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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에 반전…한국 역전 드라마로 36년 만에 4강 진출

등록 :2019-06-09 06:39수정 :2019-06-09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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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 월드컵 8강전서 세네갈에 연장 뒤 승부차기 승
이강인, 이지솔, 조영욱의 질긴 추격전 골이 발판
막판 승부차기에서도 실축 뒤 역전 명승부 연출
12일 4강에 선착한 에콰도르와 결승 진출 다퉈
9일(한국시각) 폴란드 비엘스코-비아와 경기장에서 열린 2019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 8강 한국과 세네갈전의 경기에서 연장 전반 조영욱이 역전골을 넣은 뒤 기뻐하고 있다. 비엘스코-비아와/연합뉴스
9일(한국시각) 폴란드 비엘스코-비아와 경기장에서 열린 2019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 8강 한국과 세네갈전의 경기에서 연장 전반 조영욱이 역전골을 넣은 뒤 기뻐하고 있다. 비엘스코-비아와/연합뉴스
믿겨지지 않는 끈질긴 추격전. 그리고 오세훈의 화룡점정. 대표팀 선수들이 36년 만에 4강 진출의 돌풍을 몰아쳤다.

 

정정용 감독이 이끄는 20살 이하 한국축구대표팀이 9일(한국시각) 폴란드 비엘스코-비아와 경기장에서 열린 2019 국제축구연맹(FIFA) U-20 월드컵 8강전에서 연장 120분 혈투(3-3) 뒤 승부차기(3-2)에서 세네갈을 꺾었다. 한국이 이 대회 4강에 진출한 것은 1983년 이후 36년 만이다. 한국은 12일 오전 미국을 2-1로 꺾고 4강에 선착한 에콰도르와 결승행을 놓고 맞붙는다.

 

체격조건이 좋은 세네갈을 상대로 한국 축구의 투혼이 빛난 한판이었다. 선제골을 내주고 동점골, 다시 뒤지다가 추격골을 넣은 뒤 연장에서 선제골, 이후 승부차기 드라마로 팬들을 열광시켰다.

 

스리백 수비대형으로 나선 한국은 측면 윙백의 가담으로 5명의 수비벽을 세우는 3-4-3 전형으로 나섰다. 이재익(강원), 김현우(디나모 자그레브), 이지솔(대전)이 스리백 라인을 꾸리고 좌우 윙백에 최준(연세대)과 황태현(안산)이 선발로 나섰다. 미드필더 정호진(고려대)은 박태준(성남)과 함께 중원을 지켰고, 공격진에는 오세훈(아산)과 전세진(수원 삼성), 이강인(발렌시아)이 배치됐다.

 

한국은 제공권과 속도를 자랑하는 세네갈에 전반 37분 첫골을 허용했다. 유연성이 뛰어난 세네갈은 골문 앞에서 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오른쪽 측면에서 올라온 공중볼을 머리로 받아 뒤로 내주자, 달려들던 세네갈의 케빈 디아네가 강력한 슈팅으로 기세를 올렸다.
 
한국의 반격은 후반에 본격화했다. 정정용 감독은 후반 7분 공격수 전세진을 빼고, 조영욱(FC서울)을 투입하면서 추격전을 폈다. 기회는 10분도 안 돼 찾아왔다. 이강인(발렌시아)의 패스에 이은 정호진의 슈팅이 이뤄지는 사이, 세네갈의 수비수가 벌칙구역 정면 안에 있던 이지솔을 밀어 넘어뜨렸다. 정호진의 슈팅은 골키퍼에 잡혔지만, 비디오 판독결과 이지솔이 반칙에 의해 넘어진 게 확인되면서 페널티킥을 얻었다. 키커로 나선 이강인은 구석을 뚫는 슛으로 1-1 균형을 만들었다.

 

한국은 후반 31분 다시 상대에 골을 내주면서 뒤졌다. 벌칙구역 안에서 수비수가 핸드볼을 범한 것이 비디오 판독결과 드러나면서 페널티킥을 내준 것이다. 골키퍼 이광연(강원)이 처음에는 막아냈지만, 미리 움직여 앞으로 나왔다는 비디오 판독으로 재차 페널티킥을 내주면서 1-2가 됐다.

 

후반 막판으로 갈수록 양팀 선수들은 체력이 고갈되는 듯했다. 패스 실책도 나왔다. 추격전은 끝난 듯했다. 하지만 9분의 추가시간에 반전이 일어났다. 한국은 후반 추가시간이 1분도 남지 않은 8분께 이지솔의 헤딩골로 극적인 2-2 무승부를 연출했다. 수비수 이지솔은 이강인의 코너킥을 머리로 잘라먹으면서 골망 윗부분을 갈랐다. 승부를 연장으로 이끄는 두 골에 모두 기여한 이지솔의 집중력이 돋보였다.

 

연장에서는 오히려 한국이 기선을 잡았다. 주인공은 조영욱이었다. 조영욱은 연장 전반 5분 역습 상황에서 중앙선을 넘어선 이강인이 찔러준 스루 패스를 상대 수비를 달고 들어가면서, 벌칙구역 정면에서 그대로 오른발로 차 넣어 승부를 뒤집었다.

 

승기를 잡은 한국은 세네갈의 파상공세를 막아내면서 연장 후반 15분까지 잘 버텼다. 하지만 곧 종료 휘슬이 울릴 것이라는 희망은 동점골 허용으로 사라졌다. 종료 직전에 상대 아마두 시스가 골지역 정면에서 구석을 노리고 찬 공은 야속하게도 골키퍼의 손끝을 벗어나면서 골망으로 들어갔다.

 

승부차기에 들어간 한국은 선축한 김정민(리퍼링)과 조영욱이 잇따라 골을 성공시키지 못하면서 위기감을 느꼈다. 하지만 엄원상(광주)이 처음 골을 넣었고, 네번째 키커인 최준이 골을 추가하면서 반격의 실마리를 잡았다. 골키퍼 이광연은 상대 네번째 키커의 슈팅을 막아내 2-2로 만들었고, 마지막 키커 오세훈이 마침표를 찍었다. 오세훈의 슛은 상대 골키퍼에 막혔지만, 골키퍼가 앞으로 나와 막으면서 무효로 처리됐고 재차 맞은 기회를 골키퍼 정면으로 차 넣으며 3-2로 뒤집었다. 세네갈의 마지막 키커인 주장 디아네는 부담 탓인지 공을 허공에 날렸고, 한국 선수들은 모두 껴안으며 기쁨을 만끽했다.

 

정정용 감독은 경기 뒤 “밤늦게까지 경기를 지켜보며 응원한 국민에게 감사하다. 약속을 지켜서 행복하다.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은 선수들에게 감사하다. 우리는 하나다”라고 말했다. 이강인은 “형들과 좋은 경기를 해서 기쁘다. 꼭 결승에 가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김창금 기자 kimck@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ports/soccer/897113.html?_fr=mt1#csidx93867c72c9c619787b36ea85086fd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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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등록증에 '낙인', 이건 안될 일입니다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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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9/06/09 11:55
  • 수정일
    2019/06/09 11:55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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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올해 7월부터 등록증에 '장애 심함 - 심하지 않음' 표기... '장애인 분리'가 우려된다

19.06.09 11:30l최종 업데이트 19.06.09 11:30l

 

 지난 4일 지인이 보내준 '장애인등록증' 개편 관련 안내 문서. 복지카드라는 이름은 '장애인 등록증'으로, 장애OO급은 '장애의 정도가 심한(심하지 않은) 장애인'으로 바뀐다. 이 개편안은 올해 7월부터 적용된다고 한다.
▲  지난 4일 지인이 보내준 "장애인등록증" 개편 관련 안내 문서. 복지카드라는 이름은 "장애인 등록증"으로, 장애OO급은 "장애의 정도가 심한(심하지 않은) 장애인"으로 바뀐다. 이 개편안은 올해 7월부터 적용된다고 한다.
ⓒ 김광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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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엄연히 낙인찍는 거나 다름없다."
"인권감수성이 제로인 이 결과를 도출한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지난 4일 지인으로 받은 한 장의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이런 댓글이 달렸다. 사진은 보건복지부가 만든 장애등급제 개편에 따른 장애등록증 개편 안내와 관련 지침 중 일부를 담은 것이다.

보건복지부는 기존 장애등록증(복지카드) 이름을 '장애인등록증'으로 바꾸고, 등록증에 있는 '장애00급'을 '장애정도가 심한 장애인'과 '장애정도가 심하지 않은 장애인'으로 표기한다고 적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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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2019년 7월부터 시행되는 장애인등급제 폐지에 따라 보건복지부가 바뀌는 업무에 관련한 교육을 위해 배포한 자료였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바뀌는 장애인등록증은 올해 7월부터 적용되고, 표기는 올해 7월 1일부로 시행되는 장애인복지법 개정안에 근거한다.

필자가 보기에 보건복지부의 '장애인등록증 개편 안내'는 문제가 있다. 차근차근 살펴보자.

[배경] 장애인 운동이 걸어온 길

2000년대 초반. 장애인의 이동할 권리를 주장했던 '장애인 이동권' 투쟁은 우리나라 대중적이고, 진보적인 장애운동의 서막을 알렸다. '장애인의 2000년대는 과거와는 달라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가 표출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은 이후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장애인의 교육받을 권리를 위한 투쟁, 장애인의 탈시설과 지역에서 살 권리를 향한 투쟁 그리고 장애인 등급제 폐지 투쟁으로 이어졌다.

불과 20여 년 만에 당연하게 보이는 법과 제도가 생겼던 것은 장애 당사자의 처절하고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투쟁들은 장애인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한계가 있었다. 우리나라 장애인 복지의 근간은 '장애등급제'와 '장애인복지법'이다. 이 두 개를 놔두고 장애인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데는 많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애운동 진영은 장애인복지법은 장애인권리보장법으로, 장애등급제는 전면 폐지를 통한 서비스 전달체계 전면 개편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2013년 박근혜 정부 출범과 함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중심으로 광화문에 장애등급제 폐지를 위한 농성장이 만들어졌다. 2017년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의 광화문 농성장 방문과 장애등급제 전격 폐지의 약속이 있은 뒤 농성을 해산했다.

우리나라 장애등급제는 장애인의 손상에 따라 장애유형을 15가지로 나눈다. 그리고 손상정도에 따라 장애유형별로 1~6급으로 나눈다. 1급은 장애정도가 가장 심한 것이고, 6급은 비교적 심하지 않은 정도를 뜻한다. 그리고 각 유형의 급수에 따라 장애인 복지서비스 지원 정도가 결정되고, 각종 세금 감면 및 할인 등이 결정된다.

그런데 이 1~6급을 결정하는 장애등급제는 한 사람의 어려움을 표현하고, 그들을 지원하는 데 전혀 적합하지도 않을 뿐더러 과학적이지도 않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 8월 25일 오전 서울 광화문역 장애인단체 농성장을 찾아 묵념하고 있다. 서울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서 5년간 농성했던 장애인들은 9월 5일 농성을 해제했다.
▲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2017년 8월 25일 오전 서울 광화문역 장애인단체 농성장을 찾아 묵념하고 있다. 서울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서 5년간 농성했던 장애인들은 2017년 9월 5일 농성을 해제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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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필자가 일하는 기관에 지적장애인 3급인 A씨가 있다. 지적장애인은 지능검사 및 사회적응검사 등을 거쳐서 판별되는데, 흔히 IQ라고 부르는 지능검사 결과 70 이하여야 지적장애 판정이 된다.

얼마 전 A씨는 장애인활동지원 신청을 위해 장애등급 재심사를 받았다. 의사는 몇 마디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듣고, 몇 가지 검사를 한 뒤 그의 지능을 71이라고 적었다. 결국 그는 지적장애가 없어질 처지에 놓였다. 

하지만, 내가 일하는 기관을 포함해 많은 이들의 항의 끝에 그는 지적장애 자격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초면인 사람이 대상자가 지적장애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는 구조다. 그때문에 현행 장애등급 체계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하는 비판이 나오는 것이다.

