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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남북철도 연결로 실크로드 완성"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 본격화되나..경원선 복구사업이 출발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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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6.16  15:5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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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남북철도 연결 의사를 밝혔다. 문 대통령이 남북철도 연결 의사를 밝힌 것은 취임이후 처음이다.

문 대통령은 16일 제주도에서 열린 제2차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연차총회에 참석, 축사를 통해, "한국은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아시아 개도국의 경제.사회 발전에 함께하는 동반자가 되겠다"며 실크로드를 언급했다.

"고대시대 '실크로드'가 열리니, 동서가 연결되고, 시장이 열리고, 문화를 서로 나누었다. 아시아 대륙 극동 쪽 종착역에 한반도가 있다"면서 "끊어진 경의선 철도가 치유되지 않는 한반도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특히, "남과 북이 철도로 연결될 때, 새로운 육상.해상 실크로드의 완전한 완성이 이뤄질 것"이라며 "무엇보다 한반도의 평화가 아시아의 안정과 통합에 기여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환기시켰다.

문재인 대통령이 처음 언급한 남북철도 연결은 공약인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의 핵심사업이다. 경의선 개보수, 서울-베이징 고속 교통망 건설 등 서해권 산업.물류교통벨트 건설사업을 주요 내용으로 하며, 핵심은 남북철도 재연결.

2007년 5월 경의선과 동해선 남북철도 구간이 연결됐지만, 이듬해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과 금강산 관광 중단에 대한 보복조치로 북한이 '12.1조치'를 발표해 남북철도가 끊겼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 당시 경원선 남측 구간 철도복원 기공식이 열렸지만, 토지보상비 예산확보 어려움 등의 석연치 않은 이유로 중단된 상황이다.

그래서 문 대통령이 남북철도 연결을 강조함에 따라, 경원선 남측 구간 복구를 시작해, 북한에 긍정적인 메시지를 던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전날 6.15공동선언 발표 17주년 기념식에서 문 대통령이 북한의 핵.미사일 추가도발 중단 시 조건없는 대화에 나서겠다고 밝힌 바 있다.

[전문]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연차총회 축사

존경하는 진리췬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총재님,
회원국 및 국제기구 대표 여러분,
그리고 내외 귀빈 여러분.

제2차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연차총회 개막을 축하합니다.
해외에서 오신 참석자 여러분께 우리 국민을 대표하여
따뜻한 환영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번 연차총회는 지난해 AIIB 설립 이후 두 번째 총회입니다.
본부 소재지가 아닌 지역에서 개최되는 총회로서는 첫 번째입니다.
뜻깊은 행사를 한국에서 개최하게 되어 아주 기쁘게 생각합니다.

지난달 대통령 취임 후
처음으로 참석하는 국제행사여서
저 개인적으로도 그 의미가 깊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계신 이곳 제주는
특별한 자연과 역사, 문화를 가진 한국의 자랑거리입니다.
또한 세계가 인정한 환경 보물섬입니다.
UNESCO는 제주를 세계자연유산이자, 생물권보전지역,
세계지질공원으로 선정했습니다.
머무시는 동안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한국의 문화를
마음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존경하는 내외 귀빈 여러분!
오늘날 세계는 아시아의 역동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아시아는 전세계 인구의 60%, GDP의 1/3 이상을 차지합니다.
세계의 최대 시장이고, 또 중요한 생산 공장입니다.
동시에 앞으로 세계 경제를 이끌어갈 성장잠재력이 매우 큰 지역입니다.

경제만이 아닙니다.
아시아는 정치적으로도 각별한 중요성을 갖고 있습니다.
아시아 국가들의 민주주의 발전과 정치적 안정이
세계 평화와 안보에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아시아는 인류문명의 발원지입니다.
길고 긴 시간 동안 광활한 대륙을 가로지르며
인류의 다양한 삶과 문화를 펼쳐왔습니다.
오랜 시간 축적된 아시아의 수많은 역사와 이야기들이 
21세기를 사는 인류에게 영감의 보고가 되고 있습니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아시아는
한발 늦은 걸음을 시작했지만,
아시아에는 아시아의 힘이 있습니다.
문화와 역사의 힘이고, 다양성의 힘입니다.

지금 인류는 정치, 안보, 경제, 환경 등 다양한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저는 아시아 국가 간 연대와 협력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도전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취임 후
여러 아시아 정상들과 전화로 소통하였고
아세안을 비롯하여 인도, 호주에 특사를 파견하였습니다.

아시아의 힘이 멋지게 발휘되어
인류는 직면한 도전들을 함께 극복하고 다시 한 번 도약하게 될 것입니다.

이 점에서 AIIB에 거는 기대가 큽니다.
사람과 사람을 잇고, 지역과 지역을 만나게 하며
현재를 넘어 더 나은 미래를 여는 일에 큰 역할을 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존경하는 내외 귀빈 여러분!

이번 연차총회는 “지속가능 인프라”를 주제로 열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인프라 투자는 아시아 고도성장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인프라 투자 자체로 일자리가 창출되었고,
전기, 수도, 통신, 교통 등은 제조업을 비롯한
연관 산업 발전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프라 구축은 아시아에서 여전히 중요합니다. 
빈곤을 퇴치하고 경제발전을 확대하기 위해서입니다.
아시아의 개도국, 특히 빈곤 국가들에게는 더욱 시급한 과제입니다.

다가올 4차 산업혁명시대에 대응해서
무선인터넷망 접근성 높이기,
사물인터넷망, 스마트 고속도로 등 새로운 ICT 인프라 구축도 필요합니다.
그래야 아시아가 더 큰 성장을 지속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향후 20년간 아시아 개도국들의 인프라 투자 수요는
연간 1조7천억 달러에 달한다고 합니다.
높은 인프라 투자 수요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어려워진 각국의 재정여력을 감안할 때,
아시아지역 인프라 확충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AIIB는 그 의미와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지난해 출범한 AIIB는 1년 반의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57개국이었던 회원국이 역외 회원국을 포함 77개국으로 확대되었고,
오늘 다시 3개국이 추가로 가입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AIIB는 명실상부한 국제다자은행으로 자리매김 하였습니다.
개도국의 16개 프로젝트에 25억불 규모의 융자를 지원했고,
개도국 인프라 확대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다른 다자개발은행과 협력을 통해
개도국들의 경제발전을 더욱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 자리를 빌려, AIIB 출범을 주도한 중국정부와
AIIB의 안정적인 출발에 크게 기여한 진리췬 총재의
부단한 노력에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존경하는 내외 귀빈 여러분!

AIIB가 추구하는 인프라 투자 방향은
우리 정부가 추구하는 경제성장 방식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저는 이 자리를 통해 앞으로 인프라 투자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첫째, 인프라 투자는 지속가능 성장에 기여해야 합니다.

그동안 인프라 투자는 각국의 경제성장에 기여해왔지만,
그 과정에서 자연 환경을 훼손하기도 했습니다.

한국도 그와 같은 뼈아픈 경험을 했고, 많은 반성을 얻고 있습니다.
환경을 훼손하는 개발은 미래에 더 큰 비용으로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환경문제는 당사국은 물론 주변국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친환경적 개발, 국가 간 협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다행히 최근 국제사회는 환경 친화적이고,
더 나아가 환경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는
‘지속가능 인프라’ 개발의 필요성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국제적인 공조방안도 논의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이러한 국제적 움직임을 환영하며,
이에 적극 동참하기 위한 계획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2030년까지 신재생에너지 발전을 전체 전력의 20%까지 높일 계획입니다.
석탄화력 발전을 줄이고, 탈 원전국가로 나아가려 합니다.
전기차 등 친환경자동차의 사용도 확대해 나갈 것입니다.
신재생에너지 발전, 친환경에너지 타운 등
우리의 “지속가능한 인프라” 구축 경험을
AIIB 회원국들과 적극적으로 공유해 나가겠습니다.

둘째, 인프라 투자는 ‘포용적 성장’에 기여해야 합니다.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사회구성원 모두가 서로 배려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수도, 위생, 전기 같은 기본 인프라는
“인간다운 삶”을 위한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교통, 통신 인프라는 지역 간 교류를 통해
균형성장과 사회통합에 기여합니다.

인프라 투자는 국가 간 격차를 줄이고, 지역 간 격차를 줄여서
함께 잘 살고, 균형 있게 발전하는 개발로 이어져야 합니다.

앞으로 투자 방향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개발될 시설이 모든 사람의 접근에 용이한지,
소외된 계층, 지역, 국가에 도움이 되는지를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포용적 성장’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 인프라 투자는 ‘일자리 창출’에 기여해야 합니다.

한국은 물론 전세계가
고용 없는 성장, 청년 일자리 부족이라는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한국의 새 정부는 ‘사람중심 경제’를 경제정책의 핵심에 두고,
좋은 일자리 창출을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인프라 투자는 일자리를 창출합니다.
인프라 구축에 수반되는 건축, 토목은 그 자체로 일자리를 창출합니다.
인프라를 기반으로 발전하는 제조업, 서비스업에서도
새로운 일자리가 생깁니다.
향후 ICT 인프라 구축은 새로운 산업의 출현과
새로운 일자리 창출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특히, 좋은 일자리에 접근할 기회가 적었던
청년, 여성, 노인 등 취약계층에게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내외 귀빈 여러분!

대한민국은 짧은 시간 동안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었습니다.
‘한강의 기적’ 근간에는 적극적인 인프라 투자가 있었습니다.
고속도로와 고속철도 건설로 사람과 물류의 이동이 빨라졌습니다.
자동차산업과 제철산업을 비롯한 여러 가지 제조산업이 함께 발전했습니다.
지방도시가 발전하고, 지역 간 교류가 활발해졌습니다.

여러분 대부분이 인천공항을 통해서 이곳으로 오셨을 겁니다.
인천공항은 인프라 강국 한국을 대표합니다.
공항서비스 평가에서 12년 연속 세계 1위로 평가 받았습니다.


한국은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를
아시아의 여러 이웃 국가들과 나누고 있습니다.
고속도로 건설 경험은
베트남 ‘하노이-하이퐁 고속도로’ 건설 사업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강의 남북을 잇는 31개의 다리 건설 경험은
필리핀 만다나오 ‘팡일만’ 교량 건설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인천공항 건설의 노하우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공항의 건설에도 전수될 예정입니다.

내외 귀빈 여러분!

한국은 반세기만에 전쟁의 폐허를 딛고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함께 실현했습니다.
전후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발전한 첫 번째 국가이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유례없는 정치적 격변기를 국민의 힘으로 극복했습니다.

우리의 경제적, 사회적 발전 경험이
아시아 개도국들에게도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한국은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아시아 개도국의 경제‧사회 발전에 함께하는 동반자가 되겠습니다.
개도국과 선진국을 연결하는 교량(橋梁) 국가로서
그 역할과 책임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고대시대 ‘실크로드’가 열리니
동서가 연결되고, 시장이 열리고, 문화를 서로 나누었습니다.
아시아 대륙 극동 쪽 종착역에 한반도가 있습니다.
끊겨진 경의선 철도가 치유되지 않은 한반도의 현실입니다.
남과 북이 철도로 연결될 때
새로운 육상‧해상 실크로드의 완전한 완성이 이뤄질 것입니다.
무엇보다 한반도의 평화가
아시아의 안정과 통합에 기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많은 관심을 갖고 함께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번 연차총회가 AIIB의 미래 투자 방향과 정책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와 실천적인 결과를 도출하는
의미 있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인프라 투자 확대를 통해 모든 회원국이 
아시아 경제성장에 기여하기를 기대합니다.
한국도 AIIB의 주요 회원국으로서
물적, 인적 기여를 높여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끝으로, 이번 연차총회를 준비하느라 애쓰신
AIIB와 기획재정부, 또 제주도 관계자 여러분의 노고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자료-청와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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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동포 권철남 기자회견, 내 조국 북조선으로 보내 달라

탈북동포 권철남 기자회견, 내 조국 북조선으로 보내 달라
 
 
 
주권방송 
기사입력: 2017/06/16 [08:29]  최종편집: ⓒ 자주시보
 
 

 

 

2017-06-15

 

“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입니다. 공민증번호 대홍단17***입니다”

탈북동포 권철남 씨의 기자회견이 15일 유엔인권사무소 앞에서 진행되었다.

 

기자회견 제목은 ‘나와 구속된 북조선 동포들을 즉각 석방하고 내 조국 북조선으로 보내 달라’.

기독교평화행동목자단 주최로 진행된 이날 기자회견에서 권철남 씨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낭독했다. 권 씨는 ‘다시 고향에 돌아가 아내와 아들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며 북으로 돌려보내줄 것을 호소했다.

 

기자회견을 마친 참가자들은 유엔인권사무소 측에 탄원서와 성명서를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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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위판사 엄중 경고” 대법, 거짓해명 의혹

[단독] “비위판사 엄중 경고” 대법, 거짓해명 의혹

등록 :2017-06-16 05:01수정 :2017-06-16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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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법원행정처가 판사에 대한 검찰의 ‘비위사실 통보’를 받고도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뭉갰다는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교통 안전거울에 반사된 서울 서초동의 대법원 청사.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판사에 대한 검찰의 ‘비위사실 통보’를 받고도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뭉갰다는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교통 안전거울에 반사된 서울 서초동의 대법원 청사.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대법 “소속 법원장 통해 경고…
“윤리감사관실서 사실관계 검토”
판사 ”경고받은 기억 없고
감사실 연락받은 적도 없다”
대법원이 15일 부산고법 문아무개 전 부장판사의 비위 사실을 2015년 8월 검찰에서 통보받은 뒤 “엄중경고 조치했다”고 공식 해명했지만, 당사자인 문 전 판사는 경고를 받은 기억이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이 이번 사건의 파장을 축소하기 위해 ‘거짓 해명’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병구 대법원 공보관은 이날 <한겨레>에 문 전 판사와 관련한 보도가 나간 뒤 “해당 소속 법원장을 통해 문 판사에게 품위유지 의무 등 문제가 있음을 엄중경고 조치하였다”는 공식 해명을 내놓았다. 그러나 문 전 판사는 조 공보관의 브리핑 이후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당시 법원장님한테서 ‘그런 일이 있다’는 정도 얘기를 들은 적은 있다. 그게 경고의 의미인지, 경고를 그렇게 에둘러 표현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또 “법원행정처 윤리감사실에서 문서를 전달받고 해당 사실관계를 검토했다”고 밝혔으나, 문 전 판사는 “윤리감사실로부터는 어떤 연락도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더구나 문 전 판사가 아무런 불이익 없이 판사 생활을 하다 개업을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법원이 밝힌 ‘엄중 경고’라는 해명이 무색한 수준이다. 특히 대검이 법원행정처에 통보할 정도의 심각한 비위 사건을 윤리감사실에서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은 심각한 직무유기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문 전 판사는 앞서 지난 12일 사무실로 찾아온 <한겨레> 기자에게 “(비위 사실 통보는) 지인에게 들어서 (퇴직하기 전에) 알고 있었다”고 했다. 대법원이 실질적인 징계 절차는 밟지 않은 채 행정처 내부의 누군가를 통해 비위 통보 사실을 당사자에게 알려줬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대법원은 또 이날 검찰의 통보와 관련해 “정식 공문이 아니었다”고 밝혔지만, 검찰은 당시 김진태 총장의 지시에 따라 이금로 기획조정부장(현 법무부 차관)이 비위 사실을 적시한 서류를 밀봉한 뒤 ‘친전’이라고 써서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에게 공식 전달했다고 한다. 공문은 보안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법원행정처 근무 경험이 있는 한 판사는 “행정처 구조상 대법원장이 대검에서 통보해온 판사 비위 사실을 몰랐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강희철 서영지 기자 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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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영초언니> 저자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영초언니들'이 잊혀 '박근혜' 괴물이 자랐다
[인터뷰] <영초언니> 저자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2017.06.15 08:19:03
 

 

 

 

태곳적부터 여성이 있었다. '세상의 절반'이기에 세상 어디에나 있었다. 하지만 여성들이 그 모습 그대로 기억되는 경우는 드물다. 남성들의 눈에 왜곡된 모습으로 기억되고, 기록되어 왔다. '그들의 역사(History)'가 아닌 '그녀들의 역사(Herstory)'가 필요한 이유다. 

대한민국에서 1970년대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던 운동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운동권 내에는 아들의 제적, 구속, 죽음으로 가슴 치는 어머니들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청춘을 바쳐 싸운 여성 투사들도 있었다. 남성들의 보조적인 역할만 한 것도 아니다. 책의 주인공 천영초 씨, '고려대 9.14 시위 사건'을 일으킨 이혜자 씨 등 여대생들도 앞장서 싸웠다. 여성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YH 무역 농성 사건'은 영원할 것 같던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는 방아쇠 역할을 했다. 

타국에서 불의의 사고로 시력과 기억을 잃어버린 영초언니는 그녀와 함께한 많은 이들의 젊은 시절의 기록인 한 권의 책으로 '사회적 스승'이자 '지식인의 모델'로 우리 앞에 다시 섰다. 이 책의 필자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뜨거운 '자매애'로 40여년 전 '바람이 몹시 불던 어떤 날'로 돌아가 공포와 고통, 번민을 헤집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70, 80년대 독재정치를 겪었든, 겪지 않았든, 스스로의 젊은 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책 <영초언니>(문학동네 펴냄)에 얽힌 얘기를 지난 12일 제주에서 서명숙 이사장을 만나 들었다.
 

▲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프레시안(이명선)


고려대 72학번 천영초, <영초언니>는 100% 실화다  

프레시안 : 박정희 정권에서 20대를 보낸 70년대 학번은 아니지만, 책 <영초언니>를 감명 깊게 봤다. "독재 타도"를 외치던 당시 대학가 이야기인데, 마치 소설을 읽듯 등장인물과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서명숙 : 한 매체에서는 책을 소개하며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의 첫 소설"(6월 1일 자 <오마이뉴스>)이라고 보도했다.(웃음)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도 "소설"이라고 소개하더라. 하지만 <영초언니>는 정말 100% 완벽 실화다. 구성과 문장에 글을 쓴 내 체취가 실릴 수는 있지만, 사실관계에 보탠 내용이 하나도 없다. 영초언니(고려대 신문방송학과 72학번 천영초)를 비롯한 등장인물 모두 실명 그대로다. 다만, 영초언니의 아들과 교도관, 형사만 가명이다.  

프레시안 : 책 서문에 2006년 겨울 "후배들의 기약 없는 싸움", 일명 '<시사저널> 사태'를 지켜보며 "어처구니없게도 30여 년 전 대학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 책을 쓰게 됐다고 밝혔다.

