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자유로운 영혼

[코뮤니스트 9호] 스탈린주의 비판 – 코뮤니즘 원칙을 세우며

스탈린주의 비판 – 코뮤니즘 원칙을 세우며

 1707_russia_03.jpg

 

스탈린주의 등장 배경

 

1915년 침머발트 대회에서 국제사회주의자들은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식했다평화주의에 맞서 레닌은 혁명적 행동이 없는 평화 투쟁은 공허하고 기만적이며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자는 슬로건으로 중도주의를 반대했다. 1917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유럽 전역에 혁명적 물결을 열어젖혔다이러한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은 국제 부르주아에게 제국주의 대학살에 마침표를 찍게 했다레닌의 슬로건(전쟁을 내전으로)은 현실이 되었다이처럼 프롤레타리아는 침머발트 좌파의 결의를 적용함으로써 그들의 원칙이 올바르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이 글은 전쟁과 온갖 억압에도 코뮤니즘 원칙을 지키고 건설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이하 코민테른) 100주년을 맞이하여 코뮤니즘 원칙에서 이탈하고 코뮤니즘 참칭으로 인한 스탈린주의 폐해의 심각성을 다루고자 한다.

 

1917년 러시아혁명을 통해 탄생한 소련은 혁명적 법과 제도적 조처를 한다하지만 주요 유럽 국가들에서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물결이 패배하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고립되면서 사회주의로의 혁명은 퇴행하게 된다. 1918년 봄 테일러주의의 재도입과 1인 경영 강제그리고 혁명의 성과를 방어하려는 임시조치들즉 정치반대 세력 분쇄차르 관료의 재고용자본주의 생산방식과 인센티브 부과는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실질적 권력을 깨뜨리고 노동자정부와 노동자 사이 틈새를 벌려놓았다이 과정은 3년간의 내전 동안 혁명적 노동자계급의 죽음으로 더욱 굳어졌다당이 곧 계급이라는 잘못된 판단 속에 당이 모든 권력을 장악했고당이 노동자계급을 대신하는 사회가 시작된 것이다

 

일국사회주의

 

1924년은 일국사회주의 교의가 태어난 해이다스탈린은 그 교의의 레닌주의 기원을 끊임없이 강조했다세계혁명이 역사적으로 불가피하다는 레닌의 가정에서 시작한 스탈린에게혁명적 봉기의 조류가 일시적으로 빠져나갔고 혁명을 성공시킨 유일한 국가인 소련은그 자체로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보루였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제국주의의 탐욕스러운 공격에서 보호되어야만 했다이러한 환경에서 코민테른과 각국 코뮤니스트당(공산당)의 주된 과업은 혁명적 봉기를 조급하게 추진하는 게 아니라 소련을 방어하는 것이다이것은 코민테른과 각국 코뮤니스트당의 혁명적 사명이 소비에트 국가와 이익에 종속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1)

 

세계혁명의 명백한 침체에 힘입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선언은 국제주의와의 공개적 단절이었으며 세계 제국주의 권력으로 러시아를 건설하는 약속이었다이것은 사회주의가 승리한 세계혁명의 열매임을 주장한 1917년의 볼셰비즘과 완전한 대조를 이루었다결국 일국사회주의는 세계적 규모에서만 사회주의가 건설 가능하다는사회주의의 고립된 섬은 불가능하다는 맑스주의의 근본적인 이념을 포기함을 의미했다.

부르주아 정치인과 국가에 일국 사회주의’ 정책은 스탈린이 더는 세계 혁명에 관심이 없는 것으로 이해했다실제로 1941년 스탈린주의 소련은 나치 독일과의 일시적 협정에 따라 위대한 애국 전쟁의 깃발을 들었으며 그 끝에서 제국주의자들이 지구를 분할해 차지하는 데 참여하였다.

 

스탈린주의의 코뮤니즘 참칭으로 인한 문제점

 

1917년 10월 혁명에 대하여 국제 부르주아지는 혁명이 모든 것을 악화시킨다고 주장한다러시아혁명은 스탈린주의 강제수용소로 끝났으며 뿐만 아니라 대중 테러재판 쇼역사 위조다른 의견 억압거대한 군사적 병기창을 대량 생산할 수 있었지만품위 있는 소비자 상품을 제공할 역량이 없었던 경제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1953년 동독, 1956년 헝가리그리고 1981년 폴란드에서처럼 프롤레타리아 반란을 분쇄하는 탱크를 사용했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설립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혁명으로 등장한 국가 내부에서 반혁명이 성장했고거의 국가와 구별할 수 없을 지경이 된 볼셰비키 당이 관계되어 있어서 스탈린주의 정권은 10월 혁명의 연속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이러한 거짓된 동일시는 러시아 외부의 스탈린주의 정당들에 급진적이라는 광택을 내게 해 주었다또한 자본주의와 각각 자신의 국가와 민족적 이해에 대한 완전한 헌신을 붉은 10월로 포장할 수 있었다볼셰비키 당이 권력을 붙들고 있는 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여전해 존재한다는 생각은 국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동일시하는 또는 사회주의로 가는 단계라고 여기는 비극적이고 재앙적인 결과로 돌아왔다혁명의 진정한 패배,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반혁명의 승리는 내부에서부터 10월의 연장선이라는 거짓 탈을 뒤집어쓴 채 일어났고전 세계 노동자계급 내에서 가장 파괴적인 혼란을 낳았다이것이 스탈린주의가 코뮤니즘과 같다는 거대한 거짓말의 객관적인 밑바탕이었다그렇기에 서방 지배계급의 주요 파벌들에게 스탈린주의 정권은 코뮤니즘과 같다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거짓말을 공표할 자격을 줄 수 있었다이러한 경향들은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연대와 자본주의 사회의 진정한 과정을 깨닫는 데 필요한 국제적 역사적 사고방식의 발전에 심각한 방해물이었다.  

 

서구의 많은 이에게는 스탈린주의 정권을 특징짓는 비참함결핍그리고 억압이 자본주의를 더욱더 높은 형태의 사회로 바꿀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보여주었다자본주의 경쟁제한 없는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욕망이런 것들이 인간 본성의 본질이라는 것으로 정당화되었다동유럽 정권이 80년대 말 몰락했을 때맑스주의 그리고 코뮤니즘 실패의 최종적 증거라는 거짓말이 전 세계로 증폭되었고지금까지도 국제 부르주아지는 스탈린주의를 코뮤니스트로 묘사하는 것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다이러한 선전은 노동자계급 일반에 심각한 혼란과 무질서를 가져왔으며노동자계급은 1980년대에 이미 더 높은좀 더 통일된 수준으로의 즉각적인 투쟁을 할 수 있는 전망역사적 프로젝트를 발전시키기 어려움을 깨달았다현재 사회를 넘어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널리 알려진 편견은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투쟁을 정치화하고 자본주의 체제 전체에 맞설 수 있는 역량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코뮤니즘의 죽음에 대한 선전은 지배계급이 체제의 착취를 당하는 계급의 의식에 맞서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능력 중 하나이다전제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그들의 중심 테마는 민주주의’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그리고 지배계급이 열심히 유지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신비화의 근거이기도 하다.

 

스탈린주의 국가 대 코뮤니즘 사회

 

스탈린주의는 맑스와 엥겔스 시절부터 노동자 운동 속에서 방어해 왔던 코뮤니즘과 비교했을 때 실체를 가늠할 수 있다코뮤니즘이란 인간 소외인류 스스로 만들어낸 창조물이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적대 세력이 되는 어떠한 사회적 질서도 극복하는 것을 의미했다정치 수준에서 코뮤니즘은 국가가 없는 사회를 의미한다왜냐하면 국가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한 지배의 명확한 표현이며광범위한 대중이 아무런 통제력을 갖지 못하는 정치적 기관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스탈린주의 정권은 개인사회무엇보다 노동자계급에 대한 국가의 완전한 지배의 전형이었다경제적 수준에서 코뮤니즘은 인류가 비인간적인 경제적 법칙과 이윤과 시장의 냉혹한 요구에 더는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리고 이것은 코뮤니즘에서는 돈시장또는 임노동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러나 생산성 전쟁이 전체 경제 체제를 지배하는 스탈린주의 국가 권력은 임금노동자 계급에서 추출한 잉여가치 위에 세워져 있었다자본은 본질에서 사회적 관계이지 단순히 법적 소유의 형태가 아니다임금노동자들에게는 노동력이 사적 기업가에게 팔리든 국가 관료에게 팔리든 차이가 없다자본주의 착취의 본질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그리고 코뮤니즘이 인류를 여러 민족으로 분리를 끝내고국경 철폐를 의미하는 한 스탈린주의 정권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광신적 조달자이며그들의 국경의 방어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세계라는 투기장에서 그들의 민족적제국주의적 이해를 추구한다.

 

스탈린주의 교훈

 

소련의 경험은 첫째일국사회주의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고립된 프롤레타리아 권력은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계에 직면하여 오래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프롤레타리아가 한 국가에서 권력을 쟁취하였을 때그 모든 정치적 경제적 정책은 반드시 혁명을 전 세계로 확대하는 긴박한 필요에 종속되어야만 한다한 국가 또는 지역에 제한되면 혁명은 불가피하게 외부의 공격이나 내부의 타락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그리고 국가의 이름으로 자본을 축적함으로써 소련에서의 국가는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가 폐지되고 부르주아지가 축출되었다는 환상을 만들어냈다일국 사회주의 가능성에 대한 스탈린주의 이론 및 소위 사회주의 국가들이나 노동자 국가에 대한 환상은 이러한 은폐에 모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둘째명령경제는 사회주의가 아니며사적 소유 철폐와 국가 소유로의 전환만이 아니라생산수단의 사회화와 국가 권력이 노동자계급의 지배 아래 존재하는 노동자평의회 체제이어야 한다셋째러시아 혁명의 교훈은 국가기구가 반혁명의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이며이행기에 계급과 국가 사이의 관계 문제의 복잡성과 난해성을 명료하게 보여주었다앞으로도 프롤레타리아와 혁명가들은 이 문제를 우회할 수 없으며이것을 해결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넷째어떠한 노동자혁명도사회주의적인 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중국북한 같은 착취체제는 부르주아 체제와 똑같이 노동자혁명에 의해 타도해야 할 체제일 뿐이다.

 

코뮤니즘은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으로 아래로부터의 노동자평의회 권력의 창출과 강화를 통해 가능하다코뮤니스트 혁명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당의 역할은 필수적이다하지만 당이 노동자평의회를 대신할 수 없으며 노동자계급의 집단적 권력을 당이 가질 수 없다따라서 코뮤니즘 사회 건설은 혁명의 시작과 함께 사회의 모든 권력을 노동자계급이 집단적으로 행사하는 노동자평의회 권력을 수립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노동자평의회가 모든 정치와 경제와 산업을 장악하고 노동자평의회가 전 사회에 걸쳐 모든 권력을 행사해야한다코뮤니즘 생산관계는 생산수단의 국유화사적소유의 철폐를 넘는 생산수단의 사회화이며생산수단의 사회화는 노동자평의회의 전 사회적 권력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자신의 노동자 평의회를 통해 프롤레타리아는 이행기 국가에 대한 독재를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2019년 4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윤태상

 

 

<>

 

1. 독일에서 1923년 10월이 대실패로 끝나고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당내 투쟁이 강화되면서 자본주의가 안정화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코민테른을 위기로 빠뜨렸다이러한 상황에서 코민테른의 볼세비키화가 진행된다볼세비키화란소비에트 러시아가 코민테른과 그 회원국 코뮤니스트당을 지배하려는 경향이며특수하게는 ECCI(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에 있는 소비에트 러시아 코뮤니스트당 대표의 손아귀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이다. 1920년대 말 스탈린은 코민테른과 외국 코뮤니스트들의 가장 중요한 과업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요새를 방어하는 것이라고 결정하였다이에 따라 점점 소비에트 국가 이익은 코민테른의 기본 사명인 세계혁명보다 우선하였다유럽 혁명운동의 패배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의 반혁명의 과정은 코민테른을 구성하는 당에게 소비에트 러시아 국가를 방어할 필요성을 부과하고동시에 그 당들이 사회민주주의 전략과 전술로 후퇴하도록 하면서 코민테른에 반영되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9호] 코뮤니즘(공산주의)이란 무엇인가? Ⅱ

  • 코뮤니즘(공산주의)이란 무엇인가? 

     

    30f05b8315d290bab4451f7a13577ebf.jpg

    코뮤니스트 혁명

     

    “부르주아 혁명, 즉 18세기의 혁명은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여 맹렬히 돌진한다. 그 극적 효과들은 서로 자신을 내세우며, 사람과 사물은 불꽃의 찬란함에 묻힌 것처럼 보인다. 황홀경이 그 날 그 날의 정신이다 ; 그러나 이것은 수명이 짧다. 이것은 얼마 안 가서 그 정점에 도달한다. 사회는 이 질풍노도의 시기의 결과를 냉정하게 자기 것으로 하기까지 기나긴 회한의 시기를 거쳐야 한다. 그런데 반대로 프롤레타리아 혁명, 즉 19세기의 혁명은 항상 자기비판을 행하고, 진행 도중에 반복해서 걸음을 멈춘다. 그 임무를 다시 수행하기 위해서, 완수된 것처럼 보이는 것들로도 다시 되돌아온다. 처음 시도된 것의 불완전함, 허약함, 빈약함을 가차 없이 철저하게 비웃는다. 또한 이 혁명은 마치 자신의 상대를 땅에다 메다꽂아, 그 상대가 땅에서 새로운 힘을 흡수하여 더욱 거대해져서 자신에게 대항하도록 만드는 듯하다. 이 혁명은 언제나, 자신의 목표가 너무나 거대하다는 것에 놀라 거듭 뒤로 물러난다. 그러다가 마침내 어떠한 반전도 있을 수 없는 상황이 창출되어 관계 자체가 다음과 같이 외치게 되면 이러한 물러섬은 끝나게 된다 :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여기 장미가 있다. 여기서 춤 춰라! (맑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1852)

     

    이러한 끊임없는 운동과 지속적인 자기비판이라는 기초 위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코뮤니즘을 향한 험난한 길을 걸어간다. 사실상, 코뮤니스트 혁명은 하나의 경제적 과정에서 그 최절정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적 사회적 변혁을 위한 정치적 수준에서의 전제조건이다. 또한 코뮤니스트 혁명은 옛 사회를 변혁하는 모든 과정을 위한 출발점이다. 과거에는, 계급의 경제적 권력과 그 계급이 사회관계의 새로운 시스템을 강제하는 능력은 실질적으로 같은 의미였다. 사회적 진보의 체화로서, 설득이나 힘에 의해 사회에 부과되는 새로운 사회구조는, 그 혁명 계급의 특정한 경제적 이해관계 속에서 그 정당성을 찾았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중세 봉건 사회가 부르주아지에 의해 파괴되었는지를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15세기부터 16세기까지, 거대한 부르주아 가문들은, 특히 남부 유럽에서, 무역과 상업의 명백한 주인이었다. 대지와 바다를 넘나드는 무역로를 따라서 금속과 직물, 향신료의 끊임없는 파도가 흘러들어왔다. … 황금이 새로운 무역의 중심지를 연결하는 무역로에 그리고 많은 도시에 흘러넘쳤다. 미술, 과학, 문학, 그리고 지식이 번영했다. 과학과 기술의 발견이 산업 도시처럼 증가했다. 머지않아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했다. 인간의 이해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의 진보도 일어났다. 어디든 속도와 정확성이 필요하다는 점이 명확했고, 산업 생산과 관련해서 뿐만 아니라 금융과 상업 문제에 있어서도 특히 그러했다. 한 사회 계급이 사회를 지배하고 세계를 정복하는 과정에 있었다. 이를 위해, 이 계급은 하나의 본질적인 힘, 즉 금융과 돈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부르주아지는 중세 귀족정치의 수중에 남아있던 정치권력에 직접적으로 도전하지 않고서도 그들 자신의 법을 사회에 강제했다.

