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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정책포럼/비판과 대안을 위한 건강정책학회 웹진의 '건강정책칼럼' 한 꼭지를 맡게 되었다.
사실, 독자층이 누구인지 파악이 안 돼 좀 고심하다가, 그냥 보건의료/사회정책 분야 언저리에서 공부, 연구, 일하는 사람들을 두루두루 생각해서 썼다...
정치적 스탠스도 짐작 불가한지라... 역시 두루두루..... ㅡ.ㅡ
그래서, 근자에 쓴 글 중 가장 점잖다! (심지어 본문에 영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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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행복의 지도]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미국 뉴욕타임즈와 공영 방송 NPR 기자로 일하며 세상의 온갖 불행한 사건·사고 를 알리던 ‘에릭 와이너(Eric Weiner)’가 행복의 정체를 찾아 떠난 유쾌한 여행담입니다. 저자는 국왕이 직접 국민의 행복 지수를 챙긴다는 부탄, 실패를 찬양하는 사회 아이슬란드는 물론, 더 이상 불행하기란 불가능해 보이는 몰도바 등 세계 곳곳을 다니며 행복의 근원을 탐색해 봅니다. 여행이 중반 이후에 접어들면서 필자는 ‘행복도 선택’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쉬운 선택도 아니고 항상 바람직한 선택도 아니지만, 어쨌든 선택’이라는!
책을 읽으며, 한국은 과연 얼마나 행복한 사회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 OECD 최고를 자랑하는 자살률만으로도 우리는 한국 사회의 행복 수준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유달리 존재론적 고뇌의 결행으로써 자살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면 말입니 다.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도 간접적 척도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이라면 굳이 다음 세대의 탄생을 피 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일찍이 경제학자 이스털린(Easterlin)이 확인했듯, 부나 소득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것들이 증대한다고 행복도 따라서 늘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경제 성장이 바로 행복과 직결된다면, 우리는 한국 전쟁 이래 거의 백 배 이상 더 행복해졌어야 합니다. 한국은 국민 소득에서 이미 세계의 선두 그룹에 서 있지만, 행복 척도에서는 항상 뒷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행복 연구자’들은 행복의 근원을 찾고자 매달렸습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사회적 신뢰와 관용입니다.
전 세계 사회과학자 네트워크가 80여 개 사회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사회적 가치와 문화에 대한 의견을 주기적으로 조사하는 ‘세계가치 조사(World Values Survey)’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수백 개의 문항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사회학자 잉글하트 (Inglehart)는 요인분석을 통해 ‘well-being vs. crude survival’이라는 개념을 도출한 바 있습니 다. 이 요인에는 다음과 같은 변수들이 적재됩니다. 얼마나 행복한가, 삶에 얼마나 만족하나,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 나, 이웃에 범죄자/외국인(이주 노동자)/동성애자/에이즈 감염인 등이 사는 것을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나, 일자리가 부족할 때 여 성보다는 남성, 이주 노동자보다는 내국 노동자들에게 우선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데 얼마나 동의하는가…. 쉽게 이야기하자면 ‘내가 우선 힘들어 죽겠으니 다른 사람이 어찌 되건 말건 우선 나부터 잘 살고 보자고 생각하는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 다. OECD 국가들의 점수를 살펴보면, 한국은 헝가리와 슬로바키아를 제외하고 가장 높습니다. 심지어 나머지 다른 국가들과의 점수 차이도 상당합니다. 즉 한국은 ‘well-being’보다 ‘survival’에 지나치게 경도된 사회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런 통계 결과가 없어도 우리는 한국 사회가 얼마나 살벌하고 타인의 삶에 무심한지 이미 직관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이를 특별한 1%로 키우라는 분유 광고, 어떻게 지냈냐는 친구의 인사에 말없이 대형 승용차를 내보이는 TV 광고는 상징적인 일면입니다. 또한 어린이들의 무상 급식을 반대해서라도 정적을 무력화시키겠다는 무모한 열정, 부동산 가치를 유지하기 위한 아파트 소유자들 의 끈끈한 짬짜미 연대, 한 달 2천원을 아끼겠다고 최저 임금도 못 받는 고령의 아파트 경비원을 해고하는 일상의 알뜰함도 우리에게 아주 익숙합니다. 6개월이 넘도록 냉동고에 가족의 시신을 방치해야만 하는 용산 철거민의 외침은 도무지 메아리가 없고, 평택의 노동자들은 물과 음식, 의약품마저 끊긴 상태에서 자국의 경찰과 힘겨운 공성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 사회입니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평온하게 일상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그 외견상의 평온은 OECD 최고 자살률과 최저 출산율, 최저의 행복 수준으로 속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극심해지는 불평등과 민주주의의 후퇴 속에서 나 홀로 행복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경쟁과 불안, 유무형의 폭력이 행복과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이제 고용 불안은 대다수 노동자(소위 직장인)들이 직면한 보편적인 문제가 되었고 부동산 군비 경쟁은 모두를 아파트와 대출의 노예로 만들었으며 적자생존의 사교육 생태계에서 누구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무엇을 희생해서라도―생태계를 훼손하고, 어린이들의 꿈을 짓밟고, 노동자들의 삶을 희생하고, 가난한 이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고 ― 잘 살아보자는 우리 사회의 선택이 이러한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합니다. 나부터, 우리 가족부터, 우리 아이부터 잘 살고 보자는 소박함에서 비롯된 선택들이 결국 우리 모두를, 그리고 나와 우리 가족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과연 ‘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제, 다른 선택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사회적 신뢰와 관용이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도록, 그 속에서 함께 행복할 수 있도록, 서로에 대한 연민과 책임감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결국 오늘날 한국 사회가 이토록 불행한 것은 시류에 편승한 우리의 소극적 무책임, 부당함과 불의에 저항하지 않은 우리의 적극적 무책임 탓 아닐까요? 행복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시민적 연대’ 속에서 함께 행복할 수 있는 한국 사회를 그려봅니다.
