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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농단의 검은손’ 김앤장

["존경하는 재판장님" 사법농단, 법정의 기록 ⑤]‘사법농단의 검은손’ 김앤장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입력 : 2019.05.27 06:00 수정 : 2019.05.27 09:04

 

김앤장 법률사무소의 사법농단
윤병세 등 로펌 출신 인맥들 활용

일본 기업 승소 위해 ‘전방위 로비’

서울 종로구의 김앤장 법률사무소 로비. 김앤장은 ‘양승태 대법원’과 ‘박근혜 청와대’의 ‘재판 거래’에 관여한 의혹으로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기도 했다. 윤병세씨는 박근혜 정부의 초대 외교부 장관이 되기 전 김앤장 고문으로 4년간 재직했다.    연합뉴스

서울 종로구의 김앤장 법률사무소 로비. 김앤장은 ‘양승태 대법원’과 ‘박근혜 청와대’의 ‘재판 거래’에 관여한 의혹으로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기도 했다. 윤병세씨는 박근혜 정부의 초대 외교부 장관이 되기 전 김앤장 고문으로 4년간 재직했다. 연합뉴스

 

“이 사건에는 외교관계 측면에서 민감한 여러 가지 기밀사항이 포함돼 있습니다. 노출될 경우 국익에 미칠 영향에 대해 우려스럽습니다. 과거 (박근혜) 정부뿐만 아니라 현 (문재인) 정부도 앞으로 이웃 나라(일본)와 굉장히 민감한 협의를 해야 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는데 저희가 여기서 논의하는 내용이 연계될 수도 있습니다.” 

지난 14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66)이 재판을 비공개로 진행해달라고 요구했다. 윤 전 장관은 박근혜 정부 초대 외교부 장관으로 4년 넘게 재임한 ‘장수 장관’이었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둘러싸고 대법원과 청와대가 부적절한 거래를 했다는 시기도 이때였다. 재판은 ‘사법농단’이라는 위법행위,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인권침해를 다룬다. 하지만 윤 전 장관은 ‘외교관계’ ‘국익’을 그에 앞세웠다. 재판부는 재판을 공개로 진행했다. 그러나 윤 전 장관은 검사가 외교부 문건을 제시할 때마다 ‘비밀 자료’라며 공개해선 안된다고 막는가 하면, 답변도 어물쩍 넘어갔다. 검사가 질문할 때마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하곤 했다. 윤종섭 재판장이 “증인이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검사가 묻는 사항에 대해 사실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임을 명심하라”고 지적했다.

이날 윤 전 장관의 증언에서는 국내 1위 로펌인 김앤장 법률사무소의 로비가 드러났다. 김앤장은 법정 안에서만 활약하지 않았다. 김앤장은 전직 고위 관료들을 ‘고문’으로 영입하고, 그 고문들은 현직 고위 관료들과의 연줄을 이용해 내밀한 정보를 주고받았다. 일본 기업에 한국 정부 입장을 속속 전해주고, 일본 기업의 승소를 위해 대법원 판결에 영향을 미칠 계획도 세웠다. 김앤장은 사법농단 속 또 하나의 사법농단이었다. 

■ ‘징용 소송’에 외교·법조 전관 총동원…박근혜 외교부와 ‘상부상조’

외교부 관료 출신인 윤 전 장관 역시 장관이 되기 전인 2009년부터 4년간 김앤장 고문으로 일했다. 2012년 5월24일 대법원이 피해자들 손을 들어주는 내용으로 일제 강제징용 사건을 파기환송했을 때도 김앤장 소속이었다. 파기환송 직후 김앤장에서는 대책회의가 열렸다. 김영무 대표를 포함해 김용갑·조귀장 변호사 등이 모였다. 윤 전 장관도 참석했다. 윤 전 장관은 특별한 회의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미 그 시점에 1965년 이후 한국 정부의 입장과 입법부·법원의 조치 등 사실관계가 다 나와 있었기 때문에 제가 아마 설명을 뭔가 했다면 팩추얼한(사실에 기반을 둔) 설명을 했을 수 있습니다. 일본의 우려가 언론에서 많이 나왔기 때문에 그런 내용을 공유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윤 전 장관은 2013년 1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통일안보분과 위원으로 참여하면서 김앤장 고문직을 그만뒀다. 그해 2월에는 박근혜 정부의 첫 외교부 장관으로 지명됐다.

김앤장은 김앤장 출신 장관을 활용할 계획을 세운다. 검찰에 따르면 2013년 1월10일 김앤장 조귀장 변호사가 내부 변호사들에게 전송한 e메일에는 미쓰비시중공업 고문이 된 무토 마사토시 전 주한 일본대사가 방한 일정을 조율하면서 윤 전 장관과 현홍주 전 주미대사,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과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는 내용이 기재돼 있다. e메일에는 ‘일제 강제징용 사건은 일개 기업이 아니라 양국 정부가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는 문구도 있다. 그 직후인 1월18일 김앤장의 한 변호사가 한상호 변호사에게 보낸 e메일을 보면 “미쓰비시중공업 측에서 ‘윤(외교통상부 차기 장관)’에게 직접 연락을 드린 모양”이라며 김앤장이 윤 전 장관과 무토 마사토시 전 대사의 오찬 일정을 맞춘 내용도 나온다. 

윤 전 장관은 장관 취임 후인 2013년 3월 김앤장 변호사들을 외교부에 초대했다. 김영무 대표와 현홍주 전 대사, 한상호 변호사 등이다. 현 전 대사는 윤 전 장관의 경기고, 서울대 법대 선배이고 외교부에서 함께 근무했다. 윤 전 장관을 김앤장에 스카우트한 사람이 현 전 대사이고 김앤장에서도 한팀으로 일했다. 한상호 변호사도 윤 전 장관의 경기고 선배다. 외교부 관료로 있을 때 윤 전 장관과 근무 인연이 있는 유명환 전 장관은 김앤장 고문으로 옮긴 뒤 현 전 대사와 함께 윤 전 장관을 수차례 만난다. 윤 전 장관은 이 같은 만남들이 모두 인사치레거나 친목도모 목적이었고 강제징용 사건과는 무관하다고 했다. 그러나 외교와 정치와 재판에 얽힌 학교, 직장 선후배가 ‘친목’을 도모하는 순간, ‘공정함’의 외관은 무너진다. 

김앤장 고문 출신 윤 전 장관 
취임 후 김앤장 변호사들 초청
그해 11월 외교부 사무관 일지엔 
“판결 나오면 끝이다, 작살난다
청와대·관계부처 끌어내야”
 

그해 11월 외교부 정모 사무관 업무일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판결 나오면 끝이다, 외교부는 작살난다, 판결 나오고 방안 찾을 것이냐, 청와대·관계부처 끌어내야, 범정부적 입장 마련.” 정 사무관은 윤 전 장관이 격하게 말한 내용을 받아 적었다고 했다. 윤 전 장관은 “대법원 판결의 번복을 의도한 게 아니라 어떠한 판결이 나와도 좋은데 다만 그 판결에 국내적인 측면만 있는 게 아니라 한·일관계 등 국제법적 측면이 있기 때문에 (대법원이) 충분히 고려해서 판결해주면 외교부가 대응하는 데 도움이 되고 우리 국익에도 유리하다는 입장이었다”고 설명했다.

■ “외교부 장관이 패소 전폭 협조” 

김앤장 분위기는 어땠을까. 한상호 변호사가 2015년 1월 신일철주금 관계자를 만나기 위해 작성했다는 문건은 상징적이다. 한국 정부에 대한 로비 현황을 김앤장이 일본 기업 측에 성과로 보고하는 내용이다. 

2년 뒤 김앤장 변호사 문건에선 
“외교부 최고책임자 접촉, 공감
특명 내려 패소에 전폭 협조 지시”
 

“문건을 보면 외교부 최고책임자인 증인(윤 전 장관)을 김앤장이 여러 차례 접촉해서 이야기했고, 증인이 공감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또 이런 문장도 있습니다. 외교부의 최고책임자는 담당 국장에게 ‘특명’을 내려서 패소에 전폭적으로 협조하도록 지시하였음.”(검사)

“저는 국익을 다루는 외교부가 이런 문제에 대해 (외부와) 정보를 공유하는 것에 대해 (자제해야 한다는) 분명한 철학을 항상 갖고 있었습니다. 문건들은 과장돼 있는 것이고, 유명환 전 장관이 사건 이야기를 하길래 담당 국장을 만나보라고 넘겼을 뿐입니다.”(윤 전 장관)

김앤장 최건호 변호사가 작성한 문건에는 ‘외교부 동향, 2012년 대법원 판결 잘못됐다는 공감대 있음, 참고인 의견서 제도 알고 있음, 대법원 요청 있어야 한다는 입장, 참고인 의견서 제출 이후 신속히 판결 나왔으면 좋겠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유 전 장관은 “윤 전 장관에게 들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윤 전 장관은 “제가 알려준 내용이라기보다는 외교부의 여러 인사들을 통해서 파악한 것 같다”며 “유 전 장관과 현 전 대사가 상세한 내용을 갖고 물어오면 선문답하듯이 말한 적은 있다”고 부인했다. 윤 전 장관이 흘려 이야기한 것이 김앤장에는 중요 정보가 됐고, 이 정보는 일본 기업으로까지 흘러갔다. 

2015년 12월15일 윤 전 장관이 현 전 대사·유 전 장관과 식사를 하며 나눈 대화 내용도 문건에 남았다. 윤 전 장관은 ‘그동안 진전 있었다, 대법과 협의, 청와대 VIP 보고사항, 한·일 정상회담 후 일정 바빠, 조만간 타이밍 검토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나온다. 김앤장 측 답변으로는 ‘위안부 문제 연결 적절치 않다, 일 아베 총리 생각 바뀌지 않아 실기할 수 있다, 한·일관계 중대 영향 미치는 사항,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돼 있다. 대법원에 외교부의 의견서 제출과 관련해 논의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윤 전 장관은 이 자리 발언도 의례적이었다고 했다. 외교부와 김앤장 사이에 정보는 수시로 오갔고, 결과적으로 외교부는 김앤장이 원한 대로 강제징용 사건 관련 의견서를 대법원에 제출했다. 2012년 대법원 판결에 문제가 있다는 데는 청와대와 법원행정처도 모두 입장이 같았다.

윤 전 장관도 위안부 합의 발표 전 
언론 기고 청탁 등 김앤장 활용

윤 전 장관 역시 필요할 땐 김앤장을 활용했다. 검찰에 따르면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 발표 전날인 2015년 12월27일 윤 전 장관은 유 전 장관과 또 만났다. 윤 전 장관은 검찰에서 “다음날 한·일 위안부 합의 발표를 앞두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여론 부담이 만만치 않다고 생각해서 유 전 장관에게 (위안부 합의에 대한 이해를 돕는) 언론 기고를 부탁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진술했다. 그렇게 외교부와 김앤장은 상부상조했다. 

■ “기억 안 난다”는 윤병세 

2013년 10~11월 주철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윤 전 장관에게 ‘친전’을 보냈다. “10.29. 대법원 임종헌 기획조정실장이 내방하여 주유엔대표부에 판사를 파견하기를 희망한다며 협조를 요청해왔습니다. 대법원 측에서 작성한 관련 자료를 첨부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문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 계기에 일본관계 현안도 협의 및 참고자료를 전한 바 있습니다. 외교안보수석 주철기.”

일본 기업 대변한 변호사들 
대부분 판사 출신, 김앤장 경력
최근까지도 판사들 김앤장으로
 

일제 강제징용 사건에 외교부 입장을 반영해주는 대신 법관 해외파견에 협조를 받으려고 한 것 아니냐는 검사 질문에 윤 전 장관은 친전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청와대에서 장관에게 친전으로 내려보내서 무게 있게 다가왔다”는 김규현 전 외교부 1차관이나, 윤 전 장관이 강제징용 사건에 관심이 많아 회의에도 직접 참석했다는 외교부 직원들 증언과 상반된다.

윤 전 장관은 8시간의 증언을 마치고 난 뒤에 또 한·일관계를 걱정했다.

“현재 한·일 간에 외교적으로 전례 없이 심각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고, 국제사회가 특히 일본 정부가 (사법농단 사건을) 면밀히 모니터링하기 때문에 국익과 관련해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법정에서의 성실한 증언에 추가해서 역사 앞에 증언한다는 심정으로 이렇게 섰습니다.” 윤 전 장관에겐 청와대·외교부·김앤장·대법원 선후배들의 ‘로비’도 ‘역사’가 될까.

강제징용 소송에서 일본 기업 측 일을 도맡은 김앤장 변호사들 대부분은 판사 출신이다. 최근까지도 법원행정처에서 일했던 판사 상당수가 김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관련연재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5270600025&code=940301#csidxd70e81277f250d587b04d2ed563c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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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민의 청년전태일들] 구의역 3주기, 김군이 남기고 간 과제

김종민 전 청년전태일 대표
발행 2019-05-27 09:58:51
수정 2019-05-27 09:5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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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역 3주기 추모문화제가 5월25일 2시에 구의역 앞에서 열렸다. 400명의 시민들이 모인 자리에 산재로 사망한 청년노동자의 가족들이 함께했다. 특성화고 졸업생이자 CJ에서 일하다가 죽은 故김동준의 어머니, 故이한빛 PD의 아버지, 제주현장실습생 故이민호의 아버지와 어머니,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가 산재를 당한 한혜경님과 어머니, 그리고 청년 건설노동자 김태규의 누나가 함께했다. 필자는 추모제 사회를 보며 가족들을 한 분한 분 소개해 드렸다. 가족들이 일어나서 추모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할 때마다 참가자들이 눈물을 흘렸다.

많은 사람들이 청년노동자 산재사망이 일어날 때마다 죽음에 슬퍼하고 추모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반복되는 청년노동자들의 사망 소식을 보면서 2016년 5월28일 이후 3년이 지난 지금 과연 무엇이 바뀌었을까 의문이 든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참사가 일어난 지 3년이 지난 지금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지 짚어보고자 한다.

25일 오후 서울 구의역 앞에서 '구의역 참사 3주기 추모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25일 오후 서울 구의역 앞에서 '구의역 참사 3주기 추모문화제'가 열리고 있다.ⓒ뉴시스

김군 동료들은 정규직이 됐지만
여전히 또 다른 외주화에 시달리고 있는 공공부문 노동자들

필자는 구의역 김군이 한국사회에 남기고 간 과제를 3가지로 정리한다. 첫 번째는 청년비정규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직고용) 문제이다. 두 번째는 특성화고 졸업생 노동자들의 현장실습 및 노동환경에 대한 문제이다. 세 번째는 위험의 외주화와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이다.

구의역 김군은 서울시의 대표 공공기관인 서울메트로의 하청업체 은성PSD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구의역 김군이 사망한 뒤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는 김군의 동료들을 무기계약직인 안전업무직을 거쳐 정규직으로 직고용 했다. 여전히 비정규직 출신들의 경력을 인정해주지 않는 차별은 존재하지만, 더 이상 하청 비정규직 신분은 아니다. 지하철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화는 서울 지하철뿐만 아니라 전국의 지하철에서 공통적으로 변한 부분이다.

하청비정규직 노동자가 본사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은 고용의 안정성과 노동자의 안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외주화는 하나의 현장에서 노동자가 하나의 운영시스템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외주화된 회사 숫자만큼 여러 개의 운영시스템으로 움직이게 된다. 하청업체 직원들은 정보에서 소외되는 것이다. 직고용을 해서 하나의 시스템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해야 안전을 지킬 수 있다. 더불어 직고용을 해야 노동자들 간의 동료의식이 생길 수 있다. 구의역 김군 사고 이후 장례식장에서 같은 하청업체 직원을 제외하고, 지하철 정규직 노동자들의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이는 하나의 현장이지만 회사가 달랐기 때문에 동료의식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은 당선이 된 직후 인천공사를 찾아갔다. 거기에서 문 대통령은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이야기했다. 문 대통령의 발언 이후 공공기관과 민간에서 모두 경쟁을 하듯이 정규직화를 선언했다. 대통령의 발언은 IMF이후 20년간 지속된 ‘민영화와 외주화는 끝났다’는 상징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2년이 지난 지금 공공부문에서 정부가 말한 정규직은 대부분 또 하나의 외주, 자회사로 되고 있다. 자회사는 노동자들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움직이게 하지 못한다는 지점에서 안전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방식이다.

전국특성화고등학교졸업생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특성화고 졸업생 노동조합 결성선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조합원들이 '구의역·제주·이마트 억울한 죽음 끝내자'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전국특성화고등학교졸업생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특성화고 졸업생 노동조합 결성선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조합원들이 '구의역·제주·이마트 억울한 죽음 끝내자'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김슬찬 인턴기자

차별 없고 안전한 사회 만들려는 특성화고 졸업생들

구의역 김군은 특성화고 졸업생 출신 노동자였다. 은성PSD가 저임금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2014년 하반기 특성화고 학생들을 대거 고용할 때, 친구들과 함께 현장실습생으로 스크린도어 수리 업무를 시작했다.

