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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고먹는 국회, ‘특활비’ 펑펑

[칼럼] 국민의 비판이 부당한가
 
이기명  | 등록:2018-07-09 12:23:21 | 최종:2018-07-09 13:47:2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채귀(債鬼)라는 귀신이 있다고 한다. 빚 받아내는 귀신이다. 어찌나 독한지 죽은 다음에도 저승까지 쫓아온다. 채귀를 피할 무슨 방법이 있는가. 빚을 지지 않는 것이다. 빚은 종류는 다양하다. 치사한 노름빚도 있다. 마누라 잡혀먹는 노름꾼 빚쟁이도 있었다. 구한말, 일본에 빚을 졌다.
 
“일본에 국채 1,300만 원을 빚졌다. 갚지 못하면 대한제국의 존망과 직결된다. 국고가 텅 비어서 갚을 도리가 없다.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하고 그 대금으로 빚을 갚아 나라의 위기를 구하자”
 
이게 국채보상운동이다. 나랏빚을 갚자는 국민운동이다. IMF 위기 때 전 국민이 금모으기 운동을 폈다. 손주 놈 돌 반지까지 내놨다. 국민은 정부보다 훨씬 애국이다. 정치가들은 느낌이 어떤가.

(자료사진 – 팩트TV 신혁 기자)

 ■ 특활비란 귀신의 국민세금
 
박근혜 정부의 국가정보원은 특활비란 이름의 돈을 박근혜에게 상납했다. 특활비란 도대체 무엇인가. 말 그대로 특수 활동비다. 특수 활동은 무엇인가. 특수한 활동이니 알 수가 있는가. 분명한 것은 말썽이 났으니 당당한 돈은 아닌 모양이다.
 
국회의원들의 특활비가 문제로 터졌다. 그토록 죽어라 공개를 요구했는데 죽어라 입 다물고 있더니 참여연대의 3년여간 소송 끝에 대법원 결정으로 공개됐다. 국민의 대표가 특수 활동비 좀 썼기로서니 그걸 공개하라는 야박한 인심이 어디 있느냐고 야속해 할지도 모른다. 야속한가. 그래 야속해라.
 
긴소리 하면 피곤하다. 자세한 내용은 언론을 통해 자세하게 공개됐다.
 
국민들은 눈이 뒤집히게 됐다. 없는 살림에 세금 냈더니 마음대로 펑펑 쓰느냐. 기막힌 사실 몇 가지만 말해 보자. 우선 국회는 매년 80억을 썼다. 공개된 3년간 240억이다. 이는 국회가 참여연대에 제출한 2011년에서 3013년까지의 3년간 내역이다. 이번에 공개된 특수활동비는 영수증이 필요 없기 때문에 의원들이 국회에서 받아간 돈이 정작 어디에 쓰였는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국민들은 가슴에서 불길이 타오를 것이다.
 
■ 특활비(특수활동비)의 벌거벗은 모습
 
노무현 대통령 후원회장을 하면서 수십 년을 지켜봤다. 참여연대 운영위원도 했다. 한때 공정한 매체로 평가받던 ‘서프라이즈’의 회장도 했다. 노사모는 거짓말을 금기로 했다. 이번 특활비의 진상을 세상에 알린 것도 참여연대다. 나는 믿는다. 그러기에 참여연대의 발표를 믿음으로 인용한다.
 
참여연대 분석 2011~2013 특활비 지출 내역
 
국회 교섭단체 대표, 상임위원장 등 특정 직책에 있는 국회의원은 매월 월급처럼 정기적으로 특활비를 지급받았다. 기밀 유지가 요구되는 정보 및 사건 수사에 쓰라는 특활비는 국회의원 ‘제2의 월급’이었다.
 
교섭단체 대표는 실제 특수활동 수행과 상관없이 매월 4,000여만 원(짝수달에는 6,000~7,000여만 원)의 특활비를 받았고 상임위원장과 함께 예산결산특위원장, 윤리특위원장, 특별위원회 위원장은 회의가 열리지도 않은 달에도 위원장이라는 이유로 똑같이 매월 600만 원씩을 받았다. 
 
특히 법제사법위원회는 ‘법제사법위원회 활동비’라는 명목으로 매월 1,000만 원을 받아 법사위 여·야 간사와 위원들에게 특활비를 배분해 추가 지급했다. 법사위 간사에게 매월 100만 원을, 위원들에겐 매월 50만 원씩 지급했다. 법사위는 위원들뿐만 아니라 수석전문위원에게도 매달 150만 원씩 줬다. 제 식구 감싸기 특위라고 비판받는 윤리특위는 2011년에 단 네 차례, 2012년 다섯 차례, 2013년 네 차례만 회의를 열었지만, 위원장은 매월 600만 원씩 활동비를 꼬박꼬박 받았다. 이와 별도로 정기국회 시기인 9월에 ‘윤리특위 정기국회대책비’로 300만 원, ‘윤리특위 위원회활동지원비’로 700만 원을 수석 전문위원에게 지급했다.
 
정체불명 수령인에게 전달된 특활비도 있다. 국회 특활비를 한 번이라도 받은 이는 298명에 달하는데 이중 가장 많은 금액을 받은 수령인은 ‘농협은행(급여성경비)’이었다. 2011~2013년까지 약 59억 원의 특활비가 농협통장에 입금됐는데 이는 전체 특활비의 4분의 1 정도지만...실제 사용한 실수령자가 누구인지 누가 통장에서 인출해 누구에게 어떤 명목으로 지출했는지도 전혀 알 수가 없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노회찬(정의당 원내대표)
“나는 원내 교섭단체(평화와 정의의 의원모임) 대표이기 때문에 전체 3,000만 원의 절반은 은행으로 계좌이체가 돼 왔고, 나머지 절반은 5만 원권 현찰로 밀실에서 1대 1로 만나서 직접 받았다. 누가 누구에게 얼마를 줬는지 흔적이 남지 않는 방식으로 수령했다. 설사 제대로 주지 않더라도 배달 사고가 나도 알 수 없고, 받은 돈을 어떻게 쓰든 간에 흔적이 남지 않는 그런 ‘깜깜이’ 돈이었다”
 
벌거벗은 특활비의 모습이다.
 
박정은 참여연대 사무처장의 말이다.
“의회·외교 명목의 상당한 돈이 특정인을 통해 어디로 갔는지, 또 농협 통장을 통해 어디로 누구한테 갔는지 모른다. 구체적으로 수령인 누가 어떤 내역으로 얼마만큼 특활비를 받았는지 조만간 다시 추가 자료를 정리해 내겠다.” 
 
“참여연대는 농협(급여성경비) 통장 등으로 입금된 특활비가 이후 누구에게 어떤 용도로 전달됐는지 위법사항이 발견되면 소송을 제기하거나 검찰에 수사를 의뢰할 방침이다.”
 
“실제로 지난 2007년 감사원이 국정홍보처·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국가청소년위원회·국민고충처리위원회 등 4개 기관의 특활비 감사를 실시해 부정 사용 내역을 적발했다.” 
 
“감사원이 국회 특활비 사용내역을 전수조사해서 우리가 공개한 것 외에 집행내역 확인서나 신용카드 매출전표 등 증거서류가 더 나올 수 있고, 검찰이 압수수색해 확인하면 더 명백히 밝혀질 것이다.”
 
“우리가 3년의 시간이 걸려 받아낸 국회 특활비 지출내역을 국민에게 보여줄 수 있게 돼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는 기분이 들었는데, 열어본 상자 속엔 너무나 엉망진창인 국회 모습이 들어 있어 안타깝다” “앞으로 우리는 국회뿐 아니라 특활비가 편성된 20개 중앙행정기관의 특활비 지출내역도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정보공개 청구하겠다.”

 
눈 먼 돈은 아무 데고 찾아간다. ‘대구세계육상선수권 대회 개막식 참석경비(2011)’ ‘런던올림픽대회 참관단 경비(2012)’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국회 연설 관련 경비(2012)’ 등이 대표적이다. 박병석 국회부의장 중유럽 공식방문(2012), 이병석 부의장 서유럽 공식방문(2013) 등 ‘공식’일정에도 특수활동비가 지급되긴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현충일 추념식 참석경비, 제헌절 경축식 행사경비, 광복절 경축행사 관련 경비, 삼일절 기념식 행사경비 등도 매년 국회 특수활동비에서 빠져나갔다. 의회 외교에 지급된 돈은 2011년 6억 3,800여만 원, 2012년 5억 3,500여만 원, 2013년 6억 3,100여만 원 등이었다. 그러니까 핑계만 있으면 특수활동비다.
 
■ 의원들에게 빚진 거 없다
 
밥값도 못한다는 말이 있다. 치욕적인 말이다. 밥을 먹어야 목숨을 부지하는데 밥값도 못한다면 죽어야 한다는 말과 다름없다. 요즘 국회 꼴을 보며 국민들의 생각은 어떤 것일까. 밥이야 각자가 집에서 먹을 테니까 천상 할 수 있는 말은 ‘세비 값도 못 한다’는 말이다. 얼마나 치욕적인 말인가.
 
사실 이 글을 쓰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있다. 열심히 의정활동을 하는 의원들이 많다. 국민에게 겸손하고 수시로 정부의 잘못을 지적해 시정하는 의원들을 보면 존경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들은 특활비로 의원들이 국민으로부터 지탄 받을 때 무척 괴로울 것이다. 원래 까마귀 소굴에 백로가 들어가면 곤욕을 치르게 마련이다. 그 안에서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제도개선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속 들여다보이는 소리 하지 말라. 폐지하면 간단하게 해결된다. 도대체 특활비를 사용할 무슨 명분이 있는가. 개인이 아닌 국가를 위한 특활비라면 당당하게 사용하면 된다. 오히려 이렇게 나라를 위해서 돈을 쓴다고 해야 한다. 영수증도 없이 도둑놈 물건처럼 쓰기가 염치없지 않은가. 폐지하는 이외에 어떤 제도 개선도 있을 수 없다.
 
의원들이 출마했을 때 국민에게 온갖 약속을 다 한다. 국민에게 한 약속은 바로 빚을 지는 것과 같다. 약속을 이행했는가. 국민은 자신의 대변자인 국회의원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요즘 의원들의 행동을 보면서 욕을 할 생각도 포기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버린 자식으로 여길 것이다. 미운 짓을 골라가며 한다는 말이 있다. 이번에 들통이 난 특활비가 바로 그것이다.
 
■ 훌훌 털어버리면 어떤가
 
특활비 문제는 이제 그냥 사라질 문제가 아니다. 하루가 가면 그만큼 국민의 분노는 커질 것이다. 국회의원의 배짱이 제아무리 고래 심줄 같아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더 이상 이름을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특활비를 쓰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특활비를 털어버려야 한다. 그다음 특활비가 아닌 정상적으로 돈을 써야 한다. 모든 범죄는 숨기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야당은 모두 특활비 폐지에 의견을 모았다. 왜 거대 정당만 뜸을 들이는가. 연구해서 잘 운영하면 된다고 한다. 뭘 잘 운영하는가. 차라리 뭉텅이로 들어오는 현금의 맛을 잊지 못하겠다고 고백해라.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겠지. 편하게 생각지 말라. 세상이 달라졌다. 느껴지지 않는가. 느끼고 안 느끼고는 마음대로지만 남은 의원 생활을 정상적으로 하고 다시 배지를 달려면 특활비는 포기해야 할 것이다. 국민들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 갚지 않으면 어디까지든 쫓아갈 것이다. 국민에게 존경받는 국민의 대변자,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특활비는 깨끗이 정리해야 한다.

이기명 팩트TV 논설위원장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news/mainView.php?uid=4578&table=byple_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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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 미국의 핵 보유·통제에 '의문'... 퍼그워시 성명

63년전 아인슈타인의 경고, 현실이 되다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아인슈타인, 미국의 핵 보유·통제에 '의문'... 퍼그워시 성명

18.07.09 13:40l최종 업데이트 18.07.09 13:40l

 

 

큰사진보기 알버트 아인슈타인.
▲  알버트 아인슈타인.
ⓒ 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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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핵문제의 보안관은 미국이다. 미국 스스로 보안관 완장을 차고 있다. 그런 미국을 근심어린 눈으로 바라본 과학자가 있었다. 나치 독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미국에 핵 보유를 권고한 적이 있었던 알버트 아인슈타인이다. 그랬던 그가 나중에는 미국의 핵 보유 및 통제에 염려의 마음을 갖게 됐다. 

그런 염려의 마음을 담아 아인슈타인은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 등과 함께 1955년 7월 9일 이른바 퍼그워시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 동북쪽 끝부분과 캐나다가 만나는 곳이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컴버랜드군 퍼그워시읍이다. 

여기서 과학자 11명이 모여 성명을 발표했다. 핵무기 폐기에 대한 세계 각국의 보편적 열망을 담은 성명이었다. 정식 명칭은 '핵무기 없는 세계와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호소하는 선언'이다.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으로도 불린다. 

핵문제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는 당연히 '보안관 국가'다. 세계 최초로 핵실험을 했고, 세계 최초로 핵무기를 사용했다.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핵을 투하했으니, 핵범죄 전과도 2범이나 된다. 한국전쟁 때도 핵무기를 사용하려 했었다. 그래서 보안관 역할을 할 자격은 분명히 없는 나라다. 하지만, 그 보안관 완장을 떼어낼 만한 나라도 없으니, 마음 놓고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섬 3개를 사라지게 한 미국

 

퍼그워시 성명 당시, 핵실험에 성공한 나라는 미국·소련·영국 세 나라였다. 아인슈타인 등이 주로 겨냥한 쪽은 미국 핵무기다. 미국 핵무기를 견제하는 성명이었던 것이다. 이 점은 성명문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인류가 비극적 상황에 처해 있다고 판단하면서, 이 회의를 통해 과학자들이 대량살상무기가 발달한 결과로 야기된 위험한 상황을 평가하고, 첨부된 초안에 담긴 정신에 입각해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성명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이제 우리는 특히 비키니 실험 이후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훨씬 넓은 지역에 걸쳐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는 핵폭탄이 점차 개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비키니섬으로도 불리는 비키니 환초는 필리핀에서 동쪽을 향해 태평양 중앙으로 가다 보면 나온다. 산호충 분비물이 축적돼 만들어진 약 20개의 환초로 구성돼 있다. 

미국은 1946년부터 1958년까지 23차례의 핵실험을 여기서 실시했다. 1954년에는 원자폭탄보다 훨씬 파괴적인 수소폭탄(열핵폭탄) 실험도 했다. 이 때문에 이곳 섬이 3개가 사라졌다. 방사능 피해가 이 지역에 확산됐음은 물론이다. 미국 본토의 사막에서도 할 수 있었지만, 환경문제 때문에 여기서 핵실험을 하게 된 것이다. 
 

 비키니섬 핵실험.
▲  비키니섬 핵실험.
ⓒ 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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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 등이 행동에 나선 계기는 1954년 비키니 핵실험이다. 미국 핵무기의 발달을 보면서,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원자폭탄보다 파괴력이 강할 뿐 아니라 작고 가벼워 더 멀리 날려 보낼 수 있는 수소폭탄이 비키니 실험을 계기로 더욱 확산될 경우, 인류의 앞날을 보장할 수 없다는 염려가 든 것이다.  

이들은 성명문에서 "원자폭탄 한 발로 히로시마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었던 반면, 수소폭탄 한 발로는 런던이나 뉴욕 혹은 모스크바처럼 규모가 훨씬 큰 도시들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라면서 이렇게 우려를 표명했다. 

"수소폭탄을 사용하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대도시는 틀림없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태는 우리가 겪게 될 작은 재앙 중 일부에 불과하다."

"누구에게나 최대한의 만족을 주는 방식"

아인슈타인 등은 핵무기의 기술적 발전만 걱정한 게 아니라 마땅한 통제 시스템이 없다는 점도 걱정했다. 미국이 보안관 역할을 자처하고 있지만, 그때 시각으로 볼 때도 미국은 불완전한 보안관이었다. 

"수소폭탄을 사용하지 말자고 평화 시에 협정을 맺었다 해도, 막상 전쟁이 발발하면 그런 협약이 더 이상 구속력이 없을 거라는 판단이 들 것이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쌍방은 수소폭탄 제조에 착수할 것이다. 어느 한쪽만 폭탄을 제조하고 상대방은 그렇지 않을 경우, 폭탄을 제조한 쪽이 틀림없이 승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대전이 일어나면 수소폭탄을 가진 쪽이 틀림없이 승리할 것이기 때문에, 대전이 발발할 만한 상황이 되면 국가들이 그것부터 확보하려 들 거라고 염려했다. 국가들이 보안관 미국의 역할을 신뢰하며 핵을 억제하는 게 아니라 그와 정반대되는 상황이 출현할 거라고 염려한 것이다. 

아인슈타인 등은 공정성을 의심받는 '보안관'이 세계 핵 통제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어느 한 나라의 관점이 아니라 중립적 관점에서 핵문제를 해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인류 구성원으로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중략) 공산주의자든 반공주의자든, 또는 아시아인이든 유럽인이든 아메리카인이든, 또는 백인이든 흑인이든 간에 누구에게나 최대한의 만족을 주는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이 기울어진다면 이 문제는 평화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미국은 자국 중심주의에 입각해 핵 문제를 처리하려 하지만, 아인슈타인 등은 '누구에게나 최대한의 만족을 주는 방식'에 입각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누구에게나 최대한의 만족을 주는 방식으로 핵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어느 누구도 핵을 갖지 않는 쪽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상태를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이중 삼중의 잣대를 보여왔던 미국

이제까지 미국이 핵 확산을 막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핵 통제가 공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국은 핵을 가진 상태에서 남한테만 갖지 말라 하니 핵 통제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국은 소련·영국·프랑스의 핵 보유는 물론이고 이스라엘·중국·인도·파키스탄의 핵 보유도 막지 못했다. 이는 미국의 비핵화 외침이 공감을 얻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세계 최강의 군대로 국제사회를 수시로 위협하는 나라가 핵을 통제하려 하니, 불신을 사는 것도 당연하다. 

미국은 새롭게 핵을 가지려는 나라들한테도 공정하지 못했다. 한국이나 리비아 같은 나라의 핵 보유는 끝까지 저지했지만,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는 일관된 입장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스라엘 경우에는 유대인 국가라는 이유로 핵 보유를 묵인했고, 중국 경우에는 베트남전쟁 패배 이후의 아시아 패권 상실을 막으려면 중국과의 공조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핵 보유를 국제법적으로 합법화해줬다. 

또 인도 핵무기는 중국 견제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파키스탄 핵무기는 인도 견제에 유리하다는 이유로 각각 용인했다. 처음에는 핵 확산을 막겠다며 경제 및 군사제재를 불사하던 미국은 어느 순간에는 국익을 이유로 태도를 바꾸곤 했다. 핵 폐기가 불가능해지면 체면 손상을 막고자 국익을 명분으로 핵 보유를 용인한 뒤 물러서곤 했던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자신들의 핵무기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핵무기도 통제할 역량이 매우 낮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나라가 핵문제 보안관 역할을 하고 있으니, 인류가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가장 엄격하고 정치해야 할 핵무기 통제 시스템이 이처럼 허술하게 운영되고 있으니 불안을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미국은 핵무기의 세계적 확산에 관련해서 무능력을 보여왔다.
▲  미국은 핵무기의 세계적 확산에 관련해서 무능력을 보여왔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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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그워시 성명을 발표할 당시만 해도 아인슈타인 등은 세계적인 핵 확산을 충분히 목격할 수 없었다. 미국의 능력 부족을 제대로 관찰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핵 확산은 그 뒤에 일어난 현상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미국의 능력에 의문을 품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은 미국의 무능력이 훨씬 전부터 예견 가능한 것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류는 여전히 미국의 핵 통제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 공정성도 낮고 성공 가능성도 별로 없는 그들의 행보를 그저 구경할 수밖에 없다. 미국이 세계 최강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이런 한계 속에서도 인류가 할 수 있은 일은 있다. 

