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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관련 노동안전보건단체 선언(6월 18일)

쌍용자동차 노동자 건강권 사수, 정리해고 반대투쟁 지지, 정부대책을 촉구하는 노동안전보건단체 선언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정리해고 반대 옥쇄 파업투쟁이 오늘로 28일째 접어들었다. 약 한 달이라는 시간동안 노동자들은 긴장감 속에 부실한 식사를 하며 공장 ․ 식당 ․ 사무실 바닥에 잠을 자고 공장을 지킨다. 그리고 5월 27일, 6월 11일 두 노동자가 사망하였다. 한 노동자는 ‘신경성 스트레스로 인한 뇌출혈’로, 또 다른 노동자는 ‘급성 심근경색’이 원인이었다. 두 사람 모두 쌍용자동차에서 진행되는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로 극심한 심리적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아왔다고 한다. 이들의 사망은 ‘해고는 곧 살인’이라는 노동자의 주장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보름 사이에 2명이 사망한 쌍용자동차 노동자. 이들이 구조조정 피해자라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쌍용자동차도 정부도 노동부도 해고가 곧 살인이 된 현실을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 쌍용자동차 측은 오히려 16일 정리해고 대상자가 아닌 노동자를 동원하여 노동자 끼리 갈등하도록 만드는 비열한 행동을 벌였다. 우리 노동안전보건 활동가, 전문가들은 쌍용자동차 사측의 이러한 행동과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으려는 정부와 관계 부처의 행동에 분노한다. 그리고 더 이상의 ‘해고는 살인’이라는 희생이 발생하지 않도록 쌍용자동차, 정부, 관계 부처에 다음과 같이 우리의 요구사항을 밝힌다.
 

 


첫 째. 쌍용자동차는 위기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전가시키는 정리해고와 분사계획을 즉각 철회하라! 현재 부도나 다름없는 경영 파탄의 책임은 상하이 투기자본과 경영진, 그리고 자본 투기의 길을 열어 준 정부에 있다. 그러나 사측과 정부는 자동차를 생산해온 것 외에는 아무 죄가 없는 노동자들에게 그 책임을 다 떠안으라고 강요한다. 지금 쌍용자동차와 정부가 할 일은 노동자에게 위기 책임을 전가할 것이 아니라, 대주주인 ‘먹튀’ 상하이차의 지분을 소각하고 공적자금을 투입, 공기업화해 생산과 노동자 고용을 보장해야 한다. 앞뒤 안 가리는 사람 자르기 구조조정이 기업은 물론 국가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비판을 새겨들어야 한다. 우리는 1990년대 초반, 정리해고라는 인력 자르기에 의존하지 않고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로 위기를 극복한 독일의 폴크스바겐 사례를 잘 알고 있다. 노동자와 함께 회생방법을 찾았던 폴크스바겐이 지금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판매 대수 2위라는 경쟁력을 가졌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쌍용자동차는 판단해야 한다.

둘 째. 정부는 더 이상 문제를 수수방관하지 말고 쌍용자동차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라! 세계 경제위기 단초를 제공했던 미국에서도 거대 자동차 회사 GM과 크라이슬러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때 문제해결에 가장 적극으로 나선 것은 바로 오바마 정부였다. GM은 현재 정부와 노동조합이 경영을 책임지고 있고 크라이슬러에도 공적자금이 투입되었다. 스웨덴 정부도 사브에 공적자금 투입을 결정했고 프랑스 르노자동차도 80년대 경영위기를 국유화로 이겨냈다. 정부는 쌍용자동차 문제를 ‘노사 문제’라며 수수방관할 입장이 아니다. 쌍용자동차 문제는 20만 협력업체 노동자의 생존권과 평택의 지역경제까지 걸렸다. 일자리 창출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던 정권이 이제는 막무가내로 ‘사람 자르는’ 정리해고에 침묵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무엇보다 쌍용자동차를 다시 해외 자본에 매각하겠다는 것은 상하이 자본에게 당한 것을 똑같이 되풀이하겠다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셋 째. 노동부는 쌍용자동차를 포함, 모든 구조조정 사업장 노동자를 대상으로 임시건강진단을 실시하고 결과에 따른 치료 보장, 원인 해결에 지금 당장 나서야 한다! 이미 두 명의 노동자가 구조조정 스트레스로 소중한 생명을 잃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희생이 일어날지 모른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사업장에서 사망자가 1인 이상 발생하였을 때 이를 중대재해로 규정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구조조정 스트레스, 경제적 압박, 한솥밥을 먹었던 동료와 갈등을 조장하는 사측 행동으로 지금 쌍용자동차 노동자 건강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두 명의 노동자 사망이 그것을 입증했다. 천여 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게 되었고 협력업체 20만 노동자가 고용불안에 시달리는데 노동부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건가? 우리는 쌍용자동차 노동자에게 앞으로 또 어떤 희생이 있을 지 우려와 걱정을 넘어 두려움마저 느낀다. 지금 진행되는 살인적인 구조조정에 노동부가 계속 방관한다면 역사 앞에서 그 책임을 져야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마지막으로 쌍용자동차는 노동자와 노동자를 갈등으로 밀어 넣는 관제데모와 심리적 스트레스를 증가시키는 핸드폰 문자 회유와 압박을 즉각 중단하라! 그들은 같이 밥을 먹고, 공을 차고 웃음과 슬픔을 나눴던 동료요 친구요 선후배였다. 가족들도 인사가 오가는 사이였다. 그런데 지난 16일, 회사는 어떤 일을 저질렀는가? 파업 중인 노동자는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던 동료들이 정리해고자와 비정리해고자로 나뉜 상황이 두렵다고 했다. 쌍용자동차는 안에 있는 노동자나 밖에 있는 노동자 모두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행동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

