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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준의 경제비평] 바이든 정부의 미국 국내 경제정책, 어떻게 볼 것인가?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1/06/14 08:35
  • 수정일
    2021/06/14 08:35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나원준 경북대학교 경제통상학부 교수
발행2021-06-13 15:45:13 수정2021-06-13 15:45:13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바이든 경제정책은 지난 3월 11일 확정된 1.9조 달러 규모의 구제계획(American Rescue Plan), 2.2조 달러를 소폭 상회하는 일자리계획(American Jobs Plan), 사회안전망 강화를 위한 1.8조 달러의 가족계획(American Family Plan) 등 대규모의 확장적 재정정책으로 대표된다. 합계 약 6조 달러의 이 지출 계획은 전쟁 기간을 제외하면 미국 역사상 최대 수준이다. 최근 6월 9일에 하원의 심사가 개시된 일자리계획은 가족계획과 더불어 미국 경제의 기초를 근본적으로 전환시키려는 지향을 갖는 것으로서,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미국 전역의 노후 인프라를 현대화하며 제조업의 경쟁력을 지원하고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것이 그 핵심 내용이다.

적극적 재정 운영과 부자 증세, 노동권 강화는 전향적인 변화

일자리계획과 가족계획은 10년에 걸쳐 시행되며 여기에는 4조 달러가 지출된다. 바이든 정부는 그 재원의 상당 부분을, 10년간 3.6조 달러 규모의 부자 증세로 조달하고자 한다. 5월말에 발표된 세제 개편안에 따르면 대기업의 법인세 최고 세율은 21%에서 28%로 오른다. 이는 2017년 트럼프 정부에서 35%를 21%로 떨어뜨린 것을 중간 정도로 되돌려놓는 조치이다. 소득세 역시 개인 기준 연간 45만 달러 이상, 부부 합산 50만 달러 이상의 고소득자에 대한 세율이 37%에서 39.6%로 인상된다. 특히 자본이득(보유하고 있는 자산의 가격이 상승하면서 발생한 이득)에 대한 과세가 크게 강화될 예정이다.

바이든 경제정책의 노동정책도 짚어볼 만하다. 바이든 정부는 케네디 이후 처음으로 노동운동가 출신 인사를 노동부 장관에 임명했다. 연방정부와 계약하는 노동자에 대해서는 행정명령을 통해 15달러 최저시급이 보장되도록 했다. 3월에는 1930년대 뉴딜 이후 가장 노동 친화적이라고 일컬어지는 노동법 개정안이 하원을 통과했다. 노동자들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에 대한 보호가 강화되었고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정부의 처벌 권한이 확대되었다. 플랫폼 노동자를 독립 계약자로 보는 규정도 폐지되었다. 상원을 통과하기는 어렵다고 하지만 전향적인 변화인 것만은 분명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뉴시스

그러나 바이든의 정책 변화를
새로운 경제 질서의 출현으로 보는 것은 성급한 판단

 

그러나 그와 같은 정책 변화를 새로운 경제 질서의 출현으로 볼 수 있을지, 혹은 과거 뉴딜 체제로의 복귀로 낙관해도 될지는 의문이다. 일자리계획이든, 가족계획이든, 세제 개편안이든, 노동법 개정안이든, 당장 공화당 반대로 입법이 좌초되거나 그 내용이 축소 수정되기 쉽다. 입법에 성공하더라도 현재의 법안 내용을 과연 신자유주의와의 단절로 볼 수 있을지는 다시 따져볼 문제이다. 일례로 법인세 최고 세율은 인상되더라도 2017년 이전 수준에 못 미친다. 부자 감세 기조는 벗어난다고 하지만 중산층을 포괄하는 보편 증세로 나아가지 않은 점에서 미국 사회의 불평등 심화 추세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일 수 있다. 규제 일반에 대한 정책 방향성도 아직 뚜렷하지 않은 것 같다. 환경규제가 강화된다고는 하지만 대개 트럼프 정부에서 완화된 것을 되돌리는 정도이다. 기후위기 대응은 대자본의 이해관계를 해치지 않는 범위로 국한되고 말았다는 비판이 이어진다.

노동법 개정안도 한계가 있다고 한다. 단체행동권에 대한 상당한 제약이 여전한 점,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낮은 처벌 수위가 시정되지 않는 점, 플랫폼 노동자의 노동자성이 적극적으로 인정되었다고는 볼 수 없는 점 등이 지적된다. 연방 최저시급을 15달러로 인상하는 내용을 구제계획에서 삭제한 것은 결국 민주당이었다. 코로나19 감염위기에도 불구하고 버니 샌더스의 전 국민 단일건강보험 공약을 거부한 것 역시 민주당이었다. 아직 그 내용이 확정되지 않았고 정세 변화에 따라서는 앞으로 얼마든지 후퇴하거나 역전될 수 있는 최근의 정책 변화를 두고 새로운 경제 질서의 출현을 거론하고 신자유주의가 완전히 퇴조하는 조짐으로 단정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일 수 있다.

코로나19 경제위기가 불러온, 기존 거시경제정책 패러다임의 위기

그러나 바이든 정부의 국내 경제정책 기조 변화가 기존 거시경제정책 패러다임이 처한 위태로운 현실을 드러낸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한 듯하다. 그간에 거시경제학에서 논의되어온 한 가지 이론적 과제는, 통화정책(중앙은행이 이자율을 조정해 경제를 관리하는 정책)과 재정정책(정부의 재무부처에서 지출 예산과 조세 수입의 크기를 조정해 경제를 관리하는 정책) 사이에 어떤 역할 분담(assignment issue)이 최선인지를 밝히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2000년대 초반까지 보수적인 기성 학계에서 합의된 결론은, 경제의 과열이나 침체를 막는 역할은 통화정책이 주로 맡고 재정정책은 소극적으로 재정수지(세입에서 세출을 뺀 것)가 적자가 나지 않게 관리하는 편이 최적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는 경제 안정화에 있어 통화정책의 우위(monetary dominance)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적어도 1950년대 이후 비교적 최근까지 미국에서는 통화정책이 민간 금융시장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 ‘중립성 원칙’(neutrality principle)이 고수되었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는 화폐를 공급할 때 민간 기업이 발행한 채권이나 주식을 매매하지 않고 국채(정부가 발행한 채권)만을 거래해왔다. 이에 따라 재정정책이 정부 개입에 따른 왜곡을 초래하는 반면 통화정책은 자유시장의 이상적인 자원 배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통화정책 우위의 원칙이란 다름 아닌 시장원리주의 이념의 확인이었던 셈이다. 보수적인 기성 학계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제 안정화를 달성하려는 과정에서도 정책 당국이 재량적으로 판단할 여지를 최소화하고 미리 사전에 약속된 ‘준칙’을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준칙주의를 주장했다. 재량에 입각한 정부 재정정책은 경제에 해악을 끼친다고 치부되었다. 통화정책 우위, 준칙주의, 중립성의 원칙은 기존 경제정책 패러다임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경제위기는 모든 것을 뒤흔들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연방준비제도는 ‘양적완화’(이자율이 0%와 같은 어떤 하한선까지 떨어진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민간으로부터 자산을 매입하고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라는 비전통적 통화정책을 시행했다. 그 과정에서 주택저당증권이나 민간 기업이 발행한 증권을 매입했으므로 중립성 원칙의 훼손은 불가피했다. 양적완화 자체가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을 거친 결과물이었으니 준칙이 있었다 해도 그것을 따를 여유는 없었다. 이번 코로나19 경제위기에서는 어땠을까? 연방준비제도는 위기가 닥쳐오자 지체 없이 양적완화로 복귀했고 민간 증권의 매입에 나섰다. 준칙은 이번에도 지켜질 수 없었다. 그나마 각국에서 재정정책을 규율해온 준칙의 적용조차 유예되었다.

통화정책 우위의 원칙도 코로나19 경제위기로 도전을 받는 양상이다. 양적완화는 금융시장의 붕괴를 막는 데 치중하는 것이므로 자산가 계층을 보호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막상 경제위기의 충격을 정면으로 맞은 노동자 계층과 빈곤층에 대한 지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결과적으로 분배가 크게 악화되었다. 이에 따라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진보적인 경제학자들은 취약 계층에 대한 정부의 직접 지원(going direct) 필요성과 이를 위한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요구했다. 코로나19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이번에는 취약 계층의 직접 지원과 경제 회복을 목적으로 대규모의 재량적 재정 투입이 이루어지고 있다. 전통적인 거시경제정책 패러다임에서 금기시되던 수단들이 채택되고 있는 것이다.

달러(자료사진)ⓒpixabay

거시경제학의 대안적 관점과 고압경제론은
성장 경로의 전환 가능성, 이력 효과, 재정 여력에 대한 진전된 인식을 공유

그렇다면 바이든 경제정책이 근거하는 지적 전통은 어떤 것일까? 현재로서는 재무장관 재닛 옐런의 ‘고압경제론’(high pressure economy, 침체를 벗어나기 위해 정부가 일정 기간 재정지출을 집중적으로 늘려 수요를 확대하면서 노동시장을 과열 상태로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 외에 어떤 새로운 경제학이 바이든 경제정책을 뒷받침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고압경제론 자체도 완전히 새로운 이론은 아니다. 혹자는 과감한 확장 재정을 강력히 지지해온 현대화폐이론(이하 ‘MMT’)이 바이든 경제정책의 근거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대표적인 MMT 경제학자 스테파니 켈튼이 조각 과정에서 제외되면서 바이든 정부에 MMT의 인적 기반이 남아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든 정부의 경제정책이 거시경제학의 대안적 관점들과 공유하는 요소들은 분명히 있다.

주류 거시경제학의 거장 올리비에 블랑샤는 바이든 정부의 구제계획을 비판하면서 9천억 달러 이상의 재정 투입은 미국 경제의 경기 과열과 인플레이션을 야기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여기서 9천억 달러라는 수치는, 실업률이 낮았던 2019년 4분기까지의 추세가 그대로 이어지는 기존 ‘완전고용’ 성장 경로로 미국 경제가 복귀하는 데에 재정 투입이 얼마나 필요한지 계산한 결과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논리는, 경제의 미래 성장 경로를 과거 추세에 기초해 주어지는 것처럼 사고하는 주류 경제학의 경향성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보수적인 기성 학설에 따르면, 마치 중력의 작용으로 사과가 늘 지구 중심 방향으로 떨어지듯 경제 역시 시장 원리가 순조롭게 작동하기만 하면 기존의 ‘완전고용’ 추세를 회복하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경제의 미래 성장 경로에는 막대한 불확실성이 존재하며 경제가 과거의 완전고용 추세를 자동적으로 회복한다는 생각은 근거가 없다. 완전고용을 가져오는 성장 경로조차 유일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 앞에 놓인 미래 성장 경로는 정책 효과에 따라 수많은 갈래로 길이 나눠질 것이다. 좋은 정책은 경제의 성장 경로를 상방으로, 나쁜 정책은 하방으로 전환시킨다. 고압경제론은 미래 가능한 성장 경로가 유일하지 않으며 어떤 정책이 실행되는가에 따라 더 좋은 성장 경로로 도약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대안적 거시경제학의 새로운 관점과 일맥상통한다.

고압경제론은 ‘이력 효과’(hysteresis, 경제의 과거 및 현재의 상태가 미래 성장 경로에 미치는 영향)와 ‘재정 여력’(재정 투입을 늘릴 수 있는 여지)에 대한 대안적 거시경제학의 진전된 인식과도 관련이 있다. 고압경제론 자체가 경제 침체의 지속성을 가져오는 부정적인 이력 효과를 극복하려는 방안으로 제안된 것이면서 동시에 충분한 재정 여력과 이를 지원하는 통화정책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점에서 그렇다. MMT가 강조해온 미국의 재정 여력에 대한 새로운 인식 역시 간접적으로나마 바이든 정부의 과감한 지출 계획 수립을 자극하고 고무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재닛 옐런 미국 재무부 장관ⓒ뉴시스

근본적인 전환의 조건

바이든 정부 국내 경제정책 기조의 변화가 근본적인 성격의 것인지, 그리하여 1960년대 이전의 뉴딜 경제 질서를 회복할 수 있을지는 지금으로서는 예단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분명한 것은 경제 질서의 근본적인 전환은 반드시 사회정치적 세력 균형의 변화를 수반한다는 사실이다. 근본적인 전환의 조건은 바이든 경제정책의 변화가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자본의 영향을 제한하는 대항력을 형성해낼 수 있는지, 그리하여 사회 계급 간에 새로운 진취적인 균형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그와 같은 전환이 실제로 근본적인 것이 되더라도 그것은 장기적으로만 확인될 수 있을 뿐이다. 새로운 경제 질서를 이끌어 갈 정치 주체의 형성에 실패하면 바이든 경제정책 전환의 비전도 퇴색되고 말 것이다. 경제적 불확실성과 정세의 가변성이 큰 상황에서 후퇴와 역전의 가능성은 너무 크다.

만약 경제 질서의 전환이 근본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장차 경제학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과감한 정책 실천이 이론을 앞서가야 하는 상황이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대안적 경제학의 씨앗이 뿌려질 수 있다. 다만 역사의 경험은 굳건한 과거의 도그마를 극복하지 못한 채로는 새로운 경제 질서가 뿌리 내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한때 번영을 위한 금과옥조로 여겨지던 금본위제도가 1930년대 세계대공황으로부터의 회복을 지연시킨 요인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한 번 대전환의 기회를 맞은 오늘 우리의 인식을 지배하고 있는, 기성 주류 경제학의 극복되어야할 낡은 도그마부터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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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실현되는 날

[개벽예감 448]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실현되는 날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 기사입력 2021/06/14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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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2000년 2월부터 5월까지 남북미 3자관계의 동향

2. 낮은 단계의 연방제 방안을 합의하다

3. 21년 동안 이루어놓은 남북합의가 전부 사문화되었다

4. 급변하는 주변정세와 두 개 해방전쟁의 결정적 시기

 

 

1. 2000년 2월부터 5월까지 남북미 3자관계의 동향

 

2021년 6월 15일은 6.15 공동선언이 발표된 때로부터 21년이 되는 날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평양상봉과 정상회담은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진행되었다. 분단체제를 뒤흔든 역사적인 사변이었다. 6.15공동선언에 따르면, 2000년 남북정상회담은 “서로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데 중대한 의의를 가지는” 역사적 사변이었다고 한다. 

 

시선을 격동의 2000년으로 돌려보자. 당시 김대중 정부는 남북정상회담을 어떻게 추진했던가? 이 의문을 풀어주는 이야기는 의외로 골프장에서 시작된다. 

 

21년 전, 경기도 하남시에 미8군 골프장이 있었다. 원래 미8군 골프장은 1958년 서울에 있는 미국군 용산기지에 속한 90,000여 평의 대지에 건설되었는데, 1991년 노태우 정부가 경기도 하남시에 28만2,000여 평이나 되는 거대한 성남골프장을 건설하여 미국에 상납했다. 미국은 성남골프장을 상납 받자마자 즉각 캘리포니아주에 편입시켰다. 남측 정부가 미국에 무상으로 상납한 토지들은 모두 캘리포니아주에 편입되었다. 

 

2019년 4월 1일 문재인 정부는 경기도 평택에 있는 미국군기지 캠프 험프리스(Camp Humphreys) 영내에 성남골프장보다 더 크고 멋진 골프장을 건설하여 미국에 상납했다. 지금 주한미국군이 사용하고 있는 평택골프장의 이름은 리버 벤드 골프코스(River Bend Golf Course)다.

 

지난 63년 동안 용산에서 성남을 거쳐 평택으로 옮겨온 미8군 골프장의 이전사는 미국의 한국지배와 한국의 대미예속이 응축된 굴욕의 역사다. 굴욕의 역사 속에서 미8군 골프장만이 아니라, 알짜배기 땅에 들어앉은 주한미국군기지들이 모두 캘리포니아주에 편입되었다. 이런 참담한 현실은 주한미국군이 우리 땅을 불법적으로 타고 앉은 점령군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인 2000년 3월 중순 어느 날, 당시 점령군사령관 토머스 슈워츠(Thomas A. Schwartz)가 성남에 있는 미8군 골프장에 한국군 장성들과 함께 행차했다. 2019년 9월 8일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그날 토머스 슈워츠는 한국군 장성들과 함께 성남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다가 한국군 장성들에게 “나는 당신네 정부가 뭐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2000년 3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었는데, 점령군사령관이 한국군 장성들에게 남북정상회담이 비밀리에 추진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이다. 당시 한국군 장성들은 김대중 대통령이 비밀리에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으므로, 점령군사령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점령군사령관의 골프회동발언은 2000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제의한 비밀사항을 미국이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2019년 9월 8일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2000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은 덩샤오핑(鄧小平)의 장남 덩푸팡(鄧樸方)을 통해 장쩌민(江澤民) 당시 중국 국가주석에게 남북정상회담 개최제의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전달해달라고 청탁했었다. 덩푸팡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의 청탁을 전달받은 장쩌민 주석은 2000년 3월 5일 황쥐(黃菊) 당시 상하이 당서기를 특사로 평양에 파견했다. 

 

장쩌민 주석의 특사가 김대중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평양에 도착한 시점과 거의 같은 시점에 또 다른 중개자가 평양에 도착했다. 2003년 2월 13일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당시 조일무역회사 신니혼산교(新日本産業) 사장이었으며, 총련계 재일동포 2세로 일본에 귀화한 요시다 다께시(吉田孟)는 김대중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개최제의를 2000년 3월 초 자신이 북에 전달했다고 밝혔다고 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개최제의를 두 개의 경로를 통해 전달받고, 그 제의를 수락했다. 그에 따라, 2000년 3월 8일부터 10일까지 싱가폴에서 비공개 예비접촉이 있었다.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과 송호경 당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 싱가폴 예비접촉에서 만났다. 남과 북은 2000년 3월 17일 상하이 예비접촉과 3월 22일 베이징 예비접촉에 이어 4월 8일 베이징에서 진행된 제4차 예비접촉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2000년 4월 9일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추진상황을 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당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William J. Clinton)에게 보고했고, 이튿날 청와대는 남과 북이 2000년 6월 12일부터 14일까지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진행하기로 합의했다는 사실을 세상에 공개했다. 2000년 4월 30일 김대중 대통령은 당시 외교통상부 차관 반기문을 백악관에 보내 클린턴 대통령에게 친서를 전달했다.  

