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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10/15
    아~한타!
    하늘소-1
  2. 2008/10/01
    가을인가보다(2)
    하늘소-1
  3. 2008/08/14
    올림픽을 보며 드는 잡스런 생각
    하늘소-1
  4. 2008/08/01
    변해 간다는 것
    하늘소-1
  5. 2008/07/31
    공정택의 승리와 다중지성
    하늘소-1
  6. 2008/07/21
    우리 동네 엘리베이터에는
    하늘소-1
  7. 2008/07/16
    차량 홀짝제(4)
    하늘소-1
  8. 2008/07/11
    촛불은 어떻게 진화되어야 할까
    하늘소-1
  9. 2008/06/23
    오랜만에(2)
    하늘소-1
  10. 2008/05/09
    맹박이와 진보진영
    하늘소-1

아~한타!

한국타이어에 대한 국감이 진행되었다.

아마 대전공장 생기고 처음으로 그렇게 많은

국회의원들이 공장에 들어 간 것 같다.

그러나 소문난 잔치 먹을 것 없다더니 새로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작년까지 밝혀진 사실들에 대한 재탕뿐!

마음이 답답해 진다.

당을 그만 둘때 이문제가 금방 해결될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아무 것도 진전된

상황이 일어나지 않으니 답답해 진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잘 해 주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답답함이 더 커진다.

아~ 한~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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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인가보다

"잠깐의 사랑이라도 깊게 남는다."

- 어느 신문 '오늘의 운세'에 실린 소띠의 운세다.

- 뭔 운세풀이를 요렇게 난해하게 하는지 원~참!

- 여하튼 이런 글을 보며 묘한 마음의 떨림이 느껴지니 가을이 오긴 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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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을 보며 드는 잡스런 생각

하늘소님의 [변해 간다는 것] 에 관련된 글.

아래 글의 말미에 운동권의 무소유를 주장했다던 동기의 얘기를 이어가 보자.

사실은 그 동기녀석도 운동권이었고 지금도 자신이 했던 말을 실천하면서 살고 있다. 그가 학생운동권이었을 당시, 양말 한 짝, 상하의 한 벌, 운동화 한 켤레가 그가 가진 전부였다. 양말은 매일 빨아서 신고 옷도 더러워지지 않게 잘 빨아서 입고 운동화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런 삶을 살고자 했던 동무들도 있어서 대여섯명이 그렇게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그 중에는 양심적 병역거부선언으로 유명해진 오모씨도 있었다. 그런데 그 동기녀석이 얘기했던 무소유는 단지 금전적, 재산적 소유를 넘어서서 심지어 우리가 취미생활쯤으로 여기는 각종 스포츠도 금해야 할 대상이었다. 사람들이 그런 운동을 하기위해서는 각종 시설이 만들어져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소요되는 많은 재정은 물론이고 자연의 파괴가 수반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누구는 여가를 위해 혹은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지만 누군가는 그 사람들의 여가를 위해 노동을 착취당하는 일이 발생한다는 말이었다. 월드컵에 사용되는 축구공이 베트남의 어린이 노동착취를 통해 만들어 진다는 사실이 이를 확인해 준다.

 

그에 비하면 나는 너무나 소비에 익숙해진 삶을 살고 있었고 지금도 그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앞으로도 이런 삶의 양식이 획기적으로 전환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접은지 이미 오래다. 자본의 안락함에 흠뻑 적셔진 몸과 마음을 단지 진보운동을 했다는 약력으로 탈색하기에는 나 자신이 그런 삶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심지어 어느 순간에는 그런 자본주의 삶을 갈구하는 혹은 그에 대한 욕망이 솟아 오르는 것을 느끼기까지 하니 말이다.

 

방향을 살짝 틀어서 올림픽 얘기를 해 보자.

중국은 이번 올림픽을 통해 국가마케딩에는 확실히 성공한 듯 보인다. 그 열기에 묻혀 올림픽 기간에 발생한 신장 위구르 지역의 테러도 단신처리되어 끝났고, 자신들의 4대 발명품을 세계에 자랑하며 문화적 전통성을 세계에 한껏 과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국가 위신' 때문에 개막식에서 예쁜 얼굴과 예쁜 목소리를 조합하는 열성을 보이기까지 하면서 그야 말로 '100년의 꿈'을 이루려 했다. 

