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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집단 '평균'과 일탈 '유병률'의 함수

이번 달 건강정책포럼 웹진에 쓴 칼럼이다.  차례 돌아오는 게 순식간이다... ㅡ.ㅡ

 

인구집단 ‘평균’과 일탈 ‘유병률’의 함수

 

얼마 전, 여자 어린이를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른 이에 대한 처벌 수위를 두고 여론이 들끓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범행의 내용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했던 데 비해, 가해자가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 상태였다는 것이 참작되어 형량이 예상 밖으로 낮게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기징역이나 사형을 통해 다시는 사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에서부터, 화학적 거세에 전자발찌, 신상의 완전 공개 등 사회적 분노의 수준에 걸맞는 강력한 처벌들이 제안되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나선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대통령까지 이 사건을 직접 언급하며 강력한 징벌과 재발방지를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견 당연해 보이는 일련의 사회적 반응 앞에서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선구적인 역학자 제프리 로즈 (Geoffrey Rose, 1926-1993)는 유작이 되어버린 [예방의학의 전략 (The Strategy of Preventive Medicine, Oxford University Press 1992)]에서 ‘인구집단의 평균이 일탈의 발생에 미치는 효과’를 지적한 바 있습니다. 한 인구집단 안에서 개인들 간 변이의 범위는 다양성을 지향하는 힘과 통일성을 지향하는 힘 사이의 균형에 의해 통제되며, 그 결과, 인구집단 평균의 변화는 전체적인 분포의 이동을 수반한다는 것입니다.

  52개 국가/사회들을 대상으로 시행된 인터솔트 연구 (Intersalt Study) 결과를 살펴보면, 인구집단의 평균과 일탈 유병률의 상관성은 매우 높습니다. 예를 들면, 인구집단의 평균 혈압 수준이 매우 낮은데 (특이 체질을 가진 사람들 때문에) 고혈압 유병률이 높은 경우란 거의 없고, 마찬가지로 집단의 체질량지수 평균이 높아질수록 비만의 유병률은 높아지기 마련입니다. 일탈의 내용을 이루는 것이 혈압 같은 신체 건강이든, 인지 기능 같은 정신 건강의 문제이든, 혹은 살인률 같은 사회적 일탈이든 그 양상은 비슷합니다. 보건학적, 사회학적 문제의 대부분이 ‘보통 사람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극소수의 일탈자들’에게만 국한되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분포’라는 연속선상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건도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사회에서의 젠더 불평등, 여성의 성적 대상화,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의 ‘평균’ 수준을 생각해봅니다.

  ‘얼굴이 덜 예쁜 여자들이 서비스도 좋’다고 이야기했다던 정치인이나, 여성 기자를 ‘음식점 주인으로 착각해서 실수를’ 저지른 국회의원, ‘예전 관찰사였다면 관기(官妓)라도 하나 넣어드렸을 텐데’라며 손님 접대의 소홀함을 부끄러워했던 도지사, 여자 대학생에게 ‘감칠 맛’을 운운하던 교육자께서는 여전히 현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저녁 무렵이면 ‘미녀 ○○명 항시 대기’를 알리는 매우 ‘단란한’ 주점의 전단이 주택가에 뿌려지고, 손가락으로 리모콘만 누르면 작동 가능한 노래방에 도대체 무슨 도움이 필요한지는 알 수 없으나 오늘도 전국의 수많은 노래방에서 도우미들이 맹활약을 펼치고 계십니다. 대중매체들은 (대중이 원한다는 명목 하에) 10대 소녀 연예인들의 성적 매력을 탐구하느라 여념이 없고, 초등학생, 심지어 유치원에 다니는 여자 어린이들이 쇼프로에 등장해 선보이는 정체불명의 ‘섹시 댄스’ 앞에서 어른들은 박수를 치며 좋아라합니다. 이 정도면 가히, 민관 합동의 파상공세라 할 만 합니다. 한국사회가 가진 의식의 ‘분포 (distribution)’가 어디 쯤 위치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성범죄 발생률이 낮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할 지경입니다. 몇 년 전, 영화 ‘살인의 추억’에 대한 지인들의 반응이 성별에 따라 달랐던 기억이 납니다. 남성들은 심리묘사니 미장센, 음악을 칭찬하느라 바빴지만, 여성들은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상황 - 어두운 밤길에 홀로 걷고 있을 때 뒤에서 울리는 발자국 소리의 공포- 의 100% 현실성에 공감하며  ‘너무 실감나고 무서웠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이런 곳이 한국사회입니다. 


