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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어울리는 조합의 책들..

책 읽고 메모 남기는 것도 일이다. 기록 없이 기억도 없다는 슬픈 현실을 인정하고 몇 글자라도 끄적끄적... #1. 매일노동뉴스 편집국 [현장을 가다] 2008

우연히 채널을 마주치면 입이 쩍 벌어지는 달인의 솜씨에 잠시 정신줄을 놓다가도, 정말 저래도 되나 싶어 항상 마음을 찜찜하게 만드는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가 있다. 노동안전보건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완전 황당한 프로그램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나마 생활인으로서의 평범한 노동자들이 등장한다는 측면에서는 나름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 한국사회에서 생산직, 서비스직 노동자는 미디어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노사상생을 노래하는 공익광고나 산재예방 광고를 제외한다면.... 나머지, 모든 '직장인'(노동자 말고!)들은 쿨한 캐주얼 웨어 혹은 맵시나는 정장을 입고 사무실 책상앞에서 일한다. 사실은 일도 잘 안하고 연애질에 권모술수, 집안 싸움만 하는게 보통이긴 하지만 ㅡ.ㅡ 매일노동뉴스의 [현장을 가다]는 그래서 참 소중한 기록물이다. 조롱하지도, 비탄하지도, 저주하지도 말고, 그저 이해하라는 스피노자 할배의 말씀처럼, 노동의 현장을 '연대의 마음으로' 착실하게 그려내고 있다. 제조/건설, 금융/서비스, 공공부문의 3부로 이루어진 글들에서, 그야말로 세상을 만들어내는 노동자들의 자부심, (생활의 달인에 등장할법한) 현란한 재주와 기술들, 자신이 몸담는 일터에 대한 사랑, 동료 노동자들에 대한 믿음 들을 읽을 수 있다.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 존재하는 누군가의 노동 (그 노동없이 당연히 존재할 수 없는 생산품과 서비스를 앞에 두고도, 나는 너무 자주, 그들의 존재를 잊는다), 때로는 목숨을 내걸고 나서야 하는 험난한 출근길, 점증해가는 고용불안과 팍팍해지는 노동의 댓가... 그리고 이런 것들이 빠져있을리 없다. 현상들을 종합하고 추상을 통해 일반화를 시키는 것이 연구자의 장기이자 소명이라고 하지만, 이런 생생한 일상들을 누군가 대신 그려주지 않는다면 그런 '연구'가 가능이나 할까? 고마운 책이다. 책에 등장했던 모든 분들, 취재하느라 고생한 분들... 모두에게 연대의 마음을!!!


#2. 고종석 [어루만지다 -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마음산책 2009

하드커버에다 표지가 너무 대놓고 '어루만지다'를 표현하고 있어 살까말까 잠시 고민했었다. 그래도 고종석의 말/글 책들은 그닥 실망시킨 적이 없어서 또 질렀다. 거듭 확인하는 사실이지만, 이 분의 감수성은, 통상적인 그 세대 한국 아저씨의 것은 분명 아니다 ㅎㅎㅎ 사랑이라는 모티브와 관련된 단어들을 중심으로 글을 풀어놓았는데, 저자가 앞에서 분명히 밝히듯 이건 연애지침서나 사랑학교과서가 아니라 말글 에세이다. 그래도 주제와 관련된 저자의 평소 지론이 드러나는 건 어쩔 수 없다 ㅎㅎ 단어들은 입술, 혀놀림(?), 미끈하다(?)처럼 성애와 좀더 관련시켜 설명한 것들도 있고, 딸내미, 누이처럼 또다른 종류의 애틋한 사랑에 관한 것들도 있고... 참 다양했다. 소개된 많은 어휘들 중 가장 마음을 끄는 아름다운 한국어라면, 역시 제목에 언급한 '어루만지다' 아닐까 싶다. 그것이 누군가의 볼이던, 혹은 마음이던, 그 어루만진다는 구체적/추상적 행위를 그 어떤 다른 말로 대신 표현할 수 있을까??? 몇 가지 허거덕 하는 내용들도 있었다. "...사랑을 낳는 것은 가느다란 신경일테다. 사랑은 무딘 신경. 씩씩한 마음에서 나올 수 없다..." ㅎㅎㅎ 주변사람들이 나보구 성격이 고래심줄 혹은 쇠심줄(영어로는 nerve of steel!!!) 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오늘날 이모양이구나... 큰 깨달음이었다!!! 또 사랑을 함으로써 자기자신(원래 으뜸 존재)과 사랑하는 대상 (버금 존재)의 우선순위를 바꾸게 된다는 점에서 "... 사랑은 정신의 질병이랄 수도 있다" 라고 썼다. 예전에 강유원은 [책과 세계]에서 정신이 병든 자만이 책을 읽는다고 했었다 (마치 병든 사자가 풀을 뜯어 먹듯이!)... 고로, 고종석과 강유원의 주장을 합쳐보자면, 정신이 병든 자는 참 다양한 일을 하는 것이다. 병원에만 가는게 아니라 무려 사랑도 하고 책도 읽는다 ㅎㅎㅎ (옆에서 사자는 풀 뜯어먹고!) #3.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벨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모티브북 2008