이런 올림픽에 대해 혹자들은 자본주의 스포츠가 원래 그렇고 올림픽은 그 상징이기때문에 올림픽 관련 방송에 관심이 없다고 하기도 한다. 그들의 주장을 이해하고 동의하면서도 나는 열심히 중계방송을 지켜보고 있다.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진지한 모습을 보며 저 선수들이 저 무대에 서기위해 얼마나 많은 눈물과 땀을 흘려야 했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왜 그들이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를 생각한다. 다른 잘사는 국가의 선수들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국이라는 국가에서 운동을 하는 선수들은 생존의 문턱에서 헉헉대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몇몇 잘나가는 엘리트 선수들이야 문제가 없겠지만 대다수의 선수들은 국가대표가 되어서 올림픽에 출전했다고 해서 그들의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역도에서 그 무거운 쇳덩이를 끝까지 손에서 놓지 못하고 마루바닥에 처박혀야 했던 선수는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가 운동을 그만두고 일반인으로 돌아 왔을 때 그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각종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따고 그것이 몇 차례 쌓여야 그나마 국가에서 주는 연금이라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된다. 그러나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선수는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고 그런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메달을 따지 못하면 돌아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어찌 보면 이들도 또 다른 형태의 '비정규직'인 샘이다. 

 

마르크스는 소외를 설명하면서 분업의 발생으로 인해 인간은 소외된다고 보았다. 원시공산사회에서는 소규모의 인간집단 혹은 개별인간이 생산과 소비에 이르는 전과정을 담당하면서 필요에 의한 노동을 했기 때문에 인간의 유적 소외, 본성으로부터의 소외는 없었다는 것이다. 무소유의 삶을 주장했던 동기녀석은 스스로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삶 속에서 스스로 소외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 역시 삶의 과정에서 필요에 의한 운동이 아니라 생존의 차원에서 그리고 사회적 강제에 의해서 메달을 따야만 하는 상황에 내몰려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또 유적 존재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는 오늘도 올림픽 경기를 열심히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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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해 간다는 것

내가 자동차를 소유한지 8년이 조금 넘었다.

그간 내 손을 거쳐간 차가 자그마치 4대가 되는데

모두 주변 사람들이 타다가 폐차 직전에 있던 것을

달라고 해서 타고 다녔었다. 그중 2대는 아내에게 주었다.

그래서 나와 아내가 끌었던 차는 모두 연령이 최소 10년이 넘는

차들이었다.

그러든 차에 내가 몰던 93년식 엑셀의 수리비가 너무 많이

들어가는 것 같아 큰 마음 먹고 새차를 구입했다.

삐가 뻔쩍하는 새차가 역시 좋긴 하다. 어찌나 조용하고 부드러운지

운전을 하다가 시동을 꺼트리는 경우도 종종있다.

그런데 새차를 손에 넣으니 갈등거리가 생겼다.

 

예전에 헌차를 몰고 다닐 때에는 에어컨을 거의 켜지 않고 다녔다.

아무리 더워도 누군가 동승을 하지 않는 한, 한 번도 켜지 않았었다.

심지어 여름 비오는 날에 차창에 이슬이 맺혀도 히터로 말리기까지

했었다. 그렇게 했던 건 차를 몰고 다니는 것 하나만으로도 내가 배출하는

오염물질이 엄청난데 에어컨까지 켜고 다니면 더 심해질거라는 걱정에서였다.

그런데 새차를 몰고 다니는 요즘 에어컨에 대한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에어컨을 켜지 않으면 알량한 양심은 지키겠지만,

더위를 참기 위해 차창을 내리면 다른 차들이 내뿜는 매연을 그대로 마시며

주행을 해야 하는데 그게 과연 내 건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라는

것이고 저렇게 많은 차들이 죄다 켜고 다니는데 나 혼자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갈등하는 나를 바라보며 내가 변해 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어 섬뜩해지기도 한다. 사람이 가지는 것이 많아질수록 욕심이 많아지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내적 외적 갈등이 커지면 사회적 모순으로 발전하게 되어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에 이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학교 다닐때 운동하는 사람은 무소유의 삶을 살야야 한다던 동기놈의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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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택의 승리와 다중지성

서울교육감 선거에서 공정택 후보가 당선이 되었다고 한다.

숨어 있던 또 다른 '다중지성'의 발현이 아닌가 한다.

촛불만이 아니라..........

선거일 전날에 공정택은 후보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조항을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이겼다. 그렇다! 다중지성은 촛불의 다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촛불을 반대하는 다중지성도 존재하는 것이다.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다.

