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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장외투쟁 나선 자유한국당 “친문무죄·반문유죄냐...좌파독재 중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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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9/04/21 12:41
  • 수정일
    2019/04/21 12:41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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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체제 첫 장외 투쟁...“이미선 헌법재판관 임명 강행 즉각 철회하라”

양아라 기자 yar@vop.co.kr
발행 2019-04-20 17:47:56
수정 2019-04-20 18: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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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를 마친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 등 소속 의원들과 당원들이 청와대 앞까지 행진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를 마친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 등 소속 의원들과 당원들이 청와대 앞까지 행진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정의철 기자
 
 

자유한국당이 촛불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를 '좌파 독재 정권'으로 규정하며, "국민의 이름으로 심판하겠다"며 국회 밖으로 나왔다. 황교안 체제 출범 이후, 자유한국당의 첫 장외투쟁이다. 이들은 전날 문재인 대통령이 이미선 헌법재판관 후보자 임명 강행에 '인사 참사'라고 반발하며 즉각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20일 오후 자유한국당은 서울 종로구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 대회를 개최했다. 집회에는 당 대표, 주요당직자, 의원, 당협위원장 및 당원 등 2만 여명(주최 측 추산)이 참석했다.  

자유한국당 시·도 당원들은 전국 각지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 광화문으로 모였다. 자유한국당의 상징색인 빨간색 계열의 옷을 입은 당원과 지지자들은 '문재인 STOP 국민심판'이라고 적힌 빨간 손피켓과 태극기를 흔들었다. 의원들의 규탄사에 흥분한 지지자들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욕설을 쏟아내며 고성을 질렀다.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에서 참석자들이 문재인 정부를 규탄하는 손피켓을 들고 있다.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에서 참석자들이 문재인 정부를 규탄하는 손피켓을 들고 있다.ⓒ정의철 기자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 등 소속 의원들과 당원들이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를 열고 현 정부의 독단적인 정부 운영을 규탄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 등 소속 의원들과 당원들이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를 열고 현 정부의 독단적인 정부 운영을 규탄하고 있다.ⓒ정의철 기자

무대에 오른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문재인 정부로 인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삼권분립', '시장경제'가 무너져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로 단상에 오른 자유한국당 좌파독재저지특별위원장인 김태흠 의원은 "문 대통령은 헌법재판관으로 부적격인 이미선 후보자를 야당이 반대하자, 김경수·드루킹 댓글조작으로 정권을 잡은 세력답게 교묘하게 여론조작까지 하며 전날 임명을 강행했다. 그것도 해외에서 전자결재로 했다"며 "'주식 전문가' 이미선을 헌법재판관으로 임명 강행한 것은 국회를 무시하고, 국민마저 '개무시'하겠다는 대국민 선전포고"라고 주장했다.  

김 의원은 "문 정부와 민주당은 재판부를 협박하고 협박해 김경수를 보석으로 석방시켰다"며 "한마디로 친문무죄, 반문유죄, 친문석방, 반문감방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의원은 "김정은이 좋아할 말만 골라서 하는 사람, 김정은 대변인 노릇할 사람을 통일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정권이 종북 정권이 아니고 무엇이냐"며 색깔론을 다시 꺼내들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 등 소속 의원들이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에서 손을 잡고 당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 등 소속 의원들이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에서 손을 잡고 당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정의철 기자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10인의 전사 의원들이 단상에 올라 당원과 지지자들에게 인사하자 환호와 박수가 터져나왔다. 자유한국당 김광림·주광덕·김도읍·장제원·곽상도·백승주·성일종·김종석·최연혜·임이자 의원은 문재인 정권에 맞서 싸우는 '전사 의원'으로 이날 소개됐다.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려퍼졌다. 이에 집회 사회자는 문재인 정부를 향한 '국민들의 준엄한 경고'라고 설명했다. 이날 대회에는 전희경 의원과 이인제 전 최고위원이 규탄사를 통해 문재인 정부를 맹비난했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에서 규탄 발언을 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에서 규탄 발언을 하고 있다.ⓒ정의철 기자

이후 무대에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올라서자 지지자들은 이름을 연호하며 환호했다.

나 원내대표는 "좌파 정권의 무면허 운전이 대한민국의 경제를 망가트리고 있다"며 "이념 포로 정권이 온통 국정 동력을 적폐세력 청산에만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들의 지지율이 떨어지면 북한만 바라보고 있다"며 "이 정권은 북한하고 적폐청산만 아는 북적 북적 정권이라고 그랬다"고 자신이 했던 발언의 의미를 설명했다.  

이미선 헌법재판관 임명과 관련해 나 원내대표는 "이미선 후보는 코드 사슬로 꽁꽁엮여 있는 후보"라며 "결국 이 정권이 헌법 재판관을 자신들 마음대로 쥐락펴락해서 헌법재판소가 아니라, '친문재판소'를 만드려고 했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후보(임명)를 강행한 것"이라고 외쳤다.

나 원내대표는 "왜 헌법재판소에 이렇게 집착하겠냐. 운동권 1기였던 노무현 정부가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해 얼마나 극렬하게 투쟁했는지 기억할 것"이라며 "만약 헌법재판소에서 국가보안법이 위헌으로 결정나면 우리의 노력도 소용이 없어진다. 막아야 하지 않겠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문재인 정부를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부로 비유했다. 그는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권이 펼친 무자비한 포퓰리즘의 마지막 퍼즐이 사법부 장악이었다"면서 "차베스 정권이 사법부를 굴종하게 하고 복종하게 해서 비판하는 세력에게는 입에 재갈을 물리고 마음대로 감옥에 보내고 그렇게 해서 베네수엘라가 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저는 '엄마 정치인'으로서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며 "우리 자식들과 다음 세대에게 빚더미 대한민국을 물려주려는 포퓰리즘 정권을 막아달라"고 덧붙였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에서 규탄발언을 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에서 규탄발언을 하고 있다.ⓒ정의철 기자


황 대표가 단상에 오르자, 당원과 지지자들은 함성을 질렀다. '광화문에 처음 나왔다'고 말한 황교안 대표는 이날 대회에서 20분을 넘게 문재인 정부를 비난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황 대표는 "문재인 정권은 한결같이 좌파독재의 길을 걸어왔다"며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좌파천국'을 만들어 놓았다"고 맹비난했다. 

황교안 대표는 "헌재재판관까지 청문회 무시하고 국민 반대도 무시하고 짓밟고, 주식 투자 코드 인사를 밀어부쳤다"며 "대한민국 헌법까지 자기 맘대로 주물러서 좌파독재 완성하겠다는 거 아니냐"고 주장했다.  

특히 황 대표는 "힘도 없는 지난 정권 사람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살아간다. 아무리 큰 병에 시달려도 끝끝내 감옥에 가둬놓고 있다"면서, "그래놓고 무려 8,800만건 댓글 조작해서 감방에 간 김경수를 말도 안되는 보석 판결로 풀어줬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친문무죄, 반문유죄, 유권무죄, 무권유죄 이게 이 정권이 말하는 민주주의가 이런 거냐"라고 소리쳤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에서 발언하고 있다.ⓒ정의철 기자

또한 황 대표는 "문 정권 대한민국 경제도 완전히 무너트리고 있다"며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에 대해서 강하게 비난했다. 황 대표는 최저임금 1만원과 관련해 "경제는 바닥을 치고 있는데 최저임금만 잔뜩 올려준다"며 "일자리를 잃게 하고 있다. 자영업자, 소상공인 죄다 망하고 있는데도 최저임금만 올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탄력근로제 확대와 관련해 "알바자리 구하려고 그래도, 그거 구하게 힘들게 만들어 놓고 있다. 그래놓고 일하고 싶어도 일 못하게 근로시간 줄여서 편하게 잘 살자(한다)"며 "굶어죽게 생겼는데 어떻게 쉬냐"고 말했다.  

황 대표는 "민노총(민주노총) 갑질에 대기업 수출이 줄어들고 있다"며 "귀족노조 파업하고 중소기업들은 줄도산에 직면해 있다. 불법파업, 불법 점거, 불법 폭행 온갖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고 발언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은 민노총 눈치만 본다"며 "그러니까 경찰도 검찰도 민노총 손 못대고 있다. 이러니까 어떻게 우리 경제가 살아나겠냐"고 말했다.  

황 대표는 "애국 시민들이 일어나야 한다"며 "문재인 대통령과 이 정권이 정신 번쩍 들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자유한국당은 이 정권의 좌파독재가 끝날 때까지 결코 투쟁을 멈추지 않겠다"며 "제가 선두에 서겠다. 저의 모든 것을 걸고 좌파독재를 기필코 막아내겠다"고 소리쳤다.

이날 대회 말미에는,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가 단상에 함께 올라왔고, 민경욱 자유한국당 대변인이 자유한국당의 결의문을 낭독했다. 민 대변인은 "문재인 정부는 인사참사와 인사강행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국민 앞에 사과하라"며 "인사참사의 책임자인 조국 민정수석과 조현옥 인사수석을 즉각 파면하라"고 요구했다.  

민 대변인은 "자유한국당은 문재인 정권의 독재에 맞서 당 차원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강력한 조치를 총동원해서 국민과 함께 끝까지 심판할 것"이라고 결의했다.

집회 이후, 자유한국당은 세종문화회관 앞에서부터 청와대 인근인 효자동 주민센터까지 가두행진을 펼쳤다.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를 마친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 등 소속 의원들과 당원들이 청와대 앞까지 행진하고 있다.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를 마친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 등 소속 의원들과 당원들이 청와대 앞까지 행진하고 있다.ⓒ정의철 기자
 

양아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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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혁명회, '자주·민주·통일 4월혁명정신으로 민족모순 청산'

4월혁명 59주년 선언, '미국은 남북선언 이행 간섭말라'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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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19  12: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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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월혁명회는 18일 기독교회관에서 '4월혁명 59주년 행사'를 개최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4월혁명 59주년을 맞는 18일 사월혁명회는 '4월혁명 59주년 선언'을 발표해 '외세를 몰아내고 민족자주통일 이룩하자'고 호소했다.

사월혁명회는 이날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4월혁명 59주년 행사에서 발표한 '선언'을 통해 △불평등한 한미상호방위조약 폐기와 주한미군 전면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와 모든 양심수 석방 △ILO기본협약 비준, 최저임금제 개악, 탄력근무제 기간연장 등 노동법 개악 중단 △적폐청산 방해하는 자유한국당과 수구세력 척결을 '4월혁명의 역사적 소명'으로 결의했다. 

또 미국은 4.27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 이행에 간섭말고 한반도 평화통일에 동참하라고 주장했다.

고철환 사월혁명회 공동의장은 인사말에서 "지금 한반도는 미국, 중국, 일본이라는 세계 1,2,3위의 패권국에 둘러싸여 있고 남과 북은 이들 패권국들과 겨루면서 자체 역량으로 우리 고유의 평화를 만드는 극히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문재인 정부는 남북화해의 당사자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민족자주의 정신으로 자주역량을 총동원하여 이들 패권국과 겨뤄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촛불과 함께 해 온 사월혁명회는 외세로부터의 자주, 독재로부터의 민주, 분단으로부터의 통일이라는 4월혁명 정신으로 무장하여 올해를 민족모순을 청산하는 원년이 되도록 적극 행동하겠다"고 다짐했다.

   
▲ 왼쪽부터 고철환 사월혁명회 공동의장, 박흥섭 사월혁명회 공동의장, 이창복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 이호윤 전국대학민주동문회협의회 상임대표, 한충목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창복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은 연대사에서 "4월혁명은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민주혁명임과 더불어 평화통일로 가는 길목이었다. 우리 민족의 운명을 다른 사람의 손이 아닌 우리 손으로 개척해려 한 선배 열사들의 헌신과 투쟁은 작금의 평화와 번영, 통일의 시대로 가는 주춧돌이 되었다"고 4월혁명 참가자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그러면서 "지난해 판문점에서 꽃피운 화해와 평화의 봄은 평양의 가을을 지나 번영과 통일로 나아가고 있으나 여전히 어려움이 적지 않다"며, 반통일 수구세력들은 망언을 일삼으며 평화로 가는 민족의 발목을 잡고 있고 미국은 여전히 대북제재를 무기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일에만 골몰하고 있는데, 문재인 정부는 당사자로서의 역할에 부족함이 느껴진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런 때일수록 민족의 줏대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하면서 "우리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주의 정신으로 뭉쳐야 한다. 역사적인 남북선언의 기치를 높이 들고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의 시대를 함게 열어나가기 위한 전 국민적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쳐나가자"고 강조했다.

6.15남측위는 4월 27일 임진각에서 민족자주의 원칙을 분명히 확인하고 평화와 번영, 통일의 의지를 밝히는 평화인간띠잇기와 4.27판문점선언 1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한다며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이호윤 전국대학민주동문회협의회 상임대표는 전국 70여개 대학의 민주동문회가 모인 전국대학민주동문회협의회는 모든 혁명의 '원조'인 4월혁명 참가자들의 직계 후배라고 할 수 있다며, "불의에 몸을 던지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선배들을 따라 배우겠다"고 참가자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한충목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는 "지난해 4.27판문점선언 이후 6.12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이 열린 것은 미국의 시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힘이 그만큼 커졌기 때문에 미국이 끌려나온 것"이라며, "북미간 70년 격돌이 막바지에 이르렀으며, 우리 민족과 미국, 국제평화세력과 미국과의 대결로 확장되고 있다. 선배님들이 '자주, 민주, 통일'로 정리한 4월혁명 정신이 노선적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시대의 혁명은 판문점선언에서 천명한 평화, 번영, 통일을 실현하는 것"이라며, "4월의 사자들이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를 외쳤던 것처럼 4월 27일 전국에서 1만명 이상이 임진각에 집결해 한반도의 평화혁명, 통일혁명이 일어나고 있음을 세계를 향해 외칠 것이다. 6.15, 8.15, 9.19계기에 평화세력들이 단결해 자주의 기치를 명확히 들겠다"고 밝혔다. 

정종성 한국청년연대 상임대표와 곽효남 진보대학생넷 대표는 4월의 함성을 계승해 한반도, 평화, 번영, 통일의 길을 열어나가는데 앞장서겠다고 결의했다.

   
▲ 대회 참가자들이 '외세를 몰아내고 민족자주통일 이룩하자'는 제목의 4월혁명 59주년 선언문 낭독에 이어 결의를 다졌다.[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이재봉 원광대학교 교수는 '4.27시대 평화와 통일위한 제2의 4월혁명을'이라는 제목으로 특별강연을 진행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사월혁명상 시상은 올해 생략됐으며, '4월혁명 59주년 행사'에 이어 2부에서는 이재봉 원광대학교 교수가 '4.27시대 평화와 통일 위한 제2의 4월혁명을'이라는 제목으로 특별강연을 진행했다. 

