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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김종분, 91년에 죽은 성대 김귀정이 엄마여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9/04/19 09:04
  • 수정일
    2019/04/19 09:0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민병래의 사수만보 4화] 김종분의 왕십리 노점 30년 세월

19.04.19 07:51l최종 업데이트 19.04.19 07:51l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봄볕이 꽃망울을 터트리며 어깨 위에 내려 앉아 놀던 것이 어제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 봄기운이 홀연히 사라지고 꾸물꾸물한 날씨에 찬바람까지 더해져 겨울이 다시 온 듯했다.

김종분은 이래나 저래나 몸을 추스려 경동시장(서울 동대문구)을 향한다. 언제부턴가 비탈에 선 나무처럼 기울어진 몸, 아직 지팡이 없이도 걸을 수 있음을 고마워하며 버스에 올랐다. 남들은 꽃샘추위라며 겨울 외투를 다시 꺼내고 목도리까지 챙겼건만, 김종분은 홑겹 옷차림에 전대 자루 하나 걸쳤을 뿐이다.

"에구. 만 원에 가, 가자구."
"아이구! 할머니, 너무 하셔요. 용달 기본요금이 2만원이에요."
"무신 소리야, 늘 그렇게 갔어."
 

잠시 실랑이를 했지만 흥정은 싱겁게 끝났다. 김종분이 호박·오이·옥수수 등을 떼다가 왕십리 노점에서 판 세월이 벌써 삼십 년이다.
 
김종분 할머니를 가까이에서 클로즈한 모습 행당시장에서 노점을 하며 더울때, 추울 때는 인근 맥도날드에서 잠시 피난(?)을 하기도 한다. 그곳에서 찍은 사진.
▲ 김종분 할머니를 가까이에서 클로즈한 모습 행당시장에서 노점을 하며 더울때, 추울 때는 인근 맥도날드에서 잠시 피난(?)을 하기도 한다. 그곳에서 찍은 사진.
ⓒ 민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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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년생이니 올해 팔순이 넘은 나이. 기계 운반 일을 하던 남편이 50대 중반에 뇌진탕으로 세상을 등지자 그녀는 노점으로 나섰다. 그때 그녀의 나이 쉰 살이었다. 삼남매는 아직 생활 터전을 잡기 전이었다. 무작정 거리에 나가 좌판을 펼친 곳이 왕십리 행당시장 앞 건널목이었다.
 
경동시장에서 왕십리까지는 용달차로 10분 남짓거리, 고산자로를 따라 가다가 청계천을 건너면 손에 닿을 듯한 거리에 있다. 그의 가게(?) 앞에 야채 상자를 내려놓으려니 바람이 매서워 천막으로 만든 그의 노점이 마구 흔들린다.

사실 구청에서 무허가노점을 단속한다고 천막을 뜯어간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쫓겨난 적도 많았다. 하지만 뜯어가면 뜯어가는 대로, 쫓아내고 전기를 끊으면 또 그런 대로 버티고 버티며 오늘까지 왔다.

"할머니, 요 오이 한 봉지 값 2000원 낼모레 줄게!"
"그려, 가지고 가. 요담에 줘."


오후 3시경, 막 장사를 시작할 때면 나타나는 동네 할머니다. 김종분은 2000원짜리 외상을 흔쾌히 달아준다. 그렇다고 장부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머릿속에 기억해두고 잊으면 잊는 대로 장사를 한다. 30년 세월, 한자리를 지켰으니 길거리 사랑방이 된 셈이다.
 
김종분 할머니가 손님에게 물건을 건네는 모습 김종분 할머니는 오후 3시부터 자정을 넘겨 새벽1시까지 자리를 지킨다.
▲ 김종분 할머니가 손님에게 물건을 건네는 모습 김종분 할머니는 오후 3시부터 자정을 넘겨 새벽1시까지 자리를 지킨다.
ⓒ 민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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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분의 가게는 두 평이 채 안 된다. 천막 한 구석에는 강냉이며 튀밥이, 앞에는 오이, 호박, 깐마늘, 가래떡이 귀한 손님상 보듯 가지런히 놓여있다. 안으로는 옥수수 삶는 큰 솥이 의젓하게, 가래떡 굽는 연탄화로는 얌전하게 앉아 있다. 양쪽 네 귀퉁이로는 얇은 쇠기둥이 한길 남짓 올라가 천막을 지탱해주고 있다.

여기가 그의 일터이며 삶의 터전이다. 늦은 시간엔 여기서 잠도 청했다. 자정 넘어 들어가면 아이들이 잠에서 깰까봐 걱정도 되고, 새벽시장에 늦지 않으려고 왕십리 대로변에서 경적 소리를 벗 삼아 잠들기도 했다.

김종분이 앉은 자리는 남향이지만, 앞으로 건물이 있어 하루 종일 볕이 들지 않는다. 그래도 해가 있는 낮에는 견딜 만하지만 날이 저물면 한기가 느껴진다. 길바닥을 내달리는 차들이 일으키는 바람까지 더해지면 꽃샘추위도 한겨울 매운 추위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김종분의 옷은 늘 홑겹이다. '그날' 이후 몸에 천불이 나서 옷을 여밀 수가 없었다. 몸을 풀어헤쳐야만 열을 식힐 수 있었다.

벌써 27년 전, 성대 불문과 88학번이던 둘째 딸 귀정이가 숨진 날이 27년 전인 1991년 5월 25일이다.

그날 귀정이는 학교 가는 길에 치마를 입고 나갔다가 황급히 돌아와서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그러려니 했다. 평소에도 아버지가 소주를 마시고 나면 빈병을 부지런히 나르기에 걱정이야 들었지만 별일 없으려니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딸은 그날 '공안통치 민생파탄 노태우정권 퇴진을 위한 제3차 범국민대회'에 참가했었다.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아들 친구가 늦은 오후에 노점으로 찾아왔다. "귀정이 누나가 다쳐서 백병원에 입원해 있으니 가보셔야 한다"는 얘기였다. 장사하던 중에 좌판을 치울 수도 없어 아들 친구에게 택시비를 쥐어주고 먼저 가보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렇지만 김종분도 마음이 불안해, 장사를 그냥 벌려놓은 채 물어물어 백병원을 찾아나섰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박종철 아버지가 '귀정이 어머니'를 찾아 왕십리를 헤매고 다니셨다"고 한다. 도착하니 이미 백병원 앞은 시위대와 경찰이 거친 몸싸움을 벌이며 난리통이었다. "왜 막아, 폭력경찰 물러가라!!" 고함소리가 곳곳에서 일어나 귀가 떨어져나갈 정도였다.

경찰이 병원을 빈틈없이 에워싸서 들어가려 해도 계속 밀려나고 말았다. 그때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아버님 한 분이 "가족이니 길을 열어주라"고 해서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입원했다는 딸을 보러왔건만, 병실로 안내하지 않았다. 설마 했지만 영안실로 인도받을 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슴 고동이 쿵쾅대고 터져나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왜 병실로 안 가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외면했다. 순간 다리에 힘이 쭉 빠지고 넘어질 듯했다. 영안실은 점점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천천히 방안에 들어서니 흰 천으로 쌓인 몸뚱이가 뎅그러니 놓여있었다. 사방 벽은 시퍼런, 징그럽게 시퍼런 색이었다.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외면하려 해도 몸뚱이는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비틀비틀대며 거의 무릎 걸음으로 다가가 흰 천을 걷어냈다. 눈에 들어온 것은 곱디고운 둘째 딸 귀정이었다.

그날 이후 김종분은 몸에서 열이 나 늘 식혀야만 했다. 그래서 옷을 여미고는 살 수 없었다. 살을 에는 한겨울 추위가 아니면 그저 옷을 벌려 놓고 있어야 열을 풀어낼 수 있었다.

"어머니 추운데 오늘도 나오셨어요? 옥수수 두 봉지 좀 주세요."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구청 직원이다. 천막을 뜯어가며 못내 미안해하던 단속반 사람이다. 그 뒤부터 퇴근 무렵이면 가끔씩 들러 가래떡이며 땅콩을 한 봉지씩 사간다. 김종분은 옥수수에 가래떡까지 얹어 "어서 들어가 안식구하고 따순 밥 먹으라"고 인사를 했다. 어쩜 이 맛에 장사를 하는지도 모른다.
 
김종분 할머니가 옥수수를 찌는 모습 할머니 가게에서 옥수수와 가래떡이 제일 인기다.
▲ 김종분 할머니가 옥수수를 찌는 모습 할머니 가게에서 옥수수와 가래떡이 제일 인기다.
ⓒ 민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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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해가 떨어지니 제법 쌀쌀하다. 한기가 느껴질 정도다. 그제야 김종분은 겨우 바람막이 하나를 꺼내 몸에 걸쳤다. 딸 귀정이가 좋아하던 꽃분홍색이다.

김종분은 백병원 영안실에서 5월 25일부터 6월 12일 장례식 날까지 꼬박 열아홉 날을 보냈다. 몸이 무너져 내렸지만 딸 귀정이의 친구들이 손잡아주고 어깨도 주물러주며 항상 곁에 있어주었다. 그때 형 집행정지로 출소했던 문익환 목사님, 지선 스님, 이소선 어머니 등이 거의 함께 지내며 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민가협 어머니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도움 덕에 귀정이 옆을 지켜낼 수 있었다.

열아홉 날을 지내면서 김종분이 제일 힘들었던 때는 부검한다고 경찰이 병원 난입을 시도했을 때였다.

귀정이가 대한극장 앞 도로에서 경찰의 공세에 밀리다 압사한 날이 1991년 5월 25일이다. 명지대생 강경대가 백골단에 맞아 숨진 날로부터 꼭 한 달 뒤였다. 당시 공안정국을 몰고 갔던 노태우 정부는 김귀정 사망으로 불리하게 된 정세를 서둘러 덮고자 부검을 명분삼아 시신을 뺏으려 했다.

그래서 '김귀정열사폭력살인대책위'의 사수대는 경찰과 매일 치열하게 싸웠다. 특히 격렬했던 날은 5월 30일이었다. 나중에 확인된 일이지만, 새벽 5시에 경찰은 백골단과 전경을 세 방면에서 한꺼번에 투입하는 작전을 전개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일명 '엘레베이터 작전'이었다. 80여 명의 백골단이 환자 보호자와 방문객으로 가장해서 병원 13층에 집결, 작전 개시와 함께 급강하, 영안실로 난입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관제데모작전'이었다. 시위대로 위장한 사복조들이 을지로 일대에서 전경과 맞붙은 뒤 쫒겨들어가는 것처럼 병원 바리케이드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백병원 뒤 중부세무서의 담을 굴삭기로 헐고 병력을 투입, 병원 정문을 장악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경찰은 달려들었지만 사수대의 결사항전에 밀려 작전을 포기, 철수하고 말았다. 그날 부상자들이 특히 많았다.

김종분은 딸의 친구들이 피터지며 다치고 영안실에서 밤새우며 지쳐가는 모습을 보기가 너무 힘들었다. "우리 딸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상하는구나"하는 생각에 속상하고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렇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저 바라보면서 눈만 껌벅껌벅할 뿐, 천불을 안으로 안으로 삭힐 수밖에 없었다.

"저녁 밥은 어떻게 할래요? 동태찜 시켜 먹을까?"

문득 생각에 잠겨있던 김종분을 꽃집 아줌마가 불러 깨운다. 행당시장 앞, 손바닥만 한 땅뙈기 안에서 어깨 나란히 노점 하는 이웃이다. 그 집 말고도 토스트, 칼국수, 군밤장사 이렇게 서넛이 (지금은 칼국수 장사가 죽었지만) 서로 수십 년을 의지하며 함께 했다. 저녁 끼니 때가 되면 라면을 끓이기도 하고, 시켜 먹기도 하며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식구다.

동태찜을 나눠먹고 가래떡과 옥수수를 몇 봉지 겨우 팔고 나니 어느덧 자정이 가까이 온다. 이때쯤 되면 몸이 한결 춥고 졸음까지 밀려온다. 발 앞에 연탄난로를 몸 가까이 더 끌어안아 본다. 김종분은 늘 자정을 넘겨 한시까지 장사를 한다. 밤 11시가 넘어 사람들 발길도 잦아지면 장사도 시원찮다. 그렇지만 김종분은 늘 새벽 한시 경까지 거리를 지킨다. 아니 졸음에 못 이길 시간까지 스스로를 가둬둔다.

그날 6월 12일은 참으로 길었다. 아니 11일부터 헤아려보면 더 긴긴 날이었다. 장례식을 위해 귀정이를 성대로 옮기던 날, 뜻하지 않게 성균관 유림들이 교문을 막고 나섰다. "성균관에는 정몽주·퇴계 선생 등 성현 39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초대 총장이었던 김창숙 선생 장례 때도 시신이 들어오지 않았다"며 운구를 저지했다.

그날따라 비는 추적추적 내렸고 늦은 오후여서 땅거미까지 지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학생들은 무릎을 꿇었다. 여학생들은 치마를 입은 채 맨살을 아스팔트에 드러내놓고 애원했다. "귀정이가 마지막으로 교정을 볼 수 있게 해 주세요"라며... 그 간청 덕에 운구는 정문을 피해 도서관 옆문으로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6월 12일 성균관대 금잔디광장을 출발한 장례행렬은 파고다공원 앞에서 1차 노제, 대한극장 앞에서 2차 노제를 치렀다. 그리고 딸이 다녔던 무학여고 앞을 거쳐 밤 늦게 모란공원에 묻힐 수 있었다.
  
귀정이를 보내고 난 후 김종분은 자정을 넘기고 나서야 노점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몸을 부대껴야 집에 가서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렇지만 문을 열고 자야 했다. 문을 닫고서는 잠이 들지 못했다. 옷을 풀어헤쳐야 하는 것처럼 문을 열어놓아야 겨우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자정이 넘으니 저 멀리 달빛은 맑아지는데 왕십리 가로등은 끔벅끔벅 졸기 시작했다. 큰 길가에 차 소리도 조금씩 잦아든다. 이때가 장사를 거둘 시간이다.

김종분은 연탄난로 불을 끄고, 몸을 일으켜 세운다. 전기가 끊긴 이후에는 가로등 불빛만 의지해 야간장사를 한 지 제법 오래되었다. 분홍빛 바람막이에 묻은 먼지를 툴툴 털고 남은 오이며 호박을 대충 수습해 천막 안으로 밀어놓고 얼기설기 동여매 쇳대를 채웠다.

예전에는 이 천막 안에서 많이 잤다. 그런 다음 날이면 귀정이와 큰딸은 늘 성화를 했다.

엄마 기다렸는데 왜 안 왔냐고, 
너희들 잠 깨울까봐 그냥 거기서 잤다고,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고, 엄마 몸 상한다고.

그렇게 티격태격 말다툼을 했다.
그렇게 살가웠던 귀정이. 이제 한 달 남짓이면 28주기 기일이 다가온다.

고맙게도 딸의 친구들은 '김귀정추모사업회'를 만들어 일 년에 세 번 어버이날·설날·자신의 생일날을 잊지 않고 찾아와주었다. 그것도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그게 참 힘이 되었다. 그리고 왕십리의 무학여고 동창들도 때때로 찾아왔다. 와선 안부도 묻고 쪽파 한 단 사며 몇 만원씩 전대에 밀어 넣어주기도 했다.

어떤 날은 와서 "어머니 감기 든다"며 목도리를 둘러주고 갔고 작년에는 팔순잔치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귀정이를 잃어 아팠지만 더 많은 딸과 아들을 얻었다는 행복감을 느끼기도 했다.

귀정이의 언니인 큰 딸과 동생인 막내 아들 녀석은 늘 성화다. 간청도 많이 한다. "이제 그만 노점 일 걷으시라고, 쉬셔야 한다"고.

그렇지만 김종분은 행당시장 건널목 앞 이곳을 떠날 수 없다.
귀정이와 3남매를 키워낸 이 곳,
귀정이의 친구들이 늘 찾아오는 이 곳,
왕십리의 거리 사랑방이 된 이 곳을 벗어날 수 없다.
산동네에 판잣집이었지만 첫 집을 장만했던 이 곳, 왕십리를 떠날 수가 없다.

김종분은 몸을 기우뚱거리며 발걸음을 내딛는다.
이제 집으로 가는 길이다.
김종분의 천막노점을 비추던 가로등도 졸린 눈을 부비며 따라 일어난다. 앞서서 종종 걸으며 찬바람을 막아주고 길을 비춰준다.
왕십리의 별빛 달빛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녀가 가는 길에 빛살을 보태준다.
밤하늘 어스름 어딘가에는 귀정이의 웃음, 귀정이의 속삭임이 번지는 듯하다.

"엄마 오늘도 고생했어, 사랑해..."

김종분은 눈을 꿈벅꿈벅하며 한마디 내뱉는다. 썩을 년, 꿈에 한 번도 안 보이면서...
 
김종분 할머니의 귀가길 새벽 1시까지 장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 김종분 할머니의 귀가길 새벽 1시까지 장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 민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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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분 할머님의 이력 
38년 화성에서 출생 
62년 인천으로 시집 
67년 왕십리 이주 
88년 남편과 사별 
88년 왕십리 행당시장앞에서 노점 시작
91년 둘째딸 김귀정을 민주화운동과정에서 잃음
2018년 팔순연 
2019년 팔순이 넘은 지금도 행당시장앞 거리를 지키고 있음
 
김귀정을 돌아보는 사진들
김귀정의 초상 성대 불문학과 88학번 김귀정은 91년 공안통치분쇄 시위과정에서 산화하였다.
▲ 김귀정의 초상 성대 불문학과 88학번 김귀정은 91년 공안통치분쇄 시위과정에서 산화하였다.
ⓒ 김귀정 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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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여고 재학시절의 김귀정 김귀정은 왕십리 무학여고를 나왔다. 무학여고시절의 모습, 맨 왼쪽이다.
▲ 무학여고 재학시절의 김귀정 김귀정은 왕십리 무학여고를 나왔다. 무학여고시절의 모습, 맨 왼쪽이다.
ⓒ 김귀정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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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병원 영안실에서 통곡하는 김종분 여사  91년 5월25일부터 6월11일까지 김귀정열사는 백병원 영안실에 있었다.
▲ 백병원 영안실에서 통곡하는 김종분 여사  91년 5월25일부터 6월11일까지 김귀정열사는 백병원 영안실에 있었다.
ⓒ 김귀정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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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정 열사의 무덤앞에서  김귀정 열사는 91년 6월12일 마석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가 현재는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으로 모셔져 있다.
▲ 김귀정 열사의 무덤앞에서  김귀정 열사는 91년 6월12일 마석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가 현재는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으로 모셔져 있다.
ⓒ 김귀정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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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정의 운구행렬 김귀정은 6월11일 장례를 위해 성대로 옮겨져왔다.
▲ 김귀정의 운구행렬 김귀정은 6월11일 장례를 위해 성대로 옮겨져왔다.
ⓒ 김귀정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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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유림이 학교진입을 막자 간청하는 귀정이 친구들의 모습 성균관 유림은 성현이 모셔져있는 곳에 시신이 들어갈 수 없다며 막았다. 이에 간청하는 재학생들의 모습.
▲ 성균관 유림이 학교진입을 막자 간청하는 귀정이 친구들의 모습 성균관 유림은 성현이 모셔져있는 곳에 시신이 들어갈 수 없다며 막았다. 이에 간청하는 재학생들의 모습.
ⓒ 김귀정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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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유림이 김귀정의 성대운구를 막자 빗속에서 간청하는 귀정이 친구들의 모습 성균관 유림은 성현이 모셔져있는 곳에 시신이 들어갈 수 없다며 막았다. 이에 간청하는 재학생들의 모습.
▲ 성균관 유림이 김귀정의 성대운구를 막자 빗속에서 간청하는 귀정이 친구들의 모습 성균관 유림은 성현이 모셔져있는 곳에 시신이 들어갈 수 없다며 막았다. 이에 간청하는 재학생들의 모습.
ⓒ 김귀정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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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김귀정열사 사망규탄 투쟁현장의 모습 김귀정 열사의 사망을 계기로 공안통치 분쇄 투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 91년 김귀정열사 사망규탄 투쟁현장의 모습 김귀정 열사의 사망을 계기로 공안통치 분쇄 투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 김귀정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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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년 김귀정열사 사망규탄 투쟁현장의 모습 김귀정 열사의 사망을 계기로 공안통치 분쇄 투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 91년 김귀정열사 사망규탄 투쟁현장의 모습 김귀정 열사의 사망을 계기로 공안통치 분쇄 투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 김귀정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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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정의 장례행렬 91년 6월12일 성대를 출발한 장례행렬은 파고다공원, 대한극장, 무학여고를 거쳐 모란공원에서 마쳤다.
▲ 김귀정의 장례행렬 91년 6월12일 성대를 출발한 장례행렬은 파고다공원, 대한극장, 무학여고를 거쳐 모란공원에서 마쳤다.
ⓒ 김귀정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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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적폐 몸통 자유한국당을 심판해야 한다

자주통일 평화번영 가로막는 분단적폐 청산하자
기사입력: 2019/04/19 [06:46] ㅣ 최종편집:

 
▲ 전창일 유신독재와 5공 반국가단체 고문조작 국가범죄 청산연대 공동대표가 박정희 고소인 발언을 하고 있다.     ©사람일보


4.19혁명을 짓밟은 박정희 쿠데타정권의 후예 자유한국당의 해체를 요구하는 각계 각층의 목소리가 고조되고 있다.

 

박근혜 탄핵과 함께 정계에서 퇴출되어야 할 자들이 후안무치하게도 전두환 내란반란세력을 심판한 5.18항쟁을 왜곡 모함하고 친일매국노 처단을 위한 반민특위를 모욕하는 등 망언 망동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분단적폐 몸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도로박근혜당’이라는 규탄을 받고 있다.

