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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물들여보아요 ㅜ.ㅜ

외모를 가꾸는데 그닥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나, 가끔 그래도 신경 썼던 것이 머리 염색이다. 꽤나 어린 시절부터 새치가 창궐하여, 상대적으로 어려보이는 얼굴과 함께 기묘한 부조화를 야기하는지라, 주변으로부터 뜻밖의 관심을 받는 경우가 많아서였다. 키가 작다보니, 다른 사람들이 내려다보는 (ㅜ.ㅜ) 일이 많아 더더욱... 더구나 나의 새치들은 어찌나 건강한지, 두껍고 뻣뻣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서있는 아이들이 많아서 더욱 눈에 띈다!!! 한번은 사장님(?)과 같은 엘리베이터 탔다가 '어머, 얘 웬일이니?" 하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ㅡ.ㅡ rawfish는 이런 나의 처지를 궁휼히 여겨, 가끔 새치들을 솎아주고는 했으나, 이제는 그런 수공업적 방법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도 웬만큼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번 주는 정말 주변의 압박이 장난 아니었다. 지난 주말 조교샘 결혼식장에서, (전혀 남의 외모에 신경 안쓰시는) 이웃께서 내 뒤통수에 대고 "웬만하면 염색 좀 하세요" 절규했다. 금요일에는 오랜만에 만난 또다른 샘 한 분이, "아니... 염색 좀... 어쩌다 이렇게..." 그 분은 말을 못이루셨다 ㅡ.ㅡ 심지어, 그날 오후에 있었던 학회 운영위, 점잖으신 C 샘이 결정타를 날려주셨다.내 옆자리에 앉아 씨익 웃으시더니만, "쫌, 뽑아도 될까요?" 이런 젠장... 안 되겠다 하고 있는데, 오늘 점심 때 만난 노가다 장과 주먹도끼마저 잊지 않고 한마디씩 날려주셨더랬다. 대전 내려오자마자, 얼릉 미용실에 가서 염색을 했다. 맨날 머리 잘라주시는 분께서, 마치 돌아온 탕아를 맞이하듯, 기뻐하셨다. 지난 몇 달 동안 머리 자르러 갈 때마다 제발 염색 좀 하라고 얼마나 애원했던가... 장대리의 말대로, 이건 이제 새치가 아니라 그냥 흰머리다. 예전에도, 보고서 한 번 쓰고 나면 흰머리가 화~악 늘고는 했는데, 지난 몇 달간 신경 쓰는 일들이 많다보니 이런 대 참사가 벌어진게 아닌가 싶다... 사실, 나는 거울도 잘 안 봐서 (우리집엔 화장대도 없다 ㅡ.ㅡ) 아무렇지도 않은데, 주변 사람들 서비스 차원에서 염색한거라고 생각한다. 확, 블리치도 넣고 쎄게 해볼까 하다가 역시 주변인들의 시각적 건강을 고려하여 얌전하게 했다... 나는야 진정한 이타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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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차니스트의 식탐...

접미사처럼 항상 입에 붙어있는 말 중에 하나가 '어이구,귀찮아!' 울 오마니가 가끔 물어보신다. "숨쉬는 건 안 귀찮냐?" 그럼 대답한다. "숨도 엄마가 쉬어주면 좋겠네!" ㅎㅎㅎ 이런 귀차니스트가 꼬박꼬박 밥을 해먹으며 (심지어 가끔 도시락까지 싸간다!) 출퇴근을 한다는 것은 게으름을 이겨내는 놀라운 식탐의 힘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러나,귀차니즘의 파워도 결코 만만치는 않은지라, 나의 살림살이는 뜻하지 아니한 과학과 효율을 강조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요리 시작 전에 치밀한 동선 구상, 잠시의 자투리 시간도 용납치 않는 입체적 시간 관리... 그래서 가끔씩 놀랄만큼 빠른 속도로 뭔가를 떡하니 내놓아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고는 한다. 정이는 나의 요리에 대해 가끔씩 의구심을 표명했다. "언니가 한 건, 맛은 괜찮은데 너무 정성이 안 들어간거 같애. 뭐 이렇게 후딱 하는 거야?" 이런 나의 요리 철학에 비추어볼 때, 오랜 시간 국물을 우린다거나, 사전 다듬기 작업으로 시간을 많이 요하는 품목은 진정 레어아이템이다. 그동안 보스턴이나 대전에서 튀김(복잡한 전처리 과정과 두번 튀겨내야 하는 과중한 업무 부담), 짬뽕 (복잡한 전치과정 더하기 국수삶고, 오랜 시간 육수 만들고... ㅜ.ㅜ 진정 필생의 역작!), 오뎅탕 (오랜 시간 국물 우려내기 ㅜ.ㅜ), 월남쌈 (채썰기 죽음 ㅜ.ㅜ), 멜론 (엄청난 해체작업!) 등등을 드신 분들은 스스로를 스페셜 게스트라 여기며 어디 가서 자랑하실만 하다! 최근 나의 요리철학을 배신한 소소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지난 주에, 갑자기 상큼한 부추김치가 먹고 싶어서 생협에 부추 한 단을 주문해버렸다. (이미 이 단계에서 정신줄이 살짝 놓였음) 받아본 물품상자에 곱게 놓은 부추를 보고 순간 흠칫했으나, 되돌릴 수 없는지라 월욜 밤에 요리작업 시작... 일단, 부추를 씻는게 영~ 번거로웠다. 나의 평소 전처리과정 철학 (물에 담가두었다가 대충 헹군다)에 부합하지 않는 해부학적 구조를 가진 식물이었다. 겨우겨우 씻어 3등분으로 잘라놓고 나물이 홈페이지를 들어갔다가 나는 기절할 뻔했다! '밀가루풀'이 필요하단다. 이런 경천동지할... 밀가루풀이라니??? 풀칠하는게 싫어서 항상 스카치테이프 쓰는 사람에게 심지어 풀을 쒀야 한다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 아닌가!!! 겨우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찬장을 뒤져보니, 아뿔싸... 밀가루는 없고 튀김가루 한 봉지와 녹말가루 약간이 나타났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rawfish에게 전화를 걸었다. 둘 중 뭐를 써야겠냐고. 천하의 장금이도 대답을 못하며 망설이더라 ㅡ.ㅡ 그래도 끈적거림의 강도가 튀김가루가 덜할것 같아, 일단 튀김가루로 풀을 쑤었다. 들어나봤나? 튀김가루 풀... 이걸 또 식히고, 마늘 다지고, 기타 양념 추가하여 버무리고 나니까 한 시간이 훌쩍 넘게 지나가버렸다. 정말... 슬펐다. ㅜ.ㅜ 허나 놀라운 것은, 하루를 상온에서 익힌 후 다음날 냉장고에 두었다가 맛을 봤는데, 맛이 썩 괜찮지뭔가! 난 정말 요리 영재인가봐??? 하지만 다시는 이런 뻘짓은 안 하리라 결심했다. 양념이 배어 숨이 죽고 나니까 부추 한 단이 작은 밀폐용기 하나도 가득 채우지 못하더라는... 효율이 너무 낮아 ㅡ.ㅡ 끼니 때마다 몇 올씩, 엄청 아껴먹고 있다. 회한의 부추김치!!! * 뱀발... 어제는 비장의 요리 캐슈넛호두멸치볶음 만든다고 간장양념 만드는데, 맛술 대신 식초를 부어 대박날 뻔 했다. 다행이 아직 멸치에 붓기 전에 사태 파악... 정신줄 놓고 사는게 여기저기서 뽀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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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중간중간 극장에서, 혹은 DVD 로 보았던 영화들에 대한 단상 #1. 스티븐 달드리 감독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2008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영화라서, 풍부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영화라서 좋았다. [타이타닉]에서 처음 보았을 때 그저 예쁜 배우인줄 알았던 케이트윈슬렛은 해가 거듭될수록 진짜 배우임을 스스로 증명해가는 것 같다. 그녀가 있었기에 한나 슈미트에게서 그토록 복잡한 이성과 감정의 딜레마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미국에 있는동안 [뉘렌베르크 트라이얼]을 보았더랬다. 그 때도 집단 속의 개인, 자유의지, 인간의 본성 이런 것들에 대해 열띤 토론과 고민들이 오고갔었다 (대화가 영어로 오갔다는 나름 어려운 점이 있었다 ㅜ.ㅜ). 이 영화를 보고나서도 함께 본 친구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선/악에 대해 분명한 혹은 단호한 판단을 내리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에 공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단계에 이르러서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 어려움... 홀로코스트의 '성실한' 공무원(반인륜적 범죄마저도 성심성의껏 집행한!)이었던 그녀가 20년 동안 수감 생활에서 배운 것이 무엇이었냐는 마이클의 질문에 '읽기'라고 답할 때는 무너져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굳이 20년만에 얼굴을 맞대자마자 과거를 생각해본적 있냐는 마이클의 질문은, 꼭 저 순간에 저걸 물어봐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 우리가 바로 그 질문을 회피했기 때문에 실패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는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녀의 자살이 온전히 사적 세계의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영화평을 보니 원작에서 그녀는 한나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비롯하여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회고록 등을 읽었단다. 죽음의 의미는 한결 복잡해진다 ㅡ.ㅡ 진지한 영화 속에서 한 가지 옥의 티라면... 독일어 교재라면서 왜 책들이 다 영어로 쓰여 있는지... ㅜ.ㅜ


