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명의 사상자를 낸 광주 동구 재개발 건물 붕괴 사고는 규정을 위반하고 경고음도 무시해 발생한 ‘민관합작’ 인재라는 정황이 뚜렷해지고 있다. 11일 아침신문을 종합하면 주무 감독청은 기준 미달인 해체계획서를 허가했고 현장에선 이마저 위반했으며, 사고 두달 전 같은 지역에 안전조치 민원이 제기됐지만 묵살됐다.
신문들은 이날 1면과 주요 지면에 광주광역시 학동 4구역 재개발 지역 5층 건물 붕괴사고 원인을 보도하며 “안전을 외면해 발생한 예고된 인재”이자 “민관합작품”이라고 규정했다.
▲11일 아침신문 1면 갈무리
엉터리 해체계획마저 위반, 구청은 묻지마 허가
두달 전 시민이 안전사고 위험을 제보한 적 있지만 동구청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한겨레는 “국민권익위원회 국민신문고에 지난 4월7일 ‘광주 학동 4구역 철거 공사의 인명사고 위험성이 있다’는 공익 제보가 접수됐다”며 “시민 신아무개(58)씨는 ‘철거 현장 바로 옆은 차량이 지나가는 도로인데, 천막과 파이프로만 차단하고 철거하는 것이 인명사고가 (날 수도 있을 것 같아) 불안해서 알린다’고 제보했다”고 했다.
동구청 도시관리국 쪽은 4월12일 “안전조치 명령(공문발송 등)했다”는 답변을 보냈다. 한겨레는 “철거 현장 안전을 우려하는 민원에 적극적으로 응대했더라면 막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번 사고도 ‘인재’였다”고 했다.
▲11일 한겨레 1면
▲11일 경향신문 1면
주택재개발 정비사업조합은 기준과 다른 해체계획서를 제출했고, 감독청은 안전 위반 계획서에도 철거 허가를 내렸다. 철거업체는 기준과 다른 해체계획서마저 어긴 데다 감리사 없는 상태로 철거 작업을 진행했다.
한국일보는 “동구청은 해체계획서에 담긴 해체 작업 순서가 국토부 기준과 다른데도 허가했다”고 했다. 한국일보는 “실제 이 조합의 해체계획서에 따르면 건축물 구조 안전 위험성이 높은 측벽에서부터 철거하는 것으로 돼 있다. 이에 따라 철거업체인 H사도 건물 뒤쪽에 3층 높이로 성토체(盛土體)를 조성한 뒤 굴삭기를 동원해 건물 측면부터 까나가기(해체)를 했다”며 “마감재, 지내력 벽체, 슬래브, 작은 보, 큰 보, 기둥의 순으로 해체하라는 국토부 기준을 어긴 것”이라고 했다.
철거공사를 맡은 업체가 이마저도 지키지 않은 정황이 제기됐다. 경향신문은 “계획서상에는 3층까지 해체 완료 후 지상으로 장비를 옮겨 1~2층을 해체하는 것으로 돼 있다. 철거 공법은 무진동 압쇄였다. 이 공법은 방진벽과 비산먼지 차단벽이 필요하다. 먼지가 많이 발생해 물을 뿌리는 살수시설이 필수”라고 했다. 업체 측은 사고 난 9일 철거를 시작했다고 밝혔지만 제보된 사진과 영상엔 지난 1일부터 4~5층을 그대로 둔 채 굴착기가 3층 이하 저층 구조물을 부수는 모습들이 포착된다.
▲11일 한국일보 1면
▲11일 한국일보 2면
경향신문은 “두 달여 전에도 참사 현장 인근에서 비슷한 사고가 있었다. 지난 4월4일 광주 동구 계림동에서 공사 중이던 주택이 무너져 노동자 2명이 숨졌다”며 “이 사고를 계기로 광주시는 안전점검이 필요하다고 보고 5개 자치구에 모두 4차례나 공문을 보냈다. 하지만 사고는 또 일어났다”고 했다.
철거 상황을 점검해야 할 감리자는 현장에 없었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지난해 5월부터 4층 이상의 건물에 대한 해체 공사를 할 때는 지방자치단체가 감리를 직접 지정하도록 한 개정 건축물관리법이 시행됐다. 동아일보는 “구청은 건축사 대표 A 씨를 감리자로 지정했다”며 “A 씨는 건물의 구조 안전성에 문제가 없다며 ‘적정’ 결론을 내렸고, ‘비상주 감리’라는 이유로 사고 당일 현장에도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경향신문은 이를 두고 “현행 건축물관리법에 건물 철거와 해체 공사 허가제도는 있지만, 실제로 착공에 들어가기 직전 지방자치단체에 신고하는 ‘착공 신고제’ 규정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해당 법률엔 안전 여부를 심의할 ‘감리자 상주 배치’ 규정도 없었다”고 했다.
▲11일 동아일보 1면
건설노동자 피해 가장 커, 일반공사보다 철거에서
신문들은 공사기간과 비용을 줄이기 위한 불법 다단계 재하도급이 참사의 원인이라고도 지적했다.
보도에 따르면 ㈜현대개발산업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학동 일대 12만6433㎡ 규모 학4구역 재개발 지역에서 아파트를 짓기 위해 철거작업을 진행했다. 학동4구역은 광주의 대표 노후 주택 밀집지역 가운데 한 곳으로, 이곳엔 지하 2층~지상 29층 아파트 19개동 2282가구가 들어설 예정이었다. 공사를 수주한 현대산업개발은 전문건설업체인 H기업에 하도급을 줘 철거공사를 맡겼다. H기업은 다시 광주의 구조물 장비업체 B사에 재하청을 줬다. 그러나 현대산업개발 측은 재하청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동아일보와 서울신문 등이 이를 보도했다. 조선일보도 “철거 업체의 무리한 공사와 허술한 안전 관리에 대해, 업계 관계자들은 2~3단계 하도급과 재하청이 이뤄지는 공사 현장 납품 구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도 제기됐다”고 했다.
▲11일 동아일보 3면
건물 해체·붕괴 현장 사고 피해의 대부분은 건설 노동자들이 입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향신문은 “올해 철거·해체 현장 사고 23건…정부는 ‘행정지도·교육’이 전부”에서 “2015년부터 전국에서 발생한 주요 철거·해체 공사 현장 붕괴사고는 모두 15건이다. 이들 사고로 사망자 17명, 부상자 17명이 발생했다”고 했다. 신문은 “2017년 고용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의 ‘철거·해체 공사 중 붕괴 사례 분석’ 결과를 보면 일반 공사 현장에 비해 철거·해체 현장의 중대재해 피해 정도가 더 컸다”고도 했다.
이 신문은 “건설공사 안전관리 종합정보망을 통해 확인한 자료를 보면 올해에만 전국의 토목과 건축 관련 철거·해체 현장에서 23건의 각종 안전사고가 발생했다. 이들 사고로 노동자 3명이 숨지고 2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밝혔다.
▲11일 경향신문 1면
수도권 식당·노래방 영업시간 내달 ‘밤 12시’까지
다음달부터 수도권의 식당·카페·노래연습장·유흥시설의 영업시간이 자정까지 연장될 것으로 보인다. 그 밖의 시설은 시간제한이 풀릴 전망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 새 개편안에 따라서다.
중앙사고수습본부는 7월부터 시행될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 개편안과 관련해 10일 “2단계에서는 식당·카페·노래연습장·유흥시설 등은 24시(자정) 운영제한이 있고, 그 외 시설은 운영시간 제한이 없다”고 밝혔다.
정부가 지난 3월 마련해 다음달부터 적용되는 거리 두기 개편안을 보면 수도권의 경우 주 평균 확진자가 181명 이상이면 2단계, 389명 이상이면 3단계, 778명 이상이면 4단계가 적용됐다. 현재 수도권의 확산 상황(주 평균 374.9명)은 2단계다.
▲11일 서울신문 1면
▲11일 조선일보 1면
정부는 새 거리 두기 체계의 구체적인 내용을 빠르면 다음주 공개한다.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서울신문, 조선일보 등 신문들이 1면에 이 소식을 보도했다. 신문들은 복지부가 코로나19 사태 장기화 속에 국민 피로도가 높아지고 고령층 백신 접종이 상반기 마무리됨에 따라 새 개편안을 마련 중이라고 했다.
원희복 이사장이 10일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반통일 언론'의 폐해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그들은 북을 외면하도록(북맹) 강요한다. 북맹을 넘어 북을 악마화(혐북)까지 한다. 국민들로 하여금 통일공포증을 조장하게 하고, 통일 의지를 꺾는다. 여기서 끝나면 좋은데 정치인들은 이것을 이용해서 국민을 편가르기 한다. 아까 (이부영) 이사장님이 북한의 노동당 규약이 개정됐는데 우리 정치권에서는 조용하다는 말씀을 했다. 그 이유가 뭔가. 정치인들이 ‘조중동’ 의식해서 자기검열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정부가 올바른 대북정책, 통일정책을 펼치기가 매우 어렵다. 결국 이것은 우리의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데 커다란 저해요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원희복 민족일보기념사업회 이사장이 10일 오후 2시30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평화저널리즘 모색 세미나’에서 ‘반통일 언론의 폐해’에 대해 이같이 조목조목 비판했다.
친일·분단독재에 기생해 성장한 ‘조중동’의 태생적 한계는 그렇다치고, 대안으로 기대를 모았던 진보언론조차 ‘반세기의 신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성급한 ‘반북’ 보도에 편승하는 실정이다.
이 질곡을 넘어 평화저널리즘으로 가는 길은 “결국 기자의 문제”라고 원 이사장은 강조했다.
사태를 처음 파악하고 판단하는 일선 기자들이 △냉전 사고를 버리고, △평화통일을 이룬다는 신념을 가지며, △동맹 의존성을 버리고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라고 조언했다.
토론자들은 평화저널리즘의 실현을 위한 여러 방안들을 제시했다. [사진 - 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토론자로 나선 이계환 [통일뉴스] 대표는 “‘평화저널리즘’의 첫 시도로 ‘정명론’에 입각해 남측과 북측에 제 이름을 불러주기를 제안한다”고 밝혔다. “남과 북을 한국(대한민국), 조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약칭을 쓰면 좋은데, 그 과도기적 형태로 남측을 ‘남한’, 북측을 ‘북조선’이라 부르자”고 제안했다.
권영석 [연합뉴스] 통일언론연구소장은 “평화저널리즘을 위해서는 우리 기자들이 지난 1995년에 제정한 ‘남북관계 보도제작준칙’을 학습할 필요가 있다”면서 “이 준칙의 존재조차 모르는 기자들이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동시에 “남북 언론교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임상우 ‘한반도 중립화를 추진하는 사람들’ 사무총장은 역대 정부의 “‘기능주의적 평화 프로세스’의 허구성”을 지적하면서 “선중립-후통일”이 현실적이고 시급한 과제라고 주장했다. 남북미중이 평화조약을 체결함과 동시에 남북영세중립화선언-남북국가연합 수립으로 가자는 것.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이 인사말을 전했다.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이날 행사는 ‘민족일보 창립 60주년’과 ‘조용수 서거 6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자유언론실천재단(이사장 이부영)이 마련했다.
이부영 이사장은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은 중립화통일, 영세중립 이런 걸 주장한다고 사법살인 당했다. 기가 막힌 노릇이다. 그 뒤에 박정희, 전두환 정권 내내 조용수의 중립화 통일방안은 금기어가 되어 있었다”고 상기시켰다.
그는 “그런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 중립화, 평화공존을 얘기해도 누기 시비 걸 사람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걸 안하고 있는 우리의 게으름이 너무 크다”고 개탄했다.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적과의 잘못된 전쟁."1951년 오마 브래들리 합참의장이 미 의회에서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에 대항해 중국 본토를 공격하자는 맥아더의 계획에 대해 중국과의 전쟁을 압축해서 표현한 유명한 표현이다.
1980년대 미국 유학시절 '정책결정론' 수업 교재에서 이 이야기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대한민국을 적화통일로부터 구한 구세주'로 알고 있었던 맥아더가 사실은 잘못된 정책 결정으로 미국을 '제3차 세계대전'의 위기로 끌고 갔으며, 맥아더가 남긴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져 갈 따름이다"라는 멋진 말도 이 같은 강경론을 주장하다가 해임당하면서 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3번 국도를 타고 동두천을 지나 연천에 들어서 한탄강 바로 직전에 오른쪽을 보면 두 개의 커다란 조형물이 나타난다. 먼저 나타나는 것은 '38선'이라고 쓴 커다란 돌이다. '여기는 겨레의 한이 맺힌 분단의 현장 38선입니다'라고 쓰여 있는 이 표시석은 1971년 만든 것이다. 원래 있었던 38선 표시석은 1950년 6월 25일 남하하는 북한군 탱크에 파괴된 것으로, 그 옆에 역사적 유물로 다시 세워 놓았다. 이곳이 바로 말로만 듣던 분단의 현장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 연천에는 부서진 38선 표시석과 설명석이 분단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위) 분단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부서진 38선 표시석 옆에 새로 세운 연천의 3.8선 표시석(아래) ⓒ손호철
이를 조금 지나 북쪽으로 향하면 조그마한 탑이 보인다. 탑에는 영어로, 그것도 아주 작은 글씨로 쓰여 있어 무슨 탑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 자세히 읽어 보니, 한국전쟁 발발 1년 뒤인 1951년 5월 28일 미군 제 1기병사단이 그리스군과 태국군의 지원을 받아 38선을 돌파한 것을 기념하는 한편,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세 나라 군인들을 추모하는 '38선 돌파기념비'다.
▲ 38선 바로 북쪽에 설치되어 있는 38선 돌파기념비. 인천상륙작전 후 유엔군이 북진을 히며 38선을 돌파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손호철
한국현대사, 구체적으로 1945년 해방에서 한국전쟁이 휴전되는 1953년까지의 해방 8년사에서, 38선은 네 번 중요하게 등장한다.
첫 번째는, 분단이다. 1945년 8월, 미국과 소련은 38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분할했고 그 결과 분단이 시작됐다. 두 번째는, 1948년 남쪽에는 대한민국이, 북쪽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독립된 국가'가 설립되면서 38선은 '두 체제'의 국경선이 되고 만다. 세 번째는 한국전쟁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은 38선을 넘어 전면전을 일으킨 것이다. 네 번째, 북진이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엎고 서울을 수복한 미군과 국군은 38선을 넘어 북진을 했다.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북진해 북한을 무너트리고 북진통일을 이루는가 싶었을 때, 중국군이 물밀 듯이 압록강을 건너왔다.
중국군은 인해전술로 다시 한 번 38선을 넘어 평택까지 남하했다. 따라서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38선은 여기에서 다섯 번째로 쟁점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다시 연합군이 반격을 해 황해도와 개성 등 서부지역을 제외하고 연천지역부터 강원도까지는 우리가 38선을 넘어 북쪽의 일부를 차지했으니 38선은 여섯 번째로 쟁점이 된 것이다. 연천의 38선 돌파기념비는 바로 이 반격작전 때 38선을 재돌파한 것을 기념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로 생겨난 휴전선은 크게 보아 원래의 38선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는 네 번째 속에서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38도가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그러면 38도 이남은 우리가, 이북은 당신들이 점령합시다."
최근 공개된 여러 문서들에 따르면,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항복 의사를 밝히면서 이미 한반도 국경에 도착한 소련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할 가능성이 매우 커지자, 미국의 딘 러스크 국무부 정책과장보가 찰스 본스틸 전쟁부 정책과장과 함께 서울과 인천을 미국의 통제 하에 두기 위해 군사경계선으로 38선을 긋자는 미국의 제의를 소련이 받아들임으로써 분단이 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여기에서 정작 놀라운 것은 트루먼 대통령 등 당시 미국의 관계자들이 나중에 밝혔듯이, 소련이 이를 덥석 받아들인 것이다. 멀리 떨어진 미국과 달리 소련은 한반도와 국경을 접하고 있고 이미 소련군이 한반도로 들어오고 있는 상황을 고려할 때, 소련이 38선에 반대하고 훨씬 남쪽에 경계선을 하자고 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같은 미소 양국의 분할점령이 바로 분단이라는 비극의 시초라는 점을 생각하면서 38선 표시석을 바라보니, 가슴이 더욱 아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김구의 이 같은 선언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김일성은 1948년 남북한에 각각 독립된 정부를 수립했다. 이로써 1945년 미소 양국에 의해 이루어진 군사적 분단이 항구적인 분단체제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분단도 분단이지만, 북한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며 38선을 넘어 전면전을 일으킨 것도 문제다. 물론 당시 많은 사람들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등 통일에 대한 강한 염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수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 등 한국전쟁이 가져온 처참한 결과, 그리고 그 이후 남북한에 나타난 비정상적인 억압체제와 이들 간의 대립을 생각하면, 이는 정당화 될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내가 이 나라의 최고통수권자이니, 나의 명령에 따라 북진을 하라." 용산 전쟁박물관에 가면 이승만의 북진 명령을 비롯해 유엔군의 북진 작전을 대대적으로 부각시켜 놓았다(이승만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국에 국군통수권을 양도한 만큼 자신이 최고통수권자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북한의 남침이 문제라면, 북진도 문제이긴 마찬가지다. 물론 맥아더와 이승만의 강경노선에 기초한 38선 돌파에 대해 북한이 먼저 38선을 넘어 남침을 한 만큼 우리도 38선을 넘어 북진을 한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객관적 현실을 무시한 잘못된 결정이었다.
구체적으로, 유엔군이 북진을 할 경우 중국이 이를 중국에 대한 침략으로 간주해 참전할 것이라는 경고를 여러 차례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북진을 함으로써 미국은, 나아가 우리도,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적과 잘못된 전쟁'을 하게 된 것이다.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에 대한 영국의 극비 문서들을 연구한 김계동 국가정보대학원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이다.
▲ 인천상륙작전 후 유엔군이 3.8선을 넘을 경우 중국에 대한 적대 행위로 간주해 참전하겠다는 중국의 경고를 설명한 전쟁기념관의 전시물 ⓒ손호철
▲ 중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내린 북진 명령을 전시해 놓은 전쟁기념관 전시물 ⓒ손호철
중국은 1950년 9월 초부터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경우 25만 명을 파병할 수 있다는 경고성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인도의 네루 총리는 유엔군이 북진을 하지 말도록 영국에 긴급 제의했고, 영국은 미국에 유엔군이 북한군에 항복을 권하며 최소 7~14일간 38선에서 북진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의 최고지도부는 맥아더의 분석과 주장에 기초해 '중국이 뻥을 치고 있다'고 생각,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10월 9일 전면적인 북진을 시작했다. 영국은 다시 북위 40도선에 완충지대를 만들어 중국의 우려를 해소시켜줘야 한다고 제의했지만 미국은 이를 다시 묵살했다. 그 결과가 바로 중국의 참전이다.
▲ 중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유엔군이 북진을 하자 압록강을 넘은 중공군이 남하하고 있다. 고성 DMZ박물관 전시물 ⓒ손호철
결국 중국의 경고를 무시한 맥아더 등 강경파들의 오판에 기초한 북진 결정으로 네댓 달이면 끝날 수 있었던 전쟁이 무려 3년이나 이어졌고, 미국과 중국이 정면충돌하는 국제전으로 발전되고 말았다(최근 당시 비밀문서에 대한 한 연구는 중국에 대한 핵무기 사용의 경우 맥아더보다도 워싱턴이 더 강경파였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 결과, 100만 명이 넘는 민간인 희생자는 논외로 하더라도, 국군 13만 7899명, 북한군 52만 명, 미군 3만3668명, 중국군 14만8600명 등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고 온 한반도가 쑥대밭이 돼야 했다. 중국의 경고를 받아들였다면, 중국군은 전혀 죽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한국군, 북한군, 미군 등도 최소한 6분의 5는 죽지 않아도 됐다는 이야기이다.
▲ 이승만의 북진명령서와 북진을 표지 기사로 보도한 타임지 ⓒ 손호철
▲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국군의 38선 돌파기념사진. 북진은 결국 중국의 참전을 초래해 전쟁의 장기화를 기져왔다. ⓒ손호철
이처럼 맥아더가 해임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고, 중국이 '항미원조(抗米援朝,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도운) 전쟁'이라고 부르는 한국전쟁에 대해 미국에 책임이 있다고 비판하는 데에도 나름 이유가 있다. 즉 미국이 한국전쟁의 발발에 책임이 없는지 모르지만, 북진을 통한 확전에는 분명히 책임이 있다(물론 중국도 스탈린과 함께 북한이 한국전쟁을 일으키는 데 지원을 약속했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의 발발에 일정한 책임이 있다). 바로 이 때문에 미국의 많은 '정책결정론' 수업에 한국전쟁을 가르치는 것이다.
38선 표시석과 38선 돌파 기념비를 보고 있자, 38선을 둘러싼 우리의 비극적 역사, 구체적으로 분단, 단독정부 수립, 북한군의 남침, 유엔군의 북진이라는 사건들이 차례로 지나가면서, '정책결정론'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한국전쟁, 구체적으로 북진은, 가장 똑똑한 엘리트들이 집단사고에 빠지는 경우 얼마나 멍청한 결정을 내리고 국민들의 목숨을 희생시키는가를 가르쳐주는 좋은 사례라는 점에서 두고두고 기억해야 한다."
"조선낫이 원체 무겁잖아요. 그걸 들고 열두 살 때 공동묘지에서 혼자 아버님 묘를 벌초한 자리에서 잠깐 졸았나 봐요. 흰 창호지 전지를 양손에 들고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열개 정도 내려갔더니 엑스레이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흰 뼈가 나오더라고요. 팔, 다리, 가슴뼈... 그런데 머리가 없어! 당황해서 두리번거리다 눈을 번쩍 떴어요. 너무 무서웠죠."