 

온갖 부정비리와 헌정유린으로 재판에 회부된 이명박 박근혜의 범죄에 대한 심판은 기왕에 기소된 것만으로 마칠 수 없다. 역사적인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짓밟고 남북경제공동체의 동맥인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가동을 모두 끊어버린 것은 반드시 심판받아야 할 천인공노할 특대형범죄이다.

 

그 연장선에서 자유한국당이 민족 공동의 자주통일 평화번영 강령인 판문점선언의 국회 비준동의를 1년이 다 되도록 가로막고 있음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명시하고 있는 헌법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며, 준엄한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자행한 분단적폐를 근절하려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철저한 진실 규명으로 범법자들을 엄벌하고 청와대와 대법원이 공모 결탁한 사법농단의 전모를 밝혀 정의의 심판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 지배인 허강일이 언론에 폭로한 북 해외여성종업원 납치의혹사건도 진실을 밝혀 합당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특히, 정부당국은 사회단체들의 요구를 수용해 남북관계를 동결시킨 5.24조치의 근거가 된 2010년 3월26일 천안함침몰사건 의혹에 대한 전면 재조사와 진실규명에 하루빨리 나서야 한다. 신상철 전 천안함 민군합동 조사위원은 저서 <천안함은 좌초입니다>를 통해 천안함사건이 북의 ‘1번어뢰’ 공격이 아니라 좌초 후 충돌에 의해 침몰된 ‘교통사고’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이광섭 박사는 저서 <천안함살인사건의 10가지 물리적 증거>에서 ‘좌초 후 수밀문 폐쇄에 의한 반파’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부는 1987년 대선을 앞두고 발생한 대한항공기폭파사건 폭파범 김현희 관련 의혹에 대해서도 진실규명에 나서 유가족들의 한을 풀어줘야 한다.

 

자유한국당의 원조격인 박정희 유신독재의 고문조작 학살 범죄에 대한 심판도 시급한 사회적 요구로 제기되었다. 전창일 인혁당재건위사건 반국가단체 고문조작 국가범죄 피해자는 같은 사건 사형수 8인 사형집행 44주기를 맞아 고문조작 학살의 책임을 물어 주범 박정희의 단죄를 요구하는 고소장을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제출했다.

 

피해자는 1975년 4월9일 사형이 집행된 8인이 사후 32년 만에 2007년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음으로써 주범 박정희에 대한 반국가단체 고문조작 학살 국가범죄가 확증되었다고 밝혔다.

 

고문조작 학살 국가범죄에는 시효가 없다. 박정희 유신독재 인혁당재건위사건 반국가단체 고문조작 국가범죄의 청산은 반인륜적 고문조작을 금지하고 있는 국제인권법에 의거하여 피해자 중심 해결 원칙에서 엄정하게 처리되어야 한다.

 

유신독재 고문조작 학살 주범 박정희의 단죄는 훈장 서훈을 치탈하고 현충원 국가원수 묘역에서 추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나치 학살의 주범 히틀러가 독일 국가원수 묘역에 안치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동시에 독일에서 히틀러 찬양이 불법인 것처럼 고문조작 학살의 주범 박정희를 찬양하는 행위를 엄벌해야 한다.

 
▲ 박해전 자주통일평화번영운동연대 상임대표     ©사람일보

우리 사회는 이 모든 분단적폐를 엄정하게 청산해야 역사정의와 사회정의를 바로세우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역사적인 판문점선언 국회 비준동의를 한시바삐 실현하고 이를 적극 실천함으로써 식민과 분단의 역사를 끝장내는 것이야말로 분단적폐를 근본적으로 청산하는 길이다.

 

우리 사회는 분단적폐 몸통 자유한국당을 준엄하게 심판하고 온 겨레가 염원하는 자주통일 평화번영의 미래로 힘차게 전진해야 할 것이다.

 

<박해전 자주통일평화번영운동연대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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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노딜'이라는 오해, 그리고 다가오는 진실의 순간

[창비 주간 논평]
2019.04.18 11:59:27
 
 
최근 워싱턴에서 있었던 4·11 한미정상회담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이 시점에 정상회담이 필요했느냐는 질문부터 성패 논쟁, 그리고 향후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 문제까지 이어지고 있다.

북미 "협상테이블은 살아 있다", 실제로는?

하노이회담 결렬 이후 북미 양측의 수뇌부가 '협상테이블은 살아 있다'라고 반복적으로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재인정부는 미국 내 강경론의 득세를 북한이 맞받아칠 경우, '강대강'의 대결구조에 의해 프로세스 전체가 붕괴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강경론 확산에 제동을 걸고, 약해지는 대화의 동력을 회복하기 위해 회담을 추진했다. 그런 맥락에서 미국의 자세 변화에 대한 일말의 여지를 확인했으며, 이후 4차 남북정상회담과 3차 북미정상회담으로 이어지는 협상의 로드맵을 한미가 공동 인식했다는 점은 분명 성과다. 특히 미국 내에서 꾸준히 비판을 받아온 톱다운 방식의 유지를 못 박은 점은 중요한 성과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워싱턴 노딜'이라는 평가를 포함해 일각에서 제기되는 실패론에는 이번 정상회담의 정확한 성격과 목표에 대한 일정 정도의 오해가 있다. 이번 회담은 한미 간 담판이나 합의를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하노이 이후 대북정책에 대한 공동 준비였다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빅딜 고수 및 제재 유지 등에서 감지된 양국의 차이는 현 상황에서 일시에, 그것도 공개적으로 바꾸기는 어렵다. 트럼프는 하노이회담 당시의 어려운 국내 입지가 상당 부분 해소되었고, 자신의 노딜 결단에 대한 미국 조야의 폭넓은 지지는 아마도 취임 이후 초유의 일인 만큼 당분간은 자기 입장을 견지하며 정치적 자산으로 이용하고 싶을 것이다.

북한의 양보를 전제한 협상,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다 

담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미 양국의 정상과 실무진이 나눈 총 116분간의 논의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중요하다. 한국이 가진 중재안으로 어디까지 미국을 설득했느냐가 관건이다. 물론 대북 설득을 위한 복안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현시점에서 말할 수도 없고, 말해서도 안 된다. 회담 직전 폼페이오가 제재에 대한 '작은 여지'를 원한다고 발언한 것이나, 회담 당일 트럼프의 스몰딜과 단계적 접근에 대한 언급들이 나쁜 신호는 아니다. 또한 김정은이 최고인민회의의 시정연설에서 제3차 북미정상회담에 대한 용의를 밝힌 것에 대해, 트럼프가 트위터를 통해 환영의 메시지를 보낸 것도 긍정적이다. 그러나 엇갈린 메시지도 동시에 나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트럼프는 지난 15일에 대화는 좋지만 빨리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함으로써 3차 정상회담이 북한의 양보 여부에 달려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빅딜 전까지 제재는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그래서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다. 현 구도에서 섣부른 낙관은 물론이고 희망적 사고도 금물이다. 특히 북한의 전적 양보를 전제한 협상은 전혀 녹록하지 않다. 협상 전술의 한 측면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미국이 강자의 일방적 횡포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한반도평화프로세스의 시계를 싱가포르회담 전으로 되돌려버렸고, '선 비핵화 후 제재 해제'의 리비아모델로 돌아간 양상이다. 여기에 이라크 침공과 카다피 제거의 주역이었던 볼턴이 전면에 나선 상황에서 북한은 자신들의 생명줄인 핵을 더더욱 포기하기 어려워졌다. 북한이 굴복하면 다행이지만 하지 않더라도 조급하지 않겠다는 트럼프의 언급은 상당 부분 진실일 것이다. 게다가 미국의 강경한 참모들은 주고받는 협상을 통한 평화적 비핵화는 원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북한 핵위협을 빌미로 한·미·일을 군사적으로 묶어 중국을 봉쇄하는 편이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부류이기 때문이다.

어려워진 타협, 공개 행보를 줄여야 할 때 

현재, 한국의 역할은 커졌으나 입지는 매우 좁아졌다. 미국이 결렬시킨 회담을 되살리려는 한국의 노력은 미국과 국내 보수강경파의 이른바 '김정은 수석대변인' 프레임에 걸려 있다. 북미의 강대강 대치가 길어지면 비핵화와 적대관계 해소를 통한 체제보장의 교환은커녕 어떤 부분적 비가역적 조치조차 성취하지 못할 수도 있다. 미국 조야의 대북 불신 및 회의론이 임계점에 도달할 것이고, 북한도 오바마를 포기했던 전례처럼 트럼프를 회피한 채 장기전으로 돌아설 수 있다. 

승부를 걸어야 할 이른바 '진실의 순간'(the moment of truth)이 다가오고 있다. 이 말은 투우 경기에서 투우사가 검으로 소의 급소를 찔러 마무리 짓는 순간을 뜻하는 표현으로, 회피할 수 없는 결정적 운명의 순간을 지칭한다. 문재인-트럼프-김정은 정상들에 의한 초유의 톱다운프로세스가 2017년의 위기를 극복하고, 1년 남짓 평화를 향한 잰걸음을 해왔다. 변한 것은 많으나 정작 가시적으로 이룬 것은 부족하다. 약속과 합의는 많으나 실천된 것은 많지 않다. 트럼프도 김정은도 전술적인 측면에서 서두르지 않겠다고 하지만, 사실 시간은 누구의 편도 아니다. 한국과 미국의 선거일정이 다가온다. 문재인정부의 지지율도 하락세를 보이고, 남북문제에의 올인은 추동력인 동시에 피로감이라는 양날의 검이다. 양보 없는 강자와 궁지에 몰린 약자 사이에서 더 늦기 전에 급소를 찌르는 결단의 순간이 필요하다.

시급하지만 조급함은 금물이다. 하노이에서 양쪽의 패가 공개됨으로써 협상이 쉬워진 것이 아니라, 누가 이기고 지는지가 확실해졌다는 점에서 타협은 더욱 어려워졌기에 지금부터는 공개 행보를 줄이고, 물밑에서 북미를 오가는 치열한 외교전에 나서야 한다. 특히 칼자루를 쥔 미국을 설득해야 하는데, 지나친 친미일변도로는 설득하기 어려움을 분명히 인식하고 때로 미국의 일방적 자세에 강하게 맞서야 한다.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남측은)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김정은 위원장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향후 수개월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운명의 결정적 시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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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붓으로 쓴 삼천리 독보(獨步)의 꿈"

인권운동 사랑방·인권재단 사람, '0.75평에서 붓을 든 사람들-선(線) 위에 선(立)' 전시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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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18  00:3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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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운동 사랑방과 인권재단 사람이 주관한 '0.75평에서 붓을 든 사람들-선(線) 위에 선(立)' 장기수 9인의 서예작품 전시회가 17일 개막됐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교도소에 들어가면 재소자는 혼자 걸을 수가 없습니다. 교도관이 반드시 뒤에 따라야 합니다. 독보를 못한다고 합니다. 지금도 반쪽밖에 독보를 못하는 형편이지만 그때 삼천리를 독보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꿈을 가지고 '팔도일행'(八道一行)이라고 썼습니다."

인권운동 사랑방과 인권재단 사람이 주관한 '0.75평에서 붓을 든 사람들-선(線) 위에 선(立)' 장기수 9인의 전시회가 개막된 17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라이프러리 아카이브.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대전교도소에서 20년동안 옥고를 치르다 1988년 6.29선언 1주년때 석방된 오병철 선생은 이날 개막 행사에서 1987년 옥중에서 쓰고 이날 전시된 '팔도일행'을 이같이 풀이해주었다.

   
▲ 오병철 선생이 붓으로 쓴 '삼천리 독보'의 꿈에 대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날 전시된 서예작품은 류낙진 선생, 박성준 선생, 석달윤 선생, 신영복 선생, 안승억 선생, 오병철 선생, 이구영 선생, 이명직 선생, 이준태 선생 등 아홉 분의 작품 50점.

20여년 전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모았던 것으로 옥중 작도 있고 출소 후 쓴 작품도 있다. 이번에 처음 선보이는 작품은 오병철 선생이 올해 봄 신현칠 선생의 시 제목을 쓴 '오늘이 바로 그날인가'.

오병철 선생이 쓰던 붓과 벼루, 신영복 선생이 감옥안에서 새긴 전각은 물론 감옥에서 공부하며 쓰던 책자 등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 오병철 선생의 작품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이명직 선생의 작품들. '송심난정', '소나무같이 꿋꿋한 마음 난초같은 유연한 성품'이 눈에 띤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국전 3회, 광주시, 전라남도 미술대전에 수차례 입선하기도 했던 류낙진(1928~2005) 선생이 쓴 '從善如流(종선여류), 선을 따름이 물 흐르듯 한다', '心淸事達(심청사달), 마음이 깨끗해야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 백련강(百鍊剛), 쇠는 백번을 두드려야 단단해진다'는 작품은 20년 넘는 세월이 흐르도록 여전한 가르침을 주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로부터 익힌 붓글씨를 감옥 서예반에서 만난 성주표, 조병호 선생과 옥중 스승인 이구영선생 등을 통해 체계적으로 배운 신영복(1941~2016) 선생의 옥중작인 '회우보인(會友輔仁), 벗을 모아 어짐을 더한다), '한겨레 한나라'를 비롯해 세계인권선언 전문 등 여러 작품도 볼 수 있다.

옥중에서 신영복, 이명직, 오병철 선생에게 한학과 서예를 가르친 이구영(1920~2006)선생은 '晴耕夜讀(청경야독), 날이 밝으면 논밭을 갈고 밤에는 글을 읽는다', '自天佑之(자천우지),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를 돕는다'는 글도 전시되어 있다.

이명직(1926~2012)선생이 쓴 3.1독립선언서가 병풍으로 전시되었으며, '兼治別亂(겸치별난), 겸애하면 화평해지고 차별하면 세상이 어지러워진다), '寬則得衆(관즉득중), 너그러우면 많은 사람을 얻는다', '德必有隣(덕필유린), 덕이 있으면 따르는 사람이 있어 외롭지 않다', '松心蘭性(송심난성), 소나무 같이 꿋꿋한 마음 난초 같은 유연한 성품' 등 가장 많은 작품을 볼 수 있다. 

박성준(1940~ ), 안승억(1935~ ), 오병철(1937~ ) 선생은 직접 전시장에 나와 인사도 나누고 근황을 소개하기도 했으나 거동이 불편한 석달윤(1932~ )선생과 연락이 끊긴 이준태(1943~ ?) 선생은 과거 작품으로만 볼 수 있다.

1981년 안동 일가족간첩사건으로 무고한 8년 감옥살이를 한 안승억 선생은 재심청구 5년만인 오는 5월 16일 첫 재심재판이 열리게 됐다는 소식을 알리면서 참석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박성준 선생은 최근 어떤 계기에 '언제 가장 슬펐나'라는 질문을 받고 "우리의 운명을 해결할 방도를 자신있게 말 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슬펐다"는 답을 했다고 하면서, "앞으로 대학노트 한권 분량에 나는 이렇게 본다는 견해를 정리해 살아 생전 치르는 장례식을 준비해 여기에 참석한 손님들에게 이 소책자를 예물로 드리겠다"고 근황과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전시는 오는 30일까지, 매일 오전 11시부터 저녁 7시까지 진행되고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문의는 라이프러리 아카이브(02-363-5855, 02-725-2080)

   
▲ 선 위에 선.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오병철 선생이 사용하던 붓과 머루, 신영복 선생이 새긴 전각들도 전시됐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수정-18일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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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권 아래 노점상에게 어떤 일이 있었나?

최인기의 빈민스토리(6)
  • 최인기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
  • 승인 2019.04.18 09:19
  • 댓글 0

1. 1980년대 이후 노점상

▲ 1980년대 노점상[사진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1980년대 이후 노점상 문제를 집약해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김순희(여 79세) 씨의 삶을 통해 당시의 삶을 돌아보자.

"남편을 여의고 서울로 올라와 창신동에서 월세방을 얻어 1남 1녀와 살았어요. 새벽에 경동시장에 나가 야채나 과일 같은 걸 떼어다가 길음역 근처에 펼쳐 놓고 팔았지요. 그런데 부근에 대형 슈퍼마켓이 생기고 장사가 안되어 도봉산 등산로 입구로 옮겨 다시 소라와 옥수수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장사를 마치고 인근 시장에 나가 소라를 사다가 집에서 삶아 다음 날 10시쯤 도봉산으로 올라갔지요. 이것도 한철이라 여름에는 소라가 팔리지 않아 다른 품목으로 바꾸려고 했지만 적당한 품목도 없고, 장마까지 겹쳐 사다 놓은 물건마저 모두 날렸버렸습니다. 엎친 데 겹친 격으로 단속 때 잘 봐 달라고 노점상들끼리 걷어 상납한 돈과 왔다 갔다 차비, 점심값을 떼고 나면 손에 들어오는 것은 그야말로 몇 푼 없었어요."

이러한 김 씨에게 한 줄기 빛처럼 희망이 생겼다. 바로 노점상 단체다. 전국의 노점상이 하나 되어 서로의 생존권을 지켜 주고 어려울 때 도와줄 조직이 생긴 것이다.

"처음에는 별로 내키지 않았고 얼마나 도와줄까 망설였어요. 또 이번에도 속는 셈 치고 주변 몇 사람과 단체 가입했지요. 하지만 서로 함께 도와주며 사는 삶에 감동하였지요. 단속에 맞서 싸우는 모습을 보며 새롭게 조직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저녁때는 나도 모르게 단체 사무실로 달려가는 거예요. 밥도 같이 지어 먹으면서 다른 지역 노점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공유하고 단속이 나오면 어느 곳이든 마다하지 않고 참여했어요. 집회에서 서로의 생활을 고민하고 함께 걱정하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비록 하루 종일 장사 하다 보면 몸은 피곤하고 지쳐도 마음은 언제나 뿌듯하고 활기찼어요. 노점상단체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호루라기 소리와 완장을 찬 사람만 나타나도 허급지급 뒷골목으로 도망치기 일쑤였으니까요. 매일매일 올림픽이다 뭐다 대로변 도로의 장사를 전부 금지시켜 생계가 막막하기도 했었어요.”

정동익의 도시빈민운동(아침 출판사)의 자료에 따르면, 1983년 7월11일부터 18일까지 집중적으로 단속된 전국의 노점상은 모두 3천2백82건으로 집계되었다. 이 가운데 2백52건이 수거되고 33명이 고발당했으며 2백22명이 범칙금 스티커를 발부받았다. 포장마차의 경우 모두 3백52대가 단속되었고 그 가운데 2백대가 단속 차량에 의해 수거되어 1백62대가 현장에서 폐기되었다. 1983년 7월 19일 오전 1시부터 시청 앞 광장에 노점상 1천여명이 모여 당국의 무차별 단속에 항의하며 ‘정부는 노점의 생계를 보장하라, 생활 대책을 세워 달라’ 고 쓴 플래카드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여 시청 앞 일대 교통이 큰 혼잡을 빚게 되었다. 시위가 점차 격렬해지자 기동 경찰 200여명이 출동, 앞장서서 구호를 외치던 노점상 50여명을 강제로 버스에 태워 연행하였다.

그리고 노점상 양복임(여 37세)씨가 자살한 사건으로 이어졌다. 양 씨는 그해 8월 3일 단속을 나온 종로구청 소속 단속 반원과 실랑이를 벌이다. 아스팔트에 넘어지면서 뇌를 다쳐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종로구청은 비인간적인 만행을 저지르고서도 아무런 대책 없이 양 씨를 버려두었다. 이에 항의하여 종로 노점상 200여명이 양 씨의 유해가 안치된 서울대 병원 영안실에 몰려가 농성을 벌였다.1)
주1) 정동익 도시빈민연구 200쪽-201쪽

단속은 전국에 걸쳐 시행되었다. 대구에서는 칠성 시장 노점상 1백여 명이 북구청에 몰려가 계속 장사할 수 있도록 요구하면서 농성을 벌였고, 부산에서도 노점상 200여명이 부산 중구청 단속반 30여명과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

이 밖에도 같은 시기 서울의 성동구 마장동 우시장 입구 노점상 90여명이 노점 철거에 항의하여 구청 직원과 전경 등 100여명과 충돌하여 부상자가 발생하고 노점상 12명이 연행되었다. 경찰과 단속반에 의해 폭력적인 진압을 당하자 노점상들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빈 병과 돌 등을 던지며 항의하였다.

이 시기 노점을 하다 경찰서에 연행되어 유치장에서 구류를 사는 게 비일비재 했다고 김순희 씨는 증언한다.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으면 아이들끼리 집을 지키고 있을 생각을 하면 불안해서 가슴이 미어졌어요. 즉결 처분을 받고 나와 또 하루 벌어 하루 먹기 위해 길거리로 나서야 했습니다. 누구에게는 올림픽이 축제였지만 우리에겐 지옥이었습니다."2)
주2) 이 시기 노점상단체의 결성을 둘러싼 내용은 ‘가난의 시대 : 동력출판사’ 102쪽부터 121쪽 까지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2. 6.13대회와 노점상 운동

▲ 1987년 도시노점상연합회 개소식 장면

1980년대는 전두환과 노태우 군부독재의 공안 통치가 극에 달하던 시절이다. 1985년 IMF(국제통화기금), IBRD(세계은행) 총회를 앞두고 진행된 단속을 계기로 '노점상 생존대책위'라는 형태의 조직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86아시안게임을 끝내고 12월 29일 노점상 양연수 씨를 중심으로 ‘도시노점상복지연합회’가 만들어지게 된다. 처음 이 단체는 노점상 간의 친목과 상호부조 및 복지증진을 목적으로 출발하였지만 ‘87년 저항의 시대’에 맞게 조직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올림픽은 소중한 역사적 책무였기에 자고 일어나면 마치 모든 사람이 그 일정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살아가는 듯싶었다. 중앙정부의 지침에 따라 도시미화 사업의 미명 아래 일제 단속이 전개되었다. 1987년 5월 20일 몇몇 노점상은 등사잉크로 제작한 유인물을 들고 서울 곳곳을 돌며 노점상에게 명동성당으로 모일 것을 요청하였다. 양 연수 씨의 기억에 따르면 처음엔 제대로 모일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성당 계단에 수백여 명의 노점상이 모여 집회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그 후 노점상 집행부와 양연수 씨가 구속되는 것을 계기로 6월 항쟁에 적극적으로 결합하게 된다.

