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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사는 문제에 대한 단상 : 존엄사와 푸제온 강제실시 불허 판결

지난달 23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국내 최초로 존엄사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존엄사가 시행된 지 10여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김모 할머니는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이로 인해 김모 할머니의 존엄사는 의학적 법적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외부적 소생기술의 도움 없이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는 의학적 판단이 존엄사 시행의 중요한 법적 근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논란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존엄사가 시행될 때, 인공적 소생기술이 제거된다 해도 심장박동이 멈추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이미 외국에서는 인공적 소생기술이 제거된 이후에 길게는 10여년을 넘게 스스로 생명을 유지한 사례들이 수차례 보고 된 바 있다.

  

문제는 존엄사 자체가 실질적 죽음과 필연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닐지라도 그 개념이 도입됨으로써 현대 정치에서 중요한 어떤 지점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서둘러 이야기하자면 존엄사라는 개념은 생명을 가진 주체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 생명의 죽음을 타자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언급된 타자란 법적 절차에 따라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주권의 차원을 말한다.

  

법은 체계화된 의학적 지식에 준거하여 생명을 유지할 것인지 말것인지 결정하게 된다. 문제는 의학적 지식이 (과학적 객관적 진리처럼 여겨지지만) 죽음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 있다. 예를 들어 혼수상태(코마)는 보통 ① 의식, 운동성, 감각과 같은 외부적 관계기능의 상실 ② 호흡, 혈액순환, 체온 조절과 같은 식물 상태의 생명 기능들의 중단 ③ 관계 기능들이 잔여된 각성코마 그리고 ④ 인공호흡이나 아드레날린 정맥 주사를 통한 심장 혈액 순환의 유지, 체온 조절 기술과 같은 새로운 소생기술이 중단되면 생명이 멈추는 심층코마로 분류된다고 한다.

  

여기서 네 번째로 언급된 심층코마는 1950년대 이후에 의학계에 도입된 개념으로, 심장박동의 중단과 호흡기능의 정지라는 (의학 기술의 발달 이전까지 죽음의 기준이 된) 사망 판단의 기준을 무효화 시킨다. 기존의 죽음에 이르는 신체 상태가 의학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극복될 수 있는 가능성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철학자인 아감벤(Giorgio Agamben)은 이것이 단지 소생기술의 과학적 문제가 아닌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는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해짐에 따라 1968년 하버드 의과대학의 특별위원회는 뇌사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하게 되는데, 이 보고서에는 “회복 불가능한 코마를 새로운 사망 기준으로 정의”하는 것이 자신들의 “일차 목표”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뇌사는 지금까지 거의 유일한 사망판단의 기준으로 인정받고 있다. 뇌는 이식할 수 없는 유일한 장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망 판단의 기준은 죽음을 명확히 하기보다는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뇌사와 심장박동의 중단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뿐아니라, 의학 기술의 발달을 통한 뇌 이식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존엄사는 법적 판단에 기반한 권력과 그것의 준거가 되는 의학적 지식의 결합을 통해 형성되는 정치적 장의 문제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중요한 논쟁거리가 된다. 특히 생명과 죽음에 대한 문제들이 의학적 지식이라는 매개를 통해 현대 정치의 핵심에 기입되어 있다는 점은 프랑스의 철학자인 푸코(Michel Foucault)가 끊임없이 주장해 왔던 바이다. 그에 따르면 현대의 정치는 생명에 대한 관리에 기반하고 있다. 과거의 권력이 생명의 단축(죽음, 즉 생명에 대한 위협)에 기반하고 있다면, 현대의 권력은 생명의 연장(생명에 대한 관리)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건의학이나 사회보장제도, 도시환경 정비 등이 독특하게 현대적인 현상이라는 점은 권력의 통치 기술 변화와 맥을 같이 한다. 생명에 대한 위협이 아닌 관리에 기반한 정치가 생명에 대한 지식을 필연적으로 요청하게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 좀 더 나아가 21세기 생명과학이 지닌 정치성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생명과학이 지닌 정치성을 아직 이해할 수 없다면, 몇 년 전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황우석 사태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것은 과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었다. 거기에는 의학적 발견에 대한 희구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어떤 언어들, 즉 국부, 국위선양, 출산율, 희생, 믿음, 여성, 교육과 같은 정치적 언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허는 로슈에게 무엇을 주었나?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생명과 관련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의약품이다. 의약품을 통해 유지 및 관리되는 것은 특정한 신체 상태만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 자체를 관리하거나 연장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의약품은 의사의 처방전과 약국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구입할 수 있는 보통의 상품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대단히 복잡하고 특수한 과정을 거쳐 사람들에게 제공된다.

  

에이즈 치료제인 푸제온은 의약품의 생산 및 유통 과정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푸제온은 감염인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의약품이다. 그러나 이 의약품은 아직 우리나라에 공급되지 않고 있다. 푸제온을 만든 초국적 제약회사인 로슈(Roche)가 이 의약품에 지나치게 높은 가격을 책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슈에서 제시한 약가는 연간 2200만원에 이른다.)

  

이에 로슈의 횡포에 반기를 든 국내 의약품 운동 단체들은 지난해 12월 국가를 상대로 강제실시를 청구했다. 강제실시는 제약회사가 공급하지 않는 의약품을 환자들을 위해 강제적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이다. 그러나 특허청은 2주전 강제실시 불허 판정을 내렸다. 현대 정치의 핵심에 자리잡은 생명과 지식이라는 관점에서, 이번 판결은 최소한 두 가지 중요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생명을 관리하는 권력이고, 다른 하나는 지식의 독점이다.

  

   

 

지난해 12월 시민단체들에 의해 강제실시가 청구되자, 지난 몇 년간 약가 협상에서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던 로슈가 갑자기 푸제온을 무상공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로슈는 정상공급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질 때까지 푸제온을 무상공급하겠다고 먼저 제안해 온 것이다. 단편적으로 보면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나온 조처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상공급을 할 수 있을 때까지라는 단서 조항을 달았다는 점과 제안이 나온 시점이 강제실시 청구가 들어간 직후라는 점, 그리고 자신들의 인도주의적 조치에 대한 아무런 언론 홍보를 하지 않았다는 점 등의 정황을 놓고 본다면, 로슈의 제안이 강제실시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의도였다는 것을 쉽게 유추해 낼 수 있다. 로슈는 푸제온을 무상공급하면서까지 환자에 대한 의약품 통제권을 가지려 했던 것이다. 요컨대 로슈는 환자의 생명권을 환자로부터 박탈하고, 타인의 생명을 통제할 권리를 자신들에게 귀속시킴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사례를 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태국정부가 글리벡에 대해 강제실시를 발동하자 초국적 제약회사 노바티스는 연간 소득 5천만원 이하의 태국민에게 글리벡을 무상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노바티스 역시 무상공급이라는 카드를 꺼내어 강제실시를 무력화시키는데 성공했다.

 

 생명에 대한 관리를 자신들의 권력의 기반으로 삼기 위해서는 특허제도를 매개로 의약품 개발과 관련된 지식을 독점적으로 확보할 필요가 있다. 사실 푸제온은 로슈 자체의 연구 개발을 토대로 만들어진 의약품이 아니다. 푸제온과 관련된 기술의 최초 개발은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지원을 받은 듀크대의 연구팀에 의해 이루어졌다. 듀크대 연구팀은 레이건 정부 시절 미 상원을 통과한 베이-돌 법(Bayh-Dole Law, 이 법은 공적 자금이 투여된 성과물을 사유화할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을 한다.)에 의거해 바이오 기업인 트리메리스(Trimeris)를 설립하고 푸제온 관련 기술에 특허를 출원한다. 그리고 그들은 거대 제약회사인 로슈와의 계약을 통해 특허 기술을 판매함으로써 이익을 남겼다. 로슈가 연구개발에 기여한 것은 2002년 7월에 발표된 제3상 임상시험-임상시험은 전임상, 제1상, 제2상, 제3상으로 이뤄진다-을 지원한 것이 전부였다. 다시 말해 푸제온은 공적 자금을 투여해 개발된 지식을 사유화하고, 다른 사람들의 지식에 대한 접근을 차단함으로써 로슈에게 독점적 권리를 안겨준 의약품인 것이다.

  

이처럼 현대의 권력은 ‘생명에 대한 관리’와 그것의 기반이 되는 ‘지식에 대한 정치적 방향성을 부여하는(혹은 은폐하는) 담론 투쟁’ 속에서 형성된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행위의 규범이 되는 특정 지식을 부여함으로써 개인들을 규율하고, 건강과 수명에 대한 관리를 통해 사회가 유지되기 위한 구조적 조건들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권력의 직접적인 원천인 자본이나 폭력의 수단을 획득한다. 나아가 현대의 권력은 생명과 지식을 통제함으로써 현 사회의 지배체계를 유지시키기 위한 효능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 그 자체를 발명하게 된다. 다시 말해 그들은 개별자들의 신체와 생명을 관리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경제적 행위가 이루어질 수 있는 무대를 만드는 것이다. 푸제온을 둘러싼 사건들이 보여주는 것은 현대사회의 정치경제적 권력이 준거하는 지점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그것은 로슈에게 의약품 판매를 통해 직접적 이윤을 취할 수 있도록 해줌과 동시에 지식에 대한 배타적 독점권과 타인의 생명에 대한 통제권을 부여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정치경제적 조건들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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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디어스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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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표현의 자유 침해 실태 보고-기자회견

[기자회견] 이명박 정부 표현의 자유 침해 실태 보고

- 일시 : 2009년 6월 22일 월요일 오전 11시

- 장소 : 서울광장

-주최 : 문화연대, 미디어행동, 우리만화연대, 인권단체연석회의, 인권운동사랑방, 진보네트워크센터, 청소년 인권행동 아수나로 서울지부, 한국독립영화협회, 한국작가회의, IT연맹

  

 

<이명박 정부 표현의 자유 침해 실태 보고>

 

 

집회․시위관련 실태 보고

 

1. 집회는 일단 금지하고 본다. 신고제가 허가제로 둔갑

 

사유 중 교통소통 제한과 공공질서 위협이라는 사유로 2008년 35%나 2009년 44.4%에 달하는 것에 보여지 듯 뚜렷한 금지의 이유가 없음.

(2009년 금지 사유 : 장소경합, 교통소통제한,금지장소,보완불이행,공공질서위협,군사시설주변,잔여집회금지,생활평온침해,금지시간)

(2009년 금지 사유 : 장소경합, 교통소통제한, 보완불이행, 공공질서위협, 잔여집회금지, 학교시설주변)

 

교통흐름에 방해받지 않도록 협조하는 일이 법의 목적과 경찰의 의무라면 집회 자체를 금지할 것이 아니라 교통흐름을 원활히 하기 위한 조건을 붙여 허가해야 법 취지에 맞음. 99년 유엔 자유권위원회의 권고도 있었음.

 

2. 2009년 관리지침과 집회 원천 봉쇄 일상화

 

경찰의 ‘2009년 집회시위 관리지침’에 따르면 “불법 폭력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는 집회는 신고 단계부터 적극 대응하기로 함.

 

3. 시위는 모두 불법으로 취급, 상습시위꾼 명단으로 집회시위의 권리 위축 효과

 

3월 경찰은 ‘상습시위꾼 검거 특별수사본부’ 발족. 지금까지 집시법 위반 전력이 있는 170여명을 소환 대상으로 삼아, 21일 현재 9명을 구속하고 90여명을 불구속 입건. 5월 19일 서울신문 보도에 따르면 경찰이 상습 시위꾼 소탕 목록을 만들어 2500여명을 우선 검거대상에 단체 20여개 반정부 불법, 좌파단체 및 상습시위꾼 단체로 규정

 

4. ‘정부보조금 지원’ 제한으로 집회 제한

 

행정안전부는 2009년 1월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 지원사업’ 공고를 내면서 불법폭력시위관련단체에게는 지원금을 지원하지 않겠다고 발표. 5월 12일 경찰청이 ‘2008 불법폭력시위 관련단체’ 목록 작성하여통일부·여성부·환경부·노동부·낙동강유역환경청 등에 통보하여 보조금 지원 삭감자료로 활용하도록 함.

 

 

○ 공안탄압관련 실태 보고

 

- 6월 19일 황장엽에게 협박 우편물을 보낸 김○○씨, “협박 소포를 보낸 행위는 ․․․ 대한민국의 존립, 안전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칠 위험성이 명백히 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유죄 징역형 선고.

