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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1/23
    번개맨~(3)
    하늘소-1
  2. 2007/11/01
    내부의 적은 빨리 속아내야 한다(2)
    하늘소-1
  3. 2007/10/29
    [책소개 10]미래의 도시
    하늘소-1
  4. 2007/10/25
    만인보?(3)
    하늘소-1
  5. 2007/10/17
    해바라기(3)
    하늘소-1
  6. 2007/10/12
    [책소개 9]맑스의 눈으로 현대의 도시를 보다(1)
    하늘소-1
  7. 2007/10/10
    두개의 아침풍경(2)
    하늘소-1
  8. 2007/10/04
    정통부의 진짜 속셈이 뭘까(3)
    하늘소-1
  9. 2007/09/29
    조봉암 선생에 대해
    하늘소-1
  10. 2007/09/21
    깜짝 아이디어는 좋지만
    하늘소-1

번개맨~

선거운동 기간이 다가 올수록 하루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점점 늘어간다.

더군다나 이미 처리했어야 할 일들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보니 일들이 더 더 더 더 더 많아 진다.

그날 일은 그날 해결하자!

그러다가 보니 많은 일들을 꼼꼼하게 따져보지 못하고

그야 말로 번갯불에 콩구어 먹듯 휙휙 처리하게 된다.

요사이 나의 삶은 번개인생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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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의 적은 빨리 속아내야 한다

7년간 21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은 공장이 있다.

그중 지난 1년간 죽은 노동자가 14명에 이른다.

뇌출혈, 심근경색, 폐렴, 안전사고 등으로.......

 

한국타이어.

바로 그곳이다.

대전에 공장과 중앙연구소가 있고

금산에도 공장이 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노동자들이 죽어 나갔음에도

사측은 미동도 않고 있다.

한국노총 소속 노동조합은 사측의 편을 들면서

현장노동자들에게 사태가 알려지는 것을 차단하려

급급해 하고 있다. 심지어 사건을 취재하는 기자를 찾아가

취재를 말아달라는 요구를 하고, 노동청을 찾아가 언론인터뷰에

응하지 말라는 요구를 서슴치 않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신분을 잊은 노동청 담당자는 언론에 대고

노동조합에서 회사 이미지 나빠지니까 인터뷰를 말아달라고 했기

때문에 인터뷰를 할 수 없다는 말을 하기까지 한다.

 

유족대책위가 구성되고 시당에서도 대책위를 구성했다.

한국타이어에는 30명이 조금 않되는 당원들이 있고

분회도 구성해 활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언제 사측에 의해

인사위에 회부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당에서 한국노총에 사과를 했다고 한다.

그것도 시덥지 않은 이유로.

 

적은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도 있다.

때로는 내부의 적이 더 무서울 때가 있다.

 

당은 한국타이어 당원동지들에게 먼저 사과를 해야 한다.

그리고 물러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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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10]미래의 도시

 

미래의 도시(한울, 2005)

 

이책은 원저  Urban future 21 : a global agenda for twenty first century cities / Hall,

Peter,Pfeiffer, Ulrich 를 번역한 것으로 도시의 과거, 현재,  미래를 스케치하듯이

보여주고 있다.

원저는 '세계위원회 도시21(World Commission URBURN 21)'과 전문가 그룹이

2000년 7월 베를린에서

열린 '미래의 도시 21'에 제출된 위원회의 보고서를 준비하기 위해 2년여에 걸쳐

공동으로 작업한 결과물이다.

이 보고서가 발간되기 위해 독일연방정부가 지원을 했다.

이 책에서는 도시 거버넌스 문제만이 아니라 환경, 도시개발, 교통,  경제, 주택정책, 

빈곤 등에 걸쳐 언급하고 미래의 도시가 이러한 요소들을 어떻게 담아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다소 빈약한 소개에도 불구하고 실제 책의 내용은 상당히 많은 내용들을 담고 있다.