‘구의역 김군’의 후배들은 김군 사망 직후 구의역스크린도어 9-4승강장 앞 포스트잇에 “선배의 죽음의 남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그 김군이 후배들이 2017년 7월 구의역에 모여 특성화고등학생권리연합회를 창립하면서 ‘제2의 김군’이 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다음 해인 2018년 5월에는 특성화고졸업생노동조합이 설립되면서 한국사회에서 한 번도 주목받지 못했던 집단인 특성화고 출신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017년 11월 현장실습생 故이민호의 죽음 진실을 밝히는 과정에서 특성화고 현장실습 문제가 한국사회에 많이 알려졌다. 제주라바를 만드는 생수업체 제이크레이션은 값싼 노동력을 얻고자 2017년 8월 물이 많이 팔리는 여름 성수기에 현장실습생을 대거 고용했다. 하루빨리 돈을 벌고 싶었던 현장실습생 故이민호는 안전설비는 뒤로한 채 값싼 노동력을 얻고자 했던 사장의 욕심에 삶을 마감했다. 이 사건이 사회에 알려지자 정부는 현장실습 폐지를 들고 나오면서, 특성화고 졸업생들의 노동안전 문제에 대해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당사자들이 변화의 주체로 나서면서 한국사회에서 특성화고 졸업생들의 노동안전 문제, 현장에서 고졸출신 노동자들의 차별을 당연한 것이 아니라 바꿔야 할 과제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많은 회사에서 고졸 출신들의 승진차별을 당연하다고 여긴다. 이를 명문화한 공공기관도 있다. 그러나 특성화고 졸업생들은 학력이 아닌 실력으로 평가받고 싶다고 창립선언문에 이야기했다. 2019년 4월 건설현장에서 사망한 故김태규와 같은 20대의 특성화고 출신 노동자들의 노동안전 문제, 학력으로 인한 차별을 그만 받고 싶다는 특성화고 출신 노동자의 외침에 대해 이제는 한국사회가 무엇이든 화답을 해야 할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청년 비정규직 故 김용균 시민대책위원회’와 유족은 서울 광화문 분향소에서 '국회 산안법 개정에 대한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원회 입장'을 발표했다.
‘청년 비정규직 故 김용균 시민대책위원회’와 유족은 서울 광화문 분향소에서 '국회 산안법 개정에 대한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원회 입장'을 발표했다.ⓒ시민대책위 제공

줄어들지 않는 산재 사망사고

외주화가 노동자를 죽이는 근본적 원인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인식한 사건이 ‘구의역 김군’ 사고였다. 기업이 노동안전 비용과 산업재해 이후의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서 안전업무를 외주화 시킨 결과가 김군의 죽음이었다. 산재사망 90%가 외주화된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이다. 노동자들이 ‘구의역 김군’ 이후 지속적으로 안전업무 위험의 외주화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산재사망사고가 줄어들지 않았다.

2018년 11월 서부발전 하청업체 한국발전기술 노동자인 ‘김용균’이 사망했다. 김용균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과 노동자들의 싸움, 시민사회의 연대로 28년 만에 산업안전보건법, 이른바 ‘김용균법’이 통과됐다. ‘김용균법’은 산업안전에 있어서 원청의 책임을 강화하고, 그동안 법으로 보호받지 못한 특수고용노동자, 라이더 노동자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시행령에 있어서 정부가 후퇴한 안을 들고 나와서 논란이 있지만 한국사회의 노동안전에서 진일보한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

문재인 정부가 2017년 집권 이후 2020년까지 산재사망자를 절반으로 줄인다는 목표아래 여러 가지를 추진했지만, 고용노동부는 2018년 2142명이 산업재해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2017년보다 산재사망으로 줄어든 인원이 없었다. 김용균법 통과와 더불어, 정부가 김용균 사망사고 이후 내린 공공기관에서 2인1조 지침 등이 산재사망사고에 영향을 미치길 바란다. 정부는 우선 입법취지보다 후퇴한 산안법 시행령 개정부터 해야 할 것이다.

구의역 김군이 이후 한국사회는 많은 것이 변했고, 또 여러 과제들이 남아있다. 김군의 죽음을 잊지 않고, 슬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져야 한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3주기인 지금이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한국사회에서 아침에 인사하고 저녁에 집에서 가족을 보지 못하는 일이 더 이상 없길 바래본다.

김종민 전 청년전태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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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행진에 극우 지지자 난입 ‘아찔했던 순간’

언제까지 극우 지지자의 폭력을 묵과할 것인가?
 
임병도 | 2019-05-27 09:10:0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취재를 위해 찾은 5월 25일 토요일 광화문광장은 찢어질 듯한 스피커 소리에 귀가 아팠고, 옆 사람과의 대화조차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이날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는 자유한국당의 장외집회가 열리고, 광화문 중앙광장(세종대왕상)에서는 4월 16일 약속국민연대, 4.16가족협의회 공동주최로 ‘세월호 참사 진실은폐, 민주주의 훼손, 자유한국당 적폐세력 심판’을 촉구하는 대규모 범국민촛불문화제가 개최됐습니다.

자유한국당은 촛불문화제를 의식한 듯 빠른 템포의 가요 등을 연신 틀어댔고, 크레인에 매달린 대형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굉음 때문에 객석 뒤편에서는 촛불문화제 무대에서 발언하는 목소리나 4.16합창단의 공연을 거의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공간에 두 개 집회가 열리는 모습을 보면서, 충돌(?) 보다는 극우 지자자들의 폭언과 폭력이 걱정됐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촛불문화제 도중 극우 지지자들의 시비는 계속됐고, 폭력 사태도 벌어졌습니다.

세월호 유가족의 애절한 마음을 조롱하는 피켓

촛불문화제 무대에서는 세월호 진상규명에 관한 영상과 세월호 유가족들의 애절한 마음이 담긴 발언이 이어졌습니다. 그러자 객석 뒤편을 맴돌던 극우 지지자는 급조한 ‘세월호 시체팔이’라고 적은 피켓을 들고 조롱하듯 걸어 다녔습니다.

세월호 유가족과 촛불문화제 참가자가 통로를 지나가자 극우 지지자 여성 한 명은 그들을 향해 폭언을 했고, 황급히 피하는 그들을 쫓아가며 주먹을 휘두르기도 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을 향한 폭언과 폭력은 이날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광화문광장에서는 너무나 흔히 볼 수 있었던 모습입니다.

제발 부탁드린다.
우리 유가족 엄마들과 서명지기 그리고 피켓팅 하는 분들을 괴롭히지 말아 달라.
365일 세월호 진상규명에 매달리는 유가족과 416연대 활동가들 그리고 우리 유가족 옆에서 봉사활동 하시는 분들은 괴롭히지 말아달라.

당신들이 괴롭힐 만큼 그분들이 잘못한 것 없다.
그분들 모두 내 가족이며 내 형제이다.

당신들이 두른 태극기의 숨은 뜻은 알고 있는가?
당신들이 내 뱉는 독설 속의 시체팔이가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말인가?
당신들이 우상시하는 박근혜가 우리 국민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는가?

경찰은 불법적인 폭력을 단 한건도 용납하지 마라. 단 한번이라도 우리 유가족 엄마들이나 활동가들이 불법적인 폭력에 당한다면 경찰들이 전부 책임져야 할것이다. 
나 같이 못난 위원장 믿고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 아이들 억울함을 알리려고 나오신 분들이다. 
제발 우리를 보호하라. 
저들을 보호하지 말고. (장훈 4.16연대 공동대표/준형이 아빠)

장훈 4.16연대 공동대표는 전날 페이스북에 ‘유가족과 활동가들, 봉사자들을 괴롭히지 말아 달라’며 경찰에게 ‘우리를 보호해달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태극기와 극우라는 완장이 있다고 해도 인간을 조롱하고 멸시하며 폭력을 휘두르는 행위는 법적으로 처벌받아야 마땅한 증오 범죄입니다. 이날 현장에서 목격한 모습 만으로도 경찰의 수사와 보호가 시급해 보였습니다.

촛불행진에 극우 지지자 난입 ‘아찔한 순간’

촛불문화제가 끝난 뒤 유가족과 참가자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를 행진했습니다. 행진이 시작되고 불과 몇 분 뒤 다급한 목소리로 ‘경찰’을 애타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극우 지지자 남성 한 명이 촛불행진을 향해 난입했고, 다행히 참가자들과 경찰의 제지로 안쪽까지는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이날 촛불행진에는 주말을 맞아 부모의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유모차를 타고 온 아기들도 있었습니다. 만약 촛불행진 안쪽까지 들어왔다면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촛불행진 바깥쪽 차선은 교통이 통제되지 않았기에 극우 지지자로 아수라장이 됐다면 더 큰 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언제까지 극우 지지자의 폭력을 묵과할 것인가?

집회 현장에 나가면 극우 지지자들의 폭언과 폭력을 매번 목격합니다. 이들은 과격한 행동과 충돌을 연출하기 위해 주변을 맴돌며 고의적으로 시비를 겁니다. 특히 생방송을 하는 극우 유튜버들이 많아지면서 클릭이나 후원을 위해 자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극우 지지자들은 세월호 유가족이나 진보 집회 참가자들과 싸우는 것을 자신의 애국을 증명하는 길이자 훈장처럼 여깁니다. 마치 서북청년단의 ‘빨갱이 처단’과도 같은 모습으로 광기마저 느낍니다.

문제는 경찰이 집회 도중 벌어지는 극우 지지자의 폭력과 폭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이날 집회 도중 폭언과 폭력을 휘둘렀던 극우 남성은 경찰에게 체포되지도 않은 탓에 또다시 촛불행진에 뛰어들 수 있었습니다. 이 남성이 큰 사고를 유발할 수도 있었음에도 경찰은 강력하게 제지하지 않았고, 촛불행진을 향한 조롱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날 촬영한 영상을 보면 극우 지지자 남성이 자유한국당 해체 손피켓을 든 여성의 눈을 찌르려고 했고, 여성의 얼굴에는 위협을 느낀 표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단호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기에 집회 현장에서 극우 지지자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고 폭언과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극우 지지자들의 만행을 계속 봐야 할까요?

유튜브에서 바로보기: 촛불행진에 극우 지지자 난입 ‘아찔했던 순간’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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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연 판도라, 인류의 희망? 종(種)의 재앙?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유전자 변형 인간의 탄생
 
2018년 11월 홍콩에서 열린 제2회 국제인류유전자편집학술회의에서 허젠쿠이(贺建奎) 중국 남방과학기술대학 교수는 "유전자를 편집한 쌍둥이가 태어났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불임치료를 받고 있는 7쌍의 부부로부터 배아를 채취, 유전자가위(CRISPR)를 사용하여 유전자 교정을 했다. 그리고 한 쌍의 부부로부터 에이즈 바이러스(HIV)에 면역력을 가진 룰루(Lulu)와 나나(Nana)란 이름의 쌍둥이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그동안 유전자 변형 아기의 탄생은 시간이 문제였지 이미 예견된 사건이었다. 과학자들이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실험'을 허젠쿠이(贺建奎)가 실행에 옮겼을 뿐이다. 중국은 이미 2015년 유전자 가위를 활용한 인간 배아 실험을 가장 먼저 허용하였다. 허젠쿠이가 무모한 '일탈'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중국 당국의 태도와 관련이 깊다.

중국은 2003년 12월 24일 과기부(科技部)와 위생부(卫生部)가 공동 발표한 <인간배아줄기세포 연구윤리 지도원칙(人胚胎干细胞研究论理指导原则)>을 통하여 유전자 편집기술을 통제하여 오고 있었다. 그러나 허젠쿠이는 엄격히 금지된 출산 목적의 인간 유전자 편집을 과감히 시도했다.  

크리스퍼(CRISPR), 판도라 상자를 여는 열쇠가 되다. 

오늘날 크리스퍼(CRISPR) 유전자 가위는 생명 현상의 신비를 밝히는 아주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유전자 가위는 '판도라 상자(Pandora Box)'를 여는 열쇠가 됐다. 금단의 상자를 열어 인류에게 죽음과 질병을 안겨준 판도라, 그러나 그리스 신화의 원전을 찾아가면 그녀 자신도 원래 인류에 대한 재앙으로 만들어진 인조인간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미 보편화된 'GMO 곡물'의 경우처럼 그 위험성에 대한 아무런 검증도 없이 유전자 가위의 사용이 보편화된다면 인류가 창조한 '신인류'의 탄생으로 '현생인류'는 지구 역사 속으로 사라질 지도 모른다. 찰스 다윈이 '진화론(evolutinary theory)'에서 예언한 돌연변이와 적자(適者)생존을 통한 종의 교체가 이루어지는 것을 뛰어넘어, 인류 스스로 새로운 종을 창조하고 멸망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자연임신이 아닌 인공수정 만으로만 아이를 출산하도록 통제하는 인류의 미래를 다룬 영화 '가타카(Gattaca)'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알파고(AlpaGo)가 인공지능에 대한 우려를 가져왔듯이, 유전자 조작기술 역시 유전자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사회에 대한 우려가 현실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호기심과 편리를 위하여 만들어진 기술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대한 인간의 새로운 윤리관이 중요해졌다. 노화를 되돌리고, 신체를 자유롭게 교체하고, 태어날 아기를 마음대로 선별하거나 DNA를 조작, 편집하는 것이 인류를 더욱 행복하게 할까? 아니면 인간의 신체적 능력이나 조건조차도 경제력의 차이가 결정하는 세상이 될 것인가?

나아가 가까운 장래에는 유전자 분석과 줄기세포 치료 등에 부의 양극화가 심각해질 가능성이 있다. 부유한 계층은 유전자 편집과 줄기세포 치료가 일반화되고 빈곤층은 아예 혜택을 못 누리거나 불법의 시술에 의존하게 되어 인류의 극심한 계층 분화가 일어날 수도 있다.

미래의 생명공학은 인류에게 질병 치료, 수명연장, 식량, 에너지, 환경 등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장밋빛 전망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같이 드리우고 있다. 새로운 윤리관에 바탕을 둔 정비된 법률과 제도 없이는 '판도라 상자(Pandora Box)'안에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까지도 아무 쓸모없게 된다.  

인간 유전자 편집 기술의 경우, 현재의 과학기술의 수준에서는 그 이득보다는 위험성이 훨씬 더 크다. 현재 하나의 유전자를 조작했을 때 또 다른 어떠한 문제가 발생할 지에 대한 충분한 지식마저도 없다. 특히 인간 배아의 유전자 조작은 후손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재차의 검증을 통한 접근이 필요하다. 

소 잃은 뒤에라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 

유전자편집은 지금까지 공상과학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환상적인 이야기였다. 그러나 지금 영화 속의 현실이 실제로 우리 눈앞에 실현되고 있다. 인류 전체가 짊어져야 할 위기감과 윤리적 과제를 놓고 전 지구적인 합의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는 시점이다.

허젠쿠이(贺建奎) 사건 이후에 세계 과학계는 물론 중국 정부도 유전자 과학기술의 인간 적용에 대하여 그 위험성과 사회적 합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2019년 2월 26일 중국 국가위생건강위원회(国家卫生健康委员会)가 발표한 <생물의학신기술임상응용관리조례(生物医学新技术临床应用管理条例, 의견청구안)>는 이러한 우려에서 등장한 국무원 법령으로 앞으로 중국에서 유전자 가위를 통한 연구에 학술심사와 윤리심사를 대폭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본 조례의 <의견청구안>에서는 고위험생물의학기술에 DNA편집기술, 생물복제기술, 보조생식기술 등을 포함시키고 있다. 그리고 고위험생물의학기술의 임상실험 시에 각 단계마다 엄격한 심사를 거친 후 등록을 하도록 강제하는 규정이 포함되어 있다.

이어 2019년 3월 14일 7개국의 과학자와 윤리학자 18명은 국제 공동의 규범이 정립되고 안전성이 입중되기 전까지는 최소 5년간 유전자 편집 인간 배아의 착상을 전면 중단하는 한편 인간 유전자 편집을 관리 감독할 국제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공동성명을 과학저널 <네이처>( Nature)'에 발표하였다.  

생명과학을 통제 규율하는 법제도는 연구기술 본연의 도전성, 연구윤리, 사회질서를 모두 고려하는 균형 감각을 이루는 것이 필요하고 이는 인류의 영원한 숙제로 논의의 핵심이다. 허젠쿠이(贺建奎)의 무모한 실험이 있기 전에 각국이 실질적인 법제도를 만들어 규제하였더라면 하는 후회는 있지만 지금이라도 무너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

우리나라는 2005년 '황우석 사태'를 계기로 생명윤리에 대한 규제가 강화된 후 생명과학기술에 대한 체계적 발전의 대안을 아직까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순수 연구 목적의 인간배아 유전자 편집마저도 금지하고 있다. 유전자 편집에 대한 실질적인 법제도 확립과 함께 생명공학의 발전을 위하여 금지한다고 규정하지 않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 허용하는 네거티브(negative) 방식의 규제 개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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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의 실패원인, 역사는 알고 있다

[개벽예감 349] 백악관의 실패원인, 역사는 알고 있다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9/05/27 [08:25]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백악관이 미사일협상에 매달린 이유

2. 즉석에서 제시된 파격적인 미사일해법

3. 조선의 우라늄농축문제 물고 늘어진 미국

4. 핵무기를 더 많이 만드는 조선

5. 완전히 파탄된 미국의 공중정찰작전

 

 

1. 백악관이 미사일협상에 매달린 이유

 

가을정취가 짙어가던 2000년 10월 24일 평양고려호텔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가운데, 미국 국무장관으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조선을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진행한 기자회견이었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하였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클린턴 대통령의 친서를 전하고 3시간 동안 회담하였으며, 조명록 차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백남순 외무상과 각각 회담하였다. 그처럼 중요한 방문일정을 마치고 워싱턴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기자회견장에 나왔으므로, 내외신 취재진은 그가 과연 무슨 이야기를 꺼내놓을지 무척 궁금했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기자회견 중에서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킨 발언은 다음과 같다.

 

“김정일 위원장과 나는 조선의 고유한 미사일 프로그램과 미사일 수출 등 미사일에 관한 상호관심사를 폭넓게 논의하였다.”

 

“나는 다음 주에 두 나라 미사일전문가들이 회담을 재개할 것이라는 사실을 발표하게 되어 기쁘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위와 같은 발언을 들어보면, 2000년 당시 조미협상의제는 핵문제가 아니라 미사일문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93년부터 2001년까지 클린턴 행정부 시기의 백악관은 조선의 핵무기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이 없었고, 조선의 미사일에 대해서만 관심을 두었다. 그런 사실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조선을 방문하기 14일 전인 2000년 10월 9일 조명록 차수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로 워싱턴을 방문하여 백악관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회담한 직후, 10월 12일 평양과 워싱턴에서 동시에 발표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 사이의 공동코뮈니케’에서 뚜렷이 드러났다. 조미공동코뮈니케에는 다음과 같은 합의사항이 들어있다.  

 

“쌍방은 미사일문제의 해결이 조미관계의 근본적인 개선과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의 평화와 안전에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라는데 대하여 견해를 같이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은 새로운 관계구축을 위한 또 하나의 노력으로 미사일문제와 관련한 회담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모든 장거리미사일을 발사하지 않을 것이라는데 대하여 미국측에 통보하였다.”

 

지금으로부터 19년 전, 백악관이 그처럼 핵문제를 외면하고 미사일문제에만 매달린 까닭은 다음과 같은 사연에서 밝혀진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2000년 10월 2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조선을 방문한 매들리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을 환영하기 위해 평양에 있는 백화원 영빈관에서 마련한 만찬 중에 축배를 드는 장면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에게 파격적인 미사일해법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2000년 12월 안에 평양에서 조미정상회담을 개최하여 미사일해법을 최종적으로 타결하자는 놀라운 제안을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을 통해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냈다. 만약 클린턴 대통령과 참모들이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미사일해법을 받아들였다면, 오늘 우리 겨레는 자주적 평화통일이 실현된 나라에서 살고 있을지 모른다.     

