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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성노예제 피해 할머니들을 위한 마라톤 “이건 달리기가 아니에요”

‘2018 평화나비:RUN’…“할머니들과 함께해요”

이승훈 기자 lsh@vop.co.kr
발행 2018-03-17 18:13:12
수정 2018-03-17 18: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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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오후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린 '도심형 기부 마라톤 2018 평화나비:RUN'에서 참가자들이 출발선을 지나고 있다. 평화나비가 주최한 이번 마라톤행사는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요구하는 프로젝트이다.
17일 오후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린 '도심형 기부 마라톤 2018 평화나비:RUN'에서 참가자들이 출발선을 지나고 있다. 평화나비가 주최한 이번 마라톤행사는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요구하는 프로젝트이다.ⓒ임화영 기자
 

“2018 평화나비 RUN! 5. 4. 3. 2. 1. 출발! 와~!”

17일 서울광장에서 ‘2018 평화나비:RUN’ 마라톤 행사가 개최됐다. 함성 소리와 함께 연보랏빛 맞춤복을 입은 1700여명의 학생·시민들이 달리기를 시작했다.

마라톤이 시작됐지만, 누구하나 경쟁하며 달리지 않았다. 기록에는 욕심이 없는지 어떤 이들은 옆 사람과 담소를 나누기도 하면서 뛰었다. 기록을 세우기 위한 행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1등을 해도 특별한 혜택은 없었다. 그럼에도 참가자들은 즐거운 표정으로 이 행사를 즐겼다.

평화나비 RUN은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 할머니들의 명예·인권 회복을 위해 달리는 행사다. 그래서 기록보단 ‘함께 한다’는데 의의를 뒀다. 행사를 담당한 평화나비 네트워크 간사 김샘씨는 “빠르게 달리기 보단, 함께 할머니들을 기억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모였다”며 그 취지를 설명했다.

이날 행사의 참가비는 학생 2만5000원, 일반인 3만5000원이다. 평화나비 RUN 관계자는 “참가비와 후원금 등 이날 행사를 통해 모은 수익은 모두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 김복동 평화기금’에 기부된다”고 말했다.

17일 오후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린 '도심형 기부 마라톤 2018 평화나비:RUN'에서 참가자들이 출발선을 지나고 있다. 평화나비가 주최한 이번 마라톤행사는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요구하는 프로젝트이다.
17일 오후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린 '도심형 기부 마라톤 2018 평화나비:RUN'에서 참가자들이 출발선을 지나고 있다. 평화나비가 주최한 이번 마라톤행사는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요구하는 프로젝트이다.ⓒ임화영 기자
17일 오후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린 '도심형 기부 마라톤 2018 평화나비:RUN'에서 참가자들이 참석하고 있다. 평화나비가 주최한 이번 마라톤행사는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요구하는 프로젝트이다.
17일 오후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린 '도심형 기부 마라톤 2018 평화나비:RUN'에서 참가자들이 참석하고 있다. 평화나비가 주최한 이번 마라톤행사는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요구하는 프로젝트이다.ⓒ임화영 기자

“아픈 역사, 함께 나눌 수 있어 너무 좋았어요”

올해로 3번째 열리는 ‘2018 평화나비 RUN’은 사회적 기업 ‘마리몬드’와 서울시 등이 후원하고 ‘평화나비 네트워크’와 ‘프랜트립’이 주관했다. 전국 주요 대학 총학생회와 단과대 학생회 및 학생 단체들도 ‘평화나비:RUN 추진위원회’를 결성해 200여명의 서포터즈들을 모으고 행사 프로그램 아이디어를 짜는 등 행사 준비·진행을 함께했다.

평화나비 RUN 서포터즈 총괄을 맡은 곽지민씨는 “많은 학생·시민들과 함께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 할머니들을 위한 행사를 만들 수 있게 되어 뿌듯함을 느낀다”고 밝혔다. 곽지민씨는 “콘서트 등의 행사는 수동적인 형태를 띠기 쉽다”면서 “성취감도 있고, 기억에 남을 수 있는 형태를 기획하다보니 마라톤을 생각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실제로 많은 분들이 즐겁게 참가해주고 있고, 서포터즈로 참가했던 친구들도 활동을 계속하고 싶어서 평화나비 회원으로 들어오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행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서포터즈로 참여했다는 한태균(24) 연세대 학생은 “준비할 때 솔직히 힘들었다”면서도 “하니까 보람도 많이 느끼고, 무엇보다 마라톤에 참여한 분들의 즐거운 표정에 저도 기분이 좋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17일 오후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린 '도심형 기부 마라톤 2018 평화나비:RUN'에서 참가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평화나비가 주최한 이번 마라톤행사는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요구하는 프로젝트이다.
17일 오후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린 '도심형 기부 마라톤 2018 평화나비:RUN'에서 참가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평화나비가 주최한 이번 마라톤행사는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요구하는 프로젝트이다.ⓒ임화영 기자

마라톤이 시작된 뒤 20여분이 지나자 참가자들이 종착지점인 서울광장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라톤을 완주하고 서울광장 잔디밭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학생들을 만났다. 서울과기대 4학년 학생 이정인씨는 “평소 역사책이나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를 보면서 항상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에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렇게 좋은 기회에 참여할 수 있게 돼 뜻깊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 이씨는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나’라는 질문에 “다 같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이 좋았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아픈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나누는 모습 같아 좋았다”고 덧붙였다.

대학생 시절 봉사활동 단체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왔다는 직장인 류건혁(28)씨도 행사에 대한 만족감을 드러냈다. 류씨는 “사실 ‘위안부’할머니들을 위한 행사로만 알고 왔다가 마라톤이어서 좀 당황했다”면서도 “오랜만에 뛰어서 생각보다 힘들었지만, 뛰고 나니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한편, 평화나비 RUN은 서울광장을 출발해 청계천 일대를 돌고 다시 서울광장으로 돌아오는 코스로 구성됐다. 평화나비 RUN 준비위원회는 아쉽게도 구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까지 코스를 짜진 못했다. 이날 극우단체들의 집회 및 행진코스와 겹치지 않도록 마라톤 코스를 짜야했기 때문이다.

2018 평화나비 RUN은 서울뿐만 아니라, 지역에서도 열릴 예정이다. 평화나비 RUN 관계자는 “3월 중으로 경기도와 제주도, 충청지역에서도 각 지역 평화나비 단체들이 주관하여 열릴 예정”이라고 말했다.

17일 오후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린 '도심형 기부 마라톤 2018 평화나비:RUN'에서 참가자들이 마라톤을 하기 전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 평화나비가 주최한 이번 마라톤행사는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요구하는 프로젝트이다.
17일 오후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린 '도심형 기부 마라톤 2018 평화나비:RUN'에서 참가자들이 마라톤을 하기 전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 평화나비가 주최한 이번 마라톤행사는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요구하는 프로젝트이다.ⓒ임화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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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가난' 아닌 '아름다운 욕망'을 선택하다

[귀농통문] 계획이나 원칙을 세우지 않는 삶, 이정아·송용석 부부
2018.03.17 11:20:11
 
 

 

 

2003년 5월 정아 씨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인생에 가장 큰 지지자였던 엄마가 췌장암 말기라는 선고를 받은 것이다. 의사는 더 이상 손 쓸 수 없으니 그냥 집으로 가라고 말했다. 고작 환갑도 채 되지 않으셨는데…. 엄마의 삶을 그냥 그렇게 보내드릴 수는 없었다. 몇 군데 다른 병원을 더 찾아가 보았는데 같은 상황이었다. 암울하고 막막했지만 맥없이 손 놓고 있을 수 없어서 뭔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찾아 나섰다. 그러다 '암환자 시민연대'라는 단체를 만났다.

그곳은 암에 대해 환자와 가족이 함께 공부하고 어떻게 극복해 나갈지 다양하게 모색하고 있었다. 이 만남이 당장 먹을거리를 비롯하여 환경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새로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암 환자와 가족이 함께 하는 세미나와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건강과 자연을 깊이 생각하였다. 무엇보다 먼저 생활환경부터 바꿔야겠다 싶어서 경기도 안성으로 엄마 집을 옮겼다. 내 생활 기반을 통째로 옮기지 않은 간접귀농(?)을 시도한 셈이다. 엄마는 시골생활에서 한결 여유를 찾았다. 삶에 감사하고 늘 웃음 잃지 않고 행복해하시는 엄마의 한 생애가 새록새록 다가왔다.  

엄마는 시골로 이사해서 5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그동안 모자랐던 내밀하고 솔직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더불어 지나간 내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갈 길에 대해 거듭 자문해 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삶을 찬찬히 음미해 볼 겨를도 없이 바쁘게 내달린 인생이 안쓰러워졌다.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가 이전과 다르게 다가왔다. 이때가 귀농으로 가는 첫 번째 변곡점이자 전환기였다. 
 

▲ 이정아·송용석 부부. ⓒ귀농통문


국토순례와 여성귀농학교라는 전환점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자, 내 삶에서 버팀목이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그 뒤로 오랫동안 우울 증상에 시달렸다. 견디지 못하고 방황하다 지역아동센터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청소년 대상 책 읽기 봉사에 나섰다. 그곳에서 만난 중고생 아이들은 분노가 많았고, 가족이라는 둥지에서 따뜻함과 애정을 받아보지 못한 채 바깥으로 겉돌았다. 다르지만 비슷한 아픔이 공명을 일으켰다. 분노와 좌절을 털어버리고 더 큰 시야에서 인생을 받아들이는 경험을 이 아이들과 함께하고 싶어 국토순례를 계획하였다. 

2009년 매주 금요일 밤 출발해 주말까지 꼬박 1년에 걸쳐 해남 땅끝마을부터 통일전망대까지 국토순례를 마쳤다. 바쁜 일상의 틈을 비집고 나만의 목표를 이룬 데서 오는 자신감 덕분이었을까? 묵은 짐을 털고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곧 회사를 그만두었다. 더 이상 경제적인 이유와 목표가 다인 삶에 매이고 싶지 않았다. 시골로 내려가서 생태적인 삶을 살자고 결단을 내렸다. 

엄마가 떠나가기 전후로 스콧 니어링, 서정홍 농부시인, 권정생 선생님 등의 글을 읽으면서 생태주의 가치에 눈뜨기 시작했다.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자라났다. 이즈음인 2013년에 사회복지 활동에 지치기도 해서 휴식도 취할 겸 3박 4일 동안 여성귀농학교에 참가했다. 여기서 당도은의 책 <없는 것이 많아서 자유로운>(행성B 펴냄)을 읽고 진짜 귀농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생산 활동을 하며 검소하게 생활하고 마음을 풍요롭게 가꾸는 삶을 꿈꿔 왔는데 바로 그 모습이 책 속에 들어있었다. 더 이상 귀농을 늦추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고 가족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첫눈에 반해 결정한 귀농지 

2014년 여름휴가 기간을 탐타 4박 5일 간 전북 순창 여름귀농학교를 마쳤다. 꽤나 오랫동안 귀농하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살다시피 했지만, 남편은 마이동풍으로 흘려들었던 터였다. 휴가 대신 가보자고 꼬드겼는데 의외로 순순히 따라나섰다. 남편은 귀농교욱 기간 내내 남의 일 구경하듯이 편한 마음으로 지냈다. 하지만 강의가 영 낯선 세상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그간 아내를 통해 생태주의에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만큼 강한 실행 의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해 10월에 귀농학교 동기들과 이곳에 방문했는데, 첫눈에 반했다. 어릴 적부터 왠지 산을 넉넉히 끼고 있는 병풍과 같은 풍광이 좋았고,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들에 둘러싸여 아늑하고 정겹게 다가왔다. 사실 귀농지에 대해 특별한 기준이 없어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는데, 단박에 정리가 되었다. 

아내는 '인생에 정해진 계획은 없다'는 주의로 산다. 먼저 일을 저질러 놓고 보는 성격이다. 남편은 심사숙고하고 하는 편이어서 '주저하고 망설이다 끌려 내려왔다'고 표현하지만, 이미 깊숙이 아내에게 동조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게다. 서로 완급과 강약을 조절하는 조화로운 부부관계이지 싶다. 

귀농 이듬해 옮긴 집은 동네 가장 안쪽에 숨어 들은 듯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다. 1킬로 이상 구불구불 이어진 진입로 거개가 좁은 비포장이다. 가로등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주변에 묘지가 군데군데 널려 있다. 밤에도 거리가 환하고 이웃이 빼곡한 집단 주거지에 살다 와서 잘 적응이 될까, 무섭지 않을까? '외딴집이라서 온전히 자연을 느낀다. 빛과 소음으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어서 좋다.' 주변에 묘지가 널려 있어도 전혀 겁나지 않을뿐더러, 묘지가 주변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친화적인 느낌을 준단다.
 

▲ 귀농 첫 해 단칸방 집. ⓒ귀농통문


마을공동체와 연결된 귀농 이후의 삶 

경북 상주 모동면 시흥리 36가구 가운데 세 가구가 귀농인인데, 이 마을은 유독 40대가 중심 세대이다. 시골에서는 흔치 않게 원주민의 자식 세대들이 귀향을 많이 했다. 포도농사로 비교적 경제적인 여유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요즘 도시에서 벌어먹기가 얼마나 팍팍하고 어려운가. 연 소득이 4~5000만 원에 이른다 하니 중상층 농가에 속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는 아주 빈한하고 지역에서도 고립된 마을이었다. 대다수가 20여 년 전에 논농사에서 환금성이 뛰어난 과수농가로 전환했다. 

올해로 귀농 3년 차요, 농사로는 2년 차다. 새로 집을 짓고 임대한 포도밭 2000평과 고구마, 토마토, 고추, 양파, 마늘, 잎채소 따위를 100평 텃밭에서 가꾼다. 포도 농가 10여 가구가 모여 친환경 무농약 공부하며 점진적인 유기농 전환을 시도 중이다. 여기 포도밭은 20년 이상 관행농으로 지은 땅이어서 땅심으로 키우는 농사가 될 때까지 족히 5년은 걸린다. 올해는 비가 너무 많이 오는 바람에 성과가 거의 없었다. 올 초 들여놓은 스프링클러 장비 값도 못 건졌다. 직거래하면 펑당 만 원 소득을 올릴 수 있다. 일반 농사에 비하면 꽤 괜찮은 소득이다. 더 부가가치를 높이려면 포도주를 가공해야 하는데, 지금 키우고 있는 캠벨포도는 당도가 떨어져서 포도주 담그기가 마땅치 않다. 

- 대형 거위농장 신축 반대 운동을 벌였다는데? 

"귀농자가 주측이 되어 1년 넘게 수없이 회의하고 집회하며 투쟁했다. 현재 행정소송 1심에서 승소판결을 받은 상태다. 원주민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기에 귀농자에 대한 선입관을 없애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일로 빠른 시간에 마을에서 신뢰를 얻었다. 몸으로 부대끼며 느끼는 끈끈한 공동체 의식이 각성된 사건이었다." 

- 귀농 3년 차를 지나며 초기와 달라진 생각이 있다면? 

"처음에 생태주의와 '자발적 가난'이라는 이념에 끌렸다. 생태와 자립이라는 이념이 매력적이었다. 목적의식성과 자존감이 한창일 때였다. 그런데 귀농 첫해에 낡은 단칸방도 집도 어디냐며 호기롭게 살림을 펼쳤지만, 불편을 견디지 못하고 1년 만에 손들었다. 뭔가 '멋지고 다른 삶'은 결코 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삶의 원리는 도시나 농촌이나 다르지 않더라."

- 생태주의는 현실에서 무력한 이념인가? 

