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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06/27 18:14

 

때는 2075년.

지구는 결국 자원이 고갈되었고

달로, 화성으로 자원을 찾아 생활의 영역을 넓혀갔다.

특히 달에서 발견된 자원은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각광받으며 지구 유지에 유효하게 쓰이게 된다.

그러면서 우주는 폐기된 위성, 위성에 부딪혀 폭파한 우주선의 잔해, 쓸모없어진 기지 등 각종 우주 쓰레기로 넘쳐나게 된다.

 

주인공은 이러한 우주 쓰레기를 처리하는 테크노라라는 회사의 데브리과 직원.

 

'우주'하면 항상 전쟁이야기, 로봇이야기로 일관되기 마련인 애니 세계에서,

우주 청소부이자, 민간기업의 회사원이며, 사회기여팀 수준으로 사고되는 돈 안되는 실적 최하의 별볼일 없는 부서의 구성원인 주인공의 이야기는 신선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은 때론 우주 장례를 치른 관이 우연히 태양권에 돌아와 자손에게 인계하기도 하고,

군사 위성 지나가는 길에 걸리적 거리는 평화 상징 위성을 수거해야 하기도 한다.

 

이런 잔잔하고 있을법한 일상적 얘기들 속에 슬쩍슬쩍,

겉으로는 평화를 지향하는 척하지만 실제 선진국에 붙어 돈이 되는 일이라면 약소국에서 전쟁 일으키는 것도 불사하는 우주연합의 작태가 노출되기도 하고,

미국과 일본같은 선진국 출신의 집안 좋은 사람들이 꽉 메운 사무실에서 아프리카나 아라비아 반도의 어디쯤 외부에서 조장된 내란이 끊이지 않는 나라 출신의 사람이 힘겹게 꿰찬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 쓰는 모습이 보일 때도 있다.

달의 최대 도시에는 여행 비자로 들어가 일하다가 업자에게 인건비 뜯기고 지구로 돌아갈 돈조차 없어 실업자로 전전긍긍하는 군상들도 눈에 띈다.

 

이렇게 지구와 달을 오고가며 다양한 군상들의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고 가슴 저리고 즐거웠을 터.

그러나 애니는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주인공의 고뇌를 더욱 심연으로 밀어넣고,

일어나는 사건 사고를 보다 확장시킨다.

 

주인공인 하치마키는 어느날 우주에서의 작업 중 약간의 사고로 장시간 방치되면서 어둡고 소리 없는 공간에 놓이면 3차원 공간감각을 잃게 되는 공간상실증이라는 질병을 앓게 된다.

이 병은 곧 해소되지만 보다 심각한 고뇌의 상태로 이전된다.

그가 데브리과를 그만두고 목성탐사선 선원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을 때 독자는 '할 일을 찾았군', '이야기 스케일이 커지겠군'하고 마음 편히 지켜봤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상 우주는 어둡고 외로운 곳.

그는 이미 '보다 빠르게 보다 멀리'에 중독되었고, '우주에 미친 놈'이 되기 위해 냉혹하고 고독한 혼자가 되어간다.

비록 총알이 없었으나 우주선을 지키기 위해 사람의 얼굴에 총구멍을 겨누고 쏘았었던 주인공은 진짜 '미친 놈'이 되어 목성탐사선의 선원으로 발탁되었으나 이제 더이상 '어디로?' 가야하는 지 자아의 방향을 잃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게 된 사실.

그는 이미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모두 이어져있고,

우주란 굳이 보다 멀리, 빠르게 나아가야 있는 무엇이 아닌

바로 자신과 주변 역시 우주이고 우주의 일부임을 깨닫게 된다.

 

 

뭐 이거까진 괜찮다 치고...

사이사이 일어나는 사건들 중 가장 큰 건 우주방위전선이라는 테러집단의 활동.

이제 석유조차 고갈된 상태에서 선,후진국간 빈부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40%를 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개척되는 우주는 자본이 집중된 선진국들의 부만을 더욱 늘려주고 있으며,

아무리 능력이 되어도 후진국에선 우주에 한발자국조차 디디기 힘들다.

그래서 우주방위전선은 새로 건조되고 있는 목성탐사선을 달의 최대 도시인 고요의바다에 떨어뜨리는 작전을 세운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냉혹한 법.

작전은 향후 목성탐사선을 통해 시추된 에너지원의 수입을 각국의 인구대비로 나누기로 타협하고, 투입된 테러리스트는 몽땅 내버린 우주방위전선의 우두머리와 우주연합에 의해 실패로 돌아간다.

테크노라사의 관제과라는 최고 엘리트 코스를 가고 있던 아프리카 출신 크레아는 끝없는 사회 차별에 치를 떨며 테러리스트가 되지만, 감옥에서 10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면서 앞으로 본국으로 돌아가 선진국의 책을 번역하여 읽히는 교육사업에 전념하기로 선회하였다.

궤도 보안청의 잘 나가는 경찰요원으로 위장하여 활동해온 중동지역 출신의 하킴은 테러 실패 이후 혼자서 달의 도시 폭파를 완수하고자 폭탄 설치를 하려고 하지만,

문득 달에서 태어나 자라고 있는 12살 루나리안의 '아저씨는 어느 나라에 살아요? 여기서 보여요? 나는 루나리안이라 나라라는 걸 잘 몰라요. 달에는 나라가 없어서 모두 하나인데' 비스끄므리한 말들 속에 맥을 놓게 된다.

 

테러를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저

테스트를 위해 340여명의 연구원의 목숨을 한순간 날려버린 목성탐사선의 총책임자나

서로에게 남은 거라곤 이용가치 밖에 없는 우주연합 의장과 그의 아들이나

선진국과 다국적기업의 호주머니를 착실하게 늘려주기 위한 우주연합이나

'We are the World'가 결코 될 수 없는 선진국들의 머리 속에는 전혀 내려지지 않는 인도주의적 깨달음이

약소국의 테러리스트에게만 테러 방지 차원에서 내려지는 건

그냥 현실론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설상가상, 주인공의 애인이자 같은 데브리과 직원인 타나베는

목성탐사선 폭파 작전 당시 목성탐사선에서 탈출하여 달표면 어딘가에 있다가 산소 부족으로 신경 손상을 입었다.

