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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사는 문제에 대한 단상 : 존엄사와 푸제온 강제실시 불허 판결

지난달 23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국내 최초로 존엄사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존엄사가 시행된 지 10여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김모 할머니는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이로 인해 김모 할머니의 존엄사는 의학적 법적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외부적 소생기술의 도움 없이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는 의학적 판단이 존엄사 시행의 중요한 법적 근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논란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존엄사가 시행될 때, 인공적 소생기술이 제거된다 해도 심장박동이 멈추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이미 외국에서는 인공적 소생기술이 제거된 이후에 길게는 10여년을 넘게 스스로 생명을 유지한 사례들이 수차례 보고 된 바 있다.

  

문제는 존엄사 자체가 실질적 죽음과 필연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닐지라도 그 개념이 도입됨으로써 현대 정치에서 중요한 어떤 지점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서둘러 이야기하자면 존엄사라는 개념은 생명을 가진 주체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 생명의 죽음을 타자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언급된 타자란 법적 절차에 따라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주권의 차원을 말한다.

  

법은 체계화된 의학적 지식에 준거하여 생명을 유지할 것인지 말것인지 결정하게 된다. 문제는 의학적 지식이 (과학적 객관적 진리처럼 여겨지지만) 죽음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 있다. 예를 들어 혼수상태(코마)는 보통 ① 의식, 운동성, 감각과 같은 외부적 관계기능의 상실 ② 호흡, 혈액순환, 체온 조절과 같은 식물 상태의 생명 기능들의 중단 ③ 관계 기능들이 잔여된 각성코마 그리고 ④ 인공호흡이나 아드레날린 정맥 주사를 통한 심장 혈액 순환의 유지, 체온 조절 기술과 같은 새로운 소생기술이 중단되면 생명이 멈추는 심층코마로 분류된다고 한다.

  

여기서 네 번째로 언급된 심층코마는 1950년대 이후에 의학계에 도입된 개념으로, 심장박동의 중단과 호흡기능의 정지라는 (의학 기술의 발달 이전까지 죽음의 기준이 된) 사망 판단의 기준을 무효화 시킨다. 기존의 죽음에 이르는 신체 상태가 의학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극복될 수 있는 가능성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철학자인 아감벤(Giorgio Agamben)은 이것이 단지 소생기술의 과학적 문제가 아닌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는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해짐에 따라 1968년 하버드 의과대학의 특별위원회는 뇌사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하게 되는데, 이 보고서에는 “회복 불가능한 코마를 새로운 사망 기준으로 정의”하는 것이 자신들의 “일차 목표”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뇌사는 지금까지 거의 유일한 사망판단의 기준으로 인정받고 있다. 뇌는 이식할 수 없는 유일한 장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망 판단의 기준은 죽음을 명확히 하기보다는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뇌사와 심장박동의 중단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뿐아니라, 의학 기술의 발달을 통한 뇌 이식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존엄사는 법적 판단에 기반한 권력과 그것의 준거가 되는 의학적 지식의 결합을 통해 형성되는 정치적 장의 문제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중요한 논쟁거리가 된다. 특히 생명과 죽음에 대한 문제들이 의학적 지식이라는 매개를 통해 현대 정치의 핵심에 기입되어 있다는 점은 프랑스의 철학자인 푸코(Michel Foucault)가 끊임없이 주장해 왔던 바이다. 그에 따르면 현대의 정치는 생명에 대한 관리에 기반하고 있다. 과거의 권력이 생명의 단축(죽음, 즉 생명에 대한 위협)에 기반하고 있다면, 현대의 권력은 생명의 연장(생명에 대한 관리)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건의학이나 사회보장제도, 도시환경 정비 등이 독특하게 현대적인 현상이라는 점은 권력의 통치 기술 변화와 맥을 같이 한다. 생명에 대한 위협이 아닌 관리에 기반한 정치가 생명에 대한 지식을 필연적으로 요청하게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 좀 더 나아가 21세기 생명과학이 지닌 정치성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생명과학이 지닌 정치성을 아직 이해할 수 없다면, 몇 년 전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황우석 사태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것은 과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었다. 거기에는 의학적 발견에 대한 희구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어떤 언어들, 즉 국부, 국위선양, 출산율, 희생, 믿음, 여성, 교육과 같은 정치적 언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허는 로슈에게 무엇을 주었나?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생명과 관련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의약품이다. 의약품을 통해 유지 및 관리되는 것은 특정한 신체 상태만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 자체를 관리하거나 연장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의약품은 의사의 처방전과 약국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구입할 수 있는 보통의 상품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대단히 복잡하고 특수한 과정을 거쳐 사람들에게 제공된다.

  

에이즈 치료제인 푸제온은 의약품의 생산 및 유통 과정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푸제온은 감염인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의약품이다. 그러나 이 의약품은 아직 우리나라에 공급되지 않고 있다. 푸제온을 만든 초국적 제약회사인 로슈(Roche)가 이 의약품에 지나치게 높은 가격을 책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슈에서 제시한 약가는 연간 2200만원에 이른다.)

  

이에 로슈의 횡포에 반기를 든 국내 의약품 운동 단체들은 지난해 12월 국가를 상대로 강제실시를 청구했다. 강제실시는 제약회사가 공급하지 않는 의약품을 환자들을 위해 강제적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이다. 그러나 특허청은 2주전 강제실시 불허 판정을 내렸다. 현대 정치의 핵심에 자리잡은 생명과 지식이라는 관점에서, 이번 판결은 최소한 두 가지 중요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생명을 관리하는 권력이고, 다른 하나는 지식의 독점이다.

