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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18
    혁명과 개혁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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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개혁 사이...

혁명과 개혁 사이... (예술&서민, 사치&여자, 디드로&루소, etc.)

 

개혁이나 혁명을 말한다는 것은 개인적 차원의 문제라기 보다는 사회적으로 뭔가를 더 좋은 쪽으로 방향을 틀어 뒤틀린 사회를 바꾸든가 뒤집자는 것이겠다. 성품이 온순하고 평화로운(!) 사람들은 개혁을 말할 것이고, 문제를 더 심각하고 극단적으로 파악하는 나같이 못 된 자들은 '개혁같은 것은 백날해봤자 더 힘센 반개혁적 요소들의 침입-농간에 의해 좌절되기 십상이니 혁명밖에 없다'는 주장을 한다(註1). 이러한 논쟁은 작금의 자본주의 전횡의 시대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멀리 1700년대 중-후반, 즉 자본주의의 맹아가 꿈틀대던 시절에도 벌써 있었던 모얀인데, 여기서는 그 18세기에 이뤄진 개혁-혁명 논쟁과 그런 논쟁을 불러온 원인이 되는 대상으로서의 부와 사치의 사회-정치적 의미 등에 대한 생각들을 당대의 대가들의 입을 통해 직접 들어보기로 한다. 근 250 여년 전의 논쟁이지만,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상황과 전혀 안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역사의 발전이 더디거나 아니며 후퇴했거나, 그도 아니면, 아마도, '발전의 적들'에 의해 농간당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註1) 여기서 '진보' 개념에 대해 간단히 짚고 넘어가야겠다. 사람들이 자꾸 진보와 개혁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앞으로만 나가거나 기존의 것을 부정만 하면 다 진보인 양 말하는 자들 때문에 생긴 우리말의 부정확성이 낳은 결과이리라. 좌든 우든 어디서든 그 내부에서의 개혁적(흔히 진보로 참칭되는) 움직임은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진보는 좌파의 이념을 말할 뿐이지 앞으로 가느냐 안 가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고로 우파에서 진보를 말하는 것은 아예 모순이고, 좌파-진보에서 개혁이나 혁명을 나눌 수는 있겠지만, 여기서의 개혁이라고 진보가 아닌 것은 아니겠다. 

개혁이든 혁명이든 이런 말이 나오는 이유는 기존하는 틀 속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예컨데, 5세에 즉위하여 장장 72년간이나 프랑스를 지배한 루이14세의 집권기간(1643~1715) 동안 꽉 막혔던 숨통이 터지면서 바야흐로 '빛의 세기(Lumieres-뤼미에르)'가 시작된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뭔가를 말하고 풀어내기 좋은 외적 조건 덕택이겠지만, 프랑스에서 수많은 인문학자들의 출현과 걸출한 저작들의 탄생은 가히 기념비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겠다. 바로 1721년 몽테스키외의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필두로, 34년 볼테르의 <철학서한>, 48년 <법의정신>이 나오고 1751년부터는 백과사전학파들의 활발한 활동이 시작된다. 바야흐로 살롱-부르조아 문화의 개화가 파리를 중심으로 시작됐다면, 살롱과 마담들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의 인문학적 산개-각개전투는 더 치열하고 가히 유익했다(註2). 단도직입적인 분류가 가능하지는 않겠지만, 대체로 온순한 살롱파들이 개혁을 주장했다면 황야의 거친(아카데미즘에 못 낀) 논객들은 혁명을 말한다. 디드로가 앞의 대표적 예라면 루소는 뒤의 경우겠다. 여기서 우리가 고려의 대상으로 삼는 것의 핵심은 물론 '개혁이냐 혁명이냐'는 논점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 대상으로 있는 '사회', 특히나 '부패해가는 사회', 그 부패의 고리에는 부와 재산의 독점이 있고 그러한 독점으로 과잉된 부는 사치로 흐르고, 사치의 가까운 곳에는 여자와 부르조아 문화가 있고, 멀리는 아직도 혹은 점점 더 배고픈 민중이 있다는 것, 등등에 대한 고려가 선행돼야 하는 것은 당연하겠다.