서명숙 : <시사저널>을 그만둔 상태였는데, 삼성을 비판하는 기사를 싣지 못하게 한 경영진과 그에 저항하는 후배 기자들이 첨예한 갈등을 빚으며 사태가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당시 <시사저널> 동료와 후배를 만나고 오면, 늘 영초언니 꿈을 꿨다.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로 "두 눈의 시력을 잃고 뇌의 6, 70%가 손상"된 영초언니도 사느라 바빠 잊고 있던 때다. 그런데 대학시절 영초언니와 함께했던 일이 꿈에 자꾸 나왔다. 

현실과 과거가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오죽하면, 정혜신 박사에게 '내가 왜 이런 거냐'고 물었다. 정 박사는 심리학의 '주둔군 이론'에 따르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고 했다. "군인이 전투를 하다가 밀릴 때 통상 가장 어려운 전투를 치렀던 고지로 후퇴하는 건 그곳에 가장 많은 주둔군을 두고 왔기 때문이라"며 "다시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했다. "바람이 몹시 불던 어떤 날"로 

'내 인생의 가장 충격적인 겨울이 그때였구나. 그때 심리적으로 주둔군을 그곳에 남겨놓고 왔구나' 싶어서 어떻게든 해원굿(解怨-)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글쓰기로 나를 치유하는 동시에, 1970년대 독재 정권에 맞선 수많은 영초언니를 잊고 사는 우리를 위해서라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시절에도 쓰지 않던 블로그에 글을 연재했다. 그마저도 제주 올레길 찾기라는 새로운 일에 빠져 중단됐다. 

올레길이 일차적으로 마무리될 즈음, 영초언니가 캐나다에서 영구 귀국했다. 하지만 사고 직후 모습보다 더 비참했다. 담배를 처음 소개해준 '나쁜 언니', 사회의 모순에 눈뜨게 해준 '사회적 스승', 행동하는 양심이 어떤 것인가를 몸소 보여준 '지식인의 모델'이었던 영초언니는 같은 말만 반복하며 먹을 것만 찾았다.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기록의 의무를 지닌 기자로 25년여를 살았는데, 가장 가까운 사람을 기록하지 않았구나. 매일 정치인만 쫓아다녔지. 막상 내 인생의 거물인 영초언니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구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기자직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영초언니를 기록하는 것은 기록자의 마지막 책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영초언니는 기록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들어간 <고대신문>에서 만난 인연 아닌가.  

조정래 선생님 덕에<영초언니> 출판 뒷이야기 

 

 

▲ <영초언니>(서명숙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프레시안 : 70년대 후반 대학가 주변의 정치사회적 풍경을 기록했다. 말 그대로, 서슬이 퍼럴 때였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당시 대학가 풍경을 기록하는 데 부담은 없었는지? 

서명숙 : 책 서문에 밝히지는 않았지만, <영초언니>는 4년 전에 출판될 뻔했다. 당시 조정래 선생님이 제주도에 올레길을 걸으러 오셨길래, 칭찬받을 생각으로 책 출판 계획을 알렸다. 그랬더니, '박근혜 정부에서 그런 책을 내면 절대 안 된다. 감옥 가려고 그러느냐'며 만류했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의 과오 일부에 대해 사과도 했는데 문제 될 게 없지 않아요?'라며 '감옥 가도 좋아요. <영초언니> 썼다고 잡혀가면, 책이 더 유명해질 것 아니에요'라고 농담을 했다.(웃음) 

하지만 조 선생님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자신을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동일시하고 있다며 '딸 박근혜는 자신의 집권 자체를 아버지 박정희에 대한 정치적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봤다. 이어 '심리적으로 동일한 대상이자, 이데올로기적 선언 모델인 아버지를 비판하는 책을 어떻게든 문제 삼을 것'이라며 '박근혜를 위시한 세력은 음성적인 방법으로라도 보복할 것이다. 제주올레를 후원하던 사람들이 소리 없이 후원을 중단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과거인 선배 한 사람의 잘못된 판단으로, 현재인 후배들에게 충격과 상처를 주면 안 된다'며 '현실을 직시해라. 책은 몇 년 뒤에 내면 된다. 박근혜 정부 말기에 내던지, 끝나면 내던지'라고 말했다. 

나로서는 현실과 타협하는 것 같아 비겁하게 여겨졌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태백산맥>으로 고초를 많이 당한 선생님의 과한 우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미 <시사인>과 연재를 약속한 상태였다. 선생님이 나와 제주올레를 걱정하는 마음은 알지만, '책 안 내겠다'라는 말도 딱히 하지 않은 채 넘겼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일찌감치 사모님께서 조정래 선생님이 밤새 걱정하셨다며 전화를 했다. 그래서 '선생님의 판단이 옳든 그르든 존경하는 어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는 생각에, 후배들에게 싹싹 빌며 연재 계획을 철회했다. 

"'염병' 최순실이 방아쇠를 당겼다" 

프레시안 : 지금 생각하면, 조정래 선생님의 우려가 맞았던 것 같다.(웃음)

서명숙 : 그렇다. 박근혜 정권에 대한 조 선생님의 분석이 정확했다.(웃음) 이사장의 책 한 권으로 제주올레가 박근혜 정부 블랙리스트에 포함돼 6~7년 동안 어렵게 구축한 올레길이 수포가 될 뻔했다. 당연히 후원도 끊기고.(웃음) 

올레길 유명세에,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줄 안다. 그러나 올레길은 절반 이상이 후원금으로 운영된다. 상황이 이런데, 4년 전 <영초언니>가 나왔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상상만으로도 몸이 서늘해졌다. 그래서 '박근혜 탄핵' 촛불을 들면서도 책을 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 1월 최순실 씨가 특검에 강제소환되는 장면을 생방송으로 보는데, 귀를 의심했다. 최 씨가 "민주주의"를 입에 올리며 "억울하다"고 하는 것 아닌가. 순간 40여 년 전 "민주주의를 쟁취하자"고 외치며 감옥에 수감된 영초언니 모습이 떠올랐다. 심지어 영초언니는 교도관이 입을 틀어막아 끝까지 외치지도 못했는데, 최 씨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더라. 나중에 청소 노동자가 최 씨를 향해 "염병하네"라고 말한 사실이 알려졌지만, 생방송을 보면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 죽음을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를 최 씨가 누리고 있구나. 수세식 변기와 TV가 설치된 독방에서 책도 읽으며.' 

1979년 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성동구치소에 수감됐다. 당시 17명이 5.5평에서 지냈는데, '수감번호 4141' 신입으로 지정받은 잠자리가 푸세식(재래식) 화장실 입구였다. 사람들이 밤에 화장실을 들고 나며 두꺼운 비닐을 들출 때마다 고약한 냄새가 났다. 스물두 살, 창창한 나이에 양계장의 닭처럼 사방이 막힌 좁은 곳에서 생활했다. 그런데 박근혜 전 대통령이나 최 씨는 헌정 사상 유례가 없는 국정농단을 하고도 최신식 감방에서 생활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과 영초언니, 최 씨와 나는 심지어 또래 아닌가. 정말이지, 너무 억울해서 그 감옥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웃음)  

군사독재 정권의 조작으로 억울하게 수감된 사람들, 나와서도 평생 후유증으로 괴로워하며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마음으로 '천영초의 민주주의'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번은 올레길로, 또 한 번은 조정래 선생님의 만류로 두 번이나 좌절된 영초언니의 이야기를 이번에는 꼭 세상에 내놔야겠다고 결심했다. 최 씨가 <영초언니> 출판의 방아쇠를 당긴 셈이다. 동기 부여가 확실하게 됐다. 
 

▲ 국정농단의 주범 최순실 씨는 지난 1월 특검에 강제소환되며 "더이상 민주주의 특검이 아닙니다"라고 외쳤다. YTN 뉴스 화면 갈무리.


"대통령 박근혜? 귀싸대기 맞은 기분이었다" 

프레시안 : 책에 고려대 여학생들끼리 책도 읽고 토론도 하는 '가라열'('가라! 여성 해방의 길로, 가라! 독재 타도의 길로, 가라! 노동자 해방의 길로!' 등의 의미를 함축해 지은 10명의 여학생 모임명) 이야기가 나온다. 자생적 페미니스트 조직으로, 당시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을 보면서 선구안(先驅眼)에 감탄하게 된다. 동시에 그만큼 우리 사회가 바뀌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해 씁쓸하다.  

서명숙 : 1978~79년 당시 일이다. 우리가 오히려 지금 세대를 보면 바뀐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여성이 담배를 피우면 지금도 안 좋게 보지 않나. 아직도 우리 사회는 남녀 공히 같은 시각으로 보지 않는다. '이건 아닌데?' 하는 문제의식은 있었지만, 자각하기까지 영초언니가 매개 역할을 해줬다. 
  
나 같은 경우에는 제주도 여성인 어머니가 자생적 페미니스트와 같은 요소가 있었다. 딸인 나에게 어릴 때부터 최초의 여성 장관인 임영신 상공부 장관(이승만 정부), 최초의 여성 변호사인 황산성 변호사(11대 국회의원 및, 김영삼 정부 환경부 장관 역임) 등을 롤모델로 '전문직 여성으로 이왕이면 결혼하지 말라'고 했다. 후에 딸이 결혼한다고 하자, 남자의 직업 등 현실적 조건보다 '내 딸이?'라며 결혼 소식 자체에 놀랐다. 

어머니는 정치적으로는 보수였지만, 집안에서도 딸과 아들을 차별하지 않았다. 제주에서 서울로 사립대를 보내면서도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며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런 나에게 <고대신문> 입사 첫 날, 한 선배가 남학생 책상을 걸레로 닦으라며 여비서 취급을 했다. 찬물에 걸레를 빨며 '집어 던지고 나가 버릴까'도 고민했지만, '나중에 편집국장이 되면 남자 후배들도 똑같이 느끼게 해줘야지'라며 참았다.(웃음) 

프레시안 : 영초언니 삶이 여자 입장에서 무척 가슴이 아팠다. 민주 정부 이후 학생운동 출신들이 국회에 진출하기도 하고, 장·차관에 임명되는 등 명예회복과 사회적 보상이 이뤄지는 경우도 있다. 운동권 출신의 여성 정치인들도 있지만, 남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되는 것은 분명하다.  

서명숙 : 책에 나오는 언니들, 천영초나 이혜자 모두 고려대 역사상 가장 큰 집회(데모)를 이끈 사람들이다. 영초언니와 혜자언니가 주도한 당시 집회는 국가적·제도적 폭력에 저항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였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로, 이들의 운동 동기가 너무 순수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2013년 헌법재판소의 긴급조치 1, 2, 9호 위헌 결정에도 불구하고 정치적·경제적으로 보상받지 못했다. 

1978년 생물학과 4학년이었던 혜자언니는 '고려대 9.14 시위 사건'('고려대 잔 다르크 사건', '78 민중 선언 사건'으로도 불린다)을 주도했다. 이 시위는 긴급조치 9호 발동 이후 3년 4개월 동안 이어진 대학가의 침묵을 깼다. 지금까지 기자로 수많은 역사적인 현장과 집회를 경험했지만, 내 인생의 가장 극적인 장면을 꼽으라고 하면 바로 이 날이다. 당시 1000여 명의 학생이 경찰과 대치하며 학내 정보원(일명 '짭새')이 사무실로 쓰던 정문 경비실을 부수었다. 그러나 국내 언론에는 이 같은 사실이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일본 <아사히신문>만 기사화했을 뿐이다.  

혜자언니는 '당시 두렵고 힘들었지만, 이를 이겨내고 해냈다'는 자부심으로 개인적으로는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201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자신의 인생이 모욕을 당한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역사로부터, 국민으로부터 귀싸대기를 맞은 기분이었다'고. 하지만 촛불집회를 계기로, 혜자언니는 역사와 국민 앞에 미안함이 앞섰다고 말했다.  
 

▲ 고려대 9.14 시위 당시 모습. 학생들이 강당에서 집회를 하고 있다. ⓒ고대신문


"기상나팔 대신 장송곡이 울려 퍼졌다" 

프레시안 : 70년대 대학가 풍경 하면, 통기타와 청바지로 대표되는 낭만적인 모습이 떠오른다.  

서명숙 : 사실 학생들이 정치적·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게 하기 위한 일종의 '우민정책(愚民政策)'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당시 대학을 다닌 사람들은 내상 또는 심리적 스크레치로, 웃고 있어도 웃는 게 아니었다. 인생에 있어 가장 해맑은 시기에 방관자는 방관자대로, 참여자는 참여자대로, 평생을 트라우마 또는 외상후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영초언니>를 읽은 독자들이 감상평을 보내오는데 나와 동시대 사람들은 '도서관에만 있었다. 그게 효도하는 것인 줄 알았다'라며 때늦은 자기 고백을 하기도 하고, 젊은 친구들은 'YH 무역 농성 사건'에 놀라기도 한다. 연애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도 있고.(웃음) 

프레시안 : 책에 따르면, YH 무역 여성노동자 수감 소식에 재소자들이 "노조 빨갱이" "진짜 빨갱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리고 얼마 뒤, "아침마다 우리를 깨우던 자발스러운 기상나팔 대신 구슬픈 트럼펫 장송곡이 울려 퍼"지며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이 전해졌다. 시간상으로 보면, 불과 두 달 만이다.  

서명숙 : 절대권력이 무너지는 것은 외부의 충격이 아닌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 부장이나 차지철 전 대통령 경호실 실장 등 내부의 충격 때문이다. 겉으로 볼 때는 절대권력이 더욱 강화된 것 같지만, 안에서는 모순이 쌓일 대로 쌓여 폭발 직전이 된 것이다. 

여기에 YH 무역 농성 사건이 스모킹 건(smoking gun)이 됐다. 기업주가 폐업 신고를 하고 해외로 도피하자 여성노동자들이 당시 유일 야당이었던 신민당사를 찾아 "배고파 못 살겠다"며 농성을 했고, 경찰 진압 과정에서 김경숙 씨가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의원직 제명을 당하자, 김 총재의 지지기반인 부산과 마산 시민들이 분노하며 '부마 민중 항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10.26 사태'로 이어졌다.  

'박정희'라는 통치자가 '5.16쿠데타' 이후 근대화와 권위주의를 통치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얼마나 지독한 절대권력을 휘둘렀는지 모른다. 기성세대 대부분은 박정희 전 대통령하면,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며 나라의 초석을 다진 사람이라고 한다. 이는 현대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박정희 군사독재에 저항하며 데모한 사람들은 0.01%에 불과하다. 그 외에는 침묵하거나 방관했다. 

 

 

▲ YH 무역 여성노동자들의 신민당 점거 농성.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


'박정희 시대' 청산 못해 '박근혜'가 자랐다  

프레시안 : '박정희 시대'에 대한 역사적 청산이 없었기 때문에,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선된 2012년 당시 20대들은 70년대 독재정치의 실상을 모르고 투표를 했다. 

서명숙 : 박근혜 전 대통령이 '박정희의 딸'이라는 사실이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시대에 대한 반성과 청산이 제대로 안 됐기 때문에 '박근혜'라는 싹이 자랄 수 있었다. 독일의 경우, 히틀러 치하였던 나치 시절(1933~1945년)을 끊임없이 반성하고 있다. 나치는 사회적·정치적·도덕적으로 매우 인종차별적이고 권위적이었지만, 오랜 기간 집단으로 세뇌됐기 때문에 향수를 가진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끊임없는 반성으로, 나치 추종자라고 해도 쉬쉬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를 당당하게 여긴다. 처음에는 공(功)과 과(過) 모두 있다고 생각해도 차츰 공만 얘기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옅어진다. 경제적인 성과는 계속 얘기되지만, '인혁당 사건'과 '동백림 사건'과 같은 간첩 조작 사건이나 절대권력에 희생돼 고문당하고 수감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잊힌다. 

"폭력이 폭력을 낳고 평화가 평화를 낳는다" 

프레시안 : 박정희 독재정권에 항거했던 당사자들 입장에서 지난해 촛불집회에 대한 감회도 남다를 것 같다.  

서명숙 : 지난해 촛불집회로 "박정희 정권을 향한 향수에 뿌리를 둔 박근혜 정권도 막을 내리고, 박근혜 본인은 구속되었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이뤄진 게 아니다. '6.10 민주항쟁' 이전, 긴급조치와 유신헌법으로 온 나라가 병영 같았던 시절에도 경제적으로는 약진하면서도 정치적으로 엄청난 탄압이 이뤄졌다.  

무엇이든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없다. 젊은 세대도 이제는 과거의 이런 저항이 쌓여서 지금의 민주주의와 촛불집회가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최루탄 대신 살수차와 차 벽이 등장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폭력이 폭력을 낳고 평화가 평화를 낳는다. 

프레시안 : 6.10 민주항쟁 30주년 기념식을 보면서 '언론이 언제부터 저렇게 관심을 가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민주주의 투쟁 역사를 복원해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영초언니>는 그런 의미에서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서명숙 : 그렇다. 우리 사회에 수많은 영초언니가 있을 것이다. 책 한 권을 내세우며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또 과거의 행동을 보상받자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과거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반성할 줄 알아야 독일처럼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박근혜'와 같은 괴물은 또 나올 것이다. '모든 국가는 그 나라 국민의 수준에 맞는 정치인을 갖는다'고 하지 않나. '박근혜'는 대통령이 돼야 했던 게 아니라, 치료를 받았어야 한다. 
 

ⓒ프레시안(이명선)


"길 찾는 일은 영원한 특종" 

프레시안 : <영초언니>를 통해 젊은 세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서명숙 : 내가 청춘이었던 시절에는 정치적 민주화가, 지금 청춘들에게는 경제적 민주화가 시대정신이다. 과거는 독재권력이라는 하나의 대상과 싸워야 했지만, 지금은 금수저·흙수저와 같은 부의 양극화뿐 아니라 자영업자를 상대로 한 대기업의 횡포 등 전선이 다양하다. 책에 등장한 영초언니나, 혜자언니나 처음부터 투사였던 것이 아니다. 비틀거리며 두려움에 떨면서 독재정권에 맞섰다.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어떤 행동도 없이 자신을 경멸하는 것은 위험하다.  

프레시안 : 평생을 기자로, 기록을 의무로 생각하고 살았다. 언론계 선배로 후배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서명숙 :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긴급조치 1, 2호로 유신에 반대하는 기사를 쓸 수 없게 되자, 선배들은 거리로 나왔다(일명 '동아투위'). 후배들에게 당시와 같은 '행동하는 양심'을 본받으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명박-박근혜 정권과 타협한 언론은 스스로 알 것이다. 자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이들에게는 '언론인'이 가져야 하는 시대적 책무와 고민이 없었다. 그저 단순 직업인일 뿐이었다. YTN과 MBC 등 해직기자들의 고생이 많았다. 이들 모두 상식적으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있을 것이다.  