우리는 정리해고 반대 총파업 투쟁을 전개하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을 적극 지지하며 빠른 문제해결을 위해 정부가 적극적인 역할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우리는 이 같은 요구사항이 관철되어 죽음이라는 희생이 더 이상 없도록, 무엇보다 쌍용자동차 노동자와 구조조정으로 고통 받는 모든 노동자들이 건강하게 현장에 복귀하여 일할 때까지 제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을 밝혀둔다. 쌍용자동차 회사 측과 이명박 정부는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근원적으로 현재 상황과 문제를 푸는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노동자들의 건강권과 생존권 사수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함께 투쟁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2009년 6월 18일
쌍용자동차 노동자 건강권 사수․정리해고 반대 투쟁 지지
정부대책을 촉구하는 노동안전보건 활동가, 전문가 선언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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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길 - 첫 도전

 

산 혹은 숲길, 그도 아니라면 절집, 고궁 안마당 오래된 나무들...

그 녹음과 나뭇잎들을 어루만지는 바람소리, 그리고 약간의 수고로움은 마음의 짐을 벗는데 큰 힘이 된다.

적어도 나한테는...

 

지난 토요일에 후배 나후와 함께 지리산 둘레길 한 구간을 돌고왔다.

 

전체 80km 가 개통인데, 그 중 하나... 네 개 구간을 올해 안에 쉬엄쉬엄 돌아보리라 마음 먹고 그 중 하나를 골랐다.  동강-수철 구간...

원래 안내에는 동강마을에서 수철마을로 이동하도록 되어 있지만,

산청에 위치한 수철마을의 교통편이 여의치 않을 듯 싶어서, 일단 함양으로 이동한 다음 시외버스를 타고 다시 산청으로 이동하여, 택시를 타고 수철마을로 갔다. 산청에서 수철마을 오가는 버스가 2시간에 하나씩 있는지라 택시를 탈 수밖에 없었는디, 한 15분 거리인데다 미터 요금으로 간다는 동네 아자씨 말씀에 얼릉 탔다가 기본 요금이 3300인거 보고 식겁하기는 했다 ㅡ.ㅡ

 

아침으로 준비해간 김밥이랑 빵, 우유 등을 먹고 의연하게 출발했다.

폭우가 쏟아질거라는 일기예보와 달리, 햇볕은 따가웠다. 모자도 준비안해가서 두건을 뒤집어쓰고 다녀야했다. ㅡ.ㅡ

 

첫 기점인 고동재까지 3.5km.....  정말... 욕나왔다. 호연지기고 뭐고... 역시 안내에 따라 동강마을에서 시작해야 했어야 하는게 아닌가 후회막급했다.  이 끝도 없는 오르막길... 

거의 한 시간을 파김치가 되어 고동재에 오르고 나니 '쌍재 1.8km'라는 표지판....

울고 싶었다 ㅜ.ㅜ

 

다행히 ... 쌍재에 이르는 길은 그닥 가파르지 않았다. 

막, 고개를 넘을 무렵 마주친 두 총각의 얼굴에서 우리는 기묘한 단서를 보았다.

저 고통스러운 표정은 무엇???

 

결국, 구간을 다 걷고나서 깨달은 사실이지만 첫 4km 정도만 빼놓으면 나머지 길은 거의 완만한 내리막 숲길.... 즉, 뒤집어 이야기한다면 동강마을에서 출발할 경우 거의 7km 완만한 오르막길을 꾸준히 올라야 한다는 뜻이다.... 뒤늦게 우리의 현명한 선택을 스스로 칭찬했다.

더구나 동강마을 쪽으로 내려가면 거의 마지막 무렵에 포근하고 정감넘치는 개울과, 수세식 화장실이 반짝반짝 빛나는 '산청 함양사건 희생자 추모공원'이 있다..

개울에 앉아 발 담그고 피로를 풀고, 추모관에 가서 땀에 젖은 옷가지랑 양말도 갈아신고... 또 추모관 정자에서 한숨 돌리다 내부 전시물도 둘러볼 수 있고....  더구나30분에 한 대씩 함양 시내로 버스가 다닌다.

혹시, 이 구간을 가실 분은 꼭 수철에서 동강으로 이동하시길....

 

 

다른 구간들에 비해 이 구간은 '산행의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오르막 구간도 꽤 있는데다 한적한 '마을길'과는 좀 거리가 있다. 그래도, 온통 초록 속에 빠져들 수 있는 것은 말할나위 없이 좋았다. 개울물은 어찌나 시원하고 상큼하던지....

 

 

 

 

 

그리고, 한적한 마을길 버스 타는거 엄청 좋아하는데 동강마을에서 함양터미널로 나오는 길 너무 좋다.

조금씩 흩뿌리는 빗방울과 함께 창밖에 흐르는 풍경들, 나의 번뇌도 함께 흘러가길 바랬다.

 

다른 구간들도 차근차근 둘러보자...

 

 

 

참... 추모관을 둘러보면서, 새삼 궁금해졌다.  

