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남쪽으로...

지난 몇 달 간, 남쪽으로 훌쩍 길을 떠난 것이 몇 차례...

 

잠깐 정리해둔다.

 

#1. 해인사

 

아마도 수학여행 (인지도 확실치 않음 ㅡ.ㅡ) 이후 처음 가봄...

마침 하루 세 차례, 대전에서 해인사 입구까지 오가는 버스가 있음...

이거 놓치면 개고생이라 정신 빠짝 차리고 시간 엄수...

 

기억과 별로 다르지 않았고, 엄청난 규모에 비해 암자들은 조용했고 평화로웠음..

 

대웅전 마당에 들어섰을 때, 마침 스님이 법고 연주를....

 

 

해인사 경내 암자 홍제암의 모습....

사람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는 마당에 형형색색 연등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원당암 마당의 큰스님 말씀과 언덕에서 내려단 풍경...

'공부하다 죽어라'.... 허거덕했음

 

 

 

#2. 선운사와 망해사... 그리고 금산까지...

 

세속적 복락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불가의 가르침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전국 방방곡곡 사찰 경내에 걸린 '이름표 붙은'  오색연등들과 기와불사 모습은 진정 그로테스크하고 이해불가한 광경이다.

 

 

 

언젠가 망해사가 텔레비전 드라마에 배경으로 등장한 적이 있다고 해서,

엄청 걱정하고 갔는데 다행히 그닥 모습이 많이 변하지는 않았더랬다.

나름 더운 날이었는데, 절 마당의 나무 그늘에서 맞는 바람은 번뇌를 날려주는 듯 청량하기 이를데 없었다.

 

 

망해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오랜만에 금강에 들렀다.

맛나게 어죽을 먹고 (식당이 어찌나 장사가 잘 되는지, 갈 때마다 별채가 하나씩 늘어나고 있음 ㅡ.ㅡ), 정말 몇 년째 하나도 변하지 않은 금강의 줄기인 용화강의 잔잔한 모습을 눈에 담아왔다.

 

 

#3. 송광사 - 순천만 - 선암사

 

송광사에 갔던 것도 아마 10년전 쯤...

기억 나는 건, 새벽에 승방에서 자다 일어났을 때 엄청 추웠다는 것과, (고기없이) 버섯으로만 국물을 낸 떡국이 몹시도 밍밍했다는 사실 ㅎㅎㅎ

 

들어가는 길은 고즈넉했고, 사찰은 그보다 훨씬 더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저 길을 보니, 문득 보성 삼나무길이 떠올랐으나... 여정이 짧아서 그쪽까지 가는 것은 포기....

 

 

아름다운 주암호를 지나, 해질 무렵 순천만에 도착했을 때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예전에... 그 한적하던 갈대밭은 생태"공원"으로 변해있었고, 두루미 숫자보다 사람 숫자가 몇 배는 족히 많아보였다.  거대한 생태박물관에 주차장... 아마 조만간 입장료를 받으려는 듯 매표소와 출입문 공사도 완성을 앞두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나의 동행인들 말고)  바닷가에서 갈대밭으로 떨어지던 해를 보던 그 기억은 이제 되살릴 수 없는 현실이 된 듯하여 몹시도 상심했다.

그래도 다행히, 새벽에 다시 한 번 갈대밭을 찾았을 때 조금은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모습이다... 사실 이런 걸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ㅜ.ㅜ) 그래도 잔잔한 빗줄기 속에 흐려져가는 경계는 아름다웠다...

 

 

아직.... 갈대의 전형적인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도 소위 '성수기'가 되면 이 곳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없을만큼 분주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암사에 들렀다.

온통 공사장이었다. 

대웅보전을 다시 짓고, 태국민안 10만등 달기 행사를 벌이고.....

