 천연우라늄 부국이다. 조선에서는 위의 사진에 나타난 노란 케익이 대량생산된다. 그런데 조선은 왜 우라늄핵탄을 만들지 않고, 플루토늄핵탄을 만들었을까?     

 

플루토늄핵탄을 만들려면, 반드시 원자로를 건설해야 한다. 조선이 녕변핵시설단지에서 1986년부터 흑연감속로를 가동해오는 주된 목적은 전기생산이 아니라 플루토늄생산이다. 흑연감속로는 지하에 은폐할 수 없기 때문에, 조선은 미국의 집중적인 감시와 방해와 압박을 받게 되었고, 결국 조선의 핵무기개발을 저지하려는 미국과 격렬한 핵대결을 벌여야 했다. 만일 조선이 우라늄핵탄을 만들었더라면, 자국에 풍부히 매장된 천연우라늄을 사용하여 핵원료의 주체화를 실현하기에도 좋았을 것이고, 우라늄농축공장을 지하에 건설하여 미국의 감시를 따돌리기에도 유리했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은 자기에게 유리한 우라늄핵탄개발을 외면하고, 자기에게 불리한 플투토늄핵탄개발을 선택했다.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이 의문을 풀어줄 실마리는 다음과 같다.

 

2011년 9월 15일 미국 텔레비전방송 <팍스 뉴스>에 실린 압둘 카디르 칸의 자술서에 따르면, 조선은 6.25전쟁이 끝난 뒤 1950년대 말, 소련으로부터 핵폭탄 설계도와 무기급 플루토늄 200kg을 입수했고, 그것을 가지고 핵폭탄을 만들었다고 한다. 수송기로 운반하는 크고 무거운 핵폭탄을 만든 것이다. 이 놀라운 사실은 1990년대 후반 핵무기개발기술을 전수하기 위해 파키스탄에 장기체류하던 조선의 장성급 군사지휘관 강태윤이 칸에게 직접 들려준 이야기다. 

 

6.25전쟁 중에 미국은 핵폭탄을 무더기로 투하하여 조선과 중국 동북지방을 초토화하려고 광분했는데, 그런 가공할 핵위협을 체험한 소련은 미국과 3년 간의 격전을 벌인 조선과 중국에 각각 핵기술을 지원했다. 그렇게 되어 중국은 1958년에 핵무기개발을 시작했고, 조선도 거의 같은 시기에 핵무기개발을 시작했다. 핵무기개발과정에 부닥치는 수많은 기술적 난관을 뚫고 나간 조선과 중국은 1960년대 중반에 각각 핵폭탄을 완성할 수 있었다.  

 

1950년대 말 소련이 조선과 중국에 전수한 핵무기제조기술은 무기급 플루토늄 15kg을 가지고 커다란 핵폭탄 1발을 만드는 수준이었다. 그런 핵무기제조기술을 전수받은 조선은 무기급 플루토늄 200kg을 가지고 핵폭탄을 10발 정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핵무기에 대해 알지 못하고 원자탄이라는 말이나 간혹 쓰였던 1950년대 말에 조선은 핵폭탄을 만들고 있었다. 

 

1950년대 말 조선이 소련으로부터 입수한 핵무기제조기술이 플루토늄핵탄을 만드는 기술이었으므로, 조선은 지난 60년 동안 플루토늄핵탄제조기술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세계 최고 수준의 핵탄제조기술을 완성할 수 있었다. 정보부족과 편견으로 훼손된 낡은 관념을 버리고,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알아야, 조선의 핵강국 선언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다. 

 

 

5. 우라늄핵탄, 플루토늄핵탄, 수소탄 만드는 동방의 핵강국 

 

그렇다면 조선은 플루토늄핵탄만 만들고, 우라늄핵탄은 만들지 않았을까? 조선의 핵무기개발역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조선이 플루토늄핵탄만 만든 것으로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 문제를 해명하려면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몇 가지 사실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1) 조선의 우라늄광산은 황해북도 평산과 평안남도 순천에 있고, 우라늄제련공장은 황해북도 평산과 평안북도 박천에 있다.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평안북도 구성과 함경북도 선봉에도 매장량이 풍부한 우라늄광산이 있다. 조선에서 가동되는 우라늄광산 및 우라늄제련공장의 연간 총생산량은 약 2,000톤이다. 2013년을 기준으로 미국의 연간 우라늄생산량은 1,850톤이므로, 조선은 미국보다 조금 많은 우라늄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100개나 되는 미국의 원자력발전소들이 소모하는 연간 우라늄총량은 약 18,400톤인데, 미국에서 생산된 우라늄 1,850톤으로는 턱 없이 부족하므로, 미국은 로씨야에서 저농축 핵연료를 대량 수입하여 원자력발전소들에 공급해왔다. 

 

그런데 조선의 연간 우라늄생산량이 미국보다 조금 더 많은 약 2,000톤이라는 사실이 강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조선이 우라늄을 생산하기 시작한 때는 1980년대 중반인데, 원자력발전소가 없는 조선이 우라늄광산을 개발한 이후 지난 30년 동안 해마다 우라늄 2,000톤을 생산하였다면, 60,000톤을 생산한 것이다. 그 많은 우라늄을 어디에 사용해온 것일까?   

 

(2) 2011년 9월 15일 <팍스 뉴스>에 실린 칸의 자술서에 따르면, 조선은 1990년대 초에 6불화우라늄생산공장을 가동하고 있었다고 한다. 칸은 자술서에서 조선의 6불화우라늄생산공장이 언제 건설되었는지 말하지 않았지만, 건설 직후에는 6불화우라늄을 연간 2톤씩 생산하다가 생산능력이 더욱 확장되어 연간 10톤으로 증가되었다고 했다. 6불화우라늄을 분리하면, 핵무기에 들어가는 우라늄 235를 추출할 수 있으므로, 조선이 1990년대 초에 6불화우라늄을 생산하고 있었다는 것은 우라늄 235를 추출하여 우라늄핵탄을 생산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3) 2011년 9월 15일 <팍스 뉴스>에 실린 칸의 자술서에 따르면, 파키스탄에 파견되어 미사일개발기술을 전수하던 조선의 미사일기술자 10명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려던 1998년 어느 날, 칸은 P-1(1세대 원심분리기) 20기를 감사표시로 조선에 보내려고 하였는데, 조선의 미사일기술자들은 이왕이면 P-2(2세대 원심분리기) 4기를 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실을 두고, 미국은 조선이 파키스탄에서 가져간 P-2를 가지고 원심분리기를 개발하여 우라늄을 농축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하지만 그런 추정은 사실과 다르다.   

 

만일 조선이 파키스탄에서 P-2를 가져가 원심분리기를 개발하려고 했다면, 칸이 조선의 미사일기술자들에게 감사표시로 보내려고 하였던 P-1을 P-2로 바꿔달라는 사적인 요청을 하지 않고, 정부 대 정부의 관계에서 수출입계약을 체결했을 것이다. 파키스탄이 P-1을 P-2로 교체한 때는 1983년이었으므로, 조선은 파키스탄이 P-2를 개발하였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았으면서도, P-2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조선은 국가 차원에서 P-2에 무관심했고, 그래서 조선의 미사일기술자들은 귀국길에 감사표시로 받은 P-2 4기를 가져갔다. 그렇기 때문에, 칸은 2009년 9월 31일 파키스탄 방송과의 대담에서 파키스탄이 조선의 탄도미사일기술을 이전받는 대가로 조선에 원심분리기를 넘겨주었다는 미국의 주장을 강하게 부인하였다. 

 

그렇다면 조선은 왜 원심분리기에 무관심했던 것일까? 그 까닭은 조선이 파키스탄의 원심분리농축기술과는 전혀 다른 우라늄농축기술을 개발하여 우라늄 235를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라늄농축기술에는 원심분리농축기술만 있는 게 아니다. 파키스탄은 원심분리농축기술을 개발했지만, 조선은 그보다 더 우월한 기술을 개발했다. 조선이 개발한 것은 레이저분리기를 사용하는 우라늄농축기술이다. 레이저분리농축기술은 원심분리농축기술보다 전기를 더 적게 쓰면서도 우라늄은 더 많이 농축할 수 있고, 언제나 골칫거리로 되는 방사능 폐기물은 더 적게 나온다. 조선은 그처럼 우월한 레이저분리농축기술을 개발하여 우라늄핵탄을 만들어왔다. 미국은 조선에서 원심분리기가 가동되는 우라늄농축공장들이 은폐되었다고 의심하면서 감시와 추적을 해오고 있지만, 그건 헛발질이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미국 캘리포니아 리버모어에 있는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실험소에 설치된 실험용 레이저분리농축기를 촬영한 것이다. 설비구조가 매우 복잡하다. 이 레이저분리농축기를 가동하여 우라늄을 농축한다. 파키스탄은 원심분리기농축기술을 개발했지만, 조선은 그보다 더 우월한 레이저분리농축기술을 개발했다. 미국은 조선에서 원심분리기가 가동되는 우라늄농축공장들이 은폐되었다고 의심하면서 감시와 추적을 해오고 있지만, 그건 헛발질이다. 조선은 레이저분리농축기가 설치된 우라늄농축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4) <뉴욕타임스> 2008년 6월 16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이 2006년 리비아에서 압수하여 반출한 3종의 설계도들에 나온 3종의 핵탄두들은 모두 내폭형 우라늄핵탄으로 설계되었고, 농구공처럼 생긴 구면체로 설계되었다고 한다. <뉴욕타임스> 2008년 6월 15일 보도에 따르면, 그 3종의 설계도 중에서 2종의 설계도에 나오는 핵탄두는 중국이 핵개발 초기에 만들었던 핵폭탄에 비해 크기는 절반밖에 되지 않고, 파괴력은 두 배나 크고, 현대적인 전자장치들이 들어가는 것이었다고 한다. 