  인구집단 전체의 분포가 변화하지 않으면서 일탈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설령, 분포의 꼬리를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통해) 일시적으로 제거한다고 해도, 분포 자체의 이동이 없는 한 누군가는 또 그 자리를 채우게 됩니다. 잘 알려진 고위험 접근법 (high risk strategy)의 단점입니다. 성평등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인식 변화 없이, 극단적 사례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만연한 성폭력의 문제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제프리 로즈의 계산에 의하면, 인구집단의 평균 혈압이 단지 3%만 낮아져도 고혈압과 관련된 임상적 문제의 규모를 25%나 감소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인구집단 전략 (population strategy)의 이 엄청난 잠재력을 고려한다면, 우리 사회의 의식 분포를 조금 왼쪽으로 이동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왼쪽’이라는 말에 언짢아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별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프의 X축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값이 커지도록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분포의 ‘평균’ 수준을 낮추려면 안타깝게도 (!) 왼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극악무도한 성(性) 범죄자 대(對) 나머지 선량한 시민들이라는 이분형 분포의 환상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이 포함된) 현실의 연속형 분포를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구집단 관점의 공중보건 전략은 사회적 건강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에도 상당히 유효하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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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떠난 두 분을 추모하며...

 

올해 학술운동(?)의 목표 중 하나가, 건강생활최저소득 (Minimum income for Healthy living) 관련 예비연구를 진행해보는 것이었다. 지난 여름부터 꾸준하게 모임이 지속되었고, 낮은 수준이기는 하지만 몇 주 후면 연구결과를 발표하게 된다.

6개월 남짓 함께 공부를 하는 동안 당혹스러운 두 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세미나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건강불평등 연구업계에는 Townsend index 로 널리 알려져있으면서, 복지업계에서는 상대적 빈곤과 박탈개념의 선구자로 명망이 높으신 Peter Townsend 교수가  돌아가신 것이다. 향년 81세.... 부고 기사를 읽어보니,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한 분..... (부고 기사는 여기)

안타까운 마음에, 부고 소식을 연구자 회람도 하고, 학회 소식지에도 실었는데...

 

엊그저께 또 하나의 부고...

건강불평등 연구업계의 전기를 마련한 블랙리포트의 공저자이자, 우리가 요즘 진행하고 있는 건강생활최저소득의 개념을 최초로 제안하신 분인 Jerry Morris 교수가 28일에 돌아가셨다. 이제서야 알았는데, 자그마치 1910년 생이시다... 향년 99세..............ㅡ.ㅡ

그럼 2000년도에 MIHL 논문을 제 1저자로 게재하셨을 때, 이미(!!!) 90세였다는 거다......

심지어 2005년 런던스쿨에서 노인을 위한 건강생활최저소득 프로젝트 보고서의 책임자를 맡았을 때는 95세.....  도대체 뭐 드시고 이렇게 총기를 잃지 않으셨다냐?  살아계실 때 그 비법을 캤어야 했다!!!!  나는 지금도 총명탕이 절대 필요한 상황인디?

 

언젠가 친구가, 우리가 좋아하는 가수들은 다 일찍 죽는다고 불평을 늘어놓은 적이 있다. 김현식, 김광석, 들국화의 허성욱, 나는 별로 관심없었지만 듀스의 김성재....

Townsend 나 Morris 교수들이야, 절명하신 건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한참 그분들의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데 돌아가시다니.....  일면식도 없는 사이기는 하지만 섭섭하기도 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건강하게 더 오래 사셨으면, 아마 더 많은 일을 하셨을 분들이다. 여기 젊은이들은 오늘도 스스로의 '연로함'을 탓하며 퍼져있는데..... 부끄러운 일이야!!!

부디 영면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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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과 맥락

살다보면, '실상'을 잘 알지 못한 채 '에이~ 그까이꺼' 하면서 폄훼하는 경우들이 의외로 많다.

 

마르크스의 적자임을 강조하며 그 분의 뜻을 헤아리는데 공을 들이는 좌파 훈고학계에서 어쩌면 가장 입에 담지 못할 단어는 '사민주의'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훈고학적 지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나같은 변방의 서생조차  '그까이꺼 사민주의'는 (반동보다 더 질이 나쁜) 변절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시절이 있었으니.... 