이 교수는 1958년 미국의 핵무기가 한국에 반입되었다는 것이 기밀해제된 미국 의회 보고서를 통해 공식 확인되었고, 이승만의 하야와 1960년 4월혁명 직후 한국정부의 장관 임명 과정에 주한 미국대사가 시시콜콜 관여한 것도 드러났다고 하면서 그로부터 두 세대의 세월이 지났지만 미국의 간섭은 여전한데 이를 해결하자면 제2의 4월혁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사월혁명회과 민주노총, 한국진보연대는 19일 정오 수유리 4.19묘소에서 민족민주운동단체 합동참배식을 거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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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신문 ‘김정은 위원장의 시정연설은 철저한 공격전’

노동신문 ‘김정은 위원장의 시정연설은 철저한 공격전’
 
 
 
김영란 기자 
기사입력: 2019/04/21 [09:04]  최종편집: ⓒ 자주시보
 
 

 

북의 노동신문이 21일 경애하는 최고영도자동지의 시정연설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인터넷에 올라온 소식에 의하면 노동신문은 김정은 위원장의 시정연설이 갖고 있는 역사적 의의를 잘 알고 조국의 융성번영과 찬란한 미래를 앞당기기 위하여 힘차게 싸워나가야 한다고 호소했다.

 

신문은 김정은 위원장의 시정연설은 현시기 사회주의 강국건설과 공화국 정부의 대내외정책과 관련한 문제들에 완벽한 해답을 주는 기념비적 문헌이라며 “(시정연설에서는현 정세와 새로운 발전단계에 들어선 우리 혁명의 요구우리 인민의 지향을 정확히 분석한 데 기초해 사회주의 강국건설에서 견지하여야 할 근본원칙과 입장과학적인 전략과 전술을 뚜렷이 밝혀주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신문은 김정은 위원장의 이번 시정연설은 사회주의 강국건설에서 김일성-김정일주의국가건설사상을 철저히 구현해나갈 데 대한 문제로부터 나라의 모든 힘을 경제건설에 집중하여 사회주의의 물질적 기초를 튼튼히 다질 데 대한 문제북남관계개선과 조선반도평화보장을 위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혁명이 절실히 요구하는 문제들에 전면적인 해답을 주어 사회주의 건설과 우리 혁명발전에서 커다란 이론 실천적 의의를 가진다고 거듭 강조했다.

 

신문은 이번 김정은 위원장의 시정연설의 역사적 의의 첫 번째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국가건설 사상과 업적을 계승 발전시켜 주체의 사회주의강국 건설이론을 비상히 풍부화한 데 있다며 “(시정연설은김일성-김정일주의국가건설이론을 더욱 심화시켜 국가건설과 활동에서 자주의 혁명노선을 견지하고 국가 활동과 사회생활 전반에 인민대중제일주의를 철저히 구현할 데 대한 원칙적 문제들과 사회주의 경제건설에서의 전략적 방침을 비롯해 우리 공화국을 영원히 김일성김정일동지의 국가로자주자립의 강국인민의 이상사회로 빛내어나가기 위한 방향과 방도를 뚜렷이 명시한 강령적 지침이라고 밝혔다

 

이어 신문은 김정은 위원장의 시정연설로 우리 인민은 사회주의강국건설의 곧바른 길을 따라 힘차게 전진해 나갈 수 있는 위력한 사상 이론적 무기를 가지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신문은 김정은 위원장의 시정연설의 역사적 의의 두 번째로 우리의 전진을 가로막아보려고 날뛰는 적대세력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우리 힘우리 식으로 사회주의 건설을 최대의 속도로 다그쳐 나갈 수 있게 하는 강력한 무기를 마련해준데 있다고 주장했다.

 

신문은 구체적으로 시정연설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적대세력들의 제재해제문제 따위에는 이제 더는 집착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힘으로 부흥의 앞길을 열어나갈 것이라는데 대하여 천명한 것은 적대세력들의 정수리에 철추를 내리는 통쾌한 선언으로 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신문은 김정은 위원장의 이번 시정연설은 철저한 공격전으로 일관되었다며 적대세력들의 제재 돌풍은 자립자력의 열풍으로 쓸어버려야 한다는 사상에는 남들이 가늠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자력갱생의 힘을 사회주의 건설을 추동하는 실제적인 원동력으로 전환시켜 놀라운 발전상승의 길로 질풍 쳐 내달리며 자력부강의 새 역사를 펼쳐나가려는 우리 당의 확고한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번 시정연설은 굴함 없는 공격정신으로 역경을 순경으로 전환시키고 보다 큰 승리를 이룩하려는 절세위인의 드팀없는 의지와 자기 힘으로 부강조국을 일떠세우려는 우리 인민의 강용한 기상이 응축된 기념비적 노작이라고 강조했다.

 

신문은 김정은 위원장의 시정연설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 세 번째로는 우리 인민뿐 아니라 자주와 정의를 지향하는 세계의 모든 나라와 인민들에게 신심과 용기를 안겨주고 반제투쟁으로 힘 있게 고무추동한데 있다고 주장했다.

 

신문은 이번 시정연설에서 북미 관계와 관련해 원칙적 입장을 밝힌 것은 대북적대시정책을 노골화하고 세계를 제 마음대로 농락하는 세력들의 책동을 무자비하게 짓뭉개버리는 김정은 위원장의 담대한 배짱으로 이는 북의 주민들뿐 아니라 국가의 근본이익과 관련해서는 티끌만 한 양보나 타협도 하지 말아야 하며 오직 자체의 힘으로 국력을 강화하고 번영의 길을 열어나가야 한다는 철리를 알려줘 세계 진보적 인민들에게 커다란 고무적 힘을 안겨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신문은 김정은 위원장의 시정연설은 현시대에 제국주의와 어떻게 맞서 투쟁하여야 하며 자기의 존엄을 지키자면 어떤 입장과 원칙을 견지하여야 하는가를 깊이 새겨주었다고 강조했다.

 

신문은 김정은 위원장이 이번 시정연설에서 밝힌 남조선 당국과 손잡고 북남관계를 지속적이며 공고한 화해협력관계로 전환시키고 온 겨레가 한결같이 소원하는 대로 평화롭고 공동 번영하는 새로운 민족사를 써나가려는 확고한 의지를 피력했으며 이는 조국통일의 밝은 미래를 앞당겨오는 데서 우리 민족 모두가 변함없이 틀어쥐고 나가야 할 고귀한 지침이라고 강조했다.

 

신문은 마지막으로 김정은 위원장의 시정연설에서 밝힌 투쟁의 기치강령적 지침을 백승의 보검으로 틀어쥐고 자기의 힘으로 앞길을 개척해 나가려는 북녘 주민들의 진군은 그 무엇으로써도 돌려세우거나 멈춰 세우질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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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만행의 역사는 지우려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기고] 5.18과 나의 인생 유전

 

 

 

 

 

자유한국당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모독한 김순례, 김진태 의원에 대해 '솜방망이' 징계를 내렸다. 사실상 '면죄부'를 쥐어 줬다는 비판도 나온다. 5.18은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인이 자국민을 학살하고, 이를 통해 독재 정권을 낳은 최악의 인권 유린 사태였다. 과거의 사실이 밝혀진 오늘날까지도 그 후유증은 여전히 깊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로 신군부의 언론 통제에 항의해 사표를 쓴 후 학자가 된 이상백 전 건국대 부총장이 최근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망언 사태를 보고 과거 자신의 경험담을 전해 왔다. 편집자.  
 
나는 교수이기 이전에 기자였다. 어언 39년의 세월이 건너간 옛 일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지고 전두환 신군부가 당시 '언론자유 수호선언'에 가담한 기자들의 대량 해직 폭거를 자행하기 전, 나는 과감히 먼저 사표를 던지고 신문사를 떠났다. 광주 항쟁의 무력 진압에 항거하여 20대 후반부터 40대 초까지 오롯이 내 청춘을 바친 언론인 생활을 마감한 것이다. 그 후 보안사와 안기부의 지속적인 미행과 감시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으며, 한동안 실업자 생활을 면치 못하는 등 굴곡의 인생 유전이 시작되었다. 
 
얼마 전 몇몇 극우 성향 국회의원들의 '5.18' 폄훼 발언과 '600명 북한군 침투설', 전두환 씨의 광주 법원 출두로 광주민주화운동이 새삼 부각되었다. 한국동란 이후 가장 비극적인 참사로 기록되는 이 사건을 느닷없이 정쟁의 도구로 들고 나온 일부 보수 정치인들의 태도와 전 씨의 뻔뻔스런 발언에 탄식과 울분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윽한 동안 잊고 지내던 5.18 당시의 험악한 사회 분위기를 전하고, 그에 저항하여 기자 생활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나의 사연을 말하고자 한다.  
 
5.18은 광주에서 일어났지만 그 불행은 전국적으로 확산됐으며, 나 역시 그런 불이익과 불행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5.18은 전국의 각 직장의 운명은 물론, 평범한 사람들의 개인사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 비극이었다.  
 
김재규의 저격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자 이 나라 모든 국민의 가슴은 그 동안의 오랜 군부독재가 끝나고 이 땅에도 진정한 민주 정치가 구현되리라는 기대로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그 이후의 나라 현실은 국민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박정희 정권 때보다 더 가혹한 신군부의 등장으로 귀결되었다.  
 
이에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지에서 대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고, 마침내 광주에서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자 전두환 일당이 공수부대를 투입, 무력으로 이를 제압하는 한편 자신들의 만행을 은폐하기 위한 방편으로 철저한 언론통제에 들어갔다. 신군부는 일간 매체에서 제작되는 신문이 시중에 배포되기 전 반드시 군 보안사의 검열을 거치도록 제도화 했고, 그들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를 삭제하도록 강제했다.  
 
그 당시 군부의 검열을 받기 위하여 시쇄 몇 부를 들고 서울시청에 마련된 검열실을 다녀온 기자들의 참담한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한 곳이라도 온전한 기사를 싣기 위하여 검열관과 치열한 실랑이를 벌이며 그 정당성을 역설했지만, 번번이 위관급 검열관의 강압에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허탈과 울분으로 상기된 표정들이 지금도 나의 안전에 어른거린다. 
 
평상시 같으면 이미 가판대에 진열되었을 시간이라 다시 조판을 할 수는 없고, 어쩔 수 없이 윤전기에 걸려 있는 연판에서 지적된 부분을 긁어내고 신문을 찍어내다 보니 곳곳이 여백으로 뻥뻥 뚫린 흉물인데다가 더러는 문맥조차 제대로 연결되지 않는 만신창이 신문을 독자들 앞에 내놓아야 했다.  
 
이와 같은 전대미문의 언론 탄압에 분개한 기자들의 저항 운동이 당시 동아일보를 비롯해 몇몇 신문사에서 암암리에 전개되고, 그 흐름 속에서 나의 인생행로도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1980년 당시 나는 동아일보 편집국 스포츠동아부의 편집기자로 재직하고 있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한창 진행 중이던 5월 하순, 같은 부서의 이계홍 기자가 은밀히 나에게 다가와 지금 편집국 내에서 뜻있는 기자들이 ‘언론자유 수호선언’을 준비 중인데 이 선배도 동참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즈음 사회부의 심송무 기자, 문화부의 박병서 기자, 국제부의 김재홍 기자 등이 주동해 이 선언을 준비 중이었다. 그 선언서에 서명할 동지를 규합하기 위하여 각 부서에 실무 간사 한사람씩을 선정했는데, 그때 스포츠동아부에서는 이계홍 기자가 간사로 나섰다. 
 
나 역시 5.18 사태에 분개하던 터라 이 기자의 권유에 놀람과 함께 공감을 느꼈으나 내심 한편으로는 그 서명이 가져올 후환을 예감하며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좀 더 생각해보고 가부를 알려주겠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철학도인 이 선배 같은 분이 서명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잘 생각해 보시고 결과를 알려주십시오." 
 
그날 밤 나는 이 문제로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섣불리 서명했다가 해직되는  것은 물론이요, 경우에 따라서는 군부정권에 체포돼 구속되고, 고문을 당할 수도 있었다. 당시는 항용 그랬으니까 각오해야만 했다. 이런 참혹한 상황에 내가 과연 동조해야 하는가?
 
이런 고뇌 중에도 문득 문득 되씹히며 떠오르는 것이 "철학도인 이 선배 같은 분이 서명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라는 이 기자의 목소리였다. 심각한 심적 갈등으로 엎치락뒤치락 하던 어느 순간 문득 다음과 같은 통렬한 자각이 나에게 다가왔다. 
 
"이른바 철학도로서 나름 지적 존재임을 자부해온 나에게 그 지적 존재로서 나의 존재가치를 드높여 주는 것이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일찍이 칸트가 지적한대로 내심의 도덕률일 것이다. 한갖 고상한 이론이 아니라 나의 행동의 원리로서 자각적인 결단을 촉구하는 내심의 외침 말이다. 한데 그동안 나는 그 외침에 과연 얼마나 귀를 기울이며, 그에 부응하고자 노력해 왔던가? 특히 결단의 대상이 나의 이해관계와 충돌할 경우, 과연 나는 이를 뿌리치고 내심의 외침, 곧 양심의 명령에 따라 행동해 왔던가? 아무리 좋은 사상이나 생각도 행하지 않으면 헛된 꿈과 다를 바 없는 것 아닌가? 두려워하지 말고 나서자. 양심의 소명에 충실하자. 그것이 양심을 지킨 철학도로서의 책무다." 
 
이튿날 나는 출근하자마자 이 기자를 불렀다.  
 
"이형, 앞장서시오. 심송무 기자에게 갑시다." 
 
이렇게 해서 나는 5.18의 거센 물결에 몸을 던지게 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시련에 직면하게 된다. 나의 '언론자유수호선언' 동참 소식이 알려지면서 소속 부서인 스포츠동아부 부원들의 미묘한 반응들이 침묵 속에 나를 긴장시켰다. 그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데스크였다. 그는 미리 부원들을 다잡은 뒤 나를 불렀다.  
 
"이상백 씨, 최고참 선배가 그럴 수가 있어? 선동하는 거요?"
 
분노가 묻어나는 일갈이었다. 그리고 그의 일장 훈시가 장황하게 이어졌다. 
 
"과거의 그 어느 정권과도 비교할 수 없는 거친 신군부가 마음만 먹으면 신문사 하나쯤 정간시키거나 폐간시키는 일쯤 식은 죽 먹기인 시국이요. 자중하시오. 선임기자가 선동하는 모습은 모양이 좋지 않소!"  
 
현 시국에 대한 기자들의 결사(結社)를 염려한 회사 당국의 지시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기자들에 대한 선무 공작은 늘 그렇듯 평기자와 지근거리에 있는 데스크들의 몫이다. 최고참 기자에다 선임기자인 내 행동을 그는 20여 명 부서 기자들 앞에서 제압하면서 다른 기자들이 동요하지 못하도록 무언의 압력을 행사한 것이다. 나는 후배기자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처지여서 내 움직임 하나하나가 주시의 대상이 되는 상황이었다. 
 