이 의도된 것 같은 신체 손상으로 인해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여주었거나 향후 예측되는 모습이란 건

1) 재활하면 일단 정상인으로 당연 회복되는 데 어떻든 1,2년 정도는 걸린다,

2) 목성 탐사선은 갔다오는 데 7년 걸리는 데 그동안 주인공과 결혼하고 일단 임신한다,

3) 마지막 장면에 시어머니가 빨래 널고 자신은 빨래 개고 있는 바로 그 집에서 아마도 남편이 돌아올 7년 동안 애 낳고 살림을 하게 될 것 같다,

4) 혹여 회복되어 중간에 테크노라에 복직해도 애는 시어머니가 키워줄 것 같다

이다.

 

살 떨리는 자본주의의 승리에 건배!

 

지구와 달 사이 쓰레기 줍는 일상의 잔잔함을 넘어

무려 7년이나 소요될 목성 자원 탈취 프로젝트로 확장되면서 간을 수천, 수만배 확장시켜놨으면서,

막판에 이 애니가 준 거라곤 현실에 대한 무력감 뿐이다.

 

차라리 카우보이비밥처럼

일상의 선을 뛰어넘지 않고 주인공에 대한 생사마저 언제나 생존으로 맞추면서 매 회 내용의 다양과 확장에만 초점을 맞췄다면

영악한 애니라도 되었을 터다.

실제 카우보이비밥은 막판 한두회만을 이용하여 오래된 진지함이 필요해진 때, 고민이 확장된 때에 맞춰,

더이상 서로의 일상이 유지될 수 없을 정도의 캐릭터 배치 - 즉, 죽이거나, 목표가 확실해서 왠만해선 못 돌아오게 떠나보내거나 -로 마무리한다.

 

그러나 이 바보같은 애니는

벌써 중반부터 화자들의 기대치를 있는대로 키워놓고

막판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흥분하며 보게 만들었으나

결국 흔해빠진 이 세계의 수습 논리와 뻔한 봉합으로 마무리해버렸다.

 

마지막 26화면 없었어도 약간의 용서가 가능했을 지 모르겠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마지막 5분 동안 '눈 감고 있을 걸'하고 속으로 외치게 만든 것과 같은 종류의 실망감이 밀려온다.

 

이건 폭력이라고 외치고 싶다, 정말...

 

한편

공간,자원의 확장과 포섭은 자본주의 유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게 사실이겠지?

역시 사람들의 사고와 체제부터 바꿔놓고 우주에 나가는 게 맞는 건가?

 

* 사진출처 : http://bestanime.co.kr +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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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7 18:14 2007/06/27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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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05/07 17:03

* neoscrum님의 [< Seeing > 서평] 에 관련된 글.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주제 사라마구가 쓴 '눈먼 자들의 도시'는

한 도시에서 단 한 사람을 뺀 모든 사람이 눈 멀면서 벌어진 일들을 담고 있다.

그 소설이 가장 가슴 치게 만드는 점은

어떤 도시라도 전 민중의 눈이 멀면 묘사되는 상황처럼 되지 않을까하는 

매우 현실적인 인지, 사실주의적 감각이다.

 

눈먼 자가 사회의 일부일 땐

우리에서 '너'와 '나'의 분리가 명확해진다.

격리 수용되고, 다가온다는 이유만으로 총살당하고, 먹을 것도 제때 지급되지 않고...

아이러니하게 격리된 와중에도 배급되는 음식을 독점하여 사람들의 재산을 뺏고 강간하는 매우 조직화된 -그러나 인간의 집단 형성 본능의 실체를 의심하게 할만한 매우 사악한- 집단체가 생기고...

 

모두가 눈이 먼 시점에선

인간의 창조물 도시는

- 누군가는 몇백년 몇천년 이어갈 거라 착각할지도 모르나-

신기루와 같이 단 1주일간의 인류 생존조차 보장할 수 없는 곳이며,

이미 자연과 너무 멀리 떨어진 인간이란 존재들은

먹을 것을 약탈하고 약자를 폭행하고 함께 살기 위한 어떠한 규칙과 합의도 이루지 못한채 낱낱으로 흩어지다가

시체가 되면 개들에게 뜯어먹힌다.

 

여기서 작가는 눈이 멀지 않은 한 여인을 배치함으로써

휘몰아치는 이야기의 폭풍우 속에서 독자를 위한 작은 숨구멍 하나를 열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유일한 희망인 양

눈먼 자들의 사이에서 유지할 수 없는 정신을 유일하게 유지하며

가까스로 생존한 -더불어 주위 사람들을 함께 생존시킨 - 한 여인은 그러나,

후속편격인 [눈뜬 자들의 도시] 속 '권력에 눈먼 자'들의 사이에선 끝내 생존할 수 없었다.

 



지자체 선거가 있은 다음날, 어느 나라의 한 수도에서 투표자의 80%이상이 백지투표를 했다.

투표 결과의 무정부주의적 성격에 흥분한 정부는 같은 선거를 다시 한번 치렀으나 백지투표자의 수를 더욱 늘려주었을 뿐이다.

 

이런 극악무도할,

어쩌면 -결코 그렇지 않았으나- 국제적 거대 무정부조직의 나라 흔들기라고 여길 수 밖에 없는 이 투표 결과에 대해 정부는 수도 민중들에게 합당한 처벌을 내리기로 한다.

 

공식적으로 행해진 처벌은 계엄령 선포와 모든 행정, 입법, 사법기관의 이전.