사놓은지는 꽤 된거 같은데 이제서야 읽는다.
어쨌든 책은 사놓으면 읽는다 ㅎㅎ
하승우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 그린비 2006
#1.
'아나키즘의 과학적 토대를 마련한 고전'이라는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 해설서 혹은 입문서라 할 수 있다.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 과 비슷한 류(?)라고 볼 수도 있을텐데, 강유원의 책이 공산당선언 본문의 해석에 주로 중점을 두고 있다면, 이 책은 아나키즘의 진화, 그리고 [상호부조론]의 맥락을 설명하는데 좀더 집중하고 있으며 '그 이후'의 영향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따라서, [상호부조론]에 대한 주해서라기보다, 아나키즘 사상의 핵과 역사 일반을 설명하는 아나키즘 입문서라고 보는게 더 적당할 듯 싶다.
#2. 어원
아나키즘의 어원이 된 그리스어 anarchos 는 '지도자가 없는', '선장이 없는 배의 선원들'을 뜻한다고 한다. 이건 무질서라기보다, 누구도 선장이 될 수 있음을 나타내는 생명력 넘치는 혼돈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아나키즘에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테러리즘, 혹은 아시아권에서 통용되는 한자어 '무정부주의'는 상당한 악의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한국과 중극에서는 '무정부주의'가 갖는 부정적 성격 (더구나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저항속에서 독립'국가'를 세우고자 열망이 높았던 역사적 배경을 생각해본다면!)을 바꾸기 위해 '무강권주의'라고 쓰려 했지만, 대세를 뒤집지는 못했다고.... ㅡ.ㅡ 무강권주의.... 좋은데.....
#3. 좌파 내의 갈등
아나키스트들과 마르크스주의 (혹은 마-레 주의)의 충돌은 투쟁방법을 둘러싼 '기술적' 차이라기보다, 어떤 혁명을 원하는가 하는 세계관의 차이라 할 수 있었다. PT 독재와 코뮨주의는 화해하기 어려웠고, 이를테면 파리코뮌의 실패(?)를 둘러싼 해석도 달랐다. 갈등은 사상투쟁에서 끝나지 않았고, 한쪽 (아나키)에 엄청난 실질적 손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스페인내전에서 한편으로는 프랑코 독재와 다른 한편으로는 모스크바의 패권주의적 스탈린주의자들과 싸워야했던 아나키들의 모습은 조지오웰의 [까딸로니아 찬가]에 잘 그려져 있다.
다가올 사회가 민주적이어야 할 뿐 아니라, 그런 사회로 가능 방법도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혁명을 일으키는 방법이 혁명 이후에 세워질 사회의 성격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크로포트킨의 지적에는 완전 동의...
사실, PT 독재 혹은 코뮨주의의 선택을 결정짓는 것은, 민중의 역량에 대한 신뢰수준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결정이 쉽지는 않다. PT 독재를 주창하는 이들이라고 해서 민중 스스로의 통치라는 원칙 자체를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나...
#4. 상호부조의 본성과 아나키 윤리.....
사물은 대개 여러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다윈의 진화론은 한편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깨어나게 만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적자생존'의 설명이론으로 현존의 계급갈등을 합리화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는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론에도 해당한다.
그동안 나는 생각해왔었다. 적자생존이 자연의 논리이고, 인간해방이라는 것은 이 자연의 논리를 거스르는 것이라고.... 적자생존이라는 짐승의 질서를 거부하는 것이 인간해방이라 생각했기에 목가적 생태주의 (자연으로 돌아가자!!!)에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크로포트킨의 논리에 의하면 적자생존만이 자연계 질서는 아니다. 개체 상으로는 그럴지 모르지만 집단수준에서 상호부조하는 경우 생존의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며, 인간사회에서도 그러하다.
서로 돕고 연대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본성 중 하나.....
#5.국가의 역할
크로포트킨은 지적한다. 근대 국가가 발달해가면서 시민들이 서로에게 해야 할 의무를 국가가 대신하게 되었다고....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비판적이다. 점차로 상호부조보다는 일방적 '시혜'를 강조하고,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의 비동등성을 가정하는..... (이러한 비판은 불교적 세계관과 상당히 유사함!!!) 우리가 현실속에서 복지 '국가', 민주적 '정부'의 역할을 강조할 때 반드시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민중적 참여와 상호연대없는 정부(?)의 일방적 서비스 제공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 않나...
#6. 아나키...
기독교에도 분파가 여러개 있고, 마르크스주의에도 그러하듯, 아나키즘에도 여러 분파가 존재하며, 크로포트킨의 아나코-코뮨주의는 그 중 하나....
하워드 진 할배가 60-70년대를 거치면서 자신이 아나키즘에 경도되었다 했고, 그래서 엠마 골드만의 생을 다룬 [Emma]라는 희곡을 집필하기도 했다. [Marx in Soho]에서 바쿠닌을 그렇게 친근하게 그려낸 것도 '사심'이 있기 때문일터 ㅎㅎ 나도 미국에 있는 동안 아나키즘에 관심이 생겨 Alexander Berkman 의 책이랑 Emma Goldman 의 자서전 등을 사두기는 했는데 아직 손을 대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다시금 관심 폭주.....
우선 크로포트킨의 책을 읽어봐야 할까???
요즘, 부쩍...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 후딱 읽기 - 하영식 [남미인권기행] 레디앙 2009
한겨레 21에 연재했던 기사를 거의 하나도 안 고치고 묶어서 낸 것 같다.