프레시안 : 제주올레가 어느새 10주년을 맞았다. 제주에 이어 일본에서도 '규슈올레'를 만들었다. 앞으로 계획은?  

서명숙 : 오는 17일 몽골 울란바토르를 간다. 제주올레의 상징이 말('간세 인형'으로 상품화되어 있다)인데, 진짜 말의 나라인 몽골에 올레길을 찾으러 간다. 

길을 찾는 일은 정말 즐겁다. 기자 시절에는 특종을 해도 몇 달 후면 다른 기사로 이슈가 덮였다. 그런데 길은 마치 고고학자가 유물을 발굴하듯 걸어 다니며 찾아 놓으면, 사람들이 그 길을 걷고 또 걷는다. 나로서는 '영원한 특종'을 한 셈이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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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8.15에는 한자리에서 기념하길 확신"

6.15남측위, 6.15선언발표 17주년 기념식 분산개최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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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6.15  14:2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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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5공동선어 발표 17년을 맞은 15일 오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념식이 열렸다. 이날 행사는 분산개최형식으로 열렸으며, 참가자들이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통일'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8.15민족공동행사' 성사를 다짐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오늘 6.15공동선언 발표 17돌을 부득이 남과 북, 해외가 분산개최하게 되지만 오는 8.15는 남북해외가 10년 전 그때처럼 한자리에서 기념하게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6.15공동선언 발표 17주년을 맞아 15일 6.15민족공동행사가 분산개최형식으로 열렸다. 남북해외의 공동선언문도 채택되지 못했다. 하지만 오는 8.15 광복절은 민족공동행사로 열자는 의지는 가득했다.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6.15남측위)는 이날 오전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기념식을 열었다. 

6.15남측위는 이날 대국민호소문을 발표, "17년 전 남북의 정상이 처음으로 손 맞잡던 역사적인 순간은 아직도 온 겨레의 가슴 속에 뜨겁게 살아있다"며 "그러나 강산도 변한다는 지난 10년 동안 6.15공동선언 이행의 성과는 모두 무너지고 말았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이제 위대한 국민이 만들어 낸 촛불혁명으로 우리는 다른 미래를 꿈꾸고 있다"며 "그중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는 대결 시대로 회귀한 남북관계를 복원하는 일이다. 구시대적인 대결의 결과들을 청산하고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조헌정 6.15서울본부 대표, 이종철 경기본부 대표, 이정희 부산본부 대표가 대국민호소문을 읽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제재와 압박만으로 핵문제를 비롯한 한반도 평화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검증된 사실이다. 남북관계 복원은 한반도 평화문제 해결의 중심축이자 원칙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정부가 어떤 국제적 환경에도 흔들림없이 남북관계 복원과 평화협력의 길에 과감하게 나서기를 촉구한다."

이들은 6.15민족공동행사 분산개최의 아쉬움 뒤로하고, '조국의 평화와 통일,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전민족대회' 개최를 성사시키고, 오는 8.15광복절 민족공동행사 성사를 밝혔다. "민주주의와 정의를 향한 우리 국민의 촛불혁명은 이제 남북화해의 새 시대, 민족번영의 새 역사로 완성되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날 기념식에서 이창복 6.15남측위 상임대표의장은 기념사에서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해결해 가기로 하였다'는 6.15선언 1항의 의미를 되새겼다.

"제재에 방점이 찍힌 현 정책은 과거 정책의 재탕일 뿐이므로, 그 실패 또한 재탕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새 정부가 전임 정부의 그늘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전면적인 대화와 관계개선의 길로 나아갈 것"을 호소했다.

그러면서 "민간 뿐 아니라 정부당국, 각계의 대화가 봇물 터지듯 이어지고 다시 6.15통일시대를 열어젖히는 8.15가 될 수 있도록 부단한 실천과 노력으로 앞장서 나가자"고 말했다.

   
▲ 이창복 6.15남측위 대표상임의장은 분산개최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8.15민족공동행사를 성사시키자고 강조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김영주 한국종교인평화회의 대표회장은 6.15공동행사가 분산개최되는데 유감을 표하며, "17년 전 남북 정상이 합의한 정신의 구현은 평화협정에서 출발해야 한다. 휴전을 끝내고 종전할 뿐아니라 평화협정을 맺어서 6.15선언이 구현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평화는 목적이어야 하지만 수단도 되어야 한다. 평화로 평화를 이룰 수 있다"면서 "지난 17년동안 지난한 통일운동 역사를 다시금 되새기면서 옷깃을 여미고 우리가 해야할 과제가 무엇인지 되새기면서 남북평화통일에 앞장서자"고 말했다.

이날 기념식에서는 각계의 발언이 이어졌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갈라진 민족의 맥을 잇고 남북의 오랜 단절된 관계 복원을 위해서는 6.15와 같은 결단이 필요하다"면서 "본격적인 대화는 한.미정상회담이 끝나고부터, 가시적인 성과는 8.15를 목표로 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제언했다.

윤소하 정의당 국회의원은 개성공단 즉각 재개, 이산가족 상봉, 문화체육교류 활성화, 금강산 관광 재개 등을 요구하며 "안보와 평화에서 당사자는 우리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체계를 구축하고 남북경협, 남북기본협정 등의 로드맵을 하루빨리 내놓고 마당을 펼쳐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권오희 한국전추교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민족화해분과위원장, 김영훈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도 각각 여성과 농민을 대표해 6.15정신으로 남북관계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이날 기념식에는 각계 250여 명이 참석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특히, 6.15선언의 '옥동자'로 평가받는 개성공단 입주기업을 대표해 신한용 개성공단기업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은 "6.15정신을 가장 구체적으로, 직접적으로 실현하는 공간은 개성공단이었다. 안보공단, 평화공단, 경제공단이었다"며 개성공단 재개를 촉구했다.

"개성공단은 6.15선언에서 천명한 남북경협을 통해서 민족경제를 균형적 발전시키고 평화적 공동번영 정신을 구현했다"며 "6.15선언 복원은 개성공단 복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 민족 모두의 공단이다. 개성공단은 즉각 재개되어야하고 재개의 목적은 국익이라는 틀에서 함께 공유해야한다"고 말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각계 250여 명이 참석했으며, 서예가인 이두희 서울민예총 부회장이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통일'이라고 쓴 흰 천 위에 참석자들이 통일을 염원하는 희망글을 적는 행사로 마무리됐다.

한편, 6.15남측위는 이날 오후 6시30분 서울 세종문화회관 중앙계단 특설무대에서 '다시 6.15, 만나자 8.15 서울에서' 기념대회를 연다. 대전, 광주, 울산, 충남, 경남, 제주 등지에서도 각각 6.15공동선언 발표 17주년 행사를 진행한다.

이날 6.15 17주년 기념식은 남북해외 분산개최 방식이라고 발표됐지만 정작 북측과 해외측 행사 장소와 일시도 공지되지 않았고, 공동발표문도 나오지 않아 남북 당국간 관계가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민간교류 역시 여의치 않음을 보여줬다.

   
▲ 참석자들이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통일'이라고 적힌 흰 천에 소망을 적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분단적폐 청산하고,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통일하자'[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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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월만에 또 떼죽음... 이런 난리가 또 어딨냐"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7/06/16 06:27
  • 수정일
    2017/06/16 06:27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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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민심] AI 최대 피해지역 전북 농민들의 한숨... "예방 관리만 잘 됐어도"

17.06.15 20:58l최종 업데이트 17.06.15 21:34l
글·사진: 주현웅(chesco)

 

 

지난 14일 오후 전북 전주시 성덕동의 이작마을. 온종일 재잘재잘 떠들던 녀석들이 하루아침에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무더워지는 만큼 나른함도 더해질 무렵, 그나마 녀석들 덕분에 덜 심심했는데. 하필 이웃 동네에서 조류독감이 발생할 게 뭐람. 

물론 잘만 자라준다면 콱 잡아다가 이웃들과 나눠 먹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막상 녀석들이 한꺼번에 살처분을 당하고 나니 친구를 잃은 듯한 기분이랄까. "까짓것 뭐" 하며 담담하게 받아들이려 했지만 적막해진 닭장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그리도 허전할 수가 없다. 

"수십, 수백만 원 되는 닭이지만... 살처분 보상금 2만 원"
 

 '출입금지' 스티커가 붙은 전주시 모 농가. AI여파로 인해 이따금 닭소리가 들리던 마을이 조용해졌다.
▲  '출입금지' 스티커가 붙은 전주시 모 농가. AI여파로 인해 이따금 닭소리가 들리던 마을이 조용해졌다.
ⓒ 주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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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씨(60대)가 뒷마당에 키웠던 닭(산란계)은 50여 마리였다. 마을에 경사가 있을 때 몇 마리는 식탁 위에 올라갈 처지였지만, 그래도 죽기 전까진 같은 집 사는 식구라고 전부 애지중지하며 키워왔다. 

 

"여태까지 얘네들이 (조류독감에) 걸린 적은 없어요. 나름대로 신경써서 잘 키웠거든요. 그러니 아쉽긴 하죠. 도시에서 강아지 키우는 사람들 마냥 시골에선 닭도 반려동물처럼 키우는 양반들이 좀 있어요. 어떻게 안 아쉬울 수가 있겠어요."

그럼에도 정씨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고 하니 관련 조치에 고분고분 따를 생각"이라고 말했다. 마을에서 닭을 키우는 이웃들도 대체로 이와 비슷한 생각이라고도 전했다. 지난 겨울 발생한 AI(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 사태 때는 잘 넘겼기에 반복된 피해가 아니라는 점이 그 이유였다. 

최근 확산 중인 조류독감은 소규모 농가를 중심으로 퍼져가고 있다는 분석이다. 소규모 농가 중에서는 정씨의 집처럼 닭과 오리 등의 가금류를 취미·부업 삼아 기르는 곳이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경우 살처분시 대규모 농가에 비해 재산피해는 덜한 게 사실이라고.  

하지만 이들도 나름의 고충이 있다. 정씨는 "애완용 닭은 종류별로 가격대가 천차만별"이라면서 "한 마리에 수십, 수백만 원에 이르는 닭도 꽤 된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러한 경우에도 살처분 보상금이 마리당 2만 원에 책정되다 보니 답답한 심정이라고 호소했다.

"청계닭이라고 알이 새파란 게 있어요. 그게 병아리도 한 마리에 1만 원씩 가요. 백봉오골계나 검정오골계 이런 것들도 마리당 2만 원이에요. 그런 거 사다가 오랫동안 사료 주고 그래가며 키웠는걸요. 저기 이웃집에 XX네는 큰 마음먹고 150만 원짜리도 키웠어요. 그런데 살처분해가면서 그런 것도 보상금으로 2만 원 준다니깐 얼마나 속이 터지겠어요."

이 마을에서 약 1km 떨어진 용정동의 한 농가에서 만난 박용호(70대)씨도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면서 "앞으로 닭은 도저히 못 키우겠다"라고 푸념했다. 박씨 역시 자신이 멀쩡하게 키우던 닭(산란계) 100여 마리가 이날 전부 살처분 당했다. 

그는 "(조류독감에) 안 걸리도록 정부나 지자체가 감독을 잘할 생각을 해야지, 매번 발생하고 나서 다 가져간다"라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살처분 보상금 얘기는 아직 못 들었지만 큰 기대는 안 한다"라고 전했다. 이어 "언제 정부나 지자체가 제대로 보상해준 적 있느냐"라고 되물었다.

물론 박씨의 농가도 소규모여서인지 재산상 피해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 듯 보였다. 그렇지만 지난겨울에 이어 같은 사태가 또 벌어진 것은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박씨는 자신의 농가는 동네 아이들이 놀러오는 경우가 많아 관리가 철저하다고 했다. 이는 "관리가 잘 되는지만 당국이 제대로 감독해도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전북 완주군 삼례시장. 토종닭이란 팻말만 있고 정작 토종닭은 그 안에 있지 않다.
▲  전북 완주군 삼례시장. 토종닭이란 팻말만 있고 정작 토종닭은 그 안에 있지 않다.
ⓒ 주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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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닭 거래 금지... 전통시장 상인 "금지가 꼭 능사는 아냐"

전북 완주시에 있는 삼례시장. 이 시장은 지금의 AI 사태를 확산시킨 데 일조한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본래 이곳에서 산 토종닭을 판매하는 김철수(가명)씨는 "죽지 못해 산다"고 하소연했다. 김씨는 이날 오후 5시까지 달걀 한 판을 판 게 전부라고 했다. 지난 12월부터 현재까지 6개월 동안 이런 식의 매출부진이 이어지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하지만 김씨가 걱정하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오랫동안 지속되는 AI 확산 여파에 전통시장에서의 산닭 거래금지 조치가 엄격한 수준으로 제도화될 수도 있다는 우려다. 이에 대해 그는 "이 업계 종사자들은 대체로 수십 년 일한 사람"이라면서 "퇴출시킬 거면 이들에 대한 대책도 같이 마련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 일, 지금도 불법인 거는 저도 알아요. 그런데 종사자 대부분이 수십 년 이 일만 한 노인들이잖아요. 이들에 대한 대책도 없이 불법이니 나가라는 건 죽든 어찌 되든 알아서 하라는 소리잖아요."

김씨도 정부와 지자체가 애초부터 AI 예방을 위한 관리감독을 잘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김씨는 "AI 위기경보단계를 평시 수준으로 바꾸자마자 같은 일이 다시 터진 게 말이 되느냐"라면서 "이는 관련 당국의 관리·감독이 허술한 탓"이라고 일갈했다. 이어 "그럼에도 정부는 항상 농민과 상인들 탓만 한다"라면서 "그들 시각부터 먼저 교정해야 한다"라고도 말했다. 

한편, 현재 전라북도 내에서는 삼례시장의 산닭을 판매한 노점상이 이번 AI 사태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분위기다. 해당 노점상을 보았느냐는 기자 질문에 김씨는 "자주 왔던 분"이라며 "다만 그의 정체는 확실히 모르겠다"라고 밝혔다. "그 노점상은 어디서 병아리나 닭을 구해왔느냐"는 물음에는 "낸들 알어?"라고 반문했다. 
 

 전주시의 한 치킨집(사진 속 가게는 이 기사의 취재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  전주시의 한 치킨집(사진 속 가게는 이 기사의 취재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 주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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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두 번 울리는 AI... "재난문자가 재앙문자로 보인다" 

AI 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가슴을 졸이는 이들이 또 있다. 치킨집 사장님들이다. 전북지역에서 치킨집을 운영하는 이들은 지난 6일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이날 전북 도민들에게 날아온 한 통의 문자 때문이다. 

"안전안내문자 / [전라북도] AI관련... 군산 등지에서 닭을 구입하여 키우시는 분을 신고 바람."

치킨집 사장님들은 이 문자가 "재난문자가 아니라 재앙문자로 읽혔다"라고 입을 모았다.   

덕진동에서 치킨집을 운영하는 한아무개(38)씨는 "지난주부터 슬금슬금 매출이 줄기 시작했다"라면서 "이번 주 들어서는 하루 매출이 1/3 가량 줄었다"라고 말했다. 한씨는 "얼마 안 있으면 알바생들 월급날"이라면서 걱정했다. 그는 "조류독감 한 번 터지면 대강 몇 개월은 긴장의 연속"이라고도 했다. 

인근의 또 다른 치킨집도 사정은 비슷했다. 50대 치킨집 사장 최아무개씨는 "장사가 이렇게 힘든 건줄 몰랐다"라면서 "치킨집은 더욱 그런 것 같다"라고 전했다. 최씨는 "장사한 지 4개월밖에 안 됐는데,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었다는 말을 실감한다"라고도 말했다.

"장사 처음 시작했을 때도 AI 때문에 난리였는데 그게 계속 이어지고 있잖아요. 게다가 요즘에는 치킨값이 인상된다는 등 온갖 말들이 많아서 더 힘들어요. 언제더라, 하루는 어떤 손님이 AI 때문에 치킨값 올라가서 좋겠다고 비아냥대더라고요. 사람 두 번 울리는 거죠. AI가 여러 가지로 문제예요." - 50대 치킨집 사장 최아무개씨

치킨집 입장에서 AI는 가장 흔히 발생하면서도 가장 심각한 위기와 같다. 이 가운데 현재 논란이 일고 있는 치킨값 인상과 그에 따른 불매운동은 가맹점주들에게 더욱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한씨와 최씨는 이러한 영향으로 인해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또한 AI에 관해서는 사후대책만큼이나 사전예방이 모두가 살 길이라는 데에도 동감했다. 

한편, 이번 AI 확산의 발원지이자 최대 피해 지역으로 꼽히는 전라북도는 지난 주말을 기점으로 소강 국면에 접어든 양상이다. 지자체는 당분간 24시간 비상상황을 유지해 방역 대책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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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조평통 “우리 민족끼리 북남관계 발전과 자주통일 새 전기 열어야”

6.15공동선언 17주년 성명… “남 당국, 운명적 갈림길에 있다는 것 명심해야”
▲사진 : 노동신문 홈페이지

6.15공동선언 발표 17주년을 하루 앞둔 14일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우리 민족끼리 리념에 토대하여 북남관계 발전과 자주통일의 새 전기를 열어나가야’라는 제목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는 지난해 6월 최고인민회의에서 국방위원회를 폐지하고 국무위원회를 신설할 때 국가기구로 승격된 대남 통일기구이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은 이날 성명에서 “원칙적 립장”이라며 3개항을 강조했는데 첫째, “자주의 기치,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를 더욱 높이 추켜들고 북남관계 발전과 조국통일 성업에 헌신하려는 투철한 립장을 가져야 한다”고 밝혔다.

“남조선에서 보수패당이 집권하였던 지난 9년간 북남관계가 최악의 파국을 면치 못한 것은 전적으로 그들이 민족 우에 외세를 올려놓고 민족의 리익보다 외세와의 공조를 중시하며 자주로선이 아닌 친미 굴종정책에 로골적으로 매달려왔기 때문”이라고 진단한 조평통은 “조선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복잡하고 첨예할수록 민족문제, 통일문제 해결에서 자주의 기치를 더욱 높이 들어야 하며 외세의 간섭과 전횡이 우심할수록 우리 민족끼리 더욱 굳게 손잡고 나가야 한다”고 민족자주의 원칙을 강조했다.