데스크의 강압적 충고에 나는 한동안 꾹 참았다. 그러나 신군부의 폭력진압을 불가피한 일로 용인하는 듯한 그의 언동에 발끈하고 말았다. 욕설과 함께 심한 언쟁이 오가고 여태까지 흉허물없이 지내던 둘 사이는 한 순간에 회복하기 어려운 관계로 돌변했다. 노선상의 차이는 이처럼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악화되었으나, 내 양심이 시키는 행동이었으므로 양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 후 사측으로부터도 협박성 회유가 있었다. 고참 기자들이 선두에 나서면 안 된다는 무언의 압력이 다각적으로 내려왔다. 나는 신군부와의 싸움 이전에 데스크를 비롯한 사측과 먼저 싸워야 하는 입장에 처하고 말았다.  
 
5.18 폭거에 대한 언론자유 실천운동은 독립운동을 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지난하다는 것을 느꼈다. 하루는 평소 가깝게 지내던 모 부장이 나를 다방으로 불러냈다. 그분은 내 팔을 붙잡더니 사정하듯, 그리고 충고하듯 말했다. 
 
"이 기자, 뭐 언론자유 선언인가에 서명했다면서? 75년 광고 사태 때도 회사 경영에 큰 시련이 있었던 거 아시잖아. 제발 너무 나서지 말고 회사 안정에 협조하세요. 이 기자가 다칠까봐 걱정돼서 하는 말이요. 용기는 가상하지만 개인이 다칠 때 누가 보상할 것이요? 자중하시오."  
 
그분 말대로 내가 걱정되어 충고 한마디 해준 것이라 생각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회사 측의 압력임을 알게 모르게 시사해주는 것이어서 뒷맛이 씁쓸했다. 이런 때 회사가 구성원을 보호해주어야 하는데, 도리어 군부 편에 서는 듯한 압력에 나는 절망하고 말았다.    
 
날이 갈수록 데스크와의 알력이 깊어졌다. 그와는 직급의 고하를 떠나 사사로운 입장에서 오랜 친구지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서로 눈을 맞추는 것조차 겸연쩍을 정도로 서먹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이 같은 그와의 반목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회사를 등에 업고 나를 짓누르는 것이라 여겨지자 더욱 참기 어려운 모욕감과 분노가 일었다.
 
자고로 심적 고통의 약은 한잔 술 아니던가? 나는 이래서 매일 저녁 청진동 뒷골목 소줏집에서, 또는 지금은 없어진 국제극장 뒤 카페에서 가까운 친구들과 후배기자들을 불러내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해서는 귀가 시간에 늦곤 했다. 패거리 가운데는 타사의 박 모 후배 기자도 있었다. 그는 당시 진행되고 있는 광주 현지의 상황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무언가 비선망이 있는 듯 했다.  
 
광주의 신문사 지국조차 폐쇄되다 보니 도통 안개 속인 그곳 소식을 우리는 그의 입을 통하여 생생히 들을 수가 있었다. 며칠 전엔 광주역 앞에서 시위대 몇 명이 죽고, 또 며칠 전엔 전남도청 앞에서 수백 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시 외곽에서도 탈출하던 시민들이 무더기로 총 맞아 죽고, 그리고 마침내 시민군이 무장했다고 하는 내용들이었다. 이런 내용을 세상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뉴스를 다루는 기자들마저 몰랐으니 암흑세상이라고 해야 옳았다. 
 
그래서 그는 이런 참상을 한 줄도 보도하지 못하는 신문사에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며 비분강개했다. 그래서 떠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나보고도 이런 비굴한 지성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형도 삼시세끼 굶지 않을 텐데 왜 형답지 않게 꿍꿍 앓고만 있느냐며 취중이었지만 거칠게 나를 추궁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폭압권력에, 세상에 항변하는 절규였을 것이다. 나는 박 기자의 충동적인 권유 때문에서가 아니라,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작금의 여러 가지 내 처지를 생각하며 나도 이제 거취를 결단해야 할 때가 된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나는 마침내 사표를 쓰기로 결심했다. 문제의 서명으로 인해 언젠가 강제 해직이 될 수도 있는 처지인데 몇 주, 몇 달쯤 더 버틴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래서 사내의 '언론자유실천위원회'가 정식 결성되기 전 사표를 던지고 회사를 나왔다. 그렇게 해서 나는 사회의 첫 일터였던 신문사를 떠났다. 
 
그러나 결행은 했지만 내면의 갈등 때문에 견딜 수 없었다. 당장 실업자가 된 공포감이 나를 짓눌렀다. 더군다나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을 등졌다는 아쉬움 때문에 견디기 어려웠다. 막상 떠나긴 했지만 정작 갈 곳이 없다는 현실이 또한 나를 암담하게 했다. 부모와 형제들, 자식을 거느린 장자로서 앞으로도 계속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데 섣부른 행동을 한 것이 아닌가, 후회되기도 했다.  
 
광야에 내던져진 마음으로 한동안 거리를 헤매었다. 막상 사표를 던지고 나니 동료, 후배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다. 영웅주의의 발로가 아니라 내 양심의 소명에 따른 것인데, 혹 영웅주의적 모습으로 비쳐질까 주저되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당장 개인적으로 좋은 면도 있었다. 아우들의 등록금 등으로 부채의 중압감에 허덕이던 나에게 퇴직금이라는 목돈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나는 석사학위를 갖고 있었고, 두서너 군데 강사를 뛰면 최소한의 생활은 버텨낼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공부를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 강사라도 제대로 하려면 박사과정을 이수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뒤늦은 공부 끝에 박사과정에 적을 두었다.  
 
그런 어느 날 뜻밖의 보도가 나왔다. 전두환 정권의 문교부 장관이던 이규호 장관이 졸업 정원제를 시행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내용인즉슨 대학 입학 정원을 현재보다 30% 이상 늘려 입시 경쟁을 완화하고 대신 졸업 시에 그에 비례한 30%를 탈락시켜 졸업을 어렵게 만든다는 제도였다. 치열한 입시 경쟁을 완화하여 입시생과 학부모의 환심을 사는 한편 졸업을 어렵게 함으로써 재학생들이 데모 따위에 한 눈을 팔지 않고 학업에 전념하도록 만든다는 궁리에서 나온 정권 나름의 묘책이었다. 
 
이렇게 학생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경우 교수의 수요 역시 급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당시 박사 과정에 있던 예비 교수들이 하나둘 대학 전임으로 자리를 잡았고, 나도 그 흐름에 편승하여 마침내 지방 대학에 자리를 얻었다. 본격적인 학자이자 교수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곧 난처한 문제가 대두되었다. '언론자유선언'에 서명한 후 사표를 쓰고 퇴사한 이력으로 인해 안기부의 신원 조회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였다. 다행히 그것은 별 문제 없이 넘어 갔다. 
 
신군부의 압력으로 신문사들이 '언론자유선언'에 참여한 기자들을 일제히 해직한 날이 1980년 8월 9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앞서 자진 사표를 던지고 나왔으므로 그들의 체킹 포인트를 비켜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만의 생각이었다. 교수 생활 초기에 기자 시절 '언론자유선언'에 서명한 사실과 이로 인해 사표를 쓰고 퇴직한 사실이 보안사의 정보망에 체크돼 또 다른 감시의 그물망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나의 연구실에 교무과장이 찾아와 엉뚱한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날 오전 안기부 직원이란 사람이 찾아와서 최근 나의 동태를 묻고 갔다는 것이다. 아마도 신문사 시절에 있었던 일로 문제가 생긴 것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에게 학교에서의 나의 일상에 관하여 좋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했다. 특히 강의를 잘해서 학생들의 인기를 독점하고 있는 유능한 교수라고 전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지난 학기말 수강생 수가 많은 교양과목 교수들을 상대로 시범 실시된 학생들의 강의평가에서 내가 최고점을 받은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얼마 후 건국대학교로 이직하게 되어 교수들에게 이임인사를 하던 중에 알게 된 일이다. 그 지방 출신으로 사회활동이 잦은 모 교수가 그 당시 내가 당국의 지시로 학교에서 파면을 당할 뻔했다는 저간의 사정을 귀띔해주었다. 요즘 생각으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당시는 이처럼 독재 정권이 요주의 인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인사 전횡을 일삼던 시기였다.   
 
문제를 제기한 쪽은 안기부가 아니라 보안사였고, 보안사로서는 직무상 민간인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지라 내 문제를 안기부에 이첩해 처리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는 보안사와 안기부라는 두 정보기관 간에 암투가 벌어지던 시절이라 그 지방 안기부 책임자가 "학생들로부터 인기가 많은 교수를 공연히 잡으려 한다면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면서 내 문제를 덮어버리는 바람에 무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덧붙여 그는 학군단장으로 평소 학내에서 호가호위하던 현역 육군 소령의 모함이 사건의 발단이었다고 했다. 공적인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학군단 학생들의 공결 처리를 요구하는 그의 제의를 거절한 일이 있은 후 그가 암암리에 내 뒷조사를 했고, 그 과정에서 정보기관에 문제 교수로 제보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동아일보에서 시국에 저항하여 사표를 던지고 나온 문제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문제교수로 낙인찍어 제보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대학 캠퍼스는 이렇게 정권이 다른 이들은 알게 모르게 여러 가지 학내 감시 정보망을 구축해 공포 분위기로 몰고 가던 시기였다.  
 
그 무렵 나는 수도권인 부천에 거주하고 있었다. 겨울 방학 중 어느 날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경찰 한 명이 찾아왔다. 조사할 일이 있으니 경찰서로 함께 가줘야겠다는 것이다. 
 
경찰서에 도착하자 정보과장이라는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대뜸 "당신이 북한 체제가 남한보다 우수하다는 등 용공적 발언을 하고 다닌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자술서를 쓰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철학교수다. 평소 나는 강의시간에 '사회는 전투적인 혁명에 의해서만 발전한다'는 공산주의의 폭력성과 인민을 마르크스 레닌주의 및 김일성 주체사상이란 이데올로기의 노예로 길들이는 북한식 교육을 소개하고 비판해온 사람이다. 그런 내가 북한을 두둔하고 다녔다니 동의할 수 없다"는 항변과 함께 자술서 작성을 거부했다.  
 
그러나 밤이 새도록 정보과 형사들이 번갈아 들어와 회유와 협박으로 나를 어르고 달래며 자술서 작성을 강요했다. 이런 사태가 사흘이나 계속됐다. 그들의 협박보다 더 참기 어려운 것은 이런 감옥과 같은 부정의한 세상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사회 분위기였다.   
 
그리고 내 개인적으로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최근 지방 상공인들과 관변 단체의 모임에 초빙되어 강연을 했던 일이 생각났다. 명색이 철학교수인지라 '사회 지도층과 도덕성'이란 주제를 가지고 강연을 했는데 "회사건 국가건 지도 계층의 윤리적 규범이 그 사회와 조직의 성패를 좌우한다. 특히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공직자의 윤리의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 현실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데 공직자의 윤리의식과 민주의식이 절실히 요구된다"라는 요지의 강연을 했다.  
 
며칠 동안 경찰서에 붙들려 있는 나를 보고 심각성을 느낀 어머니와 동생들이 구명운동에 나섰다. 어머니는 부천시 부녀회의 임원이었고, 그곳 유력 인사의 부인들과 친분이 있었다. 또한 나와는 달리 초등학교 때부터 부천서 학교를 다닌 동생들의 동창생 가운데는 부친이 지방 명사인 친구도 있었다.  
 
어머니와 아우들이 그런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나의 구명 운동에 나섰다. 몇 분이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셨고, 예술인 중 원로 몇 사람들도 발 벗고 나섰다.
 
그들의 탄원 덕분이었을까? 쇼비니스트 풍의 정보과장과 달리 신사적인 인상의 경찰서장이 심사숙고 끝에 나의 훈방을 결정했다. 내 문제가 정보기관으로 이첩되었더라면 경찰서에서보다 더욱 혹독한 고초와 함께 교수직마저 부지할 수 없는 사태가 초래될뻔한 일이었다. 이처럼 당시는 공포사회였다. 
 
이 모든 것은 동아일보 사직 사건으로부터 연원했다고 생각된다. 그때 이미 요즘 말하는 블랙리스트가 작성돼 나의 활동 공간을 알게 모르게 제약하는 수단으로 이용된 것이다. 나는 이런 것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여유를 부리고, 평소의 소신대로 의사를 개진했지만 그럴수록 감시망을 벗어날 수 없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에워싼 '작은 저항'이 이토록 끈질기게 내 인생의 시련으로 다가올 줄이야 나는 상상도 못했다.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는 내가 이럴진대 당시 광주 항쟁의 복판에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감시는 어땠을까. 상상만 해도 몸이 오싹해진다.  
 
나는 사실 이런 글을 쓸 생각이 없었다. 80대 노년기에 이른 나로서는 한창 젊었을 때의 뜨거운 열망을 추억으로 간직하며 세상의 변화를 묵묵히 응원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데, 불과 수십 년 전의 일, 그것도 천하가 다 아는 5.18을 아무렇지 않게 폄훼와 왜곡, 조작까지 하는 자들을 보고 참을 수 없어서 펜을 들었다.  
 
역사를 지우려 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도대로 지운다고 해서 지워지지 않는 것이 역사다. 화인처럼 더 생생히 부활하는 것이 역사의 정명(正名)이다. 역사를 망각한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것을 시민정신이 깨닫고 있다. 때문에, 그것은 더욱 선명하게 깃발처럼 나부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정명의 정신으로 살아갈 것이다. 
 
필자 약력 
 
1939년 충남 홍성 출생.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졸업, 같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 받음. 
대학 졸업 후 1980년까지 동아일보 기자 등 언론계 종사. 
그 뒤 전주대 전임강사를 거쳐 건국대학교 인문대학 교수.
건국대학교 부총장 역임.  
저서로는 <존재와 시간의 사유>(건국대출판부) 
<종교-영원과의 화해>(공저, 황소와 소나무)  
<이성과 반이성>(공저, 지성의 샘) 
<자아와 실존>(공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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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네이버에서 '소상공인' 간담회가 열린 까닭

[현장] 박영선 장관, "최저임금 부작용 대비, 600만 소상공인 입김을 대변하겠다"

19.04.19 20:38l최종 업데이트 19.04.19 20:48l

 

 

 서울 네이버 파트너 스퀘어 내부 사진들
▲  서울 네이버 파트너 스퀘어 내부 사진들
ⓒ 류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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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아래 중기부) 장관이 19일 포털업계 대기업 네이버를 찾았다. 이곳에서 열린 소상공인 상생 현장 간담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박 장관은 이날 오후 2시께 서울 네이버 파트너스퀘어를 방문했다. 이날 간담회에는 최승재 소상공인연합회 회장을 비롯한 11명의 소상공인연합회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중기부에 취임한 후 박영선 장관이 소상공인 업계와 간담회를 갖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박 장관은 이 자리에서 몇 번이나 '상생과 공존'의 가치를 강조했다. 박 장관이 직원들에게 직접 제안했던 독서 토론회에 필요한 책도 상생을 위해 지역 서점에서 사오겠다고 했다. 박 장관은 이날 참석한 박대춘 한국서점조합연합회장을 향해 "요즘 서점 사정이 좋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며 "독서토론회에 필요한 책 중 절반 가량을 역사가 오래된, 작은 서점에서 사려고 한다"고 말했다. 