 

칸은 2008년 6월 4일 미국 통신사 <맥클랫취 뉴스 페이퍼즈>와의 대담에서 리비아의 가다피 정권이 입수했던 핵탄두 설계도의 디지털 사본은 파키스탄 핵탄두 설계도의 디지털 사본을 복사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칸은 파키스탄의 핵탄두 설계도를 어느 나라에서 입수했는지 정확한 답변을 피하며 얼버무렸다. 하지만 현대적인 설계기술로 정밀하게 작성된 그 핵탄두 설계도는 파키스탄의 기술지원요청을 받은 조선이 파키스탄에게 넘겨준 조선의 핵탄두 설계도 디지털 사본이다. 이런 놀라운 사실은 다음과 같이 논증된다. 

 

칸은 2008년 6월 4일 미국 통신사 <맥클랫취 뉴스 페이퍼즈>와의 대담에서 자신이 1994년에 조선을 방문하였을 때, 조선은 파키스탄의 핵기술보다 “훨씬 더 발전되고(much more advanced)”, “훌륭한(excellent)” 핵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매우 정교한(very sophisticated)” (핵탄두) 설계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칸의 자술서를 인용한 <워싱턴포스트> 2009년 12월 28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은 1999년에 평양을 방문한 칸에게 뇌관 64개가 설치된 핵탄두가 1발씩 들어있는 보관함 3개와 핵탄두 격발기가 1개씩 들어있는 보관함 3개를 모두 보여주면서, 이 핵탄두들은 한 시간 안에 미사일에 장착되어 사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날 칸이 조선의 지하핵무기고에서 관찰하였던 핵탄두 3발은 탄도미사일에 장착할 수 있도록 탄두지름을 60cm으로 축소시킨 소형화, 경량화, 정밀화된 핵탄두다. 

 

조선을 방문하여 조선의 핵탄두설계기술이 얼마나 높은 수준에 이르렀는지를 알게 된 칸은 조선의 핵과학자들로부터 세계 정상급 핵탄제조기술을 전수받았다. 칸의 자술서를 인용한 <워싱턴포스트> 2009년 12월 28일 보도에 따르면, 파키스탄은 핵탄두 기폭장치의 일종인 고속전기스위치 크라이트론(krytron)을 만드는 제조법을 조선에서 배웠다고 했는데, 조선에게서 어찌 그것만 배웠겠는가. <사진 6>

 

▲ <사진 6> 이 사진은 이스라엘의 미사일전문가 탈 인바르가 작성한 조선의 대륙간탄도미사일 전투부를 보여주는 개념도다. 왼쪽에 있는 것은 핵탄두가 들어간 화성-13 전투부이고, 오른쪽에 있는 것은 수소탄두가 들어간 화성-14 전투부다. 조선은 지난 30년 동안 고품질 천연우라늄 60,000톤을 생산하고, 레이저분리농축기술을 개발하여 우라늄핵탄을 계속 만들어온 동방의 핵강국이다. 또한 조선은 파키스탄의 핵무기개발 총책임자가 인정한 세계 정상급 핵탄두설계기술로 플루토늄핵탄, 우라늄핵탄, 수소탄을 만들어온 동방의 핵강국이다. 미국은 동방의 핵강국에게 핵무기를 폐기하라는 말이 되지 않는 요구를 들이대며 정세를 악화시킬 게 아니라, 조선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고 동방의 핵강국과 공존하는 평화의 길을 택해야 한다.     

 

(5) 1998년 5월 30일 조선은 파키스탄 영토에서 비공식 핵시험을 하였다. 12킬로톤의 폭발위력이 나왔다. 조선은 2006년 10월 9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 있는 지하핵시험장에서 사상 처음 공식 핵시험을 진행하였는데, 그보다 8년 앞서 파키스탄 발로치스탄주 차가이사막에 있는 임시핵시험장에서 비공식 핵시험을 하였던 것이다. 파키스탄은 그보다 이틀 앞선 5월 28일 차가이사막의 임시핵시험장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핵시험장에서 우라늄핵탄 4발을 기폭시키는 핵시험을 하였는데, 1998년 5월 30일 차가이사막의 임시핵시험장에서 기폭된 것은 플루토늄핵탄이었다. 1998년 당시 파키스탄은 우라늄핵탄만 가지고 있었고, 플루토늄핵탄은 없었다. 파키스탄이 중국의 기술지원을 받아 조하라바드에 건설한 40메가와트급 쿠삽 연구용 원자로는 1998년 4월에 가동되었으므로, 파키스탄이 어떻게 원자로를 가동한지 한 달 뒤에 플루토늄핵탄을 만들어 핵시험에 사용할 수 있었겠는가. 

 

주목되는 것은, 1998년 5월 30일 조선이 차가이사막의 임시핵시험장에서 핵탄두 2발을 연속적으로 기폭시키는 핵시험을 하려고 준비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조선은 12킬로톤급 핵탄두 2발을 핵시험에 사용하려고 파키스탄에 가져갔었는데, 그 가운데서 1발만 기폭시켰고, 다른 1발은 기폭시키지 않았다. 핵탄기폭에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핵탄을 의도적으로 기폭시키지 않은 것이다. 조선이 1998년 5월 30일 핵시험에서 기폭시키려고 준비하였으나 기폭시키지 않은 두 번째 핵탄두가 바로 우라늄핵탄이다. 

 

지난 30년 동안 고품질 천연우라늄 60,000톤을 생산하고, 레이저분리농축기술을 개발하여 우라늄핵탄을 계속 만들어온 동방의 핵강국은 지금 얼마나 많은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을까? 파키스탄의 핵무기개발 총책임자가 인정한 세계 정상급 핵탄두설계기술로 플루토늄핵탄, 우라늄핵탄, 수소탄을 만들어온 동방의 핵강국은 지금 얼마나 많은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을까? 바로 이 물음의 해답 속에, 미국이 조선에게 핵무기를 폐기하라고 요구할 수 없는 명백한 이유가 들어있다. 미국은 동방의 핵강국에게 핵무기를 폐기하라는 말이 되지 않는 요구를 들이대며 정세를 악화시킬 게 아니라, 조선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고 동방의 핵강국과 공존하는 평화의 길을 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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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화가 임옥상은 어쩌다 어린이 놀이터를 만들었나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9/05/20 07:32
  • 수정일
    2019/05/20 07:32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종로의 기록, 우리동네 예술가] 민중 화가 임옥상 인터뷰 ①

19.05.19 19:31l최종 업데이트 19.05.19 19:31l

 

서울의 중심인 종로는 수많은 예술인들이 600여 년 동안 문화의 역사를 일궈온 유서 깊은 도시입니다. '종로의 기록, 우리동네 예술가'는 종로에서 나고 자라며 예술을 펼쳐왔거나, 종로를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이 시대의 예술인들을 인터뷰합니다.[편집자말]
 임옥상 화가
▲  임옥상 화가
ⓒ 임옥상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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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슬 퍼런 독재의 어둠 속에서 이뤄졌던 강력한 위압과 방해공작도 임옥상 화가의 예술세계를 구속하지는 못했다. 부패한 정권과 부조리한 현실을 비판하는 작품들을 통해 자신의 발언권을 당당히 행사해온 그는 줄곧 민중 미술의 선봉에 서 있었다.

이후 거리와 광장으로 향한 그는 대중과 예술가 사이에 놓인 경계의 벽을 허물고, 누구나 쉽게 입장 가능한 공공미술의 영역을 개척해왔다. 엘리트주의 예술을 배격하고, 진정한 소통의 예술을 추구해온 그를 지난 4월 15일, 임옥상미술연구소에서 만났다.

현시대의 초상을 담는 여정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현실참여 미술운동 그룹인 '현실과 발언'의 창립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예술 작품 속에 배제돼 있던 현시대의 초상을 찾는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1980년 10월 17일, 문예진흥원 미술회관(현 아르코미술관) 2층에서 열리기로 했던 창립전은 민중예술의 불씨를 댕긴 일대 사건으로 회자된다.

그러나 독재정권의 칼날은 예술가의 자유와 민중의 권리를 압살하는 병기였다. 작품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전시 불가 판정을 내린 데 이어, 전시 개막일에는 전시장의 전기 스위치를 모조리 내리면서 어둠의 장막을 덧씌웠다. 결국 참여 작가와 초대 손님은 손에 촛불을 들고 작품을 관람하게 된다. 밤의 정치를 무력화한 순간이었다.

