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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우리가 알던 가족의 종말

 

도전적인 제목의 책이다.

 

야마다 마사히로 지음, 장화경 옮김. [우리가 알던 가족의 종말 - 오늘날 일본 가족의 재구조화 ] 그린비 2010

 

 

전적으로 동의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고 뭔가 정치적으로 불편하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상당부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책이다.

이 책은 일본사회 가족과 결혼의 문제를 경제적, 사회적 맥락에서 분석하고 있다.  부부 개별 성 쓰기와 이혼 자유화라는 민법 개정을 모티브로 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지만, 이들 사건은 향후 벌어질 사건들의 원인이라기보다 최근까지 변화된 일본의 사회상황이 나은 결과물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나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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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제 1장에서 이러한 현상을 '가족의 규제완화'라고 표현했다. 애정의 고도성장과 경제의 저성장 속에서 '싫어진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불합리성'을 제거한 조치이자 '감정표현의 자유화'라는 것이다.  저자는 경제와 애정, 가족관계가 밀접하게 얽혀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는 애정 이데올로기, 연애결혼의 제도화가 사실은 아주 최근의 산물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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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과 3장은 '점차 없어지는 전업주부', '저출산과 기생적 싱글'이라는 제목으로 경제적 저성장이 초래한 미혼화 현상과 결혼난 (그로 인한 저출산) 문제, 그 원인들을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현재 저출산의 원인이 (기혼 가구의 출생자녀수가 줄어들어서가 아니라) 미혼화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단호하게 그 원인을 여성의 수입이 어중간하여 혼자 살 수는 있지만 가정을 유지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점, 전업주부 지향성, 부모와의 동거를 통한 생활수준 유지 (소위 기생적 싱글)에서 찾고 있다.

전업주부 지향성이라.... 21세기에 이게 뭔 일인가 싶다만 실제 조사 결과가 그런 걸 어쩌랴.

사실 근대 사회에서 지지리 고생하던 농촌 여성에게, 도시에서 샐러리맨 남편을 둔 전업주부야말로 로망 중의 로망이라 할 수 있었다. 집안 일이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새벽부터 가혹한 육체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농사일에 비하랴....  하지만 놀랍게도, 일본사회에서 오늘날까지도 여성들의 이러한 전업주부 로망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대도시에 거주하는 대졸 여성이라고 특별히 다르지도 않았다.... ㅡ.ㅡ  오히려 지방에 거주하는 비교적 저학력, 혹은 저소득 계층의 여성이야말로, 예전의 그 여성농민들처럼 어쩔 수없이 숙명적인 일을 해야 하는 처지... 

이러다보니, 여성의 직장진출이 미혼화나 저출산의 원인이 될 수 없고, 한편으로 가정-직장 양립이 저출산의 해결책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맘이 편한 것은 아니지만, 또 부정하기도 어려운 듯 싶다. 최근에 읽은 한 논문에서는 여성들이 사회진출을 하고 싶어하고, 일을 통해 자기실현을 하고싶어한다는 게 'femist myth' 의 일종이라는 지적을 했더랬다. 업무 몰입도가 남성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것으로 흔히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다수의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노동시장을 떠나있기에, 현재 노동시장에 남아있는 여성들은 매우 선택된 집단이고, 그걸 토대로 여성일반과 남성일반의 업무 몰입도가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라는 이야기도....

 

사실 여성들이 가진 일자리의 질이 높거나, 임금이 높거나, 혹은 자기성취감을 높일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기에 쉽게 떠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만한다. (그럼 남성들은 일자리가 다 괜찮아서 떠나지 않는 것인가?)  하지만 사실 그렇게 쉽게 떠나서 전업주부의 '로망' 을 실현할 수 있는 여성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래서 저자가 말한대로 취업을 계속하고 싶어하는 여성의 증대가 미혼화를 초래한 것이 아니라 '고생스럽게 직장일을 하지 않고도 풍족하고 여유있게 자녀를 양육하고 싶다는 전업주부 소망을 가진 여성이 눈에 차는 배우자를 찾지 못해 (그리고 부모와의 기생적 동거) 미혼화 현상이 초래되었고, 이러한 여성들의 존재는 오히려 취업과 가사/육아를 양립하려는 여성과 생계를 위해 필사적으로 일하는 여성들을 방해하고 있다는 지적은 전적으로 부정하기만은 힘들듯하다.

미혼화가 그렇게나 사회망조인지 동의하기는 어려우나, 최소한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 속에서 여성들의 이해가 단일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보인다.

 

어제 한 의과대학에 강의를 가서 꿈이 무엇이냐고 묻는 쪽지를 돌렸는데  놀랍게도 '현모양처 겸 교수'라는 답변이 나왔다. 기업적 마인드로 교수들을 쪼아대는 요즘의 대학에서 교수하면서 현모양처 되기란 일단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21세기에, 그것도 여성전문직의 상징적 존재인 미래의 여의사에게 듣는 현모양처라는 단어가 주는 울림은 참으로 굉장했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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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적 싱글이라는 단어를 유행시킨 게 바로 이 저자라고 하는데, 이 또한 선후관계에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유있는 생활을 즐기고 싶어서 부모에게 기생하는 (!)  비혼자들이 물론 많은 것도 사실이겠지만, 독립을 하고 싶어도 일본이나 한국사회의 빌어먹을 부동산 시세가 이를 허용하지 않기에 또다른 많은 이들이 눌러앉는게 아닐까??? 어쨌든 저성장 추세 속에서 자신의 부모세대만큼 남편이 경제적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그래서 기생적 싱글은 물론이거니와 결혼 후에도 부모로부터 지원을 받는 현상은 '신분제' 부활의 신호일 수 있다는 지적에는 그래도 백퍼센트 동의!!!

