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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 잡는 쥐, 아프리카 호저…외톨이 수컷 주로 당해

조홍섭 2019. 05. 13
조회수 1264 추천수 0
 
30㎝ 가시 찔려 평생 고통, 식인 사자 되기도
 
h1.jpg» 아프리카포큐파인 대 사자. 얼핏 상대되지 않을 것 같은 대결에서 종종 사자는 목숨을 잃기도 한다. 에릭 킬비(왼쪽),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아프리카포큐파인은 몸무게가 열 배는 무거운 최상위 포식자 사자도 쓰러뜨리는 당찬 동물이다. 쥐목 호저과에 속하는 이 동물은 몸무게 13∼27㎏으로 제법 크지만, 초식성 쥐의 일종이다. 그러나 몸 옆구리와 뒤에 밤송이처럼 돋은 강모 깃은 치명적 무기이다.
 
아프리카포큐파인과 사자의 관계를 생태학적으로 분석한 연구결과가 나왔다. 연구자들은 1960년 이후의 연구 문헌을 비롯해 신문기사, 유튜브 등 인터넷 자료 등을 조사해, 이 동물로 인해 다치거나 죽은 사자의 사례 50건을 찾았다.
 
연구 책임자인 줄리언 커비스 피터한스 미국 루스벨트대 교수는 “기록을 검토한 결과 어떤 조건에서 사자가 포큐파인 사냥에 나서는지, 또 깃에 찔린 사자가 어떻게 되는지를 더 잘 알 수 있게 됐다”고 필드 박물관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공동 연구자인 개스톤 셀레시아 미국 시카고 로욜라대 명예교수는 “한 마디로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벌어지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다. 백수의 제왕이 맛좋고 통통한 포큐파인을 먹으려 하지만 결국 깃에 찔리고 만다”고 말했다.
 
h2.jpg» 포식자의 공격을 받으면 아프리카포큐파인은 몸 뒷부분의 깃을 곧추세워 위협한다. 토마스 핸드위케,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아프리카포큐파인은 포식자에 맞서 몸 뒷부분의 강모 깃을 곧추세워 위협한다. 길이가 35㎝에 이르는 뾰족한 깃은 사람의 손톱이나 머리카락 성분인 케라틴 성분인데, 몸에서 쉽게 빠지기 때문에 길고 뾰족한 깃에 찔린 포식자는 크게 다칠 수 있다.
 
50마리의 불운한 사자들에게서 공통점이 드러났다. 다른 먹이 찾기가 힘든 가뭄이 심할 때 젊은 수컷 사자가 대부분 피해를 봤다. 피터한스 교수는 “수컷이 더 자주 포큐파인에 당하는 경향이 나타났다”며 이를 ‘젊고 멍청한 수컷 신드롬’이라고 불렀다. 경험 없는 젊은 수컷이 위험한 공격에 쉽게 나서는 데다 무리 생활을 하지 않는 외톨이여서 깃에 찔렸을 때도 동료가 빼주지 않기 때문이다.
 
Stekelvarken_Aiguilles_Porc-épic.jpg» 포큐파인의 강모 깃. 손톱이나 머리카락과 같은 케라틴으로 돼 있으며 길이가 30㎝를 넘기도 한다. 스텔켄바르켄,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사자의 무모한 공격은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끼친다. 깃에 찔려 야생동물 사냥을 하지 못하게 된 사자가 가축과 사람을 공격하게 된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1965년 사람을 잡아먹었다 붙잡혀 박제된 사자 2마리를 단층촬영으로 조사했다. 한 마리에는 23㎝ 길이의 깃이 코를 관통해 꽂혀 있었고, 다른 한 마리의 부러진 송곳니의 신경에 3㎝ 길이의 부러진 깃이 박혀 있었다.
 
두 마리 모두 뼈에 감염된 흔적이 있었고, 냄새를 맡지 못하는 등의 이유로 사람 사냥에 나서게 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피터한스는 “포큐파인 부상은 사자가 사람을 공격하는 전조”라고 말했다.
 
h3.jpg» 포큐파인에 찔린 뒤 사람을 잡아먹다 1965년 사살된 사자. 코에 박힌(흰 부분) 포큐파인의 깃이 보인다. 존 페로트, 줄리언 커비스 피터한스 제공
 
생태계의 상황을 보여주는 지표가 될 수도 있다. 피터한스 교수는 “1960년대부터 사자의 행동을 연구해 오면서 우리는 사자가 영양, 얼룩말, 들소 등 발굽 달린 대형 먹이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안다”며 “사자가 이들보다 먹이로서 질이 떨어지는 포큐파인을 공격하는 것은 이미 지역적 먹이 공급에 차질이 있음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이 연구는 과학저널 ‘동아프리카 자연사’ 최근호에 실렸다.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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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평화 어지럽히는 트럼프-네타냐후 동맹의 희생자들

[김재명의 월드포커스] 이스라엘 건국 71년에 부쳐
2019.05.14 02:27:36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 친구가 사진 하나를 보내왔다. 동예루살렘 쪽으로 바람을 쐬러 갔더니 성벽 위에 전에 없던 볼거리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미국 국기(성조기)가 펄럭이는 문양을 배경으로 '트럼프 대통령님 감사합니다' (Thank You President Trump)라는 글자가 대형 빔프로젝터 스크린으로 성벽을 수놓고 있다는 얘기였다. 

5월14일 독립기념일을 앞두고 이스라엘에선 국토대행진, 야외 음악회, 전시회를 비롯한 여러 형태의 요란스런 이벤트가 벌어지는 와중에 미국 대통령에게 고맙다는 문자 메시지가 빔프로젝트로 선보인 것이다.  

사진을 보내온 유대인 친구는 팔레스타인과의 평화공존만이 이스라엘이 살길이라 믿는 소수의 유대인에 속한다. 그의 눈에는 이스라엘의 극우-보수-종교 세력을 지원하는 트럼프 미 대통령이 곱게 비칠 리가 없다. 하지만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끈끈한 유착을 가리켜 "적어도 당분간은 깨뜨리기 어려운 현실이기에 답답하기만 하다"고 친구는 이메일에 덧붙였다. 
 

▲ 이스라엘 건국기념일 기념으로 예루살렘 성벽에 빔프로젝터로 쏜 트럼프에 대한 감사 인사 ⓒ김재명


극우-보수-종교 세력의 재집권 도운 트럼프 

지금부터 꼭 71년 전(1948년 5월 14일) 중동 지도 한복판에 새로운 국가가 그려졌다.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한 그날부터 지금껏 중동에 평화로운 날은 없었다. 늘 어디선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집이 헐리고 피가 피를 부르는 폭력의 악순환이 이어졌다. 폭력의 중심엔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 그리고 친이스라엘 일방주의를 걸어온 미국이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은 해마다 30억 달러의 군사원조를 공짜로 이스라엘에게 건네주어 왔고, 이스라엘은 그런 미국을 뒷심 삼아 주변의 중동 아랍인들을 눌러왔다.  

최근 들어 미-이스라엘 동맹은 더욱 강화된 모습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사이의 유착은 더 이상 끈끈할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지난 4월 이스라엘 총선에서 네타냐후의 극우-보수-종교 연합 세력이 가까스로 과반수를 넘겨 승리한 것도 따지고 보면 트럼프의 거듭된 지원 사격 덕분이다. 

그 보기를 꼽자면, △국제사회의 세찬 비판을 무시하면서 미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겼고(2018년 5월 14일) △팔레스타인 헤브론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과 불편한 관계에 있던 유네스코(UNESCO)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탈퇴했고(2019년 1월 1일) △이스라엘이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이른바 6일 전쟁) 때 빼앗은 뒤 지금껏 점령중인 골란고원(국제법상 시리아 영토)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에 서명했다(2019년 3월 25일).  

트럼프의 중동 정책은 지난날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공화당 출신이냐 민주당 출신이냐를 떠나) 보여 왔던 중동정책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한마디로 노골적인 친이스라엘 일방주의이다. 이스라엘에서 지난 10년 동안 정권을 잡아 온 네타냐후로선 트럼프의 전임자인 조지 부시나 바락 오바마보다 트럼프가 더없이 고마울 것이다. 특히 오바마와는 이스라엘 정착촌 철거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냉랭한 관계를 이어오지 않았던가. 

"내가 총리에 다시 오른다면,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의 유대인 정착촌을 이스라엘 영토에 합병하겠다"  

네타냐후는 4월 총선을 앞둔 보수 유권자 층의 표심을 다지려고 이런 광기를 부렸다. 국제사회의 세찬 비난과는 달리 유대인 정착촌 확장에 대해 눈을 감아온 트럼프가 그의 뒷심이 아니라면, 보이기 어려운 광기였다. 팔레스타인 서안지구는 이스라엘이 전쟁(1967년 제3차 중동전쟁)으로 차지했기에 국제법에 따라 언젠가는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1967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스라엘 군이 점령지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못 박은 바 있다(유엔안보리 결의안 242). 

2개 국가 해법 내버렸다 

지난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으로 1996년 팔레스타인에 자치정부가 들어선 뒤로 중동평화협상을 말할 때는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의 2개 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역대 미국 행정부의 정책도 그러했다. 이스라엘도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2개 국가 해법'을 부정하지 않았다. 트럼프 집권 이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의 평화 협상은 물 건너간 모습이다. 여기엔 여러 요인들이 깔려 있지만, 네타냐후와 트럼프가 2개 국가 해법을 노골적으로 뭉갠 탓이 크다. 이즈음 네타냐후와 트럼프는 2개 국가 해법을 아예 입에 담지 않는다.  

네타냐후는 지금의 팔레스타인 점령 상황을 그대로 고착화하는 이른바 '현상 유지를 위한 시간 끌기' 전략을 지녔다.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 자체를 부정해온 그의 마음속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란 없다. 네타냐후-트럼프의 유착이 빚어내는 최대 희생자는 다름 아닌 팔레스타인 민초들이다.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의 280만 주민들은 이스라엘의 억압(유대인 정착촌 확장, 8미터 높이의 분리장벽 등)으로 생존권을 위협 받으며 일상적인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다. 팔레스타인 가자(Gaza) 지구의 180만 주민들은 이스라엘의 봉쇄정책으로 말미암아 '하늘만 뚫린 감옥'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르는 상황이다. 

실업률 52%,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 

지난 5월 1일 노동절을 앞두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통계국이 밝힌 바에 따르면, 가자지구의 실업률은 52%에 이른다. 전년도 실업률이 44%였던 점에 견주면 그곳 사람들의 살림살이 형편이 갈수록 더욱 나빠지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전 세계 사람들은 걸핏하면 가자지구에서의 유혈 충돌이 벌어졌다는 소식에 익숙해 있다.  

유혈 충돌이 왜 그치지 않을까 헤아려 보면, 그 밑바닥엔 절망감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이스라엘 군의 총격을 무릅쓰고 돌을 던지며 시위를 벌이다가 죽고 다치는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의 마음속엔 "이런 한계 상황에선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깊은 절망감이 깔려 있다.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3만 5000달러쯤에 이르지만 팔레스타인은 겨우 3000달러에 머물러, 소득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팔레스타인 현지 취재 때 만났던 자치정부 경제무역부의 한 실무자는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들의 기준으로 보면, 팔레스타인 사람 2명 중 1명이 절대빈곤 상태에 있다"고 말했다. 절대빈곤의 국제적인 기준은 한 사람이 하루 1.25달러(구매력평가 기준)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절대빈곤의 책임은 고스란히 이스라엘 몫이다. 서안지구에서 만난 한 유대인 정착민으로부터 "아랍인들(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유대인들보다 게을러 못 산다"는 말을 듣는 순간 하도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푹~하며 웃음을 터트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중동평화 어지럽히고 한국에도 악영향 

트럼프-네타냐후 유착은 팔레스타인 사람들뿐 아니라 지구촌 사람들에게도 해악을 끼치고 있다. 미 오바마 행정부의 주도 아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5개 상임이사국과 독일(P5+1)이 이란과 핵협정(정식 명칭: 포괄적 공동계획 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 2015년)을 맺은 바 있다. 그런데 트럼프는 "이 협정만으론 이란의 핵 위협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며 일방적으로 탈퇴했다. 그리고는 "2019년 5월부터 어떠한 국가도 이란 석유를 수입해선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야말로 21세기 패권 국가 미국의 일방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어렵게 또는 고상하게 말할 것도 없이 "이로써 트럼프의 미국은 국제사회의 깡패"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문제는 트럼프의 조치가 한국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2015년 핵협상이 타결되기 전인 지난 2010년 당시 미국 부시 행정부는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를 가하면서 한국의 동참을 요구했었다. 이명박 정부는 한미동맹이란 이름 아래 석유를 뺀 이란과의 대부분의 교역을 중단시키고, 서울에 있는 이란 멜라트 은행 한국지점 문을 닫도록 하며 미국의 비위를 맞춘 바 있다.  

한국이 수입하는 원유 가운데 이란산의 비중은 약 8%. 문재인 정부가 그 요구에 안 따른다면? 트럼프가 내지르는 강압책으로 이런저런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 뻔하다. 국내 업계는 지금의 상황을 내다보면서 일찌감치 석유 수입선을 다변화했다고 한다. 이란 석유 수출량의 절반 가량을 들여오는 중국조차 움츠리는 모습을 보면서 잘못 돼도 한참 잘못 됐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유대인들의 손에 놀아나는 세계 

이런 상황의 뿌리에는 결국 이스라엘이 있다. 미국의 최우선으로 챙겨주는 동맹국인 이스라엘은 중동의 군사 강국인 이란을 경제적으로 붕괴시키려 한다. 남미의 반미 국가인 베네수엘라의 경제 붕괴를 노리는 미국과 닮은꼴이다. 9.11 테러 뒤 미국이 벌인 잇단 군사작전으로 중동에서 이스라엘을 위협할만한 군사력을 지닌 국가는 이란 단 하나뿐이다. 그런 이란이 핵무기를 만들어 이스라엘을 공격한다? 국제정치학자들이 말하는 합리적 선택이론을 들먹일 것도 없이 제정신이 박힌 이란 지도자라면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이란의 군사적 위협을 막겠다며 폭격기를 실은 항공모함 전단을 중동으로 출진시키는 등 법석을 떠는 상황이다. 미국의 보수 매체들은 날마다 이란 위기설을 증폭시키며 전쟁의 북소리마저 둥둥 울려댄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느긋한 미소를 짓는 사람은 다름 아닌 트럼프의 친구 네타냐후이다.  

지정학적으로 이란은 미국과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다. 사정거리 3000km의 샤하브 장거리 미사일을 보유 중인 이란이지만, 미국의 본토를 위협할만한 처지도 못 되고 능력도 안 된다. 그런데도 미국의 트럼프는 왜 이란의 핵개발 문제에 그토록 과민반응을 보일까. 결국 이스라엘의 극우-보수-종교 연합세력을 이끄는 네타냐후가 바라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네타냐후를 위해 이란을 압박하고, 한국의 문재인 정권은 트럼프의 요구를 뿌리치지 못하고 이란 석유 수입을 포기하는 모습이다. 결국 유대인들의 손에 놀아나는 셈이다. 트럼프-네타탸후 동맹이 중동평화뿐 아니라 세계평화를 어지럽히는, 참으로 이상하고 답답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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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시민군 엄마가 산 시민군에게... "살아야제, 29만원 전두환도 골프치는디"

[오월ing ①] '고등학생 시민군' 김향득씨와 시민군 아들을 잃은 어머니 김길자씨

19.05.14 07:37l최종 업데이트 19.05.14 07:37l

 

5.18민주화운동 후 39년. 떠난 자는 떠난 자대로, 남은 자는 남은 자대로 여전히 그날의 진실을 위해 싸우고 있다. 그들을 만나본다.[편집자말]

 

시신 속 아들 모습 가리키는 김길자씨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 어머니 김길자(80)씨가 시신들 사진 속에서 아들의 모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 "아들이 여기 있어"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 어머니 김길자(80)씨가 시신들 사진 속에서 아들의 모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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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그날 이후, 엄마는 투사가 됐다. 아들을 잃은 뒤다. 전두환 정권은 '막둥이'를 폭도로 둔갑시켰다. 엄마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전두환 정권은 엄마도 폭력으로 진압했다. 어느 날, 엄마는 머리가 깨져 피범벅이 됐다. 전두환 정권은 힘으로 안 되자 돈으로 꼬드겼다. 가만히 있겠다면 논 100마지기를 주겠다고 했다. 엄마는 '자식 팔아먹는 부모'가 될 수 없었다. 단칼에 거절하고, 5.18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농성을 했다. 오월의 그날, 옛 전남도청에서 최후의 항쟁에 나섰던 문재학(당시 16세·광주상고1)군의 어머니 김길자(80)씨 이야기다.

5.18민주화운동의 흔적을 카메라에 담는 '오월 사진사'가 된 사람도 있다. 그는 문재학군과 같은 '고등학생 시민군'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사회문제에 일찍 눈떴다. 1980년 당시 금서였던 김지하의 <오적>을 읽고, 유신독재에 저항했던 교사 박석무(전 518기념재단 이사장)씨도 만났다.

 

하지만 그는 공수부대의 '폭도 소탕작전'이 펼쳐진 날 체포됐다. 1980년 5월 27일, 공수부대의 몽둥이에 두들겨 맞고 군홧발에 짓밟혔다. 등에 '극렬폭도'란 글씨가 새겨진 채 오랏줄에 묶여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거기서 잔혹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오월의 그날, 광주 최후의 항쟁에서 살아남은 김향득(57)씨다.

5.18민주화운동 39주년을 앞두고 두 사람을 만났다.

두 명의 고등학생 시민군

지난 8일, 두 사람을 만난 장소는 광주시 북구 신안동 김길자씨 집에서였다. 국가폭력의 피해자로 살아가는 '남은 자'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다. 아들과 비슷한 또래의 '고등학생 시민군'이어서일까. 김길자씨는 '아들 같은 사람'이라고 김향득씨를 소개했고, 김향득씨는 김길자씨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아주 특별한 인연을 맺은 사이였다. 김길자씨가 '오월 투쟁'을 하는 곳이면 김향득씨가 나타나 사진을 찍었다. 처음엔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으나, 횟수가 거듭될수록 둘 사이 간격은 좁아졌다. 오월 광주의 어머니와 아들은 이렇게 만났다.

"처음엔 재학이 어머님인지 몰랐당께. 나중에 물어물어 알아보니 재학이 어머니라는 것이여. 다른 사람 이야기가 나오믄 별로 눈물이 안 난디 재학이 이야기만 나오면 꼭 눈물이 난당께. 같은 시절을 산 또래고 '고등학교 시민군'이었응께. 마지막 날 살아남았다는 부채 의식도 느껴지고, 그리고 그때 청소년들이..." (김향득씨)
 
'고등학생 시민군' 김향득 바라보는 문재학 어머니 김길자씨 5.18민주화운동 당시 '고등학생 시민군'으로 활동한 김향득(57)씨가 눈물 흘리는 모습을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 어머니 김길자(80)씨가 바라보고 있다.
▲ "고등학생 시민군" 김향득 바라보는 문재학 어머니 김길자씨 5.18민주화운동 당시 "고등학생 시민군"으로 활동한 김향득(57)씨가 눈물 흘리는 모습을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 어머니 김길자(80)씨가 바라보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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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향득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주름진 손으로 눈을 훔쳤다.

"80년 항쟁 후에 내 자식 살려내라고 소리치믄서 다녔제. 이것 말고 할 말이 없응께. 그럴 때마다 향득이가 와서 사진을 찍음서 뒤따라 다니데. 그렇게 하다가 알게 됐제. 향득이 울지 말고 말해." (김길자씨)

"뜻하지 않게 사진을 하게 되믄서 자꾸 문재학, 박현숙 같은 사람들 생각이 나는 거여. 당시 같은 또래였던 사람들잉께. 왜 다들 억울하게 죽었는지, 한 번 제대로 피어보도 못하고 죽어야 했는지. 그런 부채 의식이 남아서 13년 동안 사진을 찍었제. 그러다 현장에 가믄 '여기가 혹시 재학이가 사망한 자리는 아닐랑가' 이런 생각을 들어 카메라를 들기도 했제." (김향득씨)

"그려, 우리 재학이. (1980년 5월) 25일 날인가. 그때 도청으로 애기를 데리러 강께 재학이가 (양)창근이 이야기를 하는 거여. 동산초등학교 동창이었제. 아따 동산초 있잖여. 이참에 전두환이 왔을 때, '전두환 물러가라'라고 했던 애기들 있던 곳. 음... 그랑께 우리 재학이가 (처음) 18일 날 전화가 왔어." (김길자씨)


김길자씨는 기억을 더듬었다. 39년 전 5월 18일로 돌아가 아들의 전화를 받았던 일부터 광주 북구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지(구묘역)에 그를 묻기까지 사연을 들려줬다.

[어머니 김길자씨의 증언] 시신이 되어 돌아온 고등학생 아들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 영정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의 영정이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 유영봉안소에 모셔져 있다.
▲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 영정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의 영정이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 유영봉안소에 모셔져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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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8일. 문재학군은 집에 전화를 했다. 계엄군이 곳곳에 누비고 다녀 집에 갈 수 없다고 했다. 엄마에게 친구 광호네로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했다. 엄마와 광주교대를 지나가는데 엄청난 수의 계엄군을 발견했다. 엄마는 문재학군의 팔짱을 꼈다.

21일, 김씨는 아들을 찾아 집을 샅샅이 뒤졌다. 어딜 갔는지 아들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돌아온 아들은 목이 쉬어 있었다.

"목 왜 쉬었냐?"
"차 따라다녔제."

"뭣헐라고 니가 차를 따라 댕겨야"라며 한소리를 했다. 아들은 "선배들이 김대중 석방하고 전두환 물러가라고 구호를 외칭께 같이 따라했소"라고 했다. 형을 앞세워 "계엄군 온당께 절대 나가자 마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23일, 문재학군은 가족들에겐 아무 말도 안하고 문밖을 나섰다. 다음날(24일)이 돼서야 "(전남)도청 상황실에 있소"라고 집에 전화를 걸었다. 25일, 김씨는 남편 문건양(84)씨와 함께 도청으로 달려갔다. 민원실 2층에 서 있는 아들과 눈이 마주쳤다. 집으로 가자는 말에 아들은 "엄마, 꼭 (양)창근이 같은 시체가 들어왔는디 총에 맞아 죽었는지 아닌지 모르것소. 나는 역서 창근이도 봐야하고 심부름이라도 해야 항께 어서 가쇼"라고 했다. 김씨와 남편 문씨는 완강하게 거절하는 아들을 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26일, 문재학군은 도청 본관 앞에서 다시 부모님을 만났다. 엄마는 다시 설득했다. 문군은 이번에도 "엄마, 창근이 수습도 못하고 있어요. 저녁에 차가 와서 실어준당께, 그때 갈라요. 걱정말고 가쇼"라고 했다. 부모님은 "오늘은 꼭 돌아온단 약속 지켜라잉"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 통금시간 7시가 넘어도 아들은 오지 않았다. 밤늦게야 "차가 끊겨서 못가겄소"라는 전화가 왔다.

"오늘 계엄군이 쳐들어온단디 어쩔라고 그라냐, 진짜!"
"학생들은 손들고 나가믄 괜찮다고 항께 걱정마쇼. 엄마, 차근이가 저러고 있는디 어째 저만 살자고 집에 간다요."

김길자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이때 옷을 잡아끌어서라도 데려오지 못한 걸,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다. 자신의 잘못으로 아들을 죽인 것 같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27일, 김길자씨는 새벽 두세 시 즈음에 콩 볶는 소리마냥 총소리가 울러 펴지는 걸 들었다. 옥상에 올라가니 군인들이 어디론가 달려갔다. 새벽 6시, 남편 문건양씨와 외삼촌을 앞세워 도청으로 갔다. 아들을 찾을 수 없었다. 문재학군은 도청에서 '엠(M)-16 총상'으로 사망했다.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가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가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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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학이 찾을라고 시체가 있다는 데는 다 가봤제. 외삼촌 친구가 병원에 있어서 거그다가도 연락을 했어. 그랬더니 금방 전화가 와서 거기 있다고 하데. 현충일에 계엄사 가믄 (아들을) 내준다고 항께 살아있는지 알았제. 근디 현충일이 내일인데도 연락이 없어브러. 그래서 다시 연락해봉께 우리 재학이가 아닌겨(동명이인). 넋이 나가서 있는데, 즈그(문재학) 담임선생님이 연락을 해와야. 신문 봉께 재학이가 망월동에 가매장된 거 같다고. 6월 7일인가 망월동에 갔어.

묘지(번호 104, 관번호 94)를 팔라고 하는디 안 된다는 거여. 시청이나 경찰서에서 나와갖고 시체를 확인해야 가능하다고. 그랑께 즈그 아부지가 삽을 들고 화를 내며 '내 자식 아니면 안 가져 갈 것잉께 비켜, 다 때려죽여븐다'고 덤벼. (결국) 묘를 파고 봤는디 우리 재학이가 아닌 것 같은 거여. 근데 남들은 다 재학이가 맞다여.

