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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 공부하기2: 창조적 혁명 (고명섭서평+3편)

해방 위한 창조적 혁명을 꿈꿔라 / 고명섭 기자   

 

영국의 대표적인 진보 출판사 ‘버소’에서 2007년 펴낸 ‘레볼루션스’ 시리즈 가운데 다섯 종이 한꺼번에 번역돼 나왔다. <마오쩌둥-모순론·실천론> <로베스피에르-덕치와 공포정치> <호치민-식민주의를 타도하라> <예수-가스펠> <트로츠키-테러리즘과 공산주의>는 이 시리즈가 제목 그대로 ‘혁명가들의 말과 글’을 텍스트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프레시안북은 이 책들에 이어 올해 안에 나머지 다섯 종, <피델 카스트로> <토머스 제퍼슨> <시몬 볼리바르> <토머스 페인> <마르크스>를 펴낼 예정이다.

 
〈마오쩌둥-실천론·모순론〉마오쩌둥 지음·슬라보예 지젝 서문·노승영 옮김

〈로베스피에르-덕치와 공포정치〉로베스피에르 지음·슬라보예 지젝 서문·배기현 옮김

〈호치민-식민주의를 타도하라〉호치민 지음·월든 벨로 서문·배기현 옮김

〈예수-가스펠〉테리 이글턴 서문, 대한성서공회·김율희 옮김

〈트로츠키-테러리즘과 공산주의〉레온 트로츠키 지음·슬라보예 지젝 서문·노승영 옮김 (프레시안북· 각 1만3000원)

 

이 시리즈는 원텍스트 앞에 저명한 지식인들의 긴 서문이 붙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오늘날 이 오래된 글들이 왜 다시 읽혀야 하는지 소개하는 글이다. 이 글들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세계 철학계의 스타 슬라보예 지젝이 쓴 서문들이다. 지젝은 지난 200년의 근대 혁명의 인격적 대리자라 할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레온 트로츠키, 마오쩌둥 세 사람을 재해석함으로써 이 시리즈의 근본 의도를 도드라지게 보여주고 있다. 시리즈가 발간된 2007년도면,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결코 무너지지 않을 철옹성처럼 세계를 지배하고, 반자본주의적 혁명 열정은 주눅이 들어 ‘제3의 길’ 따위 패배적 타협책에 안주하던 때다. 그런 상황은 본질적으로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이런 전망 상실의 시대에 지젝은 혁명을 재사유하자고 이야기한다.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지젝이 혁명을 재사유하는 방식에 있다. 로베스피에르·트로츠키·마오쩌둥의 텍스트들이 보여주는 대로 지젝은 이들의 주장과 실천에서 ‘독재’와 ‘공포’를 사유의 중심으로 삼는다. 오랫동안 진보파들이 외면하고 회피했던 문제를 논의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지젝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지 않고는 혁명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는 듯하다.

 

지젝의 문제의식은 앞서 그가 편집하고 긴 해제를 단 레닌의 텍스트(<지젝이 만난 레닌>)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 텍스트에서 지젝은 레닌을 통해 러시아혁명을 다시 사유하자며 이렇게 말한다. “레닌을 반복한다는 것은 레닌으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레닌을 되풀이하는 것은 ‘레닌이 죽었다’는 것, 그의 특수한 해법이 실패했다는 것, 그러나 그 안에 구해낼 가치가 있는 유토피아적 불꽃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로베스피에르·트로츠키·마오쩌둥은 레닌의 기원이고 변주이며 전환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세 혁명가를 다시 사유한다는 것은 이들의 실패한 해법 안에 유토피아적 불꽃이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시인하고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드는 일이 된다.

 

지젝이 해석하는 로베스피에르는 근대 정치혁명의 출발이자 원형이다. 근대의 거의 모든 급진적 혁명은 로베스피에르가 이끌었던 자코뱅파의 혁명 원리를 이어받았다. 말하자면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주의 공포정치·독재정치의 기원적 모델을 제공한 사람이다. 자코뱅주의야말로 근대 혁명의 핵심 인자였던 셈이다. 여기서 지젝은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1793년 없는 1789년’, 다시 말해 자코뱅의 공포정치가 없는 프랑스 혁명을 옹호하는 데 대해, ‘카페인이 제거된 커피’를 옹호하는 것과 같은 주장이라고 일축한다. 로베스피에르는 온건파 당통을 두고 ‘혁명 없는 혁명’을 원하는 사람이라고 비판했는데, 지젝이 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하는 대목도 같은 맥락이다. 로베스피에르는 공포를 혁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덕이 없는 공포는 재난을 부르고, 공포가 없는 덕은 무력합니다. 공포는 신속하고 엄격하고 강직한 정의의 다른 말입니다.” 로베스피에르 연설의 특징은 ‘상반된 것들의 역설적 일체화’에 있다. “인류의 압제자를 응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비로운 일이요, 그들을 용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야만스러운 일입니다.”

 

문제는 혁명의 본질에 들어 있는 이 ‘공포’(테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다. 지젝은 공포가 정치적 해방에 필수요소로 깃들어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코뱅파가 한없이 과격해지고 극단화한 데는 어떤 무능력이 깔려 있었다고 진단한다. 다시 말해, 사적 소유의 철폐와 같은 경제적 차원의 평등을 실현할 수 없었던 이 부르주아 혁명가들이 그 문제를 미봉하고 정치적 차원에서 정의를 실현해보려 몸부림치다 나타난 결과가 대공포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로베스피에르를 겨냥해 ‘선한 테러리스트’, ‘덕을 집행하는 악마’라고 규정한다. 그런 식의 규정은 트로츠키와 마오쩌둥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이런 규정은 냉소적이기만 한 것일 뿐 자유와 해방에 대한 신념은 결여한 것이어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지젝은 말한다.

 

지젝은 철학자 헤겔이 <역사철학 강의>에서 프랑스혁명을 두고 했던 발언이야말로 진실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프랑스혁명은) 영광스러운 정신적 여명이다. 사고하는 존재가 모두 이 시대의 환희를 나누었다. 고귀한 감정이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고 정신적 열정이 전 세계를 흥분시켰다. 마치 신과 세상이 처음으로 화해한 듯했다.” 헤겔의 이런 평가는 러시아 10월혁명과 이후 중국혁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지젝은 말한다. 그는 근대의 주요한 급진 혁명들이 공포와 독재라는 본질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본질을 단순히 부정해야 할 대상이 아닌 헤겔적 의미에서 ‘지양’해야 할 대상으로 이해한다. 그 문제에 담긴 해방적·창조적 내용을 보존하되 거기에 스며든 독성은 씻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이 다소 추상적인 얼버무림으로 들리지만, 지젝의 강조점은 혁명을 상상하고 실천하기를 두려워해서는 해방은 오지 않는다는 지점에 놓여 있다. 두려움이야말로 상상력의 적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고명섭 기자/한겨레 2009-01-30 오후 09:33; [관련기사] 지젝 “해체된 저항주체를 되살려라”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3606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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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지젝에 별로 관심과 애정을 갖지 않았었는데, 고명섭의 이 서평을 읽고나니 왠지모를 친근감이 든다. 그래서 '혁명과 지젝'으로 검색을 해봤고, 나름대로 유익하다고 여겨지는 항목 몇 개를 옮겨온다. 검색에 나오는 대부분의 것은 영어항목이지만, 그쪽 분위기를 내가 잘 모르기에 불어로 된 것 중에서 믿을만하다고 여겨지는 몇 항목만 골랐다.

 

[1/3] http://ihrf.univ-paris1.fr/spip.php?article217 [<로베스삐에르, 덕과 공포사이>에 대한 소개. 서평-->공부1 참조]

Slavoj Zizek, Robespierre : entre vertu et Terreur, 2008.