 

그런데 2020년 7월 27일 <월간조선>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을 알려주었다. 보도에 따르면, 남과 북은 2000년 4월 8일 중국 베이징에서 진행된 예비접촉에서 남북정상회담 개최문제를 확정한 ‘남북합의서’를 채택하면서 비공개 합의서도 채택하였다는 것이다. ‘경제협력에 관한 합의서’라는 제목의 비공개 합의서에 따르면, 남측은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5억 달러를 (북측에) 제공”할 뿐 아니라, ”민족적 협력과 상부상조의 정신에 입각하여 북측에 2000년 6월부터 3년 동안 25억 달러 규모의 투자 및 경제협력차관을 사회간접부문에 제공”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위에 인용한 <월간조선> 보도에 따르면, ‘경제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이행하기 위해 김대중 대통령은 국정원 계좌를 통해 북에 4억5,000만 달러를 송금했고, 나머지 5,000만 달러를 현물로 제공했고 한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2000년 6월부터 3년 동안 25억 달러의 투자 및 경제협력차관을 북에 제공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이 추진한 대북송금은 백악관의 노여움을 불러일으켰다. 백악관의 시각에서 보면, 김대중 대통령이 자기들에게 전혀 알리지 않고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한 것도 괘씸한 일이었을 뿐 아니라, 거기에 더하여 30억 달러나 되는 현금, 투자금, 차관을 북에 제공하는 것은 미국의 대조선경제제재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로 보였던 것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대북송금이 미국의 대조선경제제재를 무력화하는 것을 방관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김대중 정부가 북에 30억 달러를 제공하지 못하게 합의이행을 가로막았다. 그들의 차단압박에 굴복한 김대중 대통령은 대북송금에 합의한 30억 달러 가운데 5억 달러만 제공했고, 나머지 25억 달러는 제공하지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송호경 부위원장을 만나 ‘경제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한 것으로 하여 미국의 미움을 받은 박지원 특사는 대북송금이라는 죄목으로 2003년 6월에 구속되었고, 2006년 5월에 징역 3년형을 받았다. 또한 당시 대북협력자금을 출연한 것으로 하여 미국의 미움을 받은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도 대북송금으로 고초를 겪던 중 2003년 8월 4일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남북정상회담을 한 달 정도 앞둔 2000년 5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에서 미국의 요구조건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박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의 친서를 받은 날로부터 한 주간 뒤인 2000년 5월 7일 당시 미국 국무부 고문 웬디 셔먼(Wendy R. Sherman)을 서울로 급파했다. 2019년 9월 8일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2000년 5월 8일 서울에 도착한 셔먼 고문은 당시 외교통상부 차관보 장재룡에게 6월에 개최될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북의 핵문제와 미사일문제를 거론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셔먼 고문은 5월 9일 김대중 대통령을 접견했는데, 그 자리에서도 똑같은 요구를 꺼내놓았다.   

 

그런데 2000년 5월 7일 서울에 나타났던 웬디 셔먼이 6월 5일 또 다시 서울에 나타났다. 셔먼은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났고, 남북정상회담 실무준비를 전담하고 있었던 당시 국정원장 임동원도 만났다. 이처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5월 7일에 이어 6월 5일에 또 다시 셔먼을 서울에 급파한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6월 3일 평양을 방문한 임동원 특사를 접견하였기 때문이다. 2008년 6월 14일 북의 대남언론매체 <우리민족끼리> 보도에 따르면, 그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임동원 특사를 4시간 30분 동안 접견하는 중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북남수뇌상봉에서 발표할 문건은 지난날의 것을 반복하고 모방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내용으로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남북정상회담에서 발표할 문건에 새로운 내용이 들어가야 한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발언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접견석상에서 그 발언을 직접 들은 임동원 특사도 알지 못했고, 나중에 특사의 보고를 받은 김대중 대통령도 알지 못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조금 달랐다.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의 보고를 통해서 남북정상회담 준비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던 그들은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어떤 문제를 김대중 대통령에게 제기하게 될는지 예상했다. 그래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셔먼을 또 다시 서울에 급파했던 것이다. 

 

서울에 도착한 셔먼은 김대중 대통령을 접견하면서 만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를 거론하는 경우 철군을 반대할 것을 요구했고, 북의 핵문제와 미사일문제를 거론할 것을 다시 요구했다. 그것은 외교적 요청이 아니라, 내정간섭을 자행하는 강박이었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2000년 5월 9일 미국 국무부 고문 웬디 셔먼이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접견하는 장면이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추진문제와 관련하여 김대중 대통령이 보낸 친서를 받고, 한 주간 뒤에 웬디 셔먼을 서울로 급파했다. 셔먼 고문은 김대중 대통령을 접견한 자리에서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면 북의핵문제와 미사일문제를 거론할 것을 요구했다. 셔먼 고문은 2000년 6월 5일에 또 다시 서울에 나타나 김대중 대통령과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을 각각 만났다. 그 자리에서 셔먼 고문은 남북정상회담 중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를 거론하는 경우 철군을 반대할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내정간섭을 자행하는 강박이었다.  


 

 

2. 낮은 단계의 연방제 방안을 합의하다

 

그러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예상과 요구는 모조리 빗나갔다. 남북정상회담 중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철군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철군문제는 조미협상에서 제기될 중대한 문제이므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철군문제에 대한 발언권조차 갖지 못한 김대중 대통령에게 그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것이다. 다른 한편,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에서 북의 핵문제와 미사일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어렵사리 성사된 남북정상회담에서 그 문제를 거론하여 회담을 난관에 빠뜨리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0년 6월 3일 임동원 특사에게 남북정상회담 문건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던 ‘새로운 내용’은 조국통일방안을 합의하는 문제였다. 실제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북정상회담 중에 김대중 대통령에게 조국통일방안을 제시했다. 남과 북의 정상이 정상회담에서 조국통일방안을 합의하는 것이야말로 통일국가건설과업을 실질적으로 진전시키는 매우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2000년 당시 남측에서 남북정상회담 준비작업을 총괄했던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은 2008년 서울에서 ‘피스 메이커’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펴냈다. 회고록에는 남북정상회담 중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조국통일방안을 합의하자고 제의한 발언이 다음과 같이 서술되었다. 

 

“이번에는 첫째로 민족자주의지를 천명하고, 둘째로 통일문제와 관련해서는 련방제통일을 지향하되 일단 낮은 단계의 련방제부터 하자는 데 합의하십시다.”

 

“내가 말하는 낮은 단계의 련방제라는 건 남측이 주장하는 련합제처럼 군사권과 외교권은 남과 북의 두 정부가 각각 보유하고 점진적으로 통일을 추진하자는 개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합의합시다. 남측의 련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 련방제가 뜻이 같은 것이니까, 낮은 단계 련방제로 북남이 협력해나가자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그 방안을 합의하자고 제의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통일방안은 여기서 합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면서 그 제의를 거부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거부로 조국통일방안에 관한 논의가 진척되지 않자, 회담에 배석한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이 끼어들었다. 배석자가 주제넘게 회담에 끼어든 것도 결례였지만, 그가 연방제를 반대하기 위해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을 늘어놓은 것은 더 큰 결례였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남과 북에 현존하는 서로 다른 체제가 갑자기 연방제로 통일할 수 없다고 하면서, 연방제통일을 실현하려면 남과 북이 군대를 통합하고 외교를 통합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조국통일방안을 합의하는 것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기 위해 꾸며낸 궤변이었다. 남과 북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체제를 그대로 두고 통일하는 것이 연방제인데, 그는 남과 북에 현존하는 서로 다른 체제가 갑자기 연방제로 통일할 수 없다고 주장했으니, 궤변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남과 북이 군사권과 외교권을 각각 보유하고 오랜 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통합하는 것이 낮은 단계의 연방제인데, 그는 남과 북이 군대를 통합하고 외교를 통합하는 연방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으니, 궤변이 아닐 수 없었다. 

 

협상상대가 연방제라는 말 자체를 완강히 거부하는 상황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조국통일방안으로 합의하자고 설득하는 것은 무의미해졌다. 그래서 6.15 공동선언 제2항은 매우 모호한 문장으로 표기되었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위의 인용문에 들어있는,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문장은 무슨 뜻인지 알기 힘들다. 그 문장에 들어있는 “이 방향”이라는 말에 구체적인 내용이 감춰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 말에 담긴 속뜻을 분석적으로 고찰해보자.   

 

위에 인용한 것처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측의 연합제 방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방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을 거부했고, 두 방안의 공통성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문장은, 남측의 연합제 방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방안의 공통성을 인정한 기초 위에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나라의 통일을 실현하기로 합의하였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모호한 문장으로 서술된 6.15 공동선언 제2항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야 속뜻이 명료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그 공통성의 기초 위에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을 실현하는 방향에서 나라의 통일을 실현하기로 합의하였다.” 

 

위와 같은 합리적인 해석에 따르면, 남과 북은 6.15 공동선언 제2항에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조국통일방안으로 합의한 것이다. 연방제라는 말을 듣기만 해도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반통일론자들은 남과 북이 6.15 공동선언 제2항에서 아무 것도 합의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위에 서술한 대로 남북정상회담 상황을 분석적으로 고찰하면 남과 북이 6.15 공동선언 제2항에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조국통일방안으로 합의하였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2000년 6월 13일 평양에 있는 백화원 영빈관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이 담화하는 장면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북정상회담중에 김대중 대통령에게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조국통일방안으로 합의할 것을 제의하면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 관해 자세히 해설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그 제의를 거부했다. 남북정상회담에서 채택, 발표된 6.15 공동선언 제2항은 조국통일방안에 관해 모호하게 서술되었지만, 남북정상회담 상황을 분석적으로 고찰하면 남과북이 6.15 공동선언 제2항에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조국통일방안으로 합의하였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 중에 김대중 대통령에게 제시한 조국통일방안은 남과 북이 서로 다른 현존사회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군사권과 외교권도 각각 보유하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 방안이었다. 그런데 대북적개심에 사로잡혀 논리적 사고를 하지 못하는 극우세력은 연방제통일과 ‘적화통일’이 같은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말하는 ‘적화통일’은 북이 남을 적화(赤化)하는 통일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적화통일’은 북이 남을 사회주의화(=적화)하고, 남과 북의 군사권과 외교권을 급진적으로 단일화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남과 북이 서로 다른 현존사회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군사권과 외교권도 각각 보유하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북측이 남을 적화하는 통일이 아니다. 통일학의 관점에서 보면, 연방제통일은 ‘적화통일’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그런데도 극우세력은 상반되는 두 개념이 똑같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적화통일론’이야말로 파란 색을 붉은 색이라고 우겨대는 궤변이며, 8천만 민족의 조국통일념원을 모독하는 망언이다.   

 

3. 21년 동안 이루어놓은 남북합의가 전부 사문화되었다

 

6.15 공동선언이 채택, 발표된 이후 지난 21년을 돌아보면, 그 기간에 출현 남측 정부들이 6.15 공동선언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선언을 전면적으로 배격한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6.15 공동선언이라는 말조차 기피했지만, 6.15 공동선언을 채택, 발표한 김대중 정부도 이행하지 않았고, 노무현 정부도 이행하지 않았으며, 현재 문재인 정부도 이행하지 않고 있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권이 6.15 공동선언을 이행하지 않은 사연은 다음과 같다. 

 

6.15 공동선언 제1항에 따르면,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는데, 그 선언을 채택, 발표한 김대중 정부는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자기들의 회담준비상황을 보고했으며, 그런 보고를 받고 상황을 파악한 백악관은 셔먼을 서울에 파견하여 김대중 정부의 남북정상회담준비사업을 두고 이래라 저래라 간섭했다. 준비과정에서부터 미국의 간섭을 받았던 김대중 정부는 6.15 공동선언 제1항을 철저히 외면했다.

 

6.15 공동선언 제2항에 따르면,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였는데,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중에 조국통일방안을 논의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연합제 방안과 낮은 단계의 연방제 방안의 공통성도 인정하지 않았다. 조국통일방안을 논의하는 것을 거부한 김대중 정부는 6.15 공동선언 제2항을 철저히 외면했다.  

 

6.15 공동선언 제3항에 따르면,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나가기로 하였”는데, 남북리산가족상봉은 몇 차례 진행되다가 중단되었고, 비전향장기수 송환은 2000년 9월에 한 번만 진행되었다. 6.15 공동선언 제1항과 제2항이 이행되지 않았는데, 제3항만 제대로 이행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6.15 공동선언 제4항에 따르면,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나가기로” 하였는데, 남북경제협력은 대조선경제제재를 계속하는 미국의 차단과 방해에 걸려 초기단계에 좌절되었고, 다른 여러 분야의 협력과 교류도 몇 차례 진행되다가 남북관계경색으로 중단되었으며, 그로써 남북관계에서 신뢰가 쌓이기는커녕 불신만 더 커졌다. 

 

노무현 정부의 고위관리 세 사람이 함께 저술하여 2015년 10월 서울에서 펴낸 ‘노무현의 한반도 평화구상’이라는 제목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7년 10월 2일부터 4일까지 평양에서 진행된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6.15 공동선언이 채택, 발표된 이후 5년을 돌이켜보면, 그 선언이 “상징화된 빈 구호가 되었고, 빈 종이, 빈 선전곽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6.15 공동선언만 사문화된 것이 아니라, 2007년 10월 4일 채택, 발표된 ‘남북관계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도 사문화되었고, 2018년 4월 27일 채택, 발표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선언’과 2018년 9월 19일 채택, 발표된 ‘평양공동선언’도 사문화되었다. 남북합의들은 전부 사문화되고 말았다. 미국은 남측 정부가 남북합의를 이행하지 못하도록 간섭하고 가로막았고, 남측 정부는 위에 열거한 네 개의 선언들과 배치되는 반북대결정책을 폐기하지 않았다. 미국이 지난 21년 동안 강화해온 대조선제재가 남북합의를 사문화시킨 주범이고, 미국과 남측 정부가 지난 21년 동안 지속해온 북침전쟁연습이 남북합의를 사문화시킨 주범이다. <사진 3>

 

▲ <사진 3> 위의 사진은 한미련합군 전차부대가 북침전쟁연습을 하는 장면이다. 한미련합군이 지난 21년 동안 지속해온 북침전쟁연습은 남북합의를 사문화시킨 주범이다. 2000년 6월의 6.15 공동선언, 2007년 10월의 남북관계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선언, 2018년 4월의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선언, 2018년 8월의평양공동선언은 모두 사문화되었다. 남측 정부가 미국의 지배와 간섭을 받고 있는현실, 그리고 남측 정부 자체가 반북대결정책을 폐기하지 않는 현실은 앞으로 남북정상회담이 다시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안겨준다. 남북정상회담으로는 평화통일을 실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남측 정부가 미국의 지배와 간섭을 받고 있는 현실, 그리고 남측 정부 자체가 반북대결정책을 폐기하지 않는 현실은 앞으로 남북정상회담이 다시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안겨준다. 남북정상회담을 다시 개최한다 해도, 미국의 지배와 간섭을 받는 남측 정부가 합의사항을 여전히 이행하지 못할 것이고, 남측 정부 자체가 반북대결정책을 여전히 폐기하지 않을 것인데, 북이 그런 무익한 남북정상회담을 왜 다시 하려고 하겠는가. 이런 참담한 현실은 남북정상회담으로는 평화통일을 실현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남북정상회담으로 평화통일을 실현할 수 없다면, 북은 어떤 방도로 평화통일을 실현하려는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2021년 5월 9일 조선로동당 제7차 대회에서 개정된 당규약에서 찾을 수 있다. 

 

 

4. 급변하는 주변정세와 두 개 해방전쟁의 결정적 시기

 

개정된 당규약에 따르면, 조선로동당은 “남조선에서 미제의 침략무력을 철거시키고 남조선에 대한 미국의 정치군사적 지배를 종국적으로 청산”함으로써 평화통일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통일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1년 전 남북정상회담에서 제시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실현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조선로동당은 “남조선에서 미제의 침략무력을 철거시키고 남조선에 대한 미국의 정치군사적 지배를 종국적으로 청산”함으로써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실현하려는 의지와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의지와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당규약에서 천명한 것이다. 

 

그런데 누구나 아는 것처럼, “남조선에서 미제의 침략무력을 철거시키고 남조선에 대한 미국의 정치군사적 지배를 종국적으로 청산”하는 것은 정상회담으로 실현할 수 없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당규약에 명시된 철거문제와 청산문제는 정상회담이 아니라 무력사용으로 해결되는 것이다. 

 

대화와 협상이 통하지 않는 제국주의국가를 상대로 정상회담을 할 수 있지만, 그런 정상회담은 전술적 의의를 넘어서지 못한다. 세계사에 기록된 수많은 경험과 교훈은 어느 나라에서나 제국주의지배체제를 타도하는 반제투쟁은 해방전쟁으로 발전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지난날 항일선렬들이 일제를 타도하기 위해 전개한 반제투쟁도 해방전쟁으로 발전되었다. 조선인민혁명군도 광복군도 독립군도 모두 일제를 타도하는 해방전쟁을 위해 존재한 항일무장조직들이었다. 그러므로 반제투쟁의 시각에서 보면, 제국주의국가의 식민통치는 악이며, 그 악을 제거하는 반제해방전쟁은 선이다. 조선총독부는 악의 화신이었고, 항일전쟁은 정의의 전쟁이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남조선에서 미제의 침략무력을 철거시키고 남조선에 대한 미국의 정치군사적 지배를 종국적으로 청산”하는 것은, 조선로동당의 용어를 빌리면, 남조선해방전쟁을 수행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조선로동당은 2021년 5월 9일에 개정된 당규약에서 남조선해방전쟁을 당면목적으로 명시한 것이다. 

 

남조선해방전쟁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북의 문헌들은 ‘전시사업세칙’과 ‘조선인민군 학습제강’이다. 북에서 2012년 9월에 개정되었고, 2013년 8월 22일 <동아일보>에 보도된 ‘전시사업세칙’을 보면, 제2장 제37항에 “전시무력기관사업의 기본은 (중략) 공화국 남반부를 해방하고 조국통일의 력사적 위업을 이룩하는 것”이라고 명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인민군 출판사가 2000년에 출판하였고, 2003년 1월 일본 언론매체가 보도한 ‘조선인민군 학습제강’에도 “남반부 해방을 위한 혁명전쟁”, “남조선을 해방하고 조국통일을 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명시되었다. 

 

통일학의 관점에서 위에 열거한 사실들을 보면, 21년 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에서 제시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북에서 말하는 남조선해방전쟁이 결속된 직후에 실현될 것으로 예상된다.  

 

군사학의 관점에서 위에 열거한 사실들을 보면, 북에서 말하는 남조선해방전쟁이 북에서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르는 6.25전쟁과는 양상이 전혀 다른 전쟁으로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날 6.25전쟁은 미국이 무력침공을 자행하는 바람에 전쟁기간이 3년으로 늘어났고, 그로써 남과 북이 모두 참혹한 전쟁피해를 입었지만, 오늘날 북에서 말하는 남조선해방전쟁은 미국의 무력침공을 원천봉쇄한 상태에서, 매우 짧은 기간에, 전쟁피해를 최소화하고, 신속하게 결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것이다. 

 

군사학의 관점에서 보면, 전쟁기간의 단축, 전쟁피해의 최소화, 전쟁의 신속한 결속은 현대전의 3대 특징이다. 20세기에 있었던 6.25전쟁이나 윁남전쟁과 달리, 21세기 현대전이 그런 3대 특징을 보이는 까닭은, 정밀한 작전계획, 첨단화된 무기체계, 현대화된 전략전술에 의거해 수행되기 때문이다. 북에서 말하는 남조선해방전쟁도 21세기 현대전 양상으로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북의 ‘전시사업세칙’에는 그들이 남조선해방전쟁을 수행할 필요조건이 몇 가지 제시되었는데, 그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한반도 주변정세에서 조국통일에 유리한 국면이 조성되는 것을 남조선해방전쟁의 수행조건으로 인정한 것이다. 한반도 주변정세에서 조국통일에 유리한 국면이 조성되면, 조선인민군이 남조선해방전쟁에 돌입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사진 4>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최근 한반도 주변정세가 북이 바라는 방향으로 급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정세변화는 중국이 목적의식적으로 조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 정세의 급변이 아니라 한반도 주변정세의 급변이다. 