인간은 왜 그리 인간에게 잔인할까.... 그리고 어떻게 그리 잔인할 수 있을까?

 

 

역시 좋은 카메라 때깔이....

 

사진 찍어대느라 늦어지기도 했겠지만, 예전에 지리산 같이 갔을 때도 보면 나이도 젊은 양반이 체력이 어찌나 저질인지, 나보다 산길을 더 못간다. 그래서 내 뒤통수 사진이 엄청 많다 ㅎㅎ 

 

 

보무도 당당한 아래의 사진을 보노라면, 지리산 둘레길 따위가 아니라 어디 안나푸르나 종주라도 해야할 것 같다 ㅎㅎㅎ

 

 

 

기이한 미감을 자랑하는 추모관의 기념 조형물.... 저 부드러운 산세와 절대 안 어울리는 저 뾰족 조형물... 도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부조로 장식된 조각들은 완전 근육질의  그리스 석상 분위기... ㅡ.ㅡ

 

 

흘러가는 차창밖 풍경은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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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고르, 서경식...

요사이 전공책이나 논문들은 통 읽을 시간이 없는데 틈틈이 읽는 다른 분야 책들이 훨씬 압도적인듯하다. 책상에 정좌하고 읽는 것보다 오가는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는게 더 효율적이란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공부도 길바닥을 오가면서? ㅡ.ㅡ

 

#1.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 정혜용 옮김 [에콜로지카] 생각의 나무 2008

에콜로지카 Ecologica - 정치적 생태주의, 붕괴 직전에 이른 자본주의의 출구를 찾아서
에콜로지카 Ecologica - 정치적 생태주의, 붕괴 직전에 이른 자본주의의 출구를 찾아서
앙드레 고르
생각의나무, 2008

 

데이비드 하비의 책을 읽는 동안 해미가 적극 추천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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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말처럼 쓰여진 인터뷰글에서 '사회주의가 만약 도구를 바꾸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이 결국 고르의 핵심 아이디어가 아닌가 싶다. 말하자면 노동의 재구성, 성장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 즉, "탈성장은 살아남으려면 꼭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러나 탈성장에는 다른 경제, 다른 생활 방식,다른 문명, 다른 사회적 관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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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상황에서 '이윤을 창출하는' 생산만이 부가 되고 (자발적인 물물교환이나 생태적 노력들은 국민총생산에 포함되지 못함)과 파괴가 부의 원천으로 나타나는 현실이 더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지적에는 백퍼센트 동의한다. 그래서 우리는 '에콜로지카'를 상상하지 않고는 이 체제를 극복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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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의 '생계수당' 요구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것이다. 즉, '인간의 활동을 고용의 독재로부터 해방시키자는' 것이고, 이러한 무조건적 사회수당은 오늘날 한국 사회 '기본소득' 논의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생계수당을 재분배 논리안에 위치시켜서는 안 되고, 자본과 노동에 바탕을 부를 급진적으로 넘어셔야 한다는 지적에 매우 공감... 하지만, (내가 현재 '기본소득' 의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사회의 기본소득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측면들이 있다. 그 논의의 적절성을 떠나, 일단 귤이 회수를 건너 탱자가 되는 사례를 너무나 많이 보았기 때문에, 이게 어떤 예상치 못한 결말로 이어질지 백만볼트의 걱정이 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내가 너무나 '근로윤리'에 깊이 천착해서일 수도 있다. 일이라는게 과연 생계만을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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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결정적으로 아쉬운 부분은, 노동과 성장 담론을 '어떻게' 재구성 하느냐는 것이다. 저자의 지적대로 자본주의가 가속화될수록 그리고 기술진보와 지식정보 사회의 도래에 따라 노동의 필요는 점차 줄어들고,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최소노동을 하고 나머지 시간을 자유의지에 따라 우아하게 보낼 수 있는 물질적 토대로 작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노동의 가치가 하락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적대적 공존의 토대 - 노동자는 자본가의 생산수단을 필요로 하고,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는 - 에서 노동의 힘을 현저하게 약화시키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일자리가 이제 사라져가는 종"이 되고 있다는 지적은 긍정적으로 본다면 인간해방과 새로운 노동 구성의 토대임이 분명하지만 (노역으로부터의 해방...), 분명 현실의 전선에서는 노동자 계급의 힘의 약화로 나타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어쩌면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이라는 책이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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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생산의 주요한 힘과 지대에서 취하는 이익의 주요한 힘이 차츰 공공영역으로 떨어지고 무상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 생산수단의 사유화, 공급의 독점이 차츰 불가능해진다는 지적은 동의하기 어렵다. 더구나 "자본주의의 퇴장이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바는, 자본이 소비에 대해 행사하는 장악력으로부터, 또 생산수단의 독점으로부터 우리가 해방된다' 는 지적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듯한 해석이다. 일부 해커들의 활동이 나, 소규모 자치생산의 경험들이 너무 과도하게 해석된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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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체제를 반박한다는 것이 가구단위나 마을 단위의 자급자족 경제로의 회귀도, 경제활동 전반에 대한 통합적이며 계획적인 사회화를 지향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개인의 삶에 있어서 그 일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해야만 하는 것을 '최소로 줄이기 위해서', 그리고 자유의 영역을,그러니까 집단의 활동이든 개인의 활동이든 간에 그 자체로 목적인 독자적 활동들의 영역을 '최대로 확장하기 위해서' 필요의 영역만을 사회화하는 것이다." 아... 근데 이것도 잘 모르겠다. 통찰력으로 가득 찼던 Le Guin 의 'Dispossessed'에 보면 이상으로 건설했던 계획경제 사회가 어떤 비극을 가져왔는지 잘 보여준다. 물론 생산력의 발전수준으로 볼 때,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Anarres의 그 척박함과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수요와 필요'를 조정하고 충당하기 위한 중앙기구의 설립이 그닥 효율적이고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

