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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호>교육투쟁, 망설이지 마세요.

노동해방학생연대 회원 김성렬

 

2003년 8%, 2003년 6.9%, 그리고 올 해는 5%

“인구율이 줄어든다고 해서 절대 속지 마세요. 절대 인구수는 계속 증가합니다. 알았지요?” 누구나 한창 수능 공부할 때, 이런 퍼센트 문제에 속은 경우가 있을 것이다. 교묘하게 그래프와 퍼센트로 우리 눈을 현혹시켰던 바로 문제. 그럼에도 어쨌든 대학에 온 우리는 다시금 퍼센트 문제로 고민하게 된다. 바로 매년 반복되는 등록금 인상률 때문이다. 어김없이 올 해도 올랐다. 무려 5%나 말이다. 말이 5%이지, 그 동안 인상률을 고려해 봤을 때, 우리가 실제로 납부해야 하는 금액은 이제 인문계 등록금만 300만원이 넘는다. 이공계는 말할 필요도 없이 그 이상이다. 부푼 마음으로 입학한 05학번 새내기들은 일단 등록을 해야 입학을 하게 되어 있으니, 입학금에 등록금까지 포함한 금액은 인문계의 경우 400만원을 훌쩍 넘기고 말았다.

“누가 고대에 오라고 했는가. 아무도 고대에 오라고 한 사람은 없다.”

등록금이 오르면서 학생들은 휴학에,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이러한 학교 측의 대답은 그 어이없음에 오히려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여기에 “고대가 연대를 이기는 것은 연대보다 등록금 인상을 높이는 것이다.”라고까지 말하는 학교 측의 대답은 과연 온전히 정신을 갖고 사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그렇다면 학교 측에서 내세우는 근거는 무엇일까? 바로 100주년이다. 올 해 고대는 건학 100주년을 맞는다. 그래서 중앙광장 옆의 으리으리한 100주년기념관은 5월 5일 완공을 목표로 거의 다 지었으며, 각종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러한 사업에 올 해 등록금 인상분 115억 중에서 53억이 쓰인다고 한다. 하지만 곰곰이 따져 보자. ‘이제 곧 완공되는 100주년기념관에는 우리가 마음 놓고 24시간 사용할 수 있는 ‘자치공간’이 있는가? 각종 행사를 한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행사는 과연 몇이나 될까? 있기나 할까?‘하고 말이다. 그 어디에도 학생들을 위한 것은 없다. 다만 학교 측의 입장, 재단 측의 입장만 있을 뿐이다.

‘합리적으로 대화로 풀어내자!’ vs ‘오직 우리의 실질적인 대중행동이 필요하다’

과연 어느 것이 더 옳은 말일까? 요즘 사회적으로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를 풀어나가자고 난리가 아니다. 신문 사회면에 가끔씩 ‘노동’이란 말이 들어간 기사가 나오기만 하면 어김없이 사설에는 ‘이제는 대화와 타협으로’하는 글이 실릴 정도다. 하긴 장구한 12년간의 제도권 교육에서 우리는 항상 배워오지 않았는가? ‘사회적 갈등은 구성원들의 대화를 통해 서로간의 입장을 고려하여 타협해야 한다’고 말이다. 학생들 사이에 등록금 인상 반대 목소리가 커지면 학교 측에서도 이러한 ‘대화와 타협’을 강조한다. 여기에 ‘합리적’이라는 말이 덧붙여진다. 학교 측에서 대화와 타협을 강조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저들은 학생들이 하나로 뭉쳐있지 않고 개별화 되어 있는 한 힘에서 결코 밀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대화라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바로 학생들이 하나로 단결하여 뭉치는 것이다. 학교 측의 논리에 말로만 대항해 봤자 학교 측은 당황한 기색은 전혀 없이 속으로 애써 웃음을 참으며 ‘합리적’으로 자신의 논리를 반복할 뿐이다. 이제 말이 아닌 행동이 필요할 때이다. ‘부당한 등록금 인상 반대한다’라고 말만 외칠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피부로 와 닿는 등록금 문제를 이제 결코 좌시할 수는 없다. 앞서 언급했듯 퍼센트 문제를 풀듯 머리로 푸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으로 행동으로 풀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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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호>비정규직보호입법은 비정규직을 보호하지 않습니다.

노동해방학생연대 회원 김성렬

 

 

1500만 노동자들 중 800만이 비정규직!

2003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한 남성노동자가 월차휴가를 내겠다고 하자 회사 관리자가 와서 식칼로 아킬레스건을 잘라버린 사건. 2004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한 영세한 공장에서 일하던 태국 출신의 여성노동자들의 하반신이 마비가 된 사건. 이렇게 굵직굵직하게 얘기된 사건 외에도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건들은 잠시 잠깐 신문의 한 귀퉁이에서 기사로 나타났다가 어느 새 잊혀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당사자들의 고통 역시 나 몰라라 잊혀질 뿐이었다. 바로 누구의 얘기인가? 누구의 고통인가? 하루하루 열악한 작업환경에 치를 떨며 살아가고 있는, 아무리 일해 봤자 한 달 월급이 백만 원이 채 안 되는, 그야말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이는 누구인가? 바로 우리 주변에 있는 이 땅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지난 98년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급격히 많아지더니 이제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섰다. 노동자들의 실태에 관해서는 그렇게 인색해 하는 정부조차도 인정하고 있을 정도다. 말이 800만이지 그야말로 엄청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이제 그 어디에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시대, 비정규직 800만 시대가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이다.