"4차 산업 방향성에는 공감하지만 연착륙 필요해"

 

박 장관은 '4차 산업'의 방향성에는 공감하면서 동시에 연착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 장관은 "카카오톡이 처음 생겼을 때 (카카오톡쪽으로부터) '수익성으로 인해 회사가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다'는 연락이 오기도 했다"면서도 "그런데 (카카오가) 지금은 신기루가 된 것처럼, 변화하는 시기에는 위기와 기회가 함께 찾아온다"고 말했다.

이어 "소상공인 대부분이 온라인 쇼핑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면서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의) 상권 전환기인 이 때에 소상공인에 대한 피해가 크지 않도록 정부가 어떻게 4차 산업을 연착륙시킬 것인 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박 장관은 이 자리에서 소상공인과 상생하려는 기업들의 노고를 치켜세웠다. 박 장관은 "네이버의 경제관은 '네이버가 가진 일부를 내려놓고 소상공인과 함께 채워가자'는 것"이라면서 "오늘 파트너 스퀘어를 살펴보니 촬영이 필요한 소상공인들을 위해 네이버가 스튜디오를 제공하는 등 윈윈(WIN-WIN)의 노력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서울 네이버 파트너 스퀘어 내부 사진들
▲  서울 네이버 파트너 스퀘어 내부 사진들
ⓒ 류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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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박 장관은 이날 간담회에 앞서 파트너 스퀘어 시설 곳곳을 둘러봤다. 화장품 콘텐츠 촬영을 위해 만들어 놓은 스튜디오 앞에서 발걸음도 멈췄다. 네이버쪽 관계자는 박 장관에게 해당 스튜디오를 '소상공인들이 이용하도록 만든 곳'이라고 설명했다. 네이버 파트너스퀘어는 소상공인을 지원하기 위해 2013년 네이버가 만든 '상생형' 공간으로, 소상공인을 위한 교육 장소 및 스튜디오로 활용되고 있다.

박영선 장관, 대기업-소상공인 상생 모델로 '서울 네이버 파트너스퀘어' 언급하기도
   
이날 네이버 파트너스퀘어를 소상공인 간담회 장소로 선택한 것 이러한 가치를 강조하기 위함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박영선 중기부 장관은 취임한 후 줄곧 '상생'을 강조하는 행보를 보였다. 지난 11일의 당진 전통시장 방문이 대표적이다. 박 장관은 이 시장을 이마트(노브랜드)와 지역 상인이 공존하는 '우수 사례'로 꼽으며, 자발적인 상생 문화를 만들기 위해 앞장서겠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중기부 관계자는 간담회 후 브리핑을 통해 "박영선 장관의 대외 일정에는 상생과 공존이라는 테마가 있다"며 "앞으로의 정책적 행보 역시 한동안 상생과 공존 측면에서 지역 선정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날 최승재 소상공인연합회 회장은 간담회에서 박영선 장관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최 회장은 "장관님과는 오랜 시간동안 현장에서 울고 웃었다"며 "소상공인 전체가 인정하는 분"이라며 친밀함을 보였다. 

이 자리에서 최 회장은 최저임금과 주휴수당, 소상공인 기본법 등에 대해 차례대로 언급했다. 이 중 최 회장이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은 최저임금. 최 회장은 "(박 장관이) 청문회에서 최저임금 문제를 (회사) 규모별로 나눠 생각해 볼 문제라고 말했는데, 이에 공감한다"며 "소상공인뿐 아니라 저소득층 일자리도 줄어들고 있는데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때"라고 했다. 

박 장관은 이에 대해 "현 정부가 최저임금에 대해 갖고 있는 방향성에는 공감한다"면서도 "부작용에 대해 더 대비를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이어 "최저임금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정책을 하나 둘씩 만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라며 "600만 소상공인들의 입김을 대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19일 네이버 파트너 스퀘어에서 열린 소상공인 상생 간담회에서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박영선 장관이 발언하고 있다.
▲  19일 네이버 파트너 스퀘어에서 열린 소상공인 상생 간담회에서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박영선 장관이 발언하고 있다.
ⓒ 중소벤처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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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관건적 시기”…뚜렷해진 ‘줄타기 외교’

 

입력 : 2019.04.20 06:00:03 수정 : 2019.04.20 06:01:01

 

김정은 “관건적 시기”…뚜렷해진 ‘줄타기 외교’
 

시진핑에 보낸 편지서 친선 강조 
베트남에도 답전…우방과 밀착
러시아와 8년 만에 정상회담 등 
‘포스트 하노이’ 노선 강화 움직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줄타기 외교’가 뚜렷해지고 있다. 김 위원장은 지난 12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자력갱생”을 ‘포스트 하노이’ 노선으로 내세운 이후 사회주의 연대 움직임을 강화하고 있다. 북·러 정상회담이 다음주(24일 혹은 25일) 개최될 예정이고, 중국·베트남 등 우방국과도 더 밀착하고 있다. 반면 미국과 한국에 대해선 연일 압박성 메시지를 던지며 ‘불가근불가원’식 거리를 두고 있다. 김 위원장이 올 연말을 비핵화 협상 시한으로 통보한 가운데, 미국에 일방적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외교 공간을 확보하고 ‘장기전’에 대비해 협상력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전략적으로 긴 호흡으로 움직여온 북한 외교가 또다시 변곡점을 맞는 흐름이다.

김 위원장은 최근 자신이 국무위원장에 재추대된 것을 축하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지난 17일 답전을 보냈다고 노동신문이 19일 보도했다. 김 위원장은 올해가 북·중 수교 70주년이라는 점을 들어 “조선반도의 정세 흐름이 매우 관건적인 시기에 들어선 오늘 북·중 친선협조 관계를 더욱 귀중히 여기고 전진시켜나가는 것은 중대한 사명”이라고 했다. “가장 진실한 동지적 관계”라고도 했다.

김 위원장은 응우옌 푸 쫑 베트남 국가주석에게도 “총비서 동지의 축하는 사회주의 강국 건설을 위한 우리 당과 국가와 인민의 투쟁에 대한 힘 있는 지지와 고무가 된다”는 답전을 보냈다. 그는 지난달 초 베트남을 방문했으며, 베트남식 개혁·개방 모델을 염두에 두고 있다.

김 위원장은 내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는다. ‘하노이 노딜’ 이후 김 위원장의 첫 외교 행선지다. 8년 만의 북·러 정상회담에선 경제협력 문제가 주로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국제적 우군 확보·경제 지원 등 
‘장기전’ 대비 협상력 강화 해석
한·미엔 연일 압박 메시지 대조
 

김 위원장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에 제재 완화에 대한 지원사격을 요청할 것으로 예상된다. 안보리 제재에 따라 올해 말까지 해외에 있는 북한 노동자들이 모두 송환될 예정인데, 북한은 러시아에서 일하는 자국 노동자들의 체류를 희망하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으로 중국이 제재 문제에 대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러시아를 우군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반면 미국과는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지난 15일 김일성 주석 생일(태양절)을 맞아 김 위원장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고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전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17일 신형 전술유도무기 사격 시험을 현지지도했으며, 북 외무성은 18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을 북·미 협상에서 제외시킬 것을 요구했다. 트럼프 대통령 축하 메시지와 ‘정상 간 신뢰’를 내비치면서도 미국을 압박하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남측에 대해서도 “오지랖 넓은 중재자가 아닌 당사자”가 돼달라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남북 교류협력 사업은 사실상 중지됐다. 개성 공동연락사무소의 정례 협의 채널인 남북 소장회의는 이날로 8주째 열리지 않았다. 

북한의 이 같은 태도는 자력갱생을 통한 경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사회주의 연대를 복원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미국으로부터 제재 완화를 받아내기 어려워진 만큼 국제사회에서 우군을 확보함으로써 비핵화 협상의 장기화에 대비하고 협상력을 높이려는 것이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은 “북한이 핵 포기 카드를 들고 나왔기 때문에 사회주의 연대 등 국제관계 개선도 가능한 것”이라며 “미국과의 협상을 재개하기 전에 외교적 공간을 확보하고 체력을 강화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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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방종지수’

‘저질언론지수’를 만들어 ‘자유지수’를 보완해야 한다
 
강기석 | 2019-04-19 13:47:5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국경 없는 기자회」가 18일 발표한 2019년 세계 언론자유지수 순위에서 한국은 41위를 기록, 아시아에서 가장 언론자유도가 높은 국가가 됐다.

지난 4일 ‘신문의 날’ 행사에 문재인 대통령을 수행한 한 청와대 언론 관련 인사로부터 “왜 우리나라 언론자유지수가 빨리 회복되지 않는 것이냐”고 걱정하는 말을 들었다. 「국경 없는 기자회」가 보름 만에 화답을 내놓은 셈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언론자유지수는 계속 상승해 왔지만, 참여정부 때인 2006년 역대 최고 순위인 31위에 올랐던 달콤한 기억을 지니고 있는 이 인사는 여전히 순위 상승에 목이 말랐던 것이다. 이 인사의 말을 들으면서 “그렇게 (수구)언론에 당하면서도 자유지수 순위 걱정이라니, 참 속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언론종사자로서 대한민국 언론자유지수가 상승했다는 사실이 기쁘지 않을 리 없다. 그러나 나는 「국경 없는 기자회」의 언론자유지수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국경 없는 기자회」는 언론 및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전 세계 비정부기구 활동가들과 언론인·인권운동가, 특파원들을 대상으로 △다원주의 △취재 및 보도의 투명성 △뉴스생산구조 등 여러 기준의 설문을 돌려 매년 순위를 정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언론의 자유를 구속하는 여러 요인 중 정치적 요인(권력의 침탈)을 특히 중시하며, 보도의 질 보다 제도나 틀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 또한 기자 지상주의에 함몰돼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나는 「국경 없는 기자회」의 ‘언론자유지수’가 제대로 된 언론자유를 측정하려면 ‘언론방종지수’ 혹은 ‘저질언론지수’를 만들어 ‘자유지수’를 보완해야 한다고 믿는다. 특히 한국의 경우 더욱 그렇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0&table=gs_kang&uid=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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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 1주년 임진각 향해 '평화 카퍼레이드' 펼친다

6.15서울본부, 판문점선언 이행 각계 대표자 평화선언 발표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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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19  09: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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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5서울본부는 18일 서울 미국대사관 앞에서 4.27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서울지역 각계 대표자선언 발표 기자회견을 갖고 오는 27일 임진각에서 열리는 평화 인간띠잇기 행사에 많은 시민들이 참여해 줄 것을 호소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한반도 평화와 번영, 통일의 시대를 내외에 선포한 4.27 판문점선언 발표 1주년이 다가오고 있다.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서울본부'(6.15서울본부)는 18일 서울 광화문광장 미국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오는 27일 오후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에서 진행할 예정인 '평화 카퍼레이드'에 많은 시민들이 참여해 줄 것을 호소했다.

또 현재 진행중인 4.27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평화선언 서명운동을 확대하기 위해 먼저 서울지역 각계 227명의 대표자 서명을 공개했다.

이들은 미리 준비한 기자회견문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4.27판문점선언 1조 1항, 남과 북은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주의 원칙을 확인하고 이미 채택된 모든 남북선언들과 합의들을 철저히 이행함으로써 남북관계 개선과 발전의 전환적 국면을 열어나가기로 한 내용을 상기하며, 철저히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해 힘을 모아내야 한다"며 "서울지역의 시민사회, 노동조합, 정당, 청년학생, 여성, 풀뿌리 등 각계각층의 서울 시민들과 함께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맨 앞장에 설 것이며, 더 많은 시민들과 함께 한반도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결의를 밝혔다.

이어 △4.27판문점선언 발표 1주년 기념대회 성사 △연내 금강산관광 및 개성공단 재개 △한미연합훈련 및 무기증강 반대, 미국의 대북제재 해제 촉구 행동전을 다짐했다.

조헌정 6.15서울본부 상임대표는 "희망과 기대를 안고 지난해 4.27 1차 남북정상회담을 지켜보았고 그 후 두번의 정상회담이 더 있었으나 미국이 계속 평화의 대화를 저지하고 방해하는 바람에 지금까지 지지부진,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하면서 "오는 4.27 1주년을 계기로 미국으로부터 독립하는 제2의 독립운동을 펼쳐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순영 서울겨레하나 운영위원장은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재개는 그 어느 누군가가 허가하고 말고 할 사안이 아니다. 이미 남과 북의 합의로 열린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에 대해 미국이 뭐라고 언급하는 태도는 우리의 주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라며, 미국은 도를 넘은 내정간섭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최은철 민주노총 서울본부 본부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대북제재와 관련해 지금은 적기가 아니라는 발언을 했는데, 그걸 판단하는 건 우리 민족 자신이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남과 북의 평화 번영을 가로막는 대북제재를 지켜 보지만은 않을 것 "이라며, "4월 27일 14시 27분부터 4시까지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임진각에서 이 땅의 자주, 민주, 통일과 평화, 번영을 바라는 노동자대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강미경 노원겨레하나 운영위원장은 "지난 3월초부터 DMZ인간띠잇기 운동을 준비하고 있다. 평화 통일을 바라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4.27에 한명이라도 더 DMZ, 임진각에 가야 한다는 주민들의 의지가 높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며, "당일 행사 참가 뿐만 아니라 이후 일상 생활에서도 더 넓고 깊게 주민들과 함께 평화 통일의 주인이 되는 활동을 벌여나가겠다"고 말했다.

   
▲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평화 카퍼레이드로 대북제재를 뚫는 모습을 표현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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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동물계 가수’인 비밀, 목 깊숙이 숨어 있다

조홍섭 2019. 04. 18
조회수 223 추천수 1
 
척추동물 유일하게 제2 후두 ‘울대’ 갖춰, 긴 기도를 공명통 활용
 
si1.jpg» 작은 새라도 우렁차게 노래할 수 있는 것은 후두에 이은 울대라는 추가 기관 덕분이다. 나타샤 베르츠비츠키 제공.
 
여름 철새인 휘파람새와 울새가 내는 아름답고도 커다란 노랫소리가 숲 속에서 들려온다. 하지만 정작 노래의 주인공을 찾아낸다면, 그 작은 몸집에서 어떻게 이런 소리가 나오는지 놀랄 것이다.
 
다윈을 지지하며 진화론 보급에 앞장선 영국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는 일찍이 1872년 그 답을 내놓았다. “새는 다른 동물처럼 후두가 같은 자리에 있지만 장치가 하나 더 있다. ‘아래 후두’ 또는 울대(syrinx)가 기관 끝에 달려있는데, 이것이 놀라운 발성 기관이다.”
 
