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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24
    "이것은 사람의 말" 6.9 작가선언
    흑무
  2. 2009/06/24
    정치에도...........- 경향 09.06.20
    흑무
  3. 2009/06/24
    박근혜의 침묵 - 경향 09.06.23
    흑무
  4. 2009/06/24
    요것들봐라 - 국민행동본부
    흑무
  5. 2009/06/22
    놓아주기
    흑무
  6. 2009/06/22
    남모르게 흘린 땀과 눈물
    흑무
  7. 2009/06/22
    '두번째 일'
    흑무
  8. 2009/06/22
    뿌리를 내릴 때까지
    흑무
  9. 2009/06/22
    젊었을 적의 내 몸은
    흑무
  10. 2009/06/19
    경향 - 동아일보의 경향신문 왜곡 2009.06.19
    흑무

"이것은 사람의 말" 6.9 작가선언



이것은 사람의 말   6.9 작가선언


작가들이 모여 말한다.
우리의 이념은 사람이고 우리의 배후는 문학이며 우리의 무기는 문장이다.
우리는 다만 견딜 수 없어서 모였다.

 

 


모든 눈물은 똑같이 진하고 모든 피는 똑같이 붉고 모든 목숨은 똑같이 존엄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은 극소수 특권층의 이익을 위해 절대 다수 국민의 눈물과 피와 목숨을 기꺼이 제물로 바치려 한다.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수치스럽고 고통스럽다. 본래 문학은 한계를 알지 못한다. 상대적 자유가 아니라 절대적 자유를 꿈꾼다. 어떤 사회 체제 안에서도 그 가두리를 답답해하면서 탈주와 월경을 꿈꾸는 것이 문학이다. 그러나 문학 본연의 정신을 되새기는 것이 차라리 사치가 되어버린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다급한 마음으로 1987년 6월을 떠올린다. 박종철의 죽음이 앞에 있었고 이한열의 죽음이 뒤에 있었다. 그 죽음들의 대가로 민주주의를 쟁취했고 힘겹게 그것을 가꿔왔다.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아니다.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을 망각할 권리가 없다. 이명박 정권 1년 만에 대한민국은 1987년 이전으로 후퇴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가 하나의 정부인 작가들이 이 자리에 모였다. 조직도, 집행부도, 정강도 없다.
 


우리는 특정한 이념에 기대어 발언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가 아무런 이념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세운 ‘중도실용주의’라는 가짜 이념은 집권 1년도 못 돼 폐기해야 할 대상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도처에서 헌법 위에 군림하는 독재의 얼굴을 본다. 용산 철거민들의 생존권을 짓밟는 와중에 여섯 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가고도 이명박 정부는 끝내 사죄하지 않았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강행하여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지만 저들이 행한 일은 위선적인 사과와 광범위한 탄압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언론 장악을 기도했고 도심 광장과 사이버 광장에 차벽을 치고 철조망을 세웠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사태는 이 정부가 시대착오적인 색깔론과 천박한 관료주의로 문화예술의 토대를 위협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전직 대통령을 겨냥한 사상 최악의 표적수사와 비열한 여론몰이는 그를 벼랑에서 투신하게 하였다. 민주주의의 가치는 매장되었다.
 


이 모든 일에 적극 가담한 정치검찰과 수구언론을 우리는 민주주의의 조종(弔鐘)을 울린 종지기들로 고발한다. 살아있는 권력에는 굴종하고 죽은 권력에는 군림하면서 영혼을 팔고 정의를 내던진 정치검찰들, 증오와 저주의 저널리즘으로 민주화의 역사를 모독하고 민주주의의 가치들을 조롱하는 수구언론에 우리는 분노한다. 우리가 저들과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참혹해진다. 저들을 여전히 검찰과 언론이라고 불러야 하나. 곰팡이가 온 집을 뒤덮었다면 그것은 곰팡이가 슨 집이 아니라 집처럼 보이는 곰팡이일 뿐이다. 저 권력의 몸종들과 함께 민주주의의 일반 원리와 보편 가치를 무자비하게 짓밟으면서 달려온 이명박 정권 1년은 이토록 참담하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에게서 우리는 깊은 절망을 느낀다. 저들은 수치를 모르고 슬픔을 모른다. 수치와 슬픔을 아는 것이 사람이고, 사람됨이라는 가치에 헌신하는 것이 문학이다. 우리는 문학의 이름으로 이명박 정부를 규탄한다.
 