  

   

 

지난해 12월 시민단체들에 의해 강제실시가 청구되자, 지난 몇 년간 약가 협상에서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던 로슈가 갑자기 푸제온을 무상공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로슈는 정상공급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질 때까지 푸제온을 무상공급하겠다고 먼저 제안해 온 것이다. 단편적으로 보면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나온 조처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상공급을 할 수 있을 때까지라는 단서 조항을 달았다는 점과 제안이 나온 시점이 강제실시 청구가 들어간 직후라는 점, 그리고 자신들의 인도주의적 조치에 대한 아무런 언론 홍보를 하지 않았다는 점 등의 정황을 놓고 본다면, 로슈의 제안이 강제실시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의도였다는 것을 쉽게 유추해 낼 수 있다. 로슈는 푸제온을 무상공급하면서까지 환자에 대한 의약품 통제권을 가지려 했던 것이다. 요컨대 로슈는 환자의 생명권을 환자로부터 박탈하고, 타인의 생명을 통제할 권리를 자신들에게 귀속시킴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사례를 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태국정부가 글리벡에 대해 강제실시를 발동하자 초국적 제약회사 노바티스는 연간 소득 5천만원 이하의 태국민에게 글리벡을 무상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노바티스 역시 무상공급이라는 카드를 꺼내어 강제실시를 무력화시키는데 성공했다.

 

 생명에 대한 관리를 자신들의 권력의 기반으로 삼기 위해서는 특허제도를 매개로 의약품 개발과 관련된 지식을 독점적으로 확보할 필요가 있다. 사실 푸제온은 로슈 자체의 연구 개발을 토대로 만들어진 의약품이 아니다. 푸제온과 관련된 기술의 최초 개발은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지원을 받은 듀크대의 연구팀에 의해 이루어졌다. 듀크대 연구팀은 레이건 정부 시절 미 상원을 통과한 베이-돌 법(Bayh-Dole Law, 이 법은 공적 자금이 투여된 성과물을 사유화할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을 한다.)에 의거해 바이오 기업인 트리메리스(Trimeris)를 설립하고 푸제온 관련 기술에 특허를 출원한다. 그리고 그들은 거대 제약회사인 로슈와의 계약을 통해 특허 기술을 판매함으로써 이익을 남겼다. 로슈가 연구개발에 기여한 것은 2002년 7월에 발표된 제3상 임상시험-임상시험은 전임상, 제1상, 제2상, 제3상으로 이뤄진다-을 지원한 것이 전부였다. 다시 말해 푸제온은 공적 자금을 투여해 개발된 지식을 사유화하고, 다른 사람들의 지식에 대한 접근을 차단함으로써 로슈에게 독점적 권리를 안겨준 의약품인 것이다.

  

이처럼 현대의 권력은 ‘생명에 대한 관리’와 그것의 기반이 되는 ‘지식에 대한 정치적 방향성을 부여하는(혹은 은폐하는) 담론 투쟁’ 속에서 형성된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행위의 규범이 되는 특정 지식을 부여함으로써 개인들을 규율하고, 건강과 수명에 대한 관리를 통해 사회가 유지되기 위한 구조적 조건들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권력의 직접적인 원천인 자본이나 폭력의 수단을 획득한다. 나아가 현대의 권력은 생명과 지식을 통제함으로써 현 사회의 지배체계를 유지시키기 위한 효능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 그 자체를 발명하게 된다. 다시 말해 그들은 개별자들의 신체와 생명을 관리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경제적 행위가 이루어질 수 있는 무대를 만드는 것이다. 푸제온을 둘러싼 사건들이 보여주는 것은 현대사회의 정치경제적 권력이 준거하는 지점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그것은 로슈에게 의약품 판매를 통해 직접적 이윤을 취할 수 있도록 해줌과 동시에 지식에 대한 배타적 독점권과 타인의 생명에 대한 통제권을 부여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정치경제적 조건들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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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디어스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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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고 살라는 법의 명령

이달 초 일명 ‘청담동 클럽 사진’이 나돌면서 또 다시 ‘퇴폐’나 ‘문란’ 같은 용어들이 남발되고 있다. 이 사건을 전후로 해서 대마를 접한 몇몇 연예인들이 언론에 보도되었고, 소위 말하는 문화예술 혹은 그 종사자들이 아니꼬운 시선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툭 까놓고 말해서, 남이야 클럽에 가서 뭘하고 어떻게 놀든 무슨 상관인가? 대마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누군가의 사회적 삶을 송두리째 앗아갈 만큼 해로운 것이 아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담배가 대마보다 중독성이 더 강하고 그 폐해도 심하다. 오랜 세월동안 인류 문명 발전에 기여했던 대마가 불법화된 것은 미국 헤게모니의 영향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대마가 불법화된 것도 듀퐁과 같은 석유자본이나 인종차별주의, 메카시 열풍 등의 정치경제적 배경 때문이었지 결코 대마 자체의 유해성 때문이 아니었다.(사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대마 농장주였다. 그는 섬유나 종이의 원료로서가 아니라 해시시를 만들기 위해 대마를 키웠으며, 해시시 제조를 연구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클럽을 즐기는 일부 사람들의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 과하다 싶은 놀이 문화나, 대마를 접한 연예인들의 이야기는 연일 방송에서 떠들어 대고, 인터넷을 뜨겁게 달굴 만한 대단한 소재가 아니다. 그것들은 별로 충격적이지도, 그닥 신선하지도 않다. 영화 <고고 70>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때만 되면 등장하는 퇴폐문화 논란이나, 신중현부터 시작되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연예인 대마 관련 사건은 이제 식상하기까지 하다.

 

문제는 이 식상한 퇴폐 문화 담론이 결코 무시하지 못할 정치적 결과를 불러온다는 사실에 있다. 민중의 삶을 구석구석까지 촘촘하게 짓밟아오던 국가는 퇴폐문화 담론이 퍼질 때면 언제나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며 온갖 금기들을 만들어낸다. 국가는 보지 말아야 할 영화를 골라내고, 듣지 말아야 할 음악을 퇴출시키며 가지 말아야 할 곳(광장)을 지정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비판)을 규정한다.