벨훅스의 책은 처음 읽어보았다. 어떤 독자들을 상정하고 책을 썼는지 좀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뭐랄까? 책 전체가 마치 서론처럼 느껴졌다. 뭔가 본론이 나올것 같으면서도 안 나오는 ㅡ.ㅡ 일단, 저자가 생각하는 '계급'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베버나 마르크스 류의 개념적 정의를 해야한다는 건 아니지만, 계급에 대해 논한 책에서 정작 본인이 생각하는 계급이 무엇인지 말해주지를 않으니, 상당히 애매하더라는... 사회과학적 훈련이 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모호한 상태와 그닥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 재산? 학벌? 집안? 가난??? 어쩌면 사회의 위계 그 자체를 나타내려고 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다보니, 이 현실을 어떻게 극복해나가야 할지도 애매하게 기술되어 있다. 또 한편으로는, (흑인)공동체주의가 살아있던, 그리고 가난하지만 현명했던 부모님 세대의 그 시대에 대한 저자의 목가적 향수도 느낄 수 있었다. 일찍이 루소도 안타까워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시절을 되돌릴 수는 없잖아요? 우째야한단 말입니까.... 이런 종류의 책도 쓰고 교육도 열심히 하고, 사람들이 현실을 직시하도록 만드는게 첫걸음이기는 할텐데, 어째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말씀만 들어있어서 뭔가 2% 부족한 갈증이 채워지지 않는달까..... ㅡ.ㅡ 한편, 가난한 흑인 노동계급출신으로서, 명문 사립대학을 졸업하고 주류세계에 편입한 저자가 마주쳤던 곤혹스러운 현실, 그리고 그렇기에 항상 깨어있을 수 있는 (어쩌면 축복받은) 조건들에 대한 기술에는 일백퍼센트 공감했다. 이런 신분상승의 경험을 통해 누군가는 피에르 부르디외나 벨훅스같이 뛰어난 성찰을 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해봤어? 안해봤음 말을 마세요' 하면서 자수성가 제일주의로 주변에 상당한 민폐를 끼치기도 한다 ㅡ.ㅡ (그 대상이 온 국민 전체가 되버리면 정말 괴롭다!) 그나저나 원제가 [Where we stand: class matters] 인데 왜 한국어판 제목은 저 모양인지? #4. 벨훅스 지음, 윤은진 옮김. [경계넘기를 가르치기] 모틔브북 2008

위의 책을 읽는 중에, 친구네 집에 놀라갔다가 이 책을 발견하고 빌려서 읽었다. 전자에 비해 훨씬 재미있게,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다. 가르친다는 것에 대해 이런저런 고민을 던져주었는데, 딱히 답은 잘 모르겠다. 베버의 지론과는 상충하는 이 열정적인 페미니스트 선생님의 스타일이 바람직해보이기는 하면서도, 나보고 하라하면 별로 하고 싶지 않은 ㅡ.ㅡ; 아마도 학교를 다니면서 하도 싸이코같은 인간들을 많이보고, 도덕적 감화는 고사하고 다른 거 안 바라니 선생이면 전공과목만이라도 제대로 가르쳐라... 이런 결론으로 살아왔기 때문인 듯... 앞서의 책보다 저자의 유연하고 민감한 모습이 잘 드러나 있어서 좋았다. 이를테면 파울로 프레이리에 대한 태도 - 가부장/백인중심주의의 잔영을 비판하면서도 페다고지 이론 자체의 전복적 성격과 선생의 상호존중하는 태도를 존경하며 적극 수용하는 모습 - 몇몇 인상적이었던 구절을 남겨둔다. ".. 나는 자아실현과 거리가 먼 대학은, 책에 쓰인 지식은 잘 알고 있지만 그 외의 사회적 상호작용에는 부적격인 이들에게 안식처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교육이 자유의 실천이라고 한다면 학생에게만 참여하고 고백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학생들에게는 위험을 감수하라고 하면서 교사 자신은 비난받기를 거부한다면 역량 강화는 일어날 수 없다." "'이론'이나 '페메니즘' 같은 특정한 용어들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이론화를 실천하거나 페미니스트 부쟁에 참여하는 삶의 방식을 지닌 실천가는 아니다. 용어 만들기라는 특권적 행동을 함으로써 권력을 가진 이들은 의사소통방식을 이용할 권리를 얻으며, 자신들의 연구와 행동을 설명하고 정의하고 묘사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많은 환경에서 지식인들이 퇴출되고, 이론이 종적을 감추며, 침묵이 이어지는 상황을 목격해왔다. 침묵은 공범자가 되는 행위이며, 침묵은 우리가 이론 없이 혁명적인 흑인 해방과 페미니스트 투쟁에 참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영속시키는데 일조한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 예를 들면, '흑인성'의 이론을 구축한 몇몇 엘리트 학자들은 그 흑인성을, 선택된 소수만 들어갈 수 있는 결정적 영역으로 만듦으로써 - 인종에 관한 이론적 연구를 이용하여 흑인 경험 영역의 권위를 주장하며, 이론 구축 과정에 민주적으로 접근하기를 거부한다 - 흑인 해방 투쟁을 위협한다. 우리 중 일부도 반주지주의를 조장하고 모든 이론은 가치가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이들에 호응하여 흑인 해방을 위한 공동의 투쟁을 위협한다. 이들 두 집단은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었다는 생각을 강화하거나, 이론과 실천의 분리를 조장함으로써 비판 의식을 길러주는 해방 교육의 힘을 부인하며, 그결과로 우리를 집단적ㅇ그로 착취하고 억압하도록 강화하는 환경을 영속시킨다." "정체성 정치학은 억압되거나 착취당하는 집단이 벌이는 지배 구조를 비판하는 관점, 즉 투쟁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는 위치를 갖고자 하는 투쟁으로부터 발생한다. "진보적인 교수 대부분은 어떻게 계급 편견이 교실에서 일어나는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지 의문을 갖고 자신의 교육 과정을 개혁하는 경우보다는, 마음 편하게 기존의 연구 자료에 담긴 계급 편견에 도전하려고 애쓴다..." "학교는 낙원이 아니다. 그러나 배운다는 것은 낙원이 만들어질 수 있는 장이다. 교실은 가 자체로 한계가 많지만, 가능성을 지닌 장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가능성의 장애서 우리는 자유를 얻으려 노력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며, 우리 자신과 우리의 동료에게 우리가 경계를 넘어가려 할 때 겪는 현실에 맞서게 해줄 개방된 사고와 마음을 가지라고 요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이것이 자유실천으로서의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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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와 루소