그것은 미국의 핵 통제 정책에 무조건적 지지를 보내지 않는 것이다. 또 미국이 욕하는 나라들을 덩달아 욕하지 않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핵무기를 관리할 보다 나은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펼치는 것이다. 미국이 보안관을 자처하도록 두는 게 아니라, 인류의 이익을 대변할 핵문제 보안관을 마련하는 것이다. 

미국이 욕하는 상대방에 대해서만 핵 폐기를 요구할 게 아니라 그런 욕을 하는 미국에 대해서도 똑같이 핵 폐기를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 핵을 통제할 보다 나은 시스템을 모색하는 게 아인슈타인 등이 63년 전 퍼그워시 성명을 발표할 때의 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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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숙제를 하고 있는가?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8/07/09 16:10
  • 수정일
    2018/07/09 16:1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칼럼> 정영철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
정영철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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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7.08  15: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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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3번째 방북이 마무리되었다. 폼페이오 장관은 복잡한 문제가 있었지만 ‘진전’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고, 북의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를 통해 ‘유감’을 표명하였다. 두 당사가가 협상이 끝난 후, 서로 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북의 ‘유감’ 표명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서로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고 협상을 지속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내용이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유감의 핵심은 미국의 일방적인 ‘비핵화’ 요구만이 있었고, 그에 상응하는 종전선언, 나아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요구라고 비판하고 있다. 우려스러운 것은 미국의 이런 태도를 ‘과거 이전 행정부들이 고집하다가 대화과정을 다 말아먹고 불신과 전쟁위험만을 증폭’시킨 것이라고 한 대목이다. 그리고는 자신들 스스로를 가리켜 ‘우리의 기대와 희망은 어리석다고 말할 정도로 순진한 것’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북이 이처럼 어쩌면 위태해보일 정도로 강력한 비판이 담긴 담화문을 공개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담화문에서는 여전히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신뢰감을 드러내고 있고, 미국과의 합의와 협상의 틀을 깨기보다는 미국이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에 방점이 찍혀있다. 그런 점에서 이 담화문의 핵심은 바로 미국이 해야 할 일을 성실히 수행하라는 것이다. 즉, 관계 개선, 비핵화,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싱가포르 3대 약속에 상응하는 조치들을 단계적으로 잘 준비하고, 그것들을 잘 조율하여 단계적이고 동시적으로 진행하자는 것을 재차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돌아봐야 할 중요한 문제가 놓여있다. 우리는 현재의 북미 정상회담 이후의 국면을 일방적인 북의 비핵화 과정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을 둘러싼 미국 주류 언론와 정치권의 입장이 그러하고, 우리 내부의 언론 또한 그러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북의 비핵화가 북이 떠 안은 ‘숙제’라고 한다면 – 사실, 북의 비핵화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가 정확하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숙제를 안겨주고 있다 – 종전·평화 체제 구축의 문제 등은 주로 미국이 떠 안은 ‘숙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미국은 자신들이 해야 할 숙제를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북의 담화문이 말하는 것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은 숙제를 하고 있는가?

북의 비핵화는 쉽고 단순한 과정이 아니다. 기술적으로도 그렇지만, 정치적으로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기에 한 세대가 넘는 동안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채,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우리에게는 마치 ‘신화’와 같은 한 가지 고정관념을 가지게 되었고, 이제는 변치 않는 진리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북의 비핵화’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에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북에 있고, 문제의 해결 역시 북이 비핵화를 하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본다면, 이 문제는 북-미간의 정치-군사적 대결·대립 구조가 중심에 놓여있고, 남북 관계, 미중 관계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음을 금방이라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북미 관계의 신뢰 구축과 관계 개선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외에는 해법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 지난 한 세대 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모두 동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북의 비핵화’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가 올바르다는 것도 확인하게 되었다. 모든 남북관계 합의문, 그리고 싱가포르 합의문 등이나 협상장에 있는 미국 관료들에게서 일관되게 나오는 발언은 바로 ‘한반도 비핵화’이다.

지난 싱가포르 회담은 바로 이러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큰 진전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것은 북미 양국의 최고지도자가 직접 만났다는 것 이외에도, 지금까지 서로를 갈라놓고 있던 불신의 구조를 제거하면서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등의 문제를 풀어가기로 한 합의가 이전과는 달라진 점을 확연히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싱가포르 합의문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북과 미국이 동시에 풀어야 할 수 많은 숙제도 동시에 떠안게 되었다. 북은 당장 핵과 미사일 시험을 중단하고, 핵 시험장을 폐기하고, 나아가서는 미사일 엔진시험장을 폐기하겠다는 숙제를 안게 되었고, 미국은 이에 상응하여 한미 군사훈련의 중단을 밝혔다. 그런데 그 뿐이었다. 더 이상의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아직까지는 북에 대한 더 이상의 공격적인 발언이 나오지 않을 뿐이다. 이렇게 보면 북도 반미 집회의 중단, 반미 구호의 중단 등 미국에 대한 호의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더 많은 조치들이 서로 조율되어 실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언론이나 미국의 주류 언론은 북의 비핵화, 비핵화 시간표 등의 일방적인 요구를 내놓고, 그에 대한 북의 반응만을 떠들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는 ‘북의 비핵화’라는 고정관념의 틀 속에 갇혀 있는 것이고, 정치적으로는 ‘북의 악마화’라는 불신의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주류 언론과 우리의 언론은 서로가 앞 다투어 낡은 틀의 보도에 매달리고 있다고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정작 자신들이 해야 할 숙제는 하지 않고, 북에 대해서는 숙제를 강요하고 자신들의 눈에 미흡할 때에는 모든 책임을 북에만 돌리는 과거의 낡은 사고의 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북의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잘 보면 대단히 중요한 구절이 눈에 띈다. 그대로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낡은 방식으로는 절대로 새것을 창조할 수 없으며 백전백패한 케케묵은 낡은 방식을 답습하면 또 실패밖에 차례질 것이 없다.
조미관계력사상 처음으로 되는 싱가포르수뇌회담에서 짧은 시간에 귀중한 합의가 이룩된 것도 바로 트럼프대통령 자신이 조미관계와 조선반도비핵화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나가자고 하였기 때문이다.

북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드러낸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낡은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 그를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약속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숙제는 성실히 할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이 마땅히 해야 할 숙제는 하고 있는가?
 

정영철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문학박사, 2001)
캐나다 브리티쉬 콜롬비아 대학 방문연구원(2002-2003)
서울대 국제대학원 연구위원(2004-2006)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 객원연구원(2007)
현재 서강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로 재직중 

주요저서로 북한의 개혁·개방: 이중전략과 실리사회주의(2004), 김정일 리더십 연구(2005), 서울과 도쿄에서 평양을 말하다(2008), 북한과 미국: 대결의 역사(번역서, 201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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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쳐오는 3대 재앙, 생존방도는 어디 있는가?

[개벽예감 305] 닥쳐오는 3대 재앙, 생존방도는 어디 있는가?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8/07/09 [08:09]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문재인 정부가 천명한 ‘사람중심경제’

2. 그것은 오판과 착각이다

3. 세계무역전쟁이 세계대공황 불러온다

4. 예고된 세계석유위기

5. 생존방도가 여기 있다

 

 

1. 문재인 정부가 천명한 ‘사람중심경제’

 

2018년 6월 26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일자리수석비서관, 시민사회수석비서관을 한꺼번에 교체하는 이례적인 인사조치를 단행하였다. 이를 두고 한국 언론매체들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 경제가 좋아지기는커녕 더 악화된 책임을 물은 문책성 인사조치라고 논평하였다. 문책성 인사조치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은 이번 인사조치는 “국민들께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성과를 속도감 있게 내자는 취지가 강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가 말한, “국민들께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성과”라는 것은 민생경제가 발전되는 성과라는 뜻이므로, 6.26 인사조치에 민생경제를 발전시키려는 강한 취지가 담겼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이명박-박근혜 정부와 달리 민생경제발전에 힘쓰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2017년 12월 27일 대통령 직속기구인 국민경제자문회의 제1차 회의 및 경제관계장관회의가 청와대에서 진행되었을 때,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은 2018년도 경제정책기조를 일자리중심경제와 공정경제,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이라고 요점적으로 명시한 바 있었는데, 당시 그런 경제정책기조를 발표하게 된 것으로 하여 고무된 문재인 대통령은 모두발언에서 “내년(2018년을 뜻함-옮긴이)에는 거시경제지표도 좋을 뿐 아니라, 국민이 체감하는 삶의 질도 나아지는 해가 될 것”이고, “소득주도성장, 사람중심경제가 옳은 방향이라는 것을 국민이 공감하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고 하면서 기대와 희망을 표시하였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2017년 12월 27일 청와대에서 진행된 국민경제자문회의 제1차 회의 및 경제관계장관회의 장면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모두발언에서 "소득주도성장, 사람중심경제가 옳은 방향이라는 것을 국민들이 공감하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고,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은 2018년도 경제정책기조를 "일자리중심경제와 공정경제,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이라고 요점적으로 명시하였다. 문재인 정부가 천명한 '사람중심경제'가 근로대중의 민생경제를 파탄에서 건지려는 좋은 취지를 가지고 출발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새로운 경제정책은 한국 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근본문제는 손대지 않고 임시방편들만 제시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2017년 12월 27일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경제정책 4대 기조로 제시하였던 일자리중심경제와 공정경제,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은 문재인 정부가 천명한 ‘사람중심경제’라는 새 정책의 중심개념들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시절인 2017년 4월 12일 기자회견에서 “사람에게 투자해 기업과 국가의 경쟁력을 살리는 사람중심의 경제성장구조로 바꾸겠다”는 선거공약을 내걸었는데, 집권 이후 그 공약을 실천하기 위해 ‘사람중심경제’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사람중심경제’에서 사람이라는 개념은 사람 일반이 아니라 근로대중을 뜻하므로, ‘사람중심경제’는 근로대중중심경제라는 뜻이다. 따라서 ‘사람중심경제’라는 새 정책에는 근로대중의 민생경제를 우선적으로, 중점적으로 발전시킨다는 뜻이 담겼음을 알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인 사정을 살펴보면, 문재인 정부가 천명한 ‘사람중심경제’는 고용을 증대시키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고, 실업자와 근로대중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한다는 내용으로 요약되는데, 그 실행방도는 다음과 같다. 

 

(1) 중소상공인과 영세업자에게 일자리안정지원자금을 제공하여, 고용을 증대시킨다.

(2) 고용을 증대시킨 기업체에게 일정한 비율로 세금공제혜택을 주어 고용증대를 유도한다. 

(3)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기업체에게 법인세 공제액을 확대하여, 비정규직축소를 유도한다.

(4) 근로소득증대에 대한 세금공제를 확대하여, 근로대중의 납세부담을 덜어준다. 

(5) 실업급여지급액을 50%에서 60%로 올리고, 지급기간도 8개월에서 9개월로 연장하여 실업자에 대한 사회안전망을 확충한다.

(6) 저소득층 청년과 신혼부부에게 임대주택 10,000채를 공급하여, 근로대중의 주거생활을 안정시킨다.

 

이처럼 ‘사람중심경제’가 근로대중의 민생경제를 파국에서 건지려는 좋은 취지를 가지고 출발한 것은 분명하지만, 위에 열거한 실행방도들을 보면 임시방편들만 제시되었다는 지적을 피하기 힘들다. 만일 문재인 정부가 위에 열거한 실행방도들만 추진한다면, 근로대중의 민생경제를 파국에서 건질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민생경제는 ‘극약처방’ 이외에는 백약이 무효일 만큼 파탄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 경제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혁명적인 조치를 단행하지 않으면, 근로대중의 민생경제를 살릴 방도가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 민생경제파탄은 일시적으로 침체하였다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시 회생하는 불황이 아니라, 1962년부터 지금까지 56년 동안 끊임없이 누적되어온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의 구조적 모순이 일촉즉발지경으로 격화된 파국적 결과다. 이런 근본문제를 파헤쳐야 ‘사람중심경제’를 일으켜 세울 ‘극약처방’을 모색할 수 있는데, 문재인 정부는 한국 경제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생각에는 이르지 못하고, 임시방편으로 파국을 모면할 생각만 하고 있다. 

 

그런데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의 구조적 모순이 덧쌓이기 시작한 시점을 왜 1962년으로 특정하였을까? 그것은 박정희 독재정권이 1962년부터 1966년까지 5년 동안 수출액을 1억1,750만 달러로 늘리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한 때가 1962년 1월이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근 3년이 지난 1964년 12월 1일 박정희는 수출액이 1억 달러를 돌파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봐라, 하면 되지 않느냐. 이제 시작이다”라고 말하면서 감격하였다고 한다. 박정희는 수출액이 1억 달러를 돌파한 11월 30일을 ‘무역의 날’로 제정하였으며, 정부, 여당, 기업체, 금융기관, 종합상사, 경제연구기관의 대표들이 100명 이상 참석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를 매달 몸소 주재하였다. 박정희 독재정권이 수출에 총력을 집중함으로써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를 확립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박정희 독재정권은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가 근로대중에게 고통과 불행과 궁핍을 강요하는 착취체제라는 사실을 철저히 외면했다. 그들의 눈에는 근로대중이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의 성장을 위해 쓰다가 내버리는 소모품으로 보였을 뿐이다. 박정희식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는 수천만 근로대중을 소모품처럼 착취하면서 고속팽창의 길을 달려왔다. ‘압축성장’이라고 부르는 경제성장이 그것이다. 하지만 근로대중을 가혹한 착취로 내몰아 극단적인 빈부격차를 고착시켰다는 점에서,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의 ‘압축성장’에는 질적 발전은 없었고 오직 양적 팽창만 있었다.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의 ‘압축성장’을 보여주는 각종 통계자료들은 넘쳐나지만, 그 ‘압축성장’ 뒤에서 소모품처럼 착취당해온 근로대중의 삶과 투쟁은 억압과 외면의 그늘 속에 가려졌다. 한국의 근로대중은 박정희 독재정권이 확립하였고, 그 이후 역대 정권들이 계승해온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의 ‘압축성장’ 뒤에서 고통과 불행과 궁핍으로 신음하였다. 1970년 11월 13일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에 맞서 싸우다 저항의 불꽃으로 산화한 전태일 열사의 삶과 투쟁, 그리고 그 뒤를 따라 고귀한 목숨을 바친 94명 노동해방열사들의 투쟁 속에 수천만 근로대중이 자주적 삶을 쟁취하기 위해 흘린 피눈물이 진하게 응축되었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1995년 11월 13일 서울에서 개봉된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 전태일 열사가 분신산화하는 장면이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는 온몸이 타들어가는 마지막 순간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고 절규하면서 22년의 짧은 생을 끝마쳤다. 그의 장렬한 분신투쟁은 박정희식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가 강요한 고통과 불행과 궁핍 속에서 노예처럼 혹사당하던 근로대중을 투쟁의 길로 이끌었다. 전태일 열사의 뒤를 따라 고귀한 목숨을 바친 94명 노동해방열사들의 투쟁 속에 한국의 수천만 근로대중이 자주적인 삶을 쟁취하기 위해 흘린 피눈물이 진하게 응축되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런데도 맹신자들과 문외한들은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로 ‘압축성장’을 실현한 한국, 싱가포르, 대만, 홍콩을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찬양하였다. 1997년 동아시아 자유시장경제를 파국으로 몰아간 외환위기 속에서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은 수명을 다했고, ‘압축성장’의 허상은 깨졌다. 허상이 깨지자, 그 뒤에 오랜 세월 가려졌던 실상이 드러났다. 절대다수 근로대중을 가혹한 착취로 내몰아 빈부격차를 극대화시킨 고통과 불행과 공핍의 실상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독재정권 이후 그 어느 정권도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와 근로대중의 민생경제가 양립할 수 없다는 진리, 한국의 사회경제사 50년이 실증해준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사람중심경제’를 천명한 문재인 정부도 예외로 되지 않는다. 2017년 12월 5일 문재인 대통령은 제54회 ‘무역의 날’ 기념식에서 “전체 중소기업 354만 개 중 수출에 참여하는 기업은 9만4,000개로 2.7%에 불과한데, 수출을 통해 기업을 키우고 새로운 일자리를 만드는 중소, 중견기업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하면서 “수출을 통해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전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문재인 정부도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에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2017년 12월 5일 ‘무역의 날’ 기념식 축사에서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를 역설하였던 문재인 대통령은 그로부터 22일이 지난 2017년 12월 27일 청와대에서 국민경제자문회의 제1차 회의를 주재하면서 ‘사람중심경제’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피력하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문재인 대통령은 ‘사람중심경제’와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가 양립될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2. 그것은 오판과 착각이다

 

2018년 6월 1일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7년도 한국의 연간수출액은 5,739억 달러이고, 세계수출시장 점유율은 역대 최고 수준인 3.6%에 이르렀으며, 세계수출순위는 6위로 올라섰다. 이런 ‘눈부신 경제성장’을 보고, 문재인 정부는 기뻐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기쁨과 긍지 대신에 실망과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박정희식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가 고도로 성장할수록 문재인식 사람중심경제를 살릴 방도가 없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2017년도에 한국의 수출총액은 사상 최고 수준에 이르렀지만, 한국의 민생경제발전수준을 말해주는 취업자 증가폭은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그에 따라 근로대중의 소득지표도 크게 악화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경제관리들과 경제분석가들은 2017년에 고용지표와 근로소득지표가 급격히 떨어진 원인을 놓고 설왕설래하였지만, 그들은 민생경제파탄의 근본원인이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면서, ‘정책실패’라는 아리송한 말만 늘어놓았다. 근로대중의 민생경제파탄은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실패를 근본원인으로 하여 발생한 것이 아니라,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근본원인으로 하여 발생한 것이다. 명백하게도,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가 근본원인이고, 근로대중의 민생경제파탄은 파국적 결과다. 인과관계를 바로 알아야 해결방도를 찾을 수 있는데, 문재인 정부는 인과관계를 알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사람중심경제’를 천명하기 훨씬 이전부터,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박정희 독재정권이 ‘수출입국’을 천명하였던 1962년부터 장장 반세기 동안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는 근로대중의 민생경제를 체계적으로 파탄시켜왔다.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의 성장역사는 근로대중의 민생경제가 황폐화되어온 역사다. 아래에 제시된 통계자료들이 그런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노동연구원이 2018년 3월 초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연간소득이 5,047만 원 이상인 한국의 상위계층 10%의 소득집중도는 1995년까지만 해도 29.2%밖에 되지 않았고, 2003년까지는 30%대에 머물렀는데, 2004년에 40.71%로 급상승한 이후 해마다 지속적으로 상승하면서, 2008년 43.45%, 2012년 44.9%, 2014년 48.7%, 2016년 49.19%를 기록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소득’이라는 개념은 근로소득만이 아니라 금융소득과 사업소득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인데, 한국의 10% 상위계층은 근로소득이 아니라 사업소득과 금융소득 같은 불로소득으로 막대한 재부를 거머쥐었고, 그로써 극단적인 빈부격차가 발생한 것이다. <사진 3>   

 

▲ <사진 3> 위쪽 사진은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빈민촌의 모습이고, 아래쪽 사진은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있는 최고급 주상복합아파트 타워 팰리스의 모습이다. 허물어져가는 구룡마을은 고통과 불행과 궁핍 속에서 신음하는 수백만 빈곤층의 현실을 보여주고, 첨단경비체계와 수영장, 골프연습장와 주차장을 두루 갖춘 호화로운 타워 팰리스는 부귀와 사치와 안락에 빠진 극소수 부유층의 현실을 보여준다. 한국 사회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극단적인 빈부격차가 고착되었다. 최저임금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으며 가혹하게 착취당하는 노동자가 266만4,000 명에 이르고, 실업자는 453만8,000 명에 이른다. 이것은 소득분배 불평등이 악화될대로 악화되어 사회정치적 안정을 위협하는 위험선에 접근하였음을 의미한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예컨대 프랑스나 스웨덴 같은 서유럽 나라들의 경우, 상위계층 10%의 소득집중도는 30% 안팎에 머무는데, 한국의 경우 상위계층 10%의 소득집중도는 50%에 이른 반면, 하위계층 50%의 소득집중도는 해마다 급격히 낮아졌고, 올해는 전 세계에서 소득분배 불평등이 가장 악화된 미국이나 중국보다 더 나쁜 사상 최악의 상태에 빠졌다.  