보건복지부는 장애등급제 개편과 관련해 수 년간 소위 전문가들을 섭외해 회의도 하고, 연구도 했다. 그리고 2018년 8월, 장애등급을 현행 1~6급 체계에서 중증(1~3급)과 경증(4~6급) 2등급 체계로 단순화한다고 발표했다(2019년 7월 시행). 당시 보건복지부는 "장애인의 구분을 단순화해 서비스를 지원할 때 참고자료로만 활용하고, 주요 서비스의 수급자격은 별도의 자격심사를 통해 결정함으로써 꼭 필요한 장애인이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한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수많은 장애 복지 관련 전문가들과 장애 당사자들은 비판했다. 현재 장애운동 진영은 '가짜 장애등급제 폐지'를 주장하면서 다시 투쟁을 벌이고 있다.

'장애의 정도가 심하다, 심하지 않다' 구분의 문제점 네 가지
 
 19일 오후?‘420 장애인 차별 철폐의날 행진’ 참가자들이 서울 세종로 세종대로 사거리를 점거한채 ‘장애등급제 폐지”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 2019.4.19
▲  2019년 4월 19일 오후 "420 장애인 차별 철폐의날 행진" 참가자들이 서울 세종로 세종대로 사거리를 점거한 채 ‘장애등급제 폐지”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
ⓒ 최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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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글 서두에 언급했던 '문제의 사진'으로 돌아가자. 장애인을 '장애의 정도가 심한 장애인' 그리고 '장애의 정도가 심하지 않은 장애인'으로 나누는 것은 어떤 문제점을 갖고 있는가.

첫째. 장애등급제 개편은 복지 예산과 연계된다. 하지만, 장애인등록증 개편은 복지를 바라보는 관료들의 인식이 드러나는 문제다. 복지는 단순히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정책이 아니다. 복지는 사회가 안정적으로, 정의롭게 유지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최소한'이다. 이는 헌법 제10조 행복추구권으로 보장하는 바이다.

이번 개편안은 기존 보건복지부 관료들이 복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관료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은 이상, 우리나라 사회복지가 아무리 향상된다고 한들, 국민 삶의 질은 제자리걸음이다.

둘째. 보건복지부는 장애에 대한 철학적인 개념이 미비하다는 점이다. 장애와 관련한 철학적인 논쟁은 '개별(재활)모델' 대 '자립생활(사회적) 모델'로 요약할 수 있다.

'개별(재활) 모델'은 장애의 원인을 장애 당사자에게 찾는다. 과거의 관점이다. 당사자 운동의 결과, '자립생활(사회적) 모델'이 당연한 시대에 접어들었다. 장애인 활동지원제도,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법,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이 이런 철학적 바탕 위에 만들어졌다. 앞으로 장애인 정책은 '자립생활(사회적) 모델'의 관점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장애등급제 개편은 차지하고서라도, 장애인등록증 개편은 큰 예산이 드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장애인을 '장애의 심함과 심하지 않음'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보건복지부 관료들이 여전히 '장애인(사회)복지'를 과거 철학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미래를 위해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셋째. 보건복지부의 개편 사항은 장애인 스스로에게 수치심을 준다. 기존 '장애OO급'은 소위 '아는 사람만 아는' 정도의 표기였다. 기존의 표기 방식도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장애를 부끄러워 할 정도는 아니라고 여겨진다. 자신의 손상 정도를 표기하는 것으로 보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애의 심함 혹은 심하지 않음' 표기는 당사자 스스로 '나는 장애정도가 심한 장애인입니다'라고 광고를 하게 만든다. 장애인이 왜 스스로 '힘든 존재'임을 알려야 하는가?

국가는 복지 대상자를 선정할 때, 자격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별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낙인효과'는 심각하다.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들은 보편복지를 주장한다. 보편복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상자를 구별하는 과정에서 낙인이 발생하더라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공무원들이 구별하는 것까지는 백번 양보해서 이해해도, 나 스스로 나의 비참함을 '등록증의 형태'로 증명하라는 건 국가가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해, 광화문 역사 안에서 해치마당으로 올라가는 어느 이의 모습.
▲  어느 해, 광화문 역사 안에서 해치마당으로 올라가는 어느 이의 모습.
ⓒ 최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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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국가의 역할은 통합이지 혐오에 있지 않다. 보건복지부의 장애인등록증 개편 방식은 장애인의 인식을 저해할 뿐더러, 혐오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여전히 강자들이 사회 약자나 자신들의 정적을 비난할 때 여러 장애를 끌어들여 비유한다. 

이제는 사람들이 '너는 장애 정도가 심한 장애인이냐?'라면서 장애인들의 손상 정도를 구별할지 모른다. 그리고 '장애 정도가 심한 장애인'이라는 어감은 마치 '자립생활을 하기 힘든' '지역사회에서 통합하기 힘들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어 우려된다. 

결국 장애운동이 지난 세월동안 지역 사회에서 살 권리를 얻기 위해 싸워왔던 역사를 한 순간 없던 일로 만들어버리지 않을까 우려된다. 지역사회 속 장애인 삶의 질은 복지 서비스의 양적·질적 향상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장애인을 '심한 자와 심하지 않은 자'로 표기하는 정책은 장애인 통합보다 '혐오와 분리'라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 우려된다.

장애인이 겪어왔던 '차별과 배제'

수많은 장애인들은 '장애'라는 이유로 지역사회로부터 차별과 배제를 경험했다. 그래서 그들은 직접 자신들의 몸으로 투쟁해왔다. 국가 정책 중에서, 특히 장애인 복지 부분은 당사자들의 피와 땀, 헌신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여기까지 왔다.

그렇다면 국가는 최소한 이들에 대한 예의를 갖춰야 하는 것 아닐까. 당사자들이 수많은 정책적 요구를 전달하면 보건복지부는 '예산이 없다'는 말로 일관해왔다. 그런데 이번 '장애인등록증 개편안'은 '예산'의 문제가 아닌 '철학'의 문제다. 장애인등록증 개편안이 사실이라면 마땅히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광백씨는 현재 인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무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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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 눈물 젖은 '서울 스까야'를 걷다

[시베리아 시간여행] 4. 블라디보스토크下 : 신한촌에서 영원한 불꽃까지
2019.06.08 13:43:27
 

 

 

 

"거사를 앞둔 안중근처럼 웃으면서 갑시다!"

마지막 날 아침, 다시 블라디보스토크역을 찾았다. 이번엔 기차 탑승 목적이 아니라 역 탐방이 목적이었다. 역사 앞에 선 대장 박흥수 철도기관사는 자못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곳이 거사의 시작점"이라고 했다.

1909년 10월의 어느 날 안중근 의사는 블라디보스토크 대동공보사에서 이토 이로부미의 하얼빈 방문 계획 소식을 들었다. 암살을 결심한 안 의사는 10월 21일 대동공보사 회계원 우덕순과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만나 하얼빈으로 가기 위해 열차에 올랐다. 

 

 

▲블라디보스토크역. ⓒ프레시안(박정연)


박 기관사는 이토 저격 사건과 관련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사실 이 거사의 참가자 가운데에는 거사와는 상관없는 순진무구한 17살 소년이 있었다"고 했다.

"안중근 의사 일행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까지 가는 도중에 한의사 유경집을 만납니다. 유경집에게는 17살 아들 유동하가 있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어 통역이 필요하다면서 유동하에게 통역을 부탁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이 17살 청년은 안중근 삼촌의 부탁에 아무런 의심 없이 통역과 안내를 맡으면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뤼순 감옥에 갇혔던 유동하는 석방 후 볼셰비키 당원으로 활동했고, 27살의 젊은 나이에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안중근을 만나기 전 유동하는 자신이 그런 엄청난 일에 휘말릴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혁명 전사가 될 것이라고는 더더욱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하나의 사건으로 사람의 운명이 완전히 뒤집혀버린 셈이다.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았다. 박 기관사 또한 "제가 만일 영화감독이라면 유동하를 주인공으로 영화를 찍을 것"이라고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역사 안은 오래된 건물의 정취가 느껴졌다. 박 기관사는 안중근 의사가 거쳐갔던 1909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했다. 

둘러보다 보니, 낡은 벽에 걸린 두 개의 동판이 눈에 띄었다. 하나는 제정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이자 시베리아 횡단철도 착공식에 참석한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방문을 기념하는 동판, 또 하나는 2015년 부산역과 자매결연을 기념해 만든 동판이었다. 박 기관사는 "부산에서부터 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역까지 올 그날을 고대한다"고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역과 부산역의 자매결연을 기념해 만든 동판. ⓒ프레시안(박정연)


플랫폼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내려가기 전, 박 기관사는 조합원들에게 "기차를 타러 가는 안중근 의사의 표정이 어땠을 것 같냐"고 물었다. 죽음까지 각오한 엄청난 일을 앞뒀으니 비장한 표정이었지 않았을까. 혹은 잔뜩 긴장한 표정이 아니었을까.

"비장한 얼굴로 가면 의심받을 수 있으니까 안중근 의사는 우덕순 동지와 함께 유랑 가는 여행자처럼 웃으면서 갔다고 해요. 우리도 웃으면서 내려갑시다."

플랫폼으로 나오니, 외벽에도 이런저런 동판이 보였다. 박 기관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주요 역을 소개한 동판을 소개한 뒤, 철도가 낳은 역사적 비극에 대해 이야기했다.

"1차 대전 때 프랑스, 독일, 영국의 군사 전문가들이 3개월이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땠나요? 전쟁이 4년이나 지속됐습니다. 왜 예측이 틀렸던 것일까요. 알렉산더부터 나폴레옹 시대까지는 일단 싸움이 붙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거기서 끝났습니다. 그런데 철도가 생기면서 불리한 상황이 될 것 같으면 계속 물자 보급해주고 병력을 투입하고 그러다 보니 전쟁이 장기화됐습니다. 이렇게 비극적인 전쟁이 철도로 가능해진 것입니다." 

한마디로 문명의 아이러니인 셈이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은 거스를 수 없는 법. 우리는 '9288 기념비'와 그 앞에 전시된 기차 모형을 보며 경탄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종착지임을 알려주는 '9288 기념비'의 9288은 노선 길이인 9288킬로미터를 의미한다. 지구 둘레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길이다.  

이틀 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방문으로 플랫폼이 통제되는 바람에 기념사진을 찍지 못했던 우리는 이날 비로소 '9288 기념비' 앞에서 횡단열차 탑승 '인증샷'을 찍을 수 있었다. 조합원들은 "전체 노선의 일부만 경험했지만 횡단열차에 탄 것 자체로 뿌듯하다"고 입을 모았다.

 

 

 

▲9288 기념비 앞에서 찍은 단체사진. ⓒ프레시안(박정연)


눈물의 땅, 신한촌 

버스를 타고 이번에 우리가 내린 곳은 어느 언덕 마을이었다. 박 기관사는 오르막길 어귀부터가 바로 '신한촌'이라고 했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블라디보스토크 해안가가 전략적 요충지로 급부상하자 러시아 당국은 개척리에 살던 한인들을 모조리 쫓아냈다. 그때 쫓겨난 한인들이 고개를 넘어가서 새롭게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 신한촌이다.

박 기관사는 1917년만 해도 이곳에 만 명 정도가 살았다고 했다. 특히 해외 독립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들에게는 '아지트' 같은 공간이라고 했다. 신채호, 안중근, 이동명, 안창호, 박헌영, 주세죽 등 잘 알려진 독립운동 지사 가운데 여기를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했다. 최재형과 이상설 등이 참여한 권업회를 중심으로 스탈린구락부, 대동공보사 등 항일 운동 지원 단체가 만들어졌고, 이를 통해 신한촌은 한인 사회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신한촌 입구 언덕길, ⓒ프레시안(박정연)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지만 이 길 입구에 원래 독립문이 있었습니다. 당시 사진을 보면, 1920년 3월 1일에 3.1운동 1주년이라고 해서 언덕길에 태극기도 걸어놓고 성대하게 기념식을 엽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장소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러시아를 방문한 우리에게 아주 의미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덕 정상에서 조금 걷다 박 기관사가 다시 걸음을 멈췄다. 그는 슈퍼마켓으로 보이는 한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엘레나'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박 기관사는 이 슈퍼마켓 자리가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의 생가 터라고 했다. 이동휘 선생은 임시정부 초대 군무총장(국방장관)을 지냈으며, 김 알렉산드라와 함께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결성한 인물이다. 박 기관사는 이렇게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적잖은 의미를 지닌 인물의 생가가 보존되지 않는 사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이동휘 선생의 생가터인 슈퍼마켓. ⓒ프레시안(박정연)


이동휘 선생의 생가 터 옆 언덕길로 내려가니 작은 아파트 단지가 나왔다. 이곳은 과거 한민학교 터였다. 양옥으로 지어진 건물로, 평등과 자유와 같은 기치를 가르치는 근대식 교육이 이뤄지던 곳이었다. 박 기관사는 "이곳에서 근대식 교육이 이뤄졌음에도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에 서당을 전시해놓은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분개했다.