권대용(77세)씨는 지금도 섬뜩하다고 했다. 그 뒤 6·10만세운동의 주역인 막난 권오설 선생(1897~1930)의 '철관'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데 66년이 걸렸다.
[철관] 12살의 꿈
권오설 선생의 양아들인 권씨가 부부합장을 위해 파묘한 것은 2008년 4월 15일이었다. 제95주년 6·10만세운동 기념식을 앞두고 만난 권씨는 파묘 당시 "녹이 시뻘겋게 슨 철제 관을 보고 눈물은 안 나오고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고 회상했다.
국가보훈처는 2021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권오설·이선호·박래원·이동환 선생을 선정했다. 1926년 6월 10일 융희 황제(순종) 장례일(인산일)을 기해서 일어난 6·10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참여한 주요 인물들이다. 권오설 선생은 노무현 정부 때인 지난 2005년 뒤늦게 건국훈장 독립장으로 추서됐다.
▲ 1926년 융희 황제(순종) 장례일(인산일)을 기해 일어난 6.10만세운동을 기획한 권오설 선생의 양자 권대용씨와 2005년 노무현 정부 당시 권오설 선생에게 추서된 건국훈장 독립장.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가일(佳日)마을. 삼각형 모양의 정산이 병풍처럼 감싸 안은 이곳은 안동 권씨가 500년간 지켜온 동성마을이다. 지난 2일 찾아간 선생의 고향 마을 어귀 가일지(못)에는 바람이 불 때마다 잔물결이 일었다. 그 앞에 우뚝 선 300년 된 회화나무 그늘 아래 정자에서 대여섯 명의 주민들이 담소를 나누면서 웃었다.
이곳이 항상 평화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안동의 모스코바'. 이 마을에 붙여진 별칭이다. 근대 사회주의 운동을 연 권오설과 권오직 형제, 권오상(권오돈) 등 안동의 초기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곳이다. 풍산들이 내려다보이는 가일못 제방 위, 현충시설로 지정된 권오설 선생 기적비 앞에 서면 일제 강점기의 엄혹했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입구에 세워진 "항일구국열사 권오설 선생 기적비". 민족독립을 위해 몸 바친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삶과 뜻을 기리기 위해 2001년 11월 11일 세워졌다.
"혹시, 일본 놈들이 아버님 시신을 훼손한 게 아닌가? 그 꿈을 잊은 적이 없어요. 하지만 형편이 힘들어 확인할 생각은 못했죠. 마침 2008년에 보훈청에서 이장·보수비용으로 150만원을 줬어요. 문중에서는 둘레석을 쌓은 뒤 상석을 놓자 했는데, 저는 그 속을 미치도록 들여다보고 싶었죠. 결국 생각한 게 어머니와의 합장이었어요."
포클레인으로 조심스레 파내려가다가 직사각형 모양의 녹슨 철관의 형체가 나오기 시작할 때 권씨는 공사를 중지시킨 뒤 학계에 알렸다. 인부들이 손으로 조심스럽게 파내려가 철관의 형체를 보존시키면서 유골을 수습할 때였다.
"어? 그런데 왜, 두개골이 안 보이노? 빨리 두개골 찾아봐라."
그는 꿈속에 본 모습이 떠올라 또다시 섬뜩했다고 했다. 하지만 구석진 자리에서 뒤늦게 발견된 두개골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고 했다.
"이틀 뒤였죠. 원래 합장하려던 날인 4월 17일(권오설 선생의 기일). 비가 억수로 쏟아졌어요. 억장이 무너질 정도로 슬프면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철관을 보았을 때에는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틀 뒤에 창밖을 보며 폭우보다 더 많은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생가터] 양반유림 가문의 빈농... 까치구멍집
가일마을 입구 회화나무를 지나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오른쪽으로 병곡종택과 수곡고택의 담장을 따라 걸으면 남천고택 담장 안쪽에 권오설 선생 생가터가 있다. 해방 후에 불이 났고, 지금은 참깨 묘목이 자라고 있다. 작은 텃밭만 봐도 당시 권오설 선생의 가난을 짐작할 수 있다.
▲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생가터. 권오설 선생 생가 흔적은 사라지고 밭이 되었다.
"그야말로 초가삼간이었죠. 초가집 용마루 양 옆에 구멍이 있어서 일명 까치구멍집이라고 불렀습니다."
권대용씨의 말이다. 권 선생의 부친 소암 권술조는 서당 훈장을 지내는 양반 유림이었는데, 빈농이었다. 권 선생은 부친의 한문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1907년에는 남명학교를 다니며 신학문과 한학을 익혔다. 1916년 대구 고등보통학교(경북고등학교 전신)에 입학했지만, 3학년 때 퇴학을 당했다. 친일교사 배척, 동화적 노예교육을 반대하며 동맹휴학을 주도했다는 이유였다.
"집안이 가난해서 학비 낼 돈도 없었지만, 요즘말로 하면 소위 '운동권'이었나 봅니다. 권술조 할배가 쓴 제문을 보면 이 때 당시를 묘사하며 '루에 오르던 자의 사다리를 뗐다'고 절망했습니다. 학교를 그만뒀지만, 일본인 교장도 부친의 재능을 아껴서 경주 부잣집에 가정교사를 하도록 배려해줬다고 하더라고요."(권대용)
권오설 선생은 그 뒤 상경해서 중앙보통학교와 경성부기학교 등을 다녔지만 중도에 그만뒀고, 지인이 자리를 알선해 전남도청에서 근무하다가 3·1운동을 맞았다. 권대용씨는 "그 때 부친이 광주 시위를 주도한 배후로 지목돼 체포된 뒤 6개월의 형을 살았다"고 말했다. 권 선생은 목포에서 복역했다.
[원흥의숙] 100년 뒤에 들어선 한옥책방 '가일서가'
가일마을 입구 두 갈래 길에서 왼쪽 길로 올라가면 '노동서사'가 나온다. 1770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문중 위패를 모시던 제사 공간이었고 서당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1919년 11월, 고향 가일마을로 돌아온 권오설 선생은 이곳에 '원흥의숙'이라고 불리는 원흥학습강습소를 세워 마을 청소년을 교육했다.
"많게는 학생들이 200명이 넘었다고 하더라고요. 부친은 교장 겸 교사였지요. 월급을 타면 필기구를 사라고 아이들에게 다 나눠줬답니다. 일직면에는 '일직서숙', 풍산에는 '풍산학술강습회' 등 분교를 열어 교육운동을 했지요. 목소리가 하도 카랑카랑해서 멀리 떨어진 산에서도 들렸다고 합니다."(권대용)
▲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이 고향인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에서 원흥학술강습소를 운영했던 노동서사. 오른쪽 건물은 학생들의 숙소로 사용된 노동재사.
제사 음식을 준비하고 숙식도 했던 노동서가 바로 옆 건물 '노동재사'에는 작은 한옥 서점이 들어서 있다. 이가람, 김현정 부부가 문중의 허락을 받아 차린 '가일서가'다. 책만 파는 게 아니라 노동서가 한쪽 방에서 글쓰기를 교육하고, 가일서가에서는 문화 프로그램도 진행하는 인문 사랑방이었다. 지난 2일에도 사진작가를 초대해 전시회를 열고 있었다.
"운명으로 받아들였죠. 1919년에 이곳에서 원흥의숙이 시작됐는데, 100년 뒤인 2019년에 가일서가를 열었으니까요.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일제의 불공정한 지배에 대해 깨우쳐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건물을 함부로 대할 수 없어요. 한번은 국회도서관에서 이곳을 소개해달라고 해서 '막난 권오설에 부치는 편지'라는 글을 썼는데, 선생님의 아드님(권대용)이 고맙다고 전화까지 주셨어요."(가일서가 김현정씨)
[조선공산당] "왜놈들과 맞선 항거의 무기"
권오설 선생이 100여 년 전에 가일마을에서 시작한 건 교육운동만이 아니었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 펴낸 자료총서 '권오설2'에 따르면 1920년에는 가곡농민조합을 조직했다. 안동청년회 집행위원, 일직면금주회 회장,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 입회, 풍산청년회 결성 등 청년·농민·노동운동을 벌였다.
그 뒤 풍산소작인회 대표 자격으로 서울로 간 권오설 선생은 1924년 신흥청년동맹과 한양청년연맹의 중앙집행위원이 됐다. 조선노동총동맹 상무위원을 거쳐 책임자로 올랐다. 서울에서는 인쇄직공조합을 조직하고 양말직공·고무직공·양화직공의 파업을 지도했다. 1925년 4월 17일에는 김재봉·김찬·조봉암·박헌영·김단야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창당했다.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권오설,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조선공산당은 일제에 의해 지도자들이 대거 검거되면서 와해됐지만, 권오설 선생은 조직 재건을 위해 박헌영 다음으로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맡았다. 당시 그는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에서 들어오는 자금도 관리하고 있었다.
"8·15 때 해방된 것은 친일파였지, 독립운동가는 아니었습니다. 반민특위가 뒤집어진 뒤 부친의 이름 앞에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었죠. 그래서 서훈도 늦게 받았어요. 하지만 부친이 활동할 때에는 남북이 갈리지도 않았죠. 당시 78%의 민중이 사회주의를 옹호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려면 많은 정보와 자금이 필요했고, 조직을 통해야만 가능했어요. 사회주의는 왜놈들과 맞선 항거의 무기였죠."(권대용)
1926년 9월 1일 발표된 조선공산당 선언에도 "당면한 투쟁 목적은 일본제국주의의 압박에서 조선을 절대로 해방함에 있다"고 적혀있다. 당면 정치 요구로는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되 국가의 최고 및 일체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조직한 직접, 비밀, 보통, 평등의 선거로 성립한 입법부에 있을 일 ▶일본의 군대, 헌병 및 경찰을 조선에서 철수할 일 ▶무제한의 양심,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을 내걸었다. 권대용씨의 말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명하게 밝히겠다는 선언이 이어지고 있다. 이미 권익위 결과를 받아든 더불어민주당이 8일 투기 의혹을 받는 12명 의원에게 탈당 권유 및 출당 조치 방침을 내린 가운데, 정의당·열린민주당·국민의당·기본소득당·시대전환 등 5개 야당도 9일 권익위를 찾아 소속 국회의원과 직계 존·비속에 대한 부동산 거래 전수조사를 의뢰했다. 국민의힘만이 국회의원 조사 권한도 없는 감사원을 찾아가면서 비판이 일고 있다.
이날 9개 주요 종합일간지 중에서 6개 신문에는 국민의힘을 꼬집는 사설이 게재됐다.
경향신문: 국민의힘, 감사원 핑계 말고 부동산 조사 당당히 응해야
국민일보: 국민의힘, 소속 의원 투기 조사 권익위에 맡기는 게 옳다
서울신문: ‘국회의원 부동산 투기’ 근절 없이 정권 잡을 생각 말라
조선일보: 야당도 부동산 투기 전수조사 피해 갈 생각 말라
한겨레: 야5당도 전수조사 의뢰, 국민의힘 ‘쇼’만 할 건가
한국일보: 야5당 권익위 의뢰에도 국민의힘만 감사원 타령
▲6월10일자 9개 종합일간지 1면 모음
국민일보는 “민주당 출신 전현희 전 의원이 위원장이어서 정치적 편향성이 우려돼 권익위 조사를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궁색하다”고 지적했다.
조선일보도 “이미 국민의힘 일부 의원은 부동산 투기 등 혐의로 정부합동특별수사본부(특수본)의 수사를 받고 있다”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여권의 땅 투기와 내로남불만 비판할 처지가 아니다. 이런 의혹을 철저히 조사해서 투기와 불법이 드러난 의원들은 출당과 고발 등 고강도 조치를 내려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겨레는 “국민의힘이 감사원 조사를 계속 고집한다면, 전수조사를 통해 소속 의원들의 투기 의혹이 무더기로 드러날까봐 겁내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전 법무차관 택시기사 폭행 ‘용구사미’ 수사 비판
이용구 전 법무부 차관의 택시기사 폭행 사건 수사에 대한 경찰 결론에 여러 지적이 이어진다. 일선 경찰관의 잘못을 지적한 수사 결과가 ‘꼬리 자르기’라는 비판이다. 서울경찰청 청문·수사 합동진상조사단은 관련자 91명을 조사한 결과 외압이나 청탁을 의심할 정황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해당 수사관은 특수직무유기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고의 직무유기 여부에 대해선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경찰수사심의위원회 판단을 받겠다고 했다.
▲이용구 전 법무부차관에 대한 경찰 수사를 풍자한 6월10일 중앙일보 '박용석 만평'
경향신문(경찰 “이용구 폭행 서초서 부실 수사”…윗선 개입은 못밝혀)은 “경찰이 부실 수사에 윗선 개입이 없다고 결론내린 것은 이 전 차관이 청탁하거나 외압을 행사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면서도 “경찰이 유력한 공수처장 후보로 거론되던 이 전 차관의 신분을 알고 ‘셀프 봐주기’를 했다는 의심은 남아 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5부(부장검사 이동언)는 이 전 차관 사건 전반을 검토하면서 내사종결 처리 과정에서 경찰 윗선의 개입이 없었는지 수사하고 있다”고 전했다.
동아일보는 청와대와 법무부가 이용구 전 차관의 폭행 사건을 인지하고도 인사를 진행했다고 보도(“靑, 이용구 폭행 알고도 법무차관으로 임명”)했다. “경찰의 진상조사 과정에서 법무부는 지난해 11월 9일 이전, 청와대는 같은 달 16일 이후 이 전 차관의 폭행 사건을 인지한 정황이 드러났다. 이 전 차관은 8일 또는 9일에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의 정책보좌관과 수차례 통화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며 “이 때문에 청와대가 이 전 차관 폭행 사건의 경찰 처분 과정에 대한 정밀한 인사검증 없이 차관 임명을 강행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는 것이다.
한겨레는 사설(경찰수사 공정성에 경각심 일깨운 ‘이용구 사건’)에서 “이번 사건은 일선 경찰관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서 수사 공정성이 크게 흔들릴 수 있음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 이런 사건이 반복된다면 경찰에 대한 국민 신뢰가 무너지게 된다”며 “올해 시행된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더 큰 권한을 쥐게 된 경찰은 이제 독자적 수사기관의 자격을 갖췄는지 판가름할 시험대에 올라 있음을 명심하고 환골탈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당부했다.
▲6월10일자 동아일보 '김순덕 칼럼'(위)과 한겨레 '백기철 칼럼'
국민의힘 당대표 경선을 앞두고 이준석 전 최고위원의 상승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한겨레 편집인의 ‘백기철 칼럼’, 동아일보 대기자의 ‘김순덕 칼럼’ 등 기명 칼럼이 이를 다뤘다. 상대적인 기성세대 시각의 글로 묶어볼 수 있으나 초점은 다르다.
백기철 한겨레 편집인은 “‘8090 정치’ 시대”란 제목의 칼럼에서 “이준석 돌풍은 이른바 ‘80 정치’의 본격 부상을 의미한다. 1985년생 이준석의 등장은 30대와 20대, 즉 80, 90년대생을 중심으로 한 세대교체, 세대극복론이 구호가 아니라 현실임을 보여준다”고 규정했다. 그는 “이준석의 ‘80 정치’는 ‘나쁜 정치’의 징후가 많다. 현실 정치의 성과보다는 방송을 통한 이미지 쌓기, 젠더 갈등을 이용한 편가르기 등으로 떴다는 점에서 한계도 분명하다”면서 여성의 중첩된 고통 외면, 상위 엘리트 청년 중심의 공정론, 흡수통일에 집중된 대북관 등을 비판했다.
다만 “그럼에도 이준석은 ‘박근혜 키즈’로서 ‘탄핵의 강’을 건넜고, 꼰대 문화에 젖은 보수 야당에 새바람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강력하다”며 “8090 정치의 쓰나미 앞에서 ‘장유유서’, ‘구상유취’의 꼰대 정치는 설 자리가 없다. 보수에서 지각변동이 일어난 건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진보 쪽이 더 절실해 보인다”고 봤다.
동아일보 김순덕 대기자는 “이준석과 ‘10원 한 장’의 公正”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김 대기자는 “일각에선 공정 아닌 ‘경쟁’에 방점을 찍고 ‘이준석은 실력주의자’라고 공격한다”며 “이 정권처럼 운동권 네트워크끼리 봐주는 패거리주의자나 시대착오적 마오쩌둥주의자보다는 백배 낫다”고 했다.
그는 민주당 대선주자로 꼽히는 정세균 전 국무총리, ‘기회는 공평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 밝혔던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이어간 뒤 ‘윤석열 대망론’을 언급했다. 김 대기자는 “2019년 7월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이 취임사를 통해 강조한 핵심 가치가 공정한 경쟁질서 확립이었다” “심지어 차기 대선주자로 윤석열을 지지하는 전문가들 모임의 이름도 공정과 상식”이라면서 “불행한 역사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윤석열은 10원 한 장의 불의도 미리 밝힐 의무가 있다”고 했다.
오는 11일 경기도 연천군 군남댐 인근 ‘남북농민공동통일경작지’에서 모내기 행사를 진행하는 전국농민회총연맹 박흥식 의장을 만났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남북교류가 꽉 막힌 가운데도 32개 시군에서 ‘통일쌀 모내기’를 진행한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이 오는 11일 또 하나의 특별한 모내기 행사를 진행한다.
박흥식 제18기 전농 의장은 지난 3일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오는 11일 경기도 연천군 군남댐 인근 3만 2천 평의 경작지에서 모내기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박 의장은 “11일 아침부터는 모내기를 하고 행사는 11시에 한다”며 “일단 통일부 장관하고 경기도 평화부지사, 그리고 6.15남측위원회가 함께한다. 앞으로는 ‘6.15남측위원회 농민본부’가 실제로 이 사업을 주도할 수 있도록 진행할 것”이라고 전했다.
5년 전까지 농사를 지었던 군남댐 홍수조절지 일대에 조성된 3만 2천 평의 부지에 경기도농수산진흥원과 전농 경기도연맹이 실질적인 운영관리와 경작활동을 담당하게 된다.
박 의장은 “남과 북이 다시 6.15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상황에서, 미국의 내정간섭이 이미 선을 넘어서고 그래서 더욱더 남북의 통일을 가로막는 이 시점에서, 결국 우리 국민의 힘으로 밖에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우리 농민이 먼저 나서야 되지 않겠나. 남북의 농민이 통일농업을 위한 공동경작지를 조성을 해서 이 문제를 좀 풀어가자고 한 것”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나아가 “지금은 북의 농민들과 함께하지 못하지만 앞으로 멀리 바라봤을 때 남과 북의 농산물을 교류하는 공간으로까지 발전시키고 싶다”며 “남에서 농사지은 것과 북에서 농사지은 것을 서로 물물교환을 하면서 통일의 기틀을 만들고자하는 것까지 고민하고 있다”고 바람을 전했다.
또한 “단순하게 남북통일 경작지가 아니라 남과 북이 함께 가는, 종자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농업에 대한 정보교류와 미래 후손들한테 어떻게 우리 농업을 유지하고 계속적으로 발전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의 장이라든가, 이런 공간으로서 통일경작지가 됐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가지고 시작을 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전농은 올해 전국 37개 시군에서 통일모내기 행사를 진행했다. [사진제공 - 전농]
오는 10일 저녁 7시, 전국 각지에서 모일 농민들과 더불어 전야제 행사를 가진 뒤 10일 아침부터 모내기에 들어가고 오전 11시 기념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과 이제강 경기도 평화부지사 등이 이양기에 시승하는 등 이벤트도 준비 중이다. 그러나 손모심기는 코로나19와 민통선 출입인원 제한으로 인해 성사되지 못했다.
학생운동을 마치고 1986년께 고향인 전북 김제에서 농민운동에 뛰어든 박흥식 의장은 2002~2003년 전농 사무총장으로 ‘30만 농민 대항쟁’을 함께 이끌기도 했고, 민주노동당을 통한 정치세력화를 추진하기도 했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35년의 농민운동의 요구가 지금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답답”하다고 했다.
더구나 코로나19 팬더믹으로 “노인층 농민들이 마을회관에서 서로 정담을 나누면서 밥도 같이 먹고 이러는데, 마을회관이 폐쇄되면서 정말 공동체가 무너지는” 상황을 맞고 있어 안타까움은 더해 간다.
박 의장은 “남과 북이 함께 가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농지를 유지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시점”이라며 “우리가 식량 주권을 세우기 위해서는 식량자급 기반을 만드는 문제하고, 종자 주권을 확보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도시민과 시민사회단체까지 함께하기 위한 식량주권운동본부를 꾸려서 우리가 소비자들의 주권과 농민의 주권, 그리고 우리 남과 북이 함께 가는 통일농업을 좀더 소비자들에게도 인식시키고 그래서 우리 농업이 유지되고 발전되면서, 지속가능한 농업으로 가기 위한 그 틀들을 만들기 위한 사업을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실은 암울한 상황이다. “남과 북이 함께 품앗이 농사를 하기 위해서, 트랙터를 가지고 북쪽에 가서 농사도 돕고 서로 교류도 하기 위해서 ‘통일품앗이 트랙터’를 모금을 했는데, 26대가 민통선 안 물류기지에 지금 보관돼 있다”며 “이번 통일경작지 사업을 계기로 해서 교류의 물꼬가 터진다면 이 통일트랙터를 몰고 가서 북에서 북한 농민과 함께 품앗이 농사를 하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그나마 기대를 갖는 것은 내년 지방선거다. “현재 후보를 결의한 농민후보는 20여 명이 넘고 거의 30명까지 넘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있다”며 “아마 내년에 지방자치 선거에서는 많은 후보들이 당선 가능성이 있지 않겠는가 생각한다”고.