"삶의 방향을 바꾸려는 내적 동기를 이끌어내는 힘이 있다. 그것이 이념이 가진 역할이다. 이념은 현실을 만나 풍부해지고 유연해지는 과정에서 성숙해간다. 이념을 잣대 삼아 수십 년 살아온 업과 습으로 굳어진 삶의 방식을 손쉽게 바꿀 수 있다고 믿으면 곤란하다."

- 생태농과 관행농 사이에서 갈등과 반목은 안 생기는가?

"어떤 사람은 관행농 눈치를 보느라, 독자적인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서서히 적응하고자 한다. 생태농과 관행농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를 만드는 게 중요한 것 같다."

- 마을공동체는 왜 중요한가? 

"생활 단위가 고립적이거나 너무 작아도 자기만족에 그칠 수 있다. 고령화로 마을이 공동화될 위기에 처했는데, 일단 사람이 살아야 나도 살 것 아닌가. 그래서 젊은 세대가 중요하다. 다양한 생활양식이나 다른 생각을 존중하는 분위기도 생기고, 미래가 보이니까 내 자식이 농부가 되어도 좋다는 생각이 늘어난다." 

- 포도농사 외에 일반 농사에 대한 미련은 없는지? 

"쌀농사, 밀농사, 자급자족이 가능한 농사를 짓고 싶은데 아직은 몸과 마음이 따로다. 당분간은 포도농사와 조그만 텃밭 외에는 엄두도 못 내는 형편이다. 중장기에 걸쳐 자급자족 가능한 농사를 준비하고 있다. 얻을 수 있는 땅은 얼마든지 있다."

- 예비 귀농자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꿈과 환상을 농촌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귀농하지 마시라. 도시 생활이 힘들어서 탈출구를 찾을 거면 귀농하지 말아야 한다. 도시든 농촌이든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조용히 살고 싶은 사람은 그냥 아파트에서 살아야 조용히 혼자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해줄 것이다. 농촌은 마을 자체가 가족처럼 대면해야 하는 공동체이고, 그 안에서 소소한 슬픔, 기쁨 등의 일상을 느낄 수 있는 넉넉한 품을 갖춰야 하는 것 같다."
 

▲ 수확을 끝낸 포도밭. ⓒ귀농통문


지금 소농으로 생존가능한 삶의 방식 

앞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한 농사를 짓고 생활은 낮게 사상은 높게 가지려고 노력하겠다고 한다.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얘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뜻과 이상이 높고 뚜렷하면 삶을 밀고 가는 동력이 될 수 있다. 다만 원칙 자체를 절대화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원칙은 현실과 타협하면서 풍부해진다고 믿는다.  

현실적으로 소농이 생존가능하려면 지출을 최대한 낮추는 것이 중요한데 이 방법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끔 우울함에 바지게 만들더라. 지역에서 주민들의 재능을 모아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을 만들어 기본적인 소득을 보장하는 대안을 만들까 고민 중이다.

농촌으로 오기 전에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부부가 한꺼번에 직장을 그만두지 말라는 이야기다. 남편은 귀농 1년 차에는 주말부부를 하면서 서울에서 하던 학원 강사 일을 놓지 않았고, 지금은 가까운 시내에서 강사 일을 하고 있다. 정아 씨는 옆 동네에 있는 '녹색농촌체험마을'에서 일하고 있다. 

소농으로 살아가고자 농촌에 왔고 처음엔 그렇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는데 지금은 '천천히 가자'고 다독인다. 돌아보면 운이 많이 따라주었다. 덕분에 빠르게 정착했고 만족스럽다.

"40여 년 살아온 업과 습으로 얽힌 삶의 방식은 쉽게 바꿀 수 없다." 
"원칙은 타협을 통해 풍부해진다."  

이 부부의 깨달음이다. 그들에게서 아집과 고정관념이 빠지지 않는 지혜를 보았다. '자발적 가난'이라는 고상한 가치도 자칫 생명 에너지를 억압하는 도그마가 될 수 있다.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욕망, 삶의 동력을 이루는 자기 고유의(이기적이 아닌) 욕망(꿈)을 무시하지 말고 살려야 '살맛'이 난다. 우리 시대 소농에게는 '자발적 가난'보다 '아름다운 욕망'이 더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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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통문은 1996년부터 발행되어 2017년 10월 현재 83호까지 발행된 전국귀농운동본부의 계간지입니다. 귀농과 생태적 삶을 위한 시대적 고민이 담긴 글, 귀농을 준비하고 이루어나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귀농일기, 농사∙적정기술∙집짓기 등 농촌생활을 위해 익혀야 할 기술 등 귀농본부의 가치와 지향점이 고스란히 담긴 따뜻한 글모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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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가협 33차 총회-양심수, 국보법 남북화해 시대 어울리지 않는다

민가협 33차 총회-양심수, 국보법 남북화해 시대 어울리지 않는다
 
 
 
김영란 기자 
기사입력: 2018/03/17 [22:1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민가협 33차 정기 총회에 참석자들이 통일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이하 민가협) 33차 정기총회가 3월 17일 열렸다.

 

과거 군부독재정권에서 부당한 연행구속 그리고 심각한 고문까지 자행되던 시기에 직접행동을 하던 가족들이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외치며 1985년 12월 12일 창립한 민가협이 벌써 33년이 되었다. 

 

민가협이 1993년 9월 23일 양심수 문제를 제기하며 시작한 목요집회는 이제 1160회 차를 맞이했다.

 

33번째 민가협 총회에는 통일광장범민련 남측본부유가협사월혁명회양심수후원회민중당민중민주당한보진보연대 등 각계 시민사회단체 회원들 15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 권오헌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이 민가협 33차 총회에서 모시는 말씀을 하고 있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권오헌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은 내외빈을 맞이하는 모시는 말씀을 했다.

 

권오헌 명예회장은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살아있고양심수가 갇혀 있다지금 남북정상회담조미정상회담이 열리는 순간에 남북관계 개선에 장애가 되고 있는 법적제도적 장치들이 있고 그것으로 피해를 본 양심수들이 감옥에 있다우리는 반드시 빠른 시일 안에 양심수가 없는 세상국가보안법이 없는 세상자주통일이 된 세상을 만들겠다는 다짐을 한다.”고 말한 뒤에 민가협 어머님들은 전 세상에 유래 없는 투쟁을 하고 있다어머님들은 우리사회 민주화의 상징이시다.”고 어머님들의 투쟁을 높이 평가했다이어 남북정상회담은 비핵화가 의제가 아니라 통일을 선언해야 하며조미정상회담에서 미국은 적대정책 포기북의 제도를 인정하고 존중하면 된다한미상호방위조약 폐기미군철수가 이번 정상회담에서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민가협 33차 총회를 맞이하여 각계의 격려사연대사가 이어졌다.

먼저 이규재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은 축사에서 남북북미 정상회담이 열리며 우리 역사가 커다랗게 요동치고 있다미국에게 의해 여러 가지 수난을 당해온 역사가 100여 년이 넘었다우리 민족이 겪은 수난과 모욕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역사적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이 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반미투쟁이다모든 악의 근원모순의 근원이 미국이 아닌가. 2018년 모든 역량을 반미로 결집시키고 행동으로 해야 한다.”고 반미투쟁으로 나서자고 호소했다.

 

▲ 민가협 어머님들이 각계에서 연대와 축사가 이어지는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가 평양에 꼭 함께 가자는 말씀에 박수를 치고 있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한충목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는 우리 어머님도 민가협 활동을 하신 것을 너무나 자랑스러워 하신다.고 소회를 밝힌 뒤에 한반도 평화와 통일은 분단 적폐 중의 적폐인 국가보안법미국에 대해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불가역적인 방법으로 철폐 할 때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국가보안법 완전철폐양심수 석방미국을 몰아내고 평화협정 체결, 615방식의 통일을 달성하는 길에 한국진보연대가 앞장서서 싸우겠다.”고 결의를 밝혔다.

 

김창한 민중당 상임공동대표는 축사를 통해서 자주민주통일의 한길에서 든든한 동지이자투쟁하는 사람들에게 어버이처럼 따뜻한 보살핌을 주시는 민가협 어머님들이 계셔서 늘 든든하다.”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이어 폭풍전야의 한반도에 격변이 시작되고 있다우리민족끼리 단결하면 그 어떤 역경도 순경도 바꿔낼 수 있다는 교훈을 새겨주고 있다남북 화해시대감옥에 있는 양심수같은 민족을 적이라 규정하는 만남과 화해를 불법으로 규정한 국가보안법은 새로운 시대와 공존할 수 없다남북대화와 단결의 분위기가 실질적인 조치로 이어질 수 있도록 민중당은 노력하겠다외세의 지배와 간섭이 영원히 종식될 수 있도록 함께 투쟁하겠다.”고 김창한 상임공동대표는 투쟁의지를 담은 연설을 했다.

 

▲ 민가협을 앞장에서 이끌고 있는 조순덕 상임의장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2017년 사업보고와 2018년 사업계획을 민가협 조순덕 상임회장이감사보고는 임방규 통일광장 공동대표와 김정숙 어머님이 하였다.

 

민가협은 2018년 주요사업을 통해 국가보안법 철폐 운동 양심수 석방투쟁 및 지원·조사사업 △ 민가협 목요집회 △ 민가협장터 △ 소식지 <민주가족평화, 615, 104선언이행자주통일 사업 △ 민주수호 운동 인권관련 연대사업 △ 민중생존권 연대사업 등으로 밝혀 우리 사회에서 민주와 인권 증진 사업 및 고통 받는 모든 이들과 함께할 것을 밝혔다.

 

민가협 감사패는 2017년 양심수 석방을 위해 헌신해 온 조영건 구속노동자후원회 회장에게 수여되었다.

 

조영건 회장은 감사패를 받은 뒤에 지난해 양심수 석방을 위해 끊임없이 싸웠는데 아직 결실을 맺지 못했다올해 한반도에 평화통일의 분위기가 불어오는데 우리 모두 힘을 뭉쳐 반드시 빠른 시일 안에 양심수를 모두 석방시키자.”라고 호소했다.

 

▲ 민가협 33차 총회에서 감사패를 받은 조영건 구속노동자 후원회장과 민가협 어머님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민가협은 총회 결의문에서 “2017년 촛불혁명을 통해 정권이 바뀌었지만 아직 우리 사회에는 바꿔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촛불혁명을 만들었던 힘으로 적폐청산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투쟁을 중단 없이 지속해야 한다.”고 밝혔다.

 

총회 참가자들은 △ 국가보안법 철폐양심수 전원 석방 △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 확장 △ 한반도의 자주와 평화통일 앞당기자고 결의를 다졌다.

 

▲ 민가협 33차 총회에는 투병 중인 임기란 어머님이 영상을 보내주셨다. 임기란 어머님이 오래오래 사시길 바라며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민가협 33차 총회에서 지난해 돌아가신 서경순 어머님이 생전에 민가협에 보낸 영상이 상영되어, 참가자들의 마음을 적셨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한편민가협 33차 총회에서는 투병 중인 임기란 어머님의 영상과지난해 돌아가신 서경순 어머님의 영상이 상영돼 참가자들이 다시한번 어머님들의 투쟁과 헌신을 되돌아보며 눈물을 흘렸다.

 

총회 참가자들은 구호를 함께 외치고 단체 사진 촬영으로 민가협 33차 총회를 마쳤다.

  

▲ 민가협 33차 총회에서 자료집을 보고 있는 총회 참석자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민가협 33차 총회에서 축하공연을 하는 <판소리 길음>, 모든 분들이 국가보안법 피해자이거나, 그 가족들이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민가협 33차 총회에서 축하공연을 하는 우위영씨, 옛 통합진보당 대변인이었으며, 소위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다가 만기출소 한 지 얼마 안되었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민가협 33차 총회에서 공연을 보면서 함께 노래 부르는 어머님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민가협 33차 총회에서 양심수 전원석방, 국가보안법 철폐의 구호를 외치는 참가자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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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시울 붉어진 도종환, 그는 왜 '아재 개그' 던졌나

 
 평창동계패럴림픽 '한국 선수단의 밤' 행사가 17일 오후 강릉 올림픽플라자 내 코리아하우스에서 열렸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이날 생일을 맞은 아이스하키 팀 이재웅 선수의 발언을 들으며 웃음을 내보이고 있다.

평창동계패럴림픽 '한국 선수단의 밤' 행사가 17일 오후 강릉 올림픽플라자 내 코리아하우스에서 열렸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이날 생일을 맞은 아이스하키 팀 이재웅 선수의 발언을 들으며 웃음을 내보이고 있다.ⓒ 소중한


"(휠체어)컬링 선수들도 잘하셨어요."

17일 '한국 선수단의 밤' 행사가 진행된 강릉 올림픽파크의 코리아 하우스. 18일 평창동계패럴림픽 폐회식을 앞두고 선수들을 치하하기 위한 이 자리에서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격려사를 하기 위해 연단 위로 올랐다. 그러더니 방민자, 서순석, 정승원, 차재관, 이동하 이렇게 휠체어컬링 선수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언급했다. 

이날 휠체어컬링 팀은 동메달 결정전에서 캐나다에 패하며 4위에 이름을 올렸다(관련기사 : 두 '마술사'의 눈물, 오벤저스 덕분에 행복했다). 같은 날 아이스하키 팀이 동메달을 거머쥐고, 크로스컨트리스키의 신의현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휠체어컬링 팀의 분위기는 다소 침체돼 있었다. 도 장관은 이날 한국 선수단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신의현 선수와 아이스하키 팀을 축하한 뒤, 오랜 시간을 들여 휠체어컬링 팀을 위로하고 치켜세웠다. 
 

 평창동계패럴림픽 '한국 선수단의 밤' 행사가 17일 오후 강릉 올림픽플라자 내 코리아하우스에서 열렸다. 아이스하키 팀 정승환 선수(왼쪽)와 휠체어컬링 팀 차재관, 서순석, 이동하 선수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평창동계패럴림픽 '한국 선수단의 밤' 행사가 17일 오후 강릉 올림픽플라자 내 코리아하우스에서 열렸다. 아이스하키 팀 정승환 선수(왼쪽)와 휠체어컬링 팀 차재관, 서순석, 이동하 선수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소중한


"선수촌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자로 잰 듯이 던지기 때문에 방민'자'라고. 그리고 정말 이름 그대로 순수한 돌을 던지는 '순석', 서순석. 그러니까 스킵을 바꾸자는 요구도 받아주시고, 그리고 팀 전체를 위해 하나 되는 마음으로 팀을 끌어가 주시고. 앞으로도 그러실 거라고 생각해요."

도 장관의 아재(?)개그가 섞인 위로에 행사장은 웃음바다가 됐다. 휠체어컬링 팀도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아재개그는 계속됐다.

"그리고 하우스 안에, 원 안에 집어넣는 거니까 정승'원'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반드시 승리의 월계관을 다시 쓰게 될 거라고 해서 '재관', 차재관이라고 했어요. (마지막으로) 하하하 웃는 날이 반드시 올 거라고 해서 이동'하'라고 했습니다."

이어 도 장관은 "컬링 팀 정말 잘하셨다. 우리는 진짜 그렇게 생각한다"라며 "정승원 선수 휠체어 루틴 카드에 '그동안 우리가 흘린 피눈물을 잊지 말자'라고 써놨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도 여러분들이 흘린 피눈물을 잊지 않겠다"라고 덧붙였다. 
 