이곳은 아우슈비츠다. 민주주의의 아우슈비츠, 인권의 아우슈비츠, 상상력의 아우슈비츠. 이것은 과장인가? 그러나 문학은 한 사회의 가장 예민한 살갗이어서 가장 먼저 상처입고 가장 빨리 아파한다. 문학의 과장은 불길한 예언이자 다급한 신호일 수 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과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면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종이와 펜이 있다. 그러니 동의하지 않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끝내 저항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정원을 갈아엎고 있는 눈먼 불도저를 향해, 머리도 영혼도 심장도 없는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에게 저항할 것이다. 가장 뜨거운 한 줄의 문장으로, 가장 힘센 한 문장의 모국어로 말할 것이다. 사람의 말을, 사람만이 할 수 있고 사람이니까 해야 하며 사람인 한 멈출 수 없는 그 말을. 아름답고 정의로운 모든 문학의 마지막 말, 그 말을.


 

우리는 작가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말을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글을 씁니다.
우리는 각자의 나라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쓰는 글의 바탕에 언제나 인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념이 아니라 사람의 편에 섭니다.

우리는 모였습니다.
참혹한 오늘을 불러온 것도 우리이지만
참다운 내일을 만드는 이도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권의 야만에 분노합니다.
사람의 설 자리가 사라진 현실에 분노합니다.

우리는 보고 싶습니다.
이견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민과 소통할 줄 아는 정치가의 얼굴을.
우리는 듣고 싶습니다.
아첨과 왜곡의 목소리가 아니라 공정하고 진실된 언론의 발언을.
우리는 느끼고 싶습니다.
이 땅의 주인은 국민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확신과 자부를.
우리는 되찾고 싶습니다.
본래 우리 것인 광장과 집과 대지, 스스로 흘러 생명일 수 있는 강물을.
우리는 꿈꾸고 싶습니다.
그 어떤 권력에 의해서도 사람이 죽어나가지 않는 사회,
양심과 이성이 죄가 되지 않는 세상,
자유와 평등은 원래 사람의 것이라 믿고 자라날 수 있는 아이들의 미래를.

우리는 입을 엽니다.
이것은 사람의 말입니다.

 





'한줄선언' 참가자 명단

강경희 강성은 강 진 고나리 고명철 고봉준 고인환 고찬규 곽은영 구효서 권 온 권혁웅 권현형 권희철 김경인 김경주 김경후 김 근 김나영 김남극 김남혁 김대성 김명기 김미월 김미정 김민정 김사과 김사람 김사이 김 산 김선재 김성중 김소연 김 안 김양선 김애란 김 언 김연수 김요일 김윤환 김이강 김이은 김이정 김자흔 김재영 김정남 김정란(소설가) 김지녀 김지선 남상순 맹문재 명지현 문동만 문혜진 박대현 박민규(시인) 박 상 박상수 박성원 박수연 박슬기 박시하 박연준 박정석 박창범 박형서 복도훈 박형숙 박형준 박혜상 방현희 배영옥 백가흠 백지은 서성란 서안나 서영식 서영인 서효인 서희원 성기완 손세실리아 손홍규 송기영 송승환 송종원 신용목 신해욱 신형철 신혜진 심보선 안상학 양윤의 양진오 여태천 오창은 우대식 원종국 원종찬 유용주 유정이 유형진 유홍준 윤성희 윤예영 윤이형 윤지영 이경재 이기성 이기호 이덕규 이도연 이동욱 이만교 이문재 이민하 이선우 이성미 이성혁 이순원 이시영 이신조 이 안 이영광 이영주 이용임 이용헌 이은림 이장욱 이진희 이 찬(평론가) 이현승 이현우(로쟈) 이혜경 이혜미 임수현 임영봉 임지연 장무령 전도현 전성욱 전성태 전형철 정여울 정영효 정우영 정은경 정주아 정한아(시인) 정혜경 정홍수 조강석 조동범 조성면 조연정 조연호 조용숙 조원규 조 윤 조 정 조해진 조형래 조효원 주영중 진은영 차미령 채 은 천운영 천수호 최성각 최진영 최창근 하성란 하재연 한세정 한용국 한지혜 함기석 함돈균 해이수 허병식 허윤진 허 정 홍기돈 홍준희 황광수 황규관 황호덕 총18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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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도...........- 경향 09.06.20