그러나 경찰도 정치인도 사라진 수도에서 예상된 대규모 폭력이나 약탈 사건 따윈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정부가 비공식적으로 행한 처벌 중 하나였으나 무정부주의자의 행위로 규정지워진 지하철역 폭파사건이 있었을 뿐이다.

 

정부가 아무리 시민들을 감시해도 그 뒤에 숨어있어야 할 악독한 무정부주의자들의 개입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도시의 민중들은

비록 폭압적 계엄령 속에서 입밖에 내지 못하지만

모두들 '시켜서 한게 아니예요. 내 의지대로 백지투표를 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처음부터 정부가 민중의 소리에 귀 기울여 항복을 선언하게 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우연히 4년 전 모두 눈먼 사태 와중에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았던 한 여인을 찾아낸 정부는 그녀를 백색투표 사태의 주동자로 지목하여 여론을 조작하고 끝내 암살시키고 만다.

 

그렇다고 시민들이 정부의 장난질에 놀아나거나 한 것 또한 아니다.

정부의 조작을 드러내려는 한 경찰과 어떤 언론사의 노력으로 새벽시간 아주 잠시 가판대에 나왔던 신문기사는

-비록 단기간에 가판대에서 사라졌지만-

시민들의 손에 의해 민주화 찌라시 마냥 서로 복사하고 서로에게 나누어주고 서로 읽어나가면서 퍼져나갔다.

 

 

민중의 찬란한 단결을 믿고 민중의 분열에 좌절했던 사람이라면 이번 소설에서,

민중이 여전히 분열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줌도 안되는 권력집단의 영원한 쳇바퀴 속에서 놀아날 수 밖에 없는 사회라는 색다른 좌절과 패배를 맛볼 것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 속에 나타난 긍정주의는 사라지고

노작가는 빠져나올 수 없는 인간 사회의 사슬에 갇혔다.

 

과연 이 책의 그후,

4년 전 눈이 멀지 않았던 그녀를 통해, 그녀의 죽음을 통해

민중은 무언가를 촉발시킬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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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07 17:03 2007/05/07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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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03/12 11:42

현실의 생생한 묘사를 담은 글이 내 마음에 닿을 때,
그 묘사의 상황은 어느덧 내 눈 앞에 드넓은 벌판처럼 펼쳐지고,
나는 반경 수미터, 수킬로미터에 달하는 공간을 재창조하기 시작한다.

 

표현이 사실적일수록 나의 머리가 수용 가능한 것일수록
재창조된 공간은 신뢰감을 얻고 사실성을 획득한다.

 

보통은 그러할 진데...

 

무협에 당도하면
수십, 수백을 단칼에 쳐도,
수백, 수천년을 뛰어넘어도,
수천, 수만리를 단숨에 넘어도
모든 상황이 생동감있게 펼쳐진다.

 




빙판에 매장했다가 다시 꺼내고도 동상에 걸리지 않고,
함께 묻어두었던 쇳덩이로 칼을 만들면 그 칼이 주인 옆에 붕붕 떠다니고,
심법을 쓰면 마치 거울인양 자신의 '자아'가 아닌 타인의 자아만을 비추는 얼굴이 되고,
평범한 초식 하나만 그어도 그의 숨은 내공을 눈치챌 수 있고,
뿜어져나오는 살기만으로도 죽을 듯 숨이 막히고...

어쩐지 현실에서도 존재할 것만 같다는 생각을 머리 속에 가득 채워준다.

 

7편의 무협단편을 담은 진산무협단편집에는
정파와 사파의 대서사나 각종 검법의 세세한 설명은 없다.
다만 읽어나가다보면 왠지 '강호에서 산다'는 것, '강호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 '강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다.

 

단편이라는 짧은 문장들 속에서도
수많은 이들이 수많은 내용으로 드라마를 만들어가고,
아무런 거부감이나 비약없이 자연스레 넘어가는 감정선을 느끼면서 작가의 수려한 문장에 감탄하게 된다.

 

일찌감치 강호를 벗어난 자는 인간의 삶을 얻었고 평범한 주검이라는 선물이 덤으로 기다리고 있다.
강호에 남은 자 중 너무나 살리고 싶은 많은 사람들은 모두가 주검이라는 알지 못하는 검은 나락에 빠진 듯 쓰러져간다.
그러나 그들의 주검은 강호에 꽁꽁 묶인 자들에 비해 훨씬 담담하게 선택할 수 있는 어떤 선택지와도 같은 느낌이다.
다소 비열한 듯, 냉혹한 듯 보이는 자가 끝까지 살아남은 그 곳은 더이상 벗어날 수 없는 '강호'라는 철조망 속의 고독 뿐이다.

 

강호를 살아가는, 한때 강호를 살아갔던 사람들이 모든 것을 바쳐 깨닫게 되는 삶의 마음가짐과,
사랑이든 증오든 때로는 알 수 없는 그 어떤 감정이든 생생하고 애달픈 마음의 이야기를 진하게 읽은 기분.

 

고요속에 가슴에 손이 얹어지고 눈이 감겨지는,

심박동이 마구 뛰다가도 평정을 찾게 되는,

행복한 순간이다.

 

* 사진출처 : 알라딘(http://www.alad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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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2 11:42 2007/03/12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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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02/03 03:28

오토코요님의 유희, 숨바꼭질.

'참가한 아이들은 도시에서 사라진다.'

 

높이가 아닌 깊이를 알 수 없는 도시의 밑바닥으로 카메라가 내려가는 동안,

아이들은 입에서 입으로 즐겁기만 해야할 비밀의 숨바꼭질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7명이 모이면 시작하는 숨바꼭질.

그러나 어느새 모인 8명의 여우 가면 아이들의 숨바꼭질은 결코 즐길 만하지 못하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도 일말의 기대라할 해피엔딩은 결코 보여주지 않는다.

