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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1
    최선을 다하는 자유
  2.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2
    최선을 다하는 자유
  3.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3
    최선을 다하는 자유
  4.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4
    최선을 다하는 자유
  5.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5
    최선을 다하는 자유
  6.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1
    최선을 다하는 자유
  7.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2
    최선을 다하는 자유
  8.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3
    최선을 다하는 자유
  9.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4
    최선을 다하는 자유
  10. 2005/01/15
    <공산당선언>과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 김수행1998
    최선을 다하는 자유

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3

세계노동운동사 [6장] 사회주의 대 파시즘 (1917~1945) 3

미국 노동자들의 산별노조 건설

미국이 세계 경제를 선도하는 기관차가 된다.

미국은 79억 달러의 빚을 진 채무국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세계에서 으뜸가는 채권국이 되어 종전을 맞는다. 반면에 유럽 국가들은 4년 이상 지속된 세계대전으로 경제에 심대한 타격을 입고 총 160억 달러의 빚을 진 채무국으로 전락한다. 세계대전이 세계 경제의 중심을 유럽에서 미국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또한 미국에서는 자동차 산업이 이미 경제의 기관차 역할을 하고 있었다. 헨리 포드는 1907년부터 대중적인 ‘T모델’ 자동차를 개발·양산하여 자동차 보급 속도를 놀랄 만큼 빠르게 만든다. 1930년까지 등록된 자동차 수가 유럽 전역에서 520만 대인데 비해 미국에서는 2650만 대나 된다. 포드는 대량 생산을 위해 부품을 규격화하고 작업을 기계화하여 표준화된 제품을 생산하고 컨베이어로 상징되는 자동 운반 장치를 도입해서 모든 부문의 생산 활동을 일관 조립 작업으로 통합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노동 강도가 높아진 노동자들에게 높은 임금을 제공하여 그들의 구매력을 증대시킴으로써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가능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자동차 산업과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강철·기계·유리·고무·전기·석유·건설 산업이 1920년대의 산업 발전을 선도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투기 열풍이 엄청나게 일어난다.

미국에 이어 독일·영국·프랑스에서도 1920년대부터 포드주의가 확산된다. 이에 따라 유럽 주요 국가의 산업은 1925년에 전쟁 전의 수준으로 회복하고 1920년대 후반에는 패전국 독일까지도 경제가 빠르게 성장한다.

1920년대에는 중요한 기술 발전은 일어나지 않지만 이전에 발명했던 기술들을 완성하고 상품 생산에 응용함으로써 경제가 더욱 발전한다. 라디오는 이미 1차 세계대전 중에 군대에서 사용되었지만, 1920년대 초에 와서 일반인을 위한 오락 프로그램이 정규 방송의 전파를 타면서 곧 값싸고 다루기 쉬운 제품으로 되어 영국과 독일에서는 10년도 안 되는 기간에 200만 대씩 보급된다.

자본주의 예언가들은 경제 발전에 도취되어 “포드가 사회주의를 격퇴시켰다. 사회주의는 난센스다”라고 호언장담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발전에 있어서 다음의 두 시대를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국자본주의 시대, 이 시대에는 확장의 가능성에 한계가 있었다. 그 뒤의 미국자본주의 시대, 이 시대에는 최신의 기술 진보를 토대로 무한한 확장과 발전이 가능하다. 제1의 시대에는 맑스와 라살레가 상징적이었다. 제2의 시대에는 포드가 상징적이다.” “맑스와 엥겔스가 논한 번영과 공황이 주기적으로 교대하는 순환적 발전이 들어맞는 것은 초기 자본주의뿐이다.” “우리는 자유 경쟁과 시장의 맹목성이 지배하던 자본주의 시대를 대체로 극복한 시기에 있으며, 경제의 자본주의적 조직화에 도달하고 있다.”

이러한 일반적 경향을 총괄하여 렌쯔는 이렇게 비판한다. “개량주의 이론가들은 노동 조건에 대한 국가 통제의 증대, 국가자본주의로의 경향, 노조가 자본주의 국가의 보조 조직 또는 자본주의 사회의 집행 기관으로 변모한 것들을 가지고 경제상의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로 접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노조 지도부는 영원한 번영이라는 환상에 빠져 생산 증대에만 몰두한다.

노동자들은 1차 세계대전 동안에 손실된 실질 임금을 만회하기 위해 투쟁에 나선다. 시애틀 노동자들이 1919년 2월에 먼저 파업에 나서자 5월에는 위니펙에서도 파업이 일어나고 9월에는 철강 노동자 36만 명이 전국 파업을 전개한다. 그러나 미국노동총동맹의 지도자들은 이 파업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사보타지 한다.

1922년 말 50만 철도원의 파업이 패배로 끝날 즈음, 볼티모어-오하이오 철도는 ‘노동자가 생산성을 높이는데 협력한다면 노동자에게 큰 이익을 분배하겠다’고 제안한다. 생산성이 높아지면 결국 임금이 자동으로 증대하고 노동 조건도 개선되며 노동 시간이 단축되고 실업도 사라지리라는 것이다.

노동총동맹은 1925년 대회에서 이 제안을 ‘새로운 임금 정책’으로 결정한다. 노조 관료들은 자본가와 손잡고 전진하는 노동자의 미래는 장밋빛이라며 ‘파업은 낡아빠진 방식으로서 노동자의 이익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규정하고 이제 계급투쟁은 끝났다고 목청을 높인다. 심지어 부르주아 경제학자인 카버는 노동자들이 높은 임금을 저축하여 산업을 점점 사들이고 있으며 그리하여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노조 지도부는 ‘영원한 번영’이라는 환상에 푹 빠져 오직 생산 증대에만 몰두한다. 그러나 노동 생산성이 증가하고 자본가의 이윤이 대폭 증대하는데도 실질 임금은 1923~26년 사이에 조금(2포인트) 밖에 오르지 않는다. 임금 상승의 혜택도 거의 숙련 노동자에게만 돌아가고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임금·노동시간·노동강도가 오히려 악화된다.

더 나아가 자본가들은 산업 합리화를 강력하게 추진한다. 그런데 자본가에게 ‘산업 합리화’란 전투적인 활동가들을 대량 축출하고 해고를 자유롭게 하고 임금 총액을 끊임없이 삭감하고 파업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또한 자본가들은 회사가 자금을 대어 노조를 조직하고 회사편인 사람을 간부 자리에 앉히는 ‘회사조합’을 대규모로 육성한다. 회사조합은 트러스트(독점) 산업을 미조직 상태로 두려는 술책의 하나로서 주로 기간산업에서 만들어진다. 회사조합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에는 200개뿐이었는데 1927년에는 900개(100만 명)로 증가한다. 이들 회사조합들은 밀정과 깡패들을 고용하여 체계적으로 노조 운동을 파괴하는 데에 앞장선다.

미국에서부터 세계 대공황이 시작된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의 주식 시장에는 1600만 주가 넘는 매물이 쏟아져 나온다. 주가는 불과 3주 만에 50% 이상 폭락한다. 대공황이 시작된 것이다. 1932년 말까지 1600억 달러 이상의 주식이 휴지조각으로 변하고, 기간산업의 생산이 50% 감소하고, 5761개의 은행이 파산하고, 농업 생산물의 가격은 85억 달러에서 40억 달러로 하락한다. 자본가들이 공황으로 인한 손실을 임금 인하나 대량 해고를 통해 노동자에게 전가시킴으로써 모든 산업에서 임금의 45% 이상이 삭감되고 1933년 초까지 1700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한다.

공황은 전 세계로 확산된다. 이웃한 캐나다의 산업도 마비되어 100만 노동자가 실직한다. 독일에서는 공업 생산이 45%나 감소하고, 주급은 1929년 42마르크에서 1932년 21마르크(최저 생활비는 38마르크)로 하락하고, 1932년 8월에 완전 실업자만 522만 명에 달하고, 한 달에 3~4달러의 구제 기금만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1700만 명에 이르면서, 국민 경제 전체가 마비 상태에 빠진다. 영국에서는 공업 생산이 25% 감소하고 실업자는 1929년 116만 명에서 1932년 297만 명으로 증가한다. 영국의 공업 생산이 비교적 적게 감소한 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 계속 불황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1932년에 완전 실업자가 284만 명, 반실업자가 100만 명에 이르게 된다. 프랑스 역시 1932년 6월에 실업자가 230만 명, 반실업자가 561만 명에 달한다. 이탈리아·오스트리아·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스페인·스칸디나비아국가들·오스트레일리아 등도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

공황은 (반)식민지에는 더 큰 충격을 미친다.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 국가에서는 실업자 수가 기록적으로 증가하고 농업이 크게 파괴되고 기아가 도처에 확산된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산업과 외국 무역은 50~80%까지 감소한다. 이들 나라에서는 사회 보장 제도도 없어 인민들이 더욱 비참한 상태에 처한다.

국제 산업 생산은 1929년의 2/4분기에서 1932년의 2/4분기 사이에 42%나 하락한다. 이 기간 동안 많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금본위제가 파탄 나고 자본 수출이 정지된다. 국제 금융은 무질서에 빠지고 국제 무역은 65%나 감소한다. 세계의 실업자 수는 유례없이 증가하여 3~5천만 명으로 추산된다. 세계 대공황은 1933년부터 심각한 상태에서 서서히 벗어나지만 그 여파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1939년까지 지속된다.

이 세계 대공황은 부분적인 원인에 의한 일시적인 경기 후퇴가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자본주의의 생산력 발전과 구조 변화의 산물이다. 자본주의 중심부의 생산력은 1890년 이래 과학적 연구에 기초한 기술 혁신과 생산 과정의 재조직에 힘입어 크게 발전했고 그래서 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산업의 연평균 성장률은 높은 수준(미국은 5.9%, 독일은 4.3%)을 기록했다. 전쟁의 피해에서 유럽 국가들이 회복된 이후에 성장률이 크게 둔화되기는 했지만 산업 생산고는 꾸준히 증가했다.

그러나 상품의 소비는 생산만큼 빨리 증가하지 않았다. 각 나라에서 국내 수요와 해외 수출은 이 기간을 통해 늘어나던 상품 생산량을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특히 심각한 빈부 격차가 개선되지 않음으로써 노동자의 구매력은 별로 증가하지 않았다. 생산력이 가장 빨리 발전했던 미국에서는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이 1890~1914년 사이에 매년 1.3%씩 밖에 증가하지 않은 데 비해 산업 생산고는 그보다 4배가 넘는 속도로 성장했고 이런 사정은 ‘번영’을 구가하던 192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그 결과는 상품의 공급 과잉으로 나타났다.

더구나 장기간에 걸친 생산력의 발전은 산업 부문 사이의 불균형 위에서 진행된 것이어서, 강철·기계·자동차·전기·석유·화학 같은 새로운 산업이 높은 비율로 성장한 반면에 광업·조선·방직 같이 오래된 산업은 정체 내지 위축되었다. 농업은 과잉 생산으로 인한 가격 하락에 시달리고 있었다.

1920년대 미국을 풍미했던 주식 투기는 이와 같은 불균형 성장을 토대로 했을 뿐 아니라 금융 기관의 신용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이 장기간 누적되어 주가 폭락을 계기로 한꺼번에 대공황으로 폭발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무자비한 대량 해고와 임금 인하에 반대하고 실업 구제와 사회 보장을 요구하면서 적극 투쟁에 나선다. 이에 따라 파업이 급증한다. 1929~32년 사이에 15개 나라에서 1만 8794건의 파업에 851만 명의 노동자가 참가한다. 이 가운데 1468건은 영국, 2700건은 미국, 3601건은 프랑스, 1304건은 독일, 688건은 체코슬로바키아, 1889건은 일본, 1333건은 중국, 480건은 인도에서 발생한다.

루즈벨트가 서민들의 고통을 끌어안으며 대통령에 당선된다.

미국의 수백만 노동자들이 일자리와 집을 빼앗기고 거리로 내몰린다. 포드자동차에서만 8만 5천 명이 해고되고 오하이오 주의 5대 공업 도시에서만 1930년 1월부터 2년 반 동안 10만 가구가 퇴거 명령을 받는다. 자연 재해와는 달리 이들에게는 적십자 구호 같은 구원의 손길도 오지 않는다.

좌파가 주도하는 노조통일연맹과 공산당은 1930년 3월 6일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125만 명이 참가한 집회를 열어 ‘기아 행진’을 벌이고 7월 4일 시카고에서 전국실업자위원회를 조직한다. 전국실업자위원회는 주요한 활동의 하나로 집에서 쫓겨나는 것을 막는 활동을 벌인다. 이 활동으로 뉴욕의 경우 1932년 6월 30일까지 여덟 달 동안에 퇴거 명령을 받은 18만 5784가구 중에서 7만 7천 가구를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정부는 이 경제 위기의 원인을 빨갱이들의 소행으로 돌리려고 애쓰고 의회는 1930년에 공산당을 조사한답시고 ‘피시 위원회’를 만든다. 자본가들의 폭력도 도를 넘어선다. 포드자동차 해고자들이 1932년 3월 7일 재고용을 요구하며 디어본시 공장으로 행진하자 공장 담 뒤에 숨어있던 포드 폭력단과 총잡이들이 기관총을 난사하여 수명이 죽고 수십 명이 중경상을 입는다.

재향군인노동자연맹은 4월부터 ‘1차 세계대전 퇴역군인에 대한 연금 지불을 1945년까지 보류한다’는 정부의 방침에 항의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이에 따라 재향군인의 무리가 국가의 심장부인 워싱턴의 의사당과 백악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 아나코시아 저지대의 황무지로 몰려든다. 이들은 동굴·땅굴·오두막집·천막집에서 담요만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 수가 7월에는 2만 5천 명에 다다른다. 그러자 후버 대통령은 군대를 동원한다. 맥아더 참모장의 지휘에 따라 기병들이 총검을 휘두르며 공격하고 이어서 방독면을 쓴 보병이 최루탄을 던지며 진격하여 퇴역군인들의 무리를 해산시킨다.

뉴욕 주지사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1932년 여름부터 시작된 대통령 예비 선거에서 서민들의 고통을 끌어안으며 압도적인 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러자 이때까지 사기와 요행으로 근근이 버티던 미국 경제가 완전히 침몰한다. 은행들이 잇달아 파산하면서 주 전체의 3/4이 은행을 폐쇄하고 예금 인출을 연기시킨다. 대통령 취임식(1933년 3월 2일)이 있기까지 행정 기관 자금도 동결된다. 돈은 사라지고 임금도 지불되지 않는다. 학교도 문을 닫는다. 파산한 군중들이 텅 빈 예금기관 앞에서 울부짖고 식량조차 살 수 없어 대소동이 일어난다.

민중을 위한 뉴딜 정책이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를 구한다.

루즈벨트는 대통령에 취임하자 구제·부흥·개혁을 내세우고 뉴딜 정책을 추진한다. 이에 따라 연방 정부의 승인이나 감독 아래 다시 설립될 때까지 모든 은행을 폐쇄하는 긴급은행법, 증권 시장에 광범하게 퍼져있는 사기·부정과 타인의 돈으로 투기하는 행위를 막는 법률들, 공정 거래 기준을 설정하여 산업의 극심한 경쟁을 막고 구매력 증대를 위해 최저 임금과 노동 시간을 합의하도록 규정한 전국산업부흥법 등이 만들어진다.

특히 전국산업부흥법 7조 (A)항은 노동자들의 자주적 단결권을 보장하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선택한 대표자를 통해 단체 교섭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공정노동기준법은 최대 노동 시간과 최저 임금을 규정하고 소년 노동을 규제한다. 그리고 농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농업조정법이 제정되고 농촌의 가난한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한 ‘민간 식림 치수단(民間植林治水團)’이 만들어진다. 거대한 공공사업으로 수만 명이 일자리를 찾으면서 흥분과 기쁨이 나라를 채우기 시작한다.

루즈벨트는 전쟁이 아닌 평화를, 나라 사이의 우호를, 정복과 제국주의의 중지를, 독일·이탈리아·일본의 파시즘을 억제하기 위한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집단 안보를 주장한다. 루즈벨트는 라디오를 통해 자주 국민과 대화를 나누며 국민의 친숙한 이웃이자 세계적인 인물이 된다.

노동자들은 자주적 단결권과 단체 교섭권을 쟁취하기 위해 총파업을 전개한다.

샌프란시스코와 태평양 연안 부두 노동자들이 전국산업부흥법 7조에 고무 받아 노동총동맹 산하 국제부두노동자연맹이란 단체로 모이기 시작한다. 그러자 자본가들은 1933년 9월 노조 간부 4명을 해고하고 노조와의 단체 교섭을 아예 거부한다.

이에 샌프란시스코·시애틀·포틀랜드·샌디에이고 등 모든 태평양 연안 항구의 부두 노동자 1만 2천 명이 1934년 5월 9일 일제히 파업에 들어간다. 5월 25일에는 8개 해운 노조의 3만 5천 노동자가 연이어 파업에 들어간다. 미국 노동자계급이 대약진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경찰들은 이 파업을 잔인하게 진압한다.

이에 격분한 샌프란시스코 노동자 12만 7천 명이 총파업을 전개하여 시 전체가 유령 도시로 변한다. 파업이 계속되면서 7월 3일에는 경찰과 파업 노동자들이 충돌하여 유혈 사태가 발생한다. 7월 5일에는 완전 무장한 2천 명의 주 방위군이 출동하여 최루 가스 대신 구토 가스를 사용하고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후려치고 수십 발의 총알을 발사한다. 하루 종일 총성이 울리고 실제 전투와 같은 상황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쓰러진다. 이에 도장공 노조 1158 지방 지부가 총파업을 선언하고 곧이어 기계공 노조도 투쟁에 나선다. 7월 10일에는 ‘알라메다 노조 협의회’가 총파업을 정식 승인하고 7월 12일에는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 트럭 운전수 노조 지부가 총파업을 지지한다.

노동총동맹 지도자 윌리엄 그린이 파업 금지 전문을 보냈으나 노동총동맹의 160여 개 지부(12만 7천 조합원)가 그 다음날 총파업에 대한 찬반 투표를 실시하여 압도적인 찬성으로 파업을 결의한다. 모든 노조원들이 7월 16일 아침에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인쇄공과 전기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연좌 농성을 벌인다. 모든 산업이 정지되고 거리의 전차도 멈추고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다. 그러나 7월 19일 노동총동맹의 보수적인 간부들은 호명 투표를 거부하고 기립 투표를 통해 191 대 174로 총파업을 끝내기로 결정한다. 3만 5천 해운 노동자들은 7월 30일에야 국제선원노동조합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일터로 돌아간다. 몇 주일 후에 부두 노동자들은 하루 6시간 노동과 주30시간 노동을 쟁취한다.