그러나 전농이 배타적 지지를 보내고 있는 진보당 소속 농민후보들이 지방선거에서 당선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지금까지의 진보당 득표율이 너무 저조했기 때문이다.
박 의장은 농촌이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공공농업’을 모색하며 이를 법제화한 ‘농민기본법’을 구상하고 있다면서 “통일농업을 통해서 남과 북이 함께, 겨레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식량에 대한 기반과 교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음은 3일 오전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 소재 전농 사무실에서 진행한 인터뷰 내용이다.
“사무총장할 때 ‘30만 농민 대항쟁’ 진행, 정치세력화 방침 정해”
박흥식 전농 의장과의 인터뷰는 3일 오전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 소재 전농 의장실에서 진행됐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통일뉴스 : 어느 지역에서 언제부터 농민운동에 나섰나?
■ 박흥식 의장 : 전북 김제 출신이다. 85년도 전경환(전두환 동생)의 소 수입으로 인해서 많은 농민들이 힘들었다. 많이 비관자살도 하고. 나는 그때 당시 풍물패, 그 다음에 전북지역 그림패 ‘땅’ 소속으로 문화운동을 했다.
그때 당시 소머리탈굿으로 농민들의 소몰이 집회에 참여하게 됐다. 전북지역에서 다섯 군데가 소싸움을 했었는데 완주, 익산, 임실, 진안, 부안에서 소머리탈굿 공연을 했다. 마지막 부안 싸움에서 경찰들이 워낙 심하게 탄압하면서 농민들이 단식농성을 들어가는데, 도움을 주면서 함께 있었다.
그 날도 김인술 씨가 휘발유를 가지고 와서 자기 몸에 불을 지르려고 하는 것을 다행히 우리가 먼저 발견해서 막았다. 그 정도로 사람들이 절박했다. 소를 키울 때 그냥 자기 자본이 있어서 키운 게 아니라 여기저기서 돈을 모아서 하는 것을 보면서 ‘야, 어렵구나’ 느꼈다.
그때 당시에 그림패 땅에 대한 탄압이 있어서 임실로 들어갔다. 임실에서 1년을 살다가 김제에서 동학농민회라는 자주적 농민단체를 만든다는 연락이 와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농민회를 시작했다. 86년부터 의식적으로 농민운동을 시작했다.
□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했나?
■ 했다. 그때 당시는 전두환 정권에 맞서서 독재타도를 외쳤다. 4학년 때인 84년에 서울에서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학자추)가 뜨면서 봄부터 독재타도 투쟁이 진행이 됐고, 전북에서는 원대(원광대)에서 하반기에 학자추를 띄웠다. 그때 친구들이랑 중심이 돼서 처음으로 원대에서 그러한 집회도 하고, 유인물 만들어서 학교하고 싸우면서 그때부터 운동을 했다.
□ 전농 의장은 언제 맡았나? 임기와 연임 여부는?
■ 2020년 2월에 의장을 맡았고, 내년 2월까지 임기다. 지금 집행간부들이 너무 힘들어 해서 연임은 안 갈 것 같지만 그때 가봐야 안다.
2002년, 2003년 사무총장할 때 ‘30만 농민 대항쟁’을 진행했고, 그때 당시 전농이 정치세력화 방침을 정했다. 그래서 전농이 민주노동당과 함께 했고, 각 지역에 지역위원회를 만들고 정치세력화 사업을 지금까지 진행하고 있다.
□ 지금은 진보당과 같이 하고 있나?
■ 정치적 방침으로 진보정당에 배타적 지지를 표명했고, 현재는 진보당과 함께 하고 있다. 우리 이념과 우리가 하고자하는 운동의 방향성을 함께 할 수 있는 진보당이 그래도 우리가 같이할 수 있는 정당이다. 내년 대선과 지방선거도 함께 준비하고 있다.
식량 주권, 종자 주권 문제 해결해야
농민들은 농사뿐만 아니라 '아스팔트 농사'도 열심히 지었지만 농촌과 농민들의 삶은 벼랑에 몰려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지금 코로나19가 오래 가고 있다. 농민들에게 타격이 큰가?
■ 코로나19 팬더믹 상황으로 전 세계가 많은 고통을 받고 있다. 새로운 바이러스 하나로 이렇게 세계질서가 무너지고 경제가 어려워지고 삶이 자유롭지 못하는 이 시국은 문명이 낳은, 산업화로 인한 재앙이라 생각한다.
특히 농민들은 식당이나 소비가 안 됨으로써 농산물들 판로가 막혀 있다. 학교급식이 중단된 친환경 농가, 행사가 취소된 화훼 농가, 그리고 소비가 위축된 여러 농산물로 보이지 않게 힘든 상황이다. 딱 드러난 어려움 보다 서서히 젖어가는, 그러한 힘든 상황들이 진행되고 있다.
제일 안타까운 것은 지금 고령화로 인해서 농촌 마을 단위가 거의 자연 양로원이 돼 있다. 그래서 노인층 농민들이 마을회관에서 서로 정담을 나누면서 밥도 같이 먹고 이러는데, 마을회관이 폐쇄되면서 정말 공동체가 무너지는, 많이 어려워하는, 이런 것들이 참 보기가 안타까운 거다.
농산물 가격이 떨어지고 생활이 어려운 것은 좀더 노력해서 어떤 형태든 극복이 되겠지만 생활이 코로나로 구속되고 있는 어른들을 봤을 때 마음이 아프다.
□ 전농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겠지만 식량주권과 통일농업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개략적으로라도 설명해 달라.
■ 전농은 농업문제를 바라볼 때 남측의 농업 상황만을 보지 않는다. 남과 북이 함께 살아가는 우리 농업의 방향을 기본적 방향으로 본다. 전농의 강령에 자주, 민주, 통일이 있고, 그 속에서 식량주권은 남과 북이 함께 살 수 있는 식량자급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 그리고 남측은 어느 정도까지 식량자급을 이뤄내야 하는 것인지, 이런 문제가 고민이 된다.
현재 우리나라 곡물자급률이 21.6% 정도 된다. 쌀을 빼면 4%도 안 되는 심각한 식민지국가가 돼 있는 상황이다. 식량을 자급하려면 농지가 확보돼야 하는데 농지 문제가 심각하다.
지금 현재 우리나라 농지는 거의 43%가 농사를 짓지 않는 외지인들이 소유하고 있고, 농민들은 거의 60%에서 많게는 70%까지 임대농을 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남쪽의 식량자급만 보더라도 농지가 협소하고, 부족한 상태다.
결국 남과 북이 함께 가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농지를 유지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시점이다. 그래서 우리가 식량 주권을 세우기 위해서는 식량자급 기반을 만드는 문제하고, 종자 주권을 확보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IMF 사태로 인해서 종자 주권이 훼손이 됐다. 현재 일본이라든지 미국이라든지 다른 나라의 종자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의 종자가 없어지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앞으로 식량이 무기화 되듯이, 종자도 무기화 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 종자 주권을 어떻게 세울 것인지, 지금 노력을 하고 있다.
또한 환경과 농촌이 무너지고, 농민들의 주권이 훼손되는 이 시점에서 환경과 농촌의 주권, 농민의 주권을 어떻게 세울 것인지가 숙제다. 그래서 지금 고민하는 것이 ‘농민기본법을 만들자’는 것이다.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기본법’이 있는데 신자유주의 농업개방을 전제로 이 법이 만들어졌다. 이게 농업에 있어서는 모법인데, 철학이 잘못됐다. 앞으로 통일대비, 그리고 미래세대 우리 국민들이 살아갈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이 틀을 완전히 전환시켜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농민기본법을 올바로 잡기 위한 논의가 지금 되고 있다. 내년 대선 국면에서 이슈화시키고자 현재 고민하고 있는 사안이다.
우리가 통일농업을 이룬다는 것은 농업개방으로 인해서 농촌이 어려워지고 있고, 우리의 농산물이 외국의 농산물에 서서히 잠식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남과 북이 함께 살아가는 기본 틀, 그리고 농업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의 문제다.
통일농업을 통해서 남과 북이 함께, 겨레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식량에 대한 기반과 교류가 필요하다. 그리고 남과 북이 함께 좋은 유전자가 있는 토종종자를 확보해서 지금 시대에 맞는 종자 주권을 확보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쌀부터 통일하자’는 기치로서 통일모내기도 하고 통일농사를 지었다.
□ 생협(생활협동조합) 운동과도 결합돼 있나?
■ 같이 소통하고 있다. 한살림이랑 만나서 앞으로 우리가 소비자들의 주권운동이 필요하다. 농민도 주권이 필요하지만 소비자도 먹거리 주권이 필요하다. 왜 우리 농업이 중요하고, 이런 것들을 함께 인식하기 위해서 올해 식량주권운동본부를 꾸리려고 한다.
도시민과 시민사회단체까지 함께하기 위한 식량주권운동본부를 꾸려서 우리가 소비자들의 주권과 농민의 주권, 그리고 우리 남과 북이 함께 가는 통일농업을 좀더 소비자들에게도 인식시키고 그래서 우리 농업이 유지되고 발전되면서, 지속가능한 농업으로 가기 위한 그 틀들을 만들기 위한 사업을 고민하고 있다.
올해 32개 시군서 통일쌀 모내기 진행
통일 모내기 사업은 전농의 대표적인 통일농업 사업의 일환으로 매해 진행되고 있으며, 수익금은 통일기금으로 적립되고 있다. [사진제공 - 전농]
□ 올해 통일쌀 모내기 현황은?
■ 올해는 전국에 32개 시군에서 이미 통일 모내기를 지역의 시민단체라든가 사회단체의 아이들과 같이 연대해서, 통일의 중요성을 알려내기 위해서 진행했다. 그래서 통일쌀을 농사지은 것을 모아서 통일기금으로 적립을 하고 있다. 이후에 통일사업을 하는데 있어서 종자돈으로 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전체 많은 시군이, 그리고 행정에서도 이것을 함께하는 고민을 서서히 하고 있다. 단순히 농민회의 일이 아니라 국가의 일이고 또 행정에서도 통일에 대한 중요성을 알려내기 위해서 남북통일 경작지도 그래서 많이 고민하게 되는 시점이다.
□ 통일쌀 경작은 경작지를 빌려서 하나? 형태가 다양한가?
■ 대개 두 가지 형태다, 하나는 아예 농민회가 농민회 몫으로 임대를 해서 꾸준하게 계속적으로 농사짓는 그런 시군이 있고, 그때그때 농민회 회원이 농사짓는 논을 내놓으면 그 논을 가지고 공동경작하는 곳도 있다.
회원들 논을 조직에 내놓아서 그 논에다가 통일 모내기를 해서 일정정도 들어간 비용을 빼고 이익금은 통일기금으로 이렇게 활용을 하는 거다.
11일 ‘남북농업통일공동경작지’ 모내기, 10일 전야제도
□ 기존의 통일쌀 운동에 더해, 남북농민공동경작지 사업에 대해 소개해 달라.
■ 정확한 명칭은 ‘남북농업통일공동경작지’다. 이유는 일단 지금 현재 남과 북이 다시 6.15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상황에서, 미국의 내정간섭이 이미 선을 넘어서고 그래서 더욱더 남북의 통일을 가로막는 이 시점에서, 결국 우리 국민의 힘으로 밖에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우리 농민이 먼저 나서야 되지 않겠나. 남북농민통일공동경작지를 조성을 해서 이 문제를 좀 풀어가자고 한 것이다.
4.27 판문점선언에 의미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남과 북은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 자주의 원칙을 확인”하였다는 것이고, 그 다음에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하자는 것이 핵심이라고 본다.
그런데 전혀 진행이 안 됐다.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를 바라보고 있고, 지금 우리나라와 미국이 표면적으로는 전쟁연습을 하는 것이지만 나는 내부적으로 지금도 전쟁 중이라고 생각한다.
제주 강정마을에 미군의 잠수함이 들어올 수 있도록 기지를 만든 것과 현재 부산을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전쟁에 쓸 세균전을 준비하고 있고, 북과 중국을 겨냥한 소성리 사드 배치라든지, 그리고 군산 미군기지의 패트리어트 미사일 배치라든지, 이러한 현안들을 봤을 때는 종국에는 전쟁을 염두에 두고 미군이 이 땅에서 전쟁기지화 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다.
우리 농민이 먼저 나서서 남북의 농민이 함께 농사지을 수 있는 경작지를 접경지역에 조성을 해서 이 문제를 좀 풀어가자고 해서 경기도의 이재명 도지사를 만났을 때 제안을 했다. “남북농민통일경작지를 조성하고 싶은데 경기도가 함께 할 수 있느냐?” 하니까 이재명 도지사가 “농지만 확보된다면 함께 하겠다”라는 메시지를 줬다.
그래서 우리가 농지를 좀 알아봤다. 그랬더니 연천에 있는 군남댐에 5년 전까지 농사지었던 곳이 댐으로 인해서 더 이상 경작을 못하는 8만 평 정도의 부지가 있더라. 경기도에 제안했고 경기도가 거기를 임대하고 농사는 우리 전농이 짓는 걸로 해서 지금까지 5개월 동안 준비를 했다.
초기라 전체 8만 평을 다 농사지을 수 없고, 환경이나 여러 가지 조건이 좀 불합리해서 일단 올해 시범사업으로 3만 2천 평에 모내기를 하기로 합의했다. 그래서 3만 2천 평 중에 8천 평은 연천군에서 그 지역에 사는 농민들이 통일경작을 할 수 있도록 해주고, 나머지는 9개 도에서 와서 모내기를 하기로 했다.
우리가 구글을 통해서 보니까 군남댐을 중심으로 한 북쪽도 한 8킬로 정도 너머에 농지가 확보돼 있고 농사를 짓고 있더라. 그리고 그 지역을 보니까 예전에 그리로 남북이 같이 통행했던 도로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좀 앞으로 멀게 바라봤을 때 남과 북의 농산물을 교류하는 공간으로까지 발전시키고 싶다. 남에서 농사지은 것과 북에서 농사지은 것을 서로 물물교환을 하면서 통일의 기틀을 만들고자하는 것까지 고민하고 있다.
단순하게 남북통일 경작지가 아니라 남과 북이 함께 가는, 종자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농업에 대한 정보교류와 미래 후손들한테 어떻게 우리 농업을 유지하고 계속적으로 발전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의 장이라든가, 이런 공간으로서 통일경작지가 됐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가지고 시작을 한 것이다.
□ 이번에 모내기 행사가 처음으로 진행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소개해 달라.
■ 1차는 5월 25일 진행하려고 했는데, 거기에 농사짓는 거에 대해 환경부에서 난색을 표했다. 그래서 결국 설득을 해서 미뤄 가지고 6월 11일 11시에 행사를 한다. 그리고 우리 농민들은 멀리서 오니까 1박2일을 준비하면서 6월 10일 저녁 7시에 전야제 행사를 한다.
우리가 왜 통일을 이루기 위한 남북농민통일경작지를 조성하게 되고, 앞으로 우리는 이걸 통해서 어떠한 일을 하고자 하고, 또 우리가 지역에서는 어떠한 운동을 할 것인지, 그리고 미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서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국민들과 어떠한 운동을 전개할 것인지를 소통하고 그런 결의를 하는 장으로서 10일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11일 아침부터는 모내기를 하고 행사는 11시에 한다. 일단 통일부 장관하고 경기도 평화부지사, 그리고 6.15남측위원회가 함께한다. 전농이 주관하지만 앞으로는 ‘6.15남측위원회 농민본부’가 실제로 이 사업을 주도하도록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
□ 모는 손으로 심나? 이양기로 심나?
■ 다 기계로 심는다. 원래는 YMCA에서 아이들이 농사를 체험하도록 하자고 요구해서 손모심기를 하려고 했는데 지금 코로나 상태인데다 그곳이 민통선 안이기 때문에 인원 제한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부득이하게 손모심기 보다는 이양기로 모내기 행사를 한다.
통일부장관을 비롯한 기관장들 시승식도 하고, 통일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이양기로 모내기를 한다.
통일트랙터 26대, 민통선 물류기지에 보관 중
4.27 판문점선언 1주년을 맞아 통일대교 앞에서 통일트랙터를 앞세운 농민들이 집회를 갖고 판문점선언 이행과 대북제재 해제 등을 촉구했다. 통일트랙터는 민통선 내 물류기지에서 보관료를 물어가며 아직도 방북 대기 중이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궁금한 건, 2019년에 통일트랙터 사업을 해서 통일대교 앞까지 몰고갔던 기억이 있는데, 그 사업은 어떻게 됐나?
■ 너무나 안타깝다. 남과 북이 함께 품앗이 농사를 하기 위해서, 트랙터를 가지고 북쪽에 가서 농사도 돕고 서로 교류도 하기 위해서 ‘통일품앗이 트랙터’를 모금을 했는데, 26대가 민통선 안 물류기지에 지금 보관돼 있다.
몇 키로도 안 되는 곳을 넘어갈 수가 없어서 한 달에 보관료 120여만 원을 주면서 2년이 넘게 방치되고 있다는 게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지역에서 모금한 것도 남아서 30대가 지금 확보돼 있다.
이번 통일경작지 사업을 계기로 해서 교류의 물꼬가 터진다면 이 통일트랙터를 몰고 가서 북에서 북한 농민과 함께 품앗이 농사를 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 요즘 북측 농근맹(조선농업근로자동맹) 상황에 대해서 듣고 있는 게 있나?
■ 지금 거의 단절됐다. 우리도 행사 때마다 팩스를 보내서 우리 소식도 알리고 노력을 했는데, 지금 북쪽 상황은 이미 북미문제라든지 남북문제로 인해 현재로서는 아예 단절상태라 전혀 교류가 안 되고 있다.
북측에서는 지금 현재는 이 남북교류 사업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앞으로 우리 미래의 운명을 좌우할 싱가포르 회담이라든지 남북 정상회담에서 맺었던 합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속에서는 교류사업이 의미가 없고, 그 문제를 먼저 풀고 나서 우리가 교류를 해야 하지 않느냐는 입장인 것 같다. 그걸 존중하면서 그래도 우리 나름대로는 그래도 준비해야 되지 않는가 생각하고 있다.
□ 북쪽 식량사정에 대해 설왕설래가 많다. 전농 차원이든 농민들이 보기에 북측 식량사정을 어떻게 보고 있나?
■ 그래도 북은 농지를 쭉 경지정리를 하고 있는데, 북측은 구획정리라고 하더라. 그래서 지금 현재 북쪽에서는 구획정리가 상당히 됐고, 지금 농지의 기본적인 것들은 확보가 되고 있는 것 같다.
다만 전년도에 54일 간의 장마와 태풍, 물난리 때문에 북쪽 상황이 굉장히 어렵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식량사정이 상당히 어려운 속에서 이걸 극복하기 위한 노력과 농업을 완전 자급하기 위해서 굉장히 분투하고 있는 걸 듣고 있다. 그래서 올해 농사가 잘 되어서 일정정도 식량난이 좀 해결되길 희망하고 있는 거다.
지방선거 농민후보 20여 명 넘어 “고무적”
5월 8일 광주 망월동묘역에서 정광훈 전농 의장 10주기 추모행사가 열렸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얼마 전에 고 정광훈 의장 10주기 추모행사가 있었는데 잘 진행됐나?
■ 우리 민중의 벗, 전농 의장이면서도 진보연대 공동상임대표를 맡고 있던 정광훈 의장이 민주노동당 선거운동에 도움을 주고 집으로 귀가하는 중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운명을 달리하셨는데 너무나 가슴 아프다.
올해 10주기를 맞이해서 우리가 광주 묘역에서 5월 8일 10주기 기념 추모행사를 진행했고, 기일인 13일에는 서울에서 제 단체들과 함께 추모행사를 진행했다.
추모행사로 끝나는 게 아니라, 혁명을 노래하고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위해서 한 평생을 살아왔던 그분의 정신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 이런 고민을 하면서 앞으로 전농이 주도를 해서 정광훈 의장 추모사업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다.
□ 참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분인 것 같다.
아까 잠깐 언급했는데, 내년 대선과 지방선거에 대한 구상은?
■ 일단 대선은 현재 진보당이나 정의당이나 노동당, 제 진보정당들이 지금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진보진영의 단일후보를 위해 논의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고 보고 그래도 대중단체들이 먼저 한번 논의를 해야 하지 않느냐 고민을 좀 하고 있다.
내년 대선은 굉장히 중요한 시기인 만큼, 진보진영이 단일화된 모습으로써 역할을 하고, 진보집권을 향한 준비의 태세를 함께 노력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하고 있다.
지금 지방자치선거는 진보당에서 각 시군 단위가 상당히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현재 후보를 결의한 농민후보는 20여 명이 넘고 거의 30명까지 넘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있다.
지난 다른 선거에 비해서 빠르게 후보가 마음을 결정하고 시군 단위 결의를 통해서 진행하는 모습을 본다면 상당히 고무적이다. 아마 내년에 지방자치 선거에서는 많은 후보들이 당선 가능성이 있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대선에서는 앞으로의 농업이 나아갈 방향과 우리 미래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공약을 준비하고 있다. 농민진영 7개 단체가 소속돼 있는 ‘농민의 길’이 공동으로 대선공약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 다음에 지방자치 속에서 지역운동, 지방자치운동을 어떻게 다시금 자리매김할 것인가를 논의하면서 지역에 대한 공약들도 준비하고 있다. 이러한 공약을 중심으로 내년 지방선거에서 많은 국민들한테 호응을 얻으면서 진보진영이 진일보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추기 위해서 지금 현재 노력하고 있다.