‘비정규직보호입법’이면 비정규직을 보호하는 건가?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현재 정부가 내놓은 법안을 보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사업주가 2년 동안 마음껏 부려먹을 수 있는 기간이 오히려 3년으로 늘어난다. 비정규직으로서 2년 동안 갖은 설움과 고통으로 살아가는 것도 억울한데 3년이라니. ‘비정규직을 보호하겠다는 것’은 기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고용에 대한 불안감을 줄이고 잘 살 수 있도록 ‘정규직화’ 한다는 것 아닌가? 상식이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 법안은 오히려 비정규직을 양산하려고 안달이 났다. 그렇다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를 보고만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 확산되고 더욱더 열악한 처지로 전락하고 마는 이 법안에 대해 모든 것을 걸고 싸우고 있다. 그들에게는 그만큼 절박한 것이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원칙’, 그 훌륭한 원칙만이 있을 뿐이다. ‘서로 싸우지 말고 대화로 해결하자. 하지만 우리가 정한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불법적으로 행동할 경우 가만있지 않겠다!’하는 그 원칙을 말이다. 하지만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실질적인 힘이 있어야 대화를 통해 뭐라도 따낼 수 있지 않은가? 아무런 힘이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불법행동 하지 말고 대화를 통해 (그것도 정부가 자초한) 문제를 해결하자고 하는 것은 이 법안을 통과시키겠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 목소리로 이 법안을 반대하자!

더 이상 비정규직이 양산되는 것을 이제는 눈 뜨고만 볼 수 없다. 이윤을 위해서라면 일하고 있는 노동자의 손가락이 잘려나가든, 하반신이 마비가 되든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자본가들을 위해 만든 이 법안에 대해 한 목소리로 반대해야 한다. 이 땅 모든 노동자들을 비정규직으로 만들고 노예와 같은 삶을 강요하는 것에 반대하여 우리는 힘차게 싸우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지지와 박수를 보내야 한다. 이는 책 속의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함께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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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T2호>성매매 여성 Vs"위안부°할머니"

2004년 10월에 발간된 레드타임즈 3호에 실린글입니다.
(°표시는 각주가 있음을 말 합니다.)

  얼마 전 과거사 청산을 주제로 했던 tv 100분 토론이 한동안 꽤 논란이 됐던 적이 있다. 당시 패널로 참가했던 이모 교수의 발언이 문제였다. 그는 시종일관, 진정한 역사 청산은 국가 주도가 아닌 전 사회적인 자기 성찰과 고백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요지의 주장을 펼쳤다. 찬반구도로 논의 틀이 잡혀 있던 상황에서 그것은 의도했건 그렇지 않았건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우익의 손을 들어주는 꼴이 되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나온 "정신대 문제" 관련 발언이 파장을 일으켰다. 󰡐군 위안부󰡑 강제동원과 이용에 일본인뿐만 아니라 한국인들도 다수 참여했고, 이에 대한 자기성찰적 고백이 필요하다는 것이 발언의 요지였다. 이것은 일견 민족간의 문제로만 치부되는 문제를, 가부장적 사회구조를 내면화시키고 있는 이 사회 전체의 문제로 확장시켜 봐야한다는 문제의식으로 발전될 수 있는 시각이다. 물론 내가 여기서 그 교수의 편을 들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과거사 청산에 대해 입장을 전개하려는 것도 아니다.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그 발언 이후에 벌어진 논쟁 내용과 뒤이은 네티즌들의 비난에 대해서다. 그는 단지 머릿속으로 역사를 해석하고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나약한 관념론자, 엘리트주의 지식인에 불과할 뿐이지만 발언 내용을 왜곡하진 말아야겠지..    

  그 발언 이후 논의 내용은 󰡐그렇다면, 일본이 잘못이 없다는 것이냐󰡑,󰡐위안부를 상업적 공창과 동일하게 본다는 것이냐󰡑로 흘러갔다. 네티즌들도 흥분했다. 󰡐창녀가 되어버린 위안부 할머니들, 토론회를 보면서 맘이 너무 아팠다.' , ‘우리나라도 베트남전에 한 짓이 있긴 하지만... 자기 아들이 남의 딸 성폭행 했으니 우리 딸을 성폭행한 놈도 용서해야 한다는 거냐󰡑 , 󰡐어떻게 자발적으로 몸 파는 여자랑 정신대를 비유하는가󰡑 등이 주된 비난의 내용이었다. 일단 그 발언의 정당성 여부를 차치하고서, 이러한 반응과 비난 여론이 나오는 것을 보고 나는 진절머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대 할머니󰡑를 바라보는 시각과 성매매 여성들을 바라보는 시각. 일견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시각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둘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종군 위안부󰡑로 인한 대다수의 분노는 이것이다. 󰡐일제 시대에 우리(남성화된 민족 혹은 국가)의 힘이 약해서 우리 여자를 남에게 빼앗겼다. 우리는 그들의 순결을 지켜주지 못했다. 너무나 수치스럽고 부끄럽다.°°.󰡑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대다수의 분노는 이것이다. 󰡐순결을 돈 때문에 스스로 내팽개친 더러운 년(이들이 비난받는 건 한편으로 일부종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두 시각은 모두 여성의 몸을 남성의 전유물쯤으로 사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상반된 태도를 보이며 이리도 경기를 일으키는 것인가.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정신대는 강제동원된 것이지만 성매매는 자발적인 것이라는 인식에 있다. 그리하여 정신대 할머니는 민족의 아픔이지만 성매매 여성들은 구원받지 못할 족속이 된다. 인신매매가 아니라 제 발로 걸어갔으면 당연히 자발적인 것인가? 우리는 성매매 여성을 비난하기 전에 왜 그들이 수많은(!) 직업을 놔두고 성매매를 할 수밖에 없는가를 물어야 한다. 나는 성매매 역시 사회구조적인 강제성을 띠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여성노동자의 70% 이상이 비정규직이다. 그나마도 남성 노동자의 평균 임금에 턱없이 못 미치는 수준에서,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으면 조만간 짤리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일을 해야한다. 열악한 사회적 노동조건 속에서 못 배우고 능력 없는 여성은 어떻게 해야 먹고 살 수 있을까. 혹여 어린 나이에 가출이라도 한다면? 또는 가정폭력을 못 이겨 탈출이라도 한다면? 직업소개소의 소개는 80% 이상 성매매 업소와 연결된다. 어딜 가나 성매매의 위협(혹은 유혹)은 도사리고 있다. 하다못해 주유소에서 일을 하더라도. 물론 수요가 있으니 성매매 시장이 번창할 수 있는 거다. 하지만 수요는 왜 생기는가. 남성은 생물학적으로 절대 성욕을 참지 못하기 때문에? NO!!!!!!(이건 남성들에게 직접 물어보면 가장 잘 알 수 있다) 수요는 사회가 만들어내고 있다. 남성들의 성 구매는 부끄러운 것이 아닐 수 있게 사회는 교육한다.