 

- 6월 18일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희망제작소의 계약해지, 후원 취소 등의 배경에 국정원이 있었다며 국가정보원이 불법적인 민간사찰을 하고 있다고 주장.

 

- 6월 16일 6·25 참전국가유공자회, 김대중 전 대통령이 “국가 재산 4000억원을 해외은행으로 빼돌려 북한에 제공했다”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

 

- 6월 15일 양현수(시인, 목수)씨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북한 관련 글에 국가보안법 위반 적용 구속.

 

- 6월 15일 시내 유명서점과 인터넷 서점에 정보과 형사, 자본론 몇 권 팔렸는지 문의 전화.

 

- 6월 10일 이후 언소주 김성균대표 국가보안법 위반 집행유예 선고 결과를 빌미로 언소주 운동에 색깔론 덧칠.

 

- 4월 17일 오후2시 신해철 북한의 로켓트발사 성공 축하 글을 작성했다하여 라이트코리아에 국가보안법 위반 고발.

 

○ 정보․통신관련 실태 보고

 

인터넷은 일반 시민이 직접 자신의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 유일한 매체이다. 이명박 정부의 인터넷 통제 정책으로 인해, 역설적이게도 일반 시민들은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몸소 깨닫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강제적 인터넷 실명제’ 의무대상 사이트를 기존 37개에서 153개로 확대하는 한편, 정보통신망법 개정을 통해 인터넷 전체로 확대하려 하고 있다. 권리를 침해당한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한 ‘임시조치’ 제도는 권력자가 비판의 목소리를 통제하는데 악용되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 주성영 의원 등 정치인에 대한 비판, 어청수 전 경찰청장 관련 동영상이나 ‘사무라이 조’로 알려진 폭력 경찰을 비판하는 게시물 등이 명예훼손이라는 이유로 차단되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인터넷에 대한 일상적 검열을 자행하고 있다. 방통심의위는 출범직후 ‘이명박 탄핵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에 올라온 게시글에 대해 '머리용량 2MB', '간사한 사람' 등의 표현을 했다는 이유로 ‘언어 순화와 과장된 표현의 자제 권고’를 내려 검열 기구임을 선포한 이후, 조중동 광고주 불매운동 게시! 물, 김문수 경기지사에 대한 비판 게시물, 쓰레기 시멘트를 고발한 게시물 등 정부와 기업을 비판하는 게시물에 검열의 칼날을 휘둘렀다. 한편, 30년 동안 적용되지 않아 사문화되었던 전기통신기본법 상 ‘허위사실 유포죄’는 이명박 정부 들어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동맹휴업’을 주장한 청소년, 시위자의 사망 의혹을 제기한 시민,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한 미네르바 등이 허위사실 유포죄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제 한나라당이 추진하는 ‘사이버모욕죄’가 국회를 통과한다면, ‘쥐박이’라는 표현 하나로 철창신세를 져야할 지도 모른다.

 

○ 출판관련 실태 보고

 

 

2008년 7월 국방부에서 각 부대에 공문을 보내 23권의 불온도서 목록을 선정해 불온서적 차단 대책을 지시했다. 주된 근거로는 “장병 정신과 전력 저해요소가 될 수 있어 수거를 지시”한다고 명시했다. 이는 사상과 창작 표현의 자유를 저해하는 행태로 민주공화국에 대한 부정이었다.

 

느낌표의 선정도서이자 수십만 권이 팔린 현기영 작가의 <지상의 숟가락 하나>, 김남주 시인의 일대기와 작품 세계를 다룬 <김남주 평전>, 고 권정생 동화작가의 <우리들의 하느님>, 조선소 여성노동자 출신인 김진숙의 산문집 <소금꽃 나무>, 지탄받는 삼성재벌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삶을 다룬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세계화의 그늘과 해법을 담은 세계적 경제학자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 노엄 촘스키 교수의 역작 등을 불온도서로 지정한 처사는 집필 당사자들과, 출판사, 그리고 창작을 업으로 삼는 모든 사람들을 악의적으로 인격 살해하는 행위다. 이 책을 탐독한 수백만 명을 대상으로 사상적 선전포고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국방부가 선정한 불온서적 23권>

 

1. 북한의 미사일 전략 : 전영호 씀 / 615, 2006 (품절)

2. 북한의 우리식 문화 : 주강현 씀 / 당대, 2000

3. 지상에 숟가락 하나 : 현기영 씀 / 실천문학사, 1999

4.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 허영철 씀 / 보리, 2006

5.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 : 박준성,안건모,이임하,정태인,하종강,홍세화 씀 / 철수와영희, 2007

6.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 : 전영호 씀 / 615, 2006 (품절)

7. 통일, 우리 민족의 마지막 블루오션 : 전상봉 씀 / 시대의창, 2007

8. 벗 : 백남룡 씀 / 살림터, 1992

9.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 노암 촘스키 씀 / 한울, 1999 (절판)

10. 대학시절 : (누가 쓴 《대학시절》인지 알 수 없음)

11. 핵과 한반도 : 최안욱 씀 / 615, 2006

12. 미군 범죄와 한미SOFA :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엮음 / 두리미디어, 2002 (절판)

13. 소금꽃나무 : 김진숙 씀 / 후마니타스, 2007

14. 꽃 속에 피가 흐른다 : 김남주 씀 / 창비, 2004

15.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 : 노암 촘스키 씀 / 이후, 2000 (절판)

16. 우리 역사 이야기 : 조성오 씀 / 돌베개, 1993

17. 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 씀 / 부키, 2007

18. 김남주 평전 : 강대석 씀 / 한얼미디어, 2003

19. 21세기 철학 이야기 : 21세기코리아연구소 엮음 / 코리아미디어, 2004 (품절)

20. 대한민국史 : 한홍구 씀 / 한겨레출판, 2003

21. 우리들의 하느님 : 권정생 씀 / 녹색평론사, 1996

22. 세계화의 덫 : 하랄드 슈만, 한스 피터 마르틴 씀 / 영림카디널, 1997

23.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 프레시안 엮음 / 프레시안북, 2008

 

○ 영화관련 실태 보고

 

최근 자행되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표현의 자유’ 침해 사례는 전방위적이다. 영화 영역 또한 예외는 아니다. 문화 교육 정책의 철학과 방향도 제출하지 않은 상황에서 표적 감사라는 압박카드를 이용해 한국예술종합학교 죽이기를 자행하고 있으며, 정부가 책임지지 못하는 문화적 공공 영역 지키기에 앞장 서온 시민단체, 시네마테크, 독립영화, 대안적 미디어들의 그간의 성과는 아랑곳 않고 구시대적인 색깔론을 들이대고 있다.

 

6월 25일 개봉하는 신동일 감독의 영화 <반두비>의 심의 과정 역시 위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여고생과 이주노동자의 우정을 그린 <반두비>는 제 10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12세 관람가’로 상영되어 많은 청소년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고 관객평론가상과 한국장편영화 개봉지원상을 받는 등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또한 올 7월에 예정된 제11회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그러나 개봉 전 영화의 상영등급을 분류하는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는 선정성, 대사, 모방위험 등을 이유로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내렸다. 이에 불복해 신청한 재심의에서는 선정성, 대사항목은 15세 관람가로 낮추면서도 청소년 모방위험 단 하나만의 이유로 다시 한 번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내렸다. 일부 몇몇 장면을 시비삼아 내려진 이 조치는 그들 스스로가 등급판정이 설득력이 없음을 자인한 것이다. 이런 대중의 시선과 정서에 어긋난 결정은 영등위 위원들이 스스로 현 정권의 코드 맞추기 내지 눈치 보기에 급급한 탓으로 심히 의심된다. 이는 창작에는 성역의 대상이 없음을 의미하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영등위가 청소년들을 보호하는 미명하에 통제하려는 저의가 깔린 것으로 볼 수밖에 없으며 무엇보다 청소년들의 영화를 볼 권리를 앗아가는 폭력적인 작태이다.

 

이명박 정부의 문화 정책은 문화예술 정책을 집행하는 기관장의 물갈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시민사회 영역에 대한 탄압을 넘어 문화예술의 상상력과 표현의 자유마저 박탈하고 있다. 문화예술의 입을 틀어막아 분명히 존재하는 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역행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언론관련 실태 보고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를 설명하는 유일한 요인은 아니지만 핵심요소이다. 이명박 정권은 과거 독재정권들이 자행했던 전방위적 언론통제를 답습하며 ‘언론자유’와 ‘민주주의’를 짓밟고 있다.

 

이명박 정권은 집권하자마자 공권력을 총동원하여 KBS 정연주 사장을 몰아냈다. 뒤이어 언론계 곳곳에 ‘MB낙하산’을 무더기로 투하해 언론을 장악했다. KBS와 YTN에서 낙하산사장에 맞선 언론인들이 관제사장의 ‘보복인사’로 제작현장에서 쫓겨났다. MBC은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1년 넘게 검찰수사를 받고 있다. YTN노종면 위원장, MBC 의 제작진 등 비판적 언론인의 체포와 구금이 이어졌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최전선에서 언론통제를 이끌었다. ‘이명박 형님친구’ 최시중 방통위원장은 ‘방송장악’, ‘미디어법 개악’을 주도함으로써 ‘방송통제위원장’으로 군림했다. 親정부인사가 6명을 차지한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역시 청부심의기관으로 전락해 ‘언론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는데 앞장섰다.

 

이명박 정권은 미디어자본의 무제한적 ‘시장자유’를 ‘언론자유’로 둔갑시켜 ‘탈규제’를 주장한다. 이런 극단적 상업주의 언론관을 바탕으로 언론악법을 강행하고 있다. 언론악법은 수구기득권에게 유리한 언론지형을 제도화하는데 목적이 있다. 극소수 재벌과 수구족벌신문이 방송뉴스까지 진출할 수 있게 한 신문법, 방송법 개악안은 악법 중의 악법이다. 이런 내용의 언론악법이 통과되면 민주주의의 핵심가치인 ‘여론의 다양성’이 무너진다. 재벌­수구신문­보수정치권력만을 위한 뉴스가 시민들의 눈과 귀를 장악하게 된다. 언론악법이 불러올 미디어소유의 독점은 시민들의 민주적 참여와 ‘언론자유’를 침해하고 ‘표현의 자유’를 봉쇄하는 反민주적 미디어체제로 귀결될 것이다.

 

 

➊ 방송장악 실태

1) 초법적으로 이뤄진 KBS장악

: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세력은 집권실패의 이유를 공영방송의 편파적 보도에서 찾아 왔음. 이명박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공권력을 총동원하여 불, 탈법적으로 정연주 KBS 사장을 �아냄. 그 결과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성이 심각하게 훼손됨. 이병순 사장 취임 후 비판적 프로그램들이 폐지되었고, 공영방송의 관제화가 이뤄짐.

 

[KBS 장악 관련 주요 일지]

2008년 5월 12일 최시중 방통위원장 김금수 KBS 이사장에게 정연주 사장 사퇴 압박

2008년 5월 21일 김금수 이사장 사퇴

2008년 5월 21일 감사원, KBS에 대한 특별감사 결정

2008년 6월 20일 동의대, 정연주 사장 축출에 반대했던 신태섭 KBS 이사를 교수직에서 해임

2008년 7월 18일 방송통신위원회, 신태섭 이사 해임 및 보궐이사 추천(부산대 강성철 교수)

2008년 7월 4일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 “KBS 사장 해임권도 대통령에게 있다”고 발언

2008년 8월 5일 감사원, ‘부실경영’ ‘인사권 남용’ 등을 이유로 정연주 사장의 해임을 KBS이사회에 요구

2008년 8월 11일 이명박 대통령, KBS 이사회의 ‘정연주 사장 해임제청안’에 서명

2008년 8월 26일 이병순 씨를 ‘KBS 사장’으로 임명

2008년 8월 12일 검찰, 정연주 전 사장 체포

2008년 8월 17일 정정길 대통령실장·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유재천 KBS 이사장

2008년 8월 17일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KBS 전·현직 임원 4명과 만나 KBS 사장 인선을 논의

2008년 8월 25일 KBS 이사회, 이병순 씨를 사장 후보로 임명제청

2008년 8월 26일 이명박 대통령, 이병순 씨를 KBS 사장으로 임명

↳ 출처: [이명박 정권 악행 1년, 우리 국민들의 절망 1년, 범시민사회단체 공동 평가서]

 

2) 언론계에 쏟아진 ‘MB낙하산’

: 이명박 정부는 대선캠프에 참여한 특보들을 각 방송사와 언론유관기관에 투하해 언론장악에 나섬. 사원들이 낙하산 반대투쟁에 나선 YTN에서는 ‘기자해직’, ‘노조위원장 구속’ 등 독재정권에서나 벌어졌던 언론탄압이 벌어짐.

