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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탄과 경고, 다짐... 24번 박수 받은 문 대통령 5.18기념사

[현장] 제39주년 기념식 "독재자 후예 아니라면 5.18 다르게 볼 수 없다"... 황교안 대표에겐 야유

19.05.18 15:09l최종 업데이트 19.05.18 15:23l

 

 

황교안 저지하다 쓰러진 시민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도착하자 일부 시민들이 5?18 망언 의원 징계와 5?18특별법 개정안 처리 등 밀린 숙제를 해결하지 않고 '빈손'으로 재차 광주 방문을 강행한 것에 대해 항의하며 입장을 저지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쓰러진 시민(왼쪽 아래)이 고통을 호소하는 모습도 보인다.
▲ 황교안 저지하다 쓰러진 시민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도착하자 일부 시민들이 5·18 망언 의원 징계와 5·18특별법 개정안 처리 등 밀린 숙제를 해결하지 않고 '빈손'으로 재차 광주 방문을 강행한 것에 대해 항의하며 입장을 저지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쓰러진 시민(왼쪽 아래)이 고통을 호소하는 모습도 보인다. ⓒ 남소연
문 대통령 "독재자 후예 아니라면 5·18 다르게 볼 수 없을 것"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기념사를 하고 있다.
▲ 문 대통령 "독재자 후예 아니라면 5·18 다르게 볼 수 없을 것"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기념사를 하고 있다. ⓒ 남소연
5.18 기념식 참석한 김용장-허장환 5.18 당시 전두환 광주 방문 사실을 최근 밝힌 김용장 전 미군 정보부대 군사정보관과 허장환 전 보안사 특명부장이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입장하는 문재인 대통령을 바라보고 있다.
▲ 5.18 기념식 참석한 김용장-허장환 5.18 당시 전두환 광주 방문 사실을 최근 밝힌 김용장 전 미군 정보부대 군사정보관과 허장환 전 보안사 특명부장이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입장하는 문재인 대통령을 바라보고 있다. ⓒ 남소연
 
5.18민주화운동을 폄훼하고 모욕하는 일부 움직임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입장은 단호했다. "독재자의 후예가 아니라면 5·18을 다르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18일 오전 광주 5.18국립묘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내년이면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이어서 대통령이 그때 그 기념식에 참석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들이 많았다"고 전하면서 "하지만, 저는 올해 기념식에 꼭 참석하고 싶었다, 광주 시민들께 너무나 미안하고 너무나 부끄러웠고, 국민들께 호소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특히 문 대통령은 기념사 도중 감정이 북받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80년 5월 광주가 피 흘리고 죽어갈 때 광주와 함께하지 못했던 것이 그 시대를 살았던 시민의 한 사람으로 정말 미안하다, 그때 공권력이 광주에서 자행한 야만적인 폭력과 학살에 대하여 대통령으로서 국민을 대표하여 다시 한 번 깊이 사과드린다"는 대목에서였다.

대통령 향한 24번의 박수
 
5·18 당시 가두방송 담당했던 박영순 씨 위로하는 문재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당시 가두방송을 담당했던 박영순 씨의 손을 잡고 위로하고 있다.
▲ 5·18 당시 가두방송 담당했던 박영순 씨 위로하는 문재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당시 가두방송을 담당했던 박영순 씨의 손을 잡고 위로하고 있다.ⓒ 남소연
 
대통령이 목이 메여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자 기념식에 참석한 약 5000명의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그를 위로했다. 문 대통령이 여느 해 기념사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강한 어조로 개탄과 경고, 다짐을 이어가자 광주시민을 비롯한 참석자들은 24번의 박수로 화답했다.
 
문 대통령은 "아직도 5.18을 부정하고 모욕하는 망언들이, 거리낌 없이 큰 목소리로 외쳐지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부끄럽다"라고 개탄했다. 그리고 문 대통령은 기억을 환기시켰다.
 
"'광주사태'로 불리었던 5·18이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공식적으로 규정된 것은 1988년 노태우 정부 때였다. 김영삼 정부는 1995년 5·18을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했고, 1997년 5·18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했다."
 
문 대통령의 의도는 명확했다. 노태우·김영삼 정부를 계승했다는 자유한국당의 일부 인사들이 일부 극우 세력과 5.18을 폄훼하고 모욕하는 것에 대한 경고였다. 문 대통령은 "5.18의 진실은 보수·진보로 나뉠 수 없다, 광주가 지키고자 했던 가치가 바로 '자유'이고 '민주주의'였기 때문"이라며 "독재자의 후예가 아니라면 5·18을 다르게 볼 수 없다"고 경고했다.
 
5.18 희생자 묘역 찾은 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한 후 희생자 묘역을 둘러보고 있다.
▲ 5.18 희생자 묘역 찾은 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한 후 희생자 묘역을 둘러보고 있다. ⓒ 남소연
 
특히 문 대통령은 "학살의 책임자, 암매장과 성폭력 문제, 헬기 사격 등 밝혀내야 할 진실이 여전히 많다"라고 구체적으로 적시하면서 "(5.18의 진실을 밝히는 일이) 비극의 오월을 희망의 오월로 바꿔내는 일이며, 당연히 정치권도 동참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대통령은 한걸음 더 나아가 "지난해 3월,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핵심은 진상조사규명위원회를 설치하여 남겨진 진실을 낱낱이 밝히는 것"이라면서 "그러나 아직도 위원회가 출범조차 못하고 있다, 국회와 정치권이 더 큰 책임감을 가지고 노력해 주실 것을 촉구한다"고 정치권을 압박했다.
 
문 대통령은 "우리 정부는 국방부 자체 5·18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을 통해 계엄군의 헬기 사격과 성폭행과 추행, 성고문 등 여성 인권 침해행위를 확인하였고, 국방부 장관이 공식 사과 했다"면서 "정부는 특별법에 의한 진상조사 규명 위원회가 출범하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자료를 제공하고 적극 지원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한 황교안  문재인 대통령와 김정숙 여사,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등 여야 지도부가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다.
▲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한 황교안 문재인 대통령와 김정숙 여사,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등 여야 지도부가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다.ⓒ 남소연
 
문 대통령의 39주년 기념사는, 대통령의 5.18기념사를 빼거나 국민화합을 주장하며 5.18 진상규명을 슬며시 피해가던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와는 확연하게 비교되었다.
 
문 대통령은 "진실을 통한 화해만이 진정한 국민통합의 길임을 오늘의 광주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면서 "광주로부터 뿌려진 민주주의의 씨앗을 함께 가꾸고 키워내는 일은 행복한 일이 될 것이다, 우리의 오월이 해마다 빛나고 모든 국민에게 미래로 가는 힘이 되길 바란다"라고 기념사를 마무리했다.
 
문 대통령은 5.18기념식장에 입장할 때부터 기념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순간까지 시민들로부터 따뜻한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야당 대표로는 처음 5.18기념식에 참석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일정은 순탄치 않았다.
 
황교안 저지하다 쓰러진 시민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도착하자 일부 시민들이 5?18 망언 의원 징계와 5?18특별법 개정안 처리 등 밀린 숙제를 해결하지 않고 '빈손'으로 재차 광주 방문을 강행한 것에 대해 항의하며 입장을 저지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쓰러진 시민(왼쪽 아래)이 고통을 호소하는 모습도 보인다.
▲ 황교안 저지하다 쓰러진 시민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도착하자 일부 시민들이 5·18망언 의원 징계와 5·18특별법 개정안 처리 등 밀린 숙제를 해결하지 않고 '빈손'으로 재차 광주 방문을 강행한 것에 대해 항의하며 입장을 저지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쓰러진 시민(왼쪽 아래)이 고통을 호소하는 모습도 보인다. ⓒ 남소연
 
황 대표는 오전 9시 30분께 5.18국립묘지 '민주의 문'에 도착했다. 하지만 참석을 반대하는 대학생과 시민들의 항의와 취재진, 경찰이 뒤엉켜 검색대까지 가는 데만 15분이 넘게 걸렸다. 결국 황 대표는 좌측으로 우회해 '역사의 문'을 통해 기념식장에 입장할 수 있었다.
 
황 대표는 또 기념식이 끝난 후 분향하려고 했지만 사과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항의가 이어져 분향을 하지 못한 채 5.18기념식장을 빠져나가야 했다.

한편, 이날 기념식에는 김용장 전 미군 501 정보여단 군사정보관과 허장환 전 보안사 505 보안부대 특명부장이 나란히 참석해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지난 13일 특별기자회견을 통해 "5.18은 계획된 시나리오였다"며 "전두환의 광주 방문 목적은 사살 명령 때문" 등의 주요 증언을 내놨다.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하려고 이동하는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를 향해 '망언 의원' 징계 등을 요구하는 시민이 던진 의자가 날아들고 있다. 2019.5.18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하려고 이동하는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를 향해 '망언 의원' 징계 등을 요구하는 시민이 던진 의자가 날아들고 있다. 2019.5.18ⓒ 연합뉴스
"황교안이 전두환이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도착하자 일부 시민들이 5?18 망언 의원 징계와 5?18특별법 개정안 처리 등 밀린 숙제를 해결하지 않고 '빈손'으로 재차 광주 방문을 강행한 것에 대해 항의하며 "황교안이 전두환이다" 구호를 외치고 있다.
▲ "황교안이 전두환이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도착하자 일부 시민들이 5?18 망언 의원 징계와 5?18특별법 개정안 처리 등 밀린 숙제를 해결하지 않고 '빈손'으로 재차 광주 방문을 강행한 것에 대해 항의하며 "황교안이 전두환이다" 구호를 외치고 있다. ⓒ 남소연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입장 저지당하는 황교안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도착하자 일부 시민들이 5?18 망언 의원 징계와 5?18특별법 개정안 처리 등 밀린 숙제를 해결하지 않고 '빈손'으로 재차 광주 방문을 강행한 것에 대해 항의하며 입장을 저지하고 있다.
▲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입장 저지당하는 황교안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도착하자 일부 시민들이 5·18 망언 의원 징계와 5·18특별법 개정안 처리 등 밀린 숙제를 해결하지 않고 '빈손'으로 재차 광주 방문을 강행한 것에 대해 항의하며 입장을 저지하고 있다.ⓒ 남소연
저지에도 밀고들어오는 황교안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도착하자 일부 시민들이 5?18 망언 의원 징계와 5?18특별법 개정안 처리 등 밀린 숙제를 해결하지 않고 '빈손'으로 재차 광주 방문을 강행한 것에 대해 항의하며 입장을 저지하고 있다.
▲ 저지에도 밀고들어오는 황교안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도착하자 일부 시민들이 5.18 망언 의원 징계와 5.18특별법 개정안 처리 등 밀린 숙제를 해결하지 않고 '빈손'으로 재차 광주 방문을 강행한 것에 대해 항의하며 입장을 저지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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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3년만에 개성공단 기업인 첫 방북 승인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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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9/05/19 10:18
  • 수정일
    2019/05/19 10:18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국제기구 통해 800만달러 대북 지원...식량지원은 의견수렴 거쳐 결정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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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5.17  18: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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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민 통일부 대변인은 17일 오후 긴급 브리핑을 통해 개성공단 기업인들의 자산점검을 위한 방북을 승인하고 조기 방북을 위해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2016년 2월 10일 박근혜 정부의 전면 가동중단 결정으로 멈춰선 이래 개성공단 투자 기업인들이 처음으로 자산점검을 위한 방북을 할 수 있게 됐다.

정부는 17일 개성공단 투자 기업인들의 자산점검을 위한 방북신청을 승인하기로 하고 이들 기업인들의 조기 방북이 성사될 수 있도록 지원해 나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상민 통일부 대변인은 이날 오후 긴급 브리핑을 통해 "정부는 개성공단에 투자한 기업인들이 지난 4월 30일 신청한 자산 점검을 위한 방북을 ‘승인’하기로 하였다. 기업들의 방북이 조기에 성사되도록 지원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이번 방북 승인이 우리 국민의 재산보호 차원에서 이루어 진 것이라며, 개성공단 기업인들의 자산점검 방북이 원만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필요한 노력을 다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개성공단 전면 중단 이후 2016년 6월 8일 첫 공단 방문 신청부터  지난 3월 6일 8차 방북신청까지 불허되었으나 지난 4월 30일 9차 방북신청에 이르러서야 승인이 된 배경에 대해서는 "그간 기업들의 거듭되는 요청, 이미 8차례 요청이 있었고, 이번에 아홉 번째로 요청을 했었었고, 또 특별히 중단이 된 지 3년이 지났다는 그런 상황을 고려해서 국민의 재산권 보호차원에서 이번에 방북을 승인하기로 결정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지난 4월 30일 방북신청시 제출한 201명의 명단 중 국회의원 8명은 적절한 시점에 검토해 나가도록 하고 이번에는 직접 당사자가 되는 기업인 193명 전원이 먼저 방북을 해서 자산을 확인하고 오는 것으로 추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또 이같은 결정은 이날 오후 관계부처 회의를 통해서 결정되었으며, 기업인들의 방북시기와 기간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앞서, 청와대는 이날 오후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회 회의를 개최해 대북 인도적 지원과 개성공단 기업인 방북 등을 결정했다.

일부에서 거론하는 미국의 동의 여부에 대해서는 "미국과는 기업인의 자산점검 방북 추진, 취지나 목적, 성격 등 필요한 내용들을 공유해 왔고 미국도 우리 측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하면서 물자가 출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산점검을 위한 육안점검이 목적이기 때문에 미국의 동의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개성공단 재가동의 신호탄'이 아니냐는 일부의 관측에 대해서는 거듭 자산점검을 위한 방북 목적에 부합하게 추진하겠다며 말을 아꼈다.

개성공단기업비상대책위원회는 이날 공장점검을 위한 개성공단 방문 신청에 승인 통보를 한 것에 대해 '만시지탄이지만 크게 환영한다'는 환영 입장을 발표했다.

이어 "이번 방문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3년 이상 방치된 공장 및 기계 설비를 점검하고 보존대책을 세울 수 있도록 실질적인 점검이 가능한 방문이 되어야 한다"며 방문 일정 및 절차에 대해 정부와 긴밀히 협의할 것을 요청했다. 

한편, 정부는 이날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게 북한 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지속한다는 입장에 따라 먼저 세계식량계획(WFP)와 유엔아동기금에 북한 아동, 임산부 영양지원 및 모자보건 사업 등을 위해 800만달러를 공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다만 공여 결정이 2년전에 났고 영유아, 임산부와 관련된 부분들이기 때문에 시급성을 감안해서 남북교류협력추진협의회 등 필요한 절차를 밟아 조속히 추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앞으로 대북식량지원문제는 국민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더 밟아 국제기구를 통한 지원 또는 대북 직접지원 등 구체적인 지원계획을 검토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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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로 새총 쏘듯, 몸 날려 사냥하는 부채거미

조홍섭 2019. 05. 16
조회수 1059 추천수 1
 
거미줄 탄력으로 힘 축적, 우주선 26배 가속도로 먹이 덮쳐
 
a1.jpg» 부채거미가 한껏 당긴 거미줄을 앞 두 쌍의 발로 쥐고 고정 줄과 고정줄 여유분을 뒷발로 움켜쥔 모습. 뒷발을 놓으면 새총의 총알처럼 몸이 튀어나간다. 새러 한 제공.
 
사람이 새총이나 활을 이용해 힘을 증폭하듯이 부채거미가 거미줄을 새총처럼 이용해 사냥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캥거루나 개구리가 근육의 한계를 넘어 점프할 수 있는 것은 힘줄의 탄력을 이용해 모은 힘을 한꺼번에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 이외의 동물이 자신의 근육이 아닌 사물을 이용해 힘을 증폭하는 사례가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새러 한 미국 애크런대 박사과정생 등 이 대학 연구자들은 14일 미 국립학술원회보(PNAS)에 실린 논문에서 “부채거미의 일종(힙티오테스 카바투스)이 거미줄을 새총처럼 활용해 여러 차례 근육 수축으로 모은 힘으로 자신의 몸과 거미줄을 앞으로 쏘아 먹이를 포획한다”고 밝혔다.
 
이 거미는 부채 모양의 그물을 펼친 뒤 끄트머리에서 먹이가 그물에 걸리길 기다린다. 연구자들은 고속촬영으로 이 거미의 사냥 방법이 다른 거미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거미는 앞의 다리 두 쌍으로 포획용 그물을 쥐고 맨 뒷다리는 배에서 나온 고정그물을 쥐고 있다. 몸은 두 그물을 잇는 다리 구실을 한다(그림 참조).
 
a2.jpg» 부채거미의 사냥 행동 분석. A. 앞과 뒷다리로 각각 고정용과 포획용 거미줄을 움켜쥔 부채거미. 거미는 두 거미줄을 잇는 다리 구실을 한다. B. 꽁무니에서 나온 고정 거미줄을 뒷다리로 쥐고 있다. C. 사냥용 거미줄을 쥔 앞다리. D, E. 끈끈이가 달린 사이 그물과 힘을 지탱하는 고정그물로 이뤄진 부채거미의 거미줄 얼개. F. 몸을 ‘발사’한 뒤 가속도(푸른 선)와 속도 그래프. 새러 한 제공.
 
거미는 마치 활시위나 새총을 당기듯이 앞다리로 그물을 당겨 힘을 모은다. 이때 고정그물의 일부는 둘둘 감아 보관한다. 연구자들은 “이런 상태로 먹이가 걸리기까지 여러 시간을 기다린다”고 밝혔다.
 
먹이가 그물에 걸리면 활시위를 놓듯 뒷다리로 움켜쥔 고정 줄을 놓고, 그 탄력으로 몸이 앞으로 튀어나간다. 감아두었던 고정 줄이 다 풀리면 거미는 급정지하고, 그 반동으로 끈끈한 거미줄이 튀어나가 먹이를 감싼다.
 
연구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부채거미는 체중이 7㎎이지만 실제로는 145㎎에서 나오는 힘을 낸다”고 밝혔다. 거미가 거미줄을 당겨 축적한 탄력을 이용해 튀어나갈 때 가속도는 773㎨로 우주왕복선이 발사될 때 최대 가속도의 26배에 이르렀다.
 