꼼꼼히 다 읽기가 지겨울 정도로......

 

 

o목차

새천년의 도전
2025년의 도시 세계
-추세와 결과
-두 가지 시나리오
도시 문제에의 대응
-거버넌스와 정책
바람직한 거버넌스의 실제
-실행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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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보?

권영길 후보가 다른 일 제쳐두고 만인보에 나선지 여러 날이 지났다.

사람들은 그의 이런 행동에 대한 평가가 제각각이지만

부정적인 평가가 더 많은 것 같다.

 

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전제는 언제나 옳은 일이다.

그러나 그 시기와 방법이 타당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행보는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다.

할려면, 할 필요가 있었으면 이미 한달전에 들어가서 이제는

밖으로 나와야 할 때에 거꾸로 들어가 버린거다.

 

만인보, 이건 흔히 말하는 '잠수'다.

주변 상황이 여의치 않거나 스스로의 판단이 흐려질 때

종종 주변의 활동가들이 벌이는 그 '잠수'인 것이다.

그 시작은 알 수 있으나 끝은 알 수 없는 바로 그 잠수!

 

하지만 그 잠수의 끝이 항상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누구는 심기일전, 새로운 투쟁을 각오하고 나오기도 하고

또 누구는 얼치기 '도사'가 되어서 세상사 다 그런거지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바라건데, 심기일전해서 나오시길 바란다.

그것도 빠른 시일내에,

최소한 2002년의 상태만이라도 회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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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대화동 복지관에 핀 해바라기.

해바라기는 하루 종일 해만 바라본다고 해서 해바라기라더니

얘네는 해하고 무슨 원수라도 진듯 땅만 내려보고 있다.

 

지난 여름 어리고 성긴 줄기가 있어 유심히 바라 보았지만

도저히 저렇게 큰 머리가 달리기는 어렵겠다는 생각만 했었는데

어느새 저렇게 커버려 머리를 처들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땅만 내려보도록 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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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9]맑스의 눈으로 현대의 도시를 보다

이 책은 맑스를 비롯한 맑스주의자들의 눈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 도시를 투시하고 있다.

도시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이런저런 책들을 찾아보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책이었다.

도시는 자본주의 착취구조로서 생성, 발전/성장해 가며

자본축적의 매력이 떨어진 도시는 서서히 혹은 급격하게

축소되어 진다.

그 속에는 산업단지, 금융, 시장, 산업예비군 양성소로서의 교육기관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문화 또한 나름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책은 도시를 문화적 측면에서 주로 다루고 있다.

 

 

 

목차

 

1. 칼 맑스 Karl Marx - 멀쩡한 정신을 가진 상품과 도시
2. 프리드리히 엥겔스 Frederick Engels - 맨체스터의 뒷골목 소년
3.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 세속적 계몽의 도시
4. 앙리 르페브르 Henry Lefebvre - 도시혁명
5. 기 드보르 Guy Debord - 맑스와 코카콜라의 도시
6. 마뉴엘 카스텔 Manuel Castells - 알튀세르와 사회운동
7. 데이비드 하비 David Harvey - 도시화의 지정학
8. 마샬 버먼 Marshall Berman - 맑스주의자의 도시적 로맨스

 


현대의 스펙터클한 자본주의하에서, 맑스의 “소외된 노동”은 “소외된 삶”으로 일반화 되었고,

“시간에 대한 허위의식”은 추상적인 것, 유기된 시간으로 변질된다.