 

한국 통계청이 2017년 12월 17일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전체 노동계급 중에서 최저임금보다 적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의 비율, 다시 말해서 가장 가혹하게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비율이 2003년에는 4.8% 수준이었는데, 2007년 이후에는 10~12%로 급증했고, 2016년에는 13.6%로 더 상승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한국의 전체 노동계급 1,962만7,000 명 가운데 266만4,000 명이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받으며 가혹하게 착취당하는 참혹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 청소년노동자, 노인노동자, 여성노동자, 비정규직노동자가 급증하였으니, 가장 가혹하게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비율이 급증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2017년 1월 12일 한국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에서 ‘사실상 실업자’는 2016년 말을 기준으로 453만8,000 명에 이르렀다. 이 엄청난 수치는 문재인 정부가 인정하는 ‘공식적인 실업자’보다 4.5배나 많은 것인데, 특히 청년실업사태가 매우 심각해져서 청년 4명 가운데 1명이 사실상 실업자다.  

 

한국 통계청의 보고서에 따르면, 소득분배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표로 사용되는 지니계수(Gini coefficient)는 한국의 경우 2015년에 0.396이었는데, 2016년에는 0.402로 더 악화되었다고 한다. 유엔기구 보고서에 따르면, 소득분배 불평등이 악화되어 사회정치적 안정을 위협하는 지니계수는 0.4인데, 한국은 2016년에 이미 위험선을 넘어선 것이다. 

 

위에 열거한 사회경제지표들이 말해주는 것처럼, 문재인 정부가 ‘사람중심경제’를 일으켜 세울 방도는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와 결별하는 ‘극약처방’밖에 없는데, 불행하게도 문재인 정부는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가 성장하면 ‘사람중심경제’도 성장할 것이라는 오판과 착각에 빠져있다.  

 

 

3. 세계무역전쟁이 세계대공황 불러온다

 

문재인 정부가 오판과 착각에서 벗어나 수출총력 자유시장경제와 결별하고 ‘사람중심경제’를 일으켜 세울 혁명적인 조치를 단행해도, 때는 너무 늦었다. 왜냐하면, 세계무역전쟁이 한국 경제를 파국으로 끌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민생경제파탄으로 비틀거리는 한국 경제를 파국으로 끌어가는 세계무역전쟁은 어떤 것인가? 

 

지금으로부터 89년 전인 1929년 10월 29일 미국 주식시장의 붕괴로 세계대공황이 시작되었다. 세계대공황으로 사경에 빠진 미국은 무역전쟁을 도발하는 것으로 생존방도를 찾아보려고 몸부림쳤다. 1930년 6월 17일 미국 연방의회는 수입품목에 대한 관세를 대폭 증액시킨 스뭇-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을 채택하여 세계무역전쟁을 도발하였다. 스뭇-홀리 관세법은 미국의 농업과 제조업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20,000여 개에 이르는 수입품목에 대해 52.8%의 관세를 부과한 조치였다. 미국이 관세증액조치를 감행하자, 당시 미국의 최대 교역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도 미국산 수출품에 대한 관세보복조치를 단행하였다. 1930년대 세계대공황과 세계무역전쟁은 그렇게 서로 뒤엉키면서 자유시장경제를 대파국으로 몰아갔다.

 

1930년대에 발생한 세계대공황과 세계무역전쟁으로 세계교역량은 63% 감소되었고, 세계산업생산은 40% 감소되었으며, 선진공업국들의 실업률은 25~33%로 치솟았다. 세계대공황과 세계무역전쟁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지만, 보호무역주의를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던 공화당 대선후보 허벗 후버(Herbert C. Hoover)가 1929년 3월 4일 제31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였을 때, 세계무역전쟁은 예고되었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1931년 미국 뉴욕에 있는 실업자를 위한 무료급식소 앞에서 구호음식을 받기 위해 뉴욕시민들이 길게 줄을 늘어선 장면이다. 1929년 3월 4일 보호무역주의 신봉자인 공화당 대선후보 허벗 후버가 대통령에 취임하였을 때, 세계무역전쟁은 이미 예고되었고, 1929년 10월 29일 미국 주식시장이 붕괴되었을 때 세계대공황은 시작되었다. 당시 졸지에 일자리를 잃고, 길거리로 쫓겨난 미국의 빈민들은 길거리에서 구호음식으로 연명하면서 세계대공황의 혹독한 시련을 견뎌야 하였다. 89년 전 세계무역전쟁과 세계대공황이 거의 동시에 폭발하였던 공포의 씨나리오가 지금 재연되기 시작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보호무역주의 신봉자인 허벗 후버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때로부터 89년이 흐른 2017년 1월 20일, 또 다른 보호무역주의 신봉자가 백악관의 주인으로 등장하였으니, 그가 바로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다. 후버의 계승자 트럼프가 도발한 세계무역전쟁은 세계대공황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될 것이다. 

 

세계은행(World Bank)은 2018년 6월 10일에 발표한 자료에서 오늘 세계무역전쟁이 세계대공황을 촉발시킬 것으로 우려하였다.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이며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룩먼(Paul R. Krugman)은 2018년 6월 27일 제주도에서 진행된 특별강연에 출연하여 지금 일어나고 있는 세계무역전쟁은 70년에 걸쳐 형성된 자유무역체제를 붕괴시키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세계무역전쟁으로 관세가 40%로 치솟고, 세계교역량이 67% 감소하고, 대량실업사태가 일어나, 세계무역체제는 앞으로 5~10년 안에 1950년대 수준으로 퇴행할 것으로 우려하였다. 

 

뉴욕과 런던에 각각 본사를 둔 국제신용평가기관 핏취 그룹(Fitch Group)이 2018년 7월 3일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세계무역전쟁으로 세계자유시장경제는 2조 달러(2,232조 원)에 이르는 천문학적 손실을 입게 될 것으로 우려하였다. 

 

2017년도 한국의 수출총액이 사상 최대인 5,739억 달러에 이르러 세계수출순위 6위에 올라섰다는 사실을 한국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하였던 2018년 6월 1일은 공교롭게도 세계무역전쟁이 시작된 날이다. 그 날 0시부터 트럼프 행정부는 유럽연합, 캐나다, 멕시코가 미국으로 수출하는 철강제품에 25%의 관세를, 알루미늄제품에 10%의 관세를 각각 부과하는 조치를 발효시킨 것이다. 이것은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에게 도발한 무역전쟁을 미국의 주요동맹국들을 상대로 하는 세계무역전쟁으로 확대하였음을 보여준 사건이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2018년 5월 8일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제철산업부문 노동자들에 둘러싸여 서명한, 철강제품 및 알루미늄제품에 대한 수입관세를 증액한다는 대통령 행정명령서를 들어보이는 장면이다. 2018년 6월 1일 0시, 트럼프 행정부는 유럽연합, 캐나다, 멕시코가 미국으로 수출하는 철강제품에 25%의 관세를, 알루미늄제품에 10%의 관세를 각각 부과하는 조치를 발효시켰다. 그로써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에게 도발한 무역전쟁을 미국의 주요동맹국들을 상대로 하는 세계무역전쟁으로 확대하였다. 세계자유시장경제를 대파국으로 몰아갈 세계무역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2018년 6월 15일 트럼프 대통령은 500억 달러에 이르는 중국산 수출품목에 25%의 추가관세를 부과하는 조치를 발표하였다. 평시에 중국과 미국의 교역관세는 2% 미만인데,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를 무려 25%로 대폭 증액시킨 것이다. 관세증액조치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만일 중국이 미국의 관세증액조치에 관세보복으로 맞서면 중국산 수출품목에 대한 미국의 관세를 더 증가시킬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주목되는 것은, 트럼프 행정부가 노리는 관세증액의 공격목표가 대중무역적자를 줄여 미국의 시장을 보호하려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고, 중국이 추진하는 ‘중국제조 2025(Made in China 2025)’라는 첨단산업진흥책을 봉쇄하여 중국의 첨단기술획득을 가로막고, 세계원자재시장에 대한 중국의 통제기도를 가로막는 것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은 2018년 6월 19일 트럼프 행정부가 발표한 ‘미국과 세계의 기술, 지식재산권을 위협하는 중국의 경제침략’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 들어있다. 

 

‘중국제조 2025’라고 불리는 중국의 첨단산업진흥책은 항공우주산업, 인공지능산업, 로봇산업, 생명공학 등 첨단주력산업을 발전시키려는 정책인데, 트럼프 행정부는 그 정책을 가로막아 세계첨단산업분야에서 앞서나가려는 중국을 저지하는 기술패권전쟁을 도발한 것이다. 

공격과 반격의 악순환은 시작되었다. 지금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이 적국들을 제재할 때 들이대는 ‘긴급국제경제권한법(IEEPA)’을 중국에게 들이대는 정면공격기회를 노리고 있다. 기술강국으로 올라서려는 중국을 대적국제재조치로 가로막으려는 미국의 공격시각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공격하고 중국이 반격하는 충돌의 악순환 속에서 시시각각 격화되는 세계무역전쟁은 세계대공황을 촉발시킬 것이다. 

 

2018년 6월 27일 제주도에서 진행된 특별강연에 출연한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폴 크룩먼은 세계무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경제대국들의 교역량 감소폭은 15~20%에 머물 것이지만, 한국의 교역량 감소폭은 30~40%로 치솟을 것으로 예견하였다. 한국의 교역량이 30~40% 급감하면, 한국 경제는 살아남을 수 없다. 

 

 

4. 세계석유위기도 다가온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2017년 5월 10일 산하 특수정보기관인 코리아임무쎈터(Korea Mission Center)를 설립하였고, 거의 같은 시기에 산하 특수정보기관인 이란임무쎈터(Iran Mission Center)도 설립하였다. 

 

코리아임무쎈터 책임자로 임명된  앤드루 김(김성현)은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장과 아시아태평양지역 책임자(차관보급)을 역임한 사람이다. 그는 마익 팜페오(Mike R. Pompeo) 국무장관이 중앙정보국장으로 재직하던 때부터 싱가폴 조미정상회담을 준비하는 비공개 실무작업을 전담하였으며, 2018년 7월 6일부터 7일까지 평양에서 진행된 조미정상회담 후속회담에도 팜페오 국무장관의 수행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배석하였다. 

 

그런데 이란임무쎈터의 책임자로 임명된 마이클 댄드리아(Michael D’Andrea)는 오랜 세월 중앙정보국의 비밀군사작전을 지휘해오며 ‘어둠의 왕자(Dark Prince)’라는 악명을 얻은 사람이다. 그는 오바마 행정부 시절에 오싸마 빈 라덴(Osama bin Laden) 암살작전을 지휘하였고,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등에서 국제테러범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무고한 민간인 수 천 명을 살해한 무인항공기공습을 지휘하였다.    

 

앤드루 김과 마이클 댄드리아의 대조적인 모습은, 트럼프 행정부가 조선을 상대로 대화와 협상을 추구하지만, 이란에게는 비밀군사작전과 무력침공을 자행할 것이라는 점을 예고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에게 위험한 도발을 감행하였다. 

 

2018년 6월 28일 미국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은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 핵합의’라고 불리는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에서 탈퇴한 것을 구실로 내세우며 대이란제재조치를 오는 8월 6일부터 강행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 제재조치에 따르면, 이란산 원유를 수입하는 원유수입국들은 오는 11월 4일부터 이란산 원유를 수입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이란의 원유수출을 봉쇄하여 이란을 압살하려는 도발책동이다. <사진 6>

 

▲ <사진 6> 이 사진은 2018년 5월 8일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미국의 이란 핵합의 탈퇴를 확정한 문서를 취재기자들에게 들어보이는 장면이다. 2018년 6월 28일 미국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은 이란에 대한 초강력한 제재조치를 오는 8월 6일부터 강행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 제재조치에 따르면, 한국은 오는 11월 4일부터 이란산 원유를 수입하지 못하게 된다. 2018년 7월 4일 이란혁명수비군 사령관은 미국이 이란의 원유수출을 가로막으면, 그에 대한 보복으로 호르무즈해협을 봉쇄하겠다고 언명하였다. 날로 격화되고 있는 미국과 이란의 정면대결은 세계석유위기를 불러올 것이고, 그 위기 속에서 원유공급이 끊기면 한국은 살아남기 힘들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하지만 이란은 그런 협박과 강압에 굴복할 나라가 아니다. 2018년 7월 4일 모하마드 알리 자파리(Mohammad Ali Jafari) 이란혁명수비군 사령관은 미국이 이란의 원유수출을 가로막으면, 그에 대한 보복으로 호르무즈해협(Strait of Hormuz)을 봉쇄하겠다고 언명하였다. 페르시아만과 오만만 사이에 있는, 폭이 54km밖에 되지 않는 호르무즈 해협은 전 세계 해상수송원유의 약 35%가 통과하는 전략요충지다. 이란이 그 해협을 봉쇄하면, 국제유가가 폭등하면서 세계석유위기가 발생하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석유가 한 방울도 나지 않는 한국은 미국, 중국, 인도, 일본에 이어 세계 순위 5위에 오른 원유수입국이다. 한국석유공사의 자료에 따르면, 2017년 한 해 동안 한국은 11억1,817만 배럴의 원유를 수입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중동산 원유수입량은 81.7%였다. 이것은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는 날, 한국의 원유수입도 사실상 중단될 것임을 예고해준다.  

 

한국석유공사가 9개 기지들에 분산, 비축해둔 1억3,320만 배럴의 원유를 아껴 쓴다고 해도, 108일(3개월 19일)밖에 버티지 못한다.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가 유류공급을 끊어버리면, 한국의 산업 전체가 마비될 것이고, 자동차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전기불빛이 꺼진 어둠 속에 잠길 것이다. 

 

 

5. 생존방도가 여기 있다

 

미증유의 대파국을 불러일으킬 세계무역전쟁, 세계대공황, 세계석유위기는 한국에게 3대 재앙이다. 3대 재앙들 가운데 하나만 닥쳐와도 한국은 견디지 못하는데, 불행하게도 3대 재앙이 거의 같은 시기에 대폭발을 일으키는 사상 최악의 시나리오가 예고된 것이다. 

 

한국에 3대 재앙에 닥쳐올 때, 생존방도는 없는 것일까? ‘철통같은 한미동맹’을 입으로만 되뇌는 미국은 한국이 3대 재앙으로 사경에 빠져도 외면할 것이고, 세계무역전쟁으로 허덕이는 중국에게 도움을 기대하는 것도 부질없는 짓이다. 

 

한국이 3대 재앙에 휘말려 사경에 빠지면, 누가 도와줄 것인가? 세계무역전쟁, 세계대공황, 세계석유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사회주의자립경제를 발전시키는 분단선 이북의 동족밖에 없다. 장차 통일공화국에서 함께 살아갈 동족만이 도움을 줄 것이다. 동족의 피는 물보다 진하고, 더 뜨겁다. 

 

2018년 4월 27일 남북 정상이 8천만 민족에게 안겨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이야말로 동족이 사경에 빠졌을 때 도와줄 희망의 약속으로 가득 차 있는 역사적인 문서다. <사진 7> 

 

▲ <사진 7> 이 사진은 2018년 4월 27일 남북 정상이 역사적인 판문점 선언에 서명하고 악수를 나누는 장면이다. 한국이 세계무역전쟁, 세계대공황, 세계석유위기라는 3대 재앙에 휘말려 사경에 빠지면, 누가 도와줄 것인가? 3대 재앙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사회주의자립경제를 발전시키는 분단선 이북의 동족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에게 남아있는 선택은 '괴물' 같은 한미동맹을 믿지 말고, 미국의 대조선제재를 무시해버리고, 우리 민족끼리 판문점 선언을 이행함으로써 임박한 대파국에 대비할 생존방도를 모색하는 것밖에 없으며, 조국통일이 8천만 민족의 생명선이라는 진리를 실천하는 길밖에 없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판문점 선언 제1항에는 이렇게 명기되었다. “남과 북은 남북관계의 전면적이며 획기적인 개선과 발전을 이룩함으로써 끊어진 민족의 혈맥을 잇고 공동번영과 자주통일의 미래를 앞당겨나갈 것이다.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온 겨레의 한결같은 소망이며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의 절박한 요구이다.”    

 

또한 판문점 선언 제1항 6조에는 이렇게 명기되었다. “남과 북은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번영을 이룩하기 위하여 10.4 선언에서 합의된 사업들을 적극 추진해나가며, 1차적으로 동해선 및 경의선 철도와 도로들을 연결하고 현대화하여 활용하기 위한 실천적 대책들을 취해나가기로 하였다.”

 

판문점 선언에는 그런 희망의 약속들이 명기되었지만, 미국이 대조선경제제재를 풀지 않으면, 남측은 사경에 빠지는 경우 북측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고, 사경에서 벗어날 민족경제의 공동번영도 추진할 수도 없다. 한미동맹이라는 ‘괴물’이 한국의 생존을 가로막는 불의의 사태가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은 러시아, 인도, 싱가폴을 차례로 순방하면서 임박한 대파국에 대비할 생존방도를 모색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다른 나라들에 기대를 거는 것은 헛수고다. 문재인 정부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 ‘괴물’ 같은 한미동맹을 믿지 말고, 미국의 대조선제재를 무시해버리고, 우리 민족끼리 판문점 선언을 이행함으로써 임박한 대파국에 대비할 생존방도를 모색하는 것밖에 없으며, 조국통일이 8천만 민족의 생명선이라는 진리를 실천하는 길밖에 없다. 판문점 선언에는 “당면하여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가을 평양을 방문하기로 하였다”고 기록되었지만, 가을이 오기 전에라도 평양을 방문하여 생존방도를 모색해야 한다. 세계무역전쟁, 세계대공황, 세계석유위기라는 3대 재앙이 한국을 집어삼킬 기세로 닥쳐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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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역에 모인 2만 여성 “불편한 용기가 세상을 바꾼다”

전혜원 기자 one@vop.co.kr
발행 2018-07-07 19:13:36
수정 2018-07-07 19: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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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역 3차 시위
혜화역 3차 시위ⓒ민중의소리

‘홍대 누드모델 불법촬영 사건’에 대한 경찰의 성차별적 편파 수사를 규탄하는 여성들의 3차 대규모 시위가 7일 서울 혜화역에서 열렸다.

포털 사이트 다음 카페 ‘불편한 용기’ 측은 이날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혜화역 1번 출구 앞에서 시위를 열었다. 28도를 웃도는 더위에도 시위 참가자들은 아스팔트 거리에 앉아 ‘성차별 수사를 중단하라’ ‘여성유죄 남성무죄’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꾼다’ 등이 적힌 팻말을 들고 불법촬영 사건에 대한 성차별적 수사를 규탄했다.

오후 4시 기준 2만명(경찰 추산 1만7천명) 여성들이 시위에 참가했다. 지난달 열린 1차 시위에는 주최 측 추산 1만2000여명(경찰 추산 1만여명), 2차 시위에는 3만명(경찰 추산 1만5천여명)이 참가했다.