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스님이 직접 탁자 펴놓고 불사 동참을 권고하는 와중에 애욕과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법구경이 경내에 울려퍼지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경내로 올라가는 오솔길은, 이 길을 따라가면 정말 속세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것만 같았는디.... ㅜ.ㅜ

 

 

선암사에서 키웠다는 작설차 (원래 이곳은 차 재배로 유명하다)의 향은 매우 훌륭했다.

찻잔을 내오기 전, 탁자에 있던 들꽃 장식들을 찍어보았다.

 

 

시간을 내서 강진 무위사에 한번 들러야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사조삼부곡

최근 2-3주간, 

임박한 과제들을 미친 듯이 해치우느라 정신줄을 거의 놓은 폐허상태로 지냈다.

쓰나미처럼 압도해오는 그 일들의 물결이란..... ㅡ.ㅡ

 

웬지 이번 주만 어떻게 버텨내면 (!!!) 담주부터 전혀 다른 새 세상이 열릴 것 같은 이 기이한 망상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래도 버릴 수 없는 희망....

 

이 와중에 오며가며, 잠들기 전... [사조삼부곡]의 마지막인 [의천도룡기] 8권을 다 읽었다. 

글씨가 커진 건지, 편집이 달라진 건지, 아님 번역 자체가 바뀐건지, 예전에 [영웅문]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던 고려원 문고판은 각각 6권이었던 것 같은데, 판형이 커졌음에도 각 8권씩이다.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를 순차적으로 읽지 않아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 전혀 문제는 없으나, 역시 '흐름'의 맛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의천도룡기] 마지막 부분에서야 밝혀지는 의천검과 도룡도의 비밀, 도화도 (내 고향도 아닌디 이름만 보고도 웬지 향수가 울컥?), 신조협과 소용녀의 딸, 구음진경, 심지어 구음백골조(!)까지 .... 이런 작은 디테일들이 주는 감흥이 꽤나 쏠쏠했다.

 

#.

세 작품의 남 주인공 곽정 - 신조협 (양과) - 장무기 중 가장 선호하는 이를 뽑으라면 단연 신조협!

장무기의 어린 시절, 임박한 죽음을 잊지 않으며 생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모습에 감흥했으나, 커가면서 웬지 자뻑....  순박하고 뚝심 있기로야 곽정을 따라올자 없으며, 어쨌든 장무기도 어린 나이에 겸양과 통찰력을 겸비한 진정한 고수가 된 것은 틀림없으나, 드라마틱한 인생 반전과 함께 정서적 몰입 면에서는 신조협이 단연 최고! (그 다음은 동사 황약사! 이분 매우 쿨하면서 낭만적이심 ㅎㅎ)

 

#.

삼부곡에 또한 수많은 여성 고수들이 등장하는데, 대표적으로 황용 - 소용녀 - 조민/주지약/아리/아소 등...

이 중 최고라면 단연 황용....  진짜 멋진 언니.... 그리고 소용녀도 차갑고 조용하지만 강력한 카리스마... 이에 비해 [의천도룡기]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행태는 진정 어이상실.... 아미파의 장문인 (주지약), 몽골 왕국의 소군주 (조민 - 민민테무르), 페르시아 명교 총단의 교주 (아소) 라는 엄청난 지위의 여인들이 장무기에게 보이는 모습은 정말 안습..... 제정신인가 싶더라니....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눈감아주려해도 오히려 이전 두 작품에서 보였던 여성 무인들에 비해서도 완전 퇴행....

손속이 잔인하기 그지 없는, 하지만 사랑에 눈먼 그녀들로  인해 남자들이 어찌나 위험에 처하는지.... ㅡ.ㅡ

 

#.

절대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결코 무공을 한 가지만 전문적으로 닦아서는 안 된다는 귀중한 교훈을 다시 한 번 확인... 거기다 외공이나 내공 한 가지만 쌓아도 안 되고 두 가지 모두 고르게 익혀야 하며, 기왕이면 명문정파와 사도외문의 스승들을 골고루 모시고 두루두루 배워야 하고, 정상적으로는 절대고수의 내공을 연성할 시간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계기가 반드시 있어야 함 ㅎㅎ 우연히 비급을 얻는 것은 빠지면 아쉬운, 정해진 코스랄까?