 

[언론계 MB낙하산 현황]

MB대선 공보조직

방송특보단

단장

양휘부(전KBS창원총국장) →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 사장

상임특보

구본홍(전MBC보도본부장) → YTN사장

특보

이몽룡(전KBS부산총국장) → 스카이라이프 사장

정국록(전 진주MBC사장) → 아리랑TV 사장

차용규(전 울산방송사장) → OBS사장

방송전략실

실장

김인규(전KBS 이사) → 한국디지털미디어산업협회 회장

보도분석팀장

정군기(전SBS국제부장) → 한국방송광고공사 공익사업본부장(상임이사)

TV토론팀장

이성완(전KBS시사보도팀 주간) → 아리랑TV방송본부장

언론위원회

부위원장

최규철(전 동아일보 논설주간) →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

상임특보

김현일(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 감사

특보

기세민(전 남도일보 정치부장) → 신문유통원 경영기획실장

서옥식(전 연합뉴스 편집국장) → 한국언론재단 사업이사

임은순(전 경향신문 논설위원) → 신문유통원장

➋ 이명박 정부 언론탄압 실태

 

◯ 경찰, 검찰 등 공권력을 동원한 언론탄압

: 이명박 정부는 촛불집회가 일어난 이유가 방송보도와 인터넷 때문이라며 비판적 언론인과 네티즌을 탄압. 미국산 쇠고기 수입정책을 비판한 에 대한 검찰수사가 진행되었고, 제작진에 대한 체포와 구금이 이뤄짐. MB낙하산 구본홍 사장 반대투쟁을 이끈 노종면 YTN노조위원장이 구속되는 등 공권력을 동원한 언론인 탄압이 지속적으로 전개됨. KBS에서는 불법적인 정연주 사장 축출에 반대하는 KBS사원들의 행동을 탄압하기 위해 경찰력이 투입됨.

◯ 심의기구의 정치도구화

민간독립기구로 출범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이명박 정권과 보수세력의 ‘정치심의기구’로 변질되어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도구로 전락. MBC 에 대한 시청자사과, ‘언론악법’을 강행처리하려 한 한나라당의 행태를 보도한 <뉴스후>에 대해 시청자사과, <시사매거진2580><뉴스데스크>에는 경고와 권고를 의결. 반면, KBS가 “제야의방송”에서 이명박정부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삭제하고 손팻말을 알아볼 없도록 영상처리한 불공정방송 프로그램에는 ‘권고’를, 뉴스보도에서 ‘어청수경찰청장 사퇴’라는 글씨를 편집, 삭제(KBS)한 것에 대해서는 ‘의견제시’ 조치에 그치는 등 편향심의 양산.

 

◯ 직접적인 보도통제

이명박 정부는 인수위 시절 언론사 주요간부에 대한 성향파악을 지시해 파문을 일으킴. 2008년 2월에는 박미석 청와대 사회정책 수석 내정자의 제자 논문 표절 의혹을 보도한 국민일보에 대한 외압설이 제기됨. YTN <돌발영상>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대한 청와대의 수정요구.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 국민일보 편집국장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부동산 투기 의혹 기사를 빼달라고 요청. 광우병 문제를 다룬 EBS <지식채널e>에 대해 청와대가 문의전화를 걸어 경영진에 의해 방영중단. 청와대 행정관, 용산사태를 무마하기 위해 ‘군포연쇄살인 사건’을 적극 활용하라고 경찰에 지시해 파문.

 

[이명박 정부 언론탄압 주요일지]

2008.01.12 대통령직 인수위 언론사 간부 성향조사 지시

2008.03.26 이명박 멘토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임명

2008.05.03 방통위 포털 다음에 이명박 비난 댓글 삭제 요청

2008.05.13 농림수산식품부 법원 소송

2008.05.14 청와대 민정수석실 광우병 관련 EBS프로그램 결방 압력

2008.06.16 검찰, 정연주 전 KBS사장에 소환통보

2008.06.27 검찰, 수사 시작

2008.07.01 조중동 광고불매운동 관련 게시글 삭제조치

2008.07.03 촛불집회 생중계한 아프리카TV대표 구속

2009.07.16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시청자에 대한 사과’ 제재 의결

2008.07.17 MB낙하산 구본홍씨 YTN사장 취임

2008.08.11 이명박 대통령 정연주 KBS사장 해임

2008.08.17 대통령실장, 국정원 간부 등 ‘KBS대책회의’

2008.10.06 낙하산 저지 투쟁 관련 YTN노조원 6명 해고 등 33명 중징계

2008.12.03 한나라당 방송법 등 언론악법 발의

2009.01.10 인터넷논객 미네르바 구속

2009.01.15 KBS 사원행동 양승동PD, 김현석 기자, 파면, 성재호 기자 해임 결정

2009.02.19 조중동 광고불매운동 관련 네티즌에 유죄선고

2009.03.02 검찰, 수사 재배당

2009.03.12 최상재 언론노조위원장 등 총파업 관련 소환조사

2009.03.16 다음 아고라 활동 네티즌 조회건수 조작혐의로 압수수색

2009.03.22 YTN노종면 위원장 등 4명 경찰에 긴급체포

2009.03.24 노종면 위원장 구속

2009.03.25 MBC 제작진 6명 체포영장 발부, 이춘근 PD체포

2009.04.08 검찰, MBC 압수수색 시도

2009.04.16 MBC 김보슬 PD체포

2009.04.22 검찰, MBC 2차 압수수색 시도

2009.04.27 검찰, 조능희 전 CP(책임프로듀서)와 송일준 PD, 김은희·이연희 작가 등 제작진 4명 체포

2009.05.14 검찰, 광우병 편 참여한 프리랜서PD 체포

2009.06.18 검찰, 제작진 불구속 기소, 작가 이메일 공개

 

➌ MB언론악법 추진

 

◯ 개요

- 대기업의 방송(뉴스) 진입허용: 모든 대기업이 지상파방송20%, 보도, 종합편성채널 49%지분 허용

- 신문사의 방송교차 소유 허용: 일간신문이 지상파방송20%, 보도, 종합편성채널 49%지분 허용

- 외국인에 대한 방송진입 허용: 종합편성, 보도채널의 20%

- 일간신문의 복수소유 제한 및 경영자료 신고 의무조항 삭제

 

◯ 문제점

- 보수정치권력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재벌과 조중동 등 수구세력에게 지상파방송과 보도, 종합편성채널 진출을 허용함으로써 공영방송 체제를 약화시키려는 정략적인 의도로 진행. 미디어소유권이 독과점 되어 여론다양성이 훼손되고, 소수 미디어그룹에 의한 정보통제 가능. 민주주의의 급격한 후퇴 우려.

 

   

 

[기자회견문]

 

우리의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우리의 안녕을 위해, 유쾌한 외침은 계속될 것이다.

- “우리는 이명박 정권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모든 탄압을 반대한다!”

 

2009년 6월,“표현의 자유”는 실종되었다. 남아있는 것은 이명박 정권의 무차별적인 탄압뿐이다. 소통하기 위해 광장에 모이는 것도, 인권의 가치를 나누는 영화제도, 저널리스트의 정당한 언론활동도, 인터넷 공간에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도,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것도, 촛불과 풍선을 드는 것도 모두 “반정부적”이고“불온”한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이명박 정권은 시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고, 시민들의 정당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무조건 반정부적인 정치적 활동으로 규정하고,“표현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오로지 통제강화만을 말하며, 시민들을 향해 공권력을 동원하여 폭력을 가하며, 탄압하고 있다. 이것이 2009년 6월, 한국사회의 모습이다.

 

 

모든 사람은 의사개진과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는 헌법과 세계인권선언 등을 통해 보장되어 있는 인권의 영역이다. 이처럼 표현의 자유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로서 존중되어야 하는 보편적인 가치이다. 그렇기에 정치적 의사 표현을 비롯한 각 주체들의 표현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권리이다. 또한 다양한 표현이 표출되는 공간 역시, 그 곳이 어디이든지 누구에게나 열려있어야 한다.

 

이명박 정권 1년 반 동안 우리는 무수히 두들겨 맞고, 잡혀가고, 감시당하며, 거리에서 인터넷 공간에서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용감히 외쳐왔다.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는“불온”한 이명박 정권을 향해, 결코 그 누구도“안녕”을 장담할 수 없는 현실을 향해, 우리는 더 큰 상상력을 발휘하여 말하고 행동하고 표현할 것이다. 우리의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우리의 안녕을 위해, 우리의 유쾌한 외침은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이명박 정권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모든 탄압을 반대한다!”

 

2009년 6월 22일

문화연대, 미디어행동, 우리만화연대, 인권단체연석회의, 인권운동사랑방, 진보네트워크센터, 청소년 인권행동 아수나로 서울지부, 한국독립영화협회, 한국작가회의, IT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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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자본주의 이해를 위한 책 목록

마르크스

   - 자본

 

뒤메닐

   - 자본의 반격

   - 현대 마르크스 경제학

 

Henryk Grossmann

   - The law of accumulation and breakdown of the capitalist

 

아리기

   - 장기 20세기

 

수잔 드 브뤼노프의 글들

 

 

'백승욱의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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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고 살라는 법의 명령

이달 초 일명 ‘청담동 클럽 사진’이 나돌면서 또 다시 ‘퇴폐’나 ‘문란’ 같은 용어들이 남발되고 있다. 이 사건을 전후로 해서 대마를 접한 몇몇 연예인들이 언론에 보도되었고, 소위 말하는 문화예술 혹은 그 종사자들이 아니꼬운 시선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툭 까놓고 말해서, 남이야 클럽에 가서 뭘하고 어떻게 놀든 무슨 상관인가? 대마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누군가의 사회적 삶을 송두리째 앗아갈 만큼 해로운 것이 아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담배가 대마보다 중독성이 더 강하고 그 폐해도 심하다. 오랜 세월동안 인류 문명 발전에 기여했던 대마가 불법화된 것은 미국 헤게모니의 영향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대마가 불법화된 것도 듀퐁과 같은 석유자본이나 인종차별주의, 메카시 열풍 등의 정치경제적 배경 때문이었지 결코 대마 자체의 유해성 때문이 아니었다.(사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대마 농장주였다. 그는 섬유나 종이의 원료로서가 아니라 해시시를 만들기 위해 대마를 키웠으며, 해시시 제조를 연구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클럽을 즐기는 일부 사람들의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 과하다 싶은 놀이 문화나, 대마를 접한 연예인들의 이야기는 연일 방송에서 떠들어 대고, 인터넷을 뜨겁게 달굴 만한 대단한 소재가 아니다. 그것들은 별로 충격적이지도, 그닥 신선하지도 않다. 영화 <고고 70>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때만 되면 등장하는 퇴폐문화 논란이나, 신중현부터 시작되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연예인 대마 관련 사건은 이제 식상하기까지 하다.

 

문제는 이 식상한 퇴폐 문화 담론이 결코 무시하지 못할 정치적 결과를 불러온다는 사실에 있다. 민중의 삶을 구석구석까지 촘촘하게 짓밟아오던 국가는 퇴폐문화 담론이 퍼질 때면 언제나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며 온갖 금기들을 만들어낸다. 국가는 보지 말아야 할 영화를 골라내고, 듣지 말아야 할 음악을 퇴출시키며 가지 말아야 할 곳(광장)을 지정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비판)을 규정한다.

 

지난주에는 갑자기 경찰들이 공연 중인 홍대 라이브 클럽에 들어와 단속을 시행했고, 한 클럽에서는 공연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례적인 일이다. 단지 연예인 대마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기 때문에, 홍대나 이태원, 청담동 등의 지역에서 환각 약품이 자주 거래된다는 풍문 때문에, 음악과 춤을 즐기는 클럽들은 잠재적인 범죄 장소로 취급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시점에 경찰들은 홍대지역에 있는 문신 가게에 들이닥쳐 타투이스트들을 연행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의사가 아닌 사람이 문신을 시술하면 불법 의료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타투이스트는 아티스트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그들은 불법 의료행위 시술자가 된다. 문신은 취향의 범주에 속한 향유할 수 있는 문화이지, 규제의 대상이 아니다. 기초적인 표현의 자유와 신체에 대한 자기 결정권 자체가 부정되고 있는 것이다.