들불 같이 타오르는 투쟁의 과정에서 새로운 노조(지부)들이 수없이 건설된다. 이 새로운 노조들은 (세계산업노동자동맹과 노조통일연맹이 사용한 투쟁 방식을 따라) 대대적인 피케팅, 노래, 연설, 토론, 회합, 연좌농성, 태업, 시위, 확성기 사용, 여자들을 파업 참가자로 조직하기, 빠른 속도로 차를 몰아대기 등 새롭고 다양한 방식으로 투쟁을 전개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용자를 고발하고, 라디오를 이용하고, 신문에 전면 광고를 내고, 파업 후원회를 조직하고, 파업의 쟁점을 대중에게 알리고, 조합 정책을 결정하기에 앞서 대대적인 집회를 열어 민주적으로 다수의 의견을 물으면서 아주 공세적으로 투쟁을 펼쳐나간다. 처음으로 거세게 터져 나온 노동자들의 투쟁은 1935년에 1만 8천여 명이 체포·구금되고 1934~36년 사이에 88명이 파업 중에 목숨을 잃을 정도로 아주 격렬하게 전개된다.

결국 처음으로 단체 교섭권과 파업권을 보장하고 사용자 측의 노조 방해 활동을 금지하는 전국노동관계법(와그너법)이 1935년 7월 5일에 제정된다.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자신의 권리를 쟁취한 것이다.

한편 위기의식을 느낀 대기업들은 전례 없이 대대적으로 노조 파괴 활동을 전개한다. 밀정을 고용하여 노조 움직임을 일일이 감시하고 요주의 인물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노조 간부들을 매수하고 때로는 폭력을 동원하여 노조를 파괴하기까지 한다. ‘라 폴레트 상원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대기업들이 230개의 사설탐정회사를 통해 10만 명의 밀정을 고용하여 전국 4만 8천 개의 노조 지부에 침투시켜 적극적인 조합원들을 밀고하여 해고되게 하고 밀정의 상당수가 노조 간부가 된 것으로 드러난다. 대기업 자본가들은 1934년에 노조 파괴 공작에 8천만 달러나 쓰고 ‘반공’을 내세워 오픈 숍―노조 가입과 탈퇴가 개인의 의사에 달려있는 제도―을 확립하고 뉴딜 정책을 파괴할 목적으로 미국자유연맹을 만든다. 또 제너럴모터스·스탠더드석유·웨스팅하우스 등 전국 12대 대기업은 특별위원회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하고 스스로를 노동자와 뉴딜 정책에 대해 반격 작전을 벌이는 신비스러운 비밀 지휘부로 자처한다. 더군다나 재벌들은 루즈벨트 대통령을 소련의 끄나풀이라고 매도하기까지 한다.

대기업 노동자들이 산별노조를 건설하며 대약진 한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고양되는 분위기를 타고 관료적인 노동총동맹 지도부에 비판적인 좌파들이 1935년 11월 워싱턴에서 산업별조직위원회를 결성한다. 새로운 조직의 결성은 수백만 노동자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온다. 노동자대중이 투쟁을 경험하면서 여러 개의 경쟁적인 직업별 조합으로 자신들을 쪼개서 한 공장 내의 힘을 약화시키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 2~3년의 투쟁에서 가장 앞장섰던 사람들이 산업별조직위원회를 이끌고 있어서 산업별조직위원회는 겨우 여섯 달 만에 2백만 명의 회원을 확보한다.

산업별조직위원회는 단결된 행동으로 거침없이 전진하여 1936년 3월에 ‘미국 전기·라디오·기계노동자 연합회(UE)’라는 거대한 노조를 조직한다. 그리고 자동차노조가 5월에 노동총동맹을 탈퇴하고 미국자동차노조연합이란 이름으로 산업별조직위원회에 가입한다. 9월에는 UE와 조선소 노동자들이 산업별조직위원회에 가입한다. 곧이어 판유리노조, 철·강철·주석노동자연합회, 고무노동자연합도 가입한다. 노동총동맹 소속 전국기계공조합과 총동맹 산하 지부들 그리고 독립 노조들도 단결의 물결에 합류한다. UE는 연말이 되기 전에 셰넥테디에 있는 제너럴일렉트릭 공장에도 노조를 조직한다. 이처럼 산업별조직위원회는 새롭게 한창 성장해 나가는 대규모 노조들을 끌어들이며 기세 좋게 뻗어나간다.

그러자 노동총동맹 집행위원회는 1936년 8월 4일 산업별조직위원회에 가담한 노조들의 회원 자격을 정지시키고 얼마 뒤에는 그 노조들을 제명한다. 그리고 산업별조직위원회가 노조를 둘로 분열시키고 다수결에 따르지 않는다고 공식 비난한다. 더구나 산업별조직위원회가 소련과 내통하여 공산주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며 쉬지 않고 떠들어댄다.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의 제너럴모터스 노동자들이 12월 28일 파업에 들어간다. 다음해 1937년 1월 4일에는 오하이오 주의 노오우드, 조지아 주의 애틀랜타, 인디애나 주의 앤더슨과 캔자스시티, 회사 심장부인 미시간 주의 플린트에서 제너럴모터스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연좌 농성 파업을 전개한다. 자동차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40만 명 가운데 26만 명이 일하고 있고 연간 211만 대(1937년)의 차를 생산하는, 잠자던 사자가 뒤늦게 잠을 깬 것이다. 자본가들과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하겠다고 위협하면서 ‘거대한 제너럴모터스의 파업은 자동차 산업을 소비에트로 만들려는 음모’라고 맹렬히 비난한다. 공장 바깥에서는 수천 명의 동료 노동자들과 아내와 아이들이 피켓을 들고 응원하면서 추운 겨울인데도 밤낮으로 방송차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파도처럼 움직인다. 결국 파업 44일째인 2월 11일, 제너럴모터스는 노조를 인정하고 전국 단위의 단체 협상을 하겠다고 발표한다. 이것은 아주 큰 승리였다. 마침내 오픈 숍의 대들보가 무너져 내린 것이다.

아크론 파업을 본받은 제너럴모터스의 ‘연좌 농성’ 파업―미국 노동자들에게는 새로운 투쟁 방식이다―은 곧 들불처럼 퍼져나간다. 세계에서 제일 큰 강철 회사인 ‘US강철’은 파업 경고조차 없었는데 임금 10% 인상, 주 40시간 노동, 노조 승인을 ‘강철노동자조직위원회’에 약속하며 갑자기 항복한다. 노동자들이 거대한 제너럴모터스를 꺾고 승리한 순간에 ‘강철노동자조직위원회’의 조합원이 15만 명으로 늘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웨스팅하우스와 필코 등 거대 회사에서 노조가 연이어 조직된다. 이로부터 비록 4년 이상이나 걸리긴 해도 ‘포드’에서도 노조가 설립된다.

나아가 흑인 노동자들―노동총동맹은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이 백인과 평등한 조건으로 수천 명씩 산업별조직위원회에 가입하고 (섬유·봉재 노조를 제외하고는) 역사상 최초로 수천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전기노동자연합과 식품가공노조 등에 가입한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산업별조직위원회는 1938년에 명칭을 산별노조회의로 바꾼다.

산별노조회의는 철강·자동차·고무·유리·전기·수송·식품가공·통신 등 모든 기간산업에서 오픈 숍을 몰아낸다. 그리고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공장과 지역들에서도 유급 휴가, 유급 휴일, 시간외 근무 수당, 노동 강도 완화, 주 5일 40시간 노동과 같은 값진 성과를 쟁취한다.

산별노조회의의 성장에 자극 받은 노동총동맹은 기계공·트럭운전수·호텔·식당종업원·보일러제작공들을 적극 조직하여 조합원을 100만 명 이상 증가시킨다. 1940년까지 노동총동맹 소속 조합원은 424만 명으로 늘어나고, 산별노조회의는 381만 명, 독립노동조합은 200만 명에 이른다. 그리하여 전체 조합원은 불과 4년 만에 3배나 늘어나 1천만 명에 이르게 된다. 더욱이 1866년부터 수많은 노동자들이 목숨을 바치며 외쳐 온 ‘하루 8시간 노동제’가 마침내 많은 산업에서 실현된다.

이처럼 미국 노동자계급은 루즈벨트 시대에 최대의 승리를 거둔다. 이에 발맞추어 미국의 노동자·민중은 1932·1936·1940·1944년에 네 차례나 연속해서 루즈벨트를 지지하여 대통령으로 당선시킨다. 이리하여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은 노동자·농민·흑인들의 투쟁과 단결이 추진력으로 작용한 대중 운동의 요구에 대한 답변이자 미국 민주주의 운동의 정점(민중주의)으로서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 체제를 (노동자계급의 혁명에서) 구원한다.

독점 자본가들은 전투적인 노동자 운동을 빨갱이들의 소행이라고 공격한다.

독점 자본가들은 노동자계급의 대약진의 기세를 꺾기 위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한다. 하원은 ‘비미국 활동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디이즈 하원의원의 주도 아래 노조 요시찰 인물들의 명단을 작성한다. 이 위원회는 1938년 노조 간부 선거가 전국에서 실시되기 직전에 노동계에 빨갱이들이 준동하고 있다고 떠들며 청문회를 개최하고 매일같이 산별노조회의가 공산주의 폭동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이에 장단을 맞추어 신문·라디오·잡지 같은 대중매체의 98%가 쉴 새 없이 산별노조회의를 비난하며 융단폭격을 퍼붓는다. 게다가 자경단원들은 빨갱이로부터 국가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산별노조회의의 피켓 대열에 테러를 가한다.

전국제조업자연합은 “산별노조회의에 가입해 공산주의 미국 건설을 도웁시다”는 전단 220만 장을 만들어 뿌리는 교활한 술책까지 부린다. 전국제조업자연합의 회장을 지낸 프렌티스는 “미국 실업계는 어떤 형태의 위장된 파쇼 독재 체제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며 우익 세력을 부추긴다. 독일에서 집권한 뒤 노조를 깡그리 없애버린 히틀러가 수많은 미국 실업가들의 영웅으로 추앙되면서 포드자동차 사장 포드와 국제사무기계회사 사장 와트슨 등 상당수의 대기업 우두머리들이 히틀러가 주는 훈장을 영광스럽게 받는다. 1940년에는 강력한 친 히틀러 조직인 ‘미국 제1위원회’가 생겨나고 여기에 상당히 많은 미국 산업계 대표들이 참가한다. 자본가들은 탁월한 노동자들마저도 ‘빨갱이’라는 소리 한마디에 절절 매던 쿨리지 대통령이나 후버 대통령 시대를 그리워한다.

한편 대기업들은 공황을 이용해 자본을 집중시키며 회사 규모를 확장한다. 그리하여 1935년에는 미국 기업의 0.1%에 불과한 거대 기업이 전체 순이익의 50%를 차지하고 4%도 채 안 되는 알짜 대기업들이 총 이윤 가운데 84%를 차지한다.

이에 따라 빈부 격차도 심화된다. 미국 총 세대수의 47%가 1년 동안 1천 달러도 안 되는 소득을 얻는 데 비해 1.5%도 안 되는 상류층은 밑바닥 47%의 세대와 같은 액수의 총 수입을 얻는다.

미국 경제는 뉴딜 정책으로 잠시 회복되었다가 1938년에 다시 불경기가 시작된다. 이 불경기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계속된다. 이는 다르게 표현하면 대량의 무기와 전투장비를 소비하는 2차 세계대전이 미국 경제를 구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이 생산한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전쟁이 자본주의 경제를 구제한다는 말이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하지만 제대로 알면 이상할 것도 없다. 자본은 그 속에 언제나 폭력을 본성으로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들은 자유 경쟁으로 인한 대공황을 혹독하게 경험하고서는 경제에 더욱 깊이 개입하게 된다. 정부는 파국을 막기 위해 공공 부문을 확대하고 복지 정책을 시행하며, 사기업의 투자와 생산에 대해 재정을 지원하고, 경제 성장 계획에 따라 조세·국채·신용규제를 이용하여 화폐의 순환에 개입한다. 이는 국가 권력과 독점 자본의 유착으로 정치 지배와 경제 착취가 단일한 메커니즘으로 통합되었음을 뜻한다. 이런 현상을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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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4

세계노동운동사 [6장] 사회주의 대 파시즘 (1917~1945) 4

중국 노동자 혁명의 패배와 농민 혁명으로의 전환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제2 정부’를 구성하고 제국주의 반대 투쟁으로 나아간다.

청나라는 1909년부터 입헌군주정으로의 개혁을 시작한다. 그러나 1911년 5월 철도 건설을 외국 차관단에 위임하자 이에 반대하는 봉기가 10월에 여러 성에서 일어난다. 쑨원은 삼민주의―민족주의·민권주의·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국민당을 조직한다. 북양군을 이끄는 위안스카이는 부의 황제를 퇴임시키고 1912년 1월 각 성의 대표들을 난징에 모아 중화민국(공화정)을 수립하고 쑨원을 임시 대총통에 앉힌다. 쑨원의 국민당은 1913년 선거에서 승리한다. 그러자 위안스카이는 국민당을 해산시키고 자신이 대통총의 자리에 앉는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1915년 1월 중국의 칭다오를 점령하고 중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하는 ‘21개조의 요구’를 위안스카이에게 강요한다. 위안스카이가 1916년에 죽자 지방의 군벌들이 각 열강들의 지원을 받으며 할거하는 시대가 된다.

중국 경제는 1차 세계대전 중에 ‘전쟁 특수’로 급속히 발전한다. 수출은 1913~19년 사이에 40%나 증가하고 공업 기계류의 수입은 1915~21년 사이에 13배나 증가한다. 이에 비례해서 산업 노동자도 증가한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주요 도시들에 총 150만 명의 산업 노동자가 존재하게 된다.

중국 대표단은 전쟁이 끝나고 열린 1919년 베르사유 회의에 참석하여 일본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취소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베르사유 회의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영토 재분할로 끝난다. 그러자 3천 명의 학생들이 5월 4일 베이징 중심부에 있는 천안문 광장에서 집회를 열고 중국 역사상 최초로 민족주의 시위를 벌인다. 이 5·4운동은 전국 규모의 항의 운동으로 발전한다. 베이징 정부가 무력 진압에 나서 수백 명의 학생들을 체포하자 주요 공업 중심지인 상하이에서는 6~9만 명의 노동자들이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1일 파업’에 들어가고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다.

천두슈·리다자오·취추바이·마오쩌뚱 등 12인의 대표가 1921년 7월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으며 중국공산당을 결성한다. 그리고 1921년부터 시작된 불황의 영향으로 1922년에는 100회 이상의 파업이 일어나고 연인원 30만 명이 파업에 참가한다. 이러한 상황을 타고 공산당은 1922년 5월 광저우에서 제1회 전 중국 노동자 대회를 개최한다. 여기에는 12개 도시에 있는 200개 노조의 30만 노동자를 대표하는 162명의 대의원이 참석한다. 나아가 공산당은 농민 협회들을 조직하기 시작한다. 철도 노동자들은 1924년 중국 최초로 전국 노조를 설립한다.

국민당은 1924년 1월 소련과 긴밀하게 협력하고 공산주의 운동과 연대한다는 ‘연소용공(連蘇容共)’의 원칙을 명확히 한다. 이에 따라 공산당이 개별로 국민당에 입당함으로써 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진다. 국민당은 9월에 반동적인 봉건 군벌을 타파하고 전국을 통일하여 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해 ‘북벌’을 시작한다. 그런데 자유주의자 쑨원이 1925년 3월 베이징에서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는 말을 남기고 숨진다. 그 뒤를 이어 쑨원의 동서―쑨원의 부인 쑹칭링의 동생인 쑹메이링의 남편―인 장제스가 국민당을 장악한다.

상하이에 있는 일본 자본의 직물 공장들에서 노동자들이 5월에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간다. 그런데 파업 노동자들과 공안 부대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한 젊은 노동자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노동자·학생 수천 명이 5월 30일 항의 행진을 벌인다. 조계 당국은 영국·미국·일본·이탈리아의 육군 전투 부대를 상륙시켜 진압한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에 발포하여 12명이 숨진다. 그러자 이틀 후인 6월 1일 공산당이 이끄는 상하이 노조총연맹이 외국인 소유 공장과 부두를 시작으로 총파업을 단행한다. 6월 13일에는 16만 명의 노동자가 가두 투쟁을 벌인다.

파업과 가두시위가 다른 도시로 급속히 확산된다. 6월 23일 광저우에서는 영국·프랑스 군대의 발포로 시위대 52명이 사망한다. 영국 식민지인 홍콩에서도 총파업이 벌어져 6월 말에 이르러 5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홍콩을 떠난다. 13명으로 구성된 파업위원회와 800여 명의 파업노동자대표자회의가 투쟁 전체를 총괄한다. 이 파업위원회는 이후 벗과 적 모두로부터 ‘제2 정부’로 불리게 된다. 총파업은 1926년 10월까지 16개월 동안이나 계속된다.

국민당은 1925년 7월 전국으로 확산된 노동자들의 투쟁의 성과를 기반으로 광저우에서 국민 정부 수립을 선언하고 장개석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국민혁명군을 조직한다. 국민당 군대는 1926년 7월 북벌을 재개하여 11월에는 근거지를 광저우에서 우한으로 옮긴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은 선발 정찰대 역할을 하면서 가는 곳마다 농민 반란을 고무하고 노동자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한다. 그리하여 1926년 초에 1천 명도 안 되던 당원이 불과 1년 만에 3만 명 이상으로 증가한다.

상하이의 섬유·금속·철도 노동자들은 1927년 2월 다시 총파업을 일으킨다. 경제적 요구로 시작된 총파업은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전국으로 확대되어 수개월 동안 계속된다.

공산당의 좌우편향으로 노동자들의 조직과 투쟁이 붕괴된다.

대지주·고리대금업자·제국주의세력을 대표하는 장제스는 국민당 북벌군을 상하이로 집결시킨다. 위기를 직감한 파업 노동자 70만 명은 파업을 계속하면서도 잘 훈련된 노동자 민병대로 도시 전 지역의 전략 요충지를 장악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다. 상황이 이러 하자 국민당 군대는 상하이 외곽에 이미 도착하고서도 5일 후인 3월 26일에야 상하이로 들어온다. 공산당은 장제스를 환영하는 시위를 조직한다.

장제스는 상하이의 자본가들 및 지하 갱단의 두목들과 일련의 회합을 갖고서 노동자들의 파업을 파괴할 세력을 규합해나간다. 드디어 4월 12일 새벽 암흑가의 암살단이 도시 전 지역에서 노조 사무실을 습격하여 하루 동안 400~700명을 살해한다. 장제스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공산당의 훈령에 따라 거의 모든 무기를 땅에 파묻거나 장제스 군대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궤멸 당한다.