정치에도 ‘스프레차투라’가 필요하다(김학순 선임기자) - 경향 09.06.20 -------------------------

 

데코로, 스프레차투라, 그라지아. 이탈리아 음악가들은 17세기부터 이 세 가지가 어우러져야 감동적이고 장려한 연주가 완성된다고 여겼다. 데코로는 준비와 노력을 의미한다. 이는 연구, 확인, 리허설, 반복 같은 쓸데없어 보이기도 하는 힘든 작업을 통해 준비하는 외로운 과정이다. 스프레차투라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무척이나 쉬운 것처럼 세련되게 해내는 것을 뜻한다. 스프레차투라는 데코로 없이 불가능하다. 데코로와 스프레차투라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면 자연스레 나타나는 게 우아한 아름다움인 그라지아다.

이 가운데 스프레차투라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인들이 높이 샀던 미덕이자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이탈리아 장인 정신의 뿌리다. 스프레차투라는 원래 ‘거만하게 굴다’ ‘경멸하다’ ‘싼 값을 매기다’란 뜻이었다. 르네상스기를 거치면서 ‘힘든 일을 쉽고도 노련하게 해내는 천재의 방식’을 지칭하는 말로 진화했다. ‘무심한 듯하지만 세심하게, 유유자적하면서도 능란하게’가 스프레차투라의 함축미다.

‘기술이 아닌 듯 보이는 기술’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기술을 숨기는 것이 기술’이라는 옛 라틴어 격언이나 ‘기술은 절로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로마 시인 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의 말과 맥락을 같이한다. 요절한 천재 미술사학자 고유섭이 ‘무기교의 기교’라는 모순어법으로 한국의 미를 평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어쩌면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은 그 재주를 자랑하지 않으므로 도리어 서툰 것처럼 보인다고 했던 노자의 ‘대교약졸’(大巧若拙)과도 상통하는 듯하다.

스프레차투라 정신을 처음으로 정리한 사람은 르네상스 시대의 궁정 문인이자 외교관이었던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였다. 그는 1528년에 출간된 <궁정인>에서 귀족들의 예의범절을 상세하게 규정하면서 스프레차투라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궁정 신하는 뭐든지 태연하게 행동하도록 연습함으로써, 예술적 기교를 감추고 말과 행동이 꾸며냈거나 공들여 만든 것이라는 인상을 주지 말아야 한다. 힘들게 일을 행하고 그것에 계속 신경을 쓰는 것은 우아함과 기품이 없어 보이며 그가 어떤 일을 행하든 무시하게 된다.”

21세기에 접어들어 피터 데피로와 메리 데스몬드 핀코위시가 함께 쓴 <스프레차투라>(서해문집)에서는 이탈리아가 배출한 천재들의 이면에 감춰져 있는 각고의 피와 땀을 엿볼 수 있다. 르네상스의 위대한 예술가들은 작품을 창조하는 과정을 철저히 숨겼다. 미켈란젤로는 교황에게조차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후원자에게도 자신의 작업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중간 과정을 공개하면 자연스러운 아름다움과 걸작을 대면하는 순간의 경외감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시를 쓰거나 오페라를 작곡할 때, 그림을 그리거나 대리석을 매만질 때, 먼 바다를 항해하거나 의학을 연구할 때도 수많은 이탈리아 천재들은 스프레차투라를 생명처럼 여겼다. 엄청난 집중력과 끈질긴 노력의 산물이었음은 물론이다. 이탈리아 문명의 정수(精髓)인 기능성과 아름다움은 바로 스프레차투라에서 나왔다. 지은이들은 이를 ‘미학적 실용주의’라고도 표현한다. 기품 있는 귀부인의 이상적 덕목도 스프레차투라와 우아미(優雅美)였다.

스프레차투라 정신이 정작 요긴한 곳은 권력을 경영하는 정치권이다. 잔머리나 꼼수, 한건주의는 스프레차투라와 거리가 멀다. 기교의 정치는 한 수 위의 유권자들에게 금방 들통 나게 마련이다. 최고의 정치 기술은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서 영향력을 발휘하며 정치공학의 티가 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엔 ‘데코로’에 바탕을 둔 수준 높은 내공이 필수적으로 뒷받침돼야 한다.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 T. S. 엘리어트는 교활, 표리부동, 비도덕적 책략, 무자비의 상징처럼 알려진 마키아벨리가 실제로는 가장 마키아벨리적이지 않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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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침묵 - 경향 09.06.23