 

한반도 주변정세가 북이 바라는 방향으로 급변한다는 말은, 대만해방전쟁을 수행할 준비를 완료한 중국인민해방군이 대만해방전쟁의 결정적 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극도로 긴장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고되어왔다. 2016년 9월 1일 대만 언론매체들의 보도에 따르면, 중국인민해방군은 2020년까지 대만해방전쟁준비를 완료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의 중국문제전문가 이안 이스턴(Ian Easton)은 외부에 유출된 중국인민해방군의 비밀전쟁계획문서들을 분석한 데 기초하여 집필한, 2017년 10월에 출판된 자신의 저서 ‘중국침공위협(The China Invasion Threat)'에서 중국인민해방군이 2020년에 대만해방전쟁을 수행할 비밀전쟁계획을 수립했다고 밝힌 바 있다. 

 

북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중국인민해방군이 이처럼 대만해방전쟁준비를 완료하고 결정적 시기를 기다리는 현재 상황이야말로 한반도 주변정세에서 조국통일에 유리한 정세가 조성되고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지금이 대만해방전쟁의 결정적 시기인가 아닌가하는 것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가 판단한다.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가 대만해방전쟁의 결정적 시기가 도래했다고 판단하고, 중국인민해방군에 총공격명령을 내리는 순간, 대만해방전쟁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이 남조선해방전쟁의 결정적 시기인가 아닌가하는 것은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가 판단한다.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가 남조선해방전쟁의 결정적 시기가 도래했다고 판단하고, 조선인민군에 총공격명령을 내리는 순간, 남조선해방전쟁은 시작되는 것이다. 군사학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인민해방군이 대만해방전쟁을 시작하는 날, 조선인민군도 남조선해방전쟁을 시작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중국의 군사전문가들은 대만해방전쟁이 개전시각으로부터 100시간 만에 중국의 승리로 끝나는 4일전쟁 씨나리오를 예상하고 있는데, 예상치 못한 돌발변수가 발생하여 늦어진대도 10일 만에 중국의 승리로 끝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나는 한반도의 군사상황을 분석한 데 기초하여 북의 남조선해방전쟁이 72시간 만에 북의 승리로 끝나는 3일전쟁 씨나리오를 예상한 글을 이미 2013년 이후 몇 차례 <자주시보>에 발표한 바 있다. 

 

대만해방전쟁문제와 관련하여 중국공산당의 정치일정에 눈길을 돌릴 필요가 있다. 중국공산당은 2021년 7월 1일 당창건 100주년을 맞이하고, 2022년 10월에서 11월 사이에 제20차 전국대표대회를 소집할 예정이다. 이런 정치일정에 따르면, 시진핑(習近平) 총서기는 창건 100주년을 맞은 중국공산당이 지난 100년 동안 해결하지 못한 국토완정의 역사적 임무(=대만해방)을 수행해야 할 절박한 의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절박한 의무감이라는 말은 문학적 표현이 아니다. 왜냐하면, 차이잉원(蔡英文)을 우두머리로 하는 대만의 국가분렬세력이 미국의 사촉과 지원을 받으며 대만군 무력을 증강하고, 미국이 대만을 독립국가로 인정하려고 책동하고, 미국이 일본을 비롯한 추종국들을 긁어모아 반중국전선을 견고하게 구축하는 것은 중국이 대만해방전쟁을 수행하기에 불리한 정세를 조성하는 것이므로, 시진핑 총서기는 대만해방전쟁의 결정적 시기를 앞당겨야 할 절박한 의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국이 직면한 급박한 사정은 매우 심각한 군사정세가 한반도 주변에 조성되었음을 말해준다.    

 

매우 심각한 군사정세가 한반도 주변에 조성되었으므로,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최근 동향에 관심이 집중되지 않을 수 없다. 북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2020년 7월 18일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 확대회의 중에 별도로 15명만 참석한 비공개회의가 진행되었는데, 비공개회의에서는 “조선반도 주변에 조성된 군사정세와 잠재적인 군사적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중요부대들의 전략적 임무와 작전동원태세를 점검”하였다고 한다. 북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2021년 6월 11일에 진행된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8기 제2차 확대회의에서 “최근 급변하는 조선반도 주변정세와 우리 혁명의 대내외적 환경의 요구에 맞게 혁명무력의 전투력을 더욱 높이고 국가방위사업 전반에서 새로운 전환을 일으키기 위한 중요한 과업들이 제시”되었고, 김정은 총비서는 조선인민군이 “고도의 격동태세를 철저히 견지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고 한다. 김정은 총비서가 확대회의에서 언급한 고도의 격동태세는 조선인민군이 총공격명령을 받으면 언제든지 남조선해방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전투동원태세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위와 같은 보도내용을 읽어보면,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는 최근 급변하는 한반도 주변정세가 남조선해방전쟁의 결정적 시기를 불러올 것에 대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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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이 하이힐을 신어야 했다면 ‘철학자의 길’은 탄생했을까

등록 :2021-06-12 08:44수정 :2021-06-12 18:05
 
[토요판] 이유리의 그림 속 권력
⑨‘걷기’조차 제한당한 여성들
 
핀투리키오, &lt;페넬로페와 구혼자들&gt;, 1509년께, 프레스코(벽에서 떼어내어 캔버스에 붙임), 영국 내셔널갤러리.
핀투리키오, <페넬로페와 구혼자들>, 1509년께, 프레스코(벽에서 떼어내어 캔버스에 붙임), 영국 내셔널갤러리.
 
2019년에 독일 하이델베르크로 여행을 갔다. 그곳의 대표적 관광지는 헤겔이 걸었다던 ‘철학자의 길’. 어렵게 온 김에 철학자의 길도 경험하고 싶어, 지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길에 들어서자 코스가 예상과 너무 달랐다. 거의 작은 산을 오르는 하이킹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철학자의 길은 단출한 옷에 편한 신발을 신은 사람만 환영하는 곳이었다. 경사진 길을 낑낑대며 걷다가 자연스레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과연 헤겔이 하이힐을 신어야 하는 여자였다면, 이 길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하이델베르크뿐 아니라 독일 쾨니히스베르크(현재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덴마크 코펜하겐, 일본 교토에도 철학자의 길이 있다. 철학자들은 길을 걸으면서 사색했고 그 과정에서 머릿속에 부유하는 생각을 정돈할 수 있었다. 비단 철학자뿐이랴. 평범한 우리들도 종종 거리를 걸으며 활기를 얻고 영감을 수집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자의 길’이라는 명칭은 ‘걷기’에 대한 예찬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옛 여성들은 이 걷기의 혜택을 제대로 누릴 수 없었다. 철학자의 길이 탄생하던 시절 여성들은 폭이 좁고 굽 높은 구두를 신어야 했다. 그런 조건에서 남성처럼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며 사색하고, 활력을 얻을 수는 없었으리라. 물론, 하이힐 탓만은 아니었다. <걷기의 인문학>의 작가 리베카 솔닛은 페미니즘을 처음 생각한 계기로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맘껏 걷고 싶은데, 여성인 자신은 그러기 어렵다는 걸 느꼈던 때”라고 언급했다. 그렇다면 여자의 걷기를 방해하는 것은 또 무엇이 있었을까.

거리, 남성들만의 공간
 

김수영 시인은 시 ‘거대한 뿌리’에서 이렇게 읊었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습관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이 시에 등장하는 ‘그녀’는 1894~1897년에 조선을 방문한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4)이다. 비숍은 1898년에 펴낸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조선의 이 ‘기이한 습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저녁 8시경이 되면 대종(大鐘)이 울리는데 이것은 남자들에게 귀가할 시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이며 여자들에게는 외출하여 산책을 즐기며 친지들을 방문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중략) 자정이 되면 다시 종이 울리는데 이때면 부인은 집으로 돌아가야 하고 남자들은 다시 외출하는 자유를 갖게 된다.” 그리고 비숍은 더 놀라운 사실이 남아 있다는 듯,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인다. “한 양반가의 귀부인은 아직 한 번도 한낮의 서울 거리를 구경하지 못했다고 나에게 말하였다.”

 

김수영과 비숍의 글에 따르면 조선 말 존재했던 한밤중 ‘부녀자의 세계’는 잠깐이나마 여성들이 집 밖에 나올 수 있었던, 숨통 틔워주기 풍습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마냥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어둠의 힘을 빌려 겨우 거리로 나올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장옷을 뒤집어써야 하는 등 여성들은 거리에서 철저하게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야 했다. 애초부터 길거리는 여성이 침입하면 안 되는, 남성들만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온 세계 누빈 오디세우스 부재에
‘빈집’ 몰려든 남자들 물리치고
현명함 칭송받은 아내 페넬로페
‘자기 자리’인 집 벗어났다면
성매매 여성으로 인식됐을 수도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아>에서도 오디세우스는 온 세계를 자신의 안방처럼 돌아다닌다. 그가 자의 반 타의 반 여성들의 유혹에 빠지고 자식까지 낳으며 영웅적 모험을 하는 동안 아내 페넬로페는 꿋꿋하게 집에서 남편을 기다릴 뿐이다. 이탈리아의 화가 핀투리키오(1454~1513)의 그림 <페넬로페와 구혼자들>을 보자. 그림 속 페넬로페는 남편 없는 집에서 베틀로 옷을 짜고 있다. 그런데 오른쪽을 보면 외간 남자들이 다짜고짜 집 안으로 들이닥치고 있다. 이 집은 다른 남자들 입장에서는 빈집과 마찬가지다. 집주인은 오디세우스이지 페넬로페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가 먼 여행을 떠나자, 이들은 빈집과 그 집의 가구나 다름없는 아내 페넬로페를 차지하기 위해 몰려든 것이다. 하지만 페넬로페는 “아버지에게 바칠 옷을 완성하면 결혼하겠다”는 핑계를 대고는, 낮에는 옷을 만들고 밤에는 그 옷을 다시 풀어버리는 식으로 시간을 끌며 청혼을 물리쳤다.

 

그런데 이런 지략도 한두번이어야 통하는 법. 그림 속 구혼자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보인다. 그러나 표정에 한 치 미동도 없는 그녀는 곧 자신의 처신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창밖에 오디세우스를 태운 배가 도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20년 만에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마치 어제 떠난 듯 모든 게 제자리에 있는 집과 아내를 되찾는다. 이 이야기를 통해 호메로스는 페넬로페의 현명함을 칭송한다. 페넬로페는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잘 알았고, 그 규칙을 지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페넬로페가 20년이라는 세월에 지쳐 자신의 자리인 집을 이탈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여성의 몸까지 변형시킨 ‘제자리’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는 저서 <순수와 위험>에서 더러움을 자리(place)에 대한 관념과 연결시켰다.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은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발은 그 자체로는 더럽지 않지만 식탁 위에 두기에는 더럽다. 마찬가지로 여자가 남성을 위한 공간에 들어가는 것은 더러운 것이기에, 거리에 보이는 여자는 ‘더러운 창녀’였다. 이 같은 관념은 단어에도 그 흔적을 남겼다. 거리의 남자(man of the streets)는 거리의 규칙을 따르는 남자일 뿐이지만, 거리의 여자(woman of the streets)는 성매매 여성(street walker)을 뜻한다. 만약 페넬로페가 집 밖에 나와 오디세우스처럼 돌아다녔으면 성매매 여성으로 인식되지 않았을까. 이 같은 사회의 시선은 여성들이 집밖에서 마음껏 거닐 수 없게 한 족쇄였다.

 

여성을 향해 집 안에서 인형처럼 ‘가만히 있으라’는 사회의 명령은 여성의 복장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남성복을 입었던 프랑스의 소설가 조르주 상드(1804~1876)는 회고록에서 처음 남장을 했을 때 느낀 해방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작은 뒤축에 쇠를 박아서 발을 보도 위에 단단하게 디딜 수 있었다. 나는 파리를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종횡무진 돌아다녔다. 세계 일주를 떠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입은 옷도 똑같이 튼튼했다. 나는 날씨에 상관없이 외출했고, 시간에 상관없이 귀가했다.”

 

그렇다면 남장 전의 상드는 어땠을까. “내 다리는 튼튼하고 베리 지방에서 험한 길 위를 두꺼운 나막신을 신고 걸으며 단련된 발도 믿음직했다. 그런데 파리의 보도 위에서는 내 발이 얼음 위의 배 같았다. 섬세한 신발은 이틀 만에 망가졌고 덧신을 신자니 걷기가 불편한 데다 나는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걷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돌아다니다 보면 진흙투성이가 되고 지쳐서 콧물이 흐르고 신발과 옷, 작은 벨벳 모자에까지 시궁창 물이 튀었고 옷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보통 여성의 남장은 전복적인 의미를 띠는 사회적 행위로 그려지곤 하지만 상드는 자신이 남장을 선호하는 이유를 실용성으로 설명했던 것이다.

 

동시대 중국의 경우는 복장도 모자라 아예 신체를 변형시켜 여성의 바깥 이동을 막았다. 중국에는 여성의 발을 천으로 동여매고 작은 신발을 신겼던 전족 문화가 있었다. 4살이 된 여자아이는 엄지를 제외한 네 발가락을 발바닥 쪽으로 꺾어 붙여 꽁꽁 싸매야 했다. 이는 발의 정상적 발육을 억제했고 그 결과 천천히 발의 뼈가 구부러지며 기형이 되었다. 이 때문에 전족을 한 여성은 제대로 걸을 수 없었고 무릎으로 기어 다녔다. 여성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는 이 악습은 왜 오랫동안 지속됐던 걸까. 여성을 교육할 목적으로 쓴 <여아경>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어째서 발을 싸매는가? 활처럼 구부러진 모양이 보기 좋아서가 아니라 쉽게 출입하지 못하도록 수없이 싸매어 구속하려는 것이다.”

원나라 사람 이세진이 쓴 <랑환기>에도 “듣자하니 여자가 가볍게 행동하지 않도록 그 발을 싸매어 거주하는 규방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나갈 일이 있어도 장막을 친 가마를 타야 하므로 발을 쓸 필요가 없다”라는 구절이 있다. 즉 전족은 여성들의 활동 범위를 엄격히 제한하고, 규방에 가두기 용이하다는 이유로 실시된 것이다.

 

스스로 자물쇠를 풀었지만…

이처럼 가부장제는 집요하게 ‘밖에 나다니는 여자는 창녀’라고 세뇌하며 갖은 방법으로 여성의 신체를 집 안에 매어놓으려 했다. 하지만 끊임없이 발목을 잡는 가부장제의 손길을 뿌리치고, 용감히 집 밖으로 나간 여성들은 늘 있었다. 미국의 화가 메리 커샛(1844~1926)도 그중 하나였다. 11살 때 커샛은 파리국제박람회에서 본 그림에 깊은 감동을 받아 일찌감치 화가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거센 반대에 부딪쳤다.

 

커샛은 집 밖으로 걸어 나오기까지 험난했던 과정을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여자아이의 첫 번째 의무는 예쁘게 행동하는 것이었고, 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예쁘지 않은 행동을 하면 금방 알아차리곤 한다. 내 잘못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우리 아버지도 그런 느낌을 가지고 계셨을 것이다.”

 

“유럽 가느니 네가 죽는 게 낫다”
아버지 반대 무릅쓴 미국화가 커샛
마차 운전하는 여성 그림 통해서
삶 능숙하게 운전하는 자신 투영
지금 길거리 여성한테 편한 곳일까

 

아버지는 “멜로드라마에서 타락하거나 명예롭지 못한 결혼을 한 여자에게 쓰는 말”들을 써가며 “유럽에 혼자 가서 미술 공부를 하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네가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라고 딸에게 화를 내곤 했다. 하지만 커샛은 “어쨌든, 나에게 프랑스를 달라”고 선언하며 1872년에 아버지의 반대를 뚫고 프랑스 파리에 정착했다. 또한 화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비혼으로 살았다. 보통 여성의 행동반경을 제한하는 집안의 문지기 역할은 아버지와 남편이 맡는다. 커샛은 아버지를 거스름으로써, 또 비혼을 선택함으로써 스스로 자물쇠를 풀고 거리로 나온 것이다.

 

그랬던 그녀였기에, 19세기 후반 당시 프랑스에서 유일하게 여성이 운전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마차를 모는 여인과 소녀>를 그릴 수 있었으리라. 지붕이 없는 2인용 마차 운전석에 여성이 앉아 있다. 마부는 이 여성에게 고삐를 양보하고 뒤로 돌아앉은 모습이다. 채찍을 들고 고삐를 팽팽하게 당긴 채 마차를 몰고 있는 이 여성은 메리 커샛의 언니 리디아. 무거운 모자를 쓰고, 하이힐을 신고, 폭 넓은 스커트 차림이긴 하지만 이 모든 방해를 뚫고 당당하게 운전에 몰두하고 있다.

 

커샛은 리디아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 같다. 실제 커샛은 마차 운전에 능숙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갓 개발된 자동차 운전에도 뛰어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커샛은 리디아 옆에서 팔걸이에 손을 댄 채 차분히 앞을 응시하는 소녀도 일부러 그려 넣었다. 아마 여성도 거리에 나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후세대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녀 자신이 인생의 운전대를 남성에게 넘겨주는 일 없이, 자신의 삶을 능숙하게 운전한 당사자였으니 말이다.

 

메리 커샛, &lt;마차를 모는 여인과 소녀&gt;, 1881년, 캔버스에 유채,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메리 커샛, <마차를 모는 여인과 소녀>, 1881년, 캔버스에 유채,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요즘 거리에는 커샛의 후예들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적어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제도적 장벽은 없다. 하지만 남성들만큼 여성들에게 길거리는 편안한 공간일까. 여성들이 남성만큼 한적한 둘레길을 안심하고 혼자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여성들이 모임을 마친 다음 서로의 귀갓길을 염려하며 “집에 도착하면 문자 해”라고 인사하는 것을 알고 있는가. 운전하는 여성은 종종 남성들로부터 ‘김여사’, ‘솥뚜껑이나 운전하라’고 조롱받는다는 것을 들었는가.

 

거리를 걷는 여성들은 ‘캣콜링’을 당하기도 한다. 캣콜링은 남성이 길거리를 지나가는 불특정 여성을 향해 휘파람 소리를 내거나 성희롱적인 발언을 하는 행위를 뜻한다. 이 모든 게 거리가 여전히 남성이 주도하는 공간이며, 여성인 당신은 지금 ‘잘못된’ 장소에 있다는 가부장 사회의 신호인 셈이다.

 

인류학자 김현경은 책 <사람, 장소, 환대>에서 “‘된장녀’에 대한 비난과 조롱, 그리고 ‘개똥녀’를 비롯하여 공공장소에서 부적절한 행동을 한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마녀사냥은 여성은 도로나 카페 혹은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를 이용할 자격이 부족하다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전달한다”라고 적었다. 김현경에 따르면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장소’를 갖는다는 것이고, 그 자리를 주는 행위가 바로 ‘환대’다. 과연 여성들은 거리에서 ‘환대’받고 있는가. 아니 그 전에 남성과 동등한 ‘사람’으로 대우받고 있는가.