의문과 고민거리를 잔뜩 던져준 채, 뭔가 분명한 답을 주지 않는 것 같아서 다른 책을 읽어볼까했더니 국내에 번역된 다른 글이 아직 없다 (D에게 보낸 편지 말고). 어쨌든 이 글들이 쓰여진 것은 1970년대부터였으니, 하여간 할배의 통찰력은 대단한 것 같다. 어여 다른 책들도 나왔으면 좋겠네.. 답을 주셔야죠!!!



#2. 서경식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철수와 영희 2009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 국민, 국가, 고향, 죽음, 희망, 예술에 대한 서경식의 이야기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 국민, 국가, 고향, 죽음, 희망, 예술에 대한 서경식의 이야기
서경식
철수와영희, 2009

 

 

가끔씩 언론에 실린 짧은 글만 읽다가 처음으로 그의 '책'을 읽어보았다.

 

* 이 분 까칠하시다... 그리고 내공이... 이건, 삶의 신산함과 뿌리뽑힘을 당해본 사람만이, 그리고 그로부터 분노와 원한만이 아닌 통찰력을 얻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내공이 아닌가 싶다.

 

* 민족과 국가, 그리고 소수자, 디아스포라를 바라보는 '시선'의 문제에 대해 저자는 예리하고도 냉정하며, '민감'하다. 국가의 국민이 '스스로 원해서' 되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가 제공하는 여러가지 권리만 누리면서 국가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악행에 나는 책임이 없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지적에 많이 공감한다. 물론 그것이 책임있는 분명한 행위자에 대한 면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우리'는 누구인가?" 그렇다. 나도 항상 궁금했던 것... 논문이고 신문기사고, 칼럼이고, '우리'라고 표현된 글을 읽을 때마다 항상 궁금했었다. ㅎㅎ

 

* '생명이 선이고 죽음이 악이다'라는 장은 특히 많이 공감했다. 인간이기 때문에 자살한다. 이를테면 프리모 레비의 경우를 이야기하며, "우리는 우리 의도와 상관없이 이세상에 태어났지만 그래도 어느 순간부터는 어느 시점부터는, 우리 자신이 부조리하게 얻게 된 생명의 주인공이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절대적으로 지지한다. 물론 이것이, 현재 한국사회에서 관찰되는 자살의 사회적 불평등을 '용인'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 또, 루쉰을 이야기하며 무조건적인 '희망' 고문보다는 차라리 현실을 대면하는 비관이 더 적절할 수 있다는 지적이 참 인상적이었다. 루쉰의 이야기 "그렇다. 나는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어도 희망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었다. 희망은 앞날에 속하기 때문에 희망이 없다는 내 증명으로 희망이 있다는 그를 설복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 저자는 마지막 인터뷰 글에서 한국판 '시라케'를 무척이나 걱정하며 비관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진정성을 잃어버린 이 시대에, 소위 진보주의자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적극적 반동이 아니라 어쩌면 이런 시라케... 저자가 걱정하는 방향으로 한국사회는 끊임없이 이동하고 있는 것같다. 워낙 다이나믹 코리아니까 사실,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기도 하다만, 그렇다고 대책없는 낙관주의자가 되기보다는 '솔직한 비관주의자'가 되어 고통과 기억에 기반한 연대를 구축해나가는게 어떨까 싶기도 하다...

 

#3. 서경식 지음, 김석희 옮김[청춘의 사신] 창작과 비평사 2002

 

청춘의 사신 - 20세기의 악몽과 온몸으로 싸운 화가들
청춘의 사신 - 20세기의 악몽과 온몸으로 싸운 화가들
서경식
창비(창작과비평사), 2002

 

저자의 두번째 서양 미술 기행이다. 아마도 신문에 연재했던 것이라 그렇겠지만, 각 편마다 분량이 지나치게 짧아 많이 아쉽다. 더구나 소개된 그림에 대한 도판이 모두 실린게 아니라, 충분히 저자와 '공감'하기 어렵다는 문제점도 있었다.

하지만, 20세기라는 특정 시점에서 시대와 혹은 자아와 온몸으로 싸웠던 미술가들의 이야기는 일부 새롭기도 하고, 혹은 알고있었지만 여전히 숙연해지기도 하고... 오래된 책이지만 윤범모의 [미술과 함께, 사회와 함께]를 읽었을 때 받았던 충격과 고민이 새록새록 살아나는 듯... (물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나 노버트 린튼의 [20세기의 미술]도 매우 훌륭했지만, 감흥의 영역은 약간 다른 듯...)

이 책에서 표지그림이자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는 에곤 쉴레의 [소녀와 죽음]은 나도 액자로 가지고 있는 애장품이다. 악착같이 죽음을 붙들고 있는 소녀의 모습에서 눈을 떼기 어렵다.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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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구경] 몇 구절

잊을만하면 한번씩 돌아오는 근원미상 번뇌의 시즌이 길어지고 있다.