실망.... ㅡ.ㅡ
그리고 연재되었을 당시도 생각했던 건데, 성찰의 깊이나 글쓰기가 2% 부족한 듯....
딱히 뭐라 지적하기는 어려운데, 남미 관련 글을 많이 쓰는 이들 중 박정훈 씨의 글에 비해서는 내공이 부족한 듯 싶고, 김영길 씨에 비해서는 생동감이 좀 떨어진다. 분쟁 전문 기자인 정문태씨의 글에 비해서도 결정적 한 방이 부족해보임... ㅜ.ㅜ (근데 구체적으로 지적하기는 힘드네.. 이거 인신공격인가???)
동어 반복이나 어색한 문장들도 눈에 띄는데, 이건 전적으로 편집/출판사 잘못이라 생각한다. (레디앙의 전작 [88만원 세대]에서도 비문이 와장창....)
절절한 현실과 글쓴이의 수고로움에 비해 특징들이 잘 드러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고나 할까.....
어제, 실로 오랫만에 씨네큐브에서 혼자 영화를 봤다.
아네스 자우이 감독의 레인 (Let it rain)...
전작 [타인의 취향] 이나 [룩앳미]에서 보여주었던 감독 특유의 썰렁하면서도 세심하고 통찰력 있는 유머는 사그라들지 않아 있었다.
프랑스의 우디알렌이니 어쩌니 하는 칭찬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그녀의 영화가 '나의 취향''인 것만은 분명하다.
#1.
가족, 일, 연애.. 모든 것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 등장인물들은 서로에게 이야기한다.
그래도 너는 나보다 사정이 좀 낫잖아.... (그러니까 나를 이해하고 배려해줘!)
직업정치인을 꿈꾸는 인텔리페미니스트, 재능은 있지만 그 재능을 펼칠 기회가 좀처럼 제한된 알제리 출신 이주 청년, 능력이 있는 것도 같으나 하는 일마다 엉망이 되어버리는 이혼남 다큐 감독, 무능한 남편과 드센 언니 사이에서 항상 주눅들어 있는 전업주부 여동생.... 이들은 각자 조금씩 사회적으로 결핍되어 있고, 스스로를 피해자, 희생자로 여기고 있다. 성별에서, 인종에서, 사회적 지위에서... 그리고 그건 모두 사실이기도 하다. 권력 관계는 복잡하다.
그러나 정작 이 모든 사람들을 끌어안고 가는 것은, 이 집의 가정부 할머니.... (ㅡ.ㅡ)
이주 노동자 인데다, 헛간에서 생활하고, 주인집의 생활고 때문에 월급이 몇 달째 밀려 있으며, 폭력 남편은 아직도 협박을 멈추지 않고 있다. 불행의 스토리라면야 팔만대장경을 쓰고도 남을 분이다........
세상에 자신의 고통이 가장 커 보이는게 인지상정이라지만,
연민과 염치를 겸비하면, 좀더 성숙한 인간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2.
정치 진출을 꿈꾸는 페미니스트는, 사람들의 정치에 대한 환멸과 성토 (마치 지금의 사회문제가 그녀 탓이기라도 한 것처럼)에 둘러싸여 갈등한다. 열심히 일하고 결국 돌아오는 것은 이런 것이라면 과연 정치를 할 이유가 있는 것일까? 대사가 정확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럴 바에야 그냥 까페에서 정치 이야기나 하며 살아가는 도시특권층으로 남아버릴까?'라고 내뱉어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다...
작금의 정치란 고귀한 이상을 꿈꾸는 존재들이 발을 담그기에 너무나 더러운 진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더러운 것이 우리 삶의 너무나 큰 부분을 좌우하기 때문에 술자리 안주거리로만 놔둘수는 없는게 현실이기도 하다.
#3.
영화는 결국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모두들, 깨달음의 순간(?)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비는 갈등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사람들을 치유하고 화해시키는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지금 내리는 비도,
너덜너덜해지도록 지친 수많은 이들의 가슴을 치유하는 그런 비가 되면 좋으련만....
소위 '성명서' 활동이 바람직하다고 생각치는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하는 일도 없어 이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들을 했다.
한 마디라도 보태야 하지 않을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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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쌍용차 사태'가 벌어진 이래, 벌써 네 명이 세상을 떠났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 혹은 노동자의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이렇듯 목숨까지 걸어야하는지 그저 가슴이 먹먹해질 뿐이다.
이제 와서 새삼스레 파업 투쟁의 정당성이니, 먹튀 자본의 부도덕성이니 따지고 싶지 않다. 강 건너 불구경을 지나쳐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고 있는 정부의 무책임함도 따지고 싶지 않다.
다만, 우리는 인간에 대한 예의, 그것도 최소한의 예의를 요구하고자 한다.
장사에도 상도덕이 있다. 야간에 빚 독촉을 하고 채무자의 가족을 협박하는 것은 엄연한 불법이다. 심지어 전쟁터에도 지켜져야 할 룰은 있다. 적군이라도 환자들에게는 의료서비스가 제공되어야 하며, 의료물자의 수송은 보호받아야 한다.