La conversion des pays communistes à l’économie de marché a précipité la disparition de l’horizon révolutionnaire qui avait nourri en Occident deux cents ans de vie politique. La vertueuse Terreur de Robespierre est remisée aujourd’hui, aux côtés de la dictature du prolétariat, au cimetière des paradigmes monstrueux d’une époque révolue. Faut-il toutefois se résoudre à ce que la démocratie ne soit qu’une collection d’individus, unis par les seules valeurs marchandes ? La capacité de prendre des décisions collectives pour infléchir le cours des choses a-t-elle été anéantie avec la foi dans la Vérité, qu’incarna un temps Robespierre l’Incorruptible ? Ce sont ces contradictions de la démocratie moderne, égarée entre rêve de pureté et volonté d’ordre, entre volonté d’efficacité et tentation d’exclusion, qu’explore Slavoj Zizek dans ce texte sur la violence divine de la Révolution. Et le paradoxe qu’il défend ici, avec ce sens de l’analogie qui l’a rendu célèbre, c’est qu’il appartient peut-être au solitaire Robespierre de réapprendre au citoyen désabusé d’aujourd’hui les vertus de la décision et de la responsabilité collectives.
LE MONDE, 7 février 2008 // "La réalité (souvent déplorable) de la Terreur révolutionnaire doit-elle nous conduire à rejeter l’idée même de la Terreur ? Ou existe-t-il un moyen de la répéter (...), de sauver son contenu virtuel de sa réalisation ?" Au temps de la "révolution décaféinée", signe de la victoire de l’historiographie libérale, la radicalité du discours de Robespierre semble anachronique. Pourtant, le philosophe Slavoj Zizek plaide ici pour une réappropriation de son message, dans le but de réinventer une "terreur émancipatrice". Il présente dans ce volume un recueil savamment choisi de ses discours favoris. Au risque de faire un portrait légèrement angélique de l’Incorruptible. (Jérôme Gautheret)

핵심어(밑줄친 부분): 로베스삐에르의 덕의 공포, 혁명의 신성한 폭력, 순수성에의 꿈과 질서에의 의지 사이, 실효성의 의지와 배척의 기도(실행의도) 사이, 해방적 공포,

 

* Philosophe et psychanalyste, Slavoj Zizek est né à Ljubljana en 1949 (Slovénie). Professeur invité au département de psychanalyse de l’université Paris-VIII, il enseigne dans plusieurs universités américaines prestigieuses dont Columbia et Princeton. Il est également président fondateur de la société pour la psychanalyse théorique de Ljubljana. Il a publié, entre autres : [아래에 뽑힌 지젝의 저작들이 대표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위-아래 두 곳에서 추천한 것들을 묶었다.]

Essai sur Schelling : le reste qui n'éclôt jamais (L'Harmattan, 1997),

Vous avez dit totalitarisme ? Cinq interventions sur les (més)usages d'une notion (Amsterdam, 2004),

La Subjectivité à venir : essais critiques sur la voix obscène (Flammarion, coll. " Champs ", 2006),

La Marionnette et le nain. Le christianisme entre perversion et subversion (Le Seuil, 2006),

Le Sujet qui fâche (Flammarion, 2007),

Fragile absolu. Pourquoi l'héritage chrétien vaut-il d'être défendu ? (Flammarion, 2008).

 

 

[2/3] 지젝과 바디우에 관한 좀 긴 논문. 마지막 4번(임의번호) 항의 '그들의 한계'가 흥미로울 듯. 그리고 저자가 주석의 많은 부분에 친절하게도 관련자료 링크를 걸어둬서 유익. 출처: http://quefaire.lautre.net/articles/09zizekbadiou.html  

 

Žižek et Badiou : deux philosophes radicaux de l'universalisme

par Félix Boggio (Revue Que Faire ? - numéro 9)

 

De quoi Sarkozy est-il le nom ? est paru en octobre 2007. Les éditions Lignes avaient au départ mis en vente 3 000 exemplaires du petit livre du philosophe et professeur à l'ENS Alain Badiou. En ce début d'année 2008, on annonçait pas moins de 23 000 ventes. Il s'agit d'un succès inattendu, car personne n'aurait imaginé qu'un jour Badiou puisse toucher une fraction du « grand public ». Cette surprise n'a pas manqué d'effrayer le monde médiatique, car – nous le verrons plus loin – la philosophie d'Alain Badiou est d'une radicalité inhabituelle pour les journalistes des « grands » médias.

En janvier, février et mars dernier, trois livres du philosophe slovène Slavoj Žižek sont parus en français. Žižek, lui-même ami de Badiou, est très populaire dans le monde anglo-saxon. On le surnomme « le roi de la pop philosophie ».

Le 16 février 2008, Libération a consacré aux deux philosophes un dossier spécial : « Ces intellos qui rejettent la démocratie ». L'éditorial de Laurent Joffrin avait pour titre « Egarement ». Fustigeant le « parfum rance de sacristie marxiste » dans la critique de la démocratie formelle, il enjoignait courageusement les démocrates à « réinventer l'idée même de progrès » afin de conjurer l'hydre des « utopies de fer et de sang ».

 

1/ Matérialisme démocratique vs. Dialectique matérialiste

Badiou et Žižek ont beaucoup d'affinités théoriques, et leur émergence, de succès de librairies en anathèmes médiatiques, aide à mettre en évidence les problèmes que devront affronter les luttes sociales à venir. Alors que le cycle mouvementiste de la seconde moitié des années 90 marquait le retour d'une volonté de changer le monde, de se battre contre l'offensive actuelle du capitalisme que l'on appelle « néolibéralisme », il semble s'essouffler aujourd'hui : mis à part dans certains pays d'Amérique Latine, les débouchés politiques de ces résistances sont faibles. Notre courant a souligné de nombreuses fois que les tentatives d'éviter les débats politiques au sein des mouvements sociaux ne pouvaient que renforcer le réformisme. Pourtant, des milieux militants restent encore aujourd'hui hostiles à la forme du parti de classe : d'une part, cette forme est associée à la verticalité outrancière des partis staliniens ; d'autre part, la classe ouvrière est considérée comme tellement hétérogène aujourd'hui que l'on préfère se référer au concept de « multitude » d'acteurs singuliers. Au passage, on perd la notion stratégique de « lutte de classe » au profit d'un « kaléidoscope des appartenances identitaires ou communautaires » comme le souligne Daniel Bensaïd(1) à propos des théories de Laclau et Mouffe.

(1) Daniel Bensaïd, Front Unique et Hégémonie @-인터넷 자료. 주소는 미주 참조.

 

Dans ce débat, Alain Badiou a une position ambiguë : s'il pense que la forme du parti de classe est largement périmée(2), sa théorie tranche néanmoins avec les idées relativistes véhiculées par le mouvementisme libertaire. En effet, dans son ouvrage Logiques des mondes, Badiou oppose sa « dialectique matérialiste » à l'hégémonie du « matérialisme démocratique ». Le matérialisme démocratique soutient qu'« il n'y a que des corps et des langages ». La dialectique matérialiste affirme, elle : « il n'y a que des corps et des langages, sinon qu'il y a des vérités. »(3) Le philosophe estime que le matérialisme démocratique réduit l'humanité à l'animalité : l'animal-humain serait un être fini ayant pour mode d'existence la poursuite de ses intérêts propres. Il existerait donc une diversité d'individus essentiellement séparés. Cette diversité « kaléïdoscopique » se manifeste au niveau de la pluralité des langages dont l'état démocratique reconnaît l'égalité : Badiou entend ici l'ensemble des cultures, des coutumes et des mœurs.

Ce qui intéresse le philosophe n'est pas cette diversité, mais ce qui y fait exception. Il déclare que des vérités éternelles existent, dans quatre domaines : l'art, l'amour, la science et la politique. L'objet de son oeuvre est de montrer comment ces vérités sont expérimentées par des sujets dans des présents (ou « mondes ») disjoints, sans que ces vérités ne perdent pour autant leur caractère universel. L'origine des « vérités » a été présentée au sein de l'Être et l'événement, premier ouvrage de la série dont Logiques de mondes est le deuxième opus.

(2) @. (3) Alain Badiou, Logiques des mondes, p.12, Seuil.

 

Nous n'exposerons pas ici l'ontologie (la pensée de l'être en tant qu'être) de Badiou dans un souci de clarté et de concision. Retenons simplement le caractère exceptionnel des vérités : ce qui fonde leur être, c'est le surgissement d'un « site » singulier. En règle générale, une société compte tous les individus qui la composent : chacun trouve sa représentation, sa place dans l'État et son administration : catégories socio-professionnelles, nationalités, places dans l'échelle de revenus, etc... On pose que cette représentation fixe l'existence des éléments d'un ensemble. Ce qui fait exception à cette loi, c'est ce qui n'a aucune existence, ce qui n'est pas compté par l'État (les travailleurs sans papiers par exemple). Cette exception, l'inexistant, est appelé « site » quand l'inexistant acquiert un degré d'existence maximal : « nous ne sommes rien, soyons Tout. » Dans Logique des mondes, Badiou développe longuement l'exemple de la Commune de Paris, où les ouvriers parisiens affirment l'existence d'un pouvoir ouvrier, au moment même où le pouvoir officiel (bourgeois) cherche à les désarmer. Ce site prend la dimension d'un « événement », car les sujets qui ont fait accéder l'inexistant à un degré d'existence maximal effectuent de manière organisée les conséquences de ce surgissement : essayer de faire durer coûte que coûte le nouveau pouvoir. Les sujets font l'expérimentation d'une vérité éternelle : celle de l'égalité. L'égalité n'est plus un idéal à atteindre dans le cadre du progrès, mais le point de départ d'une pratique sociale.

