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 목록
-
- 오징어3- 최승호
- 2009
-
- 사람 그리기
- 2009
-
- 2009/09/22(4)
- 2009
-
-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정희성
- 2009
-
- 나무 - 이형기
- 2009
프랑스 : 고용유연화에 저항하는 노학연대투쟁
[기고]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 공세에 맞선 전국 전선 구축 | |||||||||||||||
원영수(노동자의힘) | |||||||||||||||
2005년 11월 프랑스 사회를 강타했던 파리 교외 폭동에 이어, 전국적인 학생과 노동자들의 투쟁이 폭발하고 있다. 3월 10일밤 소르본대학을 점거중인 200여 명의 시위대가 프랑스 경찰에 의해 강제퇴거 당하면서, 1968년 혁명의 부활을 알리는 언론의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그런데 국내외 언론 역시 이번 투쟁에 주목하지만, 여전히 피상적 보도에 머물고 있다.
이번 투쟁을 촉발한 것은 지난 1월 16일 도미니크 드빌팽 총리가 도입한 최초고용계약제(Contrat Premiere Embauche)였다. 명목상 청년실업 해소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이번 조치는 2005년 20인이하 사업장에서 2년 이내의 범위에서 자유로운 해고를 허용하도록 도입한 고용계약제를 20인 이상으로 확대한 것이었다. 또한 빌팽 정부는 57세 이상 고령층을 대상으로 기간확정 노동계약제(CDD)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프랑스 실업률은 유럽연합 가운데 상당히 높은 편으로, 2006년 1월 현재 9.6%였다. 그런데 25~49세의 실업률은 8.7%인 반면, 15~25세 청년층의 실업률은 무려 22.8%에 이르고 있다. 또한 지난 교외 폭동의 중심지였던 빈민지역의 실업률은 40%에 이른다. 이런 심각한 청년실업에 대한 우파 정부의 대응은 자본측에 유리한 고용유연화였다. 해고사유를 명시하지 않고 2년 이내에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는 권한을 보장함으로써 청년층의 고용을 보장한다는 논리였고, 이런 고용유연화는 20인 이하 사업장에서 25세 이하의 청년층, 더 나아가 57세 이상의 고령노동자 층으로 점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노동유연화 반대투쟁의 폭발 1월 빌팽 정부의 CPE 도입 발표 이후, 직접적 피해 대상이 되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투쟁이 촉발되기 시작했다. 2월 7일 1차 투쟁에 전국적으로 약 40만 명이 참여하는 대중투쟁을 통해 CPE반대투쟁의 서막이 올랐다. 프랑스의 학제상 2월 방학기간 중에도 투쟁의 열기는 사그라들지 않았고, 더욱 확산되었다. 3월 7일 전국 160개 도시에서 100만 명이 참여하는 2차 전국투쟁이 조직되었다. 이들은 가두투쟁을 넘어, 40여 개 대학에서 점거농성에 돌입했다. 시위대는 프랑스 68혁명의 진원지였던 낭테르 대학과 소르본 대학을 점거했다. 그러자 3월 10일밤 프랑스 경찰은 소르본 대학에 진입하여 점거농성자들을 강제 해산하였다. 이런 정부의 탄압에 맞서 3월 14일 소르본대학 강제해산 조치에 항의하는 투쟁이 벌어졌고, 3월 16일에는 학생 대오를 중심으로 전국투쟁의 날이 조직되었다. 더불어 국제반전행동의 날인 3월 18일에도 전국적인 투쟁이 벌어졌다. 이번 투쟁에는 일차적으로 전국학생연합(UNEF)이 전국적 투쟁을 주도하고 있으며, 3월 16일 현재 전체 80여 개 대학 가운데 68개 대학이 동맹휴업에 들어가 있는 상태이다. 더불어 학생투쟁은 노동조합투쟁과 결합한 노학연대의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주요 노총들이 투쟁에 결합하고 있다. 