     

    “중세 귀족세력에 대항한 부르주아지의 투쟁은 농촌에 대한 도시의 투쟁이었으며, 토지 재산에 대한 산업 재산의 투쟁이었으며, 자연경제에 대한 화폐경제의 투쟁이었다. 이 투쟁에서 부르주아지의 결정적인 무기는 그들의 경제적 권력이었고, 이것은 산업의 발전 - 첫 번째로 수공업, 그 다음 단계로 증가하는 메뉴팩쳐, 그리고 상업의 확장을 통해 - 과 더불어 끊임없이 증가해 온 것이었다. 이 모든 투쟁 동안, 정치적인 힘은 귀족세력의 편에 있었다.” (엥겔스,『반뒤링론』)

     

    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의 이행을 위해서, 모든 착취 형태의 파괴를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런 종류의 경제적 권력을 갖지 않는다. 투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돈, 재산, 또는 산업 권력을 갖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권력을 해체하고, 코뮤니즘으로 점차적으로 이행해 갈 수 있는 어떤 경제적 권력도 없다. 자본주의의 사회관계가 지배하는 일반적인 틀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노동의 도구, 기계, 또는 심지어 공장 전체를 소유함으로써 대체 어떤 물질적 권력을 얻을 수 있는가? 자본주의적 틀 안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생산 수단이나 그 결실을 부분적으로라도 소유한다는 발상은 객관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이며, 덫이며, 신비화이다. 오직 폭력적이고 세계적인 혁명만이 생산수단과 그 결실의 집단적 전유를 위한 기초를 제공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떤 특정한 경제적 이해관계나 소유형식에 기반 하지 않는 만큼, 새로운 종류의 착취 사회를 만드는 것 따위를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착취 받는 계급으로서, “잃을 것이라고는 오직 그 족쇄뿐”인 바로 그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객관적으로 착취가 없는 사회, 계급이 없는 사회의 건설로 나아갈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 후에도, 정치적 권력을 쟁취한 후에도 착취 받는 계급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이러한 권력 쟁취 -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현 - 와 코뮤니즘 사이에서는 일종의 이행기가 필요할 것이다. 이 시기에 프롤레타리아트는 전 사회를 통해 다른 사회 계급을 생산적 노동에 통합함으로써 자신의 조건을 일반화시켜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회 변혁 없이, 계급의 이러한 점진적인 해체 없이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심지어 세계적으로 정치적 혁명이 일어난 이후에도 여전히 ‘착취받는’ 계급 (다른 사회 계층들의 기생적 소비를 위한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매우 자주 다음과 같은 질문이 코뮤니스트 혁명과 관련하여 제기된다 : “일단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잡으면 (복수를 위해) 또 다른 사회 계급을 착취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을 보라!” … 또는 “아무리 최선의 의도를 지녔다 해도 권력은 부패 한다” 등등. 이러한 질문이 제기되는 그 방식은 그들의 잘못된 추론을 드러낸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착취 받는 계급이자 혁명적인 계급이라는 본질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 그들은 다음을 설명할 수 없다 :

     

    · 계급 억압을 할 수 있는 유일한 토대인 경제적 권력을 위한 어떤 물질적 토대도 노동자계급에게는 없다는 점

    · 생산력의 계속적인 발전의 유일한 기초로서 계급 없는 사회가 이뤄질 필요성과 객관적 가능성

     

    이러한 것들을 볼 수 없는 이들은 매우 쉽게 그러한 진부한 의문에 빠지는데, 그것은 사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유지를 위한 변명과 자기합리화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서 특징적인 이러한 근시안은, 혁명이 일어난 후 노동자계급의 일부분이 나머지를 착취하기 시작한다면 (모든 노동자계급이 그 자신을 착취한다는 것을 상상하기만 해도 우스꽝스런 일이 될 것이다), 이는 혁명의 후퇴를 의미하고 자본주의의 재등장을 의미할 뿐임을 보지 못한다. “착취하는 노동자”는 실제적이고 객관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계급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대리인으로 되어버린 것에 불과할 터이다. 혁명과 자본주의의 파괴는 오직 지연될 뿐이다.

     

    그러므로 세계적 코뮤니스트 혁명의 승리는 그 자체로 결정론적이지도 않으며, 코뮤니즘의 승리를 절대적으로 보장하지도 않는다. 그 이행기 동안, 자본주의 사회로의 후퇴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한 후퇴 가능성에 대항하여 투쟁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엄청난 노력을 다해 그 자신의 의식과 연대를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기 때문에, 이 투쟁을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제한된 수의 무기만이 유용하다. 무엇보다도,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옛 부르주아 권력의 어떤 잔재도 용인할 수 없음은 명확하다. 오히려 옛 부르주아 권력의 잔재들은 이행기동안 점진적으로 분해되고 파괴되어 사라져야 할 것이다. 과거에는 이렇게 과거의 제도와 기구를 깨끗하게 철폐시키는 것이 필수적이진 않았다.

     

    부르주아 혁명은 많은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 구조들 뿐만 아니라, 사고와 행동의 방식들 …의 전복을 포함했다. 그러나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이 착취를 강제하는 기구라는,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근본적 토대까지는 아니었다. 이단 심문의 도끼는 길로틴의 ‘민주적’ 칼날로 대체되었다. 중세의 노예 상태로부터 미래에 착취당할 계급을 ‘해방시킨’ 우리의 새로운 주인은 구체제의 ‘덜 공격적인’ 측면, 중세 국가의 억압적인 기구와 같은 것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간단히 이 기구를 근대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적용했다. 경찰, 공무원, 검찰 … 들은 그들의 제복을 바꿔 입었다. 사색가, 선생, 철학자 등은 그들의 학설을 바꿨다. 특정 경우에는, 20세기가 시작했을 때의 독일과 러시아처럼, 부르주아의 경제적 권력은 귀족, 귀공자, 제국의 장교와 행정 관료, 귀족, 왕자와 황제 등의 토지와 공존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억압적 사회가 다른 억압적 사회로 바뀐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부르주아지는 이전의 억압적인 중세적 권력 구조를 이용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것은 부르주아 경제적 권력을 유지하는데 정말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종류 중 어떤 것도 프롤레타리아트에겐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오직 부르주아 국가의 모든 측면을 사전에 파괴한 그 기반 위에서만 지배적인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리코뮨의 경험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단순히 현존하는 국가를 전복시켜서만은 안 되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파괴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러므로 반드시 코뮤니스트 사회의 본질에 어울리는 투쟁과 사회 변혁의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 혁명 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 양식은, 사회 혁명의 본질에 조응해야 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주도할 사회의 새로운 형식의 본질에 조응해야 한다.

     

    “이러한 전유는 더욱이 그것이 달성되어야 하는 방식에 의해서 결정된다. 전유는,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의 성격상 그 자체가 다시 하나의 보편적인 연합일 수밖에 없는 일종의 연합에 의해 그리고 혁명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혁명 속에서 한편으로 지금까지의 생산 및 교류에서, 그리고 사회적 편제에 있어서 이전의 양식의 권력이 전복되고, 다른 한편으로 그 속에서 혁명 완수에 불가결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보편적 성격과 에너지가 발전한다. 더욱이 그러한 혁명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사회적 지위로 인해 아직 그에게 남아 있던 모든 것을 벗어 던지게 된다. ”(맑스, 『독일 이데올로기』)

     

    노동자계급의 집단적 조직화, 계급연대, 혁명적 의식의 성장, 명확한 전망과 지칠 줄 모르는 행동, 눈앞에 놓인 거대한 의무에 대해 전체 노동자계급의 창조적인 참여 … 이 모든 것은 혁명, 권력 장악, 그리고 코뮤니즘의 비옥한 토양이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은, 집단적이며 폭력적인 과정이라는 점 외에도, 무엇보다도 계급의식의 발전에 달려있다.

     

    과거에는 객관적인 조건이, 인간의 의지와 의식보다 훨씬 큰 역할을 했다. 다른 생산 양식의 계승은 어느 정도 인간과 사회 계급의 ‘머리 위에서’ 발생했다. 생산력의 불충분한 발전으로 인해, 혁명 계급은 자동적이고, 신비스러우며, 변치 않는 것 같은 현실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의 원동력은 자연적 힘으로서 나타났고, 그 힘은 보이지 않으며, 폭력적이고, 제멋대로이며, 제어되지 않는 그러한 것처럼 보였다.

     

    “코뮤니즘은, 그것이 지금까지의 모든 생산 관계 및 교류 관계를 변혁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모든 운동과 구별된다. 또한 그것은 최초로 의식적으로 모든 자연적인 전제를 지금까지 존재하는 인간의 창조물로서 간주하고, 그 전제에서 자연적이라는 성격을 벗겨내며, 그 전제들을 연합된 개인들의 힘에 복속시킨다.”(맑스, 『독일 이데올로기』)

     

    그러므로 코뮤니즘과 코뮤니즘을 향한 진행은, 다시 말해, 혁명은 같은 과정의 일부이며,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이 운동의 각각의 특정한 단계는(그 단계는, 각각 다른 단계와 고립되어 있다고 할 수 없다), 이미 최종적 목표의 특징적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만약 코뮤니즘이 인간 필요를 위한 생산을 의식적으로 조직함을 의미한다면, 코뮤니즘에 앞선 사회 변혁과 혁명은, 그 스스로 의식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러므로 반드시 편견 없이 현실을 이해하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최초의 계급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혁명적 계급은 그 이전의 사회 질서에 비해 진보적인 사회 질서를 위해 투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회질서는 새로운 착취의 형식에 기반하고 있었다. 투쟁을 통해 얻어진 이 계급의 의식은 그들의 착취를 정당화하거나 은폐해야 했기 때문에 그저 신비화된 의식일 뿐이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투쟁은 새로운 형태의 착취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모든 착취의 형식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을 지향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 의식은 진정으로 과학적인 방법으로 사회 현실을 파악할 수 있는 최초의 의식이다.

     

    확실히, 노동자계급 의식의 발전은 완결된 과정이 아니다. 노동자계급의 최초의 투쟁의 ‘자생적’ 성과는 말할 것도 없이 더 미완적이다. 그 계급의식은 물질적 환경의 압력, 계급의 역사적 경험 아래에서 차츰 발전하며, 성장과 풍부화의 지속적 과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비록 계급의식의 발전이 ‘완전한’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맞다 하더라도, 이는 혁명적 계급의식 없이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자생주의나 자발주의, 그 어느 것도 혁명의 토대가 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쟁취는 그 계급이 자신의 ‘역사적 임무’를 완전히 의식하고 있을 것을 요구한다. 요구되는 의식의 수준을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뮤니즘과 혁명의 필요에 상응해야만 한다. 더욱이, 계급의식의 발전은 집단적인 과정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발전은 계급의 객관적인 조건과 주체적인 능력, 이 두 가지로부터 비롯되는 상이한 요소들이 결합한 산물이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

    c6b7e07ec0b0e2f5d914578ec5ded1df.jpg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9호] 코뮤니즘(공산주의)이란 무엇인가? Ⅰ

코뮤니즘(공산주의)이란 무엇인가

 

30f05b8315d290bab4451f7a13577ebf.jpg

이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그것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압력이 항상적(恒常的)으로 존재하기 때문에미래 사회를 객관적으로 묘사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목적은 자본주의가 영원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그래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압력은 코뮤니즘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정의하려는 모든 시도를 단절하고 훼손한다.

 

많은 노동자들에게 코뮤니즘은 그래서 러시아중국쿠바 등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었던 (국가)자본주의와 군사화된 노동의 천국으로 비친다그러나 이와 더불어코뮤니즘의 본질 자체로 인해서 코뮤니즘을 자세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코뮤니즘이란 우리에게 있어서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가 아니며혹은 현실이 따라가야 할 하나의 이상도 아니다우리는 코뮤니즘을 현재의 상태를 폐기해 나가는 현실의 운동이라 부른다.”(맑스,독일 이데올로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이것은 코뮤니스트 사회가 소수의 계몽된’ 사람들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추상적인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헤겔(19세기 초독일의 철학자로 맑스는 그에게서 변증법을 도출했다)의 개념과는 대조적으로역사는 관념(인간의 관념코뮤니즘의 관념)의 진보적 실현이 아니다코뮤니즘은 인류의 목표로서 기능하는 정신적인 창조물이나 환상이 아니다코뮤니스트 사회는 실재적이고 인간적이며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신기원이다이것은 구()사회에 내재된 모순으로부터 그리고 그 사회 발전의 필수적인 귀결의 하나로서 출현한다.

 

그러나 코뮤니즘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비록 코뮤니스트 사회가 자본주의에 내재된 경제적사회적 모순의 결과이자 실재적이고 객관적인 조건의 산물이라 할지라도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실천적이고 집단적이며의식적인 창조물이다역사상 최초로 하나의 사회 계급이 그들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그러나 그것은 오직 조직화되고 의식적인 방법으로만 가능하다이것이 코뮤니즘이 지적인 계획도 아니며맹목적이고 기계적인 필연성도 아닌 이유다코뮤니즘은 인류 공동체가 이전 사회관계의 폭력적 파괴에 뒤이어 구세계를 의식적이고 점진적으로 변혁시킨 결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코뮤니즘을 향한 현실의 운동을 지배하는 주체적이고 객관적인 조건은오늘날 존재하는 조건의 산물이다일단 코뮤니즘이 역사적인 측면에서 하나의 가능성이 되고 나면그것의 실현은 주체적 발전다시 말해 현 시대의 의식 발전에 달려있다왜냐하면 혁명 그 자체도 코뮤니즘과 마찬가지로반드시 의식적인 정치 행동의 형식을 취해야 하고그 성공 여부가 프롤레타리아트가 획득한 의식과 조직화의 수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바로 이러한 기초 위에서 인류 공동체는 단지 객관적인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이 될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코뮤니스트 사회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면서도코뮤니스트 혁명의 주요 국면과 혁명이 지향해야 하는 최종 목표를 정의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코뮤니스트 혁명은 오직 스스로를 의식하고 있는 운동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코뮤니즘에 의해 확립되는 새로운 사회관계의 특징 자체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과 조직양식이 발전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c6b7e07ec0b0e2f5d914578ec5ded1df.jpg

 

코뮤니즘의 본질

 

코뮤니즘은 유토피아라든가추상적인 이상향이 아니기 때문에그 뿌리를 이전 사회에 두고 있다코뮤니즘의 가능성과 코뮤니즘을 이루기 위한 객관적인 조건은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하려는 혁명적 계급의 정치적 역량이 두 가지로부터 나온다미래 사회의 자양이 되는 것은생산력의 발전 정도와프롤레타리아트에게 구체화된 사회관계의 본질두 가지 모두이다코뮤니즘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객관적 필요성이 되는 시기는 오직생산력의 발전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렀을 때생산력의 계속된 발전과 자본주의의 생산 관계 사이의 모순이 발전함에 따라 이전 사회가 더는 발전할 가능성이 없을 때이다.

 

사회가 모든 생산 수단의 통제를 장악하는 것은 이것이 일어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이 존재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해지고역사적 필요성으로 될 수 있다다른 모든 사회적 진보와 마찬가지로 그것은계급이 존재함이 정의나 평등 등등에 모순된다는 통찰이 얻어진다고 해서이러한 계급을 폐지하겠다는 단순한 의지가 있다고 해서 실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일정한 새로운 경제적 조건에 의해서만 실행 가능한 것으로 된다.” (엥겔스반뒤링론1894)

 

이러한 새로운 객관적 조건은자본과 노동 사이의 구별을 철폐하고 자본과 임금 체계상품 생산그리고 모든 민족적이며 계급적인 분리를 철폐할 수 있는 그러한 사회관계만이생산력의 진보적 발전을 허용하고 인류의 현재 필요에 대응하게 될 사회관계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 코뮤니즘은 계급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어떤 종류의 개인적집단적 소유도 없는 사회여야만 한다자본주의가 이뤄놓은 생산의 사회화의 유일한 최절정은 사회 전체에 의한생산수단의 사회적인 몰수이다오직 계급 특권과 사적인 몰수의 철폐만이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사회관계의 자본주의적 성격 사이의 현존하는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모든 생산력과 생산수단의 사회적 몰수는 오직경제적으로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으면서 하나의 생산적인 집단으로서만 기능하는 피착취 계급프롤레타리아트만이 수행할 수 있다.

 

  · 코뮤니스트 사회는 그러므로 결핍의 철폐와 인류의 필요를 위한 생산에 근거한다코뮤니즘은 풍요의 사회이며이 사회는 인류의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켜줄 것이다생산력인문학기술과 지식의 수준을 통해서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경제적 힘의 지배로부터 해방될 것이다역사상 처음으로인간은 자신의 삶과 재생산을 결정짓는 조건에 대한 통제력을 의식적으로 획득함으로써, “필요가 지배하는 시대로부터 자유가 넘치는 시대로” 나아갈 것이다.

