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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10/08
    피렌체, 르네상스와 석양(3)
    겨울철쭉
  2. 2007/10/06
    피렌체에 ‘조선족’ 아주머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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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7/10/05
    아를의 하얀 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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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7/10/04
    스위스, ‘서쪽숲’을 만나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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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7/10/02
    프라하,동화속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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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7/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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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7/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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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7/09/12
    런던, 두번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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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7/09/10
    런던.여행을 시작하면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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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7/09/06
    한동안 여행 출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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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르네상스와 석양

피렌체, 르네상스와 석양

여행 중반을 넘어서 스위스 일정부터 여행은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스위스 알프스에서 날씨는 내내 흐리고 진눈깨비가 내렸고, 인터넷으로 예약한 숙소는 기차역에서 오르막으로도 한참을 가야했다.(약도에는 바로 지척으로 그려져있다;;) 아를에 가기 위해 경유해야하는 아비뇽에 가는 열차는 일찍 매진되어서 예정보다 늦게나 움직일 수 있었고, 아비뇽에 도착해서는 알아본 숙소는 문을 늦게 열고, 새로 알아본 숙소는 너무 멀어서 남프랑스의 햇빛 아래서 탈진할 정도였다.(가방은 왜 이리 무거운지..!)

아를에서 묵고, 다음날 유스호스텔을 check out하고 짐을 맡기러 간 역 앞에 짐 보관소는 문을 닫아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짐을 맡기러 아비뇽에 다시 다녀와야했다. 최악의 상황은 그 다음이었는데, 아비뇽에서 니스를 거쳐서 피렌체까지 오기 위한 기차표가 문제였다. 아비뇽 역에 역무원 아줌마는 황당하게도 아비뇽에서 니스는 당일날짜로, 니스에서 피렌체까지의 야간열차(침대)는 엉뚱한 날짜의 표를 준 것이다. 연결되는 두 번째 티켓을 다시 확인하지 않은 내 실수도 있겠지만, 덕분에 프랑스-이탈리아 국경에서 자리에서 쫒겨나서 이등석 의자에서 쪼그려서 선잠을 자야했다.

이렇게 찾아간 피렌체에서는 첫날 점식 식사하면서 엉뚱한 청구서를 받아서 항의해야했고, 일정이 늦어지면서 숙소 예약이 어긋나서 이틀째 숙소를 다시 옮겨야했다.(다행히 옮긴 곳이 조선족 분이 하는 아래 이야기한 그 민박집이다.) 이런 상황에서 도착한 피렌체에서 출발은 기진맥진하고 신경은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두오모

하지만, 피렌체 두오모(돔dome 형 성당, 원래는 주교가 있는 곳을 뜻한다).
소설 “냉정과 열정사이”에서 쥰세이와 아오이가 만나기로 약속한 곳으로 잘 알려진 피렌체 두오모의 쿠폴라는 463개의 가파른 계단을 통해서 올라갈 수 있다. 오전에 올라간 이곳에서 한참동안 피렌체 시내를 바라보다가 오후가 되어서야 내려왔다.

("냉정과 열정사이"는 두권의 책이 있고, 영화로도 나왔다. 그러나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배역부터 시작해서 줄거리의 변형에 이르기까지, 혹은 사실성까지도 영화는 매우 실망스럽다.)

피렌체는 그곳에서 빛과 색깔로 가득하다. 왜 아오이가 그곳을 “연인들의 성지”라고 말하는지 알 것같은 곳. 정오가 되어서 성당마다 울리는 종소리가 마치 화음을 이루고 서로 대화하는 것처럼 퍼져나올 때, 그곳은 마치 천상에 있는 느낌이 든다. 종소리들이 마치 중력을 사라지게하는 힘이 있는 것처럼.



르네상스, 도시의 전경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도시로 잘 알려져있다. 15-6세기에 전성기를 맞은 이 도시는 이탈리아 북부 도시국가들과 스페인이 지중해 무역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세계의 헤게모니를 형성하고 있을 때 메디치가의 지배 하에서 화려한 유산을 남긴다. 이곳은 단테, 다빈치, 미켈란젤로, 그리고 마키아벨리의 도시다.

여기서 역사적 설명을 할 것은 아니니까, 몇가지 인상만.
우선, 피렌체에는 화려한 궁전은 없다. 토스카나 공국의 ‘수도’이기는 했지만 그 자체가 도시국가였던 이 곳은, 메디치가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부르조아 시민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력했다. 이 때문에 지배 귀족의 권력은 항상 제한되었는데, 메디치가조차도 막강한 부에도 불구하고 절대군주 국가의 궁전과 같은 것은 만들 수가 없었다.

이런 느낌은 도시 전체의 전경에 배여난다. 메디치가의 궁전조차도 도시의 다른 건물들 속에서 자기 자리를 가질 뿐이지 튀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느낌은 이전에 가본 도시 중에서는 암스테르담과 비슷하다. 그곳에서도, 시민들의 힘이 강력했던 곳 답게, 평범한 건물들이 도시의 전경을 지배했던 것이다. 절대군주들이 화려한 건물을 과시적으로 건설한 런던이나 빠리와는 다른 느낌.

르네상스, 우피치 미술관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라는 우피치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2시간 정도는 줄을 서야한다. (예약을 할 수는 있지만 예약비를 따로 내야한다.;;) 많은 사람들이 피렌체에서는 거의 ‘의무적으로’ 가는 곳. (물론 들어가서 관람객들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작품들을 감상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미술관에서는 르네상스 시기에 와서 그림에 어떤 변화들이 생겼는지 알 수 있다. 원근법을 도입한 것으로 알려진 Paolo Uccello 의 “산로마노의 전투”같은 그림도 그런 것 중에 하나. (이 그림은 피카소가 자주 스케치 해갔다고 하는데, 가이드북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 그림이 생동감있어서라기 보다는, “입체”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태초의 시도’가 어떤 것이었는지, 입체를 평면에 나타내는 것이 주된 관심을 보였던 피카소가 흥미로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여러 변화를 상징하는 것은 두 개의 성모자상이다.
Filippo Lippi 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성모에 그려넣는다. 이제 성모의 모습은 여전히 천상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현실의 사랑을 담아낸다. 그녀는 수도원에서 함께 도망쳐 나온 연인이기도 했는데, 신에 대한 금욕적인 봉사보다 현세의 사랑에 더 가깝다고나 할까. Madonna with the Child and two Angels, 1465, 왼쪽위

이 작품과 함께 인상적인 것은 Parmigianino 의 “목이 긴 성모 Madonna dal Collo Lungo”(1534~40). 보면서, “아, 이게 르네상스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모는 오히려 매혹적인 여인으로 나타나는 데, 봉긋하게 드러난 가슴은 불경하게도 성적인 매력을 보여줄 정도다.  왼쪽아래

이런저런 역사적 설명들보다도 여러 작품들, 특히 두 작품을 보면서, 르네상스 시기,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해갔는지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내 이 속에서 사람들은 ‘개인’을 발견한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르네상스 이후 서양 근대의 가장 위대하고 독보적인 발견이다.

유디트, 그녀들의 분노와 그의 당혹

이 두 작품 외에 더 깊이 인상적인 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니 그것은 Artemisia Gentileschi 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1620)

페미니즘 미술의 선구자로도 알려진 그녀의 이 작품은 두 여인의 결연한 의지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모습이 담겨있다. (그녀와 작품에 대해서는 인터넷을 찾아보아도 흥미로운 정보들도 얻을 수 있다. 구약 성서 내용 중 유디트라는 여성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아시리아 장군 홀로페르네스에게 접근해서 그를 암살하는 내용이다. 젠틸리스키는 독보적인 여성화가로, 성폭력을 당하고도 오히려 고문을 받으면서까지 가해자의 유죄를 입증해야헸던 어려운 상황에 처한 적이 있다.)

두 여성(유디트와 하녀)의 표정도 그렇지만 목이 베이는 홀로페르네스의 표정도 흥미롭다. 여러 화가들이 이 테마로 그림을 그리는 데, 이 미술관의 보디첼리도 마찬가지고 대부분 근심하는 철학자의 표정을 한 베어진 목으로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이 그려진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남성은 당혹해 하면서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표정을 짓는다. 손을 하늘로 뻗지만 이미 힘은 빠져있다.

