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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는 국민" 김상조 신임 정책실장이 컬러링 바꾼 이유

<유 레이즈 미 업>으로 '국민 우선' 강조... 김수현 실장-윤종원 수석의 고별사

19.06.21 17:28l최종 업데이트 19.06.21 17:33l

 

 문재인 대통령은 21일 오전 김수현 정책실장 후임에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을, 윤종원 경제수석 후임에 이호승 기획재정부 1차관을 임명했다. 이날 오후 청와대 브리핑실에서 김상조 신임 정책실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문재인 대통령은 21일 오전 김수현 정책실장 후임에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을, 윤종원 경제수석 후임에 이호승 기획재정부 1차관을 임명했다. 이날 오후 청와대 브리핑실에서 김상조 신임 정책실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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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조 신임 청와대 정책실장이 휴대전화 컬러링을 바꿨다. 기존의 컬러링을 아일랜드 출신의 아카펠라 그룹 '웨스트라이프'(Westlife)의 <유 레이즈 미 업>(You raise me up)으로 바꾼 것이다.

웨스트라이프의 노래 <유 레이즈 미 업>에는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당신의 어깨 위에 서 있을 때 저는 더 강해질 것입니다)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당신이 저를 일으켜 세우실 때 혼자의 모습보다는 더 강해질 것입니다)"라는 가사가 나온다.

21일 공정거래위원장에서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자리를 옮긴 김상조 실장은 "여기서 'You'는 국민이다"라며 "저는 국민의 격려와 지원 위에서만 간신히 일어설 수 있는 미약한 사림이다, 많은 조언을 부탁드린다"라고 요청했다.

[김상조 실장] "경제 패러다임의 전환, 왜 제시했느냐면..."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오전 신임 청와대 정책실장과 경제수석에 각각 김상조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과 이호승 기획재정부 1차관을 임명했다(관련 기사 : '재벌개혁 전도사' 김상조 위원장, 청와대 정책실장 입성). 오후 2시께 김상조 정책실장과 이호승 경제수석이 춘추관을 찾아 기자들과 만났다.

발언에 나선 김 실장은 먼저 "제가 공정거래위원회 재직 2년 만에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옮기게 되었다"라며 "저의 미흡한 역량을 생각할 때 너무나 뜻밖이고, 공정위에서 계획했던 일들을 감안하면 아쉬움도 없지 않으나 정무직 공무원이 임명권자의 뜻을 따르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기에 감히 이 자리에 서게 되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김 실장은 "저를 정책실장에 임명한 대통령의 뜻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라며 "대한민국은 이른바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각고의 노력 끝에 놀라운 성공을 이루었고, (이는) 우리 모두가 자부심을 가져야 할 기적과 같은 성과다"라고 말했다.

이어 김 실장은 "여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성공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과거의 성공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게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라며 "과거의 밝은 면은 계승해야 하나 과거에 안주한다면, 과거로 회귀하고자 한다면 실패를 자초하게 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김 실장은 "이것이 문재인 정부가 경제 패러다임의 전환을 시대적 과제로 제시한 배경이다"라며 "여기에는 많은 국민들이 동의하리라 믿는다"라고 강조했다.

"과도기에 굴곡 있을 수 밖에 없어... 일관성·유연성 필요"

이어 김상조 실장은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가야 할 미래의 경제 패러다임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질문을 던진 뒤 문재인 정부가 제시한 '혁신적 포용국가'를 언급했다.

김 실장은 "문재인 정부는 혁신적 포용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를 3대 축으로 해서 국민 모두가 함께 잘사는 사람 중심 경제의 길을 가고자 한다"라며 "물론 예정된 정답은 없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라고 말했다.

김 실장은 "또한 경제 패러다임의 전환이 1년, 2년 만에 달성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균형을 찾아가는 과도기에 굴곡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역시 당연하다"라며 "하나의 선험적 정답, 만병통치약식 처방을 고집하는 것이야말로 실패를 자초하는 길일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김 실장은 "따라서 경제 정책의 성공을 위해서는 일관성과 유연성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 기준을 조화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라며 "'혁신적 포용국가'를 위한 '사람 중심 경제'라는 문재인 정부의 경제 정책 기조는 21세기의 모든 국가들이 지향하는 정책 목표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 실장은 "따라서 그 방향성에 대한 확신을 갖고 정부가 정책기조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기업을 비롯한 시장경제 주체에게 예측 가능한 환경을 제공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김 실장은 "물론 국내외 경제 환경의 변화에 부응해서 정책의 내용을 보완하고, 우선순위를 조정하는 등의 유연성을 갖추는 것 역시 필수다"라며 "대통령도 여러 차례 말했고, 또 2019년 경제정책 방향에서도 명시적으로 밝혔듯이 성과가 확인된 것은 더욱 강화하고, 시장의 기대를 넘는 부분은 조정하는 것이 정책의 기본이다. 지난 2년간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라고 짚었다.

김 실장은 "정책의 일관성과 유연성을 조화시키기 위해 청와대 정책실장으로서 경청과 협의에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다"라며 "또한 국민의 대표기관으로서 정부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책무를 수행하시는 국회의 여야 의원님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그 고견을 정책에 반영하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김 실장은 "마지막으로 정부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국민의 뜻을 받드는 것이다"라며 "재계와 노동시민사회를 비롯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국민 모두가 체감하는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약속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1일 오전 김수현 정책실장 후임에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을, 윤종원 경제수석 후임에 이호승 기획재정부 1차관을 임명했다. 이날 오후 청와대 브리핑실에서 이호승 신임 경제수석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문재인 대통령은 21일 오전 김수현 정책실장 후임에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을, 윤종원 경제수석 후임에 이호승 기획재정부 1차관을 임명했다. 이날 오후 청와대 브리핑실에서 이호승 신임 경제수석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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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승 경제수석] "경제팀의 유기적 조율 지원하겠다"

이어 이호승 수석은 "세계경제 여건이 어렵고, 하방위험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중책을 맡게 돼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라며 "혁신과 포용이 서로 선순환하면서 경제사회발전을 지속해 나가야 한다는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정책적으로 잘 뒷받침하는 데 모든 노력을 다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이 수석은 "우선 투자‧소비 등 내수와 민생 활력을 높이면서 대내외 리스크를 관리하는 것이 최우선 책무라고 생각한다"라며 "아울러 경쟁력과 생산성이 정책의 기본이 되도록 하겠다"라고 향후 정책방향을 제시했다.

이 수석은 "문제의식과 아이디어를 가진 분들을 널리 찾고 만나겠다. 정책 과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는 정부 내 칸막이가 없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라며 "경제팀이 경제부총리를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조율되고 팀워크를 발휘할 수 있도록 충실히 지원하겠다"라고 약속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1일 오전 김수현 정책실장 후임에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을, 윤종원 경제수석 후임에 이호승 기획재정부 1차관을 임명했다. 이날 오후 청와대 브리핑실에 정책실장과 경제수석들이 인사말을 하기위해 모여 있다. 왼쪽부터 김상조 신임 정책실장, 김수현 전 정책실장, 윤종원 전 경제수석, 이호승 신임 경제수석.
▲  문재인 대통령은 21일 오전 김수현 정책실장 후임에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을, 윤종원 경제수석 후임에 이호승 기획재정부 1차관을 임명했다. 이날 오후 청와대 브리핑실에 정책실장과 경제수석들이 인사말을 하기위해 모여 있다. 왼쪽부터 김상조 신임 정책실장, 김수현 전 정책실장, 윤종원 전 경제수석, 이호승 신임 경제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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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김수현 실장] "새로 오신 분들이 더 혁신적으로 일할 것"

이날 떠나는 김수현 정책실장과 윤종원 경제수석의 '고별사'도 있었다.

김수현 실장은 "문재인 정부 출범과 함께 청와대에서 일을 시작했다. 2년 조금 더 지났다"라며 "그동안 큰 영광이었다"라고 소회를 말했다.

김 실장은 "그런데 집권 중반기를 맞이해서 더 활기차고, 혁신적으로 일할 분과 교대할 때가 된 것 같다"라며 "그래서 새로 오신 분이 더욱 더 혁신적으로 일을 하리라 믿고 있다"라고 말했다.

김 실장은 "어느 자리에 있든 문재인 정부의 노력을 성원하고, 또한 마음을 모으겠다"라고 덧붙였다. 당분간 휴식을 취할 것으로 알려졌지만 부처 장관 등으로 재발탁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떠나는 윤종원 수석] "혁신적 포용국가 완성해 달라"

또한 윤종원 경제수석은 "1년에서 일주일 빠진 51주 전에 이 자리에 왔다"라며 "제가 '경제팀 간에 팀워크를 통해 포용적 성장을 위해서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라고 회고했다.

윤 수석은 "그동안 우리 경제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경기적이고, 구조적이고, 추세적인 도전과제에 대응할 수 있도록 혁신과 경제포용성을 높이기 위한 대책을 해왔다"라며 "나름대로 성과도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이어 윤 수석은 "아직도 전체의 성과를 국민들이 체감하기가 어렵고, 경제문제 때문에 여전히 마음 아파하는 국민들, 계층이 있다는 것에 송구스럽고, 가슴 무겁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윤 수석은 "앞으로 혁신적 포용국가를 만들어 나가는 과제에서 신임 실장과 신임 수석이 완결해 주실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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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공습 철회" 언론에 흘렸나...보도 맥락과 배경은?

민주당도 "상황은 심각"...이란의 격추 능력에 놀라
2019.06.21 15:54:53
 

 

 

 

내년 미국 대선만 아니었다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에 대해 군사공격을 감행했을까?

20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 대통령이 전날 저녁 7시 35분(이란 현지시간으로는 20일 오전 4시 5분) 발생한 이란의 미국 무인정찰기(드론) 격추에 대한 보복으로 이란에 대한 공격을 승인했다가 돌연 철회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국방부와 국무부 관료들은 이날 오후 7시(미국 현지시간ㆍ한국시간 21일 오전 8시)까지만 해도 예정대로 공습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공습 목표는 이란의 레이더 시설과 미사일 기지 등을 정밀 타격하는 것이었다. 
 

▲ 이란에 대해서는 강경파로 뜻을 함께 하는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오른쪽)이 20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과 트뤼도 캐나다 총리와의 정상회담에 참석하고 있다. ⓒUPI=연합


기밀 브리핑 받은 민주당 지도부도 "위험한 상황"

 


트럼프 대통령이 계획을 철회하는 지시를 내릴 때 작전은 이미 미사일을 발사하기 직전 준비작업 단계에 들어갔었다. 항공기들은 상공에 떠있고, 군함들은 정위치에 대기중이었다. 

<뉴욕타임스>는 이란에 대한 공습 결정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진과 공화당 지도부가 심각한 논의를 거쳤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전달받은 정부 고위 관료들을 인용한 보도라고 밝혔다. 신문은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2017, 2018년 시리아에 대한 두 차례 공습 이후 중동의 목표물에 대한 세 번째 공습이 될 뻔 했다"고 전했다.

공습 계획이 돌연 철회된 배경에 대해 신문은 "트럼프 대통령이 생각을 바꾼 것인지, 병참이나 전략적 이유로 계획을 변경한 것인지, 공습계획은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는 미지수"라고 덧붙였다. 

공습 계획과 철회와 관련해 취재에 들어가자 백악관과 국방부 관계자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지만 <뉴욕타임스>에게 보도를 자제해달라는 요청도 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트럼프 정부의 이란 겁주기 공습 쇼"라는 시각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쇼'로만 보기에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 이란은 대당 1억3000만 달러에 달하는 미국의 무인정찰기를 지대공 미사일로 격추했다. 미국의 보복 공습은 민간인 살상 등 우발적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이란 현지시각으로 21일 새벽 실시될 예정이었다. 보도대로라면 미국 현지시간으로 전날밤이라는 점에서 공습 예정 시간 직전에 철회 명령이 떨어진 것이 된다. 

이란은 미국의 드론이 반복된 경고 신호를 무시하고 이란의 영해 안에 진입해 격추했다는 입장인 반면, 미국은 이란의 앞바다이지만 이란의 영해에서 떨어진 공해상인 호르무즈 해협 인근 오만만에서 격추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란에 대해 군사적 공격으로 보복할 것인지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의 안보 참모들의 의견도 갈렸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 지나 해스펠 CIA 국장은 군사적 대응을 지지했다. 하지만 국방부 고위관료들은 이란에 대한 공습은 중동에 있는 미군을 큰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며 경고하는 입장이다. 

미국이 이란을 공습할 명분은 이미 충분하다. 미국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최근 오만해에서 유조선들이 공격을 받은 배후를 이란으로 지목하고, 미국의 드론도 공해상에서 이란이 격추했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20일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와 정상회담를 갖기 직전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드론이 공해상에서 격추됐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기록된 근거가 있다"면서 "이란의 미군 무인기 격추는 매우 큰 실수"라고 경고했다.  

게다가 이란은 지난 2015년 타결된 이란 핵협상의 핵심 조항인 농축 우라늄 제한을 파기할 것을 조만간 선언할 예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 핵협상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했으면서도 이란의 핵무기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경고해 왔다.

백악관은 중대한 군사 기밀 브리핑을 의미하듯 민주당 지도부까지 상황실에 불러들여 설명했다. 민주당 지도부는 브리핑을 받은 후 "어떠한 군사적 행위도 의회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촉구하면서도 상황 자체는 심각하다는 점에 동의했다.


하원의장인 낸시 펠로시 민주당 의원은 "이란이 탄도미사일 기술을 확산시키고, 중동 지역에서 테러를 지원하는 등 위험한 나라"라고 말했다.  

오히려 트럼프 대통령이 심각한 군사적 위기를 피하기 위한 방도를 모색하는 모습을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의 지도부를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대신 "경솔하고 어리석은 자가 드론을 격추하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본다"면서 이란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도 "두고 봅시다"라고만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무인기가 아니라 조종사가 탄 비행기가 격추된 것이었다면 훨씬 중대한 문제가 되었겠지만, 미국의 조종사가 위협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매우 큰 차이가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 국방부가 이란 공습의 후폭풍에 대해 우려하는 이유중 하나로 이란의 군사기술이 만만치 않다는 점도 꼽힌다. 이란이 격추한 미국의 드론은 이란의 지대공 미사일을 피할 수 있도록 개발돼 고고도로 비행중이었다. 이때문에 일부 미 국방부 관료들은 "이번 드론 격추는 미국이 중동 지역에 더 많은 병력과 정찰을 시행할 경우 이란이 미국을 난처한 처지에 빠뜨릴 수 있다는 역량을 보여준 것"이라고 놀라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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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당국자, “한반도 대화 신동력 불어넣었다”

“시진핑 국빈 방북은 우호의 여행이자 평화의 여행”
이광길 기자  |  gklee68@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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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6.22  09: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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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일 오전 평양 금수산영빈관 경내를 산책하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부부. [신화통신 캡쳐]

“시진핑 총서기의 이번 (북한) 방문은 우호의 여행(友好之旅)이자 평화의 여행(和平之旅)이다.”

쑹타오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 21일 오후 관영 <신화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중국은 중조 전통우의을 다지는데 힘을 쏟고, 조선의 신 전략노선을 지지하며,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 프로세스를 추동한다는 확고한 결심을 표명했다”는 것이다. 