혜화역 시위
혜화역 시위ⓒ뉴시스

시위 참가자들은 “불편한 용기가 세상을 바꾼다”는 구호와 함께 불법촬영에 대한 경찰의 성차별적 수사를 규탄했다. 또 “4만5천명의 여성들이 불법촬영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는 여전히 안이한 대응을 보이고 있다”며 “불법촬영 문제에 실질적인 대책을 촉구한다”고 주장했다.

시위에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비판도 제기됐다. 참여자들은 “페미니즘 공약을 걸어 당선된 문 대통령이 여성의 문제의식을 축소하려 한다”며 “우리의 요구를 무시하는 정부의 행태를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고 외쳤다. 문 대통령은 이달 3일 국무회의에서 홍대 몰카 사건과 관련해 “편파 수사는 맞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시위 참가자들은 성차별 없는 수사와 함께 불법촬영에 대한 엄정한 수사, 몰래카메라 판매와 유통 규제 등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검찰 및 경찰 내 여성의 비율을 늘려 공정한 수사를 위한 토대 마련을 촉구했다.

2차 시위에 이어 이날 열린 3차 시위에도 삭발식이 진행됐다. 시위 참가자 가운데 사전 신청을 받은 여성들이 무대에 나와 머리카락을 잘랐다. 주최 측은 “전 세계 시위에서 삭발은 강력한 의지와 물려서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담는다”며 “우리는 행동으로 우리의 의지를 보이려 한다”고 강조했다.

혜화역 3차 시위
혜화역 3차 시위ⓒ민중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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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반국가적 범죄집단’ 기무사를 해체하라

[데스크 칼럼] 경악할만한 군부내 반국가세력들의 준동

박근혜의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절정에 이르던 2016년 11월 18일 추미애 민주당대표는 “박근혜정권이 ‘박사모’를 시켜 물리적 충돌을 준비하고...계엄령까지 검토하고 있다는 정보가 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 때만 해도 뜬금없는 소리로 치부되었던 추대표의 이 경고는 최근 소름이 돋을 만할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철희 의원이 지난 7월 5일 공개한 국군기무사령부의 ‘전시 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2017. 3 작성) 문건에는 계엄준비실행 계획이 구체적으로 들어 있다. 광화문과 여의도 등 서울 시내에만 탱크 200대, 장갑차 550대, 무장병력 4,800명, 특전사 1,400명을 투입하는 등 촛불집회에 대한 치밀한 무력진압계획을 세웠다.

▲ 군인권센터가 공개한 계엄발령 시 서울 시내 병력 추가투입 배치도[사진 : 뉴시스]


문건은 계엄에 대한 국민의 부정적 인식을 고려, 초기에는 위수령을 발령하고, ‘폭력사태’ 등을 계기로 ‘경비계엄’을 거쳐 전국적 ‘비상계엄’으로 확대하여 국가를 완전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세부 시나리오까지 담고 있다. 
장기간에 걸쳐 병력 동원과 무력진압을 계획하고, 국회의 반발에 대한 대응, 야당 정치인사들에 대한 조치, 이른 바 ‘주동자’ 색출과 체포, 언론통제와 장악에 이르기까지 단계마다 필요한 조치와 행동계획을 세부적으로 작성했다. 평화적 시위를 무력으로 유혈진압하고 이를 계기로 전국적 계엄을 확대하는 것까지 전두환 신군부의 1212쿠데타와 비상계엄확대, 5.18광주학살, 군정 실시로 이어지는 시나리오와 놀라울 만큼 일치한다.

▲ 기무사령관이 헌재의 탄핵심판 결정을 앞둔 2017년 3월 초 '전시 계엄 및 합수업무수행방안'이라는 제목으로 작성한 문서.(제공=이철희 의원실.뉴시스)

경악스러운 것은 박근혜정권과 기무사의 ‘계엄령준비계획’이 오래전부터 정권의 위기상황을 대비한 것으로 군부장악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계엄준비실행계획문건을 작성한 기무사의 사령관인 조현천은 ‘알자회’의 핵심멤버로 알려져 있다. 알자회는 1212쿠데타를 주도한 ‘하나회’와 같은 군부내 육사출신 사조직이다. 92년 적발되어 해체된 것으로 알려진 ‘알자회’는 최순실게이트로 다시 세상에 드러난다. 2014년 청와대 문건 유출 파문을 전후로 박지만 육사 동기 그룹이 경질 좌천되면서, 최순실 라인을 통해 조현천 기무사령관이 등용된다. 
2016년 12월 28일 세계일보가 입수 보도한 ‘최순실을 활용한 군인사개입 보고서에 따르면 추명우(육사 41기 알자회, 국정원 8국장)는 최순실과 친분이 있는 누나를 이용, 조현천을 기무사령관으로 추천했다. 기무사령관으로 내정된 조현천은 군 인사정보를 추명호에게 제공했고, 추 국장은 다시 청와대 우병우와 안봉근에게 보고했다. 우병우는 군 인사 정보를 통해 알자회 회원들의 장성 진급에 관여했다. 추명우는 다 아는 것처럼 국정원특활비 제공, 블랙리스트작성, 촛불시위동향보고 등 우병우와 연계된 국정농단관련 인물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 
실제로 2014년 이후 조현천 기무사령관과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인 임호영 대장을 필두로 항작사령관 장경석 중장, 특전사령관 조종설 중장, 국방부 정책기획국장 장경수 소장, 12사단장 성일 소장, 전투지휘훈련(BCTP) 단장 송지호 준장, 논산훈련소 참모장 김덕영 준장 등 알자회 멤버들이 군부의 요직을 독차지했다.

계엄령의 주무부서는 합동참모본부다. 그런데 계엄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기무사가 계엄령 실행계획, 계엄사령부 직제구성, 실행준비까지 담당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당시 합참의장이 육사출신이 아닌 이순진 대장(3사 14기)이었기 때문이다. 계엄령발동 계획 수립과 병력 동원에 관계된 사람에서 해군과 공군을 철저히 배제하고 모두 육사 출신으로 채운 것이다. 정상적인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우병우 등 청와대와 연결된 기무사령관을 중심으로 계엄계획을 세웠다는 것은 계엄준비계획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것’이 아니라 정권 핵심부에 의해 기획된 ‘친위쿠데타음모’라는 명백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기무사의 ‘사악한 국가범죄’는 사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 2010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방산비리로 구속된 이규태 일광공영회장의 배후에는 기무사가 있었다. 당시 이규태회장이 갖고 있었던 군관련자료는 콘테이너 박스에 1톤이 넘었는데 군 관련 비밀문서가 수두룩했다. 이 비밀문서들이 미국과 러시아 등 무기수입국에 흘러 들어갔음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러나 사상최대의 방산비리인 이 사건은 기무사 실무자 두 명을 구속한 것으로 끝냈다. 이규태회장은 자신이 운영하던 연예기획사 사장에 전직 기무사령관을 앉혀 보은했다.

2012년 대선댓글공작을 시행한 사이버사령부 심리전단도 기무사의 주도로 창설했다. 당시 기무사는 댓글공작에 직접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심지어 기무사는 댓글공작TF도 감청했다. 당시 댓글공작을 지시한 국방장관이었던 김관진은 사법처리에서 제외되었고, 사이버사령관 옥도경은 집행유예 연제욱은 선고유예로 풀려났다. 
지난해 5월 국정기획위(인수위)에 대한 국방부 보고에서는 추가로 반입된 사드4기를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는데 당시에도 기무사와 알자회가 관여했다는 의혹이 무성했다. 
최근에는 기무사가 세월호 참사 당일부터 선사인 청해진해운과 연락하며 사건에 관여한 것이 드러났다. 국방부 사이버 댓글사건 조사 TF는 지난 2일 기무사가 60명 규모로 태스크포스(TF)를 꾸려 여론 형성 등에 조직적으로 관여했다고 조사결과를 밝힌 바 있다. 댓글조사TF는 기무사가 참모장(육군 소장) 중심으로 사령부 및 현장 기무부대원 등 60명으로 TF를 꾸려 유가족 사찰, 탐색구조·인양통제, ‘불순세력’ 관리 등을 했다고 보고했다.

기무사의 원형은 1948년 5월 조선경비대 정보처 산하 특별조사과다. 당시 주한미군 CIC(방첩부대)917부대는 각 연대 정보담당 장교 33명을 선발 교육하여 특별조사과를 창설했다. 이후 특무부대, 방첩부대, 보안사령부, 기무사령부로 이름을 바꾸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무사 5층 복도에는 역대 기무사령관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김구선생 암살사건의 배후인 백인엽(2대특무대장), 김창룡(5대특무대장)도 버젓이 걸려있다. 1998년 기무사는 김창룡을 대전현충원국립묘지에 안장시킨다. 전두환, 노태우가 걸려 있음은 물론이다. 반면 김재규는 없다. 대통령을 시해했다는 이유에서다. 부부 사기사건으로 유명한 장영자의 남편 이철희(11대사령관,방첩대장)도 걸려있다. 이 사진들만 보더라도 기무사가 우리 역사에서 얼마나 사악한 반국가적 범죄의 온상이었는지 한눈에 보이지 않는가?

이명박 박근혜정권 10여 년 간 정치권과 기업에 진출한 기무사의 약진은 대단히 경이적이다. 군 내부에서도 4000명이 넘는 거대조직에다가 장교의 동향을 관찰하는 기무사의 권위는 무소불위이다. 현직에 있을 때는 정권의 친위대로서 온갖 사악한 반국가적 범죄행위를 일삼는다.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사찰과 감시, 진압해야 할 적이다. 퇴직 후에는 정치권과 방산업체, 군납업체 등 공기업, 예비군과 민방위조직, 보수단체의 상층을 타고 앉아 현역과 결탁하여 거대한 정보와 이권의 카르텔을 형성한다. 
정권이 바뀌고 사악한 범죄행위가 드러날 때마다 요란스럽게 ‘기무사개혁’을 떠들었지만 그들은 거대한 힘으로 이를 좌절시켜왔다. 사실 보안사령부를 국군기무사령부로 이름을 바꾼 것도 1990년 윤석양 이병의 폭로로 정계와 종교계, 재야 등 민간인 1300명을 불법사찰한 ‘청명계획’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물론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1998년 김대중 정부 때는 기무사를 국방부 정보본부 산하로 통폐합하는 국방개혁안을 막강한 영향력으로 무산시킨 바 있다. 노무현 정부도 기무사 개혁에 착수하였으나 기무사는 개혁안을 무력화하고 거꾸로 군 사이버사령부 창설안을 입안하여 조직 확장을 시도하였다. 이명박 정권 때는 사이버사령부를 창설, 기무사 세력 확장에 대한 부정적 여론 때문에 국방부에 그 기능을 형식상 양보했으나 기무사 출신과 ‘알자회’가 사실상 장악했다. 김대중정부 때 중단된 기무사령관 대통령 독대도 이때부터 부활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기무사 개혁TF>가 구성되어 활동하고 있다. 이 TF에는 소강원 기무사참모장, 기무사 101부대장, 기무사 102부대장 등 현직 기무사 고위 간부 3명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소강원 참모장은 계엄령 검토 문건작성을 한 당사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국방부는 처음에는 ‘계엄준비문건’에 대한 조사도 이 기무사 개혁 TF에 맡긴다고 했다가 국방부 검찰단이 한다고 말을 바꿨다. 조사도 국방부에서 하고 위법성에 따른 수사 여부도 국방부에서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이 문건이 당시 한민구 국방장관에게 보고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국방부가 ‘셀프조사’를 한다? 지금도 알자회의 장악 아래 있는 국방부가?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두말할 것 없이 기무사는 당장 없애야 할 사악한 반국가적 범죄집단이다. 의문의 여지도 없이 해체해야 한다. 그 어떤 대안도 기무사 해체 위에서 찾아야 한다. 군의 방첩기능이 필요하다면 국방부 정보본부가 담당하면 될 일이다. 
나아가 군부 내 독버섯처럼 또아리를 튼 알자회를 비롯한 ‘특권 사조직’을 완전히 도려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그 무엇을 하던 의미가 없다는 것은 지난 수십 년의 역사가 오롯이 증명한다. 해체하고 도려내지 않으면 그들은 악랄한 생존력으로 부활할 것이다. 
계엄준비문건이 우리에게 안겨 주는 살 떨리는 교훈은 기무사가 존재하는 한 대한민국은 계엄령과 군부쿠데타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기무사 해체와 군부숙정, 그 출발점은 당연히 철저한 조사와 엄중한 처벌이다. 국방부와 기무사로부터 철저히 자유로운 수사기관에서 즉각 수사에 착수해야 한다. 우리는 국민과 함께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사악한 반국가적 범죄집단 기무사와 알자회의 운명을!

김장호 편집국장  jangkim2121@gmail.com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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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철의 음악카페] 김희숙 여사님 추모특집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 장준하
 
여인철 | 2018-07-06 09:37:1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민족지도자 장준하 선생 부인이신 김희숙 여사님 추모특집

(추모특집이라 글이 김. 긴글 읽는거나 노래 듣는거 취미없는 분들은 여기서 바로 pass! 바람 ㅎ)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 장준하

얼마 전 잘 모르는 사람이 “음악 잘 듣고 있습니다”라는 문자를 보내와 민망하기도, 미안하기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인철의 음악카페]라는 코너를 모 매체에서 만들어줬는데 시간에 쫓기다보니 1주일에 한번, 늦어도 2주일에 한번은 올리겠다는 언질도 못지키고 가뭄에 콩 나듯 올리는 곡들을 “잘 듣고 있다” 하니  황송했지요..

“음악 좀 올려달라”는 질타의 다른 말로 들리기도 했지만 한편 그가 정말 잘 듣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그 후론 웬만하면 가급적 시간을 내서 올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며칠 전부터 우선 이 코너를 이용해 나에게 힐링이 되는 음악을 좀 보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곧 벌어질 치열한 전투(?)에 대비해서이기도 하고, 이틀 전 세상을 떠나신 장준하선생의 부인 김희숙 여사님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대접을 보며 화가 좀 나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에겐 정말 힐링이 필요합니다. 제가 누구 다른 사람에게 힐링을 선사할 수 없을 만큼.

1.
그래서 우선 첫 번째 힐링곡으로 김희숙 여사께서 이 지구별을 떠나신 것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모짜르트의 진혼곡(requiem) 중 ‘Lacrimosa(눈물의 날)’을 신청합니다...^^

요 며칠 민족지도자 장준하 선생의 부인의 별세를 대하는 우리 사회에 슬픔을 느꼈습니다.

아무리 장준하 선생 당신이 아닌 그분의 부인으로서 별다른 사회활동 없이 사시다 돌아가셨다 해도, 백기완 선생의 일갈처럼 “장준하 선생만큼 ‘위대한’ 삶을 사시지는 못하셨지만, 그에 비길만큼 ‘거룩한’ 삶을 사신” 김 여사님을 그렇게 보내드리는 것은 김 여사님에 대한 예의가 아닐 뿐만 아니라, 민족지도자 장준하 선생을 생각해서도 도리가 아닙니다, 단연코.

이건 어쩌면 장준하 선생에 대한 대중의 배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여, 내 마음 가는 대로 ‘진노의 날(Dies irae)’을 택할까 하다가 다중의 힐링을 위해 ‘눈물의 날(Lacrimosa)’을 선택했습니다.

아마 제가 이 곡을 들으며 눈물을 좀 흘리면 힐링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https://youtu.be/8oESM64gU5M

2.
두 번째 힐링곡은 Over the rainbow(저 무지개 너머). 1939년 뮤지컬 영화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 에 나오는 타이틀곡으로 쥬디 갈랜드(Judy Garland)가 불러서 전 세계적으로 히트한 명곡입니다.

오늘은 원가수의 노래보다는 에바 캐시디(Eva Cassidy)의 노래로 듣고 싶습니다. 감성을 촉촉하게 적시는 그녀의 노래가 힐링 면으로는 훨씬 더 효과가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바 캐시디는 자기만의 특별한 스타일로 노래를 불렀는데 요절하고 나서야 명성을 얻은 불행한 가수입니다.

에바 캐시디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할 때가 올 것이니 오늘은 여기서 이만하고…

https://youtu.be/2rd8VktT8xY

“Some where over the rainbow way up high...
dreams that you dare to dream really 
do come true”

3.
세 번째 힐링곡은 사라 맥라클란(Sarah McLachlan)이 1997년에 발표한 ‘Angel(천사)’.

지상의 한 여의사(멕  라이언)를 너무 사랑해서 자기가 인간이 된 천사(니콜라스 케이지)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영화 ‘City of angel(천사의 도시)’ 에 OST 로 나오면서 더 유명해졌지요.

오늘은 사라의 품격있고 환상적인 라이브로…

https://youtu.be/i1GmxMTwUgs

3-2
(다음 곡은 jtbc 비긴어게인 2의 헝가리편에서 방영된, 박정현이 다뉴브 강가에서 부른 ‘Angel’로서, 여러분들께 찾아보시라고 하려다가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 본인의 재량으로 서비스 하는거임. 음악 오래 듣기에 취미 없는 분들은 불평하지 말고 패쑤! 하시길 바람. 
단, 명곡 놓치는 불행은 책임 안 짐 ㅎㅎ)

https://www.youtube.com/watch?v=2_epUh-zh10

“Let me be empty and weightless, and maybe  I'll find some peace tonight”
근데 제가 그게 잘 안 돼요… ᅲ 그러나 오늘 밤은 그렇게 해볼게요…

“In the arms of an angel, fly away from here...
May you  find some comfort there...”
그래요… 천사의 품에 안긴듯 멀리 날아가 거기에서 안식을 좀 찾아보렵니다.

이 노래의 가사를 음미하며 듣다 보면 이따금 울컥할 때가 있는데, 이 노래 하나만으로도 치유가 되는듯합니다.

4.
마지막 네 번째 곡은 노르웨이 출신의 가수 시셀(Sissel) 이 부른 ‘Bred dina vida vingar(Spread your wide wings)(그대의 넓은 날개를 펼쳐라/주님의 날개)’

시셀(Sissel)의 청아한 목소리를 듣는 것 만으로도 힐링이 되는듯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요절한 배우 장진영 CF 에 배경음악으로 나옴으로써 널리 알려진 곡이기도 합니다.

아래 올린 둘중에 하나 찍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둘다 썩 마음에 드는 동영상이 아닌지라… ᅲ

https://youtu.be/_19gMyVvw9s

https://youtu.be/B1bH1E0CJdY

오늘의 [여인철의 음악카페]는 저에 대한 힐링 겸 김희숙 여사님 별세에 대한 애도와 추모의 의미를 담아 특집으로 만들었습니다. 

저도 조금 치유가 됐습니다만, 이 노래를 들으신 분들도 힐링이 좀 되었으면 합니다.

첫 곡은 추모곡으로, 모짜르트의 진혼곡 중 마지막 곡인 ‘눈물의날’로 시작했습니다.

이어 김 여사께서 부디 “저 무지개 너머 저편 어딘가(Somewhere over the rainbow)”-하늘나라-로 가셨으니 “천사(Angel)”가 되셔서, 이미 천사가 되신 부군 장준하선생을 다시 만나 이승에서 채 펼치지 못하신 “큰 날개를 활짝 맘껏 펼쳐보시라(Spread your wide wings)”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김희숙 여사님, 부디 그곳에서 장준하 선생과 함께 행복하시길 빕니다.

2018. 7. 5
장준하부활시민연대
공동대표 여인철 再拜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33&table=music_cafe&uid=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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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 이촌동이 겪은 '참 치사한' 차별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장마·홍수 앞에서 한국인 차별한 일제

18.07.08 10:50l최종 업데이트 18.07.08 10:50l

 

 

일제강점기 하의 한국인들은 여름철 장마 때도 차별을 당했다. 특히 서민층인 경우에는, 노골적 민족 차별로 자연재해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일도 있었다. 일본은 입으로는 일본과 조선이 하나라고 선전했지만, 재난피해로 큰돈을 써야 할 때는 한국인을 대놓고 박대했다. 이런 피해를 당한 대표적 지역이 지금의 서울시 용산구 이촌동이다. 