이 그림은 남성인 나에게(도) 매우 인상적이다. 다른 그림들에서 홀로페르네스는 마치 ‘여성의 복수’에 대해서 “다 알아, 그건 너희편 남성들의 국가를 위한 것이지”라고 말하는 반면에 이 그림은 “도대체 왜 이 여자들이 분노하는 거지”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훨씬 진실에 근접해있다. (오히려 남성들은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반면, 여성인 젠틸리스키는 그것을 정확히 포착해서 그림 속에 넣었다.)

(복제품으로 우피치에 전시되어 있는 “라오콘 군상”도 한참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 이야기는 진품이 있는 바티칸을 보고 나서 이야기하자.)

피렌체의 석양

이제까지 다닌 어떤 도시보다, 피렌체는 석양이 아름다운 도시다.
노을이 질 때, 피렌체 건물들의 붉은 색은 더욱 붉게 빛나고 하얀 벽들도 밝은 붉은 색으로 물든다. 무엇보다 말로 표현하기도, 카메라에 담기도 힘든 것은 두오모와 종탑의 하얀 대리석 벽이 노을 빛에 물들어가는 모습이다. 천천히, 불그스레한 노을빛이 그 속에 배여든다. 

그것을 보면, 피렌체 사람들은 어떤 예술 작품들 이전에 자신의 도시 자체를 르네상스 식으로 창조했다는 생각이 든다. 도시 전체가 중세적인 딱딱함을 넘어서, 사람의 온기가 있는 곳, 그러나 빛나는 곳으로 만들어졌다.

번잡한 관광지가 되어 버렸지만, 피렌체는 여전히 아름다운 도시. 황제와 왕들의 화려한 궁전은 없지만, 그것들보다 도시 전체가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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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에 ‘조선족’ 아주머니

피렌체에 ‘조선족’ 아주머니

피렌체에서는 유스호스텔이 아니라 민박집에 묵었다. 민박이라고는 하지만 상당히 전문적으로 숙박을 할 수 있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식사가 한식이고 우리말이 숙박객들이나 주인과 통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유스호스텔과 다를 바도 없다.

피렌체에서 민박집으로 온 이유는 한편으로는 독일에서부터 거의 계속된 유스호스텔 생활의 긴장이 피곤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인터넷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인 민박은 인터넷을 꼭 갖추고, 대부분 무선 인터넷까지 가능하지만 유스호스텔은 거의 대부분 유료인데다가 비싸기까지 하며, USB 메모리도 사용할 수 없는 게 많다.

피렌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숙소에서 만난 ‘조선족’ 아주머니 이야기를 하자. (‘조선족’이라는 말이 그리 좋지 않은 용법이기는 하겠지만, 그 ‘느낌’이 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따옴표를 붙여서 그냥 쓰는 것으로 하자.) 피렌체는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할만한 곳이기는 하지만.

이탈리아에는 유독 민박집을 ‘조선족’분들이 많이 하신다. 내가 묵은 민박도 그런 곳이었는데, 한국인 유학생이 하는 곳보다 밥도 푸짐하고 지내기도 편하다. 인터넷 사이트를 보다보면 ’조선족‘ 분들이 하는 민박을 폄하하는 글을 자주 볼 수 있는데, 모종의 편견이 작용하는 것같다. 여기 주인은 ’조선족‘ 아주머니고, 일하시는 분도 ’조선족‘ 아주머니가 계신다.

남한에서 추방

이들은 이주 노동자. 저녁을 먹기 전에, 일하시는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는다.
올해 쉰넷 되신다는 이 분은 연변에서 알콜 공장에서 남편과 함께 일하셨다고 한다. 퇴직을 하고 나서 ‘배운 것이 없어서’ 남한에 일하러 오셨다고 한다. 벌써 6년전 이야기다. 역삼동 식당에서 하루를 일하고 단속이 있자, 신당동 포장마차로 옮기셨는데, 다음다음날 법무부 단속에 걸리고 말았다.

아주머니는 단속반에 하소연한다.
“내가 사람을 친 것도 아니고 물건을 훔친 것도 아니요, 그냥 일을 했을 뿐인데, 세상 어디에 일하는 게 죄가 된단 말이요?”

“불법” 이주노동자는 단지 일할 뿐이다. 자기 손으로 먹고살 돈을 버는 노동이 범죄가 되는 희안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

결국 강제추방된 아주머니에게 남은 건 1500여만원(남한 원화)의 빚이었다. 아무리 일해도 갚을 수 없는 빚 때문에 아주머니는 다시 시도한다. 이번이 이탈리아였다.

이번에는 이탈리아

이탈리아로 가기 위한 브로커비 등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 민박집 주인인 학교 동기생 친구의 도움을 받았다. 북경에서 홍콩으로 기차를 타고, 홍콩에서 말레이시아로 넘어왔다. 말레이시아에서 다시 싱가폴로, 다시 여기저기 여러나라를 거쳐 일주일이 걸려서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아마 ‘불법적’인 신분증 같은 것도 만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거리에 장사하는 중국인들 상당수가 이용한 루트가 아니었을까.) 같이 오던 분들 중 몇몇은 단속에 걸려서 추방되는 것도 지켜봤다.

한 5년을 생각하고 오셨다는 아주머니는 중국에 가족이 있다. 한달에 두 번 정도 전화하신다는 아주머니는, 남편과 딸, 아들이 있다. 과년한 딸이 시집을 안 간다고 고집이라고 걱정이라고 한다. 지구 반대편으로, 돈을 벌기위해서 가족과 5년간 이별..

올 때 주인 아주머니가 대준 비용 때문에, 1년은 월급없이 일하신다는 아주머니는, 이제 10개월째다. 월급을 받기 시작하면 남한에 올 때 진 빚부터 갚아나가야한다. 5년은 있어야하는데 이빨이 흔들려서 걱정이 많으시다. 이곳에서는 의료보험도 없이 치과 치료 받기가 끔찍하게 비싸다.

이주자들

주인아주머니는 거의 남한 말투의 억양을 사용하시는데, 왠지 물었더니 3년 동안 남한에 식당에서 일하셨다고 한다. 그 때 번 돈으로 이탈리아에 남편과 함께 와서 민박을 하신다. 남편은 베네치아에 가서 민박집을 하신다니 수완도 좋으시다.

왜 아주머니가 돈을 벌러 오셨냐고 하니까, 여자들이나 돈 벌 자리가 있다고 하신다. 민박집 같은 숙박시설이나 이런 저런 서비스업종에 일하시는 걸 텐데, 저임금의 여성 이주노동자를 요구하는 것은 전세계적인 현상인 것같다. 한편으로 여성, 불안정노동자로 착취하고, ‘불법’이라는 약점으로 더 착취한다. 일부러 국가가 ‘적당히’ 유지하는 불법의 현장들인 셈이다.

이곳에 온 ‘조선족’ 분들도 그렇지만 중국인들은 특유의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상권을 장악한다고 한다. (마치 주인아주머니가 친구분을 불러온 것과 같이 연결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런 방식의 연결을 통해 적어도 이탈리아에서는 민박은 대부분 ‘조선족’분들이 ‘장악’하고 계신다고 한다.) 아주머니는, 피렌체에 '매대‘들을 보면 대부분 중국사람들이고, 이탈리아 사람들이 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미안한 말이지만, 어쩔 수 없는 것같다는 생각도 드는 게, 이탈리아 사람들이 스스로 신뢰도를 깍아먹는 경우도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아주 개인적인 경험이라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이런 일도 있었다. 이탈리아에 첫날 와서 식당에서 먹은 점심에는, 계산서에 메뉴에 안 씌여있는 cover fee 라는 자릿세에다가, 서비스비 별도, 게다가 먹지도 않은 음료수에, 마신 것의 2배가 되는 물을 마신 것으로 청구되었다. 실수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었던 정황도 있는데, 뒤에 두 개는 항의하고 고치기는 했지만 매우 기분 상하는 일이다. 물론 개인적인 경험들일 뿐. 그랬다가 나폴리에서는 나서서 길을 가르쳐주는 노인들을 많이 만났는데, 나폴리노인들은 친절하다는 '편견'도 생긴다.;;)

'조선족'에 대한 편견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탈리아의 ‘조선족’분들의 민박에 대해서 편견을 가진 평가가 인터넷에 많다. 그런 평가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어느 정도는 ‘조선족’에 대한 편견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적어도 이번은 묵었던 어떤 곳보다 음식도 숙소도 좋았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젊은 한국출신 사람이 하는 것과 같은 ‘말이 통하는’ 분위기는 없을 텐데, 아마도 그런 점도 이유이긴 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과 말하면서 느낀 것은 적어도 어떤 사람들은 '조선족'에 대해서 동질감을 느끼는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민족'이라는 게 얼마나 웃긴 건지를 다시 느낀다.(아마 앞으로 북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같은 민족'으로는 사고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주머니 이야기를 들으면서, ‘민족’이라는 희미한 끈으로 나와 연결되고 먼 이국에서 우연히 만난 그분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세계를 돌아 첩보작전을 방불케하는 방법으로, "불법“이주를 감행하고 일하고 지구반대편의 가족에게 송금하는 여성 이주노동자. 이번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분.

