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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항쟁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6월항쟁 30년, 제26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 열려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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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6.10  17:2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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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6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위원회'는 이날 오후 2시30분 서울시청광장에서 '87항쟁 30년, 촛불혁명 원년, 제26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를 열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반 세기가 넘는 민주화 투쟁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발호하던 독재세력에게 마지막 철퇴를 가하였으며, 이 땅의 민주와 민생, 평화와 통일을 향한 투쟁의 노정에 금자탑으로 우뚝 섰다."

6월항쟁 30주년. 촛불혁명으로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민주화의 꽃을 피운 10일, 민주와 통일을 위해 산화한 열사들의 추모자리는 그 어느 때보다 뜻 깊었다. 

'제26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위원회'는 이날 오후 2시 30분 서울시청광장에서 '87항쟁 30년, 촛불혁명 원년, 제26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를 열었다. 광장에는 조봉암, 조용수, 전태일, 이수병, 박종철, 이한열, 권희정, 윤이상, 문익환, 김남식 등 665명 열사의 영정이 들어섰다.

이날 추모제에서 추모위원회는 결의문을 발표, "서른 번째 87항쟁 기념일인 오늘, 우리는 민족민주열사, 희생자 분들의 영령 앞에 촛불항쟁의 완성을 결의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며 "국민은 위대하였다. 열사.희생자 분들의 고귀한 희생과 그 정신은, 독재세력의 발호 속에서도 국민의 가슴 속에 의연히 살아있었던 것"이라고 촛불혁명의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는, 4월 혁명과 5월 광주, 87항쟁을 계승한 촛불항쟁의 완성을 위해, 적폐청산과 사회 대개혁 투쟁, 노동해방과 민중해방,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로 힘차게 전진해 나갈 과제가 놓여있다"고 강조했다.

"촛불항쟁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우리는 국민들과 함께, 적폐들을 청산하고, 이 땅에 자주와 민주, 민생과 평화가 보장되는 통일된 나라를 만들어 기어이 산 자의 의무를 다할 것이다."

   
▲ 함세웅 명예대회장은 "다시는 이 땅 위에 거짓과 불의가 준동하지 않도록 우리가 나서겠다"고 말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함세웅 명예대회장은 대회사에서 "이제 들어선 민주정권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실로 감격스러운 30여 년의 여정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 촛불은 왜곡되고 망가진 세상에서 이제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우리 모두의 결단이었다. 앞서간 열사들의 부르짖음에 대한 온 국민의 화답이었다"면서 "더 이상 이 땅의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양심들이 먼저 고통받고 희생당하지 않도록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결의를 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어제 가신 이들이 그토록 그리던 내일을 사는 오늘의 우리는, 열사와 희생자들께 부끄럽지 않도록, 오늘을 당신들이 그리던 내일로 만들겠다. 다시는 이 땅 위에 거짓과 불의가 준동하지 않도록 우리가 나서겠다"고 말했다.

장남수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장은 유가족 인사를 통해 "위대한 촛불 민중은 세계사에도 없고 대한민국 5천년사에도 없는 살아있는 권력을 민중의 힘으로 파면하고 쫓아냈다"며 "열사들이 30~40년에 걸쳐서 자기몸을 불태우고 피를 뿌려 민주의 씨앗을 뿌린 결과 자라서 광화문에 거대한 민중촛불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열사분들에게 대한민국은 이제 나라다운 나라로 가고 있으니 그래도 조금 안심하라고 부탁드리고 싶다"며 "촛불을 든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민주주의 나라를 세웠다. 이 나라가 민주주의 꽃을 피우기 위해 모두가 잘 가꾸자"고 호소했다.

열사 유가족 등 1천5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이날 추모제에서는 6.15합창단의 노래공연, 강광석 시인의 추모시 낭송, 무용가 장순향 교수의 추모공연 등으로 어우러졌다. 그리고 본행사 이후 유가족과 참가자들은 열사들의 영정에 흰 국화꽃을 헌화했다.

   
▲ 이한열 열사의 모친 배은심 여사 등 민주열사 유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무용가 장순향 교수의 추모공연.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서울광장에는 665명 열사들의 영정이 들어섰다. 헌화를 하기 위해 유가족들이 자식들의 사진을 찾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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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경협기업인들을 살려 달라”

“남북경협기업인들을 살려 달라”
 
 
 
편집국
기사입력: 2017/06/10 [08:14]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남북경협기업과 금강산관광 기업들이 차별없는 피해보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편집국

 

남북경협기업인들이 새로 들어선 정부를 향해 생존권 보장을 촉구하고 나섰다남북경협기업 생존권보장을 위한 비상대책본부(이하 비상대책본부)는 8일 오전 11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상식이 통하는 차별 없는 보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이들은 개성공단 기업들을 제외한지난 2010년 5.24조치 이후 남북교류가 중단된 남북교역 및 내륙투자기업들과 금강산관광 사업자들이다.

 

비상대책본부의 유동호 위원장은 새 시대를 연 촛불 정신은 나라다운 나라상식이 통하는 사회차별이 없는 세상을 바라는 온 국민의 염원이었다고 지적했다유 위원장은 지난 9년간 한마디 예고도 없이 하루아침에 기업의 소중한 사업권과 재산권을 박탈당하고 그로부터 지금껏 사회의 냉대와 정부의 무관심에 기업인의 삶은 만신창이가 되었다며 이를 바로 잡는 것이 촛불정신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유 위원장은 개성공단과 달리 남북교역과 내륙투자기업금강산기업은 운영과 보상 등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며 차별없는 보상을 촉구했다유 위원장은 억울하게 차별받아온 남북경협기업인들을 보상하는 문제는 과거의 문제일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앞날을 준비하는 미래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이후 이종흥 금강산코퍼레이션 대표서승우 ()코어세스 대표이종근 ()드림이스트 대표이선영 남북경협금간산기업인 가족대표 등 남북경협기업인들의 절절한 호소가 이어졌다참가자들은 촛불기둥으로 불통과 차별의 문을 부수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 '불통과 차별의 문'을 촛불기둥으로 부수고 있는 참가자들. (사진 : 주권방송 화면캡쳐)     © 편집국

 

기자회견 후 참가자들은 청와대를 향해 '풀칠 큰행진'을 시작했다이들이 풀칠이란 행진 제목을 정한 것은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게 대책을 마련해 달라는 의미에서끊어진 남북관계를 풀칠로 이어 붙이자는 의미에서다.

 

이들은 현재 남북경협기업인들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취지에서 상여소리를 내며여전히 기업인들이 어둠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에서 검은천으로 눈을 가리고하지만 한 가닥 희망인 한손에 촛불을 들고남북관계 개선의 희망을 담은 한반도 기를 두르고 행진했다.

 

▲ 상여소리를 내며 행진하는 참가자들     © 편집국

 

▲ 입에 풀칠이라도 하게 해달라며 청와대를 향해 행진하는 참가자들     © 편집국

 

▲ 검은천으로 눈을 가리고 행진하는 참가자들     © 편집국

 

▲ 남북교류 중단으로 사업을 할 수 없게되자 그 충격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기업인도 있었다.     © 편집국

 

▲ 한반도 기를 두르고 행진하는 참가자들     © 편집국

 

▲ 청와대 앞에 도착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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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서>

 

국가의 백년대계가 결정되면 국가는 그 목표를 추진할 인재를 양성한다우리 어릴 적 모든 국민이 수없이 외치고 소원했던 단 하나의 목표가 있었다그것은 바로 통일이다통일은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우리 모두의 목표였고 우리가 태어난 존재 이유였다.

 

분단 반세기를 마주하며 분단시대를 마감하고 서로 화합하여 민족의 미래비전을 열기 위해 남북경제협력과 금강산관광사업은 시작되었다그러한 대의 앞에 보수와 진보의 구분은 없었다이 고결한 국가의 뜻에 공감하며 충직하게 나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그들이 바로 남북경협과 금강산 기업인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모진 역사는 국가와 대의 앞에서 거의 예외 없이 개인의 희생을 강요했다이민족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고자 했던 의병이 그러했고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 몸을 던졌던 독립투사의 삶이 그러했으며 분단시대를 마감하고 평화와 통일의 시계로 전환하고자 했던 남북경협과 금강산 기업인의 삶이 그러하다.

 

지나친 역경은 가히 바름을 유지하기 힘들다무릇 창고가 튼실해야 예절을 알고먹고 입는 것이 넉넉해야 염치를 안다 하였다한데 지난 9년간의 남북경협 단절은 기업인들에게 가히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절망을 안기기에 충분했다.

 

그 고통은 한 인간과 그 인간을 정점으로 한 관계망을 모조리 부숴놓았다또한그 고통은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 위해 끝까지 부둥켜안아야 하는 염치와 예절마저 스스로 놓게 했다평화와 통일을 위한 첨병들의 삶은 처참히 무너져 내렸으며 남북관계 역시 산사태처럼 무너져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달았다.

 

기업인과 그 가정은 남북관계가 악화되며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거리에 내몰려야 했다기업은 부도나고 가정은 해체되어 어디에도 머리 둘 곳이 없어졌고자식의 삶은 만신창이가 되어 어린 나이에 사회의 아픔을 너무 일찍 알게 되었다.

 

기업인들은 평생을 일궈온 삶의 터전을 잃은 채 익숙지 않은 생경한 곳에서 사회의 이방인으로 9년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인생의 정점인 황금기가 허무하게 지워졌다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시간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경협 인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는 상처는 차별이었다경협 인들의 삶에선 상식도 형평성도 무시당하기 일쑤였다경협이 중단되는 과정에서도 여기는 왜 중단되고 저기는 왜 지속하는지 어떠한 기준에 의해 그리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중단으로 인한 보상 역시도그 어디에서도 상식과 공평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새 시대를 연 촛불 정신은 나라다운 나라상식이 통하는 사회차별이 없는 세상을 바라는 온 국민의 염원이었다국가의 존재이유이자 가장 기본적인 의무는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다하지만 지난 9년간 한마디 예고도 없이 하루아침에 기업의 소중한 사업권과 재산권을 박탈당하고 그로부터 지금껏 사회의 냉대와 정부의 무관심에 기업인의 삶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촛불이 모여 기적이 펼쳐졌다국민의 일상에 어둠이 사라지고 빛이 스미고 있다희망의 새 시대를 온몸으로 만들어낸 이 땅의 국민은 낡은 폐습을 청산하고 풍요로운 미래가 보장되고 도덕이 살아 숨 쉬는 그런 사회를 염원하며 모두 한마음으로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바라고 있다.

우리 남북경협기업인의 마음 역시 현 정부의 성공을 누구보다도 소망한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국민의 전폭적인 신뢰는 상식이 통하고 차별이 사라진 나라다운 나라를 건설하는 데 있다.

이웃과 사회와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보호받고 잘 살 수 있는 바로 그런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상식이 통하고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드는 그 단순한 소망이 삶에서 실천되는 것이다이 가능성이 현실이 되는 세상에 모든 국민은 전율을 느끼며 기뻐하는 것이다.

 

우리 남북경협과 금강산 기업인들은 문재인 정부 하에서 그런 세상이 도래할 것을 굳게 믿는다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대통령과 국민 앞에서 우리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길을 나섰다모든 국민이 촛불 정신으로 빛을 보았으나 아직 우리는 어둠 속에서 빛을 갈구하고 있다.

 

부디 국민과 대통령께서 빛을 주시어 남북경협과 금강산 기업이 소생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기를 간곡히 호소한다우리는 언제라도 대통령과 정부를 도와 다시금 펼쳐질 남북경제협력의 장에평화의 상징인 금강산관광의 현장에 복귀해 이 땅의 평화와 민족의 미래비전을 위해 나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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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이정씨 8남매 ‘민주화운동 40년’

[커버스토리 - 6·10항쟁 30주년]민청학련 오빠, 5·18운동 동생들과 독재 맞서…촛불도 함께 들었죠

강현석 기자 kaja@kyunghyang.com

 

ㆍ이정씨 8남매 ‘민주화운동 40년’

지난 5일 이강, 이정, 이황씨(왼쪽부터) 남매가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앞에 섰다. 1972년 박정희 정권 시절 유신 비판 유인물 ‘함성’을 자취방에서 함께 만든 남매는 지난겨울 촛불집회까지 40여년을 민주화운동 현장에 있어왔다. 박민규 선임기자 parkyu@kyunghyang.com

지난 5일 이강, 이정, 이황씨(왼쪽부터) 남매가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앞에 섰다. 1972년 박정희 정권 시절 유신 비판 유인물 ‘함성’을 자취방에서 함께 만든 남매는 지난겨울 촛불집회까지 40여년을 민주화운동 현장에 있어왔다. 박민규 선임기자 parkyu@kyunghyang.com

1973년 3월 서울역 플랫폼에 내린 이정씨(69·당시 24세)를 기다리던 건 마중 나온 고향 친구뿐만이 아니었다. 기차에서 내린 이정씨는 서울대에 다니고 있던 6촌오빠를 봤다. 너무도 반가운 마음에 “오빠”라고 외쳤다. 옆에 있던 건장한 사내들이 그녀와 친구를 순식간에 붙들었다.

둘째를 출산한 언니의 산후조리를 돕기 위해 난생처음 상경한 그녀는 어딘지도 모르는 서울의 한 경찰서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당시 전남대 법학과에 다니던 오빠 이강씨(71·당시 26세)의 친구라는 사람도 붙잡혀 왔다. 그제서야 이정씨는 지난겨울 이강씨, 동생 이황씨(63·당시 18세), 오빠 친구였던 김남주씨(1946~1994)가 함께했던 일이 떠올랐다. 형사들이 얼굴을 모르는 이정씨를 잡기 위해 친척 오빠를 서울역까지 데리고 나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나중에 알려졌다.

■ 자취방서 만든 첫 유신 비판지 ‘함성’ 

이정씨는 6남2녀 중 셋째였다. 전남 해남군 마산면의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와 큰살림을 꾸리면서도 힘들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던 어머니는 남매들을 광주로 유학 보냈다. 이정씨는 광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과 고등학교, 중학교에 다니던 오빠와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도맡았다.