 

인간의 필요를 위한 생산은인류의 해방은 오직 세계적 규모로 그리고 경제적 사회적 삶의 모든 측면에서 혁명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그러므로 코뮤니즘은 가치 법칙을 철폐한다모든 인간에 의해 모든 수준에서 사회화되고 계획되는 코뮤니스트 생산은 오로지 사용가치의 생산에만 기반하며그 사용가치의 사회화된 직접적 분배는 교환시장화폐(등을 배제한다.

 

 ·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사회경제적 경쟁과 경제적 무질서의 사회그러므로 개개인과 계급이 서로 충돌하고 경쟁하는 사회로부터인류는 코뮤니즘 아래에서 인류 공동체가 지배하는 사회로 진입한다.

 

이 공동체에서는하나의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는 체제를 유지하는 정치권력의 모든 형식(정부국가경찰 등)은 착취와 계급 분리가 사라짐과 동시에 사라질 것이다통치권들의 존재는다시 말해 인간성과 인간의 창조성을 억압하는 모든 방식의 존재는 사물의 단순한 관리,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에게 자리를 내줄 것이다.

 

코뮤니즘의 이러한 특징은 최소한의 윤곽에 지나지 않는다이를 넘어서더 서술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광범위한 일반화에 국한된다더구나이러한 간단한 묘사 속에는 인간관계와 관련된 새로운 삶의 방식의 결과들이 다루어지지 않았다또한 사회 내부의 분리와 차별소외인간 사이의 세력 관계 등을 철폐가 담고 있는 의미도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심지어 이렇게 대략적인 개괄을 통해서도 자본주의 사회와 이전에 있었던 모든 사회들과 미래 세계 사이의 엄청난 차이를 볼 수 있다.

 

착취가 없는 사회우리의 필요와 욕구에 따라 살 수 있는 곳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분리가 없는 곳자유의 의미가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있는 자유 이상을 의미하는 곳놀랄만하지 않은가!

 

비록 이렇게 인류가 만들어 가야할 거대한 도약의 자세한 부분까지 생각할 수는 없을 지라도인류의 역사상 아직까지 이와 같은 종류의 질적 도약을 위한 필요성은 없었다는 점이것 하나는 명확하다.

 

이 발언은 양날의 칼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이런 종류의 도약은 오직 한 사회 계급이 자신의 역사적 과업을 완벽하게 의식하고 있을 때야 비로소 성취될 수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의식 수준을 성취할 수 있는 계급인 노동자계급은 가장 극단적인 박탈가장 사나운 착취영속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압력에 종속되어 있는 바로 그 계급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가 이전의 모든 사회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 이르도록 하는 코뮤니즘의 모든 특징 그 자체는 프롤레타리아트 존재의 취약함궁핍그리고 비인간성에 달려있다.

 

사회 존재의 모든 비인간성이 프롤레타리아의 존재 조건에 집중된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노동자계급은 현재 그 자신의 상황에 집중되어 있는 사회의 모든 비인간적 측면을 극복하지 않고는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없다.”(맑스엥겔스신성 가족, 1844)

 

착취당하는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바로 그 입장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사회를 해방시키고또한 계급이나 착취 없는 사회를 만들도록 강제되는 것이다.

 

사회 내부에서 어떤 경제적 권력도 소유하지 않고생산의 지점에서 착취 받는 프롤레타리아트는그 자신의 해방을 위해서 오직 스스로에게만 기대할 수 있다그들은 자신의 연대와자신의 의식으로써만 자본주의에 반대할 수 있다이 두 무기는 그 자체가 미래 사회의 특징적인 원칙의 체화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반대가 매우 취약하고 깨지기 쉽다는 것을 의미한다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지 사회와 대결할 때 기반으로 삼을 수 있는 경제적 특권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그 해방을 위한 최종적 투쟁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계속적인 압력에 극단적으로 취약하다.

 

이것이 코뮤니즘을 향한 길이 필연적이지 못한 이유이다코뮤니즘은 길고 고통스러운 투쟁의 열매다이것이 어째서잃을 것은 그 쇠사슬뿐이며 쟁취할 것은 세계라는 프롤레타리아의 특별한 혁명적 역량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승리를 절대적으로 보장할 수 없는지그 발전에 대한 결정론적인 전망이 있을 수 없는지 이유다그러나 만약 이 새로운 역사적 신기원이 쟁취되지 못한다면인간성은 이름 없는 야만으로 전락하고아마도 그 최종적 파멸에까지 이를 것이다.

 

따라서 코뮤니즘을 향한 길계급투쟁은일련의 승리와 패배로서일보 후퇴와 그에 뒤이은 새로운 승리라는 패턴의 연속으로서 나타난다이것은 의지와 의식 사이의 긴장끊임없는 재평가와 자기비판 사이의 긴장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계속>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9호] 마트 계산대에서

      마트 계산대에서

 

     무겁고 긴 발을 끌고 들어와

시간의 목을 쥐고 걷듯이 가게를 한 바퀴 돌고

마침내 천 원짜리 아이스티를 한개 갖다 놓고

꼭 다문 지갑을 열어

보풀이 인 고지서들을 주섬주섬 꺼내놓다가

지갑의 바닥엔 바닥뿐임을 확인하고는

다시 주워 담는 동안

여기저기 삐져나온 살들 숨쉬며

오래 묵은 번뇌를 흘리고

퉁퉁한 큰 손이 작은 호주머니를 몇 번 파더니

우물 밑처럼 깊은 곳에서 건져 올린 건

먼지단추돌멩이그리고 수많은 주름을 가진

지전 한 장!

 

다시 먼지들을 주머니 깊이 묻어두고

두 손을 받쳐 아이스티를 가슴에 품고

느릿느릿 무겁고 긴 발을 끌고 환한 세상으로

나가시는 기나 긴 그림자

 

20180301224517553745.jpg

 

     

      슬픈 대문짝 

 

대문짝에 폐업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써 붙인 가게

그의 슬픔도 대문짝만했을 것이다

절을 한번 할 때마다 시를 한편씩 쓰는 마음으로

백팔 배를 하고,

천팔십 배를 하고,

삼천 배를 하며 하루하루를 살았을 것이다

참새처럼 종종 뛰며

똥 싸고 해탈할 시간도 없이

뱃속이 사리로 가득 찰 때까지

친구도 끊고

술도 끊고

죽기 살기로 매달렸을 것이다

희망과 놀람을 거쳐 오기와 끈기,

다음은 겸허와 근면이었으나,

허무에 와서 무릎이 꺾인 그는

열망이 그를 다치게 했다는 걸 깨달았다.

폐업을 써 붙이면서

누군가 다시 이 문을 열고

똥 싸고 해탈할 시간도 없이 살지 않기를

잠시 기도했지만

절 한 번에 시를 한편씩 쓰는 마음으로

매일 삼천 배를 하는 정성 가지고는

이 문짝 안에서 성공할 수 없으리라고

대문짝은

폐업을 덧바르면서

자꾸 얼굴이 두꺼워져 갔다.

 

C0A8CA3D00000151D141EEB5000116BE_P4.jpeg

  • - 박상화 詩

     

     

    <저자 소개>

     

    박상화 朴橡樺

    (필명 상화橡樺는 상수리나무와 자작나무 곁에서 사는 사람이란 뜻으로 지음)

     

    1968년 서울생.

    뿌림글 동인.

    동인시집 <거대한 뿌리>/2000

    해방글터 동인.

    동인시집 제1집 <땅끝에서 부르는 해방노래>/ 문예미학사/ 2001

    2집 <다시 중심으로>/ 삶이보이는창/ 2003

    3집 <하청노동자 전태일>/ 풀무질/ 2005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음
     

    #박상화 시인의 첫 시집 『동태』가 출간되었습니다.

    #코뮤니스트는 박상화 시인의 작품 게재에 감사드리며, 첫 시집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응원합니다.

     

    #시집_동태에 대한 코뮤니스트 독자-지지자들의 많은 구독과 관심부탁드립니다.

     

     

     67745409_749964952105039_1924266891887509504_n.jpg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9호] 동태

    동태

 

동태는 강자였다 콘크리트 바닥에 메다꽂아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동태를 다루려면 도끼 같은 칼이어야만 했다

아름드리나무 밑둥을 통째로 자른 도마여야 했다

실패하면 손가락 하나정도는 각오해야 했다

얼음 배긴 것들은 힘이 세다

물렁물렁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한때 명태였을지라도,

몰려다니지 않으면 살지 못하던 겁쟁이였더래도

뜬 눈 감지 못하는 동태가 된 지금은

다르다

길바닥에 놓여진 어머니의 삶을

단속반원이 걷어차는 순간

그 놈 머리통을 시원하게 후려갈긴 건

단연 동태였다.

 

- 박상화 詩

 

 

<저자 소개>

 

박상화 朴橡樺

(필명 상화橡樺는 상수리나무와 자작나무 곁에서 사는 사람이란 뜻으로 지음)

 

1968년 서울생.

뿌림글 동인.

동인시집 <거대한 뿌리>/2000

해방글터 동인.

동인시집 제1집 <땅끝에서 부르는 해방노래>/ 문예미학사/ 2001

2집 <다시 중심으로>/ 삶이보이는창/ 2003

3집 <하청노동자 전태일>/ 풀무질/ 2005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음
 

#박상화 시인의 첫 시집 『동태』가 출간되었습니다.

#코뮤니스트는 박상화 시인의 작품 게재에 감사드리며, 첫 시집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응원합니다.

 

#시집_동태에 대한 코뮤니스트 독자-지지자들의 많은 구독과 관심부탁드립니다.

 

 

 67745409_749964952105039_1924266891887509504_n.jpg

 

박상화 시인의 첫 시집 『동태』가 <푸른사상 시선 105>로 출간되었다. 시인의 주제의식과 작품들의 표현력은 콘크리트 바닥에 메다꽂아도 끄떡없는 동태처럼 단단하다. 우리 사회의 불의와 모순을 후려갈기는 통쾌함과 소외된 생명들이 한데 모여 숲을 이루려는 연대의식은 그지없이 소중하고도 아름답다. 2019년 8월 2일 간행.

 

■ 시인 소개

1968년 서울, 첫눈 펑펑 오던 날 태어났다. 본명은 흥열, 호는 위야(爲野), 필명은 상화.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다. ‘뿌림글’ 동인 시집 『거대한 뿌리』, ‘해방글터’ 동인 시집 『땅끝에서 부르는 해방 노래』, 『다시 중심으로』, 『하청 노동자 전태일』 발간에 함께했다.      이메일 getngomart@gmail.com

 

■ 시인의 말

언젠가 수국을 만난 적이 있다. 푸르지도 분홍빛이지도 희지도 않았다. 갈빛으로 꼿꼿이 마른, 목화된 꽃. 꽃이었으나 말라 나무가 돼버린 꽃. 꽃이 피어난 그 순간 그대로 시간을 멈춰버린. 세상에. 아무도 멈출 수 없던 시간, 그 시간을 멈춰버린 꽃이었다. 사랑하였으므로 피었고, 핀 그대로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멈춰버린 꽃이었다. 모든 시간은 순간이다. 너의 화양연화는 어쩌면, 힘든 삶을 버티고 말라가면서도 네가 꽃이었을 때 그 모습을 그대로 버티고 있는 고집은 아니었을까. 불안해하면서도 고집을 부리고 있다면 넌 잘하고 있는 거다. 잊지 말길. 지지 말길

 

■ 추천의 글

그가 미국으로 홀연히 떠난 지도 참 오래되었다. 그는 내게 <알함브라의 궁전>으로 기억된다. 국내 처음으로 이주 노동자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았던 책, 이란주의 『말해요. 찬드라』 홍보 배너에 그가 배경 음악으로 넣어준 곡이다. 그는 문예지들이 아직 종이 권력 눈치를 보고 있을 때 노동자들의 딱딱한 시를 멋지게 디자인해 사이버 벽시 운동을 처음 만들던 진취적인 벗이었다. 오랜 시간을 지나 그가 내게“ 서로 어깨 걸어 단단한 돌담…… 네가 버텨야 네 동료들도 무너지지 않는 걸” 다시 새기라 한다.“ 큰 나무가 되려면 삼백 번쯤 헐벗어야 하고/하늘을 날려면 뼈를 비워야” 하는 삶의 투명한 고투와 비애를 사랑하라 한다. 꽃도 나무도 자신을 찢고 터트려 새로운 꽃과 열매를 내듯“ 아프지 않고 나아갈 길”은 없어“ 아픈 건 (비로소) 나아간다는 것”임을 명심하라 한다.태평양 건너 머나먼 곳까지 가서도 밀양, 강정, 구미 아사히글라스, 평택 쌍용차, 부산 생탁과 한진중공업 등 전국 노동자 민중 투쟁의 모든 현장에 함께해온 정의로운 자. 이제 와 고백이지만 나는 그의‘ 과학’보다 대책 없는, 그러나 금강석처럼 빛나고 단단하던‘ 순정’을 더 사랑했었다. 긴 이별의 시간 동안에도 그는 우리가 살며 끝내 간직해야 할 정치적 당파적 인간애적‘ 올바름’이 무엇인지를 시적 극한까지 밀고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이젠 그만 아프길.“ 잎이 없어도/가지가 …… 없어도” 우뚝 선 겨울나무들의 아름다운 시의 집으로 나를 다시 초대해준 그가 오늘 몹시 그립다 . 

― 송경동(시인)

 

■ 작품 세계

새삼 시를 다시 생각한다. 시가 뭘까. 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채워야 시가 되지만 비우지 않으면 사라진다. 한편으론 무겁고 한편으론 한없이 가볍다.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어지럽다. 마성이되 순정한 삶 아니면 헛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란, 순연한 통증들의 연속이다. 그런데도 시인들은 이 시라는 걸 붙들고 한 삶을 건너간다.

박상화 시인도 이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오랫동안 시를 앓고 있는 것 같다. 시를 넘겨받기 전까지 나는 박 시인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력을 보니 과거에 한 번쯤은 서로 맞닿았음직하나,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장면들은 없다. 따라서 현재까지는 시만이 그와의 유일한 소통 면이다. 그래서 참 자유롭다.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의 시가 만만치 않다는 점이 나를 뒤척이게 한다. (중략)

그의 말대로 혼자서는 숲을 이룰 수 없다. “큰 나무 혼자서도 안 되고/앞장선 나무 혼자서도 안 된다.” “차비가 없어서 농성장에 오지 못하는 나무”도 데려와야 하고, “밥을 굶고 연대하는 바위”도 초대해야 한다. “피켓을 든 작은 풀도 있”어야 하고, 먼 데서 함께 우는 새와 “공장에서 일하는 마음을 띄”우는 구름도 어우러져야 한다. 그래야 숲이다. 숲의 세상이다. 어디 이뿐일 것인가. “일자리 찾아가는 냇물들도 모여/함께 다 같이” 생명의 숨결 맞비벼야 진정한 삶의 숲일 것이다.

자, 그러니 이제 어쩌겠는가 하고 그가 내게 묻는다. 당연히 함께한다. 내 등 기꺼이 내어놓고 이땅의 분투를 해소하는 화쟁의 숲에 들겠다. 당신은 어떠신가. 사람으로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도 등을 내어주고 그와 함께 등의 시간에 올라타시라. 현대인들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아 보인다. 

 

―정우영(시인) 해설 중에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9호]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소개 5 :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코뮤니스트(공산주의) 사회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소개 5

 

이   유

 

사회주의를 꿈꾸고, 사회주의를 유행처럼 주장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추상적인 노동해방을 목표로 투쟁한다 해도 노동자계급의 자기 권력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반재벌, 반자본주의 투쟁 또한 자본주의 타도 ㅡ노동자평의회 (국제적) 권력 쟁취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반드시 개량의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코뮤니스트(공산주의) 혁명을 목표로 조직(집단)적으로 투쟁하지 않고, 주장/연구/학습만 하는 것은 "사회주의 확산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주의/코뮤니스트 운동을 개인의 정치적 취향이나 취미생활로 전락시키기 때문입니다.