이를테면 곽정이 동사 황약사, 서독 구양봉, 남제 단야왕 일등대사, 북개 홍칠공 같은 초고수는 물론 전진칠자니, 주백통 같은 당대의 고수들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대개 자신의 절기를 한평생 수련했던 대 비해, 이들을 스승삼아 오만가지 무공을 다 배워 복합 응용했기 때문....

이러한 상황은 신조협도 마찬가지인데, 여기에 '신조'의 가르침까지 받았으니 뭐...

장무기도, 무당파의 태극권, 명교의 건곤대나이 심법에, 공동파의 칠상권, 심지어 구양진경까지 익혔으니.....  약관의 나이에 소림사에서 거의 백년을 수련한 도사들보다 실력이 한 수 위인 것은 바로 이런 연원... 따라서,한 우물만 파다가는 절대 업계 최고가 될 수 없다는 뼈아픈 교훈을 주신다고 할 수 있겠다 ㅎㅎ

 

 

#.

아마도 시리즈 비디오물 중에서는 이 셋 중 의천도룡도가 제일 인기 있는 듯 싶다 (본 적은 없지만).  하지만 개인적 취향으로 평가해보자면 1부 > 2부 > 3부의 순서....

그래도, 3부에서 금모사왕 사손이 금강경을 읊조리며 번뇌의 강을 건너는 모습은 나름 감동이었다.

끝이 없는 업보의 인과를 벗어나는 길은 심지어 소설 속에서도 쉽지 않은 법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일상의 신비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실무 혹은 뒷수습일 (소위 잡일)은 하나도 줄어들지 않은 것 같다.

 

계획서 (직접) 쓰고, 보고서 (직접) 쓰고,

회의록도 (직접) 정리하고,

메일 보내고 전화해서 잡다한 일정 (직접) 잡고

남들이 쓰거나 번역한 글들 (직접) 수정하고 편집하고 (교정도 함!),

자료 분석 부탁받으면 (직접) 하고....

심지어 전공의가 못하겠다고 내던진 일들도 수습하고...

 

이러니라, 기획 업무나 논문 쓰기, 전공책읽기는 도대체 뒷전....ㅡ.ㅡ

 

신비롭다 신비로워....

벗어날 수 없는 강력한 머슴의 운명이라니....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이 중단편 모음집에 실린 8편은 각기 열 배 분량의 해석과 논쟁이 가능한 텍스트!!! 

 

 

짧은 독후감 혹은 코멘트를 남긴다는 것이 웬지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은, 기이한 죄책감을 남기는 이 중단편들에 대해 일단(!) 몇 가지 메모를 우선 남겨둔다.

 

1. 바빌론의 탑

바빌론의 우주관에 충실하면서도, 충분히 '있을 법한' (plausible)'  생활의 이야기.

움베르토 에코 [전날의 섬]과 완전 다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당대의 세계관이라는 프레임을 가져와 그에 충실하게 전개했다는 점에서는 일견 유사.

 

2. 이해

높디높은 정신세계. 예측을 몇 단계 뛰어넘는 능력을 지니게 된 자들 사이에 벌어진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추격담이기도 하고, 인간정신의 고도화에 따른 인식과 인지의 변화에 대한 연상극이기도 함

 

3. 영으로 나누면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은 달라. 마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한 신학자가 된 느낌이었어..."

세상의 근간을 이루리라고 믿었던 근본 질서가 통째로 흔들리고, 더구나 자신이 추구해왔던 그것의 바탕이 틀렸음을 스스로 확인해버린 수학자의 이야기. 존재를 뒤흔드는 대사건이지만, 옆사람은 똑같은 방식으로 감정이입할 수 없음.  인식의 문제로 시작했지만 어쩌면 관계의 문제로 끝난달까???