 

지난주에는 갑자기 경찰들이 공연 중인 홍대 라이브 클럽에 들어와 단속을 시행했고, 한 클럽에서는 공연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례적인 일이다. 단지 연예인 대마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기 때문에, 홍대나 이태원, 청담동 등의 지역에서 환각 약품이 자주 거래된다는 풍문 때문에, 음악과 춤을 즐기는 클럽들은 잠재적인 범죄 장소로 취급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시점에 경찰들은 홍대지역에 있는 문신 가게에 들이닥쳐 타투이스트들을 연행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의사가 아닌 사람이 문신을 시술하면 불법 의료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타투이스트는 아티스트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그들은 불법 의료행위 시술자가 된다. 문신은 취향의 범주에 속한 향유할 수 있는 문화이지, 규제의 대상이 아니다. 기초적인 표현의 자유와 신체에 대한 자기 결정권 자체가 부정되고 있는 것이다.

 

국가는 보호가 필요한 공간에서 철수하면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할 공간에 침입한다. 민중은 경제적 권리를 박탈당함과 동시에 문화적 권리를 빼앗긴다. 그들은 전자를 자유라 부르며, 후자를 보호라고 부른다. 이로써 민중은 궁핍해질 자유를 획득하면서, 비판으로부터 보호당한다. 그리고 그러한 조치들은 법의 이름으로 실행되고 있다.

 

 

법에 대한 무지 혹은 법의 무지

 

법은 끊임없이 금기를 생산한다. 그러나 법의 금기는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자명한 준거를 가지고 생산되지 않는다. 그것은 특정한 정치경제적 맥락 안에서 교묘한 방식으로 생산된다. 국가보안법, 청소년 보호법, 영화진흥법, 통신비밀보호법, 저작권법 그리고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등 표현의 자유와 문화적 권리를 침해하는 법에 기입된 금기들은 수도 없이 많다.

 

만들어진 금기는 보편이 아니라 특수이다. 현대사회의 대부분의 법은 그것을 제정한 사람이나 법조계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이 아니면 쉽게 알 수 없다. 일반 민중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키지 못하는 법의 영역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법은 ‘법에 대한 무지는 핑계가 되지 않는다’고 단정짓는다. 이것은 법치라는 명목으로 일단의 엘리트들의 ‘무지한’ 민중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전제 조건이 된다. 법은 이렇게 무지에 대한 모든 책임을 민중에게 전가시킨다.

 

법은 완벽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이 완벽한 것이라면 역사적 변천 없이 존재했을 것이며, 특정한 정세에 따라 새로운 금기를 만들어내지도 않을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 법은 스스로 자명한 준거를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법은 (완벽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어떤 결여를 가지고 있고, 그 결여는 새로운 금기를 창출하는 원인이 된다. 법의 결여는 사회적 맥락과 그 안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메커니즘을 거쳐 불필요한 규제와 의미의 과잉으로 전환되며, 이 과잉 속에서 금기가 만들어진다.

 

법은 자신이 가진 구조적 원인으로서의 결여, 즉 무지를 민중이라는 법의 적용대상에게 전가함으로써 유지된다. 주의할 점은 무지나 결여 자체가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결여의 공간에서만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생산적이다. 문제는 자신의 무지를 감추고 타인의 무지를 드러냄으로써 유지되는 법의 존재조건이다. 자신의 무지를 감추면서 타인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 바로 이것을 통해 지배의 구조가 만들어진다.

 

지배자들이 지속적으로 민중으로부터 표현의 자유를 박탈시킬 때 그들에게는 단순히 자신들의 의지에 반하는 비판자들을 억압하기 위한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더 깊숙이 들어가 비판의 언어를 제거함으로써 무지를 생산하려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배의 조건들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조건은 국가의 감시와 처벌 그리고 폭력을 정당화한다. ‘내가 너희를 때린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너희가 잘못했기 때문이다. 내 판단은 틀리지 않다.’ 이런 방식으로 국가 폭력은 법적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들은 알고 있(다고 가정되)기 때문에!!

 

그렇다면 지배에 저항하는 첫 단계는 아마도 듣고 싶은 음악을 듣고, 추고 싶은 춤을 추며, 가고 싶은 곳에 가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 혹은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을 스스로가 갖는 것(나는 지금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체력은 국력이 아니라 자력이다!), 그리고 생각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생각하고 표현해 낼 수 있는 것, 바로 그것일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법에 대해 무지하듯이, 법 역시 무지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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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의 정치, 그리고 그 정치의 희생양

 

 

정치적 신체의 재현

 