 

국가보안법을 이유로 또는 대중(반공)의식을 이유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강령에서 삭제하거나 다른 언어(의미)로 왜곡하는 것은 사회주의/코뮤니즘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부르주아독재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 보다 훨씬 우월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사회주의 또는 노동자 국가로 불렸던 체제를 (국가) 자본주의, 당 독재 국가로 규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당과 노동자계급(평의회)의 관계, 프롤레타리아 반(半)국가의 성격을 분명히 할 때 코뮤니스트 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4371_9398_2944.jpg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코뮤니스트(공산주의사회

 

노동자계급은 혁명계급이면서 낡은 체제에서의 피착취계급이기 때문에자신의 정치·경제적 해방을 위해서 의존할 수 있는 특권이나 경제적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또한자본주의(부르주아) 국가기구나 제도에 의존해서는 해방을 달성할 수 없다노동자계급은 다수의 집단적 힘과 의지를 관철해낼 수 있는 권력을 새롭게 창출하지 않고서는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이루어낼 수 없다부르주아계급의 독재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독재로부르주아 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로 대체되어야 한다따라서 노동자계급의 코뮤니즘(공산주의)을 위한 투쟁 앞에는낡은 생산관계의 지배가 새로운 것의 이해관계를 위해 파괴되는 과도기곧 낡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부터 코뮤니즘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인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불가피하게 선행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혁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전 세계에 걸쳐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해야 하는데그것은 전 세계에 걸쳐 자본주의 국가기구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새로운 노동자(프롤레타리아)국가의 계급적인 목적을 정치적으로 공공연하게 선언하는 체제이며경제적 변혁을 수행하기 위해 착취계급의 소유권을 몰수하고 사회화 부문을 점진적으로 전체 생산부문으로 넓혀 나가는 사회이다프롤레타리아계급 독재의 형식은 역사적으로 노동자평의회와 프롤레타리아트 총회의 연합으로 나타났다노동자평의회는 노동자계급 전체를 망라하여 조직될 것이고계급 안에서 선출되고 언제나 소환 가능한 직접민주주의에 기초한 평의회 체제에 의해 중앙화(집중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기간을 포함한 코뮤니스트혁명 과정에서 코뮤니스트(공산주의자)와 혁명당은 평의회 내부에서 활동하지만그들이 노동자계급 전체의 조직인 평의회를 대신할 수 없다혁명당은 코뮤니즘의 필요성을 깨달은 가장 의식적인 노동자계급을 재구성하고 전체 계급의식을 코뮤니스트 강령에 가깝도록 일반화시키는 역할을 맡는다따라서 혁명당은 권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평의회 안에서 코뮤니스트 강령을 위해 활동하고 투쟁해야 한다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이른바 사회주의 체제로 거짓 선전되었던 국가의 당 독재와 같이 프롤레타리아계급에 대한 혁명당의 명령을 의미하지 않는다오직 노동자평의회프롤레타리아트 총회로 구성된 전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계급만이 정치권력을 가진다.

 

이러한 자본주의로부터 코뮤니즘(공산주의)으로의 이행기인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기간에도 비()착취계급과 계층은 여전히 존재하며아직 해소되지 않은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내부적인 계급투쟁이 계속 존재할 것이다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서 아직생산수단은 전체로서 사회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노동자계급의 국가체제인 노동자평의회에 속할 수밖에 없다계급이 폐지되기 전까지 생산수단은 사회의 절대다수인 노동자계급이 독점할 것이다따라서 아직까지 전면적인 코뮤니스트 생산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여전히 사회는 계급으로 나누어진 사회이며부르주아계급을 대신한 지배계급인 노동자계급이 존재한다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노동자계급의 정치권력을 창출하고 그것을 부르주아 반혁명세력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자코뮤니즘을 향한 경제적 변혁을 위한 수단이다소수 부르주아가 독점한 생산수단의 박탈은 고립된 개인집단이 아닌 노동자계급의 조직된 힘인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전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며이렇게 조직된 힘이 노동자 반()국가의 기초를 형성할 것이다이렇듯 이행기동안 노동자계급은 사회의 유일한 혁명계급이기 때문에사회 계급이 노동자계급의 사회화된 부문으로 통합되어 점진적으로 소멸하면서 모든 사회계급이 폐지되고 국가 자체도 소멸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계급내부에서의 특정한 부문이나 그룹이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는 어떤 종류의 폭력도 배제한다혁명의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의 손에 있는 수단으로서의 폭력은 자본주의와 그 국가를 파괴하기 위해그리고 내전 동안의 반혁명적 계급의 저항과 폭력에 반대하는 노동자계급의 승리를 보증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하다하지만 이것과 상관없는 노동자계급 내부의 폭력은코뮤니즘을 건설하는 데 어떤 건설적인 과업의 일부도 담당할 수 없다이러한 폭력은 노동자계급의 활동을 일탈시키고다른 노동 계층과의 관계를 왜곡시킨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로 대체한 사회다평의회 체제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최고로 꽃피어 언론회합집단 의사결정의 자유가 최대로 이루어진다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권력 참여만이 코뮤니스트 강령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기반과 원동력을 줄 수 있다누구도 전체 노동자계급의 자주적 활동 없이 코뮤니즘(공산주의)을 만들 수 없고누구도 코뮤니즘을 미리 준비해서 노동자계급에게 넘겨줄 수 없다서로에 맞서 분열되지 않는 노동자계급의 집단적 실천과 의식만이 어떠한 오류라도 정정하면서 코뮤니즘을 향한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코뮤니스트 사회는 노동자계급의 혁명과 권력 장악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생겨난 보다 낮은 단계의 사회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이 단계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권리가 부여되는즉 각자의 사람에게 각자의 노동에 따라서 분배하는 사회’ 이다이 사회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적 자본가를 소멸시킨 사회이며평등한 권리란 이런 사회와 노동자 사이에 적용되는 권리이다그리고 이러한 낮은 단계를 경과한 다음 단계는 코뮤니즘의 고유한 토대에만 의존하고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전제로 하여 코뮤니즘으로 지향하는 보다 높은’ 단계이다이 단계는 개인의 분업에 근거한 노예적 종속이 소멸하고이와 함께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대립이 소멸해야 가능하다이 단계는 노동이 단지 생존수단이 아니고 그 자체로 생명적 욕구가 되는 때이다모든 개인의 다면적 발전과 함께 생산력 발전이 모든 것을 풍족하게 하는 때이다, ‘능력에 따라서 일하고 필요에 따라서 분배하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보다 높은 코뮤니즘으로의 이행기에노동자평의회의 의식이 코뮤니스트에 가깝게 진화해야 하며동시에 혁명당도 스스로 프롤레타리아트화 되어 국가의 완전한 소멸에 이르는 것을 준비해야 한다.

 

원시 공산제를 제외하고 모든 초기 사회는 계급으로 분화된 계급사회였다또한 다른 모든 사회는 재산과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에 기반 했다하지만 코뮤니즘 사회는 계급 없는 사회이다역사에서 코뮤니즘 이전 사회는 인간의 필요에 따른 생산력의 불충분한 발전에 기초해 있었다그것은 희소성의 사회였다또한 과거의 모든 사회는 과거의 경제체제사회관계사상과 편견의 흔적을 지니고 있었다이것은 과거 사회가 사유재산과 다른 사람의 노동 착취에 기반 했다는 사실 때문이다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예제나 봉건사회가 남겨 놓은 사회관계와 사상과 편견들을 고스란히 유산으로 지니고 있었다하지만 코뮤니즘 사회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코뮤니즘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사회적 낡은 유산을 전혀 갖지 않은 사회이다.

 

사유재산과 착취계급분열에 기초한 자본주의 생산은 가치법칙 및 시장과 화폐를 통한 분배와 소비에 종속됨으로써 경쟁과 무정부성을 벗어날 수 없었다코뮤니즘(공산주의)에서 가치법칙이 사라지며생산은 평의회 체제에 의해 사회화된다코뮤니즘은 전 지구적 사회이다국가적 경계와 분할은 사라지고 인간의 보편적 정체성과 창조성이 사회를 발전시킬 것이다코뮤니즘은 자유로운 사고를 억압하는 종교와 이데올로기낡은 전통과 윤리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다계급과 계급 적대가 사라지면 국가는 필요 없게 된다코뮤니즘 사회에서 국가는 소멸된다코뮤니즘은 국가 없는 사회다사회의 행정적 업무는 모든 구성원의 협력합의집단적 의사 결정에 의해 처리될 것이다따라서 코뮤니즘 사회에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의 진정한 이상이 처음으로 실현된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c4982800fb720db1ca9a06da3979d060.jpg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9호] 제주의 난개발과 구조적 원인 -자본과 권력에 맞선 투쟁이야기-

<기고>

제주의 난개발과 구조적 원인 

자본과 권력에 맞선 투쟁이야기

노민규

 photo_2019-07-10_11-34-56.jpg

 

제주의 난개발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차를 타고 조금만 나가보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포크레인이다평일주말 구분할 것 없이 쉬지 않고 포크레인은 작동되고 있다그 내용은 상,하수도관 공사도로 확장 공사, LNG가스관 매입 공사신축 건물 공사바다 매립 공사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그만큼 제주의 풍경은 빠르게 변해 왔으며지금 필자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제주도의 모습은 변해가고 있다더 정확하게는본래의 제주도의 모습이 상실되어 가고 있다.

 

 

필자가 느끼기에 제주시의 모습은 대도시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진다제주시에서 운전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교통체증 문제 역시 심각한 상태라는 것이다또한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최근 종종 올라오는 제주의 소식은 단연 쓰레기문제이다필자가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제주의 발전제주의 눈물이라는 제목의 뉴스가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올라와 있다지난 3월에는 필리핀에 불법 쓰레기를 수출했던 것이 제주도 쓰레기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제주지역 사회에 충격을 던져 주었다.

 

 

그렇다면 제주에 난개발이 일어나고 있는 구조적 원인은 무엇일까그리고 이런 난개발은 과연 제주도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일까지금도 많이 늦었지만이제는 살펴봐야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또한제주 쓰레기 문제와 강정 해군기지 문제제주 제2공항 문제영리병원 문제비자림로 문제는 이슈는 다르지만 크게 보면 본질적으로 동일한 문제이다지금부터 그 이유를 살펴보자.

 

 

제주 난개발의 구조적 원인 >

 

1) 사회학적역사적인 측면

 

1948년 4월 3제주에서 4.3사건이 발생한다제주 4.3은 아직 이름을 찾지 못했다학살로 불러야할지항쟁으로 불러야할지 아직도 논쟁이 뜨거운 주제이다제주 4.3은 단순히 1948년에 일어났던 사건은 아니다. 1947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서부터 1954년 한라산 금족령이 풀리기까지 7년에 걸쳐 일어난 사건이다제주 4.3사건이 일어날 당시 대통령은 이승만이었다이후 박정희 – 전두환 – 노태우에 이르기까지 군인에 의한 군사쿠테타가 두 번이나 일어났다서슬퍼런 군사 독재 시절제주 4.3은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될 주제였다게다가 피해자와 가해자가 한 마을에서 살아야했다는 점 역시 4.3을 이야기하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점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50년부터 제주도 개발 논의가 본격화되었지만전시 제주도개발계획은 정부가 비계획적비현실적으로 기획하였고 결국 현실화되지 못한 계획에 그쳤다.

 

1961년 박정희가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쿠테타로 잡은 정권이라 정통성이 약했던 박정희가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택했던 방법은 경제 성장이라는 기치를 대외적으로 내세운 것이었다그 결과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게 된다이에 따라제주에서도 급격한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의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정부 주도의 관광개발의 일환으로 제주항이 개발되기 시작한다그리고 1963년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잇는 5.16도로가 개통된다이후 1973년 제주도 관광종합개발계획안이 확정되었다이 개발계획에 따라 중문관광단지 조성 1차 공사해수욕장 정비 등 관광지 개발제주국제공항과 제주항의 확장 및 카페리의 취항간선도로의 포장통신망의 확충 등 각종 기반시설의 확충과 정비가 이루어진다.

 

 

제주 4.3과 한국전쟁을 거친 이후 개발주의가 제주도를 휘감기 시작했고그것은 관광개발정책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선전되었다.

 

2) 법적제도적 측면

 

1991년에는 제주도개발특별법이 제정·공포되었다이후 2002년 1월 26일 제주특별자치도 특별법은 제주국제자유도시 특별법으로 변경되어 공포되었다이후 2006년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한다. 2011년에 수립된 제2차 제주국제자유도시 종합계획에서는 계획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제주특별자치도가 규제완화 등을 통하여 사람·상품·자본의 이동이 자유롭고 기업 활동의 편의가 최대한 보장되는 이상적 자유시장 경제모델을 구축함으로써 경쟁력 있는 국제자유도시로 발전하는데 정책방향과 지침을 제공한다.

 

1997년말 IMF 경제위기 이후 전사회적으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개방이 필수적이라는 신자유주의 담론과 이에 대한 노동 및 사회단체들의 반발로 인해 타협책으로 영토적 예외성이 허용되는 특구 정책이 추진되었다그 결과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에 제주국제자유도시경제자유구역 등 다양한 예외적 공간이 도입되었다또한제주국제자유도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현실에 직면한 국가와 지역 차원의 불가피한 생존전략으로 인식되었다. (이승욱조성찬박배균 제주국제자유도시신자유주의 예외공간그리고 개발자치도)

 

 

이것은 쉽게 말하면 자본가가 마음껏 제주도를 수탈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을 의미한다또한 법으로 이를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요약하자면제주도가 신자유주의의 실험장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제주 4.3 이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군사주의와 개발주의가 제주 지역 사회 내에 깊숙이 개입하였고제주지역 공동체를 서서히 해체하기 시작했다개개인의 관계가 파편화되기 시작했고이에 대한 투쟁은 점점 더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jeji.JPG

 

난개발에 대한 저항제주 시민들의 투쟁이야기 >

 

1) 제주 제2공항 반대 투쟁 (도청앞 천막촌 사람들)

 

 

2015년 11월 10갑작스럽게 국토부에서 성산에 제주공항 인프라 확충 사전타당성 용역 결과를 발표하면서 성산읍 부지에 제2공항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이에 대한 저항으로난산리 주민 김경배 씨가 무기한 단식에 돌입하기 시작했다제주 제2공항을 반대하는 시민들이 모여서 천막을 제주도청 맞은편에 치기 시작했다그리고 국토부와 원희룡 지사에게 제주 제2공항 기본계획 수립 용역을 중단하라는 요구를 계속해서 하고 있다.

 

이 투쟁은 제주도 민주주의의 회복이라는 지점과 난개발에 대한 저항이라는 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도민들의 자기결정권 문제

 

 

우선제주 제2공항 사업추진은 제주도민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5년 11월 10일 국토부에서 사업을 발표할 때이미 결정을 내리고 발표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제주도민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자기결정권문제이다도청앞 천막촌 사람들은 계속해서 원희룡 지사를 향해서 제주도민들의 의견을 귀담아 들으라고 얘기하고 있다제주도지사는 제주도민들의 의견을 귀담아 듣고이를 중앙정부 부처인 국토부에 전달할 것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다이는 자치권이 과연 누구에게 있나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제왕적 도지사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을 살펴보면 제주도지사에게 막강한 권한이 있음을 알 수 있다심지어 제주시장 역시 도지사 임명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그 권한은 막강하다고 볼 수 있다. 1월 8원희룡 지사는 제주도청으로 진입하는 계단에서 제2공항을 반대하는 시민들의 피켓과 문구를 발로 밟고 지나가는 만행을 저질렀다이 장면만 보더라도제주도민을 얼마나 무시하는지를 단번에 알 수 있다이런 제왕적 도지사를 견제할 수 있는 기관이나 사람이 없다는 측면에서 절망적이지만민주주의가 회복되어야 함을 계속해서 주장하는 측면에서 천막촌의 투쟁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2) 비자림로를 지키기 위해 뭐라도 하려는 시민모임

 

2018년 8갑작스럽게 송당리에 있는 비자림로의 나무들을 베어내기 시작함에 따라 이에 대응하는 모임인 비자림로를 지키기 위해 뭐라도 하려는 시민모임이 결성되었다비자림로 이슈가 전국적 이슈로 급부상함에 따라 공사는 중지되었다가지난 3월 공사가 재개되었다이에 대해 비자림로 시민모임은 시민 모니터링단을 구성하고공사를 감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비자림로의 핵심은 제주 제2공항 연계도로라는 점에 있다그리고 제주 제2공항 사업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도로부터 확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또한 필요 이상으로 환경이 훼손되고 있으며천미천 역시 훼손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새롭게 드러나는 사실들

 

 

중요한 것은 시민 모니터링을 통해 공사 진행 과정에 있어서의 문제점들이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다이 지점은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최근에는 투융자 심사논란이 일면서 공사를 진행하는 법적 근거가 부실하다는 내용이 보도되기도 하였다.