1987년 거리를 달구었던 시민들의 항쟁은 6.29선언을 끌어내고 우리 사회에는 민주화의 바람이 분다. 그 영향으로 노점상을 조직하는데 유리한 사회적 환경이 조성되어 10월 19일 ‘도시노점상연합회’로 명칭을 바꾼 후 '노점상 및 영세상인 보호법' 제정을 촉구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그리고 12월에 '노점상 양성화 촉구대회'가 명동성당에서 개최되었다.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노점상 수백여 명이 참가하였다. 노점상단체는 87년 6월 항쟁과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에 참여하면서 노점상 문제를 사회화시켜내며 자신을 얻게 되었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나갔다. 해가 바뀌어도 군사정권은 청산되지 않고 노태우 정권으로 갈아탔다. 서울 올림픽은 전 국민을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하였다. 여전히 한쪽에서는 군부독재에 맞서 싸우는 학생들의 집회로 술렁였다. 정권의 노점상 정책은 바뀌지 않고 노점상 숫자를 줄이는 것으로 일관하였다. 구청, 시청, 단속반, 게다가 경찰, 방범대원, 까지 단속으로 노점상들은 시달렸다. 조직되지 않았던 일반 노점상은 이들에게 상납 형태로 갈취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독재정권 아래 관료들 그리고 그 하부조직까지 부패되어 있어 실제 단속은 서로 공생하는 관계일 뿐이었다.

▲ 1988년 노점상 6.13대회 장면

노태우 정권은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노점상 싹쓸이 단속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 시기 노점상들은 더는 예전의 노점상이 아니었다. 조직적으로 단속에 맞서 대응하기 시작했다. 1988년 4월 18일 우리도 올림픽에 하나의 주최자로 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도시 노점상 생존권과 88올림픽에 관한 공청회’를 각계각층의 참여 속에 개최한다. 그러자 노태우 정권은 그해 6월부터 손수레 보관소 폐쇄를 포함하여 성화봉송로 주변에 대하여 대대적인 탄압을 전개한다. ‘도시노점상연합회’로 결집한 노점상들은 올림픽을 얼마 앞둔 6월 13일 성균관대학교 금잔디 광장에서 3천여 명이 모여 '노점상 생존권 수호 결의대회'를 개최한다. 집회를 마친 노점상과 시민들이 합세하여 5천여 명으로 늘어난다. 분노한 시위대가 투쟁을 결의하며 성균관대 교문을 박차고 시청으로 진출하자 곧바로 ‘군부독재 퇴진과 노점상 생존권’ 쟁취가 터져 나왔다. 이를 가로막는 전투경찰과 백골단의 진압으로 노점상 17명이 다쳐 병원에 실려 갔다. 벼랑 끝에 놓인 노점상들은 6월16일까지 무려 3일 동안 쉬지 않고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마침 여론도 노점상에 대해 생존권 보장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우호적이었다.

결국 노태우 정권은 강경한 노점단속 방침을 유보하고 손수레 보관소 폐쇄 계획을 보류하게 된다. 1988년 8월 4일 서울시는 일시적으로 노점단속 중단을, 8월 29일에는 국무총리가 노점단속 중단을 발표하였다. 마침내 조직되고 단결한 노점상들이 최초로 구체적인 승리를 쟁취한 순간이었다. 6.13대회를 계기로 노점상 생존권 문제가 사회적으로 크게 여론화되면서 노점상은 하나의 저항세력으로 사회 운동진영에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이날을 기념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노점상조직들은 매년 6월 13일에 대회를 진행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노점상이 조직적으로 사회 운동세력으로 우뚝 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당시 6.13 대회는 노점상의 대항쟁이었던 셈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노점상들이 88올림픽이 가난한 이들을 몰아내는 방식이 아니라 함께 치뤄져야 한다며 9월17일 경희대에서 '도시노점상올림픽'을 개최하며 뭉치고 생존권의 정당성을 알려냈다. 이런 사업과 실천을 바탕으로 1988년 10월 드디어 '전국조직'을 결성하여 체계적이고 탄탄한 조직 위상을 갖추게 된다.

물론 노태우 정권은 올림픽을 앞두고 소나기를 피해가자는 심정이었다. 1989년 올림픽이 끝난 후 이어지는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4월과 6월 또다시 노점상 전면 단속을 발표한다. 명동 성당에 3천여 명이 모여 다시 농성에 돌입한다. 노점상의 투쟁 전술도 한 단계 성장하였다. 명동에서 시청으로 그리고 서울시 전역으로 기습시위와 선전전을 벌이다가 대학교로 들어가 대열을 정비하고 학생들과 함께 다시 거리로 나와 시위를 전개하였다. ‘군부독재 타도와 생존권 쟁취’는 하나의 구호가 되었고 노점상 가슴에 깊게 각인되었다.

3. 1990년대 노점단속과 정책

1990년 10월 들어서는 사회기강을 확립한다는 명분으로 대통령 특별선언 ‘범죄와의 전쟁’이 발표된다. 과거 박정희가 5.16 군사 정변으로 집권한 이후 이정재를 비롯한 정치깡패들을 무더기로 구속했던 점. 그리고 전두환 정권 시절 ‘삼청교육대’와 같이 범죄와의 전쟁은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었지만, 사회적으로 불법과 무질서 그리고 과소비와 투기 또는 퇴폐와 향락 근절 아래 폭압 통치를 강화해 나가는 것이었다. 노점상도 ‘민생침해사범’으로 규정하여 노점상에 기생하는 폭력배들을 도려내겠다는 것을 빌미로 단속했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범죄로부터의 불안감은 반짝 줄어들 뿐이지만 사회안전망 확충, 복지정책 등이 동반되지 않는 범죄예방 정책의 성공은 낮을 수밖에 없었다.

1993년 군부 출신이 아닌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현재의 행정구역이 1995년 확정되면서 전국동시지방선거로 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을 뽑게 되었다. 이제 노점단속은 기존의 중앙정부에서 자치단체로 그리고 공무원의 직접 단속에서 용역을 동원한 단속으로 바뀌었다. 단속권과 철거 권한을 민간으로 이양하면서, 범죄와의 전쟁으로 철퇴를 맞은 폭력조직이 합법적인 은신처로 거대한 용역 민간업체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물론 서울시가 단속으로만 일관하지는 않았다. 이때부터 조직화한 노점상을 사회적으로 분리하고 스스로 규율을 강제하는 방식도 병행한다. 사회운동의 열기를 이어받아 노점상이 조직화 되고 저항이 심해지자 서울시는 노점상 ‘절대 금지구역과 상대 금지구역’을 지정하였다. 그 내용은 역세권을 중심으로 노점상을 할 수 없으나 이면도로에서는 묵인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존 ‘가로가판대 사업’을 확대 추진한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융자 500만 원으로 전업을 알선하고 젊은 사람을 중심으로 기술교육을 한다는 내용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는 노점상에게 맞춤형으로 특화된 대책이라기보다 일반적인 실업 대책을 응용한 것이었다. 다만 구두닦이와 버스토큰 가판대등 가로가판대 1016곳을 추가로 허용하거나 풍물시장 설립과 함께 전국 100여 곳의 시영아파트 지하상가 입주권을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1990년대 초 높은 경제성장률에 따른 고용안정과 낮은 실업률은 노점상이 점차 자연 감소하는 시대였다. 이러한 경제적 토대 아래 개량적인 정책을 모색했다. 그러나 지하상가 입주는 유야무야되거나 풍물시장은 훗날 10년도 안 되어 모두 사라지면서 이주 대책 사업은 임시방편일 뿐 현실성 없는 대책임 드러났다. 개량적인 정책은 앙상한 물거품이라는 게 증명된다.

6공화국 5년간 노점단속으로 인해 3만 339개의 노점상 강제철거, 이중 5천 662개의 손수레파손 및 물품 파손이 발생했고, 이로 인한 재산피해액 45억 6천 4백4십9만2천원으로 집계 되고 있다.3)
주3) 14대 대통령선거 도시빈민은 무엇을 할 것인가?

노점상들은 생존권 투쟁은 스스로 질서를 지킨다는 취지의 '자율질서' 사업을 전면에 걸고 노점상마차 규격화 사업과 거리환경개선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가 터졌다. MF 구제 금융사태는 한국사회 전반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고, 경제침체와 더불어 급격히 늘어난 실업자 대열은 전국적으로 노점상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노점상이 늘어난다는 이야기가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시기였다. 신자유주의 정책과 유연화 정책이 지속하고 한미FTA 협상을 통한 금융 자유화 조치 등으로 비정규직 노동자가 확대되면서 새롭게 신빈곤층이 확산하여 나가기 시작했던 것도 1990년대 후반부터다.

최인기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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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어쩌다 마주친 탄력근로제, 과로사 조장하는 법이네”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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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9/04/18 09:43
  • 수정일
    2019/04/18 09:43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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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4.28 산재사망 추모 결의대회...탄력근로제 기간확대 중단 등 촉구

양아라 기자 yar@vop.co.kr
발행 2019-04-17 18:37:26
수정 2019-04-18 08:5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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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와대사랑채 앞에서 열린 4.28산재사망 추모, 죽지 않고 일할 권리 쟁취 민주노총 투쟁 결의대회에서 민주노총 조합원이 산재 사망 기업 처벌 강화를 촉구하며 손피켓을 들고 있다.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와대사랑채 앞에서 열린 4.28산재사망 추모, 죽지 않고 일할 권리 쟁취 민주노총 투쟁 결의대회에서 민주노총 조합원이 산재 사망 기업 처벌 강화를 촉구하며 손피켓을 들고 있다.ⓒ민중의소리
 
 

"버스 운전 노동자들은 하루 16시간씩 운전하다가, 졸음운전을 해 사고가 나고는 괴로워했습니다. 그들은 작년에 근로기준법이 바뀌면서, 노동시간 특례에서 제외돼 인간답게 일하고 살 수 있을까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탄력근로제가 도입되면서, 결국 16시간 하던 운전을 그대로 하고 있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직업환경의학전문의 최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 발언 내용 중)

해마다 산재사고로 목숨을 잃는 노동자는 2,400여명, 과로사로 숨진 노동자는 한 해 370명이다. 2017년 한국의 평균 노동시간은 2069시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2위를 차지했다. 이는 OECD 국가 평균(1763시간)보다 306시간을 더 일하는 것이다. 이처럼 대한민국은 여전히 '과로 공화국'이다.  

오는 28일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을 앞두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 노동자들이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노동자 참여로 쟁취하자"며 탄력근로제 기간 확대 중단을 촉구하고 나섰다.

17일 오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하, 민주노총)은 서울 종로구 청와대 사랑채 앞에서 '4․28 산재사망 추모 및 죽지 않고 일할 권리 쟁취, 민주노총 투쟁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모두에게 산안법(산업안전보건법)을'이라고 적힌 빨간색 햇빛 가리개를 머리에 썼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라는 송골매 노래를 '어쩌다 마주친 탄력근로제'로 개사해 부르며 '탄력근로제 개악저지', '살인기업 처벌강화'가 적힌 부채 피켓을 손에 쥐고 흔들었다.

"어쩌다 마주친 탄력근로제/노동시간 고무줄 되었네/어쩌다 마주친 탄력근로제/과로사를 조장하는 법이네/국회에게 할 말이 있는데~왜이리 귀 막고 있을까./공짜노동 탄력근로제/노동자만 쥐어짜네./더이상 못참겠다./투.쟁.으.로. 개.악.저.지." 
(송골매 '어쩌다 마주친 그대'를 개사한 민주노총 '열정페이(가칭)' 팀의 '어쩌다 마주친 탄력근로제' 노래 가사 중) 

 

민주노총은 ▲과로사를 합법화하는 탄력근로제 확대 개악 중단 ▲ 모든 노동자에게 산업안전보건법 전면 적용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위해 노동자 참여 보장 ▲위험의 외주화 금지, 원청 책임 강화 ▲중대재해 기업처벌법을 제정 등을 요구했다.  

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은 대회사에서 "과로사회를 멈추자고 하면서, 정작 국회엔 재벌 대기업의 청부입법인 '탄력근로제'를 처리해달라고 요구한다"며 "'탄력근로제'는 주당 최장 80시간에 달하는 장시간노동, 휴일 없는 연속노동을 가능하게 한다. 노동자에게는 과로사를 사용자에게는 공짜노동 천국을 만들어주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도급인 책임범위 확대와 유해 작업 도급 금지로 위험의 외주화를 방지하자고 했지만, 산안법의 실행도구인 시행령에는 구의역 김군도, 발전소 김용균 노동자도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김 위원장은 "'산재사망을 절반으로 감축하겠다'는 것은 대통령과 정부의 약속이었다"며 "정부는 이제라도 탄력근로제 개악을 멈추고 위험의 외주화 금지를 명확하게 담은 산안법 시행령을 만들어, 차별없이 모든 노동자에게 산안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와대사랑채 앞에서 열린 4.28산재사망 추모, 죽지 않고 일할 권리 쟁취 민주노총 투쟁 결의대회에서 민주노총 조합원이 산재 사망 기업 처벌 강화를 촉구하며 손피켓을  들고 있다.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와대사랑채 앞에서 열린 4.28산재사망 추모, 죽지 않고 일할 권리 쟁취 민주노총 투쟁 결의대회에서 민주노총 조합원이 산재 사망 기업 처벌 강화를 촉구하며 손피켓을 들고 있다.ⓒ민중의소리

지난해 12월, 28년만에 산안법 개정이 이뤄졌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숨진 고(故) 김용균 씨의 죽음과 유가족의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용균 씨의 어머니인 김미숙 씨는 이날 무대에 올라 위험의 외주화를 막기 위한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 개정과 산재 기업 처벌 강화를 촉구했다.

김미숙 씨는 "산업안전보건법이 전면 개정됐지만, 용균이가 들어있지 않은 반쪽짜리 법안으로 통과됐다"며 "위험의 외주화 금지는 하지 못하더라도, (장관) 도급 승인 대상에 화력발전소가 포함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김 씨는 "다발성 중대재해는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며 "전력산업 운전설비 사회 곳곳에 놓여있는 컨베이어벨트, 궤도장비, 조선업, 건설업 등 모두 도급승인 대상에 들어가야 안전사고 재발 방지가 되지 않겠냐"고도 말했다.

직업환경의학전문의인 최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는 "근무일수를 줄여서 (주당) 전체평균이 52시간만 되면, 상관없다는 얘기냐?"고 따져 물었다. 그는 "심지어 3달, 6달까지도 매주 64시간씩 일하고 나머지 기간동안 주 40시간 일하면, 사람 몸의 피로가 평균 주 52시간 만큼 쌓이냐. 절대 그렇지 않다. 3개월 동안 일한 평균 노동시간이 50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아도, 열흘 동안 과로하다 과로사하는 노동자가 일 년에도 수십명이 넘는다"고 주장했다.

최민 활동가는 "근로일 사이에 11시간 연속 휴식을 준다고, 마치 큰 은혜라도 베푸는 것처럼 얘기한다"고 비판하며 "주 64시간 일하면 아침 9시에 출근해서 밤 10시에 퇴근하는 것을 월화수목금 5일하고도 주말 4시간 더 일해야 된다"며 "9시에 출근해서 밤 12시까지 일하면 다음날 2시간 늦게 출근할 수 있는 게 겨우 11시간 연속 휴식"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정부와 재계는 근로기준법이 주 52시간이 아니라 주 40시간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절대 왜곡해서는 안 되며, 향후 주 40시간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어떤 나라에서도 모든 산업에 일률적으로 12시간 연장 근로 시간을 인정하는 법이 없다"면서 "실제로 과로사를 없애겠다 하면, 연장근로 12시간을 모든 산업에 무조건 허용하는 근로기준법부터 뜯어고쳐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어 "특수고용노동자, 5인 미만 사업장, 감시단속노동자, 1차산업노동자들한테도 노동시간 규제가 적용되야 된다. 남아있는 59조 특례부터 철폐해야 한다"며 "연장근무를 하더라도 하루에 10시간 이상은 못시키도록 하는 새로운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 높였다.

특수고용노동자들은 산안법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학습지 교사, 골프 캐디, 대리운전기사, 레미콘·건설기계노동자 등 전국 약 250만명의 특수고용노동자들은 산재 보험을 적용받지 못하고 있다.

공공운수 화물연대본부 오윤석 수석부본부장은 "우리나라 고속도로에서 하루 평균 화물차로 인해 돌아가시는 분이 3명이라고 한다. 도로공사에서 발표한 내용"이라며 "화물차 노동자들은 파이프에 맞아서 죽고, 교통사고 나서 죽고, 짐 싣다 죽고 참 어렵다"며 열악한 현실을 토로했다.

오 수석부본부장은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은 사장이라는 이유로, 산재보험을 적용받지 못하고 있다"면서, "비정규직, 특수고용직 노동자뿐만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이 산업재해에 죽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발언 이후, 조합원들은 "진짜 사장 나와라. 원청이 책임져라"라고 응답했다.  

건설노조 부위원장인 김인호 전기분과 위원장은 한국전력이 발주처로서 책임이 강화돼야 노동자 안전과 배전시설 안전을 담보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김 전기분과위원장은 "한전은 1년에 1조 2천억이라는 공사를 발주한다. 그런데 어째서 한국전력이 발주처임에도 산안법에 빠져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현장에서 산재사고가 나면, 원청이 책임을 져야함에도, 노동자들한테 떠밀고 있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민주노총은 이날 결의문을 통해 "단위 사업장에서 도급금지, 원청책임 강화, 특수고용노동자 보호, 일터 괴롭힘 금지 등 개정된 법의 실질적 적용을 위한 단체협약 투쟁을 전면적으로 전개할 것"이라며 "중대재해 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해 시민사회와 연대하고 현장을 조직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노동자들은 집회 후, 산재로 사망한 노동자들을 추모하며 수 백개의 영정을 들고 청와대 사랑채 앞에서 광화문을 거쳐 보신각까지 행진을 펼쳤다.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와대사랑채 앞에서 열린 4.28산재사망 추모, 죽지 않고 일할 권리 쟁취 민주노총 투쟁 결의대회에서 민주노총 조합원이 산재 사망 기업 처벌 강화를 촉구하며 영정을  들고 있다.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와대사랑채 앞에서 열린 4.28산재사망 추모, 죽지 않고 일할 권리 쟁취 민주노총 투쟁 결의대회에서 민주노총 조합원이 산재 사망 기업 처벌 강화를 촉구하며 영정을 들고 있다.ⓒ민중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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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앗이 한다는데 대북제재 웬 말이냐?”

“품앗이 한다는데 대북제재 웬 말이냐?”
 
 
 
백남주 객원기자 
기사입력: 2019/04/17 [23:48]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농민들이 남북 농민들 간의 '통일품앗이'를 위해 대북제재 해제를 촉구하고 나섰다. (사진 - 전농 페이스북)     © 편집국

 

농민들이 남북 농민이 통일농기계로 품앗이를 하고 따뜻한 쌀밥을 나눠 먹길 바란다며 대북제재 해제를 요구하고 나섰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은 16일 오후 1시 30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북제재 해제와 통일농기계 품앗이 보장을 촉구했다.

 

전농은 북미관계 개선을 통해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 미국에 의해 물거품이 될 위기라며 미국의 전쟁 미치광이와 남한의 반통일 세력의 준동을 제압하고 대북제재를 국민의 힘으로 박살내자고 호소했다.

 

전농은 먼저 문재인 정부를 향해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재개를 자주적으로 결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전농은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재개는 누구의 허락을 받을 일이 아니라며 문재인 정부는 통일의 당사자로서 제 머리로 판단하고 제 발로 통일의 길을 걸어가야한다고 주장했다.

 

전온은 문재인 정부와 미국이 통일품앗이를 보장해야 한다며 남북 농민이 품앗이를 한다는데 대북제재는 무어란 말입니까품앗이가 제재의 대상이 된다면 지나던 개가 웃을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농민들은 남북 민간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해 작년 10월부터 통일트랙터 운동본부를 구성해 모금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전농은 미국을 향해 대북제재를 당장 해제하고 6.12 싱가폴 합의를 이행해야한다며 현재 미국이 주장하는 빅딜은 내용상 북핵 선 폐기론이며 이는 역사적 선례를 보더라도 실패한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나아가 전농은 자유한국당 등 보수세력들에게 일본과 미국을 상전으로 모시며 오로지 제 목구멍에 넘어갈 밥만을 구걸하는 당신들은 머지않아 끊어진 철조망처럼 용광로에 녹아 형체도 없이 사라질 것임을 명심하라고 경고했다.

 

한편 전농은 오는 26일 오후 7시 민중공동행동 등과 함께 통일트랙터 출정식 및 미국반대 자주평화 행진을 진행하며판문점 선언 1주년인 27일 오후 2시 통일트랙터를 몰고 파주 통일대교 앞에서 대북제재 해제와 통일품앗이 실현을 위한 전국농민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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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전문]

대북제재 해제하고 통일품앗이를 보장하라!