...........(생략)  박 전 대표는 “지도자의 철학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 맥락에서 그의 침묵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대선이 다가올 때까지 가능한 한 검증을 피하겠다는 신비주의 전략으로 비치기 십상이다. 친박 챙기기에 대한 의혹까지 겹치면 오해는 배가될 수 있다. ‘경제 대통령’ 구호에 함몰됐던 지난 대선은 교훈을 남겼다. 지도자의 철학에 대한 사전검증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사실이다. 검찰이 방송작가의 개인적 e메일까지 뒤지고 공개하는 건 사상 검열이지만,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이는 다르다. 실력과 철학, 세계관에 대해 속속들이 검증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국가 지도자를 꿈꾸는 정치인의 침묵은 직무유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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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것들봐라 - 국민행동본부

국민행동본부 "盧 전 대통령 분향소 치웠다"
연합뉴스 | 입력 2009.06.24 09:21 |

 

보수단체인 국민행동본부는 고엽제 전우회와 함께 덕수궁 대한문의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를 없앴다고 24일 밝혔다.

국민행동본부 서정갑 본부장은 연합뉴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국민행동본부 소속 애국기동단 요원 20명과 고엽제 전우회 회원 30명이 오늘 오전 5시40분께 분향소를 치웠다. 노 전 대통령 영정은 훼손하지 않고 따로 보관하고 있으며 오후 2시께 경찰에 넘길 예정이다"고 말했다.


서 본부장은 분향소를 파손한 사람을 재물손괴 혐의로 입건한다는 경찰 방침에 대해 "불법 시설물을 치운 것이라 잘못이 없다. 오히려 해당 시설물을 놔둔 경찰이 직무 유기를 했다"고 반박했다. 
 

--------------  지난 3월에 국민행동본부는 '애국기동대'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좌익세력에 의해 무너진 법치를 세운다', '법치가 무너지고 공권력이 무기력한, 개탄할 상황'  '친북 좌익세력의 척결'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했다. 활동안하나, 싶었는데 요즘 이런 일을 하고 있구나. 

'감히 노대통령님의!!' 뭐 이런것은 아니고,

이들이 우파의 한 축으로, 정권의 수족으로, 맡은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는데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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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아주기

놓아주기


과거나 환상 혹은
부수적인 것에 집착하는 한
새로운 것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놓아줌은 자신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놓아준다는 것은 당신이 기다리는
은총이 올 수 있도록 자신과 인생에
자유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 뤼디거 샤헤의《마음의 자석》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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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모르게 흘린 땀과 눈물

남모르게 흘린 땀과 눈물


"얼마 전에 맥이 그러더군.
'꿈을 이룬 사람들의 웃는 얼굴,
그 주름살에 숨어 있는 땀과 눈물의 흔적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지. 맥은 이 말에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더군.
"하나는 '그 사람들이 지금은 웃고 있어서,
편안하게 그 자리에 오른 것처럼 착각하기 쉽지만,
그들이 그 과정에서 겪은 고통은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다'는 거야. 또 하나는
'비록 그들이 꿈을 이루어서 겉보기에는 행복해 보이지만,
그들 역시 우리와 다를 바 없이 남모를 고통과
슬픔을 겪고 있다'고 말이야."


- 스탠 톨러의《행운의 절반 친구》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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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일'

'두번째 일'


'두번째 일'을 가져라
나의 본업은 의사이지만,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것이
내게는 '두번째 일'에 해당한다. 이것은 취미라고 하기에는
내 인생에 있어 무척 소중한 일이며, 나는 나름의 소명의식을
가지고 글쓰기에 임한다. 막연히 취미로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확실한 목표를 가지면 더욱 좋다.
인생의 기둥이 두 개가 되는 것이다.
일생을 걸고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더 생긴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 마음은
풍요로워질 것이다.


- 사이토 시게타의《유쾌한 카리스마》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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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일, 까지는 아니고 요즘 들어 테니스를 다시 시작하든,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든, 뭔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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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내릴 때까지

뿌리를 내릴 때까지


스스로 선택한 곳에서
뿌리를 내릴 때까지 어떤 일이든 지속하십시오.
그런 당신의 성장을 꼭 보고 싶습니다.


- 안젤름 그륀의《머물지 말고 흘러라》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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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적의 내 몸은

젊었을 적의 내 몸은


젊었을 적의 내 몸은
나하고 가장 친하고 만만한 벗이더니
나이 들면서 차차 내 몸은 나에게 삐치기 시작했고,
늘그막의 내 몸은 내가 한평생 모시고 길들여온,
나의 가장 무서운 상전이 되었다.