(註2) 살롱과 까페: "흡연 천국이라는 프랑스에서도 내년 1월 1일부터 카페를 비롯한 음식점과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울 수 없게 된다. 최근 이 기사가 여러 나라 언론에 눈에 띄게 소개된 것은 아마 흡연에 관대한 프랑스의 독특한 문화, 특히 카페로서는 상전벽해와 같은 엄청난 변화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카페라고 하면 예쁜 마담에 인테리어가 고급스러운 양주 따위를 파는 비싼 술집쯤을 말한다. 여기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돼 룸카페가 되면 술값은 아마 룸살롱 뺨칠 것이다. 하지만 원조 카페(Cafe)는 커피를 뜻하는 아랍어 카화에서 온 말로, 그냥 커피를 마시는 가게라는 뜻이다. 유럽에 처음 카페가 문을 연 것이 1647년이라니까 벌써 360년 역사를 자랑한다. 우리가 유럽의 카페에 대해 갖고 있는 전형적인 이미지를 독일 작가 헤르만 케스텐은 1959년 〈카페의 시인들〉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카페에서는 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이 독특한 분위기에서 서로 자극을 주고 받음으로써 창작의 온실이 되었다." 18세기 프랑스 사상가 몽테스키외는 "카페는 대화가 현실로 화하는 유일한 장소이고, 거창한 계획과 유토피아의 꿈이 태어나는 곳이다"라고 했다. 18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당국의 단속을 피해 정치ㆍ사상가들이 카페에서 자유 평등 박애를 논했고, 19~20세기에는 마네, 피카소, 뭉크, 사르트르 같은 문인 예술가 철학자들이 뿌연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논쟁을 벌였다. 살롱이 귀족들만의 클럽이라면 카페는 귀족과 평민, 부자와 빈자가 한 자리에 모여 격의 없이 토론하고 웃고 떠드는 장소였다. 그래서 카페의 역사는 서구 민주주의 및 학문ㆍ예술 발전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커피 한 잔 시켜놓고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눈치 주지 않는 카페 한 구석의 빈자리가 없었다면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도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기야 서구에서도 이미 1980년대부터 '카페의 죽음'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스타벅스류의 미국식 문화가 퍼지면서 매상과 경쟁력 떨어지는 카페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아들 보러 서울에 올라온 할아버지가 다방인 줄 알고 스타벅스 매장에 들어갔는데 커피를 시키고는 알바 여학생(레지가 아니다!)에게 "아가씨도 한 잔 혀!" 했다가 성희롱범으로 고소 당했다는 얘기가 생각난다. 도라지 위스키 파는 다방은 벌써 사라졌다. 파리의 하늘 밑에서도 담배마저 피울 수 없다니 세상이 너무 야박해진다 싶다." (이광일 논설위원, [지평선] 카페의 몰락, 한국일보 2007/12/26)

무척이나 반동적이게도, 볼테르몽테스외는 "부자가 있어야 빈자를 먹여살릴 수가 있다"거나 "부자가 지출을 줄이면 없는 자들은 배고프게 된다"는 따위의 mb식 발언을 서슴없이 일삼으며, 혁명은 커녕 개혁도 필요없고 원래가 세상은 그렇게 돼있다는 입장을 취한다(註3). 이들이 다른 혁명적 사고를 펼친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예컨데, 페널롱, 돌바흐, 루소 등) 보다도 오늘날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고 그들의 저작들이 더 존중의 대상이 되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고 우리의 부르조아-자본주주의-지배-시스템과 긴밀한 연관 속에 있으리라고 나는 상상한다.