 

비자림로 공사 투쟁을 계기로 제주 지역 사회와 전국에 난개발의 문제점을 환기시키고 있다는 지점에서 비자림로 투쟁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3) 영리병원 반대 투쟁

 

며칠 전 원희룡 지사는 제주영리병원 허가를 취소한다는 내용을 발표했다그러나 제주도지사는 개인 유튜브 방송을 통해 영리병원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드러냈다. “미래 먹거리 산업이 바로 그 단어이다원희룡 지사가 영리병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중요한 단어이다이것은 영리병원을 오직 자본의 논리로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사실은 영리병원 허가를 취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정이다그런데 스스로 신의 한 수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자신의 결정 미화하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공론조사 결과를 뒤집은 도지사

 

작년 12공론화 조사 결과 영리병원을 반대하는 결론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도지사가 이를 뒤엎는 사태가 벌어졌다이것이야말로 제주도내 민주주의가 완전히 망가져버린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도지사 스스로 약속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제주도민을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라고 볼 수 있다이에 대해시민사회단체와 제주 시민들의 가열찬 투쟁으로 끝내 영리병원 허가 취소라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정리하며 >

 

제주에 산적해있는 문제들 중 쓰레기 문제강정 해군기지 문제제주 제2공항 문제비자림로 문제는 사실은 연결되어 있는 문제이다제주에서 4.3이라는 사건 이후로 군사주의와 개발주의는 끊임없이 제주도를 노려 왔으며현재는 개발과 성장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뒤에는 권력과 자본이 숨어 있는 것이다사실은 제주 4.3은 제주 역사와 동떨어져 있는 사건이 아니고 제주 역사 1000년을 관통하는 긴 역사의 한 부분이다오랜 기간 동안 수탈과 착취피지배는 이어져 왔으며 그만큼 제주에서 사는 것은 어려웠다동시에 이에 대한 투쟁 역시 존재했지만이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지금 가장 표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난개발의 이면에는 이런 제주의 깊은 역사성이 숨어 있다.

 

 

그리고 이에 저항하는 제주의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있다제주도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며 제주 난개발의 문제점들을 하나씩 밝혀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무차별적인 자본의 폭격이라는 점에서 제주 4.3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그러나 시공간을 초월해 권력과 자본에 맞서 싸우는 이들은 아직 있다그것도 가장 변방인 제주에이들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그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편집자 주>

이 글은 본지의 요청으로 싣게 된 소중한 기고 글로 국제코뮤니스전망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2019년 _ 10호가 나왔습니다.

com10 cover.jpg
com10.png
 
「코뮤니스트」   2019년 _ 10호가 나왔습니다.
 
 
□ 가격 :  10,000원
 
□ 구입문의 : communistleft@gmail.com  
 
 
# 11월 9일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배포-판매 합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실천 복간 2호」 자본주의 쇠퇴기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망 2

  • 자본주의 쇠퇴기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망

    오세철

46d4be822eed282238ddd65b96b1b3a6.jpg

3.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망

 

 

자본주의의 억압과 착취에 맞선 계급투쟁의 역사는 항상적이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1인터내셔널은 상승기 자본주의의 능력 때문에2인터내셔널은 혁명주의의 포기와 민족주의 때문에그리고 코민테른은 사회주의 혁명을 포기한 스탈린주의의 반혁명 때문에 실패했다특히 1930년대 이후의 반혁명세력은 (국가)자본주의의 본질을 호도하면서 사회주의를 참칭하였고결국 세계자본주의 체제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했으며양 진영의 대립을 위장하면서 세계의 노동자 계급을 억압·착취하였다더구나 1989년 동구블록과 스탈린 체제의 몰락이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명백한 승리’, ‘계급투쟁의 종말’, 그리고 심지어 노동계급 자체의 종말이라고 떠드는 부르주아지의 캠페인은 프롤레타리아트를 그 의식과 전투성 수준에서 심각하게 후퇴하도록 만들었다.

 

1990년대 동안 노동계급은 투쟁을 전적으로 포기하지 않았다그러나 지난 시기의 투쟁의 기관이었던 노동조합에 대적할 폭이나 의식그리고 능력은 지니지 못했다. 2003년까지는 그렇지 못했지만 1989년 이래 프롤레타리아트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의 연금에 대한 공격에 대한 반대투쟁이 전기가 되었다노동자의 투쟁은 주로 중심국가에 영향을 주었는데 미국(2005년 보잉과 뉴욕교통), 독일(2004년 다임러와 오펠, 2006년 봄 의사, 2007년 봄 독일 텔레콤), 영국(2005년 3월 런던공항), 프랑스(2006년 CPE 반대 투쟁)가 있고주변부 국가로는 두바이(2006년 봄 건설노동자), 방글라데시(2006년 봄 방직노동자), 이집트(2007년 봄 방직노동자)의 투쟁이 있다. 2006년 이후 2008년까지 벌어진 세계의 계급투쟁은 이집트 두바이알제리베네쥬엘라페루터키그리스핀란드불가리아헝가리러시아이태리영국독일프랑스미국 등 전 세계로 확대되었으며, 2009년부터 심화되는 대공황과 국가 부채재정악화로 인한 노동계급에 대한 자본과 국가에 의한 공격은 유럽을 중심으로 한 노동계급의 공세적 투쟁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미국 월가의 점령 투쟁아프리카의 민주화투쟁중국인도에서의 노동자 투쟁은 쇠퇴기 자본주의 체제를 분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계급투쟁의 새로운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40년의 위기와 노동계급의 생활표준에 대한 공격특히 실업과 불안정 노동의 증가는 미래가 좋아질 것이라는 환상을 날려버렸다.

둘째점점 야만의 형식을 취하는 군사갈등의 영구화뿐만 아니라 환경파괴에 대한 가시적 위협은 사회혁명의 필요성을 불러일으킨다. ‘반자본운동과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슬로건은 혁명을 벗어나게 하려는 부르주아지가 숨긴 항체이다.

셋째스탈린주의와 20여 년 전 그 몰락 이후의 부르주아 캠페인이 만든 트라우마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고 있다지금 노동의 삶을 시작하는 새로운 세대는 공산주의의 죽음에 대한 거대한 캠페인이 벌어졌을 때 어린이였다.

 

그런데 40년 동안 세계자본주의는 엄청난 부채를 짊어짐으로써 재앙을 피해왔다자본주의에서 부채는 마약중독자에게 마약이나 다름없다그 마약을 소련 같은 (국가)자본주의가 사용했건 미국 같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사용했건 마찬가지였다이 모든 부채의 결과는 지불 가능한 시장을 찾지 못하고 결국 전 세계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돌아올 것이다그것은 또한 전 세계 노동자의 가난제국주의 전쟁그리고 생태적 재앙으로 되돌아 올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150여 년 전의 전쟁인가 혁명인가의 화두를 진지하게 꺼내들고 다시 한 번 야만인가 문명인가’, ‘코뮤니즘의 물질적 필요성을 말하는 역사적문명적 인식과 과학적 사회주의의 이론과 실천을 준비해야 한다자본주의 쇠퇴의 객관적 법칙과 조건이 생산권력역사의 주체인 노동계급과 만나 서로 침투하는 계급투쟁을 전개하는데 코뮤니스트의 역사적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코뮤니스트는 맑스주의 원칙 중에서도 국제주의의 원칙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자본주의 위기를 모면하려는 제국주의 전쟁과 파시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족해방투쟁에 왜 참여하지 말아야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왜 그것을 지지해야하는가의 문제야말로 민족해방” 투쟁에 대해 가져야 할 관점이다국제주의는 공산주의 초석 중의 하나이다그것은 1848년 이래 노동자는 조국이 없다는 노동자 운동 속에 잘 확립되어 왔고 공산주의 선언의 마지막 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에 담겨져 있다.

 

맑스와 엥겔스에게 민족국가와 민족 이데올로기는 순수하고 단순하게 자본주의 발전의 산물이었다그들의 전반적인 전망은 세계시장의 분석과 미래의 사회주의(공산주의사회가 지구적 인간 공동체세계적인 생산자 연합이라는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그러나 그들은 자본주의 상승기에 글을 썼고그 시기는 부르주아지가 봉건적 지배의 족쇄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진보적이고 혁명적 계급이었다그들의 시대에 자본주의적 상품관계는 생산력의 진보적 발전의 유일한 기반이었다그 당시 혁명가들의 민족해방 운동을 지지한 것은 이러한 관점 때문이다이 시기에 민족전쟁에 대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를 구별시킨 두 가지가 있다.

 

첫째공산주의자들은 모든 시기에 모든 국가에 적용되는 민족자결에 대한 추상적 권리를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공산주의자들은 민족해방운동의 자본주의적 본질을 이해했다는 점이다그러므로 그들은 심지어 노동자가 절대주의에 대항하는 부르주아지의 투쟁을 지지할 때에도 부르주아지로부터 엄격한 정치적 독립을 프롤레타리아트가 유지해야 한다고 이해했다.

 

맑스와 엥겔스와 같이 레닌도 민족해방투쟁이 부르주아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정확하게 보았다그러나 레닌은 러시아와 식민지 국가에서 봉건제를 전복하고민족독립을 성취하는 부르주아지의 임무는 완수되지 않았다는 근거로 룩셈부르크의 비판으로부터 민족자결권의 구호를 유지하는 볼셰비키의 입장을 방어했다반면 룩셈부르크에게 제국주의는 단순히 후진국가에 대해 선진자본이 저지른 강도적인 형식이 아니라 세계자본주의 관계의 총체성의 표현이었다그 후 스탈린주의 관료주의는 세계자본에 내재적으로 적대적인 세력이 되는 것과 달리 러시아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착취에 종속되는 세력으로그 착취의 도구였다.

 

2차 세계대전을 경과하면서 식민지에서 민족운동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진화했다.

 

첫째전쟁 후 몇 년 간 비교적 평화적인 탈식민지화의 경향이 있었다인도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폭력적인 민족운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옛 식민종주국은 재빨리 민족” 독립에 동의했다대영제국의 평화적” 해체는 가장 적절한 보기이다그러나 그것은 이러한 식민지 국가들이 스스로 자본주의적이며 지구적 자본의 확대재생산의 기반으로 더 이상 역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한국베트남중동 등에서의 전쟁은 2차 세계대전 후 세력 균형의 산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가 인류의 가장 기본적 필요에 부응할 수 없는 무능력과 구식민지 지역의 극단적인 사회적 해체 때문이었다이 전쟁에서 제국주의는 직접 서로 부딪치지 않았고 지역갈등이 강대국”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는 매개 구실을 했다이는 지역 부르주아지가 항상 강대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것이다지역 부르주아지는 그들 자신의 이해를 가지고 있고 제국주의적이다자본주의 쇠퇴 시대에 모든 민족국가는 제국주의 권력이다.

1960년대에는 제3세계주의와 민족해방 신화의 전성기였다좌파와 자유주의자는 베트남 전쟁을 미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베트남 인민의 영웅적 투쟁으로중국을 세계의 피억압민중의 성채로카스트로벤 벨라 등에 대한 숭배로 나아갔고모든 세대의 학생과 심지어 노동계급의 전투파까지도 이러한 신화에서 자양분을 얻고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연대운동을 전개했다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은 이 신화로부터 제국주의가 준 돈을 받고 면제되었으며3세계 인민의 등 뒤에서 세워진 자본주의 번영의 혜택을 즐겼다프롤레타리아트는 더 이상 주요 혁명세력이 아니었다혁명의 주동력은 훈련된 게릴라 군대가 이끌고 도시에서의 새로운 혁명전위(노동자가 아닌 학생흑인여성)와 연대함으로써 후진국 농민과 빈민대중의 봉기로부터 나온다는 것이었다.

 

1970년대는 이러한 모든 신화가 자본주의의 세계적 위기라는 빛에 의해 무자비하게 노출되었다역사적으로 파산된 세계질서의 위기는 두 개의 주요계급으로부터 두 가지 기본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경쟁하는 민족국가와 제국주의의 블록으로 나누어진 부르주아지는 세계 전쟁으로 내몰린다사회적 부의 생산자인 노동계급은 자신의 생활표준을 방어하는 투쟁즉 전쟁을 향한 움직임을 막고 공산주의 혁명의 가능성을 향한 투쟁으로 나아간다이렇게 두 계급의 분리되는 경향은 70년대에 이른바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허위와 환상을 흔들어 놓았다.

 

세계자본의 제국주의 시대에는 어떠한 새로운 독립적 자본주의도 나타날 수 없다또한 민족해방은 불가능하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환상은 거의 사라졌지만 두 가지 다른 형태로 국제주의로부터 이탈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는 이른바 반세계화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주의의 복원을 통한 미제국주의 반대운동이다반세계화운동은 부르주아지의 이념적 선전과 같은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① 자본주의는 유일한 가능한 체제이고 그 개혁이 유일한 대안이다.

② Attac과 같은 조직의 운동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잘 규제된 자본주의가 사악한 금융자본을 몰아내면 인간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③ 위기는 신자유주의 탈규제화와 산업자본으로부터의 투자수익률 15% 요구하는 금융자본의 독재의 결과이다.

④ 내핍금융 불안불경기는 부르주아지 내의 새로운 힘의 균형의 결과에 불과하다

 

모든 반세계화 운동 세력의 중심 기조는 세계자본주의에 근본적 대안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한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 흐름은 반미의 민족주의적 정서와 빈곤화되는 농민도시 빈민노동자의 밑으로부터 혁명적 분출을 기반으로 한 남미의 민중주의적 경향이다한 국가 내에서의 미국 자본과 민족 자본의 대립에 근거한 국유화 등의 조치는 세계자본 내에 경쟁하는 자본의 분파에 불과할 수밖에 없는 지금의 세계자본주의의 운동과 위기모순쇠퇴를 이해한다면 100년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경험한 오류를 다시 되풀이하는 엄청난 장애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열어갈 노동자 국제주의에 입각한 프롤레타리아트의 과제는 무엇인가?

 

 

첫째비타협적인 자발적 계급투쟁을 전개하는 일이다.

계급의 투쟁을 엇나가게 하고 자본의 분파와 연결시키는 모든 세력 (노동조합이건좌파당이건민족해방전선이건)으로부터 독립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세력들과 치열하게 투쟁해야 한다오늘날 노동계급에게 열린 유일한 전선은 자본에 대항하는 국제 프롤레타리아 전선이다이런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본주의에서 차악은 없다자본주의의 위기가 국제적인 것처럼 노동계급의 투쟁도 국제적이다.

 

둘째세계적 내전으로 길을 여는 일이다.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중심 자본주의의 쇠사슬을 끊을 때까지무기력하게 기다리도록 제3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를 저주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민족해방전선에 대한 지지를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있다이러한 견해는 지구적 사회관계로서의 자본을그리고 하나의” 세계 계급으로서의 노동계급을 이해하지 못한다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선진국에서 일어나든3세계에서 일어나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어느 곳에서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확립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세계적 내전의 시기를 연다는 것이다여기서 내전은 권력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제기되자마자 프롤레타리아트는 죽을 때까지 자본과의 투쟁을 시작함을 의미한다그것은 권력을 장악한 프롤레타리아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 세계 계급에게도 마찬가지다. “정치적” 고려라는 전반적 틀 내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의 군사적” 확장의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무장된 프롤레타리아트는 다른 나라 노동자들에게 혁명 투쟁을 촉구하지만 테러를 사용하지 않는다어떠한 경우라도 핵과 세균전쟁을 사용할 수 없다.

 

셋째세계의 인류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이다.

옛 노동자운동에서는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어느 정도 민족 선구자 뒤에서 실현될 수 있고 세계 공동체는 사회주의 경제의 점진적 융합 과정으로 창조될 수 있다는 혼란스런 생각이 가능했다그러나 러시아 경험은 일국 사회주의 건설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공산주의가 결정적으로 만들어지기 전에 자본주의는 모든 곳에서 결정적으로 파괴되어야만 한다공산주의는 자본주의 내에서” 건설될 수 없다.