- 박완서의《호미》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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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조금, 부대끼기 시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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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 동아일보의 경향신문 왜곡 2009.06.19

[기자메모]동아일보의 경향신문 왜곡

 

동아일보는 19일자 A8면에 <경향신문, 민노총과 구독 확장 ‘거래’>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경향신문과 민주노총이 함께 벌이고 있는 ‘희망릴레이’ 사업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경향신문이 민주노총과 구독 확장을 위한 ‘거래’를 하고 있고, 이로 인해 경향신문은 민주노총을 제대로 비판할 수 없다는 것이 기사의 골자다.

반론에 앞서 ‘희망릴레이 사업’의 내용을 먼저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 경향신문과 민주노총은 지난해 3월부터 ‘비정규직 차별 철폐 희망릴레이’라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이 경향신문을 구독할 경우 월 구독료 1만5000원 중 40%인 6000원을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위한 기금으로 적립하는 내용이다.

동아일보의 주장대로 ‘희망릴레이’ 사업이 저널리즘의 원칙에 반하는 불순한 ‘거래’인지 따져보려면 세 가지 기준이 필요하다.

첫째 사업의 불법성 여부다. 현행 신문고시는 월 구독료의 20% 이상을 경품으로 제공하는 행위를 금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개인 독자에게만 적용된다. 경향신문은 “개인이 아닌 단체의 경우 경품 관련 조항은 적용되지 않는다”는 신문협회의 유권해석을 얻었다. 동아일보 서울 지국 30곳 전체가 무가지와 경품을 제공해 구독자를 늘린 것은 ‘불법’이지만, 경향신문의 ‘희망릴레이’는 ‘합법’이다.

둘째, 사업의 윤리적 하자 문제다. ‘희망릴레이’는 월 구독료의 40%를 ‘비정규직 차별 철폐 기금’으로 적립하도록 하고 있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민주노총 조합원의 관심도를 높이고, 그와 연계해 경향신문 독자 수도 늘리겠다는 취지다. 적어도 상품권·현금·시계·선풍기·전화기 등을 제공해 독자를 모으는 행태보다는 윤리적으로 떳떳하다.

셋째, ‘희망릴레이’가 민주노총과 관련된 경향신문의 논조에 영향을 미치는지 여부다. 동아일보는 소위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 “민주노총 기관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지난해 중앙 정부부처로부터 수주받은 광고액이 전년 대비 432% 증가한 동아일보가 정부의 기관지로 전락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희망릴레이’는 경향신문의 논조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민주노총에 문제가 있을 때마다 어느 매체보다 비판해온 언론이 경향이다.

이는 올 들어 보도된 경향신문의 노동기사 목록만 검색해봐도 알 수 있다. 민주노총 간부의 성폭력 사건은 경향신문의 보도로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이로 인해 이석행 집행부가 총사퇴하는 등 민주노총은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 민주노총은 경향신문에 법적 대응 방침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보도 내용이 사실로 확인되면서 없던 일이 됐다. 이 밖에 ‘민주노조운동 20년, 위기의 민주노총’ 등 민주노총의 문제점을 진단하는 기획 기사도 여럿이다.

끝으로 기사의 사소한 오류도 몇 개 짚어주고 싶다. 동아일보는 ‘희망릴레이’ 사업이 마치 최근에 알려진 것처럼 ‘나타났다’고 보도했는데, 이 사업은 지난해 3월 민주노총 홈페이지 등을 통해 공개적으로 진행됐다. 어지간한 노동부 출입 기자들은 ‘1년 전부터’ 알고 있던 내용이다.

또 동아일보는 경향신문 사업 담당자인 ‘판매국 김주희 차장’의 발언을 인용했다. 기사에 따르면 김 차장은 “경향신문과 민주노총은 전적으로 비정규직 차별 철폐 기금을 마련한다는 차원에서 사업을 시작한 것… 기금도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만 국한해 쓰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독자서비스국 김주이 차장’을 ‘판매국 김주희 차장’으로 오기한 것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문제는 김 차장이 기사에 인용된 발언을 전혀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김 차장은 동아일보 기자의 질문에 “내가 답을 해야 할 의무도 책임도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동아일보의 해명을 기대한다.

<정제혁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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