그래서 아빠가 머리를 만져봤제. 애기가 시골 살 때, 다리에서 떨어졌거든. 내가 냇가에서 빨래하는디 다리 위에서 '엄마'하고 부르다가 떨어져서 머리 한쪽이 오그라졌는디, 커서도 안 펴지는 거여. 그걸 아빠가 확인하는디, 머리카락도 뭉텅뭉텅 다 빠졌고, 목도 덜렁덜렁해야. 제대로 확인이 안 돼. 이때까지도 우린 재학이가 아니길 바랐제. 근데 나중에 검찰청 8호 검사한테 갔더만 사진을 보여주는디 재학이가 맞어. (6월) 21일 망월동 묘지에 묻었제."


[김향득씨의 증언] 등에 '극렬폭도' 낙인, 체중 35kg까지 줄어
   
'고등학생 시민군' 김향득씨와 고 문재학 어미니 김길자씨 5.18민주화운동 당시 '고등학생 시민군'으로 활동한 김향득(57)씨와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 어머니 김길자(80)씨.
▲  "우리 어머니도 좀 더 건강하셔서 좋은 세상 보셨으믄 좋겄어요. 진상규명 되는 날 올 때까지 저도 노력할랍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며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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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향득씨는 어떻게 고등학생 신분으로 시민군이 됐나요?
"고등학생 때부터 김지하의 책 <오적> 등 금서를 많이 봤제. 박석무(전 518기념재단)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 되기도 했고. 당시 독서회를 했는디 거기서도 리더여서 학교나 기관에서 주시하는 인물이었어. 그렇게 사회를 바라보는 눈이 밝아지믄서 자연스럽게 시민군이 됐제."

- 가족들이 걱정을 많이 했겠어요.
"나중에 들은 이야긴디, (5월) 27일 아침부터 아버지가 시신이 있는 곳마다 가서 나를 찾았대. 지나가는 지프차를 잡고 이름을 적어주면서 간곡하게 사정해서 알아보기도 하고. 향득이란 이름이 특이하잖아. 그렇게 며칠 고생하다가 아들이 살아서 상무대 영창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데. 부모 마음 다 똑같제 뭐."

- 상무대에 끌려가서는 어땠나요?
"계엄군이 내 등에 '극렬폭도'라고 쓰고, 오랏줄에 묶어 상무대 영창으로 끌고 갔어. 아우슈비츠 포로만도 못했제. 체중이 35kg까지 줄어들었응께. 아버지한테도 맞아본 적이 없는디, 걱서 진짜 군홧발로 죽도록 맞았당께. 잠도 안 재우고 패는데, 그냥 개돼지였어.

고문도 당했제. 아니 이놈들이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워서 고문을 하데. 그라믄 손이 퉁퉁 붓어.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빌었제. 거기선 어떤 힘 좋은 장사도 못 버텨. 나도 살집을 꼬집음서 버텼제. 아버지가 정신 놓지 말라고 한 거 기억함서. 걱서 고문 받고 구타 당해서 멍청해지는 사람 여럿 봤거든. (결국 풀려나긴 했어도) 고문 독은 안 빠지데. 영창에서 나와갖고 몸에 좋다는 거 다 먹었어. 오소리, 개구리 뒷다리, 심지어 인분이 고문 독 빼는데 좋다고 해서 똥오줌도 뒤집어 썼응께. 그래도 이렇게 살아 있는 게 다행이지..."

어머니 내동댕이치고 돈으로 회유하려 한 전두환

국가는 피해자로 살아가는 '남은 자'에게도 폭력을 가했다. 김향득씨 뿐만 아니라 김길자씨도 전두환 정권이 물러나기까지 갖은 고초를 당했다. 전두환이 광주에 오는 날이면, 안방에 형사들이 드러눕고 집밖에는 전경이 배치됐다.

감시의 눈을 피해 전두환 앞에서 시위를 하는 날이면, 경찰차 실려 삼척으로 남원으로 끌려가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 내동댕이쳐졌다. 1986년도엔 강제로 제주도행 배에 오른 적도 있다. 하지만 몸이 상하는 잃은 없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진 말이다.

1984년 4월, YWCA에서 유가족협회 2세들이 청년회 발족식을 가졌다. 김길자씨는 딸과 함께 구 호남전기에 모여 YWCA가 있는 광주 유동으로 행진하려 했다. 하지만 경찰이 앞을 가로막았다. 몸싸움이 벌어졌다.
 
5.18진상규명 시위 도중 피 흘리는 김길자씨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 어머니 김길자(80)씨가 공개한 사진들.  고 문재학씨 시신 사진과 함께 진상규명을 위한 시위 도중 경찰에 맞아 피 흘리는 김길자씨의 모습도 보인다.
▲ 5.18진상규명 시위 도중 피 흘리는 김길자씨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 어머니 김길자(80)씨가 공개한 사진들. 고 문재학씨 시신 사진과 함께 진상규명을 위한 시위 도중 경찰에 맞아 피 흘리는 김길자씨의 모습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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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덩이가 날아다녔다. 그러다가 김길자씨가 한 경찰의 귀에 꽂혀 있는 무전기 리시버를 뺐다. 경찰은 김씨의 머리를 무전기로 내리쳤다. 시뻘건 피가 김씨의 머리에서 흘러내려 얼굴을 타고 땅바닥에 떨어졌다. 병원에서 여덟 바늘을 꿰맸다. 하지만 김씨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병원 옥상에 올라가서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며 농성을 했다.

"내가 재학이 보내고 석 달 동안 물만 먹고 살았어. 근디 곰곰이 생각해 봉께 우리 재학이가 민주주의를 위해 데모를 했는디 폭도라고 하는 것이여. 재학이 사망신고 하러 갔을 적에도 '학생이 총 잡았응께 폭도'라며 위로금도 안 줍디다. 우리 재학이 폭도 누명 벗겨야지. 진상규명해야지. 그래서 유족들 찾아다니면서 활동을 시작했어."

전두환 정권은 힘으로 안 되자 돈을 썼다. 김길자씨에게 소란을 피우지 않는 조건의 각서를 쓴다면, 논 100마지기를 준다고 했단다. 김씨는 이를 거부했다.

"한 번은 505보안부대에서 연락이 왔어. 안부말을 하더니 부대로 오라고 하데. 내가 뭣헌다고 거길 가냐고 볼일 없다고 했제. 그래도 자꾸 재촉해서 갔는디 '각서를 써줄 수 있냐'고 묻데. 무슨 각서냐고 하니까 다시는 소란 피우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주면 평생 먹고 살만치 준다고 하데. 영암에 논 100마지기 사준다고.

각서 쓸 만한 일한 적 없고, 내가 노동해서 먹고 한다고 했제. 자식 팔아서 부자 되면 뭣허냐고. 그랬더니 그럽디다. 역시 그놈의 집구석이라고. 그람서 당신 아들이 잘했냐, 학생이 총칼 드는 게 잘한 짓이냐고 따져. 나는 내 자식 폭도 누명 벗기려고 하는 거라고 그랬제. 잘못한 게 뭐이 있냐, 누가 먼저 사람을 죽였냐고 따진 거여."

 
고등학생 시민군 '오월의 사진가' 김향득씨 5.18민주화운동 당시 '고등학생 시민군'으로 활동한 김향득(57)씨. 현재는 5.18민주화운동의 흔적을 카메라에 담는 '오월의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다.
▲ 고등학생 시민군 "오월의 사진가" 김향득씨 5.18민주화운동 당시 "고등학생 시민군"으로 활동한 김향득(57)씨. 현재는 5.18민주화운동의 흔적을 카메라에 담는 "오월의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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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향득씨는 국가폭력에 카메라로 맞섰다. 사라져가는 5.18민주화운동의 흔적을 지키기 위해 기록을 남겼다. 지난 2007년, 도청 별관 철거 논란이 불거졌을 때부터 5.18 사적지와 현장을 사진에 담았다. 어느 샌가 '오월 사진가'라고 불리게 됐다.

"도청 원형복원 문제를 처음 제기했을 때만 해도 아무도 안 들어줬어. 그때는 단독군장을 꾸려갖고 혼자 돌아다님서 기록했제. 공간이 5.18을 기억하는 역할을 한다는 걸 알았으믄 해. 5.18 어머님, 아버지 다들 산 증인인디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니까 하나하나 기록해야제. 노시는 모습, 힘들어 하는 모습, 그게 다 기록잉께.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내가 죽었으면 유족들처럼 했을 것이여. 내가 할 수 있는 한계가 있겄지만은 아무튼 최대한 기록해야제"

"즈그가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하려 했는디..."

그렇다면 김향득씨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일까. 김향득씨는 김길자 어머님이 5.18 기념행사 전야제에서 거리행진을 하던 때를 떠올렸다.

"2016년께 5.18 전야제 행사 때 (김길자) 어머니가 광주공원에서부터 걸어왔어. 다른 어머니들이랑 하얀 소복에 검은 리본을 달고 오시는데,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더랑께. 저 어머니 한을 누가 풀어드려야 하나, 가슴이 짠했어. 사실 나는 5.18 이후 어버이날에 부모님한테 카네이션을 달아준 적이 없어. 5.18 진상규명 되는 날, 유공자들이 편안한 삶을 누릴 때, 달아드리겠다고 혼자 다짐하고 있는 거여."
 
'고등학생 시민군' 김향득씨와 고 문재학 어미니 김길자씨 5.18민주화운동 당시 '고등학생 시민군'으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5.18민주화운동의 흔적을 카메라에 담는 '오월의 사진가'로 활동하는 김향득(57)씨가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 어머니 김길자(80)씨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 "5월 어머니" 모습 카메라에 담는 "오월의 사진가" 김향득 80년 5월 "고등학생 시민군"으로 활동한 김향득씨는 5.18민주화운동의 흔적을 카메라에 담는 "오월의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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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자씨는 사진을 꺼냈다. 서랍 속에 간직해온 아들 사진이었다. 영정사진이 되어버린 중학교 졸업사진과 수학여행 때 친구랑 찍은 사진. 집 앞에서 혼자 찍은 사진 등이 김길자씨 집 거실에 펼쳐졌다. 거기엔 뜻밖의(?) 사진도 있었다.

그건, '인간 사냥'의 증거였다. 김길자씨는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1980년 5월 27일 촬영한 거라고 했다. 참혹한 현장이었다.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의 가슴에 붉은 피가 흥건했다. 길 위 곳곳에 핏자국이 선명했다. 등 뒤로 손이 묶인 채 엎드려 있는 사람들 곁에 등허리에 총을 어슷하게 멘 군인들이 서 있다. 김길자씨는 이 손가락으로 아들을 짚었다.

"여그 있는 애가 우리 재학이여. 밑에 교련복 바지 입고, 위에 카키색 면티 입은 애기. 이렇게 입고 집을 나갔제. (광주) 가톨릭센터에서 사진 전시회를 했는디, 이 사진을 보고 재학이 형이 그라데. '엄마, 재학이 여기 있다'고. 딱 보니까 우리 재학이여. 5.18재단에 부탁해서 사진을 복사했어. 여기 우리 재학이 옆에 누워있는 게 재학이 친구 안종필이고, 그 옆에가 조대부고 3학년 박성룡이여. 종필이네는 아들 '폭도'로 몰리면서 식당 크게 했다가 망했고, 성룡이 엄마는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

- 국가폭력 피해자로 살아가면서 얻은 후유증 없나요?
"나는 아닌디, 아부지(남편 문건양)가 트라우마센터에서 미술치료 받을 때여. 찰흙을 가지고 집을 만들었는데 울타리고 있고, 집도 큰 거여. 그때 옆에 있던 기자가 아부지한테 물어봤제.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그러니까 아부지가 그라데. 우리 재학이 공부방 하나 못해줘서 공부방도 만들고 그랬다고. 그리고 혹시라도 나쁜 놈들이 또 해칠까봐 울타리도 쳤다고. 짠하데." (김길자씨)

"사진을 찍다봉께 가기 힘든 공간은 없는디, 습한 곳에 가면 고문 받았던 때가 생각나. 505보안부대, 도청 민원실 지하, 국군통합병원 소각장... 이런 곳에 가면 그때 기억이 떠올라." (김향득씨)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남의 자식 죽었다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되제. 말로 천냥 빚 갚는다고 하는디. 전두환이는 29만원 밖에 없담서 골프 치러 다니고, (자유) 한국당 김진태, 김순례, 이종명 의원이랑 지만원이는 '괴물집단이네', '북한군 있었다' 이런 소리하는데, 자기 자식들도 그런 정부에서 죽어봐야 우리 속을 알지.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른당께. 진짜 그렇게 나쁜 사람들은 사회에서 멸종시켜브러야 돼.

우리도 사람이라고 즈그가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할 수 있제.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는 그렇게 못하지. 아부지(남편 문건양)가 아파서 병원에 있어서 그렇지 이런 식이면 다시 (거리로) 나가야제. 진상규명 되는 거 꼭 보고 죽어야제. 그리고 향득이, 고문 받아서 오지게 고생하고 사는디, 그라지만 살아야지. 그렇게라도 살아야지. 난 우리 재학이도 어떻게든 살아있었으면 좋겠어." (김길자씨)

"우리 어머니도 좀 더 건강하셔서 좋은 세상 보셨으믄 좋겄어요. 진상규명 되는 날 올 때까지 저도 노력할랍니다." (김향득씨)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며,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인터뷰 장소였던 김길자씨 집 거실에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두 사람의 눈물을 닦아줄 '5.18 진상규명 조사위원회'는 출범하지 못하고 있다. 청와대가 자유한국당에 조사위원을 다시 추천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재추천을 하지 않고 있다.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 어머니와 김향득씨 5.18민주화운동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 어머니 김길자(80)씨와 '고등학생 시민군'으로 활동한 김향득(57)씨.
▲  인터뷰를 마치고 함께 선 고 문재학씨 어머니 김길자(80)씨와 김향득(57)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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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광주, 美정보요원 39년만에 입을 열었다

“광주 방화·총격·차량 탈취는 30~40여명의 사복 입은 남한특수군이 벌여”
“5월21일 전두환 광주 방문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사살 명령 내렸을 것”

정철운 기자 pierce@mediatoday.co.kr  2019년 05월 13일 월요일
 

“기자들 허벌나게 와버렸네.” (5·18기념재단 관계자)

‘5·18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며 1980년 민주화운동을 모욕한 자유한국당 공청회가 2월8일 국회에서 열린 지 약 2개월 만에 국회에서 5·18 가짜뉴스의 실체와 광주학살 진상을 규명할 매우 중요한 증언이 나왔다. 전두환씨가 철저한 시나리오를 갖고 1980년 5월, 광주시민을 짓밟았다는 주장이 39년 전 미군 정보부대 군사정보관의 입을 통해 구체적으로 등장했다.  

김용장 전 미국 육군 정보부대 군사정보관과 허장환 전 국군 보안사령부 특명부장이 참석한 특별기자회견이 13일 국회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이인영 더불어민주당과 박광온 최고위원을 비롯한 민주당 관계자들과 5·18기념재단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미 육군 501정보여단에서 군사정보관으로 25년간 재직한 김용장씨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1980년 5월 광주에서 대략 40여건의 첩보를 상부에 보고했다. 501정보여단의 첩보는 미 국방정보국으로 보내졌고, 이 첩보는 백악관으로 갔다. 내가 보낸 첩보 중 5건은 백악관으로 보내졌고 카터 대통령이 3건을 직접 읽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 김용장 전 미국 육군 정보부대 군사정보관과 허장환 전 국군 보안사령부 특명부장이 참석한 특별기자회견이 13일 국회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열렸다. ⓒ미디어오늘
▲ 김용장 전 미국 육군 정보부대 군사정보관과 허장환 전 국군 보안사령부 특명부장이 참석한 특별기자회견이 13일 국회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열렸다. ⓒ미디어오늘
 

김씨는 ‘5·18 북한군 개입설’에 대해 “사실이라면 미국의 정보망이 완전히 뚫렸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라며 “전두환이 만든 완전한 허위”라고 단언했다. 그는 “(1980년 당시) 한반도 상공에는 2대의 첩보 위성이 있었고 북한과 광주를 집중 정찰했다. 북한군 수백명이 미국의 첨단 감시망을 뚫고 내려오는 건 불가능하다”며 “(상부에) 보고할 필요가 없었다”고 밝혔다.

 

그가 보고했던 것은 오히려 ‘남한 특수부대원’의 수상한 활동이었다. 김용장씨는 “시민 행세를 하던 사복 군인이 실제로 존재했다. 이들은 5월20일쯤 성남비행장에서 광주비행장으로 왔다. (인원은) 30~40명가량으로 보고했다. K-57 비행기 격납고에서 3일간 주둔했다. (주둔)첩보를 입수해 격납고로 찾아가 직접 확인했다. 나이는 20~30대 젊은이로 짧은 머리였고 일부는 가발을 썼다. 그중에는 거지처럼 넝마를 걸친 이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들을 광주로 보낸 이는 전두환 보안사령부였다. 보안부대 대공과장이 이들을 지휘했다”고 말했으며 “북한 특수군이 했다는 방화·총격·수송 차량 탈취는 일반 시민이 했다고 보기 어려운 매우 극렬한 행위인데, 나는 이들을 남한 특수군으로 부르고 싶다. 이들이 직접 벌인 소행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전두환이 강경 진압의 빌미를 마련하기 위해 남한군을 시민으로 위장해 고도 공작을 펼친 것이다. 유언비어 유포도 마찬가지다”라며 5·18 가짜뉴스의 실체에 쐐기를 박았다.  

 

▲ 김용장 전 미국 육군 정보부대 군사정보관과 허장환 전 국군 보안사령부 특명부장이 참석한 특별기자회견이 13일 국회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열렸다. ⓒ미디어오늘
▲ 김용장 전 미국 육군 정보부대 군사정보관과 허장환 전 국군 보안사령부 특명부장이 참석한 특별기자회견이 13일 국회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열렸다. ⓒ미디어오늘
 

그는 당시 “북한 게릴라가 침투했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을 죽인다는 식의 유언비어가 나왔다”고 전한 뒤 “광주MBC 방화 같은 사건이 광주시민에 의해 이뤄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한 특수공작원에 의해 이뤄졌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김씨 주장이 사실이라면 ‘5·18 북한군 개입설’은 ‘5·18 국군 개입설’로 바뀌어야 한다. 김씨는 “이들의 실체가 드러나면 광주의 모든 실체가 드러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용장씨는 이어 전두환씨가 1980년 5월21일 광주에 왔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전씨가 5월21일 점심 전후로 광주비행장에 왔다. 당시 헬기를 타고 왔다. 오자마자 1시간가량 회의를 열었다.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한 뒤 “(방문한) 이날 오후 집단 사살이 이뤄졌다”며 “(전두환) 방문 목적은 사살 명령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전씨가 타고 온 헬기의 비행계획서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밖에도 △광주 국군통합병원 시신 소각 △전일빌딩 헬기 M60 사격 △교도소 습격 △공수부대에 의한 성폭행 등을 첩보로 보고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시신 소각과 관련해 “당시 국군통합병원에서 시신을 최대로 소각했다면 10일간 200구 정도는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 뒤 “그래도 그 숫자는 터무니없이 적은 (사망자) 숫자이기 때문에 어디론가 (시신이 또) 수송됐을 것”이라고 밝혔다.  

 

▲ 김용장 전 미국 육군 정보부대 군사정보관과 허장환 전 국군 보안사령부 특명부장이 참석한 특별기자회견이 13일 국회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열렸다. ⓒ미디어오늘
▲ 김용장 전 미국 육군 정보부대 군사정보관과 허장환 전 국군 보안사령부 특명부장이 참석한 특별기자회견이 13일 국회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열렸다. ⓒ미디어오늘
 

1988년 5공 청문회 당시 ‘양심선언’을 했던 허장환 전 국군 보안사령부 특명부장은 이날 “전두환은 발포가 아니라 사살 명령을 내렸다. 5·18 당시 전두환은 모든 작전권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으며 전일빌딩 헬기사격엔 “27일 공수특전단 지침이 진압군에 사상자가 나와선 안 된다였다. 그런데 전일빌딩 5층에 저격병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해 헬기로 저격병 저격하는 작전을 수행했다”고 주장했다.

 

김용장씨가 주장한 ‘남한 특수군’과 관련해 허장환씨는 “수백명이 왔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때 그 때 와서 (임무 수행 뒤) 철수한 것으로 안다. 그 사람들은 전쟁이 벌어지면 후방교란이 주 임무로, 유언비어날조 조도 있었다”고 전했다. 시신 소각과 관련해선 “시민군 사상자 중 간첩이 있을 수 있다며 전남도청에서 지문 감식을 진행했고 가매장을 발굴해 사망자의 지문까지 채취했는데 다시 묻을 수 없어 국군통합병원에서 화장 처리했다. 그 공로로 병원장이 훈장까지 받았다”고 주장했다.  

허씨는 “보안사가 광주를 평정한 뒤 범행을 숨기기 위해 연구단을 만들어 시나리오를 기획·작성했다. 작성자들은 죽어서도 절대 발설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으며 이들의 목적은 완벽하게 역사를 변조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는 연구단을 통해 “진시황의 분서갱유에 해당하는 만큼의 변조”가 이뤄진 결과 39년째 5·18 학살의 진상규명이 미궁에 빠졌다고 덧붙였다.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마침내 진실이 때가 돼 스스로를 드러낸 현장이다. 지금껏 날조되었던 5·18의 진실이 다시 밝혀졌다”고 말했다. 박광온 민주당 최고의원은 “정권찬탈세력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을 이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두 분의 증언은 진상규명을 원하는 이들과 5·18 진상조사위 활동에 강력한 동력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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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멈춰야 해방되는 곳…기자가 뛰어든 요양원은 ‘감옥’이었다

등록 :2019-05-13 05:00수정 :2019-05-13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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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24일 오후 3시께 경기 부천 ㅇ요양원 노인들이 2층 거실에 나와 있다. 요양원 노인들의 유일한 외출(?)이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은 요양보호사의 도움 없이는 방에서 나올 수 없다. 노인들은 일주일에 두세번 오후 3시부터 30분 정도 거실에 나와 있다 다시 침대로 돌아간다.
지난 2월24일 오후 3시께 경기 부천 ㅇ요양원 노인들이 2층 거실에 나와 있다. 요양원 노인들의 유일한 외출(?)이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은 요양보호사의 도움 없이는 방에서 나올 수 없다. 노인들은 일주일에 두세번 오후 3시부터 30분 정도 거실에 나와 있다 다시 침대로 돌아간다.
[창간기획] 대한민국 요양보고서 1부 돌봄orz ①요양원에 갇힌 노인들
‘요양보호사 취업’ 한겨레 기자 한달간 직접 일하며 현장 기록
매일 똑같은 일정에 인권 뒷전…식사는 빨리 대변 묻어도 방치

 

한국의 65살 이상 노인 인구는 739만명이다. 노인 인구는 2025년 1000만명을 넘고, 2035년에는 15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추정 치매 환자 수는 75만명 정도다. 한국은 빠른 속도로 늙어가고 있다.

 

정부는 2008년 장기요양보험제도를 도입해 노인 돌봄을 공공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스스로 자신의 몸을 돌보기 어렵고, 자녀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노인들이 국가의 보조를 받아 요양원에 들어가거나, 집에서 재가요양보호사들에게 방문 요양 서비스를 받는다. 2019년 3월 현재 15만6435명이 요양원을, 41만930명이 방문 요양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요양원은 이름처럼 노인들이 편하게 생을 정리할 수 있는 공간일까? 국가가 자격증을 주는 요양보호사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한겨레> 기자가 직접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고 요양원 현장에 뛰어들었다. 재가요양보호사 14명을 만나 심층 인터뷰를 하고 200여명을 설문했다. 요양원 현지조사 결과 800건, 정부가 고발한 장기요양기관 중 확정 판결이 난 30여건의 판결문도 최초로 분석했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3부 8회에 걸쳐 ‘대한민국 노인요양 보고서’를 펼친다. 1부는 권지담 기자의 요양원에서의 한달 기록, 그리고 재가요양의 그림자다.

 

2월12일 새벽 6시 경기 부천의 ㅇ요양원 204호. 102살 정순실(가명) 할머니는 5년 동안 되풀이했던 똑같은 하루를 더는 시작하지 못했다. 요양원 최고령자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렇게 ‘퇴소’가 결정됐다. 기자가 요양보호사로 일한 지 15일째 되는 날이었다.

 

2014년 딸의 손을 잡고 요양원에 온 순실 할머니는 서서히 입을 닫았다고 한다. 말이 주는가 싶더니, 식사 때도 입을 열지 않는 일이 잦아졌다. 침대에 파묻힌 할머니를 힘겹게 앉히고 밥상을 올리면, 할머니는 ‘픽’ 하고 옆으로 쓰러졌다. 기자가 힘을 쓰면 양옆에 베개를 끼워 겨우 앉히는 것까지는 가능했다. 그러나 입을 억지로 열 수는 없었다. 얼굴을 잡고 눈을 맞춰도, 귀에 입을 대고 큰 소리를 내도, 껴안고 꼬집어도 할머니는 응답하지 않았다. 끈질기게 식사를 권하면, 할머니는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곤 했다. ‘제발 날 좀 내버려둬.’ 할머니의 몸은 점점 쪼그라들더니 침대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숨지기 며칠 전, 한 숟갈이라도 입에 넣어보겠다고 막내딸이 찾아왔다. 할머니는 입을 벌리지 않았다. 콧줄도 거부했다. “식사를 거부하는 건 죽고 싶다는 뜻이지. 저렇게 밥을 안 먹어서 살겠어? 콧줄 안 끼면 죽는 거지.” 막내딸을 보며 요양보호사들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죽을 거야.’ 할머니는 소리 없이 아우성치고 있었다.