바쁘더라도 저녁나절 30분은 좀 차분히 앉아 '재미있는' 책을 읽어보자는 결심을, 나름 잘 지켜나갔던 3월이었다. #1. 막스 베버 지음, 전성우 옮김 [직업으로서의 학문] 나남 2006

크나큰 가르침을 얻기는 커녕, 현재의 업을 접어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폭풍같은 회의감이 밀려왔던 책이다. 학문, 혹은 가르친다는 것에 대한 소명도 없이 어쩌다보니 이 바닥에 발을 들여놓고, 또 딱히 다른 것을 잘 하는게 없어서 어영부영 머무르고 있는 자신을 심각하게 돌아보았다. 번역하신 분도 괴로워하신 걸 보니, 나만의 고민이 아님은 분명하다. * 학자가 되는 길의 외적 내적 조건 이미 20세기 초에 독일에서 학자가 된다는 것의 금권적 기반을 예리하게 지적한 것은 다소 놀라웠다. 또 요행이 이 정도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직업이 어디 또 있을까 하는 장탄식, '학자의 길은 거친 요행의 세계'라는 지적에서 나도 모르게 깊은 공감의 한숨을 ㅡ.ㅡ 외적 조건보다 더욱 문제되는 것은 내적 조건 - 열정과 소명의식이다. ".. 일단 눈가리개를 하고서,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 "학문영역에서 순수하게 자신의 주제에 헌신하는 사람만이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학문영역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예술가치고 자기 일에, 그리고 오로지 자기 일에만 헌신하는 것 이외에 다른 일을 한 예술가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괴테같이 위대한..." 결국 나보구 공부 그만두라는 소리다 ㅜ.ㅜ * 합리화 과정과 학문의 발전 "... 진실로 '완성'된 예술품은 능가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또 그것은 낡아버리지도 않습니다....학문상의 모든 '성취'는 새로운 '질문'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성취'는 '능가'되고 낡아버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능가된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운명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멀리 나아가기를 희망하지 않고서는 연구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진보는 원칙적으로 무한히 계속됩니다." 베버는 오늘날 특허와 지적 재산권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는 과학계의 비밀주의와 배타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주지주의화와 합리화, 즉 현실세계의 탈주술화가 학문의 소명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나 원래 계몽주의자?) *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 베버는 강단과 정치의 분리, 가치판단과 사실 판단의 분리, 교수와 지도자의 엄밀한 분리를 극도로 강조한다. (미국과는 달리) 권력관계가 두드러진 (독일의) 강의실에서 교수에게 요구되는 것은 학생들이 스스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적 성실성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 나도 학부의 정규수업시간에는 팩트 이외에 사회적 발언을 절대 하지 않는다. 권력관계가 작동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원 수업은 좀 다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도 든다. 요즘같은 세상에 선생이 이야기한다고 그대로 믿고 따라오는 학생들이 있기나 할까? 선생의 영향력을 오히려 내가 너무 과대평가하는 건 아닐까? 그리고 주류집단의 지속적인 이념세례 속에서 한마디 정도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하워드 진이나 벨 훅스가 강의실에서 보여준 태도들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원칙에서 베버의 의견에 절대 공감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대학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하워드 진이나 벨 훅스의 교수법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것이 강단을 저급한 선동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팩트를 종합하고 전달하는 것 또한 가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고려한다면, 학생들로 하여금 가려진 진실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 결과가 보수적 온정주의가 되든 급진적 공동체주의가 되든 학생들 스스로의 길을 결정하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정작 어려운 것은, 더이상 성찰과 진지함이 사라져버린 강의실에 어떻게 진정성을 불어넣느냐 하는 것... 학교, 교육제도, 선생을 모두 하찮은 존재로 여기며 보내왔던 지난 시절의 개인적 경험들로 핑게삼아, 좋은 학자, 좋은 선생의 자질에 대해 생각조차 해보지 않고 지난 수년을 보냈다는 게 좀 한심스럽다. 다른 거 마땅히 할 것도 없으면서... (어릴 적에, 돈 벌어서 만화가게 차리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닌 거 같아 ㅜ.ㅜ)


# 2.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고봉만 옮김. 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 2003