Ainsi, pour le philosophe, toute politique émancipatrice véritable consiste en la déclaration d'un principe égalitaire (universel) en un site singulier – soustrait à la représentation (à l'état) – et en l'effectuation des conséquences de cette déclaration. Ce site singulier est ce que Badiou appelle « site événementiel ». Il est une condition de possibilité d'un « événement ». Le propre de l'événement est de disparaître aussitôt qu'il apparaît. Si bien que sa seule trace subsiste dans la déclaration partisane d'un sujet, qu'un événement a eu lieu : c'est la « décision d'un indécidable ».(4)

(4) Cf. Alain Badiou, Huit thèses sur l'universel @. ["영원한 진리는 평등의 진리이고, 평등은 진보가 다다를 어떤 이상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의 출발점이며, 고로 철학자에게 있어서 모든 참된 해방의 정치는 보편적 평등원칙의 선포를, 그리고 이 선포의 결과들의 실행을 만들어 낸다"는데...... 어찌보면 랑시에르의 주장과 비슷한 듯도 한데, 사실은 내가 두 사람의 이론을 정확히는 모르니 단어만 따라가는 번역 이상의 '제대로 된' 번역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 

 

2/ Le prolétariat : entre donnée objective et sujet révolutionnaire

Voilà où réside l'ambiguïté de Badiou pour nous, marxistes révolutionnaires : d'un côté, il rejette la politique comme représentation subjective de classes sociales objectives,  d'un autre côté, il continue à revendiquer la figure de l'« ouvrier ». Plus généralement, un événement, pensé comme une rupture, n'a lieu que sur un site soustrait à l'état d'une situation ; il n'est pas sans lien avec une certaine réalité objective.

C'est donc plus précisément l'idée d'une politique de représentation du prolétariat par un parti dont ne veut pas Badiou. Si nous ne pouvons partager ce refus, les interrogations qui le sous-tendent ne sont pas sans nous interpeller. En effet, le concept d'hégémonie implique que le prolétariat doit unifier une multiplicité d'acteurs dans un devenir politique. Cependant, on ne peut pas s'en tenir à la ligne stalinienne qui subordonnait les autres groupes sociaux et leurs aspirations à la victoire révolutionnaire du prolétariat, arguant que le socialisme résoudrait les problèmes de tout le monde.

La réflexion de Gramsci nous inviterait plutôt à repenser le rôle stratégique du prolétariat. Voici ce qu'il dit du degré ultime d'organisation politique : « [...] c'est la phase où les idéologies qui ont germé auparavant deviennent « parti », se mesurent et entrent en lutte jusqu'au moment où une seule d'entre elles ou une combinaison tend à l'emporter, à s'imposer, à se répandre sur toute l'aire sociale, déterminant ainsi non seulement l'unicité des fins économiques et politiques, mais aussi l'unité intellectuelle et morale, en posant tous les problèmes autour desquels s'intensifie la lutte, non pas sur le plan corporatif mais sur un plan « universel » »(5)

(5) Antonio Gramsci, Notes sur machiavel, Analyses des situations. Rapports de Forces @.

 

Les philosophies de Badiou et Žižek donnent des pistes pour penser le rapport entre prolétariat et universel. Dans De quoi Sarkozy est-il le nom ?, Badiou définit l'« ouvrier » comme suit : « le nom générique de tout ce qui peut se soustraire, sous une forme organisée, à l'hégémonie réalisée du capital financier et de ses servants. »(6) Žižek s'inspire de la démarche « soustractive » de Badiou pour exposer la dictature du prolétariat sous un jour nouveau(7), s'opposant aussi bien aux mouvementistes libertaires, qu'à l'orthodoxie sociologisante : au regard du système capitaliste, le prolétariat, structurellement, n'est pas représenté, c'est en cela qu'il est la classe universelle (capable d'abolir les classes sociales) dont l'opposition à l'ordre économico-social est irréductible. Pour l'état bourgeois, les classes ne sont que des « catégories socio-professionnelles ». Chacun est mis à sa place. Le geste de Marx aura été de fonder une science dont la catégorie fondamentale décrit ceux qui n'ont justement pas de place : le prolétariat, ceux qui ne possèdent que leur force de travail et qui sont en mesure d'abolir les classes sociales par l'abolition de la propriété privée des moyens de production.

6 Alain Badiou, De quoi Sarkozy est-il le nom ?, p.58, éditions Lignes.

7 Voir Slavoj Žižek, État d'urgence et dictature révolutionnaire @.

 

Il semble nécessaire de lier la définition économico-sociale du prolétariat à la perspective émancipatrice qu'il ouvre. L'unité des ouvriers n'est pas qu'une convergence d'intérêts : chaque moment de leur unité est un moment du devenir révolutionnaire de la classe. L'exemple le plus parlant est sans doute l'expérience de l'autogestion dans la Russie révolutionnaire : il est arrivé un moment où les bolchéviks ne défendaient plus les autogestions mais un plan de production unifié à échelle nationale, qui ne pouvait pas s'établir spontanément à partir du mouvement autogestionnaire lui-même. En effet, les ouvriers commençaient à défendre leurs usines respectives, ce qui brisait leur unité voire encourageait à un retour de la collaboration de classe. Ce que Badiou appelle l'« hypothèse communiste », l'Idée générique de l'égalité sociale, doit être l'horizon d'une politique émancipatrice. Elle trace une ligne de démarcation entre des pratiques qui se dirigent vers elle, et les pratiques qui s'en éloignent (qui rétablissent les places de chacun dans l'édifice social). Le prolétariat est objectivement dans la position de réaliser l'égalité sociale, mais il ne se constitue comme classe que dans un devenir subjectif qui prend conscience de lui-même : la réalisation de l'Idée universelle d'égalité sociale.

 

3/ L'hégémonie comme universalisme de la lutte

Cela nous amène au texte de Walter Benjamin, Sur le concept d'histoire, qui revisite le matérialisme historique : « Le sujet de la connaissance historique est la classe combattante, la classe opprimée elle-même. Elle apparaît chez Marx comme la dernière classe asservie, la classe vengeresse qui, au nom des générations de vaincus, mène à son terme l'œuvre de libération. »(8)

Ainsi, quand Marx affirme que « l'histoire de toute société jusqu'à nos jours est l'histoire de luttes de classes », il ne se contente pas d'effectuer une totalisation de toutes les expériences historiques jusqu'à son époque pour y découvrir une constante. Il effectue une construction partiale de l'histoire : une histoire du point de vue des vaincus qui se soutient d'un pari pascalien sur une révolution future.(9) La perspective de la révolution prolétarienne change la signification même du passé : celui-ci devient le récit des tentatives infructueuses des opprimés pour réaliser l'égalité. Le prolétariat est la classe en mesure de réactualiser dans le présent les possibilités trahies par les échecs précédents. On retrouve l'idée chère à Badiou que des vérités éternelles traversent l'histoire de manière discontinue. L'exemple le plus connu est sans doute la réappropriation de Spartacus par les spartakistes : d'un point de vue scientifique, il était impossible que la révolte des esclaves dans l'antiquité conduisît à la victoire du communisme. Cependant, le mouvement ouvrier intègre à sa subjectivité une rencontre avec les « vaincus », comme si un fil conducteur reliait tous ceux qui ont combattu en vertu de l'axiome d'égalité.

(8) Walter Benjamin, « Sur le concept d'histoire », Œuvres III, folio essais, p. 437.

(9) Le pari pascalien sur le devenir historique est même la condition de toute science humaine pour Lucien Goldmann. Voir son livre majeur, Le Dieu caché, éditions Tel.