절대 변하지 않은 결론, 아이들은 사라진다. 아니 소모된다, 그것도 비참하게.

그저 잠시동안 도시의 어둠을 밝히기 위한 에너지원이 되기 위해...

7명이어야할 숨바꼭질 멤버가 8명인 이유조차도 서글프기 그지없다.

남은 한명을 통해 끊임없이 이어질 수 밖에 없는, 깨질 수 없는 숨바꼭질의 고리.


 

 




 

25분의 단편. 짧지만 꽤 강렬하다.

캐릭터도 아이들, 소재도 숨바꼭질.

언뜻 보기엔 가볍기만해야 할 구성과 스토리는

적절한 속도와 완성도 높은 영상 속에서 한층 긴장감과 비장미를 높힌다.

비록 아이들의 에너지로 도시를 밝히는 건 매트릭스의 아이디어를 차용한 듯 보여도...

 

2005년도 SICAF 때 상영되었다던데 그럼 2004년 아니면 2005년작인가? 앞으로 SICAF 잘 챙겨 봐야겠는걸?

2005년에 나온 [Karas]도 그렇고, 엄청난 2D의 토대를 기반으로 한 일본 애니메이션이 3D를 만났을 때 보여줄 수 있는 환상의 세계에 제대로(!) 본 기분이다.

 

* 그림 출처 : 씨네21(http://www.cine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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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3 03:28 2007/02/03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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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12/17 21:10

피에로님의 [스캐너 다클리] 에 관련된 글.

 

프랑스, 벨기에, 영국에서 합작한 애니메이션 [르네상스]와

헐리우드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스캐너 다클리].

근거리의 미래를 다룬 SF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은 무척 비슷하다.

그러다보니 두 영화를 서로 비교하게 되었는데,

처음엔 [르네상스]의 압승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독특한 영상미에 취해 내용을 살짝 간과해버린 면이 없지 않다.

 

뭐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르네상스]가 괜찮다고 생각한다.

(내용에 흥미를 못느껴서 그런지 일단 화면빨에 집중이...-.-;;)

2%씩 모자라며 나를 헷갈리게 만들었지만 오랜만에 만난 흥미로운 형식의 애니메이션들.

 


 



[르네상스]

 

100% 흑백화면이다.

마치 흑백영화를 연상하여 소박하고 아련한 추억에 잠길만한, 다소 빗물 흐르는 화면을 연상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어떻게 흑백만으로 3차원의 공간감과 박진감을 잘 살릴 수 있었는 지 감탄이 절로 난다.

정말 이 영화는 공간감각 뛰어난 영상만으로도 볼만한 영화다.

 

똑똑하고 사회봉사에도 열심인 어떤 젊은 학자의 갑작스런 납치.

알고보니 오래전 영생의 비밀을 발견하였으나 숨기고 있던 늙은 학자의 비밀을 알고나서 다국적 회사와 손잡고 상용화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저 한 학자의 납치 사건인 줄 알고 있던 형사는,

자신과 애인의 목숨마저 위협받는 상태에서 젊은 학자를 발견하고,

애인의 동생이기도 한 이 젊은 학자를 구할지, 미래를 위해 늙은 학자 말대로 죽일 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 영화에서 결정적으로 아쉬운 점은 '죽음'을 통한 존재감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죽음에 대해 - 인간에게 있어서 한때의 두려움이긴 하지만 -
이를 통해 완성되는 찰나의 아름다움을 보존한다는 매우 상투적인 메시지만 남아있다.

결국 이 영화는 사람은 왜 죽어야 하는지 - 또는 왜 영생하면 안되는지-에 대한 중대한 존재론적 논의를 - 담을 수 있었으나- 빼먹어버렸다.

덕분에 스토리상으론 헐리우드 영화 한편 본 거나 다름없는 셈이 되어버렸다.

 

 


[스캐너 다클리]

 

실제 키아누리브스, 위노나 라이더 등 쟁쟁한 배우들의 실사 촬영 후 애니메이션적으로 덧입혔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 화면 자체가 실사에 선을 약간 단순화시켜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솔직히 너무 가까운 미래였나?

[르네상스]보다 훨씬 다양한 칼라를 사용했으나 훨씬 지루한 화면을 가지고 있다.

뭔가 극적인 반전의 상황에도 오히려 화면의 톤이나 인물의 역동성이 떨어져 긴장감이나 해소감을 느끼기 어렵다.


 

 

마약단속반 형사인 키아누 리브스.

실제 단속을 위해 마약을 하고, 마약을 유통하는 조직에 함께 하게 된다.

그가 손 댄 서브스탠스D라는 마약은 궁극엔 좌뇌와 우뇌를 분리시키면서 뇌의 손상을 초래시키는 매우 위험한 마약.

약에 취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원래 자신의 캐릭터가 어떠한 생활을 했었는지, 새로 만들어진 캐릭터가 진짜 자신인지, 과연 자신이 누구인지 모든 이들과 모든 상황, 결정적으로 자기 자신을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만다.

결국 단속자는 마약중독자로 변하였지만, 정부가 이 형사에게 원하는 개인의 희생은 그 이상이었다.

 

영화 속 인물들의 현란한 수사 또는 이어지지 않는 대화의 흐름들은 이 영화가 Philip K. Dick라는 소설가의의 소설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을 알게 해주지만,
동시에 빈약 내지는 끝나지 않은 것 같은 결말에 아쉬워해야하는 것은 소설의 느긋한 심리 유도를 영화가 담아내지 못한 탓일라나?