‘울대’라는 말이 탄생한 지 150년이 다 돼가지만, 동물 가운데 새들에게만 있는 이 기관이 어떻게, 왜 진화하게 됐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울대가 적은 힘으로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효율적인 장치여서, 이 기관의 진화가 일어났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프란스 골러 미국 유타대 생물학자 등 국제 연구자들은 과학저널 ‘플로스 바이올로지’ 7일 치에 실린 논문에서 새가 놀라운 노래 실력을 자랑하게 된 비밀은 울대가 기도 깊숙한 위치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란 이론을 밝혔다. 연구자에 참여한 잉고 틸츠 유타대 국립 음성 및 언어 연구센터 소장은 “흔히 잘 들리는 소리를 내려면 입이나 부리 바로 옆에서 발성하면 좋을 것 같지만, 우리가 발견한 건 그게 아니다”라고 이 대학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si2.jpg» 조류와 가까운 친척인 악어(왼쪽)와 오리의 기도 형태 비교. 위는 겉모습, 아래는 단면이다. B와 D에서 기관지가 갈라지는 곳에 있는 울대(보라색)를 볼 수 있다. 에반 킹슬리 외 (2018) ‘PNAS’ 제공.
 
공기호흡을 하는 거의 모든 척추동물에는 후두가 있다. 공기 흐름을 조절해 소리를 내는 데 이용하기도 하지만, 음식이나 물이 기도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밸브 기능을 한다. 기도 들머리에 있는 후두와 함께 새들은 기도 끝 양쪽 기관지로 갈라지는 부위에 울대가 있다. 새들은 울대를 소리를 내는 데만 쓴다. 울대를 마비시킨 새도 호흡에는 지장이 없었다.
 
연구자들은 굳이 후두를 두고 새로운 발성 기관이 왜 필요했나 확인하기 위해 컴퓨터 모델링을 이용해 기도에서 울대가 어느 곳에 자리 잡을 때 가장 소리가 잘 나는지 알아보았다. 그 결과 소리가 잘 증폭돼 소리를 쉽게 낼 수 있는 위치가 따로 있었다. 주 저자인 토비어스 리드 미국 미드웨스턴대 교수는 “울대가 자리 잡은 위치에서 발성 효율이 가장 높았다”며 “이는 울대와 부리 사이의 긴 기도가 소리를 증폭하는 공명통 구실을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si3.jpg» 새가 작은 몸집으로 다양하게 진화하는 데는 효과적인 발성 장치인 울대의 출현이 필요했다. 나타샤 베르츠비츠키 제공.
 
새들은 공룡으로부터 분화해 진화하면서 소형화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새들은 척추동물 가운데 가장 목이 길다. 울대는 긴 목과 긴 기도를 소리 공명에 활용해 소형화의 길을 열어준 기막힌 발명품이었던 셈이다. 리드 교수는 “작은 새라면 크고 멀리 들리는 소리를 내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쓸 수 없다”며 “단지 발성 기관의 위치를 바꿈으로써 훨씬 큰 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연구자들은 이번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새의 몸 형태가 어떻게 진화했는지도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울대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몸의 자세가 달라져야 했을 것이다. 또 포식자에게 들키지 않고 짝짓기 상대에게 신호를 보내는 ‘지향성’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는 머리와 몸, 목의 형태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연구자들은 밝혔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Riede T, Thomson SL, Titze IR, Goller F (2019) The evolution of the syrinx: An acoustic theory. PLoS Biol 17(2): e2006507. https://doi.org/ 10.1371/journal.pbio.2006507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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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59주년,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4·19의거의 도화선이 된 3·15마산의거
 
김용택 | 2019-04-19 08:41:1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남한만의 단독선거로 분단국가로 만든 장본인,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빨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든 사람. ‘빨갱이 제거’라는 명분으로 수만 명의 제주 양민을 학살하고 여수순천 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을 비롯해 보도연맹을 조작해 무고한 인민을 학살한 희대의 살인마, 부산정치파동, 국민방위군 사건, 발췌 개헌안, 김구선생님을 비롯한 조봉암… 등 민족의 지도자를 정적으로, 간첩으로 몰아 죽이고 공포정치를 자행한 인물이 수구세력들이 국부로 부르는 이승만이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피난민들이 지나가는 한강다리를 예고도 없이 폭파해 수많은 국민들을 죽이고, 서울 사수, 결사항전 하겠다더니 정작 자신은 부산으로 도망, 1952년 전쟁 중에 장기집권을 위해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첫 번째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이 이승만이다. 1960년 4월 19일, 이승만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조작을 하자,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에 경찰이 발포하면서 혁명의 불꽃은 타올랐다.

<4·19의거의 도화선이 된 3·15마산의거>

3.15부정선거에 항의해 2·28 대구 학생들의 시위는 급기야 대구고, 경북고, 경북여고, 경북대사대부고, 계성고 등 8개 학교로 그리고 마산으로 이어지면서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등학교) 입학시험 결과를 확인하러 왔던 상고생 김주열 군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체로 발견된다. 김주열군의 처참한 시신을 부산일보가 보도하자 마산시위는 학생들을 비롯한 시민들까지 합세, 전국으로 확대되자 당황한 이승만 정부는 “적색분자들의 준동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조종해 일어났다”며 무마하려 했지만, 시위는 마산고, 마산상고, 청주공고, 청주상고, 청주고, 동래고… 로 서울과 대구, 부산 마산, 전주, 대전, 청주, 제주 등 전국으로 확산된다.

“데모가 이적이냐, 폭정이 이적이냐”, “민주주의 바로잡아 공산주의 타도하자”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교문을 나서자 여러 단과대생들이 합세하였고 서울 시내 대부분의 대학, 이어 고등학교, 중학교 학생들까지 대대적으로 시위대에 합류, 서울에서만 시위대의 규모는 10 만에 육박했다.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이성을 잃은 이승만정권은 경찰을 앞세워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 서울에서만 무려 104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 분노한 시민들은 경무대, 중앙청, 대법원, 이기붕 사옥 등으로 몰려가 항의하고 이승만 독재정권과 자유당을 옹호하던 서울신문사에 불을 질렀고, 반공을 외치며 시민들을 압박하던 반공회관에도 방화했다. 서울 각지의 파출소들도 시민들에 의해 파괴되고 불살라졌다. 시위대는 카빈소총으로 무장,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성을 잃은 이승만 정권은 마침내 서울지역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했으나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는 시위를 진압할 수 없음을 확인, 무마하려 했지만 오히려 들불처럼 번지자 이승만정권은 계엄령은 서울, 부산, 광주, 대전, 대구, 전주, 청주, 수원 일대에 확대 선포란다. 그러나 분노한 민중의 시위는 1만명으로 늘어나자 마침내 서울대 교수단들이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에 합세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각 대학에서는 교수들의 시국선언문이 발표되고 초등학교 학생들이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 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합세하기에 이른다. 정권수호에 혈안이 된 이승만은 시위하는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 총에 맞아 사망하기에 이르고, 위대대는 10만으로 늘어나게 된다.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와서 여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한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한가지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이 지금도 삼팔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자 공산군이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써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1)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2) 3.15 정부통령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다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3) 선거로 인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이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4)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 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이승만정권은 3.15부정서거를 규탄하는 국민들의 저항은 4월 26일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이런 성명서를 남기고 하와이로 야반도주함으로써 12년의 독재정권은 막을 내린다. 4.19혁명은 이렇게 사망 21명, 부상자 1,920명의 거룩한 희생으로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 한다는 헌법전문에 대한민국을 지키는 이정표를 남기고 마무리된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아모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4·19혁명 59주년 아침 신동엽시인의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를 읽으며 아침을 맞는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30&table=yt_kim&uid=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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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김종분, 91년에 죽은 성대 김귀정이 엄마여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9/04/19 09:04
  • 수정일
    2019/04/19 09:0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민병래의 사수만보 4화] 김종분의 왕십리 노점 30년 세월

19.04.19 07:51l최종 업데이트 19.04.19 07:51l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봄볕이 꽃망울을 터트리며 어깨 위에 내려 앉아 놀던 것이 어제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 봄기운이 홀연히 사라지고 꾸물꾸물한 날씨에 찬바람까지 더해져 겨울이 다시 온 듯했다.

김종분은 이래나 저래나 몸을 추스려 경동시장(서울 동대문구)을 향한다. 언제부턴가 비탈에 선 나무처럼 기울어진 몸, 아직 지팡이 없이도 걸을 수 있음을 고마워하며 버스에 올랐다. 남들은 꽃샘추위라며 겨울 외투를 다시 꺼내고 목도리까지 챙겼건만, 김종분은 홑겹 옷차림에 전대 자루 하나 걸쳤을 뿐이다.

"에구. 만 원에 가, 가자구."
"아이구! 할머니, 너무 하셔요. 용달 기본요금이 2만원이에요."
"무신 소리야, 늘 그렇게 갔어."
 

잠시 실랑이를 했지만 흥정은 싱겁게 끝났다. 김종분이 호박·오이·옥수수 등을 떼다가 왕십리 노점에서 판 세월이 벌써 삼십 년이다.
 
김종분 할머니를 가까이에서 클로즈한 모습 행당시장에서 노점을 하며 더울때, 추울 때는 인근 맥도날드에서 잠시 피난(?)을 하기도 한다. 그곳에서 찍은 사진.
▲ 김종분 할머니를 가까이에서 클로즈한 모습 행당시장에서 노점을 하며 더울때, 추울 때는 인근 맥도날드에서 잠시 피난(?)을 하기도 한다. 그곳에서 찍은 사진.
ⓒ 민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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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년생이니 올해 팔순이 넘은 나이. 기계 운반 일을 하던 남편이 50대 중반에 뇌진탕으로 세상을 등지자 그녀는 노점으로 나섰다. 그때 그녀의 나이 쉰 살이었다. 삼남매는 아직 생활 터전을 잡기 전이었다. 무작정 거리에 나가 좌판을 펼친 곳이 왕십리 행당시장 앞 건널목이었다.
 
경동시장에서 왕십리까지는 용달차로 10분 남짓거리, 고산자로를 따라 가다가 청계천을 건너면 손에 닿을 듯한 거리에 있다. 그의 가게(?) 앞에 야채 상자를 내려놓으려니 바람이 매서워 천막으로 만든 그의 노점이 마구 흔들린다.

사실 구청에서 무허가노점을 단속한다고 천막을 뜯어간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쫓겨난 적도 많았다. 하지만 뜯어가면 뜯어가는 대로, 쫓아내고 전기를 끊으면 또 그런 대로 버티고 버티며 오늘까지 왔다.

"할머니, 요 오이 한 봉지 값 2000원 낼모레 줄게!"
"그려, 가지고 가. 요담에 줘."


오후 3시경, 막 장사를 시작할 때면 나타나는 동네 할머니다. 김종분은 2000원짜리 외상을 흔쾌히 달아준다. 그렇다고 장부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머릿속에 기억해두고 잊으면 잊는 대로 장사를 한다. 30년 세월, 한자리를 지켰으니 길거리 사랑방이 된 셈이다.
 
김종분 할머니가 손님에게 물건을 건네는 모습 김종분 할머니는 오후 3시부터 자정을 넘겨 새벽1시까지 자리를 지킨다.
▲ 김종분 할머니가 손님에게 물건을 건네는 모습 김종분 할머니는 오후 3시부터 자정을 넘겨 새벽1시까지 자리를 지킨다.
ⓒ 민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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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분의 가게는 두 평이 채 안 된다. 천막 한 구석에는 강냉이며 튀밥이, 앞에는 오이, 호박, 깐마늘, 가래떡이 귀한 손님상 보듯 가지런히 놓여있다. 안으로는 옥수수 삶는 큰 솥이 의젓하게, 가래떡 굽는 연탄화로는 얌전하게 앉아 있다. 양쪽 네 귀퉁이로는 얇은 쇠기둥이 한길 남짓 올라가 천막을 지탱해주고 있다.

여기가 그의 일터이며 삶의 터전이다. 늦은 시간엔 여기서 잠도 청했다. 자정 넘어 들어가면 아이들이 잠에서 깰까봐 걱정도 되고, 새벽시장에 늦지 않으려고 왕십리 대로변에서 경적 소리를 벗 삼아 잠들기도 했다.

김종분이 앉은 자리는 남향이지만, 앞으로 건물이 있어 하루 종일 볕이 들지 않는다. 그래도 해가 있는 낮에는 견딜 만하지만 날이 저물면 한기가 느껴진다. 길바닥을 내달리는 차들이 일으키는 바람까지 더해지면 꽃샘추위도 한겨울 매운 추위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김종분의 옷은 늘 홑겹이다. '그날' 이후 몸에 천불이 나서 옷을 여밀 수가 없었다. 몸을 풀어헤쳐야만 열을 식힐 수 있었다.

벌써 27년 전, 성대 불문과 88학번이던 둘째 딸 귀정이가 숨진 날이 27년 전인 1991년 5월 25일이다.

그날 귀정이는 학교 가는 길에 치마를 입고 나갔다가 황급히 돌아와서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그러려니 했다. 평소에도 아버지가 소주를 마시고 나면 빈병을 부지런히 나르기에 걱정이야 들었지만 별일 없으려니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딸은 그날 '공안통치 민생파탄 노태우정권 퇴진을 위한 제3차 범국민대회'에 참가했었다.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아들 친구가 늦은 오후에 노점으로 찾아왔다. "귀정이 누나가 다쳐서 백병원에 입원해 있으니 가보셔야 한다"는 얘기였다. 장사하던 중에 좌판을 치울 수도 없어 아들 친구에게 택시비를 쥐어주고 먼저 가보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렇지만 김종분도 마음이 불안해, 장사를 그냥 벌려놓은 채 물어물어 백병원을 찾아나섰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박종철 아버지가 '귀정이 어머니'를 찾아 왕십리를 헤매고 다니셨다"고 한다. 도착하니 이미 백병원 앞은 시위대와 경찰이 거친 몸싸움을 벌이며 난리통이었다. "왜 막아, 폭력경찰 물러가라!!" 고함소리가 곳곳에서 일어나 귀가 떨어져나갈 정도였다.

경찰이 병원을 빈틈없이 에워싸서 들어가려 해도 계속 밀려나고 말았다. 그때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아버님 한 분이 "가족이니 길을 열어주라"고 해서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입원했다는 딸을 보러왔건만, 병실로 안내하지 않았다. 설마 했지만 영안실로 인도받을 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슴 고동이 쿵쾅대고 터져나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왜 병실로 안 가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외면했다. 순간 다리에 힘이 쭉 빠지고 넘어질 듯했다. 영안실은 점점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천천히 방안에 들어서니 흰 천으로 쌓인 몸뚱이가 뎅그러니 놓여있었다. 사방 벽은 시퍼런, 징그럽게 시퍼런 색이었다.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외면하려 해도 몸뚱이는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비틀비틀대며 거의 무릎 걸음으로 다가가 흰 천을 걷어냈다. 눈에 들어온 것은 곱디고운 둘째 딸 귀정이었다.

그날 이후 김종분은 몸에서 열이 나 늘 식혀야만 했다. 그래서 옷을 여미고는 살 수 없었다. 살을 에는 한겨울 추위가 아니면 그저 옷을 벌려 놓고 있어야 열을 풀어낼 수 있었다.