#2.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그랜 토리노]

영화가 어찌나 훈훈하던지!!! 어찌보면 미국판 [워낭소리]로 해석될 수도 있겠으나,조금 더 '냉정하게' 만들어졌다고나 할까? 어쩜 미국이라는 문화적 거리 때문에 내가 좀더 거리를 두고 영화를 바라보고 있어서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다. 아마도 미국인들이 이 영화를 바라보는 감정은 정말 특별할 것이다. 그랜 토리노로 상징되는 백인 노동자 계급의 자부심, 집안 가득한 공구 꾸러미, 크지는 않지만 항상 깔끔하게 정돈된 화단과 집안 구석구석, 맥주와 총... 그리고 전쟁영웅... 눈엣가시 같은 다종다양한(!) 이민자들, 부모의 재산만 탐내는 자식들 (거기다 자동차는 일제!), 장례식장에서 휴대전화질에 빠진 개념상실 손주들이라니... 못마땅한 꼴을 마주할 때마다 눈쌀을 찌푸리며 그르렁거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모습은, 참 그 누구도 흉내내기 힘든 그만의 모습이다. 느끼한 서부의 총잡이가 저리 변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었을까..... 영화가 끝나고 그의 나레이션과 함께 울려퍼지는 노래 '그랜 토리노'는 모든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희망없는 송가처럼 들렸다. #3. 미셸 공드리 감독 [이터널 선샤인] 2004년

은근 호화캐스팅... 짐캐리에 케이트 윈슬렛... 거기에 커스틴 던스트와 엘리야 우드가 조연으로... 참 독특하고 재기발랄한, 그러면서도 작은 애틋함들이 살아있는 괜찮은 SF 로맨스 영화였다. 이별 후에 그리움의 고통을 벗어나고자 기억을 지웠는데도,다시금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더구나 상대방은 기억이 온전한 상태에서)이건 좀 많이 비극이다. 영화의 주제는, 결국 만날 사람은 다시 만나고 사랑에 빠질 사람은 다시 빠지고야 만다는 숙명론??? 무너지는 기억들 (무너지는 건물로 형상화된) 속에서 소중한 기억을 지키고자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짐캐리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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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와 컨텍스트 - 기형도

기형도 시인의 20주기가 되었노라고, 백수 (!) 친구를 꼬드겨 책 선물을 받았다. 완전히 자발적인(!!!) 선물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ㅎㅎㅎ # 박해현, 성석제, 이광호 엮음 [정거장에서의 충고] 문학과 지성사 2009