 

박근갑의 저서 [복지국가 만들기 - 독일 사민주의의 기원] (문학과 지성사 2009) 을 읽으면서, 과연 이 당시 독일 노동자들과 사회민주당의 전략/전술이 정말 최선의, 바람직한 것이었는가 하는 논의를 떠나, 어떠한 고민에서 이런 행보를 걷게 되었는지 (물론 완전 자발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도 없지만)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돌아보면, 그동안 나는 역사적 맥락과 내적 동력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이, '사민주의란 근본적 변혁을 가로막는 개량주의', '조합주의, 도대체 왜 저런 비효율적 제도를?' 이 정도의 단순화 논리만을 가지고 있었더랬다. 

 

 

 

이 책은, 1848-1914년에 이르는 격동의 시기, 독일의 복지국가 프로젝트가 태동하고 자리를 잡던 그 시기에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복지정치'를 둘러싸고 사민주의 세력이 어떻게 성장하고 변화해갔는지를 아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물론, 이 책 한권을 통해 그 복잡했던 시기를 다 이해하기란 어림도 없는 일이다.  더구나 사람 이름 외우는 데 천부적 무능력을 타고난 나에게, 역사책은 역시.... ㅡ.ㅡ 비스마르크, 라살, 로만, 베른슈타인, 그리고 엥겔스 (!) 말고는 다 그 사람이 그 사람... 헷갈려 죽는 줄 알았음.... ㅎㅎ

 

어쨌든 이 책은,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사회보장과 (아직 스스로 정의조차 하지 못하는) '공공적' 서비스의 확충을 이야기하는 나같은 사람들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었다. 백년 전 독일 사민주의자의 문제의식과 딜레마가 오늘날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 그닥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ㅡ.ㅡ

 

문제의식과 더 공부해봐야 할 것들...

 

* '사회보장'의 근본목적은 무엇인가?

보장 혹은 서비스의 내용을 보자면 사실 비스마르크가 생각했던 '독일 제국의 복지'와 좌파가 꿈꾸는 복지에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좌파 - 당시 사민주의 초기 운동은 비스마르크의 안과 이어진 수정안들에도 격렬히 반대했었다. 이는 '의미론' 투쟁이라 할 수 있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고민의 지점이다.

이를테면, 선거전날이 되면 보수우익 정당이나 비교적 급진적인 진보정당이나 사회복지 관련 정책에 그닥 차이가 없어진다. 보수적 온정주의 - 포퓰리즘 - 경제개발의 토대 (인적 투자) - 사회적 비용의 최소화 - 사회권 보장 등 목적과 철학적 배경에는 폭넓은 스펙트럼이 존재하지만, 과연 '그들의 것'과 '우리의 것'이 가진 본질적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내기란 쉽지 않다.

  

* 민주적 통제와 참여의 문제!

독일은 왜 북구유럽 같이 조세에 기반한 국가건강보장제도를 취하지 않고, 사회보험 방식의, 그것도 비효율적으로 찢어져있는 '조합주의적' 방식을 택한 것일까? 기존 조합들의 소위 '조합주의적' 활동 지향 때문?

하지만, 보험조합이 정치적으로 엄혹했던 시기에 어떻게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훈련'하는 정치학교가 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자본과 국가로부터 독립된 노동자 자치의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깊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몇 년 전, 공공병원 확충에 대한 고민 속에 미국과 캐나다의 일부 모범적인 공공병원 사례들을 돌아보면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사회민주적 통제와 참여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백년 전 독일 노동자들의 고민에 비추어본다면, 오늘날 한국에서 각종 사회보장 제도/프로그램의 확충을 이야기하는 이들의 고민은 '어떻게, 누가'라는 부분에 상대적으로 소흘한게 아닐까? 한편으로 국가의 계급적 속성을 논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만이 이를 보장하고 운영할 수있는 유일하고 효율적인 주체인 것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편 한국의 건강보험 통합논쟁에서도 형평성과 효율에 대한 담론은 활발했지만, 민주주의와 참여에 대한 논의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 같다. (가물가물 기억이... ㅡ.ㅡ 혹시 나만 모르고 있었남???)  이름은 비슷한 통합/조합 논쟁이지만 당시 독일에서의 논쟁과는 초점 자체가 다른....