'미친 강남 것들'이라 욕할 필요도 없다. 그들에게는 공정택이 상식이니까.

다원성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나는 네그리의 '다중지성'에 대해 그다지 동의하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

촛불 초기에 논평가들이 그의 이 말을 빌어 촛불을 표현하는 것에 대해

조금 불편함을 느끼곤 했었다. 듣기에 그럴싸 해 보이지만 '계급', '인민'에

대한 정치적 해석을 하지 못하는 단지 현상만을 보여주는 정도라고 할까.

 

그리고 대전에 사는 내가 서울교육감 선거결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현실도

짜증스럽다. 왜냐하면 한국의 각종 지방자치단체들은 대부분 '서울따라하기'에

급급해 하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뭔가를 하면 1년 정도 지나면 전국의 지자체에서

다 따라한다. 청계천이 그랬고, 버스준공영제, 뉴타운식 개발 등등이 그랬다.

머지 않아 지방교육청들도 '공정택 따라하기'에 열을 올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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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엘리베이터에는

"선풍기"가 달려 있다.

그것도 아주 큰 선풍기가, ㅎㅎㅎ.

지난 주에 간만에 볼링을 치려고 집 근처에 있는 볼링장에

갔었는데 그 건물 엘리베이터에 떡~허니 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덥고 끈적거리는 요즘 같은 여름날,

저 선풍기를 굳이 켜지 않아도 웃음이 나와 더위를 느끼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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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 홀짝제

기름값이 많이 올랐다고 차량 홀짝제를 시행하라고 한다.

그렇지, 아껴 쓰면 좋은 거고 자가용 이용보다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편이 여러 모로 보아 좋은 것은 맞다.

화석연료 소비를 줄여 생태적 가치를 높여야 한다는 것에는

분명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알이 꼴려 참을 수 없다.

대중교통체계가 왠만 해야 버스를 타고 다니지 말이다.

집에서 학교까지 버스타고 1시간 30분이 걸린다. 큰 도로를

따라 운행하면 적어도 40분 정도로 단축이 가능하지만 도중에

빙글빙글 청룡열차라도 되는 듯 돌면서 여기저기 다 들러서 가니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마을버스도 없고 그나마 지하철도 하나의 노선이 전부다.

지하철타고 가려면 2시간은 족히 걸릴 거다.

반면에 직접 운전해서 가면 아무리 많이 걸려야 30분이면 족하다.

책가방에 노트북에 점심도시락까지 바리바리 싸서 버스타기가 녹록치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기름값이 치솟는 이유가 많이 써서 만은 아니지 않은가?

이 놈에 자본이라는 것들이 투기처를 찾다가 이제는 석유에까지 손을

댄 것 아닌가? 금 값도 오르고 철강제도 오르고 식량용 곡물가도 오르고

막대한 자본의 투기가 한 몫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리라.

그런데, 내가 왜 그 놈들 돈놀이 때문에 피해를 봐야 하느냐 말이지.

괜히 욱하는 마음이 든다. 날씨도 더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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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은 어떻게 진화되어야 할까

- '미디어 충청'에 기고한 글.

-촛불집회는 딱 두 번 나가 봤다.

-그중 행진을 한 건 딱 한 번, 대전역에서.

-그 때 느꼈던 것들을 적어 보았다.

-참여하지도 않으면서 글을 쓴다는 것이 웃긴 것 같아

쓰지 않으려고도 했지만

-그래도 편집위원이 글을 좀 써야 하지 않겠냐는 대표의 명을

받들어 두서 없는 글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고민 끝에 쓰기는 했다.

 

촛불의 진화를 바란다.


   촛불의 열기가 한 낮의 태양의 열기보다 뜨겁게 밤이 내려앉은 아스팔트를 달군지 벌써 두 달이 넘어 간다. 그 동안 쇠고기 관련 추가협상을 진행케 하고 공공부문 사유화와 한반도 대운하와 같은 이명박 정부의 핵심 사업을 유보시키는 성과를 낳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촛불을 든 데모꾼들은 대단한 인내심을 유지하며 경찰의 곤봉과 물대포에 맞서 그리고 이른바 ‘명박산성’ 앞에서도 재치를 발휘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른바 ‘웹 2.0’ 시대에 인터넷 공간에서 시작되어 거리로까지 나선 촛불들.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만들고 있음은 분명하다. 수백만이 참여하고 있는 촛불집회는 역사적 사건임에 분명하고 혹자는 프랑스의 68혁명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68혁명과 같은 효과를 낳을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여전히 정권은 흔들리지 않고 있으며 여당인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는 선두를 달리고 있다. 그리고 미국산 쇠고기 소비의향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소비의향이 있다는 응답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이런 현상들을 한 발 뒤로 물러나 바라보며 들었던 생각들을 풀어 본다.