설명하려 들면야, 몇 가지 이런저런 이유들을 댈 수 있겠지만, 글쎄다...

그토록 열망하던 부동의 평정심과 통찰력이라는 것이 결국은 다른 말로 '열반'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갑자기 무릎도 팍 꺾이고... 내가 감히 이룰 수 없는 열망이로구나...

어느 구절 하나 허투루 넘길 수는 없었지만, 그 중에서도 두고두고 기억할만한 몇 구절들을 남겨둔다. 그리고 책을 선물해준 이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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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르바나 (Nirvana, 열반) - 깨달은 상태, 혹은 번뇌의 불길이 꺼진 상태

43.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이, 그리고 연인과 친구들의 사랑이, 제 아무리 깊고 넓다 하더라도 올바른 내 마음이 내게 주는 사랑은 이보다 더 깊고 큰 것이 없나니...

179. 깨달은 이는 모든걸 정복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와 같은 완벽한 승리는 얻지 못했나니 그는 드디어 무한을 정복했다. 이 세상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 그를 아, 아, 무엇으로 유혹할 수 있겠는가.

210. 사랑으로부터 벗어나라. 미움으로부터도 벗어나라. 사랑의 끝은 고통이요. 미움의 끝 또한 고통인 것을...

235. 그대 삶의 나무에서 낙엽은 지고 있다. 죽음의 사자가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그대는 이제 머나먼 길을 가야 하나니 그러나 아직 길 떠날 준비도 되지 않았구나.

251. 욕망보다 더 뜨거운 불길은 없고 증오보다 더 질긴 밧줄은 없다. 어리석음보다 더 단단한 그물은 없고 탐욕보다 더 세차게 흐르는 강물은 없다.

285. 가을 연못에 들어가 시든 연꽃을 꺾듯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꺾어버려라. 그리고는 저 니르바나의 길을 향해서 오직 한마음으로 걸어가거라.

305. 홀로 명상을 하며 홀로 누워라 오직 홀로 걸으며 열심히 수행하라. 그대 스스로 그대 자신을 다스리며 이 모든 집착에서 멀리 벗어나 오직 혼자가 되어 살아 가거라.

380. 그대의 스승은 그대 자신이요. 그대 자신이 바로 그대 자신의 피난처이니 저 마부가 말을 길들이듯 그대는 그대 자신을 길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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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과 대안을 위한 건강정책학회]

예전에 이 블로그를 통해 소개한 적이 있는 [건강정책포럼]에서 학회를 출범시켰습니다. 사실 저는 여기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는 편이 아닌데다 (전공이 좀 달라서 ㅡ.ㅡ), 이 날 저녁에 진보신당 울산시당 교육이 있어서 참석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끝까지 참여는 못하더라도 가서 일단 '세'를 과시하는데라도 한몫 보태야 할 것 같기는 합니다. 기존의 주류 학회를 벗어나 이렇게 따로 학회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그닥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생각들이 자유롭게 토론되고 사심없이 검토될 수 있다면, 굳이 별도의 학회를 만들지 않아도 될텐데 말이죠... 이 블로그에 들르는 보건,사회,정책 기타 등등에 관심 가지신 이들은 이날 학술대회에 꼭 참석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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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고픈 마음....

어디론가 떠날 때가 돌아왔다. 이 기묘한, 정주할 수 없는 삶의 끌림, 그 연원은 무엇일까? 닐 가이먼의 Neverwhere에서 메이휴가 다시 그곳 "neverwhre"로 돌아간 이유... 혹시 그런 것? 꼭 바다너머 어느 먼 곳이 아니더라도, 소진된 삶의 빈 부분을 채울 수 있는 그런 발걸음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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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영화들...

괴롭다, 바쁘다 하면서도 그냥저냥 영화들은 봤던 5월... 물론, 놓친 영화들도 있고 여전히 봐야 할 목록에 올려놓은 것들도 있다... #1. J.J. 에이브람스 감독 [스타트렉 더 비기닝] 2009

오랜만에 본 SF 수작!!! 스토리도 참신 발랄에 말이 되고, 특수효과도 훌륭하고... 무엇보다 우리(?)가 SF 영화를 볼 때 가장 싫어하는, 특수효과가 줄거리를 말아먹는 경우, SF라는 이름을 팔아 말도 안 되는 설정을 끌고 가는 경우가 아니었음. 최근 각종 프리퀄들이 창궐(?)하고 있어, 나름 우려가 깊었는디, 아주 깔끔하게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다는 생각.... 아우, 스팍 박사는 어쩜 그리 매력덩어리? ㅎㅎㅎ 그리고 연로하신 그 분은 TV 시리즈에 나왔던 오리지널 그 분... 어쩐지 포스가.... [블레이드 러너] 이후 좀 잘나간다 하는 SF들은 디스토피아를 담고 있는 거대서사물인 경우가 많았는디, 이 영화는 간만에 아주 훈훈... 무엇보다 기억나는 것은, 주먹도끼가 영화보면서 몰래 '벌칸'족의 손인사를 따라하던 장면.... 나는 어둠 속에서 그녀의 따라하는 손짓을 보아버렸네 ㅎㅎㅎ #2. 맥지 감독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 2009