 한국사회에서, 각종 국가제도, 혹은 위원회에 공익위원이나 노동계 대표 몇 명 포함시키느냐를 넘어서는,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뭔가 새로운 논의들이 시작되어야 할 듯 싶다.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가 결코 순차적이거나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최장집 교수의 이야기는 여기에 닿아있다. (공공복지 논의와는 또 별도로,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대한 통제 문제까지!)

 

* 상호부조, 연대의 원리와 책임성

노동자 계급 내부의 연대, 노동자 개인들 사이의 상호부조라는 원칙과 참여민주주의/자치행정의 운영방식이 긍정적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이를 위해 국가와 자본의 기여를 하나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발상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곤혹스럽다. 사실, 문제의 발생 책임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특히 건강보험이나 산재보험은, 기업이 부담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하지만 노동계급과 사민주의자들이 우려했던 것은, 그로부터 비롯되는 독립성의 훼손.... 말하자면, 물질적인 실리보다는 '원칙' 이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현실에서, 성수동 노동자건강센터의 건립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물론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서라면 어차피 공적 기금을 제도적으로 지원받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만일 상황이 허락한다면 그러한 지원을 받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가? 고민하는 대상의 규모는 다르지만, 그 본질은 같다고 본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과연 그러한 조직이 목표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정의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성수동 센터는 제도로부터 독립된 자치기구를 지향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게 지난 3년간 고민의 나름 결론.... 과연 적절한 것이여???

 

* 프레임의 인정? 전술과 전략?

독일의 노동자들과 사민주의자들이 복지국가 전망과 의회주의 전술을 채택한 것은 결국 체제 혹은 지배집단이 만들어놓은 프레임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현존 질서를 인정하지 않고 급진적 변혁 전략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프레임 안에서 최대한을 얻기 위해 싸울 것인가?

 물론 역사적 경험을 보자면야 전자를 위해 죽기살기 싸워야 후자라도 얻게 되는 경우가 일반적인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이건 사후 평론이고, 막상 해당 시기에 어디까지를 전략적, 전술적 목표로 두고 싸워야 할지 판단하기란 참 쉽지 않다. 무조건 최대치를 이야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알아서 깎아주며 싸우다간 그나마도 못 얻기 십상이고.....  물론 팔짱끼고 서서 관전평만 한다면야 가급적 급진적으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뽀대가 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무언가 구체적인 답을, 더구나 작은 가시적인 성과들이 모여 큰 흐름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판단을 하기가 참참참 어렵다... ㅜ.ㅜ 백년 전 독일 사민주의자들이 갈팡질팡 했던 것도 참 공감이 되더라니... ㅡ.ㅡ

 

* 사족이지만, 그 시기 독일에서 의회주의와 제도화 전술을 두고 벌어졌던 좌파 진영의 논쟁이 80/90년대 한국 사회에서 재현되었던 것은, 생각해보면 참 뜬금없다. 지금은 제목조차 가물가물한 마르크스의 고타강령 비판을 들먹이며, 합법정당과 개량주의 운동을 비판했던 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들을 하고 계실까???

  

* 역시 사족인데, 이 책이 번역서가 아니고 국내 연구자의 저서라는 사실이 새삼 놀랍고도 고마운 마음... 나도 이런저런 번역 작업을 했고, 또 지금도 하고 있는 것들이 몇 가지 있지만, 지식 수입과 중개 노릇은 이제 슬슬 접어야겠다는 반성을 부쩍 하고 있다. 학문적 지평의 확대에서 번역 작업의 소중함을 폄훼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연구자로서, 한국사회의 맥락에서 본인의 학문적 성과물을 성찰하고 정리해내지 못하는 미숙함에 대한 자기반성....

 

 

독일 사민주의 이야기하다, 엉뚱한 길로....

저자가 특강 같은 거 한 번 해주심 참 좋을 거 같은디.. 질문할 것도 많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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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책들의 도시]

정말 기나긴 2박 3일이었다.

대전-보령-춘천-서울-화성-대전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으니, 멍 ~~      +.+

 

빨래 돌아갈 동안 맥주 한 잔 하며, 책상위에 쌓여있는 책들이나 치워볼까 했는데 기력이 딸려서 원....

책들을 옮기던 중 책읽는 부흐링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입가에 미소가 절로.... (^^)

 

발터 뫼르스 지음, 두행숙 옮김  [꿈꾸는 책들의 도시] 들녘 2005

 

 

 

어쩜 이렇게 깜찍하고 발랄한 소설이 있는지...