 
1980년 2월3일 서울형사지법 대법정에서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구속된 이재문씨(일어선 사람)와 김남주씨(이씨 뒷줄 왼쪽) 등 피고인 73명에 대한 공판이 진행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0년 2월3일 서울형사지법 대법정에서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구속된 이재문씨(일어선 사람)와 김남주씨(이씨 뒷줄 왼쪽) 등 피고인 73명에 대한 공판이 진행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전남대 법대에 다니다 1972년 군에서 전역한 이강씨는 10월17일 ‘유신’이 선포되자 고향 친구 김남주씨와 함께 광주 동구 산수동 작은 자취방에 자주 모였다. 밤새 담배를 태우며 이야기를 이어가던 어느 날 이강씨는 등사기를 들여왔다. 방문과 창문을 담요로 막고 12월부터는 ‘함성’이라는 제목의 8절지 크기의 인쇄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이황씨도 형들과 함께 등사기를 밀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유인물 500장에는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글들이 가득했다. 이정씨는 밥을 해주고 심부름을 했다. 이강씨와 김남주씨는 ‘함성’을 대학의 휴교령이 풀린 그해 12월10일에 맞춰 전남대를 비롯해 광주고, 광주여고, 전남여고, 광주공고 등에 뿌렸다. 

이정씨(오른쪽에서 두번째)가 5·18여성회 회원들과 함께 지난겨울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참가해 사진을 찍고 있다. 이정씨 제공

이정씨(오른쪽에서 두번째)가 5·18여성회 회원들과 함께 지난겨울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참가해 사진을 찍고 있다. 이정씨 제공

이정씨가 서울역에서 붙잡히던 날 오전. 광주에서는 학교에 가던 이강씨와 입시학원에서 수업을 듣던 이황씨가 경찰에 체포됐다. 형에 이어 전남도경 대공공작분실 지하 취조실로 끌려간 이황씨는 고문과 폭력으로 만신창이가 된 형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황씨는 “한참 취조를 받는데 옆 사람 목소리를 들어보니 형이었다. 아침에 멀쩡했던 사람이 반나절도 안돼 그렇게 변해 있었다”고 기억했다.

3남매는 그해 봄 나란히 ‘반국가단체 구성 예비음모’ 혐의로 같은 법정에 섰다. 이정씨는 불구속이었지만 오빠와 당시 18세로 미성년자였던 동생은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정씨는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몇 달 만에야 포승줄에 묶인 오빠와 동생을 볼 수 있었다. 수십 번 울었다”고 말했다.

광주지역 인권변호사였던 홍남순 변호사가 변호인으로 나섰다. 함석헌 선생은 서울에서 내려와 재판을 두 번이나 방청했다. 유신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한 ‘함성’에 대한 재판은 오히려 박정희 독재를 부각시키는 사건이 되면서 방청석이 가득 찼다. 이강씨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이황씨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 이정씨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 공수부대에 맞선 남매 

8남매는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한복판으로 들어갔다. 박정희 시절 유신반대 운동에서 시작된 남매들의 민주화운동은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1989년 조선대생 의문사 진상규명 운동, 2016년 촛불집회까지 40년 넘게 이어졌다. 지금도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와 5·18여성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이강씨는 반유신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또다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가 이듬해 가석방됐다. 1979년에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때 이정씨는 5월27일 새벽 전남도청에 마지막까지 남았다. 항쟁 기간 광주기독병원에서 헌혈을 하는 시민들의 접수 등을 돕던 그는 도청의 시민군들을 위해 주먹밥을 만들었다. 도청에 마지막까지 남은 여성 13명 중 이정씨가 가장 나이가 많았다.

공수부대 진입 직전인 오전 3시쯤 시민군 상황실의 설득으로 이정씨는 다른 여성들을 이끌고 도청을 빠져나와 인근 동명교회에 숨었다. 

그가 피신하던 날 밤 당시 전남대 1학년이었던 동생 이연씨(57)도 시민군으로 금남로 YMCA 건물에서 새벽을 맞고 있었다. 항쟁 기간 ‘투사회보’ 등이 발행된 YMCA는 도청과 함께 공수부대의 진압작전 목표였다. 날이 밝자 이정씨는 동생을 찾기 위해 YMCA와 도청에 고꾸라진 시신들을 헤집었다. 생사를 알 수 없었다. 며칠 뒤 이연씨가 계엄군에 붙잡혀 상무대 영창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심한 폭력을 일삼은 교사의 처벌을 요구하는 성명을 내고 학교를 자퇴한 뒤 이연씨는 검정고시로 친구들보다 1년 늦게 대학에 진학했었다. 8남매 중 4번째 투옥이었다.

[커버스토리 - 6·10항쟁 30주년]민청학련 오빠, 5·18운동 동생들과 독재 맞서…촛불도 함께 들었죠

그해 12월 풀려날 때까지 이연씨는 요시찰 인물들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갖은 폭력에 시달렸다. 이정씨는 2013년 영화 <변호인>에서 고문 때문에 만신창이가 된 대학생 진우를 보면서 동생 연이가 생각나 내내 울었다. 그리고 도청 탈출을 도와줬던 대학생이 생각났다.

그는 “함께 숨어 있자”는 이정씨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도청으로 돌아가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졌다. 이정씨는 “그래도 우리 동생은 살았지만 그날 도청에서는 동생 또래의 청년들이 많이 죽었다”면서 “당시 피신했던 여성 13명 중에는 ‘도청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여고생도 있었다. 그들을 꼭 다시 만나고 싶다”고 했다. 

■ 피할 수 없는 운명, 6월항쟁 

5·18 이후 집안에 짧은 평온이 찾아왔다. 만기 출소한 이강씨는 농민운동을 시작했고, 늦깎이 대학생이 된 이황씨는 ‘광주환경공해연구회’를 만드는 등 지역 환경운동을 이끌었다. 광주 진흥고에 다니던 막내 이윤씨(52)는 공부를 잘했다. 형들은 “막내만은 제대로 키워보자”며 서울대 의대에 진학할 것을 권했고 뜻대로 됐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1987년 6월항쟁으로 평온은 끝났다. 경찰 최루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 이한열 열사는 막내동생 이윤씨의 고교 친구였다.

이강씨는 ‘민주쟁취국민운동 광주전남본부’ 사무처장을 맡으며 광주와 전남 지역 6월항쟁을 이끌었다. 이한열 열사 사건 이후 가족들의 기대와 달리 서울대 의대에 진학한 이윤씨는 빈번하게 시위 현장에 나섰다. 13대 대선이 치러진 1987년 12월16일. 광주에 있던 가족들은 이윤씨를 텔레비전 뉴스에서 봤다. 이날 오전 서울 구로을에서는 선관위 관계자가 투표함을 개표소로 옮기는 도중 투표함 안에 부정 투표용지가 들어 있다고 확신한 시민들이 몰려드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시민들은 “투표가 끝나기도 전에 투표함을 왜 개표소로 보내느냐. 부정 투표의 증거물인 투표함을 지키겠다”며 구로을 선관위가 있는 구로구청을 점거하고 40여시간 동안 농성을 벌였다. 선거함을 깔고 앉은 사람들을 보여주는 텔레비전 뉴스 화면에 이윤씨가 있었다. 경찰이 투입됐고, 이 사건으로 1000여명이 연행돼 이 중 200여명이 구속됐다. 이윤씨는 28일 동안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진 뒤 겨우 풀려났다. 

큰형 이강씨도 다시 한번 수배를 당했다. 1989년 5월 조선대 학생이었던 이철규 열사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이강씨는 ‘진상규명투쟁위원회’ 상황실장으로 나섰다. 수배가 내려진 그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강, 이정, 이황씨는 지난 5일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앞에 섰다. 지난겨울 광주에 사는 3남매는 이곳에서 시민들과 함께 촛불을 밝혔고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장면을 지켜봤다. 이정씨는 “시민들의 힘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다시 시작되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오빠와 동생들이 하는 일이 옳다고 믿었고 한번도 후회한 적 없다. 촛불집회가 보여준 것처럼 민주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이 이뤄내는 것”이라는 이정씨는 “새로운 시대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루 햇빛이 비치는 그런 세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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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료' 지명된 현역 의원 4명, 대표발의한 법안 보니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7/06/10 05:54
  • 수정일
    2017/06/10 05:5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장관 후보자 검증] 의정활동을 통해 살펴 본 김부겸·김영춘·김현미·도종환의 전문성은?

17.06.09 18:14l최종 업데이트 17.06.09 18:14l

 

김부겸·김영춘·김현미·도종환 등 더불어민주당 현역의원 4명이 문재인 정부의 각료로 지명됐다. 4선 중진 김부겸 의원은 행정자치부 장관에, 3선 김영춘, 김현미 의원은 각각 해양수산부, 국토교통부 장관에 지명됐다. 재선의 도종환 의원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지명됐다. 

현역 정치인의 입각이 드문 사례는 아니다. 참여정부에서는 이해찬·한명숙·김진표·김근태·정세균·천정배 등 10명의 정치인을 장관으로 지명했다. 이명박 정부 때도 각각 이재오·주호영·임태희·유정복·정병국 등 총 11명의 정치인을 기용했고, 박근혜 정부 역시 이완구·최경환·황우여·유일호 등 의원 8명을 장관으로 지명했다. 현역 정치인 입각을 통해 정부의 정무적 판단을 강화시키고 당청 간 소통도 원활해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입각할 현역 정치인이 그 분야에 대한 전문가적 소양 혹은 비전을 갖춰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사실상 선거 결과에 대한 논공행상 차원의 '전리품 나누기'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는 14, 15일 열릴 이들의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도 이 점이 주요한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오마이뉴스>는 김부겸·김영춘·김현미·도종환 등 장관 후보자 4인의 의원 시절 대표 발의한 법안들을 살펴봤다. 

[김부겸] 대표 발의법안만 아니라 정치적 행보로도 확인된 '지역균형발전' 
 

수화기 든 김부겸 행자부 장관 후보자 30일 행정자치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김부겸(대구 수성갑·4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회 의원회관에서 홍윤식 행자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고 있다.
▲ 수화기 든 김부겸 행자부 장관 후보자 30일 행정자치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김부겸(대구 수성갑·4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회 의원회관에서 홍윤식 행자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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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겸 후보자는 2000년 16대 총선 당시 경기 군포시에서 당선된 이래, 17대 국회(경기 군포시), 18대 국회(경기 군포시), 20대 국회(대구 수성갑)에서 의정활동을 했다. 이 기간 중 그는 국회 행정자치위원회(현 안전행정위원회)뿐만 아니라 정무위원회·통일외교통상위원회(현 외교통일위원회)·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기획재정위원회 등 다양한 상임위원회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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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활동 기간 중 대표 발의한 법안은 총 38건이다. 구체적으로는 16대 국회에서 9건, 17대 국회에서 8건, 18대 국회에서 13건, 20대 국회에서 8건을 대표 발의했다.  이 중 행자부 장관 후보자로서의 소양을 엿볼 수 있는 법안은 지난해 7월 발의한 '공공기관 지방이전에 따른 혁신도시 건설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이하 공공기관 이전)'과 '지방대학 및 지역균형인재 육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하 지방대학 육성)'이다. 

공공기관 이전 관련 법률안은 그간 '권고사항'이었던 지역인재 채용을 '의무사항'으로 바꾸는 것이다. 현행법상 혁신도시 등 지방에 이전한 공공기관장은 이전한 지역에 소재한 지방대학 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거나 졸업예정인 사람을 우선해 고용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규정의 실효성이 담보되지 않으면서 지역인재 채용비율이 2014년 10.3%, 2015년 13.3%에 불과했다. 

이에 김 후보자는 혁신도시 등 지방에 이전한 공공기관이 신규 채용인원의 40% 이상을 이전한 지역의 인재로 채용하는 것을 의무화하고, 그 결과를 해당기관 경영실적 평가 등에 반영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지역인재의 채용 기회를 확대하여 지역균형발전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다. 

지방대학 육성 관련 법률안도 같은 내용이다. 현행법상 공공기관과 상시 근로자 300인 이상인 기업은 신규 채용인원의 일정비율 이상을 지역인재로 채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대통령령을 통해 그 일정비율을 35%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의 경우처럼 '권고사항'에 불과해 그 실효성에 문제가 제기됐다. 이에 김 후보자는 신규 채용인원 중 지역인재의 채용비율을 40% 이상으로 상향조정해 법률에 직접 규정하는 한편, 민간기업에 대해서는 '권고사항'이되 상시 근로자 200인 이하 기업으로 그 대상을 확대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이외에 저임금을 받고 있는 지방자치단체 소속 근로자 등에게 최소한의 인간적·문화적 생활이 가능하도록 생활임금을 지급하는 '지방자치단체 생활임금법안'도 행자부 업무와 관계있는 법안으로 보인다. 

사실 김 후보자는 이러한 대표 법안발의 외에도 정치적 행보를 통해서 지역균형발전 그리고 지역갈등 타파라는 행자부 장관 후보자로서의 비전을 내보인 바 있다. 그는 2012년 20대 총선 때 "한 지역구에서 4선 국회의원은 월급쟁이에 불과하다"면서 민주당 소속으로는 극히 당선이 어려운 대구 수성갑에 출사표를 던졌다가 낙선했다. 2014년 대구시장 때도 40.33% 득표율로 낙선했으나 그의 도전은 지역구도 타파를 위한 도전으로 높게 평가받았다. 그는 2016년 20대 총선에서도 대구 수성갑에 출마해, 62.30% 득표율로 당선됐다.   

[김영춘] 해운업 살리기-수산인 돌보기 법안 눈에 띄어
 

지명 후 질문받는 김영춘 해수부 장관 후보자  30일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김영춘(부산 부산진구갑·3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회 의원회관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지명 후 질문받는 김영춘 해수부 장관 후보자 30일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김영춘(부산 부산진구갑·3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회 의원회관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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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출신의 김영춘 후보자는 2000년 16대 총선 때 서울 광진갑에서 당선됐다. 이후 17대 국회(서울 광진갑), 20대 국회(부산 진구갑)에서 의정활동을 했다. 이 기간 중 그는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현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예산결산특위 등에서 활동했고, 현재 해양수산부를 감시·감독하는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장을 맡고 있다. 