 

4. 네 인생의 이야기

미지의 세계와 새로운 언어를 익히는 법, 세계를 인식하는 새로운 방법에 대한 섬세한 소묘!!!

인과론적 세계관과 목적론적 세계관이라....

미래에 대한 기억과 이야기의 구조는, 어쩌면 공간적 절단면에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바빌론의 탑'과 달리 시간적 뫼비우스 띠의 모습을 가졌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토록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글은 오랜만이여!!!

 

5. 일흔 두 글자

너의 이름을 불러주면 꽃이 된다는게 반드시 시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보여주는 이야기.

짧은 글 안에 무궁무진한 논란거리가 자리해있다.

전성설이라는 당대의 과학관, 우생학과 사회공학,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적 분리 (어쩌면 이 글에서의 '이름'은 오늘날의 '소프트웨어'쯤?)... 어느 하나 시덥잖게 취급할 수 없는 묵직한 주제들

 

6. 인류과학의 진화

이건 좀 슬프다....메타인류가 거둔 과학적 성취를 그저 번역해서 전달할 뿐인 인류 학술잡지의 모습이, 오늘날의 한국 학계 상황에 겹쳐보이는 것은 나의 오바?

 

7. 지옥은 신의 부재

마지막 문장이 정말 인상적이다. "진정한 신앙이란 본디 이런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주인공 닐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ㅎㅎㅎ

 

8.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다큐멘터리

와우.... 이토록 깜찍하고 심오한 소설이라니!!!

여러 명의 작중 화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칼리스의 의무 착용을 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의 종류는 백만가지는 될 법하다!!!  차별, 인식, 온정주의, 자율성, 아름다움의 정의 등등등...

 

이 작품들이 그동안 받은 상의 종류를 늘어놓으면 두 줄이 넘는데,

뭐 그러고도 남음이 있다.

완전 강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알랭 드 보통 [일의 기쁨과 슬픔]

hongsili님의 [안 어울리는 조합의 책들..] 에 관련된 글.

 

그의 책을 꾸준히 내던 이레 출판사에서 신작이 출간되었다.

 

 

친절하게 한국 독자에게 보내는 손글씨 서문으로 설명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은 이런 것이다.

"... 배나 항구가 주목받지 못하는 것은 유조선이나 제지공장, 나아가서 어떤 분야든 노동하는 세계에 깊은 존경심을 표현하면 이상하게 여기는 근거없는 편견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기도 하고 슬픔의 근원이 되기도 하면서 일상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일'에 대한 세상의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 경시에 대해 그건 아니잖아요 라고 말하면서 그 속에 담겨 있는 의미를 찾아보려고 했달까....

 

언제나 그렇듯이 미묘한 순간, 놓치기 쉬운 의미들을 시의적절하게 포착해내고

이리저리 생각의 타래들을 엮어가는 그의 글솜씨는 실망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기대가 컸던만큼, 아쉬움도 적지 않다.

이 아쉬움의 근원은 어쩌면 이 글 자체가 아니라 오늘날 한국사회의 현실인지도 모른다. 

기쁨과 슬픔의 근원이 되는 노동 자체가 사라져가고 있고,

'노동과 일'이라면 비정규직, 고용불안이라는 단어가 자동연상되는 이 상황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철학적 성찰과 문장의 아름다움은 훨씬 덜하지만현장의 생생함과 애환 (그야말로 슬픔과 기쁨)이 절절이 묻어나는 매일노동뉴스의 [현장을 간다]가 '더 좋은' 책처럼 생각된다.

 

전반적으로, 이 책은 사람들이 행하는 구체적인 일과 노동, 그로부터 일어난 기쁨과 슬픔을 다룬다기보다

한단계 추상화된 인간 노동의 결과물, 혹은 노동의 구조나 과정에 대한 성찰이라고 봐야할 듯...

이건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하다. 풍부하고 좀더 깊은 이면을 고민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은 장점이지만, 상황의 구체성과이 결핍되었다는 것은 단점.....  