그런데 조평통은 “남조선의 새 당국자들은 이 쓰라린 교훈을 망각하고 집권 첫날부터 온당치 못한 언행을 일삼으며 벌써부터 북남관계의 전도를 심히 흐려놓고 있다”고 우려하면서 “큰 나라들에 무턱대고 굽신거리며 ‘특사외교’니, ‘전화외교’니 하고 비위를 맞추는데 급급하는가 하면 ‘한미동맹 강화’를 매일같이 부르짖으며 목숨이 간들거리는 백악관 주인을 찾아가 눈도장이나 찍을 구차스러운 행각준비에 만사를 제쳐놓고 허둥대고 있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직후의 특사외교와 이달 말 예정된 한미정상회담을 문제 삼은 것이다.

특히 조평통은 “이 나라, 저 나라에 ‘정권’유지를 구걸질하며 창녀 짓을 일삼던 박근혜 때와 오늘이 달라진 것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라고까지 견줘 비난하곤 “만약 현 남조선 집권자가 진실로 초불민심의 대변자라면, 진정 조선민족의 피와 넋이 흐르는 인간이라면 민족자주와 인연이 없는 주접스럽고 가긍한 노릇부터 그만둘 용단을 내려야 마땅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왜냐면 “오늘날 시대는 완전히 달라졌으며 통일문제 해결의 주도권은 그 어떤 외세가 아니라 우리 민족 자신의 손에 확고히 쥐여져” 있기 때문인데 “친미사대의 구태와 굴종의 사슬에 얽매여 제 마음대로 한발자국도 움직일 자신을 가지지 못한다면 북남관계도 통일문제도 절대로 풀어나갈 수 없다”고 사실상 경고했다.

둘째, “동족을 적대시하는 대결관념에서 벗어나 민족의 단합과 단결을 도모”해야 한다고 조평통은 강조했다. 이에 대해 “온 겨레의 지향과 요구에 맞게 북남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려면 응당 동족에 대한 적대적 관념부터 털어버려야 하며 화해와 단합의 새로운 려정에 들어서야 한다”고 설명한 조평통은 “그러나 현 남조선당국은 보수‘정권’ 시기 그어놓은 동족대결의 ‘붉은 선’을 넘어서지 못하고 의연히 ‘북 정권과 군은 우리의 적’이라느니, ‘제재와 압박공조를 이어가겠다’느니 하고 떠드는 한편 보수패당이 추구해온 ‘북 체제붕괴’의 간악한 수단과 방법을 계속 우려먹을 불순한 속심도 거리낌 없이 내비치고 있다”고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그래서 조평통은 “이야말로 겉 뚜껑만 달리하였을 뿐 내용에 있어서는 과거 ‘정권’이 추구한 대결정책의 복사판이라고밖에 달리는 볼 수 없다”며 “제재와 대화, 압박과 접촉의 그 무슨 ‘병행’에 대하여 떠들며 관계개선을 운운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리석은 추태이며 명백히 자기기만”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남조선 당국이 진실로 우리를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겠다면, 지금처럼 동족을 겨냥한 대결과 적대의 주먹을 굳이 펴지 않겠다면 우리 역시 강요할 생각이 없다”며 “체제대결의 끝은 물리적 충돌이며 부득불 비평화적 방법에 의한 통일로 나가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남조선 당국자들은 책임적인 선택을 하여야 할 것”이라고 또 경고했다.

조평통은 셋째로 “조선반도의 첨예한 군사적 긴장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조치들부터 시급히 취해야 한다”고 밝혔다. 조평통은 여기서도 새 정부를 지목해 “문제는 임기 내에 조선반도 평화의 ‘획기적 전기’를 만들겠다고 요란스럽게 떠들어대는 현 남조선 당국자들이 동족의 핵무력 강화조치를 계속 걸고 들며 미국의 날강도적인 침략전쟁 도발책동에 적극 가담하고” 있다며 최근 한반도 수역에 미국의 핵항모 전단과 B-1B, 핵잠수함 등 핵무력이 진입한 것을 문제 삼았다. “현 사태를 보면 남조선 집권자가 떠드는 ‘영구적인 평화와 번영’은 고사하고 핵전쟁의 재앙을 피하기 어렵게 될 것이라는 것이 내외의 한결같은 우려”라며 “남조선 당국이 진실로 평화를 원한다면 조선반도 평화의 가장 공고하고 현실적인 담보인 우리의 자위적 핵무력을 무지하게 걸고 들 것이 아니라 미국의 침략적이며 호전적인 망동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부터 취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평통은 이어 “특히 서해 열점지역에서 불법무법의 ‘북방한계선’을 고수하겠다고 무모한 군사적 도발행위에 더 이상 매달리지 말아야 하며 군사분계선 일대를 비롯하여 지상, 해상, 공중에서 무력충돌 위험을 제거하고 군사적 긴장상태를 완화하기 위한 실천행동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렇게 3개항을 강조한 조평통은 성명을 마무리하면서 “당당한 핵강국, 로케트 맹주국의 확고한 지위에 올라선 오늘의 새로운 국면에 맞게 북남관계에서 대전환, 대변혁을 이룩하여 자주통일의 대통로를 열어나가려는 우리의 립장은 확고부동하다”면서 “지금 남조선 당국은 우리와 대담하게 손잡고 북남관계를 풀어나감으로써 민족사에 긍지로운 자욱을 남기느냐 아니면 외세의 눈치를 보며 주저하고 망설이다 선임자들의 비참한 전철을 밟느냐 하는 운명적 갈림길에 서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김동원 기자  ikaros0704@g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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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한 색깔론과 사상검증에만 목맨 자유한국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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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7/06/15 10:09
  • 수정일
    2017/06/15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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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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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문재인 정부의 인사를 규탄하는 피켓을 노트북에 붙이고 있다.
14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문재인 정부의 인사를 규탄하는 피켓을 노트북에 붙이고 있다.ⓒ양지웅 기자 
 
 
 
 
 

14일 문재인 대통령의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임명에 반발하면서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후보자 청문회에 불참한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오후가 돼서야 뒤늦게 복귀했다. 이들은 문 대통령을 규탄하며 도 후보자를 향해서는 바로 사상검증과 함께 '종북몰이'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날 오후 2시께가 돼서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도 후보자 청문회에 참석한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5대원칙 훼손', '보은·코드 인사', '협치파괴' 등이 적힌 피켓을 자신의 자리 앞에 세워놓았다. 이들은 "이게 합당한 처사냐"는 더불어민주당의 불만을 샀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채 청문회에 돌입했다.

'김상조 임명' 고심하다 오전 청문회는 건너 뛴 자유한국당
오후에 나타나 '문재인 인사' 불평·불만

자유한국당 이종배 의원은 의사진행 발언을 통해 "의원총회 때문에 오전 청문회를 진행하지 못한 것에 대해 당사자로서 국민 여러분에게 죄송하다"고 운을 뗐다. 그는 "어제 문 대통령이 김상조 위원장 임명을 강행한 점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의총에서 논의를 했다"고 해명하며 "문 대통령이 이런 부적격 인사를 경제 검찰이라고 할 수 있는 공정위원장에 임명한 것은 상당히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같은 당 이장우 의원도 문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제시한 '고위공직자 원천배제 5대원칙'을 거론하며 "현재 장관 후보자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여기에 자유로운 분이 한 분도 없다"고 불평을 늘어놨다.

김석기 의원은 "인사청문 보고서 채택도 되지 않았는데 김상조 위원장 임명을 강행하는 건 야당에 대한 협치를 떠나서 국민을 무시하는 선언"이라며 "인사청문회에 과연 참석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이런 고민을 했다"고 말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더불어민주당 오영훈 의원은 '그게 지금 할 소리냐'는 취지의 항의를 했다. 그는 자유한국당이 오전 청문회 불참에 대해 사전에 양해를 구하지도 않았다고 지적하며 "청문회를 제대로 진행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운 발언을 하는 데 대해 매우 유감"이라고 밝혔다.

자유한국당 염동열 의원은 도 후보자의 '유사역사' 논란 검증을 위해 증인으로 신청한 하일식 연세대 사학과 교수가 출석하지 않았다고 불만을 제기했다. 하 교수는 학회 참석을 이유로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했다. 이에 대해 염 의원은 "10시에 (청문회를) 정상적으로 했으면 증인에 대해 충분한 신문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냐"며 "저희가 행정실에 증인 참석을 위임했는데 충실하지 못했다"고 직원을 나무랐다. 그러나 오전에 도 후보자 청문회는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불참으로 진행되지도 못 했다.

1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유성엽 위원장이 의원총회 중인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참석을 기다리기 위해 정회를 선언하고 있다.
1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유성엽 위원장이 의원총회 중인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참석을 기다리기 위해 정회를 선언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비전향장기수 회갑연에 왜 참석했냐"
"'홍명희 문학제'는 왜 하냐"
"'6.25는 통일전쟁' 주장에 동의하냐"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본격 질의가 시작되자마자 도 후보자에 대한 노골적인 사상검증을 시도하며 '종북몰이'에 나서는 등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유한국당의 첫 질의는 '북한에 대한 시각이 뭐냐'는 이장우 의원의 질문으로 시작됐다. 도 후보자는 "태권도 대회나 역도 대회 등에 대해서는 교류가 많아졌으면 좋겠다"며 "(남북간) 문화체육교류는 물꼬가 트였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곧바로 이장우 의원은 "지금 북한의 3대 세습체제에서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고 대량살상무기를 확대하는 상황에서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 조심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따져 물었다. 문화·체육분야에서 남북간 교류를 통한 화해·협력의 물꼬를 터야 한다는 취지의 답변에 어깃장을 놓은 것이다.

또 이장우 의원은 "도 후보자는 1989년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창립을 주도했고, 1991년 인민군 출신의 빨치산 비전향장기수 김영태 회갑잔치에 참여하지 않았느냐. 이유가 뭐냐"고 따져 물었다. 이에 도 후보자는 "그때는 김영삼 정부가 비전향장기수들을 북한에 송환하던 시기였다"며 "송환되는 분의 마지막 식사자리를 청주의 시민사회단체가 마련했는데 거기에 참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후보자가 14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후보자가 14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 지역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던 비전향장기수 김영태 씨는 1952년 체포된 뒤 1971년 만기출소했으나, 1975년 박정희 군사정권의 '긴급조치 9호'로 제정된 사회안전법에 따라 재수감돼 장기구금에 처해진 인물이다. 이후 1989년 사회안전법의 폐지로 출감한 뒤 2000년에 '6.15 남북공동선언'을 계기로 북한에 송환됐다.

이 의원이 문제제기한 '김영태 회갑잔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는 '인민군 종군기자' 출신 비전향장기수 이인모 씨를 중심으로 제기되던 '전쟁포로의 국제법상 권리 준수' 요구가 반향을 일으키며 '비전향장기수 송환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이에 따라 1993년 이인모 씨가 송환되기도 했다.

도 후보자의 답변도 이러한 맥락을 상기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의원은 "저는 유독 인민군 출신 빨치산 비전향장기수 회갑연에 갔다는 데에 의아심을 갖는다"고 물고 늘어졌다.

또 이 의원은 근대문학소설의 기념비작으로 꼽히는 '임꺽정'을 쓴 홍명희 작가를 언급하며 "북한에서 내각 부수상을 한 '홍명희 문학제' 추진에 노력을 많이 하지 않았느냐. 이유가 뭐냐"고 물었고, 도 후보자는 "소설 임꺽정과 관련한 학술·문학행사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의원은 "유독 북한에 가서 6.25와 관련해 전범이냐 아니냐는 논란까지 있는 사람에 대한 문학제를 하는 것에 의구심을 많이 갖는다"고 쏘아붙이기도 했다. '홍명희 문학제'는 소설 '임꺽정'을 조명하기 위해 1996년부터 해마다 학술·공연·전시 등을 하는 연례행사다.

이 의원의 맥락 없는 사상검증은 계속 이어졌다. 느닷없이 그는 '6.25는 통일전쟁'이라고 주장했던 강정구 전 동국대 교수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캐묻기도 했다. 도 후보자는 "(강 교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강 전 교수는 지난 2005년 한 인터넷 언론에 기고한 '맥아더는 38선 분단집행의 집달리'라는 글에서 '탈냉전 통일시대에 맥아더 동상 허물기는 민족사적 요구이자 합리적 행보'라는 취지의 글을 썼다가 "6.25전쟁은 통일전쟁이면서 동시에 내전"이라는 표현을 빌미로 국가보안법(제7조 찬양·고무) 위반 혐의로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학계를 비롯한 시민사회에서는 자유로운 학문 연구의 분야에 '반공이념'을 들이댄 판결이라는 비판이 강하게 제기된 바 있다.

"전교조, 주무부서 아니지만 판단해봐"

자유한국당 전희경 의원이 14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문재인 정부의 인사를 규탄하는 피켓을 노트북에 붙이고 있다.
자유한국당 전희경 의원이 14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문재인 정부의 인사를 규탄하는 피켓을 노트북에 붙이고 있다.ⓒ양지웅 기자

다음으로는 자유한국당 전희경 의원이 바통을 이어 받았다. 전 의원은 문체부 담당 사안도 아닌 전교조 '법외노조화'에 대한 도 후보자의 생각을 캐묻기 시작했다. 전 의원은 "정부의 주무부처 장관으로서 어떤 판단을 하느냐"고 물었고, 도 후보자는 "주무부처는 문체부가 아닌 고용노동부"라고 답했다.

그러나 전 의원은 전교조도 문화·예술과 관련이 있다며 답변을 피하지 말라고 채근했다. 이에 도 후보자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아니 주무부처는..."이라고 말하는 순간 전 의원이 말을 자르며 "문체부에서도 (전교조와 관련된) 상황이 생기기 때문에 현행법에 따른 상황 판단을 해야된다"고 우기기 시작했다.

답변이 나오기도 전에 전 의원은 또다시 '홍명희 문학제' 얘기를 꺼냈다. 그는 홍명희 작가를 월북한 '6.25 전범'으로 규정하며 "홍명희 문학제에서 예산지원 요청이 오면 어떻게 할 거냐"고 질문했다. 이에 도 후보자는 "지금까지 그 문학제는 예산지원 받지 못했다"고 답했다.

그러자 전 의원은 "지원 요청이 들어오면 어떻게 할 거냐"며 "그런 문학적 순수성만 주장하며 대한민국의 보편적 정서상 극단에 있는 문학제와 (인연을) 끊겠다는 말을 못하겠다는 거냐"고 몰아붙였다. 도 후보자는 답답하다는 듯 "소설 임꺽정 잘 알지 않느냐. 우리나라 대하역사소설 중 대표적인 작품이고 그 소설에 대한 문학행사를 한 것"이라며 "예산지원은 지금까지 문체부에서 한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전 의원은 "본인의 입장에서 판단하라는 매우 간단한 질문이다. 판단을 하지 않겠다는 거냐"고 재차 물었다. 그의 마이크는 질의 시간이 초과돼 이미 한참 전에 꺼진 상태였다. 눈이 동그랗게 커진 도 후보자가 "문체부에 신청한 적이 없는 예산을 '신청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시니까..."라고 말하는 순간 전 의원은 "가정해서 묻는 것"이라고 몰아세웠다. 도 후보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허허허" 웃었다.

"평양을 '시멘트 빛깔'이라고 쓰지 왜 '잿빛'이라고 썼냐"
"주적이 누구냐"

자유한국당 김석기 의원의 차례가 왔다. 그는 지난 2004년 도 후보자가 평양에 다녀와서 쓴 방문기 내용을 소재로 삼았다. 김 의원은 '서울이 욕망의 빛깔, 온갖 현한함과 어지러운 빛깔, 유혹과 타락과 탐욕이 뒤섞인 빛이라면, 평양의 빛은 그것들을 털어버리고 담백한 자존심으로 서 있는 승복 빛이다. 스님의 등뒤에 헐렁하게 매달린 바랑의 빛이다'라는 도 후보자의 방문기 내용을 거론하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냐"고 따져 물었다.

김 후보자가 언급한 글은 지난 2004년 도 후보자가 평양을 다녀온 뒤 '창비'에 게재한 '8.15 민족통일대축전 방문기' 1편이다.

김 의원의 질문에 도 후보자는 "(평양은) 도시 전체가 회색이었다. 그래서 무채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잿빛으로 가득한 회색의 도시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답했다. '잿빛'을 한 평양의 전경이 승려가 입는 '승복'과 비슷한 점을 문학적으로 표현했다는 설명이다.

그러자 김 의원은 "광주교육청에서 쓰는 보조교재에는 '평양을 세계적인 계획도시이자 전원도시'라고 기술하고 있다"며 "학생들이 '평양은 대단히 살기 좋고 그야말로 전원적인 도시'라고 오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도 후보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내용을 연결지어 색깔론의 도구로 활용한 것이다.

도 후보자가 "그건 제가 쓴 내용이 아니다"라고 받아넘기자 김 의원은 "이런 교재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신다면 나중에 교육부장관한테 이런 교재는 사용돼서는 안 된다고 건의해달라"고 황당한 주문을 하기도 했다.

김 의원의 질의가 끝나자 같은 당 한선교 의원이 '승복' 논쟁의 바통을 이어 받았다. 한 의원은 "(차라리 평양을) 잿빛이라고 쓰지 왜 승복의 빛이 되고 바랑의 빛이 돼야 하느냐"고 따져 물었고, 도 후보자는 어이 없다는 듯 "승복이 회색이지 않으냐"고 되물었다.

한 의원은 "그럼 시멘트 빛깔이라고 하지 그랬느냐"며 "이 얘기를 듣는 도 후보님을 지지하는 전교조를 비롯한 소위 민족문학을 하시는 분들은 굉장히 실망했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또 한 의원은 "주적이 누구냐"고 물었고, 도 후보자는 "북한이 적이죠"라고 답했다. 그러자 한 의원은 "좋다. 저는 차라리 그런 답을 원한다"고 반응하기도 했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후보자가 14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후보자가 14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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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개똥 치우기' 보고서가 사라졌다"

 
[6월항쟁 30주년 특집 인터뷰 ⑨] 박진도 지역재단 이사장

 

 

6월민주항쟁 30년, 오늘날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과 ‘6월민주포럼’은 세대와 시대를 넘어 6월항쟁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인터뷰 기사를 매주 1회 연재한다. 인터뷰는 6월항쟁을 경험한 이들이 오늘날 청년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시대를 초월한 공통의 의미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전두환 때는 반상회에 공무원들이 반드시 참여해서 보고서를 쓰게 돼 있었어요. 저는 국립대 교수였으니까 공무원이잖아요, 가야죠. 근데 반상회에 별거 없잖아, 보고서를 쓰는 데 쓸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반상회 오늘의 주제는 '개똥을 치우자 였다. 개똥을 아무 데나 버리지 맙시다'였다' 이렇게 써냈어요. 그 다음 달 반상회 때도 '이달에도 또 개똥을 치우자고 했다. 아직도 안 치워서 문제다’라고. 나는 만날 그렇게 개똥만…(웃음). 한 마디로 개~똥 같은 세상이었지요." 
 