내 이럴 줄 알았지만, 그래도 애틋한 그리움에 보아줬건만 정말.... 어이구..... 영화본 시간보다 길게 욕하느라 정신이 없었음... 불쌍한 크리스쳔 베일... 당신도 낚인겨!!! 그나마 3편이 하도 후져서, 그거보다는 나았다는 것을 위로로 삼아야 할 지경임...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아마 이 영화보고 홧병 나서 몸져 누웠을 것으로 짐작됨... 카일 리스로 등장한 얀톤 옐친은, 스타트렉에서 러시아 사투리 쓰는 귀여운 러시아 출신 조종사로 분했던 인물... SF 계의 신성? #3. 도리스 되리 감독 [사랑한 우에 남겨진 것들] 2008

[파니핑크]의 감독이 만들었다는 소식에 선뜻 보게 된 영화.. 부모와 자식의 관계, 사람과 사람이 맺는 진심어린 다양한 관계의 모습은 어디고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상투적인 표현과 서구사회의 '신비로운' 동양 판타지 (특히 일본, 벚꽃으로 표상되는)가 눈에 다소 거슬리기는 했지만, 영화 전체의 미덕을 가릴만한 것은 아니었다. 관계맺기에 그토록 서툴렀던 '전형적인' 아자씨가, 사랑이 사라진 후에야 진실한 관계의 힘을 깨달아가는 과정은 매우 감동적이었고, 그 관계가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있을 때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들었다. 나를 돌아보고, 또 부모님을, 그 분들의 남은 생을 돌아본 그런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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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 책들 + 헤이 웨잇

읽고 아무렇게나 책상에 버려둔 책들 좀 치워볼 생각... #1.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함규진 옮김 [유동하는 공포] 웅진씽크빅 2009

전반적 인상은....기대에 많이 못 미치는 책이었음. 어찌나 "인용"이 많은지, 정작 바우만 본인이 한 말을 찾기가 어려울 지경 ㅜ.ㅜ 왜 이양반을 오늘날의 '현자'라 하는지 도대체(!) 모르겠음. 현자? 다른 책들을 더 읽어봐야 하나? 일단 박물학적 지식과 사례들을 쏟아놓는데 이것들을 이해하지 못해서 책이 더 어렵게 느껴지고, 또 글쓰기 스타일이 나랑 잘 안 맞아 또 읽게 될 것 같지 않음... ㅡ.ㅡ 그래도 몇 가지 정리해보자면.... * '공포'란 '불확실성'이며 위협의 정체를 모른다는 것이 진정한 공포. 그래서 압도되어 꼼짝 못하기 마련이라는 지적에 일단 동의. * 보편주의적 이성보다는, "근대적 이성은 독점을 형성하고 권리의 배타성을 확보하는 데 특히 발빠르게 움직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유리한 특권이 있을 때 그 특권에 따라 움직이는 규칙을 정하는 과정에서 가장 만족스럽게 작용했다"고 비판한 부분에서 고개 한번 끄덕! * 그리고 악의 평범성과 진부함에 대한 지적은 이미 여러 군데서 논의된 바 있어서 특별히 새로울 것 없었고, '악이 도처에 숨어 있음을 깨닫는 순간, 신뢰는 무너진다'는 극적인 표현이 그저 눈에 띔. * "공포의 사회적 배분", 인재와 자연재해의 구분 어려움, 관리불가능한 리스크 등에 대한 개념은 이미 울리히 벡이 주구장창 떠들었던 이야기라 역시 새로울 것 없음. * "자연적인 원천에서 분리된 잉여 실존적 공포를 밀어내기 위한 대체목표를 찾는다. 그리고 세세한 예방책을 내세우며 임시 표적을 상대한다. 가령 간접흡연, 식품에 포함된 지방...." 결국 다룰 수 있는 위험에만 집중하게 되고 본원적 공포의 근원에 대해서는 무지하거나 회피하게 된다는 지적에는 물론 동의... * 가장 공감했던 문장이라면 폴라토인비의 글을 인용한 부분 "진실은 빈곤과 탐욕이 정치적 선택의 결과지 경제적 운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WHO CSDH 보고서에서도 분명히 언급한 내용이기도 하다. * "지식인들은 말이 육신이 되도록 하는 자신들의 능력을 한번도 신뢰한 적이 없다. 그들은 다른 누군가를 부추겨 자신들의 구상을 실천에 옮기도록 했다. 행동할 수 있는 힘들 가진 누군가, 일단 시작한 사업을 계속할 수 있는 누군가를 대망했다." 요즘 한국사회를 보면 딱... * 또다른 공감의 문장은, 역시 바우만 본인이 아닌 아도르노와 부르디외 할배의 것! "고통, 공포, 억압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그 사실은 실현할 수 없는 사상을 포기할 수 없게 한다." "사회적 세계를 연구하는데 인생을 바칠 기회를 얻은 사람은, 세계의 미래가 걸려 있는 투쟁 앞에서 무관심하거나 중립적으로 있을 수가 없다." * 그래도, 이 유동하는 공포에 맞서기 위한 바우만의 의견... "다가오는 공포, 우리의 힘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공포에 대한 유일한 치료법, 그 시작은 그것을 바로 보는 것이다. 그 뿌리를 캐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 뿌리를 찾아 들어가 잘라버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책 읽는 내내, 다른 이의 연구를 곱씹어 자신의 것으로 충분히 체화시키기 때문에 굳이 참고문헌 인용을 길게 안 한다는 리영희 교수의 글을 떠올랐다. 이건 뭥미...