1957년 에른스트 칸토로비치(Ernst Kantorowicz)는 <왕의 두 신체(The King’s Two Bodies)>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왕이 자연적 신체(body natural)와 정치적 신체(body politic)라는 두 가지 신체를 가진다고 말한다. 자연적 신체는 온갖 결함과 노화를 겪고 시간이 흐른 후에는 죽음을 맞이 할 수 밖에 없는 신체인 반면, 정치적 신체는 ‘정치형태와 정부를 구성하는, 보이거나 조정될 수 없는 신체’이다. 정치적 신체는 자연인으로서 왕의 신체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무능력에 의해서도 좌절되거나 무가치해 질 수 없다. 정치적 신체는 자연적 신체를 부인함으로써 자신을 성립시킨다. 때문에 정치적 신체는 물리적 현존(presentation)이 아니라 재현(representation)된 이미지에 의존한다. 노무현의 죽음 역시 같은 방식으로 바라 볼 수 있을듯 하다. 그의 죽음은 개인의 물리적 죽음이 아니다. 그의 죽음은 정치적 죽음이다. 그는 죽음 이후에 재현된 이미지를 통해 정치적 신체를 제공받아 사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죽음 이후에 부여된 그의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듯 하다. 하나는 탈정치화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이고, 다른 하나는 현정권의 정치적 희생양이라는 이미지이다. 어딘가에서 노무현의 죽음을 알리는 소식이 보도된 이후 인터넷과 신문, 티비, 라디오 등 온갖 매체들에서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을 애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에게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언론 뿐 아니라 시민들도 여러 경로를 통해 노무현이라는 정치적 신체에서 정치성을 탈각시키기 위해 노력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간미 넘치는 서민의 이미지로 재현되고 있었다. 밀집모자를 쓴 그의 사진은 ‘정치인 답지 않은 소탈함’, ‘파격적인 탈 권위주의’, 가난한 사람을 위해 힘썻던 가난한 이의 대통령, ‘서민 대통령’을 대리 표상하고 있다.

 

다른 한 편으로 노무현은 정치적 희생양의 이미지로 재현되었다. 그는 부자 대통령 이명박의 정치에 조롱당한 ‘바보 노무현’이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타살당한 저질 정치의 희생양인 것이다. 여기서 노무현은 마치 타락한 현대 정치의 모든 원죄를 짊어 지고 죽은 성자처럼 재현된다. 탈 권위적 소탈함을 지닌 서민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는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는 지저분한 정치와 대비를 이루며 희생의 숭고함을 부각시킨다. 그의 죽음 이후 지속되고 있는 애도와 추모는 마치 종교 의례와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그의 죽음 이후 재현된 이미지가 종교적 색채를 띄고 있는 것과 관계된 것처럼 보인다. 그의 이미지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다. 타락한 정치적 상황이라는 맥락, 헤게모니를 장악한 지배자의 가혹한 박해 그리고 그들의 고난, 온갖 고난 이후의 죽음, 죽음 이후의 삶. 이 것들이 노무현의 죽음을 종교적으로 만드는 요소들이다.  사람들이 남긴 애도의 글 속에서 발견되는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은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현실정치에 대한 혐오와 자기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고백이다. 희생된 노무현의 죽음이 종교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이런 타락과 무력함에 애도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출발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는 점 때문이다. 마치 그리스도가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걸음으로써 타락한 ‘우리’의 죄를 사하고 구원했듯이 말이다. 적절하게도 노무현을 추도하는 어느 한 광고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등장한다.

 

“당신은 우리의 책임 회피를 죽음으로 모조리 용서하셨다. 우리는 당신을 애도하며 다시금 종에서 주인이 되었다.”(경향신문 5월 26일, 전대협동우회)

 


희생적 죽음의 정치적 효과

 

희생적 죽음은 강렬한 심리적 효과를 가진다.  희생적 죽음은 정치의 타락을 방조한-살아 남은-사람들에게 심리적 고통과 부채를 남기고, 그것들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미래를 위한 계획의 지평을 열어 놓는다. 그것은 현재의 원인이며 미래로의 지향을 남긴다. 부채와 고통을 공유하는 이들은 상상적인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미래로의 지향은 이 ‘상상의 공동체’의 몫이 된다. 이 ‘상상의 공동체’는 외적으로는 확고한 경계를 가진듯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상당히 허술하다. 공동체가 내적인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는 정례화된 의례의 역사적 축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공동체의 허술한 기반 -신화화된 정치적 초상에- 기대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민주당의 노력은 그래서 빈약해 보인다. 노무현의 죽음 이후 급속히 올라간 민주당의 지지율은 그 기반 만큼이나 허술한 것이다. 한나라당의 경우는 상당히 다르다. 그들은 이 ‘상상의 공동체’의 ‘우리’ 속에 포함되지 못하고 있다. 혹은 ‘우리’의 경계 자체가 한나라당에 대한 정치적 반감으로 형성된 것이기까지 하다. 한나라당은 ‘우리’의 외부에 있음에도 그 내부를 지향하는 포즈를 취한다. 그들이 취하는 포즈는 바로 화해와 통합이라는 정치적 수사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우리’와 ‘그들’을 화해시키고 통합함으로써 자신들을 향한 적대성을 제거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실패로 끝나거나, 오히려 적대를 강화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화해와 통합에서 ‘쇄신’으로 국면 전환을 꾀하게된다.)

 

노무현의 죽음을 추모하는 이들과 민주당 그리고 한나라당은 대립구도 속에 있지만, 그 대립항에 기대어서만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를 포함하는 구조를 이룬다. 그들은 서로 포함인 배제이며, 배제인 포함 관계에 있다. 문제는 서로를 포함하는 이러한 ‘상상의 공동체’에 배제의 형식으로조차 포함되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전 대통령의 서거와 그 이후의 추도 정국 때문에 언론과 정치에서 잠시 밀려난 존재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밀려나 있는 존재들이다.

