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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8/07
    생각의 산파
    흑무
  2. 2009/08/07
    엄마의 일생
    흑무
  3. 2009/08/07
    눈물을 닦아주며
    흑무
  4. 2009/08/06
    내면의 어른
    흑무
  5. 2009/08/06
    경향 ‘쌍용차 해결 호소’ 일부종단의 침묵 2009.08.06.
    흑무
  6. 2009/08/06
    경향 - 어제의 오늘 / 임화 2009.08.06
    흑무
  7. 2009/08/06
    경향 표정관리 - 2009.08.06
    흑무
  8. 2009/08/06
    경향 '반지성적 언론'- 2009.08.06.
    흑무
  9. 2009/08/05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잘 안다
    흑무
  10. 2009/08/05
    순간순간, 날마다, 달마다
    흑무

생각의 산파

생각의 산파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 나간다.


- 알랭 드 보통의《여행의 기술》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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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일생

엄마의 일생


단 하루만이라도 엄마와 같이
있을 수 있는 날이 우리들에게 올까?
엄마를 이해하며 엄마의 얘기를 들으며
세월의 갈피 어딘가에 파묻혀 버렸을 엄마의 꿈을
위로하며 엄마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내게 올까?
하루가 아니라 단 몇 시간만이라도 그런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엄마에게 말할 테야. 엄마가 한 모든 일들을,
그걸 해낼 수 있었던 엄마를,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엄마의 일생을 사랑한다고.
존경한다고.


- 신경숙의《엄마를 부탁해》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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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닦아주며

눈물을 닦아주며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 정호승의 시집《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에
실린 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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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어른

내면의 어른


바쁜 일상 속이지만
기회가 있을 때면 잠시 마음속을
들여다보자. 그리고 내면의 어른을 상상하자.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나 말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이야기하자. 그의 존재로부터
당신에 대한 그의 애정을 느낄 수 있으리라.
이 내면의 어른은 언제라도 당신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 드류 레더의《나를 사랑하는 기술》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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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쌍용차 해결 호소’ 일부종단의 침묵 2009.08.06.

‘쌍용차 해결 호소’ 일부종단의 침묵

 

"쌍용차는 전쟁터예요. 사측이 전기를 끊어버려 농성장 안에 있는 남편과 통화도 못해요. 물·음식은 물론 의료품도 들여보내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쌍용차 노조 가족 이정아씨(35)의 절규다. 전쟁터에서도 부상당한 적군을 치료해 주는데, 평택의 전장에서는 최소한의 휴머니즘조차 증발됐다. 신랄한 이들은 평택을 ‘아우슈비츠’ ‘80년 광주’에 비유한다. 경찰이 뿌려대는 발암성 최루액이 농성장으로 쏟아지는데, 농성장 밖 가족은 농성장 안 가족의 안위를 알지 못한다.

첨예한 대치 속에 공권력이 이미 투입됐고, 협상은 타결이 난망한 상황에서 농성장 밖 가족들이 절박한 심정으로 마지막으로 기댄 곳이 ‘종교계’다. 가족들은 정진석 추기경을 만난 자리에서,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을 만난 자리에서 노조 측의 ‘전원 고용’ 구호를 외치지 않았다. “스님, 신부님이 ‘인권 유린’만이라도 막아달라”고 했다.

이런 절박한 호소를 외면하기는 힘들었을 터. 천주교·개신교·불교·원불교·유교·천도교·민족종교 등 7대 종단이 모인 종교지도자협의회는 5일 아침 쌍용차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기로 결정했다. 시민·사회단체와 언론의 비판과 지적에 모르쇠로 일관하는 공권력도 한국을 대표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단일한 의견에는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지 않을까. 헛된 기대였다.

한 종교계 인사의 전언이다. “몇몇 종단에서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다는 의견을 냈어요. 언제 다시 종교 지도자들이 의견을 낼지 모르겠습니다.” 기자회견은 이렇게 돌연 연기됐다. 김대기 문화부 제2차관도 이날 오전 지관 스님을 찾아 “곧 해결될 수 있는데 (기자회견은)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다”는 의견을 전했다고 한다. 지관 스님은 김 차관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지만 정부 측 입장이 다른 종단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몇몇 종교지도자들이 정부 눈치를 본 것 아니냐는 듣기 민망한 추측도 나온다. 종교인들의 침묵이 자초한 결과다.

‘적절치 않은 시기?’ 경찰은 5일 현재 도장2공장을 제외한 모든 건물을 장악했다. 인화 물질이 가득한 공장 특성상 자칫하면 용산참사 같은 인명 피해도 배제할 수 없다. 종교인들이 마땅히 나서야 할 시기인데, 그들은 결국 침묵을 택했다. 재난과 수난을 목전에 둔 평택에서 무조건적 사랑과 평화라는 종교의 가치는 실종됐다.