#2. 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책세상 2005

하나의 완성된 책이라기보다, 주요 논문과 책의 챕터 모음. 역자의 소개에 의하면 방대한 폴라니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한 입문서라고나 할까... 해미와 같이 읽고나서 했던 이야기는, '생각만큼 신선하지 않다' '사람들이 왜 폴라니에 열광하는지 모르겠다' '이 분, 이 얌전해보이는 외모에 평생 노동자 교육사업에 헌신하고 지지리 고생하며 캐나다에서 뉴욕으로 출퇴근하고... 정말 놀랍다'... 우선 생각만큼 신선하지 않았다는 것이, 당대에 그의 사상이 뛰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 시절 그토록 독창적이었던 그의 문제의식이 이제는 사회저변에 널리 확대되어 우리같은 무지랭이도 충분히 가질 법한 것이 되었기에 나타난 현상이 아닐까 싶다. 좋게 해석하자면 문제의식의 발전이고, 운동의 발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특히 '자기 이익과 지도력'이라는 문제의식과, 마르크스 자신이 '유럽인'으로서 범했던 오류들에 대한 지적... 하지만, '노동, 토지, 화폐'의 상품화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저자의 견해는, 여전히 신선했다. 경제라는 요소가 인간을 움직이는 모든 동기는 아니라는, "인간을 움직이는 어떠한 동기도 그 자체로 경제적인 것은 없다'는 지적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자본주의를 창출하는 '근본적 토대'에 너무 집착하느라 노동도 하지만, 다른 한편 울고/웃고/즐기고/사랑하고/분노하고... 이런 복잡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놓쳐버렸던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경제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말이다... 기계적이고 환원론적인 '경제결정론'에 그동안 얼마나 경도되어 있었나 스스로 돌아보게 되었다. 시장경제의 붕괴가 위태롭게 하는 두 가지의 자유.... "동료들을 착취할 자유, 공동체에 상응하는 봉사를 하지도 않은 채 턱없이 과다한 이익을 취할 자유, 기술 발명이 공공의 혜택을 위해 사용되는 것을 막을 자유, 사적인 이익을 위해 은밀한 공작으로 공공에게 재난이 될 일을 일으키고 그 재난에서 이윤을 취할 자유는 자유시장과 함께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들이 판을 칠 수 있었던 시장경제는 우리에게 아주 소중한 자유를 창출하기도 했다.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단결의 자유, 직업을 선택할 자유 - 우리가 그 자체로 소중이 여기는 이류한 자유의 대부분은, 사악한 자유들을 만들어낸 책임이 있는 그 시장경제의 부산물이기도 한 것이다." 시간 되면, 다시 꼼꼼하게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생각.... 그렇다고 그 두꺼운 [거대한 변형]을 읽을 것 같지는 않음 ㅡ.ㅡ #3. 막스 베버 지음, 전성우 옮김 [직업으로서의 정치] 나남출판 2007

이 분... 역시 대가... 문장도 어찌 이리 감동적인감... 번역과 해설도 전작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처럼 매우매우 훌륭! 때가 때니만큼, 한국사회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덕목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없었음. 정치와 도덕 - "정치란 악마적 힘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이 성직자와 달리 정치인들은 부패해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하지만 '정당한 물리적 강제력 (폭력)'이라는 수단을 소유한 정치권력이 가져야 할 소명과 자질은 분명 성직자와는 달라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 (나는 이보다 '통찰력'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한 것 같은디!!!)을 갖춘 자만이 진정한 정치인이 될 수 있다는 지적에 일백퍼센트 공감.... 그리고 이는 비단, 현재 물리적 폭력을 담지한 '집권 정치인'뿐 아니라 '사회운동'을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필요한 덕목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정치가의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설파한 부분에서는 우리 엠비님을 떠올렸다. 본인의 신념윤리가 절대 옳은데, 그걸 따라주지 않는 이 사탄같은 국민들은 원망하며 날을 지새우는 그 분.... ㅜ.ㅜ 하지만 무릇 정치가라면, 인간이 어리석고 비열할 수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의도와 신념이 얼마나 고결하고 올바른가가 아니라 '(예견 가능한)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지적은 월매나 적절한가! 물론, 이분은 신념윤리마저 아니올시다 이기 때문에 더욱 문제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건 그분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저항'으로서의 운동은 문제제기와 신념윤리에 투철한 반면, '책임윤리'에는 소흘했던 것이 사실 아닌가 싶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 이 글이 그의 마지막 원고가 될지도 모르고 '존경하는 청중 여러분, 10년 후에 이 문제에 대해 우리 다시 한번 이야기합시다'라며 이어간 부분은 슬프기도 하고 오싹하기도 했다. 지금 이순간, 자신이 '신념정치가'라고 혁명에 도취된 사람들이 과연 그 때에 '무엇이' 되어 있을까 의구심을 표하는 부분이 그토록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정치란 열정과 균형감각 둘 다를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뚫는 작업입니다. 만약 지금까지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아마 가능한 것마저도 성취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하게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능력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명'은 비단,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도모하는 자들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닐 것 같다... #4. 제이슨 [헤이, 웨잇...] 새만화책 2002