다음 날 작품들이 철거되면서 전시는 개막과 동시에 폐막을 통보받지만,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3주 뒤에 인사동의 동산방 화랑에서 전시를 재개한다. 1980년 촛불이 켜진 어둠 속에서 전시장을 지켰던 그는 2016년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의 현장에도 있었다.

그곳에서 직접 보고 들으며 느낀 모든 것은 180개의 캔버스로 이루어진 가로 16m의 대작 <광장에, 서>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 작품은 2017년 말,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로 소장자에게 대여해 청와대 본관에 걸리면서 다시금 화제를 모았다.
   
 광장에,서_2017
▲  광장에,서_2017
ⓒ 임옥상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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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소장자보다는 작가에게 세간의 이목이 쏠리는 경향이 있잖아요. 소장자가 허락한 부분이니 걸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거지만, 이런저런 오해도 받고 사실은 굉장히 마음이 불편해요. 저는 권력을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잖아요. 두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면서 권력이 남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싸워야 할 판인데, 거기는 권부(權府)이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운신(運身)의 폭이 좁아진 셈인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권력의 눈치를 볼 이유는 없죠."

세월이 흘렀어도 정권을 향한 날카로운 비난의 잣대를 거두어본 적은 없다. 제도화된 권력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민중의 곁을 지켰다. 촛불집회 당시 길이 500m, 폭 1.5m의 흰 천을 펼치며, 시민들의 이야기를 새기는 퍼포먼스 '백만백성'을 진행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작업실 대신 광장에서 작품을 완성하고, 미술관이 아닌 청와대로 행진하면서 예술가로서 자유를 수호했다.

"어느 세력이든 간에 정권을 잡고 나면 큰 차이가 없어요. 이런 악순환 속에서 투표하는 국민들만 꼭두각시놀음에 빠진다는 회의감이 듭니다. 그러다 보니 저 스스로를 이곳에서 추방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자진해서 자갈밭을 걸어가는 형국이 되는 것이죠. 제가 뜻하는 바를 담아내기에 완벽한 표현은 아니지만, 무정부주의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어요. 이런 세상에서 과연 어떤 미술을 해야 할지 늘 고민하고 있죠.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도 안정적인 제도권만 기웃거릴 것이 아니라, 자꾸 밑으로 몸을 내려서 저잣거리로 나가라는 겁니다. 예술로만 먹고 살기 힘들다거나, 예술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 풍토를 탓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직접 거리로 나가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라는 거죠.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거기서 답이 나오고, 그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난 그림은 오랜 생명력을 가지기 때문이죠. 또 직접 만나서 소통하고, 행동을 같이했던 사람들은 절대로 예술가를 배신하는 법이 없어요."


공공미술의 저변 확대를 위한 헌신

1993년부터 1994년까지 민족미술협의회 대표직을 역임하며 민족미술의 발전에 힘쓴 그는 1998년부터 시작한 '당신도 예술가' 프로젝트를 통해 민중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갔다. 거리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린 시간은 공공미술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를 높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공공미술의 저변 확대를 이끈  ‘당신도 예술가’
▲  공공미술의 저변 확대를 이끈 ‘당신도 예술가’
ⓒ 임옥상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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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때, 저 역시도 오갈 데가 없는 처지가 됐어요. 그림이 팔리길 하나, 누가 일을 주길 하나, 그야말로 모든 게 끊겨버린 상황이었어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니까 제 모습도 솔직히 보여주고, 시민들한테 위로도 받고 싶어서 일주일에 한 번씩 거리로 나갔죠.

그전에는 미처 공공미술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지 못했는데 사람들과 같이 그림을 그리면서 깨닫게 된 것이 많았어요. 왜 사람들이 미술관만 가면 주눅이 들어야 해요? 대관절 그림이 뭐기에 꼭 미술관까지 가서 봐야 하느냐는 거죠.

미술관에 가면 누가 말을 걸어주는 것도, 그림이 친절하게 맞아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내 옷에 행여 먼지가 있나 없나 살펴가면서, 작품을 이해 못하는 나를 행여 누가 비웃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할 거면 미술관을 왜 가냐는 거죠. 예술이라는 것은 불특정한 거리나 장소에서 그냥 조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공공미술에 대한 관심은 거기서 싹텄죠."


그때부터 곳곳에 공공미술의 씨앗을 심기 시작했다. 굳이 전시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더라도 삶 속에서 예술과 마주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30여 년간 공공미술의 저변 확대를 위해 헌신해 오면서 그는 인간 존엄성의 회복과 타인과의 상생 실현에 큰 관심을 쏟았다. 2015년 10월에 개관한 창신소통공작소의 총괄기획자로 참여한 그는 공공미술의 중요성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임옥상 화가가 총괄기획자로 참여한 창신소통공작소
▲  임옥상 화가가 총괄기획자로 참여한 창신소통공작소
ⓒ 종로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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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을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처럼 인식하는 건 무책임하다고 봐요. 지역민이 안정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살 수 있는 방향으로 도시재생의 초점이 맞춰져야죠. 그러려면 인프라가 아니라, 사람을 중심에 둬야 해요.

근본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낮은 건 사회적 형평성과 연대감이 낮기 때문이라고 봐요. 사람들이 스스로의 능력을 개발하고, 주위 사람들과 같이 소통하면서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고, 서로 돕는 사회가 돼야 하잖습니까? 그런데 경쟁을 조장하고 능력을 길러서 타인을 제압해야 한다는 식의 가치관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에, 그걸 해소하기 위해서 소통이라는 화두에, 공작소란 말을 붙인 겁니다.

창신동 전체가 다 공작소 마을이 됐으면 좋겠어요. 글쓰기공작소, 대화공작소, 연설공작소, 영상제작공작소 등 모든 종류의 공작소가 옹기종기 모여서 서로가 가진 가치를 나누면서 상생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 열기가 마을 전체에 전파되기를 고대하고 있어요."

 
 창신동 산마루놀이터 풀무골무
▲  창신동 산마루놀이터 풀무골무
ⓒ 임옥상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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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신소통공작소와 더불어 삶의 질을 높이게 될 '산마루 놀이터'도 그의 작품이다. 친환경 어린이 놀이터라는 콘셉트에 맞게 인공 놀이시설 대신 흙, 모래, 나무 등의 소재를 도입해 어린이들이 자연과 친해지도록 하고, 골무 형태의 원뿔형 건축물 내부에 모험놀이 공간인 정글짐을 만들어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도록 설계했다.

"소통공작소와 연계할 수 있는 공간도 만들었고, 실내 공간뿐만 아니라 바깥까지도 활용해서 쓸 수 있도록 기획했어요. 어린이 놀이터에도 예술을 심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이 감성을 키우고, 모험정신을 기를 수 있는 곳이 됐으면 좋겠어요."

(*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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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진정한 검증대’ 다시 서다

강병한 기자 silverman@kyunghyang.com

입력 : 2019.05.19 22:31 수정 : 2019.05.19 22:49

 

‘5·18 묘역’ 도망치듯 뒷문 퇴장한 한국당 대표
님을 위한 행진곡 ‘제창’에도 망언 징계 등 현안 시험대에
5·18 기념식 입장부터 험난…유족·시민들, 헌화·분향 막아

<b>분향소 앞에 두고…저지당하는 황교안</b>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플래카드 뒤)가 지난 18일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린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시민들의 항의로 분향을 하지 못하고 있다. 황 대표는 추념탑 앞에서 20여분간 옴짝달싹 못했고, 옛 묘역으로 향하는 후문을 통해 도망치듯 식장을 빠져나갔다. 연합뉴스

분향소 앞에 두고…저지당하는 황교안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플래카드 뒤)가 지난 18일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린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시민들의 항의로 분향을 하지 못하고 있다. 황 대표는 추념탑 앞에서 20여분간 옴짝달싹 못했고, 옛 묘역으로 향하는 후문을 통해 도망치듯 식장을 빠져나갔다. 연합뉴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62)는 지난 18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주먹을 쥔 오른팔을 상하로 흔들며 ‘님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다. 2016년 국무총리로 5·18 기념식에 참석했을 때 노래를 부르지도, 주먹을 흔들지도 않았던 것과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광주 시민들은 황 대표가 오전 9시30분쯤 민주묘지 내 민주의문 앞에 도착하자 시민들은 “5·18을 모독 말라”고 외쳤다. 기념식장 안에서는 희생자 유족들이 “물러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황 대표는 기념식 후 추념탑 앞에서 헌화와 분향을 시도했지만 시민들은 허락하지 않았다. 황 대표는 도망치듯 민주묘지 후문을 통해 식장을 빠져나갔다. 황 대표는 기념식 참석 직후 페이스북에 “진정성을 갖고 광주를 찾고, 광주 시민들을 만날 것”이라고 글을 올렸다. 19일 제주 혁신성장센터를 방문한 자리에서도 “기회가 되는 대로 광주를 찾아 상처받은 분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길을 찾겠다”고 했다. 