 

국가는 보호가 필요한 공간에서 철수하면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할 공간에 침입한다. 민중은 경제적 권리를 박탈당함과 동시에 문화적 권리를 빼앗긴다. 그들은 전자를 자유라 부르며, 후자를 보호라고 부른다. 이로써 민중은 궁핍해질 자유를 획득하면서, 비판으로부터 보호당한다. 그리고 그러한 조치들은 법의 이름으로 실행되고 있다.

 

 

법에 대한 무지 혹은 법의 무지

 

법은 끊임없이 금기를 생산한다. 그러나 법의 금기는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자명한 준거를 가지고 생산되지 않는다. 그것은 특정한 정치경제적 맥락 안에서 교묘한 방식으로 생산된다. 국가보안법, 청소년 보호법, 영화진흥법, 통신비밀보호법, 저작권법 그리고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등 표현의 자유와 문화적 권리를 침해하는 법에 기입된 금기들은 수도 없이 많다.

 

만들어진 금기는 보편이 아니라 특수이다. 현대사회의 대부분의 법은 그것을 제정한 사람이나 법조계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이 아니면 쉽게 알 수 없다. 일반 민중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키지 못하는 법의 영역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법은 ‘법에 대한 무지는 핑계가 되지 않는다’고 단정짓는다. 이것은 법치라는 명목으로 일단의 엘리트들의 ‘무지한’ 민중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전제 조건이 된다. 법은 이렇게 무지에 대한 모든 책임을 민중에게 전가시킨다.

 

법은 완벽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이 완벽한 것이라면 역사적 변천 없이 존재했을 것이며, 특정한 정세에 따라 새로운 금기를 만들어내지도 않을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 법은 스스로 자명한 준거를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법은 (완벽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어떤 결여를 가지고 있고, 그 결여는 새로운 금기를 창출하는 원인이 된다. 법의 결여는 사회적 맥락과 그 안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메커니즘을 거쳐 불필요한 규제와 의미의 과잉으로 전환되며, 이 과잉 속에서 금기가 만들어진다.

 

법은 자신이 가진 구조적 원인으로서의 결여, 즉 무지를 민중이라는 법의 적용대상에게 전가함으로써 유지된다. 주의할 점은 무지나 결여 자체가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결여의 공간에서만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생산적이다. 문제는 자신의 무지를 감추고 타인의 무지를 드러냄으로써 유지되는 법의 존재조건이다. 자신의 무지를 감추면서 타인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 바로 이것을 통해 지배의 구조가 만들어진다.

 

지배자들이 지속적으로 민중으로부터 표현의 자유를 박탈시킬 때 그들에게는 단순히 자신들의 의지에 반하는 비판자들을 억압하기 위한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더 깊숙이 들어가 비판의 언어를 제거함으로써 무지를 생산하려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배의 조건들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조건은 국가의 감시와 처벌 그리고 폭력을 정당화한다. ‘내가 너희를 때린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너희가 잘못했기 때문이다. 내 판단은 틀리지 않다.’ 이런 방식으로 국가 폭력은 법적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들은 알고 있(다고 가정되)기 때문에!!

 

그렇다면 지배에 저항하는 첫 단계는 아마도 듣고 싶은 음악을 듣고, 추고 싶은 춤을 추며, 가고 싶은 곳에 가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 혹은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을 스스로가 갖는 것(나는 지금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체력은 국력이 아니라 자력이다!), 그리고 생각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생각하고 표현해 낼 수 있는 것, 바로 그것일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법에 대해 무지하듯이, 법 역시 무지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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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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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시 시정 홍보지 만평 - 이명박 욕설

 

 

- 원주시 시정 홍보지 '행복 원주'에 실린 만평이다. (2009년 6월 1일자 230호로 배포)

 

- 호국영령이라고 쓰인 비석 밑받침에 보이는 문자들은 '이명박 개새끼', '이명박 죽일놈'이다.

 

- 이것을 그린 만평가는 원주시로부터 계약 해지를 당했다.

 

- 원주시는 홍보지 발행당시 이 사실을 몰랐으며 이후에 '6월 초라면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과 연관된 분노'와 연관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 호국 보훈의 달에 대통령을 욕해주는 센스 하시고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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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의 정치, 그리고 그 정치의 희생양

 

 

정치적 신체의 재현

 

1957년 에른스트 칸토로비치(Ernst Kantorowicz)는 <왕의 두 신체(The King’s Two Bodies)>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왕이 자연적 신체(body natural)와 정치적 신체(body politic)라는 두 가지 신체를 가진다고 말한다. 자연적 신체는 온갖 결함과 노화를 겪고 시간이 흐른 후에는 죽음을 맞이 할 수 밖에 없는 신체인 반면, 정치적 신체는 ‘정치형태와 정부를 구성하는, 보이거나 조정될 수 없는 신체’이다. 정치적 신체는 자연인으로서 왕의 신체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무능력에 의해서도 좌절되거나 무가치해 질 수 없다. 정치적 신체는 자연적 신체를 부인함으로써 자신을 성립시킨다. 때문에 정치적 신체는 물리적 현존(presentation)이 아니라 재현(representation)된 이미지에 의존한다. 노무현의 죽음 역시 같은 방식으로 바라 볼 수 있을듯 하다. 그의 죽음은 개인의 물리적 죽음이 아니다. 그의 죽음은 정치적 죽음이다. 그는 죽음 이후에 재현된 이미지를 통해 정치적 신체를 제공받아 사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죽음 이후에 부여된 그의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듯 하다. 하나는 탈정치화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이고, 다른 하나는 현정권의 정치적 희생양이라는 이미지이다. 어딘가에서 노무현의 죽음을 알리는 소식이 보도된 이후 인터넷과 신문, 티비, 라디오 등 온갖 매체들에서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을 애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에게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언론 뿐 아니라 시민들도 여러 경로를 통해 노무현이라는 정치적 신체에서 정치성을 탈각시키기 위해 노력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간미 넘치는 서민의 이미지로 재현되고 있었다. 밀집모자를 쓴 그의 사진은 ‘정치인 답지 않은 소탈함’, ‘파격적인 탈 권위주의’, 가난한 사람을 위해 힘썻던 가난한 이의 대통령, ‘서민 대통령’을 대리 표상하고 있다.

 

다른 한 편으로 노무현은 정치적 희생양의 이미지로 재현되었다. 그는 부자 대통령 이명박의 정치에 조롱당한 ‘바보 노무현’이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타살당한 저질 정치의 희생양인 것이다. 여기서 노무현은 마치 타락한 현대 정치의 모든 원죄를 짊어 지고 죽은 성자처럼 재현된다. 탈 권위적 소탈함을 지닌 서민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는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는 지저분한 정치와 대비를 이루며 희생의 숭고함을 부각시킨다. 그의 죽음 이후 지속되고 있는 애도와 추모는 마치 종교 의례와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그의 죽음 이후 재현된 이미지가 종교적 색채를 띄고 있는 것과 관계된 것처럼 보인다. 그의 이미지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다. 타락한 정치적 상황이라는 맥락, 헤게모니를 장악한 지배자의 가혹한 박해 그리고 그들의 고난, 온갖 고난 이후의 죽음, 죽음 이후의 삶. 이 것들이 노무현의 죽음을 종교적으로 만드는 요소들이다.  사람들이 남긴 애도의 글 속에서 발견되는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은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현실정치에 대한 혐오와 자기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고백이다. 희생된 노무현의 죽음이 종교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이런 타락과 무력함에 애도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출발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는 점 때문이다. 마치 그리스도가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걸음으로써 타락한 ‘우리’의 죄를 사하고 구원했듯이 말이다. 적절하게도 노무현을 추도하는 어느 한 광고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등장한다.

 

“당신은 우리의 책임 회피를 죽음으로 모조리 용서하셨다. 우리는 당신을 애도하며 다시금 종에서 주인이 되었다.”(경향신문 5월 26일, 전대협동우회)

 


희생적 죽음의 정치적 효과

 

희생적 죽음은 강렬한 심리적 효과를 가진다.  희생적 죽음은 정치의 타락을 방조한-살아 남은-사람들에게 심리적 고통과 부채를 남기고, 그것들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미래를 위한 계획의 지평을 열어 놓는다. 그것은 현재의 원인이며 미래로의 지향을 남긴다. 부채와 고통을 공유하는 이들은 상상적인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미래로의 지향은 이 ‘상상의 공동체’의 몫이 된다. 이 ‘상상의 공동체’는 외적으로는 확고한 경계를 가진듯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상당히 허술하다. 공동체가 내적인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는 정례화된 의례의 역사적 축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공동체의 허술한 기반 -신화화된 정치적 초상에- 기대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민주당의 노력은 그래서 빈약해 보인다. 노무현의 죽음 이후 급속히 올라간 민주당의 지지율은 그 기반 만큼이나 허술한 것이다. 한나라당의 경우는 상당히 다르다. 그들은 이 ‘상상의 공동체’의 ‘우리’ 속에 포함되지 못하고 있다. 혹은 ‘우리’의 경계 자체가 한나라당에 대한 정치적 반감으로 형성된 것이기까지 하다. 한나라당은 ‘우리’의 외부에 있음에도 그 내부를 지향하는 포즈를 취한다. 그들이 취하는 포즈는 바로 화해와 통합이라는 정치적 수사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우리’와 ‘그들’을 화해시키고 통합함으로써 자신들을 향한 적대성을 제거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실패로 끝나거나, 오히려 적대를 강화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화해와 통합에서 ‘쇄신’으로 국면 전환을 꾀하게된다.)

 

노무현의 죽음을 추모하는 이들과 민주당 그리고 한나라당은 대립구도 속에 있지만, 그 대립항에 기대어서만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를 포함하는 구조를 이룬다. 그들은 서로 포함인 배제이며, 배제인 포함 관계에 있다. 문제는 서로를 포함하는 이러한 ‘상상의 공동체’에 배제의 형식으로조차 포함되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전 대통령의 서거와 그 이후의 추도 정국 때문에 언론과 정치에서 잠시 밀려난 존재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밀려나 있는 존재들이다.

 

노무현은 죽음 이후 (그 자신조차도 거부했던) 국민적 영웅으로 재탄생한 반면, 그들은 살아 있을 때조차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노무현의 죽음 이후 그를 추모하는 이들이 상상적 공동체를 형성하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외칠 때에도 그들은 이름 없는 존재들이었다. 국가 폭력에 의해 살해당한 후 아직까지 장례도 못치르고 있는 용산의 철거민들, 유서에 자신의 상처만을 언급했던 노무현과 달리 노동자 민중의 고통을 유서에 남기고 죽어간 박종태, 추모객들이 ‘우리’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주권의 주체인 국민으로 호명하는 순간 배제되어 버린 이주 노동자들, 시청에 모여 국민장을 치를 때조차 그 곳까지 찾아갈 접근권을 박탈당한 장애인들. 그 열렬한 추도 행렬에서 이 모든 이들의 존재가 망각되어 있었다. 그들은 ‘온 국민’이 슬퍼하고, ‘우리 모두’ 책임 져야 한다는 노무현의 죽음 뒤에 숨어 있었다. 그들은 ‘온 국민’에도 ‘우리 모두’에도 속하지 못했다.
나는 지금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게 아니다.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화화된 정치적 초상을 등에 업은 ‘우리’들이 ‘밀려나 있는 존재들’을 서술할 어떠한 언어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추도는 자연적 신체가 아닌 정치적 신체에 대한 추도였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분노 했던 것도 mb정권의 정치적, 경제적 실정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이 노무현이라는 정치적 신체에 투사된 것이었다. 그에 대한 추도가 탈정치적 이미지를 통해 재현될 때조차 그것은 강한 정치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추모 열기 속에서 나타난 정치적 냉소는 mb정권을 향한 것이었지만, 그것의 효과는 ‘밀려나 있는 존재’들과의 소통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노무현을 추모하는 ‘우리’는 그 ‘존재들’과 소통을 포기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번역할 언어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그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저항도, 체계적인 담론이나 논쟁도 형성되지 못한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언어란 어딘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언어들을 통해 우리는 발언하고 정치적으로 개입할 수 있게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적 냉소가 아니라 소통과 연대이다. 정치적 개입이란 하나의 사안에 매몰되어 그것을 해결하고 난 후에 다른 것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위기는 언제나 총체적인 것이며 하나의 문제는 다른 문제들과 구조적으로 얽혀 있다. 이것이 지금 소통과 연대가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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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들을 루저라 부르는가