 평창동계패럴림픽 '한국 선수단의 밤' 행사가 17일 오후 강릉 올림픽플라자 내 코리아하우스에서 열렸다. 아이스하키 팀 유만균, 장종호 선수가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평창동계패럴림픽 '한국 선수단의 밤' 행사가 17일 오후 강릉 올림픽플라자 내 코리아하우스에서 열렸다. 아이스하키 팀 유만균, 장종호 선수가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소중한


"국가는 여러분을 잊지 않겠다"

별다른 원고 없이 연단에 오른 도 장관은 신의현 선수를 응원하러 갔다가 생긴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며칠 전 크로스컨트리 경기를 응원하러 갔는데 앞줄에 신의현 선수 어머니, 아버지, 아들, 딸, 부인 이렇게 앉아 계셨어요. 뒷줄엔 대통령님, 여사님, 저 이렇게 앉아 있었고요. 선수들이 내려오다가 넘어지는 걸 보고 신의현 선수의 딸이 '아이고, 저걸 어떻게 해'라고 말하니까 부인이 '괜찮아. 아빠는 더 많이 넘어졌어. 넘어졌으니까 여기까지 온 거야' 그렇게 말하더군요. 그 말이 너무 감동적이어서 제가 얼른 적었어요. 그 말 속엔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오고 헤쳐 온 삶이 함축돼 있었습니다."

도 장관은 아이스하키 팀을 향해선 "열정이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고 했는데, 여러분의 열정과 도전이 국민들을 움직였고, 대통령을 달려오시게 했고, 그리고 그 자리에 모인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함성으로 대한민국을 외치게 만들었다"라며 "여러분 정말 대단하다. 고맙다"라고 감사의 말을 남겼다(관련기사 : 무릎 굽힌 문 대통령 '포옹'에, 선수와 관중들 반응은?).
 

 평창동계패럴림픽 '한국 선수단의 밤' 행사가 17일 오후 강릉 올림픽플라자 내 코리아하우스에서 열렸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행사 도중 상영된 패럴림픽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평창동계패럴림픽 '한국 선수단의 밤' 행사가 17일 오후 강릉 올림픽플라자 내 코리아하우스에서 열렸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행사 도중 상영된 패럴림픽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소중한


도 장관은 이날 행사에서 선수들의 모습이 담긴 패럴림픽 하이라이트 영상이 상영되자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도 장관은 "(패럴림픽 선수들이) 새로운 운명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그는 "내일 폐회식이 있다. 폐회식 여러 공연 중 '도당살풀이'라는 춤 공연이 있다. 살이라는 건 우리가 사는 동안 부딪히는 나쁜 기운을 말한다"라며 "그 살 중엔 '곡각살'이란 게 있다. 뼈가 부러지고 팔다리를 잃는 그런 흉살인데, 그 운명을 좋은 운명으로 바꿔달라고 기원하는 춤이 도당살풀이다"라고 운을 뗐다.

이어 도 장관은 "여러분은 스포츠로 운명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라며 "251만 명 장애를 갖고 있는 많은 분들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야'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1000만 명 장애인 가족에게 희망을 줬다"라고 강조했다.

또 도 장관은 "올림픽을 통해 이 땅에 평화가 실현되면서 국가의 운명을 바꿨고 치유의 패럴림픽을 통해 새로운 운명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라며 "그래서 여러분께 감사하다. 국가는 이걸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평창동계패럴림픽 '한국 선수단의 밤' 행사가 17일 오후 강릉 올림픽플라자 내 코리아하우스에서 열렸다. 스노보드 박항승 선수가 행사 도중 박수를 치고 있다. 박 선수는 교통사고로 오른팔과 오른다리를 잃었다.

평창동계패럴림픽 '한국 선수단의 밤' 행사가 17일 오후 강릉 올림픽플라자 내 코리아하우스에서 열렸다. 스노보드 박항승 선수가 행사 도중 박수를 치고 있다. 박 선수는 교통사고로 오른팔과 오른다리를 잃었다.ⓒ 소중한


마지막으로 도 장관은 "'모든 꽃은 자기 내면으로부터 스스로를 축복하며 핀다'는 시의 한 구절이 있다"라며 "스스로 운명을 바꿔 가는 여러분도 그 꽃처럼 스스로를 축복하며 다시 태어나길 바란다. 여러분은 이미 인생의 금메달을 딴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러분의 인생이 아름답게 꽃필 수 있도록 저희도 지원하겠다"라며 "그리고 여러분이 훌륭하게 운동할 수 있는 환경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평등하고 따뜻한 세상, 동행하는 세상, 함께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도록 있는 힘을 다해 지원하고 노력하겠다"라고 덧붙였다.

이날 행사에는 18일 경기가 남은 알파인스키, 크로스컨트리스키 선수들을 제외한 선수들이 자리해 그동안의 피로를 푸는 시간을 가졌다. 대한장애인체육회는 모든 선수들에게 자신의 얼굴이 새겨진 메달을 선물했다.  

팽창패럴림픽 폐회식은 18일 오후 8시 평창 올림픽플라자의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진행된다. 
 

 평창동계패럴림픽 '한국 선수단의 밤' 행사가 17일 오후 강릉 올림픽플라자 내 코리아하우스에서 열렸다. 대한장애인체육회는 모든 선수들에게 자신의 얼굴이 새겨진 메달을 선물했다. 이날 대표로 메달을 받은 휠체어컬링 방민자(왼쪽), 아이스하키 한민수 선수의 메달.

평창동계패럴림픽 '한국 선수단의 밤' 행사가 17일 오후 강릉 올림픽플라자 내 코리아하우스에서 열렸다. 대한장애인체육회는 모든 선수들에게 자신의 얼굴이 새겨진 메달을 선물했다. 이날 대표로 메달을 받은 휠체어컬링 방민자(왼쪽), 아이스하키 한민수 선수의 메달.ⓒ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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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 보이지 않는 나는 살았을 때부터 유령이었다

등록 :2018-03-17 09:30수정 :2018-03-17 09:45
 

[토요판] 커버스토리
고스트 스토리 ① 죽음이 하는 말
한 도시(사진)가 있다. 일본과 미국, 농촌과 도심, 원도심과 신도시, 판잣집과 고층 빌딩, 항구와 공항, 굴뚝과 첨단이 공존하는 곳. 선거 때마다 표심 분포가 전국 상황과 유사해 한국 여론 지형의 축소판이라 평가받는 곳. 1970년대 이 도시의 한 장소를 포착한 사진 속에서 한국 근현대를 압축한 시간이 보인다. 이 도시엔 가난한 사람들이 마지막을 의탁하는 공공의료원이 있다. <한겨레>는 이곳을 거쳐 죽음을 맞은 195명(+2018년 1월 사망자 1명)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이 병원에서 2001년부터 2017년까지 연고 없이 죽어간 사망자 전수다. 한 사회가 죽음을 대면하는 방식에서 그 사회의 가장 깊은 바닥이 노출된다. 세월호의 죽음을 다루는 정치가 그 사실을 아프게 확인시켰다. ‘포기’되고 ‘처리’된 죽음들이 말문이 닫힌 채 도시의 그늘을 떠돌고 있었다. 도시 구석구석과 골목골목을 걸으며 그들의 흐린 자취를 더듬을 땐 유령을 좇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죽었으므로 투명했으나 살았을 때도 보이지 않았다. 깨진 유리처럼 조각난 흔적들을 맞추며 불러낸 목소리. 누구도 울어주지 않았던 그들의 죽음이 산 자들에게 하는 말. 연재 기획 ‘고스트 스토리’를 시작한다. ※도시 이름과 사진 출처는 2회 기사에서 밝힌다. 글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사진 ㅎ도서관 제공
한 도시(사진)가 있다. 일본과 미국, 농촌과 도심, 원도심과 신도시, 판잣집과 고층 빌딩, 항구와 공항, 굴뚝과 첨단이 공존하는 곳. 선거 때마다 표심 분포가 전국 상황과 유사해 한국 여론 지형의 축소판이라 평가받는 곳. 1970년대 이 도시의 한 장소를 포착한 사진 속에서 한국 근현대를 압축한 시간이 보인다. 이 도시엔 가난한 사람들이 마지막을 의탁하는 공공의료원이 있다. <한겨레>는 이곳을 거쳐 죽음을 맞은 195명(+2018년 1월 사망자 1명)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이 병원에서 2001년부터 2017년까지 연고 없이 죽어간 사망자 전수다. 한 사회가 죽음을 대면하는 방식에서 그 사회의 가장 깊은 바닥이 노출된다. 세월호의 죽음을 다루는 정치가 그 사실을 아프게 확인시켰다. ‘포기’되고 ‘처리’된 죽음들이 말문이 닫힌 채 도시의 그늘을 떠돌고 있었다. 도시 구석구석과 골목골목을 걸으며 그들의 흐린 자취를 더듬을 땐 유령을 좇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죽었으므로 투명했으나 살았을 때도 보이지 않았다. 깨진 유리처럼 조각난 흔적들을 맞추며 불러낸 목소리. 누구도 울어주지 않았던 그들의 죽음이 산 자들에게 하는 말. 연재 기획 ‘고스트 스토리’를 시작한다. ※도시 이름과 사진 출처는 2회 기사에서 밝힌다. 글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사진 ㅎ도서관 제공

 

죽음은 삶만큼이나 불평등하다. 한 도시에서 가장 가난하게 살다 가장 가난하게 죽은 195명(2001~2017년 ○○시 공공의료원 무연고 사망자)의 자취를 더듬었다. 지난 17년 동안 뿌려진 그들의 흔적은 거리의 먼지에 덮이고, 행인들의 발자국에 지워지고, 도시의 소란에 묻혔다. 애도되지 않는 죽음은 기억되지 않았다. 그들의 삶과 죽음이 흘린 조각들을 맞추며 숫자와 통계 뒤에서 그들이 하는 목소리를 모았다. 기억되지 못한 자들을 기록하는 일은 역사가 되지 못한 자들을 위한 역사 쓰기이기도 하다.

 

 

 

도시.

 

생동하는 활기로 차오르다가도 들끓는 열기로 화상을 입히는 공기. 그 뜨거움에 끼지 못한 자들에겐 몸을 얼릴 만큼 차가운 아스팔트. 불과 얼음과 질주와 낙오가 한데 뭉쳐진 덩어리.

 

나는 ‘이 도시’에서 죽었다.

 

이 도시에서 나(2018년 1월17일 사망 당시 63살·여)는 이름을 바꾸고 나이를 속이며 살았다. 정씨를 배씨로 쓰고 1955년생이 1967년생이 된 것은 죽지 않기 위해서였다. 배씨가 다시 정씨로 불리고 잃어버린 12년을 나이에 돌려받았을 때 나의 숨은 이미 멈춰 있었다.

 

나는 도망자였다. 20여년 전 두 아이를 두고 도망쳤을 때 나는 남편의 폭력으로 여러 번 죽은 뒤였다. 아내로서 죽었고, 엄마로서 죽었고, 인간으로서 죽었다. 그 죽음들 끝에 내게 남은 마지막 목숨을 건지려 이 도시로 도망쳤다.

 

나는 말소자였다. 남편의 추적을 벗어나려면 나는 ‘없는 사람’이어야 했다. 결혼 뒤 남편의 도시에서 살던 나는 ‘나였던 모든 것’을 지우며 이 도시에 도착했다. 남편이 번호를 한 올 한 올 잡아당기면 꼼짝없이 그의 앞으로 끌려갈 것 같아 그가 없앤 주민등록도 되살리지 못했다. ‘삭제된 자’인 나는 ‘내가 나임’을 증명해야 하는 어떤 일자리도 얻을 수 없었다. 정씨라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해 은행 계좌를 가질 수 없었고, 배씨라는 주장도 뒷받침할 수 없어 4대 보험에 가입되지 못했다. 이 식당과 저 식당에서 하루치의 일을 하며 하루치의 나를 구했다. 허름한 집에 방 한 칸을 얻어 주인의 밥을 하고 집 청소를 하며 방값을 대신했다.

 

“언니였어?”

 

지문조회 결과를 본 ‘언니’가 놀라 물었다.

 

온기가 전이된 적 없는 나의 온몸으로 암이 전이됐다. 이 도시에서 나를 챙겨주던 유일한 언니가 나를 주민센터로 데려갔다. 제대로 치료를 받으려면 신분증이 필요하다며 주민등록 회복을 신청했다. 내가 언니보다 한참 언니란 사실을 언니가 알게 됐다. 지난 15년 동안 이 도시에서 나는 동생의 동생으로 살았다.

 

“범죄에 연루돼 있을지도 몰라요.”

 

주민센터는 언니에게 경찰에 의뢰하라고 했다. 내가 ‘나 아닌 나’로 살아온 이유가 범죄와 무관함을 경찰이 증명해줬다.

 

병원에 입원했을 땐 의사가 손댈 수 있는 단계를 지나 있었다. 나는 주민등록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죽었다. 나는 죽을 때까지 ‘국민’의 통계에 잡히지 않았다. 죽지 않으려 관계를 끊고 도망친 나는 관계없음을 확인한 채 혼자 죽었다. 언니도 나의 주검을 인수할 ‘가족’이 돼주진 못했다. 나는 죽을 때까지 내 이름으로 불리지 못했고, 죽은 뒤엔 이름 대신 ‘무연고 사망자’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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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망자였고 말소자였다

 

제국주의 일본이 병참기지를 짓고, 기지를 물려받은 미군이 부대를 주둔시키고, 북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다닥다닥 밀집하고, 농촌의 가난이 몰려와 공장을 돌리며, 초국적 자본이 경계 없이 자유를 누리는 곳. 농촌과 도심, 원도심과 신도시, 판잣집과 고층 빌딩, 항구와 공항, 굴뚝과 첨단이 공존하는 곳. 선거 때마다 표심 분포가 전국 상황과 유사해 한국 여론 지형의 축소판이라 평가받는 곳. 그렇게 한국의 근현대와 산업화와 지구적 이해관계가 전국에서 이주해온 사람들 삶에 200여년을 압축해 넣은 곳. 격변의 시간이 사람들의 살고 죽음에 내려앉아 그 형태를 주조하는 도시. 가장 가난하게 살다 가장 가난하게 죽은 나는 왜 이 도시로 와서 이 도시에서 머물다 이 도시에서 죽었을까.

 

나의 죽음은 이 도시에 누적돼 있다.

 

나는 ○○시의료원(시 예산으로 운영되는 공공의료원) 냉동고에 누워 ‘연고 없이 죽은 자들’(2001~2017년 합계 195명)의 수에 더해졌다. 나는 대개 남자(149명·76.4%)였고 간혹 여자(46명·23.6%)였다. 나(50명·25.6%)는 쉰과 예순 사이(평균 나이 58.6살)에 가장 많이 죽었고, 13명의 나(7.6%)는 마흔살이 못 돼 죽었으며, 46명의 나(23.6%)는 일흔 넘은 노인으로 죽었다. 나(최소 125명)는 의료기관에 입원해 죽음을 맞거나 쓰러진 뒤 실려가 죽었다. 나(최소 10명)는 집과 여인숙과 사회복지시설에서 홀로 죽었고, 나(최소 25명)는 거리와 바다와 노동 현장에서 죽어 발견됐다. 다섯 중 한 명꼴로 나(41명)는 병사하지 못했다. 변사는 분명 관계 끊긴 자들을 선호했다.

 

“이 사람 이름이 뭐예요?”

 

경찰이 나(2014년 당시 50대 추정·남)의 인적사항을 내 고용인에게 물었다.

 

“박철식(가명).”

 

“박철식?”

 

 

한국 근대와 산업화와 초국적 자본
판잣집-빌딩, 항구-공항, 굴뚝-첨단
공존하는 국내 여론 지형의 축소판
‘이 도시’에서 살다 공공의료원에서
17년 동안 연고 없이 죽어간 195명

 

 

병원·공사장·거리·바다에서 사망·발견
최연소 0살·최고령 97살·평균 58.6살
5분의 1이 변사, 그중 5명이 자살
간질환·알코올중독·영양결핍·폐결핵
선행사인에서 읽히는 가난한 삶들

 

 

경찰이 지문을 떴을 때 내 손가락들은 지문을 내놓지 못했다. 지문이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열손가락 끝은 닳아 있었다. 검은 인주를 묻힌 발가락도 살갗이 뭉개져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나의 ‘정체’를 찾아 경찰이 내가 쓰러진 일터 주변을 탐문했다.