 

 

4. 결론에 대신하여

 

ICC는 최근 기관지 국제평론」 161호 (2018년 6)에 제국주의 긴장에 관한 보고서를 게재하면서 현 자본주의의 쇠퇴기 해체의 특성을 제국주의 긴장의 진화과정으로 진단하고 있다첫째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이 세계 경찰에서 자신만을 위한 주요 선전자로 변화하는 점둘째중국은 지나치게 직접적인 대결을 회피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는 점셋째전 세계적으로 강력한 지도자와 호전적인 수사가 부상하고 있는 점넷째유럽연합이 분열화를 향한 경향을 보이고 있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자본주의 해체국면의 특성을 1930년대의 파시즘의 재등장으로 보거나 신파시즘(Neo-Fascism)으로 부르는 일부 입장과 견해에 우리는 동의하지 않는다이는 이미 1930년대에 파시즘과 민주주의를 대립적 본질로 보고 반파시즘 투쟁을 민주주의 투쟁으로 동일시했던 오류를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1934년 12월 오토리노 페론(Ottorino Perrone)은 파시즘민주주의코뮤니즘에서 민주주의는 국가에 의해 지배되고 통제되는 다른 기관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수단일 뿐이라고 보면서 이론적 관점과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민주주의와 노동계급 사이에는 환원할 수 없고 화해할 수 없는 적대가 있다고 규정한다. (비타협」 2018. 7월 2. 23또한 그는 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당과 조직을 자본주의 편에 서서 프롤레타리아트를 반대하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파시스트의 승리로 이끄는 노선이었지 프롤레타리아트의 방어와 승리로 이끄는 노선이 아니었다고 결론지었다. (윗글 28)

 

코뮤니스트 좌파는 부르주아 좌파가 분석했던 방식으로 파시즘을 분석하지 않았다그들은 이탈리아독일스페인에서 파시스트 국가권력의 침략을 혁명적 계급투쟁의 패배 결과와 완결로 설명했다이 시기 부르주아는 파시즘을 정부의 한 형식으로 수용했으며 파시즘스탈린주의 그리고 민주주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자본주의테러 그리고 제국주의 블록에 의한 대량파괴의 현실을 완벽하게 숨기려는 깃발 아래 있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였다파시즘은 1917 ∼ 23년 혁명적 물결 이후 반혁명에 한정되어 있는 현상이다오늘날 정부 형식으로 파시즘은 의제에 올라 있지 않다트럼프주의 같은 경향을 신파시즘으로 부른다면 이는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억압하는 국가의 부속물로 설명할 수 있다. (코뮤니스트 좌파와 맑스주의 인본주의Fredo Corro 2017. 9월 참조)

 

그러나 포퓰리즘은 쇠퇴기 자본주의를 보다 잘 설명할 수 있는 의제에 올라있다. ICC는 22회 대회의 국제계급투쟁에 대한 결의 (2017년 4)에서 포퓰리즘의 등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코뮤니스트」 2018 7. 157 -8)

 

최근의 포퓰리스트의 등장은 이 모든 요인들 - 2008년의 경제적 붕괴전쟁의 충격테러리즘 그리고 난민 위기 에 의해 성장했고 체제 해체와 사회의 두 주요한 계급들 모두 인류에게 미래를 위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무능력의 농축된 표현으로 나타났다지배계급의 관점에서는 70년대 개방경제위기의 출발에서부터 자본주의가 유지되고 특히 전후 호황을 지배했던 케인즈주의 정책이 소진됨을 의미했다. (중략포퓰리스트 정책의 본질은 부르주아 사회의 불평등의 정치적 행정적 그리고 법적 공식화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적 해결책 (계급 없는 사회)을 내놓지 못하는 지금 상황에서 포퓰리스트의 반동적 정책은 존재하는 위선적인 가짜 평등을 노골적이고 솔직한“ 불법적 차별체제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코뮤니스트의 확실한 전망을 하기란 쉽지 않다자본주의 쇠퇴기의 마지막 국면으로 보이는 해체의 국면에서 코뮤니스트의 자세를 다음 문항으로 대신한다.

 

 

 

 

시간은 더 이상 노동계급의 편이 아니다그러나 그 그림자를 뛰어넘을 수도 없다실제로 오늘날에는 1917년 이후뿐만 아니라 1918 - 19년의 투쟁에서 잃어버렸던 많은 것을 되찾아야만 한다이 작업을 혁명가들에게 계급의 실제 운동과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위기로 드러난 전망을 분석하고 이러한 이론적 노력의 바탕 위에 코뮤니스트로서 입장의 첨단에 설 사람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에 대답을 제공하는 것은 매우 오랜 시간의 끈질긴 작업이 필요하다”(윗글 172)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실천 복간 2호」 자본주의 쇠퇴기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망 1

  • 자본주의 쇠퇴기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망

    오세철

     27a07656e4464cb7b96e2d7222be44d4.jpg

     

    1. 들어가며

     

    2006년 10월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에서 발표한 나의 논문 「자본주의 쇠퇴에 관한 논쟁에 대하여」에서 나는 자본주의 쇠퇴이론이 맑스의 역사적 유물론의 중심적 이론으로 앞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 전략의 기초가 되며 공산주의 전망을 여는 열쇠라고 보고 좌익공산주의 내의 자본주의 쇠퇴에 관한 논쟁을 정리하고 있다. 물론 이 논쟁은 1990년대 말부터 2005년까지의 논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 글의 잠정 결론으로 나는 더 공개적인 논쟁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몇 가지 토론 주제를 제기한 바 있다.1)

     

    첫째, 자본주의 쇠퇴 이론과 개념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공산주의 사회건설의 핵심으로 중요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둘째, 자본주의 위기에 대해 경제이론의 양적 기준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따라서 유물론에 철저하게 기초하면서 총체성의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셋째, 경제 메커니즘과 계급투쟁의 변증법적 통합인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넷 째, 부르주아지의 저항능력이나 기술발전의 힘에 대한 지나친 과대평가는 부적절하다.

    다섯째, 쇠퇴와 자본의 실질적 지배와의 관계가 철저하게 분석되어야 한다.

    여섯째, 주체로서의 노동계급에 대한 인류학적, 문화적 연구가 쇠퇴와 관련되어 폭넓게 연구되어야 한다.

    일곱째, 자본축적에서 포드주의, 포스트포드주의의 이분법을 넘어 쇠퇴시대의 울트라 포드주의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여덟째, 맑스주의 핵심과 그의 이론적 간극과 빈틈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그 이후에도 논쟁은 계속되고 있으나 대립되는 지점, 보기를 들어 이윤율 경향적 저하 법칙과 시장포화론 사이의 대립을 맑스 안에서 통합시키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최근 논쟁을 정리하고 최근까지 자본주의 위기의 역사를 쇠퇴의 마지막 단계로 보는 근거와 그에 기초한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망을 분석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는 그와 같은 전망 아래에서 한국의 코뮤니스트 운동의 역사적 평가와 앞으로의 방향도 간략하게 모색하고자 한다.

     

     

    2. 자본주의의 위기와 쇠퇴에 관한 논쟁의 역사 개괄

     

    로자 룩셈부르크가 1913년 「자본의 축적」을, 헨릭 그로스만이 1929년에 「자본의 축적과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를 출간했는데, 룩셈부르크는 시장의 부족을, 그로스만은 이윤의 부족을 자본주의 위기의 근본적 원인으로 보았는데 안톤 판네쿡은 1934년 「자본주의 붕괴론」에서 룩셈부르크와 그로스만의 이론이 모두 틀렸다고 주장하면서 자본주의는 순수하게 경제적 이유만으로 몰락하지 않고 노동계급의 의식적 행위를 통해서만 끝장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천문학을 전공한 판네쿡은 맑스주의자로서 뿐만 아니라 수학에 대한 심오한 지식을 기반으로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을 강조하여 더욱 주목을 받았다. 그는 자본주의, 위기, 궁핍화, 프롤레타리아 혁명,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은 마치 자연법칙과 같이 통일체로서 자본주의를 붕괴로 이끈다고 보았으며 자본주의가 몰락하여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점점 노동자를 견디지 못하게 만들고 투쟁하게 만듦으로써 노동자가 자본주의 자체를 전복하는 의지와 힘을 가질 수 있게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판네쿡의 이와 같은 혁명의 주체로서,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에 대한 강조는 그 당시 제2인터내셔널과 사회민주주의당을 지배하고 있었던 “엥겔스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다. 발본적 사회비판을 자연과학의 방법과 잘못 등치시킴으로써 맑스의 탐구방법을 전환시킨 엥겔스주의는 자연의 변증법을 정교화 시키는 과정에서 유사신비주의적인 헤겔의 교조로 퇴행시켰다고 비난받았다.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자본의 욕구로 통합시킨 제2인터내셔널은 노동계급의 정치사에서의 어떠한 연속성도 거부했다. 이 당시 엥겔스는 자본주의 중심부를 싸고 있는 비자본주의국가에 대한 정복이 가속화되면서 자본주의가 스스로 유지되는 경향을 보았다. 다시 말해 엥겔스는 지구의 비자본주의 영역의 정복을 끝내는 것을 목표로 한 군사주의와 제국주의의 성장이 자본주의의 중심인 유럽으로 그 발전의 위험을 되돌림으로써 혁명의 성숙을 가속화하는 동시에 문명을 야만으로 빠지도록 위협하고 있다고 보았다.2)

     

    19세기 마지막 수십 년 동안의 커다란 제국주의의 팽창은 극적인 성장률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 시기는 무엇보다 노동계급의 생활표준이 개선되면서 예기지 못한 번영과 진보의 시기로 기억되고 있다. 이는 유리한 객관적 조건뿐만 아니라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으로 조직된 노동자 운동의 영향력 증가의 덕이었고 개량주의의 출현의 기반이기도 했다. 이는 다른 형태로 수정주의, 개량주의에 대한 맑스주의 혁명가들의 자본주의 쇠퇴(몰락)이론으로 나타났다. 러시아의 레닌, 홀랜드의 호르터와 판네쿡, 미국의 부딘(Louis Boudin, 「The Theoretical system of Karl Marx(1907)」, 로자 룩셈부르크 (「Sociel Reform or Revolution(1900)」의 수정주의 비판이 그것이다. 이 둘은 위기 극복과는 거리가 멀게 카르텔과 신용을 통한 자본의 “조직”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반응이며 이는 더 크고 많은 파괴적 수단으로 자본주의 모순을 증가시킨다고 보았다. 특히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 쇠퇴의 위기의 새벽이 어떠한 형태를 취할지라도 자본주의의 파국적 몰락의 전망 없이는 사회주의가 단순한 유토피아라고 주장했다.3)

     

    2.1. 좌익공산주의 내부의 자본주의 위기 논쟁

     

     

    이윤의 부족과 시장의 부족에 대한 판네쿡의 비판을 항상 염두에 두면서 좌익 공산주의 내에서의 자본주의 위기 논쟁(룩셈부르크와 그로스만의 대립으로부터 이어지는)을 「국제공산주의흐름」과 「국제공산주의경향(또는 「공산주의노동자조직(CWO))」과의 논쟁(2006년 이후)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국제공산주의흐름」과 「혁명당국제서기국(IBRP)」과의 논쟁은 1977년 좌익 공산주의의 통합 흐름이 실패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국제공산주의흐름」은 「국제평론」 12호(1978)의 “「공산주의노동자조직(CWO)」에 대한 ICC의 대답”, 「국제평론」 13호의 “맑스주의와 위기이론”, 「국제평론」 16호의 “경제이론들”, 「국제평론」 19호의 “제국주의에 대하여”, 「국제평론」 22호의 “위기이론들”, 「국제평론」 82호의 “IBRP의 쇠퇴개념과 전쟁의 문제”, 「국제평론」 83호의 “제국주의 전쟁의 본질: IBRP에 대한 답변”, 「국제평론」 84호의 “자본주의의 역사적 위기 이론들: IBRP에 답하여”, 「국제평론」 121호(2005)의 “혼돈으로의 전락”에 그 논쟁을 실었다. 자본주의 쇠퇴와 관련된 2005년까지의 논쟁은 이미 나의 글(각주1참조)에서 정리한 바 있다. 그 이후 논쟁의 촉발은 「공산주의노동자조직」의 「혁명적 전망」 27호(2005년 11월)에 실린 글 “자본주의 쇠퇴기에서의 전쟁의 경제적 역할”에 대한 「국제공산주의흐름」의 비판 글이 「국제평론」 127호(2006, 4th Quarter, 10-17쪽)에 “CWO에 대한 답변: 자본주의 쇠퇴기의 전쟁(1부)”에 실리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이 논쟁의 목적은 공산주의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이행하기 위한 기초로서 인류사회의 진화에 대한 맑스주의의 분석을 재확인하고 발전시킬 필요성 때문이었다. 「혁명적 전망」이 전쟁에 뒤이은 번영은 전쟁의 효과가 이윤율을 증가시킨다는 점에서 경제적 합리성이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국제평론」은 거부하면서 20세기가 시작된 이래 세계전쟁이 자본주의 생존에 필수적이었고, 19세기의 10년 주기의 위기를 대체했다고 보는, 다시 말하여 자본주의 위기분석을 이윤율 저하 경향에만 기초하고 있는 「공산주의노동자조직」의 입장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국제평론」 127호(2006년 4th Quarter)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4)

     

    첫째, IBRP가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모순에 대한 맑스의 분석을 매우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폴 매틱(1904-81) 5)의 영향을 받은 IBRP의 접근방법은 자본주의의 쇠퇴, 위기, 그리고 특히 자본주의 파멸의 중요한 표현 중의 하나인 전쟁의 뿌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전쟁이 자본주의 파탄의 마지막 보기이고 자본주의 경제모순의 악화의 표현일지라도 경제위기와 전쟁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번영이 전쟁 중에 일어난 파괴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셋째, 자본주의 생존에 대한 전쟁의 경제적 기능에 대한 이론이 노동자 운동의 전통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다. CWO의 분석은 평의회주의자 폴 매틱의 「맑스와 케인즈」에서의 경제주의적 분석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 자본주의 쇠퇴기에서의 전쟁의 합리성에 대한 생각은 이론적으로나 실증적으로나 반박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섯째, 자본주의 생존에 대한 전쟁의 경제적 필요성의 기초는 사회적 진화에 대한 이해로부터 계급투쟁을 완전히 제거시키는 조야한 유물론이라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제국주의 전쟁이 노동자 운동에서 중심위치를 차지했지만 그것은 IBRP가 주장하듯이 자본주의 생존에서의 경제적 역할 때문이 아니라 전쟁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쇠퇴기를 열었기 때문이며,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분열의 뿌리였던 세계전쟁이 노동자 운동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이었고, 바로 그 참상 때문에 첫 번째 세계적인 혁명 물결(1917-23)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은 스탈린주의를 거부한 모든 공산주의 그룹들에 대한 정치적 시험대였기 때문이며, 제국주의 전쟁은 인류의 생산, 역사, 문화적 자산 등의 모든 유산과, 그리고 그 주요구성요소인 노동계급과 전위를 파괴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전쟁이 노동자 운동의 중요한 문제였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경제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제국주의적 이유 때문이었다.

     

     

    이 글에서 ICC는 맑스와 CWO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지적하고 있다.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이 자본주의 경제위기와 쇠퇴뿐만 아니라 수많은 전쟁의 뿌리라는 CWO의 주장에 대해 ICC는 맑스를 따라 이 법칙이 자본주의 역학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하지만 자본주의 생산과정의 두 가지 행위 중의 하나로만 개입한다고 본다. 맑스는 항상 축적의 순환을 완결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충분한 이윤을 생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생산하는 상품은 팔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맑스는 둘이 밀접히 연결되어 있지만 생산하는 행위는 파는 행위와 “독립적”이라고 주장했으며 부르주아 정치경제학과 반대로 생산이 자동적으로 자신의 시장을 만들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는 생산과 시장이 다르게 결정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잉여 노동의 추출(생산의 첫 번째 행위)은 사회의 생산력에 의해 제한되는 반면, 이 잉여노동의 시장에서의 실현(판매되는 두 번째 행위)은 사회의 소비력에 의해 제한받기 때문이다 (Capital Vol.III. Section III, “Exposition of the Internal Contradictions of the Law”). 그런데 CWO/IBRP 는 첫 번째 행위에 자본주의 생산과정을 환원시키고 있는데, 이는 폴 매틱을 따라 생산 그 자체가 자신의 시장을 생기게 한다는 해석 때문이다.