 

8천만 겨레는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을 벅찬 마음으로 지켜봤습니다한반도에 평화와 번영통일의 전성기가 열리는 듯합니다개성연락사무소가 생기고 철도와 산림의료분야 교류가 확대되고 있습니다남북해외 온 겨레는 평화와 통일을 얼마나 간절히 염원하고 있는지 확인했으며 더 이상 한반도에서 전쟁이 없을 것이라 단언했습니다.

 

그러나 제2차 북미 정상회담 합의서 서명이 무산되고 다시 한반도에 냉전의 기운이 드리워졌습니다북미관계 개선을 통해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 미국에 의해 물거품이 될 위기입니다그러나 길은 있고 우리는 과거로 갈 수 없습니다. ‘없는 길은 만들고 막힌 길은 뚫고 가야 한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백번 들어도 옳은 말입니다.

 

판문점 선언 제 1조 1항은 남과 북은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 자주의 원칙을 확인하였다입니다전면적인 남북교류 실현을 위해 전국농민회총연맹은 다음과 같이 요구합니다.

 

첫째문재인 정부는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재개를 자주적으로 결단해야 합니다.

이미 김정은 위원장은 아무런 대가없이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을 재개하자고 공개 제안했습니다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이 막아놓은 길을 뚫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누구의 허락을 받을 일도 아닙니다미국도 전면적인 남북교류 실현을 약속한 판문점 선언을 지지한다고 천명하지 않았습니까민족자주의 원칙, ‘우리민족끼리의 정신이 있으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문재인 정부는 통일의 당사자로서 제 머리로 판단하고 제 발로 통일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둘째문재인 정부와 미국은 통일품앗이를 보장해야 합니다.

농민들은 18년 10월부터 통일트랙터 운동본부를 구성해 모금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농민들이 통일트랙터 운동에 나선 이유는 대북제재로 인해 막혀있는 남북 민간교류를 활성화하여 평화와 번영 통일의 마중물이 되고자 함입니다남북 농민이 품앗이를 한다는데 대북제재는 무어란 말입니까품앗이가 제재의 대상이 된다면 지나던 개가 웃을 일입니다전농은 4월 27판문점 선언 1주년을 맞아 임진각으로 통일트랙터를 몰고 갈 것입니다정주영 고 현대 명예회장이 소떼 방북으로 평화 통일의 시대를 열었던 것처럼 농민들은 통일트랙터 품앗이 실현으로 평화 통일의 길을 열고자 합니다.

 

셋째미국은 대북제재를 당장 해제하고 6.12 싱가폴 합의를 이행해야 합니다.

단계적 동시행동의 원칙은 북미간 싱가포르 선언에서도 확인된 것이며 사실 이 길 밖에 없습니다지금 미국이 주장하는 빅딜은 내용상 북핵 선 폐기론이며 이는 역사적 선례를 보더라도 실패한 방식입니다재재와 관계개선은 양립할 수 없고 상호주의가 무시된 일방적 주장은 협상을 계속하지 않겠다는 판 깨기 전술과 같습니다불량한 심보로는 건설적 대화도관계개선과 평화정착도 이룰 수 없습니다.

 

넷째남한의 자한당 등 보수세력에게 경고합니다.

아직도 철지난 종북 공세색깔론을 버리지 못하고 북을 끊임없이 혐오의 대상으로 삼으며 분단에 기생하는 벌레처럼 살고 싶으면 그렇게 하되역사는 당신들을 반민족행위 범법자로 기록할 것입니다일본과 미국을 상전으로 모시며 오로지 제 목구멍에 넘어갈 밥만을 구걸하는 당신들은 머지않아 끊어진 철조망처럼 용광로에 녹아 형체도 없이 사라질 것임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국민여러분!

논을 갈아야 모내기를 하고 풍년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농민들이 준비한 트랙터에 평화와 번영 통일의 염원을 실어 함께 품앗이 갑시다.

미국의 전쟁 미치광이와 남한의 반통일 세력의 준동을 제압하고 대북제재를 국민의 힘으로 박살냅시다.

 

국민의 힘으로 트랙터를 밀고 갑시다.

<품앗이 한다는데 대북제재 웬 말이냐?> 이 구호를 함께 외칩시다.

 

감사합니다.

 

2019년 4월 16

전국농민회총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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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가 특별한 이유 3가지, 사라져야 할 이유 8가지

[주장] 다시, '서울대 폐지론'을 공론화하자

19.04.17 20:49l최종 업데이트 19.04.17 20:51l

 

 서울대학교 정문
▲  서울대학교 정문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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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과 성희롱이 뉴스의 중심인 세상을 살고 있다. 얼마 전 한 일간지에 이런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밥 먹듯 성희롱 서울대 교수들"이다. 대학교수에 의한 성희롱이 특별한 뉴스가 아닌 세상이지만 이 기사가 주목을 받은 것은 "서울대 교수들"이 주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서울대학교는 우리 사회에서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다. 과거에 수없이 반복되었던 입시 비리에서조차 서울대가 끼어 있으면 언론의 흥분지수는 급상승하고, 그렇지 않으면 좀 시시하게 취급되었다. 비리에서조차도 학벌주의가 작동하는 것이 한국이고, 서울대는 비리에서도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 성폭력에서도 서울대 교수가 주어인 것과 아닌 것이 차별을 받는다. 우리나라에서 서울대는 여러 가지로 특별하다.

우리나라에 알파벳 S로 학교 이름이 시작하는 대학은 32개였다. 지난해에 S대 중 하나였던 서남대학교가 폐교되면서 S대는 31개가 되었다. 그런데 이들 중 서울대를 제외한 나머지 대학교들은 감히 "S대학교"라고 부르지 못한다. S대학교는 오직 서울대를 지칭하는 특별한 명칭이다.

성균관대학교가 2018 중앙일보 대학평가 종합 순위에서 2위였고, 공학 계열에서 7위인 서울대를 누르고 3위에 이름을 올려도 S대학이 되지는 못한다. S대는 오직 서울대뿐이다. 서울대만이 S대로서의 특권을 누리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서울대가 특별한 이유 3가지

 

첫째, 탄생 과정이 특별하다. 알려진 대로 이 땅에 처음 세워진 근대식 종합대학교가 서울대이다. 설립 당시에는 K(경성)대학이었으나 해방 직후 일본식 명칭 경성이 서울로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S대학이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지 경영을 위해 세운 대학이 경성제국대학이고, 이 대학교는 또 다른 제국주의 미국에 의해 1946년 교육계의 거센 반대 운동을 물리치고 서울 주변 관공사립 대학을 흡수해 국립서울대학교로 재탄생했다. 두 개의 제국주의 권력의 합작이라는 특별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 S대학교는 아마도 지구상에 서울대 외에는 없을 것이다.

둘째, 서울대는 정부의 특별한 사랑 속에 성장한 학교다. 2018 회계연도 기준으로 서울대는 4371억 원의 정부지원금을 받았다. 비슷한 규모인 부산대학교가 1295억 원을 받은 것과 비교하면 3.5배 수준이다. 부산대의 2018년도 총예산은 2660억 원이고 서울대의 총예산은 8031억 원이다. 충북대학교는 정부지원금 1210억 원을 받으며 총예산은 1982억 원이다.

서울대 학생 수는 2만8102명이고 교수 총수는 2101명(교수 1인당 학생 13.4명), 부산대는 학생 2만8854명에 교수 총수는 1185명(교수 1인당 학생 24.3명), 그리고 충북대는 학생 2만3363명에 교수 총수는 755명(교수 1인당 학생 30.9명)이다. 학생 규모가 비슷한 다른 지방 국립대학교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제오늘이 아니라 지난 70년간 서울대는 이런 특별 대우를 받아 왔다. 물론 대학평가에서 이런 차등에 대해 어떤 위로점수가 주어지지는 않는다. 평가 기준은 하나이며, 평가 기준 중 많은 것이 재정 규모에 의해 결정된다. 차등 지원을 하고 공정경쟁을 요구하는 국가권력의 모순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셋째, 서울대는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을 뽑아서 가르치는 특별한 학교이다. 전국의 60만 입시 지원생들이 공부하는 목표는 서울대 입학으로 획일화되어 있다. 지원자 중 불과 0.5%만이 합격하고 나머지 99.5%는 실패하는 것이 현실임에도 모두 하나의 목표에 올인하며 초·중·고등학교를 다닌다.

서울대가 대학평가 공학 계열 순위에서 7위, 자연 계열 순위에서 3위를 하더라도 우리나라 학부모들의 서울대를 향한 열정은 전혀 식을 줄 모른다. 서울대는 특별하기 때문이다. 이 대학 졸업생들에게 우리 사회가 주는 온갖 권위와 특권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학부모들이다. 서울대에 입학할 확률이 20~30배 높은 강남구로 전입하려는 금천구나 중랑구 거주 학부모를 탓하는 것은 피해자를 비난하는 졸렬한 짓이다.

서울대가 사라져야 할 이유 8가지

우리 교육이 창의성이나 다양성을 억누르고 획일성을 강요하는 상징적 폭력기구의 오명을 벗어버리고,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제4의 길로 나아가야 하는 절박한 이 시점에서 교육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온갖 교육특권을 폐지하는 것은 일차적 필요조건이다. 서울대(적어도 학부) 폐지론을 다시 주장하는 이유는 허다하지만 지면 관계상 여덟 가지 정도만 제시한다.

첫째, 서울대가 특별한 대학교, 유일한 S대학교가 된 것이 공정한 경쟁을 통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학 간의 현실적 차이를 인정하자'는 주장, '서울대 폐지론은 서울대를 나오지 못한 자격지심의 산물'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그동안의 경쟁이 공정해야 했는데 앞에서 제시한 통계가 보여주듯 지금까지 그렇지 못했고, 지금도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불공정한 경쟁을 통해 만들어지는 교육특권은 비교육적이다. 서울대 졸업생들이 사회생활에서 누리는 특권의 어디까지가 왜곡된 학벌에 의한 것인지를 증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학벌이 대한민국 사회의 구조를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왜곡된 학벌을 증명하는 것보다는 훨씬 어려울 것이다.

공정하지 않은 경쟁을 통해 만들어진 특권, 그 특권에 의해 우수한 학생을 뽑는 경쟁에서 지속적으로 1위를 하고 있는 서울대를 폐지하는 것이 우리나라 대학교육에 가져올 부정적 영향은 결코 크지 않을 것이다. 공정경쟁을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대학 간 특성화와 전공에 따른 서열화야말로 우리나라 대학의 발전이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방향일 것이다.

둘째, 서울대로 인해 우리나라 공교육의 목표가 단일화되었고, 이것이 공교육을 훼손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학생이 자신의 특성이나 꿈과 무관하게 오직 특별한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목표로 경쟁하는 장이 우리나라의 학교이고, 이 야만적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해야 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학부모들이다. 우수 학생을 선발하는 능력에서 서울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1위인데, 과연 교육기관인 학교의 기능 중에서 '뽑는 기능'이 중심적인 기능인지는 따져볼 일이다. 학교는 가르치는 곳이지 뽑는 곳이 아니다.

셋째, 이런 획일화된 교육으로는 우리 아이들의 현실적 삶이 고단하고 그들이 살아갈 미래의 대한민국이 불안하다. 시험성적 올리기와 일류 대학 진입에 유리한 학교에 입학하는 것 외에는 공부의 의미를 용납하지 않는 것은 비교육적이다. 아이들의 타고난 다양성이 존중받고, 우리 사회가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적 삶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육 목표의 획일화를 고착화시켜온 특별한 대학교가 사라지는 것 외에 대안이 없어 보인다.

넷째, 서울대가 없는 대한민국에서는 교육의 의미가 비로소 정상화될 것이다. 서울대 폐지론에 대한 반대 논리 중에 '서울대 폐지는 대학교육의 질적 저하를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어불성설이다. 서울대가 폐지되어도 이 땅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초중고 학생들은 지금처럼 열심히 공부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서울대 입학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따라 공부하지는 않을 것이며, 목표로 했던 서울대에 입학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실망감이나 자기 부정의 심리는 완화될 것이다. 어느 학교에 입학했다는 것 하나로 평가를 받는 세상은 서서히 자취를 감출 것이고, 무엇이 되기 위해 어느 대학에 입학하여 얼마나 최선을 다하였는지를 기준으로 평가를 받는 세상이 점차 열릴 것이다.

공부를 잘하면 성적에 맞추어 서울대에 무조건 입학하던 학생들이 원하는 전공, 교수진 구성, 교육환경, 통학 편의, 등록금, 장학금, 기타 다양한 조건을 고려하여 대학을 선택하고, 스스로 선택한 학교에서 원하는 미래를 위해 열심히 공부할 것이다. 원하는 공부를 위해 입학을 결정하는 것이지, 입학을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다.

서울대 폐지는 공부의 의미를 바꿀 것이고, 그것을 통해 공부의 참다운 의미가 살아날 것이다. 다양한 기준에 따라 스스로 선택한 사립대나 통합된 국립대의 특정 캠퍼스에 입학하여 원하는 공부를 하면 혁신 노력 없이 특권에 안주하고 있는 지금의 서울대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결코 부족하지 않은 지적·정서적 성장을 이룰 것이다.

다섯째, 서울대에 매년 투자하던 정부 재정 수천억 원을 활용하여 국공립대학의 등록금을 과감하게 낮추고, 교육여건을 개선한다면 전국의 국공립대학 캠퍼스가 우리나라 대학의 교육 수준 향상과 공공재로서의 역할 회복에 기여하는 날이 다가올 것이다. 서울대 폐지가 대학교육의 하향평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는 우리나라 모든 대학에 대한 모욕이며 서울대 구성원 일부, 졸업생 일부, 엘리트 일부가 지닌 오만함의 표현일 뿐이다.

여섯째, 특별한 대학교가 없어도 최고의 교육, 최고의 복지 국가 건설은 가능하다.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이나 영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이 보여준 경험적 교훈이고 현실이다. 서울대 폐지 혹은 국공립대 통합의 목표는 대학교육 평준화가 아니라 대학교육에서의 특권의 폐지와 공정 경쟁을 통한 대학교육의 정상화일 뿐이다.

'서울대를 폐지해도 학벌사회는 해소되지 않는다'거나, '서울대를 대신해 연세대나 고려대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기 때문에 서울대 폐지를 통해 얻는 것은 실제로 없다'는 주장이 많다. 세상 어디에도 완벽하게 평준화된 대학시스템을 지닌 사회는 없다. 보다 중요한 것은 특권화된 대학이 없는 것이 교육을 정상화하고 나아가 복지국가로 가는 데 전혀 불리하지 않다는 점이다.

일곱째, '서울대를 폐지하기보다는 서울대가 가진 기존의 경쟁력을 보강해 세계 수준의 경쟁력을 갖춘 대학으로 육성하는 노력을 더 기울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의 모순이다. '서울대가 무능력한 관료주의의 간섭과 미국의 작은 주립대보다도 적은 정부의 예산 지원 하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 대학들과 경쟁하고 있는 현실을 인정하고 더욱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무능력한 관료주의를 서울대 발전의 걸림돌로 지적하기 이전에 대한민국 관료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무능력한 관료들을 만들어낸 것이 어느 대학인지? 서울대 옹호론자들은 무능력한 관료주의를 탓하기 이전에 그런 관료주의를 만들어낸 책임에 대해 자성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그런 무능력한 관료주의를 키워온 주인공이 서울대이기에 그것의 폐지가 필요한 것은 아닌지.

서울대 발전의 장애물로서 미국의 작은 주립대보다도 적은 정부예산 지원을 탓한다면 그보다 열악한 나머지 국공립대학교들이 서울대와 경쟁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 것인지. 70년 이상 특혜를 누려왔는데 더 이상 무슨 특혜를 요구하는 것인지.

여덟째, '국가발전을 견인할 수 있는 인재 양성 대학이 필요하다'는 주장의 시대착오성이다. 우리나라는 근대 학교의 출범 당시부터 교육이 구국의 수단으로 등장했던 측면이 있다. 식민지 시대에도 교육은 독립의 수단이거나, 식민지 지배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해 왔다. 해방 이후에도 국가발전에 필요한 인재의 양성은 교육 부문에 맡겨진 숙명 같은 사명이었고, 이것에 많은 국민이 동의하여 왔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적지 않은 해결과제를 안고는 있지만 나름의 경제성장과 민주화, 사회적 안정을 이루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는 교육이 국가발전을 위해 필요하다는 논리를 넘어 국가가 교육발전을 위해 힘써야 할 때이다. 교육을 통해 시민이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국가 권력의 일차적 과제가 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 서울대가 있어야 국가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논리보다 중요한 것은 서울대로 인해 고통 받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국민을 생각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평범한 희망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이길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입니다. <한국교육 제4의 길을 찾다>(2019, 살림터)에서 주장한 내용의 연속으로 일부 문장은 중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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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 아내의 골프장 막으려다…농민들은 ‘별’을 달았다

등록 :2019-04-17 05:01수정 :2019-04-17 07:06

 

 

[여의도 농부님, 사라진 농부들] ⑤개발, 그리고 쫓겨난 농민들
홍천·평택·밀양·계양 농지에
레저시설·새도시·산단 추진
외지인에 땅 팔리고 강제 수용

반대하다 손배소 당하고 전과까지
떠난 농민들은 타향서 빈민 전락
지난 3월22일 강원 홍천군 북방면 구만리 골프장 부지 앞에 반경순 구만리 골프장 반대 대책위원장(맨 왼쪽)과 주민들이 서 있다. 구만리 주민들은 골프장 반대 운동을 하면서 다치고 전과자가 되었다. 주민들의 반대 투쟁으로 골프장 공사는 중단됐다. 홍천/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지난 3월22일 강원 홍천군 북방면 구만리 골프장 부지 앞에 반경순 구만리 골프장 반대 대책위원장(맨 왼쪽)과 주민들이 서 있다. 구만리 주민들은 골프장 반대 운동을 하면서 다치고 전과자가 되었다. 주민들의 반대 투쟁으로 골프장 공사는 중단됐다. 홍천/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탐사기획] 여의도 농부님, 사라진 농부들

 

64만6706㎡. 국회의원 99명(배우자 소유 포함)이 보유한 농지 면적이다. 그들의 농지는 자신의 개발 공약과 가까웠고, 예산을 확보해 도로를 내거나 각종 규제 해제에 앞장서면서 땅값이 뛰었다.

 

2526.1㎞. 5개월간 국회의원 소유 농지를 찾아다닌 거리다. 풀이 허리만큼 자라도록 버려진 땅, 씨앗이 심기지 않은 논과 밭이었다. 전체 국회의원 298명 가운데 농지를 보유한 의원은 33%다.

 

1549.4㎢. 2008년부터 2017년까지 10년 동안 서울과 인천을 합친 규모의 농지가 사라졌다. 값싼 땅이 새도시, 산업단지 등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외지인들은 개발 예정지 인근을 사들였고, 농부는 그 땅의 소작농이 되었다. 땅을 잃은 농부들은 더 값싼 경작지를 찾아 떠났다. 의원은 농지를 왜 매입했을까. 국회의원 소유 농지를 둘러싼 이해충돌 문제와 사라진 농부들의 사연을 6차례에 걸쳐 싣는다.

 

 

 

그 땅엔 계절이 흐르지 않는다. 벼, 잡곡, 콩, 옥수수, 고추, 배추, 사과, 과실수를 심겠다고 농업경영계획서를 제출해 놓은 의원들의 논과 밭을 5개월간 2526.1㎞ 다닌 끝에 만난 것은 오래도록 방치돼 무릎 높이만큼 자란 잡풀이거나, 홀로 피었다 수확되지 않아 말라비틀어진,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 열매였다. 붉은 흙을 뚫고 여린 풀잎이 돋아나 봄볕과 여름날 소나기를 머금는, 계절이 흐르고 시간이 저무는 토지는 그들의 땅이 아니었다.

 

유동수 더불어민주당 의원 아내인 의사 정아무개씨는 배추와 고추를 심겠다고 농업경영계획서를 작성해 2007년 4월 토지거래허가구역인 인천 서구 백석동 밭 1164㎡를 샀다. 2007년 3월 당시 건설교통부가 백석동 일대를 택지개발예정지구(한들지구)로 지정한다는 발표를 한 지 열흘도 지나지 않아 땅을 사들인 것이다. 그리고 2018년 9월 10억5600만원에 매각했다. 한들지구는 공영 개발이 무산된 뒤 민영 개발 방식으로 추진돼 올해 11월 대규모 아파트 단지 분양을 앞두고 있다. 지난 2월 찾아간 백석동 밭엔 ‘경작 금지’ 팻말이 붙어 있었다. “본 사업은 도시개발법령 등에 따라 2017년 8월 실시계획인가 고시되어 보상 및 철거에 착수할 예정으로 경작 행위 등 모든 행위가 금지됩니다.” 정씨는 앞서 2004년 또 다른 토지거래허가구역인 인천 계양구 다남동 논밭 3528㎡를 사들였다가 농사를 짓지 않고 곧바로 소작농을 뒀다. 토지거래허가구역은 토지의 투기적 거래가 성행할 우려가 있는 지역 및 땅값이 급격히 상승하거나 상승할 우려가 있는 지역에 땅 투기를 방지하기 위해 설정하는 구역으로, 일정 규모 이상을 매입하려면 지방자치단체장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유동수 더불어민주당 의원 부인 정아무개씨가 2007년 매입했다가 11년 뒤 매각한 인천 서구 백석동 농지 일대에 ‘경작 금지’ 팻말이 세워져 있다. 한들구역 도시개발사업이 추진 중인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백석동 일대에 들어설 예정으로 올해 11월 분양을 앞두고 있다. 인천/김명진 기자
유동수 더불어민주당 의원 부인 정아무개씨가 2007년 매입했다가 11년 뒤 매각한 인천 서구 백석동 농지 일대에 ‘경작 금지’ 팻말이 세워져 있다. 한들구역 도시개발사업이 추진 중인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백석동 일대에 들어설 예정으로 올해 11월 분양을 앞두고 있다. 인천/김명진 기자

 

홍문종 자유한국당 의원은 2005년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농지 등을 매입했다가 4년 뒤 본인이 이사장을 지낸 바 있는 경민학원에 매각했다. 밭과 대지 898㎡, 건물의 매맷값은 13억2700만원이었다. 홍 의원이 땅을 사들인 시점은 건설교통부가 해당 농지에서 직선거리로 3㎞ 떨어진 곳에 80만평 규모로 민락2지구 택지개발을 진행하던 때였다. 경민학원은 해당 용지에 경민커피문화원을 조성했다. 그러나 지난해 11월28일 찾아간 경민커피문화원은 폐쇄된 상태였다. 간판이 없고, 문도 잠겨 있었으며 나무판자로 입구 자체가 막혀 있었다. 상당 기간 방치된 모습이었다.