 

나는 영세 설비공장과 유통업체들이 모여 있는 산업단지에서 죽었다. ‘사람이 쓰러졌다’는 사장의 신고를 받고 구급차가 도착했을 때 나는 몽롱한 의식을 붙든 채 “괜찮다”며 돌려보냈다. 정말 괜찮다고 느낀 것인지, 병원비가 걱정됐던 것인지, 나도 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구급차가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다시 쓰러졌고 구급차가 다시 오기 전에 죽었다. 급성심근경색으로 추정(허혈성 심질환 발견)됐다. 노숙을 오래 한 나는 동상으로 손가락과 발가락의 무늬를 잃었다. 내가 밟아온 길과 통과해온 시간들이 지문과 함께 마모돼 자취를 감췄다.

 

“나야 모르지. 자기가 박철식이라고 하니까.”

 

‘박철식’은 일당 벌이를 준 사장이 나를 부르던 이름이었다. 내가 정말 박철식이었는지는 과학수사도 밝혀주지 못했다. 수취인을 찾지 못한 내 죽음의 소식은 아무에게도 전해지지 않았다. 사망자의 이름 칸에 나는 안개처럼 기재됐다.

 

“박철식으로 호칭되던 자.”

 

확인되지 않는 자의 죽음은 유언조차 할 수 없었다. 노상에 쓰러져 있던 내(2007년 당시 1967년생 추정·남)가 저체온증으로 죽었을 때 뱉지 못한 나의 마지막 말도 입속에서 얼어버렸다. ‘ㅎ슈퍼’ 앞길에서 차에 치여 의식이 꺼져갈 때 내(2012년 당시 미상·남) 눈에 담긴 이 세계의 마지막 풍경도 눈 속으로 가라앉았다. 끝까지 신원이 파악되지 않는 내가 말과 풍경을 삼킨 채 ‘미상자’(박철식 포함 5명)로 정리됐다.

 

내 속엔 아직도 울음이 있다. 나(최연소 사망자·2001년 당시 0살·여)는 이름도 얻지 못한 채로 전철역 화장실에서 죽어 발견됐다. 단일 노선이 환승역이 되고 이용객이 갑절로 늘어나는 동안 내가 버려진 화장실도 녹이 슬고 부식했다. 제대로 한번 울지도 못하고 죽은 나는 울며 나를 버렸을 어린 엄마의 가슴속에서 뒤늦게 울고 있다.

 

내 등엔 아직도 세월이 있다. 나(최고령 사망자·2008년 당시 97살·여)는 이름에 불로(不老)의 염원을 담은 동네에서 한 세기를 살았다. 나의 장수가 동네 이름 덕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무연으로 견뎌온 100여년이 축복일 수만은 없었다. 그 오랜 시간을 재앙처럼 등에 지고 살았지만 나는 인연 하나 남기지 못한 사람이었다.

 

말이 되지 못한 울음을 기록해준 역사는 없었다. 0살이든 97살이든 아무도 나를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몇 시간이든 97년이든 내가 이 땅에 살았음을 기록해주는 사람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다.

 

 

가난이 사인(死因)으로 적히진 않았다

 

사인이 나의 죽음을 모두 설명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패혈증(사망자들의 ‘최종사인-중간선행사인-선행사인’의 빈도 분석 결과 27회)과 패혈성 쇼크(11회)로 죽었다. 다발성 장기부전(25회)으로 죽었고, 심인성 쇼크(14회)로 죽었으며, 뇌출혈(10회)로 죽었다. 사망 뒤 표기되는 최종사인은 명료하지만 불친절했다. 죽기까지 내가 처했던 삶의 조건(임준 서울시립대 도시보건대학원 교수 “최종 사인이나 급성기 질환보다 선행사인을 봐야 한다”)을 읽어주진 않았다.

 

나는 선행사인으로 간경화(25회)와 간부전(8회)을 앓았다. 술을 많이 마셨고(알코올 남용 8회), 영양결핍(8회)을 달고 다녔다. 폐결핵(7회)이 활성화(영양상태와 주거환경이 열악할 때)돼 몸을 갉았다. 노숙으로 저체온증(4회)이 따라붙었다. 나의 선행사인들엔 거리의 시간과, 그동안 뱉은 한숨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배어 있었다.

 

사인의 방향을 바꿔 살피면 나의 죽음은 삶의 마지막 선택인 경우가 있었다. 나(2002년 당시 72살·남)의 선행사인은 만성폐쇄성 폐질환이었다. 호흡곤란에 따른 뇌기능 장애가 있었다. 중간선행사인은 호흡중추 마비로 진단됐다. 나의 최종사인은 심폐정지였다.

 

오후 6시. 3층짜리 적벽돌 건물 외벽 가스배관에 줄을 걸었다. 줄에 목을 밀어 넣고 몸을 던졌다. 자동차 한 대로 꽉 차는 좁은 골목을 내려다볼 때마다 호흡이 가빴었다. 골목이 사람과 자동차로 뒤엉켜 목이 멜 때처럼, 줄로 목맨 나도 숨길이 막혀 허공에서 버둥거렸다. 호흡 장애를 겪어온 나조차 줄의 조임에 호흡이 끊기는 고통을 느끼는구나. 순간 줄에서 목이 빠져 건물 아래로 낙하했다. 응급처치 중 사망 선고를 들었다.

 

내가 평소 지병인 폐질환으로 삶을 비관해왔다고 나를 아는 사람들이 진술했다. 성격이 원만하지 못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다고도 했다. 나는 죽음을 계획했지만 추락사는 계획하지 않았다.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던 질병과, 목에 줄을 감으며 불러들인 죽음(변사자 41명 중 5명이 자살)과, 예기치 않은 추락이 달성한 죽음 사이에서, 나의 최종사인은 너무 깔끔하고 매끄러웠다. 한번 놓치면 따라잡을 수 없다는 두려움으로 달리는 것들에 매달려 손 놓지 못하는 사람들의 도시는 냉정했다. 손을 놓쳐 버린 자들이 손 놓아 버린 삶 앞에서 도시는 늘 딴청을 부렸다. 가난과 절망은 사망 자료에 적히는 사인이 아니었다.

 

나(2008년 당시 51살·남)는 ㅇ역 전동차 차고지에서 누운 채 발견됐다.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는 장소에 내가 어떻게 들어갈 수 있었는지 역 직원들도 파악하지 못했다. 달리던 것이 달리기를 멈춘 곳에서 나는 3월 초의 새벽을 견디며 오래 떨었다. 직원의 신고로 응급실로 실려 갔다. 50여분 뒤 심폐소생술을 받았고, 다시 50여분 뒤 숨을 멈췄다. 최종사인은 저체온증으로 추정됐다. 나의 집을 두고 직선거리 1.5㎞ 떨어진 전동차의 집에서 죽어간 이유가 술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알코올 소견 없음)이다.

 

나(2003년 당시 53살·남)는 한겨울(1월) ㄷ역 지하상가에서 얼어갔다. 병원 이송 3개월 뒤에 죽었는데 폐에 쇼크가 왔다고 했다. ㅂ역에서 앰뷸런스에 태워진 나(2012년 당시 56살·남)는 묻는 말에 응답하지 않아 문진이 불가능했다고 구급대원이 병원에 전했다. 15시간 만에 눈을 감았다. 공원에서 죽어가던 ‘행려자’ 나(2003년 당시 40살·남)는 주위에 있던 다른 ‘행려자’의 신고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한 사람의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인데 나는 아무리 죽어도 누군가의 눈물이 되지 못했다.

 

대형 빌딩들이 건설되고 있는 ‘이 도시’의 한 공사장 주변에서 천연기념물 저어새(흰색)와 민물가마우지(검은색)가 날개를 쉬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대형 빌딩들이 건설되고 있는 ‘이 도시’의 한 공사장 주변에서 천연기념물 저어새(흰색)와 민물가마우지(검은색)가 날개를 쉬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지워지고 쓸려 나갔다

 

나는 떠다니는 사람이었다.

 

나(2011년 당시 60살·남)는 이 도시 밖에 주소를 두고 이 도시에 와서 죽었다. 이 도시 밖의 마지막 주소지는 주민센터였다. 그러니까 주소지가 아니라 나를 ‘거주불명’ 처리(2010년)한 곳이었다.

 

부모라곤 얼굴도 모르는 나를 할머니가 거둬 키웠다. 초등학교만 졸업한 뒤 가난한 집이 싫어 전국을 떠돌았다. 나는 거리에서 자라며 거리의 원리를 배웠다. ‘무리의 힘에 끼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체험이 어린 내가 붙든 단순한 원리였다. 서울역 앞에서 구두닦이를 하거나 ‘똘마니’로 형들의 잔심부름을 했다. 1987년 ‘어울리던 집단’을 따라 이 도시로 왔다. 이 도시에 오기까지 9년 동안 20여차례 주소를 옮겼다. 한 해에 3차례 옮기기도 했고 한 달 간격으로 옮기기도 했다. 단기 방은 나의 생활도 단기로 쪼갰다. 기술이 없던 나는 이 도시에서 건설 현장 잡부로 일했다. 현장을 따라다니며 이 도시에서만 8개의 주소지를 가졌다.

 

 

남편 폭력 피해 성씨·나이 바꾼 여성
추적 두려워 주민등록 없이 산 20년
말소자의 불안정한 삶이 암으로 끝나
노숙중 동상으로 손발 지문 잃은 남자
일당일 하다 죽었으나 신원확인 불가

 

 

사체인수 포기 뒤 화장장으로 직행
도시 곳곳에 누적된 그들의 흔적
그 흐린 조각들을 불러 모아 구성한
죽은 자들이 산 자들에게 하는 말
“보이지 않는 나를 보이게 하라”

 

 

ㄱ동의 방만큼은 이 도시에 처음 왔을 때부터 3년을 살았다. 7군데 주소를 흘러 다니다 5년 만에 다시 찾아간 자리도 그 방이었다. 2001년 그 방을 끝으로 나는 다시 거리에서 잤다. 되돌아간 거리에서 내가 확인한 원리란 ‘힘없이 늙은 자가 낄 수 있는 무리는 힘없는 늙은 자들뿐’이란 사실이었다. ‘처치 곤란한 자’로서 나는 그해 이 도시를 떠났다. 거주불명 처리된 지역으로 흘러가 거리에서 눕고 먹었다. 10년 노숙 뒤 이 도시로 복귀했을 때 ㄱ동의 방은 증발하고 없었다. 93만3916㎡짜리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철거(전기공급설비 예정지)됐다. 모두 5년 가까이 지낸 그 방은 정주하지 못한 내가 ‘머물 곳’으로 여긴 유일한 거처였다.

 

2011년 5월 병원으로 실려 갔을 때 의사는 “위암이 발견됐다”고 했다. 내 입에서 심드렁함이 튀어나왔다.

 

“까짓 죽으면 그뿐이오.”

 

퇴원(6월) 한 달 만에 구급차가 찾아왔을 땐 고시원에 있었다. 친구가 비용을 대줘 거리를 병상 삼지 않을 수 있었다. 급격한 기력 저하로 ‘거동불가 상태’라고 신고됐다.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만큼 체중이 줄었다고 간호사가 말했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간신히 끌어냈다.

 

“이제 죽을 테니 그뿐이오.”

 

재입원 20일 뒤 나는 죽었다. 죽어도 살아도 그뿐인 목숨의 부질없음. 단 한 차례 반전의 기회도 얻지 못한 나에게 날아오는 ‘네 탓’이란 시선의 부질없음. 책임 없음. 내가 터득한 마지막 원리는 그뿐이었다.

 

떠다니며 살았던 자들은 죽어서도 떠다녔다. 나는 죽어서도 국경 없는 노동(▶3회 ‘부르혼의 혼’)에 묶여 떠다녔고, 나는 죽어서도 분단의 정치(▶4회 ‘주민번호 111111-1111111의 운명’)에 갇혀 떠다녔다.

 

말갛게 지워진 것은 ㄱ동의 방만이 아니었다. 내(2007년 당시 69살·남)가 죽은 수평의 땅엔 수직이 들어섰다. 내가 살던 낮고 낡은 판자촌이 자취 없이 밀리고 26층 높이의 아파트(2014년 입주)가 올라갔다. 좁고 굽은 한 뼘 골목과, 그 골목을 기어 다니는 소리와, 그 소리로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연들이 말끔하고 조용한 아파트들로 대체됐다. 내가 지워진 이 땅에 무엇이 있었는지 외지에서 고용돼 온 경비노동자는 알지 못했다. 옛 기억을 찾아 이 땅을 떠다닐 때마다 나의 혼이 아파트 벽에 부딪혀 곤두박질쳤다.

 

내(2014년 당시 47살·남)가 죽은 건설 현장에선 1년 뒤 오피스텔(2015년 입주)이 솟았다. 기계 소리 대신 1층 상가를 드나드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완공된 건물을 채웠다. 15층(264가구) 건물을 짓는 공사장 지하 3층에서 나는 청소작업 중 의식을 잃었다. 오피스텔에서 우측 대각선으로 150m 떨어진 곳에 나의 주소지가 있었다. 나는 그 방에 거주하지 않고 여관을 옮겨 다니며 일용직으로 일했다. 방값을 내지 못한 나는 주인을 마주치지 않으려 피해 다녔다. 나는 여전히 그 방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오피스텔 지하를 맴돈다. ‘꿈’을 새겨 넣어 작명한 오피스텔을 떠돌며 발화되지 않는 목소리로 이루지 못한 ‘꾸우움’을 발음한다.

 

*이미지를 누르면 확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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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되고 ‘처리’되고 ‘공고’되고

 

나는 포기된 사람.

 

나(2015년 당시 43살·남)는 170㎝에 39㎏으로 죽었다. 몸무게 20㎏이 줄어 병원을 찾아갔을 때 구멍 뚫린 폐에서 중증 결핵이 확인됐다. 나는 가족관계를 끊고 살았다. 아버지 어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누나와 동생은 서로를 살필 처지가 아니었다. 의식이 점점 희미해질 무렵 병원에서 누나들을 찾아 연락했다. 누나들은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무연고 사망’은 죽음의 최저 등급이었다. 내 주검을 거둬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법과 행정이 공인하는 용어(① 연고자가 없는 시신 ② 연고자를 알 수 없는 시신 ③ 연고자가 있으나 시신 인수를 거부·기피하는 시신)였다.

 

누나들 대신 온 남동생은 심폐소생 거부 각서를 쓰고 임종을 보지 않겠다며 돌아갔다. 그날 나는 육신의 눈을 감았다. 동생은 보호자 역할을 원치 않았다. 나와 무관함을 이야기하고 ‘사체포기 각서’(시신 인수를 거부하며 시신 처리를 위임하는 서약서)에 서명했다.

 

나(2002년 당시 53살·남)는 ‘직장’(直葬·안치실에서 화장장으로 바로 이동)된 사람.

 

열아홉살 딸이 사체 인수를 거부하며 쏟아낸 이야기가 죽은 나의 가슴에 박혔다.

 

“친부·친모를 모르고 살았어요. 주민센터에서 소녀 가장 지원을 받으며 간신히 살았어요. 아버지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땐 더 원망스러웠어요. 인간적 동정심도 전혀 없어요. 지금 남의 집에서 힘들게 살고 있어요. 행정기관에서 처리해 주세요.”