▲ 지난 20일부터 쌍용차 공장 안에 식수가 끊겼다. 22일부터는 소화용수마저 끊겼다. ⓒ프레시안 |
▲ 쌍용차 공장 위를 날아다니는 헬기. 경찰은 헬기를 동원해 최루액 봉지를 쌍용차 공장에 투하했다. 노동자들의 건강을 염려한 의사들이 공장에 진입하려 했으나, 경찰은 이를 막았다. 노동자들을 진료하던 의사들이 연행되기도 했다. ⓒ프레시안 |
▲ 경찰은 파업 조합원을 향해 전기총 테이저건을 발사해 한 사람은 얼굴 왼쪽 뺨에, 또 한 사람은 허벅지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테이저건은 총알 대신 전기선으로 이어진 탐침을 발사해 순간적으로 약 5만 볼트(V)의 고압전류를 사람의 몸에 흘려보내는 무기다. ⓒ<노동과 세계> 이명익 기자 |
▲ 용산참사 당시에도 사용됐던 컨테이너 박스가 쌍용차 공장 앞에 배치됐다. ⓒ프레시안 |
▲ 쌍용차 공장 옥상 위로 최루액이 떨어지고 있다. ⓒ프레시안 |
Edward W. Said [Representations of the Intellectual: The 1993 Reith Lectures ] Vintage 1994
이 책 사실, 몇 년 전에 번역서로 읽다가 황당하고 난해한 번역에 식겁해서 집어던진 기억이 있다.
알라딘 리뷰로 찾아보니 비슷한 불만들이 속출하고 있는 걸로 보아 나만의 생각은 아닌 듯 싶다.
하지만 훌륭하신 리뷰어들이 원래 사이드의 글 자체는 난해하지 않다고 (그래서 번역서보다 이해하기 훨씬 쉽다) 평한 것과 달리, 사이드의 글 자체도 쉽지는 않다. 문장이 길기도 하고, 추상적 단어들이 많은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언급한 사례들 자체가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꼭 다시 읽어보리라 생각하고 있던 차에, 들고 다니던 책을 고르던 중 적절한 두께로 인해 손에 걸려들었다 ㅎㅎ
1. Representations of the Intellectual
Benda의 초(!) 엘리트주의 혹은 선지자적 관점의 지식인론 (소위 "My kingdom is not of this world")과 Gramsci 의 유기적 지식인론을 비교하며 지식인의 '소명 (vocation) 강조!!!
"지식인"이니, '소명'이니 하는 용어들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지만, '말할 기회'를 가진자로서의 역할, 그리고 그런 말을 필요로 하는 현실이 여전하다는 지적을 어찌 부정할 수 있을까!
"There is no such things as a private intellectual, since the moments you set down words and then publish them you have entered the public world... My argument is that intellectuals are individuals with a vocation for the art of representing...."
"This is till true, I believe, despite the often repeated charge that 'grand narratives of emancipation and enlightment' as the contemporary French philosopher Lyotards calls such heroic ambitions associated with the previous 'modern' age, are pronounced as no longer having any currency in the era of postmodernism....... For in fact (!!!) governments still manifestly oppress people, grave miscarriages of justice still occur, the co-optation and inclusion of intellectuals by power can still effectively quieten their voices, and the deviation of intellectuals from their vocation is still very often the case...."
"Knowing how to use language well and knowing when to intervene in language are two essential features of intellectual activity"
"Yet it's not that simple a role, and therefore cannot be easily dismissed as just so much romantic idealism. At bottom, the intellectual, in my sense of the word, is neither a pacifier nor a consensus builder, but someone whose whole being is staked on a critical sense, a sense of being unwilling to accept easy formulas or ready-made cliches, or the smooth, ever-so-accomodating confirmation of what the powerful or conventional have to say, and what they do....This is not always a matter of being a critic of government policy, but rather of thinking of the intellectual vocation as maintaining a state of constant alertness, of a perpetual willingness not to let half-truths or recieved ideas steer one along...."
2. Holding Nationa and Traditions at bay
디아스포라 지식인이라고 해서 모두 이런 류의 성찰적 자의식을 갖는 건 아니다. 내가 뭐 누구를 품평할만한 내공을 쌓은 것도 아니고, 더구나 사이드 할배한테 이런말할 처지는 더욱더 아니지만.. ㅎㅎ
어쨌든, 한국 상황에 대해 해외에 직접 글을 쓰거나 소개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사실은 '일반화', '경험의 공유'를 강조한 사이드 할배나 레빈스 할배들의 영향 덕이라 할 수 있다.
"To this terribly important task of representing the collective suffering of your own people, testifying to its travails, reasserting its enduring presence, reinforcing its memory, there must be added something else, which only an intellectual, I believe, has the obligation to fulfull..... For the intellectual the task, i believe, is explicitly to universalize the crisis, to give greater human scope to what a particular race or nation suffered, to associate that experience with the suffering of others."
3. Intellectual Exile; Expatriates and Marginals
할배도 지적했다시피 국외자, 추방자, 혹은 디아스포라 지식인이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결정적으로 '성찰'이 필요하다. 어쩌면 단순히 가방끈 긴 자가 아니라, 성찰 가능한 자를 우리는 지식인으로 재정의해야 할지 모르겠다. 음.. 사실 intellectual 을 지식인으로 번역하는게 맞나 모르겠네? 지성인?
"Because the exile sees things both interms of what has been left behind and what is actual here and now, there is a double perspective that never sees things in isolate....
A second advantage to what in efect is the exile standpoint for an intellectual is that you tend to see things not simply as they are, but as they have come to e that way. Look at situation as contingent, nor as inevitable, look at them as the result of a series of historical choices made by men and women, as facts of society made by human beings and not as natural or god-given, therefore unchangeable, permanent, irreversible."
"The exilic intellectual does not respond to the logic of the conventional but to the audacity of daring, and to representing change, to moving on, not standing still."
4. Professionals and Amateurs
가장 흥미롭게 읽은 장이다. 예전에 읽었던 기억도 많이 나고...
정치적 억압이나 물리적 폭력만이 지식인을 순치시키는 것은 아니다.
지식인 사회 소위 '전문주의(professionalism)'의 압력... 첫째, 전문화 (막스 베버가 그리도 강조하던!!!), 둘째, 전문성과 인증된 자격에 대한 숭배 (촘스키 같은 분은 역사학 학위가 없어서 주류 학계에서 비난당한다!), 셋째, 권력 혹은 직접 고용한 이를 향한 불가피한 편향...