 

유 의원은 “농사를 지으려고 땅을 샀다”고 설명했다. 홍 의원은 여러차례 전화하고 문자메시지를 남겨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들 의원이 사들인 농지는 모두 인근에 새도시가 들어서면서 값이 뛰었다.

 

신도시, 산업단지, 레저시설이 대거 조성되는 땅은 대다수 값싼 농지나 임야다. 개발과 더불어 2008년부터 2017년까지 서울과 인천을 합친 넓이에 해당하는 1549.4㎢의 농지가 사라졌다. 외지인들은 개발 예정지나 그 인근을 사들이고, 농부들은 개발을 진행하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 등에 땅을 강제 수용당한다. 땅을 잃은 농부들은 더 값싼 농지를 찾아 떠나거나 농업을 포기했다. 지난해 늦가을부터 올해 이른 봄까지 의원들의 농지를 찾아 전국을 다니며, 개발 과정으로 인해 삶이 뒤흔들린 12명의 농민을 만났다. 어떤 이는 소유하고도 방치하는 논과 밭을, 농민들은 각종 개발로 잃어가고 있었다.

 

지난 1일 경기 의정부시 고산동 홍문종 자유한국당 의원이 소유했던 부지에 들어선 경민커피문화원(맨 아래 하얀 건물). 홍 의원이 자신이 이사장을 지낸 바 있는 경민학원에 부지를 매각했고 이 부지에 경민커피문화원이 들어섰다. 의정부/김명진 기자
지난 1일 경기 의정부시 고산동 홍문종 자유한국당 의원이 소유했던 부지에 들어선 경민커피문화원(맨 아래 하얀 건물). 홍 의원이 자신이 이사장을 지낸 바 있는 경민학원에 부지를 매각했고 이 부지에 경민커피문화원이 들어섰다. 의정부/김명진 기자

 

■ 2018년 11월: 마을 주민 27명이 ‘별’을 달았다

 

“우리 마을 주민들 절반은 다 별을 달았어. 내가 처음 골프장 반대 운동을 시작한 때가 마흔일곱이었는데 그때는 원빈보다 더 잘생겼었어. 허허. 지금은 예순이 돼버렸네.”

 

지난해 11월29일부터 이틀간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구만리에서 만난 반경순(60)씨는 농담을 던졌다. 주민들은 마을 공터에 둥그렇게 서서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65가구가 사는 이 마을에서 27명이 공무집행방해 등으로 벌금을 받은 전과자다. 구만리 골프장반대 대책위원장 반씨가 말한 ‘별’은 업무방해, 특수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생긴 전과다. “지금도 마음이 아프고 힘들어. 십년이 지나도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아. 우리는 전과자야. 사면 복권이라고 하나? 나는 그런 걸 받고 싶어.” 노인회장 강원형(83)씨가 말했다.

 

‘원하레저’(옛 비큐공영)가 2006년 홍천군 북방면 구만리 일원에 1.53㎢(46만3096평) 규모의 골프장과 숙박시설 ‘마운트나인’ 개발을 추진하면서 이 마을엔 ‘별’을 단 주민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박덕흠 자유한국당 의원 아내 최아무개씨가 공동 대표이사를 지낸 원하레저는 가시오가피 농장을 만들어서 고용을 창출하겠다며 농민들로부터 구만리 일대 농지와 임야를 대거 사들였다. 그러나 실상은 가시오가피 농장이 아닌 골프장이었다. 2006년 11월, 구만리 마을 옆에 골프장이 들어설 거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주민들이 홍천군청에 민원을 제기했다. 농업용수가 부족해 지하수를 끌어올려 농사를 짓는 상황에서 인근 골프장이 조성되면 잔디에 대량으로 뿌리는 농약이 토양과 수질을 오염시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원하레저가 2008년 공사를 본격화하면서 주민들의 반대도 더 심해졌다. 업체 쪽은 집마다 다니면서 “이 서류에 도장만 찍어주면 1천만원을 주겠다”고 회유했다. 골프장 건설에 대한 주민동의서였다.

 

박덕흠 의원 아내 투자 법인 
구만리 46만여평에 골프장 추진 
주민들 반대에 고발·재산 가압류… 
강남 살며 서귀포 과수원도 매입 
박 의원 “아내가 하는 사업 다 몰라” 
 

 

전과자 ‘별’을 단 마을 주민들 
“골프장 저지하다 용역들과 대치 
어르신들 구급차에 실려가고 
10년 지나도 가슴에 응어리로 
사면복권? 그런 걸 받고 싶어” 
 

 

‘입목 축적 조사’ 부실 강원도청 
2008년 골프장 가능케 토지용도 변경 
2014년에 인허가 직권취소 결정 
구만리 빼고 홍천 골프장 9곳 인허가 
주민들은 삶의 터전 떠나 떠돌아

 

“한밤에 검정 봉투에 현찰 천만원을 넣어서 집집마다 찾아다녔지. 업체 직원들이. 동네 민심 쪼개 보려고. 한글 모르고 돈이 필요한 노인들한테 천만원씩 갖다 안겼어. 돈 준 사람들 얘기가, 동네 찬성 50%만 넘으면 골프장을 할 수 있는데 반경순이랑 반대론자들이 돈을 더 받고 싶어서 반대하는 거라고. 그러면서 돈을 뿌렸다는 거야. 두 사람만 더 찬성하면 이제 골프장 되니까 이 돈 받으라고. 삼십명은 그때 받았어. 시골 할머니들이 천만원을 언제 봤겠어? 장독대에 돈을 묻어놓고, 쌀독에 넣어두고, 밤에 자다가 문만 덜컥해도 잠을 못 잤다고 하더라고. 이 돈 때문에. 나중에는 업체가 돈 뿌렸다고 동네에 소문이 났지. 여기 마을 공터에 주민 100명이 다 모여서, 주민이 다들 농사 못 짓게 생겼는데, 다들 반대하기로 했는데 왜 돈들 받으시냐고. 서로 얘기했어. 마을 공터에 모인 다음날 다섯명이 천만원씩을 동네에 내놨지. 한 다발 되더라고. 할머니들이 전전긍긍하다가 이거 내놓으니까 그렇게 편하다고. 우린 ‘이거 뇌물이다’라고 생각해서 업체와의 싸움에서 다 이기게 되는 줄 알았어. 근데 물어보니까 이건 죄가 안 된다는 거야, 변호사가. 골프장 반대대책위원장, 노인회장, 이장 그런 사람들한테 현찰 주는 건 죄가 형성되는데 일반 주민들한테 주는 건 법적으론 아무 죄가 안 된대.”

 

지난 3월22일 구만리 골프장 반대 대책위원장과 주민들이 골프장 부지를 둘러보고 있다. 홍천/김명진 기자
지난 3월22일 구만리 골프장 반대 대책위원장과 주민들이 골프장 부지를 둘러보고 있다. 홍천/김명진 기자

 

1천만원을 받은 주민 가운데 12명은 원하레저 쪽에 돈을 돌려주려고 했지만 받지 않았다. 결국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돈을 공탁했다. 대다수 1920~30년생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었다. 2008년 공사가 시작되면서 주민들과의 대치가 시작됐다. “용역 애들이 100명 넘게 들어왔는데 대치하다가 주민 두 명이 119구급차에 실려 가고, 헬기에 한 분이 실려 가고 그랬지. 연세가 많으신 분들인데 용역 이삼십대 애들이 평지도 아니고 산에서 막고 그러니까 굴러떨어지고 의식 잃은 노인들도 나오고. 채증하고 그랬어야 하는데 현장에서 카메라도 뺏기고. 치료비는 동네 돈으로 다 물어줬어.”(반경순씨)

 

원하레저는 2008년 8월 사업자 쪽이 벌이는 지하수·지질 조사를 저지했다는 이유로 주민 43명을 업무방해죄로 한꺼번에 고발했다. 그해 11월에는 사업 방해를 하는 주민들 때문에 주야간 경비용역업체 970명의 경비용역대금 2억4007만5천원을 지출했다며, 주민 9명을 상대로 11억98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을 당한 주민들의 재산을 가압류했다. “주민들 업무방해로 받은 벌금은 콩을 공동 경작해서 내고, 강원도 시민단체에서도 도와주고. 업체가 11억9800만원 손해배상 소송 낸 것은 나중에 판사가 몇천만원으로 줄여서 그 벌금도 냈어요.”

 

강원도청은 2008년 6월 골프장을 조성할 수 있도록 토지 용도를 농림지역 및 관리지역에서 계획관리지역으로 변경하는 ‘홍천 군관리계획 결정’을 고시했다. 이 과정에서 산지를 개발할 때 통과해야 할 ‘입목 축적 조사’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수목 밀도를 뜻하는 입목 축적 조사를 해야 산지 개발 행위 허가가 날 수 있는데, 조사 방법이 허술했다. 2009년 9월 국정감사에서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은 “입목 축적 조사에서 벌목 내용이 누락돼 있는 등 관계 공무원의 업무처리 소홀에 따른 징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2009년 12월, 산림청이 재조사를 시작했다.

 

부실한 환경영향평가와 주민들의 반대로 갈등을 빚어온 구만리 골프장에 대해 강원도는 2014년 2월 인허가 직권 취소 결정을 내렸다. 8년간 처벌을 받으면서 맞선 주민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사업자인 원하레저가 제출한 환경영향평가서 내용이 부실해 이 평가서를 토대로 내린 사업계획 승인도 취소돼야 한다고 판단했다. 박덕흠 의원이 2012년 충북 보은·옥천·영동군에서 당선돼 국회의원 가족이 운영하는 구만리 골프장 반대 운동이 힘을 얻은 이유도 작용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홍천에만 골프장 9곳이 강원도청으로부터 인허가를 받으면서 농민들은 자신들의 땅을 잃어야 했다. 9곳 가운데 8곳이 영업 중이고, 나머지 1곳은 공사를 진행 중이다.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국토계획법)은 골프장을 공공·문화체육시설로 규정해, 민간 건설업자들도 토지 소유자 80%의 동의를 받으면 나머지 소유자들의 집과 땅을 강제수용할 수 있었다.

 

지난 3월22일 강원 홍천군 북방면 구만리 골프장 부지에 가림막이 설치돼 있다. 홍천/김명진 기자
지난 3월22일 강원 홍천군 북방면 구만리 골프장 부지에 가림막이 설치돼 있다. 홍천/김명진 기자

 

“(홍천 북방면) 밭치리에 골프장 조성되면서 사람들이 그 마을에서 다 쫓겨났지. 읍내 가서 사는 사람도 있고. 병문(가명) 형은 밭치리를 떠나 경북 봉화로 갔다가 지금은 횡성 공근면으로 떠났다고 하던데. 그렇게 돌아다니면 돈 다 까먹지. 골프장 강제수용할 수 있는 근거가 소유자 동의 80%니까, 누구를 8로 만들고, 누구를 2로 만드느냐는 심리 싸움 같은 거거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사실 여기도 마을 분위기가 예전 같진 않아.”(반경순씨)

 

헌법재판소는 2011년 6월 골프장 조성을 위해 토지 강제수용권이 행사될 수 있도록 규정한 국토계획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공익적 사업이라고 볼 수 없는 골프장까지 무분별하게 수용할 수 없도록 위헌적인 행사를 막아선 것이다. 박 의원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아내가 하는 사업을 다 알지 못한다. 골프장 용지는 이미 팔려고 부동산에 내놨다고 들었다. 지나간 일인데 왜 자꾸 사람을 괴롭히느냐”며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박 의원 아내 최아무개씨는 2008~2014년 벼와 잡곡, 묘목, 가시오가피 등을 재배하겠다고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원소리와 구만리 일대 농지 13만515㎡를 매입하면서 ‘농업 경영’ 목적으로 농지취득자격증명을 발급받았다. 이 밖에 제주도 서귀포시 서홍동 과수원 3382㎡를 매입하면서 2002년에도 농지취득자격증명을 받았다. 2002년 발급 당시 농지취득자격증명에 적힌 최씨의 주소는 ‘서울 강남구’였다.

 

■ 2018년 12월: 충남 서산까지 밀려난 평택 농민들

 

지난 1일 오전 경기 평택시 고덕 신도시에서 택지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평택 전역에서 신도시 등이 진행되면서 마을 100여곳이 사라졌다. 평택/김명진 기자
지난 1일 오전 경기 평택시 고덕 신도시에서 택지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평택 전역에서 신도시 등이 진행되면서 마을 100여곳이 사라졌다. 평택/김명진 기자

 

지난해 12월27일 만난 고주은(73)씨는 홀로 전기장판 위에 앉아 있었다. 추운 날이었지만 방에 보일러가 들어오지 않았다. 38년간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 해창3리에서 1천평의 논에 쌀농사를 지었다. 고덕면 일대에 13.4㎢ 면적의 신도시가 조성되면서 그는 2014년 집을 수용당했다. 1억원 남짓의 보상비를 받고는 마땅히 갈 곳이 없어서 평택시 안중읍 안중리로 이사 왔다. “보상비를 받고 간신히 이걸 산 거야. 돈이 적으니까 그 근방으로 이사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평택) 방축리, 신대리도 가고 꽤 댕겼지. 이미 다 오른 거야. 처음에는 여기가 무지하게 멀리 온 것 같아서, 아주 진짜 마음이 없었는데. 이제 뭐 후회해도 소용없고 꼼짝없이 이렇게 사는 거지.”

 

신도시가 조성되면서 인근 농지는 값이 뛰어버렸다. 농사를 짓지 않는 외지인들이 마구 사들였다. 신도시가 조성될 때 땅을 수용당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동네 주민들과 함께 반대 운동을 했다. 처음에는 다 같이 반대 운동을 했지만 한 사람, 두 사람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땅을 수용당하고 떠나갔다.

 

“처음엔 탱크 같았지. 시름시름 사람들 마음이 자꾸 변하는 거야. 이사 가겠다는 사람도 생기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슬금슬금 없어지고. 옆 동네 망가지는 것도 봤지. 보상비 문제 때문에 찔러 죽이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닌가? 형제간인가? 살인이 났다고 하더라고. 보상비 서로 갖겠다고. 2013년도인가 그렇게 들었어. 아이고, 돈 때문에 동네가 전쟁터가 된 거야.”

 

그도 이삿짐을 쌌다. 그는 자신이 떠난 마지막 고향 마을이 가끔 꿈에 나타난다고 했다. “오늘 한 집, 내일 한 집 그렇게 떠나고 떠나보내면 말이야. 포클레인까지 들어와서 먼저 산 것(집)들을 헐잖아. 그 얼마나 보기 싫어? 개판이 되고. 빈집이 마을에 자꾸 보이니까 보기 싫더라고. 아주 보기 싫어. 밤에도 나가기 싫어. 점점 다른 동네 같고 서먹해지는 거야. 할 수 없이 이사 가자고 마음을 먹었어. 좀 늦게 나왔지, 다른 사람보다. 그런데 말이야. 지금도 꿈을 꾸지. 거기서 사람들과 놀던 꿈. 여기선, 여기에서 일어난 일들은 꿈에 나오지 않아.”

 

평택 신도시 조성으로 고향 등져 
처음엔 반대하던 동네주민들 
한사람씩 변하더니 ‘돈 전쟁터’로 
이주딱지 받았지만 생활고에 팔아 
멀리 이사 뒤 “밤마다 고향마을 꿈” 
 

 

미군기지에 농토 수용 ‘원정 농사’ 
보상금으로 땅값 싼 서산에 농지 사 
2시간30분씩 운전해 10년간 오가 
“이자도 갚기 힘들어 재작년 포기” 
 

 

수용 과정에서 경제적 양극화 
대농지 보유자는 부자 되는 반면 
땅값 올라 농지 살 수 없는 농민 
타지로 떠나 살다 결국 빈민 전락

 

그는 집을 수용당하고서 이주자 택지를 받았다. 고덕 신도시가 조성되면 토지를 일반인보다 저렴하게 살 수 있는 일종의 권리로 ‘딱지’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논과 밭을 수용당한 뒤 마을을 떠난 주민 가운데 일부는 생활고 때문에 ‘딱지’를 헐값에 팔아넘기기 시작했다. 고씨도 6천만원에 이주자 택지 권리를 투자자에게 넘겼다. 이후 위치가 좋은 이주자 택지의 경우 딱지가 8억원대까지 치솟았다. “지금 생각하면 억울해 죽지. 이렇게 오를 줄 알았으면 갖고 있었을 텐데 마을 사람들이 같이 팔자고 해서. 촌놈이 6천만원 준다니까, 그 돈이 좀 많아? 나중에 마을 사람들끼리 쓸데없이 싸움이 붙었어. 너 때문에 팔았다고 서로 탓하면서.”

 

그는 종일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아내는 가끔 새로 이사 온 마을의 회관에도 가지만 그는 여전히 이곳이 낯설다. 이사 온 첫해엔 38년간 살던 해창리 마을 사람들을 만났지만 이젠 서로 뿔뿔이 흩어져 연락이 닿지 않는다. “이사 오고 첫해에 서너명은 자주 만나서 술 한잔씩 먹었지. 이제는 전화를 안 하는데 나만 자꾸 할 수가 없으니까. 또 돈이 들잖아. 만나면 오륙만원씩.”

 

그는 여전히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아이고, 말하면 뭐해. 거기선 좋았지. 여름에 논에서 고생해도 겨울에 놀고 서로 술도 한잔씩 하고. 작물은 말이야. 주인 발소리 듣고 자란다고, 매일 돌아봐야 잘 자란다고 하잖아. 매일 나가서 내 땅을 돌고 들어오고. 그게 얼마나 마음 편하고 좋아? 저기에 내 땅이 있다는 생각.”

 

그는 고덕면에서 살던 시절을 생각하며 잠시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전깃불도 켜지 않은 채 전기장판 위에 앉아 하루해가 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가 안 간다고, 하루가. 날이나 따뜻하면 다니겠는데 집에만 이렇게 처박혀 있는 거지. 빨리 봄이 왔으면 좋겠어. 자전거도 타고.”

 

지난 1일 경기 평택시 서정동 일대에 자리한 부동산 상가들. 고덕 신도시 분양권과 이주자 택지 권리 등이 매매된다. 평택/김명진 기자
지난 1일 경기 평택시 서정동 일대에 자리한 부동산 상가들. 고덕 신도시 분양권과 이주자 택지 권리 등이 매매된다. 평택/김명진 기자

 

평택은 고덕 신도시를 비롯해 미군기지 이전, 민간개발 방식의 택지 개발이 대거 이어지면서 농촌이 사라져갔다. 평택문화원은 2014년부터 없어진 농촌 마을 100여개를 대상으로 ‘평택의 사라져가는 마을’ 보고서를 발간해오고 있다. 사라지는 마을 주민들의 구술사와 현장 탐방을 담은 책이다. 토지를 수용당하는 과정에서 고씨처럼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넓은 농지를 보유한 농민들의 경우 보상비를 많이 받아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기도 한다. 한마을에 어울려 살 때는 체감하기 어려웠던 경제적 양극화가 벌어진다. 한국토지주택공사가 땅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토지 수용 전문’ 변호사들이 마을에 들어와 ‘보상금을 많이 받기 위한 필수 지식’을 농민들에게 강의하거나 일부 농민은 도시민들처럼 땅 투자에 뛰어든다. 고덕 신도시로 토지를 수용당할 때 농민대책위원회 사무장을 맡았던 이근덕씨를 만났다. “수용되고 몇년이 지나니까 농민 가운데 일부가 빈민으로 전락하시는 게 눈에 보여요. 자기 집을 소유하셨던 분들이 전세로, 다시 월세로. 농촌하고 도시는 삶이 다르잖아요. 도시는 그야말로 돈이 없으면 낭떠러지로 떨어지니까요. 땅이 수용되지 않았으면 마을회관에서 밥 먹고 어울려 사셨을 텐데 다들 아파트나 빌라 같은 곳에 혼자 들어앉으니까 외롭고 힘들어서 그런지, 치매 오신 분들도 많이 생겼고요.”

 

농사를 짓고 싶은 농민들은 더 값싼 땅을 찾아 떠난다. 평택 팽성읍 대추리에 살던 김영식씨는 미군기지가 들어서면서 땅을 수용당한 뒤 받은 보상금으로 2007년 충남 서산 농지를 샀다. 화물 트럭을 몰고 하루 왕복 2시간30분을 운전해 쌀농사를 지으러 서산으로 다녔다. “재작년에 그만뒀어요. 그냥 뭐 힘들게 일만 한 거지. 간척지라 땅에 하얗게 염분이 올라와서 농사가 잘 안 되었어요. 평택에서 땅을 수용당한 사람들이 꽤 서산에 갔거든요. 지금도 농사짓는 사람이 일부 남아 있고요. 몇년 하다가 나이가 70대가 되니까 운전하기가 버겁고 농사지어봐야 쌀값이 싸잖아요. 땅 사면서 빌린 이자 갚기도 힘들었어요.”