 

관할 기관(변사자는 시신이 발생한 자치단체, 기초생활 수급자는 수급을 관리하는 자치단체)의 가족 찾기와 가족의 사체포기를 거쳐 나의 무연고가 확정(장사 등에 관한 법률과 대통령령 등에 따른 무연고 ‘처리’ 지침)됐다. 나는 빠르게 소각됐다. 딸을 원망할 순 없었다. 죽어서 혈육에게 포기당한 사람이나 죽은 혈육을 포기하는 사람들에게 지난 시간이 몇 마디 말로 요약될 순 없었다.

 

나는 ‘처리’되고 ‘공고’되는 사람.

 

나(2002년 당시 48살·남)는 인수되거나 포기되길 다만 기다릴 뿐이었다. 나는 178일(최장 안치자는 2013년 사망한 몽골인으로 200일) 동안 병원 냉동고에 있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뼛가루가 되는 데 반년이 걸린 나는 잃어버린 물건처럼 자치단체 게시판에 ‘공고’됐다. 나는 무연고 납골당에 봉안돼 수많은 ‘다른 나’를 만났다. 그곳에서 인연 없는 나와 내가 오직 무연(▶5회 ‘무연이 인연’)으로 연결됐다.

 

나의 죽음 값은 50만~75만원.

 

나는 규정된 비용(17년 사이 25만원 인상)으로 처리됐다. 화장용 수의와 관 등 기본 품목 7가지로 염해지고 입관됐다. 수의를 입기 전 사진과 입은 뒤의 사진, 관에 누운 사진을 첨부해 병원은 관할 자치단체에 입금 요청(홈리스행동 “75만원은 빈소 마련 등 존엄한 삶의 마무리를 위한 ‘장례’를 원천적으로 배제한 금액”)했다.

 

나는 비용 지급이 거부된 사람.

 

나(2001년 당시 46살·여)와 나(2002년 당시 48살·남)는 화장되기까지 98일과 178일이 걸렸다. 일부 자치단체는 나의 ‘처리’가 장기화되면서 불어난 안치료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다. 거부 이유로 예산 부족(2000년대 초)을 말했다. 병원이 안치료 손실을 보전하겠다면 시청에 요구하라고 했다. 예산 반영을 두고 구청과 의회가 마찰을 빚을 것이라고도 했다. 병원은 결국 안치료 전액을 감액했다. ‘귀중한 예산’을 쓰기에 나는 아까운 사람이었다.

 

나는 주검으로서만 필요한 사람.

 

열아홉살 딸이 원망을 쏟아낸 나(2002년 당시 53살·남)와 자치단체가 안치료 지급을 거부한 나(2001년 당시 46살·여)는 대학병원으로 보내져 해부(2001~2003년까지 11명)됐다. 죽으면 해부대에 눕겠다고 사전에 의사를 밝힌 것은 아니었다. 그땐 법(시체 해부 및 보존에 관한 법률)이 그렇다(인수자가 없는 시신 발생 때 자치단체장이 의과대학장에게 알리도록 한 조항으로 2015년 11월 위헌 결정)고 했다. 살아 있을 때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던 나는 죽었을 때만 쓸모를 인정받았다.

 

나는 ‘변사 영업’ 대상도 못 되는 사람.

 

연고 있는 변사자가 발견되면 시신 쟁탈전이 벌어졌다. 변사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경찰이 특정 장례식장으로 시신을 보낸 뒤 리베이트를 받는 일이 흔했다. 병원 없이 장례식장만 운영하는 업체들은 변사자 유치가 매출에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 변사자를 두고 벌이는 경쟁을 조율하느라 경찰이 업자들을 불러 유치 순번을 정해주기도 했다. 장례비 치를 유족 없이 무연고로 죽은 나는 ‘탐낼 물건’조차 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떠난 ‘이 도시’의 한 구도심에서 빈집이 부서진 채 방치되고 있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사람들이 떠난 ‘이 도시’의 한 구도심에서 빈집이 부서진 채 방치되고 있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도시의 오늘이 깔고 앉은 나‘들’

 

도시는 저 혼자 달려갔다. 따라올 테면 따라오라며 따라가지 못하는 자들을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 도시의 200년 전에도, 100년 전에도, 가장 화려한 지금에도, 나는 변함없이 가장 가난한 자리를 떠돌고 있다. 누구에게도 또렷이 기억되지 않는 내가 이 도시 곳곳에 물먹은 먼지처럼 퇴적돼 있다. 도시는 보이지 않는 담장(▶2회 ‘죽음의 지리학’)이 되어 내가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을 나눴다.

 

나는 흐릿하고 구체가 없다. 살았을 때 목소리가 소거된 나는 죽어서도 목소리가 잠겨 있다. 나를 지운 이 도시에서 내가 살았던 흔적은 깨진 유리 조각들처럼 흩뿌려져 있다. 내가 투명한 존재인 한 나의 말은 끝까지 목소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

 

도망자인 나와 말소자인 나, 박철식으로 호칭되던 나와 말갛게 지워진 나, 0살짜리 나와 97년을 산 나, 포기된 나와 처리되고 공고된 나, 예산 갉아먹는 나와 주검으로만 쓸모 있는 나…. 화석처럼 층층이 쌓인 나‘들’이 이 도시의 오늘 아래 깔려 있다. 그 조각(2012~2017년 6월 이 도시 전체 무연고 사망자는 645명)과 파편들(한국 전체는 8152명)이 굳은 혀로 더듬더듬 말한다.

 

죽어서 보이지 않는 나는 살았을 때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살아 있을 때부터 유령이었다.

 

지금, 당신 뒤에도, 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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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주한미군 철수’ 시사…, ‘낙장불입’

한반도 평화체제와 남북화해 국면, 주한미군 주둔 근거 사라져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경기도 평택 캠프 험프리에 도착해 미8군 사령부 상황실에서 기념촬영을 마친 뒤 빈센트 브룩스 주한미군사령관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 : 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뤄지지 않으면 주한미군 철수까지 고려할 수 있다고 시사해 파문이 일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4일(현지시각) 미주리주에서 열린 만찬 연설에서 “우리는 그들(한국)과의 무역에서 매우 큰 적자를 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보호하고 있다”면서 “우리는 무역에서도 돈을 잃고, 군대에서도 돈을 잃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 병사(주한미군) 3만2000명이 지금 남북한 사이 경계에 있다”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두고 보자”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WP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발언이 한미 무역협상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철수할 수 있다고 위협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동맹이란? 양국 쌍방의 공동이익을 위해 서로 협력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한미동맹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그러나 일방이 다른 일방에게 협박으로 손해를 강요할 수 있는 관계라면 그것은 동맹관계가 아니라 종속관계로 봐야 옳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시절 “미국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가지고, 미국 엉덩이 뒤에 숨어서, ‘형님 형님 빽만 믿겠다’, 이게 자주국가 국민들의 안보의식일 수 있겠습니까”라고 지적하곤,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무슨 경제적인 일이나 그 밖의 무슨 일이 있을 때 미국이 호주머니 손 넣고, ‘그럼 우리 군대 뺍니다’ 이렇게 나올 때, 그러지 마십시오 하던지, 네 빼십시오 하던지, 무슨 말이 될 것 아닙니까”라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2006.12.21)에서 연설한 바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연설은 한미동맹의 종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당장 4월 남북정상회담과 5월 북미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 터져 나온 미국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주한미군 주둔 이유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한다.

실제 지난 1953년7월27일 체결한 정전협정 13항3호에는 “(북미)쌍방 사령관들은 한국 국경 외부로부터 증원하는 군사인원을 들여오는 것을 정지한다”고 명시했다. 때문에 현재 주한미군의 존재 자체가 정전협정을 65년째 유린한 셈이다.

5월 북미정상회담에서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해 정전상태인 북미간의 군사적 대치상황을 끝내는 종전선언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더욱이 마침 4월 남북정상회담 장소가 정전협정을 맺은 판문점이라는 사실은 평화선언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북미간 종전을 선언하고, 한반도 평화체제가 수립되면 남침 대비용 주한미군의 존재 이유는 사라진다.

가뜩이나 2조원에 육박하는 방위비 분담금과 일주일에 8건 이상 발생하는 주한미군 범죄로 인해 미군 철수 여론은 나날이 높아간다. 특히 남북화해 국면이 열리면서 주한미군의 설자리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이 “트럼프, 주한미군 철수 발언, 낙장불입” 화면을 들고 인증사진을 찍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FTA 협상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주한미군 철수를 고려했지만, 한국 입장에선 FTA 협상보다 주한미군 철수가 더 시급하다는 여론이 빗발치고 있다. 민주노총 통일위원회는 트럼프의 ‘주한미군 철수’ 발언을 ‘낙장불입’이라며 꼭 철수시키라고 인증사진까지 찍고 있다.

강호석 기자  sonkang1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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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두면 쓸모있는 서울시 정보 세 가지

 
알아두면 쓸모있는 서울시 정보 세 가지
 
서울시에서도 홈페이지 등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임병도 | 2018-03-16 14:41:2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서울시가 제공하는 대중교통 통합분실물 센터, 택시나 버스 회사 등에서 습득된 물품의 사진과 연락처를 제공하고 있다. ▲서울시전자상거래 사이트에서 제공되는 인터넷 쇼핑 피해 다발 업체 리스트

버스나 택시,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다가 물건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분실물이 발생하면 택시 영수증을 찾아 택시 기사나 회사에 전화하거나 지하철역 분실물 센터 등을 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서울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다가 발생한 분실물 정보를 통합해서 알려주는 ‘대중교통 통합분실물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이트를 보면 시내버스, 마을버스, 개인이나 법인택시, 지하철 등에서 발생한 습득물들이 사진과 함께 제공됩니다. 한 번에 통합해서 알려주기 때문에 어디서 분실했는지 모를 경우에 유용합니다.

핸드폰을 잃어버렸을 경우에는 ‘핸드폰 찾기 콜센터’를 이용하면 편리합니다. 대중교통 이외 장소에서 물건을 분실했을 경우에는 ‘경찰청 유실물 종합안내’ 사이트를 가면 빠르게 습득물 정보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간혹 물건을 보관하고 있다며 습득한 물건을 보내주는 조건으로 돈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례금이나 택배비를 보냈지만 물건을 돌려받지 못하는 피해도 발생합니다. 택배는 착불로 요청하도록 하고, 물건을 받고 온전한 상태인지 확인한 후에 사례금을 보내는 편이 안전합니다.

② 인터넷 쇼핑 사기 사이트 정보

요즘은 인터넷으로 물건을 구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간혹 입금을 했는데도 물건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자신이 거래하려는 인터넷 쇼핑몰 사이트가 안전한지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울시 전자상거래 센터’에서는 배송 지연, 청약철회 지연, 환급 지연 등으로 한 달 이내 10건 이상의 피해가 접수된 인터넷 쇼핑몰의 리스트를 제공합니다. 만약 ‘피해 다발 업체’에 등록된 쇼핑몰이라면 거래를 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서울시 전자상거래 센터’에서는 ‘사기 사이트’의 정보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소비자들이 요청한 쇼핑몰에 대해 사업자등록번호나 구청 담당자의 소재지 방문 등을 통해 사기 여부를 파악해줍니다. 사기 사이트로 등록된 사이트에서는 물건을 구매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자상거래 과정에서 발생한 불만이나 피해 등도 상담할 수 있어 구제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만, 해외사이트의 경우는 센터에서 도와줄 수 없고 국내 사이트에만 한정됩니다.

③ 여성안심택배

인터넷 쇼핑으로 물건을 주문하면 대부분 택배로 배송됩니다. 그런데 밤늦은 시간 여성 혼자 집에 있을 경우 택배가 오면 불안하다는 여성도 꽤 많습니다. 그래서 서울시는 2013년부터 ‘여성안심택배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여성안심택배’는 거주지 인근 지역에 무인택배보관함을 설치해 퇴근 때 또는 자신이 편한 시간에 택배를 받는 서비스입니다.

2013년 50개소로 시작해 2014년 100개, 2015년 120개, 2016년 160개로 증가했으며, 2017년에는 30곳이 추가돼 총 190곳에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여성안심택배’는 총 누적 이용자수가 94만 명을 넘을 정도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여성안심택배’라 여성만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서울시민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48시간까지는 무료이지만 초과 시에는 24시간마다 천 원씩 요금이 부과됩니다.

<여성안심택배>
서울시 여성안심택배 설치 장소: http://map.seoul.go.kr/smgis/short.jsp?p=6LB4g

<분실물>
핸드폰 찾기 콜센터:http://www.handphone.or.kr/
대중교통 통합분실물센터:http://www.seoul.go.kr/v2012/find.html?tr_code=citizen
경찰청 유실물센터:https://www.lost112.go.kr/index.do
경찰청 습득 휴대폰 검색: https://www.lost112.go.kr/phone/phoneList.do

<인터넷 쇼핑>
서울시전자상거래센터 피해다발 업체 리스트:https://ecc.seoul.go.kr/DR2001/FN2003LS.asp
인터넷 사기사이트 정보:https://ecc.seoul.go.kr/DR2001/FN2004LS.asp

 

도심 곳곳이 와이파이로 연결되고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집니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유되는 개인의 일상부터 재밌는 동영상과 포털 사이트에서 쏟아내는 뉴스까지 현대인들은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살아갑니다.

정부와 공공기관에서도 인터넷 홈페이지와 소셜미디어, 앱 등을 통해 다양한 정보와 데이터를 제공합니다. 이런 정보 가운데는 생활에 유용한 팁도 꽤 많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알고 이용하는 시민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서울시에서도 홈페이지 등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시민이 알아두면 쓸모 있는 정보 세 가지를 꼽아봤습니다.

① 대중교통 통합분실물 센터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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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 여자화가, 베르트 모리조의 작품을 만나다

막장드라마로 소비된 여성화가, 당신이 놓친 것

[그림의 말들] 인상주의 여자화가, 베르트 모리조의 작품을 만나다

18.03.16 22:23l최종 업데이트 18.03.16 22:23l

 

아들과 함께 인상파 화가들의 전시에 갔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많았다. 아들이 묻는다. 

"인상주의가 뭐야?"
"음... 예를 들면, 녹색이 진한 나뭇잎도 강한 햇빛 아래에서는 투명한 흰색으로 보이기도 하고 핑크로 보이기도 하고 어떤 곳은 연두색으로 보이기도 하잖아. 빛에 따라 색채가 변하는 걸 보며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인상'을 포착해서 그린 그림을 인상주의 그림이라고 해. 사진처럼 똑같이 그리거나 추상적으로 그리는 그림이 아니고."

인상파의 대표주자인 세잔, 모네, 드가, 시슬레, 피사로, 르노아르 등 세기의 거장들 작품이 많았지만 내 눈을 사로잡는 건 베르트 모리조의 '접시꽃과 어린아이'라는 작품이다. 남자 화가들 사이 유일한 여자 화가. 그래서인지 색감이 다르다. 

한눈에 반하고야 마는 그림 속의 사랑스러운 아이는 그녀의 딸이다. 자식을 키워보면 알겠지만 요만할 때가 말도 배워서 쫑알쫑알 종달새처럼 재잘거리고 혼자서도 잘 뛰어다니고 세상 사랑스러울 때다. 돌이켜보면 이때의 존재만으로 평생의 효도를 다 하는 시기인 것 같다.

사랑은 힘이 세다
 

 마네가 그린 '베르트 모리조'(<제비꽃 다발을 든 베르트 모리조>)
▲  마네가 그린 '베르트 모리조'(<제비꽃 다발을 든 베르트 모리조>)
ⓒ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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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의 뮤즈이자 제자이고 연인이었던 베르트 모리조. 이미 결혼한 마네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가슴앓이를 하다가 엉뚱하게도 마네의 동생인 외젠 마네와 결혼한 여자. 