그리고 그녀가 중국에서도 걱정없이 살 수 있도록 세계경제는 변화될 수 있을까, 혹은 그녀가 원하는 곳에서 “불법”에 불안하지 않게, 안전하게 노동할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국경들이 민주화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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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은 글의 맥락과는 상관없이, 피렌체에 가깝다는 이유로 반나절 다녀온 피사에 있는 그 유명한 "피사의 사탑"
.
나도 이 앞에서는 완전히 관광객 모드로 돌입했는데, 전세계에서 온 갖가지 모양의 사람들이 모두 기울어진 사탑에 손을 대고 서있는 포즈로 똑같은 사진을 찍는게 흥미로운 곳이다.

나는 흠.. 찍어줄 사람이 없어서 그냥 일반적인 포즈의 셀카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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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의 하얀 햇빛

아를의 하얀 햇빛

남프랑스의 아를. 스위스를 떠나서 간 이 곳에 온 것은 순전히 고흐 때문이다. 고흐가 그림에 담았던 햇빛을 직접 보고, 피부에 담고 싶어서다.

아비뇽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아를. 남프랑스의 첫 느낌은 ‘밝다’는 것이다. 이곳의 태양은 어느 곳보다 밝게 빛난다. 이곳보다 위도가 더 낮은 동남아 같은 곳보다 더 밝은 빛을 띈다. 그 빛은 모든 것을 희게 빛나게 만든다.



모든 것에 흰색이 섞여들어간다. 왜 고흐가 유화를 그리면서 흰색 물감을 그렇게 많이 사용해야했는지 알 수 있을 것같다. 들판에도, 나무에도, 론강의 강물에도, 집들에도 흰색이 넘치고 눈부시다. 그것은 강렬하기는 하지만, 뜨겁다는 느낌보다는 ‘밝다’는 느낌.

고흐가 그렸던 몇군데 장소를 찾는다.
첫날 밤은 하늘이 흐려서, 밤늦게 까지 기다렸는데도 아쉽게 론강에 비치는 별빛을 보지는 못했다.
이튿날. 고흐가 그렸던 랑그루아 다리를 찾아간다.(이제는 아예 반 고흐 다리로 불린다.) 버스가 다닌다고는 하지만 시간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를 시내에서부터 운하를 따라 걸어가기로 했다. 지도에서는 그리 멀어보이지 않는 그곳까지 따가운 햇빛을 맞으며 40여분을 걸어서 도착했다. 자갈길을 걸으면서 벌써 발이 아프다.

고흐는 햇빛이 있는 현장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이런 곳을 매일 그림을 그리기위해서 오갔을 것이다. 마치 농부가 자신의 밭을 갈기위해서 찾아가는 것처럼, 하나의 노동처럼.



다리와, 주변의 들판을 둘러본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도 흰빛이 가득하다. 한참을 들판을 바라보았다. 어찌보면 평범하고 단조롭기 그지없는 들판에서 고흐는 어떻게 그렇게 살아있는 장면을 포착하고 그려낸걸까. 자연의 깊은 곳에 있는 본질적인 것을 고흐는 그 곳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과 함께 찾아낸다.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깊이 느끼고 포착해야 가능한 일이다.



천천히 걸어돌아오면서 발견한 건, 반짝거리는 무언가였다. 그것은 흔들리는 나뭇잎.
바람은 나뭇잎은 흔들고, 햇빛이 반짝거린다.
그 흔들림은 사진으로도 잡아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찍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반짝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흐는 다소 거칠고, 역동적인 붓터치를 통해서, 정지한 화면에 반짝거리는 빛의 강렬한 움직임을 그려넣었다.

시내에 들어와서 고흐가 머물렀던 요양원과 고흐가 그렸던 ‘밤의 카페’(이제는 이름이 반 고흐 카페)를 둘러본다.



아를 시내에는 고대 로마 시대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로마 시대에 갈리아 진출을 위한 전진기지였기 때문이다. 아를의 햇빛에 받아 빛나는 그 유적들도 무척 아름답다. 하지만 고흐는 고집스럽게 ‘어디에나 있는’ 밀밭과 들판, 복숭아나무, 빨래하는 여인, 추수하는 농부를 그렸다. 고흐는 평범한 것들 안에 있는 진실을 만날 수 있게 캔버스에 담았고, 화려한 궁전이 아니라 그것들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다.

모든 것을 가장 밝게 빛나게 하는 아를의 햇빛 아래서,
눈에 보이는 것을 보는 방법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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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서쪽숲’을 만나다

스위스, ‘서쪽숲’을 만나다

사실 스위스를 일정에 잡으면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산이 뭐 어딜가나 똑같지”라는 게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이내 알게되었다.



스위스에서 닷세를 보내는 동안 하루는 이래저래 이동하는 날이었고, 사흘은 날씨가 흐렸다. 알프스의 깊은 산은 항상 구름을 만들어내서 흐린날이 더 많다. 그렇지만 그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인상적이다.

수만년 동안 빙하가 만들어낸 U자형 계곡(나는 이게 교과서에만 나오는 개념인 줄 알았다)은, 목축을 하는 마을 바로 뒤편에 3000-4000 미터짜리 절벽을 만들어놓는다. 그 밑에는 빙하가 녹은 자리에 호수가 만들어지고, 석회질의 흰빛이 섞인 물은 청록색으로 빛난다. 이제까지 자연에 대한 내 관념으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규모의 경관이 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서부터 펼쳐진다.

그 자연은 이제까지 인상적으로 보았던, 인간이 만든 모든 건축물들을 왜소하게 느껴지게 만든다. 에펠탑이든, 빅벤이든, 브란덴부르크문이든, 어떤 것을 그 근처에 가져다 놓아도 장난감처럼 보일 수밖에 없을 테고, 아름다움에 있어서도 비교할 거리가 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자연만이 만든 풍광은 아니다. 사람들이 만든 건물은 자연의 거대함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고, 목축업이 만든 푸른 초원은 더 넓게 시야를 확장시킨다.)



거대하다는 느낌을 넘어 그것은 숭고함을 느끼게한다. 자연에서 느끼는 숭고함이란 감정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걸까. 사람에 대해서라면, 그것은 전에 ‘레미제라블’에 공연에 대한 느낌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신의 내면에 진실로 충실하고, (그것이 비극일지라도) 운명에조차 맞설 때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자연의 숭고함은 그와 같지는 않다. 그것은, 압도적인 어떤 힘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그것은 마치 거역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고, 그 앞에서는 자신의 운명에 대면할 때 가지는 감정을 갖게 한다. 그 안에서도 나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자연의 위대한 힘을 또한 인정한다는 것. 또는 온갖 운명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지켜낸 위대한 인간과도 같이, 수만년 동안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온 위대함에 대한 감정이랄까.



다시, 하나의 인간으로서 그 숭고함 앞에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내가 충실해야할 나의 내면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스위스에서의 여행이 좋았던 것은 단지 그러한 자연이 그곳에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곳의 여행은, 여행자를 ‘생각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새로운 볼거리를 쉼없이 제공하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산을 오르거나 내리면서, 한걸음 한걸음 계속 변화하는 광경은 끊임없이 새롭다.) 오히려 그냥 그것을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그 속에서 그 자연은 눈앞 시야에 틈을 벌여준다. 그곳 뒤에서 ‘나’를 만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다. 내가 충실해야할 나는 누구인가. 내가 가졌던 사고와 이념, 감정들은 무엇이고, 나는 어디에 있는가.

이제까지 살면서, 나 자신보다는 오히려 나의 어떤 의무감, 책임감 같은 것들이 나를 대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자신을 지워가거나 억압하면서.

심지어 운동에 대해서도 그렇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그것은 어떤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먹을거리를 만들고 자신의 노동으로 세상을 만드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그들의 권리를 위한 정의가, 어떤 대의명분 이전에 “내가” 운동하게 하는 근원적인 동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고흐의 그림 ‘감자먹는 사람들’과 막 추수가 끝난 남프랑스 아를의 들판에서도 그것을 다시 생각한다.)