해미와의 첫 책모임 이후 도대체 '사회' '공공'이 무엇이지 답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옛 민주노동당 시절 진보정치연구소에서 펴낸 "사회국가'를 살펴보았다가 잔뜩 실망하고, 고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둘 다 루소 할배의 팬이 되었다. 이 분 엄청 발랄하셔!!! 이 텍스트는 평소의 내 지론대로 컨텍스트와 분리하여 생각하기 어렵다. 디드로를 비롯한 백과전서파가 얼마나 미워했을지 이해가 충분히 된다. 중세의 미몽으로부터 깨어나 겨우 탈주술화/계몽의 가치가 성장해나가기 시작한 그 시점에서, 기술과 학문의 발전이 불평등과 패악의 원인이라 주장하며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했으니, 계몽주의자들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ㅎㅎㅎ (현실적으로 되돌릴 수 없는) 과거로 회귀하자는 그의 발상이 목가적 낭만주의를 얼마나 뛰어넘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 (당시의) 불평등이 결코 '인간의 본원적인 상태'가 아니며, '사회와 정신'이 낳은 인위적 상황이라는 예리한 통찰, 법과 제도로 고착화된 추악한 전제군주제에 대한 비판은, 왜 루소의 사상이 프랑스 혁명의 정신적 자양분이라 일컬어지는지 잘 말해준다. 그리고 책의 곳곳에 드러나는 앞서간 (!) 사상은 입을 쩍 벌어지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논문의 헌사에서 제네바공화국 의원들에게 "... 그들 (시민들)은 교육뿐만 아니라 타고난 자연의 권리에서도 당신들과 대등하며, 자신들이 당신들보다 낮은 지위에 머무르는 것은 스스로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 생각하고 당신들의 가치를 인정하여 자진해서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도 그들에게 일종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또 시민의 절반인 '여성'에 대한 언급, 그것이 비록 오늘날의 페미니스트적 관점과는 전혀 다르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로서 여성을 언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웠다. 사랑과 정념의 기원에 대한 나름 냉철한(?) 추론 또한 흥미진진 ㅎㅎㅎ 인간의 이성보다 앞서는 두개의 원리로 자기애와 더불어 '연민'을 꼽고, 이를 확장하여 동물이 불필요하게 인간으로부터 학대받지않을 권리가 있다고까지 언급한 것은 더욱 충격... 연민이라... 루소는 근본적으로 인간을 선한 존재로 바라보았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본능적으로 함께 아파하는 이 마음.... 오늘날, 특히 한국사회의 특성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어쩌면 연민이 사라져가는 사회? 가장 인상적이었던 표현은 이것이다. "어떤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땅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믿을만큼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최초의 인간이 문명사회의 실질적인 창시자이다. 말뚝을 뽑아버리고 토지의 경계로 파놓은 도랑을 메우면서 동류의 인간들을 향해 '저런 사기꾼의 말을 듣지 마시오. 과일은 모두의 소유이고 땅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는다면 당신들은 파멸할 것이오'라고 외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얼마나 많은 죄악과 싸움과 살인, 얼마나 많은 비참과 공포에서 인류를 구제해주었을 것인가?" 읽은지 오래되어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 이렇게 재치있는 말투로 쓰여지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중고등학교 시절 고전이라면 고개를 내저었던 것이 한편으로 한심하기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기도 하다. 그 시절에 이 책을 읽었다면, 임무를 완수했다는 자부심 이외에, 얼마나 이 내용과 맥락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나이를 먹고, 경험과 지혜(??? 그냥 지식이라고 하자 ㅡ.ㅡ)가 쌓이는 것이 반드시 나쁜 일만은 아니다. 참, 이 책이나 베버의 책 모두 보기 드물게 번역글이 아주 매끄럽고, 참고문헌과 해제도 충실하다. 문고판이라 부담도 없으니 주변인들께 널리널리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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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칭 대명사

지난 주말에 친구들과 적절한 2인칭 대명사에 대한 잔잔한 토론을 벌였다. 윗사람은 오히려 문제가 안 되는데, 나이가 어리거나 직급이 낮은 경우 어떤게 가장 적절한 호칭인지, 본인이 각자 들어본 호칭의 종류와 그 반응 등등을 심도깊게 ㅎㅎㅎ 아무개 씨 라고 이름을 부르거나 아주 친한 사이면 아무개, 혹은 너/네 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닌 경우 쫌 애매한게 사실이다. 그리고 후배들이라고 해도 이제는 나름 다 사회인들이라, 함부로 불러제끼기 어렵다... 교수님 박사님 선생님 같은 사회적 지위 칭호없이 서로를 존중하며 평등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호칭은 뭐가 좋은게 있을까??? 아시는 분 답 좀..... ------------------------------------------------------- 1. 당신 「1」듣는 이를 가리키는 이인칭 대명사. 하오할 자리에 쓴다. 「2」부부 사이에서, 상대편을 높여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 「3」맞서 싸울 때 상대편을 낮잡아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 「4」‘자기03[Ⅱ]’를 아주 높여 이르는 말. - 주로 내가 애용하는 단어.... 나는 주로 1번의 용례라고 생각해서 쓰는데, 듣는 사람은 3번으로 듣는거 같다 ㅎㅎㅎ 이를테면 '당신이 그러면 안 되지~' 고종석에 의하면 멱살잡이 일보직전의 표현이라는디... 2. 자기: 앞에서 이미 말하였거나 나온 바 있는 사람을 도로 가리키는 삼인칭 대명사. - 나랑 주먹도끼는 '자기'라는 표현을 엄청 싫어한다. 대개 여자 선배나 여성 상급자들이 많이 사용하는데, '내가 왜 자기네 자기야?' 하면서 불평했던 기억이 난다. ㅎㅎ 하지만, 장양은 이걸 선호하는데다 심지어 하급직 남자직원들한테도 꼭 '자기'라고 한댄다. 나같으면 엄청 싫을 것 같아... 무섭게 생긴 누나가 '자기'라니!!! 그리고 심지어 2인칭도 아니고 3인칭 대명사잖아!!! 3. 자네: 듣는 이가 친구나 아랫사람인 경우, 그 사람을 높여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 하게할 자리에 쓴다. 처부모가 사위를 부르거나 이를 때, 또는 결혼한 남자가 처남을 부르거나 이를 때도 쓸 수 있다. - 주먹도끼가 애용한단다. 나는 아주 윗사람 (이를테면 나이 많으신 원로 교수님들)한테 들어본 적은 있지만 내가 써본적은 없다. 나이차이도 얼마 안 나는 사람이 쓰면 기분나쁠것 같은디??? 4. 기타 1) 귀하: 듣는 이를 높여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 ≒존하(尊下). - 주먹도끼는 가끔 이걸 쓰기도 한다는디, 자네와 귀하를 같이 쓰는 건 무슨 무개념 용법??? 2) 댁: 듣는 이가 대등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나 아랫사람인 경우, 그 사람을 높여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 - 내가 자주 쓰는 표현. 이를테면 '댁은 생각이 어떠슈?' 근데 앞의 '당신'과 마찬가지로 별로 높임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게 문제다. 내가 껄렁하게 말해서 그런가? 3) 유 (you) - 이런 해괴한 표현을 하는 작자가 있을까 싶으나 장양은 적지않게 들어보았단다. '유가 그러면 어떡해요?' 이런 식... 이거 묘하게 막말스럽다 ㅡ.ㅡ 4) 임자 「1」나이가 비슷하면서 잘 모르는 사람이나, 알고는 있지만 ‘자네’라고 부르기가 거북한 사람, 또는 아랫사람을 높여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 「2」나이가 지긋한 부부 사이에서, 상대편을 서로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 「3」『북한어』‘자네’라는 뜻으로 허물없이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 - 이거는 내가 들어본 표현인디, 노인정에 나와 앉은 느낌이다 ㅎㅎㅎ 한국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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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진보신당] 글로벌 스탠다드를 따라주세요!