요즘 루저 만큼 핫(hot)한 문화적 트렌드가 있을까? 올해 대중음악상에서는 루저문화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장기하가 빅뱅의 태양을 제치고 네티즌이 뽑은 올해의 남자 음악인이 되었다. 예외적인 하나의 사례가 아니다. 루저는 전방위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장기하와 얼굴들’을 비롯한 ‘달빛요정 역전 만루홈런’, ‘불나방 스타 쏘세지 클럽’ 등의 음악, 박민규(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핑퐁), 김애란(침이 고인다), 임정연(스끼다시 내 인생)의 소설, ‘얼렁뚱땅 흥신소’와 ‘메리 대구 공방전’, ‘내조의 여왕’ 같은 드라마 등 문화 영역 전반에서 루저를 확인할 수 있고, ‘88만원 세대’, ‘청년 실업’과 같은 경제담론 속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유독 우리나라만의 현상도 아니다. 오래 전부터 잭 블랙이나 스티브 부세미 같은 배우들은 루저의 페르소나로 분류되어 왔고, 최근에는 루저를 직접적으로 다룬 <비카인드 리와인드> 같은 영화도 등장했다. 내친김에 좀 더 나열해 보면, 우리나라에도 많은 팬을 가지고 있는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이제 고전 문학의 하나로 꼽히는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 등도 루저가 주인공이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 등장하는 잭 스페로우 선장도 빼 놓을 수 없다. 그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버는 루저 캐릭터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루저는 우리나라의 ‘루저 문화’, 일본의 ‘하류문화’, 70년대 영국의 ‘펑크문화’, 90년대 미국의 ‘그런지 문화’등의 문화 담론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넘쳐나는 루저에 관한 이야기를 단지 잠시 유행하는 루저 문화의 산물 정도로 치부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기에는 뭔가 찝찝한 구석이 있다. 루저라는 용어도 하나의 대상만을 지칭하는 게 아닌 것처럼 보인다.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용어들이 정확한 의미를 가지고 쓰이는 것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이 루저라는 용어는 특히 뭔가 더 수상하다. 이는 아마 루저라는 용어가 경제적, 정치적 위기라는 맥락 안에서 더욱 돋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루저는 단순히 문화적 트렌드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 용어에는 총체적 위기로 진단되는 사회적 텍스트 속에서 결정되는 어떤 과잉들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반/문화로서의 루저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흔히 말하는 루저는 현대 사회의 특징적 캐릭터가 아니다. 내가 아는 가장 오래된 루저 중 한명은 고대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다. 저 유명한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에 보면 한 가운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하늘과 땅을 가리키는 손짓을 하며 앞으로 걸어나오고 있다. 그림을 들여다보면 그들 앞에 있는 계단에 제멋대로 누워있는 한 사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야말로 루저답게 널부러져 있는 그 사람이 바로 디오게네스다. 디오게네스가 등장하면서 나타나는 묘한 철학적 대립의 긴장 관계가 라파엘로 그림에 매력을 더한다.

 

디오게네스는 스스로를 개라고 불렀고 그의 철학도 견유주의(犬儒主義, Kynismus)로 분류된다. 그는 여러 기행을 일삼았고, 그가 살던 시노페에서도 추방당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폴리스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인간 사회로부터 배제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사형선고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디오게네스는 추방형이 자신에게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도 태연하게 “그럼 나는 그들에게 체류형을 내리노라”라고 말하며 당시 정치체계의 폐쇄성을 비꼬았다. 그와 관련된 가장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알렉산더 대왕과의 만남과 관련되어 있다. 길을 가던 알렉산더 대왕이 거지처럼 누워 있는 디오게네스를 발견하고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으니 말해보라고 하자 그는 “좀 비켜줘, 햇빛 좀 쬐게”라고 대답한다. 후에 알렉산더는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일화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이 일화는 주목할만한데 그 이유는 문화로서의 루저가 가진 의미를 증상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의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는 희망은 결코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다.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와 대립축에 놓을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단순히 정복자로 위치지을 수 없는 인물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정치학, 윤리학, 철학, 문학 등을 배웠고, 그리스 문화에 심취했으며, 호메로스의 시를 원정 때도 들고 다닐만큼 좋아했다. 그에 반해 디오게네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스 사회를 비판했으며,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읽는 이들에게 자기 고통도 못다스리면서 왜 남의 고통을 ‘읽고’ 있냐며 호통쳤던 인물이다. 알렉산더가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고 말할 때, 디오게네스는 한정된 의미의 표상이었다. 디오게네스가 표상하는 것은 알렉산더가 가지지 못한 자유인데, 그것은 정치적 자유라기 보다는 찌질함, 누추함, 구질구질함, 불결함 혹은 구리고 후진 것을 혐오하지 않는 (위생이나 예절과 같은 인위적 질서에 기반을 둔) 문화적 강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디오게네스는 노동도 하지 않았고, 일정한 주거가 있지도 않았다. 그는 폴리스로부터 추방당한, 즉 인간의 문화로부터 배제된 존재이다. 따라서 그가 표상하는 누추함이나 불결함은 반문화적인 것이다.

 

문화란 인위적으로 배양된(cultivated) 체계화된 질서가 반복되면서 형성된다. 여기서 대면하게 되는 것이 고상함이라는 수수께끼이다. 문화란 반문화적 불결함(부패, 치명적 고갈, 예측 불가능성 등)을 외부화 시킴으로써 정체성을 형성, 유지 하는 고상함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다. 루저는 고상함이라는 외피를 유지하도록 구상된 대상이다. 이러한 대상은 내 생활의 누추함을 대신 갖는다. 그러나 그 대상은 결코 혐오의 대상이 아니다. 고상한 인간이란 포용력과 관용(설사 그것이 진심이 아니더라도!!)으로 그것들을 보듬는다. 때로는 진실로 애처로워 하며 말이다. 하지만 그 방식은 누추함과 마주치는 방식이 아니라 그 누추함을 낭만화 시켜 외부화 하는 방식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삶이 ‘자살을 결심한 후, 옛 사랑을 강제로 범하고, 자신을 착취하던 사장을 살해한 뒤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려 죽으려고 시도 하지만, 그 마저 실패해 사지를 쓸 수 없는 인생’(불나방 스타 쏘세지 클럽의 ‘불행이도 삶은 계속되었다’ 중)이 되길 원하지는 않는다. 그런 루저의 삶이 있을 수 있다고 믿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루저의 삶은 현실에 존재하는 삶이 아니라 문화적 삶에 의해 상상된 신화적 삶의 형상을 띤다. 그 대립항 속에서 문화적 삶은 자신의정체성을 형성한다.

 

그것이 지배적인 문화 질서가 스스로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고상한 문화란 이처럼 누추한 것들을 낭만화, 외부화 시키는데, 그러한 방식이 반드시 누추한 것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화적인 것 내에 ‘외부를 가두려는’ 시도, 혹은 내부 ‘안에’ 외부를 포함시키려는 시도이다.

 

 

다른 삶을 상상하기, 루저의 정치경제

 

나는 지금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려 하고 있다. 무엇이 루저를 필요로 하는가? 무엇이 루저를 규정하는가? 왜 그들은 ‘실패자’로 호명되는가? 이 질문들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문화가 정치적이라는 점, 그리고 그것들은 언제나 경제적 지배체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 전제되어야 한다.

 

루저로 호명되는 이들은 스스로를 루저로 규명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루저들은 무엇으로부터 내쳐지고, 무엇을 이루지 못한 것인가? 루저는 실체 없이 루저 아닌 이들이 그 대립항으로 규정하는 것일 뿐이다. 루저 아닌 이들은 누구인가? 초,중,고를 거쳐 무사히 대학에 진입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얻은 후 적당한 이성과 만나 결혼하고 아이낳고 살아가는 이들일 것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꾸려 나가는 이들이다. 요컨대 그들은 제도화된 교육시스템을 거쳐 부르주아 지배질서에 순조롭게 진입하고, 일부일처제의 가부장적 질서에 스스로를 귀의시킨, 대체로 무해한 이들이다. 루저 아닌 이들에 의해 상상된 루저란 제도화된 교육으로부터 이탈했으며, 지배적 경제 질서에 진입하지 못했을뿐 아니라, 가부장적 질서로부터도 빗겨난 이들이다. 루저들은 지배질서에 진입하는데 실패한 이들인 것이다.(타자에 의해 루저라고 규정되는 어떤 루저들은 지배질서에 진입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다만 지배질서에 대한 기여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어떤 루저들은 실패자라고 불릴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들은 자신을 루저라고 부르는 것을 듣게 될 때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다.)

 

어쨌든 최근에 활발하게 오가는 루저 담론에는 지배질서와 관련된 어떤 측면들이 있는데, 그것은 청년실업이나 ‘88만원 세대’와 같은 용어들 속에 깊이 기입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항상 존재했던 루저가 유독 최근에 활발하게 이야기 되는 것은 단지 매력적 루저의 등장이나 한 때 풍미하다 사라지는 유행같은 것들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루저가 사회적으로 대량 양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배질서로 진입하는 것에 실패한 이들이 대량으로 양산될 때 그 사회는 안정적으로 재생산 될 수 없다. 일본의 히키코모리나 프리터족들을 생각해보자. 이들이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력 부족 현상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상품 생산, 유통, 소비의 주체가 되어야 할 이들이 스스로의 손을 멈춤으로서 사회의 정치경제 시스템에 치명적인 균열을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루저 아닌 이들이 루저 문제를 끊임없이 지적하고 문제화 하는 현상의 이면에는 그들 자신이 ‘루저’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있다. 자본주의적 지배질서에 기생하여 안정적 삶을 유지하는 이들에게 사회적 생산과 소비의 중단은 지배질서에 대한 위협, 보다 직접적으로는 자신들의 안정적 삶을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처럼 최근에 유행하는 루저 담론 자체가 정치경제적 위기와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사회적 불안이 문화라는 외피를 쓰고 회귀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고상한 문화적 삶을 유지하기 위한 대립항으로서 ‘상상된 신화적 삶’으로만 존재하면 되었던 것들이 필연적 이유로 구체화 되어 ‘사회적 실체’로 등장할 때 신경증적 불안이 나타난다. 상상된 삶이 사회적 실체를 가지고 나타날 때 더 이상 그것들을 낭만화, 외부화 시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낭만적 기질을 포기하는 문제가 아니라, 대면하고 싶지 않던 사회적 실재와의 마주침이라는 계기를 만드는 사건이다. 사건이란 완벽히 봉합될 수 없는 사회의 틈에서 발생한다. 루저는 그 틈에서 서식하는 이들에게 타자가 부여한 이름이다. 루저가 아닌 자들은 그들을 패배자라고 낙인 찍지만, 사실 그들은 지배질서와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의 방식을 상상하는 자유로운 삶의 아티스트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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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와 축제 : MB정권의 순수에 대한 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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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2일 진귀한 풍경이 목격되었다. 그날은 촛불집회가 시작된 지 1주년이 되는 날이었고, 서울시에서 그야말로 ‘야심차게’ 준비한 하이 서울 페스티벌(이하 페스티벌) 개막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서울에서 한다는 것 외에는 별 관련이 없어보이던 것들이 교묘하게 융합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서울역에 모여 본행사를 마친 시위대는 청계광장으로 자리를 옮겨 집회를 계속 가지려 했다. 그러나 경찰은 그들을 저지했다. 마침 그 앞에서 페스티벌의 퍼레이드가 진행되고 있었고, 청계광장으로 들어가지 못한 시위대는 자연스레 ‘경찰에 떠밀려’ 퍼레이드 혹은 퍼레이드 구경꾼들과 섞여들게 되었다. 설사 시위대가 청계광장으로 가려고 했던 것이 페스티벌의 구경꾼들과 함께 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할지라도, 설사 서울시가 일부러 촛불집회 1주년이라는 상징적 시간대를 침범하기 위한 전략으로 페스티벌을 그날 개최하기로 했다고 할지라도, 다른 질감을 가진 두 무리가 그런 방식으로 섞여 든 것은 거의 우연에 가까웠다. 퍼레이드를 이끄는 풍물패는 신명나는 집회를 위해 풍악을 울리는 듯이 보였고, 가면을 쓰고 ‘이명박 퇴진’이라고 적혀 있는 피켓을 든 시위대는 페스티벌을 구경하러 모인 사람처럼 보였다. 그것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2009년을 사는 사람들의 풍경이었다.