거미는 이런 ‘거미 총’을 먹이에 따라 여러 번 발사하기도 했다. 연구자들은 “그물을 먼 거리에서 내던지는 것이 먹이로부터 상처를 입을 위험을 줄여 준다”고 밝혔다.
 
a3.jpg»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긴 거미줄을 쥔 부채거미 앞다리가 자연스럽게 굽어 있다. 여러 시간 이런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수수께끼다. 새러 한 제공.
 
실제로 연구실에서 그물 던지기를 하지 못하게 한 거미는 사냥에 전혀 성공하지 못했지만, 정상적인 거미는 72%의 사냥 성공률을 보였다. 연구자들은 “앞발을 구부린 상태에서 어떻게 팽팽한 거미줄을 장시간 붙들고 있으면서 지치지 않는지 밝히는 것은 앞으로의 연구과제”라고 밝혔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S. I. Han et al, External power amplification drives prey capture in a spider web, PNAS, www.pnas.org/cgi/doi/10.1073/pnas.1821419116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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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발포명령, 누가 내렸는지 모른단 말인가

[기획연재] 5.18과 미국 (2) 발포명령

5.18광주항쟁 39주기를 맞아 미국에 학살 책임을 묻는 2단계 진상규명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이에 기획연재 ‘5.18과 미국’을 통해 ‘광주의 진실’에 한발 다가서고자 한다. [편집자]

[기획연재] 5.18과 미국
(1) 전두환 신군부, 하나회 배후엔 미국이
http://www.minplus.or.kr/news/articleView.html?idxno=7289
(2) 5.18 발포명령, 누가 내렸는지 모른단 말인가
(3) 5.18 진상규명을 미문화원에서 외친 까닭

주한미군 정보요원 출신 김용장 씨가 5.18 최초 발포 명령자로 전두환 씨를 지목해 논란이 뜨겁다.

김용장 씨는 “1980년 5월 당시 전두환이 K57 비행장에 와서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이재우 505보안대장과 회의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간 이후, ‘발포와 사살행위’가 이뤄졌다”면서 “당시 전두환의 방문 목적은 사살 명령이었다”고 폭로했다.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광주 전남도청 앞 광장. 시민들을 향한 계엄군의 총구에서 일제히 불꽃이 일었다.

도청 앞에는 계엄군 11공수(최웅 준장) 61, 62, 63대대와 7공수(신우식 준장) 35대대가 대기중이었다.

갑작스러운 발포로 이날만 시민 54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500여명이 다쳤다.

이후 27일 새벽 계엄군이 도청을 유혈진압하고 광주 전역을 장악할 때까지 민간인 2800여명이 죽거나 실종됐다.

이처럼 발포도 있었고, 사망자도 생겼지만 ‘사살 명령’을 내린 자는 39년째 나타나지 않는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21일을 전후해 자위권을 발동됐을 뿐 발포 명령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주영복 당시 국방부 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정도영 보안사 보안처장 등이 자위권 발동을 결정했고 계엄군은 이를 발포 명령으로 받아들였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지만, 최초 발포 명령자는 밝혀내지 못했다.

한국군과 주한미군에 대한 군사통제권은 한미연합사령관인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있다.

누가 발포를 명령했는가? 아무도 하지 않았다고 하니 질문을 바꿔보자.

누구에게 발포 명령 권한이 있는가? 그 권한은 군사작전지휘권을 가진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있다. 이제 발포 명령자를 찾는 일이 한결 수월해 졌다.

발포 명령을 한 자는 3명으로 압축된다. ①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이 직접 했거나, ②주한미군사령관에게 광주로 파견된 계엄군 20사단에 대한 지휘권을 양도받은 자이거나(이 경우에도 발포전 주한미군사령관의 승인은 필요하다), ③권한 없는 자가 현장에서 우발적으로 명령한 경우다.

이중 ③일 가능성은 없다. 왜냐하면 군 지휘권자의 명령없이 부대를 이동시키고 민간인에게 발포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군사반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때는 12.12군사반란으로 계엄령이 선포된 상태. 계엄상태에서 또다른 반란이 일어날 리 만무하고 만약 일어났다 하더라도 사후에는 제압됐어야 한다. 그러나 39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엄군의 반란을 제압했다는 소식은 없다.

그렇다면 ①위컴 사령관이거나 ②자위권을 발동하고 20사단의 광주 투입 승인을 요청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발포 명령자다.

▲ 1980년 5월 16일, 존.A.위컴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소요사태 악화에 따라 질서유지를 위하여 20사단을 군중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자 한·미연합사령관은 요청전문을 접수했음을 확인한 후 “귀하의 요청을 승인한다(Your request is approved)”고 기록하고 있다.

전두환이 비무장지대를 관할하던 한미연합사령부 소속 20사단 1만7천여명에 대한 지휘권한을 어느 수준까지 양도받았는지에 따라 위컴 사령관에게만 책임이 있는지 아니면 전두환과 위컴의 공동 책임인지가 가려진다.

작전지휘권은 작전통제권, 전투 편성, 임무 부여, 임무 수행에 필요한 지시 권한으로 분류된다. 이중 전두환이 위컴으로부터 부여받을 수 있는 권한은 고작 ‘임무 수행에 필요한 지시 권한’ 정도다.

전두환은 과연 임무(시위 진압) 수행에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지시(발포 명령) 권한을 행사했을까? 이 경우에도 민간인에게 발포하는 행위는 작전통제권에 해당하는 사항임으로 주한미군사령관의 승인을 반드시 득해야 한다.

이러나저러나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은 발포 명령 책임을 면할 길은 없다. 반면 전두환은 위컴 사령관의 ‘민간인 사살’ 명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한 것일 뿐이라고 한다면 정상이 참작될 수 있다. 재판 중인 전두환 피고인이 법정에서 어떻게 진술할 지 지켜볼 일이다.

▲ 1985년 5월 23일부터 26일까지 삼민투위(三民鬪委.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위원회. 약칭 삼민투) 주도하에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서강대, 성균관대 등 5개 대학교 학생 73명이 연합으로 서울 미국문화원(현 그레벵뮤지엄 건물)을 기습 불법 점거, 농성을 벌였다.

1982년 3월 미국에 광주 학살의 책임을 물어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강원대학교 성조기 소각사건(1982년 4월), 대구 미 문화원 폭발사건(1983년 9월), 부산 미 문화원 투석사건(1985년 4월), 미대사관 방화 미수, 서울 미문화원 점거 사건(1985년 5월), 김세진 이재호 열사 분신(1986년 4월), 부산 미문화원 점거 사건(1986년 5월) 등 반미 투쟁에 불이 붙었다.

반미의 무풍지대였던 대한민국을 반미 열풍지대로 바꿔놓은 5.18광주. 그러나 39년이 지난 지금까지 ‘누가 쏘았는지?’, ‘왜 쏘았는지?’조차 밝히지 못한 현실은 군사작전통제권이 여전히 미군의 손에 있는 것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강호석 기자  sonkang1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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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전 장관 “천안함 첫 보고는 좌초, 이후 어뢰로”

[항소심] “MB에도 보고, 어뢰피격 나도 미심쩍어…
 
미디어오늘  | 등록:2019-05-17 08:52:48 | 최종:2019-05-17 09:02:1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김태영 전 장관 “천안함 첫 보고는 좌초, 이후 어뢰로”
[항소심] “MB에도 보고, 어뢰피격 나도 미심쩍어…최원일 함장 울면서 어뢰라 확신해, 판단수정”
(미디어오늘 / 조현호 기자 / 2019-05-16)


김태영 전 국방부장관이 천안함 침몰사건 직후 처음엔 자신도 어뢰피격이라는 주장을 미심쩍어 했고, 최초 보고는 좌초였고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도 보고했다고 증언했다. 김 전 장관은 최원일 천안함장을 만나 물었더니 울면서 어뢰피격이라고 해 그 때부터 어뢰라고 확인(판단)했다고 밝혔다. 처음엔 북한 공격이라고 생각지 않았다고 했다.

김 전 장관은 16일 오후 서울고법 형사5부(재판장 김형두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신상철 전 민군합동조사위원의 천안함 관련 명예훼손 사건 항소심 공판에 출석해 이같이 최초 증언했다.

김 전 장관은 “해군이 정확한 원인을 몰라, 저한테 애매하게 보고됐다. (좌초라고) 대통령께도 말씀드려서 ‘이거를 북한의 행동이라고 어떻게 확인할 수도 없는 것 아닙니까’(했더니 이명박 전 대통령이) ‘정확하게 처음부터 객관적으로 조사하라’고 말씀 주셨고, 그래서 조사했다”고 설명했다.

김 전 장관은 “그것을(어뢰라는 것을) 저도 미심쩍어 함장을 만나 물은 적도 있다. 그랬더니 함장이 막 울면서 ‘자기가 볼 때 분명한 어뢰 피격’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어뢰라고) 확인했지만, 모든 가능성 열어놓고 했다”고 답했다. 그는 처음부터 북한 공격을 정해놓고 조사한 건 전혀 아니라고 설명했다.

구체적 보고내용을 묻자 김 전 장관은 “깜깜한 밤중에 일어난 일을 어떻게 자세히 보고 했겠느냐”며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김 전 장관이 최초 좌초로 보고 받은 사실을 직접 언급한 건 처음이다. 합조단 보고서에 의하면 김광보 중위(포술장)가 21시28분 2함대 상황실에 좌초라고 휴대전화로 보고했다. 이 보고가 대통령까지 올라갔다는 간접증언(청와대 행정관 저서 등)만 있었고 장관이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고 논의한 사실은 처음 확인됐다.

다만 김 전 장관은 이후 북한 어뢰 피격으로 민군 합동조사단 결론이 났다며 “그 주변에 좌초시킬 만한 해저구조물이 없다”고도 설명했다.

이날 재판에서 TOD 영상이 다 공개됐는지도 쟁점이 됐다. 김 전 장관이 사고다음날인 2010년 3월27일 백령도에서 망원경으로 해상을 보는 사진에 등장하는 작전상황도 질문이 이어졌다. 작전상황도에 표시된 6곳이 TOD 영상을 촬영한 곳이 아니냐는 변호인 신문에 김 전 장관은 “해안에 국방예산이 충분치 않아 전부 다 배치되지는 않는다. 여기(백령도)는 어떤지 모른다”고 했다. 

천안함 반파 순간 영상이 있는데 비공개한 것 아니냐고 묻자 김 전 장관은 “그게 없다. (TOD 초병이) 지켜보고 있지 않는한 모른다. 그래서 폭발순간 자체는 영상에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명박 ‘내가 배만들어봐서 아는데…’ 발언 어떻게 나왔나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10년 4월1일 “내가 배 만들어봐 아는데.. 북 개입 증거 없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점검하고 있지만 북한이 개입됐다고 볼 만한 증거는 아직 없다”고 발언했다는 한겨레신문(4월2일자) 보도의 진위도 관심을 받았다.

김 전 장관은 “(이 전 대통령 발언이) 기억은 안 나지만, (그때까지) 북한 개입증거를 밝히지 못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이 전 대통령이 그런 판단을 한 근거를 묻자 김 전 장관은 “(이 전 대통령이) 여러 사람 얘기 들었다”며 “열흘동안 그럴 가능성 있다고 얘기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 김태영 전 국방부 장관이 지난 2010년 11월29일 국회예결위 전체회의에서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답변이 어뢰로 기운다’ VIP메모의 진실

김 전 장관이 VIP 메모를 보는 장면이 촬영된 노컷뉴스 사진의 진위도 쟁점이었다. 메모엔 “답변이 ‘어뢰’쪽으로 기우는 것 같은.. (기자들도 그런식으로 기사쓰고)..”라고 적혀 있었다. 김 전 장관은 “내가 어뢰일 것 같다고 얘기한 것 같다. 정확치는 않다. 대통령은 북한 어뢰로 고정하는 것으로 나갈까 염려해서 (메모가) 나간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고 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북한 소행’으로 보고하거나 주장하면서 설득했느냐는 신문에 김 전 장관은 ”20일 발표할 때까지 (분석을 통해) 밝혀진 것이지, 제가 주장하고 설득해서 만들었다는 건 극히 잘못된 생각“이라고 했다.

김 전 장관은 천안함 함수가 반파 이후 즉시 가라앉지 않고 16시간22분간 떠 있었다는 사실을 보고받아 알고 있었느냐는 신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떠 있는 사실을 발표하지 않은 이유를 두고 김 전 장관은 “기억을 못하겠다”면서도 “일부러 발표 안했다는 주장은 언어도단이다. 배가 뒤집혔는지 말 못할 이유가 뭐가 있냐”고 말했다.

러시아 조사단 보고서 내용이 조작?

김 전 장관은 러시아 조사단이 ‘천안함 침몰을 북한 소행으로 단정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 걸 인정하지 않았다. 김 전 장관은 ”적국이라 기술적으로 너무많이 오픈하는 것은 그렇지만 정확히 설명해줬고, 돌아가서 조사단이나 러시아측이 아무런 행동을 안했다“며 ”그런데 미국 누구를 통해서 그런 말이 나왔다. 나는 조작이 아닌가 싶다. 러시아 조사단이 조사한 것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안수명 박사(전 안테크 대표)가 미 해군에게 정보소송으로 입수한 토마스 에클스의 이메일에서 러시아조사단 보고서 내용이 2014년 공개됐다. 그런데도 김 전 장관은 “이 자체가 만들어진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며 “러시아가 발표하기를 희망했는데, 발표한적 없다. 조작돼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엔 안보리 결의문에서 북한이라는 주체가 빠진 채 발표된 이유를 두고 김 전 장관은 “중국이 강력하게 반대했고, 참여연대 등 천안함 조작을 생각하는 많은 분들이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며 “우리 정부가 바르게 하는 것을 모함하는 세력 때문에 저런 꼴 났다”고 비난했다.

중국에 국제조사단 합류 요청을 안한 이유에 김 전 장관은 “참여요청을 하지 않았다”며 “중국은 (북한을) 감쌌기에 정확한 조사가 안됐을 것”이라고 했다. 북한의 공동조사 제안에 응하지 않은 이유에 김 전 장관은 “북한이 공동조사 했으면 보나마나 절대 아니라고 했을 것”이라며 “친북 분들이 덩달아 난리칠 것이라 북한 공동조사를 수용하기 곤란했으리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스웨덴 조사팀장 에그니 위드홀름이 정부가 발간한 조사결과보고서 서명란에 ‘한국합동조사단에 조력한 자신들이 관여한 부분에만 동의한다’고 쓴 것에 김 전 장관은 “스웨덴은 소수가 왔기에 자신들이 관여한 부분은 동의했고, 조사 안한 부분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전체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피고인 처벌을 원하느냐는 재판장 질의에 김 전 장관은 “그렇다”며 “저는 개인적 감정은 없지만, 정부가 민군합동으로 외국인을 지원받아 조사해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조사했는데도 비과학적, 소설적 상상력을 발휘해 군 지휘자를 비방한 것에 분노한다”고 주장했다. 김 전 장관은 “개인적으로는 그럴(의혹제기할) 수 있다고 보지만, 정부가 바르게 하려는 노력을 비난하는 행위는 국론을 분열시키기에 심각하게 받아들여 철저히 처벌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지난 2010년 3월27일 오전 서해상에서 전날 발생한 해군 초계함 천안함 침몰사건의 대책 논의를 위해 안보관계장관회의를 열고 있다. 김태영(오른쪽) 장관도 보인다. 사진=연합뉴스

출처: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48459&sc_code=&page=&total=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news/mainView.php?uid=4772&table=byple_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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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정부 2년, '다원성' 없고 '정파'만 강해졌다"

[윤여준-강원택 대담 ①] 문재인 정부 2년 평가
2019.05.17 09:09:23
 

 

 

 

"해질녘 산길에 접어든 형국".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이 3년차에 접어든 문재인 정부를 이렇게 묘사했다. 

3년차 임기에 접어든 문재인 정부가 6개월 뒤 반환점을 돈다. 적폐청산이 요란한 가운데에도 제도적 개혁은 그닥 성과를 보지 못했다. 소득주도성장은 사실상 간판을 내렸고, 북미 협상이 교착 국면에 빠져들어 남북 관계도 발이 묶였다. 인사 실패 논란이 반복되며 도덕성에도 금이 갔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6월, 프레시안 좌담에서 '촛불의 절대화'를 경계하며 통합을 통한 제도적 개혁을 제언했던 윤 전 장관을 다시 만나 지난 2년을 돌아보고 남은 3년을 내다봤다. 언론 칼럼 등으로 현실 정치에 조언을 아끼지 않는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대담에 함께 했다. 윤 전 장관과 강 교수의 대담을 2회로 나누어 싣는다. 편집자.


"양극화된 정치…협치의 공간을 스스로 좁혔다"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다짐했던,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최대한 나누겠다"고 약속했던, "야당은 국정운영의 동반자"라며 손을 내밀었던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는 옛말이 됐다. 

두 사람은 우선 개헌 실패에 큰 실망감을 표했다. 강원택 교수는 "국가적 규범인 헌법을 바꾸려한다면 매우 포용력 있고 세심하게 추진했어야 하는데, 마치 대선 공약 사항이니까 추진할 뿐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줬다"며 "개헌안을 거부한 국회에 책임을 넘기며 '버리는 카드'처럼 써버렸다"고 아쉬워했다. 

윤 전 장관도 "한국사회의 가장 큰 적폐는 대통령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인데, 만악의 근원을 고치지 못하고 완전히 뒷전으로 미뤘다"고 비판했다. 

권력 운영에 대한 평가도 신랄했다. 윤 전 장관은 "권력의 정당성을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은 도덕성과 효율성인데,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간판 정책, 즉 효율성은 너무 일찍 무너졌고 장관 인사청문회를 통해서 국민들은 진보의 도덕성의 실체를 봤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적폐 청산은 최고 책임자 선에서 신속하게 끝내고 국민들에게는 새 시대를 열자고 호소했어야 하는데, 온 사회가 2년 동안 인적청산에만 매달렸으니 피로도가 어떻게 안 생길 수가 있나"고 했다. 윤 전 장관은 "이 정부 사람들이 도덕적 우월감, 도덕과 윤리를 독점한 사람들처럼 행세하는 게 위험해 보인다"고도 했다. 