 

할머니가 달라졌다 싶은 순간도 있었다. 이틀 전, 같은 방 95살 박혜자(가명) 할머니의 식사를 지켜보던 순실 할머니가 갑자기 손으로 당면을 집어 먹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음식은 거부한 채 오직 고기반찬 속 당면만 입속으로 넣었다. 이때다 싶어 식판에 남은 당면을 서둘러 입에 갖다 댔다. 그게 마지막 식사였다.

 

순실 할머니가 5년 동안 누웠던 침대는 금세 깨끗이 치워졌다. 작은 체구 탓에 살았을 적에도 할머니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던 침대다. 지난 한달 동안 목욕시간을 제외하고 할머니는 한번도 침대를 벗어난 적이 없다. 기저귀를 차고 누워 전등이 켜지면 눈을 떴고, 전등이 꺼지면 눈을 감았다. 가끔 머리맡의 손바닥만한 은색 거울을 들여다보는 게 할머니가 하루 중 유일하게 자신의 의지를 담아 하는 행동이었다. 그런 할머니에게 식사 거부는 요양원을 향해 마음을 내보이는 유일한 행위이기도 했다.

 

“그동안 감사했어요.” 5일이 지난 17일, 순실 할머니의 장례를 치른 네 딸이 요양원에 찾아왔다. 손에는 큰 사과 상자가 들려 있었다. 한동안 할머니 침대를 지켜보던 딸들은 30분 뒤 요양원을 떠났다. 머리맡에 놓였던 은색 거울과 할머니가 좋아했던 꽃 모양 진주알 팔찌는 가져가지 않았다. 할머니의 유품은 검은 봉지에 담겨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204호에 남은 할머니들은 누구도 순실 할머니에 관해 묻지 않았다. 우는 사람도, 호들갑 떠는 사람도 없었다. 거실 칠판의 ‘정순실’ 이름 옆에 적힌 ‘퇴소’라는 빨간 글씨만이 할머니의 죽음을 기록했다. 2014년 요양원에 입소한 정순실 할머니는 그렇게 죽음으로써 요양원에서 퇴소했다.

 

인천 ㅊ요양원에 설치된 시시티브이(CCTV)를 한눈에 모아 볼 수 있는 화면. 요양원 곳곳에 설치된 시시티브이는 24시간 돌아간다. 낙상하거나 배회하는 노인을 확인하기 위해 요양보호사들은 쉬는 중에도 눈을 시시티브이에 둬야 한다.
인천 ㅊ요양원에 설치된 시시티브이(CCTV)를 한눈에 모아 볼 수 있는 화면. 요양원 곳곳에 설치된 시시티브이는 24시간 돌아간다. 낙상하거나 배회하는 노인을 확인하기 위해 요양보호사들은 쉬는 중에도 눈을 시시티브이에 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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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원 근무 시작…이곳이 ‘요양’원입니까?

 

기자는 1월29일부터 한달간 인천과 부천의 요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했다. 요양보호사로 노인의료복지시설 등에서 일하려면, 노인복지법에 따라 전문교육기관에서 이론·실기·실습과정 240시간을 이수하고 국가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2018년 9월부터 교육을 받은 기자는 12월 시험에 합격해, 1월24일 요양원 취업에 성공했다. “2월부터 근무하세요.” 평균나이가 50대 중반인 요양보호사 세계에서 ‘이방인’ 같은 29살 기자를, ㅇ요양원 원장은 흔쾌히 받아줬다. “갑작스럽게 미안한데, 혹시 1월29일부터 출근할 수 있겠어요? ㅊ요양원에 갑자기 요양보호사 한 사람이 비어서 며칠만 딴 데서 근무해줘요. 지담씨도 빨리 시작하는 게 좋잖아?” 원장의 갑작스러운 요청에 근무지가 변경됐다. 알고 보니 원장은 인천과 부천에서 요양원 3곳을 운영하고 있었다. ㅇ요양원의 3호점인 ㅊ요양원에서 3일 동안 근무한 뒤에야, 기자는 원래 계획대로 ㅇ요양원으로 출근할 수 있었다.

 

‘아침 6시 기상 및 세수, 7시20분 아침 식사, 오전 9시 기저귀 케어, 9시30분 목욕, 낮 12시 점심 식사, 오후 2시20분 기저귀 케어, 3시 간식, 5시10분 저녁 식사, 6시 소등, 저녁 7시30분 기저귀 교체, 밤 11시20분 기저귀 교체.’

 

요양원의 하루는 1분도 흐트러짐 없이 정해진 대로 흘러갔다. 세상이 칠흑같이 어두워도 새벽 6시엔 불이 켜졌고, 해가 길어진 한여름에도 오후 6시면 불이 꺼졌다. 식사 시간도 융통성이 없었다. 가령 오후 4시30분에 저녁으로 환자영양식 ‘케어웰’ 400㎖를 먹은 노인은 다음날 아침 7시20분까지 15시간 가까이 허기를 참아야 한다. 환자영양식은 먹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 저녁 식사 시간보다 40분 일찍 배식한다. 목욕도 일주일에 한번 정해진 요일에만 가능하다.

 

“윽! 이게 무슨 냄새예요?” 요양원 출근 9일째인 2월6일, 95살 김선주(가명) 할머니가 사는 206호에 똥냄새가 진동했다. 기저귀를 차고 용변을 본 선주 할머니가 베개와 이불에 똥을 바르고 있었다. 할머니의 똥칠은 처음이 아니었다. 요양원은 할머니의 ‘사고’를 막기 위해 우주복을 입히고, 우주복을 벗을 수 없도록 발목 지퍼 부위를 끈으로 단단하게 조여 놓았다. 그런데도 이날 선주 할머니는 끈 풀기에 성공했고, 사건은 터졌다. “할머니, 괜찮아요 괜찮아. 어차피 내일 목욕하는 날이니까 오늘만 참으면 깨끗해질 거야. 지담 쌤, 일단 대충 닦아놔요.” 최고참 요양보호사 황승희(가명) 선생님이 차분히 말했다.

 

치매 노인이 온몸에 대변을 발라도 목욕 일정은 당겨지지 않았다. 결국 선주 할머니와 같은 방을 쓰는 2명의 노인은 하루를 꼬박 똥냄새를 견뎌야 했다. 3~4명의 요양보호사가 입소자 27명을 돌봐야 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요양원 입소자의 59%(16명)가 요양보호사의 도움이 없으면 침대에만 갇혀 있어야 한다. 요양보호사가 한 사람에게 오래 머물 수 없는 까닭이다. 심지어 이 가운데 7명은 혼자서 옆으로 돌아눕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기자는 한달 동안 요양보호사로 일했지만 ‘돌봄’을 제공하진 않았다. 그저 딱 필요한 만큼의 ‘처치’만 이뤄졌다.

 

“아이고, 그렇게 해서 내일까지 하려고 그래요?” 요양원 근무 첫날 점심시간. 83살 박경자(가명) 할머니 숟가락에 반찬을 올리고 있는데 뒤통수에서 사회복지사의 꾸지람이 날아들었다. 낮 시간에 출근한 요양보호사는 4명. 다른 층에서 근무하는 요양보호사와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해야 하는 요양보호사를 빼면, 2명이 18명의 식사를 챙겨야 했다. 18명을 일으켜 세워 앉히고 앞치마를 두르고 틀니를 끼워주는 등 식사 준비부터 식사 도움, 투약, 양치질, 양치 컵 씻기, 앞치마 빨래, 오전 중 나온 빨래 널기까지 80분 안에 끝내야 한다. 사회복지사의 말이 백번 맞다. 한 숟갈씩 정성을 담아줄 시간 같은 건 있을 수 없다.

 

식사를 몇번 챙기고 나자 요령이 생겼다. 우선 플라스틱 통에 환자영양식을 넣고 빨대를 꽂은 뒤 노인들의 입에 물린다. 혹여 흘리진 않는지, 먹고는 있는지 3개의 방을 뛰어다니며 점검했다. 손은 한명의 플라스틱 통에 둔 채 시선은 다른 노인들을 향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빨대를 빨 힘이 없는 노인들은 뚜껑을 열어 직접 먹여야 했다. 시간이 없어 입속에 있는 영양식이 채 식도로 넘어가기도 전에 또 한 숟갈을 밀어 넣었다. 근무 15일차를 넘기자 기자는 10분 안에 2명의 식사를 ‘처리하는’ 기술까지 생겼다. 위생 장갑을 끼고 밥과 반찬을 주먹밥처럼 뭉쳐 입에 넣거나, 국에 밥을 말아 후루룩 먹이는 식이었다. 알약을 가루처럼 만든 뒤 밥이나 국에 뿌려 한번에 먹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어떻게 잘 돌볼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다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개인 속옷과 겉옷이 있지만 대부분 남녀 구분 없는 공동옷을 돌려 입었고, 머리도 모두 짧은 커트 머리로 잘랐다. 관리가 편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손이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요양원에서 ‘요양’은 사라지고 효율만 남았다. 식사 시간 10분 전, 똑같은 앞치마를 둘러매고 반쯤 올린 침대에 앉아 초점 없는 눈으로 밥을 기다리는 노인들의 모습은 소름 끼칠 만큼 일률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한곳에 가두거나 모아 넣는 곳.’ 기자가 한달 동안 지켜본 요양원은 사실상 수용소였다. 오직 죽어야만 ‘퇴소’할 수 있는 수용소. ‘노인 수용소’의 공동생활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소멸시켜 ‘대변 색깔’마저 같은 집단으로 만들었다. 환자영양식을 먹는 노인들의 대변은 양·색깔·묽기까지 정확히 일치했다.

 

경기 부천 ㅇ요양원 입소자인 김은희(가명·79) 할머니는 벽지에 있는 꽃그림을 ‘하느님’이라고 여겼다. 치매 환자인 할머니는 벽지가 해질 정도로 ‘하느님’을 어루만졌다. 종일 누워 지내는 할머니에게 ‘하느님’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대상이었다. 할머니는 퇴근하는 기자를 붙잡고 “혼자 두고 가지 말라”며 울부짖기도 했다.
경기 부천 ㅇ요양원 입소자인 김은희(가명·79) 할머니는 벽지에 있는 꽃그림을 ‘하느님’이라고 여겼다. 치매 환자인 할머니는 벽지가 해질 정도로 ‘하느님’을 어루만졌다. 종일 누워 지내는 할머니에게 ‘하느님’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대상이었다. 할머니는 퇴근하는 기자를 붙잡고 “혼자 두고 가지 말라”며 울부짖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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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변조차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곳

 

“너무 시원하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내가 화장실에서 똥 싸는 게 마지막 소원이었는데, 우리 딸도 안 해주는데, 아이고 고맙다.”

 

출근 2일째 날, 기자는 화장실에 제발 데려가 달라는 95살 박혜자(가명) 할머니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향했다. 보행기 없이 걷기 힘든 혜자 할머니는 평소 화장실에 가지 못하고 기저귀를 통해 용변을 해결했다. 혜자 할머니는 화장실에 데려가 똥을 닦아주는 기자에게 몇번이나 고맙다고 했다. 손등에 뽀뽀까지 해줬다. 그러나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 결과는 처참했다.

 

변기 옆 난간을 잡고 서게 한 뒤 엉덩이를 닦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똥은 닦아도 닦아도 계속 나왔다. 화장실에 오기 전 이미 기저귀에 조금 똥을 싸놓았던지라, 엉덩이 전체에 똥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휴지로 해결되지 않아 물티슈를 가져왔다. 변기는 물론 항문과 엉덩이, 기저귀에 묻은 똥을 치우고 나니 겨울인데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10분가량의 ‘닦기’를 끝낸 뒤 물을 내리려는데 변기까지 막혔다. 급한 대로 휴지와 물티슈를 변기에 넣다 보니 생긴 일이었다.

 

“선생님 어딨어! 바빠 죽겠는데 어디 간 거야? 지담 쌤!” 변기를 뚫고 있는데, 같이 일하는 요양보호사가 기자를 급히 찾았다. 이날은 요양원 2층 노인 18명을 2명의 요양보호사가 돌봐야 하는 날이었다. 당장 뛰어가야 했지만, 혜자 할머니를 버려두고 떠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혜자 할머니를 방에 모셔와 기저귀를 교체하는 데까지 30분가량 소요됐다. 미안한 마음에 동료 요양보호사에게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놨지만 돌아오는 건 꾸중이었다. “그러게 기저귀를 차는 어르신을 왜 화장실에 모시고 갔어?”

 

요양원 입소자 27명 가운데 기저귀를 찬 노인은 16명(59%)이었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요양보호사의 도움 없이 움직일 수 없거나, 치매가 심해 혼자서 대소변을 가릴 수 없는 노인들이었다.

 

변기에 앉아 시원하게 대변을 본다는 건 혜자 할머니처럼 기저귀를 찬 노인들에겐 소원이자 꿈같은 일이었다. 남녀 모두 한번에 3개의 기저귀를 찼다. 겉에 팬티 모양의 대기저귀를 깔고, 그 안에 일자형 기저귀를 댄 뒤 기저귀를 돌돌 말아 성기 부분에 하나 더 대는 식이다. 소변을 볼 경우 성기를 감싼 기저귀만 교체된다. 일자형 기저귀는 대변을 봤을 때만 교체된다. 변비 탓에 노인들 대부분이 최소 3일 동안 같은 기저귀를 차고, 가장 바깥쪽 대기저귀는 2주가량 교체되지 않는다. 오래 교체되지 않다 보니 기저귀가 찢어져 흡수제인 ‘고흡수성수지’ 알갱이가 몸에 자주 묻어 있었다.

 

더 끔찍한 건 대소변을 봐도 기저귀가 곧장 교체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기저귀 케어는 △새벽 6시 △오전 10시 △오후 2시20분 △저녁 7시30분 △밤 11시20분으로 하루 5번 이뤄졌다. 오전 10시를 넘겨 대변을 본 노인은 오후 2시20분까지 4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 탓인지 노인들은 꼬리뼈에 욕창을 달고 살았다. 기저귀를 교체할 때면 노인들은 사타구니를 손으로 벅벅 긁어댔다.

 

그나마 기저귀에라도 변을 볼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79살 최교실(가명) 할머니는 괄약근에 힘이 없어 스스로 변을 보지 못한다. “똥 나온다, 똥 나와… 계속 나와. 선생님, 이것 좀 버려주세요.” 목욕 나간 교실 할머니의 침구를 정리하고 있던 기자를 동료 요양보호사가 급히 찾았다. 구멍이 뻥 뚫린 목욕 변기 아래로 초록색 똥이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요양보호사가 아랫배를 누르자 5분 동안 대변이 쉬지 않고 나왔다. 포도 3송이보다 크고 묵직한 변은 2㎏ 아령보다 무거웠다. 목욕 때면 요양보호사들은 할머니의 배를 눌러보곤 했다. 이날 할머니가 본 대변은 자그마치 10일치였다.

 

교실 할머니는 요양원에서 유일하게 콧줄로 물과 음식을 섭취하는 입소자다. 언제 콧줄을 잡아 뺄지 모르는 탓에 할머니는 항상 오른손이 침대에 묶여 있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지내는 교실 할머니는 콧줄로 경관식이 들어갈 때만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할머니가 10일 동안 변을 보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교실 할머니는 스스로 먹지도, 스스로 변을 보지도, 스스로 곡기를 끊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 버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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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없으면 되니까” 요양원을 택한 이유

 

“친구 아들 손잡고 들어왔지. 애들이 못 가게 하니까.” 87살 박옥순(가명) 할머니는 지난해 7월 자발적으로 요양원에 들어왔다. 할머니는 대소변을 직접 해결했고, 식사도 문제가 없었다. 보행기만 있으면 어디든 혼자 힘으로 다닐 수 있었다. 옥순 할머니는 요양원에서 기자와 대화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노인 가운데 한명이었다.

 

“여기서 2년, 여기서 3년, 여긴 2년, 2년, 2년 살았지.” 아들 다섯, 딸 하나 육남매를 둔 옥순 할머니는 11년 동안 자식들의 집을 이동해 다녔다. 아들 5명이 2~3년씩 돌아가며 옥순 할머니를 모시는 과정은 순탄했다. 딸까지 여섯이 할머니의 생활비를 공평하게 부담했고, 불화는 없었다. 할머니는 그저 함께 나이 들어가는 며느리들이 눈에 밟혔다고 했다. “내 밥, 나물 3가지, 찌개 이렇게 5가지를 매일 두번씩 차렸어. 내 밥 하려면 며느리들이 땀을 비 오듯이 흘려. 나 하나만 없어지면 자기들(며느리)이 숨 쉬니까.”

 

“엄마가 우리를 어떻게 키웠는데…. 자식이 여섯이나 되는데 엄마를 요양원에 보낸다고?” 옥순 할머니의 ‘독립 선언’에 자식들은 ‘자신들을 불효자로 만들지 말라’며 길길이 뛰었다. 첫째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 남편을 잃은 할머니는 충청도 시골에서 과일 장사를 하며 육남매를 키웠다. 자식들의 반발에도 할머니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요양원 한달에 60만원이니까 여섯명이 10만원씩 내면 되는 거지. 이렇게 있다가 위(하늘)에서 부르면 가려고.” 옥순 할머니는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옥순 할머니를 제외한 노인들에게 요양원 입소는 자발적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거동이 불편해졌거나, 치매가 심해져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노인들이 가족의 손에 이끌려 요양원에 왔다. 노인장기요양보호법에 따라 보건복지부 산하 국민건강보험공단은 65살 이상 또는 65살 미만 노인성 질환 대상자 중 52개 항목을 방문 조사해, 1~5등급까지 장기요양 등급을 부여한다. 등급을 받은 노인이 요양원에 입소하면, 정부는 소득과 등급에 따라 장기요양급여의 80~100%를 지원한다. 기자가 일했던 ㅇ요양원의 한달 본인부담금을 보면, 1등급은 42만1820원, 3~5등급은 36만940원을 내야 했다. 여기에 27만1450원의 식대를 더 낸다. 입소자 27명 가운데 △1등급은 1명 △2등급은 8명 △3~5등급은 17명 △등급을 받지 않은 사람은 1명이었다.

 

75살 한현주(가명) 할머니는 사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요양원에 입소한 경우다. 현주 할머니는 15년 전만 해도 아들 부부, 손자 2명과 함께 살았다. 하지만 손자들이 성장하면서 방 두칸짜리 59㎡(18평) 집에 할머니가 설 곳은 없었다. 2004년 현주 할머니는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재작년 8월 사고만 아니었다면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화장실에 다녀왔는데도 소변이 많이 마려웠던 건지 전기장판에 오줌을 지렸어. 그걸 모르고 이불 위에 누우려다 미끄러져서 정신을 잃었어. 혼자 방에 쓰러져 있던 걸 근처 목사가 발견해 병원에 갔는데, 목사님이 안 왔더라면 큰일 날 뻔했지.” 현주 할머니는 그 뒤로 트라우마가 생겼다. 병원 입원 한달이 지날 무렵, 아들이 요양원을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내 생각에도 넘어져서 온몸에 피멍이 드는 것보단 요양원이 안전하겠더라고.”

 

요양원에 입소한 각자의 사연은 달랐지만, 요양원에 들어오는 순간 바깥 세계와 단절되는 건 모두가 같았다. 면회와 외출엔 아무런 제한이 없었지만, 찾아오는 이도 나가는 이도 거의 없었다. 노인 27명 가운데 1~2명만이 가족이 일주일에 1~2번 찾아와 10분 남짓 머물다 갔다. 나머지 노인들은 명절에만 겨우 가족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요양원에 자발적으로 입소한 옥순 할머니 역시 마찬가지다. 기자가 근무하는 한달 동안 여섯 남매 중 아무도 요양원을 찾지 않았다. 자신의 모습이 초라해 스스로 세상과 단절하기도 했다. “나는 보행기가 없으면 못 서. 친구들은 이런 굽 신고 또각또각 다니는데 난 보행기 끌고 가라고? 그런 모습 안 보이려고….” 요양원에 오기 전 교회 권사였던 옥순 할머니는 2박3일로 놀러 가자는 교회 친구들에게 ‘요양원장이 외박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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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고 고통스러운 병 ‘치매’

 

요양원 입소자의 90%는 치매를 앓고 있었다. “내 방이 어디지?” 이틀에 한번꼴로 자신의 방을 묻거나, 식사 직후 “우리 밥 먹을 때 됐나?” 묻는 건 ‘귀여운 치매’였다. 폭력성을 띠는 치매 노인은 요양보호사들도 꺼리는 기피 대상이었다.

 

81살 황복수(가명) 할아버지가 그런 경우다. 키 180㎝ 건장한 체격의 복수 할아버지는 폭력·욕·침뱉기 ‘3종 세트’를 갖추고 있어, 요양보호사들조차 두려움에 떨었다. 불안정한 정신과 달리 힘은 20대 청년만큼이나 셌다. 고관절 수술로 전신이 딱딱하게 굳은 복수 할아버지는 답답함을 폭력으로 분출했다.

 

“야이 썩어질 ×들. ××년, ×발.” 요양원 근무 11일째인 2월8일. 면도를 위해 복수 할아버지에게 다가가자 어김없이 욕설이 날아들었다. 힘겹게 양손을 움직여 요양사의 팔과 옆구리를 꼬집기 시작했다. 아랑곳없이 면도를 시도하자 침을 뱉었다. 침은 그대로 기자의 얼굴에 날아왔다. 결국 동료 요양보호사가 할아버지의 얼굴을 잡고 입을 막았다. 기자는 그 틈에 재빨리 면도를 끝내야 했다. 당연히 면도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피가 날까 턱 아랫부분은 면도를 포기했다. 베테랑이 아니면 혼자 기저귀를 교체할 수도 없었다. 양치해줄 때도 칫솔을 물거나 양칫물을 너무 세게 뱉다 보니 양치를 시키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식판을 엎을까봐 별도의 서랍장을 가져와 그 위에 식판을 놓고 멀찌감치 떨어져 먹일 정도였다. 치매 환자들의 과민 반응과 폭력성은 일몰이 다가올수록 심해졌다. ‘석양증후군’ ‘일몰증후군’이라고 했다. 하루의 끝이 생의 끝으로 여겨지는 걸까.

 

폭력은 쉽게 전염됐다. 복수 할아버지 옆 침대인 82살 허태식(가명) 할아버지의 치매도 나날이 폭력적으로 바뀌었다. “밥 빨리 줘.” 식사 시간 10분 전 복수 할아버지가 침대 난간을 흔들기 시작하자 태식 할아버지도 밥상을 두드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두 사람의 언쟁이 싸움으로 번질 뻔한 적도 있었다. 복수 할아버지가 소리를 지르자 태식 할아버지가 살기 띤 눈으로 복수 할아버지를 노려봤다. “뭐라고 이 새끼야? 죽여 버릴 거야.” 다리가 마비되지 않았다면, 손에 뾰족한 흉기라도 들려 있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치매가 심할수록 가족의 방문은 적었다. 요양원 근무가 끝나갈 무렵인 2월24일. 태식 할아버지의 부인과 딸이 처음 요양원을 방문했다. 할아버지는 아내를 알아보지 못한 채, 가족을 안내하는 기자의 멱살을 잡으려고 발버둥쳤다. “원래 저래요? 치매 약을 먹어서 이럴 리가 없는데….” 남처럼 몰라보게 변해버린 모습에 충격을 받은 아내는 10분도 머물지 않고 떠났다.

 

치매는 그렇게 자신을 죽이고, 주변 사람들까지 병들게 했다. 오죽하면 대통령이 국가가 돌봐야 한다며 ‘치매국가책임제’를 시작했을까. 문제는 치매 노인이 갈수록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보건복지부 산하 중앙치매센터의 ‘대한민국 치매 현황 2018’을 보면, 우리나라 치매 환자 수는 70만명을 넘어섰다. 65살 이상 노인 인구가 706만여명인 것을 고려하면, 노인 10명 가운데 1명이 치매 환자다. 치매 환자는 2024년엔 100만명이 넘고, 2060년엔 330만명을 넘어설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인천 ㅊ요양원에서 식사를 거부하는 노인에게 기자가 환자 영양식과 약을 함께 먹이려고 하고 있다. 요양원에서 노인들이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식사를 거부하는 것이다.
인천 ㅊ요양원에서 식사를 거부하는 노인에게 기자가 환자 영양식과 약을 함께 먹이려고 하고 있다. 요양원에서 노인들이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식사를 거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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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제정신이 아닌 게 낫지”

 

2월16일 요양원 근무 19일째. 3층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기자를 현주 할머니가 조용히 불렀다. “선생님, 나 오늘 밤부터 기저귀 채워줘.” 현주 할머니는 치매 증상도 없고 대소변도 가릴 수 있는, 요양원에서 가장 건강한 노인이었다. 수십년 전 교통사고와 최근 미끄러짐 사고로 장애 2등급 판정을 받아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지만, 기저귀를 찰 정도는 아니다.