성매매 여성들과 󰡐위안부 할머니󰡑를 바라보는 상반된 시각, 그러나 그 안에 들어있는 동일한 폭력성의 뿌리. 제대로 냉정하게 보자. 󰡐위안부 할머니󰡑를 보며 아픈 가슴, 성매매 여성들을 보면서도 함께 아파야 한다. 그리고 아픈 것에 그치지 말고 이 모순을 타파해 나가기 위해 함께, 싸워야, 한다.

주>
° 최근까지 󰡐종군 위안부󰡑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어왔고 아직까지도 대다수 사람들이 위안부라는 용어를 쓴다. 그러나 이 용어는 전시에 군을 따라다니며 그들을 위로(?)하고 사기를 높이는 데 이용된 여성들이라는 뜻으로, 동원의 강제성을 제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말이다. 공식적으로 󰡐일본군 성노예󰡑라는 용어를 쓰는 게 맞다. 인용을 위해 부득이하게 이 용어를 쓸 때는 󰡐 󰡑 로 표시하도록 하겠다.    
    
°°일상에 만연해있는 성폭력 문제를 대할 때와 󰡐정신대 문제󰡑를 대할 때 분노의 정도가 다른 분이라면 99%, 이러한 감정일 거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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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T3호>국가보안법 열린토론회 Q&A

-2004년 10월에 발행된 레드타임즈 3호에 실린 글입니다.

 

 

Q. 국가보안법은 유엔인권헌장에도 위배되는 법인만큼 ‘인권’의 차원으로 반대하는 게 옳은 거죠?

A. 물론 국가보안법은 유엔인권헌장에서 말하고 있는 인간의 존엄한 권리인 ‘인권’을 유린하고 있는 법이 맞습니다. 그래서 열우당을 비롯한 정치권의 개혁세력들도 한나라당과 논쟁을 할 때, 이제는 군부독재시절의 악습을 버리고, 자유민주주의체제의 본연에 맞는 새로운 마인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을 정도니까요. 그리고 시민단체들도 정치권에서 말하는 ‘인권’이란 개념으로 국가보안법의 완전폐지를 주장하고 있지요. 그런데 여기서의 문제점은 ‘인권’이란 무기로 국가보안법의 개정 혹은 폐지를 주장할 때, 정치권의 개혁세력이나 시민단체의 주장이 결국은 대동소이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국가보안법이 그 동안 노동계급에게 ‘친북-좌익-용공’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직접 탄압을 가했다는 것은 은폐한 채 어디까지나 현재의 ‘자본주의체제’가 용인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사회’에서 ‘악업이다/아니다’로 생각이 모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권’이 아닌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국가보안법 폐지에 관련한 논란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인권’이라는 것도 먼 옛날부터 인간에게 있어 주어져 있던 ‘보편적 권리’가 아니라 만들어진 것입니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체제로 이행되는, 즉 1789년의 프랑스대혁명처럼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과정에서 새롭게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를 관철시킴에도 불구하고 신분제폐지를 가지고 ‘전 인류의 보편적 해방이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당시 이러한 흐름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진보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부르주아지가 말하는 인권이란 그리고 평등이란 어디까지나 경제적 불평등을 전제로 한 정치적 자유만을 의미했기에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노동계급에게 있어서 이러한 ‘인권’적인 측면으로 숨을 쉴 수 있는 자유, 즉 정치적 자유를 얻을 수는 있었지만(사실 이 과정도 노동계급이 그만큼 싸워서 쟁취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냥 주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자신을 착취의 올가미로 쥐고 있는 자본주의 그 자체를 폐기하기 위해서는 ‘인권’이란 측면에서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르주아지도 인정하는 ‘인권’이 아닌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Q. 그렇다면 현재의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A. 현재 국가보안법 폐지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논란의 핵심은 부르주아 정치권입니다. 여기에 시민단체에서도 국가보안법 완전폐지를 주장하며 개입하고 있는 상황이지요. 앞서 계급적인 관점에서 국가보안법을 바라봐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정작 노동계급은 이 논란에 실질적으로 반대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한국사회에서 노동계급의 힘이 조직적으로 강하게 결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체 진보진영에서도 노동계급은 주도적인 역할을 아직은 하지 못하고 있지요. 이런 상황에서는 사실상 우리가 할 수 있는 활동이란 그다지 많지는 않아 보입니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며 가시화되고 있는 반대흐름은 분명 민주주의투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흐름은 자칫하면 형법으로 대체입법을 한다든지 일본의 예를 따라 파괴활동금지법을 도입한다든지 등의 불완전한 폐지로 멈출 수 있는 한계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완전한 폐지를 요구하고 실제로 이를 힘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계급은 오직 노동계급뿐인데, 아직 조직적인 강한 힘을 갖추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계급이 싸울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태도 역시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학생으로서 노동계급의 투쟁에 힘차게 연대하면서 그 속에서 국가보안법에 대해서 토론할 수도 있으며, 학우들과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자리를 더욱더 만들어 나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작지만 의미있는 실천을 우리 주위에서 하나씩 만들어가는 게 현재 우리가 해야 할, 그리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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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T3호>성매매특별법은 진정한 대안이 될수 있는가?