박진도 지역재단 이사장(충남대 경제학과 명예교수)은 '개똥을 치우자'는 반상회 보고서를 "출석부 내듯이" 내도 "아무도 시비 거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무원을 동네 반상회에 참석시켜 주민들의 동향을 보고토록 했다는 일화는 소름을 돋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반응을 보이자, 박 이사장은 6월민주항쟁 이전에는 사회 전체가 그렇게 감시 체제로 돌아갔다며 또 다른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는 학교 버전. 6개월간 학생과장을 맡았던 1983년도의 일이었다. 그는 "학교에 경찰들이 상주(이른바 '프락치')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교수가 프락치였다"라고 이야기를 열었다. 
 
"학교 출입하는 정보과 형사가 나한테 와서 '애들 뭐 하느냐, 어떻게 돼 가냐' 물어요. 처음에는 정보라는 게 없고, 그 사람도 직업이고 먹고 살아야 하니까 '애들 잘 지내고 있어요. 걱정 말고 가세요' 이런 형식적인 답을 했어요. 
 
그런데 자꾸 꼬치꼬치 물어보니까 화가 나잖아요. 해서 '아니, 내가 당신 정보원이야? 어디 교수한테 와서 애들 정보를 내놓으라고 그래?' 그랬더니만 이 경찰이 화를 내더라고. '전에는 안 그랬는데 왜 학생과장만 그러시냐'고. 그래서 내가 경찰서장한테 바로 전화를 했어요, 그 경찰을 앞에 앉혀놓고.(웃음) 그러니까 그 경찰이 놀라서 죄송하다고 하고는 다음부터는 내 근처에도 안 왔어요. 그렇게 전부가 다 통제 대상인거죠. 교수도 자기가 데리고 있는 정보원이고." 
 

▲ 박진도 이사장. ⓒ바꿈

'개똥 치우기' 보고서가 사라졌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던, 독재자 전두환의 기세가 등등했던 1983년. 박진도 이사장은 학생처장 임기를 마친 뒤,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박사 과정을 마치고 돌아온 때가 1987년 4월. 분위기는 4년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일본에 갔다 온 후에는 이미 전두환 정권이 무너지기 시작할 무렵이었어요. 호헌 선언을 했다는 얘기는 이미 그 전에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 이후로 사람들이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면서 여기저기에서 반대 선언 같은 걸 하잖아요. 교수들도 4월 말에 호헌 철폐 선언을 했어요." 
 
박 이사장은 새 학기가 시작하기까지 남은 기간을 서울의 길거리에서 살았다. "최루탄 가스를 많이 먹었다는 기억 밖에 없을 지경"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날을 묻자 박 이사장은 6월이 아닌, 7월의 어떤 날을 상기했다. 
 
"이한열 열사가 죽고(7월 5일) 9일에 장례식을 했어요. 연세대에서 노제를 하고 서울시청 앞으로 오게 돼 있었는데, 장례 행렬이 연세대 신촌 로터리에서 시청 앞 로터리까지 꽉 찼어요. 100만 명은 넘을 거예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정치인이고 교수고, 내가 아는 사람은 다 나온 것 같아요.(웃음) 
 
그게 굉장히 큰 사건인데, 그때 시청 앞에서 되게 혼났던 것 같은 기억이 나요. 마지막에 시청 앞에서 경찰들하고 붙었는데, 본의 아니게 시위대의 맨 앞줄에 있었어요. 경찰은 (사람들을) 해산을 시켜야 할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최루탄이 지랄탄, 사과탄… 종류도 많았어요. 나도 그때 최루탄 피해서 다녔는데, 포위돼서 갇혀 있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까 가방도 없어지고, 안경도 없어지고…." 
 
"사회 구조 변화에 농촌이 대응을 못했다" 
 
6월항쟁 중에 사라진 박 이사장의 안경과 가방 다음으로 '개똥 보고서'가 자취를 감췄다. 박 이사장이 평생 연구‧활동을 해온 농업 분야에서도 사라진 것이 있었다. 농협 조합장 간선제. 6월항쟁의 성과로 농민들은 농협의 조합장을 다시 직접 뽑을 수 있게 되었다.
 
"농협 조합장 직선제가 1988년부터 시작됐어요. 그전에는 소위 '농협 임직원 임면에 관한 임시조치법', 보통 임시조치법이라고 하는데 그걸 박정희가 1962년에 했거든요. 임시조치법으로 농협 중앙회장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나머지 조합장들은 중앙회장이 임명하는, 위에서부터 쭉쭉 내려오는 임명제로 바뀌어 버렸어요. 
 
사실 농협은 협동조합이라서 대통령이나 중앙회장이 임명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선 지금 사회 안정을 위해서 급하니까, 임시로 한다'는 뜻으로 임시조치법이라는 말을 쓸 수밖에 없던 거죠. 그게 87년까지 갔으니까 25년이에요. 임시가 아니죠. 박정희보다 더 오래 간 거지."
 
조합장 직선제는 '100만인 서명운동'(1983년)을 하는 등 농민들이 치열하게 싸워 쟁취한 결과물이었다. 사실 농민들은 군사 독재의 엄혹한 시절 내내 투쟁을 계속해 왔다. 71년 가톨릭농민회(가농)가, 82년에는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기농)가 조직됐고, 85년에는 전국 20여개 군에서 2만여 농민들이 '소몰이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농민운동이라는 게 굉장히 지역적이라 잘 조명되지 않아서 그렇지 농촌 현장에서의 대중운동이랄까 민주화운동의 동력은 다 농민운동이었어요. 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에서도 실제 조직을 구성할 때에 가농이나 기농의 활동가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기고 그랬어요. 농민운동 진영이 대도시의 청년학생 진영과 함께 시군 단위에서 6월항쟁의 거점 역량으로 역할을 한 거죠." 
 
87년이라는 시공간에서 실력과 위력을 발휘한 농민 운동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89년 2월에는 2만여 명에 달하는 농민들이 상경 집회를 열었고, 그 직후인 3월에는 전국 단위의 농민 단체인 전국농민회총연맹이 결성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7년 이후 농촌의 상황은 계속 미끄러져 내렸다. 6월항쟁의 성과가 농촌만 빗겨간 걸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87년 이후에 한국 사회가 급속히 변했잖아요. 농업농촌이 그 이전보다 주변부로 밀려난 거죠. 87년의 성과를 떠나서 사회 구조가 그렇게 변했는데 그 변화에 농촌이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고 봐야 해요."
 
농협은 농촌‧농민에 무관심하다? 
 
농업과 농촌이 사회구조 변화에 대응하는 데 실패한 원인은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한 농협의 책임은 빼놓기 어렵다. 박 이사장은 "농촌에서 농협이 굉장히 중요한 조직"이라면서 "농협이 제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농업협동조합법(농협법)에 보면, '농업생산성을 높이고, 생산된 농산물의 판로를 확대하고 잘 유통하고 가공하고 해서 경쟁력을 높이고, 또 농민의 사회적인 지위 향상 등을 위해 노력을 하라'는 게 농협의 설립 목적이에요. 신용사업은 그런 사업을 뒷받침을 하는 거고요.
 
박정희 전에는 농업협동조합과 농민은행이 따로 있었는데, 박정희가 이걸 합쳤어요. 그러니까 농민 입장에서 보면 농협은 농산물의 생산, 유통, 가공, 소비 같은 본연의 일을 잘 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관심이 없는 거예요. 못해요." 
 
과거 농협은 농민과 농촌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독재정권의 농업 정책을 현장에 시달하는 데 앞장섰다. 특히 통일벼 보급, 미곡 수매 등 쌀 농정에 집중했는데, 그 결과 "쌀 농정이 파탄났다"고 박 이사장은 평가했다. 농협 안팎의 구조적인 원인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우리나라 농협은 종합농협이라 농민 조합원의 구성이 매우 다양해요. 어떤 조합원은 쌀농사를 주로 하고, 어떤 농민은 소를 주로 키우고, 어떤 조합원은 비닐하우스 농사를 주로 하지요. 게다가 그 경영규모도 매우 달라요. 논이나 밭 300평 이상 농사를 짓거나, 소와 같은 대동물 1마리 이상 키우면 다 농민자격이 있어요. 논농사 300평 짓는 농민이나 10만평 짓는 농민, 소 1마리 키우는 농민이나 500마리 키우는 농민이 모두 함께 조합을 구성하고 있는 셈이죠. 따라서 조합원들의 경제적 이해가 다르기 때문에 협동조합으로서 기능하기가 어렵죠. 여기에 비농민 준조합원을 포함해서 돈장사를 해서 수익의 대부분을 버는 구조에요. 이미 농사에 별 관심이 없는 고령농민들이 조합원의 대부분이고요.  
 
이런 구조에서는 조합장 직선을 한다 해도, 진정으로 농민의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하는 제대로 된 사람보다는 그야말로 ‘정치꾼’, 조합장이 뽑히기 쉬운 거죠."
 
이런 상황에서 조합장 직선제가 농협의 운영 방식을 민주화시키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고질적인 부정부패 역시 그대로였다. 결국 이명박 정부는 이를 빌미로 약 20년 만(2009년)에 농협중앙회장 선거를 대의원 간선제로 바꿔 버렸다.
 
"농협중앙회장을 다시 조합장 직선으로 뽑아야 하는데, 직선제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어요. 제대로 된 조합장이 10%도 안 되기 때문에 그 사람들한테 맡겨봐야 사실은 큰 변화가 있을 게 없어요.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게 뭐냐면 '조합원의 총의가 반영된 조합장 직선제'라는 걸 하자. 지역 조합원들에게 지금 후보들 중에서 누구를 찍을지 묻는 미국의 선거인 제도처럼 그렇게 하자는 거예요." 
 

ⓒ연합뉴스

'굽은 소나무가 고향을 지킨다' 
 
이토록 많은 농협의 문제들을 왜 지금껏 잘 몰랐던 걸까. 무지와 무관심을 반성하자니 갑자기 호기심이 동했다. 지금은 낯설기만 한, 아니 인기 없는 분야인 '농업' 연구에 박 이사장은 왜 40여년을 몰두했을까. 그는 "그런 질문을 참 많이 받는다"고 답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1970년에 우리나라는 농업의 비중이 국내총생산의 25%, 취업인구의 약 절반을 차지하던 농업 국가였습니다. 그래서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농업경제에 관심이 있었죠. 그런데 그 후에 우리나라가 급속히 공업화하고 산업사회로 이행하면서 경제학자들의 관심도 급격히 국제경제, 금융, 노동 등으로 급속히 옮겨 가게 되었습니다.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이농하듯이 경제학자들도 자연스럽게 이농을 한 거죠."
 
'자연스럽게 이농'해 간 다른 이들과는 달리 제자리를 지킨 이유가 따로 있어 보였다. 박 이사장은 "굽은 소나무가 고향을 지킨다는 말이 있다"면서 본인 역시 "두 어 차례 이농할 기회가 있었다"고 했다.  
 
"끝까지 버틴 이유는 고향(농업경제학)을 떠나지 못한 거죠. 굳이 따지자면 내가 시골출신이기도 하고, 친구들과 세상을 위해 각자 할 일을 나눌 때 내 몫으로 농업농촌분야가 주어진 것, 그리고 전봉준 장군을 존경한 것들이 이유가 되겠죠."
 
그는 결정적인 이유로 70년대 활동했던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의 활동을 꼽았다. 강원용 목사(경동교회)의 주도로 1965년 만들어진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당시 운동가 양성소로 꼽혔다.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중간집단이란 개념을 도입해서, 노동자, 농민, 여성, 교회 등의 현장 활동가들을 교육했는데, 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그 이후 우리사회의 각 분야에서 사회혁신과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 성장했어요. 그때 교육을 담당하던 간사들이 노동 분야에서는 신일령 전 이대총장,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 농촌분야에서는 이우재 전 국회의원, 장상환 경상대 명예교수, 황한식 부산대 명예교수, 여성분야는 한명숙 전 총리가 큰 역할을 하셨죠.
 
나는 농촌분야의 자원봉사자로 간사들의 일을 도왔는데, 자원봉사라 해도 허드렛일만 한 건 아니고, 강의도 하고, 저 멀리 전남 보성까지 찾아가서 농촌현장지도를 하곤 했어요. 이때 농촌 중간집단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그 후 우리나라 농민운동의 지도자가 됐죠."
 
박 이사장은 이때 만나 농민운동 지도자가 된 이들이 "고생만 했지 아직도 좋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 있어 미안하다"며 "그런 분들에게 진 빚을 갚는 마음으로 농촌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만약 그때 우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소시민으로서 평범하고 행복한 생활을 했을 텐데, 운동의 지도자가 되어 감옥 가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삶을 산 것이 너무 미안해요. 정광훈이라고 해남의 전기기사이면서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분이 계셨는데, 우리 교육을 받고 나서 투사가 되셨어요. 낙천적이고 정말 사람 좋은 분이었는데, 여러 차례 감옥도 가시고 넘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어요. 그런 분들이 많아요." 
 
'지역을 바꿔서 세상을 바꾼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해나간 연구와 활동들이 결국, 농업농촌을 바꾸기 위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케 했다. 정부 정책의 변화만으로는 현실을 바꾸기 난망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지난 2004년 지역재단의 문을 열었다. 
 
"93년도에 서울대에 있는 은사님이 농정연구포럼이라는 걸 만들었어요. 그걸 같이 도와드리다가 2000년 초에 다시 확대 개편해서 농정연구센터를 했어요. 중앙정부의 농정에 대한 연구를 주로 했는데… 틀렸네, 어쨌네, 이런 비판이죠. 그런데 농촌 현실이 바뀌지 않는 거예요. 왜 안 바뀔까 생각을 해보니 바뀔 이유가 없는 거죠. 중앙(정부)에서는 지금 좋은 데 바꿀 이유가 없잖아요. 지금 농민들을 잘 '다스리고' 있으니까요. 
 
농민들은 자기네 힘으로 바꿔야 된다고 하는데 힘이 없어요. 2004년 한‧칠레 FTA할 때만도 농민들이 10만 명 씩 (서울로) 올라와서 데모도 하고, 사람이 죽기도 했어요. 그런데 (협정 체결) 하잖아요. 설사 정부가 정책을 바꿨다 해도 현장에서 그게 제대로 잘 되느냐? 안 되죠.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뭔가 변화가 생기지 않으면, 중앙에서 변화가 생긴다 하더라도 효과가 없는 거죠." 
 
지역재단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지역을 바꿔서 세상을 바꾼다'는 '거창한' 문구를 창립 슬로건으로 걸고 출범했다. 해마다 '지역 리더'를 선정해 시상하고 있는데, 2000년대 초 만해도 생소하던 개념이 10여년이 지난 이제는 "상당히 전파가 됐다"고 박 이사장은 말했다.
 
"지역의 문제라는 건 경제 뿐 아니라, 교육도 있고, 노인, 환경 문제도 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지역의 문제를 스스로 고민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나 조직을 '지역 리더'라고 명명한 거예요. 
 
농업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이 너무 많으니까, (모범 사례) 모델은 굉장히 다양한 형태로 있어요. 예를 들어 남원자활센터라는 게 있어요.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일자리 사업을 하는데, 사업 형태가 여러 가지에요. 영농 사업도 하고, 자원 재활용이라고 해서 음식물 쓰레기를 분리수거해서 돼지를 키우는 사업이라든지, 자기들이 만든 유기농 채소로 식당을 운영한다든지. 이게 여러 효과가 있는데 취약 계층에게 일자리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측면이 있고, 또 음식물 쓰레기 같은 것들은 일종의 환경 사업이죠." 
 
'지역 리더'들의 사례는 흥미로웠다. 그렇지만 지역재단의 초기 슬로건이 무슨 의미인지는 여전히 아리송했다. 농촌의 자원을 활용해 농촌다운 모습을 되찾는 것이 어째서 농촌뿐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일로 이어진다는 걸까. 
 

▲ 박진도 이사장. ⓒ바꿈

'성장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자 
 
"성장주의라는 게 생산력 높이는 거잖아요. 농업 분야도 국제 경쟁력을 높여 수입농산물에 대항해야 한다(는 식이에요). 그런 경제 성장주의가 우리나라 사람들을 어렵게 만들었어요. 소득은 열 배씩 높아졌는데 80년대와 지금을 비교하더라도 엄청나게 사회가 망가져 있거든요. 
 
성장이 아니라 행복으로 가야 한다. 행복으로 간다는 이야기는 소득, 물질 뿐 아니라 문화나 환경, 공동체, 교육이 균형 있게 발전해야 한다는 얘기에요.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농촌이 망가져서다. 성장주의로 대도시에 사람들이 몰려 사니, 일자리도 없고, 교통문제, 주택문제, 환경문제, 교육문제가 심각할 수밖에 없지요.
 
우리는 그동안 농업농촌의 다원적 가치/역할을 너무 무시했지요. 그저 값싼 농산물이나 공급하면 된다고 생각한 거죠. 그렇지만 농업농촌은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는 기능이 있어요. 건강한 먹거리, 지역사회의 균형발전과 일자리 창출, 전통문화의 계승과 발전, 환경 및 경관의 보전, 휴양 및 휴식 공간의 제공, 어린이를 위한 학습 공간 등은 국민행복을 위해서는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에요." 
 
박 이사장은 농업과 농촌의 가치가 도시의 그것과 완전히 달라야 한다고 말했다. 생산량이 아닌 생태와 환경을 중시하는 농업으로, 아파트와 넓은 도로가 건설된 도시를 닮은 모습이 아닌 농촌의 풍광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 농촌 문제를 나와 무관하게 여기는 태도에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서울을 비롯한 광역시의 인구가 전체의 70% 가량 될 거예요. 광역시를 제외한 나머지가 30%인데, 이 지역은 농업 생산에 굉장히 의존하고 있는 지역이죠. 농업 생산에서부터 나와서 가게도 생기고, 농기계 상인도 생기고 다방도 술집도 병원도 생기는 거니까요.
 
더 큰 도시, 예를 들어 대전이나 광주, 대구 이런 지역들도 사실은 그 배후지(농촌)를 먹고 사는 거예요. 대전만 하더라도 그 주변 지역에 농업지역이 쇠퇴한다고 하면 같이 망하는 거예요. 농업이 GDP에서 2%도 안 되고, 농가 인구도 5%가 안 된다고 하지만 그것이 사회를 지탱하는 굉장히 중요한 뿌리에요." 
 