 

도심의 특정 지역이 주목을 받으면서 부동산 가치가 상승하고, 이에 따라 기존 거주자 또는 임차인들이 내몰리는 ‘젠트리피케이션’은 도시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인천과 경기도 농민들은 개발되는 과정에서 비싼 농지 값을 감당하지 못해 밀려나는 농촌형 젠트리피케이션을 겪고 있었다.

 

■ 2019년 1월: 밀양나노융합국가산업단지 조성 중인 밀양

 

지난 1월22~23일 찾아간 경남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 엄용수 자유한국당 의원 아내의 밭은 버려지다시피 한 상태였다. 잡풀이 나무처럼 우거져 걸을 때마다 옷에 도깨비풀이 엉겨 붙었다. 신공항 유치 바람이 불면서 땅값이 뛴 밀양은 2016년 사업이 전면 백지화되며 주춤해졌다. 2017년 7월 국토교통부로부터 산업단지 계획승인을 받아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조성 중인 밀양나노융합국가산업단지는 현재 56.6%의 토지 보상이 완료됐다. 2021년 12월 국가산단 조성이 완료된다. 산업단지가 조성되는 과정에서 땅이 수용돼 보상비를 받은 농민들이 다른 농지를 사는 ‘대토’를 하는데 이런 작용으로 농지 값이 다시 뛰어오른다.

 

산업단지가 들어설 예정인 감천리 마을도 주민들 간에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분위기는 어두워 보였다. 산업단지 조성을 찬성한 농민 집에 들어갔다가 욕만 한 바가지 듣고 쫓겨났다. 도시와 달리 시골길을 아무리 걸어도 농한기에는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드넓은 논 사이에 드문드문 자리한 집들을 지나 소를 키우는 농민 석아무개(62)씨 집을 찾아 걸었다. 석씨는 옆에 남편이 함께한 자리에서 사과를 깎아서 내놓았다.

 

“여기 논을 수용하면 (한국토지주택공사가) 한평당 38만~42만원 준다네. 그 돈을 갖고 다른 데서 살 수가 없지. 밥도 못 먹겠고 신경성 식도염이 올라오는 거야. 이사가야 하는데, 어디를 가긴 가야 하는데. 집에 모시는 할머니가 계셔서 고층 아파트는 못 가고 단독주택으로 가려고 하면 비싸고. 나도 산업단지 찬성해. 청년들 일자리도 늘겠지만, 우리가 살아갈라 카이 농사지을 데가 없는 거야. 안 돼, 이건.”

 

석씨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틀간 밀양 부동산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느낀 농지 값은 저렴하지 않았다. 길이 붙어 있지 않아 개발 행위가 어려운 ‘맹지’에다 농사짓기에 척박한 땅도 평당 50만원을 넘었다. 석씨가 막막해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석씨도 토지 보상가를 놓고 한국토지주택공사에 이의 신청을 생각해보았지만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기서 소 30마리 키우는데 이제 팔아야겠지. 한목에 내버리면 싸게 쳐줄 테니까 한마리씩, 또 한마리씩. 다른 축사로 이사 가려고 해도 문제가 뭐냐면, 축사는 허가가 잘 안 나요. 허가를 받아도 주변 사람들이 냄새난다고 민원이 들어가니까. 이미 축사를 해온 다른 자리에 들어가려니까, 우리는 축사로 먹고사는데 다른 축사 자리를 알아보니 얄궂은 것도 7억원씩 하니까. 그럼 나는 축사도 접어야 해. 우리 동네 주민들이 순진해. 처음에는 관광버스를 타 갖고 청와대에 가자, 이 이야기가 나왔어. 작년 여름에. 근데 아무것도 못 했어요.”

 

국가산단 조성되는 밀양 부북면 
주민들 찬반 나뉘어 분위기 삭막 
보상금 적어 인근 농지도 못 사 
“어디서 생계 유지하고 살아야 하나” 
 

 

신도시 기습 발표된 인천 계양 
투자자들이 농지 절반 이상 보유 
농사 포기할 수밖에 없는 농민들 
“농기계·시설재배 대출금 상환 막막” 
일부는 전라도까지 내려갈 생각도

 

그는 토지를 강제수용당하면서 물어야 할 양도세도 걱정이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우리 땅과 집을 수용하면 양도세를 안 낸다고 해놓고는 이제 와서 그마저도 세금 낸다고 하는 거야. 팔고 싶지도 않은 이 땅을 강제수용당하면서 양도세까지 물게 생겼다고요.”

 

마을에는 ‘경작 금지’ 팻말이 붙어 있었다. 봄철 농사를 준비하고 있어야 할 2월에 아무것도 못 하고 있다고 석씨는 한탄했다. “땅 수용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 난 다음에 신경을 썼더니 각막이 갈기갈기 찢어졌어요. 하루는 갑자기 머리가 깨지고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거예요. 눈이 안 보여. 병원에서 신경성 스트레스라고 하더라고. 밀양에선 치료가 안 된다고 해서 양산 부산대병원에서 3개월 치료를 받았어요. 축사를 턱 하고 (앉아서) 보면, 허전하고 이상한 마음이 들고 이사 가려고 하니까….” 석씨는 눈물을 글썽이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 2019년 2월: 제3기 신도시 발표에 농기계 대출금 걱정

 

인천 계양구 동양동 일대에 세워질 예정인 ‘계양 신도시’. 농지가 강제 수용될 위기에 처한 농민들은 벌써부터 시름에 잠겨 있다. 인천/김명진 기자
인천 계양구 동양동 일대에 세워질 예정인 ‘계양 신도시’. 농지가 강제 수용될 위기에 처한 농민들은 벌써부터 시름에 잠겨 있다. 인천/김명진 기자

 

정부는 지난해 12월19일 인천 계양구, 경기도 남양주와 하남에 ‘3기 신도시’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인천 계양구 동양동, 귤현동, 상야동 등에 조성되는 계양 신도시는 2021년부터 주택 공급을 시작한다. 수도권 집값 안정을 위해 발표한 주택 공급 계획에 이곳에서 농사를 짓던 농민들은 망연자실했다. 지난 2월2일 만난 동양동 영농회장 정운학(67)씨는 다른 농민들과 대책회의를 하고 오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신도시가 되리라고 상상도 못 했어요. 이 동네에서 태어나서 하늘 보고 땅만 보고 그렇게 살아왔어요. 농사 외에는 다른 생각을 못 했어요. 국토부가 기습적으로 신도시 발표하면 농민들은 이렇게 불이익을 당해요. 정부는 한편으로 귀농, 귀촌을 장려한다고 지원금을 준다는데 정반대에서는 이렇게 쫓겨나는 현상이 일어난다고요. 과연 어디로 가서 남은 생애를, 생계를 유지하고 살아야 할지 길이 막막해.”

 

정씨는 계양 신도시로 예정된 농지를 투자자들이 절반 이상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농사를 짓지 않는) 관외 지주분들이 원주민보다 훨씬 많아요. 많게는 70%까지. 먼 미래를 내다보고 땅값이 오르리라고 생각하고 땅에 돈을 묻어둔 사람들이죠.” 이제 땅이 수용되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데, 대출금으로 마련한 농기계 처리를 두고 골치가 아프다고 했다. “트랙터, 콤바인, 건조기, 이앙기 4대 갖고 있는데 다 농협에서 대출받아 산 거예요. 3억인가 주고 샀어요. 이거 팔아도 중고차처럼 절반도 못 받을 거예요. 고물값이죠. 다른 농민들 상황도 다 비슷해요. 저는 쌀농사를 짓는데 비닐하우스 같은 시설 재배는 투자 비용이 더 많이 들어요. 그분들 만나면 다들 대책이 없대요.”

 

일부 농민들은 벌써 인천을 떠나 전라도 쪽으로 농지를 알아보고 있다. “수도권 근방에 이제 농지가 없어서 갈 데가 없어요. 말도 못 하게 주변 땅값이 들썩대서. 지금 다른 지방, 전라도, 경상도로 내려가야 하는데 고향을 등지고 정착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농민은 어떤 일을 겪어도 신문에, 방송에 나지 않아. 이게 힘없는 사람들의 현실이죠. 이 나이 먹고 어디 가서, 객지 가서 사는 게 쉽지 않잖아요. 농사는 여기서 끝이 난 거예요. 이게 세상살이인 건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 사람들(농지 투자자들) 생각이 맞았던 거지. 살다 보면 언젠가 땅값은 오른다는 거.”

 

세번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만난 농민 12명의 이야기는 농사를 짓지 않는 가짜 농부들이 왜 농지를 매입해선 안 되는지를 절실히 드러냈다. “땅이 수용되는 게 아니라 삶이 수용되는 것 같았다.” 자기 땅을 수용당한 평택 농민의 말이다.

 

인구가 감소하고 산업 구조가 바뀌는 과정에서 농지 또한 신도시 등의 다른 용도로 전용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수십년 살아온 농촌 마을을 떠나, 이방인으로 새 삶을 개척해내야 하는 농민에 대한 국가의 배려는 부족해 보였다. 비농업인들이 투자 목적으로 개발 예정지 주변 땅을 사들이느라 값이 덩달아 상승한 농지를 농민들은 손에 쥘 수 없었다. 허위로 작성된 농업경영계획서로 손쉽게 취득한 봄날의 밭과 논은 잎이 돋지 않는 잿빛이었다.

 

홍천 평택 밀양 인천/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연재[탐사기획] 여의도 농부님, 사라진 농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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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890302.html?_fr=mt1#csidxad4d2fe7b1df8a39706f71d6e608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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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O 100주년 총회에서 부끄러운 대통령이 되시겠습니까?”

[인터뷰] ILO 핵심협약 비준 투쟁 나선 민주노총 김경자 수석부위원장

“연행이 된다 할지라도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할 수밖에 없었어요. 노동법개악을 막아야 했기 때문에, 모든 임원들이 다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김경자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의 말이다.

민주노총은 4월도 ‘투쟁’으로 시작했다. 1일부터 최저임금 결정체계 개편과 탄력근로제 확대 법안 등 노동법 개악을 막고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해 국회 앞에서 완강한 투쟁을 벌였다. 지난 2일 김 수석부위원장은 부위원장들과 함께 미리 예정돼있던 김학용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자유한국당) 면담을 요구하다 면담은 고사하고 경찰에 연행됐다.

김 수석부위원장은 “고생을 했다는 것보다 오히려 속상한 마음이 크다”고 했다.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라는 곳에서 100만 명의 조합원이 가입된 민주노조의 총본산 민주노총을 이렇게 대할 수 있습니까?” 김 수석부위원장이 되물었다. 한국사회 노동의 현실, 노동자의 현주소를 확인한 것 같아 속상한 마음이었다는 뜻이다. 3일 국회 앞 투쟁에선 김명환 위원장까지 연행됐다. 민주노총 현직 위원장이 집회 도중 연행되는 일은 역대 정부에선 없었던 일이다.

100만 민주노총, ILO핵심협약 비준 투쟁에 나선 이유

민주노총 조합원 수는 100만 3천명이 넘었다. ‘100만 민주노총’은 민주노총에게 무한한 책임감을 가져다준 듯 했다.

“민주노총의 투쟁에 대해 보수 언론매체들이 악의적인 보도를 쏟아내도, 노동자들은 노동자를 지키려는 조직은 ‘민주노총’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노동법 개악 저지와 노동기본권 보장 투쟁을 더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김경자 수석부위원장은 말했다.

“100만의 힘으로 노동법 개악도 막고, 100만의 힘으로 노동기본권도 쟁취하고… 이것이 200만 시대를 만드는 힘이 될 거예요.” ‘노동법 개악 저지 투쟁’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그 투쟁이 조합원을 늘리는 투쟁으로 된다는 것, ‘노동기본권 투쟁’을 열심히 해 노동기본권이 보장돼야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기본권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조합원이 늘어 민주노총의 사회적 영향력이 높아지면 노동법 개악을 막는 것도, 노동기본권을 쟁취하는 것도 더욱 잘 될 것”이라며 김 수석부위원장은 이를 ‘선순환’이라고 표현했다.

이런 이유로 민주노총이 집중하고 있는 투쟁 중 하나는, 모든 노동자들의 노조 할 권리를 보장하도록 ‘ILO(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을 즉시 비준하라는 투쟁이다. 김 수석부위원장은 노동·시민·법률·사회단체들로 구성된 ‘ILO긴급공동행동’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왜 비준을 못하는지’ 대통령 만나 묻고 싶다

“1919년에 ILO가 만들어지고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에선 노동자들이 ‘노조 할 권리’를 외치고 있어요. 한국의 후진적 노동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반증이죠.” 김 수석부위원장은 노동자의 결사의 자유와 단결권·단체교섭권 보호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ILO 핵심협약 87호, 98호 비준에 대한 ‘대통령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유는 명확하다.

“대통령이 협약비준의 권한이 있고, 대통령이 결단하면 비준을 위한 단계에 들어서기 때문이에요.” 헌법 73조는 대통령에게 비준권을 보장하고 있다. 국회는 대통령이 비준한 조약이 재정과 입법을 필요로 하는 경우에 한해 동의권을 갖는다(헌법 60조).

김 수석부위원장은 ILO로부터 오는 6월 열리는 ILO설립 100주년 총회에 초청받은 대통령이 당당히 가서 연설하도록 박수쳐 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가능할까?

“교사, 공무원, 특수고용 노동자들에게 노동3권을 보장하지 않는 걸 국제사회가 이해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총회에 가서 국제노동기구에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할 얘기가 없을 거예요.”

그는 최소한의 조치를 언급했다. “부끄럽지 않은 연설을 하려면 최소한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핵심협약 87호, 98호를 비준하고, 국회의 동의를 요청해야죠. 그리고 직권으로든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가 권고한 시행령 개정을 통해서든 정부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인 ‘전교조 법외노조 철회’문제를 해결하고 가라는 거예요.”

대통령에게 직접 묻고 싶은 마음이다. “노동자를 대변하는 변호사이셨으니 노동자의 단결권 보장 범위를 세계적 수준에 맞추기 위해, 넓히기 위해선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에서 논의된 사용자들의 요구사항이 교환대상이 될 리 없다는 것을 대통령도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고 봐요.” 대체 왜 비준에 나서지 못하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

“ILO총회까지 더 큰 투쟁 준비”

민주노총은 ILO 핵심협약 비준 투쟁을 다그치고 있다. 이달 중순부터 민주노총 내에 특수고용 노동자, 전교조, 공무원, 간접고용 노동자 등 노조 할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조직들을 모아 6월 ILO 100주년 총회기간까지 핵심협약 비준을 요구하는 공동의 투쟁과 사업을 만들어갈 예정이다. 더불어 ILO긴급공동행동 단체들과 다양한 투쟁도 벌인다.

“공동행동이 출범(3월28일)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참가 단체들 모두 핵심협약 비준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노동자들이 가장 앞장서야 할 주체이지만 공동행동 단체들도 자신들이 주체라는 마음이 큽니다. 감사한 일이죠.” 교수, 법조인 등 곳곳에서 선언을 조직하는 등 ‘핵심협약 선비준’을 대세화 하기 위한 여론전에 나서고 있다는 게 김 수석부위원장의 전언이다.

김 수석부위원장은 ILO 핵심협약 비준에 대한 대통령의 태도에 따라 민주노총과 ILO긴급공동행동의 투쟁도 달라질 거라고 말했다. 민주노총은 매년 ILO 총회에 대표단을 파견해왔다. “문재인 대통령이 핵심협약을 비준한 후 국제사회 앞에서 ‘노동존중사회’로 가기 위해 한국정부가 더 노력하겠다고 연설하기를 바라고 있지만, 만에 하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로 부끄럽게 총회에 간다고 하면 민주노총은 ILO 총회에 가서도 국제노총들과 연대해 투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겁니다.”

노동법 개악안이 국회에서 공전되고 있는 지금, “국회가 최저임금, 탄력근로제 개악에 이어 노동권·파업권을 제약하는 개악안을 상정할 경우 민주노총이 무기한 파업을 해서라도 막아야 한다”는 김 수석부위장의 말대로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정부가 노동법 개악 시도를 멈추고 ILO핵심협약 비준단계로 나서길 요구하고 있다. 4월 임시국회에서도 민주노총의 강도 높은 투쟁이 예상된다. 노동자들에게 박수를 받느냐, 노동자들의 거센 투쟁에 직면하느냐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한 시기인 듯하다.

조혜정 기자  jhllk20@gmail.com

icon관련기사icon[사설] 국제노동기구(ILO)기본협약 비준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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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주가 '롤모델'이 돼버린 세상이 파괴하는 건?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부동산 부자에게 국토부 장관 맡기면 곤란
 
 
문재인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자진 사퇴했다. 최정호 전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는 "다주택자로 정부의 주요 중심 정책인 집값 안정을 이끌 수 없다"는 비판에,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정부가 주택 투기와의 전쟁을 하고 있을 때 흑석동 뉴타운 재개발 지역의 상가·아파트 입주권을 매입해 "정부의 주택 정책과 반대되는 행보를 했다"는 비판에 사퇴했다.
 
이어 치루어 진 경남 두 곳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은 고전했다. 주요 공직에 대한 인사 파동이 선거 결과에 일정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국민들이 부동산·주택 정책에 화가 난 이유   
 
국민은 현 정부 들어 두 번 불같이 화를 낸 바 있다. 작년에 수도권 특히 서울 중심으로 집값이 폭등할 때였다. 정부의 주택 정책이 지난 정부와 달리 집값 안정을 내세웠는데 반대로 치솟았기 때문이다. 
 
서울·수도권에서 정부의 주택 정책을 믿고 집값의 하향 안정화를 기대하면서 주택 구입을 뒤로 미루던 무주택자들은 분노하였다. 또한 집값 폭등으로 노력 없이 앉아서 수천만 원, 수억 원을 버는 주택·부동산 소유자들을 보면서 허탈해 하였다. 특히 지방은 집값이 하락세였기에 서울 중심으로 수도권이 오르자, 지방 거주자들의 상실감은 대단했다. 서울·수도권과 지방의 주택 가격의 탈동조화는 지방의 자산 가치를 낮추기 때문에 지방 거주자들은 앉아서 손해를 보는 셈이다.  
 

▲ 부동산 투기 논란으로 낙마한 최정호 전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 ⓒ연합뉴스

정부는 일단 다주택자의 대출 규제 강화, 양도 소득세 중과세 등을 통해 서울·수도권의 다주택자의 주택 수요를 차단하는 등 시세 차익 목적의 투기 수요를 막고, 3기 신도시로 30만 호 주택 공급을 밝혀 가까스로 주택 가격을 안정시켰으나 한 번 오른 가격은 쉽게 낮아지지 않고 있다. 
  
국민이 두 번째로 분노를 넘어 불신을 표한 것은 근래 장관 후보자 지명이었다. 7명 장관 후보자 상당수가 다주택자였고, 특히 주택 정책을 총괄하는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는 정부가 고시한 투기 지역·투기 과열 지역·조정 지역에 각각 주택을 가지고 있었던 다주택자였다. 후보 지명 전에 분당 아파트를 자녀에게 증여하기도 했다. 
 
최정호 전 장관 후보자의 주택 보유와 증여 과정은 우리 사회 상류층이 어떻게 부를 이루고 세습하는지를 보여주는 표본으로서 주택 가격 폭등으로 인한 자산 양극화를 맞이한 국민의 분노를 자아냈다. 또한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의 정부 정책과 반대되는 주택 매입 과정도 역시 국민을 크게 실망시켰다. 
 
한국 사회의 심각한 자산 양극화 
  
한국 사회에서 자산으로 부를 형성하는 전형적인 과정은 지대 추구이다. 주택을 필두로 한 부동산의 자산 가치가 오르는 곳은 개발 예정지나 교통, 공공기관, 생활편의시설 등이 잘 갖추어진 곳이다. 이런 곳은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제한된 곳이기에 선점만 하면 이익은 자동으로 보장된다. 당연히 이런 곳을 매입하려면 여유 자금이나 기본적인 자산이 있어야 한다. 결국 '부가 부를 낳는다.' 
  
이런 곳에 투자하는 사람은 탈법을 하지 않는 한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는다. 그러나 법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윤리적으로 정당하다고 할 순 없다. 위치가 좋지만 주거 환경이 낡은 재개발지역의 조합입주권(소위, 딱지)를 구입한 뒤 초고층 아파트에 입주한 사람은 확 트인 전망과 주택 가격 상승에 만족할 것이다. 하지만 그 만족감은 그 지역에서 거주하다 비자발적으로 쫓겨난 영세 가옥주와 세입자들이 겪은 고통에 기초한다. 윤리적으로 정당화하지 못한 행위가 합법으로, 재테크 성공 사례로 입에 오르내릴 때, 그 사회의 공동성은 무너져 내린다. 
   
또한 자산 양극화는 근로 의욕을 상실하게 하고 기업가 정신마저 좀 먹는다. 고용이 불안한 이 시대에 힘들게 직장생활을 해도 임금은 생활하기에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런데 자산 지대추구로 1-2년에 몇 천, 몇 억을 버는 과정을 지켜보면 도덕 기준이 흔들리게 된다. 사무실이나 점포 토지를 임대해서 사업을 영위하는 사업자나 회사에게도 부동산 가격 상승은 임대료 상승으로 이어져 부담이 된다. 열심히 자기 사업에 몰두했던 이들도 결국 자산 가격 폭등으로 이익을 본 동료나 주변 회사를 보면서 '한 우물을 파고 연구하고 투자'한 자신을 자책하면서 결국 부동산 임대사업 대열에 나서게 된다. 자산 가격 폭등은 건전한 사업자들의 기업가 정신을 갉아 먹는다. 이게 한국 사회의 민낯이다. 
  