"어머니 추운데 오늘도 나오셨어요? 옥수수 두 봉지 좀 주세요."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구청 직원이다. 천막을 뜯어가며 못내 미안해하던 단속반 사람이다. 그 뒤부터 퇴근 무렵이면 가끔씩 들러 가래떡이며 땅콩을 한 봉지씩 사간다. 김종분은 옥수수에 가래떡까지 얹어 "어서 들어가 안식구하고 따순 밥 먹으라"고 인사를 했다. 어쩜 이 맛에 장사를 하는지도 모른다.
 
김종분 할머니가 옥수수를 찌는 모습 할머니 가게에서 옥수수와 가래떡이 제일 인기다.
▲ 김종분 할머니가 옥수수를 찌는 모습 할머니 가게에서 옥수수와 가래떡이 제일 인기다.
ⓒ 민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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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해가 떨어지니 제법 쌀쌀하다. 한기가 느껴질 정도다. 그제야 김종분은 겨우 바람막이 하나를 꺼내 몸에 걸쳤다. 딸 귀정이가 좋아하던 꽃분홍색이다.

김종분은 백병원 영안실에서 5월 25일부터 6월 12일 장례식 날까지 꼬박 열아홉 날을 보냈다. 몸이 무너져 내렸지만 딸 귀정이의 친구들이 손잡아주고 어깨도 주물러주며 항상 곁에 있어주었다. 그때 형 집행정지로 출소했던 문익환 목사님, 지선 스님, 이소선 어머니 등이 거의 함께 지내며 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민가협 어머니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도움 덕에 귀정이 옆을 지켜낼 수 있었다.

열아홉 날을 지내면서 김종분이 제일 힘들었던 때는 부검한다고 경찰이 병원 난입을 시도했을 때였다.

귀정이가 대한극장 앞 도로에서 경찰의 공세에 밀리다 압사한 날이 1991년 5월 25일이다. 명지대생 강경대가 백골단에 맞아 숨진 날로부터 꼭 한 달 뒤였다. 당시 공안정국을 몰고 갔던 노태우 정부는 김귀정 사망으로 불리하게 된 정세를 서둘러 덮고자 부검을 명분삼아 시신을 뺏으려 했다.

그래서 '김귀정열사폭력살인대책위'의 사수대는 경찰과 매일 치열하게 싸웠다. 특히 격렬했던 날은 5월 30일이었다. 나중에 확인된 일이지만, 새벽 5시에 경찰은 백골단과 전경을 세 방면에서 한꺼번에 투입하는 작전을 전개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일명 '엘레베이터 작전'이었다. 80여 명의 백골단이 환자 보호자와 방문객으로 가장해서 병원 13층에 집결, 작전 개시와 함께 급강하, 영안실로 난입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관제데모작전'이었다. 시위대로 위장한 사복조들이 을지로 일대에서 전경과 맞붙은 뒤 쫒겨들어가는 것처럼 병원 바리케이드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백병원 뒤 중부세무서의 담을 굴삭기로 헐고 병력을 투입, 병원 정문을 장악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경찰은 달려들었지만 사수대의 결사항전에 밀려 작전을 포기, 철수하고 말았다. 그날 부상자들이 특히 많았다.

김종분은 딸의 친구들이 피터지며 다치고 영안실에서 밤새우며 지쳐가는 모습을 보기가 너무 힘들었다. "우리 딸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상하는구나"하는 생각에 속상하고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렇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저 바라보면서 눈만 껌벅껌벅할 뿐, 천불을 안으로 안으로 삭힐 수밖에 없었다.

"저녁 밥은 어떻게 할래요? 동태찜 시켜 먹을까?"

문득 생각에 잠겨있던 김종분을 꽃집 아줌마가 불러 깨운다. 행당시장 앞, 손바닥만 한 땅뙈기 안에서 어깨 나란히 노점 하는 이웃이다. 그 집 말고도 토스트, 칼국수, 군밤장사 이렇게 서넛이 (지금은 칼국수 장사가 죽었지만) 서로 수십 년을 의지하며 함께 했다. 저녁 끼니 때가 되면 라면을 끓이기도 하고, 시켜 먹기도 하며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식구다.

동태찜을 나눠먹고 가래떡과 옥수수를 몇 봉지 겨우 팔고 나니 어느덧 자정이 가까이 온다. 이때쯤 되면 몸이 한결 춥고 졸음까지 밀려온다. 발 앞에 연탄난로를 몸 가까이 더 끌어안아 본다. 김종분은 늘 자정을 넘겨 한시까지 장사를 한다. 밤 11시가 넘어 사람들 발길도 잦아지면 장사도 시원찮다. 그렇지만 김종분은 늘 새벽 한시 경까지 거리를 지킨다. 아니 졸음에 못 이길 시간까지 스스로를 가둬둔다.

그날 6월 12일은 참으로 길었다. 아니 11일부터 헤아려보면 더 긴긴 날이었다. 장례식을 위해 귀정이를 성대로 옮기던 날, 뜻하지 않게 성균관 유림들이 교문을 막고 나섰다. "성균관에는 정몽주·퇴계 선생 등 성현 39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초대 총장이었던 김창숙 선생 장례 때도 시신이 들어오지 않았다"며 운구를 저지했다.

그날따라 비는 추적추적 내렸고 늦은 오후여서 땅거미까지 지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학생들은 무릎을 꿇었다. 여학생들은 치마를 입은 채 맨살을 아스팔트에 드러내놓고 애원했다. "귀정이가 마지막으로 교정을 볼 수 있게 해 주세요"라며... 그 간청 덕에 운구는 정문을 피해 도서관 옆문으로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6월 12일 성균관대 금잔디광장을 출발한 장례행렬은 파고다공원 앞에서 1차 노제, 대한극장 앞에서 2차 노제를 치렀다. 그리고 딸이 다녔던 무학여고 앞을 거쳐 밤 늦게 모란공원에 묻힐 수 있었다.
  
귀정이를 보내고 난 후 김종분은 자정을 넘기고 나서야 노점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몸을 부대껴야 집에 가서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렇지만 문을 열고 자야 했다. 문을 닫고서는 잠이 들지 못했다. 옷을 풀어헤쳐야 하는 것처럼 문을 열어놓아야 겨우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자정이 넘으니 저 멀리 달빛은 맑아지는데 왕십리 가로등은 끔벅끔벅 졸기 시작했다. 큰 길가에 차 소리도 조금씩 잦아든다. 이때가 장사를 거둘 시간이다.

김종분은 연탄난로 불을 끄고, 몸을 일으켜 세운다. 전기가 끊긴 이후에는 가로등 불빛만 의지해 야간장사를 한 지 제법 오래되었다. 분홍빛 바람막이에 묻은 먼지를 툴툴 털고 남은 오이며 호박을 대충 수습해 천막 안으로 밀어놓고 얼기설기 동여매 쇳대를 채웠다.

예전에는 이 천막 안에서 많이 잤다. 그런 다음 날이면 귀정이와 큰딸은 늘 성화를 했다.

엄마 기다렸는데 왜 안 왔냐고, 
너희들 잠 깨울까봐 그냥 거기서 잤다고,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고, 엄마 몸 상한다고.

그렇게 티격태격 말다툼을 했다.
그렇게 살가웠던 귀정이. 이제 한 달 남짓이면 28주기 기일이 다가온다.

고맙게도 딸의 친구들은 '김귀정추모사업회'를 만들어 일 년에 세 번 어버이날·설날·자신의 생일날을 잊지 않고 찾아와주었다. 그것도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그게 참 힘이 되었다. 그리고 왕십리의 무학여고 동창들도 때때로 찾아왔다. 와선 안부도 묻고 쪽파 한 단 사며 몇 만원씩 전대에 밀어 넣어주기도 했다.

어떤 날은 와서 "어머니 감기 든다"며 목도리를 둘러주고 갔고 작년에는 팔순잔치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귀정이를 잃어 아팠지만 더 많은 딸과 아들을 얻었다는 행복감을 느끼기도 했다.

귀정이의 언니인 큰 딸과 동생인 막내 아들 녀석은 늘 성화다. 간청도 많이 한다. "이제 그만 노점 일 걷으시라고, 쉬셔야 한다"고.

그렇지만 김종분은 행당시장 건널목 앞 이곳을 떠날 수 없다.
귀정이와 3남매를 키워낸 이 곳,
귀정이의 친구들이 늘 찾아오는 이 곳,
왕십리의 거리 사랑방이 된 이 곳을 벗어날 수 없다.
산동네에 판잣집이었지만 첫 집을 장만했던 이 곳, 왕십리를 떠날 수가 없다.

김종분은 몸을 기우뚱거리며 발걸음을 내딛는다.
이제 집으로 가는 길이다.
김종분의 천막노점을 비추던 가로등도 졸린 눈을 부비며 따라 일어난다. 앞서서 종종 걸으며 찬바람을 막아주고 길을 비춰준다.
왕십리의 별빛 달빛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녀가 가는 길에 빛살을 보태준다.
밤하늘 어스름 어딘가에는 귀정이의 웃음, 귀정이의 속삭임이 번지는 듯하다.

"엄마 오늘도 고생했어, 사랑해..."

김종분은 눈을 꿈벅꿈벅하며 한마디 내뱉는다. 썩을 년, 꿈에 한 번도 안 보이면서...
 
김종분 할머니의 귀가길 새벽 1시까지 장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 김종분 할머니의 귀가길 새벽 1시까지 장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 민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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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분 할머님의 이력 
38년 화성에서 출생 
62년 인천으로 시집 
67년 왕십리 이주 
88년 남편과 사별 
88년 왕십리 행당시장앞에서 노점 시작
91년 둘째딸 김귀정을 민주화운동과정에서 잃음
2018년 팔순연 
2019년 팔순이 넘은 지금도 행당시장앞 거리를 지키고 있음
 
김귀정을 돌아보는 사진들
김귀정의 초상 성대 불문학과 88학번 김귀정은 91년 공안통치분쇄 시위과정에서 산화하였다.
▲ 김귀정의 초상 성대 불문학과 88학번 김귀정은 91년 공안통치분쇄 시위과정에서 산화하였다.
ⓒ 김귀정 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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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여고 재학시절의 김귀정 김귀정은 왕십리 무학여고를 나왔다. 무학여고시절의 모습, 맨 왼쪽이다.
▲ 무학여고 재학시절의 김귀정 김귀정은 왕십리 무학여고를 나왔다. 무학여고시절의 모습, 맨 왼쪽이다.
ⓒ 김귀정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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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병원 영안실에서 통곡하는 김종분 여사  91년 5월25일부터 6월11일까지 김귀정열사는 백병원 영안실에 있었다.
▲ 백병원 영안실에서 통곡하는 김종분 여사  91년 5월25일부터 6월11일까지 김귀정열사는 백병원 영안실에 있었다.
ⓒ 김귀정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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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정 열사의 무덤앞에서  김귀정 열사는 91년 6월12일 마석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가 현재는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으로 모셔져 있다.
▲ 김귀정 열사의 무덤앞에서  김귀정 열사는 91년 6월12일 마석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가 현재는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으로 모셔져 있다.
ⓒ 김귀정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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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정의 운구행렬 김귀정은 6월11일 장례를 위해 성대로 옮겨져왔다.
▲ 김귀정의 운구행렬 김귀정은 6월11일 장례를 위해 성대로 옮겨져왔다.
ⓒ 김귀정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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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유림이 학교진입을 막자 간청하는 귀정이 친구들의 모습 성균관 유림은 성현이 모셔져있는 곳에 시신이 들어갈 수 없다며 막았다. 이에 간청하는 재학생들의 모습.
▲ 성균관 유림이 학교진입을 막자 간청하는 귀정이 친구들의 모습 성균관 유림은 성현이 모셔져있는 곳에 시신이 들어갈 수 없다며 막았다. 이에 간청하는 재학생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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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유림이 김귀정의 성대운구를 막자 빗속에서 간청하는 귀정이 친구들의 모습 성균관 유림은 성현이 모셔져있는 곳에 시신이 들어갈 수 없다며 막았다. 이에 간청하는 재학생들의 모습.
▲ 성균관 유림이 김귀정의 성대운구를 막자 빗속에서 간청하는 귀정이 친구들의 모습 성균관 유림은 성현이 모셔져있는 곳에 시신이 들어갈 수 없다며 막았다. 이에 간청하는 재학생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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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김귀정열사 사망규탄 투쟁현장의 모습 김귀정 열사의 사망을 계기로 공안통치 분쇄 투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 91년 김귀정열사 사망규탄 투쟁현장의 모습 김귀정 열사의 사망을 계기로 공안통치 분쇄 투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 김귀정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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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년 김귀정열사 사망규탄 투쟁현장의 모습 김귀정 열사의 사망을 계기로 공안통치 분쇄 투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 91년 김귀정열사 사망규탄 투쟁현장의 모습 김귀정 열사의 사망을 계기로 공안통치 분쇄 투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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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정의 장례행렬 91년 6월12일 성대를 출발한 장례행렬은 파고다공원, 대한극장, 무학여고를 거쳐 모란공원에서 마쳤다.
▲ 김귀정의 장례행렬 91년 6월12일 성대를 출발한 장례행렬은 파고다공원, 대한극장, 무학여고를 거쳐 모란공원에서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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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적폐 몸통 자유한국당을 심판해야 한다

자주통일 평화번영 가로막는 분단적폐 청산하자
기사입력: 2019/04/19 [06:46] ㅣ 최종편집:

 
▲ 전창일 유신독재와 5공 반국가단체 고문조작 국가범죄 청산연대 공동대표가 박정희 고소인 발언을 하고 있다.     ©사람일보


4.19혁명을 짓밟은 박정희 쿠데타정권의 후예 자유한국당의 해체를 요구하는 각계 각층의 목소리가 고조되고 있다.

 

박근혜 탄핵과 함께 정계에서 퇴출되어야 할 자들이 후안무치하게도 전두환 내란반란세력을 심판한 5.18항쟁을 왜곡 모함하고 친일매국노 처단을 위한 반민특위를 모욕하는 등 망언 망동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분단적폐 몸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도로박근혜당’이라는 규탄을 받고 있다.

 

온갖 부정비리와 헌정유린으로 재판에 회부된 이명박 박근혜의 범죄에 대한 심판은 기왕에 기소된 것만으로 마칠 수 없다. 역사적인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짓밟고 남북경제공동체의 동맥인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가동을 모두 끊어버린 것은 반드시 심판받아야 할 천인공노할 특대형범죄이다.

