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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초 합법화에 대하여

 

김진태 kissme@jinbo.net

(노동해방학생연대 고대모임 회원)


부모님에게서 

대마초(大麻草)를 배우다.


  아니 이게 무슨 심슨가족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인가. 부모에게서 대마를 배우다니. 하지만 ‘대마초’를 슬쩍 ‘주도(酒道)’로 바꿔보라. 부모님에게서 주도를 배우다. 아 뭔가 괜찮다. 성인에게만 허용되어있지만 미리 배워두면 좋을만한 것이 술이라면, 대마초는 나이가 어떻든 간에 배우면 미친 녀석 취급받는다. 그래서 신해철이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욕을 먹나 보다. 


마약 중의 마약은

대마초가 아니라 담배


  만약에 대마초가 막걸리보다 덜 마약스럽다면. 그런데 정말 그렇다. 약물이 얼마나 위험한 지를 알아볼 수 있는 의존성, 금단성, 내성, 강화성, 독성 부문에서 대마는 알코올보다 훨씬 낮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물론 담배와는 비교도 안 된다.(담배는 모든 수치에 있어서 헤로인, 코카인에 맞먹는다.) 다시 말해 없으면 미치게 하고 몸을 병들게 하며 점점 찐한 것을 찾는 증상은 술, 담배가 훨씬 심하다는 것이다. 오해와는 달리 환각물질도 아니며, 흡입 후에 난폭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순해진다.

표 1) 필립힐츠의 NIDA보고서에서

명칭

금단성

강화성

내성

의존성

독성

니코틴

4

4

5

6

3

알코올

6

4

4

4

6

대마초

1

2

1

1

3

코카인

3

5

3

4

4

 

그런데 왜 금지하는데!


  이제 대마초 금지의 장구한 역사를 알아보자. 수천 년 전부터 인류는 대마초를 재배했다. 한 때 종이, 섬유를 만드는 원료이기도 했기에 대마 유통을 장악하기 위한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대마초를 약물로 사용한 역사도 길기만 하다. 힌두의 신 시바는 “인간에게 기쁨과 광명을 주기 위해 대마를 히말라야로부터 가져와 인간에게 주었다.”라고 말했다는 얘기도 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대마농장을 소유하고 있었고 거기서 종이 등이 아니라 약물만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방법을 연구했다고 한다. 물론 자신도 대마초를 폈겠지.


  이렇게 인류와 함께한 대마초의 금지는 1937년의 ‘마리화나 세금법’에서 시작된다. 대마초를 통해 종이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되자, 펄프를 통해 종이를 생산하던 화학자본의 이해에 충실했던 정부 인사들이 이 법을 제정한 것이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꾸준하게 대마초는 불법화되어 있다.


  자본의 이해와 대마초 금지와의 관련을 지금도 볼 수 있다고 한다. 대마초 합법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마초가 합법화 되면 지금의 담배 사업은 100% 다 망할 것으로 예측한다. 위에서 본 것처럼 대마초가 건강에도 훨씬 좋고, 위험하지도 않고, 신경질을 가라앉히며, 게다가 저렴하다. 그런데 어떤 미친 인간이 건강 버리고 돈 버리면서 신경질 나게 하는 담배를 피우고 있겠는가. 하지만 담배로 돈을 짭짤하게 벌고 있는 세계의 모든 담배자본이 이를 그냥 놔둘 리가 있나. (참고로 담배 광고에 쓰이는 돈이 담배의 폐해를 알리는 교육에 쓰이는 비용의 30배가 넘는다고 한다.) 누구나 알다시피 대다수 노동자민중들의 건강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자본가들이 원하는 대로 되는 세상이 자본주의, 자본가 세상이다.

  

반전운동과 대마초


  대마초를 불법화했던 자들은 인종차별을 이용했다. 그 당시 언론은 대마초를 억압하기 위해 계속해서 ‘마리화나를 피우면서 백인 여자를 강간하는 멕시코인과 흑인’이라는 이미지를 유포했다. 이 이미지는 성공적으로 유포되어 대마초와 흑인, 멕시코인, 그리고 폭력이라는 이미지는 하나로 연상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억압됐던 대마초는 60년대의 거대한 반전운동, 저항운동과 결합하면서 혁명의 상징이 된다. 그 당시 진보운동가들이 그냥 대마초를 조금 한 정도가 아니었다. 기득권세력과 진보세력이 충돌하는 지점에는 항상 대마초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기득권세력은 진보세력을 탄압하는 구실로 대마초를 걸고 넘어졌고, 진보세력은 대마초를 혁명의 상징으로 만들고 있었다.

  

  


마약으로 보는 자본주의


  대마초는 의약품으로 쓸 수 있는 여러 효능이 있다.  그리고 전 인류의 건강을 악화시키고 있는 담배를 대체할 아주 좋은 기호식품이 바로 대마초란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효능은 불법화로 막혀있는 상황이다. 오히려 대부분의 마약은 거대한 마약자본에 의해 암시장에서 거래되고 있을 뿐이다.


  물론 대마초와 같은 마약이 인간의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살면서 받는 스트레스란 것들이 대개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극심한 빈부격차, 가혹한 노동환경 등 자본주의가 주는 스트레스는 실로 막대하다. 이로 인해 어려서부터 본드, 가스에 손을 대는 사람들은 대개 빈곤층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술, 담배, 마약…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이것들에 손을 대게 하는지 돌아보자. 물론 자본주의가 주는 스트레스를 완전하게 해소하기 위한 방법은 오직 ‘투쟁’뿐이다.