스위스에서 마지막 일정을 보낸 루체른. 운좋게도 그날 날씨만은 맑았다.
그날 오른, 알프스 봉우리들이 보이는 ‘리기쿨룸’이라는 산을 천천히 걸어내려오다가 문득 산속 마을의 벤치에 앉았다. 날씨가 흐려서 정작 그곳에 갔을 때에는 눈보라만 보았던 알프스 최고봉이라는 융프라요흐와 그 밑의 숲이 보이는 곳. 그리고 MP3 플레이어에서 이적의 ‘서쪽숲’이라는 노래가 흘러 나온다.



나 어릴 적 어머니는 말했죠
저기 멀리 서쪽 끝엔 숲이 있단다
그곳에선 나무가 새가 되어
해질 무렵 넘실대며 지평선 너머로 날아오른단다
오, 내 어머니, 오, 난 가지 못했죠
오, 난 여기서 언젠가 언덕을 넘어 떠나고 말리라 노래만 부르죠

커갈수록 사람들은 말했죠
어디에도 서쪽 숲같은 건 없단다
너는 여기 두발을 디딘 곳에
바위틈에 잡초처럼 굳건히 견디며 버텨야한단다
오, 내 어머니, 오, 난 가지 못했죠
오, 난 여기서 언젠가 언덕을 넘어 떠나고 말리라 노래만 부르겠죠


노래를 듣다가 뭉클해서 울어버리고 말았다.
먼길을 떠나 바로 여기서 서쪽 숲 앞에 선 느낌이었고,
천천히 자리를 일어나면서 다시 조금 커가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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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동화속 풍경?

지금은  피렌체.
베를린에서, 프라하, 비엔나를 거쳐서, 스위스에 있다가, 남프랑스(아를과 아비뇽)를 지나서 막 이탈리아 도착. 한동안 인터넷이 잘 안되는 유스호스텔 숙소에 주로 있다보니 아주 늦은 여행기를 올린다. 지나간 다른 곳들은 차근차근. 일단 프라하부터.

프라하, 동화같은?

주말에 도착한 프라하에는 무척 많은 사람들이 있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 온 관광객들이 많은데, 가까우면서도 물가가 상대적으로 싼 이곳에 주말이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프라하의 舊도심은 중세 건물들을 보전하면서, 마치 ‘동화 속 나라’같다. 너무 아기자기하고 예쁘다.

도시들의 전경

유럽의 도시들을 다니다보면 한 가지 일반적인 특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 도시의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전경들이 고풍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로 뭉뜽그릴 수는 없다. 각 도시들(내가 간 주로 각 국가의 수도)은 그곳이 가장 정치적, 경제적으로 흥기할 당시의 건물들이 주로 전경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런던과 빠리는 19세기의 건물들, 암스테르담에는 17세기의 건물들, 오스트리아에는 합스부르크왕조가 융성했던 18-19세기 건물들이 주로 도시의 전경을 형성한다. 그런 점에서 프라하의 중세적인 풍광은 한때 보헤미아 왕국,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 융성했다가 16세기 이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흡수된 이곳의 역사를 보여주기도 하는 것같다.

중세적인 풍광, 색감

프라하의 유명한 건물들은 주로 그런 시기에 지어진 것들이다. 프라하성, 까렐교, 화약탑 등 주요한 관광지이며 유명한 건물들이 그렇다.

그런데, 이런 풍경들은 왜 ‘동화속’처럼 보일까?
우선, 풍광자체가 미적으로 아름답다. 내가 놀라면서도 의야했던 것은, 정작 많은 곳에서 자연적인 풍경은 한반도와 그리 다르지 않은 곳들도 많은데 왜 이렇게 다른 느낌이 들까했던 점이다. 그것은 주로 그곳의 사람들이 만들어 더한 풍경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특히, 색감.
(하지만 지금 다녀온 알프스는, 자연적 풍광자체가 다르다는 점은 언급하자)

한반도의 옛 건물들은 주로 자연속에서 튀지않고, 자연과 유사한 색을 사용해서 그 속에 묻히는 방식으로 지어졌다. 그런데, 이 곳은 자연의 색과는 대비되는--주로 보색으로 건물들을 짓고, 그것은 뚜렷하게 드러나고, 풍광 속에서 나름의 미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렇다고 한반도의 옛 건물들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다른 미적 효과를 만든다는 점).

녹색의 산 속에, 하얀벽과 빨간 지붕으로 만들어진 집들이 드문드문 있을 때, 그것은 뚜렷하게 드러나면서 재밌는 색감의 조화를 이룬다.



중세적인 풍광, 동화

한편,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에 더해서 '동화 속같다‘는 느낌은 이내 조금 씁쓸함?을 느끼게 했다. 그것은 우리가 어릴 적부터 듣고, 읽고, 영상으로 접했던 ’동화‘가 거의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다소 괴기스러운 민담들을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로 재창조한 그림형제의 영향이 크긴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이’라는 근대적인 개념을 발명하고, 어린이들에 ‘적합’하다고 판단된 관념과 관행을 만들어낸 것이 유럽이라는 점에서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그들이 만들어낸 어린이라는 개념과 “어린이용”의 여러 가지 것이 그대로 수입되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들도 있었다. (그들은 성장기에 ‘보호’받지만 한편으로는 과소인간으로 절하되고 시민권에서 배제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프라하의 풍광이 동화스럽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프라하라는 도시의 역사와, 어린이와 동화라는 근대적 발명품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을 것같다. 이런 역사들이 만나서 “동화같은 도시 프라하”라는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이 흥미롭다.

내가 이 도시에 간 것이 주말이었기 때문이었겠지만 이곳은 마치 말그대로 “관광지”같은 느낌이다. 번잡한 기념품가게, 여행객을 상대로 뭔가 팔아보려는 것들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곳이 가장 낭만적인 도시라고 말하지만, 내 느낌은 별로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무척 아릅답다는 것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다.)

(순전히 개인적인) 내 느낌과 어느 정도는 취향으로, 오히려 낭만적인 곳은 빠리인 것같은데, 어떤 낭만적인 분위기라는 것은 건물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곳의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 보여주는 모습에서 만들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건물들이 만드는 풍광은 어쩌면 덜 아름다울 수 있어도 빠리가 더 낭만적인 도시로 느껴진다. (빠리가 낭만적인 도시로 느껴지는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원인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같다.)

여튼 프라하는 가볼만한 도시. 아름답다.

***

국립박물관 앞에 바슐라프 광장.
이곳은 1968년 ‘프라하의 봄’과 잇따른 소련군의 침공이 이루어진 곳이다. 시간이 늦어져서 박물관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그 앞에 어쩌면 별로 눈에 띄지않게 거리에 놓여진 십자가를 볼 수 있었다. 바로 프라하 봉기를 촉발했던 Jan Palach, Jan Zajic 두 청년의 분신이 일어난 장소.

다시, 사회주의에 대해서 묻게 된다. 누구를 위한 누구의 사회주의? 인민을 위한, 인민 스스로의? 혹은 사회주의 조국 수호를 위한, 소련에 의한? 그러나 한편으로 두 청년이 원했을 것이 자신이 싸운 이 도시를 북적거리는 관광지로 만드는 자본주의는 아닌 다른 것이었을 수도 있을 텐데.. 지금 이 거리의 사람들은 무엇을 원할까.

이곳에 장미꽃이 놓여있다. 긴 시간이 지나서 이렇게 죽음이 기억된다. 그러고 보니, 수많은 열사들이 사리진 곳에 우리는 변변한 상징도 없구나. 겨우 남아있는 청계천, 전태일 열사의 동판 말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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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암스테르담

암스테르담, 고흐박물관

* 지금은 베를린에 있지만, 인터넷 상태가 오락가락해서 이제 겨우 암스테르담에서의 이야기. 베를린은, (인터넷만 아니면) 지내기는 편하지만, 마음은 무척 불편한 도시다. 그런데도 예정보다 이틀을 더 넘기고 있다. 그 이야기는 다음 도시에 가서.

파리에서 독일로 넘어가는 길에 암스테르담을 들려 간 건 두 가지 때문이다. 그중 하나는 17세기 세계자본주의 헤게모니 국가였던 네덜란드를 간단하게라도 봐야겠다는 생각이었고, 그것은 주로 암스테르담 박물관과 도시 자체를 둘러보는 것이 계획이었다. 그리고 암스테르담에 온 목적의 팔할 이상은, 고흐박물관이 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서둘렀는데도, 암스테르담에 도착해서 숙소를 잡고 고흐박물관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 이때부터 시작한 관람은 다음날 다시 찾아가서 오후까지 있었으니, 이번 여행에서 한 장소에 있었던 것으로 따지면 오르세 미술관보다 길다. 그러나 어쩌면 평생 이 그림들을 다시는 못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떠나는 길이 아쉽기만 하다.