이 부분은 절대 동감하면서도 여전히 곤혹스러운 부분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머뭇거리게 만드는....
이러한 상황에서 할배는 지식인의 독립성을 유지하는 방안으로 '아마추어리즘'을 이야기한다.
"These I shall collect under the name of amateurism, literally, an activity that is fueled by care and affection rather than by profit and selfish, narrow specialization"
"Every intellect5ual has an audience and a constituency. The issue is whether that audience is there to be satisfied, and hence a client to be kept happy, or whether it is there to be challenged, and hence stirred into outright opposition or mobilized into greater democratic participation in the society..."
5. Speaking Truth to Power
아마추어리즘을 선택한다는 것은, 공공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위험과 불확실한 결과를 수용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One of the shabbiest of all intellectual gambits is to pontificate about abuses in someone else's society and to excuse exactly the same practicies in one own."
"What we must be able to say instead is that intellectuals are not professionals denatured by their fawning service to an extremely flawed power, but - to repeat - are intellectuals with an alternative and more principled stand that enables them in effect to speak the truth to power."
"Nothing in my view is more reprehensible than those habits of mind in the intellectual that induce avoidance, that characteristic turning awya from a difficult and principled position which you know to be the right one, but which you decide not to take. You do not want to appear too political; you are afraid of seeming controversial; you need the approval of a boss or an authority figure; you want to keep a reputation for being balanced, objective, moderate..."
"Yes, the intellectual's voice is lonely, but it has resonance only because it associates itself freely with the reality of a movement, the aspiration of a people, the common pursuit of a shared ideal."
6. Gods That Always Fail
변절(?)한 지식인들을 다룬 동명의 책을 비판하며 소위 지식인의 전향과 변절을 이야기한다.
정치적 정황에 따라 사상적 널뛰기를 한 아랍 출신 지식인 친구(?) 사례를 이야기하며, 하지만 그의 진정성을 의심한 적이 없었노라는 술회는 참 슬프다. 전향하고 변절하는 이들도 매 순간 진심일 것이었을 거라고 나도 생각한다...
그러나 사이드 할배가, 스스로 어느 분파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지식인이 어떠한 정치적 절대명제 (그는 political god이라고 표현) 편에도 속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이야기한 부분은 고심해볼 만하다. 물론, 이것이 더러운 현실에 발을 담그지 말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신앙과 종교나 다름없는) 도그마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으로 받아들이면 될 듯 싶다.. 도그마에 빠지는 순간, 또다른 도그마로 빠지고, 이전의 도그마를 누구보다 격렬하게 비난하고 배척하는 현상은 낯익지 않은가....
"The morality an principles of an intellectual should not constitute a sort of sealed gearbox that drives thought and action in one direction and is powered by an engine with only one fuel source. The intellectual has to walk around, has to have the space in which to stand and talk back authority, since unquestioning subservience to authority in today's world is one of the greatest threats to an active, and moral, intellectual life."
"The hardest aspect of being an intellectual is to represent what you profess through your work and interventions, without hardening into an institution or a kind of automaton acting at the behest of a system or method.... But the only way of ever achieving it is to keep reminding yourself that as an intellectual you are the one who can choose between actively representing the truth to the best of your ability and passively allowing a patron or an authority to direct you. For the secular intellectual, those gods always fail."
* 강연을 직접 들었으면 무척 재미없었을 것 같기는 하다 ㅎㅎ
그리고, 여전히.... 연로하신 나이에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 초소를 향해 직접 짱돌을 던졌을 그 모습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 제러미 리프킨 지음. 이영호 옮김 [노동의 종말] 민음사 2005년 (개정판)
아마도 이 책이 인기를 누리면서 이후 리프킨의 책은 원제와 무관하게 각종 종말 ("육식의 종말" - beyond beef, "소유의 종말" - the age of access)을 이름표로 달게 된 것 같다. 이건 홉스봄의 제국/혁명/극단의 시대 3부작이 인기를 끌며 자서전격인 'interesting times'마저 [미완의 시대]라는 제목을 달고 출간된 것과 마찬가지 현상일게다. 전작의 명성에 묻어가는 출판계 관행..... ㅡ.ㅡ
눈부신 생산력의 향상 속에서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노동의 양이 줄어들면서 발생할 수 있는 현상에 대해 앙드레 고르 보다는 훨씬 비관적인 진단을 하고 있다. 앙드레 고르가 지긋지긋한 노동의 굴레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삶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강조했다면, 리프킨은 그 높아진 생산력을 감당할 수 있는 구매력의 쇠퇴로부터 비롯되는 딜레마와 잉여노동 (아니, 잉여인간)의 문제를 강조하고 있다.
예상보다 책이 두꺼워서 깜딱 놀랐다. 생산, 노동의 문제만 다룬 줄 알았는데, 문화적/사회적 함의와 역사적 고찰까지 상당히 광범위한 내용을 '망라'하고 있었다. 논문이 아닌 책의 장점이다.
초판이 처음 출판된 것이 1996년이라니 벌써 10년도 훨씬 넘었다. 아마 97년쯤, 포레스테의 [경제적 공포]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을 처음 접했고, 당시 꽤나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나서 오랜동안 나몰라라 하다가 최근 노동/고용과 관련된 건강문제를 고민하며 다시 관심을....
책은 재미있게 술술 읽힌다. 신기한 내용들도 무진장 많다 (특히 농업 부문의 자동화, 기계화!)
그런데 전체 본문을 다 읽고 나면, '도대체 우짜면 좋다는 말인가' 절로 탄식이 나온다.