특히, 시 주석의 이번 방북이 국내외의 주목을 받은 이유는 “시기적 중요성” 때문이라며, “각국이 (한)반도 대화를 추동하는데 힘을 보태고 새로운 동력을 불어넣었다”고 강조했다. 시 주석은 오는 28~29일 일본 오사카 G20 정상회의 계기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다.

20~21일 시 주석의 ‘국빈 방북’이 기대했던 목표에 도달했고 원만한 성공을 거뒀다”고 자평한 쑹 부장은 세 분야로 나누어 구체적인 성과를 밝혔다. 

첫째, “중조 양당 양국 최고지도자들이 깃발을 들어 방향을 정하고 중조우의(북중친선)을 새로운 장으로 이끌었다”고 했다. 

시 주석의 방북은 북중 수교 70주년을 기념하는 이벤트이고, 지난해 3월 이후 북중 최고 지도자의 5번째 만남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 최고지도자가 지난 19일 북한 <노동신문>에 기고를 실어 “중조우의를 이어가며 시대의 새 장을 쓰고자 한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21일 오전 10시 시 주석과 김정은 위원장이 함께 평양 시내 ‘중조우의탑’을 찾았다. 전날 회담에서 김 위원장은 시 주석의 북중관계 발전법칙 총화에 찬동하고 “시진핑 총서기의 이번 조선 국빈방문은 조선 당과 정부, 인민에 대한 거대한 정치적 지지와 고무이자 전 세계를 향해 북중친선을 한껏 과시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양측은 “고위층 상호방문을 더 긴밀하게 하고 중조 전통우의와 양당과 양국관계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더 큰 발전을 추동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둘째, “국정경험을 서로 교류하여 새 시대 중조관계의 내용을 채우기로 했다”는 점이다. 

시 주석은 김정은 위원장이 새로운 전략노선을 견지하고 경제발전에 집중하기로 한 정치적 결단을 높이 평가했다. 김 위원장은 북한의 사회주의 건설과 경제.민생 발전에 대한 시 주석의 관심에 감사를 표시했다. 양측은 북중 수교 70주년 기념 계기에 실무협력을 확대하고, 우호교류를 심화하며, 농업, 관광, 교육, 체육, 언론, 청년, 지방 등에서 교류협력을 전개하기로 했다. 

셋째, “‘책임대국’을 과시하고 (한)반도 정치대화에 새로운 동력을 주입했다”고 자부했다. 

쑹 부장은 “조선반도 문제에서 중국은 ‘책임대국’을 견지해왔다”고 말했다. 한반도 비핵화, 평화와 안정, 대화와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을 견지하면서 적극적으로 평화를 권하고 회담을 촉진하여 대화 추세를 다지고 정치적 해결 프로세스를 추진하는 데서 건설적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그는 “시진핑 총서기와 김정은 위원장은 현재 반도 정세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대화 프로세스를 유지할지 깊이 있고 솔직한 대화를 나눴다”고 알렸다. 

쑹 부장에 따르면, 시 주석은 “반도 정세는 지역 평화안정과 관련된 문제이고 반도 문제를 대화로 해결하는 것인 정확한 선택이며 전략적 높이와 장기적 관점에서 정세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고 반도 평화와 안정을 확실히 유지하며 반도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여 지역의 장기적 안정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시 주석은 “지난 1년 간 조선 측이 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고 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 프로세스를 재개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을 적극 평가하고, “중국은 조선을 비롯한 유관국들과 소통과 협조를 강화하여 반도 문제의 대화협상 프로세스를 추동하고 지역 평화안정 발전번영에 적극 공헌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인내심을 유지하면서 반도 정세를 관리하고 반도 평화 안정을 유지하며 조선의 발전에 좋은 외부환경을 만들겠다”고 호응했다. 이어 “유관국들이 조선과 함께 각자의 합리적 우려를 해결할 방안을 모색하고, 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 프로세스에서 새로운 진전을 촉진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신화통신>에 따르면, 쑹타오 부장은 “친한 이웃은 나라의 보물”이라고 강조했다. “주변은 우리나라(중국)가 발붙이고 살 곳이자 발전번영의 토대”라며 “주변 안전과 안정 수호는 우리나라 전략이익에 관한 일”이라고 했다. 특히 “지금 세계가 100년 만에 유례없는 큰 격변기에 직면”했다는 정세인식도 드러냈다.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무역전쟁을 전방위로 확대하며 중국을 압박하는 상황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시 주석은 펑리위안 여사와 함께 20일 낮 12시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해 김정은 위원장 부부의 영접을 받았다. 공항 환영행사, 평양 시내 카퍼레이드, 금수산태양궁전 앞 환영행사, 금수산영빈관에서 회담과 만찬, 능라도 5.1경기장에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불패의 사회주의’ 관람 등 첫날 일정을 소화했다. 21일 오전 10시 김 위원장 부부와 모란봉구역에 있는 우의탑을 참배했다. 이어 금수산영빈관에서 김 위원장 부부와 경내를 산책한 뒤 오찬을 함께 했다. 오후 3시 평양 순안공항에서 김 위원장 부부의 환송을 받으며 귀국길에 올랐다. 이틀 간 평양 시민 수십만명이 거리에 나와 양국 국기와 꽃술을 흔들며 ‘국빈’을 맞이하고 환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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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민주노총을 가둔 노동존중 세상은 없다”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9/06/22 10:03
  • 수정일
    2019/06/22 10:03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민주노총, “민주노총을 가둔 노동존중 세상은 없다”
 
 
 
백남주 객원기자 
기사입력: 2019/06/22 [07:13]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영장실질심사 출두에 앞서 발언하고 있는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 (사진 : 노동과세계)     © 편집국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이 국회 앞 노동법 개악 저지’ 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21일 밤 구속된 것에 대해 민주노총은 민주노총을 가둔 노동존중 세상은 없다며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민주노총은 21일 논평을 통해 정부가 국회 개원에 앞서 민주노총 위원장을 구속한 이유는 분명하다며 민주노총의 저항을 짓밟고노동법을 개악하고저임금 장시간 노동 체제를 유지하려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민주노총은 민주노총은 더 이상 촛불정부가 아닌 노동탄압 정부를 상대로 한 전면적이고 대대적인 투쟁을 벌일 것이라고 선포하며 투쟁의 불길은 6월 울산 전국노동자대회에서 7월 공공부문 비정규직 총파업으로그리고 민주노총 전조직의 전국적 총파업 투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노총은 21일 밤 비상 상임집행위원회를 열어 대책을 논의하고, 22일엔 비상 중앙집행회의를 열기로 했다같은 날 오후엔 청와대 앞에서 규탄 집회를 개최한다.

 

이미 민주노총은 간부들에 대한 구속수사위원장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등이 이어지자 20일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현 상황에 대해 토론한 바 있다민주노총 중집은 문재인 정부의 노골적인 노동탄압에 노동관계를 전면 재검토하고 모든 단위 집회에 문재인 정부의 노동탄압 규탄 기조를 포함키로 했다.

 

한편김명환 위원장은 21일 아침 서울 남부지법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 출두하며 향후 투쟁과 관련해 조합원들을 상대로 메시지를 남겼다김 위원장은 설사 제가 저들의 탄압으로 구속되더라도공공부문 비정규직 총파업을 비롯한 노동기본권 확대 투쟁국회 노동법 개악 저지와 최저임금 1만원 쟁취 투쟁 등 너무나 정당한 민주노총의 7월 총파업 투쟁만큼은 반드시 사수해주시길바란다며 이를 통해 민주노총의 자존심을 걸고 하반기 대투쟁을 만들어가자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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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 구속에 대한 입장

 

결국 정부는 총노동의 수장을 잡아 가뒀다.

 

민주노총을 가둔 노동존중 세상은 없다.

 

정부가 국회 개원에 앞서 민주노총 위원장을 구속한 이유는 분명하다민주노총의 저항을 짓밟고노동법을 개악하고저임금 장시간 노동 체제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위원장을 잃었다고 해서 물러나거나 힘을 잃을 조직이 아니다.

 

민주노총은 더 이상 촛불정부가 아닌 노동탄압 정부를 상대로 한 전면적이고 대대적인 투쟁을 벌일 것이다.

 

민주노총은 주말을 경과하며 긴급 중앙집행위원회를 소집해 이미 수립한 투쟁 계획의 세부적인 내용을 다듬을 것이다.

 

그리고 투쟁의 불길은 6월 울산 전국노동자대회에서 7월 공공부문 비정규직 총파업으로그리고 민주노총 전조직의 전국적 총파업 투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민주노총 백만 조합원은 기필코 구속된 네 동지를 석방시키고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끝낼 것이다.

 

우리는 이미 준비하고 결의하고 있다.

 

보라투쟁하는 조직 민주노총이 어떻게 싸워 나가는지.

 

민주노총은 무죄다노동탄압 분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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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200만 '검은 대행진'의 진짜 배후

[창비 주간 논평] "누구도 나를 대표하지 않는다"
 
 
"누구도 나를 대표하지 않는다." 
"인민은 당신(행정 수반)의 자식이 아니다." 
"생리 주기보다도 짧은 20일이 법안 의견수렴 기간이라니 말이 되나?" 
"항쟁은 출신을 묻지 않는다. 본토 이주민도 동참한다."

세계를 놀랍게 하고 홍콩인들 스스로도 놀란 최근 홍콩 시위와 집회에서 나온 말들이다. 누구에 의해서도 대표되지 않겠다는 구호는 지도자 직선을 요구했던 2014년 '우산혁명' 때 처음 등장했다. 그때와 지금은 무엇이 같고 다른가? 홍콩 시민과 학생들이 길거리로 연일 쏟아져 나오는 현상을 단지 특정 정책에 대한 반발, 정부와 시민의 대립, 또는 중국과 홍콩의 대립으로만 본다면 우산혁명 때와 비교하기 어렵고 이번 사건 후 홍콩이 어떻게 달라질지도 포착하기 어렵다. 

우산혁명 때는 분명한 지도부가 있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누구도 나를 대표하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점점 강해져, 점령구 집회의 중앙무대를 거부하고 단체들의 지휘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많았다. 오직 나 자신으로 참가하겠다는 자발성의 '혁명적' 성격은 찬사를 보낼 만 하지만, 상황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모든 조직을 거부하고, 심지어 점령구에서의 토론과 모임도 거부하면서 출구전략조차 토론할 수 없게 되었다. 정부에 대한 비판보다 시위대 내부 입장 차이에 대한 공격이 심해졌고, 결국 역사상 처음으로 도심을 79일 동안 점거했던 군중은 무력하게 해산되고 말았다. 도심은 빠르게 일상을 되찾았다.

우산혁명 이후 짙은 무력감 속에서 토론은 이어지기 어려웠다. 정부는 몇년이 지난 후에도 우산혁명 주요 참여자들을 기소했고, 그들은 최근 속속 수감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범죄인 인도 법안 수정이 촉발한 반대 시위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어 103만 명을 모았고 일부 지역을 잠시 점거했으며, 마침내 지난 16일에는 200만 명이 나왔다. 누구도 이끌지 않았고, 지금도 곳곳에서 경찰 방어선과 대치하는 이들 상당수는 익명의 청년들이다. 이번 시위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우선 여기에는 홍콩인들이 오랫동안 자랑스러워했던 법치의 보장을 더이상 받을 수 없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깔려 있다. 특히 '일국양제' 속 홍콩의 공간이 점점 사라져 중국에 종속될 뿐 아니라 아예 홍콩이라는 공간이 형체조차 없어질 것 이라는 우려가 크다. 갑자기 실종된 후 중국 본토에서 조사받던 서점 주인들 중 한 명은 정부가 법안을 강행하려 하자 아예 대만으로 이민을 가버렸다. 시민들이 뽑은 의회 의원들의 자격이 정부에 의해 박탈되고, 페이스북에서 독립을 주장한 글이 근거가 되어 정당 활동이 중지당했으며, 교수도 의원도 청년도 잡혀갔다. 두려움은 지난 몇 년간 사람들을 거리에 나오지 않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실상 '홍콩을 지킬 마지막 기회'라 여겨진 이번 반대 시위가 기폭제가 되자, 그 두려움은 놀라운 자발성과 새로운 광경을 만들어냈다. 

우산혁명 참여자들이 몇년 후에도 기소되고 수감되는 걸 보면서 이제 시위대들은 신분 노출을 피할 방법을 서로 공유한다. 마스크와 고글은 최루탄도 막지만 신분 노출도 막아준다. 시위 현장에서 '셀프 카메라(셀카)'나 사람들 얼굴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는 걸 삼가고, 교통카드 대신 현금을 쓴다. 일회용 심(SIM)카드로 바꿔 끼고 중국 애플리케이션들을 휴대폰에서 지운다. 페이스북 대신 텔레그램을 쓰며, 거기서 수시로 공유되는 정보에 따라 각자 선택해서 움직인다. 경찰이 찾아낼 수 있는 '주동자'는 더이상 없다. 익명의 네티즌들은 필요한 물자 목록을 중요도 순서에 따라 분류하여 공유하고, 다양한 '교전 수칙'을 자발적으로 만들어 공유한다. 모든 행동은 참가자 자신이 선택해서 하면 된다. 

그리고 전에 없던 다양한 이름의 주체가 등장했다. 행정 수반이 "100만 명이 반대해도 강행하는 이유는 제멋대로인 자식을 엄마로서 내버려둘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자, 분노한 시민들은 '홍콩 엄마'의 이름으로 집회를 열어 "인민은 당신의 자식이 아니다. 당신은 한 지역의 수장이고 심부름꾼일 뿐"이라고 외쳤다. "아이야, 두려워 말아라. 아빠가 여기 있다"며 아빠 부대가 등장했고, 법안 지지 글을 회사 홈페이지에 올린 사장에게 직원은 "사장님, 당신은 나에게 월급을 주는 사람이지만 당신의 입장은 나를 대표하지 않습니다"라는 글로 대응했다.

이번 사안에 관심이 적을 것 같은 장년층을 겨냥하여, "수정 법안이 통과되면 홍콩 돈은 휴지조각이 되어버린다"는 포스터를 곳곳에 뿌리며 관심을 촉구하는 이들도 있다. 또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광둥어에서도 다소 비하적 의미가 담긴 '아줌마'라는 호칭을 스스로 내건 집단은 말한다. "우리 아줌마들은 가족을 돌보느라 이번 시위에 못 나갈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분명히 반대한다. 전업주부건 맞벌이건 싱글맘이건 본토 이주민이건 종족과 계층에 상관없이 모든 아줌마의 이름으로 호소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고 하여 한국에도 유명해진 '홍콩 엄마' 집회에서 엄마들은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우리가 지금 일어나 우리 자식들이 폭도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으면 아이들이 죽을까 봐, 그래서 중국 톈안먼사건 희생자 엄마들처럼 자식이 죽고 난 후 30년이 지나서도 계속 그 말을 해야 할까 봐, 늦기 전에 지금 일어나 말하겠다." 자식을 지키겠다며 나온 엄마들은 홍콩의 청년들을 통해 30년 전 중국 땅에서 죽어간 이들을 함께 끌어안는다. 이렇게 소환되는 '톈안먼 사건'은 단지 오래전 먼 곳에서 있었던 불행한 비극에 그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아 이어진다. 