강 교수도 "이념적으로는 매우 강한 진보성을 가진 사람들로 똘똘 뭉쳐갔다"며 "적폐란 이름으로 특정인에 대한 공격에 집중하다 보니 격한 반발이 반대급부로 나타나 양극화된 정치로 이어졌다. 야당과 협치를 할 수 있는 공간을 스스로 좁혔다"고 비판했다.

윤 전 장관은 또 남북관계를 풀어가는 방향성을 긍정하면서도 남남갈등을 너무 쉽게 간과한 점을 지적했다. 그는 "DJ가 남북 관계를 살얼음 밟듯이 하면서 남남갈등 막아보려 얼마나 신경을 썼나. 그런 과거를 다 겪어보고도 문재인 정부는 남남갈등을 별로 걱정하지 않는 것 같다"면서 "상황을 급진전시켜서 저항과 갈등의 여지없이 관철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아닐까 추측한다"고 말했다. 

윤 전 장관은 또 최근 이슈로 떠오른 대북 식량지원 문제와 관련해 "밀가루와 옥수수는 장기적 보관이 어려운 반면, 장기적 보관이 가능한 쌀은 군량미로 전용될 수 있다는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 있다"며 "면밀하게 검토해 추진하기를 바란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강원택 교수는 한일 관계 악화로 이어지고 있는 역사 문제의 정치화를 경계했다. 그는 "(3.1 운동 100주년 기념사에서 밝힌) 친일 청산은 중요한 과제이지만, 정치가 아니라 민간과 학계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며 "지금이 반민특위 시절이라면 정치가 개입해 처단하는 게 맞지만, 몇 십 년이 흐른 지금 대통령이 개입해서 정치화시키는 것은 실용적인 해법이 아니다"라고 했다. 

다음은 지난 15일 박인규 프레시안 협동조합 이사장이 진행한 윤여준 전 장관과 강원택 교수의 대담 전문.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좌)과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요즘 문 대통령 발언 들으면 IMF 때 생각이 나" 

프레시안 : 문재인 정부 출범 때 기대감이 컸기 때문인지 2년을 보낸 지금, 실망도 크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1987년 이후와 2016년 이후의 정부가 비교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87 항쟁 이후 정권교체는 되지 않았지만, 북방정책이 추진되고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소득분배가 달라지고 4당 체제에 따른 새로운 정치 기운이 생겨났다. 2016년 촛불 이후는 정권까지 바뀌었는데 이른바 촛불 정부가 시대적 과제에 잘 부응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정치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한마디로 더불어민주당은 실망스럽고 자유한국당은 절망스럽다. 한국당을 비판하기에 앞서 우선 주도권을 쥔 세력에 대한 책임을 따져보고자 한다. 문재인 정부 2년은 왜 국민들 소망에 부응하지 못한 시간이 되었는지 여쭙고 싶다.

윤여준 : 대통령이 돼서 청와대 들어간 지 3개월 지나면 현실로부터 유리된다. 사람의 좋고 나쁨이 아니라 매커니즘 때문에 그렇게 된다. 대통령은 공식라인에서 올라오는 보고로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 보고는 관료들이 올리는데, 관료들은 대개 자기 책임을 모면하려는 심리가 앞선다. 책임 모면성, 변명성 보고가 올라가기 마련이다 보니, 대통령이 현실인식을 제대로 하기 어려운 것이다.  

대통령은 어떤 방법으로든 이를 극복해야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주말에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물어보더라. 그걸 민심 파악으로 여기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래서 내가 '그걸 민심이라고 생각하시면 착각입니다. 대통령이 물어보는데 누가 잘못됐다고 하겠습니까'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다. YS 집권 초기에는 친한 친구들을 초대해서 세상 얘기를 듣기도 했는데, 그게 소문이 나버렸다. 대통령 참모들은 외부 사람들이 대통령 귀를 잡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권청탁이 생긴다는 보고가 올라가니 YS가 깜짝 놀라서 중단하기도 했다. YS도 그랬듯이, 대통령이 현실에서 멀어지지 않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내가 보기엔 딱 석 달 걸린다.  

주변에서 '청와대 참모들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느냐'는 질문을 받고 정직성이라고 답한 일이 있다. 능력은 대부분 엇비슷하고 모자라면 보완하면 되지만 정직성은 보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대통령에게 보고해야 하는데, 청와대 수석은 대부분 부처 출신이거나 다음 자리로 장관을 염두에 두는 경우가 상례라서 부처 입장을 고려하게 된다. YS 때 (공보수석을 했던) 나와 박세일 수석은 고려해야 할 부처가 없었기 때문에 대통령에게 굉장히 많은 얘기를 했다. YS는 그런 얘기들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고 다 듣는 장점이 있던 분인데도 현실에서 멀어졌다. YS는 집권 말년에 매주 수석회의를 할 때마다 한국경제가 연착륙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러다가 어느 주 회의에서 한국경제가 급격히 나빠지고 있다고 보고를 하더라. 그 뒤가 어떻게 됐나.  

YS를 모시며 봤던 사람으로서, 요즘 문재인 대통령 발언을 들을 때마다 IMF 때 생각이 난다. 대통령이 경제를 꿰뚫어 알기는 어렵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문 대통령도 경제 원리를 잘 아는 분이 아니다보니 전적으로 보고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경제 상황이 그때 같지는 않다. 전문가들도 그때처럼 단기적 유동성 위기는 없기 때문에 그 정도 위기는 아닐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위기가 아니더라도 위기를 향해 빠른 속도로 가라앉고 있다고들 말한다. 문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지는 이유도 먹고사는 게 어려워진 부분이 제일 크다.  
 

ⓒ프레시안(최형락)


강원택 : 촛불 집회에 진보적인 사람들만은 나온 것은 아니었다. 보수도 있고 중도적인 분들도 있었다. 이들이 집합적으로 거대한 정치적 전환을 요구했기 때문에 촛불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촉발된 계기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실정과 스캔들이었지만, 87년 체제의 구조적 문제와 사회경제적 모순을 극복해보자는 것이 근본적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취임사를 들으며 새로운 시대적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했다. 야당도 만날 것이고, 지지하지 않은 사람도 포용할 것이고, 퇴근하고 시장에서 시민들도 만나겠다고 했다. 

그러나 취임사와 달리 실제에선 매우 정파적이라는 느낌이 강해졌다. 이념적으로는 매우 강한 진보성을 가진 사람들로 똘똘 뭉쳐갔다. 인사를 통해 동질성이 매우 강한 집단이 청와대와 주요 보직을 장악하다보니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들어가기 어려워졌다. 대통령이 현실에서 멀어진 이유 중에는 생각이 다르지 않은 사람들만 모여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논쟁이 일어날 수 없는 구조다. 다원성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사회가 위험한 것처럼 통치기구 역시 다원성이 보장되고 논쟁도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다양한 정보가 대통령에게 전달될 수 있는데, 근원적으로 생각의 차이가 없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게 문제점이라고 본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바랐던 개혁, 즉 시스템 전환을 요구한 개혁과 멀어졌다. 개헌을 통해 제왕적 대통령제를 고치고, 법원에 문제가 있다면 사법 시스템을 바로잡는 것이 촛불이 원한 개혁이다. 검찰 개혁도 처음부터 중요한 의제를 제시해서 추진됐다면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오직 상대편과 사람에 대한 처벌 위주로 가버렸다. 적폐란 이름으로 특정인에 대한 공격에 집중하다 보니 시스템 개혁은 실종된 것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됐지만, 사법부가 바뀔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사람에 대한 처벌 위주로 가다보니 격한 반발이 반대급부로 나타나 양극화된 정치로 이어졌다. 야당과 협치를 할 수 있는 공간을 스스로 좁혔다고 본다.

"버리는 카드로 써버린 개헌…정치개혁 고민 없어" 

정치학자로서 무엇보다 헌법 개정 문제를 다루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 개헌, 즉 87년 체제 개정은 시대적 과제였다. 나는 '8인 정치회담'(※87년 6.29 선언 뒤 여야 정치인 4명 씩 참여해 진행된 개헌 협상 회담. 편집자)에 참여했던 분들 인터뷰를 많이 했다. 그분들에게 '8인 정치회담이 한 달 만에 모든 그림을 다 그리고 개헌 타결을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될 수 있었냐'고 물었더니 정답이 이미 있었다고 하더라. 그 정답이라는 건 유신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87년에는 주요 정치행위자들은 유신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을 민주화로 생각했다는 얘기다. 그렇게 따져보면 지금 우리의 헌법은 1962년 헌법체제인 것이다. 62년 헌법은 군인들이 권력을 잡고 만든 것이어서 태생부터 가장 강력한 대통령제다. 

이것을 바꾸는 일이 대단히 중요했다. 문 대통령이 국가적 규범인 헌법을 바꾸려한다면 매우 포용력 있고 세심하게 추진했어야 하는데, 마치 대선 공약 사항이니까 추진할 뿐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줬다. 개헌안을 거부한 국회에 책임을 넘기며 버리는 카드처럼 써버렸다. 촛불 같은 사건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겠나. 그런데도 매우 중요한 집권 초기에, 진정성과 무게중심을 두면서 개헌을 추진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이 정부에 대한 기대감은 그때부터 꺾였다. 경제는 누가 집권해도 하루아침에 좋아지기 어려운 것 아닌가. 결국 문 대통령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정치적 개혁인데 그에 대한 고민이 보이지 않았다. 

윤여준 : 87년 이후 우리 국민들이 간절히 기대한 건 민주주의의 공고화였다. 그 후 등장한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 집권기에는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공고화되는 과정으로 갔다. 그러다가 이명박, 박근혜 정부 들어와서 갑자기 반민주로 회귀한 결과로 23회에 걸쳐 연인원 1700만 명이 참여한 촛불이 나온 것이다. 

내일신문이 현대경제연구소에 의뢰해서 촛불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왜 참여했냐고 여론조사를 한 게 있다. 가장 많은 대답이 '민주적 가치가 훼손된 데 대한 분노'라고 답했다. 결국 촛불이 요구한 것, 촛불정신이라는 것 역시 민주주의 공고화다. 이 정권은 촛불의 결과로 등장한 것이고 스스로 '촛불 정권', '광화문 대통령'이라고 했으면 무엇보다도 민주주의 공고화를 지상과제로 삼았어야 했다. 취임사에는 그런 의지가 있었지만 현실에선 반대로 갔다.

한국사회의 가장 큰 적폐는 대통령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이다. 만악의 근원이라는 이것을 고치치지 못하고 완전히 뒷전으로 미뤘다. 지금 어떤가. 여전한 권력집중에 대한 비판을 받지 않나. 제1야당에서 민주화 때 외치던 '독재 타도' 구호가 등장한 것을 어떻게 봐야 하나. 한국당이 말하는 '독재 타도'가 합리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용어를 구호로 내걸었다는 건 그런 분위기가 있다는 뜻이다. 정부를 지지했던 민심이 빠르게 이탈하고, 흩어진 보수 세력이 뭉치는 것이 눈에 보이니까 마땅히 성찰하고 참회해야 할 세력이 목청을 높이는 일이 벌어졌다. 한국당이 옳다는 말이 아니다. 그 원인제공을 어디에서 했느냐는 얘기다.

"인적 청산에 매달린 '적폐청산'…악순환은 반복된다" 

프레시안 : 문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진 데에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컸다고 했는데, 민생경제 정책을 돌아보면 어떤가. 

윤여준 : 권력의 정당성을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은 도덕성과 효율성이다. 둘 다 튼튼하다면 이상적이지만, 하나가 부족해도 다른 하나가 튼튼하면 보완이 가능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18년이 대표적이다. 쿠데타로 집권했으니 도덕성이 치명적이었지만, 고도성장을 통한 산업화라는 효율성으로 버틴 것이다.  

문재인 정부를 보자. 효율성은 초장에 망가졌다.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간판 정책, 즉 효율성이 너무 일찍 무너졌다. 국민들에게 소득주도성장은 실패한 정책으로 규정이 돼 있다. 이렇게 무능할 줄 몰랐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대통령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이미 끝난 얘기다. 효율성은 본전도 찾기 어려워졌다. 

그러면 도덕성으로 버텨야 하는데, 장관 인사청문회를 통해서 국민들은 진보의 도덕성의 실체를 봤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본질적으로 뭐가 다른가. 그토록 보수의 도덕성을 공격하던 사람들도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도록 한 것은 사실 아닌가. 대통령은 인사청문보고서가 채택되든 말든 임명을 강행했다. 심지어 과거 정권과 달리 헌법재판관까지 그렇게 했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청문 보고서를 채택하지 않은 채 임명된 장관이 좋은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고까지 말했다.  

문 대통령은 그런 행위들이 정권의 도덕성에 얼마나 심대한 타격을 주는지 알아야 한다. 그나마 남북관계가 교착국면 속에도 희망적이기 때문에 지지도가 유지되는 것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 국정지지도는 대통령 개인에 대한 호감도다. 엄밀하게 따지면 국정지지도가 아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고 겸손해 보이는 문 대통령의 이미지에 대한 호감도로 40%대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2년밖에 안됐지만, 해질녘 산길에 접어든 형국이다.

프레시안 : 전직 대통령 두 명과 전직 대법원장이 구속된 상황은 자신들의 허물이 초래한 일이지만 초유의 일이기도 하다. 문 대통령은 전 정부에서 시작한 수사라고 항변하면서도 적폐청산은 여전한 시대적 과제로 여기는 것 같다. 이 적폐청산 논란을 어떻게 봐야 할까. 

윤여준 : 적폐라는 게 이명박, 박근혜 정부 9년 동안만 쌓인 것이 아니다. 정부수립 이후 한국사회 폐단이 뭉쳐있는 것이다. 최고 책임자에 대한 응징 없이 새 시대로 갈 수 없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인정한다. 그렇다면 최고 책임자 선에서 신속하게 끝냈어야 한다. 나머지는 지시에 의해 한 것이니 불문에 붙였어야 한다. 그렇게 국민들에게는 새 시대를 열자고 호소하고 공무원들에게는 동기부여를 했어야 했다. 그런데 일반 부처 실무자들까지 1년을 시달렸다고 한다. 관료들 반발 심리가 생기지 않겠나. 온 사회가 2년 동안 인적청산에만 매달렸으니 피로도가 어떻게 안 생길 수가 있나. 

강원택 : 도덕적 규범과 정치적 현실에는 괴리가 있다. 개인의 문제와 함께 관행과 제도, 구조의 문제도 있다. 적폐 사건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적 개선인데, 인적청산, 사람의 문제에만 집중해버렸다. 예컨대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정농단의 여러 실마리를 제공했기 때문에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경우는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다스 실소유주 문제 등 국정과 관련되지 않은 아닌 개인적 사건 위주다.  

이에 대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데 대한 보복 아니냐고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정말 우려되는 것은 권력이 바뀌면 또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만큼 피해자인 사람이 또 어디 있나. 그러나 나는 보복하지 않겠다'고 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된다. 악순환을 한 번 끊어줘야 하는데, 이 정부의 도덕성에 대한 강조가 현실정치를 고려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과해 보이는 측면이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조국 수석은 촛불의 상징이기 때문에 못 바꾼다?" 

윤여준 : 이 정부 사람들이 도덕적 우월감, 도덕과 윤리를 독점한 사람들처럼 행세하는 게 위험해 보인다. 정의는 자로 줄긋듯이 규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쓰는 개념인데, 마치 절대적 정의감에 빠져서 모든 것을 재단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다. 균형을 잡아주지 못하면 나중에 대가가 따를 수 있다.  

프레시안 : 강 교수는 청와대에 생각이 같은 사람들 중심으로 뭉친 것이 다양한 현실 인식을 어렵게 한 원인으로 지목했는데, 인사 분야에서 무슨 이유로 포용력을 보이지 못했다고 보나. 

강원택 : YS나 DJ는 핵심적인 자리를 제외하고는 상당히 열어 놨다. 핵심인사들은 오히려 당으로 많이 갔다. 지금은 청와대나 어떤 결정을 내리는 자리에 권력 핵심들이 많이 있다. 이것은 권력을 잡았을 때 무언가를 바꿔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5년은 생각보다 짧다. 3년차 들어가면 힘이 빠지고 마지막 1년은 레임덕을 피하기 어렵다. 

차라리 YS 때처럼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YS는 하나회 척결 등 군부청산 프로그램을 인기 있고 신뢰가 높을 때 상징 정책으로 추진했다. 집권에 대한 매우 치밀한 준비가 돼 있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 문재인 정부는 촛불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촛불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내리지는 못했다. 촛불은 넓고 다양한 생각들이 반영된 건데, 특정 사람들이 독점하다보니 국무회의조차 중요성에서 2차적 지위로 밀려났다.

윤여준 : 김태우 비서관 사건이 났을 때 조국 민정수석 문책 논란이 있었다. 그때 내가 방송에서 읍참마속, 즉 기강 문제가 있으니 인사 조치를 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민주당 중진 의원이 "조국은 촛불의 상징이기 때문에 못 바꾼다"고 했다. 깜짝 놀랐다. 촛불은 민주적 가치에 대한 분노다. 민주적 가치는 추상적이다. 광장에 나온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설계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러면 촛불에 의해 탄생한 정권은 자기들이 생각하는 촛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촛불의 명령인지를 제시하고 동의를 얻었어야 한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자기들이 곧 촛불 행세를 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뒤 발표한 국정운영 5개년 계획 총론에 국민 주권 얘기가 여러 번 나왔다. 대의제도를 부정한다고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통치 시스템인 대의제를 우회하거나 뛰어넘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니, 국민에게 물어봐서 하겠다는 건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남북관계 급진전이라는 기차가 앞에서 끌고,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기차가 뒤에서 밀어 속도를 붙이고 변화의 폭을 키우면, 국민의 80% 이상이 지지하는 에너지가 생겨서 무언가를 확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했다.