황 대표의 5·18 진정성이 시험대에 올랐다. ‘5·18=폭동’이라고 망언한 이종명 의원에 대한 제명, 5·18민주화운동 진상조사규명위원회 설치 등 관련 현안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 대표가 머뭇거리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 의원에 대한 제명 처리는 감감무소식이다. 지난 2월 김병준 비상대책위원회 시절 당 윤리위원회는 제명을 권고했지만 이를 의결할 의원총회는 열리지 않고 있다. 황 대표는 “원내에서 여러 국민의 생각을 감안해 처리하리라 생각한다”며 원내지도부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특별법에 따른 진상조사규명위 설치에 대해서도 미온적이다. 청와대가 한국당 추천 진상조사위원 2명의 군 경력이 특별법에 위배된다고 밝힌 후 여야는 군 경력도 자격 요건에 넣어 특별법을 개정키로 합의했다. 그러나 패스트트랙 이후 한국당이 국회를 보이콧하면서 처리가 요원하다. 

황 대표는 이날 “광주 시민들에게 한국당이 사랑과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황 대표가 이 현안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진심을 가늠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만약 황 대표가 현안들을 미뤄둔다면 “지역감정을 부추기기 위한 방문”(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라는 비판이 더 커질 수 있다.

관련기사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5192231005&code=910402#csidx767a5e60b6e4a558b86c3fb7ca7c05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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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여성 공산주의자 김알렉산드라를 따라 걷다

[시베리아 시간여행] 1. 하바롭스크 : 아무르강변부터 중앙묘지까지
2019.05.19 19:26:01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언론협동조합 프레시안이 항일 독립 운동의 발자취를 좇아 러시아에 다녀왔습니다. 소비자 조합원 20분이 이 뜻깊은 여정에 함께했습니다. 조합원들과 해외 기행에 나선 적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여러모로 의미 있는 이번 여정에서 우리가 다녀온 도시는 하바롭스크와 우수리스크, 블라디보스토크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100년 전 어느 날 어느 독립 투사가 되어 들리지 않는 총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선연한 핏자국을 보았습니다. 고국을 그리워하며 자유와 독립을 갈망하기도 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인 시베리아 횡단열차도 탔습니다. 덜컹거리는 열차를 타고, 끝없이 이어지는 자작나무 숲, 황량한 대지 위에 빛나는 태양과 해가 진 뒤 떠오른 수많은 별들을 보았습니다. 

 

러시아에서 보고 듣고 느낀 많은 것들을 여러분께도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부터 매주 주말 1회씩 총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눈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따라오다 보면 여러분도 어느새 러시아에 와있을지 모릅니다. 자, 그럼 가슴 뜨거웠던 4박 5일간의 여행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올라 바라본 바깥 풍경. ⓒ프레시안(서어리)

 

 

하바롭스크 : 잊힌 한인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였던 이들을 따라

 

 

 
'여기가 국제 공항이 맞나?' 
 
마치 어느 시골의 고속버스터미널 같았다. 자그마한 하바롭스크 국제공항에 막 도착한 우리 일행은 마땅히 앉을 의자가 없어 출입문 근처에 옹기종기 서 있었다. 큰 창문도 없어 밖의 풍경도 잘 보이지 않았다. "밖에 날씨는 어떤가요?" 한 조합원이 물었다. 러시아에 오기 전 가장 고민했던 것이었다. 한국에는 이미 봄이 만연해있는데, 러시아라니 왠지 추울 것 같고. "바람막이라도 걸치세요", "생각보다 덜 추울거에요" 우리끼리 소박한 걱정을 나누고 있을 때 호텔로 가기위한 택시가 도착했다. 러시아의 날씨가 어떨지 걱정 반, 기대 반의 마음으로 출입문을 나섰다. 
 
웬 걸, 비가 섞인 우박이 내렸다. 노을이 지는 구름 사이로 얼음 알갱이들이 투둑투둑 떨어졌다. 비와 우박을 맞으며 택시에 짐을 실었다. 을씨년스럽다고 생각할 때쯤 누군가가 "날씨도 참 '러시아스러워'요. 너무 러시아다"라고 말하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러시아스러운 날씨'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옷깃을 여미며 조합원들과 짝을 맞춰 택시를 탔다.
 
계획된 아파트 단지처럼 일정한 모양의 주택들, 전기선으로 동력을 공급받는 트롤리버스, 사람 머리에 닿을 듯 뒤엉켜 내려온 트롤리버스의 전선, 레닌 동상이 세워진 광장, 키릴문자가 가득한 표지판. 하바롭스크의 풍경이 차창 밖으로 순식간에 지나쳐갔다. 택시 안의 한국인들은 키릴문자가 적힌 표지판을 읽어보려 골몰했다. 키릴문자는 알파벳과 모양이 비슷했지만 영 읽히지 않았다. 그런 우리가 안쓰러웠는지, 택시 운전사였던 요한은 몇몇 표지판을 읽어주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우린 알아듣지 못했다.) 택시 운전사 요한과 러시아어, 한국어, 영어 그 어디쯤의 언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소련 공산주의' 느낌이 물씬 나는 건축물 앞에 당도했다. 
 
 

▲하바롭스크 숙소였던 인투어리스트 호텔. ⓒ프레시안(서어리)

 
우리가 묵을 인투어리스트 호텔이었다. 간판 이외의 장식은 찾아볼 수 없는 정직한 사각형의 회색 시멘트 건물, 일정한 창문 크기, 같은 간격으로 설치된 환풍기. '소련 공산주의식' 건축물의 딱 떨어지는 깔끔함이 느껴졌다. 실제로 볼셰비키 고위 간부들이 묵었던 공간이기도 했단다. 비로소 러시아에 도착한 것 같았다. 
 
짐을 풀고 호텔 뒤편의 아무르 강변으로 향했다. 그때까지 우리는 그곳에서 누구를 만나게 될지 알지 못했다. 박흥수 철도기관사이자 시간여행자(그는 그의 저서 <시베리아 시간여행>(후마니타스 펴냄)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1918년 9월 김알렉산드라와 조우한 장면을 기록했다)는 한반도에서는 해방과 분단이, 러시아에서는 혁명의 기운이 꿈틀거리는 격변의 순간의 시베리아로 우리를 데려갔다. 
 
조선인 혁명가 김알렉산드라의 열세 걸음 
 
은은한 안개가 낀 아무르 강 건너로는 광활한 중국의 대지가 펼쳐져있다. 아무르 강의 또다른 이름은 헤이룽강(흑룡강). 러시아 극동의 관문이자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특성 때문에 항일 독립 운동가를 비롯한 한인들은 자연스럽게 하바롭스크에 둥지를 틀게 된다. 이렇게 모인 한인들 중 일부는 제국주의 타파와 무산계급 해방을 내세운 러시아 사회주의와 자연스럽게 결합하기도 했다.  
 
아무르 강을 따라가면 보이는 높은 절벽 우쵸스엔 아무르 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박흥수 기관사는 1918년 9월 이 자리에서 김알렉산드라가 반혁명군(멘셰비키)에 의해 최후를 맞이한 뒤 아무르 강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고 설명했다. 조합원들이 하나둘 전망대에 오르자 아무르 강에 서글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김알렉산드라. 원래 이름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 스탄케비치'. 한국인 최초의 볼셰비키 당원이자, 하바롭스크 소비에트 외무책임자이자,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인 이동휘와 한인사회당을 창당한 멤버이자, 페미니스트였던 여성 혁명가다.
 

▲ KBS '역사저널 그날' 갈무리.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 2세였던 김알렉산드라. 그의 아버지였던 김표트르(김두서)는 함경도 경원에서 일찍이 러시아로 건너가 북만주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철도 건설 현장에서 통역을 했다. 현장 노동자로 고용된 조선인, 중국인들의 불합리함을 대변해 노동자들의 존경을 받았고 아버지 김두서는 "네가 커서 일을 하게 될 때 나처럼 항상 노동자 편에 서서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사범대학에서 공부한 김알렉산드라는 자연스레 볼셰비키 사상을 접하게 된다. 1914년 전쟁에 가담한 제정 러시아는 조선인과 중국인 등을 징집했다. 이 과정에서 김병학이라는 청부업자가 등장한다. 김병학은 선금으로 1만 루블을 받고 조선인 1000여 명을 우랄스크 지역의 나제즈진 벌목장에 팔아넘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알렉산드라는 오랫동안 기다렸던 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그는 스물 여섯살 때에 우랄스크 지역으로 가 한국인 노동자들의 통역관이 된다. 러시아 관리를 상대로 임금 체불 소송을 진행해 승소했으며 한국 및 중국 노동자들과 함께 우랄스크 노동자 동맹을 결성해 이들을 해방시킨다. 이 과정에서 그는 볼셰비키와 관계를 맺고 당원이 되고 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는 러시아 혁명에 가담하게 된다. 그는 제국주의가 타도되면 일본의 제국주의도 타도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1918년 러시아 연해주는 일본군과 러시아 반혁명군에 의해 함락된다.  
 

▲ 아무르 강가와 우쵸스 전망대. ⓒ프레시안(서어리)

 
마지막까지 연해주에 남아 투쟁하던 김알렉산드라는 러시아 반혁명군에 의해 체포당했다. 주민들이 모인 아무르 강의 높은 언덕, 총살을 앞둔 그는 흰 천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자 그 천을 벗겨내고 열 세 걸음을 걸었다.  
 