사족이지만, 내 주변을 돌아보면, 나이가 들어서도 부모로부터 통제나 간섭을 받는 경우는 대개 경제적 의존 때문이다. 안 그런 것 같지만,  부모가 자녀에게 해주는 것도 없이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자신의 규율을 강제하는 경우는 (극히 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이를테면 드라마에서 내눈에 흙이 들어가기전까지 운운하며 성인자녀들을 휘두르는 경우 예외없이 경제적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경우이고, 현실에서도 이건 마찬가지이다.  성인자녀 입장에서도 받았으면 상응하는 댓가를 지불하는 것이  바람직한 경제적 행동이다.

 

하여간, 그래서 미혼화/저출산 현상을 예방하기 위해 미혼 성인자녀와 동거하는 가구에 대해 세금을 매기자는 제안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최소한 개인의 선택들이 온전히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 대해서만은 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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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부는 개호, 가사, 육아 문제를 현황을 진단하고 진정 바람직한 가족관계라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있다. 가사가 부인의 애정표현으로 간주되거나, 자녀양육에 목숨거는 형태가 과연 바람직한 것이냐는 것이다.

한편 5부에서는 앞으로 일본 가족이 어디로 갈 것인지 전망하는데, 간략한 가족의 사회사와 함께 가족제도의 규제완화가 가져올 파장들을 다루고 있다. 특히나 전후 일본 사회에서 가족은 동원, 총력전의 대상이 되었던 경험을 지적한다. 반전집회에서 우리 아이를 위해 전쟁에 반대한다는 슬로건만큼이나, 주전론자들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우자는 것 또한 설득력을 가진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이런 가족 지상주의적 태도, 사회질서와 결부된 가족주의가 가져온  오랜 갈등의 미봉... 세기말적 위기 속에서 한편으로 가족원리주의가 다시금 부활하기도 했는데 이건 어쩌면 최후의 단말마...

이제 일본사회는 '아내 전업주부, 남편의 고수입'이라는 비현실적 꿈을 버려야하고 가족의 구조조정과 새로운 사회보장제도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로 책은 끝을 맺는다

 

#.

이 책에서 그리고 있는 일본 사회의 어제, 오늘, 그리고 미래의 우울한 전망들은 사실 약간의 시차를 둔다면 한국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미혼화나 저출산이  문제다"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고, 또 현재 여성들의 전업주부 지향이나 노동시장으로부터의 후퇴, 부모와의 기생적 동거를 편하게 살아보려는 여성의 선택 (심지어 약사빠름?)으로만 해석하는 경향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없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다.

과연 오늘날 한국사회에서의 가족 특성과, 또 그러한 특성이 가져온 사회적 영향은 무엇일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없다. 특히나 사회적 불평등과 관련하여............ 어디 좋은 책이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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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차리자....

점심먹다 나눈 이야기인데 기록해두는게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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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의보통합 10주년 기념식에서 한 산별노조 간부가 나와 전문가들이 안을 만들어주기만 하면 그거 가지고 열심히 싸우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잠깐 내 귀를 의심했다.

사회 이곳저곳이 퇴행을 일삼다보니, 여기도 그 도도한 큰 흐름에 동참하자는 것인가... ㅡ.ㅡ

 

근데 사실 돌아보면, 이러한 문제가 내 안에도 없는 건 아니다.

 

건강보험료 11000 원 캠페인이 사회적 관심을 끌면서,

지난 달 성수노동자 건강센터 월례포럼 주제를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로 잡았더랬다.

강사섭외를 맡은 J 가 전화를 해서, 이게 도대체 뭔 일이냐 묻는다..

L 국장한테 강사섭외를 의논하려했더니만 어떻게 이런 민감한 주제를 잡았냐며 엄청(?) 면박을 주더라는 것이다. 팩트가 틀린 건 없다. 보건의료 운동 진영 내에서 운동 노선을 둘러싸고 갈등이 불거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나도 살짝 걱정이 되었다. 아이구, 누구한테 강의를 부탁한다냐....아직 합의가 도출된 것도 아닌데 지역운동가 노조활동가들 대상으로 섣불리 이런 거 교육해도 될까?

 

J는 우리한테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했다.

항상 전문가들이 완성된 답이나 합의된 최종안을 만들어서 현장에 줘야 된다는 생각은 좀 버리라고..... ㅡ.ㅡ

강의 듣는 사람들이 바보냐고...

 

그러게나 말이다....

 

머리로는 아는데,

때로는 온정주의적 책임감에서 혹은 때로는 덜된 주제파악 때문에

이런 일들이 종종 벌어진다.

 

그나마 누가 옆에서 싫은 소리라도 해주니 망정이지, 아니면 나도 모르게 사고 칠수도 있을 것 같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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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의 만행

# 생일 어택

 

지난 토요일, 내 생일이 아니고 주먹도끼 생일이었다.

하지만 만남의 장소는 주먹도끼네 집이 아니라 우리집...

거의 일방적인 장소 통보에 1차로 깜딱 놀랐다.

 

2차로 깜딱 놀란 것은, 내가 세미나 땜시 좀 늦게 들어왔는데

이 인간들이 주인보다 먼저 입성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짐작했더랬다) 

무한도전 봐야하는데 TV 가 작동을 안 한다고 전화로 난리를 피워대는 것이었다.

우리 집은 모뎀을 작동시켜야 TV 가 나오는데 평소에 전원을 내려놓고 다녀서 손님들은 좀 찾기가 힘들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깜딱 놀란 것은,

자정이 지날 무렵 갑자기 벌떡들 일어나 미친 듯이 집으로 가버리더라는...

집안은 난장판으로 만들어놓고.......................................................

 

거기에 보너스로,

얼마 안 남은  내 생일에 또 우리집에서 모이기로 정해버리는 만행까지 저지르고 떠나버렸다. .

 

왜 이런 일이?

그들의 전광석화 같은 신속한 몸놀림과 잘 짜여진 팀플레이는 이런 데 쓰기 아까울 지경이던데???

 

나의 복수혈전은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어디서 쓸개라도 구해다 씹으면서 대책을 마련해야겠다!