당장 키아누리브스는 자신을 상징하는 두 개의 인물이 둘다 진짜 자신인지, 그중 하나만이 자신인지, 과연 자신이 누군지 혼동하고 있다고 관객이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걸 표현하는 화면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만약 내가 미국인이었다면,

저 앞뒤 서로 연결되지 않는 - 대화 아닌 - 대화들, 그리고 그 대화를 통해 이어져가는 사실같지 않은 사실로 영화가 진행되고 있는 힘과, 그 뒤에 숨어있는 뉘앙스나 문화를 좀 더 깊이 이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 사진 출처 : 르네상스 웹사이트(http://www.renaissance-lefilm.com/accueil.htm )와

한겨레(http://www.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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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7 21:10 2006/12/17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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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11/26 18:14


이 책을 산 이유는 크게 세가지 정도 들 수 있다.

 

1. 가격이 싸다.

2. 사은품이 있다!

3. 내용이 재미있을 것 같다.

 

다행히도 이 중 두가지 정도는 만족스럽다.

더더욱 다행인 것은 3번도 꽤 만족스럽다는 점이다.


 



1. 가격

 

원래 정가는 9,500원이나 인터넷 할인가 950원이 깎인 다음

무려 3,000원짜리 할인쿠폰이 붙었다.

그래서 실제 구입에 든 비용은 5,550원.

땡 잡았다!

물론 이런 단순 계산 방식의 구매로 인해 난 이미 한 인터넷서점에서 '실버회원'이라는 자리에까지 올랐다.(-.-)

 

2. 사은품

 

사은품은 '책 한권 더'에 '쵸콜렛피자무료시식권', '다이어리'까지.

 

한권 더 온 책은 '마트형 인간의 그럴싸한 밥상차리기'이길 바랬으나, '아들아 당당한 부자로 살아라'가 도착했다.

아무리 눈 씼고 봐도 동네주민 중에 아들에게 이따위 책을 줄만한 위인은 없는 지라 선심 쓰기도 틀렸다. (내가 사는 동네는 정~~~말 이상하다!)

그리고 어찌나 아들만 부자여야하는지.

 

쵸콜렛피자무료시식권 역시 다른 무언가를 사야 덤으로 더 주는 거였고, 그나마 가게는 그닥 가볼 일 없는 동네.

친정이 그 동네인 언니에게나 줘볼까나?

 

다이어리는 생각외로 원츄~!

아마도 2007년도 내내 jineeya에게서 새빨간 다이어리를 보게 될 것 같다.

 

3. 내용

 

어릴 적부터 작두개미 연구에 흥미를 보여 언젠간 적두개미를 연구하겠다는 꿈을 품은 TC.

그러나 그는 어느새 35년동안이나 상환해야할 대출금 덩어리인 집과 자동차, 가구과 차고 정도를 가진 평범한 회사에 다니는 회계사다.

 

세째아이를 갖고 싶었으나 아이를 키울 '다락방이 없어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막아야한다는 공포스러운 사실을 깨달은 어느 날.

그는 자기 인생과 이 나라(체제)의 대차대조표를 짜본 결과

1) 자신이 빚진 것은 실은 돈($)이 아니라 시간(T)이며 결국 T = $이다.

2) 이 체제는 자신의 모든 시간을 소유하고 있고, 자신에게 빚진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평생 적두개미를 연구할 여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TC는

우여곡절 끝에 회사를 그만두고 회사를 차리는데 바로 '시간을 파는 자유주식회사'.

그가 작은 플라스크에  담아 파는 시간은 온전히 산 사람의 소유가 되었고, 이 상품은 공존의 히트를 치게 된다.

 

처음 5분짜리 시간의 플라스크를 팔았을 때, 정부와 기업은 오히려 노동자의 작업 능률이 상승한다고 무척 기뻐하였다.

2시간짜리를 팔기 시작하자 기업은 노동자를 더 많이 고용해야한다고 불평하기 시작했으나, 정부는 실업문제 극복이라며 여전히 좋아하였다.

1주일짜리 플라스크가 생산되자, 조만간 모든 노동자 임금의 1/4이 자유주식회사로 흘러들어갈 것이라 판단한 정부와 기업은 플라스크에 '유통기한'을 부여하는 법률을 통과시켜버린다.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부도 위기를 맞은 TC는 유통기한 15일 이내 한 사람당 35년짜리 시간들을 팔아치우고 대신 상환금 남은 집들을 모두 사들였다.

 

그 결과 사람들은 살 집이 없어졌으나 35년치의 자신만의 시간을 되찾았고,

자유주식회사는 나라의 모든 부동산을 소유했으나 누구도 돈이 없어 집을 사지 않으니 부동산업은 쫄딱 망하고 '체제 전복세력'으로 찍혀 정부에 몰수당했다.

한편 정부는 모든 부동산을 소유하게되었으나 누구도 경제활동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모든 국민들의 시간이라는 부채가 자동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10일도 안되어 일어났다.

 

그럼 이 나라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TC는 또다시 아이디어를 낸다.

원래 T = $.

나라는 국민들에게 시간을 빚지고 있다. 그러니 그 시간을 돈으로 사기로 한다.

다만 합리적으로.

예를 들어 집은 35년 상환이 필요한 것이 아닌 2,3년 정도의 시간으로 구매가 가능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여생 남은 시간을 기준으로 구매력이 생기는, 사실은 너무 당연한 데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사실을 체험하게 된다.

 

 

그래. 우리가 사는 세상이란 게 그런거다.

결국 노동자가 노동을 멈추는 순간, 체제와 우리 사이의 대차대조표는 완전 반대가 된다. 체제는 그들이 차압해놓은 우리의 모든 것을 순식간에 부채로 떠안게 된다.

 

TC는 말한다.

"국민들이 평생 참고 살았고, 훨씬 더 여러 해 동안 감당해야 했을 대차대조표를, 체제는 단 일주일도 견딜 수 없었다는 게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그가 발명(특허 신청해서 팔았단다.ㅋㅋ)한 '시간 팔기'.

우리는 과연 무엇을 발명(?)할 수 있을 것인가?