이 잔혹한 습격이 있기 바로 일주일 전인 4월 5일에 스탈린은 중국에서의 국공합작에 대해 “우익들은 군대를 지휘할 능력 있는 사람을 보유하고 있고 부유한 상인들에게서 자금을 끌어 모을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을 레몬처럼 다 쥐어짜고 나서 내던져 버리면 된다”라고 연설했다. 그러나 쥐어 짜인 것은 오히려 노동자들이었다. 그런데도 스탈린은 국민당 정부를 돕는 것이 공산당의 임무라며 운동의 ‘과도함’을 자제하라고 명령한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는 혁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농민 소비에트를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권력자는 스탈린이었다.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두 명의 공산당원이 국민당 정부의 노동부 장관과 농업부 장관으로 입각한다. 그런데 다음날 창사를 지배하던 군벌이 노조와 농민 조직들을 파괴하면서 대규모 처형을 자행하기 시작한다. 분노한 지방의 지도자들이 창사를 공격하기 위해 수천 명의 농민 군대를 동원한다. 그러나 공산당은 이번에도 (5월 27일) “더 이상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정부 관리들을 기다려주기 바란다”는 전보를 타전하며 농민들의 투쟁 의지를 눌러버린다. 그렇지만 학살은 다른 성으로까지 계속 퍼져나가고 7월에는 국민당 정부까지 이 학살에 가담한다. 그리하여 총 2만 명 이상의 노동자·농민이 목숨을 잃는다. 7월 말에는 모든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이 불법화된다. 이로써 국공합작이 끝장나고 반혁명이 도시와 농촌을 완전히 지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은 역량을 상당히 손실한다.

그러자 스탈린은 이번에는 “새로운 혁명적 고조!”를 선언한다. 코민테른은 전국 공세에 착수하기 위해 농민 군대가 전략 도시들을 공격한다는 계획 아래 ‘추수 봉기’로 알려진 일련의 무장 봉기를 명령한다. 이에 따라 공산당은 8월 1일 허룽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3개 군단을 편성하고 주더로 하여금 2만 명을 이끌고 난창에서 봉기를 일으키게 한다. 공산당은 이후에 이날을 인민해방군 건군 기념일로 삼는다. 마오쩌뚱은 2천 명의 부대를 이끌고 창사를 공격하다가 한 차례의 전투에서 부대의 절반을 잃고 바로 후퇴한다. 일부 다른 부대들도 겨우 탈출하지만 대부분의 부대가 금새 몰살당하고 봉기는 7일 만에 실패로 끝난다. 마오쩌뚱은 9월에 자기 부대를 이끌고 후난성과 장시성 접경의 황량한 후진 지역인 징강산으로 퇴각한다.

이후로도 계속된 11월 하이루펑 소비에트 건설, 12월 ‘광둥 코뮌’ 건설, 1928년 8월 후난성 남부 대도시들에서의 봉기는 모조리 실패로 돌아간다. 이 ‘도시 봉기’들은 노동자들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한 채 진행됨으로써 무자비한 학살만 초래하고 끝난다. 공산당은 1928년 8월 7일 장시성 회의에서 무모한 봉기를 일으킨 좌편향 노선을 스스로 비판한다. 이에 따라 천두슈가 당 서기장에서 물러나고 취추바이가 주요 책임자가 된다.

그러나 1930년 5월 장제스·풍옥산·옌시산 사이에 전쟁이 발생하자 리리산으로 대표되는 좌익 모험주의가 다시 당의 지도기관을 지배하게 된다. 이들은 6월에 전국의 홍군을 동원하여 난창을 공격하다가 패배하고 7월에는 장시에서 소비에트를 건설하지만 불과 9일 만에 무너진다. 9월 당 전체회의는 리리산의 노선을 (노선상의 오류가 아닌) 전술상의 오류라고 비판한다.

마오쩌뚱은 농촌을 근거지로 삼고 국공합작으로 반제국주의 투쟁을 전개한다.

마오쩌뚱은 무리한 공격을 피하면서 징강산에서 역량을 보존하여 1만 명으로 노농홍군 4군단을 편성한다. 그리고 ‘농촌에서 혁명 근거지를 확대하여 도시를 포위한다’는 전략을 수립하고 ‘3대 규율’과 ‘6항주의’라는 생활 규율을 세운다. 3대 규율이란 일체의 행동은 반드시 지휘를 따른다, 인민에게서 바늘 한 개나 실 한 오라기도 뺐지 않는다, 지방 유지로부터 거두어들인 물건은 반드시 전체의 소유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6항주의란 매매는 공정하게, 대화는 부드럽게, 잠잘 때 사용하던 문짝은 원래 제자리에 갖다놓고 바닥에 깔았던 짚은 묶어놓는다, 빌린 것은 반드시 돌려주고 부서진 것은 반드시 보상한다, 아무 데나 대소변을 보지 않는다, 포로의 지갑에 손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오쩌뚱은 1928년 12월 근거지 주변의 농촌에서 모든 토지를 몰수하여 가족 수에 따라 분배하는 토지 개혁을 실시한다. 홍군 4군단은 규율 엄수와 토지 개혁을 기반으로 농민들과 공고한 관계를 형성한다.

장제스는 1930년 말부터 1931년 6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장시성 남부를 중심으로 공산당 토벌 작전을 실시한다. 그러나 홍군은 적이 진격해오면 우리는 후퇴한다, 적이 멈추면 우리가 그들을 교란시킨다, 적이 전투를 피하면 우리가 공격한다, 적이 후퇴하면 우리는 진격한다는 네 가지 게릴라 전술로 유격전을 펼쳐 장제스 군대를 괴롭힌다.

1931년 9월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한다. 그러자 10월에 상하이에서 80만 노동자가 항일구국연합회와 의용군을 조직하여 항일 투쟁에 나선다. 민중들은 일본 상품 불매 운동과 경제 절교 운동을 전개한다. 1932년 상하이 항전 때는 상하이의 상공회의소와 은행협회가 자발적으로 영업을 중단하는 등 민족 부르주아까지 투쟁에 참가한다.

장제스는 1933년 10월 일본과의 전투는 접어둔 채 100만 대군을 동원하여 홍군을 포위 공격한다. 1934년 10월이 되자 ‘해방구’의 중심부까지 심각한 위협에 놓이게 된다. 홍군은 포위를 뚫고 국민당 군대의 공격을 피해 점점 더 중국 서부의 오지로 깊숙이 들어간다. 결국엔 산시성에 있는 ‘소비에트 구(區)들’을 향해 나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방안으로 남는다. 마오쩌뚱은 이 방안을 집요하게 주장함으로써 공산당의 확고부동한 지도자로 자리를 굳힌다.

출발할 때 8~9만 명이었던 부대는 중국횡단 2만 5천 리(1만㎞)의 대장정을 마치고 1년 후에 구이저우성 준이에 도착했을 때는 겨우 4천 명만 남는다. 새로운 게릴라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일부 사람들이 거쳐 가는 지역들에 남았지만 이틀에 한번 꼴로 전투를 치르는 도중에 5만 명이 넘게 죽었으니 대장정은 그야말로 인간 인내심의 대서사시다.

공산당은 1935년 1월 준이에서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열고 저우언라이의 중앙군사위 주석 직을 마오쩌뚱에 넘기고 장원텐을 당 총서기로 선출하면서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한다. 중앙위원회는 8월에 항일 구국 통일 전선을 전술로 채택한다. 일본과 싸우기 위해 힘을 뭉치자는 주장은 전국 인민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

동북군의 장쉐량과 서북군의 양후청은 공산당과 연대하여 일본에 대항하자는 ‘연공항일(聯共抗日)’을 장제스에게 제안한다. 그러나 장제스는 여전히 공산당을 박살내야 한다는 ‘초공(剿共)’의 입장을 취하면서 장쉐량과 양후청을 해직시키려 한다. 이에 장쉐량은 1936년 12월 12일 전투를 격려하러 시안에 온 장제스를 억류하여 망국적인 반공 내전을 중지하고 연공항일의 조건을 수락하게 한다.

일본 군대는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를 습격하면서부터 한 달여 동안 11세 소녀에서부터 60세 노파까지도 마구잡이로 폭행·유린하면서 무자비하게 30만 명이 넘는 중국 인민을 학살―난징 학살이 대표적이다―한다. 이에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일제히 대일 항전에 합류한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발전하자 국민당 중앙위원회가 9월 23일 (공산당이 7월에 제안한) 국공합작을 정식으로 공포한다. 장제스도 할 수 없이 공산당의 합법적 지위를 승인하는 취지의 담화를 발표한다. 이로써 항일 민족 통일 전선이 정식으로 성립된다.

공산당은 통일 전선을 펼치면서도 독자적인 유격전과 항일 근거지 건설에 주력한다. 그런데 항일 투쟁이 진척되면서 왕징웨이 집단의 패배주의적 망국론과 근거 없이 낙관적인 속승론(速勝論)이 대두한다. 이에 마오쩌뚱은 1938년 5월 항일 전쟁의 올바른 길을 제시하기 위해 ‘지구전에 대하여’를 발표한다. 이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은 일본군에게 점령된 지역과 산업에서 비밀 노조를 조직하면서 끈기 있게 활동한다.

그러나 장제스 일파는 1938년 자신들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에서 노동자협회를 만들어 노동자들을 강제로 가입시키고 파업 반대와 공산주의 반대를 표방하면서 엄중히 통제한다. 그리고 국민당 대부르주아 친일파 왕징웨이 집단은 1939년 적에게 투항한다. 이 때문에 국공합작으로 고조되던 인민의 항전 분위기가 다시 침체된다.

이런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마오쩌뚱은 1940년 1월 신민주주의 강령을 발표한다. 신민주주의 강령은 중국 혁명의 임무를 자본주의 일반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반제 반봉건이라고 규정하고 1단계에서는 반(半)식민지·반(半)봉건사회를 독립된 민주주의 사회로 바꾸고 2단계에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이에 따라 공산당은 근거지에 항일 민주 정권을 세우고 정부 기관과 민간 기관에서 공산당원·진보분자(소부르주아계급)·중간분자(중산계급·노동자·농민)가 각각 1/3을 차지하게 한다.

마오쩌뚱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긴박한 시기에도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학풍에서의 주관주의, 당풍에서의 분파주의, 문풍에서의 공론을 배격하자는 정풍 운동을 전개한다.

공산당은 항일 전쟁에서 가장 선두에 섬으로써 급속히 세력을 확대하여 권력에 도전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다. 1937년에 3만 명이던 당원과 4만 명이던 홍군은 1940년에 이르러서는 각각 80만 명과 50만 명으로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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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선언>과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 김수행1998

<공산당선언>과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 『뉴스플러스』, 1998년 6월 18일호, 동아일보사

김 수 행 (서울대 교수. 경제학)

 『공산당선언』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주의자 동맹'의 이론적 실천적 강령으로서 1847 년 12월에서 1848년 1월 사이에 쓴 글이다. 마르크스가 30살이고 엥겔스가 28살 때의 일이다. 비록 길이는 짧지만 (우리말 번역서는 35쪽 안팎), 이 책만큼 마르크스 사상을 널리 그리고 정확하게 전달한 책은 없다.

 

 『선언』은 다음과 같은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2.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들, 3.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문헌, 4. 각종 반정부당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입장.

 

 『선언』은 자본주의가 사적 소유, 경쟁, 이윤 추구에 힘입어 끊임없이 기술을 혁신하고 시장을 개척함으로써 생산력을 놀랄만큼 발달시키고 있다는 점을 올바르게 인정한다.

 

  "부르주아지는 100년도 채 못되는 그들의 계급 지배 동안 과거의 모든 세대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고 더 거대한 생산력들을 창조했다. 인간을 위해 자연력들을 정복한 것, 기계류, 화학을 공업과 농업에 응용한 것, 기선 항해, 철도, 전신, 농업경작을 위해 대륙 전체를 개간한 것, 하천의 운하화, 거대한 주민들".

 

  그러나 『선언』은 자본주의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로 자본주의는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의 투쟁은 자본주의를 멸망시키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억압자와 피억압자는 끊임없는 대립 속에서 서로 마주섰으며,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공연하게 투쟁을 끊임없이 계속했는데, 이 투쟁으로 말미암아 사회 전체가 혁명적으로 재편되었든지 투쟁하는 계급들이 함께 몰락했다".

 

  둘째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노동자계급이 점점더 숫적으로 증가할 뿐 아니라 단결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곤 임금노예라는

'쇠사슬'뿐이지만 얻을 것은 새로운 세계 전체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자본주의에서는 주기적

으로 반복하여 경제위기 또는 공황이 발생하며, 이 경제위기에서는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함

으로써 공장과 기계는 일을 멈추고 쉬지 않을 수 없고 노동자는 대규모로 실직하여 생존을

위협받게 되는데, 이것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와 경쟁 및 이윤 추구가 더 이상 생산력을

발달시키거나 주민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지 못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

지배계급은 공장이나 기계나 토지 등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전환시키

고, 생산의 목적을 자본가들의 이윤 추구로부터 주민들의 욕구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변경시키며, 무정부적인 경쟁 대신에 계획을 도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선언』은 비밀결사인 '공산주의자 동맹'의 이론적 실천적 강령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타도라는 궁극목표를 천명할 뿐 아니라 매일매일의 당면과제도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토지 소유의 철폐. 2. 고율의 누진세. 3. 상속권의 폐지. 4. 국가자본과 배타

적인 독점권을 가진 국립은행을 통해 신용을 국가의 수중에 집중시킬 것. 5. 통신수단과 수

송수단을 국가의 수중에 집중시킬 것. 6. 국가가 소유하는 공장과 생산수단을 증가시킬 것.

7. 모든 사람에게 노동할 의무를 부여할 것. 8. 농업과 공업의 결합. 농촌과 도시의 차이를

점차로 철폐할 것. 9. 모든 어린이에게 공공의 무상교육을 제공할 것. 등등.

이상이 『선언』의 내용이다. 비록 30살에 쓴 글이지만, 그 내용은 49살에 쓴 『자본론』

제1권이나 67살에 쓴 『고타강령 비판』에서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선언』의 내용은 마

르크스의 생애 전체를 대표하는 사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문제는 『선언』이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를 이해하고 비판하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을

줄 수 있는가이다. 70여년 동안 유지되던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함으로써, 자본주의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TINA: There is no alternative.)든가 역사는 자본주의와 함께 종말을 고

한다는 사상이 널리 퍼지고 있는 지금,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자본주의의 타도를 외친

『선언』은 아무런 가치도 가질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먼저 소련과 동구 등 현실 사회주의가 『선언』에서 이야기하는 공산주의였는가라는 질문

을 던질 수 있다. 마르크스가 생산수단의 국유와 계획경제를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

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나 억압을 철폐하고 주민들의 욕망이나 필요를 충족시켜야 한다

는 지상 목표에 종속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고 경제를 계획적으

로 운영했지만, 정부 관료나 기업 경영자가 모든 주민이나 일반 근로자를 억압하고 지배했

던 현실 사회주의는 마르크스가 생각한 공산주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선언』의

공산주의(또는 '새로운 사회')는 여전히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우리에게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면서 『선언』의 현재적 의의를 살펴 보자.

첫째로 선진자본주의국에서는 1980년대 이래 복지국가의 제도들이 점점더 해체되고 있다.

학교와 병원이 모든 주민들에게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했는데, 이제는 무료 서비스가 크게

줄어 들면서 사설 학교와 사설 병원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모든 주민들의 욕망

이나 필요를 충족시킨다는 원리가 퇴보하고 자본가의 이윤 추구가 더욱 확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새로운 사회'로부터 더욱 멀어지는 것이다.

둘째로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는 주기적으로 반복하여 경제위기나 공황에 부닥치고 있다.

1974-75년에는 제1차 석유가격 폭등으로 세계 전체가 위기에 빠졌고, 1981-82년에는 제2차

석유가격 폭등으로 위기에 빠졌으며, 1987년 10월에는 세계 전체의 증권시장이 1929년의 주

가폭락보다 더 큰 폭락에 직면했다. 그리고 1997년에는 타이, 인도네시아, 한국이 경제위기

에 빠졌고, 일본은 장기적인 불황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자본주의 나라들

이 모두 경제위기를 경험했을 뿐 아니라 반복하여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은 『선언』의 관점

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한국의 경제위기를 해명하는 데 있어서도 경제위기가 재벌 때문에 발생했다든지,

노동운동 때문에 발생했다든지, 정경유착 때문에 발생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

해 한국의 경제위기는 한국적인 특수사정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가 지닌

일반적 속성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한국적인 특수사정이 경제위기의 발생시

기나 발생형태나 계속기간이나 탈출형태를 규정하는 것은 사실이다.

셋째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계급투쟁이 자본주의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

이라는 『선언』의 관점은 현재 더욱 분명히 증명되고 있다. 만약 지금과 같은 어려운 시기

에 노동자계급의 세력이 매우 강력하여 정리해고제와 변형근로제를 철폐하고, 노동시간을

단축함으로써 고용을 보장하며, 실업자의 생존과 인간적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사회보장제도를 확립할 수 있다면, 한국의 자본주의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자본주의'로 변

혁될 것이다. 사실상 1950-80년의 스웨덴이 그러한 유형이었다. 그러나 지금 노동운동이 패

배하고 IMF와 정부 및 재벌이 일방적으로 승리한다면, 한국의 자본주의는 실업자의 격증,

빈부격차의 심화, 마약과 범죄의 격증, 정치적 사회적 불안정, 폭동에 의해 지배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넷째로 현재 자본은 세계 각국을 자유롭게 이동하기 때문에, 1848년의 『선언』은 자본의

세계화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이 주장은 전혀 잘못된 것이다. 마르크스

는 자본의 가치증식욕이 무한하기 때문에 자본은 모든 나라들에 침투할 뿐 아니라 모든 나

라들의 법률이나 조세제도를 동일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블루라운드나 그린라운드 등도 예측한 것이다. 또한 자본의 세계화가 진행하면 노동운동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서도,『선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각국의 노동자계급

은 당연히 맨 먼저 자기 나라의 지배계급을 끝장내야 한다", 그리고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

하라".

『공산당선언』은 150년전의 유물이 아니라, 공황이 빈발하고 대량실업이 발생하며 소수

의 초국적 금융자본이 거대한 투기이득을 얻고 있는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를 이해하고 비판

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최갑수, "[공산당선언]의 현재적 의의" 내용요약

{공산당선언}은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지침서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당장에 기대한 것은 독일에서의 부르주아혁명이었다. 그러나 1848년의 '유럽혁명'은 {선언}이 예상했던 부르주아혁명은 아니었고, 그 과정에서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망각하고 끝내 혁명을 배신했다. {선언}과 1848년의 경험과의 괴리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우선 그것은 {선언}의 역사적 분석의 배경이 자본주의사회가 아니라 전자본주의적인 사회구성인 데서 비롯하였다. {선언}은 세 가지 내지 네 가지 각기 다른 차원의 시간성을 가지며, 따라서 '먼 미래'(프롤레타리아혁명)와 '근접 미래'(독일의 자본주의적 미래) 그리고 '근접 과거'(영국과 프랑스에서의 자본주의로의 이행)가 {선언}의 '현재'에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그 괴리는 저자들의 거시적인 역사관의 핵심인 이중혁명관 자체로부터 말미암았다. 영국은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분석의 본보기였고 그들은 영국에서 자본주의의 미래를 보았다. 하지만 이 자본주의 세계의 주인공이라고 하는 부르주아지의 상(像)을 그들이 얻어낸 곳은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 그들은 영국의 자본주의 발전과 프랑스혁명의 역사적 성과를 겹쳐놓음으로써 부르주아지와 자본가계급을 동일시하고 혁명적 부르주아지라는 신화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바로 이러한 측면이 {선언}의 현재적 의미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제대로 부르주아혁명을 경험하지 못한 우리에게 {선언}은 부르주아지를 위한 '송가(頌歌)'로, 자본주의의 역동성은 사회주의의 미래를 위해 포기해서는 안될 역사적 담보물로 보인다. {선언}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르주아혁명의 역사적 과제를 맡아줄 것을 부탁하고 있으며, 그것이 오직 계급투쟁을 통해 이룩될 것임을 웅변하고 있다. 세기말의 혼돈을 넘어 {선언}은 21세기가, 외적 팽창의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가 내부로부터 '지양(止揚)의 해체력'을 발견하게 될 것임을 새롭게 전망하고 있는 것이다.




