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5월의 영화들...

괴롭다, 바쁘다 하면서도 그냥저냥 영화들은 봤던 5월... 물론, 놓친 영화들도 있고 여전히 봐야 할 목록에 올려놓은 것들도 있다... #1. J.J. 에이브람스 감독 [스타트렉 더 비기닝] 2009

오랜만에 본 SF 수작!!! 스토리도 참신 발랄에 말이 되고, 특수효과도 훌륭하고... 무엇보다 우리(?)가 SF 영화를 볼 때 가장 싫어하는, 특수효과가 줄거리를 말아먹는 경우, SF라는 이름을 팔아 말도 안 되는 설정을 끌고 가는 경우가 아니었음. 최근 각종 프리퀄들이 창궐(?)하고 있어, 나름 우려가 깊었는디, 아주 깔끔하게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다는 생각.... 아우, 스팍 박사는 어쩜 그리 매력덩어리? ㅎㅎㅎ 그리고 연로하신 그 분은 TV 시리즈에 나왔던 오리지널 그 분... 어쩐지 포스가.... [블레이드 러너] 이후 좀 잘나간다 하는 SF들은 디스토피아를 담고 있는 거대서사물인 경우가 많았는디, 이 영화는 간만에 아주 훈훈... 무엇보다 기억나는 것은, 주먹도끼가 영화보면서 몰래 '벌칸'족의 손인사를 따라하던 장면.... 나는 어둠 속에서 그녀의 따라하는 손짓을 보아버렸네 ㅎㅎㅎ #2. 맥지 감독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 2009

내 이럴 줄 알았지만, 그래도 애틋한 그리움에 보아줬건만 정말.... 어이구..... 영화본 시간보다 길게 욕하느라 정신이 없었음... 불쌍한 크리스쳔 베일... 당신도 낚인겨!!! 그나마 3편이 하도 후져서, 그거보다는 나았다는 것을 위로로 삼아야 할 지경임...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아마 이 영화보고 홧병 나서 몸져 누웠을 것으로 짐작됨... 카일 리스로 등장한 얀톤 옐친은, 스타트렉에서 러시아 사투리 쓰는 귀여운 러시아 출신 조종사로 분했던 인물... SF 계의 신성? #3. 도리스 되리 감독 [사랑한 우에 남겨진 것들] 2008

[파니핑크]의 감독이 만들었다는 소식에 선뜻 보게 된 영화.. 부모와 자식의 관계, 사람과 사람이 맺는 진심어린 다양한 관계의 모습은 어디고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상투적인 표현과 서구사회의 '신비로운' 동양 판타지 (특히 일본, 벚꽃으로 표상되는)가 눈에 다소 거슬리기는 했지만, 영화 전체의 미덕을 가릴만한 것은 아니었다. 관계맺기에 그토록 서툴렀던 '전형적인' 아자씨가, 사랑이 사라진 후에야 진실한 관계의 힘을 깨달아가는 과정은 매우 감동적이었고, 그 관계가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있을 때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들었다. 나를 돌아보고, 또 부모님을, 그 분들의 남은 생을 돌아본 그런 시간이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딱딱한 책들 + 헤이 웨잇

읽고 아무렇게나 책상에 버려둔 책들 좀 치워볼 생각... #1.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함규진 옮김 [유동하는 공포] 웅진씽크빅 2009