그래서 저자는 지난 10년간 고민을 발전시켜, 40여쪽에 이르는 개정판 서문을 추가했다.
더더욱 암울해진 현실과 (미국의 경기하락을 지켜보면서!), 저자가 생각하는 대안들을 기술하고 있다.
- 수소 시대의 새로운 일자리 창출 (소위 녹색 에너지, 환경 관련 일자리)
- 노동 시간의 단축과 일자리 공유
- 제 3섹터에서의 일자리, 사회적 자산의 창출
- 유사 통화 (이를테면 대안화폐)의 활용
이는 본문 제 5부에서 제시했던 소위 시장을 넘어선 새로운 사회계약과 사회적 경제 논의의 확장이라 할 수 있다.
논거도 합리적이고, 상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일만한데...
이러한 변화를 추동할 '주체'와 '정치성'의 문제가 분명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를테면, 단적으로 이런 거다.
마지막 단락.....
"우리는 지금 세계 시장과 생산 자동화라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거의 노동자 없는 경제로 향한 길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다. 그 길이 안전한 천국으로 인도할 것인지 또는 무서운 지옥으로 인도할 것인지의 여부는 문명화가 제 3차 산업혁명의 바퀴를 따라갈 후기 시장 시대를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달려 있다. 노동의 종말은 문명화에 사형선고를 내릴 수도 있다. 동시에 노동의 종말은 새로운 사회 변혁과 인간 정신의 재탄생의 신호일 수도 있다. 미래는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도대체 "우리"란 누구란 말인가? 이 책을 읽은 독자들??? 이 사람들이 모두 같은 이해관계???
대안들이 대단히 기술적(!)이고, 건조하게 나열되었다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미국적!!!),
노동이 소멸해가고 있다는 '슬프지만 진실'을 낱낱이 까발림으로써 성장이데올로기, 생산력 중심주의의 환상을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책에 나온 용어 이야기 중 기록해두려다 까먹었던 것!
consume - 최초의 소비라는 단어는 소모하다, 박탈하다는 뜻을 의미했다... 그래서 결핵 같은 '소모성 질환'을 cunsumption disorder 라고 표현하기도 했었다 (옛날 결핵 문헌에서 이런 표현을 발견하고 의아했던 경험이 있다 ㅜ.ㅜ) 하지만 이러한 소비가 20세기를 지나며 어느 덧 악덕에서 미덕으로 전환되었다는 아이러니.... .
worn-out, break-down, overload, burn-out, shut-down 같은 표현들이 사실을 기계들한테나 쓰던 용어들이었는데, 노동자 스스로의 피로나 지침, 과부하 등을 나타내고자 할 때도 쓰게 되었다는 사실... ㅡ.ㅡ
법정 옮김, 이레 출판사 1999
수많은 불교 경전 중 가장 초기에 이루어진 경전이라고 한다.
글이 없던 시절, 부처의 가르침을 들은 제자들이 함께 암송하여 전승하였고, 따라서 외기 쉽도록 운문 형태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후렴'도 있다...
불경을 읽으면서, 이제 'so cool' 을 지나 'too cool'로 가고 있다고 친구들이 비난한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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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물속의 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한번 불타버린 곳에는 다시 불이 붙지 않듯이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71.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273.
야차여, 듣거라.
번뇌가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인지 아는 사람들은 번뇌를 버릴 수 있다.
그들은 건너기 어렵고, 아직 아무도 건넌 사람이 없는 이 거센 흐름을 건너서 다시는 사람의 몸을 받는 일이 없다.
462.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으시오.
불은 온갖 섶에서 일어나는 것.
천한 집에 태어난 사람이라도 믿음이 깊고 부끄러워할 줄 알고 뉘우치는 마음으로 행동을 삼가면 고귀한 사람이 되는 것이오.
630.
적의를 품은 자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그들에게 적의를 품지 않고,
폭력을 휘두르는 자와 함께 있으면서도 마음이 온화하며,
집착하는 자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집착하지 않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704.
모든 육체적 즐거움을 버리라. 모든 욕망을 버리라.
약한 것이든 강한 것이든 모든 생명있는 것을 미워하지 말고 좋아하지도 말라.
721.
모자라는 것은 소리를 내지만, 가득 찬 것은 아주 조용하다.
어리석은 자는 물이 반쯤 찬 항아리 같고,
지혜로운 이는 물이 가득찬 연못과 같다.
839.
스승은 대답하셨다.
"마간디야여, 견해나 학문에 의해서, 지식이나 계율 또는 도덕에 의해서 깨끗해질 수 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견해와 학문과 지식이 없이도, 계율과 도덕 없이도 깨끗해질 수 있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것들을 버리고 고집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며, 덧없는 생존을 원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마음의 평안'이다."
851. (죽음이 오기 전에)
미래를 원하지도 않고, 과거를 추억하며 우울해하지도 않는다.
감각에 닿는 모든 대상에서 멀리 떨어질 것을 생각하며, 어떤 견해에도 이끌리는 일이 없다.
944.
낡은 것을 좋아하지 말라.
새로운 것에 매혹당하지도 말라.
사라져가는 것을 슬퍼하지 말라.
잡아끄는 것에 붙잡히지 말라.
준비가 충분치 못한 듯하여 사실 심히 걱정되었으나,
어쨌든 하기로 한 거... 강행되었다 (대책없는 사람들.... ㅡ.ㅡ )
우여곡절 끝에, 그리고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를 뚫고
계룡산 갑사 유스호스텔에 도착하니 저런 네온사인이 우리를 반겨주더라...
완전 감격... 지난 '김보순당 관광위원회 (주)'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격세지감!!!