 

사랑하는 여인을 동생에게 보내야 하는 마네. 그렇게 마네의 가족이 되어 그의 옆에서 그의 아내를 질투하며 라도 그 옆에 있고 싶은  베르트 모리조. 서로를 향한 뜨거운 눈빛을 모를 리 없었던 동생 외젠 마네. 

이들은 평생 어떤 심정으로 살았을까. 아슬아슬 막장 드라마 같은 얘기지만 영화보다 더 극적인 인생이 어디 한둘이랴. 드라마나 영화도 현실을 떠나서 나오지 않는 법.  

그렇게 외젠 마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쥴리 마네. 마네와 베르트 모리조 사이에는 무수한 소문이 떠돌았지만 사랑은 사랑한 당사자들만 아는 이야기. 그들의 러브스토리는 너무나 많이 알려진데 반해 동생과 결혼 생활에 대한 얘기는 찾기 힘들다. 

대신 그녀는 남편과 딸 '쥴리 마네'를 모델로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금수저 집안에 태어나 그 시절에도 미술교육을 받아 화가가 되었고,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을 만큼 뛰어난 외모와 예술적 재능을 가진 그녀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사랑은 어떤 선택도 가능케 할 만큼 힘이 세다.

남성 화가들로만 즐비했던 시절, 유일하게 인상파 전시에 작품을 낸 여자 화가. 그것도 인상파 전시 총 8회 중 7번을 참가했다. 단 한 번 불참 이유도 아이 출산 때문인 걸 보면 얼마나 작품 활동을 왕성히 했는지, 얼마나 그림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는지 가늠이 된다. 나중에 인상파 화가들이 다른 화풍을 추구해서 떠날 때도 그녀는 자신의 화풍을 유지했으며 그녀만의 색채는 더욱더 발전했다.

착해지고 순수해지고 싶다
 

 베르트 모리조의 '접시꽃과 어린아이"
▲  베르트 모리조의 '접시꽃과 어린아이"
ⓒ 독일 쾰른 발라츠-리하르츠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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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그림은 어린 시절 장미넝쿨이 우거졌던 우리 집과 닮아있다. 작은 시골집 대문 위로 장미 넝쿨이 우거지고 그 아래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피어있었던 우리 집. 언니, 오빠가 학교에 가고 나면 나 혼자 남아 그 넝쿨 아래서 땅을 파기도 하고 온갖 벌레들을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다 잊고 있었는데 이 그림을 마주하자 그 옛날 집이 떠올랐다. 뭔가 가슴이 뭉클해지는 느낌. 어린 내게 무슨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는 집도 아니었는데. 추억이란 이런 건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소환하기만 해도 맘이 그림 속 빛처럼 일렁인다. 

눈부신 햇살 아래 아이의 볼이 환하다. 아이를 둘러싼 색색의 아름다운 꽃들도 아이를 빛나게 한다. 열려있는 대문 밖에서 시원한 바람 한 자락이 불어와 뜨거운 볕을 식혀줄 것 같다. 

낮은 담장 사이로 보이는 시골 마을, 그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이 뜬금없이 눈물겹다. 눈을 뗄 수가 없다. 장미넝쿨 대문 아래에서 놀고 있던 나를 바라보는 우리 엄마의 시선도 이처럼 따뜻했겠지. 이제 그 때의 엄마보다 훨씬 늙어버린 딸이 그 때의 어린 나를 바라본다. 

그림으로 힐링한다는 게 이런 건가 보다. 내 몸 속의 지치고 오염된 마음이 순간 정화된 듯하다. 막 착해지고 순수해지고 싶다.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아들의 한 마디. 

"인상파의 아버지 마네가 인상파라고 이름을 정한 거야?"
"아니, 프랑스 신문기자 루이 르루아(Louis Leroy)라는 사람이 낙선전에 출품한 모네의 그림 '해 뜨는 인상'을 보고 비꼬아서 그들을 인상파라고 기사에 썼는데 그게 이름이 되었대."

낙선전은 파리의 유명한 국선미술대회인 '살롱전'에 떨어진 화가들이 그 옆에서 전시를 열었는데 그게 낙선한 사람들의 전시라 '낙선전'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 그 전시가 인상파 화가들의 첫 번째 전시였다는 이야기. 사진기 발명이 화풍의 변화를 불러왔다는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전시를 보고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에 갔다. 18살이 되어 이미 덩치는 나보다 훨씬 큰  아이의 모습에서 '접시꽃과 어린아이' 모습이 보인다. 식당 유리창에 햇빛이 가득 들어오고 아이는 눈이 부셔 하며 메뉴판을 보고 있다. 

덩달아 눈이 부신 나는 '꽃밭의 어린 소녀'와 '메뉴판을 든 아들'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베르트 모리조가 바라봤던 시선처럼 나도 내 아이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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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정상회담을 위한 스웨덴에서의 숨가쁜 협상

북미정상회담을 위한 스웨덴에서의 숨가쁜 협상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8/03/17 [04:4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스웨덴이 특급경호에 총리와 외교장관이 총출동하여 최고 예우로 대하며 리용호 북 외무상과 숨가쁜 회담을 진행하고 있다.  스웨덴 정부는 회담 성과가 좋아 하루 더 협상을 진행하기로 했다.  사진은 리용호 외무상이 회담을 마치고 자성남 대사화 함께 밝은 얼굴로 건물을 나서고 있는 모습  © 설명글: 이창기 기자

 

▲ 스웨덴에서 회담을 마치고 나오는 북의 리용호 외무상과 자성남 유엔주재 대사 , 자성남 대사의 표정이 유독 밝았다. 뭔가 협상이 잘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 설명글: 이창기 기자

 

리용호 외무상의 스웨덴 스톡홀름 행보가 심상치 않다. 미국 백악관은 스웨덴에 외교간부를 보내지 않았다고 공식입장을 밝혔고 스웨덴 정부도 북미정상회담과 관련된 협상은 북미 당사자가 할 일이며 자신들은 중재자 역할을 하고 싶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리용호 외무상은 스웨덴의 스테판 뢰벤 총리와 면담을 했고 마르코트 발스트롬 외교장관과 회담을 15일 도착 당일 저녘부터 진행하였으며 16일에도 이어졌다. 뢰벤 총리는 16일 리용호 외무상 면담 후 독일 메르켈 총리와 정상회담을 진행했으며 그 후 기자회견에서 북미 사이의 중재역할을 할 의사를 피력했다. 이는 이번 리용호 외무상의 스웨덴 방문 목적이 북미정상회담에 관한 논의라고 인정한 것과 같다.

 

발스트롬 외교장관은 16일 회담을 마치고 기자회견에서 리용호 외무상과 회담 결과가 좋아 하루 논의를 연장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좀더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 것 같다. 아마 미국 측이 동석하지 않았더라도 미국과 전화로 협의하며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데 성과가 좋아 추가로 협의할 일들이 생긴 것이 아닌가 싶다.

 

16일 JTBC 뉴스룸 보도를 보면 스웨덴측과 협상을 하고 건물에서 나오는 리용호 외무상 곁에 자성남 유엔주재 대사가 밝은 표정으로 함께 얘기를 나누며 나오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어 주목을 끌었다.

자성남 대사의 주 활동무대는 유엔본부가 있는 미국 뉴욕이다. 이번 스웨덴 협상을 위해 미국에서 스웨덴으로 날아온 것이다. 자성남 대사가 날아올 정도면 미국측에서도 얼마든지 날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폼페오 외무장관 내정자가 스웨덴에 와 있을 수도 있다고 본다. 내정되었다는 보도는 나왔는데 종시 그의 얼굴을 미국 언론에서 볼 수가 없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스웨덴으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리용호 외무상과 함께 베이징 공항에 나타났던 최강일 북아메리카 부국장이 스웨덴행 비행기를 타지 않고 모처로 사라진 점이다. 언론들은 북중, 북미 협상을 진행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내놓고 있다. 실무협상을 위해 다른 경로로 이동하여 미국 측 실무진과 맞주앉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 SIPRI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를 넣어서 인터넷에서 검색한 결과, 모두 북 무기 수출과 관련된 이 연구소의 보고서를 중요한 근거로 보도하고 있다. 서방진영의 북무기 전문 연구소가 바로 SIPRI라고 볼 수 있다.     © 자주시보

 

그리고 16일 연합뉴스에서 보도에 따르면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에서 리용호 외무상과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고 한다.

비핵화와 군축문제 전문기관인 SIPRI는 스웨덴 정부에서 출자하여 운영되는 기관이기는 하지만 독자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연구소로써 2009년 포린 폴리시는 비미국 싱크탱크 3위로 선정했을 정도로 권위가 있는 연구소이다.

 

▲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 

 

특히 이 SIPRI는 2005년 발표한 보고서에서 북이 지난 1992년부터 2004년까지 러시아에 대전차 미사일 3250기와 휴대용 지대공 미사일 1250기를 판매한 것으로 조사 되었다고 발표하여 충격을 준 바 있다. 러시아도 탐낼 정도로 북 휴대용 미사일이 위력적이라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보고서에서는 북이 1991년에서 96년 사이에는 시리아에 스커드 C 미사일 150기를 수출했고, 1999년에는 같은 미사일을 리비아에 5기를 또 2001년부터 2002년까지는 예멘에 45기를 수출했을 뿐만 아니라 시리아와 리비아에서 북 미사일을 조립 생산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더불어 북이 핵 기술을 이전해준 것으로 알려진 파키스탄도 1996년과 97년 사이에 북한으로부터 2기의 로동1호 미사일을 수입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지적했다.

 

https://www.rfa.org/korean/in_focus/arms_trade-20050608.html

 

이런 자료를 수집할 수 있는 정보력을 가진 연구소이며 특히 북 군사력에 대한 추적을 지속적으로 해온 연구소이다. 이런 자료는 스웨덴이 아니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진영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보이다. 결국 스톡홀름연구소는 스웨덴 연구소라기 보다는 실질적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진영의 핵심 대북무기전문 연구소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연구소에서 북 리용호 외무상과 협의를 한다면 결국 북의 한반도 비핵화 의지가 얼마나 확고한 것인지를 주로 확인하고 싶어할 것이다. 비핵화 검증방법은 리용호 외무상의 전문분야가 아니라서 논의하기 어렵더라도 정치 외교적 측면에서 북이 얼마나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표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상의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최강일 부국장 협상탁에서는 방법까지도 논의될 수 있다고 본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의 협의 내용은 그대로 미국에게 통보될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협상에 미국의 전문가가 참여하고 안 하고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스톡홀름 연구소를 미국 연구소로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북의 입장에서는 대화를 나누기가 더 편하고 또 제3자에게 전하는 형식이기 때문에 미국에 직접 통보하는 것보다 더 확실하고 객관적 공증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벌써부터 북미정상회담을 위한 고위급들의 숨가쁜 외교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클린턴 대통령은 북미정상회담에 합의했다가 미국 지배세력들의 반발로 깨졌는데 이번엔 진행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세계사적인 격변의 대폭발 징후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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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빨간 거짓말쟁이 이명박’ 구속 외에 길은 없다

“저와 함께 일했던 많은 공직자들이 권력형 비리가 없었다”고 거짓말
 
임두만 | 2018-03-16 08:45:4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2018년 1월 17일, 전직 대통령 이명박은 당시 진행되고 있는 검찰수사에 대해 “최근 역사뒤집기와 보복 정치로 대한민국 근간이 흔들리는데 대해 참담함을 느낀다”면서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검찰수사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보수를 궤멸 시키고 또 이를 위한 정치공작이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정치보복이라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직접 성명서를 낭독하고 있다 © 신문고뉴스 편집부

이는 앞서 1월 13일 국정원 특활비 의혹으로 30년 집사로 불리던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이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은데 이어 당일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 실질심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대한 대항이었다. 즉 자신의 금고지기를 구속하겠다는 검찰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었던 셈이다.

이에 그날 이 전 대통령은 “저와 함께 일했던 이명박 정부 청와대와 공직자에 대한 최근 검찰수사는 처음부터 나를 목표로 하는 것이 분명하다”면서 “지금 수사를 받고 있는 우리 정부의 공직자들은 모두 국가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라고 변호했다.

이어 “저의 재임 중 일어난 모든 일의 최종책임은 저에게 있다”며 “더 이상 국가를 위해 헌신한 공직자들을 짜맞추기식 수사로 괴롭힐 것이 아니라, 나한테 물어달라는 게 저의 오늘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또 이에 앞서 이 담화에서 이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지난 5년 동안 저는 4대강 살리기와 자원외교, 제2 롯데월드 등 여러 건의 수사가 진행되면서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마는 저와 함께 일했던 많은 공직자들이 권력형 비리가 없었으므로 저는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이 말은 그의 말대로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의 대통령 재임 당시 그의 친형인 이상득, 형의 친구인 최시중, 이명박 자신의 친구 천신일, 왕차관 박영준, 문고리 김희중, 부인 김윤옥 사촌오빠 김재홍, 사촌언니 김옥희 등이 권력형 비리로 구속되어 사법처리를 받았다. 또 이들 외, 이명박과 가까운 권력형 비리사범은 세기도 힘들다.

김효재 전 정무수석, 은진수 전 감사위원, 신재민 전 문체부 차관, 추부길 전 홍보기획비서관, 김두우 전 홍보수석, 이영호 전 고용비서관, 장수만 전 방위사업청장…

현재도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30년 집사로 불렸던 김백준 전 총무기획관, 김진모 전 청와대 비서관, 다스관련 재산관리인으로 불리는 이병모 청계재단 사무국장, 차명재산을 관리하고 있다는 이영배 (주)금강 대표,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즉 이명박을 지근거리에서 모셨거나 대통령 만들기에 올인하고 한자리를 꿰찼던 사람들이지만 이들은 모두가 비리혐의로 단죄되어 감옥살이를 했거나 하고 있다. 그랬음에도 그는 역사상 가장 깨끗한 정부 운운하고 “저와 함께 일했던 많은 공직자들이 권력형 비리가 없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2개월이 채 안 된 3월 14일 새빨간 거짓말은 절정에 달한다.

이날 검찰에 소환된 이 전 대통령은 자신을 조사하는 검사 앞에서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고 잘못이 있다면 부하들의 것이며, 그 잘못한 부하들이 자신들의 죄를 경감받기 위해 대통령인 자신에게 떠넘긴 것이라는 투의 진술을 했다고 한다. 검찰을 취재하고 있는 기자들의 취재노트에 나타난 상황이 그렇다.

▲ 검찰 조사가 끝난 뒤 귀가를 위해 차에 오르는 이명박 전 대통령 © 인터넷언론인연대

검찰청에 출두, 14시간 조사와 6시간의 조서 검토, 그리고 쉬는 시간까지 21시간 정도를 검찰청에 머물렀던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자신이 받고 있는 뇌물수수와 횡령·배임, 조세포탈, 직권남용,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 등 20개 안팎의 혐의에 대한 조사에서 "전혀 모르는 일이고 설령 그런 일이 있었더라도 실무선에서 이뤄진 일"이라는 취지로 진술했다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한심하고 착잡하다. 이 전 대통령은 앞서 1월 17일 자신의 사무실에서 공개적으로 “저의 재임 중 일어난 모든 일의 최종책임은 저에게 있다”와 “더 이상 국가를 위해 헌신한 공직자들을 짜맞추기식 수사로 괴롭힐 것이 아니라, 나한테 물어 달라”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럼 이는 무엇이었는가?