 

(1) 클린턴 대통령과 참모들은 조선이 핵보유국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조선이 핵무기 개발을 막 시작한 초보적 수준에 있는 것으로 오판하였다. 미국의 탐사보도기자 쎄이무어 허쉬가 잡지 <뉴욕커> 2003년 1월 27일부에 발표한 장문의 기사에 따르면, 2002년 6월 미국 중앙정보국은 부쉬 대통령과 참모들에게 조선의 핵무기개발현황을 분석한 ‘국가정보평가서’를 제출하였는데, 거기에는 “1997년 이후 정밀기술, 핵탄두설계정보, 핵무기시험자료 등을 파키스탄으로부터 넘겨받은” 조선이 우라늄을 농축하여 핵폭탄을 만들고 있다는 정보판단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1999년 조선이 파키스탄에게 정밀한 핵탄두설계도를 넘겨주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미국 중앙정보국은 거꾸로 파키스탄이 핵탄두설계정보 등 핵무기기술자료를 조선에게 넘겨준 것으로 오판하였고, 조선이 파키스탄에서 핵무기기술을 이전받아 핵폭탄을 개발하는 중이라고 오판하였다. 오판이 더 큰 오판을 낳은 것이다.

 

2019년 5월 20일 <자주시보>에 실린, ‘파키스탄과 리비아를 거쳐 미국에 간 조선의 핵탄두설계도’라는 제목의 글에서 내가 상세히 논한 것처럼, 6.25전쟁이 끝난 뒤 1950년대 말, 소련으로부터 핵폭탄설계도와 무기급 플루토늄 200kg을 입수하고 핵무기제조기술을 전수받았던 조선은 1960년대 중반에 핵폭탄을 10발 정도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1998년 5월 30일 파키스탄 발로치스탄주 차가이사막에 건설된 임시핵시험장에서 비공식 핵시험을 진행하였으며, 1999년에 평양을 방문한 파키스탄 핵무기개발 총책임자 압둘 카디르 칸에게 소형화, 경량화, 정밀화된 핵탄두 3발을 보여주고 핵탄두설계도 사본을 넘겨주었다. 그런데 미국 중앙정보국은 그런 중요한 정보를 파악하지 못하고, ‘국가정보평가서’에 뚱딴지같은 소리를 늘어놓았던 것이다. 

 

뚱딴지같은 소리가 담긴 ‘국가정보평가서’를 읽은 클린턴 대통령과 참모들이 조선의 핵문제에 대해 오판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전략적 오판에 빠진 클린턴 대통령과 참모들은 조선이 1999년에 파키스탄으로부터 기술자료를 넘겨받아 핵개발을 시작했으니, 2005년쯤 되면 일류쉰-76 전략수송기에 실을 크고 무거운 ‘원시적인 핵폭탄’이나 한 두 발쯤 만들지 않을까 예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핵협상을 외면하고, 미사일협상에 매달렸다.  

 

(2) 1991년에 파키스탄은 중국에서 탄도미사일을 수입하였다. 미사일을 해외에 수출하는 경우 사거리를 300km로 제한하고, 탄두중량을 500kg으로 제한한다는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의 규정을 준수하는 중국은 사거리가 290km밖에 되지 않는 전술미사일을 파키스탄에 수출하였다. 파키스탄은 중국산 전술미사일을 역설계한 복제품을 만들어 1997년 7월 4일에 시험발사를 진행하였는데, 당시 파키스탄이 절실히 요구한 것은 전략미사일이었다. 핵탄두를 장착할 중거리탄도미사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파키스탄에게 전략미사일 개발기술을 지원해줄 나라는 조선밖에 없었다. 중국은 미사일기술통제체제의 수출규정을 위반하지 않으려고 조심했고, 로씨야는 중거리탄도미사일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파키스탄은 그 두 나라에게 전략미사일수출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압둘 카디르 칸은 당시 파키스탄 총리 베나지르 부토에게 조선의 전략미사일 개발기술을 전수받는 의견을 내놓았다. 칸의 의견을 받아들인 부토 총리는 측근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조선을 방문하였다. 그날은 1993년도 다 저물어가던 12월 29일이었다. 영국 출신 언론인들이며 국제정치저술가들인 에이드리언 레비와 캐더린 스캇-클락이 공동집필하여 2007년 10월에 펴낸 ‘속임수: 파키스탄, 미국, 국제핵거래음모’라는 제목의 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에 도착한 부토 총리는 김일성 주석에게 파키스탄의 숙적인 인디아로부터 핵공격위협을 받고 있는 심각한 상황에 관해 하소연하였고, 인디아 내륙 깊숙이 날아갈 중거리탄도미사일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미사일설계도를 요청하였다. 부토 총리의 하소연을 들으며 미국으로부터 핵공격위협을 받고 있는 조선의 상황을 생각한 김일성 주석은 파키스탄을 도와주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김일성 주석은 부토 총리가 평양을 떠나기 전날 밤, 화성-7 설계도가 저장된 컴퓨터 디스크 보따리를 그에게 주었다. 

 

조선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화성-7은 사거리가 1,500km이고, 5축10륜 발사대차량에 싣는 중거리탄도미사일이다. 화성-7 탄체에는 우리글 자음 ㅈ과 9개 자리 숫자가 일련번호로 새겨져 있는데, ㅈ은 전략미사일이라는 뜻이다. 당시 파키스탄의 숙적인 인디아는 중거리탄도미사일을 아직 갖지 못했다.    

 

파키스탄은 화성-7 설계도를 받았으나, 그들의 기술로는 전략미사일을 만드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요구되었다. 신속한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다급한 심정을 안고 1994년에 조선을 찾아온 칸과 파키스탄 군사지휘관들에게 조선은 화성-7 완제품 10발을 넘겨주었고, 조선의 미사일기술자 10명을 파키스탄에 파견하여 전략미사일개발을 직접 지도해주었다. 그렇게 되어 파키스탄은 1998년 4월 6일 화성-7을 복제한 중거리탄도미사일 가우리를 시험발사할 수 있었다. 

 

인디아의 핵공격위협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파키스탄에게 보내는 조선의 지원과 방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파키스탄은 조선의 전폭적인 기술지원을 받아 가우리 전략미사일을 만들었으나, 핵탄두를 가우리에 장착할 만큼 핵무기를 소형화, 경량화하는 기술이 없었다. 그래서 칸과 파키스탄 군사지휘관들은 1999년에 조선을 또 다시 찾아갔다. 조선은 그들에게 소형화, 경량화된 핵탄두 실물 3발을 보여주면서 핵탄두설계도가 저장된 방대한 분량의 컴퓨터 파일 복사본을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탄도미사일 200발도 수출하였다. 조선이 탄도미사일을 한번에 200발씩 대량수출한 것은 엄청난 미사일생산능력을 가졌음을 말해준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조선이 핵탄두설계도를 파키스탄에게 넘겨주었다는 극비정보는 알지 못했고, 조선이 파키스탄에게 화성-7 제조기술을 이전하고, 탄도미사일을 대량으로 수출하였다는 정보만 파악하였다. 중앙정보국의 정보보고를 통해 그런 사실을 알게 된 백악관은 조선의 미사일기술이전을 차단하고, 미사일생산능력을 억제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하였다. 바로 이것이 클린턴 대통령과 참모들이 조선과의 미사일협상에 매달리게 된 사연이다.    

 

 

2. 즉석에서 제시된 파격적인 미사일해법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은 자주적 평화통일의 앞길을 밝혀주는 6.15공동선언을 채택, 발표하였다. 민족의 가슴마다 통일열기가 끓어올랐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조선은 미국을 상대로 미사일협상을 진행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략은 미사일협상을 넘어 원대한 목표를 지향하였다. 미사일협상이라는 강력한 지렛대로 백악관을 움직여 주한미국군을 완전히 철거하는 자주와 평화의 대격변을 일으키고, 6.15공동선언에 명시된 연방제통일을 실현하는 결정적인 국면을 열어놓으려는 것, 바로 이것이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자주통일전략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자주통일전략은 미사일해법으로 펼쳐졌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제시한 미사일해법은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는데, 2001년 3월 22일 미국 외교문제협의회(CFR) ‘한반도변화관리특별전문의원회’가 부쉬 대통령에게 보낸 공개서한을 통해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다. 서한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제시한 미사일해법은 조선이 미사일수출을 중단하는 것에 상응하여 미국은 매년 10억 달러를 현금 또는 현물로 보상한다는 것, 그리고 미국이 조선의 인공위성발사를 지원해주는 것에 상응하여 조선은 장거리미사일시험발사 및 생산을 중단하고 미사일기술통제체제에 가입한다는 것이었다. 파격적인 미사일해법이었다. 

 

또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12월 안으로 클린턴 대통령이 조선을 방문하면 미사일해법을 최종적으로 합의할 수 있다고 하면서, 합의방법과 합의시한까지 제시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파격적인 미사일해법을 받은 클린턴 대통령은 이것이 자기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호기임을 직감하였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 임기의 마지막 시기인 2000년 12월 중에 조선을 방문하여 미사일협상을 최종적으로 타결하려고 서둘렀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커다란 걸림돌이 평양으로 향하려던 클린턴 대통령의 발걸음을 가로막았다. 그 내막은 다음과 같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2000년 10월 10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로 미국을 방문한 조명록 차수와 일행이 백악관에서 클린턴 대통령을 접견한 뒤에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다. 조명록 차수는 먼저 국무부를 방문하였는데, 거기서 백악관으로 출발하기 직전 양복을 군복으로 갈아입고 백악관에 들어섰다. 위의 사진을 보면, 클린턴 대통령 옆에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과 리용호 부상의 모습이 보이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웬디 셔먼 국무부 특별보좌관의 모습이 보인다.     

 

클린턴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제시한 미사일해법을 받아가지고 워싱턴으로 돌아온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으로부터 방문보고를 받은 직후 백악관에서 대책회의를 소집하였다. 2001년 5월 1일 서울에서 발간된 <민족 21>은 그 대책회의에 관해 다음과 같은 사연을 전해주었다. 

 

대책회의에는 주한미국대사 출신들인 제임스 릴리, 제임스 레이니, 도널드 그렉, 그리고 사회과학연구협의회 동북아시아협력안보프로그램 책임자 레온 씨걸 등이 참석하였다. 참석자들의 의견은 세 갈래로 갈라졌다. 레온 씨걸은 클린턴 대통령의 조선방문을 지지하는 긍정적인 의견을 내놓았고, 제임스 릴리와 제임스 레이니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제시한 미사일해법을 검증하기 전에는 클린턴 대통령이 조선을 방문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고, 도널드 그렉은 조선과 미사일협상을 개최하여 미사일해법을 실현하려는 의지를 확인한 뒤에 클린턴 대통령이 조선을 방문하면 좋겠다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클린턴 대통령은 절충안에 귀가 솔깃해졌다. 그렇게 되어 2000년 11월 1일 말레이시아 수도 콸라룸푸르에서 조미미사일협상이 진행되었다. 

 

미사일협상에서 조선은 미국에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미사일해법을 실행하려는 의지를 재확인하면서, 클린턴 대통령이 2000년 12월에 조선을 방문하면 미사일해법이 최종적으로 타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워싱턴에 감돌던 지배적인 의견은 신중론이었다. 신중론은 합리적인 판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미사일해법에 대한 무지와 불신, 편견과 오해가 뒤엉킨 오판이었다. 워싱턴의 신중론자들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조선방문을 마치고 평양을 떠나기 직전 기자회견에서 이야기했던 다음과 같은 극적인 장면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바로 어제(2000년 10월 23일) 우리는 대집단공연(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뜻함-옮긴이)을 함께 관람하던 중에 조선의 대포동미사일(인공위성 광명성-1호를 지구궤도에 올려놓은 백두산위성운반로켓을 뜻함-옮긴이)의 영상이 (공연장 배경대) 화면에 나타났다. 바로 그때 김정일 위원장이 나에게 이것은 첫 번째 위성발사이며 동시에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처럼 극적인 분위기 속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에게 진정성 있는 미사일해법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조선에 대한 무지와 불신, 편견과 오해에 사로잡힌 워싱턴의 신중론자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진심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신중론자들이 평양으로 향하려던 자신의 발걸음을 붙잡아버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좌고우면하며 어물어물하던 클린턴 대통령은 2000년 12월 21일 아침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대중 대통령 밑에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지낸 김하중은 2015년 1월에 출판된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정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화를 건 클린턴 대통령은 자신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기 전에 조선의 미사일문제를 해결하고 싶은데 자신의 조선방문은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2001년 1월 중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워싱턴에 초청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튿날 클린턴 대통령은 유엔주재조선대표부를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워싱턴 방문을 희망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전하였다.  

 

그러나 그런 희망은 허망한 것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대통령 권한을 당선인 부쉬에게 넘겨주고 사실상 자연인으로 돌아간 클린턴과는 정상회담을 할 수 없었다. 더욱이 2000년 11월 7일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복잡한 선거개표문제 때문에 12월 13일에 가서야 당선이 확정된 부쉬는 클린턴의 조선방문을 반대하였으므로, 정상회담은 고사하고 미사일협상마저 중단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클린턴 대통령이 조선을 방문하여 미사일해법을 타결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야 보나마나, 조선은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고, 거기에 장착되는 메가톤급 열핵탄두도 만들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미국은 국가안보파탄위험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 대한 무지와 불신, 편견과 오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백악관은 절호의 기회를 놓쳤고, 그로써 국가안보파탄위험이라는 불행 속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3. 조선의 우라늄농축문제 물고 늘어진 미국

 

1998년 4월 6일 파키스탄은 가우리 전략미사일을 시험발사하였다. 발사대차량에서 하늘로 솟구쳐 오른 그 미사일은 9분 58초 동안 비행하면서 정점고도 350km에 도달하였고, 1,100km를 날아가 발로치스탄 사막에 설치된 타격목표에 명중하였다. 파키스탄에 파견되어 미사일개발기술을 전수해온 조선의 미사일기술자 10명은 그것으로 자기 임무를 완수하였다. 

 

1998년 5월 어느 날, 귀국을 앞둔 조선의 미사일기술자들에게 칸은 우라늄농축장비인 P-1(1세대 원심분리기) 20기를 감사표시로 조선에 보내겠다고 하였다. 조선의 미사일기술자들은 이왕이면 P-2(2세대 원심분리기)를 달라고 했다. 칸은 상부와 협의하고 나서 그들이 요구한 P-2 원심분리기 4기를 감사표시로 조선에 보냈다.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감시하던 미국 중앙정보국은 파키스탄의 원심분리기가 조선에 넘어간 것을 알았다. 중앙정보국은 조선이 그 원심분리기를 역설계하여 독자적으로 원심분리기를 개발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중앙정보국은 감시의 눈초리를 조선의 우라늄농축에로 돌렸다.   

 

조선의 미사일기술자들이 P-2 원심분리기 4기를 가지고 귀국한 때로부터 4년이 지난 2002년 10월 3일 아침, 미국 공군 수송기 한 대가 평양국제공항에 착륙하였다. 미국인 8명이 내렸다. 그들은 미국 대표단 성원들이었다. 대표단은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 제임스 켈리를 단장으로 하고, 대조선교섭담당 대사 잭 프릿처드, 코리아과장 데이빗 스트로브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이 평양에 도착하였던 2002년은 조미관계가 악화된 때였다. 2002년 1월 29일 부쉬 대통령은 연두교서를 발표하면서 조선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모독하는 폭언을 내뱉었고, 2002년 5월 국무차관 존 볼턴은 부쉬보다 한 술 더 떠서 조선, 이라크, 이란, 리비아, 수리아, 꾸바를 모조리 싸잡아 ‘악의 축’이라고 모독하는 2차 폭언을 토해냈다. 폭언과 모독의 광란은 협상을 중단하고, 대결을 재개하려는 흉심의 표출 이외에 다른 게 아니었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2002년 1월 29일 조지 부쉬 대통령이 연방상하원 앞에서 연두교서를 발표하는 장면이다. 그의 뒤에서 딕 체니 부통령과 데니스 해스터트 하원의장이 손뼉을 치고 있다. 부쉬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조선, 이란, 이라크를 이른바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폭언을 내뱉었다. 그가 그런 폭언을 내뱉은 것은 이전 클린턴 행정부가 진행해오던 조선과의 미사일협상을 완전히 중단하고, 조선에 대한 핵대결도발책동을 시작하려는 흉심의 표출이었다. 부쉬 행정부는 2002년 10월 조선의 우라늄농축문제를 물고 늘어지면서 제네바 기본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하였고, 2003년에는 조선에 대한 핵대결을 도발하여 정세를 극도로 악화시켰다. 8천만 민족의 안전과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직접적으로 위협한 제2차 조미핵위기는 그렇게 조성되었다.     

 

조선과 미국이 그처럼 험악한 분위기 속에 있었던 때에 미국 대표단이 평양에 나타난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해하기 힘든 사연은 2009년 11월 18일 데이빗 스트로브가 서울을 방문하였을 때 <연합뉴스> 취재기자에서 털어놓은 회고담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2002년 10월 국무부 코리아과장으로 미국 대표단에 망라되어 조선을 방문하였던 스트로브는 당시 상황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2002년 10월 3일 미국 대표단이 평양에 도착한 첫날 오후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켈리 국무부 차관보를 각각 양측 수석대표로 하는 협상이 진행되었다. 켈리 차관보는 “우리는 조선이 고농축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하면서 추궁발언을 꺼내놓았다.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김계관 부상은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고 하면서 “이것은 조미관계의 진전을 바라지 않는 자들의 책동”이라고 맞받아쳤다. 첫째날 협상은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둘째날 오전에 협상이 재개되었는데, 켈리 차관보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조선이 우라늄농축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을 자기들이 알고 있다느니 뭐니 하면서 추궁발언을 또 다시 꺼내들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이루어질 리 만무했다.  

 

셋째날 오후 5시에 마지막 협상이 진행되었다. 이번에는 김계관 부상보다 직급이 높은 강석주 제1부상이 나왔다. 그는 “어제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고위책임자들이 회의를 진행하여 논의한 내용을 설명하겠다”고 하면서 30분 동안 발언하였다. 