일단 17세기 네덜란드 작품들을 본 경험(암스테르담 박물관)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무엇보다 고흐에 대해서 말해야한다.

글쎄, 보고 나서 느낌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제까지 미술작품을 통해서 이렇게 강렬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거니와, 그 깊이와 폭으로 말하자면, 이제까지 다른 장르의 예술적 경험 속에서도 이런 느낌은 없었다. 영혼을 울린다. 니체는 열정적인 감정, 도취는 음악에서만 가능하다고 하면서 디오니소스를 특권화했지만, 만약 그가 고흐를 보았다면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아폴로를 긍정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흐의 눈빛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고흐박물관 이전에 오르세미술관에 전시된 고흐의 말년의 자화상을 언급해야한다. 오르세미술관에도 두 번 찾아가면서 매번 한참을 자리를 뜨지 못하고 지켜본 그림이 이것이었다.

이 그림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고흐와 눈이 마주치는 각도에 서서 지켜보면서 눈빛과 대화해야한다. 그러면 고흐가 자신의 자화상에 그려넣은 자신의 감정이 전달되어온다. 그것은 어떤 두려움, 분노, 그리고 무엇보다 슬픔과 그런 아픔이다. 누구나 영혼에 그런 것들이 있을 텐데, 고흐의 자화상은 내 안의 두려움, 분노, 그리고 무엇보다 슬픔과 그런 아픔에 거울처럼 직면하게 한다.

노동하는 사람의 손

이런 감동의 상당부분은 여행을 오면서 챙겨와서 읽은 책, 고흐와 동생 테오의 서간집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덕분이다. 책은 고흐가 자신의 작품과 영혼에 대해서 말하는 편지들을 담고 있다. 편지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인 이 책을 통해서 눈 앞에 보이는 그림에서 고흐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다.

초중기 작품을 먼저 보자. 고흐는 <감자먹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램프 불빛 아래에서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로 내밀고 있는 손, 자신을 닮은 바로 그 손으로 땅을 팠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려고 했다. 그 손은, 손으로 하는 노동과 정직하게 노력해서 얻은 식사를 암시하고 있다.



이 작은 사진으로도 어느 정도 볼 수 있지만, 노동하는 손의 표정을 보라. 그리고 표정굵은 얼굴을.
노동하는 사람의 손, 그 자신의 얼굴과 같은 손, 그것은 가장 신성한 모습으로 금빛 조명아래 빛나고 있다. (고흐는 서간집에서 이 그림은 진한 금색 벽에 걸어야한다고 말하는데, 고흐 박물관에는 그렇게 걸려있다. 조금 떨어져보면, 화면 전체에서 빛이 벽으로부터 배어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목사가 되기 위해 탄광촌에 있던 시절, 광부들의 파업을 지원하면서 성직자의 길을 포기하기도 했던 고흐는, 그 표현은 달라졌더라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끝없이 간직한다. 아를에서도 고흐는 이렇게 말한다.

농부를 그릴 때는 파란색의 무한한 하늘에 창백한 별 하나가 신비롭게 반짝이는 것을 그리려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내가 그리려는 훌륭한 농부가 찌는 듯한 한낮의 열기 속에서 곡식을 거둬들이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빨갛게 달궈진 다리미처럼 빛나는 오렌지색과 황금색의 반짝이는 톤을 담은 그린을 그렸다.
사랑하는 동생아, 높은 양반들은 이런 과정을 봐도 단지 서투르게 모방한 탓으로 생각하겠지. 그러나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우리는 ‘대지’와 ‘제르미날’을 읽은 사람이다. 농부를 그린다면, 우리가 읽은 작품이 우리의 일부가 되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을 그리면서는 이렇게 말한다.

모델은 카페에서 일하는 여자인데, 내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면류관을 쓴 그리스도’ 같은 모습이다. 그녀는 밤새 꽤 바쁘게 일했음이 분명한 모습을 하고 나를 찾아왔다. 인상적이게도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샴페인은 나를 즐겁게 해주지 않아요, 오히려 아주 슬프게 해요.”

그녀를 그린 그림은, 피곤함과 슬픔이 눈빛에 나타난다. 고흐는 그런 인상이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고난스러운 것, 하지만 그럼에도 혹은 그 때문에 가장 성스러운 것. 나중에 고흐가 들라클루아의 피에타를 다시 그린 그림도 전시되어 있는데, 그림에서 성모에게 안긴 죽어가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마치 고흐의 자화상과 같다. 그래서 고흐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포함해서) 하나의 개인들의 영혼에서, 성스러운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일하는 농부의 모습이 금박으로 장식한 그리스도 상보다 더 성스럽게 나타난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흔히 고흐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있다. 박물관의 설명을 보면 별로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고 말하지만, 서간집에서 언급하는 마지막 작품이 비슷한 이미지인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기 충분한 이유가 이 그림에는 있다.



그림에서 밀밭의 밀들은 정말 금빛으로 반짝인다. 그 위로 날아가는 까마귀들은 불행한 화가들의 영혼을 먼 행성으로 데려가는 것같다. 그들이 날아가는 하늘은 어두운데, 그곳에는 별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그리기 전해에 고흐는 <해뜰 무렵 밀밭에서 수확하는 사람>이라는 그림을 그린다. 이 작품의 영문제목은 ‘Wheatfield with a reaper’이다. ‘reaper’는 수확하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죽음의 신’이라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수확하느라 뙤약볕에서 온 힘을 다해 일하고 있는 흐릿한 인물에서 나는 죽음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그건 그가 베어들이는 밀이 바로 인류인지도 모른다는 의미에서다. 그러므로 전에 그렸던 <씨뿌리는 사람>과 반대되는 그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죽음 속에 슬픔은 없다. 태양이 모든 것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환한 대낮에 발생한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

그러나 고흐의 그림의 전반적인 정서가 죽음일까? 전혀 그렇지는 않은 것같다. 많은 그림들이 생명력으로 충만해있고 죽음은 그것을 더욱 두드러지게 대조해서 그러나게 한다. “씨뿌리는 사람들”이나 “해바라기”를 비롯한 여러 꽃 그림들을 보아도 그렇다. 잘 알려진 “해바라기”를 보면, 그 꽃이 열정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디선가 꽃들이 말하는 것을 한번 쯤 들어본 사람이라면. 고흐가 전하는 해바라기의 말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테오는 자신의 아들에게 빈센트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조카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그려준 그림이 “아몬드 꽃”이라는 그림인데, 빈센트 자신에게 그려준, 자화상 같아 보이는 그림도 있다. 이 흰꽃은 이렇게 이어진다.

전시의 마지막에는, 아, 고흐가 자살한 해인  1890년에 그린 ‘나비가 있는 정원’이 있다. 하얀 나비가 막핀 꽃처럼 풀밭에 있다.

지상에 머무르는 동안 지도 위에 검은 점으로 표시되어 있는 마을이나 도시에 직접 가볼 수 있는 것처럼, 어쩌면 나비가 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무수한 별이 있을지도, 그리고 죽은 후에는 우리도 그곳에 갈 수 있게 될지도 모르지 않겠나.
- 고흐가 베르나르(동료화가)에게 쓴 편지 중

고흐의 영혼은 나비(프시케)가 그림을 그리는 어느 행성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죽기 전까지 주변에서 피어나는 꽃을 그렸던 고흐는 1890년 7월 권총으로 가슴을 쏜다. 그는 이틀 후에 숨지는 데 “왜 나는 제대로 하는 것이 없을까, 총을 쏘는 것조차”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7월29일, 동생 테오의 품에 안긴채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고 숨을 거둔다. 동생 테오도 고흐가 죽은 후 6개월 후에 건강이 급속히 나빠지면서 숨을 거둔다.

고흐는 노동하는 사람들 속에서 영혼을 발견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이 금박으로 치장한 어떤 성화보다도 성스럽다는 것을 자신의 그림으로 증명했다. 고흐는 자신의 강렬한 눈빛과 그림 속에서 그들의 영혼을,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만날 수 있게 한다. 이 글에서도 하나하나의 그림에 대한 느낌을 다 말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것은 그림을 보면서 눈물이 날만큼 너무 아픈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개개인의 영혼의 상처를 더 큰 아픔들 속에서 인식할 수있게 하고 돌아볼 수 있게 한다.