 

# 아이스크림 만행

 

블로그 댓글은 엄청 젠틀하게 달아주는 노신 또한 가끔 나를 깜딱 놀래키는 인물 중 하나...

오늘 생계형 프로젝트 때문에 눈이 빠질 지경이었는데 뜬금없이 메일을 보내서 데이터 변환을 부탁하며, 그 댓가로 무려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노라는 엄청난 은덕을 베풀었다.

 

하하하.... 내 몸 값은 아이스크림 한개...

 

더욱 놀라운 것은 나의 불평에 대한 점잖기 그지 없는 답신...

 

"....얼마전에 부모님 집에 갔더니

   어머니가 하드를 한 개 사서 주시더라. 그 이름도 유명한 쌍쌍바

  깜짝 놀라 아직도 쌍쌍바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고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누가 나에게 아이스크림을 준다는 것도 놀라웠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에게 최근 몇 년간 아이스크림과 요쿠르트를  강권한 이는 어머니 밖엔 없었던 것 같다.

 

  애기인 즉

  아이스크림을 고마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까만 비닐봉지에 안에는 아이스크림 만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지….."

 

편지글에 의하면,

아이스크림에는 엄청나게 심오한 의미가 담겨있고,

심지어 그가 사줄 것은 아마도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하드'?

어쩌면 나는 배스킨라빈스의 베리베리스트로베리와 레인보우 샤베트 중에서 고르는 것이 아니라

누가바와 쌍쌍바, 아니면 돼지바 중에서 사은품을 선택해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오호 통재라..........

오호 통재라..........

 

착한 심성이 나를 이런 곤경에 빠뜨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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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나들이

지난 주에 전공 학회가 열리는 시애틀에 다녀왔다.

이틀 먼저 가서 오랜만에 놀았다!!! (마치 그동안 전혀 안 놀았다는 뉘앙스를....)

 

물론,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초치기 포스터 출력, 환전도 안 하고 출국해버린 정신줄 등 소소한 문제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구연발표가 아니니 발표 직전까지 긴장할 것도 없고, 날씨도 어찌나 좋던지 룰루랄라.....

 

날씨는 무려 이렇게 좋았다

 

 

# 시애틀커피

 

스타벅스 1호점이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 시애틀이다.

그 1호점이 있는 퍼블릭마켓에 가면 사람들이 바글바글... 사진찍고 주문하느라고 아주 북새통이다.

하지만 워낙 시애틀은 커피 많이 마시는 곳으로 유명하다. 딱히 통계를 본적은 없는데 다들 우울한 날씨 (여름에만 환상적) 때문일 것으로 이야기하며, 그래서 심지어 앞바다 돌고래들도 불면증에 걸려있다는 믿지못할 이야기까지... 

원래는 PEETS coffee 를 가려고 했다가 걸어가기 좀 멀길래 구글에 검색해보니 나름 유명한 지역 커피집들이 있었다. 가보니 어제 로스팅한 커피를 사용할만큼 신선도는 끝장이었고 내가 좋아하는 진한 스타일...

물론 한국보다 값도 싸.... ㅡ.ㅡ

그래도 이들 커피집에서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추출한 것보다는 핸드드립으로 내려주는 서울의 몇몇 커피집들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의 사진은 Seattle Coffee Works, 아래는 Ladro - 둘 다 한적하면서 여유있는 분위기는 꽤 좋음

 

#. 시내 구경

 

기차타고 교외로 나가볼까도 생각했으나 뭐 관광레포트 쓰러 간 것도 아닌데 설렁설렁 다녀보자는 생각에 이틀 반 동안 시내만 돌아다녔다. 예전에도 학회 때문에 한 번 가본적이 있어서 그닥 새로운 것은 없얼지만 그냥 청명한 날씨에 낯선 곳에서 거닌다는 것만으로도 오케이!!!

 

시애틀의 상징으라는 우주 바늘 (space needle) - 전망대가 자랑이라지만 저 정도 높이가지고 무슨....

서울의 웬만한 아파트들보다 낮아보임...ㅋㅋ

 

 

과학센터 건물... 이 곳의 보잉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허블3D 영화봤다.

다분히, 예산과 위상을 지키려는 NASA의 홍보영상 같기는 했지만 작년에 수리보완한 허블에서 포착한 저 먼 우주의 풍경들이란................................. 정말 엄청났다.

우리가 보고 있는 저 모습은 수백만년, 수십억년 전에 출발한 빛들로부터 얻은 것이다.

지금 그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시내에서 발견한 초콜렛가게 - 멀쩡한 과일을 저렇게 먹어야하는 이유는 도저히 이해 불가...

사실, 처음 미국에서 살게 되었을 때 과자의 엄청난 단 맛에 머리가 어질했었음 ㅡ.ㅡ

 

좌파 서점인 Left Bank Books - 보스턴에 있던 서점도 그랬는데 미국의 좌파 서점들에게서는 오타쿠의 정취가 물씬.... ㅡ.ㅡ 

보스턴 서점은 마오이즘 책들이 주류였다면 이 곳은 68 즈음한 아나키즘과 섹슈얼리티에 관한 책들이 주류를 이루고 거기에 덧붙여 기념비적인 시애틀 전투를 다룬 책들이 눈에 띄었다.

책을 잘 팔아보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어보이고 동호회 같은 분위기랄까... 망하지 않는 비결이 대궁금!!

 

 

#. SF 박물관

 

예전에 갔을 때도 들렀었는데, 그때는 사진 촬영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으나 이번에는 규제가 없어졌더라. 아마도, 카메라가 달린 휴대전화가 대중화되면서 규제를 포기하게 된 게 아닐까...

 

여기는 소장품이 아주 많은 건 아닌데 상당히 조직화가 잘 되어있다.

소주제별로, 배경지식과 사회적/과학적 의의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를테면 유전자 통제, 시간여행, 대안역사 등등등...