이촌동은 원효대교·한강철교·한강대교·동작대교 4개 대교가 강변북로와 만나는 곳이다. 한강대교 아래 노들섬도 여기 속한다. 이촌동과 맞닿은 위쪽은 용산이다.  

강변북로를 따라 원효대교에서부터 동작대교 구간을 달리다 보면, 중산층 아파트를 많이 볼 수 있다. 지금은 이렇지만, 일제강점기까지는 빈민가였다. 장마 피해가 유난히 심한 상습 침수 지대였기 때문이다.   
 

 1927년 지도에 실린 이촌동. 이 지도는 <정도 600년 서울지도>에 수록돼 있다. 붉은 글자는 이 기사의 필자가 첨가한 것이다.
▲  1927년 지도에 실린 이촌동. 이 지도는 <정도 600년 서울지도>에 수록돼 있다. 붉은 글자는 이 기사의 필자가 첨가한 것이다.
ⓒ <정도 600년 서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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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한자 이름이 이촌(二村)인 이유도 여기 있다. 이촌의 '이'는 처음엔 二(두 이)가 아니라 옮길 이(移)였다. 二가 移로 바뀐 것과 관련해 서원대학교 지리학과 송호열 교수의 <한국의 지명 변천>은 이렇게 말한다. 

 

"원래 이곳은 한강변 모래벌판으로 여름철에 홍수가 들면 강 가운데 섬마을(노들섬)에 살던 주민들은 강안(江岸, 강가 언덕)으로 옮겨 살아야만 했기 때문에 원래 지명은 이촌동(移村洞)이었는데, 나중에 한자가 바뀐 것이다."

장마 때면 옮겨 살아야 했다. 그래서 '옮길 이'를 써 이촌동이라 불렸던 이곳은 빈민가라는 이유로 일반 한국인보다 더 심한 차별을 당했다. 차별이 심했던 것은 인근에 용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1882년에 시민항쟁인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온 청나라 군대가 남대문 밖 용산에 주둔한 게 계기가 돼 훗날 일본군도 이곳에 주둔하게 됐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용산 땅 300여 만 평이 일본 군사기지로 조성됐다. 조선주둔군 사령부를 비롯한 대규모 군사시설이 이곳에 건설됐다. 

용산 일대에 일본인들이 거주하게 된 사연
 

 일제 강점기 당시의 용산역
▲  일제 강점기 당시의 용산역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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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은 교통 면에서도 요지였다. 대한제국 멸망 6년 전인 1904년, 지금의 용산역이 세워졌다. 그랬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에는 군부대와 철도역에 근무하는 일본인들이 용산 일대에 대거 거주하게 됐다. 

여의도와 한강 이북을 잇는 세 다리 중 하나가 원효대교다. 원효대교 북단은 욱천(만초천)이라는 하천과 이어진다. 복개돼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원효대교 북단에서 2km 안 되는 곳에 욱천고가도로가 있다는 사실에서 과거의 욱천을 느낄 수 있다. 바로 그 욱천을 경계로 서쪽은 구(舊)용산, 동쪽은 신용산이다. 이촌동은 신용산 남쪽과 닿아 있다. 일본인들은 구용산과 신용산에 집중적으로 거주했다. 

일본이 한국을 빼앗은 지 2년 뒤인 1912년, 이촌동과 용산 일대가 대규모 홍수 피해를 겪었다. 그러자 구용산의 일본인들은 총독부에 제방 건설을 청원했다. 이 요구를 수용해 총독부는 1914년 8월부터 공병대를 동원해 구용산 제방을 건설했다. 인근의 이촌동이 한강과 맞닿아 있을 뿐 아니라 장마 피해도 훨씬 더 컸기 때문에 이촌동에 제방을 건설하는 게 더 시급했지만, 총독부는 이쪽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1920년, 이촌동과 용산 지역이 또다시 홍수 피해를 입었다. 그러자 총독부가 내린 판단은, 구용산 제방을 보강해주는 동시에 신용산에도 제방을 세워줘야겠다는 것이었다. 신용산 서쪽에서부터 제방을 세워 신용산의 서·남·동쪽을 제방으로 막아주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신용산 서쪽은 욱천과 닿아 있지만, 남쪽은 이촌동과 닿아 있다. 한강물과 닿아 있는 게 아니라 이촌동이라는 거주 구역과 맞닿아 있다. 총독부의 결정은, 이촌동과 신용산 사이에 담장을 쌓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강이 범람하면, 이촌동과 신용산 경계에서 물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총독부는 이촌동에 설치하면 될 제방을 굳이 이촌동-신용산 경계에 세우고자 했다. 이촌동 장마 피해에 대해서는 '알 바 없다'는 식이었던 것이다. 신용산 제방 공사는 1923년 착공됐다. 그러자 이촌동에서 항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2012년 <한국사 연구> 제157호에 실린 김종근의 논문 '일제하 경성의 홍수에 대한 식민정부의 대응 양상'은 이렇게 설명한다.

"신용산 제방에서 제외된 서부 이촌동민은 우선 용산의 다른 지역(구용산·신용산)에서 대처했던 방식대로 치수위원회를 조성하고 한인 김용범과 함께 일본인 부전병장(富田兵藏, 도미타 효우조우)을 대표위원으로 선임하여 총독부의 토목부 및 경성부를 찾아가 제방을 쌓아줄 것을 요구하는 진정 활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동아일보>의 비판... "총독부를 양해할 수가 없도다"

총독부는 이촌동에 제방을 만들어주지 않은 이유로, 제방이 세워지면 배를 대기 어려워져 이촌동 어민들의 생계가 힘들어질 수 있고, 또 제방 때문에 건너편 영등포가 위험해진다는 점 등을 내세웠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한테 이런 말은 변명으로만 들렸다. 1923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는 총독부가 이촌동을 무시하기 때문에 제방을 세워주지 않는 것이라면서 이렇게 비판했다. 

"어느 경성부 책임자는 '이촌동민은 조금도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까지 발표하였다 하니, 당국의 조치와 방침은 도저히 양해할 수가 없도다."

경성부 토목과장은 민원을 제기하는 이촌동 주민들한테 "이촌동에서 못 살겠으면 이대로 이사를 가라"는 말까지 했다. 침수 지역에 살 수밖에 없는 빈민들을 향해 그런 막말까지 내뱉었던 것이다. 

총독부는 이촌동 제방을 세워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렇지만, 주민들과 <동아일보>가 나서서 여론을 조성하고 여기에 동조자들까지 생겨나자, 완전히 무시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경성부를 내세워 꼼수를 부렸다. 주민들한테 제방 설계비용의 부담을 요구했다. 설계사무소에 지불할 비용을 주민들이 대신 내주면 제방을 세워주겠다고 제안한 것. 황당한 제안이었다. 빈민들이 설계비용을 부담할 수 없을 거라고 계산했던 것이다. 

그 황당한 요구를 이촌동 주민들은 받아들였다. 그렇게라도 장마 피해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이들은 각지에서 모은 후원금을 보태 570만 원을 마련했다. 이 돈으로 설계사무소에 의뢰해 설계서를 만들어서 경성부에 제출했다. 그렇지만 경성부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예산이 부족하다는 핑계를 댔다. 

주민들이 탄원서 제출과 항의집회 등으로 투쟁의 강도를 높여가고 <동아일보>의 응원 보도까지 계속되자, 경성부는 할 수 없이 공사 착수 결정을 내렸다. 이촌동 문제가 민족차별의 대명사처럼 부각되는 게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공사 비용은 경성부가 대지만, 현장 노동은 주민들이 직접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역시 황당한 요구였지만, 주민들은 또다시 받아들였다. 

이제 뭔가 되는가 싶었지만, 또 마찬가지였다. 경성부의 결정은 총독부의 허가를 조건으로 한 것이었다. 최종 결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경성부가 허가를 요청하자, 총독부는 '당연히' 거부했다. 총독부와 경성부가 합작해 이촌동 주민들을 농락했던 것이다. 

제방 하나 설치하면 끝날 문제인데, 동을 없애자던 일본
 

 1966년 4월 용산구 이촌동 판자집의 모습.
▲  1966년 4월 용산구 이촌동 판자집의 모습.
ⓒ 서울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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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살아야 하나 보다 하고 이촌동 주민들이 체념하고 있을 때였다. 그나마 그대로 살기도 힘들게 만드는 사정이 발생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1925년 을축년 대홍수가 이촌동을 뒤덮었다. "전멸의 비운을 당한 이촌동"이란 표현을 써가며, 위 김종근의 논문은 피해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홍수로 이촌동의 경우, 노들섬에 위치하였던 동부와 중부 이촌동은 과반수의 주택이 쓸려 내려가 거의 황무지화되었고, 서부 이촌동의 경우도 다수의 가옥이 파손되었다."

이촌동 피해 상황을 접한 총독부는 이번에는 매우 신속한 결정을 내렸다. 홍수 직후에 내린 대책회의에서 이촌동을 없애기로 하는 '이촌동 폐동'(廢洞) 결정이 나왔다. 총독부는 주민들한테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라고 요구했다. 주민들이 눈물과 땀을 흘려가며 수해복구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요구를 한 것이다. 주민들의 의견을 전혀 듣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한강변에 있는 또 다른 지역인 송파·잠실·미사리 등지에도 대규모 피해가 발생했지만, 이촌동처럼 폐동 조치를 당하지는 않았다. 총독부가 이 조치를 내린 이유 중 하나에 관해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서부이촌동 제방 건설과 관련된 문제는 당시 한인 차별의 전형으로 인식되던 문제이고 따라서 조선총독부나 경성부에게는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문제였다. (중략) 잦은 진정 활동을 일으키며 사회불안을 일으키고 있던 소요의 근원지인 서부이촌동을 그대로 방치해둔다는 것은 이후 계속 또 다른 사회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따라서 식민정부의 입장에서는 서부이촌동민이 이주되어야만 했다."

이촌동에 제방을 건설해주지 않은 게 민족차별의 대표적 사례로 인식됐기 때문에, 차제에 이촌동을 없애 논란을 차단하자고 총독부가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사실, 이촌동 제방을 건설해주면 그만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위 논문에 따르면, 당시의 이촌동은 위생상태가 좋지 않았다. 빈민촌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바로 위쪽 신용산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이촌동을 기피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곳 일본인들은 자기네 동네와 이촌동이 한 울타리로 묶이는 것을 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굳이 신용산과 이촌동 경계에 제방을 쌓은 것도 모자라 이촌동을 없애기까지 한 데는 그런 심리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촌동이 물에 휩쓸리더라도 같은 제방 안에서 한 동네로 엮이기는 싫었던 듯하다. 

평소에는 일본과 조선이 하나라고 외치던 일본은, 자연재해가 발생하고 큰돈을 써야 할 상황이 되면 한국인을 노골적으로 차별했다. 조선에서 거둔 세금을, 그런 상황에서는 일본인한테만 사용하려 했다. 일본 식민통치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자연재해 때 국민 일부를 차별하는 일은 일제강점기뿐 아니라 대한민국에도 종종 있다. 수도권이 집중호우 피해를 입은 1990년, 노태우 정권은 충주 쪽에서 남한강을 거쳐 한강으로 물이 넘쳐드는 것을 막고자 충주댐 수문을 늦게까지 닫아뒀다. 뒤늦은 충주댐 방류로 이 지역이 침수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기쁨과 즐거움을 남과 공유하는 것은 훌륭하지만 어렵지는 않다. 재난처럼 슬프고 힘든 일이 발생했을 때, 위험을 남한테 떠넘기지 않고 함께 감내하는 태도는 사회통합이 높은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증표다. 일제강점기는 당연히 물론이고, 대한민국에서도 이 과제는 아직 충분히 성취되지 않았다. 
 

 충주댐.
▲  충주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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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외무성 대변인, 세기적인 싱가포르수뇌상봉 무의미해질 수도

북 외무성 대변인, 세기적인 싱가포르수뇌상봉 무의미해질 수도
 
 
 
김영란 기자 
기사입력: 2018/07/07 [22:52]  최종편집: ⓒ 자주시보
 
 

 

북 외무성 대변인이 7일 담화를 발표했다.

 

연합뉴스는 북 외무성 대변인이 폼페오 장관이 회담을 마치고 북을 떠난 뒤 담화를 통해 6~7일 열린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보여준 미국 측의 태도에 유감을 밝히면서 단계적이고 동시행동원칙에 따른 비핵화의 실현을 강조했다고 보도했다.

 

담화에서 북은 이번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조미관계개선을 위한 다방면적인 교류를 실현할 데 대한 문제와 조선반도에서의 평화체제구축을 위하여 우선 조선정전협정체결 65돐을 계기로 종전선언을 발표할 데 대한 문제비핵화조치의 일환으로 ICBM의 생산중단을 물리적으로 확증하기 위하여 대출력발동기시험장을 페기하는 문제미군유골발굴을 위한 실무협상을 조속히 시작할 데 대한 문제 등 광범위한 행동조치들을 각기 동시적으로 취하는 문제를 토의할것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 측은 싱가포르수뇌상봉과 회담의 정신에 배치되게 CVID신고요검증이요 하면서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비핵화요구만을 들고 나왔다고 담화는 주장하면서 미국 측이 회담에서 끝까지 고집한 문제들은 과거 이전 행정부들이 고집하다가 대화과정을 다 말아먹고 불신과 전쟁위험만을 증폭시킨 암적 존재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어 북은 회담결과는 극히 우려스러운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며 미국은 우리의 선의와 인내심을 잘못 리해한것 같다고 경고했지만 우리는 트럼프대통령에 대한 신뢰심을 아직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미국은 수뇌분들의 의지와는 달리 역풍을 허용하는 것이 과연 세계인민들의 지향과 기대에 부합되고 자국의 리익에도 부합되는 것인가를 심중히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 7일 오후 평양공항에서 일본으로 떠나기에 앞서 풀기자단에게 북한 측과의 협상 결과를 설명하는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사진출처- 미 국무부]     

 

한편, 폼페오 장관은 평양을 떠나기에 앞서 기자들에게 북 비핵화를 위한 시간표를 논의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며 거의 모든 논의의 요소에서 진전을 이뤘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북과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폼페오 장관이 이번 방북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접견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북미정상회담 이후 북미 고위급회담의 분위기가 지난 1~2차 방북과는 달랐음을 예상해볼 수 있다.

 

하지만 북이 여전히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신뢰를 보이고 있다는 점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냈다는 것은 주목해봐야 할 것이다.

 

북미정상회담이 진행되고 역사적인 합의가 있었지만정상회담을 앞두고도 미국 내에서 북미회담을 파탄시키고자 했던 일부 움직임이 있었듯이미국이 북미정상회담 합의 내용들을 이행하는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담화에서도 실무진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미국 내에서 북미정상회담 이행을 파탄내고자 하는 세력들에 대한 경고로 보인다.

 

아래는 인터넷 소식에 올라온 북 외무성 대변인 담화 전문이다.

 

-------------아래------------------------------------------

 

력사적인 첫 조미수뇌상봉과 회담이 진행된 이후 국제사회의 기대와 관심은 조미수뇌회담 공동성명의 리행을 위한 조미고위급회담에 쏠리였다.

 

우리는 미국 측이 조미수뇌상봉과 회담의 정신에 맞게 신뢰조성에 도움이 되는 건설적인 방안을 가지고 오리라고 기대하면서 그에 상응한 그 무엇인가를 해줄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6일과 7일에 진행된 첫 조미고위급회담에서 나타난 미국 측의 태도와 립장은 실로 유감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였다.

 

우리측은 조미수뇌상봉과 회담의 정신과 합의사항을 성실하게 리행할 변함없는 의지로부터 이번 회담에서 공동성명의 모든 조항들의 균형적인 리행을 위한 건설적인 방도들을 제기하였다.

 

조미관계개선을 위한 다방면적인 교류를 실현할데 대한 문제와 조선반도에서의 평화체제구축을 위하여 우선 조선정전협정체결 65돐을 계기로 종전선언을 발표할데 대한 문제,비핵화조치의 일환으로 ICBM의 생산중단을 물리적으로 확증하기 위하여 대출력발동기시험장을 페기하는 문제,미군유골발굴을 위한 실무협상을 조속히 시작할데 대한 문제 등 광범위한 행동조치들을 각기 동시적으로 취하는 문제를 토의할것을 제기하였다.

 

회담에 앞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 김정은동지께서 트럼프대통령에게 보내시는 친서를 위임에 따라 우리측 수석대표인 김영철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미국측 수석대표인 폼페오국무장관에게 정중히 전달하였다.

 

국무위원회 위원장동지께서는 싱가포르수뇌상봉과 회담을 통하여 트럼프대통령과 맺은 훌륭한 친분관계와 대통령에 대한 신뢰의 감정이 이번 고위급회담을 비롯한 앞으로의 대화과정을 통하여 더욱 공고화되리라는 기대와 확신을 표명하시였다.

 

그러나 미국 측은 싱가포르수뇌상봉과 회담의 정신에 배치되게 CVID신고요검증이요 하면서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을 들고나왔다.

 

정세악화와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기본문제인 조선반도평화체제구축문제에 대하여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이미 합의된 종전선언문제까지 이러저러한 조건과 구실을 대면서 멀리 뒤로 미루어놓으려는 립장을 취하였다.

 

종전선언을 하루빨리 발표할데 대한 문제로 말하면 조선반도에서 긴장을 완화하고 공고한 평화보장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첫 공정인 동시에 조미사이의 신뢰조성을 위한 선차적인 요소이며 근 70년간 지속되여온 조선반도의 전쟁상태를 종결짓는 력사적과제로서 북남사이의 판문점선언에도 명시된 문제이고 조미수뇌회담에서도 트럼프대통령이 더 열의를 보이였던 문제이다.

 

미국 측이 회담에서 끝까지 고집한 문제들은 과거 이전 행정부들이 고집하다가 대화과정을 다 말아먹고 불신과 전쟁위험만을 증폭시킨 암적 존재이다.

 

미국 측은 이번 회담에서 합동군사연습을 한두개 일시적으로 취소한 것을 큰 양보처럼 광고했지만 총 한자루 페기하지 않고 모든 병력을 종전의 자기 위치에 그대로 두고 있는 상태에서 연습이라는 한개 동작만을 일시적으로 중지한 것은 언제이건 임의의 순간에 다시 재개될수 있는 극히 가역적인 조치로서 우리가 취한 핵시험장의 불가역적인 폭파페기조치에 비하면 대비조차 할수 없는 문제이다.

 

회담결과는 극히 우려스러운 것 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측이 조미수뇌상봉과 회담의 정신에 부합되게 건설적인 방안을 가지고 오리라고 생각했던 우리의 기대와 희망은 어리석다고 말할 정도로 순진한 것이였다.

 

낡은 방식으로는 절대로 새것을 창조할 수 없으며 백전백패한 케케묵은 낡은 방식을 답습하면 또 실패밖에 차례질 것이 없다.

 

조미관계력사상 처음으로 되는 싱가포르수뇌회담에서 짧은 시간에 귀중한 합의가 이룩된 것도 바로 트럼프대통령자신이 조미관계와 조선반도비핵화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나가자고 하였기 때문이다.

 

쌍방이 수뇌급에서 합의한 새로운 방식을 실무적인 전문가급에서 줴버리고 낡은 방식에로 되돌아간다면 두 나라 인민의 리익과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한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가려는 수뇌분들의 결단과 의지에 의하여 마련되였던 세기적인 싱가포르수뇌상봉은 무의미해지게 될 것이다.