 레드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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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조 교수 와 '종군위안부'

 

현서 minx@jinbo.net

(노동해방학생연대 고대모임 회원)


 주)흔히 쓰이는 ‘(종군)위안부’라는 용어는 ‘위안을 주는 여성’이라는 뜻이며, 특히 ‘종군’이라는 말은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군대를 따라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가해자의 입장에 서 있는 개념이다. ‘정신대’는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친 부대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이는 엄밀히 말해  남성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군수공장에 나가 일하게 한 노동대를 말하는 것으로 정신대=일본군 성노예로 볼 수는 없다. ‘일본군에 의한 성노예(sexual slavery)'라는 용어가 가장 바람직하다. 


한승조 교수 파문, 그리고...


  지난 주 내내 한국 사회를 특히 고대를 시끌벅적하게 했던 한승조 교수 파문. 그리고 논란이 되었던 그의 글 속에는 ‘일본군 성노예’  문제가 있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한국인들의 저질 행위’라는 단락에서 “수준 이하의 좌파적인 심성 중에는 일본사대의 종군위안부의 문제가 있다. 전쟁 중에 군인들이 여성들을 성적 위안물로 이용하는 것은 일본 만의 일이 아닌 것이다. 몇 명 안 되는 소수의 노파를 끌고 다니면서 거듭 배상금을 요구하며 물고 늘어져 왔다는 것은 고상한 민족의 행동거지로 볼 수가 없는 것이 아닌지. 애초에 성의 문제는 돈으로 환산될 수가 없는 것인데 왜 돈의 문제와 결부시켜서 자기 망신을 계속하는 것인지?.”라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한승조 교수를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지만원씨 역시 한 강연에서 “아무리 억울해도 그렇지 위안부들은 부끄럽지 않나, 옛날 규수들은 봉변을 당하면 은장도로 자결하였다, 당했으면 숨어서 조용히 지낼 것이지 뭐 자랑이라고 어디 내가 위안부다 밝히나. 자손도 없나.”라고 이 문제를 언급하였다.


분노


  한승조 교수와 지만원씨의 이런 발언에 많은 국민들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이번 발언들은극우세력들의 무지를 넘어, 모든 여성들에게 폭력적으로 다가오기까지 한다. 일본군 성노예 여성들은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에서 강제로 끌려갔으며 그 수는 10-20만명에 달한다. 그녀들은 남성들을 위안해준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성적 결정권을 완전히 박탈당한 채 하루에 많게는 50명의 일본 군인들에게 강간을 당하기도 했다. 거부할 경우 따라오는 폭력과 비위생적인 생활로 인한 성병 및 낙태로 인하여 아직까지도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명백한 성폭력 범죄를 두고도 몇 안 되는 소수의 노파의 아집으로 왜곡하고 사실관계를 부인하는 것은 극우세력의 발광에 다름 아니다. 또한 상처를 힘들게 이겨내고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고 지금까지 싸워오고 있는 생존자들에 대한 모욕이며, ‘순결’ 운운하며 도리어 피해 여성들을 두 번 죽이고 있다.  



민족주의를 넘어...


  하지만 이번 파문은 극우 세력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게 한다. 이번 발언에 대한 대다수 네티즌들의 반응은 ‘우리 민족의 아픔을 어떻게 그 따위로..’ 정도이고, 일부 강경 네티즌들은 ‘일본 여자들도 당해봐야 안다’, ‘우리 국력을 키워서 복수하자’ 는 논리에까지 이르고 있다. 하지만 한 교수 발언에도 나오듯이 전쟁 중 여성에 대한 성폭력의 문제는 비단 일본군만의 문제가 아니다. 돌이켜보면 한국군 역시도 많은 베트남 여성들을 강간한 전력이 있고, 이 이외에도 전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보스니아의 여성강간캠프에서 민족청소(말살)의 명목으로 집단성폭력이 자행되었던 사건이다. 이런 사례들은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민족의 문제로, 반일의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오히려 본질을 흐리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고한 인민들이 죽어나가며, 특히 여성들에게는 무자비한 성폭력을 가하는 전쟁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다시 한 번 되묻는 일이 아닐까. 

 레드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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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조 교수 파문,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성렬 tjdfuf@jinbo.net

(노동해방학생연대 고대모임 회원)

‘친일/반일’ 구도 속에서

가려지는 진실


  한승조 고대 명예교수의 기고 글로 인한 파장은 실로 막대했다. 그렇다면 국민여론이 들끓게 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무엇일일까? 한마디로 말해 반일감정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찬물을 끼얹듯 일본 보수우익의 입장을 고스란히 반영했다는 것이다. 일제 36년 식민지배가 아직도 국민들의 뇌리에는 생생한데 말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 ‘친일/반일’의 구도는 여전하다. 즉 ‘당시에 러시아보다 일본에 먹힌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라는 한교수 입장에 대한 비판의 대부분은 ‘그렇다면 결국 일제의 식민지배를 용인하는 것 아니냐? 우리 민족이 당했던 고통에 대해 눈을 감는 것이냐?’ 등으로 한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비판의 논리의 귀결점이나 그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민족주의’에 머물고 만다.


  혹자는 ‘우리나라에서 민족주의는 아직 의미가 있다’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자본주의 체제의 성원들의 이해관계가 같을 수 있을까? 쉽게 말해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 말이다. 교과서에 나와 있듯 자본주의체제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존재하고, 봉건제에 이어 ‘계급사회’다. 즉 누구는 빼앗고 누구는 빼앗기는 그런 사회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체제에서는 비록 같은 나라에 살고 있다 해도 ‘공통된 이해’는 갖기 힘들다. 아니, 가질 수 없다. 누구는 떵떵거리며 사는 반면, 누구는 열심히 일해 봤자 하루 벌어먹고 살기도 힘든데 사이좋게 ‘공통된 이해’를 갖는다고 한다면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민족주의 논리는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하나로 묶고자 한다. 그 결과, 현재 진행 중인 [울산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과 [청주 하이닉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등 이 땅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투쟁에 대한 관심은 멀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반외세’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 남한 사회를 쥐락펴락하는 자본가와 정권에 대해서는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될 위험 역시 있기도 하다.