 

아래 사진은 생명공학 기술에 관련된 섹션..

 

어쨌든 '박물관'이니만큼 SF 팬들이 좋아할만한 기념품들도 꽤 모아두었다.

이를테면 영화 스타트랙의 대본, Blade runner에서 안드로이드들이 입었던 의상, 데커드의 총.. (이런 거에 열광하는 나는 덕후인가?), 그리고 T1의 손과 머리....

영화말고 책과 관련된 자료들도 쏠쏠...

이를테면 '로봇'이란 단어를 처음 사용한 차펙의 책이라던가, 기존의 프랑켄슈타인적 공포를 벗어나 인간과 로봇의 친근한 관계 (인간 입장에서ㅋㅋ)라는 사고의 전환을 가져왔던 아시모프의 I, Robot

내가 젤 좋아하고, 필요로 하는 발명풍 Babel Fish...

아마도 SF 만큼 팬덤이 강력한, 또 일찍 발달한 장르도 없는 것 같다.

오늘날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은 명함도 못 내밀 지경인데, 독자들이 각종 동인지와 소식지를 발행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컨퍼런스도 열었음 ㅡ.ㅡ 작가들은 한편으로 강력한 지지세력을 얻기도 하고, 또 시달리기도 하고 ...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음)...  어려서부터 독자였다가 본인이 직접 전업작가로 나서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대표적인 사례가 Ackerman, Asimov 등이라네...

아마 독자가 작가에게 직접 상을 수여하는 것도 다른 장르에서는 보기 드문 일..

투박하지만 나름 당시로서는 가장 앞서가는 이미지로 도안된 제 1회 휴고상 트로피가 보인다..

SF 는 과학기술의 사회적 의미, 혹은 (현재에 대한 비판적 성찰 속에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을 주요 주제로 다루다보니 (황당무계한 이야기라는 세간의 억측과 달리 ) 상당히 사회현실에 민감하다.

그 유명한 SF 작가들의 베트남전 찬성/반대 서명을 나란히 모아 놓았다.

 

가까운 곳에 이런 박물관 하나 있음 정말 좋겠네....

이건 돈이 많아 비싼 소장품들 수집하는 것과는 완전 다른 문제....

 

힘겹게 사진 정리하고 보니, 작년에 다녀온 이집트 여행 나머지 반쪽 사진들은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지나서 기억이나 날랑가 몰라...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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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읽기

학회 다녀오면서 도덕경을 읽었다.

오강남 풀이의 현암사 버전이다.

 

 

부피가 크지 않으면서 너무 후딱 읽어버리지 않을 책으로 딱 한 권을 엄선하여 들고나간 책이다.

번잡하고 시끄러운 공항에서,

청명하기 이를데 없는 시애틀 해변에서,

삐딱하게 앉아 이 도덕경을 읽었다. 부조리극의 한장면..... ㅡ.ㅡ

 

책에는 워낙 여러가지 판본이 있고, 번역서 또한 적지 않다고 들었다. 그리고 각 버전마다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풀이가 되어 있다고...

무엇이 가장 원전에 가깝고 노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진실을 잘 드러냈는지 나야 알 길이 없다만,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 금강경이나 법구경을 읽었을 때도 생각했던 것인데, 처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담긴 내용과 구절들은 결코 낯설지 않았다. 예전에 그리스-로마 신화나 성경이 서구인의 정신세계와 문화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던 적이 있다. 어려서부터 많이 들어서 관련 상식이 풍부하다는 소리인가?  하지만 불경이나 도덕경을 읽으면서 새삼 깨달은 것은, 그동안 내가 읽고, 생각하고, 살아왔던 수많은 장면과 방식들 속에 이미 이러한 내용들이 상당 부분, 다양한 수준과 형태로 체화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내가 특별히 공부를 하거나 지식을 쌓아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문화 속 깊이 뿌리를 두고 전승되어왔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 당혹스러웠던 사실은 추상적인 개념어가 포함된 구절들을 이해하는데, 주석으로 붙어있는 한자보다 영어 단어가 더욱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건 영어 단어의 미묘한 뉘앙스를 잘 이해하고 있다거나 한자실력이 형편없다는 뜻이 아니다. (물론 한자 실력이 형편없는 건 사실이다 ㅡ.ㅡ). 이성적인 사고, 혹은 추론과 추상화의 과정에 한자어보다는 영어가 더욱 익숙하고 편하다는 것인데,  문제는 영어를 그만큼 자유롭게 구사할 능력이 없으면서도 여전히 한자보다 영어가 편하다는 점이다.  이는 (상당한 수준으로 한자가 포함되어 있는) 모국어로 사고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애국심이 부족해서 큰일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다만, 스스로의 사고를 모국어로 제대로 개념화하지 못하고, 또 이를 다른 이들에게 정확하고 적절하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마저 제한된 것이라 생각하니, 안타깝고 조금 한심스럽다는.... ㅡ.ㅡ 또 한편으로는  모국어로 사고를 성숙시키고 추상능력을 발전시키는데 학교교육이 어찌나 부실했었나 하는 원망...

 

도덕경을 다 읽었다고 해서 '도'가 무엇이지 깨달은 것은 아니다. 시도 때도 없이 접근하여 '도를 아십니까' 묻는 이들이라고 해서 그 도를 깨달았다고는 물론 생각지 않지만,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라는 표현이 역설적으로 도의 정체를 가장 잘 드러내는게 아닌가 싶다.

무위의 정신, 집착을 놓아버리고 자연의 뜻을 따르기를 강조하는 것들이 언뜻 불경에서 이야기하는 열반 혹은 깨달음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그 폭과 깊이에서 열반의 개념에는 미치지 못하는 듯....

어찌 본다면, 속세의 강을 건너 열반의 섬에 이르는 나침반이라기보다  이 곳 현세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제시하는 현장 지침서?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도'라는 것이 유가에서 이야기하는 인/의/예보다는 한 수 위의 경지라는 것이다.