 

   먼저 참여자들과 이들의 인식에 대한 생각에서 시작을 해 보자. 이들이 내건 주장은 하나이고 이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대오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한 편으로는 아직은 어색한 동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7월 2일, 대전역 집회에 처음으로 나갔다. 금속노조를 비롯한 민주노총 대전본부의 투쟁결의대회가 있었고 이어서 촛불집회가 진행되었다. 그 날 사회자와 일부 연사들의 발언에서 왠지 노동자와 ‘일반’ 시민을 구분하려는 듯한 표현들을 듣게 되었다. 예를 들면, ‘나는 노동자는 아니지만 ……’, ‘비록 다른 활동을 하고 있지만 ……’ 이런 식의 표현이 발언 중간 중간 섞여 있었다. 그리고 행진을 하던 도중 사회자는 ‘시민 여러분이 허락하신다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겠습니다.’라고 함께 노래 부르기를 제안하기도 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집회 도중에 누구의 허락을 받아야 부를 수 있는 노래였던가. 사회자와 연사들의 이러한 표현들이 의식적인 행위였는지 무의식중에 나온 것인지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지켜보는 내내 어색함을 지울 수 없었다.

   촛불 집회가 진행되는 기간에 화물운동노동자들의 파업도 있었고 그 와중에 한 분의 열사가 발생하는 고통도 있었다. 하지만 그 열사는 타오르고 있는 수많은 촛불들 중 어느 촛불에서 타고 있는지 그 존재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촛불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정권퇴진’을 외쳤다는 것 또한 흥미로웠다. 정권이 국민들의 요구를 대변하지 못할 때 국민들은 그들이 위임했던 권력을 소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이고 따라서 이들의 요구는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몇 년 전 노무현 대통령 탄핵의 공간에서도 ‘정권퇴진’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그 주장은 함께 촛불을 들었던 그 밖의 군중들에 의해 거부당하기도 했다. 그 때 대통령 노무현과 지금의 대통령 이명박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기에 그 때는 안 되던 것이 지금은 용인이 되는지 궁금했다.

 

   이런 상황에서 촛불을 계속 밝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언론매체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논의할 때가 아니라 촛불 이후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 일부에서는 초기에 ‘생활정치’의식이 자발적 참여를 이끌었고 그 동력이 어느 조직된 저항보다 완고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생활정치라 함에 있어 ‘생활’의 영역은 어디까지인가. 건강권에 대한 염려는 생활정치의 소재가 되고 노동권은 생활의 영역을 벗어난 것인가. 서구와 같이 후기산업사회에 접어들어서 노동, 생산, 발전과 같은 경제의 문제보다 비경제 부문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이 발전하기라도 한 것인가.

   노동권의 문제는 여전히 이 사회의 중요한 문제이고 자본계급과 노동계급의 팽팽한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권리쟁탈의 대상이 되고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 아닌가.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좌파진영은 촛불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 서울만이 아니라 지역에서도 지역 수준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독자적인 논의가 진행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지 정답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생활’과 ‘노동’이 분리되지 않고, 모인 사람들에게 허락을 받지 않고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를 수 있는 그런 상황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하겠다. 그 때, 촛불은 비로소 진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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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여유 있는 시간이 찾아 왔다.

학기말 보고서도 끝나고, 영어작문 특강도 끝났다.

한 일주일 정도는 여유를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학교에 들어 온지 벌써 2달 하고도 20여일이 지났다.

처음 두 달은 자리잡기가 참 어려웠는데 이제는

아주 잘 적응을 한 것 같다.

아침에 학교에 나가면 먼저 커피 한 잔 들고 벤치로 나가

모닝 담배와 함께 숲으로 둘러 쌓인 학교의 좋은 공기를 만끽하고

나 혼자 쓰고 있는 세미나실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낸다.

점심은 가끔 지인들과 함께 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내가 직접 챙긴 샌드위치 도시락으로 해결을 한다.

처음에는 세 조각의 빵을 준비했지만 지금은 두 조각만 한다.

먹다가 보니 양이 너무 많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 같아서는 계속이 이렇게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현실이 그렇게 두지 않겠지만!

 

그 사이 세상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나는 모니터를 통해서만 그것들을 지켜보고.