 

 

* 사진 출처 : 알라딘(http://www.alad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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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6 18:14 2006/11/26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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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10/04 16:23

잭 런던의 장편 소설이되 잭 런던만의 장편소설이라하기엔 좀. 쓰다 만걸 후대의 로버트 피쉬가 완성시켜놓았다.

하지만 상관없다. 뒷 부분은 스릴러일 뿐이다. 사실 이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은 앞부분에 촘촘히 다 짜여져있다.

그가 -비록 완성하지 못했으나- 썼던 이 소설은 꽤 의미심장하다.

 

 

 

내용은 간단하다.

 

옛 맑스주의자들이 만든 암살단.

주로 들어오는 의뢰는

뭔가 꾸미려하지만 항상 어설퍼서 실패하고마는 아나키스트들 대신 사회의 악을 처단하고,

'아나키가 한 일'이라고 떠들 수 있도록 해주는 일이 많다.

이들은 처단할 대상에 대해 실제로 '사회의 악인가?'라는 점을 냉정한 평가를 통해 판단한다.

평가 후 처단이 결정되면 1년 안에 처리하는데, 혹시 못하게 되면 의뢰인에게 대가를 다시 반환한다.

 




어느날 그들의 존재와 방식은 그릇되었다고 생각한 한 젊은이가 암살단의 지도자를 만나 지도자의 목숨을 의뢰한다.

젊은이는 그들의 존재 자체의 모순과 암살이 주는 사회의 위기에 대해 수준높고 열띤 구라구라를 통해 풀어나가고, 지도자는 결국 그의 논리에 굴복하고 만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젊은이는 '이제 암살단이 해체되겠지'라고 생각했으나 지도자는 스스로를 처단의 대상으로 지목하고 온 조직망을 동원하여 자신의 처단을 명한다.

 

갑작스레 지도자의 대리가 된 젊은이.

그가 만나게 되는 조직원들은 하나같이 학문에 능통하고 고상하고 순수하고 논리적인 이성을 지닌 지식인들이다.

그들의 이치에 맞는 한 무슨일이든 충실하게 따르는 조직원들과

마찬가지로 조직의 이치에 너무 충실하여 조직원들과 서로 죽고 죽이는 사이가 된 지도자.

 

보기엔 그냥 '미친놈들!'일 뿐이다.

그러나 이 고지식함의 사슬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동네에서 '빨간약을 먹었다'며 좌절하는 네오의 후예들을 몇명 보긴 했어도

솔직히 운동의 역사도, 계보도, 계파도 하나도 모르니

'네가 뭘 안다고?'라고 한마디 들을 수 있겠으나,)

 

마치 원리원칙에 갇혀 끝내 자멸해버리는 일군의 좌파를 보는 것 같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진정성이라면

충분히 그들과 공명할 수 밖에 없는 측은지심이 발동할 것 같은 기분이다.

 

물론 그게 누구인지,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말이다.

여자 캐릭터는 남자들 이어주는 물건에 지나지 않아 살짝 기분 나쁘지만

어떻든 소설로써의 박진감 자체도 만만치 않은 글.

 

* 그림출처 : 알라딘(http://www.alad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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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04 16:23 2006/10/04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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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09/02 14:21

pannella님의 [롭스 & 뭉크 전시회]

사뿐사뿐.Idolog님의 [뭉크&롭스전] 에 관련된 글.

 

이 전시의 부제는 [남자와 여자]이다.

그러나 제목에 [악마/돼지와 여자]라고 적은 건 남자는 안보이고 그 자리에 악마와 돼지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물론 악마주의를 세상 종말의 징후로 보고 이를 이끄는 존재를 여자라고 생각했던 화가들의 작품을 대하는 21C 여성인 나에겐 

관람 내내 그게(남자) 그걸(악마와 돼지)로 보이는 야릇한 체험 상태였지만...ㅋㅋ

확실히 부제 [남자와 여자]는 표현 상 어폐가 있을만큼 '남자'가 안보인다.

오히려 남자와 여자는 마치 '관찰하는 자와 관찰당하는 자'의 경계라도 되는 것 같다.

 

창부정치가(1896)

 



남성이 되어 즐겨볼까하다가

괜히 좁은 속에 '지들이 세상 망쳐놓은 주제에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외침이 머리속을 메아리치고 있는 지라,

그냥 편하게 여자인 내맘대로 해석하고 즐기기로 했다.

제일 간단한 방법으로

작가들이 관찰의 대상인 여성(뭔가 남자와 달라 인간이 아닐 것 같은)을 그린 동안,

나는 그들의 그림에 표상된 여성이 되어 악마와 돼지들의 세계를 보고 있었다.

 

 

롭스는 책 속 삽화 그림을 많이 그렸던 것 같은데 이 작품 [주술] 역시 옥타브 위잔의 [여전하] 中 '마법의 거울'편에 수록된 삽화이다. 별 설명없어도 무슨 분위기인지 척보면 알만한 상황. 여성에 대한 화가의 전형적인 시각을 볼 수 있다.


 

 

[사탄-골고다]는 롭스의 사탄 연작 시리즈 중 하나인데, 예수의 모습을 한 악마와 그 아래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목졸리고 있는 여성이 보인다. 

사탄 연작은 악마주의의 도발을 새로운 위기로 받아들이고 육체에 대한 두려움을 표시했다는 데, 시리즈중 [사탄-제물]이 참 인상적이었다.

사탄의 몸통이 사탄을 나타내는 데 주로 쓰이는 소 두개골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주변부에 날아다니던 천사를 패러디한 해골모양의 아기악마들, 오~ 압권.

 

 

롭스는 어릴 때부터 인물을 캐리컬쳐화하는 걸 좋아하고 썩 잘했다고 한다.

이 작품 [발론지방의 장례식] 역시 인물을 희화한 것이 인상적이다.

특히 장례 진행중인 신부가 너무 가까이 얼굴에 갔다댄 성경을 보면서,

언젠가 보좌관이 써준 글을 있는 그대로 교과서 읽듯이 읽던 국회의원이 떠올랐다.