 

“옆에 할머니가 새벽에 오줌 싸는 거 냄새난다고 하루 종일 중얼거리잖아. 그냥 내가 기저귀를 차는 게 낫겠어.” 2월8일 다른 요양원에서 옮겨온 79살 박순이(가명) 할머니 이야기였다. 순이 할머니는 예민했다. 301호에 온 첫날부터 ‘텔레비전 소리가 너무 크다’는 이유로 같은 방에 사는 81살 조선중(가명) 할머니와 언쟁했다. 결국 303호로 옮겼다가 며칠 전 그 방은 ‘어둡고 냄새가 난다’며 301호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현주 할머니의 소변기를 문제 삼았다. 수면제를 먹고 잠드는 현주 할머니가 캄캄한 새벽에 혼자 화장실에 가는 건 위험했다. 요양원은 침대 옆 이동변기에 소변을 보게 했는데, 순이 할머니가 며칠째 현주 할머니에게 타박을 준 것이다. 결국 현주 할머니는 밤에만 기저귀를 차기로 결정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전문가들은 치매 환자와 치매가 없는 환자의 돌봄이 따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경기 안성에서 14년 동안 요양원을 운영했던 전직 원장 김영주씨는 “치매 환자와 일반 환자를 같은 방에 둘 경우, 일반 환자의 인권과 권리가 훼손되고 치매 환자는 치매 환자대로 집중 케어가 어렵다”며 “치매·일반 환자 사이 칸막이를 두고 싶어도 소방법에 위배돼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실제 순이 할머니와 현주 할머니의 밤소변 문제에서 가장 좋은 해결책은 ‘분리’였다. 하지만 ㅇ요양원엔 남는 방이 없었고, 현주 할머니가 1인실로 이동하려면 매달 10만원을 추가로 내야 했다.

 

“차라리 제정신이 아닌 게 나아.” 요양보호사들은 인지가 또렷할수록 버티기 힘든 곳이 요양원이라고 입을 모은다. 특히나 한방에 있다는 건 서로의 알몸을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정신이 온전할수록 수치심이 클 수밖에 없다. 같은 방의 노인들은 ‘한 세트’로 같은 날 목욕을 했다. 방에서 옷을 다 벗은 채 가로세로 0.5~1m짜리 네모난 욕창 매트를 목에 걸고 복도를 지나 목욕실로 이동해야 한다. 조그만 욕창 매트는 몸을 다 가리기엔 턱없이 작았다. 목욕이 끝난 뒤에도 방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옷을 입을 수 있었다. 목욕 중 면회자가 있어도 예외는 없다. 요양원 근무 마지막 날인 2월28일. 86살 명희숙(가명) 할머니의 아들이 찾아왔지만, 아무도 목욕을 위해 발가벗은 89살 신이숙(가명) 할머니의 몸을 가려주지 않았다. 희숙 할머니의 아들이 이숙 할머니 옆 침대에 앉아 ‘알아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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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러 오는 곳…요양원은 현대판 고려장

 

평균 나이 87살. 이곳 노인들은 70대부터 100대까지 나이와 상태는 달랐지만,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점에선 모두가 같았다. 노인들은 요양원에 오래 있을수록, 나이가 많을수록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박혜자만 예뻐하고, 나는 밥도 안 주고…. 내가 언제까지 살아야 하나 싶어 자꾸 서러워 눈물이 나요. 엄마 생각에 눈물이 나요.”

 

2월25일 최고령자 방인 204호에 사는 97살 최미자(가명) 할머니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미자 할머니 손에는 보라색에 흰 무늬 수면양말이 씌워져 있었다. 치매 환자인 미자 할머니가 기저귀를 풀어 ‘똥칠’을 하는 걸 막기 위해 요양원은 1년 365일 할머니 손에 수면양말을 씌워놨다. 노란 테이프가 손목에 칭칭 감긴 수면양말 위로 환자영양식이 담긴 플라스틱 컵을 들고 있던 미자 할머니는, 기자가 떠주는 죽을 받아먹는 혜자 할머니를 보자 갑자기 서러워졌다고 했다. “죽고 싶어. 나는 언제까지 살아야 해요?” 외로움과 설움이 복받친 미자 할머니는 절규했다.

 

2월12일 정순실 할머니가 떠나고, 2주가 채 안 된 2월24일 89살 박원식(가명) 할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순실 할머니가 숨진 다음 날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해 병원으로 옮겨진 원식 할아버지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기자가 요양사로 일한 한달 동안 2명의 노인이 죽음으로써 요양원을 퇴소했다. 가족과 함께 살게 됐다거나, 건강이 나아졌거나 등 다른 이유로 요양원을 벗어나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가족들은 전문적인 돌봄을 받으며 사시라고 노인들을 요양원으로 보낸다. 하지만 요양원에 들어온 노인들은 하루만이라도 더 빨리 죽여달라고 애원한다. “사실 요양원에 데려다 놓는 거, 자식들 욕심이지 효도가 아니야. 말도 못 하고 누워 있는 어르신들 영양제 맞히고 수면제 먹이고, 얼마나 고통스럽겠어? 요양원이 살려고 오는 곳이야? 죽으려고 오는 곳이지.” 요양보호사들은 요양원을 ‘고려장’이라고 불렀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장수 기원이 ‘덕담’이 아닌 ‘욕’이 되는 이곳. 요양원은 ‘현대판 고려장’이다.

 

글·사진 권지담 기자 gonji@hani.co.kr

 

▶ 관련기사 바로가기 : 노인요양원 체험르포(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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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이 실시한 일본의 ‘재벌 해체’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9/05/13 11:50
  • 수정일
    2019/05/13 11:5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자주적 경제민주화의 길(3)] 자유주의적 경제민주화 사례② 일본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펼치고 있는 나라들이 경제민주화를 시도한 사례에 대해 알아본다. 사례는 미국, 일본, 이스라엘 총 3편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쓰이고 있는 ‘재벌(財閥)’의 원조는 일본이다. 일본의 재벌(자이바쓰)은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탄생해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미국이 일본전역에 단행한 경제민주화 정책으로 인해 해체의 길을 맞는다. 일제시기 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을 강제노역 시킨 기업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일본 재벌기업 ‘미쓰비시’의 형성과 해체의 과정, 그리고 오늘날에도 강력한 ‘기업집단’으로 남아있는 ‘미쓰비시’의 역사를 보면 일본재벌이 걸어온 역사를 알 수 있다.

▲ 사진 : 뉴시스

일본 재벌의 탄생

메이지유신 후 메이지 정부는 ‘부국강병과 산업융성’을 국시로 내걸었다. 이 시대적 흐름을 타고 부를 쌓아 일본 경제에 영향력을 행사한 주역이 바로 ‘일본재벌’들이다.

미쓰이, 스미토모, 미쓰비시, 야스다가 일본의 4대재벌로 꼽힌다. 이들은 일본패망 이전까지 일본의 광업·공업·상업 등 주요산업 및 금융부문을 장악해왔다. 이 4대재벌이 일본 기업자본의 25% 이상을 차지할 정도였다.

일본재벌은 일본 군국주의 시대에 특정 동족(혈족)이 지배하는 거대기업이었다. 창업자 일족들이 일본재벌의 최상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아래 본사가 직계회사의 주식을 보유하고, 이들 직계회사들이 자회사와 손자회사들을 거느리는 구조다. 때문에 최정상의 창업자 일족에 부가 집중된다.

일본재벌은 또 ‘정치상인(정상)’이라 불린다. 정치권력과 밀착해 부를 축적한 기업을 뜻한다. ‘미쓰이’는 메이지 정부의 화폐 정책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그룹을 키웠고, ‘미쓰비시’의 경우 정부의 대만출병 당시 전쟁전략물자의 수송을 맡아 정부의 신뢰를 얻은 뒤 정부의 지원으로 해운업을 독점했다. 조선출병에서도 병력과 물자 수송을 담당했다. 메이지 정부가 만든 조선소 ‘나가사키조선소’는 미쓰비시 소유이며, 미쓰비시는 또 항공모함과 전투기를 생산하며 성장의 토대를 만들었다. 미쓰이 광산, 미쓰비시 광업과 중공업, 스미토모 금속공업 모두 일본의 전쟁수행 능력을 더욱 강화시키는 기업이었다.

미군정에 의한 재벌해체

정부의 침략행위에 동조하고, 일본 군국주의의 경제적 토대로 자리 잡으며 부를 축적해 온 일본재벌은 그 이유로 하여 해체의 길을 걷는다.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일본을 점령한 미국은 일본전역에 경제민주화를 위한 3대 개혁을 실시한다. 경제민주화 정책은 농지개혁, 노동조합육성, 산업민주화정책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는데, 재벌해체는 산업민주화정책의 일환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미 연합군은 일본이 어떻게 세계를 상대로 한 전쟁을 벌일 수 있었는지 전쟁자금원을 추적한 결과 ‘부가 집중돼 있는 돈 많은 자산가층들이 전쟁수행에 협력했다’고 판단,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경제적 측면에서 저지하기 위해 재벌해체를 시작한다. 일본의 비군사화와 더불어 일본재벌 해체의 또 하나의 목적은, 재벌의 독점을 해체하고 미국식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확립하기 위함이었다.

1945년 11월 유엔군최고사령관총사령부(GHQ)는 최고사령관 각서 ‘지주회사 해체에 관한 건’에서 재벌해체의 기본방향을 제시하고 직접 재벌해체에 나선다. GHQ에 의한 재벌해체 작업은 ▲지주회사의 해체 ▲재벌가족의 기업지배력 배제와 경영진의 전면적 교체 ▲주식소유의 분산화 등 세 가지 특징이 있다.

GHQ는 재벌해체 작업이 진행되는 기간 중 재벌자산의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4대재벌 본사의 자산을 동결하고 ‘지주회사정리위원회’를 설치한다. 지주회사정리위원회는 지주회사를 지정하고, 지주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산하 회사의 주식을 접수받아 그 주식을 매각 또는 처분하며, 재벌기업과 재벌가족의 독점적 지배를 배제하기 위해 지주회사와 재벌가족이 보유한 소유재산을 양수·관리한다. 그들이 보유한 유가증권은 양도 및 처분하는 조치를 취한다.

또, 1948년 제정된 ‘재벌동족 지배력 배제법’에 의해 재벌가족 및 주요 재벌회사의 임원으로 중요한 업무의 운영에 참여하고 있는 재벌 관계 임원 등은 임원직에서 추방된다. 이에 앞서 1947년 12월엔 ‘과도경제력 집중 배제법’을 제정, 과도집중기업을 지정하고 재벌관련 기업들을 분화해 규모를 축소시키기도 한다.

이와 같은 재벌해체 작업으로 인해 재벌본사가 독점했던 주식은 자본시장으로 흩어지고, 재벌본사가 산하 기업을 강력하게 지배하던 일본의 재벌구조는 붕괴된다. 미쓰비시의 경우 업종별로 분해된다.

한편, 1947년 제정된 ‘사적독점의 금지 및 공정거래의 확보에 관한 법률(독점금지법)’은 재벌해체 효과를 지속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독점금지법은 사적독점 및 부당거래, 불공정 거래 등을 규제했다. 특히 이 법률 4장(주식의 보유, 임원의 겸임, 합병, 분할 및 사업의 양수) 부분엔 사업 지배력이 과도하게 집중될 회사의 설립을 제한하거나 신고할 의무, 회사의 주식보유에 대한 제한과 신고의무, 합병의 제한과 신고의무, 탈법행위 금지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독점금지법은 과거 재벌본사의 기능을 담당했던 지주회사를 금지함은 물론, 일반 회사들이 다른 회사의 주식을 보유하는 것 역시 크게 제한해 재벌의 부활을 방지하고, 사업지배력의 과도한 집중이 발생하거나 경쟁제한적인 시장구조가 형성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해 공정하고 자유로운 시장경쟁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구재벌의 재결합… ‘기업집단’ 형성

그러나 강력했던 재벌해체 정책은 오래가지 못한다. 일본 구재벌기업들은 ‘기업집단’ 형태를 이루며 재편되는데, 그 과정 역시 미국의 정책과 관련된다.

1950년 전후 중국이 부상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일본을 통해 아시아 전략을 꾀한다. 미국이 반공의 기지로써 일본의 경제력을 적극 활용하기 위해 일본경제를 약화시키는 조치를 수정, 재벌해체 정책의 변경을 가져온다. 일본재벌 해체 관련 제법령의 폐지와 독점금지법의 개정으로 기업의 독과점 규제를 대폭 완화한다.

구재벌계 기업의 재통합 작업, 즉 쪼개졌던 그룹이 잇따라 합병하는 등 그룹통합도 시작된다. 해체된 구재벌기업들이 ‘기업집단’이라는 새로운 기업형태로 재편성되거나 재결합하는 것이다.

미쓰비시의 경우, 미쓰비시상사가 부활하고, 신미쓰비시중공업·미쓰비시일본중공업·미쓰비시조선은 1964년 합병해 다시 ‘미쓰비시중공업’이 된다. 미쓰비시제강·미쓰비시강재도 같은 해에 합병돼 ‘미쓰비시제강’으로 다시 출범한다. 이 미쓰비시그룹은 현재 미쓰비시 상사, 미쓰비시 중공업 등이 속해 있는 가장 결속력이 강한 일본의 기업집단이다.

GHQ에 의한 일본재벌 해체는 일본의 경제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일본의 기업집단은 1947년에 제정된 독점금지법이 순수 지주회사를 금지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대주주가 없는 상호주식보유를 통해 기업집단을 형성했다. 재벌이 수직적인 피라미드 형태의 소유·지배가 이루어졌다면, 기업집단의 형태는 ‘경영’과 ‘소유’가 분리된 형태다. 경제력과 소유까지도 특정의 개인 및 그 가족에게 집중돼 있는 한국의 재벌과는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재벌은 재벌 총수가 경영까지도 장악하는 반면, 일본은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위임하고 있다.

기업지배 구조가 다른 일본의 재벌과 한국의 재벌. 일본에선 전쟁을 거친 후 미군정에 의해 재벌이 해체된 반면, 한국에선 일제 패망 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로부터 일제가 남긴 재산(적산)을 헐값에 불하받은 자본가들, 그들은 이후 재벌을 형성하며 현재까지도 동족, 혈연관계로 계열사를 거느리며 거대기업과 자본을 운영하고 있다.

조혜정 기자  jhllk20@gmail.com

관련기사icon‘자유 시장경제’ 위해 독점자본 규제한 미국icon경제민주화에 대한 4가지 접근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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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일개념 바꿔놓은 천하무적 미사일의 출현

[개벽예감 347] 미사일개념 바꿔놓은 천하무적 미사일의 출현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9/05/13 [09:13]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이야기는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 화력타격훈련에 출현한 조선의 신종 미사일

3. 항모타격단의 미사일방어망 뚫어버리는 신종 미사일

 

 

1. 이야기는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9년 4월 1일 <자주시보>에 실린 ‘핵협상 결렬시킨 트럼프, 텔레미트리 점검하는 전략군’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예측했다. 

 

“미국군 전자정보수집기가 조선에서 발신된 텔레미트리 신호를 지난 3월 25일부터 몇 차례 감청한 것은 조선인민군 전략군이 미사일위협발사를 준비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뚜렷한 징후로 된다. 조선인민군 전략군이 텔레미트리를 점검한 그 미사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미사일인지 알 수 없지만, 201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 창건 70주년 열병식에 처음 등장했던 최신형 고체연료미사일인 것으로 생각된다.” 

 

위와 같은 예측은 그 글이 발표된 때로부터 약 한 달 뒤 우리의 눈앞에 현실로 나타났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지도 밑에 조선인민군 화력타격부대들의 신속반응능력을 판정검열하기 위한 훈련이 2019년 5월 4일과 9일 각각 진행된 것이다. 5월 4일에는 동부전선 화력타격부대들이 함경남도 금야군 호도반도로 기동전개하여 화력타격훈련을 진행하였고, 5월 9일에는 서부전선 화력타격부대들이 평안북도 구성시 인근으로 기동전개하여 화력타격훈련을 진행하였다. 대구경 방사포를 운용하는 부대들, 대구경 자행포를 운용하는 부대들, 전술유도무기를 운용하는 부대들이 화력타격훈련에 참가하였다. 

 

5월 4일 화력타격훈련에 참가한 부대들은 동부전선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호도반도에 긴급히 출동하여 훈련개시명령을 받았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예고 없이 불의에 조직한 화력타격훈련”이 호도반도에서 진행되었는데, “언제 어느 시각에 명령이 하달되여도 즉시 전투에 진입할 수 있게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는” 동부전선 화력타격부대들은 김정은 최고사령관의 명령을 받자마자 “화약에 불이 달린 것처럼 번개같이 기동하여 화력타격준비를 끝내”는 “신속반응능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한편, 5월 9일 화력타격훈련에 참가한 동부전선 화력타격부대들은 서부전선에서 후방으로 멀리 떨어진 평안북도 구성시 인근으로 출동하였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그 어떤 불의의 사태에도 주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만단의 전투동원태세를 갖추고 있는” 동부전선 화력타격부대들은 김정은 최고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기동전개와 화력습격”이 배합된 화력타격훈련을 진행하였다고 한다. <사진 1>

 

▲ <사진 1> 맨위쪽 사진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9년 5월 9일 평안북도 구성시 인근에서 진행된 서부전선 화력타격부대들의 화력타격훈련을 쌍안경으로 관측하는 장면이다. 가운데 사진은 5월 9일 화력타격훈련에 출동한 4축8륜 자행발사차량이 왼쪽 덮개를 열고 전술유도무기 발사대를 수직으로 세우는 장면이다. 맨아래쪽 사진은 5월 9일 화력타격훈련 중에 전술유도무기가 화염과 굉음과 폭풍을 내뿜으며 솟구치는 장면이다. 이 사진에 나타난 발사지점은 평안북도 구성시 인근에 있는 어느 작은 하천의 다리 옆에 있는 도로다. 이런 불특정한 위치에서 전술유도무기가 발사된 것은 조선인민군 화력타격부대들이 전술유도무기를 임의의 장소에서 임의의 시각에 기습발사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조선인민군 화력타격훈련에 대한 워싱턴의 반응이 좀 유별났다. 워싱턴에서 당혹감과 불안감이 표출된 것이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의 반응이 세인의 시선을 끌었다. 미국의 온라인매체 <봑스>가 2019년 5월 4일에 보도한 바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으로부터 조선에서 화력타격훈련이 진행되었다는 긴급보고를 받고 “버럭 화를 냈다(pissed off)”고 한다. 

 

무릇 사람들은 자기의 기존관념을 뒤집어엎는 돌발상황에서 정신적 충격을 받거나 심리적 불안을 느끼곤 하는데, 발칵 뒤집어졌다는 표현이 그런 경우에 잘 어울린다. 이번에 조선에서 화력타격훈련이 두 차례 연속하여 진행된 소식을 듣고 워싱턴이 그야말로 발칵 뒤집어졌다. 서울의 반응도 그와 비슷했다.  

 

워싱턴과 서울이 발칵 뒤집어진 까닭은, 조선인민군 화력타격훈련에 새로운 전술유도무기가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 전술유도무기가 도대체 어떤 무기이기에 워싱턴과 서울이 발칵 뒤집어진 것일까? 조선의 새로운 전술유도무기에 대해 심층적으로 파악하려는 것이 이 글을 집필한 목적이다.

 

조선의 새로운 전술유도무기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복절 69주년을 하루 앞둔 2014년 8월 14일 강원도 원산시 갈마반도에서 미사일 5발이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연속발사되었다. 당시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직접적인 발기와 세심한 지도 속에 개발완성된 초정밀화된 우리 식의 위력한 전술로케트탄시험발사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전술로켓탄 5발은 발사지점으로부터 200~220km 떨어진 동해 해상에 낙탄하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초정밀화된 전술로켓탄이 미국군과 한국군이 파악한 조선인민군의 대구경 방사포나 단거리탄도미사일과는 전혀 다른 비행궤도로 날아갔다는 사실이다. 그 전술로켓탄의 비행궤도는 대구경 방사포의 비행궤도와 비슷했고, 비행거리는 화성-11 단거리탄도미사일의 사거리와 비슷했다. 비행궤도는 대구경 방사포와 비슷한데, 비행거리는 화성-11 단거리탄도미사일과 비슷하였으므로, 미국군과 한국군이 어리둥절하였다. 그로부터 닷새 뒤, 미국군과 한국군은 전술로켓탄발사장면을 보여주는 조선의 언론보도사진을 분석한 끝에 그 전술로켓탄이 화성-11 단거리탄도미사일과 다른 새로운 전술미사일이라고 결론하였다.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2014년 9월 1일 자강도 남동부에 있는 룡림군에서 전술로켓탄시험발사가 또다시 진행되었다. 이번에는 1발이 발사되었는데, 220km를 날아가 동해 해상에 낙탄하였다. 그리고 추석을 앞둔 2014년 9월 6일 갈마반도에서 또 다시 발사된 전술로켓탄 3발이 220km 안팎의 거리를 날아가 동해 해상에 낙탄하였다. 전술로켓탄시험발사는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조선은 2015년 2월 8일 전술로켓탄 5발을 동해 해상으로 또다시 시험발사하였는데, 이번에도 비행거리는 이전과 같이 220km 안팎이었다. 반세기가 넘는 조선의 미사일개발사에서 총11발을 시험발사하는 복잡한 성능판정과정을 거친 미사일은 그 전술로켓탄 뿐이다. 이런 정황은 그 전술로켓탄의 초정밀타격능력을 판정하는 시험을 통과하기가 기술적으로 매우 어려웠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당시 조선은 각종 대구경 방사포와 탄도미사일을 수없이 발사하면서 미국을 드세게 압박하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 전술로켓탄시험발사도 대미압박행동들 가운데 하나이겠거니 하고 가볍게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 전술로켓탄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은 차츰 희미해졌지만, 조선은 그 새로운 전술로켓탄의 초정밀타격능력을 판정한 직후인 2015년부터 계렬생산을 시작하였고, 전선에 주둔하는 화력타격부대들에 실전배치하였다. 하지만 조선 밖에서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사진 2>      

▲ <사진 2> 위쪽 사진은 광복절 69주년을 하루 앞둔 2014년 8월 14일 강원도 원산시 갈마반도에서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전술로켓탄 5발을 연속적으로 시험발사하는 장면이다. 이 전술로케트탄들은 발사지점으로부터 200~250km 떨어진 동해 해상에 낙탄하였다. 아래쪽 사진은 2019년 5월 4일 동부전선 화력타격부대들이 함경남도 금야군 호도반도로 기동전개하여 진행한 화력타격훈련 중에 전술유도무기가 발사되어 하늘로 솟구쳐오르는 장면이다. 2014년 8월 14일에 시험발사된 전술로켓탄은 성능판정시험을 통과하여 2015년부터 실전배치되었고, 2019년 5월 4일과 5월 9일 화력타격훈련에서 사용되었다.     ©

 

조선인민군 화력타격부대들에 실전배치된 새로운 전술로켓탄이 대미압박무력시위에 처음으로 등장한 날은 2017년 8월 26일이다. 미국군이 한국군을 이끌고 ‘을지프리덤가디언’이라는 간판을 내건 북침전쟁연습을 시작한지 엿새가 되던 그날 강원도 원산시 남쪽 안변군에 주둔하는 조선인민군 화력타격부대가 깃대령에 출동하여 새로운 전술로켓탄 3발을 기습발사하였다. 전술로켓탄들은 동해안을 왼쪽으로 끼고 동북방향으로 약 250km를 날아가 함경북도 김책시 앞바다에 낙탄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섯 달이 지난 2018년 2월 8일 평양에서 진행된 조선인민군 창건 70주년 열병식에 그 전술로켓탄을 각각 2발씩 탑재한 자행발사차량 6대가 위용을 드러내었다. 그 장면을 본 서방의 군사전문가들은 조선의 새로운 전술로켓탄이 로씨야의 이스칸데르 미사일와 흡사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미국식으로 왜곡된 러시아라는 국명을 쓰지 말고, 그 나라의 원음표기에 맞는 국명을 써야 한다.) <사진 3>

 

▲ <사진 3> 이 두 장의 사진은 2018년 2월 8일 평양에서 진행된 조선인민군 창건 70주년 열병식에서 새로운 전술로켓탄을 2발씩 탑재한 4축8륜 자행발사차량 6대가 행진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본 서방의 군사전문가들은 조선의 새로운 전술로켓탄이 로씨야의 이스칸데르 미사일과 매우 흡사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군사전문가들이 이스칸데르 미사일과 흡사하다고 말했던 이 새로운 전술로켓탄은 2019년 5월 4일과 9일 조선인민군 동부 및 서부전선 화력타격부대들이 진행한 두 차례의 화력타격훈련에서 사용된 바로 그 전술유도무기다.     

 

2014년 8월 14일부터 2015년 2월 8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총11발을 발사하는 어려운 성능판정시험을 통과하여 마침내 실전배치된 새로운 전술로켓탄, 그리고 2017년 8월 26일 한미연합군 북침전쟁연습에 대응한 대미압박무력시위에 처음 등장한 새로운 전술로켓탄, 그리고 2018년 2월 8일 건군절 70주년 열병식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전술로켓탄은 이번에 동부 및 서부전선 화력타격부대들이 기동전개와 화력습격을 배합한 훈련에서 발사한 바로 그 전술유도무기다. 