 

"...

도가 없어지면 덕이 나타나고, 덕이 없어지면 인이 나타나고

인이 없어지면 의가 나타나고, 의가 없어지면 예가 나타납니다.

예는 충성과 신의의 얄팍한 껍질, 혼란의 시작입니다.

..."

 

도덕경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경서이기도 하지만 특히 당대의 위정자와 지배계층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올바른 길을 전하는 책이기도 했다. 여러가지 기억해둘만한 구절들이 있지만,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가장 와닿는 것은 이것이다.

 

"...

백성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

윗사람이 지나치게 삶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

이때 윗사람이 집착하는 삶은 꼭 개인의 복락만을 의미하지 않을 수 있다.

나라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우리 집단을 위해서.....그 형태는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헛된 집착 -- 내가 속하거나 다스리는 영역을 벗어나는 순간 타자에게 적대적으로 변해버리는 배타적인 집착, 혹은 타인의 삶을 압도해버리는 집착이 가져오는 결과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짧지만 참으로 핵심을 찌르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많이도 아니라, 단 한뼘만큼의 진정한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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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용역'과 학문적 자율성

건강정책포럼 이번 달 칼럼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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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용역’이란 ‘물질적 재화의 형태를 취하지 아니하고 생산과 소비에 필요한 노무를 제공하는 일’로 정의됩니다. 한편 법제처의 법률 정보에 의하면 ‘학술 용역’이란 ‘학문 분야의 기초 과학과 응용과학에 관한 연구 용역 및 이에 준하는 용역’을 지칭하고 이 중 ‘위탁형 용역’은 ‘용역 계약을 체결한 계약 상대자가 자기 책임하에 연구를 수행하여 연구 결과물을 용역 결과 보고서 형태로 발주 기관에 제출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새삼스레 용어의 정의를 찾아본 것은, 연기를 거듭하던 노동 패널 학술 대회가 결국 취소되었다는 뉴스를 접한 후입니다. 학술 활동과는 무관한 비민주적 정치 세력의 전횡이 이러한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합니다. 학술 대회가 취소되고 노동 패널 조사가 기약 없이 미뤄지는 것쯤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이들에 의해 연구 기관이 휘둘린다는 사실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첨예한 정치적 이슈들을 다루는 노동연구원에만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만큼 극적인 형태는 아니지만 보건학 연구 분야에도 우리가 경계해야 할 ‘학문적 자율성 침해’의 문제들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용역’이라는 단어가 존재합니다.

 

보건학의 경우, 특정 기술이나 제품과 관련된 임상 연구보다는 인구 집단 혹은 정책과 관련된 연구들이 많고, 그러다보니 사기업의 후원보다는 공공 재원에 의한 연구 수행이 상대적으로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연구재단이나 건강증진기금에서 지원하는 자유 과제들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대부분 중앙 정부의 부처나 지방 자치 단체가 발주자 역할을 하는 학술 연구 용역 과제의 형태를 갖게 됩니다. 상식적으로 이렇게 공적 재원에 의해 수행되는 연구 과제는 사적인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고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학문적 자유는 최대한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경험한 몇 가지 에피소드는 이러한 ‘상식’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2년 전, 공공 연구 기금의 지원을 받았던 한 과제는 중간 결과를 발표하기로 했던 학회 당일 주무 부처의 ‘권고’에 의해 발표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종료되지 않은 연구 과제에 대해 외부에 공표하지 않겠다는 계약 조건, 또 연구 결과를 발표할 때에는 ‘갑’의 사전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조건을 위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지방 자치 단체의 의뢰를 받은 연구 과제였는데, 공개적인 중간 결과 보고회 전날, 분석 결과가 ‘갑’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 인쇄물을 배포하지 말고 또 민감한(?) 사안들은 발표 내용에서 제외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다른 연구과제는 기이한 서약서 작성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보안 유지나 성실 의무의 수행을 약속하는 서약서를 작성해 본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런 것들과 ‘급’이 달랐습니다. 과제와 관련된 내용을 누설하는 것은 국가 안보를 해치는 것으로, 누설 시 그에 상응하는 민형사상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평범한 연구자의 상상력으로는 그 과제가 어떻게 국가 안보라는 엄청난 주제와 연계되는지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사채업자들한테 쓴다는 신체 포기 각서가 이런 거냐는 우스갯소리들을 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사실 이런 경우들은 연구 윤리나 과학 기술의 사회학 문헌들에서 강조했던 부분이 아닙니다.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청부 과학(원제 Doubt is their product)’이나 ‘더러운 손의 의사들(원제 On the Take―How Medicine's Complicity with Big Business Can Endanger Your Health)’, ‘노동자 건강의 정치 경제학(원제 Point of Production)’ 같은 책들은 일관되게 기업과 학술 연구의 유착 관계 혹은 자본에 의한 학문적 자유의 침해 문제를 지적합니다. 이를테면 공중 보건에 심각한 위해가 될 수 있는 연구 결과들이 ‘갑’에 의해 은폐되거나 ‘을’인 연구자가 ‘갑’의 허락 없이 연구 결과를 학술 대회에서 발표했기 때문에 비밀 유지의 의무를 소홀히 한 책임을 물어 기업으로부터 소송을 당한 사례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책들은 하나같이 ‘공공’ 연구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한편 대부분의 국제 학술지들이 논문 투고 시 ‘이해 갈등(conflict of interest)’ 상황을 밝히도록 하지만 여기에서 지칭하는 것은 기업의 연구비 지원이나 자문 위원 활동, 주식 보유 여부 등입니다. 정부의 연구비 지원, 즉 공공 재원에 의해 수행한 연구 결과를 두고 이해 갈등이나 유착이라고 표현한 경우는 본 적이 없고 연구 결과에 대한 정부의 압력이나 은폐를 경계하는 글을 읽은 적도 없습니다. 최소한의 형식적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사회에서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사안들도, 실무적인 측면에 국한해본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제가 민간 서베이 업체에 조사 용역을 의뢰했는데 그 업체가 조사 결과를 중간에 임의로 발표하거나 심지어 그 자료로 자신들의 논문을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문제는 간단해집니다. 대학으로 표상되는 연구기관의 정체성이, 혹은 연구 활동이 서비스 제공에 대한 금전적 보상만을 취하고 그 결과물에 대해서는 어떠한 권리도 행사할 수 없는 용역 수주 ‘업체’의 그것과 동일한지 여부만 결정하면 됩니다 (물론 연구자가 연구 자체와 관련한 신의성실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점은 굳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만일 용역의 개념정의에 따라 그 성과가 오로지 ‘갑’에게만 귀속되는 것이라면 학회발표를 취소시키는 것, 혹은 발표 내용을 수정토록 하는 것이 하등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대학이 ‘업체’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돈을 받는 대가로 정부가 해야 할 지적 노동을 대신 해주는 것이 대학의 역할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갑’이 지원하는 연구비 혹은 연구기금은 시민들이 낸 세금이지 정부의 은전(恩典)이나 담당자의 쌈짓돈이 아닙니다. 연구의 진행이나 성과물의 확산은 시민들의 건강개선과 학문발전, 혹은 시민들의 알 권리 충족이라는 원칙에만 근거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담당자의 안위나 정치적 선호, 혹은 조직적 이해에 근거하여 연구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바람직한 학술연구용역의 형태가 어떤 것인지 제가 답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불공정 근로계약서나 소비자 약관에 대한 개정처럼 정부의 학술연구용역 발주와 관련한 연구윤리 - ‘갑’과 ‘을’ 모두에게 해당하는- 에 대해 공개적인 논의와 새로운 지침 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을’의 노력이 절실합니다. ‘을’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 부끄럽게도 제가 그랬던 것처럼 술자리에서만 ‘어떻게 이런 일이!’ 언성을 높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학문적 자율성을 지키는 것은 사소한 문제제기와 일상의 수고로움으로부터 시작되며, 귀찮아서 포기한 작은 권리들이 연구자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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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반대하는 이들...