시위대 중 일부는 이 수상한 시절에 흥청망청 기분이나 내며 놀 때냐고 한심한 눈길로 퍼레이드를 쳐다보았고, 페스티벌 구경나온 사람들 중 일부는 아름다운 행사를 이렇게까지 망쳐놓아야지 속이 시원하냐는 듯 원망의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몇몇 곳에서는 경찰, 구경꾼, 시위대의 마찰이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 또 일부 시위대는 퍼레이드가 연출하는 스펙타클과 흥겨움에 어깨를 들썩였고, 일부 구경꾼들은 작년 촛불집회를 기억하며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피켓을 주워들고 구호를 함께 외쳤다. 그들은 결코 한 덩어리(mass)가 아니었으며, 4부류도 아니었다.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합집산하는 기이한 형상을 띠고 있었다. 그날 결국 시위대는 퍼레이드를 중단시켰고, 개막식 행사가 진행될 단상을 점거했다.

 

 

   
  ▲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 1주년을 맞아 촛불시민들이 2일 저녁 서울 세종로 일대에서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가로막히자 서울광장에서 열리고 있는 ‘2009 하이서울 페스티벌’ 행사 무대를 점거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같은날 정부는 5월1일에 있었던 노동절 집회를 이유로 폭력 시위를 자제해 달라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보수 언론들은 다음날부터 신나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모양새도 좋았다. 시위대는 폭력의 대리인처럼 보였고, 정부는 폭력으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는 보호자가 된 것 같았다. 조선일보는 시위대를 “비(非)시민, 반(反 )시민”이라고 부르며, 시민축제를 “난장판”으로 만든 “막가파”로 매도했으며, 동아일보는 “훼방꾼 시위대”, “불법 시위대”, “불법 폭력행위를 벌인 시위 참가자”가 시민축제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렸다고 비난했다. 보수 언론들은 시위대가 시민들의 문화 행사를 폭력으로 중단시켰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위=폭력’, ‘축제=문화’라는 이분법적 도식이 깔려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폭력은 ‘계몽되지 않은 야만적 행위’라는,  폭력을 비정치화하려는 지극히 정치적인 의도가 은폐되어 있다.

 

 

보수언론과 정부의 논리대로라면 시위대는 시민과 구분된 비시민이다.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페스티벌 구경나온 시민을 잡아갈 이유는 없다. 페스티벌 참가자와 시위대가 뒤섞이기 시작할 때, 경찰은 페스티벌이 진행중인 거리로 뛰어들어와 시위대와 페스티벌 참가자들을 분리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실패했고 결국 시위대와 페스티벌 참가자는 자연스레 뒤섞였다. 이날의 뒤섞임은 축제와 시위가 문화와 폭력으로 결코 구분될 수 없음을, 나아가 시위가 하나의 축제이고 문화임을, 좀더 나아가 문화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폭력을 통해 유지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 2일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 1주년 기념 행사가 예정돼있는 서울 청계광장 주변을 경찰이 차량으로 에워싸 원천봉쇄하고 있다. 광장 중앙에서는 서울시에서 주최하는 하이서울 페스티벌 행사가 진행중이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도시의 게릴라들

 

시위는 하나의 문화이다. 그것도 한 사회의 정치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척도로서의 문화이다. 시대별로 공간별로 시위 문화는 상당히 다양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다양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시위 문화가 변화하는 과정을 잘 관찰해보면 사회운동의 내적 성찰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확인할 수 있고,  때로는 억압되어 왔던 사회적 모순이 드러나는 방식이나 새롭게 억압되는 모순들이 무엇인지 지켜볼 수 있다. 여성운동이나 병역거부 운동에서 이러한 흐름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일단 다양화된 소규모 시위 방식보다는 촛불집회 같은 대규모 시위 방식에 대해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그것만으로도 간단히 MB 정권의 기초적인 심리 상태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면 시위 지도부의 계획에 따라 본행사와 거리 행진이 이루어졌다. 그러던 것이 2006년 반FTA 집회 이후 계획되거나 통제되지 않은 시민들의 자유로운 시위가 나타났다. 본행사 이후 거리 행진에서는 계획에 없던 골목길 행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경찰이 행진을 막아서면 모여서 항의하거나 행진을 계속하려고 그들과 부딪히기보다는 경찰이 없는 길을 찾아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작년 촛불집회 때 청와대로 가려는 시위대를 막기 위해 경찰은 주변의 모든 길을 막아야 했고, (청와대 주변에 사는 일부 주민들은) 집이 코앞인데 경찰이 모든 길을 막아 놓아 택시를 타고 빙~ 돌아서 집에 가거나, 어쩔 수 없이 시위대에 참여해 경찰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적극적인 시가 행진보다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다음 장소로 이동해서 기습적으로 시위를 하는 일명 게릴라식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

 

 

시위대는 이제 도시의 게릴라가 되어 경찰과 쫓고 쫓긴다. 어찌보면 어릴 때 하고 놀던 숨바꼭질과 얼음땡 같은 놀이를 섞어 놓은 것 같기도 하다. 시위대와 경찰은 도심 속에서 도망과 추격을 반복한다. 물론 이러한 시위 방식의 변화는 경찰의 시위 진압 방식의 극적인 변화와 더불어 나타난 것이다. MB 정권에 들어와 시위 진압은 극도로 강화된 폭력성을 보여주고 있다. 올해 초에 일어난 용산 참사는 그 전형을 보여준다. 게릴라식 시위는 그 폭력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다. (여기서 시위대의 폭력과 경찰의 폭력은 질적인 차이를 보인다. 경찰 폭력은 사회적 모순을 은폐하고 시위대를 억압하기 위한 것이라면, 시위대의 폭력은 사회적 모순과 적대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치유로서의 폭력이다.) 경찰의 시위 진압 방식은 단순히 폭력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감시와 통제를 통해 잠재적인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나 통신비밀보호법 등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잠재적인 범죄자로 낙인찍고 감시하기 위한 조치들을 포함하고 있다. 게다가 이르면 올 6월 마스크 착용 금지나 통신사업자의 감청 장비 설치를 의무화 하는 극단적인 법률 개정안들이 통과될 수도 있다.

 

 

MB 정권의 강박

 

정부는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불순분자로 미리 낙인찍고 통제하고자 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삶에 깊숙히 침투해 불순물들을 걸러내려 한다. 그들이 낙인 찍은 불순물들은 완전히 제거될 수 없는 것들이다. 불순물들은 제거될 수 없다면 분리/격리 되어야 한다. MB 정권의 순수에 대한 강박과 그것의 현실적 불가능성이 만나서 만들어진 것이 ‘평화 시위 구역’이라는 정치적 행위의 수용소이다. 그것은 작년에 제정되어 올해 1월부터 6월까지 시범적으로 운영되었다. 서울, 부산, 대구, 인천, 울산 등에 지정된 평화 시위 구역은 유동인구가 적은 지역으로, 시위를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이다. 시위는 야유회가 아니다. 시위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기네끼리 흥얼거리며 만족하는 행위가 아니다. 시위는 적극적인 정치적 요구를 통해 사회 모순을 폭로하고 적대성을 드러냄으로써 현 정치의 문제들을 드러내고 소통하는 중요한 정치적 장이다.  그것은 비시민들이 벌이는 야유회가 아니라 시민들의 정치적 요구가 드러나는 공간이다. 시위대와 시민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처음부터 한 몸인 것이다. 분리될 수 없는 것들을 분리하려는 시도는 당연히 실패한다. 울산에 지정된 평화 시위 구역인 울산역 광장에서는 올 1월부터 지금까지 단 한 건의 시위도 일어나지 않았다. 울산지방경찰청에 따르면 올 1월 부터 지난달 30일까지 모두 732건의 집회 신고가 있었고 187건이 실제로 열렸는데도 말이다.

 

 

분리 될 수 없는 것들을 분리/격리하려 할 때 극단적인 방식의 감시와 통제 그리고 물리적 폭력이 사용된다. MB 정권의 순수에 대한 강박은 정치의 장에 극단적인 폭력을 기입한다. 시위라는 정치적 행위는 시민 혹은 시민들의 공간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시위가 반복되는 만큼 이 정부의 폭력도 반복될 것이다. 만약 폭력을 통해 정치적 발언이 제거된 상태가 달성된다면, 그것을 순수 - 불순한 것들이 제거된 상태 - 라고 할 수 있다면, MB정권이 바라는 정치는 소통 없이 지배만이 존재하는 정치일 것이다. 극단적인 폭력을 매개로 순수를 열망하는 정치 속에서 파시즘의 그림자를 발견하는 것은  나뿐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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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다큐] 우리 집회할까요?

 

 

 



  • 2009 | 42:25 | 독립 다큐멘터리 | DV
  • 이용 권리: 정보공유라이선스 2.0:허용
  • 바로 보기 / 내려 받기: http://shallweprotest.net
  • 만든이: 미나리, ㅤㅎㅐㅋ

- 촛불다큐_[우리 집회할까요?] -

 

2008년 5월 2일(금)과 3일(토),

서울 도심에 수 만명의 사람들이 모여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와 이명박 탄핵을 외치는 촛불문화제를 열었다.
사람들은 이명박 정부와 보수언론에 맞서 인터넷에서 스스로 정보를 생산하고 공유하며 정부 정책을 비판하고 행동에 나섰다.
이러한 온라인 여론 형성과 작은 촛불집회들은 5월의 촛불시위로 이어졌다. 

이 다큐멘터리는 5월 2일과 3일의 촛불문화제가 조직된 과정의 일부를 다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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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신간 예상 목록(시사인 70호)

 
 
 
 
 

2009년 출간될 주요 인문·사회 서적

개마고원

<스포츠로 읽는 한국 사회문화사>(정희준)
<생태경제학 4부작:생태요괴전, 생태페다고지, 생태유토피아, 생태헤게모니>(우석훈)
<민주주의는 거리에 있다>(제임스 밀러/김만권)
<법을 보는 눈>(김욱)
<인권을 보는 눈>(오창익)
<평화를 보는 눈>(이대훈)
<그림으로 이해하는 생태사상>(김윤성)
<히로히토와 맥아더>(도요시타 나라히코/권혁태)

교양인
<살아 있는 번역 강의>(이희재)
<게임하는 사람들>(에릭 번)
<스페인 내전>(안토니 비버)
<혁명의 역사>(데이비드 파커 외)
<히틀러 평전>(이언 커쇼)
<루소 평전>(레오 담로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매튜 스튜어트)
<용병들>(로버트 영 펠튼)
<축의 시대>(카렌 암스트롱)

궁리
<밤의 제왕 수리부엉이>(신동만)
<갈라파고스>(폴 스튜어트/이성호)
<인간과 분자>(프랜시스 크릭/이성호)
<중국의 과학과 문명>(조지프 니덤/장석봉 외)
<잭 런던 선집>
<왕의 우화>(이상하)
<한국의 민담>(임동권)
(에릭 호퍼/이민아)
<지구보다 넓은 지도>(이명석)
<건축의 아홉 가지 표정>(서윤영)
<이집트 신들의 사전>(스테판 로시니/신광순)
<상상계 사전>(알베르토 망구엘/최애리)

그린비
<기다림 망각>(모리스블랑쇼/박준상) <정치논평 1953~1993>(모리스블랑쇼/고재정) <저 너머로의 발걸음>(모리스블랑쇼/이재형) <우정>(모리스블랑쇼/박규현)<도래할 책>(모리스블랑쇼/심세광) <카오스의 글쓰기>(모리스블랑쇼/박준상)
<80년대 중국과의 대화>(자젠잉 외/이성현)
<거울 속에 있는 듯>(다이진화/주재희 외)
<네오리버럴리즘>(알프레두 사드-필류·데버러 존스턴/김덕민) <현대 맑스주의 경제학>(제라르 뒤메닐·도미니크 레비/김덕민)
<니체와 악순환>(피에르 클로소프스키/조성천) <니체에 관하여>(조르주 바타유/김전유경·전일성)
<라틴아메리카>(월터 미뇰로/김은중) <혼종문화>(가르시아 칸클리니/이성훈) <1492년, 타자의 은닉>(엔리케 두셀/박병규)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마누엘 데란다/이정우·김영범) <들뢰즈와 언어>(장-자크 르세르클/이현숙)