그 속에 있을 때와는 다른 시각으로 지켜만 보았다.

뭐, 그렇다고 그 속에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솔직히....!

이번 학기에는 마르크스의 국가론에 대해 정리를 해 봤다.

그의 국가론을 독해하자니 현실의 문제가 어쩜 그리도 딱 와 닿는지!

놀라운 마르크스 형님이다.

그런데 그의 저작을 번역판으로 주로 보았는데 생각보다 오역이 많았다.

누군가 다시 제대로 번역을 해서 그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토요일에는 최장집 교수가 마지막 강의를 했다는 소식을 레디앙을

통해 접했다. 자신을 Weberian이라고 밝힌 그는 지금보다 좀 더 유연한

사회가 바라는 듯 했다. 모두가 유연해질 수 있으려면 그러한 조건이

만들어 져야 하지만 그 때가 언제일런지.....

어찌되었건 나는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당당히 밝힌 것에 대해

정체성 없는 학문이 판치는 요즘 매우 환영하며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진보진영이 선거를 통한 사회의 변혁에 대해 두려워 해서는

않된다는 그의 말에도 일정 동의한다.

한 70%쯤.-요즘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다가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되었건, 나는 이제 방학에 뭘 하고 놀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겠다.

돈 없이 알차게 놀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진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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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박이와 진보진영

- 지난 달 말에 선배의 부탁으로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특강했던 내용.

- 작년 이맘 때 쯤 시민단체에 가서 발제했던 내용을 상황에 맞게 수정/보완.

- 완성된 글로 써야 한다는 압박은 밀려 옴에도 여전히......

 

이명박 정권의 등장과 진보진영의 전망

 

Ⅰ. 개념정의

1. 주체의 측면

○ 진보, 개혁, 보수

○ 전통적 의미에서 좌파 : 전통 Marxist

○ 후기산업사회(Post-Industrialism)의 등장 : 신좌파의 형성

 

2. 담론의 측면

○ 진보 : K. Marx의 ‘계급사회’에 대한 인정

○ 개혁 : 자유주의, 신자유주의적/자유주의적 개혁

○ 보수 : 시장중심주의, 규제완화, 국가.

○ 신좌파 : 맑스주의, 생태/환경, 여성, 인권, 평등, 평화 등 탈물질주의


[표]이념과 요소2)

구  분

요   소

자유주의

개인주의, 자유, 이성, 평등, 관용, 동의, 입헌정치

보수주의

전통(Tradition), 실용주의(Pragmatism), 인간의 불완전성, 유기체(Organicism), 위계조직(Hierarchy), 권위(Authority), 재산

사회주의

공동체(Community), 형제애(Fraternity), 사회적 평등(Social equality), 필요(Need), 사회계급(Social class), 공동소유(Common ownership),

맑스주의

역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 변증법적 변화(Dialectical change), 소외(Alienation), 계급투쟁(Class struggle), 잉여가치(Surplus value), 프롤레타리아 혁명(Proletarian revolution), 공산주의(Communism)


○자유주의

-개인주의 : 집단에 대한 거부

-자유 : 평등, 정의, 권위에 우선. 법 아래 자유, 인간의 욕망을 표출하는 기제

-평등 :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사회적 불평등 인정/‘기회의 평등’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 실적주의.

-관용 : Toleration. 다원주의

-동의 : 개인의 동의. 피치자의 동의. Flowership. 대의민주주의

-입헌정치 : 제한정부(limited government). 권력분산


○보수주의

-전통 : 축적된 지혜. 검증된 제도. 안정감

-실용주의 : 인간이성의 한계 존재. 마음자세(attitude of mind). 생활에 대한 접근방법(approch to life).

-인간의 불완전성 : 제한적 의존적 안전추구. 도덕적 타락⇒강력한 국가, 엄격한 법의 강화, 엄정한 벌

-유기체 : 가족, 지역공동체, 민족으로 이루어진 유기체. 공유된 가치. 공통의 문화

-위계조직 : 사회적 지위와 신분의 등급 인정

-권위 : 지식, 경험 혹은 교육이 부족한 사람을 위해 지도, 지원. 사회적 응집력의 근원.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책임확인

-재산(권) : 재산권. 인격의 외면화. 권리이자 의무.