 

스트로브는 2009년 11월 서울에서 만난 취재기자에게 자신의 회고담을 들려줄 때, 강석주 제1부상의 발언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켈리 차관보의 발언내용만 주로 언급하였다. 자기들에게 불리한 정황은 덮어두고, 자기들에게 유리한 정황만 드러내는 화술이다. 

 

켈리 차관보가 조선의 우라늄농축에 관한 의혹을 물고 늘어지자, 강석주 제1부상은 “그런 것은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그것보다 더 강한 것도 있다”고 맞받아치면서, “미국이 우려하는 문제를 담판으로 해결할 수 있다. 최고령도자급 회담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석주 제1부상의 위와 같은 발언은 조선의 우라늄농축을 자인한 것이 아니라, 2000년 12월에 성사될 뻔하다가 부쉬의 반대로 무산된 조미정상회담을 개최하여 핵문제를 해결하자는데 강조점을 찍은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핵문제를 해결하는 방도는 조미정상회담밖에 없으므로, 당시 부쉬 대통령이 조선을 ‘악의 축’으로 모독하면서 조미관계를 악화시켰지만, 그런 그에게도 과거를 묻지 말고 조미정상회담을 다시 준비하자고 제안한 것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아량 있는 협상의지였다.

 

 

4. 핵무기를 더 많이 만드는 조선  

 

그러나 부쉬 대통령과 참모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아량 있는 협상의지를 외면하였을 뿐 아니라, 강석주 제1부상이 켈리 차관보와 회담하는 중에 조선의 우라늄농축을 사실상 인정하였다느니, 또는 조선이 원심분리기 제조에 사용할 고강도 알루미늄관을 수입했다느니 뭐니 하면서 마구 떠들어댔다. 

 

부쉬 대통령과 참모들이 2002년 10월부터 조선의 우라늄농축문제를 물고 늘어진 까닭은 제네바 기본합의를 파기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1994년 10월 21일 조선과 미국이 채택, 발표한 제네바 기본합의에서 미국은 조선에게 경수로 2기를 2003년까지 지어주기로 하였고, 클린턴 대통령은 자신의 명의로 작성한 공약이행담보서한까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보냈으면서도 착공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1997년 10월에 착공식을 진행하였다. 그런데 공약이행시한으로 정해진 2003년이 눈앞에 다가온 2002년 말이 되자, 부쉬 행정부는 미국이 공약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덮어버리기 위해 제네바 기본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다.  

 

미국의 일방적인 합의파기는 핵대결도발음모로 이어졌다. 정세는 극도로 긴장되고 있었다. 8천만 민족의 안전과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미국의 핵대결도발과 그에 맞서싸우는 조선의 대응행동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함경남도 신포의 금호지구에 있는 경수로 공사현장을 촬영한 것이다. 미국은 1994년 10월 21일 조선과 채택한 제네바 기본합의에서 조선이 플루토늄핵시설을 폐쇄하는 것에 상응하여 신포에 100만킬로와트급 경수로 2기를 2003년까지 건설해주겠다고 공약하였다. 클린턴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제네바 기본합의를 성실히 이행하겠다는 담보서한까지 보냈다. 신포 경수로 건설비는 46억 달러인데, 미국은 건설비의 70%인 32억2천만 달러를 김영상 정부에게 떠넘겼다. 클린턴 행정부가 경수로 건설비를 한국, 일본, 유럽연합에게 떠넘기기 위한 경비분담협상을 벌여놓은 바람에 경수로 건설공사 착공은 1997년 8월 19일로 늦춰졌다. 그런데 2002년 10월 부쉬 행정부는 조선의 우라늄농축문제를 물고 늘어지면서 이전 클린턴 행정부가 조선과 채택한 제네바 기본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다. 경수로 건설도 중단되고 말았다. 미국의 합의파기농간 때문에 한국이 경수로 건설비로 지출한 11억3,700만 달러, 일본이 지출한 4억700만달러, 유럽연합이 지출한 1,800만달러가 하루아침에 허공에 날아갔다.     

 

2002년 1월 부쉬 행정부는 ‘핵태세검토보고서(NPR)’를 연방의회에 비공개로 제출하였다. 그 문서에서 부쉬 행정부는 조선, 이란, 이라크, 리비아, 수리아가 “즉시적이고, 잠재적이고, 예상할 수 없는 도발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비해 핵공격계획을 수립할 필요가 있는 나라들”이라고 지목하면서, 미국 국방부에게 핵전쟁계획을 작성할 것을 요구한다고 서술하였다. 그들이 말한 핵전쟁계획은 선제핵타격계획을 뜻하는 것이었고, 선제핵타격계획에 선정된 1차 대상은 미국의 전쟁광신자들이 가장 적대시하는 조선이었다. 

 

미국이 제네바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인데, 전쟁광신자들이 노골적인 핵전쟁도발책동까지 벌여놓았으니, 조선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조선은 2003년 2월 10일 외무성이 발표한 성명에서 분노를 표출하였다. 

 

“미국이 핵몽둥이를 휘두르면서 우리 제도를 기어이 없애버리겠다는 기도를 명백히 드러낸 이상 우리 인민이 선택한 사상과 제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핵무기고를 늘이기 위한 대책을 취할 것이다. (중략) 우리는 이미 부쉬 행정부의 증대되는 대조선고립압살정책에 맞서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서 단호히 탈퇴하였고 자위를 위해 핵무기를 만들었다. 우리의 핵무기는 어디까지나 자위적 핵억제력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위에 명시된 것처럼, 조선은 미국의 핵공격위협에 대응하여 자위적 핵억제력으로 핵무기를 보유하였을 뿐 아니라, 앞으로 핵무기를 더 많이 만들겠다고 성명하였다. 조선이 그처럼 명백한 어법으로 성명했는데도, 무지와 불신, 편견과 오해에 사로잡힌 부쉬 대통령과 참모들은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다. 조선이 파키스탄으로부터 핵무기개발기술을 이전받은 것으로 오판한 그들은 조선이 실전에서 사용하지 못할 만큼 크고 무거운 핵폭탄 3~4발을 만들어놓고 허세를 부리는 줄로 착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조선이 그런 원시적인 핵폭탄을 몇 발 더 만든다고 해도 미국의 국가안보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할 것으로 오판하였다. 부쉬 대통령과 참모들이 그런 착각과 오판에 빠졌으므로, 그들은 2002년 10월 5일 평양에서 진행된 셋째날 협상에서 강석주 제1부상이 켈리 차관보에게 전한 조미정상회담 제의를 무시해버렸다.  

 

그러나 만일 부쉬 대통령이 상황을 오판하지 않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조미정상회담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조선은 핵보유-핵증산 성명을 발표하지 않았을 것이고, 조미핵대결은 중지되었을 것이며, 조미핵협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5. 완전히 파탄된 미국의 공중정찰작전

 

전략적 오판에 사로잡힌 부쉬 대통령과 참모들은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길을 선택하였다. 핵협상을 중단하고 핵대결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결코 이기지 못하고 종당에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핵대결이었다. 

 

미국이 도발한 핵대결은 조선을 핵무기증산과 핵무력완성의 길로 이끌어갔다. 당시 부쉬 대통령과 참모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핵대결을 선택한 때로부터 15년이 지난 2017년에 조선은 마침내 메가톤급 수소탄두 기폭시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였고,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화성-15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조미핵대결 25년 역사를 돌이켜보면, 백악관의 전략적 오판은 미국의 국가안보를 파탄위험에 빠뜨리는 근본원인으로 되었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조선은 부쉬 행정부의 핵대결도발에 단호한 대응조치로 맞섰다. 조선이 2003년 2월 10일 핵보유-핵증산 성명을 발표한 것은 부쉬 행정부의 핵대결도발을 강하게 내리친 대응조치였다. 

 

조선의 핵보유-핵증산 성명으로 심하게 얻어맞은 미국의 전쟁광신자들을 이성을 잃고 광분하였다. 그들은 조선에 대한 선제공격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뉴욕타임스> 2003년 2월 28일 보도에 따르면, 당시 미국 국방부는 조선에 대한 “외과수술식 미사일공격, 집중폭격, 전술핵무기를 사용하는 선제공격”을 검토하고 있었다고 한다.  

 

전쟁광신자들은 선제핵타격을 감행하기에 앞서 공중정찰활동부터 서둘렀다. 2003년 3월 2일 뜻밖의 사건이 터졌다. 그날 오전 탄도미사일발사준비에 관련된 신호정보를 수집하는 미국 공군의 RC-135S 정찰기 한 대와 통신신호정보를 수집하는 일본해상자위대 EP-3E 정찰기 한 대가 겁도 없이 조선을 정찰하려고 동해 상공에 나타났다. RC-135S 정찰기가 앞섰고, EP-3E 정찰기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의 정찰비행을 감시하던 조선인민군 항공군은 그 두 정찰기를 공중에서 나포해 강제착륙시키기 위해 미그-29 전투기 2대와 미그-23 전투기 2대를 긴급히 출동시켰다. 뜻밖의 위험에 빠진 정찰기들은 정신없이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사진 5> 

 

▲ <사진 5> 2012년 1월 30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선인민군 공군 제1017군부대를 시찰하고 전투비행사들의 비행훈련를 지도하였다. 평안북도 선천군에 있는 그 부대는 오중흡7련대 칭호를 받은 정예부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군부대 시찰과 전투비행훈련지도를 마치고 부대장의 집을 방문하였다. 위의 사진은 부대장의 집을 찾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허룡 부대장과 그의 아내 김성실의 손을 다정히 잡고 걸어나오는 장면이다. 허룡 부대장은 2003년 3월 2일 조선 동해안에서 241km 떨어진 공역에서 정찰활동을 벌이던 미국 공군 RC-135S 정찰기와 일본해상자위대 EP-3E 정찰기를 공중에서 나포하여 강제착륙시키는 항공작전에 출전하였던 4명의 전투비행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들은 정찰기들이 자기들의 접근비행을 포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전투기에서 발신되는 모든 전파장치를 끄고 오로지 전투비행사의 육안식별과 비행감각에만 의존하여 해수면을 스치는 듯한 무전파초저공비행으로 240km를 날아가, 15m까지 바짝 접근하였고, 20분 동안 그 정찰기들의 주위를 포위비행하면서 나포위협과 격추위협으로 그들의 정신을 쑥 빼놓았다. 혼비백산한 정찰기들은 전속력으로 도망쳐 나포위험에서 가까스로 벗어났다. 허룡 부대장은 이 항공작전에서 세운 공로로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미국과 일본이 정찰기 두 대를 동해에 출동시킨 것은 조선에 대한 선제핵타격을 준비하기 위해 감행한 공중정찰작전이었는데, 조선의 전투비행사들은 용맹한 무전파초저공비행으로 미일합동공중정찰작전을 완전히 파탄시켰다.     

 

조선인민군 전투기들은 정찰기 전방에 바짝 붙어 비행하다가 추력엔진을 분사하여 비행을 방해하는가 하면, 어느 새 정찰기 후방에 따라붙어 비행하다가 공대공미사일을 발사하는 사격통제레이더를 켜면서 격추위협을 가했다. 조선인민군 전투비행사가 엄지손가락 하나만 살짝 누르면 공대공미사일이 불을 뿜으며 날아가 그 두 정찰기를 바다에 쳐박을 판이었다. 20분 동안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그 두 정찰기는 전속력으로 도망쳐 나포위험에서 가까스로 벗어났다. 전쟁광신자들이 선제핵타격을 준비하기 위해 감행한 공중정찰작전은 완전히 파탄되었다.  

 

이 경악할 사태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발칵 뒤집어졌다. 전쟁광신자들은 새로운 핵전쟁계획을 작성하려고 서둘렀다.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제임스 엘리스 전략사령관에게 새로운 핵전쟁계획을 작성하라고 지시하였다. 그 지시에 따라 미국 전략사령부가 새로운 핵전쟁계획을 작성하였는데, 그것이 2003년 3월 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제출된 ‘전략핵전쟁계획서’라는 제목의 극비문서다. 

 

미국이 핵전쟁을 도발하려면 계획서는 물론 작전계획도 필요하다. 그래서 미국 전략사령부는 조선의 군사전략거점들을 선제핵타격으로 파괴하기 위한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작성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2003년 11월에 완성된 ‘개념계획(CONPLAN) 8022’다. 2004년 6월 럼스펠드 국방장관과 리처드 마이어스 합참의장은 ‘개념계획 8022’를 발효시키는 ‘임시적인 전지구적 타격 경계명령(Interim Global Strike Alert Order)’을 전략사령부에 하달하였다. 이 명령은 조선에서 공격징후가 나타나는 즉시, 미국이 지상군을 파견하기 전에 장거리스텔스전략폭격기 B-2 편대와 장거리전략폭격기 B-52H 편대를 재빨리 출동시켜 조선의 군사전략거점들을 선제핵타격으로 파괴하는 실전준비를 명령한 것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핵안보연구가 핸스 크리스텐슨이 2008년 7월 25일 미국과학자동맹(FAS) 웹싸이트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2004년 가을 제임스 카트롸잇 전략사령관은 ‘개념계획 8022’를 슬그머니 철회하였다고 한다. 전쟁광신자들이 광분했던 핵전쟁도발책동은 물거품처럼 꺼졌다. 

 

그로부터 어언 1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트럼프 대통령과 참모들은 백악관이 2000년부터 2004년까지 기간에 겪었던 실패경험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망각의 늪에 빠져있다. 조선에게 리비아식 비핵화를 적용하려는 망상이 망각의 늪에서 독초처럼 자랐다. 트럼프 대통령과 참모들은 망각과 망상의 이중주에 맞춰 어지럽게 오판의 춤을 추며 돌아가고 있다. 망각과 망상은 2019년 12월이 가기 전에 그들에게 전략적 실패를 안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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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기를까 말까, 유전자는 알고 있다

개 기를까 말까, 유전자는 알고 있다

조홍섭 2019. 05. 24
조회수 1875 추천수 0
 
쌍둥이 3만5천쌍 조사, 50% 이상이 개 소유 ‘일치’
 
do1.jpg» 사람에게는 개를 기르려는 타고난 성향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늑대가 개로 가축화했듯이 사람도 개를 향해 진화했다는 공진화 가설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어떤 사람이 개를 기를까. 어릴 때 집에서 개를 길렀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 나중에 개를 기를 확률이 크다는 연구결과는 있다. 
 
그러나 개를 기르는 선택이 이런 환경요인보다도 개인의 유전자 조성 때문에 좌우된다는 주장이 나왔다. ‘천성이냐 교육이냐’ 가운데 천성 쪽에 손을 든 연구다.
 
투베 팔 스웨덴 웁살라대 교수 등 국제연구진은 과학저널 ‘사이언티픽 리포트’ 17일 치에 실린 논문에서 “개를 기르는 데는 유전적 요인이 크게 기여한다는 사실을 대규모 쌍둥이 연구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스웨덴이 세계 최대의 쌍둥이 집단 데이터베이스를 보유하고, 2001년부터 개 등록 의무제를 시행하고 있어 이번 연구가 가능했다.
 
일란성 쌍둥이는 유전자가 100% 같고 이란성 쌍둥이는 50%가 같다. 따라서 형제가 다 함께 개를 기르는 사람의 비율이 두 종류의 쌍둥이 가운데 각각 얼마나 되는지 비교해 보면,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 가운데 어느 쪽이 개 소유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연구자들이 쌍둥이 양쪽의 정보를 구할 수 있는 3만 5035쌍을 조사한 결과 일란성 쌍둥이가 이란성 쌍둥이보다 동시에 개를 기르는 비율이 훨씬 높았다. 팔 교수는 “어떤 사람의 유전적 구성이 그가 개를 소유할지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며 “일부 사람들은 다른 이들보다 반려동물을 돌보는 내적 성향이 더 강한 것 같다”고 이 대학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연구결과를 보면, 개를 기르게 되는데 작용하는 유전적 요인은 일란성 쌍둥이 여성에서 58%, 남성에서 52%로 나타나, 이란성 쌍둥이의 35%(여성), 30%(남성), 20%(남·여)보다 훨씬 높게 나타났다. 또 어릴 때 개를 길러본 사람은 청년기에 개를 기르는 경향을 보여줬는데, 연구자들은 이런 현상을 “어릴 때 개를 기른 부모와 자식이 유전적 변이를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do2.jpg» 유럽늑대. 늑대는 사람 곁에서 살기 좋은 형질이 선택되면서 가축이 됐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번 연구는 단지 누가 개를 기르냐의 차원을 넘어, 개와 인간 사이의 오랜 관계를 해명하는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공동 연구자인 케이스 도브니 영국 리버풀대 고인류학자는 “개 가축화의 깊고도 수수께끼에 싸인 역사를 이해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이번 연구의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연구자들은 늑대가 개 쪽으로 진화했듯이 사람도 개 쪽으로 진화하는 “개와 사람의 공진화”가 일어났다는 가설을 이 연구에서 제기했다. 늑대는 어릴 때 귀여운 형질을 유지한다거나 탄수화물을 소화하는 능력을 획득하는 방식으로 진화가 일어나 가축이 됐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도 개를 선택하는 어떤 유전적 변이가 생기지 않았겠냐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일부 사람이 짧은 기간에 젖당 분해 유전자를 획득한 것이 그런 예라고 논문에서 밝혔다. 약 7500년 전 중부 유럽의 일부 유목민에게 우유를 분해하는 효소가 나이가 들어서도 사라지지 않는 돌연변이가 나타났는데, 이 형질이 북유럽으로 확산했다.
 
그러나 어떤 유전자가 개를 기르도록 하는지는 아직 모른다고 연구자들은 밝혔다. “다른 성격 관련 형질처럼 여러 개의 유전자가 관여할 가능성이 있다”고 이들은 설명했다. 연구자들은 “이번 연구가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질문, 곧 동물 가축화가 어떻게 왜 이뤄졌는가에 대답하는 중요한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논문에서 밝혔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Tove Fall, et al, Evidence of large genetic influences on dog ownership in the Swedish Twin Registry has implications for understanding domesticatication and health associations. Scientific Reports, 2019; 9 (1) DOI: 10.1038/s41598-019-44083-9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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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살 전교조 “법외노조 취소하라”… ‘숨, 쉼, 삶을 위한 교육’ 새로운 30년 결의

전교조 30주년 교사대회… 5천여 참가자 “법외노조 취소·해고자 원직복직” 한목소리
▲ 사진 : 선현희 기자

1989년 창립해 올해 서른 돌을 맞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전교조는 창립기념일인 5월28일을 전후해 전국교사대회(교사대회)를 열어왔다. 25일, 올해 서른 돌을 기념해 열린 교사대회는 전교조가 걸어온 지난 30년의 활동을 격려하는 자리이면서, 결의의 장이기도 하다.