 

La conséquence à en tirer, c'est qu'il n'y a pas de traduction directe entre une situation sociale étudiée sociologiquement et une formation politique. La situation objective demande une vigilance des révolutionnaires, de ce qui in-existe face au processus d'accumulation du capital, car ce sont les sans-parts, les laissés-pour-compte, qui sont seuls capables de réclamer l'abolition des classes sociales. Ceux qui pensent en terme de « multitude » ne contestent pas vraiment l'existence de classes sociales : ils n'envisagent qu'une radicalisation de la démocratie, son élargissement à de nouvelles communautés. Dans La Catastrophe imminente et les moyens de la conjurer, Lénine se fait observateur vigilant de ce qui in-existe face au gouvernement provisoire. Il oppose ainsi la démocratie bureaucratique du gouvernement et la démocratie révolutionnaire du peuple. « La contradiction fondamentale de la politique de notre gouvernement, c'est justement qu'il est obligé, pour ne pas se brouiller avec la bourgeoisie, pour ne pas rompre la « coalition » avec elle, de pratiquer un contrôle bureaucratique réactionnaire, qu'il qualifie de « démocratique révolutionnaire », en trompant constamment le peuple, en irritant, en exaspérant les masses qui viennent de renverser le tsarisme. Or, ce sont précisément les mesures démocratiques révolutionnaires qui, en groupant dans des associations les classes opprimées, les ouvriers et les paysans, c'est-à-dire les masses, permettraient d'établir le contrôle le plus efficace sur les riches et de combattre avec le plus de succès la dissimulation des revenus. »(10)

10 Lénine, La catastrophe imminente et les moyens de la conjurer, la faillite financière et les moyens de la conjurer @.


La centralité de la classe ouvrière au sein de l'hégémonie doit être comprise comme la conséquence de l'opposition irréductible entre le mécanisme impersonnel du capital et une partie de la population. La classe ouvrière est l'ouverture dans la société bourgeoise vers la société sans classe et sans État. Le rapport de « subordination » des autres couches de la société au prolétariat doit être compris comme la constitution d'un bloc dont la condition de possibilité est fondamentalement le prolétariat et secondairement les autres couches, sans pour autant hiérarchiser les priorités. La place stratégique du prolétariat est exposée dans son mouvement au sein d'un remarquable texte de Trotsky, issu de Terrorisme et Communisme. « Les soviets sont un appareil irremplaçable de domination prolétarienne précisément parce que leurs cadres sont élastiques et souples, de sorte que toutes les modifications, non seulement sociales, mais aussi politiques [c'est nous qui soulignons ndla], qui se produisent dans les rapports entre les classes et les couches sociales, peuvent immédiatement trouver leur expression dans l'appareil soviétique. Commençant par les plus grosses usines et fabriques, les soviets font ensuite entrer dans leur organisation les ouvriers des ateliers et les employés de commerce; ils entrent dans les campagnes, organisent la lutte des paysans contre les propriétaires fonciers, puis les couches inférieures et moyennes de la paysannerie contre les koulaks. l'Etat ouvrier utilise d'innombrables employés qui proviennent dans une large mesure de la bourgeoisie et de l'intelligentsia bourgeoise. Dans la mesure où ils se plient à la discipline du régime soviétique, ils trouvent une représentation dans le système des soviets. S'élargissant – et parfois, se rétrécissant – selon que s'étendent ou se rétrécissent les positions sociales conquises par le prolétariat, le système soviétique reste l'appareil étatique de la révolution sociale, dans sa dynamique interne, dans ses flux et reflux, dans ses erreurs et dans ses succès. Lorsque la révolution sociale aura définitivement triomphé, le système soviétique s'étendra à toute la population, pour perdre du même coup son caractère étatique et se dissoudre en un puissant système coopératif de production et de consommation. »(11)

11 Léon Trotsky, Terrorisme et Communisme, la classe ouvrière et sa politique soviétique, dans la partie « Les soviets, le syndicat et le parti » @.

 

Par le biais des soviets, des couches sociales viennent intégrer le camp politique du prolétariat, dans un mouvement simultané de dépérissement de l'État et d'abolition des classes sociales. Cela ne signifie pas que le prolétariat n'est qu'une subjectivité en dehors de tout contexte objectif. Au contraire, les évolutions sociales trouvent une traduction politique, bien que ce processus soit indirect et dépende d'éléments subjectifs : les individus issus de la bourgeoisie peuvent basculer dans le camp du prolétariat, tout comme certains éléments ouvriers peuvent rejoindre la contre-révolution. On peut parler d'un universalisme de la lutte : le système des soviets est en principe égalitaire, et se bat pour l'égalité sociale, mais les forces qui l'intègrent sont en lutte contre les propriétaires, les capitalistes, les nostalgiques du tsarisme, etc., si bien que l'universalisme scinde la société en deux.

 

4/ Les politiques de Badiou et Žižek face à leurs limites [바디우의 한계 & 친구의 한계에 대면하는 지젝]

La puissance de la pensée de Badiou donne toute sa force à un pamphlet de circonstance comme De quoi Sarkozy est-il le nom. Dans ce livre, Badiou met l'accent sur une vertu : le courage. Pour ne pas rester prisonniers de « la peur de la peur des réactionnaires », les « gens de gauche » devraient rester fidèles au communisme comme idée générique. La force du livre est donc dans son intransigeance et sa tentative de re-politisation de la politique elle-même, forcément au-delà des sondages d'opinion, des élections et de leur périodicité. Mais le livre est également une tentative de penser une nouvelle politique, à distance de l'Etat : ni prendre le pouvoir ni détruire le pouvoir, laisser l'Etat se charger du service des biens, et faire de la politique à l'extérieur. On ne peut qu'être d'accord avec Peter Hallward quand il dit à propos de l'opus de Badiou : « Il est, de plus, facile de voir combien le mépris envers l’État a de sens dans un pays dont l’État est aux mains de gens comme Mitterrand, Chirac et Sarkozy. Toutefois, il n’explique pas comment cette approche politique pourra nous aider à comprendre et à renforcer les mobilisations qui se sont récemment développées dans des pays comme le Venezuela, la Palestine, l’Équateur ou la Bolivie. Il n’explique pas pourquoi les militants politiques œuvrant dans de tels endroits devraient abandonner la politique des urnes et le contrôle de l'Etat aux mains de leurs adversaires. »(12)

(12) Peter Hallward, L'hypothèse communiste d'Alain Badiou @.

"반동-보수주의자들의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의 포로로 남지 않기 위하여 좌파는 공산주의라는 그 자체의 속성에 충실해야 한다. 여론이고 선거고 하는 그런 주기적 조사에 민감한 단계를 넘어서 정치자체의 재 정치화를 시도해야 하며, 이는 국가와 거리를 두는 새로운 정치를 사고하는 기획이다. 고로 권력의 획득도 파괴도 아닌, 국가는 복리에 복무토록 내버려두고, (좌파는) 그 밖에서 새로운 정치(공산주의)를 만들어가면 된다"는 것이 바디우의 입장이라는 것이 문단 앞부분에 압축적으로 요약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이렇다 (고동색글씨부분): "국가(권력)이 사르코지 등의 자들에게 쥐어져있는 나라에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국가에 대한 경멸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는 것은 아주 쉽다. 그렇다고해도, 바디우의 이러한 정치적 접근이 최근에 일어나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팔레스타인 등에서의 대중운동을 이해하고 강화하는 데 무슨 도움을 주는지는 설명하지 못하며; 왜 여기저기서 열심히 활동하는 좌파 정치 활동가들이 투표정치와 적들의 손아귀에 놓인 국가의 통제를 포기해야만 되는지를 바디우는 설명하지 못한다."


C'est l'un des reproches que formule Žižek à l'égard de son ami Badiou. En effet, la réfutation universaliste du « potage postmoderne » (l'expression est de Daniel Bensaïd) accouche chez Badiou de la même politique que les tenants du mouvementisme libertaire. Badiou ne conçoit la politique que comme locale, sans programme ni parti. A l'inverse, Slavoj Žižek essaie d'articuler son universalisme avec une définition philosophique d'une société post-révolutionnaire. Au lieu d'opposer politique et police, Žižek essaie de penser le nouvel ordre policier à partir des explosions politiques qui le précèdent. C'est le sens de son récent ouvrage sur Robespierre, qui présente une sélection de ses « plus beaux discours ».(13) Žižek cherche notamment à y déceler le noyau rationnel de toute terreur et à en trouver l'application pour la crise écologique actuelle.(14)

(13) Slavoj Žižek, Entre vertu et terreur, éditions Stock. (14) Ibid, p.58-59 voir aussi @

바디우의 바로 이러한 애매모호하고 때로는 "자유주의 운동의 운반책"(벵사이드의 표현)으로도 보일 입장이 결국은 지젝을 다른 극단으로 가도록 충동한다. 바디우에게 정치란 장소도 프로그램도 정당도 없는 무엇이라면, 지젝은 '정치와 치안의 대립'(랑시에르의 경우) 대신에 "새로운 치안적 질서"를 사고하고자 시도한다. 이러한 시도가 <로베스삐에르: 덕과 공포사이>에 나타나며, 그것은 "공포의 합리적 핵"을 간파하고 추려내는 작업이다.

 

Le travail de Žižek remet à l'ordre du jour la catégorie de la discontinuité historique. En effet, le sujet est selon-lui un pur vide. L'« Acte » consiste à nier les coordonnées dans lesquelles s'inscrivent les possibles au sein d'un édifice idéologique clos. L'acte construit son propre espace de référence, il redéfinit les critères à l'aune desquels on peut le juger. C'est pourquoi le sujet suspend la Loi au nom d'une éthique qui lui est singulière. C'est cette suspension que Žižek appelle en politique « violence divine », en référence à Walter Benjamin : alors que le régime du droit est un cercle vicieux entre violence conservatrice et violence créatrice de droit, la violence divine (par opposition à la violence mythique) lave la faute et détruit le droit. C'est donc pour sortir du cercle vicieux de la loi et de la transgression, de la répression et de la résistance, que Žižek espère trouver dans une société post-révolutionnaire un collectif de type nouveau, dont la dialectique se situerait entre la Loi et sa propre absence (l'absence d'habitudes par exemple). La figure très en vogue de la « résistance » n'est pas suffisante, il faut une révolution, une prise du pouvoir, il faut assumer l'institutionnalisation des explosions démocratiques.