이 사회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제대로 비판하자!


  그렇다면 친일/반일의 구도의 민족주의 논리가 아니라면 결국 한교수의 주장에 대해 찬성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비판을 하려면 제대로 하자는 것이다. 20세기 초, 조선이라는 나라가 ‘자주적 근대화’, 즉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스스로 이행한다고 한다면 그 과정은 과연 순탄하기만 했을까? 역사는 우리에게 치를 떨며 말해준다. 바로 ‘영국의 인클로저운동’을 비롯하여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은 ‘인민의 피로 얼룩진 참혹한 과정’임을 말이다. 따라서 조선이라는 봉건제 국가가 스스로 자본주의로 이행한다고 해도 그 과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결국 당시에 조선 스스로 ‘자주적 근대화’로 나가든지, 일본이 식민지배를 하든지, 러시아가 식민지배를 하든지 간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느껴야 했던 고통은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당시 역사적 판단의 과제는 단순히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선과 일본의 노동자가 함께 한 ‘원산총파업’처럼 자본주의의 이행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최소화하고 일본제국주의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는 노력에 대해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민족’이라는 시각이 아닌 한 사회를 관통하는 ‘체제’ 속에서 발생하는 대립을 중심으로 이번 한교수 파문을 다시 봐야 할 것이다. 그래야 복잡하게 얽힌 과거사 문제의 본질을 명확하게 볼 수 있으며, 여기에서부터 우리의 미래 역시 고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한교수 파문의 본질을 다시 봐야 한다.

 레드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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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토론회 QnA 교과서 다시보기: 학교에서 가르친 노동과 여성

 

발제문 중에서 ‘교과서에서는 갈등의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해결하자고 나온다’고 지적했는데요, 그럼 대화와 타협 말고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세요.


 문제해결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그 중에서 서로의 합의가 가능한 대화와 타협이라는 항목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대화와 타협으로 끝날 문제였다면 애초에 갈등이 전면화 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등록금투쟁을 할 때도 그렇죠. 학교 측에서는 매년 말도 안 되는 인상근거를 가지고 등록금을 올립니다. 학생들은 당연히 그것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내죠. 하지만 아무리 대화와 타협의 장이 마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는 학교 측에서 학생들의 요구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걸로 끝입니다. 대화와 타협은 결국 서로의 동등한 힘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생색내기에 그치게 되는 것입니다. 교과서에서 사회갈등의 예시로 많이 나오는 노동자들의 파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교과서에서는 그 해결방법으로 ‘어떻게 하면 노동자들을 설득해서 혹은 압박해서(대화와 타협이라는 용어로) 파업을 끝나게 해야 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사실은 해결 방법은 이런 것들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대중행동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힘의 관계에서 약자의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움직이고 정당성을 얻어나갈 때 해결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여성과 남성이 평등해야 한다는 것은 맞지만 원래 생물학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에 비롯되는 차이는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령 힘이 센 남성이 힘이 약한 여성을 보호하는 것 등에 대해서 말입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강하다고 하는 것을 정해져 있는 남성성/여성성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자라고 배워오는 환경이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에 따라 사회화되면서 어느 정도의 힘이나 운동 능력이 다르게 배양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회화가 진행된다고 해도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성/여성성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런 상황인데도 사회에 정해진 남성성/여성성을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일인 것 같습니다. 약간씩의 차이가 존재하겠지만 그것은 남성과 여성 본연의 차이가 아니기에 남성일반/여성일반으로 대하는 것은 다른 이에게는 또 다른 폭력이겠지요.



내가 알기로는 법에 노동 3권(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 행동권)이 보장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파업을 하면 정부에서 잡아들이는 것인가요?


 당연히 법에는 파업권인 단체 행동권이 보장되어 있지만, 그것을 제재하는 요소가 많습니다. 파업을 하기까지는 여러 과정이 필요한데요, 사측과 노동자가 만나서 교섭을 하고 그것이 결렬되면 정부에서 중재를 거치고, 거기서도 안 되면 서로 간에 냉각기간(15일)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그 과정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기간 동안(특히 냉각기간동안) 사측에서는 파업대오를 무너뜨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쓴다는 것이죠. 협박과 회유가 계속해서 되풀이되고, 초반에 뭉쳐있던 노동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지지부진함을 느끼고 파업대오에서 이탈하기도 하고 회유를 받아들이고 가만있기도 하죠. 그렇게 되면 사측과 노동자의 대결은 사측의 승리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런 것 때문에 파업들은 냉각기간을 거치지 않고 바로 돌입하기도 하는데 이를 불법파업으로 명시하고 정부와 사측은 탄압을 가해오죠. 뿐만 아니라 사측에서는 파업기간 중에 대체근로인력을 동원해서 자신에게 전혀 피해가 안생기게 하죠. 그러고는 파업노동자들을 잘라버리는 겁니다. 요즘과 같이 비정규직이 많은 곳에서는 더욱 쉽게 이 과정들을 수행하죠. 그리고 파업하기 전에 조합건설 자체를 탄압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엄청나게 어려움이 많습니다. 현실사회에서 강자는 바로 회사 측이기 때문이죠. 레드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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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범대학생회의 <노동해방학생연대의 사범대비판은 부당하다.>에 대하여

 

현서 minx@jinbo.net

(노동해방학생연대 고대모임 회원)


 지난 2월 말, 노학연 고대모임에서는 ‘모두가 즐거울 수 있는 새내기 새로 배움터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작성하여 게시하였다. 대자보를 통해 우리의 새터를 돌아보며 여러 가지 사례들을 통해 누군가에게는 웃음을 주었던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불쾌감을 주는 폭력이 되었다는 것을 학우들과 함께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자 했고, 더불어 새터 주체인 사범대 학생회에서 평가를 통해 보다 실질적인 교양과 대책을 마련하기를 제안했다. 그리고 사범대 학생회에서는 <‘노동해방학생연대’의 사범대 비판’은 부당하다>는 답변 대자보를 붙였다. 이번 대자보 리뷰에서는 집중적으로 '성폭력이다/아니다’는 논쟁을 불러일으킨 사안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자 한다.(전문은 nohak.jinbo.net) 

