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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코스텔로와 하루살이씨

 

초보좌파님의 [모기죽이기] 를 읽고.

길거리를 배회하다, 우연히 빠져든 한 모양의 목구멍에서

고통스럽게 미끄러져내려가 끝내 사망한 하모씨를 기억하며.

 

 

평소에 입을 벌리고 다니지는 않는데, 그 날따라 유난히 하품을 자주 했다.

여러마리 있던 것도 아닌데, 절묘한 타이밍으로 목구멍으로 들어온 하루살이씨.

인간보다 길지도 않은 삶으로 매 순간 삶을 위해 고난과 도전을 겪었을 하루살이씨는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끝끝내 생을 마감했다.

그 순간 한모양은 목구멍이 이상해 계속 구역질을 하다가 완전히 넘긴 다음 순간

'단백질 섭취인가'라고만 하고는 유유히 사라지고 말았다는...슬.픈.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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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에 얼마전에 읽은 책이 있어서 몇 줄 끄적거린다.

요즘에 머리를 식히려고, 외국소설부터 다른분야의 책들을 읽고 있는 중인데,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고 (내가) 평가하는 책이 있다.

존 쿠시의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처음엔 이 책을 선택했던 이유가, 인간은 왜 자신에게 피해가 되는지 알면서도

이타적 행동을 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물음에 대한 해답을 알고자 했으나,

애석하게도 이 책에서는 그런 내용이 명시되지는 않았다.

다만 몇 가지 물음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던져주고 있었다.

 

존 쿠시가 이 작품으로 노밸평화 문학상을 탔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이 전해주는

주요 명제들은 전쟁(정확하게는 유대인 학살문제), 그리고 그것을 방관한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에 대한 내용이다. (물론 그 외에도 몇 가지가 있다)

나이든 여성 원로작가가 연설의 형식으로 말하는 소설의 형식은 지금도 지구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문제에 대해 적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읽어볼만 하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의 의의를  다른 것에서 찾았다.

전쟁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를 위한 전제-인간의 이성은 과연 합리적인가-에 대해 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증명하는 방식이 꽤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채식주의자로서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방식으로 진행해나갔다.

 

 

 



증명방식으로는 여러 방법이 나오는데, 그 중 하나는 이거였다.

인간의 이성을 증명하려는 심리학자들의 여러 실험 가운데 유명한 것 중 하나가

쾰러의 통찰설이다.

원숭이가 매달아진 바나나를 먹기 위해 사고를 하고(아하!) 도구를 이용해서 먹이를

찾을 수 있다는 실험을 통해 인간의 지능(이성)이 증명된 것이다.

이건 심리학 수업에도 행동주의와 다르게 인지이론의 기본으로 등장하는 실험내용이다.

 

 

그런데 엘리자베스는 이 실험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이 생각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이 과연 옳은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과 같다.

 

늘 먹이를 주던 사람이 바나나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상자를 던져 주는 순간 원숭이가 생각한다.

왜 저 사람이 저런 행동을 하지?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게 된 걸까?

우리는 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지? 나는 왜 계속 굶어야만 하는걸까?

나는 예전처럼 돌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하지만 이런 생각은 틀렸다.

 

원숭이는 바나나만 생각하고, 상자를 이용해 먹이를 얻을 생각을 한다.

이 생각은 옳은 것이다.

 

이것이 과연 합리적이고 의심할 수 없는 이성의 정당성인가.

 

뭐, 이런 내용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까 별 내용 아닌 것 같은데,

책을 읽는 순간에는 신선했던 것 같다. 난 한번도 쾰러의 통찰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못 해봤으니까. 그냥 실험 그 자체에만 집중해왔던 것 같은데,

작가는 그러한 인간의 이성에 대한 모든 것에 의문을 품었던 것이다.

 

 

 

 

동물의 생각을 인간이 생각해본다는 것.

대단히 관념적이면서도 동시에 그건 인간중심적 사고의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앞에 써 놓은 슬픈 하루살이씨의 삶은 나의 생각이다.

그런데 길지도 않은 짧은 하루살이의 생이란 결국 내 삶의 기준에서 짧은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들이 중요한 것은

인간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작. 뭐 그런걸로 의미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뭐, 꼭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p.s)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에 대한 덧붙임.

 

서평을 따로 쓸까 하다가 이왕 쓴 김에 몇 자 더 붙여 놓는다.

이 책에서 또 눈여겨 봤던 점 중 하나는 등장인물이 여성작가로 설정되었다는 것이었다.

여성소설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들.

요즘 생각하는게 이런고 하니, 눈에 띄는 것도 그렇지.ㅋ

 

엘리자베스 그녀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신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고,

글을 쓰는 동안 그녀의 두 아이들은 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야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가 글을 쓰는 동안 집 문을 잠가버렸고,

그 동안 아이들은 문 앞에서 쭈그리고 기다리고만 있어야 했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엄마의 글쓰기가 마무리되기를 기다렸다.

 

이게 통쾌하다고 느꼈던 까닭은 이런 내용의 소설을 우리나라에서는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90년대 이후 여성작가들의 글쓰기가 가시화되고,

여성들의 자아찾기가 점차 주류를 형성해 가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내용은 자아를 찾고 싶어하는 여성들의 목소리와 일탈을 꿈꾸는 그녀들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나라의 여성작가들은 자신을 옭아매는 가부장제도의 억압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번도 엘리자베스와 같이 자신의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문을 잠그고 자신의 글쓰기를

진행했던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아이와 남편, 친정과 시댁 식구간의 굴레 안에서

벗어나고 싶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이 책이 신선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작가가 남성이였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우리와는 정말 다른 서양문화와 사고방식 때문이었을까?

분명한 건 우리나라의 다양한 여성작가의 개성 가운데에서도 그녀들을 지배하는 관습과 제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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