사실, 나는 기형도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리 많은 줄 몰랐었다. 그의 인기가 이렇게 드높은 줄 안 것은 최근 몇 년... 몇몇이서만 은밀하게 몰두하는 그런 아티스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이돌이었어... 이런 약간의 배신감도 없지않아 들었더랬다 ㅎㅎ 심지어 얼마 전에 들렀던 대학가 앞 서점, 내 앞에 선 대학생이 계산대에 올려놓은 책은 [기형도 전집]이었다. 저 또래의 학생들과 20년이 넘은 시들이 어떤 교감을 하고 있는 것일까? 문득 붙잡고 물어보고픈 생각이 들었다. #. 세대로서의 공감 책 앞부분에는 (나와 비슷한 또래)시인들의 대담이 실려있다. 어떻게 그를 만나게 되었고, 무엇에 공명했으며, 자신들의 삶에서 혹은 시에서 그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었는지... 세대론에 그닥 공감하는 편은 아니지만,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경험들을 하고, 또 비슷한 것에 감흥했던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그 무엇이 좀 애틋하게 느껴졌다. 시인의 죽음이 가져온 신비화와 극적 효과를 떨쳐버리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였다는 이야기 - 내가 괜히 유행에 편승하는게 아닌가, 죽음으로 인해 그의 시들이 과대평가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내외부를 향한 의심!!! - 들에는 참으로 공감이 갔다. 우리는 이미 '요절하기에도 늦은 나이'라는 한 시인의 날카로운 지적과 '지금 죽으면 그냥 사망'이라는 시시껄렁한 농담마저도 ㅎㅎ 한편으로, 요절이라는 것이 단순히 사망 시점의 나이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진정성이 사라진 이 시대, 지금은 어느 나이에 죽어도 요절은 불가능하다는 지적은 참... 80년대 학번들이 (물론 모두는 아니지만) 낮에는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고 밤이면 그들이 허용해준 동시상영관에서 에로영화를 즐기는 그로테스크한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와는 조금 다르지만, 학교에서는 박노해와 백무산의 시를 읽고 (또 대자보에 베껴쓰고), 밤이면 기형도의 시를 홀로 읽으며 조용한 위로를 받았다는 증언... 또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거리감과 한편으로 (기이한 죄책감을 동반한) 즐거움을 얻는 이들이 지닌 윤리적 감수성이 머무는 지점에 바로 기형도 시인이 위치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 어쨌든, 텍스트와 컨텍스트는 분리될 수 없고, 그것이 부당한 혹은 과도한 아우라를 낳던 그렇지 않던 간에, 시인이 살았던 시대와 그의 시, 또 그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시를 분리하는 것은 영영 불가능한 것 같다.


# 시인과 시 기형도의 시는 (몹시도) 어두워보인다. 혹자는 그의 시가 죽음을 예감했다고 사후 논평을 하기도 했고, 누구는 또 그 어두움의 기원을 찾으려 애쓰기도 했다. 불우했던 유년 시절... 하지만 그의 절친했던 동료들이 이야기하는 그의 삶은 그렇게 멜랑콜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시가 어둡다고 시인이 어두운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그 시가 글쓴이와는 아주 무관한 그저 허구의 말장난 인것도 분명 아니리라. 50대 아저씨가 10대 소녀의 아바타로 위장하고 사이버 세계에서 활동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와 시인의 관계는 약간, 서로 독립적인 것 같다. 이미 20대 중반의 나이에 세상을 다 살아버린 듯 치기어린(?) 단정어를 구사하고 끊임없이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들이 감정의 과잉이나 작렬하는 자기애로 나타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일상의 유쾌함과 꼼꼼한 성정 탓이 아닌가 싶다. 예의 그 껄렁한 문장으로 그려진 성석제의 회고는 우리가 대학시절 친구를 추억하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 "... 저녁이 되면 시장 안의 술집으로 가곤 했다. 기형도는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술자리에 자주 어울리다보니 알코올의 도움이 없이도 웬만한 술꾼 정도의 주정을 부릴 줄 알게 되었다. 그 재간을 자주 보여주지는 않았다." ㅎㅎㅎ # 자기 통제와 죽음 기형도는 무척이나 꼼꼼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짧은 여행의 기록] 앞부분에 보면 그의 누이가, 동생 허락도 받지 않고 이렇게 그의 글을 세상에 내보여도 되는 것인지 걱정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게나 말이다... 그의 유고시집과 산문집을 읽으면서 나는 묘한 죄책감을 느꼈더랬다. 어쩜 이건 보여주고 싶지 않았었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들을 세상에 알려준 누이와 친구들에게 독자로서의 고마움과, 자기통제를 열렬히 지지하는 한 인간으로서 그들의 행위에 대한 살짝의 원망... 이 양가감정은 뭐다냐...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어느날 준비되지 못한 죽음을 맞는다면 과연 나의 생을 온전히 '파악'하고 정리해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확신컨데, 전모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ㅎㅎㅎ 특별히 사생활(?)이 복잡하고 비밀이 많은 건 아닌데??? 혹시 다중인격??? 그래서, 통장번호나 연루된 인간관계 종류와 특성, 명단 같은 거를 일목요연하게 만들어둬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끔씩... 갑자기 포스팅이 삼천포로 흐르고 있다.ㅡ.ㅡ #. 김훈의 글 그에 대한 송가 중 애절하기로는 전연욱의 [안개]가 으뜸인 것 같고, 산문으로는 김훈의 것이 아마도... "... 형도야, 네가 나보다 먼저 가서 내 선배가 되었구나. 하기야 먼저 가고 나중 가는 것이 무슨 큰 대수랴. 기왕지사 그렇게 되었으니 뒤돌아 보지 말고 가거라. 너의 관을 붙들고 '이놈아 거긴 왜 들어가 있니. 빨리 나오라니깐' 하고 울부짖던 너의 모친의 울음도, 그리고 너의 빈소에서 집단 최면 식의 쌈움판을 벌인 너의 동료 시쟁이들의 슬픔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생사를 거듭하지 말아라. 인간으로도 축생으로도 다시는 삶을 받지 말아라. 썩어서 공(空)이 되거라. 네가 간 그곳은 어떠냐..... 누런 해가 돋고 흰 달이 뜨더냐." 시인이 살아있었더라면 향년 50세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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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념무상의 세월

요새 왜 이리 정신줄을 놓고 사는지 모르겠다. 출근해서 무슨 일인가를 미친 듯이 해나가는 와중에 (그 중 태반은 잡일이다 ㅜ.ㅜ) 나의 이성적 정신줄과 더불어 영혼이 실종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문득문득 든다. 바깥 날씨는 청명하고도 포근하건만, 그토록 갈구하던 호연지기의 약발은 형편없고, 각종 일과 논문은 하염없이 늘어지고... 어데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은 불안감..... ㅡ.ㅡ 도대체 바쁜 와중에 봄 나들이는 왜 다녀온 건지 모르겠다. 효과가 이틀도 안 가...ㅜ.ㅜ 알랭 드 보통이 [여행의 기술]에 언급했던 내용을 다시 옮겨본다. "도시의 '떠들썩한 세상'의 차량들 한가운데서 마음이 헛헛해지거나 수심에 잠기게 될 때, 우리 역시 자연을 여행할 때 만났던 이미지들, 냇가의 나무들이나 호숫가에 펼쳐진 수선화들에 의지하며, 그 덕분에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의 힘들을 약간은 무디게 할 수 있다." "인간의 삶도 똑같이 압도적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태도로, 가장 예의를 갖추어 우리를 넘어서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은 아마 자연의 광대한 공간일 것이다. 그런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면, 우리 삶을 힘겹게 만드는 사건들, 필연적으로 우리를 먼지로 돌려보낼 그 크고 헤아릴 수 없는 사건들을 좀 더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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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나들이