La limite de Žižek est qu'il revendique une conception assez élitiste du parti-Etat et de la révolution. Au fond, il partage avec Badiou un désintérêt vis à vis de la démocratie dans les mouvements d'émancipation. Daniel Bensaïd l'a remarquablement souligné chez Badiou dans son article Badiou ou le miracle de l’événement.(15) Il y signale notamment le problème que pose l'absence de bilan critique du maoïsme chez cet auteur. Chez Žižek, le phénomène est remarqué par Paul Kellogg.(16) Ce dernier montre au sein de l'édifice théorique du philosophe slovène, un refus de penser les événements dans leur contexte, et une conception de Lénine entachée du récit stalinien. Cela amènerait Žižek à penser le stalinisme comme une radicalisation inévitable de la révolution d'octobre, et à peu se soucier des questions démocratiques que posent toute crise révolutionnaire. On peut imputer ces insuffisances à une volonté légitime de se démarquer, et de la philosophie libérale qui imprègne la gauche d'aujourd'hui, et de l'historicisme vulgaire. Il n'empêche que son discours gagnerait en clarté et en justesse s'il ne passait pas son temps à tordre le bâton dans l'autre sens, geste que l'on pourrait trop facilement interpréter comme la fameuse provocation de l'hystérique contre le maître, qu'il dénonce à longueur d'articles.

(15) D. Bensaid @. (16) Paul Kellog, The only hope of the revolution is the crowd: The limits of Žižek’s Leninism @.

 

Malgré leurs limites, Badiou et Žižek fournissent une contribution philosophique incontournable pour penser la stratégie au sein du capitalisme mondialisé. Dans notre horizon politique incertain, nous ne pouvons que prévoir des rythmes, des répétitions, que Žižek analyse à l'aide de l'apport du Deleuze de Différence et Répétition et de Logique du Sens : répéter n'est pas reproduire à la lettre les événements du passé, mais inventer, toujours en fidélité avec l'histoire des opprimés et les vérités éternelles qu'elle déploie. Une répétition introduit du nouveau en réinscrivant le passé dans un nouveau référentiel : elle transforme rétroactivement notre perception même du passé. Les événements révolutionnaire ressuscitent les fantômes des précédentes défaites, et réactivent (actualisent) leurs possibilités trahies dans le présent.

Žižek s'inspire volontiers de la fidélité militante disciplinée chère à Badiou, mais il met aussi l'accent sur les moments où il faut savoir « oser » effectuer un « saut de la foi » – les conditions d'un événement global (comme une prise du pouvoir) ne sont jamais objectivement « mûres ». On peut conclure avec la célèbre maxime de Mao Tsé Toung que Žižek cite comme réponse à l'attentisme incertain de la position politique de Badiou : « de défaite en défaite, jusqu'à la victoire ! »(17)


1 Daniel Bensaïd, Front Unique et Hégémonie, http://www.europe-solidaire.org/spip.php?article7177

2 Voir l'entretien : http://www.entretemps.asso.fr/Badiou/Raynaud.htm

3 Alain Badiou, Logiques des mondes, p.12, Seuil

4 Cf. Alain Badiou, Huit thèses sur l'universel, http://ciepfc.rhapsodyk.net/article.php3?id_article=44

5 Antonio Gramsci, Notes sur machiavel, Analyses des situations. Rapports de Forces. http://www.marxists.org/francais/gramsci/works/1933/machiavel3.htm

6 Alain Badiou, De quoi Sarkozy est-il le nom ?, p.58, éditions Lignes.

7 Voir Slavoj Žižek, État d'urgence et dictature révolutionnaire, http://semimarx.free.fr/IMG/pdf/Zizek_Paris-oct07.pdf

8 Walter Benjamin, « Sur le concept d'histoire », Œuvres III, folio essais, p. 437.

9 Le pari pascalien sur le devenir historique est même la condition de toute science humaine pour Lucien Goldmann. Voir son livre majeur, Le Dieu caché, éditions Tel.

10 Lénine, La catastrophe imminente et les moyens de la conjurer, la faillite financière et les moyens de la conjurer, http://www.marxists.org/francais/lenin/works/1917/09/vil19170910j.htm

11 Léon Trotsky, Terrorisme et Communisme, la classe ouvrière et sa politique soviétique, dans la partie « Les soviets, le syndicat et le parti », http://www.marxists.org/francais/trotsky/livres/t_c/t_c_9.htm

12 Peter Hallward, L'hypothèse communiste d'Alain Badiou, http://revuedeslivres.net/articles.php?id=207

13 Slavoj Žižek, Entre vertu et terreur, éditions Stock.

14 Ibid, p.58-59 voir aussi http://www.upmm.org/spip.php?article124

15 http://www.europe-solidaire.org/spip.php?article1315

16 Paul Kellog, The only hope of the revolution is the crowd: The limits of Žižek’s Leninism, http://zizekstudies.org/index.php/ijzs/article/view/129/227

17 Cf. Slavoj Žižek, On Alain Badiou and Logique des mondes http://www.lacan.com/zizbadman.htm

 


[3/3,참고용] 2개월 전에 불어로 번역된(영어-2003,2007간) 지젝의 새 책(?), <신체없는 기관: 들뢰즈와 그 결과들>에 대한 소개 (Information publiée le 22/01/2009 par Arnauld Welfringer: http://www.fabula.org/actualites/article28338.php)

Slavoj Zizek, Organes sans corps. Deleuze et conséquences,

trad. Ch. Jacquet, Éd. Amsterdam, 2008-11-20, 253 p., 21 €

 

Organs Without Bodies: On Deleuze and ConsequencesOrganes sans corps : Deleuze et Conséquences

 

En engageant la pensée deleuzienne en territoire philosophique " ennemi ", en la confrontant à celles de Lacan et de Hegel, Slavoj Zizek s'efforce de penser Deleuze et de penser avec lui hors des sentiers battus. S'appuyant comme à son habitude sur l'analyse d'objets culturels en apparence hétérogènes, de Hitchcock à Fightclub en passant par la théorie psychanalytique, Zizek détourne la pensée deleuzienne et expose une ligne de divergence qui traverse la pensée critique contemporaine : peut-on ne pas être spinoziste aujourd'hui ? Ce faisant, il propose à ses lecteurs une manière inédite d'appréhender les termes du débat contemporain sur la mondialisation, la (dé) démocratisation et la " guerre contre le terrorisme ". Il définit par là ce qui constituerait, selon lui, un acte véritablement politique en ces temps obscurs.

 

Table des matières :

DELEUZE
La réalité du virtuel
Le devenir contre l'histoire
" Devenir machine "
Un jour, peut-être, le siècle sera empiro-moniste ?
Quasi-cause
Est-il possible de ne pas aimer Spinoza ?
Kant, Hegel
Hegel 1 : prendre Deleuze par derrière
Hegel 2 : de l'épistémologie à l'ontologie et inversement
Hegel 3 : la différence minimale
La torsion du sens
Un interlude hégélien comique : dumb and dumber
Le devenir oedipien de Deleuze
Phallus
Fantasme
Réel en soi
CONSEQUENCES
La science : le cognitivisme avec Freud
La politique : le plaidoyer pour une Révolution culture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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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 공부하기1: 혁명과 공포(로베스삐에르 편) [논쟁]

아래 그림에서 보이는 지젝의 <로베스삐에르: 덕과 공포 사이에서> 라는 책[로베스삐에르(Maximilien Robespierre (1758~1794)의 글모음에 긴 서설을 보탠 책]이 2007년 3월에 영어로 나왔고 작년 2008년 1월 16일에 불어로 번역된 것으로 돼있다. 반가운 책인 만큼이나 뤼마니떼에서 바로 얼마 후에 서평기사를 실었고(1월30일), 2달 후에 자르카(Y.-C.Zarka)라는 프랑스 최고의 홉스전문가이며 빠리1대학 교수가 비판 글을 퓌가로(Figaro) 지에 올렸다(3/27). 별로 더 이상의 논쟁이 이뤄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두 간접적인 논쟁이 흥미롭다. 그리고 얼마 후(5/16)에는 에꼴노르말에서 지젝과 바디우가 대담을 하는 자리가 마련됐었던 모양인데, 여기서는 자르카 같은 우파지식인들의 비판 따위에는 아랑곳 않고 철학을 어떻게 정치(혁명과 공산주의의 복권)에 복무시킬 것인가 하는 건설적 논의가 길게 이어진다. 이하 세 글을 옮겨온다.