지난 2004년 10월에 발행된 레드타임즈 3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성매매 특별법은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성매매는《매춘의 역사》라는 책이 있을 만큼 기나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그리하여 인류에게 있어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서 너무도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그리고 오늘도 역 근처만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월수입 몇백, 숙식제공’이라는 조그만 종이들과, 아슬아슬한 옷차림의 여성들이 나와있는 업소 광고지들이 여성과 남성들에게 성을 팔고 또 사도록 유혹하고 있다.
   전 국민의 70%가 법의 존재여부도 모른채, 지난 9월 23일 ‘성매매 특별법’이 시행되었다. 성매매 특별법은 ‘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과 ‘성매매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로 제정되어 04년 3월 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이 법은 '윤락', '매춘' 등과 같이 성매매 여성을 도덕적으로 문제삼거나 성을 '파는 것'에만 초점을 두는 용어 대신 '성매매'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윤락행위 등 방지법'에 비해 분명히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 또한 성매매특별법에는 성매매 여성들에게 '피해자'라는 개념을 도입하였고, 성을 거래하도록 알선하는 업주와 중간업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조항도 들어있다.
  그렇다면 성매매 특별법은 성매매피해여성들을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는가? 그러기에는 이 법은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성매매특별법에 따르면 ‘성매매피해자’는 위계, 위력 등으로 성매매를 강요당한 자, 마약등에 중독된 자, 장애가 있는 자, 청소년, 그리고 성매매 목적의 인신매매를 당한 자로만 한정되어 있다. 애초 02년 발의되었던 안에 포함되어 있었던 ‘선불금 등 채무의 이용에 의하여 성을 파는 행위를 한 자’는 누락되었고, 피해자임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여전히 동의의 문제가 구성요건으로 남아 있어 이른바 ‘자발적 성매매’를 한 여성들은 성매매피해자의 대상에 속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발적 성매매...라는 말은 언제나 꼬리표처럼 성매매피해여성들을 따라다닌다. 하지만 무엇이 그녀들을 ‘자발적이게’ 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본주의 사회이다. 성매매피해여성들의 대부분은 경제적 이유(가정형편, 빚 등)로 인해 성매매에 유입되고 있다. (물론 자신이 처하게 될 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고 성매매를 택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성매매에 한 번 유입된 여성은 탈성매매를 하기가 너무나 힘들다. 그녀들을 옭아매고 있는 선불금은 월수 몇백으로 갚아지기는커녕, 말도 안되는 명목들(지각비 시간당 1만원, 결근비 20만원 이상, 몇백만원이 넘는 화장품과 옷값)의 강요를 통해 더욱 더 강하게그녀들의 발목을 잡아두는 족쇄가 된다. 설사 힘들게 탈성매매에 성공한 여성들이라 할 지라도 그녀들이 쉽게 그 족쇄를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만났던 한 탈성매매 여성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업주들은 사회에서의 성매매여성에 대한 인식을 무기로 가족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하는 것은 물론 실제 거대한 조직력과 폭력성으로 그녀들을 끊임없이 위협한다고 한다. 이러한 협박과 위협들은 탈성매매 이후 생계유지방도를 찾기 어려운 여성들을 다시 ‘자발적으로’ 재유입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대한 성산업과 결탁한 자본과 경찰은 그녀들의 탈성매매를 돕기는 커녕, 오히려 도망쳐나온 성매매여성들을 다시 업주의 손을 잡고 돌아가게 하는 행태까지도 서슴치 않고 있다. 얼마 전, 성매매피해여성들이 성매매를 방조했다는 이유로 ‘국가’를 상대로 집단 소송하는 일까지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노동자민중과 자본의 화해자, 중재자가 아니라 오로지 자본의 이해만을 대변하는 집행기구일 뿐이다. 국가와 공권력은 성매매피해여성이 아니라 성산업 자본의 손을 들어줄 뿐이다.
  그렇다면 성매매의 진정한 해결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성매매특별법보다 진일보한 법을 만드는 것인가? 앞서 이야기했듯이 성매매를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 있다. 소수의 자본가를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살 수 없도록 하는 이 사회, 비정규직에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점점 더 밀어내어 자신의 ‘성’까지도 팔도록 강요하는 이 사회, 국가란 탈을 쓴 총자본이 어떤 수단을 통해서든지 몸집을 불리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이 사회, 바로 자본주의 사회를 끝장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우리의 대안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이 자본가 세상을 뒤엎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과 함께 싸워나가야만 한다.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 그리고 우리 모두의 해방을 위해서 말이다.    
  성매매는 도덕적으로 타락해서 성을 자발적으로 팔고 싶어하는 소수의 여성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참을 수 없는 욕구가 남성들의 유전자 속에 있기 때문에도 아니다. 성매매를 조장하고 여성억압을 유지시키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 맞서 함께 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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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외>레드타임즈가 여러분의 합격을 축하합니다!

 

레드타임즈가 여러분의

합격을

축하합니다!

레드타임즈는 격주로 발간되는 신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모순들을 학내에 알려나가면서 대안을 밝히고, 그 대안을 향한 움직임을 만들어 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새내기 여러분! 입학하고 나서도 꼭!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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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외>이주노동자, 다시생각해보기.

 

이주노동자,

다시 생각해보기.