그러나 소득주도성장이 일찍이 망가진 탓에 상당한 동력을 잃었다. 남북 관계도 급진전했지만, 결국 북미 관계 문제로 접어들면서 교착, 숨고르기 국면이 됐다. DJ가 남북 관계를 살얼음 밟듯이 하면서 남남갈등 막아보려 얼마나 신경을 썼나. 그런 과거를 다 겪어보고도 문재인 정부는 남남갈등을 별로 걱정하지 않는 것 같다. 남남갈등이 필연적으로 올 것을 알면서도 왜 대비를 안 하고 걱정을 안 했을까 생각해보면, 상황을 급진전시켜서 저항과 갈등의 여지없이 관철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아닐까 추측해본다.

강원택 : 대일 관계를 보면서도 왜 저렇게 갈까 의아하다. 3.1운동 100주년 대통령 연설에 기대를 많이 했었다. 식민지 국가였던 나라가 100년 뒤 경제적으로 부유한 국가가 됐다는 자긍심과 함께 아시아 평화 차원에서 일본과의 미래지향적 관계에 대한 메시지를 기대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친일 청산을 말했다. 친일 청산은 중요한 과제이지만, 정치가 아니라 민간과 학계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지금이 반민특위 시절이라면 정치가 개입해 처단하는 게 맞지만, 몇 십 년이 흐른 지금 대통령이 개입해서 정치화시키는 것은 실용적인 해법이 아니다.

프레시안 : 역사 문제나 대일 관계가 정치화된 배경을 국내정치적 유혹 때문이라고 보나?

강원택 : 문 대통령은 1948년 이후의 한국 정치와 사회의 흐름이 매우 불공정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니 일본과 관련된 부분에서 명쾌하게 선을 그으려하고 적폐 청산을 도덕적이고 이념적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게 부정된다. 하지만 자신이 부정하려는 것의 연속성 위에 대통령이라는 직도 있는 것이고 민주당이라는 정당도 있는 것이다.  

대통령은 현실을 보는 속에서 넘길 건 넘기고 집중할 건 집중하며 20~30년 후의 미래를 연구해야 한다. 노태우 정부 연구를 했던 입장에서 비교해보자면, 북방정책도 그렇고 서해안고속도로, 인천공항, 경부고속철도 등 인프라도 노태우 정부가 다 추진됐다. 문 대통령도 긴 안목에서 국가미래를 위한 투자를 하고 과거 문제에는 관심을 보이는 정도로만 하면 좋았을 텐데, 정치화한 것은 답답하다.  

"국가안보는 상대방 선의에 의존해선 안 돼" 

프레시안 : 문재인 대통령이 남은 임기 중에 업적을 남긴다면 북핵 문제가 유력한데, 어떻게 전망하나.  

강원택 : 문재인 방식이 아닌 대안이 무엇인가. 늘 한반도 전쟁가능성이 있던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대안인가. 그건 지난 10년 동안 경험을 한 것 아닌가. 북한이 가진 핵무기 폐기가 절대적 과제인데, 과거 같은 일방적 압박으로 가능한지, 한반도 위기를 고조시키는 방식이 현명한지에 동의하기 어렵다. 긴장 고조 없이 평화로움이 유지될 수 있는 정책이라면, 오래 걸려도 그런 방향이 맞지 않겠나. 그렇다면 한국당도 냉전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서 좀 더 현실적으로 북한을 바라봐야 한다. 북한 문제로 남남갈등이 격하게 이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방법론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떻게 한반도 긴장을 완화시키고 평화번영을 이끌어갈 것인가에 대해선 정파적, 이념적 갈등에서 벗어나야 한다. 

윤여준 : 전쟁 위기가 고조된 상황을 평창 올림픽을 통해서 이 정부가 풀었다. 그건 높이 평가한다. 다만, 그 이후 남북관계를 풀어가는 과정은 너무 단순한 낙관론에 의존했다고 본다. 초기에는 남북 관계의 급진전이 가능하다. 하지만 본질은 북미 관계다. 우리 의지로만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한계를 너무 가볍게 봤다. 한반도 질서는 강대국들이 만든 질서다. 

문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남북 관계의 진전은 북미 관계의 부속물이 아니며 남북 관계 진전으로 북미 관계를 견인하겠다고 했다. 이것은 미국과 일본이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대통령이 마음속에 그런 마음을 품는 것은 백번 이해한다. 그러나 속을 드러내는 말을 내뱉으면서 이 고차방정식을 풀어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문제를 너무 단순하고 쉽게 봤다. 그로 인해서 한미 간 불신이 얼마나 커졌나.  

물론 남북 관계는 진전시켜야 하고 화해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안보는 상대방 선의에 의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북한의 선의에 의존하는 모습을 자꾸 보이니 국민들이 불안해하는 것이다. 의도와 방향의 긍정성을 모두 인정하더라도, 그런 부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지금 화제가 되고 있는 대북 인도적 지원은 유엔 식량기구도 지원하자는 쪽이니 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세심하게 계획해서 해야 한다. 예컨대 쌀을 지원할 것인지, 밀가루나 옥수수를 지원할 것인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굉장한 차이가 있다. 밀가루와 옥수수는 장기적 보관이 어렵다. 장기적 보관이 가능한 쌀은 군량미로 전용될 수 있다는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 있다. 그런 것부터 면밀한 검토를 해서 추진하기를 바란다.  

프레시안 : 최근 이인영 원내대표와 김수현 정책실장의 비공개적인 대화가 우연히 마이크를 타고 공개되면서 관료들을 비판한 이야기가 새어나오기도 했지만, 관료사회와 청와대 관계를 어떻게 보나.  

윤여준 : 권위주의 시절 국가권력이 관료들에 대한 수직적 통제를 엄격하게 했다면, 국가권력이 약해진 민주화 이후에는 통제력도 많이 약해졌다. 그렇다면 민주화 시대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는 민주적 시대에 맞는 관료들에 대한 통솔 방식을 고민해야 했다. YS, DJ도 그런 고민은 하지 않았다. 상도동, 동교동 가신들이 대거 청와대 들어와서 부처를 지휘했다. 공무원들 입장에서 보면 평생 1급 달지 못하고 퇴임하는 사람들이 다수인데, 갑자기 가신들이 1급으로 날아와서 자기들을 지휘한 것이다. 이러면 관료들이 승복하지 않는다. YS 때 1급 공무원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상도동 가신들 때문에 1급이 개값 됐다'는 농담까지 했다. 그런 일을 겪은 공무원들에게는 자기 직무에 충실해봐야 출세에 도움이 안 되고 청와대에 줄을 대야한다는 학습효과가 생겼다. 관료사회가 급속도로 정치화되고 지역주의 인사로 인해 지역화 됐다. 공직사회의 윤리와 기강이 무너졌음에도, 어떤 지도자도 그 문제를 고민하지 않았다. 

새 대통령이 아무리 훌륭한 그림을 그려도 색칠은 관료들이 한다. 색칠을 엉망으로 하면 그림이 아무리 좋은들 무슨 소용인가. 청와대가 무슨 수로 정책을 다 집행하나. 관료들은 새 정부가 들어오면 정책 집행 능력을 가늠해보려고 몇 달을 기다린다. 그러니 청와대가 관료사회를 지배하려면 관료사회로부터 인정받는 사람들을 장관이나 수석에 기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능동성과 자발성을 전혀 끌어낼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와서 관료들 탓이다? 아직도 문제의 본질을 모르는 것이다.  

강원택 : 한편으로는 관료집단도 적폐로 생각하는 것 같다. 고위관료들을 기득권으로 보는 것 같다. 머리는 청와대가 하더라도 수족은 관료들일 수밖에 없는데, 수족을 스스로 쳐내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예컨대, 이명박 정부에서 녹색성장 정책을 잘한 공무원이 있었다고 치자. 이 사람은 박근혜 정부에서는 과거정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관료는 움직이지 않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게 된다. 업무적 평가가 아니라 다른 기준으로 평가받는 일이 반복되다 보면 관료들은 움츠러든다. 관료들을 청와대가 부정적으로 보고 틀어쥐려고만 하면 인센티브 위주로 가지 못하고 윽박지르는 형태로 가게 된다.

 

임경구 기자 hilltop@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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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중항쟁 39주년에 즈음한 민가협 목요집회

5.18 광주민중항쟁 39주년에 즈음한 민가협 목요집회
이종문 통신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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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5.16  23:3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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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민중항쟁 39주년을 맞이해서 민가협 1222회차 목요집회가 5.18광주 영령을 기리는 추모로 시작했다. 첫 여는 발언을 시작하는 권오헌 명예회장. [사진-통일뉴스 이종문 통신원]

민가협 1222회차 목요집회가 16일 오후 2시 탑골공원 앞에서 열렸다. 이날 목요집회는 광주민중항쟁 39주년을 맞이해서 5.18광주 영령을 기리는 추모로 시작했다.

사회를 맡은 민중공동행동 이종문 사무처장은 39주년 맞는 518광주민중항쟁의 민주주의 정신이 바로 지금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온 소중한 자산이라고 하면서 광주민중항쟁 정신을 계승하고 인권과 민주주의를 더 높은 수준에서 발전시켜나갈 것을 결의하면서 민가협 목요집회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이날 첫 여는 발언으로는 양심수 후원회 권오헌 명예회장이 나섰다.

권 명예회장은 여는 발언을 통하여 광주민중항쟁 39주년을 맞이하여 전두환 군부독재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역사적 기억과 다시는 그러한 역사적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히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해야한다고 다짐의 시간을 가졌다.

특히 최근 전 주한미군 방첩대원으로 활동했던 김용장 씨의 증언으로 전두환의 광주시민들에 대한 학살만행이 만천하에 들어난 것과 관련하여 철저한 처벌을 요구하였으며, 특별법 제정에 방해하고 국회를 공전시키고 있는 자유한국당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5.18당시 서대문 구치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있었던 권 명예회장은 당시 MBC기자로부터 엄청 많은 시민들이 희생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기도 했다고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현재 제대로 된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책임자 처벌이 이뤄지지 않고 있으면서 5.18민중항쟁 39주년을 맞이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 이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과 결부하여서도 수많은 사건들이 조작되고 무고한 이들이 희생되었으며 그중에는 양심적인 경찰공무원들도 전두환 신군부에게 고문당하고 희생당하기도 하였다고 전했다.

또한 권 명예회장은 5.18은 미국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사건이라고 하면서 계엄군을 이동시키고, 미 함대를 출동시켜 한국군의 발포를 묵인하고 그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책임을 요구했다.

나아가 우리 현대사 비극에서 미국과 관련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면서 남북분단에서부터 한국전쟁, 그리고 지금의 적대적 대결에서 강도 같은 미국의 책임이 크다고 강조했다.

이른바 북핵문제와 관련해서도 끊임없이 핵위협을 가하면서 북이 핵을 갖게 된 것도 미국의 핵위협과 적대정책의 산물임을 분명히 하고 북핵문제의 해법은 한반도 비핵화의 문제를 푸는 방식으로 해결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 범민련 남측본부 노수희 부의장은 광화문 한복판에 있는 미 대사관이 바로 총독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종문 통신원]

이어서 범민련 남측본부 노수희 부의장의 발언으로 이어졌다.

노수희 부의장은 국가보안법은 일제 강점기의 태동부터 태어나지 말았어야할 법이라고 하면서 양심적인 애국자들을 탄압하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미국 CIA에 보고하는 체계를 갖춘 잘못된 법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광화문 한복판에 있는 미 대사관이 바로 총독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계속되는 민족공동선언 이행을 가로막고 훼방질하는 미국의 행태에 대해 비난하면서 우리 국민들이 현실을 냉철히 봐야한다고 강조하면서 사대주의적 관점이 아닌 우리 민족 주체적 관점에 서서 현실을 똑바로 보자고 호소했다.

   
▲ 박교일 평화협정운동본부 대표는 39년전 무고한 광주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을 단죄하는 투쟁에 함께 나서자고 호소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종문 통신원]

이날 마지막으로 발언에 나선 평화협정운동본부 박교일 대표는 오늘 저녁 전두환 집 앞에서 집회 신고를 내고 촛불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면서 39년전 무고한 광주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을 단죄하는 투쟁에 함께 나서자고 호소했다.

마지막으로 사회자의 선창으로 참가자 전원이 국가보안법 철폐와 양심수 전원석방의 구호를 외치면 1222회차 민가협 목요집회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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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식량지원을 새로운 돌파구로 만들려면…

[창비 주간 논평] 문재인 정부, '쌀의 정치화'와 결별하라
 
북미 하노이회담 결렬 이후 한미 간에 어렵게 합의를 이룬 대북 식량지원이 과연 비핵화협상 교착 타개의 마중물이 될 수 있을지 논란이 분분하다. '단거리 미사일 도발에 보상이나 하듯이 쌀 지원하는 것은 안 된다'는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고, 심지어는 북한이 쌀 지원을 받을 것이냐를 두고도 전망이 갈린다. 북한의 대남매체 <메아리>가 "몇건의 인도주의 협력사업을 놓고 마치 북남관계의 큰 전진이나 이룩될 것처럼 호들갑을 피우는 것은 민심에 대한 기만이며 동족에 대한 예의와 도리도 없는 행위"(5월 12일)라고 주장한 것이 이런 논란에 더욱 불을 지피고 있다. 

예외없는 '쌀의 정치화' 

대북 식량지원, 특히 쌀 지원 문제는 민간 차원의 인도적 지원과 성격이 다르다. 대북 쌀 지원은 정부 당국이 주체이고 규모 역시 일반 민간단체가 감당할 수준을 넘어선다. 김영삼정부부터 시작된 정부 직접지원 방식의 대북 쌀 지원은 물량으로는 1995년부터 2010년까지 총 265만 5000톤, 금액으로는 1조 1015억 원 정도가 지원되었다.

상당 규모의 예산 편성이 필요하기에 그동안 정부 차원의 쌀 지원은 인도주의 일반원칙보다 핵문제와 국내정치 상황 등 정치적 조건에 민감하게 연동돼왔고, 그런 배경 때문에 대북지원단체 등 시민사회에서는 남북관계의 새로운 접근은 '쌀의 정치화'를 벗어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해오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의 핵 폭주와 군사적 긴장 증대, 국제 대북제재 확대가 가중되는 상황에서 쌀의 정치화를 벗어나는 새로운 접근은 사실상 봉쇄되어왔고, 이는 '촛불 정부'인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하노이회담 결렬 이후 쌀 지원 카드를 꺼내든 것도 과정이 어떠했건 예외없는 '쌀의 정치화'라 할 수 있다.

"근본적인 문제들을 밀어놓고 '인도주의'니 하며 공허한 말치레와 생색내기"를 한다거나, "남조선 당국이 북남선언들을 철저히 이행하려는 입장과 자세부터 바로 가지지 않는다면 북남관계의 전진이나 평화번영의 그 어떤 결실도 기대할 수 없다"는 최근 북한의 거듭된 발언은 비핵화협상 및 남북관계 진전과 쌀 지원을 연계하고 있는 문재인정부에 대한 섭섭함과 원망의 직설적 표현이다. 조건부 식량지원에 대한 북한의 부정적 의사 표명이 분명한 이상, 적어도 현시점에서는 실제로 북한이 쌀 지원을 수용할지조차 불투명하다.

여전히 유용한 식량지원 카드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문재인 정부가 미국과 국제사회로부터 대북 식량지원을 설득해낸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과거와 달리 북한의 핵능력이 게임체인저 수준에 달해 있고 엄밀한 국제 대북제재 시스템이 작동하는 조건하에서 식량지원 카드의 확보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당장은 북한이 쌀 지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대의 인도적 협력사업인 쌀 지원을 확보함으로써 남북 관계 발전의 중요한 레버리지 하나를 확보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문재인 정부가 지난해 남북정상회담 이후 적절한 시점에 북한에 '쌀을 지원'하고 대신 광산물과 같은 물자로 돌려받는 물물교환(구상무역) 방식의 단발성 식량지원을 추진했으면 어땠을까. 그런 일이 구체적으로 추진되었다면 현 교착국면을 비껴가거나 혹은 단축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방식은 과거에도 사례가 있고, 또 퍼주기 논란이나 제재위반 논란도 피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2007년 남북은 8000만 달러 경공업 원자재 지원과 매년 3% 물자 상환에 합의해 남북관계가 단절되기 전인 2008년에 240만 달러 상당의 북한 단천산 아연괴를 상환받은 일이 있다). 물물교환 형태의 인도적 지원 방식은 국제 대북제재 시스템의 작동과 대북 정책을 둘러싼 국내 정치 갈등 등을 고려할 때 지금도 여전히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다. 

공공성을 앞세운 적극적 대응으로 전환해야 

현재 북한의 태도로 보아 대북 식량지원을 비핵화 교착상황 타개와 직접 연동시키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런 조건에서 정부는 비핵화 협상이나 남북 관계 진전과 관련해서 더 새롭고 포괄적인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 첫 수순은 '쌀의 정치화'와 결별하는 것, 즉 식량지원과 인도적 협력을 비핵화 협상과 분리하는 것이다. 식량지원 문제를 로우키(low-key)로 바꾸고 주체, 방식 등도 기존과 달라질 필요가 있다. 아울러 인도적 대북협력 사안에 관해서는 대북제재를 의식한 소극 대응에서 벗어나 인도주의와 공공성을 앞세운 적극 대응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정부 중심 교류 협력 기조를 민간 중심으로 과감히 전환하고, 여러 민간단체와 지자체들이 계획하고 있는 보건의료 및 공공인프라 관련 인도적 협력 사업들을 적극 지원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민간의 대북 협력 사업 추진에 필요한 대북제재 면제 지원에도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 

대북 식량지원을 '쌀의 정치화'에서 해방하는 것은 비핵화 동력의 촉진과 시야(視野)의 전환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한반도 대전환이 시작된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전후 상황을 되돌아보면 더욱 명료해진다. 핵 문제에 대해 그토록 완고하던 북한이 평창올림픽에 참가하고, 이후 일련의 전환적 움직임에 나선 첫 단추는 문재인 대통령의 '한국 정부 승인 없이 한반도에서 전쟁 불가'라는 전쟁 반대 선언과 '평창올림픽 기간 중 한미 합동군사훈련 중단'이라는 군사 긴장 완화 조치였다. 매우 비판적 언사를 구사하며 문재인 정부 초기 상황을 관찰하던 북한은 이 두 사건을 계기로 '평창올림픽 참가 및 특사단 파견'을 결정했다.