 

이번 첫 조미고위급회담을 통하여 조미사이의 신뢰는 더 공고화되기는커녕 오히려 확고부동했던 우리의 비핵화의지가 흔들릴 수 있는 위험한 국면에 직면하게 되였다.

 

우리는 지난 몇 달 동안 할 수 있는 선의의 조치들을 먼저 취하면서 최대의 인내심을 가지고 미국을 주시하여왔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의 선의와 인내심을 잘못 리해한 것 같다.

 

미국은 저들의 강도적심리가 반영된 요구조건들까지도 우리가 인내심으로부터 받아들이리라고 여길 정도로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

 

조미사이의 뿌리깊은 불신을 해소하고 신뢰를 조성하며 이를 위해 실패만을 기록한 과거의 방식에서 대담하게 벗어나 기성에 구애되지 않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나가는 것신뢰조성을 앞세우면서 단계적으로 동시행동원칙에서 풀 수 있는 문제부터 하나씩 풀어나가는 것이 조선반도비핵화실현의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그러나 미국 측이 조바심에 사로잡혀 이전 행정부들이 들고 나왔던 낡은 방식을 우리에게 강요하려 한다면 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의지와는 별개로 비핵화실현에 부합되는 객관적환경이 조성되지 못한다면 오히려 좋게 시작된 쌍무관계발전의 기류가 혼탕될 수 있다.

 

역풍이 불기 시작하면 조미량국에는 물론 세계평화와 안전을 바라는 국제사회에도 커다란 실망을 안겨줄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서로가 필경 다른 선택을 모색하게 되고 그것이 비극적인 결과에로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담보는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트럼프대통령에 대한 신뢰심을 아직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미국은 수뇌분들의 의지와는 달리 역풍을 허용하는 것이 과연 세계인민들의 지향과 기대에 부합되고 자국의 리익에도 부합되는 것인가를 심중히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주체107(2018)년 7월 7

평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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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 의원 “기무사 문건, 필요하다면 박근혜 수사해야”

“기무사 단독 작성? 직무체계상 믿기 어렵다… 기무사·육군본부·수방사·특전사·靑경호실까지 전방위 압수수색해야”

김예리 기자 ykim@mediatoday.co.kr  2018년 07월 07일 토요일
 

김종대 정의당 의원이 이른바 ‘기무사 촛불 진압 계엄령 문건’과 관련, 청와대 경호실이 관여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제기했다.

김종대 의원은 7일 오전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청와대와의 교감 속에서 이 문건을 작성했을 가능성을 주목해야 한다”며 청와대 경호실을 압수수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건에 등장한 국군기무사령부·육군본부·수도방위사령부·특수전사령부를 전방위 압수수색해야 하나, 여기서 그쳐선 안 된다는 것이다. 

김 의원은 “법적으로도 경호실이 기무사를 비롯한 대전복 임무수행 부대들인 수방사·특전사 등을 통제하게 돼 있다”며 “기무사가 단독으로 문건을 작성했다? 믿기 어렵다”고 말했다.  

문건은 국군기무사령부가 박근혜 탄핵 기각 이후 위수령을 발령하고 계엄 선포 및 유혈 진압한다는 계획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기무사는 서울 시내 탱크 200대, 장갑차 550대, 무장병력 4800명과 특전사 1400명을 투입해 시위 군중을 진압할 계획을 세웠다. ‘폭행을 받아 부득이한 때’를 조건으로 군중을 향해 발포까지 허용했다. 문건은 계엄사령부를 어디에 설치할지, 정부 부처에 군인을 몇 명 파견할지, 언론 검열 업무에 몇 명을 배치할지 등 자세한 사항을 구체화했다.  

 

▲ 더불어민주당 이철희 의원과 군인권센터 등이 공개한 기무사 ‘전시 계엄 및 합수 업무 수행방안’ 문서 실행계획
▲ 더불어민주당 이철희 의원과 군인권센터 등이 공개한 기무사 ‘전시 계엄 및 합수 업무 수행방안’ 문서 실행계획
 

기무사는 문건에서 계엄사령부의 직제도 편성했다. 문건은 계엄사령관으로 장준규 전 육군참모총장을 내정했다. 김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단순히 법적 검토가 아니라 구체적 실행계획이라는 점에서 그렇다”고 밝혔다.

문제는 기무사는 본래 계엄령 선포와 아무 관련이 없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합동참모본부 직제’ 제2조 12호에 따르면 계엄령의 주무부서는 합동참모본부다. 전날(6일) 문건을 공개한 군인권센터는 성명에서 “지휘계통 상 독립전투여단급 이상의 부대이동은 합참의장의 권한이며(국군조직법 9조), 국방부 장관의 승인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군인권센터는 “계엄령에 대한 검토와 준비가 정상적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군 내 비선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풀이했다. 

김 의원은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청와대 경호실까지 그게(개입) 됐는지 안 됐는지 조사해 봐야 한다”며 “개입이 안 됐다면 더 큰 문제다. 군이 임의로 했단 얘기이기 때문에 더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개입했을 가능성을 놓고는 “법에 나오는 직무 체계로 봤을 때 청와대와 경호실 수사가 필수적이다. 수사를 진행한 뒤 (대통령 선까지 수사를 넓히는 것이) 필요하다면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국회 청문회도 준비해야 한다”며 “여당이 의지만 있으면 된다”고도 촉구했다. 

군인권센터는 6일 성명에서 “내란음모에 가담한 책임자들을 낱낱이 밝혀 고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된 인사는 문건을 보고 받은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과 한민구 전 국방부장관, 문건을 보고한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 계엄사령관으로 내정된 장준규 전 육군참모총장, 병력 동원에 관여한 것으로 추정되는 구홍모 전 수도방위사령관, 조종설 전 특전사령관 등이다. 군인권센터는 “특히 문건 생산에 관여한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과 작성자 소강원 기무사 참모장은 즉시 긴급체포하여 구속 수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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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43507#csidx0fc27b114b9f04b9e382f12323774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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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정부’임을 하나둘 포기해가는 문재인 정부

[사설] ‘촛불정부’임을 하나둘 포기해가는 문재인 정부
  • 현장언론 민플러스
  • 승인 2018.07.07 15:04
  • 댓글 0

문재인 정부가 촛불정부임을 포기해 나가려는 것 같다. 최근 보여준 일련의 반개혁적 조치와 주요 인사들의 퇴행적 발언들은 이런 우려를 낳기에 충분하다. 촛불혁명의 민심은 한국사회를 ‘헬조선’으로 만든 가진 자 위주의 사회경제정책을 혁신적으로 바꿔 국민중심, 서민중심의 사회경제정책을 시행하라는 것이었다. 문 대통령도 이에 부응해 소득주도성장이란 장밋빛 전망을 제시하고 이에 걸림돌인 재벌적폐와 관료적폐를 반드시 청산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소득주도성장은 구호만 요란할 뿐 실제 국민소득 신장으로 이어졌다는 보고는 없고, 오히려 소득하위계층의 소득이 더 줄었다는 보도만 나오고 있다. 여기에 적폐 중의 적폐 재벌적폐와 관료적폐에 대해서는 거의 손도 못 대고 있다. 재벌개혁 전도사라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오히려 ‘진보진영의 조급증, 경직성 탓에 개혁 실패를 우려’한다고 자신들의 무능과 부족을 진보진영 탓으로 돌리고, 집권 여당 홍영표 원내대표는 “노동계 편만 들지 않겠다”고 노골적으로 재계에 러브콜을 보냈다. 단언컨대 재벌과 관료를 개혁하지 않고서는 결코 국민주권의 소득주도성장은 이뤄지지 않는다.

6일 발표된 정부의 종합부동산세 개편방안도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생색내기 이상이 아니다. 지난 참여정부 때보다도 못한 방안이다. 다주택자의 세 부담을 늘려 부동산 투기를 막는다지만 실제 시가 17억 원 아파트를 보유한 3주택 이상자의 종부세 추가분은 고작 9만 원에 불과하다. 시가 26억 원 아파트를 보유한 1주택자는 증세부담이 거의 없다. 여기에 상가, 빌딩 등 업무용 부동산은 아예 종부세 대상에서 제외됐다. 모두 미흡하다고 비판받았던 재정개혁특별위원회 제안보다도 못한 수준이다, 아울러 예상대로 금융종합소득세제 확대 권고안은 아예 제외됐다. 이 나라 재벌위주 경제정책의 산실인 기획재정부 관료들의 논리에 청와대가 동의한 것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등 수구언론과 자유한국당 등은 ‘편 가르기 증세’라고 반발하면서 국회에서 저지할 태세다. 이들은 겉으로는 무슨 큰 변화나 있는 것처럼 소동이지만 속으로는 ‘역시 민주당도 별 거 아니다’고 웃을 것이다. 이런 정도의 수준으로 소득불평등을 해소하고 부동산 투기공화국이란 오명을 벗기를 기대한다면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잡으려 하는 게 빠를 것이다.

무릇 정부의 개혁정책이 힘을 가지고 시행되려면 집권 초기 국민적 지지가 높을 때 이뤄져야 한다. 지난날 노무현 대통령은 재벌개혁을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얼마 안가 삼성보고서를 받더니 급기야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고 사실상 항복선언을 하였다. 이른바 ‘대연정’의 사회경제적 배경이다. 당시를 직접 경험했던 문재인 대통령이 이를 모를 리 없다. 노무현 정부야 수구적 기득권층의 흔들기에 초반부터 어려운 처지에 몰려 우왕좌왕했다 치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한반도 평화와 남북화해로 문재인 정부에 대한 압도적 지지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또 그 어느 때보다 국민의 개혁의지가 충만한 조건인데도 겨우 이정도 개혁안밖에 내놓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세간에는 정부와 민주당이 말과는 달리 진정으로 개혁할 의지가 없다는 의구심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우려할 일이다.

문재인 정부가 높은 지지율에 취해 자신들의 시대적 임무를 망각하고 여전히 기득권세력의 눈치를 보면서 현실과 타협하려는 조짐은 이뿐만이 아니다.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 개악 ▲전교적 법외노조 직권 철회 거부 ▲밥상용 쌀 수입 강행 ▲대한항공 및 조양호 일가 범죄행위에 대한 행정처분 부재 ▲삼성증권, 삼성바이오로직스 비리 솜방망이 대처 ▲재계 요구에 의거한 과감한 규제개혁 약속 등 경제사회부문은 지난 박근혜 정부와 비교해도 과연 무엇이 촛불민심의 요구에 맞게 확 바뀌었는지 거의 알 수 없는 지경이다.

특히 개혁론자라는 김상조 공정위원장의 한겨레 인터뷰는 현 정부가 규제개혁이란 미명 아래 또 다시 기득권의 대명사 재벌에게 얼마나 다가가려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4차 산업혁명을 내세워 혁신성장을 운운하고, 규제개혁을 앞세워 핀테크(인터넷은행) 관련 은산(은행자본과 산업자본)분리 완화를 주장했다. 삼성, 현대 같은 재벌이 이제 본격적으로 은행업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려는 것이다. 이명박, 박근혜도 못했던 일이다. 경제민주화는커녕 경제독점의 길을 열어주겠다는 의향을 명색이 공정위원장이 공공연히 밝힌 것이다. 그가 시민사회를 비판하면서 제시한 ‘합리적 진보’는 법과 제도의 개정보다 “현실조건 속에서 실현 가능한” 방안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 방안으로 기존 법의 엄정한 집행과 재벌의 자율적 개혁 유도를 제시했다. 이것은 한마디로 재벌개혁 의지가 없음을 실토한 것이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속담처럼 재벌이 스스로 개혁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돼지가 하늘을 날기’ 바라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가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이 주도한 연구소 ‘여시제’의 일원이었음을 알고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 문재인 정부가 적폐 중의 적폐 재벌을 개혁할 의지나 방안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아직 시간은 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대통령 공약으로 내세운 재벌 적폐청산은 물론 최저임금 1만 원과 밥상용 쌀 수입 중단, 은산분리 원칙 등을 이제 하나하나 포기하고 있다. 문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만나는 것 자체가 그에게 사실상 면죄부를 주는 것이요, 재벌개혁 의지를 의심케 하는 것이다. 국민은 한진재벌의 갑질과 범죄혐의에 모든 구속영장을 기각하고, 어떤 행정조치도 취하지 않는 사법부와 정부에 “이게 나라냐”며 깊은 실망과 분노를 표하고 있다. 높은 지지율에 자만해 촛불민심을 거스르는 행보를 계속해 나간다면 머지않아 날개 없는 추락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될 것이다. 부디 초심으로 돌아가기 바란다.

현장언론 민플러스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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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생 김희숙, 26년생 김종필

겨우 연명한 독립운동가 가족, 죽어서도 추켜세워진 쿠데타 주역

18.07.07 12:49l최종 업데이트 18.07.07 13:11l

 

 고인이 된 김희숙 여사(왼쪽)와 김종필 전 총리(오른쪽). 둘의 삶은 한국사회의 모순을 여실히 보여준다.
▲  고인이 된 김희숙 여사(왼쪽)와 김종필 전 총리(오른쪽). 둘의 삶은 한국사회의 모순을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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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그는 둘 다 1926년에 태어났다. 그녀는 올해 7월 2일 세상을 떠났고, 그는 6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둘은 문자 그대로 똑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삶의 모습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랐다. 여기서 그녀는 장준하 선생의 반려자 김희숙 여사, 그는 김종필 전 총리다. 

두 인물이 걸어온 너무나 달랐던 삶의 모습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과 모순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렇기에 그들 삶의 궤적을 비교해 되새겨 보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1930·1940년대] 장준하와 혼인 - 탈영했다가 재입대
 

(왼쪽) 26세 때의 장준하 모습. (오른쪽)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중국 산동성 유현의 어느 사진관에 노능서와 김준엽, 장준하가 차례로 섰다(왼쪽부터). 이들 셋은 학도병으로 참가한 후 일본군 병영을 탈출, 중경 임시정부까지의 긴 여정에 올랐다. (왼쪽) 26세 때의 장준하 모습. (오른쪽)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중국 산동성 유현의 어느 사진관에 노능서와 김준엽, 장준하가 차례로 섰다(왼쪽부터). 이들 셋은 학도병으로 참가한 후 일본군 병영을 탈출, 중경 임시정부까지의 긴 여정에 올랐다.
▲  (왼쪽) 26세 때의 장준하 모습. (오른쪽)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중국 산동성 유현의 어느 사진관에 노능서와 김준엽, 장준하가 차례로 섰다(왼쪽부터). 이들 셋은 학도병으로 참가한 후 일본군 병영을 탈출, 중경 임시정부까지의 긴 여정에 올랐다.
ⓒ 장준하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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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숙은 12세 때인 1938년, 자신의 선생을 처음 만났다. 그녀는 평북 정주가 고향이고 선생은 평북 의주 출신이었다. 그녀 외삼촌이 정주에 신안소학교를 설립했는데 선생이 교사로 부임했다. 그녀는 학생이었고 선생은 그녀 부모집에서 하숙했다. 1943년 11월 그녀는 소학교 시절 자신의 교사이자, 같은 마을에 살던 8년 연상 선생 장준하와 결혼했다. 당시 일본이 여성들을 위안부로 마구 잡아가자 집안 어른들이 서둘러 둘을 결혼시켰던 것이다.

결혼 후 일주일 만에 중국으로 끌려간 남편은 1944년 7월 일본군을 탈출해 2400km를 걸어 충칭에 있는 광복군에 합류했다. 남편은 국내 침투작전을 위해 미 정보기관의 특수군사훈련을 받다가 해방을 맞았고,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한 뒤 김구 선생의 수행비서로 일했다. 그녀는 해방 후 서울에 도착한 남편의 편지를 받고 의주에서 서울로 와 1년 반 만에 재회했다. 

1946년 4월 남편은 김규식이 만든 한국청년회에 가입, 그해 12월에는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에 가입했다. 1949년 남편은 출판사를 설립, 출판활동을 하던 중 1949년 2월 한국신학대학에 편입하고, 같은 해 6월 졸업했다. 이후 <동아일보> 등에 사설과 칼럼을 발표하다 1950년 3월 남편은 서기관(4급)에 임용돼, 문교부 국민정신계몽 담당관으로 일했다. 
 

큰사진보기 20대 중후반 때인 한국전쟁 당시의 김종필.
▲  20대 중후반 때인 한국전쟁 당시의 김종필.
ⓒ 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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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에서 출생한 김종필은 1944년 3월 공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 주오대학교에 입학했지만, 그는 학내 문제와 부친 권유로 곧 자퇴하고 귀국, 대전사범학교에 입학, 1945년 초 졸업했다. 그후 그는 보령군 소학교 교사로 발령받았으나 2개월 후 교직생활을 마무리했다. 

해방 후 그는 부친이 사준 집을 팔아 자동차 회사를 운영해 재력을 쌓았다. 그리고 1946년 경성사범학교(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1948년 사범대학 3학년이었던 그는 부친이 작고한 후 집안이 어려워지자 입대해 충남 온양의 육군 13연대에 배속된다. 그러나 1주일 만에 구타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탈영했다. 

그리고 친구 집을 전전하던 중 육사 교도대와 만나게 돼 자수하고 재입대했다. 그후 육사 8기로 입학, 1949년 5월 소위로 임관했고 육군정보국에 배치됐다. 그 뒤 참모직을 역임하고 1949년 12월 육군본부 정보국에 중위, 1950년 한국전쟁 중 대위로 진급했다. 

[1950·1960년대] 궁핍한 독립운동가 가족 - 초대 중앙정보부장
 

큰사진보기 1966년 장준하 선생이 박정희를 향해 '밀수왕초'라고 하며 '국가원수모독죄' 로 구속 될 당시 서대문 전세집 문앞에서 어린 장호준과 작별인사를 하는 장준하 선생
▲  1966년 장준하 선생이 박정희를 향해 '밀수왕초'라고 하며 '국가원수모독죄' 로 구속 될 당시 서대문 전세집 문앞에서 어린 장호준과 작별인사를 하는 장준하 선생
ⓒ 장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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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숙의 남편 장준하는 한국전쟁 중인 1952년 부산에서 월간지 <사상계>를 창간했다. 이승만 정권을 비판한 <사상계>는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원고 청탁·교정·제작·배본을 도맡았던 남편은 급할 때는 그녀의 손도 빌렸다. 

사무실 임대료와 인쇄할 종이값이 없을 때에는 그녀는 자신의 외투를 팔아서 운영비를 댔다. 그후 사무실도 없어 그녀는 부산 영도다리 밑 '리더스 다이제스트' 사무실의 망가진 책상을 빌려 쓰고 다방이나 공원에 앉아서도 원고 교정을 봤다. 그렇게 나온 잡지를 리어카에 실었다. 남편은 끌고 그녀는 밀면서 부산 책방에 도매로 넘겼다. 1958년 <사상계>에 실린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이 필화사건에 휘말렸고 남편은 감옥에 구금됐다. 

김종필은 1951년 2월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의 장녀와 결혼한 뒤 한국전쟁 중 미 육군 보병학교로 연수를 갔다. 1952년 8월부터 1953년 5월까지 수색중대장으로 참전한 것을 제외하면 그는 계속 정보장교로 복무했다. 1960년 그는 하극상 사건으로 육군 중령에서 예편됐고, 그 후 <사상계>를 방문했지만 사장인 장준하가 부재중이어서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1960년대 김희숙의 남편 장준하는 <사상계>를 통해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특별히 한일수교협상, 베트남 국군 파병을 통렬히 비판했다. 1965년 '조국 수호 협의회'에 참여해, 남편은 거리에서 한일 조약 반대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5·16 쿠데타 직후 <사상계> 사무실에 박정희가 군인을 보냈다. 박정희가 수하를 통해 수표를 전달하고자 함이었다. 남편은 그 수표를 눈앞에서 찢어버리고는 군인의 뺨을 후려쳤다. 박정희가 일본군 장교 출신인 것을 남편은 경멸했다. 박정희는 김대중·김영삼을 정적으로 생각했지만 남편은 정통성과 사상까지 박정희의 가장 아픈 치부를 꿰뚫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그런지 나중에 박정희는 남편의 뿌리(자손)까지 없애버리고 싶어했다.