한민학교 터는 '4월 참변'의 슬픔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1920년, 러시아에서는 혁명군인 적군과 반혁명군인 백군으로 나뉘어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제국주의 반대 기치를 내걸고 식민지 약소민족의 해방을 외친 적군의 편에 섰다. 당시 백군을 지원하던 일본은 1920년 3월 적군의 공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었다. 이에 분개한 일본군은 조선인들이 적군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1920년 4월 5일 신한촌에 들이닥쳤다.

일본군은 적군 부대가 주둔한 한민학교를 장악한 뒤, 잡아 온 조선인들을 학교 안으로 몰아넣고는 불을 질렀다. 일본군은 자신들을 습격한 이들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다. '4월 참변'으로 하루 사이에 3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신한촌뿐 아니라 우수리스크에서도 일본군 습격이 자행됐고,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등이 일본군에 의해 처형당했다. 

 

 

러시아에서 만난 '서울 거리' 

처참한 비극의 현장을 뒤로 한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반가운 글자를 발견했다. 울타리에 'СЕУЛЬСКАЯ', '서울거리'라고 적힌 문패였다. 이곳이 한인들의 집단 거주지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몇 안 되는 단서였다. 박 기관사는 "최근 리모델링한 집"이라면서 "7~8년부터 '이곳이 한인촌이었음을 알 수 있도록 해달라'고 문제제기했던 건데 정권 바뀌고 이제야 새로 명패를 달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집을 한국 정부가 구매해서 우수리스크에 있는 최재형 박물관처럼 신한촌 역사에 대해 잘 알 수 있게끔 꾸며놓으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세울스카야 2A' 집에 걸린 문패. ⓒ프레시안(박정연)

 

 

▲신한촌기념비. ⓒ프레시안(박정연)

 


이곳이 과거 한인촌이었음을 알게 해주는 또 다른 단서가 있었다. '서울거리' 집보다 윗 동네인 하바롭스크길에 있는 신한촌 기념비다. 이 기념비는 1999년 광복절에 연해주의 한인들과 해외 동포들이 3.1운동 80주년을 기념해 세운 것이다. 박 기관사는 "우리가 남북으로 갈라져있고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미래에는 다 하나 되어 협동해서 사는 민족이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라고 했다. 

기념비는 세 개의 큰 기둥과 여덟 개의 작은 돌로 이뤄져있었다. 세 개의 큰 기둥은 서울의 한성정부, 상해의 임시정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를 뜻하고, 여덟 개의 작은 돌들은 조선 팔도를 의미한다고 했다.  

건립비 뒷면에는 기념비를 세우는 데 기여한 단체들이 적혀있었는데 그 가운데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극우 이념을 대표하는 단체가 여럿 있었다. 박 기관사는 "기념비를 세우는 것도 결국 자본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해방 역사와는 전혀 무관한 단체들에 의해 이런 기념비가 만들어진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했다.

이제 페르바야레치카역으로 걸어가는 길, 박 기관사는 이 길이 "눈물의 길"이라고 했다. 개척리에서 신한촌으로 쫓겨난 한인들은 1937년 스탈린 이주 정책에 의해 다시금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다. 박 기관사는 "역으로 가는 한인들의 걸음이 얼마나 애통했을까"라며 "지금은 봄이라 꽃도 펴서 보기엔 예쁜 길이지만 한때 누군가에게는 고향을 떠나야 하는 아픔이 있던 길"이라고 했다. 

 

 

▲페르바야레치카역 매표소. ⓒ프레시안(박정연)

ⓒ프레시안(박정연)


신한촌을 떠난 지 10분도 되지 않아 페르바야레치카역에 도착했다. 매표소만 덜렁 있는 아주 단출한 역이었다. 하루에 이곳을 정차하는 기차도 몇 대 없다고 했다. 운 좋게도 20분 뒤 블라디보스토크역까지 가는 기차가 있었다. 길게 늘어선 화물기차들을 실컷 구경한 뒤 기차에 올랐다. 낡은 외관부터 심상치 않더라니, 열차 안에 들어가니 나무 의자가 우리를 반겼다. 오래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기차에 타니 마치 놀이기구를 탄 것마냥 다들 신이 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블라디보스토크역까지는 무척 가까웠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마지막 목적지로 향했다. 

'영원한 불꽃'이 우리의 4박 5일 대장정의 마지막 방문지였다. 대조국 전쟁 당시 희생된 군인들을 기리는 곳으로, 바닥에 새겨진 별 가운데에는 실제로 붉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들어온 것은 김정은 국무위원장 명의의 화환이었다. 김 위원장은 이틀 전 이곳에서 헌화를 했다. 우리는 이 화환을 중심으로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조국 통일!"을 외쳤다.

 

 

"시베리아 시간여행, 미친 듯이 즐거웠다가 미친 듯이 슬펐다"

하바롭스크와 우수리스크,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빡빡했지만 그만큼 유익했던 여정이 모두 끝났다. 무사히 여행을 마친 조합원들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조합원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이번 여행이 가져다준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김선 조합원은 "기차에서의 기억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김화수 조합원은 "프레시안 조합원들과 함께 해서 너무 좋았고, 특히 신한촌에서 박흥수 대장이 박해받은 역사를 말하며 울컥했을 때 저도 덩달아 울컥했던 게 생각난다"고 말했다. 

임영섭 조합원은 "우리 독립운동사, 특히 연해주 일대의 활동에 대해 공부하고 싶어서 왔는데, 우리 여행 컨셉이 역사 탐방인 만큼 많은 것을 배우고 간다"며 "여행에 함께한 젊은 분들이 이번 역사 탐방을 기회로 좀 더 민족 정기를 채우고 깊은 역사의식을 갖게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나영미 조합원은 "기록되지 않은 연해주 독립운동 흔적을 돌아볼 수 있어서 너무 감동이었다"고 했다. 이상래 조합원은 "감정 기복이 굉장히 컸던 여행이었다. 미친 듯이 즐거웠다가 슬펐다가 분노스럽기도 했다. 이런 감정을 잘 이끌어내주신 박흥수 대장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시베리아 시간 여행'을 진두지휘했던 대장 박흥수 기관사도 조합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6박 7일 같은 4박 5일 일정을 마쳤는데, 극동 시베리아 연해주에서 한인들의 역사를 살펴보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그러한 것들을 우리 프레시안 조합원들과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정말 시간 여행을 했다는 생각이 들고 그 끝에 우리가 서 있다는 느낌도 듭니다. 저는 러시아에 많이 와봤지만, 올 때마다 다른 것을 느끼고 새로운 것을 봅니다. 그러면서 한 뼘씩 커나가는 것 같고, 다른 분들도 성장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여행이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이런 여행은 한국 사람이라면 한 번쯤 해보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많은 분이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쏟아지는 별을 보면서 환호 지르거나, 역사적 장소에 갔을 때는 숙연해지거나 했던, 여행이 준 에너지를 오랫동안 간직하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열심히 또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끝) 

 

 

▲블라디보스토크 '영원한 불꽃'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프레시안(박정연)

 

<'시베리아 시간여행' 시리즈 모음>

1. 최초 여성 공산주의자 김알렉산드라를 따라 걷다

2. 시베리아 횡단열차 타고 가던 중 김정은이 눈 앞에!

3. 연해주 독립운동가 59인을 지워버린 박근혜 정부

 

서어리 기자 naeori@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박정연 기자 daramji@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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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죽음을 헛되이 말라’ 28회 민족민주열사 범국민추모제

‘우리의 죽음을 헛되이 말라’ 28회 민족민주열사 범국민추모제
 
 
 
박한균 기자 
기사입력: 2019/06/08 [22:0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28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가 8일 오후 3시 청계광장에서 진행되었다.     © 자주시보, 박한균 기자

 

▲ 28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가 8일 오후 3시 청계광장에서 진행되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다.     © 자주시보, 박한균 기자

 

▲ 28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가 8일 오후 3시 청계광장에서 진행되었다. 이규재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이 열사 영정을 바라보고 있다.     © 자주시보, 박한균 기자

 

▲ 28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가 8일 오후 3시 청계광장에서 진행되었다. 박종철 열사 영정 앞에 선 시민.     © 자주시보, 박한균 기자

 

“열사정신 계승하여 사회대개혁 실현하자!” “열사정신 계승하여 적폐를 청산하자!”

 

28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가 8일 오후 3시 청계광장에서 진행되었다. 

 

사회를 맡은 유화영 전여농 사무총장은 “민주열사와 희생자 영령들의 뜻을 이어 기필코 민중 세상 이루겠다는 의지로 28회 범국민 추모제를 시작하겠다”면서 의의를 밝혔다.  

 

참가자들은 '열사들이 꿈꾸었던 세상, 자주 통일 평등 세상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실현하겠다'는 마음을 모아 묵상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불렀다.

 

▲ 김중배 명예추모위원장이 추도사를 했다.     ©자주시보, 박한균 기자

 

이날 추모제에서김중배 명예추모위원장은 추도사를 통해 “서로 가치를 존중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평화의 세상을 우리는 언제나 기약할 수 있을 것인가. 상투적인 애도나 그리운 말로 그칠 수가 없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는 그 날 통곡의 새날을 마침내 열여 젖혔다고 손을 마주 잡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고 말하면서 큰 절을 올렸다. 

 

▲ 권재희 배우.     ©자주시보, 박한균 기자

 

1968년 중앙정보부의 조작과 고문으로 간첩단 사건의 수괴로 몰려 사법살인을 당한 권재혁 선생의 막내딸 배우 권재희 씨는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했던 자녀를, 하늘처럼 든든히 여겼던 부모를, 친구와 선배와 후배를 우리는 강제로 먼저 떠나보내고 여기 이 곳에 남아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들의 신념과 뜻을 잊지 않았다. 그 분들이 민족민주 열사와 희생자를 기리면서 모두의 꽃으로 다시 피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를 올린다”면서 '다시 피는 꽃' 도종환 시를 낭독했다.    

 

6.15합창단은 노래 공연으로 민주열사들과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 28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가 8일 오후 3시 청계광장에서 진행되었다.     ©자주시보, 박한균 기자

 

▲ 28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가 8일 오후 3시 청계광장에서 진행되었다. 민중공동행동 공동대표.     ©자주시보, 박한균 기자

 

특히 민중공동행동 공동대표들은 "이미 시작된 한반도 평화번영, 통일의 새 시대는 난관이 있을지언정 결코 돌아갈 수 없다. 촛불 민의를 거역하려는 적폐세력의 시대착오와 퇴행은 민중과 시대의 거센 파도 앞에 모래성처럼 쓸려나가게 될 것이다. 계속 전진, 계속 투쟁으로 영령들의 염원을 실현하고 기꺼이 자주, 민주, 민생과 평화 통일의 새 시대를 열어내자”는 결의을 밝혔다. 

 

끝으로 장남수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장은 “불의가 판치는 시대가 100년이 흘러도, 주체적이고 정의롭게 살고자 하는 우리 민중들의 의지가 단 한 번도 꺾인 적이 없다는 사실이 감동스럽다”면서 “우리는 이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나서자. ‘우리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열사들의 외침을 기억하자”는 말로 사회 대개혁을 향한 투쟁에 함께 나서줄 것을 촉구했다.