 

그 연장선에서 자유한국당이 민족 공동의 자주통일 평화번영 강령인 판문점선언의 국회 비준동의를 1년이 다 되도록 가로막고 있음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명시하고 있는 헌법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며, 준엄한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자행한 분단적폐를 근절하려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철저한 진실 규명으로 범법자들을 엄벌하고 청와대와 대법원이 공모 결탁한 사법농단의 전모를 밝혀 정의의 심판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 지배인 허강일이 언론에 폭로한 북 해외여성종업원 납치의혹사건도 진실을 밝혀 합당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특히, 정부당국은 사회단체들의 요구를 수용해 남북관계를 동결시킨 5.24조치의 근거가 된 2010년 3월26일 천안함침몰사건 의혹에 대한 전면 재조사와 진실규명에 하루빨리 나서야 한다. 신상철 전 천안함 민군합동 조사위원은 저서 <천안함은 좌초입니다>를 통해 천안함사건이 북의 ‘1번어뢰’ 공격이 아니라 좌초 후 충돌에 의해 침몰된 ‘교통사고’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이광섭 박사는 저서 <천안함살인사건의 10가지 물리적 증거>에서 ‘좌초 후 수밀문 폐쇄에 의한 반파’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부는 1987년 대선을 앞두고 발생한 대한항공기폭파사건 폭파범 김현희 관련 의혹에 대해서도 진실규명에 나서 유가족들의 한을 풀어줘야 한다.

 

자유한국당의 원조격인 박정희 유신독재의 고문조작 학살 범죄에 대한 심판도 시급한 사회적 요구로 제기되었다. 전창일 인혁당재건위사건 반국가단체 고문조작 국가범죄 피해자는 같은 사건 사형수 8인 사형집행 44주기를 맞아 고문조작 학살의 책임을 물어 주범 박정희의 단죄를 요구하는 고소장을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제출했다.

 

피해자는 1975년 4월9일 사형이 집행된 8인이 사후 32년 만에 2007년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음으로써 주범 박정희에 대한 반국가단체 고문조작 학살 국가범죄가 확증되었다고 밝혔다.

 

고문조작 학살 국가범죄에는 시효가 없다. 박정희 유신독재 인혁당재건위사건 반국가단체 고문조작 국가범죄의 청산은 반인륜적 고문조작을 금지하고 있는 국제인권법에 의거하여 피해자 중심 해결 원칙에서 엄정하게 처리되어야 한다.

 

유신독재 고문조작 학살 주범 박정희의 단죄는 훈장 서훈을 치탈하고 현충원 국가원수 묘역에서 추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나치 학살의 주범 히틀러가 독일 국가원수 묘역에 안치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동시에 독일에서 히틀러 찬양이 불법인 것처럼 고문조작 학살의 주범 박정희를 찬양하는 행위를 엄벌해야 한다.

 
▲ 박해전 자주통일평화번영운동연대 상임대표     ©사람일보

우리 사회는 이 모든 분단적폐를 엄정하게 청산해야 역사정의와 사회정의를 바로세우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역사적인 판문점선언 국회 비준동의를 한시바삐 실현하고 이를 적극 실천함으로써 식민과 분단의 역사를 끝장내는 것이야말로 분단적폐를 근본적으로 청산하는 길이다.

 

우리 사회는 분단적폐 몸통 자유한국당을 준엄하게 심판하고 온 겨레가 염원하는 자주통일 평화번영의 미래로 힘차게 전진해야 할 것이다.

 

<박해전 자주통일평화번영운동연대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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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노딜'이라는 오해, 그리고 다가오는 진실의 순간

[창비 주간 논평]
2019.04.18 11:59:27
 
 
최근 워싱턴에서 있었던 4·11 한미정상회담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이 시점에 정상회담이 필요했느냐는 질문부터 성패 논쟁, 그리고 향후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 문제까지 이어지고 있다.

북미 "협상테이블은 살아 있다", 실제로는?

하노이회담 결렬 이후 북미 양측의 수뇌부가 '협상테이블은 살아 있다'라고 반복적으로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재인정부는 미국 내 강경론의 득세를 북한이 맞받아칠 경우, '강대강'의 대결구조에 의해 프로세스 전체가 붕괴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강경론 확산에 제동을 걸고, 약해지는 대화의 동력을 회복하기 위해 회담을 추진했다. 그런 맥락에서 미국의 자세 변화에 대한 일말의 여지를 확인했으며, 이후 4차 남북정상회담과 3차 북미정상회담으로 이어지는 협상의 로드맵을 한미가 공동 인식했다는 점은 분명 성과다. 특히 미국 내에서 꾸준히 비판을 받아온 톱다운 방식의 유지를 못 박은 점은 중요한 성과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워싱턴 노딜'이라는 평가를 포함해 일각에서 제기되는 실패론에는 이번 정상회담의 정확한 성격과 목표에 대한 일정 정도의 오해가 있다. 이번 회담은 한미 간 담판이나 합의를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하노이 이후 대북정책에 대한 공동 준비였다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빅딜 고수 및 제재 유지 등에서 감지된 양국의 차이는 현 상황에서 일시에, 그것도 공개적으로 바꾸기는 어렵다. 트럼프는 하노이회담 당시의 어려운 국내 입지가 상당 부분 해소되었고, 자신의 노딜 결단에 대한 미국 조야의 폭넓은 지지는 아마도 취임 이후 초유의 일인 만큼 당분간은 자기 입장을 견지하며 정치적 자산으로 이용하고 싶을 것이다.

북한의 양보를 전제한 협상,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다 

담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미 양국의 정상과 실무진이 나눈 총 116분간의 논의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중요하다. 한국이 가진 중재안으로 어디까지 미국을 설득했느냐가 관건이다. 물론 대북 설득을 위한 복안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현시점에서 말할 수도 없고, 말해서도 안 된다. 회담 직전 폼페이오가 제재에 대한 '작은 여지'를 원한다고 발언한 것이나, 회담 당일 트럼프의 스몰딜과 단계적 접근에 대한 언급들이 나쁜 신호는 아니다. 또한 김정은이 최고인민회의의 시정연설에서 제3차 북미정상회담에 대한 용의를 밝힌 것에 대해, 트럼프가 트위터를 통해 환영의 메시지를 보낸 것도 긍정적이다. 그러나 엇갈린 메시지도 동시에 나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트럼프는 지난 15일에 대화는 좋지만 빨리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함으로써 3차 정상회담이 북한의 양보 여부에 달려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빅딜 전까지 제재는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그래서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다. 현 구도에서 섣부른 낙관은 물론이고 희망적 사고도 금물이다. 특히 북한의 전적 양보를 전제한 협상은 전혀 녹록하지 않다. 협상 전술의 한 측면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미국이 강자의 일방적 횡포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한반도평화프로세스의 시계를 싱가포르회담 전으로 되돌려버렸고, '선 비핵화 후 제재 해제'의 리비아모델로 돌아간 양상이다. 여기에 이라크 침공과 카다피 제거의 주역이었던 볼턴이 전면에 나선 상황에서 북한은 자신들의 생명줄인 핵을 더더욱 포기하기 어려워졌다. 북한이 굴복하면 다행이지만 하지 않더라도 조급하지 않겠다는 트럼프의 언급은 상당 부분 진실일 것이다. 게다가 미국의 강경한 참모들은 주고받는 협상을 통한 평화적 비핵화는 원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북한 핵위협을 빌미로 한·미·일을 군사적으로 묶어 중국을 봉쇄하는 편이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부류이기 때문이다.

어려워진 타협, 공개 행보를 줄여야 할 때 

현재, 한국의 역할은 커졌으나 입지는 매우 좁아졌다. 미국이 결렬시킨 회담을 되살리려는 한국의 노력은 미국과 국내 보수강경파의 이른바 '김정은 수석대변인' 프레임에 걸려 있다. 북미의 강대강 대치가 길어지면 비핵화와 적대관계 해소를 통한 체제보장의 교환은커녕 어떤 부분적 비가역적 조치조차 성취하지 못할 수도 있다. 미국 조야의 대북 불신 및 회의론이 임계점에 도달할 것이고, 북한도 오바마를 포기했던 전례처럼 트럼프를 회피한 채 장기전으로 돌아설 수 있다. 

승부를 걸어야 할 이른바 '진실의 순간'(the moment of truth)이 다가오고 있다. 이 말은 투우 경기에서 투우사가 검으로 소의 급소를 찔러 마무리 짓는 순간을 뜻하는 표현으로, 회피할 수 없는 결정적 운명의 순간을 지칭한다. 문재인-트럼프-김정은 정상들에 의한 초유의 톱다운프로세스가 2017년의 위기를 극복하고, 1년 남짓 평화를 향한 잰걸음을 해왔다. 변한 것은 많으나 정작 가시적으로 이룬 것은 부족하다. 약속과 합의는 많으나 실천된 것은 많지 않다. 트럼프도 김정은도 전술적인 측면에서 서두르지 않겠다고 하지만, 사실 시간은 누구의 편도 아니다. 한국과 미국의 선거일정이 다가온다. 문재인정부의 지지율도 하락세를 보이고, 남북문제에의 올인은 추동력인 동시에 피로감이라는 양날의 검이다. 양보 없는 강자와 궁지에 몰린 약자 사이에서 더 늦기 전에 급소를 찌르는 결단의 순간이 필요하다.

시급하지만 조급함은 금물이다. 하노이에서 양쪽의 패가 공개됨으로써 협상이 쉬워진 것이 아니라, 누가 이기고 지는지가 확실해졌다는 점에서 타협은 더욱 어려워졌기에 지금부터는 공개 행보를 줄이고, 물밑에서 북미를 오가는 치열한 외교전에 나서야 한다. 특히 칼자루를 쥔 미국을 설득해야 하는데, 지나친 친미일변도로는 설득하기 어려움을 분명히 인식하고 때로 미국의 일방적 자세에 강하게 맞서야 한다.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남측은)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김정은 위원장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향후 수개월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운명의 결정적 시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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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붓으로 쓴 삼천리 독보(獨步)의 꿈"

인권운동 사랑방·인권재단 사람, '0.75평에서 붓을 든 사람들-선(線) 위에 선(立)' 전시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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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18  00:3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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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운동 사랑방과 인권재단 사람이 주관한 '0.75평에서 붓을 든 사람들-선(線) 위에 선(立)' 장기수 9인의 서예작품 전시회가 17일 개막됐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교도소에 들어가면 재소자는 혼자 걸을 수가 없습니다. 교도관이 반드시 뒤에 따라야 합니다. 독보를 못한다고 합니다. 지금도 반쪽밖에 독보를 못하는 형편이지만 그때 삼천리를 독보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꿈을 가지고 '팔도일행'(八道一行)이라고 썼습니다."

인권운동 사랑방과 인권재단 사람이 주관한 '0.75평에서 붓을 든 사람들-선(線) 위에 선(立)' 장기수 9인의 전시회가 개막된 17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라이프러리 아카이브.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대전교도소에서 20년동안 옥고를 치르다 1988년 6.29선언 1주년때 석방된 오병철 선생은 이날 개막 행사에서 1987년 옥중에서 쓰고 이날 전시된 '팔도일행'을 이같이 풀이해주었다.

   
▲ 오병철 선생이 붓으로 쓴 '삼천리 독보'의 꿈에 대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날 전시된 서예작품은 류낙진 선생, 박성준 선생, 석달윤 선생, 신영복 선생, 안승억 선생, 오병철 선생, 이구영 선생, 이명직 선생, 이준태 선생 등 아홉 분의 작품 50점.

20여년 전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모았던 것으로 옥중 작도 있고 출소 후 쓴 작품도 있다. 이번에 처음 선보이는 작품은 오병철 선생이 올해 봄 신현칠 선생의 시 제목을 쓴 '오늘이 바로 그날인가'.

오병철 선생이 쓰던 붓과 벼루, 신영복 선생이 감옥안에서 새긴 전각은 물론 감옥에서 공부하며 쓰던 책자 등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 오병철 선생의 작품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이명직 선생의 작품들. '송심난정', '소나무같이 꿋꿋한 마음 난초같은 유연한 성품'이 눈에 띤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국전 3회, 광주시, 전라남도 미술대전에 수차례 입선하기도 했던 류낙진(1928~2005) 선생이 쓴 '從善如流(종선여류), 선을 따름이 물 흐르듯 한다', '心淸事達(심청사달), 마음이 깨끗해야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 백련강(百鍊剛), 쇠는 백번을 두드려야 단단해진다'는 작품은 20년 넘는 세월이 흐르도록 여전한 가르침을 주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로부터 익힌 붓글씨를 감옥 서예반에서 만난 성주표, 조병호 선생과 옥중 스승인 이구영선생 등을 통해 체계적으로 배운 신영복(1941~2016) 선생의 옥중작인 '회우보인(會友輔仁), 벗을 모아 어짐을 더한다), '한겨레 한나라'를 비롯해 세계인권선언 전문 등 여러 작품도 볼 수 있다.

옥중에서 신영복, 이명직, 오병철 선생에게 한학과 서예를 가르친 이구영(1920~2006)선생은 '晴耕夜讀(청경야독), 날이 밝으면 논밭을 갈고 밤에는 글을 읽는다', '自天佑之(자천우지),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를 돕는다'는 글도 전시되어 있다.

이명직(1926~2012)선생이 쓴 3.1독립선언서가 병풍으로 전시되었으며, '兼治別亂(겸치별난), 겸애하면 화평해지고 차별하면 세상이 어지러워진다), '寬則得衆(관즉득중), 너그러우면 많은 사람을 얻는다', '德必有隣(덕필유린), 덕이 있으면 따르는 사람이 있어 외롭지 않다', '松心蘭性(송심난성), 소나무 같이 꿋꿋한 마음 난초 같은 유연한 성품' 등 가장 많은 작품을 볼 수 있다. 

박성준(1940~ ), 안승억(1935~ ), 오병철(1937~ ) 선생은 직접 전시장에 나와 인사도 나누고 근황을 소개하기도 했으나 거동이 불편한 석달윤(1932~ )선생과 연락이 끊긴 이준태(1943~ ?) 선생은 과거 작품으로만 볼 수 있다.

1981년 안동 일가족간첩사건으로 무고한 8년 감옥살이를 한 안승억 선생은 재심청구 5년만인 오는 5월 16일 첫 재심재판이 열리게 됐다는 소식을 알리면서 참석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박성준 선생은 최근 어떤 계기에 '언제 가장 슬펐나'라는 질문을 받고 "우리의 운명을 해결할 방도를 자신있게 말 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슬펐다"는 답을 했다고 하면서, "앞으로 대학노트 한권 분량에 나는 이렇게 본다는 견해를 정리해 살아 생전 치르는 장례식을 준비해 여기에 참석한 손님들에게 이 소책자를 예물로 드리겠다"고 근황과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전시는 오는 30일까지, 매일 오전 11시부터 저녁 7시까지 진행되고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문의는 라이프러리 아카이브(02-363-5855, 02-725-2080)

   
▲ 선 위에 선.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오병철 선생이 사용하던 붓과 머루, 신영복 선생이 새긴 전각들도 전시됐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수정-18일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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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권 아래 노점상에게 어떤 일이 있었나?

최인기의 빈민스토리(6)
  • 최인기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
  • 승인 2019.04.18 09:19
  • 댓글 0

1. 1980년대 이후 노점상

▲ 1980년대 노점상[사진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1980년대 이후 노점상 문제를 집약해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김순희(여 79세) 씨의 삶을 통해 당시의 삶을 돌아보자.