의정활동 기간 중 대표 발의한 법안은 총 46건이다. 구체적으로 16대 국회에서 6건, 17대 국회에서 20건, 20대 국회에서 20건을 발의했다. 이 중 해수부장관 후보자로서 주목할 만 한 법안은 지난 5월 발의한 '수산업·어촌 발전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과 3월 발의한 '선원법 일부개정법률안', 그리고 지난해 11월 발의한 '해운법 일부개정법률안' 등이다. 

수산업·어촌 발전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은 '배타적경제수역(EEZ)'에서의 어획량 등을 결정하는 한일어업협정의 결렬·지연으로 2016년 7월부터 장기간 조업이 중단된 어업인들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위한 법적 근거를 만들기 위한 법안이다. 김 후보자는 이 법안을 통해 관련 문제로 조업구역 및 어업량 등이 제한되는 어업인들이 대체어장에 출어하는 경우, 그 출어비용을 수산발전기금에서 보조할 수 있도록 했다. 

해운법 일부개정법률안은 김 후보자가 해당 상임위원장임에도 이례적으로 직접 제안 설명에 나섰던 법안이기도 하다. 이 법은 해운시황을 분석해 독자적인 해상운임 개발 및 선박 가치평가 등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기관, 즉 해운거래소를 지정하는 것이 주요 골자다. 국내 해운 업계가 시황분석, 효율적인 운임 변동 관리 수단이 부족해 대규모 시황 침체가 있을 때마다 유동성 부족 등을 맞게 되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인 셈이다. 

이 법안은 당시 한진해운 파산 등 국내 해운업계의 위기가 대두됐던 시기에 발의돼 더욱 주목받기도 했다. 김 후보자도 당시 제안 설명에서 "중요한 법안임을 강조하고 싶어 관례를 무릅쓰고 직접 제안 설명에 나섰다"면서 "한진해운 청산이 우리 해운사업 및 부산 경제에 미칠 여파를 해운거래소 신설로 상쇄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김현미] 국토·교통 이력 없지만 '주거복지'-'4대강 비판'에 동참
 

국토부 장관 후보 내정된 김현미 '함박웃음' 30일 국토교통부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김현미(경기 고양정·3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날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국토부 장관 후보 내정된 김현미 '함박웃음' 30일 국토교통부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김현미(경기 고양정·3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날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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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미 후보자는 2004년 17대 총선 때 비례대표로 국회에 등원해, 19대 국회(경기 고양 일산서), 20대 국회(경기 고양정)에서 의정활동을 했다. 이 기간 중 그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주로 활동했다. 

의정활동 중 대표 발의한 법안은 총 72건이다. 17대 국회에서 12건, 19대 국회에서 31건, 20대 국회에서 29건을 발의했다. 그러나 이 법안들도 주로 '관세법 일부개정법률안', '장애인기업활동 촉진법 일부개정법률안', '상속세 및 증여세법 일부개정법률안' 등 세제와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들이 대다수다. 

이처럼 상임위 활동, 대표 발의법안들만 보자면, 국토·교통 이력이 없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국가재정을 통한 주거복지 등에 초점이 맞춰진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공약을 감안할 때 관련 재원 마련을 위한 정부와 국회 간 '가교' 역할로서 적절한 인사라는 평가도 있다. 실제로 김 후보자는 지난해 여성의원 최초로 국회 예결위원장까지 맡아 2017년 예산안 통과를 이끌었다. 

무엇보다 김 후보자가 다른 동료의원과 함께 공동 발의한 법안들을 봐도 주거 복지와 부동산 시장 안정화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지난 6월 양승조 의원 등과 공동 발의한 '공공주택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은 신혼부부를 공공주택 우선공급 대상에 추가하고, 관련 세제지원의 목적을 저소득층 주거안정뿐만 아니라 청년층·고령자·저소득층·신혼부부 등의 주거안정으로 확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지난해 7월 발의한 '주택임대차보호법 일부개정법률안' 역시 주택 임차인이 4년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계약갱신요구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4대강 사업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보인다. 김 후보자가 2013년 심상정 정의당 의원과 함께 낸 '4대강 및 문화재 복원을 위한 특별법'은 4대강 사업의 추진과정과 효과를 검토하여, 인공구조물의 해체, 4대강 및 문화재 복원여부를 결정하고, 이 법에 따른 사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4대강 복원 위원회'를 두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도종환] 시인 출신 장관 후보자, 문화·예술 진흥에 주력
 

도종환 "삭제된 회의록 누구 지시인가"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에 대한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국문화예술위가 미르재단 설립을 위해 대기업을 압박했다는 민감한 내용의 회의록을 삭제해 국회에 제출했다며 박명진 한국문화예술위원장에게 "회의록 제출과 관련해 누가 왜 조작했는지, 누구의 지시였는지, 어디까지 보고한 것인지 설명하라"고 지적했다.
▲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 사진은 2016년 10월 국정감사 당시 질의 모습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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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출신의 도종환 후보자는 2012년 19대 국회에서 비례대표로 입성했다. 이후 20대 총선 때 충북 청주시 흥덕구에서 당선됐다. 주로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 활동했고 현재 민주당 간사이기도 하다. 

의정활동 중 대표 발의한 법안은 총 52건으로 19대 국회에서 34건, 20대 국회에서 18건을 발의했다. 20대 국회의 경우만 따로 볼 경우, 대표 발의법안의 80% 이상이 교문위 관련 법안이었다. 

이 중 문화·예술 진흥에 관련된 법안들이 눈에 띈다. 지난해 10월 발의한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은 대기업의 영화상영업과 영화배급업 겸영에 일정한 규제를 가하여 영화상영관 독과점 피해를 방지하고 이를 통해 결과적으로 예술영화 및 독립영화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2012년 발의한 '지역문화진흥법안'은 문화의 수도권 편중 현상을 해소하기 위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행정적·재정적·제도적 지원 등을 하도록 하는 내용이고, 같은 해 발의한 '문화예술진흥법 일부개정법률안'은 당시 현행법에 '문화예술' 개념에서 빠져 있던 만화를 포함시키는 법적 미비점을 해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신문·방송과 관련한 법안들도 주목된다. 2014년 발의했던 '방송법 일부개정법률안'은 당시 현행법상 비위사실이 있는 사람도 이사로 선출되는 등 실효성에 문제가 있던 한국방송공사(KBS) 이사의 결격사유를 확대하여 방송의 공적책임을 실현하도록 했다. 2014년 발의했던 '신문 등의 진흥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과 '방송통신발전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은 세월호 참사 당시 언론의 '전원구조' 오보 사태 등이 재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로 발의됐다. 재난·재해 관련 용어를 체계적으로 정의하고, 언론을 대상으로 재난보도 관련 교육 실시하는 등의 내용이 주된 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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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청문회를 못 보는 이유

 
[민교협의 정치시평] 청문회 속 타인의 삶
 
 
 
 
 
 
 
 
 
2017.06.10 03:37:18
 
 
 
요즘 국회에서는 청문회가 한창이지만, 어느 하나 보지 않고 있다. 새 정부에서 일할 이들은 물론, 기관의 장이라 해서 반드시 도덕군자를 뽑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개인의 탐욕을 위해 불법과 편법을 일삼은 이들을 뽑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청문회 후보자들의 삶 역시 그 양 극단을 축으로 하는 중간 어느 지점에선가 자리 잡을 것이다. 
 
이번 청문회 대상이 된 이들의 면면을 보면 대체로 성실하게 살아온 이들이 아닐까 하지만, 인터넷이나 SNS에서 들리는 청문회 이야기에 의하면 그리 간단히 진행되지 않는 듯하다. 청문회답게 당연히 언급되어 검토되어야 할 내용이 있는가 하면 과도한 의미 부여를 통한 흠집 내기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청문회를 바라보는 일반인이나 후보자를 검증하는 국회의원들이나 청문회 목적이 무엇인지 서로 공유하고 있을까. 왜 그들을 청문회 자리에 앉혀 놓으며, 왜 철저히 개인의 삶을 드러내어 검토하고 비판하는가. 개인 삶에서 조금이라도 흠결이 있으면 안되는 것일까? 혹은 청문회란 통과만 하면 되는 의례적 절차에 불과한 것일까? 무조건 잡아내는 것도, 무조건 피해가는 것도 아닌, 공인에 대한 검증 절차가 청문회라면 이제 조금은 평안한, 그러면서도 냉정한 마음으로 볼 필요가 있다.  
 
청문회 자리에 선 후보자들이 앞으로 수행해야 할 직위는 단순히 기관 운영 능력이나 행정 기술로 끝나는 위치는 아니다. 어찌 보면 후보자들이 지향해 온 삶의 가치가 그대로 국정이나 기관 운영에 반영되고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의 삶과 생활 자체에 영향을 끼치는 자리다. 권력 집단에 아부하며 교언영색의 말만 하는 기회주의적 부류가 청문회를 통과한다면 그 폐해는 결코 적지 않다. 후보자들의 관리 능력과 더불어 평소 삶의 모습과 가치를 검증하는 것은 매우 정당하며 필요하다.  
 
한편, 한 개인의 긴 삶의 여정에서 완전한 인간을 요구하듯이 진행되는 청문회는 지켜보기에도 불편하다. 또 다양한 배경 속에서 나타난 삶의 모습을 획일화된 고정관념으로 몰아가며, 이것이냐 저것이냐 식의 단순 선택을 강요하는 청문회 광경은 보기에도 힘들다. 심지어 각 개인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헌법에 규정된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후보자 개인의 소신마저 마치 십자가를 밟고 지나가게 하는 방식으로 정죄하는 형태의 질의 광경은 보는 이를 초라하게 만든다. 
 
삶이란 자신이 속한 사회나 문화 속에서 펼쳐지기에, 시대적 맥락을 무시한 채 획일적으로 적용되는 원칙처럼 잔인하고 폭력적인 것이 없다. 개인의 몫을 시대나 사회때문이라며, 혹은 관례라는 이유를 들어 책임 회피를 해서도 안되지만, 또한 특정 시대나 사회 몫마저 개인에게 전담케 하여 흑백의 이분법 논리로 문제 삼는 것도 부당하다. 인간 삶이 흑백의 문제가 아니라면, 동 시대를 살아온 후보자 각 개인들의 현실 속 삶의 지향점 내지 가치를 살필 때, 무엇을 기준으로 어느 정도를 허용 범위로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후보자들에게 확인하고 싶은 것은 공공성에 대한 삶의 자세와 공익을 위한 실행 의지다.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자리에 연연해 소신을 버리고 권력 풍향에만 집중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현실에서 우선 검토되어야 할 자질이다. 또한 개인의 이해 추구에 있어서 일반 상식을 넘어섰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상식을 넘어서는 편법과 불법을 자행한 이에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란 매우 위험하다. 이처럼 청문회에서는 옳고 그르다는 식의 이분법적 관점으로 판단하기보다는 개인 탐욕과 주요 공직자로서 지켜야 할 사회적 가치와 지향점 사이 그 어딘가에 있을 후보자들의 위치를 찾아 밝힐 필요가 있다. 
 
청문회에 선 연령대의 사람들이 열심히 살던 젊은 시절은 군사 독재와 더불어 개발 논리가 횡행하던 시대이기도 하다. 그 시절에 살아남은 자들의 모습은 불행히도 그 시대적 배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치열한 열사의 모습으로부터 기회주의적 삶으로 부와 권력을 쥔 이들과 평생을 가난 속에서 살면서도 그 가난을 자식에게 세습시킬 수밖에 없던 이들까지.
 
청문회는 중요한 공인을 검증하는 자리로서 한 개인의 삶을 타자의 눈길 속에 드러내어 환히 비추는 과정이다. 거꾸로 말하면 한 개인의 삶을 공인으로서 적합한 지를 타자가 판단하는 과정이다. 공인에게 가장 요구되는 자질 중의 하나가 선공후사이며, 이는 공과 사의 분명한 구분을 요구한다. 청문회가 그런 것을 확실히 밝히기 위한 공적 검증 과정이라면, 청문회 진행 중에도 역시 철저히 공과 사가 구분되고, 사적 부분은 개인 몫으로 존중되는 모습이어야 한다.  
 
한 인간의 삶을 통합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기 보다는 공사 구분 없이 들춰내어 비판하는 것이 마치 철저한 검증인양 진행되고 십자가를 밟아야만 통과되는 청문회란 이 시대에 공직자로 나선 이들이 감당해야 할 몫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청문회처럼 공사 구분 없이 타인의 삶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어쩌면 집단에 의한 폭력일수도 있다. 내가 청문회를 보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가 청문회에 나와서 질의를 듣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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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밥이에요, 눈물을 흘리면서도 밥은 먹으니까

 
등록 :2017-06-09 21:09수정 :2017-06-09 23:12
 
[토요판] 커버스토리 - 6·10항쟁 30돌
고 이한열 열사 어머니 배은심씨 동행 르포
‘제30주기 이한열 열사 추도식’이 열린 9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한열동산에서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가 참석해 유족대표로 인사말을 전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제30주기 이한열 열사 추도식’이 열린 9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한열동산에서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가 참석해 유족대표로 인사말을 전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 촛불이 광장을 가득 메웠고 기세에 놀란 국회는 대통령을 탄핵했다. 현직 대통령은 청와대를 떠나 교도소에 갇혔다. 티끌만한 폭력 없이 이뤄진 드라마였다. 그 겨울을 지나고 맞은 6월이 아들이 떠난 지 꼭 30년 되는 6월이다. ‘그때도 최루탄이 없었다면.’ 드라마를 지켜보던 내내 어머니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한겨레>는 고 이한열 열사 어머니 배은심씨의 ‘2017년 6월9일’을 함께했다. 8일 진행한 사전인터뷰도 덧붙였다.