▶ 이유리 작가. <화가의 출세작> <화가의 마지막 그림> 등 예술 분야의 책을 썼고, <한겨레> 토요판에 연재한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을 묶어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을 냈다. 이번엔 그림을 매개로 인간 사회에 작동하는 다양한 층위의 권력관계를 드러내고, 여기서 발생하는 부조리를 3주에 한번 다룬다.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99079.html?_fr=mt1#csidx8d459a609086dad868353620186bbb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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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이스라엘이 역사를 바꿀 수 있을까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21/06/13 09:07
  • 수정일
    2021/06/13 09:07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임상훈의 글로벌 리포트] 세계가 이들을 주목하는 이유

21.06.12 19:29최종 업데이트 21.06.12 19:30
이 땅은 나의 것, 하나님이 내게 주셨네<br style="box-sizing: inherit;" />깊은 역사의 멋진 이 땅을<br style="box-sizing: inherit;" />아침 해가 언덕과 평원을 비추니<br style="box-sizing: inherit;" />난 마침내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어 놀 땅을 보노라

긴 투쟁 끝에 얻은 자의 벅찬 가슴이 느껴진다. 이 감성을 중후함과 미성을 동시에 지닌 가수 팻 분(Pat Boone)의 목소리에 얹으니 세기적 명곡이 탄생했다. 영화 <영광의 탈출(Exodus)>의 주제곡으로 쓰인 '이 땅은 나의 것(This Land Is Mine)'의 앞 구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무려 41년 동안 주말 저녁 영화광들을 잠 못 들게 한 티브이 프로그램 <주말의 명화> 주제곡으로 쓰였다.
 

▲ 영화 <엑소더스>(영광의 탈출, 1960) 포스터 ⓒ 오토 프레밍거

 
아마도 30대 이상의 한국 사람이면 이 곡을 모르기 쉽지 않다. 하지만 정작 영화 <영광의 탈출>을 끝까지 본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무려 3시간 28분에 달하는 상영 시간도 대단하지만 대부분의 극적인 장면은 영화의 전반부에 모여 있다. 이 영화 관계자들에게 실례가 될지 모르지만 뒷부분 2시간 정도는 관객에 따라 지루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이 관리하는 팔레스타인 지방에 전 세계 유대인들이 몰려온다.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키프로스 섬에 집단 수용소를 설치한 후 모여드는 유대인들을 그 곳으로 이끈다. 수만리 '마음의 고향'을 찾아 떠나온 유대인들은 정작 팔레스타인 땅을 밟아보지 못한 채 수용소에서 하염없는 시간을 보낸다. 이때 나타난 주인공 아리 벤 캐이넌(Ari Ben Canaan)은 유대인들을 탈출시켜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끈다.

이 영화의 원작인 같은 제목(Exodus)의 레온 유리스(Leon Uris) 소설처럼 이 영화는 이스라엘의 건국 과정을 그린다. 역사적 사실 또한 영화나 소설 못지않게 극적이다. 그러니 위 노래의 가사가 이스라엘인들에게 특히 각별하지 않겠는가. 애국심과 공동체 정신이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의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에 경의를 표할 만하다. 다만 한 국가의 건국이 예술의 소재만이 아니라 역사의 일부분이라면, 건국이라는 사실관계는 역사 자체에 대한 인식과 함께 생각해야 한다. 역사관에 따라 진실은 뒤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땅은 누구 것?

역사란 과거와 현재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역사학자 카(Edward Carr)의 말이 있지만, 동시대 주체들 간의 상호작용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사실관계에 대한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균형 잡힌 인식을 함께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연히 복수의 사실관계 주장도 인정해야 한다. 나(또는 우리)의 진실만큼 그(또는 그들)의 진실도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진실들은 상호 모순되기도 한다. 그래서 진실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유대인들의 민족정신을 높이 살 만하지만 '이 땅이 나의 것'이 되기 위한 보증이 '신이 주셨기 때문'만이라면 곤란하다. 왜냐면 그 땅을 거쳐 간, 또는 지금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다른 민족들도 똑같이 그 땅을 '신이 주셨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신이 인간을 상대로 이중 계약이라도 한 걸까?
 

▲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 위키커먼스

 
천상의 세계 또는 예술의 세계라면 모를까 세속적 현실에서는 그래서 법이 필요하고 대화가 필요하다. 국제문제에서는 국제법이나 국제관계가 필요한 이유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도 신과 함께 살기 원한다면 철학을, 인간과 더불어 살기 원한다면 수사학을 가르치라는 금언을 새겼을 것이다.

현재 이스라엘이 점유하고 있거나 팔레스타인이 점유하고 있거나 혹은 두 정치세력이 분쟁 중에 있는 팔레스타인 지방은 역사 속에서도 가나안,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그리스, 로마, 아랍, 오스만, 영국 등 수많은 세력들이 점유해 왔다. 물론 역사 속의 모든 점유 세력 또는 그들의 후예(있다고 가정하면)들이 모두 해당 지역의 점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영토의 점유권 인정을 위한 합의된 보편적 국제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점유권을 보장받기 위해 통상 중요하게 고려되는 세 요소는 분쟁자들 가운데 누가 더 먼저 점유를 시작했느냐, 누가 더 긴 시간 지배했느냐, 그리고 현재 누가 점유하고 있느냐다. 보통 실효적 지배라고 부르는 조건의 요소들이다. 그 조건을 통해 현재 점유권 다툼을 벌이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보면 둘의 입장이 비슷하다. 실효적 지배 조건으로도 쉽지 않은 문제임은 분명하다.

비교적 근래의 역사만 놓고 봐도 쉽지 않다. 13세기 이후 수백 년 동안 이 지역은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당연히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은 피지배자 입장이었고, 그나마 다수의 유대인들은 해외를 떠돌았다. 이스라엘은 오스만 지배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해당 지역의 땅을 구매해 왔다며 이를 점유 정당성의 하나로 삼지만 법적 효력은 미약하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해당 지역에서 줄곧 살아왔다.

사실 팔레스타인인들의 정체성을 말하자면 유대인과의 관계가 애매한 점도 있다. 다수가 무슬림이고 기독교와 유대교를 실천하는 이들은 소수지만 생물학적으로 이들은 아랍인보다 유대인에 가깝다. 이들의 변별적 정체성을 위해 인종적 구별은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얘기다. 그보다는 수천 년에 걸친 유대인과의 지역 라이벌 관계가 19세기 이후 전 세계에 들불처럼 번진 민족국가(Nation-State) 이념과 함께 고착화된 결과의 피해자들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중동 분쟁을 낳은 영국의 사기 계약

1차 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을 상대하는 영국은 제국의 피지배자들을 이용해 전 방위적 전선을 펴는 전략을 구사한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소수민족들을 일제히 봉기하도록 한 것이다. 치밀하고 기발한 아이디어 같지만 실상은 허술하고 치명적 오류를 담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전략이었다.

영국은 오스만제국이 패망하면 이 지역에 팔레스타인인들을 위한 국가를 세워주겠다고 아랍세계와 밀약을 한다(맥마흔 각서, 1915~16). 그러면서 한쪽에서는 프랑스와 만나 지도 위에 줄을 그어가며 전후 함께 나눠먹을 파이를 협상한다(사이크스-피코 협정, 1916). 그리고 이듬해 유대인들에게 역시 같은 지역에 유대인 국가를 만들어주겠다는 약속까지 한다(벨푸어선언, 1917).

이 일련의 사기 계약의 결과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대부분의 중동 분쟁 문제들이다. 이 지역의 소수민족들은 이번에는 인간계에서 확실한 이중 계약 사기를 당한 셈이다. 1948년 건국을 선포한 이스라엘에 분노하는 아랍 세계는 영국에 따지는 대신 이스라엘을 공격한다. 수적 열세인 이스라엘은 그러나 미국의 전폭적 지지와 지원을 등에 업고 첨단무기를 갖춰 수차례의 전쟁에서 아랍 국가들을 물리친다.

그러는 사이 이스라엘 건국은 기정사실화됐고 어느 국가로부터도 지원을 받지 못한 팔레스타인은 가자지구, 서안지구로 내몰렸다. 그나마 이마저도 점점 위태로워졌다. 2000년대 들어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양측 모두 극단화되어가는 정치지형에 대화와 타협의 여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러는 사이 언젠가 있을 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고자 이스라엘 정부는 쉴 새 없이 팔레스타인인들의 주거지역에 유대인 정착촌을 늘려간다.
  

▲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인 가자지구 북부 베이트 라히아에서 6월 4일(현지시간) 주민들이 이스라엘군 공습에 폐허로 변한 주택가에 임시로 천막을 치고 생활하고 있다. 이스라엘군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간 무력 충돌로 가자지구는 많은 주택과 건물은 물론 전력과 상수도 등 도시 기반시설마저 망가져 재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요될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 연합뉴스

 
인구, 영토, 경제, 군사력, 외교력 등 모든 면에서 비교할 수 없는 열세에 있는 팔레스타인은 종말의 위기감 속에서 역시 극단적 저항에만 절망적으로 의지한다. 끝 모를 이스라엘 극우세력의 집권 속에서 팔레스타인 역시 평화적 협상의 희망을 점점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국제사회는 '양측의 자제'만 점잖게 타이르는 중이다. 청년과 유년이 싸우는 것을 지나가다 발견한 성인이 양측의 자제를 당부하고 서있는 게 적절할까?

그러던 이 지역에 지푸라기 같은 희망이 하나 생겼다. 내각제 체제의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최근 2년째 과반 의석 연정에 실패하던 중 드디어 '반 네타냐후'를 내건 8개의 야당이 과반 의석의 연정 구상에 합의한 것. 만약 이들의 구상이 의회의 승인을 얻게 되면 12년 연속 (지금까지 모든 임기를 합하면 15년) 집권 중인 네타냐후 총리를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게 된다. 심지어 개인 비리 혐의를 받고 있는 그로서는 자택이 아닌 '더 큰 집'에 가야 할 수도 있다.

이스라엘 변화 조짐, 지푸라기 같은 희망

오는 13일 이스라엘은 새로운 연정 구성을 승인하는 의회 투표를 하게 된다. 과연 새 정부 구성은 가능하며, 새 정부가 들어서면 이스라엘의 대외정책은 변할 것인가?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야 하지만 승인 가능성이 높다. 네타냐후 총리의 장기 집권에 대한 피로감과 개인 비리에 대한 반감이 크기 때문이다.

남은 변수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연정 구성 세력의 정치적 폭이 너무 넓다는 것. 이들 가운데에는 보수 정당도 포함돼 있고, 네타냐후에 반감이 없는 국회의원들도 있다. 과연 이들 가운데 반란세력이 얼마만큼 나오느냐에 새 정부 구성의 성공 여부가 달렸다. 네타냐후 총리도 새 연정을 대국민 사기라고 비난하면서 '의원 빼오기'에 공을 들이는 중이다. 만약 새 정부 구성이 실패한다면 최대 의석 정당인 리쿠드당의 네타냐후 현 총리가 다시 과반 확보를 위한 교섭 주도권을 쥐게 된다.
 

▲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 연합뉴스

 
새 정부 구성 가능성 못지않게 만약 구성이 된다면 얼마나 이스라엘 대외 정책이, 특히 팔레스타인과의 관계가 달라질 것인가 하는 문제에도 관심이 모아진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도 새 연정 파트너들의 정치 스펙트럼이 너무 넓다는 점이 걸림돌이다. 지난 3월 23일 총선 결과 리쿠드(30석)에 이어 제2당이 된 예시 아티드(17석)를 비롯 중도로 분류될 수 있는 의원 수가 23명 정도다. 이들은 주로 팔레스타인과 대화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이스라엘 건국부터 29년간 7명의 총리를 연거푸 배출하며 장기집권을 하던 노동당은 현재 7석을 보유한 채 과거의 영광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하지만 6석의 다른 진보정당 메레츠(Meretz)와 함께 이번 연정에 참여했다. 이들은 궁극적으로 이 지역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개의 별도 독립국가를 지향한다는 입장이다. 좌우 스펙트럼으로 분류하기는 어렵지만 4석을 보유한 아랍연합명부(United Arab List)도 이번 연정에 참여했다. 이스라엘 국적의 아랍인들, 그리고 남부의 베두인(Bedouin)족의 권익을 주장한다.

이번 연정의 결정적 승부수는 3개의 보수정당 야미나(Yamina, 7석), 이스라엘 베이테누(Israel Beytenou 이스라엘은 우리의 집, 7석), 새희망(Tikva Hadasha, 6석)의 합류다. 보수주의 노선인 이들 3개 정당 중에는 한때 현 집권세력 리쿠드와 연정을 꾸린 세력도 있지만 이번엔 반 네타냐후 전선에 합류했다. '새희망'은 중도에 가까운 우파세력이지만 '야미나'의 경우 팔레스타인을 인정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이 지역 전체를 이스라엘 영토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는 정당이다. 이들은 네타냐후를 거부하고 새 정부를 꾸리겠다는 공동 목표 외에 다른 연정파트너들과 접점을 찾기 어렵다.

이 이유 때문에 연정이 구성된다 해도 조기 붕괴될 것으로 예상하는 목소리도 많다. 13일 국회에서 새 정부 승인이 결정되면 4년 임기 가운데 전반기 2년은 보수 정당 야미나의 나프탈리 베네트 대표가, 그리고 후반기 2년은 중도 정당 예시 아티드의 야이르 라피드 대표가 총리를 맡게 된다.

과연 이들은 연정 구성에 성공할 수 있을까? 구성한다면 안정적 집권과 변화된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첫 번째 질문보다 두 번째 질문에 더 회의적 전망과 불안감이 있지만 희망을 가지고 지켜볼 일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평화는 물속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보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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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혈맥’ 잇는 6.15민족선언 발표

박한균 기자 | 기사입력 2021/06/13 [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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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촛불전진(준)은 12일 오후 5시 임진각 망배단 앞에서 ‘6.15민족선언대회’를 열었다.  © 박한균 기자

 

▲ 박준의 촛불전진 준비위원장(왼쪽)과 김지영 민주시민교육 교원노동조합위원장이 6.15민족선언을 낭독하고 있다.  © 박한균 기자

 

© 박한균 기자

 

▲ 극단 ‘경험과 상상’의 공연 모습. 2018년 강원도 철원 화살머리고지에서 도로연결 작업 중 남북한 장병이 만나 악수한 그 때의 감동을 재현하고 있다.  © 박한균 기자

 

▲ ‘백두, 한라의 물’을 서로에게 부어 분단의 아픔을 씻어내고 있다.  © 박한균 기자

 

© 박한균 기자

 

© 박한균 기자

 

© 박한균 기자

  

“군사분계선(DMZ) 7km 남쪽 파주 임진각 망배단 앞, ‘홀로 아리랑’ 노래가 울려 퍼지고 남북한 군인이 웃으며 서로 악수를 한다. 둘은 ‘백두, 한라의 물’을 서로에게 부어 분단의 아픔을 씻어낸다. 끊어진 혈맥을 잇듯 다시 손을 움켜쥐고, 기쁨의 포옹을 한다.”

 

촛불전진(준)은 12일 오후 5시 임진각 망배단 앞 ‘6.15민족선언대회’에서 2018년 강원도 철원 화살머리고지에서 도로연결 작업 중 남북한 장병이 만나 악수한 그 때의 감동을 재현했다. 극단 ‘경험과 상상’의 공연 중 서로에게 물을 부어 얼굴을 씻는 장면에 한 참가자는 눈물을 흘렸다.

 

대회에는 ‘한미연합훈련 중단’과 ‘남북관계 개선’을 촉구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현장, 줌(ZOOM)으로 참가했으며, 대회는 유튜브로 생중계됐다. 화상 참가자들은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 독도 지키기, 남북공동훈련 실시, 개성공단·금강산 관광 재개, 남북철도 연결’ 등의 팻말을 든 카드섹션 상징의식으로 ‘6.15민족선언’ 발표를 축하했다. 

 

이날 김지영 민주시민교육 교원노동조합위원장과 박준의 촛불전진 준비위원장이 대표로 낭독한 6.15민족선언에는 “한국 정부는 8월 한미연합훈련을 중단하는 대용단을 내려야 하며, 그러면 남북 양측이 독도 지키기 남북공동훈련, 개성공단 재개, 금강산 관광 재개, 남북철도 즉시 연결을 위해 9월 중으로 고위급 회담을 열자. 그리고 고위급회담에 성과에 기초해 정상회담을 바로 추진하자. 우리는 남과 북이 힘과 지혜, 용기를 합쳐 남북관계를 전면적으로 개선하고 평화 번영 통일의 대로를 활짝 열어나갈 것을 절절히 호소한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권오민 강북노동권리찾기모임 대표는 “6월 12일 현재 2,000여 명의 사람들과 200여 개의 단체가 6.15민족선언에 함께 하고 있다”라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6월에 용단을 내릴 수 있도록 더 큰 결단을 촉구하고 힘을 실어주기 위해 평화, 번영, 통일을 바라는 국민의 뜻을 전달하고자 한다”라는 말로 대회의 의의를 전했다.

 

정연진 AOK한국 상임대표는 “촛불의 힘을 전진시켜서 분단의 장벽을 넘어가고자 하는 오늘, ‘그냥 선언은 선언일 뿐이다’는 선언의 시대에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를 함께 만들어나가자”라고 전했다.

 

조천호 대동세상연구회 부회장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예고 없이 평양 순안공항에 직접 나와 김대중 대통령을 비행기 트랩 바로 앞에서 영접하여 두 손을 맞잡고 악수하는 역사적인 장면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던 그 날을 잊을 수가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38선을 넘어가는 모습도 잊을 수가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평양 시민 15만 명에게 육성 연설한 것은 아마 평생 영원히 잊지 못할 장면일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이어 그는 “평화가 경제다는 말처럼 DMZ에 개성공단만 한 거 10개 만들어 청년 실업문제 해결하는 거다”라며 “남과 북이 함께 누리는 대동세상, 더불어 사는 대동세상, 평화통일 대동세상을 만들어 가자”라고 말했다.

 

김영학 대학생도 “한미연합훈련은 그동안 한반도 평화를 가장 위협하는 훈련으로 꼽혀왔다. 평화와 번영을 논의했던 9월 평양공동선언을 이행해 서로에 대한 적대적인 군사 행위를 중단해야 할 것”이라며 “이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가로막는 외세를 떨쳐내고 평화와 통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미국의 방해에 결단력 있는 모습으로 한반도 민족자주원칙을 다시 확인하고 역사적인 선언을 조속히 이행해 한반도 통일은 당사자인 남과 북 한민족의 힘으로만 완성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대회에서는 6.15민족선언을 지지하는 단체와 인사의 목소리가 영상과 발언, 공연으로 소개되었다. 한국대학생진보연합 예술단 ‘빛나는 청춘’도 ‘달려가자 미래로’ 춤 공연과 ‘통일이 오면’, ‘통일할래요’, ‘철망앞에서’ 노래공연으로 선언 발표를 축하했다.

 

한편 촛불전진(준)은 ‘6.15민족선언’에 모인 국민들의 뜻을 전달하고 정부의 용단을 호소하기 위해 6월 10일 문재인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6월 15일 오전 10시로 면담 제안) 면담 요청은 등기 우편, 이메일과 팩스, 온라인 민원 신청의 방법으로 이뤄졌다. 이재명 경기도지사에게도 면담 요청서를 보냈다.