이번 여행에서 느끼는 여러 가지 것들, 매일 매일 만나는 새로운 것들 속들 속에서 현기증을 느낄 정도이지만, 누군가의 강렬한, 그리고 상처입은 영혼에 직면하는 이런 특별한 기회는 다시 없을 지도 모르겠다.


*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원래 박물관에 소장된 것으로 알고 있던 "구두"나 "고흐의 의자(초가 있는 의자)"같은 작품을 보지 못했다. 다른 곳에 순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튼 무척 아쉽다.

* 고흐의 그림에 대한 감동에서 앞서 언급한 <반고흐, 영혼의 편지>라는 책을 다시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나 감동적인 책이다. 특히 고흐만이 아니라 동생 테오의 글들도 그런데, 진정한 영혼의 동료들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테오의 글이 어쩌면 더 가슴을 울린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 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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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어떤 점들.

여행의 어떤 점들.

 

이제 기차로 빠리를 떠난다. 예정보다 하루 더 있던 빠리를 아침 기차로 떠나는 이유는 암스테르담에 고흐 미술관이 월요일에는 열지 않는다고 하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가야 오후 반나절을 볼 수 있다.(하지만 정작 와보니 잘 못된 정보였다;; 월요일도 연다.)

 

혼자 여행하기

 

* 좋을 때

 

나의 속도대로 움직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루브르박물관에 들라클루아 앞에서 한시간 넘게 보내도 부담이 없고, 페르라세즈 묘지에서 한참을 헤메도 누구에게 미안하지 않다. 기분내키면 빠리에 하루 더 머물수도 있고.

 

내 느낌대로 움직일 수 있다. 런던에서 최근 한국인에게 인기 뮤지컬은 ‘빌리 엘리엇’이나 ‘맘마미아’. 혼자라면 시간이 허락하지 않을 때에도 ‘레미제라블’을 선택할 수 있다.

눈치보지 않고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 오르세 미술관, 미술 작품 앞에서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난다면, 그럴 수 있다. 쪽팔려서 감정을 자제할 필요가 없다.

 

셀카 찍는 재미. 특히 야경을 배경으로 타이머로 셀카찍는 재미가 쏠쏠하다. 내가 뭔가 만드는 느낌인데, 정말 재밋다.

혼잣말 하기. 같이 다니면 대화할 사람은 같이 있는 상대방 뿐이다. 하지만 혼자 다니면, 말할 수 있는 상대는 무한정. 나한데 혼잣말을 해도 되고, 누군가 맘에 내키는 상대에게 말할 수도 있다.(물론 들리진 않겠지만;;)

 

배경 음악깔기. 굳이 대화할 필요가 없을 때가 많으므로, 분위기에 적합한 음악을 mp3로 들으면서 다닐 수 있다. 음악을 깔면 주변이 아주 달라보이고, 느낌이 새롭다. 빠리 밤거리에서 쇼팽을, 퐁피두 현대미술관에서 punk rock을 들어보자.

 

대략 스릴있다. 누군가에게도 의존할 수 없고 가끔 실수하기도 하는 긴장과 스릴. 전방위적인 판단을 스스로 할 것을 요구받게 되는데, 단점이자 장점.

 

* 좋지 않을 때

 

Please, Take me a picture.. 라고 말하기 짜증날 때가 있다. 마음씨 좋아보이는 (주로 젊은 여성;;) 외국인을 찾으려고 두리번 거려야하고 귀찮을 때가 있어서 사진은 주로 등장인물 없음.

 

2인분씩 먹는 메뉴는 주문하기 힘들다. 뭐 먹으라면 먹겠지만 돈 아깝다. 중국식당의 딤섬 같은 경우가 그런데, 이런 식이다보니 그냥 샌드위치나 핫도그 먹는게 편하다. 문제는 식사는 부실하고 걷기는 많이 걷다보니 살이 너무 빠진다는 것. (아, 적당한 다이어트에는 좋으니 장점이라고 해야하나?)

 

가끔 한국어가 그립다. 하지만 장기간 유학간 분들이나 이민간 분들에게 비할 바는 아니니 패스.

 

한국에서 투쟁 소식들을 때. 어차피 한국에 있다고 도움되는 형편도 아니지만, 마음이 또 그렇지가 않고 무거워진다. 로밍한 핸드폰으로 집회 안내 문자도 몇 개씩은 오는데, 거참.

 

그밖에 단점은.. 생각보다 많이 없는 것같다. 흠, 더 생각나면 나중에 이야기하자. 나가봐야할 시간됐다.

 

빠리의 인상

 

떠나는 마당에 이야기하자면, 번잡한 대도시이지만 문화적으로 풍성한 곳이라는 것, 그리고
괜히 낭만적인 도시라고 하는게 아니라는 점도.

 

노틀담 성당에서부터 퐁네프 다리, 예술가의 다리, 루브르박물관으로 이어지는 길은 환상적이다.(그에 비해서 유명한 상젤리제 거리 같은 곳은 좀 번잡하다.) 곳곳에 길거리에서 키스하는 연인들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전혀 어색해보이지 않는다. 너무나 자연스럽다. ‘빠리의 연인’ 같은 드라마가 나올 만한 분위기라는 건데, 모르는 남녀라도 여기서는 며칠만 붙여놓으면 연인이 될 것같다.

 

* 에펠탑 뒤, 안경너머로 바라본 빠리의 석양

 

Sur le quai

 

Sur le quai, ‘버스, 정류장’의 OST(루시드 폴)이기도 하고, 내 핸드폰에도, 네이트온의 아이디에도 있는 문구다. ‘on the dock'이라는 뜻의 불어라고 하는데, ’on the platform'이라고 새길 수도 있다.

 

빠리의 역에는 quai 1, quai 2, quai 3.. 이렇게 플랫폼을 표시한다. 이제 sur le quai.

 

이 문구가 노래 가사에 나온 적이 있는데, 영화 “셀부르의 우산” 주제가에 이 문구가 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더욱 아련할. 잊을 수 없는 영화와 그 음악이다.
http://blog.naver.com/ydiana?Redirect=Log&logNo=80033815735

 

Ils se sont separes sur le quai d'un gare
Ils se sont eloignes dans un dernier regard
어느 역 플랫폼에서 그들은 서로 헤어졌답니다.
그들은 마지막 눈길을 건네며 서로 멀어져 갔답니다.

 

이렇게 이어진다.
빠리, 안녕.

 

 

* 좀 서둘러 가느라 빠리에서 들렸던 중요한 곳들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못했다. 루브르 박물관--오르세 미술관--퐁피두 현대미술관과 프랑스 공화주의의 기념물인 팡테온 사원 등에 대한 것. 일단 여기 암스테르담을 뜨면서 정리해보자. 인터넷 환경이 너무 좋지 않은데, 그건 베를린도 만만치 않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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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두번째

런던에서, 두 번째

 

런던에서 (여행자의 입장에서) 가장 좋고, 부럽기도 한 것은 이 곳의 주요 미술관, 박물관들이 무료라는 것이다. 물론 박물관-미술관이 아닌, 의회 같은 경우에는 투어비를 받기도 하고 웨스트민스터나 세인트폴과 같은 성당들은 입장료를 받지만 말이다. 덕분에 내셔널갤러리, 테이트 브리튼, 데이트 모던 등을 연결해보면 미술사를 조망해볼 수도 있고, 영국박물관을 통해서 문명의 역사를, 자연사박물관, 과학박물관을 통해서 자연과 과학의 변화와 발전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이 부러운 이유는, ‘공짜’여서만은 아니다. 이 정도 수준이 되는 전시물들이 있다는 것부터 그렇다. 한편으로는 학문, 과학과 예술이 ‘공공’의 것으로 대중이 언제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열려있다는 점에서 훌륭한 일이다. 이를 통해서 사람들은 과학과 예술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정념을 고양시킬 수 있다. (사진은, 일단 공룡화석에서 시작하는 자연사박물관.)

 

빅뱅, 지구의 탄생과 공룡시대부터 석기시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스-로마를 거쳐 다빈치(르네상스)와 미켈란젤로를, 그리고 르누아르와 고흐에서, 피카소까지, 최초의 증기기관에서 우주선까지 자연과 인류의 역사와 그 성과를 종합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기회다.