운명에 더 이상 순응하지 않고 '나의 도시 홍콩을 스스로 구하겠다'는 이들의 목소리는 이제 하나가 아니다. 여러 이름이 등장하고, 이름없는 시민이 등장하고, 누구의 가르침도 따르지 않는다. 이 사건을 그저 중국과 홍콩의 대결 구도로만 본다면, 또는 한국에서 배운 것이라고 자찬하는 데 그친다면, 곳곳에서 새롭게 솟아나는 가능성을 보지 못한다. 그 가능성은 홍콩만의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든 생겨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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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 철, 물 싸움엔 부모 자식도 없다는데 아…봐 버렸다, 아랫논 임자의 그 짠한 표정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9/06/20 08:34
  • 수정일
    2019/06/20 08:3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원유헌의 전원일기](2)모내기 철, 물 싸움엔 부모 자식도 없다는데 아…봐 버렸다, 아랫논 임자의 그 짠한 표정

원유헌 cameragaga@naver.com
입력 : 2019.06.20 06:00 수정 : 2019.06.20 06:01
 

제 논에 물 대기

모내기를 앞두고 트랙터로 논 바닥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동안 배수로를 통해 물이 빠져나가고 있다. 모내기를 끝내고 나면 다시 논에 물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물 한 방울이 아쉽다. ⓒ 원유헌

모내기를 앞두고 트랙터로 논 바닥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동안 배수로를 통해 물이 빠져나가고 있다. 모내기를 끝내고 나면 다시 논에 물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물 한 방울이 아쉽다. ⓒ 원유헌

 

“뺨따구 안 날렸소?” 

옆 마을 동생 S가 트럭을 멈추고 내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예초기로 논두렁 풀을 베던 중이었고, 아직 끝내지 못한 상태에서 논두렁 옆면의 풀이 남아있는 것을 보고 S가 한 말이다. 왠지 피 튀기는 현장의 냄새가 느껴져 뉘앙스를 맞췄다. 

“응, 좀 이따 갈아불라고.” 

바야흐로 모내기 시즌이다. 모든 신경이 곤두서는 시기다. 씻나락을 물에 담그면서 시작하는 벼농사는 모내기까지 정해진 시간표대로 오차 없이 진행돼야 한다. 60도의 온탕소독을 마친 나락이 하얀 싹을 틔우고 못자리로 이주해 야들야들 자라는 동안 논에서는 별도의 작업을 수행한다. 1차 마른 로타리(흙을 잘게 부수는 작업) 후 논에 물을 가득 담아 2차 로타리 작업과 써레질(논 흙의 높이를 일정하게 다듬는 작업)을 한다. 다시 흙탕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물을 뺀 후 모내기를 하고 나서 재차 모가 잠기지 않을 정도까지 물을 방방하게 받아둬야 한다. 여기까지가 어르신들이 말씀하시는 ‘나락 농사의 절반’이다. 

짧게 설명하기 억울할 정도로 쉽지 않은 과정이다. 물론 로타리와 모내기는 트랙터와 이앙기가 한다. 운전은 기계 주인이 하는데, 나는 주인이 아니므로 기계 주인의 상황과 일정에 맞춰 논의 상태를 스탠바이시키는 임무를 맡는다. 그중 가장 어려운 것이 논에 물 받기다.

논에 받는 물의 양은 생각보다 많이 필요하다. 보통 경지정리된 논의 한 구역을 ‘한 단지’라고 표현하는데, 보통 가로 30m·길이 100m를 기준 크기로 하며, 4마지기반, 900평, 3000㎡ 모두 같은 크기의 한 단지 면적이다. 이런 단지 논에 물을 받으려면 땅을 적시는 양을 포함해서 대략 10㎝ 정도의 높이는 돼야 한다. 계산은 간단하다. 100m×30m×0.1m=300㎥. 즉 300t의 물이 필요하다. 5t짜리 소방차 60대 분량이다. 몇 년 전 심한 가뭄에 심각한 표정으로 소방차 호스를 잡았던 정치인들도 이 정도 계산은 가능했을 텐데. 

부모 자식 간에도 물싸움을 한다고 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논에 물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뭄 때는 물론이고 물이 충분하다고 해도 다툼은 생기기 마련이다. 논 주변에 보이는 모든 사람과 트럭이 적이다. 논농사를 홀로 전담하는 여성 농민이 드문 이유는 순간적으로 뿜어야 하는 근력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간혹 거칠게 밀어붙여야 하는 힘겨루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근거 미약한 분석도 해본다. 

며칠 전에도 “낼 모래 써레질 할 수 있게 물 받아 놓으시게요” 하는 기계 주인의 청유형 명령이 떨어졌다. 불퇴전의 각오로 저수지부터 우리 논까지 수로를 훑으며 물길을 뚫어 내려왔다. 한 방울의 물도 흘려 보내지 않겠다는 자세로 수로 바닥까지 꼼꼼히 막는데 뒤에서 누가 불렀다.

“사장님, 절반만 흘려 보내주시믄 안 되까요이.” 

나보다 아래쪽 논 임자인데,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보이려 애쓰고 있었다. 얼굴만 보자면 논이 아니라 주인이 물을 마셔야 하는 상태였다. 안 된다고 인상 쓰면 수로에 쓰러질 각오가 드러났다.

“이만큼이면 되시겠습니까?” 

물이 내 것도 아니건만 내 논이 상류에 있다고 돌 조금 치워주면서 유세를 떨고 앉았다. 더 상류 쪽 사람들에게 습득한 말투였다. 그나마 물길 터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쩌면 부드럽게 “사장님~”이라 불러서 기운이 좀 샌 것도 같다. 그러고보니 언젠가부터 ‘사장님’이란 호칭에 거리낌 없이 고개를 돌리는 내가 신기하다. 소상공인 전력 한번 없으면서 말이다.

이곳에서 ‘사장님’은 잘 모르는 사람(남자)을 부를 때 실례나 시비를 최소화시키는 호칭이다. 사실 농사짓는 사람들은 직원의 유무를 떠나 웬만하면 사장이다. 소상공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농민들은 생산, 유통, 포장, 영업 등을 총괄하는 업무를 직접 하고 있다. 오히려 사장 아닌 사람이 드물다. 자연스러운 호칭이다. 

지금까지 들어본 호칭은 다양한 편이다. 사장님, 아버님, 선생님, 아저씨, 형님, 원씨, 어이 등. 상황에 따라 수긍할 만한 호칭도 있고, 참 어색하고 불편해서 귀에 익지 않는 것도 있다. 그래도 그나마 부르는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참고 적응하는 편인데, 최근 색다른 호칭을 들었다.

농협에서 진행하는 농작물 피해보험의 손해평가원 교육이 있어 순천으로 갔다. 구례에는 감나무가 태풍 피해나 냉해를 입는 경우가 많아 일반 농민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한 뒤 실전에 투입하기 위한 교육이다. 주변 시·군에서 모여서 교육장인 2층은 로비까지 붐볐고, 쉬는 시간에 화장실도 만원이라 귀찮아도 1층 화장실로 내려가니 한적하고 좋았다. 손 씻고 엉덩이에 물기 문지르며 다시 계단으로 가는데, 뒤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르신~” 

두어 발짝 더 가는데, 또 불렀다. 싸한 느낌에 ‘설마’ 하며 돌아보니 멀리서 한 여인이 다가왔다. 누군가를 부르던 그 여인과 나 사이엔 아무도 없었다. 조명도 안 켜져 실루엣만 보이던 그 여인은 한껏 다가서며 살갑게 말했다. 

“어르신, 엘리베이터 이용하세요. 이리 오세요.” 

왜 가슴이 내려앉았을까. 점점 다가오면서 드러나는 그 여인의 액면 연령은 어림잡아도 내 아래는 아니었다. 나처럼 그 여인도 나의 실루엣만 봤을 텐데, 무슨 근거로 어르신이라고 불렀을까. 생전 처음 듣는 호칭에 심장은 계속 나대고 있었다. 약간의 어색함, 그보다 좀 더한 억울함 때문이었다.

모내기를 마친 논에 노을이 비치고 있다. 이맘때가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해지는 시간이다. ⓒ 원유헌

모내기를 마친 논에 노을이 비치고 있다. 이맘때가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해지는 시간이다. ⓒ 원유헌

사실 ‘어르신’이라는 말은 어느 정도 대상의 기준이 객관화돼 있다고 볼 수 있다. 만 65세 이상의 대한노인회 소속 회원증을 소지하거나, 노화로 인해 거동이 불편해서 도움과 공경이 필요한 정도의 노인을 부를 때 쓰는 말이다. 동네에서도 여든 넘은 분들 중 일부만 듣는 극존칭이다. 물론 모르는 분들을 ‘어머님. 아버님’ 하기 쑥스러워 어르신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적어도 내게 그렇게 소리지른 것은 폭행이었다. 

그 여인이 더 가까워지기 전에 됐다 괜찮다며 계단으로 서둘러 올라갔다. 이후 2시간여 진행된 교육은 기억에 없다. 내내 생각했다. 도대체 뭘 보고 어르신이라고 불렀을까. 내 몸이 이미 어르신 체형인가? 다리가 짧아서? 팔이 굵어서? 목이 거의 없어서? 

결론은 자세였다. 어쩌면 흐느적, 어쩌면 뒤뚱거리며 걷는 모양이 몸이 불편한 노인의 걷는 모양처럼 보였을지 모르겠다. 순간적으로나마 아무런 근거 없이 그 여인이 어르신이라는 호칭을 선택했을 리 없고, 그러한 판단의 근거는 내가 제공했을 것이다. 자가배양하던 억울함을 진정시키고 반성 모드로 전환했다. 힘 있게 걸을 것이다. 꼿꼿이 펼 것이다. 턱은 당기고 엉덩이를 모으면서 발끝을 뻗을 것이다. 

예상대로 노력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렇게 또 나와 타협하고 허물어졌다. 그러니 아랫논 임자의 사장님 호칭도 고마웠던 것이다. 

동생 S의 말대로 논두렁 뺨따구를 마저 날린 뒤 잠깐 집으로 갔다. 아르바이트 겸 배운 도둑질 써먹느라 군청 일을 하던 것이 시간에 몰렸다. 그 외에도 몇 가지 독촉이 쏟아졌다. 왜 일은 이렇게 한꺼번에 몰리는지, 하마터면 억울할 뻔했다. 

누군가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 뛰어야 한다’고 했다. 며칠 내내 뛰듯 지내는 이유는 분명 며칠을 걷는 만도 못하게 지낸 탓일 거다. 손 더디고 발 느린 걸 본인이 제일 잘 알면서 뛰기 싫으면 서둘러 걷기라도 할 일이지, 안 하고 미룬 일 고스란히 자신이 할 거면서 괴롭기 전에 편안함을 먼저 누린 죗값이다. 나의 선택일 뿐이다. 

4시간 만에 돌아온 논의 물꼬는 심하게 변형돼 있었다. 모인 물이 논으로 흐르도록 댐처럼 가로막았던 돌무더기는 폭격을 맞은 것처럼 수로에 길게 흩어져 있고, 그나마 바닥에 붙어 내려오던 물은 누군가의 상류 댐에 가로막힌 듯했다. 빠진 기운 추슬러 다시 한번 수로를 따라 여행을 해야 했다.

만약,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논에 물이 심하게 들어가 넘칠 것을 걱정하는 것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물이 방방해서 잡초가 덜 나는 것이오” 할 것이다.

또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 논에 물이 가득하고 논두렁은 콘크리트처럼 단단하여 물 한 방울, 우렁이 한 마리 새나가지 않아 일 좀 줄고 편안히 농사짓는 것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혼자 잘 노는 편이다. 농사의 좋은 점은 몸은 바쁘게 일하면서도 머릿속은 맘대로 놀아도 된다는 것이다. 명상-상상-공상을 이어가다 지치면 라디오 청취도 좋다. “이번 U-20 월드컵에서 우승한 나라 선수들은 정말 신체적인 피지컬이 대단합니다.” 전문가의 의견이란다. 심리적인 마인드가 안정되고 정신적 멘털이 강하다면 전설적인 레전드가 나올 거라는 예상은 나도 하겠다. 라디오는 아침에만 들을 만했다. 껐다. 

해는 저물고 자동으로 몸이 지쳐갔다. 수로를 따라 내내 숙인 제법 큰 머리가 무거워 고개를 들어보니 예전에 인사드렸던 옆 동네 어르신이 지나고 있었다.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일은 다 끝내셨어요?” 

반가워하려다 정색을 하셨다. 

“일이 어떻게 다 끝나나. 죽어야 끝나지.” 

아무 말도 못했다. 까불다 걸린 것 같아 창피했다. 맞다. 어르신들께 일이란 건 그냥 생활이고 습관이고 숨 쉬는 방식일 뿐이다. 끝내야 하는 과업이 아니다. 일생 동안 거부하기보다는 받아들이며 일을 자신의 일부로 흡수한 모습이었다. 멋지다. 

아닌가? 혹시 저 어르신도 호칭 때문에 삐치신 걸까? 모르겠다. 다음엔 그냥 아버님이라고 해야겠다. 단순한 게 좋은데. 이젠 ‘어르신’ 죽어도 안 쓴다. 에이. 
 

▶필자 원유헌 
 
[원유헌의 전원일기](2)모내기 철, 물 싸움엔 부모 자식도 없다는데 아…봐 버렸다, 아랫논 임자의 그 짠한 표정
 
1967년생. 44년간 서울에서 살다가 2011년 연고가 전혀 없는 전남 구례로 내려가 농부입네 살고 있다. 농사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들어 각종 아르바이트로 현찰을 보충하며 연명한다. 2018년 <힘들어도 괴롭진 않아>(르네상스)라는 책을 만들기도 했으나 8년째 나아진 건 없다. 웬만하면 그러려니 하며 산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6200600045&code=100100#csidxb952e38658c4657a9b6c172574e8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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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라는 칭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 열사 투쟁의 의의

열사라는 칭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 열사 투쟁의 의의최인기 빈민스토리(10)
  • 최인기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
  • 승인 2019.06.19 19:50
  • 댓글 0
▲ 추모제 참석한 노점상

1. 추모(追慕)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은 기록한다는 것이다. 기록을 통해 과거를 돌아보지 않으면 문제는 반복된다. 책임을 묻지 않게 되고, 책임을 묻지 않으면 악순환이 반복된다. "민족민주열사. 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추모연대" 관계자는 추모에 대한 사전적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추(追)’라는 말은 추억하고 기린다는 뜻보다 ‘따른다’라는 실천적인 뜻에 훨씬 가까운 말이다. ‘모(慕)’라는 말은 마음과 정신으로 사모한다는 뜻이다. 희생당한 이들을 추모하고 계승하는 일이란 이들이 생전에 추구했던 사상과 실천을 남은 자들이 마음과 정신으로 따르는 일이 된다. 이 밖에도 열사에 대한 사전적 의미와 정의를 찾는다면 의로운 뜻을 가지고 이를 지키기 위해 굳게 싸우다 가신 분들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한 사람의 죽음은 시대의 정신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인권에서도 사회권이 중요하듯이 노점상 투쟁 과정에서 희생당한 분에 대한 사회적 공감은 지금껏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문제를 개별적이거나 우발적인 사건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기록을 통해서 잊힌 이야기를 들춰내고 다시 세상에 던지는 이유는 우발적인 사건처럼 보이는 이야기의 숨겨진 이면을 통해 새롭게 추모의 의미를 되새겨 보기 위함이다.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 열사 이후 그 이듬해 1996년 부산의 해운대 해수욕장 근처에서 노점상을 하던 장애인 노점상 이동재 씨 분신 사건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반신 마비로 인해 휠체어를 이용해 살아가던 그의 분신 소식은 인터넷 시대가 시작되면서 과거 언론과 신문 기사에만 의존했던 소식들을 빠르게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노점상 단체의 활동가들은 부산으로 급히 파견되어 이 사건에 개입했다. 이를 계기로 부산지역의 해운대 해수욕장과 광안리 해수욕장 그리고 부산 사상과 부산역 등을 중심으로 조직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이후 울산 대구 등 영남권 조직을 확대해 나간다.