이집트 여행기 나머지 반은 기약없이 멀어져가고... ㅡ.ㅡ 심지어 사진 정리도 안 했는디... 그래도 좀 쉬운 최근 기록부터 남겨본다 # 다시 찾은 백양사... 아마도 3주전쯤 (?)으로 기억되는데,그냥 별 계획없이 훌쩍 백양사에 다녀왔다. 그 유명하다는 벚꽃은 아직 실마리조차 찾아볼 수 없었으나, 하늘은 더할나위없이 푸르고, 나무에는 막 물이 오르며 생기가 돌기 시작하고 있었다. 백양사를 찾을 때마다 항상 그랬듯, 들어가는 길과 절집 마당은 고즈넉하기 그지 없었고 뒷산에서는 신비로운 포스가 ㅎㅎ 대웅전 뒷마당 탑 앞에 자그맣게 놓인 동자상... 돌받침 위에 나뭇잎 한장 놓아준 이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그 좋다는 단풍철과 벚꽃철을 피해가는 것이 쪼금 아쉽기는 해도, 창문넓은 무궁화호 덜컹거리는 객차, 그 한가로운 절집 정경과, 역시 또 한가로운 백양사 역, 장성호를 끼고 도는 그 한적한 버스길... 이 모든 것이 주는 위안은 쫌 많이 소중하다 ... 마음을 어루만져준다고나 할까... 이번 여행에서 추가로 알게 된 것은, 백양사 앞 '사거리'가 네 거리이기도 하지만 행정구역 이름도 사거리라는 사실 ㅎㅎㅎ


# 통영 국제 음악제 출석 점검? 아마도 음악제는 세번째, 출장 겸 나들이까지 포함하면 아마도 다섯번째쯤 되는 것 같다. 이제 나름 익숙한 곳들도 생겨서, 같이 간 동행인들이 나에게 현지인을 사귀고 있는 것 아니냐는 해괴한 비난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ㅎㅎㅎ 지난 번 음악제 때는 엄청 난해한 현대음악을 듣다가 잠시 정신줄을 놓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었으나, 이번에는 정말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다. 로비 라카토시 [집시 바이올린]이라는 공연... 장대리께서 현지에서 표를 구하느라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다행히도 성공하여 공연도 따로 또 같이 즐기고, 주먹도끼를 꼬셔 음반까지 장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ㅎㅎ 리더 아자씨와 바이올린 이주자 빼놓고는 모두 20대의 젊은 피 프로젝트팀이라는데, 20년 연주했다는 늙수그레 아자씨와 20대 주자를 구분하기 어려운 그 외모란 ㅎㅎㅎ 유쾌함과 애잔함이 공존하는 집시 음악에 완전 매혹되었다. 그 현란한 손놀림들!!! 도대체 얼마나 연습들을 한 거야.... 난 항상 연주자들에게 경의를!!!

달아공원은 마지막 갔을 때와 달리 완전 '정비'를 하고, 휴게소도 커다랗게 짓고 있었는데 예전같은 고독한 맛은 좀 줄어들은 것 같아 아쉬웠다. 정자에 앉아 충무김밥 게걸스럽게 뜯어먹던 여인들에게, '고독'이란 안 어울리는 단어이기는 하다만... 다음 주 (즉 이번주!)에 벚꽃 축제가 열린다했으니, 당시에는 막 꽃들이 기지개를 켜던 시점..... 음악회 끝나고 시민문화회관 언덕에서 몇 장... 꽃들 너머로 보이는 통영항의 모습은, 나에게 있지도 않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참...이번에는 충무김밥, 도다리 탕수와 짬뽕, 굴국밥 - 이렇게 3종의 맛난 끼니를 즐겼다. 일정이 충분치 못해 도다리 쑥국, 장어, 꿀빵 등은 아쉽게도....ㅡ.ㅡ * 뱀발.... 이런 거 블로그에 자꾸 올리니까 사람들이 나를 한량으로 아는 경향이 있다. 백퍼센트 틀리다고는 못하겠으나, 그런말 들으면 살짝 억울한 감정이 드는 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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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어울리는 조합의 책들..

책 읽고 메모 남기는 것도 일이다. 기록 없이 기억도 없다는 슬픈 현실을 인정하고 몇 글자라도 끄적끄적... #1. 매일노동뉴스 편집국 [현장을 가다] 2008

우연히 채널을 마주치면 입이 쩍 벌어지는 달인의 솜씨에 잠시 정신줄을 놓다가도, 정말 저래도 되나 싶어 항상 마음을 찜찜하게 만드는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가 있다. 노동안전보건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완전 황당한 프로그램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나마 생활인으로서의 평범한 노동자들이 등장한다는 측면에서는 나름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 한국사회에서 생산직, 서비스직 노동자는 미디어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노사상생을 노래하는 공익광고나 산재예방 광고를 제외한다면.... 나머지, 모든 '직장인'(노동자 말고!)들은 쿨한 캐주얼 웨어 혹은 맵시나는 정장을 입고 사무실 책상앞에서 일한다. 사실은 일도 잘 안하고 연애질에 권모술수, 집안 싸움만 하는게 보통이긴 하지만 ㅡ.ㅡ 매일노동뉴스의 [현장을 가다]는 그래서 참 소중한 기록물이다. 조롱하지도, 비탄하지도, 저주하지도 말고, 그저 이해하라는 스피노자 할배의 말씀처럼, 노동의 현장을 '연대의 마음으로' 착실하게 그려내고 있다. 제조/건설, 금융/서비스, 공공부문의 3부로 이루어진 글들에서, 그야말로 세상을 만들어내는 노동자들의 자부심, (생활의 달인에 등장할법한) 현란한 재주와 기술들, 자신이 몸담는 일터에 대한 사랑, 동료 노동자들에 대한 믿음 들을 읽을 수 있다.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 존재하는 누군가의 노동 (그 노동없이 당연히 존재할 수 없는 생산품과 서비스를 앞에 두고도, 나는 너무 자주, 그들의 존재를 잊는다), 때로는 목숨을 내걸고 나서야 하는 험난한 출근길, 점증해가는 고용불안과 팍팍해지는 노동의 댓가... 그리고 이런 것들이 빠져있을리 없다. 현상들을 종합하고 추상을 통해 일반화를 시키는 것이 연구자의 장기이자 소명이라고 하지만, 이런 생생한 일상들을 누군가 대신 그려주지 않는다면 그런 '연구'가 가능이나 할까? 고마운 책이다. 책에 등장했던 모든 분들, 취재하느라 고생한 분들... 모두에게 연대의 마음을!!!