"조선의 후손들이여! 지금 나의 걸음이 바로 조선의 열 세개의 도다. 각각의 도에 공산주의의 씨앗을 뿌리고, 프롤레타리아에게 자유와 독립의 꽃을 피워라. 우리의 후예들이 조선을 해방시키고 사회주의를 어떻게 건설하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조선독립 만세! 소비에트 만세! 볼셰비키당 만세!" 
 
이후 총성이 울렸고, 김알렉산드라의 시신은 아무르 강에 잠겼다. 이때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잘못 새겨진 이름 
 
'탕'. 아득한 총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일행은 저만치 가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어떤 동양인 여성이 우리를 흐뭇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일행을 놓칠까 걸음을 재촉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다시 그 동양인 여성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혹시 그가 김알렉산드라였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르 강변을 따라 걸었지만 우초스 절벽 어디에도 김알렉산드라를 설명하는 안내판 하나 없었다. 말없이 아무르 강을 바라보던 이정희 조합원은 "어떻게 김알렉산드라에 대한 표식이 이곳에 하나도 없을 수 있냐"며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아름다운 아무르 강의 풍경을 바라보며 탄성을 외치던 조합원들이 입을 꾹 다문채 발걸음을 옮겼다.
 
혁명 전사 동상과 정교회 성당이 함께 놓여있는 어색한(?) 사회주의 혁명 광장을 지나 시내 쪽으로 난 횡단보도를 건너 도착한 무라비예프 아무르스카야 22번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이 건물에서 김알렉산드라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이곳은 하바롭스크 소비에트의 외무책임자였던 그의 집무실이었던 곳.  
 

▲ 김 알렉산드라의 집무실이었던 건물. ⓒ프레시안(서어리)

 
건물 입구 오른쪽 벽에는 번지수를 나타내는 숫자 22가 쓰인 하얀 명판이 붙어있다. 박흥수 기관사에 따르면 이 명판 바로 아래에 '김알렉산드라가 집무했던 건물'이라는 명판과 함께 그의 얼굴 부조가 걸려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얼굴 부조는 떼어진 듯했다. 당시 명판에는 "김 스탄케비츠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가 1917~1918년 이 건물에서 사업했다. 볼셰비키 공산시위원회 정치부 위원, 하바롭스크시 소비에트 외부인민위원부 전권이었던 여사는 1918년 영웅적으로 최후를 마쳤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그 명판이 사라진 채 엉뚱한 이름이 적힌 동판이 김알렉산드라를 기억하고 있었다. 원래의 명판에는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 스탄케비치А.П.КИМ-СТАНКЕВИЧ'라고 이름이 올바르게 표기되었으나 새 판에는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쿰 스만케비치А.П.КЦМ-СмаНкеВцч'라고 잘못 박혀 있었다. 
 

▲ 김 알렉산드라의 이름이 잘못 새겨진 동판. ⓒ연합뉴스

 
다행히 김알렉산드라의 집무실은 러시아 당국이 보호건물로 지정한 상태였다. 조합원들은 입을 모아 "얼굴 부조상을 찾아 다시 붙이고 이런 독립 운동가이자 혁명가가 있었다는 한글 표기도 같이 이뤄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알렉산드라의 집무실을 몇 차례 방문했던 박흥수 기관사도 "이곳에 저 잘못 표기된 명판마저 없어진다면 여기가 김알렉산드라의 집무실이었는지 누가 기억할 수 있을까. 한국 정부도 북한 정부도 이 곳을 기념하지 않고 있다"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옷가게의 흔적이 남아있는 채로 지금은 텅 비워진 김알렉산드라의 집무실을 바라보며 김알렉산드라가 반혁명군에 체포됐을 때 동지들에게 말한 대목이 생각났다. 
 
"직접 조선의 혁명을 보고 싶다. 괜찮지 않은가. 우리의 사업은 발각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조선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이룰 수 없다면 우리의 아들딸들이 이룰 것이며, 그들이 못해낸다면 손자 손녀들이 해낼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 후손들의 힘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면 우리는 커다란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1918년 김알렉산드라는 총살당하기 직전, 두렵고 암담한 상황에서도 미래의 후손들을 생각하며 희망을 가졌다. 결국 그의 바람처럼 조선의 독립은 도래했지만, 친일청산이 실패하고 독재정권이 집권한 남한에서도, 김일성 1인 수령 체제를 구축한 북한에서도 조명받지 못한 연해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이렇게 잊혀 가고 있었다. 혁명가이면서 일본의 총칼과 맞서 싸운 김알렉산드라. 그의 이름이 제대로 새겨진 한글 동판 하나 걸릴 수 없는 것이었을까.
 
이름 찾기 대작전 
 
둘째 날. 러시아 혁명과 떼 놓을 수 없는 레닌 광장에 갔다. 칼 마르크스 거리의 레닌 광장은 하바롭스크의 중심지로 버스와 트램 노선이 꼭 거쳐 가는 지점이다. 레닌 동상은 생각보다 아담했다. 모자를 쓴 채로 한 쪽 손으로 마이를 잡고 있는 레닌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그 앞에서 그의 포즈를 따라 사진을 찍기도 했고, 근처의 작은 매점에서 핫초코를 사 먹기도 했다. 레닌 동상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있었고, 동상이 있는 턱에 걸터앉아 쉬는 사람도 있었다. 한때는 혁명의 기운이 가득했을 공간이, 혁명이 사라진 시대에 일상적인 공원이 되어있었다. 
 

▲ 레닌 광장에서 본 레닌 동상. ⓒ프레시안(서어리)

 
레닌 광장에서 칼 마르크스 거리를 따라 걷다 보면, 한국 사람의 이름이 붙은 거리가 나온다. '김유천 거리'다. 김유천은 독립운동가 김유경의 잘못된 표기로 알려져있다. 1900년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고려인 2세 김유경은 스물한 살에 혁명군에 가담해 76연대에서 소대급 지휘관을 맡게된다. 1929년 10월 반혁명군과의 전투에서 그는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듬해 하바롭스크는 그를 기리기 위해 이 거리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 하바롭스크의 김유천 거리. ⓒ프레시안(서어리)

 
거리에 붙은 표지판에는 'Ким Ю Чена'이라는 키릴문자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우리 일행은 키릴문자를 독해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 러시아어가 한국인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무는 이 길을 따라 곧게 자라있었고, 거리는 생각보다 길었다. 문득 이 거리를 지나가는 러시아 사람들이 이 거리의 이름을 자주 불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레닌 광장에서 김유천 거리를 따라 걷다보면 하바롭스크 중앙 시장이 나온다. 그곳에서 1번 트롤리버스를 타고 공항 쪽으로 가다 보면, 하바롭스크 중앙묘지에 도착한다. 묘지 안의 작은 정교회 사원에는 스탈린 대숙청 시기에 반혁명을 이유로 학살된 수많은 이름들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본의 아니게 '이름 찾기 대작전'을 펼쳤다. 
 

▲ 하바롭스크 공동묘지에서 이름을 찾고 있는 조합원들. ⓒ프레시안(서어리)

비석에서는 한인들의 이름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가 찾고자 했던 이름은 '조명희'였다. 이주한 한인 2세들에게 모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항일운동과 사회주의 혁명에 헌신한 조명희. 연해주 한인 문학의 뿌리로 불리는 조명희 선생의 추모비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 하바롭스크에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현재는 그 흔적을 찾기 힘들었다. 대신 이 비석에서 그의 이름 석 자는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우리 일행은 비석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리현숙ЛИ ХЕН СУК, 리호산ЛИ ХО САН, 리산ЛИ САН, 양철운ЯН ЧЕР УН, 박선한ПЯК СЕН ХВАН, 류한민ЛЮ ХАН МИН, 김도윤КИМ ДО УН, 김은순КИМ ЕН СУН, 김은춘КИМ ЕН ЧН, 김찬석КИМ ЧАН СЕКИ, 김찬윤КИМ ЧАН ЮН 
 
박흥수 기관사는 한인들의 이름 몇몇을 읽어주었고, 우리도 비슷한 문자의 이름들을 발굴해냈다. 하지만 조명희라는 이름을 발견하기는 묘연해 보였다. 비석에 적힌 이름들은 한인을 제외하고도 셀 수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포기하고 돌아서려는 그때, 한 조합원이 "어? 이거 조명희 같은데요?"라고 외쳤고, 우리 모두 그곳에 우르르 모였다. 유일하게 키릴문자를 발음할 수 있었던 박흥수 기관사가 와서 "오! 이름을 찾았네요"라고 판독을 완료하며 우리의 이름 찾기 대작전은 성공으로 끝났다.  
 