원래 지난 주에 썼는디, 발간이 한 주 지연되어 이번 주에 업로드가 되었다. 빛보다 빠른 속도로 내 차례가 돌아오는 것 같다 ㅜ.ㅜ 지난 2주는 영리법인 도입 문제로 한겨레, 프레시안, 오마이뉴스에 기고글과 칼럼들이 그야말로 폭주했었다. 그래도 이분들 마이동풍이니... 참 미치겠다. 이 와중에 좀 당황스러운 것은, 진보신당이 제시한 올해의 4대 중점의제에 보건의료 사유화 문제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 주에 더 논의를 한다고는 하는디... ㅡ.ㅡ ----------------------------------------------- 예전에 인기를 끌었던 한 증권사 광고 기억나세요? 모두가‘예’라고 할 때 혼자 ‘아니오’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좋다던! 부화뇌동하기 쉬운 세상에서 신념과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로망을 드러낸 좋은 광고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분들을 보면서 과연 이러한 평가가 적절한 것이었는지 의구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광석화와 같은 손놀림으로 종부세를 순식간에 무력화시켰던 그 분! 홀연히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라는 옷으로 갈아입고 나타나 베이브 루스가 홈런 방향을 지목하듯 단호한 의지로 의료민영화의 한길로 매진할 것임을 밝힌 그 분, 그리고 그 절친들! 지난 한 주 동안 그 분들은 예의 그 능수능란함으로 ‘의료민영화’ 논의를 다시 전면화시켰습니다. 하지만, 잠깐 바깥으로 눈을 돌려 볼까요? 요새 뉴스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미국의 경제위기 상황과 오바마 정부의 다급한 대응 정책들이 소개됩니다. 한국에서 주로 보도되는 내용은 다우 지수 동향, 은행이나 자동차 회사들에 대한 구제금융 등이지만, 미국 내에서 보건의료 분야의 개혁은 상당히 중요한 이슈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 워싱턴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주최한 ‘보건의료개혁 대토론회’가 열렸습니다. 한국에서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가 ‘의료제도 선진화를 위한 토론회’를 열었던 바로 전 날입니다. 여야, 진보/보수를 떠나 미국인들의 시름은 깊습니다. OECD 국가들 전부를 다 합친 것에 맞먹는 천문학적 의료비 지출, 하지만 대한민국 인구수에 버금가는 무보험자의 수, 쿠바와 비슷한 평균 수명, 영아 사망률... 우리가 이미 ‘식코’라는 영화를 통해 익숙해진 바로 그 문제들 때문에 말입니다. 바다건너 미국인들이 그토록 벗어나고자 하는 (하지만 잘 안 되는!) 이 골칫덩이를 한국사회에 얼른 들여오지 못해 안달이 난 분들의 신심은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하나같이 많이 배우신 분들이니 그 명성을 모를 리 없을텐데,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조셉 스티글리츠, 폴 크루그먼 교수의 쓴 소리는 왜 못 듣는 척 하는 걸까요? 사보험 중심, 영리화된 보건의료 체계는 건강권 문제를 떠나 경제학적으로도 문제가 많다는 지적 말입니다. 한 국인으로는 국제기구의 첫 선출직 수장을 맡아 화제가 되었던 고(故) 이종욱 박사를 기억하시나요? 국내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고인은 2005년 세계보건기구에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 위원회’라는 특별 기구를 설립했습니다. 그 위원회는 건강 불평등, 이와 관련된 세계 각국의 보건복지 정책들을 종합하고 학자, 정치인, 시민사회, 다국적 기업 등 그야말로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여 2008년 말에 최종 보고서를 출판했습니다. 많은 중요한 내용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보건의료 서비스는 필수적인 공공재이기 때문에 시장에 방임해서는 안 되며 형평성과 공공성 진작을 위해 공공 투자, 국가 규제가 중요하다는 점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는 반기문 씨가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유엔의 산하기구이면서, 또 역시 ‘자랑스러운 한국인’인 고 이종욱 박사가 수장을 맡았던 국제기구의 ‘공식’ 보고서에서 말입니다. 이제 많은 국가와 국제기구들이 그 보고서의 권고를 따르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겠지만, 신심으로 가득 찬 한국의 그 분들이야 그 따위(!) 움직임에 부화뇌동할 리가 없겠지요? 오늘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 분들이 금과옥조처럼 생각하는 ‘글로벌 스탠다드’ 좀 따라 주시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다른 나라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좀 둘러보고 ‘눈치 있게’ 행동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램이지요. 지구촌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미국식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의 파산을 이야기하고, 심지어 그린스펀 같은 이조차 (이제 와서야) 그 길이 잘못된 길이었음을 고백하는 마당입니다. 소신과 ‘쇠귀에 경읽기’가 백짓장 한 장 차이 일수도 있다는 위험한 허무주의가 평범한 당원의 마음을 휘젓는 우울한 한 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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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다녀오기