 

▲ 28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가 8일 오후 3시 청계광장에서 진행되었다.     © 자주시보, 박한균 기자

   

▲ 28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가 8일 오후 3시 청계광장에서 진행되었다. 추모제를 마치고 헌화와 분향을 했다.     © 자주시보, 박한균 기자

 

▲ 2019년 민족민주열사로 등재된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 자주시보, 박한균 기자

 

▲ 이창기 아내 김일심씨.     © 자주시보, 박한균 기자

 

▲ 김승교 민주변호사.     © 자주시보, 박한균 기자

 

▲ 민족민주열사 백남기 농민.     © 자주시보, 박한균 기자

 

▲ 민족민주열사 박선애 선생님.     © 자주시보, 박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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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훨씬 더한 찬사로도 부족하다

문 대통령 현충일 추념사에 반발하는 야당, 김원봉 몰라도 너무 모른다

19.06.07 20:29l최종 업데이트 19.06.07 20:29l

 

 문재인 대통령이 6일 오전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제64회 현충일 추념사를 하고 있다. 2019.6.6
▲  문재인 대통령이 6일 오전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제64회 현충일 추념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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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문재인 대통령의 제64회 현충일 추념사에서 김원봉이 거론된 것을 두고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 비판을 가하고 있다. 김원봉에 대한 문 대통령의 언급은 좌우합작에 의한 광복군 창설을 거론하는 대목에서 나왔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기 마지막 5년, 임시정부는 중국 충칭에서 좌우합작을 이루고 광복군을 창설했습니다. 지난  3월 충칭에서 우리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청사 복원 기념식을 가졌습니다.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10일 광복군을 앞세워 일제와의 전면전을 선포했습니다." 

문 대통령이 이 말을 꺼낸 것은 국민통합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임시정부가 좌우합작으로 광복군을 창설해 대일 항전에 나선 역사를 통해 통합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럴 목적으로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거론한 다음, 김원봉이 언급됐다.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 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되어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습니다. 그 힘으로 1943년, 영국군과 함께 인도-버마 전선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고, 1945년에는 미국 전략정보국과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던 중 광복을 맞았습니다." 

문 대통령이 칭송한 것은, 임시정부가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진영, 한국청년전지공작대와 더불어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까지 통합해서 광복군을 결성했다는 점이었다. 주된 칭송의 대상은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아니라 김구의 임시정부였던 것이다. 김원봉 같은 인물까지 통합해서 한국광복군을 결성한 사실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한국청년전지(戰地)공작대는 1938년 결성돼 류저우·충칭·시안 등에서 활약한 독립투쟁단체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와 더불어 아나키스트 진영 및 조선의용대까지 함께 광복군이라는 통합 조직을 이뤄낸 사실에 문 대통령이 큰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문 대통령은 이 같은 통합이 역사에 기여한 점을 높이 샀다. 

"김구 선생은 광복군의 국내 진공작전이 이뤄지기 전에 일제가 항복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나 통합된 광복군 대원들의 불굴의 항쟁 의지, 연합군과 함께 기른 군사적 역량은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동맹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김원봉까지 참여시킨 좌우 통합에 기반한 광복군이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었다고 언급했다. 김원봉을 칭송한 게 아니라, 김원봉까지 통합한 임시정부를 칭송하는 말이었다. 결과적으로 김구를 훨씬 더 칭송하는 말이었다. 이처럼 전체 맥락을 놓고 보면 김구와 임시정부를 칭송하는 것인데도, 보수 야당들이 김원봉 부분만 떼어내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전희경 자유한국당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1948년 월북해 6.25에서 세운 공훈으로 북한의 훈장까지 받고 북의 노동상까지 지낸 김원봉이 졸지에 국군 창설의 뿌리, 한미동맹 토대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고 한 뒤 "6.25 전사자들을 뒤에 모셔두고 눈물로 세월을 견뎌낸 가족들을 앞에 두고 북의 전쟁 공로자에 헌사를 보낸 대통령은 자신의 말대로 보수·진보를 떠나 최소한의 상식의 선 안에 있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이종철 바른미래당 대변인은 "문 대통령은 6.25 전사자가 가장 많이 묻혀 있는 곳에서 6.25 전쟁의 가해자에 대해서는 한마디 못하면서, 북한의 6.25 전쟁 공훈자를 굳이 소환하여 치켜세우며 스스로 논란을 키우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구와 임시정부의 광복군 창설을 소환해 치켜세운 것인데도 이처럼 김원봉한테 초점을 맞추었으니, 논의의 초점을 벗어난 엉뚱한 비판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김원봉은 전도유망했던 독립운동 지도자
 

 김원봉.
▲  김원봉.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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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당과 미래당은 김원봉이 북에서 대단한 추앙을 받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그가 월북한 것은 김일성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그가 김구·김규식과 비슷한 시점에 북으로 간 것은 남북 분단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분단을 기도하는 미군정과 이승만에 맞설 힘을 규합하고자 북에 올라갔다가 그냥 머물렀을 뿐이다.

거기서 김원봉은 최상의 대우를 받지도 못했다. 김일성의 정적들이 대거 숙청되던 때인 1958년 12월에서 1959년 1월 사이, 그는 공식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1958년에 그는 60세였다. 숙청됐다는 설도 있고 옥중에서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최후가 쓸쓸하기는 했지만, 해방 이전만 해도 김원봉은 전도유망한 독립운동 지도자였다. 문 대통령이 그를 직접적으로 칭송한다 해도 조금도 문제 될 게 없을 정도로 훌륭한 인물이었다. 격한 칭송을 들어도 모자랄 만큼 업적을 많이 세웠기 때문이다.

 

김원봉의 공로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점은 일본이 가장 무서워한 독립투사 중 하나였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일본 외무대신이 "김원봉을 체포하면 즉각 나가사키 형무소로 이송할 것이며, 소요 경비는 외무성에서 직접 지출할 것"이라고 상하이 총영사관에 지시한 사실은 일본 내에서 그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게 한다.

그가 이끄는 의열단은 한·중·일 삼국을 무대로 일본인과 일제 기관에 폭탄을 던지고 총탄을 발사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약산 김원봉 평전>은 "일제 군경과 관리들에게 의열단원은 염라대왕과 같은 존재로 인식되었다"며 "언제 어디서 의열단원이 나타나 폭탄을 던지고 권총을 들이댈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김원봉은 일본인과 일본 기관에 대한 개별적 폭탄 공격만 한 게 아니다. 그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대 조직도 갖추었다. 후삼국 시대의 견훤과 궁예가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독립군 군대를 만들었다. 조선의용대라 불린 이 군대는 한때 300명을 넘는 병력을 보유했다.

권혁수 중국 요녕대 교수의 논문 '중국항일전쟁과의 연관성으로 본 조선의용대 항일 업적의 역사적 의미'는 "1940년에 이르러 조선의용대는 총대부(본부) 및 세 개의 지대를 포함한 314명으로 발전"(<충청문화연구> 제10호)했다고 설명한다. 외국 땅에서 총 한 자루, 폭탄 하나를 구하기도 벅찼을 텐데, 무려 300여 명을 무장시켰다는 것은 그가 민족 독립을 위해 얼마나 헌신적으로 뛰어다녔는지를 짐작게 하고도 남는다.

기득권 포기하고 김구 중심 좌우합작에 참여 
 
 조선의용대 참립 기념 사진.
▲  조선의용대 참립 기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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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대단한 것은 그만한 병력을 이끌고 스스로 광복군에 편입됐다는 점이다. 물론 중국 측의 압력도 있었지만, 기득권을 포기하고 임시정부 광복군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그가 민족해방이라는 대의 앞에서 스스로를 기꺼이 희생했음을 의미한다. 자기를 중심으로 한 좌우합작이 아니라 김구를 중심으로 한 좌우합작인데도 가슴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후보 단일화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는 한국 현대사에서 잘 드러난다. 라이벌을 대통령으로 밀어주고 자신은 후보직을 사퇴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자세히 설명할 필요도 없다.

김원봉은 그런 일을 해냈다. 라이벌일 뿐 아니라 이념적으로도 맞지 않는 김구와의 통합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임시정부 및 광복군으로 기꺼이 들어갔다. 좌우합작과 통합의 정신을 이처럼 모범적으로 보여준 인물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조선의용대라는 군대를 만든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야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라이벌 김구 앞에서 머리를 숙였다. 대의를 위해 야심을 접을 수도 있는 큰 그릇이었던 것이다.

보수 야당들의 비판과 달리 문 대통령은 김원봉을 높이 띄우지 않았다. 김구와 임시정부의 광복군 창설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김원봉과의 통합을 언급했을 뿐이다.

사실, 김원봉의 실제 활약상을 생각한다면, 문 대통령이 김원봉을 좀더 직접적으로 칭송했다 해도 별 문제 될 게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어떤 격찬을 한다 해도 그의 희생과 용기에 보답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를 강렬하게 격찬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아쉬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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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 하나 키우는데 온 유역이 필요하다

조홍섭 2019. 06. 07
조회수 1188 추천수 0
 
알래스카 자연하천서 입증…남한 3분의 1 유역 이용
 
s1.jpg» 알래스카 누샤가크 강어귀에 몰려든 산란기 홍연어 수컷들. 이 강 유역은 남한 면적의 3분의 1의 다양한 생태계로 이뤄져 있다. 제이슨 칭, 워싱턴대 제공.
 
“아이 하나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이 아프리카 속담이라고 인용해 유명해진 말이다. 그런데 이 격언은 아이뿐 아니라 연어와 같은 생물에게도 적용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션 브레넌 미국 워싱턴대 생물학자 등 미국 연구자들은 과학저널 ‘사이언스’ 24일 치에 실린 논문에서 알래스카 브리스틀 만으로 흘러드는 누샤가크 강에 서식하는 연어가 수시로 변화하는 서식지 환경조건에서 어떻게 안정된 집단을 유지하는지 정량적으로 분석했다.
 
손때 묻지 않은 자연하천인 이 강은 남한 면적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유역에 호수, 연못, 급류, 크고 작은 느리게 굽이치는 강 등 다양한 서식지가 펼쳐져 있다. 낙엽이 썩어 찻빛으로 물든 유기물이 풍부한 강이 있는가 하면 차고 청록색으로 반짝이는 맑은 강도 있다.
 
s2.jpg» 누샤가크 강의 다양한 경관. 연어는 그때그때 달라지는 상황 속에서 최선의 대응책을 찾는다. 온 마을이 아이 하나를 기르는 것과 같다. 션 브레넌, 워싱턴대, 제시 데이비스 제공
.
연구자들은 홍연어와 왕연어의 귀돌(이석) 속 스트론튬 방사성 동위원소를 분석하는 방법으로 하천마다 연어의 성장률을 알아냈다. 환경변화에 따라 연어가 잘 자라는 강이 따로 있었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생산성이 높은 강은 한 곳에서 이웃 강으로 바뀌었다. 
 
전체적으로 어린 연어는 먼바다로 떠나기 전 한 번은 유역에서 가장 여건이 좋은 곳에서 몸집을 불렸다. 마치 아이가 부모에만 의존해 자라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을이 챙겨주는 것과 비슷한 얼개다.
 
연구자들은 “안정적인 생물학적 생산을 위해서는 모든 경관이 관여한다”며 “보전과 관리를 위해서는 특정 서식지만을 우선순위에 놓아서는 곤란하다. (기후변화와 같은) 미래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다양한 경관 이용 시나리오를 평가하는 일이 더욱 중요해졌다”라고 논문에서 밝혔다.
 
s3.jpg» 연어를 보전하려면 몇몇 핵심 하천만 지켜서는 안 된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하려면 더 넓은 유역 차원의 보전의 필요하다. 상류 번식지로 이동하는 홍연어 무리. 션 브레넌, 워싱턴대 제공
.
아이 키우기를 한 가정의 책임으로만 두는 것이 점점 위험해지는 것처럼, 하천의 보전과 이용도 특정 하천이 아닌 전체 유역을 대상으로 해야 만일의 사태가 닥쳐도 생태계의 회복 탄력성을 복원시킬 수 있다는 얘기다. 연구자들은 “경관 사이의 다양성과 연결성을 유지하는 과정, 예를 들어 산불, 홍수, 생물 이동 등을 보전하는 것은 생물 집단을 지키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Sean R. Brenn et al, Shifting habitat mosaics and fish production across river basins, Science, 24 MAY 2019, Vol 364 Issue 6442, https://science.sciencemag.org/cgi/doi/10.1126/science.aav4313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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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진 출두한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 “반드시 필요한 투쟁이었다”

자진 출두한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 “반드시 필요한 투쟁이었다”
 
 
 
백남주 객원기자 
기사입력: 2019/06/07 [17:0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김명환 위원장이 경찰 출두에 앞서 3,4월 노동개악 저지 투쟁은 반드시 필요한 투쟁이었다고 밝혔다. (사진 : 노동과세계)     © 편집국

 

지난 3~4월 국회 앞에서 진행된 노동개악 저지 투쟁에서 불법행위를 계획하고 주도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이 경찰에 자진 출두했다.