권정오 전교조 위원장의 대회사엔 서른살 전교조의 성과와 앞으로의 결심이 모두 녹아있었다.

▲ 대회사 하는 권정오 전교조 위원장

“지난 30년, 우리가 꾸었던 꿈은 대한민국 교육의 역사와 현실이 되었습니다.”

30년간 학교를 변화시키고, 교육을 변화시켜 온 전교조의 성과를 하나의 팻말에 담는 건 불가능할 정도다. 그래서 전교조는 30개의 만장에 전교조의 역사를 정리했다.

‘일제고사 폐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폐지’, ‘친환경 무상급식 무상교육 실현’, ‘학생인권조례 제정’, ‘사학민주화와 부패사학 척결’ 등 교육정책 개선부터, ‘0교시 야간자율학습 폐지’ ‘혁신학교 도입과 수업혁신’, ‘내부형 교장공모제 도입’ 등 교육정상화에 앞장섰고,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 ‘교권보호와 교원들의 노동조건 개선’까지….

교육정책이 변하고 교육의 역사가 바뀌는 시기시기마다 전교조의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은 한국 사회에서도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이날 대회에서도 ‘참교육’ 실현을 위해 30년을 애써온 전교조를 많은 사람들이 격려했다. 교수노조, 학교비정규직노조, 기간제교사노조 등 교육현장에서 일하는 민주노총 조합원들을 비롯해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등 학부모 단체, 그리고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 최교진 세종시 교육감 등이 자리를 채웠다.

이들을 대표해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은 “‘교사도 노동자다’라고 외치며 굴종과 경쟁교육을 거부하고, 교단을 떠나는 일이 있더라도 자랑스러운 선생님이 되기 위해 전교조를 결성하고 어떤 탄압에도 굴함없이 싸워오느라 고생 많았다”고 격려하며 “법외노조 굴레를 벗고 대한민국의 교육을 책임지는 당당한 주체로 새로운 30년의 역사를 만들어가자”고 인사했다.

배우 문소리, 가수 안치환, 윤도현, 박원순 서울시장 등은 영상으로 전교조의 30년을 축하했다.
“아이들과 선생님이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교조 덕분입니다. 하루빨리 법외노조 철회 쟁취합시다. 전교조가 교육의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주세요.”

그러나 이들이 칭찬하고 격려하는 전교조는 아직도 ‘법외노조’다.

“결성 30년을 맞는 오늘 전국교사대회는 여전히 법외노조의 대회로 치러지고 있습니다.”

전교조는 교사대회가 열리는 이날까지 ‘법외노조 직권 취소’에 대한 청와대의 답변을 요구했다. 그러나 답은 없었다.

권정오 위원장은 청와대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을 때 우리는 박근혜 정권의 대표적인 적폐인 전교조 법외노조 취소가 우선 해결될거라 기대했다. 전교조 법외노조 취소는 법률이나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와 상식을 회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ILO핵심협약 비준 동의안 제출이 노동존중의 국정과제를 실현할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청와대가 직접 나서서 법외노조 직권 취소조치를 단행해야 한다.”

“청와대가 결단하라.” 교사대회에 참가한 선생님들은 권 위원장의 말대로 “이것이 상식”이라고 했다.

“우린 학교에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결자해지’를 가르친다. 팩스 한 장으로 전교조를 법외노조로 만든 것은 행정부다. 결자해지 해야 할 곳, 법외노조를 취소해야 할 곳은 바로 청와대다.”

정의와 상식을 만들겠다는 전교조의 결심은 단호했다.
“전교조는 다음주 부터 전국 1만 분회 비상총회를 개최해 문재인 정부에 즉각적인 법외노조 직권 취소를 촉구할 것이다. 다음달 12일엔 직권 취소를 거부하는 문재인 정부를 규탄하는 전국 교사대회를 개최할 것이다.”

“아이들의 웃음과 눈빛을 지켜 가기 위한 투쟁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임을 약속합니다.”

30년 전 노조를 창립하며 1527명의 교사가 해직됐고, 아직도 박근혜정부의 팩스 한장에 의해 법외노조에 있는 전교조다. 그러나 전교조가 두려운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권력의 협박과 탄압이 아니라 우리를 따르는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과 초롱초롱한 눈빛이다.”

서른살 전교조는 아이들을 위해 “새로운 교육의 과제를 제시해야 할 전교조의 임무를 잊지않겠다”고 다짐했다.

30년이라는 한 세대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30년을 걸어가겠다는 전교조의 의지는 ‘숨’ ‘쉼’ ‘삶’이라는 세 단어로 압축돼 있다. ‘숨을 쉬는 학교’, ‘쉼이 있는 배움’ ‘삶을 위한 교육’을 만들겠다는 결심이다.

교사대회 결의문에 그 의미가 담겨져 있다.

“우리는 몰아치는 경쟁 체제에 틈을 내고 자유와 민주의 ‘숨’을 불어넣을 것이다. 자유가 숨 쉬며 모두가 평등한 건강을 누리는 ‘숨’을 쉬는 학교를 만들 것이다.”

“경쟁교육을 혁파하고 교사, 학생, 학부모가 ‘쉼’을 보장받는 교육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대안을 제시할 것이다.”

“가르침과 배움이 삶의 이정표와 일치되는 ‘삶’을 위한 교육을 실현할 것이다.”

전교조는 ‘삶을 위한 교육’의 내용을 구체화해 올 하반기 17개 시·도를 순회하며 토론회를 벌일 예정이다.

대회를 마친 5000여 명의 참가자들은 전교조 30년의 역사가 담긴 30개의 만장과 ‘법외노조 취소’ ‘해직교사 원직복직’ 등의 요구가 담긴 팻말을 들고 광화문을 지나 청와대까지 행진했다.

 

 

 

조혜정 기자  jhllk20@gmail.com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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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성, 아직도 접지 못한 ‘영화 촬영기사’의 꿈

양심수후원회 월례강좌, 다큐영화 <달과 닻> 상영
이종문 통신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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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5.25  20: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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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전향 장기수 박희성 선생이 자신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달과 닻> 상영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사진 - 통일뉴스 이종문 통신원]

양심수후원회는 25일 오후 4시 서울 낙성대 만남의집에서 5월 월례강좌로 비전향 장기수 박희성 선생님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방아란 감독의 <달과 닻>을 상영하였다.

박희성 선생님은 올 해로 27년 감옥생활과 세상밖 생활 27년의 해를 맞았다. 북에 두고 온 1년 4개월 된 아들을 꿈속에서도 잊지 못 하시고, 선생님의 기억은 54년 전 마지막 손을 들어 해어졌던 장면의 기억이 닻처럼 정박되어 있었다.

팔순을 넘긴 박희성 선생님은 아직도 영화 촬영기사의 꿈을 잊지 않고 있었다. 감옥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훌륭한 영화촬영 기사가 되어 있었을 거라고 회상하는데 모두들 웃음바다가 되었지만, 박희성 선생님의 눈가엔 눈물이 고였다.

   
▲ 방아란 감독의 <달과 닻> 한 장면. [사진 - 통일뉴스 이종문 통신원]

 

   
▲ 양심수후원회 회원들이 영화 감상 삼매경에 빠져있다. [사진 - 통일뉴스 이종문 통신원]

 

   
▲ 월례강좌를 마치고 참석자들이 포즈를 취했다. [사진 - 통일뉴스 이종문 통신원]

 

   
▲ 박희성 선생은 만남의집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사진 - 통일뉴스 이종문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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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영화 '기생충',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9/05/26 09:18
  • 수정일
    2019/05/26 09:18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여기는 칸] 한국영화사상 첫 최고상... 봉준호 "이 영광 함께 나누고 싶다"

 제72회 칸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수상 소감을 밝히고 있다.

제72회 칸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수상 소감을 밝히고 있다.ⓒ EPA-연합뉴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제72회 칸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25일 오후(현지 시각) 팔레 드 페스티벌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심사위원장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이 봉준호 감독과 작품 이름을 언급했다.

칸영화제에 초청된 한국영화 역사상 첫 최고상이자, 세계 3대영화제(칸영화제, 베니스영화제, 베를린영화제) 기준으론 2012년 김기덕 감독(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이후 두 번째다.

이로써 봉준호 감독은 칸영화제 초청 다섯 번째 만에 본상을 수상하게 됐다. 첫 본상이 최고상이 됐다. 2006년 <괴물>이 비공식부문인 감독 주간에 초청받은 이후, 미셸 공드리 및 레오 카락스와 함께 연출한 <도쿄!>가 2008년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됐으며, 2009년엔 <마더>(주목할만한 시선), 2017년엔 <옥자>로 경쟁 부문에 초청받았다.  

감격에 차 소감 전해

봉준호 감독은 "수상 멘트를 준비하지 못했다"며 감격의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 스태프 이름을 호명한 그는 가족과 여러 관계자들에게 영광을 돌렸다. 직후 그는 주연을 맡은 배우 송강호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봉 감독은 소감 이후 시상을 맡은 프랑스 국민배우 카트린 드뇌브와 귓속말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송강호는 역시 벅찬 모습이었다. 그는 "인내심과 슬기로움과 열정을 가르쳐 주신, 존경하는 대한민국모든 배우분들께 이 영광을 바치겠다"며 다시 봉준호 감독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봉준호 감독은 "저는 그냥 12살의 나이에 영화감독이 되기로 마음먹었던 소심하고 어리숙한 영화광이었다"며 "이 트로피를 이렇게 손에 만지게 될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감사하다"는 말로 소감을 마무리 했다.

이날 세계 언론이 모인 프레스 센터에선 수상자가 호명될 때마다 탄성이 나왔다.

한 스페인 기자는 취재진에게 "지금 시상식에 누가 누가 왔나" 물어보며 "황금종려상은 아마 다르덴 형제가 받지 않을까 한다"라고 예상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후 <기생충>이 수상하자 해당 기자를 비롯한 각국 취재진 일부가 박수치며 한국 기자들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봉준호 감독의 본상 수상은 칸영화제 단골손님이었지만 상과는 인연이 멀었던 한국 영화의 지난 9년을 돌아볼 때도 의미가 크다. 이창동 감독의 <시>(2010)가 각본상을 받은 이후 임상수, 홍상수 감독 등이 꾸준히 경쟁 부문에 진출했지만 상을 받진 못했다. 지난해 이창동 감독이 <버닝>으로 경쟁에 진출하면서 큰 기대를 모았지만 역시 수상하진 못했다.  

<기생충>에서 기택 역으로 주연을 맡은 송강호 역시 <괴물> <밀양>(2007년 경쟁 부문),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년 비경쟁 부문), <박쥐>(2009년 경쟁 부문)에 이어 다섯 번째로 칸영화제에 오게 됐다. 10년 만에 레드카펫을 밟은 셈인데 그간 송강호가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올 때마다 해당 작품이 상을 받았다는 특이점이 있다. <기생충>이 본상을 받음으로써 송강호의 이색 기록 또한 이어가게 됐다. 앞서 <박쥐>는 심사위원상을 <밀양>은 여우주연상을 받은 바 있다.

쟁쟁했던 경쟁작들
 
 영화 <기생충>의 공식 상영이 열린 21일 저녁, 봉준호 감독과 배우들이 레드카펫을 걷고 있다.

영화 <기생충>의 공식 상영이 열린 21일 저녁, 봉준호 감독과 배우들이 레드카펫을 걷고 있다.ⓒ CJ ENM


이번 수상의 의미가 남다른 또 하나의 이유는 경쟁 부문에 진출한 이들 중 그간 칸영화제에서 한 번 이상 본상 수상을 했던 감독이 대거 포진한 상태였다는 점이다. 

특히 <쏘리 위 미스드 유>를 들고 온 켄 로치 감독과 <영 아메드>로 초청받은 다르덴 형제는 모두 두 번씩 황금종려상을 받은 인물들이다. 켄 로치 감독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과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로, 다르덴 형제는 <로제타>(1999)와 <더 차일드>(2005)로 최고 영예를 안았다. 

이밖에 <어 히든 라이프>로 초청된 테렌스 멜릭과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를 들고 온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메크툽, 마이러브:인터메조>로 초청받은 압델라티프 케시시도 각각 한 번씩 황금종려상의 주인공이 됐었다. 테렌스 멜릭은 2011년 <트리 오브 라이프>로, 쿠엔틴 타란티노는 <펄프 픽션>(1994)으로, 압델라티프 케시시는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로 해당 상을 받았다.

전통의 거장 외에도 첫 장편 <아틀란티스>로 경쟁 부문에 초청받는 기염을 토한 마티 디옵, <포트레이트 오브 레이디 온 파이어>로 온 셀린 시아마 등은 상영 이후 마켓과 평단에서 고른 호평을 받으며 수상 여부가 주목되기도 했다.

올해 영화제 기간 중에는 <기생충>의 수상이 점쳐지는 몇 가지 징후가 있었다. 영미권 반응을 알 수 있는 <스크린>과 유럽권 반응을 알 수 있는 <르 필름 프랑세> 등 공식 데일리지에서 모두 높은 평점을 받은 것. <스크린>에선 3.5점으로 21개 경쟁작 중 가장 높은 점수였고, <르 필픔 프랑세>에선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페인 앤 글로리>(3.6)에 이어 3.5점으로 두 번째로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한편 시상식에 앞서 봉준호 감독과 배우 송강호가 레드카펫을 밟으며 수상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기도 했다. 레드카펫에 선 봉준호 감독은 현지 리포터에게 "너무 행복하게 상영했고, 좋은 반응에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라고 말했고, 송강호 역시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고, 좋은 것도 많이 봤다"며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다.

제72회 칸영화제 주요 수상작
황금종려상 - <기생충> 봉준호 감독
심사위원대상 - <아틀란티크> 마티 디옵 감독
감독상 - <영 아메드> 장-피에르 다르덴, 뤼크 다르덴 감독
심사위원상 - <레미제라블> 라쥬 디 감독, <바쿠라우> 멘도사 필호, 줄리아노 도르넬레스 감독
남우주연상 – 안토니오 반데라스 <패인 엔 글로리>
여우주연상 – 에밀리 비샴 <리틀조>
각본상 - <포트레이트 오브 레이디 온 파이어> 셀린 시아마 감독
심사위원 특별 언급 - <잇 머스트 비 헤븐> 엘리아 슐레이만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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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 스웨덴의 ‘사회적합의·연대임금’이 주는 교훈


[자주적 경제민주화의 길(6)] 사회민주주의적 경제민주화 사례② 스웨덴
  • 이정희 민주노동자전국회의 집행위원장
  • 승인 2019.05.24 10:16
  • 댓글 2
사회민주주의적 경제민주화사례, 독일에 이어 스웨덴의 사례를 살펴본다.[편집자]

1. 복지국가의 대명사, 스웨덴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등 북유럽국가들은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실현 측면에서 자본주의 국가 중 가장 높은 점수를 받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진보적 사회개혁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롤모델로 회자되고 있다.

이 중 스웨덴은 복지국가 모델의 전형적인 사례로 소개되고 있으며, 재벌의 존재와 재벌과의 사회적 타협을 통해 복지국가를 실현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재벌개혁의 사례로 소개되기도 한다.

스웨덴 복지국가 모델의 주요 특징은 높은 사회복지 지출(GDP 대비 30% 정도), 대표적인 보편주의적 복지정책, 완전고용을 지향하는 노동정책, 여성친화적 사회정책, 공공부문 역할이 높은 복지국가 모델로 정리할 수 있다.

스웨덴은 다른 나라와 달리 노동조합에 기반한 사회민주당이 이른 시기부터 장기간 집권하면서, 주도적이면서 일관되게 복지국가를 건설했다는 특징이 있다.

▲ 사진 : 뉴시스

2. 스웨덴 복지국가 건설과정

스웨덴 복지국가의 출발은 1930년대 세계적 대공황기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1932년 집권한 사회민주당은 세계 최초로 케인즈주의적 경기부양정책을 추진했다. 당시는 케인즈주의가 이론, 정책적으로 정립되기 전이었다.

스웨덴 사민당이 이처럼 일찍 케인즈주의 정책을 추진한 것은 이미 20년대 후반 <인민의 가정, 국민의 가정>이라는 의회연설을 통해 복지국가 노선, 개혁주의 노선, 국민정치 노선을 당의 정치노선으로 밝히고, 1930년 경제공황 초기에 유효수요 창출정책인 ‘위기안정화 프로그램’을 공황극복 정책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1932년 집권 후 사민당 정권은 적극적인 실업대책으로 실업예산의 대폭증액, 공공근로정책을 시행하고 공적 실업보험제도를 도입했다.

이와 함께 인구증가율 감소가 주요한 사회이슈로 부각되었을 때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와 높은 출산율을 양립시키기 위한 가족정책을 추진하여 출산수당, 아동수당 등을 도입해 저출산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사민당 정권은 건강보험과 국민연금개혁을 통해 보편적 복지국가 모델을 완성해 갔다.

이런 정책을 통해 사민당은 1932년부터 1976년까지 44년간 연속 집권했으며, 2006년까지 10년 정도를 제외하고는 집권을 이어갔다.

3. 살트세바덴협약과 연대임금정책

성공적인 위기극복정책에 기초하여 1938년 사민당 정부는 스웨덴노총(LO), 스웨덴 경영자협회(SAF)와 함께 살트세바덴협약을 체결했다.

살트세바덴협약의 주요내용은 ①노동과 경영 측에서 각 3명씩 파견되는 대표들로 ‘노동시장위원회’ 구성, 기업단위에서 해결되지 않는 사항이 발생할 경우 노동시장위원회에서 다루고 ②노동자대표의 경영참여를 보장하며 ③정리해고에 대한 규칙과 단체교섭절차의 제정 등이다. 이 협약 이후 노사중앙조직의 장악력이 강화되는 것과 함께 노동쟁의가 급감했다.

이와 함께 스웨덴경제에서 압도적 지배력을 가진 재벌가문(발렌베리가)의 경영권을 황금주제도 등을 통해 보장했다.

자본 측이 높은 임금수준과 사회복지 재정지출을 인정하고, 안정적인 노사관계와 경영권을 보장받는 노사정 대타협이 이루어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인플레이션이 심화되는 조건에서는 긴축재정과 연대임금정책이 추진되었다.