거리에서 쓰러지고 저항하다 유명을 달리하거나 상처를 당하는 사람은 다음 해 1997년 평택의 노점상 양승진 열사, 그리고 1998년 종로 5가의 장애인 노점상 전창옥 씨, 2002년 역시 단속으로 커다란 상처를 입은 부산의 장애인 노점상 하재명 씨로 이어진다. 소위 군부독재 정권이 물러나도 여전히 노점상 생존권은 변하지 않았음을 이 사건들을 통해 보여준다. 한국 사회에서 특정 이슈를 둘러싸고 희생되거나 유명을 달리할 경우 저항의 과정은 보통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저항 주체의 역량이 준비되어 있지 않거나 역부족한 경우로, 저항이 폭발하지 않고 열사 투쟁 그 자체로 잠잠해지는 경우다. 양승진 씨는 경찰의 회유로 가족이 장례식을 서둘러 치르게 된다. 종로 5가 전창옥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사건들이 개별적, 우발적으로 발생하여 저항 주체와 결합하지 못하고 소멸하는 사례가 되었다. 그러나 노점상 조직은 열사가 돌아가시는 사건을 계기로 지속적이고 완강한 주체들을 형성하고 조직을 발전시켜 나갔다. 장애인 노점상 하재명 씨는 부산지역의 활동가들이 긴밀하게 결합하여 저항이 확대되는 경우였다. 그리고 이러한 탄압과 이에 대한 투쟁은 자연스레 민주화운동 과정과 결합하여 부당한 체제나 국가, 정부에 대항하는 조직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9년 대전의 장애인 노점상 윤창영 열사와 2002년 뇌성마비 1급 장애인 여성 노점상 최옥란 열사다.

2. 윤창영 열사 이야기

오래전 대전역 근처의 가락국수 포장마차는 여행객의 발길을 붙잡고 출출한 배를 채우던 곳이었다. 오래전 대전역 광장을 가로질러 지하도 계단을 내려가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웅크려 장사하던 장애인 한 분이 계셨다. 3살 때부터 자신의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왼쪽 다리와 양손이 반쯤 마비된 2급 장애인으로 언어마저도 매끄럽지 못했다. 그의 이름은 윤창영 씨로 대전역 광장을 배회하던 노숙자들에게는 큰형님으로 불렸다. 윤창영 씨는 매주 일요일 물을 끓여서 주변 노숙자에게 컵라면을 나누어주고 틈틈이 용돈까지 보태주었다. 불우한 그가 또 다른 불우한 이웃을 도왔던 셈이다. 그는 어눌한 목소리로 허리띠, 라이터와 같은 물건들을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가장 밑바닥 삶을 온몸으로 기어 하루하루 버텨냈다. 그러던 1999년 7월 7일 오전 9시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던 노점 물품을 구청 직원들이 압수해 갔다. 이미 그 전날에도 한 차례 물품을 단속받은 상태였다. 대전역 근처에서 장애인으로서 장사를 하는 모습이 눈에 거슬려 연일 그에게만 계속되던 소위 "표적 단속"이었다. 그는 물건을 빼앗기지 않으려 평소 거칠게 구청에 저항하고 항의를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윤창영 씨는 동구청을 방문하여 내 물건을 돌려 달라 애원하자 구청 직원과 용역반은 비웃는 눈초리로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했다. 어찌 보면 사람은 누구나 절박한 처지에 놓일 수 있다. 그러나 자기가 처한 조건과 환경 속에서만 이해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타인의 감정을 헤아리기란 쉽지 않다. 격분한 윤창영 씨는 온몸에 불을 붙였다. 온몸에 김이 모락모락 나도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장애인의 생계를 보장하라! 장애인도 노점상도 인간이다.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라고 외치며 쓰러졌다. 분신 직후 대전의 병원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해 서울의 한강 성심병원으로 급히 옮겨졌다.

“창영아 제발 죽지만 마라!” 가족들은 절규하며 며칠 밤을 새웠다. 윤창영 씨는 임종하기 직전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집에 가서 죽고 싶다. 어머니 곁에 묻어달라.”는 짧은 유언을 남기고 7월 10일 유명을 달리했다. 당시 우리는 노점상 단체 의장과 한강성심병원에서 임종을 지켜봤다. 이미 대전에서 올라온 경찰과 몇몇 공무원으로 보이는 직원들이 유가족과 장례 문제를 급히 협의하기 시작했다. 시신은 다시 대전으로 옮겨졌다. 장례식장에 도착해 어둑어둑 해 질 무렵 대전 충남대 병원 장례식장 주변에 윤창영의 분신자살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포장마차 하는 아주머니, 잔업을 마치고 온 노동자, 그리고 청년 학생, 한쪽 팔이 없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목발을 짚은 사람, 그리고 거리에서 아무렇게 뒹굴던 노숙자까지 하나둘 모여들었다.

노점상단체는 지역의 시민사회단체에 연락을 취해 ‘비상대책위’를 서둘러 꾸렸다. 대자보를 붙이고, 현장에 모인 학생과 청년들을 모아 사수대를 조직했다. 일부는 모금함을 들고 거리 선전전을 펼쳤다. 그리고 7월 15일 대전역 광장에 모여 노점상 결의대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대전지역은 노점상 단체가 조직되어 있지 않았다. 노점상을 상대로 유인물을 돌려 윤창영 씨의 분신 사망 소식을 전달하고 자발적 참여를 호소했다. 유인물을 받아 든 대전역 주변에서 노점을 하는 김지현 씨는 “구청 직원이 몰려와서 물건을 실었습니다. 울면서 봐달라고 하자 햇빛도 못 보게 징역을 보내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지금도 저의 물건은 강제로 빼앗겨 구청에 있습니다. 이제 곧 장마고 IMF 이후 장사도 안 되는데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라며 눈시울을 적셨다. 노점상 결의대회에 참석한 시위대를 대상으로 경찰은 집시법을 들먹이며 거리진출을 막았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곤봉과 함께 사람들은 넘어지고, 옷이 찢기고, 신발이 벗겨졌다.

하지만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영안실을 지키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특히 8.15대 회를 앞두고 전국을 순회하던 대학생 통일선봉대가 합류하자 집회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대전 동구청에서는 사태가 심각해지자 서둘러 사과를 하고 ‘비상대책위’와 함께 대책 마련에 들어가 유가족과 합의에 이른다.

마침내 7월 20일 윤창영 열사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행렬은 고인의 영결식 장소인 광장을 벗어나 동구청과 대전 시청까지 행진했다. 이날은 노점상이 관의 눈치나 보면서 쫓겨나는 그런 날이 아니었다.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소리 높여 구호를 외치며 대전지역 노점상들이 장례행렬에 선두에 섰다. 검은 만장이 물결을 이루며 대전 거리를 뒤덮고 출렁였다. 동양백화점을 지나 도청과 대전 시청 앞에 다다르자 시위대에 의해 현관 유리창이 박살 나기도 했다. 격렬해진 노점상의 분노를 누구도 막지 못했다. 그리고 윤창영 열사의 혼이 담긴 꽃상여를 실은 영구차는 그의 고향인 금강의 묘역으로 향했다. 대전의 장애인 노점상 윤창영 열사의 성과로 전국철거민연합과 함께 가난한 이들의 연대체 ‘전국빈민연합’을 다시 결성하기에 이른다. 1999년 뜨거웠던 여름날의 이야기다.

3. 최옥란 열사 이야기

서른일곱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한 장애인 노점상 최옥란 열사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가 어떻게 실천하는가에 따라 그 죽음은 정의를 세우는 소중한 역사의 밑거름이 될 수도 있다. 열사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은 사회구조를 이해하고 더불어 모순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각자 자신의 처지와 실정에 차이가 있겠으나 이들이 살았던 삶처럼 실천하는 것이 박제된 삶이 아닐 수 있게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때문에 이들의 삶과 정체성을 끊임없이 조명하고 이를 되살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 최옥란열사 10주기

그런 측면에서 최옥란 열사의 삶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옥란 씨는 1998년 청계천 8가에서 장난감과 치약, 구제 옷 등을 팔던 노점상이었다. 최정환 열사 투쟁 이후 장애인과 노점상이 함께 만든 ‘장애인 자립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게 되자 여기에 합류했다. 함께 장사하던 조성남 씨에 따르면 “옥란 씨도 노점상 자리를 확보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누구도 그녀의 삶의 의지를 쉽게 꺽진 못했지요.” 전경과 단속반도 그녀를 피해갔고, 경찰서를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고 회상한다.

최옥란 열사를 이야기 회상할 때 장애인 여성으로서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녀는 이혼 이후 아들 준우를 키울 수도 없었다. 전 남편의 위자료조차 받지 못한 상태에다 아들조차 제대로 만날 수 없었다. 1999년 재판장에게 면접 교섭권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장문의 글을 쓴다. “…재판장님 저의 간절한 소망을 이해하시고 꼭 나의 아들 준우를 만나게 해주세요. 냉정하게 판단해 주세요. 지금 저의 형편이 어렵습니다. 노점상을 하기에는 너무 체력적으로 힘이 듭니다. 남편의 형편도 알지만 나보다 나은 조건입니다. 나머지 주어진 삷을 좌절하지 않고 살 수 있게끔 희망을 주세요…”

그녀의 건강도 그를 괴롭히는 요인이었다. 1999년 12월 서울 동대문구의 한 병원에서 자궁 원추 절제 수술을 받게 되었고 입원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병원의 의료과실로 의료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건대 민중병원 진료 기록에 따르면 머리에 혹이 생겨 약 6개월가량 약물치료가 필요한 상태였다. 게다가 당시 많은 장애인이 ‘이동권’ 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했는데 옥란씨는 이 과정에서 전경과의 충돌로 쓰러지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녀는 주기적으로 병원을 들락거릴 수밖에 없었다.

2001년 10월부터 시행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생활 유지능력이 없거나 어려운 사람에게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임 아래 필요한 급여 등을 제공하여 최저생활을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신설된 법률이다. 기존의 복지제도를 혁신했다는 정책은 정작 옥란 씨의 형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당시 수급자가 되기 위한 소득의 기준선은 33만원이었다. 그녀는 기초 생활 보장제도가 시행되면서 수급자가 되었지만 약간의 수입원이었던 노점상을 포기하지 않으면 최저생계비를 초과해 수급비와 의료비 그리고 임대아파트 입주권과 의료보장마저 지원받을 수 없었다.

2001년 12월 3일, 뇌성마비 1급 중증 여성장애인 최옥란 열사는 "생존권 쟁취와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해 명동성당 농성 투쟁에 들어갔다. 가난한 이들의 최저생활을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정된 제도가 생계를 위협하는 이상한 제도가 되었다. 노점에서 버는 돈이 추정소득으로 잡혀 수급권자에서 탈락할 처지가 되자 최저생계비의 현실을 알리고자 일주일간 명동성당에서 텐트 농성을 하게 된다.

“당신도 장애인이면서 현재 시행하고 있는 국민기초생활 보장법이 저의 작은 꿈들을 다 잃게 했습니다. 노동도 할 수 없는 장애인이 그나마 노점 해서 돈을 벌어서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나의 아들을 찾으려고 힘이 들어도 참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장사도 못 하게 해 이제는 더 살 수 없는 심정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구걸하더라도 치사해서 수급권을 못 받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국무총리에게 26만 원을 반납하러 갑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정말로 저같이 가난한 사람들의 최저생계를 보장하는 제도로 거듭나기를 희망합니다."며 26만 원을 반납하기에 이른다.

2001년 어머니에게도 남긴 유서에 따르면 “엄마, 엄마 너무 가슴 아파하지 마세요. 그리고 용서해 주세요. 힘이 많이 들어요. 우리나라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 나를 죽음으로 가게끔 하는군요. 엄마, 엄마. 목이 메어 글 쓸 수가 없네요. 엄마. 우리 좋은 세상에서 만나요. 언니 오빠 동생 모두에게 미안해. 이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적혀 있다.1)
주1) 시대를 울린 여자 최옥란 평전 seoul post 230쪽

약값에도 미치지 못하는 한 달 생계급여를 받으며 생활하던 중 수급권마저 빼앗긴 뇌성마비 중증 장애 여성의 어눌한 외침은 김대중 정부의 생산적 복지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2002년 2월 아직 봄이 오기 전 최옥란 씨는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다행히 목숨을 건져 치료를 받던 중 3월 26일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3월이면 아직 추운 날씨였다. 겨울이 가고 봄은 아무렇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자신을 희생한 사람을 보고서야 서럽게 봄을 맞이했다. 김대중 정권의 생산적 복지정책과 기초생활보호법이 실시된 이후 이 법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보장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을 고착화하는 법이라는 것을 알려낸 투쟁이었다.

아쉽게도 당시 노점상 단체는 최옥란 열사가 유명을 달리한 그 시간 인도에서 열린 ‘국제노점상연합’ 창립을 앞두고 국제회의 일정으로 적극적인 참석을 하지 못했다. 유명을 달리한 이후에도 국민기초생활 보장법에 따른 적극적인 공감이 되지 못했다. 그의 죽음을 또 한 사람 장애인의 슬픔 소식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그 후 반빈곤연대 운동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운동적 각성이 있었다. 최옥란 열사의 장례식에 참여했던 손을 잡고 새로운 연대기구 결성을 도모하기 시작하고 그 후 "빈곤사회연대"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최옥란“ 이름 석 자는 변화를 꿈꾸는 이들의 이름이 되었다. 어떤 이름은 이렇게 죽어서도 투쟁한다. 

4. 열사라는 칭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

누구나 경험했을 테지만 작은 성냥불에 손끝을 데어도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일시적인 아픔으로 끝나지 않고 시간이 흐른 뒤 일그러진 형태로 그리고 후유증으로 이어진다. 극한 상황에 내몰린 노점상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저항은 자신의 몸에 불을 댕긴다는 것이고 그 고통은 많은 사람에게 오랫동안 전이되어 두고두고 남는다. 안타깝게도 이 시기 죽음의 행렬은 멈추지 않고 이어진다. 이 죽음의 공통점은 장애인으로서 노점을 하는 사람이었으며 주기적으로 2~3년에 한 번씩 열사 투쟁을 치렀다.