  우리는 첫 번째 대자보를 통해 "모과의 남학생이 웃통을 벗으며 FM을 했고, 웃통을 벗은채 장내를 한바퀴 돌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바지도 벗으라며 환호했다." 는 상황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 상황을 두고 그 자리에 있던 상당수의 학우들은 불쾌함을 느꼈다. 하지만 사범대 학생회는 자보에서 "사범대 학생회는 두 번째는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학우들이 불쾌했을 수는 있으나 웃통을 벗은 것이 ‘폭력’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성차별이나 여성억압도 아닙니다.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좋고 싫은 취향 문제입니다. 그것을 옳다 그르다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사범대 학생회의 성폭력에 대한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는 대자보를 통해 "모과의 남학생이 웃통을 벗으며 FM을 했고, 웃통을 벗은채 장내를 한바퀴 돌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바지도 벗으라며 환호했다." 는 상황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 상황을 두고 그 자리에 있던 상당수의 학우들은 불쾌해했다. 하지만 사범대 학생회는 자보에서 "사범대 학생회는 두 번째는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학우들이 불쾌했을 수는 있으나 웃통을 벗은 것이 ‘폭력’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성차별이나 여성억압도 아닙니다.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좋고 싫은 취향 문제입니다. 그것을 옳다 그르다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대자보 작성 이후, 이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자 사범대 학생회장은 “예를 들어 예전에는 여성들이 전신을 다 가리고 다녔는데, 이후에 팔을 내놓고 다니는 여성을 보고 ‘성적 보수주의자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반박하였다. 그렇다면 속칭 "바바리맨"이 자신의 신체 일부를 내놓는 것을 보고 성적수치심을 느끼는 것에 대해서도 성폭력이 될 수 없는가라고 되물었더니, 그 경우에는 "가해자의 목적/의도가 다르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우리의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하여서는 ‘정치적 차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놓고 우리는 사대 학생회 측이 성폭력에 대해 어떻게 개념정의를 내리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물을 수밖에 없다. 성폭력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 성적 자기결정권과 인격권을 침해하거나 성적 수치심 또는 혐오감을 일으키는 유/무형의 모든 행위(물리적, 언어적, 환경적)를 포함하는 것이며, 앞서 언급한 상황은 불쾌감을 느낀 피해자들이 존재하는 명백한 성폭력적 상황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 대한 사범대 학생회 측의 논리는 전형적인 ‘가해자 논리’에 불과하다. 일부 사람이 그것을 폭력으로 느끼는 것에 대하여 ‘좋고 싫은 취향의 문제’로 말한다면 도대체 어떤 상황이 성폭력으로 될 수 있는 것인가? 또 그것을 성적 보수주의로 빗대 말하는 것은 각 사회문화적 환경의 특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며, 오히려 문제제기자(피해자)를 ‘성적 보수주의자’로 몰아가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아프리카의 여성/남성들이 온 몸을 내놓고 다니는 것에 대해 성폭력이라 말하지 않으며, 서구에서 인사를 할 때 자연스럽게 포옹을 하고 키스를 하는 것에 대해 성폭력이라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남/여의 위계적 구조가 뚜렷하여 여성이 웃통을 벗고 다니면 ‘미친년’ 소리를 듣고, 사소할지도 모르는 스킨쉽에 성적 수치심을 느끼고 성희롱을 당하는 한국여성들의 상황에서 이러한 논리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사범대 학생회의 논리에 따르면 한국에서 어떤 남자가 여자직장동료에게 친근함의 표시로 포옹을 하고 스킨쉽을 행하는 것에 대해 여성이 문제제기 할지라도 성폭력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불쾌해하고 거부감을 느끼는 여성이 ‘성적으로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들은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한 완전한 기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피해자는 피해자의 입으로 피해자의 불쾌감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 경우 대다수는 “피해자가 너무 예민해서 그렇다. 가해자는 의도가 없었다.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 라고 가해자를 옹호하고 피해사실을 부인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를 말한다는 것은 가해자 중심의 위계적 관계에 대항하여, 피해자의 느낌과 감정을 존중하고 긍정한다는 것을 말한다. 또 가해자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간에, 피해자의 불쾌감을 인정하고 사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번 새터에서 있었던 일 또한 피해자들이 명백하게 존재하는 상황에 대하여, 분명히 성폭력으로 인정을 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가해자 논리에 대하여 사범대는 학생회 차원으로 사과해야 마땅하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우리 모두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소수일지라도 문제제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여성/남성/성적소수자, 장애인/비장애인 모두가 함께 공유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대학 문화를 만들어나갔으면 좋겠다. 레드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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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무엇이 문제인가?

 

김진태 kissme@jinbo.net

(노동해방학생연대 고대모임 회원)


  지난 호에서는 고려대학교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재정사용과 교육문제에 대한 태도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번에는 전반적인 교육문제에 대해 더 얘기해보고자 한다.


대학이 변했다?


  우리는 ‘자유, 정의, 진리’를 배우고 있다. 우리가 배우고 있는 자유, 정의, 진리는 무엇인가? ‘대학은 지식의 상아탑이다.’ 정말 자주 들어본 말이다. 하지만 입학하자마자 영어, 중국어 점령에 경영학 부전공을 목표로 하고 있는 수많은 신입생들을 보면서, 그리고 인문학부생도 인문학을 공부하지 않는 요즘을 두고서 ‘대학이 변했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학생들이 대학은 이렇게 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왜 변했을까? 왜 예전에는 고려대면 인문학부 출신도 어렵지 않게 취직을 했는데 요즘에는 경영학 2중전공 안하면 이력서도 못 낸다고 할까?