<공산당선언> 150주년 : '잊기 위하여'!

이해영(연구위원)




인간은 단순히 말만을 할 수 있는 동물은 아니다. 그들은 쓰고 읽을 수 있는 존재이다. 문자가 있음으로 해서 인간은 먹고 사는 일이 아무리 엄혹하다 하더라도 다른 동물과 구분되고 나아가 함께 세상을 바꾸는 일도 가능해 진다. 문자는 물론 밥이 아니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 아니 좀 더 인간답게 잘 살기 위해서는 밥만으로 충분치 않다. 이런 의미에서 문자는 존재 필수품이다.

이 고마운 문자로 쓰여진 지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 가운데, '인간답게 잘 살기'에 보탬이 되는 것들이 있다. 단연 여러 경전(經典)이 첫손에 꼽힌다. 그러나 성인의 경서에서 오늘날의 노동자가 어떻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지를 읽어 내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좀 더 노동자의 처지에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또 세상 어디에 문제가 있으며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지를 좀 쉽게 알려 주는 문자들이 필요하다. 더불어 '노동자 세상'에 대한 소중한 꿈도 담겨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을 게다. 말하자면 노동자용 모험소설이라고 할 까?

청년기의 열정과 도전의식으로 가득찬 맑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 세상에 나온 것은 지금부터 150년 전이다. 사실 이런 류의 구조 개혁을 촉구하는 선언서는 역사적으로도 처음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당시 그 어떤 요즘 식의 공산당이 존재했던 것도 아니다. 좀 '쫀쫀하게' 평하자면 급진적인 국제 지식인 써클 내지 정파가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선언>은 새 세상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고,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이긴 하지만 한 때 세상을 바꾸어 보기도 하였다. 어쩌면 근대 이후 역사에서 이 짧은 팜플렛만큼 세상을 뿌리채 흔든 글도 드물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선언>의 중심사상에 그 이유가 있다.

첫째, <선언>은 사회의 경제적 토대가 역사발전의 기초라는 데에서 출발한다. 이후 오늘날까지도 - 부당하게도 - 무슨 결정론이니 하는 욕을 먹고 있지만, 이 명제는 세상살이에 먹고 사는 문제의 엄중함과 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말만의 또는 머리속의 좋은 세상이 허구라는 것을 알려주는 '구조' 개혁의 사상이 확립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소유관계의 재편을 포함한 사회의 발본적인 혁신 또는 구조 - 요즘말로 '시스템' - 의 개혁 과 교체 없이 노동자 생활의 근본적 변화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둘째, <선언>은 지금까지의 역사란 것이 그 어떤 달콤한 상부상조의 목가적 꿈의 세계가 아니라, 먹고 먹히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그것도 먹는 계급과 먹히는 계급사이의 갈등과 투쟁의 세계였음을 보여준다. 이 서늘한 현실주의는 '노동자의 세상'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얻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고 <선언>은 주장하는 것이다.

셋째, <선언>은 노동자들이 어떻게 싸워야 하는 지를 제시한다. 요즘의 우리 말로 하면 한마디로 '정치세력화'이다. 그것도 단순히 군중이나 몇 몇 집단이 아니라, 전체 계급으로 조직된 정당의 불가피성을 주창한다. 그리고 모든 억압받는 계급과 사회 전체가 해방되지 않은 채, 노동자 자신만의 해방이 가능하지 않음을 <선언>은 강조한다. 이는 노동자운동이 계급이기주의나 혹은 계급 로비주의와 무관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선언>이 오늘날 다시 읽히는 이유는 단순히 정치적이거나 기념행사적인 데에 있지 않다. <선언>은 최근의 자본의 '세계화' 또는 이른바 '지구화'의 불가피성과 그 효과를 법칙적인 것으로 본다. 그 동안 체제경쟁으로 가리워 졌던 상황이 그 장막이 걷히면서 - 비교될 수 없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 150년전과 같은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선언>의 대안은 바로 국제적인 노동자 연대투쟁, 곧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것이었다. 지구적인 자본운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국적인 노동운동의 현실에 비추어 다시금 주목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누구나 알듯이 <선언>과 '우리'사이에는 단지 150년이라는 시간적 거리뿐만 아니라, 좌절한 현존사회주의의 실험과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의 노동자 정당의 경험이라는 역사적 거리가 가로 놓여 있다. 하지만 그 거리는 이승과 저승처럼 결코 넘지 못할 그 무엇은 아닐게다.

<선언>이 발표된지 150년, 이제 잊혀 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잊기 위하여', 먼저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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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노동과 자본, 칼 맑스

임금 노동과 자본

 

사람들은 우리가 요즘의 계급 투쟁과 민족 투쟁의 물질적 토대를 이루는 경제 관계들을 설명하지 않았다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비판해 왔다. 우리는 경제 관계가 정치적 충돌 속에서 직접 떠오를 때에만 의도적으로 언급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매일매일 벌어지는 계급 투쟁을 추적하는 일, 또 날마다 새로 만들어지는 역사적 자료를 경험적으로 입증하는 일이 중요했다. 2월 혁명과 3월 혁명을 일으킨 노동자 계급이 진압됨과 동시에, 그들의 적들, 즉 프랑스의 부르주아 공화파, 유럽 대륙 어디서나 봉건적 절대주의에 맞서 투쟁했던 부르주아와 농민 계급도 패배했다는 사실, 프랑스에서 '점잖은 공화제'가 승리한 것은 동시에 영웅적인 독립 전쟁으로 2월 혁명에 응답한 여러 민족이 몰락한 것이기도 했다는 사실, 끝으로 혁명적 노동자들의 패배와 함께 유럽은 다시 그 옛날의 이중 노예제, 즉 영국--러시아의 노예제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는 사실 등을 입증해야 했던 것이다. 파리에서의 6월 투쟁, 빈 함락, 1848년 11월에 벌어진 베를린의 희비극, 폴란드와 이탈리아와 헝가리에서의 필사적인 노력, 아일랜드의 대기근, 이 모두가 유럽에서 벌어진 부르주아지와 노동자 계급 사이의 투쟁을 집약해 놓은 주요 계기들이었으며, 우리는 이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입증했다. 모든 혁명적 봉기는 비록 그 목표가 계급 투쟁과는 동떨어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혁명적 노동자 계급이 승리하지 않는 한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 또 모든 사회 개혁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봉건적 반(反)혁명이 무기를 들고 세계 대전을 치르지 않는 한에는 하나의 공상에 그친다는 것을 입증했던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지만 우리들의 서술에서는 벨기에스위스가 역사의 거대한 화폭에 담긴 희비극적이고 희화적인 풍속화였는데, 전자는 전형적인 부르주아 군주국이고 후자는 전형적인 부르주아 공화국으로 이 두 국가는 자신들이 계급 투쟁과도 관계없고 유럽의 혁명과도 관계없다고 생각한다.

  1848년의 계급 투쟁이 대규모 정치 투쟁의 형태로 벌어진 것을 우리 독자들도 지켜 보았으므로, 이제 부르주아지의 존립과 그 계급 지배의 토대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 노예 제도의 토대이기도 한 경제 관계 그 자체를 좀더 상세히 파고들 때가 되었다.

  우리는 크게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서술하려고 한다. 1) 임금 노동과 자본의 관계, 노동자들의 노예 상태, 자본가들의 지배, 2) 현체제 밑에서는 피할 수 없는 중간 부르주아 계급들과 이른바 시민층의 파멸, 3) 세계 시장의 전제 군주인 영국에 의해 유럽 여러 민족의 부르주아 계급들이 겪는 상업적 예속착취.

  우리는 독자들이 정치 경제학의 가장 초보적인 개념조차 모르는 것으로 전제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하고 쉽게 서술하고자 한다. 우리는 노동자들이 잘 이해하기를 바란다. 게다가 독일에서는 기존 상태를 옹호하는 특허 변호사들을 비롯하여 자칭 사회주의적 사기꾼들과, 사람들에게서 인정받지 못하는 정치적 천재들---분열된 독일에는 이런 자들이 나랏님들보다도 더 많은데---에 이르기까지, 가장 간단한 경제 관계에 대해서도 그냥 보아넘길 수 없는 극심한 무지와 개념적 혼란이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우선 첫번째 문제를 살펴보자.

  임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노동자들에게 "당신의 임금은 얼마나 되느냐?"고 묻는다면,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나는 나의 부르주아로부터 일당 1마르크를 받는다."고 대답할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나는 2마르크를 받는다."등등의 대답을 할 것이다. 그들이 속해 있는 다양한 노동 부문에서 노동을 한 대가로, 예를 들면 아마포 한 자를 짜거나 전지(全紙) 한 장 분량을 조판하는 데 대한 보수로 그때그때마다 부르주아에게서 받는 다양한 금액을 제시할 것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금액이 다양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한 점에 귀착한다. 즉 임금이란 자본가가 정해진 노동 시간 또는 정해진 노동을 제공하는 데 대해 지불하는 금액인 것이다.

  따라서 마치 자본가는 돈으로 노동자의 노동을 사고, 또 노동자들은 돈을 받고 그에게 자신의 노동을 파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겉모습일 뿐이다. 그들이 돈을 받고 자본가에게 파는 것은 사실상 자신의 노동력이다(승수의 도움말 노동과 노동력을 구분하는 이유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을 한다. 노동은 시간이라는 단위로 잴수 있는 양을 뜻하며 노동력은 어떤 대상에 노동이라는 행위를 가할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 둘의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고용된 노동자가 잉여 노동을 하기 때문이다. 잉여 노동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보자. 한국의 노동자들의 평균적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 자신들이 하루에 일해야 할 평균 노동 시간이 4시간이라고 가정하자. 이것을 필요 노동이라고 한다. 그리고 한국의 노동자들이 하루에 평균 8시간을 일한다고 가정하면 나머지 4시간은 자신들의 생활과는 무관한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노동을 잉여 노동이라고 하고, 이 노동에 의해 창출되는 가치를 잉여 가치라고 한다. 한마디로 한국의 노동자들은 4시간의 잉여 노동에 대해서는 그 대가를 지불 받지 못한 셈인 것이다. 그래서 잉여 노동을 불불(不拂) 노동이라고도 한다.). 자본가는 이 노동력을 하루, 한 주일, 한 달 등의 단위로 산다. 그리고 노동력을 산 뒤에 그는 계약 기간에 노동자를 부림으로써 그것을 쓴다. 자본가는 자신이 노동자의 노동력을 산 바로 그 금액, 예를 들면 2마르크로 2파운드의 설탕이나 정해진 분량의 다른 어떤 상품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가 2파운드의 설탕을 사는 데 쓴 2마르크는 설탕 2파운드의 가격이다. 그가 12시간 동안 쓸 노동력을 사는 데 쓴 2마르크는 12시간 노동의 가격이다. 따라서 노동력은 설탕보다 나을 것도 없고 못할 것도 없는 하나의 상품이다. 전자는 시계로, 후자는 저울로 측정된다.

  노동자는 자신의 숭품인 노동력을 자본가의 상품인 화폐와 교환하며, 이 교환은 정해진 비율에 따라 이루어진다. 즉 정해진 시간 동안 사용될 노동력이 정해진 양의 화폐와 교환되는 것이다. 12시간 동안 베를 짜는 작업은 2마르크와 교환된다. 그런데 이 2마르크는 내가 2마르크로 살 수 있는 다른 모든 상품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사실상 노동자는 자신의 상품인 노동력을 모든 종류의 상품과, 그것도 정해진 비율로 교환해 왔던 것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2마르크를 줌으로써 그에게 그만큼의 고기, 그만큼의 옷, 그만큼의 땔감, 그만큼의 등잔불 등등을 그의 노동일(勞動日)과 교환해 준 셈이다. 따라서 이 2마르크는 노동력이 다른 상품들과 교환되는 비율, 즉 그의 노동력의 교환 가치를 나타낸다. 화폐로 표현된 상품의 교환 가치가 바로 상품의 가격인 것이다. 따라서 임금이란 사람들이 보통 노동의 가격이라고 부르는 노동력의 가격을 가리키는, 즉 인간의 피와 살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이 독특한 상품의 가격을 가리키는 특별한 이름일 뿐이다.

  한 노동자, 예를 들어 직조공을 생각해 보자. 자본가는 그에게 직조기와 실을 제공한다. 직조공은 일에 착수하며, 실은 아마포가 된다. 자본가는 그 아마포를 차지하고 그것을 예컨대 20마르크에 판다. 그러면 직조공의 임금은 아마포 가운데 한 부분, 20마르크 가운데 한 부분, 그의 노동 새산물 가운데 한 부분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아마포가 팔리기 훨씬 전에, 어쩌면 그것이 완성되기 훨씬 전에 직조공은 자신의 임금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본가는 아마포를 팔아서 생기는 돈으로 임금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된 돈으로 지불한다. 부르주아가 제공한 직조기와 실이 족조공의 생산물이 아니듯이, 그가 자신의 상품인 노동력과 교환하여 받은 삼품들도 그의 생산물이 아니다. 부르주아는 자신의 아마포를 살 사람을 전혀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또 그가 그것을 판다고 하더라도 임금조차 뽑아내지 못할 수도 있다. 또 그는 그것을 직조공의 임금에 비해 아주 많은 이윤을 남기고 팔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직조공과 아무 상관도 없다. 자본가는 자신이 이미 지니고 있던 재산, 즉 자기 자본의 일부분으로 직조공의 노동력을 사며, 이것은 그가 자기 재산의 다른 부분으로 원료---실---와 노동 도구---직조기---를 사는 것과 꼭 마찬가지다. 아마포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을 포함해 이것들을 다 산 뒤에 자본가는 생산을 하게 되며, 이때 원자재와 노동 도구는 단지 그의 것일 뿐이다. 물론 우리의 착한 직조공도 후자(노동도구--역자)에 속하는데, 그는 직조기와 마찬가지로 생산물이나 생산물의 가격 가운데에 자기 몫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임금은 노동자가 생산한 상품 속에 들어 있는 노동자의 몫이 아니다. 임금은 자본가가 얼마만큼의 생산적 노동력을 사들이는 데 사용하는 기존 상품의 일부다.

  따라서 노동력은 그 소유자인 임금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파는 하나의 상품이다. 그는 왜 그것을 파는가? 살기 위해서다.

  그러나 노동력의 활용, 즉 노동은 노동자 자신의 생명 활동이며 자기 삶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필요한 생활 수단을 확보하려고 이 생명 활동을 제3자에게 파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생명 활동이 그에게는 생존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살려고 일하는 것이다. 그는 노동이 자기 삶의 일부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은 그의 삶을 희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제3자에게 내맡긴 하나의 상품이다. 따라서 그가 활동해 낳는 산물도 그가 활동하는 목적이 아니다. 그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생산하는 것은 그가 짜는 비단도 아니고, 그가 광산에서 캐 내는 금도 아니며, 그가 짓는 궁전도 아니다. 그가 자기 자신을 위해 생산하는 것은 임금이며, 비단·금·궁전이 그에게 오면 정해진 양의 생활 수단으로, 아마 면재킷이나 동전이나 지하실 주택으로 변할 것이다. 그런데 12시간 동안 천을 짜고, 실을 뽑고, 구멍을 뚫고, 선반을 돌리고, 집을 짓고, 땅을 파고, 돌을 깨고, 짐을 나르는 등등의 일을 하는 노동자가 이 12시간 동안의 옷감짜기, 실뽑기, 구멍뚫기, 선반 작업, 집짓기, 삽질, 돌깨기를 자기 삶을 드러내는 것으로, 즉 삶으로 여기겠는가? 정반대다. 그의 삶은 이러한 활동이 멈출 때, 이를테면 식탁에서, 선술집 의자에서, 잠자리에서 시작된다. 반면에 12시간의 노동이 그에게 뜻 있는 이유는 그것이 옷감짜기, 실뽑기, 구멍뚫기 등등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식탁으로, 선술집 의자로, 잠자리로 데려다 주는 벌이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에가 애벌레로 근근이 목숨을 부지하려고 실을 뽑는다면, 그 누에는 틀림없는 임금 노동자일 것이다. 노동력이 늘 상품이었던 것은 아니다. 노동은 늘 임금 노동, 다시 말해서 자유로운 노동이었던 것이 아니다.황소가 자신의 능력을 농부에게 팔지 않듯이, 노예도 자신의 노동력을 노예 소유주에게 팔지 않았다. 노예는 자신의 노동력과 함께 통째로 그 소유자에게 영원히 팔리기 때문이다. 그는 한 소유자의 손에서 다른 소유자의 손으로 넘어갈 수 있는 상품이다. 그 자신이 상품이며, 노동력이 그의 상품인 것은 아니다. 농노는 자기 노동력의 일부만을 판다. 그가 지주에게서 임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지주가 그에게서 공납을 받아 낸다.

  농노는 토지에 딸려 있으며 토지의 주인에게 수확물을 바친다. 반면에 자유로운 노동자는 자기 자신을 팔며, 그것도 토막으로 나누어서 판다. 그는 날마다 자기 삶에서 8·10·12·15시간은 그것을 산 사람의 것이다. 노동자는 그가 바라면 언제라도 자신을 고용한 자본가에게서 떠나며, 또 자본가도 그가 적절하다고 생각하면 언제라도 곧바로 노동자를 해고한다. 즉 그가 노동자에게서 이득을 보지 못하거나 기대했던 것만큼 이득을 보지 못하면 곧 해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력 판매가 유일한 소득원인 노동자는 굶어 죽지 않으려면 구매자 계급 전체, 즉 자본가 계급을 떠날 수가 없다. 그는 이 자본가 또는 저 자본가의 소유물은 아니지만 자본가 계급의 소유물인 셈이다. 따라서 그가 할 일은 주인을 찾는 것, 즉 이 자본가 계급 속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살 사람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자본과 임금 노동의 관계를 좀더 상세히 다루기 전에, 임금 결정에 영향을 주는 가장 일반적인 사정들을 간단히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미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임금이란 상품, 즉 노동력의 가격이다. 따라서 임금은 다른 모든 상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법칙과 똑같은 법칙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면 상품의 가격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하는 물음이 나온다.
 
 
 

 

상품의 가격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 사이의 경쟁에 의해, 공급에 대한 수요의 관계, 수요에 대한 공급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상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경쟁은 세 측면을 갖는다.