2005년 8월 국회 앞마당에서 분신한 장애인 노점상이 있었다. 영등포 한강성심병원 응급실에서 온몸이 일그러진 채 응급실에 누워있는 장애인 노점상. 그의 이름은 황효선 씨다. 55세로 한국장애인문화협회 부천 이동상담소 소장이었다. 기자들은 연신 분신한 이유에 관해서 묻고 사진을 찍었다. 그동안 죽지 못해 살았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분신이 있기 한 달 전에도 이미 부천 북부역에서는 장애인 노점상 부부가 동반 자살을 시도한 사건이 있었다. 7월 10일 새벽 3시경 쇠망치와 파이프로 무장한 150여 명의 용역반이 부천역으로 들이닥쳤다. 새벽 장사를 마치고 돌아가려는 포장마차를 상대로 무차별 단속과 욕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노점상들은 아스팔트 위로 나동그라졌다.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난 후 부천역 광장 한쪽에서 자신의 승용차를 걸어 잠그고 언어장애인 노점상 부부가 석유를 부어 분신을 기도하는 일이 벌어졌다. 검은 연기와 불이 활활 타오르자 새벽에 행인이 차 문을 부수고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가까스로 그들의 목숨을 구했다.

2006년 6월 20일, 인천시 부평구에서 지체 장애 2급인 장애인 노점상 주수길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부평공원 야시장 내 단속과정에서 난투극 끝에 사람이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오후 3시경 250여 명의 용역이 부평공원으로 몰려들었다. 난투극 현장은 부평 경찰관이 현장을 지켜보는 가운데 30분 이상 진행되었고, 약 20여 개의 노점상을 철거하는 과정이었다. 이날 용역 가운데 장애인 용역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장애인 노점상을 장애인 용역이 단속하는 것이다. 목격자에 의하면 고 주수길 씨는 ‘맥주병에 맞아 힘없이 쓰러졌다’고 진술하고 있다. 주수길 씨는 119에 의해 부평구청 맞은편 세림병원에 실려 갔지만, 병원에 사람들이 많아 치료를 받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병원 측에서는 사망 시간을 대집행이 일어난 날 저녁 시간으로 추정하였으며 뇌진탕 증세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용역과의 대치과정 중 싸움이 그 원인이었다.

지자체는 장애인의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명목으로 장애인을 용역으로 고용하였다. 그들의 신체적인 장애를 이용하여 길거리로 나와 장사 할 수밖에 없는 즉 노점상을 단속하는 도구로 사용하였다. 이는 결국 저항하는 한 장애인을 죽음의 길로 몰게 한 것이다. 빈곤 정책의 사각지대에서 노점상을 하다 숨진 장애인이나 어쩔 수 없이 단속반으로 나선 장애인이나 공통으로 사회적 폭력의 희생자였다. 주수길 씨의 사망 사건은 그의 누나가 대표로 경찰 입회 아래 장례식을 치르기로 전격 합의를 보게 된다. 그리고 이 투쟁은 서둘러 끝난다. 이 시기 서울은 재개발 재건축,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뉴타운 사업이 현란하게 전개되었다. 어린 시절 뛰어놀던 골목길은 헐리고 자고 나면 새 빌딩과 아파트로 빼곡히 들어찼다. 누군가는 들어오고 또 그만큼 누군가는 어디론가 떠났다. 서울 사람들은 고향이 없다는 이야기가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다. 한때 서울 어딘가에 집 한 채 갖고 있던 사람조차 보금자리에서 내몰릴 위협에 처했다. 개발은 집을 갖고 있던 사람이나 집 없이 세 들어 사는 사람이나 할 것 없이 삶의 기초를 위협했다.

5. 글을 마치며

자신을 버리고 전체를 살리며 생존권을 지켰던 사람들의 삶은 사회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노점상 이야기를 다루는 데도 자의든 타이든 유명을 달리한 사람의 삶을 살펴보고 이들 삶에 의미를 제대로 조명하는 것은 살아남은 자의 도리라 할 것이다. 1990년대 이후 민주화가 진전되고 합법적 공간이 확대되면서 열사의 죽음을 둘러싼 진상이 부분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명예회복과 정신계승사업도 제도권 차원에서 일정 정도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덕인 열사"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등 근본적 문제 해결이 안 된 부분도 있다. 국가폭력이라 할 수 있는 용역 깡패에 의한 폭력적인 개발과 단속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빈민운동진영은 종종 빈민 열사 추모제 개최를 한 바 있으나 지속해서 이어지지는 못했다. 최근 들어서 개별 열사 추모 행사나 묘역을 방문하는 것으로 그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몇몇 유가족을 제외하고 관계도 점차 단절되고 있다. ‘열사 추모사업’의 복원과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가족과의 상호소통이 지속해서 이루어져야 하며 이 과정을 연계한 프로그램으로 발전해야 한다. 그래야 많은 사람이 개별화되지 않고 전체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계승사업은 시기마다 다양한 빈민, 반빈곤 의제들의 흐름과 결합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가려는 연장선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과거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삶에 역동적 의미를 살펴보고 "점“ 하나하나가 모여 선으로 이어지듯 민주주의의 개념을 사회권 일반으로 확대하고 아직 해결되지 못한,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 열사 혹은 수많은 의문사’에 대한 올바른 진상규명과 과거청산으로 나가야 한다. 열사는 삶의 길을 찾던 누군가에게 희생으로 다가간 사람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길을 닦고 또 그 길을 걷는다.

최인기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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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노조 "'갈등 조장 분열 획책' 김호성 해임하라"

YTN노사, 김호성 YTN라디오 상무 해임 문제로 갈등… 정찬형 사장 "시스템과 원칙에 따를 것"
송창한 기자 | 승인 2019.06.19 15:49 
 
 
 
 
 

[미디어스=송창한 기자] 전국언론노조 YTN지부(지부장 지민근)가 김호성 YTN라디오 상무의 해임을 촉구했다. YTN지부는 김 상무가 YTN의 갈등과 분란을 조장해왔으며, 자회사인 YTN라디오 경영악화의 책임자라고 규탄했다. 이 같은 노조의 요구에 정찬형 YTN 사장은 절차와 원칙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답했다. 

19일 서울 상암동 YTN사옥 앞에서는 김 상무의 해임을 촉구하는 언론노조 YTN지부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정 사장 취임 이후 지난 9개월 간 김 상무의 해임을 요구해왔지만, 정 사장의 거듭된 입장번복 등으로 김 상무의 직을 유지하는 안이 오는 21일 예정된 YTN라디오 이사회에 상정되었기 때문이다.

19일 서울 상암동 YTN사옥 앞에서는 김 상무의 해임을 촉구하는 언론노조 YTN지부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사진=미디어스)

기자회견에서 오정훈 언론노조 위원장은 "최남수 사장 사퇴 이후 상암동 이 자리에 다시 선 게 참담하다. 김 상무는 최남수 사장을 지킨다고 노조와 구성원들을 이간질하고, 많은 노조 조합원들이 책임지라 했는데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방송을 하고 있다"며 "자기 책임을 망각한 파렴치한 행위를 계속 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YTN지부는 김 상무를 청산해야 할 적폐인사로 꼽는다. 김 상무는 YTN 창립멤버이자 초대 노조위원장으로서 2012년 다른 부장급 직원 4명과 함께 'YTN의 조속한 정상화를 위한 우리의 호소'라는 기명 성명을 내 좌천됐다. 그러나 2015년 '낙하산 밀실 인사' 논란이 일었던 조준희 사장 시절 기획조정실장으로 발탁된 이후 YTN 총괄상무를 역임하면서 YTN 구성원들에게 보도 공정성 및 해직자 복직 문제를 꼬이게 한 장본인으로 평가받는다. 

YTN지부가 이날 정 사장에 제출한 '김호성 해임 촉구안'에는 YTN지부가 김 상무를 '적폐'로 꼽는 이유가 상세히 명시돼 있다. 

YTN지부가 김 상무를 적폐로 규정한 이유는 ▲2015년부터 2년간 기조실장을 역임하며 해직자 복직 문제를 퇴직금 누진제 폐지와 연계해 분란을 조장 ▲2017년 YTN 총괄상무 시절 사장 선임 절차의 관리자 역할을 내던지고 직접 후보로 뛰어들어 구성원 집단 반발 자초 ▲2차 사추위 기간 사장직무대행으로서 60명 넘는 대규모 인사 명령을 강행했다 역풍에 직면, 전면 백지화 ▲최남수 사장 선임 전후 사내게시판에 'YTN' 명의로 수없이 올라온 마타도어를 기획·승인 ▲최남수 사장 불신임 투표 당시 총괄상무의 본분을 망각하고 노골적인 신임 투표를 독려 ▲최남수 사장 퇴진 이후 삼성 동영상 관련 인사위의 위원장으로서 류제웅 전 기조실장에게 6개월 감봉 징계로 면죄부 부여 등이다.

YTN지부는 김 상무가 YTN 라디오의 경영실적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점도 해임의 근거로 들었다. 김 상무가 본사와 라디오 상무를 겸직하며 6개월간의 라디오 경영 공백을 초래했으며, 2017년까지 3년연속 흑자였던 YTN라디오의 영업이익은 김 상무 취임 첫해에 마이너스로 돌아섰고 자본잠식률은 다시 90% 목전으로 치솟았다는 지적이다.

YTN지부는 "김 상무는 적자전환의 원인을 코바코 광고 매출 하락으로 돌리고 있지만, 라디오는 자체적인 영업으로 유치하는 협찬 매출이 광고 매출보다 오히려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상무의 영업력이 실적으로 직결되는 매체"라며 "또한, 적자전환의 가장 큰 원인은 매출은 대폭 줄어든 반면, 비용은 대폭 늘어나는 것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데 있다"고 비판했다. 

또 YTN지부는 김 상무가 본사와 라디오 상무를 겸직할 수 있었던 YTN의 시스템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김 상무는 최 사장 사퇴 이후 사장직무대행을 맡으며 '새 대표이사가 오면 회사를 떠날 것'이라고 밝혔지만 본사 상무직만을 내려두고 자신이 겸직하고 있던 자회사 YTN라디오의 상무 자리를 지켰다. 

YTN지부는 김 상무가 최 사장 사퇴 이후 YTN에서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라디오 상무를 겸직했다고 보고있다. 지민근 YTN지부장은 "최남수 사장 옹립에 앞장서고 불신임 투표 당시 구성원들에게 적극적으로 신임 투표를 독려한 김호성은 파업 당시 이미 본사 촐괄상무를 맡고 있었음에도 라디오 상무를 겸직했다"며 "최남수 사장이 쫓겨났을 때를 대비해 자신의 안위를 챙긴 것이다. 심지어 셀프인사를 통해 아침 라디오프로그램 진행자에 앉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YTN지부는 김 상무 해임 문제에 대한 정 사장의 입장번복을 사태악화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YTN지부는 기자회견문에서 "우리는 김호성이 물러나야 YTN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고 정찬형 사장이 내정자였던 때부터 김호성 해임을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그때마다 사장은 '시간을 달라', '자신을 믿어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며 "그러나 실질적인 조치는 아무것도 취하지 않았다. 사장은 스스로 시간을 흘려보냈고, 스스로 믿음을 무너뜨린 것"이라고 질타했다.

정 사장은 애초 김 상무의 자진사퇴를 제안했지만 김 상무의 반복되는 거절에 비등기이사 재계약, 등기이사직 유지 및 보수체계 변경 등의 안을 제안했다. 줄곧 김 상무 해임을 요구해왔던 YTN지부는 정 사장의 입장번복과 중재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왼쪽부터)오정훈 전국언론노조 위원장과 지민근 YTN지부장이 정찬형 YTN 사장에게 '김호성 해임 촉구안'을 전달하고 있다. (사진=미디어스)

기자회견 종료 후 노조의 '김호성 해임 촉구안'을 받아든 정 사장은 시스템과 원칙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정 사장은 "'시스템에 의한 청산'을 기조로 최초에 말씀드렸고, 그 기조하에 미래발전위원회라든가 조직적인 검토 끝에 나올 수 있는 내용이 있으면 반영하도록 생각하고 있다"며 "이번 이사회에서는 라디오의 경영혁신을 위한 가장 좋은 방안은 무엇인지 찾아 회사가 상생할 수 있는 모멘텀을 만들 수 있도록 하겠다. 합법적인 틀 안에서 좋은 방안을 찾도록 할테니 조합에서도 애정을 가지고 지켜봐 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YTN 바로세우기 및 미래발전위원회'는 2008년~2017년까지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되지 못했던 보도·운영을 바로잡기 위해 설치된 YTN의 노사합의 기구다. 미래발전위원회의 조사결과와 이사회 논의 등의 절차를 통해 김 상무 해임과 관련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그러나 YTN지부는 정 사장의 결단을 김 상무 해임 문제 해결의 열쇠로 보고 있다. 미래발전위원회는 YTN 본사의 노사합의 기구로 자회사 인사에 영향을 미치기 어려우며 중소기업중앙회, 한림제약, 대교홀딩스, 제이에스티나 등 YTN라디오의 주주들은 YTN라디오의 대주주인 정 사장의 결단에 따르겠다는 의사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YTN라디오의 사원들은 YTN지부와 다른 목소리를 냈다. 라디오 사원 14명 중 11명은 지난달 17일과 20일 낸 성명을 YTN지부 기자회견 장소에서 배포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YTN라디오의 구성원은 YTN 사측, 노조 그 어디와도 대립하고 싶은 의사가 없다. YTN라디오가 아닌 프로그램 및 경영 관련 사항을 간섭받고 싶지 않음을 분명히 밝힌다"며 "YTN지부가 YTN라디오의 방송과 경영에 간섭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지상파 방송사인 YTN라디오의 독립권을 훼손하지 않도록 하라"고 촉구했다.   

송창한 기자  sch6966@gmail.com

icon관련기사iconYTN노조, 김호성 YTN라디오 상무 해임 공론화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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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방북, ‘서울행 징검다리’ 또는 ‘플랜B 시동걸기’

 북중 정상회담과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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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6.19  19: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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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올해 1월 8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4차 정상회담을 가졌다. 지난해 3월부터의 네 차례 북중 정상회담은 모두 김 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해 이루어졌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지난 2월말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 주춤거리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다시 꿈틀거리고 있다. 이번에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무대 전면에 등장했다.

북중 양국은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이자 중국 국가주석이 20~21일 북한을 국빈방문한다고 17일 저녁 발표했다. 일본 오사카에서 개최되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6.28~29)를 코앞에 둔 절묘한 시점으로, G20에서는 미중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G20 직후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시진핑 주석의 평양행을 두고 ‘서울행의 징검다리’라며 의미를 축소하는 분석과 ‘북한의 플랜B 가동’이라는 적극적 의미부여가 제기되고 있다. 물론 북미협상 중재 여부에도 눈길이 쏠리고 있다.

1. 조성렬, 중국의 ‘한국 떼어내기’

북중 정상회담 개최가 양국에서 동시에 발표되자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17일 밤 “정부는 지난주부터 시진핑 주석의 북한 방문 추진 동향을 파악하고 예의 주시하여 왔다”며 “그간 정부는 시진핑 주석의 북한 방문이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기여할 것으로 보고 이의 조기 실현을 위해 중국 정부와 긴밀히 협의하여 왔다”고 밝혔다.