0. 얼마 전에 제주도에 사는 M 형이랑 통화를 했다. 술자리에서 내 이야기가 나왔는데 목소리 듣고 싶어 전화했단다... 보고 싶다고 놀러오래... 식을 줄 모르는 이 인기 ㅎㅎㅎ 좀 웃긴 표현이긴 하지만 M 형은 나한테 언니같은 존재... 형이나 오빠의 마음이 아니라 정말 언니처럼 챙겨주고는 했다. 하긴, 가끔 보면 철딱서니 개망나니같기도 해서, 지도받는 후배였지만 내가 오히려 걱정을 해준 일도 적지는 않았던 것 같다. 형네 집에 가면, 정말 맘 편하게 풍광도 즐기고, 맛난 것도 많이 먹고, 형을 데리고 살아주는게 그저 고마울 뿐인 착한 부인 S가 끓여주는 맛난 전복죽도 실컷 먹을 수 있다. 최근 제주로 이주한 농활대 작업반장이었던 P 형도 맛난 거 사준다고 꼭 오라했으니, 정말 차비만 달랑 들고 가야겠다... 나이 먹어도 사라지지 않는 이 빈대 정신! 이번에 가면 꼭 한라산에 올라가봐야지. 갈 때마다 이상하게 날씨 때문에 못 올라가고, 성산 일출봉만 한 댓번 오른 듯 ㅡ.ㅡ 그리고 다듬어졌다는 걷기 길도.... 자리물회랑, 갈치조림, 오분자기 뚝배기 먹고, 힘내서 걸어야지 ~~~ 0. 이번 학기에 경주로 이주한 통통이 엄마도 봄을 맞아 한 번 놀러오라는 문자를 날리셨다. 그렇다.. 경주는 역시 봄! 그 포근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예전 수학여행 때 왜 그리도 경주를 미워했었는지... 나중에 대학 들어가서 친구들과 경주를 다시 찾았을 때 정말 우리 모두 깜딱 놀랐다. 우리가 저주하던 그 곳이 바로 이곳이더냐 하면서.... 학생들의 수학여행 시즌을 잘 살펴보고 여름 되기 전에 여기도 후딱... 0. 크자님이 이번에 주말 농장을 새로 분양받으셨는데, 바닷가란다. 체리나무 심어서 체리 따먹는게 나의 농사 로망인디, 그건 좀 어려울 듯 싶고, 일단 조만간 방문하여 고구마를 좀 심어야겠다 (마치 내 농장처럼 이야기하네 ㅎㅎㅎ) 설마 가까운 뻘에 나가서 꼬막 캐와라, 낙지잡아와라 이런 일을 시키시진 않겠지??? 봄도 짧은데 큰일이다. 이렇게 마실 다녀야 할 곳이 많아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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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주기...

엊그제가 기형도의 20주기였다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다. 그것도, 굴러다니는 신문 하단에 위치한 책 광고를 보고 말이다. 그를 추억하는 문집이 출간되었다.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이라는 구절이 내 머리 어딘가에 그토록 깊게 각인된 것은 언제쯤일까? 언제나처럼 나의 기억 속에서 텍스트는 컨텍스트와 함께 존재한다. 늦은 밤 부엌에 홀로 앉아 지금은 구경하기도 힘든 오비 병맥주를 마시며 기형도와 김현의 글을 읽던 그 시절이 아주 가끔 그립기도 하다. (그래봤자 스무살이 쪼금 넘은 나이었는디, 나홀로 음주의 이력이 참 길구나..ㅡ.ㅡ) 다음에 부모님 댁에 가면, 김현의 책들을 챙겨와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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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의 봄

이 나에게 남아 있을까? 유독 짧은 봄과 가을의 입구에 설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다시는 못만날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비장하게(!) 찰나를 즐겨보려하지만, 이들은 비정하게도 눈깜짝할새 지나가버리곤 한다. 기차 타고 내려오면서 생각했더랬다.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따뜻한 봄볕을 받으며 흩날리는 매화, 아님 벚꽃바람을 맞고 싶구나~~~ 음.... 책은 어떤게 좋을까??? [노동과 독점자본] [신자유주의] 이건 아닌디??? (책꽂이를 돌아봐도 마땅한 책이 눈에 안 띄는구나. 광물성 인간의 책장이란...) 우쨌든 오늘, 파란 하늘, 따스하고 나른하면서도 아직은 약간 쌀쌀한 바람이 남아있던 이런 날이면 역시나 파블로프의 개 마냥, 어김없이 떠오르는 글 한편.... -------------------------------- 그 리 움 (박노해) 공장 뜨락에 따사론 봄볕 내리면 휴일이라 생기 도는 아이들 얼굴 위로 개나리 꽃눈이 춤추며 난다 하늘하늘 그리움으로 노오란 작은 손 꽃바람 자락에 날려 보내도 더 그리워 그리워서 온몸 흔들다 한 방울 눈물로 떨어진다. 바람 드세도 모락모락 아지랑이로 피어나 온 가슴을 적셔 오는 그리움이여 스물다섯 청춘 위로 미싱 바늘처럼 꼭꼭 찍혀 오는 가난에 울며 떠나던 아프도록 그리운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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낼모레가 경칩

이라는데... 엄지 손톱만한 함박눈이, 아주 포실포실 소담스럽게 내리고 있다. 백설기 같아 (^^) 개구리들이 깜딱 놀라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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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책과 영화

벌써 3월이다. ㅡ.ㅡ 이제 세월의 흐름에 둔감해질 때도 되었건만, 문득문득, 여전히 놀란다! #1. 조한상 지음 [공공성이란 무엇인가] 책세상 2009