“사장님, 나 한국에 데려가 치료해 주세요”

  이 말은 한 타이 여성노동자가 타이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면서 한글로 쓴 편지글의 일부입니다. 지난 11일 귀국한 이 노동자는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제대로 된 안정장치 하나 없이 일하면서 노말헥산 중독으로 인해 ‘다발성 신경장애’를 앓게 되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입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는 있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황. 하지만 회사 측에서는 이런 노동자의 고통을 외면하려 하고 은폐/축소시키고자 하는 상황. 이러한 현실이 바로 이 땅 이주노동자의 현실입니다. 이번에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경우는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정부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한다고 하지만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없어 사실상 노예제도에 다름 아닌 ‘고용허가제’를 지난해부터 실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불법’이란 명목으로 마치 동물을 사냥하듯 이주노동자들을 수십 명씩 잡아서 강제출국 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주노동자들은 불법이라는 말도 안 되는 규정으로 사장이나 관리자들의 협박과 눈치를 보며 고된 노동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처해 있습니다. 3D업종이라 불리는 영세한 공장에서 그야말로 혹사에 가까운 장시간 노동에,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그 모멸감을 받아가며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장님 나빠요‘하며 희화화시킨 TV 코미디 프로를 보며 마냥 웃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봅니다.




경기 화성시 향남면 요리 ㄷ사에서 일하다가 노말헥산에 중독돼 ‘다발성 신경장애’(일명 앉은뱅이병)를 앓고 있는 한 타이 여성 노동자가 지난해 12월 초순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에서 자원봉사자의 부축을 받아 임시숙소에 들어가고 있다. 이 여성 노동자는 지난달 13일 안산중앙병원에 입원해 현재 치료를 받고 있다. 사진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 제공

 

사회적 갈등은 대화와 타협으로?

우리는 그 동안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간 이른바 ‘제도권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그 제도권 교육의 사회교과에서 항상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사회에는 각각의 이해를 요구하는 이해집단들이 있고 집단들의 요구가 상충할 때 사회적 갈등이 야기된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이해의 극단적 대립이 아니라 서로의 요구를 인정하면서 절충안을 마련하기 위한 대화와 타협이다. 그리고 갈등이 바람직하게 해결되면 사회는 한층 더 발전할 수 있고, 이런 의미에서 갈등이란 사회발전에 있어 긍정적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논리가 아니었습니까? 따라서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바라볼 때 있어, 대화와 타협이란 잣대를 먼저 우선시 하게끔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이러한 논리에서는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빠져있습니다. 바로 각 집단이 서로의 이해를 요구한다면 최소한 그 집단들 사이의 관계는 동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전제하지 않는 가운데, 모든 사안들에 대해 대화와 타협을 요구하는 것은 힘이 더 센 집단에 손을 들어주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됩니다. 자국에서는 더 이상 일자리가 없어서 더 나은 삶을 위해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가진 거라곤 자신의 몸이 전부입니다. 여기에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을 경우 아직 한국말이 서툴러서 제대로 자신의 목소리조차 낼 수 없으며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주노동자와 회사 간의 싸움에 있어 우리가 그동안 배워 온 제도권 교육의 논리를 대입하면 이는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린 회사 측의 입장을 옹호하게끔 만들어 버립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땅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을 다시 생각하며


  고된 노동 속에서 자신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기계를 위해 일을 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힘들게 살아가는 이 땅 노동자들. 이주노동자들은 이러한 고통에,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온갖 차별을 받으며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주노동자들의 상황이 우리와 전혀 무관한 남의 이야기일까요?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발 디딛고 있는 대학이란 공간에서, 교육은 전체 사회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하나가 모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공부를 하며 이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문제가 무엇인지 그 문제들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무엇인지를 앞으로 함께 고민해 보았으면 합니다.







*이주노동자들은 오늘도 정부의 강제추방정책에 반대하고, 합법적으로 일하기 위해, 병들지 않고 사람답게 살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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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외>Need Something Red?

 

Need Something Red?

 저희는 오늘 새내기 여러분들에게 조금은 색다른, 지금까지 자주 접해보지 못한 이야기들을 한 번 해보려고 합니다. 모 광고 카피에서 조금 변형해서 제목을 ‘Need Something Red?'로 한 번 달아보았어요. 여러분은 Red, 빨간색 하면 뭐가 떠오르세요? 새내기 여러분들은 아마도 고대의 상징 색? 아니면 붉은 악마를 떠올리시지 않을까요. 하지만 예전만해도, 아니 지금도 대다수 사람들에게 빨간색은 으쌰으쌰 데모하는 사람들(속칭 빨갱이;), 폭력시위, 공산주의 등등을 떠올리게 합니다=_=; 사실 이런 거부감들은 우리가 그동안 배워온 교육이나 사회 환경으로 인해 생긴 편견들로 인한 것이지요.

  "만약 상어가 사람이라면 작은 물고기들을 위해 식물은 물론이고 동물까지 포함된 각종 먹이를 집어넣은 거대한 통을 바다 속에 만들도록 하겠지. 그 커다란 통 속에는 물론 학교도 있겠지. 가장 중요한 일은 물고기들의 도덕적 수련일거야. 그들에게는 물고기 한 마리가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놓는 것이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과, 그들이 모두 상어의 말을 믿어야만 한다는 것을, 특히 상어들이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애쓰고 있다고 말할 때는 그 말을 믿어야 한다는 걸 배우겠지. 물고기들은 또한 복종을 익힐 때만 이러한 미래가 보장된다는 걸 배우게 될거야. 물고기들은 모든 저속하고 유물론적이고 이기적이고 마르크스적인 경향에 대해 조심해야 하고 그들 가운데 하나가 그러한 경향을 드러내면 즉시 상어들에게 신고해야 한다고 배울거야."  -베르톨트 브레히트 '상어가 사람이라면' 中

 독일 출신의 유명한 극작가인 브레히트가 쓴 단편집에서 일부를 인용 해보았습니다. 물고기와 상어에 빗대어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교육에 대해 풍자를 하고 있는 글이거든요. 넓은 바다가 자본주의 사회라면, 몇몇 상어들은 이 사회를 좌지우지 하는 소수의 자본가들을, 작은 물고기들은 상어들에게 임금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들을 가리키겠지요.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교육은 어떠할까요? 상어 나라에서처럼 대다수의 물고기들이 몇몇 상어들을 위한, 상어 사회의 유지를 위한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지난 12년, 우리는 무엇을 배웠나요?