#2. 고종석 [어루만지다 -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마음산책 2009

하드커버에다 표지가 너무 대놓고 '어루만지다'를 표현하고 있어 살까말까 잠시 고민했었다. 그래도 고종석의 말/글 책들은 그닥 실망시킨 적이 없어서 또 질렀다. 거듭 확인하는 사실이지만, 이 분의 감수성은, 통상적인 그 세대 한국 아저씨의 것은 분명 아니다 ㅎㅎㅎ 사랑이라는 모티브와 관련된 단어들을 중심으로 글을 풀어놓았는데, 저자가 앞에서 분명히 밝히듯 이건 연애지침서나 사랑학교과서가 아니라 말글 에세이다. 그래도 주제와 관련된 저자의 평소 지론이 드러나는 건 어쩔 수 없다 ㅎㅎ 단어들은 입술, 혀놀림(?), 미끈하다(?)처럼 성애와 좀더 관련시켜 설명한 것들도 있고, 딸내미, 누이처럼 또다른 종류의 애틋한 사랑에 관한 것들도 있고... 참 다양했다. 소개된 많은 어휘들 중 가장 마음을 끄는 아름다운 한국어라면, 역시 제목에 언급한 '어루만지다' 아닐까 싶다. 그것이 누군가의 볼이던, 혹은 마음이던, 그 어루만진다는 구체적/추상적 행위를 그 어떤 다른 말로 대신 표현할 수 있을까??? 몇 가지 허거덕 하는 내용들도 있었다. "...사랑을 낳는 것은 가느다란 신경일테다. 사랑은 무딘 신경. 씩씩한 마음에서 나올 수 없다..." ㅎㅎㅎ 주변사람들이 나보구 성격이 고래심줄 혹은 쇠심줄(영어로는 nerve of steel!!!) 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오늘날 이모양이구나... 큰 깨달음이었다!!! 또 사랑을 함으로써 자기자신(원래 으뜸 존재)과 사랑하는 대상 (버금 존재)의 우선순위를 바꾸게 된다는 점에서 "... 사랑은 정신의 질병이랄 수도 있다" 라고 썼다. 예전에 강유원은 [책과 세계]에서 정신이 병든 자만이 책을 읽는다고 했었다 (마치 병든 사자가 풀을 뜯어 먹듯이!)... 고로, 고종석과 강유원의 주장을 합쳐보자면, 정신이 병든 자는 참 다양한 일을 하는 것이다. 병원에만 가는게 아니라 무려 사랑도 하고 책도 읽는다 ㅎㅎㅎ (옆에서 사자는 풀 뜯어먹고!) #3.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벨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모티브북 2008

벨훅스의 책은 처음 읽어보았다. 어떤 독자들을 상정하고 책을 썼는지 좀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뭐랄까? 책 전체가 마치 서론처럼 느껴졌다. 뭔가 본론이 나올것 같으면서도 안 나오는 ㅡ.ㅡ 일단, 저자가 생각하는 '계급'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베버나 마르크스 류의 개념적 정의를 해야한다는 건 아니지만, 계급에 대해 논한 책에서 정작 본인이 생각하는 계급이 무엇인지 말해주지를 않으니, 상당히 애매하더라는... 사회과학적 훈련이 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모호한 상태와 그닥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 재산? 학벌? 집안? 가난??? 어쩌면 사회의 위계 그 자체를 나타내려고 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다보니, 이 현실을 어떻게 극복해나가야 할지도 애매하게 기술되어 있다. 또 한편으로는, (흑인)공동체주의가 살아있던, 그리고 가난하지만 현명했던 부모님 세대의 그 시대에 대한 저자의 목가적 향수도 느낄 수 있었다. 일찍이 루소도 안타까워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시절을 되돌릴 수는 없잖아요? 우째야한단 말입니까.... 이런 종류의 책도 쓰고 교육도 열심히 하고, 사람들이 현실을 직시하도록 만드는게 첫걸음이기는 할텐데, 어째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말씀만 들어있어서 뭔가 2% 부족한 갈증이 채워지지 않는달까..... ㅡ.ㅡ 한편, 가난한 흑인 노동계급출신으로서, 명문 사립대학을 졸업하고 주류세계에 편입한 저자가 마주쳤던 곤혹스러운 현실, 그리고 그렇기에 항상 깨어있을 수 있는 (어쩌면 축복받은) 조건들에 대한 기술에는 일백퍼센트 공감했다. 이런 신분상승의 경험을 통해 누군가는 피에르 부르디외나 벨훅스같이 뛰어난 성찰을 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해봤어? 안해봤음 말을 마세요' 하면서 자수성가 제일주의로 주변에 상당한 민폐를 끼치기도 한다 ㅡ.ㅡ (그 대상이 온 국민 전체가 되버리면 정말 괴롭다!) 그나저나 원제가 [Where we stand: class matters] 인데 왜 한국어판 제목은 저 모양인지? #4. 벨훅스 지음, 윤은진 옮김. [경계넘기를 가르치기] 모틔브북 2008