(註3) cf. Mondain de Voltaire: «J'aime le luxe, et même la mollesse, / Tous les plaisirs, les arts de toute espèce.» Il réaffirme sa position dans L'Homme aux quarante écus: «Par tout pays, le riche fait vivre le pauvre». Pour Montesquieu, dans L'Esprit des lois: «Comme, par la constitution des monarchies, les richesses y sont inégalement partagées, il faut bien qu'il y ait du luxe. Si les riches n'y dépensent pas beaucoup, les pauvres mourront de faim» (livre VII, chap. IV).]

유사 이래로 부의 축적과 편중이 있었고, 오갈 데 없이 남아도는 돈은 사람에게든(주로 여자) 물건에게든(주로 궁전이나 성곽) 화려한 치장과 방만한 사치로 기울고, 꼭 그만큼이나 배고픈 민중들은 알게모르게 착취의 사회적 룰 속으로 포섭되어 허덕인다. 문제의 핵심은 분명 부의 축적과 편중에 있겠지만, 일단 18세기의 논객들은 사치와 그 사치의 또 다른 가지(분파)일 수 있는 예술과 학문(한마디로 민중적 배고픔을 외면하고 저희들끼리만 찌지고볶는 먹물들의 소일거리인 교양이라는 이름의 예술과 학문, 등등)에 대한 비판적 의견들을 생산하며 '빛의 세기'를 장식한다. 이에 대한 비판의 대표적인 예가 루소의 거의(철학적 논의에 한정할 때) 처녀작이자 출세작인 <학문과 예술에 관한 논고>(1750)일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저작이 "학문과 예술의 재건이 풍속(과 도덕)의 순화에 공헌하는가"라는 주제의 논문 공모에서의 당선작이었듯이, 학문-예술 그리고 이것들을 낳은 상관적 토양(!)인 여가-사치-돈 등의 주제가 시대적 관심사였다는 말이겠다. 이하 몇몇 당대 논자들의 말씀을 직접 들어본다:

 

1/ Condillac : Que deviennent les mœurs lorsque les principaux citoyens, qu'on prend pour exemple, forcés à être tout à la fois avides et prodigues, ne connaissent que le besoin d'argent, que tout moyen d'en faire est reçu parmi eux, et qu'aucun ne déshonore? Le luxe fait subsister une multitude d'ouvriers, j'en conviens. Mais faut-il fermer les yeux sur la misère qui se répand dans les campagnes? Qui donc a le plus de droit à la subsistance, est-ce l'artisan des choses de luxe, ou le laboureur(13)?


2/ Helvétius, dans De l'homme, soutient que le luxe, concept variable selon les temps, les lieux, les conditions, est un stimulant indispensable à l'activité humaine, qui stagnerait sans l'espoir d'une récompense, c'est-à-dire de «quelque superfluité(8)». 8. À la différence de Rousseau, Helvétius n'associe pas le développement des sciences et des arts à la corruption du luxe (C. Larrère, L'Invention de l'économie au XVIIIe siècle, Paris, PUF, 1992, p. 74)

 

3/ Marat : «En amollissant et en corrompant les peuples, le luxe les soumet sans résistance aux volontés d'un maître impérieux, et les force de payer du sacrifice de leur liberté le repos et les plaisirs dont il les laisse jouir(12).»

 

4/ Fénelon, dont le Télémaque fait l'éloge de la frugalité et condamne les somptuosités de Versailles en des termes qui annoncent les anathèmes rousseauistes : Peut-on nommer bien un superflu qui ne sert qu'à rendre les hommes mauvais? […] Comme la trop grande autorité empoisonne les rois, le luxe empoisonne toute une nation. On dit que le luxe sert à nourrir les pauvres aux dépens des riches; comme si les pauvres ne pouvaient pas gagner leur vie plus utilement, en multipliant les fruits de la terre, sans amollir les riches par des raffinements de volupté. Toute une nation s'accoutume à regarder comme les nécessités de la vie les choses superflues. […] Ce luxe s'appelle bon goût, perfection des arts et politesse de la nation (livre XXII).