○사회주의

-공동체 : 사회적 관계 중시

-형제애 : 유적 인간. 협동의 필요

-사회적 평등 : 사회적 평등, 결과적 평등. 법적 정치적 권리의 토대

-필요 : 능력에 따라 필요에 따라. 도덕적 유인에 의한 동기화

-공동소유 : 과거 논쟁이 지점


○맑스주의

-역사적 유물론 : 상부구조, 토대의 개념. 역사적 관계

-변증법적 변화 : 헤겔의 변증법 - 정, 반, 합

-소외 : 노동의 탈인격화, 현대적 해석 필요

-계급투쟁 : 사적소유, 생산수단의 소유 양식

-잉여가치 : 착취의 관계. “가치는 상품생산을 위해 사용된 노동에서 발생”

-프롤레타리아 혁명 : 생산수단의 통제를 장악하는 자발적 봉기

-공산주의 : 과도기적 ‘사회주의’ 단계 후에 나타남. 잉여를 위한 생산이 아닌 사용을 위한 생산.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은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의 전체조건이다.”



Ⅱ. 이명박 정권의 등장과 진보위기론

1. 이명박 정권 등장의 배경

○ 87년 민주화 이후 2번의 보수정권(노태우, 김영삼)과 2번의 개혁정권(김대중, 노무현) : 단순한 역사적 사실, 유권자들의 의식적 선택으로 규정하기 어려움.

○ 보수세력의 10년에 걸친 정권창출 실패 : 보수의 결집효과

○ IMF 이후 심각한 양극화(빈익빈 부익부), 비정규직 양산 : 사회의 민주화 진전에 비해 그 혜택이 경제영역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

○ 이명박 정권의 성격 : ‘문민개발독재’


2. ‘진보위기론’의 원인과 현상

○ 위기3)론의 원인

   - 세계질서변환에서 오는 구조의 문제 : 세계화, 신자유주의.

   - 혹은 권력주체의 문제

○ 노무현 정권의 실패 ≠ 진보의 실패

-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한계 : 좌파 신자유주의, 구조적 현실.

○ 민주노동당의 실험

- 절반의 실패 : 진영내 정치대표체로서의 취약한 위상

- 18대 대선 후 분당 : 17대 10석에서 5석으로 축소

○ 신자유주의 대안체제에 대한 고민의 부족

   - 저항력으로서 존재, 대안세력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음.


3. 진보진영의 상황

○ 단일한 대중투쟁 전선체 구축 노력

- 민중연대, 진보연대 : 상층중심 연대의 한계

-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단일체 구성 시도

○ 노동조합운동의 정체

- 비정규직 문제

- 이주노동자의 노동권 확보

-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정체 :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유지 논란

○ 정치다원성 형성

- 진보신당의 등장

- 창조한국당 등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정체성 확보 노력

- 시민운동세력의 독자성 확대

- 탈물질주의세력의 등장

 


Ⅲ. 진보진영의 재구성

1. 현실인식

○ ‘87년체제’가 남긴 것

- 형식적 민주주의 : 대통령선출직선제, 지방자치제

- 내용적 민주주의 : 시민사회운동의 세력화, 정치적 다양화

- 여전한 성장담론의 헤게모니 장악 : 경제성장 = 민주주의의 확대

- 지역구도의 지속

- Red Complex의 완화 혹은 유보

○ ‘Post-87년체제’에 대한 고민

- 헌법 개정, 행정체계 개편 논의

- 심화되는 부익부빈익빈에 대한 대책 : 경제민주화

- 민주화는 완성되었는가에 대한 전반적 평가 필요


2. 진보진영 전망

○ ‘87년체제’ = ‘질곡의 20년’

- 정치 차원 : 후보단일화 논쟁, 비판적 지지

- 경제 차원 : ‘무능한 386’, 빈익빈 부익부의 확대

- 87년 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 의제설정과 행동

○ 진보의제 설정

   - 한국의 후기산업사회적 특징들에 대한 검토

   - 개발과 성장논리에 대한 대응 : 대운하, 시장개방(한미FTA, 의료보험민영화 등)

   - 지방과 수도권의 비대칭 발전

○최근의 논의

- 민생

- 녹색정치 : 시민사회, 진보신당

- 유럽의 상황 : 녹색당의 정체/후퇴. 기존 사민당의 적극적인 정책개입

⇒ 현장의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

○보수 Vs. 진보 ⇒ 진보 Vs. 진보

- 양분법에서 벗어나 다원화를 인정해야 한다.

- 정치적 자기정체성 확인 : 한나라 vs. 자유선진당

- 통칭 되는 진보 역시 자기 정체성 확인을 통한 다원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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