이 사람들, 진보신당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구나....ㅎㅎㅎ
이번에는 건강과 인권을 주제로 인권운동사랑방의 명숙 활동가, 건강세상네트워크 전 대표를 맡으셨던 강주성 샘의 초청강연과 푸제온 사건(?)을 다룬 역할극을 진행했다.
후발대로 출발하느라 명숙활동가의 강의는 아쉽지만 못 들었고, 강선생님의 강의는... 우리들의 가슴을 후벼파고 반성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사실 생업으로 복귀하신 이래 외부 활동은 모두 접고 계셨는데, 학생들 강의라고 정말 1년만에 강연에 나서주신 것이다. 이후 역할극에서도 어찌나 열심히 참여해주시던지...
역할극은 푸제온 강제실시 (정식 이름은 통상실시라더군!)를 둘러싼 논쟁을 제약회사, 보건복지부, 특허청, 환우회, 시민사회단체 등으로 나누어 재연한 것이었다. 학생들이 환우회와 시민사회단체를 맡고, maddoc 님이 특허청, adonis 님이 로슈, 내가 복지부 역할을 맡았다. 뒤의 세 명이 선수다 보니 토론이 정말 웃겼다 ㅎㅎㅎ 첨에는 어색해들 하다가 나중에 자기 역할에 완전(!) 몰입해버린 것이다... 법과 절차를 들먹이며 뻔한 이야기를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이들 셋 때문에 환자 역할 맡은 학생은 속이 터져 죽으려고 했다.... 플로어에 있던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건 여태까지의 현실이기도 했다...
특정 사안을 두고 실무/효율성과 가치가 맞붙으면 대개 가치가 뻘쭘해지기 마련이다.
정말 수많은 이야기들이 오갔고, 뒤풀이에서도 당사자 운동, 진보정당의 역할, 전문가의 역할 등에 대해 뜨거운 논쟁이 이어졌다. (이 역할극의 여파로 뒷풀이 때 나랑 adonis 님이 무슨 말을 해도 그 진정성을 사람들이 믿지 않는 분위기 ㅡ.ㅡ)
참가학생 중에, 아버지가 직접 전화로 행사를 문의하시고 딸을 부탁해오신 경우가 있었다. 떡도 한 상자 들려보내셨다... 우리는 충격과 감격.....
글리벡 투쟁과 관련한 이런저런 야사들도 들었다. 돌아가신 김삼덕 씨가 같은 병실에 있던 환자였고, TV 에 나온 강주성 샘을 보고 나중에 연락해와서 함께 싸우게 되셨다는.... 심지어 이 두분은 골수 이식을 하셨기 때문에 글리벡 한 알 못 드셔본 분들이다..... 정말 훌륭하신 분들이다... 선생님이 함께 해주신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심지어 오늘 아침 서울상경팀의 차편 운전까지 맡아주셨다. 이게 웬 민폐냐고... 멀리서 오신, 연로하신 초청강사분께 운전까지 떠맡기다니.. !!!)
술자리는 즐거웠고,
심지어 새벽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물론 이들 밤샘 음주자들의 아침 상태는 가히 좋지 않았다 ㅎㅎㅎ
후배들끼리도 서로 꽤나 친해진 것 같았다. 술의 힘은 정말 위대해....(maddoc 님이 인터내셔널가를 부르셨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도대체 그림이 안 그려진다 ...이게 뭔 분위기냐고...본인도 아침에 무척 어이없어하심 ㅎㅎㅎ)
시작 직전에는, 너무 무리한 진행이다, 담에는 이런 행사 좀 자제하자 하던 분위기가
끝날 무렵에는 예의 그 낙관주의로 돌아서곤 한다.
재밌기도 하고, 보람있기도 하고, 또 함께 있어 든든한 이 사람들과 서로들 좀처럼 떨어지기 싫은 것이다 - 무슨 마약 중독도 아니고.... ㅎㅎㅎ
후배들... 앞으로도 계속 함께 고민하고 활동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야 아니지만, 오늘날 이 살풍경한 한국사회에서 이만큼 훌륭한 선배들 만나서 함께 활동할 수 있는 것도 큰 복이다 (^^) - 자뻑모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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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고맙습니다. 그런데 무강권주의도 무정부주의처럼 ~이 없다는 부정 아닌가요.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자유연합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한다고 하던데 맑스도 자유연합을 지지했으니 이것이 좋을 것 같군요. 저는 꼬뮨주의를 가장 선호합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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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대로 무정부주의나 무강권주의나 둘 다 무언가를 부정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권위적인 현존질서에 대한 안티테제로 출발했다는 점에서 반드시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을 거 같아요. 자유연합은 어째 너무 광범위한 거 같고, 꼬뮨주의는 어렵고... 뭐가 적절한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 당시에 얼마나 고민들이 많았을까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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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이라는 용어를 번역해올 때, 보통 어떤 <무無>나 <반反>이 나오네요. 아나키 혹은 평등적, 자치적 권력관계로 살아가는 <여러 가지 공동체의 공동체>들은 기존의 지배적, 억압적 사회체제와 이 사회체제의 개념들에 의존하는 건가요? 아나키는 <무>나 <반>이라는 것으로 의미화시키면은 아나키즘이 유기적이지 않은 반동주의이죠. 그럼 무엇이라고 부를까, 아니면 명칭해야 될까 고민해요ㅋ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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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rchy 고대 희랍의 집정관archon에 반대한다는 뜻으로 알고 있어요. 귀족에게만 상습-독점되는 무제한적인 권력에 대해 반대한다는 것이죠. 이 맥락과 별개로 an-archy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그저 反의 의미로밖에 드러날 수 없겠죠. 무정부주의는 이런 의미에서는 많은 오해를 담을 수 있는 번역이라 생각됩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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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개념을 위해 독창적인 외계어를 발명했다가는 아무에게도 뜻을 전달할 수 없을테고, 그러다보니 무언가 새로운 것을 주창할 때에도 기존의 용어와 도구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은 듯해요. 아나키즘이 담고 있는 사상을 전달하기 위해 뭐가 가장 적절할지는 모르겠는데, laron님도 지적하셨듯 최소한 '무정부주의'는 아닌거 같아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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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와는 좀 상관없는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요즘 벌어지고 있는 투쟁들을 보면 블랙블록이라는 국제적인 아나키스트 조직이 눈에 띄이는데요, 사실 아는 바는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레디앙 기자가 이 분 중 한 명에게 당신들은 어떤 조직에서 나왔냐고 물었더니 우리는 조직이 없고 그냥 블랙블록일뿐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상당히 규율이 잡혀있고 조직적이라고 합니다. 지난번 삿포로 G8정상회담반대집회에서도 CNT깃발이 보여서 좀 의아했습니다. 