  요즘 대학의 구조조정을 담당하는 곳에는 항상 대기업 인사가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커리큘럼이 기업이 원하는 방향으로 구성된다. 대학인이라면 기본적으로 영어에 능통해야 하고 경영학이 어느 정도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그리고 철학과나 사학과는 전국에 몇 개만 남고 다 사라져 달라고 요구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 땅의 교육자들도 아니오, 학생들도 아니다. 바로 자본주의 사회가 지금 그러한 인력을 대학에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업은 대학을 통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인력을 공급받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현재 자본주의 사회는 인문학도를 예전만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곳곳에서 사라져가고 있고, 인기도 없는 것이다.


자본가들의 이윤만이 최고라고 말하는 교육, 변했지만 변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교육’의 의미를 돌아봤을 때, 자본가들의 요구에 따라 교육과 대학의 모습이 변하는 모습은 그다지 생소하지 않다. 공교육을 통한 기초교육의 발달과 대학교와 같은 고급교육의 발달은 모두 자본주의 국가의 탄생과 함께 시작하기 때문이다. 농사지어 먹고 사는 조선시대 백성들은 자기 이름이나 쓸 줄 알면 됐겠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국민(그 중의 대다수 노동자민중)은 기본적으로 글과 간단한 계산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에 공교육은 발달해야만 했다. 고을 원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던 조선시대에는 원님 생각이 법이었지만, 자본주의국가에서는 전국을 관장하는 행정과 법, 교육이 필요했기 때문에 행정, 법, 인문학도를 양성하는 대학 또한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이 모든 보통교육과 고급교육을 아우르는 특징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현 체제에 감히 도전하지 못하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교과서에서는 피지배계급의 항쟁의 역사를 숨기고, 권리를 위한 투쟁은 부도덕하다고 말하고 있다. 대학교육은 영어와 경영학에 통달한 엘리트 관리자가 되어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효율적으로 짜내라고 말하고 있다.(물론, 극소수의 대학 강좌가 노동자민중의 편에 서기도 한다. 아주 극소수만이.) 


바꾸고 싶다면 이렇게!


  이처럼 이 땅의 교육이 자본주의 국가가 낳은 것이기에 항상 체제가 필요로 하는 교육만을 하고 있다. 대학이 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이 체제 자체에 돌을 던질 수밖에 없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교육문제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적어도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면, 당당하게 이 자본주의 국가의 교육에, 이 체제에 돌을 던지자!

 레드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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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호>유물론이란 무엇일까?

 

김진태(노동해방학생연대 고대모임 회원)

 

 

 

‘유물론(唯物論)’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공산당? 마르크스?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악의 무리들? 우리는 유물론materialism을 ‘오직 유(唯)’자에 ‘물질 물(物)’자를 써서 번역합니다. 오직 물질! 유물론은 ‘정신적인 가치를 무시하고 물질적인 가치만을 추구하는 사상’이라는 잘못된 이해가 보편적입니다. 유물론자들은 물질적 가치만을 중요시하고 정신적 가치를 무시하기 때문에 인륜도 도덕도 땅에 떨어진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얘기들은 마치 ‘공산당은 뿔 달린 악마들’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우스꽝스러운 오해입니다.


  그렇다면 유물론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요? 이에 반대되는 관념론(觀念論)은 무엇일까요? 이는 물질(자연 뿐만 아니라 사회까지 포함)과 의식(정신, 사고 등)의 관계에서 무엇이 본원적인가에 대해 대립되는 두 견해입니다. 물론 유물론은 물질이 본원적이라는 주장이고, 관념론은 의식이 본원적이라는 주장이죠. 우리가 흔히 던지는 질문. 즉, ‘신을 비롯한 어떤 정신이 세계를 창조했는가? 아니면 세계는 인간의 의식에 앞서서 옛날부터 존재했는가?’라는 질문이 바로 유물론이 맞느냐, 관념론이 맞느냐를 묻는 질문입니다.


  여러분들의 눈이 한 줄의 여백을 지나는 동안 어떤 생각하셨을지 정말 궁금하네요. 어려운 문제인 만큼 이는 철학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쟁점을 형성합니다.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서는 ‘유물론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나타난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과 사회구조의 모순을 비판하기 위하여 대두된 사상’이라고 설명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자본주의가 발생하기 수천 년 전 철학적 사고가 막 발생하기 시작한 그 때부터 유물론과 관념론은 대립해왔답니다. 우리는 원시 공동체 사회에서부터 영혼과 육체의 관계가 무엇인지 고민했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서는 플라톤과 데모크리토스의 대립이 있었죠. 한국에서는 이황과 이이, 서경덕의 대립이 그 예라고 볼 수 있겠네요. 


  무엇이 옳은 견해일까요? 판단을 내리는 데에 도움이 되는 얘기를 몇 가지 더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만약에요. 인간이 한순간에 갑자기 몽땅 죽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계가 갑자기 몽땅 사라질까요? 아니면,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해도 날아다니던 새, 뛰어다니던 토끼들이 갑자기 멈출까요? 아니겠죠? 그렇습니다. 인간 또한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운동하는 물질일 뿐입니다. 토끼가 뛰고 새가 나는 것을 우리가 아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새와 토끼를 감각을 통해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식이 존재해야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존재해야 그것에 대한 인간의 의식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죠.


  공룡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예로 들 수 있을 듯합니다. 우리는 화석, 공룡발자국 등을 연구하면서 공룡의 진짜 모습을 상상하여 복원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연구를 하기 전에, 다시 말해 예전에 공룡이 살았다는 사실을 밝혀내기 전에는 실제로 이 지구에는 공룡이 살지 않았던 것이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공룡은 실제로 살았던 것이고, 우리는 지금에 와서야 연구를 통해서 현재 공룡이라는 대상에 대한 관념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죠. 이처럼 물질이 정신에 우선함을 알 수 있습니다.