 

이미 미학적 성취마저 이뤄버린 송전탑, 궤도를 정확하게 찾아들어가는 인공위성, 복잡하기 그지 없는 항공산업과 회계일...  여기에는 기술 자체 (과학), 인간의 이성적 성취에 대한 '존경'(???)이 담겨있는 것 같기도 하다. "... 과학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과학과 함께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옷을 거의 걸치지 않은 와이와이 인디언이 하늘에 나타나는 현상을 바라보는 것과 똑같은 유사 신화적인 방식으로 기계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또 과학기술을 찬미하는 것만도 아니다. ".. 회로판에는 존중심을 느끼고 빙하에는 동정심과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으니 말이다.

 

러스킨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모든 낭비 가운데 당신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낭비는 노동의 낭비다..."  알랭 드 보통은 막 견학을 마친 과자공장 (지나치게 과학적이고 진지했던)에서 선물로 받은 과자봉지를 뜯으며 생각한다..."이 사회는 우리의 진지하고 의미심장한 요구와 관계가 없는 산업, 수단의 진지함과 목적의 하찮음 사이의 괴리를 피하기 어려운 산업, 그 결과 컴퓨터 터미널 앞과 창고 안에서 우리를 의미 상실의 위기로 몰아넣기 십상인 산업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나는 우리 노동의 진부함을 생각하며 희미한 절망감을 느끼다가도, 거기에서 나오는 물질적 풍요를 존중하지않을 수 없었다. 겉으로는 유치한 게임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이 우리의 생존자체를 위한 투쟁과 절대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

 

 

전작 [불안]에서처럼, 보통은 직업상담소에서 강조하는 자기효능감과 능력주의에 대해 상당히 괴로워한다.  "... 나는 시먼스의 회사를 나오면서, 모두가 일과 사랑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너그러운 부르주아적 자신감 안에 은밀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배려 없는 잔혹성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 두가지에서 절대 충족감을 얻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충족감을 얻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뜻일 뿐이다. 예외가 규칙으로 잘못 표현될 때, 우리의 개인적 불행은 삶에 불가피한 측면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저주처럼 우리를 짓누르게 된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운명에서 갈망과 오류를 위해 마련된 자연스러운 자리를 부정하여, 우리가 경솔하게 결혼을 하고 야망을 실현하지 못한 것에 대해 집단적인 위로를 받을 가능성을 부인해버린다. 그 결과 우리는 어떻게 해도 나 자신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 혼자만 박해와 수모를 당한다는 느낌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일 때문에 피로에 지친 사람들을 위한 구체적/현실적 처방도 등장한다.

"이런 식으로 피곤하고 신경이 곤두설 때 유일하게 효과가 있는 해결책은 와인이다. 사무실 문명은 커피와 알콜 덕분에 가능한 가파른 이륙과 착륙이 없으면 존립할 수 없는 것이다."

예리하다 예리해.... 우리는 매일 가파른 이륙과 착륙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구나... 어쩐지...ㅋㅋ

 

알랭 드 보통이 생각하는 일이란 이런 것이다....

"할 일이 있을 때는 죽음을 생각하기가 어렵다. 금기라기보다 그냥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긴다. 일은 그 본성상 그 자신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면서 다른 데로는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일은 우리의 원근감을 파괴해버리는데, 우리는 오히려 바로 그 점 때문에 일에 감사한다."

"우리의 일은 적어도 우리가 거기에 정신을 팔게는 해줄 것이다. 완벽에 대한 희망을 투자할 수있는 완벽한 거품은 제공해주었을 것이다. 우리의 가없는 불안을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성취가 가능한 몇가지 목표로 집중시켜줄 것이다. 우리에게 뭔가를 정복했다는 느낌을 줄 것이다. 품위 있는 피로를 안겨줄 것이다. 식탁에 먹을 것을 올려놓아줄 것이다. 더 큰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게 해 줄 것이다."