 

촛불전진(준)은 ‘6.15민족선언’ 연명 운동은 한미연합훈련이 중단되고 남북대화가 재개될 때까지 해 내외로 더욱 확대해서 전민족적 운동으로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권오민 강북노동권리찾기모임 대표.  © 박한균 기자

 

▲ 정연진 AOK한국 상임대표.  © 박한균 기자

 

▲ 조천호 대동세상연구회 부회장.  © 박한균 기자

 

© 박한균 기자

 

▲ 대회 참가자들이 ‘6.15민족선언’ 발표를 축하하고 있다.   © 박한균 기자

 

© 박한균 기자

 

▲ 극단 ‘경험과 상상’의 공연 모습.     ©박한균 기자

 

© 박한균 기자

 

▲ 한국대학생진보연합 예술단 ‘빛나는 청춘’이 ‘달려가자 미래로’ 춤 공연을 펼치고 있다.     ©박한균 기자

 

▲ 한국대학생진보연합 예술단 ‘빛나는 청춘’의 ‘통일이 오면’, ‘통일할래요’, ‘철망앞에서’ 노래공연 모습.     ©박한균 기자


다음은 6.15민족선언 전문이다.

 


 

8월 한미연합훈련 중단과 남북관계 개선을 촉구하는 6.15민족선언

 

2018년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4.27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은 온 겨레에 큰 희망을 안겨주었다. 드디어 전쟁과 대결, 분단의 시대가 끝나고 평화번영통일의 새로운 역사가 열릴 것이라는 환희가 넘쳐났다. 

 

그러나 지난 2년간 남북관계는 단절되었고 교착상태가 지속되어 지금은 판문점선언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엄중한 상황에 놓여 있다. 외부 환경도 복잡하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나라들 사이에 대립이 커지고 긴장이 높아가고 있으며, 어느 나라도 우리 민족의 운명과 장래를 진정으로 걱정하고 도와주지 않는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할 때다. 남북이 결단하고 손을 잡으면 그 어떤 난관도 헤쳐 나갈 수 있다. 남북 정상은 온 겨레의 뜨거운 열망에 기초해 ‘이 땅에서 더 이상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으며, 모든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평화번영통일을 향해 나아가자고 약속했다. 그 선언은 여전히 살아있다. 

 

우리 민족의 평화와 안전, 번영은 과거 냉전시대의 낡은 틀과 관행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온전히 실현될 수 있다. 구태의연한 상호 적대정책에 기초한 한미연합훈련은 우리의 안보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긴장과 대결을 조장하고 위험천만한 전쟁위기를 불러오는 한반도 안보의 재앙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미연합훈련을 중단하고 남북이 신뢰에 기초해 모든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면 우리 민족의 앞에는 평화와 번영의 새로운 길이 활짝 열릴 것이다.또한 우리는 민족우선, 국익우선의 당당한 외교를 통해 동북아와 세계를 선도하는 민족으로 발전해 갈 것이다.

 

우리는 전민족의 염원을 담아 남북 정부에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한국 정부는 8월 한미연합훈련을 중단하는 대용단을 내려야 한다. 그러면 남북 양측이 <독도지키기 남북공동훈련>, <개성공단 재개>, <금강산관광 재개>, <남북철도 즉시 연결>을 위해 9월 중으로 고위급회담을 열자. 그리고 고위급회담의 성과에 기초해 정상회담을 바로 추진하자. 

 

우리는 남과 북이 힘과 지혜, 용기를 합쳐 남북관계를 전면적으로 개선하고 평화번영통일의 대로를 활짝 열어갈 것을 절절히 호소한다. 

 

우리는 남북관계 개선을 가로막는 모든 난관과 장애를 돌파하고 남북관계의 대전환을 이루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 나갈 것이다. 

 

판문점선언으로 희망 가득했던 4월의 봄을, 이제 2021년 새로운 전진의 가을로 이어가자.

오랜 분단의 굴레를 과감하게 걷어내고 평화번영통일의 시대를 기어이 현실로 만들어내자.

 

2021년 6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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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2위 부자 베이조스·머스크, '소득세 제로' 비결은?

미국 최고 부자 25명 소득세율 3.4%...중산층의 4분의 1 수준

미국의 저명한 탐사전문 언론 <프로퍼블리카>(ProPublica)가 지난 8일(현지시간) 연방국세청(IRS) 납세 기록을 입수해 미국 최상위 부자 25명이 연방 소득세를 거의 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폭로해 파문이 일고 있다.

 

이 보도에 따르면, 미국 최고 부자 25명은 지난 2014년부터 2018년까지 5년간 총 4010억 달러(약 447조5165억 원)의 소득을 올렸는데 소득세 납부액은 소득의 3.4%인 136억 달러(약 15조1770억 원)에 그쳤다.

 

이는 연소득 7만 달러의 중산층이 소득의 14%를 소득세로 내고, 그 이상의 고액 연봉자들의 최고 세율은 37%에 달하는 것에 비하면 한참 낮은 수준이다.


 

<프로퍼블리카>는 미국 최고 부자 25명의 '초라한 세금 납부액'에 대해 "이는 모든 사람이 정당한 방식으로 부를 획득하고 부에 비례해 세금을 낸다는 미국 세금 제도의 신화를 무너뜨린다"며 "국세청 기록에 따르면 부자들은 완벽하게 법적으로 소득세를 납부할 수 있는데 이를 회피했고, 이들의 재산은 매년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국 최고 부자들이 실제 납부한 소득세 납부액과 자산 증가액. ⓒ<프로퍼블리카> 화면 갈무리

베이조스, 5년간 자산증가액의 0.98% 소득세...워런 버핏은 0.1% 소득세


 

특히 제프 베이조스, 일론 머스크, 워런 버핏, 마이크 블룸버그 등 대중에게 잘 알려진 '슈퍼 리치'들의 소득세 납부액은 충격적인 수준이었다. 

 

세계 1위 부자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회장의 자산은 2014년부터 2018년까지 5년 동안 990억 달러 늘어났는데, 같은 기간 소득세는 9억7300만 달러로 자산 증가액의 0.98%에 그쳤다.


 

세계 2위 부자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도 같은 기간 139억 달러에 달하는 자산을 늘렸지만, 소득세는 3.27%인 4억5500만 달러만 냈다.


 

'투자의 귀재'라 불리는 워런 버핏 버크셔 헤서웨이 회장은 세금 회피에서 '귀재'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자산이 243억 달러 늘어나는 동안 소득세를 2370만 달러 납부해 실질 세율은 0.1%에 불과했다. 

 

블룸버그 통신 창업자이자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였던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도 자산 증가액의 1.3%만 소득세로 납부했다. 

억만장자 투자자 조지 소로스, 헤지펀드 투자자 칼 아이컨은 각각 투자 손실과 대출이자 납부에 따른 세금 공제 등을 들어 소득세를 수년간 한 푼도 안낸 것으로 드러났다.


 

<프로퍼플리카>는 "미국의 억만장자들은 일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범위 밖의 조세 회피 전략을 이용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주로 주식과 부동산 등의 형태로 재산을 갖고 있는데 이들 자산을 매각해 이익을 실현하지 않는 한 세금이 매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활용해 자산 가치는 계속 불리면서 세금은 매지 않고 있다는 것. 이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부동산 사업가이던 시절, 15년 동안이나 연방 소득세를 한푼도 내지 않았던 방식이기도 하다.

 

이 언론은 "앞으로 몇달간 입수한 국세청 자료를 이용해 이들 부자들이 세금을 회피하고 연방 감사관의 조사를 피하는지 자세히 조사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프로퍼블리카>의 이 보도는 국세청 납세자료가 개인정보라는 차원에서 논란이 일고 있지만, 부유층의 극단적인 세금 회피 사실을 여실히 드러냈다는 점에서 조 바이든 행정부가 추진하려는 '부자 증세'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정부에서 인하했던 법인세 증세와 함께 고소득자의 자본 소득에 대한 소득세 인상 등을 주장하고 있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61102373347548#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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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8월 한미연합훈련 중단과 9월 남북회담 성사에 모든 힘을 모으자

박준의 | 기사입력 2021/06/11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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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연합훈련 중단, 독도지키기 남북공동훈련 실시 민족추진위원회(준) (이하 민족추진위)’가 11일 ‘8월 한미연합훈련 중단과 9월 남북회담 성사에 모든 힘을 모으자’를 발표했다. 

 

민족추진위는 해내외를 망라해 8월 훈련중단 운동을 집중적, 실천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공동연대기구이다. (민족추진위 참여 신청-> https://han.gl/h5EWm)

 


 

 

1. 한반도가 위험하다

 

한반도 정세가 매우 위험한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다. 

2018년의 회담 성과가 유실되어 온 지난 3년간의 누적된 갈등이 폭발지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2018년 3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공동선언과 군사분야합의서를 채택해 승승장구 하던 남북관계가 한미워킹그룹을 내세운 미국의 방해, 차단조치로 멈춰서더니 2차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 단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교착상태에 빠져들고 말았다. 여기에 더해 남북, 북미 사이의 합의를 공공연히 파기하는 조치가 취해졌는데 그것이 한미연합훈련 재개와 대북전단살포다. 

결국 이러한 합의파기조치가 2020년 6월,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라는 초유의 사태를 불렀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라는 물리적 조치로 대남, 대미 강경대응을 예고한 북한의 입장은 8차 당대회를 통해 강대강, 선대선의 대미정책으로 공식화되었다. 

 

그러나 바이든 행정부는 기존의 대북적대정책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4월 의회연설을 통해 ‘이란과 북한의 핵문제를 미국과 세계안보에 대한 현존의 위협’이라고 규정했고 국무부가 연일 북한의 인권문제를 소재로 강경발언을 이어가고 있으며 탈북단체들을 앞세워 대북전단을 살포하는 등 역대 미국정부의 적대적 대북정책과 다를 바 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에 대해 북한은 이미 당과 정부의 담당자를 통해 ‘상응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입장을 천명한 바 있다.

 

최근 미군당국자는 북한의 ICBM을 발사 전에 공격하는 계획을 준비중이라고 밝혔으며 전임 주한미군사령관들은 한미연합훈련을 하루빨리 재개해야한다는 주장을 부쩍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 국무부는 ‘북한이 전 세계에서 가장 독재적이고 억압적인 나라 중 하나’라는 강경발언을 통해 연일 대북 인권공세를 강화하는 등 대북적대정책을 더욱 강화해나가고 있다.   

대미 강경정책을 선언한 북한의 입장에서 이렇게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이 유지, 강화되고 있는 이상 상응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지난 4월 대북전단살포를 신호탄으로 새로운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서 대북적대정책의 최고형태인 8월 한미연합훈련이 강행된다면 한반도 정세는 매우 심각한 상태에 들어갈 수 있다. 

 

교착상태와 파국을 넘어 전쟁위기까지 치달을 수 있는 현 상황을 막고 평화번영의 남북관계로의 대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8월 한미연합훈련을 반드시 중단시켜야 한다.  

올해 8월 훈련중단은 충돌방지를 넘어 남북대화의 물꼬를 트는 매우 중요한 조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대선승리, 위태롭다

 

1) 수구적폐들의 총공세 

 

박근혜탄핵으로 타격을 입었던 적폐세력들은 2018년 판문점선언으로 남북관계가 전면개선되고 평화번영이 대세가 되자 더욱 괴멸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2019년 10월 한미워킹그룹이 만들어지고 미국의 압박과 통제가 강화되자 문재인정부에 대한 투쟁을 강화하기 시작하더니 남북관계가 장기간 교착상태에 빠지고 북미관계가 냉각되자 대정부 투쟁의 기세를 더욱 올렸고 올 4월 7일 보궐선거에서 압승을 하기에 이르렀다. 

 

국민의힘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폐들은 검찰, 경찰, 언론 등 주류기득권 세력들과 한몸이 되어 문재인정부를 공격하고 정권탈환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다 쓰고 있다. 

주류기득권세력들에 의해 기울어진 운동장은 여전히 기울어져 있다. 

검찰은 국민의힘 등 적폐들의 비리와 부정부패, 성범죄는 철저히 은폐, 축소로 감싸주면서 집권당을 비롯한 민주개혁세력들에 대해서는 사소한 문제까지 극악한 범죄로 부풀려 무자비한 공격을 퍼붓고 있다. 

또한 김학의 사건 등 비리와 범죄에 대한 단죄와 적폐청산을 추진하는 정부의 개혁조치 자체를 공격해 범죄로 규정하고 처벌하려는 것이 현 검찰의 실태다.  

경찰은 청와대와 집권여당의 대표적인 남북합의 이행조치인 일명 ‘대북전단금지법’이 무력화되는 대북전단살포 행위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 그들은 대북전단살포를 예고해 온 박상학을 감시한 것이 아니라 보호하면서 실질적으로 전단살포를 방조했다. 법을 집행한 것이 아니라 박상학의 배후인 미국의 지시를 집행한 셈이다.  

언론도 의도적, 조직적, 계획적, 편파적 보도로 일관하고 있다.  

방역조치 실패 등 정부의 정책을 헐뜯고 민주개혁세력들을 비도덕, 무능, 불공정의 주범으로 색깔입히기에 여념이 없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조국 전 장관에 대한 공격이 대표적이다. 

또 국민의힘 대표선출선거를 혁신으로 치켜세워주고 윤석열을 공정과 정의의 상징으로 영웅화시켜 대세론을 만들어주고 있다. 

 

이처럼 정권탈환을 위한 수구적폐들의 결탁은 치밀하며 공세는 만만치 않다.  

 

2) 미국의 대선개입

 

미국은 한국 대선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상수다. 

미국은 자신들의 한반도, 동북아 패권정책을 실행해줄 한국정부를 원한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에서 문재인정부는 남북화해정책을 추구해 미국의 이해관계와 일정한 충돌을 빚어왔다. 

그래서 미국은 다음 대선에서 이명박근혜 정부와 같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철저히 실현해 줄 정부가 들어서게 하기 위해 다각도로 작업을 벌이고 있다.  

우선 문재인정부의 남북협력 정책을 공격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대북전단금지법 문제다.

미국은 대북전단금지법을 폐기시키기 위해 미국 의회를 동원하기도 하고 탈북자를 앞세워 대북전단금지법을 무력화시키는 전단살포를 강행하기도 하였다. 

국내 수구적폐들과 함께 문재인 정부의 대표적인 정책을 무력화시켜 정권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반문재인 조치를 취한 것이다. 

또 미국무부는 인권보고서를 통해 ‘조국 전 장관 문제’를 한국의 대표적인 부패사건으로 공식 기록하여 윤석열 검찰의 행보에 힘을 실어주고 국민의힘의 정치공세를 정당화시켜주었다. 

그리고 윤석열 검찰이 조국 전 장관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을 벌이고 있던 2019년 9월, 미국 FBI국장이 방한해 윤석열을 면담하는 등 정부의 대척점에 있는 세력들에게 노골적인 힘실어주기 행보를 보여주었다. 

앞으로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은 더 전면적으로 교활하게 진행될 것이다. 

 

3) 민주개혁의 무력화 

 

적폐와 외세의 문제 이외에도 민주개혁세력 내부의 문제도 심각하다. 

특히 민주당 내부에는 개혁의 외피를 두르고 있으나 적폐들과 같거나 비슷한 입장에 서 있는 수박같은 존재들이 있다. 

그들은 적폐청산과 사회개혁을 방해하고 교란시키며 동요를 일으켜 내분을 부추긴다.

국민적 열망이 집중되었던 검찰개혁 과정에서 검찰의 입장을 대변하고 민주당의 검찰개혁정책을 비판하던 금태섭, 조응천과 같은 검찰출신 인사들이 대표적이다. 

윤석열 총장에 대한 징계를 추진하던 민주당을 비판한 민주당 출신 이철희 전 의원도 비슷한 경우다 .

민주당 부동산특위 위원장을 맡은 김진표 의원은 대표적인 인사라고 할 수 있다. 김의원은 과거 종교인 과세를 반대하는 등 반개혁적 인사로 평가되었지만 여전히 민주당안에서 중진으로 자리잡고 있으면서 이번에는 종부세 완화라는 반개혁 정책을 주장하고 있다.

최근 미국에서 돌아온 양정철 전 민주정책연구원장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그는 또다시 연정론을 들고 나와 적폐들과의 협치를 주장하면서 국민들의 개혁열망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민주개혁세력 내부의 이런 부류들은 공통적으로 조국사태에 대한 민주당의 사과, 그리고 개혁보다 민생을 주장한다. 

이 세력들은 집권당의 개혁조치를 발목잡고 타협과 절충을 유도하며 민주당의 분열을 조장해 민주개혁세력을 무력화시키고 결국 적폐청산과 사회대개혁을 좌절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다. 

어쩌면 외부의 문제보다 민주개혁 내부의 문제가 대선승리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적폐들은 청산되지 않았고 무력해지지 않았으며 분단구조와 주류기득권 질서 속에서 다시 힘을 얻어가고 있다. 2017년 정권교체와 2018년 지방선거압승, 2020년 총선압승으로 개혁과 평화번영의 시대가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던 기대는 이제 위기감으로 변해가고 있다. 

위에서 열거한 3가지 상황 즉, 수구적폐들의 공세-미국의 개입-민주개혁세력의 무력화 상태를 돌려세우지 못한다면 적폐의 정권찬탈이 현실화될 수 있다. 

돌파구는 무엇인가?

 

3. 남북관계 개선이 열쇠다

 

4월 7일 재보궐선거를 계기로 적폐세력들이 혁신을 주도하고 정국을 주도하는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적폐들이 기세 등등, 기고만장하여 보수의 대선승리 희망과 민주개혁 세력의 패배감을 유포하고 있는 현재의 분위기를 빨리 반전시켜야 한다. 

정권말기에 들어선 현재 국면에서 정부가 개혁조치를 추진한다고 해도 제대로 효과를 내기 어렵다. 관료들도 차기정부를 내다보면서 열과 성을 내지 않는다. 현재 집권당도 개혁조치를 우선순위로 두지 않고 있으며 당의 일치된 행보도 쉽지 않아 보인다. 

복잡하고 불리해진 대선 판도를 뒤엎을 가장 확실한 돌파구는 남북관계 개선에 있다. 남북관계문제는 청와대(대통령)가 결단하고 밀어붙이면 얼마든지 풀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남북관계 대전환을 통해 적폐가 주도하는 정국의 주도권을 가져와야 하며 대선이 남북화해협력과 평화번영을 통한 안보, 경제문제 해결의 장이 되도록 만들어야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승인을 구하거나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미국이 남북대화와 협력을 지지한다고 밝힌 이상 또다시 승인에 매달릴 필요도 없다. 

이전처럼 미국의 승인에 스스로 매달리는 순간 시기를 놓치고 기회는 사라질 수 있다. 대선 2개월 전에 가까스로 성사된 10.4선언을 추진한 노무현 정부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 

반드시 9월안에는 남북회담을 성사시켜야 한다. 

 

또 미국이 남북대화를 순순히 허용하고 보장하리라는 기대나 선의, 환상을 갖지 말아야 한다. 

미국은 이미 수구적폐세력들의 집권을 바란다는 것을 정책적으로 보여줬다. 

남북대화를 차단하고 파탄내기 위해 수작을 벌이고 있는 미국이다. 한미정상회담에서 보여준 악마의 미소에 속지 말아야 한다. 

 

평화번영촛불의 승리를 위해 모두 떨쳐나서자.

 

이미 8월 훈련중단과 9월 남북회담 성사는 대선승리의 필수 과제가 되었다. 