그녀는 <사상계>가 날개 돋친 듯 팔리던 시절에도, 1967년 남편이 국회의원이 됐던 시절에도 궁핍하게 생활했다. 1962년 8월, 남편이 필리핀정부로부터 막사이사이상 언론 문학상을 받고 서울 신촌에 집을 지어 석 달간 살아본 게 그녀에게 '내 집'의 전부였다. 박정희 정권이 <사상계>에 세금을 퍼부으면서 빚을 지고 그 집에서 쫓겨난 뒤로 3남 2녀를 둔 그녀와 남편은 월셋방을 전전했다. 남편에게 생활비를 받아본 적이 거의 없어서 그녀는 봉투붙이는 일과 삯바느질 등으로 연명했다. 

한번은 그녀가 가계부라는 것을 써보고 싶다고 하니, 얼마 후 남편이 생활비라며 봉투를 줬다. 너무 좋아서 그녀가 가계부를 만들었는데 이튿날 남편이 돈을 꿔달라는 거였다. 남편은 그 돈을 친구 아들의 등록금으로 줬다. 결혼식 주례를 서고 받은 양복지도 어느 날 찾아보면 사라지고 없었다. 남편이 그녀 모르게 형무소에서 나온 제자나 어려운 이웃에게 준 것이다. 그녀가 바느질집에 가서 일하고 외상도 하면서 겨우 살림을 꾸려가고 있는 터라 서운해 하면, 남편은 '내가 밥은 굶기지 않을게, 미안해요'라고 했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국가원수 모독죄 등 혐의를 씌워 1966년과 1967년 남편을 구속시켰다. 그러나 남편은 굴하지 않고 1967년 6월 7대 총선에 신민당 후보로 서울 동대문구에서 출마해 압도적 지지로 옥중 당선됐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결국 부정부패를 폭로한 김지하의 시 '오적'을 실은 것을 빌미로 1970년 <사상계>를 폐간시켰다. 
 

 중앙정보부장 시절.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의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찍은 사진.
▲  중앙정보부장 시절.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의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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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박정희를 도와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김종필은 1961년 5월 20일부터 1963년 1월까지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특별히 1961년 7월에는 <사상계>의 필진 함석헌이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기고하자 <사상계> 사장인 그녀 남편을 불러 취조했다. 남편을 취조하면서 그는 함석헌의 5·16을 비판한 글을 문제 삼았다. 

김종필 : "정신분열자 같은 영감쟁이의 이 따위 글을 도대체 무슨 저의로 여기에 실었소? 성스러운 혁명 과업 수행에서 당신은 우리 군사혁명을 모독하자는 거요? 이걸 싣게 된 경위와 목적을 말하시오."
장준하 : "이 글은 내가 직접 함 선생께 부탁해서 내손으로 받아다 내가 읽어 보고 실은 것이오..."

중앙정보부장 시절 모든 민간 정치인들을 정치규제로 묶어놓은 상태에서 비밀리에 민주공화당을 사전에 조직하면서 정치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는 4대 의혹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면서 그는 중앙정보부장을 물러나고 외유의 길에 올랐다. 

그러다가 그는 군사정권의 민정 이양이 결정되자 귀국해서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이 시절 공화당내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박정희의 후계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 친위세력의 견제로 장기간 외유를 떠나기도 했다. 그는 1964년 일본 오히라 외상과의 막후교섭으로 한일협정 성립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일제강점기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전달해야 할 자금을 임의로 전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국민들이 일본에게 직접 배상을 받을 권리를 박탈하고 일본에서 이미 다 배상했다며 큰소리칠 수 있게 만든 구실을 김종필이 제공했다는 역사적 책임에서 그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70년대 이후 김희숙] 남편, 의문의 죽음 그리고 가혹한 괴롭힘
 

 생전의 장준하 선생
▲  생전의 장준하 선생
ⓒ 장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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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그녀의 남편 장준하는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 최고위원에 뽑혔다. 1973년 12월 24일 남편은 전격적으로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족시켜 '헌법개정 백만인 서명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해서 1974년 4월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혐의로 구속됐으며, "헌법개정을 빙자하여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의 불안을 조성"했다는 죄목으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해 12월 심장협심증과 간경화 증세 악화로 인한 형집행정지로 출감했다. 출감 후 감회를 남편은 이렇게 밝혔다. 

"죽어서야 나올 줄 알았는데 학생들을 놔두고 혼자 나오니 가슴이 아프다."  

출감 직후 김옥길 등이 방문했고, 입원 후에는 함석헌의 방문을 받았다.

퇴원 후 재야세력 결집에 힘쓰던 중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남편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경찰은 실족사로 처리했고, 박정희 정권의 탄압에 언론도 입을 다물었다. 남편을 잃은 후 그녀 김희숙은 매일 기도했다.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신께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련은 길고 모질었다. 남편의 의문사 이후 중앙정보부를 통해 내내 가족을 철저히 감시하고 일체 어떠한 생계 수단도 가질 수 없도록 괴롭혔다. 정부의 감시를 받으며 삯바느질과 성당에서 주검을 씻기고 수의를 챙겨 입히는 입관 봉사를 하면 주위에서 이것저것 챙겨줬다. 그렇게 그녀는 3남 2녀를 남편 없이 키우며 어렵게 생계를 유지했다. 

아버지 죽음의 의혹을 밝히겠다고 동분서주하던 장남은 괴한들에게 테러를 당해 턱뼈가 조각나 석 달간 병원 신세를 졌다. 집 주변에는 박정희의 기관원들이 깔려 있었다. 8년간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 집주인이 '제발 나가달라'고 했을 정도였다. 아이들이 해코지 당할까봐 늘 조마조마하면서 산 탓에 그녀는 심장병까지 생겼다. 

그녀 자녀들은 취직도 원천봉쇄됐다. 자녀들이 지인들을 찾아가서 취직을 부탁한 다음날이면 정보기관에서 그 회사에 압력을 가했다. 아는 사람이 보다 못해 자신의 서점에서 장남을 일하도록 해줬지만 장남은 석 달 만에 스스로 나왔다. 기관원들이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며 주인에게 '세금은 잘 내느냐'는 식으로 괴롭히는데 도저히 미안해서 더 이상 일할 수 가 없었다.  

수입이 없으니 연탄 살 돈이 없어 그녀와 자녀들은 겨울에는 냉방에서 떨었다. 끼니 해결조차 어려운 날이 많았다. 힘들었던 시절, 그래도 몰래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야밤에 누군가 몰래 담장 너머로 던져놓고 간 쌀이나 고기 한 덩어리가 있기도 했다. 심지어 그녀와 아이들을 감시하던 형사가 보기 딱했던지 김치 한 포기를 놓고 간 적도 있었다. 

그녀에게 쌀 한 가마니를 보내준 김옥길 당시 이화여대 총장은 이튿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중정요원들은 김 총장에게 '그 집에 쌀을 준 것은 곧 유신에 반대하는 것'이라는 기괴한 논리를 폈다. 
 

큰사진보기 17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통일동산에서 열린 '장준하 공원 제막식 및 제37주기 추도식'에서 장남 장호권씨가 부친의 '정치적 암살' 의혹에 대해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17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통일동산에서 열린 '장준하 공원 제막식 및 제37주기 추도식'에서 장남 장호권씨가 부친의 '정치적 암살' 의혹에 대해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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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의 치밀한 탄압에 셋집을 구하기가 어려워 나중에 그녀와 아이들은 흉가를 찾아 세 들어 살기도 했다. 사람들이 기피하니 월세도 싸고 주인 타박도 적었다. 자주 쫓겨나는 바람에 남편의 의문사 후 그녀와 아이들은 이사만 서른 번 넘게 다녔다. 나중엔 그도 여의치 않아 며느리는 친정집으로 돌아갔고, 그녀와 3남 2녀 자녀들은 여관의 방 한 칸에서 6개월간 살았다. 돈이 없어 라면만 먹었다. 그러다가 살기 위해 그녀는 사랑하는 자녀들과도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중정요원들에게 테러를 당한 장남은 1979년 홀로 말레이시아로 도주했다. 한국에 있으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고 아버지의 죽음도 언젠가 파헤칠 생각이었다. 막노동을 하며 버티다 1982년 정권이 바뀌어 '이젠 괜찮겠지' 하고 귀국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그를 체포한 전두환 정권의 안기부는 재야인사와 운동권 학생들의 은신처를 대라고 장남에게 추궁했다. 그래서 장남은 감시가 느슨해진 틈에 다시 싱가포르로 도주했다. 그렇게 24년을 해외에서 떠돈 뒤, 장남은 2003년이 돼서야 모국땅을 다시 밟았다. 

차남은 <조선일보> 기자를 하다가 쫓겨난 후 여러 직장을 전전했고, 삼녀는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30년 가까이 불법체류자로 살아왔다. 사녀는 결혼 후 제주도에서 살았다. 고교를 중퇴하고 방황하던 막내는 뒤늦게 신학대학을 나와 미국에서 스쿨버스 운전사 일을 하며 목회를 하고 있다. 남편을 앗아간 박정희 정권의 핍박은 끈질기게 잔인했다. 

[1970년대 이후 김종필] 최장수 총리, 정계은퇴, DJP연합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8시 15분 별세했다. 향년 92세. 사진은 1989년 당시 민주당 김영삼 총재(오른쪽), 평민당 김대중 총재(가운데), 공화당 김종필 총재가 여권의 중간평가 조기강행 대책을 논의하기에 앞서 악수하는 모습.
▲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8시 15분 별세했다. 향년 92세. 사진은 1989년 당시 민주당 김영삼 총재(오른쪽), 평민당 김대중 총재(가운데), 공화당 김종필 총재가 여권의 중간평가 조기강행 대책을 논의하기에 앞서 악수하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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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은 1971년 공화당 부총재직을 맡고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같은 해 6월 국무총리에 취임함으로써 정계에 복귀 후 5년 6개월간 최장수 총리를 지냈다. 1979년 10.26으로 박정희가 사망하자 그는 여당인 민주공화당 총재에 선출됐다. 그러나 12.12 군사반란과 5.17 내란으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다. 당시 부정축재자로 발표되며 강제로 일부 재산을 헌납하고 정계은퇴 선언을 한 뒤 미국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 이후 그는 정치에 복귀해 민주공화당의 계승을 표방한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에 이어 4위에 올랐다.

1989년 그는 노태우, 김영삼과 의원내각제 개헌을 합의하고 3당 합당에 참여했다. 1998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2년 후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김대중과 연합했고, 결국 김대중은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그는 국무총리가 됐다. 그는 골프광이기도 했는데, 1999년 외환위기 상황에도 골프를 중지하지 않고 친 실세 총리로 유명세를 떨쳤다.

그러나 집권 후 2년 이내 내각제 개헌을 약속하며 시작했던 그와 김대중의 연합은 1999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각제 개헌 이행 유무와 햇볕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로 2000년 그는 김대중 대통령과 갈라서게 된다.

[2000년대 이후 김희숙] 남편의 타살 정황... 임종 못 지킨 막내
 

큰사진보기 장준하선생 암살의혹규명 국민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5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도리 장준하 공원에서 고인의 사인 규명을 위한 유골 정밀감식을 위해 개묘작업을 해 고인의 두개골을 수습하고 있다. 유골은 이정빈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법의학자들에 의해 정밀감식하게 된다.
▲  장준하선생 암살의혹규명 국민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2012년 12월 5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도리 장준하 공원에서 고인의 사인 규명을 위한 유골 정밀감식을 위해 개묘작업을 해 고인의 두개골을 수습하고 있는 모습.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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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숙은 2001년 서울시와 국가보훈처의 배려로 국가유공자 영구 임대아파트에 입주, 독립유공자 연금을 받아 근근이 생활해왔다. 

2012년 8월 1일 파주 통일동산으로 이장하며 검안한 남편 유골에서 지름 6~7cm의 원형 상흔이 발견됐다. 그동안 추락사한 것으로 알려진 남편 장준하의 유골에서 타살 정황이 공개된 것이다. 그녀는 한 많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제 평생 가장 미안하고 마음 아픈 건 우리 애들이에요. 배 많이 곯게 하고, 하고 싶은 일도 못하게 하고 고생만 시켰으니까요. 남편에게 몹쓸짓 했던 군사정부의 핍박이 아이들에게까지 오랜 기간 계속된 것이지요. 어린 막내가 배고프고 힘들다고 할 때 아버지가 큰 유산을 남겼다고 하면 그 유산 지금 먹으면 안되냐고 했어요. 저는 그 유산은 대대손손 쓰는 거라고 말해줬지요..."(2012년 <경향신문> 인터뷰 중)

그녀는 지난 2014년부터 췌장암, 심장병, 신부전증으로 온몸이 성하지 않았다. 
 

 박근혜 정권 시절 장호준 목사가 국내외 신문에 한 광고
▲  박근혜 정권 시절 장호준 목사가 국내외 신문에 한 광고
ⓒ 장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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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미국에 살고 있는 그녀의 막내아들 장호준은 20대 총선을 앞두고 해외에서 박근혜 정권을 비판하는 언론 광고를 게재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2016년 3월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그녀의 막내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막내는 2015년 말부터 해외언론에 '불의한 정권을 투표로 심판합시다'라는 내용의 광고를 게재했다. 중앙선관위는 막내가 선거를 앞두고 충분히 유추할 수 있도록 특정 정당을 비판했고, 이것이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서 고발했다. 중앙선관위의 요청을 받은 외교부 역시 2021년 4월 13일까지 막내의 여권 효력을 무효로 하는 조처를 했다. 해외에서 선거법을 위반해 여권 무효화된 사례는 2012년 재외선거가 도입된 이후 장호준이 처음인 것이다. 

올해 4월 서울중앙지법 조의연 판사는 막내에게 벌금 200만 원을 선고했다. 막내는 "검사가 벌금 70만 원을 구형했는데 판사가 벌금 200만 원을 내라고 판결한 것"이라며 "정치적인 사건에서 판사가 검사의 구형보다 더 높은 징계를 내리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평했다. 막내는 재판부의 1심 판결에 대해 현재 항소를 제기한 상태다.
 

 장호준
▲  김희숙 여사의 막내아들 장호준 목사.
ⓒ 장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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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는 그녀의 임종을 보기 위해 입국하려면 항소심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막내는 당장 입국하지 못하더라도 항소심은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막내는 지난 6월 2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제는 어머님이 말씀조차 못 하실 만큼 위독하시지만, 저는 제 어머니께서는 당신의 자식이 옳고 그른 것을 가리기 위해, 정의로운 일을 위해, 항소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모습 보시기를 더 원하시리라 믿는다"라면서 "동지 여러분들의 염려와 걱정 진심으로 고맙습니다만 저는 아버지의 삶과 제가 믿는 어머님의 뜻을 따라 항소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막내는 어머니를 뵙고 싶지만, 항소를 포기하는 것은 불의에 대한 타협이고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이를 원하지 않으실 것이란 입장"이라고 밝혔다.

지난 6월 의식을 잃기 전까지 김희숙은 자신의 임종을 보고 싶어하지만 입국하지 못하는 막내를 많이 그리워했다. 지난 6월 27일 그녀와 막내는 마지막으로 국제 전화통화를 했다. 그녀는 통화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막내가 목소리를 크게 높여 수화기 너머로 이런저런 말을 했고 그녀가 조금 반응을 했다. 그후 그녀는 의식을 잃고 지난 7월 2일 고난에 찬 삶을 마쳤다. 

[2000년대 이후 김종필] 줄어든 영향력, 사망 뒤엔 훈장을...

매번 대선 때마다 영향력을 과시하던 그였지만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두고는 김종필은 이미 고령이 됐다. 게다가 2000년 총선 참패 등 세가 크게 위축된 상태였기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2004년에 제17대 총선에서 낙마하고 그는 정계를 은퇴했다. 사상 첫 10선 국회의원을 노리던 그의 꿈도 물거품이 됐다. 그러나 2007년 대선에서 그는 이명박을 지지했고 부족하나마 소원을 이뤘다. 2016년 들어서 대권을 준비 중인 반기문이 외교행낭을 통해 편지를 보냈고, 그는 "내가 비록 힘은 없지만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반기문을) 돕겠다"라고 화답했다. 

그리고 2017년 19대 대선 당시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가 그를 방문했다. 당시 그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를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당시 홍준표와 만난 자리에서 "문재인이 같은 그런 얼굴은 대통령이 될 수가 없는데 세상이 우스워졌다"라면서 "대통령이 앞섰다고 그러는데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말했다.

그는 "난 뭘 봐도 문재인이가 돼서는 안 되겠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라며 "문재인이 얼마 전 한창 으스대고 있을 때 한 소리가 있다, 당선되면 김정은을 만나러 간다고, 이런 놈을 뭘 보고 지지를 하느냐는 말이냐, 김정은이가 지 할아버지라도 되나. 빌어먹을 자식"이라고 했다. 

지난 6월 23일 아침. 그는 신당동 자택에서 호흡곤란으로 순천향병원으로 이송 중 심장이 정지했다. 응급실 도착 후에도 심폐소생술을 지속했으나 사망했다. 그런 그에게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을 둔 정부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역사의 역설, 역설의 역사
 

 박정희 정권 시절 유신 반대투쟁에 앞장서다 숨진 채 발견된 고(故)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 여사가 지난 2일 별세했다. 이날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고인의 영정사진이 놓여 있다.
▲  박정희 정권 시절 유신 반대투쟁에 앞장서다 숨진 채 발견된 고(故)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 여사가 지난 2일 별세했다. 이날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고인의 영정사진이 놓여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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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과 국민훈장 무궁화장 27일 오전 서울 송파 서울아산병원에서 열린 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 영결식에 영정사진과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 김종필과 국민훈장 무궁화장 27일 오전 서울 송파 서울아산병원에서 열린 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 영결식에 영정사진과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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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은 5.16 군사쿠데타의 주동자이자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2인자였다. 항일독립군이자 민주화 운동가의 자손인 김희숙의 막내는 "불의한 정권을 심판하자"라는 광고를 냈다가 박근혜 정권 하에서 여권을 취소당해 어머니의 임종도 못 지켰다. 

그러나 군사독재 쿠데타의 주역인 김종필의 죽음 앞에 놓여진 것은 훈장이었다. 이런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 아! 지금의 대한민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두 인생의 삶과 죽음을 보면서 기쁨보다는 슬픔과 비애가 눈앞을 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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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대한 오해들, 김일성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됐다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8/07/07 16:26
  • 수정일
    2018/07/07 16:26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한홍구 특강 "북한 3대 세습 원동력은 김일성 리더십"
2018.07.07 11:48:57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며 '북한 바로 알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던 북한은 진짜 북한일까. 북한에 대해 우리가 몰랐던, 혹은 오해하고 있던 것은 무언인가.

"북한에 대한 많은 오해들은 김일성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됐다."

역사학자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가 5일 서울 종로구 역사책방에서 '청년 김일성, 청년 김정은'을 주제로 특강을 열고 북한을 이해하기 위해선 김일성과 주체사상에 대한 '바로 알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 교수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레닌 동상이 허무하게 무너졌지만 북한은 3대째 세습하며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며 "북한의 3대 세습을 가능케 했던 것은 '김일성 리더십'"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김일성 리더십'의 예로 김일성이 '민생단' 명단을 불태운 에피소드를 들었다.