 

 

과연 나에게 일이란 무엇일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펌 [오마이뉴스] 신종플루...

근거없는 공포가 횡행하는 가운데,

굳이 한 마디 더 보태고 싶지 않았으나 부탁을 받고 할 수없이 글을 썼다.

 

이 글의 레시피는 다음과 같다.

주 재료: 국내 전염병 역학의 큰 마님과 작은 마님 곁에서 숙성시킨 4년간의 머슴살이

부재로: 작금 상황에 대한 속터짐과 근심걱정 한 사발....

핵심 양념: 원고를 떠넘긴 P 샘에 대한 원망 세 큰술 + 원고마감을 넘긴 죄책감 티스푼 하나

 

 

글 읽기 링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달라도 너무 다른 (!) SF 두 권

읽은지는 꽤 지났는데,

어제 오늘 미친듯이 강의자료, 회의자료, 원고 하나 해치우고, 하얗게 타버린 뇌의 혈색 좀 되찾아볼까 하여 때지난 독후감..

 

하나는 더글라스 아담스의 [The long dark tea-time of the soul]  다른 하나는 올라프 스태플든의 [스타메이커]...  진지함과 재미의 강도에서 양 극단에 위치한 작품들이랄까........... ㅡ.ㅡ

 

#1. Douglas Adams [ The long dark tea-time of the soul]

 

 

한국어로 번역하면 [영혼의 길고 어두운 티타임] 이라고나 할까 ㅎㅎㅎ

제목만 달랑 한 줄 옮기고 나서 'ㅎㅎㅎ'라니 무슨 주책인가? 그냥 더글라스 아담스의 말투만 생각해도 웃음이 나오는 걸 어쩌라구....

 

Holistic Detenctive Agency (전인적 사설탐정 사무소) 를 운영하는 Dirk Gently 의 모험담 제 2탄 되시겠다. 전작 [Dirk Gently's Holistic Detective Agency] 는 최근 한국에서  [더크 젠틀리의 성스러운 탐정 사무소]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었는데 아무래도 용어 holistic 은 성스럽다보다 전인적이라고 옮기는 것이 적절하다. 우주 만물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그 총체성에 기반한 과학 수사 (?)를 모토로 내걸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줄거리를 요약할 필요는 없겠으나, 신들의 제왕 오딘 (북유럽 신화에서 제우스에 해당하는 왕초)과 좀 덜 떨어진 그 아들 '번개의 신' 사이에 벌어진 전대미문의 부자 갈등, 그리고 이 초현실적 부자갈등의 배경이 되고 있는 현대 사회 불멸의 신들의 무용성 (ㅜ.ㅜ),  이 사건에 어쩌다보니 휩쓸리게 된 한 미국 아가씨와 젠틀리 탐정의 '죽도록 고생'이 메인 플롯을 이루고 있다.  (그러고 보니 닐 게이먼의 American Gods 와 살짝 비슷하기도 하네?)

 

아담스의 전작들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해괴한 언어구사와 얼토당토않은 상상력, 기기묘묘한 상황해석 능력에 유쾌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제일 골 때리는 장면 중 하나는 열쇄구멍을 사이에 두고 독수리와 젠틀리가 눈 마주치던 장면... ㅎㅎㅎㅎㅎㅎ 이건 정말 읽어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흠.... 이제 보니 아담스가 냈던 소설을 거의 다 읽은 것 같다.

그의 작품 중 최고로 꼽고 싶은 것은 히치하이커 2부와 3부, [The restaurant  at the end of the universe][Life, the universe, and everything] 들이다.

근데 많이 안타깝다... 좀더 오래 사셨더라면 좋았을 것을.....

 

#2. 올라프 스태픈든 [스타메이커 Star maker]  오멜라스 2009

 

 

국내외에서 평은 엄청나게 (!) 좋으나, 읽으면서 엄청 괴로웠다.

스케일은 우주의 시작과 끝을 다룰만큼 시공간적으로 장대하고, 존재의 의미와 종교에 대한 철학적 성찰의 깊이 또한 대단한 것이었으나....