 

김명환 위원장은 7일 오전 10시께 영등포 경찰서 앞에서 출두 전 기자회견을 열고 민주노총의 사회적 책임과 투쟁의 임무를 피하지 않겠다며 민주노총이 지난 3월과 4월 벌였던 저항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악순환에 빠진 한국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투쟁이었다고 주장했다.

 

김 위원장은 주 최대 노동시간을 52시간으로 제한하고최저임금을 적어도 시간당 만원으로 올리자는 요구는 우리 사회가 도저히 감당 못 할 무리한 요구가 아니며 노동자에게 건강하고 안전한 노동을 제공하는 것은 권력자 시혜나자본가 양보가 아닌사회가 함께 지켜야 할 의무라고 지적했다.

 

김 위원장은 사업을 총괄하는 위원장에게 돌아가야 할 책임을 단순히 실무를 맡은 민주노총과 가맹조직 간부들의 작은 책임에 맡긴다면노동자 전체의 생존이 달린 막중한 책임은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냐는 것이 제 입장이라며 당당히 경찰 조사에 임하겠다고 밝혔다.

 

▲ 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 (사진 : 노동과세계)     © 편집국

 

김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대선 과정에서 약속한 정책을 책임지라며 흥정이나 거래가 아닌나라의 대표로 국민과 한 약속이라고 지적했다나아가 김 위원장은 구속된 노동조합 집행 간부들을 석방하라며 “ILO 총회를 앞두고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해결을 위해 투쟁한 민주노총 간부를 감옥에 가둔다면 전 세계 노정 대표자들 앞에서 대한민국의 노동 존중을 이야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민주노총 조합원들을 향해 정부와 자본은 아직도 탄력근로제 개악을 포기하지 않았다며 투쟁의 깃발을 단단히 틀어쥐고 준비하자고 호소했다현재 민주노총은 7월 총파업을 준비하고 있다.

 

한편김 위원장을 비롯한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지난 3월과 4월 국회 앞에서 열린 노동법 개악 저지 집회와 관련해 특수공무집행방해공동건조물침입공용물건 손상일반교통방해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김 위원장은 4월 3일 집회에서 경찰을 뚫고 국회 경내로 들어갔다 체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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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소환조사에 나서는 민주노총 위원장 성명>

 

민주노총의 사회적 책임과 투쟁의 임무를 피하지 않겠습니다

 

민주노총의 존립 근거는 백만 조합원만이 아닌 25백만 모든 노동자에 있습니다.

 

제가 경찰 조사에 응하는 것 자체가 조직 내 많은 우려를 낳는 이유도 민주노총 위원장이라는 위치가 제 개인 신상 문제가 아닌, 25백만 노동자를 대표한다는 자부심과 무게감을 동시에 갖기 때문입니다.

 

민주노총의 노동자 대표성은 우리가 자칭해서도조합원이 많아서도숱한 집회와 시위를 벌여서도 아닙니다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전체 노동자의 이해와 요구를 걸고 투쟁해온 진정성 있는 역사 때문이었습니다.

 

민주노총이 지난 3월과 4월 벌였던 저항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악순환에 빠진 한국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투쟁이었습니다주 최대 노동시간을 52시간으로 제한하고최저임금을 적어도 시간당 만원으로 올리자는 요구는 우리 사회가 도저히 감당 못 할 무리한 요구가 아닙니다노동자에게 건강하고 안전한 노동을 제공하는 것은 권력자 시혜나자본가 양보가 아닌사회가 함께 지켜야 할 의무입니다.

 

민주노총의 3~4월 투쟁은 이 의무와 가능성 대신 시행착오나 가진 자의 저항을 이유로 저임금·장시간 노동을 유지하려 하는 정부에 대한 규탄과 저항이었고국회에 대한 온몸을 던진 문제제기였습니다.

 

민주노총 위원장은 노동자를 대표해 진행하는 모든 사업의 책임을 지는 자리입니다우리들의 너무나도 정당한 투쟁 과정에서 벌어진 모든 결과에 따른 책임 역시 위원장인 제게 있습니다.

 

사업을 총괄하는 위원장에게 돌아가야 할 책임을 단순히 실무를 맡은 민주노총과 가맹조직 간부들의 작은 책임에 맡긴다면노동자 전체의 생존이 달린 막중한 책임은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냐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당당히 경찰 조사에 임하겠습니다민주노총의 사회적 책임과 위원장의 임무를 피하지 않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에 요구합니다대통령 역시 대선 과정에서 약속한 정책을 책임지십시오흥정이나 거래가 아닌나라의 대표로 국민과 한 약속입니다.

 

그리고 구속된 노동조합 집행 간부들을 석방하십시오. ILO 총회를 앞두고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해결을 위해 투쟁한 민주노총 간부를 감옥에 가둔다면 전 세계 노정 대표자들 앞에서 대한민국의 노동 존중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정부와 자본은 아직도 탄력근로제 개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오히려 국회가 열리기만 기다리며 호시탐탐 노동법 개악을 노리고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민주노총 조합원 동지 여러분투쟁의 깃발을 단단히 틀어쥐고 준비합시다민주노총은 7월 총파업을 앞두고 있습니다비정규직 정규직화 약속을 지키라는최소 국제기준을 지키라는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라는 우리의 정당한 투쟁을 민주노총 전체 조합원의 결의로 주저 없이 만들어 가겠습니다투쟁!

 

2019년 6월 7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김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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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인 특보, 트럼프 방한 전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제언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9/06/08 10:05
  • 수정일
    2019/06/08 10:05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문정인 특보, 트럼프 방한 전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제언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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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6.07  15: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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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는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현안들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방관자가 돼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당사자다. 트럼프 대통령이 6월 말에 방한한다. 그 전에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비공식·비공개로 원 포인트 정상회담을 해야 한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은 7일자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타이밍이 중요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돌파구가 보이면 재빨리 미국과 협력해 한미 정상회담에 이어 곧장 판문점에서 북미 정상이 만날 수 있고 남북미 회담까지 성사된다면 금상첨화”라는 것.

문정인 특보는 “현재 우리 정부는 민족 이익을 주장하는 북한과 동맹 이익을 요구하는 미국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라며 “이 상황을 벗어나려면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나아가 “북미 양쪽에 모두 쓴소리를 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장관·참모들 중 악역을 맡는 ‘배드 캅’(나쁜 경찰)이 없다. 왜 대통령이 배드 캅이 돼야 하나”라고 반문했다.

문 특보는 미국을 향해 “북한은 제재를 적대 정책의 가장 구체적인 증표로 본다”며 “지금 ‘와이즈 어니스트’호(북한 화물선)를 몰수하는 건 북한 입장에서는 미국이 적대 정책을 눈곱만큼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하겠다는 뜻이다. 시작은 미국이 화물선을 풀어주는 게 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북한을 향해서는 “이미 폐기한 풍계리 시험장을 더 이상 쓰지 않을 요량이면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관이 들어와 살펴보고 감마 테스트 같은 것도 할 수 있게 할 필요가 있다. 평양선언 5조 1항을 통해 동창리 시험장도 조건 없이 폐기하겠다고 한 만큼 그 약속도 이행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그렇게 해줘야 우리 정부가 미 정부를 설득할 명분이 생긴다”고 말했다.

특히 “영변이 북한 핵 능력의 60~70%에 달한다는 지그프리드 헤커(미 핵 물리학자)의 평가가 정확하다고 본다”며 “영변 폐기에 합의하면서 ‘폐기하는 동안 핵 활동을 중단하라’고 단서를 달면 북한은 받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영변 외 시설까지 동결하고 신뢰를 쌓으며 신고, 폐기하려면 부분적 제재 완화뿐 아니라 연락사무소, 평화선언 등까지 화끈하게 북에다 줘야 한다”고 제시했다.

문 특보는 <조선일보> 등의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관계자들의 숙청과 처형설에 대해 “김 위원장이 하노이 회담 결렬 책임이 전적으로 미국에 있다고 주장하려면 자기 협상팀을 숙청하거나 그들에게 큰 불이익을 주면 안 된다. 자기들이 잘못했다는 걸 자인하는 꼴밖에 안 된다”고 논박했다.

문 특보는 “셈법을 바꾸라며 자기가 준 연말 데드라인을 미국이 넘긴다면 김 위원장이 7차 핵실험을 감행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며 “내년이면 미국 대선 국면인데 북한이 그런 식으로 나올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강경 모드로 돌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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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은 자주국가 제1의 목표다

농업은 자주국가 제1의 목표다

 

프레스아리랑 | 기사입력 2019/06/08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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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1월 21일 김영삼정부는 IMF에 긴급자원지원을 요청했다. IMF란 실질적인 소득이 없이 빚에 의한 이자만 증식시키며 한마디로 빚이 소득을 잠식시킨 것을 말한다.

 

1997년 우리의 재벌기업들은 대부분 소득보다 빚이 많은 부실기업들이었다. 정부는 외채를 빌려 은행를 통하여 재벌들에게 빌려주었고 돈을 빌려준 은행들이 재벌로 인하여 파산한 것이다.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며 농민들은 김대중 정부의 선거공약인 농가부채탕감으로 농정공약을 이행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의 정부는 농민의 정부"라며 농촌 발전기초위에 다른 산업이 발전한다고 전제하고 "농촌을 다시 살려야 한다는 것이 국민정부의 확고한 의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IMF극복에 공적자금 200조를 조성하여 재벌기업에 수여하고 자신의 선거공약인 정부의 정책 잘못으로 인한 농가부채탕감에는 단 한 푼도 쓰지 않은 것이다.

 

김대중정부의 IMF 극복과정에 비교우위론이 활개를 치고 농가부채탕감은 언론들에 의하여 도덕에 헤이로 몰아가자 우리농업은 영농의욕이 꺾이고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김대중 정부의 관료들도 농산물 원산지표시제가 국제적 망신이라며 차기 농산물협상에서 미국의 도움을 받으려면 미국 쌀도 사줘야 한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중국농산물 수입 <마늘파동>으로 인한 농가와의 갈등을 김대중 정부는 소탐대실이라 운운했다.

 

IMF로 우리농업은 총체적인 위기가 현실로 닦아왔다. IMF로 한국의 농업소득은 급격하게 하락하여 2002년부터 마이너스가 되었으며 일부품목은 생산과잉과 수입증가에 따른 농산물가격하락, 농촌고령에 따른 인건비 상승으로 농가소득은 도시근로자의 73% 수준으로, 농가부채는 급격하게 상승하여 IMF이전인 1992년 569만원에서 2003년 2662만원으로 한국의 농업은 사양산업으로 몰락해갔다. 한마디로 농사를 지으면 지을수록 생산비도 건지기 힘들며 빚만 쌓여가는 프레임이 자리했다.

 

통계청은 2002년 농가소득이 2300만원이라고 하더니 2005년에는 4000만원이라 발표했고 2004년 농가소득은 2654만3천원으로 농가부채는 2697만1천원으로 부채가 소득을 앞질렀지만 통계청은 수치를 수정하여 농가소득이 2687만8천원으로 당초 발표보다 33만5천원을 증가시키고 농가부채를 2661만9천원으로 35만2천원을 적게 발표하며 탁상머리로 농업소득을 부풀렸다.

 

김대중 정부를 이은 노무현 참여정부를 신자유주의 통상정권이라 부르며 마지막 남은 쌀 의무수입량 5톤트럭 9만대분을 미국 등 쌀 수출국에 약속하며 한국은 수입쌀로 식량안보를 한다는 나라로 매년 쌀 재고미로 골머리를 앓는 국가가 되었다. 노무현 정부는 소고기 100% 개방을 밀어붙였고 한국의 포도나무, 복숭아, 배나무, 자두나무를 찍어내고 과수강국 한.칠에 자유무역협정을 강행하였다. 노무현 개방농정으로 인하여 이경해 열사가 이국 칸쿤에서 자결하고 정용품, 오추옥, 하진오 수많은 농민들이 절망속에서 유서 자살을하고 전용철, 홍덕표 농민은 경찰 군홧발에 생명을 잃었다.