 

Robespierre : entre vertu et terreur

 

[1/3] Robespierre dans l’actualité (2008-01-30 l'Humanite)

Slavoj Zizek, Robespierre entre vertu et terreur, trad. Christophe Jaquet, Éditions Stock, 2008, 274 pages, 20 euros

 

Le deux cent cinquantième anniversaire de la naissance de Maximilien Robespierre à Arras, le 6 mai 1758, verra paraître quelques ouvrages consacrés à interroger son être historique et ce qu’on en a dit ou pensé depuis deux siècles. Mais le plus important sera assurément de prendre la mesure de la pensée et de l’action de « l’Incorruptible » : grâce à la réédition des Oeuvres de Maximilien Robespierre par la Société des études robespierristes (dix volumes plus un onzième d’inédits) en décembre 2007, il est désormais possible de donner au public des bibliothèques les moyens de s’informer à la source, donc de ne pas se laisser envahir par les préjugés et le qu’en-dira-t-on. On peut aussi recourir aux recueils de textes choisis. Celui que nous propose le brillant philosophe et psychanalyste Slavoj Zizek (les Plus Beaux Discours de Robespierre) se signale par la qualité de sa sélection et la hauteur de vue de la présentation qu’en donne l’auteur, quelquefois sulfureux, du Plaidoyer en faveur de l’intolérance (2004). Les quinze textes de Robespierre proposés s’échelonnent de décembre 1789 (Sur le droit de vote des comédiens et des Juifs) jusqu’au fameux dernier discours du 8 thermidor an II aux Jacobins, la veille de la chute de celui qui fut l’âme et l’aiguillon du Comité de salut public et du gouvernement révolutionnaire.

 

Dans son introduction, le philosophe exalte en Robespierre celui qui mit l’inévitable « violence », salutaire à ses yeux, d’une révolution qui « ne s’autorise que d’elle-même », au service de l’émancipation radicale, celle qu’implique la mise en oeuvre, inégalitaire dans ses effets, d’une égalité de facto. Puisant ses références dans une vaste panoplie d’auteurs, aussi bien dans Lénine (sur le concept de démocratie) que chez Lacan, lecteur du dernier Badiou autant que du premier Merleau-Ponty (1946, Humanisme et Terreur), Zizek vise haut et loin, en tout cas aux antipodes des discours consensuels et vergogneux dont témoignent les derniers avatars de la pensée postmoderne.

 

La question sera cependant posée de savoir si un « autre » Robespierre, le dirigeant politique attentif à préserver les conditions du rassemblement démocratique, le penseur averti, sensible jusqu’au sacrifice final, à la durée des choses et des représentations, ne sort pas écorné de cette présentation passionnée dont la finalité avouée et, à mes yeux fort sympathique, était de « briser le mur du son » ! Traduites de l’anglais, l’introduction et les annotations ne sont pas exemptes de bavures (exemple, page 73 : Chaumette n’a pas été victime de ses « convictions chrétiennes », mais tout au contraire de son action « dé-christianisatrice ») et on regrettera qu’à la différence de l’édition anglaise (Verso, Londres et New York, 2007), l’éditeur français, soumis à la règle du va-vite, n’ait pas référencé précisément les quinze textes reproduits : une indication bibliographique générale ne donne aucun moyen de situer des discours aussi denses et circonstanciels que ceux de Robespierre ici mis à la disposition des lecteurs. (historien, Claude Mazauric)


 

[2/3] Badiou, Zizek, le retour de la Terreur / par Y.-Ch. Zarka (Le Figaro 27/03/2008)

Yves Charles Zarka, universitaire, philosophe et directeur de la revue «Cités», 1er specialiste en France sur Hobbes
 
Aujourd'hui, comment ré­in­venter la Terreur (ja­cobine)  ? Étrange question, n'est-ce pas ? On aurait plutôt attendu la question inverse : comment éviter la Terreur ? C'est pourtant la première qui constitue l'interrogation cen­trale de la présentation par Slavoj Zizek des discours de Robespierre. Voilà donc un philosophe qui entend trouver dans la terreur le seul et unique moyen de nous libérer de l'avènement du capitalisme mondial, de rompre avec la (post) politique de la peur qui se généralise dans la société, d'en finir avec l'administration «biopolitique» de la vie qui dé­finit selon lui la démocratie li­bé­rale, et last but not least d'éviter la catastrophe écologique qui plane sur l'humanité. Excusez du peu !

Pour s'arracher à ces périls, il faut revenir à Robespierre, à la vraie Terreur, c'est-à-dire à « l'idée éternelle de la politique de la justice révolutionnaire, qui fut en vigueur depuis les anciens légistes chinois, jusqu'à Lénine et à Mao, en passant par les Jacobins» telle qu'elle se trouve ­définie, selon Zizek, par Alain Badiou dans son ouvrage Logiques des mondes. Il y aurait donc une vérité éternelle de la justice révolutionnaire qui traverserait l'histoire pour en marquer les moments forts, les moments universels. Elle serait constituée de quatre traits décisifs : la jus­tice radicalement égalitaire, la terreur à travers «un châtiment impitoyable pour tous ceux qui violent les mesures protectrices imposées» et le volontarisme qui peut seul «stopper le train de l'histoire qui roule vers le précipice de la catastrophe mon­diale» , enfin, la confiance dans le peuple qui ne peut pas ne pas soutenir ces mesures sévères. Le peuple, le vrai, ne peut pas ne pas aimer la terreur.

Est-ce là de la philosophie ou de l'aveuglement ? Une chose est sûre, les philosophes de la terreur connaissent un succès grandissant et, par certains côtés, in­quiétant auprès de la jeunesse. Leur caractéristique principale est une haine farouche de la dé­mocratie libérale, dont, soit dit en passant, ils n'ont jamais dé­daigné les avantages de toute sorte. Il y a en effet pour eux deux sortes de démocraties : la fausse et la vraie. La fausse est évidemment la démocratie libérale où règnent l'inégalité, la corruption et l'ex­clusion des sans-droits et des sans-parts. La vraie est celle où règnent la vertu et la terreur, comme si la vertu peut tempérer la terreur, comme si la plus terrible des terreurs n'est pas celle qui est exercée au nom de la ­vertu et d'une vérité absolutisée. La vraie démocratie est ainsi la prise du pouvoir par les sans-droits et les sans-parts.

Les philosophes de la terreur haïssent la démocratie libérale, mais ils haïssent au moins autant l'hu­manisme qui lui est lié : «ré­péter l'événement désigné par le nom “Robespierre” c'est passer de la ter­reur humaniste (de Robes­pierre) à la terreur antihuma­niste (ou plutôt antihumaine)». Il faut donc aller au-delà de Robespierre, qui a eu la main trop courte, aller jusqu'à l'affirmation d'une terreur antihumaine. Derrière l'homme, il y a en effet, pour ces philosophes, l'inhumain, comme derrière le prochain, qui permettait à Levinas de penser la responsabilité éthique, il y a la monstruosité. Cette apologie de la terreur et de l'antihumanisme radical réactive les vieilles lunes marxistes-léninistes du siècle passé que l'on croyait définitivement oubliées : la figure du traître à la révolution, l'idée que la révo­lution n'a pas besoin de justi­fication, elle ne s'autorise que d'elle-même, sans oublier l'inénarrable dictature du prolétariat.

La vraie démocratie ne peut s'imposer que par la dictature, parce qu'elle est le moment où la partie s'impose au tout de la société : «La dictature du prolétariat est un autre nom pour la violence de l'explosion démocratique elle-même» (Zizek). C'est précisément en ce point que l'extrême gauche rejoint l'extrême conservatisme de la droite radicale, car Zizek n'est pas très loin, sur ce point précis, de Carl Schmitt, le fameux juriste du IIIe Reich, qui haïssait également la démocratie libérale et pour lequel la véritable démocratie, celle où le prolétariat est intégré à l'unité politique, est dictatoriale. On comprend ainsi la fortune de Carl Schmitt aujourd'hui, explicitement ou implicitement, à l'extrême gauche. Faut-il en pleurer ? Faut-il en rire ? Les deux à la fois sans doute. Mais surtout en rire cependant, car ces philosophes de la terreur ne sont finalement que des terroristes de salon.

(http://www.lefigaro.fr/debats/2008/04/24/01005-20080424ARTFIG00001-badiou-zizekle-retour-de-la-terreur.php)

 

 

[3/3] Que peut la philosophie pour la politique ? [l’Humanité des débats, 2008-05-27]

Le 16 mai [2008], à l’École normale supérieure, se tenait une rencontre publique exceptionnelle entre Alain Badiou, philosophe, dramaturge, et Slavoj Zizek, psychanalyste, philosophe. Morceaux choisis. 