책을 둘러싼 레전드급 스펙타클의 진지 버전이 에코의 [장미의 이름] 이라면,

이 책은 아기자기 버전의 한 극단....

 

부모님 병세 때문에 병원에 드나들고 정신이 피폐해진 그 시기에,

잠시나마 현실을 떠날 수 있도록 해준 고마운 책이다.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또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맛깔나게 그려지지만,

그래도, 책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부흐링들의 귀엽고 기괴한 모습은 단연 최고...

마지막에 이들이 등장하던 장면에서는 하마터면 '감동'할 뻔했다. ㅡ.ㅡ

 

책을 읽으며, 부흐링의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아마도 나만은 아닐 듯...

 

뫼르스의 다른 책들을 챙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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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념'이라는 이데올로기

요며칠 경험한 (새롭지는 않지만) 난감한 상황...

 

#1. '엄마는 우리 집에서 제일 한가한 사람이예요' 

 

연수를 가게 된 남편을 따라 현재 미국에 머무르고 있는 대학원 후배 1인.

얼마 전 그 집 여덟살짜리 딸래미랑 전화통화를 하게 되었다. 

"엄마가 논문도 쓰고 힘들테니까 동생도 잘 돌보고, 엄마 공부할 수 있게 시간 좀 줘" 했더니만 득달같이 대답한다. "엄마는 우리가 학교가고 아빠 일하러 가면 집에서 빨래나 하는 제일 한가한 사람이예요..." ㅜ.ㅜ

 

허거덕했지만 굴하지 않고, "아빠 연구하는 것만큼 엄마 공부도 중요하니까, 아빠보고 집안일좀 거들라고 니가 말해" 했더니만, 아빠가 논문쓰느라 얼마나 바쁜데 그러냐며 나를 나무란다... ㅜ.ㅜ

 

그녀가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지는 나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함께 진행하던 논문의 1차 심사결과가 왔는데, 그 '한가한 엄마'가 과연 언제 시간을 내서 그것을 수정할 수 있을지..... 이건 뭐 어디서부터 어떻게..... OTL

 

#2. "국가경쟁력"

 

고 3들이 생각하는 저출산 고령화 대책의 핵심은 '국가경쟁력 확보'인가보다.

지구촌 인구가 폭발하기 전인데 왜 한국만 인구를 늘려야 되냐고, 청년 실업이 백만인데 자꾸 더 낳기만 하면 어쩌냐고, 지식기반/서비스로 경제구조가 바뀌면 힘쓸 일이 줄어서 노인도 일할 수 있을텐데 왜 노인인구 증가가 부정적이기만 한거냐고 반문해도, 한참을 주저리주저리 하다가 '그래도 국가경쟁력'으로 돌아온다. ㅜ.ㅜ 막상 국가경쟁력이 도대체 뭐냐고 물어보면 답도 못하고.... 어이구.......

 

뭐 고등학생들한테 큰 기대를 하는 건 아니지만, 어느 누구도 저출산이라는 현상이 젠더/노동의 이슈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더라. 그나마 좀 나아가면 사교육비를 줄여서 경제적 부담을 줄여야 된다는 정도? 개중에는 여성들의 인식을 제고시키는 캠페인을 해야 한다니, 원, 조선시대로 돌아가자는 말인가???

 

하긴, 누구를 나무라겠나....

이들만 특별히 이런 생각을 가진게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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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

소식도 뜸한데다 오랜만의 포스팅마저 내용이 애매모호하여 근황을 걱정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만의 착각?)

 

공교롭게도 각종 마감일정이 한꺼번에 폭주한데다...

부모님이 좀 편찮으셨습니다.

소박하게 '좀' 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안정되어 한 시름 덜었습니다만,

정신차리고 보니 새삼 병원비의 후폭풍이 놀랍기만 하군요.... 

아까 엄마로부터 전화로 지난 열흘간의 진료비 액수를 듣고, 

음하하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risk pooling 을 통해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하고 catastrophic  expense 를 최소화시켜 소득손실을 막는 것이 건강보험의 역할이라면,  내가 지금 가입해있는 이것의 정체는 무엇인지 도대체 모르겠심다 ㅜ.ㅜ

 

이 와중에 일터는 인증평가 현장실사를 받는다고 하여, 그거 준비하느라 또 정신이 없었고....