 

조선의 언론매체들이 그 새로운 화력타격수단을 언급할 때 전술탄도탄 또는 전술탄도미사일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전술로켓탄 또는 전술유도무기라는 용어를 쓰는 까닭은 그것이 기존 미사일개념을 뛰어넘은 신종 미사일이기 때문이다. 이 신종 미사일은 탄도미사일이 아니기 때문에 화성 계렬 탄도미사일로 분류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평가하면, 조선의 신종 미사일은 탄도미사일의 장점과 순항미사일의 장점만 골라서 융합시킨 사상 최고의 걸작품 미사일이다.  

 

조선인민군 화력타격부대들이 신종 미사일을 운용하기 시작한지도 어언 4년이 지났다. 신종 미사일을 2발씩 탑재한 자행발사차량 12대를 1개 여단이 운용하는데, 조선에는 신종 미사일을 배치한 여단이 최소 3개 이상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추정하는 까닭은, 신종 미사일을 탑재한 3종의 자행발사차량이 출현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정보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한국의 언론매체들은 조선인민군 화력타격부대들이 이번에 신형 미사일을 처음으로 시험발사를 하였다느니, 신형 미사일의 실전배치가 임박했다느니 하며 횡설수설하였다.  

 

 

2. 화력타격훈련에 출현한 조선의 신종 미사일

 

2018년 2월 5일 로씨야 언론매체들은 로씨야가 뽈쓰까와 리뜨바 사이에 있는 로씨야의 역외영토 깔리닌그라드에 이스칸데르 미사일을 전진배치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미국식으로 왜곡된 폴란드, 리투아니아라는 국명들을 쓰지 말고, 그 나라의 원음표기에 맞는 국명을 써야 한다.) 로씨야가 이스칸데르 미사일을 발트해 연안지역에 전진배치한 까닭은, 유럽전선에서 로씨야에게 무력위협을 가증시키는 미국의 도발에 대응하고 차후도발을 차단하기 위한 단호한 행동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로씨야가 이스칸데르 미사일을 깔리닌그라드에 전진배치하자, 도이췰란드의 수도 베를린이 미사일타격권 안에 들었다. (독일이라는 국명은 ‘도이찌’라는 일본식 국명의 한자음을 차용한 일제잔재용어이므로, 쓰지 말아야 한다.) 미국과 서유럽나라들은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며 긴장과 불안을 느꼈다. 왜냐하면, 이스칸데르 미사일은 탄도미사일도 아니고 순항미사일도 아닌 전혀 새로운 개념의 미사일이기 때문이다. 신형 미사일이 아니라 신종 미사일이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적진에서 발사된 탄도미사일 또는 순항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도록 설계된 기존 미사일방어체계는 탄도미사일도 아니고 순항미사일도 아닌 신종 미사일을 요격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이스칸데르 미사일은 전 세계의 모든 미사일방어망을 뚫고 들어가 타격목표를 파괴하는 완벽한 의미의 스텔스미사일인 것이다. 이처럼 이스칸데르 미사일을 요격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미국과 서유럽나라들은 로씨야의 이스칸데르 미사일을 보고 긴장과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진 4> 

 

▲ <사진 4> 위의 사진 네 장은 로씨야가 자랑하는 이스칸데르 미사일을 촬영한 것이다. 2018년 2월 5일 로씨야 언론매체들은 로씨야가 역외영토 깔리닌그라드에 이스칸데르 미사일을 전진배치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적진에서 발사된 탄도미사일 또는 순항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도록 설계된 기존 미사일방어체계는 탄도미사일도 아니고 순항미사일도 아닌 이스칸데르 미사일을 요격하지 못한다. 그래서 미국과 서유럽나라들은 로씨야의 이스칸데르 미사일을 보고 긴장과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미국과 서유럽나라들을 긴장과 불안으로 떨게 만든 이스칸데로 미사일과 외형과 성능이 매우 유사한 신종 미사일이 이번 조선인민군 화력타격훈련에 출현하였다. 미국 국방부와 합참본부는 조선인민군 화력타격훈련에 출현한 신종 미사일이 깔리닌그라드에 전진배치된 로씨야의 이스칸데르 미사일과 같은 급의 최첨단 미사일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차마 그 사실을 공개하지 못하고, 탄도미사일이니 뭐니 하면서 횡설수설하였고, 한국 국방부와 합참본부도 차마 그 사실을 공개하지 못하고 발사체니 뭐니 하면서 횡설수설하였다. 

 

그러나 진실은 횡설수설로 가릴 수 없다. 한국군 합참본부가 발표한 몇 가지 정보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면, 이번 조선인민군 화력타격훈련에 출현한 신종 미사일의 특징과 위력을 파악할 수 있다. 

 

(1) 번개처럼 빠른 신속기동전개 

 

조선의 신종 미사일은 4축8륜 자행발사차량에 탑재되기도 하고, 무한궤도 자행발사차량에 탑재되기도 한다. 4축8륜 자행발사차량은 차체중량이 40톤이고, 탑승인원은 3명이며, 평지운행속도가 시속 70km까지 나가므로, 신속기동전개능력이 뛰어나다. 무한궤도 자행발사차량은 굴곡이 심한 산악지대 또는 장애물이 널려있는 작전지대에서 운행할 수 있으므로, 신속기동전개능력이 뛰어나다. 조선의 신종 미사일을 탑재한 자행발사차량은 산속이나 지하기지, 또는 고속도로 차굴이나 건물 안에 매복하고 있다가 발사명령을 받는 즉시 무징후기습발사를 할 수 있다. 또한 조선의 신종 미사일을 수송기로 실어나를 경우, 신속기동전개능력은 대폭 강화된다. 

 

(2) 벼락같은 연속사격능력 

 

조선의 신종 미사일은 발사명령을 받으면 8분 안에 신속하게 발사할 수 있다. 신종 미사일을 탑재한 자행발사차량 위쪽에는 좌우로 갈라져 절반이 접히면서 여닫히는 철제 덮개가 씌워져있는데, 미사일을 발사할 때 한 쪽 덮개가 열리면, 탄체가 장착된 발사대가 수직으로 세워진다. 신종 미사일은 자행발사차량 1대에 2발씩 탑재되는데, 첫 번째 미사일이 발사되고 두 번째 미사일이 발사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1분미만이다. 2발을 모두 발사하면, 멀리 떨어진 지하기지로 돌아가서 재장전한 다음 다른 발사지점으로 이동하는 게 아니라, 미사일을 실은 재장전차량이 자행발사차량을 따라다니며 미사일 2발이 모두 발사될 때마다 재빨리 보충해준다. 이런 재장전작업은 작전 중에 계속 반복된다. 그러므로 조선의 신종 미사일은 화성 계렬의 기존 탄도미사일들이 따라올 수 없는 뛰어난 연속사격능력을 지닌 것이다. 

 

이번에 조선의 화력타격부대들이 진행한 화력타격훈련은 신종 미사일, 대구경 방사포, 대구경 자행포를 혼합편성한 동시다발-밀집사격훈련이었다. 미사일, 방사포, 자행포를 동시다발-밀집사격하면 거대한 화염구름이 일어나 교전상대를 심리적으로 압도하게 된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로씨야의 이스칸데르 미사일을 탑재한 4축8륜 자행발사차량을 따라다니는 재장전차량이 기중기를 사용하여 그 미사일을 자행발사차량에 옮겨싣는 장면이다. 이스칸데르 미사일 2발이 모두 발사되면, 자행발사차량이 멀리 떨어진 기지로 돌아가서 재장전한 다음 다른 발사지점으로 이동하는 게 아니라, 미사일을 실은 재장전차량이 자행발사차량을 따라다니며 미사일 2발이 모두 발사될 때마다 재빨리 보충해준다. 조선의 신종 미사일도 이런 식으로 재장전된다. 이것은 조선의 신종 미사일이 화성 계렬의 기존 탄도미사일이 따라올 수 없는 뛰어난 연속사격능력을 지녔음을 말해준다.     

 

(3) 신기에 가까운 절묘한 비행궤도 

 

한국군 합참본부의 발표에 따르면, 5월 4일 화력타격훈련에서 발사된 신종 미사일 2발의 최고비행고도는 약 60km, 비행거리는 약 240km였다고 한다. 또한 5월 9일 화력타격훈련에서 발사된 신종 미사일 2발의 최고비행고도는 약 40km, 비행거리는 약 270km와 약 420km였다고 한다. 420km를 비행하는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경우, 최고비행고도는 80km에 이르게 되는데, 조선의 신종 미사일은 420km를 비행하면서도 최고비행고도는 40km밖에 되지 않았다. 조선의 신종 미사일은 기존 탄도미사일에 비해 절반밖에 되지 않는 절묘한 저고도 비행능력을 과시한 것이다. 로씨야가 자랑하는 이스칸데르 미사일의 최고비행고도는 약 50km인데, 조선이 자랑하는 신종 미사일의 최고비행고도는 그보다 좀 더 낮은 약 40km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조선의 신종 미사일이 중간비행구간에서 저고도 수평비행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국군 합참본부의 발표를 보면, 조선의 신종 미사일 4발이 제각기 다른 비행고도로 비행하였고, 제각기 다른 비행거리를 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신종 미사일이 타격방향과 타격목표에 따라 비행고도와 비행거리를 자유자재로 조절하면서 불규칙한 비행궤도로 날아가는 놀라운 성능을 발휘하였음을 말해준다. 

 

탄도미사일은 포물선형 비행궤도를 따라 탄도비행을 하지만, 조선의 신종 미사일은 저고도 수평비행, 수직락하비행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저고도 수평비행 중에 지휘차량이 발신하는 지령에 따라 비행방향을 다른 타격목표로 바꾸는 비행궤도변경도 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저고도 수평비행 중에 무인전략정찰기로부터 실시간 정보를 받아 타격목표를 바꾸는 놀라운 성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순항미사일도 불규칙한 비행궤도로 날아가지만, 음속 이하의 느린 속도로 날아가기 때문에 적진의 미사일방어체계로부터 요격당할 위험이 크다. 그러나 조선의 신종 미사일은 불규칙한 비행궤도를 극초음속(hypersonic speed)으로 날아가기 때문에 규칙적인 비행궤도를 날아가는 탄도미사일이나 아음속으로 날아가는 순항미사일을 요격하는 능력밖에 없는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로는 요격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조선의 신종 미사일은 적진의 미사일방어망을 무용지물로 만들면서 적진 상공을 종횡무진 날아다니는 천하무적 미사일인 것이다. <사진 6> 

 

▲ <사진 6> 위쪽 사진은 2019년 5월 9일 평안북도 구성시 인근에서 조선인민군 서부전선 화력타격부대들이 진행한 화력타격훈련 중에 발사된 신종 미사일이 하늘로 솟구쳐오르는 장면이다.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로켓엔진을 가동하기 때문에 하얀 연기를 많이 내뿜으며 날아간다. 아래쪽 사진은 로씨야군 병사들이 재장전차량의 기중기를 이용하여 이스칸데르 미사일을 4축8륜 자행발사차량에 옮겨싣는 장면인데, 그 미사일의 엔진분사구가 드러나 보인다. 풀색 동그라미로 표시된 것이 보조로켓엔진분사구들이다. 두 개의 분사구가 주력로켓엔진분사구를 중심으로 위쪽과 아래쪽에 각각 있고, 한 개의 분사구가 주력로켓엔진분사구를 중심으로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있다. 비대칭구도로 설치되었다. 바로 이 보조로켓엔진분사구들이 이스칸데르 미사일의 비행고도와 비행거리를 자유자재로 조절하여 그 미사일을 불규칙한 비행궤도로 날아가게 한다. 조선의 신종 미사일에 달려있는 보조로켓엔진분사구들도 이와 똑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4) 경탄을 자아내는 초정밀타격능력 

 

2019년 5월 4일 조선의 언론매체들이 보도한 현장사진들 중에서 군사전문가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사진 한 장이 있다. 그것은 신종 미사일이 종말비행구간에서 극초음속으로 돌진락하하면서 타격목표에 명중하는 장면이다. 그 명중장면에 얽힌 사연을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2019년 5월 4일 함경남도 금야군 호도반도에서 진행된 화력타격훈련에 참가한 조선인민군 동부전선 화력타격부대들은 함경북도 김책시 앞바다에 있는, 지도에 나타나 있지 않은 아주 작은 돌섬을 향해 신종 미사일 2발을 연속발사하였다. 북동쪽으로 날아간 그 미사일 2발은 발사지점에서 약 240km 떨어진 돌섬에 설치된 가로 5m, 세로 5m, 높이 3m의 사각립면체 타격목표에 명중하였다. 현장보도사진에 나타난 낙하각도를 관찰하면, 사각립면체 정중앙에서 1m 정도 오른쪽으로 비껴나간 부위에 명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놀라운 명중장면은 신종 미사일의 타격오차범위가 5m라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로씨야가 자랑하는 이스칸데르 미사일의 타격오차범위는 5~7m인데, 조선의 신종 미사일도 그와 같은 세계 최고 수준의 초정밀타격능력을 지닌 것이다. <사진 7>

 

▲ <사진 7> 2019년 5월 4일 강원도 원산시 갈마반도 해안에서 김정은 최고사령관의 현지지도 밑에 진행된 화력타격훈련에서 조선인민군 동부전선 화력타격부대들은 함경북도 김책시 앞바다에 있는 작은 바위섬을 향해 신종 전술유도무기 2발을 발사하였다. 신종 전술유도무기 2발은 최고비행고도 약 60km를 유지하면서 약 240km를 비행하였다. 왼쪽 사진은 신종 전술유도무기가 240km 떨어진 바위섬에 설치된 가로 5m 세로 5m, 높이 3m의 사각립면체 타격목표에 극초음속으로 돌진락하하는 장면이고, 오른쪽 사진은 타격목표에 명중되어 화염폭발이 일어나는 장면이다. 낙하각도를 자세히 보면, 사각립면체 타격목표의 정중앙에서 약간 비껴나간 오른쪽 부위에 명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조선에서 발사된 신종 미사일의 타격오차범위가 약 5m라는 놀라운 사실이 입증되었다. 그런데 위의 사진을 자세히 보면, 화염폭발한 사각립면체 타격목표보다 더 작은 사각립면체 타격목표가 바위섬 왼쪽 상단에 설치된 것이 보인다. 이 사진은 조선인민군 스텔스무인전략정찰기가 공중에서 촬영한 것이다.     

 

어떻게 그처럼 신묘한 초정밀타격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이 의문을 풀어준 실마리는 조선의 신종 미사일이 타격목표에 명중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 속에 있었다. 돌섬 상공에 띄워놓은 무인전략정찰기가 촬영한 그 사진은 신종 미사일의 초정밀타격과 무인전략정찰기의 상관관계를 말해준다. 

 

조선의 신종 미사일이 발사될 때, 조선인민군 화력타격부대에 배속된 정보처리차량은 지휘차량과 자행발사차량을 따라다니면서 스텔스무인전략정찰기가 실시간으로 보내주는 전자영상정보를 컴퓨터로 분석하여 신종 미사일의 극초음속 돌진락하비행을 조종하면서 초정밀타격이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조선의 신종 미사일은 중간비행구간에서 위성항법장치와 관성항법장치를 이중으로 사용하여 저고도 수평비행을 하다가, 타격목표에 가까운 종말비행구간에 이르면 타격목표 인근 상공에 미리 출동하여 은밀히 잠복비행을 하는 스텔스무인전략정찰기로부터 실시간 전자영상정보를 받아 전자광학영상유도장치(Electro-optical Digital Scene Matching Area Correlation, DSMAC)를 가동하면서 타격목표를 향해 극초음속으로 돌진락하비행을 하는 것이다. 전자광학영상유도장치는 신종 미사일의 전투부 첨두에 들어있다. <사진 8>

 

위에 서술된 내용은 상상 속에서 꾸며낸 소설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조선인민군은 최신정보통신기술인 동영상압축기술과 DS-SS통신기술이 도입된 최첨단 동영상송신통제체계인 GR-510을 사용하고 있으며, ‘방현-5’라고 부르는 스텔스무인전략정찰기를 2016년에 실전배치하였으며, GS-2200이라고 부르는 최첨단 정보통신장비가 설치된 전술지휘차량을 운용하고 있다. 이런 최첨단 장비들이 연결된 최첨단 전자정보체계로 신종 미사일의 비행을 유도하면, 정밀타격수준을 뛰어넘어 초정밀타격을 능히 할 수 있다. 자동항법장치만 사용하여 정밀타격을 하는 기존 탄도미사일은 타격오차범위가 30~70m에 이르지만, 전자광학유도장치를 사용하여 초정밀타격을 하는 조선의 신종 미사일은 타격오차범위가 5m로 대폭 줄어든다. 

 

(5) 상상을 초월한 파괴력 

 

로씨야가 자랑하는 이스칸데르 미사일 전투부에는 타격목표에 따라 고폭탄, 산포탄(집속탄), 관통탄 중에서 어느 한 가지가 선택적으로 장착된다. 조선에서는 그 밖에도 파편지뢰탄, 지하침투탄, 흑연탄을 더 장착한다. 고폭탄은 레이더기지 같은 고정목표를 공격할 때 사용하고, 산포탄은 보병부대나 기갑부대를 공격할 때 사용하고, 관통탄은 견고한 지휘통제시설이나 방호시설을 공격할 때 사용한다. 파편지뢰탄은 비행장 활주로나 전술도로를 파괴할 때 사용하고, 지하침투탄은 지하시설을 공격할 때 사용하고, 흑연탄은 전력공급망을 물리적 파괴 없이 단절시킬 때 사용한다. 

 

조선의 신종 미사일 전투부에 장착되는 것 중에는 50킬로톤급 핵탄두도 있다. 이것은 조선이 신종 미사일을 사용하여 핵전자기파공격을 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공기밀도가 낮은 50km 고도에서 핵탄이 폭발하면, 핵폭풍은 일어나지 않고, 매우 강력한 전자기파(EMP)가 방출된다. 핵폭풍은 일어나지 않고 전자기파만 방출되므로, 50km 아래에 있는 지상의 생명체들과 구조물들은 손상을 입지 않고 전자장비들과 전기장치들만 파괴된다. 바로 이것이 고공폭발식 핵전자기파공격이다. 조선인민군 화력타격부대들이 이번 화력타격훈련에서 발사한 신종 미사일이 50킬로톤급 핵탄을 기폭시키는 고공핵폭발식 핵전자기파공격에 적합한 40~60km의 고도로 날아갔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3. 항모타격단의 미사일방어망 뚫어버리는 신종 미사일

 

조선처럼 중국도 로씨야의 이스칸데르 미사일과 외형 및 성능이 매우 유사한 신종 미사일을 만들었다. 중국이 만든 신종 미사일은 둥펑-12다. 둥펑-12는 2011년 2월 24일 아랍추장국련방의 수도 아부다비에서 진행된 국제방위산업전시회에서 처음 공개되었고, 2013년부터 중국인민해방군에 실전배치되었다. 조선이 신종 미사일을 실전배치한 시기가 2015년이므로, 중국은 조선보다 약 2년 앞서 신종 미사일을 실전배치한 것이다. 

 

조선과 중국이 각각 신종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었던 시기에 로씨야는 이스칸데르 미사일을 일곱 가지 유형으로 세분화, 다양화, 전문화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일곱 가지 유형 가운데서 외부에 알려진 것은 이스칸데르-M(기본형 미사일), 이스칸데르-K(순항미사일), 이스칸데르-E(해외수출용 미사일) 뿐이고, 그 밖의 네 가지 유형은 비밀에 쌓여있다. 

 

그런데 이스칸데르 미사일의 네 가지 비밀 중에서 한 가지 비밀이 중국 광둥성 주하이에서 2018년 11월 6일부터 11일까지 진행된 중국국제항공항천박람회에서 풀렸다. 중국의 최신형 지대함미사일 CM-401이 그 박람회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4축8륜 자행발사차량에 2발씩 탑재된 이 최신형 지대함미사일은 둥펑-12 지대지미사일의 변종이다. <사진 9>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이스칸데르 미사일의 변종들 가운데 둥펑-12의 변종인 CM-401 지대함미사일과 유사한 지대함미사일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로씨야가 발트해 연안지역인 깔리닌그라드에 전진배치한 이스칸데르 미사일 가운데는 지대지미사일도 있고 지대함미사일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깔리닌그라드에 전진배치된 이스칸데르 지대함미사일이 전시에 발트해에 출동한 미국 해군 항모타격단을 공격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스칸데르 지대함미사일은 미국 해군 항모타격단의 미사일방어망을 뚫고 들어가 초정밀타격으로 항공모함 사령탑을 단 한 방에 완파하는 절묘한 공격을 펼치게 될 것이다. <사진 10>

 

그런 초정밀타격씨나리오는 한반도에서도 그려질 수 있다. 만일 전쟁이 벌어지면, 조선인민군은 신종 미사일을 동시다발-밀집사격으로 집중발사하여 경기도 평택에 있는 미국군기지와 충청남도 계룡대에 있는 한국군 육해공군본부, 그리고 동해에 출동한 미국 해군 항모타격단을 눈 깜빡할 사이에 공격할 것이다. 미국이 믿는 미사일방어체계들인 페이트리엇-3 저고도미사일방아체계와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조선의 신종 미사일의 출현은 위와 같은 초정밀타격씨나리오가 결코 공상소설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님을 말해준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2017년 8월 14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조선인민군 전략군사령부 작전지휘소에서 고위급 군사지휘관들과 함께 괌포위사격계획을 검토하는 장면을 촬영한 조선의 언론보도사진을 보면, 작전지휘소 벽에 게시된 ‘남조선작전지대’라는 제목의 작전지도에는 군사분계선 이남지역을 4개의 미사일타격권으로 구분해놓은 것이 나타나있는데, 평택 미국군기지와 계룡대 한국군 육해공군본부는 조선의 신종 미사일이 조준하는 제2타격권에 들어있다. 그 신종 미사일의 초정밀타격 앞에서 평택 상공과 계룡대 상공은 무방비로 뻥 뚫려 있다. <사진 11>

 

2016년 1월 29일 이란 텔레비전방송은 이란혁명수비군 무인전략정찰기가 페르시아만 해상에서 대이란무력시위를 감행하는 미국 해군 항공모함 해리 트루먼함의 머리 위로 낮게 비행하면서 촬영한 영상자료를 방영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이런 정황은 무인전략정찰기가 미국 해군 항모타격단의 방공감시망을 뚫고 들어갈 수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거대한 코끼리가 자기 급소를 파고드는 생쥐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엄청나게 비대한 항공모함도 자기 급소를 파고드는 무인전략정찰기를 두려워한다. 

 

전시에 조선의 스텔스무인전략정찰기가 동해에 출동한 미국 해군 항모타격단의 방공감시망을 뚫고 들어가면, 조선인민군 화력타격부대들이 신종 미사일을 발사하여 항공모함 사령탑을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다. <사진 12>

 

조선인민군 화력타격부대들이 미사일방어망을 뚫고 들어가는 신종 미사일의 초정밀타격으로 미국 해군 항공모함 사령탑을 한 방에 날려버리면, 그 항공모함은 거대한 10만톤급 고철덩어리로 돌변하여 망망대해를 정처 없이 표류하게 될 것이다. 항공모함을 따라다니는 순양함, 구축함, 호위함, 보급함은 조선인민군 화력타격부대의 초정밀타격과 잠수함대의 집중공격을 공중과 수중에서 연거푸 얻어맞으며 동해의 깊은 바다속에 모조리 수장될 것이다. 핵추진 항공모함이 격침되면 동해가 방사능에 오염될 것이므로, 조선인민군은 항공모함을 격침하지 않고 사령탑만 날려버려 표류시킬 것이다. 동해로 급파된 미국의 구조함과 예인선은 조선의 잠수함대가 펼쳐놓은 수중공격망이 두려워 동해에 감히 들어서지 못하고, 정처 없이 표류하는 10만톤급 난파선에 갇힌 미국 해군 6,000여 명은 식수 및 식량공급이 끊어져 비참한 최후를 맞을 것이다. 조선은 미국 본토 심장부를 날려버릴 핵보복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미국은 항모타격단이 궤멸당해도 조선에게 섣불리 핵공격을 감행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게 될 것이다.    

 

누구나 느끼는 것처럼, 요즈음 정세는 불안정하다. 미국이 조선의 핵무장해제와 정권전복을 노린 리비아식 비핵화 방안을 제기한 것으로 하여 제2차 조미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조미관계와 한반도정세는 핵협상과 핵대결의 갈림길에 들어섰다. 트럼프 대통령이 리비아식 비핵화 방안을 철회하지 않으면, 조선은 미국과 핵협상을 재개하지 않을 것이며, 세상을 놀라게 하는 각종 미사일들을 발사하는 화력타격훈련으로 대미압박강도를 차츰 높이면서 백악관을 옥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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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들 '표준 패권전쟁', 우리는?

[연중기획- 4차산업혁명 시대의 스마트 언어 '표준] ④ 표준전문가 최갑홍 성균관대 교수
2019.05.12 12:27:26
 

 

 

 

4차 산업혁명의 특징은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므로 먼저 진입해 네트워크의 표준을 장악하는 자가 '넘사벽 승자'가 되어버리는 생존 전쟁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표준의 지위를 획득한 특허가 아니면 별로 의미가 없다.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특허기술은 네트워크 시대의 자산이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오히려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즉시 공개하고 네트워크 시대의 표준기술로 인정받기 위해 사활을 걸게 된다. 