건물주가 롤 모델이 돼버린 한국 사회 
 
자산으로 부를 일군 자산가들은 자신들을 사회의 롤 모델로 만들려고 한다. 인기 연예인들이 건물을 매입하여 부를 축적하는 과정을 상업 방송을 통해 보면서, 청소년들은 미래의 꿈이 건물주라고 말한다. '성공한 사람 = 건물주' 라는 등식이다. 많은 이들이 건물주를 선망하게 될수록 부동산·주택으로 돈을 버는 것이 이 사회에서 인정받고 성공으로 가는 길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자산으로 부를 이루는 길은 대체로 현재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산이나 부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작년 서울을 중심으로 한 주택 가격 폭등 때 이익을 본 사람은 누구인가? 지하철역 등 더 좋은 입지에, 대규모 새단지 아파트에, 강남지역 등 부동산 가격이 비싼 지역 순이었다. 철저하게 돈과 자산이 더 있는 사람 순으로, 돈을 벌고 자산을 축적했다. 
 
민주주의는 자기의 경제사회적 입장을 분명히 인식하고,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고 집단적으로 개선을 요구할 때 그 기반이 강화된다. 지금처럼 자기가 서 있는 위치에서, 자신의 발전과 사회의 발전을 고민하지 않고 자산가들의 롤 모델을 맹목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추구할 때,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이런 자산 양극화 확대를 끄는 사회경제적 힘은 완강하다. 서울·수도권의 집값과 부동산 가격을 이끄는 핵심 요인인 '수도권 집중'은 강화되고 있다. 지방의 제조업 기반이 흔들리고 무너지면서, 지방의 일자리도 줄어들고 있다. 지방의 실업자가 어디로 가겠는가? 바로 수도권이다.  
 
최근 반도체를 생산하는 SK하이닉스는 공장연구 부지를 용인시에 짓겠다고 정부에 제안했다. 전통적인 전자산업단지였던 구미시나, 천안시가 공장 유치를 희망했으나, SK하이닉스는 용인시로 결정했다. 박사급 연구원등의 인력을 확보하는데, 수도권인 용인시가 유리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처럼 서울·수도권으로 집중현상은 심화되고 이는 기득권층의 자산가격 상승의 배경이 되고 있다. 이를 시장에 방치할 때 자산양극화 심화는 불을 보듯 뻔하다.
   
문재인 정부, 자산 양극화 완화에 주력하라
 
국민들은 자산 양극화된 현실을 더 이상 감내하기 힘든 상태이다. 정부는 민심의 분노가 향했던 작년의 서울·수도권의 집값 폭등과 인사 파동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지방의 인구 유출을 막을 수 있는 실질적인 지방 발전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자산 보유 및 수익에 대한 과세 형평성 확보, 누진적인 과세 확대, 부동산과 수익 중심의 개발에서 사람과 공동체 관점의 공영개발, 토지 활용도를 높이고 공공성을 확대하는 방향의 토지 공개념 도입 등도 요구된다. 이를 통해 주택 구매력이 없는 세입자·노년·청년층도 양질의 저렴한 주택에서 마음 편히 거주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주택과 부동산으로 부를 축적한 이들에게 주택 정책, 국토(공간) 정책을 맡기면 곤란하다. 나아가 주요 공직에서의 역할도 맡겨서는 안 된다. 주택·부동산으로 부를 일군 이들에게 자산 양극화 완화를 위해 일하라는 건, '자기를 부정하고 제 살을 도려내는 것'이다. 이게 가능하다고 보는가.  
 
앞으로 국민은 현 정부가 어떤 인사를 주요 공직에 등용하는지 두 눈 뜨고 지켜볼 것이다. 또한 정부가 실질적인 자산 양극화를 이루기 위해 어떻게 노력하는지를 냉정하게 따져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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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세균실험실 잔말말고 폐쇄하라”

부산 시민사회단체, 부산항 미8부두 세균무기실험실 추방대책위 결성
 
백남주 객원기자 
기사입력: 2019/04/17 [00:37]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부산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미 8부두 생화학실험실 폐쇄를 위한 공동행동에 나섰다. (사진 - 평화행동)     © 편집국

 

주한미군이 부산항 미 8부두에서 생화학실험을 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 부산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공동 대응에 나섰다.

 

부산지역 80여개 시민사회단체들은 16일 오전 11시 부산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8부두 미군부대 세균무기실험실 추방 부산시민대책위(이하 대책위)’발족을 알리며 관련 시설 폐쇄를 촉구했다.

 

대책위는 “1그램만 유출되어도 수천 명이 죽는 세균을 다루는 시설이 부산 도심 한복판바로 우리 머리맡에 있다며 세상천지 어느 누가 이 시설을 용납하고 가만두겠는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책위는 주한미군의 변명이 모두 거짓이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난 지금우리가 내세울 구호는 추방’ 밖에 없다며 시설공개니주민공청회니 하는 거짓 놀음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다고 강조했다.

 

대책위는 지난 3년간 주피터 계획이 일방적으로 도입되는 과정을 통해 다시금 깨달은 진리가 있다며 그것은 바로 우리의 권리는 그 누가 쥐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대책위는 지금까지 주한미군은 거짓말로 변명하면 그만이었고정부와 지자체는 이를 외면하고 덮어두기 급급했다고 지적했다.

 

대책위는 평화의 촛불로 8부두 미군부대 세균무기실험실을 반드시 몰아낼 것이라며 4월 24일 미 8부두에서 대규모 촛불집회를 개최할 계획을 밝혔다.

 

한편 3월 13일자 <부산일보>는 미국의 ‘2019 회계연도(2018년 10~2019년 9생화학방어 프로그램 예산 평가서를 입수해 미군이 생물감시의 일환으로 올해 450만 달러의 예산을 투입하기로 했고미 8부두에서 프로젝트 잔여 능력 계획 개발과 작동 시연 테스트를 제공하기로 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부산일보>는 주한미군이 생물무기 탐지 실험을 목적으로 탄저균이나 페스트균과 같은 고위험 병원체를 언제라도 8부두에 들여올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부산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은 근 한 달여간 미 8부두에서 미군 출근저지 행동전과 촛불집회를 개최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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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속지 두 번 속냐부산시민 다 죽이는 위험천만한 미군부대 세균무기실험실 잔말 말고 철거하라!

 

처음이라던 평택 미군기지의 세균반입한두 번이 아니었다. 8부두에서 실시하지 않겠다던 세균 반입과 실험예산서에 살아있는 매개체 실험이라고 버젓이 적혀있다그런데도 주한미군은 세균반입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고국방부는 고장 난 레코드처럼 미군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주한미군의 뻔뻔한 거짓말이제 더 이상 속지 않겠다.

 

1그램만 유출되어도 수천 명이 죽는 세균을 다루는 시설이 부산 도심 한복판바로 우리 머리맡에 있다세상천지 어느 누가 이 시설을 용납하고 가만두겠는가주한미군의 변명이 모두 거짓이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난 지금우리가 내세울 구호는 추방’ 밖에 없다시설공개니주민공청회니 하는 거짓 놀음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다.

 

지난 3년간 주피터 계획이 일방적으로 도입되는 과정을 통해 다시금 깨달은 진리가 있다그것은 바로 우리의 권리는 그 누가 쥐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다지금까지 주한미군은 거짓말로 변명하면 그만이었고정부와 지자체는 이를 외면하고 덮어두기 급급했다이 땅 부산의 주인은 바로 우리 부산시민이다그렇기에 우리 손으로 직접 세균무기실험실을 추방할 것이다.

 

우리는 평화의 촛불로 8부두 미군부대 세균무기실험실을 반드시 몰아낼 것이다. 4월 24일 8부두에서 밝혀질 촛불은 세균무기실험실을 몰아낼 거대한 촛불 물결의 첫 심지로 타오를 것이다부산시민들은 8부두 미군부대 세균무기실험실 추방 부산시민대책위를 결성하며 다음과 같이 우리의 투쟁 의지를 선포한다.

 

도심한복판 세균무기실험실 지금당장 추방하자!

평화를 해치는 주피터계획 당장 폐기하라!

현대판 마루타시설 세균무기실험실 철거하라!

 

2019년 4월 16

8부두 미군부대 세균무기실험실 추방 부산시민대책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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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식 “왜 피해자가 모든 것 다 밝혀내야 하나”

4.16 생명안전공원 부지서 열려.. ‘진상규명·책임자 처벌’ 요구 높아

양아라 기자 yar@vop.co.kr
발행 2019-04-16 19:29:38
수정 2019-04-16 19:2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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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오후 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식 행사에서 생존 학생 장애진 양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16일 오후 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식 행사에서 생존 학생 장애진 양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김철수 기자

"국가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돌아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왜 돌아오지 못하게 하였을까요? 그 이유를 밝히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아마 국가가 더 잘 알지 않을까요? (중략) 왜 피해자가 책임자를 나서서 찾고, 죄를 물어야 할까요? 왜 피해자 스스로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밝혀내야 할까요? 도대체 왜? 피해자가 외쳐야만 하는 세상은 누가 만들어낸 것일까요?" (세월호 참사 생존 학생인 장애진 씨가 낭독한 '기억글' 내용 중)

2019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일로부터 5년의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세월호 참사 5주기 행사는 '추모식'이 아닌 '기억식'으로 진행됐다. '세월호 이전과 이후는 달라져야 한다'는 다짐과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약속을 다시 새기기 위함이다.

16일 오후 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식 행사에 세월호 유가족들과 시민들이 참석 진행되고 있다
16일 오후 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식 행사에 세월호 유가족들과 시민들이 참석 진행되고 있다ⓒ김철수 기자
16일 오후 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식 행사에서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유가족이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에게 세월호 리본을 달아주고 있다.
16일 오후 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식 행사에서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유가족이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에게 세월호 리본을 달아주고 있다.ⓒ김철수 기자

16일 오후 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 제3주차장에서 4·16가족협의회, 4·16재단 주관하고, 교육부·행정안전부·해양수산부·경기도·경기도교육청·안산시가 지원한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식'이 열렸다. 이날 식이 열린 장소는 과거 세월호 참사 정부 합동분향소가 있었던 곳이며, 향후 생명안전공원이 건립될 부지다. 지난해 세월호 4주기 '영결식'이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기억식을 찾은 시민들의 어깨에 종이로 된 노란 나비를 붙여주었다. 어깨에 노란 나비를 얹은 시민들은 노란 리본과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햇빛가리개를 머리에 쓴 채 내리쬐는 한낮의 햇볕을 받으며 기억식을 지켜봤다. 

오후 3시가 되자, 식의 시작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안산 전역에 울려 퍼졌다. 의자에서 일어선 시민들은 304명의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묵념했다.  

이날 행사에는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총리, 문성혁 해양수산부 장관, 이재명 경기도지사, 이재정 경기도교육감, 윤화섭 안산시장 등 정부 인사들이 참석했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를 제외한 여야 4당 대표도 모두 참석했다. 사회는 이지애 아나운서가 맡았다.

16일 오후 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식 행사에서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가 추도사를 하고 있다.
16일 오후 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식 행사에서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가 추도사를 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16일 오후 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식 행사에서 장훈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16일 오후 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식 행사에서 장훈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김철수 기자

추도사에 나선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유가족 앞에서 세월호 참사의 완전한 진상규명을 다시 한 번 다짐한다. 문재인 정부는 세월호의 진실을 반드시 인양할 것"이라며 "위급한 재난 위기 앞에서 국가는 국민을 반드시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들이 신뢰하는 사회안전시스템을 마련하라는 국민의 요구는 우리 정부의 국정과제로 핵심사업으로 추진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유 부총리는 "저는 교육부 장관으로서 세월호 참사 304분의 희생자 중, 무려 261명이 단원고 학생들과 교사들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무너진다"며 "교육과정 중에 발생했던 참사에 대해 무한한 책임을 느끼며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유감과 위로의 말씀을 올린다"고 말했다. 유 부총리는 기억식 중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문성혁 해양수산부 장관은 "다시 한 번 희생자와 가족, 피해자분들께 깊이 사죄드린다"며 "참사의 현장에서 함께 있던 학생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았던 의인들, 희생자 가족들을 내 가족처럼 걱정하고 힘을 보태주신 자원봉사자와 시민여러분께도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고 밝혔다.  

문 장관은 "안전에 대해서는 양보가 없다는 각오로 안전한 바다를 만드는데 뼈를 깍는 노력을 계속하겠다"며,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후속조치도 적극 지원해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16일 오후 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식 행사에서 장훈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16일 오후 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식 행사에서 장훈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세월호 참사 희생자인 단원고 2-8반 고(故) 장준영 학생의 아버지, 장훈 (사)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은 "돌아보니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1997년 우리 아이가 태어나고, 2014년 4월 16일 내곁을 떠나기 전까지 17년이었다"며 "그날 이후 지옥에서 살아왔다. 처음에는 진도체육관이, 팽목항이, 안산 장례식장이, 아이와 함께 산 집이, 광화문이 지옥이었다. 지난 5년 간 제 발이 닿은 곳은 모두 지옥이었다"며 처절한 심경을 토로했다.

장 운영위원장은 "(우리 아이들은) 국민을 구하고 보호해야 할 국가가, 권력을 움켜쥔 자들이 죽였다. 해경 지휘부가 죽였다. 박근혜 청와대와 국가 안보실이 죽였다"며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은 우리아이들을, 304명의 국민을 죽인 그 자들을 모두 잡아서 처벌하라는 국민의 요구이자 명령"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그들은 이 5주기까지 계속 증거를 은폐하고 훼손하고 있다. 6, 7주기가 되기 전에 제발 이들을 모두 잡아 처벌할 수 있도록 모든 방법을 강구해달라"며 "4.16참사특별조사위원회 조사와 더불어 전면 재수사하고, 기소해 살인자들을 모두 처벌해야 한다"고 거듭 당부했다.

이와 함게 장 운영위원장은 "5주기가 됐지만 우리 아이들이 전국 11개 곳에 뿔뿔히 흩어져 있다"며 "아이들을 이곳 안산으로 모으고, 이 땅에 다시는 세월호 참사와 같은 끔찍한 비극이 재발돼서는 안 된다는 선언을 해야한다"며 4.16생명안전공원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6일 오후 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식 행사에서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추도사를 하고 있다.
16일 오후 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식 행사에서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추도사를 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이재명 경기도 지사는 "자식 잃은 슬픔을 추스릴 새도 없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눈물로 호소하시는 여러 유족분들 앞에 죄인이 된 심정이다. 죄송하다"며 "완전한 진상규명으로 온전한 추모가 이뤄질 수 있도록 저부터 좀 더 노력하겠다. 여러분 곁에서 함께 비를 맡겠다"며 힘을 보탰다.

전날 진도 팽목항을 다녀온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은 "2021년 4.16 민주시민교육원 개원을 준비하고 있다. 민주시민 교육과 안전 교육을 통해, 안전과 생명을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고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며 "교육다운 교육으로 희생자 여러분이 꿈꾸던 정의롭고, 공정한 세상을 반드시 만들어가겠다"고 다짐했다. 

16일 오후 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식 행사에서 생존 학생 장애진 양은 기억편지 낭송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16일 오후 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식 행사에서 생존 학생 장애진 양은 기억편지 낭송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김철수 기자

세월호 참사 생존 학생 장애진 씨는 이날 자신이 쓴 편지를 낭독했다.

장 씨는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을 30년 간 봉인한 이유는 무엇인가. 30년이 지나면 저희는 50대가 되어 있을 것"이라며 "그때가 되면 우리가 포기할 거라는 생각으로 긴 시간을 묶어놓은 것일까. (제도를) 잘못을 감추고 빠져 나가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라고 일침을 가했다.

장 씨는 "정치인 중 몇몇은 세월호 참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말한다. 정작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국민들에게 세월호 참사를 정치적으로 비치도록 하며, 서로의 사이를 이간질 했다"고 비판하며, "국민여러분들이 세월호 참사를 정치적 시선이 아닌 이웃의 시선으로 바라봐 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다"고 말했다.  

장 씨는 먼저 간 친구들에게 쓴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아직도 우리에게는 세월호 생존자라는 단어가 무거운 죄책감으로 남아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친구들에게 "지금 여기 우리 앞에 와 있다고 생각해. 무능력했던 어른이 되지 않도록 노력할게. 먼 훗날 소중한 너희들에게 가게 되는 날, 부끄럽지 않은 내가 되어 너희를 만나러 갈게. 우리도 잊지 않을테니 너희들도 기억해줘."라고 말했다. 편지글 낭송을 듣던 세월호 유가족들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장 씨는 "거짓이라는 벽에 갇힌 진실은 물처럼 잔잔하고 고요해 보였지만, 아무도 모르게 벽에 아주 작은 틈새를 찾아 조용히 세상을 향해 흘러 나가고 있다"는 드라마 대사를 빌려 편지글을 마무리했다.  

16일 오후 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식 행사에서 가수 양희은 씨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16일 오후 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식 행사에서 가수 양희은 씨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김철수 기자

이날 무대에는 '기억'과 '진실'의 상징인 노란리본 조형물이 설치됐다. 노란 리본 앞으로는 '안전한 대한민국의 바람'을 의미하는 노란 바람개비가 세차게 돌아갔다.

'기억'의 의미를 담은 다채로운 문화공연도 열렸다. 성악가 홍일 씨는 '시간을 보내고'라는 곡을 불렀다. 허영민 씨의 아쟁 연주와 조성진 씨의 마임 공연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세월호 참사'를 소재로 한 영화 '악질경찰' 출연 배우 전소니 씨가 시를 낭송했다. 가수 양희은 씨는 노란 옷을 입고 무대에 올라 '상록수' 등 노래 2곡을 불렀다. 안산시립합창단은 '기억해 사랑해' 등 노래를 불렀다.

16일 오후 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식 행사에서 단원고 1학년 학생들이 참석해 기억식을 지켜보고 있다.
16일 오후 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식 행사에서 단원고 1학년 학생들이 참석해 기억식을 지켜보고 있다.ⓒ김철수 기자

한편, 이날 단원고에서는 오전 10시부터 자체 추모 행사를 진행했다. 강당에 모인 학생들과 함께 추모 영상과 합창공연을 보았고, 유족 대표와 학생들의 간담회가 열렸다.

오후 1시부터 안산 시내에서는 '1000개의 바람이 되어 첫 마음으로 함께 걷다'라는 주제로 세월호 참사 5주기 시민추모행진도 이루어졌다. 검은 옷을 입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4호선 고잔역에서부터 출발해 4.16기억교실과 단원고를 거쳐 5주기 추모식이 열리는 화랑유원지 제3주차장까지 행진했다.  

양아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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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북미정상회담은 어떻게 가능한가

[진단] 포스트 하노이, 한반도는 어디로? (6)

하노이 회담 불발 이후 북미, 남북관계, 국제정세에 대한 평가와 전망을 <진단, 포스트 하노이, 한반도는 어디로?>라는 제목으로 6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진단] 포스트 하노이, 한반도는 어디로?
1.트럼프식 빅딜론이 가져오는 위험한 후폭풍
2.패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제국주의는 없다
3.트럼프정권의 동북아 정책과 한반도
4.북의 ‘새로운 길’
5.북미교착의 장기화, 남북동시 압박과 통제의 강화
6.어디로 갈 것인가

 

 

▲ 4월 13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 트위터. "나는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 우리의 개인적인 관계가 매우 좋고(good), 아마도 훌륭하다는(excellent) 말이 훨씬 더 정확할 것, 그리고 우리가 서로 어디에 있는지 완전히 이해한다는 점에서 3차 정상회담이 좋을 것이라는데 동의한다"는 내용이다.[사진 : 트위터 캡처]

6. 어디로 갈 것인가

북미대결전이 정점을 향해 가고 있다

포스트하노이가 어떤 방향을 잡을 것인가는 4월 10일 조선노동당 제7기 4차 전원회의, 4월 11~1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차회의, 4월 11일 한미정상회담을 통해서 일정한 윤곽이 나왔다.
김정은 위원장이 북미정상회담을 ”한 번은 더 해 볼 용의“가 있다고 밝히고, 트럼프 대통령 역시 ”3차 정상회담이 좋을 것이라는데 동의“한다고 화답하면서, 3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은 한층 높아졌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4월 15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이제 남북정상회담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추진할 시점"이라면서 "북한의 여건이 되는대로 장소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입장을 피력하여 3차 북미정상회담 성사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시정연설에서 “올해 말까지는 인내심을 갖고 미국의 용단을 기다려볼 것이지만 지난번처럼 좋은 기회를 다시 얻기는 힘들 것"이라고 언급했다. 시간을 연말까지 못 박아 두고, 영변핵시설 폐기안을 철회할 가능성까지 암시하였다. 70년 북미대결전을 총결산하는 심각한 대결이 정점을 향해 가고 있는 듯하다. 2019년 남은 8개월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간이 될 것이며, 북미간 물밑협상은 한층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다. 이에 따라 문재인 정부의 역할도 ”중재자“, ”촉진자“ 역할을 넘어 어느 방향에서 높아질 것인가 역시 중요한 관심사이다.

북 : 장기전 정면돌파태세, 대화의 문은 열어두다

조선노동당은 4차 전원회의에서 “사회주의건설에서 자력갱생의 기치를 더욱 높이 들고나갈데 대하여”라는 첫 번째 의정을 심의, 의결하면서 “자력갱생대진군”을 선언했다. 북은 대화를 통한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이라는 경로에 대해 마지막 시도는 해 보겠지만, 기본은 자기 길을 가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미국과의 대치는 어차피 장기성을 띠게 되어있다”고 발언했다. 강력한 핵보유국의 지위를 점차로 강화하면서 세계비핵화를 향한 반제평화전략을 구사하겠다는 뜻이다.
또한 “핵 위협을 핵으로 종식시킨 것처럼 적대세력들의 제재 돌풍은 자립, 자력의 열풍으로 쓸어버려야"한다는 입장도 밝혔다. 70년간의 북미핵대결을 핵무력완성으로 억지력과 미본토타격력을 확보했듯이, 동일한 원칙과 방법으로 제재공세를 극복하겠다는 정면돌파의지를 천명했다.