연대임금정책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 하에 노동조합 간의 과도한 임금인상 경쟁을 억제하고, 노동계급 내의 평등과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정책이다. 또한 연대임금정책은 적극적 실업정책과 결합하여 경쟁력이 약한 사양산업의 퇴출을 유도해 산업구조를 합리화하고 산업경쟁력을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연대임금정책은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재벌기업 등 고수익 성장기업에선 임금억제를 통해 막대한 초과이윤을 보장한 측면도 있다.

4. 스웨덴 모델의 위기

그러나 연대임금정책에 따라 임금상승여력이 있는 고수익부문 노동자들의 불만이 누적되었으며 노총 중앙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스웨덴노총은 공동결정법 제정을 통해 노동자들의 기업 내 권리강화를 제도적으로 보장했다.

이와 함께 연대임금정책으로 혜택을 보는 대기업의 초과이윤을 임노동자기금(주식발행)으로 환수하여 대기업에 대한 노동조합과 사회적 통제를 통해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자본가들은 임노동자기금에 대해 대기업의 국유화정책으로 받아들이고 격렬하게 반대했으며 스웨덴노총과 경총의 신뢰가 약화되었다.

임노동자기금은 사회민주당 내에서도 심각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사민당의 장기집권 종료와 함께 흐지부지되었다.

스웨덴 모델은 수출주도경제에서 대기업의 지속적인 경쟁력이 유지되어야 하지만 70년대 이후 오일쇼크로 인한 세계적 경제위기, 조선 등 주요업종에서 국제경쟁력의 약화 등으로 인해 위기에 봉착했다.

이후 90년대 신자유주의가 전면화되면서 사민당은 복지국가 정책을 심화, 발전시키지 못하고 후퇴하게 된다.

5. 한국의 경제민주화에 대한 교훈

스웨덴 모델의 성공요인은 노동조합의 조직력에 기초하여 사민당이 1930년대 경제위기국면에서 적극적인 노동시장정책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 사회적 평등과 복지제도를 지속적으로 강화, 발전시킨 것이다.

장하준 교수 등이 스웨덴 모델처럼 ‘재벌의 안정적인 경영권을 보장하고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복지국가로 나아가자’라는 것은 선의의 주장이지만, 1930년대 스웨덴 사회와 현재 한국사회 현실의 차이를 간과하는 것이다. 강력한 노동조합과 진보정당의 존재, 경제위기 속에서 자본이 존립위기에 처한 조건에서 가능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시기 경제민주화의 우선 과제는 강력한 노동조합의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또한 현재 스웨덴경제가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것처럼, 수출주도형 경제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유동적인 세계경제 상황에 따라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노동조합 할 권리 보장을 통해 노동조합 조직력의 강화, 산별교섭을 통한 사회적 평등의 실현, 재벌과 기득권세력에 대한 강력한 과세를 통해 복지재정을 마련하고 복지국가의 기초를 마련해가야 한다.

이정희 민주노동자전국회의 집행위원장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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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횡단열차 타고 가던 중 김정은이 눈 앞에!

[시베리아 시간여행] 2. 블라디보스토크上 : 개척리부터 독수리전망대까지
2019.05.25 11:41:29
 

 

 

 

두근두근,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오르다

익숙해질 만하면 떠난다. 여행자라면 그 아쉬움을 모를 리 없다. 하바롭스크에서 꼭 그랬다. 떠날 때가 다 되어서야 하바롭스크 길이 익었다. 대장 박흥수 철도기관사의 안내 없이도 어느새 좌회전, 우회전이 자연스러워졌다. 걷고, 걷고 또 걸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바롭스크 역으로 가는 길이 못내 아쉬웠다. 쉼 없는 도보 행진에 피곤에 절었는데도 시선은 차창 밖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인투어리스트 호텔에서 15분가량 택시를 타고 달려 역에 도착했다. 초록 지붕과 넓은 광장이 먼저 눈에 띄었다. 하지만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기차에 오르기까지 남은 시간은 30분 남짓. 저녁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역 근처 마트에 가 보이는 대로 집어 들고는 다시 역으로 뛰어갔다. 

 

 

▲하바롭스크역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프레시안(서어리)

▲횡단열차 티켓. ⓒ프레시안(서어리)

▲열차 탑승에 앞서 표 검사를 받는 모습. ⓒ프레시안(서어리)


드디어 이번 여행의 대망의 일정, 시베리아 횡단열차 탑승이 눈앞에 다가왔다. 보안 검색대를 지나 문을 여니 우리가 하룻밤 묵을(?) 열차가 1번 플랫폼에 서 있었다. 키릴 문자의 홍수 속에서 '1'이라는 낯익은 숫자를 보니 반가울 지경이었다.  

표 검사를 마치고 열차 위에 올랐다. 벌써 열차는 덜컹거리고 있었지만 통로가 워낙 비좁아 넘어지진 않았다. 통로를 조금 걷다 보니 왼편에 방이 연달아 있었다. 침대 4개가 1, 2층으로 나뉜 4인실이었다. 바깥에서 보기엔 굉장히 좁아 보이지만 막상 들어와 보면 그럭저럭 괜찮았다. 침대 아래 수납공간에 짐을 넣고는 박 기관사의 지휘하에 각자 침대보를 씌웠다. 

 

 

 

▲열차 바깥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 프레시안 조합원들. ⓒ프레시안(서어리)

 

 

▲횡단열차에서 먹는 저녁식사. ⓒ프레시안(서어리)

 

 

짐 정리를 마치고 나니 그제야 바깥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도심은 이미 멀어져 나무 숲이 스쳐지나갔다. 어느덧 해도 뉘엿뉘엿 지려하고 있었다. 호숫가를 지날 때면 해가 물 위에 길게 늘어져 반짝반짝 빛났다. 

 

몸도 마음도 편하니 이번엔 시장기가 돌았다. 마트에서 사온 빵, 한국에서 공수해온 컵라면 등을 꺼냈다. 가장 맛있는 라면은 산 위, 비행기 안에서 먹는 라면이란 말이 있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한다. 바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먹는 라면'이다. 뜨끈한 국물에 종일 덜덜 떨었던 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횡단열차 2등칸 4인실 실내. ⓒ프레시안(서어리)

열차 안은 의외로 안락했다. 넷이서 오순도순 대화하기 딱 좋았다. 가끔 다른 방 조합원들이 난입하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자리를 내줄 정도로 작은 공간에 모두들 적응해갔다. 꽤 고된 일정을 소화하느라 서로 알아갈 시간이 부족했던 우리는 이야기꽃을 피웠다. 각자의 생업, 프레시안 조합원이 된 계기, 최근 사회 이슈에 대한 생각을 늘어놓느라 얼마나 밤이 깊었는지도 몰랐다.

"우악!" 별안간 옆방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의아해하던 찰나, 우리 방에 불이 탁 꺼졌다. "와!"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그때 깨달았다. 옆방에서 흘러나온 괴성(?)의 정체를.

루지노 역에서의 깜짝 공연

은하수였다. 새까만 밤하늘에 하얗고 반짝이는 별들이 무수히도 매달려 있었다. 우리는 감탄사를 내뱉는 것 말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열차 덜컹거리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차창에 액자처럼 걸린 밤하늘을 넋 놓고 바라봤다.  

"이 광경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저 별들을 본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다한 것 같아요."

불을 켜고 확인한 조합원들의 상태는 '황홀경'에 가까웠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새벽 1시가 조금 넘어 루지노 역에서 열차가 섰다. 여기선 차량 점검을 위해 40분 간 정차한다고 했다. 기차 내부 공기가 워낙 후끈했던 터라 시원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다른 방에 있던 조합원들과 만나 별 풍경을 본 소감을 나누던 사이, 누군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한국 사람들?" 

키 큰 러시아 여성 예닐곱 명 말을 걸었다. 무리 가운데 한 명이 유창한 한국말로 예전에 한국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며,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러시아에서 러시아 사람이 부르는 '아리랑'을 듣게 될 줄이야! 놀랍고도 기쁜 마음에 환호하며 손뼉을 쳤다. 반응이 좋았던 덕분인지 이번엔 나머지 일행도 다함께 노래를 불렀다.

"Ой! ты песня песенка девичья(오! 노래야 처녀의 노래야) / Ты лети за ясным солнцем вслед(날아라 밝게 빛나는 태양을 따라 날아라) / И бойцу на дальнем пограничье(그리고 머나먼 국경의 병사에게) / От Катюши передай привет(까츄샤로부터의 사랑을 전해다오) / И бойцу на дальнем пограничье(그리고 머나먼 국경의 병사에게 / От Катюши передай привет(까츄샤로부터의 사랑을 전해다오)" 

'카츄사'라는 러시아 전통 민요였다. 전쟁터에 나간 사랑하는 이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내용의 가사로, '러시아답다'는 느낌이 드는 멜로디의 곡이었다. 러시아 여성들은 어깨동무를 하며 신나게 이 노래를 불렀다. 어디선가 들은 듯한 멜로디에 나도 모르게 흥얼거렸다. 박 기관사는 여러 번 불러본 듯 정확하게 가사에 맞춰 불렀다. 

'깜짝 공연'을 선사해준 러시아 여성들에게 '쓰바시바(Спасибо ; 감사합니다)' 인사를 한 우리는,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다시 열차에 올랐다.

 

 


블라디보스토크 : 한인 디아스포라의 빼앗긴 땅 '개척리'

커튼 없이 무방비하게 아침 볕을 받아 저절로 눈이 떠졌다. 해가 아주 쨍쨍하진 않았다. 오히려 차창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마땅히 씻을 데도 없던 터라, '쿨하게' 씻는 것을 포기하고 비를 맞기로 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내린 곳은 시베리아 횡단열차 9288킬로미터의 여정이 끝나는 블라디보스토크역이었다.

역 출구와 이어진 다리에서 플랫폼을 내려다보던 박 기관사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래 플랫폼에 횡단열차 종점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는데 그 인근을 다 막아 놨네요. 제가 블라디보스토크역에 숱하게 와봤지만, 폐쇄된 모습을 본 건 처음입니다"라고 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방러 일정으로 인해 횡단열차 종점 표지석 부근이 폐쇄된 블라디보스토크역 플랫폼. ⓒ프레시안(박정연)


그렇다. 아주 예외적인 일이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기에 앞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했고, 더욱이 열차를 타고 왔던 터라 선로 일부가 통제된 것으로 보였다. 답사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것 아닌지 불안감이 엄습했다.

일단 걱정은 뒤로 하고, 블라디보스토크 이틀 밤을 보낼 숙소로 향했다. 이번엔 '소련'이 아닌 첨단의 러시아가 느껴지는 4성급 신식 호텔이었다. 체크인 시간 전이라 카운터에 짐을 맡긴 뒤 로비 화장실에서 고양이 세수만 마치고 본격적인 블라디보스토크 탐방에 나섰다.

첫 답사지는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개척리'였다. 일제 강점 시기 개척리는 미국으로 따지자면 로스앤젤레스(LA) 같은 곳이었다. 굳이 러시아어를 안 써도 살 수 있는, 그만큼 많은 한인들이 많은 동네였다. 대부분 질등일꾼같은 하층민이었다. 한 끼 챙기기도 버거운 이들이지만, 독립 자금 마련을 위해선 밥값도 마다치 않았다. 가난하디 가난한 동네에서 모금을 할 때마다 엄청난 액수가 모였다. 그만큼 조국 독립에 대한 이들의 열망은 컸다.

박 기관사가 개척리 터 어드메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길가에 있는 고풍스러운 건물이었다. 그는 이번엔 여행 전 배포한 안내서에 있는 사진을 짚었다.

 

 

 

▲개척리 일대 전경. ⓒ프레시안(박정연)

▲100여 년 전의 개척리 모습.


"사진에서, 큰 건물 뒤에 있는 건물 보이나요? 지붕 모양이 독특한데, 저기 보이는 저 건물이에요. 어때요, 지금과 똑같죠?" 

조합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눈을 바쁘게 움직이며 사진 속 건물과 눈 앞의 건물을 비교해봤다. 100년 전 사진 속 건물이 바로 눈앞에 있는 건물이라니, 괜시리 반가웠다. 

척박했던 이 개척리 일대는 100년이란 세월을 뛰어넘은 지금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핫플레이스'가 됐다. '아르바트'라는 이름을 가진 이 동네는 한국의 '홍대입구'와 같은 젊은이들의 성지다. 어둑해질 즈음이면 버스킹 하는 이들이 속속 모여들고, 레스토랑, 펍이 불빛을 반짝이며 손님을 맞이한다. 

그렇다면 과연 100년 전 개척리에 살던 한인들은 지금도 이곳에 그대로 살고 있을까? 정답은 '아니다'. 한인들은 척박했던 땅을 갈고 닦아 어렵사리 삶의 터전으로 일궈낸 이곳을 1911년 러시아 당국에 빼앗기고 말았다. 장티푸스가 퍼지는 것을 막는다는 게 명분이었다. 그러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러일전쟁 발발 이후 바다를 낀 블라디보스토크는 전략적 요충지로 급부상했다. 개척리 일대는 해안가와 가까웠다. 일본과 전쟁에서 한 차례 쓴맛을 본 러시아로선 해전에 대비해 해안지대를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어느 날, 러시아 기마병들이 개척리를 덮쳤고, 한인들은 다시 디아스포라가 되어 새 터전을 찾아야만 했다. 그렇게 몰려난 한인들의 발길이 닿은 곳은 우리가 마지막 날 가게 될 신한촌이었다. 

하얼빈서 술 마시고 평양서 냉면으로 해장하는 상상을 하다

다음 목적지는 해양공원에 자리한 요새박물관이었다. 언덕 위에 방벽이 길게 둘러져있었다. 계단을 올라 박물관 입구에 이르니 '요새'라는 이름답게 사방이 탁 트여 주변 지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바깥에는 곳곳에 거대한 대포들이 포진해있었고, 실내에는 총칼 등 무기들이 진열돼있었다. 이 가운데에는 독립군이 청산리 전투에서 사용한 무기도 있었다.

 

 

 

▲요새박물관. ⓒ프레시안(박정연)

▲블라디보스토크 초기 이주 한인들의 모습. ⓒ프레시안(박정연)


험악한 구시대의 유물들 사이로, 사진 한 장이 벽에 걸려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초기 정착한 한인 이주민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다들 꼬질꼬질한 차림새지만 얼굴엔 여유가 있어 보였다. 얼기설기 만들어놓은 집 뒤로는 황량한 터가 보였다. 이 척박한 땅을 일구느라 얼마나 힘들었을지 빤히 그려졌다. 간신히 살만한 땅으로 만들어 놓았을 땐 다시 쫓겨난 신세가 되었으니, 디아스포라의 삶이란 얼마나 애처로운가. 안타까운 마음에 속이 쓰렸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한 한인들은 개척리를 일궜고 신한촌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하다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쫓겨났다. 이 비극을 가능케 한 것은 다름 아닌 오늘 우리가 타고 온 시베리아 횡단열차였다. 횡단열차 낭만 이면에는 이러한 비극이 숨어있었다. 

박 기관사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러시아 철도공사 직원이 총 몇 명일까요? 참고로 한국철도공사 직원 수는 2만 7000명 정도 입니다." 

가늠이 안 되어 서로 눈치만 봤다. "10만 명?", "30만 명?" 여기저기서 대답이 나올 때마다 박 기관사는 "땡"을 외쳤다. 

"정답은 95만 명입니다."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박 기관사가 한 마디 덧붙이자 우리는 입이 더 쩍 벌어졌다.

"구조조정 안 했으면 108만에서 110만 명 왔다 갔다 할 겁니다."

역시 드넓은 땅덩이를 가진, 그리고 단일 노선 최장 길이의 철로를 보유한 나라답게 철도 인력 규모도 대단했다. 

"한국 철도에서 제일 긴 노선이 경부선인데 441킬로미터예요. 그리고 전체 선로를 다 합치면 4000킬로미터 조금 넘어요. 그런데 러시아는 단일노선만 해도 9288킬로미터니까 대단하죠? 그런데, 만일 우리가 남북 철도가 연결되어서 단절 구간이 사라지면,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중심으로 중앙아시아, 동북아시아, 동유럽까지 다 합쳐서 28만킬로미터가 돼요. 지금은 남북철도가 단절된 상황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이게 연결되면 엄청나게 재밌는 일들이 생길 거예요.  

이런 상상을 해볼 수 있는 거죠. '나 어제 하얼빈에서 네가 알려준 맛집 가서 연태 고량주에 하얼빈 맥주 섞어 마셨더니 머리가 아팠는데, 겨우 단둥에서 압록강 건너면서 술 깨고 평양에서 냉면 먹으면서 해장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꿈이야, 생시야? 김정은이 눈 앞에 

"엇! 김정은 이따가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환송식 한대요. 기사 떴어요!"

박물관 문을 나서자마자, 정경아 협동조합팀장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조합원들이 "김정은 보러 가자"며 방방 뛰었다. 예정된 일정 대신 역 근처에서 밥을 간단하게 먹고 다 같이 '김정은 직관'을 하기로 했다. 

역 바로 맞은 편에 자리한 식당 '리퍼블릭(Republic)'과 레닌동상 주변에는 이미 취재진들로 붐볐다. 우리도 질세라 급하게 자리를 잡았다. 조악하지만 A4 용지에 'PRESSIAN'라고 휘갈겨 쓴 다음 바닥에 놓고 돌멩이를 올려뒀다.  

헛수고였다. 밥을 먹고 나오니, 러시아 경찰들이 뒤로 이동하라며 내쫓고 있었다. "우리는 기자"라고 항변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이틀 전 미리 당국에 사전 취재를 신청한 매체 외에는 근접 취재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환송식을 취재하기 위해 대기 중인 외신 기자들. ⓒ프레시안(박정연)


아쉬운 마음을 안고 김 위원장 환송 행사장과 200미터쯤 떨어진 언덕 위로 올라갔다. 이 거리라면 진정한 의미의 '직관'은 무리였다. 바늘구멍만큼도 안 보일 터였다. 경찰 측 통제로 본의 아니게 식당에 발이 묶인 조합원들에게 긴급히 'SOS'를 청했다. 혹시 창문을 통해 김 위원장이 보이거든 영상을 찍어달라 부탁했다. '바깥팀'은 함께 쫓겨난(?) 한국 매체 ENG 영상 기자들, 카메라 기자들, 그리고 관광객과 뒤섞여 김 위원장을 기다렸다.