 대학에 들어오기 전, 우리는 12년  동안 국민교육과정을 찬찬히 밟아왔습니다. 그리고 배워왔습니다. 교과서에 있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립적이고도 참된 진리만을 담았으니 밑줄 쫙 치면서 달달 외우세요!!@_@ 흐음-과연 그럴까요? 우리가 배워왔던 공식 교육제도와 커리큘럼은 자본과 노동자 사이에서 중립적인 위치에 있을까요? 뭐 요즘은 민주주의 사회라고 하는 만큼, 교과서도 많이 개혁(!)되어서 공정하게 쓰여져 있지 않을까요?  우리나라 4000만 국민 중 1400만 명이 노동자라고 합니다. 수적으로 본다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데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노동자들의 파업을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 잘못된 행동으로, 노동조합을 이기적인 집단 정도로 생각을 합니다. 도대체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길래? 직접 여러분이 배웠던 7차 교육과정의 중.고등학교 사회과 교과서 속을 들여다봅시다. 사실 여러분들은 물론 사회 교과서에서 ‘노동’에 관하여 배운 기억조차 없겠지요. 왜냐하면 교과서에는 불경스러운 노동자라는 말 대신 ‘근로자’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죠.



-노동자=이익집단, 과격행동은 절대 금물이야!!

단원명

Ⅶ. 정치 생활과 국가/ 2. 사회적 쟁점의 정치적 해결 과정

내용

1) 정치와 사회적 쟁점

(...) 물론 사회 구성원들은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필요에 따라 서로 협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이 추구하는 권력이나 부, 명예 등과 같은 사회적 자원들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갈등과 대립이 발생하게 되며 자신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해 서로 경쟁하기도 한다. 특히, 이러한 사회 구성원들 간의 갈등과 대립 중에서 문제에 대한 의견이 여러 가지로 나뉘어져 있고, 문제 해결의 결과가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사회적 쟁점이라고 한다 (...)

그림 :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쟁점들

      주 5일 근무제를 요구하는 근로자와 이를 외면하는 사용자

      근로자 - 근로자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노동 시간을 단축하라!

      사용자 - 경제 상황도 안 좋은 데 주 5일 근무제는 안 될 말이야!

2) 정치적 해결의 과정

(...) 이익 조정에 있어서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조정 절차의 민주성이 필수적이다. 모든 이해 당사자들이 고르게 참여하여, 양보와 타협의 자세로 대화와 토론을 통해 의견의 차이를 좁혀 나갈 때 원만한 합의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과격한 집단 행동이나 실력 행사로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려 한다면, 문제 해결이 어려워짐은 물론 심각한 사회 무질서까지 초래하게 된다. 한편, 개인과 집단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회 전체의 이익을 침해하여 갈등을 빚기도 한다. 이런 경우, 특정 집단의 이익이 사회 전체의 이익보다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되며 갈등 해결의 결과가 공익을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

*자료: <고등학교, (주)천재교육, 사회 교과서, pp.202-205>


 이 교과서에서는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이익집단 중의 하나가 노동자? 그리고 그러한 이익집단 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민주적 절차가 대화와 타협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와 팔 것이라고는 노동력 밖에 없는 노동자가 사회적으로 동등한 위치에 있을까요? 더불어 교과서는 파업과 같은 과격한 집단행동과 실력행사가 사회 불안정 요소임을 강조하고 있네요.




-선생님, 파업이 뭔지나 좀 가르쳐 주세요!

단원명

Ⅶ. 정치 생활과 국가/ 1. 현대 정치의 과제/ 1) 다원화된 사회, 다원화된 이익

내용

탐구 활동 - 시민의 힘으로 금융 산업 파업 해결

다음은 2000년 7월에 전국 금융 산업 노조가 파업을 선언한 전후의 은행별 저축성 예금의 동향을 나타낸 것이다.

관련 그래프 : 비파업 선언 은행의 예금과 파업 선언 은행의 예금 대조

                  - 은행별 저축성 예금 동향(00신문, 2000.7.12) -

시민의 힘으로 은행 파업을 해결할 수 있는지 토론해 보자.

- 파업을 선언했던 I은행, J은행이 곧 파업 불참을 선언한 배경을 살펴보자.

*자료: <고등학교, 법문사, 사회교과서, p.125>


이 교과서에서는 금융산업노조의 파업에 대하여 시민의 힘으로 은행의 파업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탐구활동을 제시하고 있네요. 암묵적으로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을 암묵적으로 부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민과 노동자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묘사하면서 오히려 시민들이 노동자들의 파업 여파를 적극 해결해야한다고 가르치고 있지요.



-정리해고 문제 해결, 경제계의 우려?!

단원명

Ⅶ. 정치 생활과 국가/ 3. 민주 정치 발전과 시민 문화

내용

 

사례 탐구2 - 정치 원리에 따른 갈등 해소

 

정리 해고 문제를 놓고 노동계와 사용자의 대리전으로 치달았던 H 자동차 사태가 정치권과 정부의 개입으로 가까스로 해결되었다. 3개월에 걸쳐 6차례의 파업과 4번의 조업 중단이라는 극한 대립이 겨우 풀린 것이다. 노사 양측은 합의문에 서명하고 기념 촬영을 하는 등 화합의 모습을 보였지만, 해결 방법에 대한 비판의 소리도 높았다

 

갈등 해결 과정에서의 법과 정치의 기능

  H 자동차를 둘러싼 정리 해고 문제의 해결은 정치권의 개입으로 조정되었다. 정부나 여권에서는 노사 간의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하여 신노사 문화 창조의 모델이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계에서는 사태 해결 방식을 염려하고 있으며, 이러한 경제계의 우려가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이번 사태의 해결 과정은 노조가 정리 해고를 저지할 수 있다는 선례가 될 수 있으며, 앞으로 기업의 구조 조정과 외국 자본의 유치에 상당한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사회적 갈등의 해결을 법적으로 하면 일시적으로 효율성을 잃을 수도 있으나 갈등 해결의 원칙이 확립되어 사회적 안정성을 얻을 수 있다. 반면에, 갈등 해결을 정치적으로 하면 구체적 타당성을 얻어 융통성 있게 해결할 수는 있으나 원칙이 무너져 사회적 불안이 생길 수 있다.

