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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금병산은 김유정의 추억으로 가득하다^^

새해 첫날 금병산은 김유정의 추억으로 가득하다^^ 

 

새해 첫날 오른 금병산... 춘천의 원창고개를 시작으로 하여 잣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선 급경사진 산중턱을 아주 잠깐 숨이차게 올라가면, 이내 금병산 정상으로 향하는 능선이 시작된다. 원창고개에서 금병산까지의 길에는 쭉쭉 뻗은 잣나무, 소나무, 참나무(도토리나무)들이 하늘을 닿을듯하며, 구름도 무심히 지나치질 못하고, 기어코 나무가지에 걸쳐있다. 이 아름다운 능선길이 바로 김유정의 '봄봄'의 무대인 것이다.

 

금병산 정상에서 여러갈래의 내리막길이 있는데, 이들 길이 김유정의 '동백꽃' '산골나그네' 등등의 실제 장소였다. 651미터정도의 높이인 금병산은 흙산이다. 거친 바위돌 하나 보이지 않고, 내려오는 길이나 오르막길이 모두 능선길이다. 가장 짦은 능선이 '동백꽃길'이고, 이 아래에 유정마을 (김유정생가가 있는 곳)이 있다. 

 

나중에 김유정역사앞에 세워진 팻말을 보고서, 강원도에서 이 금병산을 문화유적지로 개발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이것을 알지 못하였더라도, 설사, 문화유적지로 선정이 안되었다 하더라도, 금병산의 길은 거의 모두 완만하게 능선으로 되어있어.. 바로 주민들의 실제적인 통행로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산 아래로 내려와서 춘천까지의 길은 걸어서 가기엔 너무나 먼 길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 이 먼 길을 산길로 단 1시간도 안걸려서 가지 않았는가?

 

그러니, 옛날 산에 나무하던 이들이나 농사를 짓는 이들은 이 금병산의 흙길을 밟고 다녔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길들이 산의 완만한 중턱을 둥글게 받아 안으면서 길들이 생겨났으리라. 예전에 금병산에는 화전민도 많이 살았다고 한다. 화전민들의 오고가던 길이 바로 이 능선들이었구나......

 

김유정역앞의 슈퍼아저씨는 지금은 김유정의 친척이나 그 당시에 살았던 후손들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김유정의 가족은 그의 자전적 소설 '따라지'에 나오는 것처럼, 모두 흩어져 버렸을까? 김유정이 살았던 시대에 농촌은 지주와 마름과 소작인의 계급관계였고 화전민들은 당연히 소작인이었겠다. 물론 김유정의 글 어디에도 계급적 문제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가산이 모두 탕진되고, 몸이 병들어가면서도 그가 금병산자락에 "금병의숙"이라는 야학을 창설했다는 것은 놀라울 따름이다.

 

금병산을 내려오는데, 부귀도 영화도 물질적 풍요도 없는 이 소박한 산골에서, 인간의 애정과 애환을 목도한 김유정이 저만치서 걸어가고 있다.

 

(점순이의 사랑을 얼떨결에 느끼는 나, 동백꽃의 말미이다).  

"... 뭣에 떠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동백꽃속으로 폭 파묻혀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질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동백꽃, 김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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