  언뜻 생각해보면 ‘TV는 누가 먼저 생각을 한 후에 물질로 만든 것이 아니냐! 그러면 관념이 우선한 것 아니냐!’라고 따질 수도 있겠습니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사실이라는 것과 유물론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자연에서 금속, 플라스틱 등의 물질을 뽑아내는 방법, 전기를 만들어내는 방법 그리고 전파라는 것을 영상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을 알아냈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연과의 결합을 통해서 알아낸 것들을 종합해서 만들어 낸 것이 TV입니다. 인간은 실제로 존재하는 물질들을 통해 형성된 관념들을 바탕으로 머리를 써서 생각한대로 물질 대상을 오히려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TV라는 관념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TV를 실제로 구성하는 것들은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따져보면 오히려 유물론이 옳은 얘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몇몇 관념론자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들은 그저 관념일 뿐,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 물질이 존재하는 것은 알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관념론의 한 견해라고 볼 수 있죠. 이런 사람들한테 실제로 대상물질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인간의 의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요? 아주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향해 총을 쏴보면 됩니다. 그 사람 말로는 총알이라는 관념은 존재해도 실제로 총알이 존재하는지는 모른다고 했잖아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총에 맞는 것이 그리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총알이라는 ‘관념’이니까요.


  그렇다면 예를 들어, 물이 끓으면 수증기가 된다는 것이 사실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누가 보장해주는데? 위에서 말한 사람들은 실재로 물과 수증기는 존재하는지 알 수 없고, ‘물’의 관념이 ‘수증기’의 관념이 시간적으로 연속적으로 감각된 것일 뿐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저라면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맨 날 끓여먹는 게 라면인데 그걸 모를 리가 있냐!’ 그렇습니다. 우리는 물질에 ‘실천’을 가함으로써 그 대상 물질이 나의 의식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실천’하면 뭔가 정의로운 뉘앙스가 있지만 철학에서는 ‘인간이 의식적으로 대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의 역사에서 물은 수천억 번이 훨씬 넘게 끓여졌고 단 한 번도 수증기로 변하지 않은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물은 끓으면 수증기가 된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물질이 의식에 반영’된다고 합니다. 이 반영이 제대로 되는가를 보증해주는 것이 바로 보고 듣고 느끼는 등의 ‘실천’입니다. 실천이야 말로 제대로 인식하는 것의 보증수표입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물질이 의식에 근원한다는 것을 알아봤습니다. 화창한 봄날이 다가옵니다. 연애하기 딱 좋은 계절이죠. 혹시 그 사람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으신가요? 그러면 계속 찔러보세요. 찔러보는 ‘실천’만이 그 사람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니까요. 그리고 명심하세요. 그 찔러봄이 그 사람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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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호>누가 뭐라 해도 군대는 문제라니까 -유쾌한 정치의 <총보다 꽃을>에 대하여

노동해방학생연대 회원 김진태

 


  ‘인분 사태’만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 국민을 경악하게 만든 일도 없을 것이다. 사실 예비역들과 함께하는 술자리에서는 공공연하게 들어볼 수 있는 얘기였지만 언론에 공개적으로 폭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 말이다. 이번 사건으로 인하여 대한민국 육군은 그야말로 ‘개망신’당했다. 그런데 그렇게 욕을 먹어놓고선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사람이 있더라.  

“실제 중대장이 한 행위는 오른손에 잔변을 묻혀서 두 차례  입에 넣었다 빼게 시킨 것이고 … 분명한 것은 삼킨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안다.” <육군훈련소 소장 허평환>

  이런 사람들을 제외하면 군대에 다양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유쾌한 정치>는 그 중에서도 불필요하게 군력을 증가시키는 정부를 문제 삼고 있다.

  「하지만 군력을 증가시키는 것으로는 평화를 유지할 수 없다. 모두가 군비를 증강시킨다면 그 결과는 누구도 보장 할 수 없으며 이러한 경쟁은 또 다른 폭력을 야기할 뿐이다. 한국군은 국방의 의무를 빌미로 개인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무의미한 군력증강을 그만 두어야 한다.」
  
  자,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군대는 왜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는 10여 년 전 강제징집과 의문사를 보았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인분사태도 봤고, 공익요원 얼차려 사망사건도 봤다. 이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모두 다 봤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군대를 별 말 없이 인정해왔다. 왜? 국방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국방은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대가 외침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 뿐일까? 그 뿐인데 사람이 인분도 먹어야 되고 심지어 죽기까지 해야 되나.  

  우리 주변에서 지겹도록 듣는 ‘군대를 갔다 와야 사람 된다.’는 말과 함께 답을 구해보자. 애초에 비장애인 남성을 제외한 여성, 장애인은 인간이 될 가능성이 없는 존재로 못 박고 있는 이 말은 군대의 성격이 어떤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사람들은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군대를 다녀와야 일도 걱실걱실 잘하고 쓸데없는 말썽을 안 일으킨다.’ 하지만 레드타임즈는 이렇게 해석한다. ‘군대를 다녀와야 위에서 시키는 대로 군말 없이 잘 따르고, 나라 중요한 것도 알게 돼서 감히 장성백 같이 설치지 않는다. 물론, 군대를 다녀온 남성이 여타 인간들 보다 우월하다.’