물질이 아닌 행복을 중시하는, 도시와는 다른 농촌농업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박 이사장의 이야기는 87년 체제의 한계 극복, 다시 말해 2017년 촛불광장이 열어준 새 시대의 과제와도 맞물렸다. 
 
"87년만 하더라도 사람들의 사고 중심이 경제에 있거나 소득에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경제가 성장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죠. 그때만 해도 우리가 고도성장을 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97년말 IMF 외환위기로 우리 사회는 그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어요. IMF와 세계은행의 권고(강요?)를 받아들이면서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한국사회를 강타한 거죠. 재벌은 급성장하는데 일자리는 생기지 않고, 가계부채는 천문학적으로 늘고, 소득불평등과 양극화로 인해 서민 대중의 삶이 급격히 악화하기 시작했어요. 극심한 경쟁으로 나만 살면 된다는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팽배해졌지요. 청년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을 ‘헬’(지옥)이라고 욕하기 시작했어요. 살기 힘든데 국가든 가족이든 친구든 기될 곳이 없는 외톨이 사회는 지옥이나 다름없어요. 
 
지금 우리는 저성장 시대에 살고 있어요. 저성장 시대에 가장 큰 문제는 옛날이 파이를 나눠먹는 시기였다면, 지금은 있는 파이를 서로 뺏어먹는, 싸움이 더 치열한 시기죠. 사회적 갈등 관계가 복잡해지고, 첨예해지고 있어요. 지금 우리는 성장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격차사회에 살고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박근혜의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거지요." 
 
행복정책의 필요성, 국민은 이미 안다 
 
박진도 이사장은 국민들의 관심사가 '행복'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사실을 박근혜 씨 역시도 알고 있었다고 설명을 이어갔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가 국민행복시대를 공약으로 당선된 것이에요. 성장이 아니라 행복을. 그런데 실제로는 박정희식 성장주의를 답습했지요. 국민들이 사기당한 거지요.  
 
성장주의는 기본적으로 있는 사람을 더 행복하게 하고 그게 넘쳐나서 그 국물로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한다는 이른바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 이론에 기초한 거예요. 이게 이제는 전혀 작동하지 않아요. 반면 행복정책은 ‘아직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맞춤형 정책을 해야 성공할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일자리가 필요한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고, 비정규직은 정규직이 되도록 하고, 아픈 사람은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도록 하고, 돈이 없어서 대학 못가는 사람이 없도록 하고, 좋은 먹거리와 환경으로 국민이 건강하도록 하는 게 국민행복정책이지요." 
 
박 이사장은 '농민이 불행하면, 국민이 불행하다'는 이야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국민 행복을 위해서는 농민이 행복해야 한다'는 말을 되새기자니 이번 19대 대선에서 농업‧농촌 문제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애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장에서 터져 나온 국민들의 목소리가 30년 전과는 달리 다양해졌다는 점은 꽤 긍정적인 신호로 읽힌다. 과제는 많고, 갈 길은 멀지만 말이다.
 
kakiru@pressian.com다른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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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여성 송환·이산가족 상봉 다룰 남북회담 즉각 재개"

"북 여성 송환·이산가족 상봉 다룰 남북회담 즉각 재개"송환촉구모임 등 35개 단체, "인도적 문제·남북관계 복원에 필요"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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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6.14  16: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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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센터.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범민련 남측본부 등 35개 시민사회단체는 14일 종로구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김련희씨와 북 여성종업원 12명의 무조건적인 즉시 송환을 촉구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최근 북한이 김련희씨와 여성종업원 12명의 송환없이 남측이 제기한 이산가족 상봉은 없다는 입장을 수차례 밝힌 가운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인권센터와 민가협양심수후원회를 비롯한 35개 시민사회단체는 14일 이들의 무조건적인 즉시 송환을 촉구했다. 

'평양주민 김련희씨 송환촉구 모임'과 '북 해외식당 종업원 기획탈북 의혹사건 해결을 위한 대책회의' 소속 35개 단체 대표들은 14일 종로구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들의 송환문제가 근본적으로 인도적 차원의 문제이며, 남북관계 복원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끊임없이 강제 유인납치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여성종업원 12명에 대해서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는 차원에서 자의에  의한 입국인지, 기획 입국인지를 분명히 밝히고 현재 이들의 생사와 안전에 대해 신뢰할만한 주체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서훈 국가정보원장이 여러 차례 밝힌 대로 여종업원 12명의 집단탈북(기획입국) 사건 전모에 대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며, 조사 결과에 따라서 책임자 처벌이 뒤따라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련희씨는 "동족을 상대로 왜 딸자식과 늙은 노부모를 떼어내는 패악을 저지르는가"라며 자신과 12명 여성종업원들의 즉시 송환을 요구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들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김련희씨의 경우 속아서 억지로 끌려와 6년이 넘는 시간을 피눈물 속에 살아왔다. 단식을 하면서 요구했고, 자살을 기도하고 스스로 '간첩'이 되어서 강제추방을 당해서라도 가족들 품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어느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백주대낮에 강제로 끌려온 나이 어린 12명의 여종업원들은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모른다. 끝내 자식의 생사조차 모른채 눈을 감은 부모도 있다"고 지적했다.

통일부가 지금도 김씨와 여종업원 12명에 대해 여전히 '본인 의사에 따른 탈북'이며, '이산가족 상봉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입장을 밝힌데 대해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발했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에 △김씨와 여종업원 12명의 조건없는 송환 △'기획탈북 의혹사건'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 △송환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남북적십자회담 등 남북대화 즉각 재개 △이산가족 상봉.장기구금 양심수 송환문제 해결 등 4대 요구를 제시했다.

교회협 인권센터 소장인 정진우 목사는 "아주 간단히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풀 수 있는 기초적이고 초보적인 문제"라고 말했다.

'기획탈북 의혹사건'의 경우 지난해 4월 8일 국회의원 선거를 코 앞에 두고 12명의 북한 해외식당 여종업원들이 한국 땅에 들어왔고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는데, 사건발생과 보도경위 자체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일에 국가정보원의 협력이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 되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12명 종업원들의 생사는 가려져 있다.

   
▲ 정진우 교회협 인권센터 소장.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정 목사는 "매우 복잡해 보이지만 지금 그들이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간단하게 조사하면 되는 일이고, 그동안 국가기관에 의한 어떤 잘못이 있었다면 사과하면 된다. 이들의 생사와 안전에 대해, 그리고 자의에 의한 입국인지 타의로 왔는지를  보편적 인권 기준에 입각해 확인하고 그 결과에 따라서 신병을 처리하면 된다"고 말했다. 

또 "잘못한 사람은 관계법에 의거해 처벌하고 재발하지 않도록 조처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김련희씨의 경우에는 '자기가 거주하고 싶은 곳에서 거주할 수 있다'는 세계인권 기준과 거주이전의 자유를 규정한 상식과 원칙에 따라서 거취를 결정한다면 너무도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 목사는 "이념적인 문제가 아니라 초보적인 인권적 문제이다.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며, "진실을 밝히고 진실에 따라서 조치를 취하면 그것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인권의 문제가 해결되고 또 감춰진 진실이 밝혀져서 다시는 인권탄압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지 않아도 되고 남북한의 경색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 인도적 토대가 될 것"이라고 적극적인 해결을 촉구했다.

이어 "대통령도 스스로 인권변호사 출신임을 여러 차례 강조했고 국민들의 기대도 높다. 통일부 장관도 정해졌으니까 통일부도 적극 나서서 이 문제의 진실을 밝히고 그것을 기초로 막혔던 남북관계도 풀어나가는 새로운 초석이 되기를 바란다"고 정부의 태도변화를 거듭 요구했다.

6년전 중국 친적집에 놀러갔다가 브로커에게 속아 한국에 들어온 김련희씨는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이었고 국정원 독방에서 석달만에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겠다'는 서약서를 쓴 후 하나원으로 넘겨졌고 그 후 지금까지 6년간 여권발급도 해주지 않는 한국에서 강제억류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미 자신의 사정이 외신을 통해 온 세상에 다 알려졌는데도 통일부가 아직도 '본인 의사에 따른 탈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언어도단이라며, "한 나라의 정부로서 어떻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는가. 동족을 상대로 딸자식과 늙은 노부모를 떼어내는 패악을 저지르려는가"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미니 인터뷰-평양시민 김련희 씨> "생 이산가족 만들면서 무슨 이산가족 상봉을 말하나"

   
▲ 평양시민 김련희 씨.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기자회견을 마친 김련희씨에게 근황과 최근 심경에 대해 묻고 들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평양의 집주소를 묻자 대뜸 주머니에서 '평양시민 김련희(金蓮希)'라고 쓰인 명함을 건넸다. 

어느새 대학을 졸업해 사회생활을 하는 딸을 안아보고 싶은 김 씨가 돌아갈 집은 '평양시 모란봉구역 긴마을 1동 17반 7층 3호'라고 적혀 있다. 

김씨는 실명을 앞둔 노모가 완전히 딸의 얼굴을 못 알아보기 전에 한번만이라고 보아야겠다고 눈물을 보였다. 

□ 최근 근황은?

■ 거주는 대구에서 하고 이런 저런 활동을 위해 서울에 다니고 있다.

□ 기자회견장에는 일부러 왔나?

■ 일주일 전에 서울에 왔다가 지하철에서 위경련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몸도 불편해서 대구로 내려가려고 했는데 오늘 기자회견 소식이 있어 모조건 참가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나왔다. 

□ 지금 건강상태는 어떤가.

■ 원래 간경화가 있어서 몸이 아픈 상태이다. 병원에서 주기적으로 진찰도, 치료도 받고 있는데 간의 40% 정도가 석회화, 섬유질화되어 굳어 있는 상태라고 설명들었다.  여기서 더 진행되면 위험하니까 최소한 이 상태는 유지해야 한다고 주의를 들었다. 

□ 남쪽에 와서 얻은 병인가.

■ 원래 북에서부터 간경화는 있었다. 

□ 그 치료를 위해서 나왔던 건가.

■ 그건 아니다. 평양에서도 간에 복수가 차서 6개월간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앓기도 했다. 조금 몸이 나아서 중국에 있는 친척집에 가려고 했는데 부모님이 아픈 몸으로 어딜 가냐며 심하게 반대를 했었다. 그때 내가 여권도 나오고 했으니 꼭 가겠다고 우겨서 여행을 가게 됐다. 그런데 중국에 간지 두달만에 복수가 재발이 되었다. 부모가 그토록 반대하는 길을 떠났다가 다시 복수가 찬 몸으로 돌아가는 것이 너무 미안했다. 그래서 치료를 받고 가겠다고 한 것이 브로커한테 속아 한국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다.

□ 최근 따님이 평양 려명거리 식당에 요리사로 취직했다는 소식이 있던데.

■ 기쁘기도 하지만 아팠다. 제 기억에는 17살 모습으로 남아있는데 이 아이가 어느새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 취직을 했지 하는 생각에... 

오랫동안 내가 따뜻한 밥 한번 못 해주고 사회 첫걸음 떼는데 옷도 한번 못사준 게 너무 죄스럽고 미안해서...어휴 이제 딸을 어떻게 만나지(하는 생각에) 그냥 좀 미안했다.

□ 최근 북에서 김련희씨와 여종업원 12명의 송환 문제를 남쪽에서 요구하는 이산가족 상봉문제와 연계하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 최근 남쪽 국회에서 8.15 이산가족 상봉 결의안을 채택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걸 두고 저도 잘 이해가 안되는 게, 그 이산가족이라는게 무언가. 그 사람들이 항상 이산가족을 부르짖지만 그들의 피눈물을 조금이라고 알고 하는 말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산가족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결국 연로해서 죽기 전에 한번만이라도 가족, 친척 얼굴을 보겠다는 그 간절함을 그들이 알까하는 것이다. 그들은 오직 정치적으로 이용할 때에나 그 카드를 쓰는 것이다. 

진정으로 이산가족의 슬픔을 알고 조금만이라도 진정을 안다면 더는 이산가족을 만들어서는 안되지 않나. 한쪽에서는 이산가족을 만들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산가족 상봉을 추구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언어도단 아닌가. 진정성도 없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하나의 카드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진정으로 이산가족의 아픔을 풀어주려는 마음이 하나라도 있다면 더는 이산가족을 만들지 말고 우리 12명과 저를 하루 빨리 보내는 것이 가장 진정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 문재인 대통령에게 한 말씀 한다면.

■ 나는 선거권이 없다. 여기서 밀항도 시도하고 위조여권도 만들어보려고 했다. 북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다보니 감옥까지 갔다 온 처지라 선거권이 없지만 할 수만 있다면 문재인 대통령에게 투표하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인권변호사였다는 말을 들었다. 제 옆에서 저의 아픔을 가장 잘 이해해주고 눈물을 닦아준 분들이 인권변호사들이다. 인권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고 변호를 해 오신 분이니까 저로서는 최고로 희망을 가지고 있고 기대감도 아주 크다. 

주변에는 실망하는 분들도 있던데 저는 끝까지 대통령을 믿고 싶다. 저의 간절한 소원은 제 가족, 부모님. 딸 자식과 함께 살고 싶은 것뿐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남북관계가 개선이 되고 통일이 앞당겨지는 그런 역사적 환경이 되자면 우선 첫걸음으로 12명 종업원과 저 김련희를 빨리 보내고 남북교류를 실현하는 것이 가장 큰 일이 아니겠나하고 생각한다.  이 일에 깊은 관심을 갖고 하루 빨리 긍정적으로 해결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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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 당국, 피살 직전 CIA가 김정남에게 거액 지급

말레이 당국, 피살 직전 CIA가 김정남에게 거액 지급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7/06/14 [23:46]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영자지인 뉴스트레이츠타임스가 2017년 2월 18일자 1면에 괴한의 공격을 받은 뒤 공항내 치료시설로 옮겨진 김정남의 사진을 공개했다.     ©자주시보

 

12일 러시아 관영언론 스푸트니크 보도에 따르면 북의 김정남(46) 추정인물이 피살되기 며칠 전 '정보 제공비'로 미국 국가정보국에서 12만 달러, 현재 환율로 한화 약 1억3천만원을 받았다고 일본 아사히 신문이 말레이시아 수사당국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와 관련해 러시아 한반도전문가 올레그 키리야노프 기자가 12일 prokorea.ru 사이트에 관련내용을 공개했다.

 

지난 2월 13일 김정남 추정인물이 국제공항에서 가족을 만나기 위해 마카오행 수속을 밟던 중에 갑자기 몸에 이상이 생겨 병원으로 후송 도중 사망하였다.

말레이시아 당국은 처음엔 심장마비라고 했다가 미국과 한국, 일본에서 피살의혹을 제기하자 돌연 방향을 바꿔 북이 VX독극물을 이용하여 암살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하여 북의 강력한 반발을 샀으며 상호 외교관을 소환하는 등 외교전쟁까지 벌인 바 있다.

 

이에 대해 스푸트니크는 "김정남 피살사건에 미 국가정보국이 개입했을 정황에 대해 어제 아사히 신문이 보도했다. 신문은 말레이시아 수사당국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김정남의 가방 안에서 엄청난 양의 현금이 발견됐다며 4개의 봉투 안에 100달러 지폐가 300 꾸러미씩 발견됐다고 전했다. 김정남이 죽는 순간 발견된 미국돈 전체 12만 달러는 신고 되지 않은 돈이었다. 당시 김정남은 말레이 주재 강철 북한대사의 여권을 소지했기 때문에 외교적으로 검사가 면제돼 세관을 통과할 수 있었다."며 이번 암살에 미국 CIA가 깊숙히 개입했음을 시사하였다.

 

특히 스푸트니크는 "말레이시아 당국은 김정남이 올해 2월 6일 입국했고 이후 8일간 체류하던 중 5일간 랑카위 휴양섬에 머물렀으며 2월 9일 랑카위 한 호텔에서 2시간 가량 2명의 미국인들과 대화를 나눈 정황을 밝혔다. 말레이 수사당국은 김정남과 대화를 나눈 미국인들이 미국 국가정보국과 관련있고 김정남에게 돈을 전달했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 돈은 김정남이 그들에게 제공한 정보에 대한 지불일 가능성이 있다"고 수사당국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일본 언론이 보도했다고 전했다.

 

결국 미국이 김정남 추정인물을 돈으로 매수하여 정보를 빼내고 나서 꼬리자르기 등 증거인멸을 위해 미국정보당국에서 암살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북이 알았다면 절대 죽이지 않고 어떻게든지 북으로 불러 자세한 진실을 조사하려 했을 것이다. 가장 확실한 범인이자 증인을 북 스스로 죽일 리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정보가 말레이 수사 당국에서 나왔기에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서 말레이 당국이 나중엔 북의 요구대로 시신도 북으로 인도해주고 양국 관계를 완전 정상화하는데 동의했었던 것으로 판단되다.

 

미국이 김정은 위원장 등 수뇌부 참수작전훈련을 전개하고 그 해외에 나와 있는 가족에게까지 이런 만행을 저질렀다면 북의 대미 적개심은 한 층 더 높아질 것이다.

어쨌든 테러를 반대하고 인권을 옹호한다던 미국의 주장이 얼마나 위선인지를 이를 통해 세계인들은 여실히 느끼게 될 것으로 보인다.

 

더불에 이번 사건은 아무리 많은 돈을 받게 되더라도 미국 정보당국의 정보원 즉 개가 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명백히 보여주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땅 곳곳에 박혀있는 친미정보원들도 이용가치가 사라지거나 미국이 그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사고사를 위장한 암살이 자행될 수 있음을 있지 말고 하루 빨리 개과천선하고 앞으로는 절대로 민족을 배신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기 조국, 자기 민족을 배신한 자를 어떻게 다른 나라에서 끝까지 믿어줄 수 있겠는가. 이는 미국 CIA의 기본 수칙의 하나라고 연합뉴스에서도 보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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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새로 쓰는 고조선 역사](2) 한반도 구석기 시대의 현재적 의미
  •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 승인 2017.06.13 13:25
  • 댓글 0
▲ 단양 금굴 유적

우리 역사 여행의 출발점은 한반도 구석기 시대이다. 이 시대는 우리 민족의 기원 문제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현대 한국인들과의 혈연적 인류학적 관계와 한반도 문명 탄생에서 차지하는 문화적 의미를 밝혀야 한다. 지금 수많은 구석기 유적·유물들이 발견됨으로써 이런 문제를 풀 수 있는 풍부한 자료가 쌓이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한반도 구석기 시대의 역사적 현재적 의미에 대해 눈을 감고 있다. 대다수 학자들은 “구석기 시대에 한반도 전역에 걸쳐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과 오늘날 한국인들과의 혈연적 연관성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혈연적 연관성이 없다면 당연히 문화적 계승성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구석기 시대를 연구하는가?