촛불혁명의 계속 전진을 위하여, 적폐청산과 사회대개혁을 위하여, 대선승리를 위하여, 한반도 평화번영 통일을 위하여 촛불국민들의 힘을 모으자. 

평화번영통일을 위한 대선승리로, 대선승리를 통한 평화번영통일로 가기 위해 모두 떨쳐나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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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층의 강력한 권력의지, "한 박자 빠른" 이준석 밀어올리다

[분석] 젠더·공정 논란 뛰어들어 바람 타고 당권 잡아... 정치권에 시작된 혁신 싸움

21.06.11 19:54l최종 업데이트 21.06.11 19:54l
국민의힘 새 대표에 이준석…헌정사 첫 30대 당수 국민의힘 이준석 신임 대표와 최고위원 등이 11일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함께 손을 잡고 인사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정미경, 김재원 최고위원, 김기현 원내대표, 이준석 대표, 조수진, 배현진 최고위원, 김용태 청년최고위원.
▲ 국민의힘 새 대표에 이준석…헌정사 첫 30대 당수 국민의힘 이준석 신임 대표와 최고위원 등이 11일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함께 손을 잡고 인사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정미경, 김재원 최고위원, 김기현 원내대표, 이준석 대표, 조수진, 배현진 최고위원, 김용태 청년최고위원.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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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의힘 이준석 신임 당 대표가 1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당선 된 뒤 정진석 의원과 포옹하고 있다.
▲  국민의힘 이준석 신임 당 대표가 1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당선 된 뒤 정진석 의원과 포옹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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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사상 최초의 30대 보수정당 대표가 탄생했다. 그것도 제1야당의 '당수(黨首)'다.

국민의힘은 11일 오전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제1차 전당대회에서 37세의 이준석 후보를 신임 당대표로 선출했다. 2위를 기록한 나경원 후보와의 격차는 6.68%p. 내용을 들여다보면 단지 한자릿수 격차를 훨씬 넘어선다.

다른 경쟁자들과 달리, 그는 캠프 사무실을 차리지도 않았고, 투표권을 가진 당원들에게 보내는 문자메시지는 최소화한다는 방침으로 선거를 뛰었다. 지역을 다닐 때도 지원차량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통상 당내 경선에서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조직표 결집엔 상대적으로 힘을 투사하지 않은 셈이다.

그러고도 이 대표는 70% 비중을 차지하는 당원 선거인단 투표에서 37.41%(5만5820표)를 얻어 40.93%(6만1077표)를 얻은 나경원 후보에 3.52%p 차 밖에 뒤지지 않았다. 그리고 30% 비중을 차지하는 일반국민 여론조사에선 58.76%를 얻어 전체 판을 뒤집었다(관련기사 : 37세 이준석 국민의힘 당대표 시대... 득표율 43.82% http://omn.kr/1tuyh).

'박근혜 키즈'로 시작한 정치 10년... 그의 소신 "정치는 한 박자 빠르게"
 

 이준석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
▲  지난 2012년 5월 <오마이뉴스>와 인터뷰 중인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 시절의 이준석 대표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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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당수 혹은 30대 국가 최고지도자가 세계적으로 없던 일은 아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만 39살에 대통령에 당선됐고,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는 만 37살에 최연소 노동당 대표로 취임해 총리까지 올랐다. 경륜 역시 탄탄한 편이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대통령 수석보좌관·경제수석·재정경제부 장관을 역임한 바 있고, 저신다 아던 총리는 17세이던 2008년 노동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해 4선 의원을 지내는 등 21년의 관록을 자랑한다.

이준석 대표는 어떨까. 2011년 '박근혜 키즈'로 정치권에 데뷔했다. 하버드대 출신 벤처기업가란 수식어가 붙었다. 2007년 설립한 무료 과외 봉사 단체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배나사)'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눈길을 끌었다. 2011년 11월 배나사를 방문했던 박 전 대통령은 한 달 뒤 그를 직접 비대위원으로 발탁했다.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과 이상돈 전 의원 등이 당시 그와 함께 비대위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중앙선관위 디도스 사건 관련 특검 주장, '논문표절 의혹' 문대성 당선자와 '성추행 의혹' 김형태 당선자에 대한 탈당 요구 등을 서슴없이 내놓으면서 주목을 끌었다.

2012년 대선 이후엔 험로를 걸은 편이다. 2016년 20대 총선과 2018년 재보궐선거, 2020년 21대 총선에서 서울 노원병 후보로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2016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후엔 탈당·복당 등의 과정도 거쳤다. 당시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일각의 탄핵 추진에 동의했던 그는 이후 탈당해 유승민 전 의원 등이 주도하는 바른정당에 합류했다. 바른정당·국민의당 합당으로 탄생한 바른미래당에선 최고위원으로 활동했지만 당내 갈등 끝에 탈당, 2020년 다시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으로 복귀했다.

고난의 10년이라 칭할 만한 시간이었지만 그의 존재감은 점점 뚜렷해졌다. 각종 시사프로그램 패널로 활동하는가 하면 예능 출연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인지도를 쌓았다. SNS를 중심으로 기존의 여의도 정치문법과 다른 화법을 구사하는 것도 주된 포인트였다. 다소 조롱기가 섞였으나 그가 '0선 중진'이란 별칭을 얻은 이유다.

특히 각종 현안 이슈에 기민한 반응을 보였다는 점도 빠뜨릴 수 없다. 이는 2011~2012년 '박근혜 비대위' 활동 때부터 보여준 그의 장점이었다. 그는 2012년 5월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총선에서 맞붙은 손수조 새누리당 후보에게 목이 잘린다는 내용의 만화 패러디물을 페이스북을 통해 공유했다가 큰 논란을 빚었다. 민심이 나빠질 뻔 했지만, 그의 사과는 빨랐다. 하루 만에 내용을 삭제한 후 문 대통령에게 전화로 사과 의사를 전하고, 같은 날 오후 문 대통령을 직접 찾아가 다시 사과했다.
 
 새누리당 이준석 비대위원이 민주통합당 문재인 상임고문의 목 잘린 만화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가 비난이 일자,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금산빌딩 로비에서 이 위원이 문 상임고문을 찾아 고개 숙이며 사과하고 있다. 이날 이 위원은 문 상임고문에게 전화로도 사과했지만 "직접 찾아뵙고 사과하는 것이 도리이다"며 "명예를 훼손한 것에 대해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이 위원은 문 상임고문을 배웅한 뒤 취재기자들의 질문에 "평소에 존경하는 분이신데 (물의를 빚어) 이렇게 처음 만나게 되어 죄송하다"고 말했다.
▲  새누리당 이준석 비대위원이 민주통합당 문재인 상임고문의 목 잘린 만화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가 비난이 일자,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금산빌딩 로비에서 이 위원이 문 상임고문을 찾아 고개 숙이며 사과하고 있다. 이날 이 위원은 문 상임고문에게 전화로도 사과했지만 "직접 찾아뵙고 사과하는 것이 도리이다"며 "명예를 훼손한 것에 대해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이 위원은 문 상임고문을 배웅한 뒤 취재기자들의 질문에 "평소에 존경하는 분이신데 (물의를 빚어) 이렇게 처음 만나게 되어 죄송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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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표는 당시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항상 빠르게 움직이는 편"이란 질문을 받고 "시시비비가 분명할 때, 신중하게 움직이는 것도 좋겠지만, 그러면 정치인이 법관과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정치는 한 박자 빠르게 책임질 수 있어야 하고, 한 박자 빠르게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관련기사 : "목잘린 만화 사과가 언론플레이? 상처 받아 난 들러리 아니다... 박근혜 지시받지 않았다" http://bit.ly/JhTdtv).

최근 이 대표의 존재감을 더 크게 확장시킨 것도 젠더·공정 이슈에 대한 기민한 대응이다. 그는 이수역 폭행 사건·GS25 포스터 손가락 논란 등 국면에서 2030 남성의 '대변인'을 자처하면서 논란의 중심에 뛰어 들었다. 경선과정 중엔 능력주의에 매몰돼 있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공정한 경쟁'을 주장, 여성·청년 할당제 폐지, 공직후보자 자격시험 등을 주장했다.

"국민의당이 새로운 보수가 된 것"... 혁신 싸움

논란이 없었던 건 아니다. 강민진 청년정의당 대표는 이날(11일) 본인 페이스북에 이 대표의 당선을 축하하면서도 그의 '공정한 경쟁' 기조와 관련, "승자와 패자를 나누고 다르게 보상하는 경쟁은 시장의 원리일지 모르지만, 사회를 운용하는 정치의 원리일 수는 없다"고 꼬집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난 4일 KBS라디오 <최경영의 최강시사>에 출연, "(이준석 후보는) 사실상 어떻게 보면 안티 페미니즘을 정치적으로 동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론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편"이라고 지적했다.

그에게 남겨진 숙제도 만만치 않다. 당장 야권의 유력한 대권주자로 부상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어떻게 영입할지, 2018년 재보궐선거 공천 논란으로 악연을 쌓은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의 합당 논의는 어떻게 마무리할 지 관건이다(관련기사 : 이준석 "윤석열의 탄핵 입장 유지돼야 시너지 효과" http://omn.kr/1tv4h). 그가 경선과정에서 밝힌 할당제 폐지나 공직후보자 자격시험 등의 실현 및 안착 가능성도 주목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당내 인사들은 '30대 당수'로 인한 새로운 변화에 대해 기대감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다. 하태경 의원은 이날 오전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 한 인터뷰에서 이 대표의 낙승을 예측하면서 "저희 당이 새로운 보수가 된 거다. 구태보수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정의했다. 정진석 의원은 이날 전당대회 후 "국민의힘의 변화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 그리고 당원들의 정권교체 갈망이 그대로 투영된 결과"라며 "내년 대선은 누가 더 빨리, 누가 더 많이 변하느냐의 싸움이다. 실로 오랜만에 혁신의 순간을 맞았다"고 평했다.

이준석 - 윤석열 조합.... 이준석 - 조수진·배현진·김재원·정미경 호흡
 
큰사진보기 국민의힘 이준석 신임 당대표가 11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열린 제1차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로 선출된 뒤 수락연설을 하고 있다.
▲  국민의힘 이준석 신임 당대표가 11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열린 제1차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로 선출된 뒤 수락연설을 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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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평론가들도 비슷한 평가를 내놨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장은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정치권 전반에 던지는 변화와 쇄신, 물갈이 메시지다.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이준석 대표를 통해 표출됐다"면서 "특히 보수·국민의힘 지지층의 권력의지가 이 대표를 통해 분출한 성격이 있다"고 말했다.

'이준석 체제'의 안착 가능성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봤다. 그는 "(이번 결과를 통해) 보수층의 의지가 무엇인지 만천하에 드러났다. 바로 대선 승리"라며 "이명박·박근혜와 거리가 먼 당대표와 대선후보, 이준석과 윤석열 조합이다. 이런 보수 민심이 워낙 강렬해서 당내에서 (이 대표에게) 강하게 반발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장성철 공감과논쟁 정책센터 소장 역시 "이준석 후보가 선출되지 않았다면 변화를 거부하는 정당이란 낙인이 찍힐 뻔 했는데 이번 결과로 역동적이고 젊어지는 효과가 발생했다. 내년 대선에서 (국민의힘에) 상당히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며 "반대로 민주당은 (이준석 체제로) 이미지만으로도 낡은 정당·기득권 정당이 되어 버렸다"고 평했다.

그는 '이준석 대표는 중요한 결정을 한 경험이 없다, 항상 갈등의 중심에 있었다'는 당내 일각의 우려에 대해서는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며 "이 대표는 지난 10년 동안 비대위원과 최고위원을 거치면서 중요한 당의 의사결정을 지켜봐 왔고 세 번이나 지역구에 출마하면서 정치적 내공도 많이 쌓인 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간 방송 등에서 평론을 하면서 여러 사안들에 대해 확고한 원칙을 갖고 있어서 어느 다른 누구보다 잘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며 "(대선 경선 관리에서도) 사적 인연·감정을 배제하고 본인이 평론한대로, 생각한대로 당을 이끌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장 소장은 새 지도부의 최고위원으로 선출된 조수진·배현진 의원, 김재원·정미경 전 의원과 이 대표와의 호흡과 관련해선 "(이 대표와 성향상 다른 면이 있어서) 같은 뜻으로 움직일지는 두고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당대표와 최고위원 경선을 따로 진행하는) 단일성 집단지도체제라 당대표의 힘이 클 수밖에 없다. 김재원 전 의원이 새 최고위원 중 중진이긴 하지만 원외인 만큼 최고위원들이 뭉쳐서 당대표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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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플래그’가 뭐길래 이렇게 요란한가?

  • 기자명 강호석 기자
  •  
  •  승인 2021.06.11 16:45
  •  
  •  댓글 0
 
 
 

레드 플래그(Red Flag, 붉은 기)는 미 공군이 네바다주와 알래스카주에 위치한 기지에서 매년 실시하는 공중전 훈련으로 한국을 비롯한 미국의 우방국 38개국이 참가하는 대규모 합동훈련이다.

레드플래그는 참가국들을 여러 차례로 나눠서 실시하는 다국적 공군훈련으로 2021년에 실시하는 레드플래그라면 2021-1, 2021-2, 2021-3... 이런 식으로 몇 차례로 나누고 매번 참가국들도 바뀐다. 레드플래그에 참가해도 일정이 다르면 볼 일은 없다. 현재 ‘레드플래그 21-2’가 10일부터 25일까지 알래스카 아일슨 기지 일대에서 진행되고 있다.

▲레드 플래그에 참가한 한국 공군 KF-16 전투기 편대가 미 공군 KC-135 공중급유기로부터 급유를 받으며 태평양을 횡단하고 있다. [사진 : 뉴시스]
▲레드 플래그에 참가한 한국 공군 KF-16 전투기 편대가 미 공군 KC-135 공중급유기로부터 급유를 받으며 태평양을 횡단하고 있다. [사진 : 뉴시스]

이런 훈련이 있는지도 몰랐다가 최근 한국군의 참가 여부가 문제시된 이유는 두 가지.

첫째, 3년 만에 F-15K 및 FK-16 전투기 6대와 200명 안팎의 한국군이 훈련에 참가하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코로나19 등의 이유로 훈련에 불참하던 공군이 ‘레드플래그 21-2’에 참가한 데는 바이든 행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 이행 요구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결국 대중국 포위압박 차원에서 실시되는 군사훈련에 참가함으로써 대중국 외교에 심각한 난관을 조성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대목이다.

훈련 참가가 문제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일본 항공자위대와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기 때문이다. 미 공군의 발표에 따르면 이번 훈련에 한국 공군과 일본 항공자위대 등 20여개 부대의 100여대 항공기와 1500여 명의 병력이 참가한다.

결국 ‘레드플래그 21-2’에 참가한 공군이 일본 항공자위대와 일정이 겹침으로써 한일 합동군사훈련이 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일본 자위대와 우리 국군이 합동으로 군사훈련을 하는 비참한 현실은 결코 우연의 일치는 아니다.

한반도를 군홧발로 짓밟은 군국주의 일본군대와 군사훈련을 해야 하는 이 비극은 지난 3월 한미 외교·국방장관(2+2) 회의에서 이미 예고되었다. 당시 회의에서 한미일 3국 안보협력을 강조하면서, 한일 군사정보협정(지소미아 GISOMIA)에 이어 실질적인 한일 군사교류를 추진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레드플래그 21-2’와 때를 같이해 문재인 대통령은 G7 정상회의 중인 바이든 미 대통령과 스가 일본 총리를 영국에서 만나 한미일 정상회담을 가진다. 대중국 포위압박 전략을 위한 미국의 각본에 따라 이번 회담에서 한미일 군사동맹은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강호석 기자 sonkang1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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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남부발전 자회사 관리자, 직원 수당 과다 지급 뒤 ‘페이백 횡령’

정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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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원 구애’ 거절당한 국민의힘, 권익위서 부동산 전수조사 받기로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1/06/11 09:50
  • 수정일
    2021/06/11 09:5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강경훈 기자 

발행2021-06-10 18:29:01 수정2021-06-10 18:29:01
국민의힘 추경호(가운데) 원내수석부대표, 강민국(오른쪽) 원내대변인, 전주혜 원내대변인이 9일 서울 종로구 감사원에 국민의힘 국회의원 부동산 투기 전수조사를 의뢰하러 갔을 때 모습.ⓒ국회사진취재단 
 
감사원을 통해 소속 국회의원들의 부동산 전수조사를 받겠다고 고집하던 국민의힘이 10일 감사원으로부터 ‘조사 불가’ 통보를 받자 국민권익위원회 전수조사를 받겠다고 입장을 바꿨다.</figcaption>

국민의힘 강민국 원내대변인은 이날 오후 “국민의힘은 소속의원 102명과 배우자, 직계존비속의 부동산 투기 여부에 대한 전수조사를 국민권익위원회에 의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다만 “권익위는 전수조사에 대한 공정성을 반드시 담보해야 한다”고 했다.

강 원내대변인은 “조사에서 전현희 위원장이 직무배제를 했다고 하지만 조국, 추미애, 박범계 등 친정권 인사들에 대해 입맛대로 유권해석을 내리고 민주당 대표조차 ‘부실조사’라고 지적하는 권익위를 생각하면 과연 야당과 국민들이 권익위 조사를 신뢰할 수 있겠는가”라며 향후 조사 결과에 따라 신뢰성을 문제 삼을 여지도 남겨뒀다.

앞서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들에 대한 권익위 전수조사 결과가 나온 이후, 국민의힘은 여당 의원 출신 전현희 위원장이 수장으로 있는 권익위 조사를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감사원 조사를 받겠다고 주장해왔다.

국민의힘은 전날 감사원에 전수조사를 의뢰했으나, 감사원은 하루 만인 이날 ‘조사 불가’ 회신을 보냈다.

 

감사원은 회신문에서 “국회의원 본인이 스스로 감사원 조사를 받고자 동의하는 경우에도 감사원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권한과 직무 범위 내에서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며 “국민의힘에서 의뢰한 부동산 투기 의혹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의원 전수조사는 실시할 수 없음을 알려드린다”고 밝혔다.

한편 전현희 권익위원장은 전날 정의당, 열린민주당, 국민의당, 기본소득당, 시대전환 등 국회 비교섭단체 5개 정당의 전수조사 의뢰서가 접수되자마자 이와 관련한 직무회피를 신청했다. 국민의힘이 의뢰한 전수조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직무회피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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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규정 위반·경고 외면한 ‘민관합작’ 철거 붕괴사고

[아침신문 솎아보기] 신문들 현대산업개발 재개발 철거붕괴 원인분석
업체의 위반·감독기관 방조·불법 재하도급·경고 무시
내달부터 수도권 식당·유흥시설 등 12시까지
 
 

17명의 사상자를 낸 광주 동구 재개발 건물 붕괴 사고는 규정을 위반하고 경고음도 무시해 발생한 ‘민관합작’ 인재라는 정황이 뚜렷해지고 있다. 11일 아침신문을 종합하면 주무 감독청은 기준 미달인 해체계획서를 허가했고 현장에선 이마저 위반했으며, 사고 두달 전 같은 지역에 안전조치 민원이 제기됐지만 묵살됐다.

신문들은 이날 1면과 주요 지면에 광주광역시 학동 4구역 재개발 지역 5층 건물 붕괴사고 원인을 보도하며 “안전을 외면해 발생한 예고된 인재”이자 “민관합작품”이라고 규정했다.