□ 구상은 좋은데, 몇 차례의 선거 결과를 보면 현실적인 득표력이 너무 낮아서 실현가능성에 대해서 회의적인 분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 마음이 아프다. 그게 문제다.
박흥식 의장은 35년 간의 농민운동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너무 답답하다면서도 공공농업 실현과 정치세력화 등을 꾾암옶아 모색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마지막 질문이다. 80년대 중반부터 오랫동안 농민운동을 해왔는데 개인적인 소회와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 미국으로부터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는 것과 그때 당시에는 민주화를 이뤄내서 남북이 통일까지 이루는 것을 이념으로 농민운동을 시작했다.
수세싸움을 시작으로 농민운동을 본격적으로 진행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35년의 농민운동의 요구가 지금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답답하고 내가 운동을 잘못하지 않았나 회의감도 든다.
우리나라는 의회정치체제, 혁명 보다는 국민 투표로써 사회를 변화시키는 체제 속에서 좀더 일찍 정치세력화를 진행하면서 많은 토대를 쌓았더라면 큰 힘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지금 진보진영의 분열로 통합진보당이 와해돼 너무나 가슴 아프고, 이걸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가 고민이다.
그리고 지금 현재 탄소중립으로 에너지 문제가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 농업은 어떠한 역할을 해야 되는 것이고, 그 다음에 기후위기로 인해서 냉해 피해라든지 물 피해, 태풍 피해 이런 걸 어떻게 국가정책으로 극복할 것인지 고민이다. 그래서 재해보상법을 만들고자 하는 고민들을 하고 있다.
우리 농업이 신자유주의 속에서 개방화된 시점에 더 이상 경쟁력을 잃어버렸고, 농촌이 유지될 수 없는 상황이다. 전체 시군 단위가 앞으로 30년 이전에 다 소멸되는 이러한 위기 속에서 우리 농업은 어떻게 가야 되는지 고민이다.
그래서 이제는 공공농업을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 국가 책임제로서 농사짓는 농민이 농지를 소유하게 해야 한다. 국가가 부재지주, 외지인들의 땅을 매입해서 농민들한테 장기 임대하고 농지를 환원하는 공공농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국민들의 먹거리 주권을 이루기 위해서 기본적 토대를 만드는 입법화, 그리고 지역이 살아가기 위한 공공의료나 공공복지 이런 부분들에 대해 더욱더 우리 운동 속에서 국가의 역할을 높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서 이제는 공공농업을 실현하기 위한, 그리고 식량자급과 우리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국가책임제를 더욱더 높여 내는 것이 지금 우리의 책무이고 또한 농민운동으로서 요구하는 것이다.
앞으로 통일농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좀더 많은 농 관련 단체가 6.15농민본부에 가입해서 우리 스스로 나서야 한다. 통일은 아무리 힘든 상황이지만 미국이 하는 게 아니고 정부가 하는 게 아니라 국민의 힘으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국민들이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열정이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지 누가 대통령이 돼서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미국은 끝까지 분단을 조장할 것이고 통일을 가로막을 것이고 자기나라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중국과 러시아, 북을 겨냥해서 끊임없이 내정간섭을 할 거라고 생각한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국민의 힘으로 미국의 이러한 횡포를 막아내고 정부가 할 수 밖에, 자주적으로 우리 스스로 이 문제에 우리 운명을 책임지게끔 만드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한다. 그래서 앞으로 더욱더 이러한 부분에 관심과 좀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이어 민중행동은 오전 9시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미일 정상회담은 한미일 군사동맹으로 가는 길이며, 대북적대정책과 중국 압박 전선에 한국을 끌어들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민중행동은 기자회견문에서 “바이든 행정부가 ‘동맹 강화’를 운운하며, 식민 지배에 대한 진정한 반성없이 군국주의로 내달리고 있는 일본과 우리나라를 억지 화해시켜 반중 전선과 대북 적대에 동참시키려 하고 있다”라며 “(미국은) 또다시 우리에게 일본과의 억지화해, 반중대결과 대북적대를 강요하고 있다”라고 미국을 비판했다.
엄미경 민중행동 자주평화통일특별위원장은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한국에 굴욕적인 요구를 할 것이며 문재인 대통령은 거부를 못 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미일 정상회담을 통해 미일동맹 아래 한미동맹을 놓을 것이 뻔하다. 이번 한미일 정상회담을 거부하며 미국에 노라고 대답하라”고 발언했다.
윤희숙 진보당 공동대표는 먼저 지난 7일 있었던 일본 기업 손해배상 소송 각하 결정을 언급하면서 한미일 정상회담이 우려스럽다고 짚었다.
윤희숙 공동대표는 “과거사 청산 없이 정상적인 한일관계 불가능하다. 미국에 의해 강제로 한일관계가 개선될 수 없다. 우리 국민들을 지키지 않는 한일관계, 한미동맹이 무슨 소용인가. 지난 7일 우리나라 사법부는 ‘일본과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했다. 이것은 일본의 주장이다. 이런 정부가 어떻게 자주적인 외교를 국익을 지키는 외교를 할 수 있겠는가”라며 문 정부의 태도를 지적했다.
김은형 민주노총 통일위원장은 “미국은 대북적대정책과 반중대결정책에 한국을 인입시키려 하고 있다. 또한 미국은 한국에 일본과 함께 북을 대상으로 하는 전쟁 훈련 참여를 강요하고 있다”라며 미국의 행태를 비판했다.
장유진 진보대학생넷 대표는 “한미 정상회담 결과를 보고 경악했다. 우리나라와 우리의 내용은 없고 미국을 위해 우리를 희생시키는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래서 한미일 정상회담이 우려스러운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미일 정상회담을 거부하고 한미군사훈련 중단 결정과 최근 일본 행태를 규탄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국민이 한미일 정상의 목에 걸린 ‘한미일 전쟁동맹’ 목걸이를 자르고 ‘굴욕적인 군사동맹 반대한다’는 명령서를 내리는 상징의식을 진행했다.
기자회견에서는 “일본 방사성 오염수 방류 합의하는 한미일 정상회담 반대한다”, “일제 식민지 반성없는 일본과의 한미일 군사동맹 반대한다”,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 허용하는 한미일 군사동맹 반대한다”, “독도를 자기 땅이라 우기는 일본과의 한미일 정상회담 반대한다”, “한일 갈등관계 강제봉합 요구하는 미국을 규탄한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아래는 기자회견문 전문이다.
--------아래-------------------
[기자회견문]
한미일 정상회담 반대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오는 11~13일 영국에서 진행되는 G7 회의에 초청을 받아 참석할 예정이며, 그 직후 한미일 정상회담이 개최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동맹 강화”를 운운하며, 식민 지배에 대한 진정한 반성없이 군국주의로 내달리고 있는 일본과 우리나라를 억지 화해시켜 반중 전선과 대북 적대에 동참시키려 하고 있고, 한미일 정상회담으로 이를 구체화하려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2015년 오바마 행정부가 위안부 야합과 한일 지소미아 체결을 강행한 것처럼, 또다시 우리에게 반중 대결과 대북 적대를 강요하는 미국을 강력 규탄하며, 한미일 정상회담 개최 시도를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취임 초 촛불 민의의 눈치를 보며 위안부야합과 한일지소미아를 파기하는 척 하던 문재인 정부는, 이제는 아예 노골적인 대미추종, 친일 행보를 보이며 한미일 군사동맹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취임 4주년에 위안부야합을 공식합의로 인정하고, 위안부 문제의 일본 정부의 배상을 판결한 국내 법원의 결정에 대해 “곤혹스럽다”는 입장을 밝히며 피해자 유족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더니, 이후 한미일 외교장관회담, 한미일 정보수장 회담을 연이어 개최하고, 그것도 모자라 이제 한미일 정상회담까지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우리 국민들의 우려를 무시한 채 방사성 오염수 해양 방류를 결정해도, 일본이 도쿄 올림픽 안내지도에 독도를 포함시키는 도발을 자행해도, 전범기를 올림픽 응원기로 사용하겠다고 해도, 자위대와의 공동 군사훈련이 강행되고, 한미일 군사동맹을 강화하는 문재인 정부의 친일 행보가 계속되고 있는데 우리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문재인 정부가 “한미동맹”을 운운하며 이러한 바이든의 요구를 맹목 추종한다면, 이는 최대교역국 중국의 경제보복에 따른 군사적 긴장과 또 다른 민생위기를 초래하는 위험천만한 반민중 행위이자, 침략자 일본과 손잡고 동족을 적대하는 반민족 행위가 될 것임을 분명히 경고한다.
‘미군 독도 폭격사건’ 73주년을 하루 앞둔 7일 사건 희생자 유족인 김상복 속초연탄은행 대표(왼쪽)와 홍성근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울릉도 도동항에서 조속한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추모사업 방안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도재기 논설위원
‘미군 독도 폭격사건’은 미 군정기이던 1948년 6월8일 낮 12시쯤 주일 미군 B29 폭격기들이 독도 일대를 폭격, 미역 채취와 고기잡이를 하던 어민들이 죽거나 다친 사건이다. 사건 발생 73주년이지만 진상규명은커녕 세인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최근 들어 유족과 연구자를 중심으로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8일 독도에서 ‘6·8 독도 미공군 폭격사건 어민 위령행사’가, 전날엔 울릉도에서 ‘독도 6·8사건 추모 사업의 과제와 방향’이란 주제의 토론회가 열린 배경이다. 한국 현대사에 반드시 기록해야 할 사건이다.
해방 이후 격동의 한국 현대사 속에서 시나브로 잊힌 비극적 사건들이 있다. 각계의 관심으로 ‘제주 4·3사건’(1948년), ‘노근리 사건’(1950년) 등은 조명을 받았지만 아직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밝혀지지 않은 사건들이 더 많다. 최근 활동을 시작한 정부의 제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 규명을 신청한 건수가 전국에서 3636건에 이른다. 민간인 희생, 인권 침해 등 진상을 밝혀내야 할 사건들이 지금도 이 숫자만큼 잊히거나 묻혔다는 의미다.
미 군정기이던 1948년 6월8일 주일 미군 B29 폭격기들이 독도 일대를 폭격, 바다에서 조업 중이던 어민들이 희생당한 ‘미군 독도 폭격사건’도 그중 하나다. 사건 발생 73주년이지만 진상규명은 이뤄지지 않았다.
8일 독도에서 개최된 ‘6·8 독도 미공군 폭격사건 어민 위령행사’, 앞서 7일 울릉도에서 열린 ‘독도 6·8사건 추모 사업의 과제와 방향’이란 주제의 토론회는 독도 폭격사건을 애써 기억하고, 진상규명에 한발이라도 더 다가가려는 노력이다.
토론회·위령제에서 독도 폭격사건의 희생자 유족인 김상복 속초연탄은행 대표(76·강원 속초시)와 독도 전문가이자 이 사건을 연구해온 홍성근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52)을 만났다. 김 대표는 사건 당시 현장에서 미역 채취 중 사망한 김해도씨의 아들이다. 폭격사건 이후 울릉도를 떠나 속초에서 자수성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연탄은행과 무료급식소 등을 운영하며 봉사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홍 위원은 10여년 전부터 폭격사건 관련 유족 인터뷰, 논문 발표 등을 해오고 있다. 홍 위원은 고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장의 조카이다.
‘독도 폭격사건이 73년이나 됐는데 진상규명이 제대로 될까’란 물음에 김 대표와 홍 위원은 “정부와 지자체, 국민들, 학계 연구자들이 지금부터라도 관심을 가져준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입을 모았다. 김 대표는 “이제 피해 당사자들은 모두 타계하고 나 같은 1세대 유족도 늙었다”며 “시간이 많지 않다”고 밝혔다.
미역 채취 중 타계한 김해도씨 아들
김상복 속초연탄은행 대표
현재 독도 희생자 위령비에는
‘조난어민’이라 새겨져 있어
당국에서 조속히 바로잡고
사건이 제대로 알려졌으면
“그냥 일을 하다가 (사망한 게) 아니라 미군의 독도 폭격으로 돌아가셨으면 진상을 규명해야지. 그리고 그 사실을 알리는 표식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야 후손들이 ‘아, 이렇게 돌아가셨구나’ 하고 알지. 사람들도 ‘이런 사건이 있었네’라고 알고….” 김 대표는 특히 독도에 현재 서 있는 당시 희생자들 위령비의 문제점을 거듭 강조했다. “위령비에 ‘독도조난어민위령비’라 새겨져 있다. 조난이 아니라 폭격이지. 잘못된 것을 울릉군이든 경상북도든 중앙정부든 바로잡아 줬으면 좋겠다. 사건이 제대로 알려져야지. 유족으로서 바람은 그것이야.”
김 대표는 “폭격사건은 제가 워낙 어릴 때라 구체적 경험이 없다”며 “젊은 시절엔 객지 생활을 하며 힘들게 사느라 사건에 관심을 두지도 못했다”고 밝혔다. “아버님이 20대 초반에 돌아가셔서 어머니는 19세에 혼자되셨다. 고생을 많이 하셨다. 먹고살기 위해 가족들이 고향을 떠나 속초로 이사했다. 저도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고 놀림도 받았다. 객지에서 생활하느라 진상규명 작업에 나서질 못했다.”
독도 전문가
홍성근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2018년 울릉도·울진·속초 등서
사망자 유족 6명 찾아 현지조사
실체 모르고 고통 간직한 채 살아
모임이나 단체도 결성 안 된 상태
홍 위원은 “먹고살기 워낙 힘든 시절이던 당시 가장이 희생되거나 피해를 입은 유족들의 삶은 더 힘들고 황폐해졌다”며 “김상복 선생도 다른 유족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2018년 4차례에 걸쳐 울릉도와 경북 울진, 강원 속초·묵호 등에 살고 있는 독도 폭격사건 사망자 유족 일부인 6명을 찾아 현지조사를 했다. 조사 당시 유족들은 사건의 실체를 잘 모르고 그저 그날의 고통을 간직한 채 살아오고 있었다. 진상규명 노력에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던 셈이다.”
실제 독도 폭격사건의 사상자 유족과 가족들은 모임이나 단체도 아직 결성하지 못했다. 사건 피해자나 유족들의 정신적·육체적 고통도 컸다. 울릉도 시민단체인 ‘푸른울릉독도가꾸기회’와 한국외국어대 독도연구회가 1995년 실시한 생존자·유족 면담에서 피해자 공두업씨의 아들 태우씨는 “아버지는 폭격 현장에서 사람들을 살리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한스러워했고, 다른 유족들의 통곡을 애써 피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어머니가 아버지 얘기는 삼가시는 바람에 6~7년 전 ‘푸른울릉독도가꾸기회’와 홍성근 박사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독도로 미역 따러 갔다가 돌아가신 것으로만 알았다”며 “이제라도 폭격사건이 명백하게 밝혀지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래서 그 사실을 제대로 알리는 위령비가 세워지고, 현장에 안내판이라도 있기를 바란다”며 “부디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홍 위원은 “일본이 여전히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상황에서 독도 폭격사건의 실체적 진실 규명은 향후 독도 관련 연구, 독도를 둘러싼 한·일관계 등 여러 측면에서 중요하다”며 “당국과 학계의 관심이 요구된다”고 밝혔다. 그는 “진상규명을 통해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고, 독도가 평화와 인권 신장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면서 독도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확장도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군 독도 폭격사건’ 73주년을 맞은 8일 독도 동쪽섬 선착장에서 시민단체 ‘푸른울릉독도가꾸기회’와 울릉군이 마련한 ‘6·8 독도 미공군 폭격사건 어민 위령행사’가 열리고 있다. 도재기 논설위원
미군, 한국에 훈련장 지정 경위 알리지 않아
학계 ‘일본의 독도 자국 영토화 전략’ 해석
‘미군 독도 폭격’과 그 후
8일 오전 11시 독도의 동쪽섬 선착장에서 동해의 검푸른 파도 소리와 괭이갈매기들의 울음소리 속에 위령제가 시작됐다. 73년 전 바로 이날, 독도 바다에서 폭격으로 희생된 어민들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제다. 잊히고 있는 ‘미군 독도 폭격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자리다. 울릉도 시민단체 ‘푸른울릉독도가꾸기회’와 울릉군이 마련하고 경북도·대구지방변호사회·독도학회가 후원한 ‘6·8 독도 미공군 폭격사건 어민 위령행사’에는 유족과 학계 연구자 등 90여명이 참석했다.
“‘미군의 독도 폭격사건’을 아세요? 1948년 6월8일 낮 12시쯤, 주일 미 공군 B29 폭격기들이 독도를 훈련장으로 삼아 폭격하는 바람에 미역 채취와 고기잡이를 하던 어민들이 희생됐습니다. 이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독도 전문가인 홍성근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사건의 실체가 아직도 제대로 규명되지 않아 연구자로서 안타깝다”며 “어민들의 희생은 물론 일본의 치밀한 독도 침탈·영유권 주장과도 밀접된 사건이라 사회적 관심이 절실하다”고 밝혔다.
‘미군 독도 폭격 사건’ 소식을 전한 경향신문 1948년 6월15일자 기사.
사건 이후 증언·보도에 여론 악화
극동공군사령부 “사고” 일부 인정
미 군정청, 진상조사 발표 없었고
어떤 정부도 실체 확인 나서지 않아
사망자 수 등 사실관계조차 불분명
8일 위령제서 진상규명 촉구 목소리
지금까지 확인된 문헌, 학계의 연구 성과, 생존자·유족들의 증언 등을 종합하면, 일본 주둔 미공군 93폭격대대 폭격기 20대가 1948년 6월8일 낮 12시경 독도 일대를 폭격했다. “태극기를 흔들며 살려달라고 외쳤다” “배에 총알 흔적이 있다”는 등 기총소사가 있었다는 증언들도 있다. 사건 발생 당시 신문들은 폭격과 피해 등을 보도하며 책임 규명을 촉구했다. 그해 6월12일자에 폭격사건을 전한 경향신문은 6월15일자에는 ‘독도 맹폭사건 어디로… 민족의 분격 절정에’라는 제목 아래 “불법적인 행동을 한 비행기를 철저히 조사 적발하라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여론이 악화되자 미 극동공군사령부는 부인하다가 뒤늦게 “우발적 사고” “오인 폭격” 등으로 일부 사실만 인정했다. 기총소사는 부인했다. 이후 미 군정청이 피해자 일부를 대상으로 위로금을 전했다는 단편적 기록이 있다. 하지만 미 군정청 등은 약속과 달리 공식 사과나 진상조사 결과 등을 내놓지 않았다. 당시 남조선과도정부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역대 정부가 실체 확인에 나서지 않아 사건 조사 등은 이후 흐지부지됐다.
사건 발생 후 73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사망자 수 등 기초적 사실관계조차 불명확한 이유다. 사망자는 14명이지만, 그 이상으로도 추산된다. 부상자, 침몰 어선 등의 피해도 마찬가지다. 희생자들은 울릉도와 울진·묵호 등에서 미역 채취 등을 위해 독도 조업에 나선 어민들이다.
의문점은 또 있다. 당시 주일미군이 일본 어민들에게는 독도 폭격 예고를 하고 한국 어민들에게는 하지 않은 이유, 폭격의 현황과 과정·지휘 체계 등이 그것들이다. 독도를 폭격훈련장으로 지정한 구체적 경위, 훈련장 지정을 한국에는 알리지 않은 이유 등도 확인되지 않았다. 기관총 사격 여부 또한 마찬가지다. 학계는 독도 훈련장 지정이 당시 일본의 치밀한 독도의 자국 영토화 전략에 따른 것으로 본다. 실제 일본 중의원 자료 등에는 미군 활용을 통한 영유권 주장 근거 확보라는 일본의 정치적 속셈이 드러나 있다.
“저 건너, 비석이 보이나요?” 푸른울릉독도가꾸기회 김대성 부회장이 위령제 행사장 건너편 저 멀리 몽돌해변 쪽을 가리켰다. 독도 방문객이 쉽게 볼 수 없는 자리에 폭격사건 희생자들 위령비인 ‘獨島遭難漁民慰靈碑’(독도조난어민위령비)가 서 있다. ‘조난’이라는 위령비의 비명은 태풍과 같은 재난을 만난 것으로 해석돼 미군 폭격으로 인한 희생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다. “진상규명의 필요성·중요성을 비명이 잘 보여주는 셈이죠. 역사적 사실을 담아내는 비명으로 제대로 고치는 것도 진상 확인 작업의 하나입니다.” 이태우 교수(영남대 독도연구소)의 말이다.
이 사건의 또 다른 희생자들이 있다. 바로 폭격 속에 죽어가는 동료들과 침몰하던 배를 지켜본 생존자들이다. 그들은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호소하다 하나둘씩 세상을 떠났다. 유족들은 생존에 급급해 진상규명에 나서기조차 힘들었다. 당시는 미 군정 통치기여서 정치·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고, 미국의 잘못을 들춰내는 일이라 정부도 진실 규명을 외면했다. 정부와 지자체의 소극적 태도로 진상규명 작업은 사회적으로도 점차 잊혔다. 당시 미국 측의 조사보고서 등 관련 자료도 부족해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생명권·재산권 침해 사실 등은 확인하면서도 실체 규명에는 이르지 못했다. 학계의 연구는 홍 연구위원을 비롯해 이태우·김태우(한국외국어대)·정병준(이화여대) 교수와 마크 로브모 등의 논문·저서, 푸른울릉독도가꾸기회 등의 일부 증언집이 있다.
연구자들은 독도 폭격사건을 50여년 만에 결국 진상이 밝혀진 ‘노근리 사건’과 비교하며 관심을 촉구한다. 위령제에 앞서 7일 울릉도에선 ‘독도 6·8사건 추모 사업의 과제와 방향’을 주제로 토론회도 열렸다. 일제강점기 위안부·강제징용 피해자 등의 법률 지원으로 유명한 최봉태 변호사(59)의 사회로 홍성근 위원의 주제 발표와 김병렬 국방대 명예교수, 김윤배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울릉도독도해양연구기지 대장, 이태우 교수 등이 토론자로 나섰다. 토론회에서는 진상규명의 필요성 강조와 더불어 향후 조사연구 과제, 추모시설 조성 방안 등을 모색했다.