 

2002년 이후는 100% 수입개방에 따라 풍년이 들면 농산물은 산지폐기로 감량을 하여 농가는 생산비도 건지지 못했다. 또한 흉년이 들면 수입농산물에 의하여 고스란히 농가에 손해가 발생하고 농가소득분에 비하여 농업경영비가 상승하여 한국의 농민들은 농사를 하면 할수록 빚이 늘어나 차라리 농사하는 것 보다 농사를 짓지 않는것이 이익인 기이한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정부는 농지의 공시지가를 매년 상승시켜 농업적자를 메우고 통계청은 농가소득과 재산이 꾸준히 증가한다고 통계를 내지만 한국의 농촌은 2002년부터 실질적인 농가소득은 마이너스로 한국의 농촌은 2025년 인구소멸 경고장이 내려졌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도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신봉자들로 농업농촌문제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농업통계에서 공시지가 상승에 따른 농가재산 증가는 폰지 게임에 불과하며 우리가 미래를 악마에게 매도하는 것은 아닐지 우려스럽다. 통계청은 무너져가는 농촌과 지방정부를 위해서도 실사구시가 필요한 시점으로 농가소득을 보전하는 대책을 정부가 세우기바라며 소멸되는 우리농촌에 애도사를 쓰고 있다. 농업은 국가의 안보로 식량자급은 국력의 제1의 목표며 경제의 기반으로 식량자급 없는 자주국가는 이 지상에 없다. 

 

정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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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변한 한유총…뒤통수 맞은 교육부

[단독]돌변한 한유총…뒤통수 맞은 교육부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입력 : 2019.06.07 06:00 수정 : 2019.06.07 07:27

 

“에듀파인 위법” 행정소송
지난 3월 ‘개학 연기 사태’ 여론 뭇매에 도입 수용 ‘제스처’
한국당 등에 업고 ‘반격’…‘유치원 3법’ 논의 악영향 우려

[단독]돌변한 한유총…뒤통수 맞은 교육부
 

사립유치원장들이 에듀파인(국가관리회계시스템) 도입을 막기 위한 법적 소송을 진행하면서 ‘한유총(한국유치원총연합회) 사태’가 다시 불거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유총을 향한 비판 여론이 잠잠해지고, 국회에서 ‘유치원 3법’의 입법이 계속 미뤄지는 등 관심에서 멀어지자 사립유치원들이 재차 반격에 나선 것이다. 한유총의 개학연기 투쟁 철회로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교육당국은 뒤통수를 맞았다는 분위기다. 

에듀파인은 사립유치원 비리를 척결하기 위해 정부가 도입한 여러 대책 중 최대 핵심 정책이다. 유치원 비리가 만연하게 된 주요 원인이 유치원장들이 교비를 쌈짓돈 쓰듯이 마음대로 해왔던 문제였다. 에듀파인을 쓰게 되면 유치원 회계가 투명하게 공개되고 정부가 상시적으로 회계부정 문제를 감시할 수 있게 된다. 정부와 한유총이 이를 놓고 강경대응을 주고받은 이유다.

사립유치원들은 올해 초까지만 해도 에듀파인 도입을 극렬 반대하다가 3월 개학연기 발표로 학부모와 여론의 지탄을 받자 결국 에듀파인을 수용했다. 정부도 3월까지 에듀파인 적용 대상 유치원(원아 200명 이상)의 에듀파인 도입률이 100%에 달하자 “예정대로 2020년부터는 모든 유치원에 에듀파인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사태가 잠잠해지자 원장들은 단체로 소송을 걸었다. 정부가 소송에서 질 경우 에듀파인 의무 도입 자체가 무산된다. 원장들이 유치원의 폐원 규정을 강화한 교육부의 지침 등 여러 사립유치원 공공성 강화 대책들에 대한 추가 소송을 낼 가능성도 있다.

한유총의 법적 대응은 ‘예고된 저항’이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덕선 전 한유총 위원장이 물러난 뒤에도 강경파가 한유총 이사진을 장악한 데다 자유한국당 등 국회 내 우군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이번 소송은 지난해 말부터 국회에 계류 중인 유아교육법 개정안 등 ‘유치원 3법’ 논의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유치원 3법은 오는 24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로 넘어갈 예정이지만 한국당이 국회에 불참하고 있는 데다, 당내에서 유치원 3법을 반대하는 기류도 여전해 법안 통과를 장담하기 어렵다. 여기에 행정소송까지 겹쳐 법안을 둘러싼 논란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유치원 3법 중 에듀파인 의무 도입을 법으로 규정한 ‘유아교육법 개정안’의 경우 국회 교육위에서 논의되는 과정에서 ‘법 적용을 1년간 유예한다’는 조항이 추가됐다. 법사위에서 이 수정된 안을 본회의에 넘겨 그대로 통과될 경우 이미 교육부가 규칙 개정으로 시행 중인 에듀파인의 법적 근거가 없어지게 된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원장들이 소송을 제기한 배경에는 신속처리안건으로 한창 진행 중인 유치원 3법에 좌초 혹은 무산 프레임을 씌워 법사위 논의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려는 꼼수가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고 했다. 박 의원은 오는 10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번 행정소송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유치원 3법 통과를 촉구할 예정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6070600025&code=940401#csidxc15352190d2aeae8c8e0a0bfdaaf76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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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73년, 조선소년단의 역사는...

창립 73년, 조선소년단의 역사는...
 
 
 
김영란 기자 
기사입력: 2019/06/07 [09:34]  최종편집: ⓒ 자주시보
 
 

 

▲ 2019년 6월 6일 금수산태양궁전광장에서 진행된 '경축 73돌 조선소년단 전국연합단체대회'     

 

북은 6월 6일을 <조선소년단창립일로 기념하며 다양한 행사를 진행했다올해는 <조선소년단창립 73돌이다.

 

<조선소년단창립 73돌을 맞아 평양에는 각 지에서 올라온 소년단원들이 평양을 참관하고 있다.

 

6일 노동신문은 논설 소년단원들은 사회주의조선의 보배이고 미래이다를 통해 조선소년단은 혁명의 계승자청년동맹의 교대자로 튼튼히 준비해나가는 우리나라 학생소년들의 대중적 정치조직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6일에는 조선소년단창립 73돌 경축 조선소년단 전국연합단체대회가 금수산태양궁전광장에서 열렸고 각 지역에서 조선소년단 도군연합단체대회들이 진행되었다

 

북은 <조선소년단의 기본임무>에 대해 소년들을 주체의 혁명위업을 떠메고나갈 주체형의 혁명가지덕체를 갖춘 전면적으로 발전된 사회주의 건설의 역군으로 키우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조선소년단>은 만 7세부터 13세까지 가입하며 김일성·김정일사회주의청년동맹(청년동맹)의 산하조직이다.

 

▲ 조선소년단 창립 73돌을 맞아 각 지역에서 올라온 소년단 대표들이 조선혁명박물관을 참관하고 있다.     

 

▲ 조선소년단 창립 73돌을 맞아 각 지역에서 올라온 소년단 대표들이 만경대를 참관하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소년단>의 역사는 어떻게 될까?

 

<조선소년단>은 1946년에 창립되었지만 출발은 항일운동 시기로 봐야 한다.

 

이는 김일성 주석이 1971년 6월 6일 창립 25돌을 맞아 발표한 축하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김일성 주석은 축하문에서 “<새날소년동맹>과 <아동단>의 붉은 깃발은 해방 후 <조선소년단>의 깃발로 이어졌습니다항일 혁명투쟁의 빛나는 혁명전통을 이어받았으며조선노동당에 의하여 교양된 우리 소년들은 소년단 생활을 통해 간결한 젊은 투사로 자라났으며 새 민주조선을 일떠세우는데 적극 이바지하였습니다소년단원들은 혁명적 조직생활에 충실하였던 항일유격대원들과 아동단원들처럼 정치적 생명을 귀중히 여기며 소년단 시절부터 그것을 빛내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합니다라고 밝혔다.

 

<새날소년동맹>은 1926년 김일성 주석이 중국 무송지역에서 12월 15일 소년들을 모아 만든 조직이다당시 14살이던 김일성 주석은 연설에서 나라와 민족을 묶어 세워 일제의 침략적 죄행을 폭로하고 조선독립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조선민족이 단결하여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날소년동맹>은 8~16세의 소년으로 구성되었으며 조선혁명을 위한 정치군사사상적으로 무장하고 혁명을 위해 동맹생활에 적극 참가하는 등의 맹세를 통해 반일투쟁반일선전 및 계몽사업 등의 활동을 했다당시 입단식에서는 곤봉과 수첩을 받았으며매일 하루생활총화매주 동맹생활 검토회의군사지식 학습군사훈련 등을 받았다.

 

1932년 5월 김일성 주석이 두만강 연안 일대에 소사하유격구를 창설하면서어랑촌우복동왕우구해란구소왕청요영구 등지 유격구 지역에 소년 조직인 <아동단>을 만들었다당시 김일성 주석은 아동단은 어린이들을 우리혁명에 무한히 충실한 참된 혁명가로 키우기 위한 소년들의 반일적이며 공산주의적인 정치조직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여기서 전 세계 무산계급의 해방을 위하여 항상 준비하자라는 구호가 제시됐다현재 '항상 준비'라는 구호가 여기서 출발한 것이다또한아동단의 상징은 깃발붉은 넥타이경례곤봉 등으로 여기서 깃발과 붉은 넥타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 항상 준비!

 

▲ 선배들이 소년단 붉은 넥타이를 메어주고 있다.     

 

▲2017년  8차 소년단대회에 참가한 어린이가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붉은 넥타이를 매줬다 

 

그리고 해방 후 1946년 6월 6일 <조선소년단>을 창립하였다.

북은 <조선소년단창립에 대해 역사상 처음으로 주체사상의 혁명적 기치 아래 지도되는 통일적인 자기조직을 가지게 되었으며모든 소년을 우리 혁명 위업의 믿음직한 후비대로 키울 데 대한 사명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조선소년단>이 창립되고 새 민주조선을 위하여 항상 배우고 준비하자라는 구호에 맞춰 농촌일 돕기 등을 진행했다그리고 북이 천리마 운동을 벌이던 시기에는 꼬마계획 활동’, ‘토끼 기르기 운동’ 등 좋은 일 하기 운동’ 등을 진행했다.

 

토끼 기르기 운동’, ‘좋은 일 하기 운동’ 등은 지금도 <조선소년단단원들에게 이어지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2년 <조선소년단창립 66돌 경축 전국연합대회에 참석해 김일성·김정일 조선의 새 세대들에게 밝은 미래가 있으라고 축하 연설을 했다.

 

또한 김정은 위원장은 ‘2013년 7차 조선소년단 대회, 2017년 8차 조선소년단 대회에 참석해 소년단원들을 격려했다.

 

김정은 위원장의 ‘2017년 8차 조선소년단 대회에 한 축하연설 일부분을 소개한다.

 

김정은 위원장은 축하연설에서 온 나라 소년단원들 속에서 위대한 대원수님들을 영원히 높이 받들어 모시는 깨끗한 충정과 사회와 집단동무들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아름답고 기특한 소행들이 수많이 발휘되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우리 조국의 자랑을 더해주었습니다오늘 우리의 사랑하는 소년단원들은 내일에 대한 푸른 꿈과 희망을 안고 열심히 공부하고 몸과 마음을 단련하며 여러 가지 사회정치 활동과 좋은 일 하기 운동도 적극 벌이면서 사회주의조선을 빛내일 혁명 인재로 자라나고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또한 김정은 위원장은 소년단원들의 아름다운 풍모와 씩씩하고 명랑한 모습에서 주체혁명의 밝은 내일을 내다보고 있는 우리 당은 소년단원들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아끼지 않을 것이며 소년단원들의 행복에 넘친 웃음과 창창한 미래를 끝까지 지켜줄 것입니다라고 의지를 표명했다.

 

창립 73주년을 맞는 <조선소년단>은 지금 사회주의 조국을 위하여 항상 준비하자라는 구호를 들고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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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돈 10억원 거부하고 산재 인정 받은 엄마와 딸

[인터뷰] 삼성LCD반도체 피해자 한혜경씨와 모친 김시녀씨

19.06.07 07:35l최종 업데이트 19.06.07 07:35l

 

 6일 오후 <오마이뉴스>는 10년만에 산재 인정을 받은 삼성 반도체 피해자 한혜경씨를 찾았다.
▲  6일 오후 <오마이뉴스>는 10년만에 산재 인정을 받은 삼성 반도체 피해자 한혜경씨를 찾았다.
ⓒ 유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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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산재 맞거든요? 그런데 이제서야 산재 인정을 받았다는 게 너무 웃겨요. 정말 내가 한심하기도 하고 답답했어요."