      커트 보네거트의 [제 5도살장 - 혹은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 죽음과 추는 의무적인 춤] (박웅희 옮김, 아이필드 2005년)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등장한다.

 

" 나는 내 아들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대량 학살에 가담해서는 안되고

  적이 대량 학살당했다는 소식에 만족감이나 쾌감을 느껴서도 안 된다고 늘 가르친다. "

 

" 또한 대량 학살 무기를 만드는 회사의 일은 하지 말라고,

  그리고 그런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경멸감을 표하라고 늘 가르친다. "

 

드레스덴 대폭격, 소위 Dresden theater의 경험은 돌아가신 두 할배 - 하워드 진과 커트 보네거트의 삶에 폭격만큼이나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에릭 홉스봄의 지적했듯, 반전운동에 누구보다 열심인 사람들이 참전군인들이라는 사실은 일견 당연해보인다.

현장의 참혹함과 스러져간 목숨들의 허무함을  직접 체험한 이들만큼 생생하게 전쟁의 부당성을 증언할  이들이 또 있을까....

이런 면에서 한국의 상황은 차~암 독특....

 

 

그나저나 요즈음 강건너 불구경하듯 태평한 모습으로 (물론 표정과 억양만큼은 결연 그 자체!) 전쟁불사를 외치는 이들이야말로 전쟁의 폐해를 피해갈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이들이다. 

고등학생인 연정이마저 그런 소리를 했다. '언니, 부자들은 벌써 비행기표 다 사놨다며?"

"야, 전쟁나면 비행기가 뜨겠냐? 혹시 모르겠다. 나라들마다 비상 항공편 마련하면 귀하신 이중국적자들 다 싣고 가실지도...."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전쟁불사 운운하는 인간들, 어떻게 하면 앗뜨거하게 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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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과 사상의 자유

이번 선거처럼 정신줄 놓고 있던 경우는 처음인 듯 싶다.

막상 선거가 사흘 앞으로 다가오니 암것도 안했다는 죄책감이 쓰나미처럼... ㅜ.ㅜ

(심지어 돈 못번다고 후원금도 찔끔.... ㅡ.ㅡ)

 

심이 사퇴한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궁금하여 점심 무렵 최은희 샘한테 전화했다가 정말 마음이 짠했다.

별로 힘들다는 소리 안하는 그녀가

완전히 잠겨 갈라진 목소리로 너무 힘들단다.... 

당으로 걸려오는 조직적인 항의전화와 심지어 항의 방문들....

차라리 어버이연합의 항의라면 웃어넘길수나 있지......

 

이게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인가?

 

87년 비판적 지지 논쟁이야 덮어둔다 치더라도

지난 10년 동안 진보정당을 상대로 그리도 상습적인 공갈협박을 해댔으면서도 또....

 

나는 진보신당 당원이다.

당연히 우리 당과 민주적 절차를 거쳐 선출된 우리 당 후보에게 표를 던질 것이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내가 생각하는 지향에 가장 가깝기 때문에 당원이 되었다.

남들이 우습게 생각한다 해도, 또 부족한 부분이 많다 해도

나 또한 책임이 있기에 '난 아니야' 라며 살짝 뒷걸음칠 수 없다. 당원이니까...

 

옘비 정권에서 정치적 시민적 권리의 적지 않은 퇴행을 목격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지난 정권 세력들을 지지하는 근거는 될 수 없다.

적의 적이 동지는 아니지 않나....

 

앙드레 고르는 지본주의와 같은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단일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그들이 반대하는 세력의 프레임으로 상황을 몰아가고 있다.

"경제가 망할 거야, 북한이 쳐들어올거야... 그니까 닥치고 한나라당을 지지해야 해!"

"한나라당이 지지하면 이러저러한 재앙이 닥칠꺼야, 그니까 닥치고 우리를 지지해야 해!"