'한국적 해법'의 가능성 

'2018년의 추억'은 현재의 비핵화 협상 교착 타개를 위해서는 식량지원을 넘어 안보 우려 해소를 우선시하는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운다. 새로운 접근법이 비현실적이라거나 '빅딜'만 고집하는 미국이 거부할 것이라는 지레짐작은 일종의 편견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주장하는 빅딜론 역시 한번에 모든 걸 끝내자는 주장이 아니고 단계적 실행 과정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는 우리 정부가 주장하는 '포괄적 합의와 단계적 실행'(comprehensive agreement and phased implementation)의 기본 방침과 일치한다. 또 빅딜과 대북 강경론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미국에서도 안보 우려 우선 해소를 강조하는 새로운 대안들이 나오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대표적으로 미국 외교협회 회장 리처드 하스(Richard Haass)의 주장을 들 수 있다. 그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비핵화가 즉시 이루어지기 어려운" 현실을 인정하는 단계적 접근을 제안한다. 초기 단계에서는 북한이 핵실험,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생산 동결 및 핵시설 신고, 국제기관의 검증을 수용하는 대신 미국은 한국전쟁 종식, 워싱턴-평양 연락사무소 개설 등 북한의 안보 우려를 우선 해소하고, 그다음에 북한의 핵무기와 시설 해체에 비례하는 경제제재 완화를 통해 완전 핵 폐기와 경제제재 완전 해제 및 북미관계 정상화를 도모하자는 주장이다.(☞관련 기사 : 3월 15일 자 <프로젝트 신디케이트(Project Syndicate)> 'Picking Up the Pieces After Hanoi')

하스의 주장은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그의 부정적 전망으로 인해 사실상 비핵화협상 초기 단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고, 또 그 초기 단계 실행 과제도 북한 입장에서는 등가교환이 아니라고 주장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하스와 같이 안보 우려 우선 해소를 중시하는 접근법을 골격으로, 완전 비핵화 실행 단계를 좀더 구체화하는 압축적이고 포괄적인 2단계 비핵화 추진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거기에 국제 대북제재와 무관한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 재개 등을 적절하게 결합하여 상호 이행 조치의 등가성을 높인다면 더욱 실현 가능한 한국적 해법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은 국제 제재의 결과는 아니지만, 내용적으로는 벌크캐시(대량 현금) 유출 금지와 기계·전자·운송수단 반출 금지, 그리고 합작 사업 금지 등의 여러 유엔 대북제재와 연동되어 있으며, 개성공단 문제는 북한의 주요 외화가득원인 노동력 고용제한 문제도 걸려 있다. 특히 개성공단 재개는 대북 합작 및 북한 노동력 고용 등을 둘러싼 중국과 러시아의 국제 대북제재 시스템 협조 문제와 바로 연동되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매우 민감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북한이 최근 개성공단 재개를 부쩍 강조하고 있으며, 이는 국제 대북제재 시스템의 약화를 위한 북한식 포석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정부는 금강산 관광을 우선 순위로 점차 개성공단 재개까지 포괄하는 신중한 프로세스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대북제재의 결과물도 아니고 미국 등이 북한에 새로 자원을 투입하는 것도 아닌, 또 북핵 논란 속에서도 국제사회의 동의하에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대표적 남북 경협 사업이 제재 대상에서 예외임을 설득해내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 안보 우려 우선 해소와 남북 경협의 특수성을 적극 활용하는 한국적 해법은 미국을 설득하고 북한을 움직이게 할 만한 충분한 동력을 지니고 있다. 거기에 정치의 굴레에서 벗어난 적정 방식의 대북 쌀 지원과 인도적 협력 확대는 한국적 해법의 성공 가능성을 더욱 높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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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차리고 보라!! 미친녀석들, 조선일보 망할년놈들 짓거리..!

 

조선일보, 5·16쿠데타는 ‘기적의 리더십’

[아침신문 솎아보기] 양상훈 주필 “5·16, 오늘의 한국 출발한 날”… 악화한 경제 지표 “정부, 현실 직시해야”

김도연 기자 riverskim@mediatoday.co.kr  2019년 05월 16일 목요일
 

“5·16 군사혁명, 엄연한 역사”

5월16일 아침신문 중 ‘5·16’을 다룬 곳은 조선일보가 유일했다. 양상훈 조선일보 주필은 이날 “58년 전 오늘이 없었어도 지금의 우리가 있을까”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박정희의 5·16 쿠데타를 ‘군사 혁명’이라고 치켜세웠다.

칼럼 부제는 “5·16은 이승만 건국과 함께 오늘의 한국 출발한 날”, “기적의 리더십 없었다면 지금 잘돼도 태국 정도일 것”, “역사를 있는 대로 인정해야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등이었다. 요즘 말로 5·16에 ‘엄지 척’이다.

그는 “오늘로 5·16 군사혁명 58년이다. 이날은 이승만의 건국과 함께 오늘의 한국이 시작된 출발점이다. 박정희 매도가 유행이지만 엄연한 역사를 바꾸지는 못한다. 세계 최빈국이던 우리가 미국 대통령이 ‘가장 부자인 나라’로 지목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 16일자 양상훈 조선일보 주필 칼럼.
▲ 16일자 양상훈 조선일보 주필 칼럼.
 

양 주필은 “기적의 리더십이 흙집 국가였던 1875년부터 일제강점기이던 1936년까지 연이어 태동했다. 이승만 1875년, 구인회 1907년, 이병철 1910년, 정주영 1915년, 박정희 1917년, 최종현 1929년, 김우중이 1936년에 태어났다. 한 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인물들이 50~60년 동안에 한꺼번에 태어나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며 재벌 1세와 이승만·박정희 등장을 강조했다.

 

양 주필은 또 “이승만의 자유민주 건국과 농지개혁, 국민교육 제도 확립, 한미 동맹 쟁취의 바탕 위에서 박정희가 외자 도입, 수출 입국, 전자·중화학 육성, 농촌 혁명 전략을 밀어붙였다. 수천년 농업 노예(노비) 국가를 근대 공업 국가로 탈바꿈시키는 기치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한국 광부들에게 “나라가 못살아 이국 땅 지하 수천 미터에서 일하는 것을 보니 가슴에서 피눈물이 납니다”라며 울음을 터뜨렸다는 사실을 전한 뒤 “광부들도 다 울었다. 그 현장 목격자 중엔 이 통곡 현장이 한국 기적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여럿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문 대통령이 지난 4월 “일부에서 우리 역사를 그대로 보지 않고 대한민국의 성취를 폄훼하는 것은 자부심을 버리는 것”이라고 발언한 내용을 인용하고는 “한마디도 버릴 것이 없다. 그 실천으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치졸한 박정희 욕보이기, 지우기부터 그만뒀으면 한다”고 끝맺었다.  

칼럼은 ‘다시는 박정희를 무시하지 마라’로 요약되는 글로 ‘경제 성장’이라는 박정희의 업적만을 강조했다. 양 주필은 박정희에 대한 칭송과 비장함으로 지면을 채웠다.

박정희에 대한 다른 평가는 서울신문에서 볼 수 있다. 문소영 서울신문 논설실장이다. 그는 “박정희 시대 독재는 ‘긴급조치’로 대변된다. 긴급조치는 유신헌법 제53조항으로, 대통령이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을 때, 헌법에 규정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일시 정지하는 것”이라며 “대통령에게 반하는 정치적 소신을 밝힌다는 이유로 대학생과 지식인들을 탄압했다”고 ‘박정희 시대’를 설명했다.  

문 실장은 “더 나아가 정치적 반대자들을 날조된 반국가단체 조직 활동으로 엮어 재판하고 사형하는 등 ‘사법 살인’이 횡행했다”며 “‘인혁당 사건’이나 ‘민청학련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막걸리에 취한 김에 대통령 욕을 했다고 붙잡혀 가던 엄혹한 시절이다. ‘없으면 나라님 욕도 한다’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였다”고 밝혔다. 독재와 국가 폭력 없이 박정희를 평가하는 건 반쪽에 불과하다. 

‘4월 고용’ 낙제점에 언론 비판 

통계청이 15일 ‘4월 고용동향’을 발표했다. 실업률 4.4%를 기록했다. 2000년 통계 집계 이후 최고치다. 조선일보는 16일 1면 머리기사 제목을 “실업民國”으로 뽑았다. 조선일보는 “국민 세금으로 만든 노인 일자리 덕분에 두 달 연속 25만명을 넘던 취업자 증가 폭이 지난달 17만여명에 그쳤다”고 했다. 언론들 제목을 모아봤다.

“지난달 취업자 17만1000명 늘어… 40대 고용 부진에 개선세 주춤”(경향신문 22면)
“취업자 증가폭 10만명대로 ‘털썩’… 실업자도 19년 만에 최고”(국민일보 19면)
“4월 청년 실업률 11.5%…20년 만에 최악”(동아일보 1면) 
“경제허리 3040 취업자 27만명 줄고, 초단시간 근로자 사상 최다”(동아일보 2면)
“단기알바 확 늘리고도… 실업률 19년 來 최악”(매일경제 14면)
“청년 ‘알바’·노인 공공일자리가 떠받친 고용지표”(서울신문 20면)
“4월 취업자 17만명 늘었는데 실업자 124만명 사상 최대”(중앙일보 4면)
“취업자 증가폭 10만명대로 뒷걸음… 실업률 19년 만에 최고”(한겨레 16면)

 

 

▲ 조선일보 16일자 1면.
▲ 조선일보 16일자 1면.
 

정동욱 통계청 고용통계과장은 “청년 실업률 상승은 지방직 공무원 원서접수가 4월에 있었던 탓에 응시자 17만9000명이 ‘취업준비생’에서 ‘실업자’로 잡힌 영향이 컸다”고 했다. 취업준비생들은 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 인구(비경제활동인구)이지만 시험에 응시하게 되면 구직 활동을 한 실업자로 분류된다.

 

사설도 정부 비판으로 한 목소리다. 한국일보는 “공무원 시험 일정 변경이 실업률을 출렁이게 하는 웃지 못할 현상은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공공일자리 확대 정책의 부작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며 “정부가 2022년까지 공무원을 17만4000명 채용하겠다고 밝힌 이후 다른 직업을 찾지 않고 공무원시험에만 매달리는 청년들이 크게 늘어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일보는 “고용의 질도 악화하고 있다. 취업자가 가장 많이 늘어난 것은 1~17시간 일하는 초단기 일자리”라며 “4월 초단기 일자리 종사자는 178만명으로 전년 동월 대비 25.5%나 늘었다. 1982년 관련 통계 작성 이후 가장 많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주휴 수당을 지급하지 않아도 되는 주 15시간 미만 취업자, 일명 ‘쪼개기 알바’가 빠르게 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신문은 청와대와 정부 인식의 안이함을 질타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최초로 수출 6000억 달러를 돌파했다”고 발언한 것이나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고용의 질 향상”, “고용회복 기미 강화” 등을 강조한 것에 대한 비판이다. 청와대와 정부가 긍정적 통계만을 부각한다는 것.  

서울신문은 “병세는 깊어지는 데 반짝 호전에 병이 나을 것이라고 진단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며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정확한 진단이 나올 수 없고, 백약이 무효하다는 걸 정부는 명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강신명 전 경찰청장 구속 

강신명 전 경찰청장이 박근혜 정부 시절 국회의원 선거에 불법 개입한 혐의로 15일 오후 구속됐다.  

신종열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이날 “피의자(강신명)가 영장청구서 기재 혐의 관련 죄를 범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고, 증거를 인멸할 염려 등과 같은 구속 사유도 인정된다”며 구속 영장을 발부했다. 법원은 같은 혐의로 청구된 이철성 전 경찰청장 등의 구속 영장은 기각했다.  

앞서 검찰은 지난 10일 2016년 4월 총선 당시 친박근혜계 후보 당선을 위해 정보 경찰을 동원하는 등 선거에 불법 개입한 혐의(공직선거법 위반 등)로 강 전 청장 등의 구속 영장을 청구했다. 강 전 청장 측은 영장실질심사에서 “청와대가 시키는 대로 정보를 만들었다. 그 정보가 어떻게 쓰일지는 잘 몰랐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 경향신문 16일자 12면.
▲ 경향신문 16일자 12면.
 

전직 경찰총수 구속이 시사하는 바는 작지 않다. 동아일보는 “정보 경찰 조직의 체계와 역할, 규모가 경찰 개혁의 주요 쟁점으로 떠오를 것으로 전망된다”며 “정보 경찰이 법령상 허용된 범위를 벗어나 선거를 앞두고 지역별 판세를 분석하고 선거 대책을 수립했던 관행에 제동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고 분석했다. 검·경 수사권 조정 법안이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상황에서 이번 사건은 향후 논의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경찰의 ‘맞불 수사’도 주목받고 있다.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임은정 청주지검 충주지청 부장검사가 고발한 김수남 전 검찰총장, 김주현 전 대검 차장, 황철규 부산고검장, 조기룡 청주지검 차장검사 등 4명을 직무유기 혐의로 입건했다.

서울신문은 “임 부장검사는 지난달 19일 고발장을 서울경찰청에 제출해 ‘김 전 총장 등이 2016년 당시 부산지검 소속 A검사가 사건 처리 과정에서 민원인이 낸 고소장을 위조한 사실을 적발하고도 별 다른 징계 조치 없이 무마했다’고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세계일보는 “검찰이 전직 경찰 수장을 비롯한 전·현직 경찰 고위 간부를 직접 겨냥하자, 경찰도 전직 검찰총장은 물론 차기 검찰총장 후보로 거론되는 현직 고검장을 수사 선상에 올리는 맞불을 놨다. 국민을 생각하는 건전한 정책비판을 팽개치고 오직 힘겨루기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상대측 망신주기 수사로 ‘진흙탕 싸움’을 전개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일보는 “김(수남) 전 총장은 박근혜 정부 마지막 검찰 총수이고, 구속된 강 전 청장 역시 박근혜 정부에서 경찰 총수를 지냈다는 점에서 검경이 공히 이전 정부의 상대 수뇌부를 정조준한 모양새”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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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김대중도 포기... 노무현은 끝까지 갔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9/05/16 09:20
  • 수정일
    2019/05/16 09:2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노무현, 부동산을 알았다 ②] 투기차단 및 주거복지 정책

19.05.16 08:56l최종 업데이트 19.05.16 08:56l
디자인: 고정미(yeandu)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동산 정책을 두고 실패했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일반 시민이나 전문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 중 일부도 그렇게 생각한다. '토지+자유연구소'는 5월 '노무현의 달'을 맞이하여, 4회에 걸쳐 노무현의 부동산 정책을 '제대로' 평가해보고 무엇을 계승·발전해야 하는지 살펴보려 한다. - 기자 주

한국경제는 부동산투기라는 중병에 시달리고 있다. 부동산투기는 생산을 제약하고 분배를 악화시킬 뿐만 아니라 환경까지 파괴한다. 투기가 기승을 부리면 집값·건물값·땅값이 치솟아 신규기업은 시장 진입이 힘든 반면 부동산을 많이 보유한 기존 기업이나 개인은 기술개발과 같은 생산 활동을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보유한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 돈을 쉽게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부동산투기는 생산을 제약한다.

그뿐 아니라 집값이 치솟으면 집 없는 서민들의 주거비는 늘고 다주택자들은 더 큰 돈을 벌게 된다. 다시 말해 투기 때문에 집 없는 서민들의 소득수준은 더 나빠지고 다주택자들의 소득수준은 더 올라간다는 것인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다주택자가 벌어들이는 소득의 상당 부분이 집 없는 서민들에게서 이전된 소득이라는 점이다. 어디 그뿐인가. 집값이 폭등하면 덮어놓고 공급확대가 대안이라며 그린벨트를 해제해서 주택을 공급하니 환경까지도 파괴한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부동산투기가 노리는 걸 차단해야 한다. 부동산투기는 불로소득을 노리고 일어나는 비생산적 경제활동, 즉 지대추구행위다. 불로소득이 없으면 집을 몇 채씩 사들이지 않는다. 사용하지도 않을 땅을 보유하지도 않는다. 그러면 불로소득은 무엇인가? 그것은 매매차익(매각가액-매입가액)과 임대소득(보유부동산의 임대가치–매입가액의 이자)의 합이다. 생각해보라. 부동산을 가지고 있어도 매매차익도 별로 안 생기고 은행 이자 수준의 임대소득이 발생한다면 사용 목적 이외에 부동산을 소유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를.

그런데 이런 부동산 불로소득을 환수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보유세 강화라는 것이다. 보유세로 부동산투기를 완전히 차단할 순 없지만, 보유세 강화 없이 투기를 제거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보유세를 꾸준히 강화하면 임대소득도 줄어들고 부동산 가격이 하향 안정화 되어 매매차익도 줄어든다. 어떤 이는 양도소득세가 불로소득 차단에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한다고 하지만, 양도소득세는 부동산 소유자로 하여금 보유 부동산의 매각을 꺼리게 만든다. 양도세를 아무리 많이 올려도 그냥 보유하고 있으면 속수무책인 것이다.

최초로 보유세 강화 로드맵 제시한 노무현 정부
 
 2006년 10월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전직 대통령 초청 간담회 자리에 참석하려고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김영삼, 전두환 등 전직 대통령들이 함께 오찬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  2006년 10월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전직 대통령 초청 간담회 자리에 참석하려고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김영삼, 전두환 등 전직 대통령들이 함께 오찬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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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유세 강화가 부동산투기 차단의 핵심수단이라는 것은 일종의 공리와 같기 때문에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제외하고 역대 정부들은 임기 초 보유세 강화를 천명해왔다. 김영삼 정부는 "부동산을 가지고 있는 것이 고통이 되도록 하겠다"라고 할 정도로 보유세 강화에 의욕적이었고, 김대중 정부도 집권 초기에 보유세 강화를 천명했다. 하지만 역대 정부는 얼마 안 가서 바로 포기해 버리고 만다.