후배라고 대전에 내려왔는데, 서로 애틋하게 챙겨주는 사이는 아니고, 뭐 모른척 지내기도 웃기고... 그냥 만나서 수다만 떨기에는 둘 다 한가하지는 않고.... 비어가는 머리를 채워야겠다는 문제의식은 있고.... 이런 오묘한 사정이 결합하여, 얼마전부터 해미와 간이 강독 모임을 하고 있다.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2주에 한번 정도 맛난 차를 마시며 책이야기를 해보자는... 첫번째 책으로 이걸 골랐다. 몇 년전부터 그 답을 알고 싶었다. 도대체 공공성, 그 실체가 묘연한 이 단어의 '정의'가 무엇인지... 저자가 지적한대로, '공공성'이라는 단어는 여기저기서 유행처럼 쓰이는데, 소위 '개념의 인플레이션' 현상으로 그 누구하나 정확한 의미를 정의하지 않은 채 남발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1장에서 짚어준 공공성 개념의 역사와 핵심 의미요소에 대한 설명은 유용했다. 인민/공공복리/공개성이라는 3대원칙은 상당히 명료하고, 개별 사안에서 과연 이것이 공공성에 부합하는가를 판단하는데 유용한 잣대로 쓰일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공공성과 국가공권력이 어떻게 등치되었는지, 그것이 왜 문제인지에 대한 저자의 설명도 혼란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는 남아있다. 계급분할이 현존하는 이 사회에서 도대체 '공공복리'라는게 존재하는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의 '공공 public'은 과연 누구? '선의'에 기반한 시민사회가 존재한다고 가정해야 되는겨? 어쩌면 논의는 다시 롤즈의 정의론으로 돌아가, 가장 취약하거나 힘없는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돌아가는 편익이 공공성이라고 해야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ㅡ.ㅡ 첫술에 배부르랴. 어쨌든, 이제 이렇게 논점들이 정리되고 토의가 본격적으로 (?) 시작되었으니 좀더 심화된 연구결과들이 빨리(?) 나와서, 우리같은 어린양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었으면 좋겠다. 참,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는, 사법관에 의한 헌법해석의 독점을 비판한 부분.... 격하게 공감했다. 헌법해석의 민주화라...


#2. 이영희 [역정-나의 청년시대] 창작과 비평사 1988

링크된 그림은 2006년도 한길사 저작집에 포함된 것이고, 내가 가진건 창비의 오래된 책... 예전부터, 평소의 행적을 볼 때 자서전을 쓰실 분 같지는 않은데 무슨 연유일까 좀 궁금했었더랬다. '책을 내는 변명의 말'을 보면 이에 대한, 그야말로 변명이 나온다. "혁명가는 지나온 혁명이 그 인간의 전기이다"며 자전 쓰기를 거부했다는 모택동과 주은래의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본인 책의 독자들에게 대한 도의적 의무감에서 이 글을 썼다는.... 엄혹했던 시절 '의식화의 원흉'으로 지목되고, 많은 대학생들이 법정에서 자신의 저서를 통해 문제의식과 비판정신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후의 실천적 삶의 과정에서 당한 시련과 고통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쁨과 동시에 무거운 부담을 느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1980년에 다시 구금되면서 다시는 지적 생활을 할 수 없다는 전망 하에, 자신의 삶을 털어놓고 지적 인생에 종지부를 찍고자 이 책을 쓰게 되었다는.....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 연배에게서 동류를 찾아보기 힘든 선생의 까칠함의 근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혼란과 야만의 시대에, 지식인이되 금전이라는 물질적 자본과 학연이라는 사회적자본을 갖지 못한 이의 삶이란... 뭐 글쎄... 약간의 동질감이라고 해야 하나??? 그 시대를 살아온 동년배 어느 누가 쉬운 삶을 이어왔을까마는, 갖은 어려운 조건 속에서 지적으로 사상적으로 성장해나가는 대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후학들에게 귀중한 경험인 것 같다. #3. 이병훈, 윤정향, 김종진, 강은애 지음 [양극화 시대의 일하는 사람들 - 환경미화원에서 변리사까지] 창비 2008

이 책은 희망제작소의 '우리시대의 희망찾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계획된 시리즈물 중 제 5권에 해당한다. 책의 구성이나 접근 방법은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생생한 내러티브를 이렇게 조리있게 재구성하여 문제의식으로 정리해낼 수 있다니... 나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일들이다. 그런데,결정적으로 마음에 걸리는 것은 첫 페이지 소개글이다. "...또 삼성은 '우리시대 희망찾기'의 연구가 실현될 수 있도록 연구기금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이런 걸 병주고 약준다고 표현해야 하나? 이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ㅡ.ㅡ #4. 팔레스타인평화연대 지음 [라피끄 - 팔레스타인과 나] 메이데이 2008

아마도 이 책의 미덕은 그 '눈높이'와 에 있는 '다양한 결'에 있는 것 같다. 국제정세 분석과 통계자료만 나열되었더라면, 그것이 아무리 최신의 자료이고 정치한 분석이라 해도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에 동시에 울림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때로는 역사와 정치를 이야기하고, 또 다른 부분에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일상적 삶 - 이를테면 검문소, 난민촌 생활, 노동, 물 문제 -을 마치 우리옆에 있는 것처럼 그려내고, 또 사람들의 흔한 오해 -홀로코스트, 테러리스트/자살테러, 부르카 - 들을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방식이 참 좋았다. 결국 연대의 시작은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네'를 인식하는 것에서부터가 아닐까 싶다. 주변에 많이 선물해야겠다. 올해의 생일선물로 당첨 ㅎㅎㅎ 국제연대활동이 쉽지 않은 한국사회에서 꾸준하게 활동해온 팔연대 활동가,회원들이 새삼 존경스러워졌음... #5. 노영석 감독 [낮술] 2009

영화보다가 웃겨서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홍보 카피에 "술과 여자의 공통점, 남자라면 거절할 수 없다"라고 쓰여 있어서 저건 또 무슨 마초적 발언? 했는데... 영화를 보면 이해가 간다 ㅎㅎㅎ 그 찌질함과 팔랑귀... 근데 그게 너무 낯익은 설정과 상황이더라는... 누구는, 이 영화가 수컷들의 심리보고서라고 평을 하기도 했던데, 적절한 지적이다!!! 음, 어쩌면 영화의 배경이 강원도 정선이라 더욱 친근하게 느껴진 건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우리 서클에서 정선으로 엠티를 갔던 적이 있었다. 정말 그 때 굉장했더랬다. 이틀 밤을 꼴딱 새며 마시고, 아침에는 해장술, 오후에는 체육대회... 무슨 극기훈련 ㅡ.ㅡ 사실, 당시에, 아침에 일어나 우리 너댓명이 해장술로 맥주 한 박스 먹는 걸 옆에서 본 신입생 하나가 도망가기도 했었다 ㅎㅎㅎ 이 영화가 중반 이상으로 넘어가면, 관람객들은 주인공과 함께 숙취를 경험할수밖에 없다. 빈 속에 보면 위험한 영화다. 그리고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내내 웃다가 나올 수 있는 영화이지만, 한 가지 교훈은 있다. "낯선 곳에서의 과잉 친절을 조심하라!!!" ㅎㅎㅎ 영화를 본 자만이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요즘 세상살이가 무료하신 분들께 강추!!! #6. 아리 폴만 감독 [바시르와 왈츠를] 2008