L’INTERVENTION D’ALAIN BADIOU
Il n’y a pas si longtemps, dans les journaux de ce pays, nous avons été (désignés), Slavoj Zizek et moi-même, comme incarnant le retour des « philosophes de la Terreur ». Or nous sommes extraordinairement différents, et c’est peut-être cette unité amicale dans la différence, sur certains points essentiels, qui est productive. L’enjeu crucial de la philosophie n’est pas la différence, mais plutôt le « labeur du même ». Notre différence, à un moment donné et de façon localisée, se renverse en proximité. Faisons d’abord l’inventaire de cette différence.

Différence d’horizon philosophique / Si je récapitule mon horizon philosophique de façon très sommaire, je dirai qu’il est constitué par une tension dialectique entre l’idée et la liberté, entre Platon et Sartre. Comment la souveraineté de l’idée, de la vérité, est-elle compatible avec la liberté ? L’horizon philosophique de Slavoj Zizek est très différent. C’est la tension entre l’idéalisme allemand (Kant, Schelling, Hegel) et Lacan. Sa dialectique est ainsi plutôt celle de la négation, dans une élaboration qui se fait du côté de Hegel, et du réel, dans un concept prélevé en définitive chez Lacan. Autre différence : je postule une autonomie radicale de la catégorie de sujet. Je ne crois pas à l’idée d’un terrain d’homogénéité dialectique entre l’être et le sujet. Le sujet est un processus singulier, exceptionnel, improbable, sans doute lié à des conditions mondaines tout à fait particulières, mais qui n’avait aucune espèce de nécessité. J’assume ce hiatus entre l’ordre de l’être, qui n’est représentable que dans la figure du formalisme mathématique, et l’ordre de la procédure de vérité, qui est subjective. Très souvent, chez Zizek, une démonstration consiste à montrer que quelque chose reste inintelligible tant que l’on n’a pas trouvé le point de réversion, c’està- dire le point où ce qui se présente comme doté d’un sens évident et écrasant peut et doit en réalité signifier l’envers de l’apparence. C’est pour cela qu’il y a un côté très démystificateur dans l’oeuvre de Slavoj Zizek. Ma propre recherche est au contraire polarisée vers quelque chose qui relève plutôt des conditions de la décision.

Différence d’horizon politique / Mon propre horizon politique a deux composantes généalogiques : premièrement, la séquence des luttes anticoloniales, avec en son centre la guerre d’Algérie. Puis cette étape est relevée, transformée, avec comme horizon Mai 68 et l’expérience fondamentale du maoïsme français. Avec Slavoj Zizek, on a un démêlé originel et profond avec les États socialistes, avec le stalinisme dans une double modalité : le stalinisme générique et le stalinisme abordé par le biais de cette hérésie singulière qu’a historiquement constituée la Yougoslavie de Tito.

Différence de localisation / Contrairement à moi, Slavoj Zizek se meut avec une parfaite aisance dans la multiplicité langagière (slovène, anglais, français…). Cette différence de localisation est toujours significative de quelque chose qui concerne le rythme de la pensée. Ce n’est pas qu’une question de références. Il y a chez lui ce cosmopolitisme, cet internationalisme de l’Europe centrale primordiale. La conséquence en est une dimension nomadique et voyageuse de sa pensée. Au contraire, il y a chez moi un enveloppement par la langue française assez prononcé, qui enracine la quasi-totalité de mes expériences primordiales en France. J’ai toujours eu conscience d’être dans un cycle national très affirmé.

Différence d’horizon culturel / Ce que Zizek aime, c’est la symptomatologie massive des grosses productions hollywoodiennes. Le cinéma, saisi non pas dans sa prétention singulière, mais plutôt en tant que fonction révélatrice des grands schèmes de l’imaginaire collectif, est une strate essentielle des démonstrations de Zizek. Pour ce qui me concerne, l’horizon culturel est toujours plutôt du côté de ce qui est en exception, en soustraction. Je cherche à traiter en exemple des exceptions locales ou des choses en dissidence. Cette différence n’est en fait qu’apparente, mais néanmoins, en tant qu’apparence, elle est absolument massive, évidente. C’est du côté d’une langue assertorique, qui déclare, que je situe mon articulation spontanée, tandis que, dans le cas de Zizek, on a plutôt une langue pressée, qui cherche son objet dans un certain style de volubilité conceptuelle.

Unis dans une lutte toujours localisée / Ni lui ni moi ne partageons la conviction selon laquelle la philosophie serait dans une étape singulière, dramatique, de son histoire, lui imposant de métamorphoser son dispositif entier. Nous avons été dressés très tôt à la réticence à l’égard des concepts de modernité, de postmodernité, et de leur couplage. Une partie cruciale de ce qui se présente comme archimoderne, postmoderne ou contemporain est en fait de l’ordre de la répétition, voire de la restauration. Toute discontinuité (nous paraît) devoir d’abord être présentée sous sa forme locale. Toute discontinuité (rupture de temporalité – NDLR) doit être localisée. Les discontinuités globales sont possibles et pensables, mais elles sont toujours intelligibles à partir de leur première localisation.

Que faire de ses ennemis politiques ? / Il y a un point qui, dans le contexte actuel, nous réunit : (la reconnaissance qu’) en réalité, en politique, il y a des ennemis. Et cela pose une question : celle de savoir ce qu’est la pratique politique dans un champ où il y a des ennemis réels. Que faire de ses ennemis  ? Nous sommes l’un et l’autre convaincus que : 1) cette question ne se laisse pas évacuer, c’est-àdire qu’on ne peut pas être dans la vision, fût-ce à terme, d’un espace politique angélisé, où tout se laisserait traiter au régime des simples contradictions au sein du peuple ; 2) que les méthodes terroristes antérieures ne nous fournissent pas un paradigme utilisable directement, parce qu’elles étaient abominables, mais aussi parce qu’elles ont prouvé qu’elles échouaient. Il est déjà extrêmement difficile et compliqué d’être dans une logique de la terreur, mais si en plus ça ne sert à rien, si en plus on est vaincu, alors là, c’est véritablement quelque chose qui disqualifie le dispositif. Saint Just interrogeait : que veulent ceux qui ne veulent ni la Terreur, ni la vertu ? Il répondait : ils veulent la corruption. Et effectivement, on en est toujours là, à cette question. Tout le débat est de savoir, dans l e s conditions renouvelées de ce siècle, comment définir ou redéfinir la vertu politique.

Le courage comme vertu / Tout cela est lié à une conception du réel que nous partageons. Le réel, c’est toujours une césure de ce qui est. Et par conséquent, dans une situation quelconque, l’indice majeur est toujours de l’ordre de la faille, de l’ordre de l’inexistant. C’est pour cette raison que nous concluons l’un et l’autre que, pour autant qu’il y ait une éthique, pour autant que la philosophie serve à quelque chose, finalement, c’est toujours parce qu’elle délivre un impératif. Si elle n’en délivre aucun, alors elle est analytique, c’est-à-dire inactive. Donc elle délivre un impératif, et cet impératif est généralement inaccordé aux formations dominantes. Qu’est-ce que cet impératif qui, quoique rationnellement extirpé de la situation, ne peut pas se dire accordé à la formation dominante ou transcendantale de cette situation ? Ce questionnement nous conduit, je crois, à un partage d’une notion ou d’une vertu qui me paraît être le courage. C’est mon dernier point. Courage en quel sens ? Précisément, il faut tenir l’impératif non pas contre la rationalité de ce qui est, mais contre la législation dominante qui règle la formation de ce qui est. Et cela, c’est le point subjectif, irréductible. Ce point, on peut le nommer « courage ». Le courage, c’est aussi n’avoir pas peur de ce que l’on redoute. Cela me paraît très important dans la situation actuelle.

L’INTERVENTION DE SLAVOJ ZIZEK
Que faire de ses ennemis politiques ? La tendance postpolitique actuelle prétend que tout peut être négocié. Mais, au fond, le but est toujours d’annuler l’opposition radicale de l’ennemi. Cette société postidéologique, dans laquelle il n’y aurait plus d’ennemis, utilise précisément une violence redoublée contre ceux qui n’entrent pas dans ses cadres. On commence par dire que tout peut être résolu dans l’espace démocratique et on finit par légitimer l’usage de la torture à l’encontre de ceux que l’on désigne comme ennemis.