그러나 노무현은 중간에 굴곡은 있었지만 보유세 강화의 기조를 끝까지 밀고 나간다. 그리고 대한민국 최초로 보유세 강화 로드맵을 제시하는 데까지 이른다. 보유세는 한꺼번에 올릴 수 없기에 점진적이고 지속적으로 강화해야 하므로 목표와 로드맵 제시가 필수다.

노무현 정부의 보유세 강화 로드맵은 2005년 5월 4일에 처음 나왔다. 당시 0.15%였던 보유세 실효세율을 2017년까지 1%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을 발표했는데, 이는 대한민국 부동산정책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일이다.

노무현 정부는 같은 해 8월 31일 이른바 '8.31대책'에서는 주택에 한해서 2017년까지 실효세율을 0.61%로 강화한다는 정책을 발표하고 연말에 이를 입법화 했다. 고가부동산과 다주택자를 대상으로 한 종합부동산세는 2009년까지 가파르게 증가하도록 했고, 중산층 이하 서민들이 내는 재산세는 2017년까지 느리게 증가하도록 설계한 것을 법제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중요한 보유세 강화 대책이 너무 늦게 나왔다. 보유세 강화처럼 중요한 정책은 지지율이 높은 집권 초기에 잘 준비해서 추진해야 했다. 아마 집권 초기, 그러니까 2003년에 철저히 준비해서 2003년 연말이나, 늦어도 2004년 연말에 입법화했다면 노무현 정부 내내 부동산은 안정되었을 것이고, 2005~2006년 폭등 현상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듯이 집권 3년이 지난 2005년 연말에 가서야 입법화 했다. 그것도 지지율이 20%로 안팎이었을 때. 이런 이유로 입법화에 성공했지만, 당시에는 재집권이 난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즉 시장 참가자들은 이명박이나 박근혜가 집권하면 강화된 보유세를 후퇴시킬 것이라고 봤기 때문에 보유세 강화 입법화의 효과는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노무현은 대체 어느 정도 보유세를 강화한 것일까? 실효세율 0.61%로는 감이 오지 않기 때문에 주택가격에 따른 보유세액을 통해서 비교해 보자. 아래 [표1]은 노무현 정부가 입법화시킨 보유세 강화가 2017년에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2017년에 부담할 보유세액과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후퇴시킨 보유세액을 비교한 것이다.

30억 원 주택이 부담해야 할 보유세액 2,500만원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보유세액 비교
▲  [표1]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보유세액 비교
ⓒ 고정미  
  
[표1]에서 보듯이 노무현 정부가 만든 보유세 강화 정책이 2017년까지 지속되었다면 시가 15억 원 주택의 경우엔 799만 원의 보유세를 부담해야 했다. 그런데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후퇴시켰기 때문에 실제로는 213만 원만 부담했다. 거의 1/4토막이 난 것이다. 시가 20억 원, 25억 원, 30억 원 주택도 마찬가지다.

노무현 정부가 만든 정책과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후퇴시킨 정책을 비교하면 3~4배 차이가 난다. 노무현 정부가 만든 보유세 강화 정책이 계속되었다면 시가 30억 원의 주택의 경우 2,124만 원(부가세까지 합치면 2,500만 원이 넘는다)을 부담해야 했는데, 이런 상태에서 투기목적으로 30억 원의 주택을 매입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노무현의 주거복지정책

한편 주거복지에서도 노무현은 우뚝하다. 주거복지는 시장에서 주거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가구에 정부가 제공하는 것인데 보통 여기에는 두 가지 목표가 있다. 하나는 장기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하여 저소득층(소득분위 1~4분위)의 주거안정성을 높이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중소득층 이상에게 자가 소유를 지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노무현의 주거복지는 후자보다 전자, 즉 저소득층의 주거안정에 집중했다.
 역대 정부의 저소득층 주거안정성을 위한 장기 공공임대주택공급 실적
▲  [표2] 역대 정부의 저소득층 주거안정성을 위한 장기 공공임대주택공급 실적
ⓒ 고정미  
 
[표2]를 보면 역대 정부 중 노무현 정부는 공공임대주택을 가장 많이 공급했다. 노무현 정부가 공급한 공공임대주택 중 저소득층을 위한 장기공공임대주택 공급비율은 무려 85.9%에 달해 역대 정부 중 최고였다.

이런 주거복지 정책은 비주택거주가구, 즉 쪽방, 고시원, 비닐하우스 등에 거주하는 가구 수가 줄어드는 결과를 낳았다. 아래 [표3]을 보면 63,312이었던 2000년 비주택거주가구의 수가 2005년에는 57,066가구로 줄어들다가 2010년(126,058가구) → 2015년(393,792가구) → 2017년(429,730가구)로 폭증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저소득층에게 얼마나 많은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했느냐가 비주택거주가구 수에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요인은 아니지만, 중요한 원인 중에 하나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만약 노무현 정부처럼 이명박, 박근혜 정부도 주거복지정책을 추진했다면 비주택거주가구는 크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비주택가구 가구수 비율 추이
▲  [표3] 비주택가구 가구수 비율 추이
ⓒ 고정미  
 
게다가 노무현 정부는 비주택주거 종식을 위한 로드맵까지 제시했다. 2007년 5월 노무현 정부는 고시원·쪽방·비닐하우스 거주자들을 2009년까지 종식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이를 '쪽방·비닐하우스 거주가구 주거지원 업무처리지침'으로 제도화한다. 다시 말해 노무현 정부는 주거복지 영역에서도 가시적 목표를 세우고 정책을 수립·추진했다는 것이다.

부동산, 특히 주택정책에서 정부가 추진해야 할 중요한 목표는 두 가지다. 하나는 투기차단대책을 확실하게 세우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다주택자들의 투기가 줄어들고 투기목적으로 보유하는 주택들이 시장에 재등장하여 중소득층 이상의 자가보유율이 높아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주거복지수요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시장을 통해서 주거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저소득층의 주거안정성 제고에 주거복지의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노무현 정부는 정책추진 타이밍 등에서 아쉬운 면을 보였지만, 문재인 정부와 차기 정부가 본받아야 할 모범을 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노무현은부동산을 알았다 2부
ⓒ 토지+자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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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부동산을 알았다]
① 이명박은 노무현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http://omn.kr/1j8ny

덧붙이는 글 | <토지+자유연구소>는 토지공개념이라는 철학 하에 부동산 문제로 고통당하고 있는 우리사회를 정의롭고 효율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이론과 구체적이고 치밀한 정책설계도를 연구하는 민간 연구소로, 이 취지에 동의하는 시민들의 개인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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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한 복지ㆍ노동예산 확대를 요구한다”

“긴급한 복지ㆍ노동예산 확대를 요구한다”
 
 
 
백남주 객원기자 
기사입력: 2019/05/16 [00:21]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이 긴급한 복지ㆍ노동예산 확대 등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요구하고 나섰다. (사진 : 참여연대)     © 편집국

 

경기 둔화가 본격화 되고 있는 가운데노동시민사회단체들이 긴급한 복지노동예산 확대 등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요구하고 나섰다.

 

양대노총 및 경실련참여연대 등 26개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은 15일 오전 10시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긴급한 복지노동예산을 확대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 단체들은 “OECD 국가들의 평균적인 사회복지지출이 GDP대비 20% 수준인 것에 반해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지출은 그에 절반 수준인 11% 정도에 불과하다며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해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사회복지 예산을 확대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게다가 현재 우리나라는 1분기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정도로 심각한 경기 하강 국면으로확장적인 재정운용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상황이라며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 예산이 충분하게 투입되지 않는다면 경제 부진의 고통은 노동자와 서민에게 떠 맡겨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 단체들은 장애인 복지빈곤주거복지연금보건의료노인돌봄 등의 분야에서의 재정확대 요구안을 마련해 청와대에 전달했다.

 

이들 단체들은 이러한 요구안은 그리고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니라며 우리가 요구하는 지금 당장 긴급한 복지노동예산의 총액은 17조 원 정도이며 이는 기획재정부가 목숨처럼 지키려고 하는 재정건전성을 유지하는 수준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실제 정부가 발표한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 2020년 관리재정수지는 -44.5조원, GDP대비 -2.3% 수준이라며 우리가 증액을 요구하는 17조 원 전액을 모두 적자로 계상한다고 해도 이는 -61.5조원, GDP대비 -3.2% 수준이며 이는 정부가 지키고자 하는 관리재정수지 GDP대비 -3% 수준에 부합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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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문>

 

지금 당장 긴급한 복지노동예산 확대를 요구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회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음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그리고 모두가 인간답게 살아가는 세상이 누구나 꿈꾸는 복지국가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러한 꿈과는 거리가 멀다심각한 불평등과 저출생고령화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는 해결될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다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꿈꾸는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한 사회복지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OECD 국가들의 평균적인 사회복지지출이 GDP대비 20% 수준인 것에 반해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지출은 그에 절반 수준인 11% 정도에 불과하다.

 

따라서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해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사회복지 예산을 확대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게다가 현재 우리나라는 1분기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정도로 심각한 경기 하강 국면으로확장적인 재정운용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상황이다이러한 상황에서 정부 예산이 충분하게 투입되지 않는다면 경제 부진의 고통은 노동자와 서민에게 떠 맡겨질 것이다.

 

수입과 지출을 맞추는 것이 가계의 살림살이라면 정부의 살림살이는 기계적으로 수입과 지출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지향해야 할 방향과 상황에 따라 전략적으로 운용 되어야 한다그러나 재정 당국인 기획재정부를 중심으로 한 현재의 정부는 과거와 다를 바 없이 지출을 최대한 억제하는 보수적인 방식으로 재정을 운용하고 있다하지만 지금은 전통적으로 재정 운용에 보수적인 관점을 보이는 IMF나 KDI마저도 적극적 재정정책 추진을 제안하고 있는 상황이다게다가 우리나라의 재정건전성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GDP대비 일반 정부의 부채 규모의 경우 OECD 국가 평균이 111.3%인데 반하여 우리나라는 46.3%에 불과하다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적극적 재정정책이다.

 

분야별로 살펴보면 장애인 복지의 경우우리나라의 장애인 복지예산은 2013년 기준 GDP대비 0.61%로 OECD 평균 2.11%의 1/3수준에 불과하다장애등급제가 변화되는 올해 7월에 맞추어 장애인 복지지출을 확대하는 것만이 장애인정책의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빈곤의 경우중위소득 50% 이하의 비율을 의미하는 상대적 빈곤율에 있어 우리나라는 17.4%로 OECD 국가의 평균인 11.8%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상황이다이러한 상황은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후의 보루로 기능한다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 하는 것에 기인한다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고질적인 문제이나 예산 등을 이유로 이루어지지 못한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등이 절실한 상황이다.

 

주거복지의 경우쪽방이나 고시원 등 비주택에 거주하지만 주거급여를 수급하고 있지 않은 가구가 약 37만 가구에 이른다그리고 주거급여는 1인가구 기준 최대 23.3만원에 불과해 최저주거기준에 해당하는 면적의 시장임대료에 절반 수준에 불과한 실정이다그리고 주거취약계층을 비롯해 전반적인 시민의 주거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필요한 장기공공임대주택은 전체 주택 대비 4.1%에 불과하다따라서 주거취약계층에 대한 공공임대주택 공급을 확대하고보장성이 매우 취약한 주거급여를 인상하고 대상을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연금의 경우우리나라의 노인빈곤율은 45.7%로 OECD 평균 13.5%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상황이다이는 노후소득보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노후소득보장 강화를 위해서는 국민연금의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기초연금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보건의료의 경우, 2017년 기준 경상의료비에서 정부 의무재원이 차지하는 비중이 우리나라는 58.2%로 OECD 평균인 73.3%에 한참 못 미치고 있어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 노력이 시급한 상황이다그러나 보장성 강화를 위해 필요한 재원조달과 관련해 법으로 명시되어 있는 건강보험에 대한 국고지원마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노인돌봄의 경우, 2008년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도입되었으나 10년이 지난 지금도 요양기관 중 국공립시설이 1%에 불과하다대부분의 서비스공급이 민간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서비스의 질은 악화되고 돌봄에 종사하는 요양보호사의 노동조건은 심각하게 열악한 상황이다따라서 공공요양시설의 확충이 절실하다.

 

이러한 요구안은 그리고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니다우리가 요구하는 지금 당장 긴급한 복지노동예산의 총액은 17조 원 정도이며 이는 기획재정부가 목숨처럼 지키려고 하는 재정건전성을 유지하는 수준이다실제 정부가 발표한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 2020년 관리재정수지는 -44.5조원, GDP대비 -2.3% 수준이다우리가 증액을 요구하는 17조 원 전액을 모두 적자로 계상한다고 해도 이는 -61.5조원, GDP대비 -3.2% 수준이며 이는 정부가 지키고자 하는 관리재정수지 GDP대비 -3% 수준에 부합한다그리고 이러한 수치가 국제적으로 보아도 매우 양호한 수준이라는 것은 재정 당국이 더 잘 알 것이다.

 

따라서 재정당국인 기획재정부를 비롯하여 정부는 예산안 편성 시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여진정으로 사람이 중심이 될 수 있는 혁신적 포용국가를 건설하는 데 앞장서기 바란다.

 

2019년 5월 15

건강세상네트워크경실련공공운수노조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전국활동지원사지부공공운수노조 보육1,2지부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국민건강보험노동조합기초법바로세우기공동행동내가만드는복지국가노인장기요양 공공성 강화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무상의료운동본부민주노총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빈곤사회연대)보건복지자원연구원보육더하기인권함께하기복지국가청년네트워크서울시어르신돌봄종사자종합지원센터세상을 바꾸는 사회복지사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주거권네트워크참여연대한국노총한국비정규노동센터한국여성단체연합한국여성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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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플라스틱 바다'와 우리 삶은 연결돼 있다

김찬국 2019. 05. 15
조회수 465 추천수 1
 
찰스 무어의 '플라스틱 바다'를 읽고 우리의 미래를 생각한다
 
06017513_P_0.jpg» 지난해 9월 11일 강원도 하점면 창우 포구 앞바다에서 잡아 올린 새우 등 수산물에서 40여 년 전에 버린 과자봉지가 최근 버려진 플라스틱이나 비닐 봉지와 함께 섞여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한 권의 책을 읽어가면서 하나의 주제에 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얻게 된다면, 그 책을 읽는 과정이 상당히 흥미롭게 느껴질 것이다. 찰스 무어 선장(Captain Charles Moore)의 책 '플라스틱 바다: 지구의 바다를 점령한 인간의 창조물'1)이 그렇다. 한 권을 읽어나가면서 그가 태평양에 위치한 거대한 ‘쓰레기 해역’을 우연히 발견한 이후, 플라스틱 쓰레기가 어디서 와서 어떻게 태평양 한가운데 모이게 되었는지 찾아가는 과정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p1-1.jpg» '플라스틱 바다'의 영문판(왼쪽)과 한글판(오른쪽) 표지.
 
태평양에 거대한 쓰레기 해역이 있다!
 
찰스 무어는 태평양의 하와이와 캘리포니아 사이에 ‘태평양 거대 쓰레기 해역(the Great Pacific Garbage Patch)’이 있다는 것을 1997년에 처음 발견한 환경운동가이자 선장이다. 일부 신문이나 어린이용 도서는 ‘플라스틱 대륙’이나 '플라스틱 섬'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 넓은 해역은 새로운 대륙이나 거대한 섬이 아니라 플라스틱을 비롯한 각종 쓰레기가 모여 ‘묽은 플라스틱 수프’와 같은 형태를 띤다(관련 기사태평양 한가운데 거대한 ‘플라스틱 수프’ 있다).
 
이렇게 해양 쓰레기가 밀집된 곳은 북태평양의 하와이와 미국 캘리포니아 사이, 일본과 하와이 사이에 위치한 넓은 고기압대 환류(gyre) 해역이다. 태평양 바다에 이런 해역이 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진 지 벌써 20년이 지났지만, 관심이 많지 않은 이들이라면 해양 쓰레기 문제에 관해 최근 본격적으로 듣게 된 계기는 아마 2018년 언론 등을 통해 많이 다루어진 미세 플라스틱 이슈를 통해서일 것이다.
 
북태평양에 해양 쓰레기가 모여 있다고 하였을 때, (물론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보이는 먼 곳의 일이었다. 하지만 최근 우리가 먹는 굴이나 생선 등의 해산물은 물론이고 소금(해염)에도 미세 플라스틱이 포함되었다고 알려졌을 때, 우리 사회의 관심 수준은 상당히 달라졌다(▶관련 기사홍합·굴 통해 매년 미세 플라스틱 1만1천개 먹는다).
 
이 책은 태평양에 플라스틱이 많아져서 생기게 될 환경과 우리 건강상의 위협뿐만 아니라, 이 플라스틱이 어디서 생겨나서 그곳까지 이동하게 되었고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하나씩 조명하여 보여준다.  
 
‘고체 석유’와 앨버트로스
 
이 책의 표지에서는 21세기판 '침묵의 봄'이라고 홍보한다. '침묵의 봄' 만큼 이 시대에 영향력을 끼치는 책이 될지는 아직 짐작하기 어렵지만, ‘플라스틱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 세대에게 플라스틱에 대해 성찰하고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주기에는 충분할 듯하다.
  
04724684_P_0.jpg» 내전으로 쓰레기 관리 체계가 무너지자 세르비아의 한 강이 '플라스틱 강'으로 바뀌었다. 이런 쓰레기는 결국 바다로 모인다. 에이피=연합
 
현재 인류가 2년 동안 생산하는 플라스틱의 양은 지구 상 모든 남녀의 몸무게를 합친 것에 맞먹는다고 한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생산되어 소비되는 플라스틱은 육지보다 바다에서 더 오래 지속된다는 점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이 편리한 물질이 바다에 도달한 이후에도 쉽게 분해되지 않은 채로 쌓여 해양 환경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플라스틱은 석유를 기반으로 생산하기 때문에 ‘고체 상태의 석유’라고 볼 수 있다. 2007년 우리나라 서해안에서 발생한 삼성중공업-허베이스피릿호 기름유출사고는 액체 상태의 석유가 바다와 바다를 근간으로 살아가는 우리네 사람들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면, 현재 우리가 직면한 해양 플라스틱의 문제는 ‘고체 상태의 석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요구한다.  
 