청와대의 이례적인 신속하고 구체적인 중국과의 협의 사실 확인은 이른바 ‘한국 패싱’을 우려한 조치로 읽힌다. “북중 간에 만남이 있는데 한국은 뭐하고 있느냐”는 식의 질문이 쏟아질 것에 대해 자문자답한 셈이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은 이에 대해 “시진핑 주석의 방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국 측에서 ‘한중관계를 소중히 하지만 우리 특성상 북한을 먼저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이해해 달라’고 양해를 구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면서 조성렬 위원은 “결국 시진핑 주석의 평양행은 서울행을 위한 징검다리”라고 짚었다. 중국은 10월 1일 주변국 정상들을 초청한 가운데 대대적인 건국 70주년 기념행사를 기획하고 있어 시 주석의 서울행은 9월 중순 이전에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그는 “중국은 한국이 미국의 ‘반(反) 화웨이 전선’과 ‘인도·태평양 전략’에 참여할까봐 바짝 긴장하고 있다”며 “실제로 미국은 10월말 11월께 열릴 SCM(한미안보협의회의)에서 한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전면 참여를 관철시키기 위해 집중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이 미국의 대중국 포위전략에 동참할 경우 중국의 입지는 그만큼 어려워질 수 밖에 없어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문제 등으로 껄끄러워진 ‘한국 달래기’, 즉 미국으로부터 ‘한국 떼어내기’에 적극 나서야 할 상황이라는 것.

실제로 미국의 한국에 대한 인도·태평양 전략 참여 압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하고, 김대중 정부 이래 사실상 미국의 미사일방어(MD)체제 편입 논란 때문에 미뤄왔던 SM-3 미사일 도입은 ‘신형 이지스함 3척 건조’ 결정으로 고삐가 풀렸다. 최근 사드 추가배치 의혹까지 불거져 중국으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시진핑 주석의 평양행을 서울행 징검다리로 보고 있는 조성렬 위원은 이례적인 시진핑 주석의 19일자 <노동신문> 기고에 대해 “평양에 줄 선물이 없어서 김정은 위원장의 체면을 세워주려는 것”이라고 의미를 축소했다.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를 둘러싸고 북미간 힘겨루기가 한창인 상황에서 중국이 북한의 대폭적인 양보를 끌어낼 묘책이 없고, 치열한 미중 무역전쟁 와중에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며 대북 경제제재를 누그러뜨리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시진핑 주석의 기고글은 19일자 <노동신문> 1면에는 실렸지만 탑기사가 아닌 사설 아래에 작게 배치됐고, 국빈방문 치고는 1박2일의 소략한 일정이라는 점도 이같은 상황을 반증하는 것이라는 분석이다.

2. 김동엽, ‘북한의 플랜B’ 시동걸기

이에 비해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시 주석의 방북 자체에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김동엽 교수는 “북한이 미국의 입장이 안 바뀌면 미국을 통한 지름길이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 등 국제관계 속에서 긴 호흡으로 가겠다는 ‘플랜 B’를 꺼내든 것”이라며 “지난번 러시아 방문이나 최근 유엔이나 국제기구에의 접근도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일환으로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올해 연말까지 미국에 협상 시한을 제시했지만 그때까지 미국만 쳐다보고 기다리기 보다는 “6월을 변곡점으로 연말까지 (플랜B로 나아가는) 스텝을 밟아나가겠다는 구상”이라는 것.

김 교수는 “시진핑 주석의 방북은 그런 의미에서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다”며 시진핑 주석의 <노동신문> 기고를 “북한의 선택과 길을 전면 지지하고 협력해 나가겠다는 내용이 주”라고 분석했다.

시진핑 주석은 기고문에서 “우리는 김정은위원장동지의 옳바른 결단과 해당 각측의 공동의 노력에 의하여 조선반도에 평화와 대화의 대세가 형성되고 조선반도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할수 있는 쉽지 않은 력사적 기회가 마련됨으로써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인정과 기대를 획득한데 대하여 기쁘게 보고있다”며 “중국측은 조선측이 조선반도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올바른 방향을 견지하는것을 지지하며 대화를 통하여 조선측의 합리적인 관심사를 해결하는것을 지지한다”고 분명하게 북측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지난해 3월부터 올해 1월까지 김정은 위원장이 네 차례나 중국을 방문해 북중 정상회담을 가졌지만 중국은 미국과의 무역전쟁 등을 의식해 대북 경제제재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시 주석에게는 심적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시 주석은 <노동신문> 기고문에서 “나는 이번 방문을 통하여 김정은위원장동지와 조선동지들과 함께 중조친선협조관계를 설계하고 전통적인 중조친선의 새로운 장을 아로새기려고 한다”고 밝혔고, “이미 합의한 협조대상들을 잘 리행”하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  지난해 5월 7일 중국 다롄에서 개최된 북중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국가주석이 마주하고 있다. 정상회담 직후 박태성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이끄는 북한 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해 양국간 경제협력 문제를 논의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김한신 남북경제협력연구소 대표는 19일 <통일뉴스> 기고문에서 “지난해 중국 다롄(대련)에서의 시진핑 주석과 김정은 위원장의 회담 내용 중 중국측이 훈춘-청진간 고속철도 건설과 청진항 개발 사업을 제안했던 것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 외에도 중국은 갈탄을 이용한 화력발전소 건설 지원과 신의주-개성 고속철도.도로 건설, 광역두만강개발계획(GTI) 등을 약속했다는 보도가 나온 바 있지만 국제적 제재에 묶여 실현된 것은 없다.

김한신 대표는 “체제보장과 비핵화를 ‘빅딜’하고 경제발전에 매진하려는 북한의 의중을 시진핑 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보증하고, 북한의 경제발전에 중국자본과 해외자본이 투자하는 형태의 거래가 성사될 수 있다고 본다”고 진단했다.

이정철 숭실대 교수는 “만약, 시진핑 주석이 대북 경제제재를 해제해줄 수 없는 조건에서 30만톤 정도의 대규모 식량지원을 한다면, 카드가 될 수 있다”며 “그 정도면 북한이 협상시한인 연말까지 미국과의 힘겨루기를 벌일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3. 정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북미협상 중재 기대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지만 시진핑 주석이 북한의 좀더 진전된 비핵화 양보를 얻어내고 이를 토대로 미국의 대북 체제보장과 제재완화의 상응조치를 약속받는 ‘북미협상의 중재자’로 나설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시 주석의 방북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진전”이라며 시 주석이 북측에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추진을 권고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표했다.

또한 “미국 측에서도 북중 정상회담, 그리고 시 주석의 방북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 계기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 같다”며 “많은 부분에서 중국과 미국 간에 대북 정책에 대한 일치점이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목표가 같고 대북제재에도 발을 맞춰왔다는 판단이 깔린 것.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17일 “(시 주석의) 이번 방문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협상의 조기 재개와 이를 통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정착에 기여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긍정적 의미를 부여했고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19일 ‘2019 한반도국제평화포럼’ 기조연설에서 아예 “모든 정상회담의 중요한 목표는 제3차 북미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환경조성에 있다"고 초점을 좁혔다.

남문희 <시사IN> 한반도담당 선임기자는 1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시진핑이 자신있게 방북하겠다고 나선 걸 보면 그동안 북중간 물밑 조율을 상당히 했나 보다”며 “결국은 1월 북이 약속했던 ‘영변+알파’ 약속을 김위원장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가가 관건”이라고 짚었다.

그렇다면 중국이 북에 줄 수 있는 것은 뭘까? 남 기자는 “지난 1월처럼 북한이 비핵화에서 더 크게 양보해 미국이 유엔안보리 제재를 해제 또는 완화하게 하면 원하는 것 주겠다고 하자니 이미 구문이라 먹히지도 않을 터이고, 결국은 뒤로 드러나지 않게 뭔가를 챙겨주는 식 밖에 없을 것”이라고 봤다. 뒤가 아닌 앞으로 챙겨줄 수 있는 것은 인도적 지원에 해당하는 식량지원 등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시 주석의 방북과 중재 역할도 중요하지만 역시 한반도 문제의 본질은 북미 양자관계에 달려있다는 것은 공통된 시각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14일 스웨덴 의회 연설에서 “북미 간, 또 남북 간에 물밑에서 대화는 계속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대화의 모멘텀은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며 “결국 김정은 위원장이 언제 호응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북미 간, 또 남북 간의 대화가 너무 늦지 않게 재개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스티브 비건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에 한참 앞서 한국을 방문할 예정인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조성렬 연구위원은 “비건 대표가 판문점이나 평양에 가서 김정은 위원장 친서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해 판을 바꿀 가능성도 있다”며 “폼페이오-김영철 라인을 빼고 비건의 급을 높여서 비건-최선희 제1부상의 고위급실무회담에서 윤곽을 잡으려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렇지 않아도 줄어든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자로서의 입지는 시진핑 주석의 방북으로 더욱 줄어든 느낌이다. 남북관계의 당사자로서 4.27판문점선언과 9.19평양공동선언, 9.19군사분야합의서를 실천하는 길이 그나마 남아 있는 고유한 영역인 셈이다.

조윤제 주미대사는 18일(현지시간) 워싱턴 특파원들과 만나 “김정은 위원장의 트럼프 친서 전달과 이희호 여사의 유족에 대한 조의문 전달은 하노이 정상회담 이후 북한 지도자의 첫 북미간 남북간 직접 소통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동향”이라며 “한미 양국은 이러한 계기를 잘 살려 다시 북미대화, 남북대화의 재개로 이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나간다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은 1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시진핑 주석이 평양을 방문하고 나면 김정은 위원장이 10월쯤 답방할 가능성이 커진다”며 “그 전후에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의 가능성도 정세상으로는 높아진다”고 관측했다.

한 소식통은 중국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그림’은 “시 주석 방북, 북중 정상회담(6.20~21) → 미중 정상회담(6.28~29) → 한미 정상회담 → 남북 정상회담 → 시 주석 방한, 한중 정상회담 → 북미 정상회담”이라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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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한껏 멋 부린 ‘진객’ 흰눈썹울새

윤순영 2019. 06. 18
조회수 130 추천수 0
 

극히 드물게 찾아오는 나그네새, 날쌘 땅 위의 사냥꾼

 

크기변환_YSY_2326.jpg» 파랑, 빨강, 주황색으로 한껏 멋을 부린 흰눈썹울새 수컷.

 

우리나라가 애초 번식지나 월동지가 아닌 새가 어쩌다 들르는 일이 있다. 반가운 이런 손님을 나그네새라고 부른다. 흰눈썹울새는 나그네새 가운데도 극히 만나기 힘든 새인데, 운 좋게 관찰 기회가 왔다. 지난달 전북 군산시 옥도면 어청도에서 흰눈썹울새를 만났다.

 

수컷의 멱과 가슴은 푸른색이며, 가운데는 진한 주홍색 깃털이 있다. 자세히 보면, 푸른 가슴 아래 검은색, 그 밑에 흰색, 진한 주홍색의 깃털이 차례로 나 있다. 가슴과 멱까지 울타리를 쳐놓은 것 같은 깃털이 특이하다. 인디언 추장이 목걸이를 한 것 같다.

 

 

크기변환_YSY_2396.jpg» 흰눈썹울새의 자세가 당당하다.

 

크기변환_YSY_0484.jpg» 꼬리를 바짝 올린 채 풀밭 위에서 먹이를 찾고 있다.

 

흰눈썹울새는 땅 위에서 걸어 다니기를 좋아한다. 하천과 습지 주변의 갈대밭이나 풀밭에 살며 땅 위에서 곤충이나 거미를 잡아먹는다. 가슴을 활짝 펴고 꼬리를 위로 바짝 치켜든 채 덤불을 바쁘게 돌아다니거나 뛰어다니며 먹이를 찾는다.

 

처음 만난 흰눈썹울새는 절대 곁을 주지 않고 얼굴만 내밀었다. 마주치면 숨어버리기 일쑤다. 돌아다니는 동선이 매우 정확하다. 매우 가까이 곁을 주는 듯하다가 멀리 가고 다시 다가오는 듯하다 멀리 떠나는, 마치 술래잡기를 하는 것 같다.

 

 

크기변환_YSY_2152.jpg» 몸을 숨긴 흰눈썹울새.

 

크기변환_YSY_1700.jpg» 꼬리를 치켜세워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땅에서 사냥하는 새들은 발걸음이 매우 빨라, 위협을 느끼면 재빨리 풀숲으로 몸을 숨긴다. 예민하고 경계심과 조심성이 강하다. 몸을 바짝 세워 주변을 살피기도 하고, 쉬지 않고 꼬리를 흔들어 댄다.

 

크기변환_YSY_0819.jpg» 달음질치는 흰눈썹울새. 

 

크기변환_YSY_1804.jpg» 먹이를 사냥하는 흰눈썹울새.

 

빠른 걸음으로 갑자기 ‘휙’ 지나가면 뭐가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다. 먹잇감은 영문도 모른 채 순식간에 사냥당한다. 흰눈썹울새는 진정한 ‘땅 위의 사냥꾼’이다.

 

크기변환_YSY_1940.jpg» 도망치지 않고 버틴다. 배짱이 두둑해 보인다.

 

크기변환_YSY_2261.jpg» 돌 위에 올라서서 가슴을 한껏 내밀고 자신감을 과시하는 흰눈썹울새.

 

크기변환_YSY_1805.jpg» 다리를 쩍 벌리고 선 모습이 당당해 보인다. 

 

빠른 행동이 다소 방정맞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14~15㎝의 작은 새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잠시 멈춰 주변을 살필 때, 이 작은 새는 천하를 호령하듯 가슴을 내밀고 꼬리를 한껏 위로 치켜든다. 몸을 꼿꼿이 세우고 도도하게 주변을 살피는 모습을 보면, 호랑이가 다가와도 물러설 기세가 아니다.

 

크기변환_YSY_1676.jpg» 경계심이 강하지만 반대로 호기심도 많다.

 

크기변환_YSY_0539.jpg» 높은 곳에 올라 주변을 경계한다.

 

크기변환_YSY_2020.jpg» 사냥감을 발견하면 꼬리를 바짝 치켜세운다.

 

나는 새가 나무보다 땅을 좋아하는 것은, 목숨을 걸더라도 먹을거리가 당장 눈앞에 널려있다는 얘기다. 흰눈썹울새는 겨울에 단독으로 생활하다 번식기에 암수가 함께 땅 위에서 산다. 5∼7월 땅바닥 작은 구멍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는다. 5∼7개의 알을 낳아 13~14일 동안 품는다.

 

크기변환_YSY_9185.jpg» 바닷가를 찾은 흰눈썹울새.

 

곤충이나 거미를 좋아하지만 식물의 열매도 먹는다. 수풀 규모가 작거나 늪지, 단일 종의 나무숲 산림지대를 좋아한다. 수컷은 다양하고 매우 모방적인 노래를 부른다.전형적인 채팅 방법을 동원하여 수다를 떨듯이 울어댄다 

 

크기변환_YSY_0497.jpg» 바위에 올라서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는 흰눈썹울새.

 

크기변환_YSY_2410.jpg» 긴장을 풀고 몸단장을 한다. 