 

노무현은 죽음 이후 (그 자신조차도 거부했던) 국민적 영웅으로 재탄생한 반면, 그들은 살아 있을 때조차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노무현의 죽음 이후 그를 추모하는 이들이 상상적 공동체를 형성하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외칠 때에도 그들은 이름 없는 존재들이었다. 국가 폭력에 의해 살해당한 후 아직까지 장례도 못치르고 있는 용산의 철거민들, 유서에 자신의 상처만을 언급했던 노무현과 달리 노동자 민중의 고통을 유서에 남기고 죽어간 박종태, 추모객들이 ‘우리’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주권의 주체인 국민으로 호명하는 순간 배제되어 버린 이주 노동자들, 시청에 모여 국민장을 치를 때조차 그 곳까지 찾아갈 접근권을 박탈당한 장애인들. 그 열렬한 추도 행렬에서 이 모든 이들의 존재가 망각되어 있었다. 그들은 ‘온 국민’이 슬퍼하고, ‘우리 모두’ 책임 져야 한다는 노무현의 죽음 뒤에 숨어 있었다. 그들은 ‘온 국민’에도 ‘우리 모두’에도 속하지 못했다.
나는 지금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게 아니다.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화화된 정치적 초상을 등에 업은 ‘우리’들이 ‘밀려나 있는 존재들’을 서술할 어떠한 언어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추도는 자연적 신체가 아닌 정치적 신체에 대한 추도였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분노 했던 것도 mb정권의 정치적, 경제적 실정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이 노무현이라는 정치적 신체에 투사된 것이었다. 그에 대한 추도가 탈정치적 이미지를 통해 재현될 때조차 그것은 강한 정치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추모 열기 속에서 나타난 정치적 냉소는 mb정권을 향한 것이었지만, 그것의 효과는 ‘밀려나 있는 존재’들과의 소통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노무현을 추모하는 ‘우리’는 그 ‘존재들’과 소통을 포기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번역할 언어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그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저항도, 체계적인 담론이나 논쟁도 형성되지 못한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언어란 어딘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언어들을 통해 우리는 발언하고 정치적으로 개입할 수 있게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적 냉소가 아니라 소통과 연대이다. 정치적 개입이란 하나의 사안에 매몰되어 그것을 해결하고 난 후에 다른 것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위기는 언제나 총체적인 것이며 하나의 문제는 다른 문제들과 구조적으로 얽혀 있다. 이것이 지금 소통과 연대가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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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들을 루저라 부르는가

요즘 루저 만큼 핫(hot)한 문화적 트렌드가 있을까? 올해 대중음악상에서는 루저문화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장기하가 빅뱅의 태양을 제치고 네티즌이 뽑은 올해의 남자 음악인이 되었다. 예외적인 하나의 사례가 아니다. 루저는 전방위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장기하와 얼굴들’을 비롯한 ‘달빛요정 역전 만루홈런’, ‘불나방 스타 쏘세지 클럽’ 등의 음악, 박민규(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핑퐁), 김애란(침이 고인다), 임정연(스끼다시 내 인생)의 소설, ‘얼렁뚱땅 흥신소’와 ‘메리 대구 공방전’, ‘내조의 여왕’ 같은 드라마 등 문화 영역 전반에서 루저를 확인할 수 있고, ‘88만원 세대’, ‘청년 실업’과 같은 경제담론 속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유독 우리나라만의 현상도 아니다. 오래 전부터 잭 블랙이나 스티브 부세미 같은 배우들은 루저의 페르소나로 분류되어 왔고, 최근에는 루저를 직접적으로 다룬 <비카인드 리와인드> 같은 영화도 등장했다. 내친김에 좀 더 나열해 보면, 우리나라에도 많은 팬을 가지고 있는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이제 고전 문학의 하나로 꼽히는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 등도 루저가 주인공이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 등장하는 잭 스페로우 선장도 빼 놓을 수 없다. 그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버는 루저 캐릭터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루저는 우리나라의 ‘루저 문화’, 일본의 ‘하류문화’, 70년대 영국의 ‘펑크문화’, 90년대 미국의 ‘그런지 문화’등의 문화 담론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넘쳐나는 루저에 관한 이야기를 단지 잠시 유행하는 루저 문화의 산물 정도로 치부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기에는 뭔가 찝찝한 구석이 있다. 루저라는 용어도 하나의 대상만을 지칭하는 게 아닌 것처럼 보인다.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용어들이 정확한 의미를 가지고 쓰이는 것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이 루저라는 용어는 특히 뭔가 더 수상하다. 이는 아마 루저라는 용어가 경제적, 정치적 위기라는 맥락 안에서 더욱 돋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루저는 단순히 문화적 트렌드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 용어에는 총체적 위기로 진단되는 사회적 텍스트 속에서 결정되는 어떤 과잉들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반/문화로서의 루저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흔히 말하는 루저는 현대 사회의 특징적 캐릭터가 아니다. 내가 아는 가장 오래된 루저 중 한명은 고대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다. 저 유명한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에 보면 한 가운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하늘과 땅을 가리키는 손짓을 하며 앞으로 걸어나오고 있다. 그림을 들여다보면 그들 앞에 있는 계단에 제멋대로 누워있는 한 사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야말로 루저답게 널부러져 있는 그 사람이 바로 디오게네스다. 디오게네스가 등장하면서 나타나는 묘한 철학적 대립의 긴장 관계가 라파엘로 그림에 매력을 더한다.

 

디오게네스는 스스로를 개라고 불렀고 그의 철학도 견유주의(犬儒主義, Kynismus)로 분류된다. 그는 여러 기행을 일삼았고, 그가 살던 시노페에서도 추방당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폴리스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인간 사회로부터 배제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사형선고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디오게네스는 추방형이 자신에게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도 태연하게 “그럼 나는 그들에게 체류형을 내리노라”라고 말하며 당시 정치체계의 폐쇄성을 비꼬았다. 그와 관련된 가장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알렉산더 대왕과의 만남과 관련되어 있다. 길을 가던 알렉산더 대왕이 거지처럼 누워 있는 디오게네스를 발견하고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으니 말해보라고 하자 그는 “좀 비켜줘, 햇빛 좀 쬐게”라고 대답한다. 후에 알렉산더는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일화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이 일화는 주목할만한데 그 이유는 문화로서의 루저가 가진 의미를 증상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의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는 희망은 결코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다.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와 대립축에 놓을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단순히 정복자로 위치지을 수 없는 인물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정치학, 윤리학, 철학, 문학 등을 배웠고, 그리스 문화에 심취했으며, 호메로스의 시를 원정 때도 들고 다닐만큼 좋아했다. 그에 반해 디오게네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스 사회를 비판했으며,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읽는 이들에게 자기 고통도 못다스리면서 왜 남의 고통을 ‘읽고’ 있냐며 호통쳤던 인물이다. 알렉산더가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고 말할 때, 디오게네스는 한정된 의미의 표상이었다. 디오게네스가 표상하는 것은 알렉산더가 가지지 못한 자유인데, 그것은 정치적 자유라기 보다는 찌질함, 누추함, 구질구질함, 불결함 혹은 구리고 후진 것을 혐오하지 않는 (위생이나 예절과 같은 인위적 질서에 기반을 둔) 문화적 강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디오게네스는 노동도 하지 않았고, 일정한 주거가 있지도 않았다. 그는 폴리스로부터 추방당한, 즉 인간의 문화로부터 배제된 존재이다. 따라서 그가 표상하는 누추함이나 불결함은 반문화적인 것이다.

