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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앞에 통곡하다

숭례문앞에 통곡하다

 

 

고요한 적막에 덮인 산골, 설이 조용히 지나가던 날, 숭례문이 타고 있다는 인터넷소식이 장난기사이길 바랬다. 그리고, 또 11시경 불길이 잡혔다고 해서 이제는 안심해도 될 줄 알았다. 하루밤사이에 몇 번을 놀라면서 가슴에는 깊은 못이 박힌듯이 아프다.

 

아직 서울을 못가봤다. 아니 가보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한참동안은 남대문시장근처를 쳐다보지 못할 것 같다. 폐허더미 숭례문앞에서 나는 왜 이렇게 통곡하는가? 왜 사람들은 가슴에 깊은 상처를 받았는가?

 

 

서울을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6학년 겨울이었다. 언니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비정규직 여사원으로 서울로 일하러 갔고, 동생에게 서울을 보여주겠다고 데려간 것이었다. 70-80년대 서울모습 중에서 내가 가장 인상깊게 기억하는 것은 길바닥에 쌓여있는 연탄재였다. 왜 그렇게 연탄재가 길바닥에 너부러져있었는지... 서울역근처가 언니의 단칸방이 있는 곳이어서 역의 시커멓고 쾌쾌한 먼지와 길바닥의 연탄재가 어우러져 먼지속의 서울만 보았고, 나는 급기야 서울에서 살수 없을 것 같는 느낌만 받았었다. 내가 그당시 본 것은 순전히 이런 풍경들이었다. 그것이 서울의 다가 아니었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언니는 주말이면 동생을 데리고 그 삭막했던 서울거리를 쏘다니곤 했는데, 언니를 따라다니면서 유독 기억나는 것이 바로 숭례문이었다. 그 당시 굉장히 높고 웅장하게 보였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그 다음에 숭례문을 기억하는 것은 87-88 민주화 대투쟁때이다. 그 당시 거의 매일 데모대열에 합류하면서 매번 서울역까지 갔던 것 같다. 그러면서 대모대열이 거대하게 형성되면,우리는 서울역에서 숭례문까지 마구 뛰어갔다. 그 때 숭례문을 지나쳐 뛰면서 나의 발걸음이 빨라질수록 나의 심장의 고동소리는 점점 커졌던 것을 기억한다. 아! 그 곳을 그렇게 마음대로 뛰어봤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었던가?

 

시골내기였고, 인생에서 숭례문에 대한 기억이 한 두 장면 밖에 나지 않는 나도 이럴진대, 숭례문을 평생동안 보고 살아온 서울의 평범한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70-80년대 자본주의의 쓰레기로 뒤덮인 그 추잡한 거리, 추악한 삶의 세파속에서 살면서도, 우연하게도 숭례문을 한번 쳐다보노라면, 그 아름다움과 기개와 웅장함에 마음이 정화되는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찌든 삶속에서, 어머니의 품처럼 다가갈 수 있는, 숭례문이 그런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숭례문이 과거 권위의 상징이었고, 왕권의 소유물이었으며, 현재는 자본주의에 의해 희생되었지만, 그것은 우리가 숭례문에게 애써서 어떤 상징과 명함을 달아주는 것일게다. 숭례문에겐 그러한 권위적인 상징조차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그 아름다움은 결국 그 당시에 가장 평범했던 민초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던가?

 

 

내가 오늘 숭례문앞에서 통곡하는 이유는 바로 600년을 이어주는 민초과 민초의 만남, 그들의 역사가 사라졌기 때문일것이다. 숭례문을 만들면서 몇 명의 민초들이 얼마나 심한 노동강도속에서 일을 했는지, 그들이 어떻게 일하다가 죽어갔는지.. 나는 이러한 정황을 정확하게는 모른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아련히 떠오르지 않는가? 600년을 거슬러가면서 민초들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그들이 만든 역사가 어떠했는가를.....

 

 

우리가 지금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역사를 상실했기때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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