 

스칸디나비아에서 오호츠크해 연안, 캄차카, 알래스카 서부에서 번식하고, 겨울에는 아프리카 북부, 인도, 동남아시아로 이동한다. 우리나라를 통과하는 나그네새다.

봄철에는 4월 초순부터 5월 중순까지, 가을에는 10월 초순부터 11월 중순까지 통과한다. 귀하고 흔하지 않은 새다. 매우 적은 수가 중부와 남부 지역에서 월동하기도 한다.

 

글·사진 윤순영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한겨레 환경생태 웹진 ‘물바람숲’ 필자, 촬영 디렉터 이경희, 김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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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끼리”라면 개성은 열린다

[기획연재] 6.15와 판문점선언(3) 6.15와 경제협력

6.15공동선언 발표 19돐을 맞아 6.15시절 ‘우리민족끼리’가 사회 전반에 어떻게 구현됐는지를 통해 4.27시대 ‘평화와 번영’의 길로 가기 위한 과제를 조망해 본다.

[기획연재] 6.15와 판문점선언
(1) 6.15와 민족화해 : 너와 나 함께했던 그 시절
(2) 6.15와 반미자주 : 미국이 점점 싫어지는 이유
(3) 6.15와 경제협력 : '우리민족끼리'라면 개성은 열린다
(4) 6.15와 수구보수

“개성공단에서는 개성공단에 맞는 운전면허증을 발급합니다. 면허증 일련번호 마지막 숫자는 ‘615’로 통용됩니다. 개성공단이 남과 북, 6.15공동선언이 만든 ‘옥동자’라는 의미 때문입니다.”
김진향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이사장이 한 라디오(팟캐스트) 프로그램에서 했던 말이다.

2000년 발표된 6.15남북공동선언 4항.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6.15선언 발표 이후 남북은 착실히 합의를 지켜나갔다.

남북경제협력의 상징이라 하는 ‘개성공단’. 2000년 8월, 현대아산과 북한(조선) 아시아태평양위원회의 <개성공단 건설 및 운영 합의서> 체결을 시작으로, 12월 남북이 장관급회담을 열어 <남북경협 4대 합의서>에 서명하면서 남북경협 활성화를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2003년 6월 개성공업지구 착공식을 연다.

1년만인 2004년 6월, 시범단지 2만 8천 평 부지조성을 완료하고 15개 입주업체를 선정해 입주 계약을 체결한다. 2005년 3월엔 남측 지역에서 개성공단으로 전력공급이 시작됐고, 2005년 12월엔 개성공단과 남측 지역 간 통신이 연결됐다.

▲ 개성공단의 모습 [사진 : 뉴시스]

개성공단이 위치한 황해북도 개성특급시 봉동리는 군사분계선에서 최단거리가 2.5km, 비무장지대에서 서쪽으로 고작 500m 떨어져 있는 곳으로 개성공단이 들어서기 전 북한(조선)군 6사단, 64기갑사단, 62포병여단이 배치돼 있었다. 북한(조선)은 개성공단 부지조성을 위해 이 지역 군병력을 10~15km 뒤로 물렸다. ‘군사지역’을 ‘경제협력지역’으로 변화시키고 남과 북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개성공단이 담당했다. 김진향 이사장이 개성공단을 “평화의 상징”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다.

많은 사람들이 개성공단을 “남북경제협력의 상징”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분명하다. 개성공단은 남쪽의 자본과 기술, 북쪽의 노동력과 토지를 활용해 진정한 의미의 ‘남북 상생의 경제협력모델’을 창출했다고 평가받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상징’이라는 표현은 수치로도 증명된다.

개성공단이 처음 가동된 2004년을 시작으로 10년간 개성공단 기업체 수는 8배, 생산액은 30배로 늘었다. 2005년 1500만 달러로 시작해 10년간 누적 생산액은 23억 달러를 기록했으며, 개성공단 방문 인원은 누적 94만 명에 달했다.

2000년 이후 남북교역액은 개성공단이 전면 중단되기 전까지 꾸준히 증가해, 2015년 남북교역 규모는 27억 1500만 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교류 건수에 있어서도 2000년 이후 총 470여 건, 이중 개성공단 관련 사업이 총 390건으로 약 80% 이상을 차지했다.

▲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북한(조선) 노동자들 [사진 : 뉴시스]

남북의 경제협력, 나아가 남북 간 긴장 완화와 관계발전에 기여했던 개성공단은 남북관계에 따라 부침을 겪기도 했다.

2010년 이명박 정부는 천안함 사건을 빌미로 북한(조선)에 대한 남북교역 중단과 대북 신규투자 금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대북제재 조치 ‘5.24조치’를 발표해 개성공단을 축소하고 개성공단을 제외한 남북교역도 모두 중단했다. 2013년 4월 한미합동군사훈련으로 인해 잠시 가동중단을 겪기도 한 개성공단은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6년 북한(조선)의 4차 핵실험을 이유로 2월 전면 중단에 이른다.

남북경제교류협력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남북철도 연결, 그리고 금강산관광이다.

6.15시대였던 지난 2003년 경의선을, 2005년 동해선 일부를 복원한 남과 북은 철도로 군사분계선을 넘나들었다. 2007년, 한국전쟁 이후 56년 만에 경의선이, 57년 만에 동해선이 남북을 종단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활발하게 추진된 남북철도연결 사업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남북관계 경색으로 중단된다.

1998년 금강호 첫 출항 이후 6.15의 바람을 타고 2005년 관광객 100만 명을 돌파한 후 금강산관광은, 2008년 이후 10년 이상 멈춰 있다. 그간 금강산을 찾은 관광객은 200만 명이 넘었다.

6.15공동선언 발표로 활발했던 남북경제교류협력은 결국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 모두 멈춰 섰다.

대북제재로 멈춰선 남북경협… 공동선언 정신으로 돌아가야

▲ 사진 : 뉴시스

지난해, 세 차례 남북 정상회담으로 남북관계엔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4월 판문점선언에서 “남과 북은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 자주의 원칙을 확인”하고, “이미 채택된 남북 선언들과 모든 합의들을 철저히 이행함으로써 관계 개선과 발전의 전환적 국면을 열어” 나가기로 했다. 9월 평양공동선언에선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사업을 우선 정상화하기로 했다. 연내 동·서해선 철도 및 도로 연결을 위한 착공식도 갖기로 했다. 또,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올해 초 신년사에서 “아무런 전제조건이나 대가없이 개성공업지구와 금강산관광을 재개할 용의가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개성공단 전면 중단의 이유이기도 하면서 미국이 대북제재를 시행한 이유는 북한(조선)의 핵실험이다. 북한(조선)은 이를 1년이 훨씬 넘도록 중단했다. 그러나, 원인은 해소됐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개성공단은 여전히 폐쇄상태에 있다. 미국의 대북제재, 그리고 한미워킹그룹의 간섭과 통제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한국은 미국의 승인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발언에 이어,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의 방한 직후 개성공단 기업인의 방북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11월 비건을 미국 측 대표로 해, 대북제재와 남북관계를 조정하는 ‘한미워킹그룹’ 출범 이후 미국은 사사건건 남북관계의 속도를 조절했다.

미국은 남북철도 연결, 그리고 금강산관광 재개 역시 제동을 걸었다. 지난해 8월, 판문점선언과 평양공동선언 합의에 따라 남과 북은 남북철도 연결을 위한 경의선 북측구간 남북공동조사를 추진했다. 그러나 유엔군 사령부의 통행불허로 무산됐다. 연내 치르기로 한 동·서해선 철도 및 도로 연결을 위한 착공식은 한미워킹그룹을 거치고 나서야 지난해 12월26일 겨우 치를 수 있었다. 전문가들도 “대북제재와 관련없다”, “행정명령으로 재개가 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금강산관광 역시 대북제재에 묶여있다.

▲ 지난해 12월 26일 북한(조선) 개성시 판문역에서 열린 남북 동·서해선 철도, 도로 연결 및 현대화 착공식에서, ‘서울-평양 표지판 제막식’ [사진 : 뉴시스]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 미국의 대북제재는 더욱 노골화됐다. 지난 4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개성공단, 금강산관광 재개에 대해 “아직 적기가 아니”라고 말한 트럼프 대통령은 이후 “제재 유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최근에도 마찬가지다.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철도·도로 연결 등 남북경제협력에 노력을 기울이던 문재인 정부에 한미워킹그룹은 한미사이 대북정책을 ‘조율’하는 자리가 아니라 ‘승인’ 여부를 결정하는 자리로 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4월 김연철 통일부 장관 임명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남북관계 발전은 북미관계의 발전과 발을 맞춰야 한다”면서 남북관계 발전에 속도조절을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미국의 대북제재가 남북경제협력에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도 제2의 6.15시대, 판문점선언 시대를 열겠다는 시민, 사회단체들의 여론은 쉬이 잦아들지 않고 있다.

리얼미터가 지난 2월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재개에 대한 국민여론을 조사한 결과, 찬성 68.9%, 반대 26.5%로 집계됐다. 지난 2017년 6월에 실시한 ‘개성공단 재가동에 대한 국민여론’ 조사(찬성 49.4% vs 반대 39.9%)에 비해 찬성 여론이 약 20%p 확대된 결과다. (사)겨레하나는 6.15공동선언 발표 19주년을 앞두고 지난 14일, 6150명이 작성한 금강산 방문신청서를 통일부에 직접 접수하는가 하면, 금강산 가기 운동은 지역과 단체들로 점차 확산되고 있다.

▲ (사)겨레하나는 지난 14일 6.15공동선언 발표 19주년 맞아 6,150장 금강산 방문신청서를 통일부에 직접 접수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북남 사이의 협력과 교류를 전면적으로 발전시켜… 온 겨레가 북남관계개선의 덕을 실지로 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4월 시정연설에선 “(대북제재는) 우리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도전인 것만큼 결코 그것을 용납할 수도 방관시 할 수도 없다…”면서 제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의사 또한 명확히 했다. 6.15공동선언, 판문점선언을 합의했던 정신으로 돌아와 다른 나라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남북 합의를 이행해야 한다는 의지다.

지난달 17일, 정부는 3년 만에 개성공단 기업인들의 자산점검을 위한 방북신청을 승인하면서 “기업인들의 조기 방북이 성사될 수 있도록 지원해 나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남북경제협력과 남북관계 개선, 대북제재를 대하는 남쪽의 선택 역시 다른 데 있지 않다. 6.15공동선언과 이를 계승한 판문점선언에 답이 있다.

“나라의 통일 문제는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

조혜정 기자  jhllk20@gmail.com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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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부인 “그냥 아는 아저씨, 내가 아니면 결혼 못할 것 같았다.”

검사가 돈을 쫓아가면 스폰서 검사로 타락합니다
 
임병도 | 2019-06-19 09:02:0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 차기 검찰총장 후보로 지명됐습니다. 윤 후보의 이력이야 워낙 많이 알려져 있어, 언론은 잘 보도되지 않았던 그의 부인 관련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기사의 내용은 대부분 윤 후보자 부인의 재산이 많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윤 후보자가 부인과 결혼하게 된 사연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그냥 아는 아저씨로 지내다 한 스님이 나서서 연을 맺어줘
돈도 없고 내가 아니면 결혼 못할 것 같았다.

윤석열 후보자 부인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는 <주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그냥 아는 아저씨로 지내다 스님이 나서서 결혼했다’고 말했습니다.

김 대표는 윤 후보를 왜 아는 아저씨라고 불러왔을까요? 김 대표는 윤석열 후보자보다 12살이 어립니다. 단순히 나이 차이 때문이 아닙니다. 결혼 당시 윤석열 후보자의 나이는 53살이었습니다.

윤 후보자가 53살에 결혼했으니 재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초혼입니다. 김 대표의 말처럼 그냥 아는 아저씨처럼 살다가 옆에서 보다 못한 스님이 나서서 연을 맺어준 셈입니다.

윤석열 후보자의 결혼이 늦은 이유는 사법시험을 무려 9수 끝에 합격했기 때문으로 풀이됩니다. 윤 후보자는 서울대 법대 재학 도중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학내 모의재판에서 검사역을 맡았습니다. 윤 후보자는 전두환에게 사형을 구형했고, 한동안 강원도로 도피하기도 했습니다.

윤 후보자는 서울대 법대 4학년 때 1차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2차에서 계속 낙방하다가 1991년에야 합격합니다. 32살의 나이로 사법연수원에 들어간 윤 후보자는 나이가 많았던 탓에 23기 사이에서는 형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윤석열 후보자보다 4살 어린 우병우 전 청와대 수석이 4 기수 선배이고, 14기였던 채동욱 전 검찰총장은 고작 1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으니 ‘아저씨’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김건희 대표는 윤석열 후보자와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에 대해 “가진 돈도 없고 내가 아니면 영 결혼을 못 할 것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결혼할 때 남편이 가진 것은 통장에 2000만 원이 전부
자기 명의 집도 없는 검찰총장 후보

김건희 대표는 <주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결혼할 때 보니 남편이 가진 것이라고는 통장에 2000만 원이 전부였다. 돈이 너무 없어 결혼 안 하려고까지 했다”라고 밝혔습니다.

김 대표는 윤 후보자가 돈이 없었던 이유로 “빚내서라도 자기가 먼저 술값 내고 밥값 내는 사람이라 월급이 남아나질 않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아마 윤 후보자가 나이가 많았기에 형이라며 따르는 사람이 많아, 술값이고 밥값을 도맡아 낸 것으로 보입니다.

윤 후보자가 돈이 없는 것은 결혼하고 7년이 지났지만 똑같습니다. 2019년 3월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현황을 봐도 윤 후보자의 재산은 예금 2억 1300만 원뿐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김건희 대표의 재산입니다.

김건희 대표의 재산을 살펴보면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의 토지와 서울 서초구에 주상 복합 건물 한 채가 있습니다. 이외에는 49억의 현금과 주식 등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재산 내역 어디를 봐도 윤석열 후보자 명의로 된 집이 하나도 없습니다. 검찰총장 후보자가 집도 한 채 없이 살아온 것입니다.

윤 후보자가 재테크 등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은 그가 여주지청장 시절이었던 2013년 공직자 재산공개에서 잘 드러납니다. 당시 윤 후보자는 부인 재산 신고를 누락했다는 오해를 받았는데, 재산을 축소한 것이 아니라 대출금 4억 5000만원까지 포함해 과다 신고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당시 윤석열 후보자는 “지난해 결혼해 처음으로 아내 재산을 신고하면서 착오가 생겼다”고 해명했는데, 착오가 아니라 재산 신고를 별다르게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으로 해석됩니다. 검사로 평생을 살아오면서 부동산이 하나 없었던 사람이 부인이 보유한 부동산을 신고하려니 얼마나 당황했을지 짐작이 됩니다.

부인 재산? 김건희 대표 재산이 맞다.
결혼 후 재산이 늘기는커녕 오히려 까먹고 있다.

만약 지금 윤석열 후보자가 이혼하면 재산분할은 어떻게 될까요? 윤 후보자 예금 이외에는 분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보유한 재산 대부분은 김건희 대표가 결혼하기 전에 이미 스스로 만들어 왔기 때문에 윤 후보자의 기여도는 0입니다.