최종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검찰이 불러서 물으니까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했다. 부하들이 진술을 했다니까 “그런 일이 있더라도 실무선에서 이뤄진 일”이란 답을 했다. 국가를 위해서 헌신한 공직자들이었다면서 60일도 안 되어서 그 ‘헌신한 공직자들’이 자기들이 잘못하고 그 잘못을 대통령에게 떠넘긴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무책임, 그런 무책임한 자가 ‘내가 책임질께’라고 허풍을 친 것인가?

소송비가 70억 원이라는데, 이를 무료로 해준 줄 알았다고 한 저 엉뚱한 배포, 한국 로펌도 아니고 미국의 로펌이 70억 원이란 거액의 소송비를 수수할 수 있는데 이를 무료로 해준 것으로 알았다고 한 것은 BBK를 설립했다고 공개 강연회에서 말하고 그 동영상 증거가 나와도 ‘그런 일 없다’고 발뺌한 것과 같다.

예측하건데 아마도 이명박을 한때라도 지근거리에서 보필했거나 그와 은원관계가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그들은 모두 진저리를 차고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쯤에서 우리는 측근비리가 자신의 책임으로 귀결됨에 따라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자신을 버려달라고 말했던 전직 대통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2009년 4월 7일, 검찰이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권양숙 여사와 연계된 뇌물수수 피의자로 체포하자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 ‘사람사는세상’에 “저와 제 주변의 돈 문제로 국민 여러분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 드리고 있습니다.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더욱이 지금껏 저를 신뢰하고 지지를 표해주신 분들께는 더욱 면목이 없습니다. 깊이 사과드립니다”라는 사과문을 냈다.

이후로 나오는 검찰발 소식은 노 전 대통령에게 더욱 참담했다. 대검 중수부를 통해 박연차 정상문 권양숙 통로로 10만 달러가 전해진 것, 이윽고 4월 12일, 뇌물 수수 혐의로 권양숙 여사가 검찰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또 같은 날 아들 노건호씨도 소환 조사를 받았다.

4월 22일, 노 전 대통령은 개인 홈페이지 ‘사람사는세상’을 폐쇄하고 ‘절필’을 선언하면서 “더 이상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미 민주주의, 진보, 정의, 이런 말을 할 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수렁에 함께 빠져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라는 글로 지지자들에게 “나를 버려라”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이 양심이다. 즉 양심이 작용하는 사람의 행동이다.

그러나 이명박에겐 이 같은 인간의 양심이 없다. 따라서 그에게 더 이상 전직 대통령으로의 삶을 살게 하면 안 된다. 그에게 구속 이외의 길이 없다. 검찰은 좌고우면할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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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준비위 “조직 단순화”...16일 첫회의

총괄간사에 조명균 장관, 의제분과장 천해성 차관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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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3.15  16:0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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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이 15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 구성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준비위원회는 정부와 청와대를 융합해 체계적이고 실질적으로 일을 추진하도록 했습니다. 2007년 정상회담과 비교하면 가볍고 빠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조직을 단순화했습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15일 오후 3시 청와대 춘추관 브리핑에서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는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이 위원장을, 조명균 통일부장관이 총괄간사를 맡는다”며 이같이 밝혔다.

오는 4월말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집에서 개최되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는 16일 오후 3시 청와대 여민1관 소회의실에서 첫 회의를 개최한다.

김의겸 대변인에 따르면,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는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이 위원장을, 조명균 통일부장관이 총괄간사를 맡고, 위원회 위원은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장하성 정책실장, 강경화 외교부장관, 송영무 국방부장관, 서훈 국정원장, 홍남기 국무조정실장으로 구성됐다.

또한 준비위원회 아래에는 3개의 분과를 두고, 의제분과 분과장은 천해성 통일부 차관, 소통·홍보분과 분과장은 윤영찬 국민소통수석, 운영지원분과 분과장은 김상균 국정원 2차장이 맡았다.

준비위원회와 3개 분과의 인적 구성을 보면, ​청와대와 통일부, 국정원이 주도하는 모양새다. 

김의겸 대변인은 “중요 사안을 결정할 준비위원회 전체회의는 주 1회 또는 격주 1회 개최된다”며 “실무 논의는 주 3~4회 열리는 분과장회의를 통해 진행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분과장 회의에는 준비위원장과 총괄간사, 그리고 3명의 분과장이 참여한다.

   
▲ 청와대가 배포한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추진체계’ 도표. [자료제공 - 청와대]

청와대가 배포한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추진체계’ 도표에는 별도의 ‘자문단’도 표시돼 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종교계를 비롯해서 2000년, 2007년 정상회담 참여했던 분들, 경험 있는 분들을 다양하게 구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고위관계자는 “2007년, 2000년 경험을 많이 참조했는데 그 때는 평양을 가는 거였다. 대규모단으로 꾸려졌고 여러 방면의 다양한 주제들을 가지고 대화했다”며 “이번에는 본질적인 문제를 중점적으로 논의하자 그래서 경제 쪽은 빠진 것이고 주로 외교, 안보 쪽을 중심으로 해서 슬림하게, 단순화시켰다”고 설명했다.

‘남북경협이 빠진 것은 남북경협이 크게 다뤄지지 않는다는 것느냐’는 질문에 “지금 그 문제가 같이 논의되기에는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고 답했다.

소통·홍보분과가 별도로 구성된 것에 대해서는 언론사들의 취재지원은 물론,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는, 그래서 외신들도 많이 온다고 한다.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전 두 차례 정상회담 준비위와 달리 실무단이 별도로 구성되지 않은데 대해 이 고위관계자는 “예전에 이원화됐던 게 이번에 훨씬 더 슬림하게 통폐합됐다고 보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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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 ‘두세 살 아이 턱뼈도’ 67년만에 처참한 모습 드러낸 충남 아산 피학살자들

충남 아산시 배방면 설화산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현장

구자환 기자 hanhit@vop.co.kr
발행 2018-03-16 08:03:39
수정 2018-03-16 08:0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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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자들의 증언이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15일 발굴 19일째를 맞은 충남 아산시 배방면 설화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현장에서는 약 50여구의 유해가 발굴되었다. 유해 중에는 2~3세 어린아이의 턱뼈가 나왔고, 20대 여성으로 보이는 유골과 쌍가락지, 은비녀, 어린아이의 장난감도 나왔다.

당시를 목격한 주민들은 1951년 1월 이곳으로 끌려간 사람들 70~80%가 여성이었고, 어린아이를 업은 여성도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증언으로 볼 때 아이를 업은 여성은 결혼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여성인 것으로 추정된다.

충남 아산시에서는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10월에서 1951년 1월, 서울수복과 1.4 후퇴시기 사이에 부역자로 지목당한 민간인들이 각 지역에서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학살됐다.

여성의 올림머리에 은비녀가 꽂힌채 발굴됐다. 머리카락 속에서는 귀후비개가 함께 나왔다. 귀후비개의 반대편 침은 음식물에 체했을 때 응급치료로 손톱위를 찌르는 용도로 사용됐다.
여성의 올림머리에 은비녀가 꽂힌채 발굴됐다. 머리카락 속에서는 귀후비개가 함께 나왔다. 귀후비개의 반대편 침은 음식물에 체했을 때 응급치료로 손톱위를 찌르는 용도로 사용됐다.ⓒ유해발굴단
한곳에서 서로 엉킨채 드러난 유골과 유품들. 여성의 골반뼈 위에 쌍가락지가 놓여 있고 그 위 신발위로 유골잔해가 드러났다. 정강이 뼈 위로는 어린아이의 두개골이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한곳에서 서로 엉킨채 드러난 유골과 유품들. 여성의 골반뼈 위에 쌍가락지가 놓여 있고 그 위 신발위로 유골잔해가 드러났다. 정강이 뼈 위로는 어린아이의 두개골이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유해발굴단
한 여성의 왼손에 끼워진 채 발굴된 은으로 된 쌍가락지.
한 여성의 왼손에 끼워진 채 발굴된 은으로 된 쌍가락지.ⓒ유해발굴팀
발굴된 피학살자들의 유골과 신발.
발굴된 피학살자들의 유골과 신발.ⓒ구자환 기자
총알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20대 여성의 골반뼈.
총알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20대 여성의 골반뼈.ⓒ구자환 기자
발굴한 유해를 세척하는 자원봉사자들
발굴한 유해를 세척하는 자원봉사자들ⓒ구자환 기자
유골과 함께 드러난 신발. 약병과 은가락지, 의류, 어린아이의 장난감, 탄피와 탄알, 불발탄, 고무줄, 단추 등의 유품이 발굴됐다.
유골과 함께 드러난 신발. 약병과 은가락지, 의류, 어린아이의 장난감, 탄피와 탄알, 불발탄, 고무줄, 단추 등의 유품이 발굴됐다.ⓒ구자환 기자
턱뼈와 치아만 남은 유골. 치아의 상태로 보아 20대로 추정된다.
턱뼈와 치아만 남은 유골. 치아의 상태로 보아 20대로 추정된다.ⓒ구자환 기자
흙더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피학살자 유해.
흙더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피학살자 유해.ⓒ구자환 기자
나무뿌리 밑에서 서로 엉긴채 드러난 유해들.
나무뿌리 밑에서 서로 엉긴채 드러난 유해들.ⓒ구자환 기자
흑더미속에서 세상밖으로 나오는 민간인피학살자.
흑더미속에서 세상밖으로 나오는 민간인피학살자.ⓒ구자환 기자
총알이 관통한 두개골의 모습. 당시 향토방위대는 5미터 이내의 거리에서 근접사격을 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총알이 관통한 두개골의 모습. 당시 향토방위대는 5미터 이내의 거리에서 근접사격을 가한 것으로 추정된다.ⓒ구자환 기자
불에 탄 흔적이 남은 유골. 당시 경찰과 반공청년단인 향토방위대는 민간인들을 학살한 후 시신을 불에 태워 증거를 은닉하려 했다.
불에 탄 흔적이 남은 유골. 당시 경찰과 반공청년단인 향토방위대는 민간인들을 학살한 후 시신을 불에 태워 증거를 은닉하려 했다.ⓒ구자환 기자
총알자국이 선명히 남은 유골.
총알자국이 선명히 남은 유골.ⓒ구자환 기자
충남 아산시 배방면 유해발굴현장. 비를 피하기 위해 현장을 천막으로 뒤덮고 발굴작업을 하고 있다.
충남 아산시 배방면 유해발굴현장. 비를 피하기 위해 현장을 천막으로 뒤덮고 발굴작업을 하고 있다.ⓒ구자환 기자
동굴 입구 오른쪽 벽면에서 겹겹이 쌓인 채 드러난 유해. 발굴팀이 붓으로 흙을 제거하고 있다.
동굴 입구 오른쪽 벽면에서 겹겹이 쌓인 채 드러난 유해. 발굴팀이 붓으로 흙을 제거하고 있다.ⓒ구자환 기자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모습으로 발굴된 유해. 두개골의 크기로 볼 때 20대 초반의 여성으로 추정된다.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모습으로 발굴된 유해. 두개골의 크기로 볼 때 20대 초반의 여성으로 추정된다.ⓒ구자환 기자
지각의 변화로 유해들이 원형을 보존하지 못하고 흩어진 채 발굴됐다.
지각의 변화로 유해들이 원형을 보존하지 못하고 흩어진 채 발굴됐다.ⓒ구자환 기자
수령이 40년 정도로 보이는 나무의 뿌리밑에서 대량의 유해가 발굴됐다.
수령이 40년 정도로 보이는 나무의 뿌리밑에서 대량의 유해가 발굴됐다.ⓒ구자환 기자
세척을 마친 유해를 건조하고 있다.
세척을 마친 유해를 건조하고 있다.ⓒ구자환 기자
발굴된 유해를 감식하는 박선주 유해발굴단장
발굴된 유해를 감식하는 박선주 유해발굴단장ⓒ구자환 기자
발굴된 유해들이 세척과정을 거쳐 현장에 보관되어 있다.
발굴된 유해들이 세척과정을 거쳐 현장에 보관되어 있다.ⓒ구자환 기자
2~3세의 아동의 턱뼈. 당시 목격자들은 아이를 업은 부녀자도 있었다는 증언이 사실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2~3세의 아동의 턱뼈. 당시 목격자들은 아이를 업은 부녀자도 있었다는 증언이 사실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구자환 기자
15일 67년만에 세상밖으로 나오는 피학살자.
15일 67년만에 세상밖으로 나오는 피학살자.ⓒ구자환 기자
피해자들이 신었던 신발과 불에 타서 검게 그을린 의류가 처참한 당시의 상황을 전해준다.
피해자들이 신었던 신발과 불에 타서 검게 그을린 의류가 처참한 당시의 상황을 전해준다.ⓒ구자환 기자
유해발굴팀이 현장에서 드러난 유골과 유품을 박선주 발굴단장에게 확인하고 있다.
유해발굴팀이 현장에서 드러난 유골과 유품을 박선주 발굴단장에게 확인하고 있다.ⓒ구자환 기자
20대로 보이는 치아와 턱벼, 골반뼈가 한 장소에서 서로 뒤엉켜있다.
20대로 보이는 치아와 턱벼, 골반뼈가 한 장소에서 서로 뒤엉켜있다.ⓒ구자환 기자
충남 아산 유해발굴 현장에서 드러난 쌍가락지와 탄피. 쌍가락지는  우리나라 전통혼례의 중요한 예물의 하나로 혼인을 한 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충남 아산 유해발굴 현장에서 드러난 쌍가락지와 탄피. 쌍가락지는 우리나라 전통혼례의 중요한 예물의 하나로 혼인을 한 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구자환 기자
충남 아산시 배방면 설화산 민간인피학살자 유해발굴 현장. 땅속 2미터 속으로 5층으로 겹겹히 쌓인 민간인의 유해가 발굴되고 있다.
충남 아산시 배방면 설화산 민간인피학살자 유해발굴 현장. 땅속 2미터 속으로 5층으로 겹겹히 쌓인 민간인의 유해가 발굴되고 있다.ⓒ구자환 기자
15일 충남 아산 배방면 유해발굴 현장. 동굴 입구 오른쪽 벽면에서  1950년 10월~1951년 1월 사이 인민군 점령기 부역했다는 이유로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유골이 서로 엉긴 모습으로 드러났다.
15일 충남 아산 배방면 유해발굴 현장. 동굴 입구 오른쪽 벽면에서 1950년 10월~1951년 1월 사이 인민군 점령기 부역했다는 이유로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유골이 서로 엉긴 모습으로 드러났다.ⓒ구자환 기자

 

 

 

 

15일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에 의해 발굴단 충남 아산 부역혐의 피학살자 유골
15일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에 의해 발굴단 충남 아산 부역혐의 피학살자 유골ⓒ구자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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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를 흥분시킨 비공개 선물이 혹시 푸에블로호?

트럼프를 흥분시킨 비공개 선물이 혹시 푸에블로호?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8/03/16 [09:38]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사진 1> 이 사진은 조선이 1968년 반미대결전에서 승리하여 전리품으로 빼앗은 미국 해군 전자정찰함 푸에블로호를 촬영한 것이다. 1968년부터 원산항에 있었던 이 전리품은 반미대결전 승리 30주년이 되는 1998년에 동해, 남해, 서해를 거쳐 평양의 대동강변 전시구역으로 이전되었고, 조국해방전쟁 승리 60주년을 맞은 2013년에 새로 개건된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보통강변 전시구역으로 다시 이전되었다. 위의 사진은 보통강변에 전시된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50년 전 세계전쟁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이 일어났을 때, 백악관은 경악실색하였고, 전 세계는 충격으로 들끓었다.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정의용 특사단장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미국 트럼프 대통령을 평양으로 초청하면서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용의 표명과 핵과 미사일 시험 중단을 선물로 주었다고 밝히면서 그 밖에도 트럼프 대통령을 대만족 시킨 선물이 하나 더 있었다고 밝혀 사람들에게 못견딜 정도의 궁금증을 유발하고 있다.