이렇게 해서 드보르에게 스펙터클한 시간은 영원한 현재, 죽음에 대한 부정, 디즈니적인 가상실험,

“진짜 같은 가짜,” 그리고 믿을만한 트루먼 쇼를 재현하게 된다. 스펙터클은 자본주의가 역사와

기억을 강점하고 훼손시켰음을 나타낸다. (p. 242~243)

지은이
앤디 메리필드(Andy Merrifield)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1999년 이후부터

미국 클라크 대학 지리학 교수로 재직 중에 있다. 도시 근대화, 비판이론, 맑스주의 등에 주된 관심을

갖고 있으며 [더 네이션The Nation], [디센트Dissent], [뉴 레프트 리뷰New Left Review]와 같은

비학술 정치 저널에 비평에세이나 그보다도 짧은 토막글을 정기적으로 게재하면서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불공평한 도시화The Urbanization of Injustice](1997)의 공동 편집자로 참여했으며,

지은 책으로는 이 책과 같은 해에 나온 [변증법적 도시주의Dialectical Urbanism](200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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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아침풍경

지난 월요일 아내가 서울에서 일주일간 교육이 있어

아침일찍 대전역으로 배웅을 나 갔었다.

7시를 갖 넘긴 시간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대전역 대합실을 매우고 있었다.

 

얼추보니 대다수의 사람들이 정장스타일의 말쑥한

모습으로 출근을 하는 듯 보였고

그중 학생인듯 보이는 사람,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도 보였다.

나는 세수도 하지 않고 대충 입고 나섰는데

이렇게 이른 시간에 저렇게 차려 입고 나오려면

꽤나 일찍 일어나야 했을 것 같다.

 

그리고 오늘 아침 출근 길.

9시가 조금 안되어 늦게 출근을 했다.

집에서 사무실까지 대략 15분정도 걸리는 거리지만

항상 늦는다.

출근길에 리모델링하는 건물이 있었는데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빵과 음료수로 참을 먹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침도 못 먹고 나선 터였다.

 

가끔 밤을 세우는 경우가 있는데

새벽 4시가 조금 넘고 어렴풋이 동이 터오기 시작하면

차츰 자동차 지나는 소리가 늘어나고

새벽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사람들이 모습이 잦아지기 시작하고.....

 

그렇게 사람들은 아침 일찍부터 움직이기 시작하고

생존의 현장으로 나선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나자 다짐하면서도

아침 잠 10분이 아쉬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결국 늦어버리기 일쑤다.

 

내일은 일찍 일어 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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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부의 진짜 속셈이 뭘까

몇일전 한 통신회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내용인 즉

2008년부터 휴대전화 번호가 통합되니 번호를 바꿔야 하고,

그에 맞춰서 단말기도 3D단말기로 바꿔야 하는데

고객(나)은 장기 이용자로서 단말기할인혜택과 번호이동에 따르는

자동안내서비스를 무기한으로 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계속 물었다.

번호통합은 무엇이고 멀쩡한 단말기는 왜 바꿔야 하냐고.

그랬더니 안내원이 하는 말이 "고객님 아직도 그걸 모르고 계세요? 정부정책에 의해서

016, 017, 011 등 휴대전화 앞자리가 모두 010으로 바뀌게 되어 있어 있습니다. 브라질인가에서도

앞자리를 011인가로 통일해서 쓰고 있고 국가별로 고유번호를 정하게 되어 있다고 하는 것

같은데요. 그리고 wcdma 방식도입으로 인해서 단말기도 기존 2D 단말기는 사용할 수 없고

3D단말기로 교체를 하셔야 합니다."

라고 한다.

그래서 통화하는 동안 급하게 인터넷에서 관련 내용을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이미 2003년부터 정통부에서 추진을 해 왔고 애초 2007년부터 시행하려던 것을

2008년부터 하게 될 것 같고 이유는 전파낭비를 막기위해서라나 뭐라나.......

 

내~ 참, 기가막혀서 안내원한테 거꾸로 그 얘기를 했더니

단말기를 꼭 바꿔야 하는 건 아니고 장기이용객들에게 할인혜택을 주고 있으니

이용하라는 얘기였다고 말을 바꾼다.

 

순간 나는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렸고,

하마트면 멀쩡한 전화기를 바꿀 뻔 했다.

 

전파낭비를 막기위해 그렇게 한다는 정통부!

그에 기생해서 단말기 팔아 먹으려는 업체!