“결혼 전에도 시아버지가 맨날 남편 빈 지갑 채워주느라 바빴다고 들었어요. 결혼 후 재산이 늘기는커녕 오히려 까먹고 있어요. 나중에 변호사 하면 그래도 괜찮겠지 생각했는데 그 기대도 접었습니다. 1년 동안 변호사 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 의뢰인들 혼내다 끝났다고 하더군요.”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 주간조선 인터뷰 )

언론은 윤석열 후보자 부인의 재산이 50억이 넘는 점을 앞다퉈 강조합니다. 하지만 김 대표는 이미 결혼하기 전이었던 1990년대 IT 주식으로 종잣돈을 마련해 문화콘텐츠 등의 사업으로 재산을 만들었습니다.

김건희 대표는 윤 후보자를 가리켜 “남편은 거짓 없고 순수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부인이라 남편을 치켜세운 말은 아닙니다.

과거 민주당 박범계 의원이 국회의원 당선 후 사법연수원 동기들끼리 축하 모임을 했습니다. 당시 윤석열 검사는 모임에 참석해 10분 간 말없이 술 한 잔만 마시고 떠났습니다. 박범계 의원은 “국회의원과 현직 검사가 사석에서 함께 있으면 검찰의 정치 중립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나에게 깨우쳐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검사가 돈을 쫓아가면 스폰서 검사로 타락합니다. 그런 면에서 윤 후보자는 평생을 돈이 아닌 검사의 길을 걸어간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유한국당은 국회 등원을 거부하고 있지만, ‘검찰 장악 저지’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윤 후보자 인사청문회에는 참여할 듯보입니다. 하지만 인사청문회 내내 윤 후보자의 부인 재산을 공격하며 꼬투리를 잡으려고 할 것입니다.

집 한 채 없이 평생 검사로 살아온 윤석열 후보자에게 물을 것은 부인 재산이 얼마나 되느냐가 아닙니다. 앞으로 검찰 개혁을 어떻게 해나가고 끝까지 국민에게만 충성하겠다는 굳은 의지입니다.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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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노동자의 손과 발을 묶기로 작정했다”

“정부가 노동자의 손과 발을 묶기로 작정했다”
 
 
 
백남주 객원기자 
기사입력: 2019/06/18 [23:16]  최종편집: ⓒ 자주시보
 
 

경찰이 지난 3~4월 국회 앞에서 열린 노동법 개악 저지’ 투쟁을 주도한 혐의를 받고 있는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의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김 위원장이 간부들과 사전 공모해 국회에 무단 침입하는 등 불법폭력 시위를 주도한 혐의가 상당하고도주와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며 구속영장 신청 이유를 밝혔다.

 

이에 민주총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민주노총은 김 위원장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에 대해 정부가 결국은 그릇된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노동자의 손과 발을 묶기로 작정했다며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 정책 추진에 거세게 저항하는 민주노총을 굴복시키기 위한 시도이며자유한국당을 비롯한 극우 집단들의 끊임없는 민주노총 때리기에 대한 편승이라고 지적했다.

 

민주노총은 정가 구속하려 하는 것은 김명환 위원장 개인이 아니라 우리나라 노동자의 삶과 노동이라며 가지고 있는 모든 역량을 모아 노동기본권 보장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근절을 위한 더욱더 힘찬 투쟁에 온 몸을 던질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중당도 대변인 논평을 통해 김 위원장에 대한 구속영장 신청은 경사노위 불참에 대한 정치 보복이며적폐세력의 반격을 잠재우기 위해 희생양 만들기라며 “‘너희도 민주노총 꼴 나기 싫으면 잠자코 순응하라는 대국민 협박에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민중당은 온갖 불법으로 경영권 승계하고 증거까지 인멸하는 재벌과는 희희낙락 맥주 마시며 기념사진이나 찍는 주제에 노동자에게 불법 시위를 죄로 묻다니결코 용납할 수 없다며 불법이 그렇게 죄라면 이재용부터 잡아 가둬라고 주장했다.

 

노동당도 성명을 통해 노동자들의 당연한 요구에 대한 정부의 강경한 대응은 노동존중 사회가 얼마나 기만인지를 다시 보여준다며 노동법 개악이 전제된 사회적 대화에 참여하라며 민주노총 길들이기를 시도하더니이제는 민주노총을 탄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편 경찰은 당시 국회 앞 투쟁에서 민주노총 조합원 74명이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고 보고 이들에 대한 수사를 진행 하고 있다민주노총 조직쟁의실 소속 간부 3인은 이미 구속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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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 구속영장 신청에 대한 민주노총 성명

 

정부가 결국은 그릇된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노동자의 손과 발을 묶기로 작정했다.

 

경찰은 18일 온갖 혐의를 붙여 김명환 위원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이는 개별 사안으로 책임을 몰아 본질을 흐리려는 탄압에 불과하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 정책 추진에 거세게 저항하는 민주노총을 굴복시키기 위한 시도이며자유한국당을 비롯한 극우 집단들의 끊임없는 민주노총 때리기에 대한 편승이다.

 

민주노총은 우리나라 전체 노동자의 삶과 노동을 대변하는 조직이다정부가 구속하려 하는 것은 김명환 위원장 개인이 아니라 우리나라 노동자의 삶과 노동이다.

 

민주노총이 이 같은 겁박에 굴복한다 생각하는가정부가 자본의 탐욕과 구태에 무릎 꿇고 이전과 다름없이 후진국형 저임금장시간 노동체계를 유지하고 악화시키겠다는 의도를 보인 이상민주노총의 답변은 확실해졌다.

 

민주노총은 가지고 있는 모든 역량을 모아 노동기본권 보장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근절을 위한 더욱더 힘찬 투쟁에 온 몸을 던질 것이다.

 

2019년 6월 18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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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노동신문 기고 통해 ‘북중친선’ 강조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9/06/19 11:18
  • 수정일
    2019/06/19 11:18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한반도 문제 관련 대화와 협상 진전 이루도록 추동”
이광길 기자  |  gklee68@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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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6.19  09: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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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일 북한을 첫 국빈 방문하는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19일 <노동신문> 기고를 통해 북중친선 강화, 대화와 협상을 통한 한반도 문제 진전 추동 의지를 밝혔다. 

<노동신문>에 따르면, 이날 시 주석은 ‘중조친선을 계승하여 시대의 새로운 장을 계속 아로새기자’는 제목의 기고문을 통해 “국제정세가 어떻게 변하든 중조친선협조관계를 공고발전시킬데 대한 중국당과 정부의 확고부동한 입장에는 변함이 없으며 변할 수도 없다”고 밝혔다.

아울러 “중국 측은 김정은 위원장 동지께서 조선당과 인민을 이끌어 새로운 전략적 노선을 관철하며 경제발전과 인민생활개선에 총력을 집중하여 조선이 사회주의건설에서 새롭고 보다 큰 성과를 이룩하시는 것을 견결히 지지할 것”이라고 했다.

특히 “우리는 김정은 위원장 동지의 올바른 결단과 해당 각측의 공동의 노력에 의하여 조선반도에 평화와 대화의 대세가 형성되고 조선반도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쉽지 않은 역사적 기회가 마련됨으로써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인정과 기대를 획득한데 대하여 기쁘게 보고 있다”면서 “중국 측은 조선동지들과 함께 손잡고 노력하여 지역의 항구적인 안정을 실현하기 위한 원대한 계획을 함께 작성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시 주석은 “이번 방문을 통하여 김정은위원장동지와 조선동지들과 함께 중조친선협조관계를 설계하고 전통적인 중조친선의 새로운 장을 아로새기려고 한다”고 밝혔다.

“전략적 의사소통과 교류를 강화하고 서로 배우면서 전통적인 중조친선에 새로운 내용을 부여할 것”이고 “고위급 내왕의 훌륭한 전통과 인도적 역할을 발휘하여 중조관계발전의 설계도를 잘 작성하고 중조관계발전의 방향을 잘 틀어쥘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여러 급의 의사소통과 조율을 강화하고 당적교류를 심화시키며 국가관리 경험을 교류하여 자기 당과 자기 나라의 사업을 훌륭히 계승하고 훌륭히 발전시켜 나갈 것”이고 “친선적인 내왕과 실무적인 협조를 강화하여 중조관계발전에 새로운 동력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밝혔다.

시 주석은 “의사소통과 대화, 조율과 협조를 강화하여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새로운 국면을 개척해 나갈 것”이라며 “중국 측은 조선 측이 조선반도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올바른 방향을 견지하는 것을 지지하며 대화를 통하여 조선 측의 합리적인 관심사를 해결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어 “우리는 조선 측 및 해당 측들과 함께 의사소통과 조율을 강화하고 조선반도문제와 관련한 대화와 협상에서 진전이 이룩되도록 공동으로 추동함으로써 지역의 평화와 안정, 발전과 번영을 위해 적극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18일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중국 최고지도자로서는 14년 만에 이뤄지는 이번 방북 기간 시 주석이 김정은 위원장과 회견, 회담하고 평양 시내에 있는 ‘중조우의탑’ 등을 방문할 것이라고 밝혔다. 

시 주석은 오는 28~29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계기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확대 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일주일 사이에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을 모두 만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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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에 묻혀있는 진실, 유해의 주인 찾아낼 수 있을까?

강석영 기자 getout@vop.co.kr
발행 2019-06-18 10:50:31
수정 2019-06-18 10:5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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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10세 아동을 성폭행한 35세 남성의 형량이 2심에서 대폭 감형돼 시민들의 공분을 샀다. 누리꾼들은 2심 재판부 재판장의 이름과 사진을 각종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며, ‘아동 성폭행범 감형 판사를 기억하자’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보습학원 원장 이 씨(35)는 지난해 4월 채팅앱으로 만난 초등학생 A 양(10)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소주 2잔을 마시게 한 뒤, 취한 피해자의 양손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눌러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지난 13일 서울고법 형사9부(부장판사 한규현)는 이 씨의 항소심에서 13세 미만 미성년자 강간 혐의를 인정해 징역 8년을 선고한 1심을 깨고 미성년자의제강간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아울러 이 씨의 정보를 5년간 공개하고, 10년간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의 취업제한과 보호관찰 5년을 명령했다.

1심과 2심의 형량을 가른 것은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상 ‘13세 미만 미성년자 강간’ 혐의 인정 여부다. 이 씨는 애초 해당 혐의로 기소됐고, 1심은 이를 유죄로 봤다. 해당 혐의는 무기징역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는 중범죄다.

그러나 2심은 강간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 씨가 A 양을 ‘폭행·협박’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대신 13세 미만 미성년자와 성행위를 하면 폭행·협박 여부와 관계없이 처벌하는 미성년자의제강간 혐의를 인정했다. 형법은 해당 혐의를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선고 직후 각종 SNS는 한규현 판사의 이름과 사진으로 도배됐다. ‘자기 자식이어도 그랬을까’, ‘국민 법 감정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 등 반응이 터져 나왔다. 다음 날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아동 성폭행범을 감형한 ***판사 파면하라”라는 제목으로 청원이 올라오기도 했다. 신청인은 “어떻게 아동과의 관계를 합의라고 인정할 수 있는지”라며 “가해자들의 감형은 피해자들에게 2차 가해나 다름없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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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안 때렸으니 강간 아니다?
35살 남성이 10살 여아 눌렀는데 ‘폭력’ 아니라는 법원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서울고법은 지난 17일 이례적으로 사후 설명자료를 배포하며 해명에 나섰다. 선고와 동시에 판결문 설명자료를 배포하는 일은 종종 있으나, 논란이 된 판결 내용에 대해 사후에 해명하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다.

법원은 피해자 진술만으로 이 씨의 폭행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경찰 조사 시 피해자 진술을 녹화한 영상물만으로 ‘이 씨가 손으로 피해자의 양손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누르는’ 방법으로 폭행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법원은 “(영상물 속) 피해자는 ‘이 씨로부터 직접 폭행·협박을 당한 사실은 없다’라고 진술했는데, 조사관이 ‘이 씨가 그냥 누르기만 한 거야?’라는 취지로 묻자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라며 폭행 여부 관련 경찰 조사가 불충분했다고 말했다.

이어 “피해자의 나이가 만 10세 불과하다는 사정을 염두에 놓고 살펴봐도, 이 씨가 피해자의 몸을 누른 행위가 피해자가 반항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정도의 폭행·협박이라고 인정하기에 부족하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재판부는 피해자가 법정 진술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유했지만, 피해자가 증인 출석이 어렵다는 의사를 밝혀 무산됐다고 법원은 덧붙였다.

법원의 이러한 해명은 상식적으로뿐 아니라 법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35세 성인 남성이 10세 여아의 몸을 눌렀다면 강간죄의 구성요건인 ‘폭행’에 해당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현행 법체계는 피해자가 반항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정도의 폭행·협박이 있어야 강간죄를 인정한다. 이른바 ‘최협의설’은 피해자의 저항 여부로 폭행·협박을 가장 좁게 해석해 현실 속 성폭력을 외면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 사건의 경우 두 사람의 물리력 차이를 생각한다면 최협의설로 판단해도 피해자의 저항이 불가능했을 것으로 충분히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강간죄 구성요건인 ‘폭행’은 주먹 등으로 신체를 때리는 행위만을 포함하지 않는다. 피해자가 반항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정도의 물리력까지 모두 폭행으로 간주한다. ‘이 씨로부터 직접 폭행·협박을 당한 사실은 없다’라는 피해자 진술을 근거로 이 씨의 강간 혐의에 면죄부를 준 법원이 비판받는 이유다.

가해자 의심한 1심은 유죄
피해자 의심한 2심은 무죄

2심 판단이 잘못된 이유는 1심과 비교해보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피해자 진술만으로 강간죄를 판단할 수 없다던 2심과 달리, 1심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을 토대로 이 씨의 강간 혐의를 유죄로 봤다.

1심은 피해자 진술이 구체적이고 자연스러워 믿을만하다고 판단했다. 2심이 강간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근거로 든 ‘이 씨로부터 직접 폭행·협박을 당한 사실은 없다’라는 피해자 진술에 대해, 오히려 1심은 “솔직하다”라고 평가했다. 자신에게 불리할 수 있는 증언임에도 피해자가 숨기지 않고 말해 진술 신빙성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두 사람의 나이 차이 등을 생각하면 가해자가 몸을 누르는 행위만으로도 피해자가 저항하기 어려웠을 거라고 판단했다. 이 씨의 폭행을 인정한 것이다.

2심 재판부는 가해자의 진술 번복을 고려하지 않았다. 1심은 이 씨의 강간 혐의를 인정하는 이유 중 하나로 그의 진술 신빙성을 따졌다. 조사 과정에서 처음 이 씨는 피해자와의 성행위 자체를 부인하다가 DNA 증거가 나오자 ‘성관계는 있었지만, 성폭력은 아니다’로 말을 바꿨다.

이번 판결에서 사법부가 여전히 아동·청소년 성폭력 범죄를 바라보는 시각이 형식적인 법리에만 치우쳐져 있음이 드러났다. 13세 미만 미성년자와의 성행위를 무조건 처벌하는 미성년자의제강간죄의 존재 이유를 생각할 때, 직접적인 폭행·협박 여부가 아동·청소년 성폭행범의 형벌을 결정하는 중대한 기준이 된 이번 판결은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다.

폭행·협박은 가중 처벌의 요소일 뿐, 그것이 없었다고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강석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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