전반적 인상은....기대에 많이 못 미치는 책이었음. 어찌나 "인용"이 많은지, 정작 바우만 본인이 한 말을 찾기가 어려울 지경 ㅜ.ㅜ 왜 이양반을 오늘날의 '현자'라 하는지 도대체(!) 모르겠음. 현자? 다른 책들을 더 읽어봐야 하나? 일단 박물학적 지식과 사례들을 쏟아놓는데 이것들을 이해하지 못해서 책이 더 어렵게 느껴지고, 또 글쓰기 스타일이 나랑 잘 안 맞아 또 읽게 될 것 같지 않음... ㅡ.ㅡ 그래도 몇 가지 정리해보자면.... * '공포'란 '불확실성'이며 위협의 정체를 모른다는 것이 진정한 공포. 그래서 압도되어 꼼짝 못하기 마련이라는 지적에 일단 동의. * 보편주의적 이성보다는, "근대적 이성은 독점을 형성하고 권리의 배타성을 확보하는 데 특히 발빠르게 움직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유리한 특권이 있을 때 그 특권에 따라 움직이는 규칙을 정하는 과정에서 가장 만족스럽게 작용했다"고 비판한 부분에서 고개 한번 끄덕! * 그리고 악의 평범성과 진부함에 대한 지적은 이미 여러 군데서 논의된 바 있어서 특별히 새로울 것 없었고, '악이 도처에 숨어 있음을 깨닫는 순간, 신뢰는 무너진다'는 극적인 표현이 그저 눈에 띔. * "공포의 사회적 배분", 인재와 자연재해의 구분 어려움, 관리불가능한 리스크 등에 대한 개념은 이미 울리히 벡이 주구장창 떠들었던 이야기라 역시 새로울 것 없음. * "자연적인 원천에서 분리된 잉여 실존적 공포를 밀어내기 위한 대체목표를 찾는다. 그리고 세세한 예방책을 내세우며 임시 표적을 상대한다. 가령 간접흡연, 식품에 포함된 지방...." 결국 다룰 수 있는 위험에만 집중하게 되고 본원적 공포의 근원에 대해서는 무지하거나 회피하게 된다는 지적에는 물론 동의... * 가장 공감했던 문장이라면 폴라토인비의 글을 인용한 부분 "진실은 빈곤과 탐욕이 정치적 선택의 결과지 경제적 운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WHO CSDH 보고서에서도 분명히 언급한 내용이기도 하다. * "지식인들은 말이 육신이 되도록 하는 자신들의 능력을 한번도 신뢰한 적이 없다. 그들은 다른 누군가를 부추겨 자신들의 구상을 실천에 옮기도록 했다. 행동할 수 있는 힘들 가진 누군가, 일단 시작한 사업을 계속할 수 있는 누군가를 대망했다." 요즘 한국사회를 보면 딱... * 또다른 공감의 문장은, 역시 바우만 본인이 아닌 아도르노와 부르디외 할배의 것! "고통, 공포, 억압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그 사실은 실현할 수 없는 사상을 포기할 수 없게 한다." "사회적 세계를 연구하는데 인생을 바칠 기회를 얻은 사람은, 세계의 미래가 걸려 있는 투쟁 앞에서 무관심하거나 중립적으로 있을 수가 없다." * 그래도, 이 유동하는 공포에 맞서기 위한 바우만의 의견... "다가오는 공포, 우리의 힘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공포에 대한 유일한 치료법, 그 시작은 그것을 바로 보는 것이다. 그 뿌리를 캐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 뿌리를 찾아 들어가 잘라버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책 읽는 내내, 다른 이의 연구를 곱씹어 자신의 것으로 충분히 체화시키기 때문에 굳이 참고문헌 인용을 길게 안 한다는 리영희 교수의 글을 떠올랐다. 이건 뭥미...