     

    사실 CWO/IBRP의 이러한 입장은 리카르도, 세이, 밀 같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견해로 맑스가 한 세기 전에 비판한 바 있다. 사회의 소비력의 한계는 사회적 소비가 다소 좁은 한계 내에서 감소하는 것으로 분배의 적대적 조건에 기초하고 있다.6)

     

    이는 착취에 기초한 기존의 모든 생산양식과 같이 자본주의는 잉여노동의 전유에 대한 적대적 계급 사이의 갈등을 둘러싸고 주기적으로 일어난다는 의미이다. 피착취자의 소비자의 힘을 제한하려는 자본주의의 내재적이고 영구적인 경향은 사회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모순, 즉 점증하는 생산의 사회적 차원과 사적 전유 사이의 모순을 나타내는 또 다른 보기이다. 개별 자본가의 입장에서 보면 임금은 생산의 다른 비용처럼 최소화해야 할 비용으로 보이지만 전체로서의 자본주의 기능이라는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임금의 총량은 개별자본가가 그의 생산의 출구를 반영하는 시장인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생산수단에 노동자를 연결시키는 구체적 관계는 임노동이다. 자본은 임노동을 전제로 하며 임노동은 자본을 전제로 한다. 이처럼 임노동은 자본주의가 살아남기 위해 이윤율 저하 경향과 경쟁에 의해 박차를 가하는 체계로서 항상적으로 임노동의 착취를 한계점까지 밀어붙이고, 가치법칙의 적용면을 확장하여 끊임없이 축적하고, 지불 능력이 있는 시장을 확장한다. 이러한 동학 내에서 이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은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즉 이윤의 총량을 보상하고 증가시키기 위해 대량생산을 통해 개별 자본가가 매 상품마다 이윤율 하락을 보상하기 위해 밀어붙인다. 그러나 임노동은 생산이 점점 사회적 성격을 가정하고 전 세계로 확장되지만 잉여생산물은 아직도 사적으로 전유되는 모순적 관계이다.

     

    “과잉생산은 구체적으로 자본생산의 보편적 법칙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 즉 생산력에 의해 정해진 한계까지 생산하는 것, 다시 말해 시장의 실제적

    한계나 지불능력이 뒷받침한 필요에 대한 고려 없이 주어진 자본의 양으로 최대의 노동력을 착취한다.” 7)

     

    이러한 맥락에서 맑스는 수요의 상대적 제한을 통한 과잉생산위기의 불가피성을 명료하게 표현했다. 한편으로 개별자본가에게는 이윤율 하락을 보상하기 위해 생산을 증진시킬 필요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이 맞부딪힌 장애물, 즉 이윤율 저하 경향이 가져다 준 잉여가치의 불충분성 이전에 발생한 생산의 출구에 필요한 시장의 상대적 축소를 통한 위기의 발발을 말하고 있다. 과잉생산의 위기는 자본의 이윤과 위기(이윤율)와 분배(지불능력이 있는 시장의 부족) 모두에서 위기로 나타난다. 이윤율 하락의 동학이 과잉 생산의 위기를 가져오지만 CWO는 맑스와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고 ICC는 비판한다.

     

    첫째, 임노동의 모순적 차원을 무시한다는 점.

     

    둘째, 임노동 관계에 놓인 사회적 모순을 보는 대신 이윤율 저하를 과잉생산위기의 유일한 기제로 보고 자본주의 쇠퇴와 제국주의 전쟁을 포함한 자본주의의 모든 경제적 모순의 시작과 끝으로 보는 점.

     

    셋째, 지불능력이 있는 시장의 차원을 이윤율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생산의 확대와 축소에만 의존한다고 본다는 점이다.

     

    반면 ICC는 맑스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자본주의의 경제적 모순에 대한 동일한 분석을 한다고 보고 있다. ‘시장이 지속적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제국주의는 확장의 역사적 과정의 마지막 장일뿐이다.’ 라는 두 사람의 입장이 같다는 것이다. 룩셈부르크가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로에 대한 살아있는 실재를 구체화했다는 점, 맑스가 보지 못한 1880년대 이후 제국주의 특징적 모순에 대한 이해를 했음을 보다 높이 사면서 그녀가 자본주의 생산관계와 제국주의 사이의 분리될 수 없는 역사적 고리를 분석했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어떤 순간에 쇠퇴기에 들어섰는지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한다.

     

    ICC가 비판의 근거로 삼고 있는 IBRP/CWO의 「혁명적 전망」 37호(2005)는 폴 매틱의 「맑스와 케인즈」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ICC를 비판한 바 있다. “역사의 유물론적 개념에서 전체로서의 사회적 과정은 경제적 과정에 의해 결정된다. 물질적 삶의 모순들은 이데올로기적 삶을 결정한다. ICC는 가장 인과적인 방식으로 자본주의 역사의 전(前)시기는 끝났고 새로운 시기가 열렸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요 변화는 자본주의 토대의 기본적 변화 없이 일어날 수 없다. ICC는 생산 영역의 분석으로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든지 아니면 그들의 순수한 추측인지를 인정해야 한다.”(135쪽)

     

    ICC는 이어지는 비판 글에서 IBRP/CWO의 입장을 맑스의 분석 방법에 기초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8)

     

    IBRP가 잊고 있는 것은 맑스주의가 유물론적 분석 방법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변증법적 분석방법이라는 것이다. 역사는 쇠퇴의 어떤 시기도 경제적 위기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데 로마제국의 쇠퇴나 봉건제의 쇠퇴에서 보듯이 하부구조에서의 봉쇄의 산물로서 위기는 쇠퇴의 진입 후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주의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제적, 양적 수준에서 위기가 나타나기 전에, 1차 세계대전으로 이끄는 지배계급 내의 갈등의 격화를 통해, 국가가 전쟁을 위해 경제를 통제함으로써, 사회민주주의의 배신과 자본진영으로 넘어간 노동조합을 통해,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전복할 능력을 보인 프롤레타리아트의 봉기를 통해, 그리고 노동계급의 사회적 봉쇄를 목표로 한 최초의 조치들의 도입을 통해, 그리고 사회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수준에서의 질적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 자본주의의 쇠퇴이다. 쇠퇴와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은 1913년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경제적 위기의 이윤율에서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경제적, 정치적 원인의 총체성에서 발견된다.

     

    그 당시 혁명가들인 레닌,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판네쿡은 경제적 요인을 지적했지만, 경제적 위기와 이윤율 저하를 전쟁의 원인으로 보지 않았다. 그리고 IBRP의 주장은 가치절하와 대량파괴의 결과로 전쟁 중에 일어났고, 이는 전후 경제성장과 이윤율 상승의 기초였다고 주장하지만 반대로 전후시기에 자본주의 전체 역사에서 최악의 경제성과 뿐만 아니라 세계무역도 정체했다. 산업생산지수는 1913년 100에서 1929년 102로 정체한 반면 국민총생산에서의 국방비의 비율은 0.19%(1929-32)에서 1933이후 3.3%로, 1938년에는 28%로 급증했다. 1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재앙이었다. 경제적 수준에서는 세계의 부의 3분의 1이 파괴되었고, 사회적 수준에서는 극도의 빈곤으로 몰아넣은 노동력의 착취로, 정치적 수준에서는 반세기에 걸친 투쟁을 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위대한 조직인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의 배신이 있었고, 인구의 수준에서는 2천만의 병사가 죽거나 부상당했고, 전쟁 후 스페인 독감으로 2천만이 죽었다. 이를 IBRP는 ICC가 전쟁을 자본주의 생존을 위한 경제적 기능으로 보지 않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비판(「혁명적 전망」, 37호)하지만 전쟁이 전후 경제에 재생효과를 가져왔다는 주장은 이론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경험적으로 볼 때 지지받지 못하고 있다고 ICC는 비판한다.

     

    또한 이 글은 이윤율 하락이 위기, 전쟁, 그리고 재건을 설명하는데 적절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윤율 수준과 진화가 전쟁을 설명할 수 있는가에 대해 ICC는 왜 3차 세계대전이 1930년대 후반에 발발하지 않았는지를 IBRP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윤율이 1965년부터 하락하고 있고, 이는 1914년과 1940년보다 낮은 수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윤율 수준과 진화가 전후 번영을 설명할 수 없는데 이는 전후 특별한 이윤율 증가가 없기 때문이다. 자본이 이윤성으로 복귀한 것은 군사 분쟁과 전쟁에 의한 파괴에 선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윤율 수준이 1929년 공황과 1930년대 위기를 설명할 수 있는가? IBRP의 주장과는 반대로 1928년은 그 이전 20년 동안의 경제성장보다 높았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IBRP는 축적순환이 이윤율이 너무 낮을 때 봉쇄되고 지체되며 고정자본의 가치절하와 재생을 허용하는 전쟁의 파괴 이후에 회복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대립에 의한 이윤율 상승과 새로운 기술혁신에 의한 고정자본의 가치하락으로 이윤율 소생을 말하고 있는 일면적 경제주의적 분석의 명백한 한계와 오류를 ICC는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ICC의 반박에 대해 IBRP/CWO는 그들의 기관지 「혁명적 전망」 43호(2007) “자본주의와 그 위기의 동학: ICC에 대한 답변”에서 ICC를 재반박하고 있다.9)

     

    이 글은 다음과 같이 ICC의 기본입장을 비판한다. ICC는 가치법칙에 대한 맑스주의의 이해에서 자본주의 실질적 운동에 대한 전망을 하지 않고 추측보다 못한 주관적 전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기가 있으니 혁명은 자동적으로 따라오고 노동계급을 붙들어 매는 유일한 길은 부르주아지의 선전이었다는 구세주적인 견해를 지니게 된다고 본다. 보기를 들어 1930년대 후반 경제위기에서 자본가들이 노동계급의 생활표준을 공격하여 계급투쟁이 고조될 때 부르주아지는 선거의 방식으로 “반대하는 좌파”가 권력을 장악하도록 했다고 ICC는 주장하는데, CWO는 이러한 주장은 넌센스이며 부르주아지는 좌우를 막론하고 공격을 수행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정부를 필요로 했다고 설명한다.

     

    또한 세계 인구의 절반이 한 쪽에서는 매일 일 파운드로 사는 상황을 만드는 반면, 극소수가 인류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수억 불 가치의 돈을 통제하는 체제인 자본주의는 어떠한 객관적 표준으로 보나 비합리적이라는 ICC의 주장이 법칙이 없음을 의미하지 않으며, 자본주의가 가치 법칙의 분석을 통해 이해될 수 없다면 맑스주의 이론에 무엇이 남겠는가라고 반문한다.

     

    CWO는 ICC의 「국제평론」 127호(2006), 128호(2007)에 실린 글을 평가하면서 적대적 논쟁을 넘어 ICC와의 공통점을 부각시키는 노력도 보이고 있다.

     

    첫째, ICC가 자본주의 모순이 체제 내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맑스의 시장에 대한 입장과 룩셈부르크가 방어하는 입장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입증하는데는 실패했다고 본다. CWO는 ICC의 경제이론의 근거는 1920년대 「빌랑」에 실린 국제공산주의 좌파의 가장 출중한 이론가 중 하나는 미첼에서 온 것이며, 그것은 자본주의의 위기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시장을 찾을 수 없다는 룩셈부르크의 이론이었다. 그리고 ICC는 항상 맑스의 「공산주의 선언」에서 “재생산의 유형”으로 위기가 온다는 인용을 되풀이하고 있는데 「공산주의 선언」은 맑스가 자본주의 체제의 내부 작동방식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하기 전에 쓰여졌다고 CWO는 설명한다. 즉, ICC의 주장은 맑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에 대한 공헌(1859년)」 이전에 나온 저작에서 나타난 시대에서 비합리적 현상으로 보이는 과잉생산의 위기를 인정한 위기의 원인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또한 ICC는 「자본」 3권에서 자본의 진정한 족쇄는 자본-임노동 관계라고 하면서 유명한 문단을 인용한다. “모든 실재 위기의 가장 최종적인 원인은 생산력을 발달시키려고 하는 자본주의의 경향에 대비되는 대중의 빈곤과 제약된 소비이다. 따라서 사회 전체의 절대적인 소비력이 그들의 한계가 될 것이다”(Lawrence & Wishart, 1934, 484쪽). 시장에 대한 ICC의 강조에 대해 CWO는 이를 이윤율의 문제로 바라본다.

     

     

    “자본주의 사회에 너무 적은 노동자가 있거나 너무 많은 생산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윤율 저하를 상쇄할 수 있는데 필요한 이윤을 창조하기에는 너무 적은 생산적인 노동자가 있다. 그리고 상품을 수익성 있게 팔기에는 너무 커다란 생산력이 있다.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다시 말해 불변자본에 대비한 가변자본의 감소는 이런 관계의 가장 명확한 표현이다.” (「혁명적 전망」 37호, 2005년, 17쪽)

     

    다른 말로 왜 시장이 어느 순간에 확대될 수 있고 다른 순간에 그렇지 않은지를 설명하는 것은 오직 가치관계의 변화 때문이며 시장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변화되지 않는 실체가 아니라 확장을 위한 수익성의 문제에 의존하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CWO는 ICC가 자본주의 위기의 원인을 임노동관계에 내재적이라고 한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이윤율 저하 경향과 “대중의 빈곤과 제한적 소비” 사이의 연결고리를 토론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그것은 ICC가 룩셈부르크의 「자본축적(1911)」의 중심 체계와 고리를 끊는 신호일 것이라고 진단한다.

     

    두 번째로 CWO는 룩셈부르크가 맑스주의로부터 벗어났음을 지적하고 있다. 맑스가 자본주의에서 상품이 일어날 축적의 전제조건으로서 어떻게 순환되는지를 간단하게 보여준 「자본」 2권 “자본의 순환과정”에서 오류를 발견했다고 룩셈부르크는 주장했는데, 이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놓인 곳을 보여주자고 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자본주의 체제를 말하고 있을 뿐인 「자본」 1권의 방법을 따랐을 뿐이라고 하면서 CWO는 이러한 단순재생산은 교육적인 목적이며 현실에서는 모든 자본축적은 확대재생산 조건 하에서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맑스는 부문1과 부문2 사이의 일시적인 불균형으로 인해 야기되는 위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중심적인 모순, 즉 역사적 모순은 유통과정에서 발견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는데 룩셈부르크는 이런 점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본의 모순은 생산과정에서 일어난다고 한 맑스의 분석을 수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본주의 위기의 원인으로서 이윤율 저하 경향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붕괴이론을 찾으려 했으며 누구를 위하여 확대재생산이 일어나야 하는가를 질문함으로써 맑스주의에서 일탈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한 룩셈부르크는 경쟁을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본질적 요소로 파악하기보다는 사회적으로 부가되는 요소쯤으로 인식한 것 같다고 CWO는 비판하면서 「자본축적」 25장에서 1부문과 2부문 사이의 관계를 논할 때 경쟁을 배제하는 포괄적인 접근을 선택하고 잉여가치가 동일한 부문에서 자본가들에 의해 실현될 수 없다고 가정한다. 더욱이 그녀는 부문 간 자본의 이동을 부정하고 자본주의적 경쟁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맑스주의에 대한 전면적 부정을 한다고 비판한다.

     

    셋째, CWO는 가치 관계가 자본주의 위기의 열쇠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ICC가 자본주의의 위기를 “대중의 빈곤과 제한적 소비”로 본다고 주장한 것을 자신들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이 맑스의 하나의 가능한 해석이지만 로자 룩셈부르크 이론의 틀에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ICC가 맑스의 위기이론의 과잉 생산주의적 해석에 대해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룩셈부르크를 포기했다고 하더라도 CWO는 ICC에 동의할 수 없는데 이는 ICC가 머릿속에 현실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ICC가 「자본」 3권과 「잉여가치학설사」를 인용하지만 과잉생산이 자본주의 위기의 선행원인이라고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혁명적 전망」 43호(2007년)은 ICC와 동의하는 한 문장이 “이윤율 하락 경향을 매시기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CWO와의 근본적 차이는 ICC가 30년 동안 그들의 정치적 교의에 갇혀 유물론적 방법을 결여했고 이는 「국제평론」 128호와 129호에서 보여주었다고 비판하면서도 이러한 논쟁이 어떻게 이윤율 하락 경향 법칙이 자본주의 위기뿐만 아니라 현재의 기생성과 쇠퇴의 배후에 놓여있는지를 설명하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긍정적인 토론의 전망을 내놓았다.
     
    그런데 그 이후 두 진영의 논의는 좁혀지지 않고 한 단계 진전된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코뮤니스트 노동자조직(CWO)」 기관지인 ‘Aurora'는 2018년 여름(44호)에서 “금융위기 이후 10년 동안 낮은 이윤이라는 세계 자본주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자본가가 성장을 회복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축적의 새로운 순환을 시작하는 길밖에 없다. 이는 기존의 자본 전체를 가치 절하할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면서 20세기에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에 두 번 발생했는데 자본을 파괴하고 평가절하함으로써 축적을 가능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이와 유사한 견해는 북미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그룹의 기관지 「비타협 (Intransigence)」(2018년 7월 2호) 권두언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우리의 유일한 교훈은 자본의 어떠한 분파도 자본주의 쇠퇴기에서 진보적일 수 없다.”고 단언한다.