 

 

 

엄마는 알고 싶었다. 한열이는 살려고 도망가다 죽은 것일까, 아니면 군사 독재에 맨주먹으로 투쟁하다 죽은 것일까. 최루탄을 맞고 앞으로 팍 고꾸라지는 순간, 무슨 말을 했을까.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쓰러졌을까, 아니면 그저 엄마 아빠를 부르면서 쓰러졌을까.

 

1987년 6월9일 오후, 2남3녀 중 넷째 큰아들이었던 이한열(사망 당시 22)은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열린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석했다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쓰러졌다. 피를 흘리던 아들의 모습은 6월 민주항쟁에서부터 6·29 대통령 직선제까지 이어지는 개헌의 기폭제가 됐지만, 아들은 26일 뒤인 7월5일 최루탄 파편에 의한 뇌손상으로 인해 끝내 숨졌다.

 

“뭔가 알고 싶어서 거리에서 살아왔지만, 얻은 것은 하나도 없고. 뒤돌아보면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내 아들만 없어져버렸네요.” 30년이 지났지만 ‘건강했던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엄마가 채 하지 못한 질문에 답해줄 유일한 사람, 아들은 이 세상에 없다. 답을 얻지 못한 엄마는 30년간의 삶에 대해 “허탈하다”고 했다.

 

이한열 피격 30주기를 맞아 9일 서울 연세대학교, 시청광장 등에서 이한열 기념 문화제가 진행됐다. 이한열 열사 어머니 배은심(77)씨는 아들이 피격된 학교와 아들의 장례 행렬이 이어진 거리 위를 30년 만에 다시 걸었다. 6월이 되면 가장 바빠지는 삶을 살았던 배씨의 발걸음엔 지난 30년의 모진 세월이 엉겨붙어 힘이 실렸다. 비가 내리고, 햇볕이 내리쬐는 땅 아래 내디딘 발자국 하나하나가 모두 아들을 기억하기 위한 의식이었다.

 

 

“행사가 있대요. ‘못 가’ 소리 못하죠.”

 

9일 오전 11시. 옷깃에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 모양의 배지를 단 배씨가 벽화 ‘청년’ 복원 기념식이 열리는 서울 경희대학교 문과대 건물 앞에 도착했다. “경희대에서도 와보라고 해서, ‘못 가’ 소리 못하고 온 거죠. 행사 자체가 이한열이에 관한 것이란 말이에요. 그분들이 그때 당시 벽화를 그려 놓은 것을 복원을 했다고. 자기들 학교 동기도 아닌데, 그런 거 생각하니까 참 고맙더라고요.”

 

‘청년’은 6월 민주항쟁을 기념해 1989년 경희대 문과대학(당시 문리대학) 흰색 벽에 그려진 가로 11m, 세로 17m 크기의 벽화다. 6월 항쟁의 의미를 되새기고, 통일과 민중에 대한 염원을 담는 의미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쥔 청년의 모습이 담겼다. 30년이라는 시간 동안 낡고 페인트칠이 벗겨진 벽화를 경희대학교 졸업생들과 학생들이 지난 5월28일부터 2주간 복원했고, 이날 복원 기념식이 열렸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경희대학교 민주동문회 등 약 100여명이 참석한 기념식에서 배씨가 축사를 하기 위해 무대에 섰다. 배씨는 경희대학교에서 ‘청년’의 이름으로 된 벽화가 남아 있어 가슴이 두근거리고 감격스럽다며 말을 이었다. “30년 전 우리 청년들이 지금 반백이 됐습니다. 반백이 된 우리 청년들의 모습이 여기서 부활한 것 같습니다. 그 속에 내 아들의 모습도 있겠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5, 4, 3, 2, 1!”

 

참가자들의 구호와 함께 벽화를 가리고 있던 천막이 걷히자, 주먹을 불끈 쥔 청년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박수를 치며 벽화를 바라보던 배씨가 말했다. “벽이 저절로 무너질 일은 없으니, 우리 세대, 다음 세대 계속 보존되어야겠죠.”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가 김현수 연세대 상경·경영대 학생회장과 포옹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가 김현수 연세대 상경·경영대 학생회장과 포옹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유가협 추모제, 습관이 되어버렸어요.”

 

벽화 복원 기념식이 끝난 뒤, 배은심씨는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소속 회원들과 함께 벽화 ‘청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유가협 공동의장인 배씨는 고 장현구 열사 아버지인 장남수 유가협 회장, 고 김윤기 열사 어머니인 정정원 부회장 등 유가협 회원들 10여명과 점심 식사를 함께했다.

 

배씨에게 유가협 회원들은 같은 고통을 안고 사는 ‘가족’이나 다름없다. 1987년 7월 아들의 장례를 치른 뒤 고통스러워하던 배씨는 그해 8월 유가협 창립 1주기 행사에 참석했고, 자식을 잃은 부모들을 만나 큰 위로를 받았다.

 

유가협 활동 덕분에 전국의 시위 현장을 누비는 삶도 시작됐다. 배씨는 1998~99년 유가협 회장을 맡아 자식 잃은 부모들의 목소리를 대변했고, 1999년에는 국회 앞에서 274일간 천막농성을 하며 민주화운동보상법과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 제정을 이끌어냈다. ‘나중에 아들을 만나면 할 말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마음에서 시작한 활동이었다.

 

“유가협에서는 매번 똑같은 일을 하고 있어요. 그때(80~90년대) 많은 아들딸들이 죽어갔고, 하나같이 돌아가면서 추모제 하는 거예요. 지난번에도 숭실대 박래전 추모제에 가서 사람들 만났는데, 매번 하는 일이 그거예요. 추모제에 못 가면 내가 섭섭할 정도로,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렸어요.”

 

“뭔가 알고 싶어서 거리에서 살아왔지만
둘도 없는 내 아들만 없어져버렸네요”
“반백 된 청년들 모습이 부활한 것 같아
그 속에 내 아들의 모습도 있겠지 싶어”

 

“스스로 내가 미운 거야. 밥을 못먹다가도
오후에 누룽지를 끓여먹고 그랬는데”
“기가 막히니까 할 말이 없고,
그냥 왜 그랬냐고 묻고 싶고, 그것뿐”

 

“이한열이라는 이름을 불러줘서 감사해요.”

 

이한열 열사 30주기 추도식이 진행된 서울 연세대학교 한열동산. 오후 3시가 되자 뜨거웠던 햇볕이 걷히고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98769757922’. 이한열이 최루탄에 피격된 날짜(1987.6.9), 숨을 거둔 날짜(7.5), 장례식을 치른 날짜(7.9), 숨졌을 당시 나이(22)를 연이어 새긴 기념물 앞에 배은심씨가 앉았다. 이한열의 대학 후배들이 매년 6월마다 치른 추도식도 올해로 서른번째다. 배씨는 지난 30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추도식에 참석했다.

 

“당신께서 ‘이제 사람 사는 세상이 됐느냐’ 하고 물으면 ‘예,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는 후배가 되고 싶은데, 후배들에게 내준 숙제가 너무 어려워 입이 쉽게 떨어질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30년째 지속되는 침묵의 호통이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김현수 연세대학교 상경·경영대 학생회장의 추도사가 시작되자, 추도식 식순이 적힌 종이를 쥐고 있던 배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한열을 잊지 않고 행사 준비해주신 모든 분들, 그리고 힘든 몸을 이끌고 찾아와주신 어머니께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배씨는 추도사를 끝낸 김씨를 말없이 끌어안았다. 추도사가 끝나고 헌화가 시작되자 흐렸던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연세대에서 한열이 후배들이 추모제 해준 것도 30년이 됐네요. 이한열이 이름을 잊지 않고 불러주는 게 참, 고맙기도 하고 때로는 미안한 감도 들고.” 배씨는 한열이의 이름을 불러주는 후배들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 매년 힘든 일을 하게 한다는 생각에 항상 미안한 마음을 안고 있다고 했다. “예전에 추모제 할 때는 도서관 앞에서 하는데, 거기서 마음이 너무 불편하더라고요. 학생들 공부하는데 시끄러우니까. 그래서 항시 미안했어요.”

 

미안한 마음은 아들의 친구들에게까지 옮겨갔다. “이한열 부축했던 종창이가 30년 동안 상당히 마음이 아팠어요. 오늘부터 종창이 (그) 마음 털어버리고 세상 살았으면 좋겠어요. 우상호(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총학생회장도 마찬가지예요. (한열이가) 좋은 후배가 됐으면 괴롭게 안 했을 텐데, 그것이 참 괴롭네요. 이 나라가 민주주의가 되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것이지, 여기서 추모제 하는 것은 부속에 불과해요.”

 

9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한열동산에서 열린 ‘제30주기 이한열 열사 추도식’에서 참석자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9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한열동산에서 열린 ‘제30주기 이한열 열사 추도식’에서 참석자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춤으로 그때 상황 기억하는 마음이 고맙죠.”

 

1987년 7월9일. 무더웠던 초여름날이 아들의 장례식이었다. 끝까지 아들이 깨어날 것이라 믿었던 배은심씨는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연단에 올라 절규했다. “이제 다 풀고 가거라. 엄마가 갚을란다, 한열아! 한열아! 가자, 우리 광주로!” 엄마는 영정사진 속에 담긴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연세대학교에서 서울시청 광장으로 이어진 장례 행렬을 따랐다. 시청에서는 110만여명의 인파가 몰려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구호를 외쳤다.

 

저녁 6시. 30년이 지나 서울시청 광장에서 진행된 이한열 장례행진 재연 행사에서 이애주 전 서울대 교수의 ‘진혼의 춤’ 베가르기 춤사위 공연이 재연됐다. 30년 전 이애주 교수는 흰 민복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춤을 추며 이한열의 운구 행렬을 이끌었다. 바람을 맞아 생명을 잇는다는 의미의 ‘바람맞이춤’이었다. 연세대학교 동문들과 이한열 장학생들이 양쪽에서 베를 들자, 이애주 선생은 30년 전 그랬던 것처럼 베를 가르며 당시 춤을 재연했다. 배씨는 30년 전 그날이 떠오르는 듯 공연 내내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훔쳤다.

 

“이애주 선생님이 춤췄던 것도 기억이 나요. 이 춤이 이쁘게, 멋지게 추는 춤이 아니잖아요. 춤으로 인해서 그때 상황을 기억하는 거라서, 춤추시는 분의 마음이 있어야 춤이 안 나오겠습니까.” 배씨가 말했다. “춤추시는 분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때로는 춤으로 인해서 눈물도 나오고 참 고맙습니다.”

 

배씨는 이날 반가운 얼굴들을 다시 만났다. 바로 세월호 유가족들이다. 30명의 ‘416 합창단’은 노란색 옷을 입고 광장 무대에 올라 ‘아름다운 사람’, ‘약속해’라는 제목의 곡을 합창했다. “우리가 너희의 엄마다/ 우리가 너희의 아빠다/ 너희를 이 가슴에 묻은/ 우리 모두가 엄마 아빠다” 곧은 자세로 무대를 바라보던 배씨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지난달 17일, 전라남도 광주 망월동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온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만난 배씨의 영상이 화제가 됐다. 배씨가 그날을 회상하며 말했다. “내 맘이 먼저 아파야 이 아픔도 전달이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내 마음이 그 사람들보다 먼저 아팠고, 그것이 전해진 거예요. (세월호 가족들은) 지금이 참 많이 울 때예요. 난 30년이 지나도 많이 울고 있는데 이제 3년이 됐잖아요. 눈물이 밥이에요. 눈물을 흘리면서도 밥은 먹으니까. ‘눈물이 밥이다.’ 그래요 항시. 똑같은 사람들끼리 뭔 얘기를 하겠어요. 밥 먹고 힘내시오. 그게 제가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

 

 

“자꾸 30년 해싸니까 이상해. 엊그제 같은데.”

 

지난 7일 저녁, 연세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린 이한열 30주기 기념전시회 ‘2017이 1987에게’에 참석한 배은심씨는 30년 만에 공개된 아들의 피격 직후 사진 앞에서 한참을 흐느꼈다. 혹여 손으로 느껴질까. 배씨는 무릎을 꿇고 쓰러져 있는 아들의 사진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훔치기를 반복했다. “30년을 살았는데 남는 건 사진밖에 없고, 참 허탈하네요.”

 

지난 30년, 배씨의 삶은 스스로의 표현대로 ‘아들을 보고 싶어도 못 보고, 좋아도 좋은 것도 모르고, 항상 마음이 괴롭게 살았던 나날들’이었다. 배씨는 최근 아들의 사진을 신문에서 봤을 때에도 마음이 아파 밥을 먹지 못했다고 했다. “사진을 볼 때마다 항상 힘들어서 아침을 못 먹었어. 그러다가 점심때 늦게 배가 고프더라고. 그게 인간이야. 그래서 그것도 미워. 스스로 내가 미운 거야. 밥을 못 먹다가 오후에 누룽지를 끓여 먹고 그랬는데. 그렇게 살았던 거예요. 그게 30년 세월이야. 오히려 30년이라고 하는데 나는 별로 달라진 게 없어요. 아직도 바로 어제 일 같아요.”

 

‘허탈했던’ 지난 30년의 시간. ‘집에 가만히 있으면 버틸 수가 없어’ 거리에 나선 그 시간들을 버틴 엄마는 아들을 만나면 가장 먼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을까. “나중에 아들을 만나면, ‘한열아 왜 그때 그 자리에 서 있었어?’ 물어보고 싶은 것밖에 없어요. 30년 동안 갖고 있던 질문. 기가 막히니까 할 말이 없고, 그냥 왜 그랬냐고 묻고 싶고, 그것뿐이에요.”