 

5/ d'Holbach dans sa Politique naturelle, où se retrouvent les accents rousseauistes : Les apologistes du luxe semblent surtout avoir été touchés des progrès qu'il fait faire aux arts. En effet, on ne peut nier qu'il n'excite une émulation très marquée entre les différents artistes que l'appât du gain engage à se surpasser les uns les autres. Mais une nation peut posséder une foule de peintres, de sculpteurs, de manufacturiers célèbres sans en être plus heureuse. La vanité d'un despote peut donner aux arts une impulsion très forte sans qu'il en résulte aucun bien pour son peuple: au contraire, ce peuple, souvent épuisé, est obligé de se ruiner de plus en plus pour mettre son tyran à portée de contenter ses goûts. Sous un mauvais gouvernement, les chefs-d'œuvre de l'art ne servent qu'à décorer le sarcophage de la nation. / D'un autre côté le luxe anéantit le goût de la belle nature; ainsi pour lui complaire, les arts et les talents renoncent à la vérité, à la simplicité, à l'énergie; ils craindraient d'effrayer des âmes pusillanimes. […] Le désir de s'enrichir et de plaire fait que l'homme de génie dépouille ses ouvrages des beautés mâles; il sacrifie honteusement au mauvais goût, à la faiblesse qui dominent; les connaissances utiles et sérieuses cèdent partout aux talents agréables: ceux-ci sont faits pour obtenir la préférence dans des pays frivoles où l'on ne veut que s'amuser(31). [31. Politique naturelle, discours IX, p. 446-7.]
D'Holbach, dans sa Politique naturelle, en 1773, répète les attaques rousseauistes contre un luxe qui dépeuple les campagnes, ruine l'esprit militaire, énerve les courages, anéantit les mœurs, ne laissant subsister que l'envie et l'égoïsme : «Dans une nation en proie au luxe, toutes les vertus paraissent étrangères et déplacées(11).» Et voici encore d'Holbach dans sa Politique naturelle, où se retrouvent les accents rousseauistes : Les apologistes du luxe semblent surtout avoir été touchés des progrès qu'il fait faire aux arts. En effet, on ne peut nier qu'il n'excite une émulation très marquée entre les différents artistes que l'appât du gain engage à se surpasser les uns les autres. Mais une nation peut posséder une foule de peintres, de sculpteurs, de manufacturiers célèbres sans en être plus heureuse. La vanité d'un despote peut donner aux arts une impulsion très forte sans qu'il en résulte aucun bien pour son peuple: au contraire, ce peuple, souvent épuisé, est obligé de se ruiner de plus en plus pour mettre son tyran à portée de contenter ses goûts. Sous un mauvais gouvernement, les chefs-d'œuvre de l'art ne servent qu'à décorer le sarcophage de la nation. 

D'un autre côté le luxe anéantit le goût de la belle nature; ainsi pour lui complaire, les arts et les talents renoncent à la vérité, à la simplicité, à l'énergie; ils craindraient d'effrayer des âmes pusillanimes. […] Le désir de s'enrichir et de plaire fait que l'homme de génie dépouille ses ouvrages des beautés mâles; il sacrifie honteusement au mauvais goût, à la faiblesse qui dominent; les connaissances utiles et sérieuses cèdent partout aux talents agréables: ceux-ci sont faits pour obtenir la préférence dans des pays frivoles où l'on ne veut que s'amuser(31). [31. Politique naturelle, discours IX, p. 446-7.]