▲ 조명희 선생의 이름이 적힌 묘비. 위에서 세 번째에 조명희 선생의 이름이 키릴문자로 적혀 있다. ⓒ프레시안(서어리)

 
그 비석에 적힌 한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그들이 살아냈던 삶을 상상해봤다. 연해주로 살기위해 도망친 자의 자식이었거나, 독립운동가였거나, 혁명가였거나. 우리는 이 곳에서 돌아가신 독립운동가 김알렉산드라, 김유경, 조명희를 비롯한 수많은 이름들을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떤 이름들은 자신의 후손이 이곳에 와서 그들을 추모해주길 기다렸으리라. 먼 이국땅 하바롭스크에서 눈을 감았을, 그들의 역사를 생각하며 잠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다음 편에 계속) 
 

▲ 하바롭스크 공동묘지에서 묵념하는 조합원들. ⓒ프레시안(서어리)

 
 
박정연 기자 daramji@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서어리 기자 naeori@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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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의 세계가 열렸다, 지금 걸어야 한다

[5월에 걷기 좋은 길] 국립수목원-광릉-봉정사로 이어지는 광릉숲 즐기기

19.05.19 11:09l최종 업데이트 19.05.19 11:09l

 

  지난해 말 국립수목원에서 봉선사에 이르는 총 3km의 숲길이 새로 조성됐다. 이로써 그동안 차로 다녀야했던 전나무숲길을 걸어서도 즐길 수 있게 됐다.
지난해 말 국립수목원에서 봉선사에 이르는 총 3km의 숲길이 새로 조성됐다. 이로써 그동안 차로 다녀야했던 전나무숲길을 걸어서도 즐길 수 있게 됐다. ⓒ 변영숙
 
고혹적이고 농염했던 매화와 팝콘이 터지듯 일제히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던 벚꽃들, 제 한 몸 감당하는 것도 버거울 정도로 탐스러움을 자랑했던 겹벚꽃도 모두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돌계단과 담벼락에는 어느새 형형색색 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여기저기서 유채꽃 축제가 한창이다. 알록달록한 꽃의 현란함에 정신이 다 아찔할 정도다. 
 
바야흐로 신록의 계절이다. 꽃의 현란함에서 벗어나 나무와 새와 손톱 만한 야생화들이 주인인 숲의 세계로 발을 디뎌보자.

광릉숲의 역사는 세조의 능 조성과 함께 시작된다. 광릉숲 일대는 세조가 즐겨 찾던 사냥터였으나 1468년 세조의 능이 조성되면서 사방 15리의 숲이 능 부속 숲으로 지정되고 왕릉 숲으로 관리되기 시작했다. 일반인의 출입은 엄격히 통제됐다.
 
일제강점기에는 산림과 임업 연구를 위한 시험림과 학술보호림으로 지정, 보호됐고 6.25 이후에도 시험림으로 보존·관리됐다.

540년 동안 일반인에게 개방하지 않았던 덕분에 훼손되지 않은 광릉숲은 전 세계적으로 온대 북부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든 온대활엽수 극상림을 이루고 있어 생태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숲이다.

광릉숲에는 944 분류군의 식물을 비롯해 장수하늘소와 같은 곤충류 3977 분류군, 이들 곤충을 먹고 사는 까막딱따구리, 오색딱다구리 등 조류종 180종, 버섯 696종, 양서 파충류와 어류 등 총 6100여 분류군의 생물이 산다. 우리나라에서 단위 면적당 가장 많은 생물 종이 서식하는 산림생물의 보고지역이다. 2010년에는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되기도 했다(면적 2만 4465ha, 서식종 5710종). 
 
광릉 숲길 
  
  지난해에 개통한 광릉 숲길
지난해에 개통한 광릉 숲길 ⓒ 변영숙
 
최근에 광릉숲과 일대의 전나무 숲에 '광릉 숲길'이라는 탐방로가 새롭게 조성됐다. 2018년 5월 경희대학교 정문에서 능내교까지의 총 1km의 구간이 1차로 완공됐고, 능내교에서 국립수목원 정문에 이르는 총 2km의 구간이 2018년 12월에 개장됐다. 

아직 마무리 공사가 진행 중인 곳도 있으나 숲길 탐방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이로써 그동안 차를 타고 지나쳐야만 했던 총 3km에 달하는 전나무 숲길을 따라 봉선사–광릉-국립수목원의 일대의 숲을 온전히 즐길 수 있게 됐다.  

숲길은 차도와 맞닿아 있는 구간도 있고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깊은 숲 속으로 뻗은 구간도 있다. 나무마다 이름표를 달아 놓아 자연스럽게 '나무 공부'를 할 수 있다. 구간마다 테마별로 조성된 작은 정원들이 산책길에 재미를 더해준다. 돌담정원에서는 낮은 돌담을 따라 걸으며 노루귀, 엥초, 조개나물 등의 키 작은 야생화를 감상할 수 있고, 습지정원에서는 광릉쥐오줌풀, 동의나물, 노루오줌 등 습지 환경에서 자라는 야생화를 만나볼 수 있다. 
 
다만 대부분의 구간이 차도와 너무 근접해 있는 탓에 쌩쌩 달리는 차량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과 소음을 고스란히 견뎌야 하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수목원 왔다가 예약을 안 해서 못 들어갔어요. 대신 봉선사 주차장에 차 세우고 숲길 따라 걷는 중인데요. 차도랑 너무 가까워서 시끄럽고 매연도 심하고…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어요."
 

광릉 숲길 데크 길에서 만난 탐방객의 말이다. 

국립수목원 
  
  국립수목원 내 육림호 풍경
국립수목원 내 육림호 풍경ⓒ 변영숙
 
광릉 숲길의 출발점(혹은 종착점)인 국립수목원은 1987년 개원한 우리나라 최초의 수목원인 광릉수목원의 후신이다. 1999년 5월 24일 국립수목원으로 승격됐다. 개원 당시 광릉 주변 약 500헥타 면적에 불과했던 수목원은 지금은 광릉숲 전체 2만 2380헥타의 절반에 해당하는 1119.5 헥타, 동서 길이 4km, 남북 길이가 8km에 이른다. 남양주시 진접읍과 별내면, 포천군 소흘읍과 내촌면, 의정부시 민락동 등 2시, 1군 2읍, 1면 1동에 걸쳐 있는 광대한 지역이다. 

국립수목원은 산림의 수집과 연구, 보존, 산림정책, 다른 국가와의 협력까지 산림식물·생물과 관련해 A~Z에 이르는 모든 업무를 관장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산림연구기관이다. 
 
 1987년 개원한 광릉수목원이 1999년 국립수목원으로 승격됐다. 수목원의 규모는 광릉숲 전체의 절반인 1100헥타에 달한다.
1987년 개원한 광릉수목원이 1999년 국립수목원으로 승격됐다. 수목원의 규모는 광릉숲 전체의 절반인 1100헥타에 달한다.ⓒ 변영숙
   
수목원 안에는 수목원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는 각종 기념탑이 줄지어 서 있다. 2010년 6월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된 것을 기념하는 기념조형물, 아름다운 숲 선정 기념비, 국토녹화기념탑, 산림헌장 기념비 등 각종 기념탑과 조형물들이 그것이다. 
 
테마별로 38개 구역으로 조성돼 취향에 따라 관람로를 선택할 수 있다. 화양목이 즐비한 비밀의 뜰, 백합과 붓꽃으로 꾸며진 백합원, 희귀식물과 특산식물 보존원, 마을정원, 난대식물 온실, 무궁화원, 수생식물원, 무궁화원 등이 있다. 
 
산림박물관에는 우리나라 숲 현황과 산림정책, 일제에 의한 산림 수탈의 역사, 각종 목재의 특징과 쓰임새, 산림분포 등 우리나라의 산림과 나무에 관한 모든 유용한 정보들이 모여 있다. 규모나 내용으로나 다른 곳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박물관이니만큼 꼭 들러보는 것이 좋다.  

숲 속의 호수 '육림호' 수면 위로 부서지는 연둣빛 햇살과 분홍빛으로 일렁이는 물살이 마치 꿈속에서 보았던 풍경처럼 아련하다.  

호수 뒤편에는 200m에 달하는 전나무 숲길이 조성돼 있다. 이곳의 전나무들은 오대산 월정사의 전나무 종자를 증식해 1927년경 조림한 것으로 80년 이상의 수령을 자랑한다.
 
  국립수목원 내 호수 풍경
국립수목원 내 호수 풍경ⓒ 변영숙
 
국립수목원은 수목원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1일 5000명으로 관람객을 제한하고 사전예약제를 실시하고 있다. 수목원해설, 태교프로그램, 광릉숲 산새탐험 등 당일 참가 프로그램과 유아, 초등학생, 국군장병 등을 위한 사전신청 프로그램과 전문가용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개원일은 화요일~토요일이며, 일요일, 월요일, 새해 첫날, 설 및 추석연휴는 휴원일이다. 사전예약이 필수다. ARS나 전화 031-540-2000, 홈페이지(www.kna.go.kr)나 모바일앱(reservenew.kna.go.kr) 등을 이용해 예약하면 된다. 관람료는 1일 성인 1000원, 청소년 700원, 어린이(만 7~12세) 500원이다.  
 
광릉과 봉선사
       
 광릉 일대의 숲
광릉 일대의 숲ⓒ 변영숙
   
광릉 숲길 데크 길을 쉬엄쉬엄 걷다 보면 발걸음은 어느새 광릉에 와 닿는다. 광릉은 조선 7대 임금 세조와 세조의 정비 정희왕후의 능이다. 매표소에서 홍살문에 이르는 울창한 숲이 일품이다. 
 