 

황금비 기자, 임세연 최호진 교육연수생 withbee@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98223.html?_fr=mt1#csidx68e4aa6f37ca6979c9de20740ccf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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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는 사드철회의 길로 당당히 나아가라”

“문재인 정부는 사드철회의 길로 당당히 나아가라”
 
 
 
편집국
기사입력: 2017/06/08 [22:15]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사드배치반대 단체들이 문재인 정부가 사드배치 철회의 가능성까지 열어놓고 성역없는 조사를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사진 : 사드저지전국행동)     © 편집국

 

문재인 정부가 사드 배치 관련 범정부 테스크포스(TF)’를 구성해서 그 동안 지적된 사안들에 대한 추가 조사 문제와 환경영향평가 실시 문제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할 것이라고 밝힌 가운데그동안 사드배치 반대를 주도해온 시민사회단체들이 8일 오후 230분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문재인 정부가 사드 철회의 길로 당당히 나아갈 것을 촉구했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우선적으로 기왕의 진행된 사항은 그대로 두고 환경영향평가 등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사드 배치를 위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며 반입된 장비의 철거를 요구했다.

.

또한 참가자들은 사드의 군사적 효용성미국 MD 참여 문제를 포함한 사드 배치가 한반도 안보와 경제에 미치는 영향한미 합의의 적법성비용 부담 문제 등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원점 재검토를 통해 사드 배치 철회의 길을 열어나갈 것을 촉구했다.

 

이들 단체들은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미국을 방문해 사드배치를 철회할 뜻이 없을 것이라고 통보하는 등 새 정부는 벌써부터 사드 배치를 기정사실화하는 발언들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며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가 사드 배치를 기정사실화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라며 중국과 러시아의 반발이 수그러들 리 없고예측할 수 없는 피해를 당하는 주민들의 투쟁도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들 단체들은 정부가 기왕에 사드 배치에 관한 범정부 TF를 구성했다면 그 업무의 범위에는 성역이 없어야 한다며 그 결과에 따라 사드 철회의 가능성까지 열어놓아야 TF 구성과 운용의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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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관련 범정부 TF 구성 및 1차 회의에 즈음한 공동기자회견문]

 

사드 가동과 공사 중단!, 배치 장비 철거!, 사드 배치 철회!

 

― 사드 배치 관련 모든 행위를 중단하고사드 배치 전반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원점 재검토를 통해 사드 배치 철회의 길을 열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문재인 정부가 사드 배치 관련 범정부 TF’를 구성해서 그 동안 지적된 사안들에 대한 추가 조사 문제와 절차적 정당성을 얻기 위한 환경영향평가 실시 문제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사드 부지 지역인 소성리에는 경찰병력만 뒤로 물러나 있을 뿐사드 배치(공사)는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헬기를 이용한 사드 관련 장비유류병력의 반입은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이뤄지고 있으며환경영향평가도 없이 불법으로 들여온 사드 레이더가 주민들에 대한 아무런 안전 조치도 없이 가동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먼저 문재인 정부에게 지금 당장 사드 레이더 가동 중단을 포함하여 사드 배치 관련 모든 행위를 중단하고 반입된 장비를 철거하여 이미 저지른 불법성을 시정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그렇지 않고 기왕의 진행된 사항은 그대로 두고 환경영향평가 등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사드 배치를 위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사드의 군사적 효용성미국 MD 참여 문제를 포함한 사드 배치가 한반도 안보와 경제에 미치는 영향한미 합의의 적법성비용 부담 문제 등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원점 재검토를 통해 사드 배치 철회의 길을 열어나갈 것을 촉구한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사드 배치 문제와 관련하여 추가 반입된 사드 발사대 4기에 대한 국방부의 보고 누락정상적 환경영향평가 회피기형적인 사드 부지 공여 등의 문제점이 밝혀졌다이는 사드 배치가 얼마나 불법적이고 기만적으로 이뤄져 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들이다이 짧은 기간에 이처럼 심각한 문제들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는 것은 박근혜 정부의 사드 배치 과정 전반에 대한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조사와 재검토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새 정부는 벌써부터 사드 배치를 기정사실화하는 발언들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문재인 대통령은 사드와 관련한 나의 (진상조사지시는 전적으로 국내적 조치이며기존의 결정을 바꾸려거나 미국에 다른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한다.”(5/31)고 밝혔고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미국을 방문하여 새 정부가 사드 체계 배치를 철회하는 일은 절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통보했다.”고 한다.(중앙일보, 6/6)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미 배치된 (사드는환경영향평가를 한다고 해서 굳이 철회하거나 그럴 이유가 없다.”(6/7)고 밝혔다우리는 환경영향평가 등 일정한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여 사드를 배치하려는 문재인 정부의 입장에 대해 매우 큰 실망과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가 사드 배치 문제를 검토하려면 사드가 과연 한국 방어에 필요한 무기인지부터 따져보는 것이 첫째 순서다군사적 효용성이 없다면 굳이 환경영향평가 등의 절차도 필요 없이 사드 배치를 철회하면 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사드를 포함한 MD가 한반도 지형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미 의회보고서 등이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듯이 사드로 북핵 미사일을 남한에서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문제다그럼에도 한미당국은 사드가 북핵 미사일을 막는 만능의 무기인 것처럼 국민들에게 거짓 선동을 해왔다따라서 이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전문가의 검토와 함께 국민적인 공론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와 함께 한미당국의 사드 배치 합의가 적법한 것인지도 따져봐야 한다사드 배치는 우리의 영토주권과 공역주권을 제약하고중국과 러시아가 유사시 사드 기지를 1차적 공격대상으로 삼겠다고 공언하고 있는 데서 보듯이 우리의 평화와 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하고우리 국가와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과 경제적 타격을 입히며 성주와 김천 주민의 생존을 해치는 중차대한 문제이다따라서 이런 문제는 당연히 한미간 법적 권리와 의무를 창설하는 조약 체결로 규율되어야 한다그러나 한미당국 사이에는 법적 구속력을 갖는 조약이 체결된 바 없다는 것이 국방부의 공식 답변이다.

 

문재인 정부가 사드 배치에 대한 이 같은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환경영향평가 등에 대한 절차적 정당성 확보를 명분으로 사드 배치를 기정사실화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사드 배치가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적 이익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반발이 수그러들 리 없고 그로 인해 한반도의 안보가 위태로워지며한국의 미일MD 및 삼각군사동맹 편입으로 나라의 주권 확보와 민족의 통일에 중대한 걸림돌이 놓이게 된다더욱이 주민들이 벌써부터 소음 피해를 호소하는 데서 보듯이 사드배치로 예측할 수 없는 피해를 당하는 주민들의 투쟁도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환경영향평가 문제도 철저히 조사해야 마땅하지만 이것은 이전 정부가 저지른 온갖 불법과 전횡의 한 사례일 뿐이다.

 

따라서 정부가 기왕에 사드 배치에 관한 범정부 TF를 구성했다면 그 업무의 범위에는 성역이 없어야 한다당연히 사드 배치 관련 근본적 문제들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국민적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그 결과에 따라 사드 철회의 가능성까지 열어놓아야 TF 구성과 운용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에 우리는 문재인 정부가 오직 우리나라의 주권과 평화이익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의 기준으로 놓고 사드 철회의 길로 당당히 나아갈 것을 촉구한다.

 

2017. 6. 8.

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원회사드배치반대 김천시민대책위원회원불교 성주성지수호비상대책위원회사드한국배치저지전국행동사드배치반대대구경북대책위원회사드배치저지부산울산경남대책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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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총선, 집권 보수당 과반상실 패닉...노동당 약진

 
'영국판 박근혜' 메이 총리 입지 흔들
2017.06.09 08:51:46
 

 

 

 

8일(현지시간) 치러진 영국 조기총선에서 '압승'을 자신했던 집권 보수당이 과반의석을 상실할 것이라는 출구조사로 충격에 빠졌다.


BBC 등 방송 3사가 이날 투표 마감 직후 발표한 공동 출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보수당은 제1당은 유지하지만, 과반의석(326석)을 간신히 넘긴 330석에서 오히려 16석을 잃은 314석을 차지할 것으로 예측됐다. 

또한 제1야당인 노동당은 37석이 늘어난 266석, 스코틀랜드국민당(SNP)은 34석, 자유민주당은 14석 등을 확보할 것으로 예측됐다. 영국 언론들은 "보수당과 노동당 모두 단독으로 과반의석을 얻지 못해, 어느 당도 단독으로 법안을 처리하지 못하는 '헝 의회(Hung Paliament)'가 출현할 가능성이 커졌다"고 보도했다. 

 

▲ 근소한 과반에서 더 많은 표를 얻어 '하드 브렉시트 협상'에 나서겠다며 조기 총선을 요구한 메이 총리. 8일 출구조사 결과 집권 보수당이 오히려 과반을 상실할 것으로 예상됐다. ⓒAP=연합


"메이 총리에 큰 타격, 재선거 상황 올 수도"

 

 

<뉴욕타임스>는 "출구조사가 개표로 확인되면, 3년이나 앞당긴 조기총선을 요구한 테레사 메이 총리에 큰 타격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나아가 조기총선의 취지대로라면, 조만간 재선거를 치러야 할 상황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메이 총리가 2년만에 조기총선을 요구한 것은 '브랙시트 협상'을 위해서는 과반수를 조금 넘긴 정도가 아니라 훨씬 더 많은 의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노동당에 대한 지지율이 바닥인 여론의 동향을 볼 때 조기총선으로 의석수를 대폭 늘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이 총리는 '브렉시트 협상의 적임자'로서의 단호한 의지의 '철혈여인'이라는 이미지를 얻으며 당내에서 '선거의 여왕'으로 추앙받았으나 '불통의 여인'으로 추락했다. 

재가요양 서비스 비용 일부를 국가가 지원하던 복지정책을 노인이 보유한 주택의 가치까지도 소득 기준에 포함해 집을 가졌지만 소득은 없는 65세 이상의 노인들이 갑자기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는 방식으로 바꾸겠다는 공약이 대표적인 실책으로 꼽혔다. 이 공약은 보수당의 주지지층인 노인층의 분노뿐 아니라 노인을 둔 가정의 많은 유권자들을 돌아서게 했다. 당내의 반발을 무릅쓰고 이 공약을 관철시켰던 메이는 비난이 거세자 곧바로 이 공약을 철회하겠다고 입장을 바꾸면서 '오락가락 정치인'으로 전락했다. 

지난 4월 메이가 조기총선을 발표했을 때 보수당과 노동당 지지율 격차는 20%포인트가 넘었지만 이 공약이 발표된 직후에 8%포인트까지 좁혀졌다.

<뉴욕타임스>는 "영국 정부가 어떻게 구성될지 불확실한 상태에서 2주내에 EU와의 브렉시트 협상이 시작된다"고 지적하며, 이번 영국 총선 결과는 영국 국민이 국민투표로 브렉시트를 선택하며 전세계에 파장을 던진 것처럼, 또다시 전세계에 불확실성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를 반영하듯 출구조사 직후 영국의 파운드화는 달러 대비 2%가 넘게 급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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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처분 이외에는 아직도 별다른 대책이 없는 조류독감

 
취임 후 처음으로 청와대 보좌관을 혼낸 문재인 대통령, 왜?
 
살처분 이외에는 아직도 별다른 대책이 없는 조류독감
 
임병도 | 2017-06-09 09:06:2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보고 내용을 질책했습니다. 질책은 꾸짖거나 나무라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혼을 냈다고 봐야 합니다.

문 대통령은 취임 후 다섯 차례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를 주재했는데 보고 내용을 질책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유는 AI(조류인플루엔자) 때문입니다.

6월 8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회의에서 조류인플루엔자 방역대책 추진 상황을 보고받은 문재인 대통령은 “AI(조류인플루엔자) 대책이 의례적으로 보인다”라고 지적한 후 “바이러스 변종이 토착화 되고 있는 것으로 의심되고 있는 상황을 엄중하게 인식하고 기존의 관성적인 문제해결 방식에서 벗어나 근원적 해결방식을 수립하라” 고 지시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보고를 받았더니 대책이라고 내놓은 내용들이 기존과 별다를게 없으니 다시 대책을 세우라는 뜻입니다.


‘살처분 이외에는 아직도 별다른 대책이 없는 조류독감’

 

▲지난 2014년 전북 정읍시의 한 오리농장에서 공무원들이 조류독감 확산 방지를 위한 오리 살처분 작업을 진행하는 모습. 이날 처분된 오리는 2만5천여마리였다 ⓒ매일노동뉴스 윤성희 기자

 

2003년 12월 충북에서 처음 조류인플루엔자가 발견됐습니다. 거의 매년 같은 패턴으로 조류독감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막기 위한 대책은 ‘살처분’이 유일합니다.

AI가 발생하면 해당 농가를 중심으로 반경 3km까지 위험 지역으로 규정합니다. 이후 가금류 이동을 금지하거나 방역 조치를 합니다. 그러나 질병 확산을 막기 위해 중점적으로 하는 대책은 감염농가 반경 500m 이내 가금류를 모두 의무적으로 살처분 후 땅에 묻는 방식뿐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유독 AI(조류인플루엔자) 대책을 보고 받고 혼낸 이유는 ‘살처분’ 이외는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위기 상황에서도 기존의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공무원들의 한계를 질타한 셈입니다.


‘2006년에 비해 10배가 넘는 살처분이 이루어진 2016년’

 

▲2011년 이후 조류독감 살처분 및 보상금 지급현황 자료출처:농림축산식품부, 기획재정부 ⓒ포커스뉴스 이희정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살처분 이외에 대책이 없다고 무조건 혼을 낸 것은 아닙니다. 조류독감의 전파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살처분되는 가금류와 피해 보상금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기 때문입니다.

2006년 11월부터 2007년 3월까지 AI가 104일 동안 진행되면서 280만 마리가 살처분됐습니다. 2016년 발생한 AI로 인해 3000만 마리가 넘게 살처분이 되는데, 불과 50일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AI확산이 급속하게 이루어지고 수천만 마리의 가금류가 살처분 되고 있습니다. 사상 최악의 피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취임 후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천천히 합시다’라고 말할 사건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기에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선 것입니다.