일본과 중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자기 나라 후기 구석기-중석기-신석기 시대 주민의 계승성을 인정하고 이로부터 자기 민족의 기원을 찾고 있다. 그리고 이를 너무도 당연하게 여긴다. 자기 민족의 기원을 자기 땅 안에서 찾으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사고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학계에서만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우리민족의 기원을 한반도 밖에서 찾으려는 헛된 노력들을 무수히 경주해 왔다. 우리 민족은 토착 한반도 사람이 아니라 신석기 시대 이후 그 언젠가 한반도 밖 그 어디로부터 흘러들어온 외래인(이주민 집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디를 찾기 위해 모질음을 쓰고 있다. 그리고 아직까지 우리 민족의 기원 문제를 속 시원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역사적 연원이 있다.

일제 관변 역사학자들은 왜 한반도 구석기 유적의 존재를 부정했나?

인터넷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발굴된 구석기 유적은 어디인가요?”를 치면 공주 석장리 유적이라고 나온다. 1964년 충남 공주 석장리에서 구석기 유적이 다량으로 발굴되어, 한반도에도 구석기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이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 한반도에서 구석기 유적이 처음 발굴된 것은 이보다 30년 앞선 1933년경이다. 당시 함경북도 종성군 동관리에서 철도공사를 하던 중에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었고, 1934년 일본인인 모리에 의해 발굴되었다. 그런데 왜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이 최초로 발굴된 구석기 유적이라고 알려졌을까? 일제 관변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이 동관리 구석기 유적을 깡그리 무시해버렸기 때문이다.

1920년대 일제 관변학자들은 당시까지 구석기 유적이 발굴되지 않은 것을 핑계로 한반도에는 구석기 시대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구석기 시대 한반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은 무인지경이었고, 기원전 2000년경 시베리아 지역에서 신석기 토기 문화를 갖고 있던 집단이 한반도에 들어오면서부터 비로소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우리 민족은 한반도가 원고향이 아니라, 외부에서 흘러 들어와 사는 이주민 집단이라는 것이다. 이때부터 우리 민족의 기원 문제가 왜곡되기 시작했다. 이후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우리 민족의 원 고향은 퉁구스라는 주장이 확산되었다. 청동기 문화를 가진 퉁구스족들이 한반도에 들어와 그 이전에 살고 있던 빗살무늬 토기인들을 몰아내고 한반도의 지배자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북방과 남방에서 흘러 들어온 사람들이 섞여 만들어졌다는 ‘혼혈기원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일제의 관변학자들에 의해 우리 민족의 기원문제가 의도적으로 왜곡되면서, 이른바 외래 기원론이 자리 잡았다. 그럼 일제 관변학자들이 우리 민족의 기원 문제를 의도적으로 왜곡시킨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조선민족 열등설을 퍼뜨려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려는 속셈이었다. 누구보다도 조상숭배 관념이 깊고 민족적 자긍심이 높은 우리민족의 고유한 민족정신을 말살시켜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우리 민족의 기원 문제를 왜곡시켜 놓아야 했다. 우리 민족을 어디서 흘러들어온지도 모르는 근본도 뿌리도 없는 민족으로 만들어 민족 자긍심을 무너뜨리고 민족적 열등의식을 확산시키려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열도와 한반도에서 모두 구석기 시대 유적이 발굴되지 않았는데도 유독 우리 민족만을 가리켜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이주민집단이라는 설을 조작해 냈던 것을 어찌 의도적 왜곡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2단계 주민교체설’로 진화한 우리민족의 기원문제

일제 강점기에는 구석기 유적이 발굴되지 않았기 때문에 외부유입론과 주민교체설이 퍼질 수 있었다. 그런데 1964년을 전후해 남과 북에서 각각 구석기 유적이 발굴되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수백 군데 이상의 구석기 유적이 발굴되었다. 또한 100만 년 전 전기 구석기 유적으로부터 중기 구석기 유적, 후기 구석기 유적이 체계적으로 발굴되었다. 그렇다면 구석기 시대에 한반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었다는 것을 근거로 한 외부유입론과 주민교체설은 마땅히 파산됐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 반대로 흘러갔다.

해방 이후 우리 민족의 기원 문제가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부터였는데,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우리 민족 외부기원론의 틀에서 한발 짝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1970년대에 들어서 외부기원론은 한반도 ‘주민 2단계 교체설’로 진화했다. 그렇다면 구석기 유적이 다수 발굴된 조건에서 어떻게 외부기원론이 사라지지 않고 진화할 수 있었을까? 주민 2단계 교체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구석기 시대에 한반도에 사람이 살고 있긴 했지만, 빙하기가 끝나면서 어디론가 흩어져 가고, 한반도에는 다시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지경으로 바뀌었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근거로 내세웠다.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주장하는가 하고 묻자 구석기 시대는 기원전 1만 년 전에 끝났는데, 한반도 신석기 문화는 기원전 3000년경에 시작되었으므로, 7000년간의 시간적 공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한반도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신석기 문화를 개척한 주체였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신석기 시대에 들어서 기원전 3000년경 시베리아 지역에 살고 있던 고아시아족들이 한반도에 신석기 문화를 갖고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스키타이 계통의 청동기 문화를 소유한 퉁구스인들이 한반도에 밀려들어 고아시아족들을 밀어내고 한반도에 지배자가 되었으며, 이들이 오늘날 한반도인들의 직접적 조상으로 된다는 것이 바로 2단계 주민교체설이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지난 2004년 11월25일 문화일보에 기고한 “청동기주역 ‘퉁구스 예맥족’이 기원”이란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한민족은 한 번도 남을 침범한 일이 없는 것을 자랑처럼 얘기하지만 ‘우리는 한반도에서 살고 있던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한 고아시아족을 섬멸시키고 이 땅에 민무늬토기와 고인돌, 청동기를 갖고 들어온 위대한 퉁구스 예맥족이다’라고 쓰는 게 한민족의 기원에 대한 정확한 고고학적인 해석이 됩니다”라고 썼다. 우리의 선조들이 양키들처럼 인종청소를 하고 이 땅에 정착했다는 엄청난 주장을 한 것이다.

▲ 상원 검은모루 유적

파산된 2단계 주민교체설

한반도 주민 2단계 교체설을 비롯한 다양한 외부기원론은 오로지 주관적 추측과 일방적 주장에 불과할 뿐 아무런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간의 인류학과 고고학의 새로운 발견과 발전을 통해 외부기원론이 제기한 대부분의 가정과 전제들이 실증적으로 명백히 부정되었다.

2단계 주민교체론의 핵심전제는 한반도 신석기 시대의 시작이 기원전 3000년경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 신석기 시대의 출발 연대는 발굴된 신석기 시대 유적에 의거하면 기원전 3000년경이 아니라 기원전 8000년경에서 1만년 경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한반도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의 시간적 공백은 사라졌다. 또한 한반도 신석기 시대의 시작이 시베리아 신석기 시대의 시작보다 연대가 더 빠르다는 게 밝혀졌다. 그러므로 시베리아 고아시아족이 내려와 살기 시작했다는 가설은 이제 설자리가 없다. 제주 고산리 신석기 유적의 경우에는 신석기 시대의 상징인 토기와 함께 후기 구석기 시대의 석기가 함께 출토됨으로써 한반도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토기를 발명하면서 신석기 시대를 개척했다는 것이 유물로 확증되었다.

청동기 문화를 소유한 퉁구스 계열의 사람들이 한반도에 들어와 신석기 주민들을 몰아내고 현대 한반도인들의 직접적 조상으로 되었다는 주장 역시 허물어졌다. 한반도 청동기 문화가 스키타이(퉁구스)계열의 청동기 문화보다 훨씬 앞섰다는 것이 유적 유물로 밝혀졌다. 스키타이 청동기 문화는 기껏해야 기원전 12~13세기를 넘지 못하는데, 한반도 청동기 시대의 출발은 우리 학계에서 기원전 20세기 또는 기원전 15세기로 편년됨으로써 스키타이 청동기 보다 앞섰다. 더욱이 한반도 청동기 문화는 다른 지역의 청동기와는 문화 종태가 매우 다른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라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한반도 신석기인들과 청동기인들이 서로 다른 주민이라는 주장의 유일한 근거로 제시된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와 청동기 시대의 무문토기는 주민집단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른 문화의 변화와 발전을 의미한다.

구석기 시대의 역사적 의미

우리나라 구석기 시대는 밝혀진 유적 유물로 볼 때 100만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이처럼 이른 시기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곳은 세계에서 몇 군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반도를 인류 발상지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 발굴된 100만 년 전 전기 구석기 유적은 상원 검은모루 유적이다. 한반도 전기 구석기 유적은 이외에도 단양 금굴 유적(70만 년 전), 평남 순천 동암동 유적(88만 년 전),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유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기 구석기 유적뿐만 아니라 중기를 거쳐 후기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의 구석기 유적들이 체계적으로 발굴되고 있으며, 수적으로도 전국적으로 수백 군데 이상의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이로써 구석기 시대에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람 뼈 화석도 체계적으로 발굴되었다. 화대사람(30만 년 전), 역포사람(10만 년 전), 덕천사람(10만 년 전), 용곡사람(5만 년 전), 승리산사람(4~5만 년 전), 홍수아이(3~4만 년 전), 만달사람(1만5천 년 전) 등 30만 년 전 중기 구석기 시대 초기 화석에서부터 10만 년 전 중기 구석기 시대 후기를 거쳐 4~5만 년 전 후기 구석기 시대, 1만5천 년 전 중석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화석들이 체계적으로 발굴되었다. 이것은 한반도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혈연적 계승성을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인류 화석들에 대한 과학적 연구에 따르면 이들 사이의 인류학적 계승성이 확고히 밝혀졌다고 한다. 그리고 제주 고산리 유적 등을 통해 한반도 후기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의 연결고리도 밝혀졌다. 우리나라도 일본 중국처럼 후기 구석기–중석기–신석기 시대의 주민계승성이 과학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 역포 사람
▲ 승리산 사람
▲ 만달 사람

우리 민족의 기원 문제를 밖으로부터 찾으려는 외래유입설은 앞에서 서술한 바대로 이미 파산했다. 그렇다면 이제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안에서 찾아야 한다. 자기 민족의 기원을 자기 나라에서 찾으려는 것은 상식이며, 정상적인 사고이다. 한반도 신석기인들은 그 어떤 외부로부터 이주한 이주민이 아니라, 한반도 구석기 문화를 창조했던 사람들의 직계 후손들이다. 또한 한반도 신석기 문화는 외부에서 유입된 이주민들에 의해 이식된 문화가 아니라 한반도 후기 구석기인들에 의해 창조된 독창적인 토착 문화이다. 그러므로 한반도 문명 탄생의 근원을 찾아가다 보면 한반도 구석기 시대에 도달한다. 우리 민족은 한반도를 원 고향으로 하는 토착민들이며,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는 한반도의 유구한 구석기 시대 역사와 문화의 토대 위에서 형성되었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한반도 구석기 문화는 우리 민족에게 인류학적 문화적으로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박경순 우리역사 연구가

- 1956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1977년 서울대 동양사학과에서 수학했다.
- 대학 2학년을 중퇴하고 인천 등지에서 현장활동하다 1985년 구속되었다.
- 이후로 노동운동, 민주화운동, 진보정당운동에 몸담다가 1998년 영남위원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4년9개월간 복역했다. 
- 2008년 민주노동당 부설 새세상연구소 부소장, 2012년 통합진보당 부설 진보정책연구원 부원장 등을 역임했다.
- 고조선 역사와 선사시대를 아우르는 책 <새로 쓰는 고조선 역사>는 40년 만에 다시 역사학도로 돌아온 그의 첫 번째 결과물이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출발점이다.
- 진보운동 관련 저서로는 <21세기 진보적 민주주의>(새새상연구소), <마녀Vs마녀>(아고라) 등이 있다.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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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역 사고가 또다시 인천공항 ‘셔틀트레인’에서도 벌어졌다.

단순한 실수가 아닌 원청-하청이라는 구조적 모순에서 발생한 사고
 
임병도 | 2017-06-14 08:31:1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2016년 5월 28일 서울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승강장에서 스크린도어를 혼자 수리하던 외주업체 김모군이 전동열차에 치여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김모군의 죽음에 많은 시민들이 안타까워했고, 서울시는 ‘안전’을 우선으로 메피아 등을 근절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김모군의 죽음이 일 년도 되기 전에 인천공항 ‘셔틀트레인’에서 또다시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지난 5월 20일 새벽 1시 30분경 인천공항 터미널과 탑승동 사이를 오가는 셔틀트레인의 탑승동 변전실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나 작업 중인 노동자 3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중화상자 1명, 경화상자 1명, 연기흡입자 1명)

이번에 발생한 인천공항 셔틀트레인 사고는 구의역 사망사고와 너무나 유사합니다. 두 사건의 유사성과 함께 문제점이 무엇인지 조사했습니다.

○구의역 사고: 2인 1조 작업 대신 혼자서 작업할 수밖에 없었던 열악한 노동 환경
▷인천공항 셔틀트레인 사고: 업무량은 2배로 늘었지만, 오히려 작업자는 줄어든 상황

사고가 발생하면 매번 ‘노동자 부주의’ 내지는 ‘매뉴얼을 지키지 않아서’라는 발표가 나옵니다. 구의역 사고 당시에도 2인 1조 작업 매뉴얼을 지키지 않았다는 ‘책임 전가’ 발표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매뉴얼을 따라 작업을 했다면 ‘고장 접수 1시간 이내 도착’ 이라는 계약 조항을 어겨 문책을 당할 상황이었습니다.

인천공항 셔틀트레인 변전소 사고 당시 작업자들은 제2여객터미널 관련 업무가 증가해, 업무량이 2배로 늘어난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5명 근무에서 최근 1명이 퇴사하여 4명이 작업을 했고, 관제실 업무로 1명이 다시 빠져 3명이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원래는 22시 40분부터 작업을 할 수 있었지만, 최근 1년 동안에는 제2여객터미널 작업, 시운전 등으로 작업투입시간이 새벽 01시로 변경됐습니다.

숙련된 노동자는 줄어들고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은 짧아졌지만, 작업은 더 빠르게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야간 휴식도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고는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구의역 사고: 열차가 들어오는 위험 속에서 승강장 작업 
▷인천공항 셔틀트레인 사고: 전기가 흐르는 상태에서 변전실 작업

 

▲부산지하철 정규직 작업 현장에서는 전기 작업은 무조건 단전이 확인되지 않으면 작업을 진행할 수 없게 됐다. 그러나 인천공항공사의 하청인 부산교통공사 소속 계약직 노동자들은 활선 상태에서 작업을 수행했다. ⓒ부산지하철노조

 

구의역 사고에서 김모군은 혼자서 작업을 하면 열차가 들어와도 비상시 구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빠르게 작업을 끝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승강장에 열차가 들어오는 위험 속에서 작업을 강행했습니다.

인천공항 셔틀트레인 변전실 폭발 사고의 가장 큰 원인은 ‘활선'(전기가 공급되고 있는 상태) 상태에서 작업했기 때문입니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 ‘단전'(정전) 상태에서 작업 해야 했지만, 작업자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부산지하철에서 정규직 작업자들은 ‘단전’이 확인되지 않으면 아예 작업을 진행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천공항 셔틀트레인 하청 업체인 부산교통공사 소속 계약직 작업자들은 ‘활선’ 상태에서 작업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단전’상태의 작업을 인천공항공사가 승인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입니다.

구의역 사망사고나 인천공항 셔틀트레인 변전실 폭발 사고 모두 안전을 무시하고, 노동자를 위험 속에서 작업을 시켜 벌어진 셈입니다.

○구의역 사고: 안전을 외주 용역에 맡기다.
▷인천공항 셔틀트레인 사고: 안전을 기간제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떠넘기다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사망한 김모군은 외주업체 직원이었습니다. 안전을 위해 설치한 스크린도어 시스템은 설치 때부터 고장이 빈번하게 일어나 항상 위험에 노출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전을 외주 용역으로 넘기면서 더 위험에 빠졌습니다.

인천공항 셔틀트레인 운영과 유지보수 용역은 부산교통공사가 맡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체 직원 62명 가운데 부산교통공사 정규직 관리자는 2명이고, 나머지 60명은 부산교통공사에서 채용한 기간제 비정규직입니다.

사고가 발생한 탑승동 변전실의 전원을 차단하려면 인천공항공사의 허가가 있어야 합니다. 변전실의 전원 공급 및 차단을 수행하는 작업은 한전산업개발이라는 공항공사의 또 다른 하청업체가 수행하고 있습니다.

하청에 하청, 기간제 계약직 노동자가 작업하는 이 복잡한 구조 속에서 과연 안전이 제대로 담보됐을까요?

과도한 업무량과 불공정 계약조건, 그러나 경영 효율이라는 명분 속에서 하청과 계약직 노동자들의 안전은 언제나 무시됐습니다. 다단계 하청 구조 속에서 안전은 우선순위가 아니었습니다.

 

▲ 19세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가 스크린도어 수리작업 도중 사망한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현장. 많은 시민들이 김모군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 근본적인 안전대책을 요구했다. ⓒ오마이뉴스 권우성

 

구의역 사고와 인천공항 ‘셔틀트레인’ 사고는 단순한 실수가 아닙니다. 원청-하청이라는 구조적 모순에서 발생한 사고입니다.

인천공항공사- 셔틀트레인 유지 보수 하청업체, 별도의 전기 분야 하청업체 등 복잡한 구조 속에서는 절대 빠르고 확실한 조치와 의사소통이 불가능합니다.

서울시는 구의역 사고 이후 안전 분야의 외주를 줄이고 있습니다. 외주업체의 비정규직을 직영화를 통해 정규직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울을 제외한 다른 곳은 여전히 안전 불감증에 빠져 있습니다.

인천공항 셔틀트레인의 위탁운영을 맡고 있는 부산교통공사는 부산지하철의 외주화, 인력 감축, 노후차량 방치 등을 통해 안전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부산교통공사는 부산지하철의 외주화를 반대하는 부산지하철노조원 (노조 위원장 이의용) 40명을 중징계하고 (해고 7명, 강등 18명, 정직 처분 15명) 손해배상청구 소송까지 제기했습니다.

자사의 지하철조차 위험에 방치한 부산교통공사가 하청 받은 인천공항 ‘셔틀트레인’을 안전하게 운영할 수 있을까요?