또한 "적대시 정책이 노골화될수록 그에 화답하는 우리의 행동도 따라서게 되어있다"고 경고하며, 한미연합훈련의 변형된 재개나 군사적 행동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3차 북미정상회담에 대해 대화의 문은 열어놓았으나, 조건은 명백히 밝혔다. "미국이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우리와 공유할 수 있는 방법론을 찾은 조건"이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자기의 요구만을 들이먹이려고 하는 미국식 대화법에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고 흥미도 없다”면서, “하노이 같은 수뇌회담 재현, 반갑지도 않고 할 의욕도 없"고, ”제재해제 문제 때문에 목이 말라 미국과의 수뇌회담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라며, 지난 하노이 정상회담에 대한 강도 높은 실망감을 표출했다.

시간은 누구편인가

하노이 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서두르지 않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근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시간이 많다”고 언급했다.
하노이 2차북미정상회담에서 시간은 트럼프 대통령편이었다. 북이 시간에 쫓기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보기 위해 절박감을 가지고 진정성있게 임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북은 이미 장기전의 태세에 돌입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내년에 재선을 위한 대선을 치러야 한다. 이제 시간의 칼자루는 김정은 위원장의 손에 쥐어졌다. 시간이 갈수록 급한 쪽은 트럼프 대통령이 될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3차 북미정상회담 시한을 연말로 못 박았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1년은 지켜보자”고 발언한 바 있다.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이 말하는 1년과 트럼프 대통령이 말하는 1년은 그 의미가 다르다.
김정은 위원장이 말하는 1년은 트럼프 대통령을 믿고 대화를 통한 북미관계수립이라는 경로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길”을 갈 것인가를 판단하는 최후 통첩성 시한을 의미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만약 1년 정도 대북제재를 강화하면 북이 “목말라” 손을 들고 나올 것이라고 판단했다면 이미 게임은 끝난 것이다. 3차 북미정상회담은 열리지도 않을 것이고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가도나 북미관계는 매우 “위험한” 상황으로 빠져들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하노이 회담에서는 코헌 청문회 등 미국내 상황이 너무 안 좋아 일단 소나기를 피하고 보자는 것이었다면 기회는 있다. 남은 것은 결국 어떤 협상을 할 것이냐 문제이다.

치열한 물밑 협상, 그러나 협상안보다 더 중요한 것

트럼프 대통령은 4월 13일(현지시간) 트위터 계정에서 "나는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 우리의 개인적인 관계가 매우 좋고(good), 아마도 훌륭하다는(excellent) 말이 훨씬 더 정확할 것, 그리고 우리가 서로 어디에 있는지 완전히 이해한다는 점에서 3차 정상회담이 좋을 것이라는데 동의한다"고 밝혔다. 3차 정상회담이 좋을 것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언론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연속적인 스몰딜”의 조합으로 빅딜을 생각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보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행이기는 하다. 그러나 트럼프의 언사는 언제나 뒤바뀔 수 있기 때문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행동을 통해 판단해야 한다.

북이 말하는 “단계적 동시협상안”(스몰딜), 트럼프 대통령의 “빅딜안”, 문재인 대통령의 “굿 이너프 딜안” 등 온갖 협상안이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그러나 북은 ‘스몰딜에는 스몰딜, 미들딜(중간급 협상)에는 미들딜, 빅딜에는 빅딜’이라는 협상전략을 채택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까지는 북이 핵전쟁 억지력을 확보한 조건에서 대북제재해제를 중심으로 대미협상에 임했다. 그것은 경제문제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반도에서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며, 항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북미협상은 매우 복잡하고 결정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상호신뢰를 먼저 구축한 후에 진행할 예정으로 뒤로 미루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빅딜안을 제시한 조건에서는 북 역시 핵보유국간의 한반도 평화담판을 뒤로 미룰 이유가 없어졌다. 따라서 북은 물밑 협상의 추이를 지켜보되, 어느 때라도 “미국의 비핵화”, “상호비핵화” “세계비핵화 협상”을 제기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때문에 3차 북미정상회담 성사과정은 정전과 평화협정, 핵군축, 대북제재, 군사연습 등 전반 문제에 대해 매우 높은 수위에서 동시다발적인 협상의제를 가지고 치열한 접전을 펼치게 될 것이다. 이제 한반도를 무대로 핵군축회담이 중요 쟁점으로 부상할 수도 있다. 또한 이런 조건에서는 북이 영변핵시설 문제를 대북제재 해제에 대한 옵션으로만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빅딜안은 미국이 뒤로 미루고 싶었던 평화답판을 오히려 촉진하고 앞당겨 쟁점화하는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다. 북이 어떠한 협상전략을 준비하고 있는지는 다 알 수 없으나, 각종 협상안에 대비하는 다각적인 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협상안이 무엇인가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바로 신뢰문제이다.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보인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행태에 대해 북은 “전혀 실현불가능한 방법에 대해서만 머리를 굴리고 회담장”에 온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때문에 다음 3차 북미정상회담에서 합의 가능한 안이 나온다 할지라도 과연 북이 무엇을 담보로 미국을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때문에 3차 북미정상회담에서는 사전적인 상응조치를 선행하지 않으면 합의안과 별도로 북이 신뢰문제를 제기하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남북관계에 대한 통제나 개입을 약화시킨다거나, 개성공단 재가동, 금강산 관광 재개 등에 대해 예외적 조치를 취한다거나 하는 문제들이다. 미국이 회담을 깨는 것은 자유였지만, 이제는 그것에 대해 책임감있게 해결해야 할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자력자강의 사회주의건설전략과 핵보유국의 반제평화전략

북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4차 전원회의와 14기 1차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전열을 재정비하고 자주의 혁명노선 고수, 인민대중일주의 실현, 당의 영도 백방강화를 통해 자력자강의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총력매진하기로 결의했다.

3차 북미정상회담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전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70년 북미대결의 총결산으로 다가가는 정세의 종심을 가로지르는 대결의 본령을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무엇보다 북은 미국의 대북제재문제에 대해 근본적이고 장기적으로 와해시키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북미대결의 첨예한 지점은 여기에서 형성되며 누가 이기느냐의 싸움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힘으로는 우리를 어쩔수 없는 세력들에게 있어서 제재는 마지막 궁여일책이라 할지라도 그자체가 우리에 대한 참을수 없는 도전인것만큼 결코 그것을 용납할수도 방관시할수도 없으며 반드시 맞받아나가 짓뭉개버려야 합니다.”라는 언급이 그것을 말해준다.
지금 북은 과학기술로 무장한 자력갱생사회주의라는 인류사에서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가겠다고 더욱 분명하게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대북제재 해제는 이제 협상의 의제가 아니라 투쟁으로 돌파해야 할 과제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미국 역시 유일한 협상 지렛대인 대북제재를 당장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북제재를 강화하는 것도 쉽지는 않다. 대북제재를 강화하는 명분과 수단이 마땅치 않고, 과거처럼 국제적 공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대북제재를 둘러싼 투쟁에서 승자가 누가 될 것인가를 전망하는 것이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다음으로 북은 공인된 핵보유국의 길과 그에 의거하여 한반도 비핵화, 세계비핵화를 견인하는 겹싸인 길을 가려는 반제평화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하노이 2차 북미협상은 비록 불발되었지만 보이지 않는 효과를 남기었다. 바로 미국 스스로 북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인증효과“이다. 이미 미국이 북과 정상회담에 나선 것부터가 북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한 결과이며, 증거이다. 미국이 빅딜안을 제시하며, 영변핵을 뛰어넘는 추가시설 등등을 운운한 것, 하노이 회담 전 미 정보국 등에서 북의 핵무력증강이 지속되고 있다고 밝힌 것 등은 결국 북이 강력한 핵보유국임을 미국 자신이 인정한 꼴이다.

미국은 북이 부분적 비핵화를 통해 사실상 핵보유국의 길을 가려고 한다고 의심하고 있는데, 반만 맞는 분석이며, 철저히 미국의 입장에서만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북이 핵무력완성선언을 통해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집중하고 한반도를 평화번영의 길로 올려세우겠다는 전략은 이미 궤도에 들어섰다. 그러나 북이 핵을 보유한 전략국가로서 추진하는 전략은 단순히 북의 체제수호차원의 수동적인 전략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북이 현재 시점에서 완전한 비핵화로드맵을 제시하지 않는 주된 이유는 한반도를 둘러싼 러시아, 중국 뿐만 아니라 미국을 상대로 한반도 핵군축과 비핵화, 전세계 비핵화를 추진하자는 전략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방법에서도 북미핵강국간 협상과 대화를 통해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는 경로를 먼저 앞세워 온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이러한 길을 한사코 거부하고, 대북적대정책을 강화하고, 긴장을 유발하며, 분단을 영구화하려고 할 경우 북의 선택은 달라질 수 있다.

다른 한편 북이 미국 본토를 직접 타격할 수 있다는 대중적 확인을 유보한 채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고 북미협상에 임한 이유는 새로운 사회주의 건설 전략의 수립함과 동시에 북미협상이 좌초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북은 끝내기 한 수를 아직 쓰지 않았다.

올해 안에 북미협상이 성사되지 않으면 북은 “새로운 길”을 갈 것이다. 그것은 핵전쟁으로 넘어가지 않으면서도 핵전쟁 위험이 미국 안방에 어떻게 다가갈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방식이 될 것이다. 호기롭게 선북비핵화, 대북강경제재를 앞장서서 외쳤던 세력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방식이다. 그리고 미국내 대선풍향계와 정치지형, 여론지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보다 중요하게는 한반도내의 정치지형에서 엄청난 파고가 몰아칠 것이다.

북은 자기 갈 길을 분명히 정했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와 한국 국민은? 2019년 정세는 문재인 정부와 한국 국민에게 3차 북미정상회담의 성사와 불발, 모든 경우에 대해 준비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다.

김장호 기자  jangkim21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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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대표자'된 김정은, 1972년 김일성에 근접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정권 잡은 지 8년 만에 비슷한 위상에 도달

19.04.16 09:18l최종 업데이트 19.04.16 09:18l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 재추대 북한의 정기국회 격인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차회의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국무위원장직에 다시 추대됐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2일 보도했다
▲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 재추대 북한의 정기국회 격인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차회의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국무위원장직에 다시 추대됐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2일 보도했다
ⓒ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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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의 공식 칭호가 격상됐다. 김정은은 11일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차 회의 첫날 모임에서 국무위원장에 재추대됐다. 그러면서 그의 국무위원장 직함 앞에 '최고대표자'란 칭호가 추가됐다.

그의 국무위원장 재추대를 축하하고자 13일 김일성광장에서 개최된 중앙군중대회에서도 그 칭호가 거론됐다. 중앙군중대회를 보도하면서 14일자 <조선중앙통신>은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김정은 동지께서 전체 조선인민의 최고대표자이며 공화국의 최고령도자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으로 높이 추대되신 대(大)정치사변을 맞이하여 온 나라는 끝없는 환희로 끓어번지고 있다."

 
국무위원장 직함 앞에 '최고대표자이며 최고령도자'가 붙는 것은 기존 헌법 제100조와 대비된다. 기존 헌법 제100조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령도자이다"라고 했다. 이 규정에 따라 '최고영도자인 국무위원장'이 4월 11일부터 '최고대표자이며 최고영도자인 국무위원장'으로 바뀌어 불리고 있는 것이다.

'최고대표자'에 관한 보다 구체적 정보는 중앙군중대회 때 있었던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의 '경축 보고'에서 드러난다. 14일자 <노동신문>에 따르면, 최룡해는 국무위원장 재추대를 경축하면서 이렇게 발언했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 동지를 전체 조선인민을 대표하고 나라의 전반 사업을 지도하는 국가의 최고 직책에 높이 모심으로 하여 공화국 정권을 강국 건설의 위력한 정치적 무기로 더욱 강화할 수 있게 되었으며, 주체의 사회주의 위업을 다그쳐 인민의 꿈과 리상을 빛나게 실현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최룡해의 발언으로부터 '최고대표자'가 '전체 조선인민을 대표하는 자리'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국무위원장에게 조선인민 대표권을 부여하는 것은 기존 헌법 제117조와 대비된다. 기존 헌법 제117조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은 국가를 대표하며 다른 나라 사신의 신임장, 소환장을 접수한다"고 규정했다. 이 규정에 따라 종래 헌법 하에서는 국회의장 격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대외적으로 북한을 대표했다.

4월 12일자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최고인민회의는 김정은을 국무위원장에 재추대한 11일에 헌법 수정도 함께 단행했다. 김정은을 '최고대표자이며 최고영도자'인 국무위원장에 재추대하고 국가기관 구성원들을 선출한 직후에 헌법 수정을 단행했다.

이를 볼 때, 남한 언론들이 보도하고 있는 것처럼, 국무위원장이 외교적 대표권까지 보유하는 방향으로 헌법 수정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북한이 새로운 헌법을 아직 공개하지 않았으므로, 국무위원장 권한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명확히 설명할 수 없다.

새로운 헌법에 국무위원장 권한이 어떻게 규정돼 있든 간에, 현재까지 나온 상황을 근거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권한이 1972~1998년 기간에 근접하게 됐다는 점이다.

김정은, 1972~1998년 김일성이 가졌던 권한에 근접
 

북한, 중앙군중대회 개최 김정은 국무위원회 위원장 추대를 경축하는 중앙군중대회가 13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렸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 북한, 중앙군중대회 개최 김정은 국무위원회 위원장 추대를 경축하는 중앙군중대회가 13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렸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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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의 할아버지인 김일성은 1972년 12월 27일 이전만 해도 '김일성 주석'이 아니었다. 노동당에서는 '김일성 총서기'였고, 정부에서는 '김일성 수상'이었다.

노동당이 국가기관의 상위에 있는 체제 하에서, 노동당 총서기는 북한 최고지도자였다. 하지만 노동당은 국가의 의사를 결정하고 집행하는 국가기관이 아니다. 그래서 노동당 총서기라는 직함에서는 국가를 대외적으로 대표할 권한이 생기지 않았다.

내각을 이끄는 수상에게도 국가를 대표할 권한이 인정되지 않았다. 1948~1972년 기간에 시행된 북한 헌법 제59조는 "수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수석이다"라며 "수상은 내각회의를 소집하며 지도한다"고만 규정했을 뿐, 수상에게 국가를 대표할 권한은 부여하지 않았다.

 

1948년에 제정된 그 헌법에서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게 그 권한이 인정됐다. 그 헌법 제49조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권한으로 "제8호: 외국과의 조약의 비준 및 폐기, 제9호: 외국에 주재하는 대사·공사의 임명 및 소환, 제10호: 외국 사신의 신임장 및 해임장의 접수"를 규정했다. 상임위원장이 대외적으로 북한을 대표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에 더해, 국가원수를 연상시키는 여타 권한들도 상임위원장한테 주어졌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법령 공포권(제53조 제1항), 법령 집행권(제75조), 사면권(제79조), 훈장 수여권(제80조)까지도 1948년 북한 헌법에서는 상임위원장에게 부여됐다.

심지어 내각의 결정과 지시를 위헌·위법을 이유로 폐지할 수 있는 권한까지도 인정됐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김일성 수상의 결정과 지시를 폐지할 수 있는 권한이 헌법상으로나마 인정됐던 것이다.

이렇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북한을 대외적으로 대표하던 시절에 이 자리를 역임한 두 인물이 김두봉(재임 1948~1957년), 최용건(재임 1957~1972년)이다. 이 중 김두봉은 유명한 한글 학자다. 한글학자 주시경의 뜻을 남한에서 이어받은 대표적 제자가 최현배라면, 김두봉은 북한에서 그 뜻을 이어받은 대표적 제자다. 김두봉과 최용건이 상임위원장을 하던 시절에 김일성은 최고지도자이기는 했지만 북한을 대외적으로 대표하지는 못했다.

그랬던 북한의 권력구조를 획기적으로 일변시킨 게 1972년 12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 회의의 헌법 개정이다. 이때 등장한 1972년 헌법에서는 주석제를 신설하면서 주석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다. 이 헌법 제89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은 국가의 수반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주권을 대표한다"고 규정했다. 북한을 대외적으로 대표할 권한도 함께 부여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1972년 12월 27일이 남한에서 대통령의 권한을 한껏 높인 유신헌법이 공포·시행된 날이라는 점이다. 

한편, 종전에 국가를 대표했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으로 바뀌었다. 명칭만 바뀐 게 아니라 권한도 축소됐다.

1972년 헌법 제87조에 따르면, 상설회의 의장은 최고인민회의를 운영하는 것 외에, 법령을 심의·결정·해석하고 중앙재판소 판사와 인민참심원을 선거하거나 소환하는 정도의 권한 밖에 갖지 못하게 됐다. 1972년 헌법 발효와 함께 상설회의 의장직에 최초로 임명된 인물이, 그로부터 25년 뒤인 1997년 북한을 탈출하게 될 주체사상 이론가 황장엽이다.   김일성이 1972년 헌법을 통해 국가 대표권을 갖게 된 배경은 국내적 요인과 국제적 요인으로 설명될 수 있다. 국내적 요인에 관해서는, 조재현 성균관대 법학연구소 선임연구원의 논문 '북한 헌법 개정의 배경과 특징에 관한 헌법사 연구'에서 아래와 같이 요약했다. 아래 인용문 속의 '8월 종파 사건'은 반(反)김일성파가 집단 숙청된 일을 가리킨다.
 
"북한은 1956년 '8월 종파 사건'과 1961년 9월 4차 당대회를 기화로 김일성 1인 지배체제를 확립하였고, 이에 대한 헌법적 수용은 1972년 헌법에서 절대 권력의 국가주석제를 신설함으로써 구현되었다."
-미국헌법학회가 2018년 발행한 <미국헌법 연구> 제29권 제3호.
 
김일성 권력이 공고해졌다는 국내적 요인에 더해, 1970년 전후로 중국과 미국·일본이 접촉하는 탈냉전 혹은 데탕트가 확산됐다는 국제적 요인도 1972년 헌법의 등장에 기여했다. 냉전질서가 흔들리는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응해야 할 상황에서 북한 지도부는 강력한 주석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이런 분위기에서 60세의 김일성(1912년 생)이 이전에 갖지 못했던 국가대표권까지 갖게 됐다.

북한이 김일성 사망 후 다시 권한 나눈 이유는?

국가주석에게 국가대표권까지 부여하는 시스템은 1994년 김일성 사망 후의 정치상황을 반영한 1998년 헌법 개정 때 소멸됐다. 1998년 헌법은 전문(서문)에서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으로 격상시킴으로써 주석직을 사실상 공석으로 두는 한편, 국방위원장이란 자리에 최고권력을 부여했다.

그러면서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의 명칭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으로 복원시키면서, 상임위원장에게 국가를 대외적으로 대표할 권한을 부여했다. 1948년 헌법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한편, 김정일이 맡는 국방위원장의 권한을 높이는 동시에, 내각 총리가 정부 대표의 지위를 갖도록 규정했다. 김정일이 국가를 대표할 권한은 물론 정부를 대표할 권한도 가질 수 없게 됐던 것이다.  

북한이 1998년 헌법을 통해 최고지도자(국방위원장)와 국가대표자(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를 분리한 배경은 그때가 '고난의 행군' 시기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제1차 북·미 핵위기 및 김일성 사망 이후로 고난의 행군이라는 경제 위기를 겪는 상황에서 최고지도자의 위상을 지키고자 권력 분산형 헌법을 내놓았던 것이다. 장명봉 국민대 교수의 논문 '북한의 1998년 사회주의헌법 개정의 배경·내용·평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김정일이 국방위원장으로서 군부 장악을 통한 실질적인 최고권력을 행사하되, 대내외적 국가 대표 기능은 제3자에게 맡기고 또 식량난 극복 등 경제회생의 책임도 제3자에게 맡기면서 '위대한 영도자'에 대한 권위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말하자면, 김정일은 책임은 지지 않고 군림하는 체제를 구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공법학회가 1999년 발행한 <공법연구> 제27집 제2호.
 
김일성은 정권 기반이 공고화됨과 더불어 탈냉전으로 세계질서가 바뀌는 상황에 대처하고자 1972년 헌법 개정을 통해 국가 대표권을 자신한테 돌리고 자신의 권한과 책임을 극대화했다. 반면, 김정일은 북미 핵대결 뒤에 고난의 행군을 겪는 위기 상황에서 정권을 지키고자 1998년 헌법 개정을 통해 국가 대표권과 내각 운영권을 남한테 주고 권한과 책임을 분산시켰다.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이후, 김정은은 1998년 체제에 입각해 북한을 이끌었다. 이에 따라 김영남이 김정일 시대에 이어 김정은 시대에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서 북한을 대외적으로 대표했다.

그랬던 김정은이 지난 4월 11일 북한을 대표하는 권한까지 보유하게 됐다. 1972년 겨울에 할아버지가 도달했던 권력 수준에 근접하게 된 것이다. 정권을 잡은 지 8년 만인 36세의 김정은이, 정권 잡은 지 24년 뒤인 61세의 김일성과 비슷한 위상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변화는, 모든 책임을 져도 괜찮을 만큼 김정은의 권력기반이 안정화됐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가 북미관계 교착이라는 현 위기 상황을 '보다 더 많은 책임을 떠안는 방법'으로 돌파하려는 의지를 굳혔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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