‘조류독감,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AI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살처분 숫자 [카드뉴스] 사상 최악의 AI, 한국과 일본 정부의 대응 ⓒ뉴스타파

 

 

지난해부터 발생한 AI는 두 가지 혈청형(H5N6, H5N8)이 동시에 발견되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적한 것처럼 ‘바이러스 변종’ 등이 의심되고 있습니다. 아직도 국내에서 발견한 AI 바이러스가 야생조류 때문인지 여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2016년 11월 16일부터 12월 16일까지 한국이 1600만 마리를 살처분 하는 비슷한 시기에 일본은 56만 마리를 살처분했습니다. 같은 병원체에 의한 감염병인데 한국이 압도적으로 살처분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위기 대책이나 방역 등이 부실했다고 봐야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수석보좌관회의에서 “국무총리를 컨트롤타워로 하여 완전 종료 시까지 비상 체제를 유지하면서 근본적인 해결 대책을 마련할 것”을 지시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아직도 부족하다며 질책한 것입니다.

대통령이라면 위기 상황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어야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보좌관을 질책한 것은 재난상황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국민이 고통 받는다는 사실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매년 발생하는 조류독감을 근절하거나 초기에 막아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길 바랍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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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죽거나 굶어 죽거나 살해당했지요"

 

[6월 민주항쟁 30주년] 1987년 3월 이야기

17.06.08 21:11l최종 업데이트 17.06.08 21:11l

 

올해로 1987년 6월 항쟁 30주년을 맞았습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오마이뉴스>가 공동기획으로 '6.10 민주항쟁 30주년 기념, 1987 우리들의 이야기' 특별 온라인 전시회를 열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전시회 내용 가운데, 가상 시민 인터뷰와 시대적 풍경이 기록된 사진 등을 갈무리해 독자 여러분께 전해드립니다. - 편집자 말

사리암의 50대 비구니 스님
 

 1987년 3월 3일 고 박종철 영가 49재 천도식
▲  1987년 3월 3일 고 박종철 영가 49재 천도식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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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3월 3일 고 박종철 군의 49재를 맞아 서울 시내에서 진행된 '3. 3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
▲  1987년 3월 3일 고 박종철 군의 49재를 맞아 서울 시내에서 진행된 '3. 3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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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3월 3일 어깨동무를 하고 청계천을 지나고 있는 시민들
▲  1987년 3월 3일 어깨동무를 하고 청계천을 지나고 있는 시민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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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987년 3월 3일입니다. 경찰 고문에 희생된 박종철 군의 49재 날이에요. 그런데 거리엔 최루탄만 날리네요.

 

조계사에서 범종단적으로 올리기로 했던 박종철 군의 49재가 결국 취소됐다는 소식이에요. 보이지 않는 압력에 밀려 조계사 대신 부산 괴정동의 작은 절로 바뀐 거지요. 경찰은 쫓고 시민은 쫓기는 험한 모습이 하루 종일 전국에서 펼쳐졌어요. 전투경찰이 도시를 봉쇄하고 거리를 장악해 버렸거든요. 온 세상이 깊은 슬픔과 매운 최루탄으로 뒤덮인 하루였어요.

지난 2월 7일 거행된 박종철 군 추모식 때에도 정말 서럽고 죄송했어요. 경찰이 절 입구에 진을 치고 있어 박종철 군 친척들도 못 들어왔대요. 스님들도 모두 자리를 슬며시 피했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박군의 어머니와 누나가 추모 타종만 겨우 울렸대요. 젊은 생명을 그렇게 보낸 것도 서럽고 억울한데 사람들이 모여서 추모도 하지말라는 건 어느 나라 법도란 말인가요.

부끄러워서 부처님 뵐 낯도 없네요. 사람이 사는 세상에선 사람이 해야할 예의와 행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나마 젊은 승려들과 시민들이 전국에서 최루탄을 뚫고 49재를 올렸다고 하니 고마움의 작은 빛이 비치는 것만 같아요. 나무 아미타불.

박종철 군의 마지막 길에 부처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매운 최루탄 대신 온누리에 평화가 가득 차길... 두 손 모아 염원드려요.

형제복지원 사건의 20대 피해자
 

 1987년 조회를 끝내고 청소를 하고 있는 형제복지원 원생들
▲  1987년 조회를 끝내고 청소를 하고 있는 형제복지원 원생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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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3월 14일 명동 입구에서 총을 들고 시민을 검문 중인 경찰들
▲  1987년 3월 14일 명동 입구에서 총을 들고 시민을 검문 중인 경찰들
ⓒ 박용수·경향신문·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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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은 대한민국의 아우슈비츠였어요. 여기에 잡혀 온 다음부터 내가 본 것은 딱 하나예요. 아수라가 지배하는 아비규환의 생지옥.

여기가 처음 생긴 건 1975년이래요. 그러다 1986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정부가 대대적으로 부랑아 단속을 하면서 수용인원이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남녀노소 구분 없이 무자비하게 잡혀 왔대요. 밤늦게 귀가하던 회사원에서부터 바람 쐬러 나왔던 여성까지. 심지어 국가보안법 위반자도 잡아 왔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는 짐승 취급을 받았어요. 가격이 매겨진 동물처럼, 강제노역에 동원되는 가축처럼 말이에요. 여기서 우리가 먹을 수 있었던 것은 꽁보리밥에 소금 뿌린 깍두기와 썩은 전어 젓이 전부였어요. 우리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새벽부터 군가를 부르며 구보까지 해야 했어요. 그리고 나선 강제 노역에 동원되어야 했죠. 차라리 죄수들이 수용된 교도소가 여기보단 나을 거예요.

왜 우리가 매일 맞아야 했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어요. 많은 원생들이 맞아 죽거나 굶어 죽거나 살해당했지요. 12년 동안 500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죽은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게 암매장당하거나 해부용으로 팔려 나갔대요. 내가 살아남은 건 정말 천운이었던 것 같아요. 나는 아직도 매일 밤 두려움에 떨고 있어요. 다시는 그런 데로 끌려가고 싶지 않아요. 전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니까요.
 

 1987년 3월 3일 '3. 3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 가두시위에 참가한 학생을 강제로 연행하는 경찰
▲  1987년 3월 3일 '3. 3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 가두시위에 참가한 학생을 강제로 연행하는 경찰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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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 박용수, 경향신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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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 있는 사람 내 놓아야 그게 적폐청산”

양심수 석방 추진위 발족, 37명 양심수 즉각 석방 촉구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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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6.08  14:2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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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심수 석방 추진위원회가 7일 프레스센터에서 발족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제공 - 양심수석방추진위]

“감옥에 있는 사람 내 놓아야 그게 민주화다 적폐청산이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7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양심수 석방 추진위원회’ 발족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 말 좀 전해달라”며 이같이 말했다.

촛불민심으로 문재인 정부가 탄생했지만 여전히 37명의 양심수가 감옥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 6월 5일 현재 통합진보당 사건 관계자를 포함해 국가보안법 관련 25명, 노동운동 관련 12명 등이다.

추진위에 따르면 함세웅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은 “문재인 정부가 지금까지는 잘하고 있지만 사회적 한계 또한 존재한다”며 “문 대통령이 한계를 넘어서서 양심수 석방을 통해 해방과 인권의 정치를 펼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권오헌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은 “양심수를 감옥에 두고 있는 것은 문명사회에 있을 수 없는 야만”이라며 “양심수 석방과 더불어 사면복권, 수배해제 나아가 국가보안법이 반드시 철폐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민가협의 보랏빛 수건을 매고 함세웅 신부가 '국민에게 드리는 제안 말씀'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 - 양심수석방추진위]

권영길 민주노총 지도위원은 “촛불의 힘이 문재인 대통령 시대를 열었다”며 “문재인 대통령이 약속한 적폐 청산의 첫 번째 발걸음은 양심수 석방”이라고 조속한 석방을 촉구했다.

조영건 구속노동자후원회장은 “양심수 석방은 대통령의 헌법적 권리”라며 “대통령이 결심하면 오늘이라도 당장 할 수 있으니만큼 국민의 제언에 귀 기울일 것”을 당부했다.

『빈곤의 세계화』 저자인 미셸 초서도브스키 캐나다 오타와대 명예교수는 연대사를 통해 “이석기 전 의원과 통합진보당에 대하여 박근혜 정권이 어떤 행위를 하였는가를 잊어선 안 된다”며 “문재인 정부의 광범위한 개혁의 일환으로서 양심수 석방이 단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6.15여성본부 상임대표인 권오희 수녀와 민변 사무총장인 강문대 변호사가 낭독한 기자회견문을 통해 “적폐청산의 첫 번째 과제인 ‘양심수 석방’이 가장 용기 있는 개혁”이라고 강조했다.

   
▲ 방한 중인 『빈곤의 세계화』 저자인 미셸 초서도브스키 캐나다 오타와대 명예교수가 연대사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 - 양심수석방추진위]

특히 “지금 감옥에 갇힌 양심수는 노동자 생존권을 위해 앞장 선 사람들, 국가보안법으로 희생된 사람들, 공작정치의 올가미에 걸린 사람들, 시민사회운동 등으로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라며 30년전 6월항쟁으로 감옥문이 열린 역사적 사례를 들어 “30년 전 바로 그 때처럼 감옥 문을 열고 양심수는 석방 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참가자들은 “우리는 각계의 뜻을 모아 ‘양심수 석방 추진위원회’의 결성을 뜨겁게 선언한다”며 “대한민국의 모든 양심수들이 석방되는 그날까지, 감옥 문을 활짝 여는 그 날까지 함께 할 것을 우리는 결의한다”고 밝혔다.

추진위는 적폐 청산, 양심수 석방을 위한 국민청원 ‘보라색 엽서’ 캠페인을 온라인, 오프라인에서 대대적으로 전개하고, 주말인 7월 8일 저녁 7시 광화문광장에서 다시 촛불을 들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양심수 석방 문화제(가제)’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한편, 추진위는 지난 5월 22일 제안자 모임을 갖고 제안자 21인 명의로 ‘양심수 석방 추진위원회 제안문’을 발송했고, 이후 98명의 공동추진위원장이 참여해 이날 발족에 이르렀다.

   
▲ 6.15여성본부 상임대표인 권오희 수녀와 민변 사무총장인 강문대 변호사가 기자회견문을 낭독하고 있다. [사진제공 - 양심수석방추진위]

제안자로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함세웅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 도법 조계종화쟁위원회 위원장, 김상근 경기도 교육연구원 이사장, 이창복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 최병모 전 민변 회장, 권영길 민주노총 지도위원, 권오헌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등이 참여했다.

정진우 NCCK 인권센터 소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가 TED ‘양심수를 말한다’를 강연했고, 박래군인권재단 사람 소장이 발족 경과보고 및 사업계획을 발표했으며, 국민청원 캠페인 ‘보라색 엽서’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기자회견문(전문)>
6월항쟁이 감옥 문을 열었던 것처럼 촛불혁명도 감옥 문을 열어야 합니다

천만 촛불시민혁명은 역사적인 정권교체를 이루었습니다. 주권자인 시민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촛불시민혁명으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지금 적폐청산의 첫 번째 과제는 ‘양심수 석방’이어야 합니다. 참된 민주주의와 인권을 더욱 활짝 꽃피울 때까지 촛불시민혁명은 현재진행형입니다.

박근혜 정권이 저지른 반민주적, 반인권적 행위로 인하여 고통을 겪은 피해자는 적지 않습니다. 박근혜는 감옥으로 갔지만 양심수는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같이 감옥에 있습니다. 지금 감옥에 갇힌 양심수는 노동자 생존권을 위해 앞장 선 사람들, 국가보안법으로 희생된 사람들, 공작정치의 올가미에 걸린 사람들, 시민사회운동 등으로 감옥에 갇힌 사람들입니다.

과거 6월항쟁 당시 국민들은 '직선제 쟁취'와 함께 '양심수 석방'을 외쳤습니다.

군사독재정권은 무릎을 꿇었고 감옥 문은 열렸습니다. 그 이듬해까지 감옥 문을 열고 나온 양심수는 모두 1천여 명에 달합니다. 심지어 미결수도 석방되었습니다. 30년 전 바로 그 때처럼 감옥 문을 열고 양심수는 석방 되어야합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9년 동안 한국의 인권은 심각하게 후퇴하였습니다. 자유로이 말하지 못하고, 안전하게 생존하지 못하고, 노동자로서 단결하지 못하도록 억압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다움'을 빼앗겼습니다. 감옥 안에 양심수를 그대로 두고는 인권을 말할 수 없습니다. 이제 ‘양심수 석방'을 통해 한국이 다시 인권국가로 나아가겠다고 국내외에 당당히 선언해야 합니다.

문재인 정부의 개혁을 많은 국민들이 응원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민주주의, 인권이 어떻게 바로 설지 세계 각국에서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촛불혁명을 이어받아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정의가 바로서는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적폐청산의 첫 번째 과제인 ‘양심수 석방’이 가장 용기 있는 개혁입니다.

이에 우리는 각계의 뜻을 모아 '양심수 석방 추진위원회'의 결성을 뜨겁게 선언합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양심수들이 석방되는 그날까지, 감옥 문을 활짝 여는 그 날까지 함께 할 것을 우리는 결의합니다.