 

문화란 인위적으로 배양된(cultivated) 체계화된 질서가 반복되면서 형성된다. 여기서 대면하게 되는 것이 고상함이라는 수수께끼이다. 문화란 반문화적 불결함(부패, 치명적 고갈, 예측 불가능성 등)을 외부화 시킴으로써 정체성을 형성, 유지 하는 고상함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다. 루저는 고상함이라는 외피를 유지하도록 구상된 대상이다. 이러한 대상은 내 생활의 누추함을 대신 갖는다. 그러나 그 대상은 결코 혐오의 대상이 아니다. 고상한 인간이란 포용력과 관용(설사 그것이 진심이 아니더라도!!)으로 그것들을 보듬는다. 때로는 진실로 애처로워 하며 말이다. 하지만 그 방식은 누추함과 마주치는 방식이 아니라 그 누추함을 낭만화 시켜 외부화 하는 방식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삶이 ‘자살을 결심한 후, 옛 사랑을 강제로 범하고, 자신을 착취하던 사장을 살해한 뒤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려 죽으려고 시도 하지만, 그 마저 실패해 사지를 쓸 수 없는 인생’(불나방 스타 쏘세지 클럽의 ‘불행이도 삶은 계속되었다’ 중)이 되길 원하지는 않는다. 그런 루저의 삶이 있을 수 있다고 믿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루저의 삶은 현실에 존재하는 삶이 아니라 문화적 삶에 의해 상상된 신화적 삶의 형상을 띤다. 그 대립항 속에서 문화적 삶은 자신의정체성을 형성한다.

 

그것이 지배적인 문화 질서가 스스로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고상한 문화란 이처럼 누추한 것들을 낭만화, 외부화 시키는데, 그러한 방식이 반드시 누추한 것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화적인 것 내에 ‘외부를 가두려는’ 시도, 혹은 내부 ‘안에’ 외부를 포함시키려는 시도이다.

 

 

다른 삶을 상상하기, 루저의 정치경제

 

나는 지금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려 하고 있다. 무엇이 루저를 필요로 하는가? 무엇이 루저를 규정하는가? 왜 그들은 ‘실패자’로 호명되는가? 이 질문들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문화가 정치적이라는 점, 그리고 그것들은 언제나 경제적 지배체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 전제되어야 한다.

 

루저로 호명되는 이들은 스스로를 루저로 규명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루저들은 무엇으로부터 내쳐지고, 무엇을 이루지 못한 것인가? 루저는 실체 없이 루저 아닌 이들이 그 대립항으로 규정하는 것일 뿐이다. 루저 아닌 이들은 누구인가? 초,중,고를 거쳐 무사히 대학에 진입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얻은 후 적당한 이성과 만나 결혼하고 아이낳고 살아가는 이들일 것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꾸려 나가는 이들이다. 요컨대 그들은 제도화된 교육시스템을 거쳐 부르주아 지배질서에 순조롭게 진입하고, 일부일처제의 가부장적 질서에 스스로를 귀의시킨, 대체로 무해한 이들이다. 루저 아닌 이들에 의해 상상된 루저란 제도화된 교육으로부터 이탈했으며, 지배적 경제 질서에 진입하지 못했을뿐 아니라, 가부장적 질서로부터도 빗겨난 이들이다. 루저들은 지배질서에 진입하는데 실패한 이들인 것이다.(타자에 의해 루저라고 규정되는 어떤 루저들은 지배질서에 진입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다만 지배질서에 대한 기여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어떤 루저들은 실패자라고 불릴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들은 자신을 루저라고 부르는 것을 듣게 될 때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다.)

 