일터에는 아직도 '큰 일'이 남아 있습니다. 이번 주말이 되어야 정리가 될 듯....

 

지난 열흘 동안 응답못한 메일이나, 전화가 산더미같습니다.

무례를 탓하지 말아주시길....

 

만나는 이들마다 얼굴이 반쪽이라고 하시는데,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제 평생 한번도 야위어 본 적은 없습니다.

아마도 잠을 못 자서 퀭한데다, 머리도 초여름 잡초처럼 다듬어지지 않아 잠시 얼굴이 작아보이는 착시 현상 ㅎㅎ

 

어쨌든, 걱정해주신 분들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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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9

 

타고난 품성인지,

트레이닝의 결과인지 알기 어려우나

'통상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 앞에서 detatchment 를 통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나름 기특한 장점이라 하겠다.

 

하지만 detatchment 가 apathy 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많은 말들을 삼키고,

집착을 놓으려했다.

 

어쩌다보니.... 이제 득도할 지경에 이른 듯....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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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

 

"조롱하지 마라, 비탄하지 마라, 저주하지 마라, 단지 이해하려 하라 (Not to laugh, not to lament, not to curse, but to understand)"

 

부르디외가 편저한 [세계의 비참]  첫머리에 쓰인 스피노자의 말이다.

 

최근에 읽은 몇 편의 글들은 이 문구를 '자동재생' 시킨다. 

 

  • 최규석 단편집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길찾기 2009년 (신판)
  • 최규석 리얼 궁상만화 [습지생태보고서] 거북이북스 2005년
  • 아리스티드 지음, 이두부 옮김 [가난한 휴머니즘] 이후 2007

 

       

 

절절하지만 선정적이지 않게,

궁상맞지만 마냥 피해자인 것만은 아니게, 그리고

"물질은 부족하지만 마음만은 부유한" 따위의 목가적 낭만주의에 경도되지 않으면서 고통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그러한 빈곤과 고통이 '대상자'가 아닌 자신의 사적 경험의 일부일 때,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으면서 서늘하게 묘사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하지만 최규석은 참 잘 해내는 작가인 것 같다. 

옛날 (?) 생각이 참 많이 났더랬다.......... '가난의 효용' 같은 장은 정말 그랬다.

 

전임 Haiti 대통령이자 신부인 아리스티드의 글은 대상이 분명하다. 선진국, 잘 사는 시민들, 그나마 정신줄이 남아 있는 인간들이 예상 독자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편지글 모음은, 글을 모르고, 혹은 편지지를 살 돈이 없거나, 우표를 살 돈이 없는 이웃들 대신해서 그가 '세계시민'에게 호소하는 글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가 그들 사회에 어떤 파국을 가져왔는지... 살아남기 위해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식의 지원과 연대가 필요한지....

 

그의 논지에 적극 공감하면서도, 그래도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있다. 사람들이 밥을 굶는다면 민주주의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맥락은 이해하지만, 이와 동일한 논리가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전용되었는지를 돌아본다면, 조심해서 해석해야 한 부분이 아닌가 싶다. 물론 큰 맥락에서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일종의 기우랄까.... 먹고 사니즘에의 경도가 오늘날 한국사회에 가져온 폐해를 생각해본다면, 조심 또 조심할 필요가 있다.....   

 

 
(* 이제 겨우 '비참한 상태'에서 '존엄한 가난'으로 옮겨가는 중일 뿐이라는 그의 설명에서, 아마도 존엄한 가난은 decent poverty 혹은 poverty with dignity 중 하나의 의미로 쓰였을 것이다. 만일 전자의 경우라면, 이 때 decent 의 의미는 존엄하다 보다는 acceptable or adequate 정도로 해석하는게 맞을 것 같다. 가난하지만 인간의 품위를 지킨다는 뜻의 존엄성을 표현하는 맥락이라기보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이제 그나마 견딜만한 가난으로 이행했다는 뜻이기에....) 

 

지난 3주간 한겨레 21 에 임인택 기자가 연재한 '노동 OTL' 시리즈는 고전적이면서도 한동안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현장'침투'의 기록이다 (그림은 최규석이 그린 표지삽화). 

 

최규석의 삽화 폴라 토인비의 [거세된 희망]  (2004) 을 떠올리게 하는 기획이다.