제가 아는 것이 없어서 두서없이 말씀드리긴했지만 최근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아나키스트조직에 대해 좀 더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홍실님이 관심을 가져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실의 운동이니까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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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block은 책에도 소개되어있어요. 독일에서 빈집무단점거운동하는 이들과 자율주의자들이 그 시초라고... 공식체계나 규율을 갖는 '조직'이라기보다 개인들의 자율연합이라고 보는게 맞을 듯해요... CNT (지금도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지는 저도 몰랐어요!)를 비롯하여 최근의 아나키 운동에 대해서 말씀드리기엔 제가 너무 문외한이고... 이 책의 후반부에, 아나키 운동의 최근 동향과 각종 자료/정보원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와있으니 참고하시면 될 듯해요 (^^)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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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카치아피카스가 쓴 정치의 전복이라는 책에 보면 독일 아우토노멘운동의 일부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복장이라든가 전술등이 원체 눈에 띄이다보니 가장 언론의 관심을 받는것 같은데요, 그에 비해 이 '조직'에 대해 알려진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저 위에 제가 마치 삿포로에 갔다온것처럼 써놔서 좀 겸연쩍은데 사진을 본 것뿐이고요 저도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CNT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 이미 해체된지 오래입니다.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 홍실님이 추천하신 책은 기회가 닿으면 한번 읽어보죠. 하지만 나중에 또 글을 쓰시면 그때 와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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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gsili님이 쓴 남미인권기행에 대한 코멘트는 근거없는 독설로 아주 가득차있군요. 먼저 한겨레21에 쓴 기사를 주로 실었다지만 책에 실린 내용과 사진이 훨씬 풍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사에서는 지면의 한계로 실리지 못한 내용들이 많이 추가된 것 같은 데 hongsili님은 제대로 읽지 않고 무작정 그대로 실렸다고 하네요. 또 한 가지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거의 인신공격에 가깝게 저자를 깎아내리고 있는데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네요. 제가 읽은 남미인권기행은 아주 감동적이었습니다. 옆에 놔두고 계속 읽고 싶은 책입니다. 무엇보다도 '아나키스트'라는 사람들의 냉소적인 비웃음에 혀를 내두를 지경입니다. 물론 당신을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지만 지나가다 눈에 띄어서 이렇게 한 자 적습니다. 알라딘에 가면 남미인권기행에 대한 독자서평이 많이 실려있습니다. 모두들 마음을 움직인 책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그 잘난 냉소주의를 버리고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읽기 바랍니다. 독자들은 당신의 악마적인 비평 한 마디로 인해 저자의 노력을 무위로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결코 진보라 할 수 없는 늙다리 보수주의자로 알겠습니다. 그럼,...남미인권기행을 사랑하는 독자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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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감동받은 알라딘 리뷰어들이 많다고 해서 저까지 감동을 받을 필요야 없죠. 그리고 한겨레21연재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겠는데요... 저도 저자의 기사를 좋아하는 편인데 (그러니까 책을 샀겠죠), 문제를 제기만 하고 근본원인이나 실체적 진실에 대해 끝까지 파헤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은 여전합니다. 제 평생 무슨 '~주의자' 내지는 '~스트'라는 생각을 안 해봤는데, 난데없이 냉소적 아나키니, 보수주의자니... 두 가지 개념이 어떻게 동시에 충족될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대체로 님의 비판을 이해하기가 어렵네요 ㅡ.ㅡ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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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부주의를 뜻하는 anarchism의 어원은 'anarchos'가 아니라 "archy"가 어원으로 archy에 "an"이 덧붙여져 만들어진 말이다. 여기서 "an"의 뜻은 "없는"으로 영어의 "without"이다. "archy"는 지도자인 사람을 뜻하기 보다는 "통치하는 힘"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지도자가 없는"의 의미보다는 "통치하는 힘이 없는"의 뜻으로 해석된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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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y 가 통치자를 뜻하는 개념어 (ruler - arhkos 에서 기원)라, 말씀하신대로 부정의 접두사 'an'과 합쳐져 '통치자 없는'으로 해석되는게 맞을 것으로 봅니다. 저자 하승수 샘의 해석에 문제는 없다고 봐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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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더/ 이렇게 마음 편하게 글을 많이 쓰시고 왠지 다시 이 곳에 오실 것 같지는 않지만, 다른 모든 것은 제껴두고라도 anarchy의 어원은 기본적으로 홍실님 의견이 맞습니다.http://www.etymonline.com/index.php?term=anarc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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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사람들 가지가지여..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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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os"도 물론 같은 뜻이지만 어근은 "archy"며 "archos"는 성별로 따지면 남성적 명사라고 할 수 있다. 남성적 명사는 어근이 될 수 없음! archos가 맞다는 건 당신들 생각일뿐이지 진리는 아님!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