#2. 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책세상 2005

하나의 완성된 책이라기보다, 주요 논문과 책의 챕터 모음. 역자의 소개에 의하면 방대한 폴라니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한 입문서라고나 할까... 해미와 같이 읽고나서 했던 이야기는, '생각만큼 신선하지 않다' '사람들이 왜 폴라니에 열광하는지 모르겠다' '이 분, 이 얌전해보이는 외모에 평생 노동자 교육사업에 헌신하고 지지리 고생하며 캐나다에서 뉴욕으로 출퇴근하고... 정말 놀랍다'... 우선 생각만큼 신선하지 않았다는 것이, 당대에 그의 사상이 뛰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 시절 그토록 독창적이었던 그의 문제의식이 이제는 사회저변에 널리 확대되어 우리같은 무지랭이도 충분히 가질 법한 것이 되었기에 나타난 현상이 아닐까 싶다. 좋게 해석하자면 문제의식의 발전이고, 운동의 발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특히 '자기 이익과 지도력'이라는 문제의식과, 마르크스 자신이 '유럽인'으로서 범했던 오류들에 대한 지적... 하지만, '노동, 토지, 화폐'의 상품화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저자의 견해는, 여전히 신선했다. 경제라는 요소가 인간을 움직이는 모든 동기는 아니라는, "인간을 움직이는 어떠한 동기도 그 자체로 경제적인 것은 없다'는 지적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자본주의를 창출하는 '근본적 토대'에 너무 집착하느라 노동도 하지만, 다른 한편 울고/웃고/즐기고/사랑하고/분노하고... 이런 복잡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놓쳐버렸던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경제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말이다... 기계적이고 환원론적인 '경제결정론'에 그동안 얼마나 경도되어 있었나 스스로 돌아보게 되었다. 시장경제의 붕괴가 위태롭게 하는 두 가지의 자유.... "동료들을 착취할 자유, 공동체에 상응하는 봉사를 하지도 않은 채 턱없이 과다한 이익을 취할 자유, 기술 발명이 공공의 혜택을 위해 사용되는 것을 막을 자유, 사적인 이익을 위해 은밀한 공작으로 공공에게 재난이 될 일을 일으키고 그 재난에서 이윤을 취할 자유는 자유시장과 함께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들이 판을 칠 수 있었던 시장경제는 우리에게 아주 소중한 자유를 창출하기도 했다.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단결의 자유, 직업을 선택할 자유 - 우리가 그 자체로 소중이 여기는 이류한 자유의 대부분은, 사악한 자유들을 만들어낸 책임이 있는 그 시장경제의 부산물이기도 한 것이다." 시간 되면, 다시 꼼꼼하게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생각.... 그렇다고 그 두꺼운 [거대한 변형]을 읽을 것 같지는 않음 ㅡ.ㅡ #3. 막스 베버 지음, 전성우 옮김 [직업으로서의 정치] 나남출판 2007

이 분... 역시 대가... 문장도 어찌 이리 감동적인감... 번역과 해설도 전작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처럼 매우매우 훌륭! 때가 때니만큼, 한국사회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덕목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없었음. 정치와 도덕 - "정치란 악마적 힘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이 성직자와 달리 정치인들은 부패해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하지만 '정당한 물리적 강제력 (폭력)'이라는 수단을 소유한 정치권력이 가져야 할 소명과 자질은 분명 성직자와는 달라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 (나는 이보다 '통찰력'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한 것 같은디!!!)을 갖춘 자만이 진정한 정치인이 될 수 있다는 지적에 일백퍼센트 공감.... 그리고 이는 비단, 현재 물리적 폭력을 담지한 '집권 정치인'뿐 아니라 '사회운동'을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필요한 덕목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정치가의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설파한 부분에서는 우리 엠비님을 떠올렸다. 본인의 신념윤리가 절대 옳은데, 그걸 따라주지 않는 이 사탄같은 국민들은 원망하며 날을 지새우는 그 분.... ㅜ.ㅜ 하지만 무릇 정치가라면, 인간이 어리석고 비열할 수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의도와 신념이 얼마나 고결하고 올바른가가 아니라 '(예견 가능한)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지적은 월매나 적절한가! 물론, 이분은 신념윤리마저 아니올시다 이기 때문에 더욱 문제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건 그분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저항'으로서의 운동은 문제제기와 신념윤리에 투철한 반면, '책임윤리'에는 소흘했던 것이 사실 아닌가 싶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 이 글이 그의 마지막 원고가 될지도 모르고 '존경하는 청중 여러분, 10년 후에 이 문제에 대해 우리 다시 한번 이야기합시다'라며 이어간 부분은 슬프기도 하고 오싹하기도 했다. 지금 이순간, 자신이 '신념정치가'라고 혁명에 도취된 사람들이 과연 그 때에 '무엇이' 되어 있을까 의구심을 표하는 부분이 그토록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정치란 열정과 균형감각 둘 다를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뚫는 작업입니다. 만약 지금까지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아마 가능한 것마저도 성취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하게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능력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명'은 비단,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도모하는 자들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닐 것 같다... #4. 제이슨 [헤이, 웨잇...] 새만화책 2002