"남편을 여의고 서울로 올라와 창신동에서 월세방을 얻어 1남 1녀와 살았어요. 새벽에 경동시장에 나가 야채나 과일 같은 걸 떼어다가 길음역 근처에 펼쳐 놓고 팔았지요. 그런데 부근에 대형 슈퍼마켓이 생기고 장사가 안되어 도봉산 등산로 입구로 옮겨 다시 소라와 옥수수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장사를 마치고 인근 시장에 나가 소라를 사다가 집에서 삶아 다음 날 10시쯤 도봉산으로 올라갔지요. 이것도 한철이라 여름에는 소라가 팔리지 않아 다른 품목으로 바꾸려고 했지만 적당한 품목도 없고, 장마까지 겹쳐 사다 놓은 물건마저 모두 날렸버렸습니다. 엎친 데 겹친 격으로 단속 때 잘 봐 달라고 노점상들끼리 걷어 상납한 돈과 왔다 갔다 차비, 점심값을 떼고 나면 손에 들어오는 것은 그야말로 몇 푼 없었어요."

이러한 김 씨에게 한 줄기 빛처럼 희망이 생겼다. 바로 노점상 단체다. 전국의 노점상이 하나 되어 서로의 생존권을 지켜 주고 어려울 때 도와줄 조직이 생긴 것이다.

"처음에는 별로 내키지 않았고 얼마나 도와줄까 망설였어요. 또 이번에도 속는 셈 치고 주변 몇 사람과 단체 가입했지요. 하지만 서로 함께 도와주며 사는 삶에 감동하였지요. 단속에 맞서 싸우는 모습을 보며 새롭게 조직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저녁때는 나도 모르게 단체 사무실로 달려가는 거예요. 밥도 같이 지어 먹으면서 다른 지역 노점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공유하고 단속이 나오면 어느 곳이든 마다하지 않고 참여했어요. 집회에서 서로의 생활을 고민하고 함께 걱정하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비록 하루 종일 장사 하다 보면 몸은 피곤하고 지쳐도 마음은 언제나 뿌듯하고 활기찼어요. 노점상단체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호루라기 소리와 완장을 찬 사람만 나타나도 허급지급 뒷골목으로 도망치기 일쑤였으니까요. 매일매일 올림픽이다 뭐다 대로변 도로의 장사를 전부 금지시켜 생계가 막막하기도 했었어요.”

정동익의 도시빈민운동(아침 출판사)의 자료에 따르면, 1983년 7월11일부터 18일까지 집중적으로 단속된 전국의 노점상은 모두 3천2백82건으로 집계되었다. 이 가운데 2백52건이 수거되고 33명이 고발당했으며 2백22명이 범칙금 스티커를 발부받았다. 포장마차의 경우 모두 3백52대가 단속되었고 그 가운데 2백대가 단속 차량에 의해 수거되어 1백62대가 현장에서 폐기되었다. 1983년 7월 19일 오전 1시부터 시청 앞 광장에 노점상 1천여명이 모여 당국의 무차별 단속에 항의하며 ‘정부는 노점의 생계를 보장하라, 생활 대책을 세워 달라’ 고 쓴 플래카드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여 시청 앞 일대 교통이 큰 혼잡을 빚게 되었다. 시위가 점차 격렬해지자 기동 경찰 200여명이 출동, 앞장서서 구호를 외치던 노점상 50여명을 강제로 버스에 태워 연행하였다.

그리고 노점상 양복임(여 37세)씨가 자살한 사건으로 이어졌다. 양 씨는 그해 8월 3일 단속을 나온 종로구청 소속 단속 반원과 실랑이를 벌이다. 아스팔트에 넘어지면서 뇌를 다쳐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종로구청은 비인간적인 만행을 저지르고서도 아무런 대책 없이 양 씨를 버려두었다. 이에 항의하여 종로 노점상 200여명이 양 씨의 유해가 안치된 서울대 병원 영안실에 몰려가 농성을 벌였다.1)
주1) 정동익 도시빈민연구 200쪽-201쪽

단속은 전국에 걸쳐 시행되었다. 대구에서는 칠성 시장 노점상 1백여 명이 북구청에 몰려가 계속 장사할 수 있도록 요구하면서 농성을 벌였고, 부산에서도 노점상 200여명이 부산 중구청 단속반 30여명과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

이 밖에도 같은 시기 서울의 성동구 마장동 우시장 입구 노점상 90여명이 노점 철거에 항의하여 구청 직원과 전경 등 100여명과 충돌하여 부상자가 발생하고 노점상 12명이 연행되었다. 경찰과 단속반에 의해 폭력적인 진압을 당하자 노점상들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빈 병과 돌 등을 던지며 항의하였다.

이 시기 노점을 하다 경찰서에 연행되어 유치장에서 구류를 사는 게 비일비재 했다고 김순희 씨는 증언한다.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으면 아이들끼리 집을 지키고 있을 생각을 하면 불안해서 가슴이 미어졌어요. 즉결 처분을 받고 나와 또 하루 벌어 하루 먹기 위해 길거리로 나서야 했습니다. 누구에게는 올림픽이 축제였지만 우리에겐 지옥이었습니다."2)
주2) 이 시기 노점상단체의 결성을 둘러싼 내용은 ‘가난의 시대 : 동력출판사’ 102쪽부터 121쪽 까지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2. 6.13대회와 노점상 운동

▲ 1987년 도시노점상연합회 개소식 장면

1980년대는 전두환과 노태우 군부독재의 공안 통치가 극에 달하던 시절이다. 1985년 IMF(국제통화기금), IBRD(세계은행) 총회를 앞두고 진행된 단속을 계기로 '노점상 생존대책위'라는 형태의 조직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86아시안게임을 끝내고 12월 29일 노점상 양연수 씨를 중심으로 ‘도시노점상복지연합회’가 만들어지게 된다. 처음 이 단체는 노점상 간의 친목과 상호부조 및 복지증진을 목적으로 출발하였지만 ‘87년 저항의 시대’에 맞게 조직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올림픽은 소중한 역사적 책무였기에 자고 일어나면 마치 모든 사람이 그 일정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살아가는 듯싶었다. 중앙정부의 지침에 따라 도시미화 사업의 미명 아래 일제 단속이 전개되었다. 1987년 5월 20일 몇몇 노점상은 등사잉크로 제작한 유인물을 들고 서울 곳곳을 돌며 노점상에게 명동성당으로 모일 것을 요청하였다. 양 연수 씨의 기억에 따르면 처음엔 제대로 모일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성당 계단에 수백여 명의 노점상이 모여 집회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그 후 노점상 집행부와 양연수 씨가 구속되는 것을 계기로 6월 항쟁에 적극적으로 결합하게 된다.

1987년 거리를 달구었던 시민들의 항쟁은 6.29선언을 끌어내고 우리 사회에는 민주화의 바람이 분다. 그 영향으로 노점상을 조직하는데 유리한 사회적 환경이 조성되어 10월 19일 ‘도시노점상연합회’로 명칭을 바꾼 후 '노점상 및 영세상인 보호법' 제정을 촉구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그리고 12월에 '노점상 양성화 촉구대회'가 명동성당에서 개최되었다.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노점상 수백여 명이 참가하였다. 노점상단체는 87년 6월 항쟁과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에 참여하면서 노점상 문제를 사회화시켜내며 자신을 얻게 되었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나갔다. 해가 바뀌어도 군사정권은 청산되지 않고 노태우 정권으로 갈아탔다. 서울 올림픽은 전 국민을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하였다. 여전히 한쪽에서는 군부독재에 맞서 싸우는 학생들의 집회로 술렁였다. 정권의 노점상 정책은 바뀌지 않고 노점상 숫자를 줄이는 것으로 일관하였다. 구청, 시청, 단속반, 게다가 경찰, 방범대원, 까지 단속으로 노점상들은 시달렸다. 조직되지 않았던 일반 노점상은 이들에게 상납 형태로 갈취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독재정권 아래 관료들 그리고 그 하부조직까지 부패되어 있어 실제 단속은 서로 공생하는 관계일 뿐이었다.

▲ 1988년 노점상 6.13대회 장면

노태우 정권은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노점상 싹쓸이 단속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 시기 노점상들은 더는 예전의 노점상이 아니었다. 조직적으로 단속에 맞서 대응하기 시작했다. 1988년 4월 18일 우리도 올림픽에 하나의 주최자로 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도시 노점상 생존권과 88올림픽에 관한 공청회’를 각계각층의 참여 속에 개최한다. 그러자 노태우 정권은 그해 6월부터 손수레 보관소 폐쇄를 포함하여 성화봉송로 주변에 대하여 대대적인 탄압을 전개한다. ‘도시노점상연합회’로 결집한 노점상들은 올림픽을 얼마 앞둔 6월 13일 성균관대학교 금잔디 광장에서 3천여 명이 모여 '노점상 생존권 수호 결의대회'를 개최한다. 집회를 마친 노점상과 시민들이 합세하여 5천여 명으로 늘어난다. 분노한 시위대가 투쟁을 결의하며 성균관대 교문을 박차고 시청으로 진출하자 곧바로 ‘군부독재 퇴진과 노점상 생존권’ 쟁취가 터져 나왔다. 이를 가로막는 전투경찰과 백골단의 진압으로 노점상 17명이 다쳐 병원에 실려 갔다. 벼랑 끝에 놓인 노점상들은 6월16일까지 무려 3일 동안 쉬지 않고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마침 여론도 노점상에 대해 생존권 보장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우호적이었다.

결국 노태우 정권은 강경한 노점단속 방침을 유보하고 손수레 보관소 폐쇄 계획을 보류하게 된다. 1988년 8월 4일 서울시는 일시적으로 노점단속 중단을, 8월 29일에는 국무총리가 노점단속 중단을 발표하였다. 마침내 조직되고 단결한 노점상들이 최초로 구체적인 승리를 쟁취한 순간이었다. 6.13대회를 계기로 노점상 생존권 문제가 사회적으로 크게 여론화되면서 노점상은 하나의 저항세력으로 사회 운동진영에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이날을 기념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노점상조직들은 매년 6월 13일에 대회를 진행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노점상이 조직적으로 사회 운동세력으로 우뚝 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당시 6.13 대회는 노점상의 대항쟁이었던 셈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노점상들이 88올림픽이 가난한 이들을 몰아내는 방식이 아니라 함께 치뤄져야 한다며 9월17일 경희대에서 '도시노점상올림픽'을 개최하며 뭉치고 생존권의 정당성을 알려냈다. 이런 사업과 실천을 바탕으로 1988년 10월 드디어 '전국조직'을 결성하여 체계적이고 탄탄한 조직 위상을 갖추게 된다.

물론 노태우 정권은 올림픽을 앞두고 소나기를 피해가자는 심정이었다. 1989년 올림픽이 끝난 후 이어지는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4월과 6월 또다시 노점상 전면 단속을 발표한다. 명동 성당에 3천여 명이 모여 다시 농성에 돌입한다. 노점상의 투쟁 전술도 한 단계 성장하였다. 명동에서 시청으로 그리고 서울시 전역으로 기습시위와 선전전을 벌이다가 대학교로 들어가 대열을 정비하고 학생들과 함께 다시 거리로 나와 시위를 전개하였다. ‘군부독재 타도와 생존권 쟁취’는 하나의 구호가 되었고 노점상 가슴에 깊게 각인되었다.

3. 1990년대 노점단속과 정책

1990년 10월 들어서는 사회기강을 확립한다는 명분으로 대통령 특별선언 ‘범죄와의 전쟁’이 발표된다. 과거 박정희가 5.16 군사 정변으로 집권한 이후 이정재를 비롯한 정치깡패들을 무더기로 구속했던 점. 그리고 전두환 정권 시절 ‘삼청교육대’와 같이 범죄와의 전쟁은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었지만, 사회적으로 불법과 무질서 그리고 과소비와 투기 또는 퇴폐와 향락 근절 아래 폭압 통치를 강화해 나가는 것이었다. 노점상도 ‘민생침해사범’으로 규정하여 노점상에 기생하는 폭력배들을 도려내겠다는 것을 빌미로 단속했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범죄로부터의 불안감은 반짝 줄어들 뿐이지만 사회안전망 확충, 복지정책 등이 동반되지 않는 범죄예방 정책의 성공은 낮을 수밖에 없었다.

1993년 군부 출신이 아닌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현재의 행정구역이 1995년 확정되면서 전국동시지방선거로 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을 뽑게 되었다. 이제 노점단속은 기존의 중앙정부에서 자치단체로 그리고 공무원의 직접 단속에서 용역을 동원한 단속으로 바뀌었다. 단속권과 철거 권한을 민간으로 이양하면서, 범죄와의 전쟁으로 철퇴를 맞은 폭력조직이 합법적인 은신처로 거대한 용역 민간업체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물론 서울시가 단속으로만 일관하지는 않았다. 이때부터 조직화한 노점상을 사회적으로 분리하고 스스로 규율을 강제하는 방식도 병행한다. 사회운동의 열기를 이어받아 노점상이 조직화 되고 저항이 심해지자 서울시는 노점상 ‘절대 금지구역과 상대 금지구역’을 지정하였다. 그 내용은 역세권을 중심으로 노점상을 할 수 없으나 이면도로에서는 묵인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존 ‘가로가판대 사업’을 확대 추진한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융자 500만 원으로 전업을 알선하고 젊은 사람을 중심으로 기술교육을 한다는 내용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는 노점상에게 맞춤형으로 특화된 대책이라기보다 일반적인 실업 대책을 응용한 것이었다. 다만 구두닦이와 버스토큰 가판대등 가로가판대 1016곳을 추가로 허용하거나 풍물시장 설립과 함께 전국 100여 곳의 시영아파트 지하상가 입주권을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1990년대 초 높은 경제성장률에 따른 고용안정과 낮은 실업률은 노점상이 점차 자연 감소하는 시대였다. 이러한 경제적 토대 아래 개량적인 정책을 모색했다. 그러나 지하상가 입주는 유야무야되거나 풍물시장은 훗날 10년도 안 되어 모두 사라지면서 이주 대책 사업은 임시방편일 뿐 현실성 없는 대책임 드러났다. 개량적인 정책은 앙상한 물거품이라는 게 증명된다.

6공화국 5년간 노점단속으로 인해 3만 339개의 노점상 강제철거, 이중 5천 662개의 손수레파손 및 물품 파손이 발생했고, 이로 인한 재산피해액 45억 6천 4백4십9만2천원으로 집계 되고 있다.3)
주3) 14대 대통령선거 도시빈민은 무엇을 할 것인가?

노점상들은 생존권 투쟁은 스스로 질서를 지킨다는 취지의 '자율질서' 사업을 전면에 걸고 노점상마차 규격화 사업과 거리환경개선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가 터졌다. MF 구제 금융사태는 한국사회 전반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고, 경제침체와 더불어 급격히 늘어난 실업자 대열은 전국적으로 노점상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노점상이 늘어난다는 이야기가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시기였다. 신자유주의 정책과 유연화 정책이 지속하고 한미FTA 협상을 통한 금융 자유화 조치 등으로 비정규직 노동자가 확대되면서 새롭게 신빈곤층이 확산하여 나가기 시작했던 것도 1990년대 후반부터다.

최인기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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