봉선사는 고려 광종 20년인 969년에 법인국사 탄문스님이 창건한 고찰이다. 조선 예종 1년인 1469년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광릉에 모셔진 세조를 추모하기 위해 89칸으로 중창하고 봉선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6.25로 전소돼 1960년 이후 중창했다. 
  
 광릉숲길이 끝나는 곳에는 광릉의 원찰인 천년 사찰운악산 봉선사가 자리잡고 있다. 해마다 7월이면 연꽃축제가 열린다.
광릉숲길이 끝나는 곳에는 광릉의 원찰인 천년 사찰운악산 봉선사가 자리잡고 있다. 해마다 7월이면 연꽃축제가 열린다.ⓒ 변영숙
 
경내에는 정희왕후가 심었다는 500년 된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다. 또 부도전에는 친일파 문학가 춘원 이광수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한글로 쓴 대법당 현판과 봉선사대종이 유명하다. 봉선사 대종은 예종 원년에 세조를 추모하기 위해 봉선사 중창 당시 주조된 종으로, 보물 397호로 지정돼 있다. 봉선사에서는 해마다 연꽃축제가 열리고, 사찰음식, 다례, 불화 강좌 등 불교 관련 다양한 문화학교와 템플스테이가 운영된다. 

주변에는 광릉불고기, 한정식 등의 맛집과 분위기 좋은 카페가 즐비하다. 가족, 연인, 친구 누구와 와도 좋은 곳이다.  

광릉은 매주 월요일 휴일이며, 입장료는 1일 성인 10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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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항쟁 39주년… 금남로 가득 메운 “자유한국당 해체”

범국민대회 1만여 참가자들, “진상규명·역사왜곡 처벌” 한목소리

5월17일 광주에서 만난 류봉수 광주전남진보연대 상임대표. 그는 올해 5.18민중항쟁 39주년 기념행사위원회 공동 조직위원장이다.

“5.18의 진상은 여전히 규명되지 않은 채 왜곡과 폄훼에 시달리고 있고, 국회에서조차 정쟁의 수단으로 되고 있다. 9월14일쯤엔 진상조사위원회가 공식활동에 들어가야 하는데, 조사위원조차 꾸려지지 못했다. 자유한국당 망언 파동에 대한 징계 여론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반드시 역사왜곡에 대한 처벌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음에도 자한당은 징계 시늉만 하고, 수없이 많은 경고를 보냈음에도 광주에 온다고 한다.” 그의 말 속에서 다음날 광주에 발 딛은 자유한국당의 모습, 범국민대회가 열릴 금남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5.18 정부기념식을 찾은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광주시민들을 비롯해 5.18정신 계승을 위해 전국에서 모인 참가자들로부터 격렬한 항의를 받았다. 기념식이 끝난 후엔 정문이 아닌, 길도 아닌 길을 통해 쫓기듯 떠났다.

▲ 사진 : 뉴시스

5.18민중항쟁 39주년을 맞은 올해, 광주 금남로에서 열린 범국민대회 기조는 ‘5.18 진상규명’, ‘역사왜곡처벌법 제정’, ‘망언의원 퇴출’이다.

이날 범국민대회에 모인 1만여 참가자들의 분노는 하루 전 류봉수 조직위원장의 말 그대로였다. 분노한 참가자들의 요구가 범국민대회 기조에 그대로 담긴 것이다.

5.18 당시 미군 정보관이었던 김용장 씨의 “전두환이 광주를 방문한 한 시간 후 사살명령이 있었다”는 증언, “5.18은 계획된 시나리오였다”는 허장환 전 보안사 특명부장의 증언 등, 최근 5.18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단서와 정황들이 하나둘 밝혀지면서 ‘진상규명’에 대한 요구는 더없이 높은 상황.

그러나 ‘5.18 특별법’에 따른 진상조사위원회는 조사위원 추천을 두고 여야가 대립하면서 아직 첫발을 떼지 못한 상태다. 더 자세히 말하면 청와대가 자유한국당 추천 조사위원 3명 중 2명을 법률상 제척사유를 이유로 임명을 거부하고 재추천을 요청했으나 자유한국당은 이를 3개월 넘게 거부하고 있다.

참가자들은 5.18 진상규명과 역사왜곡 처벌을 방해하는 자유한국당을 맹비난했다.
5.18민중항쟁 제39주년 기념행사위원회 김후식·김상근·김재규 공동상임행사위원장은 범국민대회 대회사에서 “5.18광주학살로 들어선 학살정권의 뿌리에서 나고 자란 자유한국당이 대한민국의 가장 큰 적폐”라는 말로 자유한국당을 작정한 듯 비판했다.

“우리는 더이상 그들의 역사왜곡과 망언을 좌시할 수 없다. 자유한국당이 가로막고 있는 5.18민중항쟁의 진상규명은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적폐청산이자 역사와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 범국민대회 대회사를 하고 있는 공동상임행사위원장단 [사진 : 강호석 기자]

39주년을 맞은 결심 속에서도 자유한국당 투쟁에 대한 의지가 담겨 있다.

“우리는 1980년 5월 그날의 죽음을 딛고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을 요구하며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했고, 6월 민주대항쟁과 촛불혁명에서 마침내 승리했다. 피와 목숨을 건 투쟁으로 만들어진 오늘의 민주주의와 인권, 정의와 평화를 저들(자유한국당)에게 다시 내줄 수 없다.”

그들이 자유한국당을 콕 찍어 비판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자유한국당의 ‘5.18망언’처럼 역사 왜곡을 처벌하는 법률안이 국회에서 공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법안 처리가 가로막힌 것 또한 “5.18망언 당사자들이 속한 자유한국당이 논의를 거부”하고 있다는게 그 이유다.

166명의 국회의원이 지난 2월22일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5.18 특별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개정안엔 ‘5.18민주화운동을 부인·비방·왜곡·날조하거나 허위사실을 유포한 자에게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개정안은 발의 후 제대로 된 논의조차 하지 못했다. 39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지난 4월 여야 4당은 ‘올해 기념일 이전 5.18 특별법 개정안을 처리’하기로 합의했지만 이마저도 무산됐다.

▲ 사진 : 뉴시스

참가자들은 ‘역사왜곡 처벌법’을 즉시 처리하라고 외쳤다.

박석운 5.18시국회의 상임대표도 자유한국당을 호되게 꾸짖으며 “해체만이 답”이라고 강조했다. 박 대표는 자유한국당에게 “5.18을 모독한 3인의 국회 퇴출과 5.18학살 역사왜곡을 처벌하는 5.18특별법 개정에 순응할 것”을 촉구하며 “망언의원을 퇴출시키지 않고 진상규명을 방해한다면 자한당을 해체시키는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참가자들은 박수와 환호로 동의했다.

망언 당사자 김순례·김진태·이종명 의원은 국회 윤리특별위원회(윤리특위)에 제소됐지만 자유한국당이 윤리특위 자문위원회 구성에 발목을 잡고 심의를 거부하고 있는 상태다. 자유한국당 자체 징계도 감감 무소식이다. 자유한국당은 이종명 의원의 제명을 결정했지만 의원총회를 열지 못해 처분은 미뤄지고 있고 김진태 의원은 ‘경고’, 김순례 의원은 ‘당권 정지 3개월’ 처분에 그쳤다.

박 대표 역시 5.18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했다.
“전두환의 광주시민 사살명령, 시민에 대한 헬기 기관포 사격, 한국군 특수부대를 투입해 관제폭도 공작, 성폭력 만행, 시신 암매장, 시신 불법화장 처리 등을 낱낱이 조사해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 5.18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대회사를 하고 있는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 [사진 : 선현희 기자]

광주를 찾은 노동자들은 범국민대회에 앞서 금남로에 모여 5.18민중항쟁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를 열었다.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은 대회사에서 “자유한국당은 오늘 광주시민들 앞에 뻔뻔스럽게 나타나 왜곡과 망언, 5.18폄훼의 총탄을 발포하고 있다”면서 “이런 자유한국당은 해체돼야 마땅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민중을 총칼로 짓밟고도 평생을 호의호식하며 살아온 학살범죄자들을 역사의 이름으로, 민중의 이름으로 단죄해야 한다”면서 “국회는 역사왜곡처벌법을 즉각 제정하고, 정부는 국민과 한 약속대로 하루빨리 5‧18정신을 헌법에 담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항쟁 40주년이 되기 전에 반드시 완전한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이루자.”

▲ 전국노동자대회에 참가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5.18 역사왜곡·자유한국당 해체”를 외치고 있다.

 

▲ 범국민대회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는 각계각층 대표단.