 

공동추진위원장 명단(총 98명)

함세웅(안중근기념사업회 이사장),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 소장), 오종렬(5.18민족통일학교이사장), 권오헌(민가협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조순덕(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상임의장), 조영건(구속노동자 후원회 회장), 이창복(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상임대표의장), 김상근(한국기독교 교회 협의회 비상시국 대책위원회 위원장), 최병모(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전회장), 이해동(전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배은심(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전 회장), 정동익(사월혁명회 상임의장), 박순경(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전상임고문), 박중기(추모연대 상임고문), 김정숙(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감사), 문정현(신부), 권영길(민주노총 지도위원), 김중배(전 문화방송 사장), 문규현(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상임대표), 윤한탁(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 명예의장), 이정이(615남측위부산본부상임대표), 임기란(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명예회장),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장남수(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장), 정혜열(사월혁명회 공동의장), 조헌정(전태일재단 이사장), 안학섭(통일광장 회원), 권낙기(통일광장 대표), 한상렬(한국진보연대 상임 고문), 법 안(조계종 전 중앙종회 부회장), 청 화(조계종 전 중앙종회 부회장), 도 법(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장), 지 선(조계종 백양사 고불총림 방장), 시 공(실천불교승가회 상임대표), 효 진(실천불교승가회 집행위원장), 퇴 휴(전 조계종 교육부장), 일 문(실천불교승가회 공동대표), 혜 조(청련사 주지), 재 범(인월사 주지), 정진우(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센터 소장), 김성복(NCCK인권센터 이사), 황필규(NCCK인권센터 서기 이사), 이 적(민통선 평화교회), 박철(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의장), 강은숙(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총무), 유시경(성공회교무원장), 최재철(천주교 수원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한만삼(천주교 수원교구 정의구현사제단 대표), 나승구(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대표), 이영선(천주교 광주교구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권오준(천주교 춘천교구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나핵집(한국기독교장로회 열림교회), 남재영(기독교대한감리교 빈들교회), 박승렬(한국기독교장로회 한우리교회), 강해윤(원불교 봉도수위단원), 김선명(원불교 성주성지수호비대위집행위장), 김성근(원불교 상계교당), 오광선(원불교 궁동교당), 정상덕(전 원불교 개벽교무단 회장), 임진택(연출가), 신경림(시인), 윤민석(음악가), 박래군(인권재단 ‘사람’ 소장), 심재환(통일의 길 공동대표), 김주영(한국노총 위원장), 김동만(한국노총 상임지도위원), 이호윤(전국민주동문회 상임대표), 장 건(한반도 통일을 위한 평화행동 상임대표), 정연순(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회장), 한상권(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대표), 황인성(수원 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 김희선(여성독립운동단체기념사업회 회장), 이강실(전 전국여성연대 상임대표), 손미희(전 전국여성연대 상임대표), 권오희(615남측위여성본부상임대표), 김성은(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이사장), 김영순(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안김정애(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상임대표), 최진미(전국여성연대 상임대표), 김한성(615남측위학술본부장/연세대교수), 장임원(민교협초대의장/중앙대명예교수), 김세균(서울대학교 명예교수), 김민웅(성공회대 교수), 김애영(한신대 교수), 송주명(한신대 교수), 홍성학(교수노동조합위원장/충북과학대교수), 이규재(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의장), 정현찬(한국가톨릭농민회 회장), 문경식(한국진보연대 공동상임대표), 노수희(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부의장), 송무호(공안탄압저지시민사회대책위 대표), 박석운(한국진보연대 공동상임대표), 한충목(한국진보연대 공동상임대표), 강병기(민중의 꿈 상임대표), 김영호(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 김순애(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 윤기진(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 의장), 윤택근(민주노동자 전국회의 의장), 정종성(한국청년연대 상임대표), 김 식(한국청년연대 공동대표) (이상 무순)

(자료제공 - 양심수 석방 추진위원회)


(수정,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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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조롱이 부부의 도심 속 육아 분투기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7/06/08 10:07
  • 수정일
    2017/06/08 10:07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윤순영 2017. 06. 08
조회수 11 추천수 0
 
버린 까치 집, 화분 등에 둥지, 빌딩과 유리창 충돌 위험 감수해야

육아 분업…수컷은 작은 새나 쥐 잡아 암컷에 전달, 암컷이 새끼에 먹여

 

크기변환_DSC_6052.jpg» 새끼에게 먹일 어린 들쥐를 물고 둥지로 향하는 황조롱이 암컷.

 

경기도 김포시 에코센터 건물엔 나무로 만든 탑이 세워져 있다. 이 탑에는 까치 둥지가 있는데, 지난 3월 13일 이곳에 황조롱이가 산란 터를 마련했다

 

황조롱이는 둥지를 틀지 못하기 때문에 맹금류나 까치, 어치 등이 버린 묵은 둥지를 대강 고쳐서 쓴다번식지와 먹이 터가 훼손돼 둥지 구하기 힘들어진 요즘 왕조롱이는 도심 속 빌딩이나 아파트 베란다의 흙을 담아 놓은 화분을 대체 둥지로 쓰는 일이 많다.

 

 

크기변~4.JPG» 고층 아파트 베란다에 놓인 화분을 둥지로 활용해 황조롱이 새끼를 부화했다.

 

그러나 도심에서 먹이를 찾아야 하는데다 복잡한 빌딩의 방해, 투명 유리창에 자칫 부딪힐 가능성 등 위험요소가 즐비하다. 도시환경에 적응했더라도 도심 속 황조롱이는 생명을 담보로 살 수밖에 없는 처지다. 더욱이 새끼를 키우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크기변환_DSC_1457.jpg» 에코센터 탑의 둥지 주변에서 황조롱이 부부가 짝짓기를 한다.

 

크기변환_DSC_1539.jpg» 황조롱이 부부는 정해진 장소에서 수시로 짝짓기를 한다. 산란이 임박했다.

 

이곳 에코센터의 황조롱이 부부는 운이 좋다안전한 둥지와 더불어 한강과 농경지 그리고 야생조류공원이 한눈에 훤히 내려다보이고 사냥감도 아주 풍부한 곳이기 때문이다.

 

3월 26일, 자주 눈에 띄던 황조롱이 부부가 보이지 않는다알 품기가 시작되었다. 4월 23일부터는 암컷과 수컷이 번갈아서 가끔 보이고 둥지를 자주 들락거린다새끼가 태어난 것이다.

 

크기변환_DSC_4833.jpg» 둥지 밖을 물끄럼이 내다보는 황조롱이 수컷.

 

수컷은 사냥에 열중하고 새끼들에게 먹이를 뜯어 먹이는 몫은 암컷 황조롱이다. 수컷은 새끼에게 먹이를 먹이는 방법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암컷이 잘못되면 새끼들은 굶어 죽는다너무 높고 깊숙한 곳에 둥지를 틀어 새끼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크기변환_YSJ_0586.jpg» 가끔 까치가 텃세를 부려 공격해 오지만 개의치 않는다.

 

크기변환_DSC_4808.jpg» 황조롱이는 정지비행의 달인이다.

 

5월 15일, 황조롱이 부부가 바쁘게 움직인다. 황조롱이 새끼들이 제법 자랐나 보다. 20여 일이 지나면 새끼들은 스스로 먹이를 뜯어먹는다

 

수컷 황조롱이가 사냥에 성공해 먹이 전달 장소에 앉아 당당한 소리로 울어대면 암컷 황조롱이가 재빠르게 나타나 먹이를 가지고 가 새끼에게 건네준다. 

 

들쥐와 작은 새가 주된 사냥감이다황조롱이는 둥지를 중심으로 이동 동선이 정해져 있어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황조롱이 먹이 전달식 연속 동작

 

크변환_DSC_8028.jpg» 사냥감을 가지고 전달 장소로 날아가는 수컷 황조롱이.



크변환_DSC_8029.jpg» 날아가는 모습이 급해 보인다. 사냥에 시간이 걸렸나 보다.

 

크기변환_DSC_4665.jpg» 수컷은 먹이 전달 장소인 전봇대에 도착해 암컷 황조롱이를 부른다. 앉아있을 때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사냥감을 꽉 움켜쥐고 있다.

 

크기변환_DSC_4666.jpg» 붉은머리오목눈이가 사냥감이 되었다. 암컷 황조롱이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사냥감을 건네줄 준비를 한다.

 

크기변환_DSC_4679.jpg» 수컷 황조롱이는 암컷이 먹잇감을 잘 물고 갈 수 있게 사냥감의 목덜미를 부리로 물고 기다린다.

 

크기변환_DSC_4680.jpg» 쏜살같이 나타난 암컷 황조롱이.

 

크기변환_DSC_4682.jpg» 수컷 황조롱이가 신중하게 암컷 황조롱이가 쉽게 가져갈 수 있도록 자세를 잡는다.

크기변환_DSC_4683.jpg» 먹이 전달을 위해 수컷 황조롱이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크기변환_DSC_4685.jpg» 암컷 황조롱이가 수컷 황조롱이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선다.

 

크기변환_DSC_4687.jpg» 먹이 전달은 의식을 행하듯 매우 신중하게 이뤄진다.

 

크기변환_DSC_4688.jpg» 암컷 황조롱이가 부리를 마치 입맞춤을 하듯 수컷황조롱이 부리 가까이 댔다.

 

크기변환_DSC_4689.jpg» 눈깜박할 새 암컷 황조롱이 부리로 먹이가 전달되었다. 사냥감은 항상 목덜미를 부리로 물고 나른다.

 

변환_DSC_4690.jpg» 먹이 전달이 끝나고 자세를 흐트러뜨리는 수컷 황조롱이.

 

크기변환_DSC_4691.jpg» 암컷 황조롱이가 먹이를 물고 힘차게 둥지로 향한다.

 

크기변환_DSC_4692.jpg» 수컷 황조롱이는 다시 사냥에 나선다.

 

5월 22일, 새끼가 둥지에서 나와 불안스런 몸짓으로 돌아다닌다어미는 새끼한테 먹이를 주지 않고 줄 듯 말 듯하며 둥지 밖으로 유인한다. 

 

새끼 황조롱이와 계속해서 신경전을 벌인다. 좀처럼 어미 뜻대로 안 되지만 결국 새끼는 먹이의 유혹에 둥지를 나선다. 

 

5월 25일, 첫 비행이 두려워 둥지에만 머물던 두 마리의 황조롱이 새끼가 용기를 내어 힘차게 하늘을 날았다. 어미가 유인하는데 이기는 새끼는 없다. 황조롱이 부부는 누구에게도 둥지를 내어주지 않고 내년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킬 것이다.

 

크기변환_DSC_4716.jpg» 어미 황조롱이(왼쪽)가 큼직한 쥐를 물고 새끼를 둥지 밖으로 유인하고 있다.

 

크기변환_DSC_5984.jpg» 용기를 내어 둥지 밖으로 치고 나가는 황조롱이 새끼.

 

황조롱이는 끝이 구부러진 윗부리와 날카로운 발톱, 예리한 눈을 갖고 있다. 땅 위의 목표물을 찾아 낮게 날거나 정지비행을 하다가 급강하하여 날카로운 발톱으로 사냥을 한다. 앉아 있는 새를 덮치기보다는 새가 날아오르는 순간에 사냥을 한다날개 길이는 68~76이며 암컷의 몸길이는 수컷보다 다소 큰 38, 수컷은 33로 날렵한 몸매를 자랑한다. 농경지나 도심에서도 관찰되는 텃새다.

 

윤순영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한겨레 환경생태 전문 웹진 <물바람숲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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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의 폭탄 증언...트럼프 '탄핵 열차' 시동

 
청문회 하루 앞두고 증언 "수사 손 떼고 내게 충성하라"...트럼프 탄핵 여론 힘 받나?
 
2017.06.08 08:06:00
 
 

 

 

 

제임스 코미 전 연방수사국(FBI) 국장이 7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러시아 스캔들 수사 중단 압력이 사실이라고 서면 증언을 통해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의 러시아 정부 내통 의혹을 수사하던 중 지난달 10일 전격 해임된 그는 8일 미 의회 상원 정보위에 출석, 이같은 내용의 증언을 할 것으로 보인다. 
 
코미 전 국장의 증언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 스캔들의 '몸통'인 마이클 플린 전 국가안보보좌관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코미 전 국장에게 "이 문제(러시아 내통 의혹 수사)에서 손을 뗐으면(let go) 한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언론 등을 통해 제기됐던 트럼프 대통령의 수사 중단 요구 외압설에 대해 핵심 당사자가 사실상 이를 인정하는 증언을 한 셈이다. 코미 전 국장의 발언이 만약 사실이라면 이는 '사법 방해'로 탄핵 사유에 해당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스스로 사임한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 '사법 방해'로 인해 탄핵 직전까지 몰렸었다. 
 
러시아 내통 의혹 수사 중단 압력에 대해 '마녀 사냥(witch hunt), '가짜 뉴스(fake news)'라고 부인해 온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주목된다. 
 
코미 전 국장은 또 지난 1월 트럼프 대통령이 저녁 만찬 중 자신에게 "나는 (당신의) 충성심이 필요하다. 충성심을 기대한다"는 말을 했다고도 폭로했다. 그간 언론에서 등장했던 '만찬 메모'가 실재한다고도 밝혔다. 코미 전 국장은 지난 4월 11일까지 넉 달간 트럼프 대통령을 세 차례 만나고, 여섯 차례 사적인 통화를 했다고 주장했다. 
 
코미 전 국장은 당시 만찬에서 나눈 대화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일종의 '비호 관계(patronage relationship)'를 조성하고자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밝혔다. 자신을 매수하려는 듯한 행위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간 모든 의혹을 부인해 왔던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난다면 미국에서도 탄핵 절차가 진행될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기사를 끝까지 읽으셨다면…

인터넷 뉴스를 소비하는 많은 이용자들 상당수가 뉴스를 생산한 매체 브랜드를 인지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온라인 뉴스 유통 방식의 탓도 있겠지만, 대동소이한 뉴스를 남발하는 매체도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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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경찰의 반민특위 습격, ‘6.6사건’을 아십니까?

지난 역사 속에서 6월 6일은 치욕적인 사건의 날로 기록돼 있다
 
정운현 | 2017-06-07 12:33:4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흔히 6월 6일은 사람들에게 현충일로 각인돼 있다. 그러나 지난 역사 속에서 6월 6일은 치욕적인 사건의 날로 기록돼 있다. 1949년 6월 6일, 이 날은 친일경찰들이 주도해 '반민족행위자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습격한 날이다. 이 사건으로 친일파 청산을 위해 구성된 반민특위는 두 달여 뒤인 1949년 8월 31일 자로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8일 친일기업인 박흥식(전 화신 사장)을 시작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 검거에 나섰다. 이에 맞서 이승만 정부와 친일세력들의 방해공작도 날로 심화되어 갔다. 친일기업인들이나 경찰들은 광범위한 정보조직을 동원하여 방해공작을 전개하였는데 그들은 특위 요원들에 대한 중상모략은 물론 관제데모 조장이나 테러, 암살모의도 서슴지 않았다.