  군대는 수많은 20대 남자들에게 상명절대복종정신을 불어 넣는다. ‘군대에서 한 일 중에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한 것이 무엇입니까?’ ‘삽질이요.’ 하지만 중공업이 발달한 우리나라에서 굴삭기를 사용하지 않고 왜 하필 삽질을 해야 했는지를 아는 사람을 만나보지는 못했다. 심지어 아침에는 땅을 파게 하더니 밤에는 다시 묻으라는 명령까지 수행한다고 한다. 위에서 시키는 것은 군말 없이 해야 된다는 이러한 철칙은 직장, 학교 등에서 재생산된다. 학교에서는 ‘선배의 키스는 후배의 원 샷’이라는 둥, FM못하는 후배에게 ‘군기가 빠졌다’는 둥의 얘기들이 비일비재하다. 힘들고 꼴 보기 싫어서 도저히 사랑해줄 수 없는 이 회사를 그래도 사랑하게 만들고, 매한가지로 돌아버리게 만드는 이 나라를 ‘애국’하게 된다. 그리고  군대 내에서 한 해 100~200여명 건의 자살사건과 3000명 정도의 정신이상발생이 보여주듯이 이를 이겨내지 못하면 군대에서건 사회에서건 살아가기 힘들다.

  이렇게 대다수 20대 남성들에게 국가에 대한 충성과 위계질서를 불어놓는 것과 함께, 반체제적인 움직임을 직접적으로 억압하는 도구로써 군대는 존재해왔다. 80년 광주에서 있었던 노동자민중들의 해방을 향한 움직임을 총칼로 잔인하게 짓밟은 것은 바로 한국군이었다. 이라크에 파병된 한국군을 봐도 알 수 있다. 한국군은 자본가들의 이윤을 지켜내고, 독립을 원하는 이라크 민중들을 살육하기 위해 파병되었다.

  군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국내외에서 이윤이 최고인 현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수단으로 존재한다. 그 앞에서는 인권도 소용없고 생존을 위한 몸부림도 소용없다. 군대가 더 이상 자본가들의 이윤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를 한번 꿈꿔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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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호>공공의 적2, 우리 사회의 진정한 공공의 적은 누구인가?

노동해방학생연대 회원 영현

 

 

공공의 적2, 우리 사회의 진정한 공공의 적은 누구인가?

 

 얼마 전 극장에서 영화 <공공의 적2>를 보았다. 천만 관객을 불러 모았던 <실미도> 이후, 강우석 감독이 자화자찬하며 내놓은 신작이다. <공공의 적1>에서 꼴통형사로 출연하였던 설경구가 이번에는 대한민국 정의 검사 강철중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동창생이기도 했던 사학재단 이사장 한상우(정준호 분)에게서 수상한 냄새를 맡고 그를 잡아들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것이 영화의 줄거리 전부이다. 전작에서 그러했듯이 권선징악을 메시지로 전개되는 스토리도 변함이 없었다.

 

 

보여주지..법보다 돈이 세단 걸..

 내 영화 평을 딱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국정홍보처 제작영화’ 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결코 과한 평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옆을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근데 저런 사람(강철중 같은..) 없잖아.” 그렇다. 관객이 바보가 아닌 이상 국정홍보처 광고에나 나올법한 강철중식 정의검사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왜냐하면 한상우의 말처럼 세상은 ‘법보다는 돈이 세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자기 밥줄을 내놓으면서까지 사회정의를 추구하려는 검사가 도대체(!) 어디 있다는 말인가.
 뭐...설사 그런 사람이 몇몇 있다고 가정을 해 보자. 부패한 법조계를 개혁하고, 정말로 신심에서 검사의 본분을 다하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영화에서처럼 돈이 아닌 정의를, 권력이 아닌 서민을 위한 공권력이라는 환상은 결코 현실이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기구는 결코 중립적인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국가기구, 공권력은 철저히 자본을 위해 움직이며 노동자민중을 탄압하는 곳이다. 때문에 강철중 같은 검사가 수십 명이 있다고 해도 이러한 본질은 결코 변할 수가 없다. 영화에도 나오듯 평검사는 부장검사, 검사 출신 변호사, 검찰로 수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하여 검찰, 국회, 법원, 정부, 군대까지..이들의 끈끈한 커넥션은 결국 자본가들과 연결이 된다. 뭐든 돈이 제일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결국 국가기구는 이 한국 사회가 자본을 위한 사회가 되어 더 잘 굴러가도록 작동을 하는 곳이며, 만약 이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불순분자(속칭 빨갱이들)가 있을 때는 총출동해서 때려잡게 된다. 

 

 

진짜 공공의 적은 누구인가

 어쨌든 정의의 검사 강철중은 공공의 적 한상우를 때려잡기 위해 노력한다. 한상우가 ‘그냥 나쁜 놈’보다 한 수 위인 ‘공공의 적’인 이유는 아버지가 평생 일구어놓은 사학재단을 매각해서 해외로 돈을 빼돌리는 미국 시민권자이기 때문이다. 즉, 강철중이나 관객들은 돈에 눈이 멀어 부모형제 몰라보고 패륜아 짓을 서슴지 않는 것에 한 번 분노하고, 조국을 배신하고 저 하나 잘 살자는 이기적인 인간임을 보고 민족적 감정에 욱하여 또 한 번 분노한다. 이런 점에서 <공공의 적2>는 현 사회체제를 제대로 비판하지 못한다. 그리고 ‘진짜 공공의 적’을 겨냥하지도 못한다. 오히려 비난의 화살을 한상우 개인에게 몰아가면서 사회의 모순들과 진짜 공공의 적들을 은폐시키고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한상우의 계략에 당하는 그의 아버지는 평생 교육을 위해 헌신한 캐릭터(선)로 나오며, 이에 대비되어 한상우는 교육자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돈에 눈이 먼 이사장(악)이다. 고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학생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 한국의 사학재단의 현실인데 말이다. (이런 면에서는 ‘두사부일체’가 차라리 낫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볼까, 여기서 강철중 검사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돈 없는 것들은 자격지심 때문에 부자는 다 때려잡으려고 한다는 한상우의 말에, 강철중은 “너같이 나쁜 놈(악)때문에 착한 부자들(선)까지 욕을 먹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니, 강철중 검사님! 몰라도 한참을 모르십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한 자본가가 어디 있답니까. 착한 자본가는 곧 경쟁에서 밀리게 되고, 그것은 곧 파산을 의미 할 뿐이다. 경쟁과 이에 따른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는, 자본가 개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자본의 본능적인 생리에 따른 것이다.