<김종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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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 어제의 오늘 / 임화 2009.08.06

[어제의 오늘]1953년 시인 임화 북한에서 처형

 

ㆍ남·북서 배척당한 비극의 시인

1953년 오늘 시인 임화가 북한에서 처형당했다. 45세. 그는 휴전 직후 남침 실패의 책임을 물어 박헌영 등 남로당계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진행되면서 ‘미제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총살형에 처해졌다.

본명이 임인식인 임화는 시인인 동시에 혁명가였다. 29년 ‘우리 오빠와 화로’ ‘네거리의 순이’ 같은 단편 서사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의 샛별로 떠올랐다. 21세 때였다. 그는 또 26년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가입한 이래 조직의 중추로 활동했다. 24세 때인 32년 카프의 서기장이 됐다. 임화는 ‘모던 보이’이기도 했다. 보성고 재학시절 이웃한 숙명여고 학생들로부터 ‘연애박사’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미소년이었다. 영화 <유랑> <혼가>에 주연으로 출연했고 전위예술인 다다이즘에 심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의 군국주의가 강화되면서 그의 입지는 좁아졌다. 일제의 탄압으로 35년 카프가 해산되면서 정치 투쟁의 길이 봉쇄되자 그의 평론 활동은 문학 내적인 방향으로 회귀하게 된다. 세태소설론·본격소설론 등의 평론과 <개설 신문학사> 등을 발표했다. 그러나 일제말 결국 전향하면서 친일문인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에 가입하기도 했다.

8·15 광복 이후 임화는 ‘조선문학건설본부’와 그 후신인 ‘조선문학가동맹’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다가 47년 10월 월북했다. 황해도 해주에서 문화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빨치산과 인민군 군가로 사용된 ‘인민항쟁가’의 노랫말을 짓기도 했다.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서울에 온 임화는 ‘조선문화총동맹’을 조직하고 부위원장 자리를 맡다가 인민군의 퇴각과 함께 다시 북으로 돌아갔다.

박헌영 등 남로당계를 지지하는 노선을 견지하던 임화는 김일성 쪽으로 노선을 전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친일 경력과 남로당계라는 꼬리표는 그를 족쇄처럼 따라다녔고 결국 숙청의 비극을 맞이하게 됐다.

문학과 사상과 정치의 전위에 나섰던 임화의 비극적 종말은 격동의 한국 근대사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사후에도 임화라는 이름은 남북 양쪽에서 금기어였다. 북한에서는 모든 문학기록이 삭제되면서 반동작가, 미제 간첩이라는 평가만 남았다. 남한에서도 월북작가로 접근 자체가 금지되다 88년 해금조치로 빛을 보게 됐다.

<김진우기자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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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표정관리 - 2009.08.06

여적./  표정관리.

 

얼굴에는 80여개의 근육이 있고 이 근육들로 지을 수 있는 표정이 7000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화낼 때는 53개, 웃을 때 13개의 근육이 쓰인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근육들을 조합해 무표정, 우는 표정, 놀란 표정, 비웃는 표정, 한심하다는 표정, 배고픈 표정, 고독한 표정 등 무궁무진한 표정들을 짓는다. 그러고 보면 호모 사피엔스, 호모 에코노미쿠스, 호모 루덴스는 표정의 동물이기도 하다. 이 표정짓기에 뛰어난 사람들이 배우가 되는 것일 게다.

표정관리란 말을 종종 쓴다. 비단 연기를 업으로 하는 배우뿐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일상생활에서 표정을 관리한다. 그래야 할 때가 많다. 경조사 때 분위기에 맞는 표정을 짓는 것도 표정관리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본격적인 표정관리가 작동하는 것은 사생활보다는 공적 생활 영역에서다. 정치인들은 표정관리에 능하다. 타고 나서가 아니다. 이들에게는 표정관리가 표 관리만큼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간혹 국회에서 철면피한 모습을 드러내며 표정관리를 포기한 듯한 의원들에게도 나름의 심모원려(深謀遠慮)가 있다. 내심 그게 진짜 표정관리이며 표 관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표정관리는 국제협상이나 사업에서도 즐겨 동원된다. 협상전문가 로저 도슨은 <협상의 심리학>에서 “유능한 협상가는 상대가 이겼다고 생각하며 협상을 마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그러려면 표정관리도 중요한 요소다. 표정관리라고 하면 좋은 인상을 풍기기 위해 항상 웃는 모습을 떠올리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안세영 서강대 교수는 “서양인과 상담할 때 헤프게 웃으면 안된다. 우리는 협상할 때 웃는 게 호의라고 여기지만 비즈니스를 하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서양인들은 ‘겉 다르고 속 다른 징표’라고 오해한다”고 충고한다. 표정관리도 시소에 따라 유연성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평양 방문 중 보인 표정관리가 자못 눈길을 끌었다. 기념촬영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활짝 웃는데 클린턴 전 대통령은 대비가 될 정도로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김정일은 북·미관계 돌파구의 기대에 차 있는 반면 방북 목적이 억류 자국민 석방인 클린턴은 입장이 달랐다. 하지만 “절대 웃지 말 것, 웃더라도 활짝 웃지 말 것”이란 북한 방문 고위급 인사들의 불문율을 클린턴이 지킨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

<김철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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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반지성적 언론'- 2009.08.06.