우울하고 상처난 마음에, 굵은 소금을 화악~ 뿌리면서 오랫동안 후벼파는 만화... hey, wait! 그 후 변해버린 모든 것.... ㅜ.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기나긴 하루

탈진... 음악 들으며 맥주 한 잔... 오히려 지쳐서 잠이 안 온다 ㅜ.ㅜ 서울 간 김에 한번에 해치워버리려고 일정을 몰았더니 죽을 맛이다. 문무(?)를 겸비하기란 쉽지 않다. 겸비하려다가 대개는 둘 다 후져지는 경향.... 자살 문제를 다룬 첫 발표는 완전 아카데믹 버전을 생각했으나 나의 고민 수준을 반영하듯 어리버리... 학생들이 '이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구나'라는 것과 '사회적 힘의 중요성'을 인지하기만 했다면 그나마 성공이랄까....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을 다룬 둘째 발표는 아카데믹 + 학술운동의 절묘한 조합을 의도했으나, 이미 배터리 50% 방전 상태에서 시작했던지라 역시 또 어리버리... 역사성과 맥락에 대한 고민이 더욱 필요... 마지막으로 여의도 당사에서의 서울 건준모 발표는, 총분한 시간을 이야기 나누지못해 아쉬움... 급하게 발표자료 만들기에 급급하여, 당내 정치운동으로서 건강불평등 문제를 의제화시키는 부분에 대한 고민을 충분히 하지 못했던 것을 반성... ㅡ.ㅡ 어제 밤에, 모임이 취소되기를 어찌나 바랬던지... ㅜ.ㅜ 시험전날 교무실 불나기 바라던 고등학생의 심정이랄까....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이런... ㅡ.ㅡ;; 아우... 어쨌든 일단락... 이제는 이렇게 무리한 일정은 그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주간 진보신당] '지못미'는 이제 그만...

어느 덧 또 내 차례가 돌아왔다. ------------------------------------------------------- 여느 토요일 아침처럼 ‘무한도전’ 재방송을 보려고 TV를 틀었다가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슬픔보다는 우선 놀라움이,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깊은 연민이 밀려왔습니다. 비록 정치적으로 그를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죽음이라는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했던 한 ‘인간’의 고통을 감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나타난 폭풍 같은 애도의 물결은 놀라웠습니다. 상갓집에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예의도 지니지 않은 자들을 제외하고는, 생전의 지지자건, 비판자건, 혹은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이들마저도 진심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어쩌면, 좌절당한 우리 스스로의 꿈과 회한이 그의 죽음 속에 녹아있었기에 더 크게, 많이 슬퍼했던 것 아닐까 싶습니다. 약 350년 전, 루소는 자신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타자에 대한 ‘연민’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자취를 감춘 줄 알았던 이 엄청난 ‘연민’의 폭발은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2007년 한 해에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1만 2천 명이 넘습니다. 40분에 한 명씩, 누군가 돌아오지 못할 발걸음을 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죽음을 떠올리고, 또 실제로 결행에 나섭니다. 죽음의 이유는 그 사람 수 만큼이나 다양할 것입니다. 존재론적 회의, 누군가에 대한 복수, 혹은 감당할 수 없는 심리적 고통으로부터의 탈출...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다양한 사연들을 넘어서는, 거대한 사회적 힘이 존재하고, 자살 또한 엄연한 사회적 불평등의 일면이라는 사실입니다. 지난주, 대전 중앙병원에 안치된 박종태 열사의 빈소에 다녀왔습니다. 마침 시내에서 추모 집회가 열리고 있었던 시간이라, 장례식장 건물 입구부터 늘어선 검은 화환들의 행렬과 대조적으로 영안실 안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먼 길을 마다않고 달려가 몇 시간씩 줄을 서며, 진심으로 전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그 날, 박종태 열사의 영안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떠난 이는 말이 없기에, 열사의 삶을 뒤흔들었던 고뇌를 모두 알아내기란 어렵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죽음이 자신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비정한 사회를 향한 최후의 말걸기였다는 점입니다. 30여 년 전 전태일 열사가 썼던 이 최후의 수단을 다시금 반복해야 한다는 오늘날의 현실이 새삼 놀랍고도 슬픕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음’으로 자신의 고통을 ‘증언’하고 우리 목소리를 들어달라고 ‘애원’해야 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죽음으로서 진정성을 증명해보이라고 누군가에게 잔인한 요구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수많은 이들이 전임 대통령의 소박한 꿈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의 꿈은 무엇이었습니까? 돈보다는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은 그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 렇다면, 지금 우리가 지켜줄 수 있는,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는 그런 일들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전직 대통령마저 견디기 어려웠던 삶의 신산함을 온 몸으로 견뎌내고 있는 우리 이웃들의 현재 진행형 고통에 결코 둔감해지지 말자는 것입니다. 굴뚝으로 올라간 쌍용차 노동자들, 어처구니없는 복직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88CC 여성 노동자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뉴스거리’도 못되어 언론에선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그 수많은 장기투쟁 사업장의 노동자들... 이들의 삶을, 고통을 함께 하자는 것입니다. 또 다른 비극, 더 큰 고통 앞에서야 뒤늦게 회한에 젖지 말고, 지금,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보았으면 합니다. 돌아보면, 글쓴이 스스로도 우리 사회의 이러한 고통들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익숙함이란 참으로 놀라운 잔인함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을 가진 우리들, 이제 더 이상 ‘지못미’는 그만 하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연대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 해보면 어떨까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불멸의 언어...