짜증 지대로다!

 

전파낭비와 송신설비 낭비를 막으려면 애초에 그렇게 하든가

이제 와서 설래발래 쳐서 나 같이 순진한 놈 꼬득여 단말기 바꾸게 하려는

심사는 도대체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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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 선생에 대해

남한 헌정사상 최초의 합법 사민주의 정당을 결성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죽산 조봉암 선생에 대한 이른바 법살에 문제가 있었음을 정부기관에서

공식 확인했다고 한다.

50년만의 일이라는 말도 전한다.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전쟁의 상처들에서

하나의 상처에 겨우 딱정이가 앉았다고 할 수 있겠다.

조봉암 선생과 진보당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를 하지 않아

이것이다라고 평가하기는 어려우나 예전에

그의 생애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둔 바 있어 올려 본다.

 

Ⅰ. 유연기와 3.1운동

  조봉암은 1899년 9월 25일 강화도에서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고 3.1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강화도에서 살았다. 그러나 이때까지 그는 그저 장난치기 좋아하고 세상일에 큰 관심이 없는 평범하게 자라왔던 것으로 보인다. 3.1운동의 결과 서대문형문소에서 옥고를 치를 당시를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 진심으로 말하면, 3.1운동이 터지고 내가 잡혀서 감옥으로 갈 때까지는 국가와 민족이 어떻다는 데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었고, 단순히 일본놈이 우리 조선 사람을 천대하고 멸시하는 데 대한 불만과 불평이 있었던 청년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감옥에 들어가서부터 비로소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것을 알았다.”


유년기의 조봉암은 공부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머리는 명석했었다. 그는 4년제 소학교와 2년제 농업보습학교만을 마치고 직업을 찾았고 18세 되던 해에 강화군청에서 고원(雇員)으로 일을 했다. 당시 그는 주산이 빨라 남들보다 10배는 빨리 일을 했다고 한다.

3.1운동에 참가한 대가로 1년간 수감생활을 하고 출옥 후에는 서울로 올라가 YMCA 중학부에서 공부를 할 요량이었으나 일 욕심과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으로 공부에 마음을 둘 수 없었다. 이때 일본으로 건너갈 것을 고민하기 시작했으나 평안남도에서 체포가 되었는데 YMCA를 중심으로 거사가 준비 중이었다는 혐의를 받았던 것이다. 평양에서 옥고를 치른 조봉암은 민족감정이 더욱 강해졌다고 해고한다. 이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중앙대학 전문부 정치과에 들에 가지만 그곳에서도 정규 수업보다 도서관에서 책읽기에 몰두하고 이 시기에 다양한 사상을 접하게 된다. 당시 일본은 다양한 사회주의 사상이 들어와 논의되고 있었고 그도 사회주의에 심취하게 되고 아나키스트가 되어 몇몇 친분이 있는 자들과 함께 ‘흑도회’를 만들었으나 이내 볼셰비키즘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렇게 일본에서 3년을 보내고 1922년 8월 서울로 돌아와 사회주의 활동을 시작한다.


 



 Ⅱ. 해방, 공산당과의 결별

 서울로 돌아온 조봉암의 공산주의자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은 ‘조선공산당’ 창당을 위한 연합대회 준비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2개월도 못돼 소련의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열리는 코민테른 연합대회에 참여하게 된다. 이 대회에는 조선에서의 공산당 운동을 주도하던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함께 참석했고 그는 국내파의 대표로 참석을 했다. 그러나 두 개의 해외파간의 갈등으로 이르쿠츠크파가 대회에서 탈퇴를 하게 되고 조봉암 등은 “우리는 연합대회가 되지 못하고 어느 일파의 대회로만 진행되는 까닭에 더 이상 참석할 수 없다.”고 선언한 뒤 대회장을 나왔고 그 경과를 코민테른에 전보로 알렸다. 이후 부하린의 중재로 1922년 12월 각 조직을 해산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코르뷰로(Korburo)가 코민테른 극동지부안에 발족했으나 그는 여기에 참여하지 않고 모스크바에서 시작된 이른바 카우트브(KUTV-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해 공부를 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수업이 자신이 원하는 수준에 달하지 못했고 건강도 좋지 않아 1923년 귀국해서 국제공산청년동맹 국내 대표로 일을 하면서 박헌영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의 결성을 준비하고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을 결성한다. 그리고 그해 11월에 이념적 조직체인 화요회를 결성했다.