  똑같은 상품을 서로 다른 판매자들이 공급한다. 똑같은 품질의 상품을 가장 싸게 파는 사람이 나머지 판매자들을 누르고 최대의 판로를 확보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처럼 판매자들은 판로, 즉 시장을 찾아서 앞다투어 투쟁한다. 그들은 모두 팔기를 바라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팔기를 바라며, 될 수만 있다면 나머지 판매자들을 밀어내고 혼자서 팔기를 바란다. 따라서 제각기 다른 사람보다 싸게 판다. 그래서 판매자들 사이에 경쟁이 일어나고, 그 경쟁은 공급하는 상품의 가격을 떨어뜨린다.

  그러나 구매자들 사이에서도 경쟁이 일어나며, 이것은 다시 공급되는 상품의 가격을 올린다.

  끝으로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의 경쟁이 일어난다. 전자는 될 수 있는대로 싸게 사려고 하고, 후자는 될 수 있는 대로 비싸게 팔려고 한다.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경쟁의 결과는 앞에서 제시된 경쟁의 두 측면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즉 경쟁이 구매자 진영에서 더 심한가, 아니면 판매자 진영에서 더 심한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산업은 두 진영의 군대를 싸움터에 끌어들여 서로 싸우게 하며, 그들 각자는 또 자기 군대의 대열 안에서도 전투를 치른다. 자기 대열 안에서 난투극을 가장 적게 벌이는 군대가 상대를 누르고 승리한다.

  시장에 100꾸러미의 면화가 나와 있는데, 살 사람은 1000꾸러미를 바란다고 생각해 보자. 이 경우에는 수요가 공급의 10배나 된다. 따라서 구매자들 사이의 경쟁이 아주 치열할 것이며, 그들은 각각 한 꾸러미라도, 될 수만 있다면 100꾸러미 모두를 혼자서 차지하려 할 것이다. 이 예는 멋대로 꾸며 낸 것이 아니다. 상업의 역사를 보면 면화가 흉작일 때 서로 동맹을 맺은 몇몇 자본가들이 100꾸러미가 아니라 지구상의 면화 재고량 모두를 다 사들이려고 한 시기가 있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경우에는 어떤 한 구매자가 면화 꾸러미를 비교적 더 비싼 값에 사들임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물리치려고 할 것이다. 적군의 대열 속에서 치열한 격투가 벌어지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100꾸러미가 모두 팔릴 것을 확신한 판매자들은 상대편에서 앞다투어 가격을 올리고 있는 순간에 내분을 일으켜 상품 가격을 떨어뜨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할 것이다. 따라서 판매자 진영 안에는 갑자기 평화가 찾아온다. 그들은 냉철하게 팔짱을 끼고 마치 사람처럼 단결하여 구매자들과 대립한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사야겠다는 사람들조차 그 이상은 더 못 내겠다는 명확한 한도를 제시하지 않는 한, 그들의 요구에는 한도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한 상품의 공급이 이 상품에 대한 수요보다 적을 때에는, 판매자들 사이의 경쟁이 아주 미약하거나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판매자들 사이의 경쟁이 줄어드는 만큼, 그것에 비례해서 구매자들 사이의 경쟁은 심해진다. 그 결과 상품 가격은 많든 적든 뚜렷하게 올라간다.

  잘 알려진 대로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는 정반대의 경우가 더 자주 일어난다. 공급이 수요를 훨씬 더 넘어서는 경우에는 판매자들 사이의 필사적인 경쟁, 구매자의 부족, 상품을 헐값으로 팔아 치우는 사태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가격의 오름과 내림이란 무엇을 뜻하며, 높은 가격과 낮은 가격은 무엇을 뜻하는가? 모래알도 현미경으로 보면 커 보이고 탑도 산과 비교하면 낮은 것이다. 그리고 가격이 수요와 공급의 관계로써 결정된다면, 수요와 공급의 관계는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길 가는 부르주아 가운데 아무나 붙잡고 한번 물어 보자. 그는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마치 또 하나의 알렉산더 대왕처럼 이 형이상학적 매듭을 구구단으로 끊어 버릴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만일 내가 파는 상품을 생산하는 데 100 마르크가 들었고 내가 이 상품을 팔아서 110 마르크를 받는다면, ---물론 1년이 지난 뒤에---그것은 얼마 안 되는 공정하고 적절한 이득이다. 만일 내가 교환을 통해서 120, 130 마르크를 받는다면, 그것은 높은 이득이다. 그리고 만일 내가 200 마르크씩이나 받는다면, 그것은 엄청나고도 굉장한 이득이다. 그러면 부르주아에게 이윤의 척도 노릇을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상품의 생산비다. 그가 이 상품을 정해진 양의 다른 상품들, 생산하는 데 더 적은 비용이 들어간 상품들과 교환했다면, 그는 손해를 본 셈이다. 또 자기 상품을 정해진 양의 다른 상품들, 생산하는 데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간 상품들과 교환했다면, 그는 이득을 본 셈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상품의 교환 가치가 영(零)---생산비---보다 낮은가 높은가 하는 정도에 따라 이득의 오르내림을 계산한다.

  우리는 이미 수요와 공급 사이의 변동 관계가 때로는 가격을 올리고 때로는 내리며, 때로는 낮은 가격, 때로는 높은 가격을 형성하게 한다는 사실을 보았다. 만일 공급이 부족하거나 수요가 지나치게 늘어나서 어떤 상품의 가격이 올라간다면, 어떤 다른 상품의 가격이 반드시 그만큼 떨어진다. 왜냐하면 상품의 가격이란 그것이 다른 상품들과 교환되는 비율을 화폐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단 한 자의 가격이 5마르크에서 6마르크로 올랐다면 은의 가격은 비단에 비해 떨어진 것이며, 또 그와 마찬가지로 예전 가격에 묶여 있는 다른 모든 상품들의 가격도 비단에 비해 떨어질 것이다. 이제 똑같은 양의 비단을 얻으려면 교환할 때 더 많은 양의 다른 상품을 주어야 한다. 한 상품의 가격이 오르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는가? 많은 양의 자본이 번창하는 산업 부문에 몰릴 것이며, 자본이 이처럼 더 유리한 산업 영역으로 몰려드는 사태는 그 부문에서 얻는 이득이 보통 수준으로 떨어질 때까지, 아니 오히려 그 생산물의 가격이 과잉 생산 때문에 생산비 밑으로 떨어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반대로 한 상품의 가격이 그 생산비 밑으로 떨어지면, 자본은 이 상품을 생산하는 데서 손을 뗄 것이다. 한 산업 부문이 더 이상 시대에 맞지 않아서 몰락할 수밖에 없는 경우를 빼면, 자본의 이 같은 도피는 그 상품의 생산, 즉 공급을 줄일 것이며, 이것은 그 공급이 수요와 맞아떨어질 때까지, 따라서 그 가격이 다시 생산비 수준으로 오를 때까지, 아니 오히려 공급이 수요보다 더 적어질 때까지, 즉 그 가격이 다시 생산비보다 더 오를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한 상품의 시가(時價)는 늘 생산비보다 높거나 낮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본이 한 산업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끊임없이 흘러 들어가거나 흘러 들어오는 것을 본다. 높은 가격은 지나치게 심한 유입을 낳고, 낮은 가격은 지나치게 심한 유출을 낳는다.

  우리가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볼 경우, 공급뿐만 아니라 수요도 생산비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보여 줄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되면 우리가 다루는 주제에서 너무 멀어지게 된다.

  우리가 방금 본 바와 같이 수요와 공급의 변동은 한 상품의 가격을 늘 다시 생산비로 되돌려 보낸다. 상품의 실제 가격은 늘 생산비보다 높거나 낮다. 그러나 오르내림은 서로 상쇄되므로, 얼마 동안 산업에서 나타난 썰물과 밀물을 합산해 보면 상품은 그 생산비에 따라 교환되며, 따라서 그 생산비에 의해 결정된다.

  이처럼 생산비에 의해 가격이 결정된다는 것을 경제학자들과 같은 의미로 이해하면 안 된다. 경제학자들은 상품의 평균 가격이 생산비와 같다고 말하며, 이것은 법칙이라는 것이다. 가격의 오름은 내림으로 또 내림은 오름으로 서로 상쇄되는 이 무정부적인 운동을 그들은 우연으로 여긴다. 그러나 다른 경제학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듯이, 똑같은 권리로 가격의 변동을 법칙으로 여기고 생산비에 의한 가격 결정을 우연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동, 즉 자세히 살펴보면 끔찍하기 짝이 없는 황폐화를 수반하며 마치 지진처럼 부르주아 사회를 기초에서부터 뒤흔드는 이 변동 과정 속에서만 생산비에 의한 가격 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무질서 운동 전체가 부르주아 사회의 질서다. 이 같은 산업의 무정부 상태의 과정 속에서, 즉 이 같은 순환 운동 속에서 경쟁은 말하자면 한 극단을 다른 극단으로써 상쇄한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생산비에 의한 상품 가격의 결정은 그 상품의 가격이 생산비 이상으로 오르는 시기가 그것이 생산비 이하로 떨어지는 시기에 의해 상쇄되는 방식으로, 또는 그 반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이것은 공산품 하나하나마다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산업 부문 전체에만 해당한다. 따라서 이것은 개별 산업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가 계급 전체에만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생산비에 의한 가격 결정은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에 의한 가격 결정과 똑같다. 왜냐하면 생산비는 첫째, 원자재와 도구의 마모분으로, 즉 그 생산에 얼마만큼의 노동일이 들었고 따라서 얼마만큼의 노동 시간을 나타내는 공산품으로 이루어지며, 둘째, 바로 시간이 그 척도가 되는 직접적 노동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상품의 가격을 일반적으로 규제하는 바로 그 일반 법칙이 당연히 임금, 즉 노동의 가격도 규제한다.

  노동의 임금은 수요와 공급의 관계에 따라, 즉 노동력의 구매자인 자본가와 노동력의 판매자인 노동자 사이의 경쟁이 어떠냐에 따라 때로는 오르고 때로는 내릴 것이다. 임금의 변동은 대체로 상품 가격의 변동에 상응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동 속에서 노동의 가격은 생산비에 의해, 즉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만들어 내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면 노동력의 생산비란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자를 노동자로 유지시키고 또 그를 노동자로 길러 내는 데 필요한 비용이다.

  따라서 어떤 노동을 길러 내는 기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그 노동의 가격, 즉 임금도 낮아진다. 숙련 기간이 거의 필요하지 않고 단지 노동자의 육체적 존재만으로도 충분한 산업 부문에서는 노동자를 만들어 내는 데 필요한 생산비가 거의 생명과 노동 능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상품에만 국한된다. 그러므로 그의 노동의 가격은 필요한 생활 수단의 가격으로 결정된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공장주는 자기 생산비와 이에 따른 생산물 가격을 계산할 때, 노동 도구의 소모분을 계산에 넣는다. 예를 들어 그가 어떤 기계를 사는 데 1000마르크를 들였고 또 이 기계는 10년 동안 쓰고 나면 닳아 없어진다면, 그는 10년 뒤에 이 기계를 새 것으로 바꾸려고 해마다 100마르크를 상품 가격에 포함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단순한 노동력의 생산비 속에는 노동자 종족이 번식하고 또 닳아 없어진 노동자들을 새로운 사람들로 교체할 수 있기 위한 비용, 즉 대를 이어 가는 비용이 포함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기계의 마모와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의 마모 또한 계산에 포함된다.

  따라서 단순한 노동력의 생산비는 노동자의 생존비와 대를 이어 가는 비용으로 귀착한다. 이러한 생존비와 대를 이어 가는 비용의 가격이 임금을 이루는 것이다. 이렇게 결정되는 임금을 최저 임금이라고 한다. 생산비에 의한 상품 가격의 결정이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이 최저 임금은 개별적인 개인이 아니라 유(類) 전체에 대해서 타당한 것이다. 노동자 개개인,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생존하고 대를 이어 갈 수 있을 만큼의 보수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 전체의 임금은 변동 속에서도 이 최저치에 일치하게 된다.

  임금과 다른 모든 상품의 가격을 규제하는 가장 일반적인 법칙을 알아 보았으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의 주제를 좀더 자세히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은 새로운 원자재와 새로운 노동 도구와 새로운 생활 수단을 생산하려고 사용되는 원자재와 노동 도구와 각종 생활 수단으로 이루어진다. 이 모든 구성 부분은 노동의 창조물이고, 노동의 산물이며, 축적된 노동이다. 축적된 노동, 즉 새로운 생산에 도구로 쓰이는 노동이 곧 자본이다.

  경제학자들은 위와 같이 말하고 있다.

  흑인 노예란 무엇인가? 흑인종에 속하는 한 인간이다. 위의 설명은 이런 식의 설명이나 마찬가지다.

  흑인은 흑인이다. 어떤 관계를 맺을 때에만 그는 비로소 노예가 된다. 면방적기는 면화에서 실을 뽑는 기계다. 어떤 관계 속에서만 그것은 자본이 된다. 이 관계에서 떼어 냈을 때 그것은 자본이 아니다. 이는 마치 금이 그 자체로는 화폐가 아니며, 설탕이 설탕 가격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생산 속에서 인간은 자연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서로서로에 대해서도 영향을 끼친다.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협력하고 자신들의 활동을 서로 교환함으로써만 생산을 하게 된다. 생산하려고 인간은 어떤 관계와 관련을 맺으며, 또 그들은 이러한 사회 관계와 관련 속에서만 자연에 대해 작용을 가하고 생산을 하게 된다.

  생산자들 서로간에 맺는 이러한 사회적 관계, 즉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활동을 교환하고 생산이라는 공동 행위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조건은 생산 수단의 성격에 따라서 당연히 달라질 것이다. 총포라는 새로운 전쟁 도구가 발명되면서 군대의 내부 조직 전체가 반드시 바뀔 수밖에 없었고, 각 개인을 군대의 일원으로 만들고 군인으로서 활동할 수 있게 만드는 조건이 바뀌었으며, 다양한 병과(兵科)들 사이의 관계도 바뀌었다.

  개인들로 하여금 생산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사회 관계, 즉 사회적 생산 관계는 따라서 물질적 생산 수단과 생산력의 변화 발전과 더불어 변화하며 변모한다. 총체로서의 생산 관계는 사람들이 사회라고 부르는 사회 관계를 형성하며, 좀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역사적 발전 단계에 있는 사회, 다른 것과 구별되는 독특한 특성을 지닌 사회를 형성한다. 고대 사회, 봉건 사회, 부르주아 사회는 그러한 생산 관계의 총체이며, 각 생산 관계는 동시에 인류 역사 발전의 특수한 한 단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자본도 사회적인 생산 관계다. 그것은 부르주아적인 생산 관계, 즉 부르주아 사회의 생산 관계다. 자본을 이루는 생활 수단·노동 도구·원자재 등 모든 것은 주어진 사회적 조건에서, 즉 어떤 사회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축적된 것이 아닌가? 그것들은 주어진 사회적 조건에서, 어떤 사회 관계 속에서 새로운 생산에 쓰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바로 이 사회적 성격이 새로운 생산을 위해 쓰이는 생산물들을 자본으로 바꾸지 않는가?

  자본은 생활 수단·노동 도구·원자재로만, 즉 물질적 생산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환 가치로도 이루어진다.

  그것을 이루는 모든 생산물은 상품이다. 따라서 자본은 일정한 양의 물질적 생산물일 뿐만 아니라, 일정한 양의 상품, 교환 가치, 즉 사회적 크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양털 대신에 면화를, 밀 대신에 쌀을, 철도 대신에 기선을 갖다 놓는다고 하더라도, 면화·쌀·기선---자본의 육체---이 예전에 그것의 육체 노릇을 했던 양털·밀·철도와 똑같은 교환 가치, 즉 똑같은 가격을 갖고 있기만 하다면, 그 자본은 여전히 그대로다. 자본은 조금도 바뀌지 않으면서도 자본의 육체는 끊임없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자본이 일정한 양의 상품, 즉 교환 가치라 하더라도, 일정한 양의 상품, 즉 교환 가치가 다 자본은 아니다.

  일정한 양의 교환 가치는 모두 하나의 교환 가치다. 개별적인 교환 가치는 모두 일정한 양의 교환 가치다. 예를 들어 1000마르크짜리 집은 1000마르크의 교환 가치다. 1페니히짜리 종이 한 장은 100/100페니히라는 일정한 양의 교환 가치다. 다른 생산물과 교환할 수 있는 생산물은 상품이다. 생산물이 교환되는 정해진 비율이 그것의 교환 가치를 이루며, 또 이를 화폐로 표현하면 그 가격이다. 이 생산물의 양은 그것의 본분, 즉 상품이 되거나 교환 가치를 나타내거나 어떤 가격을 갖거나 하는 본분을 결코 바꿀 수 없다. 크든 작든간에 나무는 여전히 나무인 것이다. 철을 다른 생산물들과 교환할 때 근(斤)으로 하든 관(貫)으로 하든, 그것 때문에 철의 성격, 즉 교환 가치인 상품으로서의 성격이 바뀌겠는가? 양에 따라서 철은 더 많거나 더 적은 가치를 지닌 상품, 더 높거나 더 낮은 가격의 상품이 될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일정한 양의 상품, 일정한 양의 교환 가치가 자본이 되는가?

  그것이 자립적인 사회적 으로서, 즉 사회의 일부분이 갖는 힘으로서, 직접적인 산 노동력과의 교환을 통해 보존되고 늘어나는 것에 의해서다. 노동 능력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있는 계곱의 존재가 자본의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다.

  직접적인 산 노동을 축적된 과거의 대상화한 노동이 지배함으로써 비로소 축적된 노동이 자본으로 바뀐다.

  자본의 본질은 축적된 노동이 새로운 생산을 위한 수단으로서 산 노동에 봉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본질은 산 노동이 축적된 노동의 교환 가치를 유지하고 늘리는 수단으로서 축적된 노동에 봉사하는 데 있는 것이다.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 사이에서 교환이 이루어질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과 교환하여 생활 수단을 얻는다. 그러나 자본가는 자신의 생활 수단과 교환하여 노동, 노동자의 생산 활동, 창조적인 힘을 얻는데, 이 힘을 통해 노동자는 자신이 소비하는 것을 보상할 뿐만 아니라 축적된 노동에 그것이 원래 갖고 있던 것보다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본가로부터 당장 쓸 생활 수단의 일부를 받는다. 그는 이 생활 수단을 어디에 쓰는가? 직접적인 소비에 쓴다. 그러나 내가 생활 수단을 써 버리자마자, 나는 그것을 잃어버리며 다시는 되찾을 수 없게 된다. 즉 이 수단이 나의 생명을 유지해 주는 시간을 이용해 내가 새로운 생활 수단을 생산하지 않는 한, 소비하는 동안에 써서 없애 버리는 가치 대신에 새로운 가치를 나의 노동으로 창조하지 않는 한에는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는 바로 이 귀중한 재생산의 힘을 자신이 받은 생활 수단과 교환하여 자본가에게 넘겨준다. 따라서 그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이 힘을 잃어버린 셈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차지(借地) 농업가가 자신의 날품팔이 노동자에게 일당으로 은화 5그로쉔을 준다고 하자. 은화 5그로쉔을 받고 이 노동자는 차지 농업가의 밭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여 결국 그에게 10그로쉔만큼의 수입을 확보해 준다. 차지 농업가는 자신이 날품팔이 노동자에게 건네주어야 하는 가치만을 보상받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를 2배로 늘리게 된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날품팔이 노동자에게 준 은화 5그로쉔을 실속 있게 생산적으로 사용하고 소비한 셈이다. 이 은화 5그로쉔을 가지고 그는, 2배의 가치를 갖는 농산물을 생산하여 5그로쉔을 10그로쉔으로 만드는 날품팔이 노동자의 바로 그 노동과 힘을 샀던 것이다. 반면에 날품팔이 노동자는 그가 바로 차지 농업가에게 그 작용의 결과를 넘겨주어 버린 자신의 노동력 대신에 은화 5그로쉔을 얻는다. 그는 이 돈을 생활 수단과 교환하며, 얼마 안 있어 그것을 다 써 버린다. 따라서 이 5그로쉔은 이중으로 소비된 셈이다. 그 자본을 위해서는 재생산에 쓰였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비생산적으로 쓰였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한번 쓰면--역자)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생활 수단과 교환되었고, 노동자는 차지 농업가와 똑같은 교환을 되풀이함으로써만 그 가치를 다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은 임금 노동을 전제로 하며 임금 노동은 자본을 전제로 한다. 둘은 서로서로 제약하며, 서로를 산출해 낸다.