그해 5월 하순, 이승만 정부는 이문원, 최태규, 이구수, 황윤호 의원 등 4명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전격 구속하였다. 정부는 이들이 남로당 프락치라고 발표했다. 6월에는 다시 김약수 국회부의장을 비롯해 노일환, 서용길 의원 등 13명을 구속했다. 소위 ‘제2차 국회프락치사건’이다. 이들 소장파 의원들은 외국군 철수 등을 주장한 진보 성향이었는데, 노일환, 서용길 의원은 반민특위 위원이기도 했다. 구속 의원들에 대한 석방결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국회는 크게 위축되기 시작했다.

▲반민특위가 활동하던 1949년 당시 남대문로 2가(현 롯데백화점 맞은편 명동 쪽)에 있던 반민특위 청사. 특위 해산 후 국민은행 건물로 사용되었다.

이런 가운데 친일세력들의 기세는 날로 높아갔다. 6월 2일 친일세력들의 사주를 받은 관제 시위대가 국회 앞에서 특위 요원들을 비방하고 체포된 반민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튿날 6월 3일, 이들은 특위 습격을 시도하였으나 특경대 요원들이 공포탄을 쏘며 해산시켰다. 시위 주동자는 친일경찰 출신의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로 밝혀졌다. 최운하가 구속되자 서울시내 각 경찰서의 사찰경찰 150여 명은 특경대 해산을 요구하며 집단사표를 제출하였다. 이들은 반민특위와 일전불사를 밝혔다.

사태는 날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6월 5일, 서울 중부서장 윤기병, 종로서장 윤명윤 등은 “실력으로 반민특위 특경대를 해산시키자”고 뜻을 모은 후 시경국장 김태선을 통해 내무차관 장경근의 허락을 얻어냈다. 장경근은 이승만 대통령의 사전양해를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이승만은 AP 기자에게 특경대 해산은 자신이 지시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경향신문, 1949.6.8.) 이날 밤, 반민특위 습격사건을 사전 모의한 이들은 이튿날(6.6) 새벽 중부서에서 선발한 50여명을 두 대의 쓰리쿼터에 태워 남대문로에 있던 특위 본부로 출동시켰다. 이것이 소위 ‘6.6사건’, 즉 반민특위 습격사건의 시작이다.

▲반민특위 습격 다음날인 6월 7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관련 기사. 제목에서 특위 ‘습격’ 대신 ‘돌연수색’이라고 쓴 것이 이채롭다.

이 사건을 지휘한 행동책임자는 중부서장 윤기병이었다. 그는 장탄한 권총을 꺼내들고는 경찰들을 지휘하며 출근하는 특위 요원 35명을 쓰리쿼터에 강제로 태워 사라졌다. 이들은 모두 중부서에 감금돼 심한 가혹행위를 받았다.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사건은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자행됐다. 반민특위 각 도 지부 사무실의 전화선이 모두 절단되었는데 경기도지부 사무실은 경찰에 의해 봉쇄되었다. 이날 권승렬 특별검찰부장은 경찰들에 의해 차고 있던 권총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당시 합동통신사의 반민특위 출입기자였던 오소백은 그때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사건 직후 내가 권승렬 특검부장(검찰총장 겸임)을 만난 것이 특위 청사 2층에서였다. 온건한 인상을 풍기는 권 총장의 이날 모습은 상기되어 있었다. 권 총장이 차고 있던 권총도 경찰에 빼앗겼다는 정보를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확인할 길이 없었다. 입을 꽉 다문 권 총장은 침통한 표정이었다. 생각 끝에 인터뷰를 걸었다.
- 총장께서 권총을 차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까?
“틀림없다.”
- 그럼 총장께서 차고 있던 권총을 자진해서 누구에게 건네 준 일은 없습니까? 
“그런 일은 없다.”
- 그렇다면 총장의 권총이 지금 경찰 손에 들어가 있는 게 사실입니까?
“그렇다. 그건 사실이다.”
- 그렇다면 귀신이 곡할 노릇 아닙니까?
“상상에 맡기겠다.”
인터뷰는 끝났다. 어쩔 수 없이 통신(합동통신)에도 이렇게 문답식으로 기사를 쓸 수밖에 없었다.

▲권승렬 특검부장

그때의 일을 두고 오 선생은 생전에 필자와의 인터뷰(1999년 봄)에서 권 총장이 권총을 ‘빼앗겼다’는 식으로 쓴 것을 두고 “‘빼앗겼다’는 말은 없지만 읽어보면 결국 그런 얘기죠. 그때 통신에도 그렇게 보도했는데 왜냐하면 빼앗는 걸 보지도 않고 빼앗겼다고 하면 만일 ‘너 빼앗는 거 봤느냐?’고 하면 제가 책임을 져야 하잖아요. 그래서 당시 상황을 문답 형식으로 쓴 거죠. 그때 살벌한 분위기여서 내가 그건 생각해서 쓴 거죠”라고 밝힌 바 있다.

이 사건은 곧 국회로 비화되었다. 국회에 불려나온 장경근 내무차관은 뻔뻔하게도 “특경대 해산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국회는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내각 총사퇴를 결의했으나 이미 국회는 힘을 잃은 상태였다. 결국 협상 결과 특위가 구속한 최운하, 조응선(종로서 사찰주임) 등 친일경찰과 연행된 특경대원들을 교환, 석방하는 것으로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그 와중에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하면서 반민특위는 극도로 위축되었고 국회 내에서 특위 운영에 회의론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이승만 대통령이 AP 기자에게 특경대 해산은 자신이 명령한 것이라고 말한 내용을 다룬 6월 8일 자 경향신문 기사.

이런 틈을 타서 친여 세력들은 반민법 개정을 들고 나왔다. 때마침 법무장관을 마치고 국회도 돌아온 이인을 비롯하여 곽상훈 등은 1950년 6월 20일까지로 규정된 공소시효를 1949년 8월 31일까지로 단축시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어수선한 틈을 타 개정안은 7월 6일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개정안이 통과되자 김상덕 위원장 등 반민특위 위원 전원은 항의 차원에서 그 다음날로 일괄 사퇴하였다. 반민특위 2기 위원장에 선임된 이인은 반민법 제정을 반대했던 장본인이었다. 결국 2기 특위는 잔무처리를 한 후 그해 8월 31일로 문을 닫았다.

반민특위는 반민법 공포(1948.9.22.)로부터 채 1년도 안 돼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특위 업무는 형식적으로는 대법원과 대검찰청에 이관되었으나 대부분이 무죄 또는 가벼운 자격정지형으로 끝나 결과적으로 친일파 척결은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출범 당시 특위는 7천여 명의 반민족행위자를 파악해 놓고 있었으나 실지로 특위가 취급한 건수는 682건(여자 60명 포함)에 불과했다. 채 1할도 다루지 못한 셈이다. 그나마 검찰에 송치한 건수는 559건, 석방 84건, 영장취소 30건, 기소 221건, 그리고 재판을 종결한 건수는 고작 38건에 불과했다.

(* 참고자료 : <증언 반민특위- 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 정운현, 삼인, 1999)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1&table=wh_jung&uid=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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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의 두 젊은이를 기억하시나요

 

등록 :2017-06-07 14:06수정 :2017-06-07 22:01

 

30돌 앞둔 6·10항쟁 
 
전두환 사진 불태우던 이 청년 
1987년 6월10일 저녁 경남 마산에서 시위에 참여한 한 청년이 양덕파출소에 걸려 있던 전두환 사진을 떼어내 불태우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1987년 6월10일 저녁 경남 마산에서 시위에 참여한 한 청년이 양덕파출소에 걸려 있던 전두환 사진을 떼어내 불태우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1987년 6월항쟁 당시 마산 양덕파출소에 걸려 있던 전두환 사진을 떼어내 불태운 청년을 찾습니다.”

 

‘6월항쟁 정신계승 경남사업회’는 7일 “6월항쟁 30돌을 맞아 10일 저녁 6시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사거리에서 기념식을 열고, 창동사거리 바닥에 지름 1m 둥근 동판으로 만든 표석을 설치한다”고 밝혔다. 표석은 항쟁 당시 시위대가 마산 양덕파출소를 불태우고 이 과정에서 파출소에 걸려 있던 전두환씨 사진을 떼어내 불태운 한 청년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표석엔 또 3·15의거,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밑거름 삼아 6월항쟁이 일어났다는 뜻으로 ‘3월의 의기, 4월의 선혈, 5월의 희생이 6월 민주항쟁으로 꽃피다’라는 글이 새겨졌다. 디자이너인 김의곤 경남사업회 운영위원이 도안했다.

 

‘독재 타도, 호헌 철폐’의 열기로 뜨겁던 1987년 6월10일 저녁 6시 마산에서도 전국 동시다발 집회인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하지만 경찰이 행사장인 3·15기념탑 일대를 원천봉쇄하자, 참가자들은 거리행진에 나섰다. 시위대는 마산어시장, 불종거리를 거쳐 마산종합운동장 쪽으로 향했다. 마침 이날 마산종합운동장에선 대통령배 축구대회 한국과 이집트 대표팀 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저녁 6시50분께 시위대가 마산종합운동장 앞을 지나가려 하자, 경찰은 최루탄을 마구 쏘며 이들을 막았다. 최루탄은 운동장 안으로도 날아갔다. 이집트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나뒹굴기 시작했다. 결국 이집트 선수들은 경기를 포기한 채 퇴장했고, 뒤이어 한국 선수들도 퇴장했다. 주심은 전반 34분 경기 중단을 선언했다. 관중들은 거세게 항의했고, 경찰은 이들을 해산시키려고 운동장 밖으로 내몰았다. 하지만 흥분한 관중들까지 시위에 참여하면서, 시위대 규모는 3만여명으로 불어났다.

 

그날 마산 축구경기장에 최루탄 
시민 3만여명 거리시위 물결 
대통령사진 떼어내 불붙인 장면 
“6월항쟁 민심 상징” 표석으로

 

시위대는 운동장에서 500m가량 떨어진 양덕파출소로 몰려가 파출소를 불태우고, 이어 민정당 지구당 사무실까지 불태웠다. 양덕파출소를 불태우는 과정에서 한 청년은 파출소에 걸린 전두환씨 사진액자를 떼어내 불태웠다. 이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면, 20대 청년이 불타는 전두환 사진을 높이 치켜들고 힘차게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하지만 이 청년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이날 마산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연행된 사람은 200여명에 이르렀다.

 

조명제 ‘6월항쟁 정신계승 경남사업회’ 사무처장은 “마산에선 6월항쟁 이후 노동자대투쟁까지 1987년 내내 시위가 끊이지 않았는데, 전두환 사진을 떼어내 불태운 장면이 당시 상황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다고 판단해, 이 장면을 6월항쟁 30돌 기념 표석에 새기게 됐다. 이와 함께 전두환 사진을 불태운 주인공도 찾고자 한다”고 밝혔다.

 

경남사업회는 10일 창동사거리에서 표석 제막식에 앞서 이날 오후 4시 ‘제1회 대한민국 패러디·코스프레 축제’를 열고, 제막식 직후엔 기념공연 ‘6월에 서서’를 연다. 또 11일 오전 9시엔 창원시 마산합포구 만날재에서 ‘6.10㎞ 걷기대회’도 연다.

 

창원/최상원 기자 csw@hani.co.kr, 사진 ‘6월항쟁 정신계승 경남사업회’ 제공

 


 

6월항쟁 뜻 새겨 빈민 품은 약사

 

 

“우리 모두가 그처럼 살 수는 없지만 그가 남긴 뜻을 기리려 합니다.”

 

90년대 도시빈민과 노동자와 함께 하다 예상못한 일로 숨진 고미애(당시 28살)씨가 6월항쟁 30돌을 앞 두고 ‘고미애 약사상’으로 부활했다. 경기 부천시약사회는 지난 3일 부천시약사회 50 년사 출판기념회에서 ‘이웃사랑 고미애 약사상’을 시 상했다. 첫 수상자는 희망재단 아동학대 피해 예방기 금이었다.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부천지부가 기금 200만원을 전달했다.

 

고씨는 부산 출신으로 1984년 숙명여대 약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1987년 5월 약대 학생회장으로 선출 되면서 6월항쟁에 본격 참여했다.

 

당시 같은 대학 음대 학생회장이었던 친구 최도은 (53)씨는 “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이후 고문없 는 세상과 군부독재 종식을 위한 6·10시위를 준비하 던 중 6월9일 연세대생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자 연세대에서 미애와 함께 시위를 이어갔다. 6월10일에 는 전체 숙대생 6천명 중 4천명과 함께 서울역 시위에 참여했다. 미애는 88년 졸업과 함께 지역 현장으로 갔 다”고 말했다.

 

숙대 약대 학생회장 고미애씨
그날 4천명 모인 서울역 시위 동참 
부천에 약국 열고 빈민운동 온힘 
후배 약사들 ‘이웃사랑 상’ 제정

 

고씨가 동료와 함께 문을 연 아람약국은 당시엔 드문 공영약국으로 경기도 부천시 여월동에 있었다. 도시빈 민이 많은 이곳에서 그는 낮에는 약국일을, 밤에는 부천 지역민주운동협의회 상임위원과 주거권실현을 위한 부 천연합의 상담실장으로 일했다. 매주 1차례씩 도시 빈민 자녀를 위한 새롬공부방 자원교사로도 일했다. 고씨는 1992년 겨울 구정날 당번 약국을 지키던 중 외국인 노동 자의 폭력에 의해 숨졌다. 당시 부천주거연합 의장이던 지성수 목사(오스트레일리아 거주)는 “사회적 약자에 대 한 인간애가 가득한 그를 나는 ‘까칠한 성녀’라고 했다. 그가 비명에 갔을 때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런 일이 있을까’에 고통스러웠다”고 말했다.

 

고씨의 대학 후배인 부천시 약사회 부회장인 윤선 희(50)씨는 “6월항쟁을 통해 겪은 것을 실천하고 약자 들과 소통하려던 선배의 뜻을 항쟁 30년 만에, 그리고 돌아가신 지 25년을 계기로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부천/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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