 

 

관객 여러분, 어디를 향해 분노하고 있으십니까?

 <실미도>가 국가주의를 공격하는 듯하면서도 오히려 강하게 그것을 호소했던 것처럼, <공공의 적2> 역시 관객들에게 정의로운 국가와 강력한 공권력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또, 비판의 화살을 ‘부도덕한 개인’에게 모음으로써 자본가들과 그에 붙어먹는 국가기구라는 진정한 공공의 적을 은폐시킨다.
 혹자는 이런 나의 영화 평을 보고 너무 과도하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재미로 보는 건데 말이다. 그렇다. 본인도 영화를 재미로 본다. 하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재미로 본 영화들이 의도한대로, 흘러가는 대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공공의 적2>를 보며 다시 한 번 대중문화에 무의식적/무비판적으로 동의하고 있지는 않는지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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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호>3.8 세계 여성의 날, 딸들아 일어나라!

노동해방학생연대 회원 영현  

 

 

 

 “이 땅의 노동자로 태어나~자랑스런 딸로 태어나~
 사랑도 행복도 다 빼앗겨 버리고 참아왔던 그 시절 몇몇 해~
  나가자 깨부수자 성차별 노동착취~ 뭉치자 투쟁이다 여성해방 노동해방”
(민중가요 ‘딸들아 일어나라’ 중)

 

3.8 세계 여성의 날의 유래


 산업혁명 이후 많은 여성들이 가정 밖으로 나와 임금 노동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너무나도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착취당하였고, 가정에서는 여전히 가사노동과 육아를 떠맡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성노동자들은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단결하고 싸우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 역사적인 3.8 투쟁이 있었다. 1908년 3월 8일 1만 5천명의 방직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미국 뉴욕 룻저스 광장에 모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공황으로 인한 경제 침체기 속에서, 당시 여성 노동자들은 하루에 12-14시간씩 먼지를 마시며 노동을 했다. 급기야 트라이앵글이라는 한 피복회사의 여성 노동자 146명이 불에 타죽는 참혹한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에 분노한 여성 노동자들은 들불처럼 일어나 거리로 나왔던 것이다. 그녀들은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달라’ ‘10시간 노동제를 보장하라’ ‘노조 결성의 자유를 보장하라’ ‘안전한 작업환경을 제공하라’ 라고 외치며 무장한 군대에 맞서 싸웠다.
 2년 후, 1910년 제 2인터내셔널의 노동여성회의에서 독일 사민당(SPD)의 지도자이자 국제 여성노동운동의 지도자였던 클라라 체트킨은 3월 8일을 기념하며 세계 여성의 날로 조직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이후 매년 3월 8일 전세계 각국의 여성 노동자들이 집회를 갖고 거리를 행진하며 3.8 투쟁을 기념하고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위해 싸워오고 있다. 이와 같이 3.8 여성의 날은 성차별과 노동착취에 시달리던 여성노동자들 스스로가 싸움을 통해 쟁취한 날이다.
 

 

2005년, 여성 노동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530만 여성노동자 중에서 380만명, 10명중 7명이 비정규직, 기혼여성의 80%가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임금은 남성노동자의 62%,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임금은 전체 정규직의 43%, 100만여명에 달하는 특수고용노동자의 대다수가 여성. 정리해고 1순위.

  이것이 바로 2005년 한국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이다. 성차별과 노동탄압에 항거하며 미국의 여성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선지 벌써 100여년 가까이 흘렀지만, 여성 노동자들의 처지는 여전히 열악하기만 하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능력보다는 외모를 중시하는 사회 속에서 받는 고용차별에서부터, 여성 노동자들의 대다수는 비정규직으로 채용된다. 그리고 언제 해고 될지 모르는 불안감과 저임금,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노동을 해야만 한다. 겨우 최저임금을 받는 비정규직 시설관리 노동자들의 대다수는 여성 노동자이다. 특히 골프장 경기 보조원과 같은 특수고용노동자들의 경우에는 노동자성이 인정 되지 않아 노조를 만들어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는 일조차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출산휴가나 생리휴가를 요구하는 것은 해고를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더군다나 그녀들이 여성으로서 겪는 성희롱과 성폭력, 그리고 가정에서 도맡아 하고 있는 가사노동은 여성 노동자들에게 이중의 억압을 가하고 있다.

 

 

딸들아 일어나라!

 이렇게 여성 노동자들이 겪는 성폭력과 노동착취는 극심하지만, 아직 많은 여성 노동자들은 싸우고 있지 못하다.집회에서 심심찮게 들리는 ‘노동형제’라는 표현처럼 진보 진영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에서도, 가부장적 행태들은 만연해 있어, 그녀들을 투쟁의 주체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더욱 힘들게 한다.
 그러나 100여년전 미국 여성 노동자들의 역사적인 투쟁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스스로 싸우지 않으면 스스로의 권리를 쟁취할 수 없다는 점이다. 3.8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는 그 날의 정신을 기리며,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거리로 나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노동자가 여/남 성별을 뛰어 넘어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하여 자본에 맞설 수 있도록, 여성을 억압하는 성차별/성폭력 그리고 가부장적 행태들과 철저하게 싸워나가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남성들과 동등한 일을 하고 같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면,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조직을 만들어 노동조합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리고 산전산후 휴가와 탁아소 시설에 어린아이를 맡길 수 있다면,
오늘 날 우리가 모든 투표에 참여할 수 있다면,
우리가 우리의 성(Sexuality)과 수태를 조정할 결정권이 있다면,
이것 모두는 바로 우리들의 어머니와 할머님들의 피나는 투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코펜하겐 3.8세계여성의날 기념 대회 연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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