  면방직 공장의 노동자가 면직물만을 생산하는가? 아니다. 그는 자본을 생산한다. 그는, 자신의 노동을 지휘하고 이를 매개로 다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데 쓰이는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다.

  자본은 노동력과 교환됨으로써만, 즉 임금 노동을 가동함으로써만 늘어날 수 있다. 임금 노동자의 노동력은 자본을 늘림으로써만, 즉 자신을 노예로 삼고 있는 힘을 강화함으로써만 자본과 교환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자본을 늘리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 즉 노동자 계급을 늘리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가들의 이해 관계와 노동자의 이해 관계는 똑같다고 부르주아들과 그 경제학자들은 주장한다. 사실 그렇다! 노동자는 자본이 고용하지 않으면 파멸하게 된다. 자본은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으면 파멸하게 되며, 착취하려면 그것을 사야만 한다. 생산을 위해 쓰이는 자본인 생산 자본이 급속히 늘어날수록, 따라서 산업이 번창할수록, 다시 말해 부르주아지가 부유해질수록, 사업이 잘되면 잘될수록 자본가에게는 더욱더 노동자가 필요하게 되며, 노동자는 더욱더 비싼 값에 팔리게 된다.

  따라서 노동자의 상태를 그럭저럭 살 만하게 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조건은 생산 자본이 될 수 있는 대로 급속히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산 자본의 성장이란 무엇인가? 산 노동에 대한 축적된 노동의 힘이 성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노동자 계급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지배가 성장하는 것이다. 만일 임금 노동이 자신을 지배하는 다른 사람의 부(富)이자 자신의 적대 세력인 자본을 생산한다면, 임금 노동이 다시 자본의 일부가 된다는 조건, 즉 자본을 가속화하는 성장 운동 속에 다시 투입하는 지렛대가 된다는 조건에서 일거리, 즉 생활 수단이 자본으로부터 다시 흘러 나오게 된다.

  자본의 이해 관계와 노동자의 이해 관계가 똑같다는 말은 자본과 임금 노동이 한 관계의 두 측면이라는 뜻일 뿐이다. 한 쪽이 다른 쪽을 제약하는 것은 마치 고리 대음업자와 방탕한 인간이 서로서로 제약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임금 노동자가 임금 노동자인 한, 그의 운명은 자본에 달려 있다. 이것이 그토록 칭송받고 있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이해 관계의 공통성이다.

 

자본이 커지면 임금 노동의 양도 그만큼 늘어나며, 노동자의 수도 그만큼 많아진다. 한마디로 말해, 자본이 더 많은 수의 개인들까지 지배하게 된다. 가장 좋은 경우를 생각해 보자. 생산 자본이 성장하면, 노동에 대한 수요도 커진다. 따라서 노동자의 가격인 임금도 올라간다.

  어떤 집이 아무리 작더라도 이 집을 둘러싸고 있는 집들이 한결같이 작다면, 그 집은 주택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채워 준다. 그러나 작은 집 옆에 궁전이 하나 있다면, 그 작은 집은 오두막집처럼 오그라들고 말 것이다. 이제 이 작은 집은 그 소유자가 요구하는 바가 전혀 없거나 아주 작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또 문염ㅇ이 진보함에 따라 집이 아무리 커진다 하더라도, 옆에 있는 궁전이 똑같은 정도로 또는 더 높이 치솟는다면 상대적으로 작은 집에 사는 사람은 자신의 울 안에서 더욱더 불쾌하고 물만스러복 짓눌린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임금이 조금이라도 눈에 띄게 오르려면 생산 자본의 급속한 성장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생산 자본의 급속한 성장은 부, 사치, 사회적 욕구와 쾌락의 급속한 성장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노동자의 쾌락이 늘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는 사회적 만족은 노동자가 넘볼 수 없는 자본가의 늘어난 쾌락에 비하면, 사회의 발전 상태 일반에 비하면 줄어드는 셈이다. 우리의 욕구와 쾌락은 사회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를 기준으로 그것을 재는 것이지 그것을 채워 주는 대상을 기준으로 재는 것은 아니다. 욕구는 사회적 본성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본성이다.

  임금은 일반적을오 그것과 교환할 수 있는 상품의 양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관계들을 포함하고 있다.

  우선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력의 대가로 받는 것은 정해진 양의 화폐다. 임금은 단지 화폐 가격에 의해서만 결정되는가?

  16세기에 아메리카에서 더 풍부하고 더 쉽게 가공할 수 있는 광산들이 발견된 결과, 유럽에서 유통되는 금과 은이 늘어났다. 그러므로 금과 은의 가치가 나머지 상품들에 비해 떨어졌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동력의 대가로 예전과 똑같은 양의 은화를 받았다. 그들의 노동의 화폐 가격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그들의 임금은 떨어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똑같은 양의 은과 교환하여 더 적은 양의 다른 상품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16세기에 자본의 성장, 즉 부르주아지의 대두를 촉진한 사정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또 다른 경우를 들어 보자. 1847년 겨울에 흉작으로 말미암아 없어서는 안 될 생활 수단들, 이를테면 곡물·고기·버터·치즈 등의 가격이 눈에 띄게 올랐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력의 대가로 예전과 같은 양의 화폐를 받았다고 해 보자. 그들의 임금은 떨어지지 않았는가? 물론 떨어졌다. 교환을 할 때 그들은 똑같은 돈을 주고도 더 적은 빵과 고기 등등을 얻었으니까 말이다. 그들의 임금이 떨어진 것은 은의 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생활 수단의 가치가 커졌기 대문이다.

  끝으로, 노동의 화폐 가격은 그대로인 반면에 모든 농산물과 공산품의 가격은 새로운 기계의 사용, 좋은 날씨 등으로 말미암아 떨어졌다고 해 보자. 이제 노동자들은 똑같은 돈을 주고 모든 종류의 상품을 더 많이 살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의 임금은 화폐 가치가 변하지 않았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오른 셈이다.

  따라서 노동의 화폐 가격인 명목 임금은 실질 임금, 즉 임금과 교환하여 실제로 받는 상품의 양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임금의 오르내림에 대해 논할 때 노동의 화폐 가격인 명목 임금만을 주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명목 임금, 즉 노동자가 자기 자신을 자본가에게 파는 대가인 화폐 액수도, 또 실질 임금, 즉 이 화폐로 그가 살 수 있는 상품의 양도 임금 속에 포함된 관계들을 남김없이 다 설명하지는 못한다.

  임금은 무엇보다도 자본가의 이득인 이윤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도 한데, 이것이 비교·상대적 임금이다.

  실질 임금이 노동의 가격을 나머지 상품들의 가격과의 관계로 표현하는 반면에, 상대적 임금은 노동에 의해 새로 만들어진 가치 가운데서 직접적인 노동이 받는 몫을 축적된 노동, 즉 자본이 차지하는 몫과의 관계로 표현한다.

  우리는 위 14쪽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임금은 노동자가 생산한 상품 속에 들어 있는 노동자의 몫이 아니다. 임금은 자본가가 얼마 만큼의 생산적 노동력을 사들이는 데 사용하는 기존 상품의 일부다." 그러나 자본가는 노동자가 만든 생산물을 파는 가격에서 다시 이 임금을 보상해 주어야 한다. 그는 이것을 보상할 때 보통 자신이 지출한 생산비를 초과하는 잉여분, 즉 이윤이 남을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노동자가 만든 상품의 판매 가격은 자본가 쪽에서 보면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로 그가 미리 지불한 원자재 가격에 대한 보상, 이어서 또한 그가 미리 지불한 도구·기계와 다른 노동 수단들의 마모분에 대한 보상, 둘째로 그가 미리 지불한 임금에 대한 보상, 셋째로 이것을 초과하는 잉여분, 즉 자본가의 이윤이 그것이다. 첫째 부분이 예전부터 존재하고 있던 가치만을 보상하는 반면에, 임금에 대한 보상이나 자본가의 잉여분, 즉 이윤은 대체로 노동자의 노동으로 창조된 가치, 원자재에 덧붙은 새로운 가치에서 나오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임금과 이윤을 서로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둘 모두를 노동자가 만든 생산물의 몫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실질 임금은 그대로인 채, 심지어 오르기까지 하면서도, 상대적 임금은 떨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생활 수단의 가격이 2/3씩 내렸는데, 하루치 임금은 1/3만, 예를 들어 3마르크에서 2마르크로 내렸다고 하자. 비록 노동자가 2마르크를 가지고, 예전에 3마르크를 주고 살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상품을 살 수 있다 하더라도, 그의 임금은 자본가의 이윤에 비해 줄어든 셈이다. 자본가(예를 들어 공장주)의 이윤은 1마르크 늘어났다. 다시 말해서 노동자는 이제 자본가에게서 적은 액수의 교환 가치를 받고 전보다 더 많은 액수의 교환 가치를 생산해야만 한다. 자본의 몫은 노동의 몫에 비해 늘어났다. 사회적 부가 자본과 노동 사이에 분배되는 비율이 더욱 불평등해졌다. 자본가는 똑같은 자몬으로 더 많은 양의 노동을 지배한다. 노동자 계급을 지배하는 자본가 계급의 힘은 더 커진 반면에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는 더욱 나빠졌으며 자본가의 지위 아래로 한 단계 더 떨어진 것이다.

  그러면 임금과 이윤의 관계에서 그 오르내림을 결정하는 일반 법칙은 무엇인가?

  둘은 서로 반비례한다. 자본의 몫인 이윤은 임금의 몫인 하루치 임금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비율로 올라가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윤은 임금이 떨어지는 만큼 올라가며, 임금이 올라가는 만큼 떨어진다.

  아마 다음과 같이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자본가는 그의 생산물을 유리한 조건으로 다른 자본가들과 교환하여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거나 예전 시장에서 수요가 갑자기 늘어나거나 한 결과, 그의 상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 이득을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자본가의 이윤은 임금, 즉 노동력의 교환 가치의 오르내림과는 상관없이 다른 자본가들을 속임으로써 늘어날 수도 있다. 또는 자본가의 이윤은 노동 도구의 개선, 자연력의 새로운 이용 등등을 통해 늘어날 수도 있다고 말이다.

  먼저 우리는 비록 정반대의 과정을 거쳐 생겨난 것이라고 하더라도 결과는 똑같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윤이 늘어난 것은 임금이 떨어졌기 때문에 아니지만, 임금이 떨어진 것은 이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똑같은 양의 다른 사람의 노동으로 더 많은 양의 교환 가치를 사들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동에게 더 높은 액수를 지불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노동이 자본가에게 가져다 준 순이익에 비해 노동은 더 낮은 액수를 지불받은 것이다.

  게다가 상품의 가격은 변동하는데도 각 상품의 평균 가격, 즉 그것이 다른 상품들과 교환되는 비율은 그 생산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러므로 자본가 계급 안에서 저희들끼리 속이고 속는 것은 반드시 상쇄될 수밖에 없다. 기계를 개량하거나 생산을 위해 자연력을 새롭게 이용하는 것은 같은 노동 시간에 같은 양의 노동과 자본을 가지고 더 많은 양의 생산물을 창조할 수 있게 해 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많은 양의 교환 가치를 창조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일 내가 방적기를 사용해 그 기계를 발명하기 전보다 시간당 2배의 실, 예를 들어 50파운드 대신에 100파운드의 실을 생산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길게 보면 나는 이 100파운드와 교환해 예전에 50파운드를 주고 얻었던 것보다 더 많은 상품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생산비가 절반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며, 다시 말하면 같은 비용으로 2배의 생산물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한 나라 또는 전세계 시장의 자본가 계급, 즉 부르주아지가 생산의 순이익을 저희들끼리 어떤 비율로 나누든간에 이 순이익의 총액은 언제나 대체로 직접 노동에 의해 늘어난 축적된 노동의 총량일 뿐이다. 따라서 이 총액은 노동이 자본을 늘리는 것과 같은 비율로, 즉 이윤이 임금에 비해 높아지는 것과 같은 비율로 늘어난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과 임금 노동의 관계 안에서만 보더라도 자본의 이해 관계와 임금 노동의 이해 관계가 정면으로 대립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본이 급속히 늘어나는 것은 이윤이 급속히 늘어나는 것과 똑같다. 이윤은 노동의 가격, 즉 상대적 임금이 그만큼 급속히 줄어들 때에만 급속히 늘어날 수 있다. 명목 임금, 즉 노동의 화폐 가치와 더불어 실질 임금까지 오르는 경우에도, 실질 임금이 이윤과 같은 비율로 오르지 않는 한에는 상대적 임금은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호경기 때에 임금이 5% 오르고 이윤은 30% 오른다면, 비교·상대적 임금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줄어든다.

  이처럼 자본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노동자의 수입도 늘어나지만, 동시에 노동자와 자본가를 가르는 사회적 간격도 커지며, 또 노동에 대한 자본의 힘, 즉 자본에 대한 노동의 예속도 커지는 것이다.

  노동자가 자본의 급속한 성장과 이해 관계를 같이 한다는 이야기는 단지 다음과 같은 뜻일 뿐이다. 즉 노동자가 다른 사람의 부를 급속히 늘려 줄수록 그만큼 더 큰 빵 덩어리가 그에게 떨어진다는 것, 그만큼 더 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얻고 살아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자본에 예속된 노예들의 수가 그만큼 더 늘어난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노동자 계급에게 가장 좋은 상황, 즉 자본이 될 수 있는 대로 급속히 성장하는 것조차도, 그것이 아무리 노동자의 물질적 삶을 개선해 준다하더라도 노동자의 이해 관계와 자본가의 이해 관계, 즉 부르주아지의 이해 관계 사이의 대립을 없애지는 못한다. 이윤과 임금은 예나 지금이나 반비례하는 것이다.

  만일 자본이 급속히 성장한다면 임금이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의 이윤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더 빨리 올라간다. 노동자의 물질적 상태는 좋아졌지만, 그것은 그의 사회적 처지를 희생한 대가일 뿐이다. 노동자와 자본가를 떼어 놓는 사회적 간격은 더 넓어졌다.

  결국 임금 노동에 가장 좋은 조건은 생산 자본이 될 수 있는 대로 급속히 성장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뜻일 뿐이다. 노동자 계급이 자신의 적대 세력, 자기 위에 군림하는 다른 사람의 부를 급속히 늘리고 키워 줄수록, 그만큼 더 좋아진 조건에서 그들은 부르주아지가 자신들을 묶어서 끌고 가는 황금 사슬을 자기 손으로 만든다는 사실에 만족해하면서, 또다시 부르주아의 부를 늘려 주고 자본의 힘을 키워 주러고 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생산 자본의 성장과 임금의 상승, 이 두 가지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정말 뗄 수 없도록 결합되어 있는가? 우리는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또 자본이 살찔수록 그 노예도 살찌게 된다는 말도 믿어서는 안 된다. 부르주아지는 너무 계몽되어 있고 계산에 밝기 때문에, 봉건 영주처럼 자기 하인들이 화려하다고 뽐내는 따위의 편견을 갖고 있지는 않다. 부르주아지의 존재 조건이 그들을 계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 문제를 좀더 자세히 탐구해야 할 것이다. 생산 자본의 성장은 임금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부르주아 사회의 생산 자본이 전체적으로 성장하면, 노동의 축적은 한층 더 다양한 측면에서 이루어진다. 자본의 수와 규모가 늘어난다.

  자본의 증가로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이 심해진다. 자본 규모가 커짐으로써 좀더 거대한 무기를 지닌 좀더 강력한 노동자 군대를 산업의 싸움터로 끌어내는 수단이 주어진다.

  한 자본가가 다른 자본가를 물리치고 그의 자본을 빼앗으려면 더 싸게 파는 도리밖에 없다. 파산하지 않고 더 싸게 팔려면 더 싸게 생산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노동 생산력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올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 생산력은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분업을 진전시키고 기계를 더 전면적으로 들여오고 계속 개선함으로써 높아진다. 분업에 편입되는 노동자 군대가 커질수록, 기계를 들여오는 규모가 거대해질수록 생산비는 비례해서 줄어들며, 노동은 더욱 실속있게 된다. 따라서 자본가들 사이에서는 더 전면적인 경쟁, 즉 분업과 기계를 늘리고 그것을 될 수 있는 대로 대규모로 이용하려는 경쟁이 일어난다.

  그러나 자본가가 분업을 진전시키고 새로운 기계를 사용하고 개선하여 자연력을 더 값싸게 더 대규모로 이용함으로써, 같은 양의 노동이나 축적된 노동으로 다른 경쟁자들보다 더 많은 양의 생산물, 즉 상품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면, 예컨대 그가 다른 경쟁자들이 아마포 반 자를 짜는 데 걸리는 시간과 똑같은 노동 시간에 아마포 한 자를 생산할 수 있다면, 이 자본가는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그는 아마포 반 자를 지금까지의 시장 가격대로 계속 팔 수도 있겠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자신의 적들을 물리치고 자기만의 판로를 넓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산이 늘어나는 만큼 판로에 대한 그의 요구도 커진다. 그가 활용하게 된 더 강력하고 더 값비싼 생산 수단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상품을 더 싸게 팔 수 있도록 해 주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로 하여금 더 많은 상품을 팔고 또 자신의 상품을 위해 훨씬 더 큰 시장을 정복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의 자본가는 반 자의 아마포를 그의 경쟁자들보다 싸게 팔 것이다.