우울하고 상처난 마음에, 굵은 소금을 화악~ 뿌리면서 오랫동안 후벼파는 만화... hey, wait! 그 후 변해버린 모든 것....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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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하루

탈진... 음악 들으며 맥주 한 잔... 오히려 지쳐서 잠이 안 온다 ㅜ.ㅜ 서울 간 김에 한번에 해치워버리려고 일정을 몰았더니 죽을 맛이다. 문무(?)를 겸비하기란 쉽지 않다. 겸비하려다가 대개는 둘 다 후져지는 경향.... 자살 문제를 다룬 첫 발표는 완전 아카데믹 버전을 생각했으나 나의 고민 수준을 반영하듯 어리버리... 학생들이 '이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구나'라는 것과 '사회적 힘의 중요성'을 인지하기만 했다면 그나마 성공이랄까....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을 다룬 둘째 발표는 아카데믹 + 학술운동의 절묘한 조합을 의도했으나, 이미 배터리 50% 방전 상태에서 시작했던지라 역시 또 어리버리... 역사성과 맥락에 대한 고민이 더욱 필요... 마지막으로 여의도 당사에서의 서울 건준모 발표는, 총분한 시간을 이야기 나누지못해 아쉬움... 급하게 발표자료 만들기에 급급하여, 당내 정치운동으로서 건강불평등 문제를 의제화시키는 부분에 대한 고민을 충분히 하지 못했던 것을 반성... ㅡ.ㅡ 어제 밤에, 모임이 취소되기를 어찌나 바랬던지... ㅜ.ㅜ 시험전날 교무실 불나기 바라던 고등학생의 심정이랄까....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이런... ㅡ.ㅡ;; 아우... 어쨌든 일단락... 이제는 이렇게 무리한 일정은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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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진보신당] '지못미'는 이제 그만...

어느 덧 또 내 차례가 돌아왔다. ------------------------------------------------------- 여느 토요일 아침처럼 ‘무한도전’ 재방송을 보려고 TV를 틀었다가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슬픔보다는 우선 놀라움이,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깊은 연민이 밀려왔습니다. 비록 정치적으로 그를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죽음이라는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했던 한 ‘인간’의 고통을 감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나타난 폭풍 같은 애도의 물결은 놀라웠습니다. 상갓집에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예의도 지니지 않은 자들을 제외하고는, 생전의 지지자건, 비판자건, 혹은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이들마저도 진심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어쩌면, 좌절당한 우리 스스로의 꿈과 회한이 그의 죽음 속에 녹아있었기에 더 크게, 많이 슬퍼했던 것 아닐까 싶습니다. 약 350년 전, 루소는 자신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타자에 대한 ‘연민’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자취를 감춘 줄 알았던 이 엄청난 ‘연민’의 폭발은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2007년 한 해에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1만 2천 명이 넘습니다. 40분에 한 명씩, 누군가 돌아오지 못할 발걸음을 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죽음을 떠올리고, 또 실제로 결행에 나섭니다. 죽음의 이유는 그 사람 수 만큼이나 다양할 것입니다. 존재론적 회의, 누군가에 대한 복수, 혹은 감당할 수 없는 심리적 고통으로부터의 탈출...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다양한 사연들을 넘어서는, 거대한 사회적 힘이 존재하고, 자살 또한 엄연한 사회적 불평등의 일면이라는 사실입니다. 지난주, 대전 중앙병원에 안치된 박종태 열사의 빈소에 다녀왔습니다. 마침 시내에서 추모 집회가 열리고 있었던 시간이라, 장례식장 건물 입구부터 늘어선 검은 화환들의 행렬과 대조적으로 영안실 안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먼 길을 마다않고 달려가 몇 시간씩 줄을 서며, 진심으로 전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그 날, 박종태 열사의 영안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떠난 이는 말이 없기에, 열사의 삶을 뒤흔들었던 고뇌를 모두 알아내기란 어렵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죽음이 자신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비정한 사회를 향한 최후의 말걸기였다는 점입니다. 30여 년 전 전태일 열사가 썼던 이 최후의 수단을 다시금 반복해야 한다는 오늘날의 현실이 새삼 놀랍고도 슬픕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음’으로 자신의 고통을 ‘증언’하고 우리 목소리를 들어달라고 ‘애원’해야 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죽음으로서 진정성을 증명해보이라고 누군가에게 잔인한 요구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수많은 이들이 전임 대통령의 소박한 꿈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의 꿈은 무엇이었습니까? 돈보다는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은 그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 렇다면, 지금 우리가 지켜줄 수 있는,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는 그런 일들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전직 대통령마저 견디기 어려웠던 삶의 신산함을 온 몸으로 견뎌내고 있는 우리 이웃들의 현재 진행형 고통에 결코 둔감해지지 말자는 것입니다. 굴뚝으로 올라간 쌍용차 노동자들, 어처구니없는 복직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88CC 여성 노동자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뉴스거리’도 못되어 언론에선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그 수많은 장기투쟁 사업장의 노동자들... 이들의 삶을, 고통을 함께 하자는 것입니다. 또 다른 비극, 더 큰 고통 앞에서야 뒤늦게 회한에 젖지 말고, 지금,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보았으면 합니다. 돌아보면, 글쓴이 스스로도 우리 사회의 이러한 고통들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익숙함이란 참으로 놀라운 잔인함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을 가진 우리들, 이제 더 이상 ‘지못미’는 그만 하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연대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 해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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