근본을 알 수 있는 몇 가지의 번뇌와, 또 그 근본을 알기 어려운 번뇌로 건기의 사하라 사막마냥 피폐해진 나를 위로해준다며 츄파춥스가 '법구경'을 선물해주었다. 책 앞머리에 쓰인 한 구절에... 잠시 숙연해졌다. -------------------------------- 참회하나이다 언어로 진실을 희롱한 죄, 깊이 참회하나이다. --------------------------------- 입속의 검은 잎들이 넘실대는 이 세상에서 나 스스로의 언어를 돌아본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좌절금지... 희망을 찾아서...

사람과 '가치' 문제에 천착한다는 점에서 보건학이라는 학문분야에 투신하게 된 것을 나름 좋은 선택이라 생각해왔다. 이러한 믿음이 변한 건 아니다. 하지만 요즘처럼 연구자로서의 자괴감이 큰 적은 없는 듯... ㅡ.ㅡ 학문적 질풍노도의 시기라고나 할까..... #. mb 집권 이래 데자뷰 현상의 경험이 일상화되고는 있다지만, 10년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88CC 여성 노동자들의 모습에 참으로 난감했다. 2년 전, 뻐꾸기와 함께 한국 여성노동자 건강권 운동을 논문으로 정리하면서, 우리는 이를 중요한 사례로 다루었다. 투쟁과 연대를 통해 '노동자성'을 인정받고, 노동안전보건의 영역을 확장시킨 하나의 이정표 운운하며... 그런데, 논문의 종이가 바랠 틈도 없이, 다시 처음 그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도대체 뭘 어째야할지 모르겠다. 자괴, 당혹... #. 약 3년전부터 자살 문제를 탐구하는데 상당한(?) 에너지를 쏟아왔다. 그런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욱 오리무중인데다, 절대반지를 떠안은 호빗마냥 점점 더 '직시'하기가 어려워진다. 한 발 떨어져 문제를 해석할 수 있는 emotional detachment는 오히려 약화... 더구나 최근 일어난 일련의 죽음들은, 도대체 '인간의 조건'이라는게 무엇인지, 내가 여태까지 탐구해왔던 것의 성과가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의심하게 만들었다. 인간 고통에 대한 깊은 연민이 나의 동력이라고 스스로를 도닥여도 해결되지 않는 이 무기력이란... #. 좌절할 권리마저도 감정적 사치라는 생각이 드는 아주 기이한 시절에... 고통과 절망이 아닌, 희망과 행복의 조건을 탐구하는 그런 연구를 하고 싶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stress universe 풀세트

스트레스 사회학에서 이야기하는 stress universe 의 스펙트럼 - life events, chronic stress, daily hassles, lifetime trauma 거의(?) 풀셋트 패키지 앞에서 살짝 실소가 ㅎㅎㅎ 올해 초 토정비결 볼 때, 로또맞은거에 비견될만큼 운이 좋다고 했는데, 그 운은 도대체 어데로 간 건지 모르겠다. 음력으로 치면 이제 1/4분기가 지났을 뿐이니 좀더 기다려봐야 하는 거겠지? 아우.... 부동의 평정심 찾으러 어데 다녀와야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즐겁게...