  그러나 이 자본가가 한 자를 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이 다른 자본가들이 반 자를 생산하는 데 드는 것보다 많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경쟁자들이 반 자를 파는 것만큼 싼값에 한 자를 팔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판다면 그는 아무 이득도 얻지 못한 채, 단지 교환을 통해 생산비를 되찾을 뿐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그의 수입이 조금 늘어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가 더 많은 자본을 가동했기 때문이지 그의 자본이 다른 자본보다 더 많은 가치 증식을 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기 상품의 가격을 자신이ㅡ 경쟁자들보다 몇 퍼센트 낮게 정하기만 해도 이루려는 목적을 이루게 된다. 가격을 내려 판매함으로써, 그는 경쟁자들을 물리치거나 적어도 그들의 판로의 일부를 빼앗는다. 그리고 끝으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한 상품을 팔 때 산업이 호황이냐 불황이냐에 따라 시가는 늘 생산비 이상이거나 이하라는 사실이다. 아마포 한 자의 시장 가격이 지금까지의 평균 생산비보다 낮으냐 높으냐에 따라서, 더 능률적인 새 생산 수단을 사용한 자본가가 실제 생산비 이상으로 파는 비율, 즉 퍼센트도 변동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자본가의 특권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자본가들도 똑같은 기계와 똑같은 분업을 같은 규모나 더 큰 규모로 도입한다. 그리고 이러한 도입은 아마포 가격이 예전의 생산비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산비 이하로 떨어질 때까지 일반화할 것이다.

  따라서 자본가들은 서로서로 새로운 생산 수단이 도입되기 과 똑같은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이 생산 수단을 이용해 똑같은 가격으로 2배의 생산물을 제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새로운 생산비를 기초로 똑같은 과정이 다시 시작된다. 분업이 더욱 진전되고 기계가 늘어나며, 분업과 기계의 이용 규모가 더욱 커진다. 그리고 경쟁은 이 결과에 대해 다시 똑같은 반작용을 가하게 된다.

  우리는 생산 양식, 생산 수단이 어떻게 계속 변혁되고 혁신되는가, 즉 어떻게 해서 분업이 더 큰 분업을 가져오고, 기계 사용이 기계 사용을 확대하며, 대규모 노동이 더욱더 큰 규모의 노동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가를 보고 있다.

  이것이 부르주아적 생산을 낡은 궤도에서 계속 벗어나게 하며, 자본으로 하여금 자신이 긴장시켜 놓은 노동 생산력을 계속 긴장시키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법칙이다. 이 법칙은 자본에게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으며, '앞으로! 앞으로!'라고 계속 속삭인다.

  이것은 상업 경기의 변동 내에서 한 상품의 가격을 반드시 그 생산비와 일치시키는 바로 그 법칙이다.

  자본가가 아무리 강력한 생산 수단을 싸움터에 들여온다 하더라도 경쟁은 이 생산 수단을 일반화할 것이며, 또 그것이 일반화하는 순간부터 그의 자본의 더 큰 효율성이 낳는 유일한 결과는 그가 이제 똑같은 가격으로 예전보다 10·20·100배나 많이 공급해야 한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나 그가 판매품의 양을 늘림으로써 낮아진 판매 가격을 보충하려면 아마 1000배 정도를 더 팔아야 할 것이기 때문에, 즉 더 많은 이득을 올리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생산비를 보상받기 위해서라도---우리가 보았듯이 생산 도구 자체가 점점 비싸진다.---이제 대량 판매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 대량 판매는 그에게뿐만 아니라 경쟁자들에게도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예전의 투쟁은 이미 발명된 생산 수단이 좀더 능률적일수록 점점 더 격해지기 시작한다. 따라서 분업과 기계의 사용은 훨씬 더 큰 규모로 또다시 진행될 것이다.

  사용되는 생산 수단의 힘이 어떻든간에 경쟁은 상품 가격을 생산비 수준으로 떨어뜨려 얼마나 더 싸게 생산할 수 있느냐, 같은 양의 노동으로 얼마나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느냐에 따라 값싼 생산, 즉 똑같은 가격으로 더욱더 많은 양의 생산물을 공급하는 것을 일종의 강제 법칙이 되게 함으로써, 이 힘이 낳은 황금의 열매를 자본에게서 빼앗으려고 한다. 그리하여 자본가가 자신의 노력을 통해 얻은 것이라고는 똑같은 노동 시간에 더 많이 생산해야 할 의무, 한마디로 그의 자본의 증식 조건이 나빠지는 것 외에는 전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경쟁이 생산비 법칙으로 그를 계속 뒤쫓고 또 그가 경쟁자들을 겨누어 만든 무기가 자신에게로 되돌려진다. 반면에 자본가는 경쟁 때문에 새것이 낡은 것으로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낡은 기계와 낡은 분업 대신에 값은 더 비싸지만 좀더 싸게 생산해 내는 새로운 기계와 분업을 계속 도입함으로써 경쟁을 계속 속여 보려 한다.

  이제 이 열병 같은 동요가 전세계 시장을 동시에 휩쓸었다고 가정한다면, 자본의 성장, 축적과 집중의 결과로 어떻게 하여 끊임없이,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빠르게, 또 더욱 거대한 규모로 분업, 새 기계의 사용과 낡은 기계의 개량이 이루어지는가가 이해될 수 있다.

  그러면 생산 자본의 성장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이러한 사정들은 임금을 결정하는 데 어떤 영향을 주는가?

  분업이 진전되면 노동자가 5·10·20명분의 노동을 할 수 있게 되며, 따라서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도 5·10·20배만큼 늘어난다. 노동자들은 한 노동자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싸게 자신을 판매함으로써 서로 경쟁할 뿐만 아니라 한 노동자가 5·10·20명분의 노동을 함으로써 서로 경쟁한다. 그리고 자본이 도입하여 점점 더 확대되는 분업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이런 종류의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한 발 더 나아가 분업이 늘어나는 만큼, 노동은 단순화한다. 노동자의 특수한 숙련은 가치 없는 것이 된다. 그는 육체적 능력도 정신적 능력도 활용할 필요가 없는 간단하고 단조로운 생산력으로 변질된다. 그의 노동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노동이 된다. 따라서 사방에서 경쟁자들이 그에게 육박해 오며, 게다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어떤 노동이 단순할수록, 즉 그것을 배우기가 쉬울수록 습득하는 데 필요한 생산비는 더욱 적어지며, 임금은 더욱 아래로 내려간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상품의 가격과 마찬가지로 임금도 생산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이 불만스럽고 지긋지긋해지는 정도에 따라, 그만큼 경쟁은 늘어나고 임금은 내려간다. 노동자는 더 많이 일함으로써, 즉 더 많은 시간을 일하거나 같은 시간에 더 많이 생산함으로써, 자기 임금의 양을 지켜 내려고 한다. 이처럼 그는 가난에 못 이겨 분업의 해로운 효과를 더욱 키워 간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그가 많이 일하면 할수록 그는 더 적은 임금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간단하다. 왜냐하면 그는 그만큼 자신의 동료들에게 경쟁을 불러일으키고, 따라서 그만큼 자신의 동료들을 자신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나쁜 조건에 놓이는 경쟁자로 만들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결국 그는 자기 자신이 노동자 계급의 일원이면서도 자신에 대해 경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기계는 이와 똑같은 효과를 훨씬 더 큰 규모로 불러일어킨다. 기계는 숙련 노동자를 미숙련 노동자로, 남자를 여자로, 성인을 아이들로 대체하기 때문에 기계가 새로 도입되는 경우에는 수공 노동자들이 무더기로 해고당하며, 또 기계가 완성되고 개량되고 더 효율적인 것으로 대체되는 경우에는 노동자의 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상으로 우리는 자본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산업 전쟁의 윤곽을 대략 묘사한 셈이다. 이 전쟁의 독특한 특징을 살펴보면, 여기서는 노동자 군대를 징집하는 것이 아니라 줄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된다. 사령관인 자본가들은 누가 가장 많은 산업 전사를 내쫓을 수 있는가를 놓고 서로 경쟁한다.

  물론 경제학자들은 기계 때문에 남아돌아가게 된 노동자들이 새로운 부문에서 일자리를 얻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그들도 감히 쫓겨난 바로 그 노동자들이 새로운 노동 부문에 취직한다고 직접 주장하지는 못한다. 사실들이 외치는 소리는 이러한 거짓말을 너무나도 우렁차게 반박하고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본뜻은 노동자 계급의 다른 구성 부분, 예를 들면 쇠퇴한 그 산업 부문에 들어가려고 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젊은 세대의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취업의 길이 열린다는 뜻일 뿐이다. 이것은 물론 몰락한 노동자들에게 하나의 큰 보상이 된다. 자본가 나으리들은 착취하기 좋은 싱싱한 살과 피에 부족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시체를 파묻게 할 것이다. 이것은 부르주아가 노동자들에게 주는 위안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주는 위안이다. 만일 기계가 임금 노동자 계급 전체를 없앤다면, 그것은 임금 노동 없이는 자본일 수 없는 자본에게 얼마나 무시무시할 것인가?

  그러나 기계 때문에 직접 쫓겨난 노동자들과 전부터 이 자리에서 일하기를 기다리고 있던 새로운 세대 전체가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다고 가정해 보자. 새 일자리에서 잃어버린 자리에서만큼 높은 보수를 받으리라고 볼 수 있는가? 이것은 경제의 모든 법칙에 어긋날 것이다. 우리는 현대 산업이 어떻게 더 복잡하고 더 차원 높은 일을 더 간단하고 더 차원 낮은 일로 계속 바꿔 놓는가를 살펴본 바 있다.

  따라서 기계 때문에 한 산업 부문에서 쫓겨난 노동자 대중이 더 낮고 더 나쁜 보수를 받지 않고서야 어떻게 다른 산업 부문에서 안식처를 찾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기계 자체를 제작하는 데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예외로 거론해 왔다. 산업에서 기계가 더 많이 요구되고 소비되자마자 기계는 반드시 늘어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기계 제작, 동시에 기계 제작과 관련된 노동자들의 일자리도 늘어나지 않을 수 없으며, 또 이 산업 부문에 쓰이는 노동자들은 숙련 노동자일 뿐만 아니라 교양 있는 노동자이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예전에도 절반만 옳았던 이 주장은 1840년 이래 그 반 조각 진실마저 잃어버렸다. 왜냐하면 기계 제작에서도 면사 제조에서와 마찬가지로 기계가 점점 더 전면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이리하여 기계 제작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아주 정교한 기계에 비하면 아주 타박한 기계 노릇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계 때문에 해고된 남자 대신에 아마 세 명의 아이와 한 명의 여자가 공장에 취직할 것이다! 그런데 한 남자의 임금은 세 명의 아이와 한 명의 여자를 먹여 살릴 만큼 충분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부르주아들이 늘 즐겨 사용하는 이 상투적인 이야기는 무엇을 증명하는가? 이제는 노동자 가족의 생활비를 벌려고 전보다 4배나 많은 노동자들의 삶이 소비되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는다.

  요약해 보자. 생산 자본이 성장할수록 분업과 기계 사용은 더욱더 확대된다. 분업과 기계 사용이 확대될수록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은 더욱더 심해지며, 그들의 임금은 더욱더 줄어든다.

  게다가 또 노동자 계급은 더 높은 사회 계층으로부터도 메워진다. 많은 소산업가와 소금리 생활자가 노동자 계급으로 전락하는데, 그들에게는 노동자들의 팔과 나란히 자신들의 팔을 쳐드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이 없다. 이리하여 일거리를 ㄹ요구하며 높이 치켜 올린 팔들의 수풀은 점점 더 울창해지지만, 팔 그 자체는 점점 더 야위어 간다.

  더욱더 대규모로 생산하는 것, 바로 대산업가가 되고 소산업가가 되지 않은 것이 투쟁의 일차적 조건 가운데 하나이며 이러한 투쟁에서 소산업가가 견뎌 낼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일이다.

  자본이 성장하고 자본의 양과 수가 늘어나는 만큼 자본의 이자는 줄어든다는 사실, 따라서 소금리 생활자는 더 이상 자신의 금리로 살 수 없게 되므로 산업에 투신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즉 소산업가의 대열을 키우고 그럼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 후보를 늘리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은 정말이지 더 이상 논의할 필요조차 없다.

  끝으로, 위에서 묘사한 운동 때문에 자본가들은 어쩔 수 없이 거대한 생산 수단을 더욱더 대규모로 이용하고 또 이런 목적으로 신용의 모든 용수철을 작동하게 되는데, 이럴수록 그만큼 산업 지진이 늘어나며, 그때 상업계는 부의 일부, 생산물의 일부, 심지어는 생산력의 일부까지도 저승의 염라 대왕에게 제물로 바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 한마디로 공황이 늘어나는 것이다. 공황이 좀더 자주 일어나고 격렬해지는 것은 생산물의 양, 즉 시장을 넓히려는 욕구가 커질수록 그만큼 세계 시장은 점점 더 줄어들어 이용할 수 있는 새 시장이 점점 더 작아진다는 바로 그 점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다시 앞서 지나간 모든 공황이, 정복되지 않았던 새 시장이나 지금까지 상업이 표면적으로만 착취했던 시장을 이미 세계 시장에 예속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은 노동으로 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고상하면서도 야만적인 주인인 자본은 자기 노예들의 시체를, 즉 공황으로 몰락하는 희생된 노동자 전체를 무덤으로 함께 끌고 간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자본이 급속히 성장하면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은 훨씬 더 급속히 심해진다. 다시 말해서 노동자 계급의 일자리인 생활 수단은 이에 비례해서 줄어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급속한 성장이 임금 노동에 가장 유리한 조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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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실업과 관련된 대중이데올로기의 대표적사례

청년실업이 계속적으로 늘어나는 원인은 무엇이있나요~?

 

 

    

2004년 6월말 현재 청년 실업자 수는 38만7000명. 전체 실업자 76만여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경기 침체가 지속되면서 지난 2002년 이후 증가세에 있는 청년 실업률은 현재 7.8%이다. 수치상으로 보면 전체적으로 청년 실업률이 높은 OECD 국가에 비해 심각한 수준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실업률 통계에는 학원이나 직업훈련기관에 다니면서 개별적으로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청년들은 제외돼 있다. 따라서 실제 취업 노력 중인 비경제 활동인구 30만6000명과 공식적인 실업자 수 38만7000명을 합할 경우 실제 체감하고 있는 청년 실업자 수는 69만3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실상 청년 실업자 수가 70만에 육박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학교를 졸업해서 취업난을 더 심각하게 경험하고 있는 청년층은 최고 54만7000명인 것으로 노동부는 추정했다.

최근 청년실업(15∼29세)이 심화되고 있는 것은 기업의 일자리 감소와 경력직 선호, 구직자의 고학력화 등의 주요 원인이 복합적으 로 작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19일 노동부에 따르면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등을 통해 청년실업 발생원인을 분석한 결과, 수요 측면에서는 기업의 일자리 감소와 경력직 선호 등이, 공급 측면 에서는 대학진학률 증가에 따른 고학력화와 구직자의 눈높이 조정 실패, 청년층의 가족 의존성 등이 주요 원인으로 분석됐다
◆청년 일자리 감소와 경력직 선호도 증가 =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 조사에 따 르면 청년층 취업자는 96년 542만1천명에서 지난해 460만6천명으로 81만5천명 줄었 으며, 청년층 고용률(취업자/생산가능인구)도 96년 46.2%에서 지난해 44.4%로 청년 층 일자리가 상대적으로 감소했다.
반면 주요 기업들의 경력자 채용 비중은 96년 39.6%에서 98년 61.9%, 2000년 77. 0%, 올해 79.0% 등으로 신규 졸업자보다 즉시 활용 가능한 경력직 채용 경향이 급 증했다.
청년층 임금근로자 가운데 임시.일용직 비중이 96년 41.7%에서 2000년 54.4%, 지난해 49.7%로 증가, 고용의 질도 악화됐다.
◆구직자 고학력화와 눈높이 조정 실패 = 대학 진학률이 80년 27.2%에서 90년 3 3.2%, 2000년 68.0%, 지난해 79.7%로 늘어나 95년부터 지난해까지 대졸자수가 18만 명이나 증가한 반면 교육이 노동시장의 수요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인력 수급의 양적. 질적 불일치가 발생했다는 게 노동부의 분석이다. 학교교육을 마친 뒤 처음 취업할 때까지의 소요기간은 평균 11개월이며, 청년층 취업 경험자 가운데 67.4%만이 6개월 이내에 처음 직장에 들어갔을 뿐 19.1%는 6개 월∼2년 미만, 13.4%는 2년 이상 장기 미취업 상태를 경험한 것으로 조사됐다.
대기업 대비 중소기업의 임금은 66%, 법정외 복리비는 56% 수준으로, 기업간 임 금.근로조건이 커다란 격차를 보이면서 청년층의 중소기업 기피현상이 이어지고 있 다. 전체 구직자의 희망 임금은 131만원인 데 비해 청년 임금근로자의 실제 평균 임 금은 116만원으로 13.1%의 눈높이 차이도 발생했다.
최근 청년실업(15∼29세)이 심화되고 있는 것은 기업의 일자리 감소와 경력직 선호, 구직자의 고학력화 등의 주요 원인이 복합적으 로 작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19일 노동부에 따르면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등을 통해 청년실업 발생원인을 분석한 결과, 수요 측면에서는 기업의 일자리 감소와 경력직 선호 등이, 공급 측면 에서는 대학진학률 증가에 따른 고학력화와 구직자의 눈높이 조정 실패, 청년층의 가족 의존성 등이 주요 원인으로 분석됐다
◆독립한 청년층 취업률 높아 = 우리나라 특유의 가족의존 전통도 청년실업의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로 지적됐다. 경제활동인구조사의 미혼남자 취업률을 비교하면 부모와 함께 거주하는 경우가 68.4%로, 분가해서 독립한 가구주의87.2%보다 크게 낮았다. 청년층 취업경험자의 취업경로를 조사한 결과, 연고에 의한 경우가 50.6%, 이 가운데 가족이나 친지 소개에 의한 취업이 27.6%에 달한 반면 직업안정기관이나 취 업박람회를 통한 취업은 2.0%, 학교내 취업소개기관을 통한 경우는 1.6%에 지나지 않는 등 진로지도나 직업안정 기능이 취약한 것도 청년실업의 원인으로 꼽혔다.

 

큰 원인 중 하나는 경기침체 겠지요.

하지만 취업하려는 당사자 자신들에게도 문제점은 있다고 보여집니다.

취업난이 어렵다, 취업할 곳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맘에 들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여겨지는건 아닐까요?

대기업을 가려는 지원자는 셀 수 없이 많고, 채용하려는 인원은 그에 비해 극소수입니다. 그래서 진부한 말이지만 낙타 바늘구멍 들어가기라 하죠.

하지만 중소기업은 사정이 다릅니다.
오히려 중소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 찾기가 쉽지 않으며, 대기업에 빼앗기고 있죠.

대다수의 취업생들은 명성과 조건 등 따지는것이 많습니다. 물론 따져야 하죠.
하지만 눈이 높다고 해야 할까요?
4년제, 서울의 소위 이름있는 대학을 나온 학생들의 눈은 더욱 높다고 느낍니다.

내가 이걸 해야되? 이 일은 내 적성이 아닌데, 더 나은 조건의 자리에 취직할 수도 있는데...