현재 전 세계 주요국가들에서는 '도시의 미래'로 불리는 스마트시티를 국가프로젝트로 추진하고 있다. 그 이유는 스마트시티 프로젝트는 단순히 미래형 도시를 건설하려는 사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마트시티는 바로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핵심기술을 연구개발하고 실용화하는 현실적인 집약체의 성격을 지녔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는 스마트시티의 중심은 사람이 되어야한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스마트시티가 소수의 부자나 특권층만 거주할 수 있는 특별한 도시가 되어버린다면, 그것은 4차 산업혁명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경고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스마트시티를 추진하는 국가의 정책이 신산업 개발이라는 발상에 치우칠 경우, 대다수 국민의 삶과 유리된 실패한 도시로 전락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현재 정부는 국가적으로 스마트시티를 완전히 새로 건설하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스마트 신도시 건설사업과 기존 도시들을 '스마트화'하는 도시재생형 스마트시티 사업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스마트시티는 노약자와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 '스마트'하게 살 수 있는 도시를 지향해야 하며, 지역균형발전에 맞게 추진해야 지속 가능한 사업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번 기획은 정부가 국가 핵심 선도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스마트시티를 중심으로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한 표준 등 각종 정책이 제대로 방향을 잡아가고 있는지 점검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번에는 4차 산업혁명시대는 왜 '표준'이 경쟁력의 핵심인지 알아보기 위해 국가기술표준원 원장을 역임한 대표적인 표준전문가로 꼽히는 최갑홍 성균관대학교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를 인터뷰했다. 인터뷰어로는 전자정보통신업계의 표준전문가로 활동하는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KEA) 박순길 센터장이 참여했다.  

최 교수는 “현재 세계 강대국들은 4차 산업혁명의 핵심 수단을 표준으로 보고 패권 전쟁을 벌이고 있다”면서 “정부와 기업이 이 흐름에 선제적으로 동참하지 않으면 하청업체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최 교수는 “스마트시티는 도시 인프라들의 수평적인 통합이 이뤄져야 하고, 이것이 가능하려면 표준이 우선 확립되어야 한다”면서 “현재 국가적인 스마트시티 사업이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는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평가했다. 편집자
 

▲4차산업혁명시대에 표준이 글로벌 패권 전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역설하는 최갑홍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미국의 IT공룡기업들, 표준 전쟁 주도

 


박순길: "21세기의 언어는 표준"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산업계에서는 갈수록 표준의 중요성에 주목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기술의 중요성은 많이 강조되어 왔는데, 표준이 기술을 능가할 정도로 중요한 요소로 떠오른 이유는 뭔가요? 경제 환경, 특히 기술산업 환경의 변화 속에서 표준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말씀해 주시죠. 

최갑홍: 기술이 수월성을 추구한다면, 표준은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이 왜 표준이어야 하는가는 바로 이 '보편성'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표준은 제품이나 서비스의 품질이나 성능을 보장하는 하나의 기준으로서 역할을 해왔다면, 이제는 표준이 생산현장을 뛰어 넘어서 경제사회 전반에서 경쟁력 확보의 핵심 수단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보편성을 지닌 표준이 상호운용성(interoperability)이라는 개념과 결합하는 순간 강력한 시장지배력을 갖게 됩니다. 상호운용성이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등 각종 제품과 서비스들이 서로 정보를 교환하면서 함께 작동하는 요소를 뜻합니다. 네트워크 경제에서 상호운용성을 담보하는 것이 바로 표준입니다. 

만일 누군가 표준을 장악하고 이 표준에서만 작동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관련시장을 독점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현재 세계 강대국들은 표준을 둘러싸고 패권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독일의 경우 4차 산업혁명을 '인더스트리 4.0' '네트워크 경제'로 표현하고 있는데, 국경을 넘어 촘촘하게 연결된 전지구적인 산업환경에서 패권을 좌우하는 핵심이 표준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 유럽의 권위 있는 글로벌 전략컨설팅업체 꼽히는 롤랜드버거에서 펴낸 <4차 산업혁명, 이미 와있는 미래>라는 보고서의 핵심도 "표준을 지배하는 자가 향후 20년 이상은 세계 시장을 지배한다"는 것이고, 유럽은 바로 이런 인식에 따라 표준화에 전력투구하고 있습니다. 

프레시안: 산업발전 단계에 따라 표준의 위상이 이렇게 급격히 달라지는 이유는 뭔가요?

최갑홍: 2차 산업혁명에서 표준은 제품의 단순화를 통해 대량생산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3차 산업혁명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호환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 구글 등이 해당 분야의 강자가 된 것도 시장지배적인 표준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4차 산업혁명은 물리적인 세계와 사이버 세계를 통합하고, 모든 요소들의 융합화, 복합화가 이뤄지는 단계입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호환성(compatibility)를 넘어 상호운용성이 확보되어야 합니다. 바로 표준이 상호운용성을 확보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프레시안: 미국과 유럽이 표준을 두고 패권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데, 방식이 상당히 다르다죠? 

최갑홍: EU 28개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태평양 24개국, 이렇게 큰 두 그룹이 표준화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표준정책을 추진하는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 유럽은 중앙집권식 개발형태라면, 미국은 시장중심적 개발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럽은 국가표준화기관-지역표준화기관-국제표준화기관으로 상향식 체제로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의 국가표준화기관(DIN)이 있으면, 그 위에 유럽표준화기관(CEN), 다시 그 위에 ISO(국제표준화기구) 같은 국제표준화기관이 있습니다. 

미국은 미국국가표준협회(ANSI)가 있지만, 시장에서 표준이 형성되면 국가표준으로 채택해주는 시장중심주의 체계입니다. 유럽은 사회적 자본으로서 표준 개발을 주도하는 방식으로 기업을 지원한다는 전략인 반면, 미국은 시장지배적 사업자의 표준을 국가 표준으로 채택하는 전략입니다. 

그 결과 국제표준화기관은 국제전기통신연합(ITU), 국제표준화기구(ISO),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 등 국가가 중심이 되어 표준화를 추진하는 공적표준화기구(De Jure)와 기업들이 중심이 되어 표준화를 추진하는 국제인터넷표준화기구(IETF), 국제이동통신표준화기구(3GPP), 전기전자학회(IEEE), FIDO(Fast Identity Online, 생체인식기술로 개인인증을 수행하는 표준) 등의 사실상표준화기구(De Facto)로 나뉘어 있습니다. 

프레시안: 유럽과 미국이 글로벌 표준 패권 전쟁을 벌이고 있다면,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되는 건가요? 

최갑홍: 유럽의 방식은 기업들이 직접 나서지 않는 공공재 성격의 표준 개발에 적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기업에게 표준개발을 맡겨둔 방식이지만, 사실 구글이나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의 IT공룡들은 웬만한 국가의 지원자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4차 산업혁명의 핵심기술을 두고 벌이는 표준 전쟁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국가급 기업'이 주도하는 표준 전략이 승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박순길: 국제공적표준화기구와 사실상표준화기구가 표준 개발에 협력하는 움직임도 있는데, 어떤가요? 

최갑홍: 공공재 성격이 강한 표준정책에서는 양대 기구가 협력하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갈등이 빚어지는 영역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4차 산업은 모든 분야가 융복합이 되기 때문에 표준화기구들이 전통적으로 맡아왔던 영역의 경계가 허물어졌기 때문입니다. 스마트시티를 예로 들면, 통신과 전기, 상하수도, 교통 등 모든 분야가 어우러지기 때문에 스마트시티 표준은 어느 기구의 표준화 영역이냐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최근 공적표준화기구들이 서로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또한 사실상표준화기구들이 4차 산업혁명에서 요구되는 표준개발에 선제적으로 뛰어들어 각종 포럼이나 컨소시엄을 구성해 기업중심으로 시장의 표준을 만들어버리는 사례들이 늘고 있어 공적표준화기구들과도 갈등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소비자들이 국제표준화를 추진하는 경로가 경로가 다양해지는 새로운 변화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스마트시티와 관련된 표준화는 전기전자 분야를 담당해온 IEC나 통신분야를 담당해온 ITU 등 어느 곳에서도 표준화가 가능하기 때문에 소비자의 선택폭이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최근 IEC 관계자들이 비밀리에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를 방문해, ETRI에서 개발한 표준을 ITU 대신 IEC에서 다루자고 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ETRI가 IEC에 요청해도 받아줄까 말까하는 관계였다는 점에서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을 보여준 일화입니다.

박순길: 표준은 참여자들의 합의로 정하는데, 많은 자원과 시간이 소요되지만 공공재의 성격이 강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표준이 단순하게 공공재라고만 할 수 없는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죠?  

최갑홍: 전통적으로 표준은 공공재에 속합니다. 공공재는 경합성과 배제성이 없는 재화입니다. 표준은 소유하려는 경쟁도 없고 누구나 쓸 수 있도록 되어 있다는 점에서 배제성이 없는 공공재(public goods)로 분류되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사실상 표준 영역에서는 포럼과 컨소시엄 등 클럽 참가자에게만 사용권이 주어지는 배제성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표준이 시장을 지배하는 전략적 수단으로 위상이 높아지면서, 참가자 이외에는 유료인 클럽재(club goods)로서의 성격이 강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프레시안: 클럽재로서 표준이 일반적인 특허와 다른 점은 어떤 건가요?

최갑홍: 특허를 둘러싼 가장 큰 쟁점은 특허 침해를 입증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표준특허는 침해를 입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표준 기술은 상호운용성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디지털 TV는 방송 송출에 MPEG이라는 동영상신호압축기술을 표준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 신호를 화면으로 바꾸려면 역시 MPEG 기술이 적용해야 가능합니다. MPEG 기술로 보낸 방송 신호를 영상으로 구현했다면 그 기술은 당연히 동일한 표준특허를 사용했다고 보여집니다. 따라서 입증할 필요가 없이 자동적으로 MPEG 기술을 적용했다고 판단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프레시안: 소수만 쓸 수 있는 특허가 아니라 시장지배적인 표준에 특허를 부여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특혜 아닌가요? 이런 표준특허를 부여할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 건가요? 

최갑홍: 국제표준화기관이 표준 제정 과정에서 바로 이런 표준특허를 인정해주는 겁니다. 그 대신 표준을 특허로 인정할 때는 까다로운 조건이 있습니다. FRAND라는 원칙인데요. 표준특허를 내세워 끼워팔기 등 갑질을 못하게 하는 fair(공정성), 사용료를 부당하게 높게 책정할 수 없도록 하는 reasonable(적정한 가격), 그리고(and) 경쟁사에게 사용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하는 non-discriminotory(비차별성)를 의미하는 것으로, FRAND 원칙을 지킬 때만 표준특허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표준을 장악한 플랫폼 사업자가 4차산업혁명시대의 강자가 될 것이라는 최갑홍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무료 플랫폼, 시장을 지배하는 무서운 무기

 


프레시안: 표준이 시장지배적 사업자가 되는 더 무서운 무기가 되는 것은, 안드로이드처럼 표준특허가 아니라 개방된 표준기술 아닌가요?  

최갑홍: 그렇습니다. 현재 스마트폰 운영체제의 80% 이상이 구글의 안드로이드입니다. 안드로이드 자체는 무료입니다. 모두가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을 쓰는 시장에서 안드로이드 체제에서 상호운용성이 보장되는 각종 서비스를 제공해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죠. 이것을 바로 '플랫폼'이라고 합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진정한 강자는 바로 플랫폼 사업자입니다. 플랫폼 자체는 무료로 제공하는 것이 표준특허로 수익을 창출하는 것보다 더 높은 차원의 비즈니스입니다.  

플랫폼을 구성하는 표준 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면, 기존의 제조업체들은 하청업체로 전락할 운명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현재 구글과 애플 등이 뛰어든 자율주행차 플랫폼 사업입니다. 상호운용성이 핵심인 자율주행차 플랫폼 개발에 참여하지 못하면 기존의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네트워크가 형성되지 못한 개발후진국에나 차를 팔 수 있는 상황이 올 것입니다. 플랫폼 사업에 처음부터 참여하지 못한 제조업체는 경쟁력도 가질 수 없습니다. 플랫폼의 소스를 제공받지 못해 상호운용성을 담보한 관련기술을 개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플랫폼이 가동된 이후 참여하는 것은 값비싼 비용을 들일 수밖에 없기에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국내기업들은 표준 자체가 돈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만들어진 표준을 이용하는 소극적 입장에서 비용으로 인식했지만, 이제는 상호운용성이 있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미리 참여하지 않으면 안되는 장기적 투자 개념으로서 표준과 플랫폼 사업을 바라봐야 합니다.  

프레시안: 그렇다면 현재 기업들이 수익 창출 수단으로 중요시하고 있는 빅데이터도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폐쇄적인 지적재산권 대상이 되는 차원을 넘어서겠네요?

최갑홍: 폐쇄적인 빅데이터는 좁은 시장에서는 수익 창출의 수단이 될 수 있겠지만, 글로벌 시장에서는 의미가 없는 데이터가 됩니다. 예를 들어 IBM이 개발해 의료와 금융 등의 영역에서 쓰이는 왓슨이라는 인공지능 컴퓨터가 있습니다. 왓슨을 보급해 전세계의 의료 데이터를 수집하고 정교하게 수립된 빅데이터를 왓슨을 쓰는 기업에게 무료로 제공하면, 한국에서만 쓰이는 빅데이터의 가치는 보잘 것이 없게 됩니다. 이런 플랫폼 경제를 유럽에서는 미국 기업들이 주도하는 가파노미(GAFAnomy), 가파노믹스(GAFAnomics)라는 신조어로 경계하고 있습니다. 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의 알파벳 머리글자를 만든 조어로서 네트워크 경제를 미국 기업들이 제국주의적으로 점령하고 있다는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플랫폼 경제라는 새로운 경제의 규칙을 이들 기업들이 선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프레시안: 결국 4차 산업혁명시대는 플랫폼 경제라는 것인데, 플랫폼 경제가 어떤 규칙으로 돌아간다는 것인가요?  

최갑홍: 플랫폼 경제는 '소유자, 운영자, 공급자, 소비자'라는 4가지 구성 요소로 되어 있습니다. 안드로이드라는 플랫폼을 예로 들면, 구글이 소유자이고, 삼성은 운영자 중의 하나이고, 공급자는 플랫폼에 제공되는 각종 콘텐츠와 서비스 개발자, 그리고 이런 서비스를 이용하는 소비자가 연결돼 있는 것입니다. 

프레시안: 플랫폼은 네트워크 경제의 기반으로 이해되는데, 표준과 플랫폼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요?  

최갑홍: 플랫폼은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계 최대 패션 아웃소싱업체 리앤펑(Li&Fung)은 전세계 40개 국 1만5000개 업체에게 디자인을 제공할 뿐 자체 공장이나 물류공장이 없는 홍콩의 글로벌 기업으로 매년 20조 원이 넘는 매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패션업계에 첨단 ICT 시스템을 구축해 패션 아웃소싱의 플랫폼을 제공하는 것이지만 표준을 장악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플랫폼의 상호운용성을 제공하는 요소가 시장에서 지배적으로 인정되거나, 국제표준화기관에서 인정받을 경우 '시장지배적 플랫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어떤 플랫폼이 글로벌 시장을 장악한다는 것은 '표준 전쟁'에서 승리를 했다는 것입니다.  

 

▲ 인터뷰어로 나선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 박순길 센터장 ⓒ프레시안(최형락)


스마트시티, 상호운용성 확보가 관건

 


박순길: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려면 표준이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사업이 될 수밖에 없는데요.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해야할까요?  

최갑홍: 기술적 마인드, 전문성, 커뮤니케이션 스킬, 국제감각을 겸비한 표준전문가들을 대학이나 공공기관에서 양성해 내야 합니다. 또한 정부도 표준 사업과 관련해 기업의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프레시안: 스마트시티 사업에서도 표준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데, 현재 국가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는 잘 되고 있다고 보십니까? 

최갑홍: 스마트시티는 도시의 효율을 높이는 것이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길이라는 개념 위에 있습니다. 한국의 도시 인프라의 현황을 보면, 전기와 상수도 등 각각의 인프라의 수직적 통합은 잘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마트시티라고 부를 수 있으려면, 다양한 인프라 시스템과 시스템의 정보가 수평적으로 교환. 통합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상호운용성이고, 상호운용성을 담보하려면 표준이 확립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스마트시티 사업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현재 스마트시티 사업이 상호운용성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이승선 기자 editor2@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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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5.18 전두환 신군부는 왜 이준규 목포경찰서장을 죽였나

[5.18 또 다른 역사 ①] 전남경찰청 TF, 故 이준규 서장 징계·형벌 검토 보고서 작성

이승훈 기자 lsh@vop.co.kr
발행 2019-05-12 17:48:11
수정 2019-05-12 17:4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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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규 목포경찰서장이 현직에 있었을 때 자료사진
이준규 목포경찰서장이 현직에 있었을 때 자료사진ⓒ유족 제공

5.18 민주화운동 39주년입니다.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밝혀져야 할 진실이 많습니다. 5.18 당시 전남경찰에 대한 진상도 그중 하나입니다. “지난 과오를 반복할 순 없다”며 신군부의 강제진압 명령을 거부했다가, 쫓겨나고 고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은 경찰관들이 이제껏 경찰 역사에서 가장 부끄러운 존재로 치부됐습니다. 故 안병하 전남도경국장과 故 이준규 목포경찰서장이 대표적입니다. 이들의 사연은 2017년 이후에서야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정권이 바뀌고 진상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가능했습니다. 그 결과, 최근 보훈처는 안 국장의 순직을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가장 강도 높은 징계와 고문을 당한 이준규 서장의 명예회복은 더디기만 합니다. 알려진 내용도 별로 없거니와 증언을 해 줄 수 있는 핵심 관계자들도 이미 고인이 됐습니다. 그럼에도, 지난해 일부 경찰관들의 노력으로 이준규 서장에 관한 진상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2019년 1월, 관련 보고서가 작성됐습니다. 이 보고서는 현재 이 서장에 대한 특별재심 근거자료로 제출됐지만, 외부엔 공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민감한 진술 등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죠.

‘숨겨진 의인’에 관한 진실은 알려져야 합니다. 그게 ‘바람직한 경찰 정신 찾기’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에, 지난해부터 5.18 전남경찰에 대한 취재를 해 오던 <민중의소리>는 이준규 서장 진상조사에 참여했던 경찰관을 직접 만났습니다. 또 당시 전후 상황을 구체적으로 그리기 위해 전문가와 인터뷰를 하고, 목포민중항쟁의 중심지를 찾아 자료를 모았습니다. 유족과 만나 39년간 반복되어온 아픔을 듣기도 했습니다. 이번 5.18 특별기획은 이를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보고서에 대한 최초 보도이기도 합니다. 그 이야기 시작합니다.

1) 신군부는 왜 이준규 서장을 죽였나

“절대 시민을 향한 발포를 금지한다.”

1980년 5월 21일 수요일, 목포경찰서 내부 방송시설에서 흘러나온 구내방송이다. 이준규(당시 53세) 목포경찰서장의 명령이었다. 39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다행히 그때의 구내방송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었다.

전남경찰청 ‘5.18 민주화운동 관련 전남경찰 역할 진실규명 TF’(이하, TF팀)는 지난해 3월경부터 8월까지 ‘전두환 신군부가 이준규 서장에게 가한 형벌과 징계가 합당했는지’에 대해 자체 진상조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전남청 TF는 당시 근무했던 경찰관들로부터 이 같은 진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조사를 담당했던 전영득 영암경찰서 수사과장은 “방송과 관련한 여러 사람의 진술이 있었다. 방송은 분명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또 그는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이 서장으로선 고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그런데 기록을 보면, 이 서장은 이날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 경찰서 내 모든 총기를 116전경대로 옮겼다”라고 강조했다.

당시 상황은 이랬다. 100명이 넘는 시민군이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과 5.18 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목포로 진입한 상태였다. 또 목포역엔 분노한 시민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언제 총기로 무장한 시위대가 경찰서에 들이닥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준규 서장의 선택은 ‘경찰의 무장을 해제하는 것’이었다. 투항의 의미가 아닌 시민들을 지키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이런 선택은 그를 죽음으로 몰았다. 당시 군부를 장악하고 정권을 넘보던 전두환은 그해 5월 30일 보안사령부가 작성한 ‘직무유기 경찰관 보고’라는 문건에 직접 사인했다. 이준규 서장의 직위는 그날 곧바로 해제됐다. “강제진압 하라”는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이 서장은 6월 23일 파면됐으며, 6월경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3개월 동안 고문을 당했다. 그리고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던 그는 5년을 채 못 버티고 숨졌다.

고문 당시 면회 갔던 동료 경찰관의 진술에 의하면 “얼굴이 퉁퉁 부어서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으며, 일어서질 못하는 상태였다”고 한다. 또 유족에 따르면, 생전에 그는 병상에서도 “상을 받아도 모자란 일인데…”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단다. 그리고 고문 뒤 항상 “속이 거북하다”는 말을 많이 했고, 결국 위암으로 숨을 거뒀다.

이준규 서장의 명령은 결과적으로 수많은 시민들을 살린 행위였다. 신군부는 그런 이 서장에게 직무유기 혐의를 씌워, 목포를 강제진압하지 않은 책임을 물었고, 사실상 그를 죽였다.

전두환 씨가 올해 3월 11일 광주지법에서 열릴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연희동 자택을 나서고 있는 모습.
전두환 씨가 올해 3월 11일 광주지법에서 열릴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연희동 자택을 나서고 있는 모습.ⓒ민중의소리

“강제진압 하라”는 신군부의 명령
전남청 지휘부 “과오 반복할 수 없다” 거부
유독 이준규 서장에게 가혹했던 신군부

현재의 전남경찰청이 39년 전 전남경찰에 대해 조사를 한 계기는 2017년 4월 발행된 ‘전두환 회고록’에 있다.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광주사태 초기 경찰력이 무력화되고 계엄군이 시위진압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된 것은 전남경찰국장의 중대한 과실 때문”이라며 경찰책임론을 주장했다. 그럼에도 경찰은 5.18 당시 경찰 활동에 대한 진상조사는 물론, 자료와 기록을 정리해 놓지 않았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해 전남경찰 총수였던 강성복 전남경찰청장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5.18에 대한 경찰의 주체적 보고서 한 권은 남겨야 한다”며 TF팀을 꾸리고, 진상조사를 추진했다. 그 결과, TF팀은 2017년 10월 5.18 민주화운동 당시 경찰관 증언과 자료를 중심으로 한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이라는 보고서를 내놨다.

지난해 국가기록원에도 등재된 이 보고서에는, 1980년 5월 광주 상황과 故 안병하 국장(지금의 전남경찰청장)을 비롯한 전남경찰 지휘부가 시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상세히 담겼다.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중앙정보부 전남지부장 직무대리였던 정 모 씨는 안병하 국장에 대해 “4.19 때 김주열의 시체에 최루탄이 박힌 모습이 생생하고, 경찰이 역사의 죄인이 될 수 없으며, 경찰이 피해를 보더라도 민중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보고서 표지 사진
보고서 표지 사진ⓒ민중의소리

‘지난 과오를 되풀이할 수 없다’는 것은 당시 전남청 지휘부의 뜻이었다. 안병하 국장은 이런 전남청 지휘부의 뜻을 모아 ‘시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을 도모하는 인권에 유의한 집회 시위 관리’를 강조했다고 한다. 이런 조치는 상부에서 내려온 “강경하게 대응하라”는 지시와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안 국장은 “경찰과 시민이 정면충돌해서 경찰의 희생이 발생하면, 계엄군에 강력진압 명분을 제공할 수 있다”며 상부지시를 거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안 국장은 참모들과 협의 끝에 ‘경찰은 무장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웠다. 또 안 국장은 계엄군이 광주에 투입된 이후 사태가 점차 심각해지자, “경찰무기를 소산(疏散)하라”고 수차례 지시를 내렸다. 이런 지시에 따라, 상당수의 경찰무기는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이동이 어려운 총기는 경찰이 미리 노리쇠와 공이 등을 분리시켜, 시민군이 이를 탈취해도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1980년 5월 21일 이준규 서장 또한 이런 지휘부의 뜻에 따라, 시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경찰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총기를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킨 것이었다.

그런데, 이준규 서장은 당시 전남청 지휘부 중 가장 강도 높은 징계인 ‘파면’을 당했다. 당시 전남청을 비롯해 전남지역 경찰서장 24명 중 유일하게 당한 파면이었다. 지시를 내린 안병하 국장도 직위해제를 당한 뒤 사직을 종용 당했지만, 파면을 당한 건 아니었다. 또 이준규 서장은 안병하 국장보다도 더 오랫동안, 더욱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신군부는 왜 그토록 이준규 서장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했던 것일까?

의문을 풀기 위해 TF팀의 조사활동은 이듬해인 2018년에도 계속됐다. 이어진 조사는 1980년 5월 목포민중항쟁을 강제진압 하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파면’을 당한 이준규 서장에 관한 조사였다.

이렇게 조사된 내용은 올해 1월에 보고서로 작성됐지만, 전남청은 조사에 참여한 진술자에게 가해질 수 있는 피해 등을 고려해 현재까지 외부엔 공개하지 않고 있다.