     

     

    반면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CC)」는 자본주의 쇠퇴기의 마지막 단계를 해체(deconstrction)로 규정하면서 자신들의 입장과 다른 코뮤니스트 좌파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968년 이후 코뮤니스트운동 부활의 초기 단계에는 자본주의 쇠퇴라는 주제가 수많은 지지자를 설득시켰고 부활한 코뮤니스트 좌파의 강력한 기반을 제공했다. 오늘날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코뮤니즘은 인류가 직면한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여기는 새로운 이들의 다수는 쇠퇴라는 개념을 부정할만한 온갖 종류의 이유를 댈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자본주의 쇠퇴의 마지막 단계라고 정의하는 「해체」를 언급하기 시작하면 ICC는 다소 세계에서 동떨어져 나는 것처럼 여겨진다. 다른 그룹들은 모두에게 자유로운 제국주의 사이의 새로운 시기의 다음과 같은 주요 특성을 받아드린다. 다시 말해 그들은 종교적 근본주의와 무시무시한 민족주의와 같은 심각하게 반동적인 이데올로기의 귀환, 자연과 사람의 관계위기 등의 새로운 시대에 대한 주요한 징후를 인정하는 다른 그룹들은 존재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계급 간 세력균형의 교착상태로부터 비롯되었다거나, 이러한 현상이 자본주의 쇠퇴의 질적 변화의 표현이라거나, 이러한 모든 단계와 시대가 프롤레타리아 혁명 없이는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끌어내는 이들은 거의 없다.”(22회 국제 코뮤니스트 흐름(ICC) 대회 ; 국제 계급투쟁에 대한 결의(2017. 4월), 「코뮤니스트」 7호(2018) P145∼146)

     

    이와 같은 입장 차이를 정리한 글은 ICC의 on line forum '쇠퇴에 대해 다시 한번 :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이행체제라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세계혁명」(ICC 영국지부 기관지) 2018년 가을 381호 3쪽에 실렸다. 이 토론에서 한 토론자는 자본주의 쇠퇴에 대한 일면적 견해 즉, 자본주의 착취가 시장의 ‘법칙’에 따라 기능하고 자본가는 이러한 법칙에 따라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기계와 같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이 ‘해체’는 부르주아 국가(자본주의 사유재산의 창출과 실행)의 의지와 행동에 기초하고 있고 유지되므로 자본주의는 계급 사이의 사회관계라는 ICC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자본주의의 심화되는 해체는 부르주아지가 이윤을 착복하기 위해 점점 더 극단의 조치(프롤레타리아 스스로의 파괴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전쟁과 지구의 파괴 등)를 통해 이윤을 회복시키기 위해 세계를 날려버릴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 토론자는 재앙의 축적일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2.2. 최근 40년의 공공연한 자본주의의 위기와 쇠퇴의 징후들

     

     

    위의 논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과학적 이론은 잉여가치의 추출과 그 실현과정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고, 잉여가치 추출의 과정에서는 이윤율 저하의 법칙이, 그리고 잉여가치 실현의 과정에서는 시장 포화의 한계 법칙이 위기의 기본이 된다. 이 두 가지를 대립적으로 보지 않고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틀이 요구된다. 지금의 위기는 잉여가치 실현의 막다른 골목임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 쇠퇴와 위기는 독립적이지만 상호의존적이다. 따라서 쇠퇴에 대한 인식은 위기의 순간(보기를 들어 1929년 대공황)과 위기를 지금의 자본주의가 겪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1914년 이래 쇠퇴의 상태에 있음과 자본주의가 자랑하는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괄목할 성장률이 사실은 자체 재생산의 조건 창출이 점점 더 불가능해진 체제의 죽음의 고통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자본주의 역사에서 위기에 따른 입장들이 제기되어 왔다. 하나는 파국론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에 달해 어느 한 순간 나락으로 떨어져 새로운 천년 왕국이 올 것이라는 묵시록이나 극단적인 무정부주의의 주장이다. 이러한 파국론이 자본주의의 억압과 착취 밑에서 신음하는 무산자들을 미몽에 빠뜨렸고 그러한 비과학적 태도에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어 있다. 또 하나는 부르주아지가 내뱉는 낙관론이다. 이 낙관론은 자본주의 체제가 스스로 그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자치를 내장하고 있고 투기를 근절시키면 경제는 잘 운영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두 가지 입장보다 더욱 세련되고 지배적인 입장은 자본주의의 위기를 ‘순환적 위기’로 규정하고 조용히 참고 기다리면 비바람이 그치고 순수한 항해를 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특히 이러한 세 번째 입장이 이른바 “사회주의 진영”에까지 파고들어와 계급투쟁을 희석시키고 ‘건강한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로 작동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19세기 자본주의에서 일어났던 광경이며 20세기와 21세기 자본주의 위기에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는 논리가 되어버렸다. 이는 상승기에 있고 무한히 확장되는 19세기 자본주의의 위기였고 맑스는 「공산주의 선언」에서 이 위기를 과잉생산의 전염병으로 불렀다. 그런데 과잉생산의 경향은 기아, 가난, 실업을 가져왔지만 상품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너무 많은 상품, 너무 많은 산업, 너무 많은 자원 때문이었다. 또 하나의 자본주의 위기의 원인은 경쟁을 통해 무정부체제로 끌고 가는 자본주의의 기능인데 새로운 임노동과 상품을 찾아 새로운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확장하고 심화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19세기는 위기의 순간을 건강한 심장이 뛰는 것으로 이해했다.

     

    20세기에는 1차 세계대전을 정점으로 이러한 상승기의 자본주의가 마감을 하고 전지구가 임노동과 상품의 생산관계로 확장되었다. 이 시기의 자본주의를 1919년 코민테른은 “전쟁인가 혁명인가”의 시기로 규정하였다. 자본주의는 한편으로는 세계시장의 쟁탈과 통제를 위한 제국주의 전쟁으로 나아갔으며, 다른 한편에서 나타난 과잉생산경향은 19세기와 달리 세계경제를 불안정과 파괴의 반영구적인 위기로 종속시키는 만성적인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모순은 2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20-30%의 실업자를 만든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인 1차 세계대전과 1929년 세계대공황을 가져다주었다. 이는 한쪽에 경제의 국가화를 통한 (국가)자본주의(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들”)와 다른쪽에 부르주아지와 국가 관료주의가 결합한 자유주의 국가를 형성시켰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자본주의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들’을 포함)는 25년 동안 재건과 부채 증가에 힘입어 예외적인 번영을 했으며, 정부 관료, 노조 지도자, 경제학자, 자칭 ‘맑스주의자들’까지 자본주의가 결정적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했다고 호언장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1967년 파운드화의 평가절하, 1969년 인플레이션 위기, 1973년 오일 쇼크, 1974-75년의 경기 후퇴, 1979년 인플레이션 위기, 1982년 부채 위기, 1987년 월스트리트 위기, 1989년 경기후퇴, 1992-93년 새로운 경기후퇴로 인한 유럽통화의 혼란, 1997년 아시아의 ‘호랑이’와 ‘용’의 위기, 2001년 미국의 ‘신경제위기’, 2005년 서브프라임 위기, 2008년 리만브라더스 등 금융위기, 2009년 대공황에 버금가는 총체적 위기로 현재 자본주의는 해체와 파국에 직면해 있다.

     

    이미 오래전 케인즈주의 해법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연장시키는 사이비 해법일 뿐이고 맑스가 예측한 자본축적의 모순적 경로를 막아내는 해법이 아님을 폴 매틱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10)

     

    “선진 공업국 내에서의 ‘번영하는’ 조건의 긴 기간에도 불구하고, 자본생산이 경제에의 국가개입을 통하여 내재적 모순을 극복했다는 가정에 대한 어떠한 근거도 없다. 개입 스스로 자본생산의 위기의 지속성을 가리키고 있고 정부가 결정한 생산의 성장은 사적 기업경제의 계속되는 쇠퇴의 분명한 징표이다.”

     

     

    그러나 「맑스와 케인즈」에서의 매틱의 자본주의 쇠퇴에 대한 분석은 몇 가지 결함을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가치법칙을 쇠퇴의 표현으로 왜곡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구 블록의 완전히 국가화된 국가는 더 이상 가치 법칙에 종속되지 않고 위기를 향한 경향에 종속된다고 주장한다.

     

    후에 「국제공산주의흐름」의 지부가 된 미국의 「국제주의」 그룹은 매틱의 이러한 결점을 인식하고 “국가자본주의와 가치법칙: 「맑스와 케인즈」에 대한 응답”이라는 글을 1970년대 초 「국제주의」 제2호에 실었다. 이 글은 스탈린주의 체제에 대한 매틱의 분석이 그가 여러 곳에서 방어한 쇠퇴의 개념을 훼손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국가 사회주의가 위기에 종속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매틱이 주장한 대로 그것이 생산력의 자동제어와 발전에 더욱 유리하다면, 또한 스탈린주의 체제가 제국주의적 추동을 따르도록 떠밀리지 않는다면,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 물질적 기초는 사라지고 쇠퇴 시대에 의해 제기된 역사적 대안은 불분명해졌을 것이다.” 11)

     

    「국제평론」의 이 글은 소멸하는 체제의 대차대조표를 경제적 수준, 군사적 수준, 생태적 수준, 그리고 사회적 수준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12)

     

    1. 경제적 수준에서

    1914년 이래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대한 일반적 개관은 어떠한 기법을 사용하든지 간에 상승하는 생산양식이 아니라 막다른 골목을 피할 수 없는 체제의 시나리오를 보여주고 있다.

    - 1914 – 1923: 1차 세계대전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국제적 물결: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전쟁과 혁명의 시대’의 새벽을 선언하다.

    - 1924 – 1929: 짧은 경기 회복. 호황은 주로 미국에 제한된다.

    - 1929: 미국 자본의 풍부한 확장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깊고 넓은 공황을 재촉하는 장관의 추락으로 끝난다. 19세기 초의 순환적 위기의 경우 같은 생산의 자생적 부활은 없다.

    - 1945 – 1967: 국가 지출의 주요 발전(본질적으로 부채를 통해 금융조달되고 생산성의 예기치 못한 성과에 기초한 케인즈주의 수단)은 제3세계의 상당부분을 배제한 채, 그 이전의 어떤 것과도 다른 성장과 번영의 시기를 위한 조건으로 만든다.

    - 1967 – 2008: 40년의 공공연한 위기는 특히 70년대의 질주하는 인플레이션과 80년대의 대량실업에 의해 시행되었다. 특히 1990년대와 2000년대 초의 위기는 지구의 어떤 시기와 부분에서 다른 시기와 부분보다 더욱 ‘공공연’하다: 자본 운동과 금융 투기에 대한 제한의 제거: 노동력이 싼 지역에의 전반적 산업재배치: 신기술 발전과 무엇보다 국가, 기업, 가계를 위한 사실상 무제한적 신용에의 의존은 거대 이윤이 소수 엘리트에 의해 만들어지는 ‘성장’거품을 만든다. 광란적인 공업성장은 중국 같은 국가에서 일어나며 신용카드 소비자주의는 중심자본주의국가에서 새로운 정점에 이른다.

    - 2008- : 세계자본주의의 위기는 자본주의 국가가 지난 40년동안 적용한 ‘해법들’, 무엇보다 신용에의 의존이 그것들을 부지런히 실천해 왔고, 지난 시기 잘못된 신념을 지녀왔던 정치인, 금융인과 관료들의 눈앞에서 촉발한 질적으로 새로운 상황에 도달한다. 신용을 통한 가공시장의 창조는 화폐가치를 파괴하고 고삐 풀린 인플레이션을 발생시키면서 역사적 한계점을 드러내고 있다.

     

    2. 군사적 수준에서

     

    제국주의 전쟁은 국지전이건 세계대전 이건 더 이상 공공연한 전쟁의 국면에 제한되지 않는, 자본주의 스스로를 파괴하는 경향의 가장 순수한 표현이다.

     

    3. 생태적 수준에서

    자연 세계의 오염과 파괴는 처음부터 자본주의 생산에 내재해 있었지만 지난 세기 동안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가 지구의 마지막 구석구석까지 쉬지 않고 점령하면서 더욱 광범위하게 뿌리박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막다른 골목에서 공기, 땅, 바다, 강, 그리고 숲의 약탈은 자연 자원에 값싼 노동 그리고 새로운 시장에 대한 잔인한 국가 경쟁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특히 지구 온난화의 형태로 온 생태적 파국은 자본주의의 묵시록의 새로운 기수가 되었고, 연이은 국제정상회의는 부르주아지가 그를 해결할 가장 기본적인 조치도 취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4. 사회적 수준에서

     

    40년 위기동안 자본주의는 대량실업 강제라는 직접적인 임금삭감과 복지국가를 분해하는데 비교적 조심스러웠다. 그리스 같은 국가들에 지금 떠맡기는 야만적인 긴축조치는 어디에 있는 노동자들에게나 올 수 있는 조짐이다.

    노동계급이 1960년대 말 투쟁을 부활할 때 혁명의식을 발전시키는 능력은 그들이 거쳐 온 반혁명 – 노동자의 세대가 그들 자신의 전통과 조직을 깊이 의심하도록 만든, 스탈린주의가 ‘프롤레타리아’ 의상을 입고 스스로 보여준 반혁명 – 트라우마에 의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스탈린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사기성 짙은 등식은 80년대 말 스탈린체제가 몰락할 때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적 대안을 발전시키는 능력, 즉 노동계급의 자기신뢰를 더욱 침식하면서 극점까지 몰아갔다. 이처럼 스탈린주의 국가자본주의라는 자본주의 쇠퇴의 산물은 계급의식을 망쳐놓는 부르주아지 모든 분파에 의해 사용되었다.

     

    이처럼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총체적 위기가 쇠퇴기의 마지막 단계인 해체단계에 들어섰음은 인류의 파멸이라는 보다 넓은 관점에서 확인될 수 있다. 잉여가치의 생산과 실험에서 이윤율 하락과 시장포화로 임계점에 다다랐음은 이미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주의 분석으로 확인된 것이지만 지금은 야만으로서의 자본주의와 문명으로서의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계속>

     

     

    <주>

     

    1. 더 자세한 것은, 오세철 “자본주의 쇠퇴에 관한 논쟁에 대하여”, 「좌익공산주의: 혁명적 맑스주의 역사와 논쟁」, 오세철 편저, 빛나는 전망, 2008, 262-278쪽을 볼 것

     

    2. 엥겔스, Nikolai Danielson에게 쓴 편지, 1892년 9월 22일

     

    3. 「국제공산주의흐름」, “자본주의 쇠퇴이론과 수정주의에 맞선 투쟁”, 「국제평론」, 2010, 여름호, 13-17쪽

     

    4. 「국제공산주의흐름」, “CWO에 대한 답변: 자본주의 쇠퇴기의 전쟁(1부)”, 「국제평론」 2006년 4th Quarter, 10-17쪽

     

    5. 14세부터 스파르타쿠스 청년운동의 투사인 그는 1920년 KPD를 떠나 KAPD(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에 가입했으며, 1926년 미국으로 왔다. IWW에 가입하고 소규모 평의회 공산주의 그룹에 가입했으며 「Living Marxism(1938-40)」과 「New Essays(1942-3)」의 편집자를 지냈다.

     

    6. Karl Marx, 「Grandrisse」, The Pelican Marx Library, 1973, 410쪽

     

    7. Karl Marx, 「Theories of Surplus」, vol.2, Lawrence & Wishart, 1969, 534쪽

     

    8. 「국제공산주의흐름」, “CWO에 대한 답변: 「이윤율 저하 경향과 자본주의 쇠퇴로의 진입(2부)」, 「국제평론」, 2007, 1st Quarter, 128호, 9-16쪽

     

    9. IBRP/CWO, “자본주의와 그 위기의 동학: ICC에 대한 답변(1)”, 「혁명적 전망」 43호, 2007.

     

    10. 폴 매틱, 「맑스와 케인즈: 혼합 경제의 한계」, Merlin Press, 1969, London, 14장 “혼합경제” 152와 163쪽

     

    11. ICC, “40년의 공공연한 위기는 자본주의 쇠퇴가 종착역에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국제평론」, 2012, 1st Quarter, 148호, 22쪽

     

     

     

     

    12. 윗 글, 23-27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