<뉴 레프트 리뷰ㆍ1>(페리 앤더슨 외/진태원)
<문화사 이야기>(로버트 단턴/김지혜)
<고전의 미래>(살바토레 세티스/김운찬)
<이론 이후>(테리 이글턴/이재원)
<마르크스와 그의 적자들>(자크 데리다/진태원)
<세 깃발 아래에서-민족주의와 아나키즘>(베네딕트 앤더슨/서지원)
<파괴의 씨앗-유전자 조작 식품의 실체>(윌리엄 엥달/김홍옥)
<파리의 보들레르>(발터 벤야민/김영옥·황현산)
<스펙트럼-20세기 사상의 궤적>(페리 앤더슨/안효상)
<빈곤의 역사>(브로니슬라프 게레멕/이성재)
<진보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로베르토 웅거/이병천 외)
<공산주의자 선언>(카를 마르크스/송충기)
<공화주의란 무엇인가>(조승래)
<내부로의 망명>(김상봉)
<니체 1>(마르틴 하이데거/박찬국)
<글로벌 위험사회>(울리히 벡/박미애 외)
<거대한 변형>(칼 폴라니/홍기빈)
<자본 2>(카를 마르크스/강신준)
<스피노자와 현대성>(진태원)
<고전학의 역사-서양은 어떻게 인문학을 부흥시켰는가>(파퍼/정기문)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뤽 볼탄스키 외/이진홍 외)
<서양의 기원-인문정신의 힘>(김헌ㆍ안재원)
<알랭 바디우-철학의 도전>(서용순)
<중국은 왜 서쪽으로 갔을까>(피터 퍼듀/공원국)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지오반니 아리기/강진아)
<시학>(아리스토텔레스/김헌)
<군주론>(니콜로 마키아벨리/곽차섭)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막스 베버/김덕영)
<세계철학사 1-지중해 철학의 세계>(이정우)
<철학을 위한 선언>(알랭 바디우/서용순)
<몸의 역사 1~3>(알랭 코르뱅 외/주명철 외)
<불화(不和)>(자크 랑시에르/진태원)
<소수자의 정치학>(이정우)
<뉴 레프트 리뷰ㆍ2>(페리 앤더슨 외/정병선 외)

난장

<안전, 영토, 인구: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7~78년>(미셸 푸코)
<생명정치의 탄생: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8~79년>(미셸 푸코)
<목적 없는 수단: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조르지오 아감벤)
<장치란 무엇인가?>(조르지오 아감벤)
<세속화>(조르지오 아감벤)
<사물의 서명: 방법에 관하여>(조르지오 아감벤)
<신좌파의 상상력: 전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년(수정증보판)>(조지 카치아피카스)
<정치의 전복: 유럽의 자율주의 사회운동과 일상생활의 탈식민화(개정판)>(조지 카치아피카스)
<알려지지 않은 봉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의 사회운동(1권: 한국, 2권: 동아시아)>(조지 카치아피카스)
<비오스: 생명정치와 철학>(로베르토 에스포지토)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교차적 평전>(최정우 옮김)
<이성의 군단:랜드연구소와 미제국의 등장>(유강은 옮김)
<고대 원자론 :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투크레티우스>(장 살렘/양창렬)

돌베개
<공자전(가제)>(안핑 친)
<도굴로 읽는 중국사(가제)>(웨난)
<문화경제학>(우석훈)
<한국지성의 문명의식과 실학>(임형택)
<자유, 평등, 상생 및 사회발전>(이근식)
<사회의 도덕적 기초:자유의 윤리적 토대로서의 개인주의>(이진우)
<열녀의 탄생(가제)>(강명관)
<예수전>(김규항)
<전쟁과 화가>(서경식)
<태일이 1~5(완간)>(최호철 글·그림)
<헌법 에세이>(유시민)
<휴전>(프리모 레비)
<현대 철학자들과의 대화(가제)>(움베르토 에코 외)
<십이지상>(허균)
<불화>(김정희)
<민화>(정병모)
<사군자>(이선옥)
<화조영모화>(이원복)
<한옥 시공>(김종남)
<한국 주거의 미시사>(전남일·양세화·홍형옥)
<민중미술>(성완경)
<그린디자인>(윤호섭)
<수목도감>(김태영·김진석)

마음산책
<드 니로의 게임>(라위 하지)
<코언 형제>(이선 코언·조엘 코언)
<책들의 조각보>(김진규)
<고아의식>(리디아 플렘)
<봉준호 사진집>(봉준호)
<봉준호 카툰집>(봉준호)
<카미유 클로델 서한집>(카미유 클로델)
<여행자의 아침식사>(요네하라 마리)
<엄마는 떠났다>(심재명)
<길들지 않은 땅>(줌파 라히리)

문학과지성사

<기형도 20주기 추모 문집>
<현대시와 장르비평(김준오)>
<엄정식 산문집>
<김윤식 강연집>
<문학과 근대와 일본>(윤상인)
<함돈균 비평집>
<정과리 비평집>
<강계숙 비평집>
<청소년 서유기(전3권)>
<모자>(토마스 베른하르트)
<잔지바 또는 마지막 이유>(알프레드 안더쉬)
<이십억 광년의 고독>(다니카와 순타로)
<독서의 알레고리>(폴 드 만)
<집단적 기억>(모리스 알박스)
<모던 포스트모던>(페터 지마)
<홍성원 1주기 추모 문집>
<정명환 깊이 읽기>
<영화와 논술>(강유정)
<과학 기술 그리고 사회>(송기원 외)
<보들레르 산문집>
<후지이 사다카즈 시선집>
<아버지의 책>(우르스 비트머)
<어머니의 연인>(우르스 비트머)
<창려문초-한유문집>(한유)
<악에 관한 세 편의 대화>(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
<새로운 인생>(잉고 슐츠)
<반문화>(크리스티앙 생-장-폴랭)
<지배와 공간-식민지 도시 경성과 제국 일본>(김백영)
<상상적 기표>(크리스티앙 메츠)
<성기완 문화비평집>
<내가 어른이 된 순간>(고종석 외)
<청소년을 위한 역사란 무엇인가>(김기봉)
<제프가 집에 돌아왔을 때>(캐서린 아킨/류제분)
<손바닥>(가와바타 야스나리)
<그것이 어떻게 빛나는지>(토마스 부르시히)
<골로블료프 가의 사람들>(니콜라이 시체드린)
<밤의 역사>(카를로 진즈부르그)
<오리온의 유산-사냥꾼으로서의 남자>(찰스 버그먼)
<공포의 역사>(장 들뤼모)
<리비돌리지>(맹정현)
<소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최시한)
<가정기도서>(브레히트)
<핸드폰>(잉고 슐체)
<작가 자신을 말하다>(오에 겐자부로)
<그들의 마지막 편지>(베르너 풀트)
<텍스트에서 하이퍼텍스트로, 하이퍼텍스트에서 하이퍼미디어로>(유현주)

민음사

<정치적 무의식>(프레드릭 제임슨/이경덕·서강목)
<로마제국 쇠망사 5·6>(에드워드 기번/송은주 외)
<학자의 갤러리>(이스라엘 셰플러/김영건·이재춘)
<키워드>(레이먼드 윌리엄스/김성기·유리)
<불공정의 황무지>(가 알페로비츠 외/원용찬)
<저탄소 경제, 경제의 지도를 바꾼다>(김현진)
<선비의 사유와 삶>(김기현)
<대운하와 휘주 상인-명청 시대 물류와 도시 그리고 상인>(조영헌)
<인도와 파키스탄>(조길태)

랜덤하우스

<삶의 모든 변화를 위한 첫 30일>(아리안 드 봉브와젱)
<위너스 매뉴얼 52>(나카지마 다카시)
<호스트>(스테프니 메이어)
<조지의 우주보물찾기>(루시 호킹·스티븐 호킹)
<웃지마! 나 영어책이야 3>(문덕/스노우캣 그림)
<솔로이스트>(스티브 로페즈)
<뻔뻔한 영철영어 2(가제)>(김영철)
<디퍼>(로더릭 고든·브라이언 윌리엄스)
<떨림2>(김훈 외)

뿌리와이파리
<미토콘드리아-박테리아에서 인간으로, 진화의 숨은 지배자>(닉 레인/김정은)
<요시카와 고지로의 두시 강의>(요시카와 고지로/조영렬)
<경제학 상식 뒤집어보기>(매튜 아미에 외/강상재)
<대서양사>(버나드 베일린/백인호)
<지중해의 역사>(존 줄리어스 노리치/이순호)
(피터 워드/류운)
(세르주 모스코비치/문성원)
<다윈 평전>(에이드리언 데스먼드·제임스 무어/김명주)
<문명 속의 전쟁>(아즈라 가트/오숙은)
<강유원의 고전강의 경철수고>(강유원)
<자본주의의 역사>(미셸 보/민경현)
<스페인 문화사>(전기순)

비아북
<한漢 나라 이야기>(김태권 만화·역사만화 전9권)
<사진과 함께하는 중국 근현대사>(김명호)
<호모 임페리얼스>(김시천)
<숲에게 길을 묻다>(김용규)
<한국 신화>(김열규)
<초현실주의 게임>(멜 굿딩/이우일·이우성)

사계절
<욕망의 연금술사, 뇌>(모기 겐이치로/이경덕)
<논어, 공자와 시대와의 대화>(신정근 완역·해설)
<고민하는 힘>(강상중/이경덕 옮김)
<촘스키에게 대들다>(촘스키·질베르 아슈카르 대담/강주헌)
<미셸 푸코의 파르헤지아>(미셸 푸코/심세광)
<지식의 책>(콘스탄틴 발로웬/강주헌)
<도킨스 대 굴드>(킴 스티렐니/장대익)
<코끼리들의 후퇴>(마크 엘빈/정철웅)
<아틀라스 일본사>(일본사학회)

산책자

<사진과 함께 보는 한국 근현대 의료 문화사>(서울대학교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유동하는 공포(가제)>(지그문트 바우만)
<아메리카>(장 보드리야르)
<촛불의 시대, 불안의 시대(가제)>(당대비평 기획위원회)
<로쟈의 인문학 서재(가제)>(이현우)
<자술-풍우란 자서전>(풍우란)
<음식과 사랑>(잭 구디)
<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빈곤으로부터 구할 것인가(가제)>(피터 싱어)
<푸코, 인간의 초상(가제)>(폴 벤느)
<자살의 자유에 대하여(가제)>(장 아메리)
<굴드 자연사 에세이 선집>(스티븐 제이 굴드)

산처럼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이승수)
<문명과 바다>(주경철)
<한국의 수집이야기>(이광표)
<왕의 하루, 승정원일기를 읽다>(박홍갑·이근호·최재복)
<사유의 열쇠-과학>(이중원)
<명태>(박천홍)
<제사>(이욱)
<달력>(이창익)
<동경삼재>(류시현)
<조선시대의 죄와 벌>(심재우)
<전쟁사 사전>(조지 차일즈 콘/조행복)

삼인
<스마트 파워>(CSIS 스마트파워 위원회/홍순식·이원태)
<제국의 마지막 기회>(즈비그뉴 브레진스키/김명섭)
<아픈 영혼, 책을 만나다>(김영아)
<박상증과 에큐메니즘 운동>(강주화)
<노란 잠수함 이야기>(조원진·김양우)
<엄혹의 시대>(신현칠)
<문동환 자서전>(문동환)

새물결
<에크리>(자크 라캉)
<마하바라타>(인도의 고대 서사시)
<대한민국 만들기>(정일준)
<근대의 정당성>(한스 블루멘베르크)
<예외상태>(아감벤)
<히틀러로부터 칼리가리로>(지그프리드 크라카우어)
<특성 없는 남자>(로메르트 무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마르셀 프루스트)
<중력의 무지개>(토마스 핀천)
<열정으로서의 사랑>(니클라스 루만)