프랑스 공산당계의 좌파노총인 노동총동맹(CGT)은 3월 30일 전국파업 및 집회투쟁을 결정하였지만, 학생들은 일정이 너무 멀어 투쟁의 동력을 상실할 우려를 표명하면서, 3월 23일 24시간 파업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사회당계 중도파 노총인 민주노조연맹(CFDT)은 이번 투쟁에 소극적 태도로 일관해서 빈축을 사고 있다. * 주요 투쟁일지 - 2월 7일 : 전국행동의 날 - 40만 동원, 주요 노총 + 대학생 및 고등학생 - 3월 7일 : 100백만명 160개 도시에서 가두시위, CPE 철회요구, 주요 노총, 학생, 공산당 및 좌파, 사회당 가세, 40여개 대학 점거농성 돌입 - 3월 10-11일 밤 : 프랑스 경찰 소르본 대학 침입 및 농성자 철거 - 3월 14일 : 소르본 강제퇴거 항의 투쟁 - 3월 16일 : 학생행동의 날 - 3월 18일 : 국제반전행동과 결합된 노동조합 투쟁 역사적 배경 - 최근 프랑스의 주요투쟁과 대중투쟁의 역동성 최초고용제에 반대하는 노학연대투쟁의 대중적 폭발은 현시기 유럽에서 프랑스의 민중운동이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주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프랑스 학생운동의 경우 역사적으로 1968년 5월혁명의 주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난 1986년과 1994년 학생투쟁으로 정부의 후퇴를 강제한 경험에 근거한 것이다. 특히 1994년의 경우 CPE와 유사한 입법시도에 반정부투쟁을 통해 우파정부를 좌절시켰고, 이 투쟁은 1995년 연금개악반대 공공부문 파업투쟁("불만의 겨울")의 전조가 되는 투쟁이었다. 그리고 1995년 알랭쥐페 정부의 연금개악 기도를 좌절시킨 대중투쟁 이후, 2002년 극우 르펜 반대투쟁과 2003년의 제2차 연금개악 저지 및 민영화 저지 투쟁, 2005년 신자유주의적 유럽헌법 저지투쟁 등 주요 대중투쟁의 경험적 축적의 역사적·정치적 맥락 속에서 이번 CPE반대투쟁이 폭발한 것이다. 이처럼 프랑스 민중·사회운동은 우파정권의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 공세에 맞선 전국적 전선을 구축하는 성과를 낳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제도의 틀에 갇힌 공산당만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로 선회했던 사회당마저 반신자유주적 전선으로 복귀시키는 대중적 강제력을 발휘하고 있다. 반신자유주의 대중투쟁의 대중적 확산은 정치적 질서의 재편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증가시키고 있으며, 사회당 좌파와 공산당, 트로츠키주의 좌파 등 정치적 좌파와 노학연대를 주축으로 한 좌파적 사회운동의 전투적 결합은 프랑스 사회와 정치의 지형의 근본적 변화와 반자본주의적 대안을 현실화시키고 있다.
|
[기고] 학생운동이 정부를 수세에 몰아넣다 | ||
머레이 스미스(혁명공산주의자동맹) | ||
지난 4년간 프랑스의 우익 정부는 총체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행했다. 2003년 연금 체계 개혁의 사례처럼 종종 격렬한 저항이 일어났다. 그러나 정부는 전반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정책 개혁’을 강제했고, 이는 대체로 전통적인 노동자 조직이 전면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정책 개혁에 반대할 태세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는 힘겨운 일을 계획하고 있는지 모른다. 정부가 제안한 ‘최초고용계약법(CPE)’은 26세 이하 청년들을 ‘신규고용자일 경우’ 최초 2년 내에 정당한 사유 없이 해고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법안은 고용안정을 과거지사로 돌리고 고용주에게 해고의 자유를 부여하기 위해 현존하는 모든 노동법을 무력화하려는 정부의 목표의 일환이다. 동시에 이는 특히 노동시장으로 진입하는 청년 노동자들을 겨냥한 조치다. 처음에는 완만했지만 점점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 분수령은 지난 10여 년간 최대 규모로 조직된 학생 운동이다. 주요 노조와 대학, 고등학생 조직이 2월 7일 최초의 대규모 집회를 개최했다. 