우리는 플라스틱을 몸에 걸치고 헤엄치는 바다거북이나 뱃속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플라스틱을 품고 죽은 고래를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낀다. 게다가 우리가 먹는 해산물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 플라스틱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니 걱정은 더 늘어난다. 
 
최근 성곡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 작가 크리스 조던(Chris Jordan)의 사진과 영화 '알바트로스(Albatross)'가 다룬 것처럼 해양 플라스틱을 먹고 피해를 입는 대표적인 생물로 태평양 미드웨이 섬에 서식하는 레이산앨버트로스를 들 수 있다. 세계 레이산앨버트로스의 70%가 둥지를 트는 미드웨이 섬에서는 매년 약 10만 마리의 새끼가 죽는데, 이 중 40%인 약 4만 마리는 부모 새가 물어주는 플라스틱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앨버트로스의 부리로 낚아 올리기에 좋은 크기의 반짝이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바다에 많이 떠 있기 때문이다. 앨버트로스 새끼는 생후 5개월이 지났을 때 뱃속에 소화되지 않은 것을 처음으로 토해내는데, 부모 새가 주는 ‘플라스틱 먹이’를 먹고 자란 앨버트로스 새끼는 첫 역류까지 살아남아 플라스틱을 함께 토해내야만 한다. 이러한 역류 기능 때문에 성장한 앨버트로스는 플라스틱의 피해를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새끼는 안타깝게도 상당수 죽게 된다. 
 
p3.jpg» 플라스틱 쓰레기로 뱃속이 가득찬 채로 죽은 레이산앨버트로스의 새끼.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해양 플라스틱을 줄이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이 앨버트로스 새끼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든 내가 먹는 해산물에 대한 우려 때문이든 태평양 상의 플라스틱을 줄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플라스틱 일회용품을 조금 적게 쓰고, 상식 있는 시민으로 플라스틱을 분리배출하면 충분할까?
 
이 책의 15장 ‘플라스틱 발자국 지우기’는 플라스틱의 재활용을 염두에 둔 마음 편안한 소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우리 사회가 플라스틱이 주는 편안함을 포기하고 석유에 기반한 플라스틱 산업을 바꾸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플라스틱이 모두 정해진 방식대로 분리 배출되지도 않지만, 분리수거가 잘 이루어져도 재활용이 가능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5만종이 넘는 플라스틱을 어떤 방식으로 구분하여 어떤 플라스틱으로 다시 만들어야 하는지도 남은 과제이다. 
 
오늘날 우리가 주로 듣게 되는 메시지는 “(플라스틱) 쓰레기 버리지 않기”와 “(플라스틱 분리 배출을 통한) 재활용하기”일 것이다. 이는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의 책임을 대부분 소비자 개인에 맡기는 것일 수 있다. 글로벌 경제의 부산물로 넘쳐나는 플라스틱 제품이 해양 플라스틱 문제의 핵심이라는 진단에 대해 우리가 공감한다면, ‘플라스틱 발자국’을 보다 본격적으로 지우기 위한 이 책의 제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GettyImages-897472034-2.jpg» 타이의 세계적 관광지 피피 섬 바다에 떠다니는 플라스틱 쓰레기. 게티이미지뱅크
 
바다에 가득 찬 미세 플라스틱에 대한 최근의 관심 이전에도 일회용 플라스틱은 오래 동안 우리 사회의 고민거리였다. 모두 재활용되는 것도 아니고 바다나 다시 우리 몸에 쌓이게 될 화학물질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이 책이 우리 사회에 주는 메시지는 선명하다: 지금처럼 충분히 소비하면서 플라스틱의 재활용을 조금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더이상 충분하지 않다. 현재 우리가 플라스틱을 사용하는 방식을 전면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류 사회는 성층권 오존층을 고갈시키는 프레온 가스를 지구상에서 없애려는 시도에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 하지만 대기 상에 배출된 프레온 가스를 날아다니면서 없애려고 하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바다에 이미 배출된 플라스틱 폐기물을 모두 치우는 것은 불가능할 수 있다. 지금까지 바다에서 플라스틱 쓰레기를 모아 재활용하려는 공상적 또는 혁신적인 장치가 여러 차례 제안되었으나 플라스틱 쓰레기가 엄청나게 넓은 바다에 흩어져있어 그러한 구상이 현실화되지 않았다. 
 
성층권 오존층 고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이상 프레온 가스를 배출하지 않고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던 것처럼(성층권 오존층은 2080년 즈음에나 1980년대 수준으로 회복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지금과 같이 매일 바다로 흘러들어가 쌓이는 플라스틱의 흐름을 이제는 멈출 필요가 있다.   
 
해양 플라스틱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끝없이 쓰레기를 만들 수밖에 없는 경제 체제와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무 생각 없는 소비가 사라지고, 꼭 필요하면서도 계속 쓸 수 있는 (고장이 나면 고쳐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신중하게 구매하는 가치가 존중되어야 한다. 현재 삶에 대한 성찰 없이 즉흥적이거나 과시적인 소비 방식이 유지되는 한 ‘플라스틱’ 바다를 벗어나기는 어렵다.
  
03176875_P_0.jpg» 버려진 스티로폼 어구 등 바다쓰레기는 이제 해안의 일상 풍경이 됐다. 연합뉴스
 
이 책은 ‘일회용 플라스틱의 사용 줄이기’나 ‘플라스틱 포장재를 적게 사용하는 물품 구매하기’와 같은 기본적인 실천의 확산을 여전히 지지하고 있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 사회에서 생산하여 소비하게 될 제품들이 다음 특징을 갖추도록 요구하여 바꿀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 재활용 가능성: 이 제품은 어느 정도 재활용할 수 있는가?
 
- 교체 주기: 이 제품은 얼마나 오래 사용할 수 있는가?
 
- 보수 관리 시간: 이 제품은 보수 관리가 필요하지 않는가? 
 
- 원자재 추출 스트레스: 이 제품은 사용 후에도 100% 원자재가 되는가?  
 
- 무독성: 생물학적 관점에서 독성이 없는 부품을 사용하는가? 

 

그 외에도 지역 먹을거리와 같이 플라스틱 포장재가 적게 필요한 소비 방식으로 살아가거나, 바다에서 분해될 수 있는 물질을 개발하도록 요구하고, 플라스틱 쓰레기의 국제적 이동에 저항하는 방식도 시민으로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참여의 방식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에게: 태평양의 플라스틱 쓰레기와 대한민국에서의 삶 
 
이 책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에게 헌정되었다. “플라스틱 오염이라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주길” 요청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할 책무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보다는 오늘을 살아가는 현 세대에게 있지 않을까?
 
모든 바다가 연결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곳은 북태평양의 거대 쓰레기 해역과 무척이나 먼 거리에 있다. 하와이와 미국 캘리포니아 사이나 일본과 하와이 사이의 환류 해역에 떠있는 플라스틱은 대한민국에서의 삶과 너무나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나라(한국)의 이름이 등장하는 곳이 적지 않다. 우선 세계적인 석유화학 산업 시설이 플라스틱의 원료를 생산해내고 있다. 인상적인 다른 사례로는 하와이의 카밀로 해변이라는 곳에서 눈에 띄는 세 종류의 쓰레기 중 하나로 “한국에서 정력제로 알려진 장어 어획을 위한 플라스틱 통발”이 소개되고 있다. 하와이의 카밀로 해변에서는 “참치잡이 선박과 주낙 어선이 사용하는 플라스틱 야광봉”과 “일본의 굴 양식장에서 나온 플라스틱 굴 분리기”도 눈에 띈다고 한다.  
 
p4-1.jpg» 우리나라에서 장어 어획을 위해 사용하는 플라스틱 통발. 이 책 '플라스틱 바다'에서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이름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결국 대한민국에서의 삶과 태평양의 플라스틱 쓰레기로 가득찬 해역의 연결고리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셈이다. 우리가 먹는 해산물이나 소금에 미세 플라스틱이 포함되어 있을까봐 걱정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20년 전부터 바다의 쓰레기가 어디에서 왔는지 (결국은 우리가 버린 플라스틱일 것이다)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관심을 가졌다면, 20년이 지난 지금 바다 플라스틱 문제의 해결에 보다 가까이 가 있지 않았을까? 
 
김찬국/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환경과 공해연구회 운영위원

1) 이 책의 원제는 'Plastic Ocean: How a Sea Captain’s Chance Discovery Launched a Determined Quest to Save the Ocean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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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진압에 전두환 각하께서 ‘Good idea’

[아침신문 솎아보기] 광주 진압 관련 모든 회의 참석… 경향신문 군 문서 입수해 1,4,5면에 진상규명 보도

이정호 기자 leejh67@mediatoday.co.kr  2019년 05월 15일 수요일
 

전두환 각하께서 ‘Good idea’

광주 5·18 민주화운동 39주기를 앞두고 15일자 아침신문 가운데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이 먼저  진상규명 탐사보도와 기획기사를 각각 내놨다. 

경향신문은 1980년 2군사령부의 ‘광주권 충정작전 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 문서를 입수해 5월23일자 기록에 “각하께서 Good idea”라는 반응을 보였다는 손글씨가 적힌 사실을 보도했다. 경향신문은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 기사를 1면 머리기사에 이어 4,5면 전면을 털어 보도해 가장 집중력을 보였다. 내용도 단순 기념보도가 아니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1980년 5월 한 달간 행적을 추적해 광주 진압의 책임을 물어가는 탐사보도 형태를 취했다. 

5월23일은 민주화 시위가 격화되면서 계엄군이 잠시 광주 시내에서 후퇴한 시점이었다. 2군사령부는 이날 ‘충정작전’이란 이름으로 광주 재진입을 건의했다. 이날 회의엔 진종채 2군사령관이 계획을 보고하고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참석했다. 회의에서 누군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반응과 지시사항을 자필로 옮겨 적었다.

 

▲ 15일자 경향신문 1면 머리기사.
▲ 15일자 경향신문 1면 머리기사.
 

경향신문은 “당초 5월24일 오전 2시에 실시될 예정이었던 이 작전은 군사행동에 반대한 미국의 요청으로 국방부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고 전했다. 해당 문건에는 “5월25일 오전 2시 이후까지 작전 연기”라고 기록돼 있다. 계엄군은 5월27일 새벽, 광주 재진입작전을 실행해 옛 전남도청 등을 무력 진압했다.

 

경향신문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5·18 최종 진압작전의 기획단계부터 개입해 작전을 승인했음을 증명한다”고 평가했다.  

 

▲ 15일자 경향신문 5면.
▲ 15일자 경향신문 5면.
 

이어 경향신문은 15일자 5면에도 ‘각하로 불린 전두환, 광주 재진입·도청 진압회의 모두 참석’이란 제목으로 관련 기록 12건을 통해 1980년 5월 전두환의 한 달간 행적을 추적해 “권력 찬탈을 위해 동분서주했다”고 전했다.

 

경향신문은 이날 4면엔 1980년 5월 한 달간 전두환이 등장한 각종 회의와 행사장 참석 행적 34건을 분석해 1980년 4월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임명된 뒤 5월4일 시국수습방안 회의 참석 이후 5월31일 국보위 상임위원장 취임까지 모든 장면을 날짜 순으로 기록했다. 경향신문이 기록한 전두환의 1980년 5월 행적은 권력장악을 위한 동분서주라고 할 만하다. 그럼에도 전두환 전 대통령은 2017년 발간한 회고록에선 “당시 나는 광주에서 진행되는 작전상황과 관련해 조언이나 건의를 할 수조차 없었다”고 해명했다.

▲ 15일자 경향신문 4면.
▲ 15일자 경향신문 4면.
 

 

한겨레는 사라진 사람들에 주목 

한겨레신문은 ‘5·18 사라진 사람들’이란 기획기사로 1980년 광주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한겨레는 15일자 10면에 기획기사 첫 회분으로 ‘주남마을 버스 총격사건’을 집중 조명했다.  

 

▲ 15일자 한겨레 10면.
▲ 15일자 한겨레 10면.
 

한겨레의 이 기사는 ‘주남마을 버스 총격 최소 3건…22구의 주검이 사라졌다’는 제목을 달고 대위 계급장을 단 장교의 사격명령에 매복한 군인들이 집중 사격해 버스 속 승객 10명이 몰살했다고 전했다. 한겨레는 주남마을 일대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총격사건 5건을 날짜와 피해자, 목격자 등으로 나눠 상세히 소개했다.

 

1980년 광주에서 사라진 사람은 확인된 사람만 70여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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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48419#csidxe1d05ef9e3353c09b605bd4ce7353f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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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노점상 이덕인 열사 이야기

  • 최인기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
  • 승인 2019.05.15 09:06
  • 댓글 1
▲ 이덕인 열사 시신[사진 : 필자 제공]

1. 인천의 연수구에 위치한 작은 섬 아암도

아암도를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설마 섬이었을까 싶을 이곳은 매립 이전에는 송도유원지 후문에서 5백여 미터 떨어진 작은 섬이었다. 개펄 위로 겨우 두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돌다리가 듬성듬성 놓여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바닷물이 빠진 개펄 위에 소나무를 이고 있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바닷물이 빠지면 돌다리로 인해 홍해를 연상케 하는 길이 열렸고, 송도유원지를 찾은 시민들은 마치 피난민의 행렬처럼 줄지어 아암도로 향했다. 그리곤 손바닥만한 섬에 올라앉아 바다의 정취를 만끽했다. 그러나 면적 1천8백32평에 불과한 작은 바위섬의 크기가 너무 작아서였는지 인천시가 발간한 안내 책자에서조차 섬 취급을 받지 못하고 외면당했던 섬이다. 그리고 왜 똥섬이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이 고향인 사람들은 아암도를 "똥섬"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잊혀진 작은 섬, 그 섬에서 유명을 달리한 한 젊은 장애인 노점상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덕인(남, 당시 29세)이다.

1995년 11월 28일 몹시도 추운 겨울날 "탑골공원"에서 집회를 마치고 삼삼오오 근처 식당에서 해장국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있었다. 다들 인천의 "아암도"에 망루를 세우고 농성 중인 노점상들이 걱정되어서인지 그날따라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밥을 먹고 있었다. 노점상 단체의 여성부의장 유희 씨의 입담으로 분위기가 다소 활기차졌다.

"정말 누구 하나 죽어 나가야지 이 싸움이 끝날 거야"
"그런 소리 하지 말아 말이 씨가 되지."
"삐삐 왔네, 확인하고 올께…."
"뭐라고? 누가 죽었다고?"

인천 연수구의 아암도 앞바다에서 한 구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당사자는 덕인이었다. 망루에서 내려간 뒤 행방불명되었던 그는 상반신이 벗겨진 채 온몸에 밧줄이 감겨 아암도 근처 갯벌 위로 떠 오른 것이다. 우리는 인천으로 달려가 곧바로 "장애인 노점상 고 이덕인 열사 사인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및 빈민생존권 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구성하여 사인에 대한 규명에 나서기 시작했다.

2. 눈 맑은 청년 이덕인

최정환 열사 투쟁이 끝나고 장애인과 노점상은 "장애인자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한다. 직업을 얻지 못한 이들과 노점상 그리고 장애인이 모여 청계천과 인천 아암도에 새로운 생계 터전을 일구어 나간다. 하지만 이들의 눈물겨운 노력은 단속과 탄압으로 이어진다. 청계천에서만 장애인자립 추진위원회 소속 5명의 장애인과 노점상이 구속되었다.

한편 '장애인자립 추진위원회'는 여름부터 인천의 아암도에 노점 좌판을 깔기 시작한다.
바닷물을 만질 수 있고 갯벌에 뛰어다니는 망둥이와 게를 볼 수 있어 인천 시민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아암도는 송도유원지 공유수면 매립공사로 인해 일대를 3개 지구로 나눠 56만4천 평을 메운다. 아암도 바로 앞 갯벌까지 송도 3지구 매립공사가 완료되면서 해안선 백사장에서 돌출한 형태의 작은 언덕이 되었다. 그리고 1994년 7월 개통된 폭 40m의 해안도로가 뚫리면서 아암도 근처에 노점상이 하나둘씩 들어서게 된다.

덕인이와 첫 번째 만남은 1995년 같은 해 3월 장애인으로 강남역에서 장사하다 분신자살한 최정환 열사" 투쟁 후 ‘장애인자립 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이를 계기로 몇몇 활동가들이 장애인 운동과 노점상 운동을 병행하게 된다. 청계천 장애인자립 추진위원회 사건으로 구속된 후 출소한 김종상씨와 함께 인천 장애인자립 추진위원회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였다. 
덕인은 나보다 한 살이 어리다. 턱수염을 기르고 말이 없어서 처음에는 나이가 한참 더 먹었거니 생각하였다. 그도 내가 작아서 자기보다 서너 살 어린 줄 알았다고 했다.

"한 살 많으니 내가 형이네" 했더니 너털웃음을 지으며 "네 마음대로 하십시오" 한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또 웃었다. 첫 만남부터 시원시원했다. 강해 보이는 인상 속에 맑은 눈을 가진 이였다. 어디서든 그는 눈에 띄었다. 정열적으로 활동하였기에 쉽게 눈에 밟혔는지 모른다. 집회 때는 선봉에 서서 구호를 외치거나 언제나 깃발을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이었다. 목소리가 컸고 웃음이 많았던 그였다. 하지만 그의 일기장에는 가족과 장애인인 자신의 앞날에 대하여 고민이 담겨 있었다. 일기장에 쓰여 있는 한 구절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배우지 못했다. 부모님의 가난과 장애인이라는 편견은 나의 어린 시절을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인 아이로 성장하게 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버텨 나가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강해져야 한다. 세상이 비록 우리를 어렵고 힘들게 할지라도 고생하시는 우리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미래의 내 자신을 위해서라도 약한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 된다. 공부를 잘하고 싶다. 지금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해야만 한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세상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니까…."