 

(물론 나는 ‘구경’은 했지만 그런 ‘기회’를 누렸다고 하기는 힘든데, 수박겉햝기 식의 관광객식 구경일정으로는 전시물의 내용을 확인할 틈도 없이 단지 그런 것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한달쯤 더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간절히 들었다. 여튼 이번 여행은 주마간산이라는 점은 인정하면서 갈 수밖에. 하지만 운에 따라 가끔 한 두가지라도 깊이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있기를 바랄 뿐이다.)

 

미술사 ; 추상에서 추상까지


미술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보면서 느끼고 생각하게 된 것들을 이야기해보자.

영국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의 예술은 한편으로는 사실적인 묘사가 뛰어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추상적이라고 할만하다. 대상의 특질 중에서 부각하고 싶은 것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것이 이들의 전략이기 때문이다.(그것은 사실과 유사하게 만들 '실력'같은 문제는 아니다. 예를 들어 아래 사진과 같은 람세스2세 두상은 대단히 사실적이다.)




그런 추상의 극단적인 경우가 여러 신들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종교이기도 하지만, 현실에 대상이 없는 추상적인 개념들을 눈에 보이게 표현하는 과정에서는 대상의 어떤 특징은 묘사되는 형상 속에서 '순수하게' 드러난다. 종교적 열망과 세계를 개념화하려는 철학, 그리고 예술은 이런 방식으로 같은 뿌리에 얽혀있는 것일까?

 

이집트의 경우, 사람 그림은 얼굴은 옆면, 눈은 앞면, 몸통은 정면, 다리는 옆면을 그린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대상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쪽으로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그리스에서 미술은 사실化되었지만 황금비례에 맞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그린다는 점에서 이어지는 측면이 있다. 이런 미술의 특징은 그것의 존재 이유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라기보다는 보여주고 싶은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미술을 발전시켰다.

 

르네상스 이후에 근대에는 점차 대상과 말그대로 닮은 것을 그리려는 노력이 집요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내셔널 갤러리) 미술사 책에서 볼 수 있는 작품들, 15세기에 원근법을 도입하는 그림들이나 사실적 묘사가 뛰어난 16, 17세기 미술들이 그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내셔널 갤러리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인상파 전시실은 다시 보다 화가가 전달하고자하는 것을 전달하는 것에 충실해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대상과 닮은 것은 다음 문제가 되기 시작하는데, 마네와 고흐 등은 빛을 통해서 그런 느낌들을 전달한다. 대상과 닮지 않았더라도 대상을 더욱 잘 드러내는 빛을 화폭에 담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변화들 덕분에 사진과 영상으로 대상을 담을 수 있는 시대에도 회화가 아직 살아남을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사실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사진이 정확하고, 영상과 서사를 결합시켰던 회화들(특히 그리스도의 수난이나 그리스-로마 신화를 표현한 작품들)은 영화가 대체하는 시기에도 말이다.

 

템즈 강을 건너서 데이트 모던에 가면 현대미술을 전시한다. 20세기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작품들. 사실 작품들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아서 이럴 때만큼 영어실력이 아쉬울 때가 없다. 오디오 가이드라도 들으면 좀 더 이해가 될 텐데.(미술관, 박물관들에는 영어와 함께 불어, 이태리어, 독일어, 일본어 오디오 가이드가 있다. 박물관 미술관에는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넘친다. 얼마 있다가는 중국어 오디어 가이드도 등장할 듯.) 칸딘스키나 피카소 정도를 넘어가면 이해가 너무 힘들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회화가 대상 자체가 아니라 어떤 추상적인 관념, 이념들을 전달하는데 몰두한다는 점. 사진이나 영화와 경쟁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미술계 밖에 있는 사람이 보기에는 (죄송하지만) 그런 측면은 현대미술에 일종의 강박처럼 느껴진다.

  

미술관, 박물관에는 주중에는 수업삼아 단체 관람온 학생들로 넘친다. 이런 기회를 가지면서 성장한 어린이들이 과학과 역사, 예술에 대해서 더 깊은 이해를 가지는 것은 물론, 그것을 더 발전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런 곳에는 어린이들을 위해서 ‘직접’ Acting 해볼 수 있는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기도 하다. 테이트모던에서는 이미지를 조작해서 추상적인 이미지를 직접 만들어보거나, 개념들을 환유적으로 연결해볼 수 있는 장난감도 있다. 예를 들어 카지노 슬롯과 같은 것을 돌리면 무작위로 개념들이 조합되어서, “사과--뒤짚다--이것은 예술이다”라는 식으로 말을 만들면서 상상할 수 있다. 초상화 미술관에서는 자기 초상화를 손으로 조합해볼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예술과 과학이 먼 곳의 어떤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해볼 수 있는 무엇이 된다.

 

이번 여행에서 테이트 브리튼에서는 Millais의 ‘오필리아’를 꼭 보고 싶었는데 보지 못했다. 오는 27일부터 전시라 지금은 전시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림이 들어있는 포스터만 볼 수 있었다. 지구반대편까지 와서 일부러 목표했던 것을 놓칠 때 정말 크게 아쉬울 수 밖에.

 

영국박물관 British Museum

 

이건 이름을 영국박물관 British Museum이라기 보다는 World Museun 이라고 해야할 것같다. 세계 곳곳에서 (대부분 약탈행위를 통해서) 가져온 유물들로 채워져있기 때문이다. 하이라이트는 메소포타미아-이집트-그리스 관인데,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지배한 이들 지역의 유물을 제국의 수도에 전시하면서 서양문명의 정당한 계승자로서 자신들을 드러내려고 한 것 같다.

 

원래 있던 곳이 아닌 곳까지 건너온 유물들을 보면, 과연 이집트나 이라크, 그리스에는 무엇이 남았을까하는 생각까지 든다.(그래서 그리스-이집트까지 갈 생각인 나는 기운이 좀 빠지는 일이다.) 핵심적인 것들을 집요하게 모아왔기 때문이다. 피라미드처럼 좀처럼 가져올 수 없는 것들은 없지만, 파르테논 신전에서는 기둥과 지붕을 제외하고 가져올 수 있는 조각들은 모조리 가져왔다.

 

물론, 덕분에 유적들이 보존된다거나, 영국이 이들 나라의 유적보호나 박물관에 지원하고 있다는 말도 있지만, 그렇다고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이라크를 지배하고 유적을 약탈해온 영국은, 이제 다시 이라크를 미국과 함께 침공한 상황에서 그런 정당화는 더더욱 설득력을 잃는다. (비록 얼마전에 패퇴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민족국가단위로 분할된 세계체제에서 민족의 역사적 이상을 나타내는 고대 유적들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보게 한다. 영국의 약탈이 부당하기는 하지만, 좀 과격하게 말하자면 유물들이 꼭 그 자리에 있어야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의 북경박물관에 진나라의 수도였던 서안에 있던 유물이 있다고 할 때 부당하게 느낄까? 하지만 거리로는 더 가까운 만주에 있는 고구려, 발해 유적이 북경에 있다고 할 때 당신의 느낌은?

 

(다소 포스트콜로니얼리즘적인 시각이라고 해도) 역사적 유적들이 민족사를 구성하고 민족국가를 정당화하는 상징들이 된다는 점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 유적을 약탈한 제국주의가 정당화되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해야한다. 영국인들은 자신을 세계를 지배할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물들을 단지 “옮긴” 것일텐데,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동시에 비판할 필요성.

 

뮤지컬, 레 미제라블 Les Miserables

 

런던에서 마지막날 저녁은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봤다. 여행을 떠나면서 가지고 있던 몇 개의 로망 중에 첫 번째 것.

 

CD로 보고 들었던 것과는 배우들도 약간씩 다르고 해서 느낌이 같지는 않았지만 훌륭했다. 감동할 준비를 하고 간만큼, 몇몇 장면에서는 펑펑 눈물 흘린 작품.

 

레미제라블은 인물들이 모두 생생하게 살아있는 작품이다. 플롯도 감동을 주지만, 무엇보다 인물 하나 하나가 깊은 인상을 주고 생각하게 한다. 특히 “숭고한” 인물들은 깊은 감동을 준다.

 

장발장은 주인공인만큼 가장 그렇다. 자신이 누구인지 고뇌하면서도(What Have I Done?) 다른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자기 대신 누군가가 누명을 쓸 상황이 되자 자신을 밝히고 쫒기는 몸이 된다.(Who am I?) (비록 간접적이라도) 자신의 잘못으로 죽음에 이르는 판틴과의 약속을 지키기위해서 코젯(과 그가 사랑하는 마리우스)을 위해 희생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누구에게보다 자신에게 정당하기 위해서 매 순간 위험한 선택도 마다하지 않는다.