1929년생 93세인 이 늙은이의 곡절 많은 인생 얘기 들어보시렵니까?
돌아보면 분단체제에 맞서 물러섬이 없었던 삶입니다.
▲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양원진 선생 [사진 : 민병래]
내 이름은 양원진 올해 93세입니다. 한해가 다르게 허리는 구부정하고 다리 힘은 빠져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래도 충무로에 있는 ‘조국통일 범민족연합’ 사무실에 고문자격으로 한 달에 한 번씩 나가 젊은 동지들을 만납니다. 또 낙성대 ‘만남의 집’에도 종종 들려 장기수 선생들과 우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제주 4.3 추모행사에도 다녀왔습니다. 밥도 곧잘 해 먹습니다. 돼지 등뼈에 배추김치 넣고 끓여 따순 밥 거르지 않습니다. 죽는 날까지 내 손으로 끼니를 짓고 내 발로 걸어다닐 작정입니다.
지나간 날은 힘들었어도 다 아름다운 법이지요. 죽을 고비도 많이 넘기고 오랜 징역생활을 했지만 눈을 감으면 아련한 추억이고 향기마저 느껴집니다. 기억이 더 가물가물하기 전에 내 삶에서 남길만한 이야기 몇 토막 적어볼까 합니다.①
▲ 40세때 전주교도소 수감시절 목공장출역을 할 때 양원진 선생
장기구금 양심수로 29년 6개월을 살다.
나는 1960년 5월 신혼여행 중에 체포되어 1961년 8월 15일 대법원에서 무기징역 확정판결을 받았습니다. 30대에서 50대까지 인생의 황금 시기를 감방에서 보내고, 60대에 들어선 1988년 12월에서야 광주교도소에서 나왔습니다. 29년 6개월 동안 징역생활을 한 셈이지요.
징역복이 많아선지, 대전교도소에 있을 때인 1965년 10년 추가형을 받았습니다. 이미 무기형을 받은 터에 10년이 더 얹어지는 게 문제겠냐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형이 더해지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제가 한번 더 기소가 된 일은 참으로 원통합니다. 이름하여 ‘밀서사건’입니다. 박정희가 군사반란을 일으킨 후 교도소 내에서 전향공작이 극심해졌습니다. 내가 전향을 거부하자 가족 면회도 막고 아내에게는 “내가 북에 처자를 두고 내려왔다”고 이간질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새댁이었던 아내는 2년 동안이나 나의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지요. 편지와 면회가 계속 막히자 나는 답답하고 분했습니다. 때마침 출소자가 있어 그를 통해서 어렵게 편지를 전달했는데 이게 그만 발각이 되었습니다.
당시 서울시경분실 취조주임이었다가 중앙정보부 수사국 직원이 된 유00이란 자가 있었습니다.② 그는 대북정보에 목말라 있었는데 내게도 찾아와 “나와 북에 한 번 들어가자, 그리고 감춰둔 사실이 있으면 하나만 얘기해달라”고 여러 차례 회유를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딱 잘라 거절하자, 그는 내게 안 좋은 감정을 가졌습니다. 유00은 “조금만 더 참아달라”고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북에서 공작금을 받아오려는 시도였다”고 조작했습니다. 결국 나는 기소가 되었고 이 사건으로 10년의 추가형을 받았습니다.
아내는 이 일을 계기로 자살까지 시도하다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떠나는 아내를 잡을 길이 없었지요. 가슴 아픈 일은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재판과정에서 방어를 위해 보안과장에게 집필신청을 했습니다. 그들은 종이와 볼펜을 줄 테니 ‘전향서’를 쓰라고 했습니다.
사실 아내는 중매로 만났는데 내가 신혼여행 중에 잡혔으니 그녀에게 이런 날벼락이 없었지요. 게다가 공작금 사건으로 본인까지 엮으려 하니 아내는 돌아버릴 지경이었습니다. 나는 아내를 지키고 무죄를 소명하기 위해 종이와 펜이 필요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내미는 종이에 읽어보지도 않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전향으로 처리되었지요. 조작사건으로 10년의 추가형을 받고 아내는 떠난 데다가 사상의 순결성마저 잃었으니 그 아픔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습니다. 통일사업을 위해 한 평생 살아온 제게 씻을 수 없는 오점이 되었지요.
재판 이후 나는 대전교도소 특별사동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대문 형무소로 갔습니다. 그리고 안양형무소를 거쳐 1969년 군산형무소로 갔지요. 지금이야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에서 군산 오가기가 어렵지 않습니다만, 그때는 머나먼 길이었습니다. 언젠가 어머니가 크리스마스때 면회를 오셨습니다. 서울에서 충남 서천의 장항역까지 기차로 오셔서, 장항여객터미널에서 밤을 지새우고 그다음 날 아침 배로 군산교도소에 오셨습니다. 당시 나는 무급수여서 한 달에 한 번만 면회가 되는지라 어머니는 면회 제한에 걸려 교도소 담장 밖에서 서성거리셨지요.
마침 친한 교도관이 이 사실을 귀뜸해줬습니다. 당시 목공반에 있던 나는 연장통을 집어던지며 “수정 채워서 나를 집어넣어라, 어떤 사고가 날지 모른다”며 악을 썼습니다. 그랬더니 보안과 사무실에서 특별면회를 시켜주더군요.
아버지의 바람기에 평생 마음을 졸이셨고, 무안군 인민위원장을 한 당신 남편이 학살당하는 과정을 지켜봤던 어머니입니다. 밀서사건 이후 며느리는 집을 나갔고 아들은 무기징역을 살고 있으니 어머니의 가슴은 매일매일 타들어갔겠지요. 면회실에 들어서자마자 당신은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원진아, 원진아”하고 우셨습니다. 서울에서 싸 오신 인절미와 고구마는 차디찬 돌덩이였지만 어머니는 입김으로 데워가며 제 입에 넣어주셨습니다. 인절미 한 입 베어 물고 어머니를 바라보며 울고 고구마 한 입 베어 물고 또 울던 그 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돌아서 떠나시는 어머니의 작은 어깨에 서해바다 겨울바람이 얼음 조각이 되어 촘촘하게 박혔습니다.
1970년 전주교도소로 이감을 갔는데 거기서 박희성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중앙정보부 주도로 ‘좌익수 전향 전담 공작반’이 생겨 교도소 분위기가 흉흉했습니다. 나는 저들에 의해 강제 전향된 장기수들과 함께 교무과에 항의했습니다. ‘경찰 방망이’를 치우고 전향공작을 중단하라고 요구했지요.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우리는 ‘전향취소선언’을 하고 특별사에 들어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들의 강제전향 공작을 몇 안 되는 우리 힘으로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고 동료들이 고문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그 자체가 고문이었습니다.
1977년도인가 광주교도소로 이감을 갔습니다. 거기서 강담 선생님을 만나서 1988년까지 12년동안 같이 지냈습니다. 중앙정보부 직원이 88올림픽은 나가서 보라고 했지만 밖에서 나를 받아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들 신원보증을 꺼려했는데 (죽은) 큰 누나의 남편이 나서주어 나는 1988년 12월 성탄절 특사로 강담, 박희성선생 등과 함께 감옥 문을 열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통일원로들과 함께하고 있는 양원진 선생
통일사업을 위해 내려왔습니다.
나는 1959년 통일사업을 위해 북에서 세 번째로 내려왔을 때 잡혔습니다. 그것도 작은 누나의 신고로 체포되었으니 가슴 아픈 일입니다.
휴전 후인 1953년 가을, 나는 소대장 시절에 연대 추천으로 평양정치군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일차 선발된 남쪽 출신 1,700명 중에서 다시 추려진 300명 안에 들었습니다. 유물론과 세계정치, 소련 공산당사를 배웠던 게 기억납니다. 말이 학교지 전쟁 직후 폐허상태라 건물부터 지어야 했습니다. 책걸상과 기숙사 침대 등 모든 가구와 집기까지 학생들이 만들면서 공부했습니다. 군관학교를 졸업할 즈음 나는 군인보다는 사회에서 전후 복구사업에 기여하고 싶어 제대신청을 했습니다.
내 뜻이 받아들여져 교사로 배치를 될 뻔했는데 나는 마다했습니다. 입대 전 신흥대학(지금은 경희대학교)을 다녔습니다만 어거지로 편입했고 공부도 부족한 터라 생산현장에서 일하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목포조선철강에서 일한 경력 덕에 남포조선소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3,000명 정원으로 경비정, 쾌속정, 어선, 목선을 만드는 큰 공장이었는데 내가 맡았던 일은 노력수급지도원으로 여기식으로 말하면 총무과나 노무과 같은 보직이었습니다. 기숙사에서는 ‘독신자 합숙 자치위원회 위원장’까지 맡게 되어 밤낮으로 일에 묻혀 살았습니다.
3개월이나 되었을까? 하루는 조선소의 당조직 부위원장이 부르더니만 “정치사업을 해볼 생각이 없냐?”고 묻더군요. 그 의미도 잘 몰랐지만 “조선소의 행정사무가 너무 많아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행정사무를 빼 주겠다”고 하더군요. 알고 보니 그 정치사업은 대남공작사업, 즉 통일사업에 투입되는 것이었습니다. 화선입당을 했던 나로서는 영예스러운 일이기에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시당, 도당, 중앙당 심사를 거쳐 1955년 3월 5일 드디어 노동당 연락부에 소환되었습니다. 나는 전쟁 전에 지하당 활동을 했고 전쟁 기간에는 유격전을 수행하면서 민청위원장까지 맡는 등 초급정치일꾼으로 일했습니다. 휴전 후에는 정치군관학교에서 이론수업까지 받았으니 이미 다양한 경험을 쌓은 터였습니다. 그래서 남파를 위해 배운 것은 주로 무선통신이었습니다. 나는 통신기술을 익히면서 휴대용송수신기까지 직접 만들었습니다. 흥미도 있었고 손재주도 있어 미제, 일본제, 소련제의 회로를 보면서 고성능 무전기를 설계 제작한 것이지요. 담배값 크기 정도인데 성능이 좋아 나진에서 목포까지 먼 거리의 송수신이 가능했습니다. 3차로 내려올 때 바로 이 장비를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1959년 6월 25일 해주를 떠난 배는 6노트 정도 속도로 고향인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면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영광군 안마도 부근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7월 1일에나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 일주일이 걸린 셈이지요.
1, 2차 임무가 기성 망과의 연락업무였다면 이번 3차 임무는 새로운 세포를 조직, 육성하는 것이었고 당에서는 내게 재량을 주면서 직접 계획을 짜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 고향 신안군을 떠올렸던 것이지요. 도착하니 고모님은 돌아가셨는데 고종사촌들은 나를 숨겨주고 도와주려 했습니다. 내려올 때 계획은 외삼촌의 아들들, 즉 외사촌 동생 3명을 포섭하려고 했는데, 외삼촌 집안이 살길을 찾아 서울로 가버렸더군요. 처음부터 계획이 틀어졌습니다.
그래서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경상도 쪽으로 가서 길게 내다 보고 사업을 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내려올 때, 달러는 많았지만 남쪽 돈은 조금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누나에게 부탁해서 달러를 바꾸려고 했습니다. 누나와 매형은 함께 좌익운동을 했고 10년 징역생활을 하다가 형집행정지로 출소해 아버지가 일군 임옥소주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북에서 내려올 때 소주회사가 잘되면 사상이 달라졌을 수 있으니 “접촉을 신중히 하라”는 당의 당부를 받았지만 돈을 바꿔주는 정도야 괜찮겠지 생각하고 고종 누이를 통해 연락했습니다. 나는 약속 날짜에 신안군 두류산 언덕에 올라서 작은 누나가 오게 될 외길을 살피며 안전을 점검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작은 누나는 편지를 받자마자 곧바로 전남도경에 신고를 했고 경찰이 들이닥쳐 고모네 집에서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작은 누나가 원망스러웠지만 이해도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징역을 살았고 내게 조카인 자식들 앞날을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는 1958년에 신국가보안법이 통과되고 1959년부터 발효가 된 살벌한 때였습니다. 누나는 막내 출산을 앞두기도 했었구요.
나는 수사를 받으면서, “자수를 위해 누나에게 연락을 했다”고 하면서 북쪽에서 미미한 직책에 있던 것으로 진술했습니다. 다음 접선에 대해서도 적극 협조하는 척 했습니다. 내 머릿속에서 ‘가장의 접선 작전 1, 2, 3’을 설계하고 이를 토대로 전남 도경이 생포 작전을 펼치게끔 했습니다. 물론 결과는 뻔했지요. 현장에 가보면 실체가 없었으니까요. 이른바 ‘모든 비상선’ 접촉이 실패하자 나에 대한 그들의 의심이 깊어졌습니다.
그때 나는 “대천 해수욕장 앞바다 6km 지점에 다보도라는 무인도가 있다. 나를 데리러 거기에 공작선이 온다. 그들을 해안가로 유인하겠다”고 진술했습니다. 도경은 속는 셈치고 병력을 동원했는데 당시 사찰계 경감 박00이 무슨 의도인지 바닷가에서 조명탄 발사시험을 했습니다. 그 시험 발사로 모래바람이 일자, 어선 같은 쾌속정 하나가 다보도를 한 바퀴 돌고 북쪽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우연인지 모르겠으나 정황상 나의 진술이 사실이고 ‘조명탄 시험 발사’로 놓치게 된 상황이 되었습니다. 결국 나는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되었고 공소보류 처분으로 석방이 되었습니다.
석방이 되자 나는 뒷산에 감춰뒀던 무전기를 찾아와 라디오부품을 이용해 수신기를 만들었습니다. 그간의 경과를 모르스 부호로 보고하고 활동을 재개했지요. 그때 어머니는 결혼을 서둘렀습니다. 약학과를 졸업한 아홉 살 어린 아가씨와 선을 보게 돼 벼락 결혼을 올렸습니다. 주변에서 반대가 심했지만 나를 사윗감으로 만족해하던 장모는 “그런 사람은 장가도 못가냐?”며 우리 집보다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1960년 5월 27일 군산여고 강당에서 장가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경주로 신혼여행을 간 사이에 일이 터졌습니다. 매형이 “양원진이 석방된 이후에 계속 활동을 한다”고 신고를 한 겁니다. ‘임옥소주’는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을 “내가 인민군으로 입대해 소식이 끊기자” 매형이 이어 받아 운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나타났고 결혼까지 해 가정이 생기니 “회사를 돌려달라”고 할까 봐 누나와 매형은 속을 끓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 행동을 은밀하게 관찰했던 모양입니다. 내가 신혼여행으로 집을 비운 사이 경찰은 가택수색을 했고 “달러 뭉치와 무전기”가 나오자 나는 다시 체포되었습니다.
간판이 무역회사 ‘남일사’라고 되어 있는 서울시경 공작반에서 한 달 반 가량 조사를 받았습니다. 내가 가진 무전기 기술이 탐나서인지 여러 회유가 들어왔습니다. 미국 CIA에서는 평양에 한 번만 들어갔다 오면 미국시민권을 주겠다, 공군특무대는 문관으로 채용하겠다, 시경에서는 경찰관으로 특채하겠다고 했지만 교도소에 갈 각오로 모두 거부했습니다, 결국 1960년 7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1년에 걸친 재판 끝에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게 1961년 8월 15일이고 그로부터 길고 긴 30년 징역 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유격전보다 재귀열병이 더 힘들었습니다.
▲ 1948년 스물살때 양원진 선생
1943년 나는 14살 때 아버지를 따라 작은어머니가 있는 북경으로 갔습니다. 당시 북경은 일본군 점령하에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곳에서 살길을 찾아보려 했습니다. 17살 때인 1945년 나는 일본 소화국민학교를 마치는 졸업식장에서 일본군 군속으로 끌려갔습니다. 그해 8월 일본이 패망하자 제대하고 아버지와 함께 목포로 돌아왔지요. 광주사범학교를 나와 학교선생을 했던 아버지는 제자들과 주민들의 추대로 무안군 인민위원장이 되었습니다. 문태중학교에 들어간 나도 반미투쟁을 했습니다. 1947년 미군정이 인민위원회 해산령을 내리자 아버지는 수배상태가 되었고 나도 같이 쫒기는 몸이 되어 군산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1948년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이 군대를 강화하면서 젊은 남자들은 징병을 당하는 처지였습니다. 나는 입대를 미루기 위해 대학교 입학을 생각했습니다. 당시 대학생은 26살까지 입영을 연기해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나는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했지만 가짜로 서류를 꾸며 1949년 12월 신흥대학(현 경희대학교) 영어과에 편입을 했습니다. 1950년이 되자 학기제가 바뀌어 3월이 되면서 곧바로 2학년이 되었지요.
그런데 그 해 6월 25일을 기해 전면전이 벌어졌고 나는 서울에 진입한 인민군에 지원했습니다. 을지로 6가에 있던 한양공대에 가서 머리를 깍고 군복을 지급받았습니다. 입대자 1,500명 중에서 18명을 따로 선발해 중기관총수를 임명했는데 내가 거기에 뽑혔습니다.
인민군의 기관총은 소련제 막심중기관총으로 무게가 34kg이나 나갔습니다. 그런데 보급이 원활치 않아 내게 미국 LMG 기관총이 지급되었습니다. 250발 탄창에 30kg으로 조금 가벼운 편이어서 신병인 나로서는 좋았습니다. 원래 기관총은 차량에 걸어 이동하는 것이 맞지만 유격전 기간에는 차량을 운행할 수도 없고 강원도 산간 지형에 맞지도 않아서 장거리 행군 시에는 배낭에 짊어지고 짧은 거리는 어깨에 메고 갔습니다. 전쟁 기간 내내 그렇게 행군하느라 고관절과 무릎관절이 안 좋아져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습니다. 보병전에서 기관총이 있고 없고는 사기에서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250발이 불과 몇 분 사이에 드드득하고 날아가면 웬만한 장갑차량도 격파할 수 있습니다. 실제 충청도 전장에선 이런 전과를 올렸지요. 이렇듯 기관총은 공격할 때 기선을 제압함은 물론 후퇴하면서 방어선을 지키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래서 나는 특별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경비사령부 직속 106연대 24대대 3중대 중기사수가 되어 아산 둔포지역에서 서해안 방어임무에 투입되었습니다. 온양이나 충남북 내륙으로 들어가 몇 번의 전투를 치렀습니다. 그런데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뒤늦게 통보받은 우리부대는 차령산맥과 태백산맥을 타고 후퇴길에 올랐습니다.
나는 후퇴하다가 평안남도와 함경남도 경계인 가려주리에서 최현장군의 2군단에 배속되었습니다. 최현장군은 당시 두만강까지 올라간 미군의 배후 교란작전을 수행중이었고 그 작전에 따라 나는 1950년 11월부터 1951년 5월까지 인제, 홍천, 횡성 등 강원도 일대에서 유격전에 참여했습니다.
홍천, 횡성전투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왔는데 한 부대원이 총알을 맞아 아래턱이 부서졌습니다, 피가 얼굴에 가득하고 혀가 너덜대는 상황에서도 무릎을 관통당한 동료를 부축해서 이동하는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이곳에서 보급 때문에 애를 먹었는데 하복차림으로 가을을 맞아 모두 추위에 고생했습니다. 어렵게 재봉틀 일곱대를 확보했는데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아 쳐다만 보았습니다. 나는 거의 뜯다시피 해서 다시 조립을 하고 석유칠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부드럽게 돌아가서 깊숙한 골짜기에 옮겨놓고 엉덩이까지 덮는 솜옷을 지어 입었습니다. 스스로 겨울옷을 만들어 추위를 이겨냈으니 큰 기쁨이었지요.
유격전 때는 군비도 시원치 않아 탄알을 많이 가진 병사가 겨우 15알이고 총이 없는 병사도 많았습니다. 나는 소대장이 권총을 갖게 되면서 그의 M2 소총을 받았습니다. 치열한 유격전 속에서 이미 중기관총은 못쓰게 된 터였는데 소총을 받게 되어 용기 백배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행군 중에 휴식을 하고 다시 행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만 소총을 놔두고 대오를 따라갔던 것입니다. 소총이 없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10리 정도를 가버린 상태였습니다. 당시 무기를 잊어버리면 사형을 한다는 군령이 있어서 분실했다는 보고를 차마 못했습니다. 영월에서 시가전이 벌어졌는데 나는 4명의 대원들과 한 조가 되었습니다. 모두 총은 없고 수류탄만 있는 난감한 상황이었는데 국군의 한 무리와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수류탄만 가진 우리를 만나자 그들이 갑자기 항복을 하는 바람에 소총 다섯정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잊지 못하는 장면들입니다.