1995년 3월 인천시와 군부대가 용현 갯골수로에서 아암도까지 설치된 군 철책선을 철거하기로 합의 각서를 체결한 뒤, 같은 해 6월 아암도를 중심으로 4백여 미터 구간의 철책선을 철거했다. 그리고 아암도를 하와이 와이키키형 관광위락단지로 조성한다는 계획에 따라 일대에 모래를 부어 인공 백사장을 꾸미기도 했다. 그러나 인공 백사장은 사실 터무니없는 계획이었다. 얼마 안 가 모래는 바닷물에 휩쓸려 다 없어졌고, 예산만 낭비한 것이 됐다. 더욱이 공사를 맡은 건설회사와 이권 문제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그후 이에 관련된 공무원들이 오히려 상을 받았다. 그리고 인천시는 철책선 철거 후 새로 발생한 노점상 문제에 대한 아무런 대책과 대안을 수립하지 않고 공권력과 철거 용역반원들을 투입하여 강제 철거를 무리하게 강행했다. 이 모든 것은 금전적 손실뿐만 아니라 행정력 낭비로 막대한 피해가 예상되었던 것으로 기획단계부터 과욕이 앞섰다. 인천시의 뜨거운 감자였던 아암도는 노점상에 대한 대대적인 철거뿐만 아니라 여러 문제와 의혹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아암도는 행정기관의 단속뿐만 아니라 지역의 조직 폭력배들과 싸움 또한 만만치 않았다. 95년 9월 가을로 넘어가는 시점, 인천의 폭력조직인 소위 '꼴망파'라 불리는 폭력배들이 개입하여 장사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좌판을 깔기 시작하면 이들과 싸움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당시 총무국장을 맡고 있던 이덕인은 장애인이지만 상대적으로 나이가 젊었기에 이들과 충돌에서도 언제나 앞장을 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불편한 몸으로 금품을 갈취하려는 건달들과 맞섰다. 한번은 꼴망파 행동대원들이 아암도 장사 현장에 들이닥쳐 노점 좌판과 포장을 걷어치우기 시작했는데, 덕인은 끝까지 이들과 맞붙어서 돌려보냈다. 폭력배들도 끈질긴 저항에 기가 질려 그가 버티고 있으면 함부로 접근하지 못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인천시와 연수구청에 단속이었다. 그들은 도로를 뚫고 바다를 메꾸었지만, 정작 노점상에게는 자연경관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장사를 허가하지 않고 단속을 반복하였다.

그해 10월 나는 인천 새날 청년회 회원과 함께 아암도를 방문하였다. 인천시는 노점상에 대한 행정 대집행을 계획하고 있어서 이에 대응하고자 망루를 만드는 것을 계획하던 중이었다. 망루는 울산의 현대중공업 농성자들이 거대한 크레인에 올라가 농성하던 골리앗 투쟁이라 불리던 것을 철거민이 개발지역에서 전술로 응용하였는데, 노점상이 용역 깡패의 단속에 맞서 생존권을 방어하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되는 등 투쟁은 격렬하고 희생이 컸다. 그날은 늦가을 날씨답지 않게 더웠다. 덕인이와 나는 마침 바닷가까지 차오르는 바다를 바라보며 조개를 구워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덕인씨? 망루를 세우기로 하였다는데 잘돼?"
"네, 아직은 판단이 잘 서지 않네!"
"사람들 의견은 어떤데?"
"사실 이곳은 동떨어진 해안가이기에 농성자들이 망루 안에 고립될 수 있지. 그리고 사람들의 왕래도 잦지 않아서 과연 선전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어…."

덕인은 망루를 세우고 단속에 맞서는 것에 대하여 자신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회의를 통하여 조직이 결정한다면 따라야 하지 않겠냐며 술을 한잔 털어 넣었다. 그날 아암도 근처는 때마침 노을이 붉게 물들어 있었고, 그 노을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몇 잔의 술기운 때문인지 덕인의 얼굴도 붉게 타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날이었다.

▲ 인천 아암도의 망루와 철거모습[사진 : 필자 제공]

3. 죽음을 부른 인천 아암도

'인천 장애인 자립추진위'는 물리적인 힘으로 저들의 강제 철거를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고심 끝에 1995년 10월경 약 10m 가까운 (망루)을 건설하기로 결의를 모았다.
언제 공권력이 밀려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겨울을 맞이한다. 그리고 마침내 11월 24일 4시 30분경 며칠 사이 떨어진 기온을 이기기 위하여 농성자들이 전날 피워놓은 장작더미가 거의 타들어가 재로 변할 즈음이었다. 시청과 구청에 동태를 살피던 노점상 회원들에게 연락이 왔다. 포크 레인과 전경 버스 30대, 철거 용역 깡패들이 타고 있던 서우관광 버스 4대가 연수구 일대를 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장애인과 노점상 40여 명은 즉시 총회를 개최하여 망루에 올라가 저항하기로 결정하였다. 노점상 25명은 망루에 올라가 대기하였고, 나머지 20명은 아암도 주차장에서 상황을 보거나 싸움에 대응하였다.

새벽 6시, 작전 명령이 떨어졌다. 경찰병력 8대가 현장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90년대 재개발 철거 현장에서 악명을 떨치던 무창용역 소속 철거용역깡패 300명이 푸른색 청카바를 입고 나타났다. 구청 직원 50여 명, 타이탄 트럭 15대, 덤프트럭 5대, 포크레인 3대, 물 대포용 소방차 3대가 아암도에 속속 도착하였다. 다시 한 시간 후 철거 병력 총 1400명이 아암도 현장에 도착하였다.

새벽 7시, 하늘은 이제 막 어둠이 걷히고 인천 앞바다는 서서히 푸르른 빛으로 제 모습을 비추기 시작하였다. 그날따라 바람은 미친 듯이 불어 대었다. 바다로 통하는 어통소에서 아암도 방향으로 노점 설치물에 대하여 포크레인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포크레인은 새벽의 정적을 가르며 포장마차와 좌판들을 하나둘씩 찍어 눌렀다. 상인들의 생계수단은 조각조각 뜯겨 아스팔트위에 맥없이 허물어졌다. 주차창 근처 노점상들은 손 쓸 틈도 없이 흩어져 철거되는 포장마차와 좌판을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소방차는 망루 위로 물대포를 마구 쏘아대자 한겨울 바닷바람에 힘이 실려 망루 상층을 흔들어 댔다. 눈조차 뜨지 못할 정도로 차가운 물을 온몸으로 맞으며 저항을 했지만,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장애인과 노점상에게 물대포는 살인적인 병기나 마찬가지였다. 물대포 쏘기가 끝나자 포장마차와 좌판을 철거하던 포크레인이 망루 지지대를 찍었다. 높이 10미터가량의 망루가 좌우로 흔들거렸다. 위에 있던 농성자들은 극도의 위협을 느꼈다. 계속 포크레인에 찍힌 지지대를 여러 차례 흔들어대자 조금씩 기울어졌다. 위기감에 처한 망루 위의 농성자들은 인분과 화염병을 망루 아래로 던졌다. 그러나 위협용으로 제작된 인분과 화염병은 곧 바닥이 났다. 농성자들은 죽음의 위협과 싸웠다. 계속된 공권력 앞에 마지막으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흩어져 있는 물건과 집기, 심지어는 먹으려고 갖고 있던 무와 감자 등의 식료품을 던지며 필사적인 저항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1시간 남짓 시간이 흐르자 포장마차 2개를 제외한 모든 좌판이 철거가 완료되었다. 오전 8시 30분경 사다리가 달린 소방차가 망루에 도착하였다. 경찰은 방송을 통해 농성자들을 상대로 해산하라며 협박을 하였다. 서로 대치된 상태에서 긴장과 함께 시간이 흘렀다. 위협적인 철거가 진행되고 중단하기를 반복하다가 오후 4시, 잠시 조용해진 듯싶더니 동시에 3단의 원형 철조망을 망루 주변에 설치하기 시작했다. 망루 농성자의 탈출을 막으려 했다.

싸움은 밖에서도 이루어졌다. 근처에서 서성이던 한동열의 형 한동일(남)과 이석근의 형 이회근(남)이가 동생 신변을 확인하려고 1t 트럭을 타고 가다 주차장 차도에서 용역 철거반 20여 명에 의해 발견되었다. 서슬 퍼런 눈빛의 철거반들은 이들마저 가만 놔두지 않았다. "저 새끼들도 한통속이다."라며 달려들어 집중적으로 구타하였고 아암도에서 끌고 나왔다.
부근엔 경찰이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외면하였다. 분노를 참지 못한 가족 50여 명은 오후 3시경 인천 시청을 항의 방문해 울부짖었다. 시청 측에서는 국장 면담을 주선해 주겠다고 한 후 전경을 동원해 강제로 시청 밖으로 끌어내었다. 이 과정에서 2명은 실신한다. 인천 시청에서 강제로 끌려 나온 50여 명의 가족과 장애인 노점상은 오후 7시경 아암도로 진입을 시도한다. 경찰은 이미 송도 삼거리와 아암도 주변의 약 2km의 거리를 바리케이드로 완전히 막고 모든 차량과 사람의 왕래를 봉쇄하였다. 일부 가족은 경찰 저지선을 뚫고 아암도에 진입하려다 연행된다. 이들은 남편과 자식을 살리려고 경찰과 악에 받친 싸움을 한다. 이 와중에 전투경찰에게 걷어차여 배미옥(여), 박길림(여) 씨가 다치어 인천 시립병원에 실려 가기도 한다. 오후 7시 30분, 이제 인천의 아암도는 완전히 어두워졌다. 물대포를 맞아 하반신이 마비된 장애인 권순희(여)와 한은미(여)는 탈진 상태에서 치료를 받고자 망루에서 내려오자 경찰은 연행하였다. 권순희(여)의 증언에 따르면 망루 위에는 28명의 농성자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날의 상황으로 총 연행자는 모두 15명으로 늘어나고 면회조차 거부당한다. 쏘아대는 물대포와 돌 세례를 맞아 이미 탈진의 지경에 이른 농성자들에게 공포와 추위 못지않게 허기진 배고픔을 참아야 하는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공권력에 의해 일체의 식수와 음식물을 차단 당한 채 뜬눈으로 주변을 경계하며 초조한 시간을 보낸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덕인이는 희망을 잃지 않으려 했다고 기억한다. 대부분 탈진 상태에 빠져 있어도 그는 선봉에 서서

"장애인 생존권을 쟁취하자",
"노점단속 자행하는 김영삼 정권 퇴진하라"
고 구호를 외쳐댔다. 그리고 모여있는 농성자들을 위로하며, "나 태어나 이 강산에 무엇이 됐냐, 우리 가족 먹여 살리려 노점상이 되었단다"
하며 '늙은 노점상의 노래'를 힘차게 불렀다. 이때 빨간 츄리닝을 입고 선동하던 덕인 이를 경찰은 주동자로 주목하게 된다. 망루 아래의 용역은 "빨간 츄리닝! 내려와, 죽여버린다!"라는 욕설과 협박을 당한다. 11월 25일 오후 1시경 박흥수(남)가 경찰과 협의 하에 망루 위로 올라갔다. 박흥수는 덕인이에게 '빨간 츄리닝이 경찰의 눈에 띄니 옷을 바꿔입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경찰이 방심한 틈을 타 자신이 입고 있던 검정 골덴 바지를 덕인이와 바꿔 입은 후 보급품을 전달받을 수 있도록 하자고 약속을 하였다. 망루 밖에서는 이미 수많은 사람이 경찰을 상대로 집회와 인천 남부경찰서에 항의 방문을 하였다. 그리고 지역의 시민사회단체 및 종교인을 중심으로 안전을 보장토록 촉구를 하였다. 농성자가 먹을 물과 담요 그리고 하루 두 끼의 음식을 올려 줄 것에 대해 요구를 했지만, 경찰은 무시하였다. 남부 경찰서 관계자들은 "죽을 지경이면 내려온다"는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오후 잠시 소강상태에 빠지자 노점상과 장애인 등 80여 명이 망루에 있는 농성자들에게 의약품과 물, 빵을 전달하기 위해 망루에서 150m 거리까지 진입하여 전달하려 하였다. 그러나 경찰 당국에 의해 발각되어 제지당하였다. 이어 당뇨병, 폐결핵 환자를 비롯해 부상자에게 전달할 구급약품이라도 전달하고자 노점상 배미옥 씨가 지원하여 재진입을 하였으나 경찰에 의해 팔이 뒤로 꺾이는 등 폭행과 폭언을 들으며 구급약 전달은 또 실패하게 된다. 이때 경찰병력은 도로에 전경들이 있었고, 어통소 포장마차 주변에는 백골단과 체포조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후 농성자 중 황재안(남)이는 당뇨 환자라 경찰측에 약품을 호소하였으나 거절당하여 어쩔 수 없이 그는 자신의 소변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음식과 의약품을 구하러 망루를 내려간 덕인이는 사라지고 소식이 없었다.

사태의 심각함이 더해지자 이석근은 바닷가 쪽 아래로 밧줄을 내려놓고 보급품이 전달되기를 기다렸다. 26일 오후 11시 15분경 보급품을 찾으려 윤태열이 망루에서 내려왔지만 역시 곧바로 남부서로 연행되었다. 보급품을 찾으러 간 사람은 경찰에 의해 하나둘씩 연행되거나 지쳐나가는 상황이었다. 당시 망루에 있었던 노점상은 '물대포를 맞아 몹시 춥다. 배고프다.' 며 고통을 큰소리로 호소했지만, 절규의 목소리만 바닷가를 맴돌았다. 농성자들은 살인적인 추위와 물대포 세례 속에서 28일까지 5일 동안 죽음과 같은 상황을 견뎌야 했다. 11월 28일 아침 해안가에 한 구의 시신이 포승줄에 포박되고 상의가 벗겨진 채로 발견되었다. 덕인이었다. 다시 공권력은 서둘러 망루를 무력적으로 철거하였다. 농성자들은 덕인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전의를 상실하고 농성을 해제한다. 그들은 곧 전원 인천남부경찰서로 연행된다.

** 이덕인 열사의 투쟁과 몇 가지 의문을 중심으로 한 번 더 이어집니다.

최인기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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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앞 93일째 농성중인 ‘5·18농성단’ 허화평에 공개질의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9/05/15 10:19
  • 수정일
    2019/05/15 10:19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지만원 구속, 5·18역사왜곡 처벌법 제정을 요구하며 천막농성
 
임두만 | 2019-05-14 14:50:4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지난 2월 8일 국회에서 열린 지만원 초청 공청회에서 지만원은 물론 당시 자유한국당 이종명 김순례 의원은 5.18 광주항쟁에 대해 심각한 왜곡 발언을 했다.

이에 5.18 사형수인 김종배 전 의원을 비롯한 5.18 생존 피해자들과 유족들은 이 망언을 계기로 2월 11일부터 5·18역사왜곡처벌농성단(약칭 5·18농성단)을 조직, 국회 앞에서 93일 째 농성 중이다.

▲ 5.18 농성단이 장세동 씨 집으로 가고 있다. © 농성단 제공

즉 이들 농성단은 자유한국당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의원 국회 제명과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지만원 구속, 5·18역사왜곡 처벌법 제정을 요구하며 천막농성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농성단은 중간에 행동의 날을 정하고 4월 4일부터는 광주학살의 실질적 책임이 있는 이들의 집을 찾아가 공개질의를 던지는 등 행동으로도 압박하고 있다.

이에 농성단은 ‘행동의 날’ 첫날인 4월 4일 학살주범으로 꼽히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연희동 집 앞에서 제1차적으로 행동을 보였다. 이어 4월 11일 영등포경찰서에서 제2차, 4월 18일 정호용 전 의원의 과천 집 앞에서 제3차, 4월 25일 장세동 전 안기부장의 집 앞에서 제4차 ‘5·18행동의 날’ 행사를 통해 전두환과 지만원 처벌을 촉구하고, 집단발포 명령의 진범을 추적하고 있다.

▲김종배 농성단 대표(전 국회의원)가 정호용 씨 집에 질의서를 전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이어 농성단은 또 지난 5.2 목요일 제5차 ‘5·18행동의 날’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오후 2시 양재역 9번 출구 앞에서 집결, 인근에 거주하는 허삼수 전 의원(5.18 당시 보안사 인사처장) 자택 앞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1980년 5월부터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그의 혐의사실을 공개했다.

또 당시 보안사가 전두환 집권을 위해 저지른 5,17신군부 쿠데타에서 희생양으로 삼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하고 광주항쟁과 연계, 폭동 혐의 씌우기를 주도한 자가 누구인지, 5월 광주항쟁 당시 일어난 5.21 헬기사격 주도 등에 대해 공개질의를 했다.

이런 가운데 농성단은 오는 16일 1980년 5.18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으로 신군부 쿠데타 핵심이었던 허화평 전 의원의 집을 찾아 집 앞에서 기자회견을 한 뒤 공개질의서를 전달할 예정이다.

농성단에 따르면 허 전 의원은 전두환 신군부 핵심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을 연금하고,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하는 핵심이었으며,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으로서 시민사살명령이 내려진 5월 21일 전두환과 함께 광주에 왔을 것으로 추측한다.

▲연희동 전두환 씨 집 앞에서 농성을 벌인 ‘5.18 농성단’ ©농성단 제공

이와 관련, 전날인 13일 1980년 당시 주한미군 정보요원이었던 김용장 씨와 광주 주둔 505보안부대 수사관 출신 허장환 씨는 국회에서의 공개증언을 통해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를 희생양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제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김용장 씨는 이날 “전두환이 1980년 5월 21일 정오께 K57(제1전투비행단) 비행장에 와서 정호용 특전사령관, 이재우 505보안대장 등 74명이 회의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었다.

이에 농성단은 당시 전두환 비서실장이었던 허화평 대령 또한 광주에 있지 않았는지, 전두환의 광주시민 사살명령에 개입되지 않았는지, 이 범죄를 자백할 의향은 없는지 공개적으로 질의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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