돈을 이유로 안전을 외주화하는 구조가 사라지지 않는 한, 시민과 노동자의 생명은 언제든지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서울 구의역, 인천공항 셔틀트레인, 그다음은 어디일까요?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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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석탄화력 폐쇄로 지역주민 고통 던다

이수경 2017. 06. 13
조회수 716 추천수 0
 
전국 석탄화력 절반 모인 충남, 미세먼지 건강과 재산피해 심각
수도권 값싼 전력 공급 위해 희생당한 지역의 불공정 극복 의미
 
01057949_R_0.JPG» 낡은 석탄화력발전소의 가동을 중단하는 것은 단지 미세먼지 배출량을 몇 % 줄인다는 것 이상을 뜻한다.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당한 지역의 고통을 줄여 준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겨레 자료사진.
    
6월 1일 노후 석탄화력발전소 8기가 중단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세 번째 업무지시로 올해는 6월 한 달간, 내년부터는 미세먼지가 심한 봄철 3~6월 동안 시행될 예정이다. 이번 조처로 줄게 될 미세먼지가 약 1~2%에 불과하다거나, 석탄화력발전이 엘엔지(LNG) 발전으로 대체되면 전기료 인상은 불가피하다는 걱정이 나온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한가해 보일만큼 노후 석탄화력발전 문제는 이미 심각하다. 
      
미세먼지를 줄이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첫 걸음, 노후 화력발전중단
 
이제 봄이면 미세먼지가 세계보건기구 기준(미세먼지(PM10) 50μg/m3, 초미세먼지(PM2.5) 25μg/m3)은 물론 그보다 훨씬 느슨한 한국기준(미세먼지 100μg/m3 초미세먼지 50μg/m3)조차 넘지 않는 날이 드물다(■ 관련 기사무서운 미세먼지, 모르는 게 더 많아 무섭다). 우리나라 미세먼지 농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터키를 제외하고 가장 나쁘다(■ 관련 기사한국 미세먼지 농도 날로 급증…OECD 국가 중 최악 수준). 
 
그림1. 에너지원별 연도별 발전량
      
미1-1.jpg
* 국가통계포털, 에너지원별 발전량 자료 재구성 
* 2007년부터 석탄화력발전량 증가 
 
우리나라 미세먼지가 이렇게 심각해진 요인의 하나로 2007년부터 늘어난 석탄화력발전이 주목받고 있다(그림 1). 2011년 석탄화력발전이 만들어낸 미세먼지는 전체 배출량의 3.4%이다. 여기에 석탄화력 발전에서 배출되는 질산화물(NOx, 전체 배출량의 10%), 이산화항(SO2, 전체 배출량의 16%)도 2차 미세먼지를 만든다. 초미세먼지의 41%가 이렇게 만들어진 2차 미세먼지이기 때문에 석탄화력발전이 미세먼지에 기여하는 실제 수준은 미세먼지 배출량 3.4%에 2차 미세먼지까지 더해져 훨씬 크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국내의 석탄화력발전소에서 나오는 미세먼지로 인해 한 해 최대 1600명이 조기 사망하고 2021년까지 계획 중인 신규 석탄화력발전소를 모두 지으면 매년 1100명에서 2800명이 조기 사망할 것이라는 보고가 있다.1)
    
석탄화력발전 중에서도 특히 노후 석탄화력발전은 석탄발전 설비 비중의 10.6%에 지나지 않지만 오염물질 배출량 비중은 19.1%를 차지한다. 따라서 재난에 가까운 봄철 미세먼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른 석탄발전에 비해 두 배 가깝게 오염물질을 배출하는 노후 석탄발전의 가동 중단이 시급했다. 미세먼지의 또 다른 주요요인인 경유차는 천만대 가까운 배출원을 규제해야만 하는데 비해 노후석탄화력발전소는 10기의 배출원을(이번에는 8규제하는 것으로도 우선 발등의 불은 끌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의 생사를 좌우하는 석탄화력발전
 
05605135_P_0.JPG» 2016년 7월 당진시 송전선로 석탄화력 저지 범시민대책위원회'와 그린피스, 녹색연합 등 환경운동단체 활동가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충남 당진에 계획 중인 당진에코파워 석탄화력 발전소 계획의 백지화를 요구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석탄발전의 대기오염문제는 먼저 지역에서 터져 나왔다. 충남에는 국내 59기 석탄화력발전 중 절반 가까운 29기가 몰려있다. 특히 그 가운데 10기를 차지하며, 설비용량을 합치면 6040㎿(메가와트) 규모의 당진 화력발전소가 가동되고 있는 당진은 세계 최대 규모의 화력발전 단지다. 충남, 특히 당진에서는 석탄화력발전소와 송전망으로 인한 재산 피해도 피해지만 미세먼지, 중금속과 같이 석탄화력발전에서 나오는 오염물질로 인해 심혈관계, 호흡기 질환, 암 발생의 증가로 건강 피해를 심각하게 겪고 있다. 
      
2016년 3월 충남도와 단국대가 실시한 건강조사에서 보령화력발전소·태안화력발전소 인근 주민 150명의 혈중 카드뮴 평균 농도가 다른 지역 주민보다 1.8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도 기존의 6040㎿에 더해 1060㎿급 당진에코파워까지 건설에 돌입하자 당진시를 비롯해 충남도까지 반대에 나서면서 중앙정부와 마찰을 빚었다(■ 관련 기사안희정 지사 “미세먼지 해결 위해 전력 패러다임 전환”).
  
지역주민과 중앙정부, 발전사뿐 아니라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사이의 갈등마저 커지면서 석탄화력발전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건강피해에 더해 커다란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충남지역 발전시설에서 배출되는 대기오염물질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우리나라 총 사회적 비용의 37.5%, 7700억원(2010년 기준)이나 된다고 하니 발전시설을 둘러싼 갈등이 얼마나 심각한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2)
   
00548406601_20160111.JPG» 신당진 변전소가 위치한 충남 당진시 정미면 사관리 마을의 송전철탑 모습. 지역주민과 환경단체는 공공노조가 공익을 위해 손을 맞잡기를 원한다. 당진시
  
석탄화력발전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재산과 건강 피해로 시작되지만 결국은 지역간 형평성의 문제로 격화되곤 한다. 충남의 석탄화력발전이 수도권의 미세먼지 피해에 중요 요인이라는 떠들썩한 뉴스 뒷면에는 충남이 수도권에 전기를 싼 값에 공급하기 위해 석탄화력발전으로 인한 재산과 건강 피해를 감수하고 있다는 현실이 있다.
      
2016년 4월 감사원 감사 결과보고서를 보면, 충남지역 석탄화력발전소의 수도권 대기오염 기여율은 미세먼지(PM10)가 3~21%, PM2.5가 4~28%에 이른다. 충남지역 석탄화력발전소가 수도권 미세먼지에 최대 28%까지 기여한다는 얘기다.3) 그러나 충남은 수도권에 미세먼지만 공급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한 전기의 50분의 1도 생산 못하는, 전력자급률이 고작 1.78%인 서울 등 수도권에 전기를 공급하는 것도 충남이다(표 1). 
      
표 1. 2014 행정구역별 전력자급률
 

 

발전량

사용량

자급률

서울

799,391

45,018,862

1.78

부산

37,424,885

19,980,898

187.30

대구

513,395

14,858,786

3.46

인천

73,425,270

22,578,048

325.21

광주

399,737

8,197,276

4.88

대전

151,727

9,102,524

1.67

울산

9,961,740

30,115,124

33.08

경기

28,777,547

102,180,707

28.16

강원

10,011,236

15,778,145

63.45

충북

808,047

22,179,261

3.64

충남

122,694,924

47,294,961

259.42

전북

7,618,852

22,297,413

34.17

전남

77,493,308

31,722,944

244.28

경북

73,125,603

46,016,364

158.91

경남

75,684,560

33,435,157

226.36

제주

3,080,679

4,220,090

73.00

세종

- 

2,437,032

* 전력자급률=전력사용량/발전량*100
* 국가통계 포털, 행정구역별 용도별 판매전력량, 전력통계정보시스템, 지역별 발전량 자료 재구성
      
충남의 석탄화력발전이 수도권 미세먼지의 주요 공급원이 된 이유가 수도권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서인데, 이 과정에서 충남과 당진 등 석탄화력발전소 인근 지역이 겪어야 하는 미세먼지 피해는 심각하다. 석탄화력발전이 본격적으로 늘어난 2007년 이후 석탄화력발전이 밀집해 있는 충남, 전남, 경남, 강원 등에서는 총부유분진과 미세먼지가 크게 늘었다(그림 2). 2016년 국립환경과학원과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항공조사를 통해 충남 상공에는 서울보다 최대 2배 이상 많은 미세먼지가 떠있다고 확인했다.1) 석탄화력발전 지역의 환경피해는 수도권이 체감하는 환경피해와 견줄 수 없는 지경이다.
 
그림 2. 지역별 연도별 미세먼지(PM10) 배출량(단위: 톤)
 
미2-1.jpg
* 국립환경과학원 국가대기오염물질배출량서비스 자료 재구성
 
기후변화 대책의 시작은 석탄화력발전의 중단으로부터
 
석탄화력으로 인한 피해가 해당지역, 우리나라만의 문제도 아니다. 파리기후협정에 따라 온실가스를 줄여나가야 하는 우리나라에서 당장 싸다고 석탄화력발전을 확대하겠다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석탄은 전 세계에서 화석연료 연소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의 44%를 차지하는 가장 큰 단일 배출원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석탄발전이 늘기 시작한 2007년부터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의 배출도 같이 늘고 특히 석탄화력발전이 밀집한 충남지역에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크게 늘기 시작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4)(그림 3)
 
그림 3. 지역별, 연도별 이산화탄소 배출량(단위: 톤)
      
미3-1.jpg
* 장영기 수원대 환경공학과 교수 자료 재구성
 
전세계가 기후변화 대책으로 석탄발전을 줄여가는 가운데 우리나라만 석탄발전을 늘리면서 세계적인 추세에 역행하고 있다. 결국 2016년 국제에너지기구(IEA)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일인당 이산화탄소 배출 증가율이 가장 높은 나라로 우리나라를 지목했다. 파리협정에서 탈퇴하면서 미국이 국내외의 비난에 직면하고 국가의 위상이 추락한 것처럼 우리나라도 경제규모나 탄소배출 규모에 걸맞은 책임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국제적 망신과 불신을 자초하고 있다. 
 
우선 노후 석탄발전 중단을 시작으로 신규 석탄발전 계획의 철회를 포함해 석탄발전을 축소해 나가겠다는 정부 계획에 일각에서는 지역과 국가경제에 큰 손실을 끼치고 전기요금이 인상될 것이라는 걱정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석탄화력발전으로 지역주민이 겪고 있는 환경과 건강피해로 인한 경제적 손실, 수도권지역의 대기오염대책에 필요한 환경비용, 기후변화 대책 비용과 같은 국가적 손실에 더해 공기청정기 구입과 같이 환경오염을 개인적으로 회피하기 위해 드는 비용을 더하면 하루라도 빨리 석탄발전을 멈춰야 할 경제적 이유가 넘친다.
 
512 (2).jpg
      
6월 1일 노후 석탄화력발전을 중단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노후 석탄화력발전 중단이 미세먼지 저감에 효과가 없었다는 섣부른 진단이 나온다. 이러한 진단의 진위는 차치하고라도 적어도 노후화력발전의 중단이 해당 지역주민에게 가하던 살인적인 환경피해를 멈추게 했다는  사실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전국적인 혹은 수도권의 미세먼지 오염을 줄이기 위해서만 노후 화력발전의 중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더 시급하고 더 마땅한 건 지역이 감당해내야 하는 살인적인 환경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노후 화력발전이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노후 석탄화력발전 중단이라는 이번 대통령 업무지시의 가장 큰 의의는 개발의 이익에는 동떨어져 있으면서도 개발로 인한 피해를 가장 먼저 가장 심각하게 견뎌야 하는 석탄발전지역이 감내해온 부정의를 바로잡는다는 데 있다.
  
이수경/ 환경과 공해연구회 회장   
                                                    

1) 손민우 외, 침묵의 살인자, 초미세먼지, 그린피스 동아시아사무소, 2015

2) 이인희, 충남의 발전관련시설에 의한 환경피해 분석, 충남발전연구원, 2014

3) 허핑턴포스트, 2017년 4월 7일, OECD 이산화탄소 증가율 1위인 한국이 석탄발전소 신설을 계획하고 있다

4) 허핑턴포스트, 2017년 4월 7일, OECD 이산화탄소 증가율 1위인 한국이 석탄발전소 신설을 계획하고 있다 “ 국제에너지 기구(IEA)에 따르면 한국의 석탄연료 연소로 인한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1990년 9000만톤에서 2014년 3억380만톤으로 무려 237.4% 늘어났다. 경제협력기구(OECD) 국가 중 압도적인 1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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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장관 후보자 조명균의 '화려한 귀환'

 

MB정부서 보직 못 받고 퇴직... "문재인 정부, 남북관계 원상복귀 의지 표현"

17.06.13 17:16l최종 업데이트 17.06.13 21:47l

 

 조명균 통일부 장관 후보자가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 남북회담본부로 들어서고 있다.
▲  조명균 통일부 장관 후보자가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 남북회담본부로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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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화려한 귀환'이라 할 만하다. 

조명균(60) 통일부 장관 후보자는 김대중 정부 말기부터 노무현 정부까지 현장에서 대북 정책을 집행한 핵심 실무책임자였다.

2000년 6월 1차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관계가 본격 상승기에 들어갔던 2001년부터 교류협력국장, 경수로사업지원기획단 정책조정부장, 통일부 개성공단 사업지원단장을 맡아 북한과의 실무 협상을 이끌었다.

개성공단 착공·남북철도 연결 등 실무 대북협상 주도

 

당시 통일부 장관이었던 정세현 전 장관은 "조 후보자가 개성공단 건설, 남북철도연결 문제 등에 대해 북한과 실무협상을 많이 했는데 참 잘했다, 조용조용하게 하면서도 꼭 성과를 냈다"며 "실제로는 장관인 나보다 일을 더 많이 한 사람"이라고 기억했다.

2002년 4월 통일부 교류협력국장 시절에는, 당시 부시 미국 대통령의 '북한은 악의 축' 발언 등으로 남북관계가 악화된 상황을 풀기 위해 김대중 대통령이 파견한 '임동원 특사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같은 성과와 활동을 인정받아 2006년 7월, 대북정책의 핵심인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비서관을 맡은 그는 2007년 10월에 치러진 2차 남북정상회담에 깊게 관여했다. 2007년 8월 김만복 전 국정원장과 함께 육로로 평양을 방문해 북한의 고 김양건 통일전선부장과 회담 의제를 조율했다. 10․4 남북정상회담 합의문 초안을 다듬었으며, 정상회담 당시에는 기록자로 배석해 정상회담 대화록을 작성했다. 
 

디지털녹음기에 기록된 2007남북정상회담 2007년 10월 4일 평양 백화원영빈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회담하는 모습. 노무현 대통령 뒤쪽에서 조명균 청와대 외교안보정책조정비서관이 책상위에 올려 놓은 디지털녹음기로 회담 내용을 녹음하며 동시에 메모를 하고 있다.
▲ 디지털녹음기에 기록된 2007남북정상회담 2007년 10월 4일 평양 백화원영빈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회담하는 모습. 노무현 대통령 뒤쪽에서 조명균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비서관이 책상위에 올려 놓은 디지털녹음기로 회담 내용을 녹음하며 동시에 메모를 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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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4개월 뒤인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이런 '공헌'은 정치인 출신이 아닌 직업공무원이었음에도 그의 발목을 잡았다. MB정권이 '햇볕정책'의 산물인 6․15선언과 10․4선언을 '애물단지' 취급하면서, 조 후보자는 보직을 받지 못하고 교육대기 상태에 있다가 결국 2008년 10월 사표를 내고 통일부를 떠났다. 1980년 행시 23회로 통일부(당시는 국토통일원)에 들어온 지 28년 만이었다. 당시 통일부 내에서는 "장래의 장관감이 날아갔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그 뒤 천주교 재단인 동성고 출신인 그가 성당 일을 중심으로 신앙 활동에 매진한다는 소식이 전해질 뿐 별다른 외부활동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새누리당이 일으킨 'NLL(서해북방한계선) 포기' 논란이 휘말렸고, 결국 2007년 10월부터 2008년 2월까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임의로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폐기하고 봉하마을로 무단 반출한 혐의(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 및 공용전자기록 등 손상) 등으로 2013년 11월 백종천 전 청와대 안보실장과 함께 불구속기소 됐다. 

하지만 1·2심 재판부로부터 "문제가 된 대화록 초본은 대통령기록물이 아니"라며 무죄선고를 받았다. 아직 대법원 판결이 남아있으나, 결과가 뒤바뀔 가능성은 작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그가 장관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으나 가능성이 낮다는 평이 많았다. 대통령 선거운동에도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통일부 주변에서는 "그는 사실상 종교인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기도 했다. '9년간의 공백'에 대한 우려였다.

그로서는 통일부 퇴직 후 9년 동안 시련과 우여곡절 끝에, 자신이 핵심 실무를 맡았던 대북정책 집행의 최고 책임자로 복귀하는 셈이다. 그는 첫 행시 출신 통일부 장관 후보이기도 하다. 

10․4 선언 주도 세력의 귀환... 8년 전 문 대통령 "10․4 선언, 말라죽지 않을 것"

조 후보자의 복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때 '"버림받은 선언" "말라 비틀어지고 있다"고(2008년 10월 1일, 10․4선언 1주년 기념식 연설) 비애감을 나타내기도 했던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 주도 세력의 부활과 궤를 같이한다. 2차 남북 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을 맡았던 문재인 비서실장은 대통령이 됐고, 막후 협상 등 전 과정을 주도한 서훈 국가정보원 3차장은 국가정보원장을 맡았다.

노 전 대통령이 2008년 10․4선언 1주년 기념식에서 비애감을 표현한 3일 뒤인 10월 4일 당시 노무현재단 이사장이었던 문 대통령은 "10.4선언이라는 나무는 결코 그냥 말라죽지 않을 것" 이라고 했다. 이제 9년 만에 대통령으로서 이 다짐을 이행할 구체적인 라인업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조 후보자는 청와대의 내정 발표 몇 시간 뒤인 13일 오후 '개성공단 복원 방안'을 묻는 기자들에게 "구체적인 것들은 좀 면밀히 파악하고 나중에 다시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겠다"는 전제하에 "개성공단은 다시 재개되어야 한다"는 의지를 밝혔다.

정세현 전 장관은 조명균 후보자 내정을 "남북관계를 2008년 이명박 정권 집권 이전 상태로 원상 복귀시키려는 문재인 대통령의 의지 표현으로 해석된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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