1925년에는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동맹을 발족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은 일제의 강력한 탄압으로 인해 1928년까지 4차례의 창당대회를 거치면서 급속하게 축소되었고 1930년 중국공산당에 편입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1926년 일제의 체포를 피해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청년동맹이라는 청년 단체를 조직해서 지하활동을 했지만 1931년 6월에 프랑스공원에서 잡혀 신의주에서 7년형을 살고 1941년에 만기 출소했다. 그러나 전쟁의 막바지에 몰린 일제의 예비검속에 의해 1945년 1월 다시 체포되어 8월 15일 해방을 맞아서야 출옥하게 되었다. 그는 출옥직후 인천으로 향해 치안유지회를 조직하고 이를 건국준비회 인천지부로 전환했으며 이와 함께 노동운동, 공산단 재건운동에 몰입했고 민주주의민족전선이 조직되면서 민전의장을 맡았다. 이 시기 그는 박헌영 등의 공산당에 불만을 갖기 시작했고 1946년 7월에 민전의장 사퇴와 함께 공산당과의 결별을 선언한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천에서 내가 민전의장일 뿐 아니라 공산당 등 모든 좌익운동의 지도자로 지내는 중에도 조선공산당 지도자인 박헌영 등의 여러 가지 불합리한 처사도 있었지만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일으켜서 대중적 동원운동을 하는 중에 신탁통치 반대회의를 열어놓고 소련 정부의 지시라 해서 신탁통치 찬성 결의를 하게 한 것 같은 일은 전연 한국 사람의 상식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리석은 짓일 뿐 아니라, 민족을 배반하는 폭거였습니다. ...... 내 나라도 잊어버리고 내 민족도 생각지 않고 지시대로만 하는 것은 옳다고는 생각이 안 됩니다.”


공산당과의 결별후 조봉암은 여운형, 김규식 등과 좌우합작위원회를 통해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게 되지만 1946년 12월 미군정청이 출범시킨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참여를 거부하고 민주주의독립전선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극좌, 극우 배척운동을 펼치면서 사회민주주의로의 사상전환도 이루어지게 된다. 이 시기 중간정당을 창당이라는 정치적 행보를 지속하게 되고 이른바 ‘비미비소의 민족자주 노선’을 택해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통일정부를 세워 독립국가를 세우겠다는 목표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후 1948년 5월 10일에 실시된 제헌국회 의원 총선거에 인천시 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고 이승만의 제의로 농림부 장관을 맞았고 이때 양곡매입법, 농지개혁법, 농업협동조합법을 제출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으로 재선된 그는 국회 부의장을 맡기도 했다. 이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두 차례에 걸친 정치파동이 발생했고 1954년 2차 정치파동 이후 국회 내 호헌동지회와 함께 통일 야당을 만들기로 했으나 무위로 돌아가고 서상일 등과 함께 1955년 12월 22일 진보당 창당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게 된다. 이때 그는 대통령선거 후보로 두 번째 입후보했다.


Ⅲ. 조봉암과 진보당

  1956년 3월 31일에 진보당 전국추진위원 대표자 대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조봉암이 대통령 후보로 서상일은 부통령 후보로 선출이 되었으나 서상일은 불만을 품고 부통령 수락연락연설을 거절하면서 조봉암 계열과 서상일 계열이 나누어지게 되었다.