이후에도 유격전 상황은 계속되어 경북 영주 남대리까지 내려갔는데 거기서 본부로부터 3개월 휴식명령을 받았습니다. 후방으로 가기 위해 인제를 거쳐 1951년 4월 평안북도 청천강에 도착했습니다. 그때부터 쌀 보급이 원활했습니다. 그런데 제공권을 뺐긴 상태에서 앞날이 어떻게 될 지 몰라 나는 남은 쌀을 많이 지고 움직였습니다. 나는 식량보급도 담당했던 터라 쌀 한 톨을 소중히 여기는게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쌀을 잔뜩 멘지라 땀을 많이 흘려서 청천강을 건너 어떤 우물가에서 몸을 씻는데 갑자기 몸이 떨렸습니다. 땀이 식을 때 오싹하는 정도가 아니라 몸이 오들오들 떠리며 다리에 힘까지 쪽 빠졌습니다. 돌아보니,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대원들이 여기저기서 시름시름 앓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 이게 재귀열이라고 불리는 병이구나! 말로만 듣던 세균폭탄을 맞은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득 비행기 꼬리에서 하얀 연기인지 가루인지가 며칠 내내 뿌려졌던 게 기억났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1952년 당시 75개 회원국으로 구성된 세계평화회의는 세균전 논란에 대해 국제과학조사단을 구성, 중국과 북한에서 현지조사에 나섰고
"세계만방 인민들의 공통된 비난을 무릅쓰고 이러한 반인륜적인 죄악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본 조사단은 논리적인 절차를 하나하나 밟으면서 아래의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과 중국의 인민들은 실제로 세균이라는 무기의 표적이 되었다. 이들 세균무기는 각종의 다양한 방법이, 그 중에는 2차대전 시 일본이 개발하고 사용하였던 방식도 포함하여, 미합중국 군대에 의해 사용되었다.“
고 조사보고서에서 밝힌 바가 있습니다. 미국은 이 보고서에 대해 과학적이고 설득력있게 부인하지 않은 채 그저 "터무니 없는 선전"이라고 일축하고 있을 뿐입니다.③
다행히 나는 치료를 잘 받았습니다. 진명여고 출신으로 연대장 간호를 맡고 있던 간호사가 내가 재귀열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연대본부에서 먼 길을 걸어와 주사를 놔주고 돌아갔습니다. 여고 3학년 시절 입대한 그녀는 같은 본부 성원으로 몇 번 눈길이 스쳤고 ”내가 여자께나 울렸겠다“는 얘기를 나의 부하에게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녀가 위험을 무릅쓰고 밤길을 걸어와 비상용주사를 놔줬던 일은 고마우면서도 알 듯 모를 듯한 일이었습니다.
20여 일 앓고 나는 차츰 나아서 회복기 중대에 있다가 9사단으로 원대복귀하던 중에 황해도 해주에서 6군단에 편입되었습니다. 당시 나는 9사단에 긍지를 갖고 있었지만 내가 열병을 앓고 있는 사이에 개성으로 이동을 한 상태였습니다. 전쟁으로 혼란스런 상태여서 ”군관들은 원대복귀를 하고 하사관과 병사는 주변 부대에 편입된다“는 방침에 따라 소속 군단이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6군단에 편입되어 나는 평안남도 양덕군 온천면에 있는 100명 정도 규모의 운수중대에 들어갔습니다. 몽골에서 원조한 야생말을 압록강변 의주에서 군마로 조련을 했지요. 훈련이 잘 된 말을 여러 부대에 보냈습니다. 나머지 말 74필을 계속 훈련시켜 1951년 11월에 동부전선으로 이동을 시키던 중 마식령에 이르러 미군 전투기의 기총소사를 받았습니다. 말들은 도망가려고 날뛰다가 논 한가운데로 들어가 자빠졌습니다. 마차에 실었던 소금이 녹아버리고 보급물자는 엉망이 되었습니다. 기진맥진해 자포자기 심정이 들었는데 폭격과 기총사격이 계속되었습니다. 내 옆에 있던 병사는 허리에 관통상을 입었고 나는 팔에 기관총을 맞았습니다. 기어서 도망가다가 비탈길에서 굴렀습니다. 거기가 마침 은신할 만한 곳이라 붕대를 감아 지혈을 했지요. 총상을 입으면 파상풍을 조심해야 하는데 부근에 중국인민해방군이 있어서 주사를 맞았습니다. 재귀열병에 이어 두 번째 죽을 고비였던 셈입니다.
부상을 치료하고 나는 전선사령부 직속 예비연대 하사관 교도대대에 편입되었습니다. 당시 병사들은 부족했지만 하사관은 여유가 있어 별도로 교도대대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동부전선 내금강 지역으로 배치가 되어 갱도작업을 했습니다. 몇 개월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아이젠하워가 원산에서 청천강을 기준으로 인민군의 허리를 자르겠다고 한다“는 얘기가 돌던 때여서 원산 부근의 동부전선 갱도는 중요한 작업이었습니다. 열 사람이 1개 조로 굴을 팠습니다. 거기서 나는 1등을 했습니다. 덕분에 중간 총화할 때 혼자 주석단에 앉았지요.
그때 군대 내 민주청년동맹의 추천으로 나는 화선입당 절차를 밟았습니다. 그런데 나의 입당에 대해 반대하고 의심하는 눈초리들이 있었습니다. 남쪽에서 대학을 다녔고, 아버지가 작지만 소주회사를 운영한 점이 불리하게 작용을 했습니다. 나의 입당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버지의 무안군인민위원장 경력보다는 소주회사 사장이라는 경력이 더 크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심사과정에서 정치의식과 사상적 무장을 묻는 질문이 많았습니다. 심사위원들이 질문을 많이 준비해왔더군요. 나는 당황해서 제대로 답을 못했습니다. 그래도 부결되지 않았습니다. 민청과 비당원대중으로부터 신망을 받고 있기에 떨어뜨리기가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세포에서 대대와 연대를 거쳐 전선사령부 꼬미샤까지 올라갔습니다. 꼬미샤는 검열기관으로 당에 불순분자가 들어오는 것을 감찰하는 기관입니다. 꼬미샤위원장이 1시간 30분 동안이나 개별심사한 끝에 나는 정당원으로 승인받았고 내 성분은 ‘빈농’으로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화선입당을 한 후인 1953년 3월 초, 다시 내게 어려움이 다가왔습니다. 심근류마티스, 즉 심장판막증을 앓았습니다. 20여 일을 병원에서 누워 지냈는데 몸이 좋아지는 듯 했지만 퇴원은 안된다고 하더군요. 다시 20일을 더 있었습니다. 여전히 안정이 필요하다고 하는데도 나는 군장을 꾸려 회복기 중대로 갔습니다. 거기서 중대장을 맡아 50명 정도의 인원을 인솔하고 전선으로 나갔지요. 강원도 길은 대개 하나 밖에 없는데 우리 인원이 소부대여서 야간행군이 원칙이지만 낮에 행군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우리를 앞서가던 마차부대가 행군을 하면서 먼지가 피어올랐고 이를 본 미군의 비행기 공격을 받았습니다. 야간행군을 하라는 원칙을 어겨 희생을 당하면, 안 당할 수 있는 피해를 불러온 것이어서 비상사고로 평가됩니다. 그 경우에는 지휘관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나는 대오를 적절하게 분산시켜 겨우 참사를 면했습니다. 그리곤 정찰부대를 원했지만 보병부대에 배치되었습니다. 여기서 3명으로 조를 꾸려 국군진지 깊숙이 들어가 4명이나 되는 포로를 잡은 적이 있습니다. 덕분에 2급 무공훈장을 받았지요.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발효 12시간 전에 갱도 밖으로 절대 나오지 말라는 비밀 무전이 내려왔습니다. 협정 몇 시간 전까지 격렬한 포사격이 벌어진 후 일순간 포성이 멎었습니다. 정적이 흐른 후 풀벌레들이 울기 시작했고 갱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고지 밖으로 나왔습니다. 우리는 최고사령부 명령인 정전협정 준수사항 열 가지를 받아적었습니다. 그리고 민둥산 고지에서 남은 탄약을 사흘 동안 2km 밖으로 옮겼습니다. 그때가 폭 4KM 155마일 비무장지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살아냈음이 기뻤습니다. 둘러보니 고지마다 폭격에 나무들은 다 산산조각나고 바위는 으스러져 상처투성이였습니다. 놀랍게도 전쟁의 포성이 멎어서인가요. 지하 갱도에서 몸에 바짝 달라붙었던 말라리아 기운이 고지 밖에서 햇빛을 쬐니 씼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전쟁이 끝났고 평화가 온 것이 실감나더군요.
▲ 울릉도에서 딸 강태희님과 함께한 양원진 선생
수양딸을 얻어 다시 가족을 꾸리고 전선으로 나갔습니다.
1988년 12월 광주교도소 문을 열고 나온 후 나는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작은 누나 집에서 5년간을 살았습니다. 사실 검거가 된 게 누나의 신고이니 우리 남매에겐 앙금이 깊었습니다. 하지만 출소 후 오갈 데 없는 나를 누나가 품어줬고 나는 그 집에서 살며 앞으로 살아갈 궁리를 하였습니다. 화해를 한 셈이지요. 그런데 나를 반긴 건 작은 누나 말고도 경찰이 있었습니다. 광주에서 출소하니 그쪽 담당 형사가 한 달에 한 번, 나중에는 세 번씩 만나자고 하더군요. 그렇게는 못 내려간다고 버틴 덕에 서울 성북경찰서가 나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에게 사찰을 받다보니 작은 감옥에서 큰 감옥으로 옮겨왔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출소했을 때 발등의 불은 먹고 사는 문제였습니다. 30년을 갇혀 있었지만 아직 육십의 나이고 몸은 쓸만했습니다. 같이 징역 살았던 사람 소개로 석수역과 시흥역 사이에 있는 ‘동양철선’이라는 공장에 들어갔습니다. 철선 중에 가벼운 게 100kg인지라 팔목인대가 버티지를 못했고 결국 그만두었습니다. 그 후 외가 쪽 동생이 운영하는 경운수산에 들어갔습니다. 컵라면에 들어가는 어포를 농심, 삼양, 오뚜기에 납품하는 일이었지요. 제법 회사가 돌아갔는데 사장이 풍을 맞는 바람에 사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잠시 짬을 내 피아노조율사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조율만이 아니라 수리와 조정도 할 줄알아야 딸 수 있는 자격증이었습니다. 같이 열심히 공부했던 사람들이 5~6명 있었는데 모두 떨어지고 나만 붙었습니다. 그때 나는 인천 삼능교회 영선부장을 맡고 있었는데 피아노 조율은 돈벌이도 되고 여러 교회에서 자원봉사도 할 수 있기에 땄지요.
자격증 취득 후 강담선생이 다니는 건축회사가 6층 짜리 빌딩들을 많이 지었는데 잠시 관리소장을 맡아서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99년 동방에너지에 입사를 했지요. 그 곳 사장이 나를 좋게 봐서 자격증도 없는 늙은 나에게 같이 일을 하자고 했습니다. 발령을 받은 곳이 881세대가 있었던 안중이었고 특별한 인연이 된 곳입니다. 나중에 ‘도시가스’에 밀려 2007년 회사가 망했지만 그곳 주민들이 나를 좋아해 아파트 경비로 몇 년 더 일을 하게끔 도와줬습니다.
수양딸 강태희도 그곳에서 만났지요. 당시 아파트 노인정에 회장파와 부회장파가 나뉘어져 분위기가 안 좋았습니다. 내가 총무를 맡아 양쪽 화해를 도모했습니다. 그때 강태희가 노인정으로 자원봉사를 왔고 자기 돈으로 20kg 쌀도 두 번이나 사다 놓곤 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좋게 보고 있던 차에 강담선생을 비롯 장기수 선생들이 놀러 오면 같이 자리를 하곤 했습니다. 주변에서 두 사람이 보기 좋으니 ”딸이나 삼으라“는 얘기가 나왔고 강태희가 이를 받아들여 수양딸이 되었습니다.
그 후 강태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딸은 내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집회나 행사에 참석하러 서울에 오면 꼭 낙성대 만남의 집에 들러, 장기수선생들 빨래도 해주고 김치나 정성 깃든 반찬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딸을 지켜보는 내 맘은 흐뭇했습니다. 나중에는 금강산도 같이 다녀오고 행복한 추억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나는 생계를 해결하면서 한편 통일운동전선을 찾아나섰습니다. 2010년부터 조국통일 범민족연합(경인연합에 이어 남측본부)의 고문이 되어 한 달에 한 번씩 회의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서울)‘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의 고문도 함께 맡고 있습니다. 젊은 회원들과 함께 미대사관, 국방부,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한미합동군사훈련’을 반대하는 시위를 했지요.
양심수 후원회에서 직책을 맡고 있는 건 아니어도 양심수 후원회가 주관하는 신년하례회나 총회, 역사기행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징역 안에서 면회는 물론 편지까지 금지되고 전향공작을 받을 때 양심수후원회 같은 단체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 외 ‘고난 함께’나 ‘코리아 연대’의 동지들과도 뜻을 같이하고 연대의 마음을 나누고 있습니다. 615 산악회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이 동지들 덕에 늙은 몸을 이끌고 천하 명산을 구경하고 정상에 올랐습니다.
여기까지가 내가 한 평생, 통일운동에 몸을 담으면서 살아온 곡절 많은 인생 얘기 몇 토막입니다. 묘하게도 저는 사회주의자이면서 기독교인입니다. 모태신앙이었던 탓도 있지만 사회주의는 인간의 평등을 위한 사상이고 기독교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가르침이기에 저는 두 신념을 모두 존중했습니다. 제가 입당할 때 종교를 갖게 있다는 게 걸림돌이었습니다만 모두 인간을 위한 길이라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이제 90이 넘은 몸으로 남은 여생이 얼마나 될지 알수 없습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몸 하나 뉘일 수 있는 임대아파트라도 있으니 죽는 날까지 내 손으로 밥 끓여먹고 통일운동의 현장에 빠지지 않고 걸음 할 작정입니다. 내가 옆에 서 있기만 해도 젊은 사람들에게 힘이 될 거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제 인생을 완성하는 길이기도 하니까요. 모두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 광주 518민주묘지에서 양원진 선생(오른쪽에서 두번째)
못 다한 이야기
① 이 글은 양원진선생님이 필자에게 두 번에 걸쳐서 생애를 들려준 것을 받아 적었다. 빈 부분은 양원진선생님의 구술자서전 <<곡절많은 한 생을 살아오며>>(민가협양심수후원회 편)을 참고했다.
② 양원진선생님의 자서전에는 유00과 박00의 본명이 나온다. 이들에 대해선 필자가 사실 확인의 어려움이 있어서 이글에서는 유00과 박00로 표현했다.
③ 이 인용된 부분의 출처는 오마이뉴스 2001년 6월 14일자 강성관기자의 ”무등산에서 미군 세균전했다“는 제목의 글이다. 이 기사 뒷부분에는 제1해병 비행대대 참모장 슈어 대령의 자백을 인용한 <상하이 데일리 뉴스> 1953년 3월 1일 기사의 주요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전쟁에서 일반 세균전 계획은 1951년 10월에 통합참모본부(당시 리지웨이 대장)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 달에 통합참모본부에 의해 소규모 실험적으로 시작되었던 세균전을 점차 규모를 확대하여 한반도 전체에서 착수하도록 전언했다. 이들 지역은 최소한 10일 간격으로 재 오염시킬 예정이었다. 작전은 콜레라 폭탄을 사용하였으며 6월 첫 주에 개시되었다. 적의 영토상공에서 안전을 강화하기 위해서 세균폭탄의 투하 후까지 네이팜탄을 기내에 남겨두었다. 그것은 비행기가 추락할 경우에 거의 확실하게 증거를 인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부분은 양원진선생님의 구술에는 없으나 양원진선생님의 진술을 뒷받침하기 위해 필자가 인용한 부분이다. 그런데 양원진선생님은 세균전으로 인해 재귀열병에 걸린 시기를 1951년 4월경이라고 기억하는데 위 <상하이 데일리뉴스>에 따르면 1951년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으로 나와 양원진 선생님의 진술과는 시차가 있다. 여기서는 양원진 선생님의 기억을 토대로 서술했다.
④ 경향신문 1960년 8월 21일자 기사에서 ”서울지검 김세배검사는 양원진을 당국에 신고하지 않은 불고지죄로 나익환, 나찬영, 나옥자, 나지환 양원진의 고종형제 네 명을 신국가보안법 9조 위반으로 기소하였다. 신국가보안법 발효이후 9조가 적용된 최초의 사례“라고 보도했다.
사회에 막 첫발을 내딛은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최소한의 법적 권리를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알더라도 주장할 수 있는 훈련이 전혀 돼 있지 않은 상태로 안전하지 않은 일터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산재사고까지 잇따르면서 학교에서부터 제대로 된 노동교육인권교육이 이뤄져야 한다는 요구가 커집니다. 이에 학교 노동인권교육의 현황과 내실화를 위한 대안을 3편의 기사로 소개합니다.
“내가 일을 하다가 다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일터로 내몰리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고 이선호(23세) 씨의 아버지 이재훈(62세) 씨가 아들의 추모문화제에서 울분을 터뜨리며 한 말이다. 선호 씨는 지난 4월 22일 아버지와 함께 일용직으로 경기도 평택항에서 일하다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지시받고 따르던 도중 300kg짜리 개방형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세상을 떠났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용돈을 좀 벌려다 참변을 당한 것이었다.
그에 앞서 아들 김용균(당시 24세) 씨를 떠나보낸 어머니 김미숙(53세) 씨는 선호 씨의 소식을 듣고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남의 일이 아니었다. 그의 아들 용균 씨는 3년 전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다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졌다.
김 씨는 민중의소리와 만나 “용균이가 사회에 나가도 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며 “건설업이 많이 위험하다고 뉴스에서 많이 나오니까 ‘너는 건설업에 가지 말라’, ‘화학약품 폭발사고가 있으니까 그런 데에는 가지 말라’고만 했지, 우리사회에 그런 위험이 만연하게 방치돼있다는 건 정말 생각하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선호 씨와 용균 씨처럼 사회에 막 첫발을 내딛은 청소년들과 청년들은 최소한의 법적 권리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알더라도 주장할 수 있는 훈련도 전혀 돼 있지 않은 데다, 상대적으로 저경력·하급직이어서 안전하지 않은 환경에 내몰리고 있다.
그래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청년들을 향해 안전하지 않은 일터는 벗어나야 한다고 거듭 당부하고 있다. 이 씨는 “시킨다고 다 해선 안 된다. 위험하고 힘든 일은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김 씨도 “위험한 곳은 무조건 나와라. 위험한 것은 시켜도 절대로 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이들의 말처럼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를 잘 알고 있고 노동을 존중하는 사회가 된다면 처참한 죽음 만큼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학교에서부터 교육을 통해 이뤄진다면 앞으로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까.
학교 노동인권교육 활성화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며,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는 올해 초 ‘2022 개정 교육과정’에 노동인권교육을 담자고 교육부에 공식 건의했다. 김 씨도 “아이들이 사회에 나오기 전에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촉구했다.
고 이선호 씨의 빈소ⓒ민중의소리
학교에서 노동을 배운다고?
학교에서 ‘노동’에 관한 내용을 가르치는 모습은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다른 나라에서는 익숙한 풍경이다. 특히 유럽에서는 초등학교 정규 수업 과정에서부터 철저하게 노동 문제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한국고용노동교육원 등에 따르면 독일의 경우 정규 교과과정에서 노사교섭을 배울 정도로 체계적 노동 교육을 한다. 1976년 사회적 합의로 만들어진 민주시민교육의 원칙인 보이텔스바흐 합의에 따라 교육 체계가 구성됐다. 프랑스의 경우 1985년 초·중학교에 노동 교육이 포함된 과목인 ‘시민교육’을 의무화하고 1999년부터 고등학교 필수과목으로 지정했다. 영국도 2002년부터 중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시민교육을 가르치고 있다. 시민을 정의할 때 '노동자'도 포함된다는 걸 분명히 하고, ‘노동조합이 학교 안으로’(Unions Into Schools)라는 홈페이지도 운영한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는 “유럽의 몇 개 국가만 하는 게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가 하고 있다. 전형적인 시장주의 국가인 미국과 일본도 하고 있다”며 “미국 교과서에는 ‘노동운동사’가 자세히 나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러한 외국 사례는 노동을 존중하는 사회적 인식이 높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학교에서의 노동인권교육 수준은 어떨까. 분명 이전보다 나아지고 있지만 50년 전인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에서 스물세 살의 봉제 노동자 전태일 열사가 몸에 불을 붙이며 준수하라고 외쳤던 ‘근로기준법’을 겨우 가르치고 있는 현실이다.
‘근로기준법’ 겨우 알려주는데 머무는 교육 현실
우리나라 학교에서 ‘노동’에 관한 교육이 이뤄진 역사는 매우 짧다. 한국고용노동교육원의 올해 초 펴낸 ‘노동인권교육 실태조사와 교육 활성화 방안 연구’에 따르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노동인권교육은 2009년 개정 교육과정에서 직업계고(특성화고·마이스터고)만을 대상으로 실시하도록 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이후에도 2011년 광주기아자동차 현장실습생이 과로로 쓰러지는 등 해마다 특성화고 현장실습생에 대한 산재사고가 발생했다. 노동인권교육이 체계적으로 진행되지 못한 탓이었다.
학교 노동인권교육의 전환점은 ‘2015 개정 교육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현재까지 적용되고 있는 교육과정이다. 정부는 2015년 교육과정의 개정을 통해 초·중·고등학교의 정규교육과정에 ‘노동인권의 개념’을 반영하고자 했다.
이는 직업계고를 중심으로 하던 노동인권교육을 청소년 모두에게 해야 한다는 사회적 목소리가 반영된 결과였다. 아르바이트 등 일을 하는 청소년 비율이 증가하고 있었고(2019년 기준 전국 중·고등학생 중 8.5%), 일을 시작하는 연령도 낮아지는 추세였다. 특히 불안정한 노동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은 인권 사각지대에 놓일 가능성도 커서 사회적 책임이 요구됐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2018년부터 중앙정부 차원에서의 여러 가지 정책과 사업이 나오기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중 학교와 가장 밀접한 부처인 교육부는 노동인권교육 내용을 일부 교과서에 포함시켰다.