오래 기다렸다. 10년이 넘는 기다림이었다. 6일 강원도 춘천의 자택에서 만난 삼성LCD 반도체 피해자 한혜경(42)씨는 마른 체구에도 우렁찬 목소리를 한껏 높였다. "산재 맞거든요?"라는 되물음 속에는 삼성과 싸운 10년의 세월이 녹아있었다. 결국 그는 골리앗을 이긴 다윗이 됐다.

예전에 한씨는 기자와 인터뷰를 할 때면 "내 말을 믿어달라"면서 주먹으로 가슴을 '팡팡' 쳤다. 한씨의 모친 김시녀(62)씨는 "가슴에 응어리가 져서"라고 설명했다. 지난 5월 30일 가슴에 응어리가 질 정도로 간절했던 산재 재신청이 마침내 승인됐다. 김씨가 그 소식을 전하자 당시 밥을 먹던 한씨는 밥숟가락을 채 내려놓지도 못하고 대성통곡을 했다.

 

수술 후유증으로 더이상 눈물이 나지 않았지만 한씨는 한참을 울부짖었다. 한참을 꾸역꾸역 울던 한씨는 10년 넘게 자기와 함께, 때로는 앞서서 싸운 엄마를 보고 웃었다. 

"식탁에서 밥을 먹다가 그 이야기를 들었어요. 엄마가 말해주더라고요. 밥을 먹으면서 눈물이 나왔어요. 진짜 많이 울었어요. 인정이 되고 나니까 왜 이제야 됐는지를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한혜경)
"그래. 이제라도 됐으니까 감격이 큰 거지." (김시녀)

"(끄덕끄덕) 엄마한테도 너무 고마웠어." (한혜경)
"뭐가 고마워?" (김시녀)

"엄마하테 너무 고마웠고 너무 미안해요. 그런 생각이 드니까 눈물이 났어요. 그런데 울고 나니 웃음이 나대요?" (한혜경)


"저 같은 사람 또 나오면 안 되잖아요"

한씨는 지난 1995년부터 삼성전자 경기도 기흥공장에서 꼬박 5년 10개월을 일했다. 맏딸이고 책임감도 강했다. 한씨는 상고로 진학했고 졸업 후 바로 취업했다. 월급이 세다는 삼성이었다.

그런데 삼성에서 근무하던 5년 사이에 "몸이 완전히 망가졌다". 생리가 멈췄고 몸이 안 좋아졌다. 한씨는 결국 퇴사하고 춘천으로 돌아와 마트 아르바이트 등을 했다.

그러던 2005년 10월 한씨가 갑자기 쓰러졌다. 뇌종양이었다. 종양 제거 수술을 했지만 후유증으로 시각, 보행, 언어장애인이 됐다. 그 후로부터 2015년까지 10년 동안 한씨 모녀는 전국 각지의 병원을 돌아다녔다. 가보지 않은 병원이 없을 정도였다. 

2009년 한씨는 산업재해를 인정받기 위해 근로복지공단 평택지사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승인되지 않았다. 이후 근로복지공단 심사, 재심사 청구에서도 산재 인정을 받지 못했다. 행정 소송을 했지만 2015년 대법원에서 결국 패소했다.

춘천에서 서울을 왔다갔다 하는 동안 울기도 많이 울었다. 힘들여서 3~4시간 걸려 서울까지 가면 재판을 받는 시간은 고작 3~4분. "(산재가 아닌) 개인의 질병"이라는 결정과 함께 들리는 판사의 '땅땅땅' 소리에 이들은 발걸음을 돌렸다. 때로는 "너무 화가 나서", 또 "너무 억울해서" 울었다.

반올림(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 반올림)에서 권유한 끝에 이들 모녀는 2018년 다시 한번 용기를 냈고 근로복지공단에 재심을 신청한 끝에 지난 5월 최종적으로 산재를 인정받았다.
 
 삼성LCD 피해자인 한혜경씨의 최종 의견진술서의 일부. 한혜경씨는 지난 5월 30일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산재 인정을 받게 됐다. 2009년 대법원에서 패소한지 10년만이다.
▲  삼성LCD 피해자인 한혜경씨의 최종 의견진술서의 일부. 한혜경씨는 지난 5월 30일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산재 인정을 받게 됐다. 2009년 대법원에서 패소한지 10년만이다.
ⓒ 반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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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한씨가 근로복지공단에 낸 최종 의견진술서는 다음 문장으로 끝난다.
  
"저는 꼭 산재로 인정받아서 앞으로 저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어요."

최종 의견진술서 10문장을 쓰는 데 3시간이 넘게 걸렸다.

"제가 일할 때에는 비닐장갑도 잘 찢어져서 맨손에 약품이 묻기도 하고 마스크를 껴도 냄새가 다 났어요. 그런 게 위험하다는 건 몰랐어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요.

반도체, LCD 공정에서 뇌종양 피해자가 많이 나왔고 또 명확히 입증 못해도 산재보험 취지상 뇌종양도 산재로 인정되는 분들이 여럿 생겼잖아요. 저에게도 공정하게 판정해주시면 좋겠어요." (한혜경씨의 최종 의견진술서의 일부)


삼성에서 회유가 들어왔다

모녀는 10년이 넘는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활동가가 다 됐다. 다른 산재 피해자들도 도울 생각이다. 한씨는 주먹을 꼭 쥐고 "투쟁!"이라고 외치면서 "저 같은 사람이 또 나오면 안 되잖아요. 저는 (투쟁)해야죠. 저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게 하는 데까지 가야죠"라고 말했다. 김씨는 대번 "그럼! 가야지. 하는 데까지 해야지"라고 딸의 말을 거들었다.

지난 2018년 7월 반올림 농성이 1023일로 마무리가 되고 나서 김씨는 한동안 앓아누웠다. 그는 "3년이라는 세월을 지나면서 골병이 든 모양"이라면서 웃었다. 기억에 남는 순간이 언제였냐는 질문에 김씨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 때를 떠올렸다.

"사람들이 그렇게 무서운 줄 몰랐어요. 이재용 재판을 참석하면서 태극기부대 사람들을 보았는데, 혜경이한테 '병신이 여기를 왜 왔냐'고 하더라고요. 물론 그 사람들 눈에는 혜경이가 병신으로 보이겠지만 그 트라우마는...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김시녀)

2014년 무렵에는 삼성 측에서 10억원을 줄 테니 산재 소송을 하지 말라고 회유해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김씨가 '혜경아, 엄마 너무 힘들어. 그냥 돈 받자'고 하자 한씨는 '엄마, 나중에 나 같은 사람 또 나오면 안 되잖아'라고 대답했다. 김씨는 '아차' 싶었다. 피해자가 계속 나오는 걸 보면서 김씨는 "이 일이 혜경이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한번 끝까지 가보자는 오기가 생겼다고 했다. 
 
 딸 한혜경씨의 손에 연고를 발라주는 엄마 김시녀씨의 모습.
▲  딸 한혜경씨의 손에 연고를 발라주는 엄마 김시녀씨의 모습.
ⓒ 유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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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서 환자가 한 명 나오면 풍비박산이 돼요. 그런데 내가 겪은 일을 또 다른 누군가가 겪는다? 내가 조금만 더 싸우면 되는데? 다시는 실습을 나가서 사망을 당하지 말아야 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돼요. 저희가 지금은 노동자의 권리를 교육 과정에 넣는 운동을 하고 있어요. 삼성 백혈병 문제가 끝났다고 끝난 게 아니라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서울로 다니고 있어요. 저희는 힘이 닿는데까지 싸울 거예요."

이들 모녀는 오는 14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산재인정 축하음악회 '당신에게선 꽃내음이 나네요'를 연다. 김씨는 "사람들에게 너무 고마워서요. 그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서 잔치도 파티도 아닌 그런 걸 열기로 했어요"면서 웃었다.

"혜경이랑 노래도 좀 부르고 감사 인사도 하는 자리가 될 것 같아요."

모녀는 서로를 다시 한 번 마주보았다.
 
 엄마의 품에 안긴 한혜경씨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  엄마의 품에 안긴 한혜경씨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 유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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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명진 "탄핵 대상 아니고 뭐냐...문재인은 빨갱이"

文대통령, 김원봉 언급하며 '광복군은 국군 뿌리' 발언에 한국당 발칵
2019.06.06 21:29:15
 

 

 

 

문재인 대통령이 일제 강점기 시절 '좌우 합작'을 통해 창설된 광복군이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라고 언급하자 자유한국당이 반발하고 나섰다. 광복군에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인 약산 김원봉 등이 참여한 것을 언급했다는 이유다. 
 
문 대통령은 6일 오전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4회 현충일 추념사를 통해 약산 김원봉의 이름을 언급했다. 
 
"저는 보수이든 진보이든 모든 애국을 존경합니다. 이제 사회를 보수와 진보,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보수적이기도 하고 진보적이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안정을 추구하고, 어떤 때는 변화를 추구합니다. 어떤 분야는 안정을 선택하고, 어떤 분야는 변화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스스로를 보수라고 생각하든 진보라고 생각하든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상식의 선 안에서 애국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통합된 사회로 발전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보훈이라고 믿습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기까지 마지막 5년 임시정부는 중국 충칭에서 좌우합작을 이뤘고 광복군을 창설했습니다. 지난 3월 충칭에서 우리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청사복원 기념식을 가졌습니다.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10일 광복군을 앞세워 일제와의 전면전을 선포했습니다.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 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되어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습니다.
 
그 힘으로 1943년, 영국군과 함께 인도-버마 전선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고 1945년에는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함께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던 중 광복을 맞았습니다. 김구 선생은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이 이뤄지기 전에 일제가 항복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나 통합된 광복군 대원들의 불굴의 항쟁 의지, 연합군과 함께 기른 군사적 역량은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동맹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추념사에서 김원봉은 딱 한 차례 언급된다. 문 대통령은 "저는 보수이든 진보이든 모든 애국을 존경한다. 이제 사회를 보수와 진보,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며 '좌우 합작'을 통해 창설된 광복군이 국군의 뿌리임을 언급했다. 
 
김원봉은 의열단을 조직해 일제 수탈 기관 파괴, 요인암살 등 무력 투쟁을 전개했고,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했다. 1944년에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냈다. 1948년 월북한 후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됐고, 각료를 맡는 등의 이력으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분류된다. 이후 김일성에 의해 숙청을 당하게 된다. 
 
김원봉이 월북을 하게 된 계기는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은 데 대해 좌절을 느껴서였다. 김원봉 본인이 악덕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수사를 받기도 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아주경제> 인터뷰를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약산 김원봉은 해방 후 북쪽으로 가지 않고 광복군 부사령관 직함을 갖고 남쪽으로 귀국했다. 그런데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에게 모욕적인 수사를 받았다. 심지어 친일 경찰과 연결된 테러리스트의 위협으로 생명이 위태로운 처지였다. 백범 김구 선생이나 몽양 여운형 같은 민족주의자들이 테러리스트에게 암살당하던 시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남쪽에 약산이 있었다면 생명을 부지 못했을 것이다. 약산이 월북한 것은 여기서 쫓아낸 거나 마찬가지다. 남한에서 친일파가 득세한 현실에 절망해서 월북한 것이지, 공산주의가 좋아서 간 게 아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아서 도피한 거다." (☞ 바로 가기 : 광복회장 김원웅 인터뷰 )
 
자유한국당 등 보수 진영과 극우 진영은 약산 김원봉에 대한 재평가 및 서훈 추서 움직임을 두고 '역사 전쟁'을 벼르고 있는 상황이다. 김원봉이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냈다는 이유를 들어 "김원봉에게 서훈을 주면 김일성에게도 서훈을 줘야 하느냐"고 '색깔론'을 제기하고 있다. 문 대통령의 '김원봉 언급'은 김원봉 서훈 추서 문제를 재점화할 것으로 보인다. 국가보훈처 자문기구 '국민중심 보훈혁신위원회'는 지난 2월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김원봉 등 독립유공자로 평가돼야 할 독립운동가들에게 적정 서훈을 함으로써 국가적 자부심을 고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고 권고했다. 
 