대기 시간이 30분을 넘어서며 슬슬 다리가 저리기 시작한 3시 13분께, 김 위원장을 태운 것으로 추정되는 검은색 세단이 행사장 앞으로 도착했다. 그리고 군악대 연주가 시작되며 환송 행사가 거행됐다. 블라디보스토크역 일대에 아리랑 반주가 흐르고, 이제는 더욱 친숙해진 '카츄샤'도 흘렀다. 그렇게 식이 끝나갈 때까지도 김 위원장의 실루엣을 끝내 볼 수 없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환송식. ⓒ프레시안(박정연)


행사가 끝나자 비로소 경비 상태가 해제됐다. 그렇게나 기다렸는데, 허무했다. 아쉬운 마음에 행사장 바로 앞에서 취재를 마친 미국 NBC 방송국 소속 기자들을 붙잡고 김 위원장의 반응이 어땠는지 등을 물었다. 사실 별것 없는 취재였다. 

정작 '땡' 잡은 것은 식당에서 편안히 쉬고 있던 조합원들이었다. 식당 한 면이 통창이어서 행사 장면을 생생하게 다 볼 수 있었던 것.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으로 영상을 '득템'한 김태승, 김화수 조합원은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직접 찍은 영상을 자랑했다. 나머지 조합원들은 부러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다소 허무하긴 했지만, 예상치 못했던 김 위원장과의 조우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금각만 대교를 바라보며 키릴 문자를 생각하다 

오늘의 마지막 도착지인 독수리 전망대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하바롭스크 버스와 달리 안내 방송이 선명하게 들렸다. 그러고 보니 이쪽이 더 새 버스에 가까웠다. 버스를 타고 둘러보는 블라디보스토크는 하바롭스크와는 전혀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바롭스크가 구소련을 연상하게 하는 시크(chic)한 느낌이 강했다면, 블라디보스토크는 좀 더 세련되고 밝은 느낌이었다. 어떤 도시가 더 좋은지 조합원들과 나름 진지한 고민을 나누던 차에 박 기관사의 "내립시다" 하는 소리에 따라 내렸다. 

아기자기 예쁜 대학 건물이 늘어선 푸시킨 거리를 지나, 산악열차 '푸니쿨라'에 올랐다. 1량짜리 열차 내부는 계단식으로 돼 있었다. 25석 될까 말까 한 자그마한 열차가 중력을 거스르며 힘차게 언덕 위를 향해 움직였다. 2분여 만에 정상에 도착했다.

 

 

▲푸니쿨라. ⓒ프레시안(박정연)

▲독수리전망대 가는 길에 발견한 조명희 선생 비석. ⓒ프레시안(박정연)


전망대로 가는 길에 박 기관사로부터 반가운 이름을 들었다. 조명희 선생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었다. 조 선생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기에 여기에 비석이 세워졌다고 했다. 전날 하바롭스크 중앙묘지에서 그의 이름을 찾은 터라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비석 근처를 둘러봤다. 

조명희 선생 비석에서 얼마 가지 않아 독수리전망대에 도착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제일 높은 언덕으로, 금각만 대교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다리 구경에 앞서 전망대에 있는 동상 하나를 감상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책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책에는 키릴 문자로 추정되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박 기관사는 '키릴 형제' 동상이라고 했다. 

"키릴 형제는 러시아의 세종대왕같은 분들입니다. 키릴 문자가 로마 알파벳을 차용하는데, 러시아 사람들 사이에 하는 개그 같은 게 있습니다. 키릴 형제가 글자를 보급하기 위해 로마 그리스까지 가서 쟁반에다가 알파벳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국경을 건너다 쟁반이 떨어져서 주워담다 보니까 문자가 섞이고 뒤집어졌습니다. 그래서 결국 러시아인들이 영어와 '사맛디 아니하게 되고'..." 
 

▲키릴형제 동상. ⓒ프레시안(박정연)

▲금각만 대교를 배경으로 찍은 단체사진. ⓒ프레시안(박정연)

 

 

키릴 문자를 볼 때마다 '러시아 사람들은 영어 공부하기 힘들겠다'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나만의 생각이 아닌 것 같았다. 박 기관사는 "웃자고 하는 소리"라며 "어쨌든 키릴형제 덕택에 러시아 사람들이 말에 맞게 비로소 문자를 쓸 수 있게 됐다"고 했다.

몸을 반대로 돌려 다시 금각만 대교를 바라봤다. 다리를 중앙으로 양 쪽에 우뚝 솟은 기둥이 서있고, 하프 현처럼 가느다란 철근 여러 개가 기둥과 다리를 연결하는 형태였다. 아찔한 모양이었다. 배경으로 삼아 기념사진 찍기 좋아 보였다. 돌아가면서 '인생샷'을 남기는 것으로 특별했던 오늘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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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파일 속 '최순실 대통령'의 실체, 참담하다

[게릴라칼럼] 최순실 녹음파일과 정호성의 후회, 그리고 한국당

19.05.25 12:27l최종 업데이트 19.05.25 12:27l

 

박근혜 전 대통령과 함께 재판받는 최순실 '비선실세' 최순실씨가 23일 오전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박근헤 전 대통령과 함께 재판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  최순실씨가 2017년 5월 23일 오전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박근헤 전 대통령과 함께 재판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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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권력 서열이 어떻게 되는 줄 아느냐. 최순실이 1위, 정윤회가 2위, 3위가 대통령."

박근혜 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2015년 1월, 정윤회 국정농단 문건 유출 혐의로 구속됐던 박관천 전 경정이 검찰 조사과정에서 남겼다는 이 발언은 그때만 해도 '지라시' 수준으로 여겨졌었다. 일각에서 '천기누설' 운운했지만 논란은 점차 수그러드는 분위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다수 국민들은 '최순실'이란 이름을 생소하게 여겼다. 그보다는 비선으로 지목받은 정윤회씨나 이른바 '십상시' 모임, '문고리 3인방'이 더 '핫한' 이슈였다. 당시 야당이던 새정치민주연합 정책조정회의에서 이 박관천 전 경정의 "우리나라 권력 서열이 어떻게 되는 줄 아느냐"는 발언을 인용했던 김경협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도 최순실을 직접 겨냥하지는 못했었다.

 

김 의원은 "(박 대통령 주변에) 최순실, 문고리 3인방, 십상시 등이 얽혀있다고 보는 의혹이 가시지 않고 있다"며 "직접 소통보다 문고리 3인방에 의존하는 대통령의 불통 통치 스타일이 근본원인이다. 대통령의 신년기자회견에서 이 부분에 대한 통렬한 사과와 청와대 비서실의 전면개편, 문고리 3인방의 해체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순실씨를 가리키기보다 문고리 3인방이나 십상시와 관련된 의혹을 짚는 수준이었다고 볼 수 있다.

'권력 서열' 1위 최순실의 존재와 얼굴은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나고, 국정농단 사태가 촉발된 2016년 가을경 제대로 드러났다. 흥미로운 것은 이 권력 서열 발언조차 박 전 경정의 생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2017년 3월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와 인터뷰를 가진 박 전 경정은 이 발언이 "'십상시'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밝혔다.

본인은 그저 대통령공직기강비서관실 행정관이란 책무에 충실하고자 진위 파악을 위해 최순실과 정윤회를 수차례 만났고, 이후 주변 물증을 수집하며 '권력 서열'을 확신했다는 얘기다. 23일 '박근혜-최순실-정호성 녹음파일' 2탄을 공개한 <시사저널>의 '시사저널TV'에 출연한 정두언 전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근데 저는 일찌감치 국정 농단 사태가 터지기 전부터... 우리나라 권력 서열 1위는 박근혜가 아니라 최순실이다, 그런 얘기를 제가 했었고, 또 박근혜 정권은 끝을 못 갈 것이다 그런 얘기도 했었는데. 그래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재임 기간 동안 입버릇처럼 한 얘기가 박근혜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안 되고 될 수도 없다(는 거예요)."

정 전 의원은 MB마저 재임 기간 실제로 위와 같은 말을 했다고 재차 확인했다. 그걸 알았다고 정 전 의원이 으스댈 일이 아니다. 그걸 알았거나 짐작이 가능했으면서도 정치인 박근혜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운 당시 새누리당도, 국정농단 사태 이후에도 비선실세 따위 아랑곳 않는 '친박'과 극렬 지지자들도, '정치인 박근혜' 시절부터 당선 이후에도 '형광등 100개 아우라'라고 칭송한 보수언론들도 '박근혜 정권' 창출과 관련해 통렬하게 반성한 적이 있는가. 

지난 17일에 이어 23일 <시사저널>이 '박근혜-최순실-정호성 90분 녹음파일'을 두 번째로 공개했다. 이를 듣는 심경은 그래서 더 참담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는 이미 알고 있었고, 언론을 통해서도 국정농단 사태에 앞서 점차 알려졌던 박근혜 정권 '권력 서열 1위 최순실'의 실체를 확인하는 일이었기에.

권력 서열 1위, '대통령 최순실'
 
 2015년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으로 구속 기소됐던 박관천 전 경정은 검찰 수사 과정에 故최태민 목사의 딸이자 정윤회 씨의 전 부인인 최순실 씨가 권력서열 1위라고 주장했다
▲  2015년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으로 구속 기소됐던 박관천 전 경정은 검찰 수사 과정에 고 최태민 목사의 딸이자 정윤회 씨의 전 부인인 최순실 씨가 권력서열 1위라고 주장했다
ⓒ TV조선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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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이 이 나라 대통령이었다."

국정농단 사건 수사가 한창이던 지난 2016년 12월, 이른바 '정호성 녹취' 파일을 보도한 <한겨레>의 기사 제목이다. 기사에서 '정호성 녹취'를 접한 검찰관계자는 복수의 언론에 "(적어도) 최씨가 1위라는 말은 맞다"며 "사실상 최씨가 대통령이었다. 나라를 운영했다"고까지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관련 녹취는 극히 일부만 공개됐고, 국정농단 사태 와중에 그 일부만으로도 국민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만약 그때 지금 공개된 분량의 녹음파일이 그대로 국민들에게 전달됐다면 그 공분은 배가되지 않았을까. 무려 2년 반이 지났고,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 모두 구속수감 중임에도 국민들의 반응이 2년 반 전과 비슷한 걸 보면 말이다.

도합 1시간 26분여에 달하는 1차 파일은 박 전 대통령 재임 직전에 녹취됐다. 그러나 2차 파일에는 재임 기간에 녹음된 내용이 포함됐다. <시사저널>은 총 30분 분량 11건 중 9건이 재임 기간 중 녹음된 파일이라고 밝혔다. 2차 공개에 나선 <시사저널> 측은 그 배경에 대해 이렇게 전했다.

"(1차) '90분 파일' 공개 후 논란은 뜨거웠다. '국정농단이 이 정도일 줄 몰랐다' '최순실이 대통령 같다'는 등 대부분 놀람과 분노 섞인 반응이었다. 최근 제기되고 있는 '박 전 대통령 사면론'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일각에선 '녹음파일 조작'과 '대통령 취임 전이라 문제 될 것 없다'는 주장이 나왔다. 심지어 '현 정부의 공작(工作) 아니냐'는 억측까지 있었다."

최소한의 상식을 갖춘 이라면, 이 녹취 파일을 직접 듣고 국정농단의 진위를 부정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박근혜 사면론'을 펼치거나 '공작' 운운하는 이들은 '민주주의'와 '헌법' 그 자체를 부정하는 이들이라 할 수밖에 없다. 1차 녹음 파일 중 웃을 수도, 그렇다고 울 수도 없는 황당한 내용을 하나 소개해 본다.

"그렇게 해봤더니 경회루 같다고 그랬대요." (최씨)
"그게 낫지. 품위가 있어야지, 이게. 기와 한 장만 딱.(박 전 대통령)
"과일 갖다 드릴까요?" (최씨)
"네?" (박 전 대통령)
"과일. 더 드세요." (최씨)
"근데 하여튼 기와 하나만 갖고, 이렇게 좀 청와대(라고) 하면 안 될까요? 이거는 좀 이상하지만. 이건 기완가 뭔가, 이게. 그러면 안 될까요?" (박근혜 전 대통령)
"그거는, 그거는 안 될 거 같아. 왜냐하면 사시는 데를." (최씨)
"좀 촌스럽죠. 상징적으로 만들어야지. 너무 똑같이 하려고 하니까 이상해졌잖아요." (박 전 대통령)
"낫토 드세요. (네?) 낫토 (최씨)


이게 도대체 무슨 내용이냐고? 회의 중 의견이 맞지 않자 최씨가 박 전 대통령에게 '과일이나 먹어라', '낫토(나) 드세요'라며 면박을 주는 상황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매사, 대개의 녹음 파일 속 대화가 이런 식이다. '최순실 대통령'의 위세가 대단하다.

박 전 대통령은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지만, 최씨는 고압적으로, 말이 짧을 때가 허다하다. 마치 박 전 대통령의 의견은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무시와 면박으로 대응하기 일쑤다.

정 전 비서관의 대응은 한술 더 뜬다. 꼬박꼬박 '선생님'이란 호칭을 붙인 그는 극존칭을 쓰는 것은 예사요, 쩔쩔매가며 최씨를 떠받들었다. '권력 서열 1위'의 위엄이 녹취 파일 전반에 그대로 묻어난다. 문제는 자신이 대통령인듯 감정 이입을 한 최씨의 지시가 재임 이후 국정 운영에 고스란히 반영됐다는 사실이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취임사하는 박근혜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오전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1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  박근혜 전 대통령의 취임사 역시 최순실씨가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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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중국과 한국의 젊은이들이 앞으로 문화와 인문 교류를 통해서 더 가까운 나라로 발전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실제 박근혜 전 대통령 연설, 2013년 6월 29일 중국 칭화대)

"마지막으로… 중국과 한국의 젊은이들이 미래를 끌고 갈 젊은이들이… 앞으로 문화와 인적 교류… 문화와 인문 교류를 통해서 더 넓은 확대와 가까워진 나라로 발전하길 바란다." (최순실 지시사항)

23일 JTBC <뉴스룸>이 직접 비교한 2차 녹음파일 속 최씨의 지시와 실제 박 전 대통령 연설 내용이다. 불행하게도, 녹음파일이 증명하듯 박 전 대통령이 최씨의 꼭두각시 혹은 '그림자 무사'였다는 흔적은 한 둘이 아니다. 기밀 사항인 대통령의 외부 일정을 수시로 먼저 보고 받은 것은 물론 참석 여부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최씨는 본인이 '대수비(대통령 주재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라고 지칭한 청와대 회의를 거의 관장하는 듯한 뉘앙스로 지시를 내렸다. 또 그 회의의 모두 발언에 일일이 관여한 것으로 드러났고, 정 전 비서관이 연설문 등을 수시로 이메일을 보내 '첨삭'을 받았음을 증명하는 내용도 나왔다. 국회는 물론 총리를 향한 메시지도 최씨의 입과 머리에서 도출됐다.

이밖에 녹음파일 속 최씨는 개인적인 일로 해외에 나가서도 정호성 전 비서관에게 업무 지시를 내렸고, 정 전 비서관은 한밤중에 최씨로부터 온 국제전화를 받아야 했다. 또 최씨는 정 전 비서관에게 정홍원 당시 국무총리를 압박할 것을 종용했고, 유민봉 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 역시 그 압박 대상자 중 한 명이었다. 녹음 파일은 일반인 최씨에게 이러한 지시를 받아야 하는 청와대 비서관의 '자괴감'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지난 2년여 동안 일련의 많은 일을 겪으면서 지난 공직 생활을 차분히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다른 행동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일들이 많았다."

작년 12월, 결심 공판을 위해 법정에 선 '문고리 3인방' 중 정호성 전 비서관이 남긴 최후 진술이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란 후회. 정 전 비서관은 개인적으로 죗값을 치르면 그만이겠지만, 국정농단이란 역사의 과오는 개인의 후회와는 차원이 다르다. '권력 서열 1위' 최순실이 좌지우지한 박근혜 정권이 되돌린 역사의 시계, 그 퇴행의 시간이 가져온 사회적 비용을 국민들이 그대로 치르고 있으니까.
 
 박근혜 정권에서 '문고리 권력'으로 불렸던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이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정 전 비서관은 '비선 실세' 최순실씨에게 지목된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들이 좌천당한 경위에 대해 증인신문을 받는다.
▲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이 2017년 6월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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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박근혜 정권'을 탄생시키고 그에 일조했으며 그 아래서 권력과 권세를 누린 이들이 과연 제대로 된 죗값을 치렀는지 의문이다. 처절한 반성은커녕 '기억상실증'에 가까운 언행으로 다시금 퇴행을 반복 중인 보수야당의 현재를 보라. 박근혜 정권의 가장 큰 수혜자인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독재' 운운하며 대권행보를 거듭 중인 지금 말이다.

이 녹음파일이 더 빨리 공개되지 않았던 게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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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공동선언들 이행 방해세력 제압 실천단 백두수호대" 다시 활동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9/05/25 14:03
  • 수정일
    2019/05/25 14:03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남북공동선언들 이행 방해세력 제압 실천단 백두수호대" 다시 활동
 
 
 
대학생통신원
기사입력: 2019/05/25 [11:57]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백두수호대 기자회견     ©대학생통신원

 

5월 24일 오후 2시 광화문 미대사관 앞에서 '판문점 선언·9월 평양공동선언 이행 방해세력 제압 실천단 백두수호대'(이하 '백두수호대')의 창설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백두수호대는 지난해 '서울 남북정상회담 방해세력 제압 실천단 백두수호대라는 이름으로 구성돼 활발히 활동했다작년 서울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리지 못하게 되면서 이번 백두수호대는 최근 정세에 맞게 다시 창설된 것이다이번 백두수호대의 목표는 작년의 역사적인 선언이었던 판문점 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의 이행을 방해하는 세력들을 제압하고 하나 된 한반도평화와 통일의 한반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백두수호대는 주된 활동 방향으로 한반도 평화를 가로막는 태영호박상학과 같은 인물에 대한 규탄과 자유한국당과 대한애국당 같은 분단적폐세력에 대한 규탄한미워킹그룹과 같은 미국의 주권침해에 대해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밝혔다.

 

기자회견에서는 백두수호대 단원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첫 번째 발언자는 공금횡령 의혹이 있는 박상학과 아동 성추행 혐의 의혹이 있는 태영호에 대해 비판했다이런 말도 안 되는 혐의 의혹이 있는 자들이 무슨 자유니 인권을 운운할 자격도 없다고 말했다.