문제는 너무너무 재미가 없다는 거다 ㅜ.ㅜ

플롯도 없고 구체적인 사건도 없이 우주를 '개괄'하는 사변만 창궐하다보니 책 전체가 '서론'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장이면 본격적 이야기가 전개되려나, 이번 장만 지나면 뭐가 시작되려나... 그렇게 기다리며 마지막 장까지 덮고나니 안습...... .ㅡ.ㅡ

 

도대체 '세계과학소설 사상 10대명작'이라는 타이틀은 누가 갖다 붙인겨???

책 말미에 SF 칼럼니스트가 친절한 해제를 통해 과학소설 (혹은 사변소설) 계에서 이 작품이 가진 의미에 대해 상찬하였으나, 글쎄다.... 소설은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

공부하려고 소설 읽는 것은 아니잖아....

그게 꼭 잔재미일 필요는 없지만 감성적 울림과 공감을 일으키지 못하는 작품을 '의의' 생각하며 애써 받아들여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나의 문학적 식견이 짧아서일수도 있지만, 벌거벗은 임금님 옷맵시 찬양하듯 부화뇌동하고 싶지는 않음...

세상에 진지하고 차분하기로 말하면야 램의 [솔라리스]만한 것이 있을까마는 그 때에 느꼈던 묵직한 '이성적' 감동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듯!!! 

 

이 책이 우주의 처음과 끝,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지만,

앞서 언급한 더글라스 아담스의 책들은 그 모든 것을 더구나 '재미있게' 담아내고 있다.

 

뭐 취향의 문제이기는 한데, 두 책을 함께 놓고 보니 더글라스 아담스가 더욱 그리워(?)지는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가상 현실을 다룬 영화들

매트릭스가 워낙 인기를 얻고 난 지라, 가상 현실과 현실을 넘나드는 것 쯤이야 SF 영화에서 이제 진부한 것이 되어버린 듯 하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트론]을 다시 보면서, 이것이 당시로서는 얼마나 상큼한 발상이자 특수효과였나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봐도 어찌나 포스트 모던한지....

 

 

Steven Lisberger  감독 (1982년)

 

80년대에 한창 유행하던 전자오락기에 대한 로망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드는 ㅎㅎ

오빠와 나의 보물 1호였던 스타워즈 게임기 생각도 났다... 정말 미친 듯히 하고 놀았는디...

'유저'에 대한 충성심으로 몸부림치는 프로그램들의 행태를 다소 받아들이기 어려우나,

보안을 이유로 자유를 제한하고, 권위적 감시체계를 유지하는 master control program 과 시스템 소유자에 대해 저항하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들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기왕에 생각난 거, 가상현실 - 특히 게임과 현실을 넘나드는 영화들 중에서 인상깊게 보았던 몇 편을 정리해본다. David Cronenberg 감독의 1983년 작 Videodrome 도 그 기괴함과 창조성에서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일단 '게임'과 직접 관련성은 낮으니까 제외....  Paul Verhoeven 감독의 1990년 작 Total Recall 도 역시 '게임'은 아니라는 점에서 제외... 이 영화도 참 명작인데.... 물론 필립 K 딕이라는 원작자의 힘이 큰 역할을 했지만서도....  역시 필립 K.딕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A Scanner Darkly (Richard Linklater 감독, 2006년 작)도 이런 류로 분류되지만 명백하게 '게임'이라고 말하기 어려움...

참, 1983년 작  War Games 도 관련은 있는데, 게임인 줄 알고 들어간 소프트웨어가 실제 전쟁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가상현실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음....

 

       

 

이렇게 저렇게 빼고 나서 남는 영화들이란.... 그리고 영화 제목은 다 게임 제목....