고등학교 인정 교과서 ‘성공적인 직업생활’ 중 ‘근로 관계와 산업안전’ 단원 내용ⓒ민중의소리
현재 초등학교 5~6학년, 중학교 2~3학년, 고등학교 1~3학년에서 노동인권에 대한 다양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경우 노동인권에 관한 기본개념과 노동, 시장경제 등을 다루고 있고, 고등학교는 노동자의 권리, 노동 관련 법령, 근로계약서 작성 등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성공적인 직업생활’ 교과서를 보면 ‘근로 관계와 산업안전’이라는 단원에서 근로관계법 등 근로자의 권리와 의무를 설명하고 있고, ‘통합 사회’ 교과서의 ‘인권 보장과 헌법’이라는 단원에서는 청소년 노동인권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교과과정이 개정된 2015년 이전에는 이마저도 접하기 힘들었던 것에 비하면 분명 큰 변화다.
여기에 더해 각 지역의 교육청은 노동인권교육의 활성화를 위해 별도의 조례를 제정하고 있다. 2015년 ‘대전시교육청 노동인권교육 조례’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17개 시·도교육청 중 13곳에서 노동인권교육 활성화를 위한 조례가 제정됐다.
특히 조례에 노동인권교육 대상을 명시하고 의무적으로 실시하도록 시간까지 정해둔 곳은 서울·경기·인천·광주·부산·충북 등 6개 시·도 교육청이다. 다만 구체적인 내용과 방식은 조례마다 각각 다르다.
예를 들어 서울시교육청은 직업계고, 일반고 중 직업위탁반 운영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기당 2시간 이상 노동인권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경기도교육청은 중·고등학교에서 연간 2시간 이상 노동인권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광주시교육청은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매년 실시해야 한다.
교육 방법은 명시적으로 규정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정규교과과정과 연계해 노동인권교육을 하거나 비교과인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을 활용해 노동인권교육을 하고 있다. 교과 담당교사가 자신의 수업 시간을 할애해 직접 노동인권교육을 하거나 외부강사(노동인권전문가)를 초빙해 수업하기도 한다. 광주의 경우 전국 최초로 노동인권교과서가 개발·인정되어 일부 특성화고에서 이를 선택교과로 채택해 운영하고 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육 현장에선 노동인권교육을 제대로 하는 데에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일단 교육부가 제시하고 있는 교육의 ‘성취기준’이 노동의 가치에 대한 충분한 이해보다 직업윤리, 청렴한 삶의 필요성 등 소극적인 수준에서의 노동에 대한 이해로 구성돼 있다 보니 교과서에 담긴 내용과 교육 내용도 극히 한정적이다. 지역 교육청 조례에 따른 의무 교육도 내실 있게 진행되기 어려운 구조다.
2001년부터 학교에서 노동인권교육을 담당하고 경기도교육연구원의 연구에도 참여해온 이천제일고등학교 장윤호 교사는 “노동인권교육을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근로기준법 정도밖에 못 한다”며 “노동인권교육을 많이 한다고 하지만 현재 이뤄지고 있는 것 대부분이 그렇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전국적으로 개학이 시작된 지난 3월 1일 오전 서울 강동구 강빛초중이음학교에서 학생들이 선생님 말을 경청하고 있다. 자료사진.ⓒ사진공동취재단
노동법 상식 넘어 노동에 대한 전반적인 태도 변화 견인
전문가들은 ‘학교 노동교육 의무화’ 등 제도적 보완을 통해 노동인권의 본질부터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근로기준법’을 잘 알아도 오토바이를 탄 배달 노동자에게 “공부를 못 하니 저런 일을 한다”는 노동 비하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는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호 씨의 죽음도, 용균 씨의 죽음도, 모두 그들의 노동인권을 존중하지 않아 생긴 문제들이었다.
박귀천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노동법은 본래 ‘일하는 사람의 인권’을 보장하고자 하는 데에 그 근본적인 바탕을 두고 형성, 발전되어 왔다”며 “결국 노동법이 지향하는 중요한 가치는 노동에 대한 존중, 노동인권의 존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노동인권을 배우는 것은 단지 법 조항 내용과 같은 지식만 배우는 것만이 아니라 노동인권이 형성, 발전되어온 역사 속에 깃들여 있는 인간에 대한 존중, 아름다운 연대의 의미 등 우리 삶에서 중요한 가치들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전명훈 서울시교육청 노동인권전문관은 “‘대부분 노동자가 되기 때문에 노동인권교육 해야 한다’고 많이 이야기하지만 저는 ‘절반’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며 “학생들이 노동자가 아닌 사용자가 되더라도 노동의 가치와 노동자를 존중하는 태도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나의 노동인권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노동인권도 존중할 수 있는 시민으로서, 일하는 시민으로서 갖춰야 할 노동에 대한 존중, 노동에 대한 태도를 갖추는 게 우선”이라며 “법이야 법전을 찾아보면 되지만, 이런 가치와 태도를 만드는 건 한순간에 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장 교사도 “삶이 대부분 노동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현실적으로 제도적, 법적으로 3분의 2는 임금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고, 그 외에 임금노동자를 채용해서 살거나, 임금노동자와 비슷한 수준의 영세사업자가 된다”며 “그런데 이런 고용관계에 대해 알려주는 사람이 없다”고 꼬집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일터에서 보내는 만큼 일상의 민주주의는 일터의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며 “노동교육이 필요한 이유”라고 강조했다.
이에 서울시교육청은 올해 2월에 낸 ‘학교 노동인권교육 활성화 기본계획’에서 “기존 아르바이트, 현장실습 등 일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노동기본권 중심의 교육에서 노동의 가치와 노동존중 사회에 대한 교육으로 내용요소 확대를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경기도교육연구원도 지난해 5월 발간한 ‘민주시민교육으로서 노동인권교육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란 자료를 통해 “근로기준법의 중심으로 하는 교육은 노동인권교육은 노동자의 법률적 권리에 대한 지식 전달 교육으로 제한되어 노동인권교육을 확장하는 데 한계를 드러낸다”며 “법률 중심의 노동인권교육 내용은 교육대상에 따라 다양한 주제로 확대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방향을 제시했다.
더불어민주당이 8일 국민권익위원회의 소속 의원 전수조사 결과 부동산 거래·보유과정서 법 위반 의혹이 제기된 12명의 명단을 공개하고 지역구 10명은 탈당을 권고했고 비례대표 2명은 출당시켰다. LH직원들의 신도시 땅 투기 의혹 이후 민주당이 권익위에 전수조사를 의뢰하고 69일만에 나온 결과였다. 이에 12명 전원을 당에서 내보내는 지도부 판단이 초강수라는 평가와 비례대표 2명에 대해는 탈당(의원직 박탈)이 아닌 출당(의원직 유지)조치를 해 ‘봐주기’라는 평가가 공존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오늘 공개행보에 나선다는 소식이다. 보수신문들을 중심으로 연일 윤 전 총장의 동정을 보도하는 가운데 9일 독립운동가인 우당 이회영 선생 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한다고 동아일보가 전했다. 조선일보는 이날 칼럼에서 윤 전 총장의 정치 행보가 문재인 정부 때문이라고 했다.
국민의힘 전당대회가 ‘이준석 돌풍’으로 흥행하는 가운데 “막장으로 치닫는다”는 평가가 나왔다. 당대표 여론조사 1·2위인 이준석·나경원 후보 사이에 최근 언행이 지나치다는 이유에서다.
▲ 9일자 아침신문 1면 모음
민주당 탈당 권유에 반발하는 의원도
민주당이 탈당을 권유한 대상은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을 받는 김주영, 김회재, 문진석, 윤미향 의원, 업무상 비밀 이용 의혹을 받는 김한정, 서영석, 임종성 의원, 농지법 위반 의혹을 받는 양이원영, 오영훈, 윤재갑, 김수흥, 우상호 의원이다. 비례대표인 윤미향, 양이원영 의원은 출당하기로 했다. 권익위가 정부합동특별수사본부에 사건을 이첩했는데 민주당은 이들에게 무소속으로 수사를 받고 무혐의로 입증되면 복당시키겠다는 입장이다.
일부 의원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우상호 의원은 경기도 포천 농지에 어머니 묘지를 조성해 농지법 위반 의혹을 받는데 “정치인에게 출당은 엄청난 형벌이자 큰 징계”라며 “본인의 소명 없이 이렇게 결정할 수 없다”고 탈당을 거부했다. 김한정 의원은 남양주 왕숙 신도시 인근 땅 매입 과정에서 업무상 비밀 이용 의혹을 받는데 “권익위 의혹 제기만으로 탈당을 권유하는 당의 결정은 잘못”이라고 했다. 오영훈, 김회재 의원도 반발했다.
이에 반해 김주영·문진석(부동산 명의신탁), 윤재갑·김수흥(농지법 위반), 임종성(업무상 비밀 이용) 의원 등은 지도부 뜻에 따르기로 했다.
▲ 9일 한겨레 만평
대체로 9일자 신문들은 송영길 민주당 대표의 이번 조치에 대해 ‘초강수’라는 평가다. 한겨레는 1면 기사 제목을 “탈당 권유 초강수”라고 뽑고 “민주당 지도부는 여권의 ‘내로남불’에 대한 국민적 비판 여론을 고려해 일괄 탈당 권유로 결론을 내렸다”고 전했다.
한국일보는 정치면 톱기사 제목을 ‘부동산發 내로남불 공포…與 “12명 다 나가라” 초유의 읍참마속’으로 뽑고 “단일 사안으로 정당이 의원 10여명을 무더기로 내보내는 것은 헌정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전했다. 동아일보도 정치면 톱기사 제목에서 “與 ‘부동산 내로남불’에 초강수”라며 “부동산 문제를 끊어내지 못할 경우 내년 대선 승리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봤다.
여당이 초강수를 뒀으니 국민의힘도 조사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한겨레는 사설 “‘부동산 의혹’ 12명 전원에 탈당 권유한 민주당”에서 “민주당이 전수조사를 자청한 데 이어, 공식 수사 결과가 나오지 않은 ‘의혹’ 단계에서 ‘전원 탈당’ 결정을 내린 것은 예상을 뛰어 넘는 고강도 조처”라며 “국민의힘 스스로 ‘소속 의원 102명 전원의 전수조사에 대한 동의를 받았다’고 밝힌 만큼 민주당의 동참 요구에 적극 응하는 게 정치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치유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 9일 중앙일보 만평
국민의힘은 독립기관인 감사원의 조사를 받겠다며 권익위 조사를 거부하고 있는데 감사원법상 국회 소속 공무원은 감사대상이 아니다. 한겨레는 사설에서 “이런 사실을 모르고 감사원 조사를 주장했다면 무능이자 태만이요, 알고도 그랬다면 전수조사를 피해보려는 꼼수이거나 시간 끌기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경향신문도 사설에서 “이제 시선은 국민의힘으로 향하고 있다”며 “국회의원은 감사원의 직무감찰 대상이 아니라는 걸 알고, 꼼수로 수사를 회피하려는 것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은 민주당보다 부자인 의원이 더 많다”며 “국민의힘은 당당하게 전수조사에 응해야 한다”고 했다.
반면 의원들 혐의나 반발에 초점을 둔 신문사도 있다. 조선일보는 1면 톱기사 제목을 “與 임종성 가족이 산 땅, 10배 뛰었다”로 올리고 임종성 의원이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이던 2018년 누나와 사촌 등이 경기도 광주 고산2택지지구 인근 땅을 5억여원에 공동 매입했고 3년 만에 10배 이상 가격이 급등했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1면 기사 제목을 ‘與 “투기의혹 12명 탈당” 우상호 등 4명 강력반발’이라고 뽑아 의원들이 반발하고 있는 점을 부각했다. 중앙일보는 1면 톱기사 제목을 “부동산 코너 몰린 여당, 의원 12명 내쳤다”고 정해 여당이 의원을 ‘내쳤다’고 했다.
사설에서도 강조하는 지점이 달랐다.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엄정한 수사로 실체를 밝히고 마땅히 그에 따른 정치적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고 했고, 중앙일보는 사설 “민주당의 12명 탈당 권유, 철저한 조사로 이어져야”에서 “이번 충격적 조치가 국회의원 부동산 투기 의혹에 관한 한 확실한 변곡점이 되길 기대한다”며 “무엇보다 해당 의원들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고 했다. 출당조치한 두 비례대표 의원에 대해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 배려”라고 했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민주당이 봐주려했다고 지적했다. 사설 “윤미향도 포함된 與 투기 혐의 의원 12명, 그래도 봐주려 하다니”에서 “민주당은 의원 12명의 이름과 법령 위반 유형만 밝혔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며 “투기 세력을 발본색원하겠다고 하더니 누가 어떤 방식으로 투기를 햇는지 왜 공개하지 않는 것인가”라고 지적했다.
조선일보는 “더 기가 막히는 것은 비례대표인 윤미향, 양이원영 의원의 경우”라며 “두 사람은 일본군 위안부 운동과 탈원전 환경운동을 했다고 여당 국회의원이 됐는데 투기 의원 명단에 포함됐다. 이럴 수도 있나”라고 지적한 뒤 “윤 의원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이용해 돈을 챙겼다는 의혹이 숱하게 쏟아졌지만 아직도 여당 국회의원이다. 민주당은 이들에게 출당 조치를 했지만 의원직을 유지시켜 주려는 ‘봐주기 징계’”라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수사에도 비관적으로 봤다. 특수본이 지난 3개월간 수사인력 2400명을 투입했지만 말단 공무원과 일반 투기꾼 34명을 구속하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이 신문은 “특수본에는 부동산 투기 단속 기관인 검찰과 감사원이 애초부터 배재돼 있다”며 “이런 특수본이라면 여당 의원 12명에 대한 수사도 제대로 할 거라고 기대하기 힘들다. 국민 우롱”이라고 주장했다.
▲ 9일 동아일보 정치면 보도
이어지는 윤석열 동정 보도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공개 행보에 나선다는 동아일보 보도를 보면 “유년 시절부터 친분을 쌓아왔던 이철우 연세대 교수와의 인연 때문”인데 “이 교수는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의 아들”이다. 아직 대선출마 선언을 하지 않은 채 메시지를 내거나 이러한 행보를 언론에 흘리면 언론에서 이에 의미를 부여하고 긍정적인 이미지로 해석해주는 언론플레이가 이어지고 있다.
조선일보는 “文 정권에선 검사가 정치하고 판사가 외교한다”란 ‘선우정 칼럼’에서 “검찰 수사 한 달 뒤 상갓집에서 일어난 일이다. 윤 총장이 문상을 마치고 나오자 접객실에 있던 조문객들이 일어나 손뼉을 쳤다. 청소원까지 함께 쳤다. 초상집에서 박수라니. 무의식적으로 마음을 따르다 보니 다들 실례한 것이다.”라며 윤 전 총장이 정권 인사 수사를 잘했다고 평가했다.
조선일보는 이어 “작년 말에도 그랬다. 법원이 윤 총장 직무 복귀 판결을 내렸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내 주위에서 많은 박수소리가 들렸다. 정치는 감동이다. 나는 그때 윤석열이 정치인이 됐다고 생각했다. 대통령과 조국씨는 4년 동안 국민에게 그런 감동을 준 적이 있는가. 감동의 정치를 왜 윤석열에게 빼앗겼는지 생각했으면 한다”며 윤 전 총장을 긍정 평가했다.
조선일보는 지난 8일에도 윤 전 총장 소식을 다뤘다.
이날 정치면 “尹, 노무현·박근혜 구속수사 반대 부친과 朴 유세현장 보러 가기도”에서 윤 전 총장을 다룬 책 ‘별의 순간은 오는가-윤석열의 어제, 오늘 내일’를 발췌했다. 윤 전 총장이 2017년 국정농단 특검 당시 박씨를 불구속 수사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부친 윤기중 연대 명예교수와 박씨 유세현장을 찾았고 평소 주변에 “난 원래 보수주의자”라고 말해왔다고 전했다.
다분히 박근혜씨 지지자들을 의식한 기사 제목과 내용이다. 윤 전 총장의 약점 중 하나가 국민의힘의 전직 두 대통령을 수사한 것인데 이에 대한 전통 야당 지지층에 대한 반감을 상쇄하는 내용의 기사다.
국민 “막장으로 치닫는 국힘 전대, 이준석 책임 작지 않아”
국민의힘 당대표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를 사흘 앞둔 지난 8일 후보들간 막말 공방이 이어졌다.
동아일보는 정치면에서 당 주관 후보자 토론회에서 나경원, 이준석 두 후보 공방을 자세히 전했다. 나 후보가 이 후보에게 “윤 전 총장이 장모 관련 사건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는 말을 했는데 이는 민주당 네거티브에 호응한 것”이라며 “본심은 윤 전 총장이 오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이 후보는 “(나 후보가 제기한)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과 결탁 음모론은 유튜버들이 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 후보는 이 후보를 향해 ‘이준석 리스크’라고 주장했고 이 후보는 “원내대표 할 때 우릴 지지하지 않는 국민에 대놓고 ‘문빠’, ‘달창(문재인 대통령 지지자 비하 표현)’이라고 한 분이 (나의 말을) 막말이라고 하면 어떻게 하냐”고 말했다.
주호영 후보도 나 후보를 향해 “원내대표 할 때 내세운 업적이 없다”며 “강경보수로 도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많다”고 했다. 나 후보는 “문재인 정부, 민주당에서 무한한 핍박을 받았는데, 욕설을 받을 때 같이 보호해주셨나”라고 물으며 울먹였다. 주 후보는 나 후보를 향해 “물지 않는 짖는 개”라고도 공격했다. 한겨레도 “격렬 난타전”이라며 이날 토론 발언을 비중있게 전했다.
▲ 9일 한겨레 정치면 기사
이를 두고 국민일보는 사설 “막장으로 치닫는 ‘국힘’ 전당대회 이러고도 지지 바라나”에서 “내용면에서 낙제점에 가깝다”며 “지금까지의 과정은 영락없는 진흙탕 속 개싸움이다. 미래를 향한 비전 제시는 찾을 수 없고 제 살 깎아먹기 식 흠집내기의 연속”이라고 혹평했다.
이 신문은 “특히 이준석 나경원 후보 사이에 오간 최근의 언행은 도저히 같은 당 당원의 공방으로 보기 어렵다”며 “당외 인사에 불과한 윤 전 총장의 거취를 둘러싼 공방이나 당원 명부 유출을 둘러싼 두 사람의 설전은 치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지켜보는 국민에게 ‘국민의힘 수준이 고작 그 정도냐’는 인식만 각인시킬 뿐”이라고 지적했다.
국민일보는 이 후보 탓도 있다고 봤다. 이 신문은 “새정치를 말하면서 하는 행동은 그가 혁신의 대상으로 삼은 기성정치와 별반 다르지 않다”며 “나이가 젊다는 점을 제외하면 다른 후보와의 차별성을 찾기도 어렵다”고 평가했다. 이어 “경선이 끝까지 인신공격성 막장극으로 치달을 경우 누가 대표가 되든 엄청난 후폭풍을 각오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리고베르타 멘추 툼이 2015년 4월21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인권 포럼에서 연설하고 있다. 에콰도르 외무부
과테말라 마야 원주민으로 태어나
여덟 살부터 커피 농장서 일하며
언어 장벽으로 인한 서러움 겪어
부잣집 하녀로 갖은 모욕 견디고
악착같이 스페인어를 익혀
“나에게는 말하고 싶은 일이 산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스페인어 읽고 쓰기를 익혀서 언젠가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생각하게 되었지요.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면 반드시 상황은 달라질 것입니다. 스페인어를 배우고 싶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려 보았습니다. 누구에게 배울 작정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어찌하면 좋을지 나는 모르니까, 네가 혼자서 할 수밖에 없을 거다.’ ”
1959년 1월, 과테말라 북서부 산악지대 엘 키체에서 마야 원주민으로 태어난 리고베르타 멘추 툼은 여덟 살 되던 해부터 커피 농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녀의 고향은 아름답고 고요하고 웅장했다. 마야 원주민들은 자연을 아끼고 신을 믿었지만, 누구 할 것 없이 찢어지게 가난했다. 리고베르타 멘추도 오빠들처럼 돈을 벌어야만 했다. 커피를 손으로 따는 일은 힘들었다. “커피나무 그늘에서 잠이 들어버린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커피 농장에서 일하면서 “부모님께 힘이 될 수 있는 한 사람 몫을 당당히 해내는 여자가 되었다는 생각”에 마냥 뿌듯했다. 리고베르타 멘추는 “한눈팔지 않고” 농장에서 죽기 살기로 일을 했지만, 하루 세끼는 엄두도 내기 힘들었다.