어쨌든 최근에 활발하게 오가는 루저 담론에는 지배질서와 관련된 어떤 측면들이 있는데, 그것은 청년실업이나 ‘88만원 세대’와 같은 용어들 속에 깊이 기입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항상 존재했던 루저가 유독 최근에 활발하게 이야기 되는 것은 단지 매력적 루저의 등장이나 한 때 풍미하다 사라지는 유행같은 것들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루저가 사회적으로 대량 양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배질서로 진입하는 것에 실패한 이들이 대량으로 양산될 때 그 사회는 안정적으로 재생산 될 수 없다. 일본의 히키코모리나 프리터족들을 생각해보자. 이들이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력 부족 현상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상품 생산, 유통, 소비의 주체가 되어야 할 이들이 스스로의 손을 멈춤으로서 사회의 정치경제 시스템에 치명적인 균열을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루저 아닌 이들이 루저 문제를 끊임없이 지적하고 문제화 하는 현상의 이면에는 그들 자신이 ‘루저’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있다. 자본주의적 지배질서에 기생하여 안정적 삶을 유지하는 이들에게 사회적 생산과 소비의 중단은 지배질서에 대한 위협, 보다 직접적으로는 자신들의 안정적 삶을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처럼 최근에 유행하는 루저 담론 자체가 정치경제적 위기와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사회적 불안이 문화라는 외피를 쓰고 회귀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고상한 문화적 삶을 유지하기 위한 대립항으로서 ‘상상된 신화적 삶’으로만 존재하면 되었던 것들이 필연적 이유로 구체화 되어 ‘사회적 실체’로 등장할 때 신경증적 불안이 나타난다. 상상된 삶이 사회적 실체를 가지고 나타날 때 더 이상 그것들을 낭만화, 외부화 시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낭만적 기질을 포기하는 문제가 아니라, 대면하고 싶지 않던 사회적 실재와의 마주침이라는 계기를 만드는 사건이다. 사건이란 완벽히 봉합될 수 없는 사회의 틈에서 발생한다. 루저는 그 틈에서 서식하는 이들에게 타자가 부여한 이름이다. 루저가 아닌 자들은 그들을 패배자라고 낙인 찍지만, 사실 그들은 지배질서와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의 방식을 상상하는 자유로운 삶의 아티스트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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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와 축제 : MB정권의 순수에 대한 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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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2일 진귀한 풍경이 목격되었다. 그날은 촛불집회가 시작된 지 1주년이 되는 날이었고, 서울시에서 그야말로 ‘야심차게’ 준비한 하이 서울 페스티벌(이하 페스티벌) 개막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서울에서 한다는 것 외에는 별 관련이 없어보이던 것들이 교묘하게 융합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서울역에 모여 본행사를 마친 시위대는 청계광장으로 자리를 옮겨 집회를 계속 가지려 했다. 그러나 경찰은 그들을 저지했다. 마침 그 앞에서 페스티벌의 퍼레이드가 진행되고 있었고, 청계광장으로 들어가지 못한 시위대는 자연스레 ‘경찰에 떠밀려’ 퍼레이드 혹은 퍼레이드 구경꾼들과 섞여들게 되었다. 설사 시위대가 청계광장으로 가려고 했던 것이 페스티벌의 구경꾼들과 함께 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할지라도, 설사 서울시가 일부러 촛불집회 1주년이라는 상징적 시간대를 침범하기 위한 전략으로 페스티벌을 그날 개최하기로 했다고 할지라도, 다른 질감을 가진 두 무리가 그런 방식으로 섞여 든 것은 거의 우연에 가까웠다. 퍼레이드를 이끄는 풍물패는 신명나는 집회를 위해 풍악을 울리는 듯이 보였고, 가면을 쓰고 ‘이명박 퇴진’이라고 적혀 있는 피켓을 든 시위대는 페스티벌을 구경하러 모인 사람처럼 보였다. 그것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2009년을 사는 사람들의 풍경이었다.


시위대 중 일부는 이 수상한 시절에 흥청망청 기분이나 내며 놀 때냐고 한심한 눈길로 퍼레이드를 쳐다보았고, 페스티벌 구경나온 사람들 중 일부는 아름다운 행사를 이렇게까지 망쳐놓아야지 속이 시원하냐는 듯 원망의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몇몇 곳에서는 경찰, 구경꾼, 시위대의 마찰이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 또 일부 시위대는 퍼레이드가 연출하는 스펙타클과 흥겨움에 어깨를 들썩였고, 일부 구경꾼들은 작년 촛불집회를 기억하며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피켓을 주워들고 구호를 함께 외쳤다. 그들은 결코 한 덩어리(mass)가 아니었으며, 4부류도 아니었다.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합집산하는 기이한 형상을 띠고 있었다. 그날 결국 시위대는 퍼레이드를 중단시켰고, 개막식 행사가 진행될 단상을 점거했다.

 

 

   
  ▲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 1주년을 맞아 촛불시민들이 2일 저녁 서울 세종로 일대에서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가로막히자 서울광장에서 열리고 있는 ‘2009 하이서울 페스티벌’ 행사 무대를 점거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같은날 정부는 5월1일에 있었던 노동절 집회를 이유로 폭력 시위를 자제해 달라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보수 언론들은 다음날부터 신나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모양새도 좋았다. 시위대는 폭력의 대리인처럼 보였고, 정부는 폭력으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는 보호자가 된 것 같았다. 조선일보는 시위대를 “비(非)시민, 반(反 )시민”이라고 부르며, 시민축제를 “난장판”으로 만든 “막가파”로 매도했으며, 동아일보는 “훼방꾼 시위대”, “불법 시위대”, “불법 폭력행위를 벌인 시위 참가자”가 시민축제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렸다고 비난했다. 보수 언론들은 시위대가 시민들의 문화 행사를 폭력으로 중단시켰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위=폭력’, ‘축제=문화’라는 이분법적 도식이 깔려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폭력은 ‘계몽되지 않은 야만적 행위’라는,  폭력을 비정치화하려는 지극히 정치적인 의도가 은폐되어 있다.