 

   이 땅에서 비정규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첫 회에서는 '얼마나 비참한가' 혹은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주기에 경도된 것 같아 다소 안타까웠으나 (사실, 그럼 안 되나? ) 연결기사들과 이어지는 시리즈는 훨씬 풍부한 결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제도권 학계에서 이제 이런 프로젝트는 더이상 가능하지 않다. 빈 자리를 채워주니 한편으로 고마운 마음과, 다른 한편의 자괴감이랄까....

 

성수동에서 의사나 전문가들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현장 - 특히 극적 효과가 뛰어난 제화 사업장을 방문하고는 한다.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J 와 나는 사실 좀 고민이다. 아직도 이렇게 비참한 (?) 작업환경이 있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을 각성시키는 것은 좋은데,

어쩌면 우리가 그 상황을 전유 혹은 악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 때문이다.

좀더 비참한, 좀더 불쌍한,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기꺼이 자원활동에 나서도록 만드는.....

 

우리가 그토록 혐오해 마지 않는 사랑의 리퀘스트와 과연 다르기는 한 건지 모르겠다....

 

가만히 돌아보면,

스스로 가난했기에 누구보다 이러한 문제를 잘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분이 노점상 출신이라 없는 사람들을 잘 이해한다고 이야기하는 것만큼이나 황당한 발상이다.  

여전히, 학문으로서 빈곤과 고통의 문제를 이해하고, 그러면서도 연민과 연대의 정신줄을 놓지 않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분야는 다르지만, 앞서 언급한 저자들의 통찰력, 그리고 에너지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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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연휴 첫날...

연휴 첫날,

남의 사무실 나와서 컴퓨터 빌려 일하고 있다. 사업보고서.... 끙......

 

민족의 대명절이 맞기는 하나보다.

서울시내가 어찌나 한가하던지, 3호선-2호선 지하철 내내 앉아서 출근할 수 있었다. 

 

오후에 조카들이랑 영풍문고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그때까지 열심히 작업!!!

번역본 초고도 연휴에 마무리할 생각인디, 저녁에는 조카들 꼬드겨서 같이 공부하자고 해야겠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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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가 필요한 이들...

전화가 한 통 왔는데, 난데없고 황당해서 어이와 전의를 동시에 상실해버렸다...

 

H 형이 최근 힘든 일이 있었단다.

아까 갑자기 전화해서 신세한탄을 늘어놓더니

왜 후배들끼리만 자주 연락해서 만나고 자기한테 생전 연락도 안 하냐고 툴툴댄다.

 

사실 학생 때 후배들을 정말 챙겨주곤 했는데, 더불어 잔소리도 엄청나게 심했더랬다.

선배라기보다는 잔소리많은 큰형, 큰오빠 스타일?

친 오빠한테 가부장적 잔소리라고는 들어본 적이 없이 살았던 나는 그 형과 싸움도 무진장 했다 ㅡ.ㅡ

 

평생 가야 내가 안부 전화 한통 안 하기 때문에 친히 전화하셨단다.

'아, 형 왜 그러세요~' 했더니만 새삼스럽게 왜 '오빠'가 아니라 '형'이라 부르냐고 생떼를...

푸핫 하고 웃음이 터져서 혼났다 ㅎㅎㅎ

이제 와서 갑자기 무슨 호칭 타령???

애 둘 딸린 아자씨가 형이면 어떻고 오빠면 어떨 것이며, 심지어 아자씨라고 부른 들 무슨 상관이람....

 

하여간 난데없는 오빠 vs. 형 논쟁으로 전화기가 뜨끈뜨끈해지도록 통화를 했다.

논쟁이랄 것도 없는 것이, 마구 우겨대니까 뭐 싸우고 말 것도 없음... 그저 웃음만 ㅎㅎㅎ

 

어쨌든 이래저래 들어보니, 형이 심란한 상황인 것 맞는 것 같다.

선배이긴 하지만, 학생 때부터 상처 입는 광경들을 옆에서 다 지켜보았고, 심지어 전공의 1년차 때 의국에서 말도 못할 구박을 받는 모습도 때마침 그 과를 돌던 중이라 리얼로 다 목격했었다. 후배가 옆에 있다고 태연하거나 쎈 척 할 만한 여유조차 없던 시절... .  ㅡ.ㅡ

형이 지금 어떤 상태일지 대략 짐작은 간다.

 

이번 추석에 올라가면 위로의 술자리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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