5·18진상규명! 역사왜곡처벌법 제정! 망언의원 퇴출! 범국민대회 결의문

오늘 우리는 5‧18민주화운동 39주년을 맞아 신군부 쿠데타 세력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불의에 목숨을 걸고 저항했던 ‘항쟁’과 해방 공간에서 함께 주먹밥을 나누었던 ‘공동체’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가 모인 이 자리는 39년 전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계엄군에 맨몸으로 맞섰던 바로 투쟁의 거리 금남로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죽도록 두들겨 맞고, 대검에 찔리고, 총에 맞았을 때 광주시민들은 무서웠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피를 흘리는 시민들은 병원으로 데려갔고, 부상자를 살리기 위해 헌혈을 했으며, 계엄군에 맞서 싸우는 젊은이들을 위해서는 주먹밥을 아낌없이 만들고 나누어 먹었습니다. 소금과 식초로 간을 한 주먹밥을 먹으며, 우리 형제자매들의 억울한 죽음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바로 그 금남로입니다.

그렇게 39년이 지났지만, 민주주의는 여전히 우리의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촛불혁명으로 정권을 교체했지만 사회대개혁은 가물가물하고,곳곳에서 퇴행의 움직임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적폐세력이 고개를 쳐들고, 국회는 막말 정치인들이 판을 치며, 광화문은 태극기 모독부대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39년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는 다시 한번 5‧18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과 왜곡행위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살인자 전두환은 버젓이 회고록을 내고, 김순례, 김진태, 이종명은 막말을 쏟아놓고, 자유한국당은 망언의원에 대해 솜방망이 징계로 광주를 비웃고, 적폐세력들은 5‧18 희생자를 추모하는 바로 오늘, 광주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자유한국당은 분명한 사죄도 없고, 어떻게 하겠다는 약속도 하지 않았습니다. 국회는 당리당략에 빠져 5‧18에 대한 악의적 왜곡을 처벌해야 한다는 법안을 발의만 해놓고 아무런 진전도 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극우 보수세력에 의한 5‧18 왜곡과 망언이 있을 때마다 우리 광주시민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저들의 이런 망동을 지켜봐야만 한단 말입니까?

5.18 39주년, 민생과 평화, 통일의 과제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촛불 항쟁이 있었음에도 대한민국은 여전히 재벌들의 세상이며, 부동산 부자들의 세상입니다. 민중에게 오늘의 대한민국은 내일을 꿈꾸기 어려운 나라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많은 청년과 학생들이 입시전쟁을 치르고 힘겹게 대학을 졸업해도 일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으며, 일할 곳을 찾아 노동자가 되어도 비정규직이 되어 상시적인 해고위협, 과로, 낮은 임금,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재해와 사고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합계 출산율이 1도 안된다는 통계가 보여주듯 젊은이들은 결혼과 출산의 여력을 갖지 못하고 있으며, 어른들은 노년을 대비할 수도 없이 생업에 쫓기고 있고, 나이 드신 분들은 극단적 빈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5.18을 통해, 분단을 빌미로 군사독재정권의 편에 선 미국의 실체를 보았으며, 그리하여 우리는 오월 정신의 계승이 민주주의를 넘어 자주와 평화, 통일에 이른다는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으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적폐정권이 쌓아놓은 분단과 적대의 유물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한반도 전쟁위기 해소와 평화 정착은 더 큰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있습니다.

범국민대회에 참석하신 국민 여러분! 올해 5‧18민중항쟁 슬로건이 무엇입니까?

오늘을 밝히는 오월! 진실로! 평화로!

우리는 5‧18의 진상을 규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5‧18정신을 계승하여 어둠을 밝히고, 적폐를 뿌리 뽑고, 민중의 생존을 보장하며,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5월 영령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5‧18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 망언의원 퇴출, 5‧18왜곡처벌법 제정, 5‧18진상조사위원회 가동, 적폐청산과 사회대개혁, 한반도의 전쟁위기 해소와 평화 정착이라는 결의를 모았습니다.

-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즉각 규명하라
- 5‧18민주화운동 진상조사위원회를 즉각 가동하라.
- 5‧18 망언의원을 퇴출하라.
- 5‧18왜곡처벌법을 제정하라.
- 우리사회의 적폐를 청산하고 사회대개혁을 추진하라.
- 한반도의 전쟁위기 해소와 평화 정착의 길에 담대하게 나설 것을 촉구한다.

2019. 5. 18.

조혜정 기자  jhllk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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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철의 거짓말’ 양심을 버리면 머리도 나빠지나

‘심재철의 거짓말’ 양심을 버리면 머리도 나빠지나
 
 
 
임병도 | 2019-05-17 09:42:5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최근 자유한국당 심재철 의원이 유시민 노무현 재단 이사장과 1980년 신군부 합동수사본부에서 작성한 진술서를 놓고 진실 공방을 벌였습니다.

심 의원은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었던 유시민이 배신했다며 당시 진술서를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유 이사장은 “감출 것은 다 감췄고, 부인할 것은 다 부인했다”며 반박했습니다.

유시민 이사장은 “처음에 학생회 간부를 맡을 때 잡혀서 진술하게 되면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노출할지 이미 사전에 얘기가 됐다”라며 오히려 진술서를 잘 써서 조직을 잘 지켰다고 주장했습니다.

신군부의 모진 고문 속에 작성된 진술서의 진실 공방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군인들에게 대항했다는 사실 만으로 충분합니다.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자신의 신념을 그대로 이어갔는지, 권력을 위해 양심을 버렸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심재철 의원은 변절자에 속합니다.

5·18 보상금 받아놓고 명단 공개 요구한 심재철

심재철 의원은 5.18민주화 유공자 명단 공개를 요구했습니다. 가짜 유공자들, 세금이 낭비된다는 극우보수와 자유한국당의 5.18 폄훼와 뜻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5.18 유공자 보상이 문제 있다고 주장했던 심재철 의원, 알고 보니 1998년에 5·18 보상금 3500만 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심재철 의원은 보상금을 받은 사실이 <경향신문>을 통해 알려지자, 보상금을 받은 것은 맞지만, 자신이 신청하지 않았고, 일괄 보상됐다고 해명했습니다. 그러나 5.18 관련법을 보면 본인이 반드시 신청해야 하고, 신청하지 않은 사람은 심사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심재철 의원실은 보상금을 반납했다고 말했지만, 광주시 관계자는 “피해자가 지급받은 보상금을 반납하고 싶다고 하더라도 규정이 없어 반납받을 수 없다”라고 밝혔습니다.

5.18 보상금을 받은 사실은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왜 자신은 받아 놓고 5.18유공자들을 부도덕한 사람들로 공격하고, 거짓말로 변명하는지는 따져봐야 합니다.

회의 두 번 하고 9천만 원 받아 간 세금도둑

극우보수는 5.18유공자 보상금이 세금으로 낭비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진짜 세금이 아깝게 사용된 사람이 심재철 의원입니다.

“과거 19대 국회 제가 민간인불법사찰국조특위 야당 간사시절, 단 두번 회의 열고 심 위원장께서 활동비 9000만 원 받아 가신 후에 비난 여론에 반납했지만-몰염치는요? 국회부의장 2년 시절 받아간 6억이 특활비인가요. 업추비(업무추진비)인가요.” (2018년 9월 29일 더불어민주당 박범계 의원 페이스북 글)

심재철 의원은 국회부의장 시절 특활비 6억 원을 받았고, 민간인불법사찰국조특위 회의에 두 번 참석하고 활동비 명목으로 9000만 원을 받았습니다.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반납했지만, 그 사용처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뉴스타파>는 심재철 의원이 배우자가 대표로 있는 업체에 국회 예산과 정치 후원금으로 일감을 몰아줬다고 보도했다. ⓒ뉴스타파 캡처

2018년 11월 <뉴스타파>는 심재철 의원이 국회 예산과 정치후원금으로 배우자가 대표로 있는 업체에 9천만 원대 인쇄 용역을 몰아줬다고 보도했습니다.

심재철 의원은 배우자 권 모씨가 대표로 있는 <문예당>에 2013년부터 2016년까지 4년 동안 각종 보고서, 연하장, 정책자료집, 후원회 안내장, 선거공보물 등의 인쇄를 맡겼습니다. 마치 재벌이 내부 거래를 통해 매출을 올리고 이득을 취하는 방식과 비슷합니다.

심 의원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국민들 눈에는 비윤리적인 행동이자 사라져야 할 적폐처럼 보입니다.

양심을 버리면 머리도 나빠지나

▲역사학자 전우용씨는 심재철의 5.18보상금 해명을 비판하면서, 5.18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이유는 사욕 때문에 자기 기억과 싸우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페이스북 화면 캡처

역사학자 전우용씨는 심재철 의원의 5.18 보상금 해명에 대해 “5.18 진상이 아직 다 밝혀지지 않은 이유는 사욕 때문에 자기 기억과 싸우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며 “양심은 심장에 있는 게 아니라 뇌에 있다. 양심은 지능 문제다. 양심을 버리면 머리도 나빠진다”라고 비판했습니다.

심재철 의원은 유시민 이사장의 진술서를 신랄하게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MBC기자를 거쳐 신한국당에 입당하면서 소위 권력의 중심부를 향해 걸어왔습니다.

심 의원은 신군부의 독재를 목격하고도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 사찰 의혹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내란음모 조작을 경험하고도 북한 서체와 유사한 현수막 하나만을 놓고 북한 개입설을 주장했습니다.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광주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폭동이라며 그들을 폄훼하고 마지막 남은 자존심에 대못을 박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양심을 버리면 진짜 머리도 나빠지는가 봅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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