리고베르타 멘추가 “농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보름이” 지났을 때, 이제 겨우 두 살이 된 남동생 니코라스가 영양실조로 죽었다. 장례 치를 돈도 없었다.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마야 원주민들끼리는 “말이 달라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그들 각자는 각기 다른 부족으로, 별도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같은 마야 원주민이기는 하지만, 언어 장벽에 막혀서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리고베르타 멘추는 어린 동생을 잃고 난 후부터, 스페인어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다들 스페인어를 못해서, 의사소통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어찌하면 좋을지 난감했습니다. 도움이 필요했습니다만, 도대체 누구를 불러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농장을 관리하는 감독은 리고베르타 멘추의 어머니에게 죽은 아들을 농장에 매장하고 싶다면, 한 달치 임금을 비용으로 내야 한다고 통보했다. 가족들은 하루 “일하러 가지 않고 운구를” 했고, 그날 저녁에 감독은 “오늘 하루 게으름을” 피웠다는 이유로 해고를 통보했다. 리고베르타 멘추는 여덟 살이었지만, “인생에 무어랄까 분노랄까 두려움 같은 것을 가슴에 품게 되었다.” 특히 “스페인어를 할 줄 몰라서” 겪은 서러움과 모욕을 두 번 다시 겪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여덟 살부터 열두 살 때까지 4년 동안 커피, 목화, 사탕수수를 따며 돈을 벌었지만, 집안 사정은 늘 어려웠다. 가난도 지긋지긋했지만, 고향에서는 도저히 스페인어를 배울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어머니 아버지에게 폭탄선언을 한다. 열세 살 되던 해에 리고베르타 멘추는 혼자서 과테말라 수도인 과테말라시티로 가겠다고 가족들에게 통보했다. 위험천만한 결정이었지만, 그녀는 완강했다. 리고베르타 멘추는 과테말라시티에서 돈도 벌고 스페인어도 배우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지만, 현실은 차가웠다. 도시의 부호 가문에 하녀로 들어가서 돈을 모으겠다는 그녀의 꿈은 과테말라시티에 도착하자마자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주인들이 먹고 남은 찌꺼기”를 하녀들끼리 나누어 먹었다. “나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농민운동을 시작
원주민들 설득·규합하기 위해
토착언어들을 새로 배우기도
군부의 탄압에 가족들 잃으며
1981년 멕시코로 망명 결정
어느 날 농장에서 일하던 차림 그대로 부잣집 청소를 하는 리고베르타 멘추를 ‘사모님’이 불렀다. “너에게 월급 두 달 치를 미리 주기로 했다. 그것으로 위피르(과테말라 전통 판초의 일종)와 코르테(과테말라 전통 상의에 두르는 천), 구두 한 켤레를 사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창피당하는 것은 바로 나니까 말이야. 다른 분들이 그 모습을 보았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쳐. 이 집에 오시는 분들은 모두 명사들이니 너도 몸차림을 정돈해 주었으면 해. 물건은 내가 사다 줄 테니까 너는 집에 있어도 돼. 함께 가면 내가 창피를 당할 뿐이니까. 알았지? 두 달 치 선불이야.” 리고베르타 멘추는 피눈물을 삼켰다. 악착같이 스페인어를 익혔지만, 틀릴 때가 많았다. 크리스마스 파티에 온 ‘명사들’ 앞에서 호칭을 제대로 갖추지 못해 “실컷 욕설을” 듣기도 했다. 리고베르타 멘추는 그 집에서 여덟 달을 일하고 탈출하듯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버지가 안 계셨다. 리고베르타 멘추의 아버지 비센테 멘추는 원주민들의 토지를 강탈하려는 지주들에게 저항하는 농민운동 조직을 이끌었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18년형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1972년, 1년2개월 만에 “겨우 아버지를 구출”했지만, 과테말라를 장악한 군부는 1977년 비센테 멘추를 또다시 체포 구금했다.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전국 규모의 시위가 이어지자 군부는 약 2주 후에 비센테 멘추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리고베르타 멘추의 아버지는 잠시 지하로 잠적했다가 1978년에 집으로 돌아와 더욱 적극적으로 농민운동에 뛰어들었다.
다음해 역시 농민운동을 시작한 그녀 앞을 “스물두 개나 되는 과테말라의 언어”의 벽이 가로막았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원주민들을 설득하고 규합하기 위해서 “마므어, 카쿠치케르어, 쯔토오히르어를 새롭게 익히기 시작”했다. 리고베르타 멘추는 당시 스페인어도 초보 단계였기 때문에 엉망진창 같다고 느끼면서도, “우리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까지 운동의 경위와 왜 우리가 이렇게 처참한 꼴을 당하고 있는가 하는 원인을 이야기”하기 위해 문장을 통째로 외우는 방식으로 “무모하게 덤볐다”. “매사에 주저주저하는 소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리고베르타 멘추는 스페인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있을지 자신에게 회의가 들 때마다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렸다. “배운다는 것은 힘든 일이야. 하지만 모든 것은 그렇게 고생하며 익혀가는 것이란다.” 하지만 리고베르타 멘추에게는 그 시간마저도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1979년 농민 통일위원회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가 군부의 회유에 넘어가 15달러를 받고 리고베르타 멘추의 남동생을 “팔아넘겼다”. 열여섯 살이었던 동생은 16일 이상 처참한 고문을 당한 뒤 죽었다. 이듬해인 1980년 1월에는 아버지가 과테말라 스페인 대사관 점거 및 화재 사건으로 희생되었다. 어머니는 투사가 되었다. “사회변화는 여성을 빼놓고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승리할 수도 없다”고 외치면서 원주민들의 식량 조달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어머니는 무의미한 삶을 죽음보다 더욱 두려워했다.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꽉 잡아보지도 못하고 그냥 죽어간다면 얼마나 쓸쓸할까?” 리고베르타 멘추의 어머니는 농민 운동가들 그중에서도 산속에서 게릴라로 활동하는 운동가들을 ‘자기 자식처럼’ 챙겼다. 군부는 잔인했다. 1980년 4월 어머니는 잠시 시장에 나갔다가 붙잡혔고, 그 길로 돌아오지 못했다. 리고베르타 멘추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선 과테말라시티의 한 수녀원에 몸을 숨겼다. 그곳에서 잠시나마 스페인어 공부에 다시 몰입할 수 있었다.
1981년 리고베르타 멘추는 멕시코로 망명했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탈출이었다. 멕시코의 사회 변혁에 앞장섰던 산크리스토발 데 라스카사스 교구의 주교인 사무엘 루이스 가르시아는 그녀에게 머물 곳을 제공했다. 살해 위협은 계속되었지만, 침묵의 대가로 삶을 연장하고 싶지는 않았다. 리고베르타 멘추는 망명지에서도 과테말라의 현실을 고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그녀의 연설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리고베르타 멘추는 1982년 1월 파리에서 열린 국제회의에까지 참석한다. 그곳에서 베네수엘라 출신 인류학자 엘리자베스 부르고스를 만난 리고베르타 멘추는 일주일 정도 파리에 머물면서 “약 25시간 분량”의 인터뷰를 진행한다. 부르고스는 리고베르타 멘추의 스페인어가 완벽하지 않지만, ‘증언’으로는 손색이 없다고 판단했다. “언어야말로 최고의 무기였습니다.” 그녀는 리고베르타 멘추의 ‘용기와 존엄성’을 바로 알아차렸다. “억압자의 언어를 대항 수단으로 배운” 리고베르타 멘추의 증언을 책으로 펴내기로 한다.
파리 국제회의 참석하는 등
과테말라 현실 고발 계속하다
부르고스와 함께 ‘증언록’ 출간
귀국해 원주민 운동 계속하며
1992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 돼
1983년 <나, 리고베르타 멘추(I, Rigoberta Menchu: An Indian Woman in Guatemala)>가 출간되었다. “내 이름은 리고베르타 멘추, 스물세 살입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을 증언하라고 하시는데요. 내 증언은 책에서 얻은 지식도, 내가 혼자서 익힌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을 동포와 함께 익혀왔다는 것을, 우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역정을 돌이켜 생각한다는 것은 너무나 쓰라린 일입니다.” 그녀의 자전적 이야기는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리고베르타 멘추가 국제적인 인물로 명성을 얻을수록 과테말라 군부는 긴장했다. 유럽과 미국에서 잇달아 그녀를 초청했지만, 리고베르타 멘추는 과테말라로 돌아가고 싶었다.
1988년 4월 과테말라시티 공항에서 경찰 400여명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곧장 체포되었지만, 초조해하지 않았다. 석방 후, 그녀는 원주민 운동가로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리고베르타 멘추는 1991년 유엔의 ‘원주민 권리선언’ 준비 작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92년 리고베르타 멘추는 원주민 학살의 참상을 알리며 과테말라의 인권 향상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이듬해 5월에 그녀는 노벨 평화상 상금 120만달러로 아버지의 이름을 딴 ‘비센테 멘추 툼 재단’을 설립했다. 빈곤층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제약회사를 운영하는 한편 2007년에는 원주민 정당을 조직해서 과테말라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그녀의 증언록 일부가 과장되었다는 비판이 쏟아지기도 했지만, 그 사실은 역설적으로 참혹한 기억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일의 어려움을 알려주었다. 리고베르타 멘추는 자신의 구술사가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 증언록을 출간할 때 이미 명시한 바 있다. “나는 과테말라 마야 원주민의 비밀을 모두 말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숨길 작정입니다. 어떤 인류학자, 지식인이 산더미같이 책을 쌓아놓더라도 우리 비밀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리고베르타 멘추 툼의 말에는 분명 뼈가 있다. 귀를 기울여 그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싶다.
*<리고베르타 멘츄>(리고베르타 멘츄 구술, 엘리자베스 부르고스 정리, 윤연모 옮김, 장백, 1993), <라틴 아메리카 증언서사 프로젝트 -나, 리고베르타 멘추: 과테말라 인디언 여성>(이현주, 21세기영어영문학회 학술대회, 2017년 봄 학술발표회 자료집)을 읽고 큰 감동과 도움을 받았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장영은
성균관대학교에서 논문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비교문화연계전공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를 함께 쓰고,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썼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해온 여성들의 생애를 복원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차근차근 모아 널리 전하고자 한다.
▲ 동학·천도교 관련 25개 단체가 6일 '일본의 침략야욕을 규탄하는 현충일 기념 동학·천도교인 성명서'를 발표했다. [사진제공-천도교청년회]
천도교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 대신사는 천도교경전 용담유사 안심가에서 “개 같은 왜적 놈을 한울님께 조화 받아 일야(一夜)에 멸(滅)하고서 전지무궁(傳之無窮)하여 놓고 대보단(大報壇)에 맹세하고 한(汗)의 원수 갚아보세”라며 일본을 신뢰할 수 없는 민족이라고 비판했다고 한다.
25개 동학·천도교 관련 단체가 6일 일본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천도교청년회는 보도 자료를 통해 “최근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원전 오염폐수 방류를 결정하고 도쿄올림픽 홈페이지 지도에 독도를 일본영토로 표기하는 등 이웃 국가에 대한 존중을 버리고 오만하고 무례한 침략야욕을 드러내고 있다”라면서 “127년 전 동학농민혁명부터 일제의 침략 야욕에 맞서 싸워온 우리 동학·천도교인들은 일본의 침략야욕에 맞서 6일 12시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현충일 기념 일본규탄 성명을 발표했다”라고 밝혔다.
또한 천도교청년회는 “동학·천도교 창도부터 일본을 경계해 온 역사를 바탕으로 천도교청우당과 조선천도교중앙지도위원회 등 북측의 천도교 단체와도 연대하여 우리 영토 수호에 앞장서고자 한다”라고 밝혔다.
동학·천도교 단체들은 성명을 통해 “우리 동학·천도교인들은 127년 전 일본의 침탈에 맞섰던 동학혁명과 일제 식민통치를 거부하고 자주독립을 외친 3·1독립선언을 주도하였던 역사 위에 전 세계 양심 있는 시민들과 연대하여 일본의 침략야욕에 철저히 맞서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동학·천도교 단체들은 성명에서 ‘▲일본 정부는 도쿄올림픽 홈페이지의 독도 표기 삭제와 욱일기 사용 전면 중단할 것 ▲IOC는 일본의 만행에 즉각 개입해 해결할 것 ▲우리 정부는 독도 수호 훈련 즉각 실시와 도쿄올림픽 불참을 비롯한 외교적 수단을 총동원해 우리 땅 우리 주권을 수호할 것’ 등을 요구했다.
아래는 성명서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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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침략야욕을 규탄하는 현충일 기념 동학·천도교인 성명서
“일본은 도쿄올림픽 홈페이지에서 대한민국의 영토인 독도를 삭제하고,
전범기 욱일기 사용을 중단하며, 후쿠시마 원전 오염폐수 방류계획을 철회하라”
오늘은 6월 6일 현충일이다. 현충일은 대한민국을 지켜낸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고귀한 충절을 기리는 날이다. 127년 전 동학농민혁명부터 일제의 침략 야욕에 맞서 싸워온 우리 동학·천도교인들은 현충일을 맞아 다시금 우리 영토에 대한 침략야욕을 드러낸 일본 정부를 규탄하며 현재 진행되고 있는 모든 만행을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
최근 일본 정부는 세계적 재앙이 될 수 있는 후쿠시마 원전 오염폐수 해양방류를 결정하여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으며, 도쿄올릭픽 홈페이지 지도에 독도를 포함한 이웃 국가 영토들을 일본영토로 표기를 하는 등 이웃 국가에 대한 존중을 버리고 오만하고 무례한 침략야욕을 드러내었다.
특히 올림픽은 정치적 입장을 배제하고 순수한 스포츠를 통해 온 인류가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여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전 세계인의 축제임에도 일본은 올림픽 지도에 자국의 침략야욕을 드러내고, 나치 독일의 하켄크로이츠와 같은 일제 침략 범죄 만행의 상징인 욱일기를 올림픽 공식응원도구로 활용하고 있으며, 이같은 일본의 만행에 올림픽 주최기관인 IOC는 묵인하며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지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남북화합의 상징인 한반도기에 대하여 일본은 우리 영토인 독도를 삭제하라는 억지를 부렸으며, 세계 평화의 상징인 올림픽의 성공이라는 대의를 위해 우리는 IOC의 권고를 수용하여 우리가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대한민국 고유영토임에도 불구하고 독도를 한반도기에서 지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재 일본 정부는 우리 땅 독도를 일본영토로 표기한 지도에서 삭제하라는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묵살하고 있으며, IOC는 평창 동계올림픽과 달리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하지 않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번 사태를 맞이하며 우리 동학·천도교인들은 127년 전 일본의 침탈에 맞섰던 동학혁명과 일제 식민통치를 거부하고 자주독립을 외친 3·1독립선언을 주도하였던 역사 위에 전 세계 양심 있는 시민들과 연대하여 일본의 침략야욕에 철저히 맞서 나갈 것을 다짐하며 다음과 같이 촉구한다.
1. 일본 정부는 도쿄올림픽 홈페이지 지도에서 독도 표기를 삭제하고, 욱일기 사용을 전면 중단하여 더 이상 우리 땅을 침략하려는 정치적 야욕을 버리고, 전 세계 재앙이 될 후쿠시마 원전 오염폐수 해양방류 계획을 즉각 철회하라.
2. IOC는 도쿄올림픽의 주최자로서 스포츠를 통한 세계평화 기여라는 올림픽의 정신이 구현될 수 있도록 올림픽 정신에 위배되는 일본지도에서 독도 표기를 삭제하고 욱일기 사용을 금지하는 등 일본의 만행에 즉각 개입하여 해결하라.
3. 우리정부는 일본의 침략야욕에 맞서 독도 수호 훈련을 즉각 실시하여 독도가 명실상부한 우리 영토임을 확실히 하며, 도쿄올림픽 불참을 비롯한 외교적 수단을 총동원하여 우리땅 우리주권을 수호하라.
검찰총장이 퇴임 뒤에 맡는 공직은, 지금껏 많은 경우에 법무부장관이었다. 43명 중에서 권승렬(제1대)·민복기(제5대)·김기춘(제22대)·김태정(제28대)을 포함한 14명이 법무부장관이 됐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임명된 총장들에게서는 그런 사례가 나오지 않았다. 1999년 5월 24일 총장을 퇴임한 김태정 이후에 임명된 검찰총장들은 더는 장관직으로 가지 않았다.
총장이 법무부장관이 아닌 제3의 임명직 공직으로 옮기는 사례가 과거에는 종종 있었다. 1955년 9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총장을 지낸 민복기는 대법원판사·법무부장관을 거쳐 대법원장이 됐다. 총장 퇴임 뒤에 감사원 사무총장이 된 장영순을 비롯해 신직수(중앙정보부장), 김치열(내무부장관), 서동권(안기부장), 이종남(감사원장), 김기춘(대통령비서실장)도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김태정의 후임인 제29대 박순용 총장부터는 법무부장관은 물론이고 여타 공직으로도 가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 마지막 해인 2002년에 10개월간 총장직을 수행한 이명재가 2015년 1월 23일 72세 나이로 박근혜 대통령의 민정특별보좌관이 되기는 했지만, 공직을 맡았다고 보기가 다소 애매한 사례다.
한편, 퇴임 뒤 국회로 진출한 총장은 셋이었다. 현역 대령 신분으로 5·16 쿠데타 12일 뒤인 1961년 5월 28일 38세 나이로 검찰총장이 된 장영순은 퇴임 뒤에 법무부장관과 감사원 사무총장을 거쳐 1967년 제7대 총선부터 1978년 제10대까지 네 번 당선됐다. 또 다른 사례로는 노태우 정부 때인 1988년 12월 최초의 임기제 총장이 된 김기춘이 15~17대 의원이 된 것, 김영삼 정부 때인 1993년 9월 취임한 김도언이 15대 의원이 된 것을 들 수 있다.
국회로 진출한 검찰총장들: 장영순, 김기춘, 김도언
임기제를 법률에 못 박아둔 취지 중 하나는 총장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서였다. 그런 임기제를 최초로 누린 김기춘은 그 뒤 누구보다도 왕성하게 정치 활동을 벌였다. 법무부장관을 거쳐 세 차례나 의원을 역임했을 뿐 아니라 박근혜 정부 때는 대통령비서실장이 됐다. 비서실장도 물론 의미 있는 자리이지만, 전직 검찰총장과 어울리는 자리라고는 보기 힘들 것이다.
그는 박순용 총장 이후의 검찰총장들이 퇴임 뒤 공직을 받지 않은 속에서도 박근혜 정부의 비서실장이 됐다. 후배 총장들이 만드는 검찰 문화를 존중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도언 전 총장은 김기춘만큼의 부작용을 낳지는 않았지만, 너무 노골적이고 성급하게 속마음을 드러냈다가 지탄을 받고는 했다. 그런 그가 2년 임기를 마친 날은 김영삼 정권 3년 차인 1995년 9월 15일이다. 그로부터 4일 뒤, 그는 집권여당인 민주자유당(민자당)의 조직책으로 변신해 '정치인 김도언'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해 9월 20일자 <조선일보> '민자당, 15곳 조직책 내정'은 "민자당은 19일 신·증설 사고 지구당 가운데 부산 동래갑 등 15개 지구당 조직책을 내정"했다면서 김도언이 부산 금정을구 지구당 위원장에 내정된 사실을 보도했다. 대검찰청 총장실을 나와 불과 4일 만에 사고 지구당 사무소로 직장을 옮겼던 것이다.
김도언에 대한 비판은 검찰 외부는 물론이고 내부에서도 상당했다. '물러난 지 며칠이나 됐다고'라는 부제가 붙은 1995년 9월 20일자 <한겨레> 1면 톱기사 '김도언 전 검찰총장 민자 조직책 내정'은 퇴임한 지 4일 밖에 안 되는 검찰총장에 대한 일선 검사들의 뒷이야기를 이렇게 전했다.
일선 검사들은 준사법기관으로서 어느 기관보다도 정치적 독립과 중립을 지켜야 할 검찰 조직의 총수가 퇴임하자마자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위해 집권 여당의 조직책을 맡는 것은 검찰 조직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리는 일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대검의 한 관계자는 "진정으로 검찰의 정치적 중립이 지켜지려면 검찰총장이 퇴임 뒤 정치는 물론 일체의 공직을 맡지 않는 풍토가 정착돼야 한다는 데 많은 검사들이 동의해 왔다"면서 "검찰총장이 집권 여당의 지구당을 맡을 생각을 갖고 검찰을 지휘해왔다면 그런 검찰을 국민들이 신뢰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물론 검사도 얼마든 국회의원으로 전업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있다면 총장이 되기 전에 떠나는 게 순리에 맞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마음이 있는 검사들은 부장검사 때 혹은 그 전에 검찰을 떠나고 있다.
김도언 총장이 여론의 비판을 받은 이후인 제27대 김기수 총장 이후로는 선출직 공직에 도전하는 총장들이 나오지 않고 있다. 김기춘 홀로 2000년 16대 총선, 2004년 17대 총선에 출마하는 와중에, 김기수 총장 이후의 총장들은 법무부장관을 포함한 임명직 공직은 물론이고 선출직 공직으로도 가지 않는 분위기를 형성해왔다. 이 정도면 검찰총장을 최후의 공직으로 삼는 관행이 형성되고 있다고 봐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 20년간의 이런 분위기가 윤석열 전 총장에 의해 훼손될 가능성이 농후해지고 있다. 아마도 그는 김도언 전 총장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김도언 총장은 퇴임 4일 뒤에 불미스러운 모습을 보인 데 비해, 윤석열은 퇴임 전부터 정치적 중립에 영향을 미칠 만한 행보를 보여왔기 때문이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 정치권과의 거리두기도 필요하다
사실 검찰총장만큼 '마스크 착용'과 '정치적 거리두기'가 필요한 공직도 드물 것이다. 총장은 정치문제에 입을 막아야 할 뿐 아니라 정치권과도 거리를 두는 게 필요하다. 퇴임 뒤에도 그래야 한다는 게 검사들의 생각이다. 지난 20년간 임명된 총장들이 공직을 기피한 것은, '총장실과 정치권은 멀면 멀수록 좋다'는 관념에 입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정치적 중립에 대한 열의가 높지 않아보이는 윤석열도 문제이지만, 그런 윤석열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검찰 내부에서 두드러지게 나오지 않는 것도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검찰이 건전한 조직이라면 '전직 총장의 정치 행보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나와야 마땅하다. 그런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것은 검찰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검사들이 윤석열을 제대로 비판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검찰 조직의 병폐가 이만저만이 아님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윤석열을 계기로 '검찰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풍조가 조성되지는 않을지 우려되는 이유다. 윤석열로 인해 정치적 중립을 잃을 수도 있다는 점은, 검찰이 직면한 심각한 위기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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