 

심지어 악역이라는 자베르도 그렇다. 그가 장발장을 집요하게 쫒는 것은 “법과 정의”에 대한 내적인 신념 때문이다.(Star)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충실하기 위해서, 자신이 믿던 “법과 정의”가 허구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쪽을 선택한다.(Soliloquy) 자신이 믿던 법과 정의가, 정의가 아니라는 모순적인 상황에서 그것을 회피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자신을 부정하는 선택. 역설적으로 가장 진실된 인물 중 한명.

 

그리고 에포닌이 있다. 그녀는 코젯을 사랑하는 마리우스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녀는 질투하거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비극으로 받아들이고, 그러나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 그래서 마리우스가 부탁한 편지를 코젯에게 전하고 오는 길에 시민군의 바리케이트 뒤에서 총에 맞아 죽어간다. 뮤지컬에서 가장 슬픈 장면. 그녀가 부르는 On my own도 잘 알려져있는 감동적인 곡이다.

 

그리고 앙졸라를 비롯한 학생과 시민들. 그들은 혁명을 위해서 싸우고 바리케이트에서 최후를 맞는다.(내가 본 공연에서 앙졸라 역은 흑인배우가 맡았는데, 카리스마있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다음시대의 혁명은 노동시장 밑바닥의 이주노동자로부터?) 그들은 죽을 것을 알면서도 바리케이트에 남는데, 광주에서 도청에 남은 시민군을 떠올리게 한다.(Drink with me ; 최후의 전날, 바리케이트에서 술을 나누는 시민, 학생)

 

이들 비극적인 인물들이 불러일으키는 숭고함은, 내가 나 자신에게는 어떻게 충실해야할지, 어떻게 존재를 걸어야할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번 여행 속에서 본 훌륭한 그림들이나 이런 작품에서 느끼는 숭고함은, 쓸쓸한 자유와 함께 이번 여행의 주된 느낌 중 하나다. 레미제라블은 그런 느낌들로 꽉찬 작품.

 

 

이제 아쉬운 런던 일정을 마치고 빠리로 떠나는 유로스타 기차 안이다. 워털루 역에서 빠리 북역까지, 영화에서만 보던 체크무늬 치마를 입은 스코틀랜드 홀리건들이 맥주를 마시면서 내내 시끌벅쩍거리는 2등석 기차 간. 빠리에 영국팀의 축구경기가 있나보다. 막 도버해협을 지하로 건넜다. 이제 프랑스의 끝없는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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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여행을 시작하면서.

서울에서는 이랜드투쟁과정에서 1000여명의 구사대가 집회 참가자에게 폭력을 휘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손도끼도 등장했다고 하는데, 그런 상황들로 부터 멀리 와있는 게 미안할 뿐이다.

여행을 시작하는 이야기,런던.

지구의 자전 속도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서 하루를 묵고 런던으로 날아왔다. 시속 900Km가 넘는 속도로 날아왔지만 출발한 곳의 시간보다 런던이 4시간 정도 늦었다. 엄청난 속도로 서쪽으로, 태양으로부터 도망쳐왔지만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되지 못한 셈이다.

지구의 자전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다시 느끼게 된다. 그런 속도에도 관성, 때문에 느끼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번 여행이 그런 나의 관성을 넘어서는 혹은 그것의 존재 자체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12시간의 비행 동안,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노트북에 저장해놓은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자전거도둑”을 보았다. 2차 대전 직후의 절망적인 상태의 로마를 배경으로 한 영화.(이런 종류의 영화 몇 개를 여행동안 틈틈이 볼 생각이다.) 이 영화는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서 로마의 실제 거리에서, 그리고 일자리를 잃은 금속노동자나 신문배달 소년을 영화배우로 기용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영화를 보면서, 여행에 대해서 겸손해져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그곳들은, 단지 “관광지” 혹은 좋게 말해서 “역사”들이 있는 곳들만이 아니라 “사람들”과 그들의 “삶”이 있는 곳이라는 점. 여행을 출발하면서도 벌써 단지 그 세계들을 나의 시각으로만 꿰어 맞추려고 했구나..

이번 여행 속에서 사실 그런 “삶”들을 얼마나 만날 수 있을지는 알지 못한다. 말도 통하지 않고 사람도 제대로 사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찾아가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구의 자전 속도에 겸손해야하는 것처럼.

지구 반대편, 막 도착한 런던은 맑지만, 공기는 차갑고 습하다.

혼자 여행하기



혼자 여행한다는 것은 묘한 느낌이다. 전에도 혼자 다녀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멀리 그리고 장기간 혼자 여행하는 것은 처음이다. 그것은 단순한 자유, 그러나 한편 쓸쓸함.

빅벤과 영국의회 건너편 템즈 강변에서 맥주를 혼자 마시면서 느끼게 되는 감정이 그렇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면서 역설적으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런 여행인데, 말하자면 누구보다 “나” 자신과 대화하고(사실 말할 다른 사람이 없다), 혹은 누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을 생각하고, 쉴새 없이 새로운 생각들을 촉발하는 새로운 대상들을 만난다.

우리 두뇌는 그 대상이 어떤 것이든 새로운 것을 만나면 새로운 사고를 하는 것으로 반응하게 만들어 진 것 같다. 새롭게 만나는 것들이 떠올리게 하는 것들을 모두 메모하기도 힘들 정도다.

런던, 제국의 수도

런던에서 이제 사흘(늦게 도착한 첫날을 제외하면 이틀)을 지나면서 받은 이 도시의 첫 인상은, 과연 19세기의 세게 헤게모니 국가의 수도답다는 것이다. 세계제국의 수도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

이곳에는 말하자면 19세기가 넘친다. 런던 시티 안쪽에는 상당수의 건물들이 19세기에 화려하게 지어진 것들이다. 그 것들은 규모자체도 엄청날 뿐 아니라, 그 규모에 비례하는 화려함을 갖추고 있는데, 그 엄청난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마치 앙코르와트와 같은 거대한 제국의 수도가 그곳처럼 “죽어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을 때.)



이러한 것들을 건설하기 위한 자원을 집중해낼 능력이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주로 볼거리로 알려진 각종 미술관이나 박물관도, 영국이 가졌던 (프랑스나 독일 등을 생각하자면 근대 세계체계에서 유럽이 가졌던) 힘을 생각하게 한다.

또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영향도 있겠지만 여러 인종이 다양하게 그리고 규모있게 섞여서 살고 있다는 점. 영국이 식민지로 지배했던 나라의 사람들을 포함해서 ‘세계도시’라는 말에 걸맞게 많은 인종이 섞여있다.

런던이라는 대도시의 특성이기도 하겠지만 영국에서 원래 살던 백인에 1/3 정도되는 다른 인종들이 사는 것 같다. 흑인, 아랍인, 인도인, 동양인 등등. 남한에서 이런 일이 았으면 당장 인종적 증오가 판을 쳤을 텐데, 차별은 존재하더라도 부끄럽지만 나에게는 그들이 같이 어울려 사는 것 자체가 놀라워보인다.

한편, 어제 숙소에서 만난 한 한국사람은 여행하면서 느낀 것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이, 사람을 밀치게 되면 "미안하다"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남한에서는 보기 힘든 시빌리테(시민적 에티켓이라는 의미도 있으니까)라는 건데..

아마 여기저기 다녀보면 이런 ‘느낌’이 의미하는 것도 알수 있게 되겠지.
런던에서 짧게 본 것들의 느낌은 내일까지 지나서 이야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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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여행 출발

오늘 여행갑니다.
한달반 정도, 국내에서는 안보일 겁니다. (블로그나 인터넷에는 출몰할 수 있죠.)

유럽일대, 이집트까지를 여기저기 다닐 생각인데,
누구 표현대로 스스로 제가 "물가에 내놓는 심정"입니다. 흨;;

특별한 목적보다는, 그냥 지구반대편으로 가고 싶어서. (아직 안드로메다는 너무 멀고.) 30대 중반인데 또 언제 해보겠냐는 막차타는 심정으로다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역사의 역순으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무지무지무지 강조하는 적당한 수건도 준비했으니 아마 살아돌아오는데 데는 지장이 없겠죠.

옆에 있는 배낭하나 메고 출발. (넘 무겁네.. 빼도빼도 남는 중량감은 도대체 근원이 어디란 말인가..)


* 연락이 필요하신 분은 이메일이나, 문자메시지로. (핸드폰 로밍이 되는데, 통화료는 끔찍하게 비싸군요. 하지만 문자받는 건 공짜, 보내는 건 인터넷으로다가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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