기자는 올해 초 故 안병하 국장의 아들 안호재 씨와 故 이준규 서장의 사위 윤성식 씨 등과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올해에도 보고서가 작성됐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에 이달 7일 전남 영암에서 조사를 담당했던 전영득 영암경찰서 수사과장을 만났다. 보고서를 작성한 TF 관계자와도 수차례 통화를 통해 관련 내용을 확인했다.

또 이준규 서장이 처했던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목포민중항쟁을 연구한 곽재구 목포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과 인터뷰를 했고, 목포시에서 발행한 목포시사(木浦市史:목포시가 발행한 목포를 소개하는 5권의 책)와 관련 연구 자료들을 참고했다.

이를 종합해 보면, 신군부에서의 이준규 서장에 대한 징계는 매우 부당한 조치였다.

지난해 5월 17일 금남로에서 열린 제38주년 5·18민중항쟁 전야제. 민주평화대행진단이 1980년 5.18 당시 학살을 재현하고 있는 모습.
지난해 5월 17일 금남로에서 열린 제38주년 5·18민중항쟁 전야제. 민주평화대행진단이 1980년 5.18 당시 학살을 재현하고 있는 모습.ⓒ김주형 기자

금남로에 울려 퍼진 애국가
전남 전역으로 뻗어나간 민중
유혈사태 막기 위한 이준규의 선택

1980년 5월 광주에선 계엄군이 “계엄령 해제”,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선 학생·시민들을 잔인하게 진압하면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분노한 광주시민들이 21일 광주 금남로에 쏟아져 나왔다. 18일 1천명에 그쳤던 시위는 이날 20만 명까지 확대됐다.

금남로에 세워진 시계탑 시침이 오후 1시를 가리키자, 광주 금남로에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총성이 울렸다. 애국가는 시민을 향해 총을 발사하란 명령이었다.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수많은 광주시민이 쓰러졌다. 친구, 연인, 가족, 이웃이 계엄군이 쏜 총에 목이 꺾여 쓰러지는 등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이날 이 시각 총격으로 인한 사망자는 최소 50여명. 총상자만 해도 500명이 넘었다. 학살이었다. 계엄군이 시민을 상대로 일으킨 ‘전쟁’이었다. 하지만 당시 국내 어느 언론도 이 참상을 보도하지 않았다. 침묵했다. 모든 통신 시설도 차단된 상태로, 광주는 고립무원이었다.

이를 알리려면 광주시민들이 직접 외부로 나가야만 했다.

계엄군의 총격 이후, 일부 광주시민들은 시외 무기고로 향했다. 이들은 무기를 확보해 시민군을 편성했다. 이 중에는 “자기 형의 원수를 갚겠다”는 어린아이도 있었다. 이렇게 편성된 시민군은 참상을 알리기 위해 전남 전역으로 뻗어 나갔다. 목포도 그중 하나였다. 경찰기록에 따르면, 광주 시민군이 목포에 도착한 시각은 2시 15분. 일부 무장한 120명가량의 광주 시민들이 고속버스 4대와 승용차 1대를 타고 목포로 진입했다.

광주 시민들이 진입하는 도로는 93연대 계엄군이 지키고 있었다. 시민군이 목포로 진입한다면, 광주의 참상이 알려지면서 목포에서도 커다란 항쟁이 일어날 것임은 충분히 예상되는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계엄군은 이들의 진입을 막지 않았다. 이준규 서장의 요청이 있었는데도, 계엄군은 이 서장의 요청을 듣지 않은 것으로 TF팀 조사에서 확인됐다.

전영득 수사과장은 “그때 도로가 지금과 같지 않았다”며 “군부대 앞에 도로만 막아버리면 목포는 진입 자체가 불가능했다. 차량이 진입할 수 있는 대로라면 그 길밖에 없었다. 그런데 군부대는 길목을 튼다”고 설명했다.

목포 시내로 들어온 광주 시민군은 광주에서 벌어진 참상을 전하며, 목포 시민들의 궐기를 호소했다. 이내 목포역 광장엔 수만 명의 시민들이 운집했다.

“강제진압 하라”는 신군부의 명령이 하달된 상황에서, 이준규 서장이 선택한 길은 신군부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는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만약 이 상황에서 신군부의 명령대로 경찰을 무장시키고 목포로 진입하는 시민군 또는 목포역에 운집한 시민들과 대치했다면, 어땠을까?

이에 대해 곽재구 이사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공권력이 강제로 해산시키려고 했다면, 목포도 광주처럼 됐을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나가면 죽거나 다칠 수 있는 상황에서 수만 명이 역 광장에 몰려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권력이 물리력을 가한다고 목포시민들이 집으로 갔겠나?”

만약 이준규 서장이 신군부의 바람대로 강력대응 했다면, 유혈사태는 피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 계엄군 투입에 대한 가장 강력한 명분을 만들어주는 꼴이 되지 않았을까?

광주참상을 전해 듣고 목포역 광장에 모여든 목포시민들 자료사진
광주참상을 전해 듣고 목포역 광장에 모여든 목포시민들 자료사진ⓒ목포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관계자 제공

“군중을 자극하지 않고 무기회수”
이준규 서장의 끊임없는 노력

목포시의 기록(목포시사)을 보면, 21일 오후 5시쯤 분노한 목포시민들이 광주의 실상을 보도하지 않은 MBC를 파손한다. 오후 8시 이후엔 법원 검찰지청, 시청, 파출소, 세무서 등이 파손된다. 오후 10시엔 무안·함평 지역에서 자체 봉기한 시위대가 목포 시위대와 합세해 더욱 규모가 커진다.

TF팀 관계자에 따르면, 시위대와 차마 싸울 수 없었던 목포경찰은 시내 곳곳에 정보경찰을 심어 놓고 21일 오후 늦게 경찰서에서 철수한다.

경찰이 철수한다고 하더라도, 경찰서 내에는 사용할 수 있는 총기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준규 서장의 지시에 따라, 이미 총기에서 공이를 분리해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분리된 공이는 목포 인근 섬인 안좌도와 고하도 등지로 이동시킨 것으로 조사됐다. 전영득 수사과장은 인터뷰에서 ‘목포에서 탈취한 무기 중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는 당시 시민사회 핵심 관계자의 진술도 있었다고 전했다.

이후에도 이준규 서장은 시위대를 이끌고 있는 재야인사들과 끊임없이 접촉을 시도했다.

전영득 수사과장은 “다음날인 22일 8시 무렵, 당시 재야지도자 격인 안철 씨 집에 이준규 서장이 나타난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계엄군 표현대로라면, 경찰서를 버리고 도망간 이준규 서장이 폭도 우두머리의 집에 나타난 것이다. 이 자리엔 이준규 서장 외에도, 목포시장과 목포대학장 등이 참석해 ‘수습 대책 회의’가 열렸다.

목포 민주화 운동의 성지인 동아약국 자료사진.
목포 민주화 운동의 성지인 동아약국 자료사진.ⓒ목포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관계자 제공

■ 목포민중항쟁의 중심 동아약국:당시 안철 씨는 목포 해안로237번길 24번지에 동아약국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목포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였다. 안철 씨의 집도 약국 앞에 위치해 있었으며, 당시 목포경찰서(1983년에 헐림)도 이곳에서 약 5분 거리에 있었다고 한다.

이런 소통을 통해 무기 회수도 빠르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전영득 수사과장은 “거짓말처럼 22일 자정까지 대다수의 무기가 회수된다”며 “목포대학장의 협력으로 시위대에 들어간 대학생들이 무기를 회수해 왔던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항쟁을 수습하려 했던 재야인사들과 관공서 대표자들의 대책회의는 오래가지 못했다. 학생들이 반발했기 때문이다. 군부독재에 항거하기 위해 일어난 항쟁을 수습하려고 해선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또 당시 재야인사인 안철 씨가 경찰인 이준규 서장을 만나 대화를 하는 것에 대해 학생들의 불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대책기구는 ‘수습’에 대해 논의하는 기구가 아닌 ‘투쟁’을 조직하는 기구로 변모한다. 그 이름도 ‘목포 시민민주투쟁위원회’(이하 시민투쟁위)로 변경됐다. 대책회의 성격이 변모하면서 자연스럽게 회의에서 빠지게 됐지만, 이후에도 이준규 서장은 안철 씨를 만난 것으로 파악된다. 24일에도 안철 씨는 이 서장을 만나 “경찰은 시내에 나오지 말 것” 등을 요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관련해서 곽재구 이사장은 “안철 선생님 생전에 이준규 서장이 상당히 협조적이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노력 탓일까, 목포항쟁은 광주와 비교해 큰 인명피해 없이 진행됐다.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인근 섬 등으로 이동시켰던 경찰력도 23일 복귀했다.

목포항 부근에서 바라본 고하도
목포항 부근에서 바라본 고하도ⓒ민중의소리

신군부는 왜 그에게 그토록 가혹했나

10만 명까지 운집 인원이 불어났던 목포항쟁은 광주에서 계엄군이 시민군을 완전히 진압된 이후에도 하루가량 더 지속됐다. 그럼에도 목포관내사태보고에 기록된 목포항쟁 인명피해는 사망 1명, 부상자 11명에 그쳤다. 계엄군의 강제진압으로 사망자 수를 헤아릴 수 없게 된 광주의 상황과 크게 비교된다.

시민들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인명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이준규 서장의 각종 조치가 없었다면, 어땠을지 까마득하다.

그럼에도, 전두환 신군부는 그를 직무유기 혐의로 파면시키고 3개월에 걸쳐 고문한다. 한국전쟁 당시 경찰이라는 이유로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아픔을 겪은 이준규 서장. 그는 반공이데올로기를 앞세운 신군부에 의해서도 죽임을 당했다. 왜 그의 인생은 이토록 가혹했어야만 했을까.

곽재구 이사장도 왜 신군부가 유독 이 서장을 강하게 처벌하려 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당시 광주 이외에 유일하게 전시민이 나서서 체계적으로 시위를 한 곳은 목포뿐이다. 또 목포에서의 시위는 광주 진압 이후에도 하루가량 더 진행됐다. 그런데 왜 계엄군이 광주는 강제진압하면서 목포엔 들어오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그 과정에서 이준규 서장이 어떤 역할이 있었는지는 알려진 게 없다. 남아있는 기록이 너무 없다. 이 서장이 그렇게 고문을 당하고 죽었다는 것도 최근에서야 알았다. 계엄군 측에서 봤을 땐, (시민 편을 든 것 같으니) 괘씸하다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준규 서장이 그렇게 당해야만 했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이다.”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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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이 아니라 근원적 치료가 종교역할“

[특집] 불기2561년 부처님오신날
박노자 교수 특별인터뷰
  • 불교포커스
  • 승인 2019.05.12 08:3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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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작년 촛불법회로 상징되는 한국불교의 큰 움직임이 있었다. 멀리 계셨지만 관심가지고 보셨을 것으로 본다. 떨어져서 본 한국불교 상황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하다.

한국불교는 다양하다. 쉽게 말하며 재가연대같은 사회비판적이고 개혁적인 고학력 재가자로 대표되는 근대 지향적 부분도 있는데 수적으로는 적은 것 같다.

제외하면 대체로 한국불교는 어디까지나 전통적인 신앙, 기복신앙에 의존하는 기업형태로 존재한다고 봐야할 것 같다. 

기복 의례라는 것이 과거 전통사회의 공동체적인 전통적 의례보다는 원자화된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각자도생 사회에서 지친 사람들에게 위안의 환상을 심어주는 의례에 가깝다.

전통사회에서의 기복은 공동체에 쓰일 수 있는 구조라고 볼 수 있지만.
일본불교를 장례식 불교라고 한다면 한국불교는 입시불교 일본은 장례불교 우리는 대입불교. 무엇이 더 나쁜지 잘 모르겠다.

Q.종교가 사회를 걱정하던 시대에서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는 시대로 변했다고 한다. 21세기에 종교 특히, 불교의 자리가 있나?

21세기 대한민국은 일면으로는 기술이 가장 발전한 나라다.사회적으로는 신자유주의형 자본주의다. 그것도 준 주변부식... 복지제도가 별로 없는 신자본주의 자유주의인데 중생의 고통이 갈수록 커지는 구조다.

옛날 고통이 기근 기아 질병이라면, 신자유주의 고통은 고독과 불안이다.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난다. 가족 해체되면서 혼자 불안한 노동 하면서 혼밥, 혼술 한다. 한국은 세계에서  자살율로 보면 상위를 차지한다.  과로 우울사회다. 우리가 받는 고통이 병고 기아같은 1차적 고통이 아니라, 2차적 고통이라고 하는 사회적 고통이다.

박노자朴露子는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라는 이름으로 러시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영화 <춘향전>을 보고 한국과 인연을 맺은 그는 모스크바대학교에서 고대 한국의 가야사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2001년 ‘박노자’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귀화했다. 현재는 노르웨이 오슬로대학에서 한국학 교수로 재직 중. 불교 사상에서 깊은 영감을 받은 대한민국의 대표적 진보 지식인이다.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주는 고통을 종교가 최소화하고 해소 극복하기위한 대안 제시해야 하는데...한국처럼 신자유주의로 엄청난 고통 받는 곳에선 그런 역할해야 하는데 한국종교 중 그런 역할하는 종교가 없다. 대체로 한국중교는 신자유주의로 심신이 파괴된 사람에게 쉽게 말하면 인민의 아편역할 한다. 일종의 환상적 위안을 판다.
  
문제는 아무리 모든 문제 근본이 당신에게 있다. 고통받는다고 생각말라. 참나를 찾아라. 문제는 당신이다. 마음 챙기면 된다. 아무리 주술 팔아도 사람들 고통 줄지 않는다.
 
판매 잘되는 요소도 있다. 예를 들어 혜민스님 같은 성공사례도 있다.문제는 주술판매가 성공했다고 해서 치료되느냐... 근원적 치료된 것 아니다.종교역할은 이미 피폐화되고 파괴된 개인에게는 진통제 파는 것이 아니고 병을 치료해야 한다.

Q.기존 제도권불교 넘어서려는 움직임 주장 있다. 제도권불교 기득권 승려문제 더 이상 지적 의미있나... 새로운 이 시대 불교 만들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쉽게 이야기하면 화장실 청소 ... 저는 집에서 가끔 한다. 화장실 청소는 냄새나고 힘든 노동이다. 하긴 해야 하는데... 진짜 힘들다. 하기 싫다.

양방향 다 필요한 것 같다. 한편에서는 제도권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한 개인 잘못 집중보다는 이 집단이 왜 기생적 집단인지 왜 구시대적이고 도움이 안 되는지 파악해야 한다.

또한 우리에게 맞는 불교를 만들기 위한 노력도 해야 한다.불교가 꼭 사찰이 있어야 하고 불상이 있어야 하나. 우리 마음에 있다.석가모니가 밝힌 우주적 법칙 이해하고 석가모니불이 제시한 수행법 따르고 해탈하는 것이 불교다.
사찰이, 스님이 불교인가?
불법승 하는데 승다운 승이 있나?  제외해야 한다.
불과 법에 의존하면 된다.

Q.재가자들의 움직임 긍정적이라고 보는 것 같다.
 희망이 있다면 거기에 있다. 제도화된 부패, 도려내기 어렵다. 대부분 부패니까. 포기하고 불교다운 불교를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Q. 그래도 화장실 청소 안하면 냄새 나지 않는가
해도 냄새 맡아야 한다. 그러니까...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니다. 한국사회 기득권층의 부패는 어디나 똑같다. 김학의나 방씨 일가니... 인간의 욕망이 다르겠는가

Q. 종교집단이라 다를 것 없다는 뜻인가.
다른 이웃 종교봐도 크게 모양이 다르지 않다
 
Q.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고통받는 분들에게 아편이 아니라 치료역할이 종교역할이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우리 사회 속에서 종교역할 다시 말해준다면?
 
자꾸 종교인들이 혜민스님도 그렇고 모든 문제를 개인으로 돌린다. 개인이 뭘 할 수 있나... 아무리 참나를 찾고, 아무리 인욕바라밀을 행하고,아무리 마음속의 불안을 마음챙김 방식으로 조명하고 한다 해도,비정규직 시달리고,6개월 계약에 시달리고,상사의 성희롱에 시달리면 그게 그거죠.

상사 성희롱을 마음챙김으로 대응해도 부족하다.

이런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여럿의 연대로 해결해야 한다. 종교역할이 연대의 이론적 뒷받침을 만들고 조직하고 그리고 우리가 비폭력과 사랑으로 그런 문제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것이 종교의 역할이다. 개인 마음챙김으로 될 문제도 있으나 안 될 문제가 있다.

Q. 21세기 종교 제 역할 못한다는 것이지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같다.

불교가 뭐냐...사찰이 불교인가? 건물일 뿐이다. 매매도 가능한... 소득원천일 뿐이다. 불상도 물건일 뿐이다. 옛날 선불교 화두중에 그런 것 있다. 어떤 스님이 불상에 침뱉자 “감히...”라는 질문에 “나도 부처다”라고 했다.

불상과 사찰이 불교 아니다.
불교는 결국 석가모니불이 밝힌 연기법 사성제 팔정도가 불교다.결국 우리 마음 안에 있다.
 
Q. 불자와 불교포커스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달라.

만해스님의 조선불교유신론을 영역했다.만해스님이 당시 중시했던 종교인이 마르틴 루터였다. 부패하고 면죄부 판매로 기업처럼 소득 올렸던 카톨릭 교회에 일침을 가하고 결국 그것을 버리고 새로운 교회 만든 사람이다. 당시 부패무능을 본 만해로서는 루터가 롤 모델이었다.

지금 만해스님 마인드를 생각해 볼 필요있다.
우리도 그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만해나 루터처럼 아무리 어렵더라도 기존 시대 뒤떨어지고, 전혀 도움되지 않는 종교세력과 결별하고 종교근본원리에 입각해 새로운 사회에 도움되고 각자 중생들에게 도움 되고 세상에 도움되는 그런 종교로 갔으면 좋겠다.

  남의 고통이라는것이 없다. 이 세상은 사회는 고통으로 가득차 있는데 모든게 나의 것이다. 남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의 가장 귀중한 부분이 남이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장 귀중한 가르침이다. 그것만 알고 살아간다면 이 지옥속에서도 분명히 꽃이 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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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무실한 핵폐기물 관리 공론화위... 탈핵만이 답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9/05/12 09:36
  • 수정일
    2019/05/12 09:36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초록發光] 10만년의 책임을 다하기 위한 고준위핵폐기물 공론화가 필요하다

 

 

 

해마다 750톤의 폐기물이 발생한다. 이 폐기물은 우리 모두가 사용하고 내놓는 것이지만, 종량제 봉투에 넣을 수도, 음식물 쓰레기로 분류할 수도 없는, 달라도 한참 다른 폐기물이다. 해마다 750톤이라니 그리 많지 않다고? 그러나 1그램만으로도 수천 명을 죽일 수 있고 1미터 앞에 17초만 서있어도 누구나 예외 없이 사망에 이르게 되는 폐기물이다. 10만년 이상, 영구적으로 격리 보관해야 하는 폐기물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독성물질로 불린다. 사용후핵연료. 방사능 농도가 높아서 고준위핵폐기물이라 부른다.  
 
한국은 1978년 고리1호기 핵발전소를 가동한 후 40년 이상 핵 발전을 해왔지만, 이 위험한 핵폐기물을 처리할 방안은 마련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위험한 폐기물을 안전하게 10만년 이상 봉인할 수 있는 방법과 부지를 찾는 일이 쉬울 리가 없긴 하다.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답이 없는 물질을 대책도 없이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다. 
 
여태까지 38개국 621기의 핵발전소에서 고준위핵폐기물이 발생했지만, 세계 어느 곳도 이 폐기물 처분장을 마련하지 못했다. 한국을 비롯해 핵 발전을 하고 있는 나라들 모두 핵폐기물 처분장을 찾는 일이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다. 핀란드만이 유일하게 지하 500미터 심지층 처분장을 짓고 있는 상황이다.  
 
이 위험한 폐기물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고된 숙제다. 10만년 이상을 격리·보관해야 하는 핵폐기물에 안전한 처분, 적합한 부지, 세대 간 지역 간 형평한 처분이란 말이 문장으로는 가능해도 실제로도 가능한 일일까?  
 
수십 년간 한국 정부는 핵 폐기장 부지를 일방적으로 발표해왔고, 이 과정에서 물망에 올랐던 지역의 극심한 반발과 사회적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박근혜 정부는 고준위핵폐기물 문제를 사회적 공론화를 통해서 해결하겠다며 나섰지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한 이름뿐인 공론화 얼개였다. 결국 시민 사회의 외면을 받았고, 지역주민들의 희생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핵산업계의 이해만을 담은 관리 정책이 만들어졌다. 주요 골자는 핵발전소 부지에 임시저장시설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지역과 시민사회의 의사를 반영한 제대로 된 공론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줄기차게 이어졌고, 문재인 정부는 공약대로 기존 핵폐기물 관리 계획의 백지화와 재 공론화를 위한 준비단을 구성, 운영했다. 준비단은 6개월 동안 고준위핵폐기물 관리정책을 수립할 공론화위원회의 구성과 공론화 범위, 의사결정 방식 등을 의제로 논의를 끌어갔지만, 합의를 도출하기 쉽지 않았다.  
 
공론화준비단 활동이 종료된 지 5개월이 지난 4월 3일, 산업자원부는 공론화위원회를 우리사회 각 부문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문사회, 법률과학, 소통갈등관리, 조사통계 분야의 중립적 인사 15인 이내로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이른바 '중립적 전문가' 후보군을 구성한 후 원자력발전소 지역과 환경단체, 원자력계 대표 단체에게 제척 기회를 부여해 최종 선임할 계획이라는 것이다. '중립성'의 의미는 '관련 없는' 전문가라는 의미 외에 무엇이며, '관련도 없는' 인적 구성으로 과연 중차대한 문제의 책임성을 담보할 수 있을까? 
 
산자부가 공론화위원회를 중립적 인사들로 구성한 이유는 이해관계자가 포함될 경우, 위원회 활동이 자칫 무산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공론화위원회의 무산이 우려되는 것일까? 그럴 경우 고준위핵폐기물 임시저장고 포화 시점에 맞춰 증설해야 할 임시저장고 문제를 해결할 시점을 놓치게 되는 것이 우려되는 것일까? 
 
그동안 행보를 보면, 포화할 임시저장고를 서둘러 증설하는 것만이 산자부의 목적이었다. 이 일을 무난히 처리하기 위해 관리정책을 재수립하겠다고 나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상 이를 보장하는 공론화가 필요할 뿐, 충분한 사회적 합의를 통해서 고준위핵폐기물 관리 정책을 어떻게 수립할 지는 애초에 관심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핵발전소 소재 지역과 환경단체의 주요 요구사항이었던 '이해당사자가 포함된 공론화위원회'가 아닌, '이해당사자가 배제된 공론화위원회'로 구성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고준위핵폐기물 관리정책 마련을 위한 공론화위원회는 고준위핵폐기물 처분 원칙이 무엇인지, 중간저장을 할 것인지, 영구처분장을 세울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부지를 선정할 것인지, 이러한 의제들에 참여할 당사자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어떻게 의사 결정을 할 것인지 등을 숙의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 단지 찬반으로 나눌 문제도, 기술적으로 접근해서 될 문제도, 단기간에 결론지을 수 있는 사안도 아니다. 때문에 이 복잡한 사안을 9개월이라는 정해진 일정표에 따라 서둘러 끝내려는 것 자체가 애초 이 중차대한 문제에 대한 인식의 한계 혹은 우선 일시 봉합(임시저장고 증설)이란 소기의 목표 달성, 딱 그만큼의 의도였다고 밖에 달리 해석할 도리가 없다. 임시저장고가 포화해 핵폐기물을 둘 곳이 없다면, 핵 발전을 멈추면 될 일이다.  
 
고준위핵폐기물 관리정책을 재수립하고자 하는 이유는 그것이 전 국민적 공론 주제이자 책임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든 전자 기기의 전원을 켜고 편리하게 전기를 쓸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전기를 쓰는 만큼 핵폐기물을 만들어내 쌓아두고 있다는 사실은 인지할 필요조차 없었던 대다수의 국민에게 1미터 앞에 17초만 있어도 사망에 이르는 위험한 핵폐기물 문제의 심각성과 관리의 어려움을 알려야 한다. 먼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전기를 쓰고 있는 누구나 안고가야 하는 문제라는 것, 지금 당장 적당한 장소에 묻으면 되는 문제가 아니라 10만년 이상을 안전하게 관리해야 하는 핵폐기물이라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해법을 함께 찾아나가는 과정으로서의 공론화여야 한다. 여태 쌓아둔 약 1만6500톤의 핵폐기물은 그저 지금까지 뱉어낸 양일 뿐이고, 우리가 핵 발전을 할수록 그 양은 추가로 누적됨을 알려야 한다. 핵폐기물에 대한 성찰 없는 핵 발전과 전력소비 방식을 재고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저 임시 저장고를 늘리려는 '임시' 봉합적 태도여서는 곤란하다. 이 핵폐기물을 과연 어디에 어떻게 들이실 수 있겠느냐고 물어야 하는 문제다. 이 조차 지금 당장 곤란하다면, 핵 발전을 멈추는 것 외에 답이 없다. 이 조차 못하는데 어찌 핵폐기물을 계속 뱉어 내려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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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후 잘 풀린 동창, 결국 이렇게 될 것을

[30대에 알았다면 좋았을 것들] 모든 삶은 오십보백보

19.05.11 19:29l최종 업데이트 19.05.11 19:29l

 

사십 대에 접어드니 지나온 시간이 이제야 제대로 보입니다. 서른과 마흔 사이에서 방황하던 삼십 대의 나에게 들려주고픈, 지나갔지만 늦진 않은 후회입니다.[편집자말]

출세.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유명하게 된다는 뜻이다. 단어 뜻대로 평가하자면, 학교 동창 중 가장 출세한 친구는 한 회사의 이사로 일하고 있는 A다. 동창끼리 A를 두고 하는 말이 있다. "걔는 참 잘 풀렸다." 영민하긴 했지만, 그 정도로 잘 나가게 될 줄은 몰랐던 터라 더 그렇다. 하긴. 예측대로, 공식대로 풀리는 삶이 어디 있을까마는.