 

 

[악녀- 범죄의 기쁨]도 '악녀들'이라는 시리즈 중 하나인데 역시 소설 삽화로 쓰였다고 한다.

남성을 꼬신 여성이 메두사상에서 키스하는 동안 남성에게 버림받은 여성은 상 아래서 캬라멜 녹듯 녹고 있다. 롭스는 '이미 악마는 지배하고 있고 여성을 매개체로 사용한다'고 했다던데, 그림 상으로만 보면 어찌 그 결과의 가혹함 또한 다시금 여성의 몫이 되는지...

 

사실 악녀들 시리즈 중에는 [악녀들-돈후안의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나신의 여성이 뭉크의 [사춘기]에서 본 소녀의 자세와 비슷하게 살짝 겁 먹은 듯, 울먹이는 듯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그리고 돈후안이라고 추정되는 남자는 온 몸을 망토로 가린 채 흐릿하게 뒷편에 보인다. 마치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남자의 모습, 베일을 선호하는 모습, 악마같은 대체물로만 발현되는 모습을 상징하는 느낌이다.

 

 

롭스의 그림이 상대적으로 화려한 반면 뭉크의 그림은 상대적으로 칙칙하기 이를 때 없다.

그러나 이 그림 [마돈나]만큼은 다르다. 그림 속 그녀는 사랑스러운 동시에 두려운 존재이며, 육체적이면서도 정신적인 존재이다. 그녀는 매우 매혹적이면서도 뭉크가 꿈꾼 순종적인 여성의 이미지도 동시에 내재하고 있다.

한편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아기와 정자들은 여성과 모성을 동시에 표상함으로써 그녀를 완벽한 '마돈나'로 만드는 데 성공한 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보기에 오히려 이 그림은 많은 여성들이 섹스할 때마다 겪게 되는 임신에 대한 공포를 극단적으로 표현했다는 느낌이다.


 

 

[흡혈귀II]는 뭉크의 여인에 대한 피해의식, 선입견을 그대로 표현한다. 그래서 심지어 자기 자신을 여성의 제물로 바치고 있다.

 

이 작품[골목길]은 그린 이의 의도와 나의 받아들임이 완전 반대인 대표적인 경우인데,

화가는 숨 막힐 듯한 골목길에서 여성이 마치 남성을 희롱하는 듯 상징적인 구도와 포즈로 묘사한거라고 큐레이터가 적어놨더라.

그러나 나는 아무리 봐도 권위적 남성성이 극대화된 완전 정장 차림의 수많은 남자들이 골목을 만들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한가운데인지라, 그 여성이 희롱당하기보다 희롱하고 있다는 게 참 믿기기 어려운 상황 판단이다. (선입견 과도?ㅋㅋ)


 

 

'여성은 악마의 공범자이며 남성이 저지른 모든 살인 , 범죄 , 혐오는 여성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라고 말했다길래

그림 안의 여성들이 일정 정도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자 권력도 있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현실과 똑같네.

여전히 여자는 악마가 될 수 없었고 그저 악마의 시녀일 뿐이다.

그리고 그 이유만으로 어떠한 처벌과 수치와 모욕도 모두 받아 마땅한 존재이다.

 

적어도 나에게 그림의 안과 밖은 같은 세상이다. 마음 편히 숨어들거나 거만해지거나 평정심을 유지하거나 내가 '나'로 있을 만한 공간은 극히 드물다.

만국의 여성들은 한(恨)으로 승화하려나?

 

* 그림 출처 : 덕수궁 미술관 http://www.deoksug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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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2 14:21 2006/09/02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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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06/17 21:50

여러 주인공들을 시켜 감정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영화는 수습하는 데 한참을 헤매게 된다.

그러다가 감정선 하나라도 놓치면 진짜 별볼일 없는 영화가 된다.

처음엔 그런 영화가 아닌가 싶었다.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부부 중 부인이 아프게 되고,

건물 관리인인 한 남자는 건물에 근무하는 근사한 여자를 - 남모르게 - 쫓고,

한 고등학생은 채팅으로 만난 동성 여학생과 사랑에 빠지다 바람맞게 된다.

 

그러다가 그 여인, 쳉이 은근슬쩍 화면에 끼어든다.


 

 



쳉은 어릴 때부터 귀가 먹고 눈이 먼 사람이다.

세상과의 소통이 매우 어려울 듯 보이는 그녀는 그러나, 화면 안의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장애인학교의 선생이다.

그녀가 등장할 때는 배경음악이 전혀 없다.

그녀가 말하지 않을 때, 즉 그녀가 타인과의 소통을 하고 있지 않을 때 그녀의 과거사에 대한 이야기가 자막으로 흐른다. 처음엔 '영화 자막 잘못 나온 것 아니야?' 싶을 정도로 고요 속에 흘러가는 것이라곤 그녀의 움직임과 자막뿐이었다.

감독은 마치 그녀가 사는 고요의 세상을 맛보게 해주려는 듯 하다.

 

 

이렇게 열정적이지만 고요의 바다에 사는 그녀의 삶이 지나가는 중간중간,

아프던 부인은 죽었지만 남편A는 부인을 위한 식사를 여전히 준비하고 있고,

거의 스토커 수준으로 쫓아다니던 관리인B는 드디어 그녀를 위한 편지를 준비한다.

자신을 버리고 남학생에게 가버린 연인을 위해 여고생C는 끊임없이 문자를 보낸다.

 

아, 짧은 시간안에 흩날리는 감정들...

게다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을 것 같은, 아주 가슴 먹먹한 감정들이다.

도대체 이 영화는 어떤 결말을 준비해놓고 있길래 이렇게 가슴의 응어리를 계속 쌓게 만들어 놓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술 영화랍시고 중간에 '뚝!' 끊 듯 끝나버리면 '그저 그런 영화 봤다'며 화낼 생각도 살짝 들었다.