 

 

▲5일 진행된 한홍구 교수의 '청년 김일성, 청년 김정은' 특강 모습. ⓒ프레시안(서어리)



민생단은 1930년대 만주 지역에서의 항일무장투쟁 당시 활동하던 친일 단체다. 조선인인 가운데 바로 이 민생당 첩자가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고, 서로에 대한 의심이 팽배해져 갔다. 그때 김일성은 민생단 명단이 든 보따리를 불태우며 혐의자 100여 명을 석방해 혁명세력에 편입시켰다. 

한 교수는 "민생단 혐의자였던 그 사람들은 이후 조국광복회 결성의 주역으로, 보천보 전투의 전사로 거듭나게 됐다"며 "이것이 곧 '주체사상'이다. 이들에게 생명이 두 가지가 있다면 하나는 육체적 생명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 생명인데 그것은 곧 '어버이 수령님'이었던 것"이라고 했다. 

김일성은 민생단 연루자 누명을 쓰고 처형된 이들의 자녀들도 거뒀다. 김일성과 그의 아내 김정숙이 먹이고 키운 많은 아이들은 훗날 김일성의 아들인 김정일이 태어나자 그를 업어 키웠다. 한 교수는 "이게 이북체제의 안전성"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주체사상을 우리민족이 낳은 위대한 개똥철학"이라며 "사주팔자의 감옥을 벗어나 개인과 민족의 차원에서 주체로 거듭나려는 노력"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팽두이숙(烹頭耳熟 : 머리를 삶으면 귀까지 삶아진다)'을 논하며 중국 혁명을 우선할 때에도, 조선 혁명 세력은 주체사상을 기반으로 독자적인 혁명 노선을 걸었다고 했다. 

한 교수는 김일성에 대해 "실용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하며 김일성이 '사람 중심 세계관'을 폈던 배경을 설명했다. 

"수구 사이트에 가 보면 문재인 대통령의 '사람이 먼저다'가 주체사상이라고 하던데(웃음), 왜 사람 중심의 세계관이었을까요. 그땐 돈도 기술도 없고 결국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맨주먹 붉은 피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김일성이 세우려 한 게 '밥의 공산주의'였습니다. 등소평이 '흑묘백묘론'을 이야기했는데, 그로부터 10년 전에 이미 김일성이 '밥 먹을 때 오른손을 쓰든 왼손을 쓰든 무슨 상관인가'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한 교수는 "김일성이 품었던 인민들을 배불리 먹이는 꿈은 김정일, 김정은 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고 생각한다"며 "미국이라는 깡패가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그 꿈을 이루는 방식이 핵무기였던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러나 핵무기 개발 대신 경제 발전에 집중하려는 지금이 북한의 위기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북한 체제는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체제입니다. 위기가 일상인 저런 사회의 진짜 위기는 위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청년 지도자 김정은에게는 엄청난 모험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김일성도 김정일도 하고 싶었던 일입니다."

그는 "역사가 진보하는 때는 아주 짧은 시기"라며 "단군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처음 맞이하는 좋은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고 했다.

 

서어리 기자 naeori@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매일 어리버리, 좌충우돌 성장기를 쓰는 씩씩한 기자입니다. 
간첩 조작 사건의 유우성, 일본군 ‘위안부’ 여성, 외주 업체 PD, 소방 공무원, 세월호 유가족 등 다양한 취재원들과의 만남 속에서 저는 오늘도 좋은 기자,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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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평통 비망록-판문점 선언 김정일시대 자주통일강령

조평통 비망록-판문점 선언 김정일시대 자주통일강령
 
 
 
김영란 기자 
기사입력: 2018/07/07 [10:34]  최종편집: ⓒ 자주시보
 
 

 

▲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5년 8월 11일 조국광복 50주년에 즈음하여 판문점 북측 지역 통일각 앞에 친필비를 세웠다. 김일성 주석은 1994년 7월 7일 밤,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할 조국통일방략이 수록된 문건에 친필을 남겼는데, 그 친필을 비문에 새긴 친필비다. 친필비 뒷면에는 "민족분렬의 비극을 가시고 조국통일성업을 이룩하기 위한 력사적인 문건에 생애의 마지막 친필존함을 남기신 경애하는 김일성 주석의 애국애족의 숭고한 뜻 후손만대에 길이 전해가리"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자주시보

 

노동신문이 조국통일위업 실현에 쌓아올리신 절세위인들의 고귀한 업적은 불멸의 친필과 더불어 영원히 빛날 것이다라는 제목으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비망록을 7일 게재했다.

 

1994년 7월 7김일성 주석은 조국통일과 관련한 문건에 마지막 친필 서명을 하고그 다음날 7월 8일 서거했다.

 

인터넷에 올라온 소식에 의하면 노동신문은 “<김일성 1994.7.7.> 이 아홉 글자의 친필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거룩한 애국애족의 한생과 숭고한 조국통일유훈이 깃들어있다고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김일성 주석이 조국통일과 관련한 문건에 마지막친필을 남기신 24돌에 즈음해 탁월한 사상과 영도로 조국통일위업을 개척하시고 승리에로 이끄시여 조국통일의 튼튼한 토대를 마련하여주신 절세위인들의 불멸의 업적을 천추만대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비망록을 발표한다고 밝혔다

 

비망록은 첫 번째 부분에서 김일성 주석이 조국통일의 위해 한생을 헌신한 생애라고 기록하고 있다.

비망록에서 김일성 주석에 대해 외세에 의하여 국토가 양단되고 민족이 분열된 첫날부터 조국통일을 민족지상의 과업으로 내세우시고 일관하게 하나의 조선노선통일노선을 견지하시며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을 현명하게 영도하여오신 민족의 영원한 태양이시고 통일의 구성이라고 높이 칭송했다.

 

구체적으로 비망록은 김일성 주석의 통일 노선에 대해 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소집과 진행, 1950~1960년대 과도적인 남북연방제를 실시할 것은 제안한 것, 7.4공동성명로 통일운동의 새 국면을 열어놓은 것남측에서 7,4 공동성명을 부정하고 분열 영구화를 꾀할 때도 대민족회의와 남북연방제 실시 등 조국통일 5대 방침을 천명한 것, 1980~1990년대 고려민주연방제통일방안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 새롭게 제시한 것’ 등에 자세히 설명했다.

 

이어 김일성 주석이 혁명생애의 마지막시기에도 전체 조선민족을 하나의 통일역량으로 묶어세우기 위하여 정력적으로 활동하시였으며 민족의 대의를 먼저 생각하시면서 북남최고위급회담을 몸소 발기하시고 그 실현에 온갖 심혈을 다 기울이었다고 주장하며 김일성 주석이 “1994년 7월 7일이날도 새벽 일찌기 집무를 시작하고 전날까지 이틀동안 진행된 경제부문 책임일군협의회를 지도하시느라 피로가 겹쌓인 속에서도 북남최고위급회담과 관련한 문건을 한장한장 세심히 검토하고 활달한 필체로 <김일성 1994.7.7.>이라는 친필을 남겼는데이 친필에는 조국통일 실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친 고귀한 한생이 뜨겁게 어려있다고 비망록은 밝혔다.

 

▲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7년 10월 4일 평양에서 '남북관계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에 서명한 뒤 백화원 영빈관에서 마련된 환송오찬에 참석한 장면.     ©자주시보

 

비망록 두 번째 부분에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조국통일을 위해 쌓은 업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비망록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조국통일위업을 실현하는 것은 우리 당과 인민의 혁명적의무이고 의리이며 우리 세대에 맡겨진 성스러운 민족적 임무이며조국통일유훈을 관철하여야 하며 조국과 민족 앞에 지닌 우리 세대의 책임과 임무를 다하여야 한다고 말한 것을 강조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의 필생의 염원이었던 조국통일 위업을 실현하기 위해 온갖 노고를 바치었다고 비망록은 밝힌 뒤에 판문점에 김일성 주석의 조국통일친필비가 만들어졌음을 비망록에서는 먼저 강조했다.

 

이어 비망록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조국통일3대원칙과 고려민주연방공화국창립방안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을 조국통일 3대헌장으로 정립했으며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조국통일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온 민족이 대단결하여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자를 비롯한 노작들을 통해 김일성 주석의 조국통일 업적을 변함없이 계승하여 나라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뚜렷한 진로를 밝혀주었다고 밝혔다.

 

비망록은 2000년 6월 민족분단 사상 처음으로 북남수뇌상봉을 마련하시고 6.15공동선언을 우리 민족에게 안겨 준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조국통일 위업에 쌓은 특출한 업적이라며 “6.15공동선언은 민족공동의 통일대강으로서 우리 민족끼리를 기본정신으로 하고 있으며 조국통일의 근본이념과 근본입장근본방도로부터 시작하여 북남관계발전에서 나서는 현실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통일을 위한 모든 원칙적 문제들을 전면적으로 밝혀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비망록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겨레의 자주통일투쟁을 더욱 힘있게 추동하기 위하여 2007년 10월 또다시 평양에서 역사적인 북남수뇌상봉을 마련하시고 6.15공동선언의 실천강령인 북남관계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을 통해 조선반도의 평화와 조국통일민족공동의 번영을 이룩하기 위한 원칙적 문제들과 실천적 방도들이 전면적으로 집대성 되여있는 10.4선언이 발표됨으로써 우리 민족끼리의 이념을 민족공동의 기치로 계속 높이 추켜들고 통일문제해결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우리 민족의 요구와 리익에 맞게 자주적으로 풀어나가며 북남관계를 통일지향적으로 발전시켜나갈 수 있는 넓은 길이 더욱 활짝 열려지게 되었다고 높이 칭송했다.

 

▲ 판문점 선언에 서명한 후 남북정상이 합의를 기념하는 사진을 찍었다.     ©공동취재단

 

비망록 세 번째 부분에서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에 의해 조국통일운동은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비망록은 김정은 위원장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통일유훈을 관철하여 조국통일을 이룩하는 것이 확고부동한 신념이고 의지라고 강조했다.

 

먼저 비방록은 김정은 위원장이 2012년 3월 판문점에 대한 현지시찰김일성 주석 탄생 100돌 열병식에서 한 연설을 통해 조국통일위업을 반드시 실현하실 확고한 결심과 의지를 엄숙히 천명했다고 밝혔다.

 

이어 비망록은 김정은 위원장이 위대한 김일성동지는 우리 당과 인민의 영원한 수령이시다김정일애국주의를 구현하여 부강조국건설을 다그치자를 비롯한 노작들을 발표하시여 통일위업실현에서 나서는 과업과 방도들을 환히 밝혀주고 2018년 신년사에서 북남관계대전환방침을 제시했다고 강조했다.

신년사 발표 이후 남북관계에서 판문점 연락통로가 개통군통신이 재개평창올림픽 북측 대표단 파견남북고위급회담과 각 분야의 실무회담들의 진행북측 고위급대표단과 삼지연관현악단,민족올림픽위원회대표단,선수단,응원단,태권도시범단,기자단이 남측지역에 나가 민족적 화해와 단합의 따뜻한 봄기운을 안겨주었으며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북남수뇌상봉과 회담을 마련하시고 판문점선언을 채택하시여 온 민족과 전 세계에 감격과 환희의 격파가 일어번지게 했다고 비망록은 강조했다.

 

이어 비망록은 판문점선언은 온 민족의 통일의지와 열망을 반영한 자주통일선언조선반도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구축을 위한 실천적 방도를 밝힌 평화통일선언민족적화해와 단합을 이룩하기 위한 구체적 대책들을 명시한 민족대단결선언이며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계승한 새로운 력사적시대김정은시대의 자주통일강령이라고 높이 칭송했다.

 

비망록은 계속해 역사적인 판문점상봉과 회담, 4.27선언으로 11년 동안이나 멈춰섰던 통일시계의 초침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였으며 자주통일평화번영의 새 역사가 시작되었고 5월 26일 제4차 북남수뇌상봉과 회담을 전격적으로 단행하시고 판문점선언을 신속히 이행해나가는데서 나서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중대한 합의를 이룩하심으로써 북남관계발전을 보다 높은 단계에로 추동했다고 주장했다.

 

비망록은 참으로 몇 달 전만 하여도 대결과 전쟁의 최극단에로 치닫던 조선반도 정세가 화해와 평화에로 급전환하고 북남관계에서 꿈같은 대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김정은 동지의 비범특출한 영도와 절세의 위인적 풍모가 안아온 자랑찬 결실이라고 다시금 높이 칭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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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삼성의 돈과 권력보다 우리들의 연대가 더 위대하다

 

이상수 반올림 상임활동가
발행 2018-07-02 09:54:29
수정 2018-07-02 09:5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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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일 맞은 삼성 직업병장마가 시작됐다. 농성장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이다. 천막을 닫아두니 바람이 통하지 않아 끈적이고 내내 땀이 흐른다. 조금만 있어도 지친다. 비바람이 세게 몰아치면 위태롭게 흔들리는 천막 때문에 좌불안석이 된다. 겨울과 여름 농성을 모두 겪어 본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겨울보다 여름 농성이 훨씬 더 힘들다고.
삼성 직업병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반올림 농성장이 1000일을 맞았다.
삼성 직업병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반올림 농성장이 1000일을 맞았다.ⓒ민중의소리

절박함으로 시작한 농성

반올림 농성이 세 번의 겨울을 보내고 이제 세 번째 여름을 지나고 있다. 날자로는 천 일이다. 삼성에 대한 분노와 포기할 수 없다는 절박함으로 시작한 농성이지만, 농성 천 일은 추억과 이야기가 가득한 시간이었다. 무릎으로 기어다녀야 했던 낮은 천막은 이제 서 있어도 천장이 머리에 닿지 않게 높아졌고, 두껍게 깐 바닥 스티로폼이 세월을 보내며 많이 꺼져 등에 배기게 됐다. 삼성직업병문제를 취재했던 방송국 PD가 선물해 주신 발전기는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고, 여러 사람 손을 탄 음향장비는 많이 상했다. 공연하러 왔다 낡은 스피커가 마음에 걸렸던 동지가 새 스피커를 가져다주시기도 했다. 잊을만하면 배달되는 한약상자와 철마다 받아보는 과일박스. 한겨울을 버틸 수 있게 해주었던 침낭과 핫팩까지, 반올림 농성장 곳곳에는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담긴 물건들로 가득하다.

농성장은 누군가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곳이다. 천 일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이 곳을 든든하게 지켜준 농성장 지킴이들 덕분이다. 오랜 시간인만큼 지킴이들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반올림의 상임활동가가 된 이가 있고, 누군가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부모가 되었다. 외국에 나가 조금 다른 경험을 하고 있는 이도 있고, 군대에 간 청년도 있고, 새로이 학교에 진학한 사람도 있다. 새 직장을 구한 이도, 하던 일을 그만 둔 이도 있다. 어쩔 수 없이 농성에 계속할 수 없게 된 이들도 생기지만, 새롭게 함께 하는 사람들도 나타난다. 그리고, 변함없이 매 주 1박 2일을 농성장에서 보내는 혜경씨와 김시녀 어머님, 그리고 황상기 아버님. 비가 오는 일요일 마석 모란공원에서 열린 산재사망노동자 추모식에 다녀오신 황상기 아버님이 폭우가 쏟아진 어제 밤 농성장을 지키셨다.

농성장의 가장 대표적인 행사는 ‘이어말하기’였다. 처음에는 매일, 그 뒤에는 일 주일에 한 두 번씩 진행했던 이어말하기에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셨다. 그 많은 이야기들을 ‘이제, 삼성이 답하라’란 제목의 책으로 묶어내기도 했다. 죽은 이들을 위로하는 솟대와 고무신에 담긴 꽃으로 꾸민 예쁘고 슬펐던 농성장, 계절이 바뀔 때마다 대청소를 하고 천막비닐을 함께 갈던 시간들, 100일 200일, 그리고 황유미님의 기일 때마다 행사를 준비하며 함께 힘을 모으던 시간들, 그 모든 시간들이 쌓여 천 일이 되었다.

 
삼성 LCD 뇌종양 피해자 한혜경 씨의 어머니 김시녀 씨와 삼성 백혈병 피해자 고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
삼성 LCD 뇌종양 피해자 한혜경 씨의 어머니 김시녀 씨와 삼성 백혈병 피해자 고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양지웅 기자

아직 직업병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천일 동안, 반도체 직업병 문제에도 진전이 있었다. ‘직업병 인정 투쟁’이라고 불렸을 만큼 직업병 인정 자체가 힘들었던 조건이 변했다. 지금까지 29분 피해자의 10개 질병에 대해 직업병이 인정되었다. 이런 추세를 반영해 전향적인 보상체계를 갖추고 실행하는 기업들도 생겨났다. 무엇보다 거대한 촛불이 있었고, 이를 계기로 사람들의 인식에 큰 변화가 있었다. ‘직업병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삼성의 주장이 아니라, 여전히 ‘직업병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진실이 우리사회의 상식이 되었다. 작년에는 대법원에서 반도체 직업병에 대한 전향적인 판결까지 나와, 제도 개선에 대한 희망적인 논의가 진행되고 있기도 하다. 아무리 삼성이라도 이런 추세 전체를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지난 촛불, 많은 이들의 힘으로 이재용이 구속되어 실형까지 살았다. 국정농단 범죄 때문이었지만, 직업병 방치와 노조 파괴 범죄에 대한 사회적 분노가 그가 감옥에 가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비록 항소심에서 풀려났지만, 오히려 삼성과 이재용의 범죄행위는 더 많이 드러나고 있다. 이재용과 삼성을 제대로 단죄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직업병으로 노조탄압으로 평범한 이들이 또다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오늘은 반올림 농성 천 일이기도 하지만, 30년 전 소년노동자 문송면이 수은 중독으로 고통받다 세상을 떠난 날이기도 하다. 그래서 7월 4일에 있을 반올림 농성 천 일 문화제에는 문송면과 산재사망노동자들을 추모하는 추모식도 함께 진행된다.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 사회 일터의 안전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비용 절감을 위한 북극항로의 방사선 노출로 백혈병에 걸린 대한항공 승무원, 시안화수소 중독으로 일한지 한 달도 안 되어 쓰러지고 결국 목숨을 잃은 스물 셋 청년노동자, 삼성의 부품하청공장에서 메탄올 중독으로 시력을 잃은 청년노동자들,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열차에 치여 목숨을 잃은 19세 김군, 현장 실습중 설비에 끼여 사망한 이민호군, 매년 2500명 가까이 일하다 목숨을 잃는 이 나라의 현실은 우리가 가야할 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준다.

4일 오후 6시 강남역 8번출구 반올림 농성장에서 '삼성 포위의 날' 실천 행동이 진행된다. 수은 중독으로 사망한 소년노동자 문송면과 산재 노동자 추모식도 함께 열린다.
4일 오후 6시 강남역 8번출구 반올림 농성장에서 '삼성 포위의 날' 실천 행동이 진행된다. 수은 중독으로 사망한 소년노동자 문송면과 산재 노동자 추모식도 함께 열린다.ⓒ반올림 제공

그리고, 여전히 삼성직업병 문제가 있다. 지난 11년간 삼성에서만 320명의 피해제보가 있었고, 그 중 118분이 목숨을 잃었다. 이런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삼성을 꼭 바꾸어야 한다. 우리 사회 노동안전을 위해서도 삼성의 범죄를 단죄하고 바꾸기 위해서도 삼성에 맞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여전히 중요한 일이다. 이를 위해 7월 4일 문화제 마지막에는 삼성본관을 포위하는 행동을 계획하고 있다. 예년보다 많은 분들이 오셔야만 가능하다.

김시녀 어머님이 페북에 남기신 말씀처럼 
‘삼성의 돈과 권력보다 가진 것 없는 우리들 연대의 힘이 더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다.’

삼성 직업병 해결을 위한 삼성 포위 행동 참여 선언:goo.gl/Hnb2g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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