여한 없는 삶이라는 인생의 모토... 최근, 츄파춥스는 나에게 '여한'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 물론, 여한이 있어야 할 영역, 있을수밖에 없는 영역이 있고, 또 없어도 되거나 없어야 할 영역이 존재한다. 무엇을 이루기에는 짧은 생이지만, 아무 것도 이루지 않기에는 긴 것이 인생이다. 일단(!) 하루하루 즐겁게 살기로 했다. 이러나 저러나 불안은 현대인의 삶에 내재한 항구적 속성 아닌가? 불안과 함께 사는 법, 불안정성과 즐겁게 동거하는 법... 이런 것들을 찾아봐야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세상의 사소함...

어디에나 그 정도의 불합리와 어려운 상황은 존재하기 마련... 뭐 그런 사소한 문제 가지고 괴로워해야 하나 싶지만, 세상에 그런 사소함들을 모두 압도하는 진짜 중요한 문제가 과연 얼마나 되나 싶다. 20세기 초, 미국 로웰의 여성 노동자들이 싸운 것은, 노동시간 늘리려고 시계를 뒤로 돌린 아주 유치하고 터무니없는 작태에 분노해서였다. 최근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성들이 돌맞아 죽을 각오로 싸웠던 것은, 부부 간에 잠자리를 거부할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80년대 민주노조 건설이 한창일 무렵,현대 노동자들의 요구 중에는 두발 자유화, 폭언 금지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사소한 것들을 바꾸려고 사람들은 때로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한다. 뭐 저딴거 가지고... 다른 중요한 일도 많은데? 자존감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싸울지, 회피할지 결정하기란 쉽지 않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digit ratio

점심 먹다가 최근 뜨고 있다는 digit ratio 이야기를 들었다. 태아 시기 androgen exposure 수준에 따라 검지와 약지의 발달 정도가 달라지고, 그것은 뇌의 특정 영역 발달과도 관계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개 남자 아이들은 검지에 비해 약지가 상대적으로 길고, 수학, 공간, 운동능력이 뛰어난데 비해 (소위 남성성), 여자 아이들은 검지가 상대적으로 길고 언어적 능력이 뛰어나다는.... 다들 밥먹다 말고 손바닥을 펼쳐 자신의 재능이 무엇인가 애써 찾아보았다. 근데 내 손을 보고 주변 사람들 허걱.... 그냥 척 봐도, 약지가 검지보다 길다. 자로 재 볼 것도 없게 생겼음 ㅜ.ㅜ 여태까지 한번도 신경써서 본 적은 없었는디.. 영국 프리미어 리그 선수들이 약지가 길다는데, 나의 경우는 도대체 뭥미??? 내 속에는 들끓어오르는 남성성이??? 그래도 언어적 재능 있다는 소리는 좀 들어봤는데, 그거와도 안 맞잖아??? 이런 종류의 연구들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걸 보면, 인간 본질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은 끝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생물학적 결정론은 참 쉽게 사람들한테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이미 생후 2개월만 지나도 젠더역할에 대한 학습이 시작된다는 연구결과나, 사회심리적 속성이 한 사회내의 젠더 사이에서보다, 사회들 사이에서 더 크다는 결과 (물론 이 digit ratio 도 사회간 변이가 크다)들은 쉽게 간과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만, 같이 밥먹던 이웃께서 나는 생물학적 특성에 심지어 사회화 과정까지 남성화된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은 대체 어떤 거야? 여장 마초라도 된다는 뜻???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