Enthousiasme / Il y a dans la Théorie du sujet, d’Alain Badiou, une très belle interprétation d’Antigone, qui plaide pour un retour de Sophocle à Eschyle. Le couple, chez Sophocle, est celui de la terreur et de l’angoisse, la terreur surmoïque de la loi créant l’angoisse. Badiou oppose à cela le couple courage- justice. Je crois qu’il faudrait substituer ici l’enthousiasme à la justice. Terreur-angoisse, courage-enthousiasme : tels seraient, pour moi, les quatre concepts fondamentaux de la position subjective de Badiou. Je crois comme Lyotard que l’enthousiasme, à l’instar de l’angoisse, est un affect qui ne trompe pas. Je prends cela au sens tout à fait naïf d’enthousiasme politique, contre une attitude, prédominante aujourd’hui, qui désigne le champ politique comme celui des illusions, du faux. Dans l’enthousiasme collectif, on éviterait la vérité, qui est toujours singulière. Je crois au contraire que, dans l’enthousiasme, on touche aussi le réel.

Fidélité à l’événement / Mon problème, comme celui de Badiou, est celui de la fidélité à l’événement. Le seul intérêt de l’événement, c’est ce qui vient après, c’est son instruction. La phase la plus tragique, celle qui concentre l’échec de la révolution d’Octobre, se situe à mon avis au début des années vingt. Après la fin de la guerre civile, une fois retombé le grand enthousiasme, que fallait-il faire ? Comment réorganiser la vie quotidienne ? Là se situe l’échec le plus tragique.

Matérialisme démocratique / Badiou désigne par « matérialisme démocratique  » la forme prédominante de nos ennemis. Le principe structurant du matérialisme démocratique, sa thèse fondamentale, c’est qu’il n’y a que deux choses : des corps d’un côté, de la culture, du langage de l’autre. Cela correspond littéralement aux deux faces de l’idéologie dominante.

Le « désastre obscur » du stalinisme / Ce qui est décevant, chez ceux que l’on a appelés il y a trente ans les « nouveaux philosophes  », ce n’est pas leur anticommunisme en tant que tel. C’est que, dans leur haine même des communistes, ils se montrent incapables de décrire et d’analyser l’horreur véritable du stalinisme. En réalité, personne n’a tiré toutes les conséquences de la catastrophe – Badiou parle de « désastre obscur » – qu’on appelle stalinisme. Il y a là une tragédie radicale, véritable. Au début, et sur ce point je ne cède pas, la révolution d’Octobre fut une explosion immense d’énergie émancipatrice. Disant cela, je ne nourris aucun rêve naïf de contingence historique. Je ne crois pas que le stalinisme puisse être réductible à un simple malentendu, comme le suggèrent les trotskistes. Mais nous refusons le procédé qui consiste à projeter rétrospectivement des causes pour dire que les conditions de ce désastre étaient déjà réunies chez Lénine, chez Marx, chez Robespierre, chez Rousseau, et finalement au coeur même du projet des Lumières.

Pas de trait d’égalité entre nazisme et communisme / Même le stalinisme le plus dur ne saurait être identifié au nazisme. Anne Appelbaum rapporte, dans Goulag, que les prisonniers étaient rassemblés le jour de l’anniversaire de Staline pour leur faire signer un télégramme de félicitations. Une telle scène serait tout simplement inimaginable s’agissant d’Auschwitz. Voilà la différence. Même les grands procès publics monstrueux témoignent du fait qu’une tout autre logique que celle du nazisme était à l’oeuvre dans le stalinisme. Le procès politique, l’aveu même signifient que, formellement, on a obéi à la nécessité de démontrer la culpabilité de l’accusé. Dans le cas d’Auschwitz, les nazis n’avaient rien à démontrer. C’était assez de prouver que vous étiez juif. Vous étiez coupable non pour ce que vous aviez fait, mais pour ce que vous étiez. En réalité, le stalinisme fut une chose beaucoup plus énigmatique que le nazisme. C’est pour cela que c’est un désastre obscur. Durant les douze années de la terreur, de 1925 à 1937, le lieu le plus dangereux était le sommet de la nomenklatura, avec la liquidation de 80 % des membres du comité central du PCUS. On ne trouve rien de semblable dans le nazisme. C’est très énigmatique. Il s’est passé là quelque chose que les analyses simplistes en termes de « totalitarisme » ne parviennent pas à expliquer.

L’accusation d’antisémitisme / Tous deux nous partageons une position double. Premièrement, nous combattons l’antisémitisme par principe. Aucun compromis n’est possible avec l’antisémitisme. Aucune raison ne saurait être invoquée pour tolérer l’antisémitisme. Deuxièmement, taire ou minimiser Auschwitz au nom du soutien aux Palestiniens est une obscénité. Il faut tirer toutes les conséquences de cette proposition. Oui, l’antisémitisme est aujourd’hui partout. Il y a même un antisémitisme sioniste. Celui-ci mobilise, pour critiquer les juifs qui ne se sont pas totalement identifiés au projet d’État d’Israël, la même rhétorique que celles des antidreyfusards à la fin du XIXe siècle. Même accusation de « cosmopolitisme ». Même réquisitoire sur la « trahison de la patrie ».

Une universalité de combat / Un soupçon plane aujourd’hui sur l’universalité, qui serait une forme de violence infligée aux identités particulières. On a reproché à Badiou sa lecture de la formule de saint Paul selon laquelle il n’y a plus, dans la foi, « ni Grec, ni juif ». Comme si son idée était celle d’un universalisme simple effaçant toutes les différences. Or c’est l’exact contraire qu’il propose. Premier paradoxe, son universalisme est subjectif et partiel. Ce n’est pas un universalisme de ce que Hegel a nommé « universalité abstraite ». Il ne s’agit pas de dire que je suis slovène, qu’il est français, mais que nous sommes tous deux humains. L’universalisme de Badiou est un universalisme de bataille, de combat.

La pulsion de mort et la vie humaine / Où se situe, en une phrase, ma différence avec Badiou ? Je suis d’accord avec cette problématique de la vie humaine comme vie animale faite de survie, pour le service des biens, perturbée, de temps en temps, par des événements. Mais je crois que la thèse de la pulsion de mort est ici fondamentale. La pulsion de mort, c’est cet auto-sabotage qui perturbe la vie animale. Elle signifie précisément que la vie animale, réglée par le principe de plaisir, le service des biens, la survie, n’existe pas dans l’espace humain. Elle y est toujours déjà perturbée. (Réponse d’Alain Badiou. Je suis d’accord pour dire que la possibilité de l’accueil de l’événement requiert chez l’animal humain une disposition qui n’est pas homogène comme telle, en effet, au régime de la survie ou de l’animalité. La psychanalyse désigne cela sous le nom de pulsion de mort. Pour moi, il s’agit du couple terreur-angoisse désigné dans Théorie du sujet et repris dans Logique des mondes. De même, j’accepte la proposition, remarquable, de substituer l’enthousiasme à la justice. L’accueil de la césure événementielle se fait toujours dans un complexe où il y a un élément d’angoisse attestant du réel dans son énigme, et un élément d’enthousiasme attestant que ce réel est porteur de la vérité.)

Réhabiliter le communisme / Pour le dire en des termes politiques, ce qui nous unit, c’est la réhabilitation, non pas du socialisme, mais du communisme. Tout le monde aujourd’hui est pour le socialisme. Cela ne fait aucun problème. Fukuyama est aujourd’hui abondamment moqué comme crétin qui a pensé que l’histoire était finie. Mais je crois que 99 % des gens de gauche sont aujourd’hui fukuyamistes. Au fond, ils acceptent, sans questions, le capitalisme. Ils se contentent de revendiquer un peu plus de « tolérance », un peu plus de « justice ». Mais est-ce que le capitalisme global à visage humain est l’horizon final de la gauche ? De façon très réaliste, je suis convaincu que de nombreux problèmes, comme les problèmes écologiques, les problèmes biogénétiques, les nouveaux apartheids, ne peuvent, à long terme, être résolus dans les termes du capitalisme global. J’ai de nombreux démêlés avec Toni Negri et Michael Hardt. Mais je crois comme eux que le problème peut être formulé en termes de privatisation de ce qui doit être le bien de tous. Le commun de la nature nous est pris. Le commun de la biogénétique est potentiellement privatisable. Même notre substance symbolique est visée au travers de cette tendance à la propriété privée intellectuelle. Le problème, ici, est précisément celui du commun. En ce sens, oui, il faut réhabiliter le communisme. Mais, comme le souligne Badiou, pas au sens d’une restauration de ce qui a échoué. La propriété privée, ça ne marche pas. Mais l’État, ça ne marche pas non plus. On nous présente comme de vieux totalitaires. En réalité, nous admettons que le problème n’est pas résolu. (Comptes rendus réalisés par Laurent Etre et Rosa Moussaoui paru dans l’Humanité des débats du samedi 24 mai 2008 http://www.humanite.fr/2008-05-24_Politique_Que-peut-la-philosophie-pour-la-politi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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