▲11일 아침신문 1면 갈무리
▲11일 아침신문 1면 갈무리

엉터리 해체계획마저 위반, 구청은 묻지마 허가

두달 전 시민이 안전사고 위험을 제보한 적 있지만 동구청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한겨레는 “국민권익위원회 국민신문고에 지난 4월7일 ‘광주 학동 4구역 철거 공사의 인명사고 위험성이 있다’는 공익 제보가 접수됐다”며 “시민 신아무개(58)씨는 ‘철거 현장 바로 옆은 차량이 지나가는 도로인데, 천막과 파이프로만 차단하고 철거하는 것이 인명사고가 (날 수도 있을 것 같아) 불안해서 알린다’고 제보했다”고 했다.

동구청 도시관리국 쪽은 4월12일 “안전조치 명령(공문발송 등)했다”는 답변을 보냈다. 한겨레는 “철거 현장 안전을 우려하는 민원에 적극적으로 응대했더라면 막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번 사고도 ‘인재’였다”고 했다.

▲11일 한겨레 1면
▲11일 한겨레 1면
▲11일 경향신문 1면
▲11일 경향신문 1면

주택재개발 정비사업조합은 기준과 다른 해체계획서를 제출했고, 감독청은 안전 위반 계획서에도 철거 허가를 내렸다. 철거업체는 기준과 다른 해체계획서마저 어긴 데다 감리사 없는 상태로 철거 작업을 진행했다.

한국일보는 “동구청은 해체계획서에 담긴 해체 작업 순서가 국토부 기준과 다른데도 허가했다”고 했다. 한국일보는 “실제 이 조합의 해체계획서에 따르면 건축물 구조 안전 위험성이 높은 측벽에서부터 철거하는 것으로 돼 있다. 이에 따라 철거업체인 H사도 건물 뒤쪽에 3층 높이로 성토체(盛土體)를 조성한 뒤 굴삭기를 동원해 건물 측면부터 까나가기(해체)를 했다”며 “마감재, 지내력 벽체, 슬래브, 작은 보, 큰 보, 기둥의 순으로 해체하라는 국토부 기준을 어긴 것”이라고 했다.

철거공사를 맡은 업체가 이마저도 지키지 않은 정황이 제기됐다. 경향신문은 “계획서상에는 3층까지 해체 완료 후 지상으로 장비를 옮겨 1~2층을 해체하는 것으로 돼 있다. 철거 공법은 무진동 압쇄였다. 이 공법은 방진벽과 비산먼지 차단벽이 필요하다. 먼지가 많이 발생해 물을 뿌리는 살수시설이 필수”라고 했다. 업체 측은 사고 난 9일 철거를 시작했다고 밝혔지만 제보된 사진과 영상엔 지난 1일부터 4~5층을 그대로 둔 채 굴착기가 3층 이하 저층 구조물을 부수는 모습들이 포착된다.

▲11일 한국일보 1면
▲11일 한국일보 1면
▲11일 한국일보 2면
▲11일 한국일보 2면

경향신문은 “두 달여 전에도 참사 현장 인근에서 비슷한 사고가 있었다. 지난 4월4일 광주 동구 계림동에서 공사 중이던 주택이 무너져 노동자 2명이 숨졌다”며 “이 사고를 계기로 광주시는 안전점검이 필요하다고 보고 5개 자치구에 모두 4차례나 공문을 보냈다. 하지만 사고는 또 일어났다”고 했다.

철거 상황을 점검해야 할 감리자는 현장에 없었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지난해 5월부터 4층 이상의 건물에 대한 해체 공사를 할 때는 지방자치단체가 감리를 직접 지정하도록 한 개정 건축물관리법이 시행됐다. 동아일보는 “구청은 건축사 대표 A 씨를 감리자로 지정했다”며 “A 씨는 건물의 구조 안전성에 문제가 없다며 ‘적정’ 결론을 내렸고, ‘비상주 감리’라는 이유로 사고 당일 현장에도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경향신문은 이를 두고 “현행 건축물관리법에 건물 철거와 해체 공사 허가제도는 있지만, 실제로 착공에 들어가기 직전 지방자치단체에 신고하는 ‘착공 신고제’ 규정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해당 법률엔 안전 여부를 심의할 ‘감리자 상주 배치’ 규정도 없었다”고 했다.

▲11일 동아일보 1면
▲11일 동아일보 1면

건설노동자 피해 가장 커, 일반공사보다 철거에서

신문들은 공사기간과 비용을 줄이기 위한 불법 다단계 재하도급이 참사의 원인이라고도 지적했다.

보도에 따르면 ㈜현대개발산업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학동 일대 12만6433㎡ 규모 학4구역 재개발 지역에서 아파트를 짓기 위해 철거작업을 진행했다. 학동4구역은 광주의 대표 노후 주택 밀집지역 가운데 한 곳으로, 이곳엔 지하 2층~지상 29층 아파트 19개동 2282가구가 들어설 예정이었다. 공사를 수주한 현대산업개발은 전문건설업체인 H기업에 하도급을 줘 철거공사를 맡겼다. H기업은 다시 광주의 구조물 장비업체 B사에 재하청을 줬다. 그러나 현대산업개발 측은 재하청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동아일보와 서울신문 등이 이를 보도했다. 조선일보도 “철거 업체의 무리한 공사와 허술한 안전 관리에 대해, 업계 관계자들은 2~3단계 하도급과 재하청이 이뤄지는 공사 현장 납품 구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도 제기됐다”고 했다.

▲11일 동아일보 3면
▲11일 동아일보 3면

건물 해체·붕괴 현장 사고 피해의 대부분은 건설 노동자들이 입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향신문은 “올해 철거·해체 현장 사고 23건…정부는 ‘행정지도·교육’이 전부”에서 “2015년부터 전국에서 발생한 주요 철거·해체 공사 현장 붕괴사고는 모두 15건이다. 이들 사고로 사망자 17명, 부상자 17명이 발생했다”고 했다. 신문은 “2017년 고용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의 ‘철거·해체 공사 중 붕괴 사례 분석’ 결과를 보면 일반 공사 현장에 비해 철거·해체 현장의 중대재해 피해 정도가 더 컸다”고도 했다.

이 신문은 “건설공사 안전관리 종합정보망을 통해 확인한 자료를 보면 올해에만 전국의 토목과 건축 관련 철거·해체 현장에서 23건의 각종 안전사고가 발생했다. 이들 사고로 노동자 3명이 숨지고 2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밝혔다.

▲11일 경향신문 1면
▲11일 경향신문 1면

수도권 식당·노래방 영업시간 내달 ‘밤 12시’까지

다음달부터 수도권의 식당·카페·노래연습장·유흥시설의 영업시간이 자정까지 연장될 것으로 보인다. 그 밖의 시설은 시간제한이 풀릴 전망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 새 개편안에 따라서다.

중앙사고수습본부는 7월부터 시행될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 개편안과 관련해 10일 “2단계에서는 식당·카페·노래연습장·유흥시설 등은 24시(자정) 운영제한이 있고, 그 외 시설은 운영시간 제한이 없다”고 밝혔다.

정부가 지난 3월 마련해 다음달부터 적용되는 거리 두기 개편안을 보면 수도권의 경우 주 평균 확진자가 181명 이상이면 2단계, 389명 이상이면 3단계, 778명 이상이면 4단계가 적용됐다. 현재 수도권의 확산 상황(주 평균 374.9명)은 2단계다.

▲11일 서울신문 1면
▲11일 서울신문 1면
▲11일 조선일보 1면
▲11일 조선일보 1면

정부는 새 거리 두기 체계의 구체적인 내용을 빠르면 다음주 공개한다.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서울신문, 조선일보 등 신문들이 1면에 이 소식을 보도했다. 신문들은 복지부가 코로나19 사태 장기화 속에 국민 피로도가 높아지고 고령층 백신 접종이 상반기 마무리됨에 따라 새 개편안을 마련 중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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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통일 언론, 북맹을 넘어 혐북과 통일공포증 조장”

자유언론실천재단, ‘조용수 60주기’ 평화저널리즘 세미나

  • 기자명 이광길 기자 
  •  
  •  입력 2021.06.10 17:33
  •  
  •  수정 2021.06.10 20:00
  •  
  •  댓글 2
 
원희복 이사장이 10일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반통일 언론'의 폐해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원희복 이사장이 10일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반통일 언론'의 폐해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그들은 북을 외면하도록(북맹) 강요한다. 북맹을 넘어 북을 악마화(혐북)까지 한다. 국민들로 하여금 통일공포증을 조장하게 하고, 통일 의지를 꺾는다. 여기서 끝나면 좋은데 정치인들은 이것을 이용해서 국민을 편가르기 한다. 아까 (이부영) 이사장님이 북한의 노동당 규약이 개정됐는데 우리 정치권에서는 조용하다는 말씀을 했다. 그 이유가 뭔가. 정치인들이 ‘조중동’ 의식해서 자기검열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정부가 올바른 대북정책, 통일정책을 펼치기가 매우 어렵다. 결국 이것은 우리의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데 커다란 저해요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원희복 민족일보기념사업회 이사장이 10일 오후 2시30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평화저널리즘 모색 세미나’에서 ‘반통일 언론의 폐해’에 대해 이같이 조목조목 비판했다. 

친일·분단독재에 기생해 성장한 ‘조중동’의 태생적 한계는 그렇다치고, 대안으로 기대를 모았던 진보언론조차 ‘반세기의 신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성급한 ‘반북’ 보도에 편승하는 실정이다. 

이 질곡을 넘어 평화저널리즘으로 가는 길은 “결국 기자의 문제”라고 원 이사장은 강조했다. 

사태를 처음 파악하고 판단하는 일선 기자들이 △냉전 사고를 버리고, △평화통일을 이룬다는 신념을 가지며, △동맹 의존성을 버리고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라고 조언했다.

토론자들은 평화저널리즘의 실현을 위한 여러 방안들을 제시했다. [사진 - 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토론자들은 평화저널리즘의 실현을 위한 여러 방안들을 제시했다. [사진 - 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토론자로 나선 이계환 [통일뉴스] 대표는 “‘평화저널리즘’의 첫 시도로 ‘정명론’에 입각해 남측과 북측에 제 이름을 불러주기를 제안한다”고 밝혔다. “남과 북을 한국(대한민국), 조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약칭을 쓰면 좋은데, 그 과도기적 형태로 남측을 ‘남한’, 북측을 ‘북조선’이라 부르자”고 제안했다.

권영석 [연합뉴스] 통일언론연구소장은 “평화저널리즘을 위해서는 우리 기자들이 지난 1995년에 제정한 ‘남북관계 보도제작준칙’을 학습할 필요가 있다”면서 “이 준칙의 존재조차 모르는 기자들이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동시에 “남북 언론교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임상우 ‘한반도 중립화를 추진하는 사람들’ 사무총장은 역대 정부의 “‘기능주의적 평화 프로세스’의 허구성”을 지적하면서 “선중립-후통일”이 현실적이고 시급한 과제라고 주장했다. 남북미중이 평화조약을 체결함과 동시에 남북영세중립화선언-남북국가연합 수립으로 가자는 것.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이 인사말을 전했다.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이 인사말을 전했다.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이날 행사는 ‘민족일보 창립 60주년’과 ‘조용수 서거 6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자유언론실천재단(이사장 이부영)이 마련했다.

이부영 이사장은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은 중립화통일, 영세중립 이런 걸 주장한다고 사법살인 당했다. 기가 막힌 노릇이다. 그 뒤에 박정희, 전두환 정권 내내 조용수의 중립화 통일방안은 금기어가 되어 있었다”고 상기시켰다.

그는 “그런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 중립화, 평화공존을 얘기해도 누기 시비 걸 사람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걸 안하고 있는 우리의 게으름이 너무 크다”고 개탄했다.

‘민족일보 창립 60주년’과 ‘조용수 서거 60주기’를 기념해 열린 이날 세미나에는 조용수 사장의 동생 조용준 민족일보기념사업회 고문 등이 참석했다. [사진 - 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민족일보 창립 60주년’과 ‘조용수 서거 60주기’를 기념해 열린 이날 세미나에는 조용수 사장의 동생 조용준 민족일보기념사업회 고문 등이 참석했다. [사진 - 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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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상징 '38선'은 누가, 어떻게 그었나?

[손호철의 발자국] 42. 경기도 연천 : 38선에서 분단과 남침, 북진을 생각한다

1980년대 미국 유학시절 '정책결정론' 수업 교재에서 이 이야기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대한민국을 적화통일로부터 구한 구세주'로 알고 있었던 맥아더가 사실은 잘못된 정책 결정으로 미국을 '제3차 세계대전'의 위기로 끌고 갔으며, 맥아더가 남긴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져 갈 따름이다"라는 멋진 말도 이 같은 강경론을 주장하다가 해임당하면서 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3번 국도를 타고 동두천을 지나 연천에 들어서 한탄강 바로 직전에 오른쪽을 보면 두 개의 커다란 조형물이 나타난다. 먼저 나타나는 것은 '38선'이라고 쓴 커다란 돌이다. '여기는 겨레의 한이 맺힌 분단의 현장 38선입니다'라고 쓰여 있는 이 표시석은 1971년 만든 것이다. 원래 있었던 38선 표시석은 1950년 6월 25일 남하하는 북한군 탱크에 파괴된 것으로, 그 옆에 역사적 유물로 다시 세워 놓았다. 이곳이 바로 말로만 듣던 분단의 현장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 연천에는 부서진 38선 표시석과 설명석이 분단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위) 분단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부서진 38선 표시석 옆에 새로 세운 연천의 3.8선 표시석(아래) ⓒ손호철

이를 조금 지나 북쪽으로 향하면 조그마한 탑이 보인다. 탑에는 영어로, 그것도 아주 작은 글씨로 쓰여 있어 무슨 탑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 자세히 읽어 보니, 한국전쟁 발발 1년 뒤인 1951년 5월 28일 미군 제 1기병사단이 그리스군과 태국군의 지원을 받아 38선을 돌파한 것을 기념하는 한편,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세 나라 군인들을 추모하는 '38선 돌파기념비'다.


 

▲ 38선 바로 북쪽에 설치되어 있는 38선 돌파기념비. 인천상륙작전 후 유엔군이 북진을 히며 38선을 돌파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손호철

한국현대사, 구체적으로 1945년 해방에서 한국전쟁이 휴전되는 1953년까지의 해방 8년사에서, 38선은 네 번 중요하게 등장한다.

 

 첫 번째는, 분단이다. 1945년 8월, 미국과 소련은 38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분할했고 그 결과 분단이 시작됐다. 두 번째는, 1948년 남쪽에는 대한민국이, 북쪽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독립된 국가'가 설립되면서 38선은 '두 체제'의 국경선이 되고 만다. 세 번째는 한국전쟁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은 38선을 넘어 전면전을 일으킨 것이다. 네 번째, 북진이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엎고 서울을 수복한 미군과 국군은 38선을 넘어 북진을 했다.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북진해 북한을 무너트리고 북진통일을 이루는가 싶었을 때, 중국군이 물밀 듯이 압록강을 건너왔다.


 

중국군은 인해전술로 다시 한 번 38선을 넘어 평택까지 남하했다. 따라서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38선은 여기에서 다섯 번째로 쟁점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다시 연합군이 반격을 해 황해도와 개성 등 서부지역을 제외하고 연천지역부터 강원도까지는 우리가 38선을 넘어 북쪽의 일부를 차지했으니 38선은 여섯 번째로 쟁점이 된 것이다. 연천의 38선 돌파기념비는 바로 이 반격작전 때 38선을 재돌파한 것을 기념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로 생겨난 휴전선은 크게 보아 원래의 38선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는 네 번째 속에서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38도가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그러면 38도 이남은 우리가, 이북은 당신들이 점령합시다."


 

최근 공개된 여러 문서들에 따르면,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항복 의사를 밝히면서 이미 한반도 국경에 도착한 소련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할 가능성이 매우 커지자, 미국의 딘 러스크 국무부 정책과장보가 찰스 본스틸 전쟁부 정책과장과 함께 서울과 인천을 미국의 통제 하에 두기 위해 군사경계선으로 38선을 긋자는 미국의 제의를 소련이 받아들임으로써 분단이 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여기에서 정작 놀라운 것은 트루먼 대통령 등 당시 미국의 관계자들이 나중에 밝혔듯이, 소련이 이를 덥석 받아들인 것이다. 멀리 떨어진 미국과 달리 소련은 한반도와 국경을 접하고 있고 이미 소련군이 한반도로 들어오고 있는 상황을 고려할 때, 소련이 38선에 반대하고 훨씬 남쪽에 경계선을 하자고 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같은 미소 양국의 분할점령이 바로 분단이라는 비극의 시초라는 점을 생각하면서 38선 표시석을 바라보니, 가슴이 더욱 아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김구의 이 같은 선언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김일성은 1948년 남북한에 각각 독립된 정부를 수립했다. 이로써 1945년 미소 양국에 의해 이루어진 군사적 분단이 항구적인 분단체제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분단도 분단이지만, 북한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며 38선을 넘어 전면전을 일으킨 것도 문제다. 물론 당시 많은 사람들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등 통일에 대한 강한 염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수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 등 한국전쟁이 가져온 처참한 결과, 그리고 그 이후 남북한에 나타난 비정상적인 억압체제와 이들 간의 대립을 생각하면, 이는 정당화 될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내가 이 나라의 최고통수권자이니, 나의 명령에 따라 북진을 하라." 용산 전쟁박물관에 가면 이승만의 북진 명령을 비롯해 유엔군의 북진 작전을 대대적으로 부각시켜 놓았다(이승만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국에 국군통수권을 양도한 만큼 자신이 최고통수권자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북한의 남침이 문제라면, 북진도 문제이긴 마찬가지다. 물론 맥아더와 이승만의 강경노선에 기초한 38선 돌파에 대해 북한이 먼저 38선을 넘어 남침을 한 만큼 우리도 38선을 넘어 북진을 한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객관적 현실을 무시한 잘못된 결정이었다.

 

구체적으로, 유엔군이 북진을 할 경우 중국이 이를 중국에 대한 침략으로 간주해 참전할 것이라는 경고를 여러 차례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북진을 함으로써 미국은, 나아가 우리도,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적과 잘못된 전쟁'을 하게 된 것이다.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에 대한 영국의 극비 문서들을 연구한 김계동 국가정보대학원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이다. 
 

 
▲ 인천상륙작전 후 유엔군이 3.8선을 넘을 경우 중국에 대한 적대 행위로 간주해 참전하겠다는 중국의 경고를 설명한 전쟁기념관의 전시물 ⓒ손호철
▲ 중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내린 북진 명령을 전시해 놓은 전쟁기념관 전시물 ⓒ손호철

중국은 1950년 9월 초부터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경우 25만 명을 파병할 수 있다는 경고성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인도의 네루 총리는 유엔군이 북진을 하지 말도록 영국에 긴급 제의했고, 영국은 미국에 유엔군이 북한군에 항복을 권하며 최소 7~14일간 38선에서 북진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의 최고지도부는 맥아더의 분석과 주장에 기초해 '중국이 뻥을 치고 있다'고 생각,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10월 9일 전면적인 북진을 시작했다. 영국은 다시 북위 40도선에 완충지대를 만들어 중국의 우려를 해소시켜줘야 한다고 제의했지만 미국은 이를 다시 묵살했다. 그 결과가 바로 중국의 참전이다.