관련해 오창익 국가보훈처 위법·부당행위 재발방지위원장은 <프레시안>과 인터뷰에서 "독립 유공자 인정 여부에 있어 해방 후 북한으로 넘어가 북한 정권의 요직을 지낸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비유하자면, 학교에서 개근상과 우등상을 준다고 할 때 개근상은 개근할 때 주는 상이고, 우등상은 성적이 우수하면 주는 상이다. 그런데 개근한 학생이 성적이 형편없다고 개근상을 못 주겠다고 한다면, 합당한가"라며 "'독립 유공자냐, 아니냐'의 문제와 '해방 전후 북한과 어떤 관계였느냐'는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 관련 기사 : "좌파 역사공정? 친일세력의 피해망상!") 
 
차명진 "탄핵 대상 아니고 뭐냐문재인은 빨갱이" 
 
자유한국당은 문 대통령의 김원봉 언급을 두고 강력 반발했다. 전희경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6·25 전쟁에서 세운 공훈으로 북한의 훈장까지 받고 북의 노동상까지 지낸 김원봉이 졸지에 국군 창설의 뿌리, 한미동맹 토대의 위치에 함께 오르게 됐다"며 "기가 막힐 노릇"이라고 했다.  
 
전 대변인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 나라와 가족을 위해 붉은 피를 조국의 산야에 흘린 6.25 전사자들을 뒤에 모셔두고, 눈물로 세월을 견뎌낸 가족들을 앞에 두고 북의 전쟁 공로자에 헌사를 보낸 대통령은 자신의 말대로 보수, 진보를 떠나 최소한의 상식의 선 안에 있는지 묻고 싶다"고 비난했다. 
 
'세월호 막말' 등으로 징계를 받았던 차명진 전 의원은 문 대통령의 김원봉 언급을 두고 "김원봉이 누구인가? 김일성 정권 권력 서열 3위, 6.25 남침 최선봉에 선 그 놈이다. 그런 놈을 국군 창설자라고? 이보다 反 국가적, 反 헌법적 망언이 어디 있는가? 그것도 현충일 추모사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란 자가"라고 비판했다.  
 
차 전 의원은 "내가 더이상 이 나라에서 살아야 하나? 한국당 뭐하냐? 이게 탄핵 대상 아니고 뭐냐? 우선 입 달린 의원 한명이라도 이렇게 외쳐야 한다. '문재인은 빨갱이!'"라고 비난했다.  
 
박세열 기자 ilys123@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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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반민족·반민주 행위자 65명 중 일부 묘역에 오물 뿌려

현충일 맞아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등 시민사회단체

프레스아리랑 | 기사입력 2019/06/07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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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에 묻혀 있는 반민족·반민주 행위자 65명 중 일부 묘역에 오물이 뿌려졌다.


민족문제연구소와 국가공무원노조 등이 오물(단죄수)을 뿌린 곳은 김구 선생의 암살 배후로 지목된 김창룡 묘와 정부가 발표한 친일 명단에 속한 김석범 묘 등 모두 5곳이다.

 

이들은 국립묘지 안장이 부적절한 반민족·반민주 행위자들의 묘를 즉시 이장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국립묘지법을 하루빨리 개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국가공무원노동조합, 대전민중의힘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6일 오전 11시, 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앞에서 ‘국립묘지법 개정 및 반민족·반민주행위자 묘 이장 촉구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사진 - 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 시민대회 참가자들은 김창룡(장군1-69), 김석범(장군1-71), 김동하(장군1-50), 이형근(장군1-11), 소준열(장군1-21)이 안장되어 있는 장군 제1묘역으로 이동해 단죄수를 묘역과 묘비에 뿌리는 ‘장군 제1묘역 안장자 죄악상 고발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사진 - 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현충일을 맡아 대전현충원에서는 ‘국립묘지법 개정 및 반민족·반민주행위자 묘 이장 촉구 시민대회’가 개최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국가공무원노동조합, 대전민중의힘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6일 오전 11시, 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친일 반민족행위자와 군사반란 가담자 등 부적절한 안장자의 묘를 국립묘지에서 즉각 이장하라”고 촉구했다.

 

 

 
 
▲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국가공무원노동조합, 대전민중의힘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6일 오전 11시, 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앞에서 ‘국립묘지법 개정 및 반민족·반민주행위자 묘 이장 촉구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오늘 쪽 뒤편이 대전현충원 장군 제1묘역이다. [사진 - 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 ‘국립묘지법 개정 및 반민족·반민주행위자 묘 이장 촉구 시민대회’ 참석한 독립유공자유족회 윤석경 지회장이 발언을 하고 있다. 윤석경 지회장 뒤편으로 이날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가 발표한 이장 요구 대상자 65명 중 반민족·반민주행위자 29명의 명단이 보인다. [사진 - 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이들은 성명서를 통해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회원을 비롯한 대전 시민들은 이들의 이장을 촉구하고 부적절한 자들을 이장할 수 있도록 국립묘지법을 개정하라는 요구를 지난 20여 년에 걸쳐 끊임없이 촉구하였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와 국회는 우리의 외침을 거부하고 오히려 이 부적절한 쓰레기 같은 안장자들에게 국가유공자라는 보호막을 제공하고 이들을 위하여 국민의 세금을 쏟아붓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계속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이어 이들은 “우리는 더이상 대한민국 정부와 국회가 우리의 요구를 들어줄 리 없다는 판단을 하고 친일반민족 행위자와 군사반란에 가담한 자 등 국립묘지에 있어서는 안 될 부적절한 자들의 반인륜적 범죄행위를 공개하는 등 이들의 이장을 실천하는 여론 조성 등적극적인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김창룡, 소준열, 안현태 등 반민족, 반민주행위자의 유족들에게 “그들이 국립묘지에 있는 한 국민들은 그들의 죄상에 대하여 더욱 자세히 알게 되고 손가락질을 더 할 것”이라며, “진정 고인을 위한다면 하루빨리 현충원에서 그 묘를 이장하라”고 촉구했다.

또한 “우리가 수차례 발의 요청한 [국립묘지법 개정안]이 정부와 국회의원들의 무관심과 냉대로 인하여 본회의에 상정도 못하고 폐기 또는 낮잠을 자고 있다”며 국립묘지법을 개정을 촉구했다.

 

기자회견을 마친 이들은 김창룡(장군1-69), 김석범(장군1-71), 김동하(장군1-50), 이형근(장군1-11), 소준열(장군1-21)이 안장되어 있는 장군 제1묘역으로 이동해 파묘(破墓) 퍼포먼스와 ‘단죄수’를 묘역과 묘비에 뿌리는 ‘장군 제1묘역 안장자 죄악상 고발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 시민대회 참가자들은 김창룡(장군1-69), 김석범(장군1-71), 김동하(장군1-50), 이형근(장군1-11), 소준열(장군1-21)이 안장되어 있는 장군 제1묘역으로 이동해 이장을 촉구하며 파묘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사진 - 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 시민대회 참가자들은 김창룡(장군1-69), 김석범(장군1-71), 김동하(장군1-50), 이형근(장군1-11), 소준열(장군1-21)이 안장되어 있는 장군 제1묘역으로 이동해 단죄수를 묘역과 묘비에 뿌리는 ‘장군 제1묘역 안장자 죄악상 고발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사진 - 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통일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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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기득권에 매달린다면 보수든 진보든 진짜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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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9/06/06 12:28
  • 수정일
    2019/06/06 12:28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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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민주주의·경제발전에 보수와 진보의 노력 함께 녹아 있어”

최지현 기자 cjh@vop.co.kr
발행 2019-06-06 10:37:47
수정 2019-06-06 10:3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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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6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4회 현충일 추념식에 참석하며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인사하고 있다. 2019.06.06.
문재인 대통령이 6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4회 현충일 추념식에 참석하며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인사하고 있다. 2019.06.06.ⓒ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세 번째로 맞이한 현충일에 내놓은 주된 메시지는 '보수와 진보라는 대립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근 보수진영 일각에서 민주주의에 반하는 수준의 극우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데 대한 사회적인 우려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취임 첫해인 2017년 현충일에는 '국가를 위해 헌신하면 보상받고 반역자는 심판받는다'는 점을 내세웠고, 2018년에는 국가유공자의 의미를 소방 및 순직공무원 등으로 넓히는 데에 방점을 찍었다.

문 대통령은 6일 오전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거행된 제64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우리에게는 사람이나 생각을 보수와 진보로 나누며 대립하던 이념의 시대가 있었다"라며 "하지만 오늘의 대한민국에는 보수와 진보의 역사가 모두 함께 어울려 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독립과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에는 보수와 진보의 노력이 함께 녹아 있다"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저는 보수이든 진보이든 모든 애국을 존경한다"라며 "이제 사회를 보수와 진보,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우리는 누구나 보수적이기도 하고 진보적이기도 하다"라고 덧붙였다.

문 대통령은 특히 "어떤 때는 안정을 추구하고, 어떤 때는 변화를 추구한다. 어떤 분야는 안정을 선택하고, 어떤 분야는 변화를 선택하기도 한다"라며 "스스로를 보수라고 생각하든 진보라고 생각하든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상식의 선 안에서 애국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통합된 사회로 발전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보훈이라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통합'의 사례로 광복군을 거론했다. 문 대통령은 "1945년, 일본이 항복하기까지 마지막 5년 임시정부는 중국 충칭에서 좌우합작을 이뤘고, 광복군을 창설했다"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10일 광복군을 앞세워 일제와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돼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다"라며 "그 힘으로 1943년, 영국군과 함께 인도-버마 전선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고, 1945년에는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라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김구 선생은 광복군의 국내 진공작전이 이뤄지기 전에 일제가 항복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라며 "그러나 통합된 광복군 대원들의 불굴의 항쟁의지, 연합군과 함께 기른 군사적 역량은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동맹의 토대가 됐다"라고 부연했다.

또한 문 대통령은 "지난 100년, 우리는 식민지를 이겨냈고 전쟁의 비통함을 딛고 일어났으며 서로 도와가며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이뤄냈다"라며 "그 길은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다"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독립운동의 길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선, 장엄한 길이었다"라며 "되찾은 나라를 지키고자 우리는 숭고한 애국심으로 전쟁을 치렀지만, 숱한 고지에 전우를 묻었다. 경제성장의 과정에서도 짙은 그늘이 남았다"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우리는 미래로 나아가면서도 과거를 잊지 않게 부단히 각성하고 기억해야 한다"라며 "우리 자신의 뿌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되새기며,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 통찰력을 가지고 바라봐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문 대통령은 "애국 앞에 보수와 진보가 없다"라며 "기득권이나 사익이 아니라 국가공동체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여기는 마음이 애국"이라고 밝혔다. 특히 "기득권에 매달린다면 보수든 진보든 진짜가 아니다"라고 일침을 가했다. 정치적 이득을 위해 여전히 색깔 공세를 하는 정치인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힐 여지가 있다.

문 대통령은 현충원에 안장된 유공자들을 거론하며 '기득권을 떠난 진전한 애국'의 의미를 되새겼다. 문 대통령은 "여기 묻힌 한 분 한 분은 그 자체로 역사이며, 애국이란 계급이나 직업, 이념을 초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국립서울현충원 2번 묘역은 사병들의 묘역이다. 8평 장군묘역 대신 이곳 1평 묘역에 잠든 장군이 있다"라며 "'내가 장군이 된 것은 전쟁터에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린 사병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우들인 사병 묘역에 묻어달라' 유언한 채명신 장군"이라고 소개했다.

또 "석주 이상룡 선생과 우당 이회영 선생도 여기에 잠들어 계신다. 두 분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넘어 스스로 평범한 국민이 됐다.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모든 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라며 "뿌리 깊은 양반가문의 정통 유학자였지만 혁신유림의 정신으로 기득권을 버리고,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건국에 이바지했다"라고 평가했다.

마지막으로 문 대통령은 "우리의 가슴에는 수많은 노래가 담겨있다. 조국에 대한 노래, 어머니에 대한 노래, 전우에 대한 노래, 이 노래는 멈추지 않고 불릴 것"이라며 "우리에게 선열들의 정신이 살아있는 한 대한민국은 미래를 향한 전진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최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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