학교를 졸업할 때만 해도 우리는 똑같은 선에서 출발했다. 그때는 앞으로의 미래도, 옆에 달리는 주자도 그다지 의식하지 않았다.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와 불안,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잘 달려보고 싶다는 의욕에 집중하던 시기였으니까.

30대에 들어서면서 '일'을 선택한 여성의 경우, 비로소 자기 페이스를 갖고 본격적으로 경쟁하며 달리기 시작한다. 나도 30대부터는 워커홀릭으로 살았고, 진짜 열심히 일했다. 한쪽 청력을 잃을 정도로.

성실한 무기징역수처럼
 

 주말을 앞둔 지난 1월 22일 저녁 서울 시내 한 빌딩에서 직원들이 야간 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
▲  서울 시내 한 빌딩에서 직원들이 야간 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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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를 밖으로 풀어내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점점 마음의 상태가 몸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한의원에 끌려갔다가 의사에게 한소리를 들었다.

 

"이러고 어떻게 살아요? 맥이 하나도 안 잡히네."

진단 결과 우울증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스트레스로 인한 돌발성 난청이 왔는데도 그 사실조차 모른 채 연일 야근하다 결국 한쪽 청력을 잃었다. 그런데도 내 청춘을 불사르며 열심히 일한 곳을 박차고 나오자고 결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내 나이가 서른 중반, 한창 일하며 커리어를 쌓을 나이였으니 브레이크를 잡기가 더 어려웠다.

그렇게 달리다가 순간 멈칫하게 된 계기는 내 몸이 아닌 일 때문이었다. 사장이 창업 일등 공신인 메인 팀의 부장을 자르려 했다. '답보 상태인 판매 실적 돌파구 마련을 위한 분위기 쇄신용 인사'가 명분이었다. 회사를 향한 신뢰가 와장창 깨져버렸다. 묵묵하게 일하며 회사를 함께 일으킨 사람을 자를 정도면, 나 하나쯤은 언제든 자를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 부장님을 좋아했지만, 그 모습이 나의 미래가 되는 건 싫었다.

누군가처럼 되기 싫어서, 혹은 누군가처럼 되고 싶어서, 내가 원치 않는 미래가 나에게 이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 혹은 내가 원하는 미래에 이르기 위해 과도하게 애쓰면서 살았다. 집과 회사만을 오가며 야근과 주말 근무까지 감수했다.

그야말로 '슈퍼우먼'처럼 살았다. 아이를 키우면서 일하는 친구들은 더욱 더 슈퍼우먼이 돼야만 했고, 비혼으로 나이 들어 프리랜서가 된 나는 내 한 몸 책임지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슈퍼우먼이 됐다.

빨리 어딘가에 다다르고 무언가를 마련해 놔야 할 것만 같은 조급함과 욕망이 늘 혼재돼 나를 밀어붙이곤 했다. 경주하듯 앞만 보고 내달리는 동안, 나의 얼굴은 어느새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 속 대사처럼 변해 있었다. "성실한 무기징역수"처럼.

모든 삶은 작고 크다

'아등바등 살았는데 겨우 여기인가, 고작 이것뿐인가' 하는 허무에서 조금 자유로워진 건 2년 전 참석한 동창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였다. 아주 오랜만에 '가장 출세한 친구' A가 얼굴을 내비쳤다. 반가워서 서로 안부를 나누는 와중에 A는 자녀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꽤 심각한 문제였다.

다들 걱정하며 위로해 줬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다른 친구들이라고 해서 사정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는 싱글맘으로 회사의 심한 갑질을 감내하며 고군분투하는 중이었고, 누군가는 가장으로서 두 자녀를 키우고 있었고, 누군가는 꽤 큰 병을 이겨내고 이제야 조금 편안해졌나 싶었는데 친정엄마가 치매에 걸려 마음고생 중이었다. 각자 서 있는 자리는 다르지만, 감당해야 하는 무게는 비슷했다. 누가 더 낫다는 건 없었다.

그제야 보이는 게 있었다. 같은 지점에서 출발해서 와다다 달려나갔던 사람들, 그래서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건가?' 하면서 나를 불안케 하고 의심케 했던 주자들, 혹은 뒤처졌던 주자들. 이들 모두 비슷한 지점에서 달리고 있으며 비슷한 고민을 나눈다는 사실이다. 결혼과 양육으로 멀어진 친구들도 어느 사이에 다시 옆에 와 있다. 돌고 돌아서 비슷한 지점에 서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이제 만나면 가정이나 시가, 아이들 사연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40, 50대 중년 남성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눠도 비슷한 말을 한다. 엄청 출세해 부러움의 대상이던 사람도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거나, 이혼해서 혼자 살거나, 일찍 퇴직해서 할 일을 찾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반면, 그저 그랬던 친구가 무난하게 잘 살고 있기도 한다는 게 그들의 증언이다. 결혼을 했건 안 했건, 잘 나갔던 사람이건 아니건 퇴직 후의 삶을 보장받지 못한 불안과 막막함은 비슷하다. 결국은 오십보백보다.

어차피 비슷한 지점에서 만나게 될 텐데 왜 그렇게 아등바등했을까. 어리석게도 그때는 몰랐다. 애쓰며 살아도 원치 않는 상황이 오거나, 원하던 미래의 모습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열심히 살면 그만큼의 보상도 따를 거라 믿었다. 안전한 미래도 보장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몇 번의 피눈물을 흘리며 배운 건, 삶은 늘 우리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치고 도망간다는 사실이다.

열심히 사는 삶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나는 여전히 열심히 사는 게 좋다. 단지 과도한 열심으로 눈앞의 것에 급급하며 살았던 과거를 후회할 뿐이다. 근시안이 되어 나를 돌보지 못했고 주변에도 무심했다. 나를 포함한 평범한 약자들이 겪는 부당한 노동 환경이나 불평등한 구조에 저항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내가 사는 사회에 무감각했다. 내 삶은 갈수록 지루하고 경직됐다.

"아이의 한창 예쁜 시기는 다시 되돌릴 수 없어." 자녀가 있는 사람들이 종종 하는 말이다. 정신없이 사는 동안 어느새 아이가 다 자라버렸다는 아쉬움이자 허무함이리라. 

나의 빛나는 30대도, 내 부모의 조금 더 젊은 날도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걸 그땐 잘 몰랐다. 아등바등 애쓰며 사는 동안 나는 어느덧 시들었고 부모는 너무 늙어버렸다. 그렇다고 제대로 뭔가 이루거나 돈을 많이 벌어놓은 것도 아니다. 그저 열심히 일한 것만을 훈장 삼는 기성세대가 돼 있었다. 너무 아름다운 시간이 증발해 버린 것 같아 아쉽고 허무하다.

약간의 틈을 만들기
 
 어차피 비슷한 지점에서 만나게 될 텐데 왜 그렇게 아등바등했을까. 어리석게도 그때는 몰랐다.
▲  어차피 비슷한 지점에서 만나게 될 텐데 왜 그렇게 아등바등했을까. 어리석게도 그때는 몰랐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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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돌아야 할 쳇바퀴라면 잠시 내렸다 다시 탈 수 있고, 속도도 줄일 수 있는 건데, 그땐 왜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렸을까. 다시 30대로 돌아간다면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슈퍼우먼의 옷을 벗고 정성껏 재미있게 사는 방법들을 찾고, 내가 속한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진보하는 데 관심을 두며 고민하고 싶다.

약간의 틈을 만들기. 30대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혼자서만 잘살겠다는 이기심이 아니라면, 나를 위한 여유나 투자는 열심히 일하는 것만큼 중요했다. 그래야 인생을 좀 멀리 보면서 진짜 놓치지 말아야 할 게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고, 집중해야 할 것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도한 책임감이나 부담감의 압박에 휘둘리지 않으며 중심을 잡을 수도 있다.

또한 틈이 있어야 나를 둘러싼 세상을 볼 수 있다. 내가 속한 사회를 응시할 수 있고, 건강한 감시자가 될 수 있다. 다음 세대를 위해 불평등하고 부당한 것들에 순응해선 안 되는 거였다. 나의 무감각과 무심함을 반성한다.

똑같은 후회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지금은 '이만하면 나도 잘 풀린 거야'라고 뻔뻔하게 정신승리를 하며 느긋하게 사는 중이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고 와구와구 닥치는 대로 일하던 패턴도 바꿨다. 팔순을 앞둔 엄마에게 드리는 용돈이 줄어들어서 죄송하지만, 엄마와 자주 산책하고 함께 시장 보는 시간이 늘어난 게 더 좋지 않냐며 뻔뻔하게 퉁친다.

프리랜서로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다음'을 도모하며 순응만 했는데, 이제는 당당하게 내 몫을 요구하고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이제야 뭉친 것들이 풀어지는 느낌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굳어진 낡은 것들을 이 나이에 풀어내는 건, 역시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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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촛불] "사법 당국이 못하면 우리가 자유한국당 해산시키자"

[다시 촛불] "사법 당국이 못하면 우리가 자유한국당 해산시키자"
 
 
 
김영란 기자 
기사입력: 2019/05/12 [00:18]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자유한국당을 해산하라! 11일 열린 다시 촛불에 참가한 3,000여 시민들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자유한국당을 해산하라! 11일 열린 다시 촛불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자유한국당을 해산하라! 11일 촛불 집회 후 행진하는 시민들. 세월호 유가족들이 가장 앞장에 서 있다.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5월 11일 저녁 6시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자유한국당 해산! 황교안, 나경원 처벌! 촛불문화제 다시 촛불”이 3,000명의 시민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11일 열린 다시 촛불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대학생노래패연합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11일 오후 6시 광화문 광장에서 자유한국당 해산황교안나경원 처벌촛불문화제 다시 촛불’(이하 다시 촛불)”이 3,000여 명의 시민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지난 4일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리는 <다시 촛불>이다.

 

11일 <다시 촛불>은 1,2부로 진행되었으며 집회가 끝나고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행진했다. 

 

<다시 촛불> 1부는 세월호 유가족인 영석이 엄마(단원고 2학년 오영석 군 어머니)’ 권미화 씨의 피해자 발언으로 시작되었다. 

 

권미화 씨는 피해자 발언에서 세월호 참사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왜 구조하지 않았는지왜 구하지 않았는지왜 구조를 방해했는지왜 기다리라고만 했는지스스로 탈출한 승선자만 태우고 자리를 떠났는지아무도 세월호 안에 연락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며 세월호 침몰과 304분을 희생시켰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며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해 제기했다.

 

계속해 권미화 씨는 세월호 참사는 304분 살인을 한 자들책임자공범자공모자추종자 등 끝까지 처벌해야만 안전한 대한민국을 꿈꿀 수 있다세월호 참사 그날의 진실을 우리는 알아야겠다왜 그토록 집요하게 피해자들을 폄훼했는지 거짓과 조작 증거인멸허위은폐 은닉 등 낱낱이 밝혀내야 한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해야 앞으로 억울한 희생이 없을 것이다미래는 현재의 거울이다세월호 참사 책임자 처벌될 때까지 포기란 없다며 세월호 진상규명책임자 처벌에 끝까지 시민들이 함께 해줄 것을 호소했다.

 

▲ 11일 열린 '다시 촛불'에서 영석이 엄마(단원고 2학년 오영석 군 어머니) 권미화씨가 피해자 증언에서 세월호 참사 책임자 처벌될 때까지 포기란 없다고 발언했다. 영석 군의 이야기를 하면서 울음을 참지 못하는 권미화 씨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영석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물을 참지 못하는 세월호 유가족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다시 촛불> 1부에서는 최근 자유한국당 해체적폐청산에 앞장서고 있는 대학생들의 발언이 진행되었다.

 

정어진 서울대학생진보연합 소속 학생은 세월호 참사 왜곡은폐 주범책임자 처벌 가로막는 자유한국당 해산하라!” 내용으로 연설했다.

 

정어진 학생은 국민들의 촛불로 박근혜는 탄핵되고 새로운 정부를 세웠지만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은 아직도 제자리이다올해로 5주기를 맞이했지만가족들은 아직도 사랑하는 이들이 어째서 그렇게 죽어야만 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아무리 촛불 정부가 들어서면 뭐하나아직도 박근혜 부역자 적폐세력인 자유한국당이 제 1야당이라는 자리를 꿰차고 들어앉아 있는 상황에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제대로 될 수가 없다박근혜 독재 부역자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었다가는 언제 또 세월호 참사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세월호가 지겹다고 말하는 자유한국당우리 국민들은 자유한국당이 지긋지긋하다세월호 진실을 감추고 규명을 방해하는 자유한국당을 당장 해체해야 한다해체하지 않는다면정권까지 바꿔낸 우리 국민들의 힘을 보여주자고 호소했다.

 

이어 김유진 대학생 세월호 동아리 기억이음’ 운영팀장은 후안무치 황교안 광주 5.18 묘역 방문 막아내자는 내용으로 연설했다.

 

김유진 운영팀장은 박근혜 탄핵우린 그것을 해냈지만적폐세력들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해 지금 자유한국당의 온갖 만행으로 이어지고 있다그래서 우리는 다시 촛불을 들었다바로 <자유한국당 해산촛불이다최근 자유한국당이 민생대장정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을 돌고 있지만 가는 곳마다 국민들의 거센 항의에 혼쭐나고 있다그런데 5.18 학살의 주범전두환의 후예정당인 자유한국당의 대표 황교안이 5.18 기념식에 참여한다고 한다오월 영령들을 모독하고 역사 왜곡의 죗값은 치르지도 않은 자유한국당그리고 그 수장인 황교안이 어떻게 5.18 기념식에 참가한다는 것인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황교안이 끝내 광주에 온다면 대학생들이 앞장서서 막아낼 것이며 촛불 시민들의 이름으로 자유한국당 해산심판 투쟁을 벌이겠다고 발언했다.

 

▲ 11일 열린 다시 촛불 집회의 발언자들. 왼쪽부터 정어진 학생, 김은진 교수,김유진 학생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자유한국당을 해산하라! 11일 열린 다시 촛불에서 구호를 외치는 시민들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11일 열린 다시 촛불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촛불 시민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자유한국당을 해산하라! 11일 열린 다시 촛불에서 구호를 외치는 시민들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다시 촛불> 1부에서는 김은진 원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자유한국당 해산 시민헌법재판소>의 판결 결과를 알렸다.

 

김은진 교수는 앞서서 열린 시민헌법 재판소에서 시민 배심원의 만장일치로 자유한국당 해산 판결을 내렸다자유한국당 해산은 헌법과 국회법을 보더라도 그 근거가 있다헌법 46조에 <청렴의 의무국익에 우선해야 한다는 의무지위 남용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무>가 국회의원 의무로 규정되어 있다그런데 자유한국당 의원들 이것 절대로 지키지 않고 있다국회법 25조에 <국회의원은 의원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품위 유지 의무가 있는데품위유지라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인성을 가지고 있는 것그리고 그 인성대로 실천하는 것생활하는 것이다자유한국당 의원들 이것 역시 지키지 않고 있다또한 국회법 155조에서는 <국회에는 국회의장의 주재로 국회의원들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 징계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다징계사유는 의사활동을 해야 하고의사진행 중에는 의사법규를 준수해야 하고 국회의장의 질서유지에 관한 명령을 따라야 하고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징계를 받도록 되어 있다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의사일정을 지킬 마음도 없고 국회에 출석도 하지 않고 있다그리고 국회의장의 말도 듣지 않고 있다이를 보면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전원 징계 사유가 있다자유한국당은 국회법 165조 <국회회의 방해금지위반했다그래서 시민헌법재판소에서는 국회의원 한명 한명을 할 것이 아니라자유한국당을 아예 해산하는 것이 답이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시민헌법재판소의 판결 결과를 보고했다.

 

배서영 4.16연대 사무처장의 사회로 진행된 <다시 촛불> 2부는 가극단 미래의 <자유한국당 해산>을 주제로 한 노래 공연으로 시작되었다.

 

<다시 촛불> 2부에서는 <자유한국당 규탄 시민연대>, <적폐청산국민참여연대>, <민생경제연구소>를 대표해 시민들이 무대에 올라 자유한국당 해산 투쟁에 함께하자는 호소가 있었다.

 

장훈 4.16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의 결의발언이 있고 난 후 <다시 촛불>은 끝났다.

 

장훈 운영위원장은 결의발언에서 촛불의 밝기와 우리 미래의 밝기는 정비례한다촛불 국민들이 있었기에 우리 가족들은 5년 넘게 싸워왔고 앞으로도 싸워나갈 힘이 된다우리 가족들은 국민들과 함께 할 것이다왜 자유한국당 해체에 유가족들이 앞장서느냐고 질문을 한다이유는 단 하나다세월호 진상규명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왜 우리 아이들이 죽어갔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은데 이것을 가로막고 있다우리는 그 누구이든 세월호 진상규명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으면법의 심판대에 다 세울 것이다세월호 진상규명을 방해한 중심에 황교안이 있다황교안이 어떤 당인가바로 자유한국당이다 또한 더 이상 저들의 망언과 패륜적 언어들을 용서하지 않겠다. 5년간 세월호 가족들에게 행했던 폭언모욕폄훼를 비롯한 행위들을 법의 심판대에 세우겠다사법당국도 하지 못했던 적폐 청산을 국민들의 힘촛불의 힘으로 같이 이뤄내자고 호소했다.

 

장훈 운영위원장은 마지막으로 5월 18, 5월 25일 자유한국당 해산을 위한 촛불집회 <다시 촛불>에 함께 해달라고 요청했다.

 

촛불집회를 마친 3,000여 명의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시민행진을 진행했다.

 

▲ 11일 열린 다시 촛불에서 문예패 가극단 미래가 '자유한국당 해산'을 주제로 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11일 열린 다시 촛불에서 춤 공연을 하는 대학생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자유한국당을 해산하라! 11일 열린 다시 촛불에서 구호를 외치는 3,000여시민들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자유한국당을 해산하라! 11일 촛불 집회 후 행진하는 시민들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자유한국당을 해산하라! 11일 촛불 집회 후 행진하는 시민들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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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멍으로 들어간 비건, 자신 없으면 한미워킹그룹 해체하라!

한미워킹그룹 해체 요구하며 외교부 청사 주변 행진
  • 한경준 담쟁이기자
  • 승인 2019.05.11 15:57
  • 댓글 0

지난 10일 한미워킹그룹 회의가 오전 10시 외교부청사에서 열렸다.

회의 시작 전 오전 8시부터 한미워킹그룹 해체를 요구하는 시민 100여명이 모여 “한미워킹그룹 해체하라!”, “남북합의 이행하라!” 등의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선전전을 진행했다.

오전 9시에는 외교부 정문 앞에서 한미워킹그룹 해체를 요구하는 기자회견 후 회의 저지를 위한 행동에 돌입했다.

스티븐 비건은 오전 9시 30분경 외교부청사로 향했다가 정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미대사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후 정상적인 입구로 들어가지 못하고 차를 바꿔 타고 외교부 청사 지하주차장 출구로 역주행해 들어갔다. 주차장 출구로 진입할 수 없었던 승합차량은 10시 이후 외교부 정문으로 들어가려다 남아있던 대학생들이 거센 항의에 부딪히기도 했다.

이날 한미워킹그룹 저지행동으로 인해 한미워킹그룹회의는 애초 계획되었던 10시보다 지연되었다. 또한 이후 일정들이 비공개로 전환되었다.

한미워킹그룹은 남과 북이 판문점선언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개성공단 재개, 금강산관광재개, 남북철도 연결 등 구체적 내용들을 합의하자 이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이다. 지난해 11월 20일 워싱턴에서 첫 회의 후 공식 발족했으며 남북관계 발전을 사전승인 받게 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내정간섭이다.

이날 저지행동에 참가한 시민들은 남북관계를 사사건건 간섭하는 미국에 대한 분노와 한미워킹그룹 해체를 요구했다. 외교부를 둘러싸고 진행된 저지행동으로 스티븐 비건이 주차장 출구로 역주행해 몰래 들어가고 회의 시간이 지연되었다.

한경준 담쟁이기자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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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당신들이 독재를 아는가? 민생을 아는가?

독재란 무엇인가? 주권이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김재성  | 등록:2019-05-10 17:23:53 | 최종:2019-05-11 08:55:1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한국정경신문=김재성주필] 요 며칠, 날씨가 눈이 부시게 좋더니 감나무 연한 잎이 반들반들 윤이 난다. 지금 쯤 시골 고향에서는 모내기가 한창일 터. 감잎이 반들거리면 무논에 개구리 알이 보인다. 개구리가 알을 낳을 정도면 냉기가 가셨음이니 모내기를 서둘러야 한다.

세상만사에는 때가 있다. 그 때를 잘 맞추는 것이 지혜다. 주역은 바로 때에 적응하는 지혜를 제시하는 경전이다. 훌륭한 농부는 감꽃이 피면 올콩 심을 때임을 알고 감꽃이 지면 메주콩을 심는다. 그것이 시중(時中)이다. 

정치판에서 때 아닌 ‘독재타도’ 구호가 요란하다. 자유한국당이 여야 4당 공동발의로 정치개혁법안과 사법개혁법안을 패스트 트랙(신속처리 절차)에 올리는 것을 막느라고 내 놓은 슬로건이다. 패스트트랙 상정은 이미 끝났지만 자한당의 장외투쟁은 계속된다. ‘독재타도’ ‘장외투쟁’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다.

독재란 무엇인가? 주권이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그 한 사람이 바로 독재자요. 그 한 사람이 하는 정치가 독재정치다. 그 한 사람의 비위를 건드리면 ‘감히 나를?’ 불벼락이 떨어지는 세상, 이것이 대한민국 국민이 체험을 통해 알고 있는 독재다.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 멘토로 꼽히던 8선의 고 정일형 의원은 유신에 반대하는 ‘구구선언문’에 서명했다가 의원직을 상실했다. 1976년 3월의 일이다. 충남 서천출신 남장여성의 여장부였던 김옥선 의원은 75년 국회본회의 발언에서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했다가 의원직에서 물러난 후 영원히 정치낭인으로 살았다. 대구 출신 고 유성환의원은 86년 국회 본회의 연설에서 대한민국 국시는 반공보다 통일이어야 한다고 말했다가 징역형을 받아 의원직을 상실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야당 총재시절 외신과 인터뷰 중 “미국은 박정희 정권 지지를 철회해야 한다”고 말한 것 때문에 민주공화당 발의로 국회에서 제명처분을 당했다. 

나경원 자유한국단 원내대표는 지난 3월 국회 대표연설 중 “더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는 낯 뜨거운 이야기를 듣지 않도록 해 주십시요”라고 했다. 불룸버그 통신을 인용했다고는 하지만 외신이라고 다 옳은 것도 아니요. 더구나 문맥을 달리하는 인용은 금기다. 중요한 것은 나 대표는 이런 발언을 하고도 아무런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불이익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 심한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다.

그 나라의 대통령에 대해 그토록 거침없이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는 그 입이 바로 들꽃처럼 만발한 민주주의를 입증하고 있는 셈인데 바로 그 입으로 독재타도를 외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이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이 독재를 아는가? 

아이들은 철을 모른다. 그래서 철부지라 한다. 철부지들은 올콩, 메주콩에 관심이 없다. 감꽃이 피면 그 꽃 실에 꿰어 목걸이 만들고 팔찌 만들어 신랑각시 소꿉놀이 꿈에 부푼다. 꼭 소꿉놀이를 해야 철부지인가? 지금이 어느 시대인지를 모르면 그 또한 철부지가 아닐까?  

뒤늦게 철이 났는가? 자유한국당이 ‘독재타도’를 ‘민생투쟁’으로 바꾼다는 소리가 들린다. 사실이면 늦었지만 옳은 결정이다. 그런데 틀린 게 있다. 장외투쟁은 독재타도와 궁합이 맞는다. 정치가 막장일 때 장외로 뛰쳐나가는 것이다. 민생은 삭발이나 장외투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유한국당이 민생을 말하려면 장내로 들어와야 한다. 목구멍과 직결되는 것만 민생이 아니다. 공수처 설치법안 같은 것은 그야말로 민생법안이다. 서민들은 ‘무전유죄’를 헌법조항으로 여긴다. 사법개혁 열망도 어느 때보다 높다.

참으로 민생을 챙길 양이면 소득주도 성장과 주52 시간 근로 같은 민생법안을 기업 입장에 서서 흠집만 낼 게 아니라 안착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 이분들에게 또 한 번 묻고 싶다. 당신들이 민생을 아는가?

출처: http://kpenews.com/View.aspx?No=32969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news/mainView.php?uid=4764&table=byple_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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