*자료: <고등학교, 법문사, 사회교과서, pp.234-235>

이 교과서에서는 노사분규를 해결하는 제 3자로 중립적인 정부를 설정하고 있고, 친절하게도 경제계의 우려까지도 담아내고 있네요. 하지만 노동자들이 왜 정리해고를 반대하는지에 대해서는 신기하게도 단 한 줄도 없습니다. 평생 일하던 직장에서 한 순간에 해고되어 길바닥에 나앉을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입장은 온데간데 없고, 자본의 입장만이 편향적으로 서술이 되어있는 것이지요. 오히려 중앙진흥교육연구소 교과서 355쪽에는 “김대중 정부는 노사정위원회를 구성하여 구조 조정과 관련된 경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면서 삽화에서 “구조조정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질문하면서, 정부의 반노동자적 정책만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0년 이후 우리나라의 경제 호전은 더디게 진행되고 있으며, 기업의 구조조정과 노사협조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하는 두산교과서도 있지요. 이렇게 교과서는 과감한 구조조정과 끈끈한 노사협조를 이룩하는 것이야말로 경제발전의 디딤돌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타 등등

이 외에도 천재교육 교과서의 경우 ‘일상생활에서의 정치’라는 주제 아래 사회 갈등의 여러 사례를 제시하고 있는데요, 다른 사례들의 경우 해당 주제에 대하여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예를 선정하였으나, 노동과 관련해서는 ‘노동조합의 집행부 사람들이 주도권을 둘러싸고 싸움을 하였다’라는 유달리(!) 부정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예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이러한 것들은 사소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노동자나 노동조합에 대한 이러한 예, 삽화 하나하나가 바로 하나의 이미지로 쌓여 졸업할 때쯤이면 누구나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대해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우린 빨간을 원한다.

빨간 닷 컴.

 공통적인 것은 어떤 사회과 교과서를 보더라도, 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얼마나 열악한가를 말하는 대신,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노동자들의 파업은 사회 전체에 손실을 주는 이익행위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지요. 따라서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밟은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바로 우리들처럼, 노동자와 파업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은 전혀 가질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렇게 그동안 몇몇 상어들을 위한 파란 나라에서 파란 책을 들고 파란 내용들만을 공부해왔으니 조금만 다른 시각의 내용들만 접해도 빨갛게 *_* 보이는 것이지요. 저희는 다시 한 번 되묻고 싶습니다. 빨간이 과연 잘못된 것일까? 오히려 몇몇 상어들에게 좌지우지 되는 사회가 아니라 많은 물고기들을 위한 사회가 되는 것이 빨간이라면, 우리는 파란이 아닌 빨간을 원한다고 말하고 싶네요.^-^ 앞으로도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이야기들 많이 나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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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6호>세계화에 대한 자유포럼의 입장을 비판한다!

::대자보 REVIEW::

 

세계화에 대한 자유포럼의 입장을 비판한다!

 

 

/우, 진보/보수 개념부터 정리하자고 하는 자유포럼의 주장에 대해 문제의식 자체는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자유포럼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 고민의 중심은 ‘사회의 질적인 변화’이기 때문이다. 이를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진정 좌/우, 진보/보수의 진영 역시 정립될 것이다. 하지만 자유포럼은 한 가지 놓치고 있다.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기도 한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본주의 체제가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다. 한 번 생각해 보자. 지금까지의 역사는 어떠했는가? 잉여생산물이 생긴 이래로 누군가는 더 많은 부를 위해 착취하고 누군가는 착취당하는 역사의 반복이 아니었는가? 역사에 있어 착취와 피착취가 존재하는 계급사회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극복되었는가? 착취와 피착취가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이 경제적 고통 없이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을 마련했는가? 우리는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체제 역시 이 지긋지긋한 계급사회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아가야 할 우리의 미래가 있기에 자본주의 체제는 계급사회의 종착역이라고 판단한다. 가진 것이라고는 자신의 몸뿐이기에 노동력을 팔아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끊임없는 고용불안과 가혹한 노동강도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노동계급과 착취하는 자본가계급이 존재하는 이 자본주의 체제가 결코 영원불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지난 역사의 계급투쟁에서 직접 목도해 왔던 것이다. 소수의 자본가계급이 아닌 다수의 노동계급이 계급 그 자체를 폐기시키며 모든 불평등을 없애기 위한 물질적 토대를 만들어 나가는 것!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해방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자유포럼에서 말하는 사회의 질적인 변화가 아닌가? 바로 이것이 사회의 질적인 변화가 아니라면 그 무엇이 질적인 변화라는 것인가?

 

 

유포럼에서는 ‘세계화’가 변화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세계화 그 자체는 우리 역시 사회 발전에 있어 중요한 진보라고 생각한다. 세계화는 노동해방 사회로 감에 있어 보다 높은 물질적 토대로 훌륭하게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화 자체를 현 자본주의 체제라는 계급사회에서 어느 계급의 이해를 반영하는 가를 고려하지 않고 일반론적으로만 접근한다면 이는 ‘진보’를 가장한 채 자본의 이해에 굴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세계화는 분명 사회발전에 있어 바람직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노동계급의 이해에 따라 이루어질 때만 그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자유포럼에서도 이와 같은 고민 속에서 세계화를 얘기한다면 우리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자본의 이데올로기의 세련된 언어 수사학에 불과하다면, 노동계급의 이해에서 벗어나 ‘진보’를 말하고 있다면 우리는 단호히 비판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비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힘에 의해서 체제를 어떻게 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실천으로 투쟁으로 논쟁해 나갈 것이다.