 

두 번째 발언자는 자유한국당과 대한애국당을 반드시 청산하겠다는 내용이었다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하고비상식적인 이념으로 갈라놓은 주범이 대한애국당과 자유한국당이라고 말했다판문점 선언 비준을 방해하고 전쟁을 이야기하는 적폐 세력들이 청산될 때까지 함께 하겠다고 밝혔다.

 

세 번째 발언자는 민족의 약속인 4.27 판문점 선언과 9월 평양 공동선언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문재인 정부의 행동에 대해 지적했다문재인 정부는 미국의 말을 따를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이익을 생각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기자회견은 백두수호대 부단장이 창설 선포문을 낭독하고 상징의식을 했다상징의식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방해하는 세력들을 손과 발로 격파했다.

 

백두수호대는 앞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제압할 것이라고 밝히며 기자회견을 마쳤다. 

 

▲ 백두수호대 부단장이 선포문을 낭독하고 있다     ©대학생통신원

 

▲ 상징의식을 진행하고 있다.     ©대학생통신원

 

▲ 상징의식을 진행한 피켓들     ©대학생통신원

 

아래는 백두수호대 창설 선포문 전문이다.

 

--------------------아래--------------------------------------

 

4.27 판문점 선언 9월 평양공동선언 이행 방해세력 제압 실천단 

백두수호대 창설 선포문

 

작년 4.27 판문점 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으로 국민들은 이명박근혜 정권 시절 철저히 가려져 있 던 북한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유머러스하면서도 대담한 포용력에 온 국민은 놀랐으며 감탄했다. 판문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만났을 때, 프레스센터 에서는 박수갈채가 끊이질 않았다. 남과 북이 힘을 합쳐 한반도의 공고한 평화의 길을 열어내고자 한데에 온 국민을 넘어 전 세계가 환호했다. 이렇듯 수많은 찬사와 갈채 속에서 탄생한 4.27 판문 점 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은 우리 민족이 주인이 되어 이뤄낸 역사적인 약속이며 합의다.

 

그런데 분단적폐 세력들에게 4.27 판문점 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은 마치 사형선고나 다름없었기 때문인지, 어떻게든 우리 민족의 약속을 폄훼하고 시행하지 못하게 만들어왔다. 자유한국당은 4.27 판문점 선언의 국회 비준을 계속해서 방해하여 결국엔 추진되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9월 평양 공동 선언 또한 끊임없이 평가 절하시켰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적폐 중의 적폐인 자유한국당은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 부역정당으로서 온 국민을 기만하고 농락한 것에 대한 응당한 심판과 처벌을 받았어야 했다. 하지만 새누리당에서 자유한국당으로 이름만 바꾼 채 반성은커녕, 자신들이 배불리고 살찌운 우리사회 분단 구조를 지속 시키기 위해 온 국민의 염원인 한반도 평화에 재를 뿌리며 훼방을 놓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해방 이후 우리 민족사에 사사건건 개입하여 오던 미국은 지금도 남북관계에 계 속해서 개입하고 있다. 남북관계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망발과 함께 한미워킹그룹이라는 일제의 ‘조선 총독부’ 같은 기구를 만들었다. 한미워킹그룹에서 미국은 한국을 자신들의 통제 하에 두고 좌 지우지 하고 있다. 게다가 9월 평양공동선언과 6.12 북미정상회담에 전면 위배 됨에도 불구하고 한 반도 상공에서 이름만 바꾼 전쟁 훈련을 계속해서 진행하고 있다. 이에 더해 아동성폭행범 혐의 의 혹이 있는 태영호는 언론에서 북한에 대한 혐오감 조장과 거짓 뉴스를 생산하고 있고, 박상학은 해 서는 안되는 삐라 살포를 계속 강행하며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이들은 분명 한반도의 전쟁 위기를 고조시키기만 할 따름이며 어느 누구에게도 좋을 것이 없다.

 

그리고 다음 달 트럼프가 방한을 한다. 만약 트럼프가 대한민국에 와서 또 다시 CVID니, FFVD니 철 지난 소리를 한다면 미국 자국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지탄을 받게 될 것은 자명하다. 지난 김 정은 국무위원장의 시정연설에 따르면 북한은 미국에게 새로운 계산법을 가져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명확히 밝혔다.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타결이 안 된 결정적 이유가 미국에 있다고 드러난 만큼 미국 은 신중한 결정을 해야할 것이다.

 

‘4.27 판문점 선언, 9월 평양 공동선언 이행 방해세력 제압 실천단 백두수호대’는 이러한 반통일, 분단적폐 세력들을 제압하고 반드시 해체시켜 대한민국이 더더욱 나라다운 나라, 우리 민족이 열어 가는 평화로운 한반도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갈 것이다.

 

 

4.27 판문점 선언 9월 평양공동선언 이행 방해세력 제압 실천단 백두수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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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법률가단체들, '유엔사 해체'위한 국제운동 나선다

대표단 방한, 민중당 등과 간담회...유엔사 해체 2차 국제선언운동 돌입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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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5.24  18: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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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민주법률가협회와 아시아·태평양법률가연맹 등 국제법률가단체 방한 대표단이 24일 국회의원회관에서 민중당을 비롯한 국내 시민사회단체 대표들과 함께 기자간담회를 갖고 '유엔사 해체를 위한 제2차 국제선언운동'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사진-조천현]

유엔군사령부 해체를 위한 국제운동을 진행하고 있는 민중당과 국내외 시민사회단체들이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간담회를 갖고 2차 국제선언운동 돌입을 선언했다.

민중당은 24일 국회의원회관에서 국제민주법률가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Democratic Lawyers, IADL), 아시아·태평양법률가연맹(Confederation of Lawyers of Asia and the Pacific, COLAP) 등 국제법률가단체 방한 대표단과 이장희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고은광순 평화어머니회 상임공동대표 등 국내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기자간담회를 갖고 협력방안을 논의했다.

간담회에는 IADL 유엔대표로 제네바에 상주하는 이탈리아 변호사 미콜 사비어(Micol Savia)씨와 IADL 집행위원이자 COLAP 사무총장으로 일본 변호사인 준 사사모토씨가 방한 대표단으로 참가했으며, 이들은 '유엔군사령부 해체', '북한 해외식당 여종업원 사건', '국가보안법 폐지' 등 3가지 주제에 대해 협력방안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했다.

김양현 민중당 자주평화통일위원장은 이번 간담회를 통해 유엔사 해체 2차 국제선언에 IADL, COLAP 전체 회원이 함께 서명하기로 했으며, 정전협정 체결일인 오는 7월 27일과 9월 유엔총회 기간 중에는 유엔사 해체를 위한 기자회견, 각국 대사관과 유엔본부에 서한 전달 등 공동행동도 함께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또 IADL, COLAP을 중심으로 유엔사 해체를 위한 언론기고를 비롯해 유엔 및 미국 정부에 지속적인 의견을 전달하는 여론 활동을 벌이는 한편 유엔인권이사회에서 다시 국가보안법 폐지권고안을 논의할 수 있도록 요청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상규 민중당 상임대표는 "유엔사 해체 국제선언을 하는 것은 판문점선언, 평양공동선언, 싱가포르 및 하노이 회담 등 한반도에 불어닥치고 있는 자주, 평화, 번영의 정세를 국제사회에서 확고한 평화운동의 힘으로 추진시켜 나가기 위한 것"이라며, "1953년 정전협정에 따라 모든 외국군은 이미 한반도에서 철수해야 하는데, 지금 미국은 유엔사와 한미워킹그룹 등을 통해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식민적 지배를 끝내야 한다는 것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의미가 있다"고 2차 국제선언운동의 취지를 설명했다.

이어 "유엔사 해체운동을 한반도 긴장격화의 주범인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으로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왼쪽부터 미콜 사비어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유엔 제네바 대표, 준 사사모토 아시아.태평양법률가연맹 사무총장. [사진-조천현]

준 사사모토 사무총장은  "유엔사는 한국전쟁 중 유엔안보리가 통합사령부 설치할 수 있다고 한 결의를 왜곡해 미국이 마음대로 만들어낸 것이며, 결의 과정에 당시 소련이 불참한 것도 5개 상임이사국 만장일치를 규정한 유엔헌장 위반이 된다"고 지적했다. 

또 유엔사를 실제로 유엔이 통솔하지 않고 유엔 사무총장도 유엔사가 유엔과는 상관없는 존재라고 확인한 일 등을 열거하고는 "지금은 유엔사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방해하는 훼방꾼으로 되고 있다. 판문점선언 이후 남북이 철도연결을 하고자 했을 때도 한미연합사가 유엔사의 자격으로 이걸 막았는데, 이는 판문점선언 위반이기도 하지만 남북 민중의 전체 의지에 배치되는 중대한 문제"라고 비판했다.

이어 "유엔사는 1954년 일본에서 7군데 미군기지를 일본내에서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주둔군 협정을 맺었는데, 이는 유엔사의 활동을 일본이 도와야 한다는 것이고 한반도 유사시 일본 민중도 자연스럽게 그에 휩쓸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일본 관점에서도 유엔사는 많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유엔사는 명백히 유엔헌장을 위배한 것"이라고 거듭 강조면서, 북한의 '조선민주법률가협회'는 2016년 COLAP이 창립할 때부터 함께 했으며, 유엔사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미군 군사기지 실태에 대해서도 함께 조사하고 있는데 "한국의 국가보안법이 없어지면 북한의 변호사들과 협력도 원활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1946년 파리에서 창립해 현재 뉴욕, 파리, 제네바 등에 대표부를 운영하고 있는 IADL의 미콜 사비어 제네바 대표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주도적으로 진행하는 남북 두 정부의 노력을 국제사회와 함께 지지한다. 북한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제재는 불필요하다"는 뜻을 밝혔다.

사비어 대표는 탈북 여종원들이 자의에 의해 내려 온 것이 아니라는 토마스 오헤아 킨타나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의 보고를 인용하고는 장기간 변호사 접견을 못한 상태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한국 정부, 국가인권위원회의 강력한 조사를 요청하기도 했다.

이장희 교수는 "유엔사가 유엔헌장, 국제법, 정전협정 위반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유엔은 모든 군사적 조치를 정할 때 유엔헌장 39조에 의해 평화에 대한 위협과 파괴, 침략행위가 있을 때 안보리 결의로서만 결정할 수 있고 '자위권 행사'시에만 예외를 인정하는데, 한국전쟁 중인 1952년 미일 안보조약의 부속문서이기도 한 '요시다-에치슨 공문'을 통해 한반도 유사시 미군의 작전행동에 대한 일본의 후방지원을 보증하는 비밀 조약을 체결한 것은 유엔헌장 위반이라는 것.

유엔헌장 102조에 의해 모든 회원국들이 체결하는 합의서는 유엔에 등록하도록 하고 그렇지 않으면 원용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북한 해외식당 여종업원들의 강제 입국 문제를 다뤄 온 장경욱 변호사는 "지금 진상규명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납치·유인된 나이 어린 피해자들이 그 공작에 개입한 국가정보원 수사관들에 의해서 관리·보호되고 있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그들은 지금 숨어있는 상황이다"라고 하면서 "페이스북 등을 통해 이들 종업원들이 겪고 있는 상황도 간간히 듣고 있고 더 나쁜 소식도 알고 있지만, 이 모든 일은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단의 비극"이라고 강조했다.

장 변호사는 "이들이 북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느냐는 질문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우선 진상규명에 주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 "판문점이나 적십자를 통해서라도 이들이 제발 가족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 이날 기자회견에는고은광순 평화어머니회 대표, 류경완 코리아국제평화포럼 공동대표, 이래경 다른백년 이사장, 이시우 사진작가, 정연진 AOK 공동대표 등이 함께 했다. [사진-조천현]

이날 기자회견에는 고은광순 평화어머니회 상임공동대표, 류경완 코리아국제평화포럼 공동대표, 이래경 다른백년 이사장, 이시우 사진작가, 정연진 AOK 공동대표 등이 함께 했다.

이에 앞서 이들은 지난달 25일 '평화의 시대, 냉전의 유물 유엔사 해체를 촉구하는 1차 국제선언' 발표 기자회견을 열어 140여명의 국내외 인사와 37개 단체들의 서명을 발표한 바 있다.

당시 발표한 1차 국제선언문은 다음 날인 4월 26일 유엔안보리 회원국에 발송되었으며, 이들은 선언문을 다듬어 곧 2차 국제선언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겠다고 밝혔었다.

국제민주법률가협회와 아시아태평양법률가연맹은 당시에도 집행위원회 회의를 통해 만장일치로 선언 참여를 결정했으며, 캐나다, 일본, 스웨덴, 미국, 영국,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독일 등에서 개인과 단체들이 참여했다.

(수정, 25일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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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의 지역 언론 배제 규탄’

지역 언론 콘텐츠 차별 규탄 첫 집단행동 통해 네이버 압박
 

전국언론노동조합·전국민주언론시민연합·한국지역언론학회·지방분권전국회의·(사)지역방송협의회가 23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네이버 본사 앞에서 ‘네이버의 지역 언론 배제 규탄’ 기자회견을 열어 “네이버 뉴스 배열 정책이 지역성을 말살하고 저널리즘을 훼손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대책을 요구했다.

네이버가 새로 선보인 모바일 뉴스 서비스를 통해 구독할 매체는 14개 방송통신사와 10개 종합지, 9개 경제지 11개 인터넷 및 IT지 등 44개다. 네이버를 모바일로 접속하면 지역 언론 콘텐츠를 볼 수 없다.

이들은 “지역 언론 콘텐츠는 사건 사고만 네이버에 노출된다. 그것도 지역언론이 아닌 서울에 본사를 둔 매체 시각으로 전달된다”고 했다. 국내 언론 콘텐츠의 최대 유통망인 네이버가 지역 콘텐츠를 외면하면서 결국 지역민을 차별하고 국민 알권리를 박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인원은 80여명이다. 언론노조 소속 지역 지부 간부 대부분이 참석했다. 앞서 9개 지역 민주언론시민연합도 공동성명을 내고 네이버의 지역 언론 콘텐츠 차별을 공론화했다. 이날 집회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한국지방신문협회와 대한민국지방신문협의회 등도 문제를 제기했다.

이날 기자회견은 지역 언론 콘텐츠 차별을 없애자는 목소리뿐 아니라 그동안 포털이 훼손한 저널리즘을 회복하자는 ‘명분’이 힘을 얻으면서 언론 노동자가 결집해 첫 집단행동을 했다는데 의미가 있다.

이들은 모바일 뉴스를 포함한 모든 뉴스 배열 정책을 시정해야 한다면서 △네이버 모바일 구독 설정에 지역 언론 포함 △스마트폰 위치 확인 기능 이용한 ‘내 지역 뉴스 보기 서비스’ 시행 △지역 신문·방송 지속 가능성 제고와 지역-중앙 상생 미디어 환경 조성을 위해 정부와 네이버, 시민과 학계, 언론협업인 간 대화의 장 마련 등을 요구했다.

전대식 지역신문노동조합협의회 의장은 “아침에 눈뜨면 모바일 보는 세상인데 지역 콘텐츠가 아무 설명 없이 모바일 화면에서 사라졌다”면서 “네이버는 속 시원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제휴평가위원회 탓으로 돌린다. 우리에게 네이버는 이웃이 아니라 적이자 벽이자 한계다. 네이버의 지역 차별 정책에 위헌적 요소가 없는지 따지겠다”고 말했다.

이상대 지역방송협의회 공동의장은 “네이버 포털의 지역 배제는 지역언론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민을 차별하고 국민의 알권리와 시청권을 박탈한다. 네이버라는 자본권력이 횡포를 부린다”고 비판했다.

한대광 전국신문통신노동조합협의회 의장은 지난해 10월 포털 저널리즘 토론회에서 네이버 측 간부에게 콘텐츠 생산자와 상의 없는 알고리즘 개편 문제 등을 제기했지만 “단 하나라도 이뤄진 적이 없다”면서 네이버가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전국민주언론시민연합·한국지역언론학회·지방분권전국회의·(사)지역방송협의회가 23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네이버 본사 앞에서 ‘네이버의 지역 언론 배제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고차원 MBC본부 수석부본부장은 “인터넷 정보사회가 도래하면 민주주의가 성숙되길 기대했다”면서 “하지만 네이버는 고질적 차별, 수도권과 지역을 분리하는데 편승하고 답습하고 있다. 네이버의 수익 10분의 1만 쏟는다면 수도권과 지역 뉴스 소비가 이뤄지는 솔루션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정훈 언론노조 위원장은 “네이버는 우리나라의 대표 포털로 살아남았다. 자긍심을 지키면서 IT 기업으로서 우리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를 지키는 사회적 책무를 다한다는 것을 보여달라”고 말했다.

네이버 검색 알고리즘이 중앙 언론과 지역 언론 콘텐츠를 차별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박병원 지역방송협의회 정책실장(울산MBC)은 “아무리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취재해 1보로 쓰더라도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중앙 언론이 각색한 기사들이 뜬다. 최소한 지역뉴스를 차별하지 않고 공정한 시장의 룰을 만들어달라는 게 우리 요구”라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문에 “최근 이재명 경기도지사 판결 관련 네이버 뉴스 상단은 서울 언론 기사로 도배돼 있다. ‘정치인 이재명’ 관점으로 작성된 기사만 부각돼 있고, ‘도지사 이재명’에 대한 지역언론의 기사는 한참 뒤로 빠져 있다”는 대목이 나온 이유다.


전대식 지역신문노동조합협의회 의장과 오정훈 언론노조 위원장, 고차원 MBC본부 수석부본부장이 네이버 측에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언론노조와 지역신문노동조합협의회 등은 네이버 본사 앞 집회를 한 달 동안 미리 신고해 2차 집단행동을 예고했다. 언론노조 관계자는 “1인 시위를 포함해 네이버를 압박하는 계획을 세우겠다”고 말했다. 언론노조는 전국 지방의회 의장을 만나 네이버 포털의 지역 차별을 비판하는 결의문을 채택하도록 요청 중이다.

네이버 관계자는 모바일 뉴스 서비스 개편으로 인해 모바일 화면에서 지역 언론의 콘텐츠를 볼 수 없는 상태는 맞다면서도 네이버 콘텐츠 제휴 문제는 제휴평가위원회에서 해결해야 할 사안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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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미디어오늘(http://www.media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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