 

이제 벌써 10년이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마초 영화 '친구'에 나왔다는 대사마냥...

이제 고마 마이 묵었다....

공갈협박 좀 고만 해라.....

 

내 정당 내가 지지하겠다는데 왜 이리 못살게들 구는겐가!

양심과 사상의 자유는 헌법에도 보장되어 있다면서....

그렇게들 서로 좋아 죽고 못사는데, 만일 선거 끝나고 합당 안 하면 그것도 미스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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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에서 생각하기...

 

#1.

며칠 전 퇴근 길 지하철에 올랐는데, 실내가 약간 덥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 승무원 아자씨께서 안내 방송을 하셨다.

냉방 때문에 춥다는 민원이 들어와 냉방을 껐으니, 승객들이 이 점을 양해해달라는 메시지였다.

 

그리고 한 30초나 지났을까, 아자씨가 몹시 다급한 목소리로 방송을 하셨다.

"아~ !  지금, 덥다는 민원과 춥다는 민원이 동시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

"승객 여러분! 지금 현재 덥다는 민원과 춥다는 민원이 동시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중계방송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아~ 지금 현재, 덥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
"네~  덥다는 의견이 압도적입니다."

....

"이제, 냉방을 다시 켜도록 하겠습니다. 덥다는 의견이 압도적인 관계로 냉방을 다시 켜도록 하겠습니다.... (어쩌구저쩌구...)

 

도대체 지하철 안에서 누가 그렇게 민원을 넣는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도 방송을 들으면서 다들 두리번....

요즘 지하철에는 승무원이 혼자 탑승한다.

운전상태도 점검하고, 인명사고가 발생하면 혼자 그걸 수습(!)하고, 심지어 이제는 승객들의 폭주하는 민원도 받아줘야 한다. 

승무원 아자씨의 긴장감 넘치는 중계방송은 재미났고, 목소리는 정감있었지만, 

이게 뭔 일인가 싶다....   ㅡ.ㅡ

 

#2.

어제 근 두 달 만의 무한도전, 행여나 한 조각이라도 놓칠세라 오후 내내 엠비씨에 채널을 고정해놓고 있었다.

그리하여, 음악중심인가 하는 음악프로를 보게되었는디...

 

우선, 끝도 없이 쏟아져나오는 소년소녀  떼거지에 놀랐다. 

그들의 노래 실력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으나, 최소한 분명한 것은, 각자 불러야 할 소절이 얼마 되지 않아 굳이 가창력을 애써 검증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한민족의 무의식 속에 전승되던 집단창가?

그런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내 마음 속에서는 쾌지나칭칭나네 자동 재생 ㅡ.ㅡ

 

이거야 사실 최근의 아주 새로운 현상은 아니기에 그저 '새삼' 놀랐다는 것이고 (아직도 이 문화가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진정 나를 깜딱 놀라게 만든 것은 그 놀라운 가사들!!!

이런 걸 퇴행이라 표현하지 않으면 무엇을 퇴행이라 부르리???

가부장주의와 신파는 내가 모르는 최신의 문화코드였단 말인가?

되도 않는 영어 추임새와 외계어의 조합은 일단 제껴둔다 하더라도,

일찍이 1980-90년대에도 들어보지 못한 교태, 앙탈 코드에 입이 쩍 벌어졌다.

어제 등장한 여자 가수들 노래 중에, 다양한 방식으로 오빠한테 징징거리지 않는 가사는 아마도 이효리의 것이 유일했던 듯...

갑자기 그녀가 다르게 보이더라니.... ㅡ.ㅡ

도대체 저런 노래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한국사회 문화 '시장'의 괴력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 궁금해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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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을 가로지르는 책들

 

출퇴근 거리가 길어지니까 책읽을 시간이 늘어났다.

물론, 운수대통으로 일찌감치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 도저히 깜빡잠이라고 부르기 어려울만큼 푸~욱 잠들어버리지만.....

얼마전에는 내릴 정거장이 되어서 문닫히기 전 후다닥 뛰어내렸는데,

하도 깊이 자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인지 어지러워 한동안 멍때리고 서 있었음 ㅡ.ㅡ

 

읽은지 오래되어 기억도 가물가물이나, 그나마라도 기록해놓는게 좋을 듯 싶어 몇 자 남겨둔다

 

#1. Eric Hobsbawm. Vintage 1996

 

 

지난 겨울 히말라야 가서 읽기 시작했던 책이다.

저 표지사진............ 책의 내용을 이미 절반은 설명하고 있다.

 

*

과거에 대한 올바른 이해없이 현재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소박한 진리를 새록새록 떠올리게 만드는 책이다. 

돌이켜보면, 한번도 현대사를 이렇게 폭넓게 '조망'해본 적이 없었다.

읽고난 지 얼마되지도 않아 벌써 연대기 순서도 뒤죽박죽되고 구체적인 디테일들을 왕창 까먹었지만 (ㅡ.ㅡ), 부분적으로 알고 있던 사건들을 맥락 속에서 전체적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느꼈던 '깨달음'의 즐거움만은 생생하다.  정치와 이념, 문화예술과 과학 -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시공간을 넘나들며 씨줄날줄을 잘 엮을수 있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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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봄은 1930년대 대공황 부분을 기술하면서, 시장지상주의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이렇게 생생하게 경험하고서도 1980-90년대에 신자유주의가 다시 맹위를 떨치는 현상이 참으로 기이하다고, 그래서 역사가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도 또 20년이 지나 전세계적 데자뷔를 경험하고 있는 걸 보면, 집단적 기억투쟁이 중요한 것 같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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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하워드진의 [미국 민중사]와 비교를 하고는 했다. 

[미국민중사]를 읽으면서 울컥하는 감정의 고양과 낙관을 갖게 되었다면,

[극단의 시대]를 읽는 내내 눈이 뜨인다는 이성적 기쁨과는 별개로 마음이 매우 무거웠다. 