위의 책을 읽는 중에, 친구네 집에 놀라갔다가 이 책을 발견하고 빌려서 읽었다. 전자에 비해 훨씬 재미있게,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다. 가르친다는 것에 대해 이런저런 고민을 던져주었는데, 딱히 답은 잘 모르겠다. 베버의 지론과는 상충하는 이 열정적인 페미니스트 선생님의 스타일이 바람직해보이기는 하면서도, 나보고 하라하면 별로 하고 싶지 않은 ㅡ.ㅡ; 아마도 학교를 다니면서 하도 싸이코같은 인간들을 많이보고, 도덕적 감화는 고사하고 다른 거 안 바라니 선생이면 전공과목만이라도 제대로 가르쳐라... 이런 결론으로 살아왔기 때문인 듯... 앞서의 책보다 저자의 유연하고 민감한 모습이 잘 드러나 있어서 좋았다. 이를테면 파울로 프레이리에 대한 태도 - 가부장/백인중심주의의 잔영을 비판하면서도 페다고지 이론 자체의 전복적 성격과 선생의 상호존중하는 태도를 존경하며 적극 수용하는 모습 - 몇몇 인상적이었던 구절을 남겨둔다. ".. 나는 자아실현과 거리가 먼 대학은, 책에 쓰인 지식은 잘 알고 있지만 그 외의 사회적 상호작용에는 부적격인 이들에게 안식처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교육이 자유의 실천이라고 한다면 학생에게만 참여하고 고백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학생들에게는 위험을 감수하라고 하면서 교사 자신은 비난받기를 거부한다면 역량 강화는 일어날 수 없다." "'이론'이나 '페메니즘' 같은 특정한 용어들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이론화를 실천하거나 페미니스트 부쟁에 참여하는 삶의 방식을 지닌 실천가는 아니다. 용어 만들기라는 특권적 행동을 함으로써 권력을 가진 이들은 의사소통방식을 이용할 권리를 얻으며, 자신들의 연구와 행동을 설명하고 정의하고 묘사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많은 환경에서 지식인들이 퇴출되고, 이론이 종적을 감추며, 침묵이 이어지는 상황을 목격해왔다. 침묵은 공범자가 되는 행위이며, 침묵은 우리가 이론 없이 혁명적인 흑인 해방과 페미니스트 투쟁에 참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영속시키는데 일조한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 예를 들면, '흑인성'의 이론을 구축한 몇몇 엘리트 학자들은 그 흑인성을, 선택된 소수만 들어갈 수 있는 결정적 영역으로 만듦으로써 - 인종에 관한 이론적 연구를 이용하여 흑인 경험 영역의 권위를 주장하며, 이론 구축 과정에 민주적으로 접근하기를 거부한다 - 흑인 해방 투쟁을 위협한다. 우리 중 일부도 반주지주의를 조장하고 모든 이론은 가치가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이들에 호응하여 흑인 해방을 위한 공동의 투쟁을 위협한다. 이들 두 집단은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었다는 생각을 강화하거나, 이론과 실천의 분리를 조장함으로써 비판 의식을 길러주는 해방 교육의 힘을 부인하며, 그결과로 우리를 집단적ㅇ그로 착취하고 억압하도록 강화하는 환경을 영속시킨다." "정체성 정치학은 억압되거나 착취당하는 집단이 벌이는 지배 구조를 비판하는 관점, 즉 투쟁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는 위치를 갖고자 하는 투쟁으로부터 발생한다. "진보적인 교수 대부분은 어떻게 계급 편견이 교실에서 일어나는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지 의문을 갖고 자신의 교육 과정을 개혁하는 경우보다는, 마음 편하게 기존의 연구 자료에 담긴 계급 편견에 도전하려고 애쓴다..." "학교는 낙원이 아니다. 그러나 배운다는 것은 낙원이 만들어질 수 있는 장이다. 교실은 가 자체로 한계가 많지만, 가능성을 지닌 장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가능성의 장애서 우리는 자유를 얻으려 노력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며, 우리 자신과 우리의 동료에게 우리가 경계를 넘어가려 할 때 겪는 현실에 맞서게 해줄 개방된 사고와 마음을 가지라고 요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이것이 자유실천으로서의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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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와 루소

바쁘더라도 저녁나절 30분은 좀 차분히 앉아 '재미있는' 책을 읽어보자는 결심을, 나름 잘 지켜나갔던 3월이었다. #1. 막스 베버 지음, 전성우 옮김 [직업으로서의 학문] 나남 2006

크나큰 가르침을 얻기는 커녕, 현재의 업을 접어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폭풍같은 회의감이 밀려왔던 책이다. 학문, 혹은 가르친다는 것에 대한 소명도 없이 어쩌다보니 이 바닥에 발을 들여놓고, 또 딱히 다른 것을 잘 하는게 없어서 어영부영 머무르고 있는 자신을 심각하게 돌아보았다. 번역하신 분도 괴로워하신 걸 보니, 나만의 고민이 아님은 분명하다. * 학자가 되는 길의 외적 내적 조건 이미 20세기 초에 독일에서 학자가 된다는 것의 금권적 기반을 예리하게 지적한 것은 다소 놀라웠다. 또 요행이 이 정도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직업이 어디 또 있을까 하는 장탄식, '학자의 길은 거친 요행의 세계'라는 지적에서 나도 모르게 깊은 공감의 한숨을 ㅡ.ㅡ 외적 조건보다 더욱 문제되는 것은 내적 조건 - 열정과 소명의식이다. ".. 일단 눈가리개를 하고서,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 "학문영역에서 순수하게 자신의 주제에 헌신하는 사람만이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학문영역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예술가치고 자기 일에, 그리고 오로지 자기 일에만 헌신하는 것 이외에 다른 일을 한 예술가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괴테같이 위대한..." 결국 나보구 공부 그만두라는 소리다 ㅜ.ㅜ * 합리화 과정과 학문의 발전 "... 진실로 '완성'된 예술품은 능가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또 그것은 낡아버리지도 않습니다....학문상의 모든 '성취'는 새로운 '질문'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성취'는 '능가'되고 낡아버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능가된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운명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멀리 나아가기를 희망하지 않고서는 연구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진보는 원칙적으로 무한히 계속됩니다." 베버는 오늘날 특허와 지적 재산권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는 과학계의 비밀주의와 배타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주지주의화와 합리화, 즉 현실세계의 탈주술화가 학문의 소명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나 원래 계몽주의자?) *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 베버는 강단과 정치의 분리, 가치판단과 사실 판단의 분리, 교수와 지도자의 엄밀한 분리를 극도로 강조한다. (미국과는 달리) 권력관계가 두드러진 (독일의) 강의실에서 교수에게 요구되는 것은 학생들이 스스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적 성실성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 나도 학부의 정규수업시간에는 팩트 이외에 사회적 발언을 절대 하지 않는다. 권력관계가 작동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원 수업은 좀 다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도 든다. 요즘같은 세상에 선생이 이야기한다고 그대로 믿고 따라오는 학생들이 있기나 할까? 선생의 영향력을 오히려 내가 너무 과대평가하는 건 아닐까? 그리고 주류집단의 지속적인 이념세례 속에서 한마디 정도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하워드 진이나 벨 훅스가 강의실에서 보여준 태도들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원칙에서 베버의 의견에 절대 공감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대학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하워드 진이나 벨 훅스의 교수법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것이 강단을 저급한 선동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팩트를 종합하고 전달하는 것 또한 가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고려한다면, 학생들로 하여금 가려진 진실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 결과가 보수적 온정주의가 되든 급진적 공동체주의가 되든 학생들 스스로의 길을 결정하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정작 어려운 것은, 더이상 성찰과 진지함이 사라져버린 강의실에 어떻게 진정성을 불어넣느냐 하는 것... 학교, 교육제도, 선생을 모두 하찮은 존재로 여기며 보내왔던 지난 시절의 개인적 경험들로 핑게삼아, 좋은 학자, 좋은 선생의 자질에 대해 생각조차 해보지 않고 지난 수년을 보냈다는 게 좀 한심스럽다. 다른 거 마땅히 할 것도 없으면서... (어릴 적에, 돈 벌어서 만화가게 차리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닌 거 같아 ㅜ.ㅜ)