이는 프랑스식 표현으로 ‘조용한 성공’이었는데, 40만을 상회하는 시위대가 프랑스 전역의 도심에 운집했다. 2월 한 달이 일부 고등학교와 대학이 문을 닫는 프랑스의 방학기였음에도 불구하고, 3월 내내 학생운동은 더욱 깊고 넓게 확산되고 있다. 학생들이 이 사안을 파악하기 시작하면서 운동은 [단순] 시위와 항의를 넘어 [학교] 점거로 확대, 이동하고 있다. 현재 프랑스 전국 84개 대학 중 50여 개 이상의 대학이 학생들에 의해 전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점거됐다. 3번째로 큰 규모의 낭테르 대학은 “안전상의 이유”로 휴교에 돌입했다. 100만의 인파가 160개 도심에 운집한 가운데 열린 3월 7일 2차 대규모 행동의 날은 1차 행동의 날보다 훨씬 큰 규모로 진행됐다. 시위대들은 노조원들과 다수의 청년, 학생과 노동자로 구성됐다. 시위대의 목소리는 매우 급진적이었다. 많은 청년들은 정부가 시끄럽고 호전적인 프랑스 경제인연합(MEDEF)과 공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집권여당인 대중운동연합(UMP)처럼 경제인연합의 지방 사무소는 종종 학생 시위대의 표적이 되었다. 모든 좌파 정당 - 공산당과 극좌파는 물론 사회당까지 - 들이 학생운동을 지지하며 CPE의 철회를 주장하고 있다. 선거 기간 이외에 매우 특이하게도 CPE 철회를 요구하고 시위를 지지하는 사회당 포스터들을 벽에서 볼 수 있다. 이는 운동이 강력하다는 징후다. 정부는 물러서지 않으려 하고 있고 학생들에 대해 주저 없이 전투경찰을 동원했다. 3월 10일과 11일 밤에 그들은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소르본 대학을 급습했고 점거하고 있는 학생들을 몰아냈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 일부가 부상당했다. 이 사건은 소르본이 상징했던 1968년 5월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이번 주에는 더욱 많은 학생들이 조직화를 하고 있고 3월 14일에는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소르본에서 행진을 했다. 정부와의 힘겨루기는 현재 잘 되고 있고 사태의 흐름은 급격히 빨라지고 있다. 대학과 고등학교 학생 조직들은 3월 16일 행동의 날을 호소했고 노동자들에게 지지 파업을 요청하고 있다. 토요일인 3월 18일은 노조들이 호소한 행동의 날이다. 여기에는 노조연맹 가운데 가장 우파인 프랑스노동자민주동맹(CFDT)이 포함되어 있는데, CFDT는 더 이상의 파업행동을 거부하려 한다. 프랑스 최대 노총인 노동총동맹(CGT)은 3월 30일에 파업과 시위를 더 진행하기로 발표했는데, 이는 학생들에게는 너무 멀리 있다. 3월 11일 푸아티에에서 열린 CGT 전국조직위 회의에서는 3월 23일 일일 파업을 조직하고 파리에서 전국 집회를 개최할 것을 소속 노조들에게 요구했다. 정부는 이제 심각한 우려를 하고 있다. 지난 20년 동안, 1986년과 1994년 두 번에 걸쳐 학생들은 정부로 하여금 법안을 포기하도록 몰아세웠다. 1994년의 관련 법안은 CPE와 매우 유사한 조치였다. 의견 분열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라크 정권의 전직 외무부장관이었던 에르브 드 샤레트와 같은 소수의 우파 정치인들만 CPE가 철회되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더 많은 이들이 정부 입장을 지지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7개 대학총장들은 현재 CPE 철회를 요구한 상태다. 향후 2-3주가 결정적인 시기가 될 것이다. 노동계가 23일 파업에 대한 학생들의 호소에 화답한다면 운동의 역동성은 다시금 강화될 것이다. 많은 것이 CGT에 달려 있다. 2003년에 총파업 호소를 CGT가 거부함으로써 정부가 위기에서 벗어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LCR과 그 청년학생조직인 JCR은 이 운동에 깊숙이 관계하고 있고 전국적 파업과 시위 호소를 지지하고 있다. LCR도 CPE 철회를 위해 모든 좌파세력이 단결해서 회합을 갖자고 제안한 상태다. |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