 

 

보수언론과 정부의 논리대로라면 시위대는 시민과 구분된 비시민이다.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페스티벌 구경나온 시민을 잡아갈 이유는 없다. 페스티벌 참가자와 시위대가 뒤섞이기 시작할 때, 경찰은 페스티벌이 진행중인 거리로 뛰어들어와 시위대와 페스티벌 참가자들을 분리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실패했고 결국 시위대와 페스티벌 참가자는 자연스레 뒤섞였다. 이날의 뒤섞임은 축제와 시위가 문화와 폭력으로 결코 구분될 수 없음을, 나아가 시위가 하나의 축제이고 문화임을, 좀더 나아가 문화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폭력을 통해 유지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 2일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 1주년 기념 행사가 예정돼있는 서울 청계광장 주변을 경찰이 차량으로 에워싸 원천봉쇄하고 있다. 광장 중앙에서는 서울시에서 주최하는 하이서울 페스티벌 행사가 진행중이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도시의 게릴라들

 

시위는 하나의 문화이다. 그것도 한 사회의 정치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척도로서의 문화이다. 시대별로 공간별로 시위 문화는 상당히 다양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다양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시위 문화가 변화하는 과정을 잘 관찰해보면 사회운동의 내적 성찰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확인할 수 있고,  때로는 억압되어 왔던 사회적 모순이 드러나는 방식이나 새롭게 억압되는 모순들이 무엇인지 지켜볼 수 있다. 여성운동이나 병역거부 운동에서 이러한 흐름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일단 다양화된 소규모 시위 방식보다는 촛불집회 같은 대규모 시위 방식에 대해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그것만으로도 간단히 MB 정권의 기초적인 심리 상태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면 시위 지도부의 계획에 따라 본행사와 거리 행진이 이루어졌다. 그러던 것이 2006년 반FTA 집회 이후 계획되거나 통제되지 않은 시민들의 자유로운 시위가 나타났다. 본행사 이후 거리 행진에서는 계획에 없던 골목길 행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경찰이 행진을 막아서면 모여서 항의하거나 행진을 계속하려고 그들과 부딪히기보다는 경찰이 없는 길을 찾아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작년 촛불집회 때 청와대로 가려는 시위대를 막기 위해 경찰은 주변의 모든 길을 막아야 했고, (청와대 주변에 사는 일부 주민들은) 집이 코앞인데 경찰이 모든 길을 막아 놓아 택시를 타고 빙~ 돌아서 집에 가거나, 어쩔 수 없이 시위대에 참여해 경찰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적극적인 시가 행진보다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다음 장소로 이동해서 기습적으로 시위를 하는 일명 게릴라식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

 

 

시위대는 이제 도시의 게릴라가 되어 경찰과 쫓고 쫓긴다. 어찌보면 어릴 때 하고 놀던 숨바꼭질과 얼음땡 같은 놀이를 섞어 놓은 것 같기도 하다. 시위대와 경찰은 도심 속에서 도망과 추격을 반복한다. 물론 이러한 시위 방식의 변화는 경찰의 시위 진압 방식의 극적인 변화와 더불어 나타난 것이다. MB 정권에 들어와 시위 진압은 극도로 강화된 폭력성을 보여주고 있다. 올해 초에 일어난 용산 참사는 그 전형을 보여준다. 게릴라식 시위는 그 폭력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다. (여기서 시위대의 폭력과 경찰의 폭력은 질적인 차이를 보인다. 경찰 폭력은 사회적 모순을 은폐하고 시위대를 억압하기 위한 것이라면, 시위대의 폭력은 사회적 모순과 적대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치유로서의 폭력이다.) 경찰의 시위 진압 방식은 단순히 폭력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감시와 통제를 통해 잠재적인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나 통신비밀보호법 등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잠재적인 범죄자로 낙인찍고 감시하기 위한 조치들을 포함하고 있다. 게다가 이르면 올 6월 마스크 착용 금지나 통신사업자의 감청 장비 설치를 의무화 하는 극단적인 법률 개정안들이 통과될 수도 있다.

 

 

MB 정권의 강박

 

정부는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불순분자로 미리 낙인찍고 통제하고자 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삶에 깊숙히 침투해 불순물들을 걸러내려 한다. 그들이 낙인 찍은 불순물들은 완전히 제거될 수 없는 것들이다. 불순물들은 제거될 수 없다면 분리/격리 되어야 한다. MB 정권의 순수에 대한 강박과 그것의 현실적 불가능성이 만나서 만들어진 것이 ‘평화 시위 구역’이라는 정치적 행위의 수용소이다. 그것은 작년에 제정되어 올해 1월부터 6월까지 시범적으로 운영되었다. 서울, 부산, 대구, 인천, 울산 등에 지정된 평화 시위 구역은 유동인구가 적은 지역으로, 시위를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이다. 시위는 야유회가 아니다. 시위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기네끼리 흥얼거리며 만족하는 행위가 아니다. 시위는 적극적인 정치적 요구를 통해 사회 모순을 폭로하고 적대성을 드러냄으로써 현 정치의 문제들을 드러내고 소통하는 중요한 정치적 장이다.  그것은 비시민들이 벌이는 야유회가 아니라 시민들의 정치적 요구가 드러나는 공간이다. 시위대와 시민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처음부터 한 몸인 것이다. 분리될 수 없는 것들을 분리하려는 시도는 당연히 실패한다. 울산에 지정된 평화 시위 구역인 울산역 광장에서는 올 1월부터 지금까지 단 한 건의 시위도 일어나지 않았다. 울산지방경찰청에 따르면 올 1월 부터 지난달 30일까지 모두 732건의 집회 신고가 있었고 187건이 실제로 열렸는데도 말이다.

 

 

분리 될 수 없는 것들을 분리/격리하려 할 때 극단적인 방식의 감시와 통제 그리고 물리적 폭력이 사용된다. MB 정권의 순수에 대한 강박은 정치의 장에 극단적인 폭력을 기입한다. 시위라는 정치적 행위는 시민 혹은 시민들의 공간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시위가 반복되는 만큼 이 정부의 폭력도 반복될 것이다. 만약 폭력을 통해 정치적 발언이 제거된 상태가 달성된다면, 그것을 순수 - 불순한 것들이 제거된 상태 - 라고 할 수 있다면, MB정권이 바라는 정치는 소통 없이 지배만이 존재하는 정치일 것이다. 극단적인 폭력을 매개로 순수를 열망하는 정치 속에서 파시즘의 그림자를 발견하는 것은  나뿐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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