# 2.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고봉만 옮김. 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 2003

해미와의 첫 책모임 이후 도대체 '사회' '공공'이 무엇이지 답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옛 민주노동당 시절 진보정치연구소에서 펴낸 "사회국가'를 살펴보았다가 잔뜩 실망하고, 고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둘 다 루소 할배의 팬이 되었다. 이 분 엄청 발랄하셔!!! 이 텍스트는 평소의 내 지론대로 컨텍스트와 분리하여 생각하기 어렵다. 디드로를 비롯한 백과전서파가 얼마나 미워했을지 이해가 충분히 된다. 중세의 미몽으로부터 깨어나 겨우 탈주술화/계몽의 가치가 성장해나가기 시작한 그 시점에서, 기술과 학문의 발전이 불평등과 패악의 원인이라 주장하며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했으니, 계몽주의자들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ㅎㅎㅎ (현실적으로 되돌릴 수 없는) 과거로 회귀하자는 그의 발상이 목가적 낭만주의를 얼마나 뛰어넘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 (당시의) 불평등이 결코 '인간의 본원적인 상태'가 아니며, '사회와 정신'이 낳은 인위적 상황이라는 예리한 통찰, 법과 제도로 고착화된 추악한 전제군주제에 대한 비판은, 왜 루소의 사상이 프랑스 혁명의 정신적 자양분이라 일컬어지는지 잘 말해준다. 그리고 책의 곳곳에 드러나는 앞서간 (!) 사상은 입을 쩍 벌어지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논문의 헌사에서 제네바공화국 의원들에게 "... 그들 (시민들)은 교육뿐만 아니라 타고난 자연의 권리에서도 당신들과 대등하며, 자신들이 당신들보다 낮은 지위에 머무르는 것은 스스로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 생각하고 당신들의 가치를 인정하여 자진해서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도 그들에게 일종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또 시민의 절반인 '여성'에 대한 언급, 그것이 비록 오늘날의 페미니스트적 관점과는 전혀 다르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로서 여성을 언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웠다. 사랑과 정념의 기원에 대한 나름 냉철한(?) 추론 또한 흥미진진 ㅎㅎㅎ 인간의 이성보다 앞서는 두개의 원리로 자기애와 더불어 '연민'을 꼽고, 이를 확장하여 동물이 불필요하게 인간으로부터 학대받지않을 권리가 있다고까지 언급한 것은 더욱 충격... 연민이라... 루소는 근본적으로 인간을 선한 존재로 바라보았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본능적으로 함께 아파하는 이 마음.... 오늘날, 특히 한국사회의 특성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어쩌면 연민이 사라져가는 사회? 가장 인상적이었던 표현은 이것이다. "어떤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땅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믿을만큼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최초의 인간이 문명사회의 실질적인 창시자이다. 말뚝을 뽑아버리고 토지의 경계로 파놓은 도랑을 메우면서 동류의 인간들을 향해 '저런 사기꾼의 말을 듣지 마시오. 과일은 모두의 소유이고 땅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는다면 당신들은 파멸할 것이오'라고 외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얼마나 많은 죄악과 싸움과 살인, 얼마나 많은 비참과 공포에서 인류를 구제해주었을 것인가?" 읽은지 오래되어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 이렇게 재치있는 말투로 쓰여지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중고등학교 시절 고전이라면 고개를 내저었던 것이 한편으로 한심하기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기도 하다. 그 시절에 이 책을 읽었다면, 임무를 완수했다는 자부심 이외에, 얼마나 이 내용과 맥락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나이를 먹고, 경험과 지혜(??? 그냥 지식이라고 하자 ㅡ.ㅡ)가 쌓이는 것이 반드시 나쁜 일만은 아니다. 참, 이 책이나 베버의 책 모두 보기 드물게 번역글이 아주 매끄럽고, 참고문헌과 해제도 충실하다. 문고판이라 부담도 없으니 주변인들께 널리널리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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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칭 대명사

지난 주말에 친구들과 적절한 2인칭 대명사에 대한 잔잔한 토론을 벌였다. 윗사람은 오히려 문제가 안 되는데, 나이가 어리거나 직급이 낮은 경우 어떤게 가장 적절한 호칭인지, 본인이 각자 들어본 호칭의 종류와 그 반응 등등을 심도깊게 ㅎㅎㅎ 아무개 씨 라고 이름을 부르거나 아주 친한 사이면 아무개, 혹은 너/네 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닌 경우 쫌 애매한게 사실이다. 그리고 후배들이라고 해도 이제는 나름 다 사회인들이라, 함부로 불러제끼기 어렵다... 교수님 박사님 선생님 같은 사회적 지위 칭호없이 서로를 존중하며 평등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호칭은 뭐가 좋은게 있을까??? 아시는 분 답 좀..... ------------------------------------------------------- 1. 당신 「1」듣는 이를 가리키는 이인칭 대명사. 하오할 자리에 쓴다. 「2」부부 사이에서, 상대편을 높여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 「3」맞서 싸울 때 상대편을 낮잡아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 「4」‘자기03[Ⅱ]’를 아주 높여 이르는 말. - 주로 내가 애용하는 단어.... 나는 주로 1번의 용례라고 생각해서 쓰는데, 듣는 사람은 3번으로 듣는거 같다 ㅎㅎㅎ 이를테면 '당신이 그러면 안 되지~' 고종석에 의하면 멱살잡이 일보직전의 표현이라는디... 2. 자기: 앞에서 이미 말하였거나 나온 바 있는 사람을 도로 가리키는 삼인칭 대명사. - 나랑 주먹도끼는 '자기'라는 표현을 엄청 싫어한다. 대개 여자 선배나 여성 상급자들이 많이 사용하는데, '내가 왜 자기네 자기야?' 하면서 불평했던 기억이 난다. ㅎㅎ 하지만, 장양은 이걸 선호하는데다 심지어 하급직 남자직원들한테도 꼭 '자기'라고 한댄다. 나같으면 엄청 싫을 것 같아... 무섭게 생긴 누나가 '자기'라니!!! 그리고 심지어 2인칭도 아니고 3인칭 대명사잖아!!! 3. 자네: 듣는 이가 친구나 아랫사람인 경우, 그 사람을 높여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 하게할 자리에 쓴다. 처부모가 사위를 부르거나 이를 때, 또는 결혼한 남자가 처남을 부르거나 이를 때도 쓸 수 있다. - 주먹도끼가 애용한단다. 나는 아주 윗사람 (이를테면 나이 많으신 원로 교수님들)한테 들어본 적은 있지만 내가 써본적은 없다. 나이차이도 얼마 안 나는 사람이 쓰면 기분나쁠것 같은디??? 4. 기타 1) 귀하: 듣는 이를 높여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 ≒존하(尊下). - 주먹도끼는 가끔 이걸 쓰기도 한다는디, 자네와 귀하를 같이 쓰는 건 무슨 무개념 용법??? 2) 댁: 듣는 이가 대등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나 아랫사람인 경우, 그 사람을 높여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 - 내가 자주 쓰는 표현. 이를테면 '댁은 생각이 어떠슈?' 근데 앞의 '당신'과 마찬가지로 별로 높임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게 문제다. 내가 껄렁하게 말해서 그런가? 3) 유 (you) - 이런 해괴한 표현을 하는 작자가 있을까 싶으나 장양은 적지않게 들어보았단다. '유가 그러면 어떡해요?' 이런 식... 이거 묘하게 막말스럽다 ㅡ.ㅡ 4) 임자 「1」나이가 비슷하면서 잘 모르는 사람이나, 알고는 있지만 ‘자네’라고 부르기가 거북한 사람, 또는 아랫사람을 높여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 「2」나이가 지긋한 부부 사이에서, 상대편을 서로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 「3」『북한어』‘자네’라는 뜻으로 허물없이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 - 이거는 내가 들어본 표현인디, 노인정에 나와 앉은 느낌이다 ㅎㅎㅎ 한국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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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진보신당] 글로벌 스탠다드를 따라주세요!