유포럼에서 잘 지적하고 있듯이 현재 남한에서의 좌/우, 진보/보수라는 개념은 너무나 모호하며 엉켜있다. 노동해방 사회로 가는 길의 명확한 대안인 노동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말로는 과격하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가 판을 치고 있다. 우리는 보다 명확하게 노동계급의 보편적 이해를 옹호하며 이를 학내에서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선동하고자 한다. 자유포럼에서 말하고 있듯, 미래지향적인 사회의 질적인 변화를 고민하고자 하며 이 과정에서 심도 깊은 논의를 해 나갔으면 한다. 앞으로 더욱 많은 논의가 진행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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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6호>결코 '예쁘지'않은 새마을호 여승무원들의 정리해고반대투쟁

 

::여성주의 칼럼::

결코‘예쁘지' 않은

새마을호 여승무원들의

정리해고 반대투쟁 


여승무원?


 ‘여승무원’이라는 단어를 보고 떠오르는 그림이 무엇인가? 자연스럽게 ‘젊고 날씬하고 예쁜데다가 상냥한’ 여자를 떠오르게 하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한 달에 300시간을 일하면서 밤새우기를 밥 먹듯 하는 비정규직 여승무원 노동자들이 근무 2년 만에 집단적으로 해고를 당했을 때, 이런 부당하지만 보편적인 의식은 투쟁해야할 대상이었다.  

 


해고통지, 투쟁의 시작.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여승무원 근무 2년째. 2003년 투쟁에서 여승무원을 정규직화 하겠다는 철도청과의 약속이 이루어졌었다. 하지만 철도청에서는 이 약속을 내팽기고 ‘3년 동안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면 함부로 해고하지 못한다.’라는 법조항을 피해가기 위해서 3년이 되기 전에 31명을 집단해고 한 것이다. 이에 노동조합원도 아니었던 여승무원들이 철도노조와 함께 투쟁에 나섰다. 그리고 결국 힘찬 투쟁을 통해 전원 고용승계를 쟁취하였다. 비록 정규직화를 쟁취한 것은 아니지만 큰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절반의 승리를 쟁취한 이 투쟁이 비정규직여성노동자의 투쟁이라는 점에서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해고에 숨어있는 성차별적 의식


  철도청에 소속된 같은 승무원인데도 남자는 정규직이고 여자는 비정규직이다. 성차별적 의식에 근거하여 노동자들을 갈라놓은 것이다. 여기서 드러난 성차별적 의식이란 이런 것이다. 여자는 젊어서는 직장을 갖고 일하다가도 결혼을 하면 애 낳고 기르고 해야 되는데 어떻게 직장을 다니느냐는 것이다. 출산휴가 등이 충분하기는커녕 법적으로 보장된 것도 지켜지지 않고, 휴가를 요구하면 오히려 해고당하는 사회에서, 여성은 결혼하면 사회적인 강제에 의해 직장생활에 종을 치게 된다. 게다가 여‘승무원’이라는 직업이기에 계속해서 ‘젊고 날씬하고 예쁜’ 여성으로 교체해야 마땅하다는 생각 또한 이번 문제에서 드러난 성차별적 의식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노동자들에게 저임금과 고용불안의 위협은 남성노동자에 비해 더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손에 손잡고,

 철도노조의 남성노동자들이라고 해서 이러한 성차별적 의식에서 벗어나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심지어 철도노조의 간부도 ‘예쁘지, 몸매 되지, 해고될 이유가 하나 없습니다.’라는 발언을 했을 정도다. 하지만 이는 충분한 문제제기와 의견교환을 통해서 남성노동자들이 위와 같은 성차별적 의식을 떨쳐버리도록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함께하는 투쟁 속에서 남성노동자들은 여성노동자들을 ‘집에서 애나 봐야 할 여자’가 아닌 자본주의에 맞서 함께 투쟁하는 ‘동지’로서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해고당한 여성노동자들이 정규직화 투쟁의 중심에 서야하고 남성노동자들은 이에 더욱 강하게 연대해야 한다.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문제는 단지 해고자들만의 문제, 해고자들을 동정하며 연대해야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투쟁은 철도노동자들이 처음으로 비정규직문제를 내건 중요한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계속되는 철도자본의 구조조정 공세와 이에 맞서는 철도노조 투쟁의 패배로 인해, 앞으로 인력충원에 필요한 5000여명의 인력이 비정규직으로 고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철도노조가 앞으로 비정규직 투쟁을 함께 해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승무원 정규직화 투쟁을 통해 정규직 조합원들에게 비정규직 문제를 알려나가고, 앞으로 있을 철도노조의 비정규직 투쟁을 만들어갈 불씨로 삼아야 할 것이다.


자본가의 벽을 넘어서!


  24시간 맞교대로 1년에 수십 명씩 산업재해로 죽어나가는 철도현장. 근무 2년 만에 단체협상에서 약속한 것 마저 폐기하고 일방적으로 해고통지를 날리는 철도현장…… 사람 잡는 철도현장을 바꿔보고자 전개한 철도노동자들의 파업투쟁에 ‘10억 손배가압류’ 판결을 내린 오늘, 우리는 자본가와의 투쟁 앞에서 정규직-비정규직, 남성노동자-여성노동자가 동등한 주체로서 단결해야함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게 한다. 


::매주 화요일, 금요일 아침 10시 반에 집회 및 선전전을 진행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연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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