한편 조봉암은 이승만 후보를 이기기 위해서는 야당의 후보 단일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고 4월 25일 조봉암과 신익희 후보간 양자 회담이 있었지만 결렬되게 된다. 그러나 이시기 조봉암은 이미 자유당의 부정선거 등을 대비해 후보를 사퇴할 것을 결심하고 그 시기에 대한 고민만을 남겨 놓았으나 5월 5일 신익희 후보가 호남으로 가던 열차에서 뇌출혈로 급사하게 되어 조봉암이 유일한 야당후보가 된 것이다. 5월 15일 선거가 치러졌고 여러 선거 부정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은 총 투표수의 23.9%인 216만 3천여 표를 얻었다.

이러한 선거결과의 여세를 몰아 진보당 창당을 서둘렀고 ‘민주 혁신 운동’이라는 깃발 아래 혁신 세력의 단결을 추구했다. 그러나 혁신계 인사들 사이에 이념과 노선의 차이가 다시 드러났으며 거기에 더해 정부 여당의 공작으로 내분이 벌어졌다. 따라서 조봉암 계열은 1956년 11월 10일에 서울에서 전국 대의원대회를 열고 그를 위원장으로 하고 부통령 후보였던 박기출 등을 부위원장으로 해서 진보당을 창당했다. 이 대회는 당 선언문과 강령을 채택했는데, 모두 평화 통일을 강조했다. 선언문은 “경제 문화 방위 등 제 부문에 걸친 건설을 촉진 수행하여 우리의 민주적인 주체적 역량을 확대 강화하고 이라함으로써 민주적 국토 통일을 평화적으로 실현” 할 것임을 표명했고, 강령은 “유엔 및 미국을 비롯한 민주 우방과의 긴밀한 협조 아래 우리 민족의 숙원인 남북통일을 민주적이고 평화적으로 실현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밝혔다.

그러나 1958년 1월 이른바 “진보당사건”으로 검거가 되었고 2월에는 진보당이 등록 취소가 된다. 7월 2일에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이 선고 되었으나 10월 4일 항소심과 1959년 2월 27일 상고심에서 모두 사형선고를 받고 7월 31일 사형이 집행되어 61세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Ⅳ. 리더쉽평가

  조봉암은 여운형, 박헌영, 김구 등과 함께 정권쟁탈전에서 실패한 공통점을 가지기도 하지만 정당을 창당하고 대통령선거에 입후보까지 해 상당한 지지를 획득한 점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어느 극단을 추구하기보다 통합적 조직력을 유지하려 했다는 것이 주요한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여운형, 김구 등도 중간적 성향을 가지긴 했으나 조봉암은 구체적인 정치지도체로서의 정당활동에 중심을 두었고 계속해서 조직을 만들어 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3.1운동 이후 일본에서의 흑도회 결성을 비롯해 서울로 돌아온 후 청년우원회, 노농총연맹, 조선공산당 등의 조직에 항상 간여했고 해방이후에도 민전을 결성하는 등 자신의 현실적 조직력을 만들어 갔던 것이다. 이와 함께 그의 개인성에 있어서도 주변으로부터 후한 평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목은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죽산은 불굴의 애국애족정신의 소유자임과 동시에 신념의 사람이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은 불퇴전의 기개로써 즉각 행동에 옳기고, 그칠 줄 모르는 실천에 의해 그 실현에 힘썼다........ 특히 진보적 정치운동에 참여한 정치가로서의 위대성이 있었다. 이것은 평생 변함이 없었다....... 죽산의 정치가로서의 자질은 두드러진 것이었으며, 그를 다른 정치가와 크게 구별할 특징을 이룬 귀중한 자질이었다.”


그리고 부통형 후보로 나섰던 박기출은 이렇게도 평가를 한다.