원래 지난 주에 썼는디, 발간이 한 주 지연되어 이번 주에 업로드가 되었다. 빛보다 빠른 속도로 내 차례가 돌아오는 것 같다 ㅜ.ㅜ 지난 2주는 영리법인 도입 문제로 한겨레, 프레시안, 오마이뉴스에 기고글과 칼럼들이 그야말로 폭주했었다. 그래도 이분들 마이동풍이니... 참 미치겠다. 이 와중에 좀 당황스러운 것은, 진보신당이 제시한 올해의 4대 중점의제에 보건의료 사유화 문제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 주에 더 논의를 한다고는 하는디... ㅡ.ㅡ ----------------------------------------------- 예전에 인기를 끌었던 한 증권사 광고 기억나세요? 모두가‘예’라고 할 때 혼자 ‘아니오’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좋다던! 부화뇌동하기 쉬운 세상에서 신념과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로망을 드러낸 좋은 광고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분들을 보면서 과연 이러한 평가가 적절한 것이었는지 의구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광석화와 같은 손놀림으로 종부세를 순식간에 무력화시켰던 그 분! 홀연히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라는 옷으로 갈아입고 나타나 베이브 루스가 홈런 방향을 지목하듯 단호한 의지로 의료민영화의 한길로 매진할 것임을 밝힌 그 분, 그리고 그 절친들! 지난 한 주 동안 그 분들은 예의 그 능수능란함으로 ‘의료민영화’ 논의를 다시 전면화시켰습니다. 하지만, 잠깐 바깥으로 눈을 돌려 볼까요? 요새 뉴스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미국의 경제위기 상황과 오바마 정부의 다급한 대응 정책들이 소개됩니다. 한국에서 주로 보도되는 내용은 다우 지수 동향, 은행이나 자동차 회사들에 대한 구제금융 등이지만, 미국 내에서 보건의료 분야의 개혁은 상당히 중요한 이슈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 워싱턴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주최한 ‘보건의료개혁 대토론회’가 열렸습니다. 한국에서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가 ‘의료제도 선진화를 위한 토론회’를 열었던 바로 전 날입니다. 여야, 진보/보수를 떠나 미국인들의 시름은 깊습니다. OECD 국가들 전부를 다 합친 것에 맞먹는 천문학적 의료비 지출, 하지만 대한민국 인구수에 버금가는 무보험자의 수, 쿠바와 비슷한 평균 수명, 영아 사망률... 우리가 이미 ‘식코’라는 영화를 통해 익숙해진 바로 그 문제들 때문에 말입니다. 바다건너 미국인들이 그토록 벗어나고자 하는 (하지만 잘 안 되는!) 이 골칫덩이를 한국사회에 얼른 들여오지 못해 안달이 난 분들의 신심은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하나같이 많이 배우신 분들이니 그 명성을 모를 리 없을텐데,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조셉 스티글리츠, 폴 크루그먼 교수의 쓴 소리는 왜 못 듣는 척 하는 걸까요? 사보험 중심, 영리화된 보건의료 체계는 건강권 문제를 떠나 경제학적으로도 문제가 많다는 지적 말입니다. 한 국인으로는 국제기구의 첫 선출직 수장을 맡아 화제가 되었던 고(故) 이종욱 박사를 기억하시나요? 국내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고인은 2005년 세계보건기구에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 위원회’라는 특별 기구를 설립했습니다. 그 위원회는 건강 불평등, 이와 관련된 세계 각국의 보건복지 정책들을 종합하고 학자, 정치인, 시민사회, 다국적 기업 등 그야말로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여 2008년 말에 최종 보고서를 출판했습니다. 많은 중요한 내용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보건의료 서비스는 필수적인 공공재이기 때문에 시장에 방임해서는 안 되며 형평성과 공공성 진작을 위해 공공 투자, 국가 규제가 중요하다는 점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는 반기문 씨가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유엔의 산하기구이면서, 또 역시 ‘자랑스러운 한국인’인 고 이종욱 박사가 수장을 맡았던 국제기구의 ‘공식’ 보고서에서 말입니다. 이제 많은 국가와 국제기구들이 그 보고서의 권고를 따르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겠지만, 신심으로 가득 찬 한국의 그 분들이야 그 따위(!) 움직임에 부화뇌동할 리가 없겠지요? 오늘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 분들이 금과옥조처럼 생각하는 ‘글로벌 스탠다드’ 좀 따라 주시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다른 나라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좀 둘러보고 ‘눈치 있게’ 행동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램이지요. 지구촌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미국식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의 파산을 이야기하고, 심지어 그린스펀 같은 이조차 (이제 와서야) 그 길이 잘못된 길이었음을 고백하는 마당입니다. 소신과 ‘쇠귀에 경읽기’가 백짓장 한 장 차이 일수도 있다는 위험한 허무주의가 평범한 당원의 마음을 휘젓는 우울한 한 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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