생각의나무

<길 위에서 띄운 희망 편지>(김형오)
<우리 시대의 고전 50>(한국일보)
<청조문화동전연구>(김규선 외)
<사고전서>(켄트 가이)
<중세의 도시:루와 정>(김석철)
<보디 북>(데이비드 보더니스)
<우리는 미래에 무엇을 배울 것인가>(장회익 외)
<디지로그 쉘법칙>(이어령)
<민회빈 이야기 1·2>(김용상)
<김성희의 세계주얼리브랜드)(김성희)
<상황 4>(사르트르>
<청년 대중문화를 읽는 4가지 키워드>(김용희)
<미래 융복합기술>(공학한림원)

서해문집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 시리즈(김성희 해설)
<히스토리아 대논쟁 도덕 & 지식인>(박홍순)
<히스토리아 대논쟁 정의론 & 제도>(박홍순)
<히스토리아 대논쟁 민주주의 & 시민 불복종> (박홍순) 

<뉴라이트 위험한 교과서, 바로 읽기>(역사교육연대회의)
<지리로 세상 보기>(전국 지리교사모임)
<8살, 카카오밭에서 평생 일하다>(이와스키 유키)
<미술과 사회>(김정락)
<동양의 정원>(박정욱)
<정약용 산문집>(허경진 옮김)
<감각>(최현석)
<그린란드, 빙하시대의 살아있는 기억들>(문영훈)
<행복이란 무엇인가>(쓰지 신이치)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송찬섭 외 공저)
<수메르신화에서 탈무드까지>(조철수)
<한국사를 바꾼 연설과 선언>(박정주)
<역사 속의 반란자들>(황동하)
'오래된책방' 시리즈 중 <용재총화> <인현왕후전>
'서해클래식' 시리즈 중 <에밀> <통치론>
'카툰클래식' 시리즈 중 <그리스도감> <예기> 

시대의창
<촘스키, 변화의 길목에서 미국을 말하다>(데이비드 바사미언·노엄 촘스키)
<안중근 평전>(김삼웅)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이유리·임승수)
<탕나라 사람들>(신병근)
<2009 새사연의 한국경제 진단(가제)>(새사연)
<20대와 이야기하기>(조성주)
<오바마와 한반도>(정태인 외)
<다음의 도전적인 실험>(희망제작소)
<민영화>(새사연)
<오동명의 사진강의>(오동명)
<미국의 공공외교와 한미관계>(이상호)
<다극화체제>(임승수 외)
<식량은 주권이다>(장경호)
<산업재해>(김동재)
<불만합창단>(희망제작소)
<공정무역>(박창순)
<종자전쟁>(김은진)
<이명박의 나라에서 살아남기>(하재근)
<미친 사유화를 멈춰라>(미헬 레이몬·크리스티나 펠버)
<만화로 보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정희용·길문섭)
<촘스키 이펙트>
<인사이드 레바논>
<촘스키와 푸코>
<에센셜 촘스키>

 웅진지식하우스

<철학콘서트 2>(황광우)
<천자와 아큐>(이상수)
<영웅들>(폴 존슨)
<제국의 수도에서 눈물을 흘리다>(리샹)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김상봉·박명림)
<중국신화사>(위앤커)

이매진

<씰리펀의 라오스 일기>(이영란)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김원)
<학출 ― 80년대와 공장으로 간 대학생들>(오하나)
<행복한 교육학>(최영란)
<전기에너지에 대한 불편한 진실>(이유진 외)
<에코뮤니티>(김성균)
<희망제작소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총서>(희망제작소 지역희망찾기 총서)

창비
<한국 민족주의의 기원>(신기욱/이진준) 
<부자아빠의 몰락>(로버트 프랭크/황해선)
<압축적 근대성의 미시적 기초>(장경섭)
<프로메테우스의 경제학>(류동민)
<동아시아론>(최원식)
<21세기에 다시 보는 동아시아 3국 근대이행기 (전4권)>(김동노 외)
<근대 한국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하영선 외)
<길 위에서 묻는다>(채민 만화)
<서경식-타와다 요오꼬 왕복서한>(서은혜 번역)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의 변화>(이욱)
<부인하는 국가들>(스탠리 코언/조효제)
<68혁명 시간여행>(잉그리트 길혀 홀타이/정대성)
<이식문학론을 넘어서>(배개화)
<100℃>(최규석 만화)
<프랑스혁명과 영국 낭만주의>(유명숙)
<일본의 역사인식 비판>(미야지마 히로시)
<사상경험의 교착>(윤건차/박진우 외)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개정판)>(박석무)
<라틴아메리카의 변환>(로버트 그윈·크리스또발 케이/박구병)

책세상
‘비타 악티바’ 시리즈(개념사 시리즈) <폭력>(공진성), <노동가치>(박영균), (은수미), <비정규직노동>(장귀연), <시민혁명>(박윤덕), <공공성이란 무엇인가>(조한상)
<우생학, 무엇이 문제인가>(염운옥)
<인터넷으로 소설을 읽다>(김명석)
<징병제의 역사와 전망>(최재희)
<한국의 문학권력>(이명원)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소스타인 베블런/홍기빈)
<여성 권리 옹호>(메리 울스턴크래프트/문수현)
<여성과 노동>(올리브 슈라이너/기계형)
<사회학 논문들>(에밀 뒤르켐/민문홍)
<형이상학>(아리스토텔레스/김재범)
<여성, 섹슈얼리티, 국가>(이성숙)
<식민지 이후를 사유하다-차이의 정치학, 탈식민화와 재식민화의 경계>(권명아)
<니체, 실험적 사유와 극단의 사상>(이진우)
<번역된 철학 착종된 근대>(김시천·전호근)
<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허버트 허쉬/강성현)
<그들은 왜 히틀러에게 열광했는가>(스테판 막스/신종훈)

푸른역사
<우리 근대를 보는 두 시각>(박노자·허동현)
<남환박물지>(이형상/이상규·오창명 역주)
<개화기 인물론>(신동주)
<조선학설논쟁사전>(김동주)
<장개석 일기>(레이 황/구범진)
<그들의 새마을운동>(김영미)

한길사
<함석헌 저작집(전 30권)>(함석헌)
<예수 이야기>(김민웅)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2>(이삼성)
<로마제국을 가다 2>(최정동)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가제)>(박석무)
<이오덕 우리글 쓰기(가제)>(이오덕)
<이상론>(조영남)
<매창 이야기>(허경진)
<한일역사공통교재-근대편>(한일공통역사교재 제작팀)
<프랑스 문화(가제)>(박혜숙)

한울
<의례, 상징, 정서적 에너지>(랜달 콜린스/진수미)
<바우만과의 대화>(바우만·테스터/이기홍)
<지젝과의 대화>(지젝·달리/주은우)
<카스텔과의 대화>(카스텔·엥스/백욱인)
<네트워크사회>(카스텔 외/박행웅)
<사물의 성향>(프랑수아 줄리앙/박희영)
<현인에게는 고정된 관념이 없다>(프랑소와 쥴리앙/박치완)
<중국과 베트남: 비대칭의 정치학>(브렌틀리 워맥/함명식)
<동아시아에서의 전쟁과 사회>(김귀옥 외)
<산업사회학>(비판사회학회)
<한국경제에 있어서 마르크스 가치량 측정 및 가치분배 구조변화에 관한 연구>(민주사회정책연구소)
<비판적 생태학과 환경정의>(최병두)
<환경과 사회>(찰스 하퍼/정대연)
<미디어융합시대의 광고와 사회문화>(이희복 외)
<북한 일상생활 연구>(동국대 북한일상생활연구센터)
<학생권리와 학교사회복지>(이혜원 외)
<현상과 도구>(이상원)
<현실정보사회와 정보사회운동>(홍성태)
<새로운 뇌과학: 위험성과 전망>(스티븐 로즈 외/김재영 외)
<제도경제학>(Bernard Chavance/ 김재영 외)
<가정폭력: 여성 인권의 관점에서>(한국여성의전화)
<축제와 엑스터시>(박동준)

현실문화연구

<디자인 멜랑콜리아>(서동진)
<인터페이스 연대기>(박해천)
<빛의 건축>(김주연)
<중국의 디자인>(김대영)
<민주화의 민주화>(홍성태)
<중국문화연구>(임춘성 외)
<대중문화연구사전>(최기호·김기란)
<라루스 총서(오늘날의 미국/경제의 지도자들/석유 이후/돈의 역사/세계는 사건 현장/ 사라져가는 생물종/지구촌의 물 문제/새로운 지정학 등)
<박정희 시대>(김원)
<냉전 아시아의 문화풍경>(성공회대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어린이도서관>(정기용)
<황하문명탐사>(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근대의 원초경>(김소영)
<새 이야기>(우용태)
<미드 시리즈란?>(남명희)
<개화기 여행기>(황호덕)
<이미지의 운명>(랑시에르)

후마니타스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위하여>(이대근)
<석궁 사건과 한국 사법부>(서형)
<탐사보도란 무엇인가>(김용진)
<냉전의 추억>(김연철)
<민주주의와 민주주의 정치사상>(강정인)
<산업도시와 지역 발전>(조형제)
<세계 경제위기와 한국 경제의 진로>(이병천 외)
<한국 정치와 진보정당 운동사>(조현연)
<한국 민주주의와 개발동원체제>(조희연)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본 한국 현대사>(박찬표)
<금융 세계화, 자본주의 모델 그리고 한국경제>(전창환)
<재벌 개혁의 전개 과정과 과제>(김상조)
<한국의 지역주의와 지역정당체제>(박상훈)
<대출 권하는 사회>(김순영)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라클라우·무페/이승원)
<민족과 서사>(호미 바바/류승구)
<정치와 비전 2·3>(셀던 월린/강정인 외)
<세계화와 반폭력의 정치>(에티엔 발리바르/진태원)
<정치와 역사>(루이 알튀세르/진태원)
<시민의 권리>(에티엔 발리바르/진태원)
<인민을 자유롭게 하기>(존 던/문지영)
<왜 그리스인가>(자크 로밀리/이명훈)
<인민주의의 근거>(에르네스토 라클라우/임승준)
<암흑의 대륙>(마크 마조어/김준형)
<현대 팔레스타인사>(일란 파페/유강은)
<독일 정치사>(만프레드 슈미트/이선희)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카스 선스타인/송호창 외)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크랜슨&긴스버그/서복경)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로버트 달/김순영)
<권력의 병리학>(폴 파머/보건의료노조)
<근로 빈민>(쉽플러/나일등)
<젠더와 발전의 정치경제학>(샤린 라이/이진옥)
<자본주의의 이해>(보울스 외/최정규 외)
<시장 체제>(찰스 린드블룸/한상석)
<케인스>(스키델스키/고세훈)
<정오의 어둠>(아더 쾨슬러/문광훈)
<시간의 목소리>(에두아르도 갈레아노)
<민주주의의 경제 이론>(다운스/박상훈)
<서구 정당사>(피터 마이어/강우진)

휴머니스트
<신화 이야기 1·2>(김용호)
<대청제국>(이시바시 다카오/홍성구)
<서사철학>(김용석)
<이옥 전집(전 5권)>(실시학사고전연구회)
<한국과 일본의 근대 역사학>(박환무·윤해동·도면회 기획)
<서예가열전>(이동국)
<100권 클럽 이야기>(박문호 외)
<찰스 다윈 대담집>(최종덕 외)
<임지현의 세계사 편지:역사의 불순함을 위한 변명>(임지현)
<외국인을 위한 한국사(한국어판·영어판)>(김육훈·신용균)
<도정일의 위대한 상상력>(도정일)
<마루야마 마사오 1936-1957>(마루야마 마사오/김석근)
<조선의 오디세우스>(이승원)
<조선의 지식세계>(김호)
<반이정의 사물보기>(반이정)
<이옥 이야기>(안대회)
<노마드 철학과 서양건축>(이진경)
<한필원의 우리 도시 순례>(한필원)
<서양미술사 2>(진중권)
<소문사설-조선의 기술사>(부유섭 외)
<조선의 문자생활사>(심경호)
<동다기-차의 문화사>(정민)
<동아시아사>(제임스 팔레 외)
<인과성의 문화사>(스티븐 컨/장보혜)
<명청산문산책>(김월회)

※ 출판사는 가나다순. 출간 예정작이므로 제목이 변경될 수 있습니다. 번역 소개하는 책은 번역자의 이름을 명기한 경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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