드디어 보게 되었다. 근데 먼저 본 친구들 말대로, 착잡하다... 최근의 가자 지구 공습 사건이 없었으면, 좀더 감동하면서 볼 수 있었을까? 꼭 그렇지도 않았을 것 같다.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반딧불의 묘]를 보면서 가졌던 그 미묘한 감동과 반감의 갈등은 이 영화에서도 재현되었다. 그냥, 이스라엘 사람들 - 자신들을 돌아보는 성찰적 영화라고 단정해버리면 참 괜찮은 영화인데... 영상이나 음악이나, 구성방식이나, 또 침착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 하지만 텍스트와 컨텍스트가 분리되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나마 이런 성찰적 움직임마저 폄훼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알겠으나, 그리고 극화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대상' 혹은 '객체'로 그려진 것도 일견 이해할 수 있으나, 나의 즉자적 감정은 영화를 여전히 '변명'의 하나로 받아들이고 있다. 10년 뒤, 혹은 20년 뒤, 올해의 가자 학살을 돌아보는 이런 류의 영화가 또 나올까? 이제 족한 것 같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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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여행_08

#14. 초현실주의는 결코 초(!) 현실이 아니었다. 사막에는 모래만 있는게 아니다. 사막에 들어서 온갖 기괴한 암석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선명한 원색을 보았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달리의 그림을 떠올렸다. 그림이 자연의 재현물임을 고려할 때, 자연 앞에서 '와 그림같네'라고 말하는 건 사실 쫌 웃긴 일이다. 하지만 그림에서 보았던 것들이 먼저 뇌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지라,그닥 터무니없는 현상이라고 할 수도 없는게 현실이다. 백사막은 아름답고도 신비했다.

 

#15. 두번째, 그리고 마지막 밤... 사막에서의 겨우(!) 두번째이자 어쩌면 평생의 마지막 밤이 다가왔다. 손톱같은 달이 떠오르며 주변은 또 놀라운 적막에 잠기기 시작했는데, 어제와 달리 저 멀리 드문드문 다른 여행객들의 텐트를 볼 수 있었다.

 


 

우 리가 묵은 근처에, 모하메드의 친구인 파더(이름이 파더!)가 이끄는 팀이 머물렀다. 모하메드는 참하고 일솜씨도 좋은데, 왜 친구는 그 모양인지... 어찌나 빼먹고 다니는 물건들이 많은지 주구장창 우리텐트에 와서 뭐 빌려가고, 수다도 장난 아니라, 우리는 은근 그를 미워했다... 거기다, 밤이 되니 모하메드와 오사마를 불러내 언덕 너머 다른 텐트로 놀러가자고 꼬셔대는.... 결국, 이 둘은 밤에 놀러가고 JK 와 나 단 둘이 남았다. 모닥불 옆 노천에 깔개를 깔고, 쏟아지는 별을 온몸으로 맞으며 시시덕거렸다. 별똥별을 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해서 다종다양한 소원들을 준비하고 있었건만, 떨어지는 속도가 너무 빨라 '아, 저기 별똥별'하면 벌써 지나가버린 후... ㅎㅎ 그래서, 그토록 무수한 별똥별을 봤지만 제대로 소원한번 빌어보지 못했다. 밤늦게까지 놀다온 두 총각은 아침에 일어날 줄을 모르고, 할 수 없이 우리 둘이 새벽에 일어나 불을 지폈다. JK 는 현지 영어도 잘 하더니만 모닥불 지피는 실력이 모하메드보다 완전 한 수 위... 물론 나더러, 땔감 구해오라고 쪼아대는 것이 다소 불만이기는 했으나, 아침 쌀쌀한 기운에 따뜻한 모닥불을 쬐며 차를 마시는 기쁨에 그깟 불만이야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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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그리고 나머지 여정.. 아침을 역시 또 거하게 먹은 뒤, 우리는 백사막의 나머지 부분과 흑사막쪽으로 이동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모습.... 떠나는 아쉬움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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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크리스틴과의 조우... 그리고 다시 도시로... 우리는 점심시간이 지날 무렵 마을로 돌아와 크리스틴을 만났다. 그리고 그녀가 차려준 맛난 점심상을 또 게눈감추듯이 치워버렸다. 그녀는 독일 출신이다. 사막에 여행왔다가 지금의 남편과 눈이 맞아 이 사막의 오아시스 마을에 10년째 살고 있는 중이다. 대/단/하/다... 나보구, 이 지역에 의사가 너무 부족하니 눌러앉아 살면 어떻겠냐고 한다. 글쎄... 친구들이 항상 이야기하던 '너는 사막에 던져놔도 잘 살거다'라는 덕담(?)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몸소 확인하기는 했으나, 눌러앉는 건 좀 다른 문제... 그녀의 대담함이 살짝 부러웠더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우리는 미니버스를 타고 카이로로 이동했다. 이 날은 12월 31일.... 우리는 카이로에에서 비행기를 타고 밤에 아스완으로 이동하게 되어 있었다. 2009년 새해 첫 해돋이를 아부심벨의 사원에서 보기로 했던 것....

 

*    사진... 디카의 전원이 사망한 후, 휴대전화로 이것저것 찍어보았다. 의외로 화질이 괜찮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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