“...... 그 성격 가운데 씻을 수 없는 혁명가적인 기품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사람을 대우하는데 있어서 언제나 혁명가다운 대범성을 청산 못하고 있었다. 이해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정치적인 바탕에서 우왕좌왕하는 자들까지도 신념과 생명을 걸고 같이 싸우던 참된 맹우와 같이 취급하는 습관이 남아 있었다. ........ 말하자면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고 따라서 대인관계에 세밀한 관찰과 주의가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참고자료

정태영, 오유석, 권대복(1999) 『죽산 조봉암 전집』제1, 3, 4, 6권, 세명서관

정태영(2006), 『조봉암과 진보당』, 후마니타스

권태복(1985), 『진보당』, 지양사

이영석(1983), 『죽산 조봉암』, 원음출판사

서중석(1999), 『조봉암과 1950년대〈상〉』, 역사비평사

박태균(1995), 『조봉암 연구』, 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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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아이디어는 좋지만

권영길 후보가 깜짝 생활공약이라는 것을 내놓았다고 한다.

5개가 된다는데 기억에 남는 건

명절고속도로이용요금 인하와 대학등록금 카드납부 안착화정도.

 

명절에 많은 사람들이 고속도로를 이용하니

인하한다고 해도 도로공사가 손해보는 것은 크지 않겠다.

그런데 이왕 내놓을 거면 '무료화' 이렇게 하는게 더 반향이 크지 않았을까?

명절이라고 고향가는데 이름값하지 못하는 '저속도로'운행하려면

그 짜증이 도로위에 쫙~ 깔릴 터이니 그에 대한 보상이라도 해줘야지 않을까.

 

그리고 대학등록금 카드납부 안착화 이거는 좀 생각할 부분이다.

예전에 각 은행사나 카드사별로 등록금 할부를 다 했었는데

어느 때인가 부터 사라지더니 이제는 아예 찾아보기도 힘들게 되었다.

일시에 그 많은 등록금을 부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나마 한 방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카드를 쓰면 수수료와 이자가 붙기 마련인데

등록금 금액이 워낙 크다보니 이자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나 같은 경우는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은행대출이자보다 더 많이 내야 했으니 말이다.

 

요즘은 주택공사하고 교육부하고 각 은행들이 제휴를 해서

등록금을 대출해 준다. 하지만 이 역시 대출이자가 만만치 않다.

200만원 빌리는데 연이자율이 6.8%에 이른다.

이공계와 학부, 대학원 등등 조건에 따라 이율이 달라지긴 하지만.....

아~ 이공계는 이자가 없다. 졸라 부러웠다. 힘들기는 이공계나 인문계나

마찬가지인데.................

 

자~. 그럼 본론으로 돌아가

등록금 카드 납부에 대해 얘기를 하면

그것이 다시 활성화된다 하더라도 과거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는 거다.

높은 이자율에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수 있다.

수수료에 이자를 합쳐서 원금의 30%에 이른다면 이건 거의

고리대금이다.

교육부에서 하고 있는 대출도 마찬가지다. 이왕 정부에서 신용보증을

할 거면 이자율이라도 낮추어 주든지. 이건 일반 은행대출이자보다 높으니

담보조건이 없다는 걸 제외하면 나을 바가 없다.

그저 울며 겨자먹기로 할 뿐이다.

 

그래서 말인데,

카드납부로 할 것이 아니라

학기내내, 6개월간 무이자로 분납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건 정부의 교육예산 확충과 대학등록금 상한제

같은 걸 해야 한다. 이건 그간 당에서 공약으로 내세운바도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얼마전 최순영 의원실에서 발표한 내용에 의하면 각 대학별로

엄청난 돈을 쌓아 두고 있으면서도 해마다 등록금을 인상한다는 거다.

이거 못하게 해야 한다.

이런걸 통해서 무상교육을 앞당겨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봤을 때 권영길 후보가 내놓은 등록금 카드납부 안착화는

서민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도 못할 뿐더러 근본적 대안도 될 수 없다.

앞으로 많은 공약들을 쏟아 낼 텐데,

제발 그동안 당에서 내놓은 내용이라도 잘 써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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