 

6/ Diderot : L'art se doit de jouer un rôle formateur, d'épauler et d'épurer la morale(30). De là son admiration bien connue pour Greuze, son Accordée de village ou le Retour de l'enfant prodigue : «Courage, mon ami Greuze, écrit-il en 1763, fais de la morale en peinture, et fais-en toujours comme cela!» (DPV XIII, 394). Parlant de Baudouin, Diderot s'inquiète des grands sujets auxquels songeait aussi Rousseau : «Croit-on que les bustes de ceux qui ont mérité de la patrie les armes à la main, dans les tribunaux de la justice, aux conseils du souverain, dans la carrière des lettres et des beaux-arts, ne donnassent pas une meilleure leçon? Pourquoi ne rencontrons-nous pas les statues de Turenne et de Catinat?» (DPV XVI, 290). «Rendre la vertu aimable, le vice odieux, le ridicule saillant, voilà le projet de tout honnête homme qui prend la plume, le pinceau ou le ciseau» (Essai sur la peinture, DPV XIV, 392). C'est que Diderot, dans ce qui est comme un dialogue éternellement prolongé avec Jean-Jacques, estime que les arts, bien dirigés, peuvent servir à l'éducation du peuple et à la réforme des mœurs et de l'ordre social. C'est ce que dit aussi l'Encyclopédie : «De tous les ouvrages de l'art, ceux-là ont, sans contredit, l'utilité la plus importante, qui gravent dans notre esprit des notions, des vérités, des maximes, des sentiments propres à nous rendre plus parfaits, et à former en nous les caractères dont nous ne saurions manquer sans perdre de notre prix soit en qualité d'hommes, soit en qualité de citoyens(35).» Les arts sont donc susceptibles de devenir l'école des mœurs et du civisme. Diderot assigne aux arts visuels la même fonction rédemptrice et de progrès, de transformation de la société.
Diderot assigne aux arts visuels la même fonction rédemptrice et de progrès, de transformation de la société. Quel bien ne feraient pas des statues de grands hommes dressées dans les jardins et promenades publiques? (article «Encyclopédie»). Il le répète dans De la poésie dramatique (DPV X, 338), le Plan d'une Université pour le gouvernement de Russie (OV III, 447) ou dans l'Essai sur les règnes de Claude et de Néron (DPV XXV, 293)(37). [35. Cité par J.A. Leith, op. cit., p. 49.  36. D'Holbach, Morale universelle, t. II, p. 234-5. 37. Voir J.A. Leith, op. cit., p. 40-1, qui rappelle qu'on retrouve les mêmes thèmes, en 1770, dans L'An 2440 de L.-S. Mercier.]

 

7/ Rousseau. À quoi bon insister sur les tirades fameuses du 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 : «Le luxe corrompt tout; et le riche qui en jouit, et le misérable qui le convoite.» Et dans sa réponse à Borde: «S'il n'y avait point de luxe, il n'y aurait point de pauvres. […] Le luxe nourrit cent pauvres dans nos villes, et en fait périr cent mille dans nos campagnes» (OC III, p. 79). Loin d'attester la richesse et la prospérité d'un État, le luxe annonce sa ruine irrémédiable: «Le luxe sert au soutien des États, comme les cariatides servent à soutenir les palais qu'elles décorent, ou plutôt comme ces poutres dont on étaie des bâtiments pourris, et qui souvent achèvent de les renverser. Hommes sages et prudents, sortez de toute maison qu'on étaie!» (OC III, 79-80). Avec ce fléau, point d'accommodement: «On croit m'embarrasser beaucoup en me demandant à quel point il faut borner le luxe. Mon sentiment est qu'il n'en faut point du tout» (OC III, p. 95)(17).
Rousseau reviendra sur cette question dans l'Émile : «Ceux qui nous guident sont les artistes, les grands, les riches, et ce qui les guide eux-mêmes est leur intérêt ou leur vanité; ceux-ci pour étaler leur richesse et les autres pour en profiter cherchent à l'envi de nouveaux moyens de dépense. Par là le grand luxe établit son empire et fait aimer ce qui est difficile et coûteux; alors le prétendu beau, loin d'imiter la nature, n'est tel qu'à force de la contrarier. Voilà comment le luxe et le mauvais goût sont inséparables. Partout où le goût est dispendieux, il est faux» (OC IV, 673(Emile, folio,p.509))