그렇게 영화는 결말을 내야 하는 시간에 가까워가고 있었다.

 

A는 우연한 기회에 부인을 위해 준비한 음식을 쳉에게 먹이게 된다. 그리고 쳉은 생전 처음 본 A지만 그에게서 받은 음식의 기운을 그녀 특유의 행복한 기운으로 되돌려 보내준다.

그런데 희한하게 그 순간 A는 깨닫는다.

그는 자신의 부인이 오랜 시간 곁에 머물길 애원했으나 부인은 편안한 긴 잠을 소원하였고, 실제 그렇게 하였다.

아무리 희구하여도 얻을 수 없었던 것에 대해 이제 A는 '보내야함'을 매우 매우 확실하게 깨닫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완벽하게 깨닫는 이 순간은 쳉에게서 행복의 기운을 받은 바로 그 순간이다.

쏟아지는 서러운 눈물의 A를 쳉은 소리없이 보듬어 안아준다.

 

한편 B는 결심의 결심을 거듭하고 자신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그녀에게 전하러간다. B를 한번도 보지 않은 그녀에게로 가는 길, B는 신바람이 나지만 스크린을 쳐다보는 관객들에겐 위태 천만 그 자체이다.

C는 역시나 자신을 버린 연인에 대한 미련을 접어버리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애정을 날려보내던 핸드폰을 옥상에서 바닥으로 날려보낸다. 그리고 핸드폰과 함께 자신도 날려보내고 만다.

그런데 C가 옥상에서 떨어지는 순간, 행복의 미소를 지으며 걸어가던 B와 쿵!

B는 사방에 번지는 자신의 선혈 속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편지를 보며 죽어갈 수 밖에 없었고,

B와 부딪치는 바람에 '죽음'이라는 선택을 완수하지 못한 C는 병원에 실려 새로이 인생을 시작해야하는 처지를 맞이한다.

 

결국 A,B,C 모두

아무리 애틋했던 감정도, 절절했던 소원도, 상대방에게 닿지 못하였고,

그들의 감정을 추스리려는 노력은 무엇하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숨막히게도 영화는 이렇게,

늘어놓기 시작한 감정선들을 느려보이지만, 매우 자연스럽고 확고하게 정리한다.

 

씨네21의 어떤 글을 보니

고요하게 감정을 뒤흔들어놓고는 배경음악도 안깔아줘서 울지도 못하게 만들었다고 괘씸해한다.

맞는 말이다.

아무도 외치거나 울지 못하게 만들면서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게 만든다.

그리하여 느끼게 되는 먹먹함, 뭔가 벗어나고 싶은 마음의 소용돌이,

그러나 감독은 '그게 사는 거'라고 '그렇게 사는 거'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어느날 A,B,C 모두 (B는 확인할 수 없겠군-_-)

인생의 모든 경험과 감정과 노력을

쳉과 같이 행복의 기운으로 바꾸어나갈 수 있게 되길 빌며...

그러나 지금의 가슴 아픔 또한 일생에 여러번 갖기 힘든 소중한 감정임을 잊지 말길 바라며...

지금의 이 가슴 저릿함, 꽤 오랫동안 내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 출처 : 씨네21(http://www.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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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17 21:50 2006/06/17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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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05/10 22:44

울산 조합원 3명이 부당해고당해 화요일부터 남쪽에 내려와있는데, 담주정도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 지 가닥 잡힐 듯 싶어요.

이 와중에 위원장 있는 부산에서 엘레~강스하게 노동코미디 뮤지컬 한판~! 땡겼슴다.(^^);;

어찌나 재미있던지~!

 

노동문화예술단 일터가 요즘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사무실 지하 소극장에서 [팔칠전]을 상영하고 있어요.

 

87년 대투쟁의 영웅인 '팔칠이(^^)'가 갑작스레 의식불명상태로 20년을 병원에 누워있다가 2006년 다시 깨어나 활약하는 내용임다.

깨어나면서 팔칠이는 "진실의 눈!"을 외치면 사람들이 진실을 말하게 되는 초능력(?)을 갖게 되지여. -.-

 




팔칠이가 의식불명되었을 때 함께 하던 노동동지 늦동이는 비문의 죽음을...(나중에 밝혀지죠. 그놈의 '진실의 눈!' 땜시) 

그 위로금으로 늦동이 엄마가 팔칠이를 20년동안 간호하고 있었다는데, 이 몽빼 할머니, 왕코믹하삼.

 

깨어나자 잠시 기억 상실한 팔칠이에게로 각종 정파에서 불나방 날아들 듯 명함 들고 찾아오는 모습.ㅋㅋ

참여하는, 함께하는, 앞서가는, 실천하는 노동 모임들에서 예전의 영웅 팔칠이를 가입시키려는 치열한 경쟁 한판을~!


 

 

20년이 지난 이후 우리의 자식들은 하청노조 조합원이 되어 결국 타워크레인에 올라가고, 다른 노동 동지들은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되었지요.

그런데 팔칠이가 이 모든 상황을 "진실의 눈!"으로 해결(?)하게 되죠.

 

 

그런데 마지막엔 좀 아쉬웠어여.

팔칠이를 제거하려는 사용자와 공권력들이 팔칠이의 예전 애인 앞에 놓고

사랑이냐 투쟁이냐 선택하게 하는 거 있죠?

 

이러다보면 결국 '자식이냐 투쟁이냐?', '돈이냐 투쟁이냐?', '부모냐 투쟁이냐?', '명예냐 투쟁이냐?' 이런 식으로 계속 선택지를 만들어버리는 거 아닐까요?

그냥 선택이 아닌 삶으로써의 투쟁은 안될까나?

(게다가 진부 그자체인 영화 볼때 나오는 여자 인질을 여기서도... 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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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10 22:44 2006/05/10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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