 

사실 그 선물을 이야기하자 더 이상 보고를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당장 평양에 가겠다.'며 북미정상회담을 그자리에서 수락하여 정의용 특사단장과 서훈 국정원장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한 동안 멍했다고 밝혔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4월에 북미정상회담을 하겠다고 밝혔는데 4월 말 남북정상회담이 이미 잡혀있다는 것을 이유로 난색을 표하자 5월로 잡았다는 것이다.

 

도대체 김정은 위원장이 어떤 적중한 선물을 골랐기에 이다지도 트럼프 대통령을 흥분시켰을까.

사람들을 만나보니 이에 대한 궁금증을 참을 수 없다는 반응들이 많았다.

 

본지에서 보기엔 '푸에블로호를 돌려주겠다'는 선물이거나 '미국이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겠다'는 내용이 아니었겠나 생각이 든다.

 

푸에블로호 반환은 미국이 끊임없이 요구해온 사안이었고 '미국의 대륙진출의 길'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절에 북에서 언론을 통해 은근히 발표한 적이 이는 내용이다.

 

북은 김일성,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기부터 미국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북의 협력관계에서는 일시적 제휴라는 것이 없다. 상대가 배신하지만 않는다면 한 번 맺은 인연 영원히 간다. 미국과 그런 친구가 되려면 친구의 약점이나 치부를 덮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니 굳이 푸에블로호를 북이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미국에게는 푸에블로호는 치욕의 상징이다. 미국이 포로들을 데려오기 위해 공식 사죄문을 쓴 것은 이 푸에블로호가 유일하다. 그것을 대동강에 전시해놓고 외국인 관광 기본 코스로 활용하고 있으니 정말 골치도 그런 골치는 없을 것이다. 지금은 조국해방전쟁기념관으로 옮겨놓아 외국 관광객들의 눈에 덜 뜨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외부인들도 가서 볼 수는 있다. 미국의 손톱에 콱 박힌 가시같은 푸에블로호를 빼주겠다는 선물은 분명 트럼프 대통령에게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미국 국민들에게 자신의 성과를 과시하기에도 이만한 선물은 흔치 않다. 중간선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대륙진출의 길도 미국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선물일 것이다.

미국의 경제가 어렵다. 살 길은 중국이 이제 막 개발을 다그치고 있는 동북3성과 러시아 극동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이다. 그 교두보가 북이다. 북미가 합작하면 나진선봉이니 원산특구에 별별 개발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라스베가스 저리 가라할 마이스단지도 개발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추측이다. 하도 사람들이 궁금해 하기에 한 번 써 본다. 

분명한 점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미국의 마음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트럼프 대통령을 흥분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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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서 선물받은 '북한 라이터', 곧 보답할 수 있을까?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8/03/16 11:14
  • 수정일
    2018/03/16 11:1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내가 만난 보통의 북한 사람들... 고조되는 남북 평화 분위기, 민간교류를 준비하며

18.03.15 22:32l최종 업데이트 18.03.15 22:32l

 

남북정상회담과 함께 정상 간에 설치될 '핫라인'이 화제다. 이제 두 정상이 수시로 전화할 수 있는 시대가 찾아올 것이다. 우리 사무실에도 평양과 서울을 연결하는 직통전화가 놓였던 때가 있었다. 2005년 평양답사를 주관하던 때였다. 

10월 한 달간 무려 3847명이 1박 2일 평양 여행을 다녀왔다. 서울-평양 직항기가 매일 오고 갔다. 평양에 임시 사무소를 차리고, 서울 사무실과 직통 전화를 설치했다. 전화가 처음 울리고 "네 여기는 평양입니다"라는 소리가 들리던 순간 사무실 사람들은 환호했다고 한다. 

그런 날들이 있었다. 대학생들은 금강산으로 MT를 가고, 미대생들은 금강산 스케치 여행을 다녀와 전시회를 열었다. 우리 단체 대학생겨레하나는 금강산에서 창립대회를 열기도 했다. 학생들은 물론 여성, 농민, 노동자 등 수많은 사람들이 수시 때때로 금강산, 개성, 평양은 물론 서울 등 곳곳에서 만났다. 
 

 평양 직항 전세기 안에서
▲  평양 직항 전세기 안에서
ⓒ 겨레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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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대학생들의 금강산 통일새터 모습
▲  2008년 대학생들의 금강산 통일새터 모습
ⓒ 겨레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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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역사학자들이 '독도' 토론회를 하던 때

얼마 전 한반도기에 '독도'가 빠졌다는 이유로 평창 패럴림픽 남북공동입장이 무산됐다. 북측 관계자는 "자국 개최 대회에서 정치적 이유로 독도를 표기하지 못하는 것을 수용할 수 없다. 우리의 국토를 표기하지 못하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국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조심스러웠을 패럴림픽 조직위의 입장도 있겠지만, 북측 관계자의 말에 손들어주고 싶은 것이 국민들 심정이 아닐까. 평화올림픽을 노골적으로 반대했던 아베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에 남북이 함께 힘을 모으던 때가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만남과 연대가 있었고, 2008년 남북 역사학자들은 독도 토론회도 열었다. 민족의 역사를 똑바로 기억하고 세우는 일에 남북이 힘을 합치는 것, 당연하면서도 참 근사한 일 아닌가. 
 

 남북 역사학자들이 함께 만들었던 독도 토론회
▲  남북 역사학자들이 함께 만들었던 독도 토론회
ⓒ 겨레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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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작년 용산역 앞에 세워진 일제 강제노역 노동자상의 뜻을 이어 노동자들은 평양에도 강제노역 노동자상을 세울 예정이다. 강제노역과 관련한 남북 노동자들의 토론회, 그리고 피해자 증언대회 등도 구상하고 있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을 두고 일본이 '재팬 패싱'을 우려한다고 한다. 남북이 힘을 합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주는 단면이다.

북측 사람에게 받은 '고향' 라이터

그러나 남북이 힘을 합치고 또 더 큰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들도 있다. 아직까지 남북의 만남은 조심스럽고, 또 경계가 공존한다. 

지난 평창올림픽에 참가했던 '남북공동응원단' 중 한 명은 '북한 라이터'를 선물 받았던 적이 있다. 경기장 밖 흡연 공간에서 우연히 북측 선수단 관계자들과 함께하게 됐고, 불을 붙이던 북측 사람에게 라이터를 빌리게 된 것이다. 

그 응원단은 라이터를 돌려주려다, 순간 이것도 기념이다 싶어 "이거 저 주시면 안 되나요?"라고 물었다. 북측 관계자는 흔쾌히 허락했다고 한다. 그 라이터에는 '고향'이라는 상호가 적혀있다. '내고향담배공장'에서 같이 제작한듯했다. 구경한 사람들은 너도나도 라이터를 켜봤는데, 기대보다도 품질이 좋았다는 후문이다.
 

 북측 선수단 관계자에게 받은 라이터 '고향'
▲  북측 선수단 관계자에게 받은 라이터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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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측 선수단 관계자에게 받은 라이터
▲  북측 선수단 관계자에게 받은 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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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을 받은 응원단도 답례로 뭐라도 건네고 싶어 주머니를 뒤져보게 되었다. 그때 남측 관계자(국정원으로 추정되는, 응원단과 늘 함께 다니는 사람들)가 옆에서 손사래를 치더란다. "안 주셔도 된다"면서.

평창올림픽 현장, 북측응원단 주변에서는 늘 이렇게 '아슬아슬'한 경계선들이 그어져 있었다. 응원단을 에워싼 관계자들은 몰려들어 구경하는 시민들을 그냥 바라보다가, 누군가 말을 건네면 슬그머니 나타나 시야를 가로막았다. 이날 라이터를 선물로 받는 것까지는 지켜봤지만 답례 선물은 주지 말라고 한 것은 그 관계자의 '경계선'이었던 셈이다. 

평창올림픽에서 '평양사람'과 인사하다 벌어진 일

평창올림픽에서 나는 '아는 평양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지난 2015년 평양에 방문했을 때 만났던 북측 관계자가 응원단과 함께 평창을 찾은 것이다(내가 일하는 겨레하나는 '남북교류협력단체'로 북측 파트너 민족화해협의회와 함께 2004년부터 꾸준히 교류협력사업을 진행해왔다. 2015년 12월 2일~5일 실무협의차 평양을 방문했다).

나도 그랬지만, 그분도 나를 만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놀라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지만, 반가움의 대화가 이어지지는 못했다. 눈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 반가워한다는 걸 확인한 게 전부였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마주쳤는데 그냥 지나쳤다면 "아까 제대로 인사도 못했네요. 다음에 한번 봐요"라고 문자라도 보내면 될 텐데, 그럴 수가 없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만나러 가기는커녕 연락할 수도 없다. '특수한' 남북관계, 분단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평창올림픽 경기 중에 또 이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제대로 인사하기는 어려웠다. 한번은 경기 응원이 끝나고 셔틀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북측 응원단이 우리 옆을 지나갔다. 다들 "반갑습니다"라고 인사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아는 얼굴'을 확인한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마침 나를 알아본 그분도 손을 내밀며 '하이파이브'를 해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찰나, 내 손에 부딪힌 건 검은 장갑의 다른 손이었다. 옆에 있던 다른 관계자가 자기 손을 끼워 가로막은 것이다. 

응원단과 인사를 하는 것은 괜찮지만 하이파이브를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을까? 그 관계자가 그 짧은 순간 자기 손을 내밀면서까지 가로막았던 것은 어떤 경계심의 발로였을까. 

"머릿속의 38선을 넘어야" 다양한 민간교류를 준비하며

2000년 남북정상회담으로 '북한에도 사람이 살고 있을까?'란 두려움이 단번에 깨졌다. TV로 생중계된 평양의 모습에 사람들은 충격과 감동을 동시에 받았다. 그 이후 남북관계는 급물살을 타고 발전했다. 

이제 세 번째 정상회담을 앞두고 '정례적인' 정상회담까지 거론되고 있다. 남북 관계의 정상화가 기대되는 시점이다. 김연철 교수는 한겨레 칼럼 <한반도의 새로운 상상력>(2018.03.11)에서 이렇게 말했다.
 

"2018년 봄 역사의 기차가 굽이를 돈다. '시대착오'는 튕겨져 나갈 것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담대한 상상력이다. 머릿속의 38선을 넘을 때가 왔다."


만남이 일상이 될 때, 남북 관계도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남과 북의 사람들의 만남, '민간교류'를 추진한다. 

겨레하나는 2015년 합의했지만 이어지지 못한 <남북 대학생 역사유적 답사>를 추진할 예정이다. 우체국 노동자들은 우편 교류를, 철도노동자들은 철도를 잇는 꿈을 꾸고 있다. 택배노동자들은 북한에도 택배 노동자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있을지 궁금해 하며, 마트노동자들은 북한 백화점 서비스 노동자들과 만나고 싶어 한다. 학생들은 마식령 스키장에서의 야영과 캠프, 등산 동호회에서는 백두산 트레킹을 꿈꾸기도 한다.

'민간교류'는 사람들의 만남이다. 같은 사람이라는 것, 같은 말을 쓴다는 것 등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들은 북측 사람들을 만나 '현실'과 '경험'이 된다. 이렇게 직접 만나야만 넘을 수 있는 우리 안의 벽들도 있다.
 

2015년 평양에서 실무협의차 방문했던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 2015년 평양에서 실무협의차 방문했던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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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짐 대신 '만남'이 익숙해지기를 기대하며

2015년 평양에 다녀와 주변 사람들과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사람들이 제일 신기해 한 것은 북한에서도 스마트폰을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한번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럼 북한 사람들 휴대폰에는 뭐가 들어 있을까요?"

정치 구호? 일정표? 등등 많은 답들이 나온다. 그런데 내가 경험한 건 이렇다. "아이들이 주말마다 물놀이장에 가자고 보챈다"며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보여주던 사람, 물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의 모습, 가족사진. 

나는 평양에 아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들이 나를 '서울의 아는 사람'이라고 여겨준다면 더 좋겠다. 남북에 서로 '아는 사람'이 많이 생길 때, 우리의 통일은 성큼 가까워지지 않을까. 남북이 힘을 합쳐 열어내고 있는 길을 더 많은 사람이 오가며 큰길로 넓히는 일. 그래서 다시는 끊기지 않을 튼튼한 길로 만들어내는 것. 우리가 '민간 교류'로 만들고 싶은 통일의 과정이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전쟁을 걱정했던 한반도는, 이제 평화의 봄을 맞이하고 있다. 무엇보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남북 정상의 결단이 있었다. 

남북정상회담을 환영하며, 남북의 힘으로 열어내고 있는 평화의 길, 남북관계 발전의 길이 다시는 되돌려지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남북 간에 헤어짐 대신 '만남'이 익숙해지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우리가, 시민들이 그 길에 함께 할 것이다. 
 

 시민들은 남북정상회담을 환영하고 응원한다
▲  시민들은 남북정상회담을 환영하고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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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우리말 과학·문학책 지원 타진해왔다”

[단독]“북, 우리말 과학·문학책 지원 타진해왔다”

김재중 기자 hermes@kyunghyang.com

입력 : 2018.03.15 06:00:03 수정 : 2018.03.15 09:24:20
 

ㆍ김홍걸 민화협 상임의장 밝혀
ㆍ한글에 문학서적까지 이례적
ㆍ민간 교류·협력 물꼬 ‘청신호’

[단독]“북, 우리말 과학·문학책 지원 타진해왔다”

북한이 최근 통일운동단체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측에 우리말로 된 과학서적은 물론 문학서적 등을 보내줄 수 있는지 물은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 등 올해 들어 급물살을 타고 있는 남북관계 복원 기류와 맞물려 민간의 대북 지원 및 교류·협력의 물꼬가 트여가는 모양새이다.

김홍걸 민화협 대표상임의장(55·사진)은 14일 경향신문과 통화하면서 “최근 북측 인사가 우리 측 인사를 만나 책을 지원받을 수 있는지 물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북측이 제공받고 싶다는 의향을 밝힌 책은 주로 우리말로 된 과학 분야 서적이며, 문학서적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한 것으로 전해졌다. 

과거 북한은 남한의 책 제공에 대해 한글 서적은 거부하고 영어 등 외국어 서적만 받겠다고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번에는 한글 서적도 좋다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사상통제가 엄격한 북한이 남측 문학서적도 받을 수 있다고 한 것은 이례적이다.

김 대표상임의장은 “아직 북측에서 정식으로 요청을 한 것은 아니어서 어떤 결정을 내리진 않았고 내부적으로 검토만 하는 단계”라고 말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동안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지난해까지 정부 당국은 물론이고 민간 차원의 남북 교류·협력, 인도적 지원도 완전히 끊긴 상태였다. 

2010년 천안함 사건 이후 남한 정부가 발표한 ‘5·24조치’는 남북 교류·협력을 극도로 제한했고, 북측도 이에 맞서 남측과 해오던 각종 교류·협력사업을 중단시켰다. 특히 북한은 국제기구나 해외 민간단체의 지원은 받아들이면서도 남측 민간단체의 지원이나 교류·협력 제안은 거부해왔다.

하지만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1월 신년사를 통해 적극적인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천명함으로써 기존 입장에 변화가 있을 것이란 전망이 많았다. 


통일부 당국자는 “남북한 민간 차원의 인도적 지원 및 교류·협력에 관한 의사소통이 전보다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면서도 “민간인 방북이나 물자 반출이 성사된 것은 아직 한 건도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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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3150600035&code=910303#csidx6fc313cc2a0850fafc8da0d6155c0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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