Un luxe bien géré non seulement encouragera les arts, mais les fera servir à l'instruction morale : En somme, l'art au service, non plus de la richesse et du luxe ni du pouvoir, mais de la morale et de l'esprit civique. Dès lors, Rousseau et les philosophes s'accordent bien à lier la dégradation des arts à celle des mœurs dans un cycle toujours recommencé, celle des premiers aggravant celle des seconds, qui eux-mêmes contribuent à la dépravation des premiers, et s'accordent encore à incriminer un système fondé sur l'inégalité et le luxe. Mais ils cessent de s'entendre sur l'éventualité d'un changement. Dès lors que, pour Rousseau, «un peuple vicieux ne revient jamais à la vertu, il ne s'agit pas de rendre bons ceux qui ne le sont plus» (OC II, 972). Une société corrompue ne peut produire qu'un art corrompu qui accentuera sa décadence(38). Diderot et les autres, distinguant un bon et un mauvais luxe, croient au contraire à la possibilité d'inverser le mouvement en faisant servir les arts à la régénération publique et politique et en confiant à l'artiste la fonction d'un instituteur des peuples.
Si, dès le second Discours, et même dès le premier, la pensée rousseauiste est naturellement révolutionnaire, c'est parce qu'elle se fonde, non sur un appel aux réformes, mais sur un devoir-être. Il n'y a chez Jean-Jacques nul compromis possible, ni d'évolution vers un mieux concevable dans un ordre de faits essentiellement mauvais, donc non susceptible d'un quelconque progrès(39). Moins intransigeants ou plus réalistes, les philosophes attendent beaucoup du devenir historique, luttent pour éliminer ou réduire un à un les abus d'un luxe corrupteur, alors que Rousseau n'envisage qu'une société alternative, non pas corrigée ou améliorée, mais radicalement autre. Les uns recommandent des remèdes, quand l'autre estime qu'on ne guérit pas un incurable. [38. Il est vrai que, dès la préface de Narcisse, Rousseau suggère d'extraire un remède du mal lui-même : «Les mêmes causes qui ont corrompu les peuples servent quelquefois à prévenir une plus grande corruption» (OC III, 972). Ne fait-il pas appel, en finale du premier Discours, aux grands génies et aux académies elles-mêmes? «Je l'avoue, cependant; le mal n'est pas aussi grand qu'il aurait pu le devenir. La prévoyance éternelle, en plaçant à côté de diverses plantes nuisibles des simples salutaires, […] a enseigné aux souverains qui sont ses ministres à imiter sa sagesse» (OC III, 26). Des hommes d'exception sont seuls capables de réunir savoir et vertu. Mais pointe aussi la solution révolutionnaire, qu'il se garde cependant d'encourager : «On n'a jamais vu de peuple une fois corrompu revenir à la vertu. […] Il n'y a plus de remède, à moins de quelque grande révolution presque aussi à craindre que le mal qu'elle pourrait guérir, et qu'il est blâmable de désirer et impossible de prévoir» (OC III, 56). En tout état de cause, la solution, quelle qu'elle soit — y compris la sienne — ne saurait avoir qu'un effet retardateur. Laissons donc subsister bibliothèques et universités, qui peuvent, comme le théâtre dans les grandes villes, faire au moins «quelque diversion à la méchanceté des hommes» (OC III, 56). Sur ce thème du remède dans le mal, — le «téléphisme» —, voir l'étude de J. Starobinski, Le Remède dans le mal, Paris, Gallimard, 1989. 39. Aussi ne croit-il pas à l'efficacitédes lois somptuaires : «Sur l'inutilité des lois somptuaires pour déraciner le luxe une fois établi, on dit que l'auteur n'ignore pas ce qu'il y a à dire là-dessus. Vraiment non. Je n'ignore pas que quand un homme est mort il ne faut point appeler de médecins» (OC III, 33). Même opinion dans ses Considérations sur le gouvernement de Pologne (OC III, 965).


출처: Copyright © Raymond Trousson, 2006. http://www.bon-a-tirer.com/volume42/r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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