주욱 돌아보니,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이 지구촌에 어떠한 형태든 근본적 변화가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하는 비관이 스멀스멀.....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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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대학시절 세미나 이후 처음으로, 러시아혁명과 중국 혁명에 대해 '차분하게' 돌아보았다. 물론 그 시절에도 들끓는 환호의 마음으로 모든 걸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지금 이해의 지평이 확장되었다고 해서, '그 때는 제가 철이 없었어요'  혹은 '속았어요'하며 배신감을 느낀 것도 아니다. 

세상의 복잡성과 맥락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 정도의 지식과 이해밖에 얻기 어려웠던 것이 그시절의 한계일수 있다.  하지만, 내가 막연하게 이해하고 있던 것보다 혁명 당시의 상황은 훨씬 열악했고, 혁명을 통해 과연 그 사회들이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했냐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답변을 하기가 훨씬 어려워졌다.
 

*

책의 첫 장에 인용된 인류학자 Baroja의 말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There's a patent contradiction between one's own life experience - childhood, youth, and old age passed quetly and without major adventures - and the facts of the twentieth centry... the terrible events which humanity has lived through"

20세기는 기이하게 마감되었다.

'평균적인' 물질적 조건들은 개선되었지만, 불평등은 유례없이 심화되고,

전지구적 차원의 전쟁을 사라졌지만 국지적 갈등은 이제 그야말로 유비쿼터스.....

 

기관사없는 폭주기관차처럼 위태롭게 질주하는 21세기 지구촌의 운명은 과연 어디로...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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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가는 런던을 떠나며 영국인들은 다시는 런던을 보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단다.  세계가 멸망하는 줄 알았다고.....

그러게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지속된다.  

하지만 문제는 어떤 삶이 지속되느냐 하는 것이다.

 

인류는 정말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2. John Berger < Ways of Seeing> Penguin books 1972

 

 

미술작품, 특히 회화에는 등장인물 (혹은 사물이나 풍경) - 그리는 사람 - 그림을 보는 사람 이 존재한다.

Berger는 통상적인 예술사 기술이 잔뜩 신비화된 미사여구로 등장인물과 화가들의 내면에 대해 소설을 쓰는 것을 비판하며, 등장인물과 화가 의 관계, 그리고 그림과 감상자 혹은 소유자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작품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책이 BBC에서 방송된 프로그램에 기반을 두고 쓰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렇게 '급진적'인 내용이 공중파 예술프로그램에서 가능한 거구나... ㅡ.ㅡ

 

책의 목적은 서문에 아주 분명하게 기술되어 있다.

"A people or a class which is cut off from its own past is far less free to choose and to act as a people or class than one that has been able to situate itself in history. This is why - and this is the only reason why - the entire art of the past has now become a political issue"  

 

무엇보다, 책이 재미있고,

얄팍한 나름의 서양미술사 지식에 토대를 둔 관성적인 스스로의 작품 이해방식을 앗 깜딱이야 하면서 돌아볼 수 있게 만들어준 아주 훌륭한 책.... (종류가 다르기는 하지만,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읽고서 눈이 번쩍 뜨였던 경험에 비할만하다)

칼라 도판 없이도 그림책이 이렇게 훌륭할 수 있구나!!!

 

#3. Wilkinson R, Pickett K.   Bloomsbury Press 2009

 

 

미국에 체류 중인 S 샘이 저자 친필 서명까지 얹어 선물로 보내준 책이다.

 

저자들은 주로 선진국들의 통계자료를 이용하여 소득불평등이 다양한 건강과 사회문제 (정신건강, 약물남용, 평균 수명, 비만, 교육성취, 10대 임신, 폭력, 징역/형벌, 사회 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꼼꼼하게 보여주고 있다. ( 인용하거나 참고할만한 수치나 그래프들이 적지 않다- 다만 통계미비로 한국은 분석에 거의 포함되어있지 않음 ㅡ.ㅡ)

 

그래서, 한 사회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뿐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서 좀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불평등로 인해 초래되는 사회적 비용은 그 사회 모두에게, 특히나 열악한 조건에 처한 이들에게 좀더 집중적으로, 전가되며, 윤리적인 측면에서 뿐아니라 효율이라는 측면에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평등한 사회로 변화해가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거나 수천만년 걸리는 일도 아니라는 것을 현실의 예를 들어서 보여주고 있다.

아주 꼼꼼하고 설득력 있게 쓰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좀 '결정적인' 부분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도대체 '왜' 불평등이 이러한 여러가지 건강과 사회문제들을 낳는가 말이다.

 

저자는 오랜기간 주장해왔듯, 다시 한번 사회심리적 요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분명히 중요한 요인이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단지 마음가짐과 스트레스의 문제가 아니라,

불평등으로부터 야기된 힘의 불균형 (이들은 상호강화)이 시민들의 민주적 참여를 배제시키고, 사회적 투자를 침식함으로써 실제적인 물리적 조건의 변화를 낳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 아닐까?

 

OECD 국가들 중 불평등 수준이 가장 심각한 미국의 평균적인 건강수준이 나쁜 것이,

불평등 때문에 시기와 질투로 마음에 병이 나서 그렇다기보다는

계급 혹은 계층적 이해가 달라지면서 공공의 장이 축소되고, 권력을 가진 이들의 이해에 충실한  정책과 사업들이 시행되면서 실질적인 삶의 조건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저자들의 관점에 대한 이러한 문제의식은 사실 나만이 아니라,

사회역학계에 나름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설명에 대해서는 학술적 논쟁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하지만

어쨌든, 이 책이 전공자들이 아닌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쓰여졌고 그것도 아주 쉽고 간명하게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굳이 '나 이 책 반댈세'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설명방식에 대해서 관점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불평등이 건강과 사회문제에 심원한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단지 가난한 이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한 것 같다. 

오늘날 한국사회에 무척이나 절실한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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