 

#1.  Gabriel Salvatore 감독 (1997년) [Nirvana]

 

 

 

 

[지중해]와 [푸에르토 에스콘디도] 처럼 아름다운 (?) 영화를 만든 가브리엘 살바토레 감독이 만들었다는게 좀 쌩뚱맞게 느껴지는 영화.... 평은 그닥 좋지 않았다.

하지만 반복되는 게임 속에서 매일 똑같이 죽고 다시 살아나는게 지겹다며 자기를 영원히 소멸시켜달라고 개발자에게 호소하는 게임속 주인공 (살바토레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후덕한 디에고 아자씨!)의 절절한 모습만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특수효과 자체가 특별하지는 않았었다.

 

#2. David Cronenberg 감독 (1999년) [eXistenZ]

 

 

 

 

가상현실이라기보다, 신체에 직접 게임포트를 연결한 이들이 겪게 되는 기괴한 상황을 그린 영화. 기계와 생체의 하이브리드.... 데이빗 크로넨버그 특유의 스멀스멀... 불쾌한 느낌과 극단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설정들.... 하지만 몰입도은 최고...  

이 감독의 영화들이 하도 기괴한지라, 그나마 초현실적 상황을 다뤘다는 점에서 오히려 가장 받아들이기 쉬웠던 작품이라고나 할까.... ㅡ.ㅡ  83년의 비디오드롬에서 받았던 충격에 비하면 이 영화는 순한 양!

 

#3. 오사이 마모루 감독 (2000년) [Avalon]

 

 

 

 

이 영화도 그닥 평판이 좋지는 않았으나 (심지어 흥행에서도 실패), 화면의 전체적인 톤과 음악(!!!) 때문에 내가 엄청나게 좋아하는 영화....  설령 돌아오지 못한다 해도, 미지의 클래스에 도달하고자 하는 플레이어들의 열망이 절절하게 전달된다. 

아바론 (원래 아더왕의 검이 벼려지고, 또 그가 상처를 회복한다는 그 곳)에서 울려퍼지는 음악...

오사이 마모루는 여성 전사에 대한 어떤 로망이 있나보다...  근데 또 생각해보면 여성 전사는 중국무협에서도 매우 빈번하게 등장하는 주체...  반지의 제왕 같은 서구적 신화 서사에서 여성 전사가 극도로 드물었던 것과는 대조되는 모습...  이건 어찌 해석해야 하는거지???

 

뭐 어쨌든 영화의 특수효과는 엄청나게 발전했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플롯과 아이디어라는 것을 20년도 더 된 영화 트론이 말해주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액션히어로가 필요하다?

미국 의료보험 개혁안을 둘러싼 논쟁(?)이 과열되고 있다.

과연 저것이 '논쟁'이라 칭할 수 있는 것인지는 의심스럽다만....

 

버락 오바마는, 파시스트 겸 사회주의자가 되어버렸고, 

개인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총까지 들고 집회에 나온 백인 중산층은 부당한 국가권력의 희생자를 자처하고 있다.

 

이 마당에서, 또다른 "액션 히어로"가 필요하다는  Democracy Now Amy Goodman 의 칼럼은 참신하면서도 시의적절해보인다.  연기 잘하는 배우 키퍼 서덜랜드가 캐나다 건강보험의 창설자 토미 더글라스의 손자라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http://www.truthdig.com/report/item/20090811_health_care_reform_needs_an_action_hero/

 

남의 나라 상황이지만, 이 사안이 가지는 상징적/실질적 의미가 엄청난지라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서 의료 사유화 의제를 이토록 폭발력 있는 논쟁거리로 만들고 한판 붙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가 필요한 것일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잊혀지지 않을 기억으로!

쌍용차는 정리(?)가 되었지만, 용산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쌍용차의 경우, '타결'이란 이름을 달기는 했지만 

이 일을 가슴에 담아두었던 그 누구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2009년의 이 두 사건은,

연민이라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한편으로 의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인간의 잔인함에 대해 몸서리쳐지는 공포를 실감할 수 있는 체험장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고통과 상처의 기억이 바람 속에 그저 흩어져버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