 

 
▲ 중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유엔군이 북진을 하자 압록강을 넘은 중공군이 남하하고 있다. 고성 DMZ박물관 전시물 ⓒ손호철

결국 중국의 경고를 무시한 맥아더 등 강경파들의 오판에 기초한 북진 결정으로 네댓 달이면 끝날 수 있었던 전쟁이 무려 3년이나 이어졌고, 미국과 중국이 정면충돌하는 국제전으로 발전되고 말았다(최근 당시 비밀문서에 대한 한 연구는 중국에 대한 핵무기 사용의 경우 맥아더보다도 워싱턴이 더 강경파였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 결과, 100만 명이 넘는 민간인 희생자는 논외로 하더라도, 국군 13만 7899명, 북한군 52만 명, 미군 3만3668명, 중국군 14만8600명 등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고 온 한반도가 쑥대밭이 돼야 했다. 중국의 경고를 받아들였다면, 중국군은 전혀 죽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한국군, 북한군, 미군 등도 최소한 6분의 5는 죽지 않아도 됐다는 이야기이다.

 

▲ 이승만의 북진명령서와 북진을 표지 기사로 보도한 타임지 ⓒ 손호철
▲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국군의 38선 돌파기념사진. 북진은 결국 중국의 참전을 초래해 전쟁의 장기화를 기져왔다. ⓒ손호철

이처럼 맥아더가 해임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고, 중국이 '항미원조(抗米援朝,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도운) 전쟁'이라고 부르는 한국전쟁에 대해 미국에 책임이 있다고 비판하는 데에도 나름 이유가 있다. 즉 미국이 한국전쟁의 발발에 책임이 없는지 모르지만, 북진을 통한 확전에는 분명히 책임이 있다(물론 중국도 스탈린과 함께 북한이 한국전쟁을 일으키는 데 지원을 약속했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의 발발에 일정한 책임이 있다). 바로 이 때문에 미국의 많은 '정책결정론' 수업에 한국전쟁을 가르치는 것이다.


 

38선 표시석과 38선 돌파 기념비를 보고 있자, 38선을 둘러싼 우리의 비극적 역사, 구체적으로 분단, 단독정부 수립, 북한군의 남침, 유엔군의 북진이라는 사건들이 차례로 지나가면서, '정책결정론'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한국전쟁, 구체적으로 북진은, 가장 똑똑한 엘리트들이 집단사고에 빠지는 경우 얼마나 멍청한 결정을 내리고 국민들의 목숨을 희생시키는가를 가르쳐주는 좋은 사례라는 점에서 두고두고 기억해야 한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61018125525169#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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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이 시뻘건 '철관'... 순간, 눈에서 불이 났다"

[6·10만세운동] '6월의 독립운동가' 권오설을 찾아서 ①21.06.10 07:22l최종 업데이트 21.06.10 09:35l글: 김병기(minifat)사진: 권우성(kws21)

6월 10일 개최되는 6·10만세운동 기념식은 처음으로 치러지는 정부 주관 행사이다. <오마이뉴스>는 6·10만세운동의 의미와 주요 인물을 조명한다.[편집자말]
큰사진보기 2008년 4월 14일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부근 공동묘지에서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묘에서 철관이 발견되었다. 고인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지 78년만이다. 1930년 4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후 고인의 주검은 철관에 담겨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다. 일제의 방해와 감시로 봉분을 쓰는 것과 친지들의 문상이 금지된 채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발견 당시 철관은 부식이 심한 상태로 두껑은 내려앉은 상태였다. 철관은 현재 경북 안동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2008년 4월 14일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부근 공동묘지에서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묘에서 철관이 발견되었다. 고인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지 78년만이다.
ⓒ 사진제공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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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낫이 원체 무겁잖아요. 그걸 들고 열두 살 때 공동묘지에서 혼자 아버님 묘를 벌초한 자리에서 잠깐 졸았나 봐요. 흰 창호지 전지를 양손에 들고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열개 정도 내려갔더니 엑스레이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흰 뼈가 나오더라고요. 팔, 다리, 가슴뼈... 그런데 머리가 없어! 당황해서 두리번거리다 눈을 번쩍 떴어요. 너무 무서웠죠."

권대용(77세)씨는 지금도 섬뜩하다고 했다. 그 뒤 6·10만세운동의 주역인 막난 권오설 선생(1897~1930)의 '철관'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데 66년이 걸렸다. 

[철관] 12살의 꿈

권오설 선생의 양아들인 권씨가 부부합장을 위해 파묘한 것은 2008년 4월 15일이었다. 제95주년 6·10만세운동 기념식을 앞두고 만난 권씨는 파묘 당시 "녹이 시뻘겋게 슨 철제 관을 보고 눈물은 안 나오고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고 회상했다.

국가보훈처는 2021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권오설·이선호·박래원·이동환 선생을 선정했다. 1926년 6월 10일 융희 황제(순종) 장례일(인산일)을 기해서 일어난 6·10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참여한 주요 인물들이다. 권오설 선생은 노무현 정부 때인 지난 2005년 뒤늦게 건국훈장 독립장으로 추서됐다.  
 

 1926년 융희 황제(순종) 장례일(인산일)을 기해 일어난 6.10만세운동을 기획한 권오설 선생의 양자 권대용씨와 2005년 노무현 정부 당시 권오설 선생에게 추서된 건국훈장 독립장.
▲  1926년 융희 황제(순종) 장례일(인산일)을 기해 일어난 6.10만세운동을 기획한 권오설 선생의 양자 권대용씨와 2005년 노무현 정부 당시 권오설 선생에게 추서된 건국훈장 독립장.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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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사진보기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권오설, 이선호, 박래원, 이동환 선생을 '2021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이들은 1926년 6월 10일 융희 황제(순종) 장례일(인산일)을 기해 일어난 민족독립운동인 '6.10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참여한 주요인물이다.
▲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권오설, 이선호, 박래원, 이동환 선생을 "2021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이들은 1926년 6월 10일 융희 황제(순종) 장례일(인산일)을 기해 일어난 민족독립운동인 "6.10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참여한 주요인물이다.
ⓒ 독립기념관/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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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가일(佳日)마을. 삼각형 모양의 정산이 병풍처럼 감싸 안은 이곳은 안동 권씨가 500년간 지켜온 동성마을이다. 지난 2일 찾아간 선생의 고향 마을 어귀 가일지(못)에는 바람이 불 때마다 잔물결이 일었다. 그 앞에 우뚝 선 300년 된 회화나무 그늘 아래 정자에서 대여섯 명의 주민들이 담소를 나누면서 웃었다.

이곳이 항상 평화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안동의 모스코바'. 이 마을에 붙여진 별칭이다. 근대 사회주의 운동을 연 권오설과 권오직 형제, 권오상(권오돈) 등 안동의 초기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곳이다. 풍산들이 내려다보이는 가일못 제방 위, 현충시설로 지정된 권오설 선생 기적비 앞에 서면 일제 강점기의 엄혹했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입구에 세워진 '항일구국열사 권오설 선생 기적비'. 민족독립을 위해 몸 바친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삶과 뜻을 기리기 위해 2001년 11월 11일 세워졌다.
▲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입구에 세워진 "항일구국열사 권오설 선생 기적비". 민족독립을 위해 몸 바친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삶과 뜻을 기리기 위해 2001년 11월 11일 세워졌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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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권오설(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 권오돈(족보명 오상, 1900~1928, 애족장(2005)), 권오운(1904~1927) 등 다수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경북 안동 가일마을.
▲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권오설(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 권오돈(족보명 오상, 1900~1928, 애족장(2005)), 권오운(1904~1927) 등 다수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경북 안동 가일마을.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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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묘지] "두개골이 왜 안 보이노... 두개골 찾아봐라"

권오설 선생이 묻힌 가곡 1-2동 공동묘지는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맨홀 공장 뒤쪽으로 돌아 산길을 오르니 '권오설 선생 묘소'라고 적힌 작은 표지석이 놓여 있다. 이곳에서 50m 정도 떨어진 위쪽에 아카시아와 밤나무가 묘소를 감싸고 있었다. 

'6·10만세운동의 주역/노동 민족 운동의 지도자/항일구국열사 권오설 선생의 묘'라고 적힌 묘비석만 없었다면, 다른 묘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권씨가 열두 살 때 잠시 잠들었다던 바로 그곳이었다.
 

 융희 황제(순종) 장례일(인산일)을 기해 일어난 6.10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한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묘소(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고인은 6.10만세운동 직전 체포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30년 4월 17일 고문후유증으로 순국했으며, 2008년 4월 14일 고인의 묘에서는 철관이 발견되었다. 현재 철관은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한 공동묘지에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묘가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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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일본 놈들이 아버님 시신을 훼손한 게 아닌가? 그 꿈을 잊은 적이 없어요. 하지만 형편이 힘들어 확인할 생각은 못했죠. 마침 2008년에 보훈청에서 이장·보수비용으로 150만원을 줬어요. 문중에서는 둘레석을 쌓은 뒤 상석을 놓자 했는데, 저는 그 속을 미치도록 들여다보고 싶었죠. 결국 생각한 게 어머니와의 합장이었어요."

 

포클레인으로 조심스레 파내려가다가 직사각형 모양의 녹슨 철관의 형체가 나오기 시작할 때 권씨는 공사를 중지시킨 뒤 학계에 알렸다. 인부들이 손으로 조심스럽게 파내려가 철관의 형체를 보존시키면서 유골을 수습할 때였다. 

"어? 그런데 왜, 두개골이 안 보이노? 빨리 두개골 찾아봐라."

그는 꿈속에 본 모습이 떠올라 또다시 섬뜩했다고 했다. 하지만 구석진 자리에서 뒤늦게 발견된 두개골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고 했다.
 
 2008년 4월 14일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부근 공동묘지에서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묘에서 철관이 발견되었다. 고인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지 78년만이다. 1930년 4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후 고인의 주검은 철관에 담겨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다. 일제의 방해와 감시로 봉분을 쓰는 것과 친지들의 문상이 금지된 채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발견 당시 철관은 부식이 심한 상태로 두껑은 내려앉은 상태였다. 철관은 현재 경북 안동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사진은 파묘하기 전 권오설 선생의 묘소 모습.
▲  합장을 위해 파묘하기 전 권오설 선생의 묘.
ⓒ 사진제공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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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4월 14일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부근 공동묘지에서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묘에서 철관이 발견되었다. 고인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지 78년만이다. 1930년 4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후 고인의 주검은 철관에 담겨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다. 일제의 방해와 감시로 봉분을 쓰는 것과 친지들의 문상이 금지된 채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발견 당시 철관은 부식이 심한 상태로 두껑은 내려앉은 상태였다. 철관은 현재 경북 안동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고인의 양자 권대용씨(사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파묘하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  권오설 선생의 양자 권대용씨(사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파묘하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 사진제공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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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4월 14일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부근 공동묘지에서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묘에서 철관이 발견되었다. 고인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지 78년만이다. 1930년 4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후 고인의 주검은 철관에 담겨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다. 일제의 방해와 감시로 봉분을 쓰는 것과 친지들의 문상이 금지된 채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발견 당시 철관은 부식이 심한 상태로 두껑은 내려앉은 상태였다. 철관은 현재 경북 안동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권오설 선생의 묘에서 붉게 녹슨 철관이 발견되고 있다.
ⓒ 사진제공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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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4월 14일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부근 공동묘지에서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묘에서 철관이 발견되었다. 고인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지 78년만이다. 1930년 4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후 고인의 주검은 철관에 담겨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다. 일제의 방해와 감시로 봉분을 쓰는 것과 친지들의 문상이 금지된 채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발견 당시 철관은 부식이 심한 상태로 두껑은 내려앉은 상태였다. 철관은 현재 경북 안동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일제가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을 철관에 넣어 매장한 현장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지 78년만에 확인되고 있다.
ⓒ 사진제공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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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뒤였죠. 원래 합장하려던 날인 4월 17일(권오설 선생의 기일). 비가 억수로 쏟아졌어요. 억장이 무너질 정도로 슬프면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철관을 보았을 때에는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틀 뒤에 창밖을 보며 폭우보다 더 많은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생가터] 양반유림 가문의 빈농... 까치구멍집

가일마을 입구 회화나무를 지나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오른쪽으로 병곡종택과 수곡고택의 담장을 따라 걸으면 남천고택 담장 안쪽에 권오설 선생 생가터가 있다. 해방 후에 불이 났고, 지금은 참깨 묘목이 자라고 있다. 작은 텃밭만 봐도 당시 권오설 선생의 가난을 짐작할 수 있다.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생가터. 권오설 선생 생가 흔적은 사라지고 밭이 되었다.
▲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생가터. 권오설 선생 생가 흔적은 사라지고 밭이 되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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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초가삼간이었죠. 초가집 용마루 양 옆에 구멍이 있어서 일명 까치구멍집이라고 불렀습니다."

권대용씨의 말이다. 권 선생의 부친 소암 권술조는 서당 훈장을 지내는 양반 유림이었는데, 빈농이었다. 권 선생은 부친의 한문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1907년에는 남명학교를 다니며 신학문과 한학을 익혔다. 1916년 대구 고등보통학교(경북고등학교 전신)에 입학했지만, 3학년 때 퇴학을 당했다. 친일교사 배척, 동화적 노예교육을 반대하며 동맹휴학을 주도했다는 이유였다.

"집안이 가난해서 학비 낼 돈도 없었지만, 요즘말로 하면 소위 '운동권'이었나 봅니다. 권술조 할배가 쓴 제문을 보면 이 때 당시를 묘사하며 '루에 오르던 자의 사다리를 뗐다'고 절망했습니다. 학교를 그만뒀지만, 일본인 교장도 부친의 재능을 아껴서 경주 부잣집에 가정교사를 하도록 배려해줬다고 하더라고요."(권대용)
 
큰사진보기 1926년 융희 황제(순종) 장례일(인산일)을 기해 일어난 6.10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한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권오설 선생의 양자 권대용씨가 고인의 아버지가 작성한 제문(축소판)을 보여주고 있다.
▲  1926년 융희 황제(순종) 장례일(인산일)을 기해 일어난 6.10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한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권오설 선생의 양자 권대용씨가 고인의 아버지가 작성한 제문(축소판)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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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설 선생은 그 뒤 상경해서 중앙보통학교와 경성부기학교 등을 다녔지만 중도에 그만뒀고, 지인이 자리를 알선해 전남도청에서 근무하다가 3·1운동을 맞았다. 권대용씨는 "그 때 부친이 광주 시위를 주도한 배후로 지목돼 체포된 뒤 6개월의 형을 살았다"고 말했다. 권 선생은 목포에서 복역했다.  

[원흥의숙] 100년 뒤에 들어선 한옥책방 '가일서가'

가일마을 입구 두 갈래 길에서 왼쪽 길로 올라가면 '노동서사'가 나온다. 1770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문중 위패를 모시던 제사 공간이었고 서당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1919년 11월, 고향 가일마을로 돌아온 권오설 선생은 이곳에 '원흥의숙'이라고 불리는 원흥학습강습소를 세워 마을 청소년을 교육했다. 

"많게는 학생들이 200명이 넘었다고 하더라고요. 부친은 교장 겸 교사였지요. 월급을 타면 필기구를 사라고 아이들에게 다 나눠줬답니다. 일직면에는 '일직서숙', 풍산에는 '풍산학술강습회' 등 분교를 열어 교육운동을 했지요. 목소리가 하도 카랑카랑해서 멀리 떨어진 산에서도 들렸다고 합니다."(권대용)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이 고향인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에서 원흥학술강습소를 운영했던 노동서사. 오른쪽 건물은 학생들의 숙소로 사용된 노동재사.
▲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이 고향인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에서 원흥학술강습소를 운영했던 노동서사. 오른쪽 건물은 학생들의 숙소로 사용된 노동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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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음식을 준비하고 숙식도 했던 노동서가 바로 옆 건물 '노동재사'에는 작은 한옥 서점이 들어서 있다. 이가람, 김현정 부부가 문중의 허락을 받아 차린 '가일서가'다. 책만 파는 게 아니라 노동서가 한쪽 방에서 글쓰기를 교육하고, 가일서가에서는 문화 프로그램도 진행하는 인문 사랑방이었다. 지난 2일에도 사진작가를 초대해 전시회를 열고 있었다.

"운명으로 받아들였죠. 1919년에 이곳에서 원흥의숙이 시작됐는데, 100년 뒤인 2019년에 가일서가를 열었으니까요.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일제의 불공정한 지배에 대해 깨우쳐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건물을 함부로 대할 수 없어요. 한번은 국회도서관에서 이곳을 소개해달라고 해서 '막난 권오설에 부치는 편지'라는 글을 썼는데, 선생님의 아드님(권대용)이 고맙다고 전화까지 주셨어요."(가일서가 김현정씨) 

[조선공산당] "왜놈들과 맞선 항거의 무기"

권오설 선생이 100여 년 전에 가일마을에서 시작한 건 교육운동만이 아니었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 펴낸 자료총서 '권오설2'에 따르면 1920년에는 가곡농민조합을 조직했다. 안동청년회 집행위원, 일직면금주회 회장,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 입회, 풍산청년회 결성 등 청년·농민·노동운동을 벌였다. 

그 뒤 풍산소작인회 대표 자격으로 서울로 간 권오설 선생은 1924년 신흥청년동맹과 한양청년연맹의 중앙집행위원이 됐다. 조선노동총동맹 상무위원을 거쳐 책임자로 올랐다. 서울에서는 인쇄직공조합을 조직하고 양말직공·고무직공·양화직공의 파업을 지도했다. 1925년 4월 17일에는 김재봉·김찬·조봉암·박헌영·김단야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창당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권오설,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권오설,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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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은 일제에 의해 지도자들이 대거 검거되면서 와해됐지만, 권오설 선생은 조직 재건을 위해 박헌영 다음으로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맡았다. 당시 그는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에서 들어오는 자금도 관리하고 있었다.   

"8·15 때 해방된 것은 친일파였지, 독립운동가는 아니었습니다. 반민특위가 뒤집어진 뒤 부친의 이름 앞에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었죠. 그래서 서훈도 늦게 받았어요. 하지만 부친이 활동할 때에는 남북이 갈리지도 않았죠. 당시 78%의 민중이 사회주의를 옹호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려면 많은 정보와 자금이 필요했고, 조직을 통해야만 가능했어요. 사회주의는 왜놈들과 맞선 항거의 무기였죠."(권대용) 

1926년 9월 1일 발표된 조선공산당 선언에도 "당면한 투쟁 목적은 일본제국주의의 압박에서 조선을 절대로 해방함에 있다"고 적혀있다. 당면 정치 요구로는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되 국가의 최고 및 일체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조직한 직접, 비밀, 보통, 평등의 선거로 성립한 입법부에 있을 일 ▶일본의 군대, 헌병 및 경찰을 조선에서 철수할 일 ▶무제한의 양심,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을 내걸었다. 권대용씨의 말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2편] "안동이 발칵...'철관' 내려올 때 까마귀 떼 바글바글" http://omn.kr/1tswl 

[관련기사] "중기관총으로 겁박... 좌-우익이 함께 만세 불렀다" http://omn.kr/1tp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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