[문화로 읽는 세상] 반지성적 언론

 

강의 중에 가끔 대학생은 지성의 끝을 잡고 있다고 말한다. 왜 그런지 묻는 말에 몸은 지성의 세계에 들어와 있지만 그에 맞갖은 성찰적 태도와 책임있는 행동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지성이 지식의 양이나 전문성에 있지 않다는 데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지성의 무게에 맞는 자기성찰적 자세와 그에 상응하는 진정성이 부족할 때 그 지식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으며, 심지어 반지성적이기까지 하다. 지성의 진정성과 자기성찰은 자신의 자리, 그가 선 지금 여기의 존재를 근본에서부터 되돌아보고, 때로는 부정하면서 그 과정을 통해 더 높은 존재로 나아가는 데 있다. 이러한 자기부정과 드높임의 과정 없이 존재의 도약은 불가능하다. 모든 지성은 이런 의미에서 자기부정적이며 존재의 도약을 내포하는 자기초월적 존재이다.

이른바 ‘조·중·동’은 언론다운 언론인가. 그 안의 언론인들은 과연 지성인일까. 미디어법이 권력연장책인지, 조·중·동과 대기업에 언론 장악의 계기를 마련하려는 것인지 따위의 논의에 빠진 언론은 결코 지성의 끝자락에도 미치지 못한다. 국회 투표에서의 코미디보다 못한 행태는 물론 일자리 창출, 세계적 언론으로의 도약 따위의 헛소리에 눈감은 그들은 과연 진정성이란 것을 가지고나 있을까? 어떠한 자성의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그들 언론인은 전혀 지성적이지 못하다. 코미디보다도 못한 수많은 이 땅의 현실에 눈감고, 한 줌의 이익과 권력을 향한 언론인에게 반지성적이라고 말하면 그들은 화를 낼까, 아니면 조금이라도 낯뜨거워할까? 참 궁금하다.

이제는 진부해진 말, “언론은 사회의 목탁이다!” 나는 이 말을 중학교 교과서에서 처음 읽었다. 뭔가 있어 보여 기억은 했지만, 그때는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중학생인 아들도 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 이해하지 못함이 전혀 차원이 다르다. 그 아이는 확성기는 알아도 목탁은 모른다. 중학생이 중학생 아들을 두는 동안 목탁이 확성기가 되었기 때문일까?

조·중·동이란 조롱이 싫으면 언론답게 행동하라. 그들에 대한 비판이 정치적 공세에 불과하다면 진정으로 설득해 보라. 정말 미디어법이 필요하다면 정당하게 진행시켜라. 수많은 허구에는 침묵하면서 민생문제가 아니니 곧 잊혀지리라 생각한다면 당신들은 지성은커녕 언론조차도 되지 못한다.

그대 언론인들이여 진정 무엇을 원하는가? 인터넷의 쓰레기 논객이 보기 싫으면 스스로의 진정성과 자기성찰을 회복하라. 나도 그들이 싫다. 장자연 리스트, 삼성 사건들, 동아일보의 OCI주식 매입 의혹 등에 침묵하는 것이 당신들의 진정한 얼굴인가. 이 땅의 이념과잉과 경제만능의 저급함, 그들의 천박함과 흘러넘치는 맹목이 결국 자기이익에 매몰된 껍데기 지성인 때문임을 정녕 모르진 않을 게다.

스스로 학문하지 못할 때 이 땅의 학문이 자기배반적이듯이, 조·중·동이란 말과 파당적 보도, 자사이익이나 권력 문제를 풀지 못하는 언론은 곧 그 끝을 보게 될 것이다.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나는 미디어법 파동에서 반지성적 언론과 이 땅의 기득권이 무너지는 먼 소리를 듣는다. 되돌릴 수 없기 전에 자기성찰과 자기부정을 통한 존재의 도약을 생각하라. 그나마 지성의 끝자락이라도 잡고 싶다면.

<신승환 | 가톨릭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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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잘 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잘 안다


사랑하는 것과
알게 되는 것은 거의 같은 것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잘 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 헤르만 헤세의《헤세의 사랑》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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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순간, 날마다, 달마다

순간순간, 날마다, 달마다


순간순간,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어떤 시간이나 자기가 더 바람직하게 여기는
삶을 살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것은 "내일은 새로운 날" 이라는
옛말과 통한다.


- 헬렌 니어링, 스코트 니어링의《조화로운 삶》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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