이렇게 생각하기보다는 다르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너무 이상적인 말처럼 느끼나요?

 

 

선진국들의 경우 청년 실업자의 고용가능성 제고를 위해 직업능력 배양 및 근로기회 확대에 중점을 둔 종합적인 취업지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선진국의 경험으로부터 우리 실정에 적합한 청년실업 대책을 찾아본다.
1. 직업훈련 및 직장체험 프로그램을 강화하라
최근 청년실업의 원인으로 가장 많이 지적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인력수급의 불일치 문제이다. 학력수준의 급격한 상승에도 불구하고 기업이 원하는 인력수요와 노동시장에서 공급되는 인력 간에 불균형이 생겨 결국 실업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실업자 구제라는 사후적 시각보다는 직업훈련과 연수를 통한 실업 예방이라는 사전적 시각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함을 의미한다.
2. 청년층에 특화된 취업알선 프로그램을 제공하라
청년 실업난을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효과적인 취업정보망의 미비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주요 선진국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90년대 초반부터 효과적으로 구직자와 기업을 연결해 주는 연계망 구축에 나서고 있다. 방대한 양의 직업정보 검색을 통해 청년 구직자의 특성에 맞는 일자리를 제공해 주고 있는 영국의 직업센터(Job Center)와 미국의 원스톱 센터(One-Stop Center)가 대표적인 취업알선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3. 청년 실업자의 특성에 따른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라
모든 청년 실업자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정책은 실업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청년 실업자의 연령, 근로능력의 유무, 지원 필요성 등을 고려하여 각자의 상황에 맞는 대책을 실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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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자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실업자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금속노조 금속노조웹진 (http://metalunion.nodong.org/new/maynews/)
기사원문: http://metalunion.nodong.org/new/maynews/readview.php?table=newspaper&no=1361
첨부사진/동영상: 5-신명호.JPG
사람사는 세상

실업자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일자리가 있는 노동자와 그렇지 못한 실업자의 경계는 어디쯤일까?1997년 말부터 이듬해에 걸쳐 프랑스 전역을 뜨겁게 달구었던 실업자 대투쟁은, 당시 실업자들은 정부기관을 점거했고 현직 노동자들이 가담했으며 마침내 학생과 지식인들이 가세했다. 가두시위는 전국 20개 주요 도시로 번졌고 파리 시위에는 무려 2만 명이 참가했다. 국민 70%의 지지 속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끝난 이 사건의 배경에는 무려 16%를 넘어서는 살인적인 실업률이 있었다.

프랑스의 한 실업운동가는 이렇게 말한다. “실업률이 10%의 문턱을 넘게 되면 직장을 가진 사람들도 자신이 언제 실업자로 전락할지 모르기 때문에 심각한 불안감을 느끼게 되고 남의 일이 아니라는 인식을 하게 된다. 프랑스에서도 실업률이 5% 이하일 때는 이런 연대가 일어나지 않았다.”그렇다면 공식 실업률이 4% 미만에 머무르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노동자와 실업자가 연대하려면 실업률이 더 높아지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실업과 빈곤문제의 근본 원인은 범지구화와 신자유주의라는 세계경제질서의 일방적 흐름 속에 있다. 그로 인해 노동비용을 줄이기 위한 구조조정이 상시화되고, 산업구조가 바뀌면서 이른바 ‘노동 없는 세계’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소득분배의 양극화 현상 역시 여기에 원인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원인을 제거하거나 그 흐름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통상 여러 선진국에서 쓰고 있는 실업정책은 크게 ①실업자에게 생계비를 보조하는 실업부조제도, ②실업자의 노동시장 진입을 촉진하는 정책(취업알선, 직업훈련), ③사회적 일자리 창출 프로그램, ④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①과 ②는 정부의 결단으로 추진할 수 있는 정책이고, 따라서 더 많은 예산과 개선된 제도가 수립되도록 요구하고 압박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끝으로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가 남는데, 이것은 정부의 결단만으로 시행이 불가능한 제도이다. 정규직 노동자와 자본가 모두로부터의 일정한 양보가 있어야 도입이 가능한 정책이다.

지금 실업의 문제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안고 있는 고용불안정의 문제와 맞닿아 있고, 만약 이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구조조정의 칼날은 또 다시 정규직 노동자의 목줄을 겨누게 될 것이다. 일자리 나누기의 문제는 현재의 실업자에게만 필요한 방안이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의 안정된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한 제도이다. 일자리 나누기 모두가 진지하게 고민해보았으면 싶다.

신명호/ 전국실업극복단체연대 정책위원장

교선실 2004-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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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의 젊음을 압류하는 자본주의

다함께 제 47 호  기사   [ 2005 년 01 월 08 일 ~ 2005 년 01 월 21 일 ] 

 

청년들의 젊음을 압류하는 자본주의


“청년 실업이 20만 명을 육박하는 이 때 미래에 대한 철저한 준비 없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작년 유행어 순위 5위에 오른 한 시트콤의 유행어다. 재작년 초에 시작한 이 시트콤에서 20만 명이라는 숫자는 회를 거듭할수록 30만 명, 40만 명으로 늘어갔다. 종영 때는 50만 명으로 늘었다.
2004년 말 노동부는 청년실업자, 비경제 활동 인구, 유휴 비경제 활동 인구가 모두 90만 5천 명이라고 발표했다. 실제 일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거의 1백만 명이라는 얘기다.
올해 기업들이 신규채용을 13퍼센트 줄일 계획이라 청년 실업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가능성이 높다.
청년 실업자들의 카페나 사이트에서는 “미치겠다” “너무 힘들다” “우울하다” 같은 절박한 단어를 쉽게 볼 수 있다. 청년 실업자들은 텅 빈 주머니 사정 때문에 간식으로 따뜻한 군고구마 하나 사먹기 힘든 사람이 많다. 주름살 진 부모님 얼굴을 볼 때마다 죄송스러움이 온 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 같다.
조금이나마 생계를 꾸리고자 아르바이트라도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작년 인터넷 검색순위에서 알바는 4위로 올랐으며 취업은 그 순위가 5계단이나 떨어진 32위에 올랐다. 그러나 아르바이트에 시간을 빼앗기면, 높은 취업 경쟁의 벽을 넘기가 더욱 힘들어진다는 것이 딜레마다. 
정부와 주류 언론은 개인들의 변화를 요구한다. “눈높이를 낮추고”, 기업이 요구하는 새로운 능력들을 기르라는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적성에 맞지 않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젠 더 이상 취업이 어려워 공장으로 가려고 생각중입니다. … (지원서를) 한 30통은 넣은 거 같은데 연락이 없네요 ㅡㅡ;”  한 청년 실업자 카페에 올라온 글이다.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노력과 고통은 눈물겹다.
취업 준비 여성 열 명 중 한 명은 성형수술 경험이 있다. 그 사람들 중 일부는 목소리 성형까지 한다고 한다.
디자이너가 꿈인 한 여대생은 “기업들이 여성복 디자이너들에게 ‘피팅모델(만든 옷이 괜찮은지 보기 위해 입어 보는 사람)’까지 함께 시키기 때문에 키 167 이상에 ‘몸매도 좋아’야 해요. 제 친구는 키가 작아서 포기했어요” 하고 말했다. 
오늘도 학원가와 도서관에는 토익점수 5점이라도 더 받으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그 중 대다수가 연인과 친구를 만나는 시간, 심지어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공부하고 있다. 
사람들이 익히지 못한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돈이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 젊은이들은 유학이나 어학연수를 가고 싶어도 자릿수도 세기 힘든 비용에 엄두도 내지 못한다. 하다못해 학원 수강료도 큰 부담이다.
청년 실업은 개인들이 “미래에 대한 철저한 준비”를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결코 아니다. 개인의 노력이 경쟁 무기는 될 수 있을지언정 일자리 수를 늘리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1년 5개월째 언론사 취업을 준비하는 한 대학 졸업생은 “제가 100을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누가 120을 노력하면 아무 소용없으니까요. 그게 참 힘들어요” 하고 말했다.
기업들은 이 기회를 틈타 노동유연화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동유연화는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늘릴 것이다. 그러나 실업 문제를 조금이라도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대로 노동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  
누구에게나 초등학교, 중학교 때 장래희망이 하나쯤 있었다. 과학자, 문학가, 연예인 등 …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이 이 꿈들을 포기하는 것은 그저 의지가 없어서나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다. 한 대 한 대 맞으며 의식을 잃어가는 권투선수처럼 세월이 흐를수록 가난, 입시, 실업 같은 자본주의의 강펀치에 조금씩 꿈을 잃어 가기 때문이다.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은커녕 노동력을 파는 것조차 힘들다.
여러 경제 지표들은 한국 자본주의에 더 큰 불황을 예고한다. 그것은 젊음을 압류당한 수많은 청년들에게 더 힘든 현재와 더 불안한 미래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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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참세상 (청파동 소재)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 1가 1-13 정봉원빌딩 5층 /
http://cast.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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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운동의 과제와 전망-최규진

정치에서 미래를('좌파운동의 과제와 전망'토론문) - 최규진

정치에서 미래를('좌파운동의 과제와 전망'토론문)

최규진 (역사학 연구소)

1. 무엇이 문제인가
1) 국면
o  ‘자본주의 극복’을 추구하는 남한의 ‘진정한 좌파’는 몇 가지 점에서 지금 중요한 국면을 지나고 있다. 첫째,
이러저러한 현실운동과 자생적인 운동에 어떻게 개입하고 그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조직할 것인가, 둘째, 민노당과 민노총의 성격은 무엇이고 거기에 ‘좌파’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셋째, 자본에 포위되어 속절없이 무너져가는 현장의 투쟁력을 어떻게 복원하고 노동자 대중에게 어떤 대안을 제시할 것인가. 어디 그뿐인가. ‘현존사회주의 붕괴’ 뒤에 정치와 이론에서 자기혁신을 이루고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를 실현해야 하는 기본임무 말고도, 남한 ‘좌파’에겐 ‘통일문제’도 놓칠 수 없는 과제임에 틀림없다.

2) 대중과 어떻게 만나고 누구와 연대할 것인가
o ‘좌파’라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부문운동에 개입하여 ‘계급성’ 민중성을 각인시켜야 한다”는 발제문의
근본 취지에 동의할 것이다. 그럼에도 ‘좌파’는 그렇게 해왔던가? 지난날 ‘좌파’가 부문운동에 적극 개입하여 자
신의 영향력을 조직적으로 충분하게 발휘했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불쑥불쑥 터져 나오는 현실운동에 ‘개입’하기는
커녕 정확한 평가도 내리지 못한 일이 많았으며, 자기 반성의 계기조차 마련하지 못하지 않았던가? 왜 그런가?  

o 발제문은 “한시적인 사안별 연대체’에 참여하거나 그러한 연대체를 구성하는 데에도 적극 나서야한다”고 주장한
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연대체’에 ‘좌파’가 개입한다 할지라도 명망가 중심의 상층 개입으로 그칠 따름이며,
그러한 ‘개입’으로 ‘좌파’의 결집과 역량강화를 이룩하기 어렵다고 본다.  

o 문제는 무엇인가. 소수의 ‘좌파’가 그 많은 대중과 어떻게 만나는 것이 올바른지 밑뿌리부터 점검해야 한다. 또
통일전선을 언제 누가 어떻게 구축해야하는지 원칙에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 그러려면 ‘좌파’의 현주소를 정확
하게 읽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 ‘좌파’운동은 정파가 많아서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파가 없기
때문에 더 고통 받는 것은 아닌가?  지금 ‘좌파’의 과제는 두루뭉실한 분파를 극복하고 분명한 정파로 우뚝 서는
것이다. 먼저 자신이 서야 어깨 걸어 '연대'도하고 손 뻗어 '개입'도 할 것 아닌가?

3) 강단과 ‘거리의 정치’, 그리고 노동현장
o 식민지 시대부터 이 땅의 ‘좌파’들은 노동계급과 ‘물리적 결합’이 아닌 ‘화학적 결합’을 할 것을 꿈꾸어왔
다. 그들은 사상이 현장과 밀착해야하며, 개별 현장은 고립분산성을 뚫고 전국적 전망을 확보해야 한다고 늘 말해 왔다. 그럼에도 사상과 현장의 결합은 ‘물리적 결합’에 그치고 말거나 생산현장에서 조그마한 분파를 만든 것에 그치
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은 반드시 ‘각개격파’ 되었다.
노동계급과 ‘화학적 결합’을 이루는 데에는 여러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지금 '좌파'로서는 현장에서 활동하는
‘자생적 좌파’ 또는 ‘투쟁파’들과 조직적 이론적 끈을 ‘대공업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o 좌파는 ‘강단’과 ‘거리의 정치’를 넘어, 이제 생산 현장에 자기의 무게 중심을 두어야 한다. “자본주의가 만
들어진 바로 그곳”에서 파열음을 내는 것이 '좌파'의 임무일 수밖에 없다.  현장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계급투쟁의
작은 계기들을 놓치지 않는 것, 그 투쟁에 자신을 조직적으로 연루시키고 그 안에서 노동자 정치를 부활하는 것, 이
것이 ‘좌파’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2. 어디서 시작할 것인가--- ‘명확한 정치’와 ‘좌파 대동단결론’
o 발제문은 “고립된 소수파로 전락한 좌파세력은 조직적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조직적
통합’으로 나아가는 길로서 ‘좌파연대’와 ‘공동투쟁체 건설’을 주장했다. 좌파 통일전선전술을 주장한 셈이다.
문제는 통일전선전술이란, 그것이 전술인 한 전략에 종속되는 개념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발제문은 ‘연대와 공동투
쟁체’를 주장하기에 앞서 ‘좌파’ 모두에게 자신들의 전략을 명확히 할 것을 요구해야 했다. ‘좌파’라면 자신의
정치노선· 조직노선을 분명히 한 뒤에 ‘분리와 통일’의 작업을 병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o 식민지 시대부터 ‘좌파’들은 “기회주의 경향과 싸우며, ‘외교적· 정실적 결합’이 아닌 정치 이론적으로 결합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 이론적 결합’을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서로가 자신의 노선을 명확해야 한다. 남
을 조직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조직해야 한다.

o ‘명확한 정치’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상호 연결된 세 가지 영역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당 문제. 둘째, 노동조합 전략과 소비에트.  셋째, 통일전선전술의 방침과 방향.

o 명확한 정치와 뚜렷한 조직론 없이 그 어떤 분파도 정파로 성장할 수 없다. 하물며 발제문에서 주장하듯이, ‘개인
들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좌파 대동단결’로는 ‘좌파의 조직적 통합’을 이루기 어렵다고 본다.

o ‘좌파’의 주체형성에서 첫 번째 필요한 것은 미래를 움켜쥐고 자신의 정치노선을 분명하게 확정하는 것이다. 이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지만, 그것 없이 ‘좌파’의 ‘조직적 구심’은 형성될 수 없다. “통일 이전에 분리를!!” 이
말이 다 맞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진실을 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미래는 ‘분명한 정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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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운동의 반성과 전망> 토론회 참석소감-조정환

<좌파운동의 반성과 전망> 토론회 참석소감 - 조정환

2004년 5월 22일 오세철 교수 정념퇴임 기념 학술대회 <좌파운동의 반성과 전망> 토론회 참석소감

1. 평의회에 대한 논의가 심도있게 진행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충족되지 않았다. 논의는 오히려 좌파연합(대)의 문제에 집중되었다.

2. 중요한 쟁점은 ‘좌파의 좌파인가’(김세균) ‘좌파해체인가’(김승호) 사이에서 발생했으나 논의가 크게 발전되지는 않았다. 나는 여기에 ‘좌파를 넘어선 좌파’라는 입장을 추가하고 싶다.

3. 이 쟁점은 ‘좌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다. 김세균 교수는 “좌파세력이란 대중투쟁의 활성화와 대중투쟁의 변혁투쟁으로서의 성장-발전 및 이를 통한 사회변혁의 달성을 위해 목적의식적으로 활동하는 인자”(자료집, 213쪽)라고 정의하고 있다. 나는 이 정의에서 대상으로 설정되고 있는 ‘대중투쟁’(더 정확하게는 현재의 삶이 직면해 있는 적대와 문제를 타개해 나가는 다중들의 삶의 투쟁) 자체가 오늘날의 탈근대 사회에서 좌파가 존재하는 유일한 형태이며 스스로를 목적의식적 활동가라고 사고하는 활동가들 역시 이 다중투쟁의 일부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4. 김세균 교수는 목적의식의 요구가 좌파연대보다 좌파분열의 쐐기가 되지 않겠는가라는 나의 질문에 ‘스스로 목적의식을 거부하는 사람, 심지어 질문자조차도 목적의식적으로 활동하고 있지 않는가?’고 반문함으로써 응답했지만 이것은 실천목적(Telos)과 이념목적(Ideology)의 구분을 흐리는 것이며 위의 정의에 명백하게 포함되어 있는 ‘사회주의적 정치의식’이라는 레닌주의적 함의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5. 대중이라는 용어가 광범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이 용어는 지금까지 전위와의 관계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위계적으로 구분짓는 용어, 프롤레타리아트를 분할하는 용어임은 지각되고 있지 않았다. 역시 위계적인 선진노동자라는 용어도 무비판적으로 계속 사용되고 있다.

6. 주어진 질문 기회에 나는 한국의 평의회 운동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질문을 제기하지 못하고 막연한 방식으로 질문을 제기하는 데 머물렀는데 다시 정식화하자면 “평의회 운동이 공장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낡은 계급구성의 관점을 받아들일 때, 그리하여 그것이 ‘사회주의’라는 근대적 대안을 받아들일 때, 평의회 운동이 당과 노조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회주의와 어떻게 다를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은 탈근대의 평의회는 공장을 넘어 사회 속에서 움직이는 노동의 수평적 네트워크로 발전되어야 하며 그것은 외관상 비노동으로 보이는 실업자, 주부 등을 포함하는 삶의 평의회 운동이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7. 나는 좌파 운동이 갖고 있는 남성중심적이고 권위적인 문화, 담론체계, 심성 한 마디로 다수자적이고 주류적인 경향성이 극복될 필요성을 제기했는데 이것은 나 자신까지도 늘 포함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될 비판이다. 성찰되지 않은 낡은 언어들이 우리들의 머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8. 전체적으로 보아 참가한 ‘좌파’의 대부분은 사회민주주의로부터 사회주의를 어떻게 구별정립할 것인가라는 제2인터내셔널 좌파의 문제의식을 지속하고 있었다. 이것은 사회주의로부터 어떻게 코뮤니즘을 구별정립할 것인가를 사고했던 레닌 당시의 제3인터내셔널의 고민으로부터도 후퇴해 있는 것이다. 나는 코뮤니즘을 레닌주의에서와는 다르게 정의하면서 사회주의로부터 코뮨적 운동을 구별정립해 내고 그것을 전진시키는 것이 좌파연대 이전에 거쳐야할 좌파혁신(좌파를 넘어선 좌파)의 핵심문제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계급해방은 인간해